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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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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뿌리 깊은 화두와 뜨거운 육성의 만남 댓글:  조회:771  추천:3  2019-04-01
  뿌리 깊은 화두와 뜨거운 육성의 만남 -“춘자의 남경” 애독자, 애청자 간담회에서   존경하는 라디오 방송국의 지도자 여러분, 문학계 선배님들 동인 여러분, 방송인 여러분 그리고 애독자, 시청자 여러분… 저는 오늘 다함없는 감개로 저의 또 한번의 출간 기념회나 진배없는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 종방 기념의 자리에 섰습니다.   무려 56회, 아나운서들의 생생한 육성에, 비장한 음악, 생동한 효과음과 혼효(混淆)되여 나온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은 저 작자 자신도 매료될만큼 농도와 줄기가 다른 문학의 향연이였습니다. 석달간 수고를 바친 제작진에 감사와 축하를 보내며 이 자리를 빌어 함께 작품의 창작의취와 창작 과정을 다시 한번 더듬어 보려합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저는 어느 인터뷰에서 천명한적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 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저의 창작성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러한 의취로 저는 력사의 대사건 속에 부침하는 소인물들의 나름의 서사를 보여준 장편물들을 꾸준히 창작해 왔습니다. 저의 7부의 장편소설중에서 5부가 바로 력사소재에 편중한 창작물입니다.  문화대혁명의 란장을 보여준 “마마꽃, 응달에 피다”, 일제강점기 연변이 낳은 민족의 시성 윤동주의 문학적 삶을 보여준 “시인”, 연길감옥에서 죽어 모아산 어딘가에 묻힌 중국의 마지막 황후 완용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보여준 “달의 몰락- 완용 황후전”이 바로 그 일례입니다. 그리고 그 연장선에 바로 “춘자의 남경”이 있습니다.   몇해전cctv의 짤막한 일곱시 뉴스에서 힌트를 받고 나온 작품이 바로 “춘자의 남경”입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의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에서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한명이 열흘 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불과 수십년 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수십만이 넘는 중국과 조선 그리고 동남아 나라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뉴스를 접하던 그날 나는 이미 반나마 써내려간 다른 한 장편을 접고 “춘자의 남경”을 집필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위안부라는 “뜨거운 감자”격의 이슈로 이 책이 독자들의 주목을 끌고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이 작품은 단지 위안부를 위한 이야기만은 아닙니다. 소설의 서두에는 경신년 연변땅에서 일제가 자행한 “노루골 참안”이 나옵니다. 일제는 당시 민가와 학교와 교회를 깡그리 불사르고 남정들을 모조리 죽이고도 성차지않아 녀인네들이 눈물로 묻은 시체를 다시 파내여 소각하는 귀축같은 “이중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소설의 말미에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이 잠간이나마 무겁고 핍진한 필치로 나옵니다. 이제 나라적으로 “국가 공제일”로 제정된 대학살사건입니다.  나의 고향과 남경에서 벌어진 전대미문의 대사건을 얼개로 하고 위안부를 증언자로 그 아비규환의 중심에 세워 우리 문단, 중국문단 나아가 세계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소재인 전쟁의 잔혹성을 고발하고 평화를 부르려는 그런 중후한 작품을 쓰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춘자의 남경”은 2015년 “연변문학”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2018년 연변인민출판사에 의해 출간되였습니다. 그동안 독자여러분의 꾸준한 사랑속에 작품은 또 번역가 근욱선생의  심혈을 쏟은 번역으로 중국작가협회의 번역지지작품으로 선정되였고 작가출판사에 의해 올해초에 중문으로 출판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라디오 소설로 제작되여 공중파를 타기에 이르렀습니다.       최근들어 디지털 기술의 발달과 인터넷 통신망의 확산은 문학과 그 수용방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의 위기설에 대한 신음도 한두 해의 일이 아닙니다. 방송도 동병상련으로 그 아픔을 겪어왔습니다. 새로운 전파매체에 쉽게 적응한 분야만이 대중의 호응과 갈채 속에 크게 각광을 받고 있는 현실입니다. 라디오에 이어 텔레비죤이, 텔레비죤에 이어 케이블 텔레비죤과 위성방송이, 위성방송에 이어 이제는 인터넷, 위챗… 이렇듯 전자기술의 발달은 눈부실 정도입니다. 래일 잠에서 깨면 또 어떤 매체가 득달같이 선보일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문학이 이제 더는 방송과 영 어울릴 수 없는 빙탄불상용(氷炭不相容)의 관계일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현대는 또한 매체의 공존시대이기도 합니다. 수용자에게 문학적 메시지를 전달하려면 그 전달의 종류와 방식이 다양하여 하나뿐 아니라 여러 가지 매체에 대한 수용과 선택도 다양해야 된다고 생각됩니다. 여기서 두툼한 책보다 덜 부담스럽고, 다루기가 경외(敬畏)스러운 인터넷보다 더 친근한 라디오는 내밀한 문학적 소통 방식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약간 오래 된 느낌, 느릿하지만 오래 곱씹을 수 있는 새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봅니다. 사실 오로지 종이매체에만 기대였던 문학이 21세기를 사는 디지털 세대와의 소통이 이루어지기전 라디오라는 또 하나의 오래 된 매체가 있었습니다.    비록 요즘들어 어려운 파장을 겪고 있지만 어제의 소리를 들려주고 지금 현재의 소리를 기록하는게 방송이 가지는 끊을 수 없는 매력과 최고의 지향점이 아닐가요. 흥감스러움일지 모르지만 라디오 소설 “춘자의 남경”이 바로 그러한 활용과 실천의 본을 잘 보여주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 유장한 소리의 음파가 더 높은 파장으로 더 멀리 더 오래 울려가리라 확신을 가져봅니다.   여러번 천명한 바이지만 민족작가의 소명의식으로 위기를 기회로 삼고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다함없는 순발력과 예술적 끼를 보여준 성우들과 다음 또 손잡을 기회가 있기를 바래 봅니다. 중후한 메세지, 뜨거운 육성으로 침체된 문단을 들깨우고, 독자들과 눈과 귀를 함께 할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감사합니다! 2019년 3월 30일    
19    장편인물전 "강경애 평전" 련재를 시작하며 댓글:  조회:2249  추천:16  2019-02-12
. 작가의 말 .   리얼하게 그리고 치렬하게   - 장편인물평전 "소금꽃- 강경애 평전" 련재를 시작하며   김 혁     1,   소학시절, 학교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 길에 그후 문학비 하나가 외따로 솟았다. 바로 《녀성작가 강경애 문학비》 이다. 룡정출신으로 10대로부터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 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의 첫 작품을 맨 처음 접한 것은 80년대 중기 초중학교 시절이였다. 방학이면 룡정 신화서점에서는 2층의 한 칸을 내여 아이들에게 책을 대여해 주었다. 땡전 5전을 내면 그 자리에서 책들을 열람할 수 있었다. 책의 홍수가 터진 요즘과는 달리 피폐하기 짝이 없던 문화풍토에서 아이들이 따로 접할 책이 없었다.  그래서 알뚱말뚱한 성인들의 책들을 도깨비 기와장 번지 듯 읽었다. 그렇게 책 대여점에서 열다섯 살 내기의 내가 생애 맨 처음으로 완독한 장편소설이 바로 강경애의《인간문제》였다. 일제 강점기의 농민과 로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핍진하게 그려내여 식민지 시대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그 소설을 어린 내가 다 알고 읽은 것은  아니였다. 하지만 온통 도그마(Dogma)로 점철된 “도긴 개긴”격의 책 몇 권뿐이였던 그 시절, 소설 속 곰살가운 우리 언어와 선비, 첫째, 신철, 옥점의 형상은 내내 머리 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1999년에 강경애의 문학비가 비암산 자락에 세워지면서 다시 강경애의 작품들을 찾아 읽었고 지난 2005년에도 또 한번 이 불운의 녀작가와 만났다. 당시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뜨면서 학계에서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해외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 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회장을 필두로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이 진상 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추진회에서 운영하는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결국 강경애는 오명을 씻고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문화인물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 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히고 있었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선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고향에서 필밭을 경운했던 이 질박한 녀성작가에 대한 애대와 경모를 머금고 나는 강경애의 생몰일을 기념하여 여러 간행물에 강경애의 문학적 생애를  답사기, 칼럼등 여러 쟝르로 발표했다.  그리고  강경애 탄생 110주년을 맞으면서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를 휘동하여 그의 문학과 삶을 기리는 기념행사를 기획, 주도해 펼쳤다. 조선족 소설가들과 문학도, 언론인들은 이날 룡정 비암산자락을 찾아  강경애문학비에 헌화하고 묵례를 드린 뒤 룡정시 도서관에서 강경애문학세미나를 열었고 내가 강경애의 생애와 작품을 조명하는 특강을 맡아 했다.   올해도 연변대학 조선문학연구소와 손잡고 학원생들을 상대로 “룡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강경애”라는 제목의 특강을 다시 한번 하면서 대학가에 강경애를 알리기도 했다.      2,   강경애는 조선(한국)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걸출한 녀류작가인 동시에 중국조선족문학사에서도 추앙할만한 녀류작가로 정평되고 있다.   1906년 4월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부자의 딸로 태여났다.    1929년 10월《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염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을 읽고》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가생활을 시작, 그가 전공한 쟝르도 애초의 피상적인 서정시에서 특정한 정치적립장과 비평적 시각에 근거한 리론을 담은 평론과 소설로 바뀌였다. 한동안의 습작기간을 거쳐 강경애는 감상적인 문학소녀로부터 철저히 계급의식에 립각하여 글을 쓰는 작가로 변신하였다.   1931년에 강경애는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과 결혼하고 함께 북간도의 룡정으로 이주해 왔다. 1932년 1월 “신녀성”에수필《간도 풍경》을 발표했다. 두만강을 건너서 간도로 들어서는 감회를 피력한 글이다. 체험의 현장인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는 체험을 하게 되였다. 간도방랑체험으로 강경애는 1932년 9월《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을 발표한다.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은 투철한 반일정신을 가지고 있었다.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건실한 반일사상을 지니고 작품창작에 림 (臨)했으며 룡정에서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1932년 일제는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우면서 《치안숙청》공작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 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황에 직면한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고 또한 지병(持病)인 귀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8월과 10월의 “동광”지에 발표 된 수필《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 있거라》에 이때 간도를 떠나는 감회가 세세히 적혀 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와 안수길 등과 함께 조선인들의 문학단체인《북향》회동인이면서도 고문격으로 또 가정주부로 창작에 몰두했으며 1939년에는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담당하기도 하였다. 중간에 간혹 서울이나 장연을 왕래하지만 주로 간도에 거주하면서 손수 물 긷고 빨래하며 한편으로는 꾸준히 작품을 발표했다.    귀병이 재발하여 다시 고향 장연으로 돌아가 1944년 4월 26일 영면하기까지 강경애는 10년간 룡정에서 세월을 보냈다.    강경애가 창작활동을 본격적으로 진행한 30년대는 일제의 파쑈적 탄압이 전에없이 기승부린 시기였다. 민족의식, 반일사상이 구현된 작품은 출판이 불허되였고 자그마한 요소도 수정이 강요되고 삭제당하였으며 신문련재가 중단되고 문예지, 종합지들이 결간, 페간되였다. 이런 렬악한 상황속에서 절개를 지키지 못하고 개인의 안락을 찾아 민족을 등진 문인들, 매문가(卖文家)들도 나왔다. 그러나 강경애는 지조를 굽히지 않았으며 시종 가난하고 천대받는 근로인민, 수난당하는 우리 민족의 편에 서서 그들을 대변하는 목소리를 내왔다. 일개 가정주부로 더우기 신병으로 고통을 겪으면서 진보적인 창작활동을 줄기차게 벌릴수 있은 것은 민족해방운동의 핵심지역이라 할 수 있는 룡정지역에서 살면서 시대에 대한 투철한 인식에 기초하여 글을 쓴데 중요한 요인이 있었다.   그의 작품을 일람해보아도 그 뚜렷한 구현이 료연하게 알린다. 《신가정》에 《유무》는 1934년 일본군의 잔혹한 토벌을 묘사한 작품이다.  《신가정》에 발표한 《소금》은 간도에 이주한 조선인의 참혹한 삶과 그에 저항하는 무장투쟁 부대를 묘사한 중편소설이다.  《녀성》지에 발표한 《어둠》은 제4차 간도 공산당 사건으로 사형 당한 항일혁명운동가의 가족의 고난과 과거 운동가의 전향을 그린 소설이다.  《동지》에 발표 된 《마약》은 아편중독자인 남편에 의해 첩으로 팔려 저항하다가 끝내 죽는 녀성의 수난을 그린 작품이다.  일본어로 쓴 소설《장산곶》은 황해도 몽금포의 작은 어촌을 배경으로 하여 일본인 로동자와 식민지 조선 로동자의 연대 문제를 반영한 작품이다.    강경애는 치렬한 문학생애에 21편의 소설, 2편의 장편연재소절, 24편의 수필과 7편의 시, 3편의 평문을 남긴것으로 알려진다.  강경애의 《인간문제》,《소금》,《축구전》등 많은 작품들이 룡정에서의 간도체험과 갈라 놓을수 없기에 룡정에 그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이다.     3,   오늘날 조선족문학의 근저에는 김창걸, 윤동주, 리욱, 김학철 등과 더불어 당시 간도 지역에 족적을 남겼던 안수길, 최서해,강경애와 같은 작가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들은 조선족 문학의 비조(鼻祖)로 되였고 이로써 우리 문학이 다원화적인 깊이를 이루게 될 수 있었다.   한 시대의 문학은 작가가 생존했던 동시대인들의 삶의 모습, 가치관과 시대의 소망을 담고 있다.  좋은 작품일수록 그 작품이 주어진 력사적 시대나 력사적 현실에 대한 반영에 얼마나 리얼했는가, 그리고 치렬했는가를 말해 준다. 작가만의 감성과 혜안으로 력사적인 현장에서 그 현실과 의미에 관여하면서 삶의 체험과 고뇌를 작가 자신의 것으로 수용하고 그것과 동화하고 일체가 되는 작업을 치렬하게 완수해 왔기에 그로서 생성된 문학적 가치가 강경애와 같은 이들을 명가로 그들의 작품을 명작으로 만든 것이다.   강경애의 작품이 요즘의 우리 문학에 시사하는바는 크다.   사회참여에 있어서 문학의 역할에 대한 회의론이 고개를 들고있다. 따라서 당위의 문학으로 위세를 떨쳐온 리얼리즘도 이제는 낡투로 색바래졌다고 어떤이들은 말한다. 시장과 독자의 수요에 부응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바로 부박한 그 지점에서 우리 문학은 자칫 그렇지 않아도 적은 독자까지 잃을수 있다. 상업주의 문학체제에 순응한다면 우리 문학의 이념은 결국 감각적인것이나 실험적인 론리에만 부박하게 꺼둘리고 말 것이다. 우리 문학에서 력사와 사회와 관련된 공동체 인간들의 삶을 다루는 그런 문학을 격려하고 가꾸어야 하며 문학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고민은 여전히 선행되여야 한다고 본다. 여러 쟝르, 여러 문체의 작품을 통해 시대의 진실을 전파하는 일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얘기다. 누군가에게는 강경애의 작품들이 중고로, 그가 몸으로 지향해왔던 것이 철이 지난 명제로 비쳐질 수도 있겠지만 과감하게 시장과 공리의 가치를 부정하면서도 진솔한 언어로 오늘날 공동체의 깊숙한 아픔을 감동적으로 드러내고 성찰할 수 있는 문학이야말로 바로 진정한 문학이 아닐가!   어제날의 강경애가 바로 그러했다. 하기에 그는 주어진 소명을 하얗게 불태우며 작품의 행간에 민족과 시대를 위한 하얀 기념비를 오롯이 세울 수 있었다. 삶을 형상화하고 그 삶에 가치와 빛을 부여하는 것이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한 문학의 역할과 소명이라고 할 때 우리 현대녀성문학의 기초이며 높은 봉우리에 서있는 강경애의 문학을 우리는 다시 경모의 마음으로 접하게 된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남들과 차별화된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밝힌적 있다. 이 모든 것은 수십 년간 기자라는 직종에 투신해왔기에 특정지을 수 있는 나의 남들과 차별화 된 창작성향이다. 지금도 나는 소설이라는 픽션물에 주로 매진하고있지만 칼럼, 기행문, 인물전이라는 논픽션물에도 몰입되여 있다.   다각적으로 조선족공동체의 력사와 현황의 면면을 보여주기 위한 소명의식으로 소설창작외에도 기행, 칼럼, 영화평 등 여러 장르를 충분히 동원하여 수년간 출간과 관련 련재를 이어가고 있다. 룡정의 백년사에 대해 전경식으로 조명한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푸른 솔, 해란강 깊은 물”과 문화력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인물계렬 “소설가 김혁의 인물시리즈”등이 조선족의 백여년 력사를 저널리즘의 시각으로 연구한 결과물이다.   근년래 나는 또 민족의 정체성 확인과 자부와 비젼을 위한 작업— 조선족인물전 시리즈를 사회와 약속하고 그 결과물들을 륙속 펴내고 있다.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제반 분야에서 뚜렷한 족적을 남긴 주덕해, 김염, 김학철 등 우수한 인걸들의 전기를 이미 펴냈거니와 펴내는 작업을 창작스케줄의 가장 중요한 시간대에 놓고 있다.    그 중에서도 수년래 룡정이 배출한 인물들을 시리즈로 펴내고 있다. 이미 “별헤는 밤: 윤동주 평전”, “실크로드에 지다: 한락연 평전”, “청년문사의 꿈: 송몽규 평전”등 장편인물평전들을 발표했다. 강경애 평전도 바로 이 시리즈의 맥락에서 기획, 집필중이다.    “조선족문화의 발상지로 정평되는 룡정에서 태여난 나에게 있어서 고향에 대한 사랑과 민족의 력사에 대한 소명의식은 쉼모르고 필을 들게하는 힘이요, 그 붓끝에 담아내는 묵향이다.     평전의 집필을 앞두고 또 한번 비암산 자락에 있는 강경애 문학비를 찾았다. 요즘 들어 룡정의 비암산은 풍경구 개발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비암산 자락이 온통 꽃밭으로 조경되고 유리잔도도 부설되여 일평균 8만명이 넘는 관광객들이 찾아드는 호황을 보이고 있다. 하지만 그 비암산 자락의 적요한 곳에 위치한 “강경애문학비”를 찾는 관객은 없다. 향락주의의 팽배에 유흥을 즐기면서도 막상 우리의 문학과 민족 선각자들에 대해서는 까막눈인 작금의 부박한 풍토가 처처에 엿보여 그를 조명하려는 필대를 무겁게 한다.    필대를 고누잡고 평전의 들머리를 여노라니 간밤에 내린 눈을 소복히 떠이고 있던 녀류작가의 햐얀 기념비가 여느때보다도 심중에 커다랗게 안겨온다. "장백산" 2019년 제1호  
18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댓글:  조회:1194  추천:12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나는 왜 그 “엘레지”를 불러야만 했나     “춘자의 남경”에 마침표를 찍고 작품의 후기를 쓰면서 그 소제목을 저는 “못다 핀 꽃들을 위한 엘레지”라고 달았습니다. 여기서 엘러지(Elegy)란 슬픔을 노래한 악곡이나 가곡으로 풀이 됩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그 슬픈 엘레지를 여러분 들과 함께 부르고자 합니다.    20여년 리력의 언론인 출신이라 매일이고 어김없이 경청하는 프로가 있습니다. 바로 cctv의 일곱시 뉴스입니다. 하지만 뉴스를 접하며 혹한에 들린듯 부르르 진저리를 쳤던적이 있었습니다. 그 진저리는 나의 엄청 많은 영상물 관람 리력중에서도 자주 경험하지 못했던 혹독한 떨림이였습니다.    길림성 당안국에서 소장한 일본 관동군이 작성한 10만건의 문서중에서 뒤늦게 발견된 기록에 대해 공개하는 뉴스였습니다. 뉴스는 남경대학살 기간 당시 "남경에 조선인 위안부가 36명 있었다”, “한명이 열흘 동안 일본 병사 267명을 상대했다"고 보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가을, 나는 저 유명한 남경대학살의 현장에 섰습니다. 사비를 팔아 굳이 남경으로 향했던 것은 남경대학살기념관을 찾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남경역에서 지하철을 타니 터미널 표시판과 지하철 도어의 전광판에 그리고 도시 네 거리 곳곳에 “남경대학살기념관”으로 가는 선로가 뚜렷이 표기되여 있었습니다.  기념관 입구부터 내부 곳곳에서 커다랗게 새겨져있는 “300000”이라는 수자가 나의 동공을 모나게, 강렬하게 찔렀습니다. 그것은 당시 일본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중국인의 수자였습니다.    남경대학살은 종전 후인 1946년 이 사건을 다룬 남경군사법정에서도 명백하게 확인된 참안입니다. 남경대학살의 전범들은 남경군사법정과 도꾜에서 열린 극동군사법정을 통해 처형됐습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는 일부 량심세력만이 이를 인정할뿐 “학살은 없었다”는 뻔뻔한 부인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은 위안부 강제동원 역시 부인하고 있습니다.  불과 수십년전에 우리의 할머니 세대들은 일본군의 추악한 만행의 희생자로 전락되였습니다. 수십만의 여린 하얀 꽃들은 누런 제복의 일본군에 끌려가 청춘을 검게 유린당했습니다. 위안부 배상촉구문제는 1992년 부터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여러 나라들에서 시작되였으나 일본 정부는 이후 22년이 넘도록 이를 랭랭하게 외면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남경대학살의 부인에 이은 위안부에 대한 후안무치한 태도와 궤변 그 억지주장을 펴는 사람들 중에 중국과 한국에서 베스트셀러를 펴낸 유명한 일본녀류작가도 있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는 그들의 역주행에 같은 소설가로서 나는 커다란 유감을 느꼈습니다. “력사를 왜곡하며 세계의 도덕적 심판을 벗어나려는 일본인들의 단체기억상실증”이 외려 그 력사를 다시 기억해 내고 기록하게끔 나의 창작충동을 건드렸습니다.    남경에서 돌아와서 서재를 뒤적여 보니 내가 소장한 작품들 중에 위안부소재의 작품은 몇부 안되였습니다. 품을 들여 검색해봐도 뜻밖에 위안부 소재에 관한 작품이 너무나 적었습니다. 관련 보고서나 르포, 론문들은 적지않았으나 예술적으로 재현한 픽션물이 적었습니다. 영화나 드라마는 더러 있었으나 그중 소설작품이 유독 적었습니다.  거기에서 우리 민족 작가들이 쓴 소설작품은 더구나 적었고 외려 가해자 쪽인 일본에서 쓴 작품들이 몇부 있을뿐, 작품성이 들쭉날쭉해 수작(秀作)은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중국문단과 조선족 문단에서 이 소재에 대한 픽션작품은 아예 전무하다싶이 되여 있었다.  지성화된 기계적 감정에 길들어 있는 우리 작가들과 가련할 정도로 적은 독자군은 이런 제재에 흥미를 가지지 않는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소설, 인물전, 칼럼, 기행수필등을 동원해 우리의 영욕이 엇갈린 력사를 조명하는 나의 작업은 이 십수년간 지속되고 있습니다. 역마살처럼 가고있는 이 외줄타기가 나의 근래의 창작과 생활에서의 성향이요, 소신입니다. 그래서 다섯부의 장편을 펴내고 다음 소재에 대한 선택에 심려와 숙고를 거듭하던 중 여섯번째 장편소설의 소재로 단연 위안부와 남경대학살 소재를 골라 잡았습니다.   그렇게 “춘자의 남경”은 2015년 “연변문학”지에 일년간 련재되였고 드디여 오늘 출간에 이르게 되였습니다. 지면을 할애해 작품을 연재해 준 “연변문학”지와 책을 선정, 출간해준 연변인민출판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도꾜 불교대학의 시노무라 리에 박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윤동주 연구차 연변행차를 했던 박사님은 “춘자의 남경”에서 큰 편폭으로 나오는 일본어 대화들을 까근히 교정해 주었고 일본으로 말하면 “뜨거운 감자”격인 위안부소재의 작품에 사뭇 학술적이면서 심도있는 해설을 달아주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을 휴식일, 명절을 할애 해 민족의 력사유적지답사에 동행하며 땀을 휘뿌린 우리네 룡윤회 력사동아리 성원들과 함께 읽고 싶습니다.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을 수 있는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자신의 금후의 모든 창작성향이다”고 저는 저의 창작성향에 대해 천명한적 있습니다. “소설의 본령이 곧 '허구적 사실성'의 설득력을 주요한 미덕으로 삼는 것인데” 매체기자와 소설가로서의 병행된 삶을 수십년간 이어 왔기에 그 와중에 더듬어낸 이 것이 바로 남보다 차별화되는 창작성향이라고 저는 말하고 싶습니다.    한 민족, 한 인물의 련대기적 사건에 대한 예술적인 재현만으로도 문학의 영원한 주제인 인간 내면을 탐사할 수 있습니다. 민족의 력사에 대한 화두와 메세지를 끈임없이 던지면서 그 안에 “인간이라는 존재의 다면성과 립체성을 규명하는” 방대한 제재들을 성실하고 우직한 작가정신으로 밀고 나가고자 합니다.   감사합니다.         
17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댓글:  조회:1152  추천:13  2018-10-31
.김혁 신간 장편소설 출간기념회 소감문. 내 인생의 뼈골 속 피 같이 스며든 작품     갑작스러운 마가을의 추위와 휴일의 소중함도 물리치며 한 작가의 작품의 출간의 자리를 함께 해주셔 감사합니다.     이 소설은 여느 작품의 구상때보다 나의 창작충동을 특히 강렬하게 불러준 작품입니다. 창작 당시 소설가와 기자라는 이중의 신분으로 활개짓하고 있던 필자에게 가장 크게 안겨온 것은 농촌인구의 대거 도시진출과 그속에 선봉으로 나선 녀인들의 운명이였습니다. 80년대말로부터 산해관이남을 넘어선 조선족수는 20여만, 90년대 중기로부터 한국에 진출한 조선족수는 이제 100만을 기록한다고 합니다. 200만 안으로 헤아리는 중국조선족의 인구수효로 볼때 이는 그야말로 놀라운 수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을을 비우고 집을 비우고 사랑을 비우고 떠나간 우리의 녀인들이 곳곳에서 보이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그 막중한 현실을 정시하고싶었습니다.  글에서 나는 산업화과정의 부산물로서의 시골녀성들이 고향을 떠나고 산업예비군으로 충당되며 그한 과정에 육체적파멸 내지 정신적 파멸로 이어지는 도식과 현사회를 증언하는 녀인들의 다양한 삶의 양상을 한 인물에 집대성시켜 풀이하려 했습니다.    작가라면 자신의 출산아와도 같은 작품 전반에 애정이 가겠지만 이 작품은 여느 작품에 비해 잊을수 없는 작품입니다. 많은 이야기를 가지고 태여난 작품으로 내 창작생애에 기록될 작품이 될겁니다. 내 인생의 뼈골 속에 피같이 스며든 작품으로 영원히 잊지 못할겁니다.     이 작품은 첫 장편 “마마꽃, 응달에 지다”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두달도 못되여 “연변문학”지에 련재를 시작했습니다. “연변문학”지에 2003년 10월호부터 2005년 2월호까지 일년반 가량, 16회에 거쳐 련재를 마쳤습니다.  여태 작가라는 이름으로 글밭을 경작해 오면서 도합 6부의 장편소설을 발표, 출간했고 그외에도 10여부의 여러 쟝르의 작품집들을 출간했지만 이 작품은 내 인생이 송두리째 뽑히던 그 절실했던 시기에 창작한 작품이여 각별히 사랑이 가고, 화인처럼 기억에 남는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기성작품이 아니고 한편 쓰면서 한편 련재하는 형테로 창작되였습니다. 그런데 겨우 4회째 련재하고 내 신상에 거대한 변고가 일었다. 나는 어수룩한 사람들, 두수없는 사건에 휘말려들어 수십년간의 공직을 일조일석에 떼우고 처연히 한지에 쫓겨나게 되였습니다.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 나에게 돌을 던지는 형국에 문인가정으로서는 천문수자 같은 엄청난 액수의 금액을 꾸어서 부과해야도 했습니다.   그런 사면초가에서도 련재는 이어나가야 했습니다. 이를 옥물고 등짝이 으깨질듯한 거대한 압력을 이겨내며 썼습니다. 안해와 함께 여기저기 찾아가 하소하면서 돈을 꾸어들고 돌아와서, 저녁도 거른 채 1만5천자를 치고 윤색하고 나니 동이 번히 밝아오던 그때가 생각 납니다. 어떻게 그 형국에 컴퓨터앞에 앉을수 있었고 또 두드려댈수 있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과정이 이 소설의 행간 속에도 은연중 스며들어 있고 녹아있습니다.     이 작품의 주요편집이였던 “연변문학” 조성희 편집님의 로고가 컸습니다. 번마다 투고가 늦어졌고 세상이 번거로와 전화를 끊어버린 나에게 메일로 기마다 간절한 청탁을 해주었습니다. 아울러 수십통의 메일편지에서 위안과 격려의 말을 내내 잊지 않았습니다. 후문이지만 조성희 선생님은 나 때문에 편집부 상벌제도에 따라 벌금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 자리를 빌어 감격의 인사를 전합니다.    그외에도 많은 분들이 좋은 글 그냥 보고있다, 문학의 끈을 놓지말고 시련을 이겨내라고 근근간간히 격려를 주었습니다. 그들의 따뜻한 위무(慰撫)가 없었더라면 나는 아마 이 글을 이어나가지 못했을런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나는 인생에서 가장 곤고(困苦)했던 시간을 16회 40여만자의 처절한 글쓰기로 메워나갔습니다. 어쩌면 당시의 련재잇기는 내 삶 잇기의 그 자체가 아니였는지도 모릅니다.    재액 속에 탄생한 불운아같은 작품은 련재 당시와 그 이후에도 독자들중에서 커다란 반응을 자아냈다.    출판이 언제 되냐는 문의가 쇄도했고 작품이 련재된 수년이후에도 나는 서점가에서 책이 언제 나오냐고 묻는 생면부지의 독자들과 자주 맞닥뜨려야 했습니다.     이 작품을 애대한 나머지 련재된 작품의 낱장을 한장 한장 복사해 묶어서 세상에 단 한권 밖에 없는 책자로 만들어 나에게 선물한 애독자도 있었습니다. 그 고마운 분들이 오늘 이자리에 와 계십니다.   주인공 박신애의 불운한 운명을 설계한 나에게 “신애를 작작 못살게 구시요!”하고 타매하는 전화가 오는가 하면, “왜 신애를 죽였소? 당신은 악마요!” 하고 저주의 메일이 오기까지 했고, 퇴근하니 마누라의 눈이 퉁퉁 부어있기에 따져 물으니 이 작품을 읽고 방성통곡했다는 말에 자신도 읽고는 베란다로 나가 목청깨져라 소리쳤다는 데퉁스러운 어떤 사내도 있었습니다. 계속되는 독자들의 성원과 청탁에 밀려 나는 4년후인 2008년경에 연변일보”종합신문”주간에 작품을 “각설탕”이라는 새로운 표제로 다시 일년여동안 련재하기도 했습니다. 그후 이 작품에 대한 연구로 평론가가 묵직한 상을 수상했고, 연변대학의 연구생이 석사학위를 받기도 했습니다.    작품이 발표된이후 10년만인 2014년에는 50회 방송소설로 개작되여 청중들과 새로운 쟝르의 얼굴로 만나기도 했습니다. 그동안 자비출판이 란무하는 형국에도 빈한도골(貧寒到骨) 문인의 신세라 내내 출판하지 못했던 작품이 오늘 14년만에 드디여 빛을 보게 되였습니다. 감개라 할지 아이러니할지 쓰라린 마음입니다.   불우한 작가만큼 불운했던 작품의 마침내의 출간에 관계자 여러분에게 감사를 전하며 축하차 모여오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작품 속 주인공의 원형이 되여 준 모든 조선족 여인들, 작품에 간간이 비친 나를 닮은 세상에 소외된 문인들, 문인가장을 둔 죄로 내내 불운에 시달렸지만 꿋꿋이 서로 의지해 지금은 한국에서 영화감독으로 성장해 준 내 딸 소정이, 잔약한 어깨에 산악같은 인고의 사연과 세월을 함께 짊어져 준 내 안해 주향란에게 오늘 이 책을 바칩니다.    감사합니다.  
16    잊혀진“영화 황제” 댓글:  조회:2174  추천:13  2018-05-01
 말  작가의 말      잊혀진“영화 황제”     김 혁      나의 신작 장편소설 "무성시대"가 대형문학지 "장백산"지에서 새해 제1호부터 련재를 시작했다. 30년대의 옛 상하이를 배경으로, "영화 황제"의 보좌에 오른 조선족 배우 김염의 일대기를 다룬 소설이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화대혁명의 난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여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연길감옥에서 숨진 청나라 마지막 황후 완룽의 비극을 그린 "완룽 황후". 조선족 최초 일본군 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1    그이는 “황제”로 불린다.   우리의 예술계에서 그이만큼 이러한 미칭(美称)과 극찬의 보좌에 등극한 이는 전무후무, 류례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그이는 “민국4대미인”으로 꼽히는 배우 완령옥(阮玲玉)과 영화작품을 가장 많이 한 절대 콤비였다.    하지만 구설수에 못이겨 자살한 아릿다운 완령옥에 대해 알지만 우리는 그이를 잘 모른다. 완령옥을 위한 무수한 전기에도 그의 이름은 겨우 한 두번 정도 나오고, 그녀를 위한 전기영화에도 그이는 어쩌면 단역으로 단 2, 3초 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이의 가문은 무려 일곱 명의 항일운동가를 배출하였다.  그이의 아버지는 일제에 항거하기 위해 서울의 최초 양의사로부터 중국 동북의 치치하르로 이주했고 핍박과 아픔이 없는 리상촌 건설을 꿈꾸다가 일제 끄나풀에 독살당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이도, 그이의 가족사도 잘 모른다.  대문호 로신의 산문시 “사화(死火)”을 읽고 감명 된 나머지 본명 김덕린에서 화염 “염(焰)”자를 따서 개명한 그이의 이름은 김염이다.    아시아 영화권에서 일찍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곳은 향항과 대만이다. 그러나 이곳의 영화는 모두 그 뿌리를 1930년대의 상해영화에 두고 있다.  1930년대의 상해는 중국 영화사상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하며 “동양의 할리우드”로 불렸다. 바로 그 당시 상해 영화계에 혜성같이 나타나 약관의 나이에 “영화 황제”로 등극한 한 조선인 청년이 있었으니 바로 김염이였다. 영화 속에서 펼치는 그의 개성적 연기, 준수한 외모와 건강미, 지성미는 당시 고정적인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중국 영화계에 일대 충격을 안겨주며 새로운 영화스타의 탄생을 예고했다.    출연작마다 대성공을 거둔 김염은 중국 전역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고, 중국 영화계에서 유일한 이 계관을 쓴 사람으로 그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다.  상해가 일제의 손에 함락된 뒤 일본영화의 출연 제안에 “기관총으로 나를 쏴죽인다 해도 난 못해!”하고 칼날 같은 거부를 보였던 그의 패기는 일제의 출연요구를 거부해, 녀장배우로서 수염을 길렀던 경극대사 매란방과도 꼭 닮았다. 그처럼 김염 역시 대사급의 아우라를 간직한 예술가였다.  1962년 은퇴할 때까지 30여년간 총 40여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김염은 중국 영화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그이의 신화는 오늘도 계속 된다.  “중국 최고의 미인”이요, “공주”로 불렸던 진이(秦怡)와 사랑을 맺었고 그래서 주은래 총리가 “중국의 공주를 채 갔으니 당신은 우리의 부마(驸马)”라고 일컫을 만큼 김염은 뭇사람들의 선망을 자아냈던 배우였다.  "녀자 롱구선수 5번" 등 경전영화에 출연했던 진이는 96세, 구순의 고령에도 아직도 김염이 족적을 남긴 상해에 건재 해, 중국영화의 백년사를 육안으로 지켜 본 산증인으로 되였다.  지난해 중앙TV영화채널과의 인터뷰에서 진이는 “나의 남편 김염은 영화로서 일제와 싸웠다”고 자부심에 넘쳐 말했다.  현재 상해시 용화렬사릉원 기념관에 그이의 유골이 안치되여 있고 북경영화박물관에 그이의 기념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2   “조선족 중에 나보다 영화를 더 본 사람 있다면 한번 나와 보시지?” 수년 전 모 문학지에 발표했던 “영화, 그 현란한 중독”이라는 수기의 들머리에서 필자가 치기에 넘쳐 호언했던 첫 마디이다. 이렇듯 필자가 영화광이라는 것은 이제 문단이 다 아는 일이다. 세계영화사의 류류별별 영화들을 vcd, dvd 혹은 테잎으로 족히 6천장 넘게 소장하고 있다. 거기에 영화 론평집과 관련잡지들도 천권은 실히 넘는다. 이제 예술지들의 약력소개에서 나는 소설가 외에도 “영화 수집가”라는 호칭이 기어이 따라 붙는다. 왠지 그 별칭이 싫지만은 않다.  그러한 나였기에 김염 관련 영화들은 당연 적지않게 소장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인 “대로(大路)”는 물론 콤비 완령옥의 출세작 “신녀(神女)”며 완령옥에 대한 전기영화들, 김염의 첫 부인이자 중국의 첫 국제영화상을 수상한 왕인미의 “어광곡(漁光曲)”, 일생을 함께 한 부인 진이의 영화들도 빠침없이 소장하고 있다.  근 10여 년래 민족사의 갈피에 큰 족적을 남긴 우리의 인걸(人杰)들을 논픽션과 픽션으로 번갈아 조명하는 일에 빠져 있는 나에게서 김염은 선참 조명하고 싶은 둘도 없는 인물이자 소재였다.  하지만에 나에 앞서 김염 관련 논픽션물들이 해내외에서 련이어 나왔다. 영화 100주년, 김염 탄생 100주년에 영화광으로서 헌례작품을 꿈꾸었으나 나의 감질난 창작의욕은 실현되지 못하고 말았다.  그리하여 픽션으로 만들기로 했다. 이는 내가 시인 윤동주를 평전뿐 아니라 우리 문단에서 처음으로 소설화 한 것과 같은 맥락의 창작성향이라 볼 수 있다.   이러한 고심에도 불구하고 픽션과 논픽션의 완충지대에서 고전하며 자맥질 하고 있는 우리 “력사+소설 쟁이”들에 대한 문단의 시선은 곱지만은 않다.  편한 문체, 자극적인 스토리에 길들여진 동인들과 독자들의 몰리해가 그 주된 원인이다. “문(文)과 사(史)는 불가분리”라지만 왜서인지 우리 문단에서는 력사소재를 다루는 이가 적고, 그 소재를 순문학이 아닌 낡투로 취급하는 경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신 한 세기 이전에 내던진 양것의 박래품을 주어들고 그에 대한 아집적인 취미야말로 모던하고 전위적인 문학인 듯 스스로의 상아탑을 쌓고 자족의 미주를 기울이는 이들이 외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향도 있다.    “소설을 쓰면서 그 분야를 관장(管掌)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이 하필이면 력사에만 빠져있다”며 미간을 찌푸리는 웃사람들의 로파심적인 우려에다, “왜 케케묵은 냄새나는 사료집이나 뒤지고 앉았냐?”며 온라인에서의 악플 또한 만만치 않다. 그러한 몰리해의 탁류에 치대이며 나는 한 사람의 명구를 떠올렸다.  유성영화시대가 왔다며 비아냥거리는 영화사 사장에게 “당신은 유성영화를 만드시오, 나는 위대한 영화를 만들겠소”라고 말했던 무성영화의 거장 챨리 채플린이 호매롭게 던졌던 유명한 어록. 그러한 편협한 시안을 가진 이들에게 나도 “당신은 당신 나름의 모던한 작품을 쓰시오. 나는 나 나름대로 우리의 옛 인걸들을 쓰겠소”라고 말하고 싶다.    김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려는 나의 간절한 소망에 보응이라도 주련 듯 소설 “무성시대”의 스토리는 “중국작가협회 소수민족문학중점지지 작품”으로 선정되였다. (기획서 출제 당시의 중문 원제는 “火焰”, 조선문 원제는 “수은등 아래의 황제”였다.)  금번의 소설 “무성시대”는 아이들의 시선으로 문혁의 란장을 그린 “마마꽃, 응달에 피다”, 출국붐 속에 스러진 조선족 녀인상을 그린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한민족이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조명한 “시인”, 조선족 최초 일본군위안부의 실상을 그린 “춘자의 남경”에 이은 나의 여섯번 째 장편소설이다.   그리고 김염 타계 35돐에 드디여  련재를 시작했다, 영화의 무성시대를 살아 온 예술가를 위해 한 목청 랩소디를 부르게 되여 기쁜 마음이다.    3   영화채널에 혹간 나오는 김염을 두고 그이의 빼여난 용모나 늘씬한 신장, 복근에 시선을 몰부어 부러운 듯 얘기하며 그이를 아이돌에 비하는 요즘의 시선들을 두고 그들의 용어처럼 나는 “멘붕”(신세대 용어로서, 정신상태를 의미하는 “멘탈리티”의 줄임말과 “붕괴”의 합성어이다. 즉 “정신이 허물어져버린 상황”을 이르는 말)에 빠진적 있었다.  어제의 세대를 기억해 둘 우리의 지금의 세대가 사라진 후 이 세상에는 어떤 기억들이 기억되고 어떤 기억들이 망각될까?  우리 또한 다음 세대들에게 아무런 기억도 없이 망각되지 않을가? 그러한 속찬식 문화풍토에 우려를 가지며 스스로 자문을 구해봤던 질문이다.    심리학 학자이자 영화감독인 루이스 브뉘엘은 일찍 “기억은 우리들의 일관성이자 우리들의 리성이며, 우리들의 행동이며, 우리들의 감정이다. 기억 없이는 우리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한적있다.  기억이 없는 삶은 삶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들의 삶을 만드는 하나의 큰 요소가 바로 기억이라는 점을 알아두어야 한다. 그러할진대 과거의 력사와 그 굴곡진 장하를 거슬로 온 민족의 인걸들, 그들의 력사의 공적을 기억해야 한다. 그 기억을 후세에 남기는것은 밀어버릴 수 없는 책임이며 또한 망각할 수도 없다. 망각해서는 안되는 그 기억들이 그 민족의 소급과 비전을 위한 받침돌이 된다.    소리와 영상이 획기적인 변혁을 가져와 3D 영화들이 극장가를 점령한 21세기의 오늘 날, 김염의 무성영화를 보면서 조금 어색하고 당황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의 생애를 알고 다시 보면서 차츰 익숙해졌고 오히려 편안했고 또 다른 감동을 받았다. 소리는 없어도 울림이 컸다. 배우의 풍부한 표정과 몸짓과 그 것이 전해주는 강렬한 메세지에 오감이 열리는 듯했다.  그동안 우리는 너무나 무차별적인 악음이나 소음에 로출되여 있었던 것 같다. 눈 두덩이와 코마루, 귀바퀴 위에 거추장스러운3D 안경을 얹고 얻어내는 더 실감나는 립체영상은 기술적인 감탄은 주지만 정신적인 감동은 주지는 못하는 듯 하다. 때문에 때때로 무성영화, 흑백영화, 그 옛날 영화가 그립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활동인형이라 불리던 영화도 그 양상이 많이 바뀌였다. 하지만 그 모든 변화에도 변하지 않는 건, 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마음과 자세이다. 그 마음을 그대로 간직한 김염의 아우라가 한동안 잊혀지지 않 것 같다.    몇해 전 중국영화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중국영화의 한 세기를 통틀어 가장 뛰여난 영화인 1백 명을 선정하는 작업이 있었다. 그 1백 명 가운데 최선두를 다툰 사람중의 하나가 다름아닌 완령옥과 김염이였다. 무성영화나 유성영화나 대배우들은 하나 같이 예술을 위한 생활의 형극이라는 길을 걸었다. 김염도 외는 아니였다.  서울 의사가정에서 태여나 약관의 나이에 상해로 가서 중국영화의 톱스타가 된 전설의 예술가 김염. 력사와 인간이 빚어낸 놀라운 신화와 한 배우의 생애가 중국과 한민족의 현대사와 예술사를 관통한다. 수난 많은 민족사와 중국영화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우리민족의 걸출한 인걸- 김염, 그의 모습을 퇴색하지 않는 한 컷의 필림으로 가슴 골방 깊이 소장하고 싶다.   - “청우재(听雨斋)”에서    “장백산” 2018년 제1호    
15    "음수사원"의 마음으로 댓글:  조회:1181  추천:10  2018-05-01
후 기   "음수사원(饮水思源)"의 마음으로   김혁     가을 비가 추적거리던 6년 전의 가을 날, 지인들과 함께 발족한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의 답사차로 룡정에서 명동 지역까지 비줄기를 거스르며 강행군을 한 적 있었다. 그때 승지마을에 이르러 주덕해 주장님의 고향집 옛 터를 찾아 보았었다. 비에 젖은 조촐한 기념석조물이 우리를 맞아주었다. 열심히 비문을 읽다가 아, 명년 3월이 주장님의 탄신 100주년이구나!하고 소스라쳐 깨닫고 그 동안의 무감각에 대해 자책하며 감개에 흠뻑 젖었었다.   비 속에서 강행한 답사 끝에 독감을 앓다가 그 감기의 펄펄 끓는 온열속에 나는 주덕해 주장님을 위한 위인전기를 집필하기로 마음먹었다. 창작충동은 주체할 수 없는 열기처럼 나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금방 민족의 걸출한 시인 윤동주의 일대기를 소설화하는 작업을 끝내기 바쁘게 이 작품의 집필에 헛헛한 의욕을 느끼며 달라붙었다. 중국조선족이라는 숙명의 락인이 찍혔는 작가로서 음수사원(饮水思源)의 마음으로 중국조선족의 오늘을 있게한 “대부”격인 한 인물의 발자취를 감동하며 더듬어 보았다.  절박함으로 나선지라 시간에 쫓겨 설명절 기간에도 나의 키보드는 쉼모르고 창밖의 폭죽소리와 더불어 맹렬하게 울렸다.   그리고 이 전기물은 특별히 아이들을 위한 문체로 만들기로 하였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해리포터를 알고 손오공을 알고 트랜스포머(变形金刚)를 알지만 우리의 주장 주덕해를 모른다. 주문을 외면 동물로 둔갑하고 구름을 타고 하늘을 나는 거짓의 판타지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왜놈과 맞서고 국민당을 물리치고 미제와 싸운 우리의 걸물들의 진실한 이야기에는 흥취를 잃는다. 그 응당 충만해야 할 부분이, 잊혀지고있는 공백과 유감과 아픔이 내가 금방 한부의 장편소설의 고된 창작에 마침표를 찍기 바쁘게 또 한번 이 작품의 집필에 냉큼 뛰여든 리유다.   주덕해 그이는 중국조선족의 “왕 별”이시다. 조선민족 력사의 거대한 산맥 한가운데 의연히 솟은 거대한 봉우리이며 200만에 달하는 중국 조선족들을 대표하는 졍겨운 얼굴이다. 어려서 두만강을 건느며 민족의 수난에 마음을 적셨고 북만의 깊은 밀림 속에서 일제와의 처절한 사투에 청춘을 바쳤으며 혁명의 성지 연안을 찾아 중국혁명의 승리의 신념을 다졌고 조선의용군을 거느리고 중국의 광활한 대지를 활보했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의 산파로서 중국조선족의 정초를 닦아 온 한 혁명가의 초상을 그리면서 나는 여태 창작해온 여느 쟝르나 문체보다는 다른 농도와 줄기의 중후한 기운을 느꼈다. 그리하여 불과 석 달도 못되는 잛은 시간이였지만 주장님의 100주년 탄신을 맞으며 가히 조선족문단사상 첫 청소년인물전이라 할만한 이 작품을 그이의 령전에 바칠 수 있었다.     초판본 표지   중판본 표지   그러다 6년이 지난 후인 오늘 또 중판본을 내게 되였다. 중판본은 시간에 쫓겨창졸하게 창작했던 초판본에서 많은 거친 부분을 더 정제해 다듬었고 특히 조선족자치주의 건설에 바친 그이의 마멸할 수 없는 업적에 대해 큰 장절을 내여 더욱더 상세하게 보완해 다루었다. 중판본을 내면서도 초판본을 내였던 그때와 꼭 같은 심경, 그저 나의 미숙하고 작은 필봉이 이 위대한 인물을 그려내는데 그 터치가 모자라 후덕하고 청렴하고 강직한 그이의 모습에 흠결을 줄가 두려운 마음이다.   빠른 시일 내에 질 좋은 중판본을 찍어 준 연변인민출판사에도 감사를 드린다. 초판본을 내던 시기, 방학기간 나와 함께 방대한 자료를 타이핑 해준 딸 소정이, 지금은 류학길에 오른 딸애에게 이 중판을 다시 한 번 기꺼이 선물하고 싶다. 걸 그룹이나 아이돌의 음악에만 빠져 있던 딸애는 아빠를 도와 이 책을 묶어내기 위한 자료를 정리하면서 할아버지 세대의 헌신적이고 빛나는 족적에서 감동을 느꼈다고 했다.  클릭 한번에 무어든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인터넷 문화에 익숙한 딸애 또래들이 이러한 민족의 위인들의 삶을 기록한 쟝르도 더불어 읽으며 사색의 문도 클릭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어느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기자, 소설가의 삶을 병행 해 온 나로서는 ‘문학적 다큐멘터리’로 특징지어 질 수 있는 다큐멘터리적 글 쓰기가 남들과 차별화 된 나의 창작성향”이라고 밝힌적 있다. 그러한 창작성향으로 소설쓰기 외에도 근년간 인물평전, 력사기행, 칼럼 등 쟝르들을 내 창작 스케줄의 주요한 순위에 놓고 다량으로 창작해 내고 있다. 또 몇해 전 어느 아동문학상을 수상하는 자리에서 나는 이제 짬을 내여 아동문학창작에도 간간히 필봉을 돌릴 터라고 서약한적 있다. 오늘까지도 그 서약을 잊지않고 결과물들을 한 권 또 한 권 펴내게 되여 마음이 뿌듯하다.   이에 그치지 않고 소명의식을 갖고, 우리 아이들을 위한 우리 위인들의 이야기를 펴내는 응분의 작업에 계속하여 필봉을 크게 기울일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린다.   -      2017년 9월 룡정 “청우재”에서    
14    글 속에 흐르는 력사와 시대 댓글:  조회:1137  추천:16  2018-04-19
   
13    우리 문학의 영속과 번영을 기원하며 댓글:  조회:949  추천:12  2017-11-12
우리 문학의 영속과 번영을 기원하며 - 제36회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에서의 축사 김혁 (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김병민 총장님, 오상순 교수님 이하 평심단 여러분, 존경하는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존경하는 수상자 여러분, 래빈 그리고 동인 여러분,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제36회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에서 축사하의 메세지를 드리게 됨을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저 역시 왕년의 연변문학상 몇차례의 수상자의 신분으로서는 너무나 벅차고 의미있는 순간이라 생각됩니다.   해마다 의례적으로 진행되는 우리 문단의 하나의 축제, 《연변문학 문학상》시상식은 이제 굳이 감흥스러운 설명이 필요없는 민족 공동체 사회 최고 굴지의 문학상으로 떠올랐습니다.   권위적이고 성숙된 문학상은 더 격이 높은 문학플랫폼을 만들고 나아가 민족공동체사회의 문화토양을 비옥하게 만드는 추진력 있는 처방전으로 될수도 있습니다.  진정 우리의 작가가 주인공이 되고, 훌륭한 작품이 본위가 되는 문학상, 이러한 흔들림없는 품위의 지속적인 유지야 말로 속기와 금전의 번뜩임으로 란무하는 요즘 세속에서 바람직한 문학 분위기를 만들어갈 수 있고 그러한 문학 풍토야 말로 침체기의 우리 문학을 보다 앓음앓이뒤의 수척함을 거둔 해맑고 건강한 얼굴로 거듭 날 수 있게 할수 있지않냐 생각해 봅니다.   이 자리를 빌어 그야말로 자호할만한 상을 수상하신 본 기 《연변문학 문학상》수상작가들에게 동인으로서의 가감이 없는 축하와 뜨거운 박수를 보내드립니다.    더불어 우리 문단의 웅숭깊고 년륜깊은《연변문학》지를 통하여 어제의 행간에서도 그랬듯이 래일의 갈피에서 보다 많은 윗 세대를 따라잡고 초월할 수 있는 빼여난 작가와 우리 문학사에 얼골을 남길만한 작가, 작품들이 나오기를 진심 기대합니다.   불과 달포전 세계 굴지의 문학상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일본계 영국작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수상소식을 접하고 영국국영방송 BBC를 통해 “노벨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매우 감동적이다”고 말했습니다.     문학의 위상에 바닥에 내쳐진 순간에도 굳이 삶의 방편이 돼 주지않는 문학을 선택하신 우리의 수상자 여러분들도 이 말을 그대로 복창할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연변문학 문학상 수상은 대단한 작가들의 발자취를 밟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내가 그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일부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매우 감동적이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는 또 “불확실한 순간에 있는 우리에게 노벨상이 긍정적인 힘이 돼 주기를 희망한다”고 전언했습니다.   오늘 문단사 영광의 한페지에 이름 올린 우리의 수상자들, 그리고 아직도 서재 구석쪽에서 외로움을 무릅쓰고 고전하고 있을 우리의 모든 작가들, 우리 모두가 문화적 자신감을 다시금 환기하며 삶의 불확실한 순간순간에도 긍적적인 에너지를 세상에 전할 수 있는 필과 문장력과 자세를 갖추고 보다 좋은 작품들을 량산, 헌물(獻物) 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어 재삼 축하의 말씀을 드림과 아울러 우리 모두 두손 모아 중국조선족 문학의 번영과 영속을 기원해 봅시다. 감사합니다.   2017년 10월 27일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12    100년의 성좌.星座 를 우러르다 댓글:  조회:1210  추천:15  2017-03-26
100년의 성좌.星座 를 우러르다 김혁 (소설가,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인물전 “윤동주 평전”과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저자)   시민 여러분, 추운날씨에도 소슬한 바람을 맞받아 이 언덕까지 삼오삼오 모여오신 존경하는 시민 여러분 우리는 오늘 옷깃을 삼가 여미고 하나의 순결한 령혼앞에 섰습니다.   오늘은 일제 강점기의 암울한 시기에 짓눌린 령혼을 일깨우는 희망의 시로 잠자고 있는 민족정신을 깨닫게 한 민족적 저항시인 윤동주님이 서거 72주기를 맞는 날입니다.   순결한 시인은 “시대처럼 올 아침”을 맞지 못한채 민족의 해방을 겨우 여섯 달을 앞두고 결국에는 일제형무소에서 나젊은 스물아홉의 삶을 마감합니다.   그렇게 이국의 형무소에서 이슬로 사라진 나젊은 시인의 탄생 백주년, 서거 72주기를 기념해 지금 해내외에서 추모 행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순차적으로 열리고있습니다. ​   여러분, 1917년 만주의 북간도, 바로 오늘날 중국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나 올해로 백세지후(百歲之後)를 맞는 그이는 고향이 자호할만한 시인입니다. 국내외에도 추앙받는 저명한 문인들이 많지만 윤동주만큼 우리들이 목놓아 찬미 할 모든 조건을 다 갖춘 문인은 없다고 해야할 것입니다. 그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리면 어느결에 감격과 느낌표가 머무는 시인이 바로 윤동주 시인입니다.   민족을 사랑한 윤동주는 강인한 항일,저항정신을 지녔으며 사랑과  평화를 지향하며 이를 맑고 순한 언어로 써나갔기 때문에 오늘날 그렇게 많은 독자들의 공감과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생활일반에서 우러나오는 내용을 보편적인 서정으로 적었으며, 그의 시에는 인간과 우주에 대한 깊은 사색,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실한 자기성찰의 의식이 담겨져 있습다. 비록 시인이 20대의 애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 이상 아주 많은 생애를 산 사람의 안목에 시인의 생애와 작품은 들어있습니다.   자신의 삶의 자세를 준엄하게 점검하고 자성하는 목소리가 들어있는 그이의 시를읽으며 백년을 기록하는 그이의 생애와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인생의 유한을 넘어서는 문학과 예술의 영원을 봅니다. 따라서 그이를 기리는 일은 오늘날을 사는 우리의 자긍심과 책임감을 일깨우는 시간과 기회로 될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   그러한 책임감과 사명감을 안고 시인의 탄생 100주년을 맞으며 우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올 한해 많은 일들을 기획하고 있습니다. -룡정.윤동주 연구회 산하의 력사답사팀의 주도로 룡정 나아가 연변의 력사 유적지들의 탐방을 정기적으로 이어나가려 합니다. -윤동주의 문학정신을 선양하며 나아가 민족의 력사와 현황을 아우르는 문화 포털사이트를 개설하려 합니다. 윤동주의 고종사촌이자 숙명의 동반자인 송몽규를 기리는 기념행사를 윤동주에 대한 기념과 더불어 펼쳐나가려 합니다.  - 조선족 처음으로, 윤동주의 생애를 어린이들의 눈 높이로 맞춘 청소년인물전 “’별’의 시인 윤동주”를 출간, 각 학교에 무상으로 보내주려 합니다. - “'별을 노래하다'- 윤동주 시 가영대회”를 지난해에 이어 제2탄으로 성대하게 거행하려 합니다. 윤동주의 생애를 담은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려 합니다. - “윤동주 평전” 그리고 윤동주의 문학생애를 소설화한 장편소설을 출간하여 백주년에 헌례하려 합니다. 이외 윤동주 묘소 참배, 시랑송회, 세미나 등 다채로운 행사들로 시인의 백주년을 맞은 이 한 해를 축제의 분위기로 이어나갈 계획입니다. ​   여러분, “별의 시인”이라 불리는 윤동주 시인님은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많은 명상을 해왔습니다. ‘별하나의 이름과 별 하나의 추억” 윤동주님이 입을 모아 세였던 별입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별은 백년전의 그 별일테지요.  그 별을 다시 보는 마음이 새롭습니다. 별 하나 하나마다 의미를 부여하던 시인은 이제 자신이 하늘의 별이 되였습니다, 우리들의 심방에 오롯이 떠오른 민족의 별이 되였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얄 일들은 시인의 주옥같은 글을 읊조리며 시인이 우러러보았던 수많은 별들을 눈이 시도록 바라볼 일입니다.   여러분, 윤동주와 같은 민족시인을 고향에 모실수 있고  또 그이의 백주년을 기념할수 있는건 우리 문단, 우리 사회의 축복이 아닐수 없습니다. 그러한 마음으로 오늘 우리는 그이의 혼이 스며있는 이 동산 언덕에 모여 섰습니다. 그리하여 루루 한세기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와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여나듯이’ 시인의 “이름자 묻힌 무덤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합니다.​ 감사합니다. ​ 2017년 2월 16일 "백명의 시민, 백년의 시인을 노래하다" - 룡정.윤동주연구회가 기획, 주최한 "윤동주탄생 100주년", 윤동주 옥사 72주기 기념대회에서  
11    해란강의 늠실한 흐름에 이 몸을 실어 댓글:  조회:1320  추천:13  2017-01-17
. 축사 .   해란강의 늠실한 흐름에 이 몸을 실어 - 제2회 룡정시문학축제 “해란강은 흐른다”에 부쳐   김혁     존경하는 래빈 여러분, 그리고 우리의 바르고 아름다운 운문(韻文)을 사랑해 불더위를 물리치며 이 자리에 모여 오신 문필가 여러분, 랑송애호가 여러분 이 소중한 자리를 빌어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해 여러분들께 축사를 올리게 됨을 광영스럽게 생각합니다.    오늘 우리는 옷깃을 여미고 룡정이 낳은, 겨레가 애대하는 걸출한 인걸 세분을 추앙의 높은 제단에 모셨습니다.  저 하늘의 찬란한 성좌로 빛나는 걸출한 민족 시인 윤동주, 일제강점기 항일의 저항혼을 일깨운 심련수, 조선족 당대시단의 대표자 김성휘… 이들의 존함 석자를 부르고 되뇌는 일 조차도 우리는 사무침에 애련(愛戀)과 앙모의 심정을 먹먹히 곰삭이게 되는군요.   일송정 푸른솔의 기상과 해란강의 유장한 흐름을 안고 룡두레 우물가에, 북간도의 상공에 그리고 온 겨레의 마음속에 우련한 함자를 도렷이 새긴 이들, 그러한 민족혼들을 기리는 절절한 초혼의 마음으로 우리는 오늘도 그이들을 곡진하게 불러봅니다.   불과 한달전 저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별을 노래하다"는 명제로 윤동주 시인의 시읊기 가영대회를 비교적 규모있게 개최한적 있습니다. 그 자리에서 민족의 인걸들의 아름다운 시심과 민족혼을 받들어가는 행사들을 이어나갈 서약을 주고 받았는데 오늘 또 한번 그러한 취지의 시 축제가 열리게 되니 참말로 소회가 가없네요.   우리의 선각자들이 개척의 보습을 박고, 교육계명의 종소리를 울리고, 일제와의 가렬한 사투에 해란강반의 진달래 꽃잎처럼 산화해갔던  조선족 문화의 발상지 룡정에서 어머니 해란강은 오늘도 변함없이 흐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그 기상 그 혼은 “잎새를 스치는 바람”(윤동주)으로 “힘차고 늠실늠실한 흐름”(심련수)으로 “세월은 흘러도 변함이 없이”(김성휘) 우리들의 심성에 스미고 뇌리를 흔들어 깨웁니다.    연변시랑송회가 2년째 비교적 훌륭하게 펼쳐 나가고있는 “해란강은 흐른다”라는 타이틀의 축제는 바로 고향의 강의 위상에 걸맞게 그 기상을 격앙된 목청에 담고 현란한 퍼포먼스에 싣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민족의 인걸들을 노래하고 그이들의 보귀한 정신적 유산을 고양해 가는 일들이 우리 문단 나아가 사회의 하나의 기상으로 자리 잡을때 우리의 하늘은 더욱더 청명을 펼치고 우리의 강은 더욱더 맑은 여울소리를 들려주지 않을가요!   해란강반에 족적을 남긴  시인들을 노래하는 이 자리에서 해란강을 읊조렸던 심련수 시인의 명시 “추억의 해란강”을 추려서 읊는것으로 오늘의 축사를 가름하고자 합니다.   내 잊지 못할 하나의 흐름인 너 검은 땅 간도의 품을 흐르는 생명수야 너는 영원히 믿음성있는 나의 동무였다  … …   얼마나 반겼는지 너는 알리라 고갈(枯渴)을 축이고 고로(苦勞)를 씻은 것도 이 몸이 이만 됨도 누구의 힘인지 알리라.   봄, 여름, 가을, 겨울 흐린 날 개인 날 말없이 혼자서 다닐 때에도 마음속엔 언제나 네가 동무하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2016년 8월 9일
10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댓글:  조회:1295  추천:11  2016-10-11
. 제3회 "두만강"문학상 축사 . 청산을 에돌아 “두만강”은 흐르고   김혁(소설가,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존경하는 청산그룹 리청산 리사장님, 길림신문사 홍길남사장님,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주석님 그리고 귀빈 여러분, 매스컴과 문학계의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세상이 밝은 기운으로 가득한 6월의 복판에서, 저 역시 “두만강”문학상 수상자의 한 사람으로써 세번째로 이어지는 두만강문학상 시상식에 축사를 드리게 된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먼저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평소 책임감을 떠인 창작혼과 부단한 정진으로 오늘 영예의 상을 수상하신 수상자 여러분께 진심으로 축하를 드립니다. “두만강 문학상”은 길지 않은 년륜에도 불구하고 우리 문학계의 영향력있는 문학상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으며, 그 동안의 수상작 또한 우리시대의 삶과 정신을 결집해 낸 문학계의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문학상의 짜임새나 수준이나 기획력이 문단의 그 어떤 상에 비견해도 못지않다는것을 생각하면 이제 권위와 품격을 자랑하는 “두만강 문학상”의 성장과 미래가 눈앞에 훤히 보인다고 해도 좋을것입니다. 조선족문단에서 해외인사들의 헌금으로 세워진 이러저러한 문학상이 적지않지만 순 우리 기업인의 쾌척으로 이루어지고 이렇게 이어져가고있는 문학상은 흔치않은줄로 알고 있습니다. 상의 위의(威儀)를 정착시키기 위해서 열정과 로고를 바치신 리청산 리사장님과 “길림신문”이 이룬 결실에 큰 박수를 보냅니다. 이 소중한 문학상이 우리문학의 감성에 맞는 문학적 토양을 잘 걸구어 가면서 중국조선족 문학의 한 진경(眞景)을 펼쳐보이기를 기대해봅니다. 지금 우리 조선족공동체는 변혁기의 소용돌이속에 몸부림하고있으며 또한 서글프게도 인문학 상실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따라서 문학인이 몸 담근 성소(聖所)에는 그 사회적인 책임감도 따르기 마련입니다. 렬악한 상황속에서도 굳건하게 문학을 고집하면서 살아가는 우리 문인들이야말로 민족발전의 지혜를 창출하고 그 정신세계를 구축해 나가며 우리 삶의 질 향상에 이바지하는 선봉장들인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수상하신 여러분의 작품들은 참으로 값진 열매라고 생각합니다. 조광명 시인님이 보여준 탁월한 의경의 경지와 오경희 수필가님이 보여준 민족정서의 고운 결, 우상렬 교수님이 보여준 정조준의 호쾌발랄한 평문을 수상작으로 뽑으면서 심사위원의 한사람으로서 너무나도 행복했습니다. 이렇듯 시대의 아픔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붙잡도록 해주는 빼여난 작품을 창작하신 수상자들에게 경의를 표합니다. 이러한 문학이 바로 부침과 리산의 시대를 살고있는 우리의 아픔과 고민을 도닥여 주고 지역과 세대를 하나로 이어주며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해주는 하나의 중요한 요소가 될것입니다.   존경하는 문인 여러분, 이러한 창조적 정신의 발현으로 우리 문학의 진흥에 적극 동참하여 앞으로 중국조선족문학의 장하에 큰 흐름을 보태주시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며 성리학자인 이황의 시조 한수로 오늘의 심경을 비추어 읊고자 합니다.   청산은 어찌하여 만고에 푸르르며 류수는 어찌하여 주야에 그치지 아니하는고 우리도 그치지 마라 만고상청하리라   감사합니다.   2016년 6월 16일     
9    "압록강"의 용용한 흐름처럼 댓글:  조회:1798  추천:12  2015-09-07
. 축사 . ​ "압록강"의 용용한 흐름처럼 ​ 김혁      심양에 몇번인가 다녀왔는데 개인적으로 그 리유는 지극히 간단했습니다.  심양이 료녕성의 성도로 동북에서도 가장 큰 도회지의 하나이고 또 유네스코에도 등재된 유서깊은 고궁이 있어서 유흥의 심정으로 찾은것도 있었겠지만 그 무엇보다도 우리 민족의 애환이 서린 서탑이 있어서였고 또 기라성같은 외래문자의 홍수속에서도 우리말을 꿋꿋이 구사해나가고있는 료녕신문이 있어서였고 지금은 작고하셨지만 우리 가락을 시줄로 뽑아낸 유명시인 박화선생이 있어서였습니다.  그만큼 우리가 심양을 즐겨 찾는것은 하나의 지역이 단지 볼거리와 먹거리로 매김되는 천박한 기억이 아닌 민족문화의 기호로 단단히 락인된 곳이기때문이라 하겠습니다. ​   불과 십여일전 “장백산” 잡지사에서 연변지역에 와서 문학기행을 조직했습니다. 그때 기쁜 마음으로 동참하여 산재지역에서 온 젊은 문학도들과 함께 두만강, 해란강지역을 답사했습니다. 그러다 오늘은 이렇게 “압록강”이라는 이름으로 산재지역 문인들과 문학향연을 펼치게 되였습니다.  ​미디어의 눈부신 혜택을 받고있는 오늘날 우리는 이렇게 심양에서도 장춘에서도 북경에서도 연변에서도 컴퓨터나 핸드폰 기기만 열면 서로의 문안을 주고받을수 있고 마음껏 문학적 취향에 따른 “문학 메신저”, “문학카톡”도 수다를 떨며 할수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서로 먼듯 가까이 링크되여 있습니다. ​ 료녕조선문보사가 주관하는 “압록강”문학원지의 발전을 보며 다시 압록강의 어원에 대해 반추해 보았습니다. 압록강이라는 이름은 송나라에서 편찬된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 "물빛이 오리의 머리색과 같아 압록수라 불린다(色若鴨頭 號鴨淥水)"라고 기록되여 있는데 이는 리백의 시 양양가(襄陽歌) 중 "멀리 보이는 한수는 오리의 머리처럼 푸르다. (遙看漢水鴨頭綠) "에서 련상해 강 이름을 단것이라는 견해가 유력합니다. 만주어로는 “얄루”, “두 벌판의 경계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 조선민족에게는 압록이 “우리”라는 뜻의 고대 조선어를 차자(借字)한것이라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렇게 시인의 붓끝에서 련상된 큰 강가에 우리는 모였습니다. ​   “압록강문학상”도 좋지만 또 “해란강 문학상”, “두만강 문학상”, “가야하 문학상”등등으로 우리문단에는 강으로 이름 지어진 문학상이 유난히도 많습니다.   거개가 민족의 성산 장백산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그 강들이 우리 민족의 력사와 정서와 멋을 타고 어우러져 우리 삶의 면면을 적시며 흐르고 민족문화의 장대한 흐름을 이루며 소소리 높이 궁극의 목표를 향해 흘러나아가기를 바라는바입니다.    수상자 여러분들에게 축하를 드리며 평심위원 여러분, 후원자 길경갑선생의 신로에도 경의를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2015년 8월 28일    - 제6회 《기원컵》 압록강문학상 시상식에서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8    "윤동주 평전" 연재 시작 댓글:  조회:2013  추천:13  2015-06-03
드디어 "윤동주 평전"의 련재를 시작했다. 2006년부터 여러 곳에서 윤동주 관련 인물전 집필 청탁을 의뢰받았으나  보류하고 있었다. "윤동주 연구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송우혜선생의 전기물중의 수작 "윤동주 평전"도 이미 앞서 출간 되였거니와 나의 무딘 필을 함부로 들었다가는 온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의 위상에 흠결을 줄가 저어되여 서였다. 하지만 그동안 번중한 창작스케줄에 혹사하면서도 나의심방 깊은 곳에는 늘 윤동주라는 이름 석자가 크게 자리하고 있었다. 윤동주의 고향 용정에서 근 10년간의 답사와 연구를 거쳤고 지난해 윤동주 관련 사단법인 연구회도 발족시키면서 다시 평전에 대한 집필 청탁이 들어왔다. 용기를 내여, 무엇보다 민족작가로서의 막중한 사명감으로 평전집필을 시작하기로 했다. 60만자 분량으로 된 평전은 중국 장춘에서 간행하는 조선족 대형간행물 "장백산"에 올해 2월호부터 련재를 시작했다. 3년동안, 련재, 2017년 윤동주 탄신 100주년을 맞아 출간하게 된다. 련재동안 많은 윤동주를 애대하는 독자들과 전문가들의 금언(金言)과 방조를 부탁드린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7    별의 고향에서 바치는 헌사(獻辭) 댓글:  조회:3207  추천:16  2014-09-28
별의 고향에서 바치는 헌사(獻辭) “룡정윤동주연구회” 설립 경과보고   김 혁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의 저자,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존경하는 학계인사 여러분, 그리고 문인들과 교직원 여러분, 존경하는 하객 여러분, 존경하는 윤동주의 유가족 오인경 녀사님 오늘 저희들은 유서깊은 룡정땅에서 룡정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를 위한 정규적인 단체의 발족을 기꺼이 맞이하게 되였습니다. 윤동주가 태여난 이곳, 가까이 고향집을 굽어보며 선바위가 우람하게 솟고, 그 앞으로 시인이 어릴적 물장구를 쳤던 륙도하가 유유히 감돌아 흐르고, 시인이 즐겨 톺았던 더기우의 골목길이 아직도 고불고불 몽롱히 남아있고, 시인이 한줌의 뼈아픈 하얀 재로 돌아와 고향의 동산마루에서 보람처럼 무성한 풀떨기를 피워 올리고 있는 이곳에서 저희들은 근 한세기전 어느 추운 겨울에 태여나 룡정이라는 이름과 함께 뜨겁게 영생하고있는 한 민족시인을 절절히 그리게 됩니다. 따라서 윤동주에 깊숙히 심취되고 지극히 애대하는 한 소설가의 뚝심과 정열 하나로 시작되여 연구회가 오늘 고고성을 터뜨리기 까지 짧지만 지극히 어려웠던 행보를 돌이켜 보게 되는군요. 고문단의 꼭지점에 굳건히 서주신 김병민 연변대 교장님, 주관단위로서의 겹대문을 흔쾌히 열어주신 문체국 박인철 국장님 그리고 똘똘 뭉쳐 보조를 맞추어준 연구회 임원진 그들의 정성으로 보듬은 두손에 받들려 “룡정윤동주연구회”가 드디여 고고성을 울릴수 있은것입니다. 그리고 특별히 북경조선족 화가동맹의 리산호 화백에 대해 말하고저합니다. 원체 저의 윤동주 장편소설의 표지를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숙고하며 그려왔던 리화백은 이번의 설립식에 현수막을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고 밤을 패며 그 그림을 거폭의 초상화로 수개해 보내주었습니다. 어릴적 사고로 한손을 잃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려온 그는 민족의 걸출한 시성의 초상화를 그리는데 온 몸이 붓자루가 되여 몸을 던졌다고 감개를 표했습니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시인에 대한 숭모사업은 그의 고향에서 내내 이어져 왔습니다. 권위간행물의 “윤동주문학상”이 제정되였고 청소년을 위한 “중학생문학상”도 이어져 왔으며 또 몇몇 민간단체의 가상스러운 노력에 의해 그이를 위한 동시비가 서고 그이를 위한 론문집이 출간되면서 우리는 고향이 낳은 윤동주를 때때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정부의 폭넓은 지원으로 근년들어 윤동주 생가가 크게 보수 되고 윤동주가 다녔던 명동학교가 복원되고 윤동주 생가가 국가3a관광지역으로 지정되고 윤동주 묘소가 룡정시 문물보호관리구역으로 지정되는등 반가운 거동이 일고 있습니다. 이에 편승하여 탄생된 저희 “룡정윤동주 연구회”는 향후 윤동주를 위한 일련의 사업들을 차분하고 성실하게 펼쳐나가고저  합니다. 우선 시인이 태여난 생몰일 즉 태여난 날과 서거하신 날을 꼭 챙겨 기념하려 합니다. 명년 윤동주 서거 70주기를 맞이해 연구회총서의 첫 문집으로 되는 “윤동주 추모문집”을 펴내고 그이의 서거일 2월16일에 때맞추어 출간기념회를 치르려 합니다. 청명을 맞으며 가족의 동의를 거쳐 윤동주 묘소를 정성으로 가토하여 수건하려 합니다. 윤동주 70주기를 맞아 명년 상반년에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윤동주 청소년 인물전기를 펴내 학교들에 나누어주려 합니다. 그외에도 해마다 윤동주 관련 연구론문, 회원작품집으로 정기 회원총서를 한기씩 정기적으로 간행하려 합니다. 윤동주 관련 백일장, 윤동주 아카데미, 학술회등을 펼쳐나가려 합니다. 해외의 윤동주 언덕길, 윤동주 기념관, 윤동주 시비 조성, 윤동주 축제, 윤동주 관련 책자의 출간, 윤동주 뮤지컬과 연극의 개봉등 내내 이어지는 방흥미애 (方兴未艾)의 열기에 비해 그이의 고향인 연변에서 아직도 그 기념사업이 활약상을 펼치지 못하고 있다고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따라서 저희들이 해야할일이 많고도 많음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저희 “룡정윤동주연구회”는 회원들의 정성과 아이디어를 알알이 모아 정부와 고문단의 지도아래 더 폭넓고 더 걸맞는 사업들을 꾸준히 펼쳐나가고저 합니다. 우리의 저명한 김호웅 교수님은 다른곳도 아닌 바로 윤동주의 고향인 룡정에서 꾸리는 연구회니만큼  “종가”의 경건과 의무의 자세를 지니고 연구회를 밀고나가라고 독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정말로 가슴 한자락에 들먹히 와닿습니다. 제기(祭器)를 반짝반짝 닦고 갖가지 알뜰정성 마련한 음식을 골막하지않게 그득 차려 올리며 우리를 있게 한 선친을 기리는 종가집의 자세로 저희들은 우리들의 민족정신을 닦고 닦고 또 닦아 오래도록 고양해가는 일에 온 몸을 게으름없이 바칠것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년 9월 27일 ​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6    "룡정.윤동주연구회"설립식 이모저모 댓글:  조회:3049  추천:22  2014-09-28
사진으로 보는 "룡정.윤동주연구회"설립식  축하공연: 사물놀이(연변대학예술학원 "불사조"풍물패) ​​ 설립식대회장​ ​설립식 주석단에 모신 래빈들​ (시계바늘 방향으로) 연변문화발전추진회 한석윤 회장, "중학생잡지사"윤동주문학상운영회 회장 로철호 주필, "연변문학잡지사" 채운산 주필​, 연변작가협회 최국철 부주석, 연구회 고문 리태수 소설가, 고문회 고문 전광하 작가, 연구회 고문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 연구회 고문 연변대학 김병민 전임총장, 윤동주의 유가족 대표 윤동주의 조카 오인경, 연구회 김혁 회장, ​룡정시문체국 당위위원 원정일, 윤동주 유가족 중국대리 허춘희 ​ 사회자: 최국호(연변텔레비방송국아나운서) 윤동주의 대표작"서시" 랑독(룡정시북안소학교) ​ "룡정윤동주 연구회" 설립 경위보고를 하는 김혁 초대회장 시랑송 "별헤는 밤" (연변인민방송국 아나운서 신금철) 기조발언을 하는 연변대학 김호웅  교수) 김병민,김호웅,리태수,전광하등 고문단에 회장단이 위임장 발급 축사를 드리는 연변대학전임총장 김병민 축사를 드리는 연변대학조문학부 학부장 우상렬 교수 축사를 드리는 연변청소년문화발전추진회 한석윤회장 시랑송 "쉽게 씌여진 시" (윤동주 장학금수혜자 류설화) 축하공연: 가야금 독주 "아리랑" (룡정시 예술단) 윤동주유족 중국측 대리가 김혁회장에게 윤동주관련 도서증정 시 랑송 "새로운 길"(룡정시북안소학교) 룡정시예술단의 축하 가무공연 하객들의 합영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5    억겁(億劫)의 꽃, 그 꽃잎을 세며 댓글:  조회:2484  추천:20  2014-05-31
억겁(億劫)의 꽃, 그 꽃잎을 세며 -김혁   할리우드의 영화거장 스필버그 감독의 작품중에 《쥬라기공원》이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기술로 1억년전 쥬라기시대에 지구를 제패하다가 사라진 공룡에 대한 완벽한 복원을 보며 감탄을 련발했었다.   공룡이 살던 그 시대 함께 공생했던 식물중에 우리 두만강 붉은 련꽃이 있다는것을 알게 된것은 그후의 일이였고 우리 신변에 공룡이 살던 1억년전의 꽃이 아직도 만개해있다는 사실에 또 한번 놀랐다. 우리는 왜 사라진것에 대해 연연하면서 수억대의 돈을 퍼부어 컴퓨터기술을 극구 활용해 괴물을 복원해내면서도 여태껏 우리와 함께 해온 꽃에 대해서는 린색을 보이고 무관심을 보이고있는걸가? 그 꽃이 소담하게 어우러진 삶의 터전들을 버리고 홀홀히 떠나버리는걸가? 이러한 련상이 내가 이번 소설 《련꽃밥》을 쓰게 된 계기이다. 부침을 겪고있는 우리의 민족공동체, 텅 비여가는 삶의 터전과 그 터전에 홀로 남아서도, 억겁의 시련을 거치면서도 의연하게 피여있는 련꽃, 그 꽃에 대해 단지 완상(玩賞)의 여유로운 눈길로만 바라볼수 없었던것이였다. 련꽃은 깊고 더러운 곳일수록 더욱 크고 아름답게 피며 다른 종을 섞지 않는 영원한 순종의 꽃이라고 한다. 속세의 번거로움에 물들지 않는 꽃이라 하여 《군자화》로도 불린다. 련잎에 이슬이나 비방울이 앉으면 자신이 감당할만한 무게만큼 싣고있다가 그 이상이 되면 고개 숙여서 자신을 비울줄도 안다. 그래서 《비움의 꽃》이라고도 한다. 련꽃을 종자로 한 소설을 쓰면서 배우게 된 련꽃의 의미다. 그렇게 《군자화》의 자세로 글쓰기의 밭을 경운해나가려 한다. 세월이라는 꽃잎을 세고 또 세며 좀더 성숙된 완상의 눈길을 가지기 위해 고독과 갈증을 견디며 스스로의 계절을 만들어 글줄에 꽃씨를 심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혀가는 일을 쉼 모르고 반복하고있다. 명리에 둔감하고 고독을 외려 달가워하는 많은 문학인들의 노력에 받들려 피페해진 문화풍토에서도 문학은 그 실추되고저 하는 가치를 멀미나게나마 이어나가고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또한 이러한 군자화의 자세들이 꽃줄기처럼 기조를 잇는다면 흔들리는 파고(波高)를 이겨내며 우리의 꽃을 만방에 향기 그윽하게 피워낼것임을 난 믿고싶다. 람루한 내 삶이 비쳐든 이야기들을 연거번거 수상작으로 뽑아주신 여러분들께 감사를 드린다.   ☞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    
4    신들리게 그리고 현묘하게 댓글:  조회:3367  추천:37  2011-02-10
. 단상 .   신들리게 그리고 현묘하게   김 혁     어느새 루항(陋港)의 맨 구석에 고독하게 죽치고 앉은 내 서재에도 신묘년의 해빛은 토끼꼬리처럼 짧게 하지만 앙증맞게 들어와 앉았다. 지난 한해는 걸출한 민족시인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는 작업으로 한해를 담금질 했다. 고된 작업이였지만 권위문학지에 련재해 호평을 얻었고 한민족 모두가 애대하는 인걸의 생애를 처음으로 픽션화해서 마무리했다는 뻐근함으로 충실했던 한해였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없는 시인”의 생애에 긴긴 각주(脚註)를 달고난 끝에는 “주마가편”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생애를 아이들의 시각에 맞춘 청소년 위인전기의 집필에 달라붙었다. 이제 집필을 막 끝내 3월에 곧 출간되게 된다. 한해가 가고 오는 수선스러운 문턱에서 서둔 까닭은 올 3월이 우리의 “대부”격인 주덕해주장의 100주년 탄신일이고 그들이 판 우물을 마시고 있는 자치주의 한 일원으로서의 “우물 판 이들을 잊지말아야겠다”는 량지와 사명감때문이다. 근년들어 나의 창작의 필봉은 많이 바뀌였다. 픽션작품을 흥감스럽게 펴내던 나의 필봉은 요사이 논픽션으로 치우쳐 민족사에 자취를 남긴 걸물들의 일대기와 함께 하고 있다. 력사의 물줄기를 바꾼 개인의 삶을 통해 한 시대와 만나고 그 시대의 공과를 헤아려보면서 넉넉한 삶을 예시하는 새로운 눈을 인물전기들은 갖게 한다는 판단에서이다.   새해에 나의 필봉은 또 하나의 인물과 만난다. 저명한 화가이자 중국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이며 반파쑈투사이자 고고학자인 한락연의 파란만장한 삶을 조명하는 평전의 집필에 착수, 이미 “예술세계”지 새해 첫 호부터 련재를 시작하고 있다. 또한 올해는 문화대혁명 발발 45주년, 세상과 인간의 다중성을 랭철하게 들여다보게하는 그 란장의 년대를 해부하는 중단편소설 몇편도 내놓으려 한다. 올해는 토끼의 해, 전래동화에 많이 등장하는 토끼는 명석한 두뇌를 활용하여 앞을 미리 예견하며 자신의 행보를 미리 구상하는 치밀한 동물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요즘 세상을 엽렵하게 사는 이들은 얼마나 될가? 늘 란마(乱麻)처럼 얽히고 설킨 관계속에 허둥대면서 상처받고 상처를 주면서 살아갈뿐. 때문에 삶에는 모법답안이 없다. 그리고 문학창작에도 소위 걸작이나 모범작이 없다. 오직 진정성을 가지고 어떻게 쓰냐가 문제이다. 불혹의 나이에도 여전히 세상의 조롱과 미혹에 시달리는 내게는 나를 흔들리지 않게 지켜줄 그 무엇이 갈급하다.  바로 문학이다. 경쟁력과 생산성에 휘둘리우고 모든 가치가 환금성으로 계산되는 요즘 사회에서 작가들은 그 위상이 납작해 졌다. 힘들다. 하지만 나쁘지만은 않다. 남들의 시선에 나는 아직도 밥그릇도 못챙기는 헛똑똑이 어리석은 작가로 보일지 모르지만 내가 추구하는 가치속에서 나는 어리석지 않다. 그리고 나는 끝끝내 지키고 싶고 지키고있는 나만의 세계속에서 누구보다 큰 부자이기때문이다. 그렇게 진정성을 가지고 큰 글을 쓰고 싶다. 시대에, 제반 분야에 굵직한 획을 그은 걸물들의 깊은 사상과 력동적인 몸짓을 적어내려가며 그렇게 령혼의 울림이 있는 호흡이 긴 글을 쓰고싶다. 작심삼일(作心三日)이 아닌 항상심(恒常心) 하나 가슴에 품고 길을 가련다. 토끼처럼 지혜론 시선으로 멀리를 보며 세상사를 섭렵하는 신풍이(神风耳)를 쫑긋이며 작은 보법이나마 부지런을 떨며 가련다.       신묘년 이 한해- 신들리게 그리고 현묘하게…   김혁 문학블로그:http://blog.naver.com/khk6699  
3    내 가슴속에 웅크린 코끼리를 만나러 댓글:  조회:3095  추천:38  2011-01-27
. 2005 연변문학"윤동주 문학상" 수상작품 "불의 제전" 창작 후기 .   내 가슴속에 웅크린 코끼리를 만나러  김 혁        (1)       판타지 작품 한편을 습작해보았다.  우리 작가와 독자들에게는 어딘가 낯설은, 이른바 판타지란 영상, 상상을 뜻하는 그리스어로서 우리의 경험 현실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초자연적 존재들에 의해 펼쳐지는 초자연적사건을 다루는 일종의 가상소설(假想小說)과 같은 쟝르문학을 가리켜 말한다.  19세기말, 네즈비트라는 작가가 환상적인 아동문학작품을 발표하면서 마술적이야기라는 뜻에서 처음으로 판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영국에서는 썩 오래전에 판타지의 독자적인 뜻이 인정되여 문학의 최고형식이라 불리는 동화와 함께 문학적으로 성숙되여왔다. 20세기후반에는 특히 아동용 환상이야기를 전승문학으로부터 구별하는 쟝르로서 쓰이고있다. 그러니 어찌 보면 성인을 위한 동화인셈이다. 지금 세계는 판타지작품에 열광하고있다. 그 정상에 오른 작품은《해리 포터》와《반지의 제왕》이다.  《해리 포터》는 영국에서 출간된 이래 전 세계 46개 언어로 번역돼 1억 2천만권의 판매기록을 세웠다. 세계 각종 상을 휩쓸었고, 영국 최고문학상인 웨트브레드상에서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 셔머스 히니와 각축을 벌린끝에 한표차로 2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그 작가인 30대의 아기엄마 조앤 K. 롤링은 명가의 덤에 올라 권위지가 선정한 세계저명인사 100명중 25위를 기록했고, 녀왕으로부터 대영제국훈장을 수여받았다. 《해리 포터》의 열풍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어른용까지 출간됐을 정도다.  남아프리카의 작가 톨킨이 창작한《반지의 제왕》도 출간된후부터 《기독교인이 성서를 읽지 않는것은 용서될수 있지만, 소설의 독자들이 을 읽지 않는것은 용서될수 없는 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20세기를 마감하면서 각종 영미문학 걸작 25위, 20세기 최고의 소설 4위, 100권의 책 4위 등의 위치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미 전 세계 10억명 이상의 독자가 《반지의 제왕》을 읽었다. 딱히 영미권에 살고있는 사람이 아니라도, 판타지애호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한번쯤은 접할만한 시대를 초월한 명저이다.  《해리 포터》와 《반지의 제왕》은 여러가지로 다른 지점에 있는 작품이다. 하지만 세계적인 명성을 얻은 이 두 작품 모두가 판타지작품이라는 점에서 판타지라는 쟝르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을 환기시키고있다.  이러한 세계를 강타하는 붐에도 무감각한 우리 문단에 얼굴 붉히며 늦깎이로나마 한편 만들어보았다.  기실 판타지는 서방의 전용물만이 아닌것 같다. 중국의 고전들인 《서유기》, 《봉신연의》, 《료재지의》등은 그 지칭(指稱)이 다를뿐이지 같은 범주의 작품이라 본다.  첫 판타지를 만들면서 박래품에 대한 모방으로 그치지 않으려 애썼다. 북유럽권의 판타지 베스트와  중국고전의 장점을 두루두루 따서 그리고 풍부한 유산인 우리의 민속풍토를 많이 차용해서 이 쟝르의 첫 습작에서 보이는 모자람의 틈새를 메우고 우리 특색의 판타지를 만들려 시도해보았다.     (2)          한비자(韓非子)에서 나오는 얘기인데… 옛날 중국에는 코끼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럴수록 사람들은 코끼리를 보고싶은 소망이 간절했지만 그게 어려워서 어디선가 죽은 코끼리의 뼈를 구해다 보면서 코끼리의 모습을 마음속으로 그렸다고 한다. 이로서 사람들이 마음으로 상상하는 근거가 되는것은 모두 상(象)이라고 했고 상상(想象)이란 말은 이렇게 되여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때로는 환상이 실제보다 현실을 더 잘 드러낸다. 대개 상상이란 길잡이를 통해 전개되는 환상이야기는 세태를 과장하거나 현실에서는 있을법하지 않은 가상세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우리의 직접적인 현실의 한 측면을 적라라하게 드러내보이고있는것이다. 창작이라는것이 그런것이 아닐는지. 결국은 내가 공상하고 상상하고 추상하는 이미지의 구현인것이다. 이러 저런 현답들이 많을테지만 결국은 이 상(象)이란 글자안에 담겨져있는게 아닐가싶다.  (3)   어느 한번, 문학도 몇몇이 나보고 선생님은 여러가지 쟝르를 다루고있는데 그중 한가지만 선택이 주어졌다면 무얼 택하겠는가고 물었을 때 나는 두말없이 동화를 쓰겠다고 대답한적 있다. 그리고 나의 문학을 정리해야 할 그때가 오면 모든 쟝르를 접고 동화창작에만 몰두할것이라고 했다.  뛰여난 상상으로 독자들에게 크나큰 즐거움과 황홀한 미감을 주는것이 바로 동화의 문예적특성과 우수성이다. 공상적이면서도 가능성을 지닌 미적표현을 통하여 인간 일반의 보편적진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시에 가까운 산문문학이라는 점에서 이 훌륭한 쟝르에 대한 애착이 점점 깊어진다.  문학의 원형이라 말하는 체험을 토대로 작가는 작품세계를 형성해간다. 그러나 상상의 활동을 통해서 작가의 그 체험이 비로소 보편적인 확대와 효력의 힘을 얻을수 있다고 볼 때, 이러한 표현방식이야말로 과학적인 개념과 대응되는 이른바 문학의 궁극적인 단위가 아닐가.  오늘도 내 무거운 머리통에 날개를 달아본다. 그리고 떠난다. 저 멀리서 귀를 흔들며 상아를  빛내이며 뚜벅뚜벅 거닐고있을, 내가 찾는 궁극의 령물― 《코끼리》를 만나러…    
2    도덕과 욕망 사이, 그 절박한 줄다리기 댓글:  조회:3577  추천:30  2010-11-11
도덕과 욕망 사이, 그 절박한 줄다리기 - 제3회 "김학철 문학상 수상작품   "뜨거운 양철지붕위의 고양이" 창작후기 김 혁   1   “톰소야의 모험”의 저자 마크 트웬, 집에 무려11마리의 고양이를 길렀던 그는 "고양이 꼬리를 잡고 있으면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라고 고양이에 대한 재미있는 말을 남겼다. 이 소설이 바로 고양이의 꼬리를 잡고 있는 한 남자의 이야기다. 일탈적인 사랑과 가족제도 사이에서 오랜 방황을 거듭하다 결국은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식상한 이야기다. 70년대 까지도 조선족은 전통적인 유교사상에다 사회주의 금욕사상이 공고하게 녹아들어 있어 결혼관과 정조관이 아주 건전한 이미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리상화된 가족의 유지를 “도덕”이란 이름으로 보존하면서 사회질서를 유지해 왔다. 따라서 배우자가 아닌 타자와의 사랑은 “불륜”이란 락인이 찍힌 채 사회로부터 도덕적 리상주의를 거스르는 금지된 욕망으로 인식되여왔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불륜에 대한 이 시대의 태도는 엉거주춤해져 버렸다. 개혁개방을 맞아, 또 출국붐이 일면서부터 고유의 결혼관과 정조관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중 피부에 실감되게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것이 곧바로 리혼률의 급증과 가정의 파탄, 편부모나 부모 부재로 인한 비행소년소녀들의 급증이다. 이렇케 인간의 륜리적 가치가 금전으로 쾌락으로 이동되고 있는 시점에서,  가족마다에 닥쳐 온 우환을 우스꽝스럽기도, 사랑스럽기도, 때로는 안쓰럽기도 한 한 어눌한 사내의 에피소드를 통해 풀어보려 했다. 그 사내와 함께 한 고양이의 족적(足跡)과 함께 엮어 보려 했다. 그로서 가족의 문제, 순결 이데올로기와 자신의 정체성찾기를 보여주려 했다.   2   요즘의 소설문단을 평단하는 자대는 그 기준을 잃은듯 하다. 진정 소설 만드는 사람이 몇손에 꼽기 바쁠 정도로 적어지고 그에 아우성인 문학지 편집들과 년말년시 상을 주면서도 어쩐지 탐탁치 못한 이른바 수작들, 이게 다 소설이냐? 악풀을 달면서도 자신은 쓰지도 해법도 내놓지 못하는 성숙치 못한 독자군… 게다가 우리의 작가들은 상업주의와 허명에 자기에게 걸맞던 쟝르를 버리거나, 문화권력에 치우치고 그와 제휴하면서 스스의 존립근거를 허물고 있다. 무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설문학은 서두르지 않는 변화를 통한 오랜 숙성 과정이 더 많이 필요하다. 하기에 이는 속도만 추구하는 요즘의 속성과 반대다. 요즘의 작가들은 연구하고 공부하지 않고 잽싸게 쓴 글로 재빨리 인정받으려 한다. 그런데다 나름의 독선에 빠져 남의 글을 읽으려 하지도 않는다. 이렇게 숙성의 시간이 주어지지 않으니 우리문단에서 좋은 소설 좋은 작가를 기대하기 어렵다. 또 간혹 좋은 작품이 나와도 편협한 독선과 나르시즘에 빠진 창작자, 평론자들은 그것을 가려내지 못하니 좋은 작품이 소외당하고 잊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소설쓰기를 좋아한다. 소설이라는 쟝르가 갖는 정직성을 좋아한다. 작가가 노력하는 만큼, 그리고 살아내는 만큼의 삶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기는 우직스러움과 정직함이 소설에 있고 그 정도에 깊이 들어 갈수록 자신을 청정하게 걸러낼수 있다고 믿고있다.   3   세상고에 시달리며 그 부조리를 밝혀보자 한동안 논픽션(非虚构) 쟝르에만 매달렸다가 오랜만에 집필한 허구가 가득한, 하지만 현실같은 소설. 소설을 끝낸 날이 바로 경칩이였다. 곧 다시 봄이다.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는… “봄은 고양이로소이다”라고 갈파했던 어느 시인의 한 구절을 련상케 하는 ... ... ... ...    
1    윤동주라는 아이콘 댓글:  조회:3652  추천:55  2010-01-28
  윤동주라는 아이콘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련재를 시작하며       소설이 련재된  "연변문학" 지         조선족 권위문학지 “연변문학”에 1월호부터 윤동주의 생애를 그린 장편 “시인 윤동주”의 련재를 시작했다. 참으로 어려운 작업이였다. 고향이 낳은 시인윤에 대한 경모의 마음으로 그동안 윤동주 관련 까페(http://cafe.naver.com/dz.cafe)도 개설하면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려는 작업을 한번 해보려고 오래전부터 뼈물러 먹었었다. 한국과 중국에서 윤동주 관련 론문으로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50여명 그에 대한 연구론문들이 수백편 쏟아져 나왔음에도 그의 인생을 그려낸 소설작품은 1992년에 한국에서 나온 “윤동주”가 겨우 한편 그것도 방송드라마를 각색한 드라마소설이였다. 그 공백이 나에게 어떤 사명감이 가미된 창작충동을 주었다.     나의 모교 용정중학(원 대성중학교)에 경립된 윤동주 시비 앞에서   윤동주시인의 여동생 윤혜원여사 부부와 함께   윤동주를 중국에 맨 처음 알린 일본 와세다 대학 오오무라 교수(가운데)와  필자(맨 오른쪽)   "윤동주 평전" 일본판 역자 아이자와 가쿠씨와       그 와중에 연변작가협회에서 이 작품의 기획을 제7회 연변작가협회계악작가작품으로 선정, 작품에 대한 명분을 더해주어 고마왔다. 막상 집필에 앞서 윤동주라는 걸출한 인물을 나의 졸필로 그려낼수 있을가하는 부담감에 창작 슬럼프에 시달렸다. 근 일년간 한글자도 적어내려가지 못했다. 반면 윤동주 관련 평전, 론문, 전기물과 력사서적 그리고 당시 시대상을 보여준 문학작품들을 닥치는대로 읽었다. 한국으로 출국해서도 윤동주관련 서적들을 모조리 사들고 왔는데 그렇게 수집하고 읽은 책이 저그만치 60여권은 되였다. 그동안 윤동주시인의 친녀동생인 윤혜원녀사를 두번 만나 장시간의 취재를 가졌고 “윤동주 평전”의 일본판 역자 아이자와 가크씨(번역가의 성함이 어쩌면 나와 이름이 꼭같은 혁, 윤동주라는 위인을 통한 인연이 참으로도 절묘했다)를 만나 창작에 수요되는 자료를 얻고 위인의 생애에 대한 공감을 나누기도 했다. “연변일보” 문화부기자로 뛰던시절, 윤동주 생가의 복원과 윤동주 탄생 50주기 학술회를 취재했고 윤동주를 연변에 처음 알린 일본학자 오오무라교수님과도 여러번 만나 대담을 가졌고 명동학교의 복원, 일본과 한국에서 일고있는 윤동주 붐에 대한 취재 등 그동안 윤동주관련 신문기사도 적지않게 펴냈었다.    지금 윤동주의 시비가 경립되여있는 룡정중학(원 대성중학)이 나의 모교이고 , 윤동주일가가 룡정으로 이사와 거처를 잡은 영국더기에 소학시절 학교의 자류지가 있어 교직원들이 함께 추수를 다녔고, 윤동주의 친구 문익환이 례배를 다녔던 룡정 중앙교회 옛터가 내가 문학도시절 설익은 소설작품을 들고 선배들을 찾았던 룡정시 문화관자리이며, 아침마다 조깅을 했던 중심소학교가 원 서전서숙의 옛터였다. 이렇게 룡정에서 나서 자란 내게서 윤동주의 숨결은 어디나 서려있었다. 집필하는 동안 윤동주의 생가며 묘소들을 5,6차 다녀오면서 윤시인님의 자취를 다시 밟아보는등 이 동안은 매일이 시인의 혼령과 함께 해온 나날들이였다. 그렇게 근 2년간의 신고끝에 장편을 마무리했다. 45만자, 련재를 하면서도 계속 탁마를 하고있는데 적당한 기회에 국내외에서 책으로 출시할 예정이다.   “민족시인”, “저항시인”, “민족시인” 등등으로 윤동주에게 붙는 수식어는 많다. 하지만 그의 시는 어떤 민족에게 한정된특수한 상황하에서 지어진것이지만 그의 의식은 창작당시의 상황을 훨씬 릉가하는 인류의 보편적인 문제로 승화되여 있다 그러므로 그가 적어내려간 메시지는 세월의 흐름과 함께 “과거”의 것이 되는것과 같은 유한한것이 아니라 무한성을 가진 언제나 “오늘”의 소리 그리고 “미래”의 소리로 남아있다. 그의 시가 시대를 넘어 인간의 마음에 강하게 인상과 감동받기를 계속하고 있기때문이다. 오늘날 윤동주는 단 시인이라는 수식을 뛰여넘고 있다. 윤동주는 어떠한 암울한 시대에서도 자포자기하거나 포기하지않고 인간의 근본적인 해결을 구하고 그 느낌을 노래하면서 희망을 표출해 냈다. 이 처럼 시대를 넘어 민족문제를 가로질러 미래를 향한 근본적인 목표로 한 작품이기에 개인의 고뇌와 시대적 압박에 의해 생성된 시이지만 그것의 열매는 그 틀에 그치지않고 더 높고 더 높이 향기를 뿜고 있는것이다.    그 “위대함”이라는 수식어가 아깝지않는 아이콘을 그려내는 벅찬 작업을 완수할수있게된데 대해, 그리고 그 작품이 시인의 타계와 조명붐에 편승할수 있어 뿌듯하다. 이제 시인의 고고한 삶과 정신은 이미 내 삶속에 한발자욱 깊게 들어와 있다.     저자 김 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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