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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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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2016년 01월 15일 11시 05분  조회:2365  추천:13  작성자: 김혁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상)

김 혁​



▲ 의거를 주도한 6명의 반일지사들
 


몇해전, 한국 영화계에서 한 편의 영화가 극장가를 열광의 도가니로 달구었다.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칸국제영화제 초청, 한화 200억원이라는 억대의제작비 등으로 “놈놈놈”은 갖가지 화제를 모으다가 개봉한지 불과 한 달도 못되여관객 600여만 명을 불러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올랐다.
여기서 놀라운것은 이 영화의 모티브가 된 사건은 다름 아닌 지난세기 20년대 룡정에서 벌어진 “15만원 탈취사건”이라는 사실이다. 

룡정에서 일었던 “3.13” 반일집회가 일제에 의해 무자비하게 탄압된뒤 반일지사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였다.
바로 이 당시 로시야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였다.
이에1915년전후 북간도와 로씨야 연해주 반일열혈청년들에 의해 조직된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의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습격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거사를 기획한 사람들로는 윤준희, 임국정,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들은 전홍섭에게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수송에 몇번 참가한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룡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수 있지 않을가”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련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룡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였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수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여 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령이나 선바위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것이다. 그러나 등잔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룡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였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였다.
동량리 어구는 룡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여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 15만원 군자금 운송지점인 조선은행 룡정 출장소 옛터 (사진 리련화 기자).
(계속)

"연변일보" 2015년 7월 7일

 
 
룡정지역 항일유적지 순람 (5)
일제15만원 군자금 탈취의거 (하)

김 혁​



▲ 동량리 어구에 세워 진 의거 기념비 (사진: 리련화 기자)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울라지보스또크를 향해 떠났다.
로씨야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울지보스또크로 향발, 23일 울라지보스또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날인 1월 5일, 룡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론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울라지보스또크의 반일투쟁대오에까지 숨어들어 온 엄인섭은 무기를 사는 일을 근심말라고 호언장담하면서 황급히 울라지보스또크에 있는 일본헌병대를 찾아가 상황을 밀고해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라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울라지보스또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뒤방 문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울라지보스또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였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였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였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였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련이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였더라다면 전반 조선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것은 물론일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로씨야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지금 룡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였던 조선은행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여 있다.
지금의 룡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룡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룡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였다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룡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바로 자치주 초대주장 주덕해의 고향 마을이 있는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편 륙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15만원탈취사건은 조선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력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룡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연변일보" 2015년 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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