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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적인 억압환경과 인물의 풍속화
2009년 05월 16일 15시 35분  조회:2954  추천:0  작성자: 방룡남

-󰡔삼대󰡕의 갈등구조를 중심으로



1. 문제의 제기


 염상섭의 문학세계에 대한 연구사의 정리는 그 자체만으로 하나의 방대한 작업이 된다. 이것은 염상섭 자신이 잘 읽히는 작가에 앞서 가치판단과 문제점을 시사하고 있는 연구대상적인 작가라는 것이 연구가들에게 기본 요청사항으로 제출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염상섭 연구는 실로 눈부신 정도로 발전하였다. 1920년 <창조> 6호에 실린 김동인의 <제월(霽月)>씨의 평자적 가치를 논함>에서 비롯된 염상섭 연구는 이후 발표된 비평과 연구 논문이 1997년 말 현재 무려 527편이고, 단행본이 8권이나 된다. 이 같은 연구 업적은 염상섭과 그 문학의 가치를 증명해 주는 한 예가 될 것이다”1).

 염상섭 연구가 1960년대 초부터 본격화되어 1974년에 김종균에 의해 570면에 달하는 󰡔염상섭 연구󰡕가 최초로 출간되어 그 문학의 총체적 실체를 역사적 실증적으로 기록하였고 1987년에 김윤식에 의해 945면에 달하는 제2의 󰡔염상섭 연구󰡕가 출간되어 염상섭 연구의 신기원을 이루었으며 1991년에 541면에 달하는 이보영의 역저 󰡔난세의 문학-염상섭󰡕이 출간됨으로써 염상섭 연구는 새 국면을 맞게 되어 염상섭의 문제적 장편소설을 정치 소설적 시각에서 비판적 리얼리즘의 형상화로 파악함으로써 염상섭에 대한 가치 중립적 판단과 함께 염상섭 연구가 변증법적 발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1997년 염상섭 탄생 100주년과 서거 35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된 염상섭 연구서 2권이 모두 염상섭 문학의 재조명, 재인식으로 되어 있다2).

 그만큼 오늘에 와서 문제를 제기하는 논문에서는 지난 연구성과를 일일이 재확인하기보다는 다만 지난날의 연구 중에서 반성할 만한 논법을 불러내어 재조명, 재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 논법 중에서도 개인적인 연구에 국한된 것은 1997년에 이르러 연구 논문이 이미 527편에 달하고 있다는 놀라운 성과에 질리어 그냥 최근의 문학사적인 정리에서 내놓은 논법을 두고 조심스럽게 이의를 제기해 보는 것으로 기성 연구에 대한 재조명, 재인식의 중심부에 감히 다가서 보려고 시도한다. 그러고 보니 그것이 오히려 이도 안 난 놈이 콩밥 먹으려는 망동일지는 모르겠지만 연구에 인생을 투자하려는 문학도라면 한번 가져볼 만한 바람직한 자세이기도 하다고 스스로 용기를 돋우어 본다.

 김용식, 김우종 외 34인의 공동 집필로 된 󰡔한국현대문학사󰡕(개정증보판 <현대문학> 2002, 이하 <문학사>라 함)의 1920년대 소설부분에 전문수는 <근대소설의 정착과 인식지평의 분화기>>라는 글에서 염상섭의 작품을 두고 “그는 자기 개성에 맞는 소설적 현상을 찾아 사진 찍듯 전달하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주제 빈곤이라는 지적은 안일한 소시민적 의식에서 온 것이라 본다.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한 것이다. 그의 소설 대부분은 세계 속에서 자기와 자기 가족만이 사는 개인주의적 삶에 사진기를 갖다댄 것이다.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다.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시대일보> 1924)이나 <삼대>(<조선일보> 1931)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 결국 김동인과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3)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이는 아무래도 작품의 시대적 배경이나 특정환경 내지 작가의 창작동기와 수법에 대한 문학 본체론적 진단보다는 사회 정치적인 시각에서 작가를 시대의 선구자 또는 세계관의 대변자쯤으로 추대하고 당시로서는 이상적일 수밖에 없는, 이를테면 당시 현 제도를 문제삼고 개조하고 뒤엎으려는 전형인물을 오늘의 현시점에서 강요하는 것 같다.

 전문수는 염상섭과 김동인을 “대척적인 자리에 있는 것 같으나 실은 사회적 삶을 외면한 객관인식의 결여라는 면에서 같은 계보가 되고 만다.”고 하였으나 사실 그의 상술한 관점은 <감자>를 비롯한 김동인의 창작세계를 진단하는데는 그리 무리가 되지 않는 비평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김동인의 많은 작품들을 보면 사실 어떤 시대적 배경에 대한 파악이 없이도 그냥 한 개인주의적 삶 그 자체로 읽혀진다. <감자>나 <배따라기>같은 작품은 자연주의나 탐미주의 창작기법의 성공사례로 표본이 될지라도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현실적인 신변체험으로 독자와 공감대를 형성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염상섭의 작품의 경우, 더도 말고 전문수가 언급한 <만세전>과 <삼대>는 오히려 작가의 역사적 인식 내지 시대의식이 소설의 담론구조를 손상 줄 정도로 전지적 화자의 월권행위가 범람하여 등장인물의 개성 있는 대화, 독백을 퇴색하게 하고 지어는 등장인물의 행위까지 인형처럼 줄다리기하여 문학성을 저하시키는 기법상의 약점을 드러내고 있다. 이는 작가가 관찰하고 포착한 시대인식 내지 의식을 확실하게 사람들한테 전달하려는 성급한 심리가 아니면 그가 말하려는 바를 독자들이 알아주지 못할 가봐 과잉해석을 하는 노파심일 것이고 그것도 아니라면 아무래도 작가의 기법상의 미달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과연 어떠한지는 이제 「삼대」의 갈등구조와 인물형상을 통하여 확인해 볼 것이다.


2. 갈등구조로 보여주는 시대의식


 제1장에서 작자는 중산층 출신의 부자집 손주인 덕기와, <맑스 보이>인 김병화를 보여줌으로써 30년대의 풍속도를 먼저 제시하고 있다4).

 김윤식이 판단한바와 같이 작품은 그 시작에서부터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겪고 있는 성장세대의 대표적인 두 인물인 덕기와 병화를 등장시키고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의 서로 다른 현실 대응자세를 신분, 성격적으로 충돌시키고 있다. 여기서 벌써 「삼대」가 다만 사회를 외면한 개인주의적 가족사적 소설이 아니라 변천하는 시대, 실지로는 식민지화가 고착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신변체험의 시점에서 전개될 것이라는 판단은 내려지는 것이다.

 이에 앞서 작품의 서두에서 “봉건잔재를 의식내용으로 갖추고 유교적 전통을 고집하려는 제1세대 조의관”5)을 등장시키고 그의 입을 통하여 손자 덕기와 그 친구 병화에 대한 인상착의가 내려지면서 세대적 윤리적 갈등과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좌표로 하는 이중구성의 플롯을 암시해주고 있다.

 즉 “「삼대」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축을 구성의 골격으로 하고 있다. 하나는 종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한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세대간의 대립과 연속문제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축이고, 다른 하나는 횡적인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으로서, 같은 세대에 속하는 여러 인물들간의 대립과 화해를 둘러싼 일련의 사건 축이다. 이와 같은 플롯은 <<삼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었다....이러한 이중구성은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었다고 보겠다”6).

 물론 이러한 지적은 소설 구조적인 한 특징을 정확하게 짚어냈다고는 하겠으나 시대적 인식에 따르는 작가의 주도동기를 파악하지 못하였기에 다만 “한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 세대의 다양한 생활 양상, 그리고 같은 세대의 여러 가지 가치관을 한 작품 속에서 수용하려는 의지에서 창출된 것”이라는 구조일반 내지 창작기법에 머무는 결론을 내리고 만다. 작품의 내용 내지 모티프를 외면한 이런 결론으로서는 이중구조의 플롯의 종축과 횡축의 변증법적 관계를 밝혀주지 못한다.

 이중구조의 플롯이 시대의식에 예리하고 역사적 사고에 투철한 작가의 정신적 산물이라고 확인하면 종축은 횡축의 역사적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며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되는 것이다.

 이는 우선 삼대에 걸친 인물의 설정과 그들간의 갈등이 다만 세대간이라는 혈연적인 갈등을 넘어서고 있다는 판단에서 확인될 것이다.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세대간의 갈등이란 점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듯하면서도, 그들의 삶의 태도나 현실 인식의 차원은 소설의 배경적 의미 이상의 민족사적 현실에 대응하는 것이란 점에서 소설 전체의 의미를 확대하도록 강요하게 된다7).

 말하자면 조부 김의관은 유교사상 체계의 보수주의자이고 부재지주의 형상이면서 결국은 식민지화와 함께 이미 뿌리뽑혀 역사에 사라져 가는 구한말의 시대적 상징이라고 할 것이고 부친 조상훈은 3.1운동의 실패라는 정치적 좌절로 정신을 거세당하고 시대의 개화사상으로 뿌리 내릴 수 없는 <수입품>인 기독교에 위선적으로 금욕적인 정신기탁을 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상징이라고 할 것이고 손자 조 덕기는 제도적으로 고착되어 가는 식민지 치하에서 “민족의 존재단위로 지닌 치부층의 소유양식이 뿌리가 없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어 불가피하게 그 소유양식은 깨어질 수밖에 없”8)고 문화정치로부터 극단적인 강압정치로 경직되어 가는 일제의 강경 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민족적 의식의 발육이 부진하는 시대에 싹트는 근대의식의 맹아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상징적 의미가 과연 작품의 흐름에서 흘러나온다고 확인할 때 우리는 그냥 삼대의 갈등을 혈육적 세대의 내부적 갈등으로 한계 지울 수는 없겠다.

 한 가족의 삼대에 걸친 인물의 연계성이 다만 혈육적 세대간이란 울타리를 벗어나서 당시의 역사적 굴절모습과 사회적 변천 내지 시대적 굴욕 또는 절망의 현실대응에 이어질 때 그것은 횡축에서 살아가고 있는 시대적 인간들의 의식의 갈등에 결정적으로 작용하는 역사, 사회적 환경으로 펼쳐지는 것이고 역시 그러한 시대적 이념적 갈등을 변증법적 차원에서 보다 근원적으로 조명해 주는 시대적 배경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상기 <문학사>의 논법에 따르면 작가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 한 것”이고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며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이는 김의관이 당시의 지주계급이나 중산층의 몰락을 보여주고 조상훈이 정치적으로 미래지향이 막힌 전락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상징이 되고 있음을 확인할 만한 역사적, 사회적 사건이 일어나지 않고 그 몰락과 전락이 다만 스스로의 개인주의적 행위결과로 돌려지고 있다는 지적과 같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이러한 지적 자체가 벌써 그 비평적 시각을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전체주의적인 가치판단 혹은 리얼리즘 문학을 상대로 하는 연구가 쉽게 빠지는 주관, 이성적인 진보개념 내지 이상적 전망의 방법론에 맞추고 있는 것이라고 일깨워주지 않을 수 없다.

 식민지 역사가 우리에게 준 아픔이 얼마나 뼈저리고 상처가 얼마나 깊던 간에, 그런 외래의 파괴적 폭력에 의한 집단억압에 우리가 얼마나 무능하고 굴욕적이고 절망적이었던 간에 역사는 역사로, 현실은 현실로 직시해야 할 것이다. 작가가 그에 따른 원형적 구성으로 작품의 기본골격을 세워나가는 자세가 오히려 리얼리티에 철저한 것이고 극복해야 할 특정한 시대의 특수한 삶에 대한 역사철학적인 시각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시대적 인식에서 확인해 보면 당시 지주계급, 중산층의 몰락과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전락은 역사, 시대적인, 그리고 문화, 의식적인 것의 보편적 발전에 의한 필연적인 내적 결과가 아니라 일본의 식민정책이라는 외세의 폭력에 의해 주체적 기준이나 선택이 박탈당한 타살적 몰락과 전락인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작품에서 주목할 점은 종축은 횡축의 역사적 그리고 시대적인 배경이 되는 것이며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만약 조의관에 의한 지주계급, 중산층의 역사적, 시대적 몰락을 작품의 기본구조로 자리매김하였다면 어떤 시대상황이고 어떤 극단적 현실이든 간에 몰락해 가는 인간의 처절한 몸부림이나 자살적인 대항이 운명적으로 작품에 드러나야 할 것이다.

 또 만약 조상훈에 의한 개화기시대 인텔리의 역사, 과도기적 희생을 작품의 주선으로 잡았다면 좀더 등장인물의 인텔리의 유형적 기본성격과 극단적 대항운동의 실패로 겪는 심리갈등 내지 주관적 가치기준의 변질과정을 객관세계와 시대의식과 관계를 맺어주면서 보여주어야 했을 것이다.

 문제는 작가가 노린 점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조덕기를 새로 싹트는 근대의식의 맹아의 상징이라고 확인하면 조의관이나 조상훈은 이 맹아가 싹트는 토지나 밑거름에 다름 아니다. 실제로 작품에서 보면 조의관은 작품에 등장하면서 벌써 성장, 확대되는 재산의 소유자거나 자본의 재생산을 위해 사회와 갈등하는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몰락과 죽음을 앞두고 금고와 사당으로 혈연적인 윤리질서를 보존해가려고 그 나름의 윤리관념을 조덕기한테 심어주고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 가는 낙조 같은 인물이다. 조상훈도 역시 정치적 실패 뒤에 억압적 환경에 대한 저주와 과도기적 희생세대가 운명적으로 자초하는 주관적 가치기준의 변질과정은 이미 과거의 기록에 남긴 대로 등장하면서 위선적 이중생활에서 점차 껍데기가 벗겨지면서 타락하는 인물이다.

 보는바와 같이 조의관이나 조상훈은 그들 자체의 성격발전과 역사적 운명을 대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조덕기라는 근대의식의 맹아가 싹트는 객관적 환경 내지 시대의 특정상황을 민족사적 배경으로 받침 해주기 위해 등장한 것이다.

 이들 두 인물이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의 필연적인 산물이고 이들로 형성된 종축이 횡축의 역사적, 시대적인 배경이 되고 역시 인물형상의 심리갈등 내지 성격형성의 현실적 계기가 될 때 민족자본의 재생산이 제도적 보장을 잃고(조의관의 경우) 시대에 대한 타협과 환경과의 화합이 도덕적 타락을 조장(조상훈의 경우)하는 결과는 벌써 근대의식의 맹아로 싹터 오르는 조덕기의 운명과 전망에 대한 기대지평을 무겁게 누른다.


3. 인물의 풍속화와 내면의 저항


 <문학사>에서 판결한, 작가는 “객관세계와는 관계없이 단편적인 개인적 삶에 관심 한 것”이고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은 각각의 개인주의 삶인 것”이며 “그의 개성주의란 개인주의적인 것의 표리에 지나지 않는다”. “<만세전>이나 <삼대> 역시 높은 평가에도 불구하고 개방된 삶이 아니라 갇혀진 삶이라는 데 한계가 있다”는 등등의 논법은 문학작품은 <있을 수 있는 세계>를 그리고 보편성은 형상화된 특수성을 통해 반영될 수 있다는 리얼리즘 이론을 극단화된 전형창조론에서 파악하고 리얼리티보다는 역사법칙의 진보개념을 앞세운 혐의를 받게 한다.

 “리얼리즘 소설은 보편성은 현실의 개별자에 대한 구체적인 형상화인 특수성을 통해서 재현된다는 이론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연히 역사, 사회의 총체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게 되며 따라서 당연히 근대 역사의 시간개념에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게 된다. 이런 근대 소설의 시간체험의 역할을 루카치는 특유의 유려한 어조로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근대에 이르러 선험적 고향(원리)이 사라진 훼손된 세계에서 소설은 본질을 찾아야 하지만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소재로 삼게 됨으로써 시간은 중요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소설에서 시간은 현대적 의미에 반기를 드는 살아있는 유기체의 저항이 된다. 소설에서 의미와 삶은 서로 분리되어 본질적인 것과 시간적인 것으로 분리됨으로써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G. Lukacs-반성완 역 <소설의 이론> 심설당, 1985)”9)

 루카치의 주장에 따르면 훼손된 세계에서는 본질적 의미와 시간적 삶이 분리되어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고 만다”

 주체적 자아가 훼손된 세계, 내적 발전을 박탈당하고 외세에 억압받는 특정한 현실에서 “평범한 일상성에 대한 취급”이 시간적 삶을 통한 본질적 의미에로의 지향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왜냐하면 제도적 억압과 강박적 문화이식 내지 정치적 파괴가 일상적으로 개개인의 자아에 선택 없이 강요될 때 시간적 삶의 일상성 자체가 사회환경과 시대배경 속에서는 특정환경 특정시대의 특수성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라는 악의 몸에 붙은 발과 손이 저지르는 악행을 짐짓 보지 못하고 지낸다 하더라도 한민족이라는 일개인은 어쩔 수 없이 절망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와 상황이 바로 작가 염 상섭이 살던 지점이었다”10).

 이처럼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된 세계에서의 당위적인 전망이란 당시의 혁명가나 오늘의 후대들이 시간극복의 시점에서 가져보는 희망사항일 뿐 당시의 현실 자체가 그러한 전망의 당위성을 시간적으로 갖고있지는 못한다.

 역사와 시대를 외면한 이성의 각성을 부르짖는 이론적인 전형창조론은 극복되어야 할 것이지만 전형성과 선진성 내지 진보적 이념을 직결시키는 주장 자체가 비판되어야 한다.

 “전형으로서의 인물은 한 사회가 추구하는 이념을 자신의 피 속에 육화시키는 인물이다. 그는 오히려 그 이념 자체이다. 그러나 염상섭과 발자크는 그런 의미에서의 전형을 창조하지 않는다. 그 두 작가가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전형적인 인간보다는 전형을 만들 수 있는 정열. 수난이, 다시 말하자면 한 시대의 문제가 어떻게 모든 인물들에게 확산해 들어가느냐 하는 점이다.”11)

 <삼대>가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되던 시대를 시공간으로 하고 있다는 전제를 강조할 때 시간적 삶의 일상성에서 전개되는 등장인물들의 행위와 삶의 모습은 그대로 그 시대 삶의 현장에 대한 풍속도가 된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현실사회의 제도적 사회구조 속에서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나아가 시대적 문제의식과 심리적 갈등에 고민하기를 회피하지 않을 때 “그 내적 줄거리는 시간의 힘에 저항하는 영혼의 힘이 되”는 것이고 따라서 특정시대의 문제의식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참주제도 리얼하게 표현되는 것이다.

 작가의 명석한 현실인식과 날카로운 시대포착은 등장인물들의 풍속화로 특정시대의 문제의식을 리얼하게 보여주었다는 데서 잘 보여주면서도 특히 소설 구상적 측면에서 보면 주인공설정에서 작가적인 고심과 의도가 더욱 극명하게 나타난다고 할 것이다.

  이렇게 판단할 수 있은 것은 작가가 이십대초반이고 일본유학생인 조덕기를 작품의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 연령, 신분적인 개연성에서 아직 어리고 학생이라는 사회적 미숙성과 맹아상태의 근대의식을 그 내부구조에서 통일시키고 있다고 확인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판단은 근사한 문제의식을 다룬 한 작가의 작품인 <만세전>과 <삼대>의 주인공을 동일한 위치로 환원시킬 때 인식의 기대지평이 같을 수 있다는 가능성 범주로 확인하면 더욱 명백해 질 것이다.

 두 소설의 주인공은 모두 이십대 초반이고 일본유학생이다. 일본유학생이라는 근대의식의 상징성과 학생이라는 사회적 인간으로서의 미숙성의 일체화는 그냥 한 개인의 시각적 한계나 인식의 주관성을 넘어서서 당시의 일제식민정책으로 말미암아 집단발육의 부전으로 인한 근대의식의 맹아상태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작가의 의도적인 노력에 미안함이 없는 판단일 것이다.

 동경에서 서울까지의 여로에서 썩어서 구더기 끼는 무덤으로 전락한 조선의 실상을 흩어지는 안개 속에서처럼 점점 뚜렷이 각인을 받고 내적 영혼의 저항에 주관적 기준 점을 잡을 수 있었던 <만세전>의 주인공이 <삼대>에 이르러서 그 현실 속에 몸담으면서 보다 신변 체험적으로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로 하여 민족자본의 재생산이 제도적 보장을 잃고(조의관의 경우) 시대에 대한 타협과 환경과의 화합이 도덕적 타락을 조장(조상훈의 경우)하는 결과 앞에 곤혹을 느끼게 된다.

 같은 신분, 같은 연령의 두 주인공이 서로 다른 심리갈등 내지 양상을 보여주게 되는 것은 그들의 현실접근에의 시점차이, 거리차이 때문일 뿐 의식의 본질적, 질적 비약은 아니었다.  <만세전>의 주인공이 현실에 대해 관조적이고 현실인식이 우발적 사건이나 우연적인 체험을 통해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삼대>의 주인공 조덕기는 직접 현실에 몸담고 현장인간들과의 충돌과 몸짓 속에서 신변체험을 하고 내면적 갈등을 겪으면서 의식의 주관적 기준선택에 방황하는 것이다. <만세전>이 시점에서 관조적이고 의식에서 피상적인 약점을 <삼대>에 와서 치료하는 듯 하다. 그럼에도 두 작품사이에 의식의 질적 향상이 부재한 것은 식민통치의 제도적 고착이 점점 본격화되어가면서 집단발육이 부전했던 시기라는 민족사적 배경에서 확인하면 별로 나무랄 것이 못된다고 할 것이다.

 세대적 윤리적 갈등과 시대적 이념적 갈등의 교차점에서 갈등과 선택에 모질음을 쓰는 덕기가 일제 식민주의 국권강탈과 극단적 강압정치로 말미암아 민족의 주체적 발전이 박탈당하고 자아실현 내지 인간완성이 사회성장과 동일한 위치에로 환원될 수 없었던 삶의 현실에서 도의적인 동정주의자로서나마 유용한 인간이 되려하는 것도 극한시대의 아픈 선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바로 “그렇기도 하고 안 그렇기도 한 것, 그 속에 덕기의 인생이 놓여 있다. 이 불확실한 마음이란 덕기가 놓인 상황과 등가이다. 이 점을 인식할 때 비로소 <삼대>의 참주제가 새삼 선명해진다.”12)


맺는 말


 이상에서 살핀바 작가 염상섭은 장편소설 <삼대>에서 자아와 진보개념이 극단적 탄압에 의해 훼손되던 시대를 시공간으로 하여 시간적 삶이라는 일상성 자체가 극복의지로 표현되고 있음을 인물의 풍속화를 통하여 잘 보여주고 있다.

 물론 서술시점, 시각에서 작가의 주관적 흔적이 드러나고 대화의 담론구조에서도 개성을 살리지 못하고 설교적인 등 문제점들이 소설의 성공에 크게 영향 끼치고 있음도 간과할 수 없으나 여기서는 그냥 앞에서 제기된 문제에 초점을 맞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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