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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2017년 11월 06일 21시 16분  조회:2178  추천:0  작성자: 죽림

박수근은 화가이자 가장, 혹은 구도자이자 순례자...

글 : 김태완  월간조선 기자

 

 

⊙ “당신을 외면하는 불모지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얼마나 고됐을까”(아들 박성남)
⊙ “현재 아버지의 그림은 호당 1억원이 넘어. 이게 내 아버지 맞아? 아닌데 …”
⊙ ‘박수근은 불필요할 때 결코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다’(故 박완서 선생)
⊙ 박수근의 딸·아들·(외)손자 3대가 화가의 길 걸어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오른쪽) 화백과 손자 박진흥 화백.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면 박수근(朴壽根·1914~1965) 화백이 첫손에 꼽힌다. 지금은 그림 값이 제일 비싸지만 생전 전시회 한 번 못한 비운의 작가였다. 그의 그림엔 대개 농사를 짓거나 아이를 돌보고, 난전의 여인이 등장한다. 남자는 늙거나 늘어져 있다. 가난한 이웃의 얼굴이다. 
  
  생전 박수근은 이런 말을 했다. “나더러 똑같은 소재만 그린다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우리의 생활이 그런데 왜 그걸 모두 외면하려는 걸까?”
  
  박수근의 그림은 살아서 유명세를 타지 못했고 도쿄 유학파가 장악한 화단에서 배척을 당했으나 구도자처럼 캔버스 앞에 앉아 종일 그림을 그렸다. 그런 모습을 지켜본 어린 아들(박성남)은 “너네 아버지는 뭘 하시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하곤 했다. “우리 아버지는 그냥 빌어먹고 살아요.”
  
  어느새 일흔의 나이가 된 아들 박성남(朴城男·70)씨를 경기도 파주에서 만났다. 그 역시 아버지처럼 독학으로 그림을 배운 화가다. 1986년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가 몇 해 전 한국으로 돌아왔다. 
  
  — 동심(童心)의 관찰자가 말한 ‘빌어먹다’는 표현이 왜 이리 웃플(웃으면서 슬플)까요. 
  
  박성남씨의 말이다. 
  
  “외삼촌들은 아버지가 그린 그림을 무시했어요. 방물장수가 간혹 우리집 마루에 걸터앉아 그림을 보곤 했는데, ‘수근’이라는 사인을 보고 혼잣말로 ‘나무들이 수군수군 대나 봐’ 하고 말했어요. 동네 이웃들도 아버지 그림을 두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죠. 어느 날 아버지가 마루에서 곤히 낮잠을 주무시는 걸 본 적이 있어요. 휘파람 같은 소리를 내며 주무시는데 ….”
  
  — 휘파람? 코 고는 소리?
  
  “코 고는 소리는 아니고 … 뭐랄까 제 귀엔 휘파람처럼 들렸어요. 그 모습이 떠오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아버지를 외면하는 불모지(不毛地)에서 그림을 그린다는 게 얼마나 고된 일이었을까, 하고 말이죠. 아버지는 전업작가로, 피붙이를 부양하는 가장으로 사셔야 했어요. 어쩌면 아버지가 순례자나 구도자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어요. 제가 아버지가 되니 그제야 아버지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됐어요.”
  
  
  “박수근은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살아”
  

박수근의 서울 창신동 집 마루. 박수근 화백과 아내 김복순, 딸 인숙.

 

  — 박수근은 ‘가장 한국적인 화가’라는 평가를 받아요. 
  
  “아버지는 다람쥐 쳇바퀴 같은 삶을 사셨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요강을 비우고 이불을 개십니다. 마른 걸레로 방·마루를 닦고 아침을 드시곤 오전 9시부터 오후 4시까지 그림에 매달리셨어요. 그러곤 미니 스케치북이랑 몽당연필을 주머니에 넣고 명동으로 친구를 만나러 가셨어요. 이런 생활이 거의 반복됐어요. 그런데 어느 순간 내 아버지가 ‘우리의 화가 박수근’이 돼 있더군요. 저는 대통령이란 자리도, 노벨상이란 명예도, 아버지 자리에 비해 근사해 보이지 않아요. 아버지는 정직하고 근면한 하루의 삶에 충실했을 뿐인데 말이죠.”
  
  성남씨는 “철학적인 용어인 ‘포월(抱越)’이란 단어를 좋아한다”고 했다. 포월이란 ‘품에 안고 넘는다’, ‘포함하며 초월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아버지는 묵묵히 자기 세계로 나아가셨어요. 사람이 태어나 엉금엉금 기다가 지치게 되면 어느새 걸어가게 되고 ….”
  
  — ‘지치다’?
  
  “삶에 충실하다는 말입니다. 기다가 지치면 어느새 두 발로 걷게 되고, 또 계속 걷다 보면 어느 순간 뛰어가게 됩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포월의 길로 나아가 그림의 달인이 되셨어요. ‘겪는 자’의 삶이라고 할까요? 바람 불면 부는 대로, 비 오면 비 오는 대로 겪는 삶 …. 하루아침에 이뤄지지 않지만, 작은 물방울이 강한 바위를 가르듯 자신의 경지에 오르셨어요. 
  
  아버지의 작품 중에 〈기름 파는 여인〉이란 그림이 있어요. 실제로 윗집에 기름집이 있었는데 그 집 아주머니는 글을 몰라 어머니더러 읽고 써 달라고 부탁하셨죠. 그럼 고맙다며 참기름 한 병을 주셨어요. 참기름 맛의 고소함에선 그 아주머니가 달인이겠지만 어쩌면 (아주머니는) 참기름에 취해 정작 고소한 냄새를 못 느꼈을지 몰라요. 시대에 취하면 그 시대를 모르는 법입니다. 
  
  아버지 그림은 아버지의 러닝셔츠나 흰 고무신처럼, 평범한 일상의 하나였는데 한 시대가 지나고 보니, 아버지 그림이 호당 1억원을 넘어요. 이게 내 아버지 맞아? 아닌데 ….”
  
  그의 집엔 그렇게 비싸다는 아버지 그림이 한 점도 없다. 박수근이 1965년 사망하자 가족들은 ‘박수근 유작전’을 열어 그림 대부분을 팔았다. 당시엔 호당 5000원 정도에 팔렸다고 한다. 그 돈으로 생계를 이었고 쌀을 샀으며 학비를 보탰다. 
  
  — 진짜 한 점도 없나요. 
  
  “생계를 위해 다 팔았고 나머지 그림들도 아버지 고향인 강원도 양구의 ‘박수근미술관’에 다 기증했어요. 유품 등 200 몇 십 점 모두요.”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한단다”(박수근)
  

박수근과 딸 인숙과 아들 성남. 

  강원도 양구가 고향인 박수근은 이웃의 처녀 김복순(金福順)과 1940년 결혼했다. 두 사람은 슬하에 6남매를 두었다. 현재 딸 인숙씨와 아들 성남씨만 생존해 있다. 인천에서 중등학교 미술교사로 재직한 박인숙(朴仁淑·73)은 교장으로 퇴임했다. 박인숙은 국전에 3차례 입상한 화가다. 영어교사인 천명운(千明雲·80)과 결혼해 2남을 낳았다. 장남 정국(千丁國·48)은 현재 증권회사 중견 간부, 차남 은규(千銀逵·45)는 화가로 활동 중이다. 박수근-박인숙-천은규로 이어지는 3대가 화가인 셈이다. 
  
  아들 박성남은 독학으로 그림을 배웠다. 국전에 7차례 입상했다. 그러다 1986년 국내 활동을 접고 호주에 정착, 낮엔 접시를 닦고 청소부로 일했다. 밤에 돌아와 캔버스와 마주하며 작품활동을 이어 갔다. 호주한인미술협회 회장, 크리스찬리뷰 아트디렉터를 지냈다. 
  
  권영란과 결혼해 아들 진흥·진영을 낳았다. 장남 진흥(朴振興·45)도 그림을 그린다. 역시 3대가 함께 화업(畵業)의 길에 들어섰다. 진흥씨는 인도 델리대와 웨스턴시드니대 미술대학원에서 서양미술을 전공했다. 정미영씨와 결혼해 두 아들 예담(15)·예솔(12)을 낳았다. 
  
  차남 진영(朴振英·43)은 스위스 호텔학교 레로시(Les Roches)에서 호텔경영학부와 동 대학원을 마치고 리츠칼튼 호텔(시드니, 서울)에 재직했다. 현재 시드니에서 미술학원을 운영 중이다. 정경화씨와 결혼해 딸 예서(12)·아들 예샘(9)을 두었다. 
  
  — 박수근의 아들은 어떻게 화가의 길을 걷게 됐을까요. 
  
  박성남씨의 말이다. 
  
  “환쟁이는 돈 못 번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중학교 다닐 때 집안이 어려웠어요. 중3 때 아버지께 공업학교에 가겠다고 말씀드렸죠. 아버진 아무 말씀도 안 하셨죠. 서울공고에 입학해 인쇄과를 택했어요. 인쇄과가 그림과 관련이 많거든요. 그즈음, ‘신(新)기회 미술대회’라는, 구상작가들이 주최하는 대회에 나갔는데 가작에 당선됐어요. 그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어요. 칭찬받을 생각에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아무 말씀이 없으셨어요.”
  
  — 학창시절, 박수근의 그림을 어떻게 기억하나요. 
  
  “아버지의 수채화는 단순하고 투명해서 고교생인 제 눈엔 재주가 하나도 없게 보였어요. 아버지의 단순한 채색과 달리 저는 중색으로, 가령 보라색을 칠할 때, 빨강을 칠하고 파랑을 겹쳐 그려 보라색이 나오게 붓 터치도 하고, 빛이 사물을 에워싸게 정물을 그렸죠. 어느 날 아버지께서 제 그림을 보시더니 ‘봄을 그리려면 봄의 느낌이 나야 한단다’는, 알쏭달쏭한 말씀만 하시곤 아무 말씀도 안 하셨어요. 
  
  그러다 고3 때 간경화로 갑작스레 돌아가셨어요. 아버지 화우들의 도움으로 유작전을 열었는데, 그때 아버지 그림을 유심히 보게 됐어요. 가만히 〈좌녀〉라는 그림을 응시하는데, 무표정한 여인의 얼굴에 간절한 마음의 고뇌가 느껴졌어요. 저는 그때까지만 해도 사과를 사과처럼 사실적으로 그려야 잘 그린 그림이라 생각했거든요. 유작전에서 아버지 그림을 보며 ‘아버지, 저도 화가가 될래요’라고 말씀 드렸죠.”
  
  
  6개월 동안 박수근 그림을 베껴 그리다
  

미8군에서 초상화를 그리던 시절의 박수근(왼쪽에서 두 번째).

  박성남은 박수근의 사망 이후 6개월 동안 아버지 그림을 연구했다고 한다. 아버지 그림을 옆에다 놓고 수없이 베껴 그리고,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어머니에게 물어보기도 했다. 
  
  아들은 아버지의 작업과정을 가만히 떠올렸다. ‘캔버스나 하드보드에 청자색과 암갈색 계통의 바탕색을 기름에 버무려 칠해 놓고선, 그리려는 대상을 어떤 방식으로 담아 내는지 눈여겨보았던’ 기억이 났다. 
  
  미술 평론가들은 박수근 그림의 특징으로 회백색의 화강암 같은 거친 질감을 꼽는다. 그 질감은 서민들의 삶의 무게를 연상케 한다.
  
  “저는 아버지 그림 특유의 마티에르(질감)를 얻기 위해 몇 번 정도 덧칠을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고, 아버지의 비밀기법인 ‘열십자 터치’도 알고 있었어요. 캔버스나 하드보드의 요철을 이용하고 화폭을 가로세로로 돌려 가면서 서너 번 덧칠을 하시던 기억을 떠올렸어요. 저는 아버지 작품을 두고 위작(僞作) 시비가 일었을 때 단박에 가짜를 알아챘어요. 다만 미술감정협회 등의 권위를 존중한다는 뜻에서 입을 다물었어요.”
  
  고교를 졸업한 박성남은 제15회 국전에 120호 크기의 그림을 출품됐다. 제목은 〈추야의 표정〉. 그 그림은 당시 국정교과서 미술책 표지로 채택했다. 교과서에는 박수근의 그림 〈나무와 두 여인〉이 함께 실렸었다. 
  
  “그렇게 정식 데뷔했죠. 아버지는 18살 때 선전(조선미술전람회)에 〈봄이 오다〉로 입선하며 화단에 나섰고, 저는 한 해 늦은 19살 때 국전(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데뷔한 셈입니다.”
  

박수근의 1962년작 〈나무와 두 여인〉.

  — 아버지 그림을 볼 때마다 어떤 느낌이 드나요. 
  
  “아버지가 미군 PX에서 미군들과 그들의 애인 초상을 그리고, 집에 와서는 ‘시대의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모든 것이 풍족한 미군들의 초상화와, 가진 것이라곤 폐허뿐인 ‘서울의 초상화’를 그려야 했던 나의 아버지셨어요. 
  
  1970년대 나온 박완서의 장편소설 《나목》을 읽을 때까지, 전 아버지가 PX에서 초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몰랐어요. 제 기억엔 아버지가 종일 말없이 그림만 그리던 사람이었으니까요.”
  
  박완서의 장편 《나목(裸木)》에 등장하는 ‘옥희도’가 박수근이란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또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에는 실명으로 박수근의 이름이 등장한다. 
  
  … 그(박수근)의 눈은 황소처럼 순했고 그림 그리는 태도는 진지하기보다는 덤덤했다. (중략) 그는 예술보다 사는 일을 우선했다. 그가 가장 사랑한 것도 아마 예술이 아니라 사는 일이었을 것이다. 사는 일을 위해 하나밖에 없는 재주로 열심히 작업을 했다. 그뿐이었다. 훗날 그가 예술가로서 받은 최고의 평가를 생각한다면 그는 천재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불필요할 때 결코 그 천재성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
  
  p263~266, 박완서의 《그 산이 정말 거기에 있었을까》(웅진 刊) 중에서

  
  — 박완서 선생은 ‘박수근·옥희도’를 참 따뜻하게 그려냈어요. 
  
  “어느 시인이 박완서 선생에게 이렇게 물었대요. ‘그 시절, 화가 박수근을 사랑했냐’고요. 선생은 열여덟 소녀처럼 달뜬 목소리로 ‘아니다’고 하셨대요. 제 기억으로, 어떤 여인이 서울 창신동 집에 온 적이 있는데, 당시 어머니가 밥 짓다 말고 밥주걱으로 무쇠솥을 탕, 탕 치며 질투하신 적이 있어요. 그 얘기를 전해 들은 박완서 선생이 ‘그 여인이 내가 아니다’고 웃으셨다고 해요. 하하하.”
  
  
  박수근 그림의 비밀은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는 순수함
  

박성남 화백의 2016년작 〈나팔 불 때- 나의 이름〉.

  — 같은 화가로서 박수근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독일 괴테가 가장 민족적인 것이 세계적이라고 했던가요? 아버지 그림은 가장 한국적입니다. 일제 강점기, 전쟁, 가뭄, 홍수, 전염병, 보릿고개, 그야말로 인고의 시대가 그림에 다 묻어나요. 비극을 비극으로 인식하지 않고, 슬픔을 슬픔으로 인식하지 않는 상태라고 할까요? 광폭한 현실에 대한 저항도 비관도 아닌, 그렇다고 무관심도 아니며 때를 기다리며 견디는 것도 아닌, 그냥 사는 것이었어요. 아버지에게 진실함이란 그저 물감이었고, 선함은 팔레트였습니다.”
  
  — 2세 화가라는 게 큰 짐이 되지요?
  
  “아버지보다 그림을 더 잘 그린다는 자긍심이 없다면 붓을 꺾어야 한다고 생각한 적이 있어요. 아들이 아닌 독립된 예술가로서 아버지 명성이 방해가 된다고 느낀 적이 있고요. 극복하려고 제가 그린 국전 입선작을 포함해 상당수 작품을 불태웠어요. 제가 내린 결론은 ‘2세는 죽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작년 10월부터 ‘박수근 스타일’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어요.”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화백.

  아들 박성남은 젊은 시절, 아버지와 당당히 겨뤄 보겠다며 아버지의 그림세계를 버리다시피 했다고 한다. 서울화랑에서 열린 첫 개인전부터 아버지와 다른 추상의 그림세계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아버지 그림과 마주했고 아버지가 꿈꾸던 세계로 방향을 틀었다. 
  
  “아버지는 땅바닥에 주저앉은 여인, 등짐 진 여인, 곰방대 든 노인, 멍한 모습의 이웃들을 그렸습니다. 그 모습은 선합니다. 아버지 그림의 선함은 타인에게 선함을 강조하지 않아요. 그림 〈나목〉처럼 나무에 이파리가 필요 없어요. 나목은 하늘을 가리지 않기 때문이죠. 
  
  〈절구질하는 여인〉처럼 살아가는 그대로의 모습이 아버지에겐 리얼리티였고 모던이었습니다. 세상이 변해도 아버지 그림은 소통할 수 있는 진실성이 있다고 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혼잣말로 ‘천당이 가까운 줄 알았는데, 멀어 … 멀어 …’ 그러셨거든요. 아버지에게 천당은 무얼까, 곰곰이 생각해 봤어요. 그건 선함과 진실함이 그리는 세상 아니겠어요? 아버진 그걸 그리길 원하셨지만 완성하지 못하시자 ‘멀다’고 말씀하시며 돌아가셨던 겁니다. 
  
  이 세상이 퓨전화되고 혼란스럽잖아요. 아버지가 꿈꾸던 단순하고 선하며 진실한 그림을 제 나이 일흔이 되어 세상에 알리고 싶어요.”
  
  
  박수근의 창신동 시절(1952~63)이 화가로서 인생의 황금기
  

박수근의 손자 박진흥 화백..

  이번에는 박수근의 손자 진흥씨에게 물었다. 
  
  그는 초등학교 때만 해도 ‘화가 박수근’이란 존재를 전혀 몰랐다고 한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이 “유명한 할아버지를 둬 좋겠다”고 해서 의아스럽게 생각했다. 중학생이 돼서야 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진흥씨의 꿈은 야구선수였다. 변호사나 의사 같은 직업엔 영 관심이 없었다. 청소년기를 거치며 유년시절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집 안엔 온통 그림으로 가득했다. 그림을 보고 만지며 냄새를 맡던 기억이 어느 순간 그의 마음을 움직였다. 아버지 박성남에게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했다. 진흥씨의 말이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런 표정도, 말씀도 없이 담배를 피우셨어요. 왜 그러셨을까요? 그림이라는 세계가 어려운데, 앞으로 그 길을 어떻게 헤쳐 갈지 걱정하는 마음이 앞섰던 게 아닐까요?”
  
  — 화가의 꿈이란 게 쉽지 않은 도전 같아요. 
  
  “화가가 되려 계원예고에 입학했는데 점점 할아버지 존재를 의식하게 되면서 그림을 대하는 편안함이 사라졌어요. 학교 선생님은 ‘넌 박수근 손자니까 이 정도는 해야 한다’고 하셨고, 그래서 친구들보다 더 혼이 났어요. 그림 대신 조각을 하겠다고 마음먹은 적도 있습니다.”
  
  그는 고3 때 인도로 떠났고 호주 시드니에서 미술대학원을 나왔다. 2001년 블랙타운시티 예술전시회(Blacktown City Art Exhibition)에서 대상을 타며 화가로서 처음 이름을 올렸다.

 

 

 

  “일본에 가면 3대가 하는 우동집이 있잖아요. 맛의 비법을 전수하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합니다. 화가라는 직업도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지니신 예술정신을 이어받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도 그 정신을 존중하고 싶어요. 
  
  그중에서 할아버지 박수근의 순수하고 소박한 마음을 제 화폭에 담고 싶습니다. 한땐 저도 출품 욕심을 가진 적이 있어요. 그런 그림을 그리다 보면 마음의 왜곡이 생겨 후회가 됐어요. 할아버지는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자신의 생각을 변함없이 그림에 담았던 겁니다. 저도 거짓 없는 진솔한 작품을 그리고 싶어요.”
  

박진흥의 2016년작 〈쉼/ 오늘도 마이너스〉.

 

  — 할아버지의 삶에서 인생의 황금기는 언제라고 보시나요. 
  
  “할아버지는 6·25 당시 혈혈단신으로 남하해 한동안 군산 부두에서 노동을 하시며 기약없이 지내셨다고 합니다. 그러다 서울로 올라오셨는데 할머니가 도강증도 없이 트럭에 몰래 숨어 서울로 들어가 할아버지와 극적으로 재회했다고 합니다. 온 가족이 창신동에 모여 살던 시절(1952~1963년)이 화가로서 열정이 가득 찼던 시절이 아닐까요?”
  
  — 40대 중반의 나이면 인생에서 어떤 결실을 맺어 가는 시기입니다. 자신의 그림을 어떻게 평가합니까. 
  
  “할아버지 박수근의 그림은 사립문을 열면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이웃과 풍경이 소재였잖아요. 반면 오늘의 시대는 누구나 스마트폰을 가지고 삽니다. 스마트폰을 보고 울기도 웃기도 해요. 어쩌면 스마트폰이 인간에게 ‘쉼’의 대상이 아닐까요? 저는 ‘쉼’을 주제로 스마트폰 틀에 하루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상징화시켜 그립니다. 제 그림에 등장하는 사람은 팔이 없어요. 노동자도, 화가도 팔이 없어야 쉴 수 있어요.”
  
  — 경제적으로 해방이 되셨나요. 아버지는 할아버지에게 ‘빌어먹고 있다’는 표현을 썼어요. 
  
  “너무 가난해 그림을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든 적도 있어요. 하지만 진짜 빌어먹고 살더라도 붓은 계속 잡고 싶어요.”
  
  곁에 있던 박성남씨가 대견스레 한마디 던졌다. 
  
  “진흥이는 할아버지의 붕어빵입니다. 박수근의 DNA가 그대로 있어요. 박수근이 그랬듯 시간이 지나면, 묵묵히 그 길을 가다 보면 응답이 있고 열매를 맺을 겁니다. 저는 아들이 이미 ‘대가’라고 마음속에 선포를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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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의 화가 박수근 (朴壽根) 


"하느님, 저도 이 다음에 커서 밀레와 같은 화가가 되게 해 주옵소서"

- 박수근의 12세 무렵 소망 -

박수근 선생은 이름없고 가난한 서민의 삶을 소재로 '인간의

선함과 진실함'을 그리고자 일생을 바친 화가입니다.

그는 단순한 형태와 선묘를 이용하여 대상의 본질을 부각시키고, 서양화 기법을 통해 우리 민족적 정서를 거친 화강암과 같은

재질감으로 표현해 냄으로써 한국적인 미의 전형을

이루어냈습니다. 우리 민족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던 그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구현한

서민화가이자 20세기 가장 한국적인 화가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박수근 미술관 
 

 


 

 

 


 

화가 박수근의 작품 



*...시장의 여인들 1961년-가로 62.4㎝, 세로 24.9㎝(변형 15호)


 

    • 화폭에 여인 12명이 있는 이 작품은 박수근 특유의 거칠거칠한 화강암 질감이
      잘 살아 있는 작품으로 박수근 그림 중 인물이 가장 많이 등장한
      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후반 작품인 ‘빨래터’는 다른 작품에 비해 색상이 화사하고 이미지가
      선명하다. 흰 무명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과 함께 분홍 노랑 파랑 등 파스텔톤
      색상의 저고리를 입은 여인들이 냇가에서 빨래를 하는 옆모습을 담고 있다.
      이 작품은 미국에 사는 80대 소장인이 박 화백 생전에 직접 선물로 받아 50여 년간
      간직해 온 것이다.
      이 작품은 근현대 및 고미술품 경매에서 4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나물캐는 여인들 (1940년대) 



 
*...맷돌질하는 여인 (1940년대 후반) 

 



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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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8 독일 화가 - 막스 에른스트 2020-02-29 0 2817
527 [시공부 하기] - "데칼코마니" 2020-02-14 0 2897
526 [세계국제] - 치마냐... 바지냐... 바지냐... 치마냐... 2020-01-18 0 2145
525 [세계는 지금] -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 = 23 2019-12-12 0 1675
524 오스트리아 "수수께끼"같은 화가 - 클림트 2019-12-12 0 2600
523 "당신은 감각을 잃어버리는것은 아닌지?!..." 2019-12-01 0 1822
522 [그것이 알고싶다] - 2000여년전의 그린 벽화... 2019-11-26 0 1863
521 [그것이 알고싶다] - 천재 화가 다빈치의 그림 "모나리자" 미완성 그림이라고?!... 2019-11-26 0 1832
520 무수한 점점이 백억이 되기까지... 2019-11-23 0 2608
519 [고향자랑] - 아름다운 장백... 2019-10-23 0 1794
518 우리 가락 우리 멋 - 장고야 울려라... 2019-10-10 0 1626
517 ... 2019-05-13 0 1642
516 먼... 길... 멀지만 가야 할 길... 꼬옥... 2019-04-21 0 1846
515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세계는 지금... 2019-04-10 0 2121
514 [동네방네] - 환경 미화원 = 미술가 2019-02-06 0 1989
513 [그것이 알고싶다] - "비로봉" 그림?... 2018-11-26 0 2216
512 [쉼터] - 자작나무(봇나무) 숲으로 가고싶다... 2018-10-17 0 2811
511 [쉼터] - 그림 가격에 눈이 휘둥그래지다... 2018-10-15 0 2837
510 해란강은 유유히 흘러흘러 륙십리 평강벌 흥건히 적시고... 2018-10-12 0 1997
509 [그림과 함께] - 신사임당과 초충도 병풍 그림 2018-08-24 1 2888
508 [동네방네] - "민속벽화" 닐리리~~~ 2018-06-28 0 1870
507 [동네방네] - 하마터면... 2018-06-06 0 1838
506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순간, 찰나, 8초... 2018-06-02 0 2389
505 [동네방네] - 그림 사시오... 그림 사시오... 2018-05-16 0 2347
504 영국 거리 락서화가 - 뱅크시 2018-05-14 0 2787
503 [동네방네] - 이순에 동양화를 배워 제2의 인생을 빛내이다... 2018-05-04 0 2662
502 [이것저것] - "소 그림" 팔고사고... 2018-05-04 0 2666
501 [쉼터] - "로망쟁이" = 5월 봄눈 2018-05-03 0 2000
500 [그것이 알고싶다] - "성공과 평화", "평화와 소망"... 2018-04-29 0 3898
499 [동네방네] - 금강산의 기운 받아 "통일대박" 만들자... 2018-04-29 0 3172
498 [쉼터] - 사진은 말한다... 2018-04-15 0 2269
497 [동네방네] - 피카소 그림 또 해빛을 보다... 2018-03-31 0 2233
496 [쉼터] - 안중근 의사 어록과 15m 대형 광목천 서예 2018-03-25 0 2585
495 [쉼터] - "미완성작 모나리자", "완성작 모나리자" 2018-03-25 0 4578
494 [쉼터] - "12세 모라리자" 2018-03-25 0 2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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