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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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이원혼(二元婚)-금희
2019년 07월 15일 10시 20분  조회:309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금희  

이원혼(二元婚)
 
 
처음 B를 만난 것은 아빠트 엘리베터 에서였다. 친구와 약속한 카페로 나가는 길, 밤 열시경이였고 빨갛게 빛나는 예약버튼 우의 화면 안에서 성인 남자 한명의 실루엣이 깜빡거렸다. 문을 열기전까지 나는 그 남자와의 동승을 살짝 고민했다. 요즘 들어 아빠트 무단침입범죄사건이 늘어나고 있다는 뉴스가 생각나서였다. 더 안전한 보안시스템의 아빠트는 그만큼 세가 비쌌다. 엘리베터가 도착하는 것을 보고 순간 나는 그만 습관적으로 열림버튼을 누르고 말았다.
캐주얼한 정장을 입고 단정하게 머리를 빗어 넘긴 동양혈통의 남자가 그 안에 있었다. 남자는 한쪽으로 비켜서면서 가볍게 머리를 끄덕여 인사를 했다. 짙은 눈섭 아래 크고 깊은 까만 동자의 눈이였다. 등뒤에는 커다란, 정말로 커다란 검은색 베낭이 삐죽이 솟아있었다. 나는 꼼짝 않고 서서 깜빡깜빡 변하는 층 수자만 올려보았다. 설마 심상치 않은 무엇이 들어있지는 않겠지. 엘리베터가 48개의 층을 쏜살같이 내려가는 동안 나는 머리 속으로 둔중하거나 예리하거나 독극물이 묻었거나 혹은 어떤 기체가 뿜겨나오는 도구들을 닥치는 대로 상상했다.
의외로 남자에게서는 나무의 껍질, 또는 강변의 잡초 냄새 같은 향이 은근히 풍겨왔다. 너무 자극적이지도, 너무 선정적이지도 않아서 오히려 신뢰감이 들게 하는 향이였다. 처음 맡아보는 향인데다가 이미 많이 휘발되여서 본인의 체취에 가리워지고 있는 중이였는데도 왠지 나는 그 향에 신경이 쓰였다. 지하 1층에서 남자가 먼저 내릴 때, 나는 그의 얼굴을 한번 더 들여다보았다. 그는 방금 전과 같이 가벼운 목례를 했는데, 이번에는 알릴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다. 어떤 예감이 적중했다기라도 한 듯이. 친절한 사람이거나, 약간 엉뚱한 사람일 수 있겠다고 나는 추측했다. 한달 쯤 지난 뒤, 부근의 운동클럽에서 다시 만나고 보니 그는 그냥 보통의 트레이너(教练)였다.
약력도 제대로 보지 않고 무작위로 선택한 트레이너였는데 그일 줄은 생각지 못했다. 그는 너무 헤프지도 너무 심각하지도 않은 사람이였다. 지나치게 열성적이지도 않았고 반대로 소심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본 적 있는 사람, 내면이 충실하게 차올라 있는 사람, 그는 그런 사람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 언제 한번 본적 있죠? 난 기억나는 데, 그쪽은 생각나는지 모르겠네…” 나의 트레이너가 된 B가 그날처럼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의 미소는 그의 향수 처럼 사람을 묘하게 끄는 데가 있었다. 그것은 비슷한 기대치에 있는 이성이 발산하고 있는 ‘생물학적 매력’하고는 달랐다. 인격적 성숙이 풍기는 자연스런 힘 같은 것이라고 할가, 아니면 특정한 인간들이 품고 있는 신비스런 기운이라고 해야 할가. 촉이 그만큼 예민하지 못한 나는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가 바로 B였다. 독신생활 3년만에 만난 사람, 내 오래된 삶의 방식을 바꾸도록 결심을 내리게 한 사람.
그 즈음 나는 목과 허리에 무리가 생겨 휴식과 적절한 운동을 권장받았다. 일감에 정신이 팔려 두세시간동안 쉬지 않고 내처 그림을 그린 탓이였다. 나는 꽤 실력 있는 전자출판사의 삽화가였고 한달에 한두번 정도 만나는 동료와 선배들의 말에 따르면 디스크는 우리들의 직업병이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온몸이 뻐근했다. 2, 3년전만 해도 약간의 스트레칭에 사라지던 불편감이였는데 이제는 아니였다. 삽화가로 살아온지 8년, 서른다섯이란 나이도 무시할 수 없는 악조건이였다. 뒤골이 뻐근해남을 느끼면서부터는 각별히 주의를 가한다고 했지만 가끔 팔 안쪽까지 저려올 때도 있었다. 현대인에게 있어 그만한 증상쯤은 아무리 감기처럼 흔한 증상이라 해도 더 불편해지기 전에 관리해주는 것이 현명했다.
뭉친 근육도 풀어주고 근력도 강화할 목적으로 운동클럽들을 뒤져보다가 결국 자동차를 끌고 가지 않아도 되는 부근의 것으로 정했다. 가상의 훈련장들은 가격이 착했지만 이번 만큼은 돈 좀 쓰고라도 제대로 하고 싶었다. 클럽에서는 부근 아빠트의 주민이라는 리유로 10%를 할인해주었다. “트레이너는 어떤 분으로 하고 싶습니까? 인종이나 성격, 외모 … 선호하는 스타일이 있으세요? ” 상담 아가씨가 물었을 때 나는 머리를 저었다. “아니요, 특별히 엄격하신 분이 아니라면 상관없어요.” 하지만 사실 나는 어떤 종류의 인간하고도 잘 지내는 타입이 아니였다. 차라리 어떤 종류의 인간하고도 그닥 잘 지내지 못하는 사람이라 하는게 더 나을상 싶다. 너무 자상한 사람은 부담스럽고, 너무 열정적인 사람은 숨막히고, 너무 차겁거나 소심한 사람은 답답하고 짜증 나며 나랑 비슷한 사람은 비슷해서 싫었다.
티나게 싫어하는 건 아니였다. 작심하고 내 속을 들여다보지 않는 이상, 사람들은 나를 이럭저럭 주위와 별 말썽 없이 잘 지내는 사람으로 인식했다. 그러나 유심히 들여다보면 그들 역시 나와 비슷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해서 나는 인간들에게 기대를 높게 걸지 않았다. 어차피 지내다보면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 너무 많을 테니까. 상담아가씨는 내 얼굴을 올려보더니 컴퓨터 화면을 빠른 속도로 번져넘겼다. “그렇군요… 그럼 이 분으로 할가요? ××쪽에서 일하시다가 부근으로 이사 오면서 옮겨왔거든요. 경력도 많으시고 인기도 좋으셨던 분이네요.” 나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척했지만 화면 속의 사진도 자세히 보지 않았다. 약간의 개성차이는 있겠지만 트레이너 역시 ‘고급 서비스’직이라 모르긴 해도 거의 순서대로 움직일 터였다. 그러니 누구를 선택한들 무엇이 그리 크게 달라질 것이겠는가. 아가씨는, “어쩌면 두 분이 잘 지낼 것 같다.” 라고 하면서 그래도 혹시 무슨 불편한 점이 있으면 언제든 련락하라고 나에게 조언했다.
할머니는 내가 그 비싼 종합운동련습권을 끊었다는 말을 듣고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어딘가 억지스러운 처방을 내려주었다. “그게 다 너 혼자 사느라 얻은 병이네라. 막말로, 니가 그 나이에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살림을 사느라면 언제 둬서너시간씩 컴퓨터앞에 죽치고 앉아있을 새가 있겄냐.” 듣고 보니 그럴 듯도 했다. 시대가 아무리 변했다 하더라도 결혼 후의 료리나 청소, 육아 같은 집일에는 남편보다 안해가 신경을 더 써야하는 법이니까. 나 같은 자유직업자들에게는 지나친 집중력이 오히려 건강을 해칠 수가 있어서 할머니 말대로 ‘가족들에게 방해받는 삶’이 되려 장기적으로 육체의 평형을 유지해주는 ‘무공해’ 수단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였다.
그러나 결혼이라는 것이, 15좌우의 유전자중 3개가 일치하지 않는 사람과 가족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할머니에 따르면 ‘옛날’(할머니 세대) 사람들에게 있어 결혼은 그리 쉬운 것은 아니였지만 그래도 대개의 ‘정상인’들이 모두 할 수는 있는 것이라고 했다. 그 시절에도 독신, 리혼, 일부다처, 이중 결혼 … 등 ‘비주류’의 방식으로 사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1부1처 전통적인 결혼제도를 압도할 만한 수는 절대 아니였다고 했다.
할머니는 20세기 후반기 즈음에 출생한 사람이였다. 할머니에게 자식이라고는 딸레미 하나가 전부였는데 그것은 그녀의 출산 시기가 정부의 계획생육 프로젝트에 걸쳐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할머니의 딸, 그러니까 내게 엄마가 되는 녀자는 명이 그리 길지 못했다. 3년간의 결혼생활은 무난했던 걸로 짐작되였지만 내가 어린이집으로 들어갈 나이에 엄마는 위암으로 덜컥 돌아가버렸다. 아버지는 2, 3년뒤에 재혼을 했고 나는 열두살까지 친할머니네 집에서 길러졌다. 그동안 지금의 내 유일한 혈족, 곧 외할머니는 외국에서 가사도우미로 쭉 살아왔으며 친할머니와 할아버지의 건강 때문에 련락받고 왔을 때에는 이미 예순일곱의 ‘젊은 로인’이 되여있었다.
 
 
 
 
처음 할머니와 만나던 날, 나는 예상밖으로 키가 훤칠하고 등허리 꼿꼿한 그녀를 보고 좀 놀랐었다. 힘든 로동을 하며 살아왔다고 들었는데 막상 만나고 보니 친할머니보다 활기가 넘쳤다. 그녀는 나를 만나기 위해, 또는 수년간 보지 않고 살았던 사돈식구들 앞에 나서기 위해 고심해서 맞춘 듯한 물빛정장을 차려입었다. 그녀가 옷을 입었다기보다 옷이 그녀 몸우에 가까스로 걸쳐있는 듯 어색한 차림이였다. 친할머니의 우려대로 그녀는 좀 무식한 데도 있었다. 그녀는 사돈식구들 앞에서 걱정말라고, 애 하나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건 얼마든지 가능하다고 장담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교육에 대해, 시국이나 형세, 식품의 칼로리와 안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별로 많지 않음이 곧 드러났다. 차라리 정부에서 운영하는 시설학교에 나를 맡길가 하고 친할머니는 재다시 망설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1층에서 얘기하는 동안 나는 내 방에 올라가 조용히 짐을 챙겼다.
나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재혼한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둘 있었고, 그 오누이형제는 어려서부터 친할머니와 친할아버지에게 사랑받는 비결을 훨씬 많이 터득하고 있었다. 나는 명절과 휴가철을 증오하며 자랐다. 그때가 되면 아버지는 그 오누이형제를 데리고 그들의 엄마와 함께 친할머니네 집에 들렸기 때문이였다. 그 며칠간은 나 자신이 이 세상에서 괜한 존재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기에 충분한 시간이였다. 그들은 아버지와 엄마와 누나와 동생과 할머니, 할아버지였지만 나는 무엇이란 말인가. 어머니가 죽음으로 내게는 더이상 가족다운 가족이 있을 리가 없는 것이였다. 친할머니네가 최선을 다해 나를 돌보았음에도 그 느낌은 가셔지지를 않았다.
방울이는 그것이 나의 관계감성지수가 낮은 탓이라고 말했다. 물론 엄마를 일찍 잃어 원만한 가정 속에서 자라지 못한 객관적 원인도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나보다 더 심한 폭력과 모순과 랭대와 방치를 겪으며 자란 사람들도 수두룩하다고 했다. 그 아이의 말은 일정한 참고가치가 있었다. 자전거동호회에서 만난 친구들을 보아도 나보다 나은 상황에서 자란 이들이 별반 없었다. 물론 아직도 전통적 가정에서--할머니가 말하는 그 ‘옛날’방식으로 쭉 자라온 이들이 있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소수자, ‘비주류’였고 우리 대부분은 그들이 말하는 ‘전통가정의 분위기’에 대해 공감할 수가 없었다. 언젠가 식품자판마트에서 전통가족으로 보이는 남자와 녀자, 그리고 아이 둘을 본 적이 있었는데 가게마다 우르르 쓸어모여가는 모습이 너무 불가사이했다. 전통가족이란 저런 것인가? 년령과 취향과 성별이 모두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저렇게 정신 사납게 몰려다니는 것이? 뭔가 색다른 분위기였고 어떤 말할 수 없는 생기가 그속에 도는 것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복잡하고 모순 많으며 서로에 대한 불만과 짜증이 산발하는 관계 같았다. 같은 전통가족이였지만 그들은 ‘기적의 가족들’이란 국민 토크쇼에 초대받았던 사람들보다는 그다지 행복해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그것이 전통가족의 약한 고리이며 진실된 모습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머니는 나와 생각이 달랐다. 그녀는 강인한 사람이였다. 그녀는 나젊은 외동딸을 먼저 잃었고 나를 데려다 키우면서 다시 남편을 보내였다. 그녀는 나의 친할머니와 할아버지, 나의 생부와 그의 안해가 돌아가는 것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녀는 농민, 공장의 직원, 식당주방 보조, 건물 청소부, 가사 도우미, 그리고 환자료양원 등 다양한 직업들을 가졌었으며 여러 도시와 시골에서 많은 종류의 사람들을 만나보았었다.
한 세기 가까이 살아온 그녀는 또 세상의 수많은 변화들을 겪어낸 사람이기도 했다. 얼마나 넓은 면적의 토지들이 세멘트로 덮였는 지, 도시의 아빠트들은 어떻게 최고 7층에서부터 50층내외로 높아지게 되였는 지, 거리의 자동차는 어떻게 많아지기 시작했으며 또한 어떤 식으로 정리되였는 지, 국가와 도시와 사람들의 삶은 어떤 과정을 거쳐 점점 체재화 되여왔는 지 등을 모두 체험했었다. 매번 최신형의 핸드북이나 가전제품들을 사가지고 방문할 때면 그녀는 늘 입버릇처럼 말하군 했다. “참 편리한 것들이 나오는구나. 사람 점점 약하고 게을러지게.”
실제로 할머니는 자판슈퍼를 싫어해서 일부러 매장 직원이 있는 마트를 골라 다녔다. 정말 피곤한 날이 아니면 료리도 손수 장을 봐서 해드셨다. 저번 휴가 차 내가 우겨 소형료리기계를 사드렸지만 그것을 쓰지 않는 날이 더 많은 것 같았다. 그녀는 아직까지 반나절짜리 ‘학원’을 다니고 있었는데 년세가 있는 지라 걱정이 되여 다른 많은 로인네들처럼 그냥 ‘오피스텔’에 들라고 몇번이나 얘기해도 귀등으로 넘겨들었다. 일단 ‘오피스텔’ 주민이 되자면 정부의 복지금 가지고는 많이 모자랐다. 소소한 일상과 식단에서부터 건강관리, 취미생활, 간단한 알바활동 등 삶 전체를 돌보아주기 때문이였다. 비용이야 내가 얼만큼씩 대줄 수 있다고 귀띔해도 할머니는 념두에 두지 않았다. 할머니는 ‘오피스텔’에서의 삶 자체를 싫어했다. 그 녀는 늘 그곳을 ‘안락사 하기 딱 좋은 감옥’이라고 불렀다. 대신 할머니는 내가 방울이의 동생 달랑이를 그녀 집에 들이는 것을 허락했고 집안 곳곳에 있는 감지기들과 카메라, 그리고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핸드북을 통해 자신의 일상 정보들을 매일 내게로 전송해주었다.
요즘 들어서는 그녀도 많이 약해졌는지 전보다 ‘옛날’ 얘기 꺼내기를 더 좋아했다. 대개의 로인들이 그러하 듯 그녀 역시 현대의 물건들을 리용하며 살면서도 여전히 ‘옛날’이 더 좋았다고 기억을 했다. “그때는 어디를 가나 사람이 많았고 그때 사람들은 무식하긴 했지만 요즘 인간들처럼 차겁지는 않았다.”는 것이 그녀의 주요 주제였다. “너그 엄마는 대학입시 시험을 치르고 나서 바로 운전면허를 땄는데, 출근하는 첫날 새로 뽑은 차를 주차장에서 박았지 뭐니…” 엄마가 박은 차의 주인이 나의 생부였는 모양, 할머니는 그 장면을 상상하면서 큭큭 재미있게 웃었지만 나는 도무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세상에, 보통의 사람들이 전부 면허를 따서 직접 운전하고 다녔다니… 얼마나 피곤하고 위험한 일이였을가.
물론 지금도 전문 경주자들이나 운전 동호회의 회원들은 직접 핸들을 잡는다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수의 전문인이 하는 것이였다. 도로와 도시 전체가 체제화 된 지금은 당연히 자율운전 자동차가 합리적이였으니까. 예약버튼만 누르면 출행에서부터 주차까지 전체 로선을 감지기가 통제하고 있었으므로 충돌사고나 주차곤란 같은 불편들이 있을 수 없었다. 그것은 AI에게서 교육훈련을 받기 시작한 서너살의 꼬마라도 리해할 수 있는 상식이였다. 길가에 서서 손을 흔들어 택시를 잡았다는 말도 내게는 참 신기하게 들렸다. 특정된 보행도로가 아니면 자동차 바깥에 서있는 사람을 볼 수 없었으니까. 거리마다 작은 옷가게들이 즐비했고 몸집이 큰 백화점과 사무건물과 정부청사들이 있었는데 그안에는 사람들로 바글거렸다는 말도. ‘지페’라는 것을 저축하거나 꺼내기 위해 ‘은행’이란 실체의 건물에 가서 대기표를 끊었다고 했고 시장에 가면 손질되지도 포장되지도 않은 야채들이 종류별로 무득무득 쌓여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세상에, 정말 믿기 어려운 일이였는데 ‘신분증’이란 것을 발급받기 위해 몇주일 기다려야 했다는 얘기도 있었다…
온통 불편하고 야만적이고 더럽고 무질서한 그림이였지만 할머니는 그것을 ‘지금보다 생기 있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사람은 사람을 만나면서 살아야 하는 거다. 사람 만나는게 귀찮고 불편하고 짜증날 때가 많지만 그래도 그게 산다는 거야. 어디 요즘처럼 통 사람구경하기가 힘들어서야…”
방울이는 할머니의 푸념을 전송받을 때마다 입을 삐죽거렸다. “나 참, 로인네두. 누나, 말 좀 해봐요. 나는 사람 아닌가? 내 동생은 사람 아닌가? 24시간 붙어있으면서 말동무해주고 보살펴드려도 기계사람이라고 꼭 저리 차별을 하신다니까.” 나는 그림을 그리다 말고 의자에 걸터앉아 방울이의 기계적인 안마를 받으면서 대답해주었다. “임마, 넌 아직 사람 될려면 멀었어. 니가 한 된장국은 도무지 할머니 한 것이랑 비교가 안되거든. 거봐, 지금도 여긴 살살 풀어주고 저길 꼭꼭 눌러달라고 해도 영 시원치 않게 하잖아.”
 
사실 나는 그 순간 나의 트레이너(教练)가 된 B를 생각하고 있었다. 상담 아가씨에게서 예약시간을 통보받고 클럽으로 갔더니 커다란 검은색 베낭을 멘 B가 기다리고 있었다. 어딘가 분위기가 익숙하다 싶었는데 베낭을 벗어 무릎과 손목, 발목 보호대를 찾아 착용하면서 몸을 내쪽으로 돌리는 모습을 보고야 그인줄 생각이 났다. 워낙 한 아빠트라 해도 얼굴을 본 사람이 적었고 또 그의 향수가 특이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는 그날 파란 줄을 띄운 검은색 운동복을 입었는데 그러고보니 그의 몸은 정말 일반인들과 달리 단단하고 강해보였다. 내가 불안해하던 베낭속에는 야구 방망이와 테니스, 배드민턴 채와 내가 처음 보는 신기한 휴식용품들이 있었다. 저런 것을 모두 들고다니다니, 그것도 체력훈련의 방법인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배드민턴부터 시작하고 싶다고요? 가볍게 몸풀기에는 좋은 운동이죠. 좀 따분하긴 하지만 정기적으로 몸을 운동해주는 것도 근력강화에 좋구요, 한달에 한번으로 끊었죠? 야외등반운동이요…” 그는 다시한번 꼼꼼하게 나의 운동권에 포함된 내용들을 체크해보았다. 목, 허리, 손목과 발목 등을 풀어주는 유연체조를 하고 나서 그는 기본동작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배드민턴채를 다리와 다리사이에 세워서 악수하 듯이 잡아라, 항상 그 자세로 들고 있어라, 공이 날아오지 않는다고 절대로 멍하니 내려놓고 있으면 안된다고 B 가 말했다. 공을 여러 각도에서 번갈아치기를 10분정도 한 다음 본격적인 회전하는 법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어깨와 팔꿈치를 뒤로 당기면서 상체를 오른쪽으로 엽니다, 이게 원래의 자세로 되돌아오는 자세지요… 이제 큰 원을 그리듯 어깨가 크고 자연스럽게 돌아가도록 칩니다, 이렇게… 탕!
별로 어렵지 않은 동작인 거 같은데 몇번 따라하고 나니 벌써 땀방울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가상훈련과는 차원이 달랐다. “좋습니다, 그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요, 다시 갑니다, 아니요, 좀더 크게, 좀더 자연스럽게, 물 흐르 듯이, 어깨 팔뚝에 힘 풉니다…” 동작중에 간간히 노래를 부르 듯 코치해주는 B의 목소리도 컴퓨터나 방울이보다 호소력이 있었다. 이런 맛에 사람들이 갑절의 돈을 주고라도 전문직 트레이너를 쓰고 싶어하는구나 느껴졌다.
잠간의 휴식타임, 내게 다시 친절하게 근육을 풀어주는 유연체조를 가르치는 B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이 사람은 매일 진짜 사람들을 상대하면서 살아가겠구나. 얼마나 피곤할가? 혹은 정말 재미가 있을가? 나는 그가 가르치는 대로 열심히 뛰여보고자 했지만 마음처럼 몸이 쉽게 따라주지 않았다. 련습시간이 아직 십분 남았는데 나는 벌써 땀동이가 되여버렸다. “힘드시죠? 그래도 첫날치고 잘 따라오네요. 전에 다른 운동을 했었나봐요…” 저녁에는 근육이 뭉칠 수가 있으니 온수로 샤와하고 방울이에게서라도 안마를 받은 뒤에 취침하라고 그는 조언했다. “여기를 이렇게 이런 식으로 풀어주고요, 다리도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하세요…” 내 팔과 어깨를 가볍게 주물러주며 그가 시범을 보였다. 그의 손이 한번 스치고 지났을 뿐인데 어깨가 많이 시원해진 느낌이였다. 모르긴 해도 업계에서 이만한 실력을 쌓자면 노력깨나 들였겠다 싶었다.
B와 함께 운동을 시작하면서 내 생활에는 예상치 못한 변화들이 슬그머니 생겨났다. 그림을 그리다가 령감이 고갈되면 괜히 방울이 트집을 잡는게 아니라 음악을 뒤져 노래를 흥얼거렸고 일이 끝나고는 먼저 친구에게 련락을 해서 안부를 물었으며 출판사 사장이 물량을 상식 없이 늘렸을 때에도 좀더 부드럽게 대처할 수 있었다. 이래서 뉴스마다 운동, 운동하는 듯 싶었다. 몸을 움직이고 팔다리를 조화시켜 어떤 동작을 완성하거나 목표물을 적중시킨다는 것, 거기에서 오는 쾌감과 가뿐함과 생기는 게임이나 4D영상 같은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였다.
B의 미소와 친절한 목소리도 나의 상쾌한 기분에 긍정적인 효과를 냈다. 물론 자신의 고객이라 서비스차원에서, 혹은 직업도덕의 차원에서 베푸는 친절이였겠지만 왠지 내가 느끼기에 그 정도의 얍삽함은 아닌 것 같았다. 그는 정말로 자신의 일을 사랑하는 듯이 보였으며 그래서 고객에게 최선의 것을 권장해주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그는 내게 가끔 식단상황을 묻기도 했고 소소한 일상이나 작업습관을 문의하기도 했으며 내게 뭐니뭐니해도 건강한 생활방식과 삶의 자세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 자신은 직접 료리를 해먹기도 하고 운전도 수동으로 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할머니가 말하던 그 ‘옛날’세대들이 생각났다. 몸으로 벌어먹는 사람이라 그런가? 어떻게 아직도 그런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내게는 그와 같은 성인남자가 직접 찌개를 끓이고 핸들을 잡고 있는 모습이 잘 상상되지 않았다. 그러나 혹시 그라면, 식품자판마트에서 보았던 전통가족의 남자보다 훨씬 여유롭고 품위 있어 보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가 좋아지기를 기다려 야외등산운동을 가게 된 전날, 나는 아빠트 엘리베터안에서 다시 그를 만났다. 나는 그런것을 두고도 인연이라 할 수 있나 싶었다. 1000세대가 같이 사는 아빠트에서 이렇게 가까운 시일내에 다시 만나게 되는 동일인은 그리 흔치 않았으니까. 그날 그의 곁에는 그의 안해와 예닐곱살로 보이는 딸아이가 같이 있었다.
 
내가 엘리베터속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 B는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떴다. 나에게 반가움의 미소를 지어보인 뒤 B는 얼굴을 살짝 기울여 안해에게 낮은 목소리로 나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그 모습은 정말 정겨워보였는데, 그러나 내게는 어딘가 낯설게 느껴졌다. 무슨 원인이였던지 알 수 없어도 나는 그동안 B가 당연히 독신자일 줄 알고 있었다. B는 다시 내게 그의 안해와 아이를 소개시켜주었다.
갈색머리에 초록 눈동자를 가진 B의 안해가 가볍게 목례를 하며 B의 것과 비슷한 미소를 지어보냈다. 성형을 한 티는 나지 않았고 지방흡입시술을 했는지도 잘 알 수 없었지만 원체 빼여난 미인임에는 틀림없었다. 그녀는 사랑으로 가득찬 엄마들이 그러하 듯 자신을 빼닮은 딸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어린 소녀는 엄마의 또렷한 이목구비와 아버지의 머리카락 색상을 물려받았다. 예쁘고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나 또한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어린 녀자아이를 보는 것이 오랜만의 일이였다. 기계들의 전문분야가 날로 넓어가면서 공공장소의 사람의 수는 점점 적어져 갔는데 특히 아이들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더욱 드물었다. (저출산과, 사이버학교 교육의 결과였다.)
주차장가 저만치 보이는 1층 응접실에서 먼저 내릴 때 나는 B의 가족을 향해 인사를 했다. B와 그의 안해는 맞인사를 했지만 소녀는 말똥말똥 눈만 깜짝이며 우리를 쳐다볼 뿐이였다. 다정한 부모는 딸의 어깨를 감싸안으며 나에게 답인사를 해보도록 격려했지만 소녀는 시종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서 있었다. 오누이형제를 데리고 떠나가는 아버지에게 인사하기를 거부하던 어린 내 눈빛이 저러했을가 하는 생각이 잠간 스쳤다.
B와 그의 가족들을 우연찮게 만나본 저녁, 나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그동안 사귀였던 남자들을 떠올리게 되였다. 한때는 나도 용감하게 ‘사랑’이니 ‘결혼’이니 하는 가치에 도전해본 적이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흐르고 시대가 어떻게 바뀌더라도 그런것들의 가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보통의 청춘이라면 너나없이 한번쯤 해보았던 생각이였을 것이였다. 나는 내 생각들을 증명해 보일 짝이 필요했다. 사이버 중학교에서 알게 된 사람,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 친구의 모임에 들렀다가 눈이 맞은 사람도 있었다. 처음에는 서로에게 주체할 수 없이 끌려 그게 바로 ‘사랑’인줄 쉽게 생각했었다. 그러나 련인관계를 시작해서부터는 차츰 일상의 소소한 문제들 땜에 힘들어졌다.
마지막 남자였던 X의 경우는 동거기간이 가장 길었고 ‘결혼’ 직전까지 갈 정도로 서로에게 잘 어울린다 생각했으므로 오히려 헤여짐의 상처도 제일 아팠다. 지금도 나는 가끔 음악사이트를 뒤지다가 ‘사랑해, 안나!’ 의 주제곡이 흘러나오면 마음이 쌉싸름해난다. 그의 아빠트에서 함께 뒹굴며 놀았던 게임, 함께 료리기계를 조종하여 새로운 퓨전료리를 해먹던 일, 함께 욕탕으로 들어가 샤와기로 물을 뿜으며 장난하던 장면이 찰칵찰칵 떠오른다. 안식월을 얻었을 때는 같이 자동차를 타고 도시를 떠나 세계 여러 명승지들을 둘러보던 것도 기억난다. 만년설이 뒤덮인 천산을 마주하고 따뜻한 호텔에서 보내던 그 뜨거운 밤도…
그 모든 격정과 랑만과 감동들을 겪고 나서도 오해와 갈등과 권태는 여전히 우리들을 찾아왔다. 우리는 철이 없고 어리석어서 그런 문제들을 현명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상대의 습관과 상황과 마음을 리해하고 받아들이고 감싸안기보다는 일단 자신의 편리와 리익, 자존심을 앞세웠다. 불신과 모순의 골이 더욱 깊어져서 도저히 해결하고 싶은 마음도 힘도 생기지 않게 되자, 헤여짐에 합의를 했다. 그의 아빠트를 떠나오기 전날 밤, 마지막 사랑을 나누면서 우리는 울었다. 우리의 실패한 사랑에 대해, 더이상 지속시킬 수 없는 우리의 관계를 위해, 더이상 감당할 수 없었던 우리의 나약함에 대해.
그런 면에서 볼 때 B의 결혼과 가족관계는 실로 흔치 않은 성공의 사례였다. 서로를 향한 존중과 사랑의 눈빛과, 아이에게 베푸는 인내와 독려의 자세… 그런 성숙한 관계를 형성하기까지 지불했을 막대한 대가를 상상하니 그들 부부가 존경스러워졌다.
할머니는 그런 말을 듣고도 B에 대해 여전히 시답지 않아했다. “겉으로 봐서 뭘 알갔니? 된장은 찍어 먹어봐야 알고 사람은 지내봐야 안다고 했다…” 할머니는 특히 B의 외모를 마음에 들지 않아했는데 내가 그와 함께 야외등산을 떠난다는 말을 듣고는 더욱 불만스러워했다. “뭐? 그 기생 오래비 같이 생긴 놈이랑 야외를 나간다구? 카메라 감지기가 하나도 없는 곳으로? 둘만 가는 거야? 다른 사람들 없이?” 나는 B가 보내준 소지품 내역서와 대조하면서 준비물을 하나하나 챙기기 시작했다. “고만 좀 하세요 할머니, 걱정할가봐 미리 알려두는데, 그 사람은 벌써 가족이 있네요. 것도 1대1 전통가족에 일곱살난 녀자아이까지.”
방울이가 나를 도와 사계절 옷들과 여러 물건들이 종류별로 정리해진 벽장들을 하나하나 살펴주었다. 베낭과 모자, 실외 운동복과 등산화, 세면도구와 예쁜 원피스… “엥? 누나, 근데 예쁜 원피스는 뭐에요? 등산 간다면서요?” 필요한 물품들을 일일이 꺼내 쏘파우에 무져놓다가 방울이는 물었다. 글쎄, 그거야 뭐… 가는 도중에 다른 프로그램이 혹시 있지 않을가… 나도 어물거렸다. 헷갈리거나 실수할 량반이 아니니 그렇게 챙겨 오도록 한 리유가 꼭 있을 것이였다. 방울이는 머리를 갸웃거리면서 ‘예쁜’ 원피스 몇장을 한꺼번에 꺼내왔다. “암튼 누나, 어디 예쁜 걸로 직접 골라보세요.”
예쁜 원피스라, 어떤 스타일을 말하는 것일가. 갑자기 B의 앞에 이런 원피스를 입고 나설 내가 어색하게 느껴졌다. B와는 트레이너와 고객으로 만났으니 만날 때마다 거의 운동복차림이였던 것이 자연스러웠으니까. 나는 치마의 길이와 가슴이 패인 정도와 재질의 투명성과 전반 분위기를 고려하여 겨우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내가 한벌한벌 신중히 옷을 고르고 있는 동안 방울이는 의뭉스러운 표정으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그 애한테 무슨 책잡힐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나는 부랴부랴 짐정리를 끝내버렸다.
이튿날 간단히 아침을 해결한 다음 약속시간에 맞춰 1층로비로 내려갔더니 벌써 주차장에서 스포츠카(跑车)를 불러낸 B가 차안에 앉아 대기하고 있었다. 캐주얼한 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B는 까만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자유롭고 랑만적인 분위기가 흠씬 풍겨서 이제껏 내가 보아온 그의 스타일하고는 또 많이 달랐다. “좋은 아침! 잘 주무셨어요? ” 하고 B가 쾌활한 음성으로 내게 물었다.
차문을 열어 내가 들어가 앉을 수 있도록 도와준 다음 B는 나의 베낭을 받아 뒤칸에 넣어주었다. 나는 치마자락을 잡아올리며 그의 곁에 앉아서 버튼을 눌러 반투명한 안전조끼를 착용했다. 말로만 듣던 수동식 스포츠카(跑车)였고 X이후 다른 사람이랑 한 차를 타는 것도 처음이였다. 반원형의 핸들이 불쑥 튀여나온 운전석에서 B는 머리를 돌려 나의 몸 아래우를 빠르게 훑었다. “… 원피스가, 예쁘네요… 산우에 올라가 땀도 식히고 샤와도 한 담에 바꿔입고 사진 찍으면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서 챙기라고 했습니다만…” 하고 그는 빙긋 웃었다.
순간 나는 얼굴이 붉어졌다. 비싼 종합운동권도 처음 끊어보았고 트레이너와 함께 등산도 처음이여서 내역서를 보고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한 것이였다. “뭐, 이미 입었으니까 그대로 계시다가 산에 도착해서 다시 운동복으로 갈아입으시죠. 덕분에 내 눈은 호강하겠습니다…” B는 버튼을 눌러 내 안전조끼를 벗기고 손수 원피스의 옷깃과 치마자락을 꼼꼼하게 정돈해주고 나서 다시 입혀주었다. “조금 시간이 걸릴 거에요. 속도를 많이 내지는 않겠습니다만 이런 방식의 운전이 낯설어서 겁날 수도 있을 거에요. 맨 나중 한구간은 비행모드로 강우를 날아지날 텐데 아마 그때 차체가 조금 흔들릴 수 있습니다. 참고하시구요, 걱정되면 언제든 얘기하세요…” 그는 실내운동을 시작할 때처럼 여러 주의사항들을 안내서로 친절하게 짚어주었다.
붕-- 발동이 걸리자 운전석 앞유리 전면에 넓게 부착된 모니터에 주변 차들의 이동상황이 순식간에 실시간으로 나타났다. B는 한손으로 핸들을 잡고 다른 한손으로 기어를 넣어 차를 출발시켰다. 빳빳이 경직되여있는 나를 느꼈던지 그는 얼굴을 돌려 일부러 안심하라는 뜻의 미소를 지어보였다. 몇분이 지난 뒤, 여유로운 자세로 핸들을 조종하는 그를 보면서 나는 차츰 긴장을 풀었다.
드디여 투명한 철옹성벽을 지나 초대형 컴퓨터의 성곽도시를 벗어나 교외 도로에 진입하자 B는 차뚜껑을 반쯤 열어제꼈다. 시원한 자연의 바람이 나의 긴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쓸었다. 평야를 지나 둔덕을 내려올 때면 자동차가 30초쯤 붕 떠서 날아내려왔다. 상쾌한 환성이 절로 입에서 터져나왔다. 오래동안 묵은 체증처럼 쌓이고 쌓였던 스트레스가 확확 뒤편으로 날려가고 있었다. B는 흥분된 나의 모습을 조심스럽게 지켜보면서 이따금씩 내 얼굴을 휘감은 머리카락을 목 뒤로 넘겨주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귀바퀴에 닿을 때마다 나는 모든 트레이너들이 다 B처럼 고객에게 이토록 친절할가 생각했다. 혹은 B는 자신의 모든 고객에게 다 내게 하는 것처럼 해줄가 하고.
B의 말처럼 산자락아래 굽이쳐흐르는 푸른 강물우를 날아지나는데 한줄기 돌풍이 불어 자동차가 10센치메터 쯤 덜컥 내려앉았다. 어머! 하고 내가 소리를 질렀다. 발밑으로는 넘실거리는 강물이 넓은 가슴을 헤치고 우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대로 강물 속에 처박히지 않을가, 만약 그럴 경우 이 스포츠카(跑车)는 수영모드가 따로 있을가, 만에 하나 B가 버튼을 잘못 누르기라도 하면 어떻게 될가 하는 념려들이 일시에 내 머리 속을 까만 거미떼처럼 덮쳐버렸다. B는 기어를 놓고 오른손을 뻗어 안전조끼의 자락만 붙들고 있는 내 손을 덥썩 잡았다. 강우를 모두 지나고 다시 도로우에 자동차가 내려 달리고서야 그는 내 손을 놓아주었다.
등반센터 휴계소의 탈의실에서 운동복을 바꿔입으며 나는 내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맡아보았다. 이제는 그게 B의 향수냄새인지 그의 체취인지 아니면 내 땀내인지도 잘 분간할 수 없었다. 향을 들이키자 갑자기 가슴이 후득후득 뛰며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좁고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서 이런저런 수다를 떨다가 나는 B에게 물었다. “혹시 《사랑해, 안나!》 그 영화 보셨어요?” 그는 뒤로 돌아서서 내가 다가오기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그럼요, 요즘 치고 그만큼 훌륭한 영화 만나기가 쉽지 않잖아요, 한 남자와 한 녀자만의 전통적인 사랑이라… 일각에서는 고리타분하기 그지없다고 하지만 그건 분명 그 영화의 진가를 보아내지 못한 것입니다 …”
그는 나의 손목을 잡고 둔덕을 올라오도록 힘껏 잡아당겼다. 잠간 휘청거리던 내 허리에 그의 팔이 감겨졌다.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역시 한 남자와 한 녀자의 사랑만이 가장 건강하고 진실되고 고상하고 또 황홀한 거죠, 우리 몸이 워낙 그렇게 사랑하도록 만들어지지 않았습니까?”하고 B는 모자채양 아래 나의 얼굴을 피끗 들여다보았다.
느닷없이 내 머리 속에서 엊저녁 엘리베터 안에서 보았던 그의 안해가 떠올랐다. 선명한 이목구비와 에메랄드빛 눈동자와 시원스레 굴곡진 육감적인 몸매까지. ‘황홀한 사랑’ 이란 말에 나는 문득 오래동안 잊고 살았던 육체적 희락의 순간들이 생각났다. 희미하면서도 은근스럽게. 나는 B의 눈빛을 피해 모자채양을 약간 더 눌러썼다.
예약된 지점, 산을 관통한 휴계소의 엘리베터를 통해 스포츠카(跑车)의 짐들이 올라와있었고 내가 샤와하는 동안 B는 나를 위해 작은 천막을 쳐주었다. 화덕 안에서 장작불도 지피고 먹음직스런 꼬치를 직접 구워주는가 하면 양철로 된 컵에 구수한 커피도 보글보글 끓였다. “내려갈 때는 엘리베터를 리용할 것이니까 이제부터는 여유를 가지고 쉬세요. 주위 숲속을 둘러봐도 좋고 사진도 찍으시고 피곤하면 천막안에서 쉬여도 괜찮습니다. 하산할 시간이 되면 제가 다시 올테니까요.”
B는 부드러운 장미빛 탄자가 깔려 있는 천막 안으로 나를 안내했다. 반쯤 열린 창문으로 바람이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고 나지막한 침대 요 우에는 얇은 담요와 베개가 놓여있었다. 벽걸이 컴퓨터안에서는 차분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상큼한 해살이 날아들어오는 가운데 나는 침대 요 우에서 뒹굴며 영화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여나고 보니 몸은 게나른하고 주위는 조용했다. 컴퓨터는 어느새 꺼졌고 내 배우로 담요 하나가 더 덮여있었다. 문을 열고 바깥에 나와 둘러보니 사락사락 나무잎이 바람에 쓸리는 소리, 찌르륵 찌르륵 풀벌레가 우는 소리가 가만가만 들려왔다. 어디선가 쪼르르 쫑-- 예쁜 새소리가 들려 숲을 헤치고 걸어들어가는데 작고도 노란 산꽃들이 무덕무덕 피여있는 잔디밭이 나타났다. 풀꽃과 나무, 부식토의 향이 한데 어우러져서 페부로 몰려들었고 팔랑팔랑 날아다니는 나비의 여유로움에 나도 그만 아름다운 날개를 얻고 싶었다. 깊은 산속에 나만 홀로 있는 느낌이였다. 온 산과 하나가 된 기분이였다. 내가 그림 속으로 들어왔는지 이 풍경 속에 워낙 내가 있었던 건지 헷갈렸다.
나는 홀린 듯이 앞으로 자꾸 앞으로 걸어들어갔다. 편백나무, 옻나무, 소나무들이 우거진 곳을 지나 약간 트인 공간이 나타났는데 그 풀밭우에 누군가 나를 등지고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요지부동한 기마자세로 두 손을 앞으로 쭉 뻗은 채 서 있는 그는 영낙없는 B였다. 그는 마치 살아있는 조각, 이 산에서 움터 자란 인간식물 같았다. 어떤 신비롭고도 평안한 기운이 그의 주위에 깔려있었다. 나는 그 기운의 바깥 변두리에 멈춰서서 그의 뒤잔등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B가 천천히 가세를 가다듬더니 두 팔을 내리고 내게로 돌아섰다. 방금전까지 느껴지던 기운이 스르르 사라지고 산들산들 산바람만 우리 사이에서 불고 있었다.
“혹시 지금 기수련하신 거에요?” 하고 내가 묻자 B가 웃었다. “역시 기에 대해 민감하시네요, 수련을 안했을 뿐이지 J님도 대단한 잠재력자에요.” 천막을 정리하고 엘리베터를 타고 내려가면서 내가 그랬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기수련은 옛날얘기가 아닌가요? 언녕 맥이 끊어졌다고 들었는데 아직도 전승인들이 있다는 말인가요?” 나는 영화에서 본적 있는 고대 중국의 기공이며 인도의 요가 같은 것들을 두루 떠올렸다.
“인간은 사실 늘 더 높은 차원을 갈망하는 존재이지요. 수련을 통해 몸 구석구석에 있는 기 구멍들을 열고 하나하나의 세포들을 깨워 가장 민감한 상태로 승화 시킨 다음 주변의 기를, 자연의 기를, 나가서 우주의 기를 감지하는 거에요. 소위 우주와 하나가 되고 자신이 또 하나의 소우주로 되는 것도 느낄 수가 있구요…” 믿기 어려운 말이지만 수련을 하다보면 나중엔 다른 차원의 우주도 감지할수 있으며 종내에는 더 높은 차원으로 옮겨갈 수도 있다고 B가 말했다. 그것은 내게 있어 너무 어려운 말이였다. 현실 속에서 바로 얻을 수 있는 것도 있는 데 그게 부정적이고 왜곡된 마음과 병환을 겪는 육체의 치유라고 했다.
나의 베낭을 받아 그의 천막곁에 나란히 넣어두고 나서 B는 발동을 걸었다. “아, J님도 나랑 같이 수련해보면 참 좋을 텐데. 워낙 천부가 있는 사람은 배로 빠르답니다. 한번만이라도 체험해보시면 이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알게 되실 텐데.” 바람이 불어 금방 샤와를 마친 B의 몸에서 은근한 향내가 내게로 실려왔다. 전의 것과 거의 비슷하면서도 다른 향이였다. 좀더 달큼하고 좀더 매혹적인 향이였다. 거기에 취해서인지 나는 그만 아무 생각없이 말해버렸다.
“그래요? 그럼 뭐 재미삼아 해보지요 뭐.”
나는 아빠트로 돌아와서야 제정신이 들었다. 내가 끊은 종합운동권에는 기수련항목이 없었고, B에게서 수련을 배울 경우 따로 비용을 추가해야 하는 생각 때문에 약간 골치가 아팠다. 그러나 이미 다음번 실내운동부터 반시간가량을 더 늘여서 시작해보기로 약속된 뒤였다. ‘설마 이 사람, 이런 옵션으로 돈을 버는 트레이너인가?’하는 의구심이 탐조등처럼 머리 속을 스쳤다. 한편으로는 여직껏 그가 보여주었던 성실과 친절함에 대해 너무 무례한 억측을 하는게 아닌가 하는 죄책감도 들어하면서.
나는 할머니에게 B와 기수련을 하기로 했다는 것을 숨겼다. 방울이에게도 알려지는게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어느덧 비밀을 만든 것이였다. 때때로 나 자신이 한창 어리석은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일단 한번 체험해보고 다시 그들에게 공개하겠다고 마음먹었다…
 
 
 
지금에 와서야 나는 B가 한 말의 뜻을 대부분 리해할 수 있었다. 우주의 기운이 무엇인지, 어떻게 우주와 하나로 되며 다른 차원의 우주는 어떻게 들어가는지 하는 것들을. 정확하게 말하면 운동권이 끝나는 마지막 수련때에 그런 경이로운 체험들을 해본 것이였다. 그런 느낌은 한번도 있어보지 못한 것이였고 그후에도 아마 없을 것이였다. 나는 다시 운동권을 끊지 않았고 우연한 기회에 상담아가씨를 통해 B 역시 그날부러 직장을 옮겼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B는 애초부터 려행자라고 했으며 한 도시에 2 3개월씩 머물며 한명이나 두명의 고객만을 받은 뒤 끝남과 동시에 다른 도시로 옮긴다고 알려주었다. 이제는 떠난 사람이나 이만한 신상정보쯤이야 공개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아가씨의 주책덕분에 내 마음은 좀 편해졌다. 아빠트 엘리베터를 탈 때나 로비에서 자동차를 호출할 때나 혹은 부근의 슈퍼를 거닐 때마다 B를 만나지 않을가 마음 졸이지 않아도 되였으니까.
기운이 많이 딸려하는 할머니는 마지막 유언마냥 또다시 나더러 사람 같은 사람 좀 만나며 살라며 닥달했고 방울이마저 나의 삶을 안스러워했다. “누나는 참, 딱 봐도 독신체질이 아닌데, 제발 누나가 원하는 대로 살아요. 아닌 척 좀 하지 말고. 남 눈치 보지도 말고, 비겁하게 구실만 대지도 말고.” 나는 그들의 잔소리에 넌더리가 나서, 그리고 B가 내 주위를 떠났다는 안도감에 외출시간을 늘리기로 했다. 친구들도 더 자주 만나고 일감을 받기 위해서는 일부러 출판사 사무실까지 들렸으며 돌아오는 길에는 가까운 휴양지를 거쳐 오거나 각종 전시회와 미술관도 둘러보군 했다.
한번은 어느 미술관에서 〈성녀 테레사의 환희〉란 베르니니의 모사품을 보고 깜짝 놀랐다. 천사의 불화살에 가슴을 꽂힌 성녀, 그녀의 고통인 듯 황홀인 듯 반쯤 열린 입과 정신을 거의 잃고 감겨버린 눈, 느슨한 후드의 긴 옷자락 아래로 맥없이 떨어진 손과 발을 보는 순간 나는 예술가가 표현하고자 하는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소름 끼치도록 생생한 표현이였다. 이 조각가, 그게 어떤 기분인지 아는 모양이구나… 자동차를 타고 아빠트로 돌아오면서 나는 그날밤의 B와 그의 기운을 생각했다.
… 그 즈음, 실내운동이 끝나고 샤와를 마친 다음 나는 반시간에서 사십분씩 그의 개인 수련실에서 함께 수련했다. 그의 수련실은 거대한 클럽내부의 은밀한 구석에 있었는데 가는 길이 하도 꼬불거려 수련이 끝나는 동안 나는 한번도 스스로 길을 찾아나온 적이 없었다. 신기한 종류의 식물들이 그의 수련실 곳곳에 재배되여 있었고 외부와 철저히 격리된 공간 속에서 여러 식물들의 은근한 향내만 감돌고 있었다. 그 신기한 향내는 B가 속한 수련자공동체에서 자체 배합한 것이라고 했는데 비률의 차이에 따라 안정제와 최면제 또는 흥분제 등 다른 역할을 한다고 했다. 최음제의 효능도 있다는 것은 처음부터 말해주지 않았다.
벽에는 현대파 유화들과 여러 민족의 수공예품,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장신구들이 구석구석 걸려있었고 바닥에는 아랍풍의 붉은 카펫이 두툼하니 깔려 있었다. 공기순환기가 따로 있었는지 창문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갑갑하지 않았고 조명 또한 최대한 자연광을 모방하여 낮은 조도에도 불편감이 없었다. 나는 매번 바깥 수련실에서 B가 가르쳐준 대로 련습했고 B는 항상 안쪽 별도의 수련실에서 따로 련습했다. 내가 련습할 때 B가 가끔 안쪽방에서 나와 가르쳐주었으나 나는 그의 방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두주가 지나서부터는 말초신경이 예민해져 손끝, 발끝, 머리끝에서 모두 기가 감지되였으며 뜨거운 기운, 찬 기운, 서늘한 기운들을 단전에다 모았다가 몸 구석구석으로 보낼 수 있게 되였다. 어느날엔가는 눈꺼풀 아래로 피부 모공 사이로 겨자씨 같은 벌레들이 꼬물꼬물 수없이 기여나오는 듯했고 어느날엔가는 온몸이 날아갈 듯 가벼움을 느꼈으며 어느날엔가는 내 속이 점점 텅 비여감을 느끼기도 했다. B의 예상대로 나는 매우 빠른 속도로 하단전과 중단전을 열었으며 상단전도 거의 열리려 하는 상태가 되였다. B는 책이나 영상을 통해 가르치는 것보다는 직접 기를 움직여주면서 코치해주었다. 하루하루 점점 더 선명해지는 느낌에 정말 재미있고 신기했다.
내가 B랑 같이 기수련을 하고 있다는 말에 할머니는 탄식했다. “네 년이 혼자 너무 오래 살더니 드디여 정신머리가 이상해졌구나…” 그녀는 나의 생생한 체험에 대해 일제히 ‘환각’이나 ‘신경’ 탓으로 일축해버렸다. 다른 지식과 정보들처럼 체계적으로 정리되지 않고 공개하기에도 애매한 부분이 많았지만 그래도 무조건 부정적 결론을 내리기에 아직 이르다고 나는 우겼다. 페활량이 확실히 늘어났고 시력이 좋아졌으며 몸이 유연하고 가벼워져서 디스크의 아픈 증상이 모두 사라져버렸기 때문이였다. 그림을 그리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나름대로의 만다라를 그리면서 마음의 평정을 찾았고 여태 맛보지 못했던 어떤 충실감이 내 속에서 자라는것 같았다. “좀 만 더 하면 제가 오히려 J님의 도움을 받겠네요, 허허…” B는 나의 진보를 진심으로 기뻐해주었다. 그는 수련비용을 따로 받지 않았는데 그것이 수련자공동체의 암묵적인 규례라고 했다. “혼자서 더 높은 차원까지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공동체가 필요한거죠, 서로 합심하여 수련하고 한단계 한단계 서로 부축하며 올라가야 되는 것이니까. 나중에 J님도 우리 공동체 안에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때가 되면 내가 우리 사부한테 추천해드릴게요…”  
그날밤, 수련에 들어간지 이십분쯤 되여 기를 모아 머리 끝으로 내보내고 있었는데 B의 시원하고도 강한 기운이 느껴졌었다. B가 한번씩 코치를 해주면 훨씬 빠르고 쉽게 기구멍을 열 수 있었으므로 그날도 나는 아무 거부감 없이 그의 기운을 순수하게 받아들였다. 그러고보니 그날 B의 기운은 어딘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그의 향도 비률을 달리했는 지 생소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B의 기운 속에 온전히 휩싸여서 온몸의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잔잔한 음악소리는 점점 희미하게 들렸고 몸은 나긋나긋 해졌으며 머리 속에는 아무런 생각도 판단도 떠오르지 않았다.
의식이 점점 웅크러져 깨알처럼 뭉치는 가운데 육체는 점점 멀어져가고 있었으며 나 자신이 점점 사라져가는 대신 주변의 공기의 흐름은 더욱 세밀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에는 방안의 모든 물건들의 기가 느껴지기 시작했고 그것들과 능히 교감할 수 있겠다는 기분도 들었다. 이런 것이 우주와 하나가 된다는 것일가 나는 내 의식 속에서 간신히 생각했다.
나는 어떻게 B의 안방 수련실 침대우로 옮겨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혼미상태에 가까운 의식 속에서 온몸이 뜨겁고 간지럽고 갈급해서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만 생각난다. 반쯤 뜨인 내 눈 안으로는 벽에 걸린 여러 자세의 천사와 성녀들과 부처의 그림들이 한데 얽혀 소용돌이쳤다. 그 와중에 황궁 12도의 별자리가 둥그렇게 펼쳐졌으며 황소와 오리온이, 전갈과 백조의 식으로 무질서하게 마구 뒤엉키고 있었다. 누군가의 숨소리가 귀가에 다급하게 들려왔고 “오 나의 성녀여, 천사여, 후르아여, 황홀이여… 나를 극락으로 나를 영원으로…”하고 횡설수설 부르짖는 기도소리도 간간히 들려왔다.
서늘하고도 강한 기운이 구체적인 물질이 되여 내 속으로 압박해 들어올 때 나는 갑자기 정신이 확 깨지면서 본능적으로 모든 기구멍들을 닫아버렸다. 쌀알같던 의식이 삽시간에 온몸에 퍼지며 다시 내 몸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고 생각와 판단력이 찰나에 회복되였다. 내 우에 엎드러진 B의 매끄러운 잔등에 땀방울이 맺혀있는 것이 보였다.
수련실을 나가기 전 나는 B에게 물었다. “당신은 대체 뭐에요? 카사노바? 위선자? 정신환자 아니면 사이비 광신자?” 나의 눈앞에서 단정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B가 허리띠를 추스리며 말했다. “글쎄요, 다 아닌 것 같은데… 뭐 일종의 신비주의 추종자라고 하면 그나마 비슷할래나? 당신들 말에 따르면 영지주의에 가까운 신비주의지요.” B는 전처럼 나를 위해 문을 열어주고 클럽 정문까지 나가는 길을 친절하게 안내해주었다. “J님은 대단해요, 좀만 때를 맞춰주었더라면 우리 두 사람 모두 극치의 황홀경 차원으로 들어갈 수 있었을텐데요, 아쉽네요…”
거대한 유리창으로 바깥의 해살이 눈부시도록 쏟아들어왔다. 정신은 더없이 맑아졌고 모든게 어처구니없는 꿈 같았다. 그래도 한가지 궁금한 것이 있어서 물었다. “그럼 당신 안해는요? 아이는요? 당신한테 뭡니까? 한 남자와 한 녀자 사이에서만 극치의 사랑이 가능하다면서요.”
그때 상담아가씨의 사무실이 저만치 보이는 정문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B는 빙긋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 그 부분이 마음에 걸렸을 수 있었겠네요. 그래서 때를 포기했나봐요. 생각보다 더 대단하신 분이네요.” 나는 그가 내민 손을, 부드럽고 하얀 아름다운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 인사에 응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느낀 B는 그제야 손을 내리고 어깨를 으쓱했다. “음, 그러니까 저를 1대1 전통가족으로 착각하셨을 수 있었겠네요, 하지만 사실 저는 이원혼자랍니다. 법적으로는 1대1 결혼자와 똑같은 의무를 리행하지만 사적으로는 서로의 사생활을 철저히 존중하죠. 아이의 양육에 대해서도 각자가 맡은 부분에만 최선을 다하기로 했죠, 그래서 매달 그들에게 약정된 생활비를 송금하고 약속된 날자에 면회하고 정기적으로 정서적인 교제도 한답니다. 뭐 둘 다 원한다면 그때 육체적인 교제도 할 수 있는 거구요… 물론 이 모든 것은 안해와 혼전에 미리 협의된 사항들이지요…”
 그가 말했던 한 남자와 한 녀자의 극치의 사랑이란 결국 그 순간의 물리적 행위에 불과한 것이라고 나는 리해했지만 그는 그런 리해는 편면적인 것이며 실제로는 그 순간에 육체와 마음과 령, 삼위일체의 ‘립체적인 사랑’이라고 해야 좀 더 완벽할 것 같다고 정정했다. 그것이 나와는 전혀 다른 ‘이원혼’자의 사랑관이였다.
 
내가 “그 남자, 알고 보니 이원혼자라네.”하고 메시지를 보냈더니 할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냉큼 답장을 해왔다. “거 봐라, 뭔가 요상하다고 했더니만 내 직감이 맞았지. 넌 애시당초 그런 놈팽이랑 어울리지도 않았다.” 오랜만에 할머니가 가르쳐준 대로 옛날 국수를 끓여먹고 있는데 친구가 내 모니터를 두드렸다. 친구는 내 얘기를 듣고 나서 깔깔거리며 웃어댔다. “얘, 넌 정말 1대1 결혼체질인가봐. 백년전에 출생한 할머니한테서 자라 그런가? 아무튼, 이꼴저꼴 다 보기 싫으면 재미없고 힘들더라도 넌 니 방식대로 살아야지. 어때? 너 같이 고리타분한 1대1 결혼 지망자 소개시켜줄가?”
달랑이한테서 할머니의 림종날자를 짐작받은 날, 나는 고속렬차를 타고 할머니가 있는 도시로 출발했다. 소형 비행기보다는 좀 더 많은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는 교통도구였다. 나는 내가 도착할 때까지 할머니를 이 세상에 머물게 해달라고 신께 기도했다. 기도가 끝나고 눈을 떠보니 내 맞은켠에 한 남자가 전자책을 보고 있었다. 이럴 때 백년전의 인간들은 서로에게 어떤 말을 건넸을가 하고 나는 생각했다. 기차는 여전히 앞으로, 오로지 앞으로만 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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