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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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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민족교육의 요람” 서전서숙
2015년 09월 01일 09시 12분  조회:2191  추천:13  작성자: 김혁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1)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서전서숙
 

김 혁
 
​올해는 항일전쟁 및 세계 반파쑈전쟁 승리 70돐이 되는 해이다. 중국조선족이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치른 공훈은 력사의 한페지로 뚜렷이 남아 있다.
본지는 중국조선족 문화의 발상지이자 항일의 책원지였던 룡정지역을 중심으로 소설가 김혁과 함께 하는 유적지 순람을 "겨레의 창"에 련재한다.

- 편집부


룡정시 문화로 91번지에 위치한 룡정시 실험소학교 정원에 들어서면 철봉대며 그네로 조성된 운동장 동쪽 가녘에 소소리 솟은 아름드리 비술나무가 보인다. 일견에도 수령이 만만치 않은 나무이다. 나무아래에는 현판 하나가 세워져 있다. 현판에 새겨진 내용은 이러하다.
“반일민족지사 리상설은 조선족의 후대교육을 위하여 1906년에 자기의 재산을 내놓아 이곳에 ‘서전서숙’을 세웠다…”
비술나무곁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건립한 기념표지석이 있다. 석비에는 한자와 조선문으로 “서전서숙(瑞甸书塾) 옛터”란 글자가 음각되여 있다. 석비옆에는 또 하나의 작은 석비를 두어 서전서숙옛터 비문을 담았다.
“1906년 10월 애국지사 리상설은 이곳에 연변 최초의 조선족근대학교요  민족교육의 요람인 서전서숙을 개숙하였다…”
 
연변력사학회와 룡정 3.13기념사업회가 2007년에 펴낸 “서전서숙 100돐기념문집 '력사의 종소리’”를 펼치면 당년의 서전서숙의 원 모습이 찍힌 색 바랜 사진 한 장을 볼수있다.
정갈한 초가 앞마당에 흰옷 입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는데 마당의 울바자기둥에 “서전서숙(瑞甸书塾)”이라고 새긴 현판이 또렷이 걸려있는 사진이다.


서전서숙의 원 면모를 보여주는 옛 사진
 
1906년 초 여름, 리상설, 리동녕, 려준 등 반일지사들은 해외에다 민족독립운동기지를 건립할것을 결정, 곳을 북간도 룡정촌으로 정했다.
그 반일지사들의 선두에 섰던 리상설은 1870년 음력 12월 7일 충청북도 진천군에서 태여났다.
25세때에 조선왕조의 최후의 갑오문과 병과에 급제하면서 관료의 길에 들어섰다. 하지만 여러 관직은 일제가 통제함으로 일일이 사임하고 최후로 의정부 참찬으로까지 발탁되였으나 그것도 마다하고 동지들과 망명의 길에 올랐다.
리상설은 인천에서 중국 상선을 타고 상해로 갔다가 다시 울라지보스토크를 경유, 여름철에 룡정촌에 도착하였다. 룡정촌에 도착한 리상설은 유지  최병익이 새로 지은 널직한 8간집을 매입하고 “서전서숙”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맨 처음 학생 22명을 받아들이고 신식교육을 실시하였다. 때가 바로 1906년 10월경이였다.
"서전서숙"의 건평은 70평가량되였고 교원의 월급이거나 교재, 학생들의 지필묵에 이르기까지 모든 경비는 초대숙장 리상설의 자산을 처분한 자금으로 충당하였다.
서전서숙은 모든 수업에서 반일사상을 관철하는것을 첫째로 가는 준칙으로 삼고 학생들에게 반일의식과 민족의식을 주입시켰다.
동척에서 발행한 “간도사정”이라는 책자에서 보면 당시 상인으로 가장하고 서전서숙을 기웃거리다가 랭대를 받은 일본 밀탐의 일화가 사뭇 극적이다.
 1907년 일본통감부는 륙군중좌 사이또와 사무관 등 일행은 룡정촌에 도착하여 서전서숙을 찾았다. 이자들은 상업관찰 도중에 들렸다고 에두르면서 때는 정심시간이므로 지니고 온 도시락을 먹기 위해 온수와 식기를 빌려달라고 했다. 그러나 교원들은 빌려줄수 없다며 랭랭히  이를 거절했다. 리상설의 경우는 일언반구의 질문도 없이 출타하였다. 때문에 일행은 하는수 없이 강변에 가서 강물로 목을 축여가며 식사를 끝냈다고 했다. 당시 이들의 일본에 대한 태도가 얼마나 강인하였는가 알수 있는 대목이다.
1907년4월, 화란의 수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만국평화회의에 특사로 참석하게 되면서 리상설은 룡정을 떠나게 되였다. 떠나면서 리상설은 려준에게 서전서숙 숙장의 중임을 맡겼다. 려준은  김우용, 황달영, 박정서 등과 함께 계속하여 서숙을 운영해나갔다.
일본통감부파출소에서는 서전서숙을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 가는곳마다에서 간섭, 저애했다. 회유정책으로 보조금을 지불하겠으니 합작하여 운영하자고 구슬리기도 했다. 이에 서전서숙은 오연하게 거절했다.
련이어 들이닥치는 경제난과 일제의 부단한 간섭속에서도 서전서숙은 몸부림치며 그 올곧은 자세를 이어나가고자 했다.  1907년9월경 서전서숙의 교원들과 학생들은 로씨야로 갈 목적으로 룡정을 떠나 훈춘현의 탑도구(塔道沟)에 이르렀다. 그들은 거기에서 1년간의 수업을 끝맺고 비장한 졸업식을 올린 후 3개 반 74명을 졸업시켰다.
 

반일지사 리상설
 
현재 룡정실험소학교 운동장 동쪽 켠에는 쏘련홍군동북해방기념탑”과 “심련수시비”와 더불어 “리상설 정(李相卨亭)”가 세워져 있다.
 6각정자의 천정에는 리상설선생의 화상(画像)이 그제날 서전서숙교사를 뒤배경으로 모셔져 사생들과 관광객들을 굽어보고있다.
한편 일제의 횡포를 세상에 알리고자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로 떠난 리상설은 리준, 리위종등 특사들과 함께 각국의 대표단을 만나고 거리에서 전단지를 배포하며 조선독립을 호소한다. 그러나 일본측의 강압적인 방해로 회의참석은 좌절되고 특사들은 회의장밖으로 쫓겨나고 만다.
“간도서전서숙와산실록”에는 당시 이 소식을 접한 서전서숙의 표정이 이렇게 기록되여있다.
“헤그만국회의에 조선대표들을 참가시키지 않기로 하였다는 비보가 우리 학교(서전서숙)에 전하여오자 전교의 교직원, 학생들은 대성통곡하였다.”
통한을 품고 헤이그에서 돌아선 리상설은 구미와 씨비리, 중국에서 전전하면서 독립활동기지를 세웠고 지사들과 조직을 결성하며 반일과 독립운동을 위해 로심초사하였다.
1917년 3월, 리동녕 등 애국지사들은 쌀쌀한 겨울바람이 부는 수분하 강가에서 한 반일지사의 시신을 화장한다. 그는 바로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병을 얻어 1917년 47세에 이국 낯선 땅에서 눈을 감은 리상설이였다.
안중근은 "리상설의 포부는 대단히 크다. 세계 대세에 통하고,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여러 해에 걸쳐 그의 인물을 보니 기량(器量)이 크고 사리(事理)에 통한 대인물로서 대신의 그릇을 잃지 않는다."고 했으며 그의 죽음에 대해 아쉬워했다.
 

서전서숙 기념표지석 (사진: 리련화 기자)
 
서전서숙은 그후에도 세월의 영욕을 같이하며 100여년의 로정을 걸어왔다.
학교는 력사의 변천과 더불어 16차나 이름을 바꾸었다. 일제가 투항하기전에는 간도보통학교, 간도중앙학교, 흥중국민우급학교 등으로 불리웠고 그후에는 3.1소학교, 룡정중심소학교 등등의 이름으로 개칭되였다가 오늘의 룡정실험소학교로 되였다. 지난 백여년간 룡정실험소학교는 총 4만여명 학생을 졸업시켰다. 그 가운데는 항일에 뛰여들어 렬사가 된 이들도 있고 고위급 군관이 된 이들도 있으며, 과학기술 연구등 첨단 분야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분도 있다.
서전서숙은 비록 1년미만의 짧은 력사를 기록하였으나 일제강점기 중국조선족민족교육의 첫장을 펼침으로 하여 민족의 반일운동사와 교육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있다.
 
"연변일보" 2015년 6월 2일​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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