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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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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2014년 08월 18일 16시 03분  조회:4917  추천:13  작성자: 김혁
 
. 장편력사기행  .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물 (련재15)
 
김 혁
 

 

북간도의 하늘에 비낀 “반달”
 

푸른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
돛대도 아니 달고 삿대도 없이
기도 잘도 간다 서쪽나라로
 
하수를 건너서 구름나라로
구름나라 지나선 어디로 가나
멀리서 반짝 반짝 비추이는 건
새별 등대란다 길을 찾아라’
… …
 
“반달”, 우리 겨레들이 너무나 익숙히 알고있고 몇 세대를 거쳐 동년시절의 1순위로 자리매김되였던 명동요이다.
 
까치 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우리 우리 설날은 오늘이래요
곱고 고운 댕기도 내가 드리고
새로 사온 신발도 내가 신어요
 
해마다 새해의 벽두가 열리면 집들마다에서 울려나오는 “설날” 역시 이름난 동요이다.
이러한 귀에 쟁쟁한 명곡을 작사, 작곡한 이가 윤극영이다.

윤극영
 
겨레의 아동음악가 윤극영선생은 룡정과 떼여 놓을수 없는 인연을 가지고 있다.
윤극영은1903년 9월 6일 서울 소격동에서 아버지 윤정구(尹政求)와 어머니 청송 심씨(靑松 沈氏)사이에 1남 3녀중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4살 때부터 회초리를 맞아가며 할아버지한테 천자문을 배웠다.
관아의 하급관리였던 아버지 뜻에 따라 경성법학전문학교에 들어갔지만 1921년 중퇴하고 일본으로 류학을 떠났다. 도꾜음악학교에 입학해 체계적으로 음악을 배웠다. 그 시절 친척 아저씨 댁인 하숙집에서 작곡가 홍난파를 만나기도 했다.

그가 동요에 관심을 두게 된데는 일화가 있다.
1923년 어느 날,  윤극영의 도꾜 하숙집으로 체격이 건장한 젊은이가 찾아왔다. 그가 바로 유명 아동문학가 방정환이였다.
“이보게 미래의 작곡가 윤극영님, 장차 민족을 이끌어 갈 우리 어린이들이 즐겨 부를 노래가 없네. 자신만을 위해 음악공부해서 무슨 소용이 있는가, 어린이들이 부를 노래를 만드세나”라고 방정환은 열기에 넘쳐 권장했다.  
그리하여 그해 5월1일 방정환과 윤극영 등 지기들은 “색동회”를 발족시켰다. “색동회”는 어린이들에게 순 우리말과 노래로 우리 고유의 아름다운 마음씨를 일깨워주려는 취지의 동호회였다.
그후로 윤극영은 조선가사를 붙인 찬송가곡이나 일본 노래뿐인 시대에서 적극적으로 우리말 동요 창작을 시도하였다. 1923년 7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조선소년지도자대회”에 참가하여 “동요에 대한 실재론”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하기도 하였다.

민족동요의 대표곡으로 지금까지 애창되고 있는 “반달”에 따른 일화가 많다.
1923년 일본에서는 관동대지진이 일었고 그 란장에 동포들이 일본인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 당하는 살벌한 기운이 감돌았다. 일본에서 더 이상 배길수 없게 된 윤극영은 귀국을 했다.
아버지는 윤극영이 귀가하자 뒤뜰에 음악을 할수 있는 자그마한 별채를 지어주었다. “일성당(一聲堂)”이라는 이름의 그곳에서 집에 모여드는 어린이들을 모아 윤극영은 “달리아회”라는 합창단을 만들었다.  “달리아회”는 착실하게 동요 보급단체의 구실을 했다. 그 “달리아회”를 위해 처음으로 지은 곡이 바로 “설날”이라는 노래였다.
1924년 9월 타향으로 출가한 윤극영의 맏누이가 별세해 집안이 슬픔에 쌓여 있었다. 윤극영이 5살 때 시집간 맏누이는 고생만 하다 30대의 젊음에 세상을 등졌다. 한숨을 쉬며 하늘을 쳐다보니 하얀 조각달이 하늘에 비스듬히 걸려 있었는데 대낮에 달을 보니 더 슬퍼져 시상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낮에 뜬 외로운 반달이 죽은 누이의 슬픔에 우리 민족이 처한 슬픔까지 떠올려 주었다.
그렇게 지은 곡이 바로 명동요 “반달”이였다.

“반달”은 자유롭고 행복한 세상에 대한 동경과 그것을 념원하는 조선민족의 소박한 심정을 표현하고있다. 노래말중의 “새별의 등대”, “길을 찾아라”등 구절들은 일제의 시선을 피해 토로한 현실에 대한 비판이며 부정인 동시에 행복한 생활에 대한 절절한 갈망이였다. 당시 조선에서는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의하여 민족적이고 애국적인 창가들이 자취를 감추게 되였다. 이런 시기에 윤극영을 비롯한 민족 음악가들은 창가와 동요라는 새로운 음악쟝르의 창작을 통하여 애국, 애족 사상을 반영하였으며 민족의 장래에 대한 희망과 동경을 걸었다.
윤극영은 등사판을 구해 지은 노래를 몰래 찍어 학교 선생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설날” “반달”과 함께 뒤에 나온 “할미꽃” “따오기” “고드름”, “소금쟁이” 등을 비밀리에 보급했는데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져나갔다.
우리말 노래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심했지만 ‘설날”, “반달”과 같은 노래들이 한반도를 넘어 일본, 중국에까지 알려지자 총독부에서도하는수없이 해제령을 내리고 부르도록 했다.

윤극영이 중국으로 건너와 할빈에 있을때 일이다.
할빈에서 아시아 전역의 일본화를 지원키 위한 일본 연예단의 공연이 있었다. 일본의 한 가수가 “반달”을 부르고는 무대우에서 "이 곡은 조선인이 작곡했다고 잘못 전해지고 있는데 일본인의 작곡이요."라고 어처구니없는 설명을 했다.
 마침 이 자리에 있던 윤극영과 그의 동료들이 벌떡 일어나 항의를 했다.
그날 밤 일본인은 몰래 윤극영의 집으로 찾아와 "작곡자가 이런데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하며 사과를 했다고한다.
1926년 윤극영은 “반달”이라는 제목으로 동요집과 레코드 집을 펴냈다. 동요집에는 “반달”·”설날”·”꾀꼬리”·”귀뚜라미”·”두루미”·”꼬부랑할머니”·”흐르는 시내”·”소금쟁이”·”고드름”·”파랑새를 찾아서” 등 모두 10편의 동요가 실렸다. 이는 한국의 “최초의 창작동요곡집”으로 된다. “반달”은 또 윤극영의 최초의 동요극 “파랑새를 찾아서”의 주제곡으로 쓰이기도 했다.

“반달”은 또 조선에서 최초로 방송전파를 타기도 했다.
1924년 12월 17일 오후 1시. 영화를 상영하기엔 한참 이른 시각인데도 경성 관철동의 영화관 “우미관(優美館)”앞은 인산인해를 이뤘다. 조선일보사가 주최한 무선전화 공개방송시험, 즉 라디오 시험방송을 들어보려고 온 사람들이였다.
수표동 조선일보사의 기와집 사옥에서 쏘아 올린 전파가 우미관 무대 대형수신기의 나팔에서 흘러나왔다. 객석에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조선말이 라디오 스피커를 타고 흘러나온것 자체가 처음이였다.
3일간 이어진 시험방송의 프로그램은 다채로웠다. 이동백(李東伯) 송만갑, 박녹주등 판소리 명창들의 노래와 리왕직 아악부(李王職 雅樂部·국립국악원의 전신) 명수들의 거문고, 퉁소, 해금 등 연주가 방송됐다.
동요 작곡작사가이자 성악가였던 21세 청년음악가 윤극영이 마이크 앞에서 “반달”을 불렀고, 26세 홍난파의 바이올린 독주도 조선일보 전파를 탔다. (김명환.
“조선일보에 비친 '모던 조선'”. “조선일보” 2011년 3월 8일)

1926년 발간된 뒤 동요집 “반달”은 류실되여 그 원본을 찾을길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 근대서지학회가 2012년에 일본에서 그 원본을 찾았다.
가로 19센티메터 세로 26센치메터 크기로 22쪽으로 돼있는 그 동요집은 가위에 쪽배를 타고 나팔을 부는 날개 달린 천사가 그려져있고 속지 첫 장에는 “도라간(돌아간) 누이동생 덕윤이 영전에”라고 적혀 있었다.
학자들은 “동요곡집이 일본에서 발견된것은 출간 당시 일본내에서도 ‘반달’이 인기가 높았다는 이야기가 사실임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발견된 “반달”의 원본 동요집
 
윤극영의  룡정행차는 친척 윤익선의 영향이 컸다.
보성전문학교의 교장을 지낸 윤익선은 룡정에서 학교를 운영하면서 교육인으로 활동하였다. 간도교육협회장을 맡기도 하는 등 당시 간도 지역 교육계의 중심 인물이였다. 그가 윤극영의 간도행의 차비도 대주었다.
한편 윤극영의 룡정행차의 결정적인 요인은 그의 드라마틱한 로맨스와 관련되여 있다.
윤극영은16살에 부모가 정해준 사람과 결혼을 해 딸까지 두었다.
1925년에 “달리아회”에서 그가 작곡한 창가극 “파랑새를 찾아서”를 공연할 때 피아노 반주를 맡은 오인경과 처음 만났다. 녀 피아니스트와 함께 서울 공연을 하고 개성에등지를 돌며 공연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게 되였다. 그녀와 함께 간도 룡정으로 “사랑의 도피”를 했던것이다.
기차를 타고 원산으로 가서 배를 타고 청진으로 가서 다시 청진에서 회령까지 기차를 타고 이틀만에 국경지대인 상상봉에 도착했다. 둘은 걸어서 꽁꽁 언 두만강을 건넜다.
추위를 가르며 두만강을 건너 룡정에 도착했을때 어느 려염집에서인가 윤극영의 “반달” 노래소리가 들려왔다.
“아, 간도땅에서도 ‘반달’을 들을수 있다니. 노래는 나보다 먼저 여기에 왔구나”
무량한 감개가 끓어올라 두사람은  끌어안고 눈물을 흘렸다.

윤극영은 룡정의 동흥중학교, 광명중학교, 광명녀고에서 교편을 잡고 학생들에게 음악을 가르쳤다.
윤익선의 소개로 윤극영은 룡정동흥중학교(지금의 룡정3중학)를 찾았다. 교장이 반갑게 맞으며 교사자리를 내주었다.


광명학교 옛터 표지석앞에서의 필자

첫날 동흥중학의 교단에 섰을때 윤극영은 학생들에게 슈베르트의 “보리수”를 불러 주었다. 그러자 누군가 “선생님, 그거 말고 ‘반달’을 불러주세요”하고 소리질렀다. 박수소리가 터져오르며 학생들은 한결같이 “반달”을 주문했다. “반달”은 이미 간도지역에서도 익숙히 알려지고 널리 불려진 노래였던것이다.
그렇게 윤극영의 룡정생활은 시작되였다.
하지만 며칠후의 어느날 새벽 경찰이 윤극영의 거처에 들이닥쳤다. 윤극영은 룡정의 경찰서에 련행되였다. 오인경이 집에 알리지않고 가만히 서울을 떠났기에 그의 가족은 윤극영이 그녀를 랍치한것으로 알고 신고했던것이다. 오인경의 해석으로 경찰에서 풀려났으나 서울에서 온 인경의 오빠가 그녀를 서울로 끌고 가버렸다.

홀로 간도땅에 남은 윤극영이였지만 그는 음악을 버리지 않았다.
1927년에 윤극영은 룡정에서 음악교학을 하는 한편 음악에 뜻이 많는 이들과 손잡고”예우사(艺友社)”를 창립했다. “예우사”는 중소학교 음악교원들을 묶어서 음악창작과 평론활동도 벌리였으며 잡지 “예우(艺友)“도 등사본으로 발간하여 민족음악과 가요창작에서의 넓은 길을 열어놓았다. 이시기에”제비남매”, “우산 셋이 나란히”, “고기잡이”, “외나무다리” 등 많은 동요를 작곡하였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 3- “예술사” 북경대학 조선문화연구소편. 민족출판사 1994년)
윤해영 작사, 조두남 작곡으로 된 “룡정풍경가”도 바로”예우사”의 영향으로 창작되였다.
그 무렵 오인경이 서울에서 다시 윤극영을 찾아왔다. 룡정 광명유치원의 보모로 일자리를 찾고 윤극영의 음악활동을 위해 내조를 해주었다.



20년대 음악수업을 보고있는 룡정의 녀학생들

1936년1월 윤극영은 룡정을 떠나 재차 일본으로 건너가 뮤지컬 연출가로 활동했다. 도꾜의 “무랑루즈”라는 극장에서 가수로도 활동했다. 멀리 룡정에 있는 안해 오인경을 생각하며 “두만강의 노래”라는 련가를 지어 불렀는데 크게 성공을 거두었다. “요미우리”신문에서도 “한국 예술인의 동경진출”이라는 제목아래 그와 무용가 최승희에 대한 특집을 싣기도 했다.
그러나 친지들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갔기 때문에 얼마후 윤극영은 곧 무원조한 처경이 되고 말았다. 어느날 히비야 공원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와 곁에 있던 쓰레기통으로부터 신문 한 장이 바람에 말려 튀여나왔다. 무심하게 그 신문을 보았는데 “조선의 대표적인 민요를 경성에서 중계한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읽어보니 그 민요속에는 “반달”등 자신의 작품이 다섯곡 들어 있었다. 윤극영은 그 길로 방송국으로 달려가 자신이 작곡자라며 이름을 밝히고 15원의 곡 사용료를 받았다. 그 돈으로 당장 급박한 처지를 해결했다.
1940년 윤극영은 더 큰 음악의 꿈을 이루기 위해 흑룡강성 할빈으로 향했다. 할빈 중심가의 건물의 2층을 빌리고 10여명의 로씨야 예인들과 통역, 매니저등을 모집했다. 이렇게 “할빈 예술단”이 탄생되였다. 윤극영은 예술단을 거느리고 중국의 동북지역을 돌며 공연한다음 다시 서울에 가서 공연할 꿈을 꾸고 있었다.
하지만 일년도 못되여 예술단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그후 윤극영은 그동안 때가 묻은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간장, 된장을 만드는 공장을 차리기도 했고 역마차 몇대를 사서 운수업에도 종사하였다.
풍운의 조화는 가늠할수 없었다. 생계를 위해 일본이 관여하는 협회에 가입해 아쉬운 얼룩을 남겼던 윤극영은1946년 룡정에서 투쟁을 받고 사형에 언도되였다. 사형직전까지 갔던 고비에 그가 유명한 작곡가임을 알아본 한 공산당간부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질수 있었다.
그가 바로 당시 중공 연길현위원회 부서기, 연길현 현장이였던 문정일(文正一) 이였다.
  사형수들 명단을 하나하나 체크하여 싸인을 하던 중 문정일은 윤극영이라는 이름 석자에 놀란 기색을 지었다.
 “이 사람은 음악가가 아니요?”
문정일은 그가 바로 “반달”의 작곡가 윤극영이 맞음을 확인하고 나서 한동안 생각을 더듬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죽이지 마시오. 그 음악재질이 아깝다고 생각되지 않소. 이러한 인재들은 머리를 개조해서 유용하게 써야 하오.”라고 하였다.
문정일의 그 한마디에 윤극영은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다시 헤여 나올수 있었다.
“윤극영의 친일”에 대한 론의는 그동안 갑론을박으로 오래동안 이어졌다.
룡정에서 친일단체인 오족협화회에 가입·활동한 전력 때문에 문인과 연구자들로부터 “친일파”로 지목되기도 했고 “불충분한 고증과 일방적인 시각에 의해 지나치게 폄하되거나 매도당한 면이 없지 않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잠시 침략전쟁의 부역자로 동원됐지만 일제와 전쟁을 찬양하는 글을 한 편도 쓰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일각도 있다.
오족협화회에 들어가 일했던것은 윤극영에게는 평생의 상처와 고통으로 남아있었음이 틀림없다. 지금도 겨레들은 윤극영의 력사적 오점을 감안해내면서 그가  창작한 “반달”, ”설날”, “할미꽃”과 같은 동요를 애창하고 있고 거의 거부감 없이 그를 아동음악의 대가로, 유명음악가로 추앙함은 그의 음악에 대한 공적과 기여이기 때문일것이다.
3년형 선고를 받고 연길감옥에서 복역했다. 마침 감옥의 한 간수가 동흥학교의 제자였는데 그의 도움으로 보석되였고1947년서울로 돌아갔다.
3.8선을 넘다가 또 한번 붙잡혔다 도망하는구사일생의 고비를 겪으면서 도착한 한국에서는 또”6.25”전쟁을 겪었다.
부산으로 피난한 윤극영은 당금 입에 풀칠할 돈이 없어 은행에 찾아가 돈을 빌었다. 키는 크지만 피골이 상접하고 허리가 구부정한 빈 털털이 윤극영이 누구인지 모른 은행지점장은 안된다고 잘라 말했다. 락망하여 은행문을 나서던 윤극영은 다시 은행 문을 열고 지점장을 찾아갔다.
"지점장님! 혹시 반달을 아십니까?"
"반달이라니요?"
"왜 '푸른 하늘 은하수, 하얀 쪽배엔, 계수나무 한 나무, 토끼 한 마리....'라는 반달이라는 동요가 있지 않소?"
"네, 알지요."
"바로 내가 ‘반달’을 만든 윤극영이라는 사람이요."
"아, 선생님! 몰라 뵈어서 죄송합니다."
"죄송할 거야 무엇이 있겠오. 그런데 지점장! 나 한푼도 없으니, 그 '반달'을 저당 잡혀 돈 좀 꾸어 주시요."
윤극영은 이렇게 자신의 작품때문에 생활의 질고에서 벗어날수 있었다. (리재철. “동요 ‘반달’에 숨어있는 시대적 의미”)
친구의 도움으로 포목점을 차려 안정을 되찾은 뒤 다시 동요 작곡에 매달렸다. 윤석중 작사로 된 “어린이날 노래”를 작곡하는 등 2년여 동안 에 무려 1백곡의 동요를 지었다.
그후 윤극영은 색동회를 다시 만들고 방정환 선생의 동상 건립을 추진했으며 여생을 어린이를 위한 사업에 바쳤다.


​만년의 윤극영

경기 양평 학곡마을에 건립된 “반달” 동요비
 

언제나 해맑고 순수해 수줍은 아이 같은 동심으로 6백여 편이 넘는 동요를 남긴 윤극영은1988년 11월 15일 향년 86세의 나이로 “하얀 쪽배기”를 타고 “서쪽나라’로 떠났다.
일제 암흑기에 어린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담은 음악으로 어린문화 보급에 평생을 바쳤던 그는 한국에서 “홍난파 박태준과 함께 어린이 음악의 개척자”로 평가 받고 있다”. 1968년 그의 업적을 기리는 노래비가 어린이대공원에 섰다.

모든 동심을 부드럽게 사로잡은 “반달”은 중국에서도 큰 애대를 받았다.
1950년대 초 북경에서 김정평과 김철남 부자간이“반달”을 중국어로 번역 편곡하여 레코드로 취입하였다.
“반달”은 그후 중국전역에서 수차 재판된 “외국가요 200수”에 수록되였다.
1979년 “반달”은 “하얀쪽배 小白船”라는 제목으로 중국의 통용 음악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윤극영은 룡정에서 선후로 15년의 시간을 지냈다. 그동안의 음악적공적에 대해 음악계는 높이 긍정하고있다.
1926년 윤극영의 중국이주는 중국조선족의 동요창작을 시작해 놓은데 그 음악사적의의를 가지게 된다. 그때로부터 조선민족학교들의 노래교재는 학생들의 심리특점에 부합되는 방향에로 나갔는바 저급학년 어린이들에게는 “짝짜꿍’(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 “산토끼”(리일래 작곡), “봄나들이”(윤석중 작사, 권태호 작곡)등을, 중급학년과 상금학년 학생들에게는 “고향의 봄”(리원수 작사, 홍란파 작곡), “고드름”(유지영 작사, 윤극영 작곡)등을 교재의 노래로 선택하였다.” (김덕균 외 “조선민족예술교육사” 동북조선민족교육출판사 1992년 제42~43페지)
“전후 15년이나 중국에 있으면서 그는 조선민족 음악교육에 심형을 기울이였고 많은 동요곡을 작곡하여 조선민족아동음악의 발전에 적극적인 기여를 하였다.” (“20세기 중국조선족 음악문화” 중국조선족음악연구회 편. 민족출판사 2005년)
이즈러졌다 둥글어지며 그 빛을 이루어 가는 달처럼 “반달”은 영욕과 더불어 오늘날까지도 룡정사람들이 애창하고 전 민족이 애창하는 동요로 불려지고있다.

 
"장백산" 2014년 4월호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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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 ]

1   작성자 : 반달노래가
날자:2014-08-20 10:33:56
아, 우리가 어릴때 불러던 <<푸른하늘 은하수 노래>>지은 작곡자가 룡정에서도 활동했군요. 김작가님 좋은 글 잘 봤습니다. 노래까지 틀어쥐 금상첨화로 여러번 자주 들려 듣게 됩니다. 늘 좋은글 올려줘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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