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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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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ㅇ" 시모음
2015년 06월 15일 22시 32분  조회:9570  추천:0  작성자: 죽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 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번씩 네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앞에 정서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느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을 지고
머리도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1
               - 이어령 -

   하나님

   당신의 제단에 꽃 한 송이바친 적이 없으니 
   절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그러나 하나님
   모든 사람이잠든 깊은 밤에는  
   당신의 낮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그리고 너무 적절할 때 아주 가끔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
   어떻게 저 많은 별들을 만드셨습니까 
   그리고 처음 바다에 물고기를 놓아 
   헤엄치게 하셨을 때 
   저 은빛 날개를 만들어  
   새들이 일제히 날아오를 때 
   하나님도 손뼉을 치셨습니까 
   아! 정말로 하나님 
   빛이 있어라 하시니 거기 빛이 있더이까 
   사람들은 지금  시를 쓰기 위해서 
   발톱처럼 무딘 가슴을 찢고 
   코피처럼 진한 눈물을 흘리고 있나이다 
   모래알만 한 별이라도 좋으니 
   제 손으로 만들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아닙니다. 하늘의 별이 아니라 
   깜깜한 가슴속 밤하늘에 떠다닐 
   반딧불만한 빛 한 점이면 족합니다 
   좀 더 가까이 가도 되겠습니까 
   당신의 발끝을 가린 성스러운 옷자락을 
   때묻은 손으로 조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아 그리고 그것을 저 무지한 사람들의 
   가슴속을 풍금처럼 울리게 하는 
   아름다운 시 한줄을 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하나님!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 2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부르기 전에는
   아무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아닙니다.
   어렴풋이 보이고 멀리에서 들려옵니다
   어둠의 벼랑 앞에서
   내 당신을 부르면
   기척도 없이 다가서시며
   "네가 거기 있었느냐"
   "네가 그 동안 거기 있었느냐"고
   물으시는 목소리가 들립니다
   달빛처럼 내민 당신의 손은
   왜 그렇게도 야위셨습니까
   못자국의 아픔이 아직도 남으셨나이까
   도마에게 그렇게 하셨던 것처럼 나도
   그 상처를 조금 만져볼 수 있게 하소서
   그리고 혹시 내 눈물방울이 그 위에 떨어질지라도
   용서하소서
   아무 말씀도 하지 마옵소서
   여태까지 무엇을 하다 너 혼자 거기에 있느냐고
   더는 걱정하지 마옵소서
   그냥 당신의 야윈 손을 잡고
   내 몇 방울의 차가운 눈물을 뿌리게 하소서

 

 


어느 지류에 서서

        - 신석정 -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한 줄기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검은 밤이 흐른다.
은하수가 흐른다.

낡은 밤에 숨막히는 나도 흐르고
 은하수에 빠진 푸른 별이 흐른다.

강물 아래로 강물 아래로
 못 견디게 어두운 이 강물 아래로
 빛나는 태양이
 다다를 무렵

 이 강물 어느 지류에 조각처럼 서서
 나는 다시 푸른 하늘을 우러러 보리......

 

 

     어느 정신병원에서

                 - 안장현 -

 

  끝내 함께 미칠 수 없는 마음이 부른 곳.
  그곳이 정신병원이다.

  미친 놈이라고 욕하지 말라.
  누가 미친 놈인가는 언젠가의 세월이 가름하리라.
  세상이 지표를 잃고 미칠 때
  함께 미칠 수 있는 사람
  함께 미칠 쑤 없는 사람
  밤을 앓는다.

  진실로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은 가고 사월에
  아무렇게나 살아가는 사람들은 남아 돌아가지만
  꽃은 살기를 바라던 사람들의 것.
  말할 수 없는 분노와
  가슴의 피가 뭉쳐 꽃핀 그곳--

  그러나 지금도 어느 정신병원의 환자들은
  이웃과
  사랑을 위해
  잠들지 않고 밤을 앓는다.

 

 

 

어느날

    - 최휘웅 -


 새들이 날아와 빗장에 잠긴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나는 느닷없이
무지개가 되어 날아갔다. 산과 들은 온통 바람이었다. 음악이었다.
넝마조각 위에 앉은 나는 나비였다. 백사장이 길게 누워 웃고 있었다. 아,
거기에는 황홀한 것들이 모여서 공깃돌을 던지고 있었다. 수평 저 끝
돌섬을 만지고 있었다. 솔밭에서도 여름은 부채를 흔들고 있었다. 만나는
것들마다 하늘의 안부를 물었다. 그럴 때마다 손끝에 닿는 별들이 호주머니
가득히 쌓였다.

 

 

 

어느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 유하 -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리라
바람도 찾지 못하는 그곳으로
안개비처럼 그대가 오리라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모래알들은 밀알로 변하리라
그러면 그 밀알로, 나 그대를 위해 빵을 구우리
그대 손길 닿는 곳엔
등불처럼 꽃이 피어나고
메마른 날개의 새는 선인장의 푸른 피를 몰고 와
그대 앞에 달콤한 비그늘을 드리우리
가난한 우리는 지평선과 하늘이 한몸인 땅에서
다만 별빛에 배부르리


어느 날 내가 사는 사막으로
빗방울처럼 그대가 오리라
그러면 전갈들은 꿀을 모으고
낙타의 등은 풀잎 가득한 언덕이 되고
햇빛 아래 모래알들은 빵으로 부풀고
독수리의 부리는 썩은 고기 대신
꽃가루를 탐하리
가난한 내가 보여줄 수 있는 세상이란 오직 이것
어느 날 나의 사막으로 그대가 오면
지평선과 하늘이 입맞춤하는 곳에서
나 그대를 맞으리라  

 

 

 

어느 여름날 아침에

          - 박양진 -


  늘, 새로 태어나야만 하는 정신은
  불멸을 마시려 하는 목마른 새

  그러나 존재는
  하나 속에서 모든 것을 받는다오.

  모호했던 언어들이 베일을 벗고
  투명하게 빛나는 아침

  환상과 정신이 결합하며
  그 놀라운 미소를 보내올 때
  세상의 비밀들은
  우리의 감각과 다정히 어울리네.

  보다 크고, 보다 작은 완성에로 향하는
  물음들이 사라지고 난 자리에
  피어나는 꽃들의 웃음

  존재로부터 오는 감동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부적이 되고
  고귀한 영혼들
  우리의 마음을 더욱 빛나게 하네.

  시간이 사라진 자리에서
  순간들은 영원으로서 흐르고 또 흐르는 것
  어느 우물에나 생명수의 맥박은 뜀뛰고
  존재의 내면에선
  감미로운 풍경들이 열려져 가네.

 

 

어느 언어학자의 집 

      - 심상운 -

 

말 속에는 아득한 태초가 있고 길이 있고 마을이 있고 말들이 바라보는 구름이 있고 하늘이 있고 산이 있고 강이 있고 말들이 뛰고 노는 풀밭이 있고 꽃밭이 있고 말들의 우울한 얼굴이 있고 죽음이 있고 역사가 있고 투쟁이 있고 피가 있고 사랑이 있고 그리움이 있다고 오래된 말들을 연구하다 늙은 언어학자는 그의 집을 방문한 나에게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그의 방에 가득한

침묵 속으로 들어가 버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의 집을 나오면서 내 몸에 죽은 곤충의 날개처럼 달라붙어 있는 그의 말들을 보았다. 그리고 그의 집 작은 화단에서 말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햇빛 속에서 밝게 밝게 웃고 있는 분꽃들을 보았다. 

 

 

 

어느 푸른 저녁

          - 기형도 -


    1
  그런 날이면 언제나
  이상하기도 하지, 나는
  어느새 처음 보는 푸른 저녁을 걷고
  있는 것이다, 검고 마른 나무들
  아래로 제각기 다른 얼글들을 한
  사람들은 무엇엔가 열중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다, 혹은 좁은 낭하를 지나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예감이라 부른다,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숨구멍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그런 때를 조심해야 한다, 진공 속에서 진자는
  곧,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조금씩 흔들리는
  것은 무방하지 않은가
  나는 그것을 본다

  모랫더미 위에 몇몇 사내가 앉아 있다, 한 사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쓰다듬어 본다
  공기는 푸른 유리병, 그러나
  어둠이 내리면 곧 투명해질 것이다, 대기는
  그 속에 둥글고 빈 통로를 얼마나 무수히 감추고 있는가!
  누군가 천천히 속삭인다, 여보게
  우리의 생활이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인가
  세상은 얼마나 많은 법칙들을 숨기고 있는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린다, 그러나 느낌은 구체적으로
  언제나 뒤늦게 온다, 아무리 빠른 예감이라도
  이미 늦은 것이다 이미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2
  가장 짧은 침묵 속에서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 결정들을 한꺼번에 내리는 것일까
  나는 까닭없이 고개를 갸우뚱해 본다
  둥글게 무릎을 기운 차가운 나무들, 혹은
  곧 유리창을 쏟아버릴 것 같은 검은 건물들 사이를 지나
  낮은 소리를 주고 받으며
  사람들은 걸어오는 것이다
  몇몇은 딱딱해 보이는 모자를 썼다
  이상하기도 하지, 가벼운 구름들같이
  서로를 통과해 가는

  나는 그것을 습관이라 부른다, 또다시 모든 움직임은 홀연히 정지
  하고, 거리는 일순간 정적에 휩싸이는 것이다, 그러나
  안심하라, 감각이여!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검은 외투를 입은 그 사람들은 다시 저 아래로
  태연히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어느 투명한 저녁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모든 신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하여

 

 

 

어디로?

          - 최하림 -

 

황혼이다 어두운

황혼이 내린다 서 있기를

좋아하는 나무들은 그에게로

불어오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으며

있고 언덕 아래 오두막에서는

작은 사나이가 사립을 밀고

나와 징검다리를 건너다 말고

멈추어 선다 사나이는 한동안

물을 본다 사나이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어디로?라고

말하지도 않는다

 

 

 

어디만치왔냐

          - 김해화 -


  1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내가 눈을 감고 너의
  참꽃내나는 어깨 위에 그냥 손을 얹고만 있으면
  그 봄날
     어디만치왔냐 감나무 밑에 왔다
     어디만치왔냐 당산 밑에 왔다
  순이야 감나무가 있고 당산나무
  푸른 방솔나무가 있고
  나물바구니 깔망태 아이들 우우 몰려가며
     어디만치왔냐 개굴창 건너 간다
     어디만치왔냐 논두렁길 간다
  그러면 꽃 지는 소리 꽃 피는 소리
  복사꽃 살구꽃 앵두꽃 우우우 피는 소리 우우우
  지는 소리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다 왔다
  눈을 뜨면 니가 있고 참꽃무데기 있고
  아아 내가 눈을 감고 꿈 꾸듯이
  니를 믿고만 있으면
  그 봄날

  2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갔냐 어디만치갔냐
  찬 바람만 휭휭 가슴을 때리고
  대답도 없이 어둠은 깊어만 가고
     어디만치왔냐 어디만치왔냐
     아아 어디어디있냐 어디어디있냐
  순이야 니는 어둔 길 저 쪽 어디서
  살을 팔고 웃음을 판다는데
  낯익은 길은 모두 파헤쳐져 버린 세상
  꿈 꾸듯이 믿을 사람 하나 없이
  나는 어둠 앞에 몸을 팔고 젊음을 파는데
     어디만치왔냐 새마을에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선진조국 다 왔다
  캄캄한 어둠 속에 신음소리 한숨소리
  울음소리, 소름끼치게 비명소리
     어디만치왔냐 정의사회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통일조국 다 왔다
  풀냄새 꽃냄새 풀풀나는 어깨도 없이
  믿고 붙잡을 어깨도 없이 어둠 속에서
  언제부터 그냥그냥 들려오는 달디 단 목소리
  가다보면 길을 막는 날카로운 가시철망
  소리도 없이 다가와 손목을 묶고
  발을 거는 세상
     어디만치왔냐 자유 평등 다 왔다
     어디만치왔냐 복지사회 다 왔다
  가도가도 끝도 없이 캄캄한 세상
  달디 단 목소리는 멀리서만 웅웅대고
  가파른 길 가시밭길 넘어지며 피 흘리며
  아아 목이 마른데, 목이...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디만치왔냐 당당 멀었다

 

 

어두운 지하도 입구에 서서

               - 정희성 -

 

  저녁무렵, 박수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의 깃치는 소리
  광목폭 찢어 펄럭이며
  피묻은 팔뚝 함께 일어서
  만세 부르던 이 광장
  길을 걸으며 나는 늘
  역사를 머리 속에 떠올린다   
  종합청사 너머로 해가 기울면
  조선총독부 그늘에 잠긴
  옛 궁성의 우울한 담 밑에는
  워키토키로 주고 받는 몇 마디 암호와
  군가와 호루루기와 발자국소리
  나는 듣는다, 이상하게 오늘은
  술도 안 취한다던 친구의 말을
  신문사를 가리키며 껄껄대던 그 웃음을
  팔엔듯 심장엔듯 피가 솟구치고
  솟구쳐 부셔지는 분수 물소리
  저녁무렵, 박수 갈채로 날아오르는
  저 비둘기떼 깃치는 소리 들으며
  나는 침침한 지하도 입구에 서서
  어디론가 끝없이 사라지는 사람들을 본다
  건너편 호텔 앞에는 몇 대의 자동차
  길에는 굶주린 사람 하나 쓰러져
  화단의 진달래가 더욱 붉다.

 

 

어떤 귀로

     - 박재삼 -

 

  새벽 서릿길을 밟으며
  어머니는 장사를 나가셨다가
  촉촉한 밤이슬에 젖으며
  우리들 머리맡으로 돌아오셨다.

  선반엔 꿀단지가 채워져 있기는커녕
  먼지만 부옇게 쌓여 있는데,
  빚으로도 못 갚는 땟국물 같은 어린것들이
  방 안에 제멋대로 뒹굴어져 자는데,

  보는 이 없는 것,
  알아주는 이 없는 것,
  이마 위에 이고 온
  별빛을 풀어놓는다.
  소매에 묻히고 온
  달빛을 털어놓는다.

 

 


어떤 싸움의 기록 

                - 이성복 -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 
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 
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 
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 
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 그는 신발 신은 채 
마루로 다시 기어 올라 술병을 치켜들고 아버지를 내리 
찍으려 할 때 어머니와 큰누나와 작은누나의 비명, 
나는 앞으로 걸어 나갔다 그의 땀 냄새와 술 냄새를 맡으며 
그를 똑바로 쳐다보면서 소리 질렀다 죽여 버릴 테야 
법(法)도 모르는 놈 나는 개처럼 울부짖었다 죽여 버릴 테야 
별은 안 보이고 갸웃이 열린 문 틈으로 사람들의 얼굴이 
라일락꽃처럼 반짝였다 나는 또 한번 소리 질렀다 
이 동네는 법(法)도 없는 동네냐 법(法)도 없어 법(法)도 그러나 
나의 팔은 죄(罪) 짓기 싫어 가볍게 떨었다 근처 시장(市場)에서 
바람이 비린내를 몰아왔다 문(門) 열어 두어라 되돌아올 
때까지 톡, 톡 물 듣는 소리를 지우며 아버지는 말했다 


  
어떤 대화(對`話) 
                 - 김동리 -
 

산 밑 동네에서도 젤 안 집은

동네에서 젤 할아버지네 집

뜰에는 감나무 소나무 백일홍나무

집 뒤는 대숲이 산으로 이어졌다

사철 온갖 꽃과 잎새로 에워진

묵은 기와집 할아버지는

방에서 뜰로 뜰에서 다시 방으로

언제나 왔다 갔다 그것뿐이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뭘 하고 계세요

뭘 하긴 뭘 해, 이러고 있지

비 오실 때 할아버진 뭘 하세요

비 오실 때 비 오는 거 보고 있지

눈 오는 날엔요

눈 오는 날엔 눈 오시는 거 보고 있지

또 다른 날엔요,

늬네들 와서 절하면 절이나 받아 먹지

또, 또 그 밖의 다른 날엔요

에끼 녀석 말이 많다

하긴 뭘 자꾸 하느냐

그냥 제사나 지내고 살지.

 

 

어떤적막
              - 정현종 -
 

좀 쓸쓸한 시간을 견디느라고 
들꽃을 따서 너는 
팔찌를 만들었다. 
말없이 만든 시간은 가이없고 
둥근 안팎은 적막했다.  

손목에 차기도 하고 
탁자 위에 놓아두기도 하였는데 
네가 없는 동안 나는 
놓아둔 꽃팔찌를 바라본다.

그리로 우주가 수렴되고 
쓸쓸함은 가이없이 퍼져나간다. 
그 공기 속에 나도 즉시 
적막으로 一家를 이룬다  
그걸 만든 손과 더불어.

 

 

 

어떤 처용

      - 백창수 -


  이태원 태평극장 계단 아래
  불빛 휘황하고 절도있게 휘어지는 서양 노래가락에
  우리네 어깨도 휘어진다.
  댄싱슈즈를 신은
  너의 누이도 여기 왔다지
  기사가 주문을 풀기 전에는
  멈출 수 없는 춤으로 밤을 지새고
  맺힌 일이 무어 그리 많은지
  몸도 풀고, 엽전도 풀고, 드디어는
  마음까지도 푸는 이태원, 태평극장 계단 아래
  지나가는 처자 훔쳐보는 중년 사내
  빈 주머니 뒤적거리다 체념한 듯 
  밤안개에 시선 풀어내린다.

  우리네 어둠 지키는
  부적 없는 어떤 처용.

 


어머니 

       - 김동리 -
 

가을 들녘에 내리는 황혼은

내 어머니의 그림자

까마득한 옛날 이미 먼 나라로 가신,

그러나 잠시도 내 곁을 떠난 적 없는

따스한 햇볕처럼

설운 노래처럼

언제나 내 곁을 맴도는

어머니의 그림자 

 

 

어머니

     - 이성부 -

 

  1
  오랜만에 하나뿐인 이 아들 만나도
  말씀 못하시네, 도무지 말씀을 못하시네.
  모진 하늘이 또 어머니의 가슴에
  들어와 박힌 것일까?
  허물어진 흙담 너머로
  주먹밥을 건네 주시는
  손길은 뜨겁지만,
  그 손길은 걱정스레 말을 품었지만,
  어머니의 입 어둠처럼 닫혀져서
  말씀을 못하시네.

  이 집도 마을도 남은 가슴도
  이제는 모두 내 것이 아니구나.
  무슨 큰 무서움 하나를 
  저마다 저마다 지니고 선 이웃 사람들,
  나를 보아도 큰 눈을 뜬 채
  손 붙잡지 못하는 사람들,
  겁에 질린 얼굴들.

  2
  밤이
  그 큰 아가리 벌려
  마을 삼키기 기다려서
  나는 다시 정거장 가는 길을 벼와 함께 걸었다.
  대낮에만 불타던,
  나를 키운 그 넉넉하던 논길이
  한밤에도 불타는 것을 나는 보았다.
  벼 모가지를 뽑아
  낟알을 맛보아도
  내 어깨에는 가만히 가만히 힘이 솟았다.

  어머니, 전 잘못을 범한 게 아니예요.
  땅과 하늘에 한번도 부끄러워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셨지요, 어머니.

  오늘 새벽 왼종일 느린 기차에 시달리고
  고향에 내렸을 때,
  고향은 그 첫마디를 돌아가 돌아가라고
  내게 소리쳤었다.
  다급한 목소리 떨리면서
  한 손으로 나를 숨기고
  다른 한 손으로 나를 떠다미는,
  고향은 이미 제 몸을 잃고 있었다.
  우리집 흙담에 다다를 수 있었음은
  내 발걸음을
  그래도 남도의 발이
  숨 죽이며 대신 걸어 주었기 때문이다.

  어머니, 그러나 다시 돌아갑니다.
  서울행 표를 사되, 서울로도 갈 수는 없읍니다.
  결코 저는 죄지은 게 아닌데...

  3
  아직도 따스한 이 주먹밥엔
  반쯤 목맺힘이 섞여 있다.
  이십년 전에도 삼십년 전에도
  눈물로 밥을 뭉쳐,
  급할 때마다 만드시던 어머니를 나는 기억한다.

  왜놈 순사를 때려 죽였다는 삼촌과
  징용에 나가시던 아버지에게
  만들어 주시던 주먹밥을 나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하나 뿐인 아들에게마저
  또 이것을 만들어 주시었다.
  거리에서 피투성이로 끌려갔다는 삼촌과
  흰 상자로 돌아온 아버지를
  나는 끝내 다시 뵈일 수가 없었다.

  느린 기차는 이 밤에
  나를 붙잡아 데려가는 것일까?
  우리들은 모두 이대로
  하나씩 하나씩 소문없이 사라지는 것일까?
  기차는 밤을 찢어 밤의 고요를 찢어
  나아가라고 소리치고 또 재촉하지만,
  나는 어떻게
  나를 더 감출 수가 없구나.
  더 어떻게 누구를 찾을 수가 없구나.
  혼자로도 혼자를 거느릴 수 없구나.

  4
  나주 배를 씹어도 나주 배 이미 슬픔 되어
  내 목마름 참으라 한다.
  물이 없고 다디단 시원함도 없고
  그냥 굶주림을 먹으라 한다.

  내가 비로소
  어머니의 주먹밥 꺼내어
  그 아픔 입맞추었을 때,
  내 창자 속 깊이 어머니가 가꾸던
  세월 스며들었을 때,
  젖과 꿀이 나를 채웠다고 생각했을 때,
  내가 다른 힘으로 태어났을 때,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어둠 속에 마음을 열어 빌고 또 비는
  어머니의 저 굳센 모습을.
  기차는 달리고, 가야할 길은 잃었으나
  나타날 길은 결코 멀지 않음을.
  밝아오는 새벽의 흙투성이 얼굴을,
  힘모아 싸우다가 싸우다가
  죽어서도 이겨 나오는 사람들을.

  5
  어머니의 마음은 저렇게 참 많이 있구나.
  남모르게 마을 떠나가는 사람들의
  울먹이는 발길에도
  숨고싶은 몸에도
  그리하여 쓰러지고 다시 일어서는 안간힘에도
  어머니의 마음은 참 많이 있구나.

  두려움 무릅쓰고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어둠을 뚫어 사슬을 끊어
  나아가는 젊음 곁으로
  피끓는 사람들의 곁으로
  내 어찌 돌아가지 않으랴.

 


어머니·6

        - 정한모 -


어머니는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그 동그란 광택(光澤)의 씨를 
 아들들의 가슴에 
 심어 주신다.

 

씨앗은 
 아들들의 가슴속에서 
 벅찬 자랑 
 젖어드는 그리움

 때로는 저린 아픔으로 자라나 
 드디어 눈이 부신 
 진주가 된다. 
태양이 된다.

 

검은 손이여 
 암흑이 광명을 몰아내듯이 
 눈부신 태양을 
 빛을 잃은 진주로 
 진주로 다시 쓰린 눈물로 
 눈물을 아예 맹물로 만들려는 
 검은 손이여 사라져라.

 

어머니는 
 오늘도 
 어둠 속에서 
 조용히 
 눈물로 
 진주를 만드신다. 

 

 

어머니

     - 강태기 -

 

ㅡ술 좀 묵지 말거라

어머니 계신 부산에 가면 제발 술 좀 그만 먹으라고

둘째아들한테 늘 이럴게 빌듯이 통 사정하십니다

밤저녁, 홀로 쓸쓸하여 허여멀거니 텔레비젼 보는데

부스스 방문 열리고 팔순의 우리 어머니

관절염과 함께 겨우 밤참 들어옵니다

그리고는 미어지도록 슬프고 그윽하게 바라봅니다

ㅡ밥 비볐다, 좀 묵어라, 재첩국이다

찬장문 여닫는 소리 들리고 다시 방문이 열립니다

ㅡ술 좀 그만 묵어라, 제발!

그러면서 어머니는 치마폭 감춰온 소주 한 병 주십니다



어머니의 배추 

          - 정일근 -               


어머니에게 겨울배추는 詩다                   

어린 모종에서 한 포기 배추가 될 때까지                   

손을 쉬지 않는 저 끝없는 퇴고                   

노란 속이 꽉 찬 배추를 완성하기 위해                   

손등 갈라지는 노역의 시간이 있었으니                   

배추는 이 겨울 빛나는 어머니의 시가 되었다                   

나는 한 편의 시를 위해                   

등 굽도록 헌신한 적 없었으니                   

어머니가 온 몸으로 쓰신 저 푸른 시 앞에서                   

뜨거워진다, 사람의 시를 이제 사람은 읽지 않지만                   

자연의 시는 자연의 친구들이 읽고 가느니                   

새벽마다 여치가 달려와서 읽고                   

사마귀도 뒤따라와서 읽는다                   

그 소식 듣고 밤새 기어온 민달팽이도 읽는                   

읽으면서 배부른 어머니의 시                   

시집 속에서 납작해져 죽은 시가 아닌                   

살아서 배추벌레와 함께 사는                   

살아서 숨을 쉬는 저 詩

  

 

 

 어머니날 

   - 노천명 -

 

온 땅 위의 어머니들이 꽃다발을 받는 날
생전의 불효를 뉘우쳐
어머니 무덤에 눈물로 드린
안나 자아비드의 한 송이 카아네이션이 
오늘 천 송이 만 송이 몇 억 송이로 피었어라.
어머니를 가진 이 빨간 카아네이션을 가슴에 달고
어머니 없는 이는 하이얀 카아네이션을 달아 
어머니날을 찬양하자 
앞산의 진달래도 뒷산의 녹음도 
눈 주어볼 겨를 없이 
한국의 어머니는 흑인노예모양 일을 하고 
아무 찬양도 즐거움도 받은 적이 없어라. 
이 땅의 어머니는 불쌍한 어머니
한 알의 밀알이 썩어서 싹을 내거니
청춘도 행복도 자녀 위해 용감히 희생하는
이 땅의 어머니는 장하신 어머니
미친 비바람 속에서도 어머니는 굳세었다.
5월의 비취빛 하늘 아래
오늘 우리들의 꽃다발을 받으시라.
대지와 함께 오래 사시어 
이 강산에 우리가 피우는 꽃을 보시라.

 


어서 너는 오너라

              - 박두진 -
                                                                    

복사꽃이 피었다고 일러라. 살구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너희 오오래 정들이고 살다 간 집, 함부로 함부로 짓밟힌 울타리에, 앵두꽃도 오얏꽃도 피었다고 일러라. 낮이면 벌떼와 나비가 날고, 밤이면 소쩍새가 울더라고 일러라.

다섯 뭍과 여섯 바다와, 철이야. 아득한 구름 밖, 아득한 하늘가에, 나는 어디로 향을 해야 너와 마주 서는 게냐.

달 밝으면 으레 뜰에 앉아 부는 내 피리의 서른 가락도 너는 못 듣고, 골을 헤치며 산에 올라 아침마다, 푸른 봉우리에 올라서면, 어어이 어어이 소리 높여 부르는 나의 음성도 너는 못듣는다.

어서 너는 오너라. 별들 서로 구슬피 헤어지고, 별들 서로 정답게 모이는 날, 흩어졌던 너이 형 아우 총총히 돌아오고, 흩어졌던 네 순이도 누이도 돌아오고, 너와 나와 자라난, 막쇠도 돌이도 복술이도 왔다.

눈물과 피와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오너라. ----비둘기와 꽃다발과 푸른 빛 깃발을 날리며 너는 오너라.----

복사꽃 피고, 살구꽃 피는 곳, 너와 나와 뒤놀며 자라난, 푸른 보리밭에 남풍은 불고, 젖빛 구름, 보오얀 구름 속에 종달새는 운다. 기름진 냉이꽃 향기로운 언덕, 여기 푸른 잔디밭에 누워서, 철이야, 너는 늴늴늴 가락 맞춰 풀피리나 불고, 나는, 나는, 두둥실 두둥실 붕새춤 추며, 막쇠와, 돌이와, 복술이랑 함께, 우리, 우리, 옛날을, 옛날을, 뒹굴어보자.
 

 

 

어전리 3

     - 최동현 -


  냉해가 들고, 아이들이
  무리지어 가출을 했다

  학부형이 소환되고
  닷새만에 죄인이 되어
  붙들려 온 아이들을 벌 주면서
  종아리를 치면서
  다문 이를 악물었다

  끝끝내 학교를 다닐 수 없다며
  한 아이가 퇴학을 하였다

  회초리를, 그 질긴 아픔을 
  휘두르며
  겨울이 가고

  학기가 바뀌면서 더러는 잊혀도 갔지만
  수첩을 펴면 명렬표 끝에
  아프게 남아 있는 이름, 성^256^ 순^256^ 애^256^
  아직도 너는 우리 반이다


       어전리 4
       -- 미자에게


  생활기록부를 정리하다가
  색인표 위 지워진
  네 이름을 보았다

  너는 열 다섯
  늘 찌끄래기 옷만 입어서
  언니가 밉다고 했다

  그 미운 언니를 따라 울먹이며
  공장으로 가더니
  한 달 뒤에는 퇴학이 되었고

  나는 그 날
  어느 교과서에도 없는 네 이야기를
  생각하며
  가슴이 마구 뛰었다

  책상이 치워지고
  이름이 지워지고
  그러나 그 누가 네가 남긴 기억마저를
  지울 수 있으랴

  밤마다 너는 내 불면으로 와서
  생각의 마디마디를
  아프게 했다

  길은 보이지 않지만, 모두들
  어디로든 가야만 하리라
  그렇게 떠나서 너는 지금
  어느 눈길을 가고 있느냐

  어전리, 어두운 하늘 아래
  열병처럼 너를 잊지 못하는
  찬 눈이 내려
  함부로 쌓이고 있다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 한무학 -

 

  북으로 훈풍 따라
  찬 개울 천이나 건너고,
  남으로 아지랭이 따라
  시린 산봉우리 천이나 넘어
  봄이 먼 고향 산천에
  연분홍 봄 심어 놓고는
  말없이 훌쩍 떠나버리는 꽃
  그것은 진정 진달래꽃인데,
  여기 진달래를 진달래라고 못 부른다 해서
  꽃 있는 마음에
  어찌 꽃마중이야 못 나가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형제사 있건 없건,
  이웃 있어 내가 있고
  내가 있어 이웃 있는 좁은 노정 위에
  샘물모양 가늘게나마 솟아
  36도 5부의 체온으로 이어지는 다리
  그것은 진정 동무의 정인데,
  여기, 동무를 동무라고 못 부르고서야
  그리워 나눈 술인들
  어찌 정 되어 돌아오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이름이야 옛 것이건 새 것이건,
  그 이름 뒤에 두고, 살아서 유랑 천 리
  그 이름 옷섶에 싸 안고 죽어서 귀향 천 리
  그러면서 긴 세월 울고 웃고
  그러면서 아린 세월 잃고 찾은 우리의 땅
  그것은 진정 조선인데
  여기 조선을 조선이라고 못 부른다 해서
  석별의 인사 한 마디 없이
  어찌 값없이 아무데나 넘겨야 주랴

  어차피 못 부를 바에야
  오는 마음 가는 옷섶에
  검은 상장이나 달고 가게 해 주려무나

 

 

 

언덕을 넘어서

    - 서소로 -


  자 떠나자
  진토되어 넋마저 없을 때까지
  돌아올 수 없다
  우리가
  넘어야 할 이 언덕 앞에서
  눈물굽이 몇 굽이 시내를 건너고
  울며 떨며 움츠리며
  얼마나 많이 너의 이름 부르고 있었던가
  날이 찬 봄날
  맹렬했던 겨울은 산그늘에 눈덩이를 남겨 놓았지만
  머지 않아 우리는
  저 눈덮였던 지난날을
  꽃보듯 이야기할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우리가 언덕을 넘어서
  그때야 비로소
  나는 너를 사랑한다 말하리라
  타는 입술로 사랑한다 말하리라
  이제 구름도 언덕을 넘어가고
  자 떠나자
  돌아오지 않으리라


 

언제나 살기 좋은 날은 오느냐?
                 - 임학수(林學洙 -


모든 機關을 우리 손으로
三홉의 쌀은 配給되고
겨레의 좀들 말끔히 쓸어 내
汚吏라 謀利라 하는 單語는 없어지고
電車는 타기 쉬웁고
汽車 旅行은 즐거웁고
들에는 豊年歌 들리고
工場은 연기 뿜고
言論과 集會는 自由
아해들 다 學校에 가고
뜰에는 薔薇 피고
女人들 快活해
일하기 즐거웁고 살기 즐거운
 언제나 보람 있는 날은 오느냐?

 

 

 

얼굴에게

        - 정현종 -

                                            

내 얼굴이 억제하고 있는 동안

궁둥이는 모름지기 폭발하고 있다

하하

나는 내 얼굴이 때때로

궁둥이여서

불안할 때가 있다

 

 

 

얼음시

     - 송재학 -


연산석물공장에 입사한 지 3년만에 김형모씨는 입원했다. 호흡기내과 레지던트 박기철은 챠트에 환자의 인적사항과 증상을 기술했다. 김형모 남 31세 석공 우폐상엽에 비만성섬유과다증식 우폐하엽 폐기종 호흡곤란 기침 흉부통증 혈담 폐결핵합병증노출 규폐증인상, 박기철은 자기와 같은 나이의 이 사내의 과거력이 궁금했다. 박기철이 자살한 친구로부터 받은 마르크 블로흐의 "역사의 변명"을 반쯤 읽을 무렵이었다. 김형모씨는 지난 시절 시골의 브라운관 조립공장에 다니면서 공민학교 고등과정을 마치고 도시로 나왔다. 그는 집일을 하면서 모은 돈으로 대학엘 가려고 발버둥쳤으나 솜공장에서 얻은 폐결핵으로 귀향하고 말았다. 면사무소 방위병으로 근무하며 김형모씨는 다시 강의록을 들추었다. 박기철은 대학에 들어와서 사상서클에 1년간 몸담았으나 레닌의 전기를 되풀이 읽었을 뿐 자신을 아나키스트로 키워나갔다. 샬롬에 적힌 예수의 말이 그의 비애를 지배했다. 베드로야 베드로야 너는 얕은 곳에서 많은 고기를 잡을 수 있겠는가 큰 물로 나아가거라. 박기철은 자신이 얕은 허무의 물에서 허위적거린다는 사실이 쓸쓸했지만 심전도를 찍고 X-ray를 읽으며 환자를 보는 바쁜 일정을 보낼 뿐. 김형모씨는 면의 보건 요원과 시답잖은 연애끝에 결혼을 하고 애를 두었다. 어떤 동경이 그를 다시 도시로 내몰았다. 김형모씨에게 배움이나 돈이나 다 허망하고도 진실되게 보였다. 김형모씨는 둘째 애가 생기고 나자 그 알 수 없던 집착을 포기하고 평생 몸담을 직장을 찾아다녔다. 박기철은 병동의 회랑을 뚜벅 걷거나 찬 물을 마시는 도중 자신이 의사로 남을 것인가 허무주의자로 남을 것인가를 생각했다.박기철은 일과 후 술을 찾게 되었고 김형모씨는 자주 빈혈로 고생을 했다. 김형모씨가 연산석물공장에 몸을 담고부터 안정되었다는 것은 그가 돌을 통해 감정을 표출할 수 있었던 탓이다. 돌에 때린 힘과 애정 만큼 돌은 힘과 애정으로 나타났다. 돌은 눈물처럼 섬세하더군, 김형모씨는 가끔
아내에게 말했다. 그는 과묵해졌고 자제를 했다. 박기철은 어떤 간호원으로부터 열애를 받았으나 자신에게 로맨스를 할 분량의 정열이 남아있지 않다고 믿었다. 박기철은 세계를 알기 위해선 세계 밖에 있어야 한다는 경귀를 내과학 갈피에 적었다. 김형모씨는 자신의 확신을 위해 책을 읽어나갔다. 박기철은 직업성 질환의 폐에 대한 각 영향을 학위논문으로 정하고 병실의 챠트를 정리했다. 그는 학위논문의 지루한 행간에 김형모씨를 삽입하고 싶었다. 연산석물공장에 입사한 지 3년만에 김형모씨는 심한 호흡곤란으로 입원했다.

 

 


엄마야 누나야 

        - 김소월 -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걱정

     - 기형도 -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오시네.

 

배추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 심순덕 -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하루 종일 밭에서 죽어라 힘들게 일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찬 밥 한 덩이로 대충 
부뚜막에 앉아 점심을 때워도 
엄마는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한겨울 냇물에 맨손으로 
빨래를 방망이질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배부르다 생각 없다 
식구들 다 먹이고 굶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발뒤꿈치 다 헤져 
이불이 소리를 내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손톱이 깎을 수조차 없이 
닳고 문드러져도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아버지가 화내고 자식들이 속썩여도 
전혀 끄떡없는 
엄마는 그래도 되는 줄 알았습니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외할머니 보고 싶다
그것이 그냥 넋두리인 줄만

한밤중 자다 깨어 방구석에서 
한없이 소리 죽여 울던 엄마를 본 후론
아! 엄마는 그러면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아가야 2

      - 한기찬 -


  아가야 저건 느릅나무란다
  나뭇가지 하나씩 모두 젖는,
  너처럼 맨살로
  공기뚫고 자라는

  색연필로 그릴 수 있겠니
  아름답지 않아도 좋으니
  꾸밈 없이
  뿌리 웅성대고
  줄기 건장한 저것을

  벌써 잎사귀는 모두
  네 손가락 감지하고
  빛나는구나
  나는 느릅나무라고
  명확히 뽐내고 있구나

  넌 부정보단
  긍정을 좋아하지
  또렷또렷하게 꿈꾸기를 바라지

  아가야, 우리가 닿으면
  느릅은 비로소
  말하기 시작한단다
  뿌리끝 흠뻑 젖을 때까지
  잎사귀빛으로 살아난단다

 

 

아느냐 네가

      - 최남선 -

 

 공작이나 부엉이나 참새나
 새 생명 가진 것은 같은 줄
 아느냐 네가

 

 쇠 끝으로 부싯돌을 탁 치면
 그새어미 불이 나서 날림을
 아느냐 네가

 

 미난 물이 조금조금 밀어도
 나중에는 원물만큼 느는 줄
 아느냐 네가

 

 건장한 이들이 가는 먼 길을
 다리 성치 못하여도 가는 줄
 아느냐 네가

 


아내의 발

         - 정연복 -

 

어젯밤 과음으로 
목이 말라 
새벽녘 잠 깨어 불을 켜니

연분홍 형광 불빛 아래 
홑이불 사이로 
삐죽 나온 아내의 발

 

내 큼지막한 손으로 
한 뺨 조금 더 될까

상현달 같은 
새끼발가락 발톱 
반달 모습의 
엄지발가락 발톱

 

앙증맞은 그 발로 
우리 가족의 행복을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뛰어다니느라 
아내는 얼마나 고단했을까

군데군데 제법 굳은살이 박힌 
235밀리 작은 발

그 총총 걸음마다 
행운과 복이 깃들이기를.... 

 


아내의 초승달 

      - 정연복 -

 

아차산 야간등산 
하산 길

 

아스라이 동녘 하늘에 
초승달 하나

 

선녀의 눈썹인가 
가늘고 길게 굽어진 
저 숨막히게 예쁜 것.

 

늦은 귀가의 남편 기다리다 
지쳐 잠이 든 아내

 

별빛 맑은 눈동자는 
평화로이 감겨 있는데

 

바로 그 위에 
초승달 두 개 떠 있네

 

만지면 사르르 부서질세라 
새끼손가락 끝으로

 

조심조심 쓰다듬어 보는 
한 쌍의 아미(蛾眉).

 

나는 
행복에 겨운 나무꾼.

 

 

   아내와 함께

      - 박의상 -

 

  한 쪽 것이 큰 아내여, 새끼가 윗니 하나로 쪼아댄 그 검은 젖꼭지로라도
나를 짓눌러 주게. 뒷방에 쌓인 드라이 밀크 깡통을 누르는 먼지 같이
흐릿하게 말고, 맨 위의 깡통이 밑의 빈 깡통을 짓누르는 것같이.

  새끼가 생기더라도 우리는 우리끼리라고 다짐하였지만, 그때의 내 말은
아직 내 자신에게도 달콤하지만, 아내여 푸른 비눗물에 손목이 부어서,
빨래를 내걸려고 내미는 손목이 햇볕에 너무 따가와서.
  울고 섰는 아내여, 내가 짓는 죄는 그래도 새끼가 없을 때 지은 죄보다는
가벼우리. 도둑질도 간음도 죄가 아닐 때, 멸시만은 정말 죄가 된다고
하지. 내가 그대의 지아비가 되었을 때부터가 아니라, 그대가 아내가
되었다고 믿은 때부터지만.
  신뢰하는 것, 긍정하는 것을 지나서 아내를 알고 나서부터는 무심하였네.
지난 시절이 그리웁기보다 짜증스러워서도 우리는 빨리 자고 더 많이
잤던가.
  잠든 아내여, 두 젖이 보름밤 언덕처럼 떠 있네. 나는 또 불통을
휘두르며 달려갈꺼나. 작은 숲 사이로 더 어린 아이들이 따라나오고, 나는
달을 향해서처럼 이 불의 씨들을 우리 새끼 눈에 대어보여 줄꺼나.

 

 

아득하면 되리라

         - 박재삼 -

 

  해와 달, 별까지의
  거리 말인가
  어쩌겠나 그냥 그 아득하면 되리라.

  사랑하는 사람과
  나의 거리도
  자로 재지 못할 바엔
  이 또한 아득하면 되리라.

  이것들이 다시
  냉수사발 안에 떠서
  어른어른 비쳐오는
  그 이상을 나는 볼 수가 없어라.

  그리고 나는 이 냉수를
  시방 갈증 때문에
  마실밖에는 다른 작정은 없어라.

 

 

아리랑 1

     - 김선굉 -


  이건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참 많은 고개를 넘어 또 아득한 세상
  하늘은 너무 푸르러 슬펐고
  때로는 낮은 땅으로 내려와 저만치
  강물이 구비구비
  흘러가고 있었다.
  끝이 없겠구나 이렇게 자꾸 흐르다 보면
  무궁하겠구나. 그렇겠꾸나.
  흰 옷에 붉게 배이던 소리없는 아픔을 어루만지며
  바람은 넘실 끝이 없고
  끝이 없겠구나. 그렇겠구나.
  참 많은 그리움과 참 많은 안타까움과 참 많은 설레임과 참 많은 아픔과
흰 몸과 붉은 마음이
  아! 작은 가슴에 너무 많이
  흐르고 있다.
  걸어가자. 고개 마루나 강가에서
  이 뜨거운 흙에 앉아 잠시 쉬기도 하며.
  몸보다 먼저 마음이
  어느날은 어쩌면 마음보다 먼저 몸이
  푸르게 흐를 수도 있으리라.
  온통 우리 몸이 귀가 되어 귀 기울이면 들려오리라.
  이건 참 너무 큰 그리움이다.
  우리의 가슴엔 무시로 장고 소리가
  설장고 소리가 둥두둥
  울려오고 있는 게 아니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 이형기 -


그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살아 생전
가장 소중한 생명이었기에 그는
어둠 속에서
꺼진 그 불길의 향방을 지켜보았다


이제 세상에는
엄청난 변화가 올 거다 틀림없이
그러나 이튿날도 그 이튿날도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지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형제들한테서도 그는
사흘만에 잊혀져 버렸다


죽음보다 허망한
이 차가운 기류를 타고
휴지로 날리는 부고 한 장

 

 

아버지 고향
          - 博川 최정순 -

 
개구멍 없어도
동네 모든 닭 개 고양이
제집 나드는 울바자 밑
참대 숲 뒤 울 안 장독 소 우리
참새 식솔 무리지어 편히 앉는 시골,
아버지 고향일세.

 

올챙이 쫓는 병아리
호드기 부는 개구쟁이들
홍매화 진달래 개나리 화들짝
모란 난초 살구 꽃 병풍
칡소 워낭소리 울리는 산골짝,
아버지 고향일세.

 

백두산 혈 받아
대지 정기 챙겨주는 청천강
물 흔한 마을
어름치 금강모치 둑중개
철엽 물장구 재미지던 강가,
아버지 고향일세.

 

너럭바위 쌓인 옥수수
홀테 호전기 쉼 없는 가을
한 식솔 분주한 가을걷이
기러기 늪가 노닐며 
풍작 노래하는 곳,
아버지 고향일세.

 

먹이 찾아 나선
산악 수리개 푸드득
눈꽃 살금살금 떨어지면
사랑방 모여
고치곶감 무구덩이 무
동치미랭면 먹던 박천 고을, 
아버지 고향일세.

 

 

아버지의 마음
         -  김현승  -
                                                  
바쁜 사람들도
굳센 사람들도
바람과 같던 사람들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어린 것들을 위하여
난로에 불을 피우고
그네에 작은 못을 박는 아버지가 된다.
 
저녁 바람에 문을 닫고
낙엽을 줍는 아버지가 된다.
 
세상이 시끄러우면
줄에 앉은 참새의 마음으로
아버지는 어린 것들의 앞날을 생각한다.
어린 것들은 아버지의 나라다   아버지의 동포(同胞)다.
 
아버지의 눈에는 눈물이 보이지 않으나
아버지가 마시는 술에는 항상
보이지 않는 눈물이 절반이다.
아버지는 가장 외로운 사람이다.
아버지는 비록 영웅(英雄)이 될 수도 있지만…….
 
폭탄을 만드는 사람도
감옥을 지키던 사람도
술가게의 문을 닫는 사람도
 
집에 돌아오면 아버지가 된다.
아버지의 때는 항상 씻김을 받는다.


어린 것들이 간직한 그 깨끗한 피로…….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거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아버지의 등을 밀며 

          - 손택수 -


아버지는 단 한 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일러준 대로
다섯 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 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었다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1)
                    - 博川 최정순 -


나 있던 박격포 부대 전선에 십 리 는 좋이 떨어져 조금은 안전했지
하지만 사방이 적이요 위험지대였어 싸우다 혼자 되면 포로가 되던
가 복귀하던가. 탈영하던가. 그래야 했지 나 하는 일 적군 동태 알
아내는 것 무기는 무엇이고 언제 후퇴하였는지 그런 것 내가 하와
이 사람과 통한 것 피차 일어 영어 잘 알아 의사소통 가능했던 때
문 속지 말라는 많은 삐라 하늘서 눈처럼 뿌려지는데 중공군 가냘
픈 피리 소리로 국군 마음 들쑤셔 고향 생각나게 하고 한국군 아리
랑 확성기 틀어 중공군 자수하게 했지 장거리 소포에 엎드리고 박
격포 소리에도 엎드리니 양쪽 사격하는 사이로 통과하여 건너편 산 
후퇴하라 했어 후퇴하다 숨 가쁘면 시체 덮고 바짝 엎드려  숨 돌리
다 먼저 간 아군 쫓아가려니 때는 늦었네. 이왕 죽을 바에 포복이 무
슨 소용이던가. 비질하는 실탄 속 뛰고 뛰었지 그러다 숨 가쁘면 엎
드려서 쉬다 다시 뛰었지 사람 목숨 길며 짧기도 한 모양이여 전사
한 시체 넘고 넘으면서 마침내 아군 있는 곳 도착하였어. 몇 명 남지 
않은 우리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후퇴 거듭했지 전시 군인 식
사 늘 사잣밥 언제 어느 곳 죽을지 모르는 인생이니까 후방 내려 갈
수록 민간인 많이 볼 수 있었지 부모 형제 생각나서 반갑기는커녕 
슬픔부터 앞서네. 혼자 살겠다. 배반했다는 죄책감 뜨거운 눈물 지렁
이 되어 꿈틀거리고 아, 나는 누구 위해 싸워야 하며 부모 형제 가슴
에 총부리 겨눠야 하는가. 이 아픔 접고 차라리 죽어 버릴까 갈등도 
많았어, 충주 주둔했던 우리 부대 실종 군인 보충시켰는지 다시 이동
했지 차에 올라 바람인 듯 어데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적막강산 어둠 깔
린 밤 부대는 침묵 속에서 전진 중 느닷없이 굉음 신음 소리 정신 가
다듬어 팔 다리 움직여 보니 때는 늦었지 기운 없어지고 정신 흐려져 
그냥 엎드렸네. 정신 차려 보니 장호원 병원이었어. 알고 보니 칠흑
같은 밤에 앞길 헷갈려 급경사 언덕  밑으로 굴러 떨어져 차 뒤집히고
실렸던 박격포 실탄 괘짝 우리 덮쳤지. 지나간 인생  돌이켜보니 파
리만도 못한 목숨 힘들었던 사연 생각 하면서  통곡하건만 누가 알아
주겠니. 차라리 저 허공의 달이 되었다면 부모 형제라도 바라보련만 
웃는 낯 해후 자위하면서 무덤 없는 붉은 노래 보낸다. 아버님 어머님
'기다리지 마시고 만수무강 하세요.'그리고 난데없는 휴전 휴전선은 
철통선이 되고 말았어. 죽어서나 가보려나 그리운 저 북녘 땅.

 

아버지의 마지막 유서에서(2)
                                  
김일성고지 찾아야 서울 뺏기지 않는 중요한 고지여
바로 이 고지 쟁탈전 시작 되었어 비행기 폭격 동시
박격포 가세 무성히 자랐던 식물 말없이 사라지고 몬
지만 폴싹폴싹 총 한 방 쏘지 않고 김일성 고지 점령
마음 놓고 기뻐할 때 웬 날 벼락 산 중턱 사방에서 공
격 때 이미 늦었네. 북쪽 장거리포 아군 비행기 폭탄 쏟
아 부어 정신없네. 막 대결하며 한 곳 뚫어 목숨 걸고 김
일성고지 후퇴 갱신히 살아났지 그 많던 전사자 중 나
어떻게 살았는지 알 수 없는 일 병사 보충 돌진 굴마다
수류탄 던지며 김일성고지 재탈환 경천동지 아비규환
어디론가 사라지고 적막감 전쟁 끝나 이제 고향 간다
기쁨 넘쳤는데 하늘의 무슨 뜻이던가. 휴전 돌입 이게
말이 되는 소리던가 이기든 지든 끝 봐야 부모 형제
볼 것 아니던가 유엔군 일본으로 사라지고 갈 곳 없는 
이 몸 반겨줄 사람 없는 남으로, 남으로 내려왔지 명절 
오면 고향 생각 절로 나 한 맺히니 터질 듯 아픈 가슴
아 누가 알아주랴 술 먹고 나면 왜 나만 외톨일까 눈물 
앞 가려 잠 못 이루는 밤 뻐꾹새 슬피 울어 밖에 나오니 
보름달만 휘영청 달에 부모 형제 눈물짓고 서 있었지 
이런 고달프고 외로운 인생 나만 겪는 일 아니겠지 불효 
지은 죄인 몸 쇠약해져 병원 갔더니 웬 날벼락인가 암
진단 받고 보니 더 생각나는 건 부모 형제 눈물만 강을
이루는구나! 병원 침대 누워 과거사 돌이켜 보니 자식 
노릇도 아비 노릇도 못한 나 실낱 목숨 하루 하루 지내  
며 창문에 뜬 달 보며 고향으로 달려가고 있네.

 


아버지의 손 
        - 전숙 -     

 
사막을 보고 있다
만지면 고운 모래가 묻어날 것 같은
고요가 고요를 말리는 건조증이 아직 진행 중이다
저 사막에도 용트림하듯 거센 강물줄기 흘렀었다
회초리를 들어 내 장딴지를 후려치던
그 강단진 패기는 어디쯤에서 말라버렸을까
한 장 한 장 생을 굽듯이 아슬하게 구워낸
내 대학등록금을 은행창구에 들이밀 때
아버지의 손은 사바나로 변하고 있었으리라

 

나는 회초리 든 아버지의 푸른 손만 기억하였다
모래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아버지의 손은 언제나 
내가 편히 쉴 푸른초장인 줄 알았다

 

한 방울의 비도 내리지 않은 혹독한 시절을 
무소의 뿔처럼 홀로 지고 걸어간
아버지의 강과 샘은 하얗게 말라붙어

 

눈감고 만지면 아버지의 손은
죽어 천년을 산다는 사막의 나무 
한때 그 몸에 푸른 이파리 살랑거렸던 기억까지 
깡마르게 지워낸 호양나무의 수피처럼 
갈기갈기 거친 호흡으로 덮여 있었다. 
 

 

 

아버지의 연가

             - 황선하 -

 

  잠 안 오는 아홉 밤
  괴로운 그리스도
  멍든 늑골
  궂은 비 내리고,
  궂은 비 들고
  동그맣게 미소짓는 무구한 햇살.
  구구구
  콩 먹는 사랑스런 비둘기 떼.
  외론 마음 먹은 귀 트이고,
  둥둥둥
  아득한 지심 축제의 북소리,
  울먹이며 춤추는 망각의 쥐꼬리들.
  한 점 힌 구름 뜬
  어머니의 하늘,
  비비배배
  종달새
  아버지의 연가.

 


아버지의 첨성대 

       - 博川 최정순 -


경주 시내 술병 모양 첨성대 있지
천체 움직임 관찰하던 곳이었어.
하늘 알아 책력 만들어야 명실 공히 천자거든
당나라에 신라 자주국 알리는 쾌거 아니던가.
자갈 황토 섞은 벽돌로
아버지 첨성대 닮은 뒷간 만들었지
동네 사람들 신기한 눈으로 보고
외지인 사진 박으며 설왕설래
마을 사람들 아버지 흉내 내려 하나
번번이 실패했어.
수학 교사하던 아버지
수학 공식 이용한 작품이거든 
원통부 구멍으로 바람 나들며 속삭이고
정井자형 꼭대기 북두칠성 환히 웃으니
뒷간에서도 천자가 된
아버지 기분. 
누가 알아줄까.

 

 

아버지의 창 앞에서

        - 김상훈(金尙勳) -


등짐지기 삼십리길 기어 넘어

가쁜 숨결로 두드린 아버지의 창 앞에

무서운 글자있어 '공산주의자는 들지 말라'

아아 천날을 두고 불러왔거니 떨리는 손 문고리 잡은 채

물끄러미 내 또 무엇을 생각해야 하는고


태어날 적부터 도적의 영토에서 독(毒)스런 우로(雨路)에 자라

가난해두 조선(祖先)이 남긴 살림, 하구 싶든 사랑을

먹으면 화를 입는 저주받은 과실인듯이

진흙 불길한 땅에 울며 파묻어 버리고

내 옹졸하고 마음 약한 식민지의 아들

천근 무거운 압력에 죽음이 부러우며 살아왔거니

이제 새로운 하늘 아래 일어서고파 용솟음치는 마음

무슨 야속한 손이 불길에 다시금 물을 붓는가


징용살이 봇짐에 울며 늘어지든 어머니

형무소 창구멍에서 억지로 웃어보이던 아버지

머리 쓰다듬어 착한 사람 되라고

옛글에 일월(日月)같이 뚜렷한 성현의 무리 되라고

삼신판에 물 떠놓고 빌고, 말 배울 적부터 정전법(井田法)을 조술(祖述)하드니

이젠 가야할 길 미더운 깃발 아래 발을 맞추려거니

어이 역사가 역류하고 모든 습속이 부패하는 지점에서

지주의 맏아들로 죄스럽게 늙어야 옳다 하시는고

아아 해방된 다음날 사람마다 잊은 것을 찾어 가슴에 품거니

무엇이 가로막어 내겐 나라를 찾든 날 어버이를 잃게 하느냐


형틀과 종문서 지니고, 양반을 팔아 송아지를 사든 버릇

소작료 다툼에 마음마다 곡성이 늘어가던

낡고 불순한 생활 헌신짝처럼 벗어버리고

저기 붉은 기폭 나부끼는 곳, 아들 아버지 손길 맞잡고

이 아침에 새로야 떠나지는 못하려는가 ……

아아 빛도 어둠이련듯 혼자 넘는 고개

스물일곱 해 자란 터에 내 눈물도 남기지 않으리

벗아! 물끓듯 이는 민중의 함성을 전하라

내 잠깐 악몽을 물리치고 한거름에 달려가마

 

 

아버지와 느티나무

               - 손택수 -


아버지의 스무살은 흑백사진, 구겨진 흑백사진 속의구겨진 느티나무, 둥치에 기대어 있다 무슨 노랜가를 부르고 있는지 기타를

품고, 사진 밖의 어느 먼곳을 바라보고 있는지 젖은 눈으로, 어느 누군가가 언제라도 말없이 기대어올 것처럼

 

한쪽으로 비스듬히 누운 느티와 함께 있다 나무는 지친 한 사람을 온전히 받아주기 위하여 그렇게 기울어간 것이나 아닌지, 쓰러질 듯 기울어 가면서도 기울어가는 둥치를 끌어당기느라 뿌리를 잔뜩 긴장하고 서 있는 것이나 아닌지

 

그 사람들 등의 굴곡에 가장 알맞는 모습으로 기울어가기 위하여 한평생을 고단하게 쓰러져갔을 나무, 풍성한 머릿결을 바람에 비다듬고 내가 알 수 없는 노래에 수만의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 구겨지고 구겨진 흑백 속에서도 그 노래 빳빳하게 살아 있다

 

언젠가 구겨진 선처럼 내 몸에도 깊은 주름이 패이면, 돌아갈 수 있을까 저 생생한 한 그루 아래로, 돌아가서 당신을 쏙 빼닮았다는 등허리를 아름드리 둥치에 지그시 기대어볼수가 있을까

 

처음 나무는 낯선 나를 의아해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품고 지쳐서 돌아온 나를 알아보지 못해 어리둥절해 하겠지만, 구겨진 생의 실핏줄마다 새순 같은 초록물이 번지고 몸의 박동음과 물관을 타고 오르는 은지느러미 미끄러운 물소리가 다시 눈부시게 만나는 한때

 

나무는 이내 알게 될 것이다, 약간 굽은 내 등의 굴곡을 통해, 무너져가는 가계를 떠맡은 채 일찌감치 그의 곁을 떠나간 청년 하나를, 그가 꾸다 만 꿈과 슬픔까지를 어쩌면 흑백의 저 푸른 느티나무 아래서 부를 노래하나를 장만하기 위하여 나의 남은 생은 온전히 바쳐져도 좋을는지 모른다 사진 안에 미쳐 들어오지 못한 어느 먼 곳을 향하여 아버지의 스무살처럼 속절없이 나는 또 그 어느 먼곳을 글썽하게 바라보아야 하겠지만

 

한줌의 뼈를 뿌려주기 위해, 좀더 멀리 보내주기 위해, 제 몸에 돋은 이파리를 쳐서 바람을 불러일으켜주는 한 그루, 바람을 몰고 잠든 가지들을 깨우며 생살 돋 듯 살아나는 노래의 그늘 아래서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 배창환 -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이 글을 쓰는 것은
  남 몰래 울먹여 보는 것과 같다
  누군가 뒤에서 살금살금 쉿 다가와
  꽥, 하고 덤벼들거나 히힛 웃으며 달아날 것 같아서
  뒤돌아보면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은 여전히 텅 비어 있다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는 나를 툭, 두드려 깨우는
  몇 가지의 황국, 가져 가지 않은 신발, 헌 참고서
  그리고 누가 두고 갔는지 이 겨울 오동잎 하나
  교탁에 남아 파르르 떨고 있다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그것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우스웁고 또 반가운지
  나는 조건반사처럼 그 잎을 주어들며 잎 속에
  숨어 있는 아이들을 하나하나 점검한다
  흐린 얼굴 찡그린 얼굴 하얗게 웃는 얼굴
  솔방울같은 눈물을 닦아내며 반짝 웃는 귀여운 얼굴
  그 얼굴은 변덕 심한 날씨처럼 다 달라서 기억할 수 있다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듣는 음악은 찔린다
  마구 흩어진 책걸상에 털썩 걸터 앉으면 더 깊이 찔린다
  누군까 칠판에 갈겨놓은 내일 졸업식, 오후 2시, 운동장
  하얀 글자가 아파서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다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 뒤에 급훈이 걸려 있다
  '진리는 나의 빛, 힘이요 기쁨이니...'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나 혼자 읽는다
  그래도 못다 한 말들이 눈시울에 남는다
  '착하게 살아라, 네 이웃을 껴안아라'
  그러나 부끄러워 말 못하고 입 안에 돌던 그것들이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 교단에 서면 울음처럼 터진다
  지금 떠나는 것이 어디 죽으러 가는 길도 아닌데
  떠나고 나서야 떠난 자리가 그리워지기도 하는 법인데
  송사를 읽을 때 울먹이다가 답사 끝에 왈칵, 울어버린 아이들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에 남아 서성이는 것은
  서럽다 남몰래 울먹여 보는 것과 같다
  이럴 줄 알았으면 창밖에 송이눈이라도 듬뿍 내리게 할 걸,
  하는 생각이 든다 박인환의 세월이 가면을 마지막으로
  부르던 내 노래 끝에 새삼스레 눈시울을 적시던 아이들
  내 마저 듣지 못하고 창밖으로 고개 돌려 울음 삼키던
  스승의 노래를 부르다 더 못 부르고 설워하던 아이들
  실장이 마지막으로 차렷, 경례를 하고 난 다음에도
  좀처럼 움직이려 하지 않던 아이들이 가고 없는 빈 교실 창 너머로
  2월의 마지막 잎사귀 하나, 그리운 얼굴처럼 무너져내린다
  수업종이 멀리서, 너무나 아득히, 울리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아우의 인상화(印象畵)

             - 윤동주(尹東柱) -


붉은 이마에 싸늘한 달이 서리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은 진정코 설은 대답이다.


슬며시 잡았던 손을 놓고

아우의 얼굴을 다시 들여다 본다.


싸늘한 달이 붉은 이마에 젖어

아우의 얼굴은 슬픈 그림이다.

 

 

아지랑이 / 서정주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섧고도 어지러운 사랑의 모습처럼
녀릿녀릿 흔들리며 피어오른다

공덕동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공덕동에 사는이의 사랑의 모습.
만리동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만리동에 사는이의 사랑의 모습.

순이네가 사는집 집웅우에선
순이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복동이가 사는집 집웅우에선
복동이네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누이야 네 수놓을 방에서는
네 수놓는 아지랑이
네 두눈에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면
맑은 눈물방울이 고이는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그립다> 생각하면
<그립다> 생각하는 아지랑이
<아!>하고 또속으로 소리치면
<아!>하고 또속으로 소리치는 아지랑이

아지랑이가 피어 오른다
섧고도 어지러운 사랑의 모습처럼
녀릿 녀릿 흔들리며 피어오른다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 신석정 -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그 새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언덕에서는 우리의 어린 양들이 낡은 녹색 침대에 누워서 남은 햇빛을 즐기느라고 돌아오지 않고,
  조용한 호수 위에는 이제야 저녁 안개가 자욱히 내려오기 시작하였읍니다.

  그러나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늙은 산의 고요히 명상하는 얼굴이 멀어가지 않고 머언 숲에서는 밤이 끌고 오는 그 검은 치맛자락이
  밤길에 스치는 발자욱 소리도 들려오지 않습니다.


  멀리 있는 기인 둑을 거쳐서 들려오는 물결 소리도 차츰차츰 멀어갑니다.
  그것은 늦은 가울부터 우리 정원을 방문하는 까마귀들이 바람을 데리고 멀리 가버린 까닭이겠읍니다.
  시방 어머니의 등에서는 어머니의 콧노래 섞인 자장가를 듣고 싶어하는 애기의 잠덧이 있읍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이제야 저 숲 너머 하늘에 작은 별이 하나 나오지 않았읍니까?

 

 

아차산

          - 이병기 -

 

고개 고개 넘어 호젓은 하다마는
풀섶 바위 서리 빨간 딸기 패랭이꽃.
가다가 다가도 보며 휘휘한 줄 모르겠다.

 

묵은 기와쪽이 발끝에 부딪히고,
성을 고인 돌은 검은 버섯 돋아나고,
성긋이 벌어진 틈엔 다람쥐나 넘나든다.

 

그리운 옛날 자취 물어도 알 이 없고,
벌건 메 검은 바위 파란 물 하얀 모래,
맑고도 고운 그 모양 눈에 모여 어린다.

 

 

아침을 위하여

       - 김재진 -


  잠들지 말아야지 이 추운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같이 걷던 친구마저
  동태가 뙤어 얼어붙은 밤
  입김을 호호 불며 걸어가야지
  잠들지 말아야지 두 눈 동그랗게 밝혀
  어둠이 깊어도 멀잖은 아침
  햇살 이야기 나누며 걸어가야지
  머리 위엔 눈꽃이 쌓여
  관처럼 인고의 십자가처럼
  어깨 위엔 눈꽃이 쌓여
  별처럼 이 밤의 순교자처럼
  잠들지 말아야지 숨막히고 안타까운 밤
  모르는 곳에서 누눈가 촛불 밝혀
  빛나며 기다리는 밤
  숨죽여 들으면 얼음 밑을 흐르는
  시냇물 소리 들려 오는데
  잠들지 말아야지 추운 밤 모두모두
  노래하며 걸어야지
  손 잡고 걸어야지 이 하얀 밤
  눈사람도 지친 듯 눈꽃에 싸여 조는 밤
  잠들지 말아야지
  세상의 은빛 지붕들 모두
  눈 무게에 내려앉은 밤

 


아침의 향기 

   - 이해인 -


아침마다
소나무 향기에 잠이 깨고 
창문을 열고 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도
솔잎처럼 예리한 지혜와
푸른 향기로 
나의 사랑이 변함없기를

 

찬물에 세수하다 말고 
비누 향기 속에 풀리는 
나의 아침에게 인사합니다

 

오늘 하루도
온유하게 녹아서


누군가에게 향기를 묻히는 
정다운 벗이기를 
평화의 노래이기를


 

아침이미지

       - 박남수 -

 

어둠은 새를 낳고, 돌을 
낳고, 꽃을 낳는다.


아침이면, 
어둠은 온갖 물상(物象)을 돌려 주지만 
스스로는 땅 위에 굴복(屈服)한다.


무거운 어깨를 털고 
물상들은 몸을 움직이어 
노동의 시간을 즐기고 있다.


즐거운 지상(地上)의 잔치에 
금(金)으로 타는 태양의 즐거운 울림.


아침이면, 
세상은 개벽(開闢)을 한다.


              

 아침식사
          - 자크 프레베르 -


 그이는 잔에 
 커피를 담았지 
 그이는 커피잔에 
 우유를 넣었지 
 그이는 우유 탄 커피에 
 설탕을 탔지 
 그이는 작은 숟가락으로 
 커피를 저었지 
 그이는 커피를 마셨지 
 그리고 그이는 잔을 내려놓았지 
 내겐 아무 말 없이 
 그이는 담배에 불을 붙였지 
 그이는 연기로 
 동그라미를 만들었지 
 그이는 재떨이에 
 재를 털었지 
 내겐 아무 말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이는 일어났지 
 그이는 머리에 
 모자를 썼지 
 그이는 비옷을 입었지 
 비가 오고 있었기에 
 그리고 그이는 
 빗속으로 가 버렸지 
 말 한 마디 없이. 
나는 보지도 않고 
 그래 나느 두 손에 
 얼굴을 묻고 
 울어 버렸지.

 

 

 

아편꽃

      - 박정만 -

 

  저만큼 나를 놓고 달아나는 첫사랑이여.
  내 피의 아득한 급류의 산맥 위에
  오늘은 초롱의 꽃그림자 자지러지고
  속마음 타넘고 일렁이는 능구렁이,
  짙은 아내의 푸른 불로 타오르도다.
  이 내 몸도 징그러운 꿈이 되어
  또한 푸른 불 한가지로 타오르도다.


 


안개
   - 기형도 -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릴 때까지  
안개의 軍團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 하나가 얼어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들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안개

     - 유혜목 -


  이렇게쯤 살고 있는 나를
  알기라도 한 양
  자욱한 주변
  답답함도 위장도 아닐
  적당한 거리에
  사물을 띄어 놓을 수 있는 건
  큰 북이다
  안개 덕분이다.

  시야로 삼킬 수 있는 거리만을
  머금으며 걷기로 된 것도
  잘된 일이다
  안개 덕분이다.

  함께 걷는 이의 체온에
  한결 다가서는 걸음도
  만보 덕분이다
  안개 때문이다.

 


     안개로 가는 길

         - 조병화 -

 

     --경인 하이웨이에서

  안개로 가는 사람
  안개에서 오는 사람
  인간의 목소리 잠적한
  이 새벽
  이 적막
  휙휙
  곧은 속도로 달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한 마디로 말해서
  긴 내 이 인생은 무엇이었던가
  지금 말할 수 없는 이 해답
  아직 안개로 가는 길이 아닌가

  이렇게 생각하면 이렇게
  저렇게 생각하면 저렇께
  생각할 수도 없는 세상에서
  무엇 때문에
  이 길로 왔을까
  피하여, 피하여
  비켜서 온 자리
  사방이 내 것이 아닌 자리
  빈 소유에 떠서

  안개로 가는 길
  안개에서 오는 길
  휙휙
  곧은 속도로 엇갈리는 생명
  창 밖은
  마냥 안개다.

 

 

안개속에서

      - 강계순 -

 

  땅 속에는 마르지 않는
  물의 근원이 있었서
  수만 가지 색깔의 눈물로
  봄을 피워 올리고

  하늘 속에 떠 있는
  맑고 맑은 우물
  마르지 않는 눈물을
  나는 길어 올리고 있다.

  욕심을 놓고 돌아서면
  사방에서 소리치고 있는 안깨
  안개 속에 떠 있는
  무중력의 사랑을 본다.

  돌아가리라
  가진 것 다 돌려주고
  이제야 몸 가볍게 시작하는
  여행

  휘적이며 휘적이며
  조금씩 소멸해 가는
  우리들의 매듭.

  돌아가리라
  이른 아침
  승천하는 맨 살의 안개
  다친 몸 거두어
  비단 수건으로 닦아 내고
  이제
  무연의 들판에 돌아가리라.

 

 

안개의 나라

     - 김광규 -

 

  언제나 안개가 짙은
  안개의 나라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안개 때문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안개 속에 사노라면
  안개에 익숙해져
  아무것도 보려고 하지 않는다
  안개의 나라에서는 그러므로
  보려고 하지 말고
  들어야 한다
  듣지 않으면 살 수 없으므로
  귀는 자꾸 커진다
  하얀 안개의 귀를 가진
  토끼 같은 사람들이
  안개의 나라에 산다

 

 

안개꽃

      - 이수익 -

 

  불면 꺼질듯
  꺼져서는 다시 피어날 듯
  안개처럼 자욱히 서려 있는
  꽃.

  하나로는 제 모습을 떠올릴 수 없는
  무엇이라 이름을 붙일 수도 없는
  그런 막연한 안타까움으로 빛깔진
  초변의
  꽃.

  무데기로
  무데기로 어우러져야만 비로소 형상이 되어
  설레는 느낌이 되어 다가오는 그것은

  아,
  우리 처음 만나던 날 가슴에 피어오르던
  바로 그
  꽃!

 

 

안경 흔들기

         - 박상우 -


  1
  안경을 흔들면 세상이 흔들린다
  책상 위에 있는 민중과 지식인이 흔들리고, 벽에 걸려 있는 올리비아 핫세가 흔들리고, 창문으로 보이는 술집이 흔들리고, 동대문구가 흔들리고,서울이 흔들리고, 한반도가 흔들리고, 아시아가 흔들리고, 유럽이 흔들리고, 아프리카가 흔들리고, 아메리카가 흔들린다.

  2
  안경만 흔들면 안경만 흔들린다. 안경알이 흔들리고, 안경다리가 흔들린다.

  3
  안경을 흔들면 세상도 흔들리고, 안경도 흔들린다. 영화 사랑을 합시다에서 마릴린 몬로의 유방 두 개가 같이 흔들렸듯
  안경과 세상은 같이 흔들린다.

  4
  안경을 흔들면 안경과 관계 깊은 것만 흔들린다. 안경닦개가 흔들리고, 안경집이 흔들리고, 시력검사표가 흔들리고, 최신
콤퓨터 시력 측정기가 흔들리고,  어머니의 주머니가 흔들리고, 안경원 아줌마의 금고문이 흔들린다.

  5
  안경을 흔들면 내 눈과 인연이 깊은 것만 흔들린다.  내가 **구멍을 흔들고 싶어 나의 눈구멍이 흔들리고,
  내가 *두덩을 흔들고 싶어 나의 눈두덩이 흔들리고, 내가 꼬리를 흔드는 여자를 흔들고 싶어 나의 눈꼬리가 흔뜰리고,

  화나면 안경을 자주 깨서 9,000원씩 자주 가계부를 축내는 나 때문에  어머니의 눈총이 흔들리고, 안경원에 걸려 있는 어느 외국 여우의 사진 때문에 나의 눈요기가 흔들리고,안경을 안 쓰고 걸어갈 때 잘 안 보이는 세상을 잘 보려는 나의 찡그린 눈시울 때문에 나의 눈독이 흔들리, 내가 쓰디쓴 내 눈을 달콤하게 하고 싶어 유심히 보았던 안경원 주인 딸년의 눈깔사탕이 흔들리고, 내가 흔들리는 내 눈을 보고 배꼽과 뱃속이 이산가족(?)이 되게 웃고 싶어 나의 눈꼽이 흔들린다.

  6
  안경을 흔들면 모두가 흔들리고, 모두가 흔들리지 않는다.안경은 흔들려서 모두가 흔들리는 것을 보여주고,
  세상은 멈추어 안경만 흔들리는 것을 알려준다.

  7
  나는 안경을 멋지게 흔드는 기술을 안경원 주인한테 배우면 되지만 세상은 멋지게 흔들리는 방법을 어디서 배우나.

 

 

 

안테나

     - 장종권 -


  어른들이 십자가 밑에서
  두 손 모으는 일요일
  아이들은 골목에 모여
  안테나를 세운다

  손 칼 삼아 구덩이 만들고
  개똥 모아 거름 묻고
  이놈 실례 저놈 실례 물을 삼고
  발길로 씨팔 흙 돋우어
  꽁꽁 다진 안테나

  외계인아 와라, 오지 않고
  하나님아 와라, 오지 않고
  할아버지도 와라, 오지 않고
  잠자리나 와라, 오지 않고

  잎이 돋는다
  서슬 푸른
  거짓말이 돋는다
  참말이 돋는다

 

 

알 수 없어요

        - 한용운 -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을 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에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 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 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해를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압록강행진곡(鴨綠江行進曲)

              - 한유한(韓悠韓) -

                                     

                                  우리는 한국독립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우리는 한국광복군    악마의 원수 쳐 물리자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진-주 우리나라 지옥이 되어

                                              모두 도탄에 헤매고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 가자 고향에

 

                                            등잔 밑에 우는 형제가 있다

                                             원수한테 밟힌 고통이 있다

 

                                                    동포는 기다린다

                                                    어서가자 조국에

 

                                                   우리는 한국광복군

                                                 조국을 찾는 용사로다

 

                                                        나가! 나가!

                                          압록강 건너 백두산 넘어가자   아-

 

 

 

양지

    - 최재형 -

 

  양지쪽에 앉으면
  인생이 행결 따뜻해 온다.

  어렸을 때 헐벗고 배고파도
  항상 즐겁던 양지

  나는 혼자
  오랫동안
  그늘로 쫓기어 왔다.

  여수는 절로
  녹아 내리고

  차라리
  울수도 없는
  이 막다른 골목에서

  눈부신 햇살만이
  옛날의 인정이었다.

  외로운 이여 오라.
  ...

  와서 잠깐
  해바라기 하며
  쉬어서 가라.

  이렇게
  양지쪽에 앉으면
  세상이 행결 정다와진다.

 

 

 

양화진에서

         - 나종영 -


  절두산 기슭에 서서
  저문 강물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1866년 금압령이 내려진 거리에서
  믿음을 위하여 목숨을 던진 교우들이
  믿음을 잃은 친구들을 일깨우는 곳
  오늘은 목 잘린 교우들의 외침이
  붉은 노을에 닿아 박힌다.
  한 잎 잎새를 떨구는 바람이
  교회당 첨탑 지붕 너머로 넘어가고
  나는 어두운 한 시대가 저무는
  쓸쓸한 겨울 거리의 모퉁이에서
  호외를 손에 쥔 사람들의
  비탄에 잠긴 표정을 본다.
  저만치 강물을 가로질러 뻗은
  대교의 불빛이 흩어져 눈부시고
  세계의 어느 도시로 떠나가는
  은빛 여객기의 엔진 소리가 드높다.
  일찌기 금압령이 내려진 나라
  그때 목 잘린 교우들의 이름을 되새기면서
  나는 후미진 절두산 기슭에 앉아
  어두운 강물이 깊이 흐르는 소리를 듣는다.
  짙은 안개가 걷히는 새벽
  강 건너 여의도 의사당 광장에는
  그늘 없이 뛰어노는 한 떼의 아이들
  묵묵히 첫눈을 맞으며 지나가는 시민들
  나는 어느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들의 끝없는 자유를 믿고 또 믿는다.

 

 

 

오감도(烏瞰圖)
                 - 이상 -

- 時弟一號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오.
(같은 막다른 골목이 적당하오.)


제 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4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5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6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7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8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9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0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1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2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제 13의 아해가 무섭다고 그리오.
십삼인의 아해는 무서운 아해와 무서워하는 아해와 그렇게 뿐이 모였소. (다른 사람은 없는 것이 차라리 나았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운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2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그 중에 1인의 아해가 무서워하는 아해라도 좋소.


(길은 뚫린 골목이라도 적당하오.)
13인의 아해가 도로로 질주하지 아니하여도 좋소.


- 時弟二號


나의 아버지가 나의 곁에서 조을 적에 나는 나의 아버지가 되고 도 나는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고, 그런데도 나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대로 나의 아버지인데 어쩌자고 나는 자꾸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되니 나는 왜 나의 아버지를 껑충뛰어 넘어야하는지 나는 왜 드디어 나와 나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노릇을 한꺼번에 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냐


- 時弟三號


싸움하는 사람은 즉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고 또 싸움하는 사람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었기도 하니까 싸움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고 싶거든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하는것을 구경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는 구경을 하든지 싸움하지 아니하던 사람이 싸움이나 싸움하지 아니하는 사람이 싸움하지 아니하는 것을 구경하든지 하였으면 그만이다.


- 時弟四號


환자의 용태에 관한 문제


진단 0:1   26.10.1931   以上 책임의사 이상


- 時弟五號


전후좌우를제(除)하는유일의흔적(痕跡)에있어서
익은불서목불대도(翼殷不逝目不大覩)
반왜소형의신의안전(眼前) 에아전낙상(我前落傷)한고사(故事)를유(有)함
장부(臟腑)라는것은침수된축사(畜舍)와구별될수있을란가


- 時弟六號


앵무  ※  2필
             2필
        ※  앵무는포유류에속하느니라.
내가2필을아는것은내가2필을알지못하는것이니라. 물론나는희망할것이니라.
앵무       2필
"이소저는신사이상의부인이냐""그렇다"
나는거기서앵무가노한것을보았느니라.나는부끄러워서얼굴이붉어졌었겠느니라.
앵무     2필
           2필
물론나는추방당하였느니라.추방당할것까지도없이자퇴하였느니라.나의체구는중추를상실하고또상당히창랑하여그랬든지나는미미하게체읍하였느니라.
"저기가저기지""나""나의-아-너와나"
"나"
sCANDAL이라는것은무엇이냐."너""너구나"
"너지""너다""아니다너로구나"나는함뿍젖어서그래서수류처럼도망하였느니라.물론그것은아아는사람혹은보는사람은없었지만그러나과연그럴는지그것조차그럴는지.


- 時弟七號


구원적거(久遠謫居)의지(地)의일지(一枝)·일지에피는현화(顯花)·특이한4월의화초·30륜(輪)·30륜에전후되는양측의명경(明鏡)·맹아(萌芽)와같이희희(戱戱)하는지평(地平)을향하여금시금시낙백(落魄)하는만월·청한의기(氣)가운데만신창이의만월이의형당하여혼륜(渾淪)하는·적거(謫居)의지를관류하는일봉가신(一封家信)·나는근근히차대(遮戴)하였더라·몽몽한월아(月芽)·정일을개엄하는대기권의요원·거대한곤비(困憊)가운데의일년4월의공동(空洞)·반산전도(槃散顚倒)하는성좌와성좌의천열(千裂)된사호동(死胡同)을포도하는거대한풍설·강매·혈홍으로염색된암광채임리한망해·나는탑배하는독사와같이지하에식수되어다시는기동할수없었더라·천량이올때까지


- 時弟八號


제1부시험  수술대             1
               수은도말평면경  1
               기압                2배의평균기압
               온도                개무


위선마취된정면으로부터입체와입체를위한입체가구비된전부를평면경에영상시킴.평면경에수은을현재와반대측면에도말이전함.(광선침입방지에주의하여)서서히마치를해독함.일축철필과일장백지를지급함.(시험담임인은피시험인과포옹함을절대기피할것)순차수술실로부터시험인을해방함.익일.평면경의종축을통과하여평면경을2편에절단함.수은도말2회.
ETC 아직그만족한결과를수득치못하였음.


제2부시험 직립한평면경  1
               조수             수명


야외의진공을선택함.위선마취된상지의첨단을경면에부착시킴.평면경의수은을박락함.평면경을후퇴시킴.(이때영상된상지는반드시초자를무사통과하겠다는것으로가설함)상지의종단까지.다음수은도말.(재래면에)이순간공전과자전으로부터그진공을강차시킴.완전히2개의상지를접수하기까지.익일.초자를전진시킴.연하여수은주를재래면에도말함.(상지의처분)(혹은멸형)기타.수은도말면의변경과전진후퇴의중복등.
ETC 이하불상.


진단 0:1 26.10.1931 책임의사 이상


- 時弟九號
 

매일같이 열풍이 불더니 드디어 내 허리에 큼직한 손이 와 닿는다. 황홀한 지문 골짜기로 내 땀내가 스며드자마자 쏘아라. 쏘으리로다. 나는 내 소화기관에 묵직한 총신을 느끼고 내 다물은 입에 매끈매끈한 총구를 느낀다. 그러더니 나는 총 쏘으드키 눈을 감으며 한방 총탄 대신에 나는 참 나의 입으로 무엇을 내어배앝었더냐.


- 時弟十號


찢어진 벽지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그것은 유계(幽界)에 낙역되는 비밀한 통화구다. 어느 날 거울 가운데의 수염에 죽어가는 나비를 본다. 날개 축 처어진 나비는 입김에 어리는 가난한 이슬을 먹는다. 통화구를 손바닥으로 꼭 막으면서 내가 죽으면 앉았다 일어서드키 나비도 날라가리라. 이런 말이 결코 밖으로 새어나가지는 않게한다.


- 時弟十一號


그 사기컵은 내 해골과 흡사하다. 내가 그 컵을 손으로 꼭 쥐었을 때 내 팔에서는 난데없는 팔 하나가 접목처럼 돋히더니 그 팔에 달린 손은 그 사기컵을 번적 들어 마룻바닥에 메어부딪는다. 내 팔은 그 사기컵을 사수하고 있으니 산산이 깨어진 것은 그럼 그 사기컵과 흠사한 내 해골이다. 가지났던 팔은 배암과 같이 내 팔로 기어들기 전에 내 팔이 혹 움직였던들 홍수를 막은 백지는 찢어졌으리라. 그러나 내 팔은 여전히 그 사기컵을 사수한다.


- 時弟十二號


때묻은 빨래 조각이 한 뭉덩이 공중으로 날라 떨어진다. 그것은 흰 비둘기의 떼다. 이 손바닥만한 한 조각 하늘 저편에 전쟁이 끈나고 평화가 왔다는 선전이다. 한 무더기 비둘기의 떼가 깃에 묻은 때를 씻는다. 이 손바닥만한 하늘 이편에 방망이로 흰 비둘기의 떼를 때려 죽이는 불결한 전쟁이 시작된다. 공기에 숯검정이가 지저분하게 묻으면 흰 비둘기의 떼는 도 한번 손바닥만한 하늘 저편으로 날아간다.


- 時弟十三號


내 팔이 면도칼을 든 채로 끊어져 떨어졌다. 자세히 보면 무엇에 몹시 위협당하는것처럼 새파랗다. 이렇게 하여 읽어 버린 내 두 개 팔을 나는 촉(燭)대 세움으로 내 방안에 장식하여 놓았다. 팔은 죽어서도 오히려 나에게 겁을 내이는 것만 같다. 나는 이런 얇다란 예의를 화초분보다도 사랑스레 여긴다.


- 時弟十四號


고성 앞 풀밭이 있고 풀밭 위에 나는 내 모자를 벗어 놓았다. 성 위에서 나는 내 기억에 꽤 무거운 돌을 매어달아서는 내 힘과 거리껏 팔매질쳤다. 포물선을 역행하는 역사의 슬픈 울음소리. 문득 성 밑 내 모자 곁에 한 사람의 걸인이 장승과 같이 서 있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걸인은 성 밑에서 오히려 내 위에 있다. 혹은 종합된 역사의 망령인가. 공중을 향하여 놓인 내 모자의 깊이는 절박한 하늘을 부른다. 별안간 걸인은 표표한 풍채를 허리 굽혀 한 개의 돌을 내 모자 속에 치뜨려 넣는다. 나는 벌써 기절하였다. 심장이 두개골 속으로 옮겨가는 지도가 보인다. 싸늘한 손이 내 이마에 닿는다. 내 이마에는 싸늘한 속자국이 낙인되어 언제까지 지워지지 않는다.


- 時弟十五號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렵혀 놓았다.
3.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영이되어 떨고 있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등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보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오는구나 봄이

      - 김규동 -

 

  다행한 일이다
  봄이 오는 소릴 듣는 것은
  지난 겨울은
  너무 춥고 스산하여
  마음 놓지 못하고 살았거니
  이제 강이 풀리고
  나무에 파란 물이 오르니
  희망, 기쁨
  그런 것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만 같다
  생각해 보라
  희망이 없다면 무엇이 될건가
  여전히 캄캄한 세상 살아가는 건
  죽음이나 마찬가지다
  봄바람 살랑대는 거리에 서면
  그나마 한 줄기 빛이
  잔인하게 등골을 어루만져 주는구나
  통일하자
  통일하자
  외쳐댄 소리도
  다시금 산울림 되어 들려온다
  이 혼란 속에도
  구정이라
  더러는 명절 기분을 내는데
  북으로 달리는 기차소리
  영 들리지 않고
  빈소리 외쳐댄 몸이 차라리
  형제와 조상님 앞에
  엎드려 잘못을 빈다
  무엇이 어떻게 됐다는 것이냐
  하루 하루 연명이나 하는 건
  삶이 아니다
  절대로 삶이 아니구나
  삼천리 강산 소리치고 일어설
  그날 없이는
  영광도 아니구나
  사십년 묵은
  분단의 가시 철망
  그대로 놓아둔 채
  떨리는 봄소식 듣는 건
  산뜻한 봄바람 속에
  소스라쳐 놀라는 건
  무엇 때문이냐
  오 가고 싶고나 고향 가고 싶고나
  북쪽 형제 있는 곳
  가보고 싶어라
  얼싸안고 울어보고 싶어라.

 

 

오늘
    - 구상 -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이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오늘 2

         - 한상원 -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아무도 기다려주지 않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구름다리에 오르면
  잡힐 듯한데
  공허뿐인가
  어덴가 비추는 나의 얼굴
  아, 주름살만 늘었구나

  어차피 가야 하는
  내 고독한 영혼의 안식처
  오늘은 '그레고르 잠자' *
  '디오게네스' **  의 몸짓으로
  한 많은 산을 넘어
  설움 많은 고개를 넘어
  눈물의 골짜기에서
  시의 날개를 펴볼까
  날개여, 태양이여
  저 푸른 창공을 한번만이라도
  날아보자고
  겨울비 맞으며 오늘을 간다

  *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이름
  ** 디오게네스:그리이스의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계통을 이은
'안티스테스'의 제자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 정인섭 -


  서로 눈뜨고 있네
  오늘 저녁 우리나라의 절망 우물들이
  밤바람을 견디며 새 절망 부르고 있네
  어디에 곤한 고향땅 두고 와 있네
  저 들에 하룻길
  흙을 파다 돌아가네
  이 사람아, 지금은 마른 풀에
  내 적신 우물 가득하네
  길어 올려 네게 마시우는 이 단 물
  우리 드러난 몸의 뼈 부끄러워 단단하고
  물 없이 가는 내일 해 아래
  이 쓰디쓴 발바닥에 두리니
  포근하다 썩어가는 풀무덤가여
  뉘어 보아라
  오래 내리지 않는 하늘에 내비치는 우물들
  여기서 닿는 저 산 어둠
  부르며 져 나르면 날이 새는가,
  동트기 전에 절망 우물들
  함께 우리 땅 밑으로 손잡고 있네
  이 사람아, 부르고 있네

 

 

 

오다가다

      - 김억 -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 건가.


산(山)에는 청청(靑靑)

풀잎사귀 푸르고

해수(海水)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山)새는 죄죄

제 흥(興)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길을 찾노란다.


자다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十里浦口) 산(山) 넘어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에 논다.


수로천리(水路千里) 먼 길을

왜 온 줄 아나?

옛날 놀던 그대를

못잊어 왔네.

 

 

오동꽃

          - 이병기 -

 

  담머리 넘어드는 달빛은 은은하고 
  한두 개 소리 없이 내려지는 오동꽃을
  가랴다 발을 멈추고 다시 돌아보노라

 

 

오리걸음

      - 배창환 -

 

나무 한 그루 없는 찌는 운동장, 일렬 종대로 엮인 벌거벗은 식민지 원주민 포로들처럼 머리도 못 들고 말없이 쪼그려 걸어가는

우리 반 계집아이들의 뒷모습은 내게도 너무나 처참하고 낯익은 풍경이다 십년 전 이십 년 전 내 고등학교 교련시간이나 국민학교 뜀틀시간 (그때 나는 바람 부는 대로 흔들리는 갈대 체질이었다)그리고 아버지의 보통학교 시절 큰 칼을 찬 왜놈 선생 앞의 아이들
모두 한 다발로 세월 구분 없이 얽혀드는 희한한 풍경이다 이러므로 세월은 도무지 우릴 위하여 흐른 것 같지가 않다 오리걸음으로 걸어가는 아이들을 보면 훈련소 여름 야산에 엎드려 땀을 바가지로 쏟다가 아아, 차라리 이대로 잠들어 버리기를, 얼마나 간절히, 난생 처음으로 기도의 무서움과 아름다움에 살을 떨던 그날과 지금 이 나라의 선생인 나를 왜 저 땡볕 아래 서러움의 일체감으로 못 박아 두는지 요즈음은 도무지 부끄럼밖에 없어서 아이들을 똑바로 바라보는 일이 드물어진다 지금 내 힘으로 너희를 일으켜 세울 수 없는 일이라면 오늘에 선생이 무어며 학생이 다 무어냐 오늘도 무슨 큰 잘못인지 오래오래 침묵으로 속죄라도 하듯 이 험난한 시절을 선수학습으로 체득하고 있는 우리반 아이들의 훈련시간에 나는 생각한다 도대체 우리는 누굴 위하여 살고 죽으며 누굴 위하여 종을 우리는가 그렇다 오리걸음은 너희와 나뿐 아닌 삼국시대 김춘추 때부터 익혀 온 하늘을 바로 보지 않고 땅만 짚으며 기어가는 방법이다 그러나 너희들, 오리시장의 오리새끼마냥 한번 꽥꽥거리지도 못하고 줄줄이 한 묶음에 팔려 가는 노예들의 몰골을 보는 것 같아 눈감고 싶을 뿐 이곳에 태어날 때부터 우리는 이런 식으로 단단한 한몸인 것을 아아 오리걸음, 아이들과 나를 한없이 작아지게 하는 오리걸음 죽으나 사나 그 안에서 꿈틀거리며 흔들리고 시들어가며 서로 조금씩 껴안아도 내장 깊숙이 내 거라곤 하나 없이 부서져 간 참담한 자유여 우리가 더 작아지기 위하여만 숨쉬는 것이라면 도대체 언제나 한번, 떳떳이 일어서서, 미칠 듯 푸른 하늘을 마음껏 마시며 뛰어서 걸어다닐 수 있을 것이랴 눈물나는 우리나라 아이들아

 

 

 

五 六 島

     - 이은상 -

 

 五六島 다섯 섬이 다시 보면 여섯 섬이
 흐리면 한두 섬이 맑으신 날 五六島라
 흐리락 맑으락 하매 몇 섬인 줄 몰라라.

취하여 바라보면 열 섬이 스무 섬이
 안개나 자욱하면 아득한 먼 바다라
 오늘은 비 속에 보매 더더구나 몰라라.

그 엣날 어느 분도 저 섬을 헤다 못해
 헤던 손 내리고서 五六島라 이르던가
 돌아가 나도 그대로 어렴풋이 전하리라.

 

 

오랑케꽃
           - 이용악 -
    

----- 긴 세월을 오랑캐와의 싸움에 살았다는 우리의 머언 조상들이 
너를 불러 '오랑캐꽃'이라 했으니 어찌 보면 너의 뒷모양이 머리태를 
드리인 오랑캐의 뒷머리와도 같은 까닭이라 전한다-----

아낙도 우두머리도 돌볼 새 없이 갔단다 
도래샘도 띳집도 버리고 강건너로 쫓겨갔단다 
고려 장군님 무지 무지 쳐들어와 
오랑캐는 가랑잎처럼 굴러갔단다

구름이 모여 골짝 골짝을 구름이 흘러 
백년이 몇백년이 뒤를 이어 흘러갔나

너는 오랑캐의 피 한 방울 받지 않었건만 
오랑캐꽃 
너는 돌가마도 털메투리도 모르는 오랑캐꽃 
두 팔로 햇빛을 막아줄께 
울어보렴 목놓아 울어나 보렴 오랑캐꽃   

 

 

오랑캐꽃을 위하여

             - 박남철 -


  2교시째 국어시간
  단원은 오랑캐꽃
  교사는 오랑캐꽃을 모르는 키작은 남자
  첫눈 오는 날처럼
  2학년 5반은 구석구석
  소란스러운 침묵
  오랑캐꽃에 관하여
  한 아이는 풀꽃이라 말하고
  자습서를 믿는 학생은 제비꽃이라 이해한다
  전라도에서 자라난 소녀는 잡초로 발음했다
  눈속에서도 모질게 피어나는
  등록금 밀린 아이가
  오랑캐꽃 한 구절을 읽었을 때
  창밖엔 우리의 소망같은 눈꽃송이
  소복소복 쌓인다
  이내 녹을 희망도 부질없이 쌍여본다
  소녀들의 가슴에도 눈이 내린다
  일기예보에도 없는 눈이
  열다섯살짜리 소녀의
  삶의 계곡에 가 쌓인다
  눈 눈 눈
  따뜻한 눈을 뜬 소녀가 일어선다
  오랑캐꽃
  봄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교사는 책을 덮고 중얼거렸다
  어느덧 분주하던 눈발도 그치고
  오랑캐꽃도 정말은 피지 않았더라

 

 

 

오렌지

     - 신동집 -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오렌지는 여기 있는 이대로의 오렌지다.

더도 덜도 아닌 오렌지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을 벗길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마음만 낸다면 나도

오렌지의 찹잘한 속살을 깔 수 있다.

마땅히 그런 오렌지

만이 문제가 된다.

 

그러나 오렌지에 아무도 손을 댈 순 없다.

대는 순간

오렌지는 이미 오렌지가 아니고 만다.

내가 보는 오렌지가 나를 보고 있다.

 

나는 지금 위험한 상태다.

오렌지도 마찬가지 위험한 상태다.

시간이 똘똘

배암의 또아리를 틀고 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오렌지의 포들한 껍질에
 
한없이 어진 그림자가 비치고 있다.

오 누구인지 잘은 아직 몰라도.


 

오매 단풍 들것네 (일명 -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 김영랑 - 
   

"오매, 단풍 들것네." 
장광에 골 붉은 감잎 날아오아 
누이는 놀란 듯이 치어다보며 
"오매, 단풍 들것네."

추석이 내일모레 기둘리니 
바람이 자지어서 걱정이리 
누이의 마음아 나를 보아라. 
"오매, 단풍 들것네."    

 

 

오만원

    - 박영희 -

 

시 세 편을 보냈더니 오만원을 보내왔다 
어중간한 돈이다 
죽는 소리해서 응해줬더니 
독촉 전화 잦은 <말>에 26,000원 보내주고 
그 길로 시장통에 가 아내의 머리핀을 고른다 
이것도 버릇인가. 
원고료라고 받으면 늘 이렇듯 
무엇이 되었든 하나를 남기려는 버릇이 있다 
오천원짜리 오백원 깎아 
머리핀 하나 사고 
그래도 설레임 남아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당신이야, 나야, 우리 오늘 만리궁성에 갈까? 
전화를 끊고 시계를 보니 5시, 아직도 한시간이 넘게 
남았다 
소주라도 한잔 걸칠까, 아니야, 
지 엄마만 사줬다고 딸아이가 삐치겠지 
남은 돈 계산하다 말고 내친김에 
석 달 전부터 점포정리를 하고 있는 신발가게로 향한다 
점포정리? 
정리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던가 
언론을 한번 보라지 
정치하는 놈들은 또 어떻고 
신발장 정리도 제대로 못하지 않던가 
값이 헐한 운동화 한 켤레를 사면서도 나는 
아내가 좋아하는 잡채밥 한 그릇과 
딸아이가 좋아하는 오므라이스 값을 먼저 계산해둔다 
짜장면 세 그릇은 어쩐지 서러워서다

 

 

오산 인터 체인지

                      - 조병화 -

 

자, 그럼
하는 손을 짙은 안개가 잡는다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산을 넘는 
저수지 마을
삭지 않는 시간 , 삭은 산천을 돈다
등은 ,덴막의 여인처럼
푸른 눈 긴 다리 
안개 속에 초조히
떨어져 서 있고
허허들판
작별을 하면
말도 무용해진다
어느새 이곳
자, 그럼
넌 남으로 천 리
난 동으로 사십 리.

 

 

오산장 시오릿 길

        - 홍일선 -


  어스름 풀무골 잡초 흔들어 훠어이 훠어이
  부질없는 하곡 수매가도 흔들어 훠어이
  새벽 꼴 한 짐 한숨 한 짐 베허놓고
  반나절 행보 나선 장길 시오릿길
  이젠 품앗이도 옛말이 된 마을
  타동 일꾼을 사 보리를 털었지만
  수확이 좋으면 무엇하랴
  훠어이 훠어이 먼지만 뿌옇게 피어나 자갈길
  저희끼리 드문드문 허기끼리 맞닿아 서 있는
  미류나무도 훠어이 빈 달구지도 훠어이
  등짐 진 보리자루마저 각박한 세월
  우리네 무심함을 원망하는 것이냐
  하루 너댓번 다니는 읍내행 버스
  장날은 차장과 짐삯 싸움 진저리 넌저리
  아예 걸어가는 삼일장 오산장 시오릿길
  가엾긴 왼종일 이리 부대껴 저리 부대껴
  꾸벅꾸벅 졸며 살아가는 저희들이나
  농사지어 헐값에 내다 파는 우리네나
  서럽기는 마찬가지인데 훠어이 훠어이
  그렇구나 지난 봄 언 땅 갈아엎듯
  모진 세월 속아 산 세월 갈아 엎어
  우리들도 허리피고 살 날 언제일까
  보리 서 말 등짐 메고 밀린 농약값 걱정
  산자락 윗논 터진 물꼬 걱정
  쉬엄쉬엄 걸어가면 다다를 읍내
  똥값이여 보리가 똥값이여 급하지 않걸랑
  다음 장날 내라던 구장 말이 선한데
  그래도 장터엔 속고 살아가는 농민들로
  지금쯤 한창 법석일텐데 훠어이 훠어이
  사료값도 안나와 에미 소 한 마리
  장터에서 제 손으로 죽인 죄밖에 없는데
  경찰들에게 개처럼 끌려갔다는
  어느 농민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오지만
  오늘은 초사흗날 아버님 제삿날
  쇠고기라도 한 근 사갖고 가야지
  마른 하늘에 소나기가 쏟아지려나
  대낮 천둥 번개가 훠어이 훠어이
  선진 조국 입간판 벼락맞아 훠어이 훠어이
  세상 다 속여도 흙은 못 속인다던
  아버님 생전 말씀도 훠어이 훠어이
  오늘 따라 말벗도 없이 홀로 가는
  답답한 장길 오산장 시오릿길

 

  

오 월

     - 김영랑 -

 

들길은 마을에 들자 붉어지고

마을 골목은 들로 내려서자 푸르러졌다.

바람은 넘실 천(千) 이랑 만(萬) 이랑

이랑 이랑 햇빛이 갈라지고

보리도 허리통이 부끄럽게 드러났다.

꾀꼬리는 엽태 혼자 날아 볼 줄 모르나니

암컷이라 쫓길 뿐

수놈이라 쫓을 뿐

황금빛 난 길이 어지럴 뿐
 
얇은 단장하고 아양 가득 차 있는

산봉우리야 오늘밤 너 어디로 가 버리련?
 

 

五 月 
     - 김동리 -
 

5월의 나무들 날 보고 
멀리서부터 우쭐대며 다가온다

언덕 위 키 큰 소나무 몇 그루 
흰구름 한두 오락씩 목에 걸은 채 
신나게 신나게 달려온다

학들은 하늘 높이 구름 위를 날고 
햇살은 강물 위에 금가루를 뿌리고

땅 위에 가득 찬 5월은 내 것 
부귀도 仙鄕도 부럽지 않으이.

 

 

 

오월비

        - 이승철 -


  저 비를 알아, 오월비
  오월산에 오월강에 더러운 것 다 벗어 꽃물 지는 비
  움츠러든 넋쪼가리 있어 한풀한풀 적시며
  육신에 그대 부끄러운 육신에 저며파고 떨구는 비
  저 부르짖음을 아는가, 당신
  오월의 자식들이 죽음을 마다 않고 각목 든 손길에
  뼈마디에 움푹 패인 아버지 잔주름에 머리칼에 꽂혀
  천년 원한에 시름겨운 비
  때론 송곳처럼 때론 솜털처럼 살과 살의 그늘에 나려
  아스팔트에 대인시장 좌판대에 와서 머무는
  비, 그날의 결단이었다
  죽음을 넘어 끝내 압제를 거부하기에 죽음과 한몸이 되던
  오월의 아들딸들이 맞이하던 비
  광주천에 가서는 피 맑은 강물이 되던 우리여
  그 누가 총칼을 두려워하지 않으랴
  그렇지만 그걸 송두리째 녹슬게 하던 너--옥빛 함성 실비여
  너무 시련에 가득차다 이 삶
  눈매 서글픈 외론 비문에 쓰디쓴 소주를 붓고
  망월리에 붙박혀 못 떠나는 사람아
  너무 곤혹스럽다 오월비
  젖은 새처럼 힘겹게 파닥거리지만, 이걸 우리 손으로 깨부셔야 하는
시절에
  너는 무얼 하느냐
  싸움터에 와서 쌈 싸우느냐
  유복자는 살아, 지금도 싸워 싸워 싸우는데
  어쩜 녹두의 부릅뜬 눈으로 흰옷자락의 피묻음으로 오는
  오월비여, 너는
  두번 다시 탄식이 아니었다 더더욱 그건
  빗물이 아니었다 진달래꽃보다 더 붉은
  피의 뒤범벅 생명의 깨어남이었다
  오월 광주에 내리는 저 억척같은 비는.

 

 

 

5월에

    - 박혜숙 -


  해그늘 깊은 산자락 숲속에서
  비밀의 이야기꾼은
  한 자루 가득
  수런수런대는 이야기를 담아
  아카시아꽃 향기에 달빛이 취한
  마을 한가운데 쏟아 놓는다

  어느날엔가 증발되었던 언어도
  실어증이란 이름으로 남아 있다가
  작은 자루 안에서 꿈틀대며 나와
  밀밭 사이에서
  신선한 밤이슬을 삼키며
  섬광을 뿜는다

  5월의 언어는
  동화를 만드는 기호가 되어
  우리들의 어린날
  정말 신록이 푸르던 날을 찾아가는
  숨박꼭질의 술레가 된다.

 

 

 

5월이 오면

         - 강말주 -


  고운 가슴 쥐어짜
  뿌려 놓은 정성으로
  5월은 오는 것.

  산에도 들에도
  아씨의 마음.

  시냇물에 머리 씻어
  곱게 빗은 실버들도

  훈풍에 솟는 정
  전하고파

  릴리리야 피리소리
  흘러간단다.

 

 

 

오월의 유혹
            - 김용호 -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양 치오르는 가슴을랑
네게 맡기고 사양斜陽에 서면

풍겨 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록이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에 깃들여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오월 초하루 신새벽에

           - 박선욱 -


  어머니
  난 지금 오월이 마악 걸어오는
  새벽들판에 서 있읍니다
  저 밀려오는 아득한 향내는
  오월의 풋풋한 숨결이 아닌가요
  들리네요 어머니
  잿등을, 돌고개를 한달음에 뛰어오는
  오월의 힘찬 발자욱 소리 들리네요
  시계는 방금 내 가슴 속 두 시를 치고
  나는 흥분에 겨워 죽을 것만 같읍니다
  눈을 감으면 그날의 아우성 총소리
  삼월 일일에도 사월의 하늘 아래서도
  저녁노을은 붉게 피흘렸지요 칸나보다도
  장미꽃보다도 더 붉게 타올랐지요
  보세요 어머니, 안개처럼
  폭풍은 가고 또 오월이 오는 들판을
  산 넘어 산을 넘어 오시는 오월이
  강 건너 강을 건너 오시는 오월이
  이다지도 못 견딜 그리움인 것을
  내 오늘에야 비로소 깨닫습니다
  그러나 어머니
  차가운 새벽공기를 가르며
  골목을 돌아나오는 오월은, 이제는
  더이상 눈물투성이가 아니데요
  군인이 손에 총검을 쥐고 있듯이
  다만 튼튼한 삽자루 하나 쥐고서
  오월은 성큼성큼 일터로 걸어가데요
  형형한 눈빛으론 새벽별 우르러며
  삽날에선 맑은 피 방울지며 흐르며

 

 

 

5월의 화단

         - 오일도 -

 

  5월의 더딘 해 고요히 나리는 화단

  하루의 정열도
  파김치같이 시들다.

 

  바람아, 네 이파리 하나 흔들 힘 없니!

  어두운 풀 사이로
  월계의 꽃 조각이 환각에 가물거린다.

 

 

오줌싸개 지도

        - 윤동주(尹東柱) -


빨래줄에 걸어 논

 요에다 그린 지도

지난 밤에 내 동생

 오줌 싸 그린 지도


꿈에 가 본 엄마 계신

 별나라 지돈가?

돈 벌러 간 아빠 계신

 만주 땅 지돈가?

 


오징어

     - 최승호 -

 

 

 

오징어배를 타고

오징어를 잡으러 가자

오라 오라

오징어들아 오라

오 날쌘 오징어

오 먹물을 쏘아대는 오징어

오 맛 좋은 오징어

오라 오라 오징어들아

오늘은 떼지어 오라

 

 

 그 오징어/최승호

 

그 오징어 부부는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부둥켜안고 서로 목을 조르는 버릇이 있다

 

그 오징어 부부는

싸울 때

서로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

 

그 오징어 부부는

다리가 뒤엉킨 채

징하고 징그러운 세월을 살아왔다

 

그 오징어는 죽을 때

혼자

다리로 얼굴을 감싸고 울지 모른다

 

눈이 축구공만한 초대왕오징어는 길이 9미터의 허무를 끌고 캄캄한

심해의 고요 속을 돌아다닌다, 라고 눈 오는 밤 백지에 쓴다

 

오징어 4


불 붙은 오징어의 발들이 
 연기 나는 머리를 움켜잡는다 
 마치 괴로운 사람을 흉내 내듯이

 둥그렇게 몸을 말아 
 연기를 뿜는 
 오, 징그러운 고기, 오징어여

 위대하다 조물주는 
 우리의 눈을 빚어주고 
 도무지 그를 못 보게 하였으니

 우리는 눈뜬 장님들로서 
 지팡이도 없이 길을 가다 그의 손에 찢어지리라 
 
오징어 5

 

우리는 바쁘게 늙어 왔고 바쁘게 죽어 간다
나의 전부라고 믿었던 이 육체는
썩을 두엄더미 희디힌 구름
나는 결코 미이라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오징어는
단백질이 풍부한 미이라가 되어
시끄러운 시장이나 식료품 가게에 진열된다
오징어를 먹기전에
오징어의 바다를 뒤돌아 보라
오징어가 죽든 살든 무심한 바다
출렁이는 거대하고 푸른 물북인 바다를

 

 

 

오후의 마천령(摩天嶺)

              - 박세영(朴世永) -


장마물에 파진 골짜기,

토막토막 떨어진 길을, 나는 홀로 걸어서

병풍같이 둘린 높은 산 아래로 갑니다.

해 질 낭*이 멀었건만,

벌서 회색의 장막이 둘러집니다.


나의 가는 길은 조그만 산기슭에 숨어버리고,

멀리 산아래 말에선 연기만 피어 오를 때,

나는 저 마천령*을 넘어야 됩니다.

나는 생각합니다, 저 산을 넘다니,

산을 싸고 도는 길이 있으면, 백리라도 돌고 싶습니다.

나는 다만 터진 북쪽을 바라보나,

길은 기어이 산 위로 뻗어 올라 갔습니다.


나는 장엄한 대자연에 눌리어,

산같은 물결에 삼켜지는 듯이,

나의 마음은 떨리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빠삐론* 사람처럼,

칼을 빼어 든 무녀(巫女)처럼,

산에 절할줄도 몰랐습니다.


나는 기어이 고개길로 발을 옮겼습니다.

불긋불긋 이따금 고갯길 토막이 뵈는 듯 마는 듯,

이몸이 어디로 가질지도 모르는, 사로잡힌 마음이여,

이리구도 천하를 근심하였나, 스스로 마음먹습니다.


그러나 나는 지금은 갑옷을 입은 전사(戰士)와 같이,

성난 이리와 같이,

고개길을 쿵쿵 울리고 올라갑니다.

거울 같은 산기슭의 호수는 나의 마음을 비처 보는 듯,

올라가면 오를수록 겁나던 마음이야 옛일 같습니다.


나는 마천령 위에서 나의 오르던 길을 바라봅니다.

이리 꼬불, 저리 꼬불, W자, I자, N자,

이리하여 나는 승리의 길, WIN자를 그리며 왔습니다.


모든 산은 엎디고,

왼 세상이 눈 아래서 발버둥칠 때,

지금의 나의 마음은 나를 내려다보든 이 산이나 같이 되었습니다.

이 장쾌함이여,

이 위대함이여,

나는 언제나 이 마음을 사랑하겠습니다.


* 마천령 : 함경남도 단천(端川)과 함경북도 성진(成津) 사이의 고개. 해발 725m.

* 해 질 낭 : 해 질 양, 해가 지려 하는 것.

* 빠삐론 : 바빌론

 

 

 

오후 9시의 남춘천역
             - 박용하 -

슬픔이 뒤범벅된 강물 속으로 
꽃피는 폭력처럼 낙엽으로 흩어져가는 시간들 
누구나 역에서는 바람보다 빨리 흩어진다 
그것은 불유쾌한 일이다, 하지만 이별이란 시간의 정지 속엔 
인생에 대한 어떤 완성이 있다 
도대체 어디로 갈 수 있단 말인가 
대합실 의자에 앉아 그는 허공을 허하게 들여다본다 
그는 서울로 가기 위해 피우던 담배를 끄고 
어둡고 메마른 공기를 구두로 짓이긴다 
그래도 공기는 편편해 꿈보다 쉽게 친숙해질 수 있다 
그러나 그곳은 너무 깊게 잠들 수 없는 꿈의 폐차장 
광풍이 몰아치고 폭우가 몰려와 나무를 찢어도 
천천히 물의 길을 이루는 안개의 달과 사막 
지구로 흘러들어온 그, 
그의 죽음은 저 지구 밖으로 나가는 것일까 
불행하게도 알지 못한다 
우리는 누구나 나뭇잎 하나 누일 작은 의자로 돌아간다 
죽음보다 더 빨리 움직이는 열차 앞으로 
규겨진 휴지처럼 몇 사람들은 어둠으로 접힌다 
그는 불완전하게 어둠을 구독한다 
반 캔맥주처럼 떨어져 처지는 운명들 속으로 
푸르게 깃들이는 비의 육체 
그는 돌이킬 수 없을 때만이 생을 발설한다 
아아, 그는 어디로 가는가

 

 

 

 

올 여름의 인생공부

                - 최승자 -

 모두가 바캉스를 떠난 파리에서 
나는 묘비처럼 외로웠다. 
고양이 한 마리가 발이 푹푹 빠지는 나의 
습한 낮잠 주위를 어슬렁거리다 사라졌다. 
시간이 똑똑 수돗물 새는 소리로 
내 잠 속에 떨어져내렸다. 
그러고서 흘러가지 않았다. 

엘튼 죤은 자신의 예술성이 한물갔음을 입증했고 
돈 맥글린은 아예 뽕짝으로 나섰다. 
송 x 식은 더욱 원숙해졌지만 
자칫하며 서 x x 처럼 될지도 몰랐고 
그건 이제 썩을 일밖에 남지 않은 무르익은 참외라는 뜻일지도 몰랐다. 

그러므로, 썩지 않으려면 
다르게 기도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다르게 사랑하는 법 
감추는 법 건너뛰는 법 부정하는 법. 
그러면서 모든 사물의 배후를 
손가락으로 후벼 팔 것 
절대로 달관하지 말 것 
절대로 두통하지 말 것 
언제나 아이처럼 울 것 
아이처럼 배고파 울 것 
그리고 가능한 한 아이처럼 웃을 것 
한 아이와 재미있게 노는 다른 한 아이처럼 웃을 것. 
                                                                                         

 


옹손지(饔손志)
         - 김관식 -
 

해 뜨면
굴 속에서
기어나와
노닐고,

매양 나물죽 한 보시기
싸래기밥 두어 술
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다.

 

남루(襤樓)를 벗어
바위에 빨아 널고
발가벗은 채 쪼그리고 앉아서
등솔기에 햇살을 쪼이다.

해지면 
굴 안으로
기어들어
쉬나니.

 

 

 

옮겨 앉지 않는 새

              - 이탄(李炭) -


우리 여름은 항상 푸르고

새들은 그 안에 가득하다.

새가 없던 나뭇가지 위에

새가 와서 앉고,

새가 와서 앉던 자리에도 새가 와서 앉는다.


한 마리 새가 한 나뭇가지에 앉아서

한 나무가 다할 때까지 앉아 있는 새를

이따금 마음 속에서 본다.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옮겨 앉지 않는 한 마리의 새.

보였다 보였다 하는 새.


그 새는 이미 나뭇잎이 되어 있는 것일까.

그 새는 이미 나뭇가지일까.

그 새는 나의 언어(言語)를 모이로

아침 해를 맞으며 산다.

옮겨 앉지 않는 새가

고독의 문(門)에서 나를 보고 있다.

 

 


용인 지나는 길에
     - 민영 -
 

저 산벚꽃 핀 등성이에
지친 몸을 쉴까.
두고 온 고향 생각에
고개 젓는다.

到彼岸寺에 무리 지던
연분홍빛 꽃 너울.
먹어도 허기지던
三春 한나절.

밸에 역겨운
可口可樂 물 냄새.
구국구국 울어 대는
멧비둘기 소리.

산벚꽃 진 등성이에
뼈를 묻을까.
소태같이 쓴 입술에
풀잎 씹힌다.

  

* 可口可樂 : 코카콜라.

 

 

 

용진가(勇進歌)/작자미상

 

1. 요동(遼東) 만주 넓은 뜰을 쳐서 파하고

  여진국(女眞國)을 진멸하고 개국(開國)하옵신

  동명(東明王)과 이지란(李之蘭)의 용진법(勇進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주: 李之蘭(1331-1402), 고려 말 조선 초의 장군, 공신.

 

<후렴>

  나가세. 전쟁장으로! 나가세. 전쟁장으로!

  검수도산 무릅쓰고 나아갈 때에

  독립군아 용감력(勇敢力)을 더욱 분발해

  삼천만 번 죽더라도 나아갑시다. 

 

주:【검수도산(劍水刀山)】검의 바다와 칼의 산, 불교의 지옥 중의 하나.

 

2. 한산도의 왜적들을 쳐서 파하고

  청천강수 수병(水兵) 백만 몰살하옵신

  이순신과 을지(乙支) 공(公)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3. 배를 갈라 만국회(萬國會)에 피를 뿌리고

  육혈포로 만군 중에 원수 쏴 죽인

  이준(李儁) 공과 안중근(安中根)의 용진법대로

  우리들도 그와 같이 원수 쳐보세.

 

주 : 육혈포(六穴砲), 탄알을 재는 구멍이 여섯 개 있는 권총. 리볼버.

 

4. 창검 빛은 번개 같이 번쩍거리고

  대포알은 우뢰(雨雷) 같이 퉁탕거릴 제

  우리 군대 사격 돌격 앞만 향하면

  원수 머리 낙엽 같이 떨어지리라.

 

 

5. 횡빈 대판 무찌르고 동경 들이쳐

  동에 갔다, 서에 번뜩 모두 한 칼로

  국권(國權)을 회복하는 우리 독립군

  승전고(勝戰鼓)와 만세 소리 천지 진동해.

 

주: 횡빈(橫濱)=요꼬하마, 대판(大阪)=오사카, 동경(東京)=도쿄.

 

 

 

雨期 
       - 권혁재 -


토지분쟁 소송에서 패소를 한 날 
 울음바다가 된 소작농 동네를 
 장정들이 무리를 지어 빗물로 떠돌다 
 바다에 몸을 던져 울분을 끊었다

 막막한 절망의 낯빛으로 돌아 온 
 아부지 몸에 붙은 술냄새와 비냄새가 
 먼저 괴성을 지르며 방 안 구석구석 
 기막힌 사연처럼 들어와 앉았다

 크흑 크흑 숨죽여 울던 어머니는 
 감자 같이 동글동글한 삼남매 중에서 
 잠든 막내의 얼굴을 어루만지다가 
 초상 아닌 초상에 실신을 하였다

 그 해 장마는 그렇게 왔다 
 어머니의 가슴 속에서 후두둑거리는 
 장대비로 그렇게 시작되었다.

갯벌물에 불은 장정들의 손에는 
 죽어서도 소유하지 못할 
 한 줌의 흙이 꼭 움켜져 있었다

 분노가 연일 마을을 휘돌아 
 몇 명의 장정들이 더 바다에 몸을 던져 
 긴 장마만큼이나 겁에 질리게 하였다

 그 해 장마는 그렇게 왔다 
 불혹이 된 막내의 세월 속에서도 
 신대 마을의 슬픈 전설을 알리는 
 장대비가 휘파람소리를 내며 내렸다

 증인 출두하라는 법원 통지서에 
 팔순의 장정이 두 주먹 불끈 쥐고 
 북해도를 또 넘어갔다

雨期였다 
 다시 雨期였다.

 

 

 

우리가 기다린 님은

         - 박진관 -


  눈물흘리며 살아야겠네
  눈물 쏟으며 한 생을 살아 넘겨야 하겠네.
  죽을 먹고 살아도 한민족 품에 안겨
  가슴에 저린 한을 풀어보며 살아야겠네.
  무너질 것도 없는 이 산천두덕에
  무너져 내리는 폭풍우 같은 것은 무엇이던가.
  번쩍거리면서 번쩍꺼리면서
  뒤돌아서는 것은 무명을 밝히는 것인지요.
  이 몸뚱이 멀쩡한데
  이 몸뚱이 멀쩡한 육신인데
  갈기갈기 찢는 몸뚱이는
  누구를 짓이긴 꿈이더냐.
  한번만 믿어다오
  한번만 믿어주오
  이 몸뚱이 끌고갈 몸뚱이 오게 되면
  푸른무덤을 만들어 수레를 끌고 오리니
  그날 오기만을 기다리며 살리라,
  기다리다 지치면 땅에 쓰러져
  혀를 내밀며 우리가 기다린 님 오기만을 기다릴래요,
  우리가 기다린 님은 꽃가마 타고
  봄이 오는 날 봄과 같이 오리라,
  눈물 흘리며 살아야겠네.
  눈물 쏟으며 한 생을 살아야겠네.

 

 

 

우리가 물이 되어 
                        - 강은교 - 

 

우리가 물이 되어 만난다면
가문 어느 집에선들 좋아하지 않으랴
우리가 키 큰 나무와 함께 서서
우르르 우르르 비 오는 소리로 흐른다면

흐르고 흘러서 저물녘엔
저 혼자 깊어지는 강물에 누워
죽은 나무 뿌리를 적시기도 한다면
아아, 아직 처녀인
부끄러운 바다에 닿는다면

그러나 지금 우리는
불로 만나려 한다
벌써 숯이 된 뼈 하나가
세상에 불타는 것들을 쓰다듬고 있나니

만 리 밖에서 기다리는 그대여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 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

 

 

 

우리가 죽음으로

     - 박진관 -


  우리가 죽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죽어서 새되어
  이 하늘 저 하늘
  날아다니는 파랑새.

  소리내며 날으리
  소리 지르며 울으리
  가는 봄 오는 봄을
  가슴에 안고
  이 세상을 지켜보리,

  가거라
  어서 가거라
  살아서 죄되지 않는 곳
  그곳으로 가거라
  새야 새야 파랑새야
  죽어서 죄되지 않는 곳으로
  새야 새야 파랑새야,

  너를 부르다 죽으면
  너를 부르다 죽으면
  이산 저산에 날아다니는
  파랑새 되어 울으리.

 

 

 

우리가 파문이듯

           - 이창기 -


  1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견디세요 소주 반 병과 약간의 안주
  오이 한 조각과 쇠소리 노련한 안전을 말이 말이 아니라는
  말의 처지와 아버지가 악이라는 사무침을 치약 냄새나는
  웃통을 벗고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토하세요 일기를 외쳐대듯
  어제도 내일도 이해되지 않는 황홀함 역력한 울음이
  오래도록 숨어서 날이 새도록 깊어지는
  밤,
  무릎, 물렁뼈, 불굴의 묘

  2
  절벽을 밀면서 엿장수가 가고 있어요 무딘 가위 소리에
  절벽이 점점 날카롭게 갈라지고 있어요 주위에 나뭇잎들도
  반씩 잘라져요 속고 있는 거예요 잘린 부분마다 온통
  낙인이 찍혀 있어요 기념 우표처럼 세 살 버릇이지만
  이미 사랑도 세 살 버릇이지만

  3
  파란 불은 가시고 노란 불은 돌아 가시고 빨간 불은 서시고
  숨쉬고 마치고 느끼고 묻고 따오고 말줄이고 하는 표와
  할 말 없음표 웃김표 조용함표 구속시킴표
  자유스럼표 술취함표 춤추기표 잠자기표 헤어짐표
  겉돌기표 박수침표 말속임표 등의 아직 탈옥하지 않은
  표들과 함께 살게 하자 우리 말 속에 쌍소리처럼
  영원하게 살게 하자 아 살게 하자 정식형
  불빛도 없는 열 + 자 복판에 나도 섰소

  4
  내 이름이 황인종으로 위장한 나를 의심하지 않듯
  나무는 개처럼 자라고
  나는 입사용 이력서의 위 사실과 틀림없이
  자거나 깨어 있으며
  술을 마시면 술에 취하고
  담배를 피우면 담배를 피우는 자세를 취하며
  잠을 자면 눈을 감아야 하는 줄도 아는
  종종 병신 같은 나를
  김 회장님의 친구이면서도 눈꼽만큼도
  의심할 줄 모른다

  5
  사람들이 살아가는 순간에도 TV드라마처럼
  음악이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가 헤어지거나 사랑할 때
  또는 복통이 일거나 현기증이 날 때도
  그에 어울리는 색깔의 음악이
  유유히 흘러나왔으면 좋겠다
  거짓말처럼 사는 우리가 파문이듯

 

 


 우리나라 꽃들에겐

                 - 김명수 -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 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우리 난실리

       - 조병화 -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삽니다

 

잘 살자는 꿈을 먹고 살기 위하여
부지런히 공부하며 열심히 일합니다

 

서로 사랑하며
서로 도우며

서로 아끼며

 

대대손손 영원히 이어 갈 
잘 사는 고향만들기

 

우리 난실리 고향 사람들은 
아름다운 그 꿈을 먹고 삽니다

 

 

 

우리는 포플라

       - 마광수 -

 

  포플라는 오늘도 몸부림쳐 날아오르고 싶어 한다.
  놓쳐버린 그 무엇도 없이
  대지의 감미로움만으로는 아직 미흡하여

  다만 솟구쳐 날아오르는 새가 부러워
  끝간 데 없이 뻗어나간 하늘이 부러워
  바람이 부러워
  포플라는 자유의 의미도 모르는 채
  언제껏 손을 쳐들고
  흔들고만 있다.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날아오르라!
  땅 속에 묻어버린 꿈, 역사에 지친 생활의 빛에
  체념, 권태로 하여 잃어버린
  네 생명의 자존심 섞인 의지에!
  아무리 흔들어 보아도 손에 잡히지 않지만
  아픔도 잊고 세월도 잊고 사랑도 잊고
  포플라는 오늘도 안타깝게 손을 휘저어 본다.

  명백히 놓쳐버린
  그 무엇이라도 있다는 듯이

 

 

 

우리들은  - 김해화 -
       --인부수첩 1


  우리는 별을 지우고
  우리는 별을 그릴 수 있다.
  하늘을 그리고 땅을 그리고
  우리는 모두를 지울 수 있다.

  우리는 우리들을 지우고
  그렇다 우리들의 비겁 우리들의 가난을 지우고
  우리는 우리들을 그릴 수 있다.
  우리들의 길들지 않은 노동으로
  건강한 혁명도 그릴 수 있다.
  어둠이여
  어둠보다 깊은 체념이여
  우리가 휘두르는 망치 아래 휘어지고 끊기는 철근
  그것들과 함께 묶여
  뼛속까지 스며서야 비로소 멈추는 아픔을
  원색의 욕설과 독한 술로 지우듯
  우리는 어둠을
  어둠보다 깊은 체념을 지울 수 있다.

  우리는 노래를 지우고
  우리는 노래를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눈물을 지우고
  우리는 눈물을 그릴 수 있다.

  우리는 모두를 지우고
  우리는 모두를 그릴 수도 있다.

 

 

 

우리들은 샘물에

              - 구자운 -

 

  저물녘 흥청대는 이끼를 뜯으면서
  우리들은 샘물에 씻기는 해골일 걸세.
  소금인 양 흰 덩어리 이루어
  아늑한 깊은 수풀의 길표 옆에서.
  점백이 뱀이 움틀거린다.
  전엔 희망이었을 엷은 눈을 뜨고서
  반역의 바위를 물어뜯을 때,
  우리들은 꿈꾸느니, 어슬녘의 파선을,
  검은 절망의 물결 드높이
  벼락불의 축복을 가져오며,
  허무의 고요가 기슭으로 밀려닥침을
  그리고 갓난 아이의 울음이 어머니의 오장을 꿰뚫음을,
  캄캄한 어둠에서 아침이 태어남을,
  노여움이 아니고 배의 키바퀴도 아니고,
  영롱한 맑은 숨결로 엉긴
  소리들이 날개 이루어 파닥거려 옴을.

  우리들은 밤잠에 잠기는
  썩어 버린 관 속의 해골일 걸세.
  빗물인 양 내리는 나뭇잎의 입맞춤에 덮인,
  그리고 가끔씩 하품을 하며 있는 야심 없는 꽃,
  묻혀서 보이진 않지만 가장 뚜렷한
  작은 거울 쪽.

 

 

 

우리들의 이름자

         - 정두리 -


  뉴욕 라구아디아 공항에서 만난
  내 언니는 눈화장이 흐미하도록 울었다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달라진 것을 살피고
  확인한 지난 밤
  엇갈리는 밤과 낮을 탓하며
  해가 중천에 이르도록
  빨간 집 이층에서 잘수록 모자라는 잠에 항복이다
  길 건너편 집
  제약회사 그만 두고 이민 온 부부와
  과일주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그 남자는 무교동의 저녁을 추억하고
  그의 아내는 그런 일쯤이야 일축하고 웃는다
  못 견딜 미움도 없어져 버리는
  뜨내기 기분이
  더러 다행일 수 있겠다 싶은 식탁엔
  석필로 썼다 지웠던 우리들의 이름자
  이적지 잊고 있던 어릴 때의
  아명까지 버젓이 나타나고
  되물릴 수 없는 하얗고 동그란 얼굴의
  계집아이 하나가
  목소리가 달라져서 턱을 괴며 앉았고
  쥐포 굽는 냄새 질펀한 사투리
  우리의 몸은
  허드슨 강을 질러
  막을 길 없이 밀려가고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 이해영 -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삶의 통로를 통해 본
  우리의 예견이
  그 죽음을
  인지하고 있었다.

  자욱히 연기가 내리듯
  우리 생의
  암울이 내리고
  그것이 커져서 마침내
  우리의 사랑을
  덮고 있었다.

  오직
  피맺힌 생생함으로
  밝혀 든
  명부의 등불.

  암울히 빛나는
  그
  빛둘레에서
  우리는
  어둡게 타오르는
  죽음에의 의지를
  읽고 있었다.

  이미
  깨쳐 버릴 수 없는
  크나큰 기대로
  타오르는
  죽음에의 원망을
  보고 있었다.

  --우리들의 의식에서
  그 죽음은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우리선생 백결

         - 손동연 -


  대처도 버리고 문하생도 다 끊고
  이 땅의 무등빈자로 그대 홀로 나앉아서
  남루의 흥겨운 길도 먼저 알고 행하느니

  덕지덕지 기운 옷이 어디 생의 전부냐고
  건강한 병 하나 얻어 뿌리 깊게 앓다 보면
  보아라 거문고 한 채 저절로 울리는 걸.

  쿵덕 쿵덕 방아소리 하늘을 울려, 이웃집은
  높고 낮은 웃음소리 하늘을 울려, 이웃집은
  그래도 훔치지 마라 내자여 네 옷고름.

  절구통마다 가득 고인 배고픔도 덜어내고
  울타리 친 세상의 눈도 잠시 뒤에 맞기로 하고
  이제는 대악(방아타령)한 가락 퉁길밖에, 그밖에...

  속도 벗고 도도 벗고 그저 무위인 채로
  죄없이 서러운 거문고 한 채 뜯다 보면
  가난도 빚 하나 없이 제 집 짓고 들앉으신.

 

 

 

우리 살던 옛집 지붕

         - 이문재 -


  마지막으로 내가 떠나오면서부터 그 집은 빈 집이 되었지만
  강이 그리울 때 바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강이나 바다의 높이로 그 옛집 푸른 지붕은 역시 반짝여 주곤 했다.
  가령 내가 어떤 힘으로 버림받고
  버림받음으로 해서 아니다 아니다
  이러는게 아니었다 울고 있을 때
  나는 빈 집을 흘러나오는 음악 같은
  기억을 기억하고 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에는
  우리가 울면서 이름 붙여준 울음 우는
  별로 가득하고
  땅에 묻어주고 싶었던 하늘
  우리 살던 옛집 지붕 근처까지
  올라온 나무들은 바람이 불면
  무거워진 나무잎을 흔들며 기뻐하고
  우리들이 보는 앞에서 그 해의 나이테를
  아주 둥글게 그렸었다
  우리 살던 옛집 지붕 위를 흘러
  지나가는 별의 강줄기는
  오늘밤이 지나면 어디로 이어지는지

  그 집에서는 죽을 수 없었다
  그 아름다운 천정을 바라보며 죽을 수 없었다
  우리는 코피가 흐르도록 사랑하고
  코피가 멈출 때까지 사랑하였다
  바다가 아주 멀리 있었으므로
  바다 쪽 그 집 벽을 허물어 바다를 쌓았고
  강이 멀리 흘러나갔으므로
  우리의 살을 베어내 나뭇잎처럼
  강의 환한 입구로 띄우던 시절
  그 시절은 별의 강줄기 별의
  어두운 바다로 흘러가 사라지는
  새벽 그 시절은 내가 죽어
  어떤 전생으로 떠돌 것인가

  알 수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그 집을 떠나면서
  문에다 박은 크다란 못이 자라나
  집 주위의 나무들을 못 박고
  하늘의 별에다 못질을 하고
  내 살던 옛 집을 생각할 때마다
  그 집과 나는 서로 허물어지는지도 모른다 조금씩
  조금씩 나는 죽음 쪽으로 허물어지고
  나는 사랑 쪽에서 무너져 나오고
  알 수 없다
  내가 바다나 강물을 내려다보며 죽어도
  어느 밝은 별에서 밧줄같은 손이
  내려와 나를 번쩍
  번쩍 들어 올릴는지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 안장현 -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내 마음과 네 마음을 바꾸는 일이다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내 눈과 네 눈을 바꾸는 일이다

 

우리에게 한 줄기 빛이 있다면 
내 귀와 네 귀를 바꾸는 일이다

 

 

우리 오빠와 화로 
                        - 임화 -

 

사랑하는 우리 오빠 어저께 그만 그렇게 위하시던 
오빠의 거북 무늬 질화로가 깨어졌어요 
언제나 오빠가 우리들의 ‘피오닐’ 조그만 기수라 부르는 영남(永南)이가 
지구에 해가 비친 하루의 모-든 시간을 담배의 독기 속에다 
어린 몸을 잠그고 사온 그 거북 무늬 화로가 깨어졌어요

그리하여 지금은 화(火)젓가락만이 불쌍한 영남(永男)이하구 저하구처럼 
똑 우리 사랑하는 오빠를 잃은 남매와 같이 외롭게 벽에 가 나란히 걸렸어요

오빠, 
저는요, 저는요, 잘 알았어요 
왜,그날 오빠가 우리 두 동생을 떠나 그리로 들어가신 그날 밤에 
연거푸 말은 궐련[卷煙]을 세개씩이나 피우시고 계셨는지 
저는요, 잘 알았어요 오빠,

언제나 철 없는 제가 오빠가 공장에서 돌아와서 고단한 저녁을 잡수실 때 
오빠 몸에서 신문지 냄새가 난다고 하면 
오빠는 파란 얼굴에 피곤한 웃음을 웃으시며 
'네 몸에선 누에 똥내가 나지 않니'하시던 세상에 위대하고 용감한 
우리 오빠가 왜 그날만 말 한 마디 없이 담배 연기로 방 속을 메워 버리시는 
우리 우리 용감한 오빠의 마음을 저는 잘 알았어요 
천정을 향하여 기어올라가던 외줄기 담배 연기 속에서
오빠의 강철 가슴 속에 박힌 위대한 결정과 성스러운 각오를 
저는 분명히 보았어요 
그리하여 제가 영남(永男)이의 버선 하나도 채 못 기웠을 동안에 문지방을 때리는 
쇳소리 마루를 밟는 거칠은 구둣소리와 함께 가 버리지 않으셨어요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우리 위대한 오빠는 불쌍한 저의 남매의 근심을 
담배 연기에 싸 두고 가지 않으셨어요

오빠,그래서 저도 영남(永男)이도 
오빠와 또 가장 위대한 용감한 오빠 친구들의 이야기가 세상을 뒤집을 때 
저는 제사기(製絲機)를 떠나서 백 장에 일 전짜리 봉통(封筒)에 손톱을 부러뜨리고 
영남(永男)이도 담배 냄새 구렁을 내쫓겨 봉통(封筒) 꽁무니를 뭅니다 
지금,만국지도 같은 누더기 밑에서 코를 고을고 있습니다

오빠,그러나 염려는 마세요 
저는 용감한 이 나라 청년인 우리 오빠와 핏줄을 같이 한 계집애이고 
영남(永男)이도 오빠도 늘 칭찬하던 쇠같은 거북무늬 화로를 사온 오빠의 동생이 아니예요 
그리고 참 오빠 아까 그 젊은 나머지 오빠의 친구들이 왔다 갔습니다 
눈물 나는 우리 오빠 동무의 소식을 전해 주고 갔어요 
사랑스런 용감한 청년들이었습니다 
세상에 가장 위대한 청년들이었습니다

화로는 깨어져도 화(火)젓갈은 깃대처럼 남지 않았어요 
우리 오빠는 가셨어도 귀여운 ‘피오닐’ 영남(永男)이가 있고 
그리고 모든 어린 ‘피오닐’의 따뜻한 누이 품 제 가슴이 아직도 더웁습니다

그리고 오빠, 
저뿐이 사랑하는 오빠를 잃고 영남(永男)이뿐이 
굳세인 형님을 보낸것이겠습니까
슳지도 않고 외롭지도 않습니다

세상에 고마운 청년 오빠의 무수한 위대한 친구가 있고 
오빠와 형님을 잃은 수없는 계집아이와 동생 
저희들의 귀한 동무가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다음 일은 지금 섭섭한 분한 사건을 안고 있는 
우리 동무 손에서 싸워질 것입니다

오빠, 오늘 밤을 새워 이만 장을 붙이면 사흘 뒤엔 
새 솜옷이 오빠의 떨리는 몸에 입혀질 것입니다 
이렇게 세상의 누이동생과 아우는 건강히 오늘 날마다를 싸움에서 보냅니다 
영남(永男)이는 여태 잡니다, 밤이 늦었어요 ...

 

 

우리옷
         - 博川 최정순 -


여인네 입으면 우아하고
남정네 입으면 학 같은
선 곱고 맵시 나는 한복

무명직물 오방색
천연염색에 하늘 기운 들여
내자의 빼어난 바늘질 솜씨로
한 땀 한 땀 정성들여 만든
우리의 고유 의상

애옥살이 궁핍하여
희미한 등잔 화로 옆
서방님 모시적삼 중이적삼
찹쌀 푸새 다듬이질로
인두질로 구김살 폈지

아내들여, 
당신네의 솜씨가 빚어낸 힘은 
우리 민족의 혼이며
천만 년 이을 영원한 문화유산.  

 

 

우울한 샹송

         - 이수익 -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풀잎되어 젖어있는
  비애를
  지금은 혼미하여 내가 찾는다면
  사랑은 또 처음의 의상으로
  돌아올까

  우체국에 오는 사람들은
  가슴에 꽃을 달고 오는데
  그 꽃들은 바람에
  얼굴이 터져 웃고 있는데
  어쩌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얼굴을 다치면서라도 소리내어
  나도 웃고 싶은 것일까

  사람들은
  그리움을 가득 담은 편지 위에
  애정의 핀을 꽂고 돌아들 간다
  그때 그들 머리 위에서는
  꽃불처럼 밝은 빛이 잠시
  어리는데
  그것은 저려오는 내 발등 위에
  행복에 찬 글씨를 써서 보이는데
  나는 자꾸만 어두워져서
  읽질 못하고,

  우체국에 가면
  잃어버린 사랑을 찾을 수 있을까
  그곳에서 발견한 내 사랑의
  기진한 발걸음이 다시
  도어를 노크
  하면,
  그때 나는 어떤 미소를 띠어
  돌아온 사랑을 맞이할까

 

 

 

우체국에서

       - 박몽구 -


  두고 온 남쪽 소식이 그리울 때
  불현듯 가슴에 맺힌 사람이 생각날 때
  들르는 광화문 우체국은
  반쯤 들떠 있다

  커다란 문을 여는 순간
  숯천통씩 편지들이 쏟아지고
  거미줄보다 더 복잡하게
  전화선이 얽힌 우체국은
  우리들의 궁금증을 풀어줄 것도 같다
  궂은 비 흘러내리는
  가슴의 우울울 씻어내려 줄 것도 같다

  분주한 거리들을 잠시 잊고
  죽었을지도 모르는 친구의 소식을 캐기 위하여
  멀리 멀리 떨어져서 애타는
  사랑의 선을 잇기 위하여
  우체국을 찾는다

  그때마다 우체국은 틀렸다고 말한다
  우체국은 옛과는 달리
  막상 끊겠다고 마음먹은 소식은
  여전히 끊고
  정말 궁금한 것은
  여전히 그대로 둘 뿐
  우체국은 이제 아무것도 맺지 않는다

  우체국에 가면
  텅 빈 마음만 넘쳐 있다

 

 

 

우회로

     - 박목월 -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이 깔렸다.
  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확대되어 가는 아내의 눈에
  달빛이 깔린 긴 우회로
  그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메스를 가아제로 닦고
  응결하는 피.
  병원으로 가는 긴 우회로
  달빛 속을 내가 걷는다.
  흔들리는 남편의 모습.
  혼수 속에서 피어 올리는
  아내의 미소(밤은 에테르로 풀리고)
  긴 우회로를
  흔들리는 아내의 모습
  하얀 나선 통로를
  내가 내려간다.

 

 

 

운동장을 바러보며

             - 정상현 -


  추억에 젖은 사람처럼 봄볕에 몸을 말리며
  결국 못 쓰고 말 편지를 펼쳐놓고 운동장을 바라본다
  빨간 베레모 학생들의 기합소리를 끌어 올리며
  비둘기떼는 도서관 지붕위로 날아 오른다
  봄볕을 마중하러 나오는 피아노 소리와
  늘 뒤로 물러앉아 푸르기만 한 하늘과
  모두와 모두가 실성한 것처럼 어우러진다
  아직 포플러 앙상한 운동장 구석에는
  초록빛 아이들이 농구공을 쏘아올리고
  멀리 남산탑에서 운동장을 내려보는 시선들이 보일 것 같다
  돌아서면 작은 가슴 하나 되지 못하는
  나날들의 주장을 새삼 동여매면서
  오수에 잔긴 한 여자의 무릎에
  눕고 싶은 마음이 부끄러워진다
  수업을 알리는 종소리 아득해지는 이맘때쯤
  그리운 마음들에게
  그동안 죄송했읍니다 라고 고개 숙이면서

 

 

 

운암리 시편

         - 오재동 -


  1
  잎새들 그득 모아
  바람의 결을 풀고
  즈믄 뜰 노를 젓는
  4월, 그 붉은 가슴
  타관 땅
  문풍지 새로
  밤새 눈귀 밝히나.

  2
  절산댁 작은 기침
  울 빗장 죄다 걸고
  아홉 골 묵도 안팎
  몇 되박 기척인데
  속 품은
  사연이 겨워
  달이 달이 뜨노니...

  3
  웃녘 산 얼레 날고
  돌쇠가 떠나던 날
  회억할까, 이슬 듣는
  미쁜 해 우리 사랑
  골방에
  펼쳐 든 수틀
  눈이 펑펑 내리네.

 

 


울릉도    
     - 유치환 -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금수(錦繡)로 굽이쳐 내리던
장백(長白)의 멧부리 방울 뛰어
애달픈 국토의 막내
너의 호젓한 모습이 되었으리니

 

창망(滄茫)한 물굽이에
금시에 지워질 듯 근심스리 떠 있기에
동해 쪽빛 바람에
항시 사념(思念)의 머리 곱게 씻기우고

 

지나 새나 뭍으로 뭍으로만
향하는 그리운 마음에
쉴 새 없이 출렁이는 풍랑 따라
밀리어 밀리어오는 듯도 하건만

 

멀리 조국의 사직의
어지러운 소식이 들려올 적마다
어린 마음의 미칠 수 없음이
아아 이렇게도 간절함이여

 

동쪽 먼 심해선(深海線) 밖의
한 점 섬 울릉도로 갈꺼나

 

 

 

울릉의 바다

          - 전석홍 -

 

쪽빛보다 진한 몸사위로

너울너울 춤을 추는

바다

 

수평선에 걸려있는 쪽배가 은빛으로 반짝이고

넓은  어머니 가슴인 양 짙푸른 해심에서

평화로이 유영하는 오징어 원무

 

갈매기 한가로이 나래를 펼 때

네 발을 바다에 딛고 선 바위 코끼리

긴 코로 물을 마시며

눈웃음에 바다는 찬란하다

 

마악 색동옷 입으려는

산비탈 전설 담긴 마을에선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볍고

 

저어만치

외딴 섬 하나

올곧은 기상으로 기지개 켜는

 

여기는 동해

해풍 잔잔히 부는 울릉의 바다.

 

 

울음이 타는 가을 강 
                         - 박재삼 -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고나.

제삿날 큰집에 모이는 불빛도 불빛이지만
해질녘 울음이 타는 가을 강을 보것네.

저것 봐, 거것 봐,
네 보담도 내 보담도
그 기쁜 첫사랑 산골 물소리가 사라지고
그 다음 사랑 끝에 생긴 울음까지 녹아나고
이제는 미칠 일 하나로 바다에 다 와 가는,
소리 죽은 가을 강을 처음 보것네

 

 

울타리꽃

        - 도종환 -


  아들아, 나 죽어 이 집의 울타리가 되리라.
  칼 뽑아 네 어미 아름다움 버혀 가려던
  눈먼 무리 앞에 무릎 꿇 순 결코 없어
  황망한 칼빛 아래 내가 죽거든
  아들아, 억새풀 엉겅퀴 새 돌 눌러 날 묻지 말고
  우리집 마당 가운데 나직하게 묻어다오.
  혹 떨어져 나간 내 뼈 있거든
  밤마다 숫돌에 갈고 갈아 화살촉 만들고
  흩어져 날리는 머리칼 있거들랑
  빠짐없이 추려 모아 화살줄 매어다오.
  앞 못 보는 너희 아빌 핍박하러 오는 무리
  날만 새면 사립문 앞에 눈 치뜨고 모이리니
  내 어이 죽어선들 한적한 산그늘이나 떠돌며 다니리
  아들아, 이 어민 속 붉은 꽃으로 꼭 다시 피어난다.
  나 죽어도 내 집의 울타리꽃으로 피어난다.

 

  * 울타리꽃:무궁화를 일컬음.

 

 

 

웃음

      - 김수영 -


웃음은 자기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 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갑니다. 
마차를 타고 가는 사람이 좋지 않아요 
웃고 있어요 
그것은 그림 
토막방 안에서 나는 우주를 잡을 듯이 날뛰고 있지요 
고운 신(神)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나요 
아마 잘 있으라고 손을 휘두르고 가지요 
문턱에서.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리다고 한탄하지 마시오 
나는 내 가슴에 
또 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유년시절

         - 정재희 -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서 있다
  시절을 잃어버린 텅 빈 앨범 속에 버려두었던 나를
  때 묻은 날들이 가끔은 고개들어 새삼 부르고
  사라진 그때의 사람들만 빼앗긴 계절을 돌아 온다

  아는 자만이 아는 그늘진 모퉁이를
  수없이 돌며 안으로 삼킨 우리들의 아픔을
  헹구던 시간만 가고
  아무래도 남은 것은 남는
  지울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을 들고
  아직도 나는 살아간다

  까마득히 멀어져간 날을 말없이 돌아와
  때 없는 비바람을 다스려 앉으면
  꿈결처럼 그날들은 가고
  또 헤쳐가야 할 이 시대의
  아득한 강 줄기를 타고
  소리 없이 지나는 이야기가 있다

 

 

 

유두

     - 류후기 -


  얻기 위하여 버렸던 고스란히
  흘려 온 발길을 되걷어 물맞으러 간다
  바람 끝에 갈리면서 동강이 어디인지
  길은 수다스레 얽혀 들고
  꽃은 태연스레 피어나지만 떳떳하게
  제 철에 질 줄 아는 꽃보다도
  해 넘어

  꿈과 맞먹는 체중을 딛고 정수리로
  곤두박질하는
  얼얼한 벼락을 때리면서 칼침을 놓는
  물맛을 보아야 해
  톡톡히 물맛을 보아야 해

  밑도 끝도 없이 벌여 온 입씨름도
  정면에서는 말문이 막히는 혀짤배기
  주절주절 잔가지만 우거져 보이는
  살음살음은 속절없구나
  몹시 부는 바람에 등 밀리어
  무엇을 들먹여 뜨네기같이
  꽃창포만 쓸쓸하게 울려 놓고

  쏟아 버리고 싶은 피를 무릅쓰고
  철썩철썩 허벅지를 후려 갈기는
  굵직한 물줄기같이

  막막하여라 동강은 어딜는지
  숯검정 불티를 덮어쓰고 돌부리에
  채이며 비듬처럼 떠도는 나는
  제 풀에 떨어지는 열매같이

 

 

 

유 리 창
            - 정 지 용 -


유리(琉璃)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肺血管)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山)새처럼 날아 갔구나!

 

 


유리병 편지

   - 강연호 -

 

 유리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띄울 때

 밤하늘의 별자리를 생각한다

 

 별들이 모인다고 별자리를 이루는 게 아니다

 수십 수백 광년을 떨어진 별 하나가

 다른 별을 향해 눈을 떠 처음 반짝이기 시작한 자리

 보채듯 고사리손을 한번 내밀어본 자리

 이윽고 별똥의 운명을 무릅쓰고 헤엄쳐간 자리

 별자리란 그 길을 가만가만 되짚는 자리다

 

 유리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띄울 때

 편지는 지느러미가 없고 유리병은 영법을 모르지만

 바다에 글을 던지는 심사는 깊다

 말하자면 하나의 별이 다른 별을 향해

 겨우 눈을 뜨게 하는 것

 다음은 영원한 심연의 파도에 맡겨두는 것

 우주는 역시 위태롭게 가는 맛이 제격이다

 

 청춘은 가고 연애는 끝나도

 별은 떠서 세상이 우주라는 것을

 결국 한통속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광년과 광년을 건너 어느 기슭에 흘러가 닿은 시선이

 마침내 길을 만들고 별자리를 이룬다는 것을

 그러니 간절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유리병에 넣은 편지를 바다에 띄울 때

 답장이 없거들랑 그 역시

 유리병에 넣어 바다에 띄운 줄 알 일이다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 이가림 -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모래알 같은 이름 하나 불러 본다
  기어이 끊어낼 수 없는 죄의 탯줄을
  깊은 땅에 묻고 돌아선 날의
  막막한 벌판 끝에 열리는 밤
  내가 일천번도 더 입맞춘 별이 있음을
  이 지상의 사람들은 모르리라
  날마다 잃었다가 되찾는 눈동자
  먼 부재의 저편에서 오는 빛이기에
  끝내 아무도 볼 수 없으리라
  어디서 이 투명한 이슬은 어는가
  얼굴을 가리우는 차가운 입김
  유리창에 이마를 대고
  물방울 같은 이름 하나 불러본다

 

 

 

유랑의 섬

     - 유재영 -

 

  언제부터인지 내 몸 한구석
  이름 없이 떠도는 유랑의 섬 하나
  때때로 온 몸을 한 자루 피리로 울리다가
  시름시름 은유로 돌아눕는 꽃!
  어느 봄날 무슨 까닭인지
  내 몸의 은유들이 모두 죽임을 당하고
  그 죽임마저 가루가 되어
  저문 강물로 돌아올 때
  누군가 내 가슴 변방에 불을 놓고 있었다.

 

 

유령의 나라

           - 박영희 -

 

  꿈은 유령의 춤추는 마당
  현실은 사람의 괴로움 불붙이는
  싯벌건 철공장

  눈물은 불에 단
  괴로움의 찌꺼기
  사랑은 꿈속으로 부르신 여신!

  아! 괴로움에 타는
  두 사람 가슴에
  꿈의 터를 만들어 놓고
  유령과 같이 춤을 추면서
  타오르는 사랑은
  차디찬 유령과 같도다.

  현실의 사람 사람은
  유령을 두려워 떠나서 가나
  사랑을 가진 우리에게는
  꽃과 같이 아름답도다.

  아! 그대여!
  그대의 흰 손과 팔을
  저 어둔 나라로 내밀어 주시오

  내가 가리라, 내가 가리라.
  그대의 흰 팔을 조심해 밟으면서!
  유령의 나라로, 꿈의 나라로
  나는 가리라! 아 그대의 탈을-.

 

 

 

유배지에서 보내는 정약용의 편지

             - 정일근 -


    제1신

  아직은 미명이다. 강진의 하늘 강진의 벌판 새벽이 당도하길 기다리며
죽로차를 달이는 치운 계절, 학연아 남해바다를 건너 우두봉을 넘어오다
우우 소울음으로 ?아치는 하늬바람에 문풍지에 숨겨둔 내 귀 하나
부질없이 부질없이 서울의 기별이 그립고, 흑산도로 끌려가신 약전형님의
안부가 그립다. 저희들끼리 풀리며 쓸리어가는 얼음장 밑 찬 물소리에도 열
손톱들이 젖어 흐느끼고 깊은 어둠의 끝을 헤치다 손톱마저 다 닳아
스러지는 적소의 밤이여, 강진의 밤은 너무 깊고 어둡구나. 목포, 해남,
광주 더 멀리나간 마음들이 지친 봉두남발을 끌고와 이 악문 찬 물소리와
함께 흘러가고 아득하여라, 정말 아득하여라. 처음도 끝도 찾을 수 없는
미명의 저편은 나의 눈물인가 무덤인가 등잔불 밝혀도 등뼈 자옥히 깎고
가는 바람소리 머리 풀어 온  강진 벌판이 우는 것 같구나.

    제2신

  이 깊고 긴 겨울밤들을 예감했을까 봄날 텃밭에다 무우를 심었다. 여름
한철 노오란 무우꽃이 피어 가끔 벌, 나비들이 찾아와 동무해 주더니 이제
그 중 큰 놈 몇 개를 뽑아 너와지붕 추녀 끝으로 고드름이 열리는 새벽까지
밤을 재워 무우채를 썰면, 절망을 썰면, 보은산 컹컹 울부짖는 승냥이
울음소리가 두렵지 않고 유배보다 더 독한 어둠이 두렵지 않구나. 어쩌다
폭설이 지는 밤이면 등잔불을 이루어 시경강의보를 엮는다. 학연아 나이가
들수록 그리움이며 한이라는 것도 속절이 없어 첫해에는 산이라도 날려보낼 
것 같은 그리움이, 강물이라도 싹둑싹둑 베어버릴 것 같은 한이 폭설에
갇혀 서울로 가는 길이란 길은 모두 하얗게 지워지는 밤, 사선제에 앉아 시
몇 줄을 읽으면 세상의 법도 왕가의 법도 흘러가는 법, 힘줄 고운 한들이
삭아서 흘러가고 그리움도 남해바다로 흘러가 섬을 만드누나.


   

 

 

유방의 장

     - 장순화 -

 

  난 몰라,
  모시 앞섶 풀이 세어 그렇지.

  백련 꽃봉오리
  산딸기도 하나 둘씩


  상그레 웃음 벙그는
  소리 없는 개가.

  불길을 딛고 서서
  옥으로 견딘 순결

  모진 가뭄에도
  촉촉이 이슬 맺어

  요요히 시내 흐르는
  내일에의 동산아!

 

 

 

유언      - 유승천 -
       --어느 불나방의


  알고 있었어
  그대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바보처럼 불 속으로 날아든다고
  우리를 측은해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죽으리라는 것을
  이미부터 알고 있었어
  어두울수록 맺혀서 타오르는,
  타올라서 희망이 되는
  불꽃의 둘레를 숨가쁘게 돌다가
  날개에 불이 붙고
  몸뚱아리가 터져 황홀히 죽으리라는 것을
  아무렴, 우리가 날아온
  수천 수만의 어둠 저쪽에서부터 알고 있었어
  그대들이 슬퍼해야 할 것은
  이밤 그대들을 둘러싸고 있는 겹겹의 어둠이며,
  오히려 검은 절벽같은 칠월 그믐일지니
  우리는 하나도 억울하지 않아
  죽음으로써 볼 수 있는
  미세한 나방가루의 아름다운 불떨기들
  온몸이 터지면서 비로소 눈뜨이는 불꽃의 정수
  미물로 살다가는 억울함까지
  그 찰나만큼은 그리움이 되지
  그대들은 알턱이 없지
  눈 먼 생애 더듬이조차 없는 그대들은
  우리 이렇게
  제각기의 어둠 속에서 날아 들었고,
  날아 들고 있는 것을
  하나가 죽음으로 불빛은 더 멀리까지 비쳐가고
  또 다른 우리의 동료들이 불빛을 보고 날아 들고
  그들이 죽음으로써
  불빛은 더욱 먼곳까지 비쳐져서
  어느 명부같은 곳에 있는 우리들도
  마침내 이곳으로 날아
  그의 전생애를 부끄럽지 않게 할 수 있지
  아무렴, 살아서 눈 먼 그대들은 알 리가 있나
  생전의 모든 삶을
  단 한 번의 불꽃으로 살라버리는 불나방의 뜻을
  모두의 어둠을 위한 격정의 죽음을
  죽는 줄도 모르고 불속으로 날아 든다고
  우리를 바보라고 웃는,
  사실은 그대들을 위한
  이밤 우리들 죽음의 축제를.

 

 

6월의 기억

        - 김정원 -


  염천의 비탈에
  날마다 곤두선 목숨

  빈 냄비엔
  단호박 씨앗 너댓
  허기진 천리길도
  해질녘이면 닿을 듯

  길은 돌아 강물을 쫓고
  새벽꿈에 젖은
  두려움의 성 하나를
  우린 기대며 걸었다.

  길의 피바다
  불씨의 고동
  뙤약볕의 매미 울음마저
  거듭 앓으며

  열 여덟 같은 또래의 유령들이
  주검으로 널브러진
  6월의 남행길
  너는 종내 말이 없었다

  만에 하나
  내 살아 남는다면
  살아 다시 돌아온다면
  버린 내 집 뒤켠
  한갓진 터 골라 앉아
  목 놓아 너를 울마.

 

 

 

유월의 언덕 

          - 노천명 -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하늘은 
사뭇 곱기만 한데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고 안으로 안으로만 들다

 

이 인파 속에서 고독이 
곧 얼음모양 꼿꼿이 얼어 들어옴은 
어쩐 까닭이뇨

 

보리밭엔 양귀비꽃이 으스러지게 고운데 
이른 아침부터 밤이 이슥토록 
이야기 해볼 사람은 없어 
파라솔을 접듯이 
마음을 접어 가지고 안으로만 들다

 

장미가 말을 배우지 않은 이유를 알겠다. 
사슴이 말을 하지 않는 연유도 알아듣겠다.

 

아카시아꽃 핀 유월의 언덕은 
곱기만 한데 ...

 

 

유전도(流轉圖) - 수석열전(水石列傳)

             - 박두진 -


바람과 구름이 구름과 강물이 
강물과 바다가 꼬리가 꼬리 물고 있다. 
바다가 햇살을 달빛이 번개를 노을이 강바람을 꼬리 물고 있다. 언덕과 산악, 사막과 도시, 궁전과 움막들이 
있는 것은 무너지고 
무너진 것들은 흘러가고 있다. 
아우성과 침묵이, 영화와 몰락이 
횡포한 자와 비겁한 자, 
짓밟는 자와 짓밟힌 자, 
빼앗는 자와 빼앗긴 자, 
말하고 싶은 자와 말하지 못하게 하는 자, 
아부하는 자와 바로 말하는 자, 
파계자와 성도자가, 
천 년씩 천 번을 , 만 년씩 만 번도 더 
무너지며 일어서며 영겁 속에 사그라져 
흙이 되고 물이 되고 바람이 되어 흐르고 있다. 
노여움도, 자랑도, 오만도, 겸손도, 
사랑도, 미움도 
아름다움과 추, 
지혜와 어리석음, 
쫓던 자와 쫓기던 자, 
죽이던 자와 죽던 자, 
총칼도, 보습도 
비밀 암호도, 경서도 
짐승의 뼈도, 사람의 뼈도 한데 묻혀 있다. 
난 것은 모두 죽고, 죽은 것에서 다시 나, 
소용돌이 소용돌이 
저절로의 흐름, 
침묵에서 침묵으로의 영원한 있음, 
있는 것도, 없는 것도 
모두 거기 있고 없는 
해와 달, 하늘 땅이 꼬리 이어 도는 
천의, 억의 영겁천지 바람 불고 있다.

 

 

 

유채꽃밭

          - 김정환 -

 

  내가 그대의 허망함을 눈치채기도 전에
  그대가 나의 미망의 눈앞에 펼쳐논 온통 샛노란 불볕, 벌판
  그대는 내 앞에서 그대의 몸가짐을 흐트리며 출렁이면서
  그대의 마음도 눈이 부시게 흔들리고 싶을 때
  그러나 그대가 일용의 양식으로 머금고 배앝아 낸
  입술에 배인
  고운 피, 거친 숨결이
  나는 보일 것도 같애 반란으로도 모자란, 학살로도 모자란
  그대는 아직도 동요하지 않는 한라산 슬하에서
  이제껏 조바심내며 출렁거리며 바람에 몸 식혀 왔나니
  아아 그대가 내 앞에 마련해논 광대한 벌판은 벌써 미쳐버린 색깔로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내 앞에서 끝도 없어라

  마침내 강심장으로 돌아온 사랑 앞에서

 

 

 

  6병동

    - 조석현 -


  꽃잎없이 피는 꽃
  꽃 속에서 울어요
  어릴적
  어둠 속에서 별을 본 듯이

  과거는 꿈 같은 기억 속에
  꿈은 과거였던가
  내 눈빛 녹슬어 가고
  눈물처럼 무너지는 침묵

  종이 울리면
  이 아픔 건너
  흩어질까나
  수면제 한 알만큼
  바람 속으로

 

 

 

6은 나무 7은 돌고래, 열번째는 전화기
                      - 박상순 -


첫번째는 나
2는 자동차
3은 늑대, 4는 잠수함
5는 악어, 6은 나무, 7은 돌고래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열번째는 전화기
첫번째의 내가
열번째를 들고 반복해서 말한다
2는 자동차, 3은 늑대

몸통이 불어날 때까지
8은 비행기, 9는 코뿔소,
마지막은 전화기
숫자놀이 장난감
아홉까지 배운 날
불어난 제 살을 뜯어먹고
첫번째는 나
열번째는 전화기

 

 

6은 나무 7은 돌고래
                              박상순


목쉰 연주자가 있었다 
 손풍금이 있었다

 목쉰 연주자가 졸고 있을 때 
 검은 옷의 아이들이 걸레처럼 칼질한 
 샛노란 커튼이 유령처럼 있었다

 귀 떨어진 손풍금과 
 목쉰 연주자 
 양말 속에 칼을 숨긴 
 아이들이 있었다

 높다란 철탑 아래 변전소가 있었다 
 목매달고 죽어버릴 꿈을 꾸는 
 아이들이 있었다 
 내가 있었다

 

 

윤사월
          - 박목월 -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 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원두막

      - 이동환 -                 
                     
내 모가지를 잘라 기둥으로 받치세요.
내 팔꿈치를 휘어 지붕 위를 덮으세요. 

 

언덕배기 서 자라던
한 그루 밤나무가
쉼 그늘 지킨다.

 

말을 한다면야
아픔이야 슬픔이야 오죽하랴 만은
침묵한 생명을 산소바람 드리우니
너 살고
나 쉼터이다.

 

보라,
땡볕인들 마다하랴

태풍인들 두려워하랴
꺾이고 휘어짐의 감싸 안음은
모두가 바캉스요
해수욕장이다.

 

 

원시(遠視) 
              - 오세영 -


멀리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 하지마라. 
내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다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원색의 잠

           - 윤석산 -

 

  마른 풀잎이 몰려온다
  잠 속으로,
  죽은 말 하나가
  뛰어든다.

  세멘 마당에 엎질러진
  물끼, 혹은
  어둠 속에 하양게
  박혀버린 자갈돌.
  하얗게 죽어버린
  사내들이
  마른 육체를 불사른다.

  몰켜오는 풀잎 마다엔
  꺼지지 않는 램프,
  심지를 밟으며
  달려나가는 수천 두의 말굽,

  동해남부선
  어디
  적재의 화차가
  하나 어둠 속,
  오래오래 이마를 부딪는다.

 

 

 

월식

     - 김명수 -

 

  달 그늘에 잠긴
  비인 마을의 잠

  사나이 하나가 지나갔다
  붉게 물들어

  발자욱 성큼
  성큼
  남겨 놓은 채

  개는 다시 짖지 않았다
  목이 쉬어 짖어대던
  외로운 개

  그 뒤로 누님은
  말이 없었다

  달이
  커다랗게
  불끈 솟은 달이

  슬슬 마을을 가려주던 저녁


 

의상대 해돋이

      - 조종현 -

 

  천지 개벽이야!
  눈이 번쩍 뜨인다.

  불덩이가 솟는구나.
  가슴이 용솟음친다.

  여보게,
  저것 좀 보아!
  후끈하지 않는가.

 

 

 

의주ㅅ 길

         - 유치환 -

 

  장안을 나서서 북쪽가는 천 리 길
  아카시아 꽃수술에 꿀벌 엉기는
  이 길을 떠나면 다시 오지 안하리니

 

  속눈썹 감실감실 사랑한 너야
  이대로 고이 나는 너를 하직하노니
  누가 묻거들랑 울지 말고 모른다 하소

.

  천리 길 너 생각에 하염없이 걷노라면
  하늘도 따사로이, 뒷등도 따사로이
  가며가며 쉬어쉬어 울 곳도 많아라.

 

 

의자
     - 이정록 -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라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의자
      - 김종문 -


내가 서양 문명의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단 한 가지, 의자이다.
그렇지만 나의 의자는
바로크 풍이나 로마네스크 풍과는 거리가멀고
더욱이 대감들이 즐기던 교의 따위도 아니다. 
나의 의자는
강원도산 박달나무로
튼튼한 네 다리와 두터운 엉덩판과 가파른 등이
나의 계산에 의해 손수 만들어졌고
칠이라고는 나의 손때 뿐이다.
나의 의자는
나의 무게를 저울보다는 잘 알고 있고
나의 동작 하나에 대해 민감하며
나의 거칠어지는 피부를 어루만질 줄 안다.
나의 고독은 나의 의자와의 교감이기에 고독이 아니고
나의 독백은 나의 의자와의 대화이기에 독백이 아니다.
낮을 밤에 이어 시를 쓰노라면
나의 의자에서 시가 우러나며
나의 다리, 나의 엉덩이, 나의 등이 되어
때로는 지하 팔척 아래로, 때로는 구중의
탑 위로
나를 운반하지만
나의 의자는 항시 제 자리에 있다.
나의 의자는 세계의 축(軸), 나의 만세반석이다.
세상에는 빈 것이 하도 많지만
나의 의자는
비록 공석 중이라도 비어 있지 않다.

 

 

의자

        - 조병화(趙炳華)-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지요.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어요.

먼 옛날 어느 분이
내게 물려 주듯이

지금 어드메쯤
아침을 몰고 오는 어린 분이 계시옵니다.
그분을 위하여
묵은 의자를 비워 드리겠읍니다.

 

 

의자

        - 김성용 - 

극장에 사무실에 학교에 어디에 어디에 있는 의자란 의자는 
모두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얼굴은 없고 아가리에 발만 달린 의자는 
흉측한 짐승이다 어둠에 몸을 숨길 줄 아는 감각과 
햇빛을 두려워 하지도 않는 용맹을 지니고 온종일을 
숨소리도 내지 않고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리는 
의자는 필시 맹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이 짐승에게는 권태도 없고 죽음도 없다 아니 죽음은 있다 
안락한 죽음 편안한 죽음만 있다 
먹이들은 자신들의 엉덩이가 깨물린 줄도 모르고 
편안히 앉았다가 툭툭 엉덩이를 털고 일어서려 한다 
그러나 한 번 붙잡은 먹이는 좀체 놓아주려 하지 않는 근성을 먹이들은 잘 모른 다. 
이빨자국이 아무리 선명해도 살이 짓이겨져도 알 수 없다 
이 짐승은 혼자 있다고 해서 절대로 외로워 하는 법도 없다 
떼를 지어 있어도 절대 떠들지 않는다 오직 먹이가 앉기만을 기다린다 
그리곤 편안히 마비된다 서서히 안락사한다 
제발 앉아 달라고 제발 혼자 앉아 달라고 호소하지도 않는 의자는 
누구보다 안락한 죽음만을 사랑하는 네 발 달린 짐승이다 

 

 

 

                               여명도(黎明圖) 1

                                             - 구 상(具 常) -                                   

 

                                           동이 트는 하늘에

                                           까마귀 날아

 

                                           밤과 새벽이 갈랄 무렵이면

                                           카스바 마냥 수상한 이 거리는

                                           기인 그림자 배회하는 무서운

                                           골목.....

 

                                            이윽고 북이 울자

                                            원한에 이기낀 성문이 뻐개지고

                                            구렁이 잔등 같이 독이 서린 한길 위에

                                            횃불을 든 시빌이

                                            깨어라!

                                            외치며 백마(白馬)를 달려

 

                                            말굽소리

                                            말굽소리

 

                                            창칼 부닥치어

                                            살기(殺氣)를 띠고

 

                                            백성들의 아우성

                                            또한 처연(悽然)한데

 

                                            떠오는 태양 함께

                                            피 토하고

                                            족어가는 사나이의 미소가

                                            고웁다.

 

 

                                            여명도(黎明圖) 2

                                         구 상(具 常,1919-2004)

 

                                            하늘이 찢어질 듯

                                            쇠북소리 울면

                                            

                                            안개 피인 벌판으로

                                            베폭처럼 뻗치는 여민(黎民)의 행렬

                                     

                                            아직도 하늘엔 또 하나

                                            수상한 장막이 드리워 있어

 

                                            소름도 채 가시지 않은

                                            아우성 뒤덮었는데...

 

                                            이윽고

                                            피 묻은 언덕 위에서

                                            일식(日蝕)의 자포(紫袍)벗은 대제관(大祭官)

 

                                            '모름지기 우리는 새로운 반죽이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버릴지라'

                                             포효(咆哮)하면

 

                                             백성들의 흐느낌은

                                             찬가(讚歌)되어 흐르고

 

                                             높이 쳐든 멍든 손에

                                             깃발 깃발이

 

                                             꽃처럼 피어나다

                                             꽃처럼 만발하다.

 

 

 

여수(旅愁) 
          - 한하운 -

 

이 세상 다할 때까지 
죽자고 살아보자던사람.

 

만나보자고 찾던 사람.

 

한번은 
만나봤어야 할 사람이였지만 
어쩐지 
망설였던 사람.

 

세상과 문둥이는 너무나 담이 높아 
얼마나 얼마나 많이 울어서 무너뜨려야 할 담이 높아 
서로 길이 헛갈리누나

 

이제 그 사람을 찾아 온 
천리땅 대구(大邱)길은 
경(慶) 
그 사람은 가고

 

허전한 여수(旅愁)는 
그런대로 사랑했던 까닭인가.

 

 

여승 
         - 백석 -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늬 산 깊은 금덤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따리며 가을밤같이 차게 울었다
섭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설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여우

   - 김형영 -

 

  흰 두루마기도
  장죽도 없이
  도사가 된 백여우야
  어둠 속에 길로 서서 네가 기다리는 것,
  이젠 다 둔갑해서 너를 노린다.

  대지의 이름으로 킹킹거리며
  킹킹거리며 너를 노리는
  그들은 가졌다
  이빨과 꼬리를,
  백개의 얼굴을,
  그들은 가졌다
  죽일 수 있는 권리
  더 만족할 만한 법을.

 

 

여우난골족(族)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李女) 작은 이녀(李女)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 엄매 사춘누이 사춘 동생들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뽁운 잔디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 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 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 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여인

     - 한하운 -

 

  눈여겨 낯익은 듯한 여인 하나
  어깨 넓직한 사나이와 함께 나란히
  아가를 거느리고 내 앞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무리 보아도
  나이가 스무살 남짓한 저 여인은
  뒷모습 걸음걸이 하며
  몸맵시 틀림없는 저... 누구라 할까...

  어쩌면 엷은 혀 끝에 맴도는 이름이요!
  어쩌면 아슬아슬 눈 감길 듯 떠오르는 추억이요!
  옛날엔 아무렇게나 행복해 버렸나 보지?
  아니 아니 정말로 이제금 행복해 버렸나 보지?

 

 

 

여의도 83

    - 차정미 -


  겨울은 봄 속에서 싹을 틔워
  겨울은 여름 속에서 가을 속에서 성숙되리
  봄은 겨울 속에서 반죽되는 봄
  하여
  겨울 그 겨울 속에서 봄은
  한덩어리의 풀빵으로 부푸리
  베이킹 파우다여!
  봄이 오거든 내친 걸음으로
  재빨리 봄이 오거든
  너의 공로를 어찌할거나
  북에서 동으로 불던 바람
  서에서 남으로 불던 바람
  6, 25에 영락없이 죽은 줄만 알았던
  뒷날의 무수한 비극처럼
  까무라쳐 죽은 줄만 알았던
  말숙이, 상돌이, 갑식이, 언년이
  가슴팍에 박힌 점하나로
  너를 찾았구나  영락없이 찾았구나
  붐빠빠
  꽹과리 북 치고 장구 치고
  풍악소리 높이 울려
  30년 불던 미풍
  오늘 돌풍으로 몰아치니
  바람이여
  너의 공로를 어쩔거나
  어쩔거나

 

 

 

여자

    - 임성숙 -

 

한 여인의 이름은

한 남자의 부름으로 경매된다

 

착한 여자, 나의 진주, 나의 여왕이라

부르면 그렇게 낙찰된다

 

악한 여자, 몹쓸 쓰레기라

냉대하면 곧 그렇게 폭락한다

 

걸래처럼 천대받던 여자가

닦고 행구고 행구어져

올올이 삭아서

스스로 구제 받는 날

 

한 남자의 여자를 벗고

천사가 된다.

 

 

 

    - 한성기 -

 

  푸른 불 시그낼이 꿈처럼 어리는
  거기 조그마한 역이 있다.

 

  빈 대합실에는
  의지할 의자 하나 없고


  이따금
  급행열차가 어지럽게 경적을 울리며
  지나간다.

 

  눈이 오고
  비가 오고...

 

  아득한 선로 위에
  없는 듯 있는 듯
  거기 조그만 역처럼 내가 있다.

 

 

 

역마차

         - 김철수 -

설움 많은 밤이 오면은 
우리 모두들 역마차를 타자 


 반기어주는 이 없는 廢都 여기 별 없는 거리 자꾸 그리운 합창이 듣고파 내 오늘도 또 한 잔 소주에 잠겨 이리 비틀거리는 사내이구나 

흔들려 부딪치는 어깨 위에 저 가난한 골들이 형제요 동포이라는 나의 외로움 속에서는 우리 좀더 정다운 나그네여서 따뜻한 마을을 찾아가는 것이냐 

이제는 통곡조차 잊어버린 사람들…… 
열리는 아침을 믿어 가는 길인가 

그러면 미쁜 사람이여 어디 있는가 높은 곳에 기다리는 공화국의 문이여 어디 있는가 절름거리는 궤짝 위의 차가운 꿈에서도 역마야 너와 나와는 원수이지 말자 

미친 채찍이 바람을 찢고 창살 없는 얼굴에 빗발은 감기는데 낙엽도 시월도 휘파람 하나 없이 이대도록 흔들리며 廢都의 밤을 간다

 

 

 

역사

     - 김종 -

 

  사람들은 초롱초롱한 눈을 뜨고
  언제나 변함없는 것은 역사라고 한다.
  어두운 상처 밑에 신음하는 사람도
  모두 모두 역사라고 한다.
  그것이 뭐길래 그리 믿어쌌느냐
  무슨 부모 자식간이나 되는냐 아니면
  제삿상 받아먹는 선영이기라도 하느냐 묻지는 않았지만
  목숨이 붙어있는 한 일편단심 믿고 또 믿는 것,
  그것은 틀림없는 역사라고 한다.
  못 볼 것을 보여 쥬고 주먹을 쥐면서도
  역사가 말하리란다. 저녁 끓일 것이 없는 시인나라도
  큰 배를 앞세우고 근엄하게 말씀하시는 분네도
  역사가 반드시 반드시 말해준다고 한다.
  어느 누구이건 절로 터진 입이면 늘 은혜롭고 향긋한 역사
  분하고, 뒤가 구리고, 몸을 또아리 틀어 사리는 사람 모두
  떳떳하게 당당하게 역사는 늘 위대하고 거룩하단다.

  사람들은 잠을 자면서도, 이빨을 갈고 잠꼬대하면서도
  역사를 베고, 깔고, 숨쉬고, 보듬고 산다.
  친구도 부모형제도 보이지 않아 무섬증이 든 허허벌판에서
  역사를 앞세우고 그 뒤에 숨어서 식은 땀을 흘린다.
  가랑잎 바스락거리는 소리에도, 오뉴월 물꼬속에도
  역사는 숨쉬고 살아서 하늘을 날아다닌다 한다.
  하다못해 돌멩이나 껴안고 물에 빠진 어느 촌놈도
  남강에 몸을 던진 논개가 되려고
  충향이 남편 이도령이라도 뙤려고 설레이고 쌩방귀를 뀐다
  이 시시한 시를 쓰는 나도 역사를 들먹거리며 휘파람을 분다.

  그러나 역사는 얼굴 깊이 흘러가는 주름살이다.
  몸부림도 잊어버리고 화석 속에 누워 지내는 공룡이다.
  모랫바람 속에서 사라지는 사하라 사막의 신기루다.
  우리들의 비어있는 뼈마디 아련히 차오른
  흐린 얼굴 갖가지 모양새다.
  저기 저 사는 일이 신물난 사람들의 꽁무니에
  산사태의 요란한 소리로 무너져내리는 흙탕물이다.
  불꺼진 토담집 모퉁이에서 우리의 어깨를 덮는 채알귀신이다.

  역사는 토란잎 위에 굴러내리는 아침 이슬이 아니다.
  쌩방귀는 어떨지 모르나 큰 바위 얼굴은 아니다.
  어제 진 달 다시 돋아 삼천리 강산을 비추는 시간에
  서로 껴안고 딩굴던, 사랑하는 청춘들의 밀어가 아니다.
  역사는 역사일 뿐 어느 누구의 노래도 포부도 아니다.
  떠도는 혼들이 잠들지 못하고 뒤척이는 시간에
  태연히 코를 고는 하나님의 참으로 민망한 사투리다.
  눈만 크게 떠도 무한히 작아지는 몇몇 사람의 마스코트다.
  들여다보면 무심히 알아지는 허망하디 허망한 돼지쓸개다.

 

 


역사여 한국역사여
              - 서정주 -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흙 속에 파묻힌 이조백자 빛깔의
새벽 두 시 흙 속의 이조백자 빛깔의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새벽 비가 개이어 아침 해가 뜨거든
가야금 소리로 걸어 나와서
춘향이 걸음으로 걸어 나와서
전라도 석류꽃이라도 한번 돼 봐라.


시집을 가든지, 안上客을 가든지,
해 뜨건 꽃가마나 한번 타 봐라.
내 이제는 차라리 네 婚行 뒤를 따르는
한 마리 나무 기러기나 되려 하노니.


역사여 역사여 한국 역사여.
외씨버선 신고
다홍치마 입고 나와서
울타리 가 석류꽃이라도 한번 돼 봐라.

 

 

역사 앞에서   - 이수정 -
       --분단조국


  오뉴월이 이러하랴
  숨막히는 무풍지대

  동강 난 메아리는
  빛 바랜 채 나뒹굴고

  비릿한
  어둠의 계곡만
  죄어드는 저 밀실.

  광기의 시간들이
  앗아갈 것 다 앗아가

  한 시대의 오지랖은
  공동으로 얼룩지고

  하늘엔
  쿨럭이는 강만
  덩그렇게 걸렸다.

 

 

역설의 꽃

          - 신기선 -

 

  낙엽은 그냥이 아니다.
  또 그냥 웃고
  보는 것이 아니다.
  가을에 찾아오는
  영원한 꽃이다.
  역설의 꽃이다.
  공간을 은밀한 울음으로 뛰어다니는
  움직이는 꽃이다.

  우리들의 죽음도
  그냥이 아니다.
  인간의 뒤안에 남기는
  현재는 찾아오는 꽃이다.
  잔인한 역설의
  꽃이다.

  우수의 다레기에
  독하고 아프게 피고 있는
  고통의 알깐 꽃이다.
  시간을 바람에 끓이는 
  새로운 고전의 꽃들이다.


 

   - 김관식 -

 

  수천만 마리
  떼를 지어 날으는 잠자리들은
  그날 하루가 다하기 전에
  한 뼘 가웃 남짓한 날빛을 앞에 두고, 마즈막 타는, 안쓰러히 부서지는
저녁 햇살을.
  얇은 나래야 바스러지건 말건
  불타는 눈동자를 어즈러히 구을리며
  바람에 흐르다가 한동안은 제대로 발을 떨고 곤두서서
  어젯밤 자고온 풀시밭을 다시는 내려가지 않으리라고
  갓난 애기의 새끼손가락 보담도 짧은 키를 가지고
  허공을 주름잡아 가로 세로 자질하며 가물 높이 떠 돌아다니고 있었다.

  연못가에서는
  인제 마악 자라 오르는 어리디 어린 아그배나무같이
  물 오른 아희들이 웃도리를 벗고 서서
  그 가운데 어떤 놈은 물 속의 하늘만을 들여다보고 제가끔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
  허전히 무너져 내린 내 마음 한구석 그 어느 그늘진 개흙밭에선
  감돌아 흐르는 향기들을 마련하며
  연꽃이 큰 봉오리를 열었다.

 

 


 연

  - 최병준 -


  바람맞이에서
  영원한
  바램으로,

  정월 보름
  서걱대는
  벌판에서

  연을 날린다
  액막이 연

  하늘 추스르는
  처용아비
  팔다리 휘감아
  너훌너훌

  서울 밝은 달 아래
  이슥히 노닐다가
  핑그르
  돌아가는 얼레야,

  안에 들어 자릴 보니
  가랭이가 넷이고나
  새촘하게 긴장하는
  실의 감촉

  둘은 내 것이었는데
  둘은 뉘 것이냐
  아아라히 먼
  아리 아리 아리랑 아리랑아

  본디 내 것이었지만
  빼앗긴 걸 어쩌리
  절씨구
  닐리리야 니나노 얼씨구

  비상하는 연,
  점으로 이어지는
  처용아비, 처용아비

  텅빈 벌판에서
  순리대로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쥐불 이는 논두렁에서

  표표롭게
  연을 날린다

  위대한
  해체

 

 

 

연가 (戀歌)

          - 김기림(金起林) -

 

두 뺨을 스치는 바람결이 한결 거세어 별이 꺼진 하늘 아래

짐승처럼 우짖는 도시의 소리 피해오듯 돌아오면서

내 마음 어느 새 그대 곁에 있고나

그대 마음 내게로 온 것이냐


육로(陸路)로 천리(千里) 수로(水路) 천리

오늘 밤도 소스라쳐 깨우치는 꿈이 둘

가로수 설레는 바람소리 물새들 잠꼬대……

그대 앓음소리 아닌 것 없고나


그대 있는 곳 새나라 오노라 얼마나, 소연하랴*

병 지닌 가슴에도 장미 같은 희망이 피어

그대 숨이 가뻐 처녀같이 수다스러우리라


회오리 바람 미친 밤엔 우리 어깨와 어깨 지탱하여

찬비와 서릿발 즐거이 맞으리라

자빠져 김나는 뭉둥아리* 하도 달면* 이리도 피해 달아나리라


새나라 언약이 이처럼 화려커늘

그대와 나 하루살이 목숨쯤이야

빛나는 하루 아침 이슬인들 어떠랴

 


* 소연(騷然)하다 : 떠들썩하다.

* 뭉둥아리 : 몸뚱어리.

* 달다 : 몸이 화끈해지다.

 

 

연가 9

         - 마종기 -

  1
  전송하면서
  살고 싶네.

  죽은 친구는 조용히 찾아와
  봄날의 물속에서
  귓속말로 속살거리지,
  죽고 사는 것은 물소리 같다.

  그럴까, 봄날도 벌써 어둡고
  그 친구들 허전한 웃음 끝을
  몰래 배우네.

  2
  의학교에 다니던 5월에, 시체들 즐비한 해부학 교실에서 밤샘을 한
어두운 새벽녘에, 나는 순진한 사랑을 고백한 적이 있네. 희미한 전구와
시체들 속살거리는 속에서, 우리는 인육 묻은 가운을 입은 채.
  그 일년이 가시기 전에 시체는 부스러지고 사랑도 헤어져, 나는 자라지도
않는 나이를 먹으면서 실내의 방황, 실내의 정적을 익히면서 걸었네.
홍차를 마시고 싶다던 앳된 환자는 다음날엔 잘 녹은 소리가 되고 나는
멀리 서서도 생각할 것이 있었네.

  3
  친구가 있으면
  물어 보았네.

  무심히 걸어가는 뒷모습
  하루종일 시달린 저녁의 뜻을.

  우연히 잠깨인 밤에는
  내가 소유한 빈 목록표를,
  적적한 밤이 부르는 소리를.

  우리의 내부는
  깊이 물 속에 가라앉고
  기대하던 그 웃음을
  물어 보았네.

 


     연가 12

  1
  이렇게 어설픈 도시에서 하숙을 하는 밤에는 월트디즈니의 장편
만화영화나 보자. 하숙이 허술해서 몽땅 도둑을 맞았으니 온돌을 때는
이 극장이 격에 어울리지. 총천연색의 세상에서 나도 메뚜기가 되어 보면,
밖에는 눈이 그칠 새 없고 혼자 보고 혼자 오는 발이 시리다. 친구야,
총천연색의 메뚜기가 되어 살자.

  2
  도서관을 돌다가 무심결에 호흡기 내과책 한 권을 뽑았더니, 겉장에는
알 케이 알렉싼드리아의 싸인이 있고 철필로 쓴... 보스든
메서츄세츠스에 1879년 8월 2일. 1879년 8월 2일은 날씨가 흐렸다. 흐려진
철필글씨, 무덤 속에 있는 내과 의사 알렉싼드리아의 손작국을 유심히
본다. 냄새라도 맡아서 코에 기억해 두자. 1966년을 내 책에 기입하고 나도
훌륭한 내과의사가 될 것이다.

  3
  현관이 있는 집을 가지면, 소리 은은한 초인종을 달고, 지나가던 친구를
맞으려고 했었지. 파란 항공엽서로는 연상 편지를 쓰면서 겨울을 사랑하고,
테없는 안경을 끼고 수염을 조금만 키운 뒤, 조용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헷세의 아우구스투스를 읽으려고 했었지. 이제 당신은 알고 말았군. 길어야
육개월의 대화만이 남은 것 육 깨월의 사랑, 육 개월의 세상, 육 개월의
저녁을, 그리고 나에게 남은 육 개월을, 육 개월의 눈물을 알고 말았군.

 

 

 

연날리기

          - 박남철 -

 

  한번 날아 보구 싶어라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르고
  오온 동네방네 쏘다녔던 그 어릴 때처럼
  훌훌훌 코 흘리면서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고요한 언덕배기 위에 두 다리 벌리고 서서
  높이 날려 올리고 싶어라
  언젠가 바람은 불어 오리라
  흔들리지도 않는 높은 산봉우리를 그저 바라보며
  소리도 없이 그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고
  돌아다보면 오 광활한 세계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잔잔한 침묵
  언젠가는 숨막히는 함묵은 깨어지고
  순하고 순하지도 않은 바람은 저도 모르게
  갑자기 느닷없이 일어나리라
  저 낮은 곳의 푸르른 벌판으로 빽빽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한꺼번에 술렁술렁 흔들리면서
  바람은 이 호젓한 언덕 위로
  멍멍멍 잡초들만 무성한 이 언덕배기로
  슬픈 사랑처럼 달려오리라
  아직 미처 고개 수그리지 못한
  수천 수백만의 착한 벼포기들이
  어느날 갑자기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면
  익은 열매 터지듯이 툭툭툭 깨어나면서
  웅성웅성 흔들리면서 바람은 일어나리라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한번 날려 보구 싶어라
  이 부끄러운 언덕배기 위에서 날려 보구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웃으면서 울면서
  먼지 쌓인 얼레를 풀어 주고 싶어라
  달달달 풀어 주고 혹은 서서히
  조금 잡아다녔다 다시 풀어 주고
  자유롭게 더 자유롭게 풀어 주고
  그러다 실이라도 그만 툭 끊어지면
  가물가물 허물어지며 멀어지는 연을 따라
  아아아 고함지르며 달려가고 싶어라
  돌아다 보면 저 광활한 세계
  함께 숨쉬고 함께 자라면서
  동화 속의 난장이들처럼 함께 잠자는
  평평하고 푸른 세계의 말 없는 약속
  언젠가 바람 불어 오면 그 바람을 마시면서
  끝도 없이 바람 잔잔한 이 뜨거운 계절을
  지루하고 지루한 닫혀 있는 시간들을
  두 발로 버티고 서서 추억하고 싶어라
  너무 기뻐서 마구 울면서 웃으면서
  정직한 역사처럼 텅 빈 허공 위로
  날려 올리고 싶어라 방패연
  날려 올리고 싶어라 가오리연
  질긴 생명의 가느다란 실을 풀어
  한번 날려 보고 싶어라 한번
  날아 보고 싶어라

 

 

연두색 하느님

              - 김동원 -


  나의 연두색 하느님,
  탄생의 조건을 땅에 내려놓지 마시고
  죽음의 조건을 하늘에 올려놓지 마십시오.

  제한없는 조건을 던져
  낯선 거리를 방황하게 하지 마시고,
  이 세상 눈물이
  칠월의 홍수같이 넘치는 것을
  손으로 감추지 마십시오.

  천근의 돌을
  당신의 언덕으로 나르게 하지 마시고,
  만길도 넘는 바닷물을 기르게 하지 마십시오
  또한 무릎을 꿇고는
  세상을 살게 하지 마십시오

  맨발로
  꽃피는 언덕을 밟게 하여 주시고,
  속살을 다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은 
  조건없는 물의 순결을
  나애개 주십시오.

  사랑의 조건
  혹은 죄의 조건을 만들지 마시고,
  꽃 혹은 열매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조건으로 다스리는 천한 땅,
  황제의 얼굴을 하지 마십시오.

  당신과 너무 친하지 못하도록
  나를 멀리 떨어져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리햐여
  당신과 너무 친밀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이 세상 모든 죄악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십시오.

  하늘의 조건 혹은 땅의 조건을
  만들지 마십시오.

  타인을 죄인처럼 갈라놓는
  눈먼 개인이 되지 마십시오.
  어느 개인의 하늘이 되지 마십시오.
  나의 연두색 하느님.

 

 

 

연모(戀慕)
          - 이병각 -

 
나의 호반(湖畔)을 날아다니는 어린 나비는
호박(琥珀)으로 만들어진 궁(宮)속에서 나왔습니다

청(靑) 나일보다 맑은 호수를 보았습니다

나의 아씨보다 아름다운 나비가 있거든
민들레 두견화 할 것 없이 할미꽃 삼월이라도 좋으니
나의 호반에 돌려보내 주세요

동풍이 불면 호수는 외로와지고
나의 소녀는 나비처럼 지쳐진답니다
당신은 앙상한 호저(湖底)의 바위를 보시렵니까?

 

 

 

연보(年譜)

      - 이육사 -

 

너는 돌다리목에서 주워왔다 던

할머니 핀잔이 참이라고 하자

 

나는 진정 강 언덕 그 마을에

버려진 문받이였는지 몰라

 

그러기에 열여덟 새봄은

버들피리 곡조에 불어 보내고

 

첫사랑이 흘러간 항구의 밤

눈물섞어 마신 술 피보다 달더라

 

공명이 마다곤들 언제 말이나 했나

바람에 불려 돌아온 고장도 비고

 

서리 밟고 걸어간 새벽길 위에

간(肝) 잎만 새하얗게 단풍이 들어

 

거미줄만 발목에 걸린다 해도

쇠사슬을 잡어맨 듯 무거워졌다

눈 위에 걸어가던 자욱이 지리하고

때로는 설레이며 바람도 불지 

 

 

연 시

     - 박용래 -
                                                                  

여름 한낮

비름잎에

꽂힌 땡볕이

이웃 마을

돌담 위

연시(軟枾)로 익다

한쪽 볼

서리에 묻고

깊은 잠 자다

눈 오는 어느 날

깨어나

제상(祭床) 아래
 
심지 머금은

종발로 빛나다.
 


연서戀書

        - 정진규 -

 

이른 새벽 화계사 눈 내린 겨울 솔숲으로 나를 데리고 갔어요

 즐문櫛文으로 흐르는 맨몸의 솔바람소리 싸아한 내음새 그 가운데서도

 깊게 패인 櫛文, 속살이 보이는 빗살무늬 하나는 물론 정중하게

 비껴갔어요 그 때묻지 않은 첫번째 자리엔 이 몸을 들어앉힐 수가 없었어

 요 손댈 수가 없었어요 아무리 내가 건달이라 할지라도 숫처녀에겐 그럴

 수가 없었어요 사람으로서의 염치가 아닐지요 탐하지 않았어요 잘한

 일이지요 은혜가 왔어요 이윽고 櫛文의 싱그러운 냉기들이 엉킨 내 실핏

 줄들을 곱게 빗질했어요 그래서 한 삼 년쯤 내가 더 살 수도 있겠다는

 마음의 푸른 등뼈 하나가 고맙게도 꼿꼿이 다시 서는 깊은 솔바람소리를

 나는 들었어요 읽어주셔요 끝내 지워질 수 없는 내가 쓴 상형문자象形

 文字 하나를 나의 櫛文을 냉기 한 사발을 가난한 대로 그대에게 드릴

 수 있게 되었어요

 

 

 

영산홍

    - 서정주 -

 

영산홍 꽃잎에는

산이 어리고

 

산자락 낮잠든

슬픈 소실댁

 

소실댁 툇마루에

놓인 놋요강

 

산넘어 바다는

보름살이때

 

소금밭이 쓰려서

우는 갈매기

 

 

연탄갈기

         - 이동순 -

 

  무엇이 다른가 불타고 지는 모습은
  쪼그리고 앉아서 연탄 갈아 넣으며
  우리들 살과 피의 왕래 없음이여
  이 밤을 헤매이는 개짖음만 못하리
  바람결에 살의 분노 소란한 땅에
  한 줄기 이름 없는 풀잎이 산다
  아무나 와서 보라, 저절로 자란 초목
  그대 목침에 깔려 신음하는 신문지
  가까운 들판에는 푸른 개똥이 마르고
  지하의 풀뿌리에 서릿발 친다
  내 살을 차고 노는 자여
  아픈 머리 찬 물에 담그는 자여

 

 

 

연탄재

     - 안도현 -

 

발로 차지말아라

네가 언제 남을 위해 그렇게 타오른 적이 있었더냐

 

 

연탄 한 장   
             - 안 도 현 - 
                                                       
또 다른 말도 많고 많지만
삶이란 
나 아닌 그 누구에게
기꺼이 연탄 한 장 되는 것
방구들 선득선득해지는 날부터 이듬해 봄까지
조선 팔도 거리에서 제일 아름다운 것은
연탄차가 부릉부릉
힘쓰며 언덕길을 오르는 거라네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듯이
연탄은, 일단 제 몸에 불이 옮겨 붙었다 하면 
하염없이 뜨거워지는 것
매일 따스한 밥과 국물 퍼 먹으면서도 몰랐네
생각하면
삶이란 
나를 산산이 으깨는 일
눈 내려 세상이 미끄러운 어느 이른 아침에
나 아닌 그 누가 마음을 놓고 걸어갈
그 길을 만들 줄도 몰랐었네. 나는


 

                        0157584.1

                                       - 전봉건(全鳳健) -

                                             

 

                          아이브로우 크림 콤펙트의 광고사진 그리고 파우더 루우즈

                          9분전

 

                          넓적다리 같은 베이컨과 덩어리 베이컨 같은 엉덩이,          

                          나는 원색판(原色版) LIFE를 접는다.

                          딴딴한 눈이다. 햇살이 비친 야광시계의 유리판...

                          여자 장교 포로의 팬티가 무슨 색갈인지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보초병 철모 위에 떠 있는 그름들의 가장자리가 맑다.

                          그 아래로 산이 있다는 것과 브레스트 밴드를 생각한다.

                          무수한 그것들은 벙커다.

 

                          소대장이 돌아섰다.

                          다시 11시 방향

 

                          나는 허리를 굽힌다.

                          차폐물(遮蔽物)이 없는 슬로프

 

 

 

연필로 쓰기

        - 정진규 -

                                         

 

 한밤에 홀로 연필을 깎으면 향그런 영혼의 냄새가 방 안 가득 넘치더라

고 말씀하셨다는 그분처럼 이제 나도 연필로만 시를 쓰고자 합니다 한 번

쓰고 나면 그뿐 지워버릴 수 없는 나의 생애 그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연

필로 쓰기 지워버릴 수 있는 나의 생애 다시 고쳐쓸 수 있는 나의 생애 용서

받고자 하는 자의 서러운 예비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 언제나

온전치 못한 반편 반편도 거두어 주시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연필로 쓰기

잘못 간 서로의 길은 서로가 지워드릴 수 있기를 나는 바랍니다 떳떳했던

나의 길 진실의 길 그것마저 누가 지워버린다 해도 나는 섭섭할 것 같지가

않습니다 나는 남기고자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감추고자 자는 자의 비겁함

이 아닙니다 사랑하는 까닭입니다 오직 향그런 영혼의 냄새로 만나고 싶기

때문입니다

 

 

 

연꽃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서정주 -

 

섭섭하게

그러나

아주 섭섭치는 말고

좀 섭섭한듯 하게

 

이별이게

그러나

아주 영 이별은 말고

어디 내생에 서라도

다시 만나기로 하는 이별이기에

 

연꽃

만나러 가는

바람이 아니라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엊그제

만나고 가는 바람 아니라

한두 철 전

만나고 가는 바람같이 ...
 

 

 

열대어의 유전인자

          - 박상천 -


  엔젤 핏시는 이제 아마존을 꿈꾸지 않는다.
  다방 한가운데 놓여진 어항
  알맞게 맞춰주는 수온
  실지렁이, 수초, 형광등 불빛에 그들은 만족해 한다.

  몇 대인가를 거치며 아마존의 꿈을 포기한 후, 어항 유리에 몸을
부딪지도 않고 어항 밖 사람의 장난에 놀라지도 않는다. 그저 온 몸으로
부지런히 헤엄쳐 다니다가 변질된 유전인자를 물려주고 어느날 아침,
굳어져 조금 뒤틀린 몸으로 조용히 물 위에 떠오를 뿐이다.

 

 

 

엽서 1

       - 박남철 -


  저녁 여섯시
  느즈막히 연착한 기차가
  마을에 닿으며 그 제사
  나는 희미하게 확인된다
  스물 여섯의 미망을 감추고도
  오랜 부끄러움
  시력 0.1의 안경을 벗고
  백지 위에 엎드린다

  빈 시계
  아침에 까치는 세 번 울었다

 

 

 

영혼의 닻

      - 김상환 -


  달 뜨지 않은 밤에 나는
  심천 미류나무 숲속에
  슬픈 짐승처럼 쭈그리고 앉아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타는 음성을 듣는다.

  원무를 그리며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간증의 불꽃은
  삼경을 지나
  더욱 간절한 몸부림으로 떤다.

  나는 살을 쥐어뜯어며
  본향을 생각하다,
  꿈에만 출항하는 영혼의 뱃고동 소리에
  시선이 멎다

  어차피 모래알처럼 부서질
  너와 나는
  일어나 숲속을 헤매이다, 새벽녘
  깊이도 모를 바다의 숲속에 
  닻을 내린다.

 

 

 

이 가슴 북이 되어

                 - 이운용 -

 

  이 가슴 울리지 않는 북이 되어
  한 천년쯤 두들기면 소리 날까요?
  멍들어 시펄시펄한 세월
  먹피를 사발로 퍼내면서

  한 주일 내내 두들겨 맞고
  미사에 나가면
  우리 하느님도 날 미워하시는지
  악기소리가 안 난다고 짜증이고
  소리 나면 곱지 않다고 윽박지르니
  북이여, 나의 가슴이여
  둥둥둥 둥둥둥 울려만 다오.

  곤장을 맞으면 몇 개가 더 부러져야
  이 가슴 북이 되어 울릴 것인지
  억울한 울음에도 소리 나지 않고
  혼자 코먹은 눈물 훌쩍이는 나의 북이여.

 

 

 

이 강산 돌이 되어

           - 김정숙 -


  나도 이전엔 한 그루 나무나 날아가는 새였는지 몰라
  치술령 고개마루 기다림 한에 얼어 서 있꺼나
  동굴 속 부처의 형상으로 가부좌튼 내 동료들도
  먼먼 예전엔 사람이었나 몰라
  관가마루 높은 기둥 받치던 내 동료 불타 죽고
  앉은뱅이 누구는 대궐 잔치판에서 녹두를 갈고
  또다른 누구는 성곽 벽에서 총알받이 되고
  손바닥만한 텃밭 지키다 군화발에 짓밟히기도 해도

  그 부릅뜬 눈으로
  두고 보는 게야 만수산 드렁칡이 서로 엉겨 즐거이
  개미떼 벌떼 떼서리로 긁어 모으며 즐거이
  이 강산 살찔 때
  저들이 다시 살아 무엇이 되는지
  처음 태어났던 사과나무 아래 징그런 몸뚱이의 뱀으로
  거꾸로 매달린 넓은 손의 박쥐로
  물 위를 딛고 선 긴 다리의 소금쟁이로 그런 것들로
  허공에 다시 삶을 펄럭일지
 
  두고 보면서 한 천 년 누워
  할 말 뜨거운 마음 땅 가까이 가라앉히면
  내 이마에서 푸른 달빛 푸른 노래 솟아날까 몰라
  푸른 들판 홀로 지키는 푸른 솔이 될까 몰라
  죄 많은 인간의 자식을 다시 태어나
  그들의 아버지 할아버지 뼈 묻힌 바로 그 자리에서
  저들이 또 싸우지 않으면 무얼 하는지
  다시 한 천 년쯤 두고 보려고

 

 

이 강산 유월은

          - 김정숙 -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운다 비가 와야지 큰아버지
  사촌형 없는 큰어머닌 오늘도 일손이 달린다
  묘비 없는 뒷산 구덩이를 아카시아 뿌리 휘감아 들 때
  못박아야지 살아남은 죄
  손바닥에 아카시아 가시라도 박아야지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며
  혼자 남아 너무 오래 살았어 큰어머니 한숨소리
  자잘한 고추꽃 위로 낮게 깔리며 고추나무 흔들 때

  삼십년이 지나도 못 감은 눈 몇 개
  밭기슭에 누워 우리를 본다
  참꽃 지고도 아직 칡꽃 피지 않은 이 강산 유월은
  보리고개 넘어 내리막길
  보리밥과 풋고추에 뒤가 급한 내리막길
  비탈에 기대어 잠든 조카들의 식곤증 속

  마을마다 대순이 자란다 조카들의 잠을
  쿡쿡 쑤시는 오래된 해골의 뼈마디
  이마를 타고 내리는 그들의 희석된 피
  저 대나무를 못 자라게 하자 자라면 꺾일 뿐
  꺾이면 온몸 피묻힐 뿐 네 피 내 피 없이
  더위에 흐르는 네 땀 내 땀 없이 유월 가뭄에

  쓰러지지 마라고 고추나무에 받침대를 세우면
  이 강산 천지 벗어놓은 뱀 허물이 흐느적거린다
  삼십년이 지나도 못감은 눈들 불을 켜고
  대나무처럼 곧게 자라지는 마라 속삭이는 마?마다
  아직도 대순이 자라는 이 강산 유월은

 

 

 

이대로 가자

         - 유진오 -

죽음인들 대수로우냐 
이대로 가자 
괴로움이면 차라리 
뼈를 앗아라 

사나운 바람 속에 
눈물 어려 살아왔다 
가야만 할 길이다 
꽃잎처럼 떨어지자 

하나 둘 
헤일 수 없이 
짓밟혀 간다 
아까운 목숨들이 
악착스리 짓밟힌다 

사나운 발굽 밑에 
꽃잎이 있다 
번쩍이는 총칼 밑에 
목숨이 있다 

꽃 같은 목숨이 
땅 위에 떨어졌다 
떨어진다 

허수히 죽는 게 아니다 
그냥 스러지는 
꽃 같은 목숨이 아니다 

땅 속에 흙 속에 
다시 피리라 
죽어도 떨어져도 
꽃은 피고 
꽃은 남는다 

죽음인들 대수로우냐 
이대로 가자 
괴로움이면 차라리 
뼈를 앗아라

 

 

 

이 땅에 무슨 일이

           - 박찬 -


  하늘도 울적할 땐 눈물 흘린다
  하기사 그 많은 영혼들의
  서슬 퍼런 한으로 가득한 하늘
  가을 하늘은 그래서 유난히 더 푸르른가
  이 땅에 무슨 그런 슬픈 일들이
  흐르면 한낱 잊혀질 법한 망연한 기억들인데
  여기저기 서러운 낱말들로 둥둥 떠다니나
  이따금씩 촉촉히 적셔오는 가을비같이
  아아!
  그때도 저렇게 소리없이 비는 내렸겠구나
  저렇게 고요히 머리숙여 꽃은 피었겠구나
  아무도 오지 않는 호젓한 어느 강가에서
  꽃들은 저렇게 울며 섰었겠구나
  지금 눈 앞에
  하나의 사물처럼 날으는 제비
  다만 소리로 들려오는 벌레들의 온갖 울음들,
  그런 모든 것들은
  이 땅의 무슨 들러리 같은 것쯤 아니었겠는가

 

 

 

이 땅에 모여 3

         - 정인섭 -


  겨울이 오고 논이 비었다
  이 한 해 흙을 파다가
  다친 손이며 뒷목 살기낀 나락씨들 단단히
  논바닥에 묻혀 가고
  검불 줍던 눈들 어디론지 가서는
  검불 가리며 침침한 불을 밝히고^256^
  우리에게 남은 일은 오래 잠 깨어
  새떼를 부르거나 우물을 파며
  온 나라 들을 모으는 일뿐
  얼며 흐르며 두껍게 근심 쌓는 일뿐
  지금 쑤시는 허리와 그슬린 얼굴들 모아
  서로 덮는 일뿐
  담양 곡성 장성 화순
  새들은 하늘에 멈추어 울고
  물은 남북으로 다시 갈라져
  오늘은 탈곡기 밑에서 마른 손가락이 나오고^256^
  논바닥에 넘치며 길들을 끊으며
  겨울비가 내린다, 모두
  조선 들에 모여 흘러내린다

 

 

 

이땅에 살기 위하여
Pour vivre ici
 *Jean Arp : 폴 엘뤼아르
 
1

하늘이 나를 버렸을 때, 나는 불을 만들었다.
동지가 되기 위한 불
겨울의 어둠 속으로 들어가기 위한 불,
보다 더 나은 삶을 위한 불을.

낮이 나에게 베풀어 준 모든 것을
나는 그 불에게 바쳤다.
울창한 숲과, 작은 숲, 보리밭과 포도밭을, 
보금자리와 새들, 집과 열쇠를
벌레와 꽃들, 모피들 그리고 모든 축제를

나는 불꽃이 파닥거리며 튀는 소리만으로 
그 불꽃이 타오르는 열기의 냄새만으로 살았다.
나는 흐르지 않는 물 속에 참몰하는 선박
죽은 자처럼 나에게는 단 하나의 원소밖에 남지 않았다.
 
2

창가의 벽이 피를 흘리고
나의 방에서 어둠은 떠나지 않는다.
나의 눈이 폐허에 부딪치지 않는다면
나의 눈은 어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으리라.
유일한 자유의 공간은 내 마음 속 깊은 곳
그것은 죽음과 친숙한 공간
혹은 도피의 공간

상처 입어 움츠러든 날개가 그곳을 이리저리 날아다닌다.
그곳은 연약한 나의 모습으로 에워싸여져
나는 견딜 수 있을까 새벽을 잡을 수 있을까.
더 이상 어둠을 보지 않기 위해
유일한 빛을 잃어버려야 한다.

밤은 내 위에서만 열리고
나는 불확실한 인생의
기슭, 그리고 열쇠이다.
 
3

달은 숨어버리고 수탉은 볏을 긁는다.
불의 한 방울이 차가운 물 위에 뜨고
마지막 안개의 찬송을 노래 부른다.

대지를 보다 잘 보기 위하여 
두 개의 불타는 나무가 내 눈을 가득 채운다.

떨어져 흩어진 마지막 눈물
두 개의 불타는 나무가 나의 생명을 소생시킨다.
두 개의 나무는 벌거벗고
대지여,
내 마음 속에 살아있는 대지여.
먼 거리는 사라지고
샘솟는 나 자신의 새로운 리듬
그것의 영원함이여.

열정이 가득찬 추위, 별들이 가득찬 추위
덧없는 가을 소멸된 추위
바쳐진 봄 시대의 첫 번째 반영
진심으로 우아한 여름 그림자 없는 영웅

나는 대지 위에 있고 모든 것은 불에 순응한다.
 
4

*Jean Arp에게

손길이 자아내는 완전함
피를 찢는 창백한 손
피는 점점 둔화되어
이상의 노래를 중얼거린다.

너의 손길에 의해 자연은 
평등한 매력을 이뤄내고 
너의 창가에
모든 풍경은 
언제나 아침이다.

언제나 빛은 승리자의 흉상胸像에 있는 것

육체에 가득찬 젊음

대지를 살며시 애무하면
대지와 보화는 혼합되고
풀섶을 헤치며
빛을 들춰내는 
너의 손은 새로운 요람을 창조한다.

5

어떠한 인간도 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인간도 잊혀지지 않으며
어떠한 어둠도 투명하지 않다.

나홀로 있는 곳에서 나는 많은 인간을 만나며
나의 근심은 가벼운 웃음으로 깨어지고
엄숙한 나의 목소리에 뒤섞여 들려오는 부드러운 목소리
내 눈은 순수한 시선의 그물을 유지한다.

우리는 험난한 산과 바다를 지난다.
미친 듯한 나무들이 맹세한 내 손의 길을 가로막고
방황하는 동물들은 생명을 산산조각 내어 나에게 몸을 바친다.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나의 영상이 풍성해지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자연과 거울이 흐려진다는 것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하늘이 비어 있다는 것이, 
나는 외롭지가 않은데.

 

 

 

이름 없는 여인이 되어

                         - 노천명 -

 

어느 조그만 산골로 들어가
나는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 싶소


초가 지붕에 박넝쿨 올리고
삼밭에 오이랑 호박을 놓고
들장미로 울타리를 엮어
마당엔 하늘을 욕심껏 들여놓고
밤이면 실컷 별을 안고
부엉이가 우는 밤도 내사 외롭진 않겠소.


기차가 지나가 버리는 마을
놋양푼의 수수엿을 녹여 먹으며
내 좋은 사람과 밤이 늦도록
여우 나는 산골 얘기를 하면
삽살개는 달을 짖고
나는 여왕보다 더 행복하겠소.

 

 

 

이발사의 봄

      - 장서언 -

 

  봄의 요정들이
  단발하러 옵니다.

  자주공단 옷을 입은 고양이는 졸고 있는데
  유리창으로 스며드는 프리즘의 채색은
  면사인 양 덮어 줍니다.

  늙은 난로는 가맣게 묵은 담뱃불을 빨며
  힘없이 쓰러졌읍니다.

  어항 속에 금붕어는
  용궁으로 고향으로
  꿈을 따르고

  젊은 이발사는 벌판에 서서
  구름 같은 풀을 가위질할 때

  소리없는 너의 노래 끊이지 마라.
  벽화 속에 졸고 있는 종달이여.

 

 

이별

    - 박천 최정순 -

 

구름 벗고

살그머니 다가와

향기로운 입맞춤 남긴 당신

먹구름 쌓여

얼굴 감추더니

뇌우(雷雨) 깊은 상처 주고

 

구멍난

내 가슴 깊이

대못 하나 쾅, 박고 떠나가네.

 

 

 

이별가
      - 박목월 -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뭐라카노, 바람에 불려서

이승 아니믄 저승으로 떠나가는 뱃머리에서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뭐라카노 뭐라카노 
썩어서 동아 밧줄은 삭아 내리는데

하직을 말자 하직 말자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뭐락카노 뭐락카노 
니 흰옷자라기만 펄럭거리고

오냐. 오냐. 오냐.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이승 아니믄 저승에서라도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

뭐락카노, 저 편 강기슭에서 
니 음성은 바람에 불려서

오냐. 오냐. 오냐 
나의 목소리도 바람에 날려서. 

 

 

이별의 노래 

     - 박목월 - 


기러기 울어예는 하늘 구만리 
바람이 싸늘 불어 가을은 깊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한낮이 끝나면 밤이 오듯이 
우리의 사랑도 저물었네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산촌에 눈이쌓인 어느날 밤에 
촛불을 밝혀두고 홀로 울리라 
아! 너도 가고 나도 가야지

 


이별이래

    - 서가인 - 

 

조용한 그대의 눈동자 말없이 서있는 내모습
이렇게 가까이 있는데 이것이 이별이래
하늘에 흐르는 조각달 강물에 어리는 그림자
세상은 변한게 없는데 이것이 이별이래

 

이제는 다시 볼수 없는 그대의 슬픈 얼굴
세월이 흐른 뒤에 하얗게 지워질까
추억이 밀려와 쌓이는 우리의 남겨진 시간들
이대로 발길을 돌리면 이것이 이별이래

 

이제는 다시 볼수 없는 그대의 슬픈 얼굴
세월이 흐른 뒤에 하얗게 지워질까
추억이 밀려와 쌓이는 우리의 남겨진 시간들
이대로 발길을 돌리면 이것이 이별이래

 

 

이별은 미(美)의 창조

               - 한용운 -
                                                                                                                             
 

이별은 미(美)의 창조입니다.

이별의 미는 아침의 바탕[質] 없는 황금과 밤의 올[絲] 없는 검은 비단과 죽음 없는 영원의 생명과 시들지 않는 하늘의 푸른 꽃에도 없습니다.

임이여, 이별이 아니면 나는 눈물에서 죽었다가 웃음에서 다시 살아날 수가 없습니다. 오오, 이별이여.
 
미(美)는 이별의 창조입니다.
 

 

 

 이 바쁜 때 웬 설사

              - 김용택 - 

 

소낙비는 오지요

소는 뛰지요

바작에 풀은 허물어지지요

설사는 났지요

허리끈은 안 풀어지지요

들판에 사람들은 많지요

 


이런 詩
       -  이 상 -

 
역사를 하노라고 땅을 파다가 커다란 돌을 하나 끄집어내어 놓고 보니 도무지 어디선가 본 듯한 생각이 들게  모양이 생겼는데 목도들이 그것을 메고 나가더니 어디다 갖다 버리고 온 모양이길래 쫓아나가 보니 위험하기 짝이 없는 큰길가더라.

그 날 밤에 한 소나기하였으니 필시 그 돌이 깨끗이 씻겼을 터인데 그 이튿날 가 보니까 변괴로다. 간 데 온데 없더라. 어떤 돌이 와서 그 돌을 업어갔을까? 나는 이런 참 처량한 생각에서 아래와 같은 작문을 지었도다.

'내가 그다지 사랑하던 그대여! 내 한평생에 차마 그대를 잊을 수 없소이다. 내 차례에 못 올 사랑인 줄은 알면서도 나 혼자는 꾸준히 생각하리다. 자, 그러면 내내 어여쁘소서.’

어떤 돌이 내 얼굴을 물끄러미 치어다보는 것만 같아서 이런 시는 그만 찢어 버리고 싶더라.

 

 

 

 이사
     - 원동우 -
 

  아이의 장난감을 꾸리면서 
  아내가 운다 
  반지하 네평 방을 모두 치우고 
  문턱에 새겨진 아이의 키눈금을 만질 때 풀석 
  습기찬 천장벽지가 떨어졌다 
  
  아직 떼지 않은 아이의 그림 속에 
  우주복을 입은 아내와 나 
  잠잘 때는 무중력이 되었으면 
  아버님은 아랫목에서 주무시고 
  이쪽 벽에서 당신과 나 그리고 
  천장은 동생들 차지 
  지난번처럼 연탄가스가 새면 
  아랫목은 안되잖아, 아, 아버지 
  
  생활의 빈 서랍들을 싣고 짐차는 
  어두워지는 한강을 건넌다 (닻을 올리기엔 
  주인집 아들의 제대가 너무 빠르다) 갑자기 
  중력을 벗어난 새떼처럼 눈이 날린다 
  아내가 울음을 그치고 아이가 웃음을 그치면 
  중력을 잃고 휘청거리는 많은 날들 위에 
  덜컹거리는 서랍들이 떠다니고 있다 
  
  눈밭에 흐려지는 다리를 건널 때 아내가 
  고개를 돌렸다, 아참 
  장판 밑에 장판 밑에 
  복권 두 장이 있음을 안다 
  강을 건너 이제 마악 변두리로 
  우리가 또 다른 피안으로 들어서는 것임을 
 눈물 뽀드득 닦아주는 손바닥처럼 
  쉽게 살아지는 것임을 
  
  성냥불을 그으면 아내의 
  작은 손이 바람을 막으러 온다 
  손바닥만큼 환한 불빛 

 

 

이삭줍기

     - 정동주 -


  앞서거니 뒷서거니 풀잎에 가을 듣는 날
  바인더가 흘려버린 벼이삭을 줍는다
  기계를 믿은 어리석음의 흔적을 줍는다

  맨손으로 먹이를 집어먹던 날부터
  숟가락 혹은 젓가락으로 식사를 하는
  오늘까지의 거리는 손바닥과 손등의
  그저 거기서 거기까지일 뿐
  원시채집경제는 아직도 흙에 살아 있고
  벼이삭 줍는 뜻은 목숨의 노래

  이삭 하나에서 한 계절이 열린다
  이슬이 발목 적시고
  달콤한 바람 불던 날 아침의
  들길에서 만난 김씨와 나누는 인사는
  원시보다 낮은 곳에서
  문명보다 높은 곳으로 소리없이
  와닿는 곡식들의 키를 짐작하는
  들새들 눈매만큼이나 아름다운 것인데

  이삭 하나에서 한 시대가 보인다

  오지그릇 장수였다던 고조할아버지
  짚세기 자욱마다 괴어 있는
  사람 아래 사람들 목이 진 눈물이
  떨리며 숨어 삭아 어룽진 거,

  참봉댁 머슴이었던 증조할아버지
  거덜난 삶의 팍팍한 황톳길
  낮도 밤 같은 한평생 주름살이
  무잠뱅이 기운 자욱으로 드러나는 거,

  일제 때 징용 가서 객사한
  빈혈 묻은 할아버지의 조국 하늘과
  6^256^25 때 탄알 지고 가다 행방불명된
  울 아버지 검정고무신에 흥건하게
  괴어 있을 피냄새에 엉겨붙는 파리떼
  파리떼처럼 그날 그날의 높이를
  날아보다 사라지는 하루살이 같은 거,

  월남땅 정글에서 전사한 큰형의 그
  비폭력 논리가 방위세로 부정되는 것과
  중동땅 어느 모래펄에서
  산소용접기를 손에 쥔 채 죽었다는
  작은형 적금통장에 쓸쓸하게 남아 있는
  빈 공간 같은 거

  이삭 하나에서 이상기류가 흐른다

  들바람이 농약 냄새에 시들고
  열어놓고 살던 사립문 뜯어낸 그 자리
  철문 달아 굳게 닫은 채 이웃 사람들
  빚더미 위에서 의료보험카드를
  그리워한다

  씨 뿌리는 사람들 단속하는 문서들과
  말 잘 듣는 사람들 다스리는 구호들이
  피임약을 팔고 냉장고를 팔며
  곡식값을 주무르고 대학은 자꾸
  인가되는데 자꾸 높아지는데
  거친 손바닥에 앙금진 노동은
  목타는 침묵일 뿐 술이 취하면
  논값과 서울의 아파트값을 자꾸
  견주어보며 깊어지는 막소주의 유혹

  그래도 그냥은 죽을 수 없는 까닭이 있어
  지난 여름 병든 들녘 바라보며 흘리던
  땀의 이름을 씹으며 씹으며,

  입 없는 농투산이 처진 어깨로 지고
  가는 국제적인 무게의 채무를 생각하며,

  아이들 키보다 빨리 자라는
  이자의 속도를 생각하며,

  컬러로 꾸며진 정책에 가리워져
  아직도 흙 속에서 영양분을 빨다가
  흙 속에 묻히는 20세기 문명을 생각하며,

  기계의 시꺼먼 이빨자욱마다
  짓무른 생존의 살냄새가
  가마니로 포장되어 팔려가는 이 시대,

  이 시대의 구석지고 메마른 땅에서
  오늘도 허리 굽혀 이삭을 줍는다

 

 

 

이 식물원을 위하여 5

        - 이경록 -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우리만의 암유를 위해서, 구화로
우리만의 결사를 지키기 위해서, 구화로

 

산난초가 입을 벙긋합니다. 포인세티아도 입을 벙긋합니다. 남천도
벙긋하고, 진달래도 벙긋합니다. 일렬의 철쭉, 동백, 열대식물들도 따라
벙긋합니다. 식물원의 식물들은 모두 입만 벙긋댑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두 발 독사도 알게 될 겝니다.

 

우리 서로 합창합시다. 구화로,
꽃을 피웁시다. 구화로,

 

 

이주

       - 유혜목 -


  수일을 두고 ?지 않던 삽질소리
  뿌리 들려 새 터에 가 잠겼다.
  정 밴 흙덩이 털고 와
  물 선 바닥에 몸져 누우니
  잠시 가라앉은 감각의 문턱

  헝클어진 일상의 자양들이
  환절기 감기로 으스겨 오는데
  만삭의 순리로 터져난 껍질
  주섬주섬 챙기며 몸조리하고 있다.

  지금 몸 담은 이 자리
  언젠가는 다시금 떨쳐 일어서야 한다.
  영주의 터가 주어지지 않은
  우리들 아직은 광야의 유목민

  엎드려 기도할 멍석만
  도르르 폈다 말으며
  내일 다가올지 모를
  가나안 입성을 기다리고 있다.

 

 

 

  20년 후의 가을

          - 곽재구 -


  내 어릴 적 산골 학교 미술 시간에
  나는 푸른 크레용으로 옥토끼 모양 우리나라
  지도를 그려 놓고 그 안에 울긋불긋 우거진
  단풍잎과 맑은 시내를 그렸었다
  산머루향이 교실까지 날아들던 오후
  사범학교를 갓 졸업한 처녀 선생님은
  내 그림을 보고 울으셨다
  가을 산꽃이 피고 해으름이 일고
  그 가을내 나는 선생님의 눈물방울과 같은
  단풍잎과 맑은 시냇물 속에 뛰놀았지만
  돌아서서 눈물 훔치던 선생님의 뒷모습과
  나를 쳐다보던 충혈된 눈동자를 잊을 수 없었다
  그래 단풍잎은 지고 세월은 가고
  이제는 선생이 된 내 앞에서
  아이들이 땀을 흘리며 그림을 그린다
  똑같은 얼굴 똑같은 슬픔의 푸른 크레용으로
  둘러친 동강 난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이들은 평상의 얼굴로
  반쪽의 땅 위에 단풍잎을 채우고
  나는 출혈된 눈으로 아이들을 보았다
  눈을 뜨고 모른다며 살아온 날들이 가슴 후비는 날
  가만히 손가락으로 그려 보는 내 땅 내 그리운
  하늘 아래 나는 이제 무엇을 채울 것인가
  내 손으로 그린 내 땅 안에 허름하게 시든
  단풍잎 하나 떨구는 것을 거부하면서
  끝내는 잊혀진 옛선생님의 눈물마저 되살아나
  동강 난 눈물방울들이 산과 바다와
  아이들의 웃는 얼굴을 뒤덮었다.

 

 

 

이어도

      - 문충성 -

 

  이어 이어 이어도 사나
  이어도가 어디에 시니 수평선 넘어
  꿈길을 가자 이승길과 저승길 사이
  아침 햇덩이 이마에 떠올리고
  저녁 햇덩이 품안에 품어
  노을길에 돛단배 한 척
  이어 이어 이어도 가자

  한라산을 등에 지고 제주
  바다와 마주 서 보라
  수평선은 하늘하늘
  눈썹 밑으로 잠기어 들고

  새 하늘 동터 올 내일을 열라, 이글대는
  수평선이어, 이글대는 가슴을 열라
  수평선 넘어 꿈길을 열라, 썰물나건 돛단배 한 척
  이어 사나 이어도 사나
  별빛 밝혀 노저어 가자
  별빛 속으로 배저어 가자

 

 

E.T

     - 김진경 -


  어릴 때 나는 검은 타이야표 통고무신을 신은 채
  까맣게 그을린 배가 툭 튀어 나와 있었고,
  동네 논에 불시착한 헬리콥터에서
  쑤알라거리면서 내리는 미군은
  사랑이니 평화니 말하기에는 우주인처럼 생소해서
  내 친꾸의 아버지는 망가진 벼값을 받을 수 없었다.

  군에서 휴가나왔을 때에 빌리 그레함이 왔고
  여의도엔 300만 인가가 모였고, 어머니도 그 중에 하나였고
  비가 오려고 했으므로 우산을 들고 어머니를 찾으러 갔고
  300만은 기도하고 있었다.
  사할린, 만주 등등에 있는 동포들을 구원해 주시옵소서.

  그때 가까이 서울에 있는 동포 중에는
  밀린 임금을 받으려 단식하다 떨어져 죽기도 했으므로
  나는 사람들이 갑자기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기 시작한 데 놀랐고
  빌리 그레함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헬리콥터에 올라 여의도를 한 바퀴 돌았고,
  사람들은 무슨 신음 소리를 냈으므로
  나는 그가 대단한 우주인처럼 생각되었다.

  그리고 빌리 그레함은 다시 왔다.
  이번에는 어릴 때의 나처럼 배를 툭 내밀고
  눈에서, 심장에서, 손끝에서 번갈아 불빛을 반짝이며
  광화문에서, 종로에서, 영등포에서
  사랑과 평화의 대군단을 이루었다.
  더욱 멀리 있는 것을 사랑하라.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과 평화를 우주인에게
  그때 서울에서는 모처럼의 봄이 지나갔고
  사람들은 고개를 움츠리며 코트 깃을 세웠고
  가까이 있는 것들은 무관심 속에 죽어가고 있었다.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
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
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
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
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
으로써 두 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
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
롭다는 것을

 

 

 

이 평범한 풍경이여

         - 이지향 -

 

  겨울 둥지를 풀고
  창문을 열었다
  눈이 닿는 곳마다
  눈이 생각하는 만큼의
  풍경들이 긴장해 있다

  나와 눈이 마주친
  풍경은 제 편에서 미리 미안해 한다
  점점 크게 뜨고 따라가는
  나의 눈에
  머뭇 머뭇 안개를 따라 보내며
  풍경이 하나 둘 미안해 하며
  안개 뒤로 몸을 빼돌린따

  우우우 저희끼리 모이는 잎진 나뭇가지가
  가령 저 안개를 벗고 나와
  사과나무는 사과 아닌 앵두 열매를
  매화 나무엔 매화 아닌 진달래꽃을
  피우는 일이라도 해 낸다면
  나는 하루 열 번쯤
  창문에 붚어 서서 신명이 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지독하게 정상인
  구부린 허리 얄팍한 안개뿐
  갈곳도 없는지
  자꾸 내 눈에만 들어오는
  안개 뒤에서 미안해 하는 나무들의
  이 평범한 풍?이여.

 

 

이 할애비가 살았던 어린 시절은 말이다 

                     - 임보 -

 

어리석은 무리들이 일으킨 전쟁으로

가족을 잃은 외로운 사람들이 많았단다

 

이어지는 흉년과 공출로 곡식을 잃고

끼니를 거르며 굶주리고 살았단다.

 

그러나

 

길을 가다가도 목이 마르면

개울물을 손바닥으로 움켜쥐어 마셨단다

 

젊은 여인들이 아무데서나 가슴을 열고

그들의 새끼에게 자랑스레 젖을 물렸단다

 

나막신 짚신도 귀찮아서

그냥 맨발로 들판을 뛰어다녔단다

 

어머니가 손수 지어주신 무명, 삼베

고이 적삼을 입고 살았단다

 

티브이도 냉장고도 자동차도 없었지만

이웃들과 오순도순 잘 지냈단다

 

통조림 햄버거 핏자 아이스크림 대신

칡뿌리나 찔레순을 씹으며 놀았단다

 

 

이향

     - 이기철 -

 

  제대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나는 개나리꽃이 한닷새 마을의 봄을 앞당기는
  산란초 뿌리 풀리는 조그만 시골에서
  시나 쓰는 가난한 서생이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고급 장교가 되어 있는 국민학교 동창과
  개인회사 중역이 되어 있는 어릴 적 친구들이 모두 마을을 떠날 때
  나는 혼자 다시 이 마을로 돌아와 탱자나무 울타리를 손질하는
  초부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눈 속에서 지난 해 지워진 쓴냉이 잎새가 새로 돋고
  물레방앗간 뒷쪽에 비비새가 와서 울면
  간호원을 하러 독일로 떠난 여자 친구의 항공엽서나 기다리며
  느린 하학종을 울리는 낙엽송 교정에서
  잠처럼 조용한 풍금소리를 듣는 2급정교사가 되어 살려고 생각했다.
  용서할 줄 모르는 시간은 물처럼 흘러갔고
  눈 속에 묻히는 봄보리들의 침묵이 나를 무섭게 위협했을 때
  관습의 신발 속에 맨발을 꽂으며 나는
  눈에 익은 수많은 돌멩이들의 정분을 거역하기 시작했다.
  염소를 불러모우는 비음의 말들과
  부피가 작은 몇 권의 국정교과서를 거역했다.
  뒷산에 홀로 누운 조부의 산소를 한번만 바라보았고
  그리고는 뛰는 버스에 올라 도시속의 먼지가 되었다.
  봄이 오면 아직도 그 골의 물소리와 아이들의 자치기 소리가
  도시의 옆구리에 잠든 나의 꿈 속에
  배달되지 않는 엽신으로 녹아 문지방을 울리며 흐르고 있다.

 

 

 

인동일기

        - 허영선 -

 

  강이 얼었다, 종이 비행기
  맨발인 채
  강을 건넌다

  눈만 멎으면
  바람 소리 풀 스치는 소리
  섞이지 않는다
  한사코 잠기지 않는다

  발목끼리 발목 묶고
  건너는 어둠은
  깨어지는 법 없다

  묶어 둘 수 있을까
  소리들과
  빈 강물과
  날으는 종이비행기

 

 

 

인동잎

     - 김춘수 -

 

눈 속에서 초겨울의

붉은 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

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이

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는

더욱 슬프다.

 

인동차(忍冬茶)

          - 정지용 -

노주인(老主人)의 장벽(腸壁)에 
무시(無時)로 인동(忍冬) 삼긴 물이 나린다.

자작나무 덩그럭 불이 
도로 피어 붉고,

구석에 그늘 지어 
무가 순 돋아 파릇하고,

흙 냄새 훈훈히 김도 사리다가 
바깥 풍설(風雪) 소리에 잠착하다.

산중(山中)에 책력(冊曆)도 없이 
삼동(三冬)이 하이얗다.

 

인물화

     - 장경린 -
    1
  두 다리 덜미잡힌 방아깨비처럼
  온몸을 주억거리며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로
  고려에서 코리아로
  고무신을 꺾어신고 달리는
  사람을 보았읍니까?
  쿵 쿵 쿵 쿵
  그들이 달리는 시간은
  언제나 삼경이고
  역사와 역사 사이
  사랑과 사랑 사이를
  교묘히 빠져나온 그들의 이목구비는
  오늘 따라 유난히 수려합니다.
  무교동에서
  영등포에서
  비어홀에서

    2
  또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수초 그늘에 고개를 처박고 죽은 달
  젠장.
  바람이 불면 쩍 쩌억 금이 가던데
  위험해. 그저 앞만 보고 가라니까
  어른어른 거리다 사라져 버리는 저 달빛 속으로?

    3
  06시 40분. 부활하려면 20분이나 남은 시간. 숙면으로 완벽하게 무너진
그 사내의 나이는 그런대로 아직은 쓸만 합니다. 먼지 털고 방수액을 바른
다음, 눈 코 입 귀를 틀어 막으면 누가 보더라도 번듯한 항아리 같습니다.
불만과 욕정 또는 소주와 소시민성을 담기에 편리한 자루 같습니다.

  07시.
  자, 일어나 부활하십시요.
  출금을 서두르십시요.

    4
  지하철을 타고
  꾸벅꾸벅
  통조림 속 고등어 건데기처럼 꿀렁이면서.

 

 

인파이터
-코끼리군의 엽서
          - 이장욱 -

 

저기 저, 안전해진 자들의 표정을 봐.
하지만 머나먼 구름들이 선전포고를 해온다면
나는 병어리처럼 끝내 싸우지.
김득구의 14회전, 그의 마지막 스템을 기억하는지.
사랑이 없으면 리얼리즘도 없어요
내 눈앞에 나 아닌 네가 없듯. 그런데,
사과를 놓친 가지 끝처럼 문득 텅 비어버리는
여긴 또 어디?
한 잔의 소주를 마시고 내리는 눈 속을 걸어
가장 어이없는 겨울에 당도하고 싶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
방금 눈앞에서 사라진 고양이가 도착한 곳.
하지만 커다란 기운을 걸치고
나는 사각의 링으로 전진하는 거야.
날 위해 울지 말아요, 아르헨티나.
넌 내가 바라보던 바다를 상상한 적이 없잖아?
그러니까 어느 날 아침에는 날 잊어줘.
사람들을 떠올리면 에네르기만 떨어질 뿐.
떨어진 사과처럼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거기 서해 쪽으로 천천히, 새 한 마리 날아가데.
모호한 빛 속에서 느낌 없이 흔들릴 때
구름 따위는 모두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들.
하지만 돌아보지 말자, 돌아보면 돌처럼 굳어
다시는 카운터 펀치를 날릴 수 없지.
안녕, 날 위해 울지 말아요.
고양이가 있었다는 증거는 없잖아? 그러니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구름의 것은 구름에게.
나는 지치지 않는
구름의 스파링 파트너.

 

 

인 생 (人 生) 

 - 서산대사의 해탈시 -
 

근심 걱정 없는 사람 누군고 출세하기 싫은 사람 누군고
시기 질투 없는 사람 누군고 흉 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소.

 

가난하다 서러워 말고 장애를 가졌다 기죽지 말고
못 배웠다 주눅들지 마소 세상살이 다 거기서 거기외다.

 

가진 것 많다 유세 떨지 말고 건강하다 큰소리 치지 말고
명예 얻었다 목에 힘주지 마소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더이다.

 

잠시 잠깐 다니러 온 이 세상 있고 없음을 편가르지 말고
잘나고 못남을 평가하지 말고 얼기설기 어우러져 살다나 가세!


다 바람 같은 거라오. 뭘 그렇게 고민하오.  

만남의 기쁨이건 이별의 슬픔이건 다 한 순간이오.

 

사랑이 아무리 깊어도 산들바람이고
오해가 아무리 커도 비바람 이라오.

 

외로움이 아무리 지독해도 눈보라 일 뿐이오
폭풍이 아무리 세도 지난 뒤에 고요하듯
아무리 지극한 사연도 지난 뒤엔 쓸쓸한 바람만 맴돈다오.  

 

 

인생예찬

         - 롱펠로우 - 


슬픈 사연으로 내게 말하지 말라, 
인생이 한낱 헛된 꿈에 지나지 않는다고! 
잠자는 영혼은 죽어있기 때문이고 
만물은 보여지는 그대로만은 아니기에...

인생은 실제적이다! 인생은 진지하다! 
그리고 무덤이 인생의 목표는 아니다. 
너는 본래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 
이것은 영혼을 두고 한 말은 아니었다. 
향락도 아니다, 슬픔도 아니다,

우리가 향하는 종착지, 우리가 가는 그 길은... 
그러나 행동하는 것이다. 각각의 내일이 
오늘보다 나은 삶의 우리를 맞이하도록...

예술은 길고, 세월은 날아간다. 
우리 심장은, 튼튼하고 용감할지라도, 
여전히, 감싸진 북과 같이 울린다. 
무덤을 향한 장례행진을 위해... 
이 세상 드넓은 싸움터에서, 
인생의 거친 야영지에서,
 
말 못하며 쫓기는 짐승이 되지 말라! 
싸움하여 이기는 영웅이 되어라! 
아무리 즐거워도, 미래를 믿지 말라! 
죽은 과거는 과거 속에 묻어 버려라! 
행동하라, 살아있는 현재에 행동하라!

안에는 심장이, 위에는 하나님이 있다. 
위인들의 생애는 우리를 깨우친다. 
우리도 장엄한 인생을 이룰 수 있다고... 
또한, 떠나가면서, 우리 삶 뒤켠으로 
세월의 모래톱에 발자국을 남길 수 있다고...

그 발자국... 아마도 다른 이, 곧 
인생의 장엄한 대양을 항해하던 
고독하고 조난 당한 한 형제가 
그 발자국을 바라보고 심기일전할 것이다.

그러니, 우리 곧추 일어나 일해 나가자, 
어떤 운명에도 굴하지 않는 심장으로... 
끊임없이 이루고, 끊임없이 추구하면서, 
수고함과 기다림을 애써 배우자.

 

 

 

일막이장

      - 강현국 -

 

  구석을 빠져나온 하나의 구석이
  또 하나의 구석과 어느날 만나서
  악수를 한다. 온 몸을 흔들며
  펼치는 풀밭의 푸른 힘으로
  일년초 꽃들은 피어난다.
  산그림자 잠시 바다로 눕고
  시들기 위하여 피어난 개똥쑥꽃,
  떡쇠 속눈썹이 빛난다.
  (전화벨소리 빌어먹을 정전)

  벽 속 철근들이 힘주는 소리 들린다.
  들린다. 개똥쑥은 시들고
  떡쇠 사라지는 발자욱 소리
  하늘로 번진다.
  서산 노을이 몸을 태우며
  좌중의 미간을 밝히는 동안
  산짐승 소리 점점 커다랗게
  큰 산 그림자를 일으켜 세운다.
  (초인종 소리 빌어먹을, 빌어먹을 다시 정전)

  우리는 헤어지고
  구석은 구석끼리 몸을 떨지만
  창경원 늑대의
  이빨없는 눈물처럼
  비가 내린다. 비에 젖어 번져가는
  좌중의 박수 소리
  궂은 날은 옆구리를 결리게 하므로
  떡쇠 속눈썹이 다시 빛난다.

 

 

 

일식

    - 이육사 -

 

  쟁반에 먹물을 담아 비쳐 본 어린 날
  불개는 그만 하나밖에 없는 내 날을 먹었다.

 

  날과 땅이 한줄 위에 돈다는 그 순간만이라도
  차라리 헛말이기를 밤마다 정녕 빌어도 보았다.

 

  마침내 가슴은 동굴보다 어두워 설레인고녀
  다만 한 봉오리 피려는 장미 벌레가 좀치렸다.

 

  그래서 더 예쁘고 진정 더없지 아니하냐
  또 어디 다른 하나를 얻어
  이슬 젖은 별빛에 가꾸련다.

 

 

 

  일요일에 죽은 붕어

            - 강성일 -


  천 근 늘어진
  일요일 오후 한낮,
  투명한 의식의 그늘 아래
  붕어 한 마리.

  하늘의 낮달처럼
  정신을 식히고 있다.

  바람개비 섞바뀌는
  오늘은 모든 것을
  신에게 맡긴 날,

  극과 극
  머리와 발 끝인
  이승과 저승까지
  오수 한 잔에 취한 날,

  날개 접힌
  일상의 푯대 끝 신호등에
  사명처럼 빌붙는
  빨강불의 숨소리,

  세단 같은
  정신의 질주 속에
  눈을 뜬 평생이여.

  그대
  숱한 돌멩이로
  내 가슴을 겨냥한들
  이 목숨
  새 떨어지지 않는
  새.

 

 


 일월

    - 유치환 -
                                                       
  
나의 가는 곳

어디나 백일(白日)이 없을 소냐.

 

머언 미개(未開)적 유풍(遺風)을 그대로

성신(星辰)과 더불어 잠자고

 

비와 바람을 더불어 근심하고

나의 생명과

생명에 속한 것을 열애(熱愛)하되

삼가 애련(愛憐)에 빠지지 않음은

---그는 치욕(恥辱)임일레라.

 

나의 원수와

원수에게 아첨하는 자에겐

가장 옳은 증오(憎惡)를 예비하였나니.

 

마지막 우러른 태양이

두 동공(瞳孔)에 해바라기처럼 박힌 채로

내 어느 불의(不意)에 짐승처럼 무찔리기로

 
오오, 나의 세상의 거룩한 일월(日月)에

또한 무슨 회한(悔恨)인들 남길소냐.

 

 

 

1월의 아침

        - 허형만 -

 

  세월의 머언 길목을 돌아
  한 줄기 빛나는 등불을 밝힌
  우리의 사랑은 어디쯤 오고 있는가.

  아직은 햇살도 떨리는 1월의 아침
  뜨락의 풀 뿌리는 찬 바람에 숨을 죽이고
  저 푸른 하늘엔 새 한 마리 날지 않는다.

  살아갈수록 사람이 그리웁고
  사람이 그리울수록 더욱 외로와지는
  우리네 겨울의 가슴,

  나처럼 가난한 자
  냉수 한 사발로 목을 축이고
  깨끗해진 두 눈으로
  신앙같은 무등이나 마주하지만
  나보다 가난한 자는
  오히려 이 아침을 만나 보겠구나.

  오늘은 무등산 허리에 눈빛이 고와
  춘설차 새잎 돋는 소리로
  귀가 시려운 1월의 아침,

  우리의 기인 기다림은 끝나리라
  어머니의 젖가슴같은 땅도 풀리고
  꽃잎 뜨는 강물도 새로이 흐르리라.
  우리의 풀잎은 풀잎끼리 서로 볼을 부비리라.

  아아, 차고도 깨끗한 바람이 분다.
  무등산은 한결 가즉해 보이고
  한 줄기 사랑의 등불이 흔들리고 있다.

 

 

 

일찌기 나는 
          - 최승자 -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마른 빵에 핀 곰팡이
벽에다 누고 또 눈 지린 오줌 자국
아직도 구데기에 뒤덮힌 천년전에 죽은 시체

아무 부모도 나를 키워 주지 않았다
쥐구멍에서 잠들고 벼룩의 간을 내 먹고
아무데서나 하염없이 죽어 가면서
일찌기 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떨어지는 유성처럼 우리가
잠시 스쳐갈 때 그러므로,
나를 안다고 말하지 말라
나는 너를 모른다 나는 너를 모른다
너당신그대,행복
너,당신,그대,사랑

내가 살아있다는 것,
그것은 영원한 루머에 지나지 않는다.

 

 

 

일절유심조

      - 박양진 -


  바다는 스스로 짜울 줄울 압니다.
  바다는 짜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새들은 본질의 세계로부터
  그들의 날개를 가져왔읍니다.
  하늘을 마음껏 날고 싶기 때문입니다.

  오, 장미는
  황금의 가시들을 불러 내었읍니다.
  그러한 꽃송이에는
  그와 같은 아픔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은 어디에든, 어느 곳에든 함께 하지요.
  필요로 하는 곳에는 가득히 채워 주고
  부르는 곳에는 나타나지요.

  삶을 온전케 하는 소금과 뭇 생명들의 날개--
  그리고 황금의 가시를 형성한
  그 하나의 숨결은
  우리의 심성-- 그 온갖 심정의 세계 속에도
  그대로 작용하고 있읍니다.

  마음은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까닭에
  모든 것을 이루어냅니다.

 

 

 

일터에서

         - 김기홍 -


  우리는 귀 막히고 말 막힌 사람
  두 손 열 손가락으로
  뜨거운 그리움을 말하는 사람
  철근때 묻은 옷을 걸치고
  하늘을 바라보며 파랗게
  가슴을 적시는 사람

  섣달 눈보라 마음마다 몰아친다
  잠실종합운동장 3층 난간
  피티 * 를 꽂아 올리며 하늘로 간다 (* 피티:철제 조립식 아시바)
  무엇이 우리들을 열망하게 하는지?
  하늘로 올라갈수록 바람은 거세다
  얼마나 올라가야 찾을 수 있을까

  우리들의 말도 노동의 근사치도
  내려다보는 땅엔
  개미같은 사람들이 각목을 메고
  합판을 메고
  저곳에 우리들의 사랑도 함께 있다
  하늘에 발을 딛고 땅을 우러러 볼 수는 없을까...

  내일 우리 죽어서도 귀 막힌 사람
  살아 있는 오늘은 더욱 말 막힌 사람
  이 높은 곳에 푸른 별을 매달며
  몇은 저 낮은 땅
  기다림도 모르는 아내를 사랑하고
  철부지 자식을 사랑한다
  목숨의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어제 다친 조장이 피우는 모닥불에
  손을 던지고 발을 던져도 뜨겁지 않다
  우리들은 더욱더 뜨거운 불길이다

 

 

임   
    - 박목월 -  

 
내사 애달픈 꿈꾸는 사람 
내사 어리석은 꿈꾸는 사람

밤마다 홀로 
눈물로 가는 바위가 있기로

어느 날에사 
어둠고 아득한 바위에 
절로 임과 하늘이 비치리요


 

 

임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 -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흔들려 휘날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재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근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임진강이 말하기를

                 - 기형도 -


  보름달빛이나 덮으며 초승달빛이나 고르며
  바늘귀에 스산한 풍문만 꿰차니 하 좋더냐
  내라면 한달음에 산맥 넘고 평야 질러 갈 길
  두발 짐승 두손 짐승으로 태어났거든
  무거운 그리자 벗어 땅 속에 묻고
  머리끝 하늘 닿기 전 쿵쿵 땅 꺼지기 전만큼만
  가랭이 돋우어 뛰어라
  오가는 철새들 깃털이라도 빌려 입어라
  친형제들끼리 눈흘김 미친 행각 그리 즐겁더냐
  말로 말할 수 없거든 울부짖음으로 말하며 오라
  이복 유복 서자 사고무친 아닌 누가 있어
  끄잡거든 잡힌 옷 벗고 가로서거든 메다꽂아 오너라
  발톱 검은 때 누가 흉보랴
  시궁창 진흙에 신발 들러붙거든 던져버려라
  오물이란 똥오물 끼얹겨도 그대로 오라
  숨결만 묻힌 바람이 전할 수 없어
  바람 탄 풀씨 몇 점이 피울 수 없어
  견우별 직녀별 오작교별로 이을 수 없어
  뼈를 가져와 살을 묻혀와
  따뜻한 혈맥 심긴 흙발로 몸소 와
  어린 실개천들 갈 길 몰라 목타하거든
  오종종 앞길 물길도 파주며 데불고
  집짐승들아 여기도 생솔 타는 구들방 있으니
  들짐승들아 이녘에도 손발 넓은 논밭 있으니
  가슴짐승들아 이 언덕들도 헤어짐을 시시철철 해후로 바꾸며 살았노니
  친형제 살아낸 또 하루 덧없음을 생각해보라

  이 깊은 폐토를
  어이 나 혼자 건너라고

 

 


     입만 다물면야

           - 김재원 -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세상은 산뜻합니다.
  갈빗대 들춰낸 내 허파를
  돌덩이로 내리찍는 아픔은
  함구 무언의 휴유증이지만
  어머님.
  이발사가 된다면야
  소리칠 갈대밭이 있는 게 야단이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도둑질처럼 배운 취미는 함구 무언.
  입만 다물면야 남의 세상은
  산뜻하고 고귀한 꽃밭입니다.
  아, 그래도 입만 다물면
  쑥밭인 내 세상이 안스러운 어머님.

 

 

 

  입소 28고지--사이공, 사이공 5

                - 김상윤 -


  야자수의 어깨에 걸려 있는 밤의 음울한 흐느낌소리를 들으며 우리들은
사타구니의 습진과 투이호아 우체국에서 어머님께 송금한 10불의 무사를
근심했다. 식스틴(M16)의 젖은 총구에서 초조와 긴장은 최루가스처럼 피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기다려도 새벽은 좀처럼 얼굴조차 내밀지 않았다.
수통에 가득 담아 온 고량주 썩은 냄새를 홀짝홀짝 마시고 있는 소대장과
이하사의 희뿌연 이마에서 불안은 훈장보다 분명하고 당당하였다. 우리들은
엎드려서 빌어먹을 생각했다. 단 한 번 맛본 사이공 여자의 가짜
산호목걸이와 고국에서 온 편지와 봉투에 쓰인 충남 보령군 웅천면 관당리...
눈시울이 시큰하게 저려 오는 머언 하늘과 목선 바라크와... 전갈좌의 발톱이
머리 위로 우수수 떨어지는 흉한 꿈과... 소스라쳐 깨어나면 정글화는 천근인 양
무거웠다. 저만큼 베트남공화국의 민가에서 불빛은 새어 부드럽게 대지를 적시고,
어쩌면 지겨운 --서야-- 내일도 우리들의 몫일 수 있는 매복을 위하여 나는 왼발,
오른발, 왼발, 오른발... 슬며시 흔들었다.

 

 

입속의 검은 잎

          - 기형도 -

 

택시운전가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금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방에 있었다.

먼지의 방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문을 열면 벌판에는 안개가 자욱했다.

그 해 여름 땅바닥은 책과 검은 잎들을 질질 끌고 다녔다.

접힌 옷가지를 펼칠 때마다 흰 연기가 튀어나왔다.

침묵은 하인에게 어울린다고 그는 썼다.

나는 그의 얼굴을 한 번 본 적이 있다.

신문에서였는데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일이 터졌다. 얼마 후 그가 죽었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나의 혀는 천천히 굳어갔다. 그의 어린 아들은

잎들의 포위를 견디다 못해 울음을 터뜨렸다.

그 해 여름 많은 사람들이 무더기로 없어졌고

놀란 자의 침묵 앞에 불쑥 불쑥 나타났다.

망자의 혀가 거리에 흘러넘쳤다.

택시운전사는 이따금 뒤를 돌아다본다.

나는 저 운전사를 믿지 못한다. 공포에 질려

나는 더듬거린다. 그는 죽은 사람이다.

그 때문에 얼마나 많은 장례식들이 숨죽여야 했던가

그렇다면 그는 누구인가. 내가 가는 곳은 어디인가

나는 더 이상 대답하지 않으면 안된다. 어디서

그 일이 터질지 아무도 모른다. 어디든지

가까운 지방으로 나는 가야 하는 것이다.

이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내 입 속에 악착같이 매달린 검은 잎이 나는 두렵다.

 

 

 

입술들

         - 임승빈 -


  비
  내리고 있다

  세워 둔 포크레인이 한 대
  녹슨 날끝으로 꿈에 젖는다

  꽃의 눈자위가 짙다
  그 짙은 그늘 속으로 쓸리는
  쓸리는 몸짓 가득
  돋아나는 상처

  도망하지 못한 하늘 한 구석
  세월마저 다 거부한 입술들이
  허공에 뜬 슬픔으로 만나고 있다

  슬픔도 아닌 것으로
  울고 있다

 

 

 

잊지 못할 1978년 2월 21일

          - 정명자 -


  떼때로 지난 일들이 지금 진행되는 일처럼
  생생하게 역력히 되살아난다
  1978년 2월 21일 대의원 선거날
  선거 한번 민주적으로 해보자 기대에 부풀었던 날 새벽
  낯익은 동료들
  술냄새를 풍기던 보전반 박씨의
  촛점 없이 하얗게 변색된 얼굴을 뒤따라
  대의원 선거장은 똥물로 아수라장
  "똥 먹고 싶지 않으면 싹 나가!"
  부라리며 고함지르며 덤비던 광란의 눈동자
  "아저씨 진정해요 이럴 때가 아니에요!"
  뜨거운 눈물 애절한 호소
  "비켜! 니년들이 뭐 잘났다고...
  시키는 대로 일하지 않고 까부는 년들에게는 똥물이 약이야"
  폭력 남발
  악성범죄의 현장
  작업은 거부되고 범죄자들은
  자율을 부르짖던 모두를 몰아내기 위한 시도 단행
  지부장의 자격을 박탈하고
  동일방직 민주노조는 사고지부로 낙인찍고
  민주노동조합을 때려잡는
  조직행동대라 칭하는 200여 명의 깡패를 현장으로 난입시키고
  아 -- 자율은 똥물 진창 속에 묻혔고
  노동조합법은 권모술수의 앞잡이로 둔갑
  견딜 수 없는 치욕의 날들
  살아 숨만 쉬는 허깨비 아닌 우리 모두
  우리의 정당성을 밝히기로 하고 단식으로 항의농성
  똥물 먹고 살 수 없다
  우리가 빨갱인가
  자율적인 노동조합 보장하라
  대의원 선거 치르게 하라
  백날 같은 하루 백날 같은 한 시간
  정신 잃고 들것에 실려나가고
  가족들의 아우성은 더욱 커지고
  뜻을 같이하는 동지들의 동맹단식이 이어지기를 13일
  사태는 급속도로 위급해지고
  현장으로 복귀만 하면 모든 문제는 백지화시킨다
  정부의 고급관리와 종교계 인사들께서 합의
  대의원 선거도 무사히 치르게 한다
  아 -- 가슴 터지는 승전가
  얼싸안고 얼싸안고 웃고 울고 나딩굴고
  솜먼지 자욱한 일터로 가자
  선진조국 잉태하는 기계 앞으로 가자
  그런데 맑은 하늘에 개벼락?
  무단결근으로 사칙 위반한 죄
  소요를 유발시켜 회사의 위신을 추락시킨 죄
  생상량을 50P 감소시키고 불량품의 급증으로 막대한 손해를
  유발시킨 죄로 124명 해고
  또 범죄 유발 악성범죄 재유발
  "우린 어떻게 살아요?"
  "입 닥쳐"
  입술은 곤봉에 짓이겨지고
  "같이 살아 봅시다"
  허우적거리는 손과 발은 쇠사슬에 조이고
  범죄자들은 버젓이 어깨에 힘주어 행세하기를
  선량한 노동자들은 전과자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눈물
  피보다 진한 우리 모두의 한
  아-- 식모살이 버스 안내양 봉제공장 시다
  들통나면 가차없이 해고 해고...
  차라리 웃음 팔고 몸을 파는 창녀짓을 해서라도
  목구녕에 풀칠해야 살지
  질서 정연한 공단거리
  찢어진 무심한 모집공고 앞에서 피를 토하는 듯한 애절한 한숨
  그러나
  이대로는 죽을 수 없어
  죽는다면 이 세상을 떠도는 원귀라도 되어
  진실을 위반한 범죄자들 가슴과 머리를 도려내고
  전과자 된 양심과
  핏빛보다 진한 눈물로 목욕시켜
  사랑 앞에 무릎 꿇고 과오를 번성시키는
  이런 각오로 살아야 한다
  때때로 이런 생각만 하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지고
  정신이 맑아지고
  아-- 살아야 한다
  진실과 정의의 기치를 들고 끝까지 살아야 한다

 

 

 

잊혀진 여인 

      - 마리 로랑생 - 

 

권태로운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슬픔에 젖은 여인입니다

슬픔에 젖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입니다

불행을 겪고 있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병을 앓는 여인입니다

병을 앓는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버림받은 여인입니다

버림받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쫓겨난 여인입니다

쫓겨난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죽은 여인입니다

죽은 여인보다 더 불쌍한 여인은 잊혀진 여인입니다

 

 

 

외갓집 있는 마을의 풍경

               - 설의웅 -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초가집 몇 채 숲과 어우르고
있었다.

  바랑 멘 중이 오르내리는 외딴 산길 큰절 마을 뒤에 있고 오일장 서는
읍이 앞에 있다.

  숲머리 돌아나가는 강물에 노을 조각 저녁 가을걷이 끝낸 외삼촌이
흥얼흥얼 장에서 돌아오고 큰절 재 올리는 종소리 마른 풀 향기에 실려오는

  개암도 까며 산에서 외갓집 마을을 굽어보면 발 밑 땔나무 가지에 앉은
고추잠자리 야윈 가을 볕 꼬리를 서운히 물고 있었다.

 

 

 

외눈박이 물고기 사랑

                  - 류시화 -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살고 싶다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사랑하고 싶다
두눈박이 물고기처럼 세상을 살기 위해
평생을 두 마리가 함께 붙어 다녔다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사랑하고 싶다


우리에게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나
우리는 그만큼 사랑하지 않았을 뿐
외눈박이 물고기처럼
그렇게 살고 싶다
혼자 있으면
그 혼자 있음이 금방 들켜 버리는
외눈박이 물고기 비목처럼
목숨을 다해 사랑하고 싶다

 


외인촌(外人村)

           - 김광균 -


하이얀 모색 속에 피어 있는 
 산협촌의 고독한 그림 속으로 
 파---란 역등을 달은 마차가 한 대 잠기어 가고,


바다를 향한 산마룻길에 
 우두커니 서 있는 전신주 우엔 
 지나가던 구름이 하나 새빨간 노을에 젖어 있었다.

 

바람에 불리우는 작은 집들이 창을 나리고, 
갈대밭에 묻히인 돌다리 아래선 
 작은 시내가 물방울을 굴리고

 

 안개 자욱---한 화원지의 벤치 우엔 
 한낮에 소녀들이 남기고 간 
 가벼운 웃음과 시들은 꽃다발이 흩어져 있다.

 

외인 묘지의 어두운 수를 뒤엔 
 밤새도록 가느란 별빛이 나리고.

공백한 하늘에 걸려 있는 촌락의 시계가 
 여읜 손길을 저어 열시를 가리키면


 날카로운 고탑같이 언덕 우에 솟아 있는 
 퇴색한 성교당의 지붕 우에선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 소리. 

 

 

왕십리

          - 김소월 -

 

비가 온다

오누나

오는 비는

올지라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여드래 스무날엔

온다고 하고

초하루 삭망(朔望)이면 간다고 했지.

가도가도 왕십리 비가 오네

 

웬걸저 새야

울랴거던

왕십리 건너가서 울어나다고

비맞아 나른해서 벌새가 운다

 

천안에 삼거리 실버들도

촉촉히 젖어서 늘어졌다네.

비가와도 한 닷새 왔으면 좋지,

구름도 산마루에 걸려서 운다

 

 

 

열병(熱病)
          - 문태준 -


퀴퀴한 방 한구석에 모과를 쌓아둡니다
저녁밥 짓는 연기가 탱자나무 울타리에 엉켜 꽃이라도 피우려 합니다
젖은 발을 뜨락에 얹다 말 붙일 곳 없어 감나무에 말을 건넵니다
감나무는 끝이 까맣게 탄 감꽃을 떨구어 보입니다
사람에 실성한 사람을 누가 데려 살까요 
늘그막 젖무덤 같은 두꺼비가 그늘을 따라 길게 옮겨갑니다.

 

 

 

     애가

       - 이창대 -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숨 막히는 이별은 말하지 않으리.
  여기로 불어오는 바람
  서러웁고
  저기서 울리는 종소리
  외로와도
  가만히 견디며 들으리라
  커다란 즐거움은 아픔 뒤에 오는 것.
  흐르는 강가에 가슴은 설레어도
  말하지 않으리라 이별의 뜻을.
  그대 떠난 마음의 빈 자리
  아플지라도
  나에게 잠들게 하라
  너의 그림자를.

 


 

애가(哀歌)
    - 김윤성 -


담장을 끼고 기어오르던 
덩굴이 
담장 위에 와서 
헛되이 허공만 휘젓고 있다. 

이 소리 없는 고요의 절규 

썩은 장미가지 끝에 
기척도 없이 
앉아 있던 잠자리가 
저 혼자 후르르 날아 오른다. 

영원한 한숨의 포근한 햇살.             

                        

 

 

애국자

      - 이선관 -


  빛이
  어둠을 사르는
  이른 새벽이었다.

  문틈에선가
  창틈에선가
  벽틈에선가
  나의 침실 깊숙이 파고드는

  동포여!
  하는 소리에 매력을 느끼다가
  다시 한번 귀기울여 들어보니

  똥퍼어?
  하는 소리라
  나는 두번째 깊은 잠에 취해 버렸다.

 

 

 

애너벨 리
          - 에드거 알렌 포우 -

 

애너벨 리
아주 여러 해 전
바닷가 어느 왕국에
당신이 아는지도 모를 한 소녀가 살았지
그녀의 이름은 애너벨 리
날 사랑하고 내 사랑을 받는 일밖엔
소녀는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았네
바닷가 그 왕국에선
그녀도 어렸고 나도 어렸지만
나와 나의 애너벨 리는
사랑 이상의 사랑을 하였지
천상의 날개 달린 천사도
그녀와 나를 부러워할 그런 사랑을
그것이 이유였지, 오래전
바닷가 이 왕국에선
구름으로 부터 불어온 바람이
나의 애너벨 리를 싸늘하게 했네
그래서 명문가 그녀의 친척들은
그녀를 내게서 빼앗아 갔지
바닷가 왕국
무덤속에 가두기 위해
천상에서도 반쯤밖에 행복하지 못했던
천사들이 그녀와 날 시기했던 탓
그렇지! 그것이 이유였지
한 밤중 구름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와
그녀를 싸늘하게 하고
나의 애너벨 리를 숨지게 한 것은
하지만 우리들의 사랑은 훨씬 강한 것
우리보다 나이먹은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우리보다 현명한 사람들의 사랑보다도
그래서 천상의 천사들도
바다 밑 악마들도
내 영혼을 아름다운 애너벨 리의 영혼으로부터 떼어내지는 못했네
달도 내가 아름다운 에네벨 리의 꿈을 꾸지 않으면 비치지 않네.
별도 내가 아름다운 애네벨 리의 빛나는 눈을 보지 않으면 떠오르지 않네.
그래서 나는 밤이 지 새도록 
나의 사랑, 나의 사랑, 나의 생명, 나의 신부 곁에 누워만 있네.
바닷가 그곳 그녀의 무덤에서-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그녀의 무덤에서,...


 

 

은버들 몇 잎

        - 박용래 -

                            

스치는 한 점 바람에도 갈피 없이 설레는 은버들 몇 잎을 따서 물에 띄우면 언제나 고향은 토담의 달무리.

꽁꽃에 맺히는 꽁꼬투리랑 절로 벙그는 목화 다래랑. 아아 잔물결 잔물결 치듯 속절없이 설레는 강가 은버들.

 

아우야, 휘청휘청 서녘 바람 따르면 상수리 상수리 아람 불가

아우야, 휘청휘청 동녘 바람 따르면 밤나무숲 밤송이 아람 불가

비치는 쌈짓골, 비치는 비녀산, 아침 이슬 털면 아람 불가 아롱다올 가을에 아우야

 

귀뚜라미 정강이 시린 백로白露

 

 

은수저
       - 김광균의 -

 

산이 저문다. 
노을이 잠긴다. 
저녘 밥상에 애기가 없다. 
애기 앉던 방석에 한 쌍의 은수저 
은수저 끝에 눈물이 고인다.

 

한 밤중에 바람이 분다. 
바람 속에서 애기가 웃는다. 
애기는 방 속을 들여다 본다. 
들창을 열었다 다시 닫는다.

 

먼 들길을 애기가 간다. 
맨발 벗은 애기가 울면서 간다. 
불러도 대답이 없다. 
그림자마저 아른거린다.


 

 

은종이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은종이가 한 장 끼여 있었다- 
      - 김춘수 -


활자 사이를 
코끼리가 한 마리 가고 있다. 
잠시 길을 잃을 뻔하다가 
봄날의 먼 앵두 밭을 지나 
코끼리는 활자 사이를 여전히 
가고 있다. 
너무 작아서 잘 보이지도 않는 
코끼리, 
코끼리는 발바닥도 반짝이는 
은회색이다.

 

 

은행나무 그늘

        - 백기만 -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찾아왔을 때
  이상하게도 두 뺨이 타오르고 가슴은 두근거렸어요.
  하지만 나는 아무 말도 없이 바느질만 하였어요.
  훌륭한 그이가 우리집을 떠날 때에도
  여전히 그저 바느질만 하였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이에게 선물하였는지 아십니까?

  나는 그이가 돌아간 뒤에 뜰 앞 은행나무 그늘에서
  달콤하고도 부드러운 노래를 불렀어요.
  우리 집 작은 고양이는 봄볕을 흠뻑 안고 나무가리 옆에 앉아
  눈을 반만 감고 내 노래소리를 듣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내 노래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누가 아시리까?

  저녁이 되어 그리운 붉은 등불이 많은 꿈을 가지고 왔을 때
  어머니는 젖먹이를 잠재려 자장가를 부르며 아버지를 기다리시는데
  나는 어머니 방에 있는 조그만 내 책상에 고달픈 몸을 실리고 뜻도 없는
책을 보고 있었어요.
  하지만 어머니, 제가 무엇을 그 책에서 보고 있었는지 모르시리다.

  어머니, 나는 꿈에 그이를, 그이를 보았어요.
  흰 옷 입고 초록 띠가 드리운 성자 같은 그리운 그이를 보았어요.
  그 흰 옷과 초록 띠가 어떻게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누가 아시리까?
  오늘도 은헹나무 그늘에는 가는 노래가 떠돕니다.
  고양이는 나무 가리 옆에서 어제같이 조을고요.
  하지만 그 노래는 늦은 봄 바람처럼 괴롭습니다.

 

 

은행나무 산조

             - 양명문 -

 

  은행나무 그늘엔
  노오란 음부들이 떨어진다.

  은행 이파리들에다
  내 귀여운 어휘들을 적어 본다.

  적어 놓은 어휘들은
  제법 노오란 발음들을 한다.

  도라지, 말화부리, 살구씨,
  도토리, 소금쟁이, 송이버섯
  돌개바람, 귤, 토끼똥,

  무서리 내린 마가을 저녁
  소북히 쌓인 은행 이파리들은

  졸지에 일어난 돌개바람에 실리어
  하나씩의 음부로 도옹동 떠
  저녁 노을에 화음하면서...

  나?나불 납신거리며 도동실 뜨는
  하늘하늘 하느작이는 노랑나비 떼

  허덕이는 기억을 시원히 털어 버리고
  마가을 하늘로 팔을 벌리며 솟아오르는

  아, 은행나무의 서글픈 산조!

 

 

 

  음미

     - 이향아 -

 

  한 잔의 커피를 마신다.
  뜨거운 한 모금의 차는
  발톱으로 흘러가고 코끝으로 흐른다.
  발톱으로 가서는 내가 딛고 나설 땅이 된다지만
  코끝으로 간 것은 울음만 된다.
  울음이 부서지면 산그늘로 숨지만
  내 하늘을 채우고도 되레 남는다.
  백자같이 너그러운 한낮
  수정같이 도도한 밤
  풀길없는 갈증으로 남는다.

  내가 마신 한 잔의 커피로는 안 될 것이다.
  발톱에서 코끝으로 오르는 파란만장한 질곡을
  귀먹은 아우성을
  내 철 없는 열증을
  나는 안다.

  어림도 없는 것이다.

 

 

 

음악

    - 김요섭 -


태초의 말씀과 함께

하늘에는 불과 음악이 있었다

하늘 가득히 울려퍼졌던 음악

사람들을 찾아 마을 위로 거리 위로

휘날리며 오는 동안

소리는 스러지고 눈송이가 되었다

 

나뭇가지 위

음악의 흰그림자로 앉은 눈송이

눈송이로만 있기에는 심심했다

나무 속 심줄을 타고 녹아드는

뿌리 끝에서 소리가 나고

흙들이 귀를 기울였다

 

어느 태초의 아침 같은

아침

대지는 풀포기를 토하면서

허공에다 새를 날렸다

음악처럼

 


 와사등

        - 김광균 -


 차단-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내- 호올로 어딜 가라는 슬픈 신호냐

 

 긴- 여름해 황망히 나래를 접고
 늘어선 고층 창백한 묘석같이 황혼에 젖어
 찬란한 야경,무성한 잡초인 양 헝클어진 채
 사념 벙어리 되어 입을 다물다.

 

피부으 바깥에 스미는 어둠
 낯설은 거리의 아우성 소리
 까닭도 없이 눈물겹고나

 

 공허한 군중의 행렬에 섞이어
 내 어디서 그리 무거운 비애를 지고 왔기에
 길- 게 늘인 그림자 이다지 어두워

 

 내- 어디로 어떻게 가라는 슬픈 신호기
 차단 한 등불이 하나 비인 하늘에 걸리어 있다

 

 

완화삼

    - 조지훈 -

 

  차운 산 바위 위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물길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위독(危篤) 제1호 
               - 이승훈(李昇薰 -

 

램프가 꺼진다. 
소멸의 그 깊은 난간으로 나를 데려가 다오. 
장송(葬送)의 바다에는 흔들리는 달빛, 
흔들리는 달빛의 망또가 펄럭이고, 
나의 얼굴은 
무수한 어둠의 칼에 찔리우며 
사라지는 불빛 따라 달린다. 
오 집념의 머리칼을 뜯고 보라. 
저 침착했던 의의(意義)가 가늘게 전율하면서 
신뢰(信賴)의 차건 손을 잡는다. 
그리고 
시방 당신이 펴는 식탁(食卓) 위의 흰 보자기엔 
아마 파헤쳐진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쓰러질 것이다.

 

 

 에피소드 Episode

       - 조향 -

 

  열 오른 눈초리, 하잔한 입 모습으로 소년은 가만히 총을 겨누었다.
  소녀의 손바닥이 나비처럼 총 끝에 와서 사쁜히 앉는다.
  이윽고 총 끝에선 파아란 연기가 몰씬 올랐다.
  뚫린 손바닥의 구멍으로 소녀는 바다를 내다보았다.

  -아이! 어쩜 바다가 이렇게 똥그랗니?

  놀란 갈매기들은 황토 산태바기에다 연달아 머릴 쳐박곤 하얗게 화석이 되어 갔다

 

 

 

예수가 우리 마을을 떠나던 날 -- 도성 밖 대장장이의 노래

               - 고운기 -

       
  진달래 꽃 피면 돌아오겠네
  벚꽃 만발하면 만나보겠네
  그리운 이름들 어디 가도
  불러서 모이면 쑥 캐러 가자
  봄비라도 내리면 알맞게 맞고서
  사랑하던 사람 등에 업고도 가리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그대 떠날 때 우리에게 남겨준 것이
  서울로 가던 밤 피흘리며
  기도해 준 일
  가슴마다 허전함으로 슬픔 그득하여
  개나리꽃 터쳤어도 눈물만 뿌릴 뿐

  그대의 아비도 나만큼이나 천한 사람
  일생을 목수질하며 살아왔을 땐
  아들이 장차 자라 로마의 군인이나 제사장이나
  세리가 되어 돈을 벌고
  좋은 집에 살며 세상 일은 잊으라고
  그렇게 바란 것은 아니었을 테지

  허기사 봄도 오면 무엇하리
  나귀 새끼 한나리에 몸을 싣고
  그대는 가서 서울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그리운 고향 봄이 피어 오른 산천 뒤로 두고
  진달래꽃 같은 붉은 피 흘린다니

  나는 아직 도성 밖 대장간에 앉아
  불에 담근 쇠를 꺼내 망치질 하면서도
  이 못이 장차 그대의 손을 뚫고 발을 뚫고
  이 만드는 창으로 그대의 가슴을 찌르게 될지
  알 수 없다네
  알 수 없다네.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 김소월 -

 

봄 가을 없이 밤마다 돋는 달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울 줄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달이 암만 밝아도 쳐다볼 줄을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이제금 저 달이 설움인 줄은

”예전엔 미처 몰랐어요.“

 

 

  옛꿈을 다시 꾸며

      - 이태수 -

 

     --아우에게

  자라봉이 걸어온다.
  발목이 조금 삐인 채 다가서는
  산자락의 당나뭇가지에는
  우리가 걸어둔 눈물과 몇 개의 낱말들이 눈을 뜨고
  그때 날려보낸 모습 그대로의
  멧새 한 마리 파닥이며
  옛집의 처마밑을 선회하고 있다.
  눈을 들어라. 우리는 이제
  턱수염이 거칠어지고
  꿈도 몇 번씩이나 뒤집어 꾸게 되었지만
  그때는 옛날, 옛날엔 꿈이 컸다고 투덜대는
  그런 나이가 돼 버렸지만, 고향도 등졌지만
  눈을 들어라.
  시멘트 벽에 기대어 서서 자주 자주
  한숨 쉬고, 눈물을 훔치고
  이제 우리는 더 커진 눈으로 떠돌며
  아파해야 하는 철도 들었지만
  꿈은 아직도 왜 고향 하늘만 맴돌고 있는지.
  하늘 보기가 왜 이리도 어려워만 지는지.
  그러나 눈을 들어라. 오늘 나는
  옛집의 낯선 불빛 앞에 서서
  자라봉을 끌어안고 있으니,
  우리가 걸어두었던 눈물빛과 몇 개의
  낱말들을 부여안고
  하늘 저켠, 흘러가는 구름에 떠 흐르는
  희미한 꿈조각을 더듬고 있으니,
  눈을 들어라.
  언제나 우리는 헛돌고 있을지라도
  헛돌지 않을 날을 꿈꾸며
  밤을 건너면서, 옛꿈을 다시 꾸며...

 

 

 

옛날의 금잔디

          - 송무 -


  옛날의 그 골목 지붕 위에 고이던 저녁놀과
  저녁놀 무렵이면 슬슬 모여 들던 가난한 사내들과
  갈 데도 없으면서 무사태평이었던 그 작부들은
  지금 다 어디로 가 있는지

  사방에서 열리던 물꼭지 소리와
  이 나간 사발들 낮게 부딪던 소리와
  두런두런 새어 나오던 말소리와
  노을이 처마 밑 검댕과 수십 년을 엉겨 썩다가
  어느 날 주르르 흘리던 눈물과
  그 눈물 같았던 술과
  그 술을 퍼 올리던 바가지와
  빽 없고 겁많은 울화병 환자들이
  서서히 눈뜨고 입뜨면서
  한데 어우러 들끓고 반란하던
  통금 전의 그 소란한 시간과
  삼십 촉 전구 밑의 그 이쁘던 작부들의 욕설은
  지금 다 어디로 가고 없는지

  지금 그 옛골목 찾을 길 없고
  아스팔트 한길만 널찍이 뚫려 있는데
  길가에 삼겹살 집 하나 들어서서
  퇴근길에 한잔씩 걸치면서
  낙관적으로 껄껄 웃어제끼는
  낯선 사내들의 웃음소리만
  새어나오네

 

 

 

옛사랑 

      - 이문세 -
 

남들도 모르게 서성이다 울었지 지나온 일들이 가슴에 사무쳐
텅빈 하늘및 불빛들 켜져가면 옛사랑 그이름 아껴 불러보네
찬바람 불어와 옷깃을 여미우다 후회가 또 화가 난 눈물이 흐르네
누가 물어도 아플거 같지않던 지나온 내모습 모두 거짓이야
이제 그리운것은 그리운데로 내버려 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데로 내버려 두듯이
흰눈나리는 들판을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햔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이제 그리운것은 그리운데로 내버려둘거야
그대 생각이 나면 생각난데로 내버려 두듯이
사랑이란게 지겨울때가 있지 내 맘에 고독이 너무 흘러넘쳐
눈녹은 봄날 푸르는 잎새위에 옛사랑 그대모습 영원속에 있네
흰눈 나리는 들판에 서성이다 옛사랑 생각에 그 길 찾아가지
광화문 거리 흰눈에 덮여가고 하얀눈 하늘높이 자꾸 올라가네

 

 

옛 이야기 
    - 김소월 -

  

고요하고 어두운 밤이 오면은 
어스레한 등불에 밤이 오면은 
외로움에 아픔에 다만 혼자서 
하염없는 눈물에 저는 웁니다

 

제 한몸도 예전에 눈물 모르고 
조그마한 세상을 보냈습니다 
그때는 지난날의 옛 이야기도 
아무 설움 모르고 외웠습니다 

 


웃음
    - 김수영 -


웃음은 자기자신이 만드는 것이라면 그것은 얼마나 서러운 것일까
푸른 목
귀여운 눈동자
진정 나는 기계주의적 판단을 잊고 시들어갑니다.
마차를 타고가는 사람이 좋지 않어요
웃고 있어요
그것은 그림
토막방 안에서 나는 우주를 잡을듯이 날뛰고 있지요.
고운 신이 이 자리에 있다면
나에게 무엇이라고 하겠나요
아마 잘있으라고 손을 휘두르고 가지요
문턱에서.
이보다 더 추운 날처럼 나는 여기서 겨울을 맞이하다가
오랜 시간이 경과된 후에도
이 웃음만은 흔적을 남기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어리석은 일
시간에 달린 기이다란 시간을 보시오
내가 어리다고 한탄하지 마시오
나는 내 가슴에
또하나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웃음에 바퀴가 달렸나 봐

                 - 김기택 -

  

한번 나오기 시작한 웃음이

멈추지 않아

웃음에서 깔깔 까르르르

바퀴 구르는 소리가 나

바퀴 달린 웃음이

언덕을 내려가고 있어

웃음 소리가 점점 빨라지고 있어

웃음 끄는 스위치가 있으면 좋겠어

달리는 웃음을 멈추게 하는

빨간 신호등도 있으면 좋겠어

 


월광(月光)으로 짠 병실(病室)

                      - 박영희 -

 

밤은 깊이도 모르는 어둠 속으로 
끊임없이 구르고 또 빠져서 갈 때 
어둠 속에 낯을 가린 미풍(微風)의 한숨은 
갈 바를 몰라서 애꿎은 사람의 마음만 
부질없이도 미치게 흔들어 놓도다. 
가장 아름답던 달님의 마음이 
이 때이면 남몰래 앓고 서 있다.

 

근심스럽게도 한발 한발 걸어오르는 달님의 
정맥혈(靜脈血)로 짠 면사(面絲) 속으로 나오는 
병(病)든 얼굴에 말 못하는 근심의 빛이 흐를 때, 
갈 바를 모르는 나의 헤매는 마음은 
부질없이도 그를 사모(思慕)하도다. 
가장 아름답던 나의 쓸쓸한 마음은 
이 때로부터 병들기 비롯한 때이다.

 

달빛이 가장 거리낌없이 흐르는 
넓은 바닷가 모래 위에다 
나는 내 아픈 마음을 쉬게 하려고 
조그만 병실(病室)을 만들려 하여 
달빛으로 쉬지 않고 쌓고 있도다. 
가장 어린애같이 빈 나의 마음은 
이 때에 처음으로 무서움을 알았다.

 

한숨과 눈물과 후회와 분노로 
앓는 내 마음의 임종(臨終)이 끝나려 할 때 
내 병실로는 어여쁜 세 처녀가 들어오면서 
당신의 앓는 가슴 위에 우리의 손을 대라고 달님이 
우리를 보냈나이다 . 
이 때로부터 나의 마음에 감추어 두었던 
희고 흰 사랑에 피가 묻음을 알았도다.

 

나는 고마워서 그 처녀들의 이름을 물을 때 
나는 '슬픔'이라 하나이다. 
나는 '두려움'이라 하나이다. 
나는 '안일(安逸)'이라고 부르나이다 . 
그들의 손은 아픈 내 가슴 위에 고요히 닿도다. 
이 때로부터 내 마음이 미치게 된 것이 
끝없이 고치지 못하는 병이 되었도다.

 

 

 

월남에 계신 오빠에게--사이공, 사이공.7

             - 김상윤 -


  사월이 가고... 뿌옇게 흙먼지 뒤집어 쓴 대자리행 버스가 툴툴거리며 잠시 멈추어
섰다가 떠난 빈 자리, 웅천면 합동버스정류장 뒤켠의 미장원에서 머리를 자르며...
문득 고개들어 바라보는 거울 속에서 새까만 머리칼을 실밥처럼 풀어 내리며 늙은
미용사는 시종 분주하였고... 미용사의 머리 위에 얹혀 있는, 가득한 먼지와 하릴없이
삐거덕거리는 못자국, 파리똥 쌓여 있는 판넬을 보며... 무심코 흘려 듣는 라디오
방송은 용감한 따이한 군대와 잔악한 베트콩, 고 강재구 소령에 대하여
이야기하지만... 시사해설하는 김교수의 열띤 주장에도 야자는 익고... 아오자이를
입은 소녀들이 페이브먼트를 걸어 가는 배경으로, 배경에서 꽃처럼 피어 있는
시크로(삼륜 인력거)... 어깨에 묻은,미련같은 머리칼을 떨며 미장원을  나설 때,
유리문 선반에 놓인 1967.3.2.월남에서 호가 어머님께 목조군함의 갑판에 새긴 육군
상병의 씩씩한 이름을 대하며... 미장원의 유리문을 밀 때 한층 따듯하게 울려 퍼지는
목선의 기적소리... 뿌옇게 먼저 날리는 신작로를 걸어 집으로 돌아오며 오빠, 오빠
생각하며... 이기고 돌아와요, 건강한 모습으로... 1967.5.9.

 

 


월 명(月明)

      - 박제천 -
                                                                                                                                    

한 그루 나무의 수백 가지에 매달린 수만의 나뭇잎들이 모두 나무를 떠나간다.

수만의 나뭇잎들이 떠나가는 그 길을 나도 한줄기 바람으로 따라나선다.

때에 절은 삶의 무게 허욕에 부풀은  마음의 무게로 뒤처져서 허둥거린다.

앞장서던 나뭇잎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어쩌다 웅덩이에 처박힌 나뭇잎 하나 달을 싣고 있다.
 
에라 어차피 놓친 길 잡초 더미도 기웃거리고 슬그머니 웅덩이도 흔들어 놀밖에

죽음 또한 별 것인가 서로 가는 길을 모를밖에.
 

월 훈(月暈)

       - 박용래 -
                                                                 
 

첩첩산중에도 없는 마을이 여긴 있습니다. 잎 진 사잇길, 저 모래 둑, 그 너머 강기슭에서도 보이진 않습니다. 허방다리 들어내면 보이는 마을.

 

갱(坑) 속 같은 마을. 꼴깍, 해가, 노루꼬리 해가 지면 집집마다 봉당에 불을 켜지요. 콩깍지, 꽁깍지처럼 후미진 외딴 집, 외딴 집에도 불빛은 앉아 이슥토록 창문은 모과(木瓜)빛입니다.

 

기인 밤입니다. 외딴 집 노인은 홀로 잠이 깨어 출출한 나머지 무를 깎기도 하고 고무를 깎다, 문득 바람도 없는데 시나브로 풀려 풀려 내리는 짚단, 짚오라기의 설레임을 듣습니다. 귀를 모으고 듣지요. 후루룩후루룩 처마깃에 나래 묻는 이름 모를 새, 새들의 온기(溫氣)를 생각합니다. 숨을 죽이고 생각하지요.

 

참 오래오래, 노인의 자리맡에 밭은 기침 소리도 없을 양이면 벽 속에서 겨울 귀뚜라미는 울지요. 떼를 지어 웁니다. 벽이 무너지라고 웁니다.
 

어느덧 밖에는 눈발이라도 치는지, 펄펄 함박눈이라도 흩날리는지, 창호지 문살에 돋는 월훈(月暈)

 

 

                                      육화(肉華)

                                              - 심연수(沈連洙) -

                                              

                  

                                        때는 온다

                                        온 천하가 뒤집혀도

                                        겁낼 것 없다

                                        온 지맥이 뒤틀려도

                                        덤빌 것 없다

                                        옴짝도 않는 대담(大膽)

                                        그 속에는 말 못할 대기(待機)가

                                        준마 같이 예기(豫期)하고 있다

                                        그 속에는 말 못할 희망이

                                        천마같이 날뛰고 있다

                                        행시주육(行屍走肉)은 아님

                                        만용폭위(蠻勇暴威)도 아님

                                        피 없는 고기 없고

                                        고기 없는 피 없다

                                        피 끓고 고기 뛰는 의분

                                        피 쏘고 고리 깎는 싸움

                                        그것은 오직 빛나는 사광(史光)

                                        칼 끝에 육화(肉華)를 피우리라

                                        총부리에 육향(肉香)을 피우리라

                                        상화(聖火)에 혈향(血香)을 피우리라

                                        오! 육화

                                        오! 육향

                                        아세아의 서광은 빛나리니

                                        때는 만들고야 오나니

                                        때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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