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조글로블로그
http://www.zoglo.net/blog/sy10088 블로그홈 | 로그인

※ 댓글

<< 3월 2024 >>
     12
3456789
10111213141516
17181920212223
24252627282930
31      

방문자

홈 > 주제론문

전체 [ 16 ]

조선족 상례문화가 어찌하여 무시당했고, 무었때문에 보호해야 하는가? 제2차 “조선족 상례풍속 학술심포지엄” 특별연설 “조선족 상례풍속” 대표전수인 현룡수   1, 어찌하여 조선족 상례문화가 무시당하였는가? 우리 상례문화가 락후하였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그럼 당년 좌적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완정히 그런것만도 아닙니다. 주요한 원인은 조선족 상례풍속이 성숙되고 통일된 조선족 상례문화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자기의 찬란한 상례문화가 있었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백여년 전에 조선반도의 여러 부동한 지역에서 중국에 들어 왔으며,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구체적인 상례풍속도 지방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못했던 우리 선인들은 상례지식을 주로 선배들 한테서 구전(口傳)으로 전수 받았으며, 그 과정에 오전(誤傳)이 많았고, 지방에 따라 서로의 차이도 점점 크게 되였습니다.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전통상례문화의 전수와 통일을 결과적으로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나라에서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들의 장례풍속은 국무원의 “빈장관리조례”와 그후의 민정부 보충해석 문건에 의하여 국가적 존중대우를 받게 되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끝내는 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이 비록 전국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였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서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항목이나 시설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삼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가 필요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으며, 그 직접적인 악과로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젊은이들의 책임감이 없어지고, 전통이 끊어졌으며,  경제가 발전한 반면에 민속문화의 퇴화는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2, 무엇때문에 조선족상례풍속을 보호해야 하는가? 조선족상례풍속이 특별히 우월해서인가? 아닙니다. 그럼 이 풍속이 없으면 우리 조선족들이 살아갈수 없어서인가? 그런것도 아닙니다. 주요한 원인은 조선족상례풍속에는 우리민족의 얼이 슴배여 있고, 우리민족의 뿌리가 묻혀있으며, 조선족상례풍속이야 말로 효도를 발양하고, 젊은이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 가례문화 “冠婚喪祭”를 저술한 《사례편람》이란 책이 있는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 리재(李縡기원1680~1746)가 최종 완성한 책입니다.이책은 도합 여덟권으로 되여 있는데, “冠禮”가 한권으로 되여있고, “婚禮”가 한권으로 되여 있고, “葬禮”도 한권으로 되여 있는데, “祭禮”는 다섯권으로 되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민족 수천년 생존분투사의 인생리념을 “葬禮”와 “祭禮”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은 자고로 효도를 발양하고, 젊은이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민족의 전통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의 핵심이 바로 “효도”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백가지 선행에서 효도가 첫째(百善孝爲先)”라는 리념을 견지하여 왔습니다. 즉 효도가 한사람의 현명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우선적인 표준이였으며, 한가문의 출세여부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부모를 학대했던 가문에서도 장례와 제사만은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마음먹고 후하게 치렀으며, 그 목적은 자기들도 효자 가문이라는 사회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일단 사회로부터 불효 가문이라는 평판을 받게 되면 그 가문 자손들의 출세의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기 때문이였죠.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인재등용을 평심할때 그사람의 자격과 재능만 중시하고, 인품은 상관하지 않으며, “효도”는 근본 인재표준에 들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격증을 따고, 재능을 높이는 데만 중시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인품을 높일 필요는 근본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족장례풍속이 이렇게 오래동안 사람들의 관심밖에 버려질수 있었고,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근본원인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효도가 약화됨으로써 지금 우리의 미풍량속이 얼마나 엄중하게 퇴화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늙으신 부모와 한집에서 지내는 가정이 거의 없고, 늙은이들에겐 진짜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시대가 되였습니다. 고독사, 임자없는 죽엄, 죽은후 며칠후 발견 등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런 현상은 “효도의 재난”이요, “인도주의 재난”이며, 우리민족의 망신입니다. 부모가 사망하여 당일 장례가 보편적이고, 장례도 우리식이 아닌 남의 식으로 어설프게 치루어야 하며, 수십년 동안 자식들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온 부모들이 사망하여 결국 쓰레기처럼 처리되여 버립니다. 화장을 실행하여 장례가 간단하여 진것은 시대의 진보라고 할수 있겠지만, 시체만 처리하고 장례는 지내지 않으며, 부모를 경로원에 맡겨 놓고, 사망해도 자기들은 외국에 있다는 이유로 오지도 않는, 상주로서의 최저의 례의도 지키지 않는 이런 비인륜적인 행위는 그 어느민족에서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행위는 반드시 사회의 질책을 받아야 하지만, 지금 이런행위를 질책할 사람이 근본 없고, 그런 사회기제도 업습니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퇴화가 아닐수 없습니다. 자기 부모도 존중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존중할수 있고, 남을 존중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용납될수 있으며, 사회에 용납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잘살수 있겠습니까?   3,어떻게 우리민족의 품질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겠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우선 효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효도를 중시하고 회복시켜야만 가문의 화목을 확보할수 있고, 젊은이들의 가문에 대한 책임을 담보할수 있으며,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할수 있고, 우리민족의 품질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양로보험, 의료보험 등 보험들이 많은데, 이런 보험들은 로인들의 양로에 필요한 기본적인 비용을 해결할수 있지만, 로인들에게 사랑과 존중을 줄수는 없습니다. 2500여년전에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기르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 그럼 어떻게 하면 효도를 회복시킬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민족 효도에서 가장 엄중하게 망가진 상례풍속부터 다시 살리고 봅시다. 자고로 우리민족 상례풍속은 효도를 강조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을 살린다는 것은 그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모두 회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한 부모를 神처럼 높이 공경하는 그 핵심관념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사망한 부모를 공경하는 사회기풍이 형성되면, 자연히 살아 계시는 부모를 존중하는 사회기풍도 형성될것이요, 우리민족의 여러가지 우량한 전통도 다시 계승될수 있을것입니다. 2009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각기 주급과 성급 무형문화재로 비준하였으며,저를 대표성 전수인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 상례풍속이 초보적으로 나라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조선족 상례풍속”은 조선족 천가만호와 상관되고, 조선족 매개 성원들과 상관되는 큰 일이므로, 이 무형문화재 보호가 결코 대표전수인 한사람의 힘으로 될수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선족 이름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 특히는 조선족 이름으로 직위를 얻은 분들, 학위를 얻은 분들, 재부를 얻은 분들, 어떤 리익을 얻은 분들, 우리 힘을 합칩시다! 끝까지 청취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발표 2015-03-30  
15    길림성 조선족들의 전통상례문화 현황 댓글:  조회:2899  추천:1  2014-11-19
(제1회 한국전통상례문화 국제학술세미나 지정논문) 길림성 조선족들의 전통상례문화 현황 발표인 중국 현용수   1, 중국조선족과 조선족 전통상례풍속   중국에서는 우리민족을 《조선족》이라고 부르는데, 현재 법적으로 등록되여 있는 중국 55개 소수민족중에서 비교적 선진적인 민족에 속합니다. 중국에는 조선족 인구가 약200만좌우 있는데, 주요하게 동북삼성에 분포되여 있습니다. 길림성의 조선족 인구는 약130만 좌우로서 전국 조선족 인구의 60%이상을 차지하며, 그중에서 80만 좌우가 연변조선족자치주에 호적등록이 되여 있습니다. 중국조선족 선민들 대부분은 1850년대 이후에 한반도로 부터 중국 동북지구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였는데, 160여년 력사의 연혁을 거쳐, 점차 당대 중국의 한갈래 비교적 선진적인 소수민족으로 발전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의 중국국적은 당국에 입적신청을 올리여 얻은것이 아닙니다. 장기간의 간거한 전쟁환경 가운데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접수하였고, 그 어느 소수민족보다도 엄청난 희생을 내였으며, 새 공화국 창립전쟁에 직접 참여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운 결과입니다. 중국에서 조선족은 당당한 개국민족중의 하나입니다. 나라급 노래인 《중국인민해방군 군가》도 바로 우리민족의 음악가 정률성 선생이 전쟁년대에 지은 것입니다. 정률성 선생의 고향이 한국의 전남 광주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국조선족의 한반도에서의 본원지는 비교적 광범위 한데, 그들이 중국에 가지고 들어온 상례풍속도 지방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중국의 특정된 환경에서 장기간 공동히 생활하는 가운데서, 점차 중국특색의 조선족 상례풍속이 형성되였습니다.  문화혁명 이전까지 중국조선족들은 그래도 기본상에서 한반도에서 가지고 들어온 전통상례풍속을 실행할수 있었습니다. 상례를 한개 군체의 공동대사로 삼고 공동으로 처리하였으며, 종래로 상가의 사적인 개인일이라고 여기지 않았습니다. 마을마다 丧舆契와 같은 자발적인 민간 상조조직들이 있었으며, 집체로 자금을 내여 丧舆(조선족 전통장례에서 썼던 운구공구, 香徒, 灵輀라고도 함)를 만들어서는 마을에서 떨어진 편벽한 곳에 상두집을 지어놓고 보관하였으며, 도감을 한사람 선발하여 마을의 장례행사를 관리하게 함으로써, 일단 마을에서 사람이 죽게되면 굴심을 할 사람과 상여, 그리고 상여를 멜 사람들까지 통일적으로 배치하였습니다.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많고, 덕망이 높은 좌상어른은 마을에서 진행되는 매차례의 장례의식을 엄격히 감독하였으며, 집집의 제사에 대하여서도 구체적으로 지도하여 주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가풍을 다스리고, 족풍을 단정히 하고, 민족의 우량한 전통이 대대로 이어지도록 보증 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폭팔하면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에서 제일 먼저 재앙을 당한것이 상여였습니다. 1967년 《네가지 낡은것을 때려부시는》 운동이 터지면서, 연변각지의 상여는 거의 같은 시간에 각지의 반란파들에게 의하여 봉건미신 물건짝으로 판결받고, 학교마당에 끌려나와 두들겨 부서지고, 모조리 불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후에는 간단한 운구용 소수레로 상여를 대체하고, 장례제도를 최저한 간단하게 하였으며, 일체 소위의 미신색채를 띤 장례절차를 일률로 금지하였습니다. 그후로 부터 당시의 락후한 경제조건하에서, 또 좌적 사상의 영향을 받은 각지의 조선족 주민들은 간단하게 대충 치르는 이런 상례제도에 점차 습관되였으며,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점차 빛을 잃게 되였습니다. 문화혁명이 결속된후, 1980년대부터 시작하여 나라에서는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모두 유체를 화장 할것을 제창하였습니다. 초기에 대부분 조선족 주민들은 감정상에서 일시 이렇게 화장하는 장례제도를 접수하기 어려워 하였습니다. 그러나 형세의 발전과 더불어, 1985년에 국무원에서는 《빈장관리에 관한 잠행규정》을 내오고, 1997년에 이르러 정식으로 《빈장관리 조례》를 출범 시키면서, 전국적으로 모든 장례업을 통제하고, 성시를 중심으로 조건이 되는 지방에서는 일률로 유체를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조례》를 제정하여 화장제도를 실시하게 된것은 시대 발전의 수요로서, 자손만대에 덕을 쌓는 좋은 일일수 있으며,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의 기본리념과 근본적으로 충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화장제도를 실시하면서 부터,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원래의 사회질서가 변동되였고, 새로운 형세하에서 또 나라의 인정과 사회의 중시를 받지 못하였으며, 민간인들의 아리숭한 기억에 의하여 간신히 지탱하여 오다가, 인젠 시대의 충격속에 완전 매몰되여 가고 있습니다.   2, 《조선족 상례풍속》과 《조선족 상례문화》   중국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종래로 문화적 차원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이념상에서 성숙되지 못하였고, 규범상에서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민속으로서의 특색이 돌출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지난 1980년대부터 나라에서 화장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따지크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열개 소수민족의 전통장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들었지만, 우리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을 비록 조선족자치주라고는 하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시설이나, 써비스 항목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로하여 조선족 상가에서는 어설푼대로 나라에서 제공한 통용방식으로 장례를 대충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길림성에서는 다른 지방보다 한걸음 더 나아가, 병원의 사체실마저 취소하였고, 사망이 판정된 사체를 병실에서 즉시로 화장터 냉동실로 옮겨야 하였기 때문에, 염습을 병실의 다른 환자들이 보는 앞에서 부랴부랴 끝내야만 하였습니다. 이렇게 3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에 대하여 익숙히 알고 계시던 많은 조선족 로선배님들은 선후하여 모두 사망하셨고,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이 필요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습니다. 조선족들이 보편적으로 자기의 전통상례풍속을 모르게 되니,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그 악과로,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전통이 끊어지고, 사명감이 없어졌으며, 민족의 퇴화가 너무나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이런 사회배경에서 전반 조선족 사회는 엄중한 생존 위기를 느끼게 되였으며, 조선족 문화계에서는 급속히 퇴화하는 민족을 만구하기 위하여, 반드시 잃어버린 전통문화부터 찾아야 한다는 공동의념이 형성되였습니다. 이런 의념의 추동하에 우리의 조선족 문화인들은 자발적으로 몇년간의 간거한 노력을 들여, 연변지역을 중심으로, 중국 동북삼성의 광범위한 조선족 집거지역을 심도있게 답사하였으며, 조선족 전통풍속습관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상세하게 발굴정리 하였습니다. 그 기초상에서 2009년에 우리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정리하여 나라에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고, 많은 노력끝에 끝내 길림성 비물질문화유산 등록에 성공하였으며, 우리가 전수인 대표로 지정되였습니다. 2010년말, 우리는 정부 주관부문의 지지를 쟁취하여, 연변력사상 처음으로 《조선족 상례풍속》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회의에는 20여개 부문의 주관책임자들이 참석하였고, 덕망높은 학자들과 문화인들이 합작분공하여, 여덟편의 무게있는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조선족 상례풍속》의 론리성, 합리성, 필요성을 논증하였습니다. 그 기초상에서 우리는 핵심을 《효도》로 하고, 주체를 《례의》로 하는 새시대 《조선족 상례풍속》체계를 건립하고, 초보적으로 문화적 차원으로 승급시켜 놓았습니다. 이때로부터 중국 조선족에게 비로서 나라의 인정을 받는 자기의 상례문화가 있게 된 셈입니다. 풍속습관도 문화의 범주에 속하지만, 아직 완미하지 못한 문화이며, 그 위상은 근근히 나라에서 존중한다는 차원에 그침니다. 풍속습관이 문화적 차원으로 승급하려면, 역사가 길고, 체계가 완미하며, 특색이 돌출한 기초상에서, 충분히 학술적 논증을 거쳐야만 합니다. 이때의 그 위상은 나라에서 보호하고, 발양하는 차원으로 승급합니다. 우리들이 발굴하고 정리한 《조선족 상례풍속》은 정부부문 전문가들의 충분한 평심을 거쳤고, 학자들의 여러면의 논증을 거쳤으며, 이미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등록되여 나라의 보호를 받고 있으니, 당연히 합격된 《조선족 상례문화》라고 할수 있습니다. 중국의 여러민족 상례풍속 가운데서, 진정 문화적 차원에 도달한 풍속은 그리 많지 못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여기에서 완전 해결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비록 초보적으로 조선족 상례풍속을 문화적 차원으로 승급시켰다고는 하지만, 이 문화가 진정으로 회복되고, 자기 작용을 발휘하자면 아직도 많은 길을 걸어야만 합니다. 첫째는 조선족 상례문화 규칙본이 나와야 하고, 둘째는 조선족 상례문화 운행과 보호 시스템이 완미화 되여야 하며, 셋째는 전 민족적으로 조선족 상례문화에 참여하고, 그 혜택을 받을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오늘까지 게으름 없이 노력하여 왔으며, 또한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3, 《조선족 상례풍속》과 《조선족 실용상례》   우리는 전통적인 《조선족 상례풍속》에 근거하여, 《조선족 실용상례규범》을 내왔습니다. 《조선족 실용상례규범》은 크게 세가지 부분으로 나뉩니다: 一,초종(初終), 二,안장(安葬), 三,제사(祭祀). 첫번째 부분: 초종(初終) 초종에는 임종, 수의, 고복, 소렴, 대렴, 명정, 령좌, 성복, 조문, 수령(밤지킴), 고별 … 등 내용들이 있습니다. 《조선족 상례풍속》은 자고로 사회 최하층 서민들의 상례를 계승한 풍속이기 때문에, 왕실과 양반계층의 상례를 계승한 한국의 전통상례풍속과 대비하여, 비교적 소박하고, 간단한 것이 특징입니다. 그리하여 조선족 수의는 고인이 평소에 가장 아끼던 민족례복으로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새로 장만하는 상품수의 경우에도 될수록 사치하고 화려한 것을 피합니다. 고복의 경우, 과거에는 지역에 따라 《옥보》를 부르는 지역, 《옷보시요》를 부르는 지역, 《잘가시요》를 부르는 지역 등 몹시 혼란하였으나, 그것들은 모두 글을 몰랐던 우리 조선족 선인들이 장례법을 구전으로 이어오는 과정에서 잘못 전해진 것으로 판단하고, 지금은 《아무개 돌아오세요!》로 통일 하였습니다. 중국조선족 선인들 대부분은 재황을 피하여 중국에 건네온 서민들이며, 그네들 중에 대부호 가문이나, 정부관리들은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족 상례풍속》에서 명정을 쓸때에 남성의 시호를 일률로 《學生》으로 하고, 녀성의 시호를 일률로 《孺人》으로 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성시에서는 명정을 더는 기발로 쓰지 않으므로, 명정의 폭을 많이 줄이여, 길이 네치, 너비 한치 되는 붉은 천으로 하고, 염습을 마친 유체우에 덮었다가 함께 화장한다고 규정하였습니다. 그리고 현재 중국의 각지 조선족들에게는 초종에서 아직 자기의 추모관이 따로 없으니, 성복, 조문, 밤지킴을 보통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시급히 해결해야할 과제입니다. 두번째 부분: 안장(安葬) 안장에는 굴광, 천구, 상여, 발인, 안장, 이장, 합장, 묘비 … 등 내용들이 있습니다. 몇해전까지만 하더라도 연변경내에 조선족들이 상사에서 상여를 쓰는 산촌마을이 몇곳 있었는데, 지금은 거의 모두가 쓰지않고 있습니다. 주요원인은 산구 도로조건이 개선되여 화장터 령구차가 들어 못가는 마을이 기본상 없어졌으며, 화장이 매장에 비해 많이 간편하고, 또 조선족 출국붐에 마을의 청장년들이 대량 출국하여, 전통식으로 매장하려 하여도, 상여를 멜 사람조차 조직하기가 어렵게 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화장하여 골회를 따로 받지 않고 그대로 날려 보내는 경우가 많으며, 또 골회를 받아서 산이나 강물에 뿌리는 경우도 많습니다. 이런 경우를 습관적으로 골회를 버린다고 말하며, 이런 경우에는 상관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되지 않느냐?고 문의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리는 그런 경우일지라도 골회를 버린다고 하면 틀리는 말이며, 역시 특종의 안장형식으로 보아야 하며, 될수록 상례에 따른 안신제, 소상, 대상 등 상관 제사를 지내야 한다고 권장합니다. 세번째 부분: 제사(祭祀) 제사에는 제사통용규범, 제사상, 지방, 축문, 만가, 안신제, 소상, 대상, 사갑제, 청명제, 추석제 … 등 내용들이 있습니다. 현재 조선족 제사에서 지켜지는 것이 많지 못합니다. 중국조선족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장례와 제사에서 일률로 세번절을 하여 왔는데, 우리는 중국의 특성을 고려하여 그대로 따르기로 하였습니다. 그리고 지방, 축문, 만가 등 형식도 이미 자취를 감춘지 오래 되였으나, 우리가 지금 점차 회복시키는 과정에 있습니다.   맺는말   문화에는 국계가 없습니다. 조선족 상례문화의 근원은 고국에 있습니다. 고국의 유구한 전통상례문화가 없었더라면, 오늘 조선족 상례문화도 있을수 없습니다. 세월이 가고 국적은 변했지만, 조선족 상례문화는 역시 고국 상례문화의 일부분입니다. 중국에서 조선족이 자기의 특색을 확보하려면 반드시 고국과의 전통문화 동질성을 확보해야 합니다. 조선족 전통상례문화가 고국 전통상례문화와의 동질성을 확보하려면 고국으로 부터 필요한 영양분을 끊임없이 흡수해야 하며, 고국의 관심과 보살핌이 절실히 수요됩니다. 지금 중국은 급속도로 발전하여 바야흐로 미국을 따라가고 있는데, 언젠가 중국조선족들도 고국을 위하여 많은 유익한 일들을 할수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서로 연대성을 가강하고, 공동히 노력하여 우리민족의 우수한 전통문화를 온 천하에 빛내입시다.   중국길림성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무형문화재《조선족 상례풍속》전수인대표 현용수 발표 한국경산영남대학에서 2014년11월14일
14    죽음학 댓글:  조회:5604  추천:1  2012-09-15
죽음학 문화에 있어서 의 수용 죽음을 의식하고 그것을 문화 중에 받아들이고 있는 점에서 인류는 특이한 생물이다. 모든 인류문화는 죽음에 대해서 어떤 대처법, 또는 죽음을 하나의 문제로 본 경우, 그의 해결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죽음의 기원에 대한 신화적 설명, 사후 세계의 신앙 등은 이 해결을 관념과 공상의 영역으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 이며, 인간의 죽음을 계기로서 행하여지는 의례 즉, 장제의 존재는 상징적ㆍ연극적 표현 영역에서 인류가 이루고자 한 죽음에 대한 해결을 시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런 문제의 설정과 해결의 시도를 일반화해서 이라는 것도 생기는데, 그 깊은 곳에는 수용의 모습을 한 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죽음을 개인의 인격의 완전한 무화(無化)로 보고, 그 무화에 대한 대상(代償)을 전혀 준비를 하지 않고 있는 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사후에도 존속하는 영혼과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직접적인 형태를 취하는 경우도 있는 반면, 죽음 후에 이 세상에 남는 자손이나 명성, 또는 생전에 이룬 사적 등의 물상에 의지하는 경우도 있으며,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하여, 또한 살아남은 사람들이 사자를 위해서 행하는 기념행사인 경우도 있는데, 인간의 문화는 반드시 물리적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것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이 항에서는 미개라고 불리는 문화를 예를 들어서, 죽음의 대상이나 해결로서 여기에 든 세 가지의 방식에 대해서 언급하기로 한다.   영혼과 타계 E.B. 타일러에 의한 애니미즘설에서는, 인간이 신체와는 별도의 개성적 실체(영혼)를 가진다는 이원론적 관념이 꿈의 경험에 의해서 지지되며, 나아가서 꿈속에 이미 죽은 사람의 상을 봄으로서 이 실체는 사후의 존재(사령(死靈))와 결부된다. 즉, 사자가 꿈에 보이는 이상 그(의 영혼)는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설명이 성립하는 것이며, 따라서 이는 타계, 영계의 이미지의 성립으로 유도된다고 한다. 타일러의 설은 너무나 합리주의적인 설명이라는 비판을 받지만, 사후의 존재와 타계의 표상의 발생을 인간의 기억 능력과 심상의 외적투영에서 구한 것은 기본적으로 올바르다. 사령(死靈)으로서 사후에도 인간의 개성이 존속한다는 신앙은 그리스도교 등의 역사종교에서의 영혼불사의 사고방식에 가깝다고 할 수 있는데, 미개문화에서는 이 불사를 영원한 것으로 보는 경우는 드물다. 즉 대부분의 경우, 타계에서의 생은 이 세상의 생과 매우 유사한 것으로 이미지 되어 있으며, 그 때문에 영혼도 또한 저 세상에서 죽는다고 생각되고 있다. 이 경우 인간의 죽음에 대해서 불사(不死)를 대치시키는 것이 아니라, 제2의 생(재생)을 대치시킨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산지민 사회에서 가끔 보이는 관념에 의하면, 영혼은 용해되어서 안개나 비가 되어 대지로 들어와서 곡물을 열매맺게 한다. 이를 먹음으로써 후의 인간은 생활을 계속하는 것이며, 여기에 일종의 윤회사상이 맹아, 죽음에서 생으로 복귀의 모티브를 볼 수 있다.   사회적 대상(代償) 타계에서의 제2의 생이라는 관념이 충분히 전개되어 있지 않은 문화(가령, 아프리카의 목축민사회)에서는 개인의 죽음은 자손의 번영이나 이름의 계승 등 사회적 대상(代償)으로서 일종의 구제를 받는다. 누엘족 사이에서 유령혼으로 알려진 관습은 결혼을 하지 않고 죽은 인물의 명의로 다른 자가 결혼함으로써 거기에서 태어난 아이를 사자의 아이로 보는 제도인데, 재산의 상속 등 경제적인 측면을 별로도 해도, 이로써 사자는 사회적 무화(無化)에서 피할 수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죽음이라는 문제를 사회제도 중에서 매우 교묘하게 순화하는 것 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이웃의 딘카에서도 아이를 가지는 것은 불사를 달성하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 동남아시아 대륙부 부터 도서부에 걸쳐서 보이는 거석문화 하에서는 거석기념물의 건조가 그것을 세운자의 생(生)의 표시이며,사후 그의 존재가 사회 중에 영원히 남는 것을 보증한다. 이와 같이 사회적 달성으로 죽음을 극복하려는 심리는 세속화된 현대사회에도 해당될 것이다.   의례적 해결 인류에 보편적으로 보이는 현상중 하나에 죽음을 의례로 채색하는 것이 있다. 이중에는 가끔 죽음을 상징적으로 극복하는 생 또는 재생의 모티브가 나타나는데 그 극단적인 예는 멜라네시아의 몇 민족에서 행하여지고 있다. 유족이 사자의 육체의 전부 또는 일부를 먹는, 소위 족내식인(族內食人)의 의례이다. 이는 사자의 생자에 대한 직접적 동화에 의한 죽음의 극복인데, 그 이외에도 죽음의 의례는 성적 풍요의 표현(가령 난교)이나 유희의 과잉을 수반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해서 의례는 죽음을 생으로 치환 하는 장치가 된다. 때로는 사후에 성대한 의례가 행하여지는 것 자체가 큰 의미를 가지는 경우도 있다. 슬라웨시에 사는 트라쟈족은 낭비적이라고 할 정도의 제사를 사자를 위해서 베푸는데, 이로써 개인의 죽음은 사회성원과의 광범위한 관계를 획득하는 것이며, 죽음을 생자의 삶 중에 적극적인 의의를 가진 것으로서 받아들이게 된다.   의 관념 인간의 죽음에는 자기의 죽음과 타자의 죽음의 양면이 포함되어 있는데, 현실적으로는 그중 한 쪽에 중점을 두어서 보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 중점을 두는 방법의 차이에 따라서 죽음의 관념이나 죽음에 대한 태도에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타자의 죽음은 관찰할 수 있지만, 자기의 죽음 또는 그 관념은 일종의 극한적인 경험으로써 상상이나 표상의 영역에 결부되어 있다. 가령 죽음에 관한 과학적이며 객관적인 인식과 종교적ㆍ철학적 인식의 차이는 그와 같이 해서 발생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위의 두 가지 입장에 다리를 놓으려는 시도가 한쪽에서 행하여졌는데 그중에서 죽음에 관한 다양한 신화나 의례가 발생하고, 독특한 신체론이나 우주론이나 타계관이 형성된 것이다. 이어서 죽음의 현상은 이 지상에서 더러워진 육체의 소멸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이 있는 동시에, 죽음의 현상은 생의 현상과 표리의 관계를 유지해서 사후의 세계와도 상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생각이 있다. 즉, 죽음을 생과의 절단을 상징하는 절대점 이라는 것이 전자이며, 이에 대해서 생의 세계를 사후의 세계로 접속하는 매개점이라는 것이 후자이다. 전자의 절대점을 강조한 것은 서구의 그리스도교 문화권이며, 그에 대해서 후자의 매개점을 강조한 것은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의 불교문화권이다.   공자, 불타, 그리스도 그런데 중국의 공자는 죽음을 미경험의 영역으로 위치 지었는데, 인도의 불타는 죽음을 열반으로 보고 영원한 생명에 이르기 위한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이에 대해서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고, 죽어서 다시 살아났다. 즉, 대략적으로 말해서 공자는 죽음을 불가지(不可知)의 대상으로 보고, 불타는 그것을 생의 충실로 생각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마지막은 죽음이 재생에 이르기 위한 단절로 보았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런 죽음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는 시대를 초월해서 지역을 초월해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이며, 신화나 예술, 문화이나 철학 등의 각종 관념이나 발상의 모태도 되었다.   서구에서의 그러나 일반적으로 죽음에 대한 자각이 심화된 것은 중세였다. 공자나 불타나 그리스도 등이 활약한 고대 세계에서는 죽음을 천체의 운행과 같은 불가피한 운명으로 보는 관념이 우세하였는데, 이에 대해서 중세 세계는 죽음에 대한 의식의 반성을 통해서〈죽음의 사상〉이라고도 할 수 있는 발전을 본 때였다. 즉 J. 호이징거의 『중세의 가을』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를 특징짓는 죽음의 사상은 13세기 이후에 성행한 탁발수도회의 설교에서 주요한 테마 ㅡ 의 훈계와, 14~15세기에 유행한 을 주제로 하는 목판화 의해서 상징된다고 한다. 당시의 그리스도 교회가 일상적인 설교에서 반복적으로 선전하였던 죽음의 사상은 육체의 부패라는 표상과 호응하였다. 육체의 멸시가 의 성스러운 합창으로 접속된 것이다.   죽음에 대한 태도의 유형 프랑스의 역사가 아리에스(Philippe Aries)의 『죽음과 역사』에 의하면, 유럽의 중세야마로 이 발견된 시대였다고 한다. 그의 저작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역사적으로 개관한 것인데, 그것은 결국 현대에 이르러서 태도로 바뀌었다고 한다.
13    (론문) 신 유학효론---림국웅 댓글:  조회:5159  추천:0  2012-08-05
新儒學孝論 林国雄   一、绪言   荀子礼论说:「礼有三本:天地者生之本,先祖者类之本,君师者治之本。」而易说卦指出:「天地定位,山泽通气。」易序卦又指出:「有天地然后有万物,有万物然后有男女。」易系辞下再指出:「天地之大德曰生。」所以,天地者生之本,确实合理。而先祖者类之本,君师者治之本,则易于直接理解。我国还以天地君亲师五者为人类之至尊者,故并举之以示崇敬。其中先祖与父母同为类之本,即天地君亲师中的「亲」〔方克立〕。   董仲舒春秋繁露基义说:「君为阳,臣为阴;父(母)为阳,子(女)为阴;夫为阳,妻为阴。」〔赖炎元〕其中,君臣系属上面治之本的一个范畴,父母子女或简称的父子系属上面类之本的一个范畴,夫妻则系与上面类之本密切相关的另一个范畴。而阴阳,一般是指元气(注1)中相互分立的两种基本势力,或事物相互分立的两个方面。老子第四十一章就以「万物负阴而抱阳」,最先说明阴阳的普遍性。系辞则提出了「一阴一阳之谓道」(注2),对阴阳的相互分立、相互依存,相互转化,作了意义上的概括〔方克立;王立德〕。   邵雍皇极经世观物外篇说:「阳不能独立,必得阴而后立,故阳以阴为基;阴不能自见,必得阳而后见,故阴以阳为唱。」阳常居于实位,阴则常居于虚位。阴阳且可相辅相成。此外,大国阳,小国阴;有事阳,无事阴;伸者阳,屈者阴;上阳下阴;男阳女阴,兄(姐)阳弟(妹)阴,长阳少阴,达阳穷阴;制人者阳,制于人者阴;客阳主阴,师阳徒阴,言阳默阴,予阳受阴,动阳静阴;诸阳者法天,诸阴者法地。这些都是中华文化中重要的阴阳之大义。   而上面的「先祖者类之本」,当然高祖父母、曾祖父母、祖父母、及父母亦为类之本。而母亲的父母(外祖父母)、祖母的父母(外曾祖父母)、外祖父的父母、外祖母的父母、曾祖母的父母(外高祖父母)、祖母的祖父母,祖母的外祖父母、外祖父的祖父母、外祖父的外祖父母、外祖母的祖父母、外祖母的外祖父母,在宗法关系下一般并不列为狭义的「类之本」,但仍可列在广义的「类之本」之下。「父为阳,子为阴」,当然,父母为阳,子女为阴。「夫为阳,妻为阴」,类推结果,当然父为阳,母为阴;祖父为阳,祖母为阴;……。   在上面「类之本」的各种关系中,其最重的基础当然就是家庭。家庭是由婚姻、血缘、或收养而产生的亲属间的共同生活组织。婚姻是家庭产生的前提,家庭则是缔结婚姻的结果。家庭的性质、职能、形式、结构、以及与它相联系的道德观念,常随生产方式的变化而有所变化。而家庭道德是调整家庭成员间关系的道德原则和规范,包括孝悌、尊老爱幼、男女平等(注3)、夫妻和睦、勤俭持家、邻里团结等。家庭就处于人的社会性与自然性的连结点,还直接承负生育的功能。   而孝的原意为子女对父母的敬重、奉养、和服从,始见于西周文献,并以祭祀先祖为华人之孝的基本规定,且视「不孝」为元恶。春秋末孔子就提出「孝悌也者,其为人之本欤」,又引「君子笃于亲,则民兴于仁」、「慎终追远,民德归厚」来加以说明。孟子离娄上甚至说:「不孝有三,无后为大」(注4)。孝经更倡导「以孝治天下」。时至今日,如何以新儒学的观点来重新看待孝道,将是本文之旨趣。   二、孝道的一般概况   道教崇尚自然,敬天法组,以两仪为教徽,奉三清、玉皇为最高之尊神,以三清掌教,以玉皇掌天地水三界(注5)威权。祖师传谕,道门弟子,须当积善修德,劝忠劝孝。虚皇天尊所命初真十戒(注6),第三戒为不得淫邪败真,秽慢灵气,当守贞操,使无缺犯;第四戒为不得败人成功,离人骨肉,当以道助物,,令九族雍和;第九戒为不得不忠不孝、不仁不信,当尽节君亲,推诚万物。道门弟子另有行持「忠孝仁信和顺」的六字真诀,其中「民族、血统、祖宗、尊亲,孝也」。由此可之,道教对孝道之重视程度,并不亚于儒教〔徐荣〕。   醒世文谈孝道,强调亲情的伦常关系,并不是「你若重它十六两,后代儿孙还一斤」,亦不是「他养我小,我养他老」,而是「父母不亲谁是亲,不重父母重何人?」不过,前两个以功利来劝孝,后一个以血缘来谈孝道,虽有其切身性,圈子还是小了些,并不如从摄智归仁的人性明善处来谈孝道。不过,醒世文也重视诚意正心的本源功夫,让动机与行为作有机的结合,如「大斗小秤(买进用大斗占便宜,卖出用小秤占便宜)吃甚素,不孝父母斋甚僧」,无诚意而只是外在机械性地供奉神明(注7),也是不会得到良好的报应。醒世文所反映的,是民间孝道常有的意识形态,可作为社会进一步改进的出发点〔郑志明〕。   醒世文所谈的孝道;还有「千两黄金万两银,有钱难买父娘身,在堂父母百年稀,生时不孝死徒悲」、「在生之时不敬重,死后空劳拜孤坟」、「在家不可言相激,一旦抛离更不回,要见面时难得见,要他归时难得归」、「枕上谗言不可听,顺妻逆母也逆天,纵然姑嫂有不着,也须看看父母面」、「妻子言语为圣旨,不念父母亲情重,未娶妻前真孝顺,各娶妻后多冤愆(注8)」等各种说法。也许更冷静地想一想,自己的父母都不亲,还有谁亲;父母生我养我育我,吃尽苦头把我拉拔大了,请问谁能给我们这样的大恩大德?所谓知恩图报,第一个要报答的,当然是父母〔刘汉铨〕。   中华民族的文化和国家,建立在家庭的基本道德上,且孝道为社会道德的根本。例如,如何善护家庭天伦之乐,如何教育子女,如何孝敬父母,如何节约喜庆筵宴,如何俭省丧葬排场,如何让子弟知道择善避恶,如何注重科技又不忘做人之道,如何使青年摆脱心灵的空虚迎向灿烂有意义的人生,如何教导青年与神明与祖先沟通,如何在祖宗牌位前每日上一炷香,如何充实二十四孝新的时代内容,如何在过年贴春联,如何过元宵赏花灯,如何清明扫墓(注9)与祭祖,如何端午划龙舟,如何中元普渡(注10),如何中秋千里共婵娟,如何重阳登高望远,如何守望相助。许多传统文化固有的孝道美德,都是值得再好好提倡的〔道教会;编辑部〕。   孝的观念早在西周时已经产生和流行。孝的观念产生,基于两个条件。一是基于血缘而产生的「亲亲」关系,这是人类一种古老的感情,包括对祖宗神的崇敬,祈求祖宗保佑后代,此种亲亲之情后来成为维系「孝」的感情纽带,而使家族繁荣绵延。另一是个体家庭经济的形成,以及与此相联系的家庭中权利与义务关系的出现,没有这种权利与义务关系,便无所谓「孝」的道德规范,有了个体家庭,一般的夫妻及其子女构成一个独立的经济单位,大家在经济上相互依赖,父母有抚养子女的义务,日后并可以有要求子女奉养的权利,孝的观念便由此而产生〔沈善洪等1985a;查昌国〕   和孝的起源相联系,孝的内容有两种形态,一为对在世父母的孝,一为对去世父母、先祖的追孝。子女之所以应孝,至少是为了报答父母的养育之恩。对已死父母及先祖的追孝,是孝的延伸和扩大,表示子孙们继承祖先的志业,将使后代繁荣昌盛,绵延下去,确信祖宗能在冥冥之中保佑他们。   孝可以是子女以其对父母充满活力的感谢之情,使其父母获得欢娱。孝也常离不开养,养则是相等地适用于子女对他们上了年纪的父母的自然秉性。父母作为子女仿效的榜样,所维系的常还有他们的祖先。子女常能听到有关他们祖先德行的生动描述,这是代代相传的程序。父母亦常有炫耀自己子女成就的欲望。如果一个孩子的成就是其父母造成的,那肯定也是孩子自身的,因而保持身体的健康,获得婚配,再培养下一代的孩子等,也满足了子女们自身在幸福、地位、以及某些掺杂道德超越的连续统一体方面的某些欲求〔墨子刻〕。   在中华文化中,儒有孝经,佛有孝论;儒说孝即是礼,佛言孝即是戒;儒以孝为百行之首,佛以孝为至道之宗。儒家讲孝道,但其孝常取决于血缘关系的亲疏远近。佛教从「一切众生,皆有佛性」出发,助世行孝,更认为一切众生皆我父母,是对血缘关系的某些超越。儒佛孝道在血亲之爱及天地之则(天经地义)上的理论根据是相同的;在生事之孝及死后之孝的基本内容上是相同的;在赡养父母、淳厚风俗、及弘道济世的社会功能上也是相同的。或许更贴切地说,随着佛教的中国化,佛教孝道也有着其不可避免的儒学化〔许宁〕。   孔子说孝道是一种人性,一种自然情愫。西方文化则强调个人独力发展,故血缘关系、家庭观念淡薄,只是将孝的内涵渗透在人文文化中。不过,热爱祖国、尊重人、爱人、孝敬父母、扶助弱小仍是全人类共有的最美好之品德,也是中西孝道共有的内涵。对老师如同父母一样看待,也是一种孝道。「师徒如父子」,「一日为师,终身为父」。西方人也同样尊敬老师。西方的文学作品,也有许多关于孝道的内容,如李尔王、董贝父子、双城记、高老头、局外人〔叶继宗〕。   成都二仙庵太上老君说报父母恩重经中,海空智藏问:「信徒等秉受发肤,皆因父母,父母恩深,无由报效……」太上老君答:「若孝悌者,一家之中,老少安乐,天人钦仰,神明守护,子孙相承,孝慈不断,招感孝顺,以为其子。若不孝者,世世相继,一门之内,总是冤家,虽为父子,甚于仇敌,招五逆以免其儿。父子兄弟,各财异食,同园别业,共田分谷,隐藏珍馔,吃食如偷,虽是人形,不如禽兽,神明不佑,天下轻欺。一生所为,诸不吉利,死入地狱(注11),受一切罪。苦毕受报为百劳鸟,供羽能飞,共时其母。百劫之后,讹生人中。聚集五逆诸不孝缘,共为父子,更相残害。死生忧苦,轮转无穷。」〔二仙庵1995a;福井文雅〕   太上老君续说:「夫人生世,父母为亲。非父不生,非母不养。是以天地覆荫寄托母胎,气识相凝,怀娠十月萦妊胞重,坐卧失常,岁满月充,诞育之候,其母恐怖;性命惙然恻怛心神忧丧,产孕之日,内触外触苦痛交切,失声号叫,受大苦恼,匍匐战惧,骇愕惊嗟。乃至生已,手摩其顶墬于草上,呱呱号啼,安藏被褥侧身三月。常怕为邪魔之所浸害,饥时需饭,非母不哺;渴时须饮,非母不乳。计饮母乳,八斛(注12)四升。千日提携,遮益尘垢。推干就湿,及年长大。……横簪向头,为索妻妇,情爱偏重。其母转疏,私房之中,共相笑语;父母年老,气力渐衰。终朝至暮,不来省问,独守空房,犹如外客;少衣少食,饥冻切身,手脚胼胝(手足皮厚)。耳聋眼暗,单床飘薄,度日如年。」   「身既尪羸,多饶虮虱,蚊虻噆体;通夕不寐,长吟叹息,何罪之有,生此不孝之子。柱杖呼唤,低头下气,欲伸所欠,未尽前言。其儿兴声,瞋目骂詈,回头却退,扶壁而归。捶胸自非,流泪目肿,连声喝苦,不如早亡。母告儿言,汝初小时,非吾不育;饮食遮蔽,非吾不养。怀汝十月,如携重担;气息奔喘,剧于走驰。或时寒热,坐卧不安。腹皮折裂,心胸填满。发落形瘦,不能饮食。临生产时,逆前一月,常怀忧怖,恐要相离。或有时安,或有时患。当生之日,命如风烛。四肢百脉,以及五脏,或如刀割,或如钩牵。或热如火,或冷如冰,比当解离,或生或死。尽世间苦,口不能述。」   「既得生已(顺利生下婴儿),喜惧交集。诸苦诸痛,更不可堪。三年携抱,日夜不离,眠时少时(睡得少,吃得少)。视儿气色,呼吸饥渴。或有疾病,父母心痛。为子忍苦,口不能食。心口干燥,万种求福。黄金白银,衣服玩具,心念子可,无所吝惜。念汝小时,东西随我(走到哪里,跟到哪里),不离寸步。食亦随我,眠亦随我,一旦无我,终日不食。一夜无我,啼哭不眠。如何长大,忽成冤对。今虽有汝,不如本无。付之于天,幽冥(注13)当鉴。愿我早过(逝),与汝相离。奈何奈何!」尔时,太上老君说斯事已,即现神变,令此大地一切震动。于震动中,忽见北方地狱之内无数众生,足践刀山,手穿剑树,拔出其舌,铁针刺之,酷痛号哭。身体脓烂,孔孔之内,患皆流血,大小狼籍(注14),流曳楚毒(苦痛)。   于是海空智藏肃寒毛竖,流泪呜咽上启太上老君曰:「斯之罪魂,何罪令尔?」是时太上老君告海空智藏言:「斯罪人也,生不慈孝,违弃父母,诽谤三宝(注15),侮慢出家。今之受报,涂炭何极!日趣长远,无可如何。」尔时太上老君,仍说偈(ㄐㄧˋ)言:「善善自会善,恶恶归恶根;生前不慈孝,死后报何恩?苦哉萦苦痛,往返十八门;非吾三赦日,何事暂蒙颜。」   尔时,太上说此偈已,大众悲号流泪不止。便即抬手弹指,于弹指中,即令大众回顾视盼于南方。即见南宫天堂之内,善男女等,威仪庠序,华容挺出。天厨百味,珍玩无有穷者。恣形妍盛,娱乐自在。海空智藏欢喜,重自道言:「不审此人,承何福对?得处天堂,衣服自然,受此快乐。」尔时,太上老君答海空智藏言:「此人生时,至心慈孝,供养父母,礼敬三宝。布施持戒,信重出家,令受福庆,果报(注16)无穷。」是时,太上老君仍说偈曰:「前缘至孝慈,供养礼无违;敬信于三宝,无期福会归。天堂里容曳,福祉高巍巍;斯乐今无极,由来福庆随。」   尔时,太上老君说斯偈已,叹息良久,告海空智藏言:「善哉善哉!父母恩重,昊天(天之泛称)罔极。呜呼慈母,云何可报。吾忆前世,诞于洪氏胞,凝神琼胎之府。积三千七百年,逮至上皇(注17),重胞李母。阴阳数极,八十一年,思报母恩。至今劫期,犹恐不复。何况子等凡流之辈,而不报恩。竭力尽心,尚亏礼敬。况犯上事,而有差违。诸教戒中不宣其目,三十六部不着斯言,千圣万圣谁不遵教。况子学道,而不报恩,汝等众人,深宜笃志,外行孝养,内蕴宏慈。粉骨縻身,亦不能尽。」接着,此经续有请福祈恩、拔度先祖(拔荐先亡灵魂而超度)、名报父母养育之恩的提倡。   二仙庵的玄天上帝(注18)说报父母恩重经、关圣帝君(注19)昭明翊汉天尊说反本报恩经、洞真部(注20)的太上真一报父母恩重经、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对孝道也有各种相似的开导。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中更说:「下世男女,修吾孝道,与道同德。既同德已,与道同光。既同光已,与道同真。既同真已,与道同身,既同身已,与道同神。既同神已,与道同变。既同变已,与道同寿。既同寿已,与道同有。既同有已,与道同无。既同无已,无处不无。无处不无,亦无处不有。无处不有,寂寥虚豁。无处不无,随心应变。」〔二仙庵1995b,c;洞真部2000a,b〕。   三、孝经中的孝道   认识中华文化中的孝道,离不开孝经。孝经是藉由孔子与曾参之问答,揭明孝道及孝治之深义。汉书艺文志指出,夫孝,天之经,地之义,民之行。举其大者,故称孝经。吕维祺孝经或间指出,孝经何为而作?是为阐发明王以孝治天下之大经大法而作。孝经论孝,大抵在立身、行道、德教、治化上说,非只为曾参解答,盖为天下后世之君天下者而解说的。孝经之教,乃诸善百行之根本〔慈惠堂〕。 孝经开宗明义指出:夫孝,德之本。系至德要道,以顺天下,民用和睦,上下无怨。教之所由生,身体发肤,受之父母,不敢毁伤,孝之始。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上司),终于立身。诗经大雅(注21)说:「无念尔祖,聿修厥德」,岂不追念你的祖先,好好地积功累德。   孝经依据视野之大小,依序有天子(今称总统)章、诸侯(今可称管辖区域较大的地方父母官)章、卿大夫(今可称管辖区域较小的地方父母官)章、士(今称事务官)章、及庶人(今称人民)章。   天子章说,爱亲者不敢恶于人,敬亲者不敢慢于人。爱敬尽于事亲,而德教加于百姓,行于四海(四方、天下),盖天子之孝。书经吕刑篇的甫刑说:「一人有庆,兆民赖之」,为天子的人,孝行有了好报,全国的人民都会效法。久而久之,百姓都沾了光,孝行都有好报。诸侯章说,在上不骄,高而不危。制节谨度,满而不溢。高而不危,所以长守贵。满而不溢,所以长守富。富贵不离其身,然后能保其社稷,而和其民人,盖诸侯之孝。诗经小雅小宛篇说:「战战兢兢,如临深渊,如履薄冰」,才能上为天子办好事,下为人民造好福利。   卿大夫章说,非先王之法服(先王制定或同意而合乎社会礼仪的衣服),不敢服(穿)。非先王之法言(先王教导或赞同而合乎人际礼法的言语)、不敢道。非先王之德行(先王倡导或接纳而合乎人伦盛德的行事),不敢行。是故非法不言,非道不行。口无择言(所说的话要合于人际礼法,所以出口说的都是好话,并没有什么好坏可选择),身无择行(所做的事要遵守人伦道德,所以做事都是做好事,也没有什么好坏可选择)。言满天下无口过,行满天下无怨恶。法服、法言、德行三者备,都讲求齐全而做到,然后能守其宗庙(注22),此卿大夫之孝。诗经大雅烝民篇:「夙夜匪懈,以事一人」,服从上司一人,奉公尽责〔沈善洪等1985b〕。   士章说,资于事父以事母,而爱同。资于事父以事君,而敬同。故毋取其爱,而君取其敬,兼之者父(事奉父亲的道理,是爱敬兼全)。故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上司),然后能保其禄位,而守其祭祀,盖士之孝。诗经小雅小宛篇说:「夙兴夜寐,无沗尔所生」,每天勤劳所做的事都要不辱没了祖宗与父母,才不愧人的一生。庶人章说,用天之道,分地之利,谨身节用,以养父母,此庶人之孝。故自天子至于庶人,孝无终始,而患不及者,未之有。孝道是无始无终,无穷无尽,永恒存在的大道理,谁想要做,谁都能做得到。若忧虑力量做不到,就不是尽孝了〔慈惠堂〕。   接下来,三才章说,夫孝则天之明,因地之利,以顺天下。其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先王见教之可以化民,是故先之以博爱,而民莫遗其亲。陈之以德义,而民兴行。先之以敬让,而民不争。导之以礼乐,而民和睦。示之以好恶,而民知禁。孝道是天经地义,三才一贯,原是人的性情所公有的,不用学习,自然就能。顺着性情去教化,好比顺水推舟,是很容易的了。诗经小雅南山说:「赫赫师尹,民具尔瞻」,周朝尹氏太师(注23)是个孝道纯全威名显赫的人,民众知道了全都要信服他,看着他,效法他。   孝治章说,昔者明王之以孝治天下,不敢遗(忽略)小国之臣,而况于公侯伯子男?故得万国之欢心,以事其先王。治国者,不敢侮于鳏寡,而况于士民?故得百姓之欢心,以事其先君。治家者,不敢失于臣妾(属下),而况于妻子?故得人之欢心,以事其亲。夫然,故生则亲安之,祭则鬼(祖先)享之。是以天下和平,灾害不生,祸乱不作。故明王之以孝治天下,如此。诗经大雅仰之篇说:「有觉德行,四国顺之」,这就是天子用至高的德行,至要的道理,顺引天下四方的人心,德化治理的恢宏效果。   圣治章说,天地之性,惟人为贵。人之行,莫大于孝。孝莫大于严父,严父莫大于配天,则周公其人。昔者,周公郊祭后稷以配天,宗祀文王于明堂(注24)以配上帝,是以四海之内,各以其职来祭(天下诸侯都各尽其职份前来参与祭祀)。故亲,生之于其膝下,为人子女者以养父母日严。圣人因严以教敬,因亲以教爱。圣人之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其所因者本(所根据的是其本源)。父子之道,天性,君臣之义亦然。父母生之,续(传宗接代)莫大。君亲临之,厚莫重(莫不重视)。故不爱其亲而爱他人者,谓之悖德。不敬其亲而敬他人者,谓之悖礼。以顺则逆(在上位的人拿顺应天理的事不做,反而去学逆拂天理的事),民无则(教化民众就无从取用法则了)。   不在于善(领导人不在爱亲敬亲的美德上以身作则),而在于凶德(反而在不敬不爱的凶德上去忤逆上天),虽得之(就是侥幸得为领导者),君子(因不能长久)不贵。君子则不然,言思可道,行思可乐,德义可遵,作事可法,容止可观,进退可度,以临其民。是故其民畏而爱之,则而象之(可做人民模范,人民可以观摩学习)。故能成其德教,而行其政令。诗经曹风鸤鸠篇说:「淑人君子,其仪不忒」,善人君子的威仪是以爱亲敬亲做为根本,因而是一点也没有差错的。   纪孝行章说,孝子之事亲,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年节祭拜追思,须克尽思念诚意,双亲生前言语动作笑貌如在眼前)。居养病丧祭五者都能作得完备,才算是能事奉双亲的孝顺儿女。事亲者,居上不骄,为下不乱,在丑不争(在无情的人群里要戒除争竞之心,不能争吵打骂)。居上而骄,则亡。为下而乱,则刑(接受法律制裁,甚或遭受天谴)。在丑而争,则兵(遭受兵刃之害,互相残杀)。骄乱争三者不除,虽日用三牲之养(天天进用三牲肉食奉养),犹为不孝。   五刑章说,需要执行古代刺墨、割鼻、截足、阉割、及斩首五种刑罚所属的犯罪法条已有三千多,而罪莫大于不孝。人民的一身,是君王护卫之,圣人教化之,双亲生养之。要是用武力胁迫要求君王接受自己的要求,眼里没有尊长及君王的存在,就是无上。要是用言语毁谤圣人,反对其行道救世,不遵法教,眼中没有法纪,就是无法。要是用行为毁谤孝道,诽谤行孝的人,眼里看不起父母,就是无亲。无上、无法、无亲,此大乱之道。   广要道章说,教民亲爱,莫善于孝。教民礼顺,莫善于悌。移风易俗,莫善于乐。安上治民,莫善于礼。礼者,敬而已。故敬其父,则子悦。敬其兄,则弟悦。敬其君,则臣悦。敬一人(恭敬上头的一个人),而千万人悦。所敬者寡,而悦者众,此谓之要道。广至德章说,君子之教以孝,非家至而日见之(不必家家户户都躬亲造访施教,也不必天天去看人人所做的事,才算教化)。教以孝,所以敬天下之为人父母者。教以悌,所以敬天下之为人兄姊者。教以臣,所以敬天下之为人君主者。诗经大雅泂酌篇说:「恺恺君子,民之父母」,非至德,其孰能顺民,如此其大者。   广扬名章说,君子之事亲孝,故忠可移于君。事兄悌,故顺可移于长。居家理,故治可移于官。是以行成于内,而名立于后世。孝悌兼全的人,先完成于内而后再通达于外,移孝作忠,工作负责尽职,出仕作官当能有政绩表现,自然就能扬名于后世。谏诤章说,昔者天子有争臣七人,虽无道不失其天下。诸侯有争臣五人,虽无道不失其国。大夫有争臣三人,虽无道不失其家(注25)。士有争友,则身不离于令名。父有争子,则身不陷于不义。故当不义,则子不可以不争于父,臣不可以不争于君。故当不义则争之。从父之令,怎能配称尽了孝道呢! 感应章说,昔者明王事父孝,故事天明。事母孝,故事地察。长幼顺,故上下治。天地明察,神明彰(天地生化万物的道理既明,且能克尽孝道,则神明主宰感其至诚,当能降幅佑助,将愈彰显孝道效能)。故虽贵为天子,必有尊,因为他还有父母亲。必有先,因为他还有哥哥姊姊等比之更先出生者。宗庙致敬,不忘亲。修身慎行,恐辱先(恐怕行为有过失,羞辱了祖先)。宗庙致敬,鬼神着(敬奉祖先的道理也就更加彰显)。孝悌之至,通于神明,光于四海,无所不通。诗经大雅文王有声篇说:「(孝悌之至)自西自东,自南自北,无思不服(四海人民没有人不想悦服)。」   事君章说,君子之事上,进思尽忠,退思补过,将顺其美,匡救其恶,故上下能相亲。诗经小雅隰桑篇说:「心乎爱矣,遐不谓矣(尽心去敬爱君王上司,人虽在远处,还不能说远)。中心藏之,何日忘之(敬爱出于至诚,永久藏在心中,何日能忘。)」丧亲章说,孝子之丧亲,哭不偯(一ˇ,哭余声),礼无容,言不文,服美不安,闻乐不乐,食旨不甘,此哀戚之情。三日而食,教民无以伤生,毁不灭性(哀毁心情不能太过),此圣人之教。丧不过三年,示民有终。为之棺椁衣衾而举之,陈其簠簋(祭品)而哀戚之。擗踊(捶胸顿足)哭泣,哀以送之。卜其宅兆,而安厝之。为之宗庙,以鬼(祖宗)享之。春秋祭祀,以时思之。生事爱敬,死事哀戚,生民之本尽,死生之义备,孝子之事亲终(有圆满的终结)。   孝经以德摄行,以行显性,以性摄教。其三才章,复摄用归体,明天地人总为一体。于其理一中可见分殊,于其分殊中亦可见理一。孝道顺人之性,即顺天地之性,故其教不肃而成,其政不严而治,犹天地之自然成化。体必具用,故以德摄行。用能显体,故以行显性。而全体作用,故以性摄教。且孝经特别突显出孝为德之本。中庸说:「唯天下至诚,为能尽其性。能画其性,则能尽人之性(可指孝)。能尽人之性,则能尽物之性。能尽物之性,则可以赞天地之化育。可以赞天地之化育,则可以与天地参矣!」〔马一浮〕   孝是发乎人心之不能自已者,只此便是天道之不息,故曰天之经。忠可移于君,顺可移于长,治可移于官,只此便是地道之承天,故曰地之义(注26)。以此顺天下,推而放之四海而皆准,无所不通,只此便是人道之法天地者,故曰民之行。以佛义通之,孝为德本是法性(注27),故谓天经;教所由生是缘起,故谓地义;终于立身是具足法智二身,故谓民行〔马一服〕。   郑玄说,孔子因诗书易礼乐春秋六经各讲了一个方面,怕后人不知根源,所以作孝经来总会。而汉人必须通过孝,来维系宗法血缘的纽带,且以孝治天下。故孝经包含着人伦之大本,穷理之要道,其文虽不多,而立身治国之道,尽在其中,清初学者姚际恒经过详细考证,否认孝经是孔子或孔子的弟子所作。梁启超认为,孝经之名,孔子时并未曾有。其书发端之仲尼居,曾子侍,安有孔子著书而作此称谓?〔沈善洪等1985c〕不过,一般仍认为,孝经以孔门后学所作说,较为合理〔中视文化公司〕。   四、新儒学孝论   新儒学系统论〔林国雄1992a,b,1993,1994a,b,c,d,1995,a,b,c, 1996a,b,   1997a,b,1998a,b,1999a,b,2000,2001a,b,c,2002a,b,2003a,b,2004a,b,c,d,   2005,a,b,2007;蔡渊辉2005a,b〕的思想源头主要在太极图说〔周敦颐〕。不论太极图说或新儒学系统论,均太极动而生阳;动极而静,静而生阴;静极复动;一动一静,互为其根;分阴分阳,于是两仪立焉。   就孝论来说,从家庭的形成处切入,将是个很好的出发点。婚姻是家庭产生的前提,是社会认可的配偶安排,用以形成夫妻关系。若将家庭看成一个小太极,家庭形成后夫为太极中之阳仪,妻为太极中之阴仪,夫妻同居,共图创立家庭。婚姻可用以建立所生子女之合法地位,可给予配偶包括居住、性行为、家务操作、财产等之权利,可为所生子女建立共同基金,可与配偶之亲属相联结而产生更广的亲属关系,可获得夫妻关系之公开承认。婚姻是男女之相当稳定而持久的结合,还与生育子女密切关系〔龙冠海〕。   理想的夫妻,应该是和谐无间,百年偕老。不过,依太极阴阳之关系,只要能从对方求得基本需要之满足,则婚姻之基本功能仍在。婚姻之主要动机有三:一为经济,二为子女,三为爱情。动机之实现即为婚姻之成功。一般认为构成成功婚姻之要素有九:一为感情融洽,二为生育子女,三为夫养家,四为妻持家,五为家庭收支平衡,六为民主,七为社会参与,八为获得社会赞扬,九为一夫一妻。夫妻双方的互相调适,特别有助于婚姻的成功。依据中华文化的观念,结婚乃是个人为社会及家庭所应负之责任,而生育子女则为其应尽之义务。礼记即规定,合二姓之好,上以事宗庙而下以继后世。   母亲的卵子与父亲的精子会合而受孕,在子宫发育,常怀孕期满,婴儿可脱离母体,独立生活。在子女出生后,父母即予扶养哺育,使其长大。父母子女的关系,于是发展出家庭太极中父母之新阳仪、子女之新阴仪。子女非父不生,非母不养。怀孕期间,母亲坐卧失常,产孕之日,内触外触苦痛交切,失声号叫,匍匐战惧,骇愕惊嗟。如今医学进步,这些痛楚皆有所缓和,但也只是缓和而已。养育期间,父母常怕子女为邪魔之所侵害,饥时需饭,非母不哺;渴时须饮,非母不乳;千日提携,维持身体之健康整洁;推干就湿(包尿布,除大便),及年长大。   其后黄金白银(今使用货币),衣服玩具,父母心念子女可,无所吝惜,食随父母,眠随父母。父母更送子女进学校接受教育,望子成龙,望女成凤之心也是非常普遍,父母所付出之辛劳自不待言。父母辛劳之付出,还须有家庭稳定的经济收入来源,于是社会为比家庭小太极更大之太极,父母产生稳定经济收入之活动为阳仪,社会其他各色各样的经济活动为相应的阴仪。子女进学校接受教育,当然也演进出与家庭小太极相似之学校小太极,此时师生关系中的师居阳而生居阴。在家庭生活及学校生活的各种物资劳务之需求中,每一种物资劳务之供需亦各别形成一小太极,需求面居阳而供给面居阴。   从经济关系来说,家庭内的夫妻一般是平等的,生活上各种物资劳务的供需一般也是平等的。但是在子女扶养长大成年而可以真正独立之前,父母在经济关系上一般只有对子女的付出,所以由于这种体谅,子女须对父母敬重和服从;父母年老体衰后,子女则更需予以奉养;这些敬重、服从、和奉养,就是孝的原意;这些父母子女的关系也就是人类得以生生不息,并谋求发展的最重要基础。在这些关系中通常父母慈而子女孝,慈通常只有当下之意义,故被有意无意地隐藏起来,而孝则能产生出其生生(注28)不息绵延不绝之动力,故孝在中华文化中一直特别被突显出来。   在西周文献中,已出现以奉养父母、祭祀先祖为孝的基本规定,这是孝的原意之扩大,也用以形成宗法(注29)制度。诗大雅既醉即说:「孝子不匮,永赐尔类」。西周时并已视不孝为元恶大憝(ㄉㄨㄟˋ,恶,怨),当刑之无赦。盖若不孝者,世世相随,一门之内,总是冤家,虽为父子,甚于仇敌;父子兄弟,各财异食,同园别菜,共田分谷,隐藏珍馔,吃食如偷,虽是人形,不如禽兽;更有甚者,还可能更互相残害。由孝与不孝的对比中,我们更能看出孝在人类生生不息发展中之重大意义。   不论太极图说或新儒学系统论,均无极生太极,其后彼此两仪互动,故无极而太极。另外,太极本自无极,即道。由于太极内阳变阴合,而生水火木金土,所以无极之真,二(阴阳)五(木火土金水)之精,妙合而凝。妙合增益。干道(注30)成男,坤道(注31)成女。因为已逝去的祖先所归之无极与现在子孙家庭之太极,可以有着阴阳两仪之互动,所以西周时早已把祭祀先祖作为孝的基本规定。此时,在世子孙的阳仪与已逝祖先之阴仪所形成的太极,是一个比家庭小太极更大的「类之本」小太极。   孝经庶人章说,用天之道,分地之利,谨身节用,以养父母,此庶人之孝,这就是人类社会最基本的孝道。孝经进入士章,毋取其爱,君取其敬,兼之者父,故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然后能保其禄位,而守其祭祀,盖士之孝。此士之孝已进入祭祀祖先的扩大孝道中了。   若再进入卿大夫之孝、诸侯之孝,天子之孝,于是春秋末孔子能说:「君子笃(厚,忠诚老实)于亲,则民兴于仁」、「慎终追远,民德归厚」,更进一步扩大孝的尊亲之义。在卿大夫的采地食邑中,卿大夫居阳,采地食邑的所有其他人居阴。在社稷中,诸侯居阳,社稷内的所有其他人居阴。在天下中,天子居阳,天下的所有其他人居阴。卿大夫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其采地食邑;诸侯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其社稷;天子尊亲祭祀祖先,就易于治理天下。   论语为政说:「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码,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其实,有形的养与无形的敬也是一种新儒学阴阳两仪之良性互动对待。务必要敬养兼具,才是最基本的庶人之孝。荀子子道主张「从义不从父,认为从父母命应以使父母安、父母荣为宜,反对把孝之从父命」绝对化,这是对无违父志、服从父命的合理修正。其实孝居阳、义居阴,也应有一种新儒学两仪之良性互动对待。由于孝义兼具,吕氏春秋孝行览才能说:「夫孝,三皇五帝(注32)之本务而万事之纲纪也。」   两汉魏晋时,孝成为三纲之一大德目,确定父母为子女纲,并引孝入律。至宋以后,更有「父要子亡,子不得不亡」的训条,被理学家进一步绝对化为天理之必然,见程氏遗书,此种愚孝之孝道已经走得太过头了。孝经进入士章、卿大夫章、诸侯章、天子章,忠孝一般都是相随的,士章有「以孝事君则忠,以敬事长则顺,忠顺不失,以事其上」,卿大夫章有「夙夜匪懈,以事一人」,而忠君之扩大就是忠于百姓,于是诸侯章有「保其社稷,而和民人」,天子章有「德教加于百姓,行于四海」。由家庭进入社会国家之后,其实忠居阳,孝居阴,忠孝亦应有其新儒学两仪之良性互动对待。   孝经三才章说,夫孝则天之明,因地之利,以顺天下,所以孝道还应遵循自然及社会的各种客观规律。孝经的孝治章、圣治章、孝行章、五刑章、广要道章、广至德章、广扬名章、谏诤章、感应章、事君章,所论者皆为孝道之扩大,故(孝、治)、(敬亲、威仪)、(孝道、不骄乱争)、(孝道,不无上无法)、(孝、悌乐礼)、(孝,至德)、(成于内,达于外)、(孝,谏诤)、(孝悌,神明)、(进,退)等亦皆宜有其新儒学阴阳两仪的良性互动对待。   不过,老子道德经第十九章说:「绝圣弃智,民利百倍;绝仁弃义,民复孝慈;绝巧弃利,盗贼无有。」第十八章又说:「大道废(客观规律性消失),有仁义;智慧出,有大伪;六亲不和,有孝慈。」此乃圣智仁义都是非常高远的,孝慈民利则都是非常切身而具体的,由于圣智仁义的高远,假圣假智假仁假义对于一般人来说,反而不易辨别出来。六亲不和的六亲,可指父母兄弟妻子,可指父子兄弟夫妇,可指「父子、兄弟、姑姐、甥舅、昏媾、姻亚(妻父曰昏,重婚曰媾,壻父曰姻,两壻相谓曰亚)」,可指「外祖父母、父母、姊妹、妻兄弟之子、从母之子、女之子」,亦可指「父、子、从父昆弟、从祖昆弟、曾祖昆弟、族昆弟」,因为有孝与不孝的对比,所以六亲不和有孝慈,自易于体会。 因而,(圣居阴,孝居阳)、(智居阴,孝居阳)、(仁居阴,孝居阳)及(义居阴,孝居阳)亦皆宜有其新儒学两仪之真正的良性互动对待,俾使假圣假智假仁假义无其可以藏匿的空间,这亦是孝治天下所应思及者。   孝经提倡以孝治天下,因为孝为德之本,所以孝治就是一种德治。西周提出以德配天,强调君子要加强道德修养,对人民要明德慎罚,施以德教,已有德治的萌芽。论语为政说:「为政以德,譬如北辰,居其所而众星拱之。」又说:「导之以政,齐之以刑,民兔而无耻;导之以德,齐之以礼,有耻且格。」孔子强调德治(孝治),并不主张废除刑罚杀戮,而是反对不教而杀、不戒视成。   不论孝治、德治、或圣治,其作为都比较偏重人治。人治的根本特征是君王至上,朕即国家,春秋繁露立元神即说:「君人者,国之本也」。国家的治乱系于君主一人的道德和行为,人存政存,人亡政亡。人治特别强调德治(孝治),也重视以法治民,更有像唐律那样一套完备的法律,甚至主张法不阿贵,但君主则超越在法律之上。人治把德治(孝治)的实现,寄托于德位一体的圣王,常不免因此而不切实际。   与人治相分立的是法治。法治则关注法律在国家治理中的地位和价值。现在的法治一般以人民民主或人民主权(注33)为核心。因而,宪法具有至高无上的地位,且在法律面前人人平等。政府国家则置于人民的有效监督之下。在中国历史上,法治与德治之争,法治所讲的主要是刑法。现在的法治,人民的自由平等权利得到充分的尊重与保护。法治主张法律至上,在法律面前人人平等。在法治下,法律具有绝对至高无上的地位,排斥特权(注34)的存在,宪法及法律不是保障个人权利的渊源,而是其结果。   因为民为邦本,本固邦宁,故一般认为,德治(孝治)是基于民本而实现邦宁的关键。孟子提出「民为贵,社稷次之,君为轻」,认为得天下在于得民,得民在于得其心;而要得民心,就应施仁政德治(孝治)。孔子强调,君主本人要身正,以为人民的道德表率。其身正,不令而行;其身不正,虽令不从。国家的法治、政策要有利于人民,所欲与之聚之,所恶勿施;要制民之产,省刑罚,薄税敛,深耕易耨(耕,除苗秽)。孔子主张富而教,反对不教而诛。孟子主张在不饥不寒下,谨庠序(注35)之教,申之以孝悌之义,从而人人亲其亲,长其长,而天下太平。董仲舒还提出,教化立而奸邪皆止;教化废而奸邪并出,刑罚不能胜〔朱贻庭〕。   法治的优点一般是其制度和法律不因领导人的改变而改变,也不因领导人看法和注意力的改变而改变。对一个国家的治理来说,法治与德治,从来都是相辅相成,相互促进。法治属于政治建设,属于政治文明;德治(孝治)属于思想建设,属于精神文明。依法治国,就是依照宪法和法律规定,通过各种途径和形式去实际治理国家;以德治国,就是建立与市场经济、法律体系相配套的思想道德体系,保持良好的社会秩序和风尚,营造高尚的思想道德。   由此可知,德治(孝治)与法治亦具有其新儒学两仪之互动对待,德治(孝治)居于阳仪,而法治则居于相应的阴仪。经由本节的推论,孝的概念架构之示意大致可以绘之如右:                       五、结语   本文经由孝道的一般概况、孝经中的孝道之顺序探讨,然后以新儒学系统论进入孝论的陈述,终于完成了孝论的一些阴阳理解架构。     批注   註 1:  元气的意义是:一作为宇宙终极本原的原始物资,鹖(ㄏㄜˊ)冠子及王符潜夫论采此观点。二作为天地本原的混沌物质,是宇宙演化过程中的一个阶段,亦即太易、太初、太始、太素中「太初者,气之始也」的元气阶段。三指天地间之元气。四指人体内之元气。五指一切生命物质基础的元气,王充论衡采此观点〔方克立〕。   註 2:  王夫之认为,道在氧化过程中起着主持和分剂的作用,分剂指阴阳双方的位置关系和力量对比关系,主持是指将作用相反的阴与阳结合起来的一种亲和力〔方克立〕。   註 3:  平等意指无差别、等同。   註 4:  于礼不孝有三事:一为阿意曲从,陷亲于不义;二为家贪亲老,不为禄仕(不工作赚钱);三为不娶无子,断绝先祖的祭祀。三者之中,无后为大〔林尹等〕。   註 5:  道教所称三界有三:一为以时间来说的宇宙无极界、太极界、现世界;二为以空间来说的天界、地界、水界;三为以道境来说的欲界、色界、无色界〔李叔还;张志哲〕。欲界指深受各种欲望支配、煎熬的生物所居之处。色界指粗俗欲望已经断绝的地方。无色界指既无欲望又无形体的生存者居住的地方,已经断绝了任何物质性(色)的东西。三界亦可用以指天堂、人间、地狱〔方克立〕。   註 6:  虚皇天尊初真十戒文,规定凡初入道者,不分出家或在家,均须受此十戒:一为不得不忠不孝不仁不信,二为不得阴贼潜谋害人害己,三为不得杀生(杀人),四为戒淫邪,五为不得败人成功离人骨肉,六为不得毁贤扬己,七为不得饮食酒肉(交酒肉朋友),八为不得贪求无厌,九为不得交游非贤,十为不得轻忽言笑。一般应先受皈依戒和老君五戒后,方许受以上十戒〔张志哲〕。   註 7:  神明是神之有灵者,书经说:「至治馨香,感于神明」〔李叔还〕。   註 8:  愆(ㄑㄧㄢ)指过、差失、罪、恶疾。   註 9:  扫墓是祭扫先人之墓。清通礼说:「岁寒食及霜降节,拜圹茔,届时素服诣墓,具酒馔,及芟剪草木之器,周眂(ㄕˋ,视)封树,剪除荆草,故称扫墓。」亦有生者于中元日、十月朔等节日,到墓前祭拜死者的活动,诸如献供品、焚冥钱、给坟墓培土、用土块压纸钱于坟顶等。清明扫墓的习俗,今仍沿袭〔李叔还;张志哲〕。   註 10: 道教以农历七月十五日为中元节,是地官大帝诞辰。该日地官降下,定人间善恶。道庙则日夜诵经、济度,饿鬼囚魂亦得因而解脱。该日,一般人家多持斋,荐奠祖先,抚孤判斛,屠门(关门)罢市,放灯于河中照冥〔李叔还〕。   註 11: 地狱指地下阴府之牢狱,用以治人死后之罪魂。灵宝经说:「北罗酆有十二大地狱,由十殿冥王领之。」〔李叔还〕   註 12: 斛(ㄏㄨˊ)是十斗,今制五斗曰斛,十斗曰石。   註 13: 幽冥即地下阴府。   註 14: 狼籍是纵横交错不整之貌,恶声散布亦复似之,与狼藉同。狼籍亦有行为无法纪之意。   註 15: 玉清天宝君、上清灵宝君、太清神宝君为道教的三宝,尊为最高之神。又有以学道的要旨道宝、经宝、师宝,尊为三宝者。另有以人身之精气神为修养性命之三宝。还有以慈俭让为立身行道之三宝〔李叔还〕。   註 16: 果报即因果报应。道教认为,若种下善因,则报得善果;若种恶因,则报恶果,譬如种瓜得瓜、种豆得豆。   註 17: 上皇即天皇。上古以天皇、地皇、人皇为三皇。不过尚书大传以燧人、伏羲、神农为三皇;白虎通以伏羲、神农、祝融为三皇;春秋运斗枢以伏羲、神农、女娲为三皇;史记以天皇、地皇、泰皇为三皇;尚书序以伏羲、神农、黄帝为三皇〔李叔还〕。   註 18: 玄天大帝乃元始化身,太极别体。上三皇时下降为太初真人,中三皇时下降为太始真人,下三皇时下降为太素真人。其后,托胎化生于净乐国王善胜夫人之腹。生有奇表,及长至武当山,潜形炼气,后功圆行满,白日飞升。至周武王伐商纣时,玄帝化现荡魔,大奏肤功,玉皇上帝封为玉虚师相玄天大帝〔李叔还〕。   註 19: 关圣帝君即关羽,秉性忠直,与刘备、张飞在桃园行结义,情同兄弟。初守下邳,为曹操所败。刘备奔袁绍,关羽为曹操所执!曹操礼之甚厚。关羽斩袁绍将颜良以解曹操危!曹操表奏封关羽为汉寿亭侯。关羽乃尽封所赐,辞奔刘备。后关羽守襄阳,定益州,督荆州,威震一时。孙权用了吕蒙计,袭破荆州,关羽遂被害。民国三年与岳飞合祀武庙〔李叔还〕。   註 20: 洞真部为三洞之一。道藏经分三洞:洞真部为元始天尊所流演,洞玄部为太上道君所流演,洞神部为太上老君所出。洞指通,即通达玄妙之意〔李叔还〕。   註 21: 诗经是中国最早的一部诗歌总集,编成于春秋时代,有谓由孔子删定,但近人多疑之。基本上是西周初至春秋中期的作品。分为风雅颂三大类。雅分大雅、小雅,计105首,主要是卿大夫贵族的献诗,多用于宴乐、歌颂、或反映政治得失〔中国书局〕。   註 22: 宗庙是天子、诸侯、卿大夫祭祀祖先的地方。在家天下的时代,祭祀宗庙的事是国家大典。祭祀宗庙之事,也是孔子的教学内容之一。祭祀宗庙之目的,是示民有事、教民追孝〔中国书局〕。   註 23: 太师是三公(太师、太傅、太保)之最尊者。殷纣时箕子为太师,周武王时姜太公、周成王时周公亦皆任之。其后,历代皆置之〔林尹等〕。   註 24: 明堂是明政教之堂,古时祀上帝、祭祖先、朝诸侯、养老尊贤,凡关于重大典礼者,必皆于明堂举行之,是古代政教合一的大本营〔李叔还〕。   註 25: 家是古代卿大夫的采地食邑〔中国书局〕。   註 26: 天经地义也是春秋时郑子产对礼的看法。礼,上下之纪,天地之经纬,亦即认为礼是天地的永恒法则〔方克立〕。   註 27: 法性与真如、实相、法界、涅盘等属同等涵义,主要指现象的本质、本体。方法虽异,然作为万法之体的「性」则不变,故叫「法性」。小乘佛教多不言,大乘佛教则盛论之,然大乘各派对法性的内容,又有不同的解释〔方克立〕。   註 28: 生生是指生育之仁德。易系辞上说:「日新之谓盛德,生生之谓易」,已含有赞扬阴阳生育之仁德的意思。   註 29: 宗法的中心内容是教忠教孝,强调君君、臣臣、父父、子子。而且父子有亲、君臣有义、夫妇有别、长幼有序、朋友有信,并在此基础上确立起三纲五常。君为臣纲、父为子纲、夫为妻纲是三纲,仁义礼智信五种道德规范是五常。三纲五常正式提倡于两汉。朱熹还把三纲五常纳入天理的轨道〔朱贻庭〕。   註 30: 干道指干之功能,能够无须外力,自然开通万物。   註 31: 坤道指坤之基本性质。干道健,坤道顺。阴阳变化的结果,在人则生成男女,在动物则生成雌雄牡牝,在易则生成坎离震巽艮兑〔吕绍纲〕。   註 32: 五帝可指东方青地灵威仰、南方赤帝赤熛怒、中央黄帝含枢纽、西方白帝白招拒、北方黑帝叶光纪;亦可指黄帝、颛顼、帝喾、帝尧、帝舜〔李叔还;张志哲〕。   註 33: 人民主权是指人民是国家的主体,国家的一切权力是人民赋予的,国家主权属于人民。人民主权是民主政制之本质。人民主权说最初由鲁索(J.J. Rousseau,1712-1778)创立,以其社会契约论为基础。人民的公意在国家中就表现为最高权力,而主权就是公意的具体体现。杰弗逊(Thomas Jefferson,1743-1826)继承和发展了鲁索的人民主权思想。人民主权的一切权力来自国民,国民只能通过代表,行使其权力〔朱贻庭〕。   註 34: 特权(privilege)是指国家法律上允许的特殊权利,例如可以享有豁免捐税、减免刑罚等种种特权。元朝时,将人民分为蒙古人、色目人、汉人、和南人四种,分别实行种族特权和种族歧视政策,在遴用官吏和科举、刑罚上都有所差别〔朱贻庭〕。元代通称西方各异族之民为色目人,盖色目相异,不常闻见。另外,蒙古称辽金人为汉人,称宋人为南人。 註 35: 庠序是地方所设之学校。殷曰序,周曰庠。至汉时,乡曰庠,聚曰序,皆教化之宫、养老之处、以详礼义序长幼之所。      参考文献   1.     二仙庵(1995a),「太上老君说报父母恩重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14-118页。 2.     二仙庵(1995b),「玄天大帝说报父母恩重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19-120页。 3.     二仙庵(1995c),「关圣帝君昭明翊汉天尊说反本报恩经」,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慈惠堂,121-124页。 4.     方克立(1994),中国哲学大辞典,中国社会科学出版社。 5.     中华文化公司(1999),世界辞典百科全书。 6.     中国书局(1994),孔子文化大辞典。 7.     王玉德(2003),「试论汉代文化的重要特点之一:重视孝道与孝经」,孝感学院学报,23卷4期,65-68页 8.     朱贻庭(2002),伦理学大辞典,上海辞书出版社。 9.     沈善洪与王凤贤(1985a),「孝的产生和发展」,论道,慈惠堂出版社,536-541页。 10.  沈善洪与王凤贤(1985b),「孝经的非法不言,非道不行」,论道,慈惠堂出版社,542-543页。 11.  沈善洪与王凤贤(1985c),「历代对孝经评述的变化」,论道,慈惠堂出版社,544-545页。 12.  李叔还(1979),道教大辞典,巨流图书。 13.  吕绍纲(1992),周易辞典,吉林大学出版社。 14.  周敦颐(1978),周子全书,台湾商务印书馆。 15.  林尹与高明(1985),中文大辞典,中国文化大学出版部。 16.  林国雄(1992a),「论因果与机率,并归结至阴阳思想之知识化生理论」,第九届国际易学大会,夏威夷希洛,1-53页。 17.  林国雄(1992b),「儒学阴阳两仪观念与经济活动」,儒学与法律文化,复旦大学出版社,76-84页。 18.  林国雄(1993),「经济计量时归纳逻辑机率之涵义与测量,因缘和合论及易理之运用」,交大管理学报,13卷1期,77-108页。 19.  林国雄(1994a),「新儒学经济思想的开拓」,大易集要,齐鲁书社,218-240页。 20.  林国雄(1994b),道德真经及其圣义,慈惠堂。 21.  林国雄(1994c),「预期效用的概念演化与计数属性,新儒学经济思想及因缘和合论之运用」,社会科学战线,1994年4期,29-37页。 22.  林国雄(1994d),「论矛盾」,第一届中国文化与企业管理学术会议,台南,1-29页。 23.  林国雄(1995a),「春秋繁露中的五行思想」,孔学研究,1辑,268-285页。 24.  林国雄(1995b),「新儒学经济思想的三才诠释」,太极科学,10辑,13-26页。 25.  林国雄(1995c),「金钱价值的两仪论」,交大管理学报,15卷1期,59-76页。 26.  林国雄(1996a),「论有无与场」,交大友声,354期,70-73页。 27.  林国雄(1996b),「新儒学经济思想的五行解说」,面向新世纪的中国管理,上海交通大学出版社,3-24页。 28.  林国雄(1997a),「老子道德经的仁义思想」,宗教学研究,1997年4期,15-20页及72页。 29.  林国雄(1997b),「政府所为何事的新儒学经济思考」,交大管理学报,17卷3期,147-174页。 30.  林国雄(1998a),「论道」,宗教学研究,1998年4期,15-20页。 31.  林国雄(1998b),「经营变量中五行相生致中和之力,以食品业为例」,中华管理评论,2卷1期,1-12页。 32.  林国雄(1999a),「论中和与均衡」,云南师范大学学报,1999年4期,85-91页。 33.  林国雄(1999b),「由新儒学四象结构剖析制造业厂商的会计信息(上、下)」,今日会计,77期,102-108页;78期,67-86页。 34.  林国雄(2000),「论规则与权威」,孔学研究,6辑,553-572页。 35.  林国雄(2001a),「新儒学经济活动中五行始生之序」,华人管理本土化之开拓,游汉明编,乐文书局,321-352页。 36.  林国雄(2001b),「产业与企业经营变量的卦象诠释」,2001年科技与管理学术研讨会论文集,台北,605-612页。 37.  林国雄(2001c),「企业经营因果链条的构建理性」,中华管理学报,2卷2期,43-68页。 38.  林国雄(2002a),「新儒学的文字符号逻辑」,第三届东亚符号学国际会议,武汉,1-27页。 39.  林国雄(2002b),「新儒学知识论」,新儒.新新儒,东方文化与国际社会的融合,文史哲出版社,137-189页。 40.  林国雄(2003a),「论核四释宪案的司法伦理」,暨大学报,7卷1期,59-82页。 41.  林国雄(2003b),「新儒学忠恕之道」,东亚社会及其伦理价值国际学术研讨会论文汇编,北京,8-28页。 42.  林国雄(2004a),「新道家与新儒学」,2004年海峡两岸首届当代道家研讨会,武汉,1-34页。 43.  林国雄(2004b),「新儒学因果论」,根在河洛,大象出版社,640-689页。 44.  林国雄(2004c),「新儒学组织论」,中华企业资源规划学会论文集,103-117页。 45.  林国雄(2004d),台湾政治文化发展的趋向,交通大学经营管理研究所,1-42页。 46.  林国雄(2005a),「新儒学土地论」,第九届科际整合管理研讨会,台北,1-18页。 47.  林国雄(2005b),论新儒学经营的道天地将法,交通大学经营管理研究所,1-33页。 48.  林国雄(2006a),「论道不同,不相为谋」,世界经济文汇,2006年6辑,31-47页。 49.  林国雄(2006b),「新儒学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3辑,1-58页。 50.  林国雄(2007),「论制造业普查数据的新儒学信息功能」,新儒学经营管理学报,4辑,149-209页。 51.  洞真部(2000a),「太上真一报父母恩重经」,论中和与均衡,慈惠堂出版社,207-208页。 52.  洞真部(2000b),「元始洞真慈善孝子报恩成道经」,论中和与均衡,慈惠堂出版社,209-213页。 53.  查昌国(2003),「论西周孝尊祖敬宗抑制父权」,史学理论研究,67-77页。 54.  徐荣(1978),「道教徒信誓简述」,道教选论,竹山慈惠堂,19-21页。 55.  马一浮(1995),「从孝经释三才」,新儒学四象五行之混析与义利之辨,慈惠堂出版社,97-106页。 56.  许宁(1999),「儒佛孝道之比较」,论道,慈惠堂出版社,459-468页。 57.  张志哲(1994),道教文化辞典,江苏古籍出版社。 58.  道教会(1975),「呼吁提倡家庭孝道与节约」,西王金母信仰与天山瑶池圣地之研究,慈惠堂,406页。 59.  叶继宗(2002),「中西孝道之比较」,简单回归逻辑之基本思考,慈惠堂出版社,493-498页。 60.  慈惠堂(1993),「孔子孝经及其今义」,西王金母圣略之注释,177-200页。 61.  福井文雅(1992),「三教调和论与父母恩重经」,新儒学价值论,慈惠堂出版社,480-484页。 62.  墨子刻(1996),「中国家族的人文理论」,新儒学四象五行之混析与义利之辨,慈惠堂出版社,254-262页。 63.  郑志明(1990),「醒世文要点醒什么?」,西王金母信仰与皈依传度之研究,慈惠堂,313-316页。 64.  刘汉铨(2001),「醒世文今读」,微观消费理论的新儒学诠释,慈惠堂出版社,436-445页。 65.  编辑部(2003),「孝与中元法会」,香港道讯,41期。 66.  赖炎元(1987),春秋繁露今注今译,台湾商务印书馆。 67.  蔡渊辉等(2005a),「新儒学决策结构之一:阴阳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1辑,266-303页。 68.  蔡渊辉等(2005b),「新儒学决策结构之二:五行系统论」,新儒学经营管理学报,1辑,304-360页。 龙冠海(1971),社会学,云五社会科学大辞典第一册,台湾商务印书馆。  
12    (론문) 청명절에 관한 론문 11편--미상 댓글:  조회:8282  추천:0  2012-08-03
关于清明节的论文11篇 1、远离农耕时代 我们为什么还要过清明节? 核心提示:清明节是我国民间重要的传统节日,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而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清明节还是否适合现代社会的发展需要呢?不仅限于清明节,多年来传统节日的味道就已越来越淡,“节日”的概念无意中被“假日”所置换,2005年圣诞节前后又冒出“保卫春节”一类的盛世危言,那么这些传统节日究竟与现代社会矛盾还是仍然有传承的必要--过or不过(清明节)已经成为现代人的一个问题。 传统节日作为我国民俗文化的重要内容,大家并不陌生,它主要是指与天时、物候的周期性转换相适应,在人们的社会生活中约定俗成的、具有某种风俗活动内容的特定节日。中国传统节日以它特有的内涵陪伴我们一代又一代人走过无数个春秋冬夏,同时也在我们心底形成了一个特殊的情结。但是随着社会的发展,这些传统的东西被越来越多的人视为落伍,而圣诞节、情人节等“洋节”则因其时尚和新奇受到人们的普遍追逐。这种现象的产生是颇为耐人寻味的。中国传统节日的历史与现状究竟是个什么样子?它们具有何种魅力?又为何遭到冷落?这些问题很值得我们去细加揣摩。因为正确地认识节日文化现象,对于发挥传统节日的社会功能,弘扬民族优秀文化,增强民族凝聚力,有着十分重要的现实意义。 现代人究竟过不过清明节 这是一个问题 清明节是我国民间重要的传统节日,是重要的八个节日:上元、清明、立夏、端午、中元、中秋、冬至和除夕之一。一般是在公历的四月五日,但其节期很长,有十日前八日后及十日前十日后两种说法,这近二十天内均属清明节。 清明节的起源,据传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后来民间亦相仿效,于此日祭祖扫墓,历代沿袭而成为中华民族一种固定的风俗。本来,寒食节与清明节是两个不同的节日,到了唐朝,将祭拜扫墓的日子定为寒食节。冬至后一百零五天谓之寒食,从前这天禁火,冷食,故又称“冷节”、“禁烟节”。民间传说寒食是为了纪念春秋时的介子推被火焚于绵山,晋文公下令禁火。介子推是山西人,所以冷食习俗在山西首先流行。旧时寒食断火,次日宫中有钻木取新火的仪式,民间也多以柳条互相乞取新火。 基于清明节的传统,有很多人就提出了各种各样的观点,指出传统节日清明节与现代社会的种种矛盾,典型的观点列举如下: 一、就来源而言,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的“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究其本质,清明节不过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压根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而这在人类文明高度发达、以马克思主义哲学武装国人头脑的今天,无疑是绝不可取的。 二、由于清明节的封建迷信本质使然,这使得这一所谓节日很容易变相演绎成一种“光宗耀祖”的仪式,不少为富不仁者贪赃枉法者岂能放过如此这般美好“荣归故里”、“衣锦还乡”的良机,不大摆筵席铺张浪费一番简直对不起早已被腐朽的列祖列宗哪!自从这几年清明节成为“国假”以来,张一一先生亲眼目睹攀比之风日盛,谁家的坟墓气派,谁家墓前放的鞭炮多、烧的“房子”大,甚而至于还有焚烧名贵烟酒的……清明节赫然成一场不折不扣的“烧钱秀”,而我劳动人民的疾苦,在清明节蔚为壮观的鞭炮声和火光中是如此卑微。 三、清明节盛行导致各种交通安全隐患。占道销售冥币,祭品摊点以及祭扫活动所导致的影响市容、交通拥堵、污染环境、破坏道路和绿地的问题不时发生,市区各主要街道十字路口及沿街公共绿地、广场周边的安全隐患和环境卫生得到严峻考验,极大的加重了城管人员和环卫工人的工作量。 四、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五、清明节地位的提高使“风水”等唯心主义思想抬头,助长了在人民群众中弘扬封建迷信的不良风气,不利于我国正如火如荼举行的思想道德文化建设。 现代社会传统节日味道越来越淡 不仅仅限于清明节,多年来人们就一直在感慨传统节日的味道越来越淡,而当“节日”的概念被“假日”所置换以后,节日经济以及由此被挑起的民众度假消费狂潮便成为最为壮阔的时代景观。节日观上的“政治正确”常常把我们的思维引向民族救亡法庭上了无新意的正义判词,似乎本土节日的式微都是外来洋节搞的鬼,于是,有了2005年圣诞节前后冒出来的“保卫春节”一类的盛世危言。关于本土民族文化价值应该如何保护的问题,人们已经争论了至少100年,而且还将继续在同一个层面延续下去,这遮蔽了问题的要害。 事实上,无论是在中国还是在欧洲,几乎所有的重要传统节日都面临着很大危机。作为文化身份认同仪式的节日,都打上了太多全球化时代的商业烙印。上世纪90年代,包括法国、丹麦等在内的欧洲国家就对以美国为代表的全球化时代的消费文化的渗透伤透脑筋,并试图以弘扬本土文化价值来加以抵御——结果如大家所见,收效甚微。 我们的传统节日大都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西学东进,西节也迅速在这片土地上枝叶繁茂起来,甚至有喧宾夺主之势头!圣诞节、情人节、复活节、万圣节、感恩节似乎已经成了光辉的“中国节”,商家的精明造势加上年轻一代的盲目追随则推波助澜——传统节日渐行渐远,西方节日大行其道。 西方节日来势凶猛,但硬要说它们像当年的坚船利炮那么可怕或许有点夸大其词。西方世界的节庆文化虽然在基督教诞生之前就开始萌芽,其真正壮大则是在基督教君临天下之后。自利玛窦于万历十年(公元1582年)利用儒学经典在中国传播圣经算起,基督教来中国已经四个多世纪了。 相比之下,中国传统节日却没有得到有力保护。1949年以后,大多数节日都被视为封建残余而废除,幸存下来的也只有春节、端午和中秋,其中只有春节被列入了法定节假日。1949年以来我们的全民放假日只有7天,直至1999年国务院发布《全国节及纪念日放假办法》才增至10天。这样的水平与中国宋代的69天、日本的15天、韩国的16天、澳门的22天和美国的23天相比,明显过于低下。传统节日的被贬与洋人节日的嚣张构成了这个时代最戏剧化的景象。 远离农耕时代 现代社会还需要传统节日吗? 出生在20多年之前的人还依稀记得每天翻页的老皇历上详细标注着的时令和节日的日期。翻开当下的很多日历,传统节日只剩下了春节。中秋、元宵花灯、清明祭祖、端午悼念、七夕乞巧、重阳敬老、上巳(三月三日)、夏至、中元、冬至、腊八、祭灶等重要的节日都从日历上消逝了。同时消逝的是农业祭祀、祖先崇拜、神灵崇拜、驱邪禳灾等特殊仪式。那些有着上千年辉煌和浪漫的仪式,后人难道只能在古籍中体验? 不能否认传统节日如今确实存在水土不服的成分,但如若将之视为敝屣立刻投入洋节的怀抱无异于挥刀自宫。节日不仅仅是日常生活的调剂,更是维持民族认同感的纽带。有趣但也让人不爽的是,联合国教科文组织的世界教师节、美国的教师节、中国台湾和香港的教师节,都是定在孔子诞辰日,即9月28日,我们自己却有意回避这一天。 为什么洋节大行其道而传统节日冷冷清清?学者们认为这是文化自轻和自我殖民。近代历史留给国人的不止是无尽怨怒,还有根深蒂固的自卑。落后与挨打成了人们对近代历史的习惯性总结,麻木自卑甚至憎恨因此成了大多数人对待自身文化的态度。 人类本身只是进化树枝上一个偶然分杈,人类历史背后的如铁规律不过是人类中心论调支配下的一种癖好,现代化进程也不可能是人类历史上无法避免的归宿,更不可能成为解救人类的“上帝之城”,相反现代化进程所具有的侵略性对人类“文化生态”的打击却可能是毁灭性的。在这个看上去有点在劫难逃的境遇中,无论是中国传统节日,还是外来的各种洋节,其实都被抽空了,成为徒有其表的摆设而变了味道。比如圣诞节到了我们这里也就是一个消费日,或者时尚标签,不至于对中国传统节日造成多大的威胁。真正的危险反而来自我们自身,像中秋节这样温情的节日,却成为月饼商人炫技卖乖的秀场和无良政客们腐败和投机钻营的通道。 费孝通曾经提出作为一个世界大国和文明古国,中国应有这样的文化胸怀和文化志向:“各美其美,美人之美,美美与共,天下大同”。这样的理想同样可以用来表达我们对待节日的态度,不卑不亢。在文化认同感严重缺乏的今天,不是变着法儿打着节的旗号来赚钱来消费,而是带着虔敬之心认认真真过好我们自己的传统节日,这或许才是我们的本分。     2、清明节与现代社会的矛盾:农耕节气在工业时代的末路 核心提示:清明最初是个春天节气而非节日,在二千五百多年前的周代,清明是一个很重要的节气,清明一到,气温升高,正是春耕、春种的大好时节,故有"清明前后,种瓜种豆""植树造林,莫过清明"的农谚。农耕社会的基本特征是自足的自然经济,具有狭隘的地方性,总不能彻底改变各个民族和地区之间的闭关自守的状态。作为节气的清明节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工业时代与农耕节气的矛盾重重,似乎农业节气与城市里的现代人已经渐行渐远。 专家称清明最初是个春天节气而非节日,在二千五百多年前的周代,清明是一个很重要的节气,清明一到,气温升高,正是春耕、春种的大好时节,故有“清明前后,种瓜种豆”“植树造林,莫过清明”的农谚。 中国古代利用土圭实测日晷,将每年日影最长定为“日至”(又称日长至、长至、冬至),日影最短为“日短至”(又称短至、夏至)。在春秋两季各有一天的昼夜时间长短相等,便定为“春分”和“秋分”。在商朝时只有四个节气,到了周朝时发展到了八个,到秦汉年间,二十四节气已完全确立。公元前104年,由邓平等制定的《太初历》,正式把二十四节气订于历法,明确了二十四节气的天文位置。 二十四节气名称首见于《淮南子o天文训》,《史记·太史公自序》的“论六家要旨”中也有提到阴阳、四时、八位、十二度、二十四节气等概念。汉武帝时,落下闳将节气编入《太初历》之中,并规定无中气之月,定为上月的闰月。 二十四节气每一个分别相应于太阳在黄道上每运动15°所到达的一定位置。二十四节气又分为12个节气和12个中气,一一相间。二十四节气反映了太阳的周年视运动,所以在公历中它们的日期是相对固定的,上半年的节气在6日,中气在21日,下半年的节气在8日,中气在23日,二者前后不差1~2日。 农耕社会的基本特征是自足的自然经济,具有狭隘的地方性,彼此闭塞;农本经济可以发展到较高水平,包括手工业、商业、以及市集、城镇等等;各个以农为本的地区之间,也可以发生不同程度的交往,并且发生不同程度的影响,但是,只要还是以农为本,总不能彻底改变各个民族和地区之间的闭关自守的状态。 大约在一万年前,古代世界开始发生了农耕和畜牧。世界上先后出现了几个各具特色的农耕中心。最早的是西亚,在美索不达米亚周围地带,这里的居民最早驯化了野生麦类,发展为种植小麦、大麦的农耕中心。其次是包括中国在内的东亚、东南亚。中国的黄河流域培育了小麦。中国长江以南以至东南亚、印度恒河一带,则以培育水稻为特色。另外有一个种植玉米的中心是墨西哥。秘鲁可能是另一个种植玉米的中心。还有撒哈拉沙漠以南的非洲内陆,学界认为也可能也有独自发展起来的农耕中心。农耕中心形成以后,就缓慢地向它易于农耕的地方发展。经过几千年后,就欧亚大陆而言,中国由黄河至长江,印度由印度河至恒河,西亚、中亚由安那托尼亚至伊朗、阿富汗,欧洲由地中海沿岸,都先后成为农耕和半农耕地带。这个地带绵亘于亚欧大陆两端之间,形成一个偏南的长弧形。史学界称此长弧形地带为农耕世界。农耕最初是与畜牧结合的。在欧亚大陆,易于农耕的地带基本偏南,即从东到西形成了农耕世界。 农耕经济对中国文化的发展有重大影响。这种农耕经济能够创造出世界上最早的最先进的文明。但是,它使中国形成农业和家庭手工业相结合的自给自足的自然经济。男耕女织,规模小,分工简单,不用于商品交换。农耕文明,受封建思想束缚,闭关自守。中国古代并没有形成典型的农牧结合的经济结构。农耕文明发展的后期,越来越限制了中国社会的发展。 我们的传统节日大都与古代的农业生产紧密相连,当我们告别农耕社会奔赴工业社会之后,传统节日在工业大生产时代功能开始式微,工业时代与农耕节气的矛盾重重,似乎农业节气与城市里的现代人已经渐行渐远。另一方面,又在西学东进,西节也迅速在这片土地上枝叶繁茂起来,甚至有喧宾夺主之势头!圣诞节、情人节、复活节、万圣节、感恩节似乎已经成了光辉的“中国节”,商家的精明造势加上年轻一代的盲目追随则推波助澜--传统节日渐行渐远,西方节日大行其道。   3、清明节与现代社会矛盾:帝王宗教迷信强加给百姓习俗 核心提示: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对此,有学者就指出,清明节像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并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另外,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也在某种程度上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传统节日是原始崇拜和宗教禁忌观念的存储器 从人类对自然的认识来看,农业文明起源于远古时期人们在采集、渔猎等生产活动中对自然物候的观察。自然因其与人类生息相关的天然优势而成为了苗族祖先崇拜的第一个对象。“这些自然现象和外界物体,同人一样能说会道,有喜怒哀乐,并有善恶之分。”崇拜导致了宗教禁忌观念的形成。这样的传统节日,直接体现了苗族先民的原始崇拜和宗教禁忌观念。 例如,黔东南地区的苗族为了祭祀“谷神”一年来给人们带来的好收成,而在每年稻谷将熟之际举行“吃新节”;为了祭祀祖先对自己一年生产生活的护佑,而在冬月的第一个卯日举行隆重的“苗年节”。贵阳地区的苗族为纪念传说中抗击官军在喷水池附近遇难的英雄亚努,而于每年农历四月初八到喷水池附近聚会,逐渐形成了“四月八”节日。 在上述节日中,把曾经为自己民族立下汗马功劳的神话英雄视为自己的保护神,是苗族先民在生产力相对落后的情况下,对自然界拟人化理解的结果,蕴涵了某种古朴的自然崇拜观念;而在“吃新节”前禁止人们在田里收谷子食用,则是“谷神”崇拜导致的禁忌观念的体现。由此来看,原始崇拜正是通过制度化了的节日祭祀仪式或禁忌,符号化为集体记忆的一部分。 清明节与现代社会的矛盾:帝王宗教迷信强奸百姓民族习俗 清明节的起源,据传始于古代帝王将相“墓祭”之礼,后来民间亦相仿效,于此日祭祖扫墓,历代沿袭而成为中华民族一种固定的风俗。本来,寒食节与清明节是两个不同的节日,到了唐朝,将祭拜扫墓的日子定为寒食节。冬至后一百零五天谓之寒食,从前这天禁火,冷食,故又称“冷节”、“禁烟节”。民间传说寒食是为了纪念春秋时的介子推被火焚于绵山,晋文公下令禁火。介子推是山西人,所以冷食习俗在山西首先流行。旧时寒食断火,次日宫中有钻木取新火的仪式,民间也多以柳条互相乞取新火。 对于,湖南学者张一一还有以下的观点仅供参考: 一、就来源而言,清明节始于古代帝王将相的“墓祭”之礼,并不是像我国另两大传统节日春节和端午节般发自民间。究其本质,清明节不过是当官为政者的一场奢侈作秀,其原始的意义压根不是为了纪念祖先,而是在特定的社会环境和落后的科学条件下,人们为追求心理平衡而进行的一种迷信活动。时至当下,清明节的思想和内涵依然保留着它的封建迷信本质,而这在人类文明高度发达、以马克思主义哲学武装国人头脑的今天,无疑是绝不可取的。 二、由于清明节的封建迷信本质使然,这使得这一所谓节日很容易变相演绎成一种“光宗耀祖”的仪式,不少为富不仁者贪赃枉法者岂能放过如此这般美好“荣归故里”、“衣锦还乡”的良机,不大摆筵席铺张浪费一番简直对不起早已被腐朽的列祖列宗哪!自从这几年清明节成为“国假”以来,张一一先生亲眼目睹攀比之风日盛,谁家的坟墓气派,谁家墓前放的鞭炮多、烧的“房子”大,甚而至于还有焚烧名贵烟酒的……清明节赫然成一场不折不扣的“烧钱秀”,而我劳动人民的疾苦,在清明节蔚为壮观的鞭炮声和火光中是如此卑微。 三、将以汉文化为主要背景的清明节以“国假”形式强加给各少数民族,是对他们生活习惯的极大不尊重,有伤害他们民族感情、强奸他们民族习俗的嫌疑。 四、清明节地位的提高使“风水”等唯心主义思想抬头,助长了在人民群众中弘扬封建迷信的不良风气,不利于我国正如火如荼举行的思想道德文化建设。 4、清明节与现代社会矛盾:郊游恋爱变平常 习俗渐消亡 核心提示:清明郊游之俗由来已久。先秦时期,史书记载践巨人迹而生弃(后稷),是最早的女子因郊游而生子,自然是男女欢会的结果。周代,郊游之俗“会男女”的内容被明文写进国家法典。到了春秋时期,郊游之俗已经与狂欢节无异了。魏晋时加进了文人的流觞和赋诗,唐宋又发展为踏青。而现代人工作忙碌、人际关系愈来愈疏离,郊游、恋爱也已经变成平常事,现在的中国人在清明节,除了扫墓祭拜,也并不清楚在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对此,作家冯骥才说: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清明,“节日”仍存在 “感觉”已消亡 “清明不只是扫墓祭拜,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知名作家、中国民间文艺家协会主席冯骥才在第三届中国清明(寒食)文化论坛上说,“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冯骥才表示,国家舍弃3天的GDP,而将清明节、端午节和中秋节增补为法定节日,不是件小事。他说,当前有不少公众特别是年轻人不了解节日文化内涵。因此在平常的节日里,生活也是空空荡荡、无事可做。久而久之,传统节日便退化为普通的假日,失去了原有的意义。 他举例,韩国的端午节至今仍保留着荡秋千等传统,日本的樱花节也必须穿和服。而中国人在清明节,除了扫墓祭拜,却并不清楚在这一天里还有插柳、蹴鞠、放风筝的风俗。“当这些民俗消失殆尽时,清明节的内涵也将随之消亡。” 冯骥才还表示,人民是节日遗产的携带者,更是节日的传承者。他说,节日建设不应只由政府、专家打造出来,而更需要符合节日的主题。“政府工作报告提出文化是一个民族的精神和灵魂。”因而他提议,促使全民对节日实现集体认同,需从下一代抓起。同时,节日文化应该更多地与地域文化特点相结合,使之切实浸润到孩子们的心灵深处,“让孩子们在节日中享受中华文化是我们的目标、更是我们的责任。否则,节日文化传承就是空谈”。 英国平均每十个人里面,就有一个感到寂寞,分析原因,现代人工作忙碌、人际关系愈来愈疏离是主要原因。网络可能让人封闭起来,不过即使不出门,它也可以让你和全世界联系,然而这样的联系,和面对面的互动,毕竟不同。调查显示,18到34岁的受访者,有将近六成经常、或是有时感觉寂寞。 清明郊游文化蕴涵三次演变:男女欢会,文人雅集,士女踏青 清明有郊游之俗。每至此日,多有青年男女结伴出行郊外,寻青山绿水之地纵情游玩,或藉草饮宴,或临流高歌,好不畅快!正如宋人吴惟信《苏堤清明即事》一诗所咏:“梨花风起正清明,游子寻春半出城。日暮笙歌收拾去,万株杨柳属流莺。” 其实,清明郊游之俗,早在先秦时期就已经有了。《商颂·玄鸟》说:“天命玄鸟,降而生商。”玄鸟即燕,契为殷人之祖。简狄吞玄鸟之卵而生契,虽是知其母而不知其父时代的一种传说,但燕子来时即仲春时节,古代有娀氏的女子简狄一行三人正浴于河中却是事实。这与周人女祖先姜嫄春天出行郊外,践巨人迹而生弃(后稷)的故事,同为史书所记载的两次最早的女子郊游。因郊游而生子,自然是男女欢会的结果。后世讳言,故以“吞卵”、“践迹”之说而为其蒙上一层神秘的色彩。但我们却可以据此说,这种以春天、水边和男女欢会为背景的郊游习俗,远在4000多年前即已经出现了。 到了周代,郊游之俗不但持续不衰,而且还得到了官方的正式承认,并将“会男女”的内容也明文写进了国家的法典。在仲春之月(即夏历的二月),不但民间恋爱自由,“奔者不禁”,而且政府又发布命令鼓励男女相会。而对于那些没有正当理由而不执行命令的,还要“罚之”。当然,这是指那些还没有成家的男女而言,若已有家室者,不在此例。但就是这样,郊游的场面也便空前地热闹起来了。在那桃花盛开、春水涣涣的溱河和洧河岸边,一群群的青年男女正手执香花香草,边互相调笑,边沿河游观。诗篇还用特写的镜头,记录了一对恋人的谈话。只听女的说:“到前面看看吧!”男的说:“已经看过了。”女的又说:“再看看吗!那洧河岸边,场面真是太盛大而又令人快乐了。”可以想见,春秋时期郑国的郊游之俗,实与后世的狂欢节差不多了。 到了汉代,随着礼教的加强,郊游之俗已由周代的“仲春之月”而缩减为三月上旬的第一个巳日,即所谓“上巳节”。而节日期间,无论帝王还是百姓,都要到水边洗濯,以除不祥,从而更突出了郊游中的祓禊(除去不祥,祈求福祐)习俗。据《汉书·外戚传》记载,汉武帝即曾“祓霸上”,《汉书》注引孟康曰:“祓,除也,于霸水上自祓除,今三月上巳祓禊也。”但即使是官方在有意往祈祷仪式方面引导,而民间的上巳日却仍然是男女欢会的佳节。自魏以后,郊游的日子又被固定在每年的三月三日。王羲之与谢安、孙绰等41人在会稽郡山阴县(治所在今浙江绍兴)西南的兰亭所进行的郊游,便是一次典型的文人雅集。王羲之《兰亭集序》记其盛况云:三月三日,王羲之与谢安、孙绰等41人在会稽郡山阴县(治所在今浙江绍兴)西南的兰亭所进行的郊游,便是一次典型的文人雅集。王羲之《兰亭集序》记其盛况云: 永和九年,岁在癸丑。暮春之初,会于会稽山阴之兰亭,修禊事也。群贤毕至,少长咸集。此地有崇山峻岭,茂林修竹;又有清流激湍,映带左右。引以为流觞曲水,列坐其次,虽无丝竹管弦之盛,一觞一咏,亦足以畅叙幽情。 虽然春天和水边的背景不变,而男女欢会的主题则变为文人的流觞和赋诗了。觞即酒杯,所谓“流觞”,即用耳杯盛酒置于环曲的水上,任其漂浮,杯子到了谁的面前,谁就饮酒赋诗。这便形成了以文人雅会为主要特征的魏晋郊游习俗。 唐宋以降,踏青又成为清明郊游的一大主题。陈元靓《岁时广记》引唐人《辇下岁时记》云:“三月上巳,有赐宴群臣,即在曲江。倾都人物,于江头禊饮踏青,豪家缚棚相接,至于杏园。”杜甫《丽人行》诗亦云:“三月三日天气新,长安水边多丽人。”其所谓水边,即长安城南的曲江池。池为汉武帝所造,至唐又大加兴建,遂成为一处水波荡漾、佳木如荫的郊游胜地。宋代郊游与唐代大致相似。孟元老《东京梦华录》记清明期间“都城人郊游”玩赏的情形说:“四野如市,往往就芳树之下,或园囿之间,罗列杯盘,互相劝酬。都城之歌儿舞女,遍满园亭。抵暮而归。……轿子即以杨柳杂花装簇顶上,四垂遮映。”而张择端《清明上河图》所描绘的,便是当时东京(今开封)的清明时节,人们扫墓、踏青归来的真实景象。 明、清迄今,清明郊游也仍以踏青为主。刘侗、于奕正《帝京景物略》(卷五)记明人郊游云:“水从玉泉来,三十里至桥下……岁清明,桃柳当候,岸草遍矣。都人踏青高粱桥,舆者则褰,骑者则弛,蹇驱徒步。既有挈携,至则棚蓆幕青,毡地藉草,骄妓劝优,和剧争巧。”清人钱琦《台湾竹枝词》亦云:“提壶挈榼坐平沙,恣意春游到日斜。”直到今天,那些清明郊游者不到日暮也是不肯回归的。所不同的是,今人郊游多半为男女结伴而行,于出行地的选择,也越来越倾向于清幽之处,在领略自然风光、感受春情春意的同时,又把郊游作为畅叙友情和爱情的大好时机了。 由男女欢会,而文人雅集,而士女踏青,这是清明郊游文化蕴涵的三次演变;由仲春、而上巳、而三月三、而清明节,则是清明郊游在时间上的逐渐固定。在这种演变中,清明郊游又同其它所有的文化习俗一样,经历了一个由原始自发到礼仪固定,最后又回到民间的过程。 5、“祭祖”是中国传统国教 祭奠死人为对活人产生意义 祭奠死人是为了对活人产生意义 中国自古就有祭拜先人的孝道传统,对于中国人“入土为安”的生死观,夏学銮教授认为清明祭奠对活着的人存在更大意义,“进行对后代孝道的教育;与家人有个团圆的机会,比如家庭成员不和睦的,看在先人的面也能稍微冰释前谦”。人们并不是真的相信去世的人还有知觉,能感受到我们的情意,而更多的是一种中华民族的孝道传统,所以祭奠死去的人是为了对活着的人产生更大的意义。 “敬天祭祖”是中华民族最重要的宗教传统 祭祖是由于祖先崇拜而产生的一种仪式。祖先崇拜是鬼神崇拜的发展,也是鬼神崇拜的一种形式。祖先崇拜和一般的鬼神崇拜不同的是它有长期固定的崇拜对象,并且与崇拜者有血缘关系。人们尊崇祖先的亡灵,定期举行祭祀,认为祖先的亡灵会保佑子孙后代,赐予他们幸福。后来人们又用这种民间信仰来维护宗法制度,因此,中国古代特别重视祖先崇拜。从商周开始,丧葬、祭祀便成为重要的礼仪系统。重丧,所以尽哀;重祭,所以致敬。中国古时的祭祖活动都是在宗庙里举行的,祭祀时所用的器具、摆设、祭者的服饰、仪仗与祭祀的程序,都依主祭人的身分等级及祭祀名目的不同而有着详细、严格的规定。祭祖成了维持统治秩序与道德关系的一种伦理手段,其目的在于增加整个社会的凝聚力,所谓「报本反始,民德归原也」。因而,祭祖以及由此而形户的一系列宗庙制度,就成了中国伦理文化的中心。 牟教授是这样评价这一宗教传统的重要性的:“研究中国中世纪的宗教而不研究传统的祭天祭祖祭社稷,就不只是部分的短缺,而是主导线索的丧失,其失误是根本性的。” 其实,只要我们粗略翻一下二十五史中的《礼志》或《礼乐志》,就会承认:在中国历史上,这一“敬天祭祖”宗教信仰的社会地位和所产生的影响要远远超过其它任何宗教。无论对皇帝、官员、还是对普通百姓来说,佛教、道教只是“业余爱好”,可以信也可以不信;但祭天地、祭宗庙、祭社稷等则是皇帝必须履行的政务,各级官员也都有明文规定的官祭对象和官祭制度,军民人等也不能不敬“天地君亲师”(民国后改为“天地国亲师”)、不能不祭祖。 西方人遇事时是祈祷“上帝保佑”;而中国人的传统则是祝告“上天”、“苍天”、“上苍”或“皇天”。如果遇到什么意外,西方人脱口而出的是“MyGod!”而大多数中国人脱口而出的则是“天哪!”“老天爷!”西方人得到什么福泽,总是说“感谢上帝”、“感谢主”;而中国人则习惯说“谢天谢地”。西方人总爱说“上帝的意旨”、“上帝的指引”;而中国人则是说“天意”、“天命”。 西方人举行婚礼是去教堂,由牧师代表神做见证;而中国人举行婚礼则是“一拜天地,二拜高堂(指父母双亲)”。西方人将去世称为“见上帝”;而中国人将去世称为“归天”。佛教传入后,中国人去世有时也说“归西”;但百姓平民去世可以说“归西”,而皇帝、大臣、重要人士去世还是要称“殡天”、“归天”。西方人的丧礼由牧师主持仪式;东南亚一些佛教国家的丧礼据讲是由僧侣主持。据《仪礼》,中国古代丧礼是由一种叫“祝”的人来主持。后来佛教传入后,中国人的丧礼也可以请僧道,但并非必定;而且僧道只管诵经、做法事,没有担任主持人的。 将这种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传统宗教称为“中国民间宗教(Chinesefolkreligion)”的确是太小瞧这一宗教传统了,因为“敬天祭祖”一直是各朝代皇家最重要的崇拜祭祀活动。有些西方著作将这种敬天祭祖活动放在“中国古代宗教(Chineseancientreligions)”的标题下进行叙述,这一名称还比较说得过去。如上所述,利玛窦也将这种宗教传统称为“古代的”宗教。 但“中国古代宗教(Chineseancientreligions)”这一名字会使人产生误解,以为这种宗教传统后来就消失了。但如我们所知,直到辛亥革命,这种“敬天祭祖”始终是举国上下最重要的宗教活动。还有的西方著作中将这种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称为“原初的基本的中国宗教(theoriginalbasicChinesereligion)”,感觉这一称呼与“中国古代宗教”相仿,有合理性,但也会给人以这种宗教后来消失了的错觉。 从世界范围看,像基督教、伊斯兰教、佛教那样有明确创始人、有特别入教仪式、有特别名字的宗教在数量上反倒是少数。大多数古代宗教都是没有明确创始人、没有特别入教仪式、没有特别名字、由该地区上古先民自发形成的“全民性宗教”;如果一定要命名的话,一般是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例如,谁知道古代埃及宗教、古代希腊宗教、古代罗马宗教的创始人是谁?有什么入教仪式?叫什么特别的名字?都没有。如果一定要给个名字来称呼的话,一般是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称之为“古埃及宗教”、“古希腊宗教”、“古罗马宗教”。犹太教、印度教也都是这种用其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的宗教。 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这一中国传统宗教也是这种没有明确创始人、没有特别入教仪式、没有特别名字、由中华上古先民自发形成的全民性宗教。如果一定要给个名字来称呼的话,那好像也应该用国家或民族的名字来命名,所以称之为“中国传统宗教(Chinesetraditionalreligion)”或“中国传统国教(Chinesetraditionalstatereligion)”似乎比较合适。如果仿照“印度教”“犹太教”的称呼,称之为“中国教”或“中华教”(China-ismorChinese-ism)似也均无不可。 当然,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由于与儒学“合作相处”时间最长、“交集”部分也很大,特别是与“上古儒学”的“交集”部分更大,所以如果将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称为“儒教”,人们也能理解。我们甚至可以认为“儒教”是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的“别名”。但应当明确,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与“儒学”并不完全是一回事;不能误解为只有“儒者”信奉,如前所述,源于中国本土的各家各派都没有不“敬天祭祖”的。 做一个也许并不很恰当的比喻:周树人一生用过很多笔名,直到38岁才用“鲁迅”这个名字。但由于他用“鲁迅”这个笔名时间最长、所发表的有影响的作品最多,所以“鲁迅”这个名字反倒比他的本名“周树人”更为人所知。但“鲁迅”这个名字并不代表周树人的全体、与周树人并不完全是一回事。“周树人”这个名字不仅比“鲁迅”更原本,而且涵盖范围也更广,因为周树人不仅仅用过“鲁迅”这个笔名,还用过很多其它的名字。 同理,儒学虽然与这一中国传统宗教“合作相处”时间最长,人们也可以习惯性地称这一中国传统宗教为“儒教”。但“儒教”这个名称并不能代表这一中国传统宗教全体,因为这一中国传统宗教要比“儒教”这一名称更本源、涵盖范围更广,而且这一以“敬天祭祖”为主要内容的中国传统宗教与儒学之间彼此都有一些并不“交集”的部分。 请本文作者与本栏目联系。 6、清明缅怀故人的至深精神是为做生死沟通 清明节不仅是一个传统节日,还应该是今天和未来的大众节日,应该强调其“保存记忆,沟通心灵”的功能。 近年来常听到这样的议论:现在的年轻人越来越爱过洋节日,却忘了我们的传统节日。又有人感叹,为什么洋节日可以过得热热闹闹,我们的传统节日“味”却越来越淡?其实,东方也好,西方也罢,任何节日都离不开它的宗旨和内容。圣诞等节日是宗教性的,所以只要这种宗族信仰存在,节日就会延续。世俗的节日则离不开具体的活动。如果那些活动吸引不了民众,或者无法再进行,这个节日就名存实亡,除非找到新的、有吸引力的活动。 从先秦发展到近代,清明节的主要活动是扫墓、祭祀、寒食、踏青等,其中最重要的还是生者与死者的沟通。先秦和秦汉时代,“视死如生”是人们的普遍观念,一般人都相信,人死了后还继续以另一种形式存在于地下或另一个世界。所以除了在安葬时为死者提供必要的“生活”基础外,还得有经常性的维护和补充。经过一个寒冬的冰霜雨雪,死者的居所需要维护、清扫和美化,这就是扫墓和祭祀的出发点。也正因如此,清明扫墓和祭祀,历来不限于自己的祖先或亲人,还包括民族共同的祖先和圣贤先烈。 清明节不是一年中唯一的祭祀,也不是最隆重、丰盛的祭祀,但清明是离死者最近的祭祀——一般都在墓地举行。所以除了祭祀的形式和物质部分外,还必然包括生者与死者之间的心灵沟通。在这过程中,个人、家族、人群、民族、国家的重大往事,必然得到一次次的回顾和追忆,对历史的记忆就这样形成和保存。就国家和知识阶层而言,历史可以通过书面记载或传统典籍加以保存。但对绝大多数并不具备文字记载的权力和能力的人来说,这样的记忆是他们传承历史的唯一途径。 在世界文明古国中,只有中国的历史和传统没有中断,一个重要的原因,就是中华民族无比珍视自己的历史,而其中的绝大多数人正是通过无数次与先人的心灵沟通,口耳相传地保存着对先人的记忆。例如,中华民族通过不断的迁徙使疆域得到扩展,文化得到传播,人口得到繁衍。但不管迁到哪里,移民的后裔都会追根寻源。直到今天,山西洪洞大槐树、湖广麻城孝感乡、江西瓦屑坝、苏州阊门外、南京杨柳巷等地还是亿万移民后裔祖先的圣地、心中的根。这些移民过程,正史中很少提及,它们能流传至今,就是靠一次次清明节扫墓和祭祀,将祖先筚路蓝缕的迁移、艰苦卓绝的开拓和种种嘉言懿行告诉子孙后代。这些记忆还随着人口的迁移,传播到海外的华人聚居区,遍布世界。 今天,多数国人不再相信死者存在于另一个世界,多数死者已实行火葬,甚至不再保留骨灰,不建坟墓。清明节的扫墓和祭祀的形式已发生很大的变化,但保存记忆和沟通心灵的功能不仅依然需要,而且应该不断加强。近年来,各地已经恢复或新设了不少祭典,但大多只注重形式,忽略了它们“保存记忆,沟通心灵”的功能。如果我们真的希望清明节不仅是一个传统节日,还应该是今天和未来的大众节日,那就得为保存记忆、沟通心灵创造相应的活动内容和形式。 (作者葛剑雄,复旦大学教授) 7、缅怀逝者保存共同记忆 清明节成家族团圆日 中新网杭州4月5日电(记者龚读法 实习生金斌)清明节是中国著名的传统节日之一,这一天的主要活动是扫墓、祭祀、寒食、踏青等。在这万物复苏、吐故纳新的时节里,缅怀祖先,祭奠亲人是中华民族的共同仪式,而借助清明这一特殊的日子,家族的成员在这一天聚首,分享回忆、交流感情。4月4日清明节,记者在杭州市区以及周边县市采访发现,在清明节,人们已不再单纯的表达对逝者的缅怀,更多了生者之间的交流与沟通。 4月4日一大早,家住杭州市桥西直街的王大妈便开始动手准备清明节的祭奠物品。“清明节之前,家里就已经准备今天要去给去世长辈扫扫墓的,孩子们都放假了,过一会儿就都会过来了。”王大妈一边准备着一些特色寒食,一边对记者说道,“平时大家都忙着工作,想聚一下都很难,不过清明节这一天意义重大,不用通知,每个人都会自发的放下手头的工作去看望自己的过世长辈,一家人也可以趁机好好地聚一聚了。”说话间,王大妈脸上显出满足的笑容。 据了解,杭州的许多市民在清明节这一天都不约而同地选择了一个家族的成员共同扫墓的形式。长辈原本就是属于一个家族里的所有人的长辈,大家共同前往祭奠,不但能够表达对逝者最大的尊重,对于这个家族来说,也是一个很好的交流沟通的机会。 在杭州半山公墓,一位手捧洁白雏菊的市民表达了自己对清明节的独到见解,“清明节主要是祭祀与踏青,但是它作为中国最重要的传统节日之一,清明节与除夕、中秋一样,也可以说是每一个家族大团圆的日子,在清明这一天,大家因为共同的记忆而聚集在一起,因为有共同的亲人而使得相互之间的亲情变得更加牢固。” 记者在采访中了解到,在清明节,杭州市民都会选择在上午出门扫墓踏青,祭奠先辈亲人之后,一家人便会好好团聚一番,那情景颇有些类似于除夕夜的大团圆。生者的团聚,给这个阴雨绵绵、思亲断肠的特殊时日增加了许多暖意。保存大家共同的记忆,并由此增加彼此之间的沟通,成为清明节大家的共同愿望。 8、清明关注“死”更赞美“生” 精神安顿是主要功能 核心提示:清明是一年之中万物最具生机的时节。也是人们外出、踏青、沐浴清新空气、享受自然情趣的时节。清明关注“死”,更加赞美“生”,清明的精神是将“生死并置”。清明时节更需要更多地关注人们的生活和生命——珍爱生活、珍爱生命。清明祭奠先祖、先烈,应当突出一个‘敬’字。对先祖要敬,对先烈要敬,对祖国要敬,对人民要敬。儒家学说,“修德之功,莫大于敬”。“敬”要敬天、敬地、敬祖、敬民、敬业、敬己。心存虔敬,行必谦恭;做人处事,谦虚谨慎。“满招损,谦受益”是普遍真理。   随着中国城市化的进程加快,现代化的快节奏、流动性强的生活方式也正被越来越多的人接受和适应。而与此相对应的是,春节、中秋、清明等许多传统节日的内涵也在逐渐变化,那么如何赋予传统节日新的内涵和活力,这将是保护中国文化遗产、维护和继承传统节日的重要课题。 就在清明将至的时候,北京市委宣传部主办了“清明节文化论坛”,大家共商现代化之下如何过好传统节日。专家们提出,可通过“家训堂”等途径传承家庭传统美德,让公众在清明节养成自省的习惯,利用清明踏青对孩子开展教育等。此外,在清明节植树、美化小区等亲近自然的做法,也适合城市居民的节日生活。还有专家建议,让节日出游比平时更有文化味儿。 传统节日与自然的和谐 传统节日往往不仅仅包含着社会文化的内涵,有时候还具有浓厚的人与自然和谐的内涵,中国社会科学院旅游研究中心副主任,北京联合大学教授刘德谦表示,研究这些节日会给我们新的启示,“清明节和中国许多传统节日一样,它的文化内涵是异常丰富的。它融合了中国的三个传统节日,即寒食、清明、上巳。这三个节日的来源和文化内涵并不雷同。比如‘上巳’,这个远古用洗浴来‘祓除不详’的‘修禊’的日子,后来渐渐地发展为了在水边休息娱乐的日子。这在春秋时代就是这样了。虽然它包容的活动很多,但是如果我们今天意识到在水边的环境才是它的核心所在,而不用‘戴柳’‘踏青’去误导民众,那么它就有可能摆脱旧时活动产生的生态负效应。如果我们又注意到了其诸多健身娱乐活动中的蹴鞠(被公认为现代足球的起源),有意去发扬它,也许能提升中国足球界旧貌换新颜的决心。” 清明关注“死”更赞美“生” 即将到来的清明节不仅是祭祖的日子,同样也是二十四节气之一,北京市哲学社会科学规划办公室副主任、研究员李建平表示,发挥节日本身所具有的内涵,更能让人悟到生活的美好。他说:“首先,清明节是祭祀日,其文化内涵是祭祖不忘祖,缅怀先人业绩,感谢先人的恩惠,核心是传递人类之情感。同时,清明还是中国农历二十四节气之一,是一年之中万物最具生机的时节。也是人们外出、踏青、沐浴清新空气、享受自然情趣的时节。清明关注‘死’,更加赞美‘生’。了解这样一个道理,我们在清明时节就不要异化祭扫活动,一味烧纸钱,奢侈大办,而是要更多地关注人们的生活和生命。特别要关心青少年,要倡导他们珍爱生活、珍爱生命。” 精神安顿是节日主要功能 文化部民族民间文艺发展中心主任李松认为,节日是以安顿社会精神为主要功能的时间节点,是全社会的,不应该落下任何一个人,尤其是清明节。李松还建议:“首先要明确节日是以精神安顿为主要目的的社会安排,不宜过分强调其中的经济因素。其次,通过不同层级政府部门对先烈、先贤祭奠的官方活动与民间传统活动的互动,强化国家意识、集体意识和价值观念、伦理道德的认同。其三,选择植树造林等公益事业与清明踏春的习俗结合。其四,遵循以人为本的服务理念,尽可能地为节日中广大民众的实际需求提供服务,如扫墓路上的交通、祭奠用品等。其五,利用现代科技手段和传媒,为新时期节日文化提供与时俱进的活动空间和文化平台,如网上祭奠等。此外,还要特别关注和尊重少数民族的文化传统。” 9、活着是一种修行 人生无常责任为大 核心提示:三毛曾说:“人生的聚散本来在乎一念之间,死只是进入另一层次的生命,聚散无常也是自然的现象,实在不需太过悲伤。”人说生命是初生的无知、少年的天真、青年的成熟、中年的练达、老年的愤世疾俗;人说生命是母亲的慈爱、父亲的严厉、爱人的柔情、朋友的关切,是世上一切情感的组合体,我们每个人来到了这个世间,短短数十载的光阴,我们又回到了天堂。生命,是一项随时可以终止的契约。生命,更是一个荒谬的玩笑,总是在最精彩时刻戛然而止,然后留下无数破碎片段,苦苦地折磨每一个活着的人。 以往我每次回乡下老家,儿时的几个伙伴都要上门来与我聊上一阵子,我也去他们家走走。这次“十一黄金周”回老家,我震惊不已:他们中一个遇车祸身亡,另一个染急病去世,还有一个患上不治之症!我顿觉生命的无常,产生对生命的敬畏之感。 死亡,本是一个残酷的字眼,而不到一年,竟有三个同龄人与我天人相隔,让人情何以堪! 生命是什么?人说生命是初生的无知、少年的天真、青年的成熟、中年的练达、老年的愤世疾俗;人说生命是母亲的慈爱、父亲的严厉、爱人的柔情、朋友的关切,是世上一切情感的组合体;人说生命是余晖衬夕阳、青松立峭壁、万里平沙落秋雁、三月阳春映白雪,是宝刀快马、金貂美酒、冷月孤歌的漂泊。 生命,又是一只无常的手,翻过来又覆过去,让人瞬间直达云霄,瞬间跌入深渊。伴随着一阵哭声,我们每个人来到了这个世间,短短数十载的光阴,我们又回到了天堂,这就是人生,两点一线式的生命历程。有多少人结伴而行?有多少人印证了“不求同年同月同日生,只愿同年同月同日死”? 生命,还是一项随时可以终止的契约,撕毁太过简单。可以和谁相约一生,携手走到尽头?终究,还是聚散无常。没有谁能知道下一秒会发生什么,没有谁能肯定自己还能抓紧些什么,没有谁能预言生命的明天是个什么模样,没有谁能知晓上天会突然带来什么带走什么。我们,只能小心翼翼。 生命,更是一个荒谬的玩笑,总是在最精彩时刻戛然而止,然后留下无数破碎片段,苦苦地折磨每一个活着的人。三毛说:“其实人生的聚散本来在乎一念之间,死只是进入另一层次的生命,如果这么想,聚散无常也是自然的现象,实在不需太过悲伤。”真的可以这么想么?真的可以这么做么?当你在亲身经历那种生离死别的时候,真的可以这么豁达淡然么?怎么可能! 自古以来,女子的生命似乎特别轻贱。女子的生命是貂婵轻舞的团扇,是昭君出塞的风沙,是杨玉环抛上树的白绸,是西子坠湖时的涟漪,是绿珠溅落的鲜血,是黛玉葬花的悲吟,是窦娥赴刑场的怒火,是白娘子被压塔下的凄苦——红颜薄命啊! 那么男儿呢?“对酒当歌,人生几何。譬如朝露,去日苦多……”曹丞相横槊赋诗慨叹人生苦短。列御寇御风而行,超然洒脱;庄周不被世俗所累,归隐田园;李白淡薄名利,留下千古佳话……反观周兴、来俊臣之辈贪图钱财,使自己一生不得安宁;卫青曾与霍去病抵抗匈奴立下大功,却为了功名害死李广,自己也忧郁而终。生命应得到善待,但凡追名逐利而不折手段者,其生命也将暗淡无光。 一次聚众讲道时,佛祖问众弟子:“人生有多长?”有个弟子回答:“50年。”佛祖说:“不对。”弟子又说:“40年。”“30年。”“20年”……答案越来越小,最后有个弟子甚至回答:“一个小时。”佛祖依然笑着摇了摇头。有个弟子忽然茅塞顿开,说道:“人生难道只在一呼吸间?”佛祖听了,笑着点点头。 不错,人的生命就在一呼吸间,即使长命百岁,也无非是一呼一吸的多次重复。“人生七十古来稀,三分之一要睡去……”朱自清先生曾在《匆匆》中为我们算这一笔账时,告诫青年们要珍时、惜时。鲁迅先生也曾当头棒喝青年们:“时间就是生命。”虽然都欣赏“生命诚可贵,爱情价更高,若为自由故,二者皆可抛”的人生哲学,但生命乃是人们最初的珍爱。惟有生命的存在,才有可能言及其它。 卡缪认为:“如果有罪,不是因为你对生命感到绝望,而是因为你把希望寄托在来世,放弃今生无可取代的美好。”表面上他的主张正好与宗教家们唱反调,实际是他看到了生命的短暂和无常,呼吁世人要善待生命,要利用这难得的人生去寻找自心的清净,还心灵一片宁静的天地。因为有生就有死,死亡等归于零,“生往何来,死往何去”,人死了,就不存在了,但人活着,就存在着,并非一无所有。“众生皆有佛性”,只要还活着就有了悟的机缘,就有显现佛性的机率,就有弘扬真、善、美的可能。 契诃夫说过:“要是已经活过来的那段人生只是个草稿,另有一段誊写的人生该有多好啊!”台湾作家余光中也曾有“假如我有九条命就好了”的慨叹,他希望用第九条命从从容容的过日子,看花开花谢,人来人往,并不特别追求什么,也不被“截止日期”所追迫。其实我们又何尝不是时常产生如此的念头?但这只是我们不切实际的想法,充其量也只是个不能实现的梦想而已。正如著名作家蒋丹所言:“人来世上是个偶然,而走向死亡是个必然。” 人生短短几十年,何其短暂又是何其宝贵啊!“逝者如斯夫,不舍昼夜。”大江东去,浪淘尽千古人物,有名的、无名的,都曾在我们所站立的地方生活过,而今却化为一抔黄土。于是又想起保尔·柯察金的那段名言:“人,最宝贵的是生命,生命对于每个人只有一次,这仅有的一次生命应该怎样度过呢……”谁都知道生命的可贵,但是又有多少人真正懂得去善待生命呢? 生活在这个物欲横流的时代,我们每天都在忙着学习、工作、考试、应酬……还有必不可少的吃喝拉撒睡玩。我们每天都生活在快节奏当中,于是不管事实如何,“忙”成了我们生活中最经常的慨叹与借口。我们没有时间去思考。也许只有当我们身体有恙时,我们才会意识到生命是如此的脆弱。 “生命不仅可以用年月计算,有时事件也是最好的日历。”谁都知道生命是最宝贵的,但很少有人懂得善待生命。除了生与死能引起几声欢呼、几阵痛哭外,健康生活在世上的人很少会想起生命,认为拥有生命是一种幸福。 “你活在世上幸福吗?”我问。“幸福?我还赶不上百万富翁的一半儿呢!”有人如是答。于是在他们的眼里,生命就是手中的巨额支票、股市上跳跃的荧光屏、餐桌上的珍馐佳肴、豪华的别墅加豪华的轿车。 打开报纸,触目惊心的关于生命的消息:洪灾、绝症、饥饿、暴虐、谋杀、事故……满眼是苦苦挣扎的生命。放下报纸,又整个人投在紧张的生活中,把那些令人心悸的事抛在脑后:“想那些干嘛?我总要活嘛。”我们只顾埋头生活,忘记了生命的存在。我们挤在熙熙攘攘的人群中,行走在车水马龙的街上,毫不在意多少生与死曾经或也许发生在身旁。 生命原是一个危险的旅程,当我们跨出生的一步,也同时迈向死亡。意外、疾病,随时都可能夺去我们的生命,我们又有什么理由不使这仅有的一次生命变得绚丽呢?善待生命,生命就将幻化为七色燃烧的彩虹。 或许,在现实生活中,我们遇到了太多的虚伪、脆弱、冷漠、麻木、颓废……使我们怀疑生命的真谛,会琢磨怎么样才能使生命绽放绚丽的光芒,怎么样才能寻找生活的多姿多彩,坚定“黄沙百战穿金甲,不破楼兰终不还”的信念,加深“月是故乡明,露从今夜白”的思念,执着地追逐自己那个美丽的梦。然而,在我们跋涉了一段人生之路后,驻足回首,会感到一种心灵的疲惫与迷茫,“衣带渐宽终不悔,为伊消得人憔悴”!如何才能走出这无尽的迷宫?山重水复,柳暗花明,我顿悟到,一个睿智的人绝不会因为路途的风险与坎坷而懈怠,放弃那本来美好的梦。这样,七尺男儿才能披荆斩棘,以更大的热情与毅力继续生命的旅途,完成我们生命的使命。 我想,每一个活着的人,都要时常地问自己:属于自己的生命还有多少呢?当我们不得不承受离别的痛苦,不要流泪,要笑对生命的无常。因为在另一个世界里,你的亲人在默默地看着你,他们希望看到的是一个坚强、好好活下去的你。 不要等到生命的最后一刻才感悟出生命的美好。在拥有生命的每一天里,学会善待生命,善待身边的每一个人,每一件事,每一份情感。 10、死亡是人类的节日 落叶归根死于安乐 核心提示:史铁生《我与地坛》中说:“死是一件无须乎着急去做的事,是一件无论怎样耽搁也不会错过的事,是人类的一个节日。”席慕蓉《幕落的原因》中写:“在掌声最热烈的时候/舞者悠然而止/在似乎最不该结束的时候/我决定谢幕……上帝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人生幕落的时间。”人们害怕死亡不是缘于害怕“死”的本能,而是因于喜欢“生”的习性。一是“怕生”。每个小孩都怕见生人,成人不仅依然怕见“生人”,而且怕见“生事”。二是“有话”。朋友相聚,有话要说,依依不舍。 在2010年最后一天黎明时分,史铁生离开了人世。他的《我与地坛》第一次指引我思考生存和死亡的意义。“死是一件无须乎着急去做的事,是一件无论怎样耽搁也不会错过的事,是人类的一个节日。” 死亡是人的各种可能性中唯一必须由自己承担,而且必须实现的可能性。在日常生活状态中,我们避而不谈自己的死亡,是因为我们畏惧死亡。一旦我们明确了死亡的不可逃避,必须自己担当,死亡的可能性就直接剥离了人与他人、与社会的关联,使之成为自己最本己的事情。但这也同时催生出“人的存在的意义”问题,人的生存只有在生活世界中才能赢获荣光与尊严。 在一项调查中,73.9%认为追求生命质量是实现生命价值的重要目标,人应当维护生命尊严或者应该活得有质量,26.1%认为生存是最基本的人权,保障个人生存是无条件的。作为人的生命过程中的死亡阶段的一种良好状况和达到这种良好状况的方法,安乐死不是一种人工死因或一种致死手段,其目的在于避免死亡的痛苦和折磨,改变死亡前的自我感觉状态,维护死亡时的尊严。 关于生死,许多人在孩提时代都一定朦胧地想过,因为每个“幼稚”的人都渴望:我能永远活下去就好了。孩提时代的人生,刚刚尝到人生的甜头,不谙世事,无忧无虑,在心里对世界充满着好奇和求生的欲望。可是人长大了,以为死是人生理所当然的事情,除了怕死,就不再去思考“死”的问题;二十岁以后再去思考“死”的人,就多半不是生活中的常人。所以思考“死”问题的只有两种人:极幼稚和极成熟的人。 人为什么会死啊?我的回答是:因为“人”注定要死,任何人对“死”都没有回天之力。那么“死”是谁“注定”的呢?读过我的人生理论的人一定会推测出我的回答:“死”是超人力量决定的。其实这个回答没有新意,在人类最早的智慧中就已经发现“死”的定数,如产生于古巴比伦的人类第一部史诗《吉尔伽美什》就说过:“当神造了人,就把死亡给了人类。”那为什么“神”这个超人力量要安排每个人都有“死”的命运呢?这是因为超人力量给人生安排的内容是折腾,而生活循环和生死循环是折腾展开的重要形式。人生可“玩”的宇宙内容是恒定的,而人生折腾必须折腾出新鲜花样,人才会对生活有兴趣并充满热爱之情。可是人生几十年,几十年就看完看透了,几十年就玩腻了,如果不死,那干什么啊?如果不死,拿200年来给人活的话,那么每个人都会活得极其不耐烦,都要努力地自寻死路。我家乡老百姓骂那些患有“折腾癖”的人时爱说一句:“你活得不耐烦了是吗?”的确有不少人是活得很不耐烦了,活三十年、四十年,就已经活得很不耐烦了,怎么还能永远活下去啊? 超人力量的造物能力有一种局限,就是送给人的“玩物”始终是有限的。如果超人力量规定每个人都活一百岁以上,那么每个人都会因为“玩尽一切”而成为无聊之人和疯子,然后疯疯癫癫地玩到130岁、150岁或200岁以后,通通都会迫不及待地自寻死路。他们这时对“死”的渴望,就像年轻时对“生”的渴望一样心切。这时如果他们的子子孙孙苦苦哀求他们多活几年,他们也是绝对不会同意的;而实际上所有的子子孙孙都不会希望他们100岁以上的老人继续活着,而是希望他们赶快死去,因为上上下下、老老小小的人都已经享福和伺候得很“腻”了、折腾得很“腻”了,必须要有“死人”的事情发生,才能使下一代的生活折腾换一种暂新(非“崭新”)的局面。所以超人力量就规定:你们玩吧,尽情地玩我赐予你们的“玩物”吧,并且玩够了就死吧。就像任何运动游戏都有时间和场次的规定,都有“完结”的时候,玩多了就没意思了;人生这场“大游戏”也是如此,必须有完结的时候,活多了就没意思了。就像人在深夜玩到一点、两点、三点钟就想睡觉一样,人玩到90岁、100岁和100岁以后就想死了;这时死和睡完全是一个概念,没有恐惧和痛苦,只不过死了就不再醒来。 超人力量规定人应该在什么时候死去、活的极限在哪里,一定是颇费周折的。席慕蓉《幕落的原因》中的极妙诗句写道:“在掌声最热烈的时候/舞者悠然而止/在似乎最不该结束的时候/我决定谢幕……我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幕落的时间”——这最后一句照我的意思可以改为:“上帝需要有足够的智慧/来决定/人生幕落的时间。”因此超人力量决定:人应该在折腾的乐趣意犹未尽、但大戏已完的时候死去,而不要等到对“生”充满厌倦、活得不耐烦了才死。有的人正活在兴头上就突然要死,他很遗憾,其实根据超人力量的规定,他“落幕的时间”已到,再活下去就没意思了。 超人力量规定给人“玩”的东西,无论有生命和无生命,其运动形式都是循环的,生与死——无疑是人生内容循环折腾最重要的形式。人类生活中的前后、左右、上下、高矮、大小、圆缺、黑白、好坏、优劣、进退、取舍……等等,这许多数不清的循环语意,都是反映人生内容的循环形式。循环折腾是一个非常关键的人生概念,要读懂人生,必须看懂循环。在人类历史上,只有佛法大道是真正看懂人生循环的;在中国历史上,只有《易经》和《老子》是基本看懂人生循环的。看懂人生循环的人,他就不会畏惧死亡,死亡只是生命形式的转变。宇宙内容是有限和循环的,更不要说整个动物世界了。在动物界,最主要的生死循环是转变。人死了变牛变马,也可能再变为人;动物死了变人,也可能变为其它动物。动物界循环不已的个体数量是恒定的,人多了别的动物就少,人少了别的动物就多,这其间作为连接点的就是一个“死”字。 苏格拉底说死亡只有两种可能状态:一是死后无知觉,二是死后灵魂从一个世界移居另一个世界。如果死亡是前一种失去知觉的状态,那其实是一种安详得连梦都不会来打搅的深睡,苏格拉底说这样的深睡是一种收获——难以言说的安然无梦的愉快收获——永恒不过就是一夜。这样地“深睡”的“一夜”有什么可怕呢?如果死亡是死者迁往另一世界永居,那么死亡就应该是像旅游观光和搬迁新居一样令人高兴,这样地从“生”到“死”的旅行和迁居,也没有什么让人可怕的啊。死亡的两种状态都不存在可怕的理由,因此当苏格拉底被判处死刑时,他便毫无惧色地把毒酒喝下,并且平静地微笑着向朋友、法官告别:“分离的时刻到了,我们各自上路吧——我走向死亡,你们继续活下去;至于生死孰优孰劣,只有上帝知道。” 死亡不存在可怕的理由。如果把这个道理讲给所有人听,所有人都听懂了,并且都认为事实的确如此,但所有人依然会害怕死亡。这是为什么呢?当然怕死是超人力量植入人体的本能,但超人力量规定的每一件世事都有其因果机制。根据超人力量的规定,人害怕死亡不是缘于害怕“死”的本能,而是因于喜欢“生”的习性。 这样的习性至少有两种。第一种是“怕生”。每个小孩都怕见生人,成人不仅依然怕见“生人”,而且怕见“生事”。人人都有安于现状的习性,人的现状是“活着”,因此每个人都有安于“活着”的习性。相比“活着”的习惯而言,死亡只有一次,不可能有习得的经验,每个人对“死亡”都是生疏的,在生死之间并不能像走路从第一步迈到第二步一样心无所碍、游刃有余。因此所谓“怕死”其实是“怕生”——害怕一件完全“陌生”的事情。 第二种习性是“有话”。朋友相聚,有话要说,就不愿离去,不得不散时也总是依依不舍。为什么人们会感慨“天下没有不散的宴席”,就是由于人们都依恋聚谈的美好时光。人生的内容是知识折腾,想要发泄、表达的话语数以万计,就像聚谈不忍分离一样,人们聚在世上折腾知识,总是害怕死去。如果一个人完全超越知识,面对万千世象和亲友众生无话可说,那么他就生死无谓,也无畏了。禅宗高僧能够像如履平地一般轻松自如地死去,就是因为他明心见性、超越死生而无话可说,许多僧徒想在禅师示灭之际请求一字一句偈语而不可得。世俗之人对后代总是有操不完的拳拳爱心、道不完的谆谆教诲,所以他们害怕死亡;他们害怕死亡,就是因为死亡是一件剥夺“发言权”的天大事情。 11、生如夏花绚烂死如秋叶静美 恐惧死亡因着对世界的眷恋 核心提示:泰戈尔在诗中曾这样描绘生命:“生如夏花之绚烂,死如秋叶之静美。”人们从对死亡的恐惧转变为对死亡冷静的思考。人与其他物体的区别在哪里?人这种物体是在通常我们自己认为的物体的“要素构成”上又加入了记忆、情感、心理及特殊物体(身体)等。人这种物体是更加复杂的复合体,其在“实”的基础上“承载”、包涵了更多的“虚”。虚并非空,因为一切虚中皆蕴涵了实,尽管这“实”有时并非以某种真实形体存在。怕死即等价于怕自身生命体的消失,也等价于怕消灭自我复合体所拥有的恒久性。 泰戈尔在诗中曾这样描绘生命:“生如夏花之绚烂,死如秋叶之静美。”人们由原来对死亡的恐惧转变为对死亡冷静的思考。 宇宙间的生命体有生就有灭,非生命体也该同样。事实上呢?没有生命的物体有何生灭可谈呢?一句话,只要存在于宇宙间的物体就应归入生命体的范畴。而为什么出现了非生命体这一概念呢?这实在是人类为了表述的需要而做的不得已的“分类”结果。通常人们对是否属于生命体多从“细胞学”的角度来评判而非“分子学”。于是绝大多数的动植物、微生物被归入生命体,其他(比如星座、山石等)则被称之为非生命体。这样来讲,可能有人会感到比较玄奥。细想一下:腐水有生命吗?一个去世的人在没有被火化前即使他(它)已停止了思维、停止了心跳,他(它)身体上还存在局部的生命吗?我相信是有的。只有当生命体已经无“体”可言,已经全部“融入”宇宙时,我们可以说生命体消失了。生命体的消失所对应的是新生命体的诞生而并非是非生命体的诞生。 世间万物(生命体)的生灭是无法逾越的必然,为什么我们不能对自身的“灭”坦坦然接受?为什么我们对生命之终如此之怕呢?人怕死的根源是什么?人为什么怕死实在是一个不好讲述的问题,我们先从与人密切相关的物体谈起。 奥地利的物理学家马赫这样来定义物体:由颜色、声音、压力等在时间和空间方面(函数方面)联接而成的相对恒久性的复合体。我们给这些宇宙间的复合体起了一个特别的名称,这便是物体。人属于物体吗?平心而论,无疑也是。人这种物体与其他物体的区别在哪里?主要在于人这种物体是在通常我们自己认为的物体的“要素构成”上又加入了记忆、情感、心理及特殊物体(身体)等。也就是说,人这种物体是更加复杂的复合体,其在“实”的基础上“承载”、包涵了更多的“虚”。虚并非空,因为一切虚中皆蕴涵了实,尽管这“实”有时并非以某种真实形体存在。人是主要以“虚”(特指思维、智慧等。)来控制领导“实”(整个有形身体)的一种极其特殊的物体。怕死即等价于怕自身生命体的消失,即等价于怕消灭自我复合体所拥有的恒久性。自我的恒久性随时都有消灭的可能,而一般来说自我恒久性的消灭是按照一定的规律经过时间的消耗而逐步、局部进行的。它并非一促而就,局部的消灭在时刻进行。当局部消灭积累到一定程度,整体消灭(人的死亡)降临。思维、智慧高的人相对越看重貌虚内实的“精神”,对精神越看重的人越易体验到生命的丰富性与曲折性的乐趣,如此以来便极易对现实世界产生更大的留恋。思维、智慧低的人相对越看重貌实内虚的“物质”,对物质所取的缺乏使其很难体验到生命的丰富性与曲折性的乐趣,如此以来便极易对非现实世界产生更大的向往。前者因对宇宙主观求索而导致了对世界之不二法“从哪来到哪去”追问不休,后者因对宇宙懵懂无知而导致了对世界之不二法“从哪来到哪去”期冀奇迹。一个人死后是进入天堂还是下入了地狱?另一个“世界”有没有悲欢离合?天大的笑话,绞尽脑汁的追问什么!?不思不想的期冀什么?宇宙间的一切物体都是从无中来到无中去,既然你我都要成为了“无”、都要成为了不存在,哪来的实(形体)虚(精神)?没有了实虚,一切感受(包括怕)全部消失。生命之门越临近关闭时人的恐惧越大,对于一个曾经存在过思维、智慧等的特殊物体来说,在其思维、智慧等就要殆尽时,他已经处在了从“有”向“无”转变的临界点。在这个临界点上如果人还有些清醒,他会在自己的大脑中“释放”生命中曾经存在过、潜隐过的“虚体”形式:悲欣交集、万千滋味!“释放”的终结落在对自我恒久性的消失:存在过的自己就要不存在了! 人为什么怕死?你我明知生命体有始有终,自己仍抱有对生命尽可能延长直至不老的奢想;你我明知时间没有恒久,自己仍要妄待特例的出现;你我明知“无中生有”,自己仍做着“无中生无”(生命体结束希望生出“非生命体”的“生命”)的美梦。 人为什么怕死?只要你我对整个宇宙的认识不是彻底的了无挂碍,只要你我在清醒状态下意识到对整个宇宙还有未知,人怕死实在是正常。人为什么怕死?因为存在过。 人类在整体上保持怕死是一件好的事情,否则人类将急剧走向灭亡。在这一点上讲,人对死的害怕是推动人类发展的极大动力。另一方面,如果一个社会、国家几乎没有不怕死的人(或者认识极高、极低导致不怕死、或者信仰导致不怕死),这样对于人类自身的发展也是不太有利的。
11    (론문)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성원 댓글:  조회:4795  추천:0  2012-07-16
儒家孝道思想的三大内容 玄 盛 元   秦汉时期的中国最初的词典《尔雅》中解释道;“善父母为孝。”(释训)《说文解字》中也解释说:“孝,善事父母者。从老、从子,子承老也。”(许慎)因此,当人们谈论儒家孝道思想的时候,往往最容易想到的就是子女赡养父母的内容,其实,儒家孝道思想不仅局限于子女赡养父母的内容,还包括其他两个层面的内容,一个是对祖先崇拜、祭祀的内容,另一个是生儿育女、传宗接代的内容。  早在殷商甲骨卜文中已经发现“孝”字,成熟的“孝”字是会意字,“老”的略字在上,“子”字在下,以此,我们可以想象出丰富的伦理、道德的含义。以金文和小篆的会意文字结构来分析我们先可以想象出;1、灵位前子孙在跪拜的形象,2、儿子驮着老父母的形象,3、爷爷怀抱小孙子的形象…等等,对于其含义我们可以想象出;一是崇拜祖先,二是赡养父母,三是传宗接代。“孝”的会意结构向我们展示了“孝”所具有的最原始、最质朴的意蕴,尽管这只是一种萌芽状态,但已经明确告诉我们了整个孝文化的出发点。正是通过对“老”和“子”这种原发性的生命关系的延伸和提升,才形成了内涵丰富、博大精深的孝文化。 对祖先的崇拜和祭祀是对生命渊源的追孝意识的体现;对父母的孝敬则是对现存活生命的珍视与关爱意识的体现;生儿育女、传宗接代则是让家族生命得以延续而谋求昌盛意识的体现。在以家庭为单位的社会里,人类的生命正是通过这三个环节的不断交替得以传承和提升。 儒家孝道思想的本质就是尊重生命意识。   一、对祖先的崇拜 随着人类进入文明社会,我们的祖先逐渐认识到生命的宝贵性,在长期而艰苦的生命活动过程中,开始重视自身存在的意义和生命本源问题,同时思考如何加强生命活力的问题。当时生产力极其落后,人的生命力也相当脆弱,人们逐渐产生对祖先的崇拜和感激的意识,同时产生祈求祖先神灵得以保佑的意识。“万物本乎天,人本乎祖”(《礼记·效特性》),“无先祖焉出?”(《大戴礼记·礼三本》)等观念的产生形成了对祖先的崇拜意识最初的思想基础。人们认识到自己的生命来之不易,是祖先们经过漫长的艰难岁月一代一代传承下来的,所以做人不能忘祖,“君子反古复始,不忘其所由生也。”(《礼记·祭义》)于是,人们开始以各种形式表达对祖先的崇敬、感激和追思之情。 在西周金文中已经发现不少关于孝的记录,大部分出现在各种祭祀活动的记录中,如《追簋》中有“用享孝于前文人”(《三代吉金文存》),《酒诰》中有“用孝养厥父母”(《尚书·酒诰》),《文侯之命》中有“追孝于前文人”(《尚书·文侯之命》)…等等。当时对祖先的崇拜意识主要以祭祀形式来表达,而孝的内容基本上还是局限于对祖先的崇拜上。由此可知,产生孝观念的文化根源直接与对祖先的崇拜意识有关。 对祖先的崇拜观念把古代氏族制度的遗存带到文明社会里来,发展成宗族制度,对于家庭结构、社会心理和意识形态方面产生了深刻影响。 早在上古殷商时期,中国盛行崇尚天地、崇尚祖先的原始宗教,到了春秋末期,崇尚天地的意识通过老子发展成道教,而崇尚祖先的意识通过孔子发展成儒教,儒教又以对祖先的崇拜思想为核心创立孝道思想加以发展,使儒教思想的内容更加丰富,更加体系化。 孔子虽主张“郁郁乎文哉!吾从周”(《论语·八佾》),但他谈论孝并不是只注重西周的文化,而是继承和发展春秋的新思想,他将孝还原成人们对祖先、父母的真实情感,为孝提供了合理的伦理依据。在回答宰我问“三年之丧”时,孔子曰:“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论语·阳货》)由此可知,当时已经盛行的父母死后“三年之丧”并不是依据什么圣意而决定的,而是依据为回报已故父母养育之恩的具体要求而决定的。 在长期的历史大变革当中人们的意识也发生了巨大变化,孝道对祖先的以感恩为主的祭祀意识逐渐发展成为以祈求保佑为主的祭祀意识。从此,孝道对祖先的祭祀意识发展成为一种社会性制度。 “夫孝,天之经也,地之义也,民之行也。”(《孝经·三才》)孝道思想发展成为东方文化圈内一切社会行为的根本准则和从事一切社会活动的起点,故曰“夫孝,三皇五帝之本务,而万事之纲也。”(《吕氏春秋·孝行览》) 我们的先人举行对祖先的祭祀活动,制定了严格的执行制度和烦琐的程序与规范,其目的是为了确保祭祀的严肃性和唤起人们对祖先的诚意。人们坚信只要竭尽诚意进行对祖先的祭祀,就可以得到祖先神灵对现实生活的保佑,万事可以太平顺利,家族可以繁荣昌盛。 以现在的观念来看问题,对祖先的祭祀是否真有那么大的神通是尚要进一步研究的问题。可是,对祖先的祭祀活动对增强家族观念、传授优良传统、促进家族和睦等方面确实有很积极的作用。   二、对父母的孝敬 孝道思想的尊重生命意识不仅在敬宗祭祖的活动中体现,更重要的是在现实生活中珍惜和爱护现存活生命过程中体现。孝道思想把对祖先的崇拜和感恩的意识化为一种现实的意识,对生命的关怀也相应地转化于现实的伦理生活中,将基本内容发展到赡养父母、兄爱弟悌、保全自己的新境界。这就是孔子所倡导的儒家孝道思想的核心部分。 1、赡养父母 孟子道:“孝子之至,莫大乎尊亲。”(《孟子·万章上》)荀子也曾说:“能以事亲谓之孝。”(《荀子·王制》)可见,孝首先是赡养父母,诚如《孝经》所云:“夫孝,始于事亲。”关爱父母、孝敬父母,“父母之年,不可不知也。一则以喜,一则以惧。喜者何,喜吾父母在,可以时常尽孝也。惧者何,惧吾父母老。恐不能长久以尽孝也。故曰:祭而丰,不如养之薄。死而哭,不如生之顺。与其致敬于无形,不若承欢于眼。与其伤心于日后,不若尽心于生时。”(《论语·里仁》) 子女理应珍惜父母有限的生命,尽可能地保证父母长寿。当然,对父母的孝敬、对父母生命的延长,在物质层面上的赡养是必不可少的,但更重要的是在精神层面上的关怀。孝敬父母的实质在于爱、在于敬、在于尊重。孔子在论及孝敬父母的时候也多侧重于发自子女内心的真情实意。如:“子夏问孝。子曰:色难。”(《论语·为政》)“孟武伯问孝。子曰:父母唯其疾之忧。”(《论语·为政》)孔子弟子子游问孝,子曰:“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论语·为政》)这就意味着孝敬父母在物质层面上的满足只是其中的一个方面,在此基础上更要对父母有恭敬之心。“顺乎亲有道:反诸身不诚,不顺乎亲矣。”(《中庸》)其中所体现的思想就是说,孝顺父母是有原则的,孝敬父母要常常反问自己对父母尽孝是否是发自内心的诚意,如果对父母不是内心诚意,也就谈不上是孝顺父母了。从外在形式来看,孝敬父母的行为要严肃庄重,要合乎于礼:“生,事之于礼;死,葬之于礼,祭之以礼。”(《论语·为政》)“孝子之事亲也,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孝经·纪孝行章》)从内在情感来看,孝敬父母要怀有真诚的态度和真挚的感情,要“笃于亲”,只有心里对父母有笃诚的亲爱之情。才能做到“事父母,能竭其力”,才能做到对父母“又敬不违,劳而无怨”。 总之,对父母的孝行具有不同层次和境界,但核心是尊敬,诚如曾子所言:“其孝有三:大孝尊亲,其次弗辱,其下能养。”(《礼记·祭义》) 2、兄爱弟悌 在儒家孝道思想中,除了注重“父子有亲”,也很讲究“兄弟有序”。因为家庭的基本关系是以父母、子女、兄弟、夫妇等共同构成的,其中兄弟关系在家庭中也占有很重要的地位。 传统长幼伦理的基本规范是“兄友弟悌,长幼有序”。以兄长为主,以弟幼为从,具体的传统伦理规范要做到: 一是亲而爱之;仁爱或友爱是孝道思想的重要的道德规范,它也是正确处理人际关系的重要原则。“惟孝,友于兄弟,克施有政。”(《尚书》)对兄弟的爱也体现在祸福相同、忧乐与共上。兄弟间要荣辱与共,分享幸福,分担痛苦,把幸福送给对方,将痛苦留给自己,这是兄友弟悌最为宝贵的德行。“仁人之于弟也,不藏怒焉,不宿怨焉,亲爱之而已矣。”(孟子·万章上) 二是宽以悔之;“宽”是指宽恕、宽厚。宽恕是处理个人和他人交往时要有宽广豁达的胸怀,设身处地地为他人考虑。推己及人,平心容人,严于律己,宽以待人。古人提倡“为人兄者,宽裕以诲;为人弟者,比顺以敬。”(管仲)在家庭内部,兄弟之间讲求宽恕是非常必要的,它可以使兄弟间正确地对待他人的缺点和错误,恰当地处理自己和兄弟的关系,缓解兄弟间的纠纷和矛盾,创造一个和谐的生活氛围,有利于家庭的安定团结。对于兄弟之间的矛盾,儒家的基本态度就是要以同胞情谊为重,尽力互让,不使矛盾激化。《诗经》上有:“兄弟阋墙,外御其侮”,“兄弟虽有不忿,不废懿亲”。对兄弟要宽以诲之,就是作为兄长除了对弟弟要宽恕、宽厚外,对弟弟还有训导之责。“至于兄弟之际,吾亦惟爱之以德,不欲爱之以姑息。教之以勤俭,劝之以习劳守朴,爱兄弟之以德也:丰衣美食,俯仰如意,爱兄弟以姑息也,姑息之爱,使兄弟惰肢体,长娇气,将来丧德亏行。”(曾国藩家书) 三是表以率之;“表”指榜样、模范。道德表率,或者说道德示范是社会运行的重要机制。由于中国古代社会结构保留了原始氏族制的遗迹,特别是英雄崇拜的影响,因而对道德表率,特别是对长辈自身的道德表率作用的重视,显得尤为突出,成为“德治”、“教化”思想的重要内容,也是处理人际关系的重要准则。榜样的力量是无穷的。作为表率,影响力的体现不是靠说教,而是靠自己的身体力行,因为言传不如身教。 除了兄长对弟弟要遵循一定的伦理规范外,弟弟对兄长也要遵循一定的伦理规则。这些传统伦理规范对弟弟也提出了专门要求: 一是尊之敬之;“兄爱弟敬,……兄爱而友,弟敬而顺。”(司马光·家范)兄弟之间,最重要的是相互爱敬,“居处恭,执事敬”(《论语·子路》)遇到问题委曲求全,以保“怡怡”之乐,这是保证兄弟亲爱之道。 二是顺之从之;提到“弟”本身就包含着顺从之意。班固在《白虎通》里说:“弟者,悌也,心顺行笃也。”,“弟,悌也,言顺于兄”,“为人弟者,比顺以敬。”这些伦理规范,都是主张弟弟顺从兄长,但是也不能无原则的顺从,有道当从,无道可不从。 3、保全自己 在孝道思想中所蕴含的尊重生命意识还表现为对自我的关怀、珍爱。“身者,亲之遗体也。行亲之遗体,敢不敬乎?”(《大戴礼记·曾子大孝》)身体不仅是自己生命的承载体,同时也是父母生命因子在我们身体中的延续。善待自我、重视自我就是对父母乃至祖先健康生命因子的保全。“父母全而生之,子全而归之,可谓孝也。不亏其体,不辱其身可谓全也。”(《礼记·祭义》)“君子无不敬也,敬身为大。身也者,亲之枝也,敢不敬与?能敬其身,是伤其亲。伤其身,是伤其本。”(《礼记·哀公问》)为了保全自身的生命,为了自身安全,不登高,不临深,不处险地,游必有方。当然,伤风败俗、违科犯禁的行为更不能去做,以达到“不辱其身,不羞其亲,可谓孝矣”(《礼记·祭义》)的境界。 孔子的弟子曾子临死时对他的弟子们说:“启予足,启予手。”(《论语·泰伯》)让弟子们看到自己的身体是完整的,没有损伤,并以此感到欣慰。曾子说,自己在生活中“战战兢兢”、“如履薄冰”,十分注意不使自己的身体受损伤,这是因为他认为自己的身体是受之于父母的,其中承载了从祖先传下来的生命。 曾子等都认为,受之于父母以完整的身体,应该以完整的身体还给父母,才能使父母的生命也得以健康延续,这也是孝道思想中的一个重要内涵。“身体发肤,受之于父母,不敢毁伤,孝之始也。”(《孝经·开宗明义章》)作为一个生命体,自己的身体肯定是过去生命的承载体,生命是通过这一有形物体而贯穿于过去、现在和未来的整体。人们对自我存在、自我生命的重视,正表现人们对生命的崇高敬意。因为人的生命源于父母,父母的生命无限地往上追溯则来自天地,因此,人们对自我生命的敬意就好比对父母、对天地的敬意一样。在家族观念流行的社会背景下,强调对自身的珍视、爱惜,体现出对家族生命健康传承的责任意识。   三、对子孙的养育 祭祀祖先、孝敬父母、兄爱弟敬、保全自身只是孝道思想中的几个阶段,只有让家族的生命力不断延续下去,才是最大最终的孝。“孝有三:小孝用力,中孝用劳,大孝不匮。”(《曾子·大孝》)孝道思想体现出人的生命意识,从祖先到父母,从父母到自己,从自己到自己的后代,生命就是在这样的传宗接代的延续中得到流动、生生不息,从而也实现了人们对于生命有限的遗憾而追求永恒的一种价值取向。父母的生命传续到自己,如果不能继续延续下去,那将是一件非常严重的事。“不孝有三,无后为大”(《孟子·离娄上》),“无子为其绝世也”(《大戴礼记·本命》),正是这种思想的明显体现。生命总是在代代相传中得以延续,这也是人类有限生命对无限生命的一种追求。以关爱生命、重视生命为内容的孝道思想,正是这样的一种生命价值观。这种生命价值观既表现为渴望生命延绵不断的传递,又表现为追求生命价值的不断升华。 从人的自然生命本性来说,任何一个个体生命都是有限的、暂时的,要想获得生命的延续,而实现生命的永恒,就不得不考虑传宗接代问题。生命的延续是通过家族延续的形式表现出来的。这样,家族生命的传承与家族的兴旺发达的价值观念就联系起来了,婚姻便成了人们生命延续的一件大事。“天地不合,万物不生;大婚,万世之嗣也。”(《礼记·哀公问》)男女结婚就成了传承祖先生命的一项重要内容,生儿育女成为保持家族生命兴旺的重要手段,是人生至关重要的责任。孔子说:“父母生之,续莫大也。”(《孝经·圣治章》)只要每一代人都努力承担起传承生命的重任,家族生命就会枝繁叶茂,万代不竭。 生命传承不仅表现为绵延不断的自然和生物意义的传承,更表现为对家族生命的物质传承和文化传承乃至精神传承(包括家业、家风等),而后者是一种更有意义的价值传承。家族生命价值的物质传承的基本要求是传承家业,家族生命价值的文化传承的基本要求是传承良好的家风。孔子在回答孟懿子问孝时说:“无违。”孔子还说:“父在观其志,父没观其行,三年无改于父之道,可谓孝矣。”(《论语·学而》)具体说来就是为了好好继承先祖基业,就要继承先辈的优秀精神和优良风范。“夫孝者,善继人之志,善述人之事也。”(《中庸》)没有很好地继承先辈的优秀精神和优良风范就很难守住祖宗基业,这种人往往被认为是不肖子孙而遭贬斥,无论再大的富豪、文豪,只要后世出现一个不肖之孙,祖先几百年基业会毁于一旦。 从个体对家族生命的传承上来说,个体仅仅维持祖先遗留下来的基业是不够的,更重要的是能够在继承祖先的基础上有所创新、有所突破,要使家族生命在维持前辈的基础上有所超越,使整个家族生命意义得到辉煌发展,生命传承的意义也就体现出来。如果想使整个家族生命得到传承,其出发点便是立己身。“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终于立身。”使自己的地位身份能够确立是传承生命最重要的一步。“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也。”(《孝经·开宗明义章》) “立身行道”的内涵是丰富的:“太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虽久不废,此之谓不朽。”(《左传·襄公二十四年》)诚如孔子所担忧的那样“君子疾没世而名不称也。”(《论语·卫灵公》)如果一个人在经过立德、立功、立言等三方面的努力,能够使自己垂德后世、建功立业和著书立说,最终实现超越短暂而有限的生命,获取人的永恒的生命价值。这一超越,从个人角度而言,既获得了现实生活的幸福,又实现了自身生命价值,体现了人生的意义;从家族角度而言,既可光宗耀祖、彰显其亲还可以进而福荫子孙;从社会角度而言,可以报效国家,有益于民众。立言就是著书立说,妙手著文章。如果达到了立德、立功和立言的完美结合,那么就意味着圆融了生命的意义,体现了生命的价值。这样,也就达到了孝的新境界,实现了传承家族生命和完善自我生命的统一,真正实现了个体生命价值的不朽。   结束语 百善孝为先,孝是人生立身之本、家庭和睦之本、国家安康之本,同时也是民族生存之本。 儒家思想是一门生命的学问。因此,儒家的孝道思想也就不仅表现为一种家庭伦理思想,更是蕴涵了人类关于自身生命的尊重意识和学问。孝道实际上是中国人的一种人文宗教,反映了中国人的生命永恒不息,文化绵延不断的历史意识和终极价值理想。 文明初期,人们认识到生命的宝贵性,逐渐产生对祖先的崇拜和祭祀的意识,这是孝的最原始的萌芽阶段。后来,孝道对祖先的崇拜和祭祀意识发展成为一种社会性制度。 到了春秋战国时期,孝道思想把对祖先的崇拜和感恩的意识化为一种现实的意识,对生命的关怀也相应地转化于现实的伦理生活中,将基本内容发展到赡养父母、兄爱弟悌、保全自己的新境界。这就是孔子所倡导的儒家孝道思想的核心部分。 “赡养父母”不仅要做到物质需求的满足,更是要做到精神上的关怀,达到“又敬不违,劳而无怨”,以实现对现存活生命的爱护和关怀。 “兄爱”要做到“亲而爱之”、“宽以悔之”、“表以率之”,“弟悌”要做到“尊之敬之”、“顺之从之”,以实现对家族生命的协调发展。 “保全自己”要做到不登高,不临深,不处险地,游必有方,以实现对父母行孝的基础问题和出发点。一个人的生命是以祖先为代表的宗族生命的一部分,为了对一个宗族生命负责,首先就得保重自己的生命。 为了宗族的壮大,让祖宗生命能够永久地延续下去,每世代生命个体就必须要担负起有计划地生育后代的责任,以保证本宗族的生命载体继续健康存在;同时,正是由于这些生命载体的健康存在,承载了整个家族的精神生命,使得家族生命继续得以传承、发展。否则,家族生命的延续若受到阻碍,不仅因此而犯了世间最大的不孝,也会违背家族乃至人类生存发展的基本法则。     2011.12.20 유가 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 玄 盛 元   진한시기 중국 최초의 사전인 《尔雅》에서는 《부모를 잘 대하는것이 효이다.( 善父母为孝。)》(释训)라고 해석 하였으며, 《说文解字》에서도 《孝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老와 子로부터 子가 老를 받들고 있다.( 孝,善事父母者。从老,从子,子承老也。)》(许慎)라고 설명하였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효도사상에 대하여 담론하게 되면 왕왕 가장 쉽게 생각나는 것이 자녀가 부모에게 효성하는 내용일 것이다. 그런데 기실 유가 효도사상은 부모에 대한 효성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두개방면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그 하나는 조상에 대하여 숭배하고 제사 지내는 내용이고, 또 다른 하나는 자녀를 낳아서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내용이다.  일찍이 殷商 갑골문에서 이미 《孝》한자가 발견되였는데 성숙된 《孝》한자는 의미로 만들어진 글짜로서 《老》의 략자가 위에 있고 《子》자가 아래에 있는데 이로부터 우리는 풍부한 륜리적 도덕적 의미를 구상해 낼수 있다. 《孝》한자의 문자결구로 부터 우리는 먼저 다음과 같이 구상할수 있다: 첫째는 자손이 조상에게 제사 지내는 형상, 둘째는 아들이 로부모를 업고 있는 형상, 셋째는 손자가 할아버지 품에 안겨있는 형상…등이며, 그 함의를 구상해 볼때 첫째는 조상을 숭배한다는 의미로, 둘째는 부모를 잘 모신다는 의미로, 셋째는 가문의 대를 이어간다는 의미로 구상할수 있다. 《孝》한자의 문자결구는 우리들에게 효의 가장 원시적이고 가장 소박한 함의를 나타내고 있는데 비록 맹아상태이지만 전반 효문화의 출발점을 알려준다. 바로 《老》와 《子》의 이런 원발생적인 생명관계의 연장과 제고를 통하여 내용이 풍부하고 의미가 심각한 효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조상에 대한 숭배와 제사는 생명본원에 대한 숭배의식과 감은의식의 체현이고, 부모에 대한 효성은 현존하는 산 생명에 대한 아낌과 보살핌 의식의 체현이며, 자식을 낳아 가문의 대를 이어가는 것은 가문의 생명이 영원히 이어져 내려가 번영창성하기를 추구하는 의식의 체현이다. 가정을 단위로 하는 사회에서 인류의 생명은 바로 이 세가지 환절이 부단히 교체되는 과정에서 계승되고 제고 되는 것이다. 유가 효도사상의 본질은 바로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이다.   첫번째 요소: 선조에 대한 숭배 인류가 문명사회에 들어서면서 부터 우리의 선조들은 점차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였다. 기나긴 세월의 간고한 생명활동 가운데서 점차 자신의 생명과 그 본원을 중시하게 되였으며 동시에 어떻게 하면 생명활력을 가강할수 있겠는가를 사고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의 생산력은 극히 락후하였는바 사람들의 생명력도 상당히 취약하였으며 그로하여 사람들은 점차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면서 선조영령에 기원하는 것으로 현실에서는 얻을수 없는 리상적인 보우를 얻으려는 의식이 생기게 되였다. 《만물의 근본은 하늘이요, 사람의 근본은 선조이다.( 万物本乎天,人本乎祖)》(《礼记·效特性》),《선조가 없이 후손들이 어찌 생길수 있었겠느냐?( 无先祖焉出?)》(《大戴礼记·礼三本》) 등등의 선조관념이 산생하면서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의 최초의 사상기초를 형성하였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그것은 아직 기본人性을 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인정하였다. 《군자가 옛일을 돌이키며 다시 답사를 시작하는 것은 자기가 태여난 곳을 잊지않기 위해서이다.(君子反古复始,不忘其所由生也。)》(《礼记·祭义》) 그때로 부터 사람들은 여러가지 형식을 통하여 선조에 대하여 숭배하고 감격하고 그리워 하는 정을 표달하기 시작하였다. 西周시기의 金文중에서 이미 적지않은 효에 관한 기록들이 발견되였는데 대부분 여러가지 제사활동 기록중에서 나타났다. 이를테면 《追簋》중에 《用享孝于前文人》이라는 기록이 있고, 또 《酒诰》중에 《用孝养厥父母》이라는 기록이 있으며, 그리고 《文侯之命》중에 《追孝于前文人》이라는 기록이 있다. 당시에 이미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은 주요하게 제사형식을 통하여 표달되였으며 효의 내용은 아직 기본상에서 선조에 대한 숭배에 국한되여 있었다. 이로부터 효관념의 문화적 근원은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과 직접적으로 련관된다는 것을 알수있다. 선조에 대한 숭배관념은 고대 씨족제도의 유존을 문명사회에 가지고 들어와 종족제도로 발전시켰으며 가정결구, 사회심리와 의식형태에 심각한 영향을 일으켰다. 일찍이 上古 殷商시기에 중국에서는 천지를 숭상하고 선조를 숭상하는 원시종교가 성행하였었는데 춘추말기에 와서 천지를 숭상하는 의식은 로자에 의하여 도교로 발전하였고, 선조를 숭상하는 의식은 공자에 의하여 유교로 발전하였는데 유교는 또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을 핵심으로 효도사상을 창립하고 발전시키여 유교사상을 더욱 풍부하게 더욱 체계적으로 제고시켰다. 공자는 《다채롭구나 문장들이! 내가 주나라 문채를 따랐노라!(郁郁乎文哉!吾从周)》(《论语·八佾》)하고 주장하였지만 그가 효를 담론하면서 西周의 문화만 중시한것이 아니라 춘추의 새사상을 계승하여 효를 사람들의 선조와 부모에 대한 진실한 감정으로 환원시켰으며 효의 규례에 합리한 륜리적 의거를 제공하여 주었다. 한번은 宰我가 《三年之丧》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자식을 낳아서 삼년이 지나서야 부모품에서 떨어지더라. 무릇 삼년상례는 천하의 보편 규례로 되였다. 보답하는 것이다. 이것으로 부모의 삼년사랑에 보답할수 있지 않느냐?(子生三年,然后免于父母之怀。夫三年之丧,天下之通丧也。予也,有三年之爱于其父母乎?)》(《论语·阳货》)하고 말하였다. 이로부터 그당시에 이미 성행한 부모작고후의 삼년상례는 그 어떤 聖人의 뜻에 의하여 결정된것이 아니라 이미 작고한 부모의 낳아서 키워주신 은덕에 보답하기 위한 구체적 요구에 의하여 결정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장기적인 력사 대변혁중에서 사람들의 의식에도 거대한 변화가 일어 났는데 효도에서 선조에 대한 감은위주의 제사의식은 점차 선조영령으로 부터의 보우위주의 제사의식으로 발전하였다. 그로부터 효도의 선조에 대한 제사의식은 일종의 사회성 제도로 발전하였다. 《무릇 효라는 것은 하늘처럼 필연적이고 땅처럼 당연한 것으로서 백성들의 행위규범으로 되였다.(夫孝,天之经也,地之义也,民之行也。)》(《孝经·三才》) 효도사상은 점차 동방문화권에서 일체 사회행위의 근본준칙으로 되였으며 일체 사회활동에 종사하는 기점으로 되였다. 그리하여 옛사람들도 《무릇 효라는 것은 삼황오제가 창도한 근본사무로서 만사의 기본고리이다.(夫孝,三皇五帝之本务,而万事之纲也。)》(《吕氏春秋·孝行览》) 라고 하였다. 우리의 선인들은 선조에 대한 제사활동 과정에서 엄격한 집행제도와 번쇄한 순서규범들을 제정하여 놓았는데 그 목적은 제사의 엄숙성을 확보하고 사람들의 선조에 대한 성의를 불러 일으키기 위한 것이였다. 사람들은 성의를 다하여 선조에게 제사 지내면 선조신령으로부터 바라는 바의 보우를 받을수 있으며 만사가 태평할수 있고 가족이 번영창성할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지금의 관념으로부터 볼때 선조에 대한 제사가 정말로 그렇게 큰 신통력를 갖고 있는가 하는것에 대하여 앞으로 더 연구하여야 할 과제이지만 선조에 대한 제사가 가족성원들의 가족관념을 증강시키고 우량한 전통을 전수하며 가족의 화목을 추진시키는 등 방면에서는 확실하게 적극적인 작용을 할수 있다는것만은 완전히 긍정할수 있다.   두번째 요소: 부모에 대한 효성 효도사상의 생명존중의식은 선조를 숭배하고 제사지내는 활동중에서만 체현되는것이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현실생활중에서 현존하는 살아있는 생명에 대하여 아끼고 애호하는 과정에서도 체현된다. 효도사상은 선조에 대한 숭배와 감은의식을 일종의 현실적인 의식으로 발전시키고 생명에 대한 보살핌 의식도 상응적으로 현실적인 륜리생활중에 전화시키여 그 기본내용을 《1; 부모를 잘 모시는 것, 2;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내는 것, 3;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 등으로 발전시켰다. 그리하여 효도사상은 새로운 더욱 높은 경계에로 발전하게 되였으며 이 내용들은 공자가 창도한 유가 효도사상의 핵심부분을 형성하였다. 1; 부모를 잘 모신다.(孝敬父母) 맹자왈: 《효자의 표준에는 부모를 존중하는 그 이상이 없다.(孝子之至,莫大乎尊亲。)》(《孟子·万章上》) 순자도 말했다: 《부모를 잘 모실수 있으면 효라고 말할수 있다.(能以事亲谓之孝。)》(《荀子·王制》) 이로부터 알수있는바 효라는 것은 수선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효경》에서 말한 것처럼 《무릇 효라는 것은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夫孝,始于事亲。)》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부모의 년세에 주의 돌리지 않을수 없다. 한편으론 기쁘고 한편으론 걱정이 되는데 기쁜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아직 건재하여 계시기 때문에 시시로 효성할수 있는 그것이고, 걱정이 되는것이 무엇인고 하면 내 부모가 이미 늙어서 오래오래 효성을 다하지 못할가봐 그것이다. 그리하여 말했더라: 사망후 제사를 풍성히 차리느니 살아 계실때 검소하게 잘 모시기만 못하고, 사망후 통곡하느니 살아 계실때 웃으며 효순하기만 못하며, 존경을 하면서 무표정 하느니 확실하게 즐거운 기색을 나타내기만 못하며, 사망후 괴로워 하느니 살아 계실때 정성을 다하기만 못하다.(父母之年,不可不知也。一则以喜,一则以惧。喜者何,喜吾父母在,可以时常尽孝也。惧者何,惧吾父母老。恐不能长久以尽孝也。故曰:祭而丰,不如养之薄。死而哭,不如生之顺。与其致敬于无形,不若承欢于眼。与其伤心于日后,不若尽心于生时。) 》(《论语·里仁》) 자녀는 당연하게 부모의 제한된 생명을 아끼면서 될수록 오래 장수하시게끔 노력해야 한다. 물론 부모에게 효성하고 부모가 오래 장수하게끔 하려면 물질방면에서 충분히 보장하여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한것은 정신방면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려야 한다. 부모에게 효성하는 실질은 사랑에 있으며 존중에 있다. 공자는 부모에 대한 효도에 대하여 가르칠때 항상 자녀 마음속의 진실한 감정이 중요하다고 하였다. 子夏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항상 맑은 표정이 어렵니라.(色难。)》(《论语·为政》) 라고하였고 孟武伯이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부모의 질환을 근심하여 드리는 것이니라.(父母唯其疾之忧。)》(《论语·为政》)라고 하였으며 제자 子游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왈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사양하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사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论语·为政》) 이로부터 알수 있는바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물질방면의 충분한 보장은 효의 한개 방면에 불과하며 그 기초상에서 반드시 부모에 대하여 진정으로 공경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효순함에 있어서 원칙이 있는데 자기 마음에 반문해 보아서 진정한 성의가 아니라면 부모에게 효순한다고 말할수 없다.(顺乎亲有道:反诸身不诚,不顺乎亲矣。)》(《中庸》) 외부에서 보건대 부모에게 효성하는 행위는 반드시 엄숙하고 장중해야 하며 례의에 부합되여야 한다. 《살아 계실때는 례의에 맞추어 잘 모시고 사망하면 례의에 맞추어 장례지내고 례의에 맞추어 제사 지낸다.( 生,事之于礼;死,葬之于礼,祭之以礼。)》(《论语·为政》) 《효자가 부모를 잘 모신다는 것은 집에 계실때에는 존경을 드리고, 부양함에 있어서는 즐거움을 드리며, 몸에 병이 나면 걱정해 드리고, 사망하면 애도를 들이며, 제사를 지낼때는 숭엄함을 드리는 것이다.(孝子之事亲也,居则致其敬,养则致其乐,病则致其忧,丧则致其哀,祭则致其严。)》(《孝经·纪孝行章》) 내심의 정감으로 부터 볼때 부모에게 효성함에 있어서 반드시 성의있는 태도와 진실한 감정이 있어야 하며 부모에게 충성을 다해야 한다. 오직 부모에게 충성하고 진실한 감정이 있어야만 부모를 모심에 있어서 마음과 힘을 다 할수 있으며 부모를 존경하고 부모의 뜻을 어기지 않으며 고생하면서도 원망하지 않을수 있다. 총적으로 부모에 대한 효행에는 여러개의 층차가 있는데 핵심은 부모를 존경하는 것이다. 증자가 말한것 처럼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大孝는 부모를 존중하는 것이고, 其次가 부모를 괄시하지 않는 것이며, 其下가 부모가 죽지않을 정도로 부양만 하는 것이다.( 其孝有三:大孝尊亲,其次弗辱,其下能养。)》(《礼记·祭义》) 2、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낸다.(兄爱弟悌) 유가 효도사상중에서 부모와 자식간의 사랑을 중시할뿐만 아니라 형제간의 친밀도 매우 강조한다. 가정의 기본관계는 부모, 자식, 형제, 부부 등으로 공동히 구성되였는데 그중 형제관계가 가정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전통적으로 형제관계에서 륜리의 기본규범은 《형제간에 친밀을 지키고, 이상과 제하간에 순서를 지키는 것이다.》 형이나 이상 사람이 동생이나 제하 사람을 대하는 전통 륜리규범에서는 구체적으로 아래와 같이 요구한다; 첫째는 사랑하며 관심하라. 仁愛와 友愛는 효도사상의 중요한 도덕규범이며 역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정확히 처리하는 중요한 원칙이다. 《효에 의하면 형제간에 친밀하면서도 해야 할것과 하지말아야 할것에서는 나라의 법을 따른다(惟孝,友于兄弟,克施有政。)》(《尚书》) 형제간의 사랑과 관심은 주요하게 화복을 함께 나누고 희노애락을 함께하는데서 체현된다. 형제간에 영광과 수치를 함께 하면서 행복은 대방에게 양보하고 고통은 자기가 감수하려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형제간 사랑의 가장 보귀한 덕행이다. 《인의로 동생을 대할때 노여움을 감추지 않을수 있느냐? 원망을 누르지 않을수 있느냐? 오직 친밀하게 지내며 사랑할수 있을 뿐이다.(仁人之于弟也,不藏怒焉,不宿怨焉,亲爱之而已矣。).》(孟子)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주라. 너그럽다는 것은 남과의 교제를 처리할때 나에게 미안한 립장의 사람을 너른 흉금으로 용서해 주며 그의 사정을 충분히 돌보아 주는것을 말한다. 내 사정이자 너의 사정이라고 평상심으로 동생을 용납해 주며 엄격히 형님표준으로 자기에게 요구하면서 너그럽게 형제간의 관계를 처리한다. 옛사람들은 《형님으로서 동생을 너그럽게 대하는 것으로 깨우쳐 주고, 동생으로서 형님을 곰상스럽게 대하는 것으로 존경하라.(为人兄者,宽裕以诲;为人弟者,比顺以敬。) 》(管仲)하고 제창하였다. 가정내부에서 형제간의 너그러움과 양보는 아주 필요한것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형제간에 대방의 결점과 착오를 정확히 대할수 있으며, 형제간의 관계를 타당하게 처리할수 있으며, 형제간의 분기와 모순을 완화시킬수 있으며, 화기로운 생활 분위기를 창조하여 가정의 안정과 단결에 유리하게 할수 있다. 형제간의 모순에 대하여 유가의 기본태도는 형제의 정분을 첫째로 하고 양보를 앞세우면서 모순이 진일보 격화되지 않도록 한다. 여기에서 《먼저양보》가 중요하다. 《먼저양보》가 없이는 《서로양보》가 어렵다. 《诗经》에 있듯이 《형제간에 벽을 사이두고 서로 욕질을 해대니 담장 밖에서 남들이 손가락질 하며 비웃더라.(兄弟阋墙,外御其侮)》, 《형제간에 틀리는 일과 노여움이 있다 하더라도 형제의 정분만은 버리지 말어라.(兄弟虽有不忿,不废懿亲)》 너그럽게 대하며 깨우쳐 준다는 것은 형님으로서 동생을 너그럽게 대하여 줄 뿐만 아니라 동생을 적당히 훈계하여 깨우쳐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대할때 역시 덕으로 사랑해야 하지 방종으로 사랑하지 말아야 한다. 근검하도록 가르치고 로동을 익히고 소박함을 지키도록 권고하는 것이 형제를 덕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풍의미식 시키면서 제멋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는것은 형제를 방종으로 사랑하는 것이다. 방종의 사랑은 형제로 하여금 몸과 사지가 게으르게 하고 의뢰심만 잔뜩 키워놓아 장래 필연코 패덕망신하게 될것이다.(至于兄弟之际,吾亦惟爱之以德,不欲爱之以姑息。教之以勤俭,劝之以习劳守朴,爱兄弟之以德也:丰衣美食,俯仰如意,爱兄弟以姑息也,姑息之爱,使兄弟惰肢体,长娇气,将来丧德亏行。)》(曾国藩家书)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끄러 주라. 본보기란 시범을 보이는 것이다. 도덕상에서 본보기를 보이는 것은 사회운행의 중요한 기제이다. 중국 고대 사회결구는 원시 씨족제도의 흔적을 보류하고 있었고, 특히는 영웅숭배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로하여 도덕상의 본보기, 특히는 이상 어른들의 솔선수범 작용을 특별히 중시하여 왔다. 이것이 《덕으로 다시리고(德治)》, 《교육하여 개조시키는(敎化)》 사상의 중요한 내용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역시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를 처리하는 중요한 준칙으로 되였다. 본보기의 힘은 무궁한 것이다. 형님은 동생의 본보기로서 자기의 영향력을 말로서가 아니라 자기의 행동으로 체현해야 하는데 그것은 행동으로 가르치는 것이 말로 가르치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형님이 동생에 대하여 이상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생도 형님에 대하여 이하의 륜리규범을 준수해야 한다. 전통적인 륜리규범에서 동생에게도 역시 다음과 같은 전문적인 륜리요구가 제출된다: 첫째는 존경하라. 《형의 사랑과 동생의 존경이란,…형은 동생을 사랑하고 친밀하게 대하며, 동생은 형을 존경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兄爱弟敬,……兄爱而友,弟敬而顺。)》(司马光·家范) 동생으로서 문제에 부딛치면 될수록 먼저 양보하면서 겸손하게 가르침을 청하며 이로써 형님에 대한 존경을 표시한다. 이것이 바로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보증하는 원칙이다. 둘째는 순종하라. 《동생》이라는 이름 본신에 이미 순종의 함의가 들어있다. 반고는 《白虎通》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동생으로서 형님을 존경해야 하며 마음으로 순종하고 행동으로 충성해야 한다.(弟者,悌也,心顺行笃也。)》, 《한사람의 동생으로 되였다면 그사람에게 순종하고 그사람을 존경해야 한다.(为人弟者,比顺以敬。)》 이런 륜리규범들은 모두 동생이 형님에게 순종하라는 도리를 말하였는데 그렇다고 무원칙하게 무조건 순종하라는 뜻은 아니다. 도리가 있으면 순종하고 도리가 없으면 순종하지 않을수도 있다. 3、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한다(保全自己) 효도사상중에 포함된 생명존중 의식은 또 자기에 대한 보살핌과 아낌에서도 표현된다. 《몸이라는 것은 부모가 물려준 것이다. 부모가 물려준 몸으로 살아 가면서 감히 존경하지 않을수 있느냐?( 身者,亲之遗体也。行亲之遗体,敢不敬乎?)》(《大戴礼记·曾子大孝》) 신체는 자기의 생명을 담은 물체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부모의 생명이 슴배인 물체이며 부모생명의 나의 신체에서의 연속인 것이다. 자기 신체를 살뜰히 대하고 자기 안전에 중시하는 것은 곧 부모와 나아가서는 선조로 부터 물려 내려온 생명을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이다. 《부모가 완미하게 낳아 주신 신체를 자식으로서 완미하게 부모에게 돌려 드리는것이 곧 효이다. 자기 신체가 상하게 하지 않고 자기 신체가 너무 욕보게 하지 않는다면 곧 완미하다고 할수있다.(父母全而生之,子全而归之,可谓孝也。不亏其体,不辱其身可谓全也。)》(《礼记·祭义》), 《군자는 제몸을 존경하지 않는 사람이 없는데 제몸을 존경하는 것은 확실히 큰 일이다. 몸이란 것은 부모에게서 갈라져 나온 아지인데 감히 존경하지 않을수 있느냐? 자기몸을 존경하지 않는다면 자기 부모를 상하게 하는 것으로 되며 자기몸을 상하게 한다면 가문의 근본을 상하게 하는 것으로 된다.(君子无不敬也,敬身为大。身也者,亲之枝也,敢不敬与? 不能敬其身,是伤其亲。伤其身,是伤其本。)》(《礼记·哀公问》) 자기의 신체를 완미하게 보전하기 위하여 자신안전에 특히 주의해야 하는데 리유없이 높은곳에 오르지 말고 깊은곳에 가지 말며 위험한 곳에 가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유람을 갈때에도 반드시 사전에 안전조치가 빈틈이 없어야 한다. 물론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더구나 해서는 안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최저로 《몸이 욕보게 하지 않았고 부모에게 부끄럽지 않으니 그래도 효를 하였다고 말할수 있노라.(不辱其身,不羞其亲,可谓孝矣)》(《礼记·祭义》) 하는 경지에는 도달시킬수 있다. 공자의 제자인 曾子는 임종하면서 자기의 제자들더러 《내발을 들어 달라, 내손을 들어 달라.(启予足,启予手。)》(《论语·泰伯》)라고 하여 자기의 신체가 완정하며 손상이 없다는 것을 보고서야 마음놓고 눈을 감았다고 한다. 曾子는 자기는 평시 생활에서도 언제나 얼음위를 걷는듯 하면서 자기의 신체가 손상받지 않게 조심한다고 하였다. 왜냐하면 자기의 신체는 부모한테서 물려 받은 것으로서 거기에는 선조로부터 이어져 내려온 생명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란다. 曾子처럼 부모에게서 완미한 신체를 가졌으면 반드시 완미한 신체로 부모한테 돌려 들여야 하며 그래야만 부모의 생명이 제대로 연장될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도 역시 효도사상중의 한개 중요한 내용이다. 《자기몸이 부모한테서 물려받은 것이기 때문에 감히 회손하지 못하는것도 효의 시작이라고 할수있다.(身体发肤,受之于父母,不敢毁伤,孝之始也。)》(《孝经·开宗明义章》) 생명체로서의 자기의 신체에는 긍정적으로 무수한 조대를 통하여 이어져 내려온 과거생명이 슴배여 있으며 생명은 곧바로 이런 유형적인 물체에 의하여 과거-현재-미래에 관통되여 있다. 사람들의 자아존재와 자아생명에 대한 중시는 곧바로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숭고한 경의를 표현하고 있다. 자기의 생명은 부모에게서 가졌지만 부모의 생명래원을 무한히 찾아 올라가면 결국 하늘과 땅이 되는데 그러므로 자아생명에 대한 존경은 결국 부모에 대한 존경과 자연에 대한 존경과 마찬가지로 중요하게 되는 것이다. 현재 가족관념이 류행하는 사회배경에서 자신에 대한 아낌과 중시를 강조하는 것은 가족의 생명을 왕성하게 높은 질량으로 후대들에게 물려주려는 책임의식을 체현한 것이다.   세번째 요소: 자손에 대한 양육 선조에게 제사 지내고, 부모에게 효성하며, 형제자매간에 친밀하게 지내고,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 것은 효도사상중의 몇개 계단에 불과하며 오직 가족의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끔 보장하는 것이야말로 제일 큰 효이다. 《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작은효는 힘으로 하고 중효는 로동으로 하며 대효는 자손자리에 빈곳이 없이 한다.(孝有三:小孝用力,中孝用劳,大孝不匮。)》(《曾子·大孝》) 효도사상은 사람들의 생명의식을 체현하였는데 선조로 부터 부모에까지, 부모로 부터 자기에까지, 자기로 부터 자기의 후손에 까지, 생명은 이렇게 대를 이어서 연속되는 가운데서 쉼없이 류동하며 이로부터 사람들의 유한한 생명에 대한 유감으로 부터 영구함을 추구하는 일종의 가치관을 실현한다. 부모의 생명이 자기에게까지 와서 만약 계속 연속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주 엄중한 문제로 된다. 《불효에는 세가지가 있는데 후대가 없는것이 제일 큰 불효이다.(不孝有三,无后为大)》(《孟子·离娄上》), 《자손이 없는 것은 가문의 대를 끊는 것이다.(无子为其绝世也)》(《大戴礼记·本命》) 사람들의 자연생명의 본성으로 놓고 볼때 그 어떤 개체의 생명도 모두 유한한 것이며 잠시적인 것이다. 생명은 언제나 한세대 한세대 이어지는 가운데서 연속되는데 이것은 역시 인류의 유한생명이 무한생명에 대한 일종의 추구이다. 생명을 보살피고 생명을 중시하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효도사상은 바로 이런 일종의 생명 가치관을 체현한다. 이런 생명가치관은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기를 갈망할 뿐만 아니라 생명가치의 부단한 승화를 추구한다. 그러므로 생명이 부단히 연속되게 하여 생명의 영구함을 실현하기 위하여 부득불 후대문제를 고려하게 된다. 생명의 연속은 가족 연속의 형식으로 표현된다. 이렇게 가족생명의 계승이 가족 흥성의 가치관념과 서로 련계되면서 혼인이 사람들의 생명연속의 하나의 대사로 되였다. 《천지가 결합되지 않으면 만물이 생성할수 없다. 결혼하는 것으로 만세대를 계승할수 있다.( 天地不合,万物不生;大婚,万世之嗣也。)》(《礼记·哀公问》) 남녀의 결혼은 선조생명을 계승하는 중요한 내용으로 되였으며, 자녀를 낳아 키우는 것이 가족생명의 번영창성을 보장하는 중요한 수단으로 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인생의 아주 중요한 책임으로 되였다. 공자는 《부모가 자식을 낳아 가문을 이어가는 것보다 더 큰일이 없다.(父母生之,续莫大也。)》(《孝经·圣治章》)라고 하였다. 오직 매 세대에서 모두 생명계승의 중임을 원만히 완수한다면 가족생명은 갈수로 왕성하게 되며 천추만대를 가도 끊기지 않을수 있다. 생명의 계승은 자연적 생물적 계승에서 표현될 뿐만 아니라 더욱 중요하게는 가족생명에 대한 물질적 계승과 문화적 정신적 계승에서 표현되는데 이 후자의 계승이 더욱 의의있는 가치의 계승이다. 가족생명가치의 물질적 계승의 기본요구는 전통가업을 계승한는 것이며 가족생명가치의 문화적 정신적 계승의 기본요구는 량호한 전통가풍을 계승하는 것이다. 孟懿子가 효에 대하여 묻자 공자는 《가문의 전통을 위반하지 않는 것이니라.(无违。)》라고 하였으며 또 《부친이 계실때는 그 뜻을 보고 부친이 사망한후에는 그 행위를 보아 삼년이 지나도록 부친의 원칙이 위반되지 않았다면 효라고 할수 있니라.(父在观其志,父没观其行,三年无改于父之道,可谓孝矣。)》(《论语·学而》)라고 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선조들이 남겨놓은 전통가업과 전통가풍을 계승함에 있어서 그에 따르는 선조들의 우량한 정신과 원칙을 계승하고 견지한다는 것이다. 《무릇 효를 하는 사람들은 선인들의 뜻을 잘 계승하고 선인들의 사적을 잘 말하더라.(夫孝者,善继人之志,善述人之事也。)》(《中庸》) 선조들의 우량한 정신과 원칙을 계승하지 못하면 전통가풍과 전통가업을 제대로 지켜내기 어렵다. 이런 사람을 가리켜 사람들은 《후레자식》이라고 욕한다. 아무리 대부호 대문호 가문이라 하여도 후세에 《후레자식》이 하나만 나온다면 선조들이 몇백년 동안 분투하여 이룩한 가업을 하루아침에 말아먹는 수가 있다. 선조들이 남겨 놓은 전통가업과 전통가풍을 계승함에 있어서 단지 원래의 수준으로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반드시 선조의 基業을 계승한 기초상에서 창조가 있어야 하고 돌파가 있어야 하며 원래의 수준을 초월하여 전반 가족생명의 의의를 더욱 빛나게 발전시켜야만 생명계승의 진정한 의의를 체현시킬수 있다. 전반 가족생명이 건전하게 계승되고 발전하게 하려면 그 효과적인 보장수단이 바로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와 신분을 확고히 수립하는 것이다. 《무릇 효라고 하면 부모를 잘 모시는 것으로 부터 시작하여 군왕을 잘 섬기는 것으로 발전시키여 최종으로 사회에서 자기의 신분을 확고히 수립한다.(夫孝,始于事亲,中于事君,终于立身。)》 사회에서 자기의 지위와 신분을 확고하게 수립하는 것은 가족생명계승의 가장 중요한 조치이다. 《신분을 수립하고 도를 집행함으로써 후세에 길이 이름을 남기고 그것으로 부모를 빛내이는 것이 효도의 최고의 표준이다.(立身行道,扬名于后世,以显父母,孝之终也。)》(《孝经·开宗明义章》) 《신분을 수립하고 도를 집행한다.》는 함의는 매우 풍부한데 《가장 높은 경계는 덕을 쌓는것이고, 그 다음이 공을 세우는 것이며, 그 다음이 유훈을 남기는 것으로서 오래가도 페지되지 않는다면 이것을 가리켜 불후하다고 한다(太上有立德,其次有立功,其次有立言,虽久不废,此之谓不朽。)》(《左传·襄公二十四年》). 바로 공자가 말한 것처럼 《군자들이 두려워 하는 것은 자기가 세상에 없은 후에 자기의 이름마저 불려지지 않는 것이다.(君子疾没世而名不称也。)》(《论语·卫灵公》) 만일 한사람이 덕을 쌓고, 공을 세우고, 유훈을 남기는 등 세방면의 노력에서 모두 성공한다면 능히 자기를 후세에 길이 빛나게 할수 있으며 잠시적인 유한한 생명을 초월하여 영구한 생명가치를 얻을수 있게 된다. 이러한 초월이 개인의 각도에서 볼때 현실생활의 행복을 얻을수 있고 자신 생명의 가치를 실현할수 있으며 인생의 의의를 실현할수 있게 되며, 가족의 각도에서 놓고 볼때 조상을 빛내일수 있고 부모의 위신을 수립할수 있으며 자손들에게 복음을 마련하여 줄수 있으며, 사회의 각도에서 볼때 나라에 보답할수 있고 백성들에게 유익하게 할수 있다. 유훈을 남긴다는 것은 저작을 남기거나 전기를 남기는 것을 말한다. 만일 덕을 쌓고 공을 세우고 유훈을 남기는 것이 완미하게 결합되였다면 그것은 생명의 의의를 원만하게 완성한 것으로 되며 생명의 가치를 충분히 체현한 것으로 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효도의 새로운 경계에 이르고 가족생명 계승과 자아생명 제고의 통일을 실현하며 진정으로 개인의 불후한 생명가치를 실현한다.   결속어 백가지 善行에서 효가 첫째라고 하였다. 효는 인생립신의 근본이요 가정화목의 근본이며, 국가안전의 근본이요 민족생존의 근본이다. 유가의 효도사상은 하나의 생명의 학문이다. 그러므로 유가의 효도사상에는 가정륜리사상만 내포되여 있는것이 아니라 더우기는 인류의 생명존중의식에 관한 사상과 학문이 포함되여 있다. 효도는 실제상 우리민족의 인문성 종교이며, 우리민족의 생명불멸의식과 문화발전의식의 종극적 가치리상을 반영하였다. 인류 문명초기에 사람들은 생명의 보귀함을 인식하게 되면서 점차적으로 선조에 대한 숭배의식과 감은의식이 산생되였다. 이것이 효도사상이 산생하게 된 최초의 원시적 맹아계단이다. 사람들은 자기의 생명이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니며 선조들이 기나긴 세월을 통하여 한세대 한세대 간고하게 이어서 내려온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람으로서 자기선조의 은덕을 모른다면 아직 기본인성을 채 갖추지 못한 것으로 인정 하였다. 이런 사상들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생명래원에 대한 숭배와 감은의 의식을 반영하였다. 춘추전국시기에 와서 유가의 효도사상은 《1; 부모를 잘 모시는것, 2; 형제간에 친밀하게 지내는것, 3;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하는것》 등등의 더욱 높은 새로운 경계에로 발전하였다. 이런 사상들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현존하는 산 생명에 대한 아낌와 보살핌 의식을 반영하였다. 이것은 공자가 창도한 유가 효도사상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다. 부모를 잘 모시려면 당연히 물질적으로 충분히 보장해 드려야 하겠지만 더욱 중요하게는 정신상에서 부모를 즐겁게 해 드리며 마음속으로 부터 성의를 다하여 부모를 존중하고 보살펴 드린다. 이것은 효도의 생명존중의식에서 가장 주체적인 부분이다. 형이 동생을 대함에 있어서 첫째는 사랑하고 관심하며, 둘째는 너그럽게 대하고 일깨워 주며, 셋째는 본보기를 보이며 이끌어 준다. 동생이 형님을 대함에 있어서는 첫째는 존중하고, 둘째는 순종한다. 이렇게 형제간의 친밀한 관계를 확보한다. 자기를 완미하게 보전함에 있어서 리유없이 높은곳에 오르지 않고 깊은곳에 가지 않으며 위험한 곳에 가지 않는다. 그리고 신체단련과 신체보양을 잘하여 항상 건강한 신체소질을 확보한다. 물론 사회풍기를 문란하게 하고 죄를 범하는 일은 더구나 하지 않는다. 한사람의 생명은 종족의 시조를 대표로 하는 전반 종족생명의 한부분으로서 자기의 종족생명에 대하여 책임지기 위하여 먼저 자기의 생명안전부터 확보한다. 가족생명이 번영창성하고 종족의 생명이 영구적으로 이어지게하기 위하여 매개 세대에서는 책임지고 후대를 생육하는 의무를 원만히 완성하며 본 종족의 생명체계가 계속 건강하게 계승되는것을 보증한다. 이것은 유가 효도사상의 생명불멸의식의 구체적인 체현이다. 바로 종족의 생명체계가 건강하게 존재함으로써 전반 종족의 정신생명을 담을수 있으며 종족의 생명이 천추만대 계승되고 발전하게 할수 있다. 그렇지 않고 만약 종족생명의 연속이 자기세대에 와서 저애를 받는다면 그것은 선조와 부모에게 최대의 불효를 범하게 되며 가족과 나아가서 인류의 생존발전의 기본법칙을 위반하게 된다.    2012-01-02
10    (론문) 사망의 절대성과 상대성--차홍란 댓글:  조회:3957  추천:0  2012-07-16
(发表在2012.12) 论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                                                          车红兰     摘要:死亡,自古以来始终以它独特的神秘性引人深思。死亡的困扰是任何一种试图对人生作总体思考的哲学都不可回避的问题。面对死亡时,我们经常感到无法克服的恐惧,即使活着痛苦,也不敢走向死亡,也许瞬间的死亡比活着的痛苦要少得多,可人越接近死亡,就越贪恋生命,害怕死亡,人类无法控制贪生的心态。但是,当我们把死亡通过绝对性和相对性来理解之后,就会发现死亡不是一个难以接受的事情。 On death and its significance  Che  Honglan Department of Social Sciences, Yanbian University, Yanji ,Jilin province133002,China 关键词:死亡   绝对性 相对性 中图分类号:        文献标示码:             文章编号: Abstract: Death, since ancient times for its unique mystery is always thought-provoking. Death is any kind of trouble trying to think of the overall philosophy of life for all can not be avoided. The face of death, we often feel unable to overcome the fear, even if the pain alive, did not dare to die, perhaps the moment of death than the pain of living is much less pleasant closer to death, the more eager for life, fear of death, human beings can not control the greed mentality. However, when we die by the absolute and relative to understand, you will find difficult to accept death is not a thing. Keywords:  death, absolute,relativity       死亡不单是有机体的生命终止问题,而且涉及到灵与肉、死灭与不朽、必然与自由等一系列重大哲学问题,成为一个人们不能不猜的斯芬克斯之谜。自有哲学以来,人们也就开始了对死亡之谜的哲学思考,死亡问题是中外古今哲人说不完、道不尽的永恒课题之一。然而,在哲学和医学的指导下,死亡理论可以被清理和总结。 一、死亡的绝对性   死亡的绝对性是指世人皆知的可视性死亡。   马克思主义辩证唯物主义认为“世界是物质的,物质是运动的,物质的运动永远不会终止,一种运动形式的消失标志着另一种运动形式的开始。”[1]生命的本质是机体内同化、异化过程这一对矛盾的不断运动,而死亡则是这一对矛盾的终止。世界上任何具体事物都必须经历产生、发展和消亡的过程,从来没有只生不灭的具体事物。有生亦有死,凡生必定死,这是不依人们的意志为转移的客观规律。在宇宙的时空长河中,人类作为一个具体的总体,也必然经历一个从产生到消亡的过程,经历一个人类生死过程。朱熹主张死是一种自然规律,是生命的归宿,同时,他认为,“天地间无非气,人之气与天地之气常相接,无间断,人自不见。人心才动,必达于气,便这与屈伸往来相感通。”[2]在人类存在的这段人类历史长河中,人类的延续、发展和进步,就是在一代代的个体生命不断产生又不断灭亡的自然过程中实现的。在此漫长的过程中,如果人类的个体生而不死、死而不生,人类就不存在。生命个体的死亡是既定的,无数生命个体从古至今的既定死亡,构成了人类历史或任何有机体生命发展史的历史性。   赫拉克利特是西方哲学史上最早对死亡进行哲学思考的哲学家。他从唯物主义的自然哲学的角度对死亡本性问题作了积极的探讨,坚持从自然界本身、从人的本身出发来解释人的死亡,断言“死亡就是我们醒时所看见的一切。”[3]人死后,无呼吸,无心跳,无温度,无意识……停止供氧、供血,神经系统迅速瓦解,周身鲜活的细胞不复存在,生命丧失了能动性,变成了一具僵硬而乏味的尸体。“按照全脑、心和肺这3个重要生命器官机能不可逆中止发生的起始部位,人们可以将身体死亡分为脑死亡、心脏死亡和肺死亡。”[4]脑死亡指全脑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任何严重的脑外伤、脑疾病和障碍中枢神经系统的毒物,甚至电击、辐射和放射线,都可以引起全脑功能的不可逆中止而发生脑死亡。脑死亡发生时,大多数情况下心肺功能将很快随之不可逆中止,一般呼吸停止先于心跳停止。但有时心脏和或肺的功能仍然可以以某种形式维持着,不言而喻,这时脑死亡的诊断应十分严格。心脏死亡指原发于心脏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此时心跳停止先于呼吸和脑功能的完全停止。心脏死亡最主要的原因是心脏本身的严重损伤或疾病。其他原因如各种原因的休克、电流通过心脏的电击、具心脏毒性的毒物中毒等也能引起心脏功能不可逆中止而死亡。肺死亡又称呼吸死亡,指原发于肺或呼吸功能不可逆中止所引起的死亡。此时呼吸停止先于心跳和脑功能的完全停止。肺死亡最主要的原因是肺或呼吸系统的严重损伤或疾病、机械性窒息、障碍呼吸功能的毒物中毒及所有能引起呼吸中枢、呼吸肌麻痹的因素。过去人们习惯把呼吸、心脏功能的永久性停止作为死亡标志,但众所周知,脑是机体的统帅,是人类生存不可缺少的器官。一旦脑的功能永久性停止,个体的一生也就终结,这就产生了关于死亡概念更新的问题,“脑死亡”的概念逐渐被人们所接受。 二、死亡的相对性  相对死亡则是指死亡的非可视的那一部分。 无论人类还是动物,甚至包括一些有质量的植物,一切生命的死亡都不是像人们有目共睹的那样一了百了干净彻底。目前,人们对死亡的认识,不仅仅停顿在视力范围所见到的,即绝对死亡的那一部分,而且也提到相对死亡的非可视部分。其实,从最远古的先民到当代广众,人类的内心从来也没有忽视过死亡隐秘着的另一面。特别是中华民族面对死亡时,常常会说出两个词儿“在天之灵”和“九泉之下”。这天上的与地下的,正是对绝对死亡与相对死亡两大部分的一种暗喻。西方的柏拉图给哲学下了一个流传千古的定义:“哲学是死亡的练习。”[5]柏拉图强调,人生目的在求真善美,但永恒的真善美,只有在死亡之后,并且主张灵魂不死论。德国神学家Moltmann提出死亡万岁的口号,这成为伊斯兰原教旨主义的行动纲领。恩格斯指出:“死亡或者是有机体的解体,除了构成有机体实体的各种化学成分,什么东西也没有留下来;或者还留下某种生命本原,或多或少和灵魂相同的东西,这种本原不仅比人,而且比一切活的机体都活得更久。”[6] 今天按照二十一世纪的认识水准,撩开灵魂二字的面纱,它的本质说来也很简单,灵魂,就是对人们大脑能量的一个统称。大脑能量是每个生命的主宰,虽然目前科学技术尚不能识察到它的全部行踪,只对其中的脑电、脑磁等能量有了初步的握定。不过不可否认,在地球万类生命中,人类所以聪智,正是因为拥有了杰出的大脑,而大脑的应用,又必须区分出两个部分:一个是大脑脑体(通过解剖可以看得见的部分),另一个是大脑能量(肉眼看不见的部分)。作为一种非可视的、上乘的精神之花,大脑能量从来就不是易朽易烂的物质。它全然不同于人的肉体,肉体质地的不耐用,决定了它最后不得已的废弃。大脑能量拥有最精锐的运动形式,它的特点是永远的循环往复,聚合弥散。无形的大脑能量,与一切有形的大脑组织相对应、相匹配。这里所说的与绝对死亡并列着的相对死亡,也主要就是指大脑能量不灭不朽的这一部分,以及它们循环回返的目的地。这一切都不在表象,所以又堪称死亡的本质。   进一步来讲,人之精神与肉体有完全不同的性质。人的肉体之身是一种实在之物,它只能占有一定的空间,存在于一定的时间之内;而人之精神虽然是人之肉体的一种派生物,但它却能够不受肉体的束缚,既可游于无限的空间,又可回溯和后行于无穷的时间。一般而言,人们既离不开对物质的摄取以维持身体的存在;同时,人们也离不开精神性的关系,它是人维持一个人的存在的根本。离开了精神性的关系,人也许还活着,但却不是作为人而活,只是作为一个物而存在着。当一个人很多与他人、与许多的人建立各式各样的关系时,虽然肉体经过一定的时间必然的死去,但精神关系不一定随着身体死亡而死亡。人在精神关系中,给物注入意识,此时这个物就不是单纯的自然之物,它具有了某种价值,使社会或一些人愿意去欣赏、保存。创造了这些物的主人,由于将自己的精神和意识贯进了其中而得以使生命永存。而当创造出的物越价值,它在世间被保存得越长,相对死亡也来临得越慢。    三、 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   死亡具有绝对性和相对性对立统一的属性。   首先,绝对死亡和相对死亡是统一。绝对死亡和相对死亡是相互渗透和相互包含。一方面,相对之中有绝对,绝对寓于相对之中。任何相对死亡都包含有绝对的颗粒。另一方面,绝对之中有相对,相对是绝对的一个成分。绝对和相对,总是“你中有我,我中有你”相伴而生,即没有离开绝对死亡的相对死亡,也没有离开相对死亡的绝对死亡。   “生命是蛋白质的存在方式,这种方式本质上就在于这些蛋白质的化学组成部分的不断自我更新。”[7]生物体内同化与异化的相互转化就是生物体生与死的相互转化。生命体的死亡并不意味着生命体物质组成及其能量的消灭,随着物质分解重组、能量转移转化,这些又将成为其他生命体的一部分。生与死原本没有意义,生命只是物质循环、能量流动过程中的载体而已。即作为个体的人,一旦生命力消逝,他的肉体就开始了与其他一切有机物相同的化学变化,分解成水、二氧化碳等元素,但这些元素不会消失,将永远地存在于世。人的死是一个从哪里来,回到哪里去的自然过程。而且死亡后,人类可以继续保存精神架构。如果人类在人生有限的时间里,吸取科学文化知识,积极投身社会实践,以圣贤为榜样,甘于忍受无边寂寞之苦,常怀律己之心,常修为政之德,常祛贪欲之念,义无反顾地承担人生加以人类的重任,潇洒自如地走完人生道路,成为一个对社会有所作为的人,当死亡的阴影笼罩的时候,人类可以给子孙或社会留下宝贵的精神财富,如勤俭持家,艰苦奋斗,面对逆境,自强不息。死亡是美好的,并不是说生命不值得珍惜,而只是在强调死亡是生命历程中不可缺少的自然环节之一,是一个自然的过程,完全不必过于看得过重,完全可以淡然处之。死亡不是一种痛苦,而是生命应有的归宿,人性的、生活的句号。   死亡的绝对性和死亡的相对性是对立的。生,活着,死,意味着一切都结束。从根本意义上来说,生是一个人一生的追求与希望,如果一个人死,他没有追求与梦想。生的时候,人会有喜怒哀乐,会感受到人生的酸甜苦辣,然而,人死后彻底失去了所有的感觉,失去原来生存时所拥有享受的一切,死亡具有绝对性的。弗洛伊德认为“人不仅有生的本能,也有死的本能。”[8]我们都了解人求生本能的顽强,却不愿意接受弗洛伊德求死本能的观点,也许弗洛伊德就是看了太多不珍惜生命的人,他们的行为毫无理性可言,只好作这样解释。契诃夫曾经说过“死亡是人类最了不得的导师。”[9]死亡带给人的教诲深入骨髓,也许只有死亡才能让人明白生是怎么回事。死亡的存在及其必然性能使我们珍惜生命,去积极地建构健康与合理的人生观及人生态度,并注重自我生命的保护。正因为死是生的本质,我们只有活得精彩,活得充实,才不会觉得“该死”。相对永恒的死亡,生就显得十分短暂。正是这种短暂给了人类一个限制,让人类思考着作出选择,在生命的区间中放入有意义的事物;使人类感到存活是多么贵重、值得珍视的。死亡是一个不可逃避的问题,我们迟早都要面对,微笑着淡然地面对才显现出我们不虚此生。而要做到这一点,就需要我们将生命塑造得充实、趋于完美;对生活多一份欣慰,少一份埋怨,多一份坦然,少一份茫然。   万物有生就有亡,存在只是一个过程。死亡的面前我们似乎只能无能为力了,事实上也的确如此。然而面对死亡的绝对性和相对性我们唯一还可以值得庆幸的就是,我们还可以对它进行设想,并据这些设想而加以阐述。也就是这样,在人类中诞生了死亡哲学,它是专门为死亡而诞生的一门学问,永远负载在每一个的身上,直到人世间不再存在着会思考的生命。因为只有会思考,更确切地说只有可进行复杂思考的生命结束的时候,哲学才可能失去它的意义。   参  考  文  献 [1] 江德兴.马克思主义哲学原理[M].苏州:苏州大学出版社,2001:32. [2]朱熹.答黄道夫-朱文公文集卷58[M].上海:商务印书馆2009:891. [3]赫拉克利特.赫拉克利特著作残篇[M]. 广西:广西师范大学出版社,2007:206. [4]http://www.babyschool.com.cn/ask/detail_old_1271111.html[EBOL].中国育婴. [5]王晓朝译.柏拉图全集[M].北京:人民出版社,2003:287. [6]于光远译编.自然辩证法[M].北京:人民出版社,201:121 [7]中共中央马克思恩格斯列宁斯大林著作编译局编.马克思恩格斯选集[M].北京:人民出版社,1995:6. [8]车文博译注.弗洛伊德文集[M] .长春:长春出版社,2004:34. [9]汝龙译注.契诃夫短篇小说选[M].北京:人民文学出版社,2002:67.    作者简介:车红兰(1969-)女,吉林省龙井市人,延边大学马克思主义学院  硕士,研究方向:马克思主义意识形态和宗教学.    (본편 론문은 저자의 요구에 의하여 외부수집 스크랩 불허입니다.) (기사) 조선족 전통문화를 적극 선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성원 회장은 조선족 전통문화를 선전하기 위하여 2010년부터 2012년 사이에 연길시 각 가두 판사처와 손잡고 여러 사회구역을 돌아 다니며 이미 조선족 전통문화 강의를 10여차례 진행하였으며 연변방송국과 연길 아리랑 방속국과 손잡고 조선족 전통문화 라디오 강의 생방송을 이미 8차례 진행하였다.
9    (포럼) 한 민족이 자기의 상제문화가 없어선 안된다--성원 댓글:  조회:3851  추천:0  2012-07-16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 主题发言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盛元   各位领导,各位专家,各位佳宾,同志们,朋友们: 2009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吉林省非物质文化遗产,从此,朝鲜族丧葬习俗不再是迷信活动,不再是陋习,是一种宝贵的朝鲜族传统民俗文化。 我们要继续加强我们民族的文化建设,将朝鲜族丧葬习俗提升为有根系、有体制的更高一级的真正的朝鲜族丧葬文化,为提高朝鲜族文化质量而增添宝贵的成分和营养。 为了实现这一目标,我们要探讨如下的几个学术性问题: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今天我们召开“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首先要探讨以上几个学术性问题,在此基础上,集中讨论怎样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问题。 下边,根据我在这几年对朝鲜族丧葬习俗的研究和一年多的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经验,发表我的浅薄的观点。   一、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历史发展中的作用 李朝太宗12年(公元1412年)朝廷下令全国效仿中国的《朱子家礼》,李朝成宗16年(公元1485年)颁布《经国大典》,全面实行推崇儒教,排斥佛教的政策,从此,包括丧祭礼仪在内的李朝社会的一切礼仪活动,都推行中国儒家的礼仪。 朝鲜后期学者李縡在中国《朱子家礼》基础上还掺和朝鲜民族很多传统习俗和理念,编纂《四礼便览》,全面阐述朝鲜民族“冠婚丧祭”礼仪规范,李朝宪宗10年(公元1844年)首次发行。 中国朝鲜族的先民,多是在1850年以后,自朝鲜半岛迁入到中国东北地区定居的,经过100多年的历史沿革,逐渐发展成为当代中国的一支少数民族。 中国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半岛丧葬文化的一个分支,中国朝鲜族在朝鲜半岛的本源地比较广泛,他们带到中国来的丧葬习俗,也按地方大同小异,他们在中国特定环境下共同生活的过程中,还逐步形成了中国特色的朝鲜族丧葬习俗。 文革以前,中国朝鲜族基本上还是实行从朝鲜半岛带过来的传统丧葬制度,村村有“丧舆契”之类的民间相助治丧组织,集体出资打造丧舆,在村外僻静处盖库房保管,选一人当都监,负责管理有关丧葬的事务,村里出丧事,统一安排丧舆抬夫和掘墓人。座上大人(村里最高年长者)严格监督村里举行的每一次丧祭仪式,以此,治理家风、端正族风,保证民族传统代代相传。 朝鲜族丧葬习俗的基本思想是传统的儒家思想,其核心是“孝道”,是千百年来维持社会秩序和家庭关系的东方民族的道德准则。在朝鲜族传统丧葬活动中集中表现孝道思想,朝鲜族的先人们就是利用葬礼和祭祀的形式传授孝道思想,继承民族传统的。 所谓的“孝”是具有两种含义:一是孝敬,二是办丧。在我们祖先的时代里对父母长辈不孝是天大的罪孽,普遍信奉“孝为百行首”,“人间百善孝为先”,深信“犯不孝,天诛地灭,误祭祀,断子绝孙”。因此,一旦父母长辈去世,就尽最大努力去办好厚葬,向社会表明自己是大孝子。平时曾经对父母长辈欠孝的人更是要利用厚葬的手段来掩盖自己的耻辱,填补心理的空虚。这是古代朝鲜人重视葬礼的重要原因之一。 葬完之后还有“三年守孝”之特习,就是在父母坟前打草棚守墓三年。在这期间不洗脸、不吃肉、不回家,确实是苦行。这种人也叫做“孝子”,他们苦行的目的就是弥补在父母生前没有尽到的孝道。现在来看是很愚昧的行为,可是我们从中可以看出我们的祖先在落后的古代意识形态的条件下还是要坚持优良道德准则的一片苦心。 朝鲜族丧葬习俗伴随朝鲜族先民进入中国以后,默默分担朝鲜族先人们死亡之痛苦和悲伤,默默安抚朝鲜族先人们对于死亡的恐惧和失望,默默指挥每次朝鲜族葬礼之大事,与朝鲜族先人们一起走过来了一百多年的风风雨雨,凝聚着朝鲜族先人们的深厚情感和理念。 二、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传统民俗中的位置 民族是人类在历史上形成的共同语言、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以及表现于共同文化上的共同心理素质的一定历史阶段的共同体。随着时代的发展,如今在中国,共同地域、共同经济生活不再是代表一个民族的重要特征。中国有56个民族,他们都是中国公民,都是在中国境内生活,可以自由流动。在这种情况下一个民族向社会展示自己的手段主要是自己的特色文化,没有自己的特色文化,或者抛弃了自己的特色文化,这个民族已经失去了以民族自居的社会基础,在素质和各方面都已经丧失了优势。 一个民族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或者是抛弃了自己的丧葬文化,这个民族很可能是还没有成熟的民族,或者是正在退化的民族。 我们朝鲜族民俗文化中不可能没有自己的丧葬文化,如果没有自己的丧葬文化,我们民俗文化就失去其完美性。 朝鲜族历来很重视喜庆的民俗文化(抓周、结婚、花甲等),而当今正在进入辉煌期,到处设有婚礼厅、生日厅,厅厅响彻祝福歌。 可是朝鲜族的丧葬文化的处境好比是遗弃在北邙山坡的古碑,人人惧而远之,任凭风吹雨打,没有人管理,没有任何保护措施。 其实,朝鲜族丧葬习俗是朝鲜族传统“冠婚丧祭”文化中不可或缺的重要部分,朝鲜传统家礼指导书《四礼便览》共四册八卷,仅是“葬礼”部分就占五卷,其他“冠礼”、“婚礼”、“祭礼”只占各一卷,可见,朝鲜族先人们欲把民族的传统习俗和理念集中表现在葬礼中,朝鲜族葬礼可以说是最能代表朝鲜民族的民俗文化。 中国有句“红白喜事”之说法,结婚叫做“红喜事”,死人叫做“白喜事”,两者合起来叫做“红白喜事”。结婚叫做“喜事”,人人皆知。可是中国人死人也叫做“喜事”。一方面哭鼻子办丧事,是人之常情。还一个方面叫做“喜事”,而确实是“喜事”。世界好比是公共巴士,先上车的乘客到了目的地下车,就有空间新的乘客能上车。世界也是一样,先出生的人生活好自己一生以后慷慨死去,就有空间新的生命能诞生。假如孔子、秦始皇至今还是服用“长生不老药”而未死,他们已经是两千多岁,这个地球人满为患,很可能已经爆炸了。因此,丧葬文化不仅是表示对死者的哀悼,也是表现对活人的希望。 千百年来,人们都是为了过好日子而奔波,为幸福生活而奋斗。时代到了今天,我们应该还要考虑如何死的好,如何提高死亡质量的问题。正确处理死亡问题的民族,才是有前途的民族。生老病死是人间常事,朝鲜族民俗文化并不是贪喜文化,不应该只为结婚、生孩子、生日等喜庆之事而服务,应该还要为死亡等悲痛之事而服务,这才是成熟民族文化的正确态度。   三、朝鲜族丧葬习俗在朝鲜族现实生活中的意义 所谓葬礼通俗地讲就是人死以后处理其遗体的仪式,主要具有两种功能:一是将失去生命功能的遗体送还自然的自然功能,二是终结与死者的社会关系和情感关系的社会功能。 葬礼实际上对于死者来说是毫无意义的。人死以后魂魄到底去哪里谁也说不明白。古代孔子曰:未知生,焉知死。就是说“活着时候的事情还没有搞明白,怎能知道死后的事情呢?”。表面上看葬礼好象是把死者的灵魂送到美好天国的仪式,其实不然。葬礼实际上是活人为获得精神依托和心理安慰的文化手段。因此,葬礼不是为死者所必要的,而是为活人所必要的。 葬礼在现实生活中大体上具有如下的几种意义: 葬礼是孝道的延续,补充和完成。 当今时代竞争激烈,年轻一代在开辟自己人生路的征途上往往是照顾不周自己的父母。取得一定的成功以后再回来要好好孝敬父母的时候,父母往往已经是太老了或者是已经去世不在了。 人们通过葬礼可以以自己的方式弥补对父母生前未尽到的孝道,可以向已故父母表示愧疚,请求宽恕,得到安慰。 葬礼是家庭义务的新分工,是家庭的新出发点。 人生活在一个家庭,都赋予特定地位和特定义务。一个人的死亡意味着一个家庭里空了一个位子,必然破坏原来的家庭平衡。如果是一家之主去世更为如此。在这种情况下葬礼上照例首先确定丧主,他就是家庭的新代表。传统来讲丧主必须是长子、长孙,而如今若没有儿子,长女、女婿也可以当丧主。在这个基础上家里的其他成员也自动调节自己的义务,形成家庭的新的平衡,开始家庭的新的生活。 3、葬礼是对于死者生前人生价值的评估和总结。 人生在世,创造财富,生儿育女,建功立业。因此,人死后充分评估他的生前人生价值,这就等于给活人留下有用的精神遗产。人们办丧开追悼会,一般在悼词中多讲死者的功德,不讲死者的缺点,这是因为死者的功德对于活人是有意义的,可是死者的缺点对于活人是没有任何意义的。 4、葬礼是人们对于自己人生进行反省的机会。 人一出生就决定某一天注定要死,这是不可违背的天约。人们在办丧的时候强烈意识到人对死亡的无可奈何,与此同时反观自己,感觉到对人生的紧迫感。 5、葬礼是关系到自己尊严、家族尊严、民族尊严的大事。 人是有尊严的,自己父母的葬礼也办不好,何以谈尊严?办丧有体面不一定要场面大,而是应该有自己民族特色,有成熟而精炼的章法,这样的葬礼才有体面的。 6、葬礼是传统教育的有效形式。 人们通过父母的葬礼,可以给孩子们传授孝道思想,可以给孩子们讲讲祖先的优良传统,增强孩子们的家族观念和民族观念。 … … … … … … … …   四、关于保护朝鲜族丧葬习俗工作中的几个问题 自从去年6月,朝鲜族丧葬习俗被指定为省级非物质文化遗产以来,做为保护单位的我们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为了不辜负时代赋予我们的历史使命,在保护朝鲜族丧葬习俗的工作中,积极开展了一些新的尝试。 我们主要以三个方面开展工作:1、发掘、研究、整理,2、提出合理化建议,3、指导、服务。 1、在一年多的工作当中,我们对朝鲜族传统丧葬习俗进行一系列的发掘、研究工作,已经初步整理出来了结合现实朝鲜族丧葬活动的新的丧礼程序。在新整编的过程中我们着重考虑了以下三个方面:1、遵守国家的“殡葬管理条例”,2、精简而不草率,沉痛而不凄惨,3、突出显示朝鲜族特色。现在的主要问题不是去粗取精,如今糟粕、精髓都被冷冻,只要择精恢复就是。我们在新整编的朝鲜族丧礼程序中增加了读祝文和诵挽歌的内容,祝文和挽歌本来就是我们朝鲜族传统丧葬文化最精彩的一部分,此一举已经受到社会的普遍欢迎和肯定。今后我们不断总结经验,不断进行改进,与有关部门和有关学者们合作,为编纂一本完整的现代朝鲜族丧礼指导书而继续努力。 2、在向政府的相关部门和社会的相关单位提出合理化建议方面,虽然效果不甚理想,我们还是义不容辞,继续坚持。 第一个提出的建议:作为朝鲜族自治州的延边地区的四大殡仪馆中竟然没有一间朝鲜族告别厅,这显然是美中不足。就此,我们已经向有关方面提出了“在延吉殡仪馆设立朝鲜族告别厅的建议”,而且,州文化局的积极沟通和努力的结果,有关部门已经下文件认可和同意了我们的建议。下一步我们准备向有关部门提供拟设置的朝鲜族告别厅内部设计图和仪式程序,希望在这次研讨会上评估解决。 第二个提出的建议:朝鲜族丧葬习俗中“殓袭”(给死者穿寿衣、包裹)是一项很重要的程序,是每一家朝鲜族遗家属首要关切的事项。不过,这一领域现在却变成了社会上的一些人捞取钱财的自留地。这是我们民族没有保护好自己丧葬文化的后果。社会上的有些人专门利用朝鲜族遗家属的悲痛、着急的心情,诱骗他们提供一些糊涂服务以后,狮子大开口要钱,没有讲价的余地,其主要场所就是医院和福利院。就此,我们向延边州卫生局和延边医院等相关部门和相关单位提出了“在殓袭领域实现规范化、组织化的建议”,而且,已经得到了州卫生局、州护士协会等有关部门的积极的响应。可是,因为部门之间还是缺乏沟通,大部分医疗单位和福利单位还是没有完全理解我们的善意,客观上给社会上的那些人提供了可乘之机。 3、我们认为保护朝鲜族丧葬习俗最行之有效的方式是在丧葬活动中直接给朝鲜族遗家属提供指导和服务。我们不能指望每一位朝鲜族人都要熟悉朝鲜族丧葬知识,我们还没有权利处罚损害朝鲜族遗家属利益的那些人。在这种情况下我们能作到的只能是建立一支有规律、有素质的自己的丧葬服务队伍来占领这个领域。可是要占领这个领域,没有各地医院和福利院的协助是不可能的。我们三番五次地请求各地医院和福利院协助我们工作的基本理由就在于此。 在指导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延吉市各街道办事处进行了关于朝鲜族传统孝文化的演讲,已经在延边广播电台和延吉广播电台的早晨直播节目中进行了关于朝鲜族丧葬习俗的广播演讲,今后我们继续推进这方面的工作。我们还开设了咨询电话,认真解答各地朝鲜族遗家属提出来的有关丧葬的各种问题。 在服务性工作方面,我们已经在工商管理部门注册设立了“白花相助(丧葬)服务中心”,还缺少什么手续我们会继续补办。我们严格管理收费标准和服务质量,凡是与朝鲜族丧葬有关的所有事务上提供具体的、全面的指导和服务。一旦家里出丧事,只要拨打我们的服务热线,繁琐的丧葬事务就可以又体面又方便地OK了。我们的服务工作跟殡仪馆的工作并不发生冲突,恰恰相反,我们的服务工作就是殡仪馆工作的补充和提升。 我们认为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是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有效保障。我们把朝鲜族丧葬服务中心搞好,而且长期坚持下去,只要功能健全的朝鲜族丧葬服务中心继续存在,朝鲜族的丧葬文化就可以继续发扬光大。 我们研究会是社会团体,在财务上没有国家的财政补帖,没有任何部门的经费支持。我们为民族保护民俗文化,可是事业经费都是靠个人出资,靠自力更生。在这种情况下设立朝鲜族丧葬服务中心,以服务养保护是唯一可取的解决方法,政策上也是支持的。 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不好,会直接影响保护朝鲜族丧葬文化的事业,如果朝鲜族丧葬服务中心经营的很好,必然促进保护朝鲜族丧葬文化事业的发展。 经营朝鲜族丧葬服务中心,自然涉及到争取服务对象的问题,我们只能以市场模式提供服务。现在个体户拼命与我们争抢客户,这不仅影响我们的经营效益,而且,严重阻碍我们事业计划的实施。 对此,我们制定了如下的对策方案: 抓住“保护单位”这一使命,争取政府扶持和行政支持; 充分利用广告、演讲等手段,继续扩大知名度和影响力; 提高服务质量,增加服务项目,进一步满足客户的要求; 加强与医院、福利院等相关单位的沟通,争取协助和支持; 联系有关部门,逐步实现职业培训、持证上岗的行业管理方法。   总而言之,保护朝鲜族丧葬文化是全社会性的事业,单靠一个部门、一个团体的努力是远远不够的,只要政府支持,各部门协助,全社会参与才能完成。 我们相信今天的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对于我们民族的丧葬文化事业具有积极而深远的意义,对于今后我们的工作会起到积极的推动作用。 谢谢! 2010-12-14  
8    (칼럼)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리광평 댓글:  조회:4811  추천:0  2012-07-16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안도현 신툰 진남순 할머니 상례와 제례 실기— 세미나 문건집에 수록                   리    광    평 (연변중국조선족생태문화발전회)   조선반도의 우수한 조선민족문화를 간직한대로 중국에 이주하여온 중국조선민족은 반만년의 풍부한 문화유산을 바탕으로 하고 그 전통을 계승, 발양하면서 중국문화의 테두리 속에서 화하(華夏)문화의 자양분을 부단히 섭취하여 점차 자기의 주체적인 나름새를 가지게 되었다. 그러므로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중국 다민족문화의 구성부분인 동시에 세계적 범위에서의 조선민족정체(整體)문화의 일부분이다. 이처럼 이중성격을 지닌 중국 조선민족문화는 조선민족의 전통문화에 깊이 뿌리박고 중국 및 주변 국가 여러 민족 문화들과의 상호교류와 영향속에서 자기의 좌표를 한결 뚜렷이 하였으며 광활한 중국의 동북지대를 활무대로 독자적인 발전의 길을 걸어오면서 고유한 민족적 정기와 향기를 무르익혀 왔다.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 《민속사》의 간행사에서 인용 함) 한개 민족의 풍속은 그 민족의 력사의 일부분이며 문화의 일부분이기도 하다. 연변조선족의 력사와 문화유산에 대한 조사를 하느라고 줄기차게 뛰여다니던 나는 2001년 7월 27일 한국 사진가 강위원과 동행하여 안도현 장흥향 신툰(安圖縣長興鄕新屯)에 다녀갔다가 뜻밖에도 이 마을에서 치르는 진남순(陳南順) 할머니 상례와 제례에 참가할수 있어 인생의 종점과 저승의 시점에서 거행되는 전통적인 의례를 직접 기록할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였다.   지성으로 꾸미는 상여 2001년 7월 26일과 27일, 나는 연변대학 예술학원 객좌교수로 계시던 한국사진가 강위원과 함께 안도현 장흥향 신툰에 다녀와 이 마을의 이민사도 조사하고 강교수님이 쓴 《조선족의 오늘》의 사진설명문에 대한 이 마을 로인님들의 의견들도 수집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중국 동북(만주)전역을 점령한 일제는 1936년에 이른바 《재만조선인지도요강 (在滿朝鮮人 指導要綱)》을 제정하여 매년 조선으로부터 1만 세대, 5만여 명의 이주민을 연변과 동변도(東邊道)지역의 23개 현에 이주시키고자 계획하고 1938년에 39개 현(길장지구 포함)으로 확대하였다. 그 결과 1937년부터 1939년까지 만주지역에 이민한 조선인 집단이민(集團移民)은 무려 125개 촌에 9,226세대, 49,600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신툰의 전신은 바로 일제의 계획에 따라 1938년 3월 25일에 설립된 연길현 명월촌 도안구 집단이민부락 (延吉縣明月村島安溝集團移民部落)이다. 한국 경상도 합천군의 30세대, 밀양군의 30세대와 거창군의 40세대가 1938년 3월 25일 도안구에 60세대, 주가툰에 40세대로 나뉘여서 집단이민부락을 꾸리기 시작했단다. 그들은 이미 조선으로부터 완전한 민족풍속을 지니고 와서 연변이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자기 민족풍속습관을 고스란히 지켜왔다. 당시 만척은 유화정책으로 흥농회를 통하여 조선인들의 민속적인 행사를 보급하였는바 1941년에는 관혼상제례를 위한 상여와 가마, 사모관대, 활옷 등과 명절이나 행사 농악놀이에 필요한 북이나 장구, 매구, 징, 꽹과리 등을 보급했다. 이리하여 신툰에서는 부락이 서서부터 지금까지도 사람이 세상 뜨면 조선민족민속전통을 바탕으로 하고 시대와 지역의 변천에 적응하면서 상례와 제례를 실시하고있다. 그 무서운 문화대혁명시기에 상여와 상여당이 무작정 부셔졌다만 1년 좀 지나 다시 만들어져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있다.      7월 26일 점심 저들이 한창 이 마을 로인님들을 모시고 취재를 하고있는데 이 마을 진남순(1923년 합천군 출생) 할머니께서 안도현병원에 입원하셨다가 사망했으므로  27일 상례와 제례를 치려달라는 진남순의 맏아들 정도영(鄭道永)의 기별이 전해왔다. 이 마을 로인회 회장 리상준(李相俊, 합천군 출생)은 골간들을 모아놓고 구체적배치를 하는것이였다. 상례(喪禮)란 좁은 의미에서 말하면 사람이 죽어서부터 장사를 지내기전에 진행하는 행사를 말하고 넓은 의미에서 말하면 부모가 사망한 후 자식들이 상제로 있는 동안에 행하는 모든 례절을 말한다. 제례(祭禮)는 죽은 사람의 넋에 음식을 차려놓고 일정한 의식(儀式)을 치르는것을 말한다. 언녕부터 전통적인 상례와 제례를 기록하려고 벼르고 벼르던 나는 우연하게 이 절호의 기회를 만난지라 충분한 준비를 하였다. 27일 아침, 로인회장의 인솔밑에 10여명 로인들이 문화실 마당에서 홍송나무로 관을 짜서 안도현병원에 실어 보냈다. 아침식사를 마친 나는 로인님들한테 물으면서 상여당을 촬영하려갔다. 상여(행두라고도 부름)란 령구를 인공적으로 메여 운송하는 도구를 말하고 상여당이란 상여와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보관하는 집을 가리킨다. 일반적으로 상여당은 마을 밖 500∼600m 되는 곳에 짓는다. 마을의 동남쪽 골짜기 수레길을 따라 500여m 걸어가니 귀틀막에 벼짚이영을 이은 상여당이 보였다. 방금 상여를 실어갔으므로 텅 비였는데 주먹만한 자물쇠가 잠겨져 있었다.  객사한 사람의 령구를 집안이나 마을 안에 들여오지 않으므로 다이야수레에 실어온 상여를 마을 북쪽출구 길옆에 내려  놓았다. 강영운(姜永云), 곽인영(郭仁永) 등 마을의 좌상어른들이 리덕순(李德淳) 촌당지부서기와 촌장 등 10여명 중년들을 이끌고 지성을 다해 상여를 꾸미였다. 먼저 6대의 가름대를 놓고 그우에 2대의 대채대를 올려놓았다. 그리고 령구에 씌울 집을 따로 만들었다. 먼저 벽널 4쪽을 비녀로 서로 물려 조립하고 붉은 천에 흰 무늬를 새긴 천을 둘러치고 수탉대가리조각 8개를 꼽고 둥그스럼한 덮개를 덮었다. 그리고는 청천대 4대를 세워서 동여매고 가운데는 흰색이고 변두리는 붉은 색인 청천을 치고 청천대 웃끝에 헝겊방울을 각각 하나씩 단다. 령구집 정면에 직경이 반메터 될 흰 꽃을 달고 옆과 뒷면에 흰색, 분홍색, 록색의 꽃을 달아놓았다. 이어서 검은 천으로 만든 바땋이줄을 대채대 량옆의 가름대에 두줄씩 매여놓았고 령구를 동이는 새끼줄도 다 매여놓았다. 바로 이렇게 담배쉼도 없이 10여명이 한시간 남짓이 부지런히 일한 보람으로 상여는 다 준비되였다. 이 마을 사람들이 꾸며놓은 멋들어지고 아름다운 상여에는 우리 민족인민들의 인생과 죽음에 대한 인식과 태도, 조선민족풍속의 풍요로움과 숭고함, 그리고 우리 민족 선배님들의 지혜와 슬기가 슴배여있음이 분명하였다.   오전 10시 반 되여 령구를 실은 자동차와 상제, 복인 빈객들이 도착되였다. 마을 장년 넷이 굵직한 바줄로 관을 들어 상여의 대채대우에 올려놓자 여러 사람들이 새끼로 령구와 대채대를 十자형으로 두곳이나 묶었다. 이어서 다 준비한 령구집을 천천히 들어 령구를 덮어주었다. 이어서 발인제를 행했다. 상여가 집을 떠나 묘소로 가는것을 발인이라고 한다. 상여앞에 돗자리를 펴고 제사상을 차려놓은후 맏상제인 정도영이 제사상앞에 꿇어앉아 자기절로 술을 한잔 부어서 제사상우에 올려놓고 절을 두번 드리고 물러섰다. 그러자 집사가 《령이기가 왕즉유택 재진견례 영결종천(靈輀旣駕 往卽幽宅 載陳遣禮 永訣終天: 령여에 모셔 발인차비를 다 했으니 가시는 곳은 유택입니다. 견례를 행하여 영원히 작별 하고자 합니다.)》라고 발인축을 고했다.     《영결종천》하는 소리가 끝나자 상여군들이 일제히 상여를 메고 일어서서 묘지를 향해 출발하기 시작했다. 한쪽 가름대 어간에 상여군 2명씩 들어서서 바땋이줄을 어깨에 걸었다. 그러니 한쪽에 10명씩, 모두 20명 상여군들이 상여를 멘것이다.            애달픈 상여소리 출상할 때 명정을 든 사람이 앞에 서고 그다음 공포(功布)를 든 사람,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이 서고 그뒤에 상여 맨뒤의 가름대를 붙잡은 상제들이 따르고 복인, 빈객들이 따라섰다. 상제인 녀인들을 제외한 다른 녀인들은 묘지로 가지 않고 마을에서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접할 음식을 준비하였다.  상여소리는 령구를 상여에 싣고 묘지로 갈 때에 부르는 노래이다. 상여소리는 보통 호상(好喪―늙은 로인이 사망된 경우)에만 내고 액상(厄喪―젊은 사람이 사망된 경우)에는 내지 않는다. 이 부락의 상여소리는 고정적인 가사가 없고 흔히 즉흥적으로 엮어댄다. 이 마을에선 리교영(李交榮, 원 이름은 리범룡) 로인님이 제일 처음으로 종구쟁이를 맡으셨댔는데 오늘엔 안영춘(安永春, 50세)이 제3임 종구쟁이로 나섰다.  상여앞에서 왼손으론 대채대를 잡고 오른손엔 구리종을 쥔 종구쟁이가 종을 흔들면서 상여군들을 향해 구슬프고도 애절한 목소리로 선소리를 먹인다. 그러면 상여군들이 그 소리를 받아 일치하고도 우렁차게 후렴을 부르면서 맞추어 나간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간다 간다 나는 간다      영영 리별 나는 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인간 세상 하직하고      북망산천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천년 집을 하직하고      만년 집을 찾아간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부모님께 효성하고      자식을랑 다 키웠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좋은 세상 더 살자니      요놈 병에 끝장났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내가 비록 떠났어도      너희들은 잘 살아라.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 검은 구름이 낮게 드린 하늘에선 비가 담방 쏟아질듯 하고 산골짜기사이로 뻗은 달구지길은 지난밤에 내린 비로 하여 즐벅즐벅하였다. 붉은 천에 흰색으로《孺人麗陽陳氏之柩》라고 쓴 명정을 앞세우고 말도 없고 웃음도 없이 고개를 숙인채 느릿느릿 걸어가는 비장한 출상행렬. 애처롭고 거치른 종구쟁이의 먹이는 소리와 둔탁하고 처량한 상여군들 남성저음의 특유한 받음소리. 그리고 상제들의 애짭잘하고 목 메인 흐느낌소리와 터벅터벅 흙탕길을 짓밟는 흐트러진 발자국소리. 이 모든것이 한 덩어리가 되어 사람들의 마음을 괴롭히고 눈물을 흘리게 한다. 이 모든것에 초목도 떨고 산천도 울부짖고 하늘도 흐느낀다.          이 마을의 상여소리가사에 대하여 리교영 로인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알려줬다. 가사내용은 일반적으로 사망한 로인님의 인생경력과 업적, 자식들과 친척들에 대한 간절한 부탁과 희망, 그리고 상제와 복인, 빈객들이 사망자에게 바치는 효성과 바램, 출상행렬이 지나는 과정 등 내용들을 즉흥적으로 엮어서 부른단다. 때문에 종구쟁이로 나서는 사람은 일반적으로 학식이 높고 사망자와 그 가정에 대해 잘 알아야 하며 강한 호소력, 령활한 조직능력과 변화무쌍한 환경에 임기응변을 하는 재간을 가져야 한단다. 출상행렬이 울퉁불퉁한 자그마한 둔덕길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종을 요란하게 울리면서 선소리를 먹이고 상여군들도 그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가기는 가겠는데 길이 험해 어쩌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맞상제 맞상제여 로자 없어 못 가겠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종구쟁이가 대채대를 뒤로 밀자 상여군들이 뒤걸음을 친다. 맞상제인 정도영 부부가 술병을 들고 상여앞에 나와 먼저 령구에 절을 두번 올린후 술을 부어 종구쟁이와 상여군들에게 권하고 상여 맨앞 왼쪽 가름대에 선 상여군에게 부의금을 맡긴다. 상제가 절을 올리면 상여군들이 일치하게 허리를 굽혀 답례하고서 권하는 술도 마이고 한참 노래를 부르면서 멈춰 섰다가 다시 앞으로 나간다. 출상행렬이 작은 물도랑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멈춰 서서 노래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강이 가로 놓여 다리 없어 못 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어데 있소 빨리 나와 다리 놓소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둘째상제 정순영(鄭淳永) 부부가 상여앞에 나와 절을 두번 올리고 상여군들에게 술과 담배를 권하고 부의금도 낸다. 출상행렬이 길 복판의 자그마한 물웅덩이앞에 이르자 종구쟁이가 또 멈춰 서서 노래를 부른다.        어허 어허요 어허람마 어허요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대해가 망망하여 배가 없어 못건너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어데 있소 돛배 하나 갖춰주오      에헤요 에헤요 어허럼마 데헤요   큰사돈 부부가 상여앞에 나오자 종구쟁이가 상여군들을 이끌어 물구덩이에 딱 붙어섰다. 큰사돈부부는 막무가내로 물구덩이에 엎드려 옷을 적시면서 절을 올린후 부의금을 낸다.   바로 이렇게 종구쟁이가 즉흥적으로 노래를 엮어 부르면서 상제들은 물론 복인과 빈객들도 불러내여 령구에 절을 올리고 부의금을 내게 한단다. 때문에 이 마을에서는 호상일 경우엔 부의금을 별도로 내지 않고 상여가 나갈 때에 낸다. 이날 출상행렬은 상여소리에 맞추어 앞으로 걷기도 하고 멈추기도 하고  뒤걸음도 하면서 두공리 되는 길을 한시간 반동안 걸었다. 저승의 새집들이 사람들은 흔히 사람이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고 한다. 저승에 가면  새집에 들기 마련이 아닐가? 하여 나는 령구를 매장하는 것을 저승의 새집들이라고 말한다. 25년전에 사망된 진남순의 남편 정현태(鄭鉉泰)를 이 마을 공동묘지에 모신 정황에서 상제들은 진남순의 묘소는 별도로 쓰지 않고 그의 남편묘소에 합장하기로 했다. 로인회에서는 이미 동네사람들을 보내 아침 일찍 정현태 묘소중간 왼쪽에 합장할 묘혈을 파놓았다. 정현태 묘소에 후토가 있기에 진남순은 후토를 따로 두지 않는다. 상여가 묘소에 이르자 령구집을 벗겨내고 령구를 동이였던 새끼줄들을 풀어낸 다음 네 사람이 참바로 령구를 들어 묘혈에 가져다 하관(下棺)하였다. 하관할 때 령구의 머리쪽을 산꼭대기로 향하게 했다. 이때 상제들이 몰려들어 관을 붙잡고 통곡을 한다. 그 처절한 곡소리에  가슴이 찢어지는듯하고 눈물이 흐르는것을 어쩔수 없었다. 굴심을 책임졌던 김태호(金泰浩) 로인과 종구쟁이를 맡았던 안영춘이 손을 맞추어 묘혈에 들어가 령구를 바로 잡아놓고 동네사람들더러 령구 변두리에만 흙을 채우게 한다. 그런 다음 안영춘이 장판을 닦는 아낙네처럼 관을 가로 타고 엎드려 공포로 관우의 흙을 말끔히 닦아냈다. 홍송으로 된 관 널판자가 새하얀 빛을 반사한다. 이어서 김태호와 안영춘이 《孺人麗陽陳氏之柩》 라고 쓴 명정을 관우에 바르게 덮었다. 그리고 김태호 로인께서 참대젓가락 2대를 령구의 머리쪽 위치의 정현태 령구 흙벽에 꽂아 주면서 부드럽게 여쭌다. 《오작교를 놓았으니 서로 련애하러 밤낮으로 잘 다니시소.》 이 참대젓가락은 부부의 령혼이 서로 오가는 오작교를 상징한다. 김태호가 묘혈에서 나오자 맏상제와 둘째상제가 저마다 옷섶에 묘혈에서 파낸 흙을 담아서 령구의 머리쪽, 중간, 아래쪽 세곳에 쏟아놓는다. 이것을 《사방토를 놓는다.》고 한다. 그다음 상여군들이 통곡하는 상제들을 물리치고 부지런히 삽질하여 령구를 묻고 봉분한다. 이 마을사람들은 봉분한 흙우에 풀뿌리 떼짱을 큼직큼직하게 떠서 차례로 덮으면서 공기가 통하지 않도록 삽으로 힘주어 두들겨준다. 그러면서 또 낫으로 떼짱우의 풀들을 말끔히 베여버린다. 이러고보니 합장한 큼직한 묘소엔 파아란 풀들이 잔디처럼 붙어있어 이미 있던 묘소나 새로 만든 묘소가 한데 서로 어울려 분간하기도 힘들었다. 여러 사람들이 무덤의 아래머리에 묘제를 지내는 너비가 약 반메터, 길이가 약 2메터되는 제단을 흙으로 만들었다.   효성을 바치는 추모 사람들은 제례를 통하여 사망된이를 추모하면서 못 다한 효성을 바치는 한편 사망된 이의 관심과 조력을 받아보려는 심리를 가지고있다.  성분제례는 로인회 리상준 회장께서 집사를 맡았다. 먼저 상제들이 후토자리에 종이를 펴고 음식을 간단히 차려놓은후 맏상제가 술을 한잔 붓고 절을 두번 하였다.   후토제를 지낸 다음 묘제(성분제)를 지냈다. 상제들이 집사의 지도하에 제단우에  흰 종이를 펴고 음식을 차린다. 앞줄(무덤과 가까운 곳)에는 밥그릇, 물그릇 같은것을 놓고 뒤줄에는 반찬을 놓는다. 돼지고기, 소고기 같은 육류는 서쪽에 놓고 물고기는 동쪽에 놓는다. 그리고 검은 액틀에 넣은 진남순의 사진을 앞줄 한복판에 놓았다. 집사의 안내로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의 오른쪽에 모여서고 빈객들이 제단 왼쪽에 모여 섰다. 집사께서 고 진남순의 제사를 시작한다고 선포하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곡을 하다가 그치고 제단앞에서 술을 붓고 절을 올렸다. 먼저 맏상제부부가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고 절을 두번 하고 헌작한 술을 제단 변두리에 부어버리고 음식들을 조금씩 무덤 앞부분에 던져 주면서 고인들께서 많이 잡수시라고 알린다. 이어서 상제와 복인들이 사망자와의 직계, 방계 등 친척관계순서로 제단앞에 나와 상술한 방법대로 헌작, 배례한다. 상제와 복인들의 헌작, 배례가 끝나자 빈객들도 나와서 헌작하고 무덤을 향해 세번 경례를 올리고 상제와 복인들에게도 경례를 한번 올린다. 그러면 상제와 복인들도 답례로 빈객을 향해 경례를 한번 한다. 헌작, 배례가 끝나자 상제와 복인들이 제단앞에 가로섰다. 맏상제가 상제와 복인들을 대표하여 마지막 술을 한잔 부어 제단우에 놓았다.  그러자 상제와 복인들이 일제히 허리 굽혀 절을 두번 했다. 바로 이렇게 《하직절》을 마치자 맏상제 정도영이 천천히 걸어서 부모님의 무덤  머리쪽에 쪼크리고 앉아 눈물을 훔치면서 말한다. 《아버지, 25년만에 어머니를 모셔왔습니다. 언제든 한국 고향에 가 보시겠다던 소원을 이루게 못하여 죄송합니다. 이젠 부모님께서 서로 잘 지내시면서 계속 자손들과 친척들이 잘 되게끔 보살펴주옵서소. 다음날 다시 다녀오겠습니다.》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쉰 정도영은 제단앞에 다시 돌아와 전체 사람들더러 제사상에 놓았던 음식을 조금씩이라도 음복(飮福)하게 권한다. 정도영의 안해도 여러 사람들이 음복하도록 하고는 제단앞에 놓인 시어머니사진을 보면서 나지막하게 말한다. 《어머니, 이젠 모든 근심을 버리고 잘 계십시오. 내일 안신제를 지내려 오겠습니다.》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조금씩 음복하고는 모두 마을로 돌아왔다.  로인회에서 녀성들을 동원하여 촌문화실과 몇집에 음식을 차려놓고 산소에 다녀갔던 사람들은 물론 온 마을 사람들을 청하여 음복하게 했다. 그리고 상여가 나갈 때 받아들인 부의금을 로인회에서 점검한후 로인회에서 조직하면서 쓴 모든 경비를 지불한 외에 나머지는 몽땅 상주집에 넘겨주었다. 이 부의금은 절대로 상여군 등 개인들에게 나누어주거나 기념품 사는데 쓰지 않으며 로인회거나 촌에서도 한푼도 점하지 않는다. 혹시 경제형편이 괜찮은 상주집들에서 고맙다고 로인회에 돈을 좀 주면 그 돈은 상여나 상례, 제례에 쓰는 제구, 식기들을 갖추는데만 쓴다.   나는 이 마을 진남순 할머님의 상례와 제례에 참가하여 많은것들을 배웠고 또 많은것들도 생각해보았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사망자의 평생공적을 찬송하고 참다운 인생비결을 찾고 인생도리를 밝힘으로써 살고있는 사람들이 자기의 인생길과 인생가치를 재인식하고 참답게 살아갈 용기와 힘을 얻게 한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조상전래의 조선민족미풍량속을 연변이란 특정된 자연환경, 사회환경, 력사환경에 알맞게 계승, 발전시키고있으며 이런 미풍량속을 후세들이 이어가도록 본을 보여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상례와 제례를 통하여 서로간의 믿음과 친선을 늘이고 마을공동체사상을 수립함으로써 제반사업을 내미는 원동력을 키운다. 이런 행사에선 참가자가 간부이든 평민이든, 시가지사람이든 촌민이든, 친척이든 이웃이든 모두가 평등하고 모두가 행사지휘에 복종한다. 이런 행사에 참가한 사람들은 모두가 자진하여 자기가 해야할 일을 찾으며 또 에누리없이 완성한다. 그리고 서로 잘 도와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마을에 정착한지 66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어찌하여 이처럼 자기민족 미풍량속을 잘 지켜갈수 있을가? 나는 그 리유가 다음과 같지 않겠는가 제나름대로 생각해본다. 그것은 중국공산당의 옳바른 민족정책이 있기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중화민족대가정속에서 다른 형제민족들과 마찬가지로 나라의 떳떳한 주인이 되어 자기 민족문화를 이어가고 발전시켜가고있는것이다. 지구촌 140여개 나라와 지구에 널려 사는 조선민족들가운데서 중국에서처럼 민족자치제도를 실시하는 곳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이 마을에서 간직하고 있는 미풍량속은 반만년의 풍부한 민족문화유산을 토대로 하고 중국 및 주변국가 여러 민족문화의 자양분을 섭취하면서 시대의 발전에 맞게 계승되고 발전되였기에 다른 문화가 대신할수 없는 강대한 생명력을 가지고있다. 그리고 자기 민족문화를 지켜가고 발전시켜 가는 훌륭한 선줄군과 지도자가 있고 이들을 받들고 따르는 훌륭한 조선민족 군중들이 있으며 한족을 비롯한 여러 민족인민들의 도움과 성원이 있었기때문이다. 지금 새로운 시대에 들어서면서 이 마을에서도 많은 변화가 생기고 조선민족의식과 인구, 교육, 그리고 농촌체제개혁 등 여러 면에서 심각한 도전을 겪고있다. 특히 녀성들과 젊은이들의 도시진출로 하여 이런 미풍량속을 이어갈 사람들이 점점 적어지는것이 뚜렷한 문제로 나서고있는 현실이다. 때문에 앞으로 당과 정부와 관계기관, 단체 및 전문가, 학자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이 이런 문제를 더 관심하시길 바라는것이 나의 소원이다.      2003년 7월
7    (론문) 신툰의 조선족 전통 장례습속에 대한 천담--정종인 댓글:  조회:5034  추천:0  2012-07-16
(论文)浅谈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 研讨会上发表 安图县文物管理所  郑钟仁   葬礼习俗是一个民族、一个地区或一个部落、一个家族在特定的历史发展进程和环境条件下,携带着当时当地历史、经济、文化、意识形态等多方面信息,从不同侧面反映当时的文明水平的一种文化遗产。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作为中国朝鲜族典型葬礼习俗,具有一定的文化价值、历史价值和使用价值。保护和传承这一习俗,对于研究如何“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葬礼习俗类文化遗产,有其特殊的意义。   一、渊源、沿革与基本状况 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是在中国朝鲜族传统葬礼习俗中较好地传承朝鲜族葬礼习俗的典型葬礼习俗。目前的中国朝鲜族丧葬习俗,究其来源是形成于朝鲜的李朝时期(1392——1910),又在中国朝鲜族居住地经过漫长时期的演变而形成的。 在李氏朝鲜以前的较长时期,土葬和火葬并行,由于崇尚佛教,火葬也比较盛行。到李氏朝鲜时期,统治者由于推行崇儒抑佛政策,把火葬看作是严重违背孝道的葬俗。认为“祖父母安于地下,则子孙安,不尔则反是,且人之生于世,然木之拖根于地,焚其根株,则枝叶凋瘁,安有发荣滋长之理乎”。朝鲜国王“传旨礼曹司宪府曰:┄┄无知之民,或有不葬其亲,而烧焚之。毁风俗,蔑彝伦,莫甚于此。祖宗以来,已有禁令,然恐习俗犹踵前弊,自今内而宪府,外而监司守令,痛行禁断。如有犯者,依律论罪,其族亲邻里,知而不禁者,并重论”。礼曹呈国王、经国王同意的整治火葬的规定尤为严酷,“其从尊长遗言,将尸烧火者,杖一百。┄┄子孙毁弃祖父母、父母死尸者斩”。于是三番五次下令严禁火葬。从此,朝鲜人民逐渐形成火葬不可为的观念,土葬成了葬俗的规则,火葬风俗随之消失。直到二十世纪六十年代以前,中国朝鲜族人民中,也曾长期存在着把火葬看作违背孝道的、不可为的、不愿为的观念。二十世纪六十年代开始,尤其是改革开放以后,中国朝鲜族人民逐渐破除实行火葬是对父母不孝的陈旧观念,逐步接受火葬风俗,根据条件实行火葬或土葬。 朝鲜族旧时丧葬的丧期较长,丧服实行五服习俗,运棺工具为丧舆,禁忌较多,程序也十分复杂,现多为简化。就丧葬程序来说,从人死到安葬的过程包括属纩、招魂、小殓、大殓、成服、迁棺、发靷、出殡、安葬,比较繁多,丧期也较长。从二十世纪六十年代之后,随着时代的步伐,为了适应生产生活的需要缩短了葬期,丧葬程序也逐渐简化,现在一般包括招魂、殓、成服、出殡、安葬或火葬等程序。 安图县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主要继承今位于韩国东南部庆尚道的葬俗,其传承渊源和历史沿革已无从考究。二十世纪三十年代中期,迁居中国后的首任护丧(丧事中负责安排和处理各种事情的指挥者)的代表人物是李姓老人,他较完整地继承了朝鲜族的葬礼习俗,并把葬俗较完整地传给后任护丧。后来随着生活环境、思想观念变化和时代的进步,又几经传承和演变,丧葬风俗已有不少变化和简化,但固有的主要葬礼习俗基本上较好地传承下来。   二、新屯葬俗与其特点及价值 新屯现行葬俗基本上是土葬三日葬风俗,其具体办法和程序大致如下: 1、招魂。临终之人一旦咽气,儿子(儿子不在,近亲)就为死者招魂。招魂过后,死者亲属们开始哭号,亲属们分为丧制(死者的配偶、子女、儿媳、、孙子等)和服人(死者的兄弟、姐妹、女婿、侄子等旁系亲属)。丧制要哭出“哀高—哀高—”,服人则哭出“哦咿—哦咿—”的之声。接着向外地的亲属和朋友发出讣告,打电话告知丧事。丧家发出哭声之后,邻里前来吊唁。 2、殓。招魂过后,将袭、小殓、大殓、成服等程序并在一起进行。其大体过程是:脱去死者旧衣,换上寿衣,“含饭”,用酒精棉堵塞七窍,脸盖冥帽,手带白手套,脚穿白纸鞋或白袜,用白布带从肩到脚腕捆扎七道,把扎好的尸体放在七星板上,盖上被子,拉一道幔帐遮挡。紧靠幔帐摆上食桌,既用于上食,也用于灵桌,死者的遗像放在灵桌幔帐处。客人前来吊唁时,在灵桌上斟上一杯酒,磕头三次,并向丧制表示慰问。什么时候做好了棺材,就什么时候进行大殓。大殓之后,书写铭旌垂挂在幔帐上。铭旌的一般书写方式是;若死者是男,写“显考学生府君神位”;若死者是女,写“显妣孺人XX(籍贯)X(姓)氏神位”。大殓后,死者的亲属(男臂系白布带,女头系白布条)系带丧服标志举行入棺祭祀。三天丧期内,上食桌上一日三次摆桌,上一些菜、饭、酒等。 3、出丧(出殡)。出丧包括迁棺、发靷(丧舆从家里出发)及其祭祀、出丧、安葬、山神祭祀和墓祭等程序。把灵柩从屋里抬到外边称迁棺,出殡时把灵柩抬进丧舆后,在丧舆前举行出丧前发靷祭祀,此时,丧舆契(专管丧葬的部落民间组织)的肩夫们把肩挑的丧舆做前低后高的姿势,使丧舆上的灵柩前头随之向下倾斜,做磕头还礼状,意为棺中人在离家前向邻里朋友们对生前关心和死后的帮助表示感谢并道别。 发靷祭祀结束后,丧舆开始出发。出发前丧舆都监喊发靷祝文,丧舆随即出发。此时,领柩者手持铜铃,丧舆前引路,领唱丧舆歌,每唱两句,肩夫们齐唱副歌,其声十分悲壮。离开新屯时领柩者代死者说:“我去了,我去了,我去XX,别了,永别了”等语。离村后丧舆一路行至已挖好的墓穴里安好灵柩,棺盖上覆盖铭旌,由丧制衣襟兜起挖墓穴的新土,撒在棺材四角或头部、中部、脚部处,称“四方土”。之后众人动锹圆坟。修完坟墓,先在墓旁祭祀山神,后进行墓祭,最后行告别礼返家。返家后丧主以酒食招待参加葬礼的人们。 第二天,去墓地举行安神祭,之后选择时机立墓碑,并年年清明和中秋节祭祀。 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以朝鲜族传统文化为基调,包含儒教中积极的思想,表现中国朝鲜族人民情感、孝道思想和民俗文化,经过演变,形成了适合当地文化、生活的、具有代表性的中国朝鲜族传统葬礼风俗。以此为特征的这一风俗,主要有如下价值: (1)历史价值。新屯朝鲜族传统葬礼习俗,开始形成于朝鲜半岛,自清末开始,随朝鲜移民大量移居中国而带入中国。此葬俗经过新的环境下的考验和几经传承、演变,如今仍在实行,有其存在的合理性和必要性。这一习俗对于研究中国朝鲜族历史及其文化、民俗演变具有重要的价值。 (2)文化价值。新屯葬俗具有深厚的朝鲜族文化底蕴,在传承演变中去其糟粕,留其精华,既较好地传承固有的基本葬礼习俗,又在社会主义环境下吸取先进文化,今天已形成为中国朝鲜族不可缺少的较先进的民俗文化。 (3)使用价值。在走完人生最后必由之路时,需要一定的程序、礼仪来慰藉死者及其亲人亲属和邻里亲友,抚平死者家属的悲痛心情,以此来悼念故人并激励人们不要虚度年华,要珍惜生命,珍惜时间,团结互助,和睦相处,努力奋斗,对国家和邻里,对家庭和亲友多做好事,多做贡献,积极争取活得有意义、有价值。   三、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 尽管新屯葬礼风俗有合理性的积极意义,但其传承处于濒危境地。老一辈护丧等熟悉丧葬风俗的人大多过世,在世的人也不多,而且年事已高。新屯现仅存三人,年龄均八十岁以上,而年轻一点的大多受到现代观念的冲击,忙于挣钱,不愿学习、传承,到这些老人过世后,可能断档,较完整的丧葬风俗将面临逐渐失传的困境。 丧葬习俗,这一人类文化遗产是历代前人馈赠给当代和未来人们的珍贵礼物和宝贵财富。它帮助后人去识别对与错、好与坏、事物的相关性和不相关性。以及时间的有限性和无限性。当代人没有权利把前人留给自己和未来人们的礼物和财富,断送在自己的手中,一定要留给子孙后代,这是我们的历史使命。为了保护和传承发展新屯葬礼习俗等文化遗产,我们要努力做到以下几点: 1、加强领导,提高认识,加大执行非物质文化遗产的“保护为主、抢救第一、合理利用、传承发展”这一方针。安图县成立了非物质文化遗产保护领导小组,做了大量的工作,取得了较好的成绩,但也有不足之处。领导的重视程度,往往决定人力、物力、财力的投入力度,进而影响工作效益的高低和成果的大小及执行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方针的认真程度。因此,我们要积极争取领导重视、关心和参与。当然,不能奢望或提出不切实际的要求,理解他们的苦处和难处,但一定要争取非物质文化工作所需要的领导重视和支持,争取必需的人力、物力、财力,以利于非物质文化遗产保护工作顺利进行。 2、建立机构,加强宣传、保护、研究、挖掘、传承发展工作。要建立民俗研究学会。学会集研究、交流、挖掘、宣传、培训、保护、传承、发展民俗文化的功能和作用,必定起着非物质文化遗产保护领导小组无法代替的特殊作用。只要有领导和相关部门的实际行动支持,民俗研究学会一定会完成自己的使命。同时,通过媒体宣传等各种形式,加大非物质文化遗产保护方面的宣传,提高全社会保护非物质文化遗产意识,参与到共同保护、共同所有、共同享受文化遗产的社会活动中来。 3、建立培养传承人队伍机制,把非物质文化遗产代代相传。长期以来,人们对非物质文化遗产的传承性一直认识不足,实际上无论是保护、抢救还是利用,核心问题终究还是传承,而传承的关键在于传承人问题。解决一时一地的一项非物质文化遗产的传承人问题,终非长久之计,所以,党政有关部门和民间组织要共同努力,鼓励有条件的人们参加非物质文化遗产传承事业,同时,以培训形式和师承制等传授与学习的有效途径,有计划地解决传承人培养问题。 总之,非物质文化遗产保护的本质是文化的传承与发展的问题。人类文明在世代的文化创造和积累中不断发展进步,原有的文明,过去创造的非物质文化遗产,有些作为可以利用的价值和因素被传承下来,有些则被历史遗忘。新屯中国朝鲜族葬礼习俗作为可以利用的价值和因素被传承下来,只要我们保护中传承,传承中发展,将来无论丧葬习俗怎样演变,其固有的本质和基本原则将会长期传承下去。                       二0一0年十二月十日    
6    (칼럼)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김선화 댓글:  조회:4360  추천:0  2012-07-16
상여에 대한 간단한 조사 세미나 응모작품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 김선화   《장례》하고 《죽은 사람》하면 머리카락이 쭈볏이 일어서고 밖에 나가기조차 무서워하던 필자는 박물관에 와서 많은 시간을 오래된 문물들과 접촉하면서, 특히 올해에 있은 전국 《귀중문물 데이터베이스(数据库database)》 건설에 참가하여 룡정부분을 책임지고 재료를 수집하고 정리하는 과정에 국가급 일급 문물인 상여를 진일보 가까히 접촉하고 그에 관한  재료를 수집하면서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게 되였고 문물 하나 하나에 담겨진 그 의미를 진일보 터득하게 되였다. 웅장하면서도 비감한 상여군들의 상여소리에 맞추어  명정을 선두로 공포, 요여, 만장, 상여, 그뒤로 상인, 조객 등으로 길게 늘어진 상여행렬은  20세기 60년대초까지만 하여도 연변지구 농촌에서 흔히 볼수있었던  한개 경관이였다. 상여는 장례시 죽은 자의 시체를 장지로 운반하는 공구인데 행상 또는 령여, 향두라고도 부른다. 상여가 제일 처음 문자로 문헌에 기재된 것은 조선의 《주자가례》라고도 할수 있는 리재가 쓴 《사례편람》인데 《대여는 가난한 사람들이 구하기 힘들므로 상여를 사용해도 된다.》라고 씌여 있다. 그리고 8권으로 된 《사례편람》에서  3권부터 8권까지는 상례와 제례에 관한 부분이다. 이로부터 효도와 조상숭배를 인륜의 첫째 준칙으로 주장하는 유교륜리에 의하여 관혼상제의 사례 (四礼) 가운데서 상례와 제례는 그 절차가 얼마나 번잡하고 까다로웠는가를 엿볼수가 있다.  상여는 장례때 씌이는 여러가지 물건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물건으로서 과거 상여의 정교함과 호화로움은 그 가족의 사회적 지위와 경제적 지위을 나타내기도 하고 죽은 자에 대한 효도와 사랑을 상징하기도 하였다. 상여는 종족끼리 준비하는 것도 있었고 마을에서 공동으로 준비하여 쓰는것도 있었다. 이것은 비상업적인 행위로서 세를 놓는것이 아니고, 공익성적으로 마을에 상사가 생기면 서로 빌려다 쓰군 하였다. 상여의 좋고 나쁨은 한 마을의 명예와도 관계되기 때문에 매 마을에서는 자기마을의 상여제작 과정중에서 자연히 호화롭고 아름답게 만들기에 심혈을 기울이게 되였다. 그리고 종족에서 준비하는 상여일 경우에는 상여의 좋고 나쁨이 그 종족의 지위와 재력을 직접 표현하기 때문에 상여의 제작공예나 재료에 더더구나 성본을  아끼지 않았다. 60년대 초기까지만 하여도 연변의 조선족 마을마다에 거의 상여가 있었다. 평상시에는 마을과 동떨어진 곳에 상여막을 짓고 그곳에 보관하였다가 유사시에만 가져다 쓰군 하였다. 우리가 답사한데 의하면 덕신향 석문촌에는 원래 상후동 (지금의 석문4대 )과 간촌(지금의 석문2대)에 각기 향두막이 있었다. 마을과 좀 동떨어진 곳이였는데 향두막은 돌을 쌓아 벽을 하고 짚으로 지붕을 이였는데 문은 하나만 냈다. 향두를 관리하는 사람을 “향두워량”이라고 불렀는데 마을 어른들이 일년에 한번씩 회의를 하고 선거를 하였다. 향두를 써야 할때에는 먼저 “향두워량”과 상의해서 쓰군 하였다. 60년대 문화혁명이 시작되면서 잡귀신을 때려잡는다고 하여 향두를 불살라버리고 향두막도 허물어 버렸다. 우리 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는  상여는 피나무와 적송으로 된것인데 1989년 훈춘현 마적달향 마적달진에서 수집한 것이다. 1960년대에 제작한 것이고 16명이 메도록 만들어졌다. 이 상여는 양장, 웃덥개, 몸체, 운각, 들대, 장식등 6개 부분으로 구성되였다. 양장은 너비1.5메터, 길이 3메터의 연푸른색 광목천 변두리에 15센치메터의 검은색 광목천 변두리를 둘렀고, 그 옆에 흰색천으로 레스모양을 만들어 달았다. 양장은 길이가 약 2메터 되고 직경이 7센치메터 좌우의 두대의  x자형 양장대로 긴 들대에 고정시켜 쓴다. 덮개는 앞뒤 두장의 반원모양의 룡수판을 세오리의 가름대로 고정시키고, 그위에 검은색 광목천을 덮어 지붕모양을 만들었다. 혼백이 검은 의복을 입은 저승사자에 안내되어 북방으로 간다고 생각하여 관 위를 검은색천으로 덮어서 사용하였다. 그 위에는 입에 여의주를 물고 머리를 각기 앞뒤로 향하고 몸체를 칭칭 감아 서로 얽힌 두마리 운룡모양의 조각을 마룻대에 얹어 고정시켰다. 그 룡조각위에는 또 하나가 크고 두개가 작은 꼭두각시 세개가  꽂혀 있다. 가운데 큰 인형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었는데  이는 동방삭을 의미한다고 한다. 동방삭은 보통 사자를 탄 모습이라고 하는데 여기서는 사자를 타지 않고 직립하고 있다. 전설에서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하는 동박삭은 죽은 자의 망령을 좋은 곳으로 안내한다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고 한다. 크기가 같은 두개의 꼭두각시는 하나는 남자모양으로, 하나는 여자모양으로 되여 있다. 죽은자가 남자이면 남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고, 죽은자가 여자이면 여자 꼭두각시를 앞에 꽂는다고 한다. 전체 조각은 피나무를 깎아서 만들었는데 특히 룡조각은 모양이 생동하고 선이 미끈하여 흠잡을데가 없다. 하나의 상여는 조각기술과 목공기술 및 미공기술의 종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몸체부분은 아래위 두개의 네모난 틀로 되였는데 네귀에 4개의 기둥을 세워 련결하였다. 몸체 조성이 완성된후 기둥 웃부분에 봉황새 조각을 꽂고 휘장을 드리우면 된다. 휘장은 흰색을 위주로 홍, 황, 청 세가지색을 곁들어 이쁘게 만드는데 상여안의 관이 보이지 않게하는 작용을 한다. 운각은 윗틀 휘장을 고정시키는데 쓰는 둘레 막이인데 너비가 13센치메터인 널판자로 되여있다. 이 상여는 네쪼각으로 된 운각을 쓰기 편리하게 돌쩌귀로 연결해 놓았다. 운각에도 먹으로 국화, 련꽂 등 도안을 그려 넣은것을 볼수가 있다. 운각과 몸체 웃틀에는 상응한 디(卯)가 나있어 계자순자 (鸡子榫子)를 꽂아 고정할수 있게 만들었다. 이 상여에는 앞뒤에 각각3개씩 6개, 좌우에 각각 5씩 10개, 모두 16개의 계자순자가 있다. 계자순자의 다른 한가지 용도는 장식용 술을 거는 것이다. 들대로는 장강(长扛)과 횡강(横扛)이 있다. 장강은 길이가 5메터 남짓히 길고, 지름이 15센치메터인 두대의 적송으로 되였는데 그 한쪽에 나란히 일정한 간격을 두고 5개의 꺽쇠모양의 부속이 달려있다. 이는 횡강을 꽂아 사용할때 고정하는 곳이다. 두대의 장강은 세대의 길이 60센치메터 되는 단강으로 연결되여 있다. 횡강은  길이가 2.5메터 남짓하고  지름이 8센치메터 되는 다섯개의 나무대로 구성되였다. 상여를 멜때에는 횡강 사이를 기다란 흰광목천으로  련결한후 그 천을 상여군들이 어깨에 메고 횡강을 손으로 잡는다. 이 상여는 모두 50여개의 부속품으로 구성되였지만  한개의 못도 사용하지 않고 완전히 장부구조로 련결되여 있다는 것이 특점이다. 사용이 끊난후에는 작은 부속품들을 분해하여 130×40×40인 작은 상자에 넣을수 있어 운반과 보관이 간편하게 만들었다. 이번의 자료수집에서는 또 한국의 많은 상관 자료들을 접촉하게 되였는데 우리의 상여와 한국 상여의 차이점도 보아내게 되였다.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의 룡수판에는 구호수법으로 대부분 벽사적 역할을 하는 룡의 머리나 도깨비 얼굴모양을 그려넣은 것이 특징이나, 우리가 수장하고 있는 상여의 룡수판은 반월형 널판자에 련꽃과 물고기등 그림을 먹으로 그려넣고 글자를 쓴것이 특점이다. 상여와 마찬가지로 룡수판 역시 지방, 사회계층, 제작자의 취향에 따라 매우 다양하게 제작된다. 또한 룡수판은 전문가가 제작한 불교 공예품과는 달리 마을에서 솜씨깨나 있다는 사람들이 모여 공동으로 제작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여기에는 만든 이의 심성이 그대로 드러나 있게 된다. 그리고 한국에서 소장하고 있는 꼭두각시 조각들은 기법이 복잡하고 여러가지 색갈을 내여 색감이 화려하지만 우리의 것들은 간단면서도 미끈한 기법으로 그냥 봉황만 약간의 색갈을 올렸을 뿐이다. 총적으로 한국에서 수장하고 있는 상여들은 색채나 조각면에서 현란하고 호화로운 아름다움을 추구했다면 우리의 상여는 소박하고 장엄한 아름다움을 추구했다고 할수 있다. 이번 조사에서 필자는 상여와 더불어 쓰이는 도구들 가운데서 제일 중요한 도구인 관과 수의에 대해서도 간단한 조사를 해보았다. 필자가 조사한데 의하면 과거에는 집에 년령이 60에 가까워지는 로인이 계신다면 자식들이 관널과 칠성판을 준비해 두는것이 효도라고 생각하였다. 보통 2~3센치메터 두께 되는 옹이 적은 홍송널이 관널 재료로는 상등품이라고 하였다. 생활에 여유가 있어 가정에서 자식들이 홍송널을 준비해 주면 로인들은 자기 집널을 좋은것으로 마련하였다고 즐겨워 하고, 남들 앞에게 자랑하기도 하였다. 나이가 60환갑에 가까워 오면 안노인들은 내외 두분의 수의(속옷, 겉옷, 폭건, 악수, 버선)도 생전에 베천으로  만들어서 풀까지 빳빳이 먹여서 장롱속 깊은 곳에 고이 넣어 두었다. 과거 조선족 민간에서는 노인을 위해 생전에 수의를 미리 마련해 두면 더욱 오래 앉을수 있다는 관념이 류행되였다. 력사의 흐름과 시대의 발전에 따라 연변지구에서 50년대 까지만 하여도 흔히 볼수 있었던 상여행렬은 60년대를 기점으로 전통 장례풍습이 사라져감에 따라 력사의 무대에서 사라진지 오래지만 풍격이 독특한 상여는 력사의 세례를 겪었어도 의연히 그 소박함과 고요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우리 여기 용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는 민간으로 부터 수집한 상여와 제례에 상관되는 문물이 족히 백여건에 달한다. 비록 물건들은 세월의 세례속에서 좀이 먹고 색이 바랬지만 소박하면서도 단아한 조형으로부터 이 물건들의 당년의 그 기품을 그대로 보아낼수 있다.   2010-11-29
5    (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한광운 조경희 댓글:  조회:9094  추천:0  2012-07-16
(론문) 조선족 상례문화의 흔적—상여 세미나에서 발표 연변박물관 한광운 조경희   머리말 상여라 하면 사람들은 인츰 죽음을 떠 올리게 된다. 상여라 함은 죽은사람을 메여 내가는 도구로써 사람들에게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축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을 것이고 나이 많은 분들은 기억으로나 남아 있을지 상여에 대해 거론할때가 거의 없다. 필자도 어릴적에 상여를 본적이 있고 상여로 관을 메여 내가는 광경을 직접 목격했었으며 무시무시한 상여막에도 호기심으로 접근해 본적도 있었다. 상여란 어구는 민속에 접촉하면서 알게 된것이고 그전에는 라고 들어었다. 사무실에 앉아서는 상상도 못했는데 이 근래에 민간조사를 하면서 생각밖으로 를 재차 목격하게 되였다. 어릴때는 무서워서 접근 못했지만 지금에 와서는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이란 차원에서 친근감을 느끼면서 아주 가까운 곳에서 그것도 직접 만지면서 그젯날 조상들의 넋을 떠올리였다. 다행스럽게도 2009년에 가 길림성 비물질 문화유산 대표성 명록에 등재되여 보호를 받게 되였고 상여도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부분으로서 문화유물로 보호를 받게 되였다. 아래에 상여에 관련해서 필자의 감수를 적으려 한다. 여러 전문가, 학자들께서 참고하시기 바란다. 1.연변지역 상여보존현황 조선족이 조선반도로 부터 중국에 이주해온 력사도 어언간 150년이나 된다. 비록 간고한 이주력사를 걸치고 파란곡절 많은 삶을 영위해 왔지만 민족의 전통만은 잃지않고 항시 전승해 왔다. 상여도 우리민족의 넋을 담은 문화전통으로 끈질기게 지금까지 살아남아 있었다. 필자는 20세기80년대 후기부터 민속사업에 종사하게 되였으며 점차 문화적 시각으로 우리민족이 남겨놓은 유물에 대해 접근하였다. 필자의 고향은 훈춘이여서 자주 훈춘지역을 들락거리였다. 1989년에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서 근무하면서 훈춘에 방문갔다가 우연하게 당시의 마적달향에 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인츰 박물관에 알리고 조사를 진행할것을 제의 하였다. 사실 1988년에 필자(고향은 훈춘시 삼가자향 동강자촌임)의 부친이 사망하면서 장례식은 전통식으로 치렀으며 로 관을 메여 내갔던것이였다. 이런 상황으로 보아 훈춘지역에선 이 시기에 기본상 를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수있다. 3명으로 구성된 룡정박물관 조사일군들은 마적달향에 도착하여 쉴 사이도 없이 으로 달려갔다. 현장에 도착하여 실물을 보는 순간 놀라움을 금치못하였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가 눈앞에 나타났던 것이다. 필자 고향의 상여와는 다른 인형도 있고 새도 있고 그림도 있는 상여였다. 그 형태로부터 볼때 가마형 상여였다. 아쉽게도 유물 수집에만 급급하다보니 상세한 내용조사는 못하고 그렇다할 기록도 남기지 못하였다. 허나 조선족의 대표성적인 문화유물인것만은 사실이였다. 현재 이 유물은 룡정조선족민속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다. 20여년이란 세월이 흐르면서 보관장소가 합당하지 않은 탓으로 많이 좀이 먹어들어 갔고 시급히 수리해야할 지경에 이르렀다. 2008년 연변박물관에서는 조선족 민속전시를 새롭게 꾸리면서 룡정민속박물관의 상여를 본따서 김광혁이란 공예 미술가를 초청하여 원모양대로 복원해 놓았다. 대채의 길이는 4.3메터정도이고 너비는 75센치메터였다. 몸체의 길이는 260센치메터, 너비는 75센치메터, 총높이는 125센치메터였다. 조각품으로는 룡두 2개, 오리모양의 큰새 4개, 오리모양의 작은새 16개, 선비인형 1개, 동자인형 2개이다. 그림으로는 앞 룡수판(룡두를 올려놓는 반원형 나무판)에 그린 물고기가 룡으로 화한 그림, 뒤룡수판의 련꽃, 물고기 그림, 란간에 그려진 매화, 국화 꽃무늬가 있었다. 1930년에 제작된 상여. 훈춘시 마적달향에서 사용하던 것인데 1989년에 룡정조선족 민속박물관에 수집, 소장하고 있음 조선족 조각예술가 김광혁선생이 상여를 복원하고 있음(2008)   2007년부터 필자는 연변지역 민간조사를 규모있게 진행하였었다. 조사 주제는 상여가 아니였지만 상여를 적지않게 발견하게 되였다. 새세기에 들어서면서 조선족의 장례방식은 많이 바뀌였다. 나라적으로 화장법을 제창하는 바람에 전통적인 토장법은 거의 사그러져 갔고 깊은 산간마을에서만 아직도 가담가담 토장법은 계속 실행하고 있었으며 상여도 어느정도 사용한다고 한다. 지금에 와서 상여가 있어도 멜 사람도 찿기 힘든 상황이며 동력운수도구를 사용할때가 더욱 많다. 2007년 가을 룡정시 부유향 하마래촌(현재 부유향을 취소하고 삼합진에 합병)을 조사하면서 우연하게 을 지나게 되였는데 1970년도에 제작된 소수레에 조합해서 만든 상여를 발견하였다. 동네로인들과 문의하였는데 하마래촌의 김종식(1939년생)로인이 만든것이라 한다. 김종식로인은 하마래촌에서 태여나서 어릴때부터 목수일을 익혀왔으며 문화대혁명초기에 원래의 상여가 없어지자 수레에다 상여를 조합하는 착상을 내놓아 산길에서도 쉽게 오르내릴수 있는 중국조선족들에게만 있는 새로운 상여를 만들었다. 그 상여구조를 보면 조선족 전통의 팔간기와집 지붕을 본딴것인데 루각식 상여의 일종이라 할수 있다. 아쉽게도 이 상여는 그 당시 크게 파손되였는데 타민족의 페품수구하는 사람들이 에 들어가 수레의 축과 바퀴테의 쇠붙이만을  빼내갔고 상여를 분리해서 사처에다 널어놓았다. 정말로 량심없는 인간들이였다. 조선족들은 옛날부터 황디막에 보통 접근하지 않았으며 아이들이 그 근처에서 장난질 하는것도 제한하였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오랜세월이 흘렀어도 인위적으로 상여가 파손되는 현상은 매우 드물었다. 필자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널려져있는 상여 부분품들을 황디막에 들여놓아 어느땐가 수집해 가려고 하였다. 헌데 그 이듬해 재차 갔는데 그 나머지 마저도 불을 때려고 누군가가 가졌갔다는 것이였다. 이렇게 이 특이한 상여는 사진으로만 남아있게 되였다. 하마래촌은 도시의 화장터와 거리가 너무 멀어서 지금도 토장법을 행하고 있는 실정이다. 인젠 전통식 상여로 장례를 치를수가 없게 되였다. 룡정시 삼합진 하마래촌에서 1970년에 제작한 수레에 조합한 상여 하마래촌에서 제작한 상여의 부속물-혼백함 2008년 가을, 필자는 훈춘시 마적달향 마적달촌으로 내려가 재차 민간조사를 진행하였다. 본촌의 진장춘(당시71세), 정기수(당시62세) 두 로인의 안내하에 마을 서북쪽에 위치한 으로 갔다. 은 기둥과 지붕만 있고 벽은 없었다. 비나 눈을 막기 위한 것이였다. 이 마을의 상여는 그 구조가 매우 간단하였는데 필자의 고향마을의 상여와 흡사했다. 대채와 몸체로 구성되였는데 대채는 그 규격이 길이가 41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70센치메터였다. 몸체는 기둥과 보로 이루어졌는데 조선족 가옥구조와 비슷했다. 몸체의 규격을 보면 길이 200센치메터, 너비 70센치메터, 높이 68센치메터였다. 몸체 중간에 관을 놓게 되였는데 관의 규격은 보통 길이가 180-200센치메터이고 너비가 45센치메터이며 높이가 30센치메터였다고 한다. 관을 놓은후 몸체 사면은 붉은 천으로 두르고 웃지붕은 흰천으로 쳐놓는다. 그리고 흰천으로 품바를 만들어 관을 메게 앞뒤채에다 열십자로 동여 매놓는다.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의 상여-대채 2009년 음력설이 금방 지난후 필자는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원래는 동신향에 속했는데 후에 동신향이 취소되고 천교령진에 합병)을 조사하였다. 태양촌은 20세기 30년대에 일제의 강제이주로 인해 생겨난 집단부락이였다. 주로 조선반도 경상북도 안동, 문경에서 많이 이주해 왔는데 지금도 경상도 말씨를 사용하고 있다. 태양촌 서북쪽 강변에 (상여를  보관하는 막집)이 세워져있다. 지금도 상여가 보관되여 있다. 현재의 매장법에 의하면 이곳 주민들은 화장법이나 토장법을 모두 채용할수 있다. 허나 지금은 토장은 거의 치르지 않고 화장하는데 연길이나 도문의 화장터로 가야한다. 태양촌에 원래 오래된 상여가 있었는데 문화대혁명시기에 없어졌다가 1970년 이후에 로인독보조에서 다시 원래의 모양대로 만들었다. 이곳의 상여는 기타 지방보다 많이 다르다. 이 상여를 만든이는 태양촌의 72세 되는 신창순로인인데 태양촌에 살다가 지금은 동신촌에서 멀지않은 하동촌에 이사하였다고 한다. 신로인은 목수재간이 있고 경상북도에서 전해진 모양을 본따서  만들었다고 한다. 전문적인 상여조직도 있었는데 지금은 로인협회에서 관리한다. 그전에 상여소리를 하는 로인들도 계셨는데 모두 세상뜨고 가석하게도 후세에 전해주지 못하였다. 상여의 형태로 보아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로서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 상여인듯 하였다. 조각품은  란간에 꽂혀있는 쐐기인데 머리쪽에다 봉황과 물고기를 그렸다. 그리고 지붕 앞뒤면에 각기 두마리의 룡과 두마리 학을 그려놓았다. 지붕 중간에 붉은 룡주를 달아놓았다. 색조는 오방색을 취하였는데 대채는 누른색, 지붕은 누른색, 기둥과 보는 푸른색, 란간은 붉은색을 칠하고 몸체에는 검은색천을 두르고 푸른색, 누른색, 붉은색천으로 장식물을 만들어 달아놓았다. 휘장은 흰색바탕에 변두리에 하늘색을 대였으며 네귀에 푸른색, 하늘색, 누른색, 붉은색으로 조합해 만든 장식물을 달았다. 현재는 상여를 별로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에 보존되여 있는 상여 이상은 필자가 민간조사 과정에 상여에 대한 직접 보고 느낀것이다. 조선족로인들은 그래도 전통적인 장례방식에 대해 고집하고 있으며 별로 사용하지않는 도구라고 하지만 버리기 아쉬워하며 우리민족의 문화전통으로 세세대대로 간직하기를 바라고 있다. 2.상여에 관련된 민속 내용 상여에 관련해서 여러문헌들에 적지않게 소개되였다. 조선의 서책에서는 상여를 아래와 같이 귀납하였다. 상여는 시체를 운반하는 기구이다. 상두, 령여라고도 한다. 상여모양은 가마와 비슷하며 가마보다 더 길고 몸체좌우에는 멜채가 길게 뻗어있어 그 량쪽끝에 채 막대기를 가로 대고 앞채 막대기 좌우로 두줄씩 끈(천)을 달아 뒤채 막대기에 붙잡아 맨 다음 중간에 일정한 간격으로 멜방망이를 좌우로 끼여 사람들이 그 사이에 들어가 끈을 어깨에 메도록 되여있다. 몸체는 단청식으로 여러가지 채색을 하고 네귀에는 기둥을  세워 우로 포장을 쳐 해빛을 가리우며 상여 뚜껑에는 련꽃 또는 봉황새등으로 장식하였다. 상여는 마을에서 일정하게 떨어진 곳에 (상두막, 상구막, 행사막)라는 집을 공동으로 짓고 그안에 보관해두고 사람이 죽으면 가져다가 리용하였다. 상여를 보관할때는 분해하였다가 사용할때마다 조립하군 하였다.[1] 여기에서 상여막이 거론되는데 상여를 보관하는데 필수적인 시설인것이다. 연변지역에서는 상여를 황두라고 부르는데 황두라는 말은 옛날 평안도나 함경도 지방에서 주로 상사때에 서로 도와주는 상호부조 조직이였던 에서 유래된 것인데 향이 황, 도가 두로 음이 와전된 것으로 인정한다.[2] 상여막은 마을에서 500메터안으로 떨어진 좀 편벽한곳에 설치하는데 15-20평방메터의 면적에 벼집지붕 모양으로 지었다. 벽면을 만들어 문을 달아 자물쇠를 잠그기도 하였고 산간지대에서 벽면도 없이 기둥과 지붕만 만들어 세우기도 하였다. 옛날에는 새나 짚으로 지붕을 얹어 놓았지만 20세기70년대후에는 세멘트기와나 붉은기와를 얹었다. 사람들은 상여막을 가까이 접근하는것을 꺼리였으며 아이들이 상여막 근처를 가지못하도록 단속하였다. 길을 가다가 상여막이 맞띄우면 길을 에돌아서 지나간다. 이렇게 상여막은 범접할수 없는 금지구역으로 되여 고스란이 유지되여 왔다.    왕청현 천교령진 태양촌 서북쪽에 위치한 황두막   장례식때 상여를 동반하여 상여소리가 이어지는데 상여소리는 장례때에 부르는 노래로서 상여군들이 고인의 령구를 실은 상여를 메고 묘지까지 가면서 부르는 추도곡과 같은 노래이다. 상여소리에는 긴 상여소리와 잦은 상여소리가 있는데 집에서 상여를 멜때부터 마을을 벗어 날때까지는 긴 상여소리를 부르고 상여가 마을을 벗어나면 잦은 상여소리를 불렀다. 상여소리에서 특징적인것은 고인을 넋을 대신하여 노래 잘 부르는 선소리군이 먹이는 소리와 상여군들이 받아부르는 소리로 되여있는 것이다. 긴 상여소리는 먹이는 소리가 길고 받는 소리가 짧고 그 음악형상은 한없이 구슬프고 애절하다. 잦은 상여소리는 선소리군이 고인의 넋을 대신하여 부르는 노래인 동시에 상여행렬을 다그쳐나가기 위한 지시를 주는  소리이기도 하였다. 잦은 상여소리의 먹이는 소리와 받는 소리는 같은데 그 음악형상은 처량하면서도 활기 있는것이 특징이다. 상여가 묘지에 도착하면 이어 제사를 지내고 관을 묘자리에 묻었는데 이때 상여군들은 달구로 무덤을 다지면서 를 불렀다.[3] 안도현 신툰과 왕청현 태양촌에서는 20세기 90년대까지도 장례식때 상여 소리를 불렀다고 한다. 새 세기에 들어서면서 상여소리를 부르는 로인들이 세상뜨면서 점차적으로 자취를 감추기 시작했는데 후대에 제대로 전해지지 못하였던 것이다.     연변에서 류행되던 상여소리 가사 두곡을 살펴보기로 하자. 상여소리1: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저승길이 멀다해도 대문밖이 저승일세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다시 오지는 못하리   엥 엥 엥요 어이 갈고 에헤요 평풍에 그린 저닭이 홰를 치면 다시 오리 (리상철 창,김태갑 수집)[4]   상여소리2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넌 안산이 북망일세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이길로 한번 돌아가면 어느 황천에 다시볼가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인제가면 언제오리 올날이나 일어주소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시내안산에 우지지고 차천명월이 밝아온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   새벽접동이 지저울고 강상두루미 춤을 춘다. 어이이히노 이나리 넘자 어허노[5]   상여와 관련되는 민속내용에서 상여조직도 매우 중요한 한부분이다. 이러한 상여조직을 상여계라고 하는데 연변에서는 향도계라고도 하였다. 향도는 민간에서 친목과 상호부조를 목적으로 무어진 생활조직이다. 향도는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우선 성원들 호상간 친목을 도모하였다. 다음으로 상사일을 서로 도와 주었다. 상여계는 전문적으로 상례와 장례를 치르는 민간조직이다. 20세기60년대 이전까지 조선족 마을에는 거의다 상여계가 건립되여 있었다. 호수가 200-300 호에 달하는 큰 마을은 단독으로 상여계를 건립하고 호수가 몇십호밖에 안되는 마을은 몇개 마을이 련합하여 상여계를 건립하였다. 18세이상 되는 남성 촌민들은 모두 상여계에 참가하며 집에 로인을 모시고 있는 경우에는 18세미만의 소년도 상예계에 가입하였다. 상여계의 관리인원들로는 존위(尊位), 도감, 집사, 소임등이 있다. 기타의 성원들은 제원(诸员) 이라고 한다. 존위는 상여계의 우두머리로서 년세가 많고 덕망이 높은 사람이 담당한다. 상례와 제례행사에서 실제적 지휘는 도감이며 집사는 도감을 협조하여 구체적 행사를 집행하는 사람이다. 소임은 심부름군이다.[6] 2008년 9월에 필자가 훈춘시 합달문향 마적달촌을 조사하면서 상여계에 관련되는 내용을 어느정도 알게 되였다. 이 마을에는 황디월이라는것이 있는데 주로  상사때 장례식을 도와 나서는 조직이라 한다. 황디월의 좌상되는 사람을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라 하는데 시신을 렴하고 부고를 내는 일을 맡아 한다. 그 아래에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이란 직무가 있는데 장례식의 구체적일을 맡아 처리한다. 집집이 돌아다니며 (제보자의 발음대로 표기. 황디월에서 거두는 비용항목)을 거두기도 한다. 이러한 은 옛날에는 인민페50전씩 거두었는데 현재는 10-20원정도를 거둔다고 한다. 촌민들이 모두 황디월에 참여할수 있는데 과부만은 참여 못하며 돈만 기부하면 된다고 한다. 매년 섣달 20일좌우에 황디월 회의를 소집하여 좌상을 선거한다고 한다. 그러면 매년 한번씩 좌상을 바꾸는 셈이다. 대부분 조선족 마을에서는 현재 전문적인 상여조직을 내오지 않고 로인협회에서 그 직능을 리행하고 있다. 필자가 조사한 왕청현 태양촌과 룡정시 하마래촌도 그러한 상황이였다. 3.상여의 구조와 장식물의 문화적함의 상여의 구조는 크게 가마형과 루각건물형으로 나눌 수 있다. 가마형은 전체적인 형상이 가마처럼 생긴 상여를 말하며 다시 상여 본체 지붕의 위치에 자리한 덮개의 형태로 보아 자라의 등처럼 둥근 형태로 생긴 별갑형(鱉甲形)과 지붕 량쪽에 박공 2개를 접속 고정한 박공형(朴工形)이 있다. 루각건물형은 다층 루각형태로 된 상여로서 상여의 상단을 기와집의 형태로 마감하여 기와와 처마 등을 갖춘 기와집의 구조물을 그대로 재현한 것을 말한다. 임금이 타던 련(辇)이나 고관대작들이 타던 화려한 가교(驾轿)처럼 비슷하게 꾸며서 죽은 이가 평소에 탈수 없었던 것을 죽어서나마 한번 타보라고 하는 것이다.[7] 연변지역의 조선족 마을에서 류행되던 상여는 가마형이 대부분이며 루각건물형도 간혹 볼수가 있었다. 룡정박물관에 소장되여있는 상여는 가마형의 박공형 상여이고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는 가마형의 별갑형 상여라 할수있다. 룡정시 하마래촌에 있었던 수레에 조합한 상여는 루각건물형이라고 할수있는데 단층으로 된것이라 할수있다. 상여는 저승(陰間)과 이승(陽間)령역, 그리고 신성(祖上神) 령역과 일상 령역의 통합, 또는 전이 단계에서 존재하며 그렇기에 상여와 그 장식물은 이 량자적 령역을 동시에 수반하는 속성을 갖는다. 일반적으로 말할 때 삶의 방위는 동쪽이나 남쪽에 두고 죽음의 방위는 그와 반대인 서쪽이나 북쪽에 두는 사례가 많다. 유교에서도 죽음의 방향을 북망산(北邙山: 하남성[河南省] 락양[洛阳] 북쪽에 있는 산으로, 옛날의 왕후나 공경[公卿]들이 대부분 이곳에 묻혔음.)으로 두고 있다. 죽음은 두려움이나 부정의 대상이 아니고 삶의 또 다른 연장선이다. 상여는 상례문화 안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이며 그 장식으로 인해 화려함과 더불어 가장 구체적인 형상물이 제시되는 상징 공간이다.[8] 상여 장식물은 조선왕조시기의 유교적 상례문화와 함께 성행한 예술적 산물이다. 충렬왕 16년(1290년) 성리학과 함께 들어온 주희(朱熹,1130~1200)의 가례(家礼)는 조선 례제 (礼制)의 기본이 되였고 이를 토대로 (经国大典) (1469)과 (国朝五礼仪)(1474)가 편찬되여 유교식 의례의 보편화가 진행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가의 유교식 상례의 정책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왕조 중기까지는 고려의 불교식 화장(火葬)문화의 영향으로 유교식 매장의례는 완전히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유교식 상례문화가 정착된 계기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서 중국식 가례를 수용하였지만 있는 그대로 답습한 것이 아니라 조선반도의 실정에 맞는 부분은 받아 들이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과감히 버리는 형태로 취하였다. 조선왕조 후기의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상례에서 가장 큰 의례 용구인 상여에서도 그 구조와 장식물에서 큰 변화가 일어났다.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호화로운 건축물화 현상이 나타나고 장식적인 측면에서는 민화적 성격을 갖춘 그림과 더불어 각종 목조 장식물이 부착되였다. 상여 장식물은 유교적 의례 활동을 통해 량반 신분으로의 상승을 보여줄수 있는 중요한 표상물(表象物)이였다. 연변의 조선족 에게는 그러한 화려함이 이어지지 못하고 서민층에서 보편화된 간이한 상여가 전승되였다. 그러나 민화적인 장식물과 그림들이 활용되였다. 상여에 나타난 민화적 소재를 보면 가구나 도자기 그리고 수예품에서 늘 볼수있는 동식물 문양들이였다. 룡정민속 박물관에 소장되여 있는 상여는 비교적 대표적인 장식물이 부착된 나무공예품인 것이다. 상여의 몸체의 지붕꼭대기에 꼬인 룡두가 앞뒤로 향하게 놓여 있고 룡몸뚱이 우에는 선비인형과 동자인형이 박혀있다. 룡두를 받치는 룡수판에는 룡으로 화한 물고기, 련꽃과 물고기가 각기 그려져있고 배경으로는 산, 물, 구름이 그려져 있었다. 몸체 네귀퉁이에는 오리모양의 새 네마리가 조각되여 꽂혀 있고 란간을 고정하는 쐐기머리는 오리모양의 작은 새로 조각되였다. 란간에는 사군자의 일종인 매화, 국화가 그려져 있었고 물결무늬가 보인다. 여기서 인형은 망자를 인도하는 시자(侍者)라 볼수 있고 새들은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령혼의 안내자라 볼수 있다. 왕청현 태양촌의 상여에는 그려진 봉황과 물고기가 보이고 룡과 학 그림이 보이며 해와 산, 구름도 보인다.          선비인형(복제품) 동자인형(복제품) 룡두와 인형(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새 조각품(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봉황과 물고기문양(왕청현 태양촌 상여의 부분품) 이러한 상여 장식물들은 삶의 소망을 담아 죽음의 부정적 측면보다는 죽음을 통해 삶이 연장될 것이라는  삶에 대한 축복의 함의로 묘사되는 것이다. 옛날엔 여러가지 소재로 된 자연적인 문양들이 장소나 내용에  맞게 제작되였으며 부귀다남 (富贵多男), 부귀공명(富贵功名), 무병장수(无病长寿) 등의 의미와 같이 서민들의 삶에 대한 애착과 소망을 담아 일상 기물과 같은 친숙한 소재에 상징적으로 표현되였다. 기물과 상여 장식물에 많이 등장하는 것들 중에서 모란꽃은 꽃중의 왕으로 부귀와 명예를 상징한다. 모란과 다른 문양이 서로 결합되여 여러가지 의미를 나타내는데 모란을 병에 꽂은 형상은 부귀평안을 상징하며 모란과 백조 한쌍이 결합되면 백발이 될때까지 부귀를 누린다는 뜻을 나타낸다. 매화의 자연현상을 보면 늙은 줄기에서 새 가지가 돋아 나오며 추운 겨울을 견딘후 꽃이 피기 때문에 로쇠하지 않음을 상징한다. 민간에서는 매화가 다섯잎으로 되여 있기에 오복인 복(福), 록(禄), 수(寿), 희(喜), 재(财)를 표시한다고 여기여 길상 문양으로 많이 리용된다. 련꽃무늬에서 련뿌리와 줄기가 서로 얽혀 있는것은 형제자매의 우애, 련꽃열매와 씨앗은 다산을 소망하는 관념이다. 그리고 련꽃의 자연특성을 보면 비록 진흙에서 피여 나지만 어지럽게 물들지 않고 항상 깨끗함을 유지하며 수명 또한 길다. 룡은 옛날 봉건사회에서 하늘의 권위와 왕의 덕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대자연의 여러가지 동물을 상상해서 조합한 것이였다. 십장생 문양은 각각에 다른 의미가 있는데 태양은 세상을 밝게 비추어 앞날을 환하게 함을 의미하며 산은 한마음 한뜻으로 변함이 없음을 의미하며 구름은 속세를 벗어난 자유로움을 의미하며 물은 깨끗한 마음을 의미하며 소나무는 굳은 절개, 참대와 학은 높은 기상을 의미하며 사슴은 선함과 평화를 상징하며 거북이는 수호신과 복을 상징하고 불로초는 불로장생을 의미한다. 부귀를 나타내는 어구에서 련년유여(连年有余)라는 말이 있다. 즉 해마다 나머지가 있게 풍족하다는 의미이다. 민간에서는 이런 의미를 련꽃과 물고기에 의탁했는데 이 동식물의 명칭은 중문으로 련년유여와 같은 발음이였다. 그리고 련꽃과 물고기의 자연속성이 부귀와 련관이 있기에 장식무늬로 같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중국의 문헌인 《후한서》(后汉书) 《리응전》 (李膺传)에서 등룡문(登龙门)이란 이야기가 나오는데 바로 선비가 과거에 급제하여 임금을 배알하는 과정을 적고 있다. 등룡문(登龙门)은 전설적인 이야기인데 그 기본내용을 보면 황하 상류의 룡문이라는 협곡에서 해마다 봄철이면 잉어들이 거센 물살을 거슬러 올라 가기 위해 앞다투어 협곡을 뛰여 오르는데 그곳을 성공적으로 뛰여넘는 잉어가 룡으로 화한다고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학문에 진력하는 선비들을 이 전설속의 잉어에 비유했고 과거에 급제하여 높은 관직에 오르는 것을 잉어가 변하여 룡이되는 것에 비유하였던것이다. 룡수판에 그려진 련꽃과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룡으로 화한 물고기(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지붕앞면에 그려진 룡두(왕청현 태양촌의 상여 문양) 지붕뒷면에 그려진 학(왕청현 태양촌 상여)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사군자 무늬중의 국화와 매화(복제품-원품은 룡정민속박물관에 소장) 그리고 사군자에 속하는 매화, 란초, 국화, 참대는 색채가 담담하고 향기가 청신하며 그윽하고 외진곳에서 자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래서 력대의 문인들은 그들의 생태적 특성을 군자의 도덕적 심성이라든가 절개와 련관시켜 관념적인 대상물로 보았다. 오리(鸭)는 갑옷이라는 갑(甲)이 있어 장원급제함을 나타내고 원앙은 부부금실을 뜻하였다. 이렇게 사람들의 삶의 소망은 삶의 흔적으로 상여 장식물에 남아 있었으며 또한 망자에게 죽은 이후에도 삶이 있다면 새롭게 재탄생되는 념원을 반영하기도 하였다.     맺는말 상여는 다만 사람이 죽은후 시체를 운반하는 도구로서가 아니라 문화적 함의가 농후한 공예품으로 보아야 한다. 장시기동안 인간의 삶과 죽음의 령역에서 령혼을 이어주는 역할을 착실히 해온 상여는 비록 일상생활에서 도외시 될때도 많았지만 신비하면서 상징적인 표상물로서 매우 큰 인상을 남기였다. 조선족의 상례문화에서 빠뜨리면 안되는 상여는 현재 흔적으로만 남아있어 어느땐가 소실되지 않을가 하고 우려심이 들때가 많다. 상여를 박물관의 소장품만이 아닌 민간의 상례문화에서의 표연품으로도 활용되였으면 한다. 어떻게 보면 정중한 상례의식이 아니라 예술이 담긴 표연항목으로 재현 하는것도 바람직한 것이다. 조선족 상례가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여 있는 상황에서 상여를 상례문화의 중요한 구성 부분으로 간주하고 방법을 모색하여 보호하고 어떻게 하나 그것이 재현되게 하는것이 방향인듯 싶다. 우리 모두 합세하여 조선족의 상례문화의 흔적-상여를 문화적 차원에서 적극 보호하고 리용해야 한다. 2010년12월2일 [1]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2]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3] 조선민속사전 과학백과사전출판사 2004년 [4]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6페지 [5] 민요집성 김태갑 조성일 편주 연변인민출판사 1981년 217페지 [6] 중국조선민족문화사대계7-민속사 민족출판사 1998년 [7]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8] 리현경 민속학연구 제25호
4    (론문) 조선족 상장문화 보호와 발전문제에 관하여--천만수 댓글:  조회:3789  추천:0  2012-07-16
(论文)关于朝鲜族丧葬文化保护与发展问题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中共延边州委党校 千万修   2009年6月,我州《朝鲜族丧葬习俗》被延边朝鲜族自治州政府和吉林省政府批准为“非物质文化遗产”。这是我州朝鲜族民族文化建设史上的一件大事,也是我们朝鲜族丧葬习俗,能够合法保护、传承和发展的客观依据。一年来,在党和政府的关怀和支持,尤其是州文化局的正确领导及负责保护的单位的共同努力下,我州朝鲜族丧葬文化的保护与发展工作,有了新的起色。 朝鲜族传统丧葬习俗,在我州有100多年历史,又经历了那么多的风风雨雨,却到今天还能保护和传承,并使之发扬光大,固然离不开本民族自身的努力,但更重要的是得益于中国共产党对少数民族的关怀和各兄弟民族的帮助。因此,我们没有任何理由来,衰减或削亡我们民族的文化遗产,使传统的朝鲜族丧葬文化造成边缘化、趋同化和散失化。 包括丧葬礼仪在内的各民族的风俗习惯,在一定程度上表现和反映着一个民族的生活方式、历史传统和心理感情,是民族文化的重要组成部分,是民族特点的一个重要方面。现代化的推进过程中必然伴随着对传统文化的冲击,这是世界现代化进程和当代社会发展中极具普遍性的问题。不论发达国家还是发展中国家,不论占人口多数的民族还是少数的民族,都是如此。而从传统向现代转变的过程中,必然要经历文化的转型和文化的整合。在现代化的强烈冲击和国家及社会各种力量自觉保护的双重作用下,当前我国少数民族传统文化的基本状况是复兴、衰退和变异三种现象并存。不可否认,在现实中少数民族文化的确在国家相关政策的保护和本民族人民的坚持下存在一些复兴和繁荣的景象,但总体上,在现代化进程中,少数民族文化仍面临的危机比繁荣景象多。 有人认为,现代化必将导致多元文化的消失,多元将归于一元。但是,事实上现代化作为人类社会文明进步的标志,它更应该是各种文化交相辉映、共同繁荣发展的一种多元文化共存的现实。现代化并不意味着文化的同质化,也不是文化的同一化,它是多元文化的统一体。而少数民族文化的现代化是在保持现有民族特色的基础上,充分吸收和利用现代科学所带来的文明成果,它体现的是一种现代的、文明的生活方式,体现的是一种有秩序、和谐的生存状态。中国共产党历来认为,民族问题没有小事,在民族之间的交往中,是否尊重各民族的风俗习惯,关系到是否坚持民族平等和民族团结等原则问题,于是制定一系列政策措施,以保护少数民族的风俗习惯。   一、加强对朝鲜族传统丧葬文化遗产的抢救与保护的重要意义   1.这项工作关系到我州党政领导干部是否自觉遵守党纪国法的一件大事。因为,中国共产党在法律和政策上规定尊重少数民族风俗习惯。从《中国人民政治协商会议共同纲领》到《中华人民共和国宪法》、《中华人民共和国民族区域自治法》,无一例外地规定“各民族有保留或改革自己风俗习惯的自由”;1979年7月第五届全国人民代表大会第二次会议通过的《中华人民共和国地方各级人民代表大会及地方各级人民政府组织法》第33条,则把“尊重少数民族的权利和少数民族的风俗习惯”作为县以上各级人民政府的一项重要职责规定下来。为了更好地贯彻落实上述规定,《中华人民共和国刑法第147条又进一步规定:“国家工作人员非法剥夺公民的宗教信仰和民族风俗习惯,情节严重的,处二年以下有期徒刑或拘役”。 2.它是保存人类文明多样性的要求。众所周知,现代化在文化上的本质要求是保存文化的多样性,以实现世界文明的多样性。文化的多样性是人类文化得以延续和保存的重要前提,也是人类文化保持自身活力的重要条件。同时,文化多样性所要求的不同文化之间的多元关系,成为各种文化之间的张力赖以保持的可靠保障,而不同文化之间的张力关系恰恰为人类文明的存在和发展提供了不竭的动力。正如《2000年世界文化报告》中科学委员会主席阿里斯佩所说“文化的多样性是人类的精神创造无法抑制的表达……没有任何一种力量能够压制和窒息它”。少数民族文化作为中华民族文化艺术宝库的重要组成部分,在现代化进程中,保护民族文化的多样性,就是保存人类文明的结晶,就是保存中华民族的生机与活力。目前,在世界范围内,对保护文化的多样性有了广泛的共识。2000年6月在巴黎举行的首届国际文化论坛上通过了《文化性和文化多样性权利宪章》要求有关国际组织和各国政府采取措施,加强管理,使各民族的文化教育和宗教信仰得到尊重和保护。此外,保护文化多样性也成为人类共同创造地球未来的七项行动原则之一。 3.它是保护民族平等权利的一种体现。文化权利也是民族的基本权利之一。人类学家乔健认为:“族权中最具体、最重要也最具迫切性的便是对文化(包括语言)的尊重与维护。其重要性与迫切性不是基于人权的观念,因为人权论者主要着眼于个人权益而非文化的存亡;乃是基于一个现代社会新的价值观——要求尽量保存人类文化的多样性,而弱势民族的文化却正在迅速消失中。”一种民族文化代表着一个民族的历史发展,也是一个民族尊严和价值观的象征。在法律上保护一个民族的文化权利,不仅在于将它视为一种文化历史遗产而予以保护,而且在于承认一个民族有发展本民族文化的能力和要求。 4.它是提升民族凝聚力的一种途径。文化是民族区分的基础,是一个民族区别于其他民族、屹立于民族之林、并将民族成员联合起来的凝聚核心,它不仅表现一个民族的外在风貌,而且内存着它的“灵魂”。民族文化的形成过程,是一个民族道德观念、价值取向和对外部世界认知方法的培养积累过程。当一种文化被所有的本民族的社会成员所共同认同时,民族文化就成为民族内部共有的精神坐标和价值体系,成为这个民族看不见、摸不着,但却能强烈地感受到的一种民族凝聚力、向心力和整合力,民族因文化而被聚合成为一个有机整体。因此,保护民族文化,对增强民族认同感、提高民族自信心和自豪感,具有重要的意义。   二、对朝鲜族丧葬文化保护和改革的对策   在人类历史上,任何一种文化都不是单线进化的结果,相反,对不同文化的接纳和吸收是一种文化充满生机的表现。文化就其本质来说,从来就是一个历史的、开放的、变化的、发展的动态概念,而不是封闭的、停滞的、一成不变的静止概念。文化随着时代的变化处在不断地运动变化之中,但少数民族文化的变迁并不意味着民族文化的消亡与同化,相反,在某种程度上是民族适应时代发展的需要,在更高、更先进、更合理层次上的重构。一种有生命力的文化,必然是与其他文化不断交流、碰撞、融合的文化。民族传统文化的弘扬必须根据变化的社会实践与时代特点不断更新自己,使民族传统文化与时代精神和民族社会实践有机结合起来,构建新的民族文化传统,只有在这样的不断更新和创造中,民族文化才会永葆青春与活力。因此,在现代化进程中,少数民族必须要有文化适应的准备。虽然我州朝鲜族丧葬文化转型与价值重构是一个痛苦的过程。事实上,任何一个民族要生存和发展,都不得不适应环境来调整自我。当前,我们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要抓好如下工作: (一)坚持党的领导,落实好党的民族政策 这是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的关键。中国共产党历来有着尊重少数民族风俗习惯的一贯政策,而主张:“各民族都有保持和改革本民族风俗习惯的自由”、“风俗习惯的改革,要依靠民族经济基础本身的发展,不要乱改”、“少数民族地区的风俗习惯是可以改革的。但是,这种改革必须由少数民族自己来解决”等等。来自美国、加拿大、朝鲜半岛的朝鲜人,来到延边考察后,都为中国的朝鲜族能够如此完整地保留本民族的风俗习惯而赞叹不已,都认为中国共产党的少数民族政策好。我们作为中国的一个少数民族,必须坚持党的领导,坚决拥护党的民族平等、民族团结政策。只有这样,才能经得起党和国家的考验,保持和传承朝鲜族丧葬风俗习惯。 (二)紧紧依靠国家政府支持和自治州本民族的主观努力 这是保护和改革朝鲜族丧葬文化的基本途径。 1.没有国家政府的有力支持,就不能抢救和保护朝鲜族传统丧葬的风俗习惯。当前,我州朝鲜族丧葬文化建设中存在三大问题:一是失散的比保留的多;二是缺乏保护的物质载体:三是保护人员的队伍建设滞后。如果没有政府的支持、单靠民间组织开展工作,就无法解决上述问题。 2.我州朝鲜族传统文化受中华民族文化和朝鲜半岛朝鲜人文化的双重影响,虽然具有多样性,但还有自治州区域的独特性。因而,保护和改革我们的丧葬民风习俗,决不允许外人横加干涉,任意指责。保持什么和如何保护,什么时候改和怎么改均取决于我州朝鲜族干部和群众。  (三) 保护和改革朝鲜族的丧葬文化应注意以下几个环节: 1.认知和定位  有种观点认为传统代表着保守、惰性和僵化,是与现代化完全对立的。但是在现实中任何国家或民族的现代化或社会经济的发展,都不可能完全抛弃一切传统的东西。某种角度看现代化就是与传统相对而言的社会变迁,现代化的发展仍然需要传统的积淀。因此,如何正确看待民族的传统文化很重要。不能对民族的传统文化一概否定,要充分认识其在文化传承中的价值,任何一个民族一旦丧失文化上的个性,它的发展亦将失去重要的动力源。但也不能一概美化,认为传统的都是好的,都是精华。就如同对待任何事物一样,我们必须两面来看,两面来分析,趋利避害,留其精华、去其糟粕是最客观和理性的态度,而这种认知与定位对于少数民族的文化适应是非常关键的。 2.摒弃与保护  每个民族要进步,在不断创造和吸收新的文化因素的同时,都必须舍得丢弃自己落后的东西,不能在强调传统特色的同时形成文化上的保守主义。传统文化并不等于优秀文化,不等于优秀文明。如一些民族中存在的原始家族观念、婚姻上的近亲习惯、丧葬上的繁琐形式和封建迷信活动等等都是与现代观念格格不入的。它们的确是传统的东西,但它们的失落、衰退实际是民族文化的进步。对于这些文化内容,我们所采取的态度不应是保留,而是摒弃。 而对许多有历史价值且具有不可再生性的传统文化,如旧的生产工具和生活器具,它们都有浓郁的民族文化特色,在现实社会中它们已失去了原有的使用价值,但却忠实地反映着某一民族的生产生活状况,印刻着这一民族的历史痕迹。又如一些已经不再使用的文字和无法传承的技艺、艺术、原始宗教及礼仪等,它们都是各民族传统文化的重要构成,反映着民族特色,也记载着人类的文明。对这些文化内容应该利用博物馆、影视、文字档案、文物收集等手段,尽可能使这些即将消失且不能再生的文化成为“标本”保留下来。 3.创新与发展  任何文化的存在和发展都离不开自身创新和外来文化的补充,保护传统文化不是制造“保留地”,从长远来讲,民族文化既要与现代社会进程相适应,又要保持民族文化的个性与多样性,才能真正向前发展。正是在开放创新中,形成了各民族丰富的民间文化艺术,在相互交流和互补中,实现了各种文化的优化与发展。   总之,全球化大潮汹涌而至,少数民族文化必然面临巨大的挑战,在外部环境的冲击下将出现民族特性嬗变的过程,前景充满激荡。同时,机遇与挑战同在,社会的开放和多种文化相融合的包容性在一定程度上打破了传统意识的封闭和狭隘性,并创造了一种各民族文化共享的广阔空间,极大地改善和丰富了人们文化多元欣赏的状况。社会变革与经济发展为传统民族文化的发展开拓了广阔前景,扩大了民族文化的辐射面,使民族文化有条件实现自然性、社会性和实践性的结合与统一。因此,朝鲜族丧葬文化只有在现代化进程中加快自我调适、不断创新的步伐,才会使自身的独特性和多样性,闪烁出时代的光辉。   2010-11-29   [参考文献]: 1.《毛泽东著作选》下册P697 2.《周恩来统一战线文选》P388 3.《民族多元与多元文化》 乔健 《广西民族学院学报》 1999年 第4期
3    (론문) 조선족 빈장습속에 대한 문화적 해석--허휘훈 댓글:  조회:3804  추천:0  2012-07-16
(论文)朝鲜族殡葬习俗之文化阐释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延边大学  许辉勋        殡葬是人类对失去自然生命的同类所采取的告别活动, 其间积淀着厚重的文化内涵,是一定文化的特定存在形态,它体现了人类对生命的认识、理解与把握。而殡葬习俗是人类处理亡者遗体的方法、规范经过漫长的发展和演变而逐渐形成的一种特定民俗。我国各民族都有自己独特的殡葬习俗,这种习俗是各个民族生活文化的一部分。   一、殡葬习俗的表现形态   殡葬是一个重要的民俗现象,古人曾说:“生,人之始也;死,人之终也。终始俱善,人道毕矣。故君子敬始而善终。”因而殡葬在世界范围内无一例外地受到重视,从而在世界各地形成了多种多样的殡葬习俗。 殡葬习俗作为一种文化现象,它的表现形态主要有如下两个方面:     1)处理遗体的方法及其器具 处理遗体的方法与器具,又称为葬法和葬具。人们选择什么样的葬法和葬具,来源于传统的殡葬习俗,而这些约定俗成的习俗又源于人们所处的自然环境和经济文化发展水平。 通观我国各民族安葬亡者的形式,计有土葬、火葬、风葬、野葬、水葬、天葬、塔葬、悬棺葬等。其中土葬是自古到今较为普遍的葬法。 多数民族认为,土地是万物之母,生命之本,人死后只有回归母体,才能使灵魂得以再生,因此实行土葬。还有火葬也是较为古老,而且对现今社会影响很大的葬法。 实行火葬的民族认为,火是光明洁净之神,火可以把亡者灵魂送上天堂。当然,传统历史上的火葬和当今社会提倡的火葬在其内容和形式上有着本质的区别,但在形式上对现代人接受火化起到了类同而易于接受的作用。 葬具是放置亡者遗体的器皿。历史上传承下来的葬具,主要有由木、石、陶、金属等制成的,其中最为悠久的是数千年前就已经出现的木制棺。 2)殡葬礼仪 殡葬礼仪是指安葬、悼念亡者的一系列礼仪活动。人类的殡葬礼仪早在旧石器时代晚期就已经出现。如生者在死者身上或身旁撒些红色的赤铁矿粉就是那时的殡葬礼仪,其意图是给死者以新的血液,赋予新的生命。后来,人类社会的殡葬礼仪走过了从简到繁,直至系列化、程序化而完整配套的历程。 根据春秋战国时期的《仪礼》和宋代的朱子《家礼》,我国传统的殡葬礼仪大体上分为三个部分:葬前之礼、安葬之礼、葬后之礼。 葬前之礼又叫治丧礼俗,它包括从准备后事到出殡之间的各项仪式,主要有临终、招魂、沐浴、饭含、大小敛、成服、朝夕哭奠等。 安葬之礼又称下葬礼俗,它包括从出殡到下葬的各项仪式,主要有打墓、出殡、路祭、下葬等。 葬后之礼又叫服丧礼俗,它包括安葬之后的各种礼仪活动,主要有虞祭(或称安神祭)、小祥、大祥、除服等。 殡葬礼仪作为人生的最后一个通过仪礼,它具有特定的“转换”功能:葬前之礼和安葬之礼侧重于人向灵魂的转换,而葬后之礼则侧重于家庭从非常状态向常态的转换。   二、殡葬习俗的文化内涵   殡葬习俗是人们在长期的丧葬活动实践中所创造的一种特殊的文化。殡葬所包藏的文化内涵最深厚,对人的心灵震撼最深刻,因而对社会各方面的影响也最为深远。 传统的殡葬习俗包含着一些从古时传下来的观念意识。其一为古老的灵魂观念,它认为人的肉体和灵魂能合能分,而且灵魂是不死的,人死后灵魂还在,它只不过是脱离亡者的肉体去往别处,所以殡葬就是为死者灵魂在另一个世界的生活做准备。这种观念是传统殡葬习俗的思想基础。其二为魂归故里观念,它认为死是回老家,也就是说人死后便回到祖宗那里,与已故祖宗团聚。这种观念产生的最初动机是古人朴素的感恩观念和祖灵庇荫意识。其三为儒家的孝道思想。它认为人必须对父母生养死葬,延续香火,事死如事生,从而将殡葬视为孝子履行孝道的一个重要环节。父母对子女有十月怀胎、多年怀抱哺育、终身关爱之恩情,他们过世,子女应通过祭奠来怀念父母的恩情,以表达孝心,正如古人所说“孝为德之始”。其四为葬先荫后观念。它认为把已故祖先安葬在风水宝地,其子孙就会得到祖灵的庇佑,得以大富大贵。 从历史和文化的角度来看,殡葬习俗的内涵极其复杂多样,在经历了长期的探索和考察的今天,我们可以对殡葬习俗的本质作出如下的解释: 无可避免的死亡是对人生的不可抗拒的否定,因而是最深刻的人生问题,也是最沉重的悲苦意识的渊薮。然而在传统观念中,死亡只属于肉体,灵魂却能永存,所不同的是它伴随着人的死亡而转入另一个世界。于是,围绕死者灵魂在另一个世界里的生活,人们进行一系列的殡葬活动。换句话来说,殡葬就是把死亡虚构成生命形式转换的一种特殊的文化现象。人们通过生者对死者灵魂的抚慰和祝愿来表达一种期冀,即期冀死者欢悦,以达到死者保佑生者的目的。这就是自古至今的殡葬习俗的本质之所在。 毋庸置言,殡葬是生者按照自己对生命、人生的理解所设计的,也是办给生者看的,一场殡葬是否合格也是由生者来评判的,它的最终目的仍是生者。因而,殡葬文化本质上是一种特殊的生存文化,其中隐藏或寄托了对人生归宿、生命价值的理解,对永生的追求,对现存社会的反映等。 从人道的立场来看,所有人的生命都是宝贵的,殡葬文化就应该承载对逝者的尊重,以及让活着的人在寄托哀思时,对逝者先贤有一颗敬畏之心,同时“凝聚孝心,传递爱心”,爱惜自己和他人的生命,这也是社会和谐的一部分。      三、对朝鲜族殡葬习俗之审视   朝鲜族殡葬习俗是朝鲜族民俗文化中的一个重要环节,它是朝鲜族传统的人生仪礼中的一个重要的“通过仪礼”。 在民俗学里,人生仪礼又称“通过仪礼”,它作为社会民俗的重要组成部分,是指人的一生中在不同的年龄阶段所举行的具有一定标志意义的仪式,主要有如下的四大仪礼:如出生仪礼,表示婴儿脱离母体来到社会;成年仪礼则意味着一个人发育成熟,被接纳为社会的正式成员;婚礼,表示一对男女建立配偶关系来组建家庭和繁衍子孙;葬礼则表示一个人走完人生旅途,最终离开人间。 朝鲜族的传统人生仪礼则与上述的四大人生仪礼有所不同。朝鲜族传统的人生仪礼叫做“冠婚丧祭”,包括成年仪礼、婚礼、丧礼,还有祭礼(葬礼以后定期举行的祭祀仪式)。此外,还加上给老人祝寿的寿礼和给小孩过的百日和周岁等。在一般的人生仪礼环节中,刻意加上具有浓厚的“祖先崇拜”氛围的祭礼,正反映出朝鲜族注重“尊长尊老”的传统观念。 对于朝鲜族来说,丧葬仪礼是告别人生的一项“通过仪礼”,它的主要内涵为:(1)表现生者对死者的哀悼;(2)怀念死者生前的功德;(3)超度亡灵,使死者的灵魂得到安息;(4)寄托对于死者的美好愿望。 朝鲜族的传统殡葬习俗,基于东方式的农耕文化和血缘宗法关系,自古就接受儒家文化的影响,并把古代中原的士大夫殡葬习俗接受过来,并据此建构其基本构架。如朝鲜族传统葬礼的程序就是基本上遵循朱子《家礼》而成的,而且一直把这个传统保持下来。 朱子《家礼》里所记载的殡葬程序,是我国宋、元、明、清时期一直沿袭下来的古代士大夫阶层丧葬礼仪的基本程序,直到封建末期没有大的变化。然而到了近代,中原的殡葬礼仪虽在程序上参考了士大夫的丧葬礼仪,但仪式的内容却变成平民化的民间习俗,与朱子《家礼》里的古代礼制多有不同。 可见,朝鲜族和汉族的殡葬礼仪,尽管其基本构架都来源于古代中原士大夫的殡葬习俗,但前者在经历许多社会变化的过程中,基本上保存下来朱子《家礼》的传统,而后者则在以平民化取代贵族化的过程中,使朱子《家礼》的传统丢失殆尽。朝鲜族传统文化里多留有古代中原文化的远古遗存,而这些远古遗存恰恰在如今的中原文化里是找不到的,这是值得进一步研究的文化现象。 再说,朝鲜族的殡葬习俗作为殓殡祭奠死者的仪礼,它既有社会民俗的特点,又有信仰民俗的性质。也就是说,朝鲜族的殡葬习俗将民间的社会习俗和信仰习俗杂糅在一起,因而既存在对死者的一生作为进行评价和追念,又包括对死者转入俗信中的另一个世界的祝福。朝鲜族传统人生仪礼中的祭礼,作为丧葬以后的追荐仪式,就属于信仰习俗中的仪礼。如果说,葬礼是对人的最后仪礼,那么祭礼就是由人转向“鬼灵”、“祖灵”的仪礼。所以说,朝鲜族的传统祭祀礼仪就是古老的“祖先崇拜”之遗风。它把殡葬习俗所体现的深深的孝道精神提升到对祖先英灵的敬仰上。祖先崇拜,含有崇高的怀念性质,人们希望祖先在天之灵能够关心其后代,保佑人丁兴旺,繁荣昌盛,因而崇拜中寄托着极其美好的情感。 至于朝鲜族传统殡葬习俗的文化定位,可从以下两点予以涉及。其一,朝鲜族传统殡葬习俗作为一种文化传承,它无疑是一种文化创造。其二,朝鲜族传统殡葬习俗又作为历史遗存,掺杂着与如今的社会发展和文明进步不相适应的旧习俗。今天我们重视传统丧葬习俗,并不意味着盲目地宣扬和赞颂那些千百年来积淀而成的旧俗的全部内容,而是继承和弘扬传统殡葬习俗中的优秀部分的同时还要剔除其糟粕,并以符合现代文明规范的新的殡葬习俗替代陈旧过时的旧丧俗。 建立优秀文明的殡葬文化,其意义在于,灌输健康的生命意识,提升人性,淳化风俗,倡导“尊长尊老”,以促进社会风俗之良性发展。 继承和发展朝鲜族殡葬文化的问题上,需要科学地探讨的是:在现代社会生活的条件下,能否贯彻“原汁原味地保存”的原则,原原本本地保留传统殡葬习俗?如何处理传统丧俗之保护与殡葬改革的关系?这些问题值得进一步深入研究。 孔子曾说:“未知生,焉知死。”如果把这句话倒过来:“未知死,焉知生。”意味着只有从死亡出发才能理解生命、把握生命。而殡葬无疑是进行这种生命教育的一项文化活动。古往今来,人们对殡葬的关注以及殡葬所体现的人文及生命内涵,逐渐形成了殡葬文化,这种特殊的文化形态在传达着一种文化信息——生命教育,朝鲜族的殡葬习俗也正是如此。                作者:许辉勋,延边大学朝鲜-韩国学学院 教授、博士生导师,               延边朝鲜族民俗学会 会长   2010-11-30
2    (론문) 조선민족 전통 상제례의를 서술해 본다--천수산 댓글:  조회:4083  추천:0  2012-07-16
(论文)谈谈朝鲜民族传统丧祭礼仪 《朝鲜族丧葬习俗》研讨会上发表       地方志 千寿山   丧祭礼仪是指人死之后举行的初丧礼、葬礼、祭礼三种礼仪。初丧礼是指人死之后到举行葬礼之前进行的丧礼。 中国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追溯其本源,来自朝鲜半岛李朝时期(公元1392年~1910年)的丧祭礼仪。经过一百五十多年的历史发展,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已经在好多方面发生了新的变化和发展。为了更好地了解朝鲜的传统丧祭礼仪,本文想从如下几个方面作一番探讨和简要的阐述。 A;丧祭礼仪在朝鲜民族生活史上的重要地位 朝鲜民族自古以来十分重视丧祭礼仪,主要表现在如下几个方面: 1、把丧祭礼仪视为生活中的大事 在历史上,十分重视丧祭礼仪成为举国上下的共同观念。在李朝时期,统治者们说;“国之大事,无过丧祭”。这个意义是说,国家的大事没有超过丧祭礼仪的。这主要是针对国王的去世而说的。国王是最高统治者,他的去世关系到国家的政治统治,意味着一代统治结束,将要开始新一代国王的统治,所以把国王的丧祭看做国之大事。 对于平民百姓来说,丧祭礼仪同样属于生活中的大事。在《礼记》里说;“大事,死丧之事也”。这里所反映的虽然是中国古代儒家的丧祭观点,但因李朝时期全国上下都崇尚儒学,重视丧祭礼仪的观点同样成为朝鲜民族的观点。 2、把丧祭礼仪视为十分重要的人生礼仪 在人的一生中,在不同的阶段按照本民族的习俗举行特殊的礼仪,这种礼仪称作人生礼仪(又称通过礼仪)。在朝鲜族人的一生中,要举行好多种人生礼仪。在20世纪30年代以前,把冠(女为笄礼)、婚、丧、祭当作最重要的四大礼仪。在此四大礼仪中,丧礼和祭礼占了一半,可见其重要性。30年代后,冠礼(女为笄礼)消失,但是,丧礼和祭礼仍居于重要的地位。 3、把“事宗庙”视为男女婚娶生子的重要目的 对“婚礼”一词的概念,中国儒学家们解释说;“婚礼者将合两性之好,上以事宗庙,而下以继后嗣也”。这个意思是说,男女结为夫妻的目的有两个方面;其一是为了给祖先举行祭祀,其二是为了传宗接代。给祖先举行祭祀要想做到香火不断,就得有后代不断接续。所以从根本上讲,传宗接代的目的仍在于给祖先举行祭祀。在李朝时期编写的《四礼便览》一书中,把中国儒学家们对婚礼所下的定义,原原本本地记载于书中。因而,“事宗庙”也成为朝鲜民族在封建社会时期举行婚礼的重要目的。 4、为了掌握丧祭礼仪中的祝文而学习汉字 过去,朝鲜族在举行丧祭礼仪的过程中,要宣读好多祝文。所谓祝文是向神灵禀报的报告文,各种祝文都是用汉字书写的,不懂汉字就无法领会和书写祝文。学习汉字的途径是到书堂就读。书堂是20世纪30年代以前,朝鲜族农村惟一的民间办学机构,如同汉族的私塾。在书堂所学的《千字文》、《童蒙先习》、《论语》、《孟子》等课文都是用汉字书写的。要想进入书堂念书,要交纳训料(学费)。男孩子多的人家,如果交不起学费,往往只把长子送到书堂学习。其目的一方面是为了掌握必要的文化知识,另一方面是为了学习汉字,以后能够懂得丧祭礼仪中的各种祝文和讣告、铭旌等有关应用文的读法和写法。有了知识才能够更好地掌握丧祭礼仪方面的知识。这样就可以在父母去世以后,能够很好地担负起丧主的责任。 5、丧舆契 文化革命以前,东北各地的朝鲜族村屯普遍建有丧舆契(又称香徒契)。它是村民自发组建的专门办理村民丧葬事务的民间组织。全村各户必须有一名男性青壮年加入这一组织。家里有老人的人家,如果没有青壮年男子,未成年的男子也得参加。丧舆契里设有尊位、都监、执事等职位,各有分工。一旦谁家有丧事,就有丧舆契出面办理丧事,所以村民们对丧舆契很重视。对于丧事,不仅本村的村民们重视,邻村的村民也很关心。当某村的丧舆从邻村的村边路过的,该村的青壮年主动出来帮助扛丧舆。文化大革命期间丧舆契被当作封建迷信的东西取消。文革以后,实行土葬的地方有的又重新组建了丧舆契。没有丧舆契的村子,一般由老人协会出面办理丧事。 B;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特点及文化内涵 (一)、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特点 朝鲜族传统丧祭礼仪特点主要体现在如下两个方面: 其一、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传承了朝鲜半岛李朝时期庶民阶层的丧祭礼仪,它同贵族阶层的丧祭礼仪有明显区别。贵族阶层的丧祭礼仪场面隆重,程序繁杂;庶民阶层的丧祭礼仪相对地来说,场面比较简朴,程序也不那么繁杂。古代的统治者们主张;“礼不下庶人”,所以当初不论在中国还是朝鲜,儒学家们所制定的丧祭礼仪都是以贵族阶层为对象来制定的。这种丧祭礼仪不符合庶民阶层的生活实际。所以,庶民阶层的人们对儒家学者们制定的丧祭礼仪,采取了便通实行的办法。因此,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同李朝时期制定的丧祭礼仪比较起来,有很多不同之处,对此,可以举出如下例子: (1)、丧服制度 贵族阶层实行的丧服制度里,根据与死者关系的远近分为斩衰、齐衰、大功、小功、缌麻等五种服亲。不同的服亲所穿的丧服和服丧期限各有区别。中国朝鲜族把服亲只划分为丧制和服人两种。死者的直系亲属为丧制,旁系亲属为服人。 (2)、祠堂与四龛 贵族家庭后院通常建有专门供奉神主的祠堂。中国朝鲜族在里屋设置四龛,供奉四代祖先的纸榜或魂帛,称做供奉四龛。只供奉已故父母魂帛的设施称做丧门。 (3)、祭祀种类 贵族阶层的祭祀种类包括虞祭、小祥、大祥、卒哭、禫祭、四时祭、称祭、墓祭、节日祭等好多种。中国朝鲜族的祭祀主要包括虞祭、小祥、大祥、节日祭、生日祭等。以虞祭来说,分为初虞、再虞、三虞,此三种虞祭何时举行,礼书上都有具体规定。但中国朝鲜族不遵行礼书上的规定,另有自己的时间安排。通常是举行葬礼的当天举行初虞祭,称做返魂祭祀。第二天举行再虞祭(在延边称做安神祭),第三天举行三虞祭。 其二、中国朝鲜族丧祭礼仪的传承,不是靠学者们的引导和礼书上的有关规定,而是以言传身教的方式来传承。在20世纪80年代以前,用于朝鲜民族丧祭礼仪方面的书籍匮乏,只能依靠言传身教的方式一代一代地传承。因而各地的丧祭礼仪有好多不同之处。 (1)、招魂 礼书上记载的招魂方法是,由一个人手持死者的上衣,站在院子里或者站在屋顶上,面向北方先喊死者的姓名,而后连喊三声“复—复—复—”。但是各地朝鲜族的招魂方式五花八门,有的喊“某村的某某,把衣服拿走!”,有的喊“某某人,看衣服罗!”。居住在内蒙古乌兰浩特市乌兰哈达乡三合村的朝鲜族招魂的方式更为奇特,他们招魂时喊“某某人上西天吧!”。实际上这不是招魂,是送魂。 丧祭礼仪程序中存在的诸如此类的差别实例不胜枚举。 (2)、祝文 日伪统治时期曾经出版的《流行金玉尺牍》是记载丧祭礼仪各种祝文的范本,可是朝鲜族人中持有这种书的人极为罕见。各地朝鲜族持有的绝大多数是手抄的祝文,所以存在着不同程度的谬误。从现在的情况看,懂得丧祭祝文的人很少,所以干脆取消了宣读祝文的程序。 (3)、祭祀口诀 由于传统的丧祭程序相当复杂,不好掌握,有人编出了一套口诀: 设主参香降神初,启饭读祝哭再拜, 亚络添插正阖立,嚱启茶成纳烧退。 举行祭祀时,按照上述口诀的顺序进行就行。但因各地的祭祀口诀都是传抄的,有些字词不尽一致,所以对口诀的理解也不相同。 (二)、朝鲜族传统丧祭礼仪的文化内涵 朝鲜民族的先人们在远古时期最早实行的是土葬。到了朝鲜半岛的三国时期,随着佛教的传入,实行火葬的人逐渐增多,到了李朝时期,实行抑佛崇儒政策,认为对已故父母遗体进行火化的做法严重违背孝道。于是对一般人禁止火葬,推行土葬,并于太宗十二年一月,国王“特命似司,丧祭之仪一依文公家礼”。《文公家礼》是中国明朝时期的邱浚根据宋朝时期的大学者朱熹有关冠、婚、丧、祭等方面的理论编写的礼书。从此以后,这本书在朝鲜半岛成为士大夫阶层遵行的正统的礼书。 除此之外,中国古代的阴阳五行学说很早传入到朝鲜半岛,对朝鲜民族的宇宙观和丧祭礼仪文化产生了重要影响。 根据朝鲜民族在历史上受到的上述几个方面的文化影响,在朝鲜族传统的丧祭礼仪中所蕴含的思想理念主要体现在如下四个方面: 崇拜祖先观 祖先象征着一个民族和家族的血统。崇拜祖先的观念起始于远古时期。《隋书》记载:百济“立其始祖仇台庙于国城,岁四祠之”。《北史》记载:高句丽有神庙二所;其一供奉高登神(高句丽开国之君高朱蒙);其二供奉夫餘神(高朱蒙之母何伯女)。 祠堂是供奉祖先神主的处所。朝鲜民族有一种观念,家里一旦遇到火灾或水灾,首先抢救神主,而后抢救财物。 朝鲜民族在旧历年(春节)、端午节、秋夕(中秋节)、等传统节日,天亮后作的第一件事情是给已故的四代祖先举行祭祀,谓之“茶礼”。中国朝鲜族一般只在旧历年举行茶礼,这种习俗延续到上个世纪50年代,个别家庭现在仍有举行茶礼的。 灵魂不灭观 对于中老年人的去世,朝鲜族一般不说“死了”,而是说“回去了”,或者说“离开了人世”。这个意思是说人死之后,灵魂不死,另有去处—阴间世界。这种观念主要来源于佛教的生命轮回观。佛教认为,有生命的东西永远像车轮一样在天堂、地狱、人间等范围内转化。 灵魂不灭的观念体现在朝鲜族丧祭礼仪的好多方面: (1)、招魂 人去世之后,首先要招魂,让游荡在空中的灵魂返回到躯体里。 (2)、使者床 招魂之后,在大门口或院子里放一张小桌,上面陈设草鞋、米饭、酒之类,谓之“使者床(桌)”,象征阴间使者前来引领死者。 (3)、饭含 对遗体进行小殓时,用柳木勺往死者口里放入三勺米,同时喊:“百石、千石、万石!”,以此象征死在阴间所需的口粮。除了米粒而外,还往死者口里放入珠子、硬币之类,以此象征死者携带的财宝。 (4)、过关费 桓仁县雅河村的朝鲜族人对遗体进行小殓时,用绞带捆扎十二道。同时用白纸折叠12个三角形(象征白银),塞入十二道绞带里,以此作为死者经过十二道鬼门关时候的过关费。 (5)、人情 柳河县姜家店乡曙光村、集安市凉水朝鲜族乡永泉村的朝鲜族,举行大殓时,往棺材里放入“人情”,所谓人情是白纸条(原来是白衬领),象征馈赠给死者的礼物。遗体入棺之前把一张张人情分给丧制们,遗体入棺后,由执事收取每个人的人情放入棺内,同时口称:“这是某某人的人情,希望日后多多给予保佑”。 (6)、虞祭 虞祭有安慰之意,虞祭是为了安慰死者的灵魂而举行的祭祀。 (7)、迎神和送神 在屋内举行祭祀时,要把房门开个小缝,以便让神灵进屋。神灵就餐时丧制和服人们到门外等候一会儿。进屋时还是先咳嗽一声,以免惊动神灵。祭祀结束,也要把门开个小缝,以便让神灵返回。 (8)、缅礼 安葬父母遗体之后,过了若干年,对其遗骸进行合葬,谓之缅礼。合葬时,两具骸骨安放在同一个墓穴里,中间砌一道矮小的隔墙。此时在隔墙中间留出一个小口,以便两个人的亡灵相互往来。 人们相信死者到阴间以后,对活在人间的亲人还能给予帮助。这种荫助观念由来已久。 《三国遗事》里记载了这样一个传说:新罗儒理王时,伊西国人入侵,新罗人难以招架。正在危机关头,突然杀出一群身披竹叶的军队,把侵略者打得狼狈逃窜。原来这支从天而降的军队是由已故的未邹王在阴间派遣的。 如今,相信人死后灵魂尚存的人已经不多了,但是“告慰在天之灵”,“向英灵致敬”,“安于九泉之下”之类的习惯性话语仍不难听到。 阴阳五行观 阴阳说和五行说合在一起称做阴阳五行说,产生于中国古代。阴阳说是把宇宙的万物划分为相互对立的阴与阳两个方面。五行说是把宇宙间的物质归纳为水、火、金、木、土五种物质。阴阳五行说早在朝鲜半岛的三国时期就已经传入到朝鲜半岛,并对以后包括丧祭礼仪在内的朝鲜民族的文化产生很大影响。 《三国遗事》里有“女为阴,其色白,白西也”,“草构五方神像”,“又十月,四天王寺五方神弓弦皆绝”等语。由此可知,此时阴阳五行说在社会上已经产生了影响。 在中国朝鲜族的丧祭礼仪中阴阳五行观念主要体现在左右位置与上下方位上。 (1)、丧主丧服 患者一旦咽气,丧主即穿丧服。此时,父丧不套左袖,母丧不套右袖。现在有好多地方举行丧礼时丧制们只在臂上扎白布带,父丧时扎在左臂,母丧时扎在右臂。 (2)、小殓 用小殓布包裹遗体时把死者的两只手叠放在腹部。此时,男性左手在上,女性右手在上。在阴阳五行观念里,天为阳,在上;地为阴,在下,男属阳,女属阴。 (3)、选择墓地 选择墓地,选在青龙、白虎之间。以遗体为本位,左侧的山丘为青龙,右侧的山丘为白虎。此时,左为东,右为西。按五行学说的颜色观,东为青色,西为白色。这里的“龙”,指龙状的山脉形状。 (4)、安葬 把灵柩放入墓穴,覆盖铭旌之后,先由丧主把墓穴土兜在衣襟上,撒在灵柩的上中下三处,谓之五方土。 (5)、祭桌 在祭桌上摆放水果时,按“红东白西”的顺序陈放。按阴阳五行观,东方与红色同属阳性,西方与白色同属阴性。   报本尽孝观 蕴涵在朝鲜族传统丧祭礼仪中的文化内涵中,最主要的是报本尽孝观念。 所谓报本尽孝的含义是报答父母的养育之恩,尽到孝敬父母的责任。 在一个人的道德修养方面,以孔孟为首的儒家的观点是“立身有义而孝为本”。其意思是说,做人要符合一定的道德标准,其中最重要的标准是孝道。在朝鲜族的传统观念中孝为百行之源,是各种美德之首。孔安国在《古文孝经序》里说:“孝者,人之高行,经常也。自由天地人民以来,而孝道著矣”。这个意思是说,孝道这一经久不变的美德,在人类历史上源远流长。 那么,作为子女怎样做才算尽到了孝道呢?中国的儒学家们说:“孝子之事亲也,有三道焉:生则养、没则丧、丧毕则祭。生事之以礼,死葬之以礼,祭之以礼”(《礼记》)。这个意思是说,要想成为合格的孝子,必须作到如下三点:其一,父母在世的时候要以爱戴之心很好地奉养;其二,父母去世之后要按照有关的礼仪办好葬礼;其三,葬礼结束后,要按时举行祭礼。对此,朝鲜民族的儒学家们持有完全相同的观点。在做为书堂课本的《启蒙篇》里写道:“人非父母无从而生,且人生三岁然后始免于父母之怀,故欲尽其孝,则服勤至死。父母没,则致丧三年,以报其生我之恩”。 丧祭礼仪包括好多程序,在这些过程中怎样做才算尽到了孝道呢?对此,儒家学者们提出了两条原则:“丧礼惟哀为主”,“祭以敬为主”(《礼记》)。这种观点在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中也得到了充分的反映。对此,可以举出如下例子: (1)、父母去世,儿女们以罪人自罚 父母一旦去世,儿女们认为自己没有尽到很好地奉养父母的责任,把自己当作罪人,在举行丧祭礼阶段穿质地最粗糙的麻布衣服,不喝酒,不吃肉,不吃干饭,喝稀粥。 (2)、以哭声代礼 朝鲜族有一种说法:“丧家应该哭声不断”。吊客们到丧家吊唁时,丧制和服人们以哭声迎客和送客。 (3)、祭祀饮食 朝鲜族做祭祀饮食时,强调诚意和干净。秋季打场时,留出最饱满的谷粒,经过精心加工成米之后,用以做饭或糕饼,作为祭品。举行秋夕节祭祀时,用新粮做的糕饼和新下来的果物作为祭品,谓之荐新。摆放祭桌上的食品种类,不恪守礼书上的规定,但不忽略死者生前喜欢吃的食品。 儒家学者们讲的蕴涵在传统丧祭礼仪中的“报本尽孝” 观念,“丧礼唯哀为主”,“祭以敬为主”的观念,在今天看起来也有积极的意义和重要的参考价值。 结 束 语 中国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传承于朝鲜半岛李朝时期庶民阶层的丧祭礼仪。在一百五十余年的历史发展过程中,原有的丧祭习俗又不断地变化发展,形成了具有自己特色的丧祭礼仪。 蕴涵在朝鲜族传统丧祭礼仪中的最主要的文化内涵是报本尽孝观念和缅怀亲情的观念。随着对外开放政策的实施,资本主义社会金钱至上,惟利是图的观念正在冲击着朝鲜族崇尚的孝道观念。父母关爱子女,子女爱戴父母的观念,不仅是朝鲜族的传统美德,也是中国其他各民族的传统美德。 丧祭礼仪是生活中的大事,关系到千家万户,关系到每一个人。对朝鲜族的传统丧祭礼仪,我们既不能完全肯定,也不能全盘否定,应当结合时代精神,取其精华,弃其糟粕,使其得到健康发展。 朝鲜族的丧祭礼仪,场面不宜过分隆重奢华,程序不宜繁杂,但也不能办得过分简陋草率,应当提倡内涵健康,文明雅观的符合时代精神的丧祭礼仪形式。       2010-12
1    (론문집결) 죽음에 대한 연구 댓글:  조회:3572  추천:0  2012-07-14
죽음에 대한 연구 유형과 개념용어   정 의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사의 새벽, 인류는 ‘생각’의 첫머리에서 이 문제와 맞닥뜨렸을 것이다. 종교와 철학 그리고 모든 문명의 시발점에 이 문제는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과학적 지식이 극대화되고 분초를 다투어 정보가 쏟아지는 오늘날에 와서도 이 문제는 분명하고도 확실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있다. 대개의 학자는 죽음이란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완전히 정지되어 원형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라는 데에 동의하지만, 단서를 붙이는 것을 잊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인가를 규명하지 않고는 죽음에 대한 완전한 해답은 있을 수 없다”고도 하고, “죽음의 세계란 인간의 경험 영역, 지각 영역을 넘어서는 차원의 문제에 속하기 때문에 그 본체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고도 한다.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해석에 특히 자기 식의 독단을 많이 개입시킨다. 각자 자신의 안경을 통해 죽음을 보는 것이다. 죽음에 대한 통일된 답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죽음이라는 것이 그만큼 인생에서 중대 문제이고, 누구나 한번은 겪어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사실이며, 또 그것으로 모든 것이 종말을 맞기 때문이다. 생물학자들은 삶과 죽음의 구분에 고심한다. 생물계에는 단세포 생물도 있고 다세포 생물도 있어서, 생사를 가름하는 기준을 일정하게 말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의사들은 고등 동물인 인간의 죽음을 판정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는다. 일반적으로 심장 고동과 호흡 운동의 정지를 표준으로 삼지만 가사상태(假死狀態)인 경우도 있고, 한 때 멈추었다가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경우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죽음의 형태도 가지각색이다. 천수를 누리고 기력이 쇠진하여 저절로 여러 기능이 멈추는 자연사가 있는가 하면, 아직 창창한 나이에 뜻하지 않은 원인이 생겨 죽음을 맞는 우연사도 있다. 우리 나라 사람은 예로부터 오래 사는 것[壽]을 가장 큰 행복으로 삼았고,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히 죽는 것[考終命]을 오복의 하나로 꼽았다. 인간을 “죽음으로 향하는 존재”라 규정한 철학자도 있고, “산다는 것은 무덤을 향하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다가가는 과정”이라고 말한 소설가도 있다. “가끔 죽음에 대해 생각을 돌려라. 그리고 미구에 죽을 것이라 생각하라. 어떠한 행동을 할 것인가를 그대가 아무리 번민할 때라도 밤이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면 그 번민은 곧 해결될 것이다. 그리하여 의무란 무엇인가, 인간의 소원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인가가 곧 명백해질 것이다. 아아, 명성을 떨쳤던 사람도 죽고 나면 이렇게 빨리 잊혀지는 것일까!” 그리스의 비극 시인인 소포클레스(Sophokles)의 말이다. 이를 받듯이 몽테뉴(Montaigne, M.)는 그의 ≪수상록 隨想錄≫에서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어디에서 죽음이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는지 모른다. 곳곳에서 기다리지 않겠는가! 죽음을 예측하는 것은 자유를 예측하는 일이다. 죽음을 배운 자는 굴종을 잊고, 죽음의 깨달음은 온갖 예속과 구속에서 우리들을 해방시킨다.” 어쨌든 사람은 죽지 않으면 안 되고 단 한번 혼자서 죽는다. 그리고 그것은 삶의 끝막음이다. 누구도 피하지 못하고 거부하지 못하며 전신으로 맞아들여야 한다. 이러한 죽음이란 과연 무엇인가? 의문은 다시 되풀이된다. 우선, 종교에게 물어본다.   죽음에 대한 인식 한국인은 무척 죽음을 외면하려 든다. 그래서 말한다. “개똥 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 가난에 찌들어도 천대를 받아도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이 좋다. 죽음은 싫다. 삶에 강렬한 애착을 지닌다. 죽음을 재난으로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렵다. 죽음은 휴식이 아니라 새로운 공포이고 재앙이다. 이 세상에서 누리는 오복 가운데 ‘오래 사는 것[壽]’을 으뜸으로 친다. 그저 오래 살고 싶어한다. 아기를 낳았을 때 금줄을 치는 것이나, 돌을 맞았을 때 실을 안겨 주는 것이나, 모두 인생의 마디마디에 ‘오래 살아라’ 하고 기원하는 뜻을 담는 것이다. 새해를 맞아 세배를 드려도 “만수무강하십시오” 하고, 젊은이의 이러한 축수(祝壽)에 어른은 “명복(命福) 많이 받아라” 하고 덕담을 내린다. 모두 오래 살고 싶은 심정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나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는다. 굳이 외면하고 싶지만 가까이 있음을 안다. ‘저승 백년보다 이승 일년이 낫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저승 길이 대문 밖’인 것이다. 죽음은 늘 가까이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복의 마지막은 ‘제명대로 살다가 편안하게 죽는 것’이다. 사실, 이 세상에서 가장 억울한 것은 ‘제명대로 못 살고 원통하게 죽는 것’이다. 일찍 죽는 것[夭死], 객지에서 죽는 것[客死], 횡액으로 죽는 것[橫死], 원통하게 죽는 것[寃死], 분하게 죽는 것[憤死], 모두 억울한 죽음이다. 하늘에서 받은 수명대로 오래 살다가 자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편안하게 자리에 누워 죽는 것[臥席終身]이 바람직하고, 억울하게 죽으면 원귀(寃鬼)가 된다. 이들은 ‘왕신’·‘몽달귀신’·‘손각시’·‘영산’·‘객귀(客鬼)’·‘여귀(?鬼)’가 되어 저승에서도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게 된다. 무속 신앙에서는 죽음이란 다름 아니라 저승사자를 따라가는 일이다. 너이들을 길을 적에 불면 날까 쥐면 꺼질까 금지옥엽 갓치 길러내어 생전영화 보잿든이 천명이 다 지나고 조물이 시긔하야 두번 다시 돌아오지 못할 영별의 객이 되니 죽은 혼이라도 설고 넉시라도 설다. <巫歌의 일부> 병사(病死)는 대개 천명이 다하고 조물주가 시기하여 영별의 객이 되는 것으로 알았다. 무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저승사자를 보내는 것은 명부(冥府)에 있는 최 판관(崔判官)이라 생각한다. 최 판관이 체포 영장인지 소환 영장인지를 발부하면 저승사자가 이것을 들고 사자(死者)를 찾아 오는 것이다. “활등같이 굽은 길을 설대같이 다다라서 닫은 대문 박차 여니 수문장이 설난하고 마당간에 들어서니 원당지신 설난하고 마루 대청 떼구르니 성주왕신 설난허구.” 저승사자는 이토록 시퍼렇게 위세를 부리며 방안으로 들어 와서는 잡아갈 사람을 무자비하게 나꿔 챈다. “실날같은 목에다가 오라사실 걸어 놓고, 한번 잡어 나우치니 맑은 정신 간 곳 없고, 두번 잡어 나우치니 열손 열발 맥이 없고, 삼세번을 나우치니 혼비백산 간 곳 없고, ……” 죽음의 장면은 이렇게 참혹하다. 그러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죽음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저승길을 가야 하는 것이다. 어떤 때는 혼자 가기도 하고 저승사자의 인도를 받아 가기도 한다. 어쨌든 서러운 길이다. “가다 가다가 저물거던 길에도 앉지 마오, 길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던 산에도 앉지 마오, 산신이 아니 놓소, 또 가시다 저물거든 못가에도 앉지 마오, 용신이 아니 놓네, 또 가시다 저물거든 독에도 앉지 마오, 독신이 아니 놓네.” 명부로 가는 여행 길은 험난하기 이를 데 없고 함정도 많다. 황천강(黃泉江)을 건너면 비로소 득달하게 되는데, 거기에서는 시왕[十王, 또는 十大王]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 생전의 잘잘못에 대하여 엄한 문초를 받게 되는 것이다. 염라대왕이나 최 판관의 재량에 따라서는 드물게 이승으로 환생하는 수도 있다. 민간 신앙이나 무속은 죽음에 관한 한 불교의 영향이 짙게 깔려 있음을 본다. ≪반야심경≫에는 “낳지 않고 사그라지지 않고(不生不滅)”, “더럽혀지지 않고 깨끗해지지 않고(不垢不淨)”, “더해지지 않고 덜해지지 않고(不增不?)”라 하였고, “드디어 늙음도 죽음도 없고 또한 늙음과 죽음이 없어지지도 않게 되는 데 이르는 것이다(乃至 無老死 亦無老死盡)”라 하였다. 말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실체(實體)가 없으며, 따라서 낳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고, 사그라져 없어졌다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더럽혀진 것도 깨끗한 것도, 더해졌느니 덜해졌느니 따질 것도 없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으니 물질적 현상이나 감각이나 표상이나 의지·지식 같은 것이 있을 리 없고, 눈도 코도 귀도 혀도 몸뚱이도 없다. 늙음과 죽음이 있을 수가 없다. 따라서,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라, 처음부터 구별이 없다. 서산대사(西山大師)는 말한다. “중생이 낳는 것 없는 중에서 망녕되이 삶과 죽음과 열반을 보는 것이 마치 허공에서 꽃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으니라.” 이를 풀이한 글은 다음과 같다. “성품에는 본래 낳음이 없으므로 삶과 죽음과 열반이 없는 것이고, 허공에는 본래 꽃이 없으므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삶과 죽음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나타나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열반이 있는 줄로 아는 것은 허공에 꽃이 사라지는 것을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죽음이 무엇인가를 다시 말하고 있다. “사람이 죽을 때는 단지 오온(五蘊)이 다 공(空)이고 사대(四大)가 내가 아님을 볼 것이다. 참 마음은 모습이 없어서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며, 살았을 때도 성품은 또한 살지 않았고 죽을 때도 성품은 또한 떠나가지 않는다.” 죽음은 어쩌면 이 티끌 세상을 탈출해서 영원한 자유인이 되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만, 마음가짐을 거울처럼 맑고 호수 같이 고요하게 지닐 수 있어야 하며, 그렇게 되면 삼세인과(三世因果)에 이끌리거나 얽매이지 않게 되어 출세자유인(出世自由人)이 된다는 것이다. 서산대사에 의하면, 인간은 사대(四大)로 이루어지고 오온으로 살아간다. 사대는 지(地)·수(水)·화(火)·풍(風)으로 사람의 몸은 이 네 가지에 의하여 성립이 되어 있다. 오온은 색(色)·수(受)·상(想)·행(行)·식(識)의 다섯 가지인데, 색은 물질로서 육체이며, 수는 감각, 상은 개념 구성, 행은 의지, 식은 의식이라 간단하게 설명될 수 있다. 죽음에 다달아 사대 곧 육신이 진정한 ‘나’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오온 곧 살아 움직인 활동 그것이 모두 공(空)이라는 것을 알아차려야 비로소 세간을 벗어난 자유인으로 해방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이 세상에서 익힌 매듭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다시 얽매임으로 굴러다니게 된다. ≪선가귀감≫의 다음 구절을 보자. “사람이 죽을 때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범부(凡夫)니 성인(聖人)이니 하는 감정이 끊어지지 않거나 생각을 잊지 못한다면 나귀의 태(胎)나 말의 뱃속으로 향해 의탁하게 되며, 지옥의 끓는 가마 속에 처박혔다가 전과 같이 다시 개미나 모기 등으로 되고 말 것이다.” 극락과 지옥의 구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무(無)로 되는 것이 아니다. 매미가 허물을 벗듯이(蟬脫) 훨훨 벗어 던지고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다. 낡은 허물을 벗는 것이 죽음이며,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는 것이 윤회(輪廻)다. 새로운 옷이 무슨 빛깔이 되고 어떤 모습이 될지는 이승의 업(業)에 따라 결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은 무가 아닌 동시에 두려워할 일도 슬퍼할 일도 아니다. 도리어 웃으며 새 옷으로 갈아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다만, 이승에서 살아 움직이며 맺은 인연이 있고, 주고 받은 정이 있기에 아쉬운 느낌이 들 수는 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망집(妄執)이다. 사대가 내가 아니고 오온이 다 공인 바에야 어찌 망집에 사로잡혀야 하는가! 매섭게 끊어 버려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삼세(三世)의 인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웃으며 훨훨 낡은 허물을 벗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죽음에 대한 불가(佛家)의 인식이다. 공자는 제자인 자로(子路)가 죽음에 대해 묻자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삶에 대해서도 모르거늘 어찌 죽음에 관하여 알겠는가(未知生 焉知死)!” 아직 삶에 대해서도 모르면서 어찌하여 죽음까지 알려 하느냐며 제자가 차근차근 공부하지 않고 덤벙대는 것을 꾸짖는 말일 수도 있고, 삶을 알게 되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된다며 타이르는 말일 수도 있다. 아무튼 이 말에서 공자는 죽음보다 삶을 더 중시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시했다기보다 더 절실하게 생각했다고 고쳐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죽음에 이르기 전에 삶이 앞서 있다. 당장 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는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의 질서, 곧 윤리 도덕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인(仁)을 말하여 사랑을 가르쳤고[仁愛人也], 효(孝)를 강조해 사람은 이 세상에 단독자(單獨者)로 오는 것이 아니라, 무수한 조상을 뿌리로 해 태어나는 것이며, ‘나’를 출발점으로 해 또 무수한 자손이 뻗어 나간다는 것을 가르쳤다. 알고 보면 사람은 죽음으로 하여 삶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자손의 모습으로 영원히 이어져 간다는 것을 효에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나 내세에 대하여 직설적으로 말한 바는 없지만, 삶을 알면 죽음은 저절로 알게 되며, 현세의 연장이 곧 내세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공자는 죽음에 대해 각별한 경의를 지니고 있으며 언제나 죽음에 대비하고 있었다. ≪논어≫에 “공자께서는 상(喪)을 당한 사람 곁에서 식사하는 경우 배부르도록 먹는 일이 없었으며, 상가에 가서 곡을 한 날에는 종일토록 노래 부르는 일이 없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병이 났을 때 자로가 기도 드리자고 제의하자 물었다. “그런 선례가 있느냐?” “있습니다. 뇌(?)에 위로 천신에게 빌고 아래로는 지기(地祇)에게 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로의 대답에 공자는 말한다. “나는 기도한 지 이미 오래다.” 항상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아 왔다는 뜻이다. 공자의 제자인 증자(曾子)는 임종에 제자들을 불러 놓고 말한다. “내 발을 펴 보아라, 내 손을 펴 보아라, ≪시≫에 이르기를 ‘전전긍긍 조심하기를 깊은 못 가에 서 있듯 얇은 얼음 판을 밟고 가듯 한다’ 하였지만, 이제부터는 나도 걱정을 면하게 되었음을 알겠구나! 얘들아.” 죽음에 임해서 자기 신체의 각 부분을 점검시키고 있다. 행여 상처난 곳은 없는가, 흉터는 없는가, 잘못된 뼈마디는 없는가, 면밀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 몸은 부모한테서 받은 것, 한 평생 고이 지니고 있어야 효도를 다한 것이 된다. 곧, 저승에 가면 부모를 뵙게 될 것이고 그래서 새삼 되돌아 보는 것이다. 사실, 유교에서는 조상이 늘 자기와 함께 있다고 생각한다. 생사의 구분이 확연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증자는 임종에 또 말한다. “새가 죽어갈 적에는 그 울음소리가 애처롭고 사람이 죽으려 할 때는 그 말이 착하다.” 사람은 마지막 죽음을 앞두면 순선(純善)한 본성으로 돌아오게 되고, 따라서 그 말도 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죽음은 모든 것을 귀결시키는 동시에 새로운 출발이기도 하다. ≪중용≫에 “성실한 것은 하늘의 도이고 성실해지려는 것은 사람의 도다(誠者 天之道也 誠之者 人之道也)”라고 하였지만, 인간이란 하늘을 배우고 따르고 드디어는 합일(合一)하는 존재다. 천도(天道)에 기(氣)의 모이고 흩어짐(聚散)과 음양(陰陽)의 성쇠(盛衰)가 있어 네 계절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봄에 싹이 트고 여름에 자라고 가을에 열매 맺으며 겨울에 땅속으로 사그라진다. 여름에 극성하던 양은 가을이 되면 차차 쇠하였다가 겨울에는 거의 없어진다. 그와 반면에 음이 극성을 누린다. 그렇지만 동지(冬至)날에 거의 없어졌던 양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한다(一陽始生). 그리고는 봄이 되면 싹을 틔게 하여 새로운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소우주인 사람도 마찬가지다. 죽음은 새로운 싹을 트이기 위한 사그라짐(消)이다. 천도도 인도도 사그라짐(消)과 자라남(長)의 순환인 것이다. 둥그런 보름달이 차차 사그라져 들다가 그믐이 되면 거의 없어지고 다시 초승달로 되살아나며, 이것이 돌고 도는 것(循環)과 같다. ≪성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러므로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로마서≫ 제5장 12절).” 요컨대, 죽음은 죄에 대한 벌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죄는 원죄이다. 물론, 낱낱의 인간이 자의식으로, 개별적으로 범하는 죄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크고 공통적인 죄가 원죄이다. 인류의 조상인 아담이 범한 죄로 인해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토 죄를 지니게 되며, 그것이 원죄인 것이다. 죽음은 이 원죄로 인해 신으로부터 받는 벌이다. 따라서, 기독교에서의 죽음은 육신의 죽음과 영혼의 죽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육신의 죽음은 그저 생물학적으로 한 생명체의 모든 기능이 정지되어 다시 원상대로 회복될 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고, 영혼의 죽음은 생명의 원천인 영혼이 육체에서 떨어져 나가는 것을 뜻한다. 그러면 육체에서 분리되어 떨어져 나간 영혼은 어디로 가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 앞으로 간다. 이 세상의 창조자이고 구원자이고 심판자인 하느님 앞에 가서 시험대에 올라 일생 동안의 일을 심판받게 되는 것이다. 죽음은 말하자면 심판자의 앞으로 나아가는 일이다. 누구나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는 필연적인 사항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죄를 대신해 죽음을 당했다. 신자들도 육신의 삶에 연연하지 말고 이 거룩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부활을 통한 영생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한국인의 죽음 신라 제19대 왕인 눌지왕은 어느 날 여러 신하와 나라 안의 호방하고 의협심 있는 사람들을 궁중으로 불러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술이 서너 순배 돌고 나자 왕은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내 큰 아우 복호(卜好)는 고구려에 인질로 가 있고, 작은 아우 미사흔(未斯欣)은 왜국에 인질로 가 있다. 두 나라에서 억류해 놓고 돌려보내 주지 않으니 내 비록 부귀를 누리고는 있지만 하루도 울지 않는 날이 없다. 누구든지 두 아우를 데려와서 함께 아버님 사당에 뵈옵게 해준다면 그 은혜를 잊지 않고 갚겠다. 누가 이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이에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아뢰기를, “이 일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지혜와 용맹이 겸비해야 해낼 수 있습니다. 삽량주(?良州) 태수 박제상(朴堤上)이면 해낼 수 있을 것입니다”라 하였다. 이에 왕은 박제상을 불러 간곡히 분부했다. 제상은 두 번 절하고 말하였다. “신이 듣기로는 임금에게 근심이 있으면 신하가 욕을 당하며, 임금이 욕을 당하면 신하는 죽는다고 합니다.” 그 길로 그는 고구려로 가서 왕과 담판을 하고 계교를 써서 복호를 신라로 데려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는 선걸음에 다시 왜국으로 향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그의 아내가 달려 갔지만, 이미 율포(栗浦) 갯가에서 배를 탄 뒤였다. 아내는 울부짖었으나 그는 손을 흔들어 보일 뿐 배를 멈추지 않았다. 왜국에 이르자 거짓 망명해온 것처럼 가장하였다. 왜왕은 처음에는 의심했으나 곧 믿었다. 그는 미사흔을 만나 자주 바닷가에 나가 노닐었다. 어느 날 새벽 마침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다. 미사흔을 배에 태워 빨리 떠나기를 권하였다. 미사흔은 제상의 목을 껴안고 같이 도망치기를 애원하였지만 제상은 고개를 저었다. “같이 떠난다면 왜인들이 알고 뒤를 따를 것이오. 나는 여기 남아 뒤쫓는 것을 막겠소.” 할 수 없이 미사흔은 혼자 도망을 쳤다. 제상은 미사흔의 방에 들어 다음 날 아침 늦도록 나오지 않았다. 미사흔이 멀리 갔을 무렵에야 그는 실토했다. 왜왕은 크게 노했다. 발을 구르며 닥달하는 왜왕에게 그는 태연히 말했다. “나는 신라왕의 신하지 왜국 신하가 아니오. 우리 왕자를 구했을 뿐이오.”. 왜왕은 더욱 분이 치밀어 고함쳤다. “너는 이미 내 신하가 되지 않았느냐?” “차라리 신라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왜왕은 제상의 발 가죽을 벗기고 갈대를 벤 위를 걷게 하였다. “너는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또, 불[薪火]로 사지를 지지며 물었다. “어느 나라 신하냐?” “신라의 신하다.” 왜왕은 목도(木島)라는 섬에 귀양 보내어 온 몸을 불로 태운 뒤 목베어 죽였다.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그의 아내는 세 딸을 데리고 치술령(?述嶺)에 올라가 왜국을 바라보고 통곡을 하다가 종내 죽고 말았다. 그 지아비는 충(忠)에 목숨을 던졌고, 그 지어미는 열(烈)에 목숨을 던졌다. 신라 법흥왕은 불교에 독실하였다. 그리하여 불법을 일으켜 이를 널리 펴고 여러 곳에 절도 세우고 싶었지만 신하들이 이를 가로막았다. 오랜 세월을 두고 내려오는 토착신앙이 있었고, 유교가 있었고, 선도(仙道)가 이미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왕은 탄식하였다. “아아, 나는 덕이 없는 사람으로 왕업을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의 조화가 이지러지고, 아래로는 백성들을 기쁘게 할 일이 없구나! 정사를 보는 여가에 부처에 마음을 두었으니, 그 누가 나와 일을 함께 할 것인가?” 사인(舍人)이라는 하잘 것 없는 벼슬에 있는 이차돈(異次頓)이라는 신하가 있었는데 왕족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사람이었다. 나이 불과 22세인 이 젊은이가 왕의 심중을 헤아리고서 아뢰었다. “소신이 비록 비천하오나 불법을 위하여 계교를 써 보겠나이다.”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이차돈도 굽히지 않았다. “나라를 위하여 몸을 죽이는 것은 신하의 큰 절개이옵고, 임금을 위하여 목숨을 던지는 것은 백성된 곧은 의리입니다. 거짓으로 말씀을 전하였다고 해서 신의 목을 베시면 백성들이 굴복하여 감히 어명을 어기지 못할 것이 옵니다.” “이 세상에 자비를 베풀고 아무리 하찮은 목숨이라도 고이 보전하게 하는 것이 부처의 가르침이며, 나의 뜻은 사람을 이롭게 하려는 것이거늘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느냐?” 왕은 고개를 저었지만 이차돈도 물러서지 않았다. “모든 것은 버리기 어려우나 신명(身命)은 더욱 어렵사옵니다. 그러나 소신이 저녁에 죽어서 불교가 아침에 행해진다면 불일(佛日)이 찬란해질 것이고 성주(聖主)께서는 길이 편안하실 것입니다.” “내가 네 큰 뜻을 이미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참으로 대견스러운 일이로구나!” 왕도 허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이차돈은 조정으로 나가 여러 신하들에게 절을 세우라는 왕명이 내렸다고 거짓말을 전하였다. 놀란 신하들이 왕에게 달려가 간하였고 왕은 짐짓 크게 노하여 이차돈을 잡아 들이라 명하였다. 형구(刑具)를 벌여 놓고 왕의 추궁이 추상같았지만, 이차돈은 한 마디 변명도 하지 않았다. 결국, 참형을 당하게 되어 형장으로 끌려갔다. 옥리(獄吏)가 그 목을 베자 흰 젖이 한 길이나 솟아 올랐으며, 갑자기 하늘이 칠흑으로 어두워지면서 땅이 진동하고 비가 뚝뚝 떨어졌다. 다른 기록에는 참형을 당하기 직전 이차돈이 다음과 같이 맹세하였다고 전한다. “대성법왕(大聖法王)께서 불교를 일으키려 하시므로 내가 신명을 돌아보지 않고 세상 인연을 버리니, 하늘에서는 상서를 내려 두루 사람들에게 보여주십시오.” 그의 머리는 날아가 금강산(金剛山 : 경주 북쪽에 있는 산) 마루에 떨어졌다. 믿음을 위한 최초의 순교였다. 믿음은 죽음을 넘어선다. 우리 나라 유학 사상 가장 높은 봉우리를 점한 이황(李滉)은 70생애가 바로 ‘배움의 나날’이었다. 자신에게 엄격하고 남에게 너그러웠던 그는 죽는 날까지 구도(求道)의 자세를 흐트리지 않았다. 그의 고종기(考終記)를 현대문으로 옮겨 본다. “경오년(庚午年, 1570) 섣달 초8일,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병석에 누우신 선생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이 찬란한 광명을 맞이하셨다. 다음 순간 선생은 옆에 모시고 있는 이를 향하여 나직이 말씀하셨다. ‘저 매화에 물을 주어라.’ 방안 윗목에 매화분이 있었고, 금방 향기를 터뜨릴 듯이 두 세 개의 꽃망울이 부풀어 있었다. 바깥 날씨는 쌀쌀하였지만 하늘은 맑게 개었고 바람도 일지 않았다. 그러나 저녁 5시쯤이 되자 갑자기 흰 구름이 지붕 위로 모여들더니만 눈이 펄펄 내리기 시작하였다. 순식간에 한 치 가량이나 쌓였다. 지붕도 마당도 앞산도 순백의 세계로 변하였다. 자리에 누워 계시던 선생께서 창문을 잠시 바라보시더니 조용한 어조로 이르셨다. ‘자리를 정돈하여라.’ 자제와 제자가 가까이 다가와 일으켜 드렸다. 선생은 꼿꼿이 앉아 자세를 가다듬더니 이내 숨을 거두었다. 그러자 하늘에 서렸던 구름이 흩어지고 흩날리던 눈도 개었다.” 휴정(休靜)은 조선 불교의 높이 솟구친 묏부리이자 호국 불교를 몸소 실천한 걸승(傑僧)이기도 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왕(선조)이 의주로 파천하는 난국을 당하자 대사는 감연히 묘향산(妙香山) 깊숙한 암자에서 칼을 짚고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달려갔다. 대사의 나이 73세였다. 선조는 팔도십륙종도총섭(八道十六宗都總攝)이라는 일컬음을 대사에게 내려주었다. 전국의 승병 대장이 된 것이다. 이후 7년 동안 대사는 남북의 피비린내 나는 전장을 전전하였다. 전쟁이 끝났을 때는 나이 79세였다. 뒷일은 제자인 유정(惟政)과 처영(處英)에게 맡기고 홀연히 묘향산으로 들어갔다. “갑진년(甲辰年, 1604) 정월 23일, 묘향산 원적암(圓寂庵). 아침 일찍 일어난 대사는 목욕을 한 뒤 새 옷으로 갈아 입었다.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창문을 열자 눈앞에 하얀 은세계가 펼쳐졌다. 간밤에 눈이 내린 것이다.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 오는 햇빛을 받으며 대사는 큰 소리로 분부를 내렸다. ‘남여(藍輿: 의자 비슷하고 위를 덮지 않은 가마)를 가져 오너라.’ 행자들이 남여를 뜰 아래 대령하자 대사는 올라타고서 눈길을 가리켰다. ‘가자!’ 두텁게 쌓인 눈을 헤치며 남여는 앞으로 나아갔다. 묘향산 주름마다 박힌 암자를 낱낱이 돌아 보았다. 그리고는 원적암으로 돌아와 손을 씻고 위의(威儀)를 갖춘 뒤 불전으로 들어가 분향을 하였다. 조실로 다시 돌아와서 벼루에다 스스로 먹을 갈더니 붓끝에 듬뿍 먹물을 찍었다. 벽에 자화상이 걸려 있었다. 대사는 자화상 여백에 이렇게 적었다. ‘팔십 년 전에는 네가 내더니 팔십 년 후에는 내가 너로다(八十年前渠是我 八十年後我是渠).’ 다시 먹을 찍어 임종게(臨終偈)를 썼다. ‘천만 가지 온갖 생각들 벌겋게 타는 화로에 한 송이 흰 눈, 진흙 황소는 물 위로 가고 대지와 허공이 찢어지네(千計萬思量 紅爐一點雪 泥牛水上行 大地虛空裂).’ 쓰기를 다하자 단정히 부좌(趺坐)하고서 입적하였다. 방안에 이향(異香)이 서렸다.” 황현(黃玹)은 꼿꼿한 선비이다. 천성이 강직하여 악을 미워하기를 원수 같이 하고, 가난을 즐길지언정 뜻을 굽히면서 벗어나려고 하지 않았다. 권력 있는 사람을 대하면 당당하게 정도(正道)로 타이르고, 혹 잘못이 있으면 즉석에서 면박해 마지 않았다. 시에 뛰어나고 문장에 능했으며, 고향 구례(求禮)에 들어 앉아 동서고금의 학문을 깨치느라 골몰하더니 부모의 권유에 못 이겨 할 수 없이 과거를 보아 장원을 하였다. 때는 조선조 말엽, 임오군란·갑신정변의 뒤를 이어 청·일 양국이 우리 나라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었고, 조정은 극도의 문란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고향으로 내려가 문을 닫고 공부에 열중하였다. 서울에 있는 여러 친구들이 함께 벼슬길에 나아갈 것을 여러 번 권하였지만 그는 그때마다 거절하였다. “그대들이 어찌 나를 귀신 나라, 미친 사람 가운데로 끌어 들여, 같은 귀신이 되게 하고 미친 사람을 만들려고 하는냐?” 그는 틈틈이 문란한 나라 사정을 춘추필법으로 기술하였다. 그 결과가 후일의 ≪매천야록 梅泉野錄≫이다. 정치의 부패상, 조정 상하의 탐욕상을 한 점 거리낌 없이 엄정하게 기록하였다. 1910년 8월 종내 나라는 망하고 말아 경술국치를 당하였다. 이 소식이 구례 시골에도 닿았다. 그는 우선 ≪매천야록≫을 정리하여 상자에 넣고 자물쇠를 채웠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 상자는 열지 말라.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말라. 먼 훗날 햇볕을 볼 날이 있을 것”이라고 기록하였다. 팔월 8일(양력 9월 10일) 황현은 아편을 먹고 자결을 하였다. 향년 56세. 네 수의 시를 남겼다. 그 가운데 이런 구절이 있다. “가을 등불 아래 읽던 책 덮고 천고의 역사를 되돌아 보니, 사람으로 글자 아는 사람 되기가 이토록 어렵구나(秋燈掩卷懷千古 難作人間識字人.)” 먼 시골에 묻혀 살던 선비에게 나라가 망한 책임이 돌아올 리 없다. 그러나 어찌 책임이 없다 하겠는가! 머리 속에 먹물이 들어 있지 않는가! 지식인은 그 시대의 아픔에 대하여 어떤 형태로든 책임이 있다.   사후 세계 민간 신앙에 의하면, 사람은 죽으면 저승으로 간다. 구천(九泉)·황천(黃泉)이라고도 하고 음부(陰府)·유도(幽都)·염라국(閻羅國)이라는 말도 마찬가지다. 죽은 사람은 저승에 가면 먼저 최 판관 또는 시왕 앞으로 끌려가 심판을 받는다. 생전의 잘잘못을 꼬치꼬치 캐묻고 따져서 극락으로 갈 것인지 지옥으로 갈 것인지 판결을 내린다. 이런 대목은 불교의 영향으로 엇비슷하다. 그런데 따지는 조목을 보면 효 또는 집안의 화목에 중점을 둔다. 유교의 영향일 수밖에 없다. 부모한테 회성하고 동승한테 화목하고 일가친척한테 우애하였느냐고 문초하니 그 망제 할 수 없어 절얼적이는 부모한테 회성하고 동승함께 화목, 일가친척 화목헌 저런 망제는 좋은 꽃밭으로 모세라 여기 또 죄목으로 다슬적 저런 여자 풍두옥에 가둘 저런 죄 많은 여자는 여봐라 이 년 들어라 네 부모한테 불효하고 가장께 눈 세기고 동승함께 우애 못한 이는 화목도 못하고 일가친척 우애 못한 저런 년은 풍두옥에다 가두어라 ……. <巫歌의 일부> 회성은 효성(孝誠)이고 동승은 동성(同姓), 망제는 망자(亡者)이다. 말하자면, 죽어 저승에 가서 심판을 받을 때 살아 생전의 효성이 으뜸으로 도마 위에 오르는 것이다. 그런데 억울하게 죽은 원귀는 구천의 암흑 속을 떠돌아다니며 안정을 찾지 못하는 수도 있으며, 자기를 해친 자에게 앙갚음을 하러 이승에 나타나는 수도 있다. 어쨌든 저승에는 극락과 지옥이 있으며, 때로는 그런 구별이 없이 그저 이승과 같은 모습으로 사령(死靈)들이 모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죽으면 저승으로 가서 먼저 죽은 자들을 만나 보게 된다. 조상도 만나 보고 일가친척 친구들도 다시 해후한다. 이승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다만, 해마다 죽은 날이 되면, 꼬박꼬박 이승으로 와서 자손이 차려 주는 제사 밥을 얻어 먹고 간다. 그래서 무자귀신(無子鬼神)이 서럽다고 하였다. 불교의 생사는 무수한 삶과 죽음이 되풀이되는 윤회이며, 선은 선을 낳고 악은 악을 낳는 인과응보의 반복이기도 하다. 삶과 죽음은 인과응보에 따라 육도(六道)를 돌고 돌게 된다. 육도란 지옥·아귀(餓鬼)·축생(畜生)·수라(修羅)·인간·천상(天上)이다. 지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생전에 죄를 많이 지어 악업(惡業)이 많은 사람이 가는 곳으로 고통의 업보를 받는 곳이다. 지옥은 아주 다양하여 근본 지옥으로 팔열(八熱)·팔한(八寒) 지옥이 있고, 팔열 지옥의 주변에는 각각 십육유증(十六遊增) 지옥이 있다. 그뿐만도 아니다. 산간·광야·나무 밑·공중에 고독(孤獨) 지옥이 있기도 하다. 이런 지옥에서 전생에 저지른 죄값을 받느라 별의별 고통을 다 당한다. 죄인끼리 치고 받고 죽이다가 다시 살아나면 다시 죽이는 형벌이 있는가 하면, 시뻘건 쇳물이 끓는 솥 속에 내던져지기도 한다. 어떤 곳에서는 전신을 밧줄로 묶어 죄기도 하고, 수족을 자르기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고함만 짖어대기도 한다. 생각만 하여도 몸이 오싹한다. 아귀는 목구멍이 바늘 구멍 같아 음식이 넘어가지 않는 세계이다. 그래서 늘 굶주리고 몸이 낙엽처럼 바싹 말라 있다. 음식을 보면 불로 변하는 곳도 있으니 어차피 항상 굶주림에 허덕여야 한다. 역시 생전에 악업(惡業)을 저지른 자가 가는 곳이다. 축생은 짐승이다. 인간이 생전에 죄를 지으면 죽어 개나 돼지·소로 태어나는 수가 있다. 역시 고보이다. 괴로움을 당하는 형벌인 것이다. 이상, 지옥·아귀·축생을 삼악도(三惡道)라 한다. 수라는 아수라도(阿修羅道)로 생전에 남에게 교만하고 남 잘되는 것을 시기하며 나보다 나은 사람을 질투하던 사람이 죽어서 가는 악귀의 세계다. 좋은 곳일 수 없다. 인간은 바로 이승이다. 죽어서 다시 이승의 인간으로 태어난 것이다. 이승 인간과의 인연이 끊어지지 않아 새로이 새 모습으로 태어난 것이다. 행운이라 할 수 있을까? 알 수 없다. 천상은 곧 천상계(天上界)다. 생전에 착한 일을 많이 한 사람이 간다. 이곳에 극락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극락 세계는 아미타불이 살며 설법하는 곳이다. 서방으로 십만억의 불국토(佛國土)를 지나야 다다를 수 있다 하였으니 까마득하게 멀어 보인다. 이곳에 태어나는 자는 줄거움만 누리게 된다. 일체의 고통이 없다. 공자는 괴이(怪異)한 것, 폭력, 어지러운 일, 귀신에 대하여 별로 말을 하지 않았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그리고 도덕적인 것이 아니면 즐겨 이야기하지 않았던 것이다. 제자인 번지(樊遲)가 슬기로움(知)에 대하여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이러하였다. “사람이 지켜나갈 의로움(道義)에 힘쓰고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하면 슬기롭다 하겠다.” ‘공경하되 멀리하라(敬而遠之).’ 그것이 귀신에 대한 공자의 자세이다. 자로가 귀신 섬기는 일에 대하여 물었을 때도 그의 대답은 단호하다. “사람도 제대로 섬기지 못하는데, 어찌 귀신을 섬길 수 있겠느냐?” 철저한 인간 중심, 인본주의다. 그렇다고 귀신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귀신을 초월적이거나 절대적인 존재로 올려 놓고 인간이 그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거나 굴종하는 견해를 철저하게 배제하고, 귀신은 귀신의 영역에서, 인간은 인간의 영역에서 각각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귀신과 인간의 관계는 제사로 맺어진다. 그래서 “제사는 거기 계시듯 지낸다(祭如在)”고 하였다. ≪중용≫에서도 “죽은 이 섬기기를 살아 있는 이 섬기듯이 한다(事死如事生)”고 하였다. 국가나 가정에서나 가장 큰 일(大事)이 제사다. 엄격하고 경건한 의식으로 귀신을 받든다. 특히, 가정에서는 4대 조상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는 가묘(家廟)가 있어 기제(忌祭)를 받들 뿐만 아니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사를 지낸다. 집안에 일이 있으면 고유(告由)를 한다. 먼 여행을 떠날 때 아뢰고, 돌아오면 아뢰며,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우선 조상의 신위 앞에 올리고 먹으며, 계절의 신미(新味)도 빠뜨리지 않고 첫물을 올린다. 조상은 돌아가셔도 늘 집안에 함께 계신다. 그런데 성리학에서는 귀신을 철학적으로 풀이한다. 귀신은 기(氣)의 굴신(屈伸)·왕래(往來)이며 음양의 소장(消長)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귀(鬼)는 굴(屈)로서 돌아가는 것(歸)이며, 음(陰)이므로 사람의 백(魄)이다. 따라서, 죽으면 혼(魂)과 분리되어 땅으로 돌아간다. 신(神)은 신(伸)으로서 뻗어나는 것이며, 양(陽)이므로 사람의 혼이다. 따라서, 죽으면 백과 분리되어 하늘로 올라간다. 혼도 백도 그 기가 점차 흩어지고 사그라져 종내는 없어지고 만다. 사람이 죽은 다음 귀신으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전혀 없어지고 마는가 하는 문제는 객관적 실체로 가름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 내면의 성(誠)에 가능 근거를 가질 뿐이다. 유교에 있어서 귀신은 절대적 존재도 아니고 초월적 존재도 아니며 객관적 실체도 아니다. 오직, 우주 자연의 이기론적(理氣論的) 바탕에서 인간의 합리적 인식일 뿐이다. 인간은 자연의 일부분이며 그래서 인간 내면의 성이 그 매듭을 쥐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결국 자연에서 나서 자연으로 돌아 간다. 일생 동안 시험 기간을 치르고 죽어서 하느님 앞에 선 사자(死者)는 준엄한 심판을 받는다. 하느님의 계명을 독실하게 믿고 실천하며 착하게 산 사람은 하느님이 지배하는 은총과 축복의 나라 천국(天國, 天堂)으로 가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구원 받지 못한 채 영겁(永劫)의 벌책을 받는 지옥으로 떨어지게 된다. 특히, 두려워 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에서 죽게 되고, 하느님의 진노 아래 머무르게 되며, ‘불못’·‘진노의 포도주 틀’·‘어두운 곳’에 던져진 채 영원한 죽음의 상태에 놓이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구원을 받게 되어, 이 세상이 끝나는 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여 영생을 얻게 된다. 따라서, 믿는 자의 머리가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는 자들은 다가올 세계의 생명을 지니게 되었으므로 그들에게 육체적인 죽음은 한낱 잠자는 상태에 불과하다. 죽음은 두려워 할 바가 아니라 오히려 바라야 할 바인 것이다. 부록: 생사관 연구 론문집결   121 p. 朝鲜民族传统生死观研究   中央民族大学博士学位论文朝鲜民族传统生死观研究姓名:崔荣根申请学位级别:博士专业:民族学指导教师:黄有福20050501摘要人类的生物学存在由生而起,因死而终。人类社会亦在生生死死的无间断新陈代谢中 硕士论文    121页      浏览:6次     文档格式:PDF    上传时间:2012-10-20 04:11:01     37 p. 庄子生死观研究   密级:学校代码:10075分类号:学号:20090023哲学硕士学位论文庄子生死观研究学位申请人:郭红娟指导教师:李振纲教授学位类别:哲学硕士学科专业:中国哲学授予单位:河北大学答辩日期:二○一二 毕业设计    37页      浏览:0次     文档格式:PDF    上传时间:2013-02-20 10:28:21     10 p. 中华民族生死观 PDF   第一节 中土生死观概观 和世界各民族的先祖一样华夏民族的远祖从有遗迹可考的一万多年前的山顶洞人开始便有了死而不亡的观念和相应的葬礼。到氏族公社制时期形成了崇拜祭祀英雄祖先魂神的制度和“家为巫史”的 讲义教程    10页      浏览:0次     文档格式:PDF    上传时间:2013-04-23 20:30:57  
조글로홈 | 미디어 | 포럼 | CEO비즈 | 쉼터 | 문학 | 사이버박물관 | 광고문의
[조글로•潮歌网]조선족네트워크교류협회•조선족사이버박물관• 深圳潮歌网信息技术有限公司
网站:www.zoglo.net 电子邮件:zoglo718@sohu.com 公众号: zoglo_net
[粤ICP备2023080415号]
Copyright C 2005-2023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