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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
2013년 11월 19일 15시 22분  조회:1891  추천:0  작성자: suseonjae


박경리선생의 삶과 문학(작가론)
문혜영

 
박경리 선생(본명: 금이今伊)은 1926년 10월 28일,
경남 충무시 명정리 서피랑 꼭데기 허름한 집에서 태어납니다.
선생 스스로 ‘불합리한 출생’ 이라고 말한 바대로,
선생은 아버지는 있으나 홀어머니 밑에서 자란 것이나 다름없는 성장기를 보냅니다.
14살 때 4살 연상인 어머니와 결혼하여,
18세에 그를 낳은 아버지는 바깥으로만 떠돌면서 딴 살림을 차렸습니다.
어머니에게 혹독한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사랑을 구걸하듯 하여 자신을 낳은 어머니,
선생에게 있어 아버지는 증오심과 반항심의 대상, 어머니는 연민과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 부모를 바라보며 사회 기존 관습이나 질서 전부를 위악적인 것으로 규정할 만큼
반항 정신이 강했던 선생은 극단적인 감정 속에서 공부는 별로 였고,
소외감과 고독감을 보상이라도 받듯 독서와 시 쓰기에 몰두합니다.


 
해방 이듬해인 1946년 진주여고를 졸업한 뒤, 선생은 전매청 서기였던 김행도와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6.25 전란 중, 행방불명이 되었던 남편은 50년 말 서대문형무소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뒤이어 세 살짜리 아들마저 잃게 되고 외동딸 영주만 남게 됩니다.
‘불합리한 출생’ 보다 더욱 가혹하고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자존심에 흠집이 남지 않도록 몸부림치던 선생은
불행의 탈출구로 문학을 생각하고 더욱 틈틈이 시 습작을 하게 됩니다.


 
그 무렵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셋방살이를 하며 상업은행 본점에 다니던 선생은
소설가 김동리 선생에게 자신이 써둔 시작 원고를 보일 기회를 가집니다.
습작 원고를 읽고 나서 김동리 선생은 ‘상은 좋은데 형체가 갖춰지지 않았다.’고 평가하면서
시보다 소설을 써보라고 권합니다.
그 권유에 따라 소설을 쓰게 되고, 김동리 선생의 주선으로 <현대문학>에 55년 <계산>,
56년에 <흑흑백백>이 추천 완료되면서 정식으로 한국 문단에 얼굴을 내밀게 됩니다.
57년 단편 <불신시대>로 현대 문학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59년 장편 <표류도>를 발표하면서 대중의 인기도 얻게 됩니다.


 
선생의 초기 작품에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내력을 많이 담습니다.
남편과 아들을 잃은 여성이나 홀어머니를 부양하는 딸이 자주 등장합니다.
특히 64년 발표한 <시장과 전장>은 자전적 작품으로
거기에 등장하는 황해도 연백의 연안여고 선생 ‘남지영’의 모델이 바로 박경리 선생 자신이고,
‘차기석’의 모델은 선생의 남편입니다.
이러한 선생에게 60년 4.19의 경험은 박경리 문학에 중요한 변화를 가져옵니다.
단편에서 장편으로 옮겨갔고, 박경리의 세계가 넓혀졌습니다.
이제 시선이 개인과 가족의 고통을 넘어
민족과 인류의 보편성을 다루는 데까지 뻗치게 됐다는 평을 받습니다.
<김약국의 딸들(1962년)>, <시장과 전장(1964년)>,<파시(1965년)>, 등 굵직한 장편들을 내놓으면서,
‘내성문학상’, ‘한국여류문학상’ 등을 수상하고 베스트셀러 작가의 반열에도 오릅니다.


 
69년 8월부터 선생은 <토지>의 집필을 시작합니다.
당초<토지>는 외할머니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1권 분량으로 예상했던 소설이었습니다.
어머니와 딸의 생활을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현대문학>에 연재를 시작했으나,
결국 다섯 살 서희가 쉰셋의 나이가 되어 평사리의 최참판댁 옛 땅을 찾을 때까지
반세기의 세월을 선생 자신을 유폐시킨 채,
25년이란 세월 동안 온갖 군상의 삶과 한 시대의 역사를 그려냅니다.


 
‘소설은 혼자 하는 작업, 외로운 시간이 없으면 글을 쓸 수 없어요.’ 라고 말하던 선생은
<토지> 1부의 서문에서, ‘대매출의 상품처럼 이름 석 자를 걸어놓은 창작행위,
이로 인하여 무자비하게 나를 묶어버린 그 숱한 정신적 속박의 사슬을 물어 끊을 수는 없을까?
자의로는, 그렇다. 도망칠 수는 없다. 글을 쓰지 않는 내 삶의 터전은 아무 곳에도 없었다.
목숨이 있는 이상 나는 또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라고 술회하며,
그 고통의 시간을 ‘빙벽에 걸린 자’, ‘주술에 걸린 죄인’이라 표현합니다.


 
그러한 고통으로 엮어진 <토지>를 선생은
‘강 같이 흐르는 모든 생명의 흐름’이라고 한마디로 축약합니다.
한 인간의 비극이 아니라 집단적 생명 자체가 뭉뚱그려진 숙명을 그려 낸 것인데,
그것을 쓰게 한 것은 ‘서러움’이었다고
2001년 나남출판사에서 새롭게 발간한 <토지>의 서문에서 밝힙니다.
‘지도 한 장 들고, 한번 찾아와 본 적이 없는 악양면 평사리,
이곳에 토지 기둥을 세운 것은 서러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삶을 잇는 서러움이었다.’


 
전 5부, 21권의 <토지>는, 69년 8월에 시작하여 94년 8월까지 집필기간 25년,
원고지 3만 1200매의 분량으로, 1897년부터 1945년까지 반세기에 걸친 한국사회의 기나긴 격동기에
주인공 ‘서희’를 중심으로 700여명이 넘는 인물이 등장하는 대서사극입니다.
이 방대한 작업을 위해 선생은 인물 족보나 이야기의 어떤 틀도 미리 만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손이 닳도록 들여다보던 을유문화사의 <한국사연표>를 동무 삼아
인물들이 제 생명력으로 역사 속에서 살아 움직이도록 기록해 나갔다고 합니다.
‘삶이란 틀 속에 끼우면 이해도 안 되고 해석도 안 됩니다. 문학도 그렇지요.’
복잡한 인물들과 사건이 얽히는 소설을 머릿속에 세밀하게 기억해두고 써나가다 보니
생활인으로는 건망증도 심하고 세상일에 관심도 끊은 채 바보처럼 살았다고 회고하기도 합니다.


 
<토지>를 집필하면서 작품의 배경이 되는
경남 하동의 평사리 악양 들판과 만주땅 용정을 한 번도 가보지 않았으면서도
사실적으로 생생히 묘사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책이 다 나온 뒤, 그곳을 둘러보고 선생 자신도 불가사의하게 생각할 정도였는데,
이에 대해 선생은 지리와 기후를 비롯한 관련 책자를 읽고,
상상력과 직관력으로 쓴 것임을 밝혔습니다.
선생에게 있어 상상력은 글을 쓰는 원동력입니다.
선생은 상상력 없는 글은 생각할 수 없다고 하였으며,
그러한 상상력은 많은 독서가 밑거름이 되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2500여개의 독특한 어휘와 방언, 속담, 풍속, 제도 등을 담은 사전이 발간될 만큼
<토지>는 민족문화의 보고(寶庫)로 꼽히는 작품이며, 세 번이나 TV드라마로도 만들어졌습니다.
또한 영어 일본어 프랑스어 등으로 번역되어 국제적으로도 호평을 받고 있으며,
여러 번 노벨 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국민 대다수가 세계에 가장 알리고 싶은 우리 문인과 작품으로
박경리 선생과 <토지>를 꼽고 있습니다.


 
그러나 소설 <토지>의 운명도 선생의 삶처럼 평탄한 길을 걸어오지 못했습니다.
69년 <현대문학>에서 처음 시작한 <토지>의 연재는 여러 매체를 거치게 됩니다.
72년 <문학사상>으로 자리를 옮겨 2부를 연재하고,
78년 다시 <한국문학>과 <주부생활>에 3부를,
81년 <마당>으로 옮겨 4부를 연재합니다.
그리고 83년부터 <정경문화> (87년부터 제호가 <월간경향>으로 바뀜)에 5부를 연재합니다.


 
<토지>는 오랜 기간에 걸쳐 집필된 만큼 이를 펴낸 출판사도 여럿입니다.
4부(12권)까지 삼성출판사에서 초판이 출간됐고,
이어 88년 지식산업사에서 박경리문학전집으로 <토지>개정판을 냈습니다.
완간본(16권)은 93~94년 솔출판사에서 나왔으며
1998년 출판권을 반납함에 따라 구간도서로 존재하다
2002년 나남에서 총 21권으로 새롭게 펴냈습니다.


 
출생부터 시작된 선생의 고난은 <토지>집필 중에도 계속 이어집니다.
71년, 유방암 수술로 붕대를 가슴에 동여맨 채 병마와 싸우며 밤새워 원고를 메웠고,
70년대 말, 사위인 시인 김지하가 투옥되자 손자 원보까지 돌보며 글을 썼습니다.
80년엔 남편도 없이 시집살이를 하게 된 외동딸 김영주의 울타리가 되어주기 위해
원주 단구동으로 이주하여,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28년을 원주에서 살았습니다.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토지> 4,5부를 탈고하였으며,
<토지>완간 이후에는 간간이 산문을 기고하고 시집을 출간하는 것 외에 작품 활동은 최소화한 채
토지문학관 건립과 환경에 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토지 집필실이었던 단구동의 집은 토지개발로 인해 후에 토지문학공원으로 조성되었고,
선생은 원주 매지리에 새롭게 조성된 토지문학관에 칩거하면서
후배 소설가들을 위한 창작실 지원과 밭농사, 집필로 은둔생활을 합니다.
<토지>로 명예를 얻었으나 그 명예를 좇아 세상으로 나오는 대신
어려운 후배작가들의 글쓰기를 돕는 것으로 만년의 생을 보냅니다.
후배 작가들을 뒷바라지 하며 ‘하숙집 아줌마’를 자처하고
손수 텃밭에서 일군 유기농 채소들로 매일 새벽에 일어나
작가들이 먹을 반찬을 한 두 가지씩 만들어 식당으로 내려 보내곤 했습니다.


 
91년부터는 연세대 원주 캠퍼스에 객원교수로 출강하며,
95년에는 강의 노트 <문학을 지망하는 젊은이들에게>를 냅니다.
선생은 ‘인생이 행복하였으면 문학은 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내 문학적 요소는 인간에 대한 동경으로서 비롯된 것이지만 결코 문학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분명히 나는 인간으로서 행복을, 인간으로서 참됨을 갈망하여 왔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니까 토지만큼이나 굴곡졌던 선생의 불행한 삶은 선생의 문학을 낳게 한 불씨인 셈입니다.


 
<토지>를 탈고 후, 9년 만인 2003년 선생은
소설 <나비야 청산가자>를 <현대문학>에 연재하기 시작합니다.
쓸 수 있는 기력이 남아 있는 순간까지 창작의지를 불태우지만,
<토지>후속으로 해방 이후 반세기의 지식인 사회를 다루려던 <나비야 청산가자>는
건강악화로 3회로 아쉽게 막을 내립니다.
선생은 정치인보다 지식인을 더 부정적으로 보았습니다.
물 밑 지식인들의 의식싸움과 그보다 더욱 문제가 되는 회색 지식인이
우리 사회 전체를 어떻게 지배하는지 다루려 했던 것입니다.


 
선생은 생명과 생존의 가치를 최고로 두었습니다.
생명과 생존 이상의 진실은 없다며, 그게 있음으로써 문학도 있는 거라던 선생은
‘글쓰기보다 사는 일이 더 중요하다, 문학은 본질이 아니라 본질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
그저 밥하고 풀 뽑는 일처럼 일상적인 일이 더 본질적이다’고 했습니다.
그러한 생명사상으로 선생은 생활 속에서 실천하는 환경운동가였습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닭장과 거위장 문을 열고, 손수 기른 상추에 아침을 먹고,
텃밭을 일구고, 마당의 돌을 고르고, 뒷산에 올라 칡덩굴을 뽑으며 살았습니다.
토지문학관을 세우면서도 선생이 제일 먼저 한 일은
늪지대에 도랑을 치고 수로를 만들어 밭으로 일구는 일이었습니다.
물길을 열어주고, 흙의 숨길을 열어주는 것이 선생의 생명사랑 삶이었습니다.


 
선생은 ‘역사는 인간의 자유를 위한 혁명은 수없이 되풀이했지만,
생명의 평등을 위한 혁명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며
‘인간을 위해 다론 종을 보존해야 한다는 인간위주의 환경운동이 아니라,
생명 그 자체를 존중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나와야 한다.’고 말할 만큼
생명운동, 환경운동에 앞서 가시는 분이었습니다.


 
오랫동안 고혈압과 당뇨 등 지병을 안고 지내오다가 2007년 7월 폐암 선고를 받습니다.
하지만 여러 가지 지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원주에서 흙과 더불어 살았습니다.
흙이 모여 있는 곳이 토지요,
토지가 있는 곳이 곧 선생의 모든 것이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의 공간이었던 셈입니다.
저항과 한의 정서에서 생명에 대한 연민으로 되돌아 온 선생은
주변의 치료 권유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거부했습니다.
자신의 텃밭에 농약을 치지 않았던 것처럼
선생은 자신의 육신에게도 억지를 부리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렇게 10개월의 시간이 흐르고, 2008년 5월 5일 82세의 일기로
대하소설 <토지>와 수십여 편에 달하는 장, 단편소설과 수필집, 시집들을 남기고
선생은 생을 마감합니다.


 
한평생 소설을 써왔지만,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은
어쩌면 남몰래 시를 썼기 때문인지 모른다고 했던 선생은
마지막 여명의 시간에도 시를 썼습니다.
시는 나의 직접적이고 날 것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를 지닌 것이라면서
시작의 즐거움을 토로하던 선생의 문학생애는 공교롭게도
습작 시로 출발하여 유작 시로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옛날의 그 집-중에서
 
쓰러지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시처럼,
한 생애 큰 생명으로 살아오신 선생은 모든 것 다 내려놓고
더 큰 생명의 품으로 홀가분하게 떠나 가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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