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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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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이적 댓글:  조회:2999  추천:0  2018-09-12
  "이적",의 기적은 어디에 있는가...   「이적」/ 윤동주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여 바리고 황혼(黃昏)이 호수(湖水)우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 보리 잇가?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 이적(異蹟)이 외다.   오늘따라 련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자꾸 금(金)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것을 여념(餘念)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 윤동주, , 1938. 6. 19.   세속과 신앙의 틈바구니에 끼어 고투하는 시인의 자아가 엿보입니다. 「새로운 길」을 부르며 자신 있게 대학생활을 시작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누나의 얼굴은 해바라기 얼굴/ 해가 금방 뜨면 공장에”(「해바라기 얼굴」) 가야 하는 피곤한 현실을 경성에 와서 목도한 겁니다. 그 호숫가에 가기 전에 그는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여(빼어) 바리고(버리고)” 왔다고 합니다. 마치 모세가 호렙산에서 십계를 받을 때 신발을 벗었듯이 윤동주는 터분한 것 그러니까 더럽고 지저분한 것, 개운치 않고 답답하고 따분한 것을 버리고 호숫가 앞에 섰습니다. 윤동주 나이 21세. 이제 대학에 입학하고 2개월 보름이 지난 어느 날, 그는 문득 호숫가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물론 관념의 호숫가겠지만, 이상섭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제로 지금의 홍대 근처에 호수 비슷한 큰 연못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물가에서 시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입니다.   당시 연희의 숲은 무척 우거져서 여우, 족제비 등 산짐승이 많았고, 신촌은 초가집이 즐비한 서울(경성) 변두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시골 마을이었고, 사이사이에 채마밭이 널려 있었고,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지금의 홍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러한 사실은 1946년부터 신촌에서 살기 시작한 필자가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   그럴 가능성도 있겠으나 실제 호숫가에서 썼는가 아닌가 하는 점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가 쓰고자 했던 생각이겠죠. 1연 끝에 “ … 보리잇가” 그리고 마지막 행에서 “나를 불러 내소서”라는 구절에서 보듯, 전체적으로 기도문의 형식으로 써 있습니다. 1연에서 “황혼이 호수우로 걸어오듯이 / 나도 삽분 걸어 보리 잇가?”라는 구절은 당연히 파도치는 갈릴리 호수를 걸어오는 예수를 보고 자신도 걸어보려 했던 베드로의 이야기(마 14:22-33)를 연상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이 이야기 이전에 있었던 기적은 바로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오병이어의 이적이었습니다. 그 어마어마한 이적을 행한 뒤, 예수는 “재촉하사 자기 무리를” 흩어지게 합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영웅이 되기를 거부하는 예수의 모습이 더욱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저희가 와서 자기를 억지로 잡아 임금 삼으려는 줄을 아시고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요 6:14-15)라고 적혀 있어요. 때는 해가 서산으로 지고 황혼도 완전히 사라진 한밤 중 “밤 사경”이었을 때였습니다. 베드로는 전날 낮에 오병이어라는 큰 이적을 보았기에, 예수처럼 바다 위를 걸을 수 있다고 믿었을지도 모릅니다. 이적이 계속 이어지리라 생각했나 봅니다.   이 성서구절을 인용하면 많은 목회자들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에 강조점을 두어 설교하곤 합니다. 실은 제가 성서 전체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윤동주는 전혀 다른 시각에서 이 성서구절을 패러디합니다.   이제 이 성서구절을 윤동주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 볼 차례입니다. “발에 터부한 것을 다 빼어 버리”면 예수님처럼 물 위를 걸을 수 있을까 하는 것이 1연의 의미죠. 아무튼 물 위를 걷는다는 것은 큰 이적이지요. 그런데 윤동주는 2연에서 그런 이적을 말하지 않습니다.   내사 이 호수(湖水)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워 온것은 참말이적(異蹟)이 외다.   베드로는 물 위를 걷는 이적을 바랐을지 모릅니다. 아마 물 위를 걸었다면 베드로는 이후 간증이나 자랑거리로 여러 번 그 기적을 드러냈겠죠. 그런데 윤동주가 보는 기적은 전혀 다릅니다. 윤동주는 그저 호숫가에 불리워 온 것이 “참말이적”이라고 합니다. 풍랑 치는 고통 앞에 서 있는 것이 기적이라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일상 자체가 “참말이적”인 것이죠. “내사”는 나야, 나아가 나와 같은 것이라는 겸손의 표현이겠죠. 나처럼 부족한 존재가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도 없는데 불리워 온 것이 “참말 이적”이라는 겁니다. 가령 상상치도 못했던 순간을 경험하는 특별계시(special revelation)와 햇살이나 공기 속에서 살아가는 일반계시(general revelation)를 구분한다면, 그냥 일상 속에서 느끼는 일반계시를 윤동주는 바로 ‘참말이적’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는 이어서 이렇게 씁니다. 오늘따라 연정(戀情), 자홀(自惚), 시기(猜忌) 이것들이 작고 금(金)메달처럼 만저 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것을 여념(餘念)없이, 물결에 써서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湖面)으로 나를불려내소서.   여성에 대한 ‘연정’(戀情), 자기 도취(自惚), 남에 대한 시기(猜忌) 따위의 고민을 알 수 있습니다. 본래 원고를 보면, 자긍(自矜), 시기(猜忌), 분노(憤怒)라고 써 있습는데, 분노를 지우고 가장 앞에 ‘연정’을 써 놓습니다. 분노보다 윤동주에게 심각했던 유혹은 연정이었던 모양입니다.   연정이란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 먼저 떨어졌습니다. /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그 여자(女子)」)라고 윤동주가 청소년기에 썼던 구절을 떠올리게 합니다. “붉은 능금”이라는 구절은 대단히 유혹적인 느낌을 줍니다. 그 능금을 얻지 못했던 안타까움이 느껴집니다. 몰래 앓았던 사랑의 아픔도 나직히 느껴집니다.   자홀(自惚)이란 자기도취입니다. 그의 습작기의 작품인 「공상(空想)」을 보면 “무한한 나의 공상 /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 나는 두 팔을 펼쳐서 /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 금전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라는 구절이 나옵니다.그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잡지 「숭실활천(崇實活泉)」(1935, 10.)에 발표했던 시인데 나중에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에 들어가면서 끝줄의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知慾)”으로 수정합니다. 황금의 지식을 탐하는 욕망,그것이 그에게 자기도취였을까요. 그가 억제할 수 없는 지식욕을 갖고 있었다는, 그 일에 자기 도취되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오늘 따라 금메달처럼 만져”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바로 그 금메달 같은 욕망들을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 물결에 씻어 보내”겠다고 합니다. 마음속의 욕망을 씻어 버릴 수 있을 ‘참말이적’을 경험한다는 생각이지요. 그는 이미 이적을 체험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를 파도치는 호수로 불러 세워달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힘이 있다면 물 위에 걸을 수 있다는 의타적인 말일까요. 그렇게도 볼 수 있을지 모르나, 자신의 연정과 자기도취와 시기를 버렸을 때 이미 그는 기적을 체험한 순간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4연이 원래 퇴고 전에는 “하나, 내 모든 것을 바리려니 /당신이 이 호수(湖水)우로 / 나를 불러 내소서 / 걸으라 명령(命令)하소서!”였다는 흔적을 볼 때, 시련을 당하겠다는 의미의 표출이며 능동적인 다짐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적」을 쓰고 창작날짜를 쓴 원고지에 “모욕을 참아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메모는 옆에 이어 쓴 「아우의 인상화」와 관계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모욕을 참아라”라고 쓴 메모는 「이적」과 연관하여 시련과 부닥치고자 하는 능동적 다짐으로 읽힙니다.   결국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 내소서”라는 표현은 수동과 능동 모두로 해석할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수동이든 능동이든 “내게 준험한 산맥이 있다”(「이적」)는 깨달음과 비슷한 다짐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윤동주에게 이적은 첫째 일상 속에서 느끼는 무한한 영원회귀(니체)이며, 메시아적 순간(발터 벤야민)과 비슷했습니다.둘째 그 이적은 연정, 자홀, 시기 등을 버릴 때 가능해집니다. 그 순간이 윤동주가 느꼈던 ‘현현’(epiphany)의 순간이었던 겁니다. 그리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사랑의 전당」)는 다짐과 ‘참말이적’의 힘으로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십자가」)에게로 다가서기 시작하는 청년, 대학교 1학년 때 윤동주의 모습입니다.   /김응교 l 교수는 시인, 문학평론가이다.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외국어대학(東京外國語大學)을 거쳐 도쿄대학(東京大學) 대학원에서 비교문학을 전공했다.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객원교수를 역임했으며, 현재 숙명여자대학교 교양교육원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     「이적」은 윤동주가 연희전문에 입학한 해 여름, 1938년 6월 19일에 쓴 것이다. 그는 지금도 남아 있는 연희전문 기숙사에서 3년이나 살았는데 시간이 나면 혼자 근처 산과 들을 산보하였던 것 같다. 당시 연희의 숲은 무척 우거져서 여우, 족제비 등 산짐승이 많았고, 신촌은 초가집이 즐비한 서울(경성) 변두리 어디서나 볼 수 있던 시골 마을이었고, 사이사이에 채마밭이 널려 있었고, 지금의 서교동 일대(1960년대까지 ‘잔다리’라고 했다)에는 넓은 논이 펼쳐 있었다. 지금의 홍대 앞 신촌 전화국 근처에 아주 큰 연못이 있었는데 1950년대에도 거기서 낚시질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이러한 사실은 1946년부터 신촌에서 살기 시작한 필자가 잘 기억하고 있다.) 어느 옛글에 보면 한양 팔경 중에 ‘서호낙일(西湖落日)’이 들어 있는데 이는 바로 지금의 서교동, 합정동 일대, 즉 서강에서 바라보는 한강의 해 지는 풍경을 가리켰다. 윤동주가 묵던 기숙사에서 잔다리의 연못까지는 약 30분 거리, 거기서 10여 분 더 걸으면 강가(서강)에 도달했다. 아마도 1938년 초여름 어느 황혼 녘에 그는 잔다리의 그 연못가로 산보를 나왔다가 순간적으로 놀라운 경험을 한 것 같다.(필자도 5, 60년대에 그렇게 그 연못가로 산보를 하곤 했다.)   발에 터분한 것을 다 빼어버리고 황혼이 호수 위로 걸어오듯이 나도 사뿐사뿐 걸어보리이까?   갑자기 그의 몸이 가벼워져 물 위를 걸을 것 같다. 성경에 나오는 예수와 제자 베드로의 사건이 다시금 벌어질 듯하다. 풍랑 이는 갈릴리 호수에 배를 저어 가던 베드로 등 예수의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는 예수를 보자 유령인가 하여 놀랐지만 예수가 안심시키고 믿음이 있으면 물 위로 걸을 수도 있다고 하니 베드로가 물 위로 걷다가 물결이 무서워 그만 빠지고 말았다는 기사가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과 마가복음 6장 47절~52절에 나온다. 마태복음 기사를 인용하면 이렇다.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 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후세의 기독교인들이 으레 부딪치는 걸림돌이 성경에 나오는 이적 또는 표적에 대한 기사들이다. 어릴 때에는 실제로 일어난 놀라운 이야기로 쉽게 받아들일 수 있지만 청소년기에 반드시 괴로운 불안과 의심을 죄책감과 함께 느끼기 마련이다. 날 때부터 기독교인이었던 윤동주도 그랬을 것이다. 실상 불교, 이슬람, 힌두교 등 모든 종교의 기본 경전들은 모두 그런 기적적 사건들을 담고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에 대한 강력한 도전이 된다. 그러나 이른바 이성적, 합리적, 상식적 세계 인식이 사람의 근본적인 갈망을 채워 주지 못하는 한 종교적 이적은 언제나 어떤 힘을 가지고 남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들을 상식적인 의미의 사실이라고 믿거나 안 믿는 것은 성숙한 신앙인이 되면 별로 문제되지 않는다. 그런 것은 확증해야 할 지식이나 정보라기보다는 초월자와의 관계에서 삶의 태도를 올바르게 가지라는 준엄한 요청으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이다. 지금 황혼녘에 연못가에 선 윤동주도 성경의 그 장면을 떠올리며 자기가 어느 틈에 보통 연못가가 아닌 성경의 갈릴리 같은 ‘호숫가’에 도달하여 호면으로 걸을 수 있을 듯한 놀라운 느낌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는 일부 서양 예술가들이 말하는 ‘현현(epiphany)’, 즉 순간적 비전 같은 것이다.   내사 이 호숫가로 부르는 이 없이 불리어 온 것은 참말 이적이외다.   기숙사 식당에서 여러 친구들과 저녁을 먹은 후에 혼자 ‘서호낙일’을 구경하러 산보를 나왔지만 갑자기 그는 그런 일상적 습관의 차원을 넘어 갈릴리 호숫가에 불려 나온 듯한 놀라운 느낌, ‘이적’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한다. 그의 말씨도 일상적 언어가 아닌 기도의 말씨로 변한다. 또 한 가지 덧붙이자면 “내가” 대신 “내사”라는 청록파 시인들이 즐겨 쓰던 말투를 써서 그의 순간적 경험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말하고 있다. 상식적 차원에서 말하자면 그를 물에 빠지게 하는 것은 물보다 비중이 큰 그의 몸뚱이이다. “몸뚱이”라는 말은 바로 ‘달을 쏘다’라는 그의 수필에서 “발걸음은 몸뚱이를 옮겨 못가에 세워 줄 때 못 속에도 역시 가을이 있고 달이 있다.”라고, 그가 못가에 선 자기를 가리켜 한 말이다.(이 수필은 예사롭게 못가로 산보하던 이야기를 적고 있다.) 물 위로 걷고 싶은 마음을 거역하는 것은 바로 그 “몸뚱이”인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식적 인식은 돌연 중요하지 않게 된다. 그를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온갖 무거운 것들에서 해방되어 물 위를 걸을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짐을 느끼는 순간적 “이적”을 그는 경험한다. 단순히 그의 무거운 “몸뚱이”보다도 연정, 자홀(自惚), 시기 따위가 그의 발에 “터분하게1) /+“터분한”이 1955년 정음사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는 “터부한”으로 되어 있어 필자가 참으로 부끄럽게 우스운 해석을 한 적이 있다. ‘터분하다’라는 말은 ‘기분이 매우 답답하고 따분하다’란 뜻이다.” +/ 달라붙어 그를 침몰시키려고 위협하는 무거운 것들인데 그것들이 일순 씻겨져 나갈 것 같은 것이다. 바로 그렇게 가볍게 되는 순간, 그는 베드로처럼 예수의 명을 따라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꾸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윤동주를 무겁게 내리누르던 것이 민감한 청년의 이성에 대한 그리움(“연정”), 자기 도취(“자홀”), 남에 대한 질투(“시기”) 따위의 고민들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연정”에 대해서는 「명상瞑想」에서,   들창 같은 눈은 가볍게 닫혀 이 밤에 연정은 어둠처럼 골골이 스며드오.   라 말하고 있는데 이 작품은 1937년 8월 20일, 만주 용정학교 재학 시 지은 것으로 어떤 아가씨에 대한 그리움을 나타내고 있다. 청소년 시절의 애틋한 연정은 1년 뒤 그가 연희 전문 1학년 시절 바로 위의 「이적」과 같은 날짜에 쓴 것으로 추정되는2) /+원고를 보면 「이적」을 쓴 날짜인 1938. 6. 19.라는 날짜가 이 작품의 말미에 적혔다가 그 뒤에 한 연을 덧붙이면서 그 날짜를 지웠다. +/ 「사랑의 전당(殿堂)」에서도 다음 같이 표현되고 있다.   우리들의 사랑은 한낱 벙어리였다.   청춘! 성스런 촛대에 열한 불이 꺼지기 전, 순아 너는 앞문으로 내 달려라. 어둠과 바람이 우리 창에 부닥치기 전, 나는 영원한 사랑을 안은 채 뒷문으로 멀리 사라지련다.   이제 네게는 삼림 속의 아늑한 호수가 있고 내게는 준험한 산맥이 있다.   「이적」에서 그가 벗어 버리고자 한 “연정”은 바로 이런 성질의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떤 아가씨와 서로 인생의 갈림길에서 헤어져 결코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을 혼자 몰래 앓을 것을 결심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마음의 짐이 아닐 수 없었다. 여기서 “자홀”, 즉 자기도취를 그가 괴로운 짐으로 여겼다는 사실에 우리의 관심이 쏠린다. 겸손하고 얌전한 윤동주, 그에게 무슨 자기도취가 있을 수 있었을까? 그의 습작기의 작품인 「공상(空想)」을 보면 제2연에서 그는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무한한 나의 공상 그것은 내 마음의 바다 나는 두 팔을 펼쳐서 나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친다. 금전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이 작품은 윤동주가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학교 잡지 ‘숭실활천(崇實活泉)’(1935, 10)에 발표했던 것인데 나중에 ‘나의 습작기의 시 아닌 시’ 에 편입시키면서 끝줄의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知慾)”으로 수정했다. 그는 미래에 대한 꿈이 많은 민감한 소년답게 ‘금전과 지식의 수평선을 향하여 자신의 바다에서 자유로이 헤엄치는’ 자기를 가슴 설레며 그려 보았음 직하다. 그것이 그의 “자홀”, 즉 자기도취였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모든 똑똑한 소년의 꿈이기도 하다. 어른이 된 그가 “금전 지식”을 “황금 지욕”이라는 더 적극적인 부귀와 지식에 대한 욕망을 뜻하는 말로 바꿈으로써 그것이 더욱 허망함을 나타내려 했던 것 같다. 이는 자기의 욕망에 대하여 스스로 은근히 비판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끈질기게 남아 있는 소년 시절의 자기도취를 지금 그는 자기를 밑으로 끌어당기는 무거운 짐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를 괴롭히는 “시기”는 누구에 관한 것이었을까? 역시 소년기에 쓰인 「그 여자(女子)」에 보면,   함께 핀 꽃에 처음 익은 능금은 먼저 떨어졌습니다. 오늘도 가을바람은 그냥 붑니다. 길가에 떨어진 붉은 능금은 지나던 손님이 집어갔습니다.   라고 하는데, 이 시에 「그 여자」라는 제목이 붙지 않았다면 시 자체로서는 먼저 익어 떨어진 “능금”을 전혀 엉뚱한 사람이 집어 갔다는 이야기를 할 뿐이다. 그 제목을 미루어 보아 우리는 이 시가 한 동네에서 함께 자란 예쁜 여자를 딴 동네 남자가 아마도 결혼하여 데려갔다는 이야기인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 시인은 자기가 몰래 그리워하던 여자를 빼앗아 간 남자를 질투하는 모양이다. 앞서 「사랑의 전당」에 나온 “순이”가 바로 그 여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어쨌든 그런 성적 질투나 공부 따위의 집단행동에서의 경쟁자에 대한 시기가 없으면 그는 가벼워져서 물 위로 걸을 것 같다.   그리고 그를 물 밑으로 끌어당기는 그런 연정, 자홀, 시기 따위가 “오늘 따라 금메달처럼 만져”진다고 한다. 이는 그의 가장 인상적인 비유(직유)의 하나이다. 그러한 마음의 온갖 짐이 간단하게 떼어 버릴 수 있는 메달 같은 것이며, 세속적 승리를 상징하는 “금메달”이 떼어버려야 할 거추장스러운 짐이 된다는 발견은 그가 경험한 놀라운 “이적”의 핵심이다. 그런데 그는 이 대목에서 갑자기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고, 앞뒤의 기도의 말씨에서 친근한 이웃에게 하는 말씨로 돌변한다. 그리하여 번쩍이는 영광의 표시인 금메달이 실상은 무거운 짐이 될 뿐이라는 말은 오로지 그런 금메달을 목표로 하고 있는 이웃들에게 하는 말이 되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갈릴리 호수에서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베드로가 실패했던 사실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는 어쩌면 “금메달” 같은 마음의 짐들을 떼어 버리면 베드로의 실패를 저지르지 않고 성취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발견이다. 그러나 마지막 연에서 그는 다시 기도의 말씨로 돌아가 직접 기도의 대상에게 간절히 구한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그를 가라앉게 하는 마음속의 짐들을 남김없이 씻어 버릴 수 있을 절대 순수의 순간적 “이적”을 그는 경험했다. 피와 살을 가진 몸뚱이로서 물 위를 걷는 요술 같은 “이적”과는 상관없이 (그런 일은 실상 배를 타면 문제없이 성취할 수 있는 일이다) 자기를 짓누르는 마음의 짐들을 금메달처럼 벗어 버릴 수 있는 순간이 진정한 “이적”임을 그는 발견하고 이를 희구하는 것이다. 그 순간 모든 평범한 물가는 갈릴리 호숫가가 되고 그는 그 호면으로의 부름을 따라 사뿐사뿐 걸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가 예수의 제자 베드로처럼 믿음으로 물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황혼”처럼, 다시 말하면 아름다운 순수한 시인으로서 자연처럼 호면 위로 걷기를 소망한다는 사실이다. 그에게는 신앙만큼 순수한 시도 “이적”을 경험할 수 있었고 그것이 그에게 가장 중요했다. 그리하여 “당신”은 기독교적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에서 시라는 이적을 허락하는 또 하나의 ‘하느님’이라는 상당히 모호한 존재로 변하는 것이다.
1    [매일 윤동주 시 한수 공부하기] - 비 오는 밤 댓글:  조회:2894  추천:0  2018-09-12
  비 오는 밤 - 윤동주 솨- 철썩! 파도 소리 문살에 부서져 잠 살포시 꿈이 흩어진다. 잠은 한낱 검은 고래떼처럼 살래어, 달랠 아무런 재주도 없다. 불을 밝혀 잠옷을 정성스레 여미는 삼경(三更). 념원. 동경의 땅 강남(江南)에 또 홍수질 것만 싶어, 바다의 향수보다 더 호젓해진다. @@ *** 비 오는 밤을 상상하면... 어둠이 짓게 깔린 고요한 밤... 솨아아--- 내리는 빗소리를 들으면 더욱 외로워집니다... 고독감을 더욱 느끼게 됩니다... 그리고... 그 비가 말끔히 더러운 세상을 쓸고 가듯... 많은 부정적인 생각들, 행동들... 삶의 부정까지도 말끔히 씻겨 갔으면 좋겠습니다...   ==================///   국치(國恥)의 울분을 달래며 한(恨) 맺힌 일생(一生)을 시로 노래하고, 예술과 인생, 그 일치와 완성을 향해 부끄럼 없는 길을 걷고자 념원하신 윤동주님의 뜻을 기리며 "비 오는 밤"을 조용히 읽어봅니다.     ====================/// 고뇌하는 지식인의 상념의 강엔 시대 상황적 암울한 현실이 어둠과 밝음의 대조에서 언제나 꿈틀거린다. 위 시를 읽다보면 마찬가지로 뚫어야함에도 그럴 수 없는 무력이 언제나 저 찬란한 태양빛처럼 밝고 쾌활한 의지력이랴 그리고 잊지 않을 것을 강조 하 듯 살아나는  인식의 생동하는 모습이 내재되어 희망을 사르는 듯하다.   =======================///   광복절에 다시 윤동주를 생각하며[시사비평-함태식] 2009.08.15  글씨키우기 글씨줄이기 인쇄하기 신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구글 카카오스토리       ▲ 뒷줄 오른쪽, 윤동주     “일제 헌병은 동(冬) 섣달에도 꽃과 같은, 얼음 아래 다시 한 마리 잉어와 같은 조선청년 시인을 죽이고 제 나라를 망치었다. 뼈가 강한 죄로 죽은 윤동주의 백골은 이제 고토 간도에 누워있다.”   경향신문 주필이던 정지용이 죽은 윤동주의 첫 시집 를 1948년 펴내며 쓴 서문의 글이다. 일본 유학 중 불온한 사상이라는 죄목으로 후쿠오카 감옥에서 옥사한 윤동주는 자신의 바램, “내 고향 간도에 묻어 달라”는 말 대로 그의 고향 간도 용정에 묻혀있다. 오늘은 새 아침 서리같이 맑고 명징한 시인 윤동주가 기억나는 광복절이었다.   1917년 태어나 1945 2월 16일 옥사한, 겨우 28년의 삶을 살고 죽은 윤동주를 생각한다. 작년 초부터 이 나라에는 기존의 모든 가치가 전도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의로운 죽음으로 세워놓았던 그 아름다운 말들, 생각들조차 의문에 처해졌다. 사람들 스스로 의심하고 사람들 스스로 걱정한다. 사람들 스스로 포기하고 사람들 스스로 말한다. “언제인가 그런 날이 오리라고...” 많이들 지쳤고 또 많이들 포기해 간다. “내가 무얼 할 수 있다고...”   그랬다. 윤동주가 살았던 시대, 일본의 강점기가 막바지에 이를 때, 누군가도 일본의 종말을 감히 예측할 수 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아무도 더 이상 움직일 힘조차 가지지 못했다. 설사 모든 말들이 막히고 모든 집회가 금지되고 모든 사상이 머릿속에서 나오기 전부터 검열된다 하더라도, '희망'을 검열하진 못했을 텐데, 그 조차 꿈꾸길 두려워했고 그 말 '희망'의 길에 한발 내어 딛지 못했다.     두려워하게 되는 것은 우리 삶이 얼마나 피폐해지고 얼마나 어려워질 것인지가 아니다. 차마 말 못하는 무서움은 지난 일 년의 거꾸로 된 역사가 우리 삶의 모든 가치를 뒤집어 놓은 것이 아니다. 실은 어느새 우리들 가슴과 가슴 사이에 싹터 이제 다 자라버린 우리 자신에 대한 불신, 우리 희망에 대한 의심이다. 윤동주는 그 시절의 어느 겨울, 누이에게 편지를 쓴다.   누나! 이 겨울에도 눈이 가득히 왔습니다.   흰 봉투에 눈을 한줌 넣고 글씨도 쓰지 말고 우표도 붙이지 말고 말쑥하게 그대로 편지를 부칠까요?   누나 가신 나라엔 눈이 아니 온다기에   -윤동주 "편지" 전문      끝없는 절망의 나락에서 윤동주는 무엇을 보았던 것일까? 무엇을 보았기에 그 불온한 사상을 그대로 품으며 꿈을 꾸고 있었을까?   순이가 떠난다는 아침에 말 못할 마음으로 함박눈이 나려, 슬픈 것처럼 창밖에 아득히 깔린 지도 위에 덮인다. 방안을 돌아다보아야 아무도 없다. 벽과 천장이 하얗다. 방안에까지 눈이 날리는 것일까, 정말 너는 잃어버린 역사처럼 홀홀이 가는 것이냐, 떠나기 전에 일러둘 말이 있든 것을 편지를 써서도 네가 가는 곳을 몰라 어느 거리, 어느 마을, 어느 지붕 밑, 너는 내 마음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냐, 네 쪼고만 발자국을 눈이 자꾸 나려 덮어 따라갈 수도 없다. 눈이 녹으면 남은 발자국 자리마다 꽃이 피리니 꽃 사이로 발자국을 찾아 나서면 일 년 열두 달 하냥 내 마음에는 눈이 나리리라 -윤동주, '눈 오는 지도'  전문   유신 정권하에서 싸웠던 시절, 그 독한 80년도 공안 정국, 그리고 87년 유월 항쟁, 그 시절 얻고자 했던 것과 지금 바라는 것이 다르지 않다. 역사는 반복이라고 했지만 아직 미완의 것을 이루어가는 그저 그 지난한 길일 뿐이리라. 그 시절 우리는 단 한 번도 진정한 민주, 진정한 자유, 그리고 정의를 맛보지 못했었다. 우리의 자유는 남의 나라 독립선언서에 있었고 우리들의 민주주의는 교과서와 서양 역사에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을 쟁취하는 것이 역사의 필연이라 알았고 그러므로 승리를 늘 예감했었다. 비록 하루 이틀이 늦어질지언정 우리의 승리는 필연이라고. 결코 우리는 승리한다고.   그러나 이제 지난 10년간 우리가 새롭게 감지한 것이 있다. 진정 민주주의는 무력하기 짝이 없고. 진정 자유는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는 것을, 진정 민주주의는 지루하고 골치 아프며, 진정 자유는 위험하고 어설프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랬다 진정 민주주의는 완성된 채로 제공되는 질 좋고 힘 있는 규정이 아니고 시시때때로 느닷없이 우리의 희생을 원하고 있음을, 진정 자유롭고 정의로움은 귀찮게도 어느 순간마다 우리의 새로운 결단을 요청한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래서 놓아버렸다. 돈 안 되는 민주, 자유, 정의보다는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으면서 마음 편히 사는 쪽으로. 그래서 나라도 놓아버렸다. 아무렴 죽기야 하겠는가. 그나마 그 놈들 덕에 근대화도 이루고 철도도 뚫렸지 않은가. 매일매일 골치 아픈 결단과 자존을 위한 노력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한 평생 아닌가 말이다. 조금은 수치스럽지만 그렇게 살게 내버려 두어다오.   오늘 따라 연정, 자홀, 시기, 이것들이 자꼬 금메달처럼 만져지는구려 하나, 내 모든 것을 여념 없이 물결에 씻어 보내려니 당신은 호면으로 나를 불러내소서.   -윤동주 '이적' 부분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 뿌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었든 눈을 와짝 떠라.   -윤동주 '눈 감고 간다' 전문   윤동주가 태어난 추운 간도의 삭풍보다는 못해도, 이 한 여름 들이닥친 서슬퍼런 사람으로서의 위기에서 그가 꾸었던 불온한 사상을 모두 함께 꾸어보길 희망한다. 원래 불온한 생각은 현실을 생각해야 재미있는 법. 또 다시 저녁 허름한 술자리에서도 끝없이 민주를 이야기하고 도래해야할 새로운 세상을 끝없이 꿈꾸어야하며, 또 다시 흘려야할 지 모르는 피에 대해서도 비장하게 소곤거려야 한다. 그리고 가슴 깊숙이 어느 구석에 품어야 한다. 새로움은 늘 혁명적이라는 것을. 이미 “발 뿌리에 돌이 채였다는 것을” 감지하였으니 눈을 번쩍 떠야 한다는 것을. /가톨릭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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