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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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상냥한 친구들
2019년 07월 17일 09시 40분  조회:318  추천:0  작성자: 문학닷컴

상냥한 친구들

금희

 

내 친구 영란은 여러 날의 고민 끝에 결국 그번의 동창모임에 출석하기를 결정했다. 미국은 최초의 흑인대통령이 집정하고 있었으며 중동 등 일부 개별적인 지역을 제외하고는 무력보다 대화를 강조하는, 비교적 평화스러운 시기였었다. 20세기 70년대 태생인 영란은 같은 세기 30년대에 있었던 세계대전의 혼란을 틈타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해온 조부모 덕분에 28살까지 쭉 그곳에서 살아온 경력이 있었다.

신장 153센치의 영란은 키가 좀 작은  편이였고 약간 말랐다 싶은 체형에 이례적으로 어딘가 서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실리콘을 넣지 않았다 그러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코가 날이 섰고 동양인 치고 쉽게 마주칠 수 없는 크고도 륜곽 선명한 쌍가풀눈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싸구려 캐쥬얼을 입기 좋아할 뿐 아니라 좀처럼 화사한 화장도 하지 않아 세련됨과는 거리가 있는 녀자라서 많은 사람들과 함께 섰을 때 그 속에 묻히기 십상인 축에 속했다. 가난하고 착하며 자신감이 결여된 조선족 부모에게서 자란 다수의 사람들이 그러하듯 영란은 말수가 적었고 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려고 지나치게 애썼으며 반대로 자신의 욕구를 정확하게 표현하는데는 어딘가 서툴렀다. 말하자면 “김치찌개 먹을가, 된장찌개 먹을가?”라고 물을  때마다 거의 매번 동행한 사람의 입맛을 생각하며 “아무거나.” 라고 대답하는, 때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그런 타입이였다. 속눈섭이 길고 까만 그녀는 늘 반짝이면서도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주위 사람들을 바라보군 했는데 어쩌다 한번 까르르 웃음이 터질 적이면 사실 자신의 눈의 라인이 얼마나 아름답게 꼬리쳐 올라가는지 스스로 잘 느끼지 못하기도 하는 사람이였다.

물론 나의 조부모님도(다른 동창들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도) 조선인이였으며 나 또한 영란과 마찬가지로 중국의 조선족 동네에서 소학교와 중학교를 마쳤었다. 영란이 남편과 함께 한국으로 떠난 뒤 나는 여전히 중국에 남아 직장을 다니며 생활하고 있었으므로 그 번의 동창모임 같은 경우는 내게 있어 고민거리가 될 수 없었다. 아주 돈이 많거나 약간 모자란 ‘칠부(칠푼이)’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우리의 중학교 동창들 중 일부러 비행기 왕복티켓을 사서, 것도 별로 정중하지도 않은 모임을 위해 날아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나는 위챗에다가 모임에 동참하고 싶지만 이번엔 유감이라고 문자를 남겼고 친구들 역시 모두 그런 나를 리해해주었다. “그러게, 이럴 때 서로 얼굴 보면 얼마나 좋겠냐만 시간도 안되고 장소도 그러니까…”, “담엔 우리 중국에서 보자.” 정말이지 다들 친절했고 어른스러워졌으며 서로를 존중할 줄 알았다. 하긴, 우리 나이도 이제 마흔이 넘어가니까. 중국에서 자란 사십대 초반의 조선족이란 말은 그가 전쟁의 잔허로 잉태되고 그 후유증 속에서 자랐으며 개혁개방이란 사춘기를 거쳐 지금 평화공존의 새 천년을 살고 있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던가.

그러나 영란은 나와 상황이 달랐다. 영란이 출근하는 신세계백화점은 대림동에서 지하철로 반시간 정도의 거리에 있었고 그녀가 세내여 살고 있는 빌라 역시 한시간 내로 이동할 수 있는 반경 안에 있었다. 게다가 그들이 잡은 모임날자는 바로 영란의 휴일날이기도 했다. (실은 그들이 날자를 정할 때 한 사람이라도 더 모이게 하기 위해 영란의 휴일을 물어 참고사항에 넣은 것이였다.) 영란은 그들에게 답장을 보내기 전에 먼저 내게 음성메시지를 보내왔는데 그렇게 가까운 곳에서 휴일을 조절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참석할 수 있는, 7~8년만에 꽤 많은 수의 동창들을 단번에 볼 수 있는 모임이라 할지라도 별로 가고 싶지 않다는 의사를 밝혔었다. 

“싫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꼭 가고 싶다는 마음도 아니야.” 그 즈음 목욕탕관리사로 일하던 그녀의 남편이 실직하면서 미처 받지 못한 권리금이며 어쩌다 방학 기간 그녀의 아이를 데리고 한국으로 왔다가 허리를 다쳐 누워있는 시어머니를 생각하면 그녀에게 동창들과의 만남을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여유가 부족한 것은 얼마간 당연해 보였다. 그러나 한편 내가 알고 지낸 영란을 생각하면 여태 어떤 상황 속에서든지 언제 한번 기꺼이 그런 모임에 참석해 본 적도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 그럼. 시어머니 병시중을 구실 삼으면 되겠네.”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렇지? 그러면 되겠지? 이렇게 가까운 곳에서도 안 간다고 누가 뭐라고 하진 않겠지? 하긴, 나 하나 빠진다고 어느 누가 신경이나 쓰겠어?” 내 답장을 보고 반나절이나 지나서야 영란은 음성으로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분위기가 모름지기 아쉬운 듯 느껴졌다. 어렸을 때부터 소꿉친구로 쭉 같이 자라왔던 터라 그녀를 너무 잘 알고 있는 나는 그 메시지를 듣고 이렇게 답했다. “얘, 너 가고 싶으면 그냥 가. 누가 꼭 챙겨줘야 가냐? 가서 너 보고 싶었던 사람 만나고 재밌게 수다 떨고 그러다가 오면 되지.” 그랬더니 영란은 다시 반나절이 지나서(퇴근하기를 기다려) “글쎄…” 라는 애매한 문자를 보내왔었다. 

다음날 점심 쯤 영란은 내게 그 모임에 나갈 거라고 알려주었다. 그들한테 시어머니 병시중 때문에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말했더니 아니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고, 곁에 사람이 없으면 안될 정도냐고 물었다 했다. 융통성이 부족해 둘러대기를 잘하지 못하는 영란은 급히 그 정도는 아니라고, 실은 남편도 실직이라 집에 있긴 하다고 했다 한다. 그러자 친구들은 하긴 너 여태 출근도 했으니까 반나절 쯤 더 잔업(加班)한다 셈 치고 오면 되겠네 하며 영란 대신 결론을 보더라 했다. 그 말을 듣고도 영란이 여전히 주밋거리자 보다 못한 다른 한 친구가 그녀에게 에이 정말 이러기냐고? 누구처럼 먼데 있는 것도 아니요, 정말 오지 못할 상황도 아니면서 자꾸 못 온다 그러는게 말이 되냐고, 일부러 너 시간 맞추려고 미리 휴일날자 물어본 줄 다 알면서 그런다고 약간 세게 밀어붙였다고 했다. 그렇게 되고 보니 영란은 자신이 너무 자기중심적으로만 고려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 친구들한테 미안해지려는 마음까지 생기는 바람에 그만 소심하게 웃음으로 그들의 결론에 암묵적인 동의를 표할 수 밖에 없었다고 했다. 

“그럼 뭐. 가보면 되겠네. 오랜만에 옛친구들 만나면 좀 좋냐? 가서 옛날 생각 하면서 얘기도 하고 스트레스도 풀고.” 나는 영란에게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이틀이 지난 뒤 영란은 또다시 번민스러운 어투로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얘, 이번엔 창옥이도 온다네. 걘 미국 갔다길래 당연히 못 올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창옥은 미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온 지 수개월 쯤 된다는 것이였다. 학교시절에도, 더 어렸을 적에도 사람 북적이는 것을 좋아했던 친구라 이런 모임을 마다할 리가 없었을 것이였다. 전직 기러기아빠였다는 한국 남자와 갓 재혼한 창옥은 수원에서부터 남편의 차를 끌고 서울로 올라갈 것이라고 자신의 열의를 보였다고 했다. 영란은 내심 그녀의 지나친 열정이 반갑지 않았지만 친구의 열정이 불편해서 이미 내린 자신의 결정을 번복하는  것은 유치한 일이라 생각되여 아무 내색도 하지 못했다. 그러면서도 모임에 가기만 하면 어쩔 수 없이 마주치게 될 창옥을 상상하고 그녀와 있었던 여러 껄끄러운 일들을 떠올리며 찝찝해하던 나머지 나라면 자신의 기분을 알아주지 않을가 라는 마음으로 내게 문자를 했던 모양이였다. 

‘창옥’이라는 이름을 듣자 내 머리 속에서도 몇컷의 별로 유쾌하지 않았던 장면들이 스쳐지났다. ‘창옥’은 영란과 나와 같은 소학교, 중학교를 다녔던 바로 우리와 한 동네에 살았던 친구였다. 여느 동창들 보다도 많은 시간을 함께 했던 친구였지만 동시에 가장 만나고 싶지 않은 친구이기도 했다. 창옥은 우리 셋 중 키가 제일 크고 입고 다니는 옷도 제일 비쌌으며 성격마저 활달하고 자신감 넘쳤었다. 리해관계에도 셈이 밝아 친구들 속에서 어떻게 하면 주도권을 빨리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여서 어렸을 적 그녀는 항상 우리에게 새로운 놀이를 가르쳐주고 어떤 놀이를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해주는 역할을 맡았었다. 어떤 바보 같은 경우에는 누구랑 친하게 지내야 할 것인가 하는 것까지 조종하려고 했지만 말이다. 

영란이 재정대학원을, 내가 연변대학을 다니던 어느 겨울, 고향동네로 설 쇠러 돌아온 동창들 여럿이 만났던 자리에 창옥도 끼여있었는데 나는 그 뒤로 아직 그녀를 직접 만나본 일이 없었다. 그날의 창옥은 그 시절의 최신 류행을 쫓아 두꺼운 입술선을 그리고 골병환자처럼 보이게 하는 진한 커피색의 립스틱을 바르고 있었는데 빽 안에는 어느 정도 있는 사람들만 차고 다니던 BP호출기도 가지고 있었다. 

그때 우리는 술을 좀 마셔서 약간 들떠있는 상태였었다. 누군가 창옥이 낸 돈으로 사온 구운 닭을 뜯으며 넌 참 잘 나가는가 부다, 고 운을 떼자 다른 친구들도 그녀의 옷이며 핸드빽이며 반지 따위에 대해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기 시작했다. 고중을 중퇴하자 바로 사회생활에 뛰여든 창옥은 우리들의 눈에 이미 성숙되고 로련한, 뭘 좀 꽤 아는 사람처럼 보였었다. 창옥은 ‘사회’라는 곳에 대해, 중국의 개혁개방을 좇아 들어온 외국기업들에 대해 그리고 인간관계 처리의 기술에 대해, 지어 인생에 대해 뚝을 넘은 강물마냥 거침없이 지절거렸다. 그녀에 따르면 ‘사회’는 ‘학교’와 완전 다른 곳이며 중국은 지금 도처에 ‘기회’라는 것이 발에 채일 정도로 넘쳐나고 있는  중이니 따라서 이 같은 호시절에는 학교에서 ‘죽은 글’을 배우고 있을 것이 아니라 사회에서 ‘살아있는 경험’을 쌓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모든 것이 돈을 향하는一切向钱看’ 시대가 왔으니까. “나 고중도 졸업하지 못했잖어? 근데 나 지금 우리 회사 사장님 통역 겸 비서야. 그 말이 뭔고 하니, 중국어 한마디도 못하는 우리 사장님, 모든 결재를 나 없이는 못한다는 얘기지. 저번 달 우리 회사에서 새로 뽑은 대학생들만 셋이거든. 대학만 나오면 뭐하게? 사회경험 제로에 시키는 일 밖에 모르는 위인들인데…” 그녀의 말에는 신비한 령적 세상을 실질적으로 체험했다는 종교인의 것 같은 구체적인 확신이 있었다. 그녀는 그 같이 웅변을 펼치며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을 둘러보면서 야릇한 자신감에 찬 웃음을 지었다. 

공교롭게도 그날 모인 친구들 중 소위 ‘대학’을 다니면서 ‘죽은 글’을 배우고 있는 애들이라곤 나와 영란 뿐이였고 모임 내내 ‘시키는 얘기’ 밖에 하지 않고 소심하게 구석자리를 지키고 앉은 사람도 우리 둘이였다. 창옥처럼 학교를 중퇴했거나 대학에 진학하지 못한 탓으로 취직자리를 알아보고 있던 다른 친구들은 그녀의 웅변에 십분 공감하며 기분 좋게 웃을 수 있었지만 나와 영란은 그렇지 못했다. 대학의 입학률이 많이 낮았던 그 시절, 우리는 그녀가 얼마나 ‘대학’에 가고 싶어했고 특히 성적 면에서 얼마나 영란에게 뒤떨어지고 싶어하지 않았는 지를 알고 있었다.  

지금 우리는 모두 그 날 창옥이 쓴 돈은 사실 노래방에서 술을 마시거나 혹은 더 은밀한 행위를 통해 벌어들인 돈이라는 것을 떠도는 풍문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그 뒤 창옥은 실제로 한국 독자기업에 취직했으며 얼마 지나지 않아 정말 사장님의 통역 겸 비서가 되기도 했었다. 그녀는 청도 중심가에 꽤 고급스런 아빠트를 사서(물론 회사돈으로) 사장님과 함께 지내며 일을 했는데 얼마간 지난 뒤에는 자신의 명의로 된 아빠트를 고향 읍내에 사놓기도 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매번 딸이 보내온 고급 화장품이며 옷이며 보약 따위와 돈깍지를 자랑하기 위해 부지런히 동네 마실을 다녔고 한쪽 눈의 초점이 약간 빗나간 영란의 어머니한테 와서는 유별나게 액수를 강조하기도 했다. 그때 창옥의 아버지는 벌써 그녀의 어머니를 떠나 다른 집의 안방으로 들어가 산지 여러 해가 넘었었다. 

영란은 왜 창옥과의 만남을 불편하게 생각했을가. 혹은 창옥의 동창모임 출현에 대해 왜 영란이 유독 심한 거부반응을 느끼게 된 것일가. 영란의 오랜 규방친구闺蜜로서 나는 혹시 영란이 아직도 중학시절과 창옥이 중퇴하기 전까지의 고중시절에 겪었던 어떤 암울한 감정들을 내내 마음속에 두고 있지 않는지 추측해보았다. 정상적인 사춘기 소녀라면 누구라도 겪어보았을 자질구레한 사건들에 얽매인 감정을 말이다. 

그중 한가지만 짚고 넘어가보자. 중학교를 다닐 적이였다. ‘베틀린장벽을 허물어달라’는 레이건의 연설이 있은 뒤였고 쏘련은 아직 해체되기 직전이였으며 영원한 적이리라 생각했던 중국과 미국이 공식수교한지 10년이 거의 되가는 때였다. 총알이 비발치듯 날아다니고 폭격기의 폭탄에 신체 일부가 떨어져나가는 그런 진정한 전쟁은 우리에게 실감을 주지 못했지만 자라는 내내 ‘봉쇄’니 ‘제재’니 하는 랭전의 용어들은 귀따갑게 들었던 것 같았다. 중학교에 올라오면서부터 반이 달라진 나는 더 이상 창옥이나 영란과 함께 붙어다니지를 못했는데 한반으로 편성된 그 두 사람 역시 예전 같은 사이는 되지 못했었다. 씀씀이가 헤프고 대인관계에 적극적인 창옥은 친구들 사이에 주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위치에 이르렀고 그녀와 비슷한 다른 두명의 녀자애들과 ‘세송이 장미파’를 결성했었다. 반대로 영란은 소학교시절과 너무 달라진 중학교의 분위기에 압도당하여 전보다 더 소심하게 처신하면서 평범하다 못해 애들에게 자주 잊히는 존재로 그 시절을 살아갔었다. 창옥은 ‘학급의 꽃(班花)’만큼의 미모는 아니였지만 자신의 외모에 대해 자신감이 있었고 실제로 남학생들한테 상당한 인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해서 그런 그녀가 경쟁력이라곤 거의 론할 수 없는 영란에게서 느낀 질투라기보다 부당하다고 생각한 감정은 그만큼 더 굳고 강했을 것이였다. 

문제남은 중3때 우리 학교로 온 전학생이였다. 중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졌고 눈섭과 눈 모두 가로로 쭉 째여진, 날카로운 인상의 남학생이였다. 전학생들에게 처해지는 관례에 따라 그는 골목길에서 일곱명의 남학생들의 급습을 받았는데 학교사상 최초로 그들을 모두 때려눕힌 ‘영웅’이 되였었다. 소문에 의하면 문제남은 싸움질에 이골이 터서 퇴학처분을 받았다 했고 그 나이 또래 남학생들이 의례 그러하는 련애질에는 오히려 천성적으로 무뎠던 것 같았다. 창옥은 명색이 ‘장미’인 자신에게 별 관심을 가지지 않는 문제남에게 신경이 씌여했고 같은 반에 있지 않는 나 같은 ‘대중’조차 느낄 수 있을 만큼 그에 대한 호감을 로골적으로 드러내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남은 여전히 남학생들 하고만 히히덕거릴 뿐 창옥을 비롯한 다른 ‘장미’나 녀학생들과는 말조차 섞는 일이 드물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가 뜬금없이 갑자기 영란에게 말을 걸기 시작한 것이였다. 처음에는 만년필을 빌려달라, 공책 한장만 찢어주라 하더니 유치한 초딩처럼 욕설을 적은 종이뭉치를 그녀 뒤통수로 던지는가 하면 가방에 죽은 개구리를 넣어 자지러지게 소리를 지르게 하기도 했었다. 엉겁결에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게 된 영란은 창피하고 수치스러워서 피하다 못해 화를 냈다. 영란에게 있어서 문제남의 그런 식의 관심은 전혀 반갑지 않을 뿐더러 다만 그에게서 괴로운 감정만을 느꼈을 뿐이였다. 

그런 와중에 영란은 다른 종류의 불안한 공기를 함께 느끼고 있었는데 그것은 중학교에 오면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던 창옥의 그림자가 다시 그녀에게로 가까이 눌러오고 있다는 것이였다. 영란이 무의식간에 뱉은 어떤 말들이 창옥에게는 영란의 위선을 증명할 수 있는 빌미로 잡혔으며 녀학생들 사이에서 모종의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성공하여 얼마 동안 나는 영란이 매일 혼자 앉아 밥을 먹는 모습을 안스럽게 지켜보기도 했었다. 졸업식이 가까와와서 대형 ‘사교무’ 종목을 련습할 때 문오文娱위원인 창옥은 자신의 파트너로 문제남을 세웠고 영란에게는 헐렁한 셔츠를 입혀 어느 녀학생의 우습강스러운 ‘남자’ 파트너로 분장해주었다. 우리는 대부분 그것이 의도된 ‘배려’라는 것을 알았고 영란 자신도 남자로 분장한 자기 모습에 대해 굴욕감을 느꼈다. 영란에게 차례진 셔츠는 가장 누르께하고 가장 컸으며 그녀가 손잡고 돌려줘야 하는 파트너는 때로 정상적인 분별을 할 수 없어서 아무도 가까이하고 싶어하지 않는 위인인데다가 그녀보다 키까지 더 컸기 때문이였다. 

영란은 후날 고중에 진학해서도 키가 별로 더 크지를 못했지만 전체적으로는 더 예뻐지고 총명해졌다. 항상 하위권이던 성적은 점점 우로 올라가더니 어느 월별 시험에서는 가까스로 중위를 유지하던 창옥을 앞지르기도 했다. (성적이 꽤 좋았던 나와 한반으로 되여 우정을 계속 쌓을 수 있었던 것이 그녀에게 적지 않은 위로가 되였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부터 사실 창옥은 급속히 살이 찌기 시작했고 다른 학교의 어중이떠중이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성적 또한 가파른 하강선을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였다. 

이것은 모두 사실이였고 또한 이미 지나간 사실이였다. 매일매일 홍수처럼 터져나오는 국제뉴스와 민간언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제는 아무도 그때처럼 유치하고 집요하게 살려 하지 않는 세상이 되였다. 누구에게나 불편한 과거와 껄끄러운 친구와 바보 같았던 자신의 ‘흑력사(黑历史)’가 있지 않는가. 그래서 나는 영란에게 말했다. “얘, 이젠 다 지나간 일이야. 그땐 우리 모두 철이 없었잖아. 너 설마 아직도 그런 것 가지고 창옥을 불편해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또 이렇게 말했다. “불편해하는 사람이 여전히 약자라는 거 알고 있지? 다른 애들은 다 괜찮은데 그리고 창옥이 걔는 너 만나는 거 아무렇지도 않을텐데 너만 바보같이 그렇게 생각하는 거 아니야?” 그리고 나서 나는 몇년전에 만났던, 내가 편견을 가지고 기억하고 있었던 몇몇 동창들의 경우를 생각해보았다. 녀학생들을 그렇게 많이 집적거리던 ‘바람둥이’ 남학생은 의젓한 가장이 되여 마누라에게 충성을 다하며 살고 있었고 입이 너무 가벼워 친구들 사이에 성실치 못하다고 외면을 당하던 어떤 녀학생은 누구보다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주먹을 믿고 다른 애들을 괴롭히는 것을 일삼던 어떤 이는 상상 외로 양같이 순한 남성이 되여 술자리 구석을 지키고 있는 모습도 보았었다. 살아가고 있는 사람의 상황은 반드시 변하는 법, 사춘기 극단으로 치우치던 한때의 모습을 가지고 서뿔리 그의 평생을 판단할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나는 그런 나의 생각을 영란에게 모두 말해주었다. 리해심이 많은 그녀는 정말 그런 것 같다고, 아마도 그녀 자신이 아직 편견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고, 이제 그냥 정말 평정심(平静心)으로 모임에 나가보겠다고 대답했다. 

 

그래서 영란은 모임날자에 맞춰 남편에게 량해를 구한 뒤 그녀 옷장에서 가장 어리게 보이고 가장 값져보이는 캐쥬얼 정장을 찾아입고 대림동의 어느 숯불갈비집으로 갔다. 노란 은행나무잎들이 우수수 그녀의 신발 아래 떨어져있었고 담장 너머 어느 집 마당가에는 빨간 홍시를 달랑이고 있는 감나무가 그녀를 내다보고 있었다. 십년 가까이 치열하게 일하면서 살아온 서울이였지만 그날 서울의 거리는 마치 처음 만난 새로운 거리마냥 몰라보게 아름답고 정겨웠었다. 돼지갈비집에는 그 모임을 주선하고 영란의 휴일날자를 ‘특별히’ 체크해보던 몇몇 친구들이 벌써 와있었다. 한 친구는 인천의 60평대 아빠트에서 남편과 두 아이와 살고 있다 했고 한 친구는 중국과 한국을 오가며 무역회사를 경영하고 있다고 했고 다른 한 친구는 려행사 사장이 되였다고 했다. 그중 한명은 왕년에 창옥이랑 같이 결성했던 그 ‘세송이 장미’ 중의 한송이였다. 모두들 영란의 이름과(성을 포함해서) 그녀의 옛모습을 기억해내려고 애썼으며 친근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눴다.

분위기는 영란의 예상보다 더 화기애애하고 흥겨웠는데 그녀는 신발을 벗고 올라가면서 무의식적으로 친구들 속에 창옥의 모습이 보이는지를 살폈다고 했다. “어머, 영란이 아니니? 조영란! 맞지? 세상에, 이게 얼마 만이니?” 하는 새된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려보니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 나오는 창옥이가 등뒤에 서있더라고 했다. 얼굴피부는 탄력이 약해지고 엉덩이살도 처져버린 아줌마가 되였지만 꼼꼼한 화장과 멋스런 셋팅펌으로 풀어헤친 머리와 럭셔리한 옷차림 덕분에 여전히 친구들 속에서 튀여보이더라고 영란은 느꼈단다. 아무 그늘 없이 웃으며 자신을 반기는 창옥을 보면서 영란은 어정쩡하게 선 채로 일전 자신의 불합리한 념려들을 다소 자책했다고 했다. 영란은 순간, 창옥을 알게 된 이후 처음으로 그녀의 파란만장했던 인생에 대해 그녀에 근접한 립장에서 생각해보게 되였으며 왜 전에는 그녀를 좀더 립체적인 인간으로 바라보지 못했던가 하는 아쉬움이 들기도 했다 한다. 아버지의 바람기와 어머니의 히스테리, 부모의 리혼과 학교중퇴, 유부남과 동거하며 흘러보낸 청춘, 급작스런 결혼, 잇따른 리혼과 이민생활에서의 재혼… 그러고 보니 사람마다 자신의 이야기가 있는 것이였고 누구의 인생이나 록록치 않다는 생각도 들어 거기 앉은 친구들 모두가 그렇게 친근해보이더라고 했다. 매번 원족이나 파티 때 영란의 존재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녀의 소심함과 민감한 정서를 배려하지도 않았으며 지어 한동안은 그녀와 함께 앉아 밥 먹기조차를 거부했던 친구들이 말이다.

영란이 그들과 함께 돼지고기를 구워먹고 있을 때 나는 아이의 려권을 신청하러 시공안국에 갔었다.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차거운 의자에 무료히 앉아있다가 나는 간간이 올려지는 그들의 사진을 열어보았다. 고기가 깨끗한 숯불그릴에 올려지고 아직 색갈마저 변하지 않았을 때, 그들은 같은 상에 모여앉은 수대로 집게를 들거나 저가락을 든 채 브이자를 그리며 사진을 찍었다. 영란의 얼굴은 창옥이 찍힌 사진 속에 함께 나와있었다. 창옥은 사진에서 영란이 후날 묘사하던 모습보다 훨씬 우아하고 화사하게 찍혔고 변두리 쯤에 앉은 영란은 내가 화상채팅을 할 적마다 보던 그 얼굴보다는 약간 촌스럽고 비률이 어색하게 나와있었다. 둥그스름하니 모여앉았던 터라 끝자리에 있을수록 얼굴이 변형되기 쉬웠을 까닭이였다. 

어느 정도 먹고 마시고 나서 그들은 또 다른 사진들을 올렸는데 남자와 녀자, 이 상과 저 상의 친구들이 뒤죽박죽 섞인 채로 여러가지 표정들과 포즈를 취하고 찍은  것이였다. 연거퍼 일여덟장을 올렸지만 영란의 모습은 모두 보이지 않았다. 모임을 주선했던 친구들이나 창옥의 얼굴은 자주 보였다. 불그스름하니 취기가 오른 창옥은 찍힌 사진마다에서 약간 과장된 포즈로 활짝 웃고 있었는데 그 웃음 속에서 나는 아스라이 멀어지던 그녀의 옛모습을 무심히 기억해내였다. 마지막으로 올라온 두어장의 사진 속에는 영란도 있었다. 술에 약한 영란은 얼굴이 빨개진 채로 술잔을 들고 수줍게 다른 친구의 잔과 부딪치는 중이였다. 그릴 우의 고기들은 까맣게 그을렀고 밑반찬 접시들은 여기저기 포개져있었으며 엉거주춤 얼굴을 반쯤 돌린 영란의 옆모습은 얼핏 즐거운 듯 보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여전히 그 분위기에 잘 녹아들지 못한 듯 서툴게 느껴졌다. 

요추가 어느 정도 나아진 시어머니를 아이와 함께 중국으로 돌려보내고 나서 영란은 그날의 모임에 대해 얘기해주었다. 그녀의 짝꿍과 그녀의 아래침대에 있던 친구를 만났고 그녀 뒤자리에 앉았던, 그녀와 꽤 친했던 친구는 일본에 간 뒤로 어느 동창과도 련락이 닿지 않았다고 했다. 어떤 애들은 살이 많이 쪘고 어떤 애들은 벌써 머리숱이 현저히 적어졌으며 어떤 애들은 완전 다른 사람으로 착각할 만큼 더 예뻐지고 밝아졌더라고 했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서 영란은 덩달아 즐거워졌는데 창옥이 열정적으로 권하는 바람에 얼결에 그녀와 같은 상에 앉게 되였다고 했다. “그래서, 별 다른 얘기는 하지 않았냐?”고 나는 영란에게 물었다. “글쎄, 그냥 다른 친구들처럼 소소한 수다를 떨었을 뿐.”이라고 영란은 대답했다. 

창옥은 반짝이는 집게를 들고 능숙한 솜씨로 그 상의 그릴 우의 갈비를 구워선 싹둑싹둑 잘라 친구들에게 집어주더란다. “야, 넌 아직도 고 만큼 밖에 자라지를 못했니? 신랑은 키가 좀 큰 사람으로 찾았는지 몰라…” 창옥의 웃음기 섞인 롱에 친구들이 영란을 돌아보며 가볍게 웃었다. 작은 키에는 아래우 같은 계렬의 컬러의 옷으로 코디를 해줘야 좋다고 창옥은 부드럽게 자신의 노하우를 알려주었다. 아직 젊은 나이인데 화장도 좀 하고 다니라는 조언과 함께. 창옥은 다른 친구들에게 준 것보다 더 많은 갈비를 집어 영란의 대접에다 놓아주었다. 어느 친군가 지나가는 소리처럼 창옥에게 너 오늘 술 마시면 어떻게 운전하고 내려가겠느냐고, 느그 새 남편한테 한소리 듣지 않겠냐고 말하자 그녀는 쿨하게 웃어버렸다. 사람마다 모두 자기 인생 사는 거지 무슨 남편의 기분 때문에 동창모임도 제대로 못하는 답답한 인생을 살겠냐고 그녀는 멋지게 받아쳤다. 사실 새 남편과는 미국에서부터 알고 지냈는데 그들의 결합은 상대의 사생활에 대한 불간섭과 서로의 인격에 대한 상호 존중을 가장 기본적인 전제조건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설명도 덧붙였다. 당대 가장 민주적이며 최고 선진국에서 생활해본 사람다운 말투였다. 그녀의 설명을 들은 다음 다시 그러루한 물음을 그녀에게 묻는 친구는 없었다. 술병들이 하나 둘 비워지기 시작하자 창옥은 다시 바빠져서 이 상 저 상 다니며 친구들과 열정적으로 건배하며 활기찬 목소리로 금후의 우의를 새롭게 다졌다. 영란은 남편과 짧게 통화하여 시어머니와 아이의 상태를 확인하였고 그러는 동안 점점 뜨거워지는 모임의 분위기를 느끼고 있었다. 좀 더 수위 높은 육담과 롱담들이 친구들 사이에서 오가기 시작했고 벌써 알콜의 힘을 빌어 허풍을 떨어대는 남자들도 생겨났다. 

친구들의 상을 한바퀴 다 돌고 돌아온 창옥은 여직 그 상에 오도카니 앉아있는 영란을 보고 넌 참, 술이란 원체 서로 붓고 마시는 재민데… 혀를 차며 잔을 채워주었다고 했다. 창옥은 팔소매를 둥둥 걷어올려 붙인 채 재빠른 손놀림으로 같이 앉은 친구들의 잔을 찰찰 채워주면서 챙챙한 소리로 영란에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 사는게 그런 거지, 응? 이렇게 친구들 자주 만나고 만나서는 부어라 마셔라 통쾌하게 놀아주고… 이런 게 사람 사는 재미 아니겠니? 영란도 모처럼의 모임분위기에 맞춰보려 애쓰는 마음에서 창옥의 잔을 채워주려고 했지만 곁에 앉은 다른 친구가 손에 들고 있던 술병을 벌써 창옥의 잔으로 가져가는 것을 보고 그냥 있었다고 했다. “내가 워낙에 소심하잖니? 이런 건 아직도 서툴러서 그래…” 하며 영란은 스스로 용기를 내여 친구들에게 웃어보였다. 창옥은 잔을 들어 친구들의 것과 부딪치면서 영란에게 “넌 어쩜 학교 때나 지금이나 아직도 고대로냐? 소심한 게 뭐 자랑이냐? 그 성질머리 고쳐라 좀…” 하고 오랜 친구답게 선의의 핀잔을 주었다. 그 말을 들은 같이 앉은 친구들 역시 모두 영란을 보며 웃음을 지었다. 

그러고 보니 창옥의 말처럼 “술자리의 룰”에 능숙한 친구들은 끊임없이 서로의 잔을 채워주고 자신의 잔을 들고 이런저런 권주제의를 하였으며 개중 어떤 이는 중국정부의 관리들 만큼이나 멋들어진 연설을 중국어로 선보이고 있었다. 몇번이나 용기를 내여 친구들한테 술을 붓고 간단하나마 권주제의를 해보려고 했지만 영란은 끝내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매번 그녀가 술병을 잡으려고 결심한 순간, 이미 술병을 확보하고 일어선 다른 친구들이 그녀의 소심한 용기를 꺾어버렸다. 결국 영란은 그런 짓거리를 포기하고 친구들이 연설을 하면 들어주고 술을 부어주면 마시고 권하면 함께 잔을 부딪쳐주는 역할을 자청했다. 

분위기가 점점 흐트러져가며 친구들의 화제도 다양했는데 무역회사를 경영한다는 친구의 사업얘기며 려행사 사장의 여러 나라 풍속얘기며 60평대 아빠트에서 산다는, 이제 한국적이 된 친구의 애들 교육얘기… 같은 것들이 모두의 관심을 일으켰었다. 친구들은 창옥의 영어실력과 미국생활에 대해서도 듣고 싶어했다. 그들은 모두 열심히 잘살고 있는 듯 보였으나 그들의 화제에 참견할 수 없었던 영란은 그들이 얘기하는 내내 옛날의 짝꿍이랑 학교 시절을 회상하며 간간이 수다를 떨었다고 했다. 자신의 얘기를 다 마치고 난 창옥이 영란에게 넌 어떻게 살고 있는지 말 좀 해봐라며 시어머니의 허리와 남편의 실직 그리고 할머니 손에서 자라는 그녀 아이에 대해 물어보았다. 일시에 친구들의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것을 느끼며 영란은 얼마간 불편했는데 적당히 둘러대는 화술에 약한 그녀는 약간 얼굴을 붉히면서도 그 별로 유쾌하지 않은 상황들을 비교적 가감없이 얘기해주었다. 친구들은 영란의 얘기에 머리를 끄덕이며 약간의 안스러움을 표했고 곧 다시 일어나 자자, 오늘은 그냥 아무 생각 말고 즐겁게 마시자는 식으로 서로의 잔을 부딪쳤었다. 

모임이 파하고 돌아오면서 영란은 왠지 자신이 말수는 적었지만 쓸데없는 말은 가장 많이 한 사람처럼 느껴졌다고 했다. 사는 건 누구나 비슷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자신만 그 친구들보다 더 불행하게 살고 있는 듯이 비춰진 것도 찝찝했다. 창옥만 하더라도 식당 마당의 구석에서는 현 남편과(아마도) 화를 내며 통화하는 것을 보았는데 말이였다. 그녀는 모임에 참석하기로 했던 자신의 결정을 후회하지 않으려고 즐거웠던 순간들을 계속하여 생각해보았다고 했다. 그녀가 먼저 일어나겠다고 귀띔하자 모임을 주선한 친구들은 강력하게 말렸다고 했다. 특히 창옥은 그녀에게 이젠 련락 좀 하면서 살아라, 카카오 스토리에다 사진도 많이 올리고. 하며 미국식으로 왜소한 그녀를 껴안아주기도 했다 한다. “나 참, 나 너하고도 여태 허그(그 명사는 창옥에게서 들은 것) 못해봤는데 창옥이 걔랑 그런 거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얘.” 영란은 그 장면을 생각하며 큭큭 웃었다. 향수냄새와 폭탄주냄새가 어우러 풍겨나는 창옥의 품안에서 영란은 여러가지 감정을 느꼈지만 정확히 무슨 감정들이였는지 말할 수 없을 것 같다고 알려주었다. 

암튼, 당분간은 다시 그런 동창모임에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영란은 말했다. 그 ‘동창’들 속에 앉아있어보니 그녀는 여전히 작아보이고 가난해보이고 촌스러워보이고 서투르게 보인다고 느꼈던 때문이라 했다. 그녀는 내가 또다시 “그렇게 느끼는 사람이 약자라는 거 알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라고 말해줄가봐 급히 한마디 덧붙였다. “알아, 내 문제라는 거 알아. 나는 너무 민감하고 소심하고 약해. 어쩌겠어? 그렇게 생겨먹었는데.” 나는 그녀의 말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그녀만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어딘가 부당하다는 것을 나는 느꼈다. 나는 그 얘기를 영란에게 해줄 수 없었는데 왜냐 하면 영란을 그런 감정 속으로 밀어뜨린 짓거리에서 나 자신도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였다. 나는 영란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는 게 참 그렇지? 꼭 누군가를 약자로 만들어야 자신이 강하게 되는 것은 아니지만, 실제로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살고 있잖아? ” 나는 뉴스얘기를 하면서 그 말을 해주었다. 인류에게 참혹한 상처를 남겨준 전쟁은 다시 벌어져서는 안되며 어떤 경우에든 폭력은 정당화될 수 없으며 오직 평화로운 번영을 위해 상호 협력해야 한다는 도리를 누구나 다 아는 시대에 말이다. “세상 참 어떻게 돌아가려는지 몰라. 모두들 말은 옛날보다 훨씬 문명하게 하면서도 무기는 전보다 더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잖아.”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난 뒤 과연 세상은 다시 전쟁얘기로 날이 갈수록 분위기가 긴장해져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 듯 일각에서는 이 모든 것이 곧 지나갈 것이며 이런 유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은 인류가 아직 덜 성숙해서라고, 그러니까 좀더 나이가 들면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분명해질 날이 있다고 해석하고 있었다.

다행히 이미 나이가 많아진 나는 나의 아이들보다는 그런 정세에 덜 두려워했다. 해볕이 잘 들어오지 않는 작은 아빠트에서 옛날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나는 영란과 나와 창옥이 찍힌 사진 한장을 찾아내고는 한참 동안 가물가물 멀어져간 우리의 어린 시절을 애써 떠올려보았다. 낮고 찌그러진 지붕의 영란네 집, 김치소 만두를 그렇게 맛나게 쪄주던 그녀의 어머니와 말을 더듬는 그녀의 아버지, 같은 증세를 보이는 그녀의 오빠며 그 오빠가 나와 영란에게 보여주던 작은 참새새끼, 높고 반듯한 창옥네 집, 큰 키에 멋쟁이였던 그녀의 어머니, 익살맞은 롱담으로 항상 아줌마들한테 인기짱이였던 그녀의 아버지, 유난히 그녀를 예뻐해주었던 그녀의 외사촌오빠, 그 오빠가 들고 다니던 나무권총…

마을 어린이집에서 금방 서로를 알게 되였을 때, 선생님이 접어준 노란 배의 한 귀퉁이가 찢어지자 창옥은 영란에게 서로의 배를 바꿔가지자고 했단다. 창옥의 배는 노란색이였고 영란의 배는 초록색이였으므로. “적극적인 애들은 그만큼 공격성도 강한 것 같애. 얘, 내가 그 배 찢어진 거 보고 바꾸기 싫다고 하니까 바로 내 손에서 뺏어가더라. 아주 눈 깜짝할 새에.” 언젠가 영란이 그런 얘기를 해주었었다. 녀자애들이니까 이 정도지 영란의 오빠 같은 경우에는 골목대장 창옥의 외사촌오빠한테 정말 많이 맞으며 자랐다고 했다. 그건 나도 아는 사실이였다. 그때 귀쌈을 너무 많이 맞아서 오빠가 바보스럽게 되였는지, 해서 평생 제 노릇 한번 똑똑하게 못하고 사는 건지 모르겠다고 영란이 말했다. “그래서 얘, 난 창옥을 보는 게 싫어. 걔는 내게 너무 비참한 과거를 떠올리게 하거든.” 그렇게 얘기했던 영란이 이미 뇌졸증으로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쳤다는 것을 나는 남아있는 동창들을 통해 전해들었다. 죽기에는 좀 아까운 나이라고 다들 유감을 표했었다. 창옥은 아직 건재했는데, 영란이 혹시 병원비 때문에 적정 치료기간을 놓친 게 아닐가고 애석해했다. 

살아있을 날들이 많지 않았으므로 나는 그 즈음 시간을 거슬러올라가 옛날의 일들을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거의 본능에 의해 움직이던 우리의 동년과 그 전, 우리가 잉태되였던 시절 그리고 그 시절을 존재하게 했던 어떤 ‘전쟁’을 말이다. 이미 돌아간 지 오래된 조부모님의 말로는 아주 유치하다 못해 야만스러운 전쟁이라 했는데 그 때문에 그들은 평생 지키며 살았던 자신의 것들을 모두 빼앗겼다고 했었다.

따뜻한 해빛 한줄기가 비쳐드는 창문가에서 나는 옛사진을 들고 30여년 전의 그날 영란과 창옥이 ‘허그’했다는 그 동창모임의 력사적인 한 장면을 생각해보았다. 나는 입을 벌리고 영란처럼 큭큭 웃었다. 청청한 하늘 아래, 영란이 걸었다던 노란 은행나무잎 수북한 인행도로며 빨간 홍시 달랑이는 감나무 보이는 담장을 그려보면서. 

출처:<장백산>2017 제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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