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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檀古記>나 <규원사화>의 사료적 가치;
2012년 07월 30일 16시 39분  조회:2751  추천:1  작성자: 백화상조
<桓檀古記> <규원사화> 사료적 가치;
필자(筆者)는 어떤 고기(古記)가 있을 경우 그 고기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책 전체를 일괄적으로 평가하지 않고 그 고기에 적혀 있는 개개 문구별로 사료로서의가치를 평가한다. 그럴 경우 개개 문구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거나 또는 일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더라도 다른 정사(正史) 문구와는 부합하는 경우 다른 여러 사료를 분석하여 그 고기 문구가 신빙성(信憑性)이 있다고 판단될 때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데 필자(筆者)는 고기(古記) 문구를 인용(引用)할 경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인용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인용하지 않는다. 이는 필자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사료적(史料的) 가치를 아주 낮게 보기 때문이다.
강단사학자(講壇史學者)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19세기 말이나 20세기에 들어와 위작(僞作)한 것이므로 사료로서의 가치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위작(僞作)이 아니므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는 재야사학자(在野史學者)들도 규원사화(揆園史話)나 환단고기(桓檀古記)의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제한없이 인정하는 견해와, 정사(正史) 문구와 충돌(衝突)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제한적으로 인정하는 견해로 나누어 진다.
혹자는 필자에게 환단고기(桓檀古記)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모두 위서(僞書)일 가능성이 많은데, 환단고기(桓檀古記)는 제한적이지만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왜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아래에 필자가 왜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사료(史料)로서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지 그l 이유를 설명한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675년(조선 숙종 2년)에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쓴 책으로 서문(序文),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 단군기(檀君記), 만설(漫說) 순서로 적혀 있다. 서문(序文)에는 저자(著者)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고하여 지었다고 적혀 있고, 조판기(肇判記)에는 환인(桓因)이라는 일대주신(一大主神)이 천지(天地)를 개창하고, 환웅천왕(桓雄天王 일명 神市氏)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정(神政)을 베푸는 과정이 서술되어 있으며, 태시기(太始記)에는 환검(桓儉) 이전 환웅(桓雄)의 역사가 적혀 있고, 단군기檀君記)에는 환검(桓儉)부터 고열가(古列加)까지 47명 단군과 그 재위기간 및 1,195년간의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으며, 만설(漫說)에는 유학자(儒學者)들의 사대주의(事大主義)를 통렬히 비판하면서 민족의 주체의식(主體意識)을 고취하는 내용 등이 들어 있다.
앞에서 말했다시피 강단사학자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는 20세기 초에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위서(僞書)라고 주장한다. 그 주장 근거는 19세기 이전에는 규원사화(揆園史話) 원본(原本)이나 필사본(筆寫本)이 존재하지 않았고, 20세기 초에 처음 등장한 점, 규원사화(揆園史話)나 그 저본인 진역유기(震域遺記)는 20세기 이전에 언급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에 대하여 진서(眞書)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일부 내용이 처음 인용된 것은 1925년 간행된 단전요의(檀典要義)를 통해서이지만, 단전요의(檀典要義)에 인용된 것과 거의 같은 내용이 1929년 간행된 대동사강(大東史綱)에서 인용되었고, 1940년에는 양주동(梁柱東)이 필사본(筆寫本)을 소장하고 있었음이 확인되었다. 뒤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북애자의 원본 또는 조선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필사본(筆寫本)을 구입하여 1972년에 귀중본(貴重本)으로 등록하였고, 1972년 11월 3일 국립중앙도서관 고서 심의의원인 이가원(李家源), 손보기(孫寶基), 임창순(任昌淳) 3인이 조선 중기에 씌여진 진본임을 확인하여 인증서를 작성하였으므로 진서(眞書)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필자가 보기에는 현존하는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설사 북애노인(北崖老人)이 지었다 하더라도 그 내용에는 심각한 문제점이 있다.
그 문제점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단군조선의 역사에 대하여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대비해 보면, 같은 점은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2333년부터 시작되었다는 것, 각 단군에 대한 일부 역사적 사실이고, 다른 점은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B.C 1139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는 반면에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B.C 238년에 끝났다고 적혀 있다. 즉 규원사화(揆園史話)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름에도 불구하고 두 사서(史書)에 모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은 다음과 같다. 1세 왕검(王儉) 단군에 관한 내용, 4세 오사구(烏斯丘) 단군이 순시하다가 영초를 얻었다는 내용, 8세 우서한(于西翰) 단군이 수확물에 대한 세금 비율을 정하였다는 내용(세율이 규원사화에는 90분의 1, 단군세기에는 20분의 1), 10세 노을(魯乙) 단군 때 짐승을 우리에 넣어 길렀다는 내용, 15세 대음(代音) 단군이 수확물의 80분의 1로 세율을 바꾸었다는 내용, 23세 아홀(阿忽) 단군이 동생 고불가(固弗加)에게 낙랑골(樂浪忽)을 다스리게 하고 웅갈손(熊乫孫)으로 하여금 은(殷)나라를 남정(南征)하는 군사를 살펴보게 하였다는 내용, 30세 나휴(柰休) 단군이 청구를 둘러 보고 엄독골(奄瀆忽)에 이르러 제후국(諸侯國)의 한(汗)을 만났다는 내용, 47세 고열가(高列加) 단군 때 단군조선이 멸망했다는 내용 등등이다.
그렇다면 2 사서에 적혀 있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왜 47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일부 같은 것이 적혀 있을까?
이는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를 짓기 이전에 존재한 저본사료(底本史料)에 48명의 단군(檀君) 이름과 그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두 사서(史書) 모두 이 저본자료를 이용하여 사서(史書)를 만들면서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238년 사이에 적어 넣고, 규원사화(揆園史話)는 48명 단군의 역사를 B.C 2333년부터 B.C 1139년 사이에 적어 넣었다. 그러면서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역사적 사실로는 너무 빈약하니까 단군세기는 단기고사(檀奇古史)를 참조하여 각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고, 규원사화는 진역유기(震域遺記)를 참조하여 각 단군(檀君)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보완하였다. 그리고 두 사서 모두 중국의 사서 문구를 연도에 맞추어 인용해 놓았다.
그 결과 단군세기(檀君世紀)나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각 단군에 관한 역사적 사실에 단기고사(檀奇古史)나 진역유기(震域遺記)에 적혀 있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많이 전사(傳寫)되어 있다.
그렇다면 환단고기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단기고사(檀奇古史)를 대비하면 계연수나 이유립은 북애노인이 지었다는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필사하면서 단기고사(檀奇古史)에서 전사(傳寫)된 문구 중 역사적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은 내용은 많이 걸러낸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아직도 문화발달 정도에 맞지 않는 내용이 많이 들어 있다. 그런데 과장(誇張)된 내용은 그 시대 문화발달 정도에 비추어 가려낼 수 있지만, 가필(加筆)된 내용은 어느 것인지 가려낼 수 없다. 따라서 단군세기(檀君世紀) 문구는 다른 사서 문구와 비교 검토하여 개개 문구의 신빙성(信憑性)을 판단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렇다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문구는 어느 정도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내용이 어느 정도 들어 있을까?
필자가 보기에는 규원사화는 과장(誇張) 또는 가필(加筆)된 정도가 아닌 통채로 사서가 왜곡된 것으로 보인다.
규원사화(揆園史話)를 보면, 조판기(肇判記), 태시기(太始記)에는 전승(傳承)된 설화(說話)와 중국의 사서(史書)를 인용(引用)한 내용이 들어 있다. 전승된 설화가 주(主)이기 때문에 신빙성을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신빙성(信憑性)에 있어 심히 문제가 있다.
이것을 이해하려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歷年)과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 존재하였다는 기자조선(箕子朝鮮)이 실존(實存)한 나라인지 여부를 먼저 이해해야 한다. 왜냐하면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滅亡)하였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그 성격으로 나누면 전기(前期), 중기(中期), 후기(後期)로 나누어지고,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은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적혀 있는 어국(御國) 1,500년(실제는 1,048년인데 약 1,050년을 1,500년으로 잘못 오기하였다.)이다. 그리고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에서 어국(御國) 1,048년을 뺀 860년이다. 후기단군조선(後期檀君朝鮮)은 수명(壽命) 1,908년 이후부터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하고 고구려가 일어날 때까지 대부여(大夫餘) 시대 188년이다.
조선시대에 지어진 사서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1,048년으로 보는 견해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이 1,048년은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의하면 왕검(王儉) 단군부터 소태(蘇台) 단군까지 전기단군조선(前期檀君朝鮮)의 역년이다. 이 견해는 왕검(王儉)이 세운 전기단군조선을 색불루(索弗婁) 단군이 무력(武力)으로 빼앗았기 때문에 전기단군조선과 중기단군조선(中期檀君朝鮮)을 별개의 나라로 본 것이다. 이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의 혈통(血統)이 바뀌었으므로 같은 나라로 볼 수 없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고려 때 지어진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존재하였다고 적혀 있고, 북부여기(北夫餘紀)에는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났을 때 단군조선(檀君朝鮮)이 멸망했다고 적혀 있다. 해모수(解慕漱)가 일어난 해는 B.C 239년이므로,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B.C 239년경까지 존속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단군조선(檀君朝鮮)과 기자조선(箕子朝鮮)이 병존(倂存)하였다고 적혀 있는데, 이는 환단고기(桓檀古記) 단군세기(檀君世紀)에 적혀 있는 견해와 같다.
삼국유사(三國遺事)나 북부여기(北夫餘紀)에 의하면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에도 존재하였다. 그런데도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기(檀君記)에는 왜 단군조선이 기자동래 이전에 멸망하였다고 적혀 있을까?
그 대답은 이렇다. 아직 사대주의 사상이 강하기 전인 고려말(高麗末) 이전에 지은 책들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이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삼국유사) 또는 2,096년(단군세기)으로 적었다. 그러나 사대주의(事大主義) 사상이 강한 고려 말이나 조선시대에 지은 책들은 조선을 소중화(小中華)라 칭하면서 단군조선의 역년을 기자동래 이전으로 임의로 확 줄여 버리고, 조선은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후부터 중국왕조의 후국(侯國)이 되어 중국왕조의 교화(敎化)를 받은 나라로 적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저자도 단군기(檀君記)를 지으면서 당시 조선시대 시류(時流)의 영향을 받아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원래의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대로 1,908년 또는 2,096년으로 적지 않고 기자(箕子) 동래(東來) 이전에 멸망한 것처럼 단군조선(檀君朝鮮)의 역년을 확 줄이고, 그 역년 안에 그 이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저본사료에 적혀 있는 47명의 단군 이름과 단군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집어 넣어 놓았다. 규원사화에 의할 경우 단군조선(檀君朝鮮)은 기자동래(箕子東來) 이전에 멸망하였고, 그 이후 존재한 조선(朝鮮)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아니라 주(周) 나라의 후국(侯國)인 조선(朝鮮)이라는 것이다.
http://203.208.37.104/search?q=cache:bFw4H-7dpA0J:home.megapass.co.kr/~hsg8689/zz224.htm+桓檀古記의+가치&hl=zh-CN&ct=clnk&cd=1&gl=cn&st_usg=ALhdy28ayhhaK_zjjUK-xDPLxTpqgOSW5A

桓檀古記 관하여;

우리 고대사를 알아가다 보면 말도 안됀다 싶을 정도의 이야기가 넘쳐납니다.

우리의 민족 역사의 시작은 기원전 9200년 경이고 이때 천부인이 완성되었고 나름대로의 사상체계도 갖추었다 하며 최초의 국가는 기원전 7199년의 환국(한국)이라고 합니다. 그 다음 나라는 기원전 3898년의 배달제국이구요.

그렇다면 우리 민족의 역사는 약 11200여년 경이고 국가의 형태로서 존재 한것은 9000여년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천부인에는 365일의 개념과 4년주기의 삭과 판현상(노르웨이 최북단에서 일어나는 길게는 육개월간 해가 지지 않는 현상, 남극의 동지 무렵의 기후 이상현상)을 비롯해 역법까지 모두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환국에는 12개의 나라가 나누어 져 있었다 하고 오색인종을 아우른 나라 였다 합니다.

한단고기에 수록된 내용 보다도 신빙성 없어보이나 달리 보면 믿어지는 이야기들이 부지기수 입니다.

제가 아는 것이 짧아 제가 자주 가는 홈의 글을 붙이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읽어보시길.;

유목민 마을이라는 홈페이지에서 조금 퍼온 글입니다.


桓檀古記의 가치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그 민족의 시련기가 되면 민족적 자긍심을 일깨우기 위한 민족사(民族史)가 등장하기 마련이다. 인물위주의 영웅사관(英雄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한다든지, 혹은 국난극복의 종교적 사명감을 고취시키는 고통극복사관(苦痛克服史觀)에 입각하여 서술하는 예가 보통이었다. 하지만, 우리 민족사의 경우는 이러한 예와 달랐다. 국난극복이라는 면에서는 궤적을 같이하고 있으나, 잊혀진 사실을 발굴하려는 노력으로 또는 본래의 모습을 되찾으려는 노력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한데, 이러한 노력에 있어서 내용에 다소 과장된 부분이 생기기도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전체적인 줄거리에 대한 검토없이 과장된 부분만을 확대해석하여 내용전체를 부정하는 태도는 바람직하지 못하다. 현재의 기성사학계에서 일관되게 견지되어 온 이러한 의식은 분명 수정되어져야 한다.

최근에 등장하여 이러한 경향을 지닌 우리의 민족사로, 『한단고기(桓檀古記)』,『규원사화(揆園史話)』,『단기고사(檀奇古史)』,『신단실기(神檀實記)』,『부도지(符都誌)』 등이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한단고기(桓檀古記)』인데 다른 책들의 내용을 포괄하고 있고 또한 각 시대별로 서술된 여러권의 책들을 합친 것이다. 분명 『한단고기(桓檀古記』(‘환(桓)’을 ‘한’으로 발음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는 새로운 차원의 내용을 담고 있어 충격적이기도 하고 일견 거부감마저 들기도 한다. 여태까지 듣고 보지 못했던, 혹은 신화로만 여겼고 배워왔던 상고시대 고조선(古朝鮮)의 역사와 그 이전시대 한인·한웅의 민족기원까지 구체적인 사실로 서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막연하게 동경하여 왔던 대륙에서의 선조들의 활약상이 너무나도 상세하게 그려져 있어 자칫 꾸며낸 이야기처럼 여겨질 우려마저 안고 있다.

현재의 역사연구의 분위기는 많이 달라지고 있는 추세이다. 고조선의 활동영역이 한반도에서 만주대륙으로 확대되어 지고 있고 고조선의 실체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그렇지만 고조선의 담당자로서의 단군조선 문제나 그 이전 단계인 한인·한웅시대 문제가 역사적 사실로 거론되기까지는 아직 요원하기만 하다. 한인·한웅시대가 신화적 차원으로 머물러 있고서야 진정한 의미의 고조선연구는 본질을 망각한 형체가 되엉 버릴 우려가 있어 심각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러한 결과는 워낙 자료가 부족한 탓도 있겠지만, 『한단고기』와 같은 역사서들을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배격하는 태도에도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책이 이러한 신화들을 신확 아닌 사실로 기록하고 있어 오히려 더 연구할 가치가 있을 터인데, 위작으로만 몰아부칠뿐 구체적인 고찰을 하지 않고 있는 현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이 글을 쓰면서 한가지 경계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이른바 재야사학계에서 민족사복원이라 하며 일관되게 주장해 왔던 ‘우리의 역사는 반도가 아닌 대륙을 무대로 했던 역사’라고 하는 논리이다. 이런 주장은 다소 위험한 발상이 될 수도 있다. 마치 우리가 현재 우리의 삶의 터전을 부인하고 과거의 영광에만 사로잡혀 있는 듯한 오해와 착각을 불러 일으킬 소지가 다분한 것이다. 물론 부정적 시각의 ‘반도사관(半島史觀)’을 탈피하자는 의미에서 ‘대륙사관(大陸史觀)’을 강조하다 보니 지나친 감이 없지 않았으나, 이러한 잘못 때문에 오히려 기성사학계가 더욱 한반도중심의 역사관을 고수해왔는 지도 모른다. 대륙이 우리의 주무대였다는 논리는 자칫 현재의 한반도지역에 대한 애착감을 상실하게 만들수도 있다. 다행스럽게도 고대의 한반도 또한 대륙과 연계되어 한반도 자체가 선사시대이후부터 뿌리내려온 역사의 터전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상에서와 같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부분은 경계해야 하고, 선조들의 대륙생활사는 한반도라는 한민족의 현재으 활동무대를 축으로 하여 그 연장선상에서 기원을 탐구하는 방식으로 연구되고 밝혀져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남의 땅이 되어 버린 곳을 되찾겠다고 성그히 주장하기 보다는 우리의 본래모습, 곧 “민족사의 원형”을 재구성한다는 취지로 접근해야 할 것이다. 단순히 한반도지역 내부에서만의 연구로는 원형을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에 대륙과 연계해야만 올바른 정립이 가능하다는데 의의를 두고 한민족 삶의 터전에 대한 변천과 이동의 역사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한단고기를 부정하는 이유로는 크게

용어사용의 부적절
인용서적의 불분명
저술연대와 저자 문제를 들수 있습니다.

다시 유목민 마을 주인장님의 글을 보여 드리자면

『한단고기』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편찬자가 유명한 학자가 아니라는 사실과 뚜렷한 업적이 없었다는 이유로 저술연대와 저자들에 대해 의심을 하고,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내세워 내용전체를 위작으로 여기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도 언급해 왔지만 비전문가에 의한 편찬과 정서(正書)에서 잘못된 용어사용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 내용의 검증이다.

다행스럽게도 『한단고기』에서 기술한 중국관련 기록들이 실제 중국측 사서들과 서로 일치하거나 더 상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만약 중국사서와의 일치된 부분을 놓고 그 전후의 사건들을 모두 꾸며내었다고 주장한다면, 『한단고기』의 작자는 정말로 위대한 소설가라 아니할 수 없다. 저작자가 개인이든 집단이든 중국의 고대사서를 철저히 분석하고 대단한 상상력과 창작력을 발휘하여야 가능한 방대한 내용을 『한단고기』는 담고 있는 것이다. 특히 상고시대의 철학과 사상 등에도 해박한 정도가 아닌 꿰뚫는 혜안이 있어야 가능한 내용도 담겨져 있으므로, 분명히 오랜 기간에 걸친 역작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한단고기』이외의 다른 루트를 통해 알려진 책들(『단기고사』,『규원사화』등)과도 내용과 줄거리가 유사하다는 점도 위작이라는 논리하에서는 설명하기 어렵다.

중국문헌과의 비교검토

중국측에는 정사(正史)로 인정되는 ‘25史’외에도 『죽서기년(竹書紀年)』,『설문(說文)』,『춘추좌전(春秋左傳)』,『자치통감(資治統監)』,『산해경(山海經)』 등의 고서(古書)들이 있고, 『맹자(孟子)』,『논어(論語)』,『시경(詩經)』,『서경(書經)』등의 유가경전에도 역사적 사건에 대한 단편적 기록들이 남아 있다. 한민족에 관한 기록은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史記)』이후의 『한서(漢書)』,『후한서(後漢書)』,『삼국지(三國志)』등에 와서야 「동이전(東夷傳)」이나 「조선전(朝鮮傳)」으로 체계화되지만, 그 이전시대에는 중국중심의 역사서술에 단편적으로 삽입되어 있거나 사물의 기원, 이민족의 풍습 등을 소개할 때 간혹 등장하곤 한다.

우선 중국내륙지역과 가장 접촉이 빈번했던 시기로 알려지는 고조선의 실체인 단군조선(檀君朝鮮)시대의 기록을 검토해 보자. 이는 단군조선의 건국(B.C.2333)이후 중국내륙인 중원지역에 왕조라 인정할 夏·殷·周·春秋戰國時代 등이 전개되어 중국의 역사기록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가 풍부하기 때문이다.

1) 기독교의 구약성서에는 홍수설화가 있는데 밝혀진 바로는 슈메르문명(기원전 3천년경의 메소포타미아지방)의 홍수설화와 유사하며, 지질학적으로도 기원전 2천년전에 지구에 큰 홍수가 있었다고 한다. 홍수에 관해서는 동양의 고대사에도 유사한 기록이 남아 있다. 『한단고기』중의 『단군세기』와 『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번한세가(番韓世家)편에 1세 단군왕검때(丁巳50년, B.C.2284) 큰 홍수가 있었는데 풍백인 팽우에게 명하여 치수사업을 성공시켜 이를 극복하고 그 비법을 중원지역 요순시대(堯舜時代) 순(舜)이 파견한 우(禹)에게 태자 부루(扶婁)를 도산(塗山)에 파견하여 치수를 위한 삼보(三寶)를 전해주고 국경을 정해 유영지방(幽營地方:북경일대)과 회대지방(淮垈地方:산동지역과 양자강하류역)의 동이(東夷)제후들을 평정하여 직접 분조(分朝)를 두어 당시의 중원정치를 감독하게 하고 직접 5년마다 순수하시어 순(舜)이 네번이나 조근(朝覲)하였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이때 전해준 삼보로는 ‘王土의 篆(문자의 일종)이 새겨진 천부왕인(天符王印)’, ‘물의 깊고 얕음을 측정할 수 있는 신침(神針) 일매’, ‘험하고 중요한 곳의 물을 진압할 수 있는 황거종의 보물’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오행치수(五行治水)의 법을 적은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주었는데, 『오월춘추(吳越春秋)』에는 “금간옥첩을 창수사자(蒼水使者)가 夏의 禹에게 준 치수의 비결”로 기록되어 있어 대비된다.

중국고대에는 삼황오제(三皇五帝)시대가 있었는데 삼황으로는 염제신농, 태호복희, 황제헌원 등이다. 『한단고기』중 『삼성기』나 『태백일사』「신시본기」등에는 삼황의 인물들이 모두 한웅시대의 후손으로 중원지역에 발달된 문화를 전파하고 정착한 것으로 상세히 기록되어 있고, 오제의 인물들도 역시 같은 계보를 지닌 것으로 나와있다. 순임금도 동이계통으로 확인되는데, 『맹자(孟子)』 이루장구(離婁章句) 하편에,

- 순은 제풍에서 나고, 부하로 옮겼으며, 명조에서 졸하였는데, 동이의 땅이고, 순은 동이인이다(舜生於諸風, 移於負荷, 卒於名條, 東夷之地, 舜東夷之人也) -

라 하였고, 『한단고기』에는 순의 아버지 유소씨(有巢氏)가 단군조선의 신하로 기록되어 있다. 단군조선에서 분조를 두고 산동지방 낭야성에 5년마다 순수하였다는데, 이에 대해 『서경(書經)』虞書 舜傳을 보면,

- 2월, 동쪽으로 순수하여 대종에 이르러 시일을 협의하고 협의하고 도량형을 맞추며 오례의 법을 닦고 다섯가지 옥과 세가지 비단, 두가지 산짐승과 한가지 죽은 짐승의 예물을 정리하였고, 다섯가지 제기는 제사가 끝난뒤 되돌려 주었다.(歲二月,東巡守之于岱宗,協時月正日,同律度量衡,修五禮五玉三錦二生一死執如五器卒乃復) -

고 하였다. 중국에서 최초의 왕조로 불리는 하(夏)의 시조 우(禹)가 치수사업에 성공하여 그 공으로 군장위를 이어받았는데, 우의 성공비결은 창수사자에게서 나온 것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흔히 말하는 중국사람들의 춘추필법(春秋筆法:중화중심의 역사관)은 창수사자라는 모호한 명칭으로 진실을 가리고 있지만, 『한단고기』는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단히 명쾌한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이다.

2) 현재의 중국사에서는 산동지방과 양쯔강일대 평야지대에 옛부터 동이족들이 터전을 마련하고 생활해왔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은 북방에서 이주해 온 종족이며, 황하문명을 꽃피운 은(殷)나라도 이들 동이계통이 세운 고대국가였다. 이러한 결론에는 중국지역의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큰 몫을 담당하였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동이관련 기록은 단편적이나마 그 원형을 살펴볼 수 있으므로 이를 『한단고기』의 기록들과 비교검토해 보자.

단군세기』 4세단군 오사구(烏斯丘)조를 보면,

- 임인19년(B.C.2119) 하나라 주 상이 덕을 잃어 단군께서 식달에게 명하여 남·진·변 3부의 병력을 이끌고 그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천하가 이를 듣고는 모두 복종하게 되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에는

- 하후씨 태강이 덕을 잃어, 동이인들이 모반을 시작하였다. 註에 태강은 익으로 하여금 물리치게 하였다.(夏后氏太康失德,夷人始畔...註,太康...爲익所퇴也) -

라고 되어 있고, 『죽서기년(竹書紀年)』夏王 相元年(B.C.2146)조에는

- 원년에 견이를 정벌하고, 2년에 풍이와 황이를 정벌하고, 7년에 우이가 내빈하였다.(元年,征犬夷,二年,征風夷及黃夷,七年,于夷來賓) -

라고 되어 있다.

夏의 태강과 상은 각각 다른 시기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단군세기』는 이에 대해 두사람을 한사람으로 혼동하고 있는데, 이 부분에 관해서는 『규원사화』「단군기」에 보다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연대설정이 『한단고기』와 다르지만, 내용상의 흐름은 『한단고기』와 유사하여 상호 참고될만 하다. 『규원사화』「단군기」3세단군 가륵조와 4세단군 오사구조를 보면,

- (가륵조)때에 夏王이 失德하여 그 신하중 찬역(왕을 추방)하는 자가 있었다. 이에 식달로 하여금 남진번의 백성을 이끌고 이를 정벌하니 국위가 더욱 빛났다.
(오사구조) 夏王 后相을 쳤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후에 사신을 보내 화친하고 서로 통교했다. -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사건의 개요를 보면 동이가 하왕 태강을 정벌하여 이겼지만 상에게는 진 것으로 되어 있고, 이는 중국의 사서들과 같은 내용이다. 중국의 고대사서에는 동이족을 구이(九夷)로 나누어 불렀다. 견이(犬夷), 풍이(風夷), 황이(黃夷), 백이(白夷), 적이(赤夷), 양이(暘夷), 우이(于夷), 방이(方夷), 현이(玄夷:鳥夷 혹 北夷) 등인데 조이(북이)의 위치가 발해북안지대일 것으로 보는 외에 다른 이족들의 중국내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불확실하다. 대개 이들 구이는 산동반도와 회대지방(양쯔강하류역)에 분거한 것으로 알려져 있을 뿐이다.

3) 하나라와의 관계사를 한가지 더 보자. 『단군세기』 11세단군 도해(道奚)조에

- 丁卯38년(B.C.1854)... 徵民가운데 장정을 뽑아 모두 병사로 삼고 選士 20인을 夏의 도읍으로 보내 처음으로 國訓을 전함으로써 위세를 보였다. -

고 하였는데, 중국측 『죽서기년』 夏王 發 원년(B.C.1837)조에

- 發 원년, 諸夷들이 왕에게 인사하고 夷人들이 춤을 추었다.(帝發元年,諸夷賓于王門...諸夷人舞) -

라고 하여 단군조선과 하나라와의 친선관계를 보여주는 기록으로 연대도 유사하고 있다.

4) 夏나라는 은나라에게 멸망하였는데 은나라를 구성한 종족은 발달된 청동기문화를 꽃피웠으며 한자(漢字)의 기원인 갑골문자(甲骨文字)를 사용한 종족으로 북쪽에서 내려온 동이계통으로 알려져 있다. 중원지역에서는 하와 은의 교체기에 동이족이 권력구도의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데 『한단고기』상으로는 단군조선의 결단에 의한 것으로 나타난다.

단군세기』 13세단군 흘달(屹達)조에,

- 甲午16년(B.C.1767) 겨울, 殷人이 夏나라를 정벌하니 夏의 桀王이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단제께서 읍차인 末良으로 하여금 九桓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싸움을 돕게 하니 殷의 湯王이 사신을 보내 사죄하였다. 이에 말량에게 命을 내려 군대를 되돌리게 하였는데, 夏의 桀王은 조약을 위배하고 병력으로 길을 차단하며 약속을 깨려하였다. 이에 殷人들과 함께 夏의 桀을 정벌하기로 하여 몰래 신지 于亮을 파견하여 견이(夷)의 군대를 이끌고 가서 낙랑과 합쳐 진격하여 關中의 분기땅에 점거하여 관제를 설치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여기서의 구환은 구이를 말한다. 이는 환인,환웅의 자손이라는 의미이다. 낙랑은 고대 발해서북지역 지명이고 관중의 분기는 섬서성일대를 지칭한다. 이에 대한 중국측 기록인 전한(前漢)의 유향(劉向:B.C.77~)이 저술한 『설원(說苑)』夏王癸(桀)52년(B.C.1767)條에 보면,

- 탕이 걸을 토벌하려 하므로 걸왕이 노하여 구이의 군사를 일으켜 탕을 토벌하니 탕이 이에 사죄하였다.(湯欲伐桀,桀怒起九夷之師以伐之,湯乃謝罪)
라고 되어 있고, 계속하여 53년조에 보면,

- 탕이 걸왕에게 조공을 하지 않으므로 다시 구이의 군사를 일으키려고 하였으나 구이가 군사를 일으켜주지 아니하므로 마침내 탕이 군사를 일으켜 걸왕을 토벌하여 남쪽변두리로 추방하였다.(湯不貢桀起九夷之師,九夷不起,湯乃興師伐之,遷桀南巢) -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사를 보면 구이(九夷)가 세력향방의 변수로 작용할만큼 막강한 힘을 가진 것으로 그려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중국의 춘추필법으로도 감추지 못할 사건의 결과인 것이다. 이에 대해 『죽서기년』夏王 癸(桀)條에서는,

- 계(걸)3년(B.C.1816)...견이인이 岐땅에 들어와 모반을 일으켰다. 6년(B.C.1813) 기땅에서 물러나고 사죄하였다.(帝癸三年...(田犬)夷人于岐以叛...六年岐踵戒來賓) -

라 하여 걸왕때 견이가 岐에 들어와 夏에 반하였다는 내용이 일치되고 있다.

『단군세기』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규원사화』에는 분기땅에서 철수하는 기사가 있는데, 철수이후의 기록이 또한 『단군세기』에 전해지고 있다. 단군조선이 殷을 도와 夏를 멸망시킨 후 근 4백여년 동안 은과 지속적인 친선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규원사화』 단군 흘달(벌음)조에는,

- 商王 湯이 어진 정치를 크게 베풀었으므로 단제께서 말씀하시기를 ‘德이 있는 임금으로 가히 서로 침범할 수 없다’하시고 이에 그 군사를 거두시고 후에 화해하였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15세단군 벌음(흘달)조에는,

- 庚辰元年(B.C.1661) 殷主 小甲(B.C.1672~)이 사신을 보내 화친을 구했다. -

라고 되어 있는데, 『후한서(後漢書)』「동이열전(東夷列傳)」商湯元年(B.C.1766)條에,

- 앞서 桀의 난리때 빈기사이의 땅에 침입하여 점거하고 있던 견이를 쳐서 물리쳤다.(先是,后桀之亂,(田犬)夷入居빈岐之間,成湯...興伐而攘之) -

라고 되어 있어 서로 비교된다.

5) 은나라와 지속된 4백년간의 친선관계가 단군조선 내부의 정변(政變)을 틈탄 은의 세력확장으로 깨어지고 정변을 수습한 단군조선은 마침내 은나라 내지(內地) 깊숙이 들어가 분국(分國)을 설립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중국역사에서 수수께끼의 나라로 전해지는 이른바 엄국(奄國)과 서국(徐國)의 실체가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부분으로 동양사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대목이다. 『단군세기』 21세단군 소태(蘇台)조를 보면,

- 甲辰元年(B.C.1337) 殷왕 武丁(B.C.1339~B.C.1280)이 鬼方을 쳐서 이기더니 대군을 이끌고 索度,令支 등을 침공하였으나 우리에게 대패하여 화해를 청하며 조공을 바쳤다. -

라고 되어 있고, 『단군세기』 22세단군 색불루(索弗婁)조에는,

- 丙申元年(B.C.1285) 11월, 제께서 몸소 九桓의 군사를 이끌고 여러차례 싸워 殷의 도읍을 격파하고 곧 화친하였으나 또다시 크게 싸워 이를 쳐부쉈다. 이듬해 2월 이들을 추격하여 黃河상에서 승전의 축하를 받고 弁韓의 백성들을 淮垈(양쯔강하류유역)의 땅으로 옮겨 그들로 하여금 가축을 기르고 농사를 짓게 하니, 나라의 위세가 크게 떨쳤다.
乙卯20년(B.C.1266) 때에 藍國이 매우 강성하여 孤竹君과 함께 여러 적들을 쫒아내고 南으로 이동하여 奄瀆忽에 머물렀으니 殷의 경계에 매우 가까웠다. 이에 黎巴達로 하여금 병사를 나눠 진격하여 빈기땅에 웅거하도록 하면서 그곳의 유민과 서로 단결하여 나라를 세워 黎라 칭하고 西戎과 함께 殷의 제후들사이를 차지하고 있도록 하였으니 藍氏의 위세가 매우 강성하여 단제의 교화는 멀리 恒山(하북서부지방) 이남의 땅에까지 미치게 되었다. -

라고 되어 있다. 계속하여 『단군세기』 23세단군 아홀(阿忽)조에,

- 甲申元年(B.C.1237) 황숙인 固弗加에게 명하여 樂浪忽을 통치하도록 하고 웅걸손을 보내 藍國君과 함께 남쪽을 정벌한 군대로 하여금 殷나라 땅에 대읍을 설치하는 것을 살펴보게 하였는데 은나라 사람들이 서로 다투며 결정을 내리지 못하니 마침내 병력을 진격시켜 공격하여 이를 격파하였다.
乙酉2년(B.C.1236) 藍國君 今達이 靑邱君,九麗君과 周?에서 회합하고 蒙古里의 병력을 합쳐 가는 곳마다 殷나라의 城柵을 쳐부수고 깊숙이 오지로 들어가 淮垈의 땅을 평정하더니 浦古氏를 奄땅에, 寧古氏를 徐땅에, 邦古氏를 淮땅에 각각 임명하니 은나라 사람들은 우리의 위세를 우러러 보며 두려워하여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

라고 되어 있는데, 이상의 기록들은 또한 『규원사화』의 내용과도 동일하다.

전통적으로 동이족(東夷族)의 활동지역인 양쯔강하류의 비옥한 평야지대인 회대의 땅에 단군조선 초기의 분조(分朝)보다 더 대규모인 분국(分國)을 설치하였는데 이 분국들이 은나라 후대의 주(周)나라와도 지속적으로 세력을 다투게 된다.

『후한서』「동이열전」 - (商王)仲丁六,征于藍夷 -
『후한서』「동이열전」殷王武乙條 - 東夷寢盜,分遷淮垈,漸居中土,所謂徐夷是也 -
『후한서』「동이열전」周王勵條 - 勵王無道,淮夷入寇,王命괵仲,征之,不克 -

『후한서』의 기록에서처럼 동이의 강성함이 은나라와 주나라와 대등하면 대등하였지 결코 떨어지지 않음을 알수 있는데, 이후의 『단군세기』에는 특히 周나라와의 비교적 평화적인 관계가 지속되는 한편,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의 초(楚),제(濟),조(趙) 등의 나라와도 관계를 맺고있는 것으로 나오고 단군조선 말기에는 특히 연(燕)과의 관계가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춘추좌전(春秋左傳)』을 비롯한 주대(周代)이후의 문헌에도 동이구족(東夷九族)을 대표하여 ‘淮夷’,‘徐夷’등이 주나라와 춘추시대 제후국들과 지속적인 투쟁의 관계를 맺고 있음이 보이고 있다.

중국내륙에서의 동이족의 활동을 중국사서와 비교해서 보았는데, 중국측 문헌에는 단군조선에 대한 언급없이 중원의 왕조와 관련되는 사건에 대해서만 단편적으로 기록하고 있을 뿐이다. 다만 순임금때부터 서주(西周)까지 간간이 등장하는 ‘숙신(肅愼)’에 대한 전거가 단군조선의 ‘조선(朝鮮)’에 대한 일단의 실마리를 제공할 뿐, 중국내 동이족과의 관련면에서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한다. 오늘날 학계에서는 ‘숙신’과 ‘조선’을 같은 명칭에 대한 다른 시대적 한자표기로 여기고 있지만, 종족구성에 있어서는 ‘숙신’을 퉁구스계통으로 보는 등 아직 일치하지 않고 있다.

중국사에 등장하는 ‘숙신’은 읍루(邑婁)와 물길(勿吉)로 이어지는 만주지방에 있던 고대의 종족명칭이고 호시((木苦)矢:싸리나무화살),석노(石弩:석궁)가 유명한 곳으로 알려진다. 춘추시대이후의 문헌에는 ‘조선’이란 국명이 정식으로 등장하는데 그 위치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지만, 과거의 한반도위치설에서 요녕지역으로 중심지가 이동되어지고 있다. 이는 고고학적 발굴성과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지만 문헌상에서도 조금씩 해석상의 오류를 수정하고 있는 결과이기도 하다.

『한단고기』의 고조선에 대한 역대단군들의 상세한 치세기록은 이러한 불확실한 역사에 대해 실로 명쾌한 해답을 주고 있고, 또한 사실들에 대한 기록이 중국과도 일치하고 있음을 주목하여 그 가치를 재고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문헌적 비교검증외에도 최근까지의 고고학적 발굴성과는 『한단고기』의 내용을 전반적으로 입증하고 있으며, 특히 이 책의 천문기록에 대한 과학적 검증은 『한단고기』를 단순한 위작이 아닌 명백한 실제기록임을 증명해주는 것이다. 부분적 비판도 필요하겠지만 전반적인 검토가 더 중요한 시점이 된 것을 알아야 한다.

평어;

서울대 국사학과에서 과연 "주류"라는 자존심 가지고 이런 책에 대해 관심을 안 기울였을까요 ? 그건 터무니없는 낭설입니다. 여러분이 조금만 사회과학에 대해 공부하신다면, 그리고 역사가 어떻게 발전되어왔는지 아신다면 한단고기의 내용은 "전부는 믿을 것이 못 된다" 정도는 아셔야죠.

한단고기의 내용대로라면 대륙에서 "근대국가에" 걸맞는 대제국을 한민족이 세우고 놀았다는 건데 이게 맞는 소리일까요 ? 우선 '민족'이란 것을 따져봅시다. 민족이란 개념은 이십세기 '식민통치'란 압제에서 나온 것입니다. 즉 한민족이라는 '자각'도 일제 식민통치나, 그 이전의 몽골제국 통치에서 비롯한 것이란 말입니다. 조선시대에 언제서부터 우리가 민족 타령했습니까 ? 내로라하는 지식인들의 화두는 "중화"였습니다. 성리학적 세계관은 민중들까지 지배하였단 말입니다. 그리고 고대 시대에 무슨 민족타령입니까 ? 종족이라면 몰라도 민족이란 말은 우스꽝스럽습니다.
게다가 한단고기의 내용을 읽으면 가장 중요시되는 "하부구조"에 대한 내용은 없습니다. 누가 누굴 지배했느니 쳤다느니하는 기독교식 서술이 나왔지, 생산구조가 어떠하였고 세금은 어떻게 걷었으며 농사는 무얼로 지었고 하는 식의 "현실적인 얘기"는 거의 없습니다. 생각해보세요. 적어도 근대적 자본주의 생산관계가 있어야 제국이고 말고 언급이나 하지, 그 당시처럼 정착농경도 발전하지 않았을 무렵에 무슨 제국 타령입니까 ? 몽골제국 같은 경우도 전세계적으로 각 국가의 생산력이 일정 수준 이상 발전한 것을 착취하고 빼앗고 소유함으로써 유지하였습니다.

이런 얘기로만 보자면 한단고기는 그 서술방향부터 의심스럽습니다. 하지만 부분적인 진실은 있을 터, 어디까지 참고용으로 그리고 그 진위성 증명 과정을 통해서 얘기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사대주의적 역사관이 드러나고 일부 왜곡이 있되, 중국 중심의 서술 부분에 있어선 기막힌 진실성을 보여주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비하면 얼마나 가치가 있을지 의심스럽군요. 기분이 좋으면 다 역사책입니까 ?
그런 식이라면 우리는 일본서기를 마땅히 인정해야하며, 아직도 논란이 일고 있는 임나일본부도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야하며, 그리스 신화조차 예날엔 정말 신이 있구나 하는 식으로 받아들여야죠.

혹은 이런 반론도 있을 것입니다. 김부식과 기타 무리들이 옛날 고사서를 불태우지 않았냐고. 맞는 얘기입니다. 소위 춘추필법이라는 "날조된 서술방식"이 있었고, 김부식은 자신이 참조하였던 많은 역사서를 보존조차 안 한걸로 생각되고 있습니다. 김부식이 스스로 취재 및 현장조사를 하여 역사서를 적어나간 것이 아니라, 그 이전의 참고서적들이 분명히 있을 터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가 주목받은 것은 그 내용보다도 "그나마 객관적으로 사실(史實)을 서술하고 차례차례 기술해나가는 역사서술의 방식을 확정지은 데"에 있는 것입니다. 고대의 역사서술방식이 과연 정확하였을 까요 ? 늑대 한마리 잡아서 부족이 나눠먹은 얘기가 수백년이 가다보면 무시무시한 괴물을 물리쳐 영웅이 되었다라고 윤색되기 십상인 것 아닙니까 ?

문제는 한단고기가 딱 이런 수준의 얘기를 따라가고 있단 것입니다. 한단고기의 서술방식은 과학적이지 않으며, 흠을 잡으면 얼마든지 잡을 수 있는 부분이 많습니다.
고등학교 지리부도에서조차 우리 조상들의 강역은 중국 북부에 뻗쳤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만‥ 대책없이 중국 전체가 한민족의 터전이었느니 하는 것은 문제가 많습니다. 백제가 중국 동부에 영향력을 끼쳤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말해서 백제의 상인들이 중국 동부에서 그 세력을 구축하였다는 것으로 보지, 군사적으로 먹어치웠다고 보면 안 됩니다. 그런 식으로라면 미국도 주한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니 한국 역시 미국 땅이겠죠 ?

한단고기를 보고 가치있다 여기면 스스로의 역사지식을 의심해보십시오. 서술방향부터 이상한 책은 일단 의심하고 그 진위성부터 따져보되, 부분적인 진실을 추려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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