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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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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 늘 (중편소설)
2009년 01월 09일 16시 18분  조회:4001  추천:43  작성자: 김혁



. 중편소설 .


와 늘

 

김 혁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 별이 떨어진다
상심한 별은 내 가슴에 가벼웁게 부숴진다
그러한 잠시 내가 알던 소녀는
정원의 초목 옆에서 자라고
문학이 죽고 인생이 죽고
사랑의 진리마저 애증의 그림자를 버릴 때
목마를 탄 사랑의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 박인환 “목마와 숙녀”중에서

 

조춘 (早春)

너를 처음 만난건 5월이였지? 아마?
푸르름이 신들린 무희(舞姬)의 치마자락처럼 마악 산자락을 덮으려 하고, 해빛이 구태여 어깨전 까지 찾아와 툭툭 건드리고는 올올이 부서져 내리던 5월,
그래, 5월이였다.
흔히 봄은 아름다운 계절이라하지만 또한 사람들이 쉽게 잊혀져하는 계절이기도 하지. 봄이 쉽게 잊혀짐은 여름의 지긋지긋한 더위도, 가을의 못견딜 쓸쓸함도 겨울의 몸서리치는 추위도 아닌 온화함으로 조용히 왔다가 조용히 가버려서일가?
하지만 봄날이. 그 봄날이 오래도록 잊혀지지않음은 나의 시인 된 흥감스러운 감성때문일가? 아니면? 잊지못할 그날 네가 남긴 인상의 락인때문일까?
그래, 5월이였다.
정확히 5월의 첫주 월요일이였지. 
    그날 서울에서 시인들이 왔고 시인들은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없는 시인”의 생가를 가보고싶어했다. 잡지사 시 편집인 내가 그네들의 향도를 맡기로 했다. 고향의 산야와 고향의 시인에 대한 향도를 맡기엔 내가 가이드 못지않은 적임자라 난 생각했지
그런데… 서울서 오신 시인님들은 려행사와 이미 련락이 되여있었고 가이드도 이미 배당되여 있었다. 그렇다고 그냥 뿌리치고 나올수도 없고 나는 어쩐지 잉여인간이 된 기분으로 그네들의 틈바구니에 끼여 려행사의 자호가 큼지막하게 찍힌 관광뻐스에 올라야 했다.
그리고 서울서 오신 귀하신 손님들이 한참 기다리게 해놓고 늦게야 등장했다. 넌.
안녕하세요? 오늘 가이드를 맡은 심예나입니다!
허겁지겁 뻐스로 올라와 좌석등받이를 손으로 잡고 넌 말했다. 필요이상으로 소리높게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네 작은 입술, 립스틱은 심하게 번져져 있었다.
그리고 양광이 지극히도 찬란한 차창밖을 내다보며 뱉은 다음 말, 그말은 이렇게 오래동안 널 기억하게 만들었다. 오래동안, 오래동안…
오늘 날씨 와늘 좋지요?
서울서 오신 시인님들은 일순 머리를 갸웃했고 다음순간엔 설둥해져 버렸다.
사실 윤동주시인의 생가는 이곳에서 와늘 가깝슴다.
시인 한분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저 한마디 물읍시다. 와늘이란 무슨 뜻이죠?
낯꽃을 확 붉혔다. 넌. 그리고 미처 해석을 가하지 못했다. 넌.
그 모습이 안쓰러워 내가 곁에서 해석해 주었다.
이 말 함경북도 방언인데… 아주, 영, 대단히, 썩 이런 뜻으로 쓰입니다.
아~ 네~ 시인들이 이구동성으로 머리를 끄덕이였다. 처음 보는 풍경과 처음 듣는 방언에 그들은 즐거워하고있었다. 그럴수록 넌 몸둘바를 모르고있었다. 하지만 일신에 배여 체질화된 방언을 넌 쉽게 버리지 못해 했다.
잠시 내릴가요. 와늘 볼만한 곳 또 있어요.
너에게서 와늘이란 방언이 튀여나올때마다 사람들은 미묘한 눈길로 널 지켜보았고 저마다 눈이 빛나며 얼굴에 감추지 못하는 웃음이 묻어 났다. 널 지켜보며 사람들은 모두 유쾌해했고 즐거운 기대와 궁금증으로 가득 차 했다.
급기야 한 시인이 이죽거리며 불렀다.
이보세요 와늘 아가씨
웃음소리가 차안에서 얽혔고 이렇게 너의 별명은 붙여졌다. 와늘이라고. 와늘 촌스럽고 와늘 우숩고 와늘 귀엽기도 한…
그리고 일견에도  초짜 가이드였다. 너 “와늘”.
    너의 해설은 관광수첩 몇페지를 읽고 설핏 버무린 느낌이였다. 윤동주 생가로 가던 중 여러곳에 차를 세우고 고향의 명물들을 소개해 주었지만 많은 곳을 틀리게 말하고 있었다.
반일의사릉에서 년도를 잘못 말했고 15만원 탈취 의거현장에서 넌 의거를 주도했던 최봉설의 성씨를 틀리게 리봉설이라고 말했다.
내가 곁에서 일일이 시정해 주었다. 일면 난 안쓰러움을 금치 못했다. 이러다 내가 네 밥통을 깨뜨리는건 아닌가 하는 위구심에. 하지만 외지서 온 이들에게 우리의 력사는 제대로 알려주어야 했다.
드디여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 한 시인”의 생가에 이르렀다. 생가 퇴마루에, 우물가에, 생가 가까이의 교회옛터에 숙연함을 머금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생가 전람실에서 윤동주 관련 서적을 고르고있는 나의 옆구리를 네가 쿡쿡 찔렀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 하여 난 너의 뒤를 따라나섰다. 구석쪽으로 가서 네가 소리를 죽여 물었다.
저… 윤동주 친구 이름이 뭐든가요? 문 뭐였던가요?
문익환, 그분 한국에서 알아주는 목사야
아. 맞다 문익환, 그럼 윤동주 사촌 이름은요? 송씨라고 있잖아요.
난 그만 실소를 머금지 않을수 없었다. 그런데 네가 한마디 속살거렸다.
이 책값 제가 낼게요. 학비 낸 셈 치고요.
  그리고 넌 기어이 책값을 물었다.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실랑이질 하기도 그렇고 해서 나는 네가 선물하는 “윤동지 시 해제”를 받아들고 말았다.
  코를 찡긋 하고 웃으며 네가 말했다.
  “오늘 와늘 감사했슴다”
    그런 네 눈이 짓궂은 개구쟁이 같았다. 순간 왠지 엉터리 가이드에 어처구니를 머금었던 난 네가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늘”.
자두알처럼 동그란 얼굴형의 널 다시 바라보았다. 작은 몸집에 비해서 너의 목소리는 랑랑했고, 매우 적극적인 인상이였다. 넌 순진무구, 단순 그 자체였다. “와늘”.

   감흥을 싣고 돌아서던 뻐스는 어느 유원지에 멈추어 섰다. 시골 음식점에 들려 시인들은 이곳의 일품인 토닭을 맛보았다.
진짜 알곡 먹여 기른 닭, 이곳 토닭 와늘 맛잇어요! 하고 네가 극적인 표정으로 말했다.  네가 몸 담고있는 려행사와 음식점간의 교역을 념두에 둔 과장적인 광고 티가 좀 나긴 했지만 음식은 참말로 훌륭했다.
서울서 오신 손님들은 토속 막걸리로 해갈을 했고 토종 닭다리를 뜯었다. 도회지 인스턴트 음식에 찌든 입맛을 확 사로잡는 시골음식에 감흥에 넘친 술잔들이 돌았다.
한잔 드세요 와늘 아가씨!
취흥에 몇몇 시인이 너의 별명을 부르며 권주를 했지만 넌 완연 막아버렸다. 사업시간엔 절대 술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와늘 진지하시네 와늘아가씨가!
    권주자의 말에 술판이 웃음으로 뒹굴어졌고 나도 그만 따라서 웃고 말았다.
더불어 술 몇잔 마셔주고 나는 그들의 격정을 방치한채 밖으로 나왔다. 음식을 포식한뒤의 게나른한 자의 유흥으로 뜨락을 거닐던 난 보았다.
유원지의 뜨락에 부설되여있는 회전목마를. 그리고 회전목마에 실려 가고있는 너 “와늘”을
어딘가 툽상스러운 회전목마였다. 말이나 동물의 형태도 아닌 그냥 안장을 만들고 페인트 칠을 올린 수동식 회전목마, 그마저도 칠이 벗겨져 녹물이 든 쇠붙이가 드러나 보였다. 그래도 목마는 잘도 돌아갔다.
목마를 빙그르르 돌려놓고 넌 잽싸게 목마에 뛰여올랐다. “와늘”. 나무가지에 매달려 꿀밤 찾는 다람쥐처럼.
날씨는 너무 맑아 쨍그랑쨍그랑 명랑하게 소리내여 웃는것처럼 보였다.
잘게 찢어진 목화송이 같은 구름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고 오월의 화사한 태양이 머리우에서 빛살을 흩뿌리고있었다.
푸르고 청정한 공기를 안고 계절을 앞질러 화사한 너의 치마자락이 부풀어올랐다. 정오의 빛줄기는 직사광으로 내리비쳤고 그 아래 너는 발광체처럼 빛났다. 길고 풍성한 머리털이 흩어져 후광처럼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머리칼이 뒤로 날릴때면 길고 아름다운 목선이 드러났다. 빛줄기아래 귀바퀴의 연골이 투명해 보였고 그 연골을 타고 찰랑이는 머리칼의 끝머리마다에는 해빛은 묻어있었다. “와늘”
넌 그 간단한 작희(作戏)에 빠져 있었다. 그리고 아주 부드럽게 또 때론 아주 힘있게 넌 회전목마의 리듬을 만들어내고있었다. “와늘”.
영화의 한 장면을 스틸(剪辑)하기라도 한듯한 그 장면에 일순 멍해지고 말았다. 난. 무슨 의식이라도 치르는 사람처럼 한동안 그자리에 서버렸다. 목마의 회전을 따라 나의 눈길도 나의 머리도 움직이고있었다.
한 자락 신선한 산소를 들이키는 듯한 상큼함을 느껴 나는 장력(張力)에 끌리듯 너에게로 다가갔다.
   접붙이마다 녹이 슬기 시작한 회전목마의 삐걱대는 소리, 하지만 그 소리가 왜 내게는 청동악기의 연주소리처럼 들려온걸가? 놀랍게도 너의 회전에 따라 잃어버렸던 내 세포 하나 하나의 감각이 다시 되살아나고 있었다. “와늘”.
삐걱거리는 회전목마의 쇠소리에 뒤섞여 너의 깔깔대는 웃음소리도 흘렀다.
그리고 난 오랜만에, 참으로 오랜만에 시인의 단전(丹田)에서부터 올라오는 어떤 감흥을 느끼고있었다. 따스한 피줄속에서 돋아 오르는 순(筍)같은것을 근지러움으로 감지했다.
하늘은 그야말로 투명에 가까운 블루(蓝色) 톤이였고 봄의 지열이 아지랑이처럼 피여올랐다.
해빛이 색실이 풀리듯 회전목마를 휘감는다.
슬슬 깃을 단장하기 시작한 봄 새들이 여러 가지 목소리로 지저귄다. 
바람을 가르며 목마가 돈다.
빛속에서 너의 모습은 신기루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저만치 한 무더기의 사과 꽃이 보였다. 근처 과수원에서 접붙이를 해와 울타리 대용으로 심어 놓은 꽃,
그래. 넌 꽃이였다. “와늘”.
항거할수 없는 봄날의 꽃이였다.
넌 빛과 풋풋함을 흩뿌리고있었다. “와늘”
그리고 풋풋함의 저변을 묻어 동인들의 시 한수가 내 귀바퀴를 맴돌았다.

 

너의 푸른 뼈속엔
산골 물소리 랑랑하고
들바람 내음이 풋풋하다

네 산뜻한 눈동자엔
령롱하게 해살이 깃들고
맑은 구름이 쉬였다 간다

네 옆에서 나는
물가에 산속에 대숲에
유유히 살아가는
어진 사슴이다
… … …
- 박설매 “란아 너의 이름으로”

 

    시의 음절을 안고 넌 돌고있었다. 그 눈부신 회전은 슬로우모션(慢镜头)처럼 느릿느릿 돌다가 정지되여버렸다. 문뜩…
나의 머리속에 나의 심방속에 영원히, 영원히.
그리고 못나게도 그날부터, 시나브로 봄이던 그날부터 난 널 기억해 버렸다. “와늘”.

 

 

 

나 방

 

모색(暮色)이 창연한 연길로 관광뻐스는 그제야 도착해 서울서 오신 려행객들을 이 작은 시가지의 낯설은 거리에 꾸역꾸역 토해냈다.
하지만 서울사람들의 여흥은 계속되였고 난 손님들을 섬기는 립장에서 그 여흥을 묻어갈수밖에 없었다. 그 대오에는 너도 끼여있었다. 관광뻐스와 함께 사라지려는 너를 어느 시인인가가 함께 가요! 와늘 아가씨~하며 손목을 잡았고 막무가내라는듯 너역시 따라나섰다. “와늘”.
서울에서 온 시인들은 감흥을 주체하지 못하고 서울 명동의 축소판인듯한 이 작은 도시를 누볐다. 보신탕도 마시고 양꼬치구이도 뜯었다. 다방에 가서는 윤동주를 읊고 김소월을 읊고 릴케를 읊었고 노래방에 가서는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갔어도”를 열창했다.
그리고 맥주며 소주며 콜라며 각약각색의 술이며 음료며가 너를 향해 몰부어졌다.
수고많았어 “와늘”씨!
원샷! 연변 아가씨!
술 못합니다. 술 와늘 못합니다! 하다가 겨우 몇잔 마셨는데 노래방 쏘파에 류탄(流弹)에 격중 된 사람처럼 넌 픽- 쓰러지고 말았다. “와늘”
정말 주량이 “와늘” 적은 모양이였다. 서울손님들은 그런 널 내쳐두고 그냥 18번을 열창했고 뒤처리는 내가 나설수밖에 없었다. 널 부축해서 노래방을 나와 택시에 앉혔다.
어데냐? 살고있는 집이 어데냐고?
내가 쓰러져있는 널 깨워라도 볼 요량으로 소릴 높여 물었고 다음순간 또박또박 대답했다. 넌
선생님, 우리 술 한잔 더 해요.
    사실 멀쩡했다. 넌. “와늘” 멀쩡했다. 손님들이 끈질기게 술 권할가 연극을 놀았다고 했다.
    선생님도 내가 와늘 취한줄 알았죠.
    깔깔 웃어댔다. 넌. 장난기 가득한 웃음이 작고 령롱한 구슬처럼 택시안을 뒹굴었다. 나도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하루의 피곤이 그 웃음 한방에 날아가는듯 한 느낌이였다. 사실 나도 어떤 핑계를 대서라도 알콜로 질퍽해가는 그 자리를 언녕 뜨고싶었던것이였다. 그런데 너의 깜냥에 끌려 나도 은연중 탈출구를 연것이다. “와늘”.
우리들의 웃음에 감염된듯 뭐가 그리 우수워요?하고 택시기사도 멋모르고 따라 웃었다. 웃음을 실은 택시는 네가 원하는 곳을 향해 달렸고 어정쩡하면서도 재미난 기분으로 난 널 따라서고 말았다. “와늘”.
    북대의 밤시장. 방수포로 하늘을 이고 네변을 두른 조야한 밤시장의 음식난전에서 우린 마주앉았다. 여름의 전조(前兆)가 풍기는 5월의 밤, 금방 개장한 밤시장에서 난 흔쾌히 돈지갑을 열었다. 무얼 먹겠는가고 물으니 뻔데기를 먹겠다고 했다. 놀랍게도 앳된 처녀애가 그런 징그런 놈을…
   와늘 맛있슴다. 잡숴보세요 한번.
   드디여 뻔데기 튀김 한 접시가 올랐다. 술 한모금 비우고 노르스름하게 튀겨진 뻔데기 하나를 집어 아삭아삭 씹어먹었다. 와늘 맛있게 먹었다. 너 “와늘”.
평소 웬간한 주량이고 안주도 가리는 쪽이 없는 나였지만 뻔데기만은 먹어보지 못했다.
잡숴보세요. 먹는다고 죽지않아요. 영양가만 높은걸요. 바삭바삭하면서도 뒤맛이 고소하답니다. 와늘 맛있는데요.
너의 간청에 못이겨 나는 한 점 집어 입에 넣었다. 자기 몸에 대고 시약(试药)하는 약사의 기분으로. 종이장을 씹는듯 어딘가 퍽퍽한 느낌, 그런데… 아닌게 아니라 뒤맛이 고소했다. 환장하게 고소했다. 저도모르게 또 한점 집어 입어 넣고 말았다.
다시 한번 작고 령롱한 구슬이 내 신변에서 구을렀다. 웃으면서 사실 오늘이 가이드 첫날이라고 말했다. 너 “와늘”
그럴줄 알았어.
그렇게 티가 많이 났어요?
그래 와늘 많이 났지.
내가 과장된 표정으로 너의 어폐를 흉내냈지만 넌 웃지않았다.
  나 아마 가이드 감이 아닌가 봐요.
    걱정을 뿜으며 넌 연거퍼 술잔을 비웠다. 난 오늘 저지른 너의 몇가지 실수를 지적해 주었다. 부끄러운듯 넌 술만 들이켰다. 듣는둥 마는둥 했지만 난 나대로 윤동주라는 시인의 청고한 일생이며, 시인이 소외된 사회며, 관광지보호의 중요성이며에 대해 열기를 뿜으며 말했다.
말해놓고 나스스로 무안해 졌다. 그만큼 너처럼 나도 대화가 필요했나보다. 처음 만나는 가이드와 이렇게 말 주머니를 열고 대화거리를 만드는걸 보면. 
이번엔 제 얘기 들어보실래요.
취기에 눈시울이 발가우레해진 네가 입을 열었다. 사뭇 진지한 표정이였기에 나도 진지하게 귀를 빌려주었다.
낮은 톤으로 너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넌. 가끔씩 뻔데기 튀김을 입에 넣어가면서.
  넌 업둥이였다고 했다. “와늘”.
다섯살때 양모가 업어왔는데 친부모의 얼굴은 생각나지 않지만 양모의 집에 온 첫날은 그 나이에도 또록또록 생각이 난다고 했다. 유난히 넓은 양모의 집이 추워 보였고 공격적인것 같이 뾰죽한 양아버지의 코가 무서웠고 안고 다독여 주었지만 양모에게서 풍기는 향수냄새가 낯설었다고 했다.
그렇게 남의 집 양녀로 자랐는데 고중에 입학하던 해, 정을 붙여온 양어머니가 뺑소니차에 치여 죽었다고했다. 뒤미처 양아버지는 중국 녀자와 재혼하고 그 녀자의 고향인 관내로 따라 가버렸다. 또 한번 원치않게 낯선 세상에 내쳐져야만 했다. 넌. 학비를 대줄 사람도 없고해서 고2에 사회로 나오고 말았다고 했다. 친구네 집을 떠돌다가 먹여주고 재워준다는 미장원에 잠시 취직했다.  미장원에 몇해째 붙박혀 있는데 머리하러 오던 단골인 려행사의 책임자가 가이드에 의향이 있나고 물어서 처음 나섰다는것이였다.
  아직 어린 육신에 토네이도(龙卷风)처럼 들이닥친 인생의 불행에 대해 넌 아프게 말했다. 생맥주 한모금에 뻔데기튀김 하나씩 씹어가며. “와늘”.
그리고 이야기하고있는 너의 눈은 모호한 슬픔과 갈등, 그리고 약간의 불안기 같은것을 가득 담고 있었다. “와늘”

 

더는 크게 뜰수없는
작은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았네
그 이상 더는 작아질수 없는
작디작은 귀로
바람소리, 새소리 그리고
세상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네

하늘이 어찌하여
나를 만들었는지
나는 그것을 몰라도 좋네
더는 작아질수 없는 가슴에
바늘귀 같은 뙤창을 만들고
푸른 하늘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나도 시간의 하늘을 오가는
한오리 바람인줄 알았네

 

- 김동진 “말하는 이끼”

 

화장을 지우며 눈물이 흘러내렸고 네 왼쪽 눈가장자리에서 무언가가 서서히 드러났다.
그건 태짐이였다. “와늘”.
팥알처럼 도드라진 하나의 푸른 태짐(胎痣).
  어머 들켰네. 사실 나 눈물짐 있어요. 그래서 맨날 울며 살 팔자래요. 모두들…
  나의 시선을 의식하고 핸드백에서 화장솔을 끄집어 내여 넌 눈가를 문질렀다.
  싫어요. 남들앞에 눈물짐 보이는거
  바삐 화장을 고쳤고 잠간새에 태짐은 사라져버렸다. 화장으로 생기를 되찾은 얼굴로 넌 말을 이었다.
  사실 제 이름 심예나 아니얘요. 건 려행사 사장님이 달아준 이름이고요. 제 진짜 이름은… 듣고서 웃지 말아요. 제 진짜 이름은 심순애랍니다. 좋아하던 연극의 주인공 이름을 본따 지었대요. 울 양아버지가. 이름이 와늘 웃기죠?
령롱한 구슬이 또 한번 구을렀다. 하지만 네 눈귀에 아직도 완고하게 맺혀있는 이슬을 난 보았다. “와늘”.
네 이야기를 듣는 동안 하나의 형상이 내 눈앞에서 그물거렸다. 그건 나방이였다. 한 마리의 나방이였다. 이제 겨우 뻔데기속에서 탈출한, 하지만 높고 너넓은 세상의 하늘에서 작은 나래를 어찌할지 주체하지 못해 파득이는 나방.
딱 한 잔이라고 했던 술은 두잔 석잔으로 이어졌고 그날 우린 밤늦도록 밤시장에서 앉아있었다. 눈까풀이 풀어질 때까지 술을 마셨다.
밤시장의 음식난전마다에는 알전구가 밝혀져 있었다. 알전구가 뿜는 희윱스르레한 불빛아래 눈물짐이 있는 처음 만난 녀자와 마주해 난생처음 씹어보는 환장할 맛의 뻔데기와 환장하게 우울한 이야기들, 내 시인의 감수로서는 환장하게 인상적인 밤이였다.  “와늘”.

 

 

 

 

재 회

 

사실 그 무렵 나 역시 환장하게 힘든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내내 책상물림이라 글외에는 또 글밖에 모르는 청빈한 문인과 몇해를 힘들게 살아준 안해는 두손을 들었고 리혼수속을 마치자 곧 출국을 해버렸다.
그리고 화는 단으로 오지 않았다. 모두들의 말처럼 화는 쌍으로 왔다. 혼인의파렬로 몸부림하는 나에게 또 한번의 타격이 왔다. 내가 여태 근무하던 잡지사가 정간되고 만것이다. 우리 말로 된 유일한 시 전문지가 우리 말의 위축으로 더는 지탱하지 못하고 그 “페지”를 닫아버리고 만것이다.
난, 사거리에서 엄마의 치마꼬리를 읽어버린 미아(迷儿)처럼 되여버렸다. 격심한 실의끝에 난 한숨을 거두었고 눈물을 닦았다. 눈물을 흘린뒤의 보다 명징(明澄)해진 시선으로 현실을 정시했다. 그만큼 의연하고 담대한 마음을 갖지 않으면 살기 힘든 세상이였다. 정말이지 이제부터 내가 혼자 가야할 길은 멀었다.
리혼한 안해에게로 집은 넘겨졌고 둥지털린 멧새처럼 난 시급히 엉덩이를 놓을 보금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세방집을 찾아 나섰다. 이곳저곳을 누볐고 어눌하게나마 세방주인과 실랑이질하며 방세를 깎고하면서 겨우 북대부근에 집 한채를 세맡았다.
이사짐은 많았다. 많은 이사짐은 모두다 책이였다. 삼륜차부들을 동원해 책을 날랐다. 볼썽사나운 한 시인을 동반해 보들레르와 릴케와 뿌쉬낀과 김소월과 리상과 윤동주가 일렬로 나를 따라 작은 세방으로 붐비며 들어갔다.
어머, 책이 와늘 많네!
층계에서 이사짐의 행렬을 보고 누군가가 놀란 소리를 뿜었다. 그 소리, 그 익숙한 말마디에 나는 문뜩 멈춰 서고 말았다. 책짐을 든채로.
그래 너였다. “와늘”.
이 세상에는 수많은 만남이 있고 그중에는 인차 잊혀질 만남도 많았지만 난 순간에 널 기억해 내고 말았다. “와늘”.
너도 미구에 날 알아보았다.
어머, 선생님! 이사하세요? 어머 묘하네. 와늘 묘해!
어폐를 쓰는 그 버릇은 여전하구나.
공교롭게도 나의 세방주인은 네가 아는 분이라 했다. 넌 내게서 이사집을 앗아냈다. 굳이 함께 날랐다.
드디여 이사짐을 다 나르고 땀을 들이고 있는데 네가 누군가와 함께 들어섰다. 나에게 인사시켰다.
제 남자친구얘요.
그래? 반갑네
난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런데 그 앤 나의 손을 받아주지 않았다. 두 손을 바지주머니에 찌르고 키 큰 맨드라미처럼 서서. 그저 안녕하세요! 한마디만 던져왔을뿐이였다.
그렇게 말하는 애의 키가 압도적으로 컸다. 대보름날 민속춤을 추는 사람들이 나무다리를 짚고선듯 엄청 컸다. 그런데 솔직히 첫 인상이 좋지않은 애였다. 손님에게 일별의 목례조차 없는애. 크지만 비쩍 마른 몸에 온 얼굴이 좁쌀을 한 되박 쏟아붓기라도 한듯 여드름투성이였다. 강파르고 뾰족한, 그리 너그럽지도 않은 성품이 보이는 아이였다. 미안하지만, “와늘”.
      그 앞에 서니 넌 도토리처럼 작아보였다.  하지만 그애의 겨드랑이밑에 끼여 웃고만 섰는 네 얼굴은 엄청난 키 차이에도 불구하고 밝아보였다.
선생님의 이 세집 제 남자친구 이모부가 세주는 집이랍니다.
오, 그래? 키도 크고 좋구나 남자친구
난 본의에 없는 덕담을 할 수밖에 없었다.
흡독하는 사람 같은 인상의 네 남자친구는 아무말도 없이 사라졌고 넌 나의 이사짐을 풀며 도와주려했다.
잘 생겼죠? 내 친구?
너의 물음에 엉.하고 난 애매한 단답을 주고 말았다. 하지만 넌 나의 반응을 느끼지못하고있었다. 이사짐을 정리하고있는 내곁에서 끝없이 남자친구 이야기를 했다. 잘 생겨서 좋고 키가 커서 좋고 이모부네가 잘 살아 좋고… 묻지도 않는 남자친구에 대한 칭찬을 이어댔다. 남자친구 덕분에 힘든 가이드직도 때려치우고 집에서 그냥 논다고했다.
이때 네게서 투명한 새소리가 울렸다. 내가 흠칫했고 넌 웃음을 토했다. BP호출기의 소리였다.
내 남자친구 사준거랍니다.
옆구리에서 BP를 떼내 보이며 네가 자랑했다.
날 부르네요.
그리고 경쾌한 뮤지컬 배우의 보법으로 넌 집에서 뛰여나갔다. “와늘”.

 

 

 


우 기 (雨季)

 

혼인이 조종을 울리고 직장을 잃은뒤로 난 전전긍긍 이 도시를 떠돌아 다녔다. 뿌리잘린 부초(浮草)처럼. 네 남자친구의 이모부가 세를 주는 세방집도 기한이 찼고 난 또 세집을 옮겨야만 했다.
얼마후 난 이 시가지의 서쪽 가장자리에 자그만 세책방 하나를 차렸다.
남자친구네 집에 올때마다 내 방을 노크하고는 어줍은듯 들어와서는 돌각담처럼 무져있는 책무지 앞에서 내가 타주는 싸구려 막대커피를 마시며, 재깔이던 너를 더는 볼수 없었다. “와늘”
책 안 읽는 풍토의 이곳에서 책방수입은 보잘것 없었다. 수많은 관념과 방향들로 들어차 있을것 같은 저 두꺼운 책들도 결국은 나의 생활에 대한 향방을 제시하지 못했다. 하지만 책상물림인 내가 뾰족히 찾아할 일거리도 없고 하여 난 책방에 매달려 입칠을 하고있었다. 확실한 내 일을 갖고 몰두하다보니까 인생에 좀 자신감이 생기기도 했다.
한편 아직 페간당하지 않은 우리말로 된 순문학지들에 열심히 투고했다. 몇줄 안되는 시와 내 이름 석자가 적혀나온 문학지들을 받아들고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기쁨에 몸을 떨군하였다. 그리고는 나의 시가 적힌 그 문학지들을 책방의 세책코너에 꽂아두기도 했다. 읽는 사람도 없을터지만.
그것이 그무렵 내 인생의 전부였다. 사라져버린 꿈과 랭혹한 현실에 대한 인식 때문에 아름답지만 뼈아픈 시를 쓰고 인생이며 문학이며에 대하여 고민하는, 고작 몇평방메터의 책방에서 수백권의 책을 임대하면서 임대료를 챙겨 살아가는 이 시대 서러운 시인일뿐이였다. 난.
  그날도 비 내리던 날이였다. 하늘은 연신 더러운 비물을 재빛 도시의 정수리에 무진장 흩뿌리고 있었다.
난 비오는 날이 싫다. 책에 누기가 드는건 물론 가슴도 습해지는 그런 날이. 그래서 여느때보다 일찍 문을 닫으려는데 해종일 손님없던 책방에 비소리를 들려주며 문을 밀고 녀자 하나가 뛰여들었다.
    전화 한통 합시다!
녀자는 급박하게 수화기를 쳐들었고 급박하게 버튼을 눌렀다. 푼돈이라도 끌려고 난 책방에 공용전화를 가설했고 때로 책 임대료 한잎도 못받는 날에 외려 전화비값이 더 많을때도 있었다.
오빠야? 나야!
한 마디를 떼놓고 녀자는 울기 시작했다. 녀자의 어깨가 톱질하듯 오르내렸다. 밖에선 비가 내렸고 책방안에서는 눈물이 내렸다.
울음섞인 코멩멩이 소리로 녀자는 말을 이어나갔다. 수화기가 그 무슨 고해상사를 하는 신부의 창구인듯이 많은 말을 했다. 시끄러운 곳이나 먼 곳에서 거는 듯 높은 목소리다. 실내를 가득 채우는 녀자의 톤이 높은 소리가 비소리의 단조음을 갉아먹었다.
어떻게 지내? 아프지는 않아? 음식은 입에 맞고? 고기는 먹여줘? 하루 몇시간씩 잠을 재워? 한 방엔 몇이 들어 있고? 그 사람들 오빨 괴롭히진 않아? 난 괜찮아. 몸상태도 좋고. 정말이야 와늘 좋아….
나는 흠칫 녀자에게로 눈길을 주었다.
드디여 끊나지 않을것 같던 통화가 끝났다.
얼마얘요? 녀자가 호주머니에서 짤깍돈을 꺼내여 세면서 나에게로 다가왔다. 아직도 그치지 못한 울음이 딸국질처럼 이어지고있었다.
  난 아무 대답도 못했고 녀자에게 들붙은 시선을 거두어 들이지도 못했다. 
비물이 떨어지는 긴 머리칼, 회가루라도 뒤집어 쓴것처럼 창백한 얼굴, 발갛게 질린 눈가에 또렷이 박힌 눈물태짐. 얼마나 울었는지 얼굴 선이 울퉁불퉁하게 부어있었다.
그래 너였다. “와늘”
어머, 선생님?
급기야 너도 나를 가려보았다. 
눈물에 씻겨진 네 눈동자는 까맣고 깊었다. 덩그마니 쌍꺼풀 진 큰 눈은 경계심으로 가득했고 또 그것은 한없이 텅 비여 보였다. 
첫 만남때보다 넌 유약해 보였고 조금은 지저분해 보였다. “와늘”.
애초의 미려한 모습은 오간데 없었다.
헐렁한 옷이 네 피부에 눅진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비에 젖은 바지에 척척 감긴 네 다리가 마냥 무겁게 보였다.
흰 양말에 든 검은 흙물이 보였다.
끈적하고 탁한 공기가 네 주위를 감돌고있었다. 비물에 흠뻑 젖은 너의 일신에선 꿉꿉한 냄새가 날것만 같았다.
넌 중량 없이 허허 안개바다에 떠있는 사람처럼 처연하게 보였다. “와늘”.
그리고 들먹이는 높은 가슴 그 아래로 배가 선연하게 불어있었다. 난 결례(缺礼)라는것도 잊은채 뚫어지게 그것을 바라보았다. 드러난 목이며 팔이며가 너무 말라있었지만 배만은 베개라도 품은듯 툭 튀여나와 있었다. 너의 작은 몸속에 분명 또 하나의 숨결이 숨어 있었다. 겨우 한두해 보지 못했더닌 넌 산월을 앞둔 녀인네로 되여 내앞에 나타났다. “와늘”
보도랑이 터진 물처럼 너의 눈물이 다시 흘러내렸다. 푸른 태짐우로 흘러넘쳤다. 동전을 움켜쥔 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넌 울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물을 손가락으로 훔쳐내면서 네가 입을 열었다. 낮게, 조금은 부끄러움이 섞인듯한 소리로 물었다.
라면있어요?
뭐? 뭐라고?
잘못 듣기라도 한듯 내가 다시 물었다.
라면 있어요? 뜨끈한 라면 먹고픈데
부끄럽게, 하지만 또박또박 넌 말했다.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봐!
난 쏜살같이 책방을 뛰쳐나갔다. 우산도 쓰지않은채 길건너 슈퍼까지 달려가 라면이며 짠지들을 샀다. 합자기업에서 만든 라면이 아니고 비싼 수입제 라면 몇개를 사들었다. 다시 비를 가르며 돌아와 책방뒤에 붙은 작은 자취방에 들어가 라면을 끓였다.
달갈도 넣을가?
네가 머리를 까땍가땍했다. 달걀을 깨넣었다. 두개를 넣었다. 이젠 홀아비생활이 몸에 배인지라 나 라면만은 그런대로 잘 끓였다.
라면이 다끓자 짠지봉지의 입구를 이발로 물어 찢어서는 짠지를 라면 그릇에 몽땅 부어넣고는 선채로 넌 라면을 건져 먹기 시작했다.
후르륵~ 후르륵~ 그 무슨 음식 빨리먹기 오락쇼에 나간 사람처럼 빨리도 한그릇을 비웠다. “와늘”.
네가 상기된 얼굴로 들이붓듯 허겁지겁 라면 한그릇을 다 비울 동안, 나는 우두커니 앉아 너의 둥근 등만 애처롭게 지켜보았다. 굽은 등은 먹이를 뜯는 맹수의 뒷모습처럼 굼지럭거린다.

 

미안하다
정말

너무도 먼먼 길을 너는 외로이
홀로 걸어왔구나

다시 한번 마주서서 생각해 봐도
미안하다 정말…

 

- 윤청남 “꽃이 꽃으로 보이는 순간”

 

그런 질문 따위는 하지 말아야 옳은거라고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지만 너의 그 심하게 불어오른 배를 자꾸 의식해 나의 질문은 터져나오고야 말았다.
어떻게 된거니?
매워서 실실거리며 입가로 번져진 국물자국을 휴지로 닦다가 네가 다시 입을 비죽이며 울기시작했다. 울음에 사연을 담아냈다.
남자친구에게, 키큰 맨드라미 같은 그 남자친구에게 일이 생겼다고 했다.
원체 남자친구의 이모부가 들어있는 집과 세를 놓는 세방집은 모두 남자친구의 어머니가 한국에서 부쳐 보낸 돈으로 이모네가 산것이라고 했다. 동생네 집에 얹혀있는 아들 때문에 매달 어김없이 학비며 생활비들을 부쳐왔다고 했다. 그러던 어머니가 어느날부터인가 소식이 끊겼고 그날로부터 이모와 이모부의 태도는 급변했다. 그녀와 결혼할 요량으로 집을 내달라고 하자 그때로부터 남자친구와 이모네는 전쟁이 시작됐다고 했다. 집의 소유권을 두고 법놀음까지 벌렸다고 했다.
실랑이가 오가다가 이모부가 남자친구의 귀뺨을 때렸고 남자친구가 우직함을 참지못해 재떨이로 이모부의 머리를 깠다고 했다. 이모부는 중태에 빠져 입원했고 모질게도 이모는 그런 조카를 고소했다고 했다. 그래서 3년의 실형을 받고 “콩밥”을 먹고있는 중이라고했다. 남자친구가 판결받기 전날 그녀도 임신사실을 알게 됐다고 했다.
비는 그냥 내렸고 비처럼 습한 어조로 넌 진창길처럼 엉망이 된 네 신세를 이야기했다. “와늘”.
말을 마치고 너는 울었다. 한동안 울었다. 깊은 오열이였다. 너무 깊어서, 나는 그 순간 너를 건드리지 못했다.  지금까지 넌 허방위를 걸어온 듯했다. “와늘”
네 이야기를 들으며 목구멍으로 무언가가 뜨겁게 치밀어 올라 나는 자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왜 내 삶의 테두리에는 사연 아픈 사람들만 있는거지?
문뜩 네가 내 팔뚝을 잡았다. 급박한 어조로 말했다.
날 여기 있게 해주세요! 있을데가 없어요. 
애원에 가까운 소리였다. 그러면서 넌 불안한 시선을 연신 좌우로 날려보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후두둑 무너져 내릴것만 같이 지쳐 있는 그 눈빛이 새삼스레 내 가슴을 후벼냈다.
오래 가진 않을거애요. 이제 법원판결이 나서 집 찾으면 나갈게요.
잠시 진지한 침묵이 실내를 감쌌고 스스로도 그 침묵이 싫어져 난 머리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모습이 혼란스러운 탁류속에 떠내려가는 한가닥 지푸라기 같아서. 그리고 이 순간엔 목석이라도 머리를 끄덕이였을것이였다.
    작고 초라한 내 자취방에 이 몇년간 손님을 치르지 않았다. 네가 첫 사람이였다. 이렇게 카메라의 줌렌즈로 눈앞에 바짝 끌어다 놓은것처럼 불쑥 나타난 너와 난 참으로 묘한 인연으로 엮어져 한 처마밑에서 한 솥밥을 먹게 되였다. 큰 물고기의 배에 붙은 작은 흡반어처럼 책방에 붙여 지은 작은 자취방에서, 이제 겨우 몇번 만났던 남녀가. 그야말로 소설 같은 이야기였다.
   나에 대한 감사를 표하고자 넌 무거운 몸으로 일을 손에 잡았다.
   나를 도와 돌려온 책들을 정리하고 파손된 책들을 손질했다. 미처 정리하지 못해 창고에 박혔던 책들이 서렬을 찾았고 낡고 너덜너덜 하던 책들이 새옷 단장을 했다. 책방의 창문을 필요이상으로 알른알른 닦았다. 그때로부터 우리 책방의 유리는 그 무슨 의류전시장의 창문처럼 그렇게 깨끗하고 맑아졌다. 청결함을 좋아하는 그것이 곧바로 네 깨끗한 마음의 표출이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와늘”
집안 구석구석 빗질을 하고 닦기를 반복했다. 물건들이 제 자리로 정리되고 방에 윤기가 흐렀다. 나의 밀린 빨래도 기어이 앗아내 해주었다. 음식도 네가 끓였다. 아침이면 들려 오는 나지막한 도마소리, 기름타는 냄새, 그리고 슬리퍼를 잘잘 끌고 오가는 너의 발소리... 불편함보다 그 어떤 충만감이 작은 방을 들먹히 채웠다. 꽤 오래된 홀아비생활로 부잇하게 거미줄 어렸던 내 방과 내 심성이 먼지를 털고 일습을 개비하기 시작했다. “와늘”.
하지만 네 얼굴엔 물 그림자 같은 수심기가 마냥 어려있었다. 일을 하다가도 잠시 손을 놓고 멍하니 앉아서 바보 같은것, 바보 같은것하고 혼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기도 했다.
배속의 아이를 위해 저녁이면 가끔 산책을 나가곤했다. 어느 날인가부터 내가 널 배동해주었다. 어스름이 내리고 한낮의 화끈했던 열기가 삭아드는 초저녁 도시의 가녁을 우리는 노량으로 거닐었다. 어느날 네가 내손을 더듬어 잡아 쥐였다. 그리고 부여잡는 네손엔 힘이 들어가 있었다. 혼자서 생활의 중량을 감싸안은채 추운 비속을 가르며 온 넌 사람의 온기가 그리웠나 보다. “와늘”
그 손을 난 꼭 사려쥐여 주었다. 신혼에 아기를 가진 부부처럼 우리는 손을 꼭 잡고 산책을 했다. 세간의 눈길을 난 의식하지도 않았고 피하지 않았다. 이렇게 터무니없고 허무맹랑한 관계가 어디있을가만은 사랑이 필요한 너에게 조금이라도 위무(慰撫)를 줄수있다면 어떡하든 좋다고 난 생각했다. 그건 또 어찌보면 외로웠던 나 자신에 대한 위무이기도 했다.
산책으로 책방 가까이에 있는 공원에도 자주 갔다.
그곳에는 회전목마가 있었다. “와늘”.
밤의 어둠을 썰며 음악을 안고 돌아가는 회전목마는 이승의 그것 같지않게 신비스럽고 영묘해 보였다. 목마가 돌고 음악이 울리고 아이들의 웃음이 어우러져 천국의 풍경을 그리고있는 그곳을 넌 무척이나 좋아했다. 기쁨의 회오리에 잠긴 아이들을 지켜보며 넌 속삭이듯 말했다.
나도 저렇게 이쁜 애를 낳을거애요.
우기였다. “와늘”. 우기에 우리는 또 만났다.
이렇게 습습한 우기속에 여의치 못한 운명을 가진 사람이 한사람도 아니고 두사람이 있다는 건 슬픈 일인데, 이상하게도 슬프지만은 않았다. “와늘”.
우리는 서로의 체온으로 애써 상대의 눈물을 말려주었고 젖어드는 가슴에 온기를 주고있었다. 거부할길 없이 우리몸을 두다리며 쏟아져내리는 세간의 장대비를 피하고 막아주며 우린 살아가고있었다. “와늘”.
책방에는 수업을 끝낸 학생들로 점심나절에 손님이 가장 많았고 오전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더구나 기분이 찜찜한 우기라 요사이는 손님이 거의 끊기다 싶이 되여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것 같은 오전, 그런데 그날은 오전나절에 웬 손님이 뛰여들었다. 선뜻 들어서지 못하고 뭉그적거리다 손님은 계산대쪽으로 다가왔다. 아침에 네가 깨끗이 닦아놓은 바닥에 큼직한 발자국을 내며 다가와 물었다.
순애 여기 있습니까?
일순 멍혀졌던 나는 순애라는 이름이 너의 본명이였음을 급기야 떠올렸고 마주한 사람의 키가 엄청 크며, 그 사람의 머리가 까까머리이며, 그가 누구라는것을 뒤미처 알아보았다.
    인기척을 듣고 뒤방에서 네가 머리를 내밀었다. 예리한 날에 상처를 입을 때 나는 비명 같은 소리로 넌 불렀다.
오빠!-
녀석이 네 앞에 몸을 내던지더니 서러운 아이처럼 울기 시작했다. 한쪽 다리를 꿇은채, 녀석은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네 둥시런 배우에 손을 올려놓고 울었고 넌 불어난 몸 때문에 녀석을 안을수도 없어 그저 손을 뻗쳐 녀석의 박박 밀어버린 머리통을 만지며 울었다.
나는 조용히 책방을 빠져나오고말았다. 두 사람의 시간을 갖게해주고싶었다.
나오고보니 불시에 가출한 소년처럼 갈 곳이 업어졌다.
그 시간을 난 찜질방에서 먹고자며 보냈다. 형형색색색의 사람들로 시끌벅적한 찜질방에서 혼탁한 온도에서였던지 아니면 딱딱한 목침때문에서였던지 꼬박 잠못 이루고 뒤척이였다.
그런데 왠지 허전한 이 감정은 또 뭘가? 무언가 설명 못할 미진함 같은것이 발목을 잡아채는 듯한 끈끈한 느낌?

이튿날 책방에 돌아와 보니 뜻밖에도 책방앞에 경광등(警光灯)을 단 경찰차가 서있었고 푸른제복의 경찰들이 서슬퍼렇게 보였다.
난 난생처음 파출소로 불려갔다. 너와 내가 무슨 관계인가고 경찰들은 매눈을 하고 어조를 살려 물었다. 경찰들의 질문에 난 일순 대답을 잃었다.
너와 난 대체 무슨 관계였던가? “와늘”?
경찰에 진술할념 않고 난 스스로에게 묻고있었다. 다른곳도 아닌 파출소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경찰들의 채문앞에서 난 너와의 관계에 대해 새삼스런 답을 구하고 있었다.
그저 언젠가 려행길에 엉성하게나마 가이드를 해준적 있는 녀자. 내가 들어있던 세방집 주인의 조카의 녀자친구, 그렇게 알게된 면목으로 불쌍해서 내 집에 잠깐 아주 잠깐 묵게 해준 녀자…
이렇게 설명하기로는 세간의 리해는 물론 나 자신의 해석도 모자랐다.
사실 좁은 자취방에서 너와 지내며 난 우리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 본적있었다. 그때면 이상하게도 TV의 “동물세계”프로에서 보았던 한 장면이 떠오르군했다.
작은 소(沼). 그 푸른 소에 몸을 담근 코뿔소며 소에 다가와 물을 마시는 령양이며 양의 뿔우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고있는 새며… 이런 진풍경이 자꾸 떠오르군 했다.
너와 나는 그렇게 덥고 목이 마르고 해바라기를 하고싶어하는 소며 양이며 새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각자의 수요는 있지만 서로를 다치지 않고 서로를 리해하며 의존해 지내온 순하디 순한 온혈동물. 그렇지않을가? “와늘”?
탕! 경찰이 손으로 사무상을 내리쳤다. 아마 내가 대답을 거부한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넘이 어떤 넘인지 알아? 탈옥범이라고! 탈옥범!
경찰이 나를 향해 소리소리 질렀다.
결국 내가 고용한적 있는 책방의 영업원이였다는쪽으로 아퀴를 지었다.
어디있나요? 그애?
진술을 마치고 난 너의 행적부터 물었다.
뿌즈도우! (不知道)!
퉁명한 대답으로 너의 행적은 일축되여버렸다.
파출소에서 나오니 밖은 그냥 비의 세상이였다. 거리의 축축함이 달라붙듯이 나에게 다가왔다. 몸이 가늘게 떨렸다. 옷깃을 올린채 비물 추적거리는 거리를 가로질러 책방으로 왔다.
책방에 돌어서서 영업할념도 하지않은채 난 창 가까이의 의자에 앉아 버렸다. 장마철의 축축하고 후덥지근한 열기를 안고 멍하니 앉아있었다.
굵은 비방울이 창문을 타악기처럼 두드렸다. 힘있게 때리고는 아픈듯 몸을 허물며 주르르 흘러내리고……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이 허무하게 유리창으로 부서져내리는것 같다. 언젠가는 화창한 해빛이 스며들던 창, 네가 호호불며 극성스레 닦은데서 현실감없이 환장하게 빛나던 창, 지금 그 창에 얼룩을 내며 그 창을 때리며 차가운 비만 턱없이 내린다. 차겁게 그리고 허무하게.
이 차거운 비에 그 무거운 몸으로 너 어디 갔느냐? 밖에는 어둑시니 같은 어둠이 웅크리고 있는데
너 어디 있느냐? “와늘”?


 

 

몽 롱 (朦胧)


끝내 나는 서점을 부도내고 말았다. 나 같은 이들은 책을 쓰고 책을 만들어도 책을 팔줄은 모르고있었다. 책 안읽는 풍토에 하필이면 책으로 장사를 하려했으니 부도를 낼수밖에. 그렇게 세간의 눈에 비친 난 언제나 모자라고 서러운 시인일수 밖에 없었다.
안쓰러워보였던지 동인들이 일자리를 알선해 주었다. 작은 신문사에 취직했다. 큰 잡지사에서 오랜 편집으로 있던 내가 연예계 스캔들이나 스포츠계의 어둠을 들추며 어수룩한 독자들의 말초를 자극해 부수를 올리는 그런 신문사에서 밥줄을 이으려 뛰여다녀야 했다.
그래도 꿈은 그냥 가지고있었다. 예전처럼 현란하지도 않고 색채도 바래진 흑백의 꿈, 그 때문에 한결 더 현실같아보이는 소박한 꿈은 그냥 꾸고 있었다. 그 작은 꿈은 시집 하나를 내는것이였다. 여태 써놓은 그렇게 많은 시중에서 딱 100수의 정수만 골라 가위에 내 이름 또박이 찍어박고 장정도 아치(雅致)하게 내고싶었다. 그 누가 읽지 않더래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동인들께, 내 못난 시를 수첩에 베껴두고있을 흔치않을 독자들께 싸인하여 척 내여줄 그런 시집 하나 내고 싶었다.
다행이도 요즘 세월에 보면 유치하고 진부하고 어리뜩하기 짝이없을 그런꿈을 들어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어느 한번 신문사의 회동에서 취기에 나의 꿈을 역설했는데 자리에 끼여 내곁에 앉았던 광고부 부장이 듣고서 시집에 협찬해줄 사람을 찾아준것이였다.
어느 건강원의 사장님이였다. 말이 건강원이지 농촌에서 상경한 아직 촌티를 벗지못한 녀자애들에게 후다닥 단기훈련을 시킨후, 똑 같은 유니폼을 입히고 술 취한 나그네들의 목줄기며 발가락이며 허리통이며 간간이 다른곳이며를 주물러주는 그런 안마업소였다. 
하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따질 계제가 못되였다. 좋은 작품을 량산해도 팔리지않고 자비출판을 해야만하는 풍토가 야속했지만 그런 자비출판이라도 할 밑천마저 마련하지 못나는 자신한테 화가 났고 따라서 이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가상스러운 각오까지 머금은 나였다. 때묻은 돈이건 코묻은 돈이건 그 돈으로 바꾼 것이 깨끗하면 되지않나?하고 스스로를 위안하고있었다. 난.
사장님에게 한턱 내면서 술로 공략하라고 광고부장이 귀뜸해 주었다. 이건 국이다, 이건 나물이다며 세세히 일러주는 광고부장의 제안에 따라 난 사장님을 청했다. 당연하다는듯 마다하지 않았고 친구까지 하나 달고왔다. 눈이 연필심 구멍만하게 뚫리고 주독에 절은듯 코가 유난히도 빨간 사내였다.
광고부장과 함께 그들을 손님이 문전성시를 이룬 어느 유명한 맛집에 청했다.
첫대면에 나는 그들과 맞지않고 겉돈다는 느낌이 들었다. 고귀한 척 해보았지만 내재되여있는 그들의 천박성은 금세 드러났다. 하지만 내 이름 석자가 박힌 책 한권을 꼭 내고야말겠다는 각오를 머금고 주억거리며 그들과 어긋나는 궤도를 맞추어 공전하려고 부득부득 애를 썼다.
   나이에 비해 이마가 지나치게 벗겨오르고 갓 출품한 오지독처럼 반들반들한 건강원 사장님과 객반위주(客反为主)로 감놓아라 배놓아라 말도 많은 “딸기 코” 친구는 술을 엄청 마셨다.
2차로 간 노래방에서 나와서도 사장님의 취흥은 제어가 되지않았다. 자기가 아는 술집으로 가자고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했다.
글쟁이들 사는거 받아먹을려니 속이 더부룩하구먼.
목소리에는 베푸는 자가 보이는 거만함이 묻어 있다.
사장님의 자가용에 앉아 허깨비처럼 흔들거리며 달렸다. 한참 달려서 시가지 변두리에 있는 처음 와보는 술집으로 왔다.
난 “관청에 들어선 소”처럼 어색하게 실내를 두리번거렸다. 조명을 적게 쓴 홀 안은 어두우면서도 탁했다. 신문지 글씨를 식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조도(照度)가 낮다. 벽면에 모조품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사장님이 반고흐를 좋아하는지 아니면 모르고 그냥 걸었는지 죄다 반고흐의 그림들이였다. “해바라기”며 “론강의 별밤”이며 “의사 가제의 초상화”며…
홀에서는 쉰듯한 목청의 팝송이 흘렀고 결이 그대로 드러난 목재 마루바닥우로 웨이터들이 기분좋은 구두소리를 내며 걸어 다녔다. 유독 불이 환한 길다란 바엔 갖가지 종류의 양주가 들어차 있었다. 사장님이 한병 청했다.
이런 술 마셔봤어? 시인? 이거 나뽈레옹 꼬냑이야! 비싼 술이라고.
사장님이 양주에 넣는 얼음조각을 먼저 집어 입에 넣고 서걱서걱 씹으며 말했다. 나보다 겨우 한두살 위인 사장이 반말을 틱틱해가며 시종 건방을 떨고 있었지만 난 참았다. 외려 난 여태 비싼 양주 한번 마셔보지못한 처지의 자신한테 화가 나 있었다.
깔끔하고 뒤끝도 개운했지만 결국은 40도가 넘는 독한 술인지라 목이 연탄을 삼킨듯 했다. 난 알프스산을 공략하는 나폴레옹처럼 독기를 품고 그 술을 공략했다.
술이 몇순배 돌자 사장이 문뜩 웨이터를 불러 녀자를 요구했다. 인차 녀자들이 나왔다. 굽높은 신으로 나무바닥을 탕탕거리며 다가와서는 향수냄새를 폭탄처럼 터뜨리며 우리곁에 털썩 드러앉는다.
밤을 먹고 사는 녀자들인지라 화장기 진했고 로출도 심했다. 미니스커트가 감싼 엉덩이들이 풍선처럼 터질듯 했고, 몸을 틀때 잘록한 허리가 금방이라도 끊어질것 같았다. 부담스럽게 밀착해 앉아 요란스럽게 몸을 비트는 그들의 몸짓에서 단내가 났다.
그녀들의 도발적인 에로티즘에 사로잡혀 일순 멍해졌는데 사장이 내곁의 녀자를 불렀다. 흐느적거리는 눈빛으로 자기곁으로 오라고 손짓했다. 나의 허락도 없이 자기녀자와 바꾸어 앉혔다..
나 좀 살이 붙은 녀잘 좋아해. 흐흐
    허연이를 드러내며 낄낄댔다. 성긴 이 사이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가 술집바닥에 굼닌다. 폭발하는 순간의 화염을 보듯 염색하고 란발한, 내곁에 앉았던 녀자는 기다렸다는 사장에게로 다가갔다. 넘어지듯 그에게 안겨들었다.
우와, 양귀비구먼 아주 그냥 죽여주는데…
사장이 녀자의 도드라진 엉덩이를 찰싹 치면서 입술이 벗겨지게 웃었다.
제가 양귀비면 사장님은 뭐애요?
녀자가 코소리를 내며 애교를 떨었다.
난 네 시아버지다.
어머 오빠도 아니고 사장님도 아니고 하필 시아버진 왜요?
당태종이 제 아들의 녀잘 빼앗지 않았더냐. 그러니 양귀비면 내가 오늘 저녁은 당태종, 네 시아버진거지 크크큭…
사장이 야비하게 웃었다. 웃으면서 녀자의 목이 훤히 패인 분홍빛 상의의 옷섶으로 손을 밀어넣었다.
오늘저녁 어디한번 시아버지와 즐겨볼가?
녀자는 만수받이로 받아주고있었고 사장은 우리가 보는앞에서 내놓고 녀자를 만지고 주물고 했다.
독한 술이 돌았고 질퍽한 육두문자가 오갔다. 그 어울리지않는 좌석에서 나는 반고흐의 그림속 “가제 의사”처럼 식지로 관자놀이를 짚고 있었다. 거칠고 천한 언사와 행동들에 난 눈살을 찌푸렸다.  머리꼭지가 맹렬히 뜨거워 지는것 같다.
내가 왜 이자리에 있지? 지금 대체 뭘하고 있는거냐? 하는 반문이 들었다. 그리고 저들이 필요로 하는것은 뭘까. 세상것 가운데 금전과 치환할수 없는것이 있을까.하는 자문을 구했다.
나는 그렇게 욕망의 틈바구니에 보잘것없이 앉아있었다. 문뜩 엄습해오는 질문들에 해답을 찾지 못해 몸부림하며 그 해소법으로 곁의 녀자가 따라주는 대로 술을 마셨다. 맨숭한 정신으로는 견딜수가 없었다. 더 강한 알콜을 계속 위속에 머리속에 주입했다.
먼 길을 강행군한 것 같은 피로감이 엄습한다. 질량을 헤아리기 어려운 무력감이 온몸을 덮쳐온다. 곁에 바싹 밀착해 앉은 녀자의 물컹한 살 때문에 에어컨을 튼 방이였지만 더웠다. 땀이 났고 위가 쓰렸고 머리가 폭발할것만 같았다. 욕이 나올것만 같았다. 이대로만 간다면 난 저 고민하는 모습의 “가제 의사”를 그려낸 반고흐처럼 자기 귀를 뎅겅 베여버릴지도 모른다. 나는 취한 게 아니고 분명히 지쳐 가는 거였다.
소주에 맥주에, 소주와 맥주를 섞은 혼합주에, 위하여! 원샸!을 수없이 웨치고 나서 사장님이 곯아떨어졌다. 드디여 끝나려보다 안도의 숨을 쉬는데 범없는 골에 삵이 나타났다. 사장님의 친구가 이번엔 그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그냥 술을 청했다.
역시 사장처럼 작은 안마업소를 차리고있다는 그 “딸기 코”친구는 사장못지않게 바람을 잡고 구름을 타고 있었다. 사장의 술배동녀였던 폭발머리녀자를 핧듯이 바라보던 “딸기 코”가 한사코 몸을 트는 녀자의 옷섶으로 부득부득 손을 밀어넣어 녀자의 부푼 가슴을 잔뜩 움켜쥐였다. 그리고 길고 날렵한 혀가 녀자의 얼굴로 덮쳤다.
다음순간, 녀자가 찰싹 남자의 뺨을 때렸다.
썩을 놈!
이를 앙다물고 녀자가 투명한 고음을 질렀다.
나 원 드러워서. 참자참자 했더니 이젠 별 허접쓰레기가 다 건드리고 지랄이야.
“딸기 코”의 얼굴이 불판처럼 시뻘겋게 달궈졌다. 땀구멍이 숭숭한 붉은 코가 벌름거렸다.
어허 이 년이? 미쳤나? 야, 너 거기에 금띠 두른 팔자는 아니잖아, 이년아?
“딸기 코”는 욕설 한번에 덤 한번으로 녀자의 가슴을 툭툭 건드렸다.
내가 만졌다. 왜? 만지면 어떡할래? 이 순 걸레 같은 년, 이 순 창녀 같은…
어떤 기를 모아들이듯 거친 숨을 들이마시던 녀자는 아주 길게 야- 이- 개-새-끼-야!하고 앙칼지게 내지르며 맥주병을 들어 “딸기 코”의 이마빡을 깠다. “딸기 코”가 비명도 지르지못하고 폭삭 거꾸러졌다.
순간 난  나는 아득해 졌다. 멍청한 눈길로 맥주거품에 섞여 피가 솟는 “딸기코”의 이마와 피처럼 붉게 루즈를 바른 녀자의 폭언이 쏟아져 나오는 입술을 쳐다보았다. 무성영화처럼 아무도 들리지 않았다. 기분이 얼얼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다행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부근의 병원분원을 찾아 몇코를 꿰멘뒤 야단칠 여력이 없었던지 “딸기코”는 택시에 앉아 집으로 가버렸다.
뒤수습을 마저 하려고 다시 술집으로 왔는데 광고부장은 란동에도 곯아떨어져 있는 건강원 사장을 챙겨 사라지고 없었다.
    난 미간을 일그러뜨린 채 맥주병을 휘두른 그 폭발머리 녀자를 찾았다. 웨이터 하나가 화장실쪽을 가리켰다. 난 거칠게 화장실문을 와락 열어젖혔다.
사실 난 화가 잔뜩 나 있었다. 어떤 허탈감과 함께 알수 없는 분노가 목구멍까지 차 올라왔다. 이런 추잡한 란동이 벌어졌다는데 대해 그리고 이런 란동의 중심에 청고한 시인으로 자처하던 내가 끼여있다는것에 화가 났다.
화장실의 세면대에 녀자가 엎드려 있었다. 녀자는 토악질을 해대고있었다. 오페라를 부르듯이 소리높혀 구역질을 하고있었다. 오늘 장소를 쑥대밭으로 만든 장본인으로 생각되는 그 녀자를 격한 소리로 불렀다.
여보세요! 아가씨! 나 좀 봅시다!
녀자가 세면대에서 꺼수수 풀린 머리를 쳐들었다.
순간, 내 머리속에서 하얀 새떼가 화르르 날개를 펴며 날아갔다.
토악질을 하던 녀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흐르고있었고 눈물이 번져져 화장기가 지워진 얼굴이 추례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아이새도우(眼影)가 벗겨져 시커먼 눈물줄기로 흘러내리는 녀자의 볼에서 난 무엇을 보았던가?
눈물에 땀에 화장이 벗겨진 눈가에 드러난 그것은 푸른 태짐이였다.
난 덫을 밟은 사람처럼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순애? 너 순애 맞냐?
그래.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믿기어렵게도 너였다. “와늘”.

너를 끌고 꿈의 자락에 이끌리듯 술집을 나와 밤시장에 앉았다. “와늘”.
너는 토하자 속이 좀 개운하니 술을 더 마시자고 했다. 사실 나도 술이 말짱 깨여있었다. 안주를 청하려니 아무것도 싫다고 했다. 그냥 술이면 된다고 했다. 그러던 네가 철제화로앞에서 양고기꼬치를 굽고있는 주인장을 불렀다.
저 여기 뻔데기 있어요?
뻔데기 튀김이 올랐다. 너와 처음 만났던 그 5월의 밤이 환영으로 떠올랐다 사라졌다. 뻔데기 튀김을 안주로 맥주 몇잔을 들이켰다. 양주에 타던 목에 랭동이 잘된 맥주를 구명환처럼 부어서 삼켰다.
술 한모금 하던 네가 속이 쓰리다며 잔을 내려놓았다. 거품이 삭은 맥주잔을 내려다보며 넌 길게 하품을 했다. 부스럭거리며 핸드백에서 무언가 찾았다. 한동안 뒤적여 무건가 끄집어 내였다. 담배였다. 몸서리치도록 빨갛게 메니큐어를 한 손톱으로 한 개비를 끄집어내여 입에 물었다. 리이터를 찾았다. 라이터가 없는 모양이였다.
이봐요! 불이 없나요 불?
네 목소리는 자정으로 가는 밤시장을 흔들었다. 곁에서 수타면(手墮面)을 먹고있던 련인인듯한 한쌍의 눈길이 너에게 몰부어져있었다. 입에 잔뜩 문 국수발을 끊치않은채, 짧은 미니스커트에 불량인형처럼 화장하고 담배를 꼬나문 너의 일신을 훑어보고있었다. 순간 나의 얼굴이 먼저 달아올랐다.
주인장이 다가와 라이터를 켜주었다. 고개를 숙여 불을 붙혔다. 깊게 패인 앞섶으로 커다란 가슴의 륜곽이 거침없이 드러났다. 나는 덴겁히 시선을 돌렸다.
맛나게 한모금 빨고나서 도넛(圈饼干)처럼 동그란 담배연기를 토해내고는 그 얇은 연기의 망사를 뚫고 넌 나를 말똥하니 쳐다보았다. 화장을 고쳐 한 얼굴에 푸른 태짐은 사라졌고 숱 많은 인조눈썹이 달려졌다. 그런 너를 난 잘못 부른 이름에 뒤돌아보는 사람처럼 생경하게 쳐다보았다.
네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근데 아저씨!
술집에서처럼 여전히 간드러진 소리였고 칭호도 이전처럼 선생님이 아니고 아저씨다.
근데 왜 저런 사람들과 다녀요? 돈 좀 있다고 세상 유세 다 떠는 저런 새끼들하고. 아저씨 맞아요? 그 김동주인지 윤동주인지처럼 시 쓴다는 아저씨.
나는 나인데 넌 네가 맞느냐?
      난 가라앉은 소리로 대답했고 물었다.
맞아요. 나 “와늘”인데
네가 깔깔 웃었다. 웃음이 밤시장을 뒤흔들었다. 거품 같은 웃음이였다. 나는 온몸에 전기가 오른듯 소름이 돋았다.
나 이제 와늘이란 말을 안해요. 그게 언제일인데. “와늘”인 죽었어요. 그 촌시런 “와늘”이는
넌 숨이 막힐듯 웃어댔다. 웃음소리는 천막안에 가득히 명멸했다. 헛바람이 새는듯한 그 웃음소리는 자못 방탕하기까지 했다. 수타면을 먹던 한쌍의 눈길이 또 한번 너에게 쏠렸다.
천장 쪽에서 푸드득 소리가 들려왔다. 웃음소리에 놀란듯 나방 한 마리가 천장에 달린 알전구에 제 몸을 부딪치고 있다. 나방의 날개짓에 따라 불빛이 어지러워졌다.
나는 말없이 나방의 란무를 지켜보았다. 알전구의 빛줄기가 만들어내는 빛의 반경안에서 나방은 어지러운 곡선을 그리고 있었다. 빛을 갈구하며 날아들고는 가까이하다가는 뜨거워 튕겨나는 나방의 몸짓은 애처롭게 보였다.
    어찌된 일이냐? 어떻게 된거냐?
난 너의 사정이 궁금했다. 웬지 그 궁금증은 필요이상으로 컸다.
뻔데기를 한점 집어 입에 넣고 소리나게 씹으며 네가 되물었다.
스코필드라고 알아요?
스코필드?
외계인의 음성을 듣기라도 한듯 난 네 입을 지켜보았다.
그럼 “탈옥”이란 드라마는 보셨어요? 미국 드라마인데…
아, 그런 드라마 들어본것 같애. 지금 시청률 젤 높은 드라마지. 근데 자다가 봉창두드리냐? 드라마는 웬?
     스코필드, 그 드라마서 나오는 주인공 이름이죠.
근데는?
나는 궁금증이 나고 초조해 미칠지경이였다.
내 남자친구 별명이 스코필드래요. 스코필드. 오빠가 정말 스코필드처럼 잘 생겼잖아요.
웃을 대목이 아니였지만 네가 웃었다. 그 웃음이 또 한번 날 괴롭게 했다.
왜 스코필드냐구요? 드라마속 얘기처럼 탈옥을 시도했니까. 그래서 깜방에서 불리는 별명이 스코필드래요.
네가 두번째 담배를 꺼내물었고 또다시 새된 소리로 주인장을 불렀다.
여기요 불있어요 불?
내가 일회용 라이터를 가져다 불을 붙여주었다. 불을 붙여 물고 연기를 한숨처럼 토하더니 넌 말을 이었다. 희극을 연기하다가 갑자기 비극을 연기하는 배우처럼 얼굴을 바꾸어서 말했다.
오빠가 또 탈옥하다 잡혔어요. 이번엔 깜방밥 더 오래 먹어얄것 같애요.
녀석은 무려 세번이나 탈옥을 시도했고 중형을 받았다고 했다. 그렇게 되자 녀석은 면회를 온 순애와의 절교를 선포했다. 이제 감옥에서 나오면 늙어갈 터이니 청춘을 아껴 다른 남자를 찾으라고 했다고 한다. 아이는 지우라고 덤덤하게 말했고. 그후부터는 면회를 가도 아예 만나주지를 않았다고했다. 그렇게 수십번 찾아가도 녀석이 만나주지도 않고 모질게 나오자 모든것을 체념했다고 했다.
아이를 키울 자신도 없고 자기처럼 낳아서 남의 업둥이로 보낼바에는 지우기로 마음먹었다고했다. 자신은 얼빠진 녀자, 이제 곧 태여날 아이는 죄수의 새끼라는 꼬리표를 달리게 하고싶지않다고 했다. 그리고 의사들도 말리는 인산(引産)을 기어이 강행하다가 하마터면 죽을뻔했다고 했다. “와늘”.
소리없이 나타난 눈물이 네 얼굴을 적셨다. 화장기 진한 얼굴에 흉터같은 길을 만들던 눈물은 곧 소금처럼 얼어붙었고 그 소금우로 새로운 눈물이 길을 만들었다.  
나는 다시한번 너를 쳐다보았다. 진한 파운데이션 화장에 짙은 인조눈썹, 붉은 립스틱으로 입술을 도색한, 요염한 얼굴. 하지만 너의 제슈체어(行为)는 어색했고 짙은 눈화장에가려진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난 마음이 저릿했다. 상처입고 두려워 떠는 짐승의 눈이 저럴까. 불안함이라고도, 슬픔이라고도 할수있는 그 떨림, 그 눈은 대상을 주시하는 눈이 아니라 안으로 잠긴 눈이였다. 거침없이 사위를 보고있지만 넌 나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내 뒤의 먼 곳을, 결국은 자기자신을 안으로 응시하는 듯했다. 그러고보니 네 몸체의 곡선은 당차지 않고 연약했고, 어딘가가 허술한듯 허물어져 보였다.
나는 휴지를 건네주었다. 휴지로 얼굴을 닦자 그 푸른 태짐이 다시 드러났다. 너의 끝없는 눈물샘을 자극하는 그 눈물짐을 지켜보며 나는 몽롱한 혼돈속을 헤쳐나오고자 몸부림했을 너의 아픈 시간들을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아픈 몽롱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네 손을 잡아주고싶어졌다. 끄당겨 주고 싶어졌다.

 

내 하늘에는
지난 사랑을 불러보는
시계 하나가 걸려있다
우걱거리는 그리움이
시계바늘을 타고 흔들흔들 달려나오면
그우에 어진 파초처럼 드러누워
비온뒤 보았던 하얀 목련의 죽음 같은
절망을 뜯어먹는다
뿌려진 상처로 시간은 얼룩지고
아픔의 맛은 비릿하고 사납다

이제 그 시계를
별밭에 부수어 이지러지게 하련다
그리고 다음날
노란 장미로 피여나
누군가의 입에 곱게 물려있게 하고싶다.

 

- 심명주 “보름달”

 

어수선한 그 밤이 지난뒤 넌 내가 남긴 전화번호대로 나를 찾아왔다. 내가 제의한대로 내게서 타이핑(打字)을 배우겠다고 했다. 어차피 술집에서 쫓겨난 처지이고 나의 진지한 요구처럼 새 길을 걷겠다고했다.
저녁이나 휴일이면 넌 나의 거처로 찾아와 타이핑을 배웠다. 넌 오성(悟性)이 빠른 애는 아니였지만 부지런한 덕성이 있었다. 힘들게 허나 열심히 넌 타이핑을 배웠다.
네 숨결곁에서 네게서 풍기는 농익은 향기를 맡으며 너의 지법을 바로잡아주며 때때로 난 옆면으로 보이는 네 붉은 뺨에 입술을 가져다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했다. 하지만 나를 쳐다보는 아직도 명암이 또렷한 눈망울에서 소스라쳐 깨여나 다시 근엄한 선생의 모습을 짓곤했다.
어찌보면 너와 난 끊어질듯한 세실로 짠 인연으로 이어진 오랜 친구였다. “와늘”.
스쳐 지날수도 있는 가벼운 인연인줄 알았는데 우리들의 운명을 단단히 련결 지운 끈 하나가 이처럼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었다니. 그 동안 네가 겪은 고통, 네가 견뎌낸 시간들을 생각하며 난 동정에 젖었다. 그리고 동정과 련민이 인간의 천박한 속성과 한계를 뛰여넘을수 있다고 나는 믿었다. 인간적인 그런 량식(良识)을 끝내 믿으려고 했다. 어쩌면 그러한것들이 너를 향해 꿈틀거리는 한 가닥 욕망의 촉수마저도 둔화시키는것인가 보다. “와늘”.
근 한달동안의 신고를 거쳐 넌 자유자재로 타이핑을 구사할수있었다. 은빛 레루를 따라 들녘을 질주하는 기차의 절주와 같은 키보드의 소리를 들으며 나는 어떤 성취감에 웃음을 머금었고 너 역시 어떤 자부감에 높은 가슴을 들먹이였다.
난 벼룩신문에 타자원으로 너를 취직시켜주려 했다. 비록 작은 광고지라 하지만 그 주접스러운 아수라장에서 너를 빼내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늘에만 숨어 지내던 내 육신에게도 해빛을 만끽하게 해주고, 최소한의 표면적을 갖고 살던 령혼에게 너른 세상의 숨결을 주고 싶었다.
신문사 주필을 구워삶고 겨우 너의 일자리를 구했다.
드디여 면접보기로 한 날이 왔다.
화장 진하게 하지마라. 넌 화장 안하는 편이 낫다, 로출이 심한 옷 입지마라. 묻는 말에 주저하지말고 또박또박 대답해라.
전날 상차림을 앞둔 시어미처럼 곁에서 세세히 일러주었던 나는 너의 변모된 모습을 그려보며 신문사앞에서 즐거운 궁긍증으로 너를 기다렸다.
그런데…

오지 않았다.
너에게로 핸드폰을 넣었다. 따르륵 따르륵 따르륵, 신호음 소리가 이어졌다. 하지만 넌 받지않았다. 나는 오래동안 이어지는 신호음 소리를 초조하게 듣고 있었다. 이윽고 전화가 끊어졌다. 뚜뚜뚜, 하는 날카로운 기계음이 나의 귀속을 깊숙이 찔렀다.
신문사앞에서 나는 풍선을 놓친 아이처럼 서글픈 얼굴로 굳어져렸다. 마음은 투명이 걷히고 연기가 자욱하기만 했다. 자꾸만 가슴 한 귀퉁이가 조금씩 조금씩 허물어져 내리는 듯한 느낌에 손가락을 뚝뚝 꺾었다.
그날 넌 종내는 오지 않고 말았다. “와늘”

 

5월에는 온다고 했지
꼭 온다고 했지
5월은 왔는데
너는 아니 와라

… … …
5월을 적시는 단비는
내 오뇌의 쓴 술
숲은 무성해 가도
나는 수척해가라

짧아진 밤
길어진 실면
꽃은 웃어도
나는 울어라

5월에는 온다고 했지
꼭 온다고 했지
5월은 왔는데
너는 아니 와라

 

- 조룡남 “네가 없는 5월”

 

며칠뒤 뜻밖에도 네게서 메일이 왔다.
메일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짤막하게.
선생님께서 배워 첫 사람으로 선생님께 메일을 띄워봅니다. ㅎㅎ
그동안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잊지않을게요! ㅠㅠ
그리고 약속을 어겨서 미안했습니다. 지송~
사실 난 시집가요. 서울로.
빠이빠이!

 

 

 

락화

 
드디여 시집이 나왔다. 겉봉에 내 이름 석자가 박히고 장정도 아치한 나의 첫 시집.
“돈냥 좀 있다고 유세떠는 사장님”들의 적선을 받아서가 아니고 내 스스로가 악착같이 모은 적금을 부어서였다. 그런 인간들과 엮여서 시를 읊고 나의 미래를 꿈꾼다는것이 역겨워서 힘들더라도 스스로의 힘으로 낸것이다.
서점가 진렬대에 꽂혀 몇 년이 지나도 누구도 보지 않을 시집일지라도 나는 홀아비생활에 아껴먹고 모은 돈을 부어 굳이 시집을 냈다. 그것은 어찌보면 궁핍한 한 시인이 밑바닥 생활을 바꾸어보려는 몸짓이자, 지성이 소외당하는 이 뒤틀려진 세상에 내미는 도전의 출사표였라고나 할가?
시집이 인쇄소에서 출고하던 날 나는 작은 세방집에 책들을 무져놓고 그 싱긋한 인쇄잉크의 향을 맡으며 시집의 행간에 눈물을 떨구고 말았다. 몇해간 홀아비로 지내온 볼썽사나운 인생을 반추해 보았다. 백기를 들고 내게서 떠난 짧은 혼인의 녀자를 그려보았고 청춘을 바쳐왔지만 정간을 맞아야했던 우리 말 잡지의 운명에 대해 떠올려 보았고 곤고했던 책방에서의 나날들을 떠올려 보았고 어수룩하지만 이젠 정이 붙는 작은 주간지에서의 생활들을 떠올려 보았다. 
나의 재능과 나의 노력에 보상이라도 주련듯 동인들이 모여서 출간기념회를 열어주었다. 분에 넘치게 이 시가지에서 가장 좋은, 한인들이 꾸리는 외국독자기업 호텔에서 치러주었다.
시인협회 회장의 치하가 있었고 평론가들의 평문이 있었고 꽃바구니가 올라왔고 덕담이 넘쳐 흘렀다.
출간식의 모든 식순이 끝나고 호텔 정원에 모여 합영을 남겼다.
사진사의 배치에 따라 앉고 서며 서렬을 정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텔 대문밖에서 대문밖에서 갑작스런 소음이 끓었다. 장마기 홍수의 포효소리같기도 이동하는 동물들의 발구름같기도 한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 지더니 불쑥 대문께에 한무리의 사람떼가 나타났다.
그들은 서로 서로 팔을 겯고 몇줄의 종대(纵队)를 짓고 있었다. 저마다 마스크를 끼고있었는데 마스크에는 붉은 칠로 x표가 쳐져있었다. 저마다 충혈된 눈동자를 가진, 기름에 절은 머리카락 사이로 허연 비듬을 달고 있는 똑같은 인상을 가진 사람들이였다. 그 인상은 한결같이 하얀 분노에 달아올라 있었다. 성난 행렬은 대문의 수위를 사정없이 밀쳐버리고 곧바로 정원으로 쳐들어왔다.
호텔 정문앞까지 대여와서 멈추어섰다. 앞장선 한사람이 운을 떼였고 그를 따라 우렁우렁 구호를 목청껏 웨쳐댔다.
한국 사기범들을 응징하라!
한국정부는 사기피해자를 우선 입국시키라!
동포 고용허가제를 강행하라!
   그들은 모두가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자들, 그리고 그 상처를 벗어나려고 안깐힘을 쓰는 자들이였다. 한국으로 가려다 브로커들에게 사기를 당한 한국출국사기피해자들.
우리 주간지에서도 전재한적있는 김혁이라는 소설가의 장편르포에서 우리들은 사기피해의 실태를 놀랍게 읽었었다.
출국붐, 그 열기에 휘말려 숭어가 뛰니 망둥이도 뛰는식으로 너나 할것없이 출국행렬에 붐비며 끼여들었던 사람들은 출국사기라는 덫에 치여 비명을 지르고 신음하기 시작했다.  저그만치 3만명, 그 피해액이 3억에 가깝다니 놀라운 수자가 아닐수 없다. 급박한 부(富)에 대한 집착과 열망은 허점을 보였고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이 그 허점을 파고든것이였다.
소팔고 집문서 땅문서 들이밀고 그래도 안되면 고리대까지 맡아 브로커들에게 내밀었다가 돈도 떼우고 출국도 못한 사람들의 절망은 하늘에 닿았다. 하여 벼랑 끝까지 내몰린 사기피해자들끼리 뭉쳐 정부청사앞이나 사거리에서 시위를 벌린 일도 수차 있었다. 그러다 오늘은 이 시가지에서 유명짜한 한국인의 독자기업까지 쳐들어온것이였다.
구호를 웨치는 사람들의 목줄기에는 굵은 지렁이가 섰고 목청은 쉬여있었다. 울분에 찬 소리를 쥐여짜다가 누군가 참지못하고 돌멩이를 들어 호텔 출입문을 향해 뿌렸다.
잘그랑! 회전유리문이 박살났다. 그를 선두로 하여 시위자들은 너나없이 돌멩이를 찾아들고 뿌리기 시작했다. 호텔경비원이며 직원들이 뛰여나와 시위자들과 몸싸움을 벌렸고 욕지거리소리, 비명소리, 창문깨지는 소리 그 와중에도 드팀없는 구호소리… 호텔은 삽시에 아비규환의 수라장이 되여 버렸다.
합영을 남기려던 하객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흩어져 버렸다. 무양하던 나의 출간기념회의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시위자들의 소란속에 창졸하게 마무리되고말았다.
남의 경사의 날에 이게 무슨 난동이야. 재수에 옴붙네.
동인들이 가자고 잡아끌었으나 난 그자리에 못박혀 버렸다. 그네들의 아픔과 처절한 몸부림에 동조하고있는 나의 눈길은 시위자 중의 한 사람에게 몰부어져 있었다.
맨 앞장에서 새처럼 투명한 고음을 지르며 돌을 뿌리고있는 녀자, 돌이 창에 까지 닿지 못하자 또다시 돌을 찾아들고 사력을 다해 뿌리고있는 녀자, 웅크리고있는 거대한 몸체의 호텔이 그 무슨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위협하고있는 괴물이기라도 한듯 머리카락이 바람에 새집이 진 녀자는 호텔을 향해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며 돌멩이를 날리고있었다.
그런 녀자의 붉은 x표가 쳐진 마스크우로, 눈가에 또렷한 태짐 하나가 보였다.
    너였다. 틀림없이 너였다. “와늘”
혼란의 폭이 도가 지나치게 부풀려져 110 경찰까지 동원되였다. 그제야 시위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란장속에 네가 밀쳐 넘어지는게 보였다. 나는 사람들 틈새를 비집고 달려가 너를 부추켰다.
    왜 사람을 잡아! 우리가 뭘 잘못한거야! 놔, 놔아!
    상처입은 짐승처럼 몸부림쳤다. 넌 격투하듯 온몸으로 거부했다. 넌. 목청 터져라 악다구니를 질렀다. 넌. 그런 너의 입에선 상하기 직전의 비릿한 우유같은 냄새가 났다.
진정해! 나야 나. 진정해 순애, 심순애!
    그제야 휩뜨고 겉돌던 실핏줄이 도드라진 눈이 나의 몸에 와 정착했다.
    선생님! 네가 마른 입술을 떨며 목메여 불렀다.
 
전장으로부터 돌아온 패잔병들처럼 우리는 밤시장에 마주 앉았다.
포옹을 한다거나 유난을 떨며 재회의식을 갖는다는것은 우리 둘 다에게 쑥스럽고 고통스러운 일이였다.
일전처럼 술도 마시지않았고 담배도 피우지 않았다. 넌. 입술은 까칠하다 못해 허물 같은 살갗을 드러내고 있다. 네 몸 구석구석에 차지게 들러붙어 있는 고단함을 나는 보았다.
온 하루 격정의 신돌림에 지쳐 배가 고팠던 넌 수타면 한그릇을 단숨에 비웠다. 술마시라고 내가 청한 뻔데기튀김을 후식처럼  씹다가 입을 열었다. 몇번째였더가? 난 또다시 네가 걸어온 아픈 행보의 이야기에 귀를 빌려줘야 했다.
    광고지에서 국제혼인광고를 보고 서울서 온 청혼자를 만났다고 했다.
나이가 많고 말이 많은게 흠이였지만 너의 눈에는 괜찮은 재력가로 보였다고했다. 그와 함께 이 생애 최고의 석달을 보냈다. 장백산에 올라 천지도 보고 북경으로 가서 의화원도 거닐고 샹해로 가서 상해타워(塔)에도 올라보고…
한국사장님이 급히 출국한 몸이라 현찰 지닌게 적다고 하자 자기가 물장사하면서 모은 돈을 서슴치않고 내놓았다.
돌아가서 요청장을 보낼터니 곧 서울로 와요. 이제 할일이라면 행복만 깨작깨작 누리는거애요!하고 단키스를 남기고 사장님은 서울로 날아갔다. 
하지만 요청장은 오지않았고 님도 나타나지 않았다. 서울주소로 전화를 해보았지만 존재하지않은 번호라는 기계음만 들려올뿐이였다. 혼인을 주선했던 혼인소개소도 어느샌가 꼬리를 사리고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울분을 안고 사기피해자협회에 몸을 의탁하게 된것이였다.
난 정말 지지리 운도 없는 년이지요? 평생 눈물 흘리며 살 팔자라더니…
쉬이 기우는 마음을 가진 녀자에게 내려진 하늘의 벌일지도 모른다고 넌 말했다. 그런 너의 음성은 일전과는 달리 간신히 새여나오는 것 같았다. 그리고 붉어진 눈가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라 했다. 넌
그 모습을 보는 난 가슴에 각진 소금을 뿌린것 같이 따갑고 쓰라렸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넌 표정을 바꾸며 자신의 얘기에 엉뚱한 조항을 달았다. 그리고 그 말은 나를 놀라게 했다.
    나 꼭 한국 나갈거애요! 밀입국을 해서라두요.
꼭 그길로만 가야하겠니?
소스라쳐 놀라며 내가 물었다.
갈거얘요! 무릎이 부스러지더라도 나갈 거얘요!
목소리가 의외로 단호했다. 그리고 눈빛은 열에 들뜬 것처럼 깊고 강했다.
그 결단에 나는 순간 두려움을 느꼈다.  난 밀입국의 위험성에 대해 역설했고 출국의 좁은 소로에 붐비는 요즘 세태에 대해 비난의 말을 했다. 그런데 네가 펄쩍 뛰였다.
그럼 어떡해요? 나더러 어떡하라구요? 엄만 죽고 남자친군 감빵 가고 혼자인데. 언제봐도 혼자인데. 나더러 어떡하라고요?
다시 술집가서 주물리고 비탈리며 물장사해요? 아님 재주도 안되는 가이드 노릇 해먹어요? 그렇찮음 몇푼 안되는 돈 받으며 팔목 쑥 빠지게 타자나 하면서 살아요?
    목소리가 걷잡을수 없이 높아졌다 말의 사소한 뉘앙스 차이에도 넌 예민하게 반응했다. 상궁 지조(傷弓之鳥)한 너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너는 자신에게 몰부어진 그런 불리익들이 어디에서 연유하는 건지 알수없어했다. 낯빛이 심한 혼돈으로 무눌져 심각한 어지러움에 자맥질하는것 같았다. 뒤죽박죽인 인생의 장본인이 앞에 있기라도 한듯 나를 향해 소리소리 질렀다.
어거지로 리치에 닿지않는 질문들을 얼기설기 엮다가 감정이 상승과 하강을 몇 번인가 반복하고 난 뒤에야 넌 가까스로 평정을 찾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나 힘들어서 그래요.
화투패의 불길한 운세를 들여다보듯 마뜩찮은 표정으로 넌 혼자말처럼 중얼거렸다.
깜깜해요. 세상이. 앞이, 앞이 보이지 않아요…
너의 퀭한 눈그늘이 섬뜩하도록 어둡게 느껴졌다.
그래. 세상은 호락호락 하지도 않고 아름답지도 않아. 하지만 참고 견디느라면모든것이 다 풀릴거야. 다 잘 될거야.
무슨 말인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 난 위로의 말을 갖다붙였다. 하지만 그저 추상적인 위안을 련발하고 말았다. 어떻게 해주어야 할지 가리사니가 서질 않았다.
그래서 그저 너의 맥없이 늘어뜨린, 공기처럼 가볍고 물에 젖은 휴지만큼한 너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그날 점도록 넌 하염없이 앉아 있었다. 수천년의 세월을 뚫고 일어난 미이라처럼 수분없이 앉아 있었다. 팍 사그라질 듯한 모습으로.

그날 이후로 난 또 너와의 련락이 끊겼다. 피해자들과 함께 합숙한다고는 하지만 그곳이 어느곳인지 몰랐다. 다시 난 내 생활의 반경안에서 숨가삐 채바퀴돌리듯하며 널 잊어가고 있었다.
  어느하루 사회면을 맡은 기자가 나를 불렀다. 나의 주당붕우(酒党朋友)인 그는 나와 못하는 말이 없는 사이였다.
대박이애요. 대박.
좋은 기사 하나를 건졌는데 주필이 이번주 톱기사로 내기로 했다는것이다.
   절강성 녕파에서 밀입국 했지 뭡니까! 스물다섯명이. 네. 밀입국자 모두가 조선족이지요.
곁에 모여드는 편집들을 보고 사회기자가 대박감 뉴스의 내용을 말했다.
좁은 배 밑창 물탱크에 돼지싣듯 빼곡하게 밀어 넣고 문을 닫고 그물을 씌워 위장했다 합니다. 그런데 통기성이 나빠서 그 스물다섯이 덜컥 질식사했지않고 뭡니까! 나 원 세상에! 
전남 여수 앞바다에서 밀입국 조직했던 넘들이 몽땅 잡혔대요. 하지만 잡은들 뭐합니까! 모두 죽어버렸는데. 아주 돌아버렸어요. 돈에 그냥 환장들을 한 거지요
편집들이 혀를 찼다. 사회부 기자가 컴퓨터에 CD를 밀어 넣었다. 공안국 외사과에서 복사해 온 사진자료와 동영상을 곁들어 보여주었다.
    문제의 선박이 나타났다.
    무장한 해경들이 선박을 훑는다.
    검거된 밀입국자들이 렌즈에 담겨졌다. 렌즈를 피하며 옷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질식사한 밀입국자들이 선박의 갑판에 놓였다. 방수포로 몸이 덮여 그 무슨 커다란 어물처럼 놓여있다. 
    렌즈가 시체의 수를 확인하련 듯 한구 한구 훑고 지나갔다.
잠시만요! 나의 시망막을 찌르는 무엇이 있어 나는 엄청 높은 소리를 지르고말았다.
컴퓨터에 달려들어  급박하게 동영상의 단추를 뒤로 젖혔다.
    시체가 다시 나왔다. 그중 한구에 이르러 정지버튼을 눌렀다.
    화면이 코르크 핀(押钉)으로 꽂아놓은 듯 정지됐다.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눈시울을 좁히며 난 그 화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숨이 탁 막혔다. 혈관을 흐르던 피가 얼어붙는듯 했다.
방수포 밖으로 익사자 하나의 얼굴이 반쯤 드러나와 있었다.
 마네킹같이 경직된 살갗의 익사자, 그 눈가에 태짐 하나가 또렷이 보였다.

난 홀로 밤시장으로 나왔다.
겨울이 다가오는 처처(凄凄)한 계절. 밤시장의 천막이 바람의 손길에 뒤척이고 있었다. 날씨도 추워져 이제 며칠후면 밤시장도 문을 닫을거라고 했다.
뻔데기 튀김을 청했다. 주인장이 철이 아니여서 신선하지못하다며 다른 특색의뉴를 추천했지만 난 굳이 뻔데기 튀김을 요구했다. 식도를 타고 흘러내리는 소주의 아린 기운을 느끼며 뻔데기 튀김 한 점을 입에 넣었다. 고소하지 않았다. 마분지를 씹는듯 했다.
아, 퍽퍽한 이 느낌, 목이 메는 이 느낌. 왜 그때 그맛을 찾을수 없을가? “와늘”!
어느새 차거운 눈물이 흘러내려 나의 볼을 간지럽혔다.
나는 어두워져 가는 초겨울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천막에 달린 알전구 주위에는 박명(薄明)이 서려있었다. 알전구가 만들어내는 옹색한 불빛아래 볼썽사납게 홀로 앉아 나는 못나게도 울고있었다. 눈물짐이 있어서였던지 내내 눈물을 흘리며 살아온 녀자를, 어느 허허바다에서 무주고혼이 됐을 기구한 그 녀자의 짧은 생을 그리며 내가 무슨 그녀의 상주(丧主)이기라도 한듯 슬픔의 술잔을 비웠다.
입가로 흘러드는 짭조름한 눈물을 빨다가 난 보았다. 알전구의 빛을 따라 날아예는 나방을. 초목이 얼어드는 이 겨울에 무슨 나비일가만은 난 분명 보았다. 혼혼해진 눈 기운으로. 처절한 나방의 몸짓을.환영으로 보았다. 수선스레 날개를 터는 나방을 보며 난 너를 떠올려 보았다.
그래 그 나방은 바로 너였다 “와늘”

 

꽃의 시간은 끝났다
아름다운 꽃들은 다 떠나갔다
가버린 꽃들의 표적으로
나비의 날개 하나
꽃잎대신 꽃대우에 말라서 얹혀있고

… … …
너를 위해 꺾은 꽃이
영원한 아픔의 표본으로
박물처럼 누워있는 가을언덕우에
영원한 사랑의 미이라로
나도 말라서 굳어져 꽃과 함께 합장될가

꽃을 심듯 꽃을 파묻는 이로
나는 이제 나를 파묻어 꽃을 심을가
내 상복입는 리유를
나만은 안다

 

- 조광명 “꽃 가신 뒤길에”

 

 

 

영 춘 (迎春)

 

다시 봄이다. 은밀하게 그러나 사실은 재빠르게 변화하는 계절처럼 나의 신상에도 큰 변화가 일었다.
편집부 부장으로 승격했고 하필이면 요즘 같은 세월에 못난 시인을 돋보며 사랑한 어떤 과년한 처녀와 새 가정을 이루었다. 소형 임대아파트에서 살림을 시작한 우리는 적금을 부어 넓고 쾌적한 새집도 한채도 마련했다. 이렇게 내 삶은 새로운 출항의 깃발을 올렸다.
금방 일떠선 아파트구역은 신록을 입은 산처럼 깨끗했고 새집들이 한 사람들의 얼굴은 환한 미소로 들떠있었다. 아파트 구역에 슈퍼며 세탁소며 로인활동실이며가 들어섰고, 광장에는 간단하지만 어떤 감흥을 주는 조각물이 섰고 운동기구도 설치되여 있었다. 아이들이 즐길수 있도록 수동식 회전목마도 놓였다.
천방지축 제멋대로인 아이들이 곡예를 하듯 회전목마에 매달려 있다. 더러는 핫도그나 붕어빵 같은 것을 입에 물고 있었다. 과일나무에 매달린 원숭이처럼 회전목마에 매달려 지칠줄 모르고 돈다. 아이들의 환성에 광장에서 먹이를 쫓던 햐얀 비둘기 몇 마리가 날아올랐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낯설고 먼 곳의 향기를 묻혀 놓는다. 그 향기와 목마의 풍경이 나에게 어떤 찰나의 기억을 실어준다. 하지만 그 기억의 내용이 무엇이던지 나는 흐릿해 했다. 그 기억은 마치 감광제(感光剂)가 고루 발리지 않은 필림과도 같았다. 어느 부분은 환히 빛나며 뚜렷이 떠오르고 어느 부분은 아주 깜깜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즐기던 명시나 잠언, 한 포기 풀이나 꽃, 시인들의 모임이나 송구영신 등 극히 례사로운 일들이 떠올랐지만 나는 끝내 그 기억의 내용을 더듬어내지 못했다. 기억이란것은 굉장한 에너지여서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원했던 그곳으로 굴려간다지만 이제는 너무 멀리 와버려 떠올릴수 없는 과거의 기억들.
회전목마에 매달린 아이들을 재미나게 지켜보다 아파트 단지에서 금방 개장한 슈퍼로 들어갔다. 새집들이 한터라 이것저것 생필품들이 자꾸만 수요되였다.
어서 오세요!
슈퍼의 젊은 녀주인이 반겨 맞아주었다.
저, 방향제 있습니까? 화장실 냄새 제거하는 그런 방향제.
네 있습니다.
녀주인이 명랑하게 대답했다.
국산으로 드릴가요? 아니면 외제쪽으로…
문뜩 그녀가 말을 멈추었다. 나를 뚫어져라하고 지켜보았다.
왜요? 얼굴에 무엇이라도 묻었나 턱을 만지며 난 그녀의 당돌한 눈길에 일순 당황해 했다.
절 모르시겠어요?
난 뜨악해하며 그녀를 유심히 뜯어보았다. 화사한 얼굴을 한 30대의 녀자. 눈매며 입언저리가 어디서 본듯한 느낌이 들긴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에 없었다.
미안 합니다. 누구신지…
그녀가 계산대에서 명세를 적으려고 놓았던 볼펜을 집어들었다. 볼펜을 들어 눈가장자리를 쿡 찍었다.
그것은… 하나의 태짐을 방불케 했다.
아~ 나의 입으로 신음이 새여나갔다.
지그재그 모양을 그리던 기억의 빛이 머리를 뚫고 쏜살같이 지나가는 듯하다. 나는 머리 속에 잠자고 있던 몇가지 단상들을 끄집어 올렸다. 금방 얼핏 본 슈퍼의 이름이 “순애 슈퍼”였던것이 떠올랐고 슈퍼에 들어오기전 회전목마를 보면서 기억을 살리려고 했던 조각나고 분해된 내용이, 잊혀졌던 그 짙은 기억의 원형이 순간에 퍼즐조각이 맞추어지듯 온전한 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순애? 심순애!
녀주인이 힘차게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 너였다. “와늘”.
그간 무사하셨죠. 선생님?
너 배 탔다 잘못되지 않았어?
내가 떨떠름해지며 물었고 령롱한 구슬이 구는 소리로 네가 웃었다.
아이 선생님도. 누가 죽어요! 이렇게 멀쩡한데, 막 이렇게 잘살려하고있는데…
슈퍼 전체를 안을듯 두팔을 활짝 벌려보이며 넌 다시 환한 웃음을 지었다.
난 다시 나름대로 머리속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온갖 상상이 소다를 넣은 빵처럼 부풀어오르기 시작했다.
요즘 세월에 어쩌면 너 같은 사연을 품은 사람이 한 둘일가? 밀입국하다 죽은 녀자는 아마 몸에 너와 비슷한 태짐을 가진 녀자였을거다, 너는 무양하게 출국했고, 출국해서 열심히 일해 돈 많이 벌었고, 몇해후엔 이렇게 잊을수 없는 고향으로 돌아왔고, 여유가 생기자 더 아름다워지려고 눈물 짐도 빼면서 성형했고, 슈퍼도 차리고 막 성업을 시작하고 있고…
현실감을 붙잡기 위해  다시 널 바라보았다.
이건 순간에 떠오른 나의 판단이였지만 적중한것 같았다. 네 얼굴에서 피어오르는 온유함, 기쁨, 밝음을 난 똑똑히 보았다. 너의 더 예뻐지고 더 생기 오른 얼굴이 그를 말해주고 있고 너의 떠나지 않는 웃음과 마음속의 어떤 그윽하고 힘찬 상태가 그를 증명해 주고있었다.
오늘 개업 첫날입니다. 지금 막 시작이얘요. 어때요? 와늘 좋지요?
네가 장난기로 옛날의 사투리를 구사했고 너와 나는 파안대소를 했다.
슈퍼의 남향으로 낸 창으로 양광이 미여지게 들어와 차넘쳤다. 그 창으로 아파트 구역이 훤히 내다보였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회전목마가 첫눈에 보였다. 그 풍경이 흘러와 우리들의 마음에 스민다. 어느 볕바른 날, 유원지에서 돌아가던 회전목마가 얼핏 떠올랐다가 사라진다.
우리는 세월이 이끄는 대로 따라서 돈다. 각자의 삶을 돈다. 정해진 궤도와 짝져진 순서대로 순응해 가다가 끝내는 내 생의 회전방향을 깨달게 되고, 내가 돌아온것의 속도가 얼마나 덧없는것이엿던가를 깨닫는다.
이렇게 원륜(圆轮)의 세월을 허위허위 돌다 멈추어보면 어딘가에서 잃어버린 나를 만날것만 같다. 내 삶의 출발 지점에서나 볼수 있었던 아직도 청춘인 나와 아직도 남아있는 그런 순수함을… 그러니 회전은 본래의 그 자리로 돌아가는것이다. 가득 찬 찌꺼기를 시간을 통해 버리고 그 자신으로 돌아가는것이다.
그 여여히 돌아가는 목마의 회전을 너는 홀린듯 지켜보고있다.
그 동안 넌 참말로 백년 하청(百年河淸)의 세월을 걸어온것만 같다. “와늘”
해볕에 젖은 빨래를 말리듯이 넌 인생의 신산스러움이 곳곳에 상처처럼 남아있는 축축한 과거를 말리고있다. 그리고 희고 바삭거리는 새 옷감이 되여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있다. “와늘”
어두운 미로를 헤매다 간신히, 드디여 출구앞에 선 넌 지금 찬란한 빛살의 세례를 맞받고 서있다. “와늘”
봄의 절정답게 해살은 더욱 부풀어오르고있고 성하(盛夏)의 꽃처럼 화사하고 푸른 너의 미소도 따라서 부풀어 오르고있다.
계절은 사뭇, 아니 와늘 좋다.
그렇지 아니한가? “와늘” !

"연변문학" 2009년 1월호

 

 김혁 문학블로그: http://blog.naver.com/khk66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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