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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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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우리민족 족보, 친척, 호칭, 성씨 댓글:  조회:3332  추천:0  2016-10-04
  우리민족 족보, 친척, 호칭, 성씨   1, 족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은 전통적으로 가문에서 문재가 비교적 좋은 사람들이 나서서,혈연관계로 맺어져 내려가는 자기 가문의 계보를 도표식으로 작성하여기를 나누어 기록하여 두었다. 이것이 바로 족보이다. 지금말로 하면 한 가문의 기본적인 력사당안자료인 셈이다.  우리는 족보에서 자기 가문의 시조를 알수있고, 자기 가문의 전통을 알수 있으며, 그 시조로부터 어떻게 발전하여 오늘까지 오게 되였는가? 하는 전반과정을 알수 있으며, 자기 친척의 범위와 갈래, 그리고 그 관계를 쉽게 알아볼수 있다. 중국조선족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족보에 대한 개념이나 관심이 조선반도에 있는 우리 민족보다는 강하지 못하지만, 그래도 족보를 중시하는사람들이 아직도 적지 않다.  가문 구성원들의 변화를 총체적으로 적어둔 대종보가 아니더라도, 자기친척 구성원들의 정황과 변화발전 과정을 기록해 두고, 그 관계를 명시하여 후대들에게 물려주는것, 또한 선대로서 마땅한 의무와 책임이 아닐가 생각한다.  특히 오래전부터 시작된 핵가족 시대에서, 자기 친척 구성원들의 정황마저 후대들에게 남겨주지 못한다면, 더불어 살아야 하는 사회에서 우리 후대들은 자기 혈친도 못 알아보고, 고립무원의 환경에서 살게 되며, 그때 가선 우리민족의 응집력도 크게 영향받을수 있다.  이것은 선대로서 후대들에게 너무나 미안한 일이 아닌가?   2, 족보의 기원 일찍 삼국시기 신라에 벌써 족보 비슷한것이 생겨나 왕공귀족들이 리용하였다고 하였다. 족보란 계급사회의 등급제도의 산물로서 그 의의는 주요하게 자기가문의 정통성과 고귀함을 증명하기 위한것이였다. 그후 고려에서는 양반제도를 실시하였는데, 양반이란 주로 조정에서 벼슬을 하고 있는 문무관원들을 일컬으는 말이다. 지금말로 하면 국가공무원인 셈이다.  고려에서는 文宗(기원1047년)때부터 과거제도를 개혁하면서 상놈도 제한적으로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는데, 상놈가문에서 그누가 과거에 합격되여 조정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그 가문은 곧 출세하여 량반가문이 되므로, 왕으로부터 성을 하사받거나 또는 선조명이나 출신지역의 지명으로부터 성을 결정한후, 그사람을 시조로 하고, 그사람에게 봉해진 식지 혹은 출신지역을 본관으로 하여 계보를 작성하여 기록하여 내려 오는데, 그것이 후에 와서 족보가 되는 것이다. 식지란 봉지라고도 하는데, 봉건사회에서 벼슬을 하게되면 벼슬의 급별에 따라 봉해주는 토지와 그 관리구역으로서, 양반가문 경제수입의 주요 래원이였으며 세습할수 있었다.    3, 족보의 가치 과거에는 족보가 지배층, 즉 귀족이나 왕실에서 신분을 가려보고, 피줄의 갈래를 잊지 않으려고 기록한 비망록의 기능을 하였다. 하지만 인권평등을 강조하는 오늘날에 와서 족보의 가치는 신분증명보다는 가족의 뿌리를 알고, 가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가족과 친척의 관계를 명확히 함으로써, 가족관념을 가강하고, 가문의 뉴대를 형성시키며, 가문의 매개 성원들의 사명을 강조하기 위한것이라고 본다.  연변 조선족 가정의 대부분의 족보는 문화혁명때에 훼멸성적인 재난을 당하여 이미 기본상 근절되였다. 개혁개방을 하고, 한국과의 국교가 맺어지고, 한국의 종친회와의 련계를 다시 회복하게 되면서 적지않은 가문에서는 다시 자기의 족보를 가지게 되였으며, 선조와의 련계점을성공적으로 찾고, 자기가정 성원들을 족보에 보충 기입해 넣은 가정도 적지 않다.     4, 족보의 형식 족보의 형식은 가문에 따라 조금씩 차이는 있으나 기본적인 형식은 비슷하다. 맨 앞에 가문을 자랑하는 서문이 있고, 시조를 포함해 주요한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밝혔으며, 시조와 조상들 가운데서 력사에 이름난 인물들의 사적을 적어 놓았다.  그다음부터는 시조 아무개로 시작하여 가문성원들의 이름을 세대를 나누어 항렬의 순서에 따라 적고, 매 사람의 이름에 곁붙여 자, 호, 생졸년월일, 그리고 생전에 지낸 대표적인 벼슬, 간단한 략력, 안해의 본과 성씨, 무덤의 위치등을 적어 넣었다.  딸은 출가외인이라 하여 보통 이름을 밝히지 않았지만 어떤 가문에서는 사위의 성과 이름을 밝히기도 한다. 남자들은 성이 모두 같으므로 이름만 적었으며, 그것도 적서의 구별을 두어 본처의 자식은 《적》으로, 첩의 자식은 《서》로 갈라 적었으며, 외손자인 경우 보통 밝히지 않지만, 또 일부 밝힌 가문도 있다.  보통 족보는 해당 문중에서 스스로 자기 문중의것을 작성하였고, 이밖에족보와 성질은 같지만 형식과 내용이 약간씩 다른 가첩과 가승이란것도 있었다. 가첩이란 직계친족만 적어둔 것이며, 가승은 가문의 직계친족과 그 가문의 사적을 적어놓은 것이다. 족보를 중요시함에 따라 해당 가문의 종친을 체계적으로 종합한 종보와 그중 어느 한갈래의 종친만을 밝힌 지보란것도 생겨났다.    5, 친척이란 무엇인가? 친척이란 피줄과 결혼관계로 련결된 사람들을 말한다. 친척은 크게 친족, 인척 두가지 부류로 나눈다. 친족은 피줄관계로 련결된 것인데, 흔히 집안이라고 한다. 인척은 결혼관계로 련결된 것을 말한다.  친족안에는 직계와 방계로 구분되는데, 직계는 할아버지(할머니)-아버지(어머니)-아들(딸)-손자(손녀)-증손자(증손녀) 등과 같이 피줄이 직접 잇달아 물린 사람들이다. 이것을 가족이라고 부르며, 이것을 방계와 구별하기 위하여 《친할아버지》, 《친손자》 등 《친》자를 붙여 부르기도 한다.  방계는 큰(작은)할아버지-큰(작은)아버지-조카 등과 같이 몇 대우에서갈라져 나간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인척가운데서 어머니켠을 외켠(외척), 안해켠을 처켠(처척)이라고 하며, 시집간 딸은 친족성원에서 빼버렸으나, 사실상 고모, 고모부, 고모사촌 등은 실제생활에서 아주 가까운 친척으로 되여 있다.    6, 친척의 촌수를 어떻게 밝히는가? 우리 민족은 친척관계의 멀고 가까움을 촌수로 밝힌다. 우리 민족이 촌수를 밝히기 시작한것은 대체로 고려시기부터였다고 한다. 14세기 문인 리색이 《4촌회》라는 말을 쓴것도 있고, 또 《고려사》에 외사촌이란 말이 나온 것으로 미루어 보아 그쯤으로 추증하는것이 옳을것 같다.  촌수는 부부관계에서부터 시작하여 한세대를 한촌으로 센다. 때문에 부부사이는 촌수가 없이 동체로 치고, 대수가 점차 벌어짐에 따라 촌수는 많아진다. 따라서 촌수가 적을수록 가까운 친척이고, 촌수가 많을수록 먼 친척으로 된다. 직계에 속하는 친척은 대수가 곧 촌수인데, 부모와 자녀사이는 1촌이고,할아버지와 손자사이는 2촌이다. 그러나 부를 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으며, 증조할아버지와 증손, 고조할아버지와 현손사이도 촌수는 각각 3촌, 4촌이지만 부를때에는 절대로 촌수로 부르지 않는다.  방계(곁갈림)에 속하는 친척의 촌수는 먼저 어느 조상에서 갈라졌는가를 따져보고, 그 조상과 자신과의 촌수에다 알려고 하는 대상과 그 조상과의 촌수를 합하면 된다. 례를 들면 조카와 자기와의 촌수는 자기와 아버지의 촌수에다 조카와 아버지와의 촌수를 합하면 된다. 즉 자기와 아버지와는 1촌이고, 조카와 자기 아버지(조카에게는 할아버지)는 2촌이므로 자신과 조카는 3촌이 된다.    7, 인척의 촌수는 어떻게 밝히는가? 외켠의 친척은 어머니와 그 친척과의 촌수에다 자기와 어머니와의 촌수(1촌)를 합한 수와 같은 촌수이다. 례를 들면 어머니의 남동생은 어머니와 2촌이므로 자기와는 3촌, 즉 외삼촌이 된다.  처켠에 대해서는 알아보려는 사람과 자기 안해와의 촌수를 그대로 따르면 된다. 례를 들어 안해의 작은 아버지는 안해의 3촌이므로 처삼촌이라고 부른다.  촌수로 친척의 멀고 가까운것을 나타내는데, 형제벌의 친척은 4촌, 6촌, 8촌과 같이 짝수(우수)로 나가고, 큰(작은)아버지, 조카 등 아잡조카벌의 모든 친척은 3촌, 5촌, 7촌과 같이 홑수(기수)로 나간다. 이것은 촌수의 련결마디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세대와 세대사이에는 그를 낳은 부모가 끼여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촌형, 칠촌아우, 6촌조카, 8촌조카라는 것은 있을수 없다.    8, 몇촌까지 친척으로 보는가? 고려와 리조에서는 서로 범위에서 얼마간 차이가 있었으나, 대체로 친족은 7~10촌까지, 인척은 5~6촌까지를 친척으로 보았으며, 리조시기 법에는 친족이 10촌까지로 되어 있으나, 실제생활에서는 대체로 8촌까지 친척으로 보았다.    9, 사돈도 친척의 범주에 속하는가? 우리말에 사돈이 한호적이란 말도 있다. 《아언각비》란 책에 《친척》이란 《척》에는 외척, 처척, 인척을 들고 있는데, 여기의 이 인척이 곧 당시 사돈집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였다. 그런데 사돈은 친척가운데서 제일 먼 관계에 있다. 그러므로 《사돈의 팔촌》이라 하게되면 친척이라고 할수 없을 정도로 관계가 먼것을 말한다. 하지만 실제생활에서 사돈과 가깝게 지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매부와 처남 사이는 일반적으로 매우 가깝다.    10, 직계친족을 부르는 호칭에는 어떤것이 있는가? 3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증조》를 붙여 증조할아버지, 증조할머니라고 부르며, 3대의 손자와 손녀는 《증손》을 붙여 증손자, 증손녀라고 부른다. 4대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고조》를 붙여 고조할아버지, 고조할머니로 부르고, 4대의 손자와 손녀는 《현손》을 붙여 현손자, 현손녀로 부른다. 5대이상의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자, 손녀는 대수를 그대로 붙여 5대할아버지, 6대손자 등으로 부른다. 직계친족가운데서 형의 안해를 흔히 형수, 아우의 안해를 제수라고 부르며, 누이의 남편을 매형, 혹은 매부라고 부른다.    11, 방계친족은 어떻게 불러야 하는가? 방계친족을 부를때에는 같은 항렬에 속하는 4촌, 6촌, 8촌형제를 친형제와 구별하기 위하여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종형제, 재종형제, 삼종형제 등으로 부른다.  아버지항렬에 속하는 큰아버지를 백부, 작은아버지를 숙부라고 부르며, 흔히 숙부를 삼촌이라고도 하는데, 직접 촌수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이런 친삼촌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촌, 칠촌, 구촌백부와 숙부는 각각 《종》, 《재종》, 《삼종》을 붙여 부른다.  할아버지 항렬을 부를때에도 친할아버지와 구분하여 할아버지의 형제를 종조부로 부르며, 따라서 증조할아버지 형제를 재종증조부, 고조할아버지의 형제를 삼종고조부로 부른다.  아들, 손자항렬에서도 친조카와 오촌, 칠촌, 구촌조카, 그리고 친손자와형제의 손자를 구별하기 위하여, 《당》, 또는 《종》, 《재종》, 《삼종》등을 붙였다. 이를테면 사촌의 아들은 5촌으로서 당질(오촌조카)이며, 륙촌동생의 아들은 7촌으로서 재종질(칠촌조카)이며, 팔촌의 아들은 9촌으로서 삼종질(구촌조카)이라고 부른다.   이런 추리로써 형제의 손자는 6촌으로서 재종손, 륙촌의 손자는 8촌으로서 삼종손이라고 부른다. 누이의 딸은 생질, 고모사촌은 고종형제라고한다.  이밖에도 친족을 부르는 말에는 넛할아버지(아버지의 외삼촌), 넛손자(누이의 손자), 올케(오빠와 남동생의 안해) 등이 있다.    12, 인척을 부를때에는 어떻게 부르는가? 인척을 부를때에도 촌수를 캐는 법은 같으나, 부를때 외켠에는 《외》, 어머니의 자매는 《이모》, 처켠에는 《처》를 붙여 부르며, 안해의 부모를 장인, 장모로 혹은 가시아버지, 가시어머니로 부른다. 이모의 아들딸은 이모사촌이 되고, 처남과 처형제의 아들딸들은 처조카로 되며, 안해의 삼촌은 처삼촌으로 부른다.  우리 민족은 친척교제에 있어서 비록 구분은 우에서 말한것처럼 촌수가밝혀져 있으나, 직접 상대하여 말할때에는 될수록 가깝게 부르는 풍속이있다. 즉 례를 들면 구촌조카를 당면해서 부를때《구촌조카 왔는가?》하지 않고 《조카 왔나?》라고 하는 식이다. 웃사람에 대해서도 그러하다.  연변 등지에서는 《아바이》, 《클아배》, 《아매》, 《맏아매》등 함경도 방언이 많이 쓰이고 있는데, 친척, 가족내에서 친근감을 줄수 있으나, 많은 장소에서는 소개가 잘못될 수도 있다. 그러니 좋기는 소개는 구체적으로 촌수에 따라 하고, 부를때는 장소를 고려하여 해당된 표준어를 쓰는것이 좋겠다.    13, 아주머니, 아재, 아저씨는 누구? 우리 연변에서는 형의 안해 즉 《형수》를 직접 대면하여 부를때  보통《아주머니》라고 불렀고, 고모, 이모 등과 같이 자기 어머니와 나이 비슷한 녀인들을 부를때에는 보통 《아재》라고 불렀다. 그런데 지금 《아주머니》란 말은 주로 형수, 자기와 나이가 비슷한 여자, 또는 젊은 남의안해를 부를때 자주 쓰이고, 《아재》라는 말은 보통 자기보다 젊은 녀인을 대칭하여 많이 쓰인다. 그러니 자기 형의 안해를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타인의 안해와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수》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고, 고모, 이모도 그대로 《고모》, 《이모》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 하다.  그리고 《아저씨》라는 말도 그전에는 외삼촌과 고모부, 이모부 등과 같이 자기 아버지와 나이가 비슷한 남자들을 부를때 쓰였으나, 지금은 주로 여자들이 언니의 남편, 혹은 친척관계가 없는 젊은 남자들을 부를때 쓴다. 때문에 자기 언니의 남편을 공식적인 장소에서는 타인의 남편들과 구분하기 위해서라도 《형부》라고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다.  동서끼리 혹은 시누이와 올케가 서로 부를때 《형님》, 《언니》, 《동생》등으로 부르며, 특히는 여자들이 시형과 시아우를 자기 자식들이 부르는 대로 《큰아버지》, 《삼촌》 등으로 부르는데, 친근감을 돋구는 친척호칭이기는 하지만 일련의 오해의 여지가 있으니, 제대로 촌수에 따라서 정확히 부르는것이 바람직 하다.    14, 항렬이란 무엇인가? 항렬이란 친족가운데서 세대수 관계를 나타내는 말인데, 어떤 사람의 자손가운데서 세대수가 같아서 형제벌 되는 사람들을 같은 항렬이라고 하며, 그들의 아버지벌 되는 사람들을 아버지항렬, 아들벌 되는 사람들을 아들항렬이라고 한다. 우리 민족은 재래로 이름을 지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썼다. 이 《항렬자》에 근거하여 성과 본이 같은 사람끼리 이름만 보고도 대체로 항렬을 가릴수가 있었다. 지금은 이름 짛을때 《항렬자》, 즉 《돌림자》를 쓰지 않고 각각 제맘대로 짓는다. 하지만 년세 많은 분이 집안에 계시는 경우, 아직도 항렬자를 따져서 이름을 짓기도 한다.    15, 성씨란 무엇인가? 옛날에는 평민들을 가리켜 한자말로 《백성》이라고 하였는데, 그뜻인즉《백가지 성씨를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다. 하지만 이 말이 나오기썩 오래전인 원시사회나 노예사회, 봉건사회 초기때만 해도 성씨가 많지 않았고, 그 성씨는 왕족이나 귀족과 같은 지배계급에서만 사용되였었다. 그리하여 성이 없는 평민들은 《천민》 혹은 《상놈》이라고 불리였으며, 이름은 《돌쇠》나 《똥애》처럼 아무렇게나 지어 부르는 것이 고작이였다. 하지만 사회가 발전하면서 인권평등의식이 강조되고, 인격존중이 하나의 사회적 원칙으로 됨에 따라 호적등록을 하면서 점차 누구나 성씨를 갖게 되었다. 우리 민족의 경우, 이름앞에 붙이는 성씨는 일반적으로 같은 족속을 나타내는 칭호인데, 한문투를 따서 보통 무슨 《씨》, 무슨 《가》라고 한다. 이를테면 《허》란 성을 부를때면 《허씨》, 혹은 《허가》라고 한다.    16, 우리민족 성씨는 몇가지 되는가? 《백성》이라고 하지만 실지 우리민족의 성씨는 100가지를 훨씬 초과해 수백가지에 달한다. 옛날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265성이 기록되여 있고, 그후에 나온 《증보문헌비고》에는 496성으로 근 5백가지를 헤아리고 있다.  1975년 한국 국세조사에서는 249가지 성으로 되어 있으며, 김씨가 전체 인구의 21.9%, 리씨가 14.9%, 박씨가 8.5%, 최씨가 4.8%로 한국 총인구의 근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한자가 들어오기 이전에 고대사회에서 조선 고유말로 된 성이 있었을수도 있지만 아직 고증할 문헌기록이 없다.  우리민족 력사문헌으로서 가치가 가장 큰 문헌중의 하나인 《삼국사기》에서는 사람 이름 앞에 출신지방의 이름을 붙여서 혈연관계 혹은 지방소속관계를 밝혔다. 이를테면 옛날 백제왕실의 성인 《부여》같은것이다. 백제왕실은 고구려왕실에서 갈라져 나왔는데, 자연 이 두 왕실의 출신지방이 같은 《부여》였기 때문이다. 백제왕실에는 《부여》란 성외에도 사, 연개, 협, 해, 진, 국, 목, 백 등 큰 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를 세운 주몽의 성은 《고》씨인데, 고구려에는 이밖에도 장, 양,리, 오, 두, 왕, 등 큰 성이 있었으며, 이런 큰 성을 가리켜 우성이라고 불렀다.  신라왕실의 성은 박, 석, 김이 위주였고, 그외에 최, 안, 설, 남, 손, 정, 배,리, 등성이 있었다.    17, 우리민족 성씨는 어째서 한자성씨인가? 력사문헌에 나오는 성씨들은 대부분이 왕실귀족의 성씨였지 백성들의 성씨는 아니였다. 《삼국사기》에 고위계층 즉 왕실이나 귀족들 가운데서는 성씨가 점차로 보급되여 가고 있었으나, 평민들은 성이 없었다. 때문에 《삼국사기》에 나오는 숱한 평민들은 이름만 나오고, 성이 적혀 있지 않다. 고구려의 온달, 신라의 계백과 관창, 고구려의 창조리, 백제의 도미, 신라의 솔거, 지은 등 평민들에게는 그것이 성씨인지 이름만인지 알기 어렵다. 특히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 살펴보면 우에서 례를 든 왕실의 성씨들을 내놓고도, 을지문덕, 연개소문, 명림담부 등의 을지, 연개, 명림 등 성씨가 나오는데, 그 뜻이 아마 당시 고구려의 고유어로 되어 있는것 같고, 한자를 그대로 쓴 성이 아닌듯 싶다.  조선에서 한자성을 널리 쓰기 시작한것은 아마도 후신라때부터라고 보는것이 타당할것 같다. 왜냐하면 그때가 바로 중국과의 군사, 정치, 외교래왕이 전의 다른 어느 시기보다 잦았을 뿐만 아니라, 후기신라 귀족들의 한자말이 열도가 올랐었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신라 경덕왕은 당시 신라의 지명을 모두한자식 이름으로 고치였으며, 이와 때를 같이하여 신라의 귀족들은 모두한자성을 붙였다. 이로부터 고려, 리조에 이르기까지 한자성이 위주로널리 퍼졌고, 왕실이나 귀족들내에서 한자성씨를 숭상하고, 그 유래를신비화 했거나, 또는 한자성씨를 국가의 공로자에게 상으로 주는 이른바《사성》이라는 제도가 행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18, 평민들은 언제부터 성을 가지게 되였나? 일반 평민들이 성씨가 없이 이름만 붙여 불리운것이 조선력사 반만년에 깔리운 하나의 상황이였다. 고려文宗(기원1047년)때부터 비양반가정에서도 자기성을 가질수 있었다고 하지만 극히 제한적이였으며, 지어 리조말기에 이르러서도 성이 없는 평민들이 상당수준으로 존재하였다. 근대에 들어와서 전국적 범위내에서 통일적으로 호적등기를 하게 되자, 성이 없던 평민들은 여러가지 경로를 통하여 성씨를 가지게 되였으며, 조선반도 전 국민이 비로서 성씨를 다 쓰게 되었다.    19, 본이란 무엇인가? 우리 민족이 예로부터 성씨를 귀중하게 여긴것은 성씨가 봉건사회에서혈연관계 즉 피줄을 상징하는 외에도 계급적 차원에서 신분의 귀천을 상징하는 표징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리조시기에 들어와서 유교가 국교로 됨에 따라, 남존녀비와 《3강5륜》사상이 풍조로 되었다. 따라서 혈통관념이 보다 강하게 성씨에 깃들게 되었으며, 정통이냐? 아니면 갈래이냐? 하는것을 무섭게 따지게 되였다. 그에 앞서 한 성씨안에서도 시조가 누구냐? 그리고 그 시조가 발상한 고을이름이 어떠냐에 따라 《본》이란 개념이 생기게 되였고, 엄격이 그것을 준수하여 벌써 리조초기에 귀족들은 한자성 앞에다가 발상지명을 덧붙여 《전주리씨》,《밀양박씨》하고 불렀다.  시조의 발상지는  출신지역이 될수도 있고, 또 벼슬하여 받은 봉지일수도있다. 사실 고대에 있어서는 성씨 자체가 발상지 이름으로 된것이 적지 않다. 그리하여 이름앞에 선조의 발상지(원래의 성)을 붙이는것이 거의 통례로 되었는데, 한자성씨가 보급됨에 따라 발상지 이름이 따로 《본》이란 명칭으로 성씨앞에 붙게 되였다.  그후 한 종족에서도 그누가 벼슬하게 되면 따로 가보를 창설하고, 성은 원래의 성을 그대로 쓰고, 본은 자기의 봉지명으로 고쳐서 따로 기록하기 시작하였는데, 주요하게 자기의 공덕, 혹은 근친의 공덕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이렇게 되여 같은 성씨에 여러가지 본이 생겨나게 된것이다.  그때로 부터 본이란 기실 한 가족의 발상지만 대표하게 되였으며, 지금은 같은 성씨의 다른 종친을 구분하는 의거로 많이 리용된다. 이것을 《본관》, 혹은 《관향》, 《향관》이라고도 한다.  사회, 력사적 변천으로 하여 본관의 이름이 지금은 없어졌거나, 또는 다른 이름으로 바뀌여 진것도 허다하다. 이를테면 연주 현씨, 문화 류씨, 가주 한씨, 반남 박씨, 무송 윤씨 등이다. 《연주》는 평안북도 녕변의 옛지명이였고, 《문화》는 신천군안의 옛고을이였으며, 《가주》는 정주군 가산고을의 별칭이고, 《무송》은 고창군 무장고을의 별칭이며, 《반남》은 라주군 소속에 있던 별칭이다. 하지만 이런 변천은 성씨의 본관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왜냐하면 상기 본관의 개념이 바로 혈연갈래를 가르는데 두고 있기 때문에, 그냥 옛날지명을 그대로 부르면서 련속되여 왔던것이다.     20, 본 안에 또 파가 있다던데. 기록에 의하면 리조시기에 본이 가장 많은것은 김씨였는데, 499본에 달하였고, 리씨는 451본에 달하였으며, 최씨는 326본에 달하였고, 박씨는 309본에 달하였다. 장씨는 245본, 림씨 216본, 조씨 200본 등의 차례로 선보인다. 본이 많다는것은 그만큼 력사적으로 벼슬을 한사람이 많다는 방증이 된다. 리조후기부터 시작하여 같은 본끼리도 서로 멀고 가까운 현상이 많아졌는데, 족보를 캐여 같은 본안에서 그 문벌이 누구의 자손인가? 그리고 자기 혹은 타인과 어떤 관계인가를 밝혔다. 하여 본안에 또 파가 생겼다.    21, 성씨유래를 캐여보는 의의 우리 민족이 성씨를 쓴지도 이미 천년도 넘는 유구한 력사를 자랑하고있다. 민속학적인 의미에서 볼때, 대대로 성을 물려 주면서 피줄의 흐름을 이어온 그 자체가 하나의 력사이며, 조상들의 지혜로운 유산이다. 때문에 일제가 《동조동근》을 강요하면서 창씨개명까지 협박했던 그 살벌한 민족수난의 시기에도 우리 민족은 자기의 성씨를 잊지 않고, 따라서 자기가 조선민족임을 잊지 않고 줄기차게 살아왔던 것이다. 글로벌화된 오늘날에 와서 종친이요, 한 성씨요 하는 혈연개념이 희박해질수도 있고, 또 그 어떤 다른 목적에 리용될 수도 있다. 하지만 민속학적인 각도에서, 성씨의 유래를 캐여보는것은 력사지식방면에서 도움이 될수 있을 뿐만 아니라,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하고, 민족의 응집력을 가강하는 방면에서도 도움이 될수있다. 세계가 날로 좁아져서 마침내 지구촌이라는 개념으로 이 세계를 평가하는 오늘날, 우리가 자기의 민족성을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자기 가족의 소중함을 다시 한번 새겨보며, 자기의 사명을 다시 한번 생각하는 방면에서도, 모두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연변인민방송국  김동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공동작성 2016-10-04
230    상례문화, 얼마나 알고있는가? 댓글:  조회:2103  추천:0  2016-10-01
상례문화, 얼마나 알고있는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이 얘기하는 조선족 상례문화의 현주소 날짜  2016-9-29 16:40:40   조회  146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 예로부터 관혼상제는 인생대사의 기본으로 우리 조상들은 이에 대해 더없이 중요하게 여겼다. 유교를 바탕으로 나라가 다스려지던 과거에는 관혼상제가 단순한 의례 이상이였으며 지금에 와서도 관혼상제는 우리의 생활에서 자못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회구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오늘날 관혼상제중 많은 의례들은 간소화되고 이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 역시 전과 사뭇 다른 양상을 보인다. 이 가운데서도 상례와 제례는 그 문화적전승이 제대로 돼있지 못한 상황, 현대사회의 뒤안길에서 거의 잊혀져갈법한 위기를 맞았다. 이를테면 도대체 어느 민족의 상례인지 알아볼수 없을 정도의 정체불명한 의식들, 지나치게 간소화되고 형식적이여 초라하기까지 한 장례방식, 단순한 영리목적으로 운영되고있는 상조업체의 비정규적인 장례서비스가 란무하는것 등이 우리 지역 상례문화의 현주소다. 이와 같은 현상을 개변하고 상례문화가 맞은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무어진 단체가 있으니 바로 조선족상례풍속 보호책임단체인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 현용수씨는 길림성비물질문화유산-조선족상례풍속의 대표전승인으로 잊혀져가는 우리 민족 상례풍속을 전승, 보급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있다. 현용수회장에 의하면 중국에서 장례개혁이 실행되기 시작한것은 지난 세기 80년대, 그러나 조선족의 상례풍속은 문화적차원에서 정부의 인정을 받지 못한 상황이였고 그때문에 연변 지역내 병원이나 장의관에는 조선족의 장례시설들이 따로 설치되지 않았다. 장기간 조선족 상례문화가 중시를 받지 못한 상황에서 조선족 상례문화는 철저히 소실될 위기를 맞게 됐으며 그 존재의식도 엄중히 약화됐다. 2009년, 조선족 상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조선족의 상례문화는 비로소 정부의 인정을 받게 됐고 민속문화로서의 자기의 자격과 체계를 초보적으로 갖게 됐다. “상례문화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은 기피하고싶어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문화의 보호에 집착하는것은 이 문화에 우리의 뿌리가 묻혀있고 우리의 넋이 슴배여있기때문입니다.” 현용수회장은 이처럼 상례문화를 보호하고 널리 보급시키기 위한 조치로 “상례문화의 상업화”를 꼽았다. 특히 시장경제시대에 와서 산업화되지 못한 문화는 그 생명력을 유지할수 없다고 지적, “이대로 상례문화를 민간의 자연존재법칙에 맡겨놓는다면 이 문화는 곧 철저히 소실될것”이라며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그는 또 “상례문화를 상업화한다는것은 단지 영리를 목적으로 상조업체의 건설에 국한되지 말고 정규적인 상례복무업체를 설립하여 국가의 유관정책과 시장기률을 준수하면서 인성화된 합리한 유상복무를 제공하는것”이라고 설명했다. 특히 “업체의 체제를 건전히 하고 경영관리를 가강하며 장기적으로 견지해나간다면 우리의 상례문화는 살아남게 될것”이라고 소신을 밝혔다. 망자를 위한 장례는 단지 고인의 유체를 처리하는 실무수단뿐만아니라 고인의 죽음을 추모하고 은덕에 감사를 표시하며 민족(가문)의 전통을 이어받는 문화수단이기도 하다. 여기에는 한 민족의 고유한 넋이 고스란히 체현되며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바른 인식과 살아있는자들에게 삶에 대한 긍정적인 에네지도 함께 불어넣어주는 정중한 의례이기도 하다. 박진화 기자   QR코드를 스캔하여 위챗 모멘트에 공유하여주십시오. 저작권성명: 본 사이트 기사를 전재하실 경우에는 연변일보 사명과  기사 작성자명(기자명)을 반드시 표기하여주십시오.
229    중양절과 우리민족 상례문화 댓글:  조회:1970  추천:0  2016-09-27
중양절과 우리민족 상례문화   중양의 어원 중국의 전통 음양학설에서는 우수[隅數]를 음(陰)의 수라고 하고, 기수[奇數]를 양(陽)의 수라고 하며, 보통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습니다. 그리하여 양의 수가 두개 겹치는 날은 대길한 날로 여기고 명절로 삼았습니다. 례컨대 음력으로 1월1일은 설날(태아의 날), 3월3일은 삼진날(어린이 날), 5월5일은 단오날(처녀총각의 날), 7월7일은 칠석날(련인의 날), 9월9일은 중구날 혹은 중양절(노인의 날)이라고 하였습니다. 그중에서 중구날은 가장 큰 양의 수가 두개 겹쳤으니 대길중의 대길한 날이인 셈이죠. 2.   중양절의 유래 구구중양에 대하여 일찍 중국 춘추전국시기에 기록이 있는데, 그 당시에는 아직 명절은 아니였습니다. 삼국시기 위문제 조비가 쓴 《九日与钟繇书》라는 문헌에서 처음으로 중구가 명절로 표시되여 있습니다.  당조에 와서 중구는 중양절이라고 칭하고 정식 민간명절로 정해졌고, 명조에 와서는 황궁에서까지도 중양절을 굉장히 쇠였으며, 그 풍속이 청조에까지 전해져 내려 왔습니다. 전통적으로 중양절에는 상국(賞菊), 등고(登高), 시주(詩酒) 등의 풍속이있었고, 당송(唐宋)때에는 관리들의 휴가일로서 추석보다도 더 큰 명절이였습니다. 반도에서 이 풍속은 신라시대에 당조로부터 들어 온것으로 추정됩니다.신라시대에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중구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술을 마이며 시가를 즐긴 기록이 있으며,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나라적으로 정례화 되였습니다. 조선 세종 때에는 삼짇날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였으며, 성종 때에는추석에 행하던 기로연을 중구로 옮기고 유생들에게 과거를 실시했습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9월 조에 의하면"서울의 풍속을 보면 중구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먹고 마시며 단풍놀이를 한다."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3.   구구 중양절의 전설 중국 남북조때 량(梁)나라의 吴均이란 사람이 쓴 《续齐谐记》란 책의 기재에 근거하면; 중국 동한시기에 汝河지역에서 해마다 9월9일이면 온역이라는 마귀가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가 나타나기만 하면 사처에 전염병을 퍼뜨려, 집집마다 사람이 병들어 눕고, 마을마다 사람이 매일 죽어 나갔다고 합니다.  恒景이란 청년이 있었는데, 그는 마귀를 소멸하여 마을사람들을 구할 뜻을 품고, 신선을 찾아 마귀 잡을 도술을 꾸준히 익혔습니다. 9월9일, 그는 마을에 내려와 먼저 마을사람들에게 수유(茱萸)잎 하나와 국화꽃술(菊花酒) 한종씩 나누어 주면서 높은산에 올라가 피신하게 하였습니다.  오시에 마귀가 나타나 산밑을 지나가면서 수유와 국화꽃술의 특이한 냄새를 맡더니 몹시 당황해 하였습니다. 이때 그 청년이 나타나 보검을 휘둘러 그 마귀를 죽여 버렸습니다. 지금도 중국 중원 지역에서 중양절에 옷이나 머리에 수유열매를 꽂고 높은산에 오르며, 국화꽃을 감상하고, 국화꽃술을 마이는 등 풍속이 있는데, 모두 온역을 피한다는 위의 전설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우리 민족 가운데서 전해져 내려 온 유설에 의하면; 중구날에는 양기가 너무 강하여, 음계(저승)에서는 사무를 볼수 없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날에 전반 음계에서는 염라왕을 포함하여 모든 신령과 귀신들이 휴가를 보낸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이날이 탈이 없는 날이라는 속설이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이날에 면례 하거나 묘소를 수리하기도 하였고, 비석을 세우기도 하였으며, 객사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였거나, 구체적인 기일(忌日)을 알수 없는 조상이나 부모의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연변에서는 이날에 이장하고, 합장하는 행사가 많습니다. 4, 우리민족 상례문화에 대하여 중양절은 일년중에 양기가 가장 강하고, 또 탈이 없는 날이라고 하니깐,구태여 기피할 필요가 없는 이 기회에 무형문화재로 된 우리민족의 상례문화에 대하여 몇가지 말씀 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민족 상례문화가 왜 필요한가? 현재 우리 연변의 조선족 장례방식은 극히 간단하고 초라합니다. 아마 세상에서도 제일 초라한 장례방식인것 같습니다. 지금 대부분 사람들은 이런 상황에 이미 습관되여 있으며, 시대의 현상이라고만 생각하고 이것이 우리민족의 수치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고로 우리민족은 찬란한 장례문화가 있었습니다. 부모의 장례를 단지 부모의 유체를 처리하는 실무수단뿐만이 아니라, 부모의 죽음을 추모하고, 부모의 은덕에 감사를 표시하며, 가문의 전통을 이어받는 문화수단으로 삼고 정중하게 실행하여 왔습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의 부모장례를 살펴보면, 환경위생부문에서 쓰레기 처리하는 것과 별로 다르지 않습니다. 절차가 너무 간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손들의 성의가 부족하고, 사람으로서의 인정을 느껴볼수 없습니다.  한 민족이 흥성발전하려면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여야 하겠지만, 자기민족의 전통문화의 기초상에서 받아들여야만 적극적인 효과를 낼수있습니다. 자기조상을 숭배하고 근본을 이어가는 민족은 선진적인 문화를 받아들여 흥성발전할수 있지만, 조상을 배반하고 근본을 잊어버린 민족은 선진적인 문화에 의하여 결국 쇄망하게 됩니다. 사람이 세상에 살면서 은덕에 보답할줄 알아야 하고, 감사할줄 알아야합니다. 이것은 사람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인성입니다. 그래야만 사람들과 어울려 살수있고, 사회에서 발전할수 있으며, 위기에서도 운명의구원을 받을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많은 사람들은 작은 은덕에는 감사할줄 알지만, 큰 은덕에감사할줄 모릅니다. 그 큰 은덕이란 바로 조상들이 근본을 내려 주신 은덕이요, 부모가 생명을 주시고 키워 주신 은덕입니다.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들에게 하늘과 같이 큰 은덕를 주시고도, 얼마 보답도 받지 못한채 저 세상으로 갔습니다. 인젠 그분들에게 보답의 기회조차 없어진 형편에서 감사이 마음이라도 있어야 할것 아닙니까? 장사제사를 크게 버젓하게 지내라는 것이 아니라, 간소하면서도 성의를 다하여 지내라는 것입니다. 그 성의 가운데 바로 자기민족의 기본례의를 지키라는 뜻도 포함되여 있습니다. 지금 사람들은 결혼이나 아이 돐잔치 같은 행사에서는 천문수자의 돈도 아끼지 않고 푹푹 쓰다가도, 부모의 장례나 제사라고 하면 린색하기 짝이 없습니다. 결혼이나 아이 돐잔치에 쓰는 돈은 살아있는 사람들에 대한 투자이기 때문에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장례에 쓰는 돈도 기실 죽은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돈은 절때 아닙니다. 그 돈도 여전히 살아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쓰는 돈이며, 량심에 대한 투자, 도덕에 대한 투자,운명에 대한 투자로 됩니다.  우리의 상례문화는 바로 사망한 부모에게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과정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기본적인 인간도리인 효도를 깨우쳐 주는 문명하고 엄숙한 문화수단입니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상례문화가 필요한 것입니다. 둘째: 우리 상례문화를 왜 산업화 해야 하는가? 상례문화라고 하면, 가정에서 누군가 사망하였거나, 혹은 청명이나 추석이 띄였을 때는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평소에는 누구나 될수록 기피하는 것이 이 문화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문화의 보호에 집착하는 것은, 이 문화가 특별히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라, 이 문화에 우리의 뿌리가 묻혀있고, 우리의 넋이 슴배여 있으며,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도록 깨우쳐 줄수있는 특수문화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이 문화를 효과적으로 보호할수 있겠습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산업화 하여야 합니다. 시장경제시대에 와서 산업화 하지 못한 문화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만일 이 문화를 계속 민간의 자연존재 차원에 맡겨 놓는다면 다음 세대에 가서 이 문화는 철저히 소실 될 것임은 의심할바 없습니다. 일단 이 문화가 없어지면 우리민족의 일생생활에는 엄중한 결점이 생기게 될것이고, 우리민족 소질도 엄중히 떨어지게 될것이며, 우리민족의 존재의식도 엄중히 약화될 것입니다. 상례문화를 산업화 한다는 것은 상례복무업체를 건립하고 국가의 유관정책과 시장규률은 준수하면서 합리한 유상복무를 제공한다는 것입니다. 이 업체의 체제를 건전히 하고, 경영관리를 가강하며, 장기적으로 견지해 나간다면, 우리의 상례문화는 살아남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견지에서 우리는, 상관정책에 의하여 이미 전문 조선족 상례복무업체를 건립하였습니다. 상례는 조선족 천가만호와 상관되는 대사이며, 조선족 매 사람들과 상관되는 대사입니다. 조선족 상례문화 보호는 전체 조선족들의 공동의 책임입니다.  어떻게 책임 질것인가? 바로 가문에 상사가 나면 우리를 찾으면 됩니다.이것은 우리의 상례문화 보호사업에 직접적인 참여로 됩니다. 우리 모두 공동 단결하여 우리민족의 보귀한 무형문화재를 보호합시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작성  2016-09-27      
228    조선족 장례규범 댓글:  조회:2735  추천:1  2016-07-11
현재 지킬수 있는 조선족 장례규범   《조선족 상례풍속》이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였습니다. 조선족 상례풍속의 핵심은 효도이고, 주체가 례의입니다. 부모님들이 아직 살아 계실때 잘 모셔야 할 뿐만 아니라, 더우기는 어느날 불행히 돌아 가셨을때, 우리 례의로써 품위있게 보내 드려야만 완미한 효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이 문화를 보호함에 있어서, 조선족 매 사람마다 모두 책임이 있습니다. 이번에 장례연구부문에서는 조선족 장례 현유습관을 존중한 기초상에서 몇가지를 규범화 하였으니, 조선족 상가와 유관 봉사일군들은 새 장의관이 건설되여 조선족 분향소가 설치되기 전까지 여기에 기준하기 바랍니다.   1, 사람이 사망하면 인차 혼을 부르고, 염습을 해야 합니다. (상세한 설명 따로 있음.)   2, 염습이 끝나고, 령구차에 싣기전에 고인한테 발인례를 합니다. 그 자리 사람들 다 함께 고인의 명복 빌어 세번 머리숙여 경례합니다.   3, 령구를 장의관 랭동상에 보관시키고, 자기집 객실에 작은 령좌를 차려 놓습니다. 상주와 가속들은 하루밤 령좌를 지키며 덕담하면서, 夕奠, 子奠, 朝奠만은 간단히 올리는 것이 기본 례의입니다.   4, 장례기간에 유가속에서 남성들은 왼팔에 흰 상장을 두르고, 녀성들은 머리 오른쪽에 흰 나비를 꽂습니다.    5, 고별식이 끝나고, 화장이 끝나면 골회함 보관여부 상관없이 안신제를 지냅니다. 전통적으로 안신제는 유가족들만 지냈으나, 지금은 제한하지 않습니다.(상세한 설명 따로 있음)   6, 골회함을 보관시킬 경우, 납골당에 안치하고 물러가면서 세번 허리굽혀 고별례 하는것을 잊지 마십시요. 제사때문에 납골당에 보관한 골회함을 꺼내와야 할 경우에는, 먼저《오늘 제사 때문에 잠시 움직이오니 부디 놀라질 마옵소서!》하고 말씀 올리고, 세번 허리굽혀 경례한 다음 움직이는 것이 례의입니다.     조선족 염습의 방법과 절차   염습전 준비 물품: 1,수의(내의 두별, 외의 한벌); 2,버선; 3,악수; 4,실타래; 5,쌀; 6, 습건; 7,렴포; 8,포끈; 9,천금; 10,지요; 11,명정 12,분필.   조선족 장례에서 염습(殓袭)은 현재까지 비교적 완미하게 보존된 풍속중의 하나입니다. 염습시 먼저 고인한테 세번 허리굽혀 경례한 다음 시작합니다. 1, 皋復: 혼을 부르는 절차입니다. 고인의 웃옷을 두손으로 받혀들고 서북쪽을 향하여 흔들면서, 고인이 남자일 경우에는 《학생모공 복》하고 세번 부르고, 녀자일 경우에는 《유인모씨 복》하고 세번 부릅니다. 혼을 부른 옷은 개여서 종이에 싼후, 고인의 머리밑에 고여 드립니다.   2, 下袭: 먼저 고인의 아래몸을 속벌까지 내리고, 습건으로 닦습니다. 그 다음 버선을 신기고, 아래벌 세벌 입힙니다.   3, 上袭: 고인의 웃몸을 속벌까지 벗기고, 습건으로 닦습니다. 수의를 세벌 입히고, 옷깃은 반대로 여밉니다. 그 다음 악수를 끼우고, 두손을 배우에 가지런히 올리여 고정시키고, 한태의 무명실을 헝클어서 고인의 손에 감아 드립니다.   4, 饭含: 고인의 얼굴을 습건으로 닦고, 입안에 쌀알을 넣어 드립니다. 나무 숟가락으로 쌀알을 적당히 떠서 세번 넣어 드리는데, 차례로 “백석이요!”, “천석이요!”, “만석이요!” 하고 외움니다.   5, 面袭: 고인의 코구멍과 귀구멍을 약솜으로 막고, 고인의 입에도 약솜으로 채운다음 잘 다물겨 드립니다. 그리고는 약솜편으로 고인의 얼굴을 가리우고, 면백으로 머리와 얼굴을 싸서 동입니다.   6, 小殓: 전폭의 렴포로 유체를 쌉니다. 그리고는 포끈으로 발목부위, 허리부위, 어깨부위, 이렇게 세 부위로 나우어 동입니다. 다섯곳 동일수도 있고 일곱곳 동일수도 있는데, 매듭은 옭매지 않고 비틀어서 끼우는 방법으로 풀어지지 않도로 단단히 동입니다. 소렴이 끝난 유체에 지요(地褥)을 깔고, 천금(天衾)을 덮습니다.   7, 铭旌: 흰 분필로 붉은천에 고인의 시호, 본관, 성씨를 쓰는데, 한자로 씁니다. 남성 고인의 경우 시호를 “學生”으로 쓰는데, 본관이 安东이였고, 성이 金씨 였다면, “學生安东金公之柩” 라고 씁니다. 녀성 고인의 경우 시호를 “孺人”으로 쓰는데, 본관이 全州였고, 성이 李씨 였다면,  “孺人全州李氏之柩” 라고 씁니다. 써 놓은 명정을 염습을 마친 유체우에 덮습니다.   8, 发引礼: 염습이 끝나면, 령구차 오기전에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염을 마친 고인 유체 주위에 모이여, 고인 명복을 빌어 다 함께 세번 허리굽혀 례를 올립니다.   9, 大殓: 전통적으로는 입관하는 절차였으나, 지금은 령구차가 온후 유체를 주머니에 넣는 절차로 됩니다. 유체를 주머니에 넣은후 담가에 담고, 머리부터 바깥으로 나가고, 발부터 영구차에 실으며, 담가를 든 사람들이 될수록 문설주와 문턱을 다치지 않도록 합니다.     조선족 제사 통용규범   북쪽에 자리 정하고, 고인 골회함 혹은 유상 모시고 제사상 차립니다. 상주를 비롯한 유가속은 제단 왼쪽에 서고, 기타 조문객들은 제단 정면에 서며, 집사자가 제단 오른쪽에 섭니다.(한족 례법와 다른 점입니다.)   첫번째 순서로 강령, 독축(降靈,讀祝)입니다. 일동 묵-도! 그사이 집사자가 메밥두껑 열고 숟가락 단정히 꽂고, 반찬그릇위에 저가락을 단정히 놓습니다. 그리고 상관축문을 읽습니다.   두번째 순서로 초헌(初獻)입니다. 상주부부 나와 술 따라 올리고, 함께 삼배 올립니다. 술을 쏟고 퇴장.   세번째 순서로 아헌(亞獻)입니다. 아헌자는 고인 안해(주부), 혹은 상주 형제가 됩니다. 아헌자 나와 술 따라 올리고, 삼배 올립니다. 상주와 맞절하고 퇴장.   네번째 순서로 종헌(終獻)입니다. 종헌자는 고인 형제, 혹은 고인 손군으로 합니다 종헌자 나와 술 따라 올리고, 삼배 올립니다. 상주와 맞절하고 퇴장.   다섯번째 순서로 첨작(添酌)입니다. 전통적으로 첨작은 세번 초과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 증가합니다. 친척, 단위, 친구, 제자 등 순서로 될수록 단체로 나와서 행사합니다. 첨작자 술 따라 올리고, 일동 삼례 올립니다. 가속들과 맞례하고 퇴장.   여섯번째 순서로 유식(侑食)입니다. 일동 묵-도(9초). 그 사이 집사자가 숟가락에 밥알 조금 떠서 물그릇에 놓고, 반찬도 집어 놓으면서 존령의 식사시중 드는 동작을 합니다. 그리고 메밥에 숟가락을 다시 단정히 꽂고, 반찬위 저가락을 움직여 놓습니다.   일곱번째 순서로 송신(送神)입니다. 집사자가 술 한잔 따라서 제단위에 놓고, 일동 지휘하여 삼례 올립니다.   마지막 순서로 철찬(撤饌)입니다. 가속에서 서둘러 제사상 치우고, 기름떢 아홉개를 상징적으로 구워 기름내 피우면서, 상장, 나비, 축문, 등 장례비품들을 모두 살읍니다. 마지막으로 제단에 기름떡 아홉개를 그릇에 담아 올려놓고, 상주부부만 나와서 함께 삼배, 혹은 삼례 올립니다.     통용 제사축문 안신제(虞祭)와 돐제(小祥), 삼년제(大祥)때 읽습니다. 제사에 따라 조절하여 읽되, 우리글 부분만 읽습니다.   유세차 간지년월일 (維歲次 干支年月日) 효자부수 감소고우 (孝子俯首 敢昭告于) 현고학생 부군지령 (顯考學生 府君之灵) [현비유인 모씨지령 (母丧의 경우)] 일월불거 엄급초우 (日月不居 奄及初虞) 숙흥야처 애모불녕 (夙興夜處 哀慕不寧) 근이청작 서수애천 (謹以淸酌 庶羞哀薦) 안사 상향하시라 하였사와  (安事 尙饗)   일월성신 불거하여 벌써초우 웬일인고? 서러움과 그리움에 밤낮으로 불녕하야, 맑은술과 음식으로 안신제사 올리오니, 두루 흠향 하옵소서!     전체 조선족 동포들에게 공개부탁   우리는 정부에서 지정한 무형문화재 《조선족 상례풍속》 보호단위입니다. 장례문화라고 하면, 가문에서 누군가 사망하여, 자기몫에 띄였을 때는 조금 관심을 가지게 되지만, 일단 장례가 끝나고 나면, 언급하기조차 싫은 것이 이 문화입니다. 모두들 이렇게 싫어하는 문화가 숙명인 우리 립장도 몹시 어렵습니다. 하지만 이 문화를 잃게되면 우리의 민속문화에는 엄중한 공백이 생기게 되며, 우리는 춤노래만 알고, 뿌리도 모르는 떠돌이 삼류민족으로 추락될 위험이 있습니다. 현재 우리 상례문화는 30여년 무시 당하여, 몹시 위험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부에서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고 보호하게 된것입니다. 민속문화의 출로는 비즈니스에 있습니다. 즉 산업화 되지 못하고, 민간에만 의거하는 민속문화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이런 이념에서 우리는 시대상조 복무중심을 내왔습니다. 모두가 싫어하고 꺼리는 일은 우리가 대신 맡아 하고, 겨례들은 깨끗한 일만 하면서 안거락업 할수있게 하는 것이 우리의 경영취지입니다. 가정에서 불행히 상사 나게되면, 당황하지 마시고, 우선 우리에게 련락 주십시요. 우리가 전부 맡아 처리해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새롭게 디자인한 민속상시옷을 무료 공급하며, 한국급 장례지도사가 합리한 가격으로 성심봉사 제공합니다. 조선족 장례에서는 우리를 찾으십시요. 민속보호사업에 대한 참여로 되며, 최대의 지지로 됩니다. 여러분 부탁합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장례연구반공실 자문전화:138-9438-7438 복무전화:252-0420
227    노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댓글:  조회:1708  추천:0  2016-06-25
노년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   지식노트 내용 노년기에는 쉽게 상실감, 자기 정체성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노년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방법들을 알아본다. 노년기, 우울증과 자기연민에 빠지기 쉬워 가정에서 나이가 들수록 여성들은 독립적이며 능동적으로 변해간다. 여성의 경우는 감성적이고,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생활을 해왔기 때문에 주위에 자기편이 되어 줄 사람들이 많이 있다. 반면 일 밖에 몰랐던 남편들은 퇴직과 함께 갑자기 무력한 존재가 되고 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아내가 돌봐주지 않으면 자기 속옷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정도가 되고, 식사를 거르는 경우도 있다. 경제력 상실과 함께 가족이 바라보는 눈이 사뭇 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여전히 가족 위에 군림하려는 경우가 많아 노년기 갈등이 심해진다. 정년 이후의 소외감, 분노 등을 부인에게 쏟아냄으로써 갈등이 더욱 깊어지는 경우가 생겨나는 것이다. 노년준비 1 - 부부간 대화를 하자 자녀가 독립하고 부부만 남겨지게 되면 평생 함께 살아왔던 타인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주기에서 보면, 자식이 떠난 빈 둥지에 남겨진 두 사람만의 노년은 신혼기와 비슷하다. 신혼기는 서로 개성이 다른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면서 적응하느라 어려움을 겪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고, 노년기도 마찬가지지만 오랜 시간 가정에서 또는 직장에서 서로 다른 생활을 해오다보니 이미 멀어져 버린 경우가 많다. 또한 신혼기는 애정으로 넘쳤지만, 노년기에는 살아오면서 실망하고 힘들었던 점이나 원망 등이 쌓여 부정적인 감정을 갖기 쉽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 부부생활에서 일어나는 갈등, 불만 등은 가슴 속에 쌓아두지 말아야 한다. 대화를 많이 하는 부부라면 노년준비를 절반은 한 셈이다. 노년준비 2 - 새로운 친구를 사귀자 은퇴를 하고 사회활동의 폭이 줄어드는 노년기에 들어설수록 친구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진다. 친구들의 부고가 들려올 때마다 의기소침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늘 같은 사람과 어울리게 되면 편협해지기 쉽고, 결국 혼자만 남겨질 수 있다. 따라서 새로운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것이 필요하다. 종교적인 만남, 동호회를 통한 만남, 동창모임 등을 통해 늘 새로운 사람을 만나며 생활에 생기를 잃지 말아야 한다. 노년준비 3 - 자기다움을 찾자 사람을 사귀려면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어주는 열린 마음을 가져야 한다. 사회적인 역할, 가족 내에서의 역할 등을 모두 벗어버리고 나면 내면적인 자아가 남는다. 성공한 사람일수록 이 둘을 일치시키려고 한다. 자신이 사회에서 대접 받는 것은 자신의 인격이 훌륭하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정년퇴직을 하거나 지위가 낮아질 때 큰 자아상실을 겪게 된다. 따라서 먼저 자기다움을 찾아야 한다. 타인이 정한 가치가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살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노년준비 4 - 취미생활, 봉사활동에 참여하자 취미생활이나 지역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는 것도 한 방법이다. 그 곳에서는 자연인으로서의 매력이 평가를 받는다. 모임의 분위기를 이끌어가는 능력이나 생활의 지혜, 타인에 대한 배려 등 그 사람 본래의 장점들이 주목받고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자원봉사는 노년기 삶에 생기를 불어 넣어주는데 큰 역할을 한다. 자원봉사를 통해 퇴직이나 배우자 상실, 자녀의 독립 등 노년기 상실감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원봉사를 하면 새로운 사람도 만나고 새로운 기술도 습득하게 된다. 시간 가는 것을 잊게 할 정도로 즐거우면서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유익한 활동은 바로 취미활동이다. 나이가 들면서 취미생활을 즐긴다는 게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여기에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 그리고 어느 정도의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노년기에 취미를 즐기려면 지금부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을 취미로 삼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한다. 노년준비 5 - 유언장을 쓰자 죽음을 생각해 본다는 것은 삶의 점검이 되고 삶을 충실히 이끌어가는 원동력이 된다. 따라서 어떻게 죽을 것인가의 대답은 어떻게 잘 살 것인가로 귀착된다. 죽음에 대해 준비하고 유언장을 써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소중히 여기게 되며, 삶의 속도를 늦추고 미루었던 일을 시작하게 된다고 한다. 죽음이란 마지막 나눔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퇴직 후 막연히 죽음을 기다리며 무료하게 시간을 보내는 것이 노년이 아니라 이 때부터 진정한 인생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라. 
226    창부타령 가사 총 모음 댓글:  조회:1808  추천:0  2016-05-21
창부타령(倡夫打令) 총 모음   *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 모진 간장(肝腸) 불에 탄들 어느물로 꺼주려나 뒷동산(東山) 두견성(杜鵑聲)은 귀촉도(歸蜀道) 귀촉도(歸蜀道) 나의 설음을 몰라 주고 옛날 옛적 진시황(秦始皇)이 만권시서(萬卷詩書)를 불 사를제 이별(離別) 두자를 못살랐건만 천하장사(天下壯士) 초패왕(楚覇王)도 장중(帳中)에 눈물을짓고 우미인(虞美人) 이별(離別)을 당(當)했건만 부모같이 중한 분은 세상천지 또 없건마는 임을 그리워 애타는 간장 어느 누가 알아주리 2.서산(西山)에 해 기울고 황혼(黃昏)이 짙었는데 안 오는 임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 떠서 짝을 불러 슬피울 제 원망스런 우리 임을 한 없이 기다리다 일경(一更) 이경(二更) 삼(三) 사(四) 오경(五更) 어느듯이 새벽일세 추야장(秋夜長) 긴 긴 밤을 전전불매(輾轉不寐) 잠 못들제 상사일념(相思一念) 애타는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 데 없는 이내 심사(心思)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해도 욕망이난망(欲忘而難忘)이라 차마 진정(眞情) 못잊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3.진국명산만장봉(鎭國名山萬丈峰)이 청천삭출금부용(靑天削出金芙蓉)은 서색(瑞色)은 반공(蟠空) 응상궐(凝象厥)이요 숙기(淑氣)는 종영출인걸(鍾英出人傑)하니 만만세지금탕(萬萬歲之金湯)이라 태평연월(太平烟月) 좋은 시절(時節)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는 듯 유유(悠悠)한 한강(漢江)물은 말없이 흘러가고 인왕(仁旺)으로 넘는 해는 나의 감회(感懷) 돋우는듯 4.사랑 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 게 무엇인가 알다가도 모를 사랑 믿다가도 속는 사랑 오목조목 알뜰 사랑 왈칵달칵 싸움 사랑 무월삼경(無月三更) 깊은사랑 공산야월(公山夜月) 달 밝은데 이별한임 그린 사랑 이내 간장 다 녹이고 지긋지긋이 애탠 사랑 남의 정(情)만 뺏어 가고 줄줄 모르는 얄민 사랑 이사랑 저 사랑 다 버리고 아무도 몰래 호젓이 만나 소곤소곤 은근(慇懃) 사랑 얼씨구좋다 내 사랑이지 사랑 사랑 참사랑아 5.요망(妖妄)스런 저 가이야 눈치없이 짖지 마라 기다리고 바라던 임 행여나 쫓을세라 임을 그려 애태우고 꿈에라도 보고지고 구곡간장(九曲肝腸) 다 녹을 제 장장추야(長長秋夜) 긴 긴 밤을 이리하여 어이 샐꼬 잊으려고 애를쓴들 든 정이 병이 되어 사르나니 간장이라 6.백두산(白頭山) 천지(天池)가엔 들쭉 열매 아름답고 굽이치는 압록강(鴨綠江)엔 뗏목 또한 경(景)이로다 금강산비로봉(金剛山毘盧峯)엔 기화이초(奇花異草) 피어있고 해금강(海金江) 총석정(叢石亭)엔 넘실대는 파도(波濤) 위에 백조(白鳥) 쌍쌍(雙雙) 흥(興)겨 운다 배를 타고 노(櫓)를 저어 대자연(大自然)좋은 풍경 마음대로 즐겨 볼까 7.섬섬옥수(纖纖玉手) 부여잡고 만단정회(萬端情懷) 어제런 듯 조물(造物)이 시기(猜忌)하여 이별(離別)될 줄 뉘라 알리 이리 생각 저리 궁리(窮理) 생각 끝에 한숨일세 얄밉고도 아쉬웁고 분(?)하고 그리워라 아픈 가슴 움켜잡고 나만 혼자 고민(苦憫)일세 8.추강월색(秋江月色) 달 밝은밤에 벗 없는 이내 몸이 어둠침침(沈沈) 빈 방(房) 안에 외로이도 홀로 누워 밤 적적(寂寂) 야심(夜深) 토록 침불안석(寢不安席) 잠 못 자고 몸부림에 시달리어 꼬꾜 닭은 울었구나 오날도 뜬눈으로 새벽맞이를 하였구나 9.어지러운 사바세계(娑婆世界) 의지(依支)할 곳 바이 없어 모든 미련(未練) 다 떨치고 산간벽절 찾아가니 송죽(松竹) 바람 슬슬(瑟瑟)한데 두견(杜鵑)조차 슬피우네 귀촉도불여귀(歸蜀道不如歸)야 너도 울고 나도 울어 심야삼경(深夜三更) 깊은 밤을 같이 울어 새워볼까 *오호(嗚呼) 한평생(平生) 허무(虛無)하구나 인생백년(人生百年)이 꿈이로다 10.a귀(貴)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대끼어 남은 것은 한(恨)뿐이라 만고풍상(萬古風霜)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路柳墻花)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山中)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世上煩惱)를 잊어 볼까 b귀치 않은 이내 몸이 사자 사자 헤매어도 세파에 부딪끼어 남은 것은 한뿐이라.(추월춘풍 화개화락 몇몇성상이 지나갔나) 만고풍상 비바람에 시달리고 시달리어 노류장화 몸이 되니, 차라리 다 떨치고 산중으로 들어가서 세상번뇌를 잊어 볼까. 11.세파(世波)에 시달린 몸 만사(萬事)에 뜻이 없어 모든 시름 잊으려고 홀로 일어 배회(徘徊)할 제 만뢰(萬?)는 구적(俱寂)한데 귀뚜라미 슬피 울어 다 썩고 남은 간장(肝臟) 어이 마저 썩이느냐 가뜩이나 심란(心亂)한데 중천(中天)에 걸린 달은 강심(江心)에 잠겨 있고 짝을 잃은 외기러기 운소(雲宵)에 높이 떠서 처량(悽?)한 긴 소래로 짝을 불러 슬피 우니 춘풍호월(春風晧月) 저문 날에 두견성(杜鵑聲)도 느끼거든 오동추야단장시(梧桐秋夜斷腸時)에 차마 어찌 들을건가 12.한 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落花)진다고 설워 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을 나도 번연히 알건마는 모진손으로 꺽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림도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근들 아니 슬플 소냐 숙명적(宿命的)인 운명(運命)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 살겠네 13.세상공명(世上功名) 부운(浮雲)이라 강호어용(江湖漁翁) 되오리다 일엽편주(一葉片舟) 흘리저어 임기소지(任期所之)하올적에 만경창파(萬頃蒼波) 넓은물에 호호탕탕(浩浩蕩蕩)떠나간다 주경(舟輕)하니 산사주(山似走)요 파급(波急)하니 야여주(野如走)라 은린옥척(銀鱗玉尺) 펄펄 뛰고 백구(白鷗) 편편(翩翩) 비꼈는데 청풍(淸風)은 서래(徐來)하고 수파(水波)는 불흥(不興)이라 좌우산천(左右山川) 살펴보니 경개무궁(景槪無窮) 좋을씨고 격안전촌 (隔岸前村) 양삼가(兩三家)에 저녁 연기(煙氣) 일어나고 반조입강번석벽(返照入江?石壁)에 거울 낯을 벌였는데 언덕 위에 초동(樵童)이요 석벽(石壁) 아래 어옹(漁翁)이라 창랑일곡(滄浪一曲) 반겨 듣고 소리 좇아 내려가니 엄릉(嚴陵) 여울 다다랐다 천척단애(千尺斷崖) 높은 곳에 창송녹죽(蒼松綠竹) 푸르렀고 칠리청탄(七里淸灘) 고요한데 쌍쌍(雙雙) 오리 높이 떴다 고기 주고 술을 사서 취(醉)케 먹고 달을 띠고 돌아오니 대장부(大丈夫) 세상자미(世上滋味) 이에서 더할소냐 * 얼씨구 좋다 지화자 좋네 인생백년(人生百年)이 좋을씨고 14.때는 마침 어느때뇨 춘풍(春風)이 화창(和暢)하니 양춘가절(陽春佳節)이 아니냐 만산홍록(滿山紅綠) 요염(妖艶)하여 금수병(錦繡屛)을 둘렀는 듯 백화(百花) 만발(滿發) 난만(爛漫)한데 꽃을 찾는 벌나비는 향기(香氣)를 좇아 날아들고 휘늘어진 버들새로 황금(黃金) 같은 꾀꼬리는 벗을 불러 노래하고 시냇물 맑았는데 낙화(落花) 동동 떠나가니 이도 또한 경(景)이로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15.명년삼월(明年三月) 오시마더니 명년(明年)이 한(限)이 없고 삼월(三月)도 무궁(無窮)하다 양류청양류황(楊柳靑楊柳黃)은 청황변색(靑黃變色)이 몇 번(番)이며 옥창앵도(玉窓櫻桃) 붉었으니 화개화락(花開花落)이 얼마인고 한단침(邯鄲枕) 빌어다가 장주호접(莊周蝴蝶)이 잠깐 되어 몽중상봉(夢中相逢) 하쟀더니 장장춘단단야(長長春短短夜)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몽불성(夢不成)을 어이하리 16.a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風紙)가 펄렁 날 속였네 행여나 임이 왔나 창문(窓門)열고 내다보니 임은 정녕 간 곳 없고 명월(明月)조차 왜 밝았나 생각끝에 한숨이요 한숨 끝에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쟀더니 그대 화용(花容)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b기다리다 못하여서 잠이 잠깐 들었더니 새벽별 찬바람에 풍지가 펄렁 날속였네. 행여나 님이 왔나 창문 열고 내다보니, 님은 정녕 간곳없고 명월조차 왜 밝아서, (생각사록 눈물이라) 마자마자 마자해도 그대 화용만 어른거려 긴 긴 밤만 새웠노라. 17.간밤 꿈에 기러기 보고 오늘 아침 오동(梧桐) 위에 까치 앉아 짖었으니 반가운 편지(片紙) 올까 그리던 임이 올까 기다리고 바랐더니 일락서산(日落西山) 해는 지고 출문망(出門望)이 볓 번인가 언제나 유정(有情) 임 만나 화류동산춘풍리(花柳東山春風里)에 이별(離別) 없이 살아 볼까 18.봄이 왔네 봄이 왔네 무궁화(無窮花) 이 강산(江山) 새봄이 왔네 방실방실 웃는 꽃들 우줄우줄 능수버들 비비배배 종달새며 졸졸 흐르는 물소리라 앞집 수탉이 꼬끼요 울고 뒷집 삽사리 컹컹 짖네 앞논의 암소가 엄매 뒷뫼의 산꿩이 끼긱끽 물 이고 가는 큰애기 걸음 삼춘(三春)의 흥(興)에 겨워 사뿐사뿐 아기장아장 흐늘거리며 걸어가네 *.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구려 삼춘가절(三春佳節)이 좋을씨고 19.하늘같이 높은 사랑 하해(河海)같이 깊은 사랑 칠년대한(七年大旱) 가문 날에 빗발같이 반긴사랑 구년지수(九年之水) 긴 장마에 햇볕같이 반긴 사랑 당명황(唐明凰)의 양귀비(楊貴妃)요 이(李) 도령(道令)의 춘향(春香)이라 일년 삼백 육십 일에 하루만 못봐도 못 살겠네 20.오늘도 화창하니 이삼요우(二三僚友) 작반(作伴)하여 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부여팔경(夫餘八景) 구경 가세 부소산(扶蘇山) 저문 비에 황성(荒城)이 적막하고 낙화암(落花岩) 잠든 두견(杜鵑) 삼천궁녀(三千宮女) 죽은 원혼(?魂) 쌍쌍이 짝을 지어 전조사(前朝事)를 꿈꾸느냐 고란사(皐蘭寺) 쇠북 소래 사자루(泗자樓)를 흔드는 듯 선경(仙境)이 방불(彷彿)하다 21.증경(증?=꾀꼬리)은 쌍쌍(雙雙) 녹담중(綠潭中)이요 호월(皓月)은 단단(團團) 영창롱(映窓?)인데 적막한 나유(羅惟) 안에 촛불만 도두 켜고 인(人) 적적(寂寂) 야심(夜深)한데 귀뚜람 소리가 처량하다 금로(金爐)에 향진(香盡)하고 옥루(屋漏)는 잔잔(潺潺)한데 돋은 달이 지새도록 뉘게 잡히어 못 오시나 임이야 나를 생각하는지 나는 임 생각뿐이로다 독수공방(獨守空房) 홀로 누워 전전불매(輾轉不寐) 장탄수심(長嘆愁心) 남은 간장(肝腸) 다 썩는다 22.날 찾네 나를 찾네 그 누구라 날 찾나 기산(箕山) 영수(潁水) 별건곤(別乾坤)에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날 찾나 백화심처일승귀(百花深處一僧歸)라 춘풍석교화림중(春風石橋花林中)에 성진화상(性眞和尙)이 날 찾나 청산기주(靑山?洲) 백로탄(白鷺灘)에 여동빈(呂洞賓)이가 날 찾나 도화유수무릉(桃花流水武陵) 가자 어주속객(魚舟屬客)이 날 찾나 수양산(首陽山) 백이숙제(伯夷叔齊) 고사리(採o) 캐자 날찾나 부춘산(富春山) 엄자릉(嚴子陵)이 간의대부(諫議大夫) 마다 하고 칠리동강일사풍(七里桐江日斜風)에 함께 가자 날 찾나 기경선자(騎鯨仙子) 이태백(李太白)이 풍월(風月)짓자 날 찾나 상산사호(商山四皓) 네 노인(老人)이 바둑 두자 날 찾나 기주(嗜酒)하던 유영(劉怜)이가 동배주(同盃酒)하자고 날 찾나 칠석은하(七夕銀河) 견우직녀(牽牛織女) 한포(漢浦)로 지나다가 함께 가자 날 잧나 차산중운심(此山中雲深)한데 부지처(不知處) 오신 손님 날 찾을리 없건마는 그 누구라 날찾나 23.그대 나와 사귈 적에 이별(離別)하자 사귀었나 백년(百年)살자 굳은 언약(言約) 일조허사(一朝虛事) 뉘라 알리 임을 그려 애태다가 상사(想思)로 병(病)이 되니 조물(造物)이 시기하여 날 미워서 준 병(病)인가 안타까운 이내 심정(心情) 억제(抑制)할 길 바이 없어 일배일배부일배(一杯一杯復一盃)에 몽롱(朦朧)히 취(醉)케 먹고 울적(鬱寂)한 빈 방안에 외로이 혼자 앉아 옛일을 생각하니 만사(萬事)가 꿈이로다 상사불견(想思不見) 우리 임을 어느 때나 다시 만나 그린 회포(懷抱)를 풀어 볼까 24.일년 삼백 육십 일은 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인데 꽃 피고 잎이 나면 화조월석(花朝月夕) 춘절(春節)이요 사월남풍(四月南風) 대맥황(大麥黃)은 녹음방초(綠陰芳草) 하절(夏節)이라 금풍(金風)이 소슬(蕭瑟)하여 사벽충성(四壁蟲聲) 슬피 울면 구추단풍(九秋丹楓) 추절(秋節)이요 백설(白雪)이 분분(芬芬)하여 천산(千山)에 조비절(鳥飛絶)이요 만경(萬逕)에 인종멸(人踪滅)하면 창송녹죽(蒼松綠竹) 동절(冬節)이라 인간칠십고래희(人間七十古來稀)요 무정세월약류파(無情歲月若流波)라 사시풍경(四時風景) 좋은 시절(時節)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5.a일각(一刻)이 삼추(三秋)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三秋)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 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肝腸) 봄눈(春雪)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비가 되어 우리 임 자는 영창(映窓)밖에 불면서 뿌려나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 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뿐이로다 b일각이 삼추라 하니 열흘이면 몇 삼추요 제 마음 즐겁거니 남의시름 어이 알리. 얼마 아니 남은 간장 봄눈같이 다 녹는다. 이내 한숨 바람되고 눈물은 흘러 비가 되어 (세풍세우 흩날이며), 우리 님 자는 영창 밖에 불면서 뿌려 주면 날 잊고 깊이 든 잠 놀래어 깨우고저 아서라 쓸데없다 마자 마자 마자 해도 그대 생각 뿐이로다. 26.금풍(金風)은 소슬(蕭瑟)하고 휘영청 달 밝은 밤에 임 생각을 잊으려고 아픈 마음 달랠 적에 야속할손 외기러기 북천(北天)으로 날아가며 처량한 울음으로 나의 심회(心懷) 돋워 주고 지는 달 새는 밤에 귀뚜라미 슬픈 울음 사창(紗窓)에 여읜 잠을 살뜰히도 다 깨운다 무인동방(無人洞房) 홀로 누워 이리 딩굴 저리 딩굴 잠 못자고 애태우니 안타까운 이 심정을 어느 누가 알아주리 27.a.공도(公道)라니 백발(白髮)이요 면(免)치 못할 죽음이라 요순우탕(堯舜禹湯) 문무주공(文武周公) 공맹안증(孔孟顔曾) 정주자(程朱子)는 도덕(道德)이 관천(貫天)하여 만고성현(萬古聖賢) 일렀건만 미미(微微)한 인생(人生)들이 저 어이 알아보리 강태공(姜太公) 황석공(黃石公)과 사마양저(司馬穰?) 손빈오기(孫?吳起) 전필승(戰必勝) 공필취(攻必取)는 만고명장(萬古名將) 일렀건만 한번 죽음 못 면했네 멱라수(멱羅水) 맑은 물은 굴삼려(屈三閭)의 충혼(忠魂)이요 상강수(湘江水) 성긴 비는 오자서(伍子胥)의 정령(精靈)이라 b.공도라니 백발이요 면치 못할 죽음이라 천황 지황 인황이며 요순 우탕 문무 주공 성덕이 없어서 붕 했으며, 말 잘하는 소진 장의 육국제왕을 다 달랬으되 염라왕은 못 달래어 한 번 죽엄 못 면하고, 그러한 영웅들은 사후 사적이라도 있건마는. 초로 같은 우리 인생 아차 한번 죽어 지면 움이 나느냐 싻이 나나.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명년삼월 봄 돌아오면 너는 다시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기 어려워라. 28.통일천하(統一天下) 진시황(秦始皇)은 아방궁(阿房宮)을 높이 짓고 만리장성(萬里長城) 쌓은 후에 육국제후(六國諸侯) 조공(朝貢)받고 삼천궁녀(三千宮女) 시위(侍衛)할 제 동남동녀(童男童女) 오백인(五百人)을 삼신산(三神山) 불사약(不死藥)을 구하려고 보낸 후에 소식조차 돈절(頓絶)하고 사구평대(砂丘平臺) 저문 날에 여산황초(驪山荒草) 뿐이로다 아서라 쓸데 없다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29.죽장망혜단표자(竹杖芒鞋單瓢子)로 천리강산(千里江山) 들어 가니 산은 높고 골은 깊어 두견접동(杜鵑) 날아든다 구름은 뭉게뭉게 상상고봉(上上高峯) 산(山)머리에 낙락장송(落落長松) 어려있고 바람은 슬슬 불어 구곡계변(九曲溪邊) 암석상(岩石上)에 꽃가지 떨뜨린다 경개무궁(景槪無窮) 절승(絶勝)하고 별유천지비인간(別有天地非人間)이니 아니 놀고 어이 하리 30.망망(茫茫)한 창해(滄海)이며 탕탕(蕩蕩)한 물결이라 범피중류(泛彼中流) 떠나가니 일모향관하처시(日暮鄕關何處是)요 연파강상사인수(烟波江上使人愁)는 최호(崔顥)의 유적(遺跡)이라 봉황대(鳳凰臺) 나려가니 악양루(岳陽樓) 고소대(姑蘇臺)는 호상(湖上)에 떠있는데 동남(東南)을 바라보니 오산(吳山)은 천첩(千疊)이요 초수(楚水)는 만중(萬重)이라 반죽(斑竹)에 어린 눈물 이비한(二妃恨)을 아뢰는 듯 동정호(洞庭湖)에 비친 달은 상하천광(上下天光)이 일색(一色)이라 삼협(三峽)에 잔나비는 슬피 울어 호소(呼訴)하니 천객소인(遷客騷人)이 몇이런가 31.창외삼경세우시(窓外三庚細雨時)에 양인심사(兩人心事) 깊은 정(情)과 야반무인사어시(夜半無人私語時)에 백년동락(百年同樂) 굳은 언약(言約) 이별(離別)될 줄 어이 알리 동작대(銅雀臺) 봄바람은 주랑(周郞)의 비웃음이요 장신궁(長信宮의 가을달은 한궁인(漢宮人)의 회포(懷抱)로다 지척(咫尺)이 천리(千里)되어 은하(銀河)를 사이하고 까막까치 흩어졌으니 건너갈 길 바이 없고 어안(魚雁)이 돈절(頓絶)하니 소식인들 뉘 전(傳)하리 못 보아 병(病)이 되고 못 잊어 원수(怨讐)로다 가뜩이나 썩은 간장(肝臟) 이 밤 새우기 어려워라 32.춘하추동(春夏秋冬) 사시절(四時節)을 허송세월(虛送歲月) 옥중고생(獄中苦生) 망부사(望夫詞)로 울음울 제 춘풍(春風)이 눈을 녹여 가지가지 꽃이 피니 반갑고도 서러워라 꽃이 피고 잎이 나니 녹음방초(綠陰芳草) 시절(時節)이라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유상세지(柳上細枝) 늘어진 가지 구십삼춘(九十三春) 자아내고 잎이 지고 서리 치니 황국(黃菊)의 능상절(凌霜節)과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할제 송죽(松竹)의 천고절(千古節)을 그 아니 불워하리 33.인생천지백년간(人生天地百年間)에 부귀공명(富貴功名) 뜬구름이라 차라리 다 버리고 세상풍경(世上風景) 완상차(翫賞次)로 용문(龍門)에 장도(壯途)타가 구점연(九點烟)에 산하원기(山河元氣) 동정호(洞庭湖) 운몽택(雲夢澤)을 흉중(胸中)에 삼킨후에 낙안봉(落雁峰) 다시 올라 사조(謝眺)의 경인구(驚人句)를 청천(靑天)에 낭음(朗吟)하고 장건(張騫)의 팔월사(八月?)를 은하(銀河)에 흘려 놓아 장생술(長生術)을 익혀가며 세상진미(世上珍味)를 읊어볼까 34.정월(正月)이라 상원일(上元日)에 달과 노는 소년(少年)들은 답교(踏橋)하고 노니는데 이월(二月)이라 청명일(淸明日)에 나무마다 춘기(春氣)들고 잔디잔디 속잎 나니 만물(萬物)이 화락(和樂)하는데 우리 임은 어디 가고 봄이 온 줄 모르는가 삼월(三月)이라 삼짇날에 강남(江南)서 나온 제비 왔노라 현신(見身)하고 소상강(瀟湘江) 기러기는 가노라 하직(下直)한다 이화도화(李花桃花) 만발(滿發)하고 행화방초(杏花芳草) 흩날린다 우리 임은 어디 가고 화류(花游)할 줄 모르느냐 35.청려장(靑藜杖) 둘러 짚고 북향산(北香山) 찾아가니 백두산(白頭山) 내맥(來脈)이요 청천강(淸川江) 근원根(源)이라 월림강(月林江) 건너가서 향산동구(香山洞口) 다다르니 계변(溪邊)에 우는 새는 춘흥(春興)을 노래하고 암상(岩上)에 피는 꽃은 원객(遠客)을 반기는 듯 외사(外寺)목 넘어들어 좌우(左右)를 살펴보니 창송(蒼松)은 울울(鬱鬱)하고 녹수(綠水)는 잔잔(潺潺)이라 심진정(尋眞亭) 높은 집은 대소행차(大小行次) 영송처(迎送處)라 어화 이 좋은 풍경(風景) 아니 취(醉)고 어이하리 36.a.휘황월야삼경(輝煌月夜三更)에 전전반측(輾轉反側) 잠 못 이뤄 겨우 한잠 들었을 제 오매불망(寤寐不忘) 우리 임 만나 일구월심(日久月深) 그리던 회포(懷抱) 반이나 이루려니 베갯머리 귀뚜라미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곁에 임 간 곳 없고 임 잡았던 나의 손길은 빈주먹만 쥐었구나 야속타 저 귀또리 네 짝 잃고 울 양이면 나의 원통(?痛) 이사정(事情)을 이다지도 모르느냐 b.휘황월야 삼경인데 전전반측 잠 못 이뤄 태고풍편에 오신 님 만나 그린 회포를 풀랴ㅆ더니, 벼갯머리 저 귀뚜리 서상가약을 그리느냐, 불승청원 실려 탄으로 귀똘귀똘 우는 소리 겨우 든 잠 놀라 깨니, 잡았던 님은 간곳 없고 들리느니 귀뜨람 소리 구곡간장 구비 구비 솟아 나느니 눈물이라, 야속하다 저 귀뚜리 네 짝을 잃고 울 양이면 남의 사정을 왜 모르나. 37.압록강(鴨綠江) 내리는 물 황해(黃海)로 돌아들고 한라(漢拏)에 이는 바람 백두(白頭)에 부딪쳐서 삼천리(三千里) 이 강산(江山)에 속속들이 불어온다 봄바람 따스할 제 꽃도 같이 보던 것을 여름날 시냇물에 서로 벗고 놀던 것을 철벽(鐵壁)에 가로막혀 못 본 지 몇몇 핸고 바람 불어 십년(十年)이요 물결쳐서 십년(十年)이라 언제나 다시 만나 이내시름 풀어 볼까 38.진상전(眞常殿) 해회당(海會堂)을 좌우(左右)로 살펴보니 만세루(萬歲樓) 올라서서 원근산천(遠近山川) 바라보니 남산(南山)의 웃는꽃은 춘색(春色)을 띠어 있고 청계(淸溪)의 맑은 물은 계곡(溪谷)을 둘러 있고 취운당(翠雲堂) 백운각(白雲閣)에 오작(烏鵲)이 쌍비(雙飛)하니 요지(瑤池)는 어디런지 선경(仙境)이 여기로다 여래탑(如來塔) 십구층(十九層)과 대보탑(大寶塔) 십이층(十二層)을 전후(前後)로 구경하고 대웅전(大雄殿) 들어가니 탑상(榻床)에 앉은 불상(佛像) 거룩하기 짝이없네 39.천황지황(天皇地皇) 개벽후(開闢後)에 인황구주(人皇九州) 분장(分張)하니 천만고(千萬古) 흥망사적(興亡事蹟) 남가일몽(南柯一夢)아니런가 홍몽일월(鴻?日月) 태고초(太古初)에 소박현풍(素朴玄風) 혼동(混同)하니 구목위소(構木爲巢) 순거곡식(?居穀食) 몇몇해나 지나간고 복희(伏羲) 신농(神農) 황제(黃帝) 요순(堯舜) 계천극립(繼天極立)하신후에 사도지직(司徒之職) 전악관(典樂官)이 상서학교(庠序學校) 열어내어 문장귀천(文章貴賤) 분별(分別)하고 예악교화(禮樂敎化) 선포(宣布)하니 인물(人物)이 혁혁(赫赫)하고 풍속(風俗)이 희희(熙熙)로다 40.응향각(凝香閣) 들어가서 오동향로(烏銅香爐) 구경하고 심검당(尋劍堂)과 관음전(觀音殿) 동림헌(東臨軒)과 미타전(彌陀殿) 망월루(望月樓)를 차례(次例)로 구경하고 유산(遊山)길 찾아가서 안심사(安心寺) 돌아드니 무수(無數)한 부도비(浮屠碑)는 도승(道僧)의 유적(遺跡)이라 명월(明月)은 교교(皎皎)하고 청풍(淸風)은 소슬(蕭瑟)이라 녹수청산(綠水靑山) 깊은 곳에 상원암(上院庵)을 찾아가서 대해포(大海浦) 구경하니 정신(精神)이 쇄락(灑落)하다 이층철사(二層鐵絲) 휘어잡고 인호대(引虎臺) 올라가니 송풍(松風)은 거문고요 두견성(杜鵑聲)은 노래로다 41.증광경과(增廣慶科) 택일(擇日)하여 문장(文章) 무사(武士) 다 모두어 초시회(初試會)를 설장(設場)하고 춘당대(春塘臺) 후원(後苑) 안에 대소과(大小科)를 창방(唱榜)하니 부(賦) 장원(壯元)에 굴원(屈原)이요 시(詩) 장원(壯元)에 이백(李白)이라 의(義) 장원(壯元)에 사마천(司馬遷)과 의심(義心) 장원(壯元) 한퇴지(韓退之)라 책문(策文) 장원(壯元) 동중서(董仲舒)요 표(表) 장원(壯元)에 왕발(王勃)이라 생원(生員) 진사(進士) 이백인(二百人)과 삼십삼인(三十三人) 호명(呼名)하니 반악(潘岳) 송옥(宋玉) 가의(賈誼) 유향(劉向) 반고(班固) 매승(枚乘) 조식(曹植)이요 두자미(杜子美) 송지문(宋之問)과 유자후(柳子厚) 두목지(杜牧之)와 가도(賈島) 잠삼(岑參) 맹동야(孟東野)와 백낙천(白樂天) 원진(元?)이라 구양공(歐陽公) 왕안석(王安石)은 소년성명(少年成名) 조달(早達)하고 소자첨(蘇子瞻) 소영빈(蘇潁濱)은 형제연벽(兄弟聯壁)호기(豪氣)로다 설문청(薛文淸) 이동공(李??)과 왕양명(王陽明)과 왕감주(王감州)라 문장재사(文章才士) 다 뽑으니 천하득인(天下得人) 영광(榮光)이라 *띠리리잇 띠리리 잇 띠리리리리리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2.임이별 해본 사람들 몇몇이나 덴다드냐 임을 잃든 그날밤이 어디가 아프고 쓰리드냐 배지나간 바다위에는 파도와 물결만 남아있고 임떠나간 내 가슴에는 그 무었을 남겼느냐 장미화 꽃이 곱다고 해도 꺽고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고 해도 남되고 보면 원수로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3.a지리하구나 임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누나 인연없어 못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안 같이 살며 왜 이다지 애가타 그려사나 차라리 몰랐드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것이 원수로구나 b 지리하구나 님 이별은 생각사록 목이 메고 인연 없어못 보느냐 무정하여 그리느냐, 인연도 없지 않고 유정도 하건마는, 일성중 안 같이 살며 (오매불망 우리님을) 왜 이다지도 그려사나, 차라리 물랐더라면 뉘가 뉜줄 몰랐을걸 사귄 것이 원수로구나 정 많이 든 것이 대원수로다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서 (참아진정) 못살겠네. *얼씨구나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4.a.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정 안주니 그것이 모두가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손가 신롱서를 꿈에보고 불끌약을 물었더니 임으로 하여 난병이니 임이 아니면 못끈다네 서리맞어 병든 잎은 바람이 없어도 떨어지고 임그리워 애타는 가슴 병 아니 든다고 내 어이 사나 b.원수가 원수가 아니라 내 정은 뺏어가고 제 정은 안주니 그것이 모두 다 원수로다 심중에 타는 불을 그 뉘라서 꺼줄소냐 신롱씨를 꿈에 보고 불 끌 약을 물었더니 인삼 녹용도 쓸데 없고 화타 편작도 소용이없네 님으로 연하여 난병이니 님이 아니면 못 끈다네. *얼씨구 절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네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45.잊어라 꿈이 로구나 모두 다 잊어라 꿈이 로구나 옛날 옛적 과거지사를 모두다 잊어라 꿈이로다 나를 싫다고 나를 마다고 나를 박차고 가신임을 잊어야만 올을줄을 나도 번연이 알건마는 어리섞은 미련이 남아 그래도 몾잊어 걱정일세 46.나 떠난다고 네가 통곡말고 나 다녀 올동안 마음 변치 말어라 제 몸에 병이 들었나 뉘게 잡히여 못오시나 해다저서 황혼이 되면 내 아니가도 제 오니 아마도 우리임은 남에 사랑이 분명하구나 47.지척동방 천리 되어 바라 보기 묘연하고 은하작교가 흩어졌으니 건너 갈 길이 아득하다. 인정이 끊텼으면 차라리 잊히거나, 아름다운 자태거동 이목에 매양 있어 못 보아병이로다. 못잊어 한이 되니 천추만한 가득한데 끝끝이 느끼워라. 48.창문을 닫쳐도 숨어드는 달빛 마음을 달래도 파고드는 사랑 사랑이 달빛이냐 달빛이 사랑이냐, 텅 비인 내가슴엔 사랑만 가득 쌓였구나. 사랑사랑 사랑이라니 사랑이란게 무엇이냐 보일듯이 아니 보이고, 잡힐듯하다 놓쳤으니 나혼자 고민 하는게 이것이 모두가 사랑이냐. 49. 바람아 광풍아 불지 마라 송풍낙엽이 다 떨어진다 명사십리 해당화야 꽃 진다 잎 진다 설워 마라. 동삼 석달 잠을 자다가 춘삼월이 다시 올제. 황금같은 꾀꼬리는 양류상으로 넘나들며 순제금을 희롱하고 탐화봉접이 춤을 출제 훈풍을 좇아서 또 피련마는 우리 인생 늙어지면 다시 젊지는 못하리로다. 50.만리장공에 하운이 흩어지고 무산십이봉에 월색도 유정하더라 님이 저리 다정하면 이별인들 있을 소냐. 이별 마자고 지은 맹서 태산같이 믿었더니, 태산이 허망하여 (백년동락 굳은 언약이) 무너질줄 뉘라 알리. 무정하다 저 달 빛은 천리원정에 님 잃은 서름 너는 어이 모르냐. 51.바람 불어 누운 남기 봄 비 온다고 일어나며 님으로 연하여 얻은 병이 약을 쓴다고 낳을 소냐. 우황 웅담으로 집을 짓고 청심환으로 왕토를 치고, 인삼 녹용으로 구들을 놓고 삼신산 불로초로 약을 지어서 먹은 후에, 화타 편작이 갱생(更生)을 해도 님으로 연하여 애타는 간장 이내 병 낫기는 만무로구나. 52.인간 이별 만사중에 날같은 사람 또 있는가 천지만물 분연후에 설른 이별이 몇몇이냐. 강산에 떠 가는 저 배는 가는 곳이 그 어디메뇨, 만단수회 실은 후에 천리 약수 건너 가서 임계산 곳에 풀고지고, 장탄단우 이내 설움 구곡간장 맺힌 한을 어이하면 풀어볼까. 53. 동정호 지는 달도 그믐이 지나면 또 볼수 있고 북경 길이 멀다해도 사신행차가 왕래하고, 하늘이 높다 해도 오경전에 이슬이 오고, 무한년 정배라도 사만 있으면 풀리는데 황천길은 얼마나 멀게 한번 가며는 영절인가. 54.창해월명 두우성은 님 계신곳 바쳐 있고 회포는 심란한데 해는 어이 수이 가노, 잘새는 집을 찾아 무리무리 날아들고, 야색은 창망하여 달빛 조차 희미 한데 경경히 그리는것은 간장 썩는 눈물이라. 55.춘풍화류 번화시에 애를 끊는 저 두견아 허다공산을 다 버리고 내 창전에 와 왜 우느냐. 밤중이면 네 울음 소리 억지로든잠 다 깨운다. 잠을 자느냐 꿈을 꾸느냐 날 생각 하느라고 번민이냐 생각을 하고 또 생각해도 님의 화용이 그리워 뭇살겠네. 56.뉘라서 장사라더냐 죽음 길에도 장사가 있나 누누중충 북망산을 뉘 힘으로 뽑아 내며 봉리춘풍 빠른 광음을 어느 재사라 막아 내리 명황도 눈물을 짓고 왕후장상도 울었으니 오는 백발을 어이하리 진시황 한무제도 채약구선 못 하고서 여산황릉 갚은 골에 모연주초 뿐이로다 고왕금래 영웅 호걸이 백발이 공도 되어 속절 없이 묻혔구나. 57.님과 날과 만날적에는 백년을 살자고 언약을 하고 태산을 두고 맹서를 하고 하해를 두고서 언약을 하더니, 산수지맹은 간 곳 없고 다만 남은건 이별이라, 이별 두자 누가 내며 사랑 두자를 그 누가 냇나 이별 두자 내인 사람 날과 한 백년 원수로다. 박랑사중 쓰고 남은 철퇴 천하장사 항우를 주어 깨치리로다 깨치리라 이별 두 자를 깨치리라. 58.억만장안 남북촌에 영웅호걸 재자가인 명기명창 가객이며 가진풍류를 갖추어 싣고, 순풍에 돛을 달어 범피중류 내려 갈제, 벽파상에 나는 백구는 흥에 겨워 춤을 추고 고기 잡는 어옹(漁翁) 들은 어기여차 노래한다. 세상공명 다 떨치고 풍월 따라 희롱하니 이도 또한 좋을시고. 59.봄이 왔네 봄이 왔네 원근산천에 봄이 왔네 먼 산의 아지랑이 아롱아롱 뒷 내에 실 버들 하늘하늘, 불탄 잔디 속 잎이 나니 봄은 분명 봄 이로구나. 강남 갔던 저 제비도 옛 집을 찾아 다시 오고 개나리 진달화 만발하니 벌 나비 잡충이 춤을 춘다. 우리 인생도 저 봄과 같이 다시 젊지를 왜 못하나. 원수로구려 원수로구려 무정세월이 원수로구려 검던 머리 곱던 양자 어언간에 백발일세. 백발이 날 찾아올 줄 알았으면 한 손에는 창을 들고 또 한 손에는 철퇴를 들고 오는 백발을 막을것을. 60.우연히 길을 갈적에 이상한 새가 울음을 운다 무슨 새가 울랴마는 적벽화전의 비운이라 하야구구(귀귀) 진토를 보고 설리 통곡 우는 모양 사람의 심리로서야 참아 진정 못 보겠네. 포연탄우 모진광풍에 천하장사 영웅호걸이 비명횡사가 몇몇일러냐. 일후에 그 원혼들이 와석종신 못 한 이한을 어느 누구에게 하소연 하느냐 61.서산에 해 기울고 황혼이 짙었는데 안 오는 님 기다리며 마음을 죄일 적에, 동산에 달이 돋아 온 천하를 비쳐 있고, 외기러기 홀로떠서 짝을 불러 슬피 울 제 원망스런 우리 님은 한없이 기다리다 일경이경 삼사오경 어느덧이 새벽일세. 추야장 긴 긴 밤을 전전불매 잠못 들제 상사일념 애타는 줄 그대는 아시는가, 둘데 없는 이내 심사 어디다가 붙여 볼까 차라리 잊자 해도 욕망이 난망이라 차마 진정 못 잊겠네. 62.산은 적적 월황혼에 두견접동 슬피 울고 오동 우에 비낀 달은 이내 회포를 돋우는데, 야월공산 깊은 밤에 님 그리워 설이울제. 독대등촉 벗을 삼아 전전불매 잠못 들고 상사일염 애 태우니, 옥장의 깊은 곳에 잠든 님을 생각을하고 남가일몽 꿈속에라도 잠깐이나마 보고 지고, 짝을 잃고 우는 저 두견아 남의 원통 이 사정을 너는 왜 이다지도 모르느냐. 63.손목을 잡고 작별을 하려고 눈물 씻고 자세히 보니 홍도와 같이 고운 얼굴에 앵도와 같이 붉은 입술 검은 눈섭을 그린듯이 깍은듯이 가는 허리가 활대와 같이 휘였구나 노란 저고리 다홍치마에 붉은 깃에 남 끝동에 물명주 삼팔 수건을 눈결과 같이 휘여잡고 들며 날며 곁눈질에 돈 없는 건달 마음 산란하다.
225    이 묘비문을 좀 일찍 보았더라면... 댓글:  조회:1285  추천:0  2016-04-06
영국런던 웨이스민스터교회당 지하실에는 력사상의 많은 왕공과 명인들의 묘비가 소장되여 있다. 그중에 이름도 년대도 모르는 한 수수한 무명묘비가 있는데, 거기에 새겨져 있는 묘비문으로 하여, 이곳은 세계에 특히 유명하여 졌다.   그 묘비문에는 영어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When I was young and free and my imagination had no limits,I dreamed of changing theworld. As I grew older and wiser, I discovered the world would not change, so I shortened my sights somewhat and decided to change only my country. But it, too, seemed immovable. As I grewinto my twilight years, in one last desperate attempt, I settled for changing only my family, those closest to me, but alas, they would have none of it. And now, as Ilie on my death bed, I suddenly realize: If I had only changed myself first, then by example I would have changed my family.From their in spiration and encouragement, I would then have been able to better my country,and who knows, I may have even changed the world.   우리말로 변역하면 대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내가 젊었을때 나는 원대한 리상이 있었다. 나는 세계를 개변하려 꿈꾸었다. 내가 성숙되면서 나로서는 세계를 개변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시야를 좁히여 나의 나라를 개변하려고 결심하였다. 내가 늙어가면서 나로서는 나의 나라를 개변할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최후로 나의 가정이라도 개변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그것조차 뜻대로 되지않았다.   나는 늙어서 인제는 침대에서 운신조차 하기 어렵게 되자, 갑자기 깨달았다; 당초에 내가 자기부터 개변하고 좋은 본보기가 되였더라면 나는 가능하게 나의 가정은 개변할수 있었으리라; 그리고 집식구들의 방조와 고무를 받으며, 나는 나라를 위하여 유익한 일들을 할수 있었을 것이다; 그 다음은 누가 알랴, 내가 혹시 이 세계도 개변할수 있었을지?   세계의 많은 정계 요인들은 이 비문을 보고는 모두 감탄을 금치 못하였다고 한다. 어떤사람은 이 비문을 한편의 인생교의라고 평가하였고, 어떤사람은 이 비문은 령혼의 자아반성이라고 평가하였다.   당년의 젊은 만델라는 이 비문을 보고는 금시 크게 깨닫는 바가 있어서, 자기가 남아공, 나아가서는 전반 세계를 구하는 금열쇠를 찾았다고 생각하였다. 남아공에 돌아간후 그는 폭력으로 폭력적인 종족기시의 사회를 뒤엎어야 한다던 자기 원래의 정치주장을 철저히 개변하여, 평화와 화해의 방침을 제정하였다. 이렇게 그는 자기를 개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몇십년을 노력하여 끝내는 자기의 나라 남아공을 개변할수 있었다.
224    (아리랑방송)청명성묘를 이렇게 하십시요! 댓글:  조회:1545  추천:0  2016-04-04
  프로그램명 --청명특집 방송날자 2016년 4월4일 아침 7시 40분까지 연길시방송국 3층 아리랑생방송실 도착 주     제 청명의 유래, 풍속, 옯바른 청명문화 등. 래     빈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 책임편집 강순선 --13179080088 사회자 박성국, 서윤옥   ---프로그램 节目头---     남; 오늘은 4월 4일 우리의 전통명절인 청명절입니다. 주로 조상을 추모하는 청명절은 성묘나 제례 등 향해지는 주요 전통의식과 문화적 의의도 남다른데요.  녀; 오늘 저희 “FM88, 좋은 세상”프로에서는 청명절을 맞아 조상님들의 산소를 찾아뵙는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드리고저 청명절의 풍속, 옳바른 청명문화 등에 대해 상세히 알아보고저 합니다.   남; 지금 생방송실에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의 현용수회장님께서 나와 계시는데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는 주급, 성급 무형문화재《조선족장례 풍속》 의 보호책임단위이며 현용수회장은 《조선족장례풍속》의 대표성 전승인입니다.  녀; 여러분들의 많은 애청 기대합니다. ---로고송---    ********************************************************************** 1.    먼저 오늘 청명절을 맞아 생방송실까지 찾아주신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님과 인사 나눠 보도록 하겠습니다.  반갑습니다. 현회장 ; 인사나누기…   1.   그럼 먼저 청명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 주시렵니까? 현회장;1;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약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드는데,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을 원점으로 이미 약60도 움직였고, 동지를 원점으로 하면 바로 약105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3. 청명을 일명 한식이라고도 부른데요. 그 유래도 알고 싶네요? 현회장; 청명은 우리민족 전통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한식은 동지날 부터 계산하여 105일이 되는 날입니다.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내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방랑길에서 굶고 지치여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신하들의 추천으로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지금의 山西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4; 청명에 왜 성묘를 하는지요? (간단히) 현회장; 성묘란 주로 부모나 조상의 산소에 가서 제사를 지내고, 겸사 산소를 살피고보수하는 일인데요, 동방의 전통문화에서 부모의 은덕을 잊지않고, 자기 뿌리를 잊지않기 위하여 해마다 정기적으로 진행하는 중요한 행사중의 하나입니다. 5. 청명과 추석 모두 산소를 찾아 성묘하는데요. 어떤 다른점이 있는지요?  현회장; 전통적으로 추석성묘에서는 제사소물을 햇곡식과 햇과일을 주체로 하였고, 낫으로 여름내 산소에 자란 잡초를 깨끗이 베여버립니다. 이것을 “벌초”라고 합니다. 이에 대비해 청명성묘에서는 제사소물을 육류나 어류를 주체로 하였는데, 지금은 여기에 구애될 필요가 없이 간단하게 성의껐 차리면 되겠구요, 삽으로 겨우내 망가진 산소를 보수하고 흙을 올립니다. 이것을 “가토”라고 합니다.   6. 언제부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이 생겨났는지요? 한회장;1;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문화가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민족의 4대명절로 확고히 고정되여 있었습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7.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과 한족들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차이점들이 존재하는지에 대해 소개 주시렵니까? 현회장;1; 주로 청명성묘풍속에 대하여 말씀 드리면 그 문화래원이 중국이였기 때문에 한족들의 풍속과 형식상 대체로 비슷하지만 구체적 내용상에서는 평소 생활풍속이 다르기 때문에 차이가 컸습니다. 한족들의 청명성묘풍속에 대해서는 우리가 상관할 필요가 없구요, 주로 우리의 청명성묘풍속과 그 방법에 대하여 말씀 드리겠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간단히 지냅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령한테 례를 올리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면서 잔디를 입히기도 하는데, 속칭 가토 혹은 개사초(盖莎草)라고 합니다. 가토가 끝나면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묘제를 지냅니다. 먼저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降神이라고 합니다. 즉 이미 신령으로 되신 고인께서 제사받으려 내려오신다는 뜻이 되겠죠.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獻酌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初獻, 亞獻, 終獻, 添酌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숟가락으로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넣고, 저를 옮겨 놓으면서 신령의 식사를 시중드는 동작을 하는데, 侑食이라고 합니다. 유식을 끝내고는, 숙주(냉수)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辭神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8.만약 한자리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때에는 어떻게 성묘하는지요? 현용수;1. 한곳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 경우에는,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이미 당사자가 성묘한 묘에는 관계자가 다시 성묘할 필요가 없습니다. 제물은 여러자리 성묘에서 련속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묘자리에 따라 각기 준비합니다. 상업성 현대식 능묘에 가서 성묘할 경우에는 능묘를 포함하여 주위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가토를 대신하고, 제사 지내는 방법은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지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제사상을 꽃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창할 바입니다.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에는 이날에 골회함을 찾아내와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위의 제사지내는 방법을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간단하게 지내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골회함을 꺼내 올때나, 제사 끝내고 다시 넣을때 물건취급 하지말고, 산사람처럼 공경하면서 자리를 옮길때마다 반드시 경견히 인사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그리고 특히 말씀 올리고 싶은것은, 지금 많은 분들은 성묘할때 한족들을 본받아 종이돈을 살으는데, 이것은 우리의 성묘문화가 아닙니다. 이 풍속은 미신색채가 짙고, 방화기에 페단이 많으므로 정부에서도 단속하는 풍속입니다. 우리가 구태여 한족들의 나쁜풍속까지 본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9.제사상 차리는 방법에 대해 상세히 알려 주시렵니까?  현용수; 준비할 제물종류 필수품; 메밥, 수저, 물, 물그릇, 술, 술잔, 과일류; 대추, 밤, 감 각기 얼마간, 사과배 사과 오렌지 등 과일 각기 세알, 어육류; 명태 낙지 각기 세꼬리, 익은 돼지고기 적당량… 이외에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 봉공하고 싶은 물품으로 갖추되, 개수는 홀수로 하고 짝수로 하지 않습니다. 제사는 음에 속하고, 홀수는 양에 속하므로 음양을 평형시킨다는 원칙입니다. 제물은 많이 갖추기 보다, 간단하면서도 정성들여 갖추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과한알을 골라도 가장 크고 고운걸로 고르고, 허물이 없는지를 자세히 살피며, 종이에 싸서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룹니다. 금기로는 전통적으로 복숭아, 개고기, 칼치, 멸치 등은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제사상 차리는 방법 진설규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구체적으로 제사상 좌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제사상 마주하여 오른손편을 동으로 취급합니다. 진설방법; 맨앞 첫줄에는 메밥과 물그릇 술잔을 놓고, 제사 시작하여 강신이 끝나면 메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아놓고, 물그릇에 저가락을 얹어 놓습니다. 두번째줄에는 반찬류와 어육류를, 세번째 바깥줄에는 과일류와 부식품류를 놓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많은 규칙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총체적인 분포규칙을 지키고,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고,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10. 우리민족의 청명절 풍속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습니까? 현용수;1; 전통적-청명절 풍속에서는 들놀이, 연날리기, 활쏘기, 식수, 성묘? 가장 중요한 풍속은 성묘/ *;현재 우리민족의 청명풍속에는 주요하게 성묘와 들놀이 ./  성묘라고 하면 또 청명날에 연변각지 소학교 학생들의 렬사비 성묘활동을 빼 놓을수 없다./성묘를 끝내고, 마음을 정화   (11);요즘 보면 청명을 맞아 제사법이 간소화되는 등 전통장례제사문화에 커다란 변화가 생겨나고 있는데요. 여기에 대해서는 어떤 견해를 갖고 계시는지요?  현회장; 1; 상례법이 간소화 된것은 시대의 추세라고 봅니다. 이 방면에서 중국이 한국보다 많이 앞섰죠. 그리하여 적지않은 한국분들이 중국식 상례법을 부러워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우려되는 점이라면 상례법이 간소화 되면서 우리의 전통 효도문화가 색이 바래지는 것입니다. 우리가 효도문화를 잃게되면 우리민족은 자기의 전통문화에서 가장 귀중한 것을 잃게 됩니다. 반드시 전사회가 중시해야 할 문제라고 봅니다.   (12):길림성 무형문화재 조선족장례제사풍속》보호책임단위로서 이런 옳바르 지 못한 청명문화리념을 어떻게 바르게 잡기 위해 어떤 노력과 타산을 갖고 있는지요? 현회장; 1. 상례법이 간소해 진 형편에서 어떻게 우리문화를 지키겠는가? 하는 방면에서 지금 많이 탐색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디지텔 성묘관, 인테넷 성묘… 등이죠. 그리고 상례문화 산업화를 실현하기 위하여 지금 많이 노력하고 있습니다. 산업화 할수없는 문화는 생명력이 없습니다. 오직 산업화만이 문화를 살릴수 있습니다.   ***********************************************************************결속어; 남; 지금까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회장을 모시고 청명절의 유래와 성묘방법, 풍속 등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녀; 도움이 될 좋은 말씀 주신 현룡수회장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여러분들 에게 조상을 기리는 마음과 가정이 화합할수 있는 청명이 되였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보면서 오늘 프로 여기에서 이만 접겠습니다.      이 시간 책임편집에 강순선이였습니다.
223    정월 대보름에 새해 행운을 댓글:  조회:1921  추천:0  2016-02-21
                           1.정월 대보름의 어원   대보름은 음력 정월보름날을 칭하는 말로써, 이날은 일년 중의 첫보름이라 특히 중요시하였고, 그해 년사(年事)의 풍흉(豊凶), 신수의 길흉화복을 점치고 또 다라밟기.쥐불놀이.연날리기 등 여러가지 민족 행사가 있었다.   정월의 절일(節日)로는 설과 대보름이 있다. 태고적 풍속은 대보름을 설처럼 여기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대보름에도 섣달 그믐날의 수세하는 풍속과 같이 온 집안에 등불을 켜 놓고 밤을 세운다는 기록이 보인다. 달맞이 불놀이     율력서(律曆書)에 의하면 "정월은 천지인(天地人) 삼자가 합일하고 사람을 받들어 일을 이루며, 모든 부족이 하늘의 뜻에 따라 화합하는 달"이라고 한다.   따라서 정월은 사람과 신,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하나로 화합하고 한해 동안 이루어야 할 일을 계획하고 기원하며 점쳐보는 달인 것이다. 정월 대보름날을 한자어로는 '상원(上元)'이라고 한다. 상원은 도가(道家)에서 말하는 삼원(三元) 의 하나로, 삼원이란 상원(1월 15일), 중원(7월 15일), 하원(10월 15일)을 말한다.   도가에서 이 날은 천상(天上)의 선관(仙官)이 인간의 선악을 살핀다고 하는데, 그때를 '원(元)'이라고 한다. 한편으로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정월 대보름(1월 15일)· 7월 백중(7월 15일)· 8월 한가위(8월 15 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명일(名日)은 보름을 모태로 한 세시풍속들이다.   대보름은 음력을 사용하는 전통사회에 있어서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농경을 기본으로 하였던 우리 문화의 상징적인 측면에서 보면, 달은 생생력(生生力)을 바탕으로 한 풍요로움의 상징이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의하면 태양을 '양(陽)' 이라 하여 남성으로 인격화되고, 이에 반하여 달은 '음(陰)' 이라 하여 여성으로 인격화된다.   따라서 달의 상징적 구조를 풀어 보면 달(月)-여신(女神)-대지(大地)로 표상되며, 여신은 만물을 낳는 지모신(地母神)으로서의 출산력을 가진다. 이와 같이 대보름은 풍요의 상징적 의미로 자리매김한다. 보름세배   3. 정월 대보름의 풍속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정월을 '노달기'라 하여, 농군들은 휴식을 취하며 농사준비를 한다. 예컨대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퇴비만들기· 농기구의 제작 및 수리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는 휴식으로만 일관되지는 않는다.   새해를 맞이하여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다양한 제의(祭儀)와 점세(占歲) 및 놀이가 행해진다.    지방마다 차이가 있지만 농촌에서는 마을공동제의로 대개 대보름날 자정을 전후로 하여 동제(洞祭)를 지낸다.  가가호호 성의껏 각출하여 제비(祭費)를 마련하고, 정결한 사람으로 제관을 선출하여 풍요로운 생산과 마을의 평안을 축원하는 것이 바로 동제인 것이다.    또한 풍요다산을 기원하는 놀이로 줄다리기를 들 수 있다. 는 라고도 하며 주로 농촌에 전승 되어온 점세적 농경의례(農耕儀禮)이다. 볏짚을 이용하여 암줄과 숫줄을 만든 후에 마을단위 혹은 군단위로 양편으로 나뉘어 줄을 당기게 되는데, 암줄이 승리를 해야 풍년이 든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줄달이기   이밖에도 풍농(豊農)을 기원하는 풍속으로 "지신밟기"가 있는데, 지신밟기는 정월 대보름 무렵에 마을의 풍물패가 집집마다 돌며 흥겹게 놀면서 지신(地神)을 진정(鎭靜)시키는 놀이인데, 이때 집주인은 금전이나 곡식을 주는 것이 상례이며, 모여진 금품은 그 부락의 공동사업에 사용하였다. 이것으 지신을 진압하여 연준(年中) 무사하기를 빈다는 뜻에서 행사화하였다.   지역에 따라서 마당밟기· 매귀(埋鬼)· 걸립(乞粒) 등으로 불리었다.   요즘유행하는 지신밟기 방법 - 삼채를 치면서 다니다가// 들어갈 가게 앞에서 휘모리를 짧게친후, 상쇠 : 문여소 문여소 주인장 문여소// 만~인간 들어갈제 만~복이 들어갑니다.// - 바로 이어서 휘모리로 신명나게 조진다. 만일 그 점포의 주인이 호응이 좋다면 상쇠는 가게로 들어가서 무병장수, 소원성취, 사업의 발전등을 기원해준다. 물론 사이사이 짧게 가락도 치면서, 만일 호응이 없다면 복을 빌어주러 왔는데 홀대하면 안좋다는둥 협박을 웃으면서 기분나쁘지 않게 하고 그래도 호응이 없으면 다음 점포로 이동한다.   이와는 달리 개인적인 의례로서, 대보름날 아침 일찍 일어나면 '부스럼 깬다'하여 밤·호두·땅 콩 등을 깨물며 일년 열 두달 종기나 부스럼이 나지 않도록 축원한다. 또 아침 일찍 일어나 사람을 보면 상대방 이름을 부르며 '내 더위 사가라'고 한다. 이렇게 더위를 팔면 그 해 더위를 먹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편 아침 식사 후에는 소에게 사람이 먹는 것과 같이 오곡밥과 나물을 키에 차려주는데, 소가 오곡밥을 먼저 먹으면 풍년이 들고, 나물을 먼저 먹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아이들은 대보름날이 되면 '액연(厄鳶) 띄운다'고 하여 연에다 '액(厄)' 혹은 '송액(送 厄)' 등을 써서 연을 날리다가 해질 무렵에 연줄을 끊어 하늘로 날려 보냄으로써 액막이를 한다.   주부들은 단골무당을 청하여 가신(家神)과 여러 잡신들을 풀어 먹임으로써 가내의 평안을 기원하는데, 이를안택(安宅)이라고 한다.    대보름날 밤에는 달맞이 풍속이 있다. 달맞이는 초저녁에 높은 곳으로 올라서 달을 맞는 것을 말하며, 먼저 달을 보는 사람이 길(吉)하다고 한다. 아울러 달의 형체, 대소, 출렁거림, 높낮이 등으로 1년 농사를 점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달집태우기 풍속도 대보름날 밤에 행해지는데, 횃불싸움과 쥐불놀이 등과도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짚이나 솔가지 등을 모아 언덕이나 산위에서 쌓아 놓고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려 불을 지른다. 피어 오르는 연기와 더불어 달을 맞이하고, 쥐불놀이와 더불어 이웃마을과 횃불싸움을 하기도 한다.   이 외에도 볏가릿대세우기, 복토(福土)훔치기, 용알뜨기, 다리밟기, 곡식 안내기, 사발점, 나무그림자점, 달붙이, 닭울음점 등이 있다. 볏가릿대세우기는 보름 전날 짚을 묶어서 깃대 모양으로 만들고 그 안에 벼·기장·피·조의 이삭을 넣어 싸고, 목화도 장대 끝에 매달아 이를 집 곁에 세워 풍년을 기원하는 풍속이며, 복토훔치기는 부잣집의 흙을 몰래 훔쳐다 자기집의 부뚜막에 발라 복을 기원하는 풍속이다. 용알뜨기는 대보름날 새벽에 제일 먼저 우물물을 길어와 풍년을 기원하며, 운수대통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이다.   곡식 안내기는 경남지방의 풍속으로 농가에서는 정초에 자기집 곡식을 팔거나 빌려주지 않는다. 이는 이 시기에 곡식을 내게되면 자기 재산이 남에게 가게된다는 속신 때문에 행해진 풍속이다.   사발점은 대보름날 밤에 사발에 재를 담아 그 위에 여러 가지 곡식의 종자를 담아 지붕위에 올려 놓은 다음, 이튿날 아침 종자들의 행방을 보아 남아 있으면 풍년이고, 날아갔거나 떨어졌으면 흉년이 든다고 한다. 나무그림자점은 한자 길이의 나무를 마당 가운데 세워 놓고 자정무렵 그 나무 비치는 그림자의 길이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달붙이는 대보름 전날 저녁에 콩 12개에 12달의 표시를 하여 수수깡 속에 넣고 묶어서 우물속에 집어 넣어 콩알이 붙는가 안붙는가에 따라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닭울음점은 대보름날 꼭두새벽에 첫닭이 우는 소리를 기다려서 그 닭울음의 횟수로써 농사의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다. 대보름날에 행해지는 놀이로는 사자놀이, 관원놀음, 들놀음과 오광대 탈놀음, 석전, 고싸움, 쇠머리대기, 동채싸움 등이 있다.            다리밟기(踏橋)는 음력 대보름날 다리를 밟는 일로써, 이날 다리를 밟으면 1년간 다리병이 없고, 12다리를 밟으면 12월의 액을 면한다고 한다. 이수광(李수光)의 "지봉유설"에 의하면 고려 때 시작하여 성행하였는데, 혼잡했기 때문에 여자들은16일 밤에 행하였다고 한다.   조선에서는 양반들이 서민들이 들끓는 것을 싫어하여 14일 밤에 행하여 속칭 이날을 라 하였고, 다리밟기 중엽 후에는 여자들의 다리밟기는 차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날은 1년중  4월 초파일과 더불어 서울 시내에 가장 사람이 가장 많이 나와 돌아다니는 날로서 이날 밤에는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지신밟기(마당밟이, 뜰밟이) 지신밟기는 주로 정월 초부터 대보름까지 많이 하는데, 그때만이 아니라 크고 작은 명절과 마을 에서 쓸 돈을 모아야 할 때마다 행해져 왔다. 마을공동체, 나아가서 모든 겨레의 바람(기원이나 소 망)을 이루고 모든 나쁜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뜻에서 진행되는 것이다. 지신밟기를 통해 마을의 공동 관심사가 이야기되고, 이를 통해 거두어 들인 자금은 마을사람 모두의 이익을 위해서 쓰여진 다. 밟아 버려야 할 나쁜 신을 힘껏 내리 밟는 다리와 다리에서 뿌듯한 마음을 느끼게 될 때 지신 밟기는 절정을 이루며, 주인이 내놓는 술과 음식으로 구경꾼이나 풍물잽이나 할 것 없이 함께 어울 려 놀 때 어느새 한마음 한뜻이 될 수 있다. 지신밟기는 농촌뿐만 아니라 공동체의 바람이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그 기능이 드러날 수 있으 며, 각각의 경우에 맞는 노래나 고사반을 만들어 진행할 수 있다. 농촌에서의 지신밟기는 대개 다 음과 같은 짜임에 의해 치루어졌으며 굿을 치는 곳을 따라다니며 입장단이나 덕담(잘 되길 비는 말)으로 바라는 바를 빌었다. 1) 당산굿 마을의 수호신인 당산님(마을을 지켜 주는 신으로 나무나 돌을 가리킴)께 인사하는 것으로 당산 에 대한 인사굿으로서의 뜻만이 아니라 마을사람 모두의 바람(기원)을 나타내고 모든 이의 의사를 모아 가는 자치의 기능을 맡아 왔다. 당산굿은 공동체 의식을 나타낼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의식적 행사라 할 수 있다. 곳에 따라 순서나 덕담이 다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서는 전라도에서 일반적으 로 전해지는 것을 보기로 들겠다. 순서)    (1) 질굿(풍류)을 치며 치배의 끝(보통 소고를 말함)에서부터 당산에 들어간다.    (2) 당산에 이르러 삼채 등으로 장단을 바꾼 뒤 오방진을 감는데, 여기서 오방진        을 감는 것은 판을 깨끗이 씻는다는 뜻이다.    (3) 오방진을 다 감고 푼 뒤, 한 줄 또는 두 줄로 늘어서서 인사굿을 세 번 친다.    (4) 제사 -- 제문(발원문) 읽기 :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에…… 상향                소지(신령 앞에 비는 뜻으로 얇은 종이를 오려서 불을 붙여 공중으로                날리는 일, 또는 그 종이) : 어허러루 당산님 우리네 발원 들어보소                …… 어허러루 당산님 만세유전을 비옵니다.        음복(제사를 지내고 나서 제사에 썼던 음식물을 나누어 먹는 것)    (5) 인사굿 -- 세 번 치고 나온다. 2) 샘굿 (마을의 공동 우물) 길을 가다가 샘이 있는 곳이면 꼭 치고 지나간다. 용왕님께 빌어 물이 일 년 내내 맑고 넘치게 하여 풍년이 들고 어떤 병도 얻지 않고 오래도록 튼튼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빈다. (덕담 : 솟아라 솟아라 맑은 물만 솟아라, 물 줍쇼 물 줍쇼 사해용왕 물 줍쇼, 만인간이 먹더라도 무병장수 비나이다.) 3) 문굿 집집마다 풍물굿을 치며 돌아다니다가 한 집에 다다르면 문 앞에서 주인이 나와서 맞아들이기를 기다리며 친다. (덕담 : 주인 주인 문여소 문 안 열면 갈라요, 주인 주인 문여소 마당 가운데 불 놓소, 주인 주인 문여소 복 들어강께 문여소.) 4) 성주굿 (대청굿) 그 집이 지어진 내력을 노래하고 성주님께 복을 비는 굿이며 성주풀이와 액맥이를 한다. 문굿을 치고 마당으로 들어가서 한바탕 논 뒤 상쇠나 대포수가 재담을 늘어 놓는다. 고사 소리꾼이 있으면 고사소리도 한다. 5) 조왕굿 (정지굿) 부엌에서 치는 굿으로 대포수가 솥뚜껑을 엎어 놓으면, 주인이 그릇에다 쌀을 담아서 촛불을 꽂 아 놓고 그 옆에 정화수(깨끗한 물)를 떠놓는다. (덕담 : 누르세 누르세 조왕님전 누르세, 울리세 울리세 조당지신 울리세, 이 솥에 밥을 하여 만백 성을 먹여내세, 구석구석 네구석 정지구석도 네구석.) 6) 청룡굿 (뒤안굿, 장독굿) 장독에서 치는 굿으로 된장, 고추장, 간장 등 음식맛을 좋게 해주십사 하고 비는 굿이다. (덕담 : 지신지신 지신아 청룡지신을 울리세, 장달다 장달다 꼬장띠장 장달다.) 7) 샘굿 (집 안의 우물) 내용은 2의 샘굿과 같다. 8) 고방굿 (곡간굿) 광에서 치는 굿으로 많은 쌀이 모이길 비는 굿이다. (덕담 : 올해도 풍년이라 넘실넘실 나락 풍년, 고방마다 쌓인 나락 우리 농부 피땀일세, 앞으로 봐 도 천석군 뒤로 봐도 천석군 천년만년 울리소.) 9) 외양간굿 마구간이나 가축우리에서 치는 굿이다. (덕담 : 매있네 매있네 금송아지 매있네, 송아지를 낳으려면 암송아지를 낳고, 이왕이면 쌍둥이라 한꺼번에 낳아주소.) 10) 측간굿 뒷간에서 치는 굿이다. 지역에 따라서는 치지 않는 곳도 있다. (덕담 : 측간 속에 빠지면 백약이 소용없네, 애비부터 손자까지 빠지는 일 없도록, 비나이다 비나 이다 측간지신께 비나이다.) 11) 술굿 주인이 마당에 술상을 차려 놓으면 술을 마시기 전에 치는 굿이다. (덕담 : 두부국에 김나네 어서 치고 술먹세, 시어머니 주기는 아깝고 며느리 주기는 쑥쑤고, 저 밑 에 지렁이 온다 우리가 먹자 홍자쿵.) 12) 경운기굿, 자동차굿 요즘 들어 생산수단의 중요한 도구로 쓰이는 경운기나 자동차가 고장이 안 나고, 일을 하는 데 도움이 되기를 빌며, 경운기나 자동차를 새로 산 것을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며 치는 굿이다. 새로 운 풍속의 하나이다. (덕담 : 굴러간다 굴러간다 힘차게 굴러간다.)  
222    자기운명을 어떻게 장악하는가? 댓글:  조회:2397  추천:0  2016-02-13
我的命运观(玄龙洙原创)     人生可分为三个境界:一是感觉性境界,这个境界是朴素的本能性人生,欲望基数较低,幸福度反而高;二是感知性境界,这个境界是追求性人生,欲望基数较高,幸福度反而低;三是感悟性境界,这个境界是奉献性人生,自觉掌控欲望,懂得如何幸福。 人是大自然的一员,也是社会的一员,都有自己的使命,首先适应大自然和社会的环境,在这基础上谋求生存,开辟自己的人生路,最后结束自己的使命。这就是总体上的人的命运。  “命运”本来是一种迷信的说法,指的是人在一生中先天注定的富贵卑贱、吉凶祸福…等等,是“宿命论”的代表性观点。 现代人所说的“命运”,主流上已经摆脱了迷信,一般含有两种意义:一种是人或某种事物的发展前途,譬如说“国家的命运”、“民族的命运”、“个人的命运”…等等。 另一种是每个人人生中的使命、条件、机遇、方法、过程…等等,以现代时尚语来说明,近似于电脑中的功能系统(system)和运作程序(Program)。 从形式上看,人生好比用电脑玩游戏,而每部游戏各有特殊的功能系统和复杂多变的运作程序。熟练掌握其系统和程序并灵活运作,你才赢得高额分数,而盲目运作,你会挣不到多少分数,就被淘汰出局。 当然,人生不是游戏,应该严肃认真对待,不然终被游戏所玩弄。   一、“命”是什么? “命运”一词中的“命”和“运”是两个不同概念。 所谓的“命”,指的是人的使命和生存、发展所需要的基本的自身条件,包括身体、身份、资格、技能…等等。 一个人的出生并不是根据自己的意愿进行选择和创造的结果,而完全是父母们履行自己的使命,进行偶然而必然的性结合的结果。 人一旦出生,就不可抗拒地接受一些先天的条件:1、时代,2、出生年月日,3、地域,4、父母,5、家庭,6、性别,7、遗传因子,8、健康状况,9、姓名…等等。人刚出生叫婴儿,婴儿还不是完整的人,还得继续靠父母们的精心抚养,才能逐渐成长为人。 就此,人被赋予了最初的“命”,坎坷无常的人生旅程就开始了。 每个人的“命”都包含着使命,而使命有两种:一是为人的普遍性使命,二是人为的特殊性使命。为人的普遍性使命包括:生儿育女、创造财富、继承传统、…等等;人为的特殊性使命包括:理想、目标、任务、计划…等等。 旧社会把“命”以贵贱观念来分类,例如高贵命、卑贱命、富命、穷命…等等。当今社会是高度文明的社会,很重视“人权”和“平等”,旧的分类法已经不适合于当今社会。 不过,当今社会依然存在各种不同“命”之矛盾,主要是根据出生时的家庭背景来分类,例如优越命、平凡命、福命、苦命…等等。存在这些不同“命”之矛盾,才有了社会要继续发展的理由。 特别需要强调的是;出生时的“优越命”不一定永远是“优越命”,出生时的“苦命”也不一定永远是“苦命”,那些只不过是人生的出发点而已,在此后的漫长的人生旅程中,人的“命”在内外各方面因素的作用下可以不断升华,也可以相互转换。 人在生活过程中,根据自身条件的成熟和发展程度,取得各种各样的相关证书,例如;出生证、身份证、毕业证、资格证、许可证、荣誉证、…死亡证等等。所有的这些证书在形式上就象征着你在人生各个阶段中的“命”的标价。 当然,一个人的真正价值不能以这些证书来衡量,应该以此人的实际技能和作用来衡量。   二、“运”是什么? 所谓的“运”,指的是人生中的机遇、方法、过程…等等。 中国有句俗语;“天时、地利、人和”,常用来表述人或事物的最佳“运数”。中国传统智慧把“运数”分为“天数”、“地数”、“人数”来衡量。 不过,上述三个“运数”都属于外部因素,而现代人强调的主要是内部因素。因此,要研究影响现代人一生的重要因素,除了上述三个“运数”外,应该还增加一个“己数”,而且,应该当做第一要素来研究。 综上所述,“运”可分为四类;1、己运、2、天运,3、地运,4、人运。 1、     己运:精神、健康、实践能力…等等,能动性的主导因素。 2、     天运:时代、形势、社会环境…等等,绝对性的先天因素。 3、     地运:地域、职业、自然环境…等等,相对性的稳定因素。 4、     人运:亲人、人脉、社会名气…等等,流动性的变化因素。 在上述的“四运”中,“己运”是内部因素,是能动性的主导因素,“天运”、“地运”、“人运”是外部因素,只能通过“己运”起作用的。只要把握好“己运”,“天运”是可以掌握或利用的,“地运”是可以选择或改造的,“人运”是可以争取或改善的。 “命”只要与“己运”紧密地结合在一起,才能达到提升或改变的目的。 “己运”把握的好,“苦命”可以变成“福命”,“己运”把握的不好,“福命”也可以变成“苦命”或“堕落命”。   三、如何掌握自己的命运? 世界上人口很多很多,七十多亿呢!但你是唯一的,除了你,世界上永远不可能再有你。 你已经是一个奇迹,你的成功出生,就说明你是很了不起的胜利者,你在母亲腹中战胜了数以万万计的竞争对手,唯一争夺生命权而胜利出生。 这就是人要自己掌握自己命运的必要性和可能性。   1、如何掌握“己运”? “己运”是人的内因性运数,是能动性的主导因素,掌握自己的命运,关键是首先要掌握好“己运”; (1)   提高自己的精神素质, (2)   保持自己的健康素质, (3)   加强自己的实践能力。 这是要掌握“己运”必须做到的三个基本点。   (1)如何提高自己的精神素质? 要树立积极的心态。心态决定一切,成功人和失败人的差异其实就是心态的差异。所谓的“积极的心态”就是对人或事物的肯定性思维的心态,具体包括;正直、大义、仁爱、乐观、勇敢、宽恕、坚韧、睿智、负责…等等。树立积极的心态,你就会拥有强有力的精神能量,任何人间奇迹都有可能创造出来。 要树立积极的心态是需要能量的,此能量是从何而来?就是从空间来,就是从你身边来。这不是很荒唐吗?不!一点不荒唐。你身边空间里确实隐藏着无穷无尽的能源,只要你强烈要求,认真要求,你可以从身边空间里免费得到充足的能源。如此合算的好买卖为何不做呢? 每个人得到空间能源的能力上存在很大的差别,其原因主要是每个人的思想开放程度不一样,思维能力和方式不一样,胸襟的开阔程度不一样。 思想是引进空间能源的大门,思维是把空间能源加工成精神能量的炼能厂,胸襟是储存精神能量的创库。 全方位开放思想,满负荷开动思维,大海般开阔胸襟。只要你努力做到这三个方面,你将具备伟大成功者们特有的高级的精神素质。   (2)如何确保自己的健康素质? 人生价值不是单凭人的寿命来衡量的,然而健康素质是人生价值中必不可少的因素,做一位英年早逝的成功者不是很光荣的事情。 要确保自己的良好健康素质,与其相关的因素很多,其中不可忽视的一个因素就是要增强人体的自愈功能和免疫功能。 人体固有自愈功能和免疫功能。造物主创造人类的时候,已经赋予了自己解决自己疾病的功能。可是,在长期的人类进化过程中,人类逐步习惯于依赖外部手段来解决自己疾病,这样长期下来反而造成疾病越来越泛滥,治病越来越困难。 单靠医疗技术是永远战胜不了疾病的,道高一尺魔高一丈,医疗技术越先进,病魔以更顽强、更怪异的方式出现。这是自然规律。在这种意义上讲,片面发展医疗技术就等于损坏人体自身功能。为了人体健康的可持续发展,恢复和增强人体的自愈功能和免疫功能很重要。 一个人的身体好比一个国家;脑部相当于国家的首脑机关,五脏六腑相当于国家的各部职能机关,神经系统相当于国家的通信系统,血液循环系统相当于国家的交通运输系统,自愈功能和免疫功能相当于国家的治安功能和国防功能…。 人们都很清楚一个铁的道理,就是保卫一个国家首先要依靠的是自己的强大治安力量和国防力量,然后才考虑国际环境和外国援助。世界上没有一个国家只依靠外国援助来长期维持的。 对于人体而言,一切先进的医疗技术都不过是“外国援助”,人体内部的自愈功能和免疫功能才是最可靠的“人民警察”和“人民解放军”。 打针、吃药、手术…等医疗手段固然很重要,可是,如果内部自愈功能和免疫功能被破坏,再先进的医疗技术也起不到应有的作用,甚至会起到反作用。 生命是你所拥有的财富中最宝贵的,首先要自己把握,然后找医院。在疾病面前其实你是最好的医生,饮食是最好的药,厨房是最好的医院。 平时保持宽松的乐观心态,不急躁、不生气、多欢笑,生活上坚持良好的习惯,工作上采取适度上进和负责任的态度,注意安全,避免事故,正确掌握保养和锻炼的有效方法并长期坚持下去。只要做到这几点,你就没有理由生病,可以达到长期确保自己良好健康素质的目的。   (3)如何加强自己的实践能力? 要把握“己运”,关键是要加强自己的实践能力。远大的理想、优越的环境、和谐的人脉、出众的才能等,只要通过实践能力才能实现其价值。 在实践过程中遭到挫折和失败是很正常的事情,没有经过挫折和失败的成功是还没有成熟的成功。人的实践能力就是主要表现在战胜挫折和失败的过程中。 屡次遭到挫折和失败,看来成功的希望越来越渺茫的时候,成功很可能通过其他暗道,已经到了你的眼皮底下。实在太累了,暂时休息也是必要的。但是不要抛弃希望和信心,很可能就在下一个一击,成功的钟声突然响起来呢。 加强实践能力,首先要以提高精神素质为主导,以确保健康素质为基础。没有这两个先决条件,加强实践能力会成为空谈。 加强实践能力必须具备决心和信心、勇气和智慧。这些是你来起动你的实践“发动机”的精神能量,充分保障这些精神能量,才能确保你的实践“发动机”的满负荷运转。 这些精神能量是从何而来?就是从你的胸襟里来。你已经通过开放思想、开动思维、开阔胸襟,储备了充足的精神能量,这是你加强实践能力,最终取得成功的有力保证。 加强实践能力,最大的障碍是恐惧。 恐惧是一种人的自我保护心理功能,往往与人的意志发生冲突。人一旦意识到某种事情对自己有危险,系统就马上排放大量毒素,软化你的进攻意志和行动能力,这就是恐惧。 恐惧和勇气都是人的自我保护心理功能,恐惧是消极防卫性的,勇气是积极进攻性的。人有了恐惧功能,可以躲过不少灾难,而人有了勇气功能,可以战胜很多灾难,并且可以不断打开新的局面。 可知,要加强实践能力,最需要的是足够的勇气。 恐惧是勇气的最大的敌人,要加强实践能力,必须首先战胜恐惧。 如果你的勇气不足于战胜恐惧,再壮胆也无济于事,此时最好的方法是强迫自己采取行动。只要你迈出第一步,恐惧就马上跑的远远的了。   2、如何掌握“天运”? “天运”是人的外因性运数当中绝对性的先天因素。 首先,要全面观察和认识时代、形势和社会环境,并长期反复酝酿,逐步确定有益于社会又符合自己志向的大方向和大目标。这就叫“立志”,以现代话来说是“理想”或“梦想”。 有理想的人生和没有理想的人生大不一样,有理想的人生是有灵魂的高质量的人生,而没有理想的人生是没有灵魂的低质量的人生。 立志不分先后,关键是要看是否符合实际。活在当代不应该立志于封建皇帝,活在中国不应该立志于美国总统。符合实际的立志是有可能早一点实现,但不符合实际的狂妄立志不仅是不可能实现,反而会对自己带来灾祸的。 得志也不分先后,关键是要看过程,要看是否尽力了。要实现崇高的理想是需要付出很大代价的,而且,这些在奋斗过程中付出的代价本身已经是对社会的很大贡献。因此,评价一个人的人生价值主要看此人对社会的贡献,不应该以得志与否来衡量。 正确的方向和符合实际的目标确定了,可以说你已经走完了成功征途的一半行程,因为,从此你有了可靠的向导,又一个伟大成功者的诞生成为可能。 如果你正在寻找方向和目标,要集中精力全面观察当今社会缺少什么?需要什么?在那里就有你的方向和目标,也隐藏着你成功的机遇。“你要做什么?”当然重要,“你能做什么?”更为重要。 你的方向和目标确定了,要毫无犹豫地抛弃与你无关的华丽的机会和条件。不抛弃无用的东西,就不能得到有用的东西。   3、如何掌握“地运”? “地运”是人的外因性运数当中相对性稳定因素。要掌握好“地运”,首先要争取对自己有利的环境条件。 要争取有利的环境条件,不仅要善于观察和选择,也要敢于改造和创造。在此过程中制定出自己的行动计划。 制定行动计划不要拘束于常理,大胆相信自己的感觉。有的计划按常理说是根本不可能实现的,可是如果此计划对你非常重要,并且是你心中长期酝酿过的强烈欲望的话,不妨要敢于试一试,很可能你会碰到意外的好运气呢,如果失败了,大不了重新爬起来。这也是尽早达到成功彼岸的捷径之一。 其实,人们可以想象、可以希望的计划,终究会存在实现此计划的方法,只不过是你还没有发现而已。成功不是靠计划实现的,最终是靠实践实现的,而且实践的机动灵活性是无穷无尽的。   4、如何掌握“人运”? “人运”是人的外因性运数当中流动性的发展因素,是最活跃的因素。 有句韩国俗语;“独不将军”。在当今世界上所有有意义的事情中,没有一件事情是可以单独完成的,都是与很多人或很多因素相互配合完成的。 在成功实践过程中,需要很多新的知识和技术,需要处理很多专业事务。可是,单凭你一个人的能力,不可能掌握好那么多新的知识和技术,不可能处理好那么多专业事务。 人人都有自己的专长、特长,你的主要精力应该集中在如何与这些身怀专特长的人才进行合作的问题上。这就是你的领导能力。 你能够与这些专特长人才充分进行合作,你的工作效力会提高到几倍、几十倍,几百倍,甚至更高。这就是团队的效率。 当今社会团队精神很重要,为了实现目标,为了扩大成绩,要么你来组织一个团队,要么你加入一个团队,总比单枪匹马强得多。 广交朋友,积极拓宽社会人脉,努力提高自己的知名度。 只要你平时多帮助别人,在你需要时才会得到别人的帮助。 先做人,后做事。首先要把自己打造成足够成熟、足够优秀、足够强大,然后吸引广大同行组织起来,齐心协力创造新天地。   四、结束语 人一旦出生,就与岁月签订“生命契约”,内容包括:一、不能长生不老,二、空手来空手去,三、只能生活一世,四、有效期一百年。在这基础上根据自己“运”的发挥程度,把自己的寿命或提前或延长。 人生终究一场梦,若是你一生在稀里糊涂中过来了,你的临终感受肯定是一场迷雾梦,若是你一生在贪得无厌中过来了,你的临终感受肯定是一场饿鬼梦,若是你一生在创造和奉献中过来了,你的临终感受肯定是一场神仙梦。 金玉满堂,莫之能守;荣华富贵,过眼烟云,最终没有实际的意义。只有你养育出来的儿女们和为社会创造出来的物质财富和精神财富才是真实的。 人生的真正意义不在于生前的得失,而在于人死后他生前所创造的财富继续为社会所利用。 “死”,其实是回归大自然,没有什么了不起。可是人不能指望“来世”,不得不重视“死”。好不容易做人一回,自己的人生计划起码要制定到一百年。若是真能活到一百岁当然好,可是活不到一百岁也不要紧。“生死簿”期满,阎王爷叫你过去,你就说一声“知道了!”,随即舍弃一切,过去就是。 “命”是你的,本来可以功成名就,百岁善终。可是只因为“运”的运作不当,很多人身败名裂,英年早逝,何不憾哉?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龙洙编写 2016-2-12  
221    우리 옷 '한복' 이야기 댓글:  조회:2047  추천:0  2016-02-07
예부터 전해 내려오는 한민족 고유의 의복인 한복(韓服)은 조선옷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전통미(美)를 상징하는 한복은 직선과 곡선이 어우러져 화려하고도 단아한 자태를 풍긴다. 현대에 와서는 명절이나 결혼식 등 특별한 날에 주로 입는 예복이 되었으나, 최근 한복의 현대화·세계화가 많이 이루어져 부담스러운 옷에서 친숙한 옷으로 자리를 잡고 있다. 한복과 상식 한복 입을 일이 생겼을 때 입는 법이 헷갈릴 때가 많다. 다시 익혀두면 도움이 될 남녀 한복 입는 법과 옷고름, 대님 매는 법을 모았다. 여자 한복 입는 법 1. 속바지와 속치마를 차례로 입는다. 2. 겉치마를 입는다. 이때 왼손으로 치마꼬리를 잡을 수 있게 하기 위해서, 겉치마 자락을 왼쪽으로 여며 입어야 한다. (사람들이 대부분 오른손잡이므로, 오른손으로 일해야 하는 상황을 배려함, 왼손잡이라면 반대로 하면 된다.)  3. 속적삼을 입고 버선을 신는다.  4. 저고리를 입고 옷고름을 맨다. 5. 필요에 따라 마고자(저고리 위에 덧입는 옷)나 두루마기를 입으면 된다. ※ 옷고름 매는 방법 ①왼손은 긴 고름을, 오른손은 짧은 고름을 아래서 받치듯 손으로 들어준다. ②오른손의 짧은 고름을 위로 가게 해 X자 모양으로 교차시킨다.  ③위로 올라간 짧은 고름을 긴 고름 아래에서 감아 위로 뽑는다. 이어 왼손을 위로 올려 짧은 고름을 잡은 다음, 둥근 원을 만든다. 오른손으론 밑에 있는 긴 고름을 둥글게 말아 접어 짧은 고름의 원 안으로 넣어준다.  ④양손으로 모양을 바로잡는다. 남자 한복 입는 법 1. 속옷(속고의, 적삼)을 갖춰 입은 후 바지를 입는다. 바지를 입을 땐 앞뒤를 구분해 큰 사폭(邪幅)이 오른쪽으로, 작은 사폭이 왼쪽으로 가게 입어야 한다. (사폭은 남자 한복 바지에서 허리와 마루폭 사이에 잇대어 붙이는 네 쪽의 헝겊을 말한다.) 이어 바지를 왼쪽으로 여며 허리띠를 맨다. 2. 대님(발목을 졸라매는 끈)을 맨다. 3. 저고리를 입고 고름을 맨 후 그 위에 조끼를 입는다. 4. 마고자를 입는다. 마고자를 입을 땐 저고리가 마고자의 소매 끝으로 보이지 않아야 깔끔하다. 외출할 땐 위에 두루마기를 걸치면 된다. ※ 대님 매는 법 ①가운데 솔기(두 폭을 맞대고 꿰맨 줄)를 발 안쪽에 댄다. ②왼손으로 바짓부리를 잡고 발목을 한 번 돌려 앞서 누르고 있는 곳까지 와서 오른손으로 같이 잡는다. 남은 여유분은 왼손으로 잡고 뒤쪽으로 돌려 바깥쪽 복사뼈까지 가지고 간다. ③대님을 대고 두 번 돌린다. ④외코로 매어주면 끝난다. 반대 방향도 같은 방법으로 매면 된다. 두고두고 오래 입는 한복 관리법 한복을 장만했을 때의 멋스러움과 깔끔함을 오래 유지하는 방법들이다.  세탁법 한복은 실크 소재이기 때문에 두세번 깨끗하게 입고 동정만 바꾸는 것이 가장 좋다. 드라이클리닝 등 세탁을 자주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다림질법 한복을 다릴 때는 반드시 다림천을 덧대야 한다. 스팀다리미는 부적합한데, 써야만 한다면 스팀을 끄고 다린다. 개는법 한복은 동정이 제일 중요하므로 여성, 남성 모두 동정이 꺾이지 않도록 주의한다. 보관법 습기와 해충에 약하고 쉽게 얼룩이 생기므로 상자에 넣어 햇볕이 들지 않고 통풍이 잘 되는 그늘에 보관한다. ▶▶ 이 밖에 한복 관리법 자세히 알고 싶다면? /웨프 제공   생활화 · 현대화 되는 한복 생활에서 한복입는 사람 많아져… 전통 한복에 이어 좀더 편하게 바뀐 한복으로 '계량 한복'이 나왔지만 그동안의 계량 한복은 전통 도예가, 운동권 인사, 한식집 직원 등이 입는 이미지가 강했던 것도 사실이다. 이후 좀더 멋스럽게 바뀐 생활 한복은 현대인들의 생활 안에 한걸음 더 다가왔다. 한복이 점점 '생활 한복', '퓨전 한복' 등으로 다양화 및 대중화 되면서 최근에는 생활 속에서 한복을 입는다는 사람들도 많아졌다. 과거의 계량한복들 /조선DB   매일 아침 '한복' 입고 출근하는 삼성전자 여직원 벤츠 탄 사모님도 개량 한복 찾는다   한복을 즐기는 젊은이들 요즘엔 한복이 젊은이들의 패션 아이콘의 하나로 떠오르는 추세다. 특히 자발적으로 한복을 쇼핑해 입는 젊은 여성들이 늘었다. 명절 때 입거나 궁궐같이 전통적인 장소에 한복을 입고 가는 것은 기본. 한복을 입고 지하철을 타고, 파티를 열고, 외국여행까지 다닌다. 그들 사이에서 '생활 한복'을 입은 사진을 SNS에 올리는 게 유행하고, 이에 따라 전문 인터넷 쇼핑몰도 급속도로 증가해 젊은 층을 겨냥한 활동하기 편하고 다양한 디자인의 한복이 많이 나오고 있다. 국내 인기 여행지로 꼽히는 전주의 한옥 마을은 특히 10~20대의 여행 성지로 각광 받고 있다. 이 곳에 가면 대여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고 관광을 즐기는 젊은이로 가득찬 거리를 볼 수 잇다. [톱클래스] 한복 입고 어디까지 가봤나요? 2030 세대가 열광하는 '핫 패션 아이템', 생활한복의 진화 2015년 12월 9일 한복을 차려입고 전주 한옥마을을 찾은 방문객들이 한옥 툇마루에 앉아 있다. /김영근 기자 2015년 12월 9일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방문객들이 전주 한옥마을을 둘러보고 있다. /김영근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광복절을 앞두고 2015년 8월 5일 서울 경복궁 앞에 설치된 태극기 바람개비 앞에서 한복을 입고 경복궁을 찾은 고등학생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종찬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2015년 9월 9일 서울 중구 덕수궁에서 신목고 3학년 학생들이 한복을 입고 졸업사진을 찍고 있다. /성형주 기자 추석 연휴에 한복을 입고 서울 경복궁을 찾은 시민들이 셀프 촬영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성형주 기자 2015년 2월 10일 야간개장을 개시한 창경궁에서 한복을 입은 대학생들이 기념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고운호 기자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 태조로 한옥마을에서 3.1절을 맞아 한복을 입은 학생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플래쉬몹을 펼쳤다. /김영근 기자 이전다음 1 / 9 슬라이드 크게보기   한복 입기 다양한 행사도 열려 명절에 거리에서 한복을 입고 진행되는 전통놀이 행사는 물론, 학생들의 성인식 행사나 외국인 학생들의 한복입기 체험 행사 등 한복을 입고 진행되는 다양한 장(場)이 전국적으로 열리고 있다. 2015년 9월 24일 오후, 남산골 한옥마을 국악당에서 열린 '외국인 주민과 함께하는 한가위 한마당'행사에서 외국인들이 한복을 차려입고 절을 하고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고운호 객원기자 2015년 9월 1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농협 하나로 클럽 양재점에서 열린 '어린이와 함께하는 추석 차례상 차리기' 행사에서 어린이들이 한복을 차려 입고 절하는 법을 배우고 있다. /김연정 객원기자 2015년 9월 24일 오전, 광화문광장 앞에서 열린‘추석맞이 전통 한복입기 캠페인’에서 종로구 관내 어린이집 참가자들이 한복을 입고 광화문 광장에서 출발해 세종문화회관으로 행진하는 퍼레이드를 하고 있다. /고운호 객원기자 /고운호 객원기자 2015년 12월 9일 대전 유성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회 대전시교육청 성년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절을 하며 예를 올리고 있다. /신현종 기자 2015년 12월 9일 대전 유성구 컨벤션센터에서 열린 ‘제1회 대전시교육청 성년식’에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족두리를 쓰는 가례의식을 하고 있다. /신현종 기자 2015년 10월 30일 서울 중구 정동 덕수궁길 일대에서 열린 야행축제에서 외국인 유학생들이 한복체험을 하고 있다. /김지호 기자 이전다음 1 / 8 슬라이드 크게보기 젊은이 들이 직접 한복 입는 행사를 마련 "일본 축제를 보니 젊은 사람들도 기모노를 입던데, 저는 한복을 입은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더라고요. 마땅한 계기가 없다면 '날'을 잡아 한복을 입자는 뜻에서 '한복데이'를 만들었습니다." 2014년 10월 부산에서는 2030세대 청년들이 '제1회 부산한복데이(Day)' 행사를 마련했다. 대학생과 대학을 갓 졸업한 직장인 40여명이 두 달간 준비해 전주, 대구, 울산, 대전 등에서도 동참해 이날 5개 도시에서 젊은이 1000여명이 한복을 입고 거리를 활보했다. 이들은 2015년에도 부산 해운대구와 함께 해운대해수욕장에서 한복 패션쇼, 민속놀이, 국악 공연 등 한복을 입고 즐기는 행사를 진행했다. 2014년 10월 4일 '한복데이'를 앞두고 부산 지역 대학생들이 플래시몹 연습을 위해 광안대교 앞에 모였다. /부산한복데이기획단 제공   한복, 명절에만 입으란 법 있나요 유명인들의 한복 패션 박 대통령의 한복 패션 박근혜 대통령은 그동안 각종 행사나 외교 순방 때 다양한 한복 패션을 선보였다.  화마로 소실된 국보 1호 숭례문이 5년 3개월만에 국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5월 4일 오후 열린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 참석하고 있다.(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숭례문 복구 기념식에서 참석해 축사를 마친 후 단상을 내려가고 있다. /조선DB 우즈베키스탄을 국빈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6월 17일 오후(현지 시각) 타슈켄트 대통령궁에서 이슬람 카리모프 대통령과 만찬을 갖고 건배를 하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10월 15일 오후(현지 시각) 이탈리아 밀라노 팔라초 파리지호텔에서 열린 동포오찬간담회에 참석해 인사말을 한 후 단상을 내려오고 있다. /조선DB 국빈으로 캐나다를 방문한 박근혜 대통령이 2014년 9월 20일(현지 시각) 오타와 시내 한 호텔에서 열린 동포만찬간담회에 인사말을 마치고 화사한 한복의 멤시를 드러내며 연단을 내려오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2월 25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한복을 입고 국민의 소망과 기원메시지가 담긴 복주머니 개봉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입장하고 있다.(왼쪽), 박근혜 대통령이 복주머니 개봉행사 참석에 앞서 한복을 입고 어린이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조선DB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9월 8일 베트남 하노이에 있는 경남하노이랜드마크 컨벤션홀에서 열린 한복ㆍ아오자이(베트남 전통의상) 패션쇼에 참석하였다. /청와대 제공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G20 정상회의를 마친 박근혜 대통령이 2013년 9월 6일 오후(현지 시각) 러시아 마지막 일정으로 미하일로프스키궁에서 열린 동포 만찬 간담회 참석하고 있다. 박 대통령은 동포 사회의 단합과 발전을 위한 노력을 치하하고 격려하는 시간을 가졌다. /청와대 홈페이지 이전다음 1 / 7 슬라이드 크게보기 박근혜 대통령은 직접 패션쇼 모델로 나서기도 했다. 박 대통령은 지난 2013년 9월 8일 베트남 하노이의 경남 랜드마크 72호텔에서 열린 '한복·아오자이(베트남 전통 의상) 패션쇼'에서 한복 모델로 데뷔했다. 양국 전통 의상인 한복과 아오자이의 아름다움을 뽐내는 뜻깊은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행사 참관에만 그치지 않고 직접 모델이 되었다. /청와대 제공   런웨이 오른 박근혜 대통령의 '스타일 외교' 박근혜 대통령, 인도에서도 한복으로 '패션 외교' 펼쳐 한복 디자이너 이야기 한복 외길 40년…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80). 1994년 한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쇼에 올라 저고리 없는 한복 치마를 선보였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패션전문기자 로랑스 베나임은 그 옷에 '바람의 옷'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전통을 뒤집은 과감한 디자인이었지만 외국인들 눈엔 한복의 고운 선이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최고의 디자인이었다. 2010년 역시 한국에선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라 불리는 파리 오트쿠튀르(맞춤복) 쇼에서 한복을 소재로 한 컬렉션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2013년 11월 1일 독도 선착장에서 열린‘독도 사랑 이영희 한복패션쇼’에서 한복을 입은 모델들이 강강술래를 하고 있다. 이번 패션쇼는 독도가 분쟁이 아닌 문화 예술의 섬이라는 점을 알린다는 취지로 기획됐다. 모델 뒤로 독도의 모습이 보인다. /김지호 객원기자 /김지호 객원기자 2011년 8월 10일 경상북도 울릉군 서면 거북바위에서 한복디자이너 이영희의 패션쇼가 열렸다. 당초 이 패션쇼는 독도에서 열리기로 기획됐으나 기상 상황 악화로 독도에서 열리지 못하고 울릉도에서 개최됐다. /이태경 기자 /이태경 기자 2007년 5월 19일 하얏트호텔에서 워싱턴 스미소니언 박물관 내 한국관 개관 기념으로 열린 이영희 한복 패션쇼. 이날 행사에는 스미스 소니언 아시아 역사 문화 담당 큐레이터겸 이사인 ' 폴 미셸 테이러 '가 개막 축하연설을 했으며, 이태식 주미대사 부인도 참석했다. /임희순 기자 이전다음 1 / 5 슬라이드 크게보기   한복을 입다? 문화를 입다! "삼각지붕 밑 그윽한 그림자… 내 色은 여기서 나왔어요" "쟤들은 맨날 벗는데 우리도 벗어볼까… 韓服 치마만 입은 모습 정말 섹시해" 그녀 자체가 곧 한복… 한복 디자이너 담연 이혜순 이혜순 디자이너는 영화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2003), '쌍화점'(2008) 등의 의상 제작을 맡았고, 2010년 G20 정상회의에서 한복 패션쇼를 연 유명 디자이너. 한복의 아름다움을 알리기 위해 20여년 전부터 평소에도 한복 차림으로 생활해 왔으며, 작년 4월 '신라호텔 한복 해프닝'의 주인공이다. 그는 '아트 마이애미(Art Miami)' 오프닝 행사에서 한복 12벌을 내놓고 패션쇼를 여는 등 미국에서도 한복의 아름다움을 선보였던 인물이다.  담연 이혜순, "한복 한류 이전 우리 경험치가 중요하다" 담연 이혜순의 한복문화를 집 안에 들이다 한복이라는 틀, 그 이상…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한복 디자이너 김영석,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식과 외국 정상회담 때 입었던 한복을 지어 화제를 모았다. 김씨는 이명박 대통령부인 김윤옥 여사, 홍라희 리움미술관장, 힐러리 클린턴 미국 국무장관 등의 한복을 만든 국내 정상급 한복 디자이너이다. 김씨는 한복이라는 틀에 갇혀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한복장이를 넘어 한국인으로 남고 싶다"고 말했다. "한복을 짓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우리 것'이 무엇이고 어떤 것인지 말하고 알리는 것이다. 사극이나 영화 속에서만 보는 아득한 옛날의 전통이 아닌, 우리 할머니나 어머니가 쓰다듬고 만졌던 우리 것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다."며 과거 전시회를 앞두고 한 인터뷰에서 본인의 소신을 밝혔다. 유물 같았던 할머니 베개… 오, 예술이네 세계화 되는 한복 아카데미賞 사전 행사에 초청받은 한복 "브라보" "원더풀" 박수갈채 2015년 2월 20일 로스앤젤레스 글렌데일에 있는 MGN 파이브 스타 극장, 의상 디자이너 제니퍼 목(목플러스), 김문경(필월 우리옷), 조진우(한국의상 백옥수), 조영기(천의무봉), 오인경(이노주단) 5명이 지은 한복 37벌이 영화관을 달궜다. 이틀 뒤 열리는 공식 시상식에 앞서 영화 관계자와 배우들, 현지 정·재계 인사들이 모이는 할리우드 트리뷰트 행사에서 한복 패션쇼가 열린 것이다. 주제는 '색동: 한국의 색에 동요되다 in Oscar'. 미국 기업체 협의회(US Business enterprise Council) 주최,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복진흥센터(센터장 최정철) 주관, 제니퍼 목이 총연출을 맡았다. ▶ 관련기사 2015년 2월 20일 오후 8시(현지 시각) 제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의 사전행사로 마련된 한복 패션쇼에서 디자이너 제니퍼 목은 색동으로 여성의 몸을 감싼 한복 드레스를 선보여 박수갈채를 받았다. /한복진흥센터 제공 한복의 향연, DDP '샤넬 크루즈 컬렉션 쇼' 칼 라거펠트가 색동에 영감을 받아 만든 드레스 /AP 뉴시스 2015년 5월 4일 저녁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수놓은 프랑스 패션 브랜드 '샤넬(CHANEL)'의 2015/16 크루즈 컬렉션 쇼는 우리 옷 한복과 함께한 '한복의 향연'이었다. 샤넬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칼 라거펠트가 서울서 캐낸 창조의 씨앗은 한복이었다.  이브닝드레스는 저고리를 벗어던진 채 치마만 슬쩍 둘러 야릇한 미를 풍겼다. 조각보처럼 자투리 천을 성기게 이은 원피스, 승려들이 등에 지고 다닌 바랑처럼 끈으로 조여 어깨에 슥 두른 가방, 수영복 위에 걸친 두루마기 형태의 가운이 눈길을 끌었다. 거기에 버선처럼 생긴 양말을 신고, 자개·진주 같은 보석을 동백꽃 무늬로 작업한 브로치를 더해 동·서양의 상반된 분위기를 동시에 담았다. ▶ 관련기사
220    (시작품)송구영신의 밤 댓글:  조회:1399  추천:0  2015-12-31
송구영신의 밤 현용수 작   하늘이 술 내였다 하니 신선 령혼 술이런가? 땅도 술을 내였다 하니 도깨비 담 술이렸다.   누가 신선이 되여 보시겠소? 술을 마셔 보시라요 머리가 알딸딸 돌아 가면서 몸뚱이 허공에 둥둥 뜨지요.   누가 도깨비 되여 보시겠소? 술을 마셔 보시라요 범도 강아지로 우습게 보이고 천하에 무서운 일 없답니다.   그래서 나도 술을 좋아하니 술도 나를 졸졸 따르네요 이렇듯 다정한 우리 술님을 내가 어찌 마다하리오.   투명하여 물같이 생겼지만은 기실은 물도 아닌 요놈이 무뚝뚝한 나를 웃게도 하고 또 울게도 하는 재주 있더래요.   한잔 술 따라 허공에 쳐들어 별님들 불러내여 창가에 앉히고 내 그림자 곁들여 동무하면서 송구영신 이밤을 취해 봅니다.   첫번째 한잔 술 쭈욱 마이니 목줄기 적시며 꿀꺽 넘어가 가슴속 고요하던 호수에서는 수많은 동그라미 생겨 납니다.   두번째 한잔 술 쭈욱 마이니 심장이 뜨겁게 달아 오르며 가슴속 응어리로 엉키여 있던 근심걱정 스르르 사라집니다.   세번째 한잔 술 쭈욱 마이니 머리가 핑그르르 돌아가면서 서울에 있는 안해의 모습이 눈앞에서 삼삼 웃고 있네요.   붓고 마이고 마이고 또 부으며 묵은년 가고 복년이 오라 했더니 별들은 재밌다고 눈 까박거리고 그림자도 우스워 비츨거립니다.   내가 인젠 술 그만 하겠다 하니 술은 나를 기어코 붙잡고 술이 인젠 그만 마이라고 하니 내가 도리여 술을 붙잡습니다.   사람이 산들 백년 더 살겠소만 어쩌다가 한번 온 인생인데요 염왕님 부르실 땐 가시더라도 백년쯤 욕심이야 세워 봐야죠.   돈도 많이 벌어야 하겠지만은 제몸 챙기는게 첫째 아니겠소? 일단 제 몸뚱아리 망가지며는 한줌의 재밖에 남는것 없다오.   자식들 위해 살았다 말 마시요 결국은 모두 자기 인생이라오 꿈을 바라고 오늘도 뛰시였소? 뛸수 있는 그것이 행복이라오.   꽃은 피어도 소리가 없고 사랑은 불타도 연기가 없으며 새는 울어도 눈물이 없고 재부는 넘쳐도 만족이 없다오.   장미가 고와서 꺾으려면 가시에 손 찔릴 각오 해야하고 친구가 좋아서 사귀려면 자기것을 줄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이 좋아서 태여 났으면 부모에게 효도할줄 알아야 하고 부자가 좋아서 되여 보시려면 사회에 봉사할줄 알아야 합니다.   잡을수 없는 무정세월 성큼성큼 가기만 하는데 늦출수 없는 우리네 인생  아직 할일이 너무나 많습니다.   매일매일 새 아침 밝혀 주시는 세월님 너무나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행운을 가끔 주십시요 제가 열심히 잡아 보겠습니다!   2015년12월31일 저녁
219    “人不为己,天诛地灭” 是正见 댓글:  조회:2374  추천:0  2015-12-28
“人不为己,天诛地灭” 是正见 (献给2016丙申年) 延边朝鲜族礼仪研究会 玄龙洙 在当今社会上,反映主流思想的积极的观点称之为正见,而反映陈腐思想的消极的观点称之为负见。 中国有一句俗语“人不为己,天诛地灭”。 “天诛地灭”是一句成语,对此有很多人知道,可是对于“人不为己,天诛地灭”,知道的人并不多。此语在包括《四书五经》在内的可查寻的所有中国经典古籍中竟然查不到,《辞海》或《辞源》等中国大型辞典里也没有收录此语。 可知,此语不可能是经典古语,很可能是近代或现代才形成的一句民间俗语。   有人说;《論語-宪问第十四》中的“古之学者为己,今之学者为人。”一句是此语的来源。 又有人说;中国战国时期诸子百家中的《杨朱》所言“损一毫以利天下,不与也。”一句是此语的来源。 可是,这些主张都是推测,没有直接的证据,与“人不为己,天诛地灭”相差甚远。 至今为此,发现此语最早出现的文献是1937年刘少奇所著的《论共产党员的修养》一文,文章里写道:“…这种人的脑筋,浸透着剥削阶级的思想意识,他相信这样的话:‘人不为己,天诛地灭’……他甚至用这一大套剥削阶级的话,来为他的自私自利和个人主义辩护。” 不过,以此来断定刘少奇就是创造此语的第一人,为时尚早,因为,刘少奇文章中此语是打引号的,是引用别人之语的,引用何时何处何人之语呢?我们不得而知。 还有在文革时期,中国商务印书馆出版的《汉语成语小词典》第276页,在解释“天诛地灭”成语的例文中也引用了此语,只道是“反映了剥削阶级反动腐朽的世界观。”,却没有说明此语最初的出处。 此外,网上还可以查寻到引用此语的一些佛文讲稿和文艺作品,例如一位高僧(净空法师)讲述的《佛说十善业道经》第二十四集和文革时期的现代京剧《红灯记》中,各有发现一段引用此语的痕迹,可惜都是现代版的东西,没有考证价值,不能做为历史依据。   至今,“人不为己,天诛地灭”的原话出自何时何处何人,依然是个迷。 现在,问题的焦点是对此语的理解上存在的一些争议和由此衍生出来的很多奇谈怪论。 包括刘少奇和净空法师在内的曾经引用过此语的所有人普遍认为,此语的基本意思是“人若不为自己谋私利,会遭到天诛地灭”,并当做典型的极端利己主义观点来加以否定和批判。   此外,有一些人执意编造各种奇谈怪论,试图证明此种利己主义观点的合理性和正当性,可能他们是真正的高智商的利己主义者,我们不必去惹他们。 为了彻底揭开对此语的疑惑,我们不妨换个方式来观察此语,以进一步了解此语中所包含的其他内容。 如何理解此语,关键是如何解释此语中的“为”字的含义。 我们知道“为”字是广义字,有以四声发音的“为”字和以二声发音的“为”字。现代汉语(白话文)中以四声发音的“为”字表示;“为了、代替、因为、对于、利于、帮助…”等,以二声发音的“为”字主要表示;“做、作、成、当…”等。 古汉语(文言文)中二声属于“平音”,四声属于“仄音”,其意义和用法完全不同。   上述所见,人们说“人不为己,天诛地灭”的基本意思是“人若不为自己谋私利,会遭到天诛地灭。”,但要知道这只是把“为”字以四声来解释的情况,这样解释此语,确实是一句极端利己主义的观点,根本上违背了中国传统道德标准,只能视为负见。   可是,人们忽略了此语还有一种解释法,就是把“为”字以二声来解释的方法,可以把“为”字换成“做”字来解释,此时,此语的基本意思就变成“人若不做好自己,会遭到天诛地灭。”。这样解释就合理多了,不违背中国传统道德标准,含蓄着很强的哲理性,可以视为正见。   同样一个“为”字,采取不同声调,其意义就变了,这可以说是中国汉语的魅力之一吧!   通常所说的“为自己谋私利”是针对于“不合法,不合理,不道德”而言的,是“以损失别人或公共利益来谋取自己私人利益”的意思,是个很缺德的行为,所以遭到天下人的吐沫。   把“私利”和“自己利益”混为一谈是概念上的错误。正当谋取“自己利益”是天经地义,是要大力鼓励的,是“做好自己”很重要的一个内容。   所谓的“做好自己”可以理解为;“加强自己生存能力和发展能力(包括正当谋取自己利益),保持自己特色,忠实于自己职责,担负起自己责任…”等,实为更全面、更积极的“为己”。 如今,我们无法证实“人不为己,天诛地灭”的初衷到底是什么?可是,为了增加社会正能量,还是采纳正见为好。 人是社会的主体,都是以“自己”的身份去成为社会的一员,人人都要首先做好“自己”;这是人人自我生存和发展的基本条件,是与人共存共荣的前提条件,是帮助别人、战胜敌人的必备条件。   首先做好自己,应该说是正常人的本能。没有首先做好自己,连“自己是谁?”也不知道,自己的基本生存也不能保障,这种人有什么余力去参与社会的其他事务呢? 人若不做好自己,不加强自己的生存能力和发展能力,社会就不承认他,他不能成为健康的社会成员,会被淘汰出局,此乃天诛地灭也。 一个民族也是如此,若不做好自己,不保持自己特色,不加强自己建设,世界就不承认此民族,会被取消,此乃天诛地灭也。 一个国家也是如此,若不做好自己,不加强自己建设和管理,他国就欺负此国家,此国家在地球上丧失合法地位,会被推翻,此乃天诛地灭也。   从以上意义上讲,“人要为己,天经地义,人不为己,天诛地灭。”可以解释为;“人要做己,天经地义,人不做己,天诛地灭。”,是完全的正见。   2015-12
218    동지(冬至)를 아십니까? 댓글:  조회:5065  추천:0  2015-12-22
  1. 동지의 어원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 고 한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다. 2. 동지의 유래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중국의《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다.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3. 동지의 풍속 중국의《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동지팥죽이절식이고, 팥은 붉은 색 깔을 띠고 있어서 축사(逐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疫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린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한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한다. 이에 대해《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11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옛부터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전하여 온다. 전통사회에서는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철이라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여름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되면 책력을 선사하는 풍속이 성하였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부록: ▶ 이십사 절기(二十四節氣)란?   한 해의 변화를 24절로 나눈 것. 즉, 태양을 중심으로 하는 지구 공전의 궤도(황도)를 스물 넷으로 등분한 각 구점(區點)을 태양이 통과하는 일시. 지구상의 기후는 이 절기순서에 따라 변화 반복함. 평기(平氣)로는 오일(五日)을 일후(一候), 삼후(三侯)를 일기(一氣), 일년을  이십사기(二十四氣)로 나눔.   계절은 태양의 적위(赤緯)에 의하여 지배되고 있으나 우리나라는 원래 태음력(太陰曆)이며 태양의 위치와 관계없이 역일(歷日)을 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역일로서만은 계절이 어떻게 정밀하게 변화하는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역일 외의 태양력적 요소를 가미하기 위하여 사용하게 된 것이다. 역법(曆法)과 절기(節氣)  ♣ 음력(陰曆)과 양력(陽曆) 인류가 역법(曆法)을 만들어 사용하고 있는 달력은 태양과 지구, 달의 변동에 따라 만들어진 것으로 관측의 대상에 따라 태음력(太陰曆)과 태양력(太陽曆), 태음태양력(太音太陽曆)의 세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 太陰曆(태음력) 달의 삭망(朔望)을 기준으로 하여 만든 역법(曆法)으로 태음태양력을 줄여서 태음력이라고도 하나 주로 순태음력을 가리킨다. 태음력은 달이 29.53059일(1삭망월)을 주기로 규칙적으로 차고 기우는 데서 자연적으로 생겼다. 대부분의 고대력은 태음력으로 출발하여 태음태양력(太陰太陽曆) 또는 태양력으로 변해갔다. 현재는 터키 ·이란 ·아라비아 ·이집트 등 이슬람지역에서 사용하는 이슬람력이 순태음력으로 남아 있다. 순태음력에서는 29일의 작은달과 30일의 큰달을 번갈아 배치하여 1년을 12달의 354일로 하고, 30년에 11일의 윤일을 두어 달의 삭망과 날짜가 일치하도록 하고 있다.  ♣ 太陽曆(태양력)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만든 역법(曆法)으로 태음력(太陰曆)과 상대되는 역법이다. 태양력의 기원은 이집트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에서는 일찍부터 나일강(江)이 범람할 때면 동쪽 하늘의 일정한 위치에 시리우스(큰개자리 α별)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냄으로써 태양력을 만들 수 있었다. BC 18세기경 이집트인들은 1년을 365일로 하고, 이것을 30일로 이루어진 12달과 연말에 5일을 더하는 식으로 달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후 시리우스와 태양의 관계를 좀더 자세히 관측하여 1년이 365.25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것이 율리우스력에 채용되어 4년마다 1일을 더하는 윤년이 생겼고, 1582년 다시 1년의 평균길이를 365.2425일로 하는 그레고리력에 인계되어 현재에 이르렀다. 그레고리력에서는 4년마다 윤년을 택하되, 100으로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지 않고, 다시 400으로 나누었을 때 나뉘는 해는 윤년으로 하는 등 복잡한 역법이 이용된다.  ♣ 太陰太陽曆(태음태양력) 달의 운행(朔望月)에 기준을 두면서 계절(太陽年)에도 맞춘 역법(曆法)으로 큰달(30일)과 작은달(29일)을 조합하여 12개월(平年) 또는 13개월(閏年)을 1년으로 하는데, 평년에는 354일과 355일, 윤년에는 383일과 384일의 네 가지 1년이 있다. 치윤법(置閏法)으로는 처음에는 2년에 1회 윤달을 두었는데, 나중에 19년에 7회 윤달을 두는 메톤법(法)이 채용되었다. 큰달과 작은달을 배치하는 방법에는 평삭(平朔:평균삭망월 29.53059일에 맞추는 것)과 정삭(定朔:실제의 삭망에 맞추는 것)이 있다. 평삭에서는 큰달과 작은달이 교대로 나타나며 단지 16개월 또는 17개월마다 큰달이 3회 계속된다. 정삭에서는 달의 운동이 같지 않은 데서 큰달 또는 작은달이 4회 계속되는 일이 있다. 서양의 역은 모두 평삭이었으며, 한국과 중국의 역도 처음에는 평삭이었으나, 나중에 정삭으로 변하였다.     이상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제공
217    (탐구)한국성씨 대부분 위조된 가짜성씨라는데... 댓글:  조회:4024  추천:1  2015-11-03
(탐구)한국성씨 대부분 위조된 가짜성씨라는데...   문장래원;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1&docId=206099399&qb=7ZWc6rWt7ISx7JSo6rCA7Kec&enc=utf8§ion=kin&rank=2&search_sort=0&spq=0&pid=SBl71soRR18sscpmQmwsssssstN-374529&sid=zrloXeXd/+drTn3nW7gtqg==
216    성(姓)과 씨(氏)는 뭐가 어떻게 왜 다른가? 댓글:  조회:2417  추천:0  2015-10-18
성(姓)과 씨(氏)는 뭐가 어떻게 왜 다른가? ⊙ 원래 姓은 母系를 표시, 氏는 父系를 표시, 최초의 姓들은 모두 ‘女’ 부수 사용 ⊙ 周와 로마의 姓氏제도 유사, 姓은 로마의 ‘Gens’, 氏는 ‘Familia’에 해당 ⊙ 중국 史書가 최초로 기록한 법흥왕은 募씨로 되어 있어, 진흥왕순수비에도 신하들의 성씨는 보이지 않아 ⊙ 고려 이후에는 西域·東南亞 출신 귀화자 많아… 장순룡·인후 등은 정승 반열에 오르기도 글 | 김정현 역사저술가   黃帝가 탄생하는 모습. 황제의 어머니가 姬水에서 황제를 낳은데서, 姬라는 姓이 생겼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을 보면, ‘성씨(姓氏)’를 ‘성(姓)을 높여 이르는 말’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예컨대, 김씨, 이씨 하는 말에서 김(金), 이(李)라고 하는 성에다 존칭으로 씨(氏)를 붙여준 것이 ‘성씨’라는 것이다.      하지만 원래 중국 주(周)나라 때에는 성과 씨가 별개의 뜻을 가지고 있었다. 중국에서는 성의 기원(起源)을 주대(周代)에 두고 있었다. 주나라에서 혈통 표시로 일찌감치 등장한 것이 성이었다. 당시 주 왕실의 성은 희성(姬姓)이었다.      1955년에 조좌호(曺佐鎬) 동국대 교수가 펴낸 《동양사대관(東洋史大觀)》은 주대의 성씨제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존칭 ‘姬’는 원래 周나라 王室의 姓    神農氏의 姓인 姜은 그의 어머니가 姜水 가에서 신농씨를 낳은 데서 비롯되었다.   〈주의 성씨제도는 로마의 성씨제도와 유사한 점이 많다. 주나라 사람의 성은 로마의 ‘Gens’에 해당한 것인데 여러 성 가운데 주 왕실에 속하는 희성(姬姓)이 가장 고귀하고 유력하였다. 성을 여러 씨(氏)로 나눴는데 씨는 주로 거주하는 지명 또는 세습하는 관명(官名)을 따서 붙였다. 씨는 로마의 ‘Familia’에 해당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시 귀족의 칭호는 성(姓)·씨(氏)·명(名) 세 부분으로 되어 있어서 보통 남자는 씨와 이름을 칭하고 여자는 성과 이름을 칭하였다. 가령 진(陳) 나라의 공실(公室) 성은 규(嬀)이며 씨는 진(陳)이었다. 일찍이 진나라 한 공자(公子)가 공실을 찬탈한 바가 있는데 춘추(春秋)에는 그를 진타(陳陀)라고 기록하고 있었다.   진은 씨이고 타(陀)는 이름인데 그가 남자(男子)이기 때문에 성인 규를 생략한 것이다. 그리고 진에서 위국(衛國)으로 출가한 여자가 있었는데 여규(厲嬀), 재규(載嬀)라 하였다. 그들은 여자이기 때문에 성을 규(嬀)라 하였다. 이것은 로마에서도 같은 것으로 이름(persona), 성(Gens), 씨(Famillia)를 표시한 것인데 남자는 보통 성을 생략하였다.      주 왕실의 성은 희(姬)의 성인데 여자를 모두 희(姬)라고 불렀기 때문에 뒤에 희가 일반 여자의 존칭이 되었다. 주인(周人)의 성은 결혼에서 중요한 의의(意義)를 가진 것으로 그것은 동성간(同姓間) 결혼을 금(禁)하는 것이었다.   후세에 이르러 씨족제도가 문란해져서 성이 사실상 소멸하고 씨와 성을 혼용한 후에도 동성불혼(同姓不婚)의 법이 실제 동씨불취(同氏不娶)가 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계속되어 왔다. 가령 장씨(張氏)와 장씨(張氏), 이씨(李氏)와 이씨(李氏)는 아무리 혈연이 멀다 하여도 서로 결혼하는 것을 피하는 것이었다.〉      주나라의 왕실 성이 희(姬)라고 하였는데 왕실에서 제후(諸侯)로, 즉 봉건국가의 군주로 나가면 동일족으로 희의 성을 가졌다 하더라도 씨(氏)를 새로 갖는 것이 주의 성씨제도였다. 이 제도는 주의 종법(宗法)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주의 종법엔 대종(大宗)과 소종(小宗)이 있었다. 대종은 종갓집과 같은 것으로 처음의 시조(始祖)를 영구히 받드는 것이었다. 소종은 분가(分家)한 계보들을 말하였다.      제후국의 군주로 봉을 받아 소종이 된 맨 처음의 사람을 시봉자(始封者)라고 하였다. 시봉자는 새로운 성을 가졌다. 그것을 ‘씨’라 했는데, 이 씨를 가지고 다시 새로이 혈통을 표시한 것이다. 소종의 시봉자 후손들은 계속 이 ‘씨’를 이어 갔다. 그러다가 그들의 후손에서도 ‘씨’를 만들기도 했다. 이것이 씨의 분출(分出)이다. 여기서 많은 종류의 ‘씨’가 등장하게 된다.      주나라 시대에 최초로 나타난 성들은 모두가 ‘계집 녀(女)’를 부수(部首·글자 변에 붙은 것)로 사용했다. 주나라 왕실의 성이라 하는 희(姬)를 비롯해서 강(姜), 규(嬀), 사(姒), 요(姚), 길(姞) 등이었다.      ‘희’는 황제(黃帝)의 어머니가 희수(姬水)라는 곳에서 자식을 낳은 데서 비롯했다. ‘강’은 신농씨(神農氏)의 어머니가 강수(姜水)에서 자식을 낳았으므로 ‘강’을 성으로 삼았다. ‘요’는 우순(虞舜)의 어머니가 요허(姚墟)에 살았으므로 이를 성으로 한 것이다.      황제, 신농씨, 우순은 모두 중국 역사가 신화적 인물로 묘사하는 조상들이다. 이들 신화 속 인물들은 모두 남성이었다. 황제는 중국 문명의 발상지인 황하(黃河)지역을 최초로 다스린 제왕이라는 의미다. 황제의 이름은 헌원(軒轅)이었다.      황제, 신농씨, 우순 같은 신화 속 인물들의 성은 모두 어머니로부터 비롯했다. 성은 원래 모계(母系)를 표시하는 것이었다는 얘기다. 반면에 제후국의 혈통을 표시하는 ‘씨’는 부계(父系)를 표시하는 것이다. 제후국의 군주가 모두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李’씨의 유래      중국 고대 성씨의 유래를 밝혀 주는 책들이 있다. 5세기에 나온 《위서(魏書)》 〈관씨지(官氏志)〉, 12세기에 나온 《통지(通志)》가 그것이다. 남송(南宋) 때 간행한 《통지》 씨족지(氏族志)에 나타난 이(李)씨의 유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중국 상(商)나라 때 이정(理征)이란 고위관리가 어떤 사건으로 폭군 주왕(紂王)에게 죽음을 당했다. 그때 그의 부인이 하나밖에 없는 아들 이정(利正)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달아났다. 그 모자는 달아나면서 어느 나무 아래서 허기진 몸을 잠시 쉬었다. 이 나무는 오얏나무였다.   모자는 떨어진 오얏나무 열매로 배를 채웠다. 덕분에 모자는 허기를 면한 후에 무사히 딴 나라로 갔고 거기서 아들은 장성하였다. 이후 손자까지 두었고 그 손자는 진(陳)의 대부(大夫) 벼슬까지 올랐다. 손자는 할아버지의 생명을 구해 준 오얏나무를 잊을 수 없다고 하여 오얏나무 이(李)를 성씨로 삼았다.〉      위에 소개한 성씨의 연원을 소개한 책들을 보면, 성씨 가운데는 국명(國名), 지명(地名), 관직명(官職名) 등에서 씨의 글자, 즉 성씨가 된 것이 많았다. 정(鄭), 조(趙), 한(韓), 오(吳), 신(申), 조(曹), 정(丁), 성(成), 서(徐), 황(黃), 노(魯), 송(宋), 주(朱), 진(陣), 양(梁) 등이 나라이름에서 취한 성씨다. 백(白), 배(裵), 노(盧), 방(方), 소(蘇), 신(辛), 양(楊), 고(高), 유(劉), 원(元) 등은 식읍(食邑·나라에서 공신에게 내려준 지역)에서 따온 성씨다.   강(姜), 하(河), 임(林), 유(柳), 지(地), 천(千) 등은 지명과 관련한 성씨다. 벼슬이름, 즉 관직에서 따온 성은 장(張), 윤(尹), 최(崔), 홍(洪), 차(車), 추(秋), 사(史) 등이다. 자(字)와 시호(諡號)에서 유래한 성씨도 있는데, 이는 조상의 자나 시호에서 한 글자를 따서 성씨를 삼은 것이다. 손(孫), 문(文), 민(閔), 남(南), 공(孔), 유(兪), 전(田) 등이 이에 해당한다.        신라는 單姓, 고구려·백제는 複姓      한국인의 성씨 기원은 고려시대 김부식(金富軾)이 지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알 수 있다. 물론 각 성씨의 문중들이 족보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로 인정하기 어려운 부분이 적지 않다. 반면에 《삼국사기》는 신라의 성씨 등장에 자세한 설명이 있고, 백제와 고구려의 성씨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언급하고 있다.      신라는 《삼국사기》의 기록에서 잘 알려진 6촌의 성씨가 있었다. 그들 성씨는 최(崔), 정(鄭), 이(李), 손(孫), 배(裵), 설(薛)이다. 그리고 왕족 성으로 박(朴), 석(昔), 김(金)이 있다.      현 한국인의 성씨들 중에는 신라에 등장한 성씨가 인구수로 주류를 이루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고구려나 백제계 성씨는 오늘날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고씨(高氏) 성이면 우리의 역사에서 먼저 고구려의 건국시조 고주몽(高朱蒙)을 떠올린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고씨는 고구려 고씨가 아니라 탐라(제주도)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근래에 와서 뒤늦게 고구려 고씨에 기원을 둔다고 주장하는 고씨들이 있지만, 보학계(譜學系)에서는 기록이 뒷받침되지 않는다 하여 인정하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삼국사기》가 언급한 성씨들은 대개 한 글자로 된 단성(單姓)인데 비해, 백제와 고구려인의 성은 대개 두 글자로 된 복성(複姓)이라는 점이다. 신라는 중국 당(唐)나라 성씨제도에 영향 받아 주로 단성을 사용하였다. 당나라는 세족(勢族)들의 성씨가 대부분 단성이었다.      신라의 성씨 기원에서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비롯해서 3대 유리왕(儒理王) 때 6촌에서 등장하였다는 성씨들에 의문을 제기하는 설(說)도 있다. 이러한 주장들은 중국의 사서(史書)에 대한 검토에서 비롯한다. 신라는 23대 법흥왕(法興王·514~540) 이전 왕들의 경우에는 시호(諡號)와 성씨도 없었다고 한다.   중국의 《양서(梁書)》와 《남사(南史)》는 신라의 경우 법흥왕 때 와서 비로소 성씨를 가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법흥왕은 성씨를 모(募), 이름은 진(秦)이라고 기록했다. 《북제서(北齊書)》는 법흥왕 다음의 왕인 진흥왕(眞興王·540~576)을 김진흥(金眞興)이라 기록했다. 신라 임금을 김씨라고 한 것은 이것이 최초의 기록이다.      중국 역사서에는 법흥왕 이전 신라왕의 시호와 성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중국 사서에 의하면 신라에는 문자가 없었다고 한다. 문자가 없었으면 의당 성씨도 없었다고 보아야 한다.      법흥왕이니 진흥왕이니 하는 시호는 중국에서 전래되어 법흥왕 때부터 비로소 사용한 것으로 《삼국사기》에서도 기록하였다. 법흥왕 이전의 왕들은 니사금(尼師今), 마립간(麻立干)이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법흥왕 이후 한자 성씨 사용한 듯      ‘신라가 한자 성씨를 갖게 된 것은 법흥왕 이후’라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는 진흥왕 순수비(巡狩碑)이다. 진흥왕은 새로 정복한 지역에 순수비를 세웠는데, 여기에 기록한 신하들의 이름을 보면 성씨가 나와 있지 않다.      예를 들어 경남 창녕(昌寧)에서 발견된 진흥왕 순수비를 보자. 〈喙(훼) 居七智(거칠지) 一尺干(일척간) 沙喙(사훼) 心表夫智(심표부지) 及尺干(급척간) 村主(촌주) 麻叱智(마질지) 述干(술간)〉이라는 내용이 있다. 훼(喙)는 이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육부의 양부(梁部)를, 사훼(沙喙)는 최씨 성을 하사 받았다는 사량부(沙梁部)를 말한다.   촌주(村主)는 비를 세운 지역의 마을 촌장을 말하는데, 그의 이름이 마질지(麻叱智)인 것이다. 일척간(一尺干), 급척간(及尺干)은 중앙관리의 벼슬 이름이고, 술간(述干)은 지방관리의 벼슬 이름이다. 거칠부지, 심표부지, 마질지는 신라말 발음으로 표기된 신하들의 한문 글자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 비는 양부의 일척간 거칠부지, 사량부의 급척간 심표부지, 촌주 술간 마질지 3명을 공신(功臣)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었다. 진흥왕의 신하들이라면 신라 6부(六部), 즉 6촌(村) 사람들의 후예일 가능성도 높다.   그런데도 이들에게 성씨가 없다는 것은 이상하다. 결국 진흥왕 시대까지도 신라에 성씨가 없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25대 진지왕(眞智王·576~579)과 26대 진평왕(眞平王·579~632) 때 세운 비에서도 신하들의 이름만 있었고 성씨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이를 보면, 신라가 박혁거세를 비롯해서 유리왕 때 6촌의 성씨, 그리고 탈해왕(脫解王)과 알지(閼智)에게 석씨(昔氏)니 김씨(金氏)니 하는 성씨가 실제로 그들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인지 의심스럽다.        濊의 同姓不婚 풍속      한반도의 성씨와 관련해 중국 《후한서(後漢書)》에 흥미로운 기록이 있다. 이 책은 지금의 함경도 지방에 있던 예(濊)의 풍속에 대해 언급하면서 “같은 성(姓)끼리는 혼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예에 동성불혼(同姓不婚) 풍속이 있었다는 것인데, 그렇다면 예맥에서는 성씨가 있었다는 얘기다.   예에 구체적으로 어떤 성씨가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후한서》는 중국 송(宋)나라 범엽(范曄)이 저술한 책으로, 예뿐 아니라 부여와 초기의 고구려, 옥저(沃沮)에 관한 기록도 있다. 그런데 ‘동성불혼’에 대해 언급한 것은 예가 유일하다.      예에 성씨가 있었다면 그것은 중국 한(漢)나라가 한반도 북부에 설치했던 한사군(漢四郡·낙랑, 진번, 임둔, 현도)을 한동안 설치한 것과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예의 성씨는 한나라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예는 한반도 북쪽 지역에서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지역까지 남하했다. 예가 망했을 때 그 주민들은 진한(辰韓), 즉 신라지역으로 이주했는데, 이때 그들이 사용하던 성씨가 신라로 전해졌을 수도 있다.      현재 우리나라 성씨는 대부분 신라에서 비롯한 것이다. 여러 문중의 족보들이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 설사 신라 토종(土種) 성씨가 아니더라도 중국 등에서 신라로 귀화(歸化)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삼국사기》에 나타난 신라 왕족의 세 성씨나 6촌의 성씨가 아니더라도, 우리나라의 성씨가 신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라가 당나라의 성씨 문화와 그 제도를 본격적으로 전래 받기 시작한 것은 통일 이후였다. 《삼국사기》의 신라 관련 기록들을 보면 문무왕(文武王·661~681) 이후의 기사에서 성과 이름을 함께 표기한 인명이 부쩍 많이 등장한다. 이를 보면 그 이전까지는 높은 신하들의 경우에도 성씨를 갖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왕실에서만 혈족의 표시를 위해 성씨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통일신라 시대에는 신라와 당나라 간 교류가 활발했다. 당의 문물(文物)과 제도가 전파(傳播)되면서 성씨제도도 본격적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西域에서 온 歸化人들    베트남 리 왕조를 창건한 리 태조의 동상. 제공=박순교   신라 6촌의 성씨를 중국인의 성씨와 비교해 보면 배씨(裵氏) 성 하나를 제외하고는 그들의 주류(主流)라고 하는 백가성(百家姓)에 들어갔다.      중국의 성씨관계 자료를 보면, 박씨(朴氏) 성만은 한반도에서 등장한 성씨로 기록하고 있다. 《중국성씨대전(中國姓氏大全)》 기록을 보면 고려에서 원(元)나라로 귀화한 환관(宦官) 박불화(朴不花)가 중국 박씨의 선조다. 그 뒤에는 ‘조선족이 이 성을 많이 갖고 있다(朝鮮族多此姓·조선족다차성)’고 기록해 놓았다. 반면에 ‘더러는 분명하지 않은 내용으로 고대 파군(巴郡)에 있었던 소수 민족의 수령인 박호(朴胡)한테서 비롯한 성’이라는 기록도 있다.      오늘날 각 성씨의 문중에서 펴낸 족보들을 보면 《삼국사기》에는 없는 성씨들이 신라에서 비롯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강(姜), 남(南), 노(盧), 라(羅), 문(文), 방(方), 변(卞), 백(白), 부(夫), 사공(司空), 서(徐), 성(成), 소(蘇), 송(宋), 신(辛), 안(安), 여(呂), 오(吳), 위(魏), 유(兪), 육(陸), 윤(尹), 임(林), 장(張), 정(丁), 제갈(諸葛), 조(趙), 조(曹), 주(周), 차(車), 홍(洪), 황(黃) 등이 그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 가운데 신라의 역사에 기록될 만한 유명 인물은 왜 없었을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이들 성씨의 족보 기록을 보면 대개 귀화인, 그것도 중국에서 온 귀화인들인 경우가 많다.      고려시대에 들어오면 귀화자들에 대한 기록이 역사서에 많이 나타난다. 건국 초에는 외래인, 특히 여진족, 거란족 출신의 귀화자가 많았다. 한족계(漢族系), 몽고족계도 많았다. 고려 후기로 들어오면 귀화자들의 출신지가 더욱 다양해지는데, 그중에는 이슬람교를 믿는 투르크 혹은 위구르 사람도 많았다. 고려 25대 충렬왕(忠烈王·1247~1308) 조에 귀화한 고위관리 장순룡(張舜龍)이 바로 그들 가운데 한 명이다.      《고려사》는 그를 회회인(回回人)이라 기록했다. 그는 원(元)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었는데 원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를 수행해서 고려에 왔다가 귀화했다. 장순룡은 원나라에 있을 때 이름이 삼가(三哥)였다. 그는 고려에 와서 낭장(郎將·정6품) 벼슬부터 시작해서 재상 반열의 첨의참리(僉議參理·종2품) 벼슬까지 올랐다. 그가 바로 덕수 장씨의 시조다.      장순룡과 함께 제국공주를 수행해 온 몽고인도 있었다. 그는 인후(印侯)로 본시 이름은 ‘홀라대’였다. 그도 무관 벼슬인 중랑장(中郞將·정5품)을 받게 되었는데 충렬왕이 이름을 바꾸라고 했다. 그는 대장군 인공수(印公秀)에게 “내가 당신하고 친하니, 당신 성을 빌려 썼으면 한다”고 청했다. 인후는 검교정승(檢校政丞)이란 최고 관직의 자리와 함께 공신(功臣) 칭호까지 받았다.      설손(偰遜)이란 이름의 귀화인도 있었다. 그는 위구르인이다. 원나라에 귀화해서 백료손(百遼遜)이란 이름을 얻었는데, 학식(學識)과 문장이 뛰어나서 원나라 조정에서 높은 관직을 얻었고, 원의 황태자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공민왕과 즉위 전부터 알고 있던 그는 공민왕을 따라와서 고려인이 되었다. 그의 출생지인 ‘설렌’의 첫 글자를 따서 설(偰)이라는 성을 취했다. 그의 아들 설장수는 이성계 밑에서 활약하다가 조선의 개국공신이 되었다.        東南亞 출신 귀화인들    베트남 박닌성 딘방(이씨 왕조 발상지)에서 매년 음력 3월 15일 이 태조의 창업을 기려 열리는 덴도 축제. 화산 이씨의 시조 이용상은 태조의 8대손이다. 제공=박순교(《화산군 이용상》저자)   동남아(東南亞) 출신으로 화산(花山) 이씨의 선조가 된 귀화인으로는 베트남 출신 이용상(李龍祥)이 유명하다. 고려 고종 때 귀화한 그는 안남국(安南國·베트남)의 왕족이었다. 당시 안남국도 한자(漢字)를 쓰고 있었고, 중국식 한자 성도 갖고 있었다. 그의 이씨 성은 고려로 귀화한 후 취한 것이 아니라, 원래 그 나라 왕실의 성씨였던 것이다.      동남아 출신 귀화인 중에는 27대 충숙왕 때 남만인(南蠻人) 귀화인 왕삼석(王三錫)도 있었다. 남만인은 동남아 사람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왕삼석은 충숙왕이 원나라에 있을 때 의술(醫術)에 재능이 있다고 하여 가까워졌다. 그는 아첨과 속임으로 왕의 사랑을 받아 측근 신하가 되었다. 《고려사》는 그가 성질이 경망스럽고 간특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고 기록하였다. 그런데도 왕의 총애를 받아 왕실의 성을 하사받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란 고위 벼슬 자리에 올랐다.      조선시대에도 다양한 국적의 귀화인이 있었다. 초기에 장사도(張思道) 외 20여 명이나 귀화해 온 일이 있었다. 장사도는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예빈경(禮賓卿)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이 관직은 종3품 고위직이었다.      세종 때 귀화한 우신(禹信)이라는 남만인이 조선 여인을 얻어 살았다는 기록도 있다. 그밖에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태국인, 자바인, 타타르인 등이 귀화한 기록이 나온다. 《세종실록》에는 특히 회회인에 대한 기록이 자주 보인다. 멀리 중동지역에서 한반도까지 육로나 해로로 많이 왔던 것이다.      지금 일본 영토가 된 오키나와에서 온 귀화인 오보야고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는 배를 만드는 기술자였다. 그는 조선 여인에게 장가들려고 하였지만 조정에서 허가를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결혼 후 그가 자기 나라로 돌아갈까 하는 의심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조선에서는 외국인이 혼자 와서 정착하는 경우이면 장가드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오보야고는 계속 조선에 살겠다는 조건으로 결국 조선 여인과 결혼을 하였다.        歸化 倭人들    우록 김씨의 시조인 김충선의 초상과 유물.   조선은 홀로 온 귀화인 남자가 조선의 여자와 결혼하면 세금과 부역(賦役)을 면제해 주었다. 글을 잘 알면 관직도 주었다. 이런 배려가 있었음에도 가정을 꾸린 뒤 본래의 제 나라로 도망가는 자들이 있었다. 《세종실록》에 보면 신하들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린 기록이 있다.      〈이도을치(李都乙赤)가 귀화해 와서 벼슬이 4품에 이르렀는데도 임금의 은혜는 생각지 않고 본래의 나라로 도망하였다. 이런 불충(不忠)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흉악한 놈이므로 그의 처자(妻子)를 모두 천인(賤人)으로 만들어 뒷사람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소서.〉      또한 이런 기사도 있었다.      〈귀화 왜인인 변좌(邊左)와 그의 아들 변효충(邊孝忠), 변효생(邊孝生)을 의금부(義禁府)에 명하여 국문(鞠問)을 하였다. 변좌 등이 자신들의 직위가 낮고 녹봉이 박하다는 이유로 본토에 돌아가려 한 것이다.〉      주로 지리적으로 가까운 왜인들이 본래 살던 곳으로 돌아가려 해 문제를 일으켰다. 귀화인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조선인과 같은 성씨를 갖겠다고 조선 조정에 청을 올린 왜인도 있었다. 일본 구주(九州)지방에 살던 의홍(義弘)이란 왜인이었다.      〈저는 백제의 후손인데 조선인과 같은 성을 갖고 싶습니다. 청컨대 부디 성을 하사해 주시기 바랍니다.〉      조선에서 귀화왜인들이 취한 성은 이씨(李氏) 성이 많았다. 임진왜란 때 사고소우 등 15명에게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선조 28년 때 있은 일이었다. 그들은 화약제조, 포 쏘는 솜씨가 있는 왜인으로, 귀화해 조선인이 됐다.      중종 때는 귀화한 왜인 박산동개(朴山同介)가 있었다. 그는 거제도에 살면서 거제에 왜인들이 침입했을 때는 앞장서서 그들을 격퇴했다.      그런데 오늘날 이렇게 귀화한 일본인의 후손으로 알려진 성씨는 찾아보기 어렵다. 왜인으로 귀화해서 본관과 함께 알려진 성씨는 김충선(金忠善)이 시조인 김해 김씨(일명 우록 김씨)뿐이다.   본명이 사야가(沙也可)인 그는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의 선봉장으로 참전했으나, 조선의 문물을 흠모해 휘하 병사들과 함께 귀순했다. 임진왜란은 물론 이괄의 난, 병자호란 등에서 공을 세웠다. 이를 기려 선조(宣祖)는 김해를 본관으로 하는 김씨 성을 하사했는데, 원래 있던 김해 김씨와 구별해 ‘사성(賜姓) 김해 김씨’라고 한다.        요즘 귀화인들은…      고려와 조선에서는 귀화인들이 우리나라의 관습과 제도를 따라 본관과 성을 만들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을 따른다’는 원칙에 충실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은 그렇지 않다. 한글로 표기만 하되, 본래의 자기 성을 그대로 갖는 경우가 많다. 귀화인이 귀화국의 성씨 문화에 동화하지 않고, 원래의 성씨를 계속 유지하면 후대(後代)에게 자신의 조상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에 동화되지 못했다는 이질감을 후손에게 남겨줄 수도 있다. 출처 | 월간조선 10월호  
215    추석(한가위) 댓글:  조회:1641  추천:0  2015-09-26
추석(秋夕)        목록가기       1. 추석의 어원   추석은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로 한가위.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다. 한가위의 한은  "하다(大. 正)"의 관형사이고, 가위란 "가배(嘉俳)를 의미한다.   이때 가배란 "가부. 가뷔"의 음역(音譯)으로서, "가운데"란 뜻인데, 지금도 옛 신라의 땅인 영남지방에서는  "가운데"를 "가분데"라 하며, "가위"를  "가부", "가윗날"을 "가붓날"이라고 한다.     또 8월 초하루에서 보름까지 부는 바람을"8월 가부새 바람 분다"라고 한다. 이로써 미루어 볼때 가뷔. 가부는 뒷날 가위로 속전(俗轉)된 것으로 알 수 있으니, "추워서"를 현재에도 "추버서"로 하는 것에서도 이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한가위란 8월 중에서도 정(正) 가운데란 뜻이니, 정중심(正中心)을 우리가 "한가분데" 또는 "한가운데"라고 하는 것과 뜻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한가위를 추석, 중추절(仲秋節). 중추가절(仲秋佳節)이라고 한 것은 훨씬 후대에 와서 생긴 것이다. 즉 중국으로부터 한자가 전래되어 중추(仲秋)의 추(秋)자와 월석(月夕)의 석(夕)자를 따서 추석(秋夕)이라 한것으로 생각된다. 2. 추석의 유래   추석의 기원에 대해서 정확히는 밝힐 수 없지만, 고대로부너 있어 왔던 달에 대한 신앙에서 그 뿌리를 짐작할 수 있다. 고대사회에 있어 날마다 세상을 밝혀주는 태양은 당연한 존재로 여겼지만 한 달에 한번 보름달이 이 되는 달은 고마운 존재였다.   밤이 어두우면 맹수의 접근이나 적의 습격도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므로 인간에게 있어 캄캄한 밤은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이러한 가운데 보름달은 인간에게 있어 고마운 존재였고, 그 결과 보름달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게 되었다.   그런데 보름달 중에서도 가장 큰 보름달을 이루는 8월 15일인 추석이 큰 명절로 여겨진 것은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 큰 보름달 아래에서 축제를 벌이고 먹고 마시고 춤추었으며, 줄다리기. 씨름. 강강수월래 등의 놀이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일년 중에서 가장 달이 밝은 :한가위"는 이미 고대에 우리 민족 최대의 축제로 여겨지게 되었고, 후에 와서 의식화(儀式化)되므로 명절로 제정되어 오늘날 까지 전승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가위의 기원에 대해서는 에 잘 나타나 있다.   지금부터 약 2천년 전인 신라 제3대 유리왕  때부터라고 한다. 유리왕은 백성들이 기쁜 마음으로 즐겁게 살기를 바라는 "도솔가"를 지어 부르게 하였고, 여러 가지 산업을 장려하기도 하였는데, 그가 일으킨 산업 중에 유명한 것이 바로 길쌈이었다.   왕은 길쌈 장려를 위해 6부의 부녀자들에게 내기를 시켰다. 우선 6부를 두 패로 나누어 편을 짜고, 왕녀 두 사람을 뽑아 각각 부내(部內)의 여자들을 거느리게 한 다음, 7월 16일 16일부터 날마다 6부의 부녀자들이 뜰에 모여 길쌈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8월 15일에 이르러 그 공이 많고 적음을 살펴 왕이 판결을 내리면, 진 편에서는 술과 밤을 장만하여 이긴 편을 대접하였다고 한다.  온 갖 푸짐한 음식을 마련해 놓고, 양편은 모두 둥그런 원을 그리며 둘러앉아 함께 먹으며 노래와 춤으로 유희를 즐겼는데, 이를 가배(가배)라 한다.   서라벌에서 유래한 ""한가위" 라는 신라의 명절이 지금껏 전승되어 계속이어져 내려온 것이, 오늘날 우리나라 한가위의 기원이요 유래라 할 수 있다.    3. 추석의 풍속   추석에 행해지는 세시풍숙으로는 벌초. 성묘. 차례. 닭싸움. 소놀이. 거북놀이. 강강수월래. 원놀이. 가마싸움. 씨름. 반보기. 올게심니. 밭고랑 기기 등을 들 수 있다.  (1) 벌초와 성묘   추석에 조상의 무덤에 가서 여름동안 무성하게 자란 잡초를 베어주는데, 이를 벌초라 한다.  (2) 차례    추석 이른 아침에 사당을 모시고 있는 종가(宗家)에 모여 고조(高祖)까지의 차례를 지낸다.다.  차례 지내는 절차가 설날과 다른 것은 흰떡국 대신 메[밥]를 쓰는 점이다. 제물은 신곡으로 만들어 진열하며, 고조 이상의 윗대는 10월에 시제라 해서 묘에서 제사를 지낸다.  (3) 소놀이   추석날 차례를 마치고 난뒤 알맞은 시간에 소놀이는 진행된다. 먼저 마을 사람들로 구성된 농악대가 풍물을 울리면 마을 사람들이 하나둘씩 모여든다. 상쇠의 선도에 따라 한바탕 신나게 풍물을 울리며 어우러져 놀다가 소놀이가 시작된다.   두 사람이 허리를 굽히고 그 위에 멍석을 뒤집어 씌우며, 뒷사람은 큰 새끼줄로 꼬리를 달고, 앞사람은 막대기 두 개로 뿔을 만들어 소이 시늉을 한다. 소를 끌고 농악대와 마을 사람들은 그 마을에서 가장 부농집이나 그 해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사람의 집으로 찾아간다. 대문 앞에서 "소가 배가 고프고 구정물을 먹고 싶어 왔으니 달라"고 외치면 주인이 나와서 일행을 맞이한다. 소를 앞세우고 일행은 앞마당으로 들어가 농악을 치고 노래하고 춤추고 놀면 주인집에서는 술과 떡과 찬을 차려 대접한다. 마을 사람들은 한참 놀다가 다시 소를 끌고 다른집으로 향한다. 이렇게 여러 집을 찾아가  해가 질 때까지 어울려 논다.   소 놀이를 할 때는  당년에 농사를 가장 잘 지은 집 머슴을 상머슴으로 뽑아 소등에 태우고 마을을 돌며 시위하는 경우도 있다. 농사를 천하의 대본으로 알고 살아온 농경민족에게 있어 농사를 잘 지어 풍작을 거두었다는 것은 큰 공이니, 위로하고 포상하는 뜻에서 소에 태우는 영광을 주는 것이다.   한 번 상머슴으로 뽑히면 다음해 머슴 새경을 정할 때 우대를 받게된다.    (4) 원놀이. 가마싸움   옛날 서당 교육은 훈장을 초빙해서 가르치는 것이었다. 명절이 되면 훈장도 고향에 가서 차례. 성묘를 하게되므로 서당은 며칠 ㅜ시게되고 학동들은 자유롭게 놀 수가 있다. 이럴 때에 학동들에 의해서 원놀이와 가마싸움이 있게된다.  원놀이란 학동들 중에서 공부를 많이 했고 재치있는 사람을 원님으로 선발하고 나머지 학동들은 뱃성이 되어 원님께 소장을 내어 그 판결을 받는 놀이인데, 오늘날의 대학에서 모의 재판과 유사하다.   이때에 현명하고 지혜로운 원님은 사건을 잘 해결하지만,  서투른 원님은  백성들의 놀림감이 된다고 한다. 장차 과거에 등과해서 벼슬을 하고 백성을 다스려야 할 학동들의 놀이로서는 매우 적격이다. 가마싸움도 학동들이 주가되어 행하는 놀이이다. 훈장이 없는 틈을 타서 가마를 만들어 이웃마을 학동들과 또는 이웃서당의 학동들끼리 대결을 하는 놀이이다. 가마를 끌고 넓은 마당에 나아가 달음질해서 가마끼리 부딪쳐 부서지는 편이 지게 되는데, 이긴 편에서 당년에 등과가 나온다고 한다.  (5) 반보기 추석이 지난 다음, 서로 만나고 싶은 사람끼리 장소와 날짜를 미리 정하고 만나는 것을 반보기라 한다. 옛날에 시집간 여자들은 마음대로 친정 나들이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모녀 사이에 중간지점을 정해서 서로 즐기는 음식을 마련하여 한나절 동안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푸는 것이 반보기인 것이다. 이와같이 반보기란 서로 중간 지점에서  한나절 동안만 상봉하여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다 풀지 못하고 반만 풀었다는데서 나온 말이다. 또한 마을의 여인들이 이웃 마을의 여인들과 경치 좋고 풍광이 수려한 곳에 집단으로 모여 우정을 두터이 하며 하루를 즐겼는데, 이 때에는 각 마을의 소녀들도 단장하고 참여하므로 자연스럽게 며느리감을 고르는 기회가 되기도 하였다.  (6) 올게심니 추석을 전후해서 잘 익은 벼, 수수, 조 등 곡식의 이삭을 한 줌 베어다 묶어 기둥이나 대문위에 걸어두는데 이것을 올게심니라 한다. 올게심니를 할 때에는 주찬(酒饌)을 마련하여 이웃을 청해서 주연을 베풀기도 한다.  올게심니한 곡식은 다음해에 종자씨로 쓰거나 떡을 해서 사당에 천신하거나 터주에서 올렸다가 먹었다. 올게심니를 하는 것은 다음해에 풍년이 들게 해달라는 염원의 뜻이 담겨져 있다.  (7) 밭고랑 기기 전라남도 진도에서는 8월 14일 저녁에, 아이들이 밭에 가서 발가 벗고 자기 연령수대로 밭고랑을 기는 풍숙이 있다. 이 때에 음식을 마련해서 밭둑에 놓고 하는 수도 있는데, 이렇게 밭고랑 기기를 한 그 아이는 몸에 부스럼이 나지 않고, 또한 밭농사도 잘된다는 것이다.                  시골 마당에서의 윷놀이                차례 상                       방에서의 윷놀이   (8) 기타 풍속  추석은 시기적으로 곡식과 과일 등이 풍성한 때이므로 이즈음에는 여러 가지 시절 음식이 있다. 추석에는 차례를 지내기 위해서 제찬을 준비하는데, 제찬은 설날과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추수의 계절이라 햇곡식으로 밥과 떡, 술을 만든다. 철이 늦은 해에는 미리 밭벼[山稻]를 심었다가 제미(祭米)로 쓰기도 한다. 이렇게 햅쌀로 밥을 지으면 맛도 좋고 기름기가 있으며, 떡도 맛이 좋다.  추석의 대 표적인 절식으로는 송편을 빼놓을 수가 없다. 송편 속에는 콩· 팥· 밤· 대추 등을 넣는데, 모두 햇것 으로 한다. 열 나흗날 저녁 밝은 달을 보면서 가족들이 모여 송편을 만드는데, 송편을 예쁘게 만들면 좋은 배우자를 만나며, 잘못 만들면 못생긴 배우자를 만나게 된다고 해서 처녀, 총각들은 송 편을 예쁘게 만들려고 노력한다.   또한, 임신부의 태중 아이가 여자인지 남자인지 궁금할 때에는 송편 속에 바늘이나 솔잎을 가로 넣고 찐 다음, 한쪽을 깨물어서 바늘의 귀쪽이나 솔잎의 붙은 곳(나무에 붙었을 때의 접착부분)을 깨물면 딸을 낳고, 바늘의 뾰족한 곳이나 솔잎의 끝쪽을 깨물면 아들을 낳는다고 하여, 이를 점치기도 한다.   특히 올벼로 만든 송편은 올벼 송편이라 부른다. 추석의 차례상에서 빠질 수 없는 또 하나의 것이 바로 술이다. 추석 술은 백주(白酒)라고 하는데, 햅쌀로 빚었기 때문에 신도주(新稻酒)라고도 한다. 추석 때는 추수를 앞 둔 시기이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이 풍족해진다. 사람들의 인심 또한 후해서 추석 때에는 서로 술대접을 하는 수가 흔하다. 또 이 때의 가장 넉넉한 안주로 황계(黃鷄)를 들 수 있는데, 봄에 알을 깬 병아리를 길러서 추석 때가 되면 잡아먹기에 알맞게 자란다.  또 옛날에는 명절에 어른에게 선사하는 데에 닭을 많이 썼다. 친정에 근친을 하러 가는 딸은 닭이나 달걀꾸러미를 가지고 갔으며, 경사가 있을 때에도 닭을 선물했으며, 반가운 손님이 찾아오면 손쉬운 닭을 잡아 대접하였다. 특히 사위가 찾아오면 장모는 닭을 잡아 대접하는 일이 흔했다. 녹두나물과 토란국도 추석의 절식이다.녹두나물은 소양(消陽)한다고 하지만 잔치상에 잘 오르고, 토란은 몸을 보한다고 해서 즐긴다.                      ▲위로가기             목록가기                          
214    미국의 바지 벗겨보자! 어떤 괴물이드냐? 댓글:  조회:2714  추천:0  2015-09-20
미국의 바지 벗겨보자! 어떤 괴물이드냐?   一、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몇가지   1, 미국에는 “련방저비위원회(美国联邦储备委员会简称美联储)”라는 것이 있는데, 국가의 중앙은행에 상당하다. 그의 직능은 미국의 화페정책을 제정하고 실시하며, 금융복무를 제공하며, 금융체계를 유지하고 보호하는 것이다. 이름은 “련방”이라 하지만, 기실은 사인 은행가와 사인 기업집단 총재들로 구성된 대 재벌들의 핵심조직으로서, 순수한 사적인 금융조직이며, 정부의 공제를 받지 않고, 그 어떤 법률의 예속도 받지 않는다.   2, 미국에는 국영은행이 없다. 우리들이 익히 알고있는 딸라는 모두 美联储에 의하여 발행되는 것이다. 미국정부는 화페발행 권한이 없고, 오직 국채를 발행할 권한만 있을 뿐이다.   3, 미국정부는 美联储로부터 딸라를 대출 받아서, 미국과 전세계 범위에서 유통시키며, 정부의 국채를 담보로 저당한다.   4, 미국국민들이 매년 바치는 세금중에서 가장 많은것이 개인소득세인데, 이 방대한 세금들은 정부의 재정수입으로 들어가는것이 아니라, 직접 美联储의 계자에 들어가며, 정부가 딸라를 대출받은 리식으로 계산된다.   二、참으로 괴상한 나라   1864년 4월 14일 저녁, 웨싱톤의 한 극장에서 연원차림의 한 사나이가 곧바로 링컨대통령의 관람석을 찾아갔다. 그는 신사답게 링컨에게 인사를 건네고는 천천히 총을 꺼내여 링컨을 향하여 침착하게 여덟발을 발사하였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종용히 극장을 떠나가 버렸다. 이튿날 미국 력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은 끝내 숨을 거두었다.   링컨이 왜 죽었는가? 주요한 원인은 그가 중앙은행을 세우고, 정부의 이름으로 화페를 발행했기 때문이였다. 링컨이 죽자 중앙은행도 정부화페도 모주 페지되였다.   1963년 11월 22일, 요한 케네디 대통령이 상엄한 호위를 받으며 거리를 질주하던 자기의 차에서 총 세발을 맞고 당장에서 숨졌다.   케네디는 왜 죽었는가? 그는 대통령 11110호명령을 반포하여, 정부의 이름으로 백은권을 발행하였으며, 미국의 방대한 백은 저비량으로 사인 은행가들을 제압하려 시도했기 때문이였다. 컨니디가 죽자 11110명령도 백은권도 모두 페지되였다.   미국의 길지않은 200여년의 력사를 살펴 보면, 력대의 대통령들이 은행 금융거두들과 화페 발행권을 두고 판가리 싸움을 벌리여 왔으며, 선후하여 모두 일곱명의 대통령이 암살당했다. 이것은 미국병사들이 노만디 등륙작전에서 죽은 비례보다도 더 높다. 이 일곱명의 암살된 대통령들은 저마다 자기의 특수사연이 있었지만, 공통점이라면 모두가 미국의 기존 화페정책에 칼을 댔다는 점이다. 미국의 화페정책 혁명을 위하여 선후하여 일곱명의 위대한 대통령들이 자기의 보귀한 생명을 바쳤다. 하지만 미국의 화페정책 혁명은 오늘까지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매기의 미국정부에서는 여전히 자기로 화페를 발행하지 못하고, 모두 美联储한테서 빚을 내여 써야만 한다.   그리하여 미국은 결국 빚을 지어 살아가는 괴상한 나라로 되였다. 세계의 최강국이며 유일한 패권국으로서 얼마나 격에 맞지않는 일인가?   오늘, 미국의 국채중에서 외국에 빚진것이 약 3만억 딸러가 되는데, 중국에서 약 1.3만억 딸러의 채권을 사 들이여, 세계 제1의 딸러채권국으로 되였다. 그런데 이것이 대단한것이라고는 여기지 마라. 미국정부가 美联储에 빚진 채무는 무려 44만억딸러나 된다. 이 채무는 해마다 증가되는 추세이며, 그 어느날에 빚을 다 갚고, 쨍-하고 볓들날은 영원히 올수 없게 되였다.   미국에서는 정치, 외교, 군사, 경제가 완전히 美联储의 자본에 의하여 공제되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곰상곰상 美联储의 손자질을 해야한다. 대통령도 美联储의 동의를 거쳐야 될수있고, 대통령의 정책도 美联储의 동의가 있어야 실행될수 있다. 그런데 美联储는 필경은 정부가 아니고, 방대한 영리성 사인집단 조직으로서, 소유의 목적은 오직 더욱 큰 리윤을 얻기위한 것뿐이다.   미국정부에서 권리가 가장 큰 자리가 당연히 대통령 자리이다. 그런데 그들이 대통령이 되기전의 경력을 살펴보면 모두가 어떤 큰 경제실체에서 주요책임을 맡은적이 있으며, 그들이 대통령이 되여 실행하는 정책도 대체적으로 그들 배후의 리익을 위하여 복무하게 된다.   부쉬 부자의 경우를 살펴보자; 애비 부쉬는 대통령이 되기전에 휴스톤 석유공사의 창시인이자, 총 대표로서 미국의 석유계 리익과 깊은 인연이 있었다. 그리하여 그가 대통령이 되자, 우선 자기의 석유리익에 방애가 되는 이라크를 길 들이게 된 것이다.   그 다음  아들 부쉬를 보자. 그는 미국 력대 대통령 중에서 학벌이 가장 높은 대통령인데, 그도 대통령이 되기전에 덱사스주에서 석유회사를 경영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부쉬 에네지회사를 포함하여, 여러 석유회사의 총재로 있었다. 그리하여 그도 대통령이 되자 황당한 구실을 만들어 가지고, 자기의 말을 잘 듣지않는 이라크 싸담을 잡아 죽이게 된것이다.   현실적으로 지금의 미국 대통령은 결코 미국 국민들의 리익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기실 미국 재벌들의 리익을 대표하며, 美联储의 리익증식을 보증해 주는 괴뢰이다. 미국은 세계를 몇십번 훼멸시킬수 있는 방대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금 대단히 방자하여 졌다. 그들은 자기들의 리익을 위해서라면 남의 나라를 서슴없이 무장침략 할수 있고, 그 어떤 국제표준도 제구미에 맞추어 규정한다. 동방사람들의 리념으로는 도저히 용납할수 없는 일도 그들에게는 아주 당연한 일로 된다.   자기들의 계획이 순리롭게 실행되게 하기 위하여, 美联储에서는 우선 미국 국민들에게 많은 대출을 내주고, 많은 우대조건을 주어 그들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국민으로 만들었다. 중국에서는 벌어서 소비하지만, 미국에서는 먼저 소비하고 벌어서 갚게 만들었다. 그러다가 일단 필요할땐 국민들을 전쟁으로 마구 내몰아 대포밥이 되게 한다. 누가 당신들더러 그렇게 많은 빚을 지라 하였는가? 대포밥이 되여도 너무 억울하진 않을 것이다.   중국에서 백성들이 가장 증오하는 것이 정부 관원과 상인이 결탁하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에서는 이런 문제가 존재하지 않는다. 미국에서는 정부의 관원이자 상인이고, 상인이자 정부의 관원이 될수있다. 대 기업집단의 총재가 마음만 먹으면, 선거자금을 내고 선거에 참가하여 의원으로 될수 있고, 주장으로 될수 있으며, 심지어 대통령까지 될수 있다. 일년에 30만 딸라의 봉금만 보고 대통령질 하려는 멍청이 대통령은 아마 없을 것이다. 그들은 대통령의 특권을 리용하여 자기가 예속되여 있는 경제집단의 리익을 우선적으로 돌보아 줌으로써, 그로부터 차례지는 거대한 리익을 기본 목적으로 하는 것이다.   나뽈레옹에게 한가지 명언이 있었다; “금전은 조국이 없다. 금융가는 애국이 무엇이고, 고상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들의 유일한 목적은 리익을 얻는 것뿐이다.”   아도부 히틀러는 원래 반 유태주의자가 아니였다. 그런데 그가 독일의 정치무대에 오른후에, 경제위기속에서 90%이상의 백성들이 모두 빈곤과 기아에 허덕이는데, 유독 유태인들만은 여전히 횡재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들은 투기모리하고 고래대을 놓고, 의원들과 관원들을 수매하여 자기들 집단을 위하여 복무하게 하면서, 전반 독일의 경제를 맘대로 가지고 놀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히틀러의 야심실현을 크게 방해하였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우선 이 유태인들의 기득리익집단을 없애 버리려고 결심하였다. 후에 히틀러의 이 심리가 기형적으로 팽창되여 변태적인 종족 근멸주의자가 되였지만, 그로하여 그는 성공적으로 독일의 경제권리와 국가권리를 모두 자기손에 장악하게 되였다.   히틀러는 6년의 시간을 들여 모든 전쟁준비를 마쳤는데, 그 기간 그를 대폭 지원해 준 세력이 바로 스위스의 국제청산은행과 미국의 방대한 사인은행조직들이였다. 심지어 2차대전이 가장 치렬할때에도 대량의 미국의 자금들이 스위스의 국제청산은행을 통하여 흐르는 물처럼 독일의 계좌에 흘러 들어왔다. 당시의 형편에서 전쟁이 끝나면 가장 큰 리익을 차지할 준비가 아직 되여있지 않는데, 독일이 너무 일찍 동맹국에게 지게 할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독일을 방조하여 전쟁을 좀더 지연시키고, 그사이 가장 큰 떡을 차지할 준비를 충분히 하기 위하여 미국의 은행가들은 도리여 자기 정부의 적을 방조하여 주었던 것이다.   三、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   많은 미국사람들은 매우 이상해 하고 있다; 자기들은 예수를 신봉하면서 마음이 선량하고, 문명하고 남을 돕기를 즐기며, 또 세계의 가난한 나라를 많이 도와주고 있는데, 왜서 세계적으로 자기들을 증오하는 나라가 그렇게 많은가? 그들은 아마 진짜 몰랐을 수도 있다. 그들은 자기도 모르게 美联储의 대리인이 되여 세계와 거래하게 되면서 세계의 미움을 샀던 것이다.   미국의 막후는 방대한 美联储가 통치하고 있다. 지금 그들이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은 과거 짐승을 사냥하듯이 흑인노예들을 마구 잡아 들이던 때와는 다르며, 로 식민제국때와도 다르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그들이 세계를 략탈하는 수단도 많이 신사스러워 졌는데, 특히 세계 발전도상 나라들을 략탈하는 수단이 원래의 전함과 대포를 앞세우고 강박적으로 략탈하던 데로부터 지금은 먼저 도와주고 후에 받아가는 아주 문명한 수단을 쓰고 있다. 그들은 “국제화페기금조직”, “세계은행”, “아세아발전은행” 등 세개 금융기구를 활용하여 정채로운 현대 문명략탈 삼부곡을 연출한다;   제일부곡; 먼저 고급 경제자객(외교관, 정부대표단, 대통령…)을 파견하여 대방의 나라를 방문한다. 정부수뇌들과 만난 자리에서 그 나라를 방조하여 경제와 군사등 각 방면에서 대폭 발젼시켜 주겠다고 구슬린다. 대방나라 정부를 설복하여 그 나라가 발전하려면 여사여사한 큰 항목이 필요한데 자금은 자기들이 우혜조건으로 대출하여 주겠다고 담보한다.   제이부곡; 대방나라에서 대출을 받는데 동의하면, 진일보로 그 항묵의 공정을 자기네 상관 회사에서 맡겠다고 요구한다. 그러니 미국으로선 기실 이쪽 호주머니 돈을 저쪽 호주머니에 넘겨 넣은 셈이 된다.   제삼부곡; 몇년후 공정이 완공되여 너도 좋고 나도 좋고, 공동으로 크게 경축한다. 그때로 부터 그 나라에서는 몇십년간의 국민수입을 몽땅 빚을 갚고, 리식을 무는데 써야한다. 만일 빚을 갚지 못하면 어떻게 되는가? 미안하지만 저당했던 대형기업, 은행, 심지어 토지까지 몽땅 몰수한다.   이것은 미국이 빈손으로 승냥이를 옭아 잡는 고명한 방법인데, 때로는 이 방법도 막힐때가 있다. 바로 그들이 말하는 “망나니 국가”의 경우이다. 이런 나라에서는 작심하고 미국의 돈을 쓰지 않으며, 리식도 물지 않는다. 그러면 미국에서는 진일보의 내정간섭과 군사간섭을 고려하게 된다.   1, 미국중앙정보국에서 책임지고, 요언을 산포하여 반대파를 부추기면서 소위의 분홍색 혁명을 일으킨다. 군중을 사촉하여 강박적으로 소위의 망나니 지도자를 파직시키고, 자기말을 잘 듣는 대리인이 대통령으로 되게 한다. 그다음 그가 다시 미국의 원조를 받게 한다. (이집트, 우크란의 경우)   2, 첫번째 수단이 막히면 직접 반대파를 무장시켜 내부 군사충돌을 일으키여, 그 소위의 망나니 지도자를 없애 버린다. 이것으로 후임 지도자에게 한번 본때를 보여주는 셈이다. (리비야의 경우)   3, 두번째 수단까지 효험이 없으면, 직접 군사간섭을 감행한다. 강력한 미군의 공격앞에서 버텨내는 나라는 거의 없다. 그 다음 그 망나니 지도자를 체포하여 “반인류죄”로 심판하여 죽이거나, 종신 감금한다. 그리고는 자기말을 잘 듣는 대리인을 내세워 대통령이 되게하고 많은 원조를 제공한다. (이라크와 유고슬라비야의 경우)   그 어느 나라가 일단 미국의 원조를 받아 들였다면 그때로 부터 어쩔수 없이 미국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만 한다. 백여년간의 전쟁 피해로 거의 페헤가 되였던 중국에서, 1949년 공화국이 성립되면서 제국주의 렬강들의 장기적인 봉쇄를 당했지만, 모택동 주석의 자력갱생의 정신으로 중국은 신속히 원기를 회복할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많은 발전도상의 나라들은 아무리 발전하여도 빈궁과 락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근본원인이 바로 그들에게는 자력갱생의 정신이 없고, 미국의 원조를 렴가 만찬으로 생각하고 받아 드렸기 때문이다.   2003년 태국의 총리 타신은 나라가 “국제화페기금조직”에서 대출받았던 120억 딸러를 몽땅 갚았다. 이 돈을 갚기 위하여 태국의 주가가 떨어지면서 입은 손실은 이루 헤아릴수 없이 컸다. 타신은 태국의 국기아래서 다시는 국제 은행가들의 원조를 받지 않겠다고 장엄하게 선서하였다. 심지어 태국의 기업들에서 국제은행에 빚진돈을 갚지 말것을 선동하였다. 2006년 미국은 태국의 군부를 사촉하여 정변을 일으키여, 타신을 쫓아 버렸다.   이 외에 미국이 남의 나라 재물을 략탈하는 최고급 수단으로는 또 경제포말을 일으키는 수단이 있다.   한때 일본의 경제가 신속히 발전하여 총 경제량이 방대하여 지면서 미국 딸러를 위협하게 되였다. 그러자 미국은 일본을 핍박하여 엔 가치를 올리게 하고는, 일본의 딸러 보유량을 줄였다. 그 다음 미국은 조치를 대여 엔의 포말을 일으키여 엔 가치가 형편없이 떨어지게 하고는 자기들이 보유한 일본 채권을 몽땅 일본에 되넘겨 팔았다. 이렇게 되자 거의 배로 증가된 딸러의 지불량을 일본에서는 보장할수 없었다. 엔의 가치는 진일보 떨어져, 많은 일본 대기업들이 파산되였다. 일본의 경제가 붕괴되자 미국은 다시 딸러의 가장 낮은 가격으로 일본의 기둥산업들을 사들여서는 일본경제를 틀어 쥐였고, 양을 길러 털을 깎아내는 식으로 영구적으로 리윤을 보장받게 되였다.   그런데 미국의 이 최고급 수단도 한국에서는 실패하고 말았다. 미국의 수단에 빠져, 한국돈이 페지처럼 되였을때, 한때 망국의 설음까지 겪었고, 나라의 보귀함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있는 한국의 국민들은 비장한 결심을 내리고 전민이 동원하여 자기몸의 금은 장식품들을 서슴없이 나라에 바치여 외채를 물게 하였다. 물론 대부분의 딸러는 중국에서 지원하여 주어서 위기를 넘길수 있었지만, 한국인들의 그 애국정신만은 일본인들의 애국심보다 얼마나 더 고상하고 문명한지 모른다.   四、미국이 가장 무서워 하는 것   세계적인 정부를 건립하고, 세계적인 경제질서를 건립하는 것이 아마도 미국 금융집단이나 은행집단의 최종 목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공산주의 리론처럼 세계인민들이 모두 공동히 잘 살게 하려는 것이 아니다. 세계의 그 어느나라의 재부도 마음대로 략탈하여 자기 주머니에 넣을수 있게 하려는 것이다. 금융은 오직 한가지 목적밖에 없다; 바로 재물을 모으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천적이 있었다. 바로 칼 맑스가 창시한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다. 19세기 말엽, 독일의 철학가 칼 맑스는 자기의 “자본론”에서 자본주의의 본질을 폭로하고, 자본주의가 필연코 멸망한다는 것을 제시하였다. 그러면서 그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 리론을 창시하였다.   그후 레닌에 의하여 칼 맑스의 리론이 실천에 옮겨 지면서, 세계에 처음으로 소련이라는 사회주의 나라가 건립되였다. 그후 동유럽과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아세아에 사회주의 진영이 서게 되면서 근 한세기 동안 미국의 금융가들은 악몽에 시달려야만 하였다.   미국의 금융가들에게 있어서 사회주의 리론의 가장 요해적인 부분이 바로 나라가 경제를 공제하고, 나라가 금융을 공제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자기들의 세계금융제국의 꿈은 산산히 박산나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계에 사회주의 제도가 서게 되면서부터, 미국의 금융가들은 사회주의와 생사 판가리 싸움을 걸어 왔다. 오랜 겨름끝에 미국의 금융가들은 사회주의를 힘으로는 소멸할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평화연변의 전략을 취하였다. 끝내는 소련을 해체시키고, 동유럽의 사회주의 진영을 일거에 소멸해 버리는 휘황한 성과를 거두었다. 미국의 금융가들은 이로하여 얼마나 기뻐 했을가?   지금 미국과 세계 자본주의 금융가들의 목표는 일제히 중국에 집중되였다. 그들에게 있어서 중국은 참으로 침을 흘릴 정도로 욕심이 나는 비계덩이다. 그들은 중국에서도 소련에서처럼 공산당을 밀어내고 나라의 해체에 성공한다면 참으로 멋질텐데! 하고 꿈꾸고 있다.   미국의 금융가들은 중국에서 공산당을 밀어내고, 자본주의를 실행시키기 위하여 장시기 동안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많은 공세를 들이 대여 왔다. 그리하여 그들이 중국에서도 이미 괜찮은 성과를 거두었다고 해야 할것이다. 현재의 중국에서는 당년에 모택동 주석이 가장 두려워 했던 자본주의 복벽이 이미 기본상 현실로 되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중국식 사회주의이고, 오직 이길만이 중국을 살리고, 공산당을 살리고, 자본주의 금융가들을 이길수 있는 길이라는 것을 모택동 주석도 미처 몰랐을 것이다.   이름이야 사회주의던 자본주의던 무슨 상관이랴? 오직 이 나라에서 공산당이 계속 청렴하게 집정하고, 정부에서 시종 경제를 주도하고, 은행을 튼튼히 통제한다면, 의심할바 없이 장차 세계는 중국의 것이다.     현용수 작성 2015-09-20    
213    삶의 질 못지않게 죽음의 질도 중시해야... 댓글:  조회:1886  추천:0  2015-09-16
호스피스 운동본부 김명자 “‘웰다잉 권리’ 찾아줄 것” 시대 따라 다른 사망기준…“죽음도 삶만큼 독창적” 호스피스 비용 하루 2만원 안팎 낸다 말기암 환자 15일부터 호스피스 건보 적용…월 44만원 “암 아닌 말기환자도 호스피스 이용” 사랑 가득한 호스피스 병동…사별한 유족의 마음까지 치유 죽음이 곁에 있기에 오늘의 삶이 찬란한 것을
212    《천불지산》은 아름다운 전설 댓글:  조회:4126  추천:0  2015-08-17
《천불지산》은 아름다운 전설     현용수 작성 어제 초청을 받고 《천불지산술》 출시회에 참석하였다. 이술과 《어곡술》이 함께 출시되였는데, 《어곡술》은 결혼이나 회갑 등 희사잔치 전문용으로 만들었고, 《천불지산술》은 주로 장례나 제사 전문용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무형문화재《조선족 상례풍속》대표전수인으로서 감사의 마음을 표달하기 위하여, 말로나마 가장 아름다운 말들을 골라 진심으로 축하하여 드렸다. 그러면서 《천불지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몹시 긍금증이 생겼다. 돌아와서 인테넷을 뚜지며 찾던중, 길림신문 2015년7월2일자, 《지명은 》라는 문장을 보게 되였다. 이 문장에서는 당지에 이 산을 두고 《천불붙이》라는 토백이 지명이 있었다는 선색을 제공하였다. 보귀한 선색이 아닐수 없다. 그러면서 문장은 《일부 학자와 문인들은 리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설화까지 억지로 꾸며가며, 지명을 천불지산으로 왜곡하고있다》고 질타하였다. 나는 이 문장을 보고 《천불지산》 지명의 유래에 대하여 대체적으로 짐작하게 되였으며, 나의 경우에 이 지명에 대하여 력사적 료해보다는 문화적 료해가 더욱 의의가 깊겠다고 느껴졌다. 그러면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 몇가지 상식적인 문제를 반드시 명확히 구별해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첫째: 력사와 전설의 구별 력사란 지난시기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들을 가리킨다. 중국에서는 력사를 연구함에 있어서 엄격히 력사유물론을 준수한다. 즉 사서기록이나 력사자료 및 고고학적 발견에 의한 확실한 증거를 기초로 한다. 여기에서는 그무슨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든가, 《그리 하였을것이다》 등등의 추측이나 가설을 용납할 여지가 없다. 아무리 충분하고 당연한 도리로 해석할수 있는 사건이라 하여도 직접적인 실제증거가 확실하지 않다면 결코 력사로 취급할수 없다. 문장에서는 《천불붙이》에 대하여 전편을 통하여 많은 해석을 하고 있지만, 그 말이 어떻게 《천불지산》으로 되였는지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일찍 일제식민지 시대에 고유지명인 천불붙이 지명을 한자로 행정서류에 적는 과정에 천불지산 (天佛指山)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지여 옛 간도지도에 天佛指山으로 표기된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하였는데, 충분히 가능한 일이겠지만 력사적 증거로 보기엔 아직 거리가 멀다. 전설이란 지난시기에 있었다고 전해 내려온 이야기들을 말한다. 전설도 때로는 증거를 필요로 하지만 력사처럼 직접적인 증거가 크게 필요없으며, 사람들의 주관의사에 따라 과장된 성분이 많다. 그러면서도 전설은 력사의 보충역활을 한다. 즉 어떤 력사적 사물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찾을수 없을 경우, 왕왕 전설로 해석된다. 이를테면 자고로 중국인을 《룡의 전수인(龍的傳人)》, 혹은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고 하였는데, 후날 그 확실한 력사적 증거를 찾을길이 없었다. 그리하여 아름다운 신화가 만들어져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오늘까지 《천불지산》지명의 유래가 력사적으로 확실하게 증명되지 못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일부 학자와 문인들이 리성계, 김종서, 무학대사, 지장보살 등 성인들의 아름다운 설화까지 꾸며가며, 이 산을 신비화하였는데, 결코 비난받을 일이 아니라 크게 고마운 일이라고 해야 할것이다. 다만 그것이 력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전설이라는 점만 명기하면서 말이다.   둘째: 과학과 전통문화의 구별 오늘에 와서 과학적 도리는 유일 정확한 도리로 오식되여 진리와 거의 동의어가 되여 있다만, 기실 과학이란 일종의 방법론일 뿐이며, 시기 제한성과 환경 제한성이 강하며, 결코 만능이 아니다. 그러므로 과학적 도리라고 하여 반드시 真理인것은 아니다. 진리란 원래 종교에서 나온 추상적인 말인데, 절대적으로 정확한 도리라는 뜻이다. 그러나 세계에는 기실 절대적인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맑스주의가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미국에는 적합하지 않고, 미국에서는 민주주의가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중국에는 적합하지 않다. 백성들은 돈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관원들은 권리가 진리라고 주장하며, 불교에서는 욕심 버리는것이 진리라고 주장하고, 도교에서는 자연에 맡기는 것이 진리라고 주장하며, 유교에서는 사람마다 책임 다 하는것이 진리라고 주장한다. 그러니 절대적 진리가 어디에 있는가? 근대 유럽의 산업혁명을 계기로, 뉴톤, 와트, 에디손 등 대 발명가들에 의하여 과학적 연구방법이 탄생하였다. 그러니 과학의 력사는 이제 근근히 몇백년밖에 되지 않는다. 과학적 연구방법이란 간단하게 말하면 여러가지 사물에 대한 반복적인 실험과 증명을 통하여, 보편성 규률과 특수성 규률을 찾아내여, 定律, 定理 혹은 论文의 형식으로 체계화, 규범화, 리론화 시키는 것이다. 물론 과학적인 것이 가장 휼륭한 것이고, 가장 효과적인 것이라는 것은 이미 몇백년의 세계적인 근대사와 현대사가 증명하였으며, 현실에서도 계속 증명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의 세계적 기술연구 령역에서 과학이 주도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세계는 결코 과학이 전부가 아니며, 과학을 유일표준으로 하는 단일세계가 아니다. 세계에는 과학으로 해석할수 없고, 또는 과학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많은 종교와 전통문화들이 존재한다. 과학으로는 종교를 해석할수 없다. 과학으로 전통문화를 해석하기에도 적합하지 않다. 중국의 문화대혁명이 시대적 착오로 된 근본적 원인이 바로 소위의 과학적 의식형태로 모든 전통문화를 혁명하고 개조하려 시도하였기 때문이다. 력사연구는 사회과학의 범주에 속하며, 전설은 전통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어떤 한 가설이 그것이 초기에는 아무리 왜곡되고, 황당하고, 미신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을 믿은 시간이 길고, 그것을 믿는 사람이 많다면 그것이 곧 전통문화가 되는 것이다. 전통문화는 전통문화로서의 존재의 리유가 있고, 자기의 생명력을 갖고 있다. 전통문화연구가 반드시 력사연구에 기준해야 하는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력사연구와 전통문화연구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할것이다. 마치도 《삼국지》와 《삼국연의》를 서로 혼돈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2015년8월17일
211    척추·관절건강, 뼈를 세워라 댓글:  조회:2662  추천:0  2015-07-11
척추·관절건강, 뼈를 세워라 직립보행은 인간에게 있어 혁명이었다. 동물과 달리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면서 손은 자유를 얻었다. 한결 편해진 손으로 도구를 만들고 이용할 수 있게 됐으며, 이는 문명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게 세상의 이치. 직립보행을 하며 두 손은 자유로워졌지만 중력으로부터 받는 압력은 더 커질 수밖에 없었다. 그 압력은 고스란히 척추와 관절에 전달됐고, 그로 인해 각종 질병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척추 뼈가 보이는 그림 역시 세월엔 장사가 없다. 오래도록 중력을 견뎌온 척추와 관절은 나이가 들면서 조금씩 문제를 드러낸다. 세월의 무게로부터 척추·관절건강을 지키는 방법은 따로 있다. 자세를 바르게 하고 올바른 생활습관을 기르며, 척추와 관절 주변 근육을 키워 버틸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 자칫하면 몸을 지탱하는 기둥이 무너질 수 있기에 건강하게 나이 들기 위해서는 뼈를 세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chapter1 . 세월의 무게를 견디는 척추와 관절 이미지 크게보기   사람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206개의 뼈 중 몸의 기둥 역할 을 하는 26개의 뼈가 척추다. 척추는 위로는 머리를 받치고 아래로는 골반과 연결돼 목과 등, 허리, 엉덩이, 다리에 이르기까지 주요 골격을 유지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우리 몸 을 꼿꼿하게 세우고 지탱해주며 평형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더불어 척추 속 빈 공간에는 온몸의 움직임을 주관하는 척추신경인 척수가 지나고 있는데, 척추는 이 신경다발을 보호하는 중요한 역할도 맡고 있다.    척추가 우리 몸의 구조를 담당한다면 우리 몸의 움직임을 담당하는 것이 관절이다. 뼈와 뼈가 연결된 부분을 의미하는 관절은 척추를 포함한 온몸의 운동에 축으로 작용해 뼈가 원활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관절은 움직임 여부에 따라 못움직 관절(부동관절)과 움직관절 (가동관절)로 나뉘며, 관절 조직의 특징에 따라 윤활관 절, 섬유관절, 연골관절 이렇게 세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림으로 보는 척추·관절의 구조 척추는 마치 하나의 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26개의 척추뼈(추골)를 탑처럼 쌓은 모양으로 경추, 흉추, 요추, 천추, 미추 등 크게 다섯 부위로 구분할 수 있다. 가장 위쪽에 위치한 경추(목뼈)는 7개의 척추뼈로 이뤄져 머리와 목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 그 아래 갈비뼈와 연결된 12개의 척추뼈가 흉추(등뼈)며, 여기에 연결된 요추(허리뼈)는 5개의 척추뼈로 이뤄져 상반신 무게 전체를 지탱한다.  가장 아래쪽에는 천추(엉덩이뼈)와 미추(꼬리뼈)가 있는데, 태어날 때 각각 5개의 척추뼈로 따로 분리돼 있던 두 부위는 성인이 되면 각각 한 덩어리의 뼈로 합쳐진다. 이렇게 경추 7개, 흉추 12개, 요추 5개, 천추 1개, 미추 1개 총 26개의척추뼈가 척추를 구성하고 있다. 각각의 척추뼈 사이에는 디스크(추간판)라는 젤리처럼 말랑한 물질이 들어 있다. 작은 원반 모양을 한 디스크가 있어 우리는 자유롭게 고개를 움직이고 허리를 돌릴 수 있다.   관절 구조 그림 디스크가 척추뼈 앞쪽을 지탱하는 역할을 한다면, 척추뼈 뒤에서 충격을 완화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 관절이다. 관절은 뼈 끝에 자리한 구조물로, 딱딱한 뼈가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도록 하는 젤리 같은 재질의 연골이다. 관절은 연골과 관절낭, 윤활액, 윤활막 등 다양한 구조물로 돼 있다. 관절낭은 물 95%로 이뤄진 윤활액이 차 있는 부위다. 연골과 연골 사이에 위치해 뼈와 연골이 서로 맞닿아 닳지 않도록 완충작용을 하며, 융털같이 부드러운 재질의 윤활막이 이를 둘러싸고 있다. 척추·관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 척추와 관절은 특히 우리가 움직이는 데 많은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종종 교통사고 등으로 척추를 다쳐 몸에 마비가 온 사람들이 있는데, 그 이유는 척추 안에 들어 있는 중앙신경인 척수가 손상됐기 때문이다. 머리부터 엉덩이까지 길게 이어진 척수에서 나온 신경은 척추뼈 양옆의 작은 구멍인 추간공 사이로 빠져나와 온몸으로 뻗어나간다.  수많은 신경이 가지를 뻗어 뇌의 명령에 따라 온몸을 움직이게 하거나 몸의 다양한 감각을 뇌로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이 때문에 척추를 다치면 온몸의 감각 및 운동 정보를 전달하는 신경이 손상돼 몸을 제대로 통제하기 어려워지는 것이다. 척추뿐 아니라 관절 역시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몸을 마음대로 움직이기가 어려워진다. 관절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딱딱한 뼈와 뼈가 맞물려 몸을 움직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설상 움직인다 해도 심한 마찰로 인해 걷기만 해도 뼈가 쉽게 부서지거나 변형된다. 관절은 우리 몸에서 유일하게 혈관이 닿지 않는 부분으로 한 번 손상되면 잘 회복되지 않는다. 세월의 무게가 척추·관절을 망친다 척추와 관절에 문제가 생기는 원인은 다양하다. 바르지 못한 자세를 취하거나 척추·관절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건강을 악화시킨다. 그런데 아무리 조심해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노화다.  우리 몸은 20대부터 본격적으로 노화되는데, 척추·관절 역시 예외가 아니다. 피부가 50~60대에 들어서면서 두꺼워지고 생기를 잃듯, 척추와 관절에도 비슷한 증상이 나타난다. 척추의 경우 노화가 시작되면 점점 두꺼워지는데, 이때 척추뼈에는 이전에 없던 불필요한 가시뼈들이 자라게 된다. 이 가시 모양의 뼈가 척추뼈 안의 중앙신경과 신경 가지를 눌러 다양한 척추질환을 유발한다. 노화에 따라 골밀도가 낮아지는 것도 문제다. 골다공증이 있으면 척추뼈에 구멍이 생겨 중력과 체중의 압력을 이기지 못해 쉽게 무너지고, 이때 튀어나온 척추뼈가 신경을 눌러 또 다른 질환을 야기하는 것이다. 척추뼈의 유연한 움직임을 책임지는 디스크와 관절 역시 노화에 따라 달라진다. 나이가 들면 디스크와 관절 속 수분이 점차 빠지게 되는데, 디스크와 관절이 딱딱해져 충격을 흡수하는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한다.  나이가 들면 척추나 관절뿐만 아니라 그 주변 인대와 힘줄, 근육 역시 딱딱해지고 두꺼워진다. 이 경우 인대와 근육, 힘줄이 척추뼈들을 단단히 잡아주지 못해 작은 충격에도 쉽게 균형을 잃게 된다. 결국 노화는 척추와 관절, 그리고 이들을 지탱해주는 구조물에 영향을 끼쳐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다. 숫자로 보는 척추·관절질환 연도별 허리 목디스크 입원 환자 수 99.04% 관절 환자들이 대부분 두 가지 이상의 관절질환으로 고통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관절전문 세정병원에서 2010년 4월부터 2011년 2월까지 관절수술을 받은 환자 629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99.04%인 623명이 두 가지 이상 복합관절질환을 앓고 있었다. 관절질환 중에서도 특히 연골연화증과 퇴행성관절염 환자가 다른 관절질환을 함께 앓고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전문가들은 관절질환자들이 관절질환을 방치하거나 잘못된 치료를 받아 또 다른 관절질환으로 이어진 것으로 설명했다.   스마트폰 그림 270만5566명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2013년 디스크로 입원한 환자는 270만556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4년 전 환자 수인 224만259명과 비교했을 때 연평균 5.3%씩 환자가 늘어난 것이다. 시기적으로는 2010년 목디스크 환자가 급격히 늘어났는데,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스마트폰 사용이 본격화된 것을 주요 원인으로 지목했다.   엠블런스 그림 267만명 자세를 바꿀 때마다 "아이고 무릎이야"를 외치는 사람이 점차 늘고 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무릎관절질환으로 병원을 찾은 사람이 2009년 235만 명에서 2013년 267만 명으로 약 14%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어깨통증질환 환자도 급격하게 늘고 있다.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2011년 오십견 등 어깨통증질환으로 병원 진료를 받은 사람은 210만 명으로, 2006년 137만 명에 비해 약 53% 증가했다. 척추와 의사 그림 73.1% 지난해 국내에서 입원 환자가 가장 많았던 질환이 기타 추간판장애(허리디스크)인 것으로 나타났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허리디스크로 진료를 받은 사람은 지난해 27만9000명으로 5년 전보다 11만8000명(73.1%) 증가했다. Chapter 2 당신의 이런 생활습관, 척추·관절을 망친다 물건 들 때의 모습 ◈ 물건 들 때 바닥에 있는 물건을 들어 올릴 때 허리를 앞으로 구부정하게 굽힌 채 팔을 몸에서 멀리 뻗으면 척추가 활처럼 휘면서 무게 부담을 더 크게 느끼는 상태로 변한다. 물건의 무게가 대부분 척추에 가해지는 것이다. 물건을 들 때는 허리를 곧게 펴고 한쪽 다리를 약간 앞으로 내민 뒤 무릎을 약간 구부려야 한다. 자전거 탈 때 ◈ 자전거 탈 때 자전거를 탈 때 페달에 놓인 발의 위치가 안쪽이나 바깥쪽을 향하면 무릎관절이 뒤틀려 부담이 가해진다. 페달을 굴릴 때 다리가 11자가 될 수 있도록 발을 똑바로 놔서 무릎이 자전거 안쪽이나 바깥쪽으로 기울지 않도록 해야 한다. 안장 높이도 잘 조절해야 한다. 안장에 앉아서 뒤꿈치를 페달 위에 올려놓고 최대한 펴거나 살짝 구부러지는 정도가 좋다. ◈ 걸을 때 발을 앞으로 내딛을 때마다 바깥을 향하는 팔자걸음은 발에 체중이 골고루 분산되는 것을 막는다. 이로 인해 무릎관절과 인대, 근육에 부담이 가해진다. 걸을 때마다 무릎 각도가 틀어지는 것도 문제다. 걸을 때는 양발이 평행하도록 놓고 뒤꿈치에서 발바닥으로, 발바닥에서 발가락 순으로 바닥에 놓이도록 해야 한다. 보폭은 자신의 키에서 100㎝를 뺀 것만큼을 유지하면 된다. 누울 때의 모습 ◈옆으로 누울 때 옆으로 비스듬히 누워 손으로 목을 받치면 목의 곡선이 비뚤어지면서 목뼈 주변 근육이 경직된다. 이런 자세를 오래 유지하면 목뼈를 지탱하는 인대나 근육이 손상될 수 있다. 누울 때는 천장을 보고 양발을 어깨너비로 벌린 채 다리를 쭉 펴는 게 좋다. 옆으로 눕고 싶다면 베개를 베고 무릎을 조금 구부리거나 양 무릎 사이에 베개를 끼는 게 좋다. 앉을 때 모습 ◈앉을 때 바닥에 앉는 자세는 관절에 좋지 않다. 책상다리를 하거나, 무릎을 꿇고 앉거나, 쪼그려 앉으면 무릎관절이 과도하게 구부러지며 뒤틀려 부담이 가해지기 때문이다. 되도록 딱딱하면서 높은 의자나 소파에 앉고, 앉을 때는 다리를 직각보다 크게 펴는 게 좋다. ◈침대에서 일어날 때 침대에서 허리를 직각으로 펴서 벌떡 일어나면 허리가 갑자기 격하게 구부러지면서 접질리기 쉽다. 누운 상태에서 양손을 옆으로 놓아 상체가 약간 돌아가게 만들고, 그 상태에서 팔에 힘을 주면서 무릎을 굽혀 일어나야 척추에 부담이 덜하다.  빨래 널 때 모습 ◈ 빨래 널 때 빨랫줄이 높이 있어서 머리 위로 팔을 자주 올리면 어깨에 있는 회전근개라는 근육이 상할 수 있다. 게다가 높은 곳에 그냥 손을 뻗는 게 아니라 빨래 너는 동작을 취하게 되므로 허리가 젖혀져 척추에도 무리가 간다. 높은 곳에 빨래를 널 때는 반드시 의자 등을 밟고 올라가서 빨랫줄이 어깨나 눈높이에 맞춰지도록 해야 한다. Chapter 3 척추·관절에 대해 궁금했던 몇 가지 Q 허리디스크가 있는데, 아팠다 안 아팠다 해요. 걷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가도 어느 순간 통증이 싹 가라앉아요. 그러다 잊어버릴 때쯤 다시 통증이 시작돼요. 치료가 필요할까요?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물론입니다. 허리디스크는 대부분 서서히 진행되며, 망가지기 전에는 증상이 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퇴행성질환이라 부르지요. 초기에는 통증이 있어도 휴식을 취하거나 물리치료만 받아도 쉽게 낫습니다. 이후 증상이 생겼다가 좋아지기를 반복하고, 갑자기 통증이 심해지거나 통증 기간이 길게 지속되곤 합니다. 대부분 이때 치료가 필요하다 느끼고 병원에 오지만 이미 병이 상당히 진행된 경우가 많습니다. Q 시중에 파는 척추 의료기기가 효과 있나요? 척추건강을 되돌려준다던데요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승철 근본적인 치료를 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허리건강을 유지하고, 척추질환을 예방하거나 완화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기구입니다. 예를 들어 온열마사지기의 경우 혈액순환을 도와 허리 통증을 완화하는 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보조기를 잘못 이용하면 오히려 허리건강에 안 좋을 수 있습니다. 보조기는 약해진 허리근육 대신 허리를 지탱해주는 효과가 있어 통증을 일부 완화할 수 있지만, 장기간 이용하면 오히려 허리근육을 약화시킬 수 있거든요. 따라서 전문의와의 상담 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Q 허리디스크는 가만히 두면 저절로 낫는다면서요. 너무 아파서 일상생활이 힘들 때 치료하면 된다던데 사실인가요? 이동엽 (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이동엽 (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립니다. 허리디스크가 제자리를 벗어나 밖으로 튀어나왔더라도 우리 몸의 자가회복력에 의해 자연적으로 흡수되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놔둔다고 무조건 회복되는 게 아닙니다. 환자의 병력, 상태 등에 따라 치료가 반드시 필요한 경우도 있습니다. 따라서 통증이 있을 때는 지켜보기만 하지 말고 정확한 검사를 통해 상태를 파악해야 합니다. Q 척추 치료법은 크게 비수술과 수술로 나뉘는 것 같아요. 차이가 뭔가요?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이승철 수술은 신체 구조 자체를 변화시키는 것입니다. 비수술요법은 신체 구조를 건드리지 않은 상태에서 약물을 넣는 등의 처치를 하는 것이죠.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질병을 풍선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부풀어 오른 풍선을 터뜨려버리는 것은 수술이라면, 풍선에 구멍을 내서 바람을 빼 크기를 줄이는 것은 비수술 요법입니다.  Q 허리병을 치료하는 곳이 너무 많아서 헷갈려요. 한의원, 대체요법시술소, 병원이 모두 다른 원리와 방법으로 치료해요. 병원 내에서도 신경외과, 정형외과, 통증의학과가 모두 허리병을 보고요. 어느 분야의 어떤 치료법을 택해야 하나요?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각 분야마다 질병과 원인을 이해하는 원리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야별로, 진료과별로 치료법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큰 원칙은 있습니다. 당장 신경 마비가 있으면 수술을 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상태를 봐서 비수술치료를 먼저 해볼 수 있다는 겁니다. 허리병 치료는 인체에 부담이 덜한 작은(비수술) 치료부터 큰(수술) 치료법으로 단계를 거치는 게 맞으니까요. 작은 치료는 수술을 제외한 추나요법, 카이로프랙틱, 한방요법, 비수술요법 등이 모두 해당되겠죠. 작은 치료 때는 환자가 원하는 원리와 방법을 택하는 게 좋겠습니다. Q 비수술요법 중 몇백만원이나 하는 신경주사가 있잖아요. 지인이 말하길 스테로이드성 진통제를 뿌려서 통증만 덜어주는 것이라던데 사실인가요? 그럼 병이 근본적으로 낫는 게 아니고 진통 효과가 끝나면 통증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거 아닌가요? (입을 모아) 아닙니다. 신경주사에 쓰이는 스테로이드제는 단순 진통 효과뿐 아니라 신경의 부기와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를 내므로 병을 근본적으로 치료합니다. 또 염증이 완화돼 통증이 줄어들면 아파서 못 펴던 허리를 펼 수 있게 돼 바른 자세를 취할 수 있게 됩니다. 아파서 못 하던 운동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면 척추를 지탱하는 주변 근육을 키울 수 있어 척추가 건강해집니다. 병 상태에 따라 신경주사를 맞고도 통증이 재발하는 경우가 있지만, 효과가 분명히 있고, 주사치료 자체가 몸에 부담이 덜하기 때문에 충분히 시도해볼 만합니다. Q 50대인데 등이 약간 굽었어요. 자세만 바르게 하면 다시 곧게 펼 수 있을까요?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규철 허리 문제는 없는데 단순 자세가 불량해서 허리가 굽은 것이라면 자세를 교정하는 것만으로 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척추뼈가 구조적으로 이상하거나 척추 신경이 압박돼 허리를 펼 때 아프거나 허리를 펼 때 쓰이는 근육이 약화되는 등의 원인으로 인해 허리가 굽은 것이라면 근본 원인을 제거해야 허리를 펼 수 있습니다. Q 안마의자나 안마기기를 목이나 허리가 아픈 사람이 써도 되나요?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근육을 마시지하는 가벼운 안마 기능이라면 대체로 별 문제 없겠지만, 환자마다 병의 정도가 다르니 주치의와 상의 후 사용하는 게 안전합니다.  Q 앉았다 일어날 때마다 무릎에서 '뚝' 소리가나요. 딱히 통증은 없습니다. 관절에 문제가 생긴 걸까요?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통증 없이 소리만 나는 것은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관절이 움직이면서 관절 속 압력이 달라져 기포가 생기고, 이게 터지면서 소리가 날 수 있습니다. 관절 주위 구조물이 서로 부딪히면서 소리를 내기도 합니다. 하지만 통증이나 불편함이 느껴지면 진료를 받아봐야 합니다. Q 계단을 오르내릴 때마다 무릎이 너무 아파요. 무릎에 좋은 음식이 없을까요?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관절염 탓이라면 염증을 없애는 음식을 먹는 게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미국의 건강의료정보 사이트 웹엠디(Web MD)가 관절염에 좋은 음식을 소개했는데요. 등푸른 생선인 청어, 정어리, 멸치에는 염증 유발 물질을 억제하는 오메가-3 지방산이 풍부하다고 합니다.  호박, 고구마, 당근, 토마토, 고추, 오렌지 등에는 염증을 없애는 항산화제 플라보노이드와 카로테노이드가 들어 있고요. 통곡물인 현미나 보리를 많이 먹는 사람은 몸속 염증 수치가 현저히 낮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올리브오일은 염증 유발 물질 생성을 막는다는 연구가 있고요. 동시에 관절을 붓게 하는 염분 섭취를 줄이고 규칙적인 운동으로 염분을 배출해야 합니다. Q 관절염에 아쿠아로빅이 좋다고 해서 시작했어요. 근데 운동 후 오히려 무릎이 더 아파요. 이유가 뭔가요?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아쿠아로빅을 하면 물 밖에서 운동할 때보다 무릎에 실리는 체중 부담이 적어서 관절에 가해지는 부담이 줄어드니 좋습니다. 하지만 관절의 정확한 상태를 파악하고 그에 맞는 운동 계획을 세우는 게 선행돼야 효과를 온전히 볼 수 있습니다. 잘못된 운동 방법 때문에 아플 수도 있고,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 근육통이 생긴 탓일 수도 있습니다. Q 여름에 관절염이 심해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지인은 아니라고 하더군요. 습도와 관계가 없다고요. 사실인가요?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 기온과 기압의 변화에 따라 관절염 통증이 심해질 수 있다는 연구가 있지만, 반대로 날씨와 관절염 통증이 아무 연관 없다는 연구도 있어 논란이 되는 부분입니다. 해부학적으로 봤을 때 계절에 따라 관절염이 심해진다는 연구도 없습니다. Q 수영이 온몸에 좋다니 관절에도 좋을 거라 생각하고 시작했어요. 그런데 수영만 하면 어깨가 너무 아파요. 어깨에는 안 좋은 운동인가요?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수영은 전신과 관절 모두에 좋은 운동입니다. 걸을 때 사용되는 관절에 무리가 가지 않으면서 근력 운동도 되니까 요. 하지만 어깨가 잘 안 움직이면서 아프거나 회전근개가 찢어져 있는 등 어깨관절에 문제가 있으면 수영할 때 아플 수 있습니다. 정확한 어깨 통증의 원인을 파악한 후 수영을 하는 게 바람직합니다. Q 어깨가 자주 빠져요. 많이 끼우다보니 요령이 생겼는지 점점 통증이 덜하더라고요. 이렇게 낫고 있는 게 맞는 거겠죠? 여우진 아닙니다. 어깨 탈구는 재발할수록 통증이 줄어드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증상이 더 악화된다는 뜻입니다. 어깨를 잘못 끼워 맞추면 주위 인대나 힘줄이 계속 자극받아 염증이 생기거나 근육이 손상돼 회전근개파열 등으로 발전할 수 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처음 어깨가 빠졌을 때 팔걸이 등으로 어깨가 움직이지 않게 고정하고 즉시 병원을 찾아야 합니다. 전문의 도움 없이 빠진 어깨를 끼우다보면 파열된 어깨 조직이 원상태로 회복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 습관적 탈구가 될 수 있습니다. Q 오십견이 있는데 밤만 되면 통증이 너무 심해져요. 어떻게 하면 통증을 줄여서 잠을 편히 잘 수 있을까요? 왜 밤에 더 심해지는 것인가요? 여우진 오십견 초기에는 어깨 관절을 감싸고 있는 관절낭에 염증성 혈관이 만들어지면서 통증이 생깁니다. 그런데 이 통증은 주로 밤에 나타나죠. 낮에는 어깨를 계속 움직이므로 근육이 풀리는데, 자려고 누우면 어깨 움직임이 없어지면서 근육이 굳어 통증이 심해지기도 합니다. Q 관절염이 있을때 붙이는 패치의 효과는 무엇인가요? 근본적인 치료에 도움이 되나요?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금정섭 통증을 줄이고 염증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긴 합니다. 패치는 관절염이 있을 때 먹는 소염제가 피부를 통해 흡수되도록 만든 제품입니다. 관절염 부위로 직접 스며들어 염증이 가라앉고 진통 효과가 납니다. 하지만 근본 치료법은 아닙니다. 관절염은 연골이 닳아 없어지며 생기는 증상이라 닳아 없어진 연골을 재생시키거나 관절 자체를 갈아 끼우는 시술 또는 수술이 근본 치료법입니다. Q 주말에 친구들과 야구를 했는데 팔꿈치가 아파서 쭉 펴지도 못하겠더라고요. 병원에 가서 엑스레이와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는데 아무 이상이 없다네요. 분명 너무 아파서 팔에 힘도 안 들어가는데요.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동선 팔꿈치에서 손으로 연결되는 힘줄 시작점에 염증이 생기면 그럴 수 있습니다. 통증이 심한데 초기에는 MRI에서도 이상이 나타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골프엘보’ ‘테니스엘보’라 불리는 병입니다. 약물치료, 물리치료 혹은 주사치료로 증상을 완화시킬 수 있습니다.   Chapter4. 척추·관절에 생기는 여러 가지 질환 [척추 편] 척추의 노화는 나이와 상관없이 찾아온다. 스마트폰을 오래 보고 있거나 허리를 구부리고 앉는 잘못된 자세, 구부정한 걸음걸이, 과도한 운동이 각종 척추질환을 유발한다. 척추질환은 척추뼈가 분리되거나 척추와 척추 사이에 있는 추간판에 문제가 생기거나 척추관이 좁아졌을 때 생긴다. 척추질환은 대부분 신경을 압박하기 때문에 통증이 발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통증을 잘 감지해 초기에 대처하면 허리 통증에서 벗어날 수 있다. 투과되어 척추가 보이는 그림 허리를 앞으로 굽히기 힘들면 '추간판탈출증(디스크)' 추간판이 돌출돼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추간판은 척추뼈와 뼈 사이에 있고, 척추에 가해지는 충격을 완화한다. 중앙에는 젤라틴 상태의 수액이 있고 주위에는 섬유륜(추간판을 감싸고 있는 조직)이 둘러싼 구조다. 척추뼈 사이에 있는 디스크가 노화되거나 충격을 받아서 추간판이 뒤로 밀려 신경근을 압박해서 통증을 일으킨다. 허리를 구부리는 잘못된 자세로 오래 앉아있거나 반복적으로 무거운 물건을 들어 올릴 때 생기기 쉽다. 허리를 뒤로 젖히기 힘들면 '척추관협착증' 척추관이 좁아져서 허리에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척추관은 척추의 몸통과 뒷뼈 사이에 있는 둘째손가락 굵기만 한 구멍이다. 척수와 요추 부위에서 다리로 이어지는 신경다발이 지나간다. 척추관이 좁아지는 원인은 노화다. 나이가 들수록 디스크의 수핵이 노화돼서 딱딱해진다. 이와 함께 척추를 감싸는 관절이나 인대도 두꺼워지면서 척추관이 좁아진다. 허리를 뒤로 젖히면 통증이 나타난다. 서 있을 때도 통증이 심한데, 척추관을 감싸고 있던 인대가 안으로 밀려 척추관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오래 걸으면 다리가 터질 듯 아프면 '척추전방전위증' 척추분리증이 심해지면 척추뼈가 흔들리면서 앞으로 미끄러진다. 이를 척추전방전위증이라 한다. 척추분리증이 아니어도 척추 주변의 근육과 인대가 약하면 척추뼈가 어긋나서 척추전방전위증이 생길 수 있다. 척추뼈가 앞으로 밀리면 추간판이 튀어나와 신경을 자극해 통증이 생긴다. 발병 연령층은 10대에서 50대까지 다양하다. 허리부터 다리까지 통증이 있고 오래 걸으면 다리가 터질 듯 아파서 앉아서 쉬어야 통증이 사라지는 특징이 있다. 허리를 폈을 때 통증이 심하면 '척추분리증' 척추뼈와 뼈를 있는 ‘ㄷ’자 모양의 고리뼈가 끊어져 척추뼈가 분리된 경우를 말한다. 척추분리증이 있으면 척추가 불안정해 허리가 자주 아프고 불편하다. 앉거나 선 자세를 오랫동안 유지하지 못하고 몸을 자주 뒤척인다. 태어날 때부터 연결 뼈가 붙어 있지 않은 경우가 있어서 10대 환자들이 많다. 연결뼈가 끊어져 있어도 근육과 인대가 척추뼈를 받쳐주고 있어서 생활하는데 불편을 못 느끼는 환자도 많다. 심한 통증 없이 허리가 약간 뻐근하고 불편한 정도라면 물리치료만 받아도 충분하다. 허리가 앞으로 굽었다면 '척추후만증' 주위에 허리가 굽은 사람이 있다면 척추후만증 환자다. 척추후만증은 척추뼈가 뒤로 휘어져 있는 경우를 말한다. 주로 60대 이상에게 많이 나타난다. 나이가 들면서 척추를 받치는 인대와 근육이 약해지고 추간판이 납작해져 허리가 점점 으로 굽는다. 쪼그리고 앉아서 장시간 일하는 자세도 원인이다. 추간판탈출증이나 척추관협착증 같은 척추질환이 있는 환자는 시간이 지나면 척추후만증이 생길 확률이 높아진다. 통증을 완화하기 위해 편한 자세를 취하다가 척추를 변형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척추후만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구부정하게 앉는 자세를 버리고 틈틈이 허리를 뒤로 젖히는 스트레칭을 하는 것이 좋다. [관절 편] 관절질환은 관절이 약해지거나 끊어져서 뼈와 뼈끼리 부딪혀 통증이 생긴다. 나이 들수록 관절이 약해져서 생기기도 하지만, 스포츠 활동을 하면서 관절에 손상을 입는 경우도 많다. 젊은 사람들은 운동하다가 다쳐도 그냥 방치해 병을 키우는 경우가 많다. 관절질환도 척추질환과 마찬가지로 증상에 주의를 기울이면 초기에 잡을 수 있다. 여러 관절을 표시해 둔 전신 그림 책상다리를 할 때 무릎 안쪽이 아프면 '퇴행성관절염' 관절을 보호하는 연골이 점차 손상되고 노화로 인해 관절을 이루는 뼈와 인대에 손상이 일어나서 염증과 통증이 생겼을 때 나타난다. 등산이나 달리기를 하고 나서 무릎이 아프거나 무릎을 굽힐 때마다 뼈가 부딪히는 듯한 소리가 난다. 책상다리를 하면 무릎이 굽은 상태라서 통증이 생긴다. 되도록 무릎에 과중이 실리는 행동은 삼가야 하고, 살이 찐 사람이라면 체중이 무릎 관절에 많은 부담을 주므로 조절해야 한다. 움직일 때마다 통증과 함께 ‘뚜둑’ 소리가 나면 '반월상연골판파열' 말 그대로 반월상연골판이 파열된 경우다. 반월상연골판은 무릎관절의 위뼈와 아래뼈 사이에 있으며 반달 모양이다. 나이와 관계없이 생긴다. 젊은 층은 과격한 운동으로 인해서 생기고, 40대 이상에서는 연골판에 퇴행이 일어나 찢어져서 통증이 생긴다. 자세를 바꿀 때마다 통증이 있고, 무릎이 힘없이 꺾이거나 움직일 때마다 통증과 함께 ‘뚜둑’ 소리가 난다. 반월상연골판파열이 생기면 충격이 뼈에 그대로 전달돼 퇴행성관절염으로 발전할 수 있으므로 조기 치료가 중요하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무릎이 떨어져나간 느낌이 들면 '십자인대파열' 무릎 앞뒤에 십자 모양의 인대가 파열됐을 때 생긴다. 십자인대는 종아리뼈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을 막고 무릎관절이 뒤로 꺾이거나 회전하는 것을 막는 역할을 한다. 십자인대파열은 점프하면서 착지를 잘못하거나 부딪쳤을 때, 운동하다가 넘어졌을 때 생긴다. 십자인대파열이 일어나면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통증이 동반되고 무릎이 붓기 때문에 즉시 병원을 찾는 환자가 대다수다. 팔을 옆으로 들 때 아프면 '충돌증후군' 충돌증후군은 어깨관절뼈인 견봉과 어깨를 움직이는 회전근개근육 사이의 공간이 좁아져 서로 마찰하면서 통증을 유발하는 질환이다. 무리한 어깨 사용으로 힘줄이 손상됐거나, 나이가 들어서 어깨의 힘줄이 약해졌을 때 나타난다. 팔을 높이 들 때나 뒤로 젖힐 때 통증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팔을 움직이면 무언가 걸리는 소리가 나기도 한다. 머리 위로 팔을 올리기 어려우면 '오십견(동결견)' 외부의 충격 없이도 어깨가 아프고 어깨 운동 범위가 제한되는 질환이다. 어깨관절을 둘러싼 조직에 염증이 생기거나 조직들이 달라붙어서 생긴다. 의학적 진단명은 ‘유착성 관절낭염’이다. 팔을 앞으로 들어 올리거나 바깥으로 회전하기 힘들다. 점차 어깨가 굳어서 잘 움직여지지 않는다. 50대 이후의 사람에게서 많이 발생한다고 해서 오십견이라고도 불린다. 어깨를 돌릴 때 바늘로 쿡 쑤신 것처럼 아프면 '회전근개파열' 어깨충돌증후군이 지속되면 회전근개근육이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한다. 그게 바로 회전근개파열이다. 팔을 위로 들거나 뒤로 돌릴 때 아프다. 부분 파열일 때는 팔을 쓰는 데 불편함이 없지만 완전 파열일 때는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할 정도로 아프다.  Chapter5. 척추·관절질환은 시술해야 할까, 수술해야 할까? [척추질환 편] 추간판탈출증 대부분의 환자는 비수술적 치료로 좋아질 수 있다. 수술까지 하는 경우는 10% 미만이다. 탈출된 추간판이 오랜 기간에 걸쳐 흡수되기도 하고, 그렇지 않더라도 증상이 없어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약물요법, 주사요법 같은 보존적인 치료로 효과가 없으면 수술이 필요하다. 추간판제거술이 대표적인 수술법이다. 비수술요법 몸이 스스로 치유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법. 통증 등 증상을 완화시켜 견딜 수 있게 해준다.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 같은 약물을 사용하는 치료가 가장 흔하다. 약물로 호전되지 않을 때는 신경주사요법이 동원된다. 대표적인 주사요법인 경막외주사요법은 통증을 빨리 줄이는 효과가 있다.  스테로이드와 국소마취제를 척추신경을 감싸는 막 바깥쪽에 주입한다. 요즘은 주사치료의 일종인 신경성형술이 많이 시행된다. 꼬리뼈 끝 구멍에 가느다란 카테터를 넣어서 주사하는 방법이다. 일반적인 주사보다 업그레이드되기는 했지만 신경을 누르고 있는 추간판은 직접 제거하지 못한다. 수술요법  약물과 물리치료, 주사치료 같은 비수술적인 방법을 6주 이상 했는데도 증상이 지속된다면 수술을 고려한다. 신경 압박이 너무 심해서 소변이나 대변 보는 기능에 마비가 오는 경우는 응급 수술을 해야 한다. 추간판탈출증의 대표적인 수술 방법은 추간판제거술이다. 추간판이 탈출한 부위를 제거해서 눌리고 있는 신경근을 풀어주는 원리다.  수술은 다양한 도구로 시도되고 있다. 많이 쓰이는 건 내시경과 현미경. 내시경 추간판제거술은 관절 내부를 보는 데 쓰는 내시경으로 척추 안을 보면서 탈출된 추간판을 제거한다. 조직 손상이 적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늘고 약한 기구만 넣을 수 있기 때문에 충분히 제거되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문제 부위에 내시경이 도달할 수 있는 상황일 때 적용한다. 반면 현미경 추간판제거술은 대부분의 추간판탈출증 환자에게 시행되는 방법이다. 피부를 작게 절개하고 튜브를 삽입해 현미경으로 보면서 수술을 한다. 정밀하게 문제 부위를 제거할 수 있고, 피부 절개 부위가 작아서 회복이 빠르다.   척추관협착증 추간판탈출증과는 달리 비수술적 치료를 해도 잘 낫지 않는다. 허리 통증도 심하지만 다리까지 통증이 내려가기 때문에 일상생활을 하기 힘들다. 증상이 심하지 않으면 약물치료, 물리치료, 운동치료 같은 보존적인 방법으로 완화시킨다. 이러한 치료로 효과가 없거나 통증이 심해서 걷는 것도 쉽지 않게 되면 수술이 필요하다. 비수술요법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다. 약물치료는 추간판탈출증과 비슷하게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제를 사용한다. 신경조직 혈류를 개선시키는 약물을 추가로 쓰기도 한다. 이런 방법을 4~6주 정도 시행했는데도 호전되지 않으면 신경주사요법을 쓴다. 신경주사요법은 증상이 완화되는 데 도움을 주기는 하지만, 협착이 심한 경우는 재발할 위험이 있다. 따라서 몇 차례 시행했는데도 재발하면 수술을 고려하는 게 좋다. 수술요법 수개월 동안 비수술적 방법으로 치료했는데도 증상에 호전이 없다면 수술을 고려하는 게 좋다. 수술은 협착증 정도에 따라 방법이 달라진다. 단순하게 신경을 눌리는 곳을 넓혀주는 감압술과 감압술을 좀더 광범위하게 하면서 뼈를 고정하는 감압 및 유합술이 대표적이다.  감압술은 허리 피부를 최소 절개하고 현미경으로 보면서 신경관을 넓혀주는 수술이다. 신경 압박으로 생기는 척추관협착증은 단순감압술로도 호전될 수 있다. 하지만 같은 척추관협착증이라도 신경이 많이 눌려 있는 상태일 때는 관절까지 제거해야 한다. 이때는 척추가 불안정해지기 때문에 감압술을 한 후 유합술을 시행한다.  유합술은 고장난 척추의 마디마디를 연결해 고정하는 방식이다. 이미 약해진 척추를 고정하려면 고도의 시술 능력이 필요하다. 예전엔 유합술을 하고 나면 회복에만 3개월 이상 걸렸지만 최근에는 기간이 단축됐다. 척추 안에 고정하는 기구가 발달해서 움직임에 필수적인 근육을 덜 건드리기 때문이다.   [관절질환 편] 퇴행성관절염 퇴행성 변화로 인해 관절을 이루는 연골이 손상되거나 닳아 없어져서 생긴다. 기계가 오래 쓰면 낡듯이 나이가 들면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발생 자체를 완전히 정지시킬 수 없으며, 정상으로 복구가 불가능하다. 따라서 치료 목적도 환자의 통증을 감소시키고  관절의 기능을 유지시키면서 더 이상 변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다. 변형이 이미 많이 진행된 경우는 수술로 교정해서 관절 손상이 더 빨리 진행되는 걸 막는다. 경과가 많이 지난 상황이라면 마지막 치료법인 인공관절치환술을 한다. 환자가 통증을 느끼지 않고 생활하도록 돕기 위함이다. 비수술요법 보존적 치료 방법에는 운동치료, 약물치료, 주사요법이 있다. 운동은 근육운동 위주로 해야 한다. 근력이 강화되면 관절의 부하를 감소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 무릎 관절염 환자는 허벅지 앞쪽 근육을 강화하는 운동이 도움이 된다.  약물치료에는 진통 및 소염 작용이 있는 약들을 사용한다. 하지만 골관절염을 예방하거나 치료하는 확실한 약물이 없다는 게 문제다. 심한 통증이 계속된다면 관절 내 주사요법을 시행한다. 관절에 스테로이드 제재를 주입하면 일시적으로 통증이 감소하고 운동 범위가 늘어난다. 하지만 자주 사용하면 스테로이드가 관절 연골에 변성을 촉진시킬 수 있다. 3개월 이하의 반복 주사나 1년에 3~4회 이상 맞는 건 피하는 게 좋다. 수술 전 후 사진 수술요법 관절염에는 당장 수술을 권하지 않는다. 60세 이하 관절염 환자들의 경우라면 최대한 자기 관절을 보존하는 치료를 하고 난 뒤에 시행하는 게 좋다. 비수술적 치료에도 불구하고 증상 호전이 없는 경우, 관절의 변화가 계속 진행돼 일상생활에 지장을 심하게 주는 경우라면 수술을 고려한다. 수술 방법은 관절염 정도에 따라 다르다.  퇴행성관절염 정도가 심하지 않거나 관절의 한 부분에서만 발생한 환자에는 절골술을 시행한다. 관절의 정렬을 바꿔줌으로써 체중이 가해지는 부분을 변경시키는 방법이다. 대개 60대 이전에 발생한 관절염에서 통증 완화의 목적으로 시행한다.  나중에 증상이 다시 나빠지면 인공관절치환술이 필요할 수 있다. 퇴행성관절염이 이미 많이 진행돼서 일상생활에 지장을 줄 경우엔 인공관절치환술을 고려한다. 닳아 없어진 무릎연골 대신 인체에 해가 없는 금속이나 세라믹으로 만들어진 인공관절을 넣는 방법이다. 통증이 효과적으로 감소하면서 변형된 관절이 교정되는 효과가 있다.  하지만 수명이 15~20년이라 향후 재수술을 받아야 하는 상황도 염두에 둬야 한다. 또 수술 후 감염이나 탈구 등의 합병증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경험이 충분한 전문의와 상담 후 수술받는 게 좋다. 인공관절 수술 후에는 재활치료가 반드시 필요하다. 재활운동은 인공관절 수명을 늘려주고, 관절 기능이 빨리 회복되도록 도와준다. 회전근개파열 만성적인 어깨 통증의 가장 흔한 원인인 회전근개파열. 어떤 원인으로 파열에 이르는 지 알려져 있지는 않다. 하지만 심한 통증이 발생하므로 반드시 치료해야 하는 질환이다. 오랜 기간 방치하면 파열된 힘줄이 안으로 말려 들어가 봉합 자체가 불가능해질 수 있다. 부분 파열의 경우는 일차적으로 비수술요법을 시행한다. 비수술치료를 해도 증상이 완화되지 않으면 수술치료를 고려한다. 관절경적봉합술이 일반적인 방법이다. 비수술요법 기본적인 비수술요법으로 약물치료 및 물리치료, 운동재활치료 등이 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운동재활치료다. 직접적으로 회전근개의 기능 회복을 돕기 때문이다. 운동재활치료는 먼저 수동적 운동으로 관절 운동 범위를 회복한다. 운동능력이 향상되면 점차적으로 주변 근육 간 균형을 잡으면서 근력을 증가시켜 나간다.  다만 무리한 재활운동은 오히려 회전근개 손상을 더 악화시킬 수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회전근개파열로 극심한 통증이 지속되는 환자에게는 스테로이드 제제를 주입하거나 신경 부위에 국소마취제를 주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테로이드 제제 주입은 회전근개파열을 더욱 심화시킬 수 있어 전문의와 상담을 거쳐서 결정하는 게 좋다. 수술요법 3~6개월 동안 비수술적인 치료를 했는데도 증상 호전이 없을 때 수술을 고려한다. 부분 파열이 아닌 전층 파열에 대해서는 수술치료가 기본이다. 수술은 관절경적봉합술이 일반화된 방법. 관절경적 봉합술은 피부에 4㎜ 미만의 작은 구멍을 두세 개 만들고, 초소형 카메라와 수술 기구를 삽입한 뒤 환부를 직접 살펴보면서 수술한다.  치료할 부위를 선명하게 확대해서 보기 때문에 정밀한 시술이 가능하다. MRI나 초음파로는 안 보이는 부분까지도 정확하게 볼 수 있어서 병의 진행 상태를 파악하는데도 용이하다. 절개 부위가 작고 정상 조직에 가하는 손상이 적어서 수술 뒤 회복이 빠르다. 수술 후에는 어깨관절이 굳는 것을 예방하는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어깨 힘줄을 강화하는 데 도움이 되는 재활치료도 병행하는 게 좋다. /도움말 금정섭(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김재화(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박예수(한양대구리병원 정형외과 교수), 손원수(나누리서울병원 관절센터 과장), 신규철(제일정형외과병원 원장), 신동은(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여우진(바른세상병원 관절센터장), 이동엽(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이승철(바른세상병원 척추센터장), 이재철(순천향대학교 서울병원 정형외과 교수), 이중명(분당차병원 정형외과 교수), 임동선(참포도나무병원 원장), 임재현(나누리서울병원 병원장) /참고도서    
210    한 늙은 어미소의 이야기 댓글:  조회:1536  추천:0  2015-07-02
한 늙은 어미소의 이야기   아래의 이 이야기는 2011년 중국의 《도덕》인테넷 (http://www.daode.org/jwsx/256.htm) 에 수록되였던 이야기다. 조용히 한번 읽어 보면서 나의 마음은 강한 진동을 받았다. 우리글로 정리하여 한국 분들에게 추천하는 바이다;   중국 청해성의 한 사막지구에서는 한때 물이 특별히 모자랐다. 당지 주둔군에서는 매일 자동차를 파견하여 아주 먼곳에 가서 물을 실어 와야 했는데, 매사람은 하루에 겨우 3근의 물을 보장받을수 있었다. 이 3근의 물로 사람들은 자기의 기본 음용수를 해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밥을 짓고, 채소를 씼고,… 마지막에는 짐승까지 먹여야 하였다.   짐승들은 언제나 물이 모자라 몹시 설치였다. 그러던 어느하루, 언제나 사람들에게 후덥고 충성스럽던 한 늙은소가 갈증을 참다못해 고삐를 끊고 물 나르는 군용차량을 찾아 떠났다. 늙은소는 믿기어려울 식별력과 판단력으로 반나절을 기다려 끝내는 물을 싣고 오는 군용차량과 맞띄였다. 늙은소는 신속히 차량앞에 뛰여가 버티고 서서 앞길을 막았다. 그리고는 아무리 밀고 당기고 하여도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듯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물나르는 전사들은 이전에도 종종 짐승들이 길은 막고 물을 구걸하던 정형들을 보았었다. 그러나 그때의 그 짐승들은 오늘의 이 늙은소처럼 이렇게 고집스럽지는 않았었다. 부대에는 규정이 있었는데, 물나르는 차량은 중도에서 멈춰서선 안되고, 물을 흘려도 안되며, 사사로히 그 누구에게 물을 함부로 주어서는 더구나 안 된다. 이런 규정들은 보기에는 너무 무정한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 당시 부득이한 형편에서 내온 규정이였다. 매 한방울의 물은 기실 여러 사람들의 생명을 보장하는 식량과 마찬가지였다. 사막길에서 사람과 소가 이렇게 대치하여 반나절이 지나자, 결국 사막길은 막히우고 말았다. 뒤의 차량의 운전수들은 참다못해 욕지거리를 하기 시작하였고, 어떤 운전수들은 휘발유에 불은 달아 소를쫓아 버리자고 하였다. 그러나 늙은소는 태산인양 끄떡하지 않고 차량을 막아떡 버티고 서 있었다.   이윽하여 소의 임자가 왔다. 소의 임자는 너무나 송구하여 전사들에게 급히 사과하고는 긴 채찍을 휘둘러 여윈 늙은소를 사정없이 내리 족쳤다. 짱-짱- 채찍소리 울릴 때마다 늙은소의 몸가죽은 이리저리 찢어졌다. 하지만 늙은소는 너무 아파서 대가리를 움출움출 하면서도 여전히 그 자리에 꿈쩍이지 않고서 있다. 결국 채찍에 묻어 나오는 피에 채찍이 붉게 물들었고, 소의 몸뚱이도 붉게 물들었으며, 사막도 붉게 물들었고 석양도 붉게 물들었다. 늙은소는 채찍에 맞으며 처절하게 소리내여 우는데, 그 광경은 사막의 음산하고 차거운 냉기와 더불어 유난히 비장해 보였다. 물나르는 전사들은 이 광경을 보고는 참다못해 울음을 터뜨렸고, 길에 막히운 다른 차량의 전사들도 모두 소리내여따라 울었다.   결국 물나르는 전사는 결심을 내리고 소 족치기에 점점 맥이 진해가는 소임자를 제지시켰다. “내가 한번 규칙을 위반하겠습니다. 내가 처분을 받겠습니다.”그는 차에 가지고 다니던 빈 그릇에 물 3근을 받아서는 서슴없이 늙은소의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런데 늙은소는 자기가 그렇게도 많은 매를 맞고, 그렇게도 많은 피를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쟁취한 그 물을 한모금도 마이지 않았다. 늙은소는 물을 보자 대가리를 쳐들고 하늘에 대고 길게 소리내여 울었다. 뜻밖에도 저녁노을아래 그리 멀지않은 모래언덕뒤에서 한 새끼소가 비칠거리며 뛰여 나왔다. 피투성이 늙은소는 자기 새끼가 와서 탐욕스럽게 그 물을 다 들이켤때까지 조용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혀를 내밀어 자기 새끼의 두눈을 다정하게 핥아 주었다. 새끼소도 대가리를 쳐들고 자기 어미의 눈을 서툴게 핥아 주었다. 침묵속에서 사람들은 두마리 소 모자의 눈에 글썽하게 고여있는 눈물을 분명히 보았다. 하늘가에서 마지막 한가닥 노을이 붉게 불타자, 소 모자는 주인의 명령도 기다리지 않고 사람들의 침묵을 뒤에 남긴채 슬슬 꼬리질 하면서유유히 귀향의 길에 올랐다.   이야기는 여기서 끝났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사람들에게 남긴 여운에 누구나한번은 심사숙고 하게 된다. 만물에게는 모두가 靈性이 있다. 아무리 하찮은 짐승이라 하여도 절대 함부로 학대하지 말아야 하리라. 그들에게도 자기의 부모가 있고, 자녀가 있고, 가정이 있으며, 우리 사람들처럼 갈망과 쾌락, 행복이있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는 또 자기 부모에 대하여 더욱 효성해야할 필요성을재삼 느끼게 된다. 우리의 부모들은 우리들을 키우면서 기실 그 늙은소보다 몇갑절 더 숭고한 사랑을 바쳤으니깐!   현용수 정리 2015.07.02
209    (연변방송) 우리민족 단오 세시풍속 댓글:  조회:1727  추천:0  2015-06-17
단오 특집 연변인민방송국 사회교육생방송 《우리 방송 한마당-클릭, 우리 사는 세상!》 방송주제:《우리 민족 전통명절 단오의 유래와 세시풍속》 출연연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룡수 회장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안녕하십니까? (현룡수 회장: 답례, 반갑습니다.)  이제 며칠이면 음력 5월5일 단오가 다가 옵니다. 단오는 음력설, 한식, 추석과 더불어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로 불리웁니다. 먼저 현회장께서 단오에 깃든 유래에 대해서 들려주시죠?       현룡수 회장: 단오의 유래는 중국 전국시기의 초나라 회왕(懷王)때에 비롯되었다고 전합니다. 굴원(屈原)이라는 애국사상이 있는 신하가 간신들의 모함에 자신의 지조를 보이기 위해 멱라수[汨羅水]에 투신자살을 하였는데, 그날이 5월 5일이었습니다. 그 후 해마다 굴원을 위하여 제를 지내게 되었는데, 이것이 후에 조선반도에 전래되어 단오가 되었다고 합니다. 단오는 중국과 우리민족뿐만 아니라 일본에서도 중요한 명절의 하나라고 합니다.   단오는 우리민족 고려시대에는 9대명절중의 하나였고, 조선시대에는 4대명절(설, 한식, 단오, 추석) 중의 하나였습니다.   단오의 어원: 단오는 일명 수릿날[戌衣日·水瀨日], 천중절(天中節), 중오절(重午節), 단양(端陽)이라고도 합니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번째를 뜻하고, '오(午)'는 간지에서도 다섯의 뜻으로 통하므로 단오는 '초닷새'를 뜻합니다. 중오는 오(五)의 수가 겹치는 5월 5일을 뜻하는 것으로 일년중의 중심으로 양기가 가장 왕성한 날로 풀이됩니다.   음양사상(陰陽思想)에 따르면 홀수[奇數]를 '양(陽)의 수' 라 하고, 짝수[隅數]를 '음(陰)의 수' 라 하여 '양의 수'를 길수(吉數)로 여겼습니다. 예컨대 전통사회의 절일(節日)로서 설(1월 1일)· 삼짇날(3월 3 일)· 칠석(7월 7일)· 중구(9월 9일) 등이 있는데, 이러한 속절은 '양수(陽數)'를 '길수(吉數)'로 여기는 기수민속(奇數民俗)들입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를 수리날이라고 부르게 된데는 어떤 유래가 있습니까?   현룡수 회장: 수릿날이라고 부르게 된 유래는 조선 후기에 간행된  5월 조의 기록에서 전합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날 쑥떡을 해 먹는데, 쑥떡의 모양이 수레바퀴처럼 만들어졌기 때문에 '수리'라는 명칭이 붙었다고 합니다. 또한 수리란 고(高), 신(神) 등을 의미하는 우리민족의 고어인데, '신의 날', '최고의 날'이라는 뜻에서 불리워졌다고 합니다.      김동선 기자: 오월은 여름철 세시풍속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데 단오날이 가장 대표적인 명일이라 들었습니다. 단오는 일년 중 가장 양기가 왕성한 날이라 해서 큰 명절로 생각하여 여러 가지 풍속과 행사가 행해졌다고 들었습니다. 단오에는 주로 어떤 행사들이 있었습니까?    현룡수 회장: 이날 우리민족은 전통적으로 단오차례(茶禮)를 올리며,지방에 따라 그 풍속이 다르긴 하지만, 그네뛰기. 씨름놀이. 가면무용. 사자무(獅子舞). 가면극(假面劇). 우인극(偶人劇) 등의 행사들이 진행됩니다.   창포에 머리감기: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이라 하여 창포 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했습니다. 또 단오날 새벽 상추밭에 가서 상추잎에 맺힌 이슬을 받아 분을 개어 얼굴에 바르면 버짐이 피지 않고 피부가 고와진다고 믿었습니다. 남자들은 단오날 창포뿌리를 칼처럼 허리에 차고 다니는데, 이는 병사의 효험을 기대하는 믿음에서 비롯되였다고 합니다.   단오날 중에서도 오시(오전11시~오후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으로 생각하여 전통사회의 농가에서는 약쑥, 익모초, 찔레꽃 등을 따서 해볓에 말리여 두기도 했습니다. 말려둔 약쑥은 농가에서 홰를 만들어 일을 할 때에 불을 붙여놓고 담배불로 사용하였으며, 저녁에 한곳에 모여 덕담하면서 모기불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그네뛰기와 씨름대회: 단오의 대표적인 놀이로 그네뛰기와 씨름을 들수 있습니다. 그네뛰기는 단오날 여성들의 대표적인 놀이입니다. 조선 후기의 화가 신윤복의 단오풍정을 보면, 한복을 차려 입은 부녀자들이 치마폭을 바람에 날리며 하늘로 치솟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그림을 보노라면 창포꽃 피는 단오날에, 남정들이 동네어귀에 있는백년묵은 비슬나무 가지에 그네줄 높이 높이 매어 놓으면,  젊은 녀인들이 붉은댕기 비단치마 바람에 나붓끼며, 영샤! 영샤! 그네 뛰던 옛고향의 옛시절이 그리워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단오 시절 모르고 지낸지도 이미 너무 오래 되였습니다.     녀성들의 그네뛰기와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남성들의 놀이로는 씨름대회가 있습니다. 남성들의 씨름대회에서는 이기는 사람에게는 관례로 황소를 상품으로 주는데, 경기방식은 요즘과 같이 토너먼트식이 아니라 도전자들을 모두 이겨 상대자가 없게 되면 우승을 하게 됩니다.    부채: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 의하면 "공조(工曹)에서는 단오선(端午扇)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다."고 전합니다.부채는 더위를 식히기 위한 도구로 단오 무렵이면 더위가 찾아오니, 이날 부채를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한 것을 '단오선'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날에는 공조에서 단오선을 만들어 임금에게 진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임금 또한 진상받은 부채를 직접 신하들에게 하사하기도 하였습니다   부채는 순수한 우리말로, 손으로 부처서 바람을 일으킨다는 자와, 가는 대나무라는 뜻의 자가 어우로진 말로", 손으로 부쳐서 바람을 일으키는 채"라는 뜻입니다. 부채를 한자로는 "선(扇)"이라고 하는데,이는 집을 뜻하는 호(戶)자와 날개를 뜻하는 우(羽)자가 어우러진 말입니다.   전통사회에서 단오의 세시풍속은 더운 여름철의 건강을 유지하는 지혜와 신체단련을 위한 방법, 재액을 방지하기 위한 습속, 풍농을 바라는 의례가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오시목욕: 단오 전날 저녁 물을 길러 두었다가 단오날 오시에 무병장수를 바라며 목욕을 하였습니다.      단오제와 단오굿: 지역민들의 일체감을 고취시키는 의례로서 단오제와 단오굿이 있습니다. 단오제와 단오굿은 마을 사람들이 마음을 하나로모아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행사입니다. 해마다 이날이면 마을마다 축제를 열어 마을의 풍년과 안복을 빌었습니다. 특히 강릉지방의 강릉단오제와 강릉단오굿, 경남 영산의 문호장굿, 경북 자인의 한장군놀이 등이 있는데, 이러한 의례들은 각종 놀이 및 행사들과 접목되어 현재 지역민의 축제로 발전하였습니다.      단오장: 전통사회에서 농가의 부녀자들은 '단오장(端午粧)'이라 하여 창포뿌리를 잘라 비녀로 만들어 머리에 꽂아 두통과 재액을 막고, 창포를 삶은 물에 머리를 감아 윤기를 더하게 하였다.      대추나무 시집보내기: 농가에서는 대추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대추나무 가지 사이에 돌을 끼워 넣는 습속이 있는데, 이를 '대추나무 시집보내기'라고 합니다.   부적: 나쁜 귀신을 쫓아 버리기 위해 이날에는 집집마다 부적을 그려서는 가택의 기둥이나 대문에 부쳐 놓습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에 먹는 주요 음식들로는 어떤것이 있는지요?    현룡수 회장: 조선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5월조의 기록에서는 "궁중의 내의원(內醫院) 에서는 옥추단(玉樞丹)과 제호탕을 만들어 왕에게 진상하였다."는 궁중풍속을 전합니다.   옥추단은 일종의 구급약으로 여름철 곽란이 났을 때 물에 타서 마십니다.    제호탕은 오매육(烏梅肉)과 사인(砂仁), 백단향(白檀香), 초과(草果) 등을 곱게 빻은 다음, 꿀에 버무려 끓였다가 냉수에 타서 마시는 일종의 청량음료입니다. ‘동의보감’에 따르면 더위를 피하게 하고 갈증을 그치게 하며, 위를 튼튼하게 하고,  장의 기능을 조절함과 동시에 설사를 그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전해집니다. 주 재료인 오매는 껍질을 벗긴 매실을 짚불 연기에 그을려 말린 것으로서 소갈(당뇨), 설사, 기침에 효험이 있습니다. 매실에 들어있는 구연산은 더위로 손상된 체내 독소를 제거하고 산성화된 몸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단옷날 먹는 음식은 그 풍성함의 절정을 이룹니다. 제 철을 맞아 약효가 최상인 쑥이나 수리취를 이용한 수리떡, 앵두편, 앵두화채 등 절기식을 이웃과 함께 나눠 먹었습니다. 이 단오 음식들은 미각을 돋울 뿐 아니라 여름을 건강하게 날수 있는 영양식이라는 점에서 선인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습니다.   민간에서는 예로부터 단옷날 오시(午時)에 익모초(益母草)를 뜯어 해볓에 말리워 두는 풍속이 있었습니다. 이 때가 일년 중 양기가 가장 왕성한 때로서 익모초의 효능이 최상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를 돕는 풀’이란 뜻의 익모초는 월경과다, 산후출혈, 생리통,  생리불순 등 각종 부인병과 위장질환 치료에 효과적입니다.    떡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쑥이나 수리취를 넣고 만든 절편에 수레바퀴 문양의 떡살을 박은 차륜병은 단오 분위기를 물씬 나게 하는 특급 도우미입니다. 단옷날에 쓰기 위해 말려 둔 쑥잎으로 쑥차를 만들어 먹으면 위장병과 변비, 신경통 등 치료에 특효가 있다고 널리 전해집니다.    단오하면 바로 떠오르는 ‘창포’는 그 우러난 물에 머리를 감는 풍습 외에도 창포 뿌리로 건강을 도모했습니다. 창포 뿌리는 위장을 튼튼하게해주는 건위제나 가래를 그치게 하는 거담제로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단오의 시절음식으로는 수리떡과 약떡이 있습니다.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의 기록에서는 "이 날은 쑥잎을 따다가 찌고 멥쌀 가루 속에 넣어 반죽을 하여 초록색이 나도록 하여 이것으로 떡을 만든다. 그리고 수레바퀴 모양으로 빚어서 먹는다."라는 풍속을 전합니다. 이것이 바로 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약떡은 전라남도 지역에서 전하는 시절음식입니다. 전라남도 지역에서는 평소에 떡을 별로 하지 않지만, 단오날만은 5월 4일 밤 이슬을 맞혀두었던 여러가지 풀을 가지고 단오날 아침에 떡을 해 먹는데, 이를 약떡이라고 합니다. 앵두가 제철인 단오 무렵이면 앵두화채를 만들어 먹기도하며, 아이들의 주전부리로 옥수수나 쌀 등을 튀겨 주기도 합니다. 또 이날은 새 쑥을 넣어 만든 떡으로 차례를 지내는 것이 상례입니다.    제주도에서는 보릿가루에 누룩을 섞어서 부풀게 만든 기루떡과 곤떡· 새미떡· 인절미· 표적· 율적· 해어· 실과 등을 제물로 사용합니다.      도행병(桃杏餠): 복숭아와 살구가 무르익었을 때 만드는 계절 음식입니다. 초여름에 나는 각종 과일을 즙을내어 쌀가루에 버무려 설기를 쪄 먹습니다.      앵두편과 앵두화채: 앵두(살구, 모과)를 살짝 쪄서 굵은 체에 걸러 살만 발라 설탕을 넣고 졸이다가 녹말을 넣어 굳힌 것입니다. 생률과 함께 담아 냅니다. 앵두화채는 단오날 민가에서 즐겨 만들어 먹는 청량음료입니다. 앵두를 따서 깨끗이 씻어 씨를 빼서 설탕이나 꿀에 재워 두었다가 먹을 때 오미자 국물에 넣고 실백을 띄워 냅니다.       준치만두와 준치국: 준치는 생선 가운데 가장 맛있다는 것이라 진어(眞魚)라고도 합니다. 준치는 유난히 가시가 많은 생선으로 그것에 대한 전설이 있습니다. 옛날 사람들이 맛있는 준치만 잡아가서 준치는 멸종의위기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용궁에서는 묘책으로 여러 물고기들이 자기의 가시 한개씩을 빼서 준치에게 박아 주면 사람들이 쉽게 잡지 않으리라는 의논이 모아져 결국에는 준치가 유난히도 가시가 많은 생선이 되었다고 합니다.      준치 머리 쪽의 뼈를 모아 맞추어 새의 형상을 만들어 앵두를 주둥이에 물려서 처마 끝에 매달아 두면 새가 된다는 풍습이 있어 할머니들은 그냥 가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준치의 가시를 바르는 방법은 준치를 통째로 쪄서 윗부분의 살을 가만히 나무저로 들어 내고, 가운데 가시를 들어 낸 다음 다시 고운 체에 살을 올려 두고 나무 주걱으로 내려서 잔가시를 골라야 합니다. 살만 발라 둥근 완자를 만들어 국을 끓이거나, 밀가루에 여러번 굴려 준치만두를 만듭니다.      김동선 기자: 단오날에 성묘를 지내거나 조상제사도 지낸다고 하던데요. 성묘는 어떻게 하고 또 조상제사는 어떻게 지내게 됩니까?    현룡수 회장: 단오제는 우리의 향토민속 축제일뿐만 아니라. 우리민족4대가례중의 제사의 일종이기도 합니다. 축제의 경우, 단오제 행사는 고대 제천행사의 유풍으로서, 주로 풍농제, 풍어제, 마을수호, 행로안전, 재액방지 등의 기원을 겸한 소위의 신에게 올리는 종합적 향토신제였으며, 전통적으로는 단오굿이라고도 하였습니다. 제사의 경우에는 청명, 추석, 중양, 등을 포함한 4대묘제의 일종으로서, 산소를 찾아가 묘자리가 있는 모든 선조와 부모의 묘를 다듬고, 먼저부모의 묘에 제사를 올리고, 그다음 맨 윗대의 조상의 묘부터 차례로 내리 제사를 지냈습니다. 지금은 청명과 추석에만 산소에 가서 묘제를 올리고, 단오와 중양에 가는 경우는 드믑니다.     김동선 기자: 성묘때나 조상제사를 지낼때 어떤것을 반드시 지켜야 합니까?      현룡수 회장: 지금은 조상제사를 지내지 않는다 하여도 그 누가 어떻다 할수는 없지만, 일단 지낸다면 형식에만 그치지 말고, 상관 상식을 알고, 반드시 정성스럽게 지냈으면 합니다. 조상제사는 미신이 아니라, 자기의 뿌리를 숭배하는 문화행사로서 비난할바가 아닙니다.    보우를 바라는 립장에서도 예수나 보살에게 백번 기도하고 참배하기보다 자기 조상에게 한번제사 지내는 것이 훨신 더 효과적이라고 말하고싶습니다. 예수나 보살은 생면부지의 당신을 특별히 보우하여 줄 아무런리유도 없지만 당신의 조상은 당신을 보우하여 줄수 있는 충분한 리유가있습니다.   우리민족 제사문화가 다시 회복되는 날이면, 해이해진 우리민족 기강이 다시 회복되는 날일것이라고 믿고 싶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은 성묘를 할때나 조상제사를 지낼때 금기시하는 것들이 있다고 하던데요. 주로 어떤것을 금기시 해왔습니까?       현룡수 회장: 지금은 조상제사를 지내는 사람조차 별반 없는데, 금기를 말했댔자 부질없는 일입니다만, 그 언젠가에 가서는 우리민족도 다시기강을 회복하고, 자기 조상을 찾을 날이 올것이라고 믿습니다.      김동선 기자: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인 단오때가 되면 날씨도 좋고 기후도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고 좋기에 여러 가지 행사를 벌이면서 경축하면서 기념해야 할텐데 지금의 상황을 보면 이런 전통명절의 색이 점점 바래져가고 있는거 같아서 참으로 가슴아픕니다. 우리 민족의 4대 전통명절 단오날을 명절로 다시 부활시키기 위해 국가에서도 명절로 지정하고 정식휴식도 하지 않습니까? 현회장께서는 이러한 기회를 빌어 단오명절의 분위기를 잘하려면 정부에서는 어떤 조치를 대야 한다고 보십니까?        현룡수 회장: 나라에서는 이미 “비물질문화유산법”을 제정하고 실시하고 있습니다. 단오명절과 같은 의의있는 전통적 명절을 살리기 위하여정부측에서는 우선 민간 문화시장을 개방하고, 민간 문화단체의 활동을 장려해야 한다고 봅니다. 정부가 주도하는 전업단체에만 의거해서는 민족문화를 살려낼수 없습니다. 반드시 문화시장을 개방하고 전민이 참여하고, 사람마다 유익한 문화혜택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봅니다.      김동선 기자: 민간단체나 기업차원에서는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 할까요?     현룡수 회장: 지금 명절이라 해 봤자 하루 휴식하는것이 고작인데,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려면 반드시 민간에서 주최하는 자발성적인 축제같은 행사가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려면 우선 우리민족 전체적으로 전통을 이어가려는 강력한 민족의식이 있어야 하며, 이런 축제를 책임지고 조직할 능력이 있는 민간단체 핵심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 이 두가지가 모두 없습니다. 그리하여 단오를 진정한 명절로 부활시키려면 아직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지요.      김동선 기자: 가족내에서도 부모와 자녀들이 단오를 우리 민족의 전통명절로 기념하기 위해서 부모들이 우선 솔선수범해서 단오를 의의있고 유익하게 쇠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현룡수 회장: 지금 전통적 의미에서의 완미한 가족은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많은 가족에서는 식구들이 세계 각지에 뿔뿔히 널려 있습니다. 이런 형편에서 중요한 것은 후대들에게 단오의 개념을 심어주는 것이라고 봅니다. 한자리에 모여서 단오를 쇨수는 없지만, 단오를 리유로 서로 문안 전화나 문안 메시지를 보낼수는 있습니다. 부모들이 우선 솔선수범해서 전통명절 단오를 리유로 타향에 있는 자식들에게 전화를 쳐 주어 의의있고 유익하게 단오를 쇠라고 긔뜸해 주는것이 바람직 합니다.         김동선 기자: 현회장님, 오늘 말씀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현룡수 회장: 감사합니다.       방송사명: 연변인민방송국   방송부서: 사회교육부
208    “德不配位,必有灾殃”에 관하여 댓글:  조회:2069  추천:2  2015-05-04
“德不配位,必有灾殃”에 관하여   요즘 중국 인터넷에서는 “德不配位,必有灾殃”란 말이 류행되고 있는데, 당면의 반부패중에서 잡혀나온 많은 관원들에 대한 적절한 평가인것 같다. 뿐만 아니라 현대 젊은이들의 절제없이 팽창되는 재부욕에 대한 적시적인 경고라고 할수도 있겠다.   어찌하여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쉽게 젊어서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은 이름을 날리고는 까닭없이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은 많은 돈을 벌어놓고는 써보지도 못하고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관원들은 금방 승급을 하고는 이상하게 중병에 걸려 죽는가? 어찌하여 많은 사람들이 금방 멋진양옥을 구매해 놓고는 사고를 당하여 죽는가? …… 이런것들은 도대체 무었때문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德不配位”, 즉 우리말로 해석하면 그의 福報가 그의 德性과 맞지않았기 때문이다.   물질적 재부, 정신적 재부, 사회적 재부를 통털어서 옛사람들은 “物”이라는 특수한 개념을 만들어 냈다. 그리하여 “厚德载物”란 말이 나오게 되였는데, 현재중국 청화대학의 校訓으로 추대받고 있다. 우리말로 “덕성이 두터워야 많은 지식과 재부를 가질수 있다”는 뜻이 된다.    “德不配位”란 말은 “厚德载物”와 상반되는 말인데, 여기에서 “位”란 사람들이 받는 대우와 보수를 말하는 것으로서 전업술어로는 福報라고 하며, 일부 사람들의 졸렬한 덕성이 그들이 받고있는 과분한 대우와 보수(福報)에 부합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이 종래로 큰 덕을 쌓은 적이 없고, 재부를 소유할 자격이나 용납할수 있는 심리그릇도 겨우 빈곤층 정도밖에 안 되였는데, 어찌하여대박이 터져 이 사람한테 천만원, 억만원의 재부가 생겼다.   또 이를테면 어떤 한 사람의 됨됨이가 기껏해야 제노릇이나 잘하는 소인물인데, 어찌하여 이 사람한테 벼슬운이 터져 승승장구로 엄청난 고위급 벼슬까지오르게 되였다.   이런것을 가리켜 “德不配位”라고 하며, 덕성을 쌓아 빨리 미봉하지 않는다면 필연코 재화가 생기게 되는 것이다.   어떤 사업가는 숭고한 목표가 있고, 능력도 있으며, 그에 맞추어 상당한 노력도 투입하고 있지만 그가 기대하는 리상적인 결과는 심술을 부리는 듯 나타나지 않는다. 기실 이것 역시 “德不配位”의 현상이며, 즉 사업이 성공한 후에 차려질 福報에대비하여 아직 그가 바친 노력과 덕성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금전, 권리, 명성 등은 모두 자기의 福報이면서도, 또 자기몸을 내리 누르는 物이다. 자기를 충분히 크고 단단한 그릇으로 만들지 않고서는 그 物을 제대로 담을수도 없고, 담당해 낼수도 없으며, 종당에는 그릇이 깨여지고 말것이다.   자기를 충분히 크고 단단한 그릇으로 만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바로 덕행을 많이 베풀어 덕성을 쌓는 것으로 사회의 인정을 얻는 것이다. 이 방법은 자기의 능력과 지혜를 힘써 제고하는 것보다 엄청 더 현명한 방법이다. 이 방법은 또한 마윈의 성공을 꿈꾸고 있는 모든 젊은 창업자들에게도 반드시필요한 방법일 것이다.   중국에서 현재 가장 많이 남아도는 것이 능력과 지혜이고, 가장 부족한 것이 덕성과 사상이다. 능력과 지혜로는 재부를 얻을수는 있겠지만 지켜내기 어렵다. 고상한 덕성과 숭고한 사상이 있어야만이 보다 많은 재부를 얻을수 있을뿐만 아니라 또 효과적으로 지켜내면서 유익하게 사용할수 있다.   어떤 상인이나 기업인들은 사회도덕 같은 것은 념두에도 없으며, 돈을 벌기 위하여 방법과 수단을 가리지 않고, 법률마저 무시하며 경영하다가 결국은 필연코 모두 망해 버린다.   지금의 반부패에서 많은 관원들은 덕성과 사상경계가 없었기 때문에 직권을 리용하여, 회뢰를 받아서는 자기 팔자에도 없는 엄청난 재부를 모아놓고 흐믓해 하다가, 결국 쌍규를 당하고 사람과 재물을 모두 망치는 경우도 우리는 많이 보고있다.   이런것이 바로 "당신의 덕성이 당신의 福報에 부합되지 않아 결국 재앙을 당했다(德不配位,必有灾殃)”"는 경우이다. 바꾸어 말하면 “당신이 가진 재부나 권리가 당신이 쌓은 덕성에 부합되지 않게 엄청 많으면 기필코 재화가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 많은 재부와 높은 권리를 가지고 안전하게 오래동안 향유하겠으면 거기에 맞게 먼저 고상한 덕성을 갖추라는 뜻이이리라.     연변례의 현용수 작성 2015-05-03    
207    성원 규격시사 묶음 댓글:  조회:1965  추천:0  2015-05-01
성원 규격시사 묶음         七绝 桃花傲春 2012-5-5 盛元  桃花争艳傲春天, 少女愛穿迷你裙。 散步花街昨日事, 回头眨间又一年。   복숭아꽃 빛갈 다투며 봄을 뽐내니, 소녀들은 미니치마 즐기여 입누나. 여기 꽃거리 거니던 일 어제 같은데, 머리돌려 깜짝사이 또 한해 갔었구나.   格律式 平平仄仄仄平平, 仄仄仄平平仄平。 仄仄平平平仄仄, 平平仄仄仄平平。         (思越人--鹧鸪天) 思念沪友亚平 05.乙酉大寒--盛元    往事依稀憾逝风,左流泛滥九州蒙。  红灾落难遇知友,海阔天空无束情。    从别后、忆相逢。几回枉喜远笛声?  昨宵又梦单簧乐,尤盼重逢在北东。     사월인(저고천) 상해 친구 야핑이 그립다 2005 을유년 대한날 -- 성원 지나간일 꿈같구나  유감많은 그세월아 좌류가  범람하여  온 나라가  어리벙벙. 붉은난을  당했을적 고마웠던 내친구야 바다처럼 하늘처럼 구속없은 우정이여.   갈라져서  그날부터  그리움만   더해져 하늘가  피리소리에 그몇번  놀랬던가? 간밤 꿈에  또한번  크라네트  들려오니 언제다시 만날가  북동의 그  옛터에서.   格律式: 仄仄平平仄仄平,平平平仄仄平平。 仄平平仄平平仄,平仄平平仄仄平。 平仄仄、仄平平。仄平平仄仄平平。 平平仄仄平平仄,平仄平平仄仄平。         (五 律) 行路乐 (纪念癸末半百生日--盛元)   人生行路乐,天命到知年。 五度江山变,十轮世道迁。   难得糊涂误,幸免半生奸。 少做发财梦,多交世上仙。     오언률시 행로락 계말 오십생일 맞으며 두루 걸어 인생길이 즐거웠노라 인젠 나이 지천명에 이르렀구나. 강산이 다섯번 변화하는 사이에 세도는 열번이나 옮기여 지더라.   천성이 둔하고 미련했던 덕분에 다행히 간사하게 살진 않았어라. 이제부터 부자꿈 적당히 접고서 세상의 신선들과 벗하며 살리라.   五 律 平平平仄仄,仄仄仄平平。 仄仄平平仄,平平仄仄平。 平平平仄仄,仄仄仄平平。 仄仄平平仄,平平仄仄平。           虞美人(一江春水) 游玩"满天星" (盛元—2004-6-20)   汪池清水七仙女,七彩边嬉浴。 樵夫怀念旧仙情,到此游山玩水满天星。   风调雨顺娘娘在,但愿福长久。 问仙人间几多缘?恰似一池静水照蓝空。     우미인 (일강춘수) 《만천성》에서 노닐었노라 성원작 2004-6-20   너른호수 맑은물에 일곱선녀 황홀합니다 무지개 옆에서 목욕하며 장난칩니다. 당년의 나무꾼 선녀사랑 잊지못해 오늘도 만천성 찾아 산놀이 물놀이 즐겨 봅니다.   조화로운 바람과 비를 왕모마님 살펴 주시니 오로지 이 행복 오래 가기만 바람입니다. 저기요 선녀님!이런 인연 인간에 얼마나 있습니까? 마치도 고요한 호수물에 푸른하늘 비끼듯 하답니다.   格律式 平平仄仄平平仄,仄仄平平仄。 平平仄仄仄平平,平仄仄平平仄、仄平平。 平平仄仄平平仄,平仄平平仄。 仄平平仄仄平平?仄仄平平平仄、仄平平。           生查子 月光酒 [2005-10]-盛元   (1) 明月浴云池,酒仙一游处。 月宫桂树边,玉兔忙舂谷。 朋友远方来,不醉何情趣? 婵女速来人,端来月光酒。   ……………………………     생사자 월광주 [86-6]   (1) 운지명월 헤염친다 이태백이 노던달아! 계수나무 옆에서는 옥토끼가 절구찧네. 옛친구들 왔는데야 멀정하니 될말이냐? 여보시요! 월궁아씨 월광주를 가져와요.   (2) 어느신선 부터던가 영웅본색 술이더라. 청사펼쳐 음미하니 술냄새가 향기롭다. 술병속에 세월담고 술잔속에 사연담아. 천하대사 론할진대 흥망역시 술이더라.    (3) 달은지쳐 서산가고 친구열변 여전하다. 태백성이 떠오르니 월광주가 바닥났다. 통쾌할손 우정깊어 이인생이 유감없다. 빈잔들어 달바래며 공명이뤄 다시보세.   生查子格律式 仄仄仄平平,仄仄平平仄。 仄平仄仄平,仄仄平平仄。 仄仄仄平平,仄仄平平仄。 平仄仄平平,平平仄平仄。         七言詩 宇宙与人生 [97丁丑年亥月]    宇宙外有大宇宙, 우주 바깥에 대우주 있고 宇宙内存小宇宙。 우주 안에 소우주 있다. 宇宙究竟为何乎? 우주란 도대체 무엇이냐? 宇宙乃是时空也。 우주란 바로 시공간이다. 时者永恒无始终, 시란 영구함이요 시종이 없고 空者空空无边际。 공이란 너름이요 변두리 없다.   大宇宙无限可大, 대우주 무한히 클수 있고 小宇宙无限可小。 소우주 무한히 작을수 있다. 无限在于有限中, 유한중에 무한 존재 하거니 无数有限成无限。 무수한 유한이 무한 이룬다.   大外有大大非大, 큼 바깥에 또 큼이 있고 小中有小小非小。 작음안에 또 작음이 있다. 大外有小大亦小, 큼 바깥에도 작음이 있고 小中有大小亦大。 작음 안에도 큼이 있다.   大至无乃空无也, 커서 무에 이른것 공무요 小至无乃极无也。 작아 무에 이른것 극무다. 空无乃膨胀之终, 공무는 팽창의 종결이요 空无亦收缩之始。 공무 역시 수축의 시작이다. 极无乃收缩之极, 극무는 수축의 종결이요 极无亦膨胀之始。 극무 역시 팽창의 시작이다.   收缩之极乃黑洞, 수축 극한이 블랙홀이요 吸收银河聚于点。 은하를 흡수하여 한점이 된다 所有物质成反质, 모든 물질은 반물질로 되거니 此乃银河之终也。 이것이 바로 은하의 종결이다.   膨胀之始乃爆炸, 팽창의 시작은 우주 대 폭팔이요 释放所缩大能量。 수축된 에너지를 대량 방출한다. 基本粒子由此生, 물질 기본립자 이로부터 생기거니 此乃银河之始也。 이것이 바로 은하의 시작이다.   大至小又小至大, 컸다가 작아지고 작았다가 커지며 如此无限循环也。 우주는 이렇게 무한 반복순환한다.   空无非一无所有, 공무는 아무것도 없는것 아니다 空无中充满能量。 공무에는 에너지 충만되여 있다. 能量者不生不灭, 에너지는 생성 소멸 되지 않으며 千变万化終归能。 아무리 변하여도 여전히 에너지다. 能量乃物质之本, 에너지는 물질의 본질이요 物质乃能态之一。 물질은 에너지의 일종 형태이다   能量组合成阳物, 에너지 조합되여 양성물질 이루고 阳物升化成阴物。 양성물질 승화하여 음성물질 된다. 能量者产生能场, 에너지는 자기의 마당 형성하고 能场中容纳万物。 에너지 마당에 만물이 용납된다.   阳物者产生旋场, 양성물질은 회전마당 이루거니 旋内旋外无不旋。 회전안 회전밖 회전 없는곳 없다. 阴物者产生波场, 음성물질은 파의 마당 이루거니 不占空却充满空。 공간 점하지 않고도 충만되여 있다.   光速乃阳速之顶, 광속은 양성속도의 최고봉이요 光速亦阴速之初。 광속 역시 음성속도의 시작이다. 阳速临顶论相对, 속도 광속에 접근하면 상대론이요 空间变小时间慢。 공간 좁아지고 시간 늦어진다.   阳速过顶化阴速, 속도 광속 초과하면 음성속도요 时空坐标变无维。 시공간 좌표 무방위로 변한다. 三维不见化为波, 립체물 없어지고 파로 되거니 时间流满全方位。 시간은 전방위로 흐르게 된다.   阴速减慢还阳速, 음성속도 감속하여 양성속도 되면은 时空坐标复如原。 시공간 좌표 원래대로 회복된다. 三维再现还为旋, 립체물 다시 나와 회전운동 하면서 时间只往未来流。 시간은 미래로만 흘러간다.   此理玄之又玄之, 이 도리는 현묘하고 현묘하여 恐是永远无解底。 아마 영원히 그 해답 없을 것이다. 无奇不有大宇宙, 별아별 신기함 다 있는 우주에서 莫信一理通万理。 한 도리 만에 통한다는 말 믿지마라 无限宇宙谜无限, 무한 우주에 수수께끼도 무한한데 绝对真理岂有哉? 절대적 진리 어찌 있을수 있겠느냐? 不断探索新真理, 부단히 새 진리 탐구하는 것 此乃宇宙之真谛。 이거야 말로 우주의 진짜 도리이다.   生命只是一瞬间, 생명은 단지 한순간 뿐 宇宙可是恒又恒。 우주는 영구한 것이다. 时空阴阳一相合, 시공간에서 음양이 한번 결합하여 此乃生命之始也。 이것이 곧 생명의 시작이다.   生命之主在于魂, 생명의 주재는 령혼에 있으니 魂者高等阴物也。 령혼이란 고급 음성 물질이다. 生命灵魂一相合, 생명과 령혼이 한번 결합하여 此乃人生之始也。 이것이 곧 인생의 시작이다. 人生意义在于德, 인생 의의는 덕성에 있거니 德者灵魂之精也。 덕성이란 령혼의 정수이다.   人之能力无限大, 사람 능력은 무한히 클수 있거니 只待敢于去开发。 오로지 과감히 개발하길 기다린다. 人之能力在于运, 사람 능력은 운에서 표현 되거니 运者运用能量也。 운이란 에너지를 운용함을 말한다. 宇宙能量无穷尽, 우주에는 에너지 무궁무진 있으니 只待敢于去索取。 오로지 과감히 섭취하길 기다린다.   思想是进能大门, 사상은 에너지를 들여오는 대문 开放思想全方位。 사상을 전방위로 개방하라. 思维是炼能熔炉, 사유는 에너지를 제련하는 용로 开动思维满功率。 사유를 만부하로 운전하라. 心胸是存能仓库, 마음은 에너지를 저장하는 창고 开扩心胸似大海。 마음을 바다처럼 넓혀라.   灵魂置于宇宙时, 자기 령혼을 우주에 놓았을때 此乃人生高境界。 이것이 인생 제일높은 차원이다. 吾乃宇宙也!          내 바로 우주여라! 宇宙亦吾也!          우주 역시 내여라!           卜算子 咏 日 赞高尚人格試作一首 盛元--(1997-8)   烈阳送晨归,凉日迎晨到。 长夜终来破晓明,不管金鸡报。   亮也不贪辉,只把瀛寰照。 待到人间热闹时,悦在空中笑。     복산자 해를 읆노라 고상한 인격을 찬미하여 한수 적어 보았다. 성원--(1997-8)   뜨거운 해 아침 바래고 차거운 해 아침 맞습니다. 아무리 긴밤도 동트면 밝으리니 그까짓 수탉이야 울거나 말거나.   밝아도 빛발 탐내지 않고 오로지 세상만 비춰 줍니다. 인간세상 밝아서 분주할 때면 그는 공중에서 즐거워 웃습니다.   格律式 仄仄仄平平,仄仄平平仄。 平仄平平仄仄平,仄仄平平仄。 仄仄仄平平,仄仄平平仄。 仄仄平平仄仄平,仄仄平平仄。           七言詩 醇香楼随感  盛元94甲戍年腊月 (汉文配字不配韵律)   举杯杜康咏古诗, 韵间复显五千年。 一饮而尽望东方, 烽台浓烟直冲天。   一散一合合而分, 春夏秋冬照序更。 江山依旧今日在, 几度夕阳红又红。   天地玄黄盘古开, 三皇五帝道德建。 始创王朝夏商周, 建号皇帝赢政先。   大汉民族由汉武, 盛唐文化始开元。 成吉思汗开大元, 努尔哈赤建大清。   震惊天下当年战, 已是酒楼闲话题。 千秋功绩万古罪, 任凭醇香人人判。   先人夺地后人失, 前世英雄后世奸。 兴旺盛衰朝夕事, 是非胜败回头空。   盗用天道偷天下, 借天号令百姓蒙。 厚皮脸者称皇帝, 黑心肝者得江山。   自古以来共苦易, 何故从来同甘难。 一旦天下归己有, 昔日功臣先砍头。   北邙山坡密密坟, 青史留名无几行。 直到一名上青史, 无数人头无偿献。   黄尘古道铁轨铺, 烽火边城游人挤。 日月依旧人间换, 管它东西与北南。   英雄枭雄埋于土, 功绩罪过没于史。 百年后评由他去, 担当身前二三事。     사언시 술향루 수감 [성원1994갑술년 섣달]   옛술한잔 따라들고 옛시한수 읊조리니, 운을따라 률을따라 반만년이 숨쉬는듯, 한모금에 잔을내고 동쪽하늘 바라보니, 봉화대의 검은연기 하늘높이 치솟누나.   흩어졌다 합해지고 합해졌다 갈라지고, 춘하추동 눈과비를 철을따라 뿌리면서, 강산이야 오늘에도 당년인양 여전한데, 서산마루 저녁노을 벌써몇번 붉었던고?   혼돈했던 하늘땅을 개척한이 반고라면, 인륜도덕 만든것은 삼황오제 공로여라, 왕권나라 세운것은 하상주가 시작이고, 황제조대 시작한건 진시황이 먼저여라.   大汉民族 흥기한건 한무제때 부터였고, 중원문화 흥성한건 당조개원 부터여라. 제일너른 대원제국 칭키스칸 공로이고, 제일부강 대청제국 누르하치 세웠노라.   세인들을 놀래우며 끔찍했던 당년싸움, 지금에는 술집에서 한담거리 신세되고, 천추공적 무엇이고 만고죄인 누구던가? 지금사람 술맛따라 이러저러 해지누나.   앞사람이 뺏은땅을 뒤사람은 빼앗기고, 전세에는 영웅이요 후세에는 간적이니, 흥망성쇄 알고보니 조석으로 달라지고, 시비성패 돌아보니 부질없는 일이더라.   하늘이름 훔쳐다가 남의강산 뺏어낼제, 내가바로 천자니라 천하민심 속이더니, 낯거죽이 두터운자 황제보좌 차지하고, 마음속이 검은자가 이강산을 가지더라.   옛날부터 초창기에 함께고생 쉬웠지만, 어찌하여 성공후엔 함께향락 어렵더라, 하루아침 이강산이 자기것이 되고보면, 그전날의 공신부터 목을쳐야 하였더라.   북망산에 빼곡빼곡 옛무덤이 수없지만, 청사에는 적힌이름 몇사람이 아니여라, 하나이름 청사에다 올리려고 하기까지, 너무나도 많은사람 자기머리 바쳤노라.   먼지일던 옛길에는 기차레루 놓이였고, 변강마을 봉화대엔 유람객이 붐비누나, 인간세상 변했지만 일월성신 여전하야 , 그까짓껏 바깥일을 상관해선 무엇하랴?   영웅들도 패장들도 진토속에 묻히였고, 공적이든 죄과이든 력사속에 묻혔노라, 백년후의 평가라야 마음대로 하라하지, 앞에놓인 몇가지일 이것부터 해야겠네.       古體詩一首:路 汉文配字盛元 2004-10 世间本无路,有道才有路。 行者千里游,足下乃路也。   珠峰固然高,天下丘一座。 瀛海实在深,地上池一片。   跋山涉水兮,天涯万里辽, 一步再步兮,海角咫尺及。     고체시 한수 길(路) 성원작--1987-08    길이란 무어겠나? 밟고 밟아 길이겠지! 나그네 먼길 떠나, 걷고 걸어 길이렸다.   주무랑마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요, 태평양이 깊다하되, 이땅우의 내로다.   산을 넘고 물을 건너, 천애지각 머다마라, 가고 가고 또 가노라면, 지척에 닿으리다.  
206    아직은 못 간다고 일러라! 댓글:  조회:2094  추천:0  2015-04-26
아직은 못 간다고 일러라!    옛날옛적 동방삭은 삼천갑자 살었는데, 한 두갑자만  사자는데 이리도 성화드냐? 육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아직 할일이 태산같아 못 간다고 일러라!  칠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아직 새파랗게 젊어서 못 간다고 일러라!  팔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세계여행 떠났으니 기다리라고 일러라! 구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자서전 쓰고 있으니 조용하라고 일러라!  일백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마누라 놓아주지 않아 달랜다고 일러라!  백열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좋은 날 좋은 시 맞춰서 간다고 일러라!  백이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글쎄 알아서 갈테니 재촉 말라고 일러라!   백오십살에 하늘에서 날 데리러 오시거든 후생들 보기 민망해 이미 갔다고 일러라!     연변례의 현용수 정리 2015-04-25
조선족 상례문화가 어찌하여 무시당했고, 무었때문에 보호해야 하는가? 제2차 “조선족 상례풍속 학술심포지엄” 특별연설 “조선족 상례풍속” 대표전수인 현룡수   1, 어찌하여 조선족 상례문화가 무시당하였는가? 우리 상례문화가 락후하였기 때문인가? 아닙니다. 그럼 당년 좌적사상의 영향을 받아서인가? 완정히 그런것만도 아닙니다. 주요한 원인은 조선족 상례풍속이 성숙되고 통일된 조선족 상례문화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자기의 찬란한 상례문화가 있었습니다. 중국 조선족은 백여년 전에 조선반도의 여러 부동한 지역에서 중국에 들어 왔으며, 그들이 가지고 들어온 구체적인 상례풍속도 지방에 따라 정도 부동하게 차이가 있었습니다. 글을 아는 사람이 많지 못했던 우리 선인들은 상례지식을 주로 선배들 한테서 구전(口傳)으로 전수 받았으며, 그 과정에 오전(誤傳)이 많았고, 지방에 따라 서로의 차이도 점점 크게 되였습니다.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전통상례문화의 전수와 통일을 결과적으로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1980년대부터 나라에서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들의 장례풍속은 국무원의 “빈장관리조례”와 그후의 민정부 보충해석 문건에 의하여 국가적 존중대우를 받게 되습니다. 그러나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끝내는 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이 비록 전국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였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서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항목이나 시설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삼십여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가 필요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으며, 그 직접적인 악과로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젊은이들의 책임감이 없어지고, 전통이 끊어졌으며,  경제가 발전한 반면에 민속문화의 퇴화는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2, 무엇때문에 조선족상례풍속을 보호해야 하는가? 조선족상례풍속이 특별히 우월해서인가? 아닙니다. 그럼 이 풍속이 없으면 우리 조선족들이 살아갈수 없어서인가? 그런것도 아닙니다. 주요한 원인은 조선족상례풍속에는 우리민족의 얼이 슴배여 있고, 우리민족의 뿌리가 묻혀있으며, 조선족상례풍속이야 말로 효도를 발양하고, 젊은이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민족의 전통을 계승하는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민족 가례문화 “冠婚喪祭”를 저술한 《사례편람》이란 책이 있는데, 조선왕조 말기의 학자 리재(李縡기원1680~1746)가 최종 완성한 책입니다.이책은 도합 여덟권으로 되여 있는데, “冠禮”가 한권으로 되여있고, “婚禮”가 한권으로 되여 있고, “葬禮”도 한권으로 되여 있는데, “祭禮”는 다섯권으로 되여 있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선조들은 우리민족 수천년 생존분투사의 인생리념을 “葬禮”와 “祭禮”에서 집중적으로 표현시켰던 것입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은 자고로 효도를 발양하고, 젊은이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며, 민족의 전통을 전수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의 핵심이 바로 “효도”입니다. 우리민족은 자고로 “백가지 선행에서 효도가 첫째(百善孝爲先)”라는 리념을 견지하여 왔습니다. 즉 효도가 한사람의 현명여부를 가늠하는 가장 우선적인 표준이였으며, 한가문의 출세여부와 직접적으로 관계가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평소에 부모를 학대했던 가문에서도 장례와 제사만은 가산을 탕진하면서까지 마음먹고 후하게 치렀으며, 그 목적은 자기들도 효자 가문이라는 사회 평판을 얻기 위한 것이였습니다. 일단 사회로부터 불효 가문이라는 평판을 받게 되면 그 가문 자손들의 출세의 길은 영원히 막혀버리기 때문이였죠. 그런데 지금은 사회적으로 인재등용을 평심할때 그사람의 자격과 재능만 중시하고, 인품은 상관하지 않으며, “효도”는 근본 인재표준에 들지도 못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젊은이들은 자격증을 따고, 재능을 높이는 데만 중시하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인품을 높일 필요는 근본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족장례풍속이 이렇게 오래동안 사람들의 관심밖에 버려질수 있었고, 오늘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그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근본원인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런데 여러분들은 생각해 보셨습니까? 효도가 약화됨으로써 지금 우리의 미풍량속이 얼마나 엄중하게 퇴화되고 있는지 말입니다. 지금의 젊은이들은 늙으신 부모와 한집에서 지내는 가정이 거의 없고, 늙은이들에겐 진짜 혼자서 살다가 혼자서 죽어야 하는 고독한 시대가 되였습니다. 고독사, 임자없는 죽엄, 죽은후 며칠후 발견 등 현상이 자주 발생하는데, 이런 현상은 “효도의 재난”이요, “인도주의 재난”이며, 우리민족의 망신입니다. 부모가 사망하여 당일 장례가 보편적이고, 장례도 우리식이 아닌 남의 식으로 어설프게 치루어야 하며, 수십년 동안 자식들을 위하여 모든것을 바쳐온 부모들이 사망하여 결국 쓰레기처럼 처리되여 버립니다. 화장을 실행하여 장례가 간단하여 진것은 시대의 진보라고 할수 있겠지만, 시체만 처리하고 장례는 지내지 않으며, 부모를 경로원에 맡겨 놓고, 사망해도 자기들은 외국에 있다는 이유로 오지도 않는, 상주로서의 최저의 례의도 지키지 않는 이런 비인륜적인 행위는 그 어느민족에서도 용납하지 않습니다. 이런행위는 반드시 사회의 질책을 받아야 하지만, 지금 이런행위를 질책할 사람이 근본 없고, 그런 사회기제도 업습니다. 이것이 우리민족의 퇴화가 아닐수 없습니다. 자기 부모도 존중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남을 존중할수 있고, 남을 존중할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사회에 용납될수 있으며, 사회에 용납되지 못한 사람이 어떻게 잘살수 있겠습니까?   3,어떻게 우리민족의 품질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겠는가? 이 문제의 해답은 간단합니다; 한마디로 우선 효도를 회복시켜야 합니다. 효도를 중시하고 회복시켜야만 가문의 화목을 확보할수 있고, 젊은이들의 가문에 대한 책임을 담보할수 있으며, 민족의 우량한 전통을 계승할수 있고, 우리민족의 품질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습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양로보험, 의료보험 등 보험들이 많은데, 이런 보험들은 로인들의 양로에 필요한 기본적인 비용을 해결할수 있지만, 로인들에게 사랑과 존중을 줄수는 없습니다. 2500여년전에 공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효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부양만 하면 되는것으로 여기는데, 기실 우리는 개나 말도 기르고 있다. 부모를 존경하지 않고 부양만 한다면 개나 말을 기르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느냐?(今之孝者,是谓能养。至于犬马,皆能有养。不敬,何以别乎?)》 그럼 어떻게 하면 효도를 회복시킬수 있겠습니까? 우선 우리민족 효도에서 가장 엄중하게 망가진 상례풍속부터 다시 살리고 봅시다. 자고로 우리민족 상례풍속은 효도를 강조하는 가장 유력한 수단의 하나였습니다. 우리민족 상례풍속을 살린다는 것은 그많은 번쇄한 규례들을 모두 회복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망한 부모를 神처럼 높이 공경하는 그 핵심관념을 살린다는 것입니다. 사망한 부모를 공경하는 사회기풍이 형성되면, 자연히 살아 계시는 부모를 존중하는 사회기풍도 형성될것이요, 우리민족의 여러가지 우량한 전통도 다시 계승될수 있을것입니다. 2009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와 길림성 정부에서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각기 주급과 성급 무형문화재로 비준하였으며,저를 대표성 전수인으로 지정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민족 상례풍속이 초보적으로 나라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는 것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조선족 상례풍속”은 조선족 천가만호와 상관되고, 조선족 매개 성원들과 상관되는 큰 일이므로, 이 무형문화재 보호가 결코 대표전수인 한사람의 힘으로 될수있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 조선족 이름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 특히는 조선족 이름으로 직위를 얻은 분들, 학위를 얻은 분들, 재부를 얻은 분들, 어떤 리익을 얻은 분들, 우리 힘을 합칩시다! 끝까지 청취하여 주셔서 고맙습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발표 2015-03-30  
204    제2차 “조선족 상례풍속 학술심포지엄” 연길서 개최 댓글:  조회:1316  추천:0  2015-04-01
제2차 “조선족 상례풍속 학술심포지엄” 연길서 개최 주제-“전통상례의 가치와 현대적계승”   청명절을 앞두고 3월30일 연변대학과 주문화국에서 공동으로 주관하고, 연변무형문화재보호중심,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연변대학 민족연구원에서 공동으로 주최한 “제2차 조선족상례풍속 공동학술심포지엄”이 연변대학에서 개최되였다. 심포지엄은 “조선족전통상례의 가치와 현대적계승”이란 주제를 둘러싸고,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원장 박금해가 “조선족 상례문화의 현주소와 향후 과제”라는 제목으로 기조논문을 발표하였고, 연변박물관의 한광운이 “조선족 전통상제례식의 현실적 응용과 의의에 대하여”라는 제목으로, 연변대학 인문학원 사회학과 부교수인 최민호가 “조선족 상례문화의 변천과 요인 연구”라는 제목으로, 연길시 민정국에서 “조선족 빈장문화의 전승과 창신”이란 제목으로 각기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이며 조선족상례풍속 대표전수인 현룡수가 원래는 “유가효도사상의 세가지 요소”라는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기로 하였는데, 수요에 의하여 임시로 의제를 바꾸어 “조선족 상례풍속 보호사업에 관한 몇가지 문제”라는 특별연설을 발표하였다. 논문과 연설 발표가 있은후 잠간 휴식하고 대회토론이 있었는데, 연변병원, 종양병원 등 병원계통의 대표와 안도현 명월진 대표, 룡정시 빈장관리소 대표, 연변대학 대표 등 10명 대표의 토론발언이 있었다. 연변대학 민족연구원 원장 박금해는 “조선민족풍속에는 ‘관혼상제’라는 4대 인생의례가 있는데, 그중에서 상례와 제례가 절반을 점하며, 상례는 그 어느 의례보다 관습의 규제가 강하고, 절차 또한 까다로왔으나 우리 민족은 그 관습을 오롯이 지켜왔다. 하지만 오늘날 행해지고있는 우리의 상례는 그야말로 조선족, 고유의 상례도, 한족상례도 아닌 정체불명의 상례로 탈바꿈하고 있으며, 특히 안타까운 사실은 상례의 근저에 깔린 효문화도 퇴색되고 있는것이다”고 제기했다.그러면서 “다행히 ‘조선족상례풍속’이 성급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조선족 상례풍속 전수인도 지정되였다. 하지만 일정한 물적, 인적 공간의 전승기지가 없다면 문화재의 보존은 운운할수 없다. 진정한 민속문화보호의 차원에서 특정된 마을을 전승기지로 지정하여 일정한 인구규모의 조성을 통한 주변정비와 자금조달 및 프로그램 도입 등으로 구체적이고, 정형화된 지원을 줌으로써 상례문화가 특정된 지역범위안에서 전승될수 있게끔 조건을 창조해주어야 한다”고 피력하였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회장이며, 조선족상례풍속 대표전수인 현룡수는 자기의 특별연설에서 다음과 같은 몇가지 문제를 가지고 력설하였다: 1, 무엇때문에 조선족 상례문화가 무시당하였는가?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중국 조선족이 자기 전통상례문화 계승을 완성하지 못하였고, 조선족 상례풍속이 성숙되고 통일된 중국특색 조선족 상례문화로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2, 무엇때문에 조선족 상례풍속을 보호해야 하는가? 조선족 상례풍속에는 우리민족의 얼이 슴배여 있고, 우리민족의 뿌리가 묻혀있으며, 조선족 상례풍속이야 말로 효도를 발양하고, 젊은이들의 가정에 대한 책임을 강화하며, 민족전통 계승을 담보하는 유력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3,어떻게 우리민족 품질을 다시 회복시킬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우선 효도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럼 어떻게 하면 효도를 회복시킬수 있겠는가? 우선 우리의 효도에서 가장 엄중하게 망가진 상례풍속부터 다시 살리고 보자! 사망한 부모를 공경하는 사회기풍을 형성시키면, 자연히 살아 계시는 부모를 존중하는 사회기풍도 형성될것이요, 우리민족의 여러가지 우량한 전통도 다시 계승될수 있을것이다. 끝으로 현룡수 회장은 다음과 같이 호소하였다; “조선족 상례풍속”은 조선족 천가만호와 상관되고, 조선족 매개 성원들과 상관되는 큰 일이므로, 이 무형문화재 보호가 대표전수인 한사람의 힘으로 될수있는 일이 아니다. 조선족 이름으로 살아가시는 모든 분들, 우리 힘을 합치자!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2015-3-31
203    우리민족 청명 성묘풍속 댓글:  조회:2295  추천:0  2015-03-16
  청명과 한식 청명은 전통적으로 한식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기실 청명과 한식은 계산하는 방법이 서로 다릅니다. 한식은 동지날 부터 계산하여 105일이 되는 날입니다. 그런데 청명은 24절기의 하나로서 립춘으로부터, 다섯번째 절기가 됩니다.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15도씩 움직이면 한절기가 드는데, 청명이면 지구가 립춘을 원점으로 이미 60도 움직였고, 동지를 원점으로 하면 바로 105도 움직인 위치입니다. 그런데 일년 365일을 지구가 태양을 에워싸고 한회 공전한 360도로 나누면, 공전1도가 실제로 하루의 24시간을 조금 초월하므로 한식은 청명과 같은날이 아닐수 있습니다.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 한식을 기념하게 된 유래에 대하여 몇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서 개자추(介子推) 설이 비교적 대표적입니다. 중국 춘추시기에 진문공(晉文公)이라는 임금이 있었습니다. 그가 바로 력사상 유명한 춘추 7패중의 두번째 패왕이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아직 임금이 되기전에 한번은 내란을 당하여 심복신하들을 데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방랑하게 되였습니다. 하루는 방랑길에서 굶고 지치여 쓰러진 진문공을 개자추라는 한 신하가 자기 허벅지 살을 썩- 베어내여 구워먹여서 살려냈습니다. 그후 고난이 끝나고 임금자리에 오른 진문공이 개자추에게 벼슬을 주려고 불렀지만, 개자추는 벼슬에 뜻이 없어 이미 어머니를 모시고 면산(지금의 山西綿山)에 들어 갔으므로 찾을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를 나오게 할 목적으로 진문공은 산에 불을 질렀으나 개자추는 끝내 나오지 않고 어머니와 함께 불에 타 죽었습니다. 그 옆에는 헝겊에 피로 쓴 한수의 시구가 있었습니다; “… 나는 구천에서도 부끄러움 없으니, 임금께선 나라일에 청명하시고 또 청명하시라.” 진문공은 개자추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 지내게 하였으며, 산에 불을 놓은 그날을 한식날로 하고, 전국적으로 이날에는 불을 금하고 찬 음식을 먹도록 하였으며, 개자추의 시구에 근거하여 이날을 청명절로 부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언제부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이 생겨났는가? 청명풍속은 중국 춘추시기부터 있었다고 하는데, 청명에 성묘하는 풍속은 공자에 의하여 시작되였다고 합니다. 그러니 이미 2500여년이 되지요. 그러다가 당나라 개원년간 당현종때에 와서 청명성묘를 한식성묘로 공식적으로 고쳤습니다. 당시의 조선반도는 통일신라시기였는데, 당나라와의 밀접한 관계에 의하여 한식성묘 문화가 신라에까지 받아 들여진것으로 추정됩니다. 그후 송나라때에 와서 중국에서는 한식성묘가 다시 청명성묘로 복귀되였지만, 조선반도에서는 조선왕조가 시작되면서 한식은 이미 설, 단오, 추석과 함께 우리민족의 4대명절로 확고히 고정되여 있었습니다. 우리민족은 한식날에 주로 조상의 산소를 돌보고 제사를 지내며 성묘를 합니다. 우리 조선족이 중국에 건너온 초기에만 하여도 여전히 한식을 쇠였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중국에서 장기적인 정착생활을 하게 되면서, 점차 한족들의 영향을 받아, 지금 와서는 한식의 개념은 거의 없어지고, 청명개념으로 일반화 되였습니다. 청명에 왜 성묘하는가? 성묘는 우리민족 전통家禮인 冠婚喪祭 四禮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祭禮의 일종이며, 墓祭에 해당합니다. 전통적으로 제례는, 조상에게 감사드리고 사망한 부모를 추모하는, 죽은 사람들을 위한 문화라고 하지만, 기실 제례는 철두철미 산 사람들을 위한 문화입니다. 사람이 사망한후에 저승이나 천국이 실제로 있는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 공자왈; ”未知生 焉知死”(사는 일도 아직 잘 모르겠는데 죽은후의 일을 어찌 알겠느냐?) 그러면서도 사람들은 몇천년을 내려 오면서, 자기조상이나 사망한 부모에게 줄곧 정성 들여 게으름 없이 제사 지내여 왔습니다. 무엇때문이였겠습니까? 우리의 생명은 결코 쉽게 온것이 아닙니다. 시작을 알수없이 아득히 먼 옛날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파란만장 헤치시며, 이루 헤아릴수 없이 많은 희생을 내면서 생명인자를 한세대 한세대 어렵게 이으시여 오늘 우리에게까지 전달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조상과 부모에 대한 숭배는 결국 자기 생명에 대한 숭배로 됩니다. 제사는 조상이나 사망한 부모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달하는것으로 사람으로서의 기본도리와 의무를 지키는 것이고, 자기의 근본을 잊지않고, 거기에 근거하여 자기 삶의 태도를 바로잡기 위한 것이며, 신앙의 힘을 얻기 위한 것입니다. 자고로 근본을 중시하면 흥하였고, 근본을 무시하면 망하였습니다. 오늘날 경제발전과 더불어 한국인들과 중국한족들의 제사의식은 점점 짙어가는 반면에, 우리 조선족들의 제사의식은 점점 해이해져 가는데, 심히 우려되는 부분입니다.   청명 성묘방법 우리민족의 청명 성묘방법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산소에 도착하면 먼저 후토를 찾아 후토제를 간단히 지냅니다. 묘제를 지낼때마다 먼저 후토에 제를 지내는데, 이것은 땅을 파고 초목을 베기 전에 묘를 지켜준 산신령한테 례를 올리고 허가를 받는다는 상징적 절차로서 자연에 대한 존중를 표시합니다. 그다음 삽으로 가볍게 묘소를 손질하면서 잔디를 입히기도 하는데, 속칭 가토 혹은 개사초(盖莎草)라고 합니다. 가토가 끝나면 제단에 제물을 차려놓고 묘제를 지냅니다. 먼저 사회자가 술을 따르고 다함께 절를 세번 하는데 降神이라고 합니다. 즉 이미 신령으로 되신 고인께서 제사받으려 내려오신다는 뜻이 되겠죠. 그다음 제주로부터 차례로 나와 술을 따르고 절을 세번씩 하는데, 獻酌이라고 합니다. 헌작에는 初獻, 亞獻, 終獻, 添酌 등 절차가 있습니다. 소유의 사람들이 모두 헌작이 끝난후, 사회자가 숟가락으로 메밥을 조금 떠서 물그릇에 넣고, 저를 옮겨 놓으면서 신령의 식사를 시중드는 시늉을 하는데, 侑食이라고 합니다. 유식을 끝내고는, 숙주(냉수) 한잔 따르고, 모두 다 함께 절을 세번 올리는데, 이것을 辭神이라고 하며, 이것으로 성묘가 끝납니다. 성묘가 끝나면 자리를 정하고 모여앉아, 갖고간 제물들을 음복하면서 덕담들을 나눕니다. 한곳에 조상들의 묘가 여러자리 있을 경우에는, 부모묘에 먼저 성묘하고, 그다음 윗대 순서에 따라 성묘하는데, 후토제는 부모묘에서 한번만 지냅니다. 제물은 여러자리 성묘에서 련속 쓸수 있지만, 메밥과 수저만은 묘자리에 따라 각기 갖추어야 합니다. 상업성 현대식 능묘에 가서 성묘할 경우에는 능묘를 포함하여 주위를 깨끗이 하는 것으로 가토를 대신하고, 제사 지내는 방법은 위의 절차를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지내면 되겠습니다. 현대에 와서 제사상을 꽃으로 대신하는 분들도 있는데, 제창할 바입니다. 골회함을 납골당에 보관하였을 경우에는 이날에 골회함을 찾아내와 적당한 자리를 정하고, 위의 제사지내는 방법을 참조하면서 조절하여 간단하게 지내면 되겠습니다. 여기에서 주의해야 할것은 골회함을 꺼내 올때나 제사 끝내고 다시 넣을때 물건취급 하지말고, 산사람처럼 공경하면서 자리를 옮길때마다 반드시 경견히 인사의 말씀을 올려야 합니다.   제사상 차리는 방법 1,준비할 제물종류 필수품; 메밥, 수저, 물, 물그릇, 술, 술잔, 과일류; 대추, 밤, 감 각기 얼마간, 사과배 사과 오렌지 등 과일 각기 세알, 어육류; 명태 낙지 각기 세꼬리, 익은 돼지고기 적당량… 이외에 자기 마음에 물어보아 봉공하고 싶은 물품으로 갖추되, 개수는 홀수로 하고 짝수로 하지 않습니다. 제물은 많이 갖추기 보다, 간단하면서도 정성들여 갖추는 것이 원칙입니다. 사과한알을 골라도 가장 크고 고운걸로 고르고, 허물이 없는지를 자세히 살피며, 종이에 싸서 상하지 않도록 조심히 다룹니다. 금기로는 전통적으로 복숭아, 개고기, 칼치, 멸치 등은 제물로 쓰지 않습니다. 2,제사상 차리는 방법 진설규칙; 紅東白西, 生東熟西, 魚東肉西, 頭東尾西, 左脯右醯, 棗栗李枾. 구체적으로 제사상 좌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제사상 마주하여 오른손편을 동으로 취급합니다. 진설방법; 맨앞 첫줄에는 메밥과 물그릇 술잔을 놓고, 제사 시작하여 강신이 끝나면 메밥뚜껑을 열고 숟가락을 꽂아놓고, 물그릇에 저가락을 얹어 놓습니다. 두번째줄에는 반찬류와 어육류를, 세번째 바깥줄에는 과일류와 부식품류를 놓습니다. 전통적으로 제사상 차릴때 많은 규칙들이 있었는데, 지금 그 많은 번거로운 규칙들을 일일히 모두 따를 수는 없습니다. 총체적인 분포규칙을 지키고, 신위와 제물이 놓인 위치가 합리하고, 제물 종류가 합리하며, 미관상에서 어색하지 않고, 정연하게 차리면 되겠습니다. 명시감상 《淸明》(唐)杜牧 清明时节雨纷纷, 路上行人欲断魂。 借问酒家何处有, 牧童遥指杏花村。 청명절날 구질구질 비가 내리니, 길손들 저마다 혼줄이 났습니다. 술집은 어디쯤 있는냐 물었더니, 목동은 멀리 행화촌 가리킵니다. 《조선족 상례풍속》과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조선민족은 자고로 자기의 찬란한 상례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력사적 원인으로 하여 중국조선족은 자기의 전통상례문화의 전수와 통일을 완성하지 못하였습니다. 나라에서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들의 장례풍속은 국가적 존중대우를 받았지만,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인정받지 못하고 무시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이 비록 조선족자치주였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서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항목이나 시설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30여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가 필요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으며,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전통이 끊어지고, 사명감이 없어졌으며,  민족의 퇴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이런 사회배경에서, 2009년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발굴정리하여, 나라에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으며, 많은 노력을 거쳐 끝내는 길림성 비물질문화유산 등록에 성공하였고, 전수인 대표로 지정되였습니다. 이리하여 중국 조선족들도 나라로 부터 자기 상례문화의 합법적 권익을 초보적으로 인정받게 되였습니다. 몇년간 이 연구회에서는 사회상의 많은 오해와 기시를 감수하면서, 우리 민속문화의 공백을 미봉하여, 민족을 위하여 실질적인 일을 한가지 하겠다는 일념만으로, 머리숙이고 꾸준히 노력하여 왔고, 지금도 노력하고 있으며, 또 계속 노력할 것입니다. 이 연구회에서는 일찍 《조선족 상례풍속》3단계 발전전략을 확정하였습니다: 1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발굴하고 정리하여, 이 문화에 대한 원래의 고고학적 문화연구를 현실적 문화연구로 전환시킨다. 2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사람들의 의념상에서 죽은사람을 위한 문화로 부터, 산사람을 위한 문화로 전환시킨다. 3단계; 《조선족 상례풍속》을 문명하고 현대적인 조선족 특색 브랜드문화로 발전시킨다. 제1단계는 2009년에 《조선족 상례풍속》이 길림성 무형문화재로 지정 되였고, 2010년에 제1차 학술세미나가 개최되면서 이미 초보적으로 완성되였습니다. 제2단계는 지금 한창 진행중입니다. 1, 2011년 한국장례관리협회의 요청으로 한국에 가서 전통장례를 연수하고 “전통장례 일급지도사”영예를 가졌습니다. 2, 연구회 산하에 “시대상조 복무중심”을 설립하고, 가장 저렴한 가격으로 조선족들의 상례치르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여 드리고 있습니다. 3, 2014년에 한국의 동국대학과 나라얼연구소의 초청으로 장례문화 국제학술 세미나에 두번 참석하여 논문을 발표하였습니다. 4, 《조선족 상례풍속》전수기지를 건립하기 위하여, 2015년3월30일에 연변대한 과학기술홀에서 제2차 세미나가 개최됩니다…. 우리민족은 우수한 민족입니다. 지금 시대의 대변혁속에서 이런저런 진통을 겪고 있지만, 우리가 시종 자기 뿌리를 잊지않고, 자기 문화를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필연코 더욱 성숙된 민족으로 탈바꿈 되여, 중화대지 곳곳에서 뿌리박고 꽃을 피우게 될것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현용수 작성 2015년3월
202    조선족 상례문화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댓글:  조회:1633  추천:0  2014-12-21
조선족 상례문화와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중국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종래로 문화적 차원에서 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우리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이념상에서 성숙되지 못하였고, 규범상에서 통일되지 못하였으며, 민속으로서의 특색이 돌출하지 못하였습니다. 지난 1980년대부터 나라에서 화장을 주요목적으로 하는 장례개혁을 시작하면서, 회족, 위그르족, 따지크족 등 이슬람 종교를 신앙하는 소수민족들의 전통장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넣었지만, 조선족 전통장례풍속은 국가적 보호대상에 들지 못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연변을 비록 조선족자치주라고는 하지만, 연변경내의 병원이나 빈의관에서는 특별히 조선족 상가를 대상으로 하는 써비스 시설이나, 써비스 항목을 따로 설치하지 않았으며, 그로하여 조선족 상가에서는 어설푼대로 나라에서 제공한 통용방식으로 장례를 대충 치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30여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장기간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이 필요 없게 된 상황에서, 조선족 전통상례풍속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점 사라지게 되였습니다. 조선족들이 보편적으로 자기의 전통상례풍속을 모르게 되니, 직접적으로 초래되는 그 악과로, 가정에서 효도가 약화되고, 전통이 끊어지고, 사명감이 없어졌으며, 민족의 퇴화가 놀라울 정도로 가속화 되였습니다. 이런 사회배경에서, 2009년 현용수 회장이 이끄는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에서는 《조선족 상례풍속》을 정리하여, 나라에 비물질문화유산으로 신청하였고, 많은 노력끝에 끝내 길림성 비물질문화유산 등록에 성공하였으며, 전수인 대표로 지정되였습니다. 이때로부터 중국 조선족들도 나라의 인정을 받는 자기 상례문화의 합법적 권익을 초보적으로 가지게 되였습니다. 2010년말, 이 연구회에서는, 연변 력사상 처음으로 《조선족상례풍속》세미나를 개최하였는데, 주시정부의 20여개 유관부문의 주관책임자들이 참석하였으며, 여덟편의 무게있는 논문이 발표되여, 《조선족상례풍속》의 론리성, 합리성, 필요성을 논증하였습니다. 그 기초상에서 이 연구회에서는 몇년간의 간고한 노력을 거쳐, 핵심을 《효도》로 하고, 주체를 《례의》로 하는 새시대 조선족 상례문화 체계를 건립하였으며, 이제 곧 책으로 출판되여, 장기간 떳떳하지 못했던 조선족 상례문화의 공백을 영원히 미봉하게 될 것입니다. 금년에 이 연구회에서는 한국에서 개최한 상례문화 국제 학술세미나에 두번 초청되여, 중요한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지금은 바야흐로 명년 3월에 연변대학과 공동으로 가지게 될, 제2차《조선족상례풍속세미나》를 위하여 분망히 보내고 있습니다. 이번 세미나에서 《연변조선족빈의소》 프로젝트가 정식으로 통과될 것입니다.     연변조선족례의연구회 제공 201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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