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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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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타향문단] - 료녕성조선족문인들을 응원한다... 댓글:  조회:3440  추천:0  2018-09-11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제1기리사회 제1차회의 진행 (ZOGLO) 2018년9월11일  심양시조선족문학회 료녕성조선족문학회로 승격     료녕성조선족문단이 새로운 발전전기를 맞았다. 1987년 설립되여서 30여년간 전 성 조선족문단의 발전을 리드해 온 심양시조선족문학회가 근 반년여의 진통기를 거쳐 지난 8월 18일 해당 기관의 정식 인준을 받으며 료녕성조선족문학회로 거듭났다.   료녕성조선족문학회는 모바일 투표방식으로 21명의 리사를 선출한 기초우에서 9월 8일 제1기리사회 제1차회의를 갖고 제1기 회장단을 선거했다.   회의에서는 먼저 문학회의 과도기를 책임졌던 전정환씨가 "문학회의 회원이 전 성에 분포된 상황에서 성급 승격은 필연이다. 문학회의 운영에 반년여의 공백기가 생겼으나 다행이 승격이 인준되여 고무적이다. 문학회 리사회 후선인 추천에는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제10기 리사회의 성원 외 지역을 많이 고려했다" 며 료녕성조선족문학회의 성급 승격 인준 경위와 제1기리사회 선출 경위를 설명했다.   회의에서는 전체 리사들의 폭넓은 토론을 거쳐 료녕민족출판사 권춘철 부총편집이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제1임 회장에 선임됐다. 심양시조선족문학회 제9기, 제10기리사회 회장에 련임하며 문학회의 발전에 기여한 공헌과 문학회 운영에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는 점이 선임 리유가 됐다.   권춘철 회장은 자신의 향후 사업 구상에 따라 상무부회장에 전정환, 부회장에 림금산, 김창영, 문운룡, 사무국장에 리흔 등 후선인을 제1기리사회에 제출, 리사회의 심의를 거쳐 순리롭게 통과됐다. 새로 구성된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제1기리사회 회장단은 상호 소통의 시간을 갖고 급선무로 나서고 있는 올해의 사업 방향을 결정했다.   이어진 회의에서 권춘철 회장은 하반년 사업계획을 "10월 27일 료녕성조선족문학회 성립대회를 개최한다. 한국 성남문화원과 년례행사로 개최해오던 시랑송대회를 계속 조직한다. 제4회 단풍문학기행을 진행한다. 료동문학 위챗계정을 개설, 오픈한다. '료녕성조선족문학통사'출간기념식과 리창인선생 '리창인시조집'출간식을 갖는다" 등 몇가지로 요약하여 설명했다.   /료녕신문 김창영 기자
4    윤동주 시 리해돕기와 "납인형" 댓글:  조회:3500  추천:0  2018-09-11
납인형은 고대 바빌론에서도 만들어졌으며, 알렉산더대왕은 자기의 상을 만들게 하였다는 기록도 전한다.  옛날에는 이것을 녹여 사람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는 저주(咀呪)의 목적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으며, 14세기경까지는 사자(死者)를 기리는 뜻에서 교회의 벽에 나란히 세워놓는 풍습도 있었다. 후에는 장난감으로도 만들어져, 시장 같은 곳에서는 납인형 쇼가 열리기도 하였다. 유럽의 납인형은 역사나 일화(逸話)로 유명한 사람의 생존시 그대로의 모습을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소박한 호기심에 부응하여 발달해왔다. 1761년 스위스에서 태어난 M.타소는 프랑스 혁명 때 길로틴으로 처형당한 왕족들의 머리를 납세공으로 만듦으로써 납인형 기술의 완성자로 유명하다. 그녀는 후에 런던으로 이주하여 본인의 컬렉션을 전시한 ‘왁스 뮤지엄(납인형관)’을 개설, 세계 여러 나라의 왁스 뮤지엄의 원형이 되었다. 그리고 현재도 타소의 직계인 타소 공방(工房)이 대대로 내려오는 비법에 따라 인형을 제작하고 있다. 납인형의 특색은 꼭 살아 있는 것같이 보인다는 점에 있으며, 이것은 사실적인 조소(彫塑)에다 착색을 한 위에 백랍을 치는 독특한 기법을 쓴다. ========================/// 인형의 유래... 인형은 나라마다 있지만, 어느 것이나 모두 간소한 구성으로서 행복을 부르고 재액(災厄)을 쫓는 종교적인 의미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어린아이의 장난감으로서도 만들어졌다. 또 문화가 발달하여 미(美)에 대한 감각이 갖추어짐에 따라 모든 것이 필요 이상으로 미적으로 만들어져 감상을 목적으로 하는 인형도 탄생되었다. 인간을 본뜬 상(像)이 최초로 출현한 것은 구석기시대 오리냐크문화기(BC 25000년경)이며, 이 문화기에 예술작품이 인류사상 처음으로 출현하여 유명한 《빌렌도르프비너스》를 비롯한 여성의 흉부나 둔부 등 신체의 특성을 강조한 인물상이 유럽에서부터 시베리아에 걸친 각지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들은 다산(多産)을 상징·기원한 것이라고 하나 인형의 부류에는 넣지 않는다. 그후의 선사시대 유적에서도 인형의 기능을 가진 것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인형의 기원은 종교적·주술적인 것뿐 아니라 상당히 일찍부터 장난감으로서의 요소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이집트나 그리스·로마의 어린아이 묘에 인형이 묻혀 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다. 멕시코 유카탄반도 근처의 하이나란 작은 섬은 섬 전체가 고대 마야 문명의 유적지인데, 점토제의 인물상이 묘, 특히 어린아이 묘에서 다량 발견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시대에는 소녀와 인형은 이미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로서 혼기를 맞은 처녀는 필요없게 된 인형을 여신 다이아나의 신전에 바쳤다고 한다. BC 500년 이후의 그리스 인형에는 종교적 색채가 짙어지게 된다. 중세 유럽에서는 인형의 목을 매달고 악의에 찬 주술을 행하는 흑마술(黑魔術)에 인형이 사용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적(敵)을 본뜬 밀[蠟]이나 납인형을 주문을 외면서 파괴하는 일은 이미 로마 시대에 행해지고 있었으며, 오스트리아의 슈타이어마르크에서는 밀인형에 주문을 걸고 심장부를 바늘로 찌르면서 상대방 인물에게 병이나 죽음이 오기를 기원하는 습관이 지금도 남아 있다. 유럽 이외의 지역에서도 인형은 각각 독자적으로 발전하였다. 가장 오래 된 인형은 고대 이집트의 무덤에서 발견된 유품일 것이다. 그것은 BC 2000년경의 것으로서 얇은 널판지로 만들었으며, 머리에는 머리카락 대신에 목제의 염주(念珠) 같은 것을 몇 줄 드리우고 있다. 또, 고대 이집트의 제19왕조(BC 1304∼BC 295)의 유아(幼兒)의 묘에서는 당시의 복장을 한 손이 움직이는 목제 인형이 발견되어 당시 이미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인형이 있었음을 알려준다. 또 끈을 잡아당기면 널판지 위의 남자가 점토 덩어리를 앞뒤로 움직여서 빵반죽을 하도록 장치된 목각인형도 있다. 고대 그리스의 유적에서도 많은 인형이 발견되었으며, 특히 BC 8세기~BC l세기에 만든 타나그라 지방의 초벌구이 소상(小像)은 타나그라 인형으로서 잘 알려져 있다. 또, 고대 로마에서는 조상을 본뜬 인형을 신성한 장소에 안치하여 집을 지키는 신(神)으로서 존경을 바쳤으며, 이 풍습은 근래까지도 유럽 각지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밖에 인간을 대신하여 역병(疫病) ·재화(災禍) 등을 떠맡기기 위해, 또는 풍작(豊作)을 기원하기 위해 만든 속신앙적(俗信仰的) 인형은 세계 각지에 존재하였다. 인형이 오로지 어린아이의 완구로 사용된 것은 언제부터인지 확실하지 않으나 8∼9세기경에는 포제(布製) 인형이 유럽 각지에 있었으며, 13∼14세기에는 나폴리를 중심으로 그리스도 강탄인형(降誕人形)이 유행하였다. 점차 유럽 각지에 퍼지면서 크리스마스에 교회를 비롯한 일반 가정에서도 그리스도 강탄인형을 장식하게 되었다. 또, 14세기 초에는 파리의 의상점이 아름다운 포제 인형을 고안하여 패션모델 대신 외국에 파송했으며, 이것이 프랑스 인형의 시작이라고 한다. ===================///(참조하기) 윤동주의 서시 원작자가 따로 있는 서신이 나왔다.       서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누구든 읽으면 마음이 선해지고 숙연해버리는 이 시는 윤동주가 직접 쓴 것이 아니고  또 다른 천재 시인의 부탁으로 윤동주의 이름으로 기록된 거라는, 윤동주와 그 시인 사이에 오간 편지가 발견됐다.  그 시인은 ‘문둥이 시인’으로 유명한 한하운 이었다. 그 한하운의 유품이 나왔다.    한하운이 윤동주 보다 3살 아래쯤 되고, 이 시를 쓴 것은 21~22세인데 그 때 이미 나병 증세를 본인은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세상에서 사라져버릴 작정이었는데 평소에 사랑하던 형, 윤동주를 생각하자  너무나 절실하게 삶이 다가 와서 윤동주의 마음이 되어 이 시를 쓴 모양이다.  써서는 간곡하게 윤동주의 이름으로 살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다고 한다.  몇 년 후 윤동주는 옥사를 하고, 한하운은 그 후로도 굳이 밝히지 않았고...   한하운은 그 때 죽지는 않았고, 다시 세상에 나왔는데 이미 나병이 밖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의 절창의 시들을 썼다. [출처] blog.naver.com/noteksc/221342953636   백구친구 윤동주의 서시 원작자가 따로 있는 서신이 나왔다.|작성자 백구 ・ 2018. 8. 21. 12:21   
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북극곰아, 여생을 맘껏 뛰여놀아라... 댓글:  조회:4122  추천:0  2018-09-11
한국 동물원서 24년째 갇혀 지낸 북극곰 - 통키 영국 이사간다... 2018.09.09.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북극곰 통키가 오는 11월 영국으로 옮겨지는 가운데, 그간 통키가 동물원에서 지내온 모습이 공개됐다. 지난 6일 동물권 단체 '케어'는 공식 유튜브 채널에 그간 동물원에 갇혀 지낸 통키의 생애를 돌아본 영상을 게재했다. 통키는 지난 1995년 경남 마산의 한 유원지에서 태어났다. 이후 1997년 경기 용인 에버랜드로 팔려간 뒤 지금까지 한 번도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 지난해 1월 대전 오월드에서 생활하던 북극곰 '남극이'가 폐사하면서 통키는 국내에 유일하게 남은 북극곰이 됐다.    북극곰은 하루에 80km를 이동할 만큼 활동성이 많은 동물이지만, 통키는 평생을 좁은 우리 안에서 지냈다. 그래서인지 몇 년 전부터 사람으로 치면 자폐 행동인 '정형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지난 2017년 여름에는 케어가 통키 사육장 안의 물이 모두 빠진 영상을 공개하기도 했다. 당시 에버랜드 측은 "북극곰 전용 풀장 청소 과정에서 촬영된 것으로 보인다"고 해명한 바 있다. 이런 환경에도 24년째 동물원에서 살아온 통키는 사람 나이로는 70~80대 정도의 고령이다. 북극곰의 평균 수명은 20~25년이다. 오는 11월 통키는 비로소 영국 요크셔 야생공원으로 이송돼 남은 생을 보낸다. 이곳은 4만㎡의 북극곰 전용 공간을 보유한 세계적 수준의 생태형 동물원으로, 대형 호수와 초원 등 실제 북극곰 서식지와 유사한 조건을 갖추고 있다. 지난 6월 에버랜드는 "통키에게 최적의 노후 생활 공간을 제공하기 위해 고민했다. 최근 증가하고 있는 동물 복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했다"라며 통키의 이전 이유를 밝혔다. YTN PLUS 문지영 기자   [사진 출처 = 동물권단체 케어]
2    윤동주와 송몽규, 정병욱 댓글:  조회:3383  추천:0  2018-09-11
목차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윤동주와 친구들 앞줄 중앙 송몽규, 뒷줄 오른쪽 윤동주 시인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가족이 하늘이 맺어준 인연이라면 친구는 내가 선택한 가족이다.’라고 말했다. 언제나 나를 믿어주는 가족과 친구는 지난한 인생살이에 기쁨과 위안을 주는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시인 윤동주에게는 가족이자 친구로서 평생을 동행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인 송몽규이다. 고종사촌 사이였던 송몽규와 윤동주는 석 달 간격으로 한 집에서 태어나 유년기를 같이 보냈고 나란히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했다. 이어서 일본으로 건너가 교토에서 유학 생활하던 도중 독립운동 혐의로 함께 체포되었다. 그리하여 두 사람은 해방을 불과 몇 달 앞두고 수감되었던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한 달 간격으로 목숨을 잃었다. 윤동주는 오늘날 민족시인으로서 널리 추앙받고 있지만 그와 함께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발휘했고 뚜렷한 민족의식으로 조국의 독립을 갈망했던 송몽규는 그 동안 까맣게 잊혀져 있다가 2016년 개봉된 이준익 감독의 영화 〈동주〉를 계기로 그 삶이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시인 윤동주의 평생의 동반자 송몽규(宋夢奎)는 1917년 9월 28일 지금의 중국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내에 있는 북간도 명동촌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은진, 아명은 한범(韓範)이다. 아버지는 교육자였던 송창의, 어머니는 윤동주의 큰고모 윤신영이다. 그의 가족은 본래 충청도에 살았는데 구한말 간도 지역에 대한 청나라의 봉금정책이 풀리자 할아버지 송시억이 가솔을 이끌고 연해주로 가다가 길목에 있던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 웅상동에 눌러앉아 터전을 잡았다. 연변 명동촌 송몽규의 집 그의 집안은 전래 초기였던 기독교와 신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등 몹시 진취적인 가풍을 지니고 있었다. 송시억은 웅상동에 북일학교를 세웠으며, 송창의의 육촌동생 송창빈은 홍범도 부대 소속의 독립군으로 활약하다 1920년에 전사했고, 송창근은 미국에 유학하여 1931년 한국인 최초로 미국에서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와 목사로 활동했다. 이런 개방적인 분위기 속에서 송창의는 서울에서 신교육을 받고 주시경 선생으로부터 한글강습을 받았다. 1916년 그는 주시경의 《우리말본》의 서문을 쓴 박태환을 따라 명동촌에 가서 민족운동가이자 교육자인 김약연의 집에 머물렀다. 그때 김약연의 딸이자 윤동주의 어머니였던 김용 여사의 눈에 들어 윤신영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때부터 송창의는 처가에 살면서 명동학교 조선어 교사로 봉직했고, 일제에 의해 명동중학교가 폐교되자 명동소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쳤다. 1917년 9월 송몽규가 태어나고 석 달이 지난 12월 30일 윤신영의 동생 윤영석이 맏아들 윤동주를 얻었다. 그리하여 윤동주와 송몽규의 평생에 걸친 인연이 시작되었다. 송몽규는 8세 때인 1925년 4월 4일 윤동주, 문익환, 윤영선, 김정우 등과 함께 명동소학교에 입학했다. 4학년 때부터 송몽규는 경성에서 간행하던 《어린이》, 《아이생활》을 구독하며 문학의 꿈을 키웠다. 5학년 때는 윤동주와 함께 등사판으로 《새명동》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그는 성품이 엄하고 코가 커서 명동학교 생도들은 송호랑이, 콧대 등의 별명으로 불렀다. 1931년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그는 윤동주, 김정우와 함께 인근 대랍자(大拉子)에 있는 중국인소학교 6학년에 편입하여 1년 동안 다니다 1932년 4월 은진중학교에 진학했다. 그는 두뇌가 명석했을 뿐만 아니라 성격이 활발하고 리더십이 뛰어나서 늘 앞장서서 친구들을 이끌었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그는 윤동주와 함께 수많은 책을 섭렵하면서 창작 활동에 열중했다. 그 와중에 ‘문해(文海)’라는 호를 지어 사용했고, ‘문해장서(文海藏書)’라고 새긴 도장을 마련하여 자신의 책을 분류하고 정리하는 데 사용하기도 했다. 은진중학 3학년 때인 1934년 12월에는 동아일보 신춘문예 콩트 부문에 ‘술가락’이 송한범이란 필명으로 당선되어 뭇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독립운동의 길을 걷다 은진중학교 재학 시절 송몽규는 교사로 봉직하던 애국지사 명희조 선생의 독립의식에 크게 감화되었다. 도쿄제국대학 사학과 출신이었던 명희조 선생은 그 무렵 춘원 이광수의 계몽문학이 제시하는 사이비 이상주의에 도취된 제자들에게 서릿발 같은 기상으로 역사를 보는 바른 시각과 대의를 일깨워주었다. 재기발랄했던 송몽규는 명희조 선생의 강의를 통해 일제의 폭압과 조국의 비참한 현실을 직시하고 비감에 젖었다. 그리하여 19세 때인 1935년 3월, 명희조 선생으로부터 남경에 있는 낙양군관학교에서 2기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듣자 은진중학교 4학년에 진급하지 않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혈혈단신 남경에 다다른 송몽규는 은진중학교 1년 선배인 라사행을 만나 백범 김구가 국민당 장제스 정부의 지원으로 운영하던 낙양군관학교 한인반에 2기생으로 입학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30여 명의 생도들과 함께 남경의 동관두 32호에 있는 민가에서 합숙하면서 군사훈련과 중국어 등을 공부했다. 교관은 엄항섭과 안중근 의사의 막내동생으로 독일 베를린대학 출신의 안공근이었다. 김구는 종종 찾아와 이들의 교육상황을 점검했다. 생도들은 중국정부로부터 식비 9원, 용돈 3원, 도합 12원을 지급받아 비교적 넉넉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2개월여 뒤 생도들은 강소성 의흥현 용지산에 있는 불교사찰 용지사로 이동하여 10월 초까지 훈련을 받았다. 그때는 엄항섭이 총책임자였고, 김구의 장남으로 낙양군관학교 1기생이었던 김인이 교관으로 나섰다. 고된 훈련의 와중에도 송몽규는 생도들에게 원고를 받아 등사판으로 《신민(新民)》이란 잡지를 만들기도 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일제의 감시망이 촘촘하게 깔려있었으므로 그는 다른 생도들처럼 왕위지, 송한범, 고문해라는 세 가지 가명으로 활동했다. 송몽규는 정열적으로 훈련에 임했지만 현실과 이상은 달랐다. 함께 피땀 흘리며 훈련하던 생도들이 독립운동의 방법적 문제 때문에 점차 김구파, 김원봉파, 이청천파 등 세 갈래로 나뉘어 대립하는 등 분열상이 드러났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공산당과 내전을 벌이고 있던 국민당 정부의 처지가 어려워지면서 낙양군관학교에 대한 지원이 끊어졌다. 그 때문에 1935년 10월 초 낙양군관학교 생도들은 해산하여 각자의 길을 걸어가야 했다. 송몽규는 용지산에서 내려온 뒤 산동성 성도인 제남(?南)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 지도자 이웅의 휘하에 들어갔다가 1936년 4월 10일 제남 주재 일본영사관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그는 6월 27일 본적지인 함북 웅기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았고, 8월 29일 청진 검사국으로 송치되어 16일 동안 구금되었다. 하지만 혐의가 중하지 않았던지 9월 14일 웅기경찰서로 복귀한 뒤 거주제한의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그렇지만 송몽규는 경찰의 경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북간도의 집으로 돌아가 그 동안 피폐해진 심신을 달랬다. 이듬해인 1937년 4월 그는 은진중학교로 복학하려 했지만 학교당국에서는 문제학생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복학을 불허했다. 하는 수 없이 그는 용정에 있는 윤동주 집에 기숙하면서 대성중학교 4학년으로 편입했다. 그때부터 와신상담, 실력을 키워 독립운동의 대열에 동참하기로 마음을 다잡은 송몽규는 문학 활동 및 학업에 열중했다. 역동적인 《문우》 시절 1938년 초봄, 송몽규는 윤동주와 함께 서울에 가서 연희전문학교 문과 입학시험을 치렀다. 결과는 동반 합격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기숙사에 입주한 그는 윤동주, 원산 출신의 수재 강처중과 함께 3층 꼭대기에 있는 방을 함께 썼다. 윤동주의 산문 〈달을 쏘다〉에는 그들이 머물던 기숙사 창문으로 내려다본 가을날 달밤의 풍경이 그림처럼 묘사되어 있다. ‘가을 하늘은 역시 맑고 우거진 송림은 한 폭의 묵화다. 달빛은 솔가지에 솔가지에 쏟아져 바람인 양 솨- 소리가 날 듯하다.’ 엄혹한 일제 치하였지만 연전은 기독교계 학교였으므로 송몽규는 자유롭게 창작활동을 영위할 수 있었다. 중학 시절 이미 문단에 데뷔한 바 있던 송몽규는 9월 12일 조선일보에 〈밤(夜)〉이란 시를 발표했다. 이 시에는 참담한 시대 상황 속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겠다는 그의 의지가 드러나고 있다. 고요히 침전된 어둠  만지울 듯 무거웁고  밤은 바다보다도 깊구나.  홀로 밤 헤아리는 이 맘은  험한 산길을 걷고  나의 꿈은 밤보다도 깊어  호수군한 물소리를 뒤로  멀리 별을 쳐다보며 휘파람 분다. 1941년 4학년이 된 송몽규는 학생회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면서 잡지 《문우》의 편집을 맡았다. 당시 회장은 기숙사 동기였던 강처중이었다. 그해 6월 발행한 《문우》에 ‘꿈별’이란 필명으로 〈하늘과 더불어〉란 시를 게재했다. 윤동주는 여기에 〈새로운 길〉, 〈우물속의 自像畵(자상화)〉를 발표했다. 《문우》는 창씨개명, 조선어 사용 금지, 언론사 폐간 등 당시의  폭압적인 상황에 따라 본문이 일본어로 제한되었지만 시(詩)는 언어표현의 특성상 조선어 표기가 용인되었다. 하지만 편집과정에서 많은 원고가 검열에 걸려 삭제되었고, 일제의 강요로 문우회가 해산의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처럼 부산한 시기에 《문우》가 최후의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었다. 뒤편에 실려 있는 발행 후기에는 폐간 인사 및 발간 과정의 고충을 설명하는 송몽규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이 잡지를 받은 사람들은 내용의 빈약함, 편집의 형편없음에 얼굴을 찌푸릴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어리고 경험이 없는 학생들의 손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는 것과, 동분서주하며 모은 원고의 대부분을 게재할 수 없었던 점을 양해 받고 싶다. 국민총력운동에 통합하여 학원의 신 체제를 확립하기 위하여 문우회는 해산하게 된다. 그렇기에 교우회의 발행으로써는 이것이 최후의 잡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잡지 발행 사업은 연맹으로 계승되어 더욱 더 좋은 잡지가 나올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들은 새로운 것에 합류하는 것을 기뻐하며 그것에 힘쓸 것을 맹세하며 이번 마지막 호를 보낸다.’ 소오우라 무게이가 되어 현해탄을 건너다 여름방학을 맞아 윤동주와 함께 용정 집에 들른 송몽규는 집안 어른들의 고답적 의식 때문에 고통을 겪었다. 그들은 졸업을 앞둔 두 사람이 하루 빨리 사회에 나가 번듯한 직장을 잡고 가족들을 위해 살아가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고단한 삶에 부대끼고 있던 그들에게 식민지 조선의 암울한 현실은 먼 나라 이야기였다. 송몽규는 내심 반발했지만 곁에 있던 윤동주의 만류로 끓어오르는 울화통을 식혔다. 1941년 12월 27일 연희전문학교 졸업식이 거행되었다. 태평양전쟁의 개전으로 인해 이듬해 3월에 거행되어야 할 일정이 앞당겨진 것이다. 연전의 명예교장이었던 원한경 박사와 원일한 교수는 진주만 공습이 벌어진 12월 8일 하오에 체포되어 폐교가 된 감리교 신학대학에 연금되었고, 친일파인 윤치호가 교장으로 부임하여 의식을 주관했다. 졸업생은 문과 21명, 상과 50명, 이과 18명이었는데 송몽규는 졸업성적이 전체 2등이었으므로 우등상을 탔다. 한데 윤치호 교장이 부상으로 준 보따리를 펼쳐보니 일본 군국주의를 정당화하는 책자 일색이었다. 분개한 송몽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성을 내며 책을 땅바닥에 집어던져버렸다. 그처럼 반일의식에 투철한 송몽규였지만 졸업 후 일본 유학을 떠나는 과정에서 창씨개명이라는 난관을 만나 초지를 꺾는 아픔을 겪는다.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면 자칫 전선으로 끌려가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집안의 설득을 받아들여 소오우라 무게이(宋村夢奎)가 되었다. 그때 윤동주 역시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가 된다. 당시 두 사람은 도항증명서를 받기 위해 직접 연희전문학교의 졸업생 명부에 수록된 이름을 새로 바꾼 일본식 이름으로 고쳐야 했다. 윤동주는 이때의 부끄러운 심정을 〈참회록〉이라는 시로 남겼다. 그렇게 치욕을 감내하면서 일본으로 건너간 송몽규는 교토제국대학 입학시험에 합격하여 서양사학과에 들어갔고, 함께 응시했다가 낙방한 윤동주는 도쿄에 있는 릿교(立敎)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진학했다. 치안유지법의 마수에 걸리다 교토에 도착한 송몽규는 명문으로 알려진 제3고등학교 재학생 고희욱과 함께 하숙을 시작했다. 그해 여름방학에 윤동주는 고향 용정으로 갔지만 그는 따로 조선과 만주 일대를 두루 살펴보고 돌아왔다. 여름방학이 끝난 뒤 윤동주가 릿교대학을 나와 교토의 사립 기독교계 학교인 도시샤(同志社)대학 영문학과로 전학했다.그렇게 해서 송몽규는 윤동주와 또 다시 한 공간에서 살게 되었던 것이다. 일면 그것은 윤동주가 낙양군관학교 이래 요시찰인물이었던 송몽규의 우산 속으로 걸어 들어간 셈이었다. 그때부터 송몽규는 고희욱, 윤동주, 백인준 등과 자주 만나 조선의 앞날에 대하여 토론했다. 일본경찰은 오래 전부터 요시찰 인물로 지목된 송몽규의 하숙집을 수시로 감시하면서 그와 고희욱, 윤동주와 나눈 대화내용을 엿들었고, 그들이 민족의 현실과 독립에 대하여 비분강개하는 사실에 대하여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그해 7월 10일, 일본경찰은 송몽규와 고희욱을 급거 체포하여 시모가모(下鴨)경찰서에 구금했다. 이어서 7월14일 하숙집에서 귀향을 준비하던 윤동주까지 체포했다. 1941년 5월 15일 실시된 개정 치안유지법은 한층 엄격해지면서 ‘준비행위’를 했다고 판단되면 검거가 가능했다. 사실상 누구라도 범죄자로 만들 수 있었다. 이들에 대한 갑작스런 조치는 그해 7월 24일로 예정된 조선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의 간도 시찰을 염두에 둔 예비검속이라는 풍문이 있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송몽규는 면회 온 가족들에게 곧 석방될 것이라고 안심시켰지만 상황은 정반대로 흘러갔다. 경찰과 검찰의 지루한 심문이 이어지면서 구금 기간이 길어지는가 싶더니 이듬해인 1944년 1월 19일 고희욱은 기소유예의 처분을 받고 풀려났지만 2월 22일 윤동주와 송몽규는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되었던 것이다. 조선 독립의 미래를 엿보다 1977년 10월, 일제 내무성 경보국 보안과에서 발행한 극비문서 〈특고월보(特高月報)〉 1943년 12월분에 실린 송몽규와 윤동주의 심문기록 〈재경 조선인 학생민족주의 그룹사건 책동 개요〉가 입수되면서 알려지지 않았던 두 사람의 혐의의 대강이 밝혀졌다. 그로부터 2년 뒤인 1979년 1월 일제 사법성 형사국 발행의 극비문서인 〈사상월보(思想月報)〉 제109호 1944년 4~6월분에 실린 송몽규에 대한 판결문과 관련자 처분결과 일람표가 입수되면서 두 사람의 형량이 알려졌고, 두 사람의 체포 혐의가 ‘독립운동’이었음이 처음으로 확인되었다. 1982년 8월에는 교토지방재판소의 판결문 사본을 통해 송몽규와 윤동주의 체포와 재판에 관련된 전모가 완전히 밝혀졌다. 이 판결문에 씌어있는 송몽규의 혐의 내용을 살펴보면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른 그 시기에 당시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재일유학생들이 어떤 생각을 품고 있었는지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이전의 조선독립운동은 외래사상에 편승한 것이라 확고한 이론 없이 감정적 폭동이라 실패한 것이라 하며, 우리는 학구적, 이론적으로 독립운동을 해야 한다면서 독립의식을 앙양했다. 둘째, 송몽규는 윤동주에게 최근 조선에서 총독부의 압박으로 소학생, 중등학생이 일본어를 사용함으로써 조선어와 조선문이 멸망해가고 있으며, 만주국에서는 조선인들이 식량배급에 차별대우를 받고 있고, 최근의 징병제도는 훗날 조선독립을 실현할 때 일면 위력을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셋째, 송몽규는 하숙집에서 윤동준, 백인준에게 징병제도를 비판하면서 앞으로 징병제도 때문에 조선인이 무기를 갖고 군사지식까지 얻으면 장차 일본이 패전할 무렵 우수한 지도자를 앞세워 무력봉기를 결행하여 독립을 실행할 수 있으며, 독립 초기에는 군 출신의 인사를 내세워 강력한 독재를 취해야 하고, 그 시기가 올 때까지 함께 실력을 양성하자며 독립 의식의 강화를 꾀했다. 넷째, 송몽규는 고희욱에게 태평양전쟁은 강화조약으로 종결될 가능성이 큰데, 그 과정에서 버마, 필리핀이 독립국으로 참가할 것이니, 우리도 그때 조선독립 여론을 환기하고 세계 각국의 동정을 얻어 단숨에 바라는 바 목적을 이룩해야 한다며 민족의식을 유발했다. 다섯째, 송몽규는 6월경 윤동주에게 찬드라보스를 지도자로 하는 인도 독립운동에 대하여 논의하면서 아직 일본의 세력이 강대하므로 우리도 그런 지도자를 얻기는 힘들지만 민족의식은 왕성하므로 훗날 일본이 피폐하여 호기가 도래하면 위대한 인물이 출현할 테니 그를 도와 궐기하자며 서로 격려했다. 원수의 땅에 아들의 뼛가루 한 점 남기지 않겠다 1944년 4월 13일, 교토지방재판소에서는 송몽규에게 징역 2년을 선고했다. 윤동주는 이보다 앞선 3월 13일에 역시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두 사람은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규슈의 북서쪽에 있는 후쿠오카 형무소로 이송되어 고달픈 수형생활을 시작했다. 그로부터 1년여가 흐른 1945년 2월 16일 윤동주가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그해 3월 6일 문익환 목사의 부친이었던 용정중앙장로교회 문재린 목사의 집례로 장례식이 치러졌다. 한데 그 다음날인 3월 7일에 송몽규마저 만27세의 창창한 나이로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윤동주의 시신을 수습하러 간 친척들과 면회한 자리에서 자신이 투옥 이후 매일 밤 의문의 주사를 맞았다는 증언을 남김으로써 일제로부터 생체실험을 당했을 것이라는 추측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 당시 조카에 이어 아들의 부음까지 들은 어머니 윤신영은 주먹으로 가슴에 푸른 멍이 들 정도로 두드리며 통곡했다. 하지만 아버지 송창의의 처신은 더욱 비장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간 송창의는 후쿠오카 화장터에서 아들의 시신을 화장한 다음 타고 남은 뼈를 빻는 자리에서 뼛가루가 주위에 튀자 주변의 흙을 모조리 쓸어 담으며 이렇게 말했다. “내가 왜 몽규의 뼛가루 한 점이라도 원수의 땅에 남기겠느냐.” 송몽규의 시신은 명동의 장재촌 뒷산에 안장되었다. 1945년 5월 20일 언 땅이 녹자 아버지는 애달픈 심정으로 그의 무덤 앞에 ‘청년문사송몽규지묘(靑年文士宋夢奎之墓)’라는 비석을 세워 주었다. 훗날 유족들은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하다 순국했다고 주장했지만 정부와 학계 공히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재일유학생에 대한 일제 탄압의 일환으로 검거되었다가 억울하게 희생당했다는 것이 당시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유족들의 끈질긴 노력으로 마침내 송몽규와 윤동주의 죽음에 관련된 진실이 빛을 볼 수 있었다. 송몽규의 삶은 일면 친구이자 동반자였던 윤동주의 순수한 문학에 가려진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의 문학과 독립에 대한 열정은 해맑은 윤동주의 시어와 함께 민족의 아름다운 역사로 길이 남을 것이다. 각주         서시(序詩)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민족서정시인 윤동주. 일제 치하의 고통과 독립에의 염원을 주옥같은 시로 풀어낸 이.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 담겨진 그의 문학정신은 아름답고 숭고하다. 일제는 독립운동을 했다는 죄목으로 윤동주를 감옥에 가두었고 그는 1944년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청년 윤동주가 남긴 시들은 자칫하면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다. 1943년 일본 경찰에 붙잡히기 전 친구 정병욱에게 그가 써놓은 원고를 맡기는 데 정병욱은 이 원고를 그의 집 마루 밑바닥에 숨겨놓고 잘 간직했다. 그 장소가 바로 전남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있는 ‘정병욱 가옥’이다. 윤동주의 시에 많이 등장하는 ‘하늘’과 ‘바람’과 ‘별’들이, 1945년 광복이 오기까지 2년여 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던 곳이 바로 광양이다. 광양을 통해 어둠속에 갇혀 있던 ‘윤동주시인의 하늘’이 다시 열리고 ‘정지했던 바람’은 다시 생기를 얻어 동서남북으로 향하고 ‘빛을 잃었던 별’들은 다시 반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도 많은 이들은 윤동주와 광양과의 이런 인연을 잘 알지 못하고 있다. 최근 들어서 한 지역 언론의 보도로 이 같은 사실이 알려졌으며 시는 지난 2007년 7월 이곳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했다. 직접적인 인연은 아니지만 윤동주시인과 광양시 간에 맺어진 인연은 문학사적으로 의미가 크다. 그 인연을 어떻게 가꿔나가느냐는 광양시민들의 몫이다.   정병욱의 어머니가 일제의 감시를 피해 2년여동안 원고를 숨겨두었던 마루밑.                       ■ 일제감시 피해 윤동주 유고 숨겨둔 정병욱 생가   섬진강변에 위치한 진월면 망덕리 길가에는 1925년에 지어진, 가옥 한 채가 자리하고 있다. 정 병욱 가옥으로 알려진 이 집은 과거 양조장이었다. 따라서 도로 쪽 가옥에는 가게가 나 있고 뒤쪽은 살림집으로 돼 있다. 당시 이 집에는 정병욱과 그의 어머니 등이 살고 있었다. 정병욱은 연희전문에 다니던 시절 윤동주와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아주 가까운 친구였다.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 졸업을 (1941) 즈음해 시집을 출판하고자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뜻을 접는다. 은사였던 이양하교수는 일제가 시의 내용을 문제 삼을 것을 우려해 출판을 만류했다. 윤동주는 일본유학을 떠나기 전 3부의 원고를 만들어 한권은 자신이 갖고 다른 두 권은 이양하교수와 후배이자 친구인 정병욱에게 각각 건넸다. 이후 정병욱은 학병으로 징용 당하게 되자 광양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맡기며 일본헌병에게 들키지 않게끔 잘 간직해줄 것과 자신이 죽을 경우 연희전문학교 교수님들에게 갖다 줄 것을 당부했다. 정병욱의 어머니는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일제의 수색을 피해 이 집 마룻바닥 밑에 원고를 숨기고 보관해 왔다고 한다. 광복 후 학병에서 무사히 돌아온 정병욱은 어머니로부터 2년여 동안 숨겨왔던 유고를 건네받았고 1948년 윤동주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발간했다. 윤동주 본인과 이양하교수가 지니고 있었던 원고는 모두 사라지고 없어서 정병욱 집안이 아니었더라면 오늘날의 윤동주는 없을 뻔했다. 한편 정병욱은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로 근무하면서 한국 고전문학 연구와 판소리 연구 등에 큰 발자취를 남겼으며 평소 자신의 가장 큰 보람으로 ‘윤동주의 시를 간직했다가 세상에 알린 일’이라고 밝혀왔다     ========================/// 룡정도심에서 윤동주의 거처 집터 확인             지난 13일 기자는 젊은 지성들의 모임 “중국조선족력사문화동호회” 회원들과 더불어 룡정의"산증인"으로 불리는 저명한 사학자 최근갑 옹(85세)을 모시고 룡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와중에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룡정에서의 자택 옛터를 확인할수 있었다.     태여난 명동에서 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소학교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격인 룡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나라사랑”이라는 잡지에기고한 추모문 ”윤동주의 생애”라는 글에 따르면”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30여리 떨어진 룡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카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룡정으로 이사하였다.”고 밝히고있다.   윤동주네 일가가 룡정으로 이주한것은 대변혁이였다.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령 윤씨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크게 변했다. 윤동주네가 이사온 룡정집은 룡정가 제2구1동36호로서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20평방메터 정도밖에 안되는 초가집으로 옮겨온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윤일주, 윤광주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8명의 식구가20평방메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하는 환경속에서 윤동주의 은진중학교시절이 시작되였다.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윤동주가 다녔던 은진중학의 30년대의 모습. 윤일주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자.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문익환목사는 “중앙월간”(1976년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페소트를떠올리고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문익환목사는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룡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녀학교와 한 언덕우에 자리잡고있었다. 그곳에는 또 카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룡정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영국더기’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여기서 말하는 “영국더기”는 지금 룡정 동남쪽에 위치한 더기로서 당년에 연변의 첫 조계지가 이곳에 설립되여 있었다. 그 더기우에 일떠선 은진중학은 1만평 부지에600평의 본관과150평의 기숙사, 400평의 대강당을 가지고있는 ,명실상부한 룡정 최고의 신식근대교육기관으로 이름이 높았다. 다른 학교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민족교육을 거침없이 실시해 일제가 금지하던 조선말 교육은 물론 영어-성경-국사 등 민족의식을 일깨우고 지식인을 양성하는 수업이 이뤄졌다. 간도 개척기에 민족정신과 독립운동의 산실이 명동촌의 명동학교였다면 일제 강점기에는 룡정의 은진중학이 그 맥을 이였던것이다.   “영국더기”와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8년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200메터 상거한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땀 한방울”이라는 제목으로1등상을 땨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윤동주는  그 청년기를 담금질했다.   현재 오스트랄리아에 거주, 현존하는 윤동주의 유일한 혈육인 녀동생 윤혜원녀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룡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절구통우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있었다”고 윤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잘 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사람으로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 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류학, 선후로 도꼬 립교대학 영문과, 도꾜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사상범”으로 체포되여 일본 규슈의 후꾸오까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룡정의 자택에서 치러진 윤동주 장례식 광경.   상주들중에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영정곁의 오른쪽 첫번째), 아버지 윤영석(그 두번째), 동생 일주(세번째), 어머니 김룡(다섯번째), 여동생 혜원(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왼쪽으로 네번째)의 모습이 보인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가 문익환 목사이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 부터 그의 골회가 운송되여 왔다 . 1945년3월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아버지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 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룡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력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1985년에 이루어졌다.              서대숙 (미국 하와이대학 정치학 석좌교수    30~40년대 룡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룡정 자택과 불과100여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후 미국콜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현재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문제연구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룡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영국더기”를 찾으면서 룡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명동마을의 정초자,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룡정의 "산 증인"으로 불리는 사학자 최근갑옹이 김약연 목사의 옛집 터를 확인하고있다. 지금은 한 아파트단지의 접수실로 변모해 있다.     최근갑 옹은30년대 김약연목사의 자택(현재 룡정 안민가 “해란의 별(海兰之星)”아파트)부근에서 당시 “벌채조합(伐采组合”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력사에 관한 어제의 “산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1926년독립운동가 최청남의 아들로 태여난 최근갑옹 역시 은진중학교 23기 졸업생이다. 즉 윤동주와 은진중학의12년 후배로 되는것이다.   해방후 맡은바 직무에 충실하면서수차례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의 표창을 받기도 했던 최근갑옹은1986년룡정시 건설국 국장에서 정년 리직한 뒤 제2의 인생 즉 우리 민족의 력사발자취를 찾고 그것을 발굴, 복원해 후세에 남김과 아울러 력사관광전적지건설에 혼신을 바치고있다.           윤동주의 룡정자택 옛터     최근갑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룡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고 한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 “오줌싸개 지도”를 산출시킨 곳, “초 한대”등 자신의 시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곳이 바로 이 룡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는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조차 없어 보는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김혁 기자     ==================///  윤동주와 정병욱의 사진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와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 유고 시가 보존됐던 진월면 망덕리의 정병욱 가옥(근대문화유산 제341호) 마루 밑에 숨겨진 윤동주 시인의 친필원고는 그의 사후에 유고로 공개된다         전남 광양시의 정병욱 가옥. 윤동주는 시집을 출판하려 했으나 이양하 등이 반일작가로 낚인 찍힌다고 말려서, 일본으로 유학(도지샤대학)을 떠나기 앞서 친우 정병욱에게 시의 원고를 맡겼다. 정병욱은 일제말 학도병으로 끌려가기 직전 그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원고를 다시 맡기면서 ' 내가 돌아오지 못하면 이 원고를 연희전문에 보내주라'고 하여 그 어머니는 이 집의 마루밑에 곱게 싸서 감추어 두었다. 정병욱은 무사히 돌아왔으나 윤동주는 후쿠오카감옥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      교토 우지강에서 열린 윤동주 송별회 사진.  현존하는 윤동주 최후의 사진으로 알려져 있다.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윤동주.  이 사진으로 윤동주와 인연을 맺은 우지시의 시민들은 인근 우지공원에 윤 시인의 기념비를 세우고자 서명운동을 벌이고 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유고 시집을 발간해 한국 근대문학사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윤동주 시인.       해환 윤동주 시인은 1917년 북간도의 명동촌에서 태어나,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대랍자 중국인 관립학교를 거쳐 이듬해 용정 은진중학교에 입학했으나, 1935년 평양 숭실중학교로 학교를 옮긴다. 그리고 이듬해 신사참배 문제가 발생해 문을 닫자 다시 용정으로 돌아가 광명학원 중학부에 편입, 졸업하게 된다. 이때부터 윤동주 시인은 시인으로서의 소양을 보이며, 여러 편의 시를 남긴다.     윤동주와 정병욱과 함께 하숙한 집앞골목길 왼쪽 처마가 보이는 한옥 기와집이다       이후 1838년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에 입학해 1941년 졸업하게 되며, 1939년 산문 ‘달을 쏘다’를 조선일보에, 동요 ‘산울림’을 소년지에 각각 발표해 본격적으로 시인에 등단하게 된다.  이후 윤동주 시인은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던 해인 1941년에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하숙집 후배인 정병욱에게 친필원고 1부를 보관해줄 것을 부탁하고  일본 유학을 떠난다. 정병욱은 이후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면서  고향의 어머니에게 윤동주의 필사본 원고를 맡기면서 아주 귀중한 것이니 일본인들에게 들키지 말고 잘 간직하라고 당부하며, 혹시 광복 후에도 자신이 전사해서 돌아오지 못하면,  연희전문학교 교수들에게 가져가 시집이 발간 등을 통해  세상에 빛을 볼 수 있게 해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떠난다. 이에 정병욱의 어머니는 일제의 징발을 피해 이집(현재 망덕리 23번지)의 마루 밑 공간에 보관했다가 광복 후 아들이 돌아오자 정병욱은 윤동주의 형인 윤일주와 함께  1948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를 처음 발간하게 된다. 한편 윤동주 시인은 1942년 도쿄의 릿교대학 영문과에 입학했으나,  교토의 도지샤대학 영문과로 전학을 가게 되고, 1947년 7월 귀향 직전에 항일운동의 혐의를 받고 일경에 검거돼 2년형을 선고 받은 후 광복을 앞둔 1945년 2월 28세의 젊은 나이로 일본의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치게 된다. 윤동주의 시는 한마디로 어두운 시대를 살면서도 자신의 개인적 체험을 역사적 국면의 경험으로 확장함으로써 한 시대의 삶과 의식을 노래하는 동시에 특정한 사회문화적 상황 속에서의 체험을 인간의 항구적 문제들에 관련지음으로써 보편적인 공감대에 도달하고 있다. 이처럼 역사적인 이야기가 담겨있는 정병욱 가옥은 건축물 자체보다 윤동주 원고를 간직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그 보존의 가치가 더해지고 있다.   전남 광양시 망덕포구 정병욱의 옛집 지금은 바다쪽으로 20m 정도 나와 매립되어 돌축대가 없어졌다.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어머니 댓글:  조회:4991  추천:0  2018-09-11
어머니 /윤동주 좋은 글      어머니 / 윤동주 어머니! 젖을 빨려 이 마음을 달래어 주시오. 이 밤이 자꾸 설워지나이다. 이 아이는 턱에 수염자리 잡히도록 무엇을 먹고 자랐나이까? 오늘도 흰 주먹이 입에 그대로 물려 있나이다. 어머니 부서진 납인형도 싫어진지 벌써 오랩니다. 철비가 후줄근히 내리는 이 밤을 주먹이나 빨면서 새우리까? 어머니! 그 어진 손으로 이 울음을 달래어 주시오. 1938.5.28.     이 시는 윤동주가 그의 어머니한테 하고 싶은 말을 시로 표현하였다. 먼저 '수염자리 잡히도록' 이란 표현은 보통 수염이 14세 정도부터 난다. 이것을 보면 그 시대로는 애어른이 되었는데도 흰 주먹, 즉 밥이 입에 그대로 있다는 것이다. 또한 마지막 단에서도 어머니께 달래어 달라는 것을 보면 보이그룹 위너의 랩퍼 송민호의 곡인 '겁(Feat : 태양)'과 같이 나는 이제 어른이 되었지만 아직은 힘들다라는 느낌을 받는다. 윤동주는 굉장히 여린 사람 중 하나. 그에게 어른이 되는 것은 아직 힘들었었던 것 같다. 나도 아직 어리지만 점점 커가는 중에 힘드는 점이 있다. 이것은 모두가 그런 것 같다. 나이가 들면 그에 필요한 책임도 부여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들다고 가만히 있거나 운다고 나아지는 것은 없다. 힘들더라도 그것을 극복해나갈 수 있는 힘은 인생에 꼭 필요한 힘 중 하나다. 아마 윤동주도 그래도 일본 유학을 간 것을 보면 힘들고 부끄러운 것을 알고 극복해나가려 한 것 같다. 마찬가지로 나도 힘든 일이 있더라도 극복해나가야겠다고 다짐해본다.   =======================///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별'·'부끄러움'" / 2017.04.22.  독자들은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서 '별'과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인터넷 이용자 1천8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 312명이 '별'을 들었고 '부끄러움'(249명), '성찰'(78명)이 뒤를 이었다.     "'저항시인'보다 '성찰·실천하는 시인'으로 인식"..김응교 교수 설문조사 (서울=연합뉴스) 김계연 기자 =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윤동주 '별 헤는 밤' 부분) 독자들은 시인 윤동주(1917∼1945)에게서 '별'과 '부끄러움'의 이미지를 가장 많이 떠올리는 것으로 나타났다. 22일 김응교 숙명여대 교수가 인터넷 이용자 1천86명을 상대로 설문 조사한 결과를 보면 '윤동주 하면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로 312명이 '별'을 들었고 '부끄러움'(249명), '성찰'(78명)이 뒤를 이었다. 윤동주의 시 중에서도 유독 별이 등장하는 작품을 독자들이 사랑하기 때문으로 보인다. 가장 좋아하는 시로는 응답자의 667명이 '서시', 384명은 '별 헤는 밤'을 들었다. '별 헤는 밤'에는 별이 12번, '서시'에도 2번 나온다. 가장 좋아하는 구절로도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96명),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73명),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73명) 등 별을 그린 시구가 많이 꼽혔다. 윤동주는 어떤 시인이라고 생각하는지 묻는 질문에는 '자기성찰하고 실천을 꿈꾸었던 시인'이라는 응답이 529명으로 절반을 넘었다. '자기성찰의 시인'이라는 응답이 275명으로 뒤를 이었다. 반면 '민족시인'(79명)이나 '저항시인'(89명) 등 그동안 교과서에서 주로 써온 수식에 동의한 경우는 상대적으로 적었다. '기독교 시인'이라는 응답자는 5명에 불과했다. 김 교수는 "윤동주를 일본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시인으로만 한정하면 더 많은 공감대를 갖고 세계인에게 다가갈 윤동주 시의 넓은 모습을 막아버리는 문제가 생긴다"며 "응답자들이 '성찰'과 '실천'을 같은 무게로 보고 있다는 점도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조사결과는 대산문화재단과 한국작가회의 주최로 27일 광화문 교보빌딩 세미나실에서 열리는 '2017년 탄생 100주년 문학인 기념문학제' 심포지엄에서 발표된다.   ====================/// 목차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작품 설명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핵심 정리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이해와 감상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작품 설명 [발상과 표현의 유사성] 백석의 ‘흰 바람벽이 있어’는 고향을 떠나 있는 화자가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흰 바람벽이 있어’와 윤동주의 ‘별 헤는 밤’의 화자는 어떤 매개물을 통해 ‘어머니’를 비롯한 그리운 사람들을 떠올리고 있으며,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을 열거하고 있다는 점에서 발상과 표현 방법이 유사한 시이다.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핵심 정리   별 헤는 밤 흰 바람벽이 있어 갈래 자유시, 서정시 자유시, 서정시 성격 회상적, 성찰적, 의지적, 사색적 회고적, 의지적 제재 별 타향에서의 고단한 삶 주제 아름다운 과거에 대한 그리움과 자기 성찰 고단한 삶 속에서도 고결함을 잃지 않으려는 삶의 자세 특징 ① ‘현재 -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간적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② 산문적 리듬을 가진 연을 삽입하여 운율의 변화를 줌. ① 화자의 내면 풍경과 삶에 대한 성찰의 자세를 형상화하여 표현함. ② 감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구체적으로 제시함. ③ 화자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시상이 전개됨. 별 헤는 밤(윤동주)과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의 이해와 감상 별 헤는 밤(윤동주) 이 시는 부정적 현실 속에서 자신의 모습에 부끄러움을 느끼는 화자가 자기반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의지를 통해 현재의 삶을 극복하고자 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흰 바람벽이 있어(백석) 이 시는 고향을 떠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있는 화자가 쓸쓸한 흰 바람벽을 보며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감상을 한 편의 영상물처럼 그려 낸 작품이다. 흰 바람벽에 어렵게 살아가는 늙은 어머니, 사랑하는 사람이 스쳐 지나가면서 화자는 외로움과 쓸쓸함, 그리움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러다가 자신의 처지를 운명으로 알고 체념하지만 곧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 현재 자신의 외롭고 힘든 처지를 극복하고자 하는 태도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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