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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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선화련상(김동진)
2007년 12월 06일 17시 07분  조회:857  추천:32  작성자: 김동진
봉선화련상


김동진



앞뜨락에 심은 봉선화가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하면 나는 조건반사로 조용한 공간에서 봉선화련상에 잠기군 한다. 봉선화에 얽힌 수많은 사연중에도 선참으로 떠오르는것이 《울밑에 선 봉선화》(김형준 작사 홍란파 작곡) 의 정한에 젖은 노래가락이다.

《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 반겨 놀았도다// 어언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 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도록 침노하니/ 락화로다 늙어졌다 네 모습이 처량하다》

내가 이 노래를 처음 들은것은 시골에서 농사일을 할 때였다. 싸란(沙蘭)이라는 산골에서 우리 마을로 이사온 리정안이라는 친구가 흘러간 옛노래를 어찌나 잘 부르는지 오락판에서 한몫을 단단히 하고있었다. 도깨비장물까지 몇잔 들어가는 날이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눈을 지긋이 감고 저가락장단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는데 《눈물젖은 두만강》으로부터 시작하여 무슨 《나그네 설음》이요, 《물방아 도는 래력》이요, 《리별의 부산항구》요 하면서 제목조차 알수 없는 노래를 밑도 끝도 없이 이어대는것이였다. 들어보니 모두가 망국의 설음을 달래는 한의 노래여서 그 슬픈 가락 하나하나가 듣는이의 가슴을 아프게 하였다. 

노래 《울밑에 선 봉선화》도 그 친구가 어느 되놀이술판에서 눈물이 글썽하여 부른것으로서 역시 동양적이고 민족적인 우리의 노래였다. 조선반도의 비운을 울밑에 핀 한송이 봉선화로 이미지화한 이 노래가 그토록 나의 기억에 생생히 남게 된것은 단순한 애정가요의 쓸쓸함과 가냘픈 애수에서 벗어난 3절의 가사내용때문이였다. 랭혹한 계절에 형체는 사라졌어도 령혼은 죽지 않았으니 해빛 따사로운 새봄에 다시 소생하기를 바라는 그 애절한 념원이 바로 우리 민족이 살아남을수 있는 정신바탕으로 내 가슴에 다가온것이다. 하여 이 노래는 세월이 많이 흘러갔어도 변함이 없이 봉선화만 보면 떠오르는 앞세대의 노래로 내 가슴에 뿌리를 내렸다.

여름 한철, 농가의 바자굽이나 장독대옆, 그리고 원두막 밭머리와 길섶에서 흔히 만날수 있는 꽃중의 하나가 봉선화이다. 흙이 있고 습도가 조금 있으면 아무런 투정도 없이 잘 자라는 민초의 꽃 봉선화는 일명 봉숭아라는 오동통한 이름으로 우리네 삶의 뜨락에서 향기를 풍기였고 나비와 꿀벌을 불러들였다. 날개와 깃 그리고 발까지 봉황을 닮았다고 하여 봉선화라 부르는 이 꽃이 분홍에 선홍에 보라에 흰색으로 여러가지 색갈의 꽃망울을 터칠 때면 볼을 붉히며 아미를 숙인 모습이 마치 열아홉살 처녀의 순정을 보는것 같아 공연이 가슴이 설레이기도 했었다.

해마다 7∼8월이면 물이 잘 오른 통통한 줄기와 잎 사이에서 여러개의 꽃망울을 빚어올리는 봉선화는 보슴털이 보시시한 씨주머니가 익을 때면 손끝이 살짝 스치기만 해도 톡 하고 터지는것이 어쩌면 요술쟁이 같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봉선화씨주머니를 건드리면서 장난치는것도 나또래의 개구쟁이시절에는 하나의 재미있는 놀음이였다. 나이를 먹으면서 언젠가는 이 꽃이 연분홍저고리에 초록치마를 날리며 생글거리던 옆집 누나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어릴 때 동네의 단발머리 녀자애들이 봉선화를 짓쪼아 손톱에 붙이고 헝겊오리로 싸매는것을 본적이 있다. 시간이 얼마쯤 지나 그것을 풀어내면 손톱에 분홍물이 드는것이였다. 썩 후에야 나는 그것이 소녀들의 심심풀이 놀음만이 아닌, 자신을 예쁘게 가꾸려는 녀인들의 마음이라는것과 그속에는 붉은색으로 악귀의 범접을 막아내려는 민간신앙의 의념도 깃들어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메니큐어와 같은 현대식화장품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던 그 세월에 우리의 녀인들은 이렇게 원시적인 소박한 미용법을 활용했던것이다.

인간과 가까이하는 꽃마다 전설을 안고있듯이 봉선화에 관한 민담도 한두가지가 아니다. 지금도 내 기억속에 아래와 같은 이야기가 남아있다.

옛날 한 집에 봉선이라고 부르는 딸이 있었는데 출중한 외모에 총명을 겸하여 어려서부터 거문고를 잘 다루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날 갑자기 대국에서 공녀공출을 독촉하여 미녀를 물색하는중에 봉선이가 뽑혔다. 봉선이는 이국땅에 가서 대왕의 총애를 받는 후궁이 되였지만 떠나온 고향과 자기를 낳아준 부모님 생각에 그만 병이 나고말았다. 그녀는 병석에서도 식음을 전페하고 매일같이 거문고만 뜯다보니 다슬어버린 여린 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러다가 눈감은 그녀의 무덤에 후날 피방울 같은 꽃이 피여났다. 사람들은 그 꽃이  틀림없이 봉선이의 혼백이 살아난것이라 하여 봉선화라 이름지었다는 유래의 이야기이다. 옛말이긴 하지만 눈물겨운것으로서 봉선화의 색조가 한 많고 설음 많은 우리 민족의 빛갈임을 암시하는건 아닐런지?

봉선화전설은 서양에도 있다. 옛날 그리스의 한 녀인이 억울하게 도적으로 몰려 올프스산에서 추방당하였다. 그녀는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려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렸다. 후날 그녀의 무덤에 피여난 꽃이 봉선화라고 한다. 이야기의 줄거리는 다르지만 조금만 건드리면 열매를 터뜨려 속을 뒤집어보이는것에 대한 해석에는 일치성이 있으니 다름아닌 자신의 순결과 결백을 증명하려는 성급하고 과단적인 행위표현이라는것이다.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여 봉선화는 인간의 정서생활속에서 사랑의 꽃, 눈물의 꽃, 피의 꽃으로 피여나는것이리라!.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그대/ 봉선화라 부르리》라는 가사의 글귀도 결코 우연하게 씌여진것이 아님을 알것 같다.

얼마전 조카의 결혼식을 보려고 시골에 다녀왔었다. 그곳에도 봉선화는 흐드러지게 피고있었다. 하지만 봉선화가 피여나는 동네에 봉선화 같은 처녀들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앞에서 개운한 심태를 가질수 없었다. 처녀가 없는 마을에서 속절없이 피였다 지는 봉선화를 평온한 눈길로 바라볼수 없었다는 말이다. 아기들의 울음소리가 없고 처녀들의 웃음소리가 없는 동네에서 내가 본것은 우리 조선족농촌에 무겁게 드리운 생존우환의 그림자였다. 

노래에도 많이 오르고 이야기도 많은 봉선화!

순정의 꽃, 결백의 꽃이면서 여전히 애수의 꽃으로 필수밖에 없는 봉선화!

력사적인 아픔과 현실적인 애환을 숙명으로 감내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봉선화!

나는 이런 봉선화앞에서 《울밑에 선 봉선화》의 3련 가사를 되새겨보았다. 그것은 시대가 다르고 환경이 다르지만 《봉선화》가 화창한 새봄에 더욱 아름답게 피여나기를 바라는 우리의 소망만은 변함이 없다는것을 믿기때문이다.

《북풍설한 찬바람에 네 형체는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 꾸는 너의 혼은 예 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연변문학>> 2007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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