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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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신사 Z의 별장-금희
2019년 07월 16일 10시 58분  조회:300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금희   

신사 Z의 별장
 
 
한동안 나는 Z선생과 가까이 지낸 적이 있었다. 그는 신사였고 학자였으며 유능한 상인이자 천재적인 예술가, 내지 대단한 수집애호가였다. 그의 별장 2층에는 아무도 들어가본 적이 없는 어마어마하게 큰 규모의 서재가 있었는데, 높고 넓은 여러 간벽면마다에 줄줄이 선반을 박아넣고 크고 작은 책들과 세계 여러 나라의 공예품들, 내가 듣도 보도 못한 희귀한 장신구들과 박물관에 있음직한 골동품, 그리고 뭣에 쓰는지 통 알 수 없는 별의별 실험기기들을 진렬해놓았다. 가끔 Z선생은 스위치를 눌러 눈 깜짝할 새에 내 눈 앞에서 벽속으로 사라질 때도 있었는데 그의 말투를 보아해서는 그 속에 별도의 비밀창고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서향으로 주방과 맞붙은 벽면 선반아래에는 긴 아일랜드식 책상이 있었고 그 우에는 대형 모니터들이 여러개 이어져있었는데, Z선생은 매일 그곳에서 책을 읽거나 금융거래를 하거나 미니 홈페이지를 관리하고 음악을 듣군 했다.
나는 바깥에서 창문너머로 그의 서재를 구경했다. 그의 서재는 바로 곁에 있는 거실, 주방, 그리고 작은 공장을 방불케 하는 작업실과 개방형의 긴 복도로 이어져있었으며 남향의 바깥벽은 특수재질의 유리로 되여있었다. 물론 Z선생은 내가 그의 허락 없이 창문을 통해 함부로 그의 일거일동을 들여보는 것을 싫어했다. 충분히 리해할 수 있는 일이였다. 나 역시 집을 거둔다거나 설겆이 또는 료리를 할 때 누군가 창문너머로 지켜보는 것이 싫었으니까. 게다가 괴물 같은 까맣고 둥근 눈동자라니, 그 커다란 유리구슬이 나의 창문 밖에서 슴벅거리고 있다는 것은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였다.
Z선생의 별장은 볼수록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사실 그의 별장은 대단히 호화롭고 사치스럽고 기발하고 또 ‘첨단적’이였다. Z선생은 한번도 나를 그 안으로 초대하지 않았지만 마음에 내키는 대로 내가 바깥에서 이리저리 둘러보는 것은 허락하군 했다. 그의 별장은 엷고도 강한 콩크리트와 비슷한 재질과 목조가 혼합된 복층의 지중해풍 건물이였다. 파란 지붕들은 각기 다른 방향으로 경사져내렸고 유백색의 벽은 깔끔하게 미장되였으며 정밀하게 설계된 여러 기능의 방들은 오밀조밀 빈틈없이 이어져있었다. 2층의 긴 복도와 이어지는 발코니에는 넓고 상쾌한 마루가 깔려있었고 머리를 식히기에 좋을 편한 벤취와 하얀 양산이 달린 탁자도 배치되여있었다. 1층에는 인공잔디가 깔린 더 넓은 테라스가 있었는데 조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여러 종류의 아름다운 화분과 식물이 별장의 운치를 더해주고 있었다. 별장 둘레에는 야트막한 나무울바자가 쳐져있었고 뒤켠으로 돌아가보면 작은 폭포가 굽이쳐 흐르는 가상공원도 만들어져있었다. 1층에는 다용도실과 세탁실, 화장실 겸 샤와실, 그리고 드레스룸과 침실 같은 사적 공간의 방들이 위주여서 카텐을 치고 있는 시간이 많았다. 나는 주로 그가 2층 공간으로 올라오는 시간대에 그의 별장을 구경하군 했다.
낮에 그는 서재로 올라와 간단한 스트레칭을 마친 뒤 책상에 마주앉아 환률을 조회하고 주식시장을 돌아보고 여기저기 인터넷뉴스를 뒤적거리다가 소일거리로 흥미로운 실험 한두가지를 해보거나 작업실에 들어가 작은 도구들을 개량하기도 했다. (그가 사용하고 있는 간단한 도구들은 거개가 스스로 개량한 것이였다.) 지치거나 지루하면 완벽한 멀티미디어 시설을 갖춘 거실에 나와 음악을 듣거나 3D영화를 보거나 게임을 했고 배가 고프면 주방에 들어가 스탠드바에 걸터앉아 과일조각이며 과자, 혹은 간단한 식사를 하군 했다. 하루에 한두번 머리를 식힐 겸 마실 것을 들고 발코니로 나와 하얀 양산의 탁자에 마주앉기도 했는데 그때가 Z선생이 비교적 한가한 시간대라서 나는 내 시간만 허락된다면 그와 이런저런 한담을 즐길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참으로 경이로운 일이였다. 그는 메소포타미아의 수메르문명에서부터 고대 이집트, 고대 그리스세계와 로마, 인더스문명과 황하문명과 마야문명, 중세를 거쳐 현대의 세계에 대해, 소크라테스와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에 이어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칸트, 헤겔과 하이데거, 들뢰즈, 자크 데리다 등 철학가들에 대해, 길가메시와 오딧세우스와 시경, 아라비안나이트, 햄릿과 파우스트, 부활과 농담, 백년의 고독 등 위대한 문학작품에 대해, 비슷한 맥락의 음악과 미술과 종교에 대해, 그리고 잡다한 전설과 신화와 일반상식에까지 모두‘조예가 깊었다.’사실은 그의 류창하고도 방대한 담론들을 거의 대부분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당연히‘조예가 깊을 것’이라고 지레 짐작하는 것이였다.
그는 활달하고 친절하고 유모아적인 사람이여서 대화 분위기를 유쾌하게 끌고 나갈 줄 알았다. 그러나 나는 그 무슨 해박한 지식이나 신사적인 매너보다 Z선생이 말을 하는 자체에 더 매혹되군 했다. 깨알처럼 작은 입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야무진 목소리로 말을 하는 그의 모습은 내게 언제나 무한한 상상력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40대의 중년남자였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발랄한 멋쟁이였다. 갈색의 머리결과 네모 안경속의 큰 눈, 그리고 오똑 솟은 코날과 도톰한 입술은 어딘가 바비의 남자친구 켄을 닮았다.
잘생긴 그의 외모에 매료되여 멍하니 앉아있는 나를 Z선생은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이런 천박한 표정의 사람과 대화하는 것은 자신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라 생각되서였다. “이보시오, 금자씨. 제발 부탁인데 그런 표정으로 나를 보지 말았으면 해요.” 그렇게 안타까이 말하고 있는 Z선생에게 “네, 네, 그럼요, 그러지요…” 역시나 홀린 듯한 얼굴로 대답해주고 나면 그는 한숨을 쉬며 머리를 흔들었다. “이게 문명의 차이지요, 암. 금자씨만 그런게 아니라 전에 내가 만나본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랬답니다.” 하지만 Z선생의 고뇌스러운 얼굴표정이라든가 후-- 한숨 짓는 모습도 사실 여간 귀여운 게 아니였다. 그가 알았더면 원통해할 일이였겠지만, 그가 머리를 잘래잘래 흔들며 쯧쯧 혀를 차는 순간이면 나도 모르게 그를 반짝 안아들고 그 매끄럽고 잘생긴 얼굴에 진한 키스라도 한바탕 퍼붓고 싶은 충동을 느끼군 했다. 물론 나는 최대한 그 욕구를 자제했다. 필경 그는 햄스터나 강아지가 아니였으니까.
그는 입맛이 까다로운 편이였지만 내가 성의껏 만든 음식을 조금 덜어 건네는 따위는 허락했다. 하루나 이틀에 걸러 신선한 과일 디저트, 그리고 약간의 마실 것 등을 발코니의 탁자우에 놓아두는 것도. 하긴, 그런 사항들은 계약서에 이미 명시되여있었다. 그는 주방의 랭장고에 일정한 분량을 보관했다가 언제든지 원할 때 그것들을 꺼내먹었다. 때로는 전자렌즈와 전기남비를 리용하여 입에 맞는 간단한 료리를 직접 해먹기도 했다. 좋아하는 소스와 빵과 양념들의 이름을 내게 알려주었고 그것들이 바닥이 나면 다른 생필품들과 같이 목록과 그람수를 적어 발코니의 탁자우에 정중히 놓아두었다. 그는 내가 뭔가를 먹고 있다가 참 맛있다고 생각되여서 그만 자제력을 잃은 채 그의 창문을 두드려 한조각 건네는 행위를 몹시 기분 나빠했다. 먹고 남긴 음식을, 아무리 맛나고 깨끗한 음식일지라도 들이미는 것은 더구나 말할 것도 없었다. “제발 금자씨, 아무리 천한 교육을 받았기로소니, 어쩜 이렇게 몰상식할 수가… 다시 정중하게 말씀드립니만, 저는 제가 먹고 싶을 때 먹고 싶은 것만 먹습니다. 저를 그냥 내버려두세요, 햄스터 취급하지 말아달란 말이에요…” 아, 그가 얼굴을 붉히면서 화까지 내다니, 정말 기묘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신기하게도 나는 그가 화를 내면 낼수록 그의 사생활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가 랭장고에서 수박조각을 꺼내 잘게 썰어 조그만 접시에 담는 모습, 밥알 하나를 죽처럼 짓뭉개고 거기에 여러 야채를 송송 다져 비빔밥을 만드는 모습, 그리고 예쁜 포트에 물을 발랑발랑 끓여서 커피를 내리는 모습… 아무리 보아도 신물이 나지 않았다. 저녁이면 그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와인 한잔을 손에 든 채 1층 침실로 내려가군 했는데, 정말이지 내가 가장 보고 싶은 장면이 바로 그가 샤와하는 모습과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 모습이였다. 욕망으로 번쩍이는 내 눈빛을 느끼는 Z선생은 계단 입구에 멈춰서서 내게 익살궂게 말했다. “이봐요, 금자씨. 뭘 더 보고 싶은 거죠? 우리 같이 지내는 동안, 최저한도의 매너는 서로 지킵시다? 계약서에 썼잖아요…”
학교 다녀온 아이가 곤히 잠든 밤, 나는 거실에서 Z선생의 침실의 환한 불빛을 바라보았다. 그는 매일 밤 거기서 무엇을 하고 있을가. 불빛은 흔히 자정너머까지 켜져있었다. 아이를 씻기고 돌아와보면 그의 샤와실에서도 쏴-- 물소리가 들리군 했다. 그의 화장실에도 변기가 있을가? 세면대는 어떻게 생겼을가? 세탁기는 어떻게 돌아가고 보일러는 또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 걸가? 나는 늘 그런 것들을 궁금해했다. 보드라운 물줄기 아래에 서있는, 혹은 따뜻한 물을 가득 채운 욕조 안에 잠겨있는 그의 알몸이 더 궁금했다고 하는 편이 차라리 옳았다. 그의 가슴과 허리와 다리, 그리고 가운데의 성기를 생각하면… 세상에, 그는 정말 그게 있을가 웃음이 나왔다. 둥근 단추만 한 얼굴에, 키가 펜만큼 컸으니 사실 그는 진짜 사람이 아니라, 그냥 인형이 아니였을가. 기막히게 사람을 닮은, 인조피부를 덧씌우고 그 안에는 풀떡풀떡 살아숨쉬는 장기대신 각종 정교한 부품과 센서들이 빼곡이 담겨있는 인공지능로보트말이다. 신기하고 호화로운 그의 별장은 겨우 바비의 집보다 한뽐 정도 더 컸을 뿐이였다.
 
나는 Z선생의 별장을 교외의 국도곁에서 발견했다. 아이를 교외 조용한 아빠트단지에 있는 부모님 댁에 잠시 맡기고 돌아오는 길이였다. 조숙한 아이는 나의 리혼을 알면서도 모르는 체 꼬치꼬치 캐묻지 않았다. 아이의 아버지는 건장했고 유능한 편이였지만 독재자이기도 했다. 나와는 어려서부터 같은 지역에서 살아온 익숙한 사람이였다. 우리들의 고향은 완만한 산세의 아름다운 산이 있는 작은 시골마을이였다. 산에는 복숭아꽃, 살구꽃, 진달래꽃이 만발했고 달래와 고사리와 취나물도 흔했다. 옛날에는 오소리, 너구리, 여우와 고라니, 가끔은 호랑이까지 출몰했다는 산이였다. 산자락으로 내려오면서 뙈기뙈기의 논밭이 옥수수밭 사이에 층층이 있었는데 논밭을 감도는 시내물에는 붕어, 잉어, 메기며 버들치가 자리를 잡고 살고 있었다.
바자를 친 마당안에서, 동네 길목 해묵은 비술나무아래에서, 그리고 강가 들꽃 만발한 비탈길에서 나는 어린 친구들과 함께 열심히 소꿉놀이를 했다. 해가 뜨면 약속도 없이 동네길로 뛰여나가 서로 만나고 해가 지면 래일 보자는 인사도 없이 각자 제집으로 달려 들어가던 시절이였다. 가끔은 다툼이 있고 시기와 분쟁도 생기군 했지만 대체로 평화로운 분위기였다. 친구들도 부모님을 닮아서 온화한 편이였다. 물론 례외는 항상 있었다. 또래들 속에는 반드시 그 아이들을 좌지우지하고 싶어하는 ‘대빵’들이 있어서 놀이의 규칙을 정하거나 ‘외세의 침입’에 항거하거나 아이들 속의 분쟁을 중재하군 했다. 그 대가로 늘 아이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공동의 리익중‘노란자위’만을 차지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렇게 평온한 분위기의 아이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소위‘대빵’이란 존재가 생겨났는지도 몰랐다.
나의 기억속에서 전남편은 그런 류의‘대빵’이 아니였다. 오히려 그는 ‘대빵’의 지휘 아래 무슨 제안이든지 모두 곰상곰상 양처럼 순복하던 사람이였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었다. 우리가 청춘남녀로 자라 련애를 시작할 즈음에도 그는 무엇이든 받아들이고 포용할 사람처럼 보여졌었다. 특별히 랑만적인 로맨스가 있었던 건 아니였지만 그와 함께했던 자잘한 일상들이 편하고 즐거웠었다. 결혼 후에는 모든 것이 차차 달라졌다. 집도 사고 차도 장만하고 아이도 낳아기르려 하자니 그의 부담이 커진 것도 사실이였다. 가정의 책임자로서 크고 작은 문제를 늘 해결해야 하며 그때그때 정확한 결단을 내리고 리익의 경중에 따라 어떤 것들은 과감히 버리기도 해야 했다. 그는 당연히 자신이 그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도 반대하지 않았다. 우리는 모두 고향시절의 ‘대빵’시스템에 물든 사람이였던 것이다.
우리는 열심히 노력하여 집도 사고 차도 사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나 그동안 세상이 많이 바뀌였고 따라서 예상치 못했던 많은 문제들도 같이 발생했다. 우리의 고향마을은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표제를 달고 서서히 몰락해갔다. 무엇이 ‘뒤떨어진 것’인지 기준은 모호했다. 개개인의 인격과 성향을 무시했다는 설도 있었고 감정표현에 너무 린색했다는 주장도 있었으며 직관적인 감각과 현세계에 대한 향락과 인간 육체의 본능을 너무 억제했다는 의견도 있었다. 현대에 있어서 도시란 무엇이고 문명이란 무엇인가. 바로 이 오래동안 잘못 저질러진 모든 행위에서 완전 다른 방향으로 바꾸어가는 것이 아니던가. 더 개인적으로, 더 감성적이고 본능적으로, 더 순간적이며 현실적이게, 더 자유롭고 심플하고 쿨하게…
 
 
나날이 현란한 속도로 바뀌여가는 세상 속에서 나와 전남편은 여러가지 문제들의 시험대에 밀려 올라갔다. 서로 모르고 살았던 가장 내밀한 성격문제, 취향문제, 그리고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덧 많이 달라진 가치관과 인생관 문제 등등. 결혼생활 13년, 아이가 열한살 생일을 쉬는 주일, 우리는 서로를 더이상 용납할 수 없게 되였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원망이 있었고 미움이 있었고 책임 전가하는 다툼이 여러번 있었지만 다행히 소송까지는 가지 않았다. 아이 앞에서 최저한도의 체면은 유지한 셈이였다. 그에게는 이미 젊은 녀자친구가 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아이를 내줄 수 없었다. 그는 내게 정신 피해 보상금으로 자신의 이름하에 있던 아빠트 한채를 내주었고 앞으로 1, 2년간 먹고살 만한 금액을 계좌로 이체했다. 아이에 관해서는 다달이 약정한 양육비를 보내고 성인이 될 때까지 한달에 한두번 만나보는 것으로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나는 합의서에 서명했다. 결혼기간 그가 항상 나보다 더 많은 경제적 리익을 창출한 것도 사실이였고 안전문제나 경조사, 큰 사건이나 사고가 났을 경우 주된 책임을 진 것도 사실이였지만 나는 그 속에서 보호를 받았다기보다 간섭 내지 조종을 당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점점 많아졌다. 그가 독자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면 할수록 나의 의견은 설 자리가 없었고 결과적으로는 해결된 문제 자체에 불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의견이 무시되였다는 것에 자주 분노를 느끼게 되였다. 그것은 곧 나의 인격에 대한 불존중으로 받아들여져서 나는 기분이 몹시 나쁘게 된 것이였다. 민정국에서 나온 다음 그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내게 악수를 청했다. 우리는 왜 더이상 함께 해보지 못했을가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았다. 이제는 그의‘세력 범위’안에서 벗어났다는 홀가분함과 같이 이제부터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가 하는 막막함도 나를 엄습했다. 어찌됐든 다시 옛날처럼 살 수는 없었다. 미래 내가 나가야 할 길을 고민하는 동안, 리혼으로 피페해진 내 몸과 마음도 추스릴 겸 아이는 친정 부모님께 잠간 맡겨두기로 한 것이였다.
코스모스가 한들거리는 국도로 한참 달려가고 있는데 먼발치의 길가에 눈부신 은빛의 상자가 떨어져있는 것이 보였다. 주변에 쓰레기통이 없는 걸 보아 어느 화물차에서 떨어진 것으로 보여졌다. 가까이 달려가면서 나는 생각을 바꿨다. 그냥 평범한 상자가 아니라 매우 깨끗하고 정교해보이는 상자 같아보였기 때문이였다. 게다가 재질이 보통의 종이상자가 아니라 단단하고 강한 금속이였다. 나 같은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없는, 뭔가 첨단과학의 산물이 그 안에 들어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이 내게 쓸모가 있는지 또는 위험한 것인지 누가 알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속도를 늦추며 금속상자에서 눈길을 떼지 않으면서도 그런대로 서서히 지나치려고 했다.
그때 운전대를 쥔 내 눈이 무슨 빛줄기에 찔러졌다. 금속상자의 뚜껑 한켠,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을 닮은 장치에서 뿜어나온 빛줄기였다. 신기하게도 그 빛줄기는 이동하는 나의 동선을 따라 정확히 내 눈을 겨냥하고 있었다. 불빛은 깜빡깜빡 여섯번 비춰졌다가 멈췄는데, 잠간 지나 다시 깜빡깜빡 비춰졌다. 순간 내 머리속에는 SOS 불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뜩 떠올랐다. 설마 하는 순간 내 귀에는 삐 삐 경보신호도 들려왔다. 확실히 그 속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나는 그것을 지나쳐 30메터 쯤 되는 곳에 차를 세운 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려가 보았다. 혹시 안에 시한폭탄이 들어있지는 않나 하는 로파심 때문에 바로 접근하지 못하고 먼발치에서 이리저리 둘러보았다. 완벽하게 밀봉된 금속상자가 아니라 여러 조각들로 정교하게 조립된 상자였으며 뚜껑과 벽 군데군데에 작은 구멍도 뚫려있었다.
주변의 인기척을 탐지했는지 상자는 부르르 진동했다. 상자 쪽에서도 내가 위험하지 않은 물체로 인식되였는 모양, 뚜껑으로부터 한 조각의 금속이 스르르 젖혀졌다. 작은 지붕과 베란다의 창문 한귀퉁이가 빠끔히 보였다. 첨단 시스템의 집모형 장난감 같았다. 스스로 구조신호도 보내고 경보신호도 울리며 보안포장의 시스템도 가지고 있는 장난감이라니, 너무 대단했다. 나는 두려운 마음을 접고 조심스레 다가가 그것을 만져보았다. 촉감이 단단하고 정교했다. 악의 없는 내 손길에 평화로운 반응을 하는 것처럼 그것도 금속조각들을 하나하나 젖혀주었다. 파란 지붕과 마루바닥인 베란다와 서재, 주방, 거실 등 공간들이 보이는 긴 유리벽, 건물의 2층 전체 구조가 내 눈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세상에, 이렇게 복잡한 구조를 지닌 집모형이라니. 이 많은 작은 가구들과 물건들을 어떻게 만들어 넣어두었을가, 쇼파와 책장과 모니터와 싱크대와 랭장고와 각종 냄비와 식탁과 의자… 모두 진짜와 똑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어느 부분도 대충 생략하고 넘어가지 않고! Z선생은 그 즈음에 계단을 통해 2층으로 총총히 올라왔다. “안녕하세요? 녀사님.” 하고 그는 내게 인사를 했다. 나는 그날 말로만 듣던 ‘티컵인(茶杯人)’의 실체를 처음으로 보게 된 것이였다.
별로 믿음직스럽지 못한 여론의 통계에 따르면 현재 전세계에는 약 수천명의 티컵인이 존재한다고 했다. 절대적인 것은 아니지만 그들 대부분은 소위‘선진국’사람이였고 학벌이나 재산의 정도도 상대적으로 괜찮은 편이라고 했다. 티컵인으로 산다는 것은 아무래도 주류의 인간들이 받아들이기 힘든 삶의 방식이였지만 그들은 그 방식을 기꺼이 원해서 선택한다고 했다. 그들은 법적으로 아직 통과되지 않은 시술을 통해 티컵인이 되고자 하는 자신의 소원을 이루었다. 한편 지금까지는 정상인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시술전 자신의 모든 주변을 정리하고 로후까지 대비할 방도를 미리 생각해두는 게 현명했다. 그러나 보통의 경우 이런 사람들은 정리할 주변이 거의 없었고 로후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들은 번거로운 사회적 의무를 거절했고 어느 공동체에 속하기도 원하지 않았으며 철저히 자유로운 개인생활을 원했다.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집착하지 않아서 가정이나 절친이나 이웃이나 동료 같은 특정한, 지속적인 역할의 사람들을 원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만나는 대로’‘인연이 가는 대로’동거인과 더불어 살려고 했다. 그들의 추구하는 바가 그랬다.‘어떤 만남이든 일단 소중히 여겨라’, ‘우연히 만난 사람과 최대한 즐거운 시간을 보내라’, ‘즐겁게 만나고 행복하게 동거하며 쿨하게 헤여져라’, ‘로화와 림종도 쿨하게 맞이하라’ 등등.
언제나 나는 그것은 나와 요원한 일, 일생을 살면서 거의 마주칠 확률이 없는 일이라고 여겨왔는데 아니였다. 내가 사는 나라에서도 내가 구사할 수 있는 언어를 할 줄 아는 티컵인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였다. 혹시 그는 주변의 다른 나라에서 특수한 사정 때문에 이 나라로 건너왔을 수도 있었다. 세상은 아마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보다 더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모양이였다. Z선생은 티컵인답게 먼저 나에게 자신에 대해 간단히 소개했다.
 
 
 
“안녕하세요? 녀사님. 저는 유쾌한 자유인 Z랍니다.” 하고 Z선생이 말했다. 사람들은 편한 대로 그들을 티컵인이라 부르지만 그들 자신은 스스로를‘자유인’또는‘오메가인’이라 지칭한다고 했다. Z선생은 그 외의 많은 정보를 공개하지 않았다. 국적과 민족, 가정배경과 경력 등에 대해서 그는 지금까지도 굳이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보통의 사람들에게는 그런 개인적인 신상에 대해서 시간을 두고 천천히 나누자 생각하는 경향이 더 많다면 그들에게는 별 필요성을 느끼지 못함으로 나누지 않는 경향이 더 많았다. 어떻게 되여 그런 교외의 국도 길가까지 오게 되였는지 하는 경위에 대해서도 그는 얘기하고 싶어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현재, 이 순간, 나를, 그에게 호기심을 가지는, 느낌이 괜찮은 한 녀인을 만났다는 것이였다.
“실례지만 어떻게 호칭을 해드릴까요? 녀사님?” Z선생이 기분 좋은듯 싱글싱글 웃으며 물었다. 작지만 아주 호남형의 얼굴이였다. 티컵인 시술을 받기 전에 미리 성형을 했을 수도 있었다. 나는 금자라고, 손금자라고 내 이름을 떠듬떠듬 알려주었다. “아, 네 금자씨. 금자씨라고 불러도 괜찮을까요? 반갑습니다, 금자씨!” Z선생이 머리를 까댁이며 내게 작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세상에! 내가 정말 티컵인을 만나 그와 악수를 하다니! 친구들이 알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것 같은 일이였다. 놀라면서도 신기해하는 나의 표정을 Z선생은 유심히 지켜보았다. “금자씨, 제가 지금 잠깐 어려움이 있어서 구조신호를 보냈는데요, 혹시 지금 가능하시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그제야 나는 뭔가 이상한 점들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되였다. 이렇게 멀쩡히 살아있는 티컵인이 국도가에 있다니, 얼마나 오래동안 이곳에 있은 것일가. 그동안 무엇을 먹었으며 난방은 어떻게 해결했을가 등등.
Z선생은 내게 가능하면 전기와 인터넷과 물이 있는 곳으로, 물론 신변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달라고 부탁했다. 여태까지는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으로 최저한도의 전기만 쓰면서 겨우 버텼지만 이제는 배터리도 배터리거니와 비상식량과 물을 보충하지 않으면 안될 상황이라고 했다. 말이 쉽지 그런 곳이 어디 흔한가? 솔직히 말해 안전이 가장 문제였다. 범죄률이 나날이 높아가고 있는 도시에서 량심 있는 선량한 시민, 또는 그런 사람들이 모이는 공공장소를 찾아내기란 쉽지 않은 일이였다. 그러나 이 국도 곁에 이대로 방치하는 것도 위험한 일이였다. 야산에서 들고양이들이 내려올 수도 있고 비상식량이 모두 떨어질 수도 있으며 다른 위험한 인물들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였다. 나의 착잡한 얼굴표정을 읽으면서 Z선생이 말했다. “너무 깊이 고민하지 마세요. 일단 물땅크에 물을 채우고 며칠 분량의 전기만 충전하더라도 제게는 큰 도움이 되는 일이라서요.” 나는 더이상 망설이기가 저어하여 그의 별장을 들어 차로 옮겼다. 1층 아래로 지하층 같은 공간이 붙어있어서 별장은 보기보다 꽤 무거웠다.
차 트렁크에 별장을 싣고 나서 Z선생은 내 곁의 조수석으로 올라와 앉았다. 도시에만 가면 와이파이 터지는 곳이 많을 테니 인터넷으로 비상식량과 생필품들을 주문해 보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그렇게 주문하더라도 구체적인 주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단 며칠 만이라도.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아빠트를 련상했다. 물과 전기와 인터넷이 모두 있었고, 내 나름대로 안전하고 편한 장소라 판단할 수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러나 나의 아빠트로 Z선생의 별장을 옮겨온다는 것은 그리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였다. 막말로, 강아지 한마리를 입양하려고 해도 여러모로 물질적 심리적 정신적 준비를 해야 하는데, 아무리 작아도 어엿한 사람이 아닌가? 그의 성격과 취향과 습관과 과거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상태인데 덥석 집에 들인다는 것은 나의 립장에서 금방 결단하기 어려운 일이였다.
Z선생은 나의 마음을 충분히 리해할수 있다는 표정으로 머리를 끄덕였다. “어떤 념려들을 하고 있는지 짐작이 갑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그런 고민을 거친답니다. 하지만 어쩌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저희 ‘자유인’의 특성상 좋은 동거인을 만난다는 게 최대의 행운이지만, 그것은 언제까지나 우리 두 사람의 합의에 의하여서만 실현이 가능한 것이거든요. 저는 금자씨가 나의 동거인으로서 참 좋겠다 생각이 되는데, 금자씨는 개인 여건상 편한지 어떤지, 혹은 원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념려스러운 부분이 있으면 그대로 말씀해주세요…” Z선생이 이렇게까지 얘기하자 오히려 내 쪽에서 피동이 되고 말았다. 내 아빠트로 오는 동안 나는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으며 결국에는 그의 제안을 고려해 림시계약서를 쓰고 거실 베란다의 한 모퉁이를 그에게 ‘세’주기로 결정했다.
Z선생은 그 베란다를 꽤 맘에 들어했다. 삼면이 유리로 둘러싸여서 해빛도 충족하고 전망도 괜찮았으며 더욱이 상하수도 시설이 있어서 그의 별장을 비치하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거실하고는 간이 미닫이문으로 원하는 동안 격리시킬 수도 있었으니 거의 독립된 공간이나 다름없이 편했을 것이였다. 그는 서둘러 지하실을 열어 호스 두개를 꺼내 내게 건네주었다. 하나는 물땅크와 련결된 호스였고 하나는 오물땅크와 련결된 호스였다. 하수구로 오물이 빠져나가고 대신 깨끗한 물이 물땅크와 뒤마당 가상공원 폭포에 차오르는 동안 그는 또 코드를 꺼내 충전을 부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곧 보일러가 돌아가고 가전제품들이 작동하기 시작했으며 서재의 대형 컴퓨터 모니터도 밝아졌다. (대형 컴퓨터라 해봤자야 핸드폰 크기나 매한가지였지만) 별장 안팎의 조명들이 일시에 반짝 빛나는 모습이 ‘위대한 개츠비’의 저택마냥 황홀하고 아름다웠다.
Z선생은 집안에서 분주히 돌아쳤다. 비상모드에 들어갔기 때문에 가구나 벽 속에 수납되였던 물건들과 기기들을 꺼내 원위치로 복귀시키는데 거의 한나절이 걸렸다. 저녁은 내가 삶아 내놓은 만두로 끼니를 때웠다. 만두 하나의 팔분의 일이면 그의 한끼 식량으로 충분하고도 남았다. Z선생은 이렇게 맛있는 만두를 먹어보기는 처음이라고 나의 음식솜씨를 칭찬했다. 체면 때문에 말을 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동안 얼마나 배가 고팠을가. 그날 저녁, 림시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 그는 바로 석달치의 선불금을 내 계좌로 이체했다. 전에 ‘세’들어 살았던 집의 아이에게 좋지 않은 기억이 있었던지 지원이 얘기가 나오자 아이에게 자신의 정확한 신분을 우선 알려주지 않는 것이 좋겠다고 청구했다. 그리하여 삼주 지난 뒤에 온 지원이는 Z선생의 별장이 내가 친구에게서 잠간 맡아주기로 한 실물모형이라고 알게 되였다. Z선생 자신은 웬만한 대화가 가능한 최신 지능인형으로 소개되였다. 그가 거금을 들여 주문제작한 초소형 가전제품들과 실험기기들과 작업실의 기계와 여러 물건들 역시 실물과 몹시 흡사하게 생긴 소품에 불과하게 되였다. 지원이는 서재나 작업실에 박혀있는 Z선생보다 그의 별장을 더 신기해하였고 숙제를 마치고 나서 가끔 다가가 이곳저곳 만져보았다. 그 호기심도 며칠동안에 그쳤고 다음부터는 집안에 의례 놓여있던 가구나 소품 취급을 했다. Z선생 립장에서는 안전하게 된 셈이였다. 우리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였다.
 
 
 
나는 내친 김에 직장을 한동안 쉬기로 했다. 리혼으로 나의 일상생활이 어쩔 수 없이 달라져야 하는 리유도 있었다. 무엇보다 내게는 시간상 더 자유로운 일거리가 필요했다. 새 일을 찾기까지 나는 지원이를 학교뻐스에 태워보내고 한낮에는 산책을 하거나 장을 보고 돌아와서 집을 치운 다음 약간의 번역알바만 했다. 자칫하면 우울하기 쉬운 나날에 Z선생이 있음으로 그나마 무난히 보냈던 것 같다. 나는 그에게서 많은 력사, 문화와 과학기술에 대한 견해를 들을 수 있었다. 너무 어렵고 방대하고 학파간의 주장 차이로 헛갈리고 실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어떤 지식을 계속 입력받고 있다는 느낌이 잠시나마 내 마음의 공허함을 채워주었던 것 같았다. 내 보이지 않는 미래와 답답한 현실에 대해 갑갑증이 나는 날에는 삶의 고민을 어느 정도 나누기도 했다. 어떤 부분에 있어서 Z선생은 괜찮은 조언자였다. “금자씨, 얼굴 좀 펴세요. 금자씨는 웃는 모습이 참 사랑스럽단 말이예요.” 하고 Z선생은 종종 나를 위로하기도 했다.
전남편은 요즘 전쟁소식 때문에 경기가 좋지 않다고 약정한 양육비를 기한대로 보내지 않았다. 그의 새 아내가 임신했다는 풍문을 친정어머니가 내게 흘려주었다. 한번 만나서 정확히 짚고 넘어가자는 내 제안을 그는 거절했다. 만날 필요도 없고, 만나서 해결될 문제도 아니라고 그는 딱 잘라 말했다. 기한을 좀 넘기더라도 약정된 만큼은 꼭 보낸다고 다시 약속을 했다. 이제는 자신의 피줄까지 방치하려는 고약한 사람이 되였나, 또는 남남이 되였다고 이렇게까지 매정하고 불협조적으로 나오는 건가, 하는 생각 때문에 울분이 치밀었다. 그러나 그 정도 악한은 아니였던지 두주가 지나서 입금하기는 했다. 새 아내의 눈을 피해 약속을 지키고 있는 것이였다.
친정 부모님의 건강은 그럭저럭 견딜 만했지만 아버지가 한번 심장질환으로 입원한 적이 있었다. 큰 문제는 아니였지만 병원에서는 생명 위험을 운운하면서 겁을 주었고 결국 입원하여 페로부터 위, 간, 담낭 등 거의 모든 장기들의 검사를 거쳐 나중에야 심장 대동맥의 문제라고 진단을 내렸다. 병자는 병자대로 곤욕을 치렀고 가족들은 가족들대로 마음과 물질상의 손해를 입었다. 의사들의 뻔한 횡포에도 별도리 없이 당해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기분 나빴다.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친구들이 위로를 해왔지만, 그 말에 더욱 우울해졌다. 도무지 개선할 수도, 개선되지도 않을 것 같은 상황들이 사회 구석구석에 징그러운 뱀들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경제문제도 골치덩이였다. 우선 지원이를 돌보면서 직장을 다닌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였다. 리력서를 여기저기 넣어보았지만 출퇴근시간이 빡빡해서 아이의 등하교시간을 맞출 수 없는 것은 물론 ‘가정숙제’와 학부모회의도 제때에 참여할 수 없는 직장이 대부분이였다. 직장에서는 당연히 최선을 다해 업무를 보는 일에 집중하기를 원했다. 혼자 작은 가게를 경영해볼가 고민도 해보았지만 그것도 한가하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였다. 초창기에는 아무래도 직장보다 더 부지런히 뛰여다니며 시장을 조사하고 연구하고 직접 맡아서 해야 성공할 확률이 높지 않겠는가. 더욱 불안한 것은 창업에 실패를 하더라도 생계를 영위할 수 있는 보장이 없다는 데 있었다. 한마디로 나 같은 서민들은 아프지도 말아야 하고 사고도 나지 말아야 하고 실패도 하지 말아야 하는 요지경 세상이였다. 품위와 량심과 엄마로서의 역할 모두를 지키면서 돈 되는 일을 할 수 있는 길은 아직 내게 보이지 않았다.
지원이를 생각하면 더 막막했다. 대학공부까지는 어떻게든 시켜보겠지만 더 이상 밀어줄 힘이 내게는 없었다. 청년실업률이 이렇게 높은 시대, 지원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은 지금보다 훨씬 척박하고 어려울 텐데 어떻게 그 아이의 생존경쟁력을 높여줄 것인가. 그 아이는 과연 충성스럽고 리해심이 많은 배우자를 만날 수 있는 것인가. 걱정만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념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위에서는 나의 사정을 보고 더러 재혼을 권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리혼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무슨 선택이나 대가가 따르는 법, 재혼의 삶은 필경 지금 내가 누리고 있는 많은 권리와 자유를 포기하게 할 것이였다. 사실 나는 그보다 또다시 한 사람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일이 두려웠다. 많은 사생활을 공유해야 되고,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조절해야 되고, 습관과 취향과 성격을 새로이 맞춰가야 한다는 사실이 귀찮고, 버겁고, 또 공포스러웠다. 세상과 사회와 인간관계에 대해 이토록 부정적인 생각만 한다는 것은 내가 많이 약해졌다는 증거일 것이였다.
그 대목에서 Z선생은 이렇게 권유했다. “꼭 금자씨의 문제 때문만은 아니지요. 해아래 새 것이 없다고 인류의 력사가 시작되는 순간부터 이런 문제는 계속 있지 않았습니까?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기성권력과 신생세력, 다수의 리익과 소수의 리익간의 갈등… 사회는 언제나 부조리하고 불공평하고 해결책이 딱히 없는 문제들로 가득차 있지요. 어느 나라에 가나 문제는 산재해있더군요. 개개인이 열심히 노력해 산다고 해서 해결되는 일들이 아니였어요. 뭐 우리네 인생사도 비슷하지 않습니까? 누구 하나 마음 편한 삶을 사는 이가 없지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나 사랑하는 사람 때문에 산다고들 하지만, 솔직히 말해보세요. 그들로 인한 기쁨이 더 많은지, 다른 상황들로 인한 고통이 더 많은지. 인간이라면 당연히 누리고 살아야 할 자유와 행복이 대체 얼마나 있습니까?…”
Z선생의 열변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머리가 끄덕여지고 한숨이 나오면서 내 삶을 좀더 근원적으로 들여다보게 되였다. 그렇지, 그래, 삶이란 너나없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것을. 인간이라고 태여났지만 항상 세상에, 사회에, 타인에 휘둘리며 살지. 어디 하루라도 제 소원대로, 저 하고픈 대로 다 하며 살 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였다. Z선생은 그 모든 문제가 바로 자신을‘자유인’으로 만들게 한 리유였다고 말했다.
“금자씨, 그래서요, 저는‘자유인’이 되기로 마음 먹었답니다. 기존의 사회와 삶의 방식으로서는 도무지 진정한 인간다운 자유의 삶을 살 수가 없는 것이라는 걸 어느날 문뜩 깨달은 거죠. 하긴, 제가 살던 나라에는 미리 깨달은 사람들이 좀더 많아서,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그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저도 어떤 ‘자유인’과 동거하면서 그의 삶과 그때의 제 삶을 비교해보게 되였답니다. 나는 그렇게 힘들고 지치고 버겁게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지만 저와 동거하던 ‘자유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금자씨도 제 삶을 보세요, 매일 내가 원하는 일을 하고 원할 때 먹고 원하는 사람과 얘기하고 원하는 만큼 쉬거나 즐기지 않습니까. 인간관계에서도 최대한 간섭과 상호의지를 자제하고 독립적이고도 자유로운 감정생활을 영위하려고 노력하지요. 언제 어떤 이변이 생기더라도 그 때문에 큰 영향을 받지 않도록 말입니다. 물론 이 삶도 아직 완벽하지는 않습니다만 주류 인간들이 사는 방식보다야 훨씬 자유롭고 평화로운 생활이랍니다. 그러니 제게 무슨 금자씨가 념려하는 것 같은 걱정거리들이 있겠습니까?…”
그런가? 그랬다. 정말 그런 듯했다. 왜 세계에서도 유독 ‘선진국’에서, 그것도 학력과 재산 모두 괜찮은 사람들이 그런 삶의 방식을 선택하는지 리해가 될 것 같았다. 앞으로는 더 많은 나라의 사람들이 이 대렬에 가담할 것이라고  Z선생은 내다보았다. 인간은 소위 정치제도와 경제구조와 사회질서에 신물이 날 것이며 어떤 개혁도 결코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연설했다. 그의 리론에 따르면 그들이야말로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세대를 주도하게 될‘신인류’일 수가 있으며 그런 맥락에서 스스로를‘오메가인’이라고 부른다는 것이였다.
Z선생이 열변을 토하는 동안 나는 턱을 괴고 조용히 앉아서 그와 그의 별장을 바라보았다. 내가 만약 그와 같은 티컵인이 된다면 나는 과연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가. 전남편과 그의 새 아내와 친정 부모님과 아이를 모두 잊고 오직 나의 삶에 집중한다면 어떨가. 직장과 가게와 번역알바와 모든 자질구레한 일들도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면 나는 매일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가. 나는 어렸을 때 배우다가 그만둔 피아노를 다시 배우고 싶었다. 바이올린과 가야금과 드럼에도 도전해보고 싶었다. 미술공부를 하고, 여러가지 수공예품도 만들어보고 싶었다. 매일 아홉시까지 늦잠을 자고, 여유롭게 식사를 하고, 울다가 웃으며 드라마, 영화를 보고 춤을 추거나 운동을 하는 것으로 일상을 보내고 싶었다. 수다를 떨고 싶으면 티컵인 동호회 채팅방에 들어가 마음껏 떨면 되는 것이였다. 어차피 만나지 못할 친구들이기 때문에 복잡하고 피곤한 관계로 엮이지 않을 것이니까… 이 모든 것이 현실적으로 정말 가능한 일일가. Z선생과 한담을 마치고 나서 나는 혼자 침대로 돌아와 무거운 한숨을 내쉬였다. 나의 삶은 여전히 칙칙하고 답답하고 어두웠다.
 
 
 
구질구질 장마비가 내리던 날, 지원이의 학부모회의에 가는 길에서 나는 결국 사고를 내고 말았다. 골목길을 가로지르는 중학생을 피하기 위해 핸들을 급히 꺾었다가 마주 오는 차량의 앞부분을 들이박은 것이였다. 다행히 인명사고는 없었지만 상대의 전조등 하나를 부숴버렸고 철판도 우묵하게 눌러버렸다. 내 차의 손실은 미처 세세히 체크해볼 사이도 없었다. 까만 눈을 빛내며 나만 기다릴 지원이를 생각하니 속이 바질바질 탔다. 교통경찰을 부르지 않고 합의하여 해결하려니 상대 쪽에서 부르는 가격이 너무 터무니없었다. 우산을 들고 서있었지만 이따금씩 세차게 부는 바람에 한 모퉁이가 자주 뒤집혔다. 차가운 비줄기가 나 따위는 우습다는듯 잽싸게 얼굴을 얼얼하니 때리고 지나갔다. 하늘은 우울했고 상대는 야만스러웠으며 나는 바보같이 떠듬떠듬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사진을 찍어 보험회사에 넘기고 나서야 나는 차를 끌고 그 혼란중에서 나올 수 있었다. 전남편에게 대신 학부모회의에 참석하라고 련락을 할가 몇번 망설이다가 그냥 담임선생님께 련락을 했다. 아이가 혼자 기다리고 있는 학교에 도착하여 나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어떡하니? 금자야, 늙으면 빨리 죽어 없어져야 하는데…” 어머니는 체통이고 뭐고 할것없이 전화기를 붙든 채 흐느꼈다. 년세가 들어가면서 부모님은 나날이 약해갔고 내가 리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저질렀다. 이번에는 로후자금으로 예치해둔 은행카드였다. 아버지가 자칭 은행직원이라는 낯선 이의 전화를 받았고 카드의 주인이 범죄사건에 련루되여 그 계좌로 예치했던 모든 금액이 경찰서로 넘어가야 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전형적인 전화사기였지만 두 로인네는 쉽게 넘어갔다. 아버지는 그 길로 현금인출기로 달려가 전화가 알려주는 대로 이것저것 건판을 눌렀다. 산처럼 믿고 살던 거액의 자금이 눈 깜짝할 새에 날아가버린 것이였다.
지원이를 데리고 나온 그 길로 나는 친정에 돌아가 부모님을 모시고 경찰서에 들렀다. 곽밥을 시켜 먹던 중년의 경찰 한 사람이 사건을 접수했다. 그는 아버지의 어눌한 발음에 짜증을 참지 못하고 마뜩찮은 말투로 자주 되물었다. “네? 뭐라고요? 다시한번 말씀해주세요. 네, 그래서요… 네? 다시…” 마음이 급한 어머니는 정서를 가라앉힐 수가 없어 둘 사이의 대화에 격앙된 표정으로 끼여들었다. “아니, 경찰량반, 이게 지금 얼마나 큰 돈인데… 우리 늙은 것 둘이서 손에 쥐고 있는 것이란 이 통장 뿐이라우. 나중에 갑자기 아프기라도 해서 자식 발목 잡는 짐이라도 된다면 어떻게 한단 말이요? 제발…” 나는 어머니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이런 말단 경찰한테 그렇게 애원을 해보았자 별 효과가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였다. 그는 그저 경찰이라는 직업인이였을 뿐 개인적으로 다른 이의 고통에 대해 같이 안달해할 아무런 의무도 없었다. 진술서를 작성하고 나서 그는 비슷한 경위를 당한 사람들에게 수없이 반복했을 말을 우리에게도 해주었다. “요즘 이런 전화사기가 부쩍 늘었답니다. 로인들을 상대로 한 사기가 상대적으로 많으니까 항상 조심하셔야 돼요… 이 사건에 관해서는 최선을 다해 추적해볼겁니다. 소식이 있으면 알려드리지요. 련락전화나 남기고 가세요.” 그 외에 그가 또 무슨 말을 해줄 수 있었을가.
부모님을 집까지 모셔드리고 나는 밤중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하는 내내 앞바퀴에서 삐걱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주차장은 이미 만원이였다. 지원이는 피곤했던지 조수석에 앉아 잠들어있었다. 나는 차를 아빠트단지 바깥의 길거리에 세우고 아이를 깨웠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는 흐릿한 밤하늘이였다. 희미한 가로등이 구부정한 허리로 무심하게 서있었다. 예상했던 것보다 빨리 일을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혹은 이 아빠트를 좀더 작은 평수로 바꿔 자금을 마련해볼가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엘리베터를 타고 올라가는데 순간 눈앞이 아찔해났다. 깜빡거리는 표지판에 5까지 바뀌는 것을 보았지만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갑자기 낮아진 혈압이 문제였다. 잠간이긴 했지만 그렇게 정신을 잃어본 적은 처음이였다.
그 뒤로 련 며칠 나는 몹시 우울했다. 살아가는 게 너무 힘이 든다는 생각이 내 머리 속을 꽉 채웠다. 내가 감당하고 해결해야 할 문제들은 나의 능력보다 훨씬 커보였고 그래서 감당하고 싶은 마음도 희미해져가고 있었다. 삶의 락이 무엇인지,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건지, 왜 나는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게 귀찮았다. 모든 것에서 떠나 오직 나만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가 학교로 가고 나면 Z선생은 2층 발코니로 나와서 멍을 때리고 있는 나를 살펴보았다. 나는 말없이 수걱수걱 집일을 계속했지만 Z선생은 나의 우울한 기분을 알아챘을 것이였다. 그는 길 잃은 한마리의 양을 기다리는 목자처럼 안타까운 눈빛으로 나를 잠간씩 바라보군 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유쾌하고 자유로운 사람으로 돌아갔다. 혼자 료리를 해먹고 커피를 내리거나 차를 우려 마시고 좋은 음악을 듣고 좋은 영화를 보고 익숙한 채팅방에 들어가 수다를 떨거나 혼자 그림을 그리고… 그의 세계에는 누릴 수 있는 것들로 무궁무진한 것 같았다. 혹은 그의 세계에는 정말 이 세상의 삶 같은 고민거리들이 없는 것 같았다.
저녁, 아이가 잠이 들고 나서 그는 내게 와인을 한잔 권했다. 그는 나의 거대한 유리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금자씨,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어보지는 않겠습니다만… 한잔 하실까요?” 그것은 며칠전 특별히 나를 위해 인터넷으로 주문한 좋은 와인이라고 했다. 그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미안하여 나도 과일을 두어가지 잘게 잘라서 그가 마주앉은 발코니 탁자우에 놓았다. 한모금 마시고 나니 속이 후끈해지는 것 같아 더 마시고 싶었다. “사람이 산다는 게 그렇지요, 이 일이 끝나면 저 일이 생기고… 끝나지 않는 문제 천지지요.” 친구들하고 미처 나누지 못했던 얘기들을 나는 그날 와인의 힘을 빌려 Z선생에게 쏟아버렸다. Z선생도 충분히 리해된다는듯 와인잔을 굽냈다. 나는 병을 들어 두 사람의 유리잔을 다시 채웠다.
습한 밤바람이 열어놓은 창문사이로 솔솔 불어왔다. 달빛을 감싸안은 카텐이 창문가에서 펄럭이였다. 나와 Z선생은 권커니 작커니 어느새 반병의 와인을 마셔버렸다. 처음에는 느낌이 별로 없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취기가 슬슬 오르기 시작했다. 좀 과했구나 싶어서 나는 말을 절제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내 목소리는 의지보다 높아졌고 대화내용도 얼토당토하게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오랜만에 있어보는 흥분이였다. Z선생도 평소보다 많이 마셨다. 그 역시 얼굴이 불그스레해졌는데 나를 위로한답시고 작은 손을 내밀어 내 얼굴을 쓰다듬기까지 했다. “그러니까, 금자씨. 그렇게 사는 게 얼마나 힘이 듭니까. 저는 그게 무슨 생활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답니다.” 그는 내게 또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금자씨, 그냥 나처럼 자유인이 되세요. 얼마나 편하고 좋습니까? 자유인의 삶은 온전히 자신의 것이에요… 그렇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 서로 원하는 동안 사랑을 해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르겠는데요. 후훗…” 그는 그 얘기를 하고는 배를 부여잡고 웃었다.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정색하며 말했다. “사랑은 롱담이구요, 자유인이 되라는 건 진담이에요.”
나는 뒤죽박죽 혼란스러워지려는 머리를 겨우 가누었다. “그건 불가능해요. 저는 부모님도 있고 아이도 있다구요. 선생님은 혈육들이 없으니까 그게 가능하겠죠.” 내 말에 Z선생은 도를 닦는 사람처럼 초연히 웃었다. “꼭 그런 건 아닙니다. 우리 자유인 중에는 금자씨처럼 부모 자식 다 살아있는 경우도 있답니다. 어떤 분은 금슬 좋은 부부생활을 하기도 했구요. 출가하는 사람도 그렇지 않습니까? 가족들이 있고 없고는 출가의 결정적인 원인이 될 수 없는 거죠.”
나는 Z선생의 말에 취하여 자꾸자꾸 와인을 마셨다. 나중에는 내가 누구랑 대화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점점 작아지고 있었고 내 주변의 물건들은 계속하여 커지고 있었다. 어느 시점에 다달아서 나는 Z선생만큼 작아져버렸다. Z선생은 이제 내게 티컵인이 아니라 정상인이 되였다.
그는 비칠거리는 나를 이끌고 그의 별장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쇼파와 예쁜 탁자, 벽마다 빼곡이 공예품들로 진렬된 서재와 깔끔한 스테인리스강로 장식한 주방, 그리고 여러가지 기계들이 놓여있는 작업실까지… 나는 그의 손에 이끌리여 그 공간들을 일일이 들려 보았다. 실제로 들어가보니 더 화려하고 더 아름답고 더 완벽했다. “어때요, 금자씨? 이런 곳에서 세상 념려는 다 잊어버리고 매일매일 원하는 일만 하면서 여유롭게 사는 겁니다…” Z선생은 매일 이런 곳에서 이런 기분으로 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그 시점의 내게도 들었다. “그래요, 선생님은 정말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는 것 같네요…” Z선생은 약간 우쭐해나서 나의 손을 잡고 1층 계단으로 이끌었다. “모처럼 이 안에까지 오셨으니 이참에 1층 공간도 보여드릴까요? 거긴 정말 제 사적인 공간인데…” 나는 허공에 들뜬 발걸음으로 쿵쾅거리며 그를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빨간 불, 초록 불이 빼곡이 들어온 커다란 계기판이 있는 곳이 이 별장의 슈퍼컴퓨터가 내장된 곳이였다. 드럼세탁기가 놓여진 세탁실도 있었고 커다란 욕조가 비치되여 있는 따듯한 샤와실도 있었으며 사계절의 옷들이 스타일별로 빼곡이 걸려있는 넓은 드레스룸도 있었다. 그는 내게 자신의 침실도 보여주었다. 랑만적인 원형의 침대가 침실 가운데에 있었고 간단한 가구들이 딸려있었는데 벽에는 70인치의 모니터가 걸려있었다. 우리는 비칠거리며 침대로 다가가 그 우에 쓰러져버렸다. 푹신하고 향긋한 침대였다. 뭔가 둥그스럼한 것이 이불 아래에 깔려있는것 같아 나는 금세 일어나 앉았다. Z선생이 이불을 젖히고 실리콘으로 된 녀자인형을 꺼내 머리맡의 서랍 속에 치워두었다.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며 큭큭 웃었다…
문뜩 내 귀에 삐걱거리는 문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이 별장에 무슨 손님이 있을가 신기해하며 고개를 돌렸는데 침실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지원이가 보이는 것이였다. “엄마, 지금 뭐하세요?” 하고 지원이가 물었다. 나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아이를 쳐다보았다. “뭐하긴? 아저씨랑 와인 한잔 하고 있었지. 얘, 아저씨네 별장, 안에 들어와 보니까 바깥에서 들여다보기보다 훨씬 좋아.” 지원이가 가까이 다가와 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아저씨는 무슨? 엄마 지금 누구 얘기하는 거에요? 이 과일조각들은 다 뭐구요?” 순간, 지원이가 아직 Z선생을 모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웃음이 나왔다. 흥분의 상태중에서 나는 참지 못하고 실상을 말하여버렸다.
“그래, 너에겐 일부러 얘기하지 않았지. 이 별장에 사시는 분, 이 별장의 주인 되시는 분은 Z선생이셔. 이 분은 사실 ‘자유인’이란다. 알지? 사람들이 말하는 티컵인…”
지원이는 그 말에 충격을 받은듯 멍하니 두 눈을 흡떴다. 나는 Z선생을 만난 경위며 그의 학식과 매너와 예술가적 기질과 그의 고상한 인생관, 가치관에 대해서 한참 떠들어댔다. “세상에 대해 많은 것을 내려놓으신 분이야. 쿨하고 멋지고 자유로운 인생을 즐기는 분이지. 나도 상황만 되면 그렇게 살고 싶다만… 그래, 상황이 문제가 아니라 나는 아직 이 분만큼 깨닫지를 못한 거지, 안 그러니? 아들?” 그 말에 지원이는 드디여 어떤 결심을 내린듯 내 손을 꽉 잡아일으켰다. 내 손에 쥐여졌던 와인잔이 거실 마루바닥에 떨어져 쨍그랑 한 모퉁이가 깨졌다. “엄마, 정신 차리세요. 지금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에요?”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는 Z선생의 별장앞에 있었고 Z선생이 마시다만 글라스는 발코니의 탁자 우에 놓여있었다. 그는 아까 전에 벌써 1층 침실로 내려갔는 모양이였다.
 
 
지원이는 한심스럽다는듯 나를 쏘아보았다. “자유인이라니요? 고상한 가치관이라고요? 이런 삶이 부러워요? 엄마 정말 몰라서 그렇게 말하는 거에요? 말이 듣기 좋아 티컵인이지, 사실 그냥 애완인일 뿐이잖아요.” 시원한 바람 한줄기가 내 이마를 스쳐지났다. 가물가물하던 정신이 화들짝 놀라며 돌아왔다. 너무 솔직해서 꺼림직한 단어가 이 아이의 입에서 저리 쉽게 나와버렸다니…
 
아빠트를 작은 평수로 옮기는 동안 나는 Z선생과 어쩔 수 없이 헤여지게 되였다. 이사하게 될 작은 아빠트는 방이 하나 뿐이였고 베란다도 없었다. 방은 지원이에게 주고 나는 거실에 침대 하나를 들여놓아 방삼아 지내기로 했다. 화장실도 비좁아서 세탁기를 겨우 들일 정도였으니 Z선생의 별장은 둘 수 없었다. 대신 나는 얼마큼의 차액을 챙길 수 있어서 작은 슈퍼라도 해볼 요량으로 길가의 가게 하나를 세냈다. 부모님이 와서 이사를 도왔다. 그전에 나는 미리 Z선생에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그는 쿨한 ‘자유인’답게 그 일들을 받아들였다. Z선생의 새로운 거처를 위해 그나마 믿음직한 시설이나 친구들에게 물어볼가 생각했지만 Z선생은 그렇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금자씨, 이런 일까지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 ‘자유인’의 인생철학이 바로 이런 거 아닙니까. ‘즐겁게 만나고 행복하게 동거하며 쿨하게 헤여져라’”
그는 비상식량을 창고에 무더기 쌓아놓고 랭장고와 물땅크도 가득 채운 다음, 별장의 시스템을 비상모드로 전환했다. 해빛이 충족한 곳이면 태양에네르기 전자판으로 최저한도의 전기를 꽤 오래동안 계속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웬만한 기계와 가구들이 벽 속으로 자취를 감춘 다음, 내가 처음 보았던 은빛의 금속판들이 지하실 벽아래부터 나와 별장을 스르륵 올리싸고 있었다. 마지막 금속판이 닫힐 무렵 그는 내게 악수를 청했다.
“금자씨, 같이 있는 동안 정말 즐거웠습니다. 금자씨도 즐거웠길 바래요… 이번에는 제 별장을 이 도시의 가장 큰 공원 나무숲 길가에 놓아주세요. 그런 곳에는 아직 가보지를 못해서요.”
나는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그의 제안에 동의했다. 그는 성인이였고 충분히 자신의 삶을 결정할 권리가 있었다.
이사를 마친 후 나는 짐을 정리하다가 Z선생과 썼던 계약서를 보게 되였다. 지원이가 서랍 속에서 발견한 것이였다. 계약서에는 이런 사항들이 적혀있었다.                
 
갑: Z선생   을: 손금자
갑은 을의 이런 제공들이 필요합니다.
쾌적한 주거공간, 전기, 물, 인터넷 및 오물처리와 쓰레기처리.
아주 적은 분량의 음식, 식용수, 음료와 각종 생필품. (단 먹다 남은 음식은 사절입니다.)
안전 보장, 사생활 보장.
(의류나 화장품 등 선물은 반드시 을의 자원에 따릅니다.)
 
계약서 다른 한쪽에는 또 이런 것들이 씌여있었다.
 
갑은 을에게 이런 것들을 제공해줍니다.
합리한 주거세, 전기세, 물세 및 쓰레기 처리비용.
음식 가공비용, 류사한 서비스 비용.
친절하고 유쾌한 말 상대, 흥미로운 볼거리와 색다른 재미.
(덤으로 제공할 수 있는 것: 방대한 지식과 상식. 을의 책임감과 인내력, 친화력 강화. 특별한 경우, 갑의 자원 하에 신체적인 접촉을 허락할 수도 있음…)
 
지원이는 그 계약서를 훑어보고는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쓰레기는 짐을 다 정리할 때까지 계속 나왔다. 검은 비닐봉지로 싸서 던진 우리의 쓰레기봉투곁에 이웃집의 고장난 햄스터우리가 같이 던져졌다. 그 뒤로 나는 Z선생을 아직 만나지 못했다. 그는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는지 아마도 다시는 알 수 있는 길이 없을 터였다. Z선생의 말대로 나는 그것까지 신경쓰지 말아야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를 존중하는 일일 것이였다.
하지만 나는 그 후로부터 국도를 달리다가 길가에 떨어진 상자 같은 것을 보는 날이면 속으로 꿈틀 놀라군 했다. 아름답고 정밀한 최첨단의 별장이 그 안에 있어서 세상 삶에서 도피하고 싶은 나를 다시 유혹할가 걱정되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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