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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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 슈뢰딩거의 상자
2016년 06월 03일 19시 04분  조회:724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단편소설  
 
슈뢰딩거의 상자
 
김금희

 
 
 
빛이다. 마치 미리 겨누고 오기라도 한 듯, 빛 줄기들이 정확히 그녀의 머리 위에, 주춤 멈춰 선 허벅지 위에 무작위로 내리 꽂힌다. 따갑다. 그리고, 낯설다.

요즘 도시들은 거개가 거기서 거기라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X시가 낯선 만큼, 그녀에게는 그 도시의 빛마저도 못 견디게 생소하다. 지금쯤 식구들은 뭐하고 있을까. 그녀는 잠시 자전거를 타고 출근길을 달릴 남편의 차가워진 앞이마와, 시어머니의 펑퍼짐한 등에 업혀있을 아들녀석의 통통한 엉덩이를 떠올린다. 그 위에 쪼여질 익숙하고 푸근한 그 도시의 빛들을 그려본다.

코펜하겐이 그랬던가. 광자는 동시에 두 개의 창문을 지난다고. 그게 진실이라면, 하고 그녀는 갑자기 엉뚱한 상상을 해본다. 사람도 동시에 두 공간에 머무를 수 있는 방법이 있게 되지 않을까. 잠깐만이라도 그 익숙한 도시의 빛을 쬐고 왔으면 싶다. 순간, 알싸한 그리움이 날 세운 면도칼처럼 그녀의 가슴을 쓰윽 싸악 훑으며 지난다.
 
“툭”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밀친다. 어깨에 걸쳤던 가방끈이 주르르 팔꿈치께로 흘러 내린다. 그녀를 예의 없이 밀치고 지나간 여자는 오히려 제 쪽에서 더 짜증난다는 얼굴로 돌아본다. 이런, 하고 그녀가 미처 깨닫기 전에 “툭, 투둑” 더 많은 사람들의 어깨가 연신 그녀를 건드리며 총총히 지나치고 있다. 신호등이 바뀐 것이다.
 
서둘러 가방을 고쳐 메고 그녀도 걸음을 내딛는다. 주위 사람들의 무심한 얼굴은 마치, 한 공장에서 주문한 가면이라도 맞춰 쓰고 나온 듯  서로 무척이나 닮아 있다. X시 스타일이다. 그네들 속에서 영 조화롭지 못하게 뚜걱뚜걱 걷고 있는 사람은 오직 하나 그녀 뿐이다.
 
X시에 온지 삼일 째, 막 면접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였지만 그녀는 이 거대한 도시가 여전히 실감나지 않는다. 판타지 영화 속이나 만화 속 인형마을에 온 것 같은 착각에 자주 깜박깜박 속는다. 매일 아침 일어나 침대에서 내려 머리를 숙이고 슬리퍼를 찾아 발을 꿰 신을 때, 그 때가 그녀는 가장 실감이 나지 않았다. 어제도 오늘도 그녀는 여전히 그녀인데, 그녀가 베던 베개와 덮던 이불과 침대와 슬리퍼가, 아니, 그녀의 방 통째로가 감쪽같이 바뀌여져 버린 것이다. 그녀가 익숙했던 그녀의 모든 물건들과 곁에 있었던 식구며 친지들이 언제 있었냐 싶을 정도로 자취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마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비 방울처럼, 느닷없이 딴 세상으로 덜컥 와버린 것 같다고 생각하였다.

사실이지만 믿을 수가 없을 때, 사람들은 실감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그녀는 그 실감보다는 사실을 믿고 싶어서 하루에도 몇 번씩 자신에게 단단히 일러주군 한다. 여기는 X시야, 실재하는 곳이지. 며칠 전에 왔잖아, 기차 타고 너 혼자.

아무도 X시에 가라고 그녀를 강요하지 않았다. 애는 커가고, 돈은 필요하고, 직장은 찾아야겠고, 집 주위에는 취직기회나 조건이 좋지 않았고… 인터넷으로 전국 다른 도시들에 이력서를 넣었는데 X시의 회사로부터 면접통지가 날아 온 것 뿐이였다. 그녀의 마음처럼 따지고 선택할 상황이 아니였다.

열심히 일해서 돈 벌어 보낼게. 자리를 잡으면, 우리 다 그쪽으로 옮길지도 모르잖아. 그녀는 조국의 지도를 펼쳐놓고 X시와의 거리를 가늠해보는 남편의 시무룩한 얼굴을 훔쳐 보았다. 떠나기를 작정한 누군가라도 지껄일 수 있는 시시한 약속이었다. 남편은 그 약속을 몹시 믿을 수 없어 하는 눈치였으나 일단 가서 보자며 짐을 챙기는 그녀에게 떠나지 않아도 될 다른 대책을 내놓지도 못하였다. 아들녀석의 눈초리를 마주하는 일이란 훨씬 어려운 것 이여서 그녀는 녀석의 눈을 잠 재워 감겨 놓은 뒤에야 짐 가방을 끌고 살그머니 집을 빠져 나왔었다.  뿌연 어둠 속에서 끄덕끄덕 졸던 계단은 그녀가 한장 한장 디딜 때 마다 터덕터덕 깨여났고, 아파트 정문 앞에서 마지막 버스를 기다릴 때 밤하늘 허공에서는 미지근한 비 방울이 투둑 떨어졌었다. 그 비 방울이 그녀의 얼굴에 닿아서 주륵 흘러 내릴 때의 처연한 느낌, 그런 느낌이 생생하게 살아 오를수록 X시는 그녀에게 더욱 실감나지 않았다.
 
ㅡ도시 전체가 어떤 커다란 막 안에 들어 있는 것 같애. 세 집을 잡고, 짐을 정리한 뒤에 그녀는 비좁은 방안 낡은 침대 옆 벽에 걸려 있는 청동색 테두리의 거울을 들여다 보았었다. 중세시대 북유럽풍의 타원형 거울 안에는 아직 X도시에 속하지 못한 생 얼굴의 그녀가 핸드폰을 들고 있었다. ㅡ아무리 찔러도 휘저어도 터지지 않는 막 같은 거 말야. 여기 사람들은 다 그 속에서 살아 가는데, 나만 바깥에 남겨진 것 같다? 그녀는 먼저 번 세입자가 남기고 간 걸레로 거울 앞 칠이 벗겨진 테이블을 닦았다. 친구는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ㅡ그 무심한 인간들 표정 보면, 나는 무슨 투명인간 같더라. 하긴, 지들이 나랑 무슨 상관이 있겠니? 걸레를 꾸깃 접어서 한 쪽으로 밀어놓고 그녀는 왼 손으로 턱을 고였다. 거울 안의 그녀는 오른 손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었다. ㅡ다 그래, 처음에는. 한참만에야 듣는 친구의 목소리는 별거 아니라는 듯, 자신은 이미 겪어보았다는 듯, 평온했다. 정말, 그 친구는 외국생활 벌써 4년째구나 하는 생각이 반짝 들었었다. 친구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는 것과 지금 저리 버젓이 적응하고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잠시 위로가 되는 듯 하였다. 그렇겠지? 그런 건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거울 속에서 그녀가 그녀에게 되물었었다.

버스 터미널에 있는 기다란 의자에 엉덩이를 걸치면서 그녀는 가방 속에 손을 집어넣어 더듬거린다. 네모난 금속덩어리가 손안에 잡히우자 그녀는 안궁환을 찾은 심장병환자처럼 안도의 숨을 내쉰다. 꼭 집에 전화를 하려는 건 아니다. 이 시간대는 모두들 바쁘다는 걸 그녀는 잘 안다.

폴더를 열어 통화내역을 보는 것 만으로도, 그 익숙한 도시의 지역번호를 보는 것만으로도 그녀는 많이 침착해진다. 바탕화면에 뜬 아들녀석의 얼굴을 엄지로 싹싹 문질러 본다. 보들보들한 어린 아이의 피부가 손가락 표피세포에 닿는 듯 하다. 지금 이 핸드폰은 그녀가 여기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창이다. 그녀가 이제껏 어떤 세상에서 확실히 살아 왔었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도구이자, 또한 이 거짓말 같은 세상에서 옛날의 진실한 세상을 간간히 느껴볼 수 있는 유일한 통로다.

“어때, 지금? 자?” 전날 저녁에도 거울 앞에서 그녀는 핸드폰을 열었었다. “애들이 그렇지 뭐. 아까까지 찾다가 우유 먹고 지금 잔다.” 남편은 반가운 기색은 티 나게 감추고, 억지로 심드렁한 목소리를 애써 살렸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떠나간 그녀가 괘씸스럽고, 그립다는 얘기다.

“밤에 두 번쯤 오줌을 쌀 거니까 명심해서 깨워. 쉬 통은 변기 뒤에 있어.” 떠나기전 이미 당부했던 사항이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강조했다. 그 외 식구들의 양말을 넣은 서랍들의 위치와, 긴 팔 티만 개켜넣은 옷장 문 순서와 냉장고 속 야채들의 “유통기한”까지 일일이 다시 곱씹어주었다. 남편은 별 도움이 안되는 얘기를 되풀이하는 그녀에게 알았다를 반복하여 되돌려 주었지만 전화를 놓지는 않았었다. 통화를 끝내고 폴더를 닫아 내릴 때, 그녀는 다시 허상의 세계로 굴러 떨어진 것 같은 허탈감에 몸서리를 쳤었다. 거울 속 그녀의 머리 위쪽에서 벽시계의 분침이 또각또각 태연히 돌아가고 있었다.

“디리릭” 갑자기 핸드폰이 그녀의 손안에서 떨기 시작한다. 딱딱한 전자음악소리도 어설프게 흘러 나온다. 면접을 갔던 회사다. “네? 래일요? 그럼요, 괜찮죠 …” 실감이란, 실제와 다른 거라고 생각하며 그녀는 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핸드폰을 내려다 본다. 믿기든 믿기지 않든, 내일부터 정식 출근이다. 그것은 X시가 그녀에게 흔들어 보인 첫 손짓이라고 그녀는 생각한다. 그와 동시에 그녀가 기다리던 버스가 드디여 치익치익 정류장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 높고 큰, 새 도시의 버스 속으로 그녀는 쑤욱 발을 집어 넣었다.
 
 
 
※                 ※            ※ 

“안녕하세요?” 그녀가 인사를 건넨다. 자기 이름과 더불어 잘 부탁한다는 말도 형식처럼 의례 덧붙인다.  남자 한 명과 여자 한 명, 그녀까지 모두 세 사람이 함께 일해야 하는 공간이다. 그러니까 여기가, 하고 그녀는 사무실을 휘익 둘러본다. 내 이름을 불러주는 첫 번째 거점이 되겠지. 그녀는 그녀가 사용하게 될 책상 앞으로 다가가 조용히 서랍을 정리한다.

전임사원이 남기고 간 물건은 많지 않다. 쓸만한 것들은 다 가져갔고, 못쓰게 된 펜 두 개와 딱딱해진 껌 따위며 꾸깃한 종이 몇장이 구석구석 숨어 있었다. 그것들을 하나하나 찾아내여 버리고 나서 그녀의 노트와 펜, 휴지 같은 물건들로 서랍 가득 채우고 나니, 정말 그녀의 책상이 된 것 같다는 실감이 살짝 든다. 남자동료는 누군가와 통화하다가 벌떡 일어서 나가고, 그녀보다 어려 보이는 맞은 켠 여자는 얼굴이 모니터에 가려져 있어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사장이 맡기고 간 서류를 번역 타이핑을 시작한지 몇 분도 안 되는 사이에 그녀는 자판중의 “ㅇ”자가 잘 먹히지 않는다는 사실과 문서중에 “ㅇ”자가 유난히 많다는 사실을 느껴 버린다. 이런, 젠장 하필이면 이럴 때 전자시계는 더 힘차게 깜빡거리고, 그녀는 “ㅇ”자가 들어간 단어를 볼 때마다 속을 졸이며 미리 조바심을 낸다. “타다닥, 타닥..” 몇 번을 썼다 지웠다 싱갱이질을 하는 와중에 누군가 “저기요” 속삭이는 것 같다. 모니터 옆으로 맞은 켠 여자의 얼굴이 반쯤 나와 있었다. “왼쪽 모서리에다 힘을 주세요, 그게 워낙에 오래 된거라서…” “아, 네 ㅡ” 그녀는 고맙다고 생각되기 보다는 놀랍다는 생각을 한다. “저기요”라는 말은 누군가와 어떤 관계를 맺을 시 처음으로 사용되는 말이 아닌가, 그녀는 그 도시를 둘러 싸고 있던 투명하고 질긴 막이 퐁 구멍이 뚫리는 것을 느낀다.

  퇴근하여 돌아오는 길은 출근할 때 보다 퍽 낯익다. 마냥 무심해만 보이던 사람들의 얼굴에도 사실 희로애락의 서로 다른 표정이 실렸다는 것을 희미하게 나마 느낀다. 세 방 부근까지 와서는 야채과일 가게에 들러 대머리 아저씨한테서 감자 몇 알과 사과 서너 알도 같이 산다. 실감이라는 건, 먹는 데서 가장 빨리 느낄 수 있지 않는가 하고 그녀는 혼자 깝자른다.

“나 출근했어.” 저녁을 먹고 커피 한 잔을 들고 거울 앞에 앉으며 그녀는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괜찮은 것 같애, 여러모로…”그녀는 회사 환경과 번역하던 서류와 적지 않은 급여를 떠들어 댄다. “다행이네, 괜찮아서…” 그녀가 괜찮아서 오히려 퍽 야속스럽다는 듯 남편의 목소리는 샐쭉하다. “아 참, 거기는 어때? 잘 지내?” 자기 얘기가 얼추 끝나갈 때 그녀는 문득 그쪽 세상이 생각 키운다. “잘 있지 그럼, 지구는 너 없이도 잘 돌아가니까.” 그제야 남편의 심통이 들린다. 그런 투정쯤은 괜찮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살짝 애교를 떨며 먼저 분위기를 풀어주고, 집안 식구들의 상황을 꼬치꼬치 캐묻는다. 알고 싶은 것도 있지만 그래야 한다는 의무감도 없지는 않다. 못이기는 척 남편이 일일이 대답하는데 아들녀석이 자다가 깨였는지 와락 전화를 빼앗아 소리 지른다. 엄마야? 엄마 왜 안 와? 아이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너무 가깝게 들린다. 서슬에 그녀의 머리 속은 뒤죽박죽이 된다. 간신이 쌍아 올렸던 그 무엇인가가 순간 와르르 덧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건지, 왜 이러고 있는 건지 그녀 자신도 헷갈린다. 전화를 겨우 끊었을 때 거울 속에서 그녀는 이미 코물을 훌쩍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익숙해지려던 침대와 이불과 베개가 다시 낯설어진다. 약해지지 말자, 훅 ㅡ 코물을 휴지에 풀고 나서 그녀는 핸드폰의 알람을 6시 반으로 맞춘다. 다음 번엔 좀 덜 아파하자고 생각하며 그녀는 선뜩한 이불 속으로 기여 들어간다.

 
 
“광자는 동시에 두 개의 창문으로 들어 가지만, 관측자가 관측하는 순간 하나의 창문만을 선택하여 들어간다.” 코펜하겐의 실험은 상식을 뛰여넘는 일이 또 하나 실존한다는 것을 증명하였고, 상상하기 좋아하는 다른 아저씨들에게 그것을 토대 삼아 한 술 더 뜰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정말 우리가 모르는 어마어마한 비밀이 있는지도 모른다. 여러 개의 세상이 겹쳐서 공존하는, 평행우주 같은 것이 말이다.”

  한 때 그녀도 그 황당한 가설에 푹 빠졌었다. 코 아저씨가 보여준 자유 때문이였다. 한낱 땅 위를 꼬물거리던 굼벵이에게 날개가 돋혀 하늘을 날아 보았을 때의 자유 말이다. 세상에, 하늘이 이렇게 높고 컸었다니… 굼벵이는 아마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세상 어떤 기적이나 불가사이한 일들도 가능할 것 같다는 자유, 그 동안 그녀를 가두어 놓았던 어떤 마법의 힘들이 풀어지는 것 같다는 황홀한 느낌, 그녀는 그것을 친구에게 조잘대였었다. “얘, 그러니까, 확률상 가능한 모든 세계 중에 수없이 많은 내가 동시에 존재한다는거지.” 친구는 그녀보다 훨씬 현실적이였다. 그 애는 가소롭다는 듯 핏 웃으며 “너도 참, 그게 사실이라고 생각하냐? 그럼 왜 우리는 다른 세상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거니?” 하고 반문했었다. 그녀는 훨씬 더 진지해져서 “그러니까 평행우주 지. 여러개의 우주가 교차점이 없이 평행으로만 존재한다니까. 말하자면 이 세상 의 나는, 어떤 세상의 어떤 상황속의 나 하고도 아무런 상관없이 존재한단 말이지.”라고 우겼었다.

  그때 그녀가 그렇게 우겼던 것은 그 모든 가설이 책에만 적혀있었기 때문 이였다. 책 속에서만 존재하는 세상, 현실세계와 교차점을 이루지 못하는 그것도 어찌 보면 하나의 평행우주가 아니였을까.

  어느 날인가 블루 원피스를 입고 출근했었다. “어머 언니, 블루랑 잘 어울리네요.” 하고 맞은 켠 여자가 그녀를 춰올렸었다. 그녀는 고마워 라고 대답하며 자리에 앉았지만 정말 그런가, 이전에는 왜 몰랐지 하고 의아했었다. 언젠가는 남자 동료가 뽑아 준 블랙 커피를 예의상 마셔주었는데 그 뒤로 사람들에게 “블랙커피 좋아한다”고 전해지기도 했었다. 회식 때 찬 음료수가 늦게 나와서 시원해 보이는 맥주 한 잔 마셨던 탓으로 그녀는 “맥주 꽤 하는 여자”로 되기도 하였으며, 우연히 누군가와 수다를 떨다가 “ㄴ시 에 있을 때” 얘기를 두 개 했을 뿐인데 그 뒤로 ㄴ 시의 집값을 구체적으로 물어보는 사람도 생겼었다.

  그녀는 이 모든 사람이, 이 새로운 세상이 자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것은, 얼마 뒤 자신이 정말 블루 원피스랑 잘 어울린다는 사실을, 블랙 커피도 맛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였다. 그녀는 헷갈리기 시작하였다. 이건 뭔가, 그 사람들의 착각이나 오해가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자신이 변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원래부터 그런 가능성이 있는 자신을 몰랐던 것인가.

  그리고 또, 맞은 켠 여자가 불쑥 언니 고향집은 어디야? 라고 물었을 때, 그녀는 무심하게 응, *시야. 대답했었다. *시 *향 *촌이란 것이 사실이였지만 그녀는 그것까지 일일이 말해주지 않았다. 아, *시구나. 우리 삼촌네도 *시 개발구에 있는데. 하고 여자가 반가와 하는 목소리에 그녀는 어딘가 뜨끔했지만 끝내 덧붙여서 촌스런 마을이름까지 말해주지는 않았다. 그런 건 별 상관이 없지 않냐고 그 때는 그렇게 생각했었다.

 사장님이 이력서를 보고 **회사에서도 일했으니 베테랑이군 하고 흡족해 했을 때에도 그녀는 임신 때문에 **회사에서의 경력은 겨우 석달밖에 안된다는 사실과 그 전의 더 초라했던 경력에 대해서 일절 함구하고 있었다. 지나간 일들이 뭐가 중요한가, 지금 잘 하면 되지 않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회사내에서 옛날 세상에서와 다른 새로운 자신에 대한 소문이 퍼지는 것을 들으면서 그녀는 그런 생각이 들어 버린 것이다. 아, 이 세상은 나를 모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내가 원하는 다른 모습의 나로도 살아갈 수 있는 거구나. 그래도 괜찮은거 아닌가. 어차피 이 세상은 옛날 그 세상하고 아무 상관도 없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불안하면서도 동시에 유혹을 떨칠 수 없는, 부작용을 알 수 없는 새로운 항암제 같은 것이였다. 세상에, 평행우주란 이런 것이란 말 인가.

 
 
ㅡ얘 넌, 언제 올꺼니? 외국 오퍼가 수고했다며 밥을 사주던 날, 평소보다 늦어져 집으로 돌아온 그녀는 청동색 테두리의 거울 앞에 앉아서 친구의 전화를 받았었다. 술을 마신 탓인지 그녀의 목소리가 여느 때보다 컸던 것 같았다. ㅡ글쎄, 지금 가면 뭐하나 싶기도 하고, 한 번 나오기 힘든데 몇 해 더 벌어서 가야 될 것 같기도 하고 … 친구는 언제 오냐 란 말만 나오면 은근히 말끝을 흐리웠다.  거울 속 새 퍼머를 한 그녀가 머리를 흔들었다. ㅡ글쎄라니? 요즘 X시에서 한창 유행하는 단발 웨이브 퍼머의 컬이, 들인 돈 아깝지 않게 잘 나왔었다. ㅡ 딸레미가 가을에 초등학교 들어가게 생겼잖아, 기집애야…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며 친구를 닥달했다.

  언젠가 남편에게서 들은 친구의 소문이 생각키웠다. ㅡ너 혹시, 그쪽에 다른 사람… 있는 거 아냐? 친구의 침묵에 이어지는 한숨은 인정한다는 뜻으로 들려왔다.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이리 간사할까. 두 돌짜리 딸애를 떼여놓고 울고불고 질질 짜던 때는 언제고. ㅡ정신차려 기집애야, 언젠가는 돌아와야 할거 아냐? 아직 자신에게 그만한 분별력은 있다고, 지금 귀띔해야 한다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ㅡ알어, 나도. 첨엔 다 그렇게 생각하지… 근데 지금은 여기서 이렇게 사는 게 왜 안되나 싶다. 어차피 여기랑 거기랑은 서로 상관없는 세상이잖아. 안 그래?  당연히 아니지, 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녀는 그때 친구를 반박할 유력한 이유가 당장 생각나지 않았다.

  여기랑 거기랑 도대체 어떤 상관이 있는 거지? 길고 가는 전화선 하나? 아니면 통장갈피 속에 찍힌 은행계좌번호 몇 개?  아무 결론도 없이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보았다. 실제로 두 세상을 이어주는 것이 정말 있기나 할까 하고 그녀는 처음으로 의심하였다. 파란 불이 깜빡깜빡 들어오는 핸드폰을 내려놓는 거울 속 여자의 얼굴이, 문득 어딘지 모르게 서먹해진 것 같은 밤이였다.

 
 
※                   ※               ※
 
피카소는 거울 앞에 선 여자와 거울 속에 비친 여자의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렸고, 이상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빙자하여 세상을 비추는 시를 지었다지. 고대인들은 거울을 주술에까지 썼다고 했으니 사람의 상상을 불러 일으킬 만큼 신비스러운 것임에 틀림없었다.

언제부터였던가. 매일 아침 화장을 끝내고 돌아서 방을 나올 때, 그녀는 어떤 확실치 않은 이상한 예감을 슬금슬금 느끼군 하였다. 뭐지? 딱히 알 수는 없지만 뭔가 곧 벌어질 것 같은 느낌, 한창 무엇인가 배후에서 진행되고 있다는 불안감, 영문없이 찾아오는 신경통처럼 그녀는 가끔씩 그런 직감에 따끔따끔 찔렸다.
 
회사생활은 별 큰 문제가 없었다. 여느 직장에서나 그렇고 그렇듯이, 일 잘해서 칭찬받은 날 있고 실수해서 욕먹는 날이 있고, 동료들과 사이좋은 날이 있는가 하면 아무개랑 얼굴을 붉힌 날도 있었다. 매일 아침 세수를 하고 화장을 하고 조반을 사먹은 뒤 붐비는 지하철을 타고 출근하고, 회사에서는 서류를 만들거나 회의를 하거나 하층 공장을 방문하거나 오퍼의 통역으로 뛰여다녔고, 저녁에 퇴근하면 누군가와 밥을 먹거나 아니면 집에 돌아와 느긋이 책을 뒤적거리던가 인터넷을 휘젓고 돌아다니기도 하였다. 주말이면 친해진 여자 동료들과 번화가에 놀러 가기도 하였고 아주 가끔씩 인근 도시에서 친구들이 놀러 올 때도 있었다. 너무 자연스럽고 실감나게 시간은 이 도시 본연의 항로대로 똑딱똑딱 흘러가고 있었다.
 
 뭐가 문제지? 실감은 실제와 다를 수도 있다는 거? 실재했던 X시가 실감나지 않았던 것처럼, 지금 이렇게 실감나는 이 도시의 생활이 실재하지 않을 수 있지 는 않을까 하는 황당한 억측? 그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였다.
 
 아마 저번에 집전화를 받은 날부터였던 것 같기도 하였다. 거울 앞 테이블 위에서 컴퓨터를 켜고 친구랑 메신저를 하는 중에 받은 전화였다. ㅡ어, 난데. 별 일 없지? 언제나 그랬듯이 남편의 목소리는 애정결핍증을 앓는 아이의 것처럼 고깝게 들려왔다. 그럼, 뭔 일 있겠어? 거기는? 그녀는 핸드폰을 턱과 어깨사이에 끼우고 머리를 갸웃한 채 계속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겼었다. ㅡ여기도 뭐, 별 큰일은 없어… 라고 하다가 남편은 그제야 생각이 났다는 듯 근데, 나 그 까만 색 츄리닝 어딨어? 라고 물었었다. 그녀는 츄리닝 하나 찾지 못해 장거리전화를 건 남편이 약간 귀찮아졌었다. ㅡ있던데 있지, 잘 찾아 봐. 그러자 남편은 사실 그게 용건이 아니였다는 듯 대답도 없이 또 다른 질문을 하였다. ㅡ거 애 가을내의 말이야. 어디서 사? 글고 아 참, 예방주사는 언제 맞히지? 그녀는 남편이 왜 그런 일들을 그녀에게 묻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얘기해줄만한 것들은 이미 다 얘기했고, 그리고 그것들은 이젠 그녀와 상관없는 그쪽 세상의 일들이 아니였던가.

남편의 문의가 끝날 무렵에는 아들녀석이 전화를 받기도 하였다.  그 아이는 어른들보다 훨씬 현실적이여서 자기가 있는 세상에 이미 충실히 적응하며 살아가고 있는 중이였다. 엄마야? 엄마 뭐해? 벌써 그 아이에게 그녀는, 그리움 이나 아픔이 아니라 그냥 전화에서 흘러 나오는 어떤 목소리가 된 모양이였다. 아이는 자기가 누군가와 전화로 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여 들까불면서 “엄마”라는 목소리의 물음에 건성으로 대답하기도 하였고 할머니가 시키는 대로 발음이 시원찮은 노래도 한마디 불러 주었었다. 엄마가 보고 싶냐고 그녀가 마지막 질문을 했을  때 아이는 이미 인형 루비에게 주사를 놓기 위해 쌩 하니 달려가버렸었다.
 
 그래서 정말, 전화를 끊고 나서도 아프지가 않았다. 금방 식구들과 통화하 였다는 사실마저도 실감나지 않았다. 그렇게 진실했던 과거의 세상이 실존하였 다는 사실과 지금도 어디선가에서 존재할거라는 사실이 도무지 느껴지지가 않았다. 마치 여태 누군가에게 있지도 않은 과거를 쇠뇌당했던 것처럼.
 
바로 그때였던가. 그녀를 마주 바라보던 거울 속 여자가 희미하게 냉소 같은 것을 입가에 걸었던 것이. 그녀는 깜짝 놀라 눈을 비비면서 크게 뜨고 거울을 쳐다 보았었다. 거울 속 여자도 놀란 시늉을 하며 눈을 뜨고 있었다. 아마 잘못 본 모양이군 하고 생각하며 그녀는 다시 모니터에 눈길을 돌렸었다. 잠깐잠깐 거울 속으로 눈길을 돌려 보았으나 다시 그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었다. 

그때만 하여도 그녀는 대수롭게 생각하였었다. 그러다가 어느 주일날 아침, 언젠가 밥을 사준적이 있었던 단골 오퍼에게서 전화가 온 것이였다. 쉬는 날인지 알고 있지만 사적으로 도움을 청하고 싶다고, 그래도 괜찮겠느냐고 남자가 물어왔었다. 워낙 하는 일이 번역 통역이라 가끔 이렇게 도움을 청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그녀는 잠깐 망설이였다. 남자가 다른 오퍼들에 비해 젊은 편이고, 호감 가는 얼굴이라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걸렸다. 밥을 사주던 날, 그녀에게 식구들 생각나냐고 묻던 남자의 저의가 무엇이던지 알쏭하던 것도 왠지 불안하였다.

 결국 그날 그녀는 나갔고, 남자와 하루 낮을 함께 보내였다. 정장대신 심플한 점퍼를 걸치고 나온 남자는 언제부터 가고 싶었다며 그녀를 끌고 골동품거리와 실크시장을 골목골목 훑었었다. 맥도널드에서 치킨버거를 먹고,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닐 때, 그녀는 남자에게 예상외로 유머스런 면이 있었다는 것과 장난끼도 다분하다는 것을 느꼈었다.

남자는 호텔앞에서 그녀에게 택시를 잡아주며 있다가 전화할게요 인사했었다. 그래서 그녀는 집으로 돌아오기 바쁘게 걸려온 전화가 남자의 것 인줄 착각했었 다. ㅡ나야, 뭐해? 예의없고 무뚝뚝한 남편의 목소리인줄 확인하는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바락 냈었다. ㅡ왜? 뭔 일 있어? 남편의 목소리는 주춤 끊겼다가 뭔 일 없으면 전화하지 말아야 되나? 하고 나직이 시부렁거렸었다. 그녀는 어딘가 미안해져서 아니, 그런게 아니라,… 지금 급한 일이 있어서… 라고 얼렁하게 둘러대였다. 남편은 기분 좋지는 않지만 이해는 한다는 듯 ㅡ그래? 알았어. 다음에 할게… 라는 말로 전화를 끊었었다.

 후유 ㅡ 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며 핸드폰 폴더를 덮다가 그녀는 살짝 죄책감 같은 것이 들었다. 왜 그랬을까? 급하긴 뭐가 급하다고… 그러나 그녀는 폰 벨이 다시 울리자 부리나케 목소리를 가다듬고 받았다. 무사히 잘 들어 갔냐, 수고 많았다, 고마웠다, 다음에 기회 봐서 갚아 주겠다 뭐 대충 그런 인사치례차 전화였었다. 그녀는 언제 짜증을 내기라도 했냐는 듯 맑은 목소리로 네, 아닙니다, 저두요, 고맙습니다. 라고 친절히 대답을 했었다.
 
전화를 끊은 뒤 그녀는 뜨거운 물을 틀어놓고 샤워를 했었다. 샤워를 하고 잠옷을 입었는데도 개운하지가 않았었다. 거울 앞 테이블위에 놓인 스킨 뚜껑을 열어 손바닥에 두 방울 떨구면서, 그녀는 자연스레 거울 속 여자를 보게 된 것이였다. 여자도 잠옷을 갈아입고 스킨을 손바닥에 떨구는 중이였다. 병을 내려놓고 손바닥을 마주 비볐다가 얼굴에 가져갈 때, 그녀는 화들짝 놀랐었다.  거울 속 여자는 아직도 두 손바닥을 마주 비비고 있지 않겠는가.

어떻게 이럴수가? 그녀는 저번처럼 눈을 비비고 나서 크게 치떠보았었다. 거울 속 여자도 매우 놀란 듯 눈을 크게 치뜨고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다시 한번 그녀가 왼 손바닥을 얼굴에 가져갔다. 거울 속 여자도 잠시 망설이다가 오른 손을 얼굴로 가져가는 것이였다. 그녀는 이번에도 잘못 본거겠지 라고 되뇌이며 침대로 올라갔었다. 그러나 놀랐던 가슴이 팔딱거려서 금방 잠이 오지는 않았다.

 
 
거울 앞에서 돌아설 때마다 이상한 느낌이 드는 건 그 후부터였다. 거울 속 여자가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도 껄끄럼하니 점점 더 낯설어져갔다. 그녀와 모든 것을 공감하는 그녀의 그림자가 아니라, 다른 하나의 인격체가 된 것 같은 느낌, 그녀가 보지 않을 때의 거울 속에서는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만 같은 생각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아무에게도 그것을 얘기하지 않았다. 그건 그냥 느낌일 뿐이였고, 다른 어떤 확실한 일은 일어나지 않아서였다. 그녀는 될 수록이면 거울을 보지 않으려고 했으며, 또 회사 일이 바빠질수록 실제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앉아 있을 시간이 점점 더 적어졌다. 

 
 
인터넷의 어떤 심리학자는 자신의 눈을 믿지 말라고 충고해주었다. 이른바 착시현상이나 환영이나 모두 실제보다 시각이란 감각기관만 믿었기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라고 했었다.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그녀는 상식과 경험이라는 실제의 세계를 믿기로 하고 더 열심히 일을 했다. 그간 모은 돈을 집에다 부쳐주고 사나흘에 한 번 꼴로 전화를 넣어주기도 하며 회사에서는 자진하여 야근을 하거나 동료들과의 모임에도 자주 나갔었다.
 
 그 단골오퍼도 가끔씩 연락을 해왔으며 회사에 들를 때에는 꼭 그녀의 통역을 요구하였다. “사적인 도움이 필요”해서 그녀는 남자와 두 번 더 만났었다. 남자의 농담이 즐거워질수록 한편으론 내가 왜 이럴까 하고 자책하기도 했었다.

 그런 자책감 때문에 그녀는 더는 친구에게 뭐라고 자신있게 닥달할 수가 없어졌다. ㅡ그래, 요즘은 어떠니? 하고 묻는 그녀에게 친구는 ㅡ그렇지 뭐.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잘 모르겠다. 고 대답하였었다. 그녀는 혼란에 빠져 기운이 없는 친구가 안쓰러워 나서 너 많이 힘들겠다 라고 말해주었다. 친구는 갑자기 자신에게 관대해진 그녀가 이상했던 모양인지 ㅡ기집애, 갑자기 왜 그래? 뭔 일 있어? 라고 그녀에게 되물었다. 그녀는 저번 날의 친구처럼 떠듬거리며 ㅡ글쎄… 뭐 사람 사는 게 다 그렇지 않나 … 하는 말로 어색하게 얼버무렸었다.

ㅡ 나 말이야, 아무리 거기랑 상관없이 산다고 해도 거기서 살던 일을 잊어버릴 수는 없더라. 친구는 한숨을 쉬며 말했었다. 그렇지, 그런 것이였지. 사람들의 어제와 오늘을 잇고, 그녀의 옛날 세상과 X시를 잇고 있는 것이  바로 기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을 나설 때 밤하늘에서 떨어지던 비 방울과, 정신차려 기집애야 친구를 닦달하고, 회사에서 “아무개는 다중인격”이라고 흉을 보던 자신이 생각났다. 남자와 먹던 치킨버거와 남편의 전화에 괜히 짜증을 내던 일들도 밤거리의 네온간판 처럼 그녀의 머리속에 환히 떠올랐다. 기억이 있어서 그것들은 서로 상관되고 그럼으로 어떤 자유는 자유로울 수가 없는 것이였다.    

기억을 평생 외면할 수 없거나 상실할 수도 없다면, 답은 하나 뿐이지 않은가, 하고 그녀는 생각했었다. 친구는 왜 답은 하나라고 하느냐, 여기 세상도 지금 너무 진실하다, 꼭 돌아가야 한다는 법이 어디 있느냐고 꼬치꼬치 캐물었었다. 나중에는 코물을 훌쩍거리면서 내 나이 서른하난데, 살아 갈 날이 살아 온 날보다 더 많은데… 아 나는 왜 이리 이기적인가 하고 넉두리를 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뭐라고 말해줄 수가 없었다. 친구의 말도 틀리지 않았다. 진실한 세상이란 그저 자기가 더 오래 머물러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튿날, 한창 혼란스러운 그녀를 사장이 불렀었다. 다음 주 출장 가능하냐고, 그녀의 단골오퍼가 초청했는데 그녀를 지명했다고.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앉아서 그녀는 남자의 감성적인 목소리와 장난끼 어린 얼굴을 떠올려 보았다. 바로 어제 만났던 것처럼 감자튀김을 씹을 때 움직이던 남자의 관자노리까지 생생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그 사람 실력자야…”하고 혼자말처럼 중얼대던 사장의 말도 머리속을 맴돌았다. 뭔가 인생에 전환점이 올 것 같은 예감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눈치 없는 낡은 핸드폰은 그 때 울린 것이다. “디리릭 디리릭” 온 몸을 부르르 떨면서 딱딱한 전자음악소리를 함께 내였다. 집이였다. ㅡ또 왜? 9시 전에는 전화하지 말랬잖아. 알 수 없는 화가 슬그머니 치밀어 오르고 있었다. 집은 이유없이 화를 내는 그녀가 황당하였던지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어색한 기운이 차갑게 돌고 있었다. 그러니까, 하고 그녀는 수습해야 되겠다는 심사로 하는 수 없이 소리를 낮추었다. ㅡ무슨 일이야? 집은 굉장히 당황스러웠다는 듯 뿌루퉁해서 ㅡ뭔 신경질이야? 얼마나 대단한 일 하시기에 전화 받는 것도 짜증이 셔? 하고 쏘아 붙였다. 누구의 목소리였던가 싶을 정도로 멀고 낯설었다. ㅡ 아니, 이 시간대는 회사 일을 하고 있을 때가 많아서… 그래, 뭔 일이냐고? 집이라는 목소리는 매우 내키지 않는 듯 시부렁거리다가 ㅡ 다음 주 국경절 휴가 나잖아, 올 수 있어? 라고 겨우 용건을 말해 주었다. 그녀는 휴가는 뭔 놈의 휴가냐고, 사립회사가 뭐 국가단위랑 같은 줄 아냐고 냉소를 하였고 집은 애 때문에 그러는데, 아님 내가 그쪽으로 갈까 하고 제의하였다. 그녀는 비좁은 침대와 하나밖에 없는 슬리퍼를 내려다 보며 글쎄, 다음 주 회사 스케줄이 어떻게 될지 몰라서 라고 둘러 대였다. 컴퓨터에 새 메일이 도착하고 있었다. 남자의 주소였다. 알았어, 다음에 보자며 서둘러 그녀는 전화를 끊어 버렸다.

 바로 그 때였다. 거울 앞 테이블 벽 뒤로 연결된 인터넷선이 당기우며 뽑아져 나온 것 같아 몸을 일으켜 그 쪽으로 다가갔던 것이. 어쩔 수 없이 피끗 거울을 보게 되였는데, 세상에, 이럴 수가!

거울에 비친 그녀는, 아니 그 여자는, 그녀가 사본적이 없는 잠옷을 입고 구경해본적도 없는 귀걸이며 액세서리를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것 이였다. 아악! 터져 나오는 경악의 소리를 입으로 막고 그녀는 그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아무리 눈을 비비고 깜박거려 보아도 환영이 아니였다. 

그 여자도 그 녀를 그제야 발견하였다는 듯 소스라쳐 놀라는 표정을 보이며 벌떡 일어서는 것이였다. 뭐라고 새되게 소리지르는 것 같았지만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녀보다 그 여자가 더 놀란 듯 새파랗게 질려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마치 그 여자에게는 그녀가 허상이라도 되는 것 처럼. 여자의 움직임이 너무 진실하여서 그녀는 자신이 정말 진짜일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럴 수는 없었다. 매일 출근하고 열심히 일하고 사람들과 밥을 먹고 이야기를 하면서 얼마나 진실하게 살고 있는데, 이 삶이 모두 허상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여자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보려는 듯 머리를 흔들어 보기도 하고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오가며 서성이기도 하다가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급히 침대위를 뒤적이며 뭔가를 찾고 있었다. 그렇지, 핸드폰! 멍하니 서서 그 여자가 부산히 움직이는 것을 바라보고만 있다가 그녀는 문득 핸드폰이 생각났다.

 X시의 누군가에게 연락을 해보면 알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도 부리나케 테이블이며 침대를 뒤적여서 핸드폰을 찾아 내였다. 폴더를 열고 숨을 고르다가 맞은 켠 여자 동료의 전화번호를 찾아 눌렀다. 뚜 ㅡ 뚜 ㅡ 신호음이 한참 가더니 어떤 낯선 여자의 목소리가 지금은 연락이 안된다고, 죄송하다고 기계처럼 말해주는 것이였다. 그녀가 알고 있던 다른 동료의 전화번호는 그 외 두 개 더 있었는데, 하나는 이미 꺼져 있었고, 다른 하나는 신호음만 갈 뿐 통 받아주지를 않았다.

 그녀는 갑자기 현기증을 느꼈다. 이 모든 것이 하나의 거대한 거짓말 세상이 아니였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바로 이런 순간에 미치지 않을까 싶었다. 거울을 얼핏 보니 여자도 아무하고 연락이 안되였던 모양인지 핸드폰을 손에 든채 멀거니 서있었다. 빨리 거울 앞에서 사라지고 싶었다. 이 거짓말 같은 밤이 지나고 아침이 오면, 모든 게 해명될 것 같아서 그녀는 허겁지겁 불을 끄고 침대위로 숨어 들었다.

 
 
※                   ※               ※   

“실재는 실험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재에 대한 엉성한 가설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의 대부분은, 자신들이 실재를 가지고 얼마나 위험한 장난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빛의 이중성을 최초로 증명한 사람이 아인슈타인이였지만 그는 기어이 코 아저씨의 해석에 동의하지 않았다. 관측에 따라 물리량이 변한다면, 우리가 보지 않는다고 하늘에 떠있던 달이 사라지는게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코 아저씨 계열의 학자들은 그 관측이란 개념부터 재정립해야 한다고 반박했었다. 

 고양이는 그렇게 슈뢰딩거의 가상의 가스 상자속으로 들어간 것이라고 하였다. 진실을 가리기 위하여. 상자가 열리기까지 고양이는 삶과 죽음이란 두 세계의 중첩상태에 있다고 할 것인가, 아니면 살았던 죽었던 이미 결판난 상태에 있다고 할 것인가.

 
 
친구는 그 세상에서 살기로 결정하였다고 하였다. ㅡ 나 정말 못된 인간이야, 그치? 그렇게 되자고 한게 아니라, 살다보니 그렇게 되더라. 애한테 미안해서 어쩌지? 그녀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가만히 듣기만 하였다. ㅡ 근데 사람은 말야, 새끼도 품안에 있을 때 새끼지, 새끼 때문에 인생을 선택하지는 못하겠더라. 나만 이렇게 못된거니? 결정을 내린 친구의 목소리는 이제 혼란스럽지는 않았다. ㅡ 아냐, 사람이 다 그렇지 뭐, 그럴 수 있어. 그녀는 자기 스스로에게도 위안삼아 말해준다. 깜빡깜빡 아이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는 자신에게, 아이의 목소리도 낯설어지는 자신에게, 친구의 결정은 오히려 위안이 되려 한다. ㅡ 나, 열심히 살거다. 후회 않을 만큼 행복해질꺼다. 너 나 이혼녀라고 무시하면 안돼, 알았지? 친구의 목소리가 울음을 참느라 떨리고 있었다. 왈칵 눈물이 나올려 한다. ㅡ 기집애, 그게 친구 하는 거 하고 뭔 상관이래? 이왕 결정한 거, 그래, 인생에 무슨 놈의 답이 하나밖에 없겠니? 잘 살어, 나한테 너는 언제든지 너야. 

 전화를 끊고 그녀는 이마를 잠시 유리창에 갖다 대였다. 18층 빌딩의 복도 유리창이다. 주변의 단층건물들과 그 건물들사이에 난 길들, 그리고 군데군데 파란 숲들이 내려다 보인다. 빛이다. 미리 작정하고 날아온 것처럼, 새로운 아침의 빛 줄기들이 정확히 그녀의 머리 숨구멍 위에 내리 꽂힌다.

 유리창에 언뜰 그녀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친다. 사장이 사무실 문을 열어 보인다. 금방까지 뭔가를 보고 드리던 다른 부서 직원이 나가고 사장이 그녀를 향해 손짓을 한다. 그녀는 숨을 들이 마신다. 이제 그녀의 차례다.

ㅡ이번엔 못갈 것 같아서요. 그녀는 어제 밤 거울 속의 여자를 떠올린다. 지금 그녀는 슈뢰딩거처럼 위험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아니, 누군가가 그녀를 거울과 함께 이미 상자속으로 집어 넣은 것이다. 사장이 묻는다. ㅡ 왜? 좋은 기횐데. 중첩된 상태였든 하나의 상태였든, 상자를 열면 결과는 보이는 것이다. 그녀는 이를 살짝 깨물었다. ㅡ 다음 주엔 남편이 휴가 나서 아이랑 온대네요. 몹시 화목한 가정이였다는 듯 그녀는 해맑은 웃음을 지어 보인다. ㅡ그래? 가족은 다음에 볼 수도 있겠지만, 이런 기회는 다시 오기 힘든데… 사장은 아쉽다는 듯 한 번 더 설득하다가 그녀의 말없는 미소를 보고 ㅡ글쎄, 가족이 더 중요하다면야. 설마 이다음에 뭐 다른 기회가 없을라고. 하면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이제 한 세상이 선택되고 한 세상은 붕괴되는 건가. 그녀는 사장실을 나와서 자기의 사무실로 들어간다. 맞은 켠 책상의 여자가 커피 두 잔 뽑아놓고 그녀를 기다린다. ㅡ 언니, 엊저녁 전화 했었어? 나 그 후진 세집, 신호가 영 안 좋아서. 여자가 그녀를 보고 웃음을 짓는다. 인간다운, 자연스러운 웃음이다. 문득, 여태 여자에게 고향이 어딘지도 물어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연락이 안되였던게 아닌가 싶다. ㅡ응, 별일은 아니고. 심심하면 놀러 오라고. 그녀는 여자에게 뭔가를 보여주고 싶다. 가방안을 뒤적거리며 핸드폰을 찾아내여 여자에게 바탕화면에 뜬 아들녀석의 얼굴을 넘겨준다. ㅡ 우리 아들이야. 다음 주에 아빠랑 놀러 온대. 여자는 어머 너무 귀엽다 하며 호들갑을 떨다가 언니, 나 얘 보러 언니네 가야겠네. 하고 덧붙인다. 그녀는 고마워 하고 나직이 속삭인다. X시가 드디여 그녀의 옛 세상과 진실하게 이어지는 것을 실감나게 느낀다. 평행우주 같은 게, 있다고 해도 상관없다. 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이후에나 항상 나 일거니까. 하고 그녀는 생각한다.

  

  ㅡ 이제 20분이면 도착한다. 하고 남편이 들뜬 목소리로 전화한다. 그녀는 걸레로 집안 구석구석을 훔치는 중이다. ㅡ 알았어. 있다가 출구에서 보자. 침대머리도 닦고, 테이블 위도 닦고, 컴퓨터 모니터와 자판도 닦는다. 청동색 엔틱 거울 테두리를 보고, 그녀는 테이블위로 올라가 무릎을 꿇고 앉아서 거기도 닦는다. 거울 속 그녀도 열심히 같이 닦고 있다. 언제 그녀와 달랐던가 싶게 꼭 같은 모습으로 꼭 같이 움직이고 있다.

  청소를 마무리하고 나서 그녀는 서둘러 가방을 찾아 들고 방문을 나선다. 방문이 닫기려는 순간, 그녀는 본능적으로 얼굴을 돌려서 거울을 쳐다본다. 거울 속 그녀도 방문을 막 닫으려는 순간이다. 이제 이 문이 닫기면, 또 어떤 세상이 펼쳐질까.

 그녀는 알 수 없다. 그녀가 살았던 세상이 진실한 건지, 지금 사는 세상이 진실한 건지, 아니면 거울 속 세상이 진실한 건지, 거울 밖 세상이 진실한 건지. 그날 밤 본 것들이 진실이였는지 마저 그녀는 알 수 없다. 진실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이다. 슈뢰딩거의 고양이처럼, 사람은 바로 그 진실속에 살기 때문에.

 그리고 그런 건 중요하지도 않다. 중요한 건 고양이는 한 마리 뿐이였고, 순간순간 숨을 쉬고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이제 슈뢰딩거의 상자속에서 기여 나와, 거울을 꺼냈다. 빛은 언제나 참, 따갑다.   (끝)                  

2010.     9. 
 
 
[<도라지> 2010년 5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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