최상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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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    나의 하루 댓글:  조회:300  추천:0  2024-03-26
                                     나의 하루       한치의 앞날도 내다볼줄 모르면서 앞날을 동경하고 살아온 내 인생, 황혼녘에 추억으로 남길가 하여 일기를 쓴다.     나의 하루의 첫 시작은 걷기운동이다. 전날  저녁 9시에 취침하였다가 오늘 아침 5시에 일어났다. 일어나서 이불을 개인후 화장실로 갔다 와서 물을 끓이였다. 고뿌에다 로씨야제 가루우유 두 숫가락, 지방산 꿀 두 숫가락, 홍삼액 반에 반 숫가락을 넣고 끓인 물을 부어 푼후 그물을 마시고는 걷기운동을 하려 나간다.     내가 아침 걷기운동을 열심히 하자 친구들은 아침 걷기운동 보다 오전8시경에 걷기운동을 하는것이 더 좋다고 권고하였다. 나는 친구들이 권고에 수궁하는 척 하면서도 내 주장대로  아침  걷기운동을 25년 견지하여 왔다.     아침 걷기운동이 어느 시간때보다도 좋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은 첫째 아침해가 뜨는 아침에는 공기가 맑지고 시원하여 좋고. 둘째 아침에는 달리는 차량이 적어 소음이 적다. 소음의 영향을 받지 않고 조용히 걸으면 사색하기 좋다. 세째 아침 걷기운동을 하다보면 나와 같이 걷기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며 그들과 아침 인사를 나누고 함께 걸으면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기분이 좋아 진다. 오늘 아침에도 왕청에서 연길로 이사온 김씨부부를 만났다. 언제 보아도 원앙 같이 부부가  걷기운동을 하는 것을 보면 부럽기도 하다.     나는 아침 걷기운동을 60분 좌우 하는데  목적지를 향하여  30분가량 걸었다. 목적지에 도착하여  몇 분간 몸 돌리기 운동을 하고 나서 다시 왔던 길을 뒤돌아 왔다. 돌아오는 길에서 친구 아들이 나를 보더니 이런 말을 했다.     “아바이는 백세까지 살것 같습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 하네.”     아침 걷기운동을 하고 나서 집안에 들어서기 바쁘게 세수를 하고 창작실로 들어갔다. 아침 걷기운동을 하면서 떠 올랐던 글감들을 컴퓨터에 주입했다. 글감을 신속히 주입하고 나서는 전날에 쓴 글들을 다시 훝어보았다.     20여년간 글농사를 지으면서 보니 글쓰기란 참으로 힘든일이라 느껴진다. 글은 샘물처럼 계속 흘러나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잘 흘러나오다가도 막힐때가 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뇌즙을 짜야 한다. 글을 쓸때에는 내가 구상하였던 소재들이 통통여문 글감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정작 필을 들고 글을 쓰다보면 그 통통하게 여문 소재들의 쭉정이처럼 맘에 들지 않을때가 있다. 글이 맘에 들지 않을 때에는 가차없이 삭제를 했다. 삭제를 하고 나면 다소 아쉬운 감이들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는 무조건 삭제를 하여야 했다.  맘에 드는 글을 쓰려면 쓰고 지우고 다시 쓰며를 반복하여야 한다.     아침 7시가 되자 안해가 아침식사 시간이 되였다고 알리였다. 안해가 정성들여 차려놓은 푸짐한 밥상을 보면  술 생각이 났다. 나는 애주가는 아니였지만 근래에 들어서서 술을 자주 마시게 되였다. 술은 자주 마시지만 한번에 마시는 술은 한 량가량 된다. 한량 술에도  물을 타서 마신다.     아침을 자시고 집안 청소를 했다. 청소가 끝나자 커피 한잔 마시였다.     8시가 되자 부랴부랴 신들메를 동이고 모아산으로 가는 뻐스에 올랐다. 나는 자주 모아산을 다닌다. 모아산을 한바퀴 돌고 나면 몸이 거뿐해지고 새로운 기운을 얻는것 같다.     나 자신은 스스로 젊어보이고 건강하다고 여겨 왔지만 나이는 속일수가 없었다.  60대에는 모아산 정상까지 오르는데 별로 힘들지 않게 올랐는데 70 부터는 산 정상으로 오르는 것이 힘들어서 산 기슭을 돌았다. 오늘 모아산 산길에서 우연히 김정숙녀사를 만났다. 김정숙녀사는 내가 평생로년대학을 다닐때 우리반의 반장이였다. 10년전에도 씩씩하던 그녀가 고희년을 넘기였지만 여전히 씩씩하게 걷고 있었다. 내가 김반장님의 건강 비결이 무엇인가 물었더니 김반장은 미소를 지으면서 꾸준히 걷기운동을 한데 있다고 답하였다.     나는 점심을 자신후 낮잠을 자는 습관이 있다. 낮잠을 자지않으면 정신이 흐리터분하다가도 낮잠을 자고 나면 머리가 맑아지는것이였다. 낮잠을 자고 나서 텔레비죤을 켜고 오후에 방송하는 국내외 뉴스프로를 보았다.      오후 2시가 되자 늘 하던대로 오후 걷기운동을 시작 하였다. 오후에는 멀리 걷지 않고 마을 주위를 한바퀴 돈다. 마을 한복판에는 넓은 광장이 있다. 봄, 여름, 가을에는 광장에 사람들이 많이 몰려와 각자의 취미에 따라 즐거운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나는 걷기운동을 나갔다가도 광장에서 친구들을 만나면 걷기운동을 하지않고 그들과 한담하면서 오후 시간을 즐겁게 보내였다. 오늘은 날씨가 무척 추워 광장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나는 광장을 지나 동네를 한바퀴 돌고는 고추 집으로 돌아 왔다.     집으로 돌아 와서 신문과 책을 보는것이 습관으로 되였다. 먼저 신문을 본후 “연변단풍수필협회” 창설 25주년 기념 특집인  “단풍이여 활활 타오르라”란 책을 읽었다. 수필가들의 재치있는 글들을 보노라면 책속에 푹 빠진다.     나는 항상 나에게 좋은 눈을 주신 부모님께 감사를 드린다. 여든이 되도록 안경이 뭔지 모르고 지나왔으니 말이다.     오후 다섯시가 되자 저녁식사를 하였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나는 집안 청소를 하였다. 저녁 청소를 한후 이불을 펴려고 했다. 저녁에 이불을 펴고 아침에 이불을 개이는 것은 내가 하여야 할 몫이였다. 내가 이불을 펴려고 하는데 안해가 잠간만 하면서 이불을 펴지 못하게 했다. 안해는 덮던 이불을 치우고 이불장에서 새이불을 꺼내 펴는 것이였다. 내가 덮던 이불도 덮은지 며칠이 안되는데 왜 새 이불을 펼가 의아해 하자 안해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다니는 “커시안”회사에서 잠이 잘 오게하는 이불이 있다 하기에 큰맘먹고 오늘 삿어요.”     “잠이 잘 오는 이불도 있다오? .”     “네.”     “가격은 얼마라오.”     “2천원입니다.”     “2천원! 어떤 이불이기에 2천원이나 한다오?”     “2천원이 뭐가 대단하다고 그래요. 잠이 잘 오게 한다면 2만원이라도 살텐데.”     “허허”    나는 안해가 잠을 잘 지지 못하여 고생하는줄 아는 터라 뒷 말을 하지  않았다.    이불을 펴고 조금있자 외지에 있는 딸한테서 영상전화가 왔다. 어제 이맘때에 아들한테서 영상전화가 와서 기뻐했는데 딸한테서 전화가 오자 슬그머니 기분이 좋았다. 딸과 몇마디 통화를 하고나서 곁에 있는 안해 한테 딸과 통화를 하라고 스마트폰을 넘기였다. 애비하고는 길게 말하지 않던 딸이 제 에미하고는 통화가 길었다. 곁에서 모녀간의 통화를 들으니 딸이 하는 말이 아버지 80돐 생일 다가오는데 어떻게 할것인가 하는 문제를 가지고 에미하고 토론하는 것이였다.    통화가 끝나자 드라마를 볼 시간이 되였다. 세편의 드라마를 련속 보니 여덟시 반이였다. 안해는 드라마를 보고는 인츰 잠들었다. 나는 드라마를 보고나서 오늘 일기를 썼다.  
187    산수(傘壽)에 이르고 보니 댓글:  조회:1887  추천:0  2023-09-07
                                         산수에(傘壽) 이르고 보니                                                 최상운      세월에 떠밀려 나는 어쩔수 없이 여든(傘壽)이란 산에 오르게 되였다. 여든이란 산에 올라서서 앞을 내다보니 구십이라는 산이 어서 올라 오라고 손짓하고 뒤돌아 보니 지나온 산들이 백세까지 살라고 축수하는것이였다.    옛 사람들은 무엇때문에 나이 여든이면 산수(傘壽)라 하였을가? 뜻풀이를 하여보면 산(傘)은 우산 산자요 수(壽)는 목숨수자라 나이 여든이면 우산처럼 비를 막으며 살라는 뜻이 아닐가, 우산과 같이 비를 막아줄 그런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나이가 아닐가 생각된다.     인명재천이란 말이 있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하는 뜻이다. 사람은 태여날때부터 한치의 앞날도 내다볼줄 모면서, 얼마를 살지를 모르며 산다. 각자는 나이와 상관없이 길고 짧게 사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내 나이 여든에 이르렀는데도 하도 건강해 보이니까 누군가 나한테 이런 질문을 들이됐다.    “선생님은 년세에 비하여 매우 정정하십니다. 건강 비결은 어디에 있다고 봅니까?”    “내 건강 비결에는 여러가지가 있지만 간추려 보면 첫째는 부모님들이 나를 건강하게 낳고 키워준데있고 둘째는 내가 자아관리를 잘한데 있으며 세번째는 좋은 세월을 만난데 있다고 봅니다. 지금 보면 세가지 중에서 좋은 세월을 만난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세상  사람이 사는 것이 제나름대로 이건만 사람들은 모든일이 자기의 뜻대로 되지않으면 조상탓을 한다. 나도 한때는 내 일이 잘 풀이지 않자 아버지를 원망했다. 어릴때 가정 경제란 때문에 학교를 제대로 다닐수 없고 청년시절에는 아버지 력사문제로 인하여 심리적 고통을 받었다. 심지어는 나를 이렇게 고생시킬것이면 왜 나를 낳았습니까 하는 험한 말을 하기도 했다. 내가 부모가 되여서야 부모님들의 심정을 리해하게 되였고 부모님들을  탓한것을 후회했다.  알고보니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지 않을 부모가 없다. 단지 부모님들의 세월을 잘못 만나 본신도 고생하였으며 자식들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을 뿐이였다. 나이를 먹고 보니 헴이 드는 것 같다. 이제는 부모님을 탓하지 않고 오히려 부모님께 감사를 드리고 있다.    세월에 대한 말을 하였으니 말난김에 더 말하여야 할것이 있다. 내가 살아온 경험에 비추어 볼때 사람들의 수명이 길고 짧음은 시대와 련관되여있다고 본다.  가혹한 정치제도하에서, 전쟁이 빈번한 시대에는 인구가 감소되였다가 평화로운 시대에서는 인구가 증가하며 수명도 길어진다.     50년전만하여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길지 않았다. 그 당시 내가 살던 마을에는 환갑을 넘긴 로인이 몇분안되였다. 남자 나이 50이면 “아바이”라는 말을 들었다. 61세가 되면 오래산 로인으로 취급하여 환갑잔치를 베풀었다. 나의 조부님과 부친은 60세 이전에 돌아가셨다. 아마 나는 조부님과 부친의 남겨 놓은 나이를 가졌는지 아무런 병고가 없이 여든이란 산에 올랐다.     나이는 속일수가 없다고 한다. 나이 여든이면 속을 파먹은 떡호박 같아 보인다. 로인들의 모인 장소로 가면 몸이 아프지 않다는 사람이 없다. 다들 한다는 말이 어느병원 의사가 의술이 고명하다, 어느 약이 효과가 좋다, 보건품은 꼭 먹어야 한다. 등등의 말들을 한다.  나는 그런말을 들을 때면 먼산을 바라 본다.    자신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여겨 왔던 나한테 요즘들어 이상한 일이 발생했다. 문밖을 나가면서 열쇠를 지니지 않고 나갔다가 헛 고생을 한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나이를 먹으면 말 조심을 하여야 하는데 상대방이 어떻게 생각하는 줄 모르고 내 좋은 말을 했다가 나이값을 못한다는 피잔을 받기도 했다. 몇번 경을 치르고 나서 나도 이제는 내리는 를 막기위해 우산을 들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젊어서는 꿈을 키우며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한다. 나도 이제는 추억으로 사는것 같다. 추억속에서 지나온 내 인생의 그라프를 그려보면 인생초기에는 그라프 “포물선” 지점이였다가 나이를 먹으면서 행복이 지수가 점차 높아 지는 것이였다. 그라프를 그리다 보니 이런생각이 들었다. 나한테는 무덤까지는 가지고 가야 할 말못할  사연은 없다만 내 인생 그라프속에 지워지지 않는 고마운 분이 몇분있다. 그분들은 다름아닌 네째 이모부님과 내가 다니던 공장에서 공장장 직을 맡고 있던 동봉률씨이다. 나는 그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었지만 아직까지 보답을 못한것이 가슴속에서 내려가지 않는다. 어쩌면 마음씨곱고 패기가 있어 보이던 두분다 오래 사시지 못하고 일찍 돌아 가시여 더 안타갑다.    내 인생 그라프에는 50세를 기준으로 전 후 생활형편은 천양지차였다.  50세 이전에는 가정을 꾸려나가기 위해 동분서주 하면서 힘들게 보냈다. 그러던것이 50세를 넘기면서 일이 순조로이 풀려 나갔다. 환갑년에 이르자 운이 탁 트이였다. 부부가 정령퇴직을 하였고 누구의 단속도 제한도 받지 않는 자유인으로 되였다. 퇴직하여 얼마 안되여 외국 나들이를 할 기회가 찾아왔다.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외국 나들이를 하였다.    외국 나들이를 하면서 려행자금을 장만하게 되자 나는 본격적으로 려행을 시작하였다. 10여년간 21개 나라를 관광하였으며 대만, 향항, 오문을 비롯한 국내의 여러지역과 명승지를 유람하였다. 려행을 하는 한편 기행견문을 부지런히 썼다. 기행문을 정리하여 책으로 묶었다. 기행문을 쓰면서 겸하여 시, 수필, 소설을 썼다. 내가 쓴 문학작품들이 문학지에 100여편 발표되였다. 나도 이제는 보람있게 글쓰는 작가로 되였다는 신심을 가졌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쓴 글들이 적지않게 문학지에 발표되였지만 한번도 문학상을 탄적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은근히 단 한번이라도 문학상을 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런 내 속내를 읽기라도 하듯이 중앙인민방송국조선어부에서 나의 기행작품 “최상운, 세계를 돌아보다.”를 8개월간 련재로 방송하였다. 전 세계로 내 작품이 전파되자 나는 행복의 도가니에 빠졌다. 뒤이어 연변일보 문예부간에 “최상운, 세계를 돌아보다.”를 3년 동안 련재로 발표하여 주시였다. 나는 중앙인민방송국조선어부와 연변일보에서 내 작품을 방송하고 실어주자 큰 상을 받었다는 기쁨을 만끽하였다.    희로애락을 겪으면서 산수년에 올랐으니 이제부터는 남아있는 여생을 어떻게 보낼가 숙제로 제기되였다.    남아있는 여생에 두가지를 꼭 견지하고 싶다. 하나는 걷기운동이고 다른 하나는 늦깍이로 시작한 글쓰기이다. 나는 20여년간 꾸준히 걷기운동을 하였으며 15년을 매일과 같이 글을 썼다. 내 신체가 이만큼 건강한것도 걷기운동과 글쓰기가 보약이 되지않냐 생각한다. 하기에  남은 여생에 걷기운동과 글쓰기 두가지만은 꼭 견지 하겠다.    고기를 먹어본 사람이 고기맛을 안다고 한다. 걷기 운동을 하면서  걷기운동이 내 신체건강에 얼마나 좋은가를 알게 되였고 글쓰기가 내 정신건강에 도움이 되였다고 생각하고 있다.    지금의 신체조건으로는 90세, 백세까지도 걷기 운동을 견지 할 것 같다.    글을 쓰다보니 이런 견해를 가지게 되였다. 글쓰는 사람 – 작가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공부를 많이 하였다하여 작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작가란 평범한 일을 평범하지 않게 쓰는 특수한 재주를 가진 사람이라고 본다.     글쓰기가 어렵다고 하며 나이 60이면 필을 놓는다고 하는데 나는  나이 60에 글쓰기를 시작하였다. 20년동안 글쓰기를 견지하여왔다. 이제는 하루도 글을쓰지 않으면 무엇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듯 손이 근질근질해 난다.    년초에 어떤 글을 쓸가 고민하였다. 수기를 쓸까, 수필을 쓸까, 시를 쓸가, 소설을 쓸까 생각하다가 뭔가 떠 오르는 것이 있었다. 여지껏 써보지 못한 중편소설을 쓰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작가란 명예를 가진봐 하고는 장편소설은 몰라도 중편소설은 써야 하지 않을가 생각했다.    정작 중편소설을 쓰자고 하니 애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전처럼 정신이 집중되지 않고 사유가 무디였다. 어떤 주제로, 어떤 형식과 수법으로 써야 할지, 단어하나 철자 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했으니 머리가 복잡해 졌다. 그래도 무엇이나 시작하면 끝을 보는 끈질긴 성격을 가진 나는 시간을 쪼개가며 글을썼다.    여든 나이가 인생 그라프에서 행복지수의 최고점이 아닐가 생각된다. 세월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산수년에 오르기는 했다만 이제부터는 좀씩 내리막길을 걸어야 할것 같다. 퇴직 전에는 당당한 사회의 주력군으로 존경을 받었다고 하면 퇴직후에는 성쌓고 남은 돌이되여 주눅이 들것만 나는 남은 여생을 의의 있게 보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나라에서는 로인들에게 오래살라고 양로금을 발급한다. 나도 그 혜택을 받으면서 걷기운동과 글을 쓰면서 구십(卒壽)년을 지나 백세(上壽)년까지 가려는 욕심을 부려본다.
186    새봄맞은 찔레꽃 (6) 댓글:  조회:392  추천:0  2023-06-06
                                                                    새봄맞은 찔레꽃(6)                                                  10         순옥이는 네번째로 맞은 남편이 저 세상으로 가자 한국에서 더는 살고 싶지 않아 연길로 돌아왔다. 연길로 돌아와서 집을 팔고 집판돈에 돈을 더 보태여 병원과 가까운 곳에 있는 엘리 베이터가 설치된 호화로운 집 한채를 삿다. 시어머니와 함게 살자고 해도 시어머니는 기어이 경로원으로 가겠다고 하자 시어머니 요구대로 하였다.     순옥이가 한국에 가서 돈을 많이 가지고 왔다는 소문이 바람타고 쫙 펴지였다. 친척 친구는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그와 가깝게 하려고 하였다. 하루에도 수십통의 전화가 왔다. 전화 내용은 대체적으로 순옥이를 만나자는 전화였다.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보면 거개가 돈에 대한 말이였다. 그런말을 들으면서 내가 뭐 은행인가? 자선가인가? 다들 왜 나를 이렇게 못살게 구는지 리해가 안갔다. 이제는 돈에 대한 말이 나오면 신물이 날 지경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순옥이는 전화를 받기가 싫어졌고 자기와 가까히 하려는 사람들과 거래하는 것조차 싫어졌다. 때론 그들에 대한 고까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자기가 어려움에 처해있을 때에는 골도 안 내밀던 사람들이 내가 돈을 좀 벌어 가지고 왔다고 하니 이제와서 아는척 하는지 머리를 젓게 했다. 한편으로 이런 이중적인 사람들과는 거리를 두어야 하겠다고 생각했다. 모르는 전화는 받지 않고 만나주지 않았다. 차츰 가까히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갔다. 몸에 달려있는 혹처럼 부담스럽게 여겼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자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혹같아 보이던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자 홀가분해서 좋기는 한데 어쩐일인지 자신의 처지가 홀로 서있는 외톨이 나무와 같아는 생각이 들면서 허전하다는 감이 들었다. 한편으로 돈이 뭐길래? 수십년 사이좋게 지나온 이웃들과 거리를 두며 너무 야박하게 놀지 않았냐? 그들에게 미안하다고 생각했다.      이전에는 너무도 어려운 생활고를 겪다나니 고독이 먼지 모르고 지나왔는데 생활형편이 좋아진 지금 아무런 부담도 없이 홀로 행복하게 산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것이 아니였다. 사람들과 어울려 살지 못하고 홀로 산다는 자체가 불행이 아닐까, 생각했다.     홀로 사는 녀자들은 부담없이 홀로사니 좋다고 했다. 요즘 순옥이는 그말을 부정하고 싶었다. 밖에 나갔다가 집안에 들어서면 반기는 사람도 없고 이야기를 나눌 사람도 없다. 어떤 때에는 적막한 기운이 감도는 집안은 마치 깊은 산속에 뭍쳐있는 절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했다.    순옥이는 고독하고 불안정한 심기을 풀기 위해 온 종일 공공뻐스를 타면서 시간을 보내였다. 공공뻐스를 타는 것도 하루 이틀이 좋지 며칠 타고 나니 그것도 실증났다.    고심끝에 그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기로 하였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무도장으로 갈가고 생각했다. 알아보니 무도장에 대한 사회여론이 그닥 좋지 않았다. 무도장으로 가려던 생각을 접고 명성이 높은 “아리랑 노래교실”로 가기로 했다. 아리랑 노래교실을 찾아가니 곱게 생긴 녀성이 반갑게 맞어 주었다. 그 녀자는 곁에 서있는 뚱뚱안 체구에 더부룩한 머리 발을 가진 남성분을 가리키면서 이분이 노래교실의 원장님이신 황선생님이라 소개하였다. 그는 황선생님과 인사를 나눈 후 황 선생님을 따라 노래교실로 들어갔다. 노래교실에는 수십명의 학생들이 있었다. 황선생은 순옥이를 학생들 앞에 인사를 시키면서 새로 오신 미녀신입생이라고 소개하였다. 황선생은 순옥이를 보면서 자아소개를 하라고 했다. 순옥이가 자아소개를 하자 장내에서는 열렬한 박수소리가 났다. 순옥이는 열심히 노래교실을 다니였다. 집에 있을 때에는 답답하던 것이 노래교실로 오면 마음이 즐거웠다. 몇 달 사이에 많은 학우들과 사귀게 되여 더 좋았다. 노래를 부를 때마다 선생님이 노래를 잘 부른다고 칭찬해주자 마음이 둥둥 뜨는것 같았다. 그는 처녀시절에도 노래를 잘 부른다는 소리를 들었다. 촌의 문예선전대의 업여가수이기도 했다. 결혼을 하고 나서는 가정 살림살이와 배우자들이 련이어 사망하는 바람에 마음 편히 노래를 부를 겨를이 없었다.    그는 노래를 배우는 시간마다 선생님의 가르쳐 준대로 음절, 박자, 리듬을 명심하며 노래를 불렀더니 상상외로 노래가 잘 흘러 나왔다. 황선생님도 그가 노래를 정확히 잘 부른다고 여러번 칭찬하였다. 학우들도 노래를 잘 부른다고 높이 평가하여주자 신나게 노래교실을 다니였다.    순옥이는 한국에서 돌아 올 때 속으로 이런 맹세를 했다.    “이제는 절대 남자를 만나지 않는다. 네번 남편을 만나 네남자를 다 저세상으로 보냈으면 됐지, 아직도 무엇이 부족하여 또 남자를 친한단 말인가? 이제 또 남자에게 미련을 둔다면 성이라도 바꾸겠다.”    그는 그 맹세를 지키기 위해 노래교실을 다니면서도 남자들과는 거리를 두었다. 심지어 황선생과도 거리를 두었다. 어찌 할수 없는 상황에서 남자들과 교제하게 될 때에는 뒷말이 없도록 조심하고 조심하였다. 순옥이가 랭정하게 남자들을 대하자 그를 아는 사람들은 뒤에서 그를 가시돋친 찔레꽃이라 말했다.     남녀가 옷깃이 스치여도 인연이 맺어진다는 말이 있다.      시간이 약이란 말이 있듯이 시간이 지나면서 굳게 닫겼던  순옥이 마음이 해동하는 얼음장처럼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인연이란 사람의 힘으로 막을 수 없는 존재인가 보다. 황선생과 자주 만나고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순박한 처녀시절로 되돌아 가듯 싶었다. 어느사이 녀인들만이 가지고 있는 미묘한 감정이 싹트면서 섬세한 안광으로 황선생을 주시해 보게 되였다. 외모를 보아서는 멋진 남자라고 보이지 않지만 속에 들어찬 풍부한 음악지식과 시원하게 말하는 성격이 가슴속에 와 닿게 되였다. 황선생은 거친 외모와는 다르게 교학을 할때 보면 그심성이 곧잘 보이였다. 학생들이 선생이 배워준대로 노래를 제대로 부르지 못할때에는 짜증이 나겠건만 황선생은 항상 웃는 얼굴로 내심하게 차근차근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이 였다. 황선생이 그런 모습이 보기 좋았다. 더구나 순옥이를 행하여 싱긋 웃는 모습은 보기가 참 좋았다. 그는 황선생이 자기한테 노래를 부를 기회를 많이 주고 노래를 부를 때마다 정확히 잘부른다고 칭찬 하는 것을 보면서 황선생의 일종의 암시를 나한테 보내는 신호가 아닐가? 생각했다.     어느날인가 황선생은 은근 슬쩍 순옥의 가정사를 묻기도 했다. 왜서 내 가정사를 물을가? 의심이 들었다. 때로는 내가 왜서 황선생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를 자신도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매일 황선생을 만나 대화를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황선생에 대한 호감도가 높아졌다.    어느날 순옥이는 황선생과 학우들을 자기 집으로 초대하였다. 학우들은 호화롭게 장식된 집안을 둘러보면서 순옥이가 좋은 집에서 호화롭게 살고있다며 부러워하였다.    학우들은 널직한 객실의 둥그런 상에 빙둘러 앉아 산해진미를 먹으면서 마셔라 부어라 하더니 흥이 도져 흥겹게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황선생은 가만히 남들이 눈을 피해 집안의 이곳저곳을 돌아 보았다. 황선생은 순옥의 침실로 가더니 살그머니 문을 열고 침실안을 들여다보았다. 침실안은 영화에서나 볼수 있는 외국의 돈많은 회장님들의 침실처럼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아늑한 침실에서 녀자의 향기가 흘러나와 코를 심히 자극하여 아! 소리를 지를번 했다. 침실 정면에는 활짝 핀 찔레꽃을 그린 벽화가 유난히 눈에 안겨왔다. 그림을 보던 황선생의 눈에는 그 그림속의 찔레꽃이 순옥이 고운 얼굴로 바뀌더니 자기를 오라고 손짓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재빨리 침실문을 닫고 나서 집안 곳곳을 자세히 돌아보았다. 어느곳을 보아도 모두가 고급적으로 인테리어가 잘 되여 있어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황선생은 속으로 순옥이야 말로 예술적 소질을 갖춘 미모의 녀인일 뿐만 아니라 남부럽지 않을 정도의 재산을 소유한 알짜박이 부자라고 여기게 되였다.     황선생은 순옥이네 집으로 갔다 온 후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여짓껏 추구해 왔던 리상적인 배우자는 인물은 쑬쑬해도 대화가 잘되며 인품의 좋으면 좋다고 생각했는데 이외로 순옥이를 보고는 생각을 바꾸게 되였다. 고운 미모에 넉넉한 재산을 소유하고 있고 마음이 좋아 보이니 정말로 구하기 힘든 배우자 감이라 생각하였다. 황선생은 한켠으로 달리 생각해보니 혼인이란 일방적이여서는 성사될수 없다고 여긴다. 자기의 판단으로는 순옥이는 둘도 없는 좋은 배우자 감이라 점 찍었지만 대방의 의사를 아직 모르고 있는 것이 너무 일방적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순옥이를 만나 집적 묻고 싶었다.     어느 조용한 기회에 황선생은 순옥이를 보고 한번 만나서 긴요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순옥이가 수응하자 황선생은 순옥이와 같이 으로 갔다.     두 사람은 인사를 나눈 후 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황선생은 뚤어지게 순옥이 얼굴을 보다가 정색해서 이런  말을 했다.     “순옥씨는 저를 어떻게 보십니까?.”     “뭘, 그러세요.”     “어떤 남자로 보는가 말입니다.”     “탁월한 재주를 가진 훌륭한 선생님으로 보지요.”     “선생님 말고 , 순옥씨한테 알맞는 배우자로는 안됩니까?”     “선생님도 참, 별 말씀을 다 하시네요. 선생님한테는 좋은 사모님이 있지 않나요?”     “오년전에 마누라가 저 세상으로 먼저 가고 저는 외톨이로 살아온지 여러해 됩니다.”     “정말!”     “녀사님 앞에서 어떻게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말하면 저는 선생님을 안지는 오라지 않지만 선생님은 좋은 분이라 생각합니다. 선생님께 호감은 가지만 남자복이 없는 저로서는 선생님의 호의를 받아들일수 없습니다."     “저도 녀자복이 없는 사람입니다. 알고보면 우리 두 사람 다 싱글인데 뭘 론할게 있겠습니까? 그러니 먼저 사귀여봅시다."     “그렇다면 다시 생각해 보겠어요.”     “녀사님의 좋은 답복을 기다리겠습니다.”     두사람은 몇 달간 대방에 대한 료해를 거쳐 대방을 신임하게 되였다. 서로가 자석처럼 대방을 끌어안더니 이제는 사제간으로부터 부부간으로 되기를 기약하였다.                                             에필로그       결혼식을 앞두고 순옥이는 지나온 인생길을 도리켜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인생이란 참으로 알고도 모를 일이다. 자신은 무엇때문에 살이센 녀자라는 말을 들으며 남다른 인생을 살아왔을가? 이번에 만난 남편과는 오래오래 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의 운명은 하늘에 달려 있으니 하늘에 순종하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얼마후 두 사람은 결혼식을 올리였는데 그날이 바로 찔레꽃이 활짝핀 5월 5일이였다.   
185    새봄맞은 찔레꽃 (5) 댓글:  조회:196  추천:0  2023-06-01
                                        새봄맞은 찔레꽃 (5)                                                      9         순옥이가 왕서방을 잃고 슬퍼하고 있는데 한국에 있는 녀동생한테서 전화가 왔다. 언니에 대한 정황을 알고 있다면서 중국에서 속을 썩이지 말고 한국으로 오라고 했다. 한국으로 갈가 말가 고민하다가 그래도 제일 믿을직한 사람한테 물어보는게 좋다고 생각하고 아들한테 전화를 하였다. 순옥이 아들은 명문대학을 졸업하고 상해 모 연구소에서 사업하고 있었다. 아들한테 한국으로 가면 어떨가? 하였더니 아들은 어머니의 의사대로 하라고 하였다.     그는 빠른 시일내에 한국으로 가는 수속을 밟았다. 한국으로 가는 비자 신청을 하여 한달만에 한국 입국비자가 내려왔다.     사실대로 말하면 순옥이는 한국으로 돈 벌려고 가려고 떠난 것이 아니였다. 왕서방이 남긴 재산만으로도 로후를 얼마든지 잘 보낼수 있었다. 한국려행을 하면서 여지것 받아왔던 스트레스들을 풀어보자고 떠난 것이였다. 그는 떠나면서 집을 시어머니한테 맡겨놓았다.      순옥이는 비행기 안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지나온 인생 55년을 생각하면 악몽같기도 하였다. 남들의 상상도 못할 어려움과 깊은 상처를 받으며 지나왔다. 어쩌면 세 배우자를 만났는데 세 사람 다 저 세상으로 먼저 보냈으니 이놈의 팔자는 무슨놈이 개팔자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설음이 북받쳐 올라 눈물을 흘렸다.      한국에 도착한 후 동생집에서 며칠 머물러 있으면서 한국려행이나 실컷하자고 생각했다. 동생들과 함께 려행을 다니자고 하였다. 그런데 동생네 부부간은 일하려 다니느라고 마음편히 려행을 할 사이가 없다며 언니 혼자 다니라고 했다. 순옥이는 려행사를 통하여 한국국내려행을 하였다. 한달동안 혼자서 려행단을 따라 려행을 하고 보니 한국을 다 돌아본것 같아 더 돌고 싶지 않았다.      순옥이는 려행에 흥취를 잃게 되자 무료하게 놀것이 아니라 소일거리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에 와서 일을 하자면 한국 법무부와 로동부의 비준을 받어야 했다. 그는 법무부와 로동부의 규정에 따라 외국인들이 반듯이 받아야 할 강습반에 참가하였으며 법적절차를 받어 취업허가서를 받았다. 취업 허가서가 나오자 동생과 같이 서울 모 직업소개소로 찾아갔다. 직업소개소 담당자가 그녀를 보고 년세가 얼마인가 물었다. 그가 55세라고 하자 담당자는 일반적으로 50세 이상이면 일자리를 얻기가 힘들다 하면서도 젊게 보이기에 일자리를 찾기가 어려울것 같지 않다고 했다. 그 담당자는 순옥이가 소지한 증건을 확인해 보더니 어떤일을 하시려고 하는지? 물었다. 그가 식당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담당자가 여러 곳에 전화를 하더니 경기도 화성시 모 음식점으로 가라고 했다. 그날 그는 소개비로 한화 2만원을 냈다.      화성시 모 음식점을 찾아가니 음식점 녀업주가 반갑게 맞어 주었다. 서비스산업을 하는 업주들은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고용 일군들이 젊고 얼굴과 몸매가 고울수록 채용하는데 우선 순위를 두었다. 마침 일군이 모자라 일군 구입에 애를 먹고 있는데 이런 미인이 찾아오니 금상첨화가 아닐수가 없었다.     순옥이는 중국에 있을때 음식점에서 일을 많이 했기에 한국에 와서도 별로 어려울것이 없으리라 생각했다. 정작 식당에서 일하다 보니 한국료리의 명칭을 잘 몰라 한참 애를 먹었다. 몇 달 지나고 보니 한국 료리와 음식메뉴에 대해 익숙히 알게 되였다.     순옥이가 고운 얼굴에 하냥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열심히 일하자 식당주인은 물론 찾아오는 손님들도 순옥에게 엄지척을 보였다. 한번 왔던 손님들은 재차 왔다. 재차오는 단골 손님수는 늘어났다. 사람들은 이 식당의 활기를 뛰게 된것은 미녀 영업원을 영입했기때문이라고 했다. 순옥이가 인기 인물로 등장하자 따라서 잡음이 많아졌다. 다행히 순옥에 대한 구설이 나돌 때마다 식당주인이 방패막이 되여 단호하게 막아나섰다.     순옥이가 한창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을때 예상치 않은 일이 발생하였다. 등잔밑이 어둡다고 고운 녀자를 보면 오금을 못 쓰는 사장의 남편 정회장이 순옥이를 보더니 첫 눈에 반하여 눈독을 들였다.     어느날 순옥이가 퇴근하려고 식당문을 나서는데 순옥의 앞으로 승용차 한대가 오더니 칙 하고 멈쳐섰다. 차에서 정회장이 내리였다.    “순옥씨 퇴근시간이 늦었는데 이 차에 앉으시오. 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소”    “저는 통근 뻐스를 타고 가겠으니 회장님은 볼일을 보려 가십시오.”    “우리 식당에서 열심히 일하는 분을 집까지 모셔 드리는 것이 달리 생각마시고 차에 오르십시오.”    순옥이는 회장님이 하도 차에 오르라고 재촉하는 바람에 할수없이 차에 올랐다. 그날 이후 정회장은 여러번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가 차를 가지고 와서 순옥이를 집까지 바래다 주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고 누군가 정회장이 차로 순옥이를 집까지 모셔갔다고 녀사장한테 일러바쳤다. 남편의행실에 대해 아니꼽게 보아오던 차에 남편이 녀종업원을 차에 태워 집까지 바래 주었다는 말을 들은 녀사장은 얼굴에 노기가 잔뜩 서리였다. 이상하게도 녀사장은 남편에게 분풀이를 하여야 할 대신 양같이 순진한 순옥이한테 분풀이 했다. 그것도 말로 경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칼로 무우를 베듯이 단호하게 순옥이를 해고시키였다. 연고없이 해고를 당한 순옥이는 억울함을 풀곳이 없었다.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사장은 나를 해고 시킬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떠 오르는 것이 하나 있었다. 정회장의 차를 몇번 탄적이 있었던 일이 떠올랐다. 그는 이 사실을 밝힐가 생각했다가 밝혀보아야 좋은 말이 없으리라 생각되여 접고 말았다.     그후 순옥이는 음식점, 모텔, 경로원을 전전긍긍하면서 다니였다. 어디로 가나 그 못쓸 남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떼우곤 하였다.     이번에는 지인의 소개로 늙은 량주가 살고 있는 집으로 가사 도우미로 들어가게 되였다.     순옥이가 찾아간 집은 서울에서도 부자 동네라 불리우는 하남 대치동이였다.  5층으로 된 단독주택이였다. 소개자의 말에 따르면 이 주택건물주가 바로 허영택이란 사장님이였다. 사모님의 년세는 81세이고 사장님은 78세라 하였다.     순옥이가 찾아 갔을 때 안로인은 거동이 불편하여 침대에 누워 있고 바깥로인은 키는 작아도 허리가 곧고 이마가 벗겨졌는데 학자다운 감이 들었다. 사장님은 순옥이를 보고는 마음에 들어 순옥이를 데리고 건물 안밖을 돌아보았다. 허사장은 순옥을 보고 계약서를 쓰자고 하였다. 계약서에는 가사 도우미가 하여야 할 일들과 가사 도우미 월급까지 상세히 적혀 있었다. 순옥이가 싸인을 하자 사장은 가사 도우미가 일을 잘하면 보너스까지 주겠다고 했다.     순옥이는 허로인을 사장님이라 불렀고 안로인을 사모님이라 불렀다.     순옥이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에다 사모님의 병시중까지 돌보느라 바삐 돌아쳤다. 허사장은 순옥이가 바삐 돌아치며 힘들어 할때마다 곁들어 주었다. 허사장은 월말이 되면 꼭 월급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보너스까지 가첨해 주었다.     순옥이가 그집에서 일한지 만 3년이 되던 날 사모님은 저세상으로갔다. 순옥이는 사모님이 돌아가시자 이 집에 있을 멋이 없어 이집을 나오려고 하였다. 순옥이가 이집을 나가겠다고 말하자 허사장은 순옥이 손을 잡으며 이집을 나가지 말고 계속 이집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럭저럭 몇 달이 지났다. 허사장은 순옥이를 보자고 해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     “순옥씨가 우리 집에 와서 고생을 많이 했소. 나는 몇 년간 순옥이를 지켜보면서 보기 드문 참한 녀성이라고 보아왔소. 순옥이가 만약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이곳에 계속 눌러 앉아 나와 같이 한집에서 살면 안되겠소.”     “나도 당분간은 중국으로 돌아갈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사장님과 계속 한 집에서 산다는 것이 불편해서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사장님은 새로운 분을 만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장님께서 새로운 배우자를 만날 때까지만 있겠습니다.”     “순옥이 다시 생각해 보오. 내가 이 나이에 새로운 배우자를 만난다는게 말이되오. 그러니 순옥이가 계속 가사 도우미로 있어도 되고 과분한 내 욕심인데 부부로 되여주면 어떻겠소.”     “사장님의 마음은 리해합니다. 사장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사장님과 저하고 나이 차이가 많아 부부로 되기엔 어려울것 같습니다. 사장님께서 내가 집에 남기를 원하시다면 그냥 가사 도우미로 있겠습니다.”     “순옥이 다시 생각해 보오. 보건대 내가 나이에 비하여 젊어보이지 않소. 난 아직도 순옥이를 사랑할만한 신체를 가지고 있소. 순옥이도 짐작했겠지만 나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지 않소. 무자식인 내가 이 많은 재산을 죽을 때 가지고 갈 수는 없으니 아무튼 누구한테 물려주어야 하지 않겠소. 순옥이가 나와 같이 산다면 돈 근심을 할 필요가 없고 앞으로 재산의 절반을 순옥의 명의로 전의하겠소. 그외의 재산은 사회에 기부하겠소.”     “저– 는 사장님의 재산에 대하여 신경을 쓰지 않겠지만 사장님의 너그러우신 인품이 맘에 듭니다.”     “그럼 동의한다는 말이오.”     “사장님도 너무 급하시네요. 내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네.”     순옥이는 며칠 고민하다가 허사장의 간곡한 요구를 받아 주기로 하였다.      순옥이가 허사장이 청혼을 받아준다고 한 날 허사장은  꽃다발을 들고 순옥이 침실로 들어왔다. 젊은이들처럼 한쪽 무릎을 끌고 정중하게 순옥에게 꽃다발을 드리며 청혼을 받어주어 고맙다고 하였다. 순옥이도 반겨주었다.     며칠후 허사장은 순옥이를 데리고 혼인 등록청에 가서 혼인 등록을 하였다. 혼인등록을 하자 정식으로 두사람은 호화롭게 꾸며진 신혼방에 자게 되였다. 신혼의 밤 허서방은 젊은이 못지지 않게 여러가지 동작으로 신부가 깜짝 놀랄 정도로 즐겁게 해 주었다. 신부는 너무도 신기하여 물었다.     “서방님은 년세가 많으신데도 젊은이 못지지 않게 힘있고 재치있게 여러가지 동작을 하네요. 어디서 배웠어요.”     “그일을 누가 배워주어서 안다던가. 나는 우리 허씨가문의 명의이신 허준선생이 쓴 을 읽고 그대로 하였을 뿐이네.”     “호호호 그런책도 다있네”     순옥이는 입을 싸쥐고 웃었다.    순옥이는 허사장과 같이 살면서 서로 호칭을 어떻게 부를가 생각 하다가 서방님한데 물었다.    “사장님, 우리는 이미 부부로 되였는데 호칭을 어떻게 불러야 할가요?”    “그것은 당신이 부르기 싶은 대로 불러도 돼.”    “근데 그냥 사장님이라 부를가요. 아니면 령감님, 우리아저씨, 오빠, 여보, 서방님이라 불러야 하겠는데 제일 듣기 좋은 호칭은 뭐예요.”    “나야 여보거나 서방님도 좋지만 좋기는 오빠라고 부르면 제일 좋아하지. 나는 그렇다치고 내가 순옥이를 뭐라고 부르면 좋겠나?”     “그냥 순옥이라고 불러도 좋고 여보라거나 자기라고 부르면 편할것 같아요.” 두 사람은 집안에서는 남편을 오빠라거나 자기라고 부르고 안해를 자기라고 부르기로 합의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두사람의 사이는 좋아만 졌다. 허사장은 젊고 이쁜 안해를 맞이하고 보니 세상이 모든것을 다 차지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안해와 같이 쇼핑하려 자주 다니였다. 허사장은 려행 다니기를 좋아했다. 젊어서는 돈을 버느라 려행을 자주 다니지 못하였다. 본댁과 같이 제주도 려행을 한것 뿐이였다. 이쁜 새마누라와 같이 려행을 하면은 자신의 품위가 올라 갈것 같아 려행을 하기로 마음을 다졌다. 순옥이도 집에 파묻쳐 있는 것이 갑갑하여 어디로 려행이라도 갈가고 생각하던차 서방님이 신혼려행을 떠나자고 하니 선득 동의하였다.    처음에는 국내의 이름난 해변가나 명승지를 찾아 다니였다. 해변가나 명승지에 가서는 숙박시설이 제일 좋은 곳에서 신혼 부부가 랑만이 있게 보내였다. 려행지에서 사람들은 젊고 이쁜 녀인을 데리고 다니는 허사장을 보고 능력이 있는 남자라고 평가 하여 주자 신랑은 어깨가 으쓱해 졌다. 순옥이는 국내 려행을 하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그가 한국에 와서 려행단을 따라 다닐때에는 동반자가 없어 고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면 이번에는 령감님과 함게 다니니 기분이 좋았다.     그들은 국내 려행에서 시야가 넓어지자 이번에는 한발 더 나아가 해외 려행을 떠났다. 첫 려행코스는 한국과 가까운 이웃 나라인 일본과 동남아의 싱가포르, 말레아시아, 태국 유람이였다. 순옥이는 처음으로 부부동반으로 해외 려행을 하고 보니 시야가 넓어지는 감이 들면서 려행도 일종의 학습이라고 느끼였다. 그는 점점 능력이 있는 좋은 남편을 만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 부부는 동남아 려행을 마치고 이번에는 서유럽의 독일, 이딸리아, 프랑스, 스위스, 빠띠노시국을 유람하였다. 연후 한차원 더 높여 대양주에 있는 오스트랄리아와 뉴질랜드를 유람을 하였다. 마지막으로  미국, 카나다, 멕시코, 하와이 려행을 하였다. 여러개 나라를 려행하면서 가장 살고 싶은 곳이 어딘가 묻는다면 서슴없이 물좋고 공기좋고 기온이 좋은 하와이라는 동일한 생각을 했다.     몇년간 허사장은 젊고 아릿다운 녀인과 세계려행을 하고 보니 기분은 좋았는데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불편하였다. 려행단체를 따라다니다 보면 항상 시간에 맞추어 다녀야하고 힘 있는 젊은이들과 어울려 다니다 보니 힘겨웠다. 단단한 박달나무도 좀이 먹기 마련이다. 자신을 박달나무처럼 자부해 왔던 허사장도 시간이 지나면서 체력이 따라가지 못함을 느끼였다. 이맘큼 해외려행을 하였으니 만족하다는 생각들면서 한켠으로는 체력이 따라가지 못하여 더는 해외려행을 갈것 같지 않았다. 안해 순옥이는 남편이 려행을 하면서 힘들어 하는 모습을 보자 너무 무리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해외려행을 그만하고 조용히 살자고 제의하였다. 허사장은 안해의 의견을 받아들여 해외려행을 가지않기로 하였다.     좋은 세월은 빨리도 흐른다. 허사장이 순옥이와 결혼한지 5년이 되였다. 남자들은 나이와 상관없이 젊고 이쁜녀인을 좋아하는 근성을 가지고 있다. 허사장도 마찬가지였다. 늙은 마누라와 상징적으로 살아왔던 그가 젊고 어여쁜 녀인을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되였으니 고목에 새싹이 돋듯이 새로운 기분으로 새 생활을 시작하였다. 어언 후처와 결혼한지 5년이 된다. 후처에 감투끈이 벗겨진다는 말이 있듯이 허사장은 5년동안 많은 정력을 후처에게 쏟아부었다. 좋은 일 뒷끝에는 불행이 닦쳐온다. 이제는 허령감의 체력이 고갈이 날 지경에 이르렀다.     허령감은 몸관리에 특별히 신경을 쓰고 운동을 열심히 하여 왔지만 세월을 이기는 장사가 없다고 나이를 먹고보니 그렇게 무병하다고 자신만만 했던 그가 신체의 여기저기에 고장이 나더니 병원출입이 잦아졌다. 안해가 아무리 남편한테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마음을 즐겁게 해 드렸지만 남편의 로쇠는 막을수 없었다. 뒤돌릴수 없는 시간은 허사장을 죽음의 변두리에 몰아가고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무심한 하늘은 순옥이 네번째 남편에게 저세상으로 오라는 호출장을 내려보냈다.     림종을 앞두고 허사장은 안해의 손을 꼭 잡고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오래 살 것 같지 못하오. 당신을 만나 행복하게 보냈소.  당신한테 넘길 유산 상속서를 작성하여 놓았소. 그 유산이면 당신은 후반생은 근심걱정 없이 살것이오. 나 죽으면 내 골회를 강릉에 있는 우리허씨가문의 조상들이 계시는 선산에 묻어주오.” 허사장은 유서를 남기고 저세상으로 갔다. 순옥이는 남편의 유언대로 남편의 골회를 허씨가문의 조상들이 계시는 강원도 모 선산에 묻었다. 순옥이는 남편의 유골을 묻자 소리없이 눈물만 뚝뚝 떨구었다.     순옥이는 한국 남편한테서 재산 상속을 넉넉히 받았다.  
184    새봄맞은 찔레꽃 (4) 댓글:  조회:186  추천:0  2023-05-27
                                                                                                              새봄맞은 찔레꽃  (4)                                                                                                                8         두번째 남편의 3년제를 지내고 난뒤 어느날 순옥이가 일하는 식당 주인 김사장이 순옥이를 불러놓고 정중하게 이런 말을 했다. “아주머니에게 한가지 묻겠습니다. 아주머니는 아직 젊으신데 재혼할 생각이 있는지요? 만약 생각이 있으시다면 제가 좋은 사람을 소개할가 합니다.”     “나는 아직 재혼할 생각이 없습니다.”     “안된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랭정하게 생각해 보십시오. 아주머니는 아직 젊지 않습니까? 갈길이 멀고도 먼데 좋은 배우자를 만나 지난 일을 잊고 후반생을 행복하게 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그렇기는 한데, 어디 나같이 팔자가 사나운 녀자를 맞아줄 남자가 있겠습니까?”    “어째 없겠습니까? 제가 소개하려는 사람은 건설업을 하는 돈많은 사장입니다.”    “돈많은 사람이면 더 안될것 같습니다. 돈 많은 남자들일 수록 따르는 녀자들이 많고 여자를 선택하는 기준이 높다고 들었습니다. 나는 재산도 없고 아이 달린 녀자여서 돈많은 남자를 선택하기 힘듭니다.”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사람은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만나보면 알것 입니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순옥이는 집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새끼달린 녀자로서 혼자 산다는게 말이 아니다. 현실적으로 보아 자신은 남자를 떠나서 자립적으로 살것 같지 않다. 점쟁이 할머니가 내 팔자에 남자 여럿을 할것이라고 했으니 어차피 세번이면 어쩌고 네번이면 어쩌라 싶어 만나 보리라 생각했다.     며칠이 지나 사장이 순옥이를 보고 어떻게 생각을 하였는가 묻자 순옥이는 시원스럽게 답하였다.     “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사장님을 믿고 한번 만나 보겠습니다.”      김사장의 주선으로 그 남자를 만나게 되였다. 순옥이가 만날 장소로 가니 거무틱틱한 얼굴에 건장하게 생긴 남자가 와 있었다.그 남자는 반갑게 순옥이 손을 잡으며 억양이 약간 다른 조선말로 이렇게 인사말을 하였다.     “안녕하세요. 저는 연서가에 살고 있는 왕가복이라고 합니다.     “저는 북산가에 살고 있는 박순옥이라고 합니다.”     “김사장을 통하여 아주머니에 대해 알게되였습니다. 김사장의 말대로 아주머니는 대단한 미인입니다. 초라한 저를 만나 주셔서 반갑습니다.”     “지천에 미녀들이 널려 있는데 초라한 저를 미녀라고 하니 과분합니다. 혹시 가복씨가 한족이 아니세요.”     “네, 옳습니다.”     “한족인데 조선말을 곧잘합니다.”      “어릴때 조선족 마을에서 살았습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조선말을 별로 쓰지 않다나니 좀 서툴기는 합니다. 순옥씨한테 한가지 물어봅시다. 사랑에는 민족도, 국경이 없다고 하던데 순옥씨는 배우자가 한족이면 안됩니까?”     “아니예요. 내처지에 뭘 가릴게 있겠습니까? .”     “아, 그렇군요.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니 다행입니다. 이제부터 솔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뭔저 말씀하세요.”     인연이 되자고 그랬던지 그 두사람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진지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번 만남이후 순옥이는 왕씨를 자주 만나게 되였다. 자주 만나 대화를 나누면서 보니 왕씨는 겉 모양을 보아서는 거칠어 보이였지만 실상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순옥이는 왕씨에게 호감이 가면서 왕씨의 리력을 조사하여 보았다. 왕씨는 모 건축회사의 지배인이였다. 부자소리를 들을 만한 재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본처는 병으로 사망했고 자식 둘이 있는데 큰 자식은 외국류학을 갔고 작은 자식은 상해 모대학을 다니고 있다고 했다. 왕씨는 처를 먼저 저세상으로 보낸 후 여러 녀성들을 만났지만 마음에 드는 녀성이 없어 여지껏 독신으로 있다고 했다. 왕씨는 유별나게 조선족 녀성을 안해로 맞겠다고 고집하고 있다고 했다.     순옥이는 왕씨에 대한 조사를 한후 정식으로 왕씨와 사귀기로 하였다. 몇달간 사귀는 과정에서 두 사람은 대방에게 믿음이 가면서 서로 신뢰할수 있게 되였다. 한발 더 나아가 결혼을 하기로 언약을 했다.     결혼하기로 언약을 한지 한달만에 왕씨는 순옥이를 보고 결혼 등록을 하자고 했다. 순옥이는 너무 급하게 결혼등록을 하는 것이 이르지 않는가 하다가 아무래도 살봐엔 결혼등록을 하고 사는것이 좋겠다고 생각하고 결혼등록을 하였다.     결혼등록을 한 후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리였다. 결혼식을 올리여 얼마 안되자 왕서방은 한가한 겨울철이라 건설업계에서는 휴식하는 기간이여서 려행하기 딱 좋은 때라고 하면서 신혼 려행을 가지고 하였다. 남편이 신혼려행을 떠나자고 하자 순옥이도 얼싸좋다 신려행을 떠나는데 동의하였다. 순이는 쾌히 동의하였다. 왕서방은 려행을 떠나면서 겨울에 할 일들을 부하직원에게 맡겨놓고 안해와 같이 기분좋게 려행을 떠났다.      먼저 찾아 간곳은 만민의 꼭 한번은 찾아가 보려고 하는 곳, 호남성 장사시 소산충에 있는 모택동주석의 생가였다. 소산충으로 가기전에 먼저 모택동주석의 동상앞에서 참배를 올리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모택동 동상에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곧추 모택동주석의 생가가 있었다. 의의가 있게 모택동주석이 생가를 돌아보고나자 왕서방은 순옥이를 보고 소산충에서 멀리 보이는 웅장한 산을 가리키면서 이런말을 했다.     “여보 저 앞에 보이는 산이 무슨 산인줄 아오.”     “산이름이 뭔지 모르겠는데요.”     “저산이 바로 풍류소자에 뭐산자를 가진 소산이오. 소산을 두고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소.  풍수지리를 잘 본다는 외국인이 소산(韶山)을 보면서  “소산은 온후하고 강하여 위인이 나타날 곳이다.” 라고 말했다고 하오. 그말대로 위대한 인물 모택동주석이 태여났다오.” 순옥이는 왕서방의 말을 들으면서 소산을 보니 정말로 위인이 나타날 산으로 보였다.      모택동 생가를 돌아 보고난후 그들은  천하제일경이라 불리우는 장가계를 찾아갔다. 소산에서 장가계를 가는 사이 차창으로 보이는 산은 높지 않은 야산이였는데 장가계입구에 들어서자 산발이 높아지면서 하늘을 찌르듯이 높고 웅장한 산들이 나타났다. 순옥이는 처음으로 이렇게 웅장하고 기괴한 산을 보고 연신 감탄을 자아냈다. 장가계시에 도착하자 선참으로 세계에서 제일 길다는 케불카를 타고 산 정상으로 올랐다. 오르고 보니 마치 하늘 나라로 오르는 감이들었다. 산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다보니 기이한 산들이 석림을 이룬것이 가관이였다. 장가계에서 제일 인기를 끄는 곳은 천문동이라는 동굴이다. 동굴 안에서 하늘을 쳐다보면 마치 자신이 하늘 나라로 왔다는 감이 든다. 순옥이는 보아도 보아도 신기하기만 한 장가계를 돌아 보고 나니 신선이 사는 나라로 다녀온 감이 들었다. 장가계를 돌아본후 그들 부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풍경관광도시인 광서쫭족자치구에 있는 계림시를 찾아갔다. 그들은 계림시 자연        풍경구를 돌면서 조물주가 만들어 놓은 수려한 푸른 산, 맑은 물, 기이한 동굴과 아름다운 돌, 그리고 산과 물이 어울린 이강을 보면서 아!소리를 련발했다. 계림시에서 맘껏 즐기고 난뒤 중국의 명산중에서도 명산이라 불리우는 황산을 찾아갔다. 중국의 명산중에서 으뜸이라 불리우는 황산에 오르고 보니 세상만물을 한품에 다 않은 감이들었다.     려행에서 재미를 붙친 그들 부부는 이듬해 겨울에도 유람을 떠났다. 이번에는 광주를 거쳐 해남도 유람을 하였으며 향항, 오문, 대만을 유람하였다.     왕서방은 이쁜 안해를 위하여 머슴이 되겠다고 하면서 유람길에서 안해를 공주처럼 모시였다. 유람지에 가서는 당지에서 나는 특산물과 귀한 장식품을 사서 안해에게 선물로 주었다.     이야기는 다시 그들 부부의 첫 날 이야기로 돌아간다. 결혼 첫날밤 왕서방은 신부를 건득들어 침대우에 눕혀놓고 애무해 주었다. 신부가 가는 신음소리를 내자 왕서방은 힘있게 신랑노릇을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렇게 왕성했던 그것이 10분이 되기전에 물렁해졌다. 왕서방은 신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려오면서 가는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했다. 신부는 아직 쾌감을 느껴보기 전에 서방님이 주저앉자 실망감이 들었다. 풀이죽어 돌아눞는 왕서방의 우람진 체구를 보니 무기력한 존재로 보였다. 왜서 건장한 체구를 가진 왕서방이 그 방면에서는 이렇게 무기력할가? 혹 첫날이여서 긴장해서 그렇지 않을가? 아니면 몸에 병이나 있지 않을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이튿날 순옥이는 조용한 기회에 왕서방에게 어제 그 일을 그리 일찍 끝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혹시 몸에 병이 있지 않느냐고 살짝 물어보았다. 왕서방은 괴면쩍해하면서 미리 말못하여 미안하다고 했다. 사실은 오랜기간 고혈압에다. 당뇨병종합증이 있어서 그렇다고 대답하였다.     꽃나무도 계절따라 꽃이 피고 지고 열매를 맺으며 락화한다. 순옥이는 왕서방을 만나 여지껏 누려보지 못한 향수를 실컷 누려 보았다. 비록 밤생활을 조화롭지 못하여도 여러모로 안해를 끔직히 아껴주는 왕서방의 따뜻한 마음이 가슴깊이 스며들었다. 왕서방의 도움으로 아들은 별고 없이 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시어머니 생활비도 넉넉히 드리였다.     누군가 인생은 처음에는 희극으로 연출되다가 후에는 비극으로 엮어지기도 하며 처음에는 비극으로 연출되다가 후반부는 희극으로 엮어지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결혼하여 5년이 되던 어느날 왕서방이 외지로 출장을 갔다가 갑자기 쓰러졌다. 왕서방이 쓰러졌다는 급보를 접한 순옥이는 눈앞이 캄캄해나며 단박 쓰러질번 하였다. 다행히 이런 급변을 여러번 당해 봤기에 쓰러지지는 않았다. 그는 떨리는 가슴을 안고 왕서방의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순옥이가 왕서방이 입원한 병원으로 가보니 왕서방은 급진실에 있었다. 점적 주사를 맞고 있었는데 순옥이를 알아보고 눈 인사를 하였다. 순옥이가 근심어린 눈길로  왕서방을 보자 왕서방은 손을 내밀어 순옥의 손을 잡고 큰 병이 아니니 근심하지 말라고 하면서 며칠더 맞으면 무사히 집으로 돌아 갈것이라고 했다.       순옥이가 담당의사를 보고 왕서방의 병증세가 어떤가고 물었다. 의사가 하는 말이 환자는 과중한 로동과 스트레스로 인하여 쇼크가 왔다고 했다. 다행히 병증상이 심하지 않아 치료를  받으면 효과가 있을 것이라 했다.    사람들은 흔히 여러가지 업종중에서 사장들이 수명이 짧다고 한다. 왜냐하면 사장들은 돈을 벌기위해 밤낮이 따로없이 과도하게 일한다. 그뿐이 아니다. 사업관계망을 넓히기 위해 술좌석에 빈번하게 앉게된다. 사장들은 누구보다도 과도한 일과 과음, 스트레스를 받게된다. 그런 스트레스들이 쌓이고 쌓여 일찍 죽는다고 한다. 왕씨도 사업을 하느라 바삐 돌아치다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당뇨병에 걸리였고 고혈압환자로 되였다.     담당의사가 왕서방은 혈당수치가 높고 혈압이 정상이 아니기에 입원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왕서방은 혈당 수치가 높고 혈압이 높은 것은 이전에도 있은 일이 기에 큰병이 아니라며 집에가서 약을 먹고 안정을 취하면 나을 것이라 했다. 순옥이는 입원하여 치료를 받는 것이 옳다며 입원수속을 밟았다. 입원치료를 받아 왕서방의 병세는 호전되였다. 입원하여 10일이 되자 출원하였다. 출원후 안해의 정성어린 간호와 왕서방이 몸관리를 잘하자 몸은 점점 나아졌다. 나날이 좋아지는 왕서방을 보면서 순옥이는 한숨을 돌리게 되였다.     몇달이 지나자 병세가 호전되자 왕서방은 회사로 출근하였다. 회사에 가서는 예전처럼 바삐 돌아쳤다. 또다시 피로가 겹쳐 왔다. 왕서방의 병세가 악화되기 시작하였다. 혈당수치가 높아지는 것은 물론 혈압이 올라가면서 이번에는 가슴이 답답해 나며 숨이 막히는것 같다고 했다. 다시 병원에 가서 전면검사를 받았다. 검사결과 혈앞이 높고 혈당수치가 높으며 심지어는 심장 박동에 문제가 있다고 했다. 재차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사람의 명은 하늘에 달려 있다고 한다. 수차 전면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었지만 병은 나아지지 않고 더해만 갔다. 하늘은 왕가복이를 부르고 있었다. 죽음이 림박해 왔다는 것을 안 왕서방은 변호사를 불러 재산의 일부를 안해 순옥에게 상속한다는 유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유서를 작성하던 날 왕서방은 눈물이 글썽한채 아내의 손을 잡고 안해와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었는데 먼저 떠나게 되였다며 미안하다고 했다. 그리고는 유언장을 안해에게 넘겨 주었다. 왕가복이는62세의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였다.     순옥이는 왕서방의 유언대로 그의 골회를 경도릉원 납골당에 있는 본댁의 골회상자 곁에 안치했다. 무심한 하늘이 왕가복이를 일찍 하늘나라로 데려가자 순옥이는 또다시 살이센 녀자라는 억울한 루명을 쓰게 되였다.  
183    새봄맞은 찔레꽃 (3) 댓글:  조회:199  추천:0  2023-05-23
                                                새봄맞은 찔레꽃 (3)                                                               6         순옥이는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하였다는 소식을 들는 순간에 졸도하였다. 그렇게 평화롭던 오씨 집안에 난리가 났다. 끌끌하던 아들이 하늘나라로 갔고 마음씨가 곱던 며느리가 졸도하여 병원에 입원하였으니 이보다 더 큰 불행이 어디 있으랴… 백주에 오씨가문에 청청벽력이 떨어졌다.    남편이 사망한 후 순옥이는 그집에서 살 생각이 없었다. 밤마다 피투성이 된 남편이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악몽을 꾸었다. 매일 악몽에 시달리다 보니 도저히 잠을 잘수 없어 몸은 수척해 갔다. 밤을 설치고 나면 온 하루 정신이 나지않고 흐리멍텅하였다.    순옥이는 시부모님한테 친정집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시부모님들도 며느리의 고운 얼굴이 이그러지는 것을 참아 더는 볼수가 없어 그렇게 하라고 하시면서 손자만은 두고 가라고 하였다. 애가 다니던 학교를 다녀야지 다른 학교를 다니면 적응하기 힘들기 때문이라 하였다.    순옥이는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시댁을 나와 친가로 조용히 갔다. 정들었던 집을 떠나면서 다시 한번 고개를 돌려 남편과 행복했던 일들을 회상하면서 비애의 눈물을 흘리 였다.    시집가서 얼굴이 밝아졌던 딸이 죄진 사람처럼 얼굴이 반쪽이 되여 친정집에 들어서자 그를 본 부모들의 가슴에는 문짝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친정에 온 후 얼마 안되여 순옥이는 연길로 올라와 세집을 잡아 놓았다. 친구가 소개해준 모 식당에서 일하게 되였다. 로동이란 힘들면서도 기쁨과 성취감을 주기도 한다. 순옥이는 로동속에서 안정을 찾았다.     순옥이가 그 식당으로 간지 얼마 안되여 미녀 복무원이 식당으로 왔다는 소문이 소리없이 펴지였다.  미녀의 고운 얼굴을 보려고 우정 찾아 오는 엉큼한 남자들이 있었다. 한번 왔다간 손님들은 다음번에 올때에는 꼭 여러 사람을 데리고 왔다.  업주는 손님이 나날이 많아서 매출이 올라가니 좋아서 웃음주머니가 흔들거렸지만 반대로 순옥이는 손님이 많을 수록 몸은 지치였다.     순옥이는 집에 있을 때에는 온갖 잡생각을 하다가도 식당에 와서 일을 하면 잡념들이 가뭇 사라지는 것이였다. 식당주인도 열심히 일하는 그를 믿어주고 로임을 제대로 주었을 뿐만아니라 보너스까지 챙겨주었다.    식당일을 한지 삼년이 되던 어느날 순옥이는 출근 시간전에 식당에 와서 청소를 하고 밥상을 닦고 있을 때였다. 식당안으로 남자 손님 한분이 들어왔다. 그 손님은 식당안에 들어서자 사방을 휘 둘러 보고는 순옥이 앞에 와서 멈춰서더니 이런 말을 했다.    “저 – 어, 박순옥씨가 아닙니까?”    “네, 그런데요.”    순옥이가 언결에 대답하고 돌아보는 순간 그 사람이 먼저 그를 알아 보았다.     “순옥이가 옳구나!”     “아이, 깜짝이야! 오빠가 웬일로 오셨어요.”     “너를 만나려 왔다.”     “나를 만나려 왔다? 잠깐만. 오빠가 나를 찾아 왔을때에는 꼭 할말이 있어 왔겠는데, 이걸 어쩌나, 여기는 식당이여서 말하기 불편하니까 밖에 나가 이야기 해요.”     두 사람은 조용한 곳을 찾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오빠가 나를 찾아온 리유는 뭐예요.”     “너는 아무때건 내가 너를 찾을 때가 있을 거라고 짐작은 했을거다. 나는 이미 네 남편이 사망하였고 네가 힘들게 산다는 것을 알고 있다. 우리 둘이 같이 살자는 말을 하려고 왔다.”     “뭐! 같이 살자구요? 그건 안돼요.”     “왜서 안된다는 거냐?”     “나는 이미 오빠를 배반한 녀자예요. 내가 무슨 면목으로 오빠와 같이 살수 있어요. 난 자격이 없는 녀자예요.”     “지금 형편에 뭘 자격을 론할게 있니, 니나 내나 다 홀로난 판에. 우리들에게 우리 자식이 있지 않니, 그러니 우리 함께 살아야 한다.”     “내가 낳은 자식이 오빠 아들이라고 누가 그럽데까?”     “그 일을 구태여 내게 묻지 말라.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네가 더 잘 알고 있지않니, 지나간 일들을 다 잊고 우리 함께 잘 살아보자.”     “자식을 위해서라도 우리 함께 살고는 싶지만 남편이 사망한지 겨우 3년밖에 안되는데 벌써 결혼을 하면 남들이 웃지 않겠어요.”     “구더기가 무서워 장을 못 담그겠니? 남이 눈이 무서워 결혼 못한다는게 데려 우습다. 내 친구들 중 재혼 경험이 있는 친구가 이렇게 말하더라. 과거 부부사이가 좋았던 사람들은 빨리 재혼하고 부부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들은 늦게 재혼을 하거나 아에 재혼을 하지 않는다고 하더라. 너네 부부 사이가 좋았고 우리 두 사람을 서로 잘 알고 있는 사이가 아니니, 그러니 무얼 고려하고 깝자를게 있니 빨리 결혼 하자.”     “오빠 조금만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렇게 하거라”     철규는 매일이다싶이 순옥이 찾아갔다. 마치 총각이 처녀에게 구애를 하듯이 구애를 했다. 순옥이도 철규의 마음을 잘 아는터라 질질 끌지 않고 철규의 마음을 받아주었다. 순옥이가 같이 살기로 대답한 날 철규는 순옥이를 으스러지게 끌어않으며 사랑한다고 말했다. 얼마나 갈망하며 오매불망 기다려 왔던 사랑이였던가? 물론 그날 두 사람은 두번째로 사랑의 즐거움을 만끽하였다.     두 사람은 결혼식을 어떻게 할것인가? 결혼한 후 어디에서 살것이가? 를 의론하였다. 순옥이는 우리가 재혼을 하는 만큼 결혼식은 검소하게 하자고 제의했다. 애를 위해서는 교육시설이 좋은 연길에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기는 절대 농촌에 가서 농사일을 할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철규도 순옥의 의사를 따르겠다고 하면서 빠른 시일 내에 농촌에 있는 집과 임대 받았던 과수원을 경매하기로 했다.     둘이 재혼하기로 약속 한 후 순옥이는 시어머니를 만나 뵈려고 명신촌으로 갔다. 몇년간 명신촌은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마을의 길은 모두 포장도로로 되여 있고 집집마다 산듯한 새집에서 살고 있었다.     철규네 집은 마을 앞에 있었는데 널직한 터를 가진 70평방에 멋진 양식을 갖춘 벽돌집이였다. 겉만 보아도 집안은 잘 꾸리였으리라 짐작되였다.     순옥이가 선물을 들고 집안에 들어 섰을 때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순옥이는 시어머니 앞에 머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어머니 그간 안녕하세요. 저를 잘 아시지요. 오늘부터 제가 어머니 며느리로 되였습니다. 부족한 저를 잘 가르쳐 주세요.” 시어머니는 며느리 손을 잡으며 말했다.     “어릴때부터 네가 자라는것을 보면서 내 며느리 감으로 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은 했다만 세상일이란 어디 내 마음과 같이 되더냐, 이제는 네가 진짜 내 며느리로 되여 한시름 놓게 됐다. 반갑다. 우리 고부사이로 잘 지내보자.”     “네”     시어머니는 며느리 앞에서 십여년간 아들이 지나온 일들을 이야기 했다.     “네가 시집을 갔다는 소문을 들은 후 철규는 웬일인지 기분이 상해하면서 밤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더라. 불행은 엎친데 덮친다고 어느 날인가 학교에서 시교육국의 지시정신에 따라 각 촌에 널려있던 학교들을 집중하였고 정식교원만 남겨두고 민반 교원과 대과교원들을 다 내보내게 되였다. 철규는 민반교원이 였기에 학교에서 나오게 되였다. 아들은 학교에서 나온 후 한동안 불안한 상태에 있었다. 철규는 죄지은 사람처럼 집안에 들어 밖혀있으면서 두문불출하고 있었다. 어느날인가 친구들과 같이 놀려갔다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맥없이 집안으로 들어왔다. 풀이 죽어 지내는 아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찢어지는 듯 아팠다. 그날 철구가 밤에 잠꼬대를 하던데 피뜩 들을라니 순옥이 네 이름을 부르는것 같더라. 쥐구멍에도 빛 들날이 있다고 어느날 촌장이 찾아와 철규를 보고 촌의 과수원을 맡아 달라고 했다. 아들은 과수원으로 가서 열심히 일하면서 한편으로 과수재배에 관한 많은 기술서적을 읽어 향내에서도 이름있는 과수 기술자로 되였다. 고진감래라 할가 아들한데 좋은 기회가 찾아 왔다. 농촌개혁을 하면서 도거리가 시작되였다. 아들은 선참으로 촌의 과수원을 도급 맡았다. 일이 잘 되자고 그랬던지 련속 3년동안 과수풍작을 따내였다. 그때 만원호라고 하면 대단하다고 할때 우리 집은 년간 수입 2만원을 올리였다. 돈을 벌자 아들을 마을에서 선참으로 이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멋진 오토바이도 한대 샀다.     아들한테 여러번 혼사 말이 들어왔지만 아들은 다 거절했다. 내가 하도 장가를 가라고 졸라 대여 할수 없는지 안도현 복흥에 있는 한 처녀를 만나 결혼하였다. 아들이 장가를 가자 나는 어서빨리 손주를 안고 싶었다. 그런데 아들이 결혼하여 5년이 되여도 며느리가 생육하지 않았다. 둘이 몇번 병원검사를 받었는데 며느리가 생육할수 없다는 진단을 받었다고 하더라. 그후 아들 며느리 사이가 버성거리면서 리혼하게 되였다. 리혼한 후 아들은 재혼할 생각을 하지 않더라. 내가 보건대 그때까지 철규가 맘속으로 너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더라.     요즘 철규가 갑자기 네가 내 며느리로 되였다고 하면서 기뻐 하더라. 더 좋은 소식은 어머니가 그렇게 안고 싶어 하던 친 손자를 보게 된다고 하더라. 나는 그말을 듣고 너무도 기뻐 친 손자가 누구인가 물었다. 철규가 하는 말이 네가 낳은 아들이 내 친손자라고 하더라. 순옥아 정말이지?. 애 이름이 뭐라고 했니? 다음에 올때에는 그녀석을 꼭 데리고 오너라. 내 손주가 어떻게 생기였는지 보고싶다.” “어머니가 보시면 알겠지만 아들애가 제 애비를 꼭 떼 닮았어요. 어머님의 소원대로 다음번에 올때에는 어머님의 손자를 꼭 데리고 오겠습니다.”     “고맙다 며늘아.”     순옥이가 시어머니를 뵙고 난후 철규도 순옥이와 같이 처가로 인사드리려 갔다.     장인 장모는 반가워 하시였다. 장모는 사위를 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사위 미안하네 이렇게 될줄을 않았으면 반대하지 말아야 할것을 그랬네, 앞으로 네 식구가 오붓하게 잘 살게.”                                                               7         철규는 결혼식을 치른 후 태평촌의 집과 과수원을 팔고 철남에 세칸짜리 집을 장만해 놓았다. 세칸 중에서 해빛이 잘드는 남쪽칸은 아들의 방으로 정하고 조용한 북쪽칸은 어머님의 방으로 정하였다. 새집에서 새 생활을 시작하니 사랑이 한껏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철규는 일자리를 찾으려고 로무시장으로 갔다. 우연히 로씨야 장사를 갔다던 고향친구 신욱이를 만났다. 서로 말을 주고 받던 중 신욱이가 하는 말이 지금 많은 중국 사람들이 로씨야 변해지구에서 장사를 하여 적지 않은 돈을 벌어왔다고 했다. 친구 말에 귀가 솔깃해진 철규는 로씨야 장사를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모아두었던 돈을 몽땅 외화로 바꾸어가지고 신욱이를 따라 로씨야 장사를 떠났다. 산설고 물설은 이국타향에서 3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 적지 않은 돈을 벌어가지고 귀국하였다. 귀국 후 먼저 철남 집을 팔고 돈을 보태여 연변제1고급중학교 근처에다 아빠트 한채를 사놓았다. 네식구가 한 집에서 오붓하게 사니 세상에서 부러울게 없는 것 같았다.     철규는 거저 놀기가 답답하여 자가용차를 사놓고 낚시질을 다니였다. 돈이란 많이 있어도 근심, 없어도 근심이 되는 요물같기도 한 존재이다. 철규는 몇 년간 돈을 벌지는 않고 벌어온 돈을 쪽쪽 쓰다보니 쥐가 소금을 야금야금 갈아먹듯이 돈뭉치가 줄어들었다.호주가 돈을 벌지 않고 안해에게 의거해 사는 꼴이 되니 철규의 마음도 편치 않았다. 돈쓸일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렇게 돈을 쓰다가 모아놓은 돈이 바닥이 날것 같았다. 철규는 다시금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돈을 벌가 생각해보니 외국으로 로무를 간다던가 아니면 남의 밑에서 일하여서는 큰돈을 벌것 같지 않았다. 지나온 경험을 비추어 보아 목돈을 벌려면 작던 크던 로반이 되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돈벌이 중에서 제일 빠리 리득을 얻을수 있는 것은 장사라고 생각했다. 장사중에서도 제일 파악이 있는 장사는 로씨야장사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시 로씨야장사를 떠나기로 작심했다. 순옥이는 남편이 다시 로씨야장사를 가겠다고 하자 극구 말렸다. 로씨야 장사를 갔던 사람마다 로씨야 장사가 위험하더라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였다. 중국에서 돈벌기 힘들면 한국로무를 가라고 했다. 안해가 그렇게 말리였지만 철규는 철규대로 타산이 있었다. 비록 로씨야 장사는 위험성이 있기는 하지만 잘만하면 목돈을 쥘수 있다고 여기였다. 그는 기어이 로씨야 장사를 떠났다.     남편이 로씨야 장사를 떠난지 2년이 되도록 소식이 없던 남편이 어느날 갑자기 사람들의 부축을 받으며 집에 들어섰다. 눈만 내놓고 머리를 풍대로 칭칭 감은채로 지팡이를 집고 간신히 집에 들어섰다. 남편이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순옥이는 억장이 무너지는듯하였다.     철규는 몸은 불구로 되였지만 정신상태는 괜찮았다. 순옥이 가 어떻게 된일인가 묻자 철규는 간신히 입을 열고 이렇게 말 했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의 말을 듣지 않았기에 이렇게 되였소.  로씨야에서 돌아오던날 강도들한테 모아논 돈을 다 빼앗기고 맞아서 이렇게 되였소.”     알고 보니 철규는 로씨야에 가서 적지 않은 돈을 벌었다고 한다. 귀국하려고 하던 날 밤 낌새를 알아차린 깡패놈들이 숙소에 들이닦쳐 돈을 내놓으라고 협박을 했다. 철규는 돈을 지키기 위해 반항하다가 그자들한테 맞아서 정신을 잃게 되였다. 다행히 친구들의 도움으로 병원에가 구급치료를 받어 목숨을 부지하게 되였다고 한다.     철규는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병원치료를 받아 다소 회복되는 것 같던 것이 출원하여 한달만에 병세가 악화되더니 그만 저 세상으로 갔다.     순옥이는 남편의 저세상으로 가자 하늘땅이 뒤집혀 지는 듯이 제정신이 아니였다. 그는 애타게 가슴을 쥐여 뜯으며 하늘을 향하여 하소연하였다.     “무정한 하늘이여! 어찌하여 나한테만 이런 불행과 고통을 안겨줍니까? 내가 무얼 잘못했다고, 이런 슬픔을 안겨줍니까? 이제 나는 어떻게 살란 말입니까…”      순옥이는 이를 악물고 다시는 남편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어디 자기의 뜻대로 되던가? 다시는 남편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한 것이 허무한 맹세일줄은 어찌 알았으랴…  아들때문에, 살기위해 부득불 그 맹세를 포기 할수 밖게 없게 되였다. 아들이 고중을 졸업하고 대학으로 가게 되였다.  돈쓸일이 많아졌다. 순옥이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아들의 뒷 바라지를 할것 같지 않았다.     순옥이가 자신에게 다가온 이 난제를 어떻게 풀어 나갈가 고민하고 있을 때 이모가 찾아와 개산툰에 유명한 점쟁이가 있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고 했다. 이모의 말을 듣고나서 점쟁이가 뭘 안다고 하면서도 혹시나 내 앞날을 풀어 줄지 모른다는 무지개 같은 희망을 품고 점쟁이 집으로 찾아갔다. 생각외로 점쟁이 할머니 집으로 찾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순옥이는 한시간을 기다려서야 점쟁이 할머니를 만나볼수 있었다. 순옥이가 점쟁이 할머니 앞으로 가서 공손히 앉으며 찾아온 리유를 말하고 나서 돈봉투를 내 놓았다. 점쟁이 할머니는 말하지 않고 막대기로 돈봉투를 자기앞에 끌어가면서 순옥의 얼굴을 깐깐히 훝어보는 것이였다. 그러던 할머니가 갑자기 순옥의 얼굴에 팥을 던지면서 천둥같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 살이 쎈 모쓸 년아! 남자를 둘이나 잡아 먹었지! 아직도 성차지 않아 또 몇을 더 잡아 먹겠으니 이를 어쩌노.”      순옥이는 어망간에 팥의 세례를 받고 얼굴을 감싸고 있는데 할머니가 자기의 뼈아픈 과거사를 말하자 어리둥절한채 말을 못하고 멍하니 있었다. 조금지나 정신이 돌아오자 얼굴을 닦으며 점쟁이 할머니의 얼굴을 보았다. 길죽한 얼굴에 날카로운 세귀눈을 가진 얼굴이였다. 세귀눈에서 내뿜는 강한 눈빛이 나약한 먹이감을 노려보는 야수의 눈처럼 보였다. 할머니 얼굴을 보며 문득 머리속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초하루 보름에도 보지 못했던 이 할머니가 무슨 재주로 자신이 지나온 일들을 이렇게 속속 잘 알가? 사람들이 이 점쟁이 할머니가 신을 업었다고 하던데 그 말이 헛말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머니는 뒷말은 하지 않고 슬그머니 뒷방으로 들어가면서 순옥이를 방으로 들어 오라고 눈짓하는 것이였다. 순옥이가 뒷방으로 들어가자 점쟁이 할머니는 부적을 주면서 잠잘때 이 부적을 베개속에 넣고 자면 잡귀신이 범접 못 할 것이라 했다. 그리고 길일을 택하여 방토를 해야 한다고 했다. 순옥이는 할머니 말을 순수히 받아들이고 할머니한테 좋은날을 택하여 방토를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나서 아까 할머니께서 나를 보고 남자를 몇을 잡아먹을 것이라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겠는가 물었다. 점쟁이 할머니는 순옥의 귀에 대고 이런 말을 했다.     “너는 타고 난 팔자가 남자 다섯을 하게 되여 있다. 이제부터는 액운을 피면하기 위해 타 민족이거나 외국인 남자와 살아라 그럼 조금이나마 액운을 피할것이다.”     “뭐! 다섯이나 한다고! ?”     순옥이는 남편을 다섯이나 하게 된다는 말을 듣고 가슴이 선득해 났다.     순옥이는 접쟁이 할머니가 정해준 날에 조용하고 비밀스런 곳에 가서 방토를 했다.  
182    새봄맞은 찔레꽃 (2) 댓글:  조회:171  추천:0  2023-05-19
                                      새봄맞은 찔레꽃(2)        총각은 첫눈에 처녀가 마음에 들자 매일이다싶이 처녀를 만나고 싶었다. 순옥이도 어느정도 마음이 통하였지만 아직까지 철규와의 관계문제를 매듭 짖지 않은데다가 서뿔리 다른 남자를 만났다가 철규가 알면 어쩌랴 싶어 량손에 떡쥔겪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있었다. 순옥이는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면서 총각을 만나주지 않았다. 처녀가 만날 기회를 주지 않자 조급해 난것은 총각이였다. 하루가 삼추로 느껴지는 총각은 활짝핀 아름다운 꽃을 누가 먼저 꺾지나 않을가? 하는 근심을 하게 되였다.    영철이는 순옥이 고모를 찾아가 순옥이가 이러저러한 구실을 대면서 만나주지 않는다고 하면서 혹 순옥이가 다른 남자와 사귀고 있지 않는가 물었다. 순옥의 고모는 조카는 절대 그런 애가 아니라 주동적으로 구애를 하라고 말했다.    영철이는 소개자의 말을 듣고 괜히 순옥이를 의심했구나 하면서 아직까지 처녀에 대한 구애가 부족하였음을 느끼게 되였다. 고심끝에 사내 대장부가 째째하게 대방을 의심할것이 아니라 대범하게 주동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소뿔은 단김에 빼라고 이미 처녀에게 청혼의 뜻을 밝힌봐 하고는 그대로 방임 할것이 아니라 고삐를 단단히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매일마다 처녀한테 전화를 하였고 퇴근후에는 오토바이를 타고 처녀집으로 찾아갔다. 끈질긴 구애가 효과를 보았다. 꼭 잠겼던 처녀의 문이 살그머니 열리기 시작하였다. 순옥이는 영철이가 제기한 자주 만나자는 요구를 받아주었다.    그사이 순옥이는 철규를 만나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었다.    “오빠 미안해,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는 혼인을 할수가 없어요. 오빠 나를 진정 아낀다면 큰맘 먹고 나를 잊으세요.”    철규도 묵묵히 순옥이 말을 들으면서 이미 예고된 기정 사실이라 더 버틸힘이 없었었다. 간신히 한마디 하였다.    “잘 살아라.”    순옥이는 비록 철규와의 관계를 단절하였지만 흑판과 같은 인생에서 철규를 사랑했던 지난 날의 추억을 말끔히 지울수 없었다.  다행히 시간이 약이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박철규의 빈자리를 오영철이가 채워주기 시작하였다. 순옥이는 인생의 흑판에 쓰여진 첫 사랑의 흔적을 하나하나 지우면서 오영철에게 사랑의 쪽문을 열게 되였다.    사랑은 사랑할수록 두터워지는 법이다. 남자들은 녀자를 사귀게 되면 그것부터 실험해 보려고 하는 심리를 가지고 있다. 언약하여 며칠 안되는 어느날 영철이는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제 못하고 끝내 순옥이라는 문대를 향하여 힘차게 꼴을 집어 넣었다.    아들이 향 내에서 소문 높은 미녀와 약혼하였다는 말을 들은 총각 부모들은 너무 좋아서 아들을 보고 그 처녀를 빨리 집으로 데리고 오라고 독촉했다.    영철이는 부모님한테 약혼녀를 자기집으로 데리고 오는 것도 좋지만 례의상 먼저 자기가 약혼녀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려 가는 것이 우선이라고 말하자 부모님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처사라고 했다.    이튿날 영철이는 례물을 푸짐하게 사들고 약혼녀 순옥이네 집으로 찾아갔다. 사위감이 찾아 온다는 소식을 듣고 순옥이네 부모님들은 집안을 깨끗이 정리해 놓고 사위감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꺽다리 사위감이 집안에 들어서자 집안이 대번에 환해지는 것이 였다. 사위감은 미래의 장인, 장모에게 넓적 엎드려 인사를 올리였다.    “아버님 저한테 고운 딸님을 보내 주십시오. 맹세코 딸님을 고생 시키지 않겠습니다.”    “자네가 내 딸을 고생시키지 않겠다고 맹세한다니 나는 자네를 믿겠네. ”    남편의 동의하자 순옥이 어머니의 얼굴에는 밝은 미소가 넘실거렸다.    인사가 끝나자 어머니는 술상을 갖추어 놓았다. 장인과 사위감이 술을 마이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자네 성이 오씨라 하던데 본은 어디라오?”    “해주오씨 입니다.”    “나의 외조부도 해주 오씨였다오. 오씨남자들 맘이 곱지. 부모님들의 년세는 얼마오?”    “아버님은 오십오세이고 어머니는 오십삼세입니다.”    “그러고 보니 나와 동갑이구려, 자네는 군인생활을 몇해 하였소?”    “군복무를 삼년하였습니다.”    “남자로 태여났으면 군대를 갔다와야지. 나도 젊어서 지원군으로 조선전쟁으로 갔다 왔네.”    “존경합니다. 아버님, 저의 부친도 지원군으로 조선전쟁으로  갔다 왔습니다.”     “허허 후일 자네 부친을 만나면 군대갔던 이야기를 해야겠네”    두 사람은 군대에서 있었던 일들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였다.  장인과 사위가 술을 마실때 장모는 이야기 속에 끼여들어 사위, 우리 사위라는 호칭을 부르면서 안주를 연신 사위 앞에 놓으면서 많이 자시라고 하였다.    그날 영철이는 약혼녀의 집에서 진짜 사위 대접을 받고 보니 어깨가 으쓱해 걸음걸이도 가벼웠다. 며칠후 순옥이도 영철이네 집으로 인사 드리려 갔다. 영철이네 집은 마을 앞에 있었는데 널직한 앞 마당을 가진 2층 집이였다.    순옥이가 총각의 인도를 받아 시부모님들 앞에 공손하게 머리를 숙여 “아버님, 어머님 안녕하십니까” 인사를 드렸다.    순옥이는 인사를 드린 후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가만히 훔쳐보니 두 분 다 인자해 보이였다. 마치 친정 부모와 같다는 감이 들었다. 키골이 장대한 시아버님은 풍채가 름름하며 의젓해 보였다. 웅글진 시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으니 꼭 마치 판박이로 영철씨가 아버지를 꼭 떼 닮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시어머니 되실분은 너부죽한 얼굴에 뚱뚱한 몸매를 가지였는데 마음씨가 후더워 보였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감의 용모를 이리저리 보면서 흡족해 하시였다. 곱게 보아서 그런지 볼수록  티없는 옥처럼 복스럽고 귀엽게만 보였다. 시아버지는 며느리감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으셨다. 어머니는 순옥의 손을 꼭 잡고 좋은 내 며느리로 되여 달라고 부탁했다.    그날 순옥이는 처음으로 이런 훌륭한 대접을 받았다. 그가 문을 나설 때 시어머니는 순옥의 손에 용돈까지 쥐여 주었고 자주 놀려 오라고 했다.                                                       4        영철이 부모님들은 한시 바삐 며느리를 맞고 싶어 서둘러 사돈 보기를 하였고 약혼하여 두달 만에 결혼식을 치르기로 하였다.    남자측에서 서둘러 결혼식을 올리자고 하니 순옥의 부모들은 너무 서두르지 않냐고 하면서 잘 납득되지 않았다. 순옥의 부모님들의 견해로는 결혼식을 빨리하는가 늦게하는가는 결혼 당사자인 딸이 태도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였다. 딸한테 어떻게 하는것이 좋겠는가 물었다. 딸은 부모님들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면서도 빨리 결혼하고 싶어하는 눈치였다. 딸이 빨리 결혼하고 싶다는 태도를 보이자 순옥이 부모들도 결혼식을 속히 치르는데 동의하였다.    약혼하여 두달이 되자 결혼식 날이 왔다. 평소에도 이쁘다던 신부가 곱게 단장을 하니 하늘 선녀가 내려 온 듯이 아름다웠다. 결혼식장에서 신랑은 넋이 나간 듯 신부의 몸에서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결혼식은 백산호텔에서 하였다. 결혼식 사회는 모 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있는 권철이가 담당하였다.    경쾌한 음악소리가 울리자 사회자가 신랑 오영철씨와 신부 박순옥의 결혼식이 시작된다고 선포하였다. 열렬한 박수 속에서 꽃바구니를 든 남녀 아이의 뒤를 따라 선녀같이 아름다운 신부와 헌칠한 키골에 멋진 용모를 가진 신랑이 등장하였다.    결혼식에서 제일 인기를 끈 종목은 신랑신부가 식상에서 물 바가지를 아래로 던지는 종목이였다. 바가지를 던지기전에 사회자가 신랑을 보고 자식 몇을 낳겠는가 물었다. 신랑은 둘을 낳겠다고 대답했다. 사회자가 다시 신부에게 자식 몇을 낳겠는가 물었더니 신부역시 둘을 낳겠다고 대답했다. 사회자가 바가지를 들고 이 바가지는 일반 바가지가 아니라 행운의 바가지라고 하면서 던진 바가지가 원 형태로 있으면 아들을 낳고 엎어지면 딸을 낳는다고 하였다. 신랑신부는 조심스럽게 식상에서 아래로 바가지를 던지였다. 바가지가 빙빙 돌다가 원상태로 됐다. 순간 하객들은 일제히 “아들이다.” 고 외치였다. 사회자는 다시 재차 던져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용케도 바가지가 뱅글뱅글 돌다가 엎어졌다. 사람들은 일제히 “딸이다.” 라고 외치였다. 사회자는 신랑신부가 바라던대로 자식 오누이를 낳게 된다고 하면서 축하 하였다.    요즘 세상엔 첫 자식은 딸을 낳고 둘째는 아들을 낳게 되면 백점짜리 부모라는 말이 돌고 있다. 앞으로 성철이네 부부는 어떤 성적표를 가질지 두고 봐야 했다.    결혼식 행사가 원만하게 끝났다. 저녁때가 되자 신랑의 집으로 신랑과 신부의 친구들이 축하파티를 한다며 우르르 몰려 왔다. 축하파티의 사회자로는 마을에서 입담 좋기로 소문높은 리영선생이였다. 사회자의 축하발언이 있은 뒤에 재미있는 오락회가 진행되였다. 사회자는 신랑신부에게 어느때부터 알게 되였으며 약혼은 어느때 하였는가? 만약에 강물에 어머니와 안해가 동시에 빠졌을때 누구를 먼저 건지겠는가?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 알륵이 있어 다툴때 누구편을 들것인가? 등등의 까다로운 질문을 들이대자 신랑은 거침없이 대답을 했으나 준비가 미흡했던 신부는 떠듬거리며 대답했는데 손에 땀을 쥐였다. 사회자는 신랑신부더러 노래와 장끼자랑을 하도록 하였다. 신랑은 용기가 있게 노래를 불렀고 장끼자랑을 하였지만 신부는 얌전하게 노래만 불렀다.    신랑신부의 노래와 장끼자랑이 끝나자 하객들의 노는 시간이 되였다. 사람이 많다보니 별별 재간을 가진 재간둥이들이 다 있었다.       그들은 각가지 장끼를 부려가며 노래하고 춤을 추자 축하 파티는 고조로 올라 환희로 들끓었다.    새볔 닭이 울 때에야 축하파티는 끝마쳤다.    저녁부터 다음날 새벽까지 신랑은 밥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과분하게 술을 마시여 몸이 지칠대로 지쳐 녹초가 되였다. 신부도 지치였지만 술을 마이지 않았기에 다행이였다.     신부는 지친 몸을 달래며 신방으로 들어왔다. 옷을 갈아입으려하는데 시어머니가 밤찬을 가지고 들어왔다. 시어머니는 신랑이 보이지 않자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잠시후 신랑이 어머님의 부축을 받으며 비틀걸음으로 들어왔다. 들어오자 그대로 꼬꾸라졌다.     어제 신부의 친정 어머니가 시집가는 딸한테 이런 말을 했다. 결혼 첫날 밤에는 신랑이 잠자리에 들기전에 신부의 옷고름을 반듯이 풀어 주느니라. 절대 신랑이 옷고름을 풀어 주기전에 옷을 벗지 말아라. 신랑이 어머니도 아들한테 첫날 밤 잠자리에 들기전에 신랑이 신부의 옷고름을 풀어 주는게 대대로 내려온 전통례법이라고 알려주었다. 어머니가 아들한테 신신당부 했건만 그 놈이 몹쓸 술이 어머님의 부탁을 망각하게 하였다. 신랑은 어머님의 부탁을 망각한체 제 몸도 건사못하고 잠자리에 쓰러졌던것이다.    아침 햇살이 창문을 환히 비추었다. 그때까지 신랑은 잠에서 깨여나지 못하고 있었다. 아침준비를 마친 새각시가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그때에야 정신이 들었는지 신랑은 새각시를 끌어 않으려 했다. 새각시가 아침을 자실 시간이 되였다며 거절했다. 신랑은 부랴부랴 일어나 세수를 하고는 옷을 입고 식사칸으로 들어갔다.     오씨 집안에서는 전통적으로 결혼식 이튿날에는 꼭 가문 잔치가 있었다. 아침식사가 끝나자 신랑신부는 전통민족복장을 입고 먼저 부모님들게 큰 절을 올리고 나서 차례로 집안 어른들께 인사를 올렸다. 큰절을 받고난 부모님들과 집안 어른들은 신랑 신부에게 사의금을 주었다.     가문잔치가 끝난 뒤 점심을 자시고 두루두루 하다나니 저녁때가 되였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며느리가 설거지를 하자고 하니 시어머니가 못하게 했다. 시어머니가 말리는 데도  며느리는 시어머니를 도와 설거지를 끝냈다. 설거지가 끝나자 침실로 들어 와 옷을 갈아입으며 이런 생각을 했다. 오늘 밤도 신랑이 어제 밤처럼 지나면 어쩌라 싶었다. 그런데 웬걸 먼저 옷을 벗고 새각시를 지켜보던 신랑이 갑자기 호랑이 기세로 신부에게 덮치더니 신부의 입가에서 엄마를 부르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5         초혼 생활은 행복했다. 남편은 꽃같이 아름다운 녀인을 안해로 맞아 어깨가 으쓱해하며 마치 온 세상의 모든것을 독차지 한 기분으로 흥얼흥얼 코노래를 불렀다. 안해는 자기를 정성껏 사랑해주는 믿음직한 남편한테 무한한 만족을 느끼였다. 남편은 매일 밤마다 안해가 지치도록 그 노릇을 하였다.몇 달이 지나자 남편의 열기는 차츰 식어가고 밤 생활도 뜸해지기 시작했다.     결혼하여 다섯달이 되자 순옥이 배가 점점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안해가 임신하였다는 것을 안 남편은 너무도 기뻐 입이 귀에 걸렸다. 시부모들은 결혼한지 몇 달밖에 안되는 며느리가 임신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집안의 경사라며 너무나 좋아 기쁨을 금치 못했다. 시어머니는 지극정성으로 며느리 입에 맞는 음식을 해주느라 분주했다. 성철이도 어머니 못지지 않게 안해가 먹고 싶어하는 음식을 사다주었다.     성철이는 안해가 어느때 임신하였을가? 손꼽으며 계산하여  보았다. 결혼식전에 임신한걸로 판단되였다. 어느날이 였던가? 생각해 보니 약혼한지 며칠 지난 어느날에 있었던 일이 문득 떠 올났다. 그래, 바로 그날이다. 그날 자신이 축구 선수되여 순옥이라는 꼴 문대에 면봐로 한방에 꼴을 차넣지 않았던가…    며느리가 결혼 여덟달만에 금뚜꺼비 같은 아들을 낳자 시부모님들은 집안에 쌍 경사가 났다며 동네 방네에 자랑을 했다. 손주가 출생한지 100날이 되던 날, 온 집안이 모여 손주의 출생 100일 잔치를 베풀었다. 할아버지는 손주에게 오덕수라는 멋진 이름을 지어주었다.    좋은 세월을 빨리도 흐른다. 아들이 세살이 되자 유치원으로 가게 되였다. 유치원으로 간 첫날 원장선생님은 애가 복스럽고 총명하게 잘 생겼다며 칭찬하였다.    애가 유치원을 4년을 다니고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유치원을 다닐 때부터 아들애가 동갑내기 애들보다 키가 크고 총명한 재질을 보여 선생님에게 좋은 인상을 남겼다.    학교에서는 정기적으로 학부모회의를 소집하였다. 학부모회의에서는 담임선생님이 학생들이 학교에서의 정황을 이야기 했다. 순옥이는 담임 선생님이 늘 자기 아들에 대하여 칭찬할때마다 기쁨을 금할 수 없었다.    학부모회의 때마다 어머니인 순옥이가 참가하였는데 그날은 다른 볼일이 있어 가지 못했다. 대신 아버지인 성철이가 가게 되였다. 성철이가 교실에 들어서니 선생님은 누구의 아버지인가 물었다. 성철이가 오덕수의 아버지라고 대답했다. 오덕수의 아버지라고 분명 말했는데도 선생님은 이상한 눈길로 그를 쳐다보는 것이 였다. 일반적으로 부자간은 어느모로 보나 비슷한 점이 있는데 이집 부자간의 용모가 판이하게 다르다는 눈치였다. 선생님의 이상한 눈길로 바라보자 성철이는 직감적으로 선생님의 그 눈길이 오히려 이상스럽게 느껴졌다.    성철이는 집으로 돌아오면서 왜서 담임 선생님이 내 아들이 아버지를 담지 않았다는 이상한 눈길로 나를 보았을가? 집에 돌아와 와 아들과 같이 찍은 가족사진을 보았다. 자세히 사진을 보니 자신의 보건대도 확실히 아들은 아버지를 닯지 않고 제 어머니를 많이 닮은 것으로 보였다. 저녁 밥상에 마주앉아 아들이 숟가락을 사용하는 것을 보았다. 자기는 오른손 잡이인데 아들은 외손잡이였다. 의심의 병이라 아들이 행동거지를 보아도 에미 행동을 많이 닮은 것 같고 아버지인 자기 행동과는 완전히 달라보였다.    며칠후 성철이는 친구들과 모 식당에서 술을 마이고 있었다. 술을 한참 마시고 있는데 옆 칸에서 녀자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였다.    “나 오늘 몇 년만에 박순옥이를 보았다. 순옥이가 남편과 함께 남자애를 데리고 백화상점으로 가는 것이 였다. 순옥이가 나를 보더니 제 남편과 아들애를 나한테 인사 시키더라. 그런데 애를 보는 순간 애가 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고 제 어머니쪽을 닮았다는 감이 들더라.”     “나도 전번에 순옥이네 세 식구를 보았는데 네가 본 것과 같더라. 사람들은 모두 아들은 아버지를 닮는다고 하던데… 혹 순옥이가 다른 남자의 애를 배지 않았을가?”     “야! 네가 무슨 천벌을 받을 그런 허무한 소리를 하느냐. 너도 순옥이를 잘 알지 않니 걔가 어디 그럴 애야.”     “하긴 니 말이 옳기는 한데 어쩐지 의심은 간다.”     그말을 들은 성철이 가슴에는 얼음덩이를 껴 않은듯 오싹해 났다. 머리속에는 안해에 대한 의혹의 불꽃이 튕기는 것이 였다. 며칠전에 학부모회의를 갔다가 선생님이 아들놈이 제 아버지를 전혀 담지 않았다던 눈길이 떠오르며 안해가 혹시 자기 모르게 불륜을 저지르지 않아냐 하는 의심이 들었다.     성철이는 옆칸에서 녀자들이 주고 받는 말을 들은 후 어쩐지 취하지 않고 도리여 정신이 올똘해 지는 것이였다. 친구들이 술을 더 마시자 해도 마시고 싶지 않아 빨리 집으로 돌아가 안해한테 진실을 묻고 싶은 생각 뿐이 였다.     술좌석에 있을 때에는 정신이 말쑥한것 같았는데 밖에 나와 찬공기를 마시고 보니 머리가 띵해 났다.    그는 도정신하여 오토바이를 몰았다. 처음에는 천천히 달리던 오토바이가 점점 속도가 빨라졌다. 성철이 머리속에는 선량한 순옥이가 그런 일을 저지를리 없겠지? 아니, 절대 그럴리가 없겠지, 하면서도 혹시나? 하는 부정적인 의혹이 가첨되는 것이였다.     큰길로 한참 달려 주유소 앞까지 왔을 때였다. 난데없는 트럭이 앞을 가로 막았다. 갑자기 트럭에서 내뿜는 강한 불빛에 눈을 뜰수가 없었다. 방향을 잃은 성철이는 앗! 소리와 동시에 자동차에 부디치여 아까운 생명을 잃었다.      
181    새봄맞은 찔레꽃 (1) 댓글:  조회:228  추천:0  2023-05-16
중편소설                                            새 봄 맞은 찔레꽃(1)                                                         1     올해는 유난히 찔레꽃이 곱게 피였다. 활짝핀 찔레꽃은 어려운 역경을 이겨온 아름다운 녀인 순옥의 결혼을 축하하는 것처럼 보였다.     오늘은 그녀가 다섯번째로 맞는 결혼식날이다.     그는 어설펐던 지난날을 잊고 새 아침을 맞는 기분으로 미용실을 찾아 갔다. 미용사가 준비를 하는 사이 그는 거울에 비낀 자신의 얼굴을 이리저리 자세히 보았다. 티없이 말쑥했던 얼굴피부가 거칠어 졌고 주름살 하나없던 얼굴에 잔주름이 얼기설기 생기였다. 함치르했던 검은 머리는 어느덧 서리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미용사의 정성스런 손길로  변모한 자신의 예쁜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    순옥이는 자신의 걸어온 인생길을 돌이켜 보니 고진감래의 인생길이 아니였나 생각되였다. 그는 좋은 부모님을 만나 어릴때에는 별로 큰 고생을 모르고 자라다가 성인이 되면서부터 왼일인지 인생은 자기의 뜻대로 되지 않고 꼬인 바줄처럼 배배 탈리기만 하였다. 다행히 석양에 접어들자 실타래처럼 꼬였던 밧줄이 서서히 풀리는 것이였다.    순옥이는 소녀 시절에는 아름다운 꿈도 많았고 예쁘다는 소리를 많이 들어왔다. 순옥이가 초급중학교에 다닐때였다. 난데없는 정치운동이 시작되면서 한창 공부 할 학생들이 정치 소용돌이에 말려들어 아까운 시간을 허송 세월로 보내였다. 몇 해 지나 정치운동이 잠잠해 지자 나라에서는 고등교육 시험 제도를 회복하였다. 졸업을 앞두고 학교에서는 졸업반 학생들에게 참군, 상급학교 진학, 공장, 농촌으로 가는 길중에서 한가지를 선택하도록 하였다. 그녀는 운수 좋게 현 소재지에 있는 모 화학공장으로 가게 되였다. 공장으로 간지 일년이 되는 어느날 공장측에서는 상급이 지시라며 농촌 호구를 가지였던 사람은 일률로 농촌으로 돌아가라는 통지를 전달했다. 그녀는 울며 겨자먹기로 귀향할 수 밖에 없었다.     그녀가 스물 두살이 되던 해였다. 박철규와 오영철이가 그의 인생에 끼여들어 평온하던 생활에 파문이 일기 시작했다.     그녀의 고향에는 큰 길을 사이두고 두 마을이 있었다. 박 철규는 남쪽 마을에 살고 그녀는 북쪽 마을에 살았다. 오랜전부터 두집 부모님들은 두집이 고령 박씨에 동성동본이라 가까히 보내였다. 철규는 그 녀의 오빠와 절친한 친구 사이여서 그녀의 집으로 자주 다니게 되였다. 순옥이는 어릴때부터 철규를 친척집 오빠라고 불렀다.     그녀는 철이 들면서 이성의 눈길로 철규를 보게 되였다. 그가 알고 있는 남자들 중에서 철규가 제일 돋보이였다. 순옥이가 도시생활을 접고 농촌으로 돌아와 풀이 죽어 수심에 잠겨 있을때 부모님 못지지 않게 따뜻하게 위로의 말을 해준 사람도 철규였다. 철규는 인물 체격이 좋고 동네에서 수재라 할 만큼 말도 잘하고 필력이 좋아 마을 소학교에서 민반 교사로 있었다. 오라지 않으면 철규선생은 정식 교원으로 된다는 소문이 돌았다. 순옥이는 만약 철규 오빠가 정식 교사로 채용 된다면 당당하게 철규 선생님과 결혼을 할 꿈까지 꾸었다. 철규선생과 결혼을 한다면 사모님이란 호칭까지 받을수 있겠다는 좋은 생각을 하니 가슴이 활량거렸다. 하지만 고령박씨라는 벽이 가로 막을 줄은 미처 생각 못했다.     철규도 처음에는 순옥이를 단순히 친척집 녀동생으로 생각했다. 한해 두해 철이 들면서 귀엽고 아름답게 변모해 가는 순옥이 고운 얼굴을 보면서 남성의 독특한 야성으로 눈여겨 보게 되였다. 철규의 눈에는 순옥이가 톡 하고 다치기만 해도 터질것만 같은 망울진 꽃봉우리로 보였다. 어느덧 망울졌던 꽃봉우리가 터지면서 한송의 아름다운 꽃으로 피였다. 언제가는 저 아름다운 꽃이 누군가에게 꺾이고 말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물오른 버들가지 같은 가는 허리, 이슬을 머금은 찔레꽃 같은 얼굴, 새하얀 맑은 피부, 봉긋이 솟은 앞가슴이 철규의 눈길을 자석처럼 끌어 당겨 뗄수가 없었다. 보면 볼수록 저 혼자만 흠상하고 저 혼자만 꺾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이 치밀어 올랐다.     남녀가 자주 만나게 되면 이성의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자주 만나다 보니 두사람 사이에는 저도 모르게 미묘한 감정이 싹트기 시작 하였다.     어느날 철규는 그녀를 불러 놓고 넌지시 이런 말을 했다.     “순옥아 너는 나를 어떻게 보니?”     “어떻게 보다니요, 친척 오빠로 보지요.”     “친척 오빠 말고 어떤 남자로 보이는가 말이다.”     “녀자들한테 인끼를 끌만한 멋쟁이 선생님이지요.”     “이 멋쟁이 남자가 순옥이를 좋아해도 될까?”     “오빠가! 날 좋아 한다구? 호호호 우수워라.”     “웃긴 왜 웃니, 내가 너를 좋아하면 안되니? 정말이다. 진짜 너를 좋아 한다.”     “피-잇 거저 롱담이지요.”     “아니야 진심이다. 내 뛰는 가슴을 보여 줄가? ”     “아니, 난 아직까지 오빠에 대한 내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어요.”     “거짓말이지? 난 이미 네가 나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네 눈속에 나를 좋아하는 눈도장이 꼭 찍혀있는것이 똑똑히 보인다.”    “사실 나도 오빠를 좋아 해요. 하지만 아버지가 동성동본은 절대 결혼 못한다고 말씀하셨기에 고려하고 있는 중이예요”    “동성동본은 결혼 못한다는 것은 옛날 이야기이고 지금은 법률적으로 직계만 아니면 동성동본은 결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버지하고 다시 물어 보겠어요.”    “물어 볼것 없이 내 말만 들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    순옥이 속내를 알아낸 철규는 본격적으로 그녀의 마음속 문을 노크하기 시작하였다. 온몸의 지력상수를 총 동원하여 아주 끈질기게, 재치있게, 사전에 있는 멋있는 말을 골라 가면서 듣기 좋은 말은 다 하였다. 사랑에 엇설눈이 튼 그녀의 눈에는 콩깍지가 끼워 철규에 대한 좋은 일만 보이고 나쁜일은 보이지 않았다. 련애를 하여 몇달이 되던 어느날 순옥는 자신을 책임져 주며 사랑한다고 한말을 진심으로 믿고 건너지 말아야 할 강을 건너고 말았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순옥이가 한창 철규와 사랑의 단 꿈을 꾸고 있는데 순옥이 어머니는 딸이 모르게 중매군을 통하여 사위감을 물색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에는 나날이 곱게 피는 딸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고운 보배로 보이지만 왠지 딸이 고운 얼굴이 화를 불러 올 것 같은 우려가 심히 생겼다. 순옥이 어머니는 가만히 딸의 행동을 면밀히 주시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딸의 주위를 맴도는 총각들이 몇이 보이였다. 의심이 병이라 딸이 주위를 맴도는 총각들의 눈길이 모두 토끼를 노리는 승냥이 눈빛 같아 보였다. 자칫 하다간 딸한테 어떤 일이 벌어 질지 모르겠다는 위기심이 들었다. 하여 옛 사람들도 “과년한 처녀를 둔 부모는 우물 곁에 아이를 둔것 같다.”고 하지 않았던가, 순옥이 어머니는 이럴 때에는 근심할 것이 아니라 딸한테 무슨 변이라도 생기기 전에 딸을 지켜 줄만한 듬직한 대상자를 구해 주는게 상책이라고 여기였다. 그리하여 딸이 모르게 사위감을 물색했던 것이였다.     중매에 나선 사람은 향정부 소재지인 소영촌에 살고 있는 순옥의 고모였다. 올케가 시누이를 보고 딸이 나이 스물 두살이 되였는데 대상자를 구해야 할때가 되였다면서 좋은 신랑감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고 청들었다. 순옥이 고모는 올케한테 한 남자를 소개했다. 그 남자는 고모네와 한 동네에 살고 있는데 그집 내막을 잘 알고 있다고 했다. 총각이 이름은 오영철이라 하는데 현역군인이라고 했다. 금년 나이 스물네살인데 총각의 인물 체격은 나무랄데 없다고 했다. 총각이 아버지는 향정부에서 근무 한다고 말했다. 순옥이 어머니는 시누이가 하는 말이 귀속으로 쏙 들어갔다. 시누이는 올케한테 그 총각이 사진을 보여 주었다. 사진을 찬찬히 보니 헌칠한 키에 잘 생긴 용모를 가진 군인이라 딸을 지켜 줄만한 대상자감이라 보여졌다. 순옥이 어머니는 당사자가 현역 군인이고 아버지가 향정부 간부라고 하니 좋은 혼처 감이라 생각했다. 그는 곧추 집으로 돌아와 남편 한테 오늘 시누이를 만나서 했던 말을 전하였다. 말수가 적은 남편도 안해의 말을 듣고는 만족해 하였다.     순옥이 어머니는 이렇게 속궁리를 했다. 당시 농촌 처녀들은 현역 군인한테 시집 가는 것을 선호하는데 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딸한테 군인 총각을 소개해주면 별일이 없으리라 여기였다.     이튿날 순옥이 어머니는 딸을 보고 농촌 녀자가 나이 스물이 넘었으면 시집 갈 나이가 되지 않냐고 물었다. 딸은 우물쭈물 거리며 대답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딸앞에 군복을 입은 의젓한 남자 사진을 보이였다. 딸은 어머니가 건너 주는 사진을 힐끔 보더니 괜찮은 사람인데 하는 기색을 보이다가 사진을 어머니한테 돌려주면서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이미 마음속에 정해진 사람이 있어요.”    “뭐! 마음속에 정해진 사람이 있다니 누구냐?”    “철규 오빠예요.”    “철규 오빠! ? 그럼 앞 마을에 사는 박선생 말이냐.”    “네.”     그말을 듣고 순옥이 어머니는 당장 얼굴색이 검풀어지더니 언성을 높였다.     “안된다! 박철규만은 절대 안된다!”     “박선생이 왜 않돼요.”     “우리 두 집은 동성동본이니 안된다는 거다.”     “박선생이 그러는데 동성동본이라도 직계가 아니면 법률상에서 문제가 없다고 했어요.”     “법이고 뭐고간에 내가 안된다면 안되는 거다. 네 아버지가 알면 큰 일 나겠다. 순옥아 그러지 말고 소영촌 고모가 소개해준 그 군인 총각을 만나봐라. 네 고모가 소개하는데 뭐가 잘못 될게 있겠느냐.”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터이니 엄마는 삐치지 말아요.”     “뭐! 내일은 내가 알아서 할터이니 삐치지 말라고! 자식일에 부모가 삐치지 않고 누가 삐치겠니. 옛날부터 녀자가 남자를 잘 만나는 것도 복이라고 하였다. 앞으로 사람을 잘못 만났다고 후회하지 말고 지금 이 에미 말을 들어라.”     저녁에 순옥이는 조용히 철규를 만나 낮에 있었던 일을 자세히 알려주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던 철규가 날이선 말을 했다.     “부모님은 그렇다 쳐도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나야 오빠를 좋아하지만 엄마가 동성동본은 절대 안된다고 펄쩍 뛰니 어쩌겠어요?”     “내가 동성동본이라도 직계가 아니면 결혼할수 있다고 수차 말하지 않었느냐, 안되겠다. 래일 너히 부모님을 만나 인사를 드려야 하겠다.”     “그건 절대 안돼요. 사실 나도 이 일 때문에 머리가 터질것만 같아요. 오빠를 따르자니 부모님의 반대할 것이고 부모님의 뜻을 따르자니 오빠에게 상처를 주겠으니 이걸 어떻게 해요.  오 - 빠 내가 더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그렇게 해라. 하지만 나를 배반할 생각을 해서는 절대 안된다. 만약 네가 딴 맘을 가진다면 두말없이 부모님을 뵈려 가겠다.”   순옥이가 철규와의 관계를 어떻게 하여야 할가 고민하고 있는데 철규선생에 대한 불길한 소식이 전하여 왔다. 시 교육국에서 상급의 지시 정신에 따라 농촌에 흩어져 있던 학교들을 집중하며 농촌학교에서 채용하였던 민반교원과 대과교원들을 정간하게 되였다. 철규선생도 민반교사였기에 정간되였던 것이였다. 순옥이는 철규선생이 정간되였다는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렁하였다. 부모님들의 철규선생을 사위감으로 받아줄수 없다고 구극 반대할때에도 철규선생을 포기하지 않고 버티여 낼수 있었던 것은 철규오빠가 정식교원으로 될수 있는 가망이 보였기 때문이였다. 기둥처럼 믿어왔던 철규선생이 정간을 당했다고 하니 희망의 탑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아 고민은 더 깊어만 갔다.                                                        2       며칠전에 소영촌에 있는 고모한테서 전화가 왔다. 소영촌의 오씨 총각이 제대되여 집으로 왔다면서 시간을 타서 만나보라는 것이였다. 순옥이는 만나야 하나 만나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다가 한번 쯤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영촌의 오영철이는 군복무를 마친후 제대되여 고향으로 돌아왔다. 귀향한후 얼마 안되여 향 농전소에 근무하게 되였다. 영철이 어머니는 아들한테 명신촌에 인물곱고 집안이 좋은 처녀가 있는데 만나 보라고 독촉했다. 영철이는 어머니 말을 듣고 마음이 동하여 만나보겠다고 했다.     순옥이는 고모의 주선으로 “매화” 다방에서 오영철이라는 총각을 만나기로 하였다. 순옥이가 제 시간에 매화다방에 도착하자 객실에는 고모와 그 총각이 이미 와있었다. 고모가 두 사람을 인사시키였다. 키꺽다리 총각이 각이나게 허리를 굽히며 솥뚜껑같은 큰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하였다. 순옥이도 얼른 섬섬옥수를 내밀었다. 집게같은 손이 순옥이 작은 손을 잡자 손이 부서질 것 같았다.    고모는 두사람에게 인사를 시키고는 자리를 떴다. 상을 사이두고 두 사람은 마주 앉았다. 순옥이가 정면으로 당사자를 보니 사진속의 사람보다 더 멋져 보였다. 머리 속에 그 남자와 철규를 대비해 보니 인물체격이 철규에게 짝지지 않고 오히려 더 멋져 보였다. 총각도 그녀의 고운 얼굴을 보는 순간 듣던 소문과 같이 정말 미인이구나! 헛 소문이 아니구나! 하면서 처녀한테 눈길이 떠나지 않았다.    총각이 차물과 해바라기씨를 주문하였다. 두 사람은 차물을 마이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총각이 말머리를 뗏다.     “순옥씨 가족은 몇분입니까?”     “부모님과 오빠가 있는데 오빠는 이미 결혼하여 딴 살림을 꾸리고 있고 부모님과 저하고 세식구가 같이 살고 있습니다.”     “순옥씨 고모님한테서 들었는데 순옥씨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효녀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효녀라고 하기보다 오히려 부모님의 시름꺼리로 되고 있습니다.”     “순옥씨가 이렇게 아름다운걸 보니 순옥씨의 부모님들도 멋지겠습니다.”     “어릴때부터 동네 분들이 우리 부모님들을 보고 궁합이 잘 맞는 부부라는 말을 들어왔습니다. 내가 보건대도 그런것 같기도 했습니다. ”     “순옥씨는 두분 중에서 누굴 닮았다고 생각합니까?”     “남들이 모두 나를 아버지를 닮았다고 하던데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버지를 닮은 딸이 잘 산다고 하던데 어떻습니까?.”     “아직까지는 부모님의 덕에 별로 큰 고생은 하지 않았지만 앞으로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영철씨네 가족은 몇분 입니까?”     “부모님과 누님이 한분이 계시는데 누님은 이미 출가하였습니다. 그렇다보니 세식구가 합께삽니다. 순옥씨는 어떤 취미나 특기를 가지고 있습니까?”    “저는 별다른 특기는 없지만 독서를 즐기고 음악을 즐겨 듣는 편입니다.”    “오! 그렇구만요. 저는 문학이나 음악예술에 대한 재능이 없지만 운동을 즐깁니다. 학생시절에는 축구선수였고 군대에 가서는 롱구를 즐기였습니다.”     “영철씨는 제대된후 농전소에 배치를 받았다고 하던데 부모님의 도움이 컸겠습니다.”     “내가 제대된후 얼마 안되여 농전소에 배치를 받자 아버지 후광이 있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없지 않아 있었겠지만 내가 농전소로 배치를 받은 것은 아버지의 후광보다 특수병종으로 있었기에 특수병종으로 있었던 제대군인들을 우선적으로 직업안배를 한다는 정책에 의하여 배치를 받았을 뿐입니다. 내가 듣건대 순옥씨도 한때는 공장으로 배치를 받았다가 농촌호구때문에 농촌으로 내려 갔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많이 속상했겠습니다.”     “물론 마음고생을 많이 했지요. 처음에는 농민인 아버지를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중국해방전쟁과 항미원조 전쟁에 참가한 분이 간부나 공인으로 되지 못하고 평생을 농민으로 있었다는 것이 안타가웠습니다. 더구나 농촌호구 때문에 공장에서 밀리워 농촌으로 쫒기여 내려 올때 억울하다도 생각했습다. 지금도 알록하기는 하다면 별수없지요. ”     “외람된 말이겠지만, 한가지 묻겠습니다. 순옥씨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아 따르는 남자들이 많았겠다는 느낌이 듭니다.”     “솔직히 말하면 따르는 남자들이 있기는 했는데 모두 농민이여서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어떻습니까?”     “영철씨가요! 첫 만남에 어떻게 태도표시를 할수 있겠어요. 그 대답은 후일로 미루면 좋겠어요.”     “그렇게 합시다. 저녁 식사시간이 되였으니 저녁을 자시려 갑시다. “     “미안하지만 다른 일이 있어서…”    이튿날 고모는 순옥이를 불러놓고 그 총각이 어떠냐고 물었다. 순옥이는 괜찮은 사람이던데 하면서도 사귀고 싶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고모가 총각을 만나 자기의 조카가 어떻던가? 물었더니 총각은 보기드문 미인이더라고 하면서 맘에 들더라고 했다. 고모는 총각에게 우리 조카는 야무진 애여서 걸케시 잡으려 해서는 안된다며 바짝 다가 붙으라고 튕겨주었다.  
180    인물전(4) 석양에 대학생으로 된 손원종선생 댓글:  조회:614  추천:0  2023-04-17
                            인물전(4)     석양에 대학생으로 된 손원종선생       필자는 조글로에 아직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흙속에 묻쳐있는 보석같은 인물들의 전기를 올리기로 하였다. 이미 세분의 사적을 올리였는데 반응이 좋았다. 네번째로 소개할분은 다름아닌 정령퇴직을 하고나서 연변대학 로어학부의 방청생으로 된 손원종선생님이다.    손원종선생은 2003년1월14일에 정녕퇴직을하였다. 퇴직후에도 작품창작과 번역, 심열을 하면서 3년동안 바쁜일정을 보내였다.    어느날 그는 자신의 신체상황과 애호에 맞는 로씨야어 학습에 힘써보려고 작심하였다. 왜냐하면 중학교와 대학을 다닐 때 로어를 배웠고 또 로어과대표로도 활약한 적이 있었으니까.    2006년 8월 하순의 어느 날, 손원종은 연변대학 외국어학원 로어학부 학부장 사무실에 찾아갔다. 그 때 로어학부 학부장은 사유로 안 계시고 40대 쯤 돼보이는 당지부서기가 전 학부 사무를 맡아보고 있었다.    “어느 학급 학생의 학부모이신가요?”    당지부서기는 아주 상냥하게 물었다.    “저는 이미 퇴직한 로인인데 이 학부의 방청생으로 되려고 찾아왔습니다. 꼭 받아주십시오.” 손원종은 애걸하다싶이 청을 들었다.    “아직까지 본학원에서는 70을 바라보는 로인을 받은 전례가 없었고 또 학원 지도부와 학교 지도부에서도 절대 비준하지 않을 겁니다.”    지부서기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로어를 배우려고 연길시내 곳곳을 다 찾아보았습니다. 영어, 일어, 한국어, 강습반은 많은데 로어강습반만은 찾지 못하여 예까지 오게 되였습니다. 학원과 학교 지도부에는 제가 말씀드리겠으니 념려 마십시오.”    손원종이 이렇게 간절하게 간청했지만 결국 지부서기는 대답 대신 “전 수업시간이 되여서 나가봐야 하겠습니다.” 하고는 사무실을 나갔다.    첫날은 이렇게 허탕치고 말았다. 그 이튼날부터 손원종은 련속 며칠간 아침 8시에 학교에 가서 로어학부장 사무실에 “출근”하여 신문도 보고 청소도 하면서 떼를 썼다.    8월30일 아침 종전 대로 “출근”하였더니 지부서기가 손원종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그럼 9월3일부터 1학년 신입생들과 함께 학습하십시오. 그러나 세가지는 꼭 지켜야 합니다. 첫째, 맨뒷줄에 앉아야 하고 둘째, 수업시간에 발언하거나 질문하지 말아야 하며 세째, 지각하여서는 절대 안됩니다.”    손원종은 너무도 기뻐서 거듭 감사를 드리며 “꼭 선생님이 말씀한 세가지 요구를 준수하겠습니다.”라고 다짐하였다.     2006년 9월3일 부터 손원종은 마침내 연변대학 로어학부 방청생이 되였다.    그당시 로어학급에는 전국 각지에서 온  학생 26명에 손원종까지 합하면 27명이였다. 한족, 조선족외에도 만족, 회족, 몽골족으로 다민족 대가정이였다. 남학생은 손원종까지 7명이였고 그외 20명은 전부 녀학생이였다. 손원종이 옆자리에는 키가 그와 비슷하고 몹시 령리하게 생긴 조선족 남학생이 앉아있었다. 그 학생은 다정다감하였는데 말끝마다 “할아버지”하고 부르며 살감게 굴었다. 그 학생은 전해에 우수한 성적으로 연변대학 로어학부에  입학하였는데 첫해에 그만 인터넷개입에 빠지다 나니 락제를 하여 그 학급으로 내려왔다고 했다. 처음에 반급학생들은 손원종이 그 학생이 할아버지여서 며칠간 그와 함께 수업에 참가하여 그의 마음을 달래주는  줄로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얼마간 지나도 그가 여전히 자기들과 똑같이 수업에 참가하는 걸 보고 그제야 그학생이 할아버지가 아닌 것을 알게 되였는데 도대체 그분을 어떻게 호칭해야 하는지 몰라 나름 대로 고민하다가 결국에는 학급회의에서 토론을 거쳐 손원종을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로 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가 그들의 할아버지와 비슷했기때문이였다.    손원종은 장장 4년간 그들과 함께 학습하고 생활하였다.    손원종이 금방 학습을 시작할 때 우연한 기회에 선생님들이 주고받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선생님들은 모두 그를 “로선생(老先生)”이라고 불렀다. 그러면서도 “로선생이 학습하려는 정신은 참 좋은데 끝까지 배워낼 수 있을가?”    “글쎄 얼마전에 주정부에서 30세좌우이 간부 몇을 우리학급에 보내여 로어를 배우게 되였는데 한달도 안되여 전부돌아갔었지 로선생은 그들보다 년세가 많으니 3주일도 견지하기 어려울거야.”    선생님들이 의론을 들은 손원종을 더욱 분발하게 하였다. 손원종은 꼭 학습을 끝까지 견지하여 훌륭한 성적을 따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하였다.    얼마 안 지나 1학년 전학기 중간시험이 있었다. 시험문제는 아주 간단하였다. 100개 단어에서 50개는 로어를 한어로 번역하고 50개는 한어를 로어로 번역하는 것이였는데 손원종은 참답게 복습한 데다가 명제가 간단하여 97점을 맞고 5등안에 들었다.    그 뒤로 선생님과 학생들이 손원종을 보는 눈길이 달라졌다. 아마 “이 늙은이를 얕잡아보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였다.    그러나 나이는 속이지 못한다. 손원종은  60을 훨씬 넘긴 사람이고 학급의 학생들은20세도 채 되지 않았으니 어찌 그들과 비기랴 .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젊은 학생들의 학습성적은 매일과 같이 달라지는데 손원종은 매일매일 “숨가뿌게 따라가”느라 바빴다. 게다가 나이 앞에 장사가 없다고 몸이 마음을 따라주지 않았다.    때론 진한 커피 두잔을 련속 마셔도 수업시간에 달려드는 졸음을 쫓을길 없었다. 그 주되는 원인은 신체가 피로한 데도 있었겠지만 과문을 잘 리해하지 못하는 데도 있었다.    어떻게 할 것인가? 손원종은 결심을 단단히 내렸다. 매일 새볔 3시에 일어나 그날 배울 과목을 예습하였다. 이방법은 확실히 효과를 보았다. 수업시간에 선생님의 강의가 머리에 쏙쏙 들어오니 졸음도 온 데 간데없이 사라졌다. 이리하여 그의 학습성적은 줄곧 중상에 속하게되였다.    2학년 기말시험이 끝난 뒤 손원종은 학교에서의 학습을 끝마치려 하였다. 이 정도로 공부하면 단과대학 수준에 도달하였으니 집에 돌아가 계속 자습을 하면서 사전을 뒤지면 웬만한 로어로된 우화, 동화 혹은 꽁뜨 같은 것은 중국어 혹은 조선어로 번역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선생님들은 한사코 말리면서 3학년부터는 로씨야문학과 대외무역 과목이 설치되여있으니 배울 것이 더 많고 4학년에 가서는 졸업론문쓰기와 실습이 있어 부담이 별로 크지 않다면서 꼭 끝까지 견지하라고 격려하였다. 학급 단지부서기와 반장은 그를 찾아와 고무하였고 학생들은 “할아버지 떠나지 마세요. 우리랑 함께 졸업하자요.”라고 하면서 간곡히 만류하였다. 손원종은 선생님의 지도와 학생들의 부추김에 못이겨 끝끝내 4년간의 대학생활을 견지하였다.    4년간의 공부를 끝마치던 날 학원의 권원장이 대학4년 수료증서를 친히 손원종에게 발급하였다.    필자는 손원종선생의 석양에 비낀 학구열을 보면서 심히 감동되여 필을 들게 되였다. 우리조선족 사회에서 손원종선생과 같은 분들이 많이 계셨으면 좋겠다.        
179    "인물전3" 걱정도감 댓글:  조회:786  추천:0  2023-03-17
"인물전3"                                         걱정도감       민간에서는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리고 걱정해주는 사람을 이라고 말한다. 걱정도감이란 말을 듣는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호인이라고 한다.    서두에 걱정도감에 대한 말을 언급하였으니 말난김에 걱정도감이란 호칭을 받고 있는 퇴직교원 한분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분은 다름아닌 연길시직업학교에서 정령 퇴직을 하신 최운일선생님이시다.     최운일선생님은 항일 투사의 가정에서 장남으로 태여 났다. 그는 어릴때부터 공부를 잘하고 체육운동을 즐기였는데 달리기를 특별히 잘하였다. 부모님을 따라 안도현에서 유소년기와 청년기를 보내였다. 안도현 제2고급중학교를 다닐때 안도현을 대표하여 길림성에서 조직한 마라톤경기에 참가하게 되였다. 그번경기에서 최우수 선수로 되였다. 고중을 졸업하고 시험을 쳐서 길림성체육학원에 입학하였다. 그가  체육학원을 다닐때 전국마라톤운동대회가 심양에서 열리였다. 그는 길림성을 대표하여  대회에 출전하게 되였는데 영예롭게 2등상을 수여 받았다.    길림성체육학원를 졸업하고 연길시 4중학교에 배치를 받았다. 체육교사로 부임된 그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치여 그가 체육교사로 근무하고 있은 기간에 연길시 4중학의 학생들은 주와 성에서 조직한 륙상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따내여 길림성 체육보급 중점학교로 되였다. 후에 최운일선생은 연길시직업학교로 전근하여 퇴직할때까지 체육교사로 근무하였다. 연길시직업학교에 와서도 체육에 중시를 돌리여 연길시직업학교는 연길시에서 체육을 잘하는 이름있는 학교로 되였다.    연길시북산가도 중심에는 북대광장이 있다. 북대광장은 시민들이 즐거운 하루를 보낼수 있는 장소이다. 날씨가 따뜻해 지면 많은 사람들이 광장으로 몰려든다. 필자도 광장으로 자주다니는 사람중이 한사람이다. 나는 북대광장에서 연길시직업학교에서 퇴직한 여러선생님들과 사귀면서 친구사이로 되였다.    최선생님과 한 학교에서 근무했던 선생님들의 말에 따르면 최선생님은 우수한 체육교원이였을 뿐만 아니라 어려운 이웃들을 도와주는데 적극적으로 나섰기에 동료들로부터 이라는 별호까지 가지였다고 한다.    몇달전 어느날 최선생님은 우리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요즘 나는 우리집 마중켠 아빠트 1층 창고에서 이름을 모르는 한 장애인이 살고 있는 것을 보았소. 그 사람은 중풍을 맞었는지 한쪽 팔과 다리를 잘 쓰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였소. 지팡이를 짚고 다니면서도 넝마주이를 하고 있었소. 힘겨웁게 넝마를 줏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떤 말못할 사연이 있기에 저런 불구의 몸으로 넝마를 주울가? 하는 생각이 들었소. 우리가 그를 도와 주면 안될가?”    모임에 참가한 사람들은 최선생님의 말을 들으면서 아직도 우리사회에 그렇게도 어렵게 사는 사람이 있느냐? 하면서도 그사람을 도와주는것이 마땅한 일이라고 여기였다. 사람들은 최선생님한테 그사람의 집주소는 어디며 가정정황이 어떠한지를 똑똑히 알고 도와주는 것이 좋겠다고 입을 모았다. 최선생님도 그렇게 하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신분을 조사해 보겠다고 하였다.    며칠이 지난후 최선생님은 그 사람에 대하여 조사하여 보았는데 그 사람은 김ㅁㅁ로서 거주지는 단연사회구역인데  홀로 산다고 하였다. 아직 장애인 인증서를 받지 못하여 나라에서 발급하는 구제금을 받지 못하고 넝마주의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최선생님의 말을 듣고 우리는 동감이 가면서 그 사람을 돕기로 하였다. 소뿔은 단김에 뽑으라고 말난김에 최선생님,김선생님, 나 세사람은 고추 단연사회구역 사무실로 찾아갔다. 단연사회구역 사무실로 찾아가니 출입문이 잠가져 있었다. 방정맞게도 그날이 일요일이여서 우리는 단연사회구역 책임자를  만나지 못하였다.    다음날 최선생님은 단독으로 단연사회구역책임자를 만나 그사람의 어려운 사정을 반영 하였다고 했다. 단연사회구역 책임자는 그런 사람이 자기가 관활하는 단연사회구역에 거주 하고 있는 줄은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의 호적이 단연사회구역이 아니고 단령사회구역이기 때문에 해결 못  하고 있다고 하면서 단령사회구역에 련계하여 빠른 시일내에 해결하도록 하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최선생이 단연사회구역 사무실로 갔다온지 20여일이 지나도 아무런 소식이 없자 우리 세사람은 그냥 기다릴것이 아니라 북산가도판사처를 찾아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였다. 북산가도판사처로 찾아가니 마침 판사처에 전문 빈곤호와 장애인들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민정실의 있었다. 민정실의 리주임은 우리들의 말을 들어보더니 그 사람에 대하여 자기도 제보를 통하여 이미 알고 있다고 하면서 그 사람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려고 하고 있는 중이라 했다. 그러면서 정부에서는 그 사람의 실제 곤난을 해결해 주려고 하는데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들과 련계를 할수없어 안타갑다고 했다. 여러번 그 사람의 누나와 외 조카에게 전화하였는데도 받지 않고 만나려 해도 만나주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이런 부탁을 하였다. 북산가도 민정실의 책임자로서 여러분들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려고 나선데 대하여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미안한 부탁이지만  선생님들께서 그 사람의 가족들을 찾아주고 그 사람의 호구부, 신분증, 학교졸업증, 병원진단서를 가지고 오시면 그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겠다고 답 하였다.    북산가도 민정실에 갔다온 이튼날 최선생님은 그 사람을 찾아가 자기가 가도 판사처로 갔다 왔다면서 협조해 주겠으니 신분증과 호구부를 보자고 했다. 처음에는 최선생님을 믿어주지 않던 그사람이 최선생이 내심하게 설득시키자  최선생님에 대한 믿음이 갔던지 물에 젖어 글자가 히미하게 보이는 호구부와 초급중학교 졸업증을 보이면서 신분증은 분실되여 없다고 했다.    이튼날 최선생님은 아들 며느리한테 자기가 김모란 장애인을 도와 주겠다고 말하였다. 효자 효부인 아들 며느리는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좋은 일을 한다면서 적극 지지하겠다고 하였다. 이튼날 아들은 차를 가지고 왔다. 최선생과 김모는 먼저 연길시정무대청으로갔다. 시정무대청의 담당자는 최선생님이 찾아온 용건을 자세히 듣고나서 최선생님에게 좋은 일을 하신다면서 적극적으로 도와 주겠다고 하시였다. 당일에 호구부를 새로 만들었고 5일 후에 새 신분증을 발급 하였다.    새호구부와 신분증을 발급 받자 최선생님은 저와 같이 김모의 누나와 외조카를 찾았다. 여러모로 애쓴덕에 김모의 누나와 외조카를 찾게 되였다.    김모의 누나는 우리를 향하여 자신의 달아다니며 하여야 할일을 선생님들이 하시게 되여 미안하다고 하면서 여러분과 함께 동생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적극적으로 나겠다고 하였다.    최선생님은 김모를 데리고20여일간 연길시정무청사, 연길시민정국, 연길시부동산관리국을 다니면서 김모에 관한 서류들을 작성하여 북산가도 민정실에 바치였다. 북산가도 민정실의 리주임은 자료를 보시고 만족해 하시면서 정부를 협조한데 대하여 감사하다고 하였다.    이제는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다. 마지막 단계는 김모가 장애자라는 인증서를 받는 것이였다. 장애자 인증서를 받자면 연길시병원 법의실에서 신체 검사를 받아야 했다.    최선생님은 김모의 누님과 함께 김모를 데리고 연길시병원 법의실로 찾아갔다. 법의의 세밀한 검사를 받어 김모는 2급 장애인이라는 판정을 받게 되였다.  법의의 판정을 받은후 최선생님은 김모를 데리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장애자련합협회를 찾아갔다. 주장애자련합회에서는 김모에게 2급장애인이라는 인증서를 발급했다.    김모는 2급장애인이라는 인증서를 받게 되자 다음달 부터 장애자에게 발급하는 구제금을 받게 되였다.   장애자 인증서를 받던 날 김모는  눈물이 글썽하여 떨리는 손으로 최선생님의 손을 꼭  잡고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렸다.    단영사회구역의 책임자도 최선생님을 보고 우리가 응당하여야 할일을 선생님들께서 해결해 주었다며 련신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였다.   필자는 글을 마무리 지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나라의 지도자는 백성을 위해 걱정하며 부모는 자식 걱정을 한다. 사람이 사는 것이 모두다 제각기이다. 잘사는 사람과 어렵게 사는 사람들로 사회를 이루어 상부상조하면서 산다. 사람들은 각자가 하고저 하는 일이 잘 풀려 나갈때에는 몰라도 어려움에 처하였을때에는 절실히 남이 도움을 바라게 된다. 마음뿐만 아니라 행동으로 어려운사람을 돕는 사람을 천사같은 사람이라고 한다.  말로만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행동으로 어려운 사람들의 애로를 풀어주는 최운일선생님이야 말로 참된 “걱정도감”이 아니겠는가...      
178    (인물전 2)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나이 댓글:  조회:707  추천:0  2023-02-17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나이      사람들은 흔히 젊은 시절에는 도전하며 살고 늙어서는 추억으로 산다고 한다. 나이 여든이 넘어서도 여전히 도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바로 유일한 조선족 고급양봉학자이며 양봉전문가라 불리우는 김한덕선생이다.    김한덕은 1943년6월2일에 왕청현 동광향 동광촌에서 아버지 김병룡과 어머니 원애선의 사이에 삼남으로 태여났다. 위로 형들이 병으로 사망하자 그의 부모들은 그를 형제가 여럿이 있는 김씨집의 양자로 들여보냈다. 그집 형제들의 이름(漢)자 돌림에 따라 김한덕(金漢德)이란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김한덕이란 이름을 가지여서 그런지 어릴때부터 지금까지 건강한 몸으로 인생을 보내고 있다.     김한덕은 어릴때부터 도전 정신이 매우 강하였다. 학생시절에는 공부를 열심히 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적 소질을 구비하고 있었다. 그는 초급중학교를 졸업하고 예술적기량을 닦기위하여 연변가무학교에 입학하였다. 연변가무학교에 입학한후 열심히 공부하였다.    운명의 조화라할가 그가 연변가무학교로 간지1년이 되기전에 아버님의 병환으로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게 되였다. 워낙 생활형편이 어려운데다가 아버지가 입원치료를 받게되니 가정 생활형편은 매우 어려워졌다. 가정의 경제난으로 인하여 학비를 댈수 없게 되였다. 그는 부득불 눈물을 머금고 중퇴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1964년부터 왕청림업국 산하에서 로동자로,기층간부로 있었다. 후에 왕청현 공농합판공장에 전근하였다가 다시 왕청현 사회복리공장으로 전근되여 공장장직을 맡아하였다.  2005년에 정령퇴직을 하였다.    퇴직하고나서 무엇을 할가 생각하고 있는데 일본에 있는 딸한테서 초청장이 왔다. 김한덕은 부인과 같이 일본려행을 하게 되였다. 일본에 체류해 있는 기간에 일본의 이름난 도시, 해변가, 명산,  명승지를 돌아 보았다. 일본유람을 하면서 제일 인상이 깊었던 것은 다른 나라에서 볼수 없었던 일본식 음식문화였다. 여러 곳을 다니며 여러가지 지방 특색이 있는 음식들을 맛보앗는데 어느곳으로 가던지 그곳의 음식은 다 단맛이나는 것이 특징이였다. 어떤 조미료를 넣었기에 음식이 단맛이 나고 맛이 있을가? 궁금하여 가이드한테 물었더니 가이드가 이런말을 하였다. “과거 일본사람들은 설탕을 즐겨 드셨는데 지금은 설탕을 자시지 않고 설탕대신으로 꿀을 많이 드시고 있습니다. 설탕을 대신하여 꿀을 많이 드시게 되자 일본사람들의 설탕으로 인하여 생기는 고질병인 설사병을 치유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꿀을 많이 드셨기에 일본사람들은 세계에서도 손꼽을만하게 건강장수한 나라로 되였습니다.”    김한덕은 일본사람들이 설탕대신 꿀을 많이 드셨기에 장수한 나라로 되였다는 말을 듣는 순간 우리 중국에서도 이제는 음식문화를 개변할때가 아닐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꿀을 많이 드시는 일본식 음식습관을 도입하여 중국의 음식문화와 접목한다면 건강장수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을가 하는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한번은 후지산을 유람하고 기진맥진하여 호텔로 돌아온 그들부부에게 호텔종업원이 봉교목욕을 해보라고 추천하였다. 봉교목욕을 하고나니 하루종일 쌓였던 피곤은 신기하게도 거뜩 가셔졌다. 알아보니 봉교는 신진대사에 필요한 여러가지 효능이 있는 꿀제품이라고 한다. 그는 봉교의 효능에 감탄하며 “귀국하면 양봉해야지”라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귀국하여 양봉업을 해보기로 마음을 굳힌 김한덕은 귀국하기전에 꿀생산기지를 찾아가 양봉업을 하는 현지인들을 만나 그분들한테서 양봉기술을 초보적으로 배웠으며 양봉에관한 기술서적을 선물받았다. 귀국할때 양봉업에 필요한 자재와 도구를 한짐 샀다.    귀국한후 양봉업에 관한 지식을 넓히기 위해 신화서점으로 달려갔다. 그당시 신화서점에는 양봉에 관한 조선문으로 된 책이 없었다. 그는 한어로 된 책을 사서 보면서 양봉에 관한 지식을 장악했다. 연후 양봉업을 하기 적합한 연길시 조양천진 부암촌에 터전을 잡고 1만5천원을 투자하여 벌통13개와 기자재를 사고 양봉업을 시작했다.    일을 하다보면 일이 잘될때가 있고 못될때가 있다. 양봉업을 해본 사람들은 양봉업은 십년일득이라고 말한다. 그말뜻인즉 양봉업은 볼봐엔 간단해 보이고 수익이 높은 업으로 보이지만 정작 해보면 십년에 한번쯤 풍수를 거두는 어려운 일이라는 뜻이다. 농사는 하늘이 맞추어 주어야 풍작을 따낼수 있듯이 양봉업도 하늘이 맞추어 주어야 잘된다고 한다. 다행히 김한덕이가 양봉업을 시작한 그해에 기온이 알마춤하여 그는 꿀풍작을 않아왔다. 당해에 800근의 꿀을 받아냈고 벌통도 20개가 늘어났다. 당해에 쓴 비용을 제하고도 만원수입을 올리였다.     김한덕은 양봉업을 하는 한편 양봉업에 관한 리론적 연구를 하면서 양봉업에서 얻은 실천경험을 총화하여 론문을 썼다. 유관부분에서는 그의 론문을 보고 좋은 평가를 하였다.     그는 양봉업을 더 확대발전하기 위하여 양봉업을 하는 사람들과 협상하여 자원적으로 양봉전문 합작사를 세웠다. 합작사 회원들은 상호협력하여 안정적인 수입을 올리였다.     양봉업도 과학기술이 필요하다. 거대한 국토를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는 북방에는 눈이내리는데 남방에는 꽃이피는 다양한 기후조건을 가지고 있다. 계절에 따라 피는 꽃이 있는가 하면 사시장철 피는 꽃도 있다. 꽃을 따라 사는 꿀벌은 민감한 동물이다. 꿀벌도 지방벌이 있는가 하면 외래벌도 있다. 자연의 리치에 따라 벌의 특징을 장악하고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하는 문제는 양봉업자들 앞에 놓인 과제였다. 우리 연변은 꽃이 피는 기한이 길지않기 때문에 꿀벌들의 월동기간이 긴편이다. 어떻게 하면 꿀벌들의 월동기한을 짧게하고 일년사시절 꿀을 채집하며 십년일득이라는 양봉업의 옛날 고정개념을 떠나 해마다 양봉업의 풍수를 따낼수 있게 할것인가 고심하였다.    그는 양봉업을 하는 한편, 꿀벌의 월동기간을 리용하여 남방에 있는 양봉기지를 찾아가 견학하였으며 한국을 찾아가 한국의 양봉기술업자들 한테서 양봉기술을 배웠다. 열심히 공부하고 실천하는 과정을 거쳐 김한덕은 양봉에관한 리론적지식을 장악하여 사람들로부터 조선족의 유일한 양봉기술전문가로 인정받게 되였다.    어느날 김한덕은 신문을 보다가 중국벌침학회에서 학원들을 모집한다는 기사를 보게 되였다.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싶어 하던차 그정보를 알게되자 그는 그 자리에서 신문기사에 실린 통신처에 전화하여 벌침연구소에서 개최한 학습반에 참가할것을 신청했다.    2006년12월 김한덕은 석가장에서 열린 제4기 전국 중의양료림상인용기술양성반에 참가하였다. 양성반에서 저명한 벌침전문가들의 강의를 들었으며 벌침을 놓는 기술을 배웠다. 학습을 통하여 벌침이 인체에 주는 영향과 작용에 관한 리론을 습득하게 되였다. 학습반에서 열심히 공부하여 훌륭한 성적으로 모범학생이란 영예를 안고 졸업증서를 받았다. 여러차려 벌침연구 학습반에 참가하여 상당한 수준의 벌침치료기술을 장악하게 되였다. 후에 의학부분의 검증을 거쳐 벌침을 연구하는 연구원 인증서를 받았다.    그는 학습반에서 배운 벌침으로 병을 치료할수 있는 기술을 림상시험에 도입하였다. 부암촌에 있을때 한 마을에 살고 있는 류모는 코암으로 앓고 있었다. 류모는 무더운 여름철에도 솜옷을 입고 다니는 허약한 환자였다. 김한덕은 류모한테 벌침을 놓는 한편 봉교로 코를 씻게 했다. 수십차 벌침을 맞고 봉교로 씻자 류모의 코병은 기적처럼 가뭇 사라졌다. 또 한사람은 화룡시에 있는 김씨성을 가진 모단위의 간부였다. 그는 양성종양으로  고생하다가 소문을 듣고 김한덕을 찾아왔다. 그도 몇달간 벌침치료를 받어 종양을 기본상 제거하여 건강한 몸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발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김한덕이 벌침으로 병을 치료한다는 소문이 펴지자 가근방은 물론 외지에서도 많은 환자들이 찾아왔다.     어느날 연길시 모 병원 책임자가 김한덕을 찾아왔다. 찾아온 리유는 모 병원에서 김한덕을 벌침의사로 초빙하겠다는 것이였다. 김한덕은 모 병원의 초빙을 수락하고 모병원에서 6년간 벌침의사로 근무하였다. 그는 6년간 벌침으로 많은 고질병 환자들을 치료하여 좋은 호평을 받았다.    김한덕은 벌침의사로 활력하면서도 꿀벌에 대한 연구를 늦추지 않았다.    한번은 사과배 과원을 지나다가 꽃이핀 사과배 나무사이로 꿀벌이 날아다니며 수분하는 것을 보게 되였다. 그장면을 보는 순간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꿀벌로 사과배꽃에 수분하면 좋지 않을가? 그렇게 된다면 많은 경제적효과를 얻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는 이 실험을 하기 위하여 연변과학기술협회의 도움으로 연변사과배나무 선조촌인 룡정시로두구진소기촌에 점을 잡고 꿀벌로 사과배꽃 수분시험을 하였다. 꿀벌수분시험을 한후 소기촌사과배전문합작사 책임자는 꿀벌수분은 일손을 덜고 비용을 줄이는 등 여러가지 좋은 점도 있다면서 올해 이 실험기지의 400구루의 나무에서 인공수분용화분비용, 인건비 등을 3,000원 절약할수 있다고 소개했다. 그해에 꿀벌로 수분한 그 과원에서는 사과배 풍작을 따내였다. 꿀벌로 사과배꽃에 수분한 실험이 성공하자 많은 과원에서 김한덕을 초빙하여 꿀벌수분을 하였다.    김한덕은 꿀벌로 사과배꽃 수분에 성공하자 또다른 실험을 하였다. 이번에는 겨울철 하우스안에서 꿀벌로 딸기를 수분하는 실험을 하였다. 딸기외에도 오이, 토마토에도 꿀벌수분실험을 하였는데 모두 좋은 성과를 따내였다.    김한덕은 어느한 과학기술 잡지에 “불개미의 몸체에 사람의 몸을 보양하는 좋은 효소들이 들어있다.”는 기사를 보았다. 김한덕은 그 기사를 보고 흥미를 느끼고 불개미에 대한 연구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불개미 둥지를 채집하여 자신의 실험기지에 갔다놓고 불개미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그는 지금 불개미에 대한 연구를 거쳐 초보적인 성과를 올리고 있다.   김한덕은 자기의 실천경험을 토대로 하여300여편의 론문을작성하여 등 각지의 신문잡지에 투고하였는데 100여편이 발표되였다. 발표된 론문들을 수록하여 책으로 묶어 출판하였다. 2010년1월에 연변인민출판사에서 출판한 저서 출판기념식이 연길에서 거행되였다. 책은 출판되였지만 누구도 30만자에 달하는 이 전문저서의 저자가 60세가 넘은 조선족이라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책의 출판으로 1985년 이후 중국에 조선문양봉전문저서가 없는 공백이 메웠졌다.     김한덕은 2004년에 중국양봉학회로 부터 정식회원이라는 인증서를 발급 받었다.    2010년에 중국과학기술협회와 재정부에서는 김한덕에게 이라는 칭호를 수요했다. 련이어 길림성과학기술협회, 연변조선족자치주과학기술위원회에서도 김한덕에게 성, 주과학기술보급 선진인이라는 영예증서를 발급하였다.    김한덕 선생은 2015년에 대전세계양봉대회에 참가하여 양봉산업에 관한 론문을 발표하였으며 대회참가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대회기간에 세계아피몬디아 회원들과 문화교류를 하였다   연길시조선족양봉전업합작사도 중국양봉학회로 부터  집체 회원 인증서를 발급 받었다.   도전을 뭠추지 않는 김한덕선생의 황혼은 아름답다.        
177    (인물전 1) 시대가 배출한 녀걸 리영숙회장 댓글:  조회:5348  추천:0  2023-02-05
     (인물전1)                                                                             시대가 배출한 녀걸 리영숙회장       시대가 영웅을 배출한다는 말이 있다. 고금중외를 훝어 보면 격변기 시대마다 영웅이 나타났다.     시대가 영웅을 배출한다는 말을 언급하고 보니 마치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의 회장이신 리영숙 회장을 두고 한말인것 같기도 하다. 리영숙회장은 영웅칭호는 받지 않았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마다 엄지척을 보이며 시대가 배출한 녀걸이라고 말한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는 어떤 단체이며 리영숙회장은 어떤 좋은 일을 하였기에 녀걸이라 불리울가? 연변아리랑 서로돕기창업협회의 장정에는 이렇게 씌여있다. “본 협회는 어려운 약체군체를 위해 봉사하는 독립적이고 법인 자격을 갖춘 비영리성 사회단체이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는 사회자선사업의  발전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국내외 지명인사들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각 사회단체의 기부와 의연금, 회원들의 낸 회비등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빈곤부축자금과 빈곤가정의 학생들을 돕는데 유용하게 쓰인다. 본 협회에서는 회장단을 선출하며 민주선거로 회장, 부회장, 상무리사를 선출한다.”     리영숙 회장은 한 철도 로동자의 가정에서 장녀로 태여났다. 어린시절 그의 가정은10여명 식구가 사는 대가정이였다. 아버지의 월급에 의지하여 살다보니 가정 살림살이는 매우 어려웠다. 곤난한 집 아이들이 일찍 철이든다고 영숙이는 장녀로서의 책임감을 가지고 어릴때부터 부모님들을 도와 집안 일을 하였으며 동생들을 보살펴 주었다. 그는 공부를 열심히 하여야 좋은 학교로 갈수 있으며  좋은 직장을 얻을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학교에서 학습을 잘하고 품행이 단정하여 늘 우수학생이란 칭찬을 받았다. 돈화에서 소학교 교사로 있다가 후에 길림성교사양성전업학교를 졸업한후 연변제2고급중학교에 배치를 받았다. 그는 수십년동안 연변제2고급중학교에서 교육사업을 하였다. 교육사업을 잘 하여 여러번 주, 성의 우수교원으로 표창을 받았으며 영예롭게 전국우수교원이란 칭호도 수여 받았다. 리영숙선생님은 연변제2고급중학교에서 정령 퇴직을 하였다.     퇴직을 한 사람마다 퇴직을 하게 되면 퇴직 후에 무엇을 할가? 생각하게 된다. 리영숙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날 리영숙 선생은 훈춘시의 한 시골 마을로 갔다가 우연히 그곳에서 장애자 부부가 어렵게 아이를 키우는 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홀아버지인 한남자가 헐망한 초가집에서 아이를 힘들게 키우는 것을 보게 되였다. 두 가정에서는 정부에서 발급하는 최저 생활 보장금으로 근근득식으로 생활해 가고 있었다. 리선생은  어렵게 사는 그들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쓸쓸해 났다. 정부에서는 빈곤부축 정책을 실시하여 많은 빈곤호들이 빈곤에서 벗어 났지만 아직도 일부분 사람들은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생태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으며. 그들의 자녀들 또한 어려운 환경속에서 힘들게 살고 있음을 알게되였다. 어떻게 하면 빈곤호와 그들의 자녀들을 돕는 사업을 할가 고민하게 되였다.      리선생은 집으로 돌아 오면서 이런 생각을 하였다. 오늘 목격한 아이들처럼 사회의 곳곳에 우리가 알지못하는, 아직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결손가정과 그들의 자녀들이 더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사회 조사를 하기로 했다. 그는 뜻이 맞는 동료들과 같이 연변각지를 돌면서 사회 조사를 하였다. 조사를 해보니 생각보다 빈곤에서 해탈되지 못한 빈곤 가정과 그들의 자녀들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때로 부터 리영숙 선생은 퇴직후의 일정을 자선 사업에 받히기로 마음을 굳히였다. 자선 사업이란 말로는 하기 쉽지만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리영숙 선생은 빈곤에서 해탈되지 않은 빈곤호와 그들의 자녀를 도울 자선사업을 하려면 자기 혼자 힘으로는 할수 없다고 생각했다. 한 사람이 열사람을 먹여 살리기는 힘들지만 열사람이 한 사람을 먹여 살리기는 쉽다는 말처럼 여러 사람들의 힘을 모으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리선생님은 자선사업을 하려면 자선 단체를 꾸려야 하며 자선사업 기금을 모금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뭐든지 하려고 하면 꼭 해내고야 만은 성격을 가진 리선생은 이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맥을 통하여 국내외 사회 각계 인사들과 동료들을 만나 자선 사업단체를 꾸리겠다는 자신의 소견을 내놓았다. 생각외로 많은 분들이 좋은 생각이라며 지지해 주겠다고 표시하였다.      동료들의 힘을 얻은 리영숙 선생은 자선협회를 꾸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협회준비위원회에서 충분한 협상과 토론을  거쳐 단체의 명칭을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라 하였다. 협회준비위원회에서는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의의 장정을 명확히 규정하였으며 민주선거를 거쳐 리영숙선생님을 협회의 회장으로 추천하였다. 조직기구가 완정해 지자 드디어 2005년5월31일에 사단법인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가 고고성을 울리였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가 설립되자 협회를 지원하기로 약속한 국내외의 지명인사들과 단체들에서 자선사업을 돕기위한 기부금을 보내왔다.      협회에서는 사업의 수요로 연변에 8 개 분협회를 두었고  단동시에도 분협회를 두었다 분협회마다 분회장이 있게 되였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 주석단에서는 협회의 장정에 따라 사업을 진행하였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는 우선적으로 빈곤호들을 돕는 부축 사업과 동시에 빈곤가정 학생들을 돕는 일을 시작하였다.     처음으로 훈춘시 이도포촌 동물사양 전문호에 토끼와 오리 사양기지를 꾸리는데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였으며 삼가자향 딸기, 참외 생산기지와 밀강향과 마적달향에 있는 황소 사양기지에도 필요한 자금을 대주었다. 화룡시 숭선향에 있는 옥수수 생산기지, 로과향에 있는 고추생산기지, 길지향과 남평향에 있는 무우씨 생산기지와 오미자 생산기지에도 부축 자금을 지원하였다. 룡정시 동성향에 있는 벼종자 생산기지, 개산툰진 광소촌에 있는 벼종자기지, 삼합향에 있는 고추 생산기지에도 부축 자금을 지원하였다. 도문시 량수촌에 있는 옥수수종자기지, 감자종자기지, 월청진 마패촌의 벼농사기지,  백룡촌의 벼농사기지를 돕는 자금을 지원하였다. 연길시에서 창업을 하고 싶지만 창업 자금이 부족하여 창업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창업대금을 대주었다. 창업 부축 대금을 받은 그분들은 각자의 능력에 따라 자전거수리, 신수리, 옷수선, 반찬 가게를 꾸리여 장사가 잘되였다, 또 이란진 남계촌에 있는 기러기, 치면조, 닭 사양기지에도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였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는 훈춘시에 있는 빈곤 가정 두집에 새 벽돌집을 지어주어 학생들이 시름을 놓고 학교로 다니도록 하였다. 연변의 몇개 현 시의8개 촌의 촌정부와 합작하여 농촌도서실을 꾸리는데 필요한 자금과 책을 지원하였다. 그뿐이 아니다 의지가지 갈곳없는 노약자, 장애인10명에게 부양 자금을 지원하였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는 18년동안 빈곤가정 부축사업을 진행 하였으며 동시에 빈곤가정 자녀들에 대한 자금 지원을 하였다. 매년 빈곤가정의 학생 200명에게 매달 250원을 조학금과 장학금으로 발급 하였다. 그리고 2018년부터  장학금을 받은 학생이 대학에 입학 하면 협회에서는 대학입학등록금을 매년 한 학생에게 3,000원씩 지불하였다.      용장수하에는 약졸이 없다는 말이 있다. 리영숙 회장은 투지력이 있고 결단성이 있는 장수처럼 일심정력으로 자선사업을 밀고 나갔다. 리영숙 회장과 같은 용장수하에 있는 분협회의 회장들도 리영숙회장과 손잡고 똘똘 뭉치여 자선사업을 참답게 하여 왔다. 특히 표창 하여야 할 분회장 중에는 훈춘시 분협회의 오금숙 회장과 도문시 분협회의 회장인 김덕자 회장을 빼놓을수 없다. 오금숙 회장은 모 기업에서 퇴직한후 장장 18년동안 훈춘 분협회의 회장직을 맡아 하시였다. 오금숙 회장은 대수술을 한 몸이지만 빈곤 가정과 그들의 자녀들을 돕는 일이라면 발벗고 나섰다. 훈춘분협회에서는 18년동안 수백명의 빈곤가정의 자녀들을 후원하였다. 정성을 들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고 훈춘분회에서 정성을 들여 빈곤가정 학생들을 돌봐 주었더니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으로 간 학생이 50여명이 된다. 김혜언 학생은 2018년에 전주에서 제일 우수한 대학 입시 시험 성적을 따내여 명성이 높은 상해복단 대학으로 갔다. 오금숙 회장은 자선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기부하였다. 작년에 오금숙 회장은 빈곤호 학생이 대학으로 갈때 대학입학 등록금으로 2만원을 기부하였다.     도문시의 김덕자 회장도 18년간 도문 분협회 회장직을 맡아서 빈곤호와 빈곤호 자녀들을 돕는 사업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그는 량수촌 감자종자기지, 마패촌의 벼농사기지, 장안진 소동구 경로원 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지원하는데 기여 하였다.    그가 외출하였을 때 남편이 나서서 분협회 일을 책임져 주었다. 김덕자 부부는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를 위하여 빈곤호 부축사업과 빈곤호 자녀들을 돕는 일에 많은 노력을 하였다.     꽃나무도 키우기에 달려 있다. 정성들여 키운 꽃나무는 아름답게 피며 탐스런 열매를 맺게 된다. 빈곤가정의 학생들도 아름다운 꿈을 가지고 있었다. 누군가 꿈을 키우려고 하는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그들을 도와 준다면 그들의 꿈은 현실로 될것이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는 가물이 단비인양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빈곤가정의 학생들에게 제때에 도움의 손길을 보내였다. 협회의 도움을 받은 학생들중 많은 학생들은 공부를 잘하여 100여명의 학생들이 대학으로 갔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 사회에 진출하여 사회의 유용한 인재로 되였다.     채설경, 라혜연, 엄문길 등 학생들은 사회에 진출한후 첫 월급을 받자 월급에서 일부를 빈곤학생들을 돕는 자선 사업에 기부했다. 라혜연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후 빈곤가정의 학생 셋을 책임지고 돌봐주었다.     필자는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와 리영숙회장이 쌓아온 업적을 보면서 심히 감동을 받았다. 자선 사업이란 부자들만 하는 전리품이 아니고 마음의 부자인 많은 사람들의 할수 있는 사랑의 담겨있는 사업이다. 리영숙회장은 자선 사업을 하면서 많은 돈을 협회의 운영비와 자선사업에 기부하였다. 리영숙 회장은 포만된 의력으로 빈곤부축 사업과 빈곤호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업을 참답게 하여 왔다. 그는 자선 사업을 하면서 스스로 행복감에 도취되여 있다고 했다.리영숙 회장은 녀걸다운 흉금으로 우리가 상상못할 정도로 많은 자금을 빈곤부축 사업과 빈곤호 자녀들을 도와주는 사업에 기여하여 왔기에 필자는 리영숙 회장을 녀걸이라고 높이 평가 한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 18년간 빈곤 부축사업과 빈곤가정 자녀들을 도왔다. 협회의 도움을 받은 사람들과 협회의 좋은 사적을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 자선사업을 잘한다는 찬사를 보내왔다.     아름다운 보석도 흙속에 파뭍쳐 있을 때에는 진가를 알수 없지만 발견되여 닦고 닦으면 아름다운 보석으로 빛을 내게 된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를 이끌어온 리영숙 회장이야 말로 보석 같은, 사회가 배출한 녀걸이라고 말 하지 않을수 없다。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에서는  18년 동안 줄곳 많은 빈곤호 부축사업과 빈곤가정 아이들을 돌봐주는 사업을 잘하여 주부련회, 주민정국으로 부터 선진 민간단체라는 칭호를 수차 받았으며  리영숙회장도 주민간단체 선진일군으로 표창 받았다.      
176    오래 살라는 축복인줄 아세요 댓글:  조회:1213  추천:0  2022-12-31
                                오래 살라는 축복인줄 아세요       설날을 앞두고 감기에 걸려 마을 진찰실로 갔다. 의사는 요즘 진찰실에는 감기에 걸려 오는 환자들이 많다고 했다. 나는 의사의 말씀을 들으면서 며칠전만 하여도 핵산검사를 할때에는 병원을 찾는 환자들이 많지 않았는데 핵산검사를 하지않고 규제를 풀자 불세로 감기환자들이 부쩍 늘어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사실대로 말하여 나는 감기에 대하여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편이다. 오히려 일년에 한 두번 감기를 하는것이 내 건강 노하우라고 여겨왔다.    내가 점적 주사를 맞고 있는데 옆에서 점적주사를 다 맞고난 할머니 한분이 의사한테 이런 말을 했다.    “의사님 한테 한가지 묻겠습니다. 웬일인 이 몇년간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고 있습니다. 밤시간이 어찌도 지루한지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두 시간이라도 푹 잦으면 좋겠는데, 선생님께서 잠을 잘 자게 하는 치료방법이 따로 있는지요.”    “의학상식에 의하면 년세가 70이 넘은 로인님들의 90프로가 불면증을 겪고  있다고 합니다.”    “아유, 그렇게 많은 분들이 나와 같이 불면증에 고생 하는줄 몰랐네요. 선생님을 믿고 싶은데요.  어떻게 하면 불면증을 치료할수 있나요.”   “의학상에서는 불면증 환자들에게 수면제 약을 쓰도록 하고 있습니다. 수면제를 사용하면 불면증을 다소 해결할수 있으나 자주사용하면 부작용을 일을 킬수 있습니다. 나한테 불면증을 치료하는데 도움이 될수있는 중약 처방이 있습니다. 어머니께서  그 중약을 써볼 의향이 있으며 처방을 써 드리겠습니다.”    “그럼 중약을 써 보겠습니다. 중약을 쓰려면 대략 시간이 얼마 걸립니까?”    “대략 3개월 내지 6개월을 써야 효과가 나타납니다.”    “6개월 후에나 효과가 나타난다구요!”    “불면증은 로인성 질환이기 때문에 너무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불면증을 치료하는 제일 좋은 방법은 마음의 안정을 찾는 것입니다. 어머니께서 한번 엉뚱한 일, 잡생각을 버리고 모든 일을 긍정적으로 생각해 보십시오. 나에게 온 불면증도 나를 하루라도 산 사람으로 오래 살라고 하는 축복이라고 생각 해 보십시요 그럼 스스로 불면증이 치유될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될것을 가지고 그랬네요. 선생님의 약처방과 선생님의 하신 말씀대로 마음 가짐을 한번 바꾸어 보겠습니다.”    나는 두분의 대화를 들으면서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책과 위신을 통하여 보면 로인 장수비결의 첫째 조건이 모두다 마음 가짐을 옳게 가지고 잠을 잘 자는 것이라 했다. 특히 로인들은 하루에 6-7시간을 자도 수면시간이 충족하다고 했다. 건강 장수한 로인들이 내놓은 장수비결이 하나가  잠을 잘 자는 것이라 하였다.    잠을 잘 자면 건강 장수 할수 있다는 도리를 누구도 뻔히 알면서도 불면증으로 고생하고 있다. 불면증은 보편성을 띠고 있는 로인성 질환으로 치유하기 힘든 난리성 질환으로 되고 있다.    나는 의사도 과학자도 아니기에 발언권이 없다. 하지만 입가진 자로서 한마디 하겠다. 내 생각에는 세상일 모두가 이중성을 가지고 있으며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오늘 내가 들은 말도 그렇다. 로인성 질환인 불면증을 대함에 있어서 두가지로 생각해 보자. 단순히 치료하기 힘든 병이라고 하기보다  의사가 말한대로 생각을 바꾸어 보자. 불면증이 나를 못살게 구는 질병이 아니라 하루라도, 한시간이라도 깊은 턴널을 나와 밝은 날을 더 보라는 축복이라고 생각 한다면 스스로 불면증도 해소 될것이 아니겠는가...  
175    우리 집 밥상 변천사 댓글:  조회:972  추천:0  2022-11-18
                                     우리집 밥상 변천사       세월과 더불어 우리집 밥상은 옛날 부자집 밥상이 부럽지 않으리만치 풍성해지고 있다.     요즘들어 나는 풍성한 반찬 덕분에 반주를 겉들이는 습관까지 생겨났다. 특히 고기반찬을 안주 삼아 마시는 술은 그야말로 꿀맛이다. 나는 식사때마다 먼저 밥상을 쭉 훑어 보고는 밥상에 고기반찬이 있으면 술병을 가져온다. 형편이 좋아진 근래에는 끼니마다  밥상에 고기반찬이 오르다보니 자연히 반주를 마시는 일이 잦아졌다.    40년전만 해도 우리 집 밥상에는 고기반찬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명절때에만 고기점이 올랐을 뿐 평소에는 장국과 김치가 위주이고 어쩌다가 밥상에 닭알이 오를 때도 있는데 그 날은 에누리 없이 누구가의 생일날이였다. 그토록 귀하던 닭알도 지금은 거의 끼니마다 밥상에 오르다싶이 한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다. 부자와 빈민을 가려 내려면 그들이 입고 다니는 옷을 보아서는 구별하기 어려우나 고기와 부식물을 사는것을 보면 알수 있다고 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나는 안해의 소비관이 바뀐 것을 발견하였다. 예전에 안해는 고기나 부식물을 살때 값 싼 것을 골라 사느라 신경을 썼는데 지금은 품질이 좋은 물건을 사고 흐뭇해 하는 안해의 모습을 보면서 안해도 이제는 아끼고 모으는 고유의 관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활 방식을 추구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평생을 살아 오면서 어머니와 안해가 만든 음식을 먹으며 살아 왔다. 사람들이 나한테 어머니와 안해가 만든 음식중에서 누가 만든 음식이 더 맛이 있었더냐고 묻는다면 안해가 해준 음식보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이 더 맛이 있었다고 대답 할 것이다.     나는 결혼하기 전까지 27년간 어머니가 해준 음식을 먹었다. 그 당시 우리집은10여명 식구가 사는 대 가정이였다. 어머니는 매일마다10여명 식구들의 밥상을 갖추느라 로심초사하시였다. 고기붙이는 없었지만 여러가지 김치와 각종 나물들이 밥상에 올라 늘 푸짐하였다. 어머니는 계절에 따라 들나물과 산나물을 캐다가 밥상에 올렸는데 봄에는 달래김치와 민들레무침, 여름철에는 미나리, 고사리, 더덕, 버섯으로 만든 반찬들이 올랐다.    어머니는 아무리 일이 힘들고 고달파도 아침밥을 잘  먹어야 힘이 난다면서 아침에는 꼭 밥을 지어주었다. 저녁은 옥수수죽에 감자, 호박을 곁들어 먹는 것이 보통이였다.    나는 여짓껏  어머니가 어느때 주무시셨고 어느때 일어 났는지 기억 못하고 있다. 단지 어련푸시 떠 오르는것은 내가 아침에 일어나서 보면 어머니는 어느새 일어 나 아침 준비를 하시던 모습이 우렸히 떠 오른다.    어머니는 늘 저녁이면 다음날에 쓸 음식 재료들을 미리 준비해 놓으셨다. 밥을 지을 때 가마솥에 먼저 넙적하게 썬 감자를 펴고 그 우에 옥수수쌀을 얹은다음   입쌀을  살짝 펴고 나서 물을 부었다. 어머니가 밥 지을 준비를 마무리 짓고 가마뚜껑을 덮으면 아버지는 부억 아궁이에 불을 지피였다. 한참지나 가마가 달아오르고 뜨거운 김이 솟구치면서 가마뚜껑이 드르렁 소리를 내였다. 뜸을 들이고  어머니는 가마뚜껑을 열고 밥을 골고루 저어 놓는다. 가마에서 풍기는 구수한 밥 냄새는 우리들의 군침을 돋구었다.     지금 같아서는 순 옥수수밥이나 다름없는 밥이 무슨 맛이 있었으련만 그 때 그 시절에는 그 밥이 어찌도 맛 있었던지 별미중의 별미였다. 어머니는 밥을 큰 그릇에 듬뿍 담아 밥상우에 올려놓고 나서 장국과 김치, 고추장, 장졸임, 야채볶음, 싱싱한 나물을 차례로 올려놓는다. 어머니가 밥상을 차려 놓으면 우리는 밥상에 빙 둘러 앉아 구수한 장국에 밥을 말아서 게눈 감추듯 순식간에 밥그릇을  비워버리군 했다.  밥을 다 먹은 뒤에는  누룽지와 슝늉을 먹게 되는데 그 맛이 또한 기가막히였다. 지금도 가끔 그 시절 어머니가 차린 밥상을 떠올리면 군침이 돈다.    결혼하여 새 살림을 꾸리게 되자 이번에는 어머님의 손길을 떠나 안해가 지은 음식을 먹게 되였다. 새 살림을 꾸리게 되자 깨알이 쏟아 질둣이 달콤하게 살리라 생각 했다 그런데 그런것이 아니였다. 여러 식구가 큰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먹을 때에는 뭐나 다 맛이 있었는데 달랑 두 사람이  작은 밥상에 마주 앉아 음식을 먹자고 하니 무엇을 하나 잊은 것처럼 허전해 나며 밥맛이 제대로 나지 않았다. 더구나 어머니는 음식을 좀  슴슴하게 만들었는데 안해는 좀 짜게 만들어 음식맛이 제대로 나지 않아 얼굴을 찌푸릴때가 있었다.    내가 어머니가 만든 장국을 즐겨 먹었는데 안해가 만든 장국은 어머니가 만든 장국보다 맛이 달라 잘 먹지 않았다. 내가 안해가 만든 장국을 즐겨 먹지 않자 안해는 시어머니를 찾아가 맞있게 장국을 만드는 비결을 배워 왔다. 어머니는 장국을 만들때 먼저 장과 시래기를 기름에 튀운다음 물을 부었다.    수 십년간 안해가 차려준 밥을 먹고나니 이제는 안해의 음식맛에 길들어져 군소리가 없이 달게 먹는다.    개혁 개방후 우리 가족의 주거생활은 큰 변화를 가져 왔다. 초가집에서 벽돌집으로 이사를 했고  벽돌집에서 아빠트단지로 이사를 했다. 아빠트단지로 이사 온 후 우리집 밥상도 변하기 시작하였다. 작은 밥상으로 부터 여러 사람이 앉을수 있는 큰 상으로 되였다. 채식의 위주던 밥상이 고기와 해산물이 많이 밥상에 올랐다.  안해는 로년기에 들어서자 로년에는 손바닥 1/4 만큼한 고기를 매일 자세야 건강에 리롭다는 의사들이 말을 듣고 때마다 고기 반찬을 올리였다.     한가지 고기도 많이 먹으면 고기 맛을 잃게 된다. 안해는 며칠에 한번씩 돼지고기, 소고기, 양고기,  닭고기, 해어를 번갈아 가며 밥상에 올렸다. 나는 매일 이다싶이 변하는 밥상을 보면서 우리집 밥상이 부자집 밥상이나 다름 없다고 하면서 안해의 음식 솜씨가 일품이라고 칭찬 하였다.  내가 안해 음식 솜씨가 일품이라고 창찬하자 이튼날 새로운 음식이 상에 올랐다.    아빠트 단지로 이사 오고 보니 새로운 페단이 생기 였다. 단층집에 있을 때에는 터밭에서 남새를 가꾸거나 겨울에 먹을것을 저장하느라 바삐 돌아 쳤다. 아빠트 단지로 이사를 오고 보니 그런 번거름이 없어서 좋기는 한데 몸이 불편한 안해가 매일 힘들게 계단을 오르 내리며 시장에 가 물건을 사야 했으니 부담이 되였다. 힘들어 하는 안해를 보면서 내가 당신이 시키는 대로 물건을 사 오겠으니 당신은 시키기만 하라고 했다. 안해는 내가 사온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다며 기어이 자신이 사는 것이 였다. 나는 할수 없이 안해의 충실한 짐군으로 되였다.    요즘은 근심걱정없이 보내면서 매일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어서 행복하지만 옛날에 먹던 움김치가 문득문득 생각났다. 아빠트 단지로 이사 온 후 김치가 옛날 김치처럼 맛이 나지 않았다. 안해는  집적 김치를 담그지 않고 명성이 높은 “금강산”김치를 사왔다.  “금강산”김치도 첫 맛은 좋았는데 몇 때 먹고나니 그 김치도 그 김치라며 젓 가락이 김치쪽으로 가지 않았다. 왜서 같은 배추로 같은 조미료를 가지고 같은 방식으로 김치를 담그었는데도 옛날이 김치 맛이 나지 않을가? 분석하여 보니 집에서 담근 김치나 시장에서 산 김치는 움 김치처럼 제대로 발효되고 숙성되지 못한데 있다고 생각 되였다.      흥안촌에서 살때 우리집 김치는 움 김치여서 유별나게 맛이 있었다. 습도와 온도가 알마춤한 움에 저장된 김치는 초저름 김치 맛이 따로 있고 움에서 일정한 정도로 숙성된 묵은 김치 맛이 따로 있었다. 잘 숙성된 움김치는 새큼하면서도 싸한 맛이 돌아 밥 도둑이란 말을 들을 만큼 맛이 있었다. 시내에 살고 있는 사돈이 우리집에 왔다가 김치를 먹어 보고는 세상 별미라고 칭찬 하였다. 후에 사돈은 고기를 사가지고 와서 우리집 김치를 바꾸어 가기도 했다.    며칠전에 연길 교외에서 사는 처제가 내 마음을 알기라도 한것 처럼 움 김치를 한 박스 가지고 왔다. 안해가 처제가 가지고 온 박스를 헤치자 특유의 싱그러운 김치냄새가 물씬 풍기였다.  군침을 삼키는 나를 보던 안내는 바로 배추김치 한잎을 찢어서  내 입에 넣어주었다. 배추김치는 칼로 썰어서 먹기보다 쭉쭉 찢어서 먹는게 더 일품이였다. 씹을수록 새큼하고 싸  한것이  옛날 그 맛이였다. 그 날 저녁에는  움 김치에 수육을 싸서 안주를 하니 술이 술술 잘도 넘어갔다.    처제가 가지고 온 김치를 다 먹자 나는 고기를 사들고 체제네 집으로 가서 주기적으로 고기와 김치를 바꾸어 먹자고 약속 했다.    작은 물방울이 태양빛을 반사할 수 있듯 한낱 우리 집 밥상 변천사에서 사람들의 생활수준이 나날이 향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생활이 더없이 풍요로워진 오늘날 밥상의 변천은 인민들의 생활이 갈수록 아름다운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가 싶다.    부부가 오래 살려면 서로가 존중하며, 칭찬해 주며, 보듬어 주며 알콩달콩 맛나는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도 장수 비결이 아닐가 …      
174    합심하여 가교적 역활을 하자 댓글:  조회:3343  추천:0  2022-10-01
                                         합심하여 가교적 역활을 하자        드라마를 보면 가끔 가교(架橋)란 말을 듣게 된다. 가교란 무슨 뜻을 내포하고 있을가? 인간 사회에서 이웃과 이웃사이, 나라와 나라 사이를 련결하여 주어 소통하게 하는, 오작교와 같은 역활을 하는 것을 가교라고 말하리라.    세상 사람 모두다 각자의 선택지에 의하여 독자적인 생활 방식을 추구 하면서 상호간 어울렸다가도 배척하며 배척하였다가도 다시 상부상존하면서 살아가는 과정에 누군가 가교역활을 하여 돈독한 사회를 이룩해 가고 있다.    글로벌 시대에 들어선 오늘 날 산업화 시대로부터 과학기술 시대로 발전 되면서 인터넷이 광범위하게 보급되고 있다. 인테넷을 통하여 전세계 어디에서나 통화를 할수 있으며 영상을 볼수 있고 송금하거나 금융결제를 할수 있게 되였다.  몇년간 지속된 코로나 때문에 학교에서도 인테넷 수업을 하고 있다. 신형이 로버트가 등장하여 사람들이 하기 힘들어 하는 작업을 대체하고 있다. 자칫 잘못하다간 사람이 자기가 만든 로버트한테 일자리를 빼앗기지 않을가? 우려가 된다.    유선전화로만 소통하던 시기로 부터 지금은 무선전화 즉 인테넷을 통하여 활발하게 소통하게 되였다.    우리 민족의 넋이 담긴 조선글은 과거 말과 책으로만 소통 되였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말과 책으로만 소통되던 시대를 벗어나 인터넷이 가교적 역활을 하면서 세계 각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백의민족 동포들에게  우의를 증강해 주고 단합 되게 하고 있다.    내가 알건대 전세계에 대략 8천만명이 넘는 조선인이 살고 있다고 한다. 조선 반도에 7.500만명이 거주하고 있고 해외에 700만명이 살고 있다고 한다. 세계적 범위에서 한 민족 인구가 8천만명이라면 작은 민족이 아니라고 한다. 어느 나라던  8천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으면 강대국으로 되기를 바라고 있다. 강대국으로 되려고 하는 것은 모든 나라와 민족들의 념원이라고 할수는 있다. 현실적으로 조선민족 인구가 8천만명이 넘는 다고는 하지만 아직은 강대국이라거나 강대한 민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강대국이란 이름을 가지려면 네가지 조건이 구비돼야 한다고 한다. 첫째: 나라 인구가 8천만명 이상의 되여야 하고 둘째; 경제 실력은 세계에서 10위 권 안에 들어야 하며 세째: 자주적인 강대한 국방력을 가지고 있어야 하고. 넷째: 자국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가지고 있는 독립된 나라여야 한다. 인구 숫자로 보아 조선민족은 8천만명이 넘어 강대국 표준에 어느 정도 따라 가지만 우리 민족의 본거지인 조선반도는 국토가 분렬되여 있는 상태이고 해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주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강대국이란 칭호를 받을수 없다. 만약에 조선반도가 통일되고 자주적인 국방력을 가지고 있으면 강대국으로 될수 있다.    비록 우리 조선민족은 강대국의 대렬에 서지 못하였지만 우리의 언어와 글은 파급력있게 세계의 곳곳에서  활발하게 전파되고 있다.    2004년에 나는 한국으로 갔다가 서울의 모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하영보 교수님을 알게 되였다. 하교수님을 사귀면서 하교수님과 남북통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님이 보시건대 조선반도는 어느때 통일 될것 같습니까?”    “내가 보건대 한반도는 2016년이거나 2026년, 늦으면 2036년 에 통일 될 전망이 보입니다. 그 근거는 한반도 력사를 훝어 보면 세번 통일과 분단이 있었는데 마지막 년도의 수자는 6자 였습니다. 현실의 실제 정황과 력사적 규률을 보아 늦으면 2036년에 통일 될 가능성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반도가 분단 된 상태인데 어떻게 하면 2036년에 통일 될수 있다고 생각 하십니까?”    “남북의 지도자들 중에서 통일 대업을 이룩하기 위한 큰 포부를 가진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야 하지오. 위대한 지도자가 결심을 내리고 국민을 설득시키고 이끌어 나가야 하지요. 위대한 지도자가 있어야 할 뿐만 아니라 남북을 오갈수 있는 조건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들의 가교적 역활도 주요하다고 봅니다.”     “조선족인 저도 힘껏 가교적 노력을 해 보겠습니다.”     귀국하면서 하선생님의 예견대로 조선반도가 2036년에 통일 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생각해 보았다. 늘 가슴속에 남북조선의 통일을  바라고 있었다.     금년 년초에 인터넷 사이트인 조글로를 통하여 좋은 소식이 전하여 졌다. 일본에 거주하신 조선족 련합회에서 주최한 “2022년 칼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전하였다. 세계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많은 조선족들이 글짓기 대회에 호응하여 많은 글들을 올리였다. 계획 대로 8월에 글 짓기가 마무리가 되였다 9월에 접어들자 작품 평심에 들어 서게되였다. 저명한 조선족 평론가 다섯분이 평심위원으로 선정 되였다. 평심위원님들은 알심들여 매 작품들을 평심하고 있었다.     나는 조글로에 등장한  “2022년 칼라즈컵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에 발표된 문장들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번에 진행된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는 세계적 범위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글 짓기 대회이므로 의의와 의미가 깊다고 생각 한다. 단순한 글짓기 대회가 아닌,   우리민족의 대통합과 민족의 언어와 문화를 발전시키며 추진시키는데 기여 한다고 심심히 느끼였다.     세계조선족 글짖기 대회를 조직하여준 일본에 거주한 조선족 련합회와 후원을 하여주신 재일본 기업가들과 조글로 , 쉼터, 동북아신문사 선생님들께 축하의 인사를 드린다.    희망컨대 세계조선족 글짓기 대회의 원만한 성공을 바라며 앞으로 대회의 승기를 타고 일본에 계신 조선족련합회와 세계각국에 계시는 조선인들이 합심하여 이번이 대회보다 한층 범위를 넓혀 를 조직하여 주면 어떨가 하는 요구를 제기 한다. 다함께 앞으로도 우리의 글과 언어의 발전을 위하여 서로간의 가교적 역활을 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173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댓글:  조회:2433  추천:0  2022-08-27
                                            오직 앞만 보고 달려온 인생        “짐승이 여위면 산으로 가고 사람의 궁하면 벌방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어쩌면 내 인생경력에 딱 들어맞는 말인 것 같다.    1980년, 나는 정든 고향 룡정시 로두구진 렴명촌을 떠나 저수지를 끼고 있는 룡정시 용신향 대신툰으로 이사를 갔다. 당시만 해도  개혁개방초기라 성향간의 차별이 컸기에 농촌 호구를 도시 호구로 이전하기 위해서였다. 운 좋게도  대신저수지로 이사한 4년만에 도시 호구를 올리고 달마다 로임을 탈 수 있는 정식 로동자로 되였다.     나는 달마다 로임을 꼬박고박 탈 수 있는 외에도 천연적으로 산과 물을 끼고 있어서 장작불로 뜨끈뜨끈하게 덮힌 구들에 앉아 때마다 이밥에 물고기국을 먹을 수 있는 대신저수지에서의 생활이야말로 무릉도원에서 누리는 복된 생활이 아닐가 싶어 매우 흡족했다.    그러던 나의 마음속에 현실에 안주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파문을 일게 한 일이 일어났다. 다름 아닌 룡정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아들애의 학부모 회의였다. 그때 대신저수지 관리소에 출근하는 종업원들의 자녀는 대신저수지에서 꾸린 소학교에 다니였지만 중학생이되면 룡정중학교를 다니게 되였다. 룡정중학을 다니는 학생들은 모두 대신 저수지에서 꾸린 기숙사 생활을 하였다.    그 날 담임선생님이 학부모들에게 학생 성적표를 나누어 준 다음 매 학생들의 상황을 일이리 소개했다. 선생님은 먼저 학습성적이 우수한 학생에 대하여 언급하다가 마지막켠에 와서 우리집 아들 애에 대하여 언급하는것이였다.    “최모학생은 착하고 머리도 총명한데 학습에 그닥 열중하지 않습니다. 부모님께서 잘 이끌어주셔야겠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얼떠름해서 성적표를 들여다보니 아들애의 성적은 50명중에서 겨우30번째였다. 나는 성적표를 보는 순간 믿던 나무가 쓰러진다는 허무한 생각이  들었다. 이날 이때까지 아들애는  어릴때부터 총명하고 공부를 잘 하던 애니깐 중학교에 가서도 여전히 공부를 잘 하리라 믿었는데 이게 웬 날벼락이란 말인가? 나는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그날 기분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애를 혼뜨검을 내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수 없었다. 집에 돌아와 랭정하게 생각해 보니 아이의 학습성적이 부진하게 된 책임은 아버지인 나한테 있다고 생각되였다. 철이 들지못한 애를 일찍 부모곁을 떠나 기숙사 생활을 하게 하였으니 말이다. 그대로 시골에 머무르다가는 아이들의 앞길을 그르칠 것 같아 대신 대신저수지를 떠나기로 용단을 내렸다.     여러모로 수소문한 끝에 룡정과수농장에서 관활하는  룡정철합금공장에서 공장장으로 있는 친구 동봉률씨와 연줄을 닿았다. 렴치를 불구하고 찾아가 딱한 사정을 털어 놓고 룡정과수농장으로 전근할수 있게 도와달라고 청들었다. 친구는 한번 힘써보겠노라고 시원하게 대답했다. 한달후 그쪽으로 부터 희소식이 날아왔다. 룡정과수농장 인사처로 부터 나의 전근 동의서를 받아 놓았으니 한번 찾아가 보라는 것이였다. 나는 전근동의서를 가지고 시 로동국으로 찾아가 전근수속을 마무리 지었다. 나는 룡정과수농장으로 전근 되여 얼마 안되여 룡정철합금공장으로 출근하게 되였다.    내가 그 공장으로 간 후 공장이 경기는 좋았다. 기업가 다운 재질을 가진 동봉률공장장은 경영관리를 잘 하여 룡정철합금공장이 창설되여 5년만에 일약 룡정시에서 직공 일 인당 리윤창조률과 세금납부가 제일 높은 공장으로 되였으며 3년간 련속 룡정시 우수기업소란 칭호를 수여 받었다. 동시에 동봉률씨도 룡정시우수기업가란 칭호를 수여 받았다.    그사이 나는 공장에서 총무직을 맡아 하였고 안해도 공장에서 림시공으로 일하게 되였다. 부부가 한 공장에서 일하고 월급을 받게되자 가정 살림은 나날이 좋아졌다. 나는 날로 좋아지는 우리집과 나날이 발전하는 공장의 모습을 보면서 마음이 뿌듯해서 대신저수지를 떠나 이곳으로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앞날을 예측할수 있으나 한치의 앞날을 내다 볼줄 모르며 산다.    어느 인생 선배는 이런 말을 했다. “인생에서 제일 넘기 어려운 고개가 아홉 고개다.” 어떻게 보면 그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내 나이 마흔아홉이 되던 해 였다. 누가 생각이나 했을가 그렇게 잘 나가던 우리 공장이 시장경제의 충격하에 시장판로가 막히면서 공장설립10년만에 부득불 파산 선고를 하게 되였다. 공장이 파산선고를 하던 날, 동봉률 공장장은  애써 일떠세운 공장을 내손으로 문을 닫게 되였다면서 소리없이 눈물을 흘리였다. 그날 이후로 나는 실 끊어진 연 신세가 되였다.    파산의 아품을 겪게된 직공들은 몇달간 월급이 70프로를 받으며 새로운 일터를 찾아야 했다. 다달이 월급에 매워살던 나는 돈줄이 끊기게 되자 살기위해 배광주리도 틀고 돼지치기도 했으며 삸일을 하면서 닥치는 대로 돈이 된다는 일은 가리지 않고 다 했다. 그런데 룡정은 원체 지역범위가 작은데다 파산된 공장이 많아 일자리를 얻기도 힘들었고 돈 벌기도 힘들었다. 막벌이로는 도저히 두 자식들의 학비를 대기도 어려웠다. 어떻게 하면 이 고비를 넘길가? 고민하던 중 그해 가을 언배장사를 하면 돈을 벌것 같아 남의 돈을 꿔 가지고 통크게 언배 장사를 하였다. 안될놈은 뒤로 번저져도 코가 깨진다고 그해 따라 언배가 어찌도 많았는지 팔려고 하는 사람은 많고 사가는 사람이 적어 팔로가 막히였다. 나는 그만 엎친데 덮친격으로 언배 장사에서 쫄딱 망하고 빚낟가리에 올라 않고 말았다. 꾼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되였다. 개도 안가진다는 돈이라 하지만 사람에게는 돈이 필수품이며 힘이였다. 아무리 힘쎈 장사도 돈없으면 머슴으로 살아야 하며 돈없는 자는 돈 있는 사람을 상전으로 모셔야 하고 허리를 급히며 살아야 하는 것이 인지상전인것 같다.     “지갑이 가벼우면 마음이 무겁다.”고  생계가 어려운데 빚까지 걸머지고 나니 한때는 잘 나간다는 소리를 듣던 내가 저절로 풀이 죽어 죄를 지은 사람처럼 머리를 숙이고 다니였다. 어딘가에서 빚군이 불쑥 나타나 빚 재촉을 할 것 같아 속이 한줌이 되여 조마조마하며 살았다. 사람이 빚을 지고 살면 빨리 늙는 것 같았다. 마음속의 고충을 털어 놓지 못하고 혼자 끙끙거리는 사이 검던 머리 가락이 어느새 희슥희슥해졌다.    그때 내 맘을 알아주는 이가 있었다. 다름아닌 안해였다. 안해는 종일 구들이 꺼질도록 긴 한숨만 내쉬는 나를 따뜻하게 위로 했다.     “돈은 있다가도 없고 없다가도 있을 수 있어요. 사람이 무탈한데 무서울 게 뭐가 있어요. 우리 합심하면 꼭 살길이 트일거예요.”    그 말이 내 마음속  상처를 보듬어주어 치유하여 짙은 고민의 안개속을 혜여 나올 수 있었다. 룡정에서 더 이상 버틸 힘이없다는 판단이 서자 눈물을 머금고 정들었던 집을 팔아 빚을 물고 무작정 연길로 이주하기로 결심하였다.     빈주먹으로 연길로 이사오다보니 세집 살이를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제집에서 살 때에는 몰랐는데 정작 세집 살이를 해보니 만만치 않았다. 집주인한테는 어떨지 몰라도 세를 맡은 우리에게는 집세는 큰돈이였다. 고정된 직업이 없어 막벌이로 근근득식하면서 한푼두푼 모아놓으면 어느새 집세를 내는 날자가 돌아왔다.    옛 말에 이르기를 “사람이 궁할 때는 대끝에서도 삼년을 산다”고 했다.  3년간 세집살이를 하면서 마른일 궂은일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더니 끝내 밝은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동안 나는 참외 장사를 해보고 목수일도 해보았으며 학교의 경비원 일도 해보았다. 안해도 호텔의 청소부로 일하면서 작은 장사를 하였다. 그사이 자식들은 모두 학업을 마치고 사회로 진출하였다. 온 가족이 합심하여 애쓴 보람으로 빚을 다 물고도 흥안에다 단층집 두채를 장만했다. 다시 제집에서 발편잠을 잘수 있게 되니 그때 공장이 파산된 후 인차 연길로 들어 오지 않는 것이 후회되였다.     사람은 정으로 살고 정을 위해 죽는다고 한다. 정에대한 견해는 저마끔이겠지만 나는 나대로 정이란 서로간에 오고가는 미더운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어느곳이나 오래 정착해 살고 보면 그곳에 정이들게 된다. 연길에서 27년을 살고 보니 정이 푹 들었다. 이제는 세상 어디를 다녀봐도 연길 만큼 살기 좋은 곳이 없는 것 같다.    때때로 연길로 이사 온 이후의 날들을 회고해 본다. 연길에 와서 첫 10년은 어엽사리 자리를 잡고 생계를 위한 길을 열었다면 그 후 17년은 행복한 삶을 누렸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집살이로 시작해서 이제는 아빠트 3채를 소유하고 부부가 퇴직금을 받으며 여유롭게 지내니 고진감래라는 말이 가슴에 와닿는다.    연길에 이사 와서 중국민족예술가협회 연변분회를 알게 되고 훌륭한 분들을 만나 그분들의 도움으로 가사창작에 뛰여들었다. 작곡가 리종선선생과 합작하여 라는 가곡을 창작하여 중국민족예술가협회의 기관지인 “예술관찰”에 발표했고 이를 계기로 나는 중국민족예술가협회의  회원으로 되였다. 또 여러 작가들을 알게되고 그들의 도움으로 인생황혼기에 문학창작에 뛰여들었으며 연변작가협회를 알게 되였으며  67세에 연변작가협회 회원으로 되였다. 그뿐만 아니라  연변단풍수필회에서 여러 작가들과 평론가들을 알게 되였고 그들과 어울려 문학창작과 각종 문화활동을 활발히 전개 하면서 로후를 보람차게 보내고 있다.    여기에 특기하고 싶은 것은 연길에 와서 민간 자선단체인 “연변아리랑서로돕기창업협회를 알게 되고 여러 지성인들과 함께 지난10여년간 자선사업을 해오면서 사랑과 나눔의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물은 아래로 흐르고 사람은 우로 달린다.”고 했다. 내 인생을 도리켜보면 오직 앞만 바라보고 달려오며 소 갈 데 말 갈 데가리지 않고 별이별 고생을 다했지만 후회는 없는 것 같다. 다만 쉽게 차레지지 않은 이 아름다운 삶의 터전에서 가족과 친척친우들과 더불어 오래오래 행복을 영위하고 싶다.      
172    하유례가 본 대륙 댓글:  조회:609  추천:0  2022-08-03
                                        하유례가 본 대륙       개혁개방 후 나는 20여개 나라와 국내의 이름난 명승지들을 유람하였다. 유람을 하고 나니 머리가 명석해지며 시야가 넓어지였다.     유람후의 소감을 말하라고 한다면 철학자 아우구스타가 말한 “세계는 한권의 책이며 려행자들은 그 책의 한폐지를 읽었을 뿐이다.”라고 한 말과 같이 나는 세계라는 책속의 한페지만 읽었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려행을 떠나기전에 한 선배님이 나한테 이런말을 했다.  “세상은 넓고 크고 인생은 짧다. 다가오는 기회를 놓치지말고 빨리 려행을 떠나라” 나는 그말에 힘을 얻어 륙십넘어 려행길에 올랐다.      친구들은 나한테 세계유람을 하였으니 세상에서 제일 살기좋은 나라가 어느나라인가 물었다. 나먼저 세계 려행을 다녀온 사람들은 오스트랄리아와 카나다가 살기 좋은 나라라고 말하였다. 하지만 나는 세상에서 백성이 제일 살기좋은 나라는 중국이라고 말할것이다. 그리고 중국에서 제일 살기좋은 고장이 어딘가고 묻는다면 두말없이 연길이라 말할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제일 살기 좋은 나라가 중국이고 중국내에서 제일 살기좋은 곳이 연길이라고 말할수 있는 리유는 세계관광을 하면서 내가 접촉한 많은 외국인들과 화인들이 중국에 대하여 우호적이면서도 실제적으로 중국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사람은 다름아닌 대만 사람 하유례何維禮라는 젊은이였다. 나는 하유례가 대륙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는 것을 보면서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으로서의 자호감을 쁘듯이 느끼였다.     2014년 7월8일 우리 길림성대만유람팀 팀원들은 제시간에 장춘룡가공항을 떠나 광주에서 하루밤을 자고 이튼날에 대북으로 향하는 전용기를 타고 대북송산국제공항에 안전하게 착륙하였다.     공항출구에서 이마가 벗겨지고 뚱뚱한 40대의 사나이가 우리려행단을 반겨 맞어주었다. 그 사람은 다름아닌 대만국제 려행사에서 파견한 가이드 하유례였다.     하씨는 우리려행단 성원들과 반갑게 인사를 하였다. 하씨는 나를 보고 대륙 어디에서 왔는가고 물었다. 내가 길림성연길시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하씨는 잠간 머리를 굴리더니 이런말을 했다. 자신은 몇년전에 연길시로 갔다온적이 있다고 하면서 연길시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도시라고 말하였다. 그러면서 연길로 갔을때 인상깊었던 것들을 이야기했다. 자기가 연길로 갔을때는 눈내리는 겨울철이라 했다. 연길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사이 차창밖으로 보이는 것은   은세계로 변한 연길이 아름다운 모습이였다고 했다. 사시장철 나무잎이 푸르고 꽃이피는 대만의 경치도 좋지만 사계절의 분명한 연길의 가을의 단풍도 보기좋지만, 눈내리는 겨울철의 연길 모습이 더 보기좋았다고 했다. 밖은 눈보라라 휘몰아치는데 집안에 들어서니 훗근훗근하여 전혀 겨울철이라고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여름철이 라는 감을 느꼈다고 했다.     그리고 조선족의 전통음식인 랭면, 비빕밥, 김치, 찰떡이 맛이 있더라고 했다. 나는 그말을 들으면서 저도 몰래 어깨가 으쓱해났다.      어느날 하씨는 이런말을 했다. 자기는 대만에서 태여 났지만 아버지의 고향은 복건성 하문시의 어느 농촌이라고 하였다. 하씨의 아버지는 국민당 장교였는데 대륙에서 쫓기여 대만으로 갈때 가족을 데리고 가지 못한 채 홀로 대만으로  갔다고 했다. 대만에서 당지의 녀인을 만나 결혼하였는데 그 녀인한테서 낳은 자식이 자기라고 했다. 그러면서 자기의 피속에는 대륙과 대만이 동족의 피가 흐른다고 하였다.     해협량안에서 서로 래왕이 시작되던 해 하씨의 아버지는 수십년만에 고향을 찾았다고 했다. 고향에 있는 친척들에게 선물을 주려고 금가락지를 여러개 사가지고 갔다고 했다. 친척들에게 금가락지를 선물로 드리자 받는 사람들은 모두 감동해 하였다고 했다.     그당시 대륙의 농민 가정의 일년 분배액이 많아야 몇 천원이였는데 대만에서 온 친인한테서 천원짜리 금가락지를 선물로 받고 보니 감동을 받지 않을수 없었을 것이다.     하씨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여러차례 아버지의 고향과 대륙의 곳곳을 방문하게 되였다고 했다. 그가 처음 대륙을 방문할때 대륙에서 개혁개방을 시작한지 20년이 되는 때라고 하였다. 연해지구를 포함한 많은 곳에서 개방이 봄 물결이 일고 있었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향마을에서도 새집 짓는 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후20년이 지나 다시 대륙을 방문하였을때 급속도로 발전한 대륙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버지의 고향마을을 찾아가니 가가호호마다 3-4층짜리 단독 주택을 가지고 있었다고 했다. 그가 처음 대륙을 방문하였을 때만하여도 금 가락지를 끼고 다니는 사람을 부유한 사람으로 보였지만 20년후에 갔을 때에는 금가락지와 보석반지를 끼고 다니는 것은 아주 보편화였다고 했다. 한시기 대륙에서는 젊은이들이 오토바이를 타고 다니는 것이 류행이였다면 지금은 오토바이를 대신하여 자가용차를 갖고 있는것이 류행이라고 말하였다.      하씨는 또 이런 말을 했다. 지금 대만관광을 오는 유람객 대닷수는 대륙에서 온 유람객이라 했다. 대만을 찾는 유람객이 많아 지자 대만의 경제는 활기를 띠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대륙에서 오는 유람객이 너무 많아 대만에서는 유람객을 접대할 서비스 설비가 부족하여 하루 유람객을 5000명으로 제한 한다고 했다.      나는 세계의 여러나라를 돌아보니 어느곳이나 중국유람객이 많이 보였다. 중국관광객이 많다는 것은 중국의 경제가 높은 수준으로 부상하고 있으며 사람들의 문화소질이 제고 되였음을 의미하며, 또한  여유로운 생활을 누릴수 있는 중산계층이 많아졌음을 설명하고 있었다.     나는 대만 유람을 통하여 하유례를 비롯한 많은 대만 사람들이 대륙을 방문  한후 객관적 시각으로 공정하고 현실적으로 대륙에 대한 평가를 하는 것을 보면서 마음의 쁘듯하였다.     그러나 지금의 대만의 집권자들은 무엇때문에 대만독립을 주장하는지 리해가 안간다. 하나의 중국이라고 승인해놓고 괴변을 부리는  미국에 빌붙지 말고 국부 손중산 선생의 유지를 받들기  바란다.  
171    안타가웠던 생각 댓글:  조회:2152  추천:0  2022-07-27
                                            안타가웠던 생각         요즘 조글로에 “엉뚱한 생각”이란 짧은 글을 올리였다. 뜻밖에 많은 독자들이 내 작품을 구독하고 좋은 평가를 하시여 마음이 둥둥 뜬다.    오늘 길을 걷다가 “안타가웠던 생각”이란 글감이 떠 올라 필을 들었다.    “안타가웠던 생각”이라는 글을 쓰려고 보니 어떤 내용을 쓸가 사색하게 되였다. 반복적으로 사색하다가 결국은 우리 조선족에 관한 내 견해를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우리 조선족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민족이라 보아왔다. 그리고 “소를팔아 자식공부 시킨다.”는 정신으로 교육을 중시한 민족이라고 자부해 왔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어쩌면 우리 조선족이 너무나 내부 갈등이 심하지 않았냐 하는 생각을 했다.    중국에는 56개 민족이 살고 있다. 한족을 제외한 55개 민족은 소수민족이라 한다. 력사적 원인으로 인하여 한족은 연해지구와 장강류역과 황하류역에 많이 분포되여 있고 소수민족들은 장성이북의 변방지대에 많이 살고 있다.     중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은 196만명이 된다고 한다. 사람들은 조선족을 “도강민족” 혹은 “이주민족”이라고 한다. 내 생각에도 조선족을 도강민족이나 이주민족이라하는 것이 틀린 말이 아니라 생각한다.     조선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력사는 근200년이 된다고 하지만 집단적으로 많이 이주한 시기는 일본이 조선을 강점한 이후라 한다.    1905년 11월17일, 일본은 강제로 대한제국과 을사조약을 맺었다. 을사조약이란 “대한제국은 일본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국제적 조약이나 약속을 할 수 없다. 대한제국의 궁궐에 일본인 통감을 두어 외교 활동을 전담한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을 보호한다.”등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내용이 담긴 조약이였다.     을사조약 이 후 많은 반일투사들과 난민들이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 중국으로 들어오게 되였다.  조선이주민이  가장많이 집결하여 있는 곳은 연변이였다. 일제는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미명으로 위만주국을 회유하여  연변지구를 땅이라 하였고 룡정에다 령사관을 설치 하였다. 조선 이민이 많이 사는 곳에 경찰서를 설치하였다. 일제는 조선이민을 보호한다고 하였지만 기실은 조선이민을 통제하고 간도땅을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혹한 통치는 반항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 이민들은 일본침략자와 위만주국의 가혹한 이중 통치를 받아야 했다.  가혹한 통치를 받게된 조선이민은 항일 투쟁에 나서게 되였다. 조선 이민은 중국인과 련합하여 일본 침략자와 싸워 중국땅에서 일본침략자를 몰아냈다. 항일 투쟁에서 수많은 희생자를 낸 조선이민은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과 함께 중화인민공화국 국민으로 인정받었다.    중국 조선족들은 항일 투쟁에서 앞장을 섰으며 중국해방전쟁에서 위훈을 떨치였고 조선전쟁에서 많은 피와 목숨을 바치였다. 그리고 토지개혁, 반우파 투쟁. 대약진, 문화대혁명시기에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런 높은 정치열정이 때로는 엄중한 실책을 빛어 내기도 하였다. 특히 “반우파 투쟁”시 우리 조선족들은 함께 적들과 싸웠던 동지들을 정치판에 몰아넣어 “우파” “민족주의 분자” "반혁명분자"로 분리해 놓아 그들에게 치명적이 타격을 가해 왔다. 대약진 시기에는 과장된 허위보고를 하는데 열을 올리여 연변에서 경제난과 식량난을 초래하게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문화대혁명시기에 두개파로 갈라져 싸워야 하는 비극을 연출하기도 하였다.     나는 우리 민족의 겪었던 력사 사실을 보면서 무엇때문에 우리 조선족이 이런 과오들을 빛어 냈을가? 생각할수록 안타갑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곰히 심사숙고해 보니 그 안타갑다고 생각했던 문제에 대한 답이 나왔다. 중국에 사는 우리조선족은 이주민족으로서 민족의 생존을 위하여 정착하고 있는 곳에서 필연적으로 헌신하게 되였던 것이다. 그런 헌신정신이 있었기에 우리 조선족은 당당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으로 되였다고 생각 했다.      이렇게 생각해 보니 내가 안타갑다고 생각 했던 것들이 스스로 해소되였다.  
170    엉뚱한 생각 댓글:  조회:2347  추천:0  2022-07-19
                                                                      엉뚱한 생각        요즘 나는 엉뚱한 생각을 했다. 80고개를 마주하고 있으니 구십까지 살아야지, 아니, 하늘이 나를 부르지 않는다면 100세까지는 살아야지, 어떻게 보면 100살까지 살것 같기도 하다. 지금의 신체조건과 사회환경조건을 보아 그런 욕심을 부릴만 하기도 하다.     범이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날린다고 하는데 나는 크게 이름을 날리지못하였다. 작가라는 이름을 가진 내 자신이 고작 내세워야 할것은 기행문집 “최상운 세계를 돌아보다”와 소설집 1권과 수필집과 산문집을 5섯권을 출간하였을 뿐이다.     나 자신은 늙었다고 생각하지 않으나 손군을 셋이나 둔 할아버지다. 할아버지로 되였으니 할아버지로서 뭔가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하겠다는 의무감이든다. 후손들에게 무엇을 물려주어야 할가, 고심하게 되였다.    손가는 대로 옥편을 뒤져 보았다. 옥편에서 유遺자를 골라 보니 유遺자에 대한 해석문은 이러하였다. 유遺자는 끼칠유, 줄유라고 되여 있었다.    유遺자에는 여러가지 함의를 가지고 있었다. 유산遺産, 유언遺言, 유서遺書, 유업遺業, 유실遺失, 유적遺蹟, 유족遺族, 유지遺志, 유훈遺訓, 유감遺憾, 유고遺稿, 유물遺物, 유복자遺腹子 등이 있었다.    줄유遺자의 뚯을 알았으니 이제는 누구한테, 무엇을 주어야 할가? 에 대한 답이 나와야 했다. 고심끝에 엉뚱한 고안을 생각해냈다.    에라 생을 마감하기 전에 단단하고 정교한 함 하나를 만들자, 그 함속에 내가 쓴 글들을 묶은 책을 넣고 수십년간 저금한 돈을 금으로 바꾸어 그 함속에 넣고 단단히 봉하자.    연후 함 우에 큼직하게 가보(家寶)라고 쓰고 가보란 글씨옆에 “이 함을 여는 자에게 행운이 찾아 올것이다.”라는 글을 쓰기로 했다.    허 허 허!  …  
169    천려일득 댓글:  조회:1199  추천:0  2022-06-21
                                      천려일득{千慮一得}        천려일득이란 우리말로 풀이하면 우둔한 사람의 궁리도 천에 한가지는 쓸모 있다.  우둔한 사람도 천에 한번은 좋은 수를 생각해낼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도 많이 생각하면 꾀가 나온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천려일득이란 흔히는 자기의 견해를 말할 때 겸손하게 하는 말인데 많이 생각하면 한번은 옳게 말할 때가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에는 천려일득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가 기록되여 있다.    한(漢)나라 초기에 한신이 조나라왕 헐과 그의 모사 광무군을 생포하였다. 한신은 광무군이 비록 포로이지만 조나라 왕의 모사로 있은 것만으로도 비범한 인재라고 생각하고 광무군에게 물었다.    “저는 북쪽으로 연나라를 치고 동쪽으로 제나라를 치려고 하는데 어찌하면 성공할수 있겠습니까?”    광무군은 주저하다가 솔직이 자기의 견해를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패한 군사의 장수는 용기에 대해 말할수 없고 망한 나라의 대부는 나라의 존망을 도모할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지금 저는 패망한 군사의 포로입니다. 제 어찌 나라의 대사를 의논할수 있겠습니까? ”    “아니오. 저는 진심으로 공의 계책을 따르려 합니다. 모쪼록 사양하지 말아주십시오.”    한신이 기어코 광무군의 가르침을 바라니 광무군이 말하였다.    “제가 듣건대 지혜로운 사람의 천번 생각에 한번의 실수가 있을수 있고, 미련한 사람의 천번 생각에 한번은 좋은 수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 하였습니다. 아마도 저의 계책이래야 쓰실만한것이 못될것이겠지만 미련한 계책이나마 충성을 다해 바칠가 합니다.    이제 장군을 위한 계책으로는 군사들을 갑옷을 벗고 휴식하게 하고 점령한 조나라의 백성들을 안정시키고 전패자들의 유고를 무휼해주는것입니다. 그러면 백리안에서 날마다 사람들이 소고기와 술을 가져다가 장수와 병졸들을 옹호하며 위로하는 연석을 베풀어 주게 될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북쪽 연나라로 가는것처럼 군사를 배치하고 구술이 좋은 사람들에게 짤막한 서신을 주어보내서 장군의 유리한 점을 연나라에 현시한다면 연나라는 기필코 복종하지 않을수 없을 것입니다. 연나라가 항복한 이후에 말을 잘하는 자들을 동쪽 제나라에 보내서 지금 조나라 백성들이 좋아하고 연나라가 평화적으로 항복하였다는 소식을 알린다면 제나라도 기필코 강대한 한나라와 맞서 싸우지 않고 바람앞의 풀마냥 숙어들 것이며 아무리 지혜로운 자라도 제나라를 위해 다른 계책을 대줄수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한나라가 천하를 도모할 대사는 모두 어렵지 않게 될것입니다.”    한신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그 계책에 따라 군사들의 갑옷을 벗고 휴식을 취하며 조나라 백성들을 위로하면서 한편으로 연나라에 사자를 보였다. 연나라는 조나라 백성들이 한나라 군사를 위로하는 것을 보면서 바람에 따라 풀이 쓰러지듯 곧 항복하였다. 연후 한신은 곧 사신을 띄워 한왕에게 알리여 조나라의 왕자 장이를 조나라왕으로 세워 나라를 안무하도록 청하였다. 한왕은 이를 허락하였다.    한왕 4년에 한신은 서두르지 않고 계속 광무군의 계책에 따라 제나라와 큰 싸움을 하지 않고서도 제나라의 성읍들을 모두 전복하고 제나라를 평정하였다. “    나는 천려일득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력사를 거울로 삼아 현실에 적용한다면 좋은일이 찾아올것이라  생각되였다.    인생을 살다보니 총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일지라도 천번에 한번쯤 실수를 할수있고, 미련하고 아둔한 사람일지라도 천번생각에 한번은 좋은 생각을 가질수 있다.는 도리를 터득하게 된다.    인생을 살아보니 각자가 생각하는 범위가 다르고 사물에 대하여 관찰하는 관점이 다르다. 그리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지위에 따라 하는말과 행동이 달라지게 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한나라의 대장군 한신도 그런 인생행로를 겪은 사람이였다. 한신은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태여나 하층인으로 살면서 어려운 생활고를 겪으며 지나왔다. 한번은 부자집 자식의 한신을 보고 자기 다리사이를 기여나가라고 강요했다. 한신은 체면을 차릴 처지가 안 되였으므로 할수 없이 그자의 다리 밑으로 기여나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후에 한신은 역경을 이겨내고 대장군으로 되였다.     한신은 어릴때 어려운 고초를 겪었기에 백성들의 고초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자아관리를 잘하여 “미친사람의 말도 가려서 들을수있는”성인 다운 사람으로 되였다. 벼슬이 올라 갈수록 겸손한 태도로 아래 사람들의 말을 경청하였다.     인간은 요망한 존재이기도 하다. 한 하늘 아래에서 살고 있지만 사람들의 의식 형태는 다르다. 누구나 세상에 태여나서부터 남보다 더 많은 재물을 소유하고 더 많은 권세를 누려보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누구나 잘살아보자는 욕망을 가지고 있으나 사람의 뜻대로 되지 않는것이 인생기기도 하다.    사업에 성공한 총명한 사람들은 타고난 총명한 자질을 가지고 있지만 그들은 남들의 말을 명심히 듣고 대방의 말중에서 자기에게 필요한 인소들을 골라 써 먹는데 있다고 본다. 반면에 모자란 사람은 총명한 사람에 비하여 객관 사물에 대한 판단력이 낮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사람마다 공정한 세상을 바라고 있다. 하지만 인류사회는 공정하지 않는 사회를 이루면서 불공정한 사회를 지탱해 나가고 있다. 말못하는 동물, 물고기도 군체 생활을 하면서도 무리속에 강한 우두머리가 있고 그 우두머리를 따르고 있다. 만물의 령장이라는 사람사는 사회에는 왕의 있고 대통령이 있으며 기업에는 기업통수가 있고 부족 마을에는 부족장이 있는것처럼 상층사회와 하층인간의 등급사회를 이루고 있다. 계급사회를 이르는 것은 매우 의례적인 것이라 보아진다。    천려일득에 대하여 말하였으니 소감을 말 해야 겠다.    어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개인으로서 천려일득과 같은 일들을 누구나 겪고 있지 않는가, 천려일득을 잘 풀이해 가면서 옳바르게 향하는 자가 영웅이 아닐가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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