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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의 소리- 《민성보》
2016년 02월 04일 08시 07분  조회:1784  추천:11  작성자: 김혁

룡정지역반일유적지 순람 7

민중의 소리- 《민성보》

김 혁



▲ "민성보" 신문사의 20년대 모습.


룡정에는 민성가라는 거리가 있다. 지난 세기 20년대에 그 거리에 민성보라는 신문을 꾸리는 신문사가 있었고 거리의 이름은 그에서 연유되였다.
그 신문사 옛터는 조선말로 된 간행물의 탄생지로서만이 아니라 “중공룡정촌지부”유적지로도 유서가 깊다.

1919년 중국 5·4운동은 문화운동의 영향하에 연변의 진보인사들은 반일무장투쟁을 배합하여 어려움을 이겨나가며 많은 간행물을 꾸렸다. 1919년 3월, 연변지역에서 발행한 조선문신문들로는 《일민보》, 《신국보》, 《중외통신》, 《구국일보》, 《조선민보》가 있었다.
그러던중 1928년 1월, 《민성보》가 룡정에서 고고성을 올렸다. 신문사는 룡정촌 신안거리(현 민성거리)에 세워졌다. 《민성보》의 최고지도기구는 40명으로 구성된 “보무위원회”였다. 강위청(연길 현상회 회장)이 위원장으로, 관준언(화룡현교육국 국장)이 신문사 사장으로, 방지함(룡정촌 전화국 국장)이 경리로 추대되였다.

《민성보》는 한문과 조선문으로 된 4절지 4개 면으로 된 일간신문이였다. 그중 1, 2면과 3면의 전반부는 한문판이고 3면 후반부와 4면은 조선문판이였다. 한문판 총편집은 안회음이 겸했고 조선문판 총편집은 윤화수였다. 일발행량은 2000부, 연변에서 그 영향이 컸다.
신문은 민중의 목소리를 대변한다는 취지에서 《민성보》라고 이름을 달았다. 그 취지에 걸맞게 《민성보》는 신학제, 신문풍, 백화문을 구사하였으며 혼인자유, 남녀평등을 제창하는 등 진보적인 언론의 구실을 톡톡히 하였다.

1928년 2월 주동교가 신문사 편집일군으로 초빙되여 왔다. 주동교는 겉으로는 편집일군의 명색을 띠였으나 실제로는 중공만주성위의 파견으로 민중의 토대와 혁명적극성이 높은 연변에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발전시키는 사업을 하러 온것이였다. 하여 1928년 2월 연변에서의 첫 공산당조직인 중공룡정촌지부가 민성보사를 거점으로 건립되였다. 주동교가 당지부 서기를 맡았다.

《민성보》의 한문판 주필 안회음은 신문사내의 진보세력들앞에서 자신의 주장을 세우지 못하게 되자 1928년 여름 사직하고 천진으로 돌아갔다.

이를 기회라 생각한 주동교는 중공만주성위에 청시하여 당간부를 증파해줄것을 요구했다. 곧 공산당원 손좌민, 리별천이 파견되여 와 신문사에 취직했다. 이리하여 《민성보》의 주필로부터 책임편집에 이르기까지 모두 공산당원들이 필을 잡게 되였고 《민성보》는 실제상 중공룡정촌지부의 전투보루로 되였다.

중공룡정촌지부가 건립된후 중공북방국에서는 지방교육부문에서 북평의 해당 당국에 교원을 파견해달라고 요구를 제기하는 기회를 빌어 1928년 3월부터 6월까지 연변에 파견되여오는 북평 향산자유원(香山慈幼院)의 졸업생속에 17명의 공산당원과 공청단원을 함께 파견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17명 당원, 단원은 인차 주동교와 련락을 맺고 중공룡정촌지부의 령도밑에서 지하건당사업을 전개하였다. 불과 몇달이 못되여 그해 7,8월에 국자가, 동불사,로투구, 광개욕, 팔도하자, 옹성라자, 삼도구, 화룡, 훈춘 등 9개 지역에 당지부가 설립되였다.
8월에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정신에 따라 중공동만구위가 건립되였다. 동만구위를 민성보사에 두었다.
주동교가 서기를 맡고 조직위원을 류건장, 선전위원을 조지강이 맡았다.

이들은 《민성보》를 하나의 선전도구로 삼고 용감하게 일제의 침략행위를 폭로, 규탄하였으며 피압박자들이 일떠나 침략자들과 용감히 싸우라고 호소하였다.

1929년 1월 15일 중공동만구위 서기 주동교가 룡정의 국민당특무들에게 체포되고 2월에는 서기대리인 류건장도 체포되였다. 손좌문, 리별천 등 북평에서 온 당원들도 선후로 피신하여 연변을 떠나는바람에 중공동만구위는 실제상 와해되고말았다. 국공합작의 분렬, 국민당의 간섭, 지방관원들의 무능 등 원인으로 1931년 “9.18”사변후 민성보는 부득불 정간되였다.

지금 룡정시연수학교 정원에는 기념석 하나가 세워져있다. 2010년 룡정시 당위와 정부에서 건립한 기념석에는 조, 한 두가지 문자로 룡정촌당지부 건립상황이 주홍빛 글자로 음각되여있다.

기념석의 건립을 주도했던 룡정시로혁명근거지건설추진회 박호만회장은 “민성보는 푸른 벽돌로 지은 불과 240여평방메터 되는 단층집이였습니다. 하지만 이곳에 룡정촌의 당지부가 들어서면서 이로써 항일투쟁은 새로운 단계에로 들어서게 되였고 연변의 당사에 빛나는 한페지를 적어내려갔습니다”고 말했다.
또 “《민성보》의 옛터는 이곳에서 남으로 수십메터 떨어진 곳에 위치해있었으나 그곳에 민가가 밀집하기에 룡정시연수학교내에 세우게 되였다”고 소개했다.

《민성보》는 20세기 20년대 동북에서 중문과 조선문으로 꾸린 유일한 신문이였다. 또한 《민성보》는 예봉을 직접 일제와 국내통치계급에 돌렸고 인민대중들에게 각성하고 단합하여 다같이 대적하며 외환을 막아나서라고 호소한 진보적 신문이였다.

"연변일보" 2015-8-5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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