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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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후회막급 댓글:  조회:2295  추천:2  2014-10-14
수필 후회막급 강룡운   희비가 엇갈리고 다사다난했던 쥐의 해 무자년이 물러가고 대망의 소의 해  기축년이 신주대지를 진감하는 요란한 폭죽소리 속에서 도래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나는 둘째아들놈과 함께 살고있는 이곳 산동성 청도에서 차례상을 차려놓고 머나먼 북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을 그려보며  아버지, 어머니께 차례를 지냈다. 어릴적엔 설이 되면 나이를 한살이라도 더 먹으면  빨리 자라 어른이 된다는 막연한 희망에 설레이며 퍼구나 들뜬 기분이였지만 나이 지긋한 로년에 접어든 다음부터는 설을 쇤다는것이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해마다 늘어가는 나이때문에 저으기 부담스러워진다는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뱀띠 신사년생인 내가 기축년을 맞아 예순아홉이 되여 인생 칠십 고래희 (人生七十古来稀)”의 턱밑에 바짝 다가서게 되였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29년전, 나의 부친은 바로 올해 내 나이와 같은 예순아홉에 아홉고개를 넘기시지 못하고 아쉽게도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그후 4년뒤에 어머니마저 타계하시니 나는 졸지에 그만 고아가 되였던것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갖고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을 소유하고있을 때는 그것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느끼지 못하고있다가도 일단 그것들을 상실한 뒤에야 비로소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많다. 나는 부모님 생전에 그분들이 적어도 10년은 더 앉으시면서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여주고 손자녀석들의 성장도 지켜봐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부모님들의 건강에 대해선 너무나 등한시했던것 같다. 평소에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고 무병하시여 병원출입이 거의 없었던 어르신들인지라 너무나 무덤덤하게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용서할수 없는 불효였음을 나는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통감하게 되였다. 내가 안도방직공장에서 근무할 때 나는 비록 둘째아들이였지만 안해와 상의하고 부모님을 모셔다가 함께 지냈다. 그때까지만해도 무탈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연길로 전근하여 아직 집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근무하던 안도에서 갑자기 뇌졸증으로 우리곁을 떠나셨고 그 뒤를 이어 외기러기가 되신 어머니도 딸이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희소식을 듣고 딸집에 놀려가셨다가 급작스레 뇌출혈로 사망하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어머니의 림종을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하였다. 부모님 생전에 그분들의 건강을 좀더 꼼꼼히 체크하고 조기진단과 조기치료만 잘 하였더라도 그렇게 총망히 황천길에 오르시지 않을수도 있었으련만 부모님을 다 잃은 후에  통탄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회막급, 이 세상에 후회라는 병을 치유할수 있는 약은 없는것이다. 한국가수 오승근의 희트곡 “있을 때 잘 해”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맘속으로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후회막급”이란 이 성구의 깊은 함의를 새삼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후에 제사를 지내고 설명절에 차례상을 차리고 청명과 추석에 성묘하러 다니는것도 자식된 도리이지만 그보다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제때에 건강검진을 해드리고 살뜰하게 건강관리를 도와드리는것이 오히려 더 절박하고 값진 효도가 아니겠는가! 부모님이 돌아가신후에 보이는 사후효성보다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챙겨드리는 생전효도가 진정한 효성이요, 값진 효도라는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그 십분의 일의 정성과 노력으로 부모님의 건강을 챙겨드렸더라면 부모님은 그렇게 일찌기 타계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리하여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시던 량친께서 몇해라도 더 앉으시여 개혁개방의 호시절을 맞아 만년에라도 조금이나마 호강할수 있게 하였더라도 내 가슴이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으리라.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 흔들리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 붙잡지 그랬어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들을수록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노래말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도 살아 생전에 잘해 드려야하는것처럼 건강도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강할 때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도리를 잘 모르고 살아간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30대, 40대에는 건강관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망가지고말았다. 두분 다 중풍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전인자가 나의 몸속에 깊이 배여서인지 나는 재직 당시 고혈압에 고혈지까지 겹치여 건강이 말이 아니였다. 14년전부터 벌써 뇌혈전진단을 받고 두번이나 한달 넘게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10년전 직장에서 은퇴하고 편안한 백성이 된 다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그때까지만해도 귀밑머리에 내리기 시작했던 흰서리가 어느새 머리를 온통 뒤덮은 백설로 변하여  명실공히 백발로인이 되였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날마다 어김없이 한시간씩 신체단련을 위해 탁구 치러 다닌다. 어렸을 때 작난처럼 조금씩 배워두었던 탁구를 재작년부터 다시 치기시작했는데 웬만한 젊은이들도 상대하기 어려운 만만찮은 실력이란다. 워낙 고혈압, 고혈지 체질인데다가 재작년에는 또 고혈당진단까지 받게 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등 3고의 성인병환자들도 약물치료에만 매달리지 않고 음식조절과 적당한 운동을 잘 결합하면 얼마든지 건강을 되찾을수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충고가 나에게 희망을 갖다주었다. 술담배를 언녕 끊은데 이어  그렇게 즐겨먹던 기름진 음식도 줄이고 주식을 잡곡쪽으로 돌리고 날마다 한시간씩 산책을 하던 습관을 견지하면서 재작년부터는 또 매일 오후 한시간씩 탁구운동을 견지하였더니  80킬로 체중이 70킬로로 내려가면서 혈압, 혈지, 혈당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나간 10년동안, 나는 생명은 운동에 있다는 이 명언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철리임을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더우기 탁구를 다시 치기 시작해서 반년만에 혈당을 내리는 약을  더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약을 끊은지도 벌써 2년이 다가온다. 운동료법으로 땀을 흘린 보람이다. 기적이 아닐수 없다.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나는 이 노래말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싶다. 좀더 젊었을 때부터, 좀더 건강할 때부터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나는 “3고”환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더 일찍부터 술, 담배를 멀리하고 끊어버렸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입맛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육식을 적게 하고 소식을 많이 하였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입쌀이나 밀가루에만 련련하지 않고 좁쌀이나 옥수수 등 잡곡을 자주 챙겨 먹었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탁구와 같은 스포츠를 생활의 일과속에 정착시켰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 하지 않고 많이 걸어다녔더라면 나는 그렇게 여러번 입원치료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있을 때 잘해라는 이 말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나 건강관리에만 국한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있을 때 잘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것 같다. 사랑하는 인생의 동반자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문자나 민족교육과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도 다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을 보다 심도 있게 해보고싶다.   2009. 1. 30.  청도에서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79-83]        
23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댓글:  조회:2492  추천:7  2014-10-04
수필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강룡운   지난겨울 나와 안해는 작년에 새로 이사 온 아빠트에서 추운 고생을 전혀 모르며 따뜻하게 한겨울을 잘 보냈다. 아들덕에 호강한 셈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석탄값이 엄청나게 뛰여오르면서 겨울 집중난방 열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아빠트가 많아졌는데 원래 우리가 살던 아빠트 실내온도는 섭씨 15도에서 머뭇거리다가 13도까지 내려간 때도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작년에 설 쇠려 집에 왔던 큰아들애가 집안에서 모직세타우에 솜옷까지 걸쳐입고 덜덜 떨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하도 가긍스러웠던지 우리한테 시설이 좀더 구전한 온돌난방 새 아빠트를 사주어 마침내 인테리어까지 마치고 이사를 오게 되었던것이다. 부르하통하강반에 자리한 새 아빠트의 북쪽 창가에 서서 호수처럼 넓어진 수면우로 유유히 노니는 뽀트들과 강변 유보도에서 산책하는 련인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마냥 펼쳐진 수려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노라면 똑 마치 큰 호수가 유원지 근처의 관광호텔에 투숙한듯한 착각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사를 도와주려 왔던 고종사촌동생이 그 긴 두다리 콤파스로 집안을 두루 재여보더니  북쪽 창문에서 남쪽 창문까지의 거리가 무려 15메터나 된다고 했다. 거실외에도 침실 두칸과 서재까지 달린 휑하니 널다란 이 큰집에서 만년을 보내게된 우리 부부는 뙤창문 하나 없던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그때가 자꾸 뇌리에 떠올린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전까지도  뙤창문 하나 없는 초가집에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를 간 다음에도  그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안도현 명월진 명안가 북쪽  기차역으로 가는 한 큰길목 우물가에 위치해있던 그 집은 팔간짜리 두집 사이 틈바구니에 이어지은 보잘것없이 헐망하고 초라한 오막살이집이였다. 이 초가집 앞과 뒤, 두 출입문 사이의 거리가 6메터도 채 안되고 방너비는 겨우 2메터 남짓, 면적이 12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였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우리는 할머니,아버지,어머니 그리고 나와 녀동생 다섯 식구가 같이 살았고 이 작은 집에서  나의 형님과 나 그리고 녀동생 삼남매가 모두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다. 집이 작은 것도 불편했지만 뙤창문마저 하나 없어 집안이 늘 어둑컴컴한것이 더욱 사람을 미치도록 갑갑하게 만들었다. 유리문도 아니고 창호지를 밖으로 붙인 출입문으로는 겨울이면 랭기가 들어온다고 바깥쪽에 포장용종이상자를 뜯어 붙이고 또 그 우에 세멘트포장지까지 덕지덕지 두껍게 붙여놓아야 추운 한겨울을 지낼수 있었므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했다. 1959년 국경10주년 때 할빈공업대학을 갓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받은 형님이 이 초가집에서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집 식구들은 며칠간 다른 집들을 전전하면서 잠자리를 찾아다녀야 했고 형님이 북경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금방 시집온 형수님까지 여섯식구가 이 작은 집에서 같이 살아야 했다. 1962년 가을,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이 초가집을 떠나게 된것은 나로 말하면 그야말로 오래동안 학수고대하여 오던 해방이였고 그 지긋지긋한 오막살이 생활과의 작별이였다. 그런데 모든것이 다 타고난 운명이라고나 할가. 나의 신혼생활도 바로 이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시작되었다. 미닫이를 사이 두고 좁디좁은 아래 가마목은 나와 안해의 잠자리가 되였고 그 보다 조금 더 넓은 웃방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팔순이 된 할머니가 비좁게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다. 집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그후 내가 공인계급의 “재교육”을 받던 안도방직공장에서는 건평 24평방메터 되는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여섯식구가 같이 살아야했고 1980년 여름 내가 자치주인민정부에 전근되어 왔지만 집이 없어서 하는수없이 코구멍만한 연길방직공장 “모자숙사”에서 1년을 살아야 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주정부에서 배치해주는 “사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로소 3대 다섯식구가 여전히 단칸방 한구들에서 살아야했다. 이 집은 옛날 왜놈들이 쓰던 낡은 집으로서 동서 량쪽 입구로 들어가면 기다란 복도가 있고 북쪽벽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한낮에도 눈앞이 캄캄하였다. 여덟세대가 한칸씩 차지하고 사는 이 “사택”에서는 어느 문이 자기집 문인지 찾기가 힘들어 복도에 들어서서 몇발작만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예 장님처럼 벽을 더듬어야 가까스로 자기집 문을 찾을수가 있었다.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이것은 나의 오랜 소망이였다. 고생끝의 락을 고진감래라고 했듯이 1983년에는 나도 드디여 56평방메터짜리, 절반만 온돌인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됐고 1989년에는 78평방메터짜리 집중난방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몇십년전 안도현 명월진 그 12평방메터밖에 안 되는 초가집에서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던 우리 삼남매는 지금 모두 100평방메터가 넘는 집에서 살고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하여 그렇게 비좁고 그렇게 헐망하고 그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을가? 그것은 그때 그 시절에 오륙십원밖에 안되는 아버지의 박봉으로 가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열여덟살 꽃나이까지 곱게 키워오던 나의 누나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그 몹쓸놈의 립파선암이라는 병을 고쳐보려고 모든것을 몰부어야했으므로 가난에 쪼들리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게다가 두 아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시느라 다른 집을 마련할 엄두도 못내시였고 또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을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처럼 궁핍한 살림살이는 우리 집만의 사정이 아니였고 나의 부모님이 남들보다 무능해서도 아니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아들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낸 분들이셨지만 아들덕에 호강 한번 못해보시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였다. 그때 그 시절은 계급투쟁의 시기였고 온나라가 “사람잡이”에 열을 올리던 동란의 시기였으며 나라경제가 붕괴의 위험에 빠져 가난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형님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의 가난은 떨쳐버릴수있고 부모님을 호강시킬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제아무리 대학을 졸업했어도 우리 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소하여 가난의 현실을 개변시킬수 없었다. 1978년 가을,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께서 당의 사업중심을 계급투쟁으로부터 경제건설에로 전이시켜야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중화의 대지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개혁개방의 물결은 점차 온 나라의 모습을 몰라보게 바꿔놓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달라졌다.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나의 아들애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류학을 나갈수 있었고 또 해외취직도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 세대와는 달리 자기가 번 돈으로 집을 사서 부모님께 효도할수도 있게 된것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 이 모든것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일이였다. 작년 국경절에 북경에 계시는 형님과 형수님이 연길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시였다. 그때 우리 삼남매는 안도방직공장 부근에 모셔진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마치고 부모님을 추모하는 심정으로 명월진에 올라가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옛집을 찾아가보았다. 그런데 옛집터에 있던 나지막한 초가집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는 층집들이 즐비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우리 집 옛터뿐 아니라 명월진 전체가 천지개벽이나 한듯 완전히 몰라보게 변모돼있었다. 형님과 형수님은 명월진의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시고 “고향이 변하기는 많이 변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초라하던 명월구가 이처럼 몰라보게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해마지않는것이였다. 명월구뿐아니라 지금 연변의 각 현 시, 더 나아가 전국 각지 그 어데라 없이 가는곳마다 모두 거대한 건설장으로 변하여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고있다. 최근년간 우리 나라가 건설에 소모한 강재(钢材)만해도 전세계 강재 생산량의 3분의 1을 웃돌고, 세멘트 소모량이 전세계 세멘트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웠다고 하였으니 그 건설규모를 가히 상상할수 있으리라. 그 누가 말했던가? “집은 참으로 그 누구에게나 소중한 삶의 둥지이고 마음의 항구이다.”라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을 다그치고 있는데 항간에는 “초요사회냐 아니냐의 분수령이 바로 주택이라”는 말까지 있다. 우리 나라는 금년부터 제11차 5개년계획이 개시되고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에 더욱 세찬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인 발전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후대들도 다같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주택에서 살게 될 날이 멀지 않아 우리앞으로 성큼  다가오고있다.   2006. 3. 5.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21-26]          
22    수필다운 수필을 한편만이라도 댓글:  조회:1824  추천:2  2014-09-24
수필다운 수필을 한편만이라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오래동안 본의 아니게 공무원으로 공직에 몸 담고있으면서 줄곧 한어문으로만 글을 써왔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모두  문학과는 거리가 먼, 틀에 맞춰진 글이 아니면 천편일률적인 공문이나 연설문들이였다. 이런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해야 했으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필해주면서 문학에는 겨우 곁눈질이나 하였을뿐 시름 놓고 크게 한눈을 팔지도 못했다. 정년이 되여 공직에서 은퇴하게 되자 나는 드디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머리로 생각을 굴려보면서 다른 민족의 언어문자가 아닌 나의 모어인 조선문으로 오직 나만의 개성이 엿보이는 그런 글다운 글을 좀 써보고싶었다. 그래서 시작한것이 수필이다. 나는 비록 천부적으로 문학적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이제 얼마 남지않은 여생에라도 진정 문학수필의 반렬에 오를수 있는, 그야말로 수필다운 수필을 몇편만이라도, 아니 단 한편만이라도 써보고싶은것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유일한 꿈이다.   2013년 6월 강소성 무석에서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1 머리글 ]  
21    "로인네트워크" 례찬 댓글:  조회:2135  추천:3  2014-04-26
수필 “로인네트워크” 례찬 강룡운   나는 날마다 적어도 세번씩은 컴퓨터앞에 앉는다. 이른 아침 날이 밝아 기상을 하게 되면 난 맨먼저 버릇처럼 컴퓨터부터 켜놓고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하루밤새 텅 비여있던 속을 달래기 위해 광천수 한컵을 손에 들고 느긋이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이메일 도착을 알리는 귀맛 좋은 신호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북경 모교에 계시는 서영섭은사님께서 매일아침 제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이 어김없이 이 시간이면  도착하기때문이다. 2년전, 우리 대학교 한학급 동창생들은 대학 입학 50돐에 즈음하여 동창문집 《추억의 메아리(岁月如歌)》를 출판해가지고 북경 모교에 찾아가 동창모임을 가진적이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란 미명하에 이 땅에 휘몰아쳤던 그 사나운 회오리바람을 타고 사처로 흩날려가는 추풍락엽마냥 산지사방에 흩어졌던 우리 동창생들은 고희의 나이가 되여서야 비로소 오랜 세월의 격조끝에 락엽귀근의 심정으로 다시 모교로 찾아갔던것이다. 옛날 우리를 가르치던 년세가 많은 은사님들은 륙속 세상을 뜨시였고 젊은 나이에 교단에 올라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은사님은 어언 팔순을 바라보는 로옹이 되여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오매에도 그리던 은사님과의 재회는 뒤이어 “로인네트워크”로 이어질줄을 우리는 그때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동창문집의 출판을 기획하던 나날에 컴퓨터를 먼저 익힌 우리 몇몇 동창생들은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지지 못해 아직 이메일주소마저 갖추지 못한 다른 동창생들에게 이메일주소를 만들어주고 동창문집 출판기획을 통보하는 통지문을 발송하면서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코 통지문만은 읽어보라고 전화련락을 하게 된것이 동창생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첫 시발점이 되였다. 그것을 계기로 적잖은 동창생들은 고희의 언덕을 톺아오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컴퓨터를 배우게 되였고 나중에는 저마다 서로 뒤질세라 자기가 직접 타자한 원고들을 이메일로 보내와 드디여 동창문집을 편집하여 출판하게 되였다. 모교에서의 동창모임은 동창문집의 출판으로 말미암아 그저 모여서 회포를 나누고 먹고 마시며 한껏 즐기는 차원을 넘어 한결 색다른 품위를 보이게 되였으며 일찍 모교를 떠났던 우리 오랜 졸업생들은 동창문집이란 이 소중한 선물을 통해 모교와 은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할수 있었다. 동창모임이나 은사님과의 재회도 잠간, 감격적인 만남의 희열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우리들은 또다시 각자 저마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야 하였고 사랑하는 모교와 존경하는 은사님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 동창생들은 며칠후에 뜻밖에도 서영섭은사님께서 보내온 이메일을 받게 되였다. 동창생통신록을 보시고 제자들의 이메일주소를 확인하게 된 은사님은 2012년 8월 28일부터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은사님은 8월31일 나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은 62년급 졸업생들에게 도합 280통의 메일을 전송하면서 즐거이 보내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어도 한때 맺은 사제지정은 변함이 없어 줄것 없는 나로서는 모아 두었던 남의 좋은 글이라도 전송해드리니 늘그막 삶의 바탕을 가꾸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그때로부터 은사님께서는 팔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시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발송하신다. 은사님이 전송해오는 이메일중엔 “혼자만 보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아쉽다”는 수많은 정보들이 포함되여 있었는데 세계견문, 명승고적, 인생철학, 건강정보, 명언묶음, 좋은 글중에서 선택한 미문 등등 그 내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다채롭고 다양했다. 은사님께서는 하루 평균 3통이상의 이메일, 지금까지 무려 2100여통이 넘는 이메일을 전송해 보내셨는데 그 속에는 엄청난 수량의 갖가지 정보들이 담겨져있었다.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면 우선 컴퓨터가 있어야 하고 컴퓨터를 다룰줄 알아야 하고 인터넷을 리용할줄 알아야 한다. 우리 학급의 적잖은 동창생들은 동창문집 편집을 계기로  컴퓨터를 배우게 되였고 인터넷을 통해 원고를 주고받으며 동창생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일과 같이 이어지는 은사님의 이메일 접수를 계기로 동창생네트워크가 어느덧 사제간의 네트워크로 업그레이드된 셈이였다. 나는 내나름대로 우리 동창생네트워크나 사제간의 이 네트워크를 “로인네트워크”라고 부르고싶다.  1년 사이에 우리들의 이 “로인네트워크”는 은사님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사제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들의 만년 생활을 2년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들어가고있다. “로인네트워크”를 통한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각자 소유의 지식과 정보의 공유이다. 우리 동창생들도 은사님의 본을 배워 각자가 독서를 통해, 혹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어낸 지식이나 정보들을 혼자만 보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아쉽다싶으면 이메일을 통해 “로인네트워크” 성원들에게 다 전송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몇통의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였고 더불어 자기집 서재의 책들보다도 더 많은 책들을 볼수 있게 되였고 자기가 자주 드나드는 사이트이외에도 수많은 사이트의 정보들을 접수하게 되였다. 덕분에 우리는 인생만년에 들어섰어도 오히려 대학을 다닐 때보다도 더많은 지식과 정보를 향유할수 있게 되였다. 이렇다 보니 지금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아예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로 되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젊은이들이나 직장인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다. 직장을 떠나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는 우리 늙은이들도 일사천리로 발전해가는 정보화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시대와 더불어 전진하자면 컴퓨터도 배우고 인터넷도 리용할줄 알아야 한다. 나는 나의 동창생들과 더불어 은사님을 모시고 “로인네트워크”를 구축해가지고 만년을 보내게 된것을 더 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로인네트워크”는 우리들 만년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은사님과 동창생들이 보내오는 많은 지식과 정보는 우리의 생활습관까지 개변시켜주었으며  보다 원숙하고 건강한 인생만년을 보내도록 큰 도움을 주고있다. 은사님이나 동창생들이 보내오는 이메일은 내가 먼저 읽고나면 나의 마누라도 날마다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명심해서 읽어본다. 왜나 하면 나의 마누라도 “로인네트워크”의 수혜자의 한 사람이기때문이다.   2년전에 불치의 병이란 진단을 받고 북경병원에 가서 방사성치료와 화학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나의 마누라는 작년 여름에 또다시 입원하게 되였다. 그때 의사들은 이 병은 이미 방사성치료와 화학치료의 후유증까지 한데 겹치여 이젠 현대의학의 수단으로는  자기네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퇴원시킬 때는 약 한알도 처방해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가. 북경에 계시는 은사님께서 보내온 이메일속에는 밀방이 하나 있었다. 한 사형수가 형장으로 나가기 사흘전에야 세상에 공개했다는, 중화포럼(中华论坛)에서 퍼왔다는 이 밀방을 받아안은 나의 마누라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더러 약방에 가서 이 약을 지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이 중약을 몇달 련속 복용하였더니 현대의학으로는 별수 없다던 마누라의 병세는 거짓말처럼 큰효험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마누라는 북경에 계시는 교수님을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하면서 날마다 은사님께서 보내시는 이메일을 명심해서 깐깐히 읽어보고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있으면 어서 빨리 아이들한테도 보내주라고 졸라댄다. 북경 은사님께서 보내오는 이메일외에도 동창생들한테서 보내오는 이메일도 적지 않다. 동창생들도 저마다 자기네들의 네트워크에서 주고받는 정보들중에서 서로 공유하고싶은 정보들을 보내준다. 나는 그중에서 내나름대로 일부 정보들을 선택하여 나의 네트워크에 속하는 옛 동창생, 옛 동사자, 한 고향친구, 심지어 연길에서 함께 탁구를 치던 “탁구친구”들한테까지도 전송해준다. 그러면 그네들도 좋은 정보를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네들 네트워크에서 공유하고있는 유용한 정보를 보내줌으로써 크고 작은 네트워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서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숱한 이름 모를 네트즌들의 신세를 톡톡히 보게 되였다. 이렇게 동창생네트워크가 사제간의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사제간의 네트워크가 또 다른 한고향친구네트워크, 옛동사자네트워크, 옛친구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양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또 다른 하나의 모습으로 되였다. 우리 겨레의 말과 글을 매개로 이어지는 이와 같은 크고 작은 네트워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게 되면 우리 민족이 이 세상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아가고있는 새로운 생존방식인 민족네트워크가 이루어지게 될것이다.  만약 우리들 저마다가 북경에 계시는 은사님처럼 자신의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남들과 함께 나누면서 베풀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정신적문화생활은 훨씬 더 풍요롭고 다채로워질것이다. 그러면 그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갈 때면 나도 이렇게 말할수 있으리라. “인간세상은 존경하는 은사님과 사랑하는  동창생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그리고 일면지교도 없는 수많은 고마운 네트즌들이 있었기에 그 동네는 그야말로 살맛나는 세상이였다”고 말이다.   (2014-04-09 무석에서) [2014년 4월 18일 연변일보 해란강 제1566기]
20    경외심과 요행심리 댓글:  조회:1757  추천:1  2013-12-19
칼럼 경외심과 요행심리 강룡운   우리 말 사전들을 두루 살펴보면 경외심(敬畏心)이란 이 한자어는 경외지심(敬畏之心)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그 무언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험난한 인생로정을 걸어가자면 반드시 경외심 이란게 있어야 한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은 갓 태여난 강아지가 백수지왕인 범의 위엄이나 사나움을 모르고 함부로 덤빈다는 말이다. 이 속담을 좋은데 비유하면 그 어떤 권위나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고 과감히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를 말하는것이고, 나쁜데 비유하면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햇내기들이 경솔하고 경박하게 행동하는 경거망동을 비꼬는 말이 되겠다. 그러므로 보다 성숙되고 로련한 사람일수록 경외심이 있기 마련이다. 인류는 최초부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있었다. 천둥번개가 무섭고 홍수가 무섭고 태풍이 무섭고 지진이 무서웠다. 그래서 자연을 숭상하고 하늘을 공경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느님을 숭경하기에 이르른다. 《성경》을 보면 고대 유태인들은 무소불능, 무소불위의 여호와를 몹시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자연을 통칭하여 하늘(天)이라 하고 그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사상이 산생하게 되였으며 또한  백성을 하늘로 간주하고 민심이 바로 천심이라고 인정하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는 경천외민(敬天畏民)사상도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의 리념으로 자리잡게 되였다. 당나라의 명군이였던 당태종도 순자(荀子)나 위정(魏征)의 영향을 받아 백성을 물에 비유하면서 물은 배를 띄울수도 있고 뒤집을수도 있다(水能载舟,亦能覆舟)고 하면서 경천외민을 자신의 치국리념으로 삼았다. 나는 공산당간부들도 경천외민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계의 천둥 번개가 무섭고 홍수가 무섭고 태풍이 무섭고 지진이 무서운것처럼 백성도 무섭다. 백성의 눈이 무섭고 백성의 입이 무섭고 백성의 분노가 무섭고 백성의 반항이 무섭기때문이다. 공산당간부들은 자기 수중의 권력이 누구의것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이 손에 쥐고있는 권력은 모두 인민이 부여한것이다.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인민이고 간부는 인민의 심부름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간부들은 주인앞에서 우쭐렁거리며 주인행세를 하려고 까불지 말고 공손히 주인을 위해 봉사할 의무밖에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간부는 인민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동시에 인민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쁜 짓을 삼가해야 한다. 나쁜 짓을 하기전에는 적어도 한번쯤 백성들의 눈치을 봐야 하고 백성들의 입에서 무슨 여론이 터져나올까를 우려해야 하며 백성들의 분노가 어떤 엄청난 후과를 초래하게 될것인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백성에 대한 경외심이다.     지난 11월1일, 북경시제1중급법원에서는 몇년전 연변에서 제1인자로 군림해있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임  연변주위 서기 전학인(田学仁)을 수뢰죄로 판정,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개인의 전부 재산을 몰수한다고 1심 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부성장의 보좌에까지 올라갔던 이 거물급인물이 어떻게 되여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되였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소견에 의하면 전학인의 타락과 몰락은 일개 공산당간부로 말하면 그가 권력의 보좌에 오른후 입당할 때의 선서를 망각하고 공산당원의 수양을 게을리한데 그 주된 원인이 있겠지만 일개 인민의 공복으로 말하면 그가 인민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하고 요행심리의 함정에 빠져들어 헤여나오지 못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학인밑에서 일해본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별로 없다. 내가 알고있는 전학인은 내가 연변일보사에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후 그가 자치주 제1인자의 권력을 람용하여 연변일보사에서 문화대혁명때나 있을법했던 필화(笔祸)를 연출하여 일장풍파를 일으켰다는 그 한가지 사실뿐이다. 그는 한 소인배가 고자질한 보고서를 받아보고 주당위 상무위원회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그 당시 연변일보사에서 조선문편집부를 책임지고 한창 일을 잘하고있는 최호(崔虎) 부사장에게 문화대혁명때처럼 어거지론리를 펼쳐대면서 터무니없는 엉터리죄명을 들씌워 해임시킨 그 필화를 말하는것이다. 전학인이 최호에게 들씌운  죄목은 매우 간단했다. 최호 부사장이 2000년 4월에 취임한후 2002년 3월 20일 조선문 《연변일보》 3면에 연변대학 김관웅(金宽雄)교수의 글 한편을 발표했다는 그 리유에서였다. 전학인이 그토록 문제시했던 김관웅교수의 문장은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어렵다”는 천자좌우의 짧은 글이였다. 김교수는 중국의  고전《국어. 주어상(国语·周语上) 에 나오는 “방민지구,심우방천 (防民之口,甚于防川)”, 즉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구에 내포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우리 연변에서도 이 고훈(古训)을 거울로 삼아 인민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였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문장은 우리 당의 일관된 군중로선에도 부합되는 글이다. 그런데 전학인은 최호를 고자질한 그 소인배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론리대로 이 글을 그 당시 법륜공지지자들을 부추기는 나쁜 글이라고 훼방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언론을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또한 신문지상에 이런 글을 발표하도록 방임했다는 그 한가지 리유때문에 최호 부사장에게 그 책임을 물어 그 문장이 발표된 이틀뒤인 2002년 3월 22일에 최호의 부사장 겸 부주필 직무를 해임시켰던것이다. 뿐만아니라 전학인은 최호가 신문분야에서 일할만한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연변의 신문출판보도분야에서 일할수 없다고까지 엄포를 놓았던것이다. 이 필화의 여파로 말미암아 연변대학에서는  김관웅교수에게 중임을 떠메이려던 계획조차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나 다름없었던, 4인무리의 요문원따위가 오함의 “해서파직”을 비판하고 등탁 등 삼가촌을 박해하던 론리와 조금도 다를바 없다. 전학인은 무엇때문에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더 어렵다는 이 천고의 진리를 그토록 싫어했을가? 그리고 전학인은 또 무엇때문에 이런 글을   주당위 기관지에 발표했다는 그 한가지 리유때문에 최호를 그토록 사경에 몰아넣지 못해 안달을 했을가? 도적이 먼저 매를 든다는 말이 있다. 그는 아마 이런 필화를 연출해냄으로써 인민의 입을 막고 당보의 입을 막고 김교수와 같은 지성인들의 입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도에 의하면 전학인은 재임기간중 1919만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수뢰했다고 한다. 전학인은 원체 처음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였을것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된다고 했다. 그는 그의 수중에 장악하고있는 권력을 빌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챙겨보려는 소인배들에게 옭매여 그들의 포로가 되였던것이다. 그는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을 권력자의 자리에 발탁시켜주거나 혹은 그들의 돈벌이에 편의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욕심스레 그 엄청난 거금을 받아챙기면서 한발작한발작 범죄의 수렁에 빠져들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전학인은 수뢰가 범죄라는걸 몰랐을가?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장기간 고위급간부로 일해온 그가 국가의 법을 모르고 당의 당규당칙을 모를리 만무하다. 그는 다만 현실생활속에서 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에 걸리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위선자들을 많이 보아오면서 자기도 행여 운수가 좋으면 법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수 있을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범죄의 길에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갔을것이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고기잡는 어부들이 뿌린 그물에 걸려드는 고기보다 거기서 빠져나가는 고기가 훨씬 더 많은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속에서 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에 걸리지 않거나 당규당칙을 위반하고도 처벌을 모면하는 사례가 많은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전학인은 고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물에서 빠져나가기 더 쉬운데 반해 고기가 크면 클수록 그물에 걸리는 확률이 더 높다는것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곡식은 뿌린대로 거두고 죄는 지은대로 간다고 했다. 이는 불변의 철칙이다. 중국의 고전 《로자(老子)》에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网恢恢,疏而不失) 즉 하늘의 그물은 눈이 굉장히 넓어서 매우 성긴것같지만 악인은 결코 하나도 새여나가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걸핏 보기엔 그 그물에서 빠져나가기가 매우 쉬울것같지만 실제로는 빠져나갈수 없다는것이다. 환언하면 죄를 지었으면 천국의 징벌은 피해갈수 없다는 말로도 풀이된다. 오늘 인민대중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된 중국에서 천망(天网)은 바로 인민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법망(法网)을 말한다. 법은 범보다도 더 무섭다. 인민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법에 대한 경외심마저 없는 주제에 범 무서운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강아지처럼 법을 무시하고 법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그 끝장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오늘 파리건, 호랑이건 걸리기만 하면 다 잡아치우는 이 마당에 요행만 바라고 경거망동해서는 결코 안될것이다. 전학인의 몰락이 그렇고 박희래(薄熙来)의 몰락도 그렇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바로 법률의 심판이며 인민의  심판이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1월부터 2013년 8월까지 32명에 달하는 성(부)급 관료가 부정부패로 사법처리를 받았다고 한다. 전학인은 아직 그중에 포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5년동안 전국 각급 검찰기관에서 립안한 사건은 15만 6350건이며 관련인원은 19만8781명, 그중 16만7514명을 공소하고 14만8931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당이 부정부패척결에서 취득한 위대한 성과를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는 전학인처럼 인민에 대한 경외심은 꼬물도 없고 안하무인격으로 수중의 권력을 리용하여 우쭐렁거리며 범죄를 서슴치 않는 위인들이 존재하고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요행심리에 사로잡혀 요리조리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같은 위인들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부정부패척결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연변일보》 2013. 12. 18.
19    무궁화련정 댓글:  조회:2775  추천:8  2013-12-06
수필 무궁화련정 강룡운                  나는 무궁화란 이 낱말을 소학교 다닐 때 처음 알게 되였고 무궁화란 이 꽃은 대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실물을 보게 되였다.     1949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만천하에 선고하기 몇달전, 나는 만 7세에, 우리 나이로는 아홉살이 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가 처음으로 배운 어문과목이 한글이였는데 몇해 지나서부터는 조선어라고 바꿔 불렀다. 아직 철부지였던 나에게 있어서 한글이든 조선어든 모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배워준 우리 말과 우리 글이였으므로 그것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으며 어째서 한글을 조선어라고 바꿔 부르는지 그 영문조차 알수 없었다. 아무튼 한글이라고 하든 조선어라고 하든 우리는 소학교 1학년때부터 우리의 모어를 배운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가 한글을 배우는것도 ㄱㄴㄷㄹ,ㅏㅑㅓㅕ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하는 순서대로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웠는데 교과서에는 무궁화란 낱말도 있었다. 선생님은 무궁화를 조선의 국화(国花)라 하면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나의 머리속에 무궁화가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다가 떠나온 조상의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라는것을 각인해주었으며 또한 나의 어린 가슴속에 아름다운 동경의 꽃씨를 심어주었다.1962년 9월 나는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에게 현대조선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수업도중 무궁화를 언급하면서 조선의 무궁화를 중국에서는 목근화(木槿花)라 부른다고 하면서 학교도서관앞에 무궁화나무 두 그루가 있으니 꽃피는 계절이 되면 명심해서 잘 관찰해보라고 당부했다. 그후부터 나는 도서관으로 드나들면서 때로는 무궁화나무에 한참 눈길을 멈추고 다른 꽃나무를 마주할 때와는 달리 그 어떤 이름할수 없는 상념속에 빠져들군 하였다.    무궁화는 그 원산지가 중동의 시리아라는 일설도 있고 옛날부터 동서방 방방곡곡에 널리 분포되여있었지만 무궁화를 국화로 정한 나라는 오직 하나뿐이였다. 비록 지금은 조선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워쑤처럼 지내고있지만 옛날 통일신라나 고려왕조나 리씨조선은 모두 하나로 통일된 단일민족국가였다.    신라시대의 이름난 문장가 최치원(崔致远)의 문집 《최문창후문집(崔文昌侯文集)》제1권에 수록되여 있는 국서(기원897년7월에 신라의 효공왕이 당나라의 광종(光宗)에게 보낸 국서)에는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乡)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무궁화의 나라”라는 이 별칭은 일찍 신라때부터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 하다.    력사는 길고 현실은 짧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직 세상도 모르는 어린 손자에게 “사람들이 널 보고 성이 뭐냐, 본이 뭐냐,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성은 강씨, 본은 진주, 고향은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사구동이라고 대답해라.”고 하시면서 가끔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있는가를 확인해보시군 하였다. 내가 대여섯살이 되나마나한 그 소시적부터 이렇게 가르쳐 주셨으니 그것은 분명 너희들이 절대로 자기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간곡한 부탁이였으리라.    1989년 여름, 나는 연변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에 참가하게 되였다. 내가 평양 량강호텔정원에서 조선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예쁜 꽃송이를 자랑하며 우리를 반겨주는 무궁화를 보게 되였을 때 나는 그 어떤 오래된 꿈이라도 이루고 마음속으로부터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소원을 성취한듯 홀연 달콤한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20여년전 대학교 도서관앞에서 무궁화를 바라보며 빠져들었던 그 이름할수 없는 상념에서 비롯된것이였다. 아마 무궁화의 고향에 와서 무궁화를 보니 저도모르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살길을 찾아 남부녀대하여 두만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내가 오늘 드디어 조상의 나라로 찾아왔노라고 알려드리고싶은 그런 충동을 느꼈기때문이였으리라.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진후 나는 여러번 기회가 주어져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한번은 《매일신문》 창간 50돐 기년행사에 참가하고 그 길로  경상남도 진주 (晋州)에 내려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고향을 찾아보고 돌아온적이 있다. 그때 나는 진주에서 그 유명한 촉석루(矗石楼)에도 가보았다.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진주성을 함락하자 촉석루에서 왜장들과 함께 주연을 벌이던중 의기(义妓) 논개(论介)가 왜놈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왜장 한놈을 끌어안고 낭떠러지밑으로 흘러 내리는 강물에 뛰여들어 목숨을 바친 그 유서깊은 촉석루에 찾아간것이다. 내가 진주 에 머무르고있을 때 논개가 몸을 던져 순국한 그 남강기슭에서도 무궁화는 어김없이 꽃철을 맞아 나에게 그 특유의 이쁨을 보여주고있었다.    나는 세세손손 대를 이어 무궁화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오붓하게 살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후 일제침략자들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자이다. 내가 이렇듯 조선반도의 북과 남을 오고가며 무궁화를 반기는것은 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저세상으로 떠나 가시면서도 떨쳐버리지 못한 그 망향의 넋이 아직도 나의 잠재의식속에서 맴돌고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궁화는 아욱과에 속하는 락엽관목으로서 온대지방에서 7—10월에 약 100일 동안 줄기차게 피여나는 아름다운 꽃나무이다. 꽃은 종(钟)모양으로 생겼는데 새로 자라난 가지에 돋아난 잎겨드랑이에서 한송이 한송이씩 피여난다. 숱한 꽃망울이 동시에 나무가지 여기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련거퍼 꽃망울을 터뜨린다. 매일 이른 새벽에 피여나 저녁에 시들어 말라 떨어지면서  3개월이상 날마다 새꽃이 피어나 계속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은 끝도 시작도 없이 영원하리라는 겨레의 념원을 담아 무궁화(无穷花)라는 아름다운 꽃이름을 지어준게 아닌가싶다. 이것은 고증된바 없는 내나름대로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어불성설은 아닐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무궁화를 정원수나 가로수로 심어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겨레들도 무궁화처럼 전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지거나 한데 모여 살면서 각자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해가고있다. 조선반도의 남과 북은 물론, 더 나아가 중국, 미국, 로씨야, 일본 등 나라에 비교적 많이 모여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뿐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에 흩어져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을 모두 합치면 무려 7천만이 된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입에 올리시던 “3천만 백의동포”는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7천만이 되였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있는 7천만 단군님의 후예들과 더불어 우리의 유구한 력사, 찬란한 문화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공유하고있음으로하여 항상 더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살아간다. 내 나이가 벌써 고희를 넘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무궁화와 우리 말, 우리 글은 일찍  나의 소년시절에 할아버지가 몸소 사랑의 금실로 이어준 보석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내가 소학교때부터 배워온 우리 말과 우리 글은 나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을뿐더러 오늘도 이렇게 나로 하여금 이 수필을 쓰도록 령감을 주고있다. 그러므로 나의 무궁화사랑은 단순한 꽃사랑이 아니며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나의 다함없는 사랑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국가와 민족은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엄연히 동일시할수 없는 서로 다른 별개의 개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앙과 국경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무궁화를 사랑할것이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기대에 손색이 없는 백의민족의 훌륭한 후손이 되고싶다. 이것이 내가 항시 가슴속에 간직하고있는 소망이다.     (2013년 11월 20일 강소성 무석에서)   [2013년 12월 6일 연변일보 해란강 제1549기]    
18    빨간 양말 댓글:  조회:1963  추천:2  2013-09-04
수필 빨간 양말 강룡운   빨간 양말이란 말만 들으면 아마 어린 아기들이 신는 쬐꼬맣고 앙증맞은 예쁜 양말이 먼저 떠오를것이다. 아기엄마가 임신 10개월의 천신만고끝에 이제 곧 태여날 아기에게 신기려고 일찌감치 마련해두었다가 아기가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면 신겨주는 빨간 양말, 그런 빨간 양말이 얼마나 신통하고 이뻐보이는가. 그런데 사람이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내 나이 저그만치 일흔셋이 되여 금년에 나도 난생처음 빨간 양말을 신어보게 되였다. 지난 섣달 그믐날밤, 음력설고정프로인 CCTV음력설야회를 보고있다가 천지를 진감하는 요란한 폭죽소리속에 계사년의 도래를 알리는 새해의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안해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새해선물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궁금해서 펼쳐 보았더니 뜻밖에도 빨간 양말이였다. “여보, 올해는 당신의 본명년(本命年)이니 이 빨간 양말을 신고 액운을 막아내면서 작년처럼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금년부터는 우리 둘 다 툭툭 털고 일어납시다. 제발 더는 앓지 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오래오래 살아갑시다.” 작년에 우리 부부가 북경에 있는 큰아들 집에 가있을 때 두사람이 동시에 입원치료를 받는 악몽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였는데 올해부터는 그런 “악몽”을 다시 꾸지 말고 43년전 백년가약을 맺으며 꼭 잡았던 두손을 더욱 굳게 마주잡고 계속 이대로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가자는 안해의 간절한 소망이였다. 빨간 양말을 보자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였지만 난 그래도 안해의 청을 액면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는 날마다 오전이면 이 빨간 양말을 신고 로간부탁구협회 활동실로 탁구 치러 다녔다. 하루는 올해 금방 정년퇴직하고 탁구 치러 온 한 한족간부가 어느새 내가 신은 빨간 양말을 보고 나에게 물었다. “사장님, 금년이 본명년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아, 그럼 금년에 일흔셋, 저하고는 띠동갑이네요. 지금은 조선족들도 우리 한족들처럼 이런 습관을 따르는군요.” 그 친구의 말처럼 한족들은 년세가 지긋한 부모님의 본명년이 되면 자식들이 부모님께 빨간 속옷, 빨간 양말, 빨간 허리띠, 빨간 옷 등을 사드려 그해에 들이닥칠지 모를 액운을 미연에 막아내고 탈없이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습관을 가지고있다. 안해도 오래동안 한족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족들의 이런 습관을 받아들이고 그 효험을 기대해보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허다한 습관은 그 어떤 믿음에서 기인된다. 다들 좋다고 하면 그것을 믿게 되고 그러면 믿음이 생겨난다. 아울러 그 믿음이 효험이 있을수도 있다는것이 일반 대중들의 심리이다. 심리학이나 의학분야의 전문용어를 빌어 말하면 플라시보효과(Placebo effect), 자기암시효과 혹은 가짜약효과이다. 즉 실제로 아무 효과없는것을 맹신하는것으로 그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수면제를 장기복용하는 수면장애환자에게 수면제라고 속이고 모양과 색상이 똑 같은 비타민제를 복용시키면 수면효과를 볼수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병도 몸에 드는 병이자 마음에서 나는 병인 경우가 많으므로 좋다는걸 믿으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아 평온을 찾을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면 건강도 그만큼 좋아질수 있다. 지금은 안해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43년전 스물네살 꽃나이에 나에게 시집올 때는 퍼그나 매력적이고 건강한 모습이였다. 헌데 나한테 시집 와서 나때문에 풍파도 많이 겪고 고생도 많이 하면서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다. 때문에 나에겐 안해의 소망이 담긴 빨간 양말을 거부하고 진정어린 청을 들어주지 않을 아무런 리유도 없다. 내 나이 서른이 다되여 안해를 만나 결혼할 때는 온 나라가 온통 열병을 앓고있던 “문화대혁명”시기였는데 사람들이 거의다 제정신이 아니였다. 나의 아버지가 “혁명”의 대상이 되여 감금되고 투쟁을 받게 되자 딸가진 집들에서는  “흑오류(黑五类)”의 자식인 나를 외면하였다. 감히 나에게 시집오려는 처녀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금쪽 같은 아들녀석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런 비참한 처경에 몰린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갇혀있으면서도 이게 다 못난 애비탓이라고 자책하시면서 몹시 가슴 아파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가. 내가 이처럼 난처한 궁지에 처해있을 때 혜성처럼 내앞에 나타나 천사마냥 나와 백년해로를 약속한 처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의 안해이다. 가정배경이 여의치 않다는 딱 한가지 리유때문에 178센치메터 훤칠한 대학생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부모님의 거센 반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레 기어코 나를 선택한것도 나의 안해였고 그 어느 집에서나 딸을 시집보낼 때 어김없이 다 마련해주는 첫날이불도 안해줘서 낡은 이불에 새 이불겉감과 이불안을 얻어서 씌워가지고 시집 온것도 나의 안해였으며 결혼 첫날 큰상을 받을 때 꽃너울을 쓰면서 입어야 할 하얀 한복도 마련해주지 않아 삼촌댁이 시집올 때 입었던 첫날옷을 빌려입고 시집 온것도 나의 안해였다. “혁명”이란 이름아래 “정치가 제일”이랍시고 모든걸 압도하던 그 시절에 투쟁대상으로 몰린 사돈어른이 얼마나 마음에 걸리고 마뜩잖았으면 귀한 딸자식을 그렇게 시집보냈겠는가! 그뿐이 아니였다. 설상가상으로 갓 장가를 간 신랑이 결혼해서 불과 한달만에 “5.16반혁명분자”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여 심사를 받게 되였으니 그 충격이야말로 백주에 악몽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였다. 며칠후 공안인원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하였다. 그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집으로 가져온 서적들과 노트들을 낱낱이 뒤적여 “죄증”을 찾아내려고 설쳐댔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모님이 신랑이고 시집이고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막무가내로 안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솟아났는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내곁을 지켜주었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장 8년동안 “반혁명”루명을 쓰고 살았다. 그 길고 험악한 세월에 한결같이 나를 믿어준 사람이 오직 안해뿐이였다. 당시 나는 로동개조를 하다가 갑작스레 허리를 다치게 되였다. 그때 마침 안해가 첫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넉달씩 두번이나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그때 안해는 예산출산일이 눈앞에 다가와 반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만삭의 몸으로 온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수도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가 나에게 밥을 지어주었다. 그때 다쳤던 허리가 10년이 지난 1981년에 다시  척추원판탈출증으로 재발하였다. 그리하여 다리근육이 위축되고 하지마비가 와서  제대로 걸을수조차 없었다. 나는 부득불 북경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척추수술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였다. 그때도 불철주야 나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나의 안해였다.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안해는 지금까지 다섯번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나의 간병을 도맡았다.  그리고 당뇨병으로 6년동안이나 식단조절을 해야 하는 나에게 끼니마다 건강식을 챙겨준 사람도 안해였다. 내가 지금 뛰여다니며 탁구를 칠수 있는것은 모두 안해의 덕분이다. 이처럼 안해는 나와 결혼해서 지금껏 다사다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매사에서 나를 살뜰하게 보살핀다. 본명년이 돌아오자 새삼스럽게 나에게 빨간 양말을 선물한것만 보아도 그렇다. 여기에는 나와 함께 더 오래 살자는 간곡한 소망이 깃들어있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주책없이 빨간 양말을 신고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소뿔도 제각각이라고 내가 좋고 안해가 흡족해 하면 그만이 아닌가. 모든것이 다 생각하기나름이다. 그래서 나는 안해의 그 갸륵한 마음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빨간 양말을 신고 다닌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것보다 주는것이라고 했다. 나는 안해와 결혼해서 43년이란 긴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준것이 적고 받은것이 많다. 이제 여생은 안해한테 주면서 베풀면서 살고싶다. 안해의 손이 되고 안해의 발이 되여 안해에게 기쁨을 보태주고 아픔을 덜수 있는 일이라면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리라.   (2013년 4월 28일 연길에서) [2013년 제9호 제172--176페지]            
17    백양나무꽃씨 댓글:  조회:2399  추천:3  2013-07-23
수필 백양나무꽃씨 강룡운   1 나의 옛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어렸을 땐 우리 이 고장에는 백양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우리 동포들이 아기자기 모여사는 고장이면 그 어데라없이 가는곳마다에서  우리 동포들의 얼굴을 자주 볼수 있었듯이 마을근처나 학교주변이나 길녘이나 강변에서 언제나 흔히 볼수 있는 수목이 바로 백양나무였다. 나무 잎사귀가 둥글넙적한 우리 겨레들의 얼굴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나무껍질이 희슴프레하여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옛날부터 많이 입고다니던 베천으로 만든 허름한 바지저고리나 두루마기와 비슷하여서인지 백양나무는 마냥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해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백양나무는 이파리가 채 피여나기도 전에 겨우내 몸속에 한가득 품고있던 자양분을 유전인자에 몰부어 제나름대로 일찌감치 씨앗을 잉태하여 새하얀 꽃씨를 온 누리에 날려보낸다. 우리 백의 동포들을 많이 닮은 민들레의 홀씨 같은 새하얀 꽃씨를 수없이 천하 방방곡곡에 날려보낸다. 이 꽃씨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땅에 떨어져 흙속에 묻히여 새봄을 맞아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리게 되면 또 새로운 군락을 이루게 되는것이다. 때문에 새하얀 그 꽃씨가 나의 눈에는 꼭 마치 우리 겨레의 무한한 번성을 축원하는 꽃보라와도 같이 곱게 안겨와 나는 우리 겨레의 미래에 대해 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백양나무는 경제림 조성에서는 락엽송과 같은 수종에게 밀리우고 가로수가운데서는 관상가치가 더 높은 다른 멋쟁이  나무들에게 밀려나면서  점차 우리의 주변에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올해도 백양나무꽃씨가 하늘을 뒤덮고 하늘하늘 날아예는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건만 백양나무가 워낙 예전보다 많이 줄어서인지 눈에 잘 띄이지 않고 하늘을 날아예는 벡양나무의 새하얀 꽃씨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2. 해해년년 봄이면 만천하에 흩날리는 새하얀 백양나무꽃씨를 중국의 고대문인들은 양화(杨花)라고 불렀다. 즉 백양나무꽃이라는 말이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문인들의 시구에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양화”는 백양나무꽃씨가 아니라 버드나무꽃씨라는 주장도 있다. 백양나무꽃씨든 버드나무꽃씨든 그것이 결코 꽃이 아니고 꽃씨임을 그네들도 분명히 잘 알고있었던것 같다. “사화환사비화(似花还似非花)”라는 소동파의 “양화사(杨花词)”가 이를 잘 말해준다. 얼핏 보기엔 꽃과 흡사하여 꽃이라고 이름하였지만 결코 꽃은 아니라고 대서특필하였으니 천만 지당한 말씀이다. 백양나무꽃씨는 백양나무꽃이라고 불리우지만 필경 백양나무의 꽃이 아니고 백양나무의 씨앗인것이다. 깃털같은 새하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백양나무꽃씨 하나를 손에 잡아쥐고 유심히 살펴보면 새하얀 날개속에는 티끌 같은 새까만 알맹이가 박혀있는데 그게 바로 백양나무의 유전인자를 간직한 씨앗이다. 그것이 바람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어느 한곳에 정착하여 흙속에 묻히여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리면 백양나무 애나무로 자라나게 되는것이고 또 한데 모여 자라면 새로운 군락을 형성하여 그네들의 새동네가 이루어지는것이다. 아마 백양나무꽃씨의 이같은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적의미때문에 백양나무꽃씨가 예로부터 줄곧 문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도 모른다. 고대문학사를 한쪽에 저쳐놓고 중국의 당대문학사를 살펴보아도 옛문인들 못지 않게 백양나무꽃씨에 관한 멋진 시구를 남긴 위인이 계신다. 그분이 바로 중국 당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시인이였던 모택동주석이다. ——나는 어엿한 양씨를 잃고 그대는 류씨를 잃었네. 양류는 훨훨 날아 하늘 높이 구중천에 올라가 오강더러 무엇이 있냐고 물었더니 오강은 계수나무꽃으로 빚은 계화주를 받쳐들고 나오더라. 이것은 1957년 5월에 쓴 모주석의 “접련화ㆍ리숙일에게 화답하노라”의 첫대목이다. 모택동은 혁명을 위해 희생된 자신의 애처 양개혜렬사와 리숙일녀사의 부군이였던 류직순렬사의 성씨가 양(杨)씨와 류(柳)씨임을 감안하여 혁명을 위해 먼저 떠나간 이들 두분을 양류(杨柳)라 지칭하고 백양나무꽃씨(杨花)와 버드나무꽃씨(柳絮)에 비유하여 양류는 훨훨 날아 구중천 월궁에 이르러 오강의 환대를 받았다는 기상천외한 시상(诗想)을 펼쳐보이면서 혁명을 위해 몸바친 혁명선렬들의 충혼이 영생불멸하리라는 혁명적영웅주의를 찬미한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류는 그저 백양나무꽃씨나 버드나무꽃씨가 아니라 혁명선렬들의 충혼을 이르는 말이다. 즉 고매한 인간의 넋을 말하는것이다.   3. 그러면 백양나무꽃씨의 넋은 무엇일가? 그것은 그 꽃씨속에 숨어있는 유전인자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의 존재 리유는 자신의 유전인자를 보전하여 물종의 존속을 유지하는것이라고 한다. 백양나무는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여 꼬챙이를 땅에 꽂아도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소유한 수종이다. 지금은 인간들이 백양나무를 식수할 때면 나무가지를 꺾어심는 무성번식방법을 사용하고있지만 자연환경에서의 백양나무는 초봄에 벌써 나무가지에서 키워낸 이삭처럼 생긴 꽃줄기들을 땅에 떨어뜨려 일광과 춘풍에 건조된 꽃씨가 터져나오게 하고 자연의 풍력을 빌어 바람따라 산지사방으로 날려가게 하여 대자연속에 자신의 유전인자를 남기는것이다. 백양나무는 암수딴그루 나무이다. 즉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따로인 수종이다. 암나무에는 암꽃이 피고 수나무에는 수꽃이 피는데 수꽃이 피여 화분을 바람에 날려 보내면 암나무에 핀 암꽃이 수분하여 열매를 맺게 되므로 식물학에서는 곤충을 매개로 하기에 충매화(虫媒花)로 분류되는  버드나무꽃과는 왕창 달리 백양나무꽃은 바람을 매개로 하는 꽃이라 하여 풍매화(风媒花)로 분류한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풍력의 힘을 빌어 유전인자의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냄으로써 수분과정을 완성하여 이 세상 만물속에 자신들의 후대를 남길수있는 꽃씨를 만들어내여 하늘로 날려보내는것이다. 때문에 백양나무군락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암나무와 수나무의 혼거상태가 유지되고있는것이다. 만약 백양나무숲속에 수나무만 있고 암나무가 없다면 백양나무꽃씨도 이 세상에 태여나지 못하게 될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엇설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일개 말못하는 나무가 다 이러할진대 인간세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광활한 대지에 얼기설기 여러 갈래 뿌리를 깊숙히 내리박고 하늘을 떠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백양나무처럼 우리 겨레들도 이 땅에 뿌리내려 150여성상을 세세손손 대를 이어 남못지 않게 떳떳하게 살아왔건만 언제부터인가 민족존속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처녀애들이라고는 거의 씨를 말린 시골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본지도 퍽 오래 되였다. 이것은 우리 겨레들이 오래동난 살아오던 시골마을들이 지금은 자연계에서도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수나무만 자라고 암나무가 자취를 감춘 그런 백양나무숲과 같은 꼴이 돼버렸다는 얘기이다. 백양나무는 그래도 나무가지를 꺾어심는 무성번식이란 방법이 따로 있어 꽃씨가 없어도 번식이 가능하지만 짝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가는 우리 로총각들은 이 세상에 태여나서 자신의 유전자마저 남기지 못하게 되였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4 모택동주석은 혁명적랑만주의수법으로 백양나무꽃씨와 버드나무꽃씨를 혁명렬사들의 충혼에 비유하여 불후의 시편을 남기였는데 나는 백양나무꽃씨를 볼때마다 어쩐지 나의 뇌리에는 그저 바람따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는 우리 겨레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도 어김없이 백양나무꽃씨가 흩날리는 봄이 찾아왔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백양나무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봄이면 하늘에서 흩날리는 백양나무꽃씨가 눈송이처럼 온 하늘을 뒤덮던 그런 광경을 다시는 볼수 없게 되였지만 그래도 부질없이 흩날리는 백양나무꽃씨의 공중 춤사위는 여전히 우리 이 고장에서 자주 보게되는 봄날의 풍경이다. 그런데 지금의 백양나무꽃씨들은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니다가도 자신의 모체가 싹트고 뿌리내렸던 고장이나 그 린근 지역에 내려와 싹티우고 뿌리내릴 기미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멀리멀리 타향으로만 날아간다. 멀리멀리 날아가더라도 그냥 하늘공중에서만 맴돌지 말고 산좋고 물좋은 고장을 만나면 땅에 내려와 흙속에 파묻혀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려 자리잡는곳마다에서 더욱 번성한  백양나무군락을 이루었으면 하는것이 나의 자그마한 소망이다. .  (2013년 봄 연길에서) [2013년 제4호 제116-119페지]  
16    어머니의 사월초파일 댓글:  조회:2588  추천:7  2012-06-06
수필   어머니의 사월초파일 강룡운     사월초파일(음력 四月初八日)은 석가모니의 탄생일, 불교의 기념일중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그래서 불교신자가 많은 한국에서는 이날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지칭하고 전국적인 공휴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땐, 석가모니의 탄생일이요 “부처님 오신 날”이란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사월초파일이 어머니가 각별히 명심하는 날이란건 알고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서란현 막석이란 곳에서 태여나 첫돌생일을 쇠기도 전에 한번은 좀 크게 앓았다고 하는데 어머니의 속이 까맣게 타서 재가 되도록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는것이였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찾아다니며 헤매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가는 숨을 겨우 몰아쉬는 나의 그 갸냘픈 모습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이런 애는 출가한 스님더러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새 이름을 지어주면 혹시 운명이 바뀌여질지도 모른다고 귀뜸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걸식하는 스님 한분이 동냥하려 집으로 찾아왔기에 어머니는 쌀 두바가지에 정갈한 음식을 후히 드리면서 등에 업혀 칭얼대는 나를 가리키며 이애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스님은 어머니의 후한 대접이 너무 고마워 차마 거절할수 없었던지 “룡 룡(龙) 구름 운(云)”, 이렇게 두 글자를 적어주고 이애가 첫돌까지만 무사히 넘기면 앞으로 장수할거라는 덕담까지  남기고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껏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룡운”이란 이 두 글자가 바로 그 스님이 나에게 지어준 이름이란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의 쪼각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머니는 불교신자, 부처님을 믿고 섬기시는분이였다. 아마 내가 일곱살때였을것이다. 그때 나는 조양천에서 어머니를 따라 한 자그마한 사찰에 갔댔었는데 거기서 황금옷을 입은듯한 멋진 불상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속 한구석에 남아있다. 맨날 수수밥만 먹던 그 시절에 어머니가 갖고간 새하얀 입쌀로 밥을 지어놓고 스님과 함께 밥 한끼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난히 향긋하던 그 밥맛이 어쩐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집은 워낙 길림지구의 서란, 막석, 구전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았었는데8.15광복을 맞고 길림에 나와 둘째고모네와 한데 모여서 살다가 1946년  국민당군대가 길림으로 처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큰 할아버지, 둘째 할아버지가 살고계시는 조양천으로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길림에서 우리와 이웃하여 함께 살던 둘째고모네는 미처 자리를 뜨기도 전에 국민당의 폭격을 맞아 여섯식구중 네식구가 목숨을 잃게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비보가 전해오자 우리 집은 련며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당이 길림을 점령하고 교하를 지나 여기 연변에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아 한참 민심이 불안하던 바로 그때에 어머니는  우리집 식구들의 안녕을 보우해 주십사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그 구차한 살림에도 어디 가서 벼를 구해다가 정성들여 절구에 빻고 또 빻아서 티끌 하나 볼수 없는  새야얀 “공양미”를 마련해 가지고 나를 데리고 사찰에 찾아가 불상앞에 향을 피워올리고 기도를 드린게 아닌가싶다.     내가 조양천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옛 기억을 더듬어 그 사찰이 있던 곳에 찾아가 보았지만 불상이나 스님은 다시 찾아볼수 없었다. 토지개혁이후 여러차례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 구리로 만든 불상들은 혹여 포탄을 만드는 군공장에 들어가 탄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사찰은 없어지고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졌어도 해마다 사월초파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나 잊을세라 명심해서 기다리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어머니는 늘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공양미”를 갖고 오전엔 어디론가 가셨다가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시군 하였다. 해마다 부딪치는 일이라서 나는 언젠가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잘 되라고 여태껏 불공을 드려왔는데 지금은 찾아갈데가 없어서 그저 조용한 강변에 가서 갖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놓고 기도만 드리고 온다”는것이였다.     내가 초중 1학년때 청년단조직에 가입하여 2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 전교 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 책임을 지고있을 때였다. 한번은 우리 반 반주임이며 물리과 과임인 선생님의 입단신청을 심의하는 단총지위원회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때 그 선생님은 천주교를 신앙하고 성당에 다니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있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의 입단신청이 부결되는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어머니가 사월초파일이면 어디론가  다니는게 어쩐지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께 그런게 다 미신이고  부질없는 노릇이니 이젠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린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다 너희들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이건 내 마음이다. 너희들에게 해가 될게 하나도 없으니 걱정 말아.” 하시고는 당신이 운명하는 1984년까지 몇십년동안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한번도 어김없이 어디론가 조용히 다녀오시군 하였다.    1954년 우리나라 제일 첫번째 헌법으로부터 종교신앙의 자유는 줄곧 기타 여러가지 자유와 함께 명문으로 헌법에 규정되여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것은 일종 형식상, 지면상의 규정이였을뿐 종교신앙의 자유란 지극히 제한된 자유였으며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문화대혁명때는 극좌적인 사조가 홍수처럼 전국에 범람하여 종교신앙의 자유란 그 허울조차 깡그리 부셔버리고 모든 종교신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미증유의 비극을 초래하기도했다.    개혁개방을 맞아 국문이 열린후 나는 여러번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갔을 때 성당에도 가보고 교회에도 가보고 신부와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보았으며 불국사나 해인사와 같은 사찰에도 가보았다.     나는 신앙적으로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네들 신봉자들의 주장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몇천년 세월이 흘렀어도 왜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가  아직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매료되여있는지 알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 힐튼호텔에 주숙하고있을 때 기증용으로 놓아두는 《성경》을 갖고 돌아와 읽어보기도 하였고, 충천도 서천의 한 목사님이 나에게 선물한 큰글자 《통독성경》을 갖고 돌아와 안도방직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시간을 짜내 《자본론》을 통독하던 그런 끈질긴 의지력으로 거의 1년이란 시간을 할애하며 통독하기도 하였고, 기독교와  불교와 이스람교 등 세계 3대 종교에 관한 서적들도 더러 읽어보았다.     이런 종교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나는 알고도 모를것 같은 그런 아리숭한것들이 너무 많아 뭘 좀 알았다고 떠들어댈건 조금도 없지만 아무튼 종교란 우선 문화라는것은 알게되였다. 인류의 력사와 문화는 종교를 떠나서는 설명할수 없거니와 리해할수도 없는것이다. 여기까지 써내려오다보니 갑자기 백암송(白岩松)이 쓴 《행복했습니까?(幸福了吗?)》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 나라 대석학 계선림(季羡林)선생이 해방군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중앙의 주요령도자 한분이 문병을 갔다고 한다. 두분은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인간의 령적인 문제를 담론하게 되였는데 령도자분께서 계선림선생에게 “주의(主义)와 종교 이 두가지중에서 어느것이 인간들속에서 먼저 사라질거라고 보십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러자 계선림선생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무때든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한 아무래도 주의가 종교보다 하루라도 더 먼저 사라질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보건대 종교가 아무리 허황한것이라 할지라도 그 허황한 종교가 오히려 맑스주의와 같은 여러가지 정치적이데올로기보다도 오히려 더  장수할거라는 얘기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바꾸어 말하면, 례를 들어 인류 력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책  두 권을 놓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칼 맑스의《자본론》 신봉자들보다 《성경》을 읽는 예수님의 신자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간이라도 더 오래동안 생존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냥 죽음의 공포속에서 떨고있는 심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수 없거나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난제에 부딪치면 왕왕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 초자연적인 존재에 기대여, 이를테면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기대여 죽음의 공포에서 해탈해보려고 시도하였던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산생되고 지금껏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장구한 세월 계속 존재할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중의 하나일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령적인 신앙문제는 결코 그 어떤 강압적인 수단으로 해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맑스주의정당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주장한다. 즉 종교를 신앙할수 있는 자유와 종교를 신앙하지 않을수 있는 이 두가지 자유를 동시에 주장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종교를 마치 홍수나 맹수처럼 너무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맑스주의가 진리라면 종교를 무서워할 아무런 리유도 없지 않은가? 유물론이 유심론을 겁나한다면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부모가 종교를 신앙한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 부모의 자식이 공산당을 따라 청년단에 가입하겠다는 그런 진보적인 소망마저 묵살해버릴수 있다면 그게 어디 진정한 신앙의 자유란 말인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이러한 사례는 결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였을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두말할것 없이 광범위한 보편성을 띠고있었을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엄청 어마어마한 일들도 무지무지 많았을것이다.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던 일들을 생각하면 평생을 동서방문화연구,  특히는 종교연구에 온갖 정력을 몰부었던 계선림선생님의 그 의미심장한 말씀에 다소 리해가 간다. 어머니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부처님을 믿게 되였을것이다. 어머니로 말하면 한살도 되기전에 병에 시달려 경각을 다투는 어린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가정 식구들이 국민당의 폭격에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참극을 모면하기 위해, 일곱이나 낳았어도 셋밖에 남지않은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신 사찰을 찾아다니시였고 사찰마저 사라진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강가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을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 그 스님의 덕담때문에 첫돌이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인생칠십고래희”의 고개를 넘어 지금껏 살고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서 그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드팀없이 불공을 드린 그 부처님 덕분에 여러번 위험천만했던 인생의 험난한 고비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뛰여 넘어왔다고 믿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지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나는 신앙적으로는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하늘도 감동시킬수 있고 돌에도 꽃을 피울수 있는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첫돌후에는 그나마 큰 탈없이  무난히 자랄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그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대학공부까지 다 할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문화대혁명때 “반혁명”의 루명을 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허리를 다쳐 거의 불구자신세가 되였던 내가 북경에 가서 수술에 성공하여 마침내 기적적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을수 있었다고 믿는다.   믿음이 곧 신앙이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2011년 12월 10일 연길에서)   [2012《장백산》3 (5-6월호) 158-164페지/ 2013년03호77-81페지]
15    특효약광고 댓글:  조회:2470  추천:2  2012-05-22
수필 특효약 광고 강룡운 . 타지방 사람들이 우리 연길에 오면 이곳엔 노래방이 많고 사우나가 많고 약방이 많다고들 말한다. 이 “삼다”현상중 세가지가 다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자적으로 보면 아마 약방이 제일 많을것이다. 그중엔 “신특대약방”이란 약방도 있다. 신특대약방이란  새로 나온 약이거나 특효약을 판매하는 약방이란 상호(商号)가 아니겠는가. 지금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도시마다 그 어데라 할것없이 한낮에 아무때든 길가에 나서면 심심찮게 건네주는 전단지들을 받게 되는데 얼핏 들여다 보아도 거기엔 약광고가 많고 그중에서도 특효약광고가 유난히 많다. 이런 광고들을 훑어보면 천하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고는 거의 없는것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흔한 특효약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병원엔 항상 환자들이 차 넘친다. 북경에 계시는 나의 형수님은 1976년 당산대지진때 그 여진때문에 아빠트에서 주무시지 못하고 림시천막에서 생활하던 그 시절부터 벌써 35년동안이나 류마티스(类风湿)란 괴이한 병에 걸려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좋다는 약은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여전히 효험을 보지 못하고 휄체어에 앉아서 고달픈 여생을 보내고있다. 언젠가 내가 형수님께 류마티스를 고친다는 광고가 많더라는 얘기를 하였더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시면서 “말도 마오. 그건 다 광고요. 거짓말이요. 나도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고 행여나 해서 그런 약들을 다 사서 써보았는데 돈만 날렸지 지금도 이 모양 이꼴이라오. 진짜 그런 약이 발명되였다면 진작 노벨의약상이라도 탔을텐데 그런 얘기는 아직 누구도 들어보지도 못했지 않았소.”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소를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말그대로 전단지의 특효약 광고들을 살펴보면 류풍습 같은 병은 두말할것도 없고 인류의 제일 큰 난제의 하나라고하는 각종 암도 못 고치는 병이 아니란다. 광고는 광고대로 약장사들의 상술이지만 세상에 특효약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1929년 영국의 학자 플레밍(Fleming)이 항생제중에서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영국의 병리학자 플로리(Florey)가 그에 대한 끈질긴 연구끝에 드디어 페니실린의 제약공정을 현실화하고 페니실린의 전염병에 대한 약효를 발견함으로써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는 질병과의 투쟁에서 더 많은 특효약들을 발견하고 제조해냈는데 각종 세균의 감염으로 인한 질환을 치료할수 있는 천연항생제만 해도 이미 알고있는것이 만여가지가 넘는다고한다. 무릇 약이란 모두 약이 일곱이면 독이 셋이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약이란 다 일정한 치료효과를 갖고있는 동시에 부작용이 따른다는 얘기다. 지금 항생제의 람용과 오용으로 하여 각종 병원균(病原菌)이 항생제에 스스로 저항할수 있는 내성이 점점 강해져 병치료에 더 큰 어려움을 조성하고있다는것이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로 나서고있다. 나도 날마다 약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쉰살이 되기도 전에 고혈압 진단을 받고 오늘까지도 계속 혈압약을 장기 복용하고있다. 그래도 특효약이 없어서인지 50대중반에 덜러덩 중풍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벌써 세번이나 뇌혈전, 뇌경색으로 하여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4년전에는 또 당뇨병진단까지 받았다. 연변병원 내분비내과 정박사님은 나에게 2형 당뇨병환자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당뇨병엔 인슐린이 특효약이지만 장기적으로 인슐린투입에 의존하면 부작용이 있으므로 좋기는 음식조절과 운동료법에 약물치료를 적당히 결합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치료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뇌혈전, 뇌경색과 당뇨병을 유발하는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은 모두 영양과다섭취와 운동부족과 련관되므로 그 병인을 통제하고 병을 치료하려면 인슐린등 약물투입보다도 음식조절과 운동료법을 우선시해야한다는것이였다.  중국말에 당뇨병 치료에는 “입단속을 잘 하고 팔다리를 많이 움직이라(管住嘴,迈开腿)”는 노하우가 있다.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온다는 말이 있으니 입단속부터 잘하는 동시에 운동을 많이 하라는 충고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고혈압으로 인하여 뇌혈전, 뇌경색, 당뇨병에 시달린것도 다름아닌 나의 입때문인것 같다. 나는 워낙 먹새가 좋은 놈이였다. 그래서 대학교때는 늘 량표가 부족하여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는 녀학생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농촌에 내려가 농업생산을 지원할때는 한끼에 찐빵 한근두냥을 먹어도 성차지 않아했으니 매달 35근씩 주는 량권이 모자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한이 맺힌 놈이였던지라 개혁개방을 맞아 생활이 풍족해지자 얼씨구좋아라 허리띠를 풀어놓고 좋은것만 찾아 먹기 시작한것이 바로 그게 화근이 되여 그만 탈이 나게된것이였다. 따지고보면 이게 모두 가난콤플렉스에서 기인된 과욕때문이였다. 옛 성인들도 언녕 과유불급이라고 가르쳤건만 된장에 생파를 찍어먹어도 살이 찌기 시작할때는 쇠고랑이를 삼켜도 다 녹여낼것만 같았다. 그런 놈이 집살림이 점차 펴이면서 하루 삼시 먹고싶은걸 맘대로 먹는데다가 사업의 수요랍시고 손님접대가 자주 이어지면서 거의 날마다 진수성찬을 접하게 되였으니 영양과다섭취는 블보듯 뻔한 일이였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아직 건강상식 무지몽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결국 쇠고랑이를 녹여내기는커녕 과다섭취한 지방질과 탄수화물도 제대로 삭이지 못하여 점점 체중이 늘어나더니 그만 팔자에도 없는 “맥주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입이 많으면 그만치 지출도 많아야 균형을 이루어 건강을 유지할수 있었을텐데 날마다 차타고 출퇴근하고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걸어다는것이 고작이였으니 운동부족으로 몸에는 군살이 찌고 비게덩이가 늘어나고 앞배가 점점 나와 과다한 지방이 혈관을 압박하는데 혈압이 아니 올라갈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재직시 뇌졸증에 걸려 그렇게 고생하면서 겨우 금연에는 성공했지만 정년퇴직후 당뇨병 진단을 받고서야 뒤늦게나마 겨우 입단속에 들어갔다. 육류와 기름진 음식은 멀리하고 채소를 많이 먹고 정제된 밀가루나 입쌀은 적게 먹고 잡곡을 주식으로 삼으면서 옛날 가난에 쪼들리던 그 시절의 밥상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로 되였다가 다시 본연의 “초식동물”로 되돌아온 셈이라고나 할가.  그리고 의사선생님의 권유대로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4년전부터 탁구채를 사가지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소학교 다닐때 목수일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엷은 널조각을 깎아 만들어준 탁구채를 갖고 여름방학때 학교에 가서 흑판을 책상위에 엎어놓고 처보기 시작했던 그 탁구를 70고개를 바라보는 시점에 다시 손에 쥐게 되였던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늘그막엔 건강이 제일이라고 뒤늦게 셈이 들어 건강을 챙기면서부터 거의 날마다 한시간씩 탁구운동을 견지했더니 드디어 기적이 발생했다. 음식조절과 더불어 운동료법이 효험을 보기 시작하여 약물치료 석달만에 의사선생님께서 혈당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니 약물치료는 이제 그만 중단해도 된다는것이였다. 그때로부터 벌써 4년이 지나갔다. 일주일에 한번씩 혈당을 체크하고 1년에 한번씩 건강검진을 받지만 혈당은 여전히 정상이다. 그 비결이 바로 엄격한 음식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을 견지한데 있다. 작년에 연변병원 내분비내과에 재검진 받으러 갔더니 정박사님은 많은 당뇨병환자들 앞에서 “나는 당뇨병 치료를 오래동안 해왔지만 이 아바이처럼 딱 석달만 약을 자시고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환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당뇨병에 걸리면 모두 이 아바이처럼 치료하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나더러 계속 음식조절을 잘하고 운동만 잘하면 다시 재검진 받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것이였다. 당뇨병은 치유되는 병이 아니다.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한다고해서 병이 완전히 나아지는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음식조절을 등한시하고 규칙적인 윤동을 견지하지 않으면 또다시 당뇨병증세가 나타나게 된다는것이 정박사님이 나에게 준 경고메시지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연회석상에 가도 절대 탐식하지 않고 청도나 북경의 아들집에 가 있을 때도 “약대신 탁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먼저 탁구장이 어디에 있는가부터 살펴보고 뻐스를 타고 날마다 탁구치려 다녔다. “생명은 운동에 있다”는 명언은 나의 몸에서도 그대로 체현되였다. 비록 체중은 80키로 이상에서 70키로이하로 내려왔지만 10년전 정녕퇴직할 때 병약하고 로쇠한 그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은 온몸에 활력이 넘쳐 날마다 씩씩하게 로간부국 활동실로 탁구치러 다닌다. 그래서 70고개를 넘긴 지금도 옛직장의 젊은이들과 탁구시합을 해보면 나를 손쉽게 이기는 선수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나의 몇년간의 체험을 통해 다른 병은 잘 몰라도 당뇨병에는 그래도  음식조절과 운동료법만한 특효약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유명한 페니실린도 어떤 환자들에겐 과민반응이 있어 과민반응시험을 먼저 해보고서야 약을 투입할수 있는것처럼 운동료법이라는 이 특효약도 모든 환자에게 다 적합한것은 아닐것이다. 자신의 병세와 신체조건에 맞게 의사선생님의 지도를 잘 따르는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나의 이 글도 진짜 광고같다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특효약광고임은 분명하다. 모든 약방과 병원들에서 이런 특효약을 헐값에 잘 팔아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수 있게된다면 참 좋겠다.   [2011-06-03 해란강 1427기]
14    황혼의 붉은 노을 댓글:  조회:3502  추천:70  2009-12-04
수필 황혼의 붉은 노을     지난 8월 하순, 우리 대학교 동창생들은 연변에서 첫동창모임을 가졌다. 연변에 있는 동창생들은 물론 대련, 심양, 장춘, 길림에 있는 동창생들이 연길로 모여왔고  한국에 일보려 나갔던 동창생도 서울에서 날아왔다. 이번에 확인해 보니 벌써 11명 동창생이 타계하였고 와병중에 있는 몇을 제외하면26명 동창생만이 모일수 있는 아쉬운 자리였다. 이번 동창모임의 주제가는 김경석작사, 동희철작곡으로 된 《동창상봉가》였다.    한 고향 한 학교를 다닌 친구야/ 졸업하고 리별한지 몇해이더냐    한 고향은 아니여도 한 학교 한 학급에서 6년동안이나 고락을 함께 했던 동창생들의 이번 모임은 졸업하고 42년, 문화대학명때문에 1년 늦게 배치를 받고  모교에서  석별의 정을 나눈지 41년만의 첫 상봉이였다.   거멓던 머리에는 서리 내리고 / 복스럽던 얼굴에는 주름졌구나 야 반갑다 나의 동창아/ 우리 서로 그리운 정 풀어나 보자/ 풀어나 보자    41년만에 처음 만나 두손을 마주잡았지만 기억속에서 상대방의 옛모슴을  확인하지도  못한채 서로 서먹해 하고 머뭇거리는 친구들도 없지 않았다. 옛추억속으로 돌아가 서로를 확인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상봉의 첫날저녁 연길 해란강민속궁 연회청에서 축배의 술잔을 들고 《동창상봉가》를 부르는 사이에 어느덧 모두들 40여년전 대학교시절로 돌아가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여버렸다. 이튿날 우리들은 돈을 주고 임대한 뻐스를 타고 왕청 만천성풍경구로 자리를 옮기였다. 유람선을 타고 수려한 호반풍광을 감상하고 가파로운 신녀봉정상으로 등반하면서 40여 성상 서로 다른 고장 다른 직장에서 겪어온 생활의 시련을 이야기 했고 부모님 모시고 자식 기르며 나라 위해 쌓은 업적도 회고해보았다. 더구나 만천성에서 하루밤을 자고 떠나기에 앞서 호반운동장에서 가졌던 남녀동창생 배구시합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월의 무정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였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늙지 않는게 마음이라고 생각같아서는 40여년전처럼 멋지게 잘 칠것만 같았던 배구공이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아 얼마나 많은 웃음을 자아내고 또 얼마나 잊을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기실 배구공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게 아니라 이미 로구가 돼버린 몸들이 생각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것이였다. 녀자배구팀의 주력멤버는 대학교때 학교팀 주력멤버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는데 40여년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서브도 제대로 들이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아무튼 우리의 이번 모임은 너무도 때늦은 만남이였다. 10년전, 20년전에 이런 모임을 가졌어도 오늘처럼 이렇게 로쇠한 모습들은 아니였을것이고 타계한 동창생들도 더러 만나볼수 있었을텐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진것은 어쩔수 없거니와  또 돌이킬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였다. 우리가 아직 재직일 때에 연길에 있는 동창생들이 주체가 되어 이런 모임을 조직해 보라는 건의가 없은것은 아니였다. 그때는 자치주 직속기관에서 근무하는 국장급 동창생만해도 다섯이 넘었으니 조금만 수중의 권력을 리용하면 차량을 움직이고 숙식을 해결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별로 없을거라고 하면서 “유권불용, 과기무효(有权不用,过期无效)”라는 농담까지 오고갔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년퇴직한 다음에는 자식들의 공부뒷바라지를 하고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손자 손녀가 태여난 다음에는 또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여념들이 없었다가 지금에 와서 조금 여유가 생겨나니 이제 더는 미룰수 없다는듯이 다그쳐 동창모임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만약 우리가 재직중인 그 시절에 이런 모임을 가졌더라면 이번처럼 돈을 주고 임대한 뻐스를 타고 만천성으로 가지 않고 승용차를 움직이여 모임에 참가한 동창생들을 모시면서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두고 두고 량심의 견책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이번처럼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숙식과 교통비를 해결하는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처사였는지 모른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먼곳에서 찾아온 동창생들을, 그것도 40여년만에 만나는 동창생들을 민족호텔 4층의 초라한 객실에 류숙하게하였지만 누구 하나 잠자리를 탓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2년전 나는 《생일파티》라는 수필의 결미에서 우리 자치주의 주요책임자의 한분이셨던 어르신이 자기의 부하들로부터 옛동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자택의 비좁은 방안에서 그저 친인척들끼리만 모여앉아 조촐하게 회갑잔치를 치루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쓴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한자리 한다하는 어른들이 회갑잔치를 차린다는 소문만 나도 벌써 몇백명 하객이 줄지어 문전성시를 이루고 하루사이에 몇만원 ”수입”을 올렸다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 어르신은 이런 시체류행은 아랑곳하지않고 시종일관 입당할 때의 약속을 맘속깊이 굳건히 지키면서 아름다운 황혼을 불태우는 공산당원의 숭고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석양의 찬연한 붉은 노을은 바로 이러한 어르신들이 있음으로 하여 한결 더 아름다운것이리라! 우리 대학교 동창생들도 인제는 오라지 않아 고희의 언덕에 올라서는 늙은이가 되였다..아침 여덟시나 아홉시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라고 비유하던 청춘의 황금기는 이미 아득한 옛추억으로 되었고 지금은 서산마루에 걸려 여열을 발산하고있는 석양의 빛을 받아 황혼을 불태우는 저녁노을이라 하면 그 아름다움이 한결 더 돋보이리라는 일념으로 여생을 살아간다.    한 고향 한 학교를 다닌 친구야/ 모교 위해 떨친 영예 얼마였더냐 그 어느날 어디에서 다시 만날 때 / 후회없는 여생을 자랑해보자    “후회 없는 여생을 자랑해보자.”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바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노래말이다. 나는 이와 같이 후회없는 여생을 자랑하자면 생일파티도 흥청망청 공금으로 차리는 일부 부정적인 세태 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그 어느 누구도 재직시절의 여세를 빌어 후배들에게 기웃거리며 손을 내밀지도 않고, 늦기는 많이 늦었어도 다소곳이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숙식과 교통비를 해결하면서 동창모임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천번만번 옳바른 선택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번 동창모임에서 2012년 9월 대학교 입학 50주년에 즈음하여 북경의 모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동창생들이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하시라! 나는 지금부터 우리들이 수도 북경에서 다시 만나 《동창상봉가》를 더욱 우렁차게 부르는 그 황홀한 광경을 눈앞에 그려보며 모두들 깨끗하게 옥체안강하기를 날마다 두손 모아 빌겠나이다.   (2009년 9월 10일 연길 자택에서)  
13    손녀의 미니홈페지 댓글:  조회:3074  추천:92  2009-08-26
수필 손녀의 미니홈페지 강룡운   나와 마누라는 지난해 봄부터 손녀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구경하는 재미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며느리가 딸 지연이에게 만들어준 미니홈페지다. 나의 중학교 동창생들 가운데 어떤 친구의 손녀는 금년에 벌써 시집을 간다고 하는데, 그리고 또 대학교 동창생들 가운데 어떤 친구의 손자 손녀들은 언녕 중학교나 고중에 다니는 애들도 많다고 하는데, 그런데 나는 작년에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되였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손녀가 북경에서 태여났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나는 너무 기뻐서 아들의 이메일주소로 갓 태여난 손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지연아. 반갑다! 너의 출생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할아버지는 너에게 강지연(姜智渊)이란 이름을 지어놓고 기다렸단다. 너의 아빠 엄마는 이 이름이 이쁘단다. 너도 아마 이 이름을 좋아하게될것이다. “앞으로 니가 커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니가 태여날 때 너의 할아버지는 벌써 고희를 바라보는 백발로인이였단다. 그래서 너의 출생이 너무 너무 반가워 주름진 얼굴에 때늦게나마 함박꽃이 피였단다. “지연아, 너는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 호시절에 태여난 우리가문의 귀염둥이이고 보배둥이란다. 니가 아빠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서 어서어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하루 빨리 할아버지가 써보내는 이 이메일을 읽을수 있게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더덩실. 춤이라도 출것만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날이 도래하기를 학수고대할것이다.” 갓 태여난 아기가 이메일을 받을수도 없고 읽을수도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래도 손녀에게 꼭 평생을 두고 간직할수 있는 좋은 선물을 남겨주고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던것이다. 갓 태여난 아기에게 이메일을 보내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따로 있었다. 지연이가 지금은 이 이메일을 읽을수 없다는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지만 장차 커서 학교를 다닐 때가 되면 그때 그 어디에서 살든지를 막론하고 꼭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배우게 하여 할아버지가 써보내는 이 이메일을 읽을수 있도록 잘 키워야한다는것이 바로 이 이메일속에 담겨진 나의 소망이였고 나의 진정한 속셈이였다. 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큰아들더러 앞으로 지연의 출생일에 찍은 사진과 첫돐 사진 그리고 기타 성장과정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편집하여 CD를 만들어 지연이에게 선물하면서 꼭 할아버지의 이 이메일도 함께 편집하여 기념으로 남겨주라고 부탁했었다. 이런 부탁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나의 생각이 그래도 디지털시대에 걸맞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확신하고있었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나보다 훨씬 더 앞서가고있었다. 그애들은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수 없었던 미니홈페지를 만들어 갓 태여난 지연이에게 선물했던것이다. 그리고는 륙속 “사진일기” ”백일기념” ”첫돐앨범” 등을 올려 지연이가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인터넷에 남겨놓고있었다. 손녀의 이 미니홈페지가 있음으로 하여 나와 마누라는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비록 북경에 있는 지연이와는 멀리 떨어진 타고장에서 살고있었지만 지연이가 보고싶을 때마다 아무 때든 상관없이 인터넷으로 손녀의 미니홈페지에 들어가 그애의 사진과 동영상을 볼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지연의 “극성팬”들이 남겨놓은 대글을 읽어보는 재미에 푹 빠져보는것도 말그대로 금상첨화였다. “야, 이쁘다!” “이거 완전히 예술이구나!” 손녀가 이쁘다고 극찬하는 이런 찬사를 읽으면서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늙은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직장을 떠나 집에 돌아와 “편안한 백성”이 된지도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 10년사이에 내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일들중에서 그래도 먼저 서둘러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진것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손꼽는다. 만약 내가 아직도 적지않은 늙은이들처럼 컴퓨터를 다룰줄 모르는 컴맹이였다면 손녀에게 미니홈페지가 있다고한들 감히 들어가 구경할수나 있었겠는가! 컴맹의 모자를 벗는다는것은 문맹의 모자를 벗는다는것과는 차원적으로 보아 천양지차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컴맹탈출과 문맹탈출은 비슷한 점도 많은것 같다.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던 문맹이 가갸거겨의 식자관(识字关)을 넘어 글을 쓰고 글을 읽을수 있게 되면 문맹의 행렬에서 탈출할수 있게되는것처럼 내가 컴맹의 모자를 벗었다는것은 컴퓨터의 ABC를 초보적으로 장악하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찾고 열람할수 있고 또 자기가 쓴 글도 인터넷에 올릴수 있는 초보수준에 이르렀다는것이다. 이것은 무소불능의 컴퓨터기능으로 놓고 말하면  천만분의 일, 아니 억만분의 일에 불과한 수준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식자관을 넘은지 얼마 안되는 “소학생”수준과 비슷하다고 하면 어불성설은 아닐것이다 그러므로 디지털시대 컴퓨터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동행하고있는 “중학생”이나 “대학생”수준에 도달하자면 아직도 갈길이 아득히 멀고도 멀다는것이다. 그래서 나는 짬만 있으면 홀로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이것저것 작업을 하며 공부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늘 TV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내던 마누라도 손녀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보고난 다음부터는 차츰 저절로 컴퓨터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더러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열게하여 손녀의 사진을 보자고 졸라대던것이 어느날부터인가 자기도 인제는 컴퓨터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아마 지연이가 보고싶을 때마다 남편의 손을 빈다는게 장구지책이 아니라는걸 뒤늦게나마 각성하게 되였던 모양이다. 컴퓨터를 아주 신비한 물건으로 간주하고 감히 손을 대지도 못하던 마누라였는데 차츰 지연의 미니홈페지가 열려있는걸 보기만해도 자기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사진을 찾아 한장 한장 넘기면서 감상하던 단계를 넘어서 지금은 “야후”와 같은 사이트에서 자기가 보고싶은 기사들을 찾아 읽으면서 좀처럼 컴퓨터에서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할망구가 되여버렸다. 지연이가 돐전부터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더니 지연의 할머니도 인제는 컴퓨터앞에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였다고나 할가. 나는 손녀의 미니홈페지를 접촉하면서부터 마누라의 신상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하면서 시대의 락오자가 되지 않으려는 모지름도 읽을수 있었다. 븐명한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물젖은 우리 늙은 세대들로 말하면 디지털시대를 맞아 앞장서 달려가고있는 젊은 세대들을 보고 너무 빨리 달린다고  짜증만 낼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생신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되도록이면 시대의 발전에 맞추어 그들을 따라가는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자세라는 그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흘러간 옛노래를 좋아한다고 해도 계속 트로트만 고집할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즐기는 발라드나 댄스 그리고 랩이나 록 같은 현대음악도 수용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갖추어나가는것이 세대간의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할수 있는 지름길이라는것이 나의 새로운 인생체험이다. 아무튼 손녀의 미니홈페지가 이순의 나이를 넘긴 나의 마누라로 하여금 차츰 컴퓨터에 다가서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대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제 나의 마누라도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질 가망이 환히 내다보이는것 같다. 그래서 손녀 지연이가 더욱 예쁘기도 하고 지연의 미니홈페지가 더욱 고마운지도 모른다. 이제 마누라도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컴퓨터를 좀 더 능숙하게 다룰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지연이도 몇해 지나서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고 컴퓨터도 다룰수 있게 된다면, 그때가 되면 지연이는 할아버지가 작년봄에 써보낸 출생축하 이메일도 읽을수 있게 될것이고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메신저로 채팅도 할수 있게 될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이고 행복의 미소가 저절로 주름진 로안을 헤가르며 피여오르는것만 같다..     (2009년 4월 청도에서 초고 2009년 8월 연길에서 수정        2009년 8월 21일 연변일보/해란강 제1361기)   .
12    자식농사 하나 둘 셋 댓글:  조회:3336  추천:153  2008-04-26
[수필] 자식농사 하나 둘 셋 강룡운 전 연변일보사 사장   하나 지난 청명에 부모님산소에 가 성묘하고 돌아온지 며칠 안되였는데 연길시 장백로 길 량켠에 벌써 화사한 복사꽃들이 꽃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컴퓨터에서 묵은 일기장을 열어보았더니 작년에는 4월 20일에 개화, 그러니까 올해는 작년보다 열흘이나 앞당긴 셈이였다. 고대 그리스의 한 철학가는 사람은 똑같은 강물에 두번 들어설수 없다는 수수꺼끼 같은 천고의 명언으로 사물의 끊임없는 변화야말로 깨뜨릴수 없는 만고의 철칙임을 설파한바 있다. 세월도 흐르는 강물처럼 해마다 지나간 세월을 똑 같이  복사해 내는게 아니였다. 금년 개화기가 작년보다 열흘이나 앞당겼으니 말이다. 활짝핀 환한 웃음으로 오고가는 행인들에게 정다운 미소를 선사하는 복숭아꽃을 바라보고있노라면 저도모르게 너무나 귀에 익은 옛노래가 가슴속에서 메아리친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바로 이거였다. 먼옛날부터 우리네 조상들은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가   피여나는 산촌마을에 모여살면서 꽃피는 봄이 오면 밭을 갈고 씨뿌리면서 한해 농사를 시작했고 농사를 지어 의식주의 모든 걱정거리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우로는 부모님 모시고 아래로는 자식들을 키우면서 대를 이어 세세손손 민족의 혈맥을 이어왔던것이다. 자급자족의 농경사회에서 농사는 천하지대본이라 농사보다 더 큰 일이 따로 없었다. 그래서인지 예로부터 우리 민족은 자식을 낳아 키우는 일을 농사에 비유하면서 자식농사란 낱말을 곧잘 사용해왔던것이다. 청명에 부모님 산소에 다녀오면서도 자식농사 얘기가 흘러나왔다. "우리 시아버지 시어머니는 정말 자식농사를 잘 하셨어요. 자식 셋에 대학생 둘…그래도 제사밥을 차려주는 자식은 당신 하나밖에 없지만서도…" 안해의 이 말에 그 어떤 미묘한 뉘앙스가 깔려있었지만 그래도 내 귀에는 그냥 듣기 좋은 칭찬의 소리로  들려왔다. 안해의 말처럼 나의 부모님은 평생 어렵게 살면서도 두 아들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내신 존경스러운 분들이였다. 형님은 일찍 대학을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받아 거기서 근 50년을 살다보니 부모님산소를 두세번밖에 찾아오지 못하였고 녀동생은 출가외인이라 부모님 생전에 두분을 모신것도 나와 안해의 몫이였고 세상을 뜨신후에는 지금까지 20여년간 청명과 추석이면 꼭꼭 성묘하러 다니면서 가토하고 벌초하는것도 역시 자연스레 우리의 몫이 되였다. 옛날사람들은 자식이 불효하면 너의 집에 가서는 제사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겠다고 한바탕 야단을 쳤다고 하는데 옛사람들의 표준으로 말하면 해마다 꼬박꼬박 성묘하러 다니는  둘째 아들놈이 있음으로해서 나의 부모님의 자식농사는  헛되지 않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하지 않는가.   둘 로씨아의 대문호 고리끼가 말했듯이 모든 비유는 다 일정한 제한성이 있기마련이다. 농작물을 재배하는 농사와 자녀양육을 뜻하는 자식농사란 이 두가지 일은 비슷한 일면이 있으면서도 엄연히 다른 점이 더 많다. 농사는 농절기를 잘 맞춰 좋은 종자를 골라서 되도록이면 밑거름을 많이 주고 제때에 파종하고 제때에 기음매고 후치질해주어 충족한 일광과 충분한 수분만  보장해주면 무럭무럭 잘 자랄수있므로 만풍년을 기약할수 있는것이다. 그러나 자식농사는 이런 밭농사나 벼농사와는 달리 그저 잘 먹이고 잘 입혀서 건실하게  잘 키우는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인간이란 이 생명체는 다른 동식물과는 많이 다르다. 사람도 일종의 동물이긴 하지만 사회적동물이기때문에 자식을 낳아서 그저 몸뚱아리만 멀쩡하게 키워서는  잘 키웠다고 말할수 없는것이다. 모택동의 말을 빈다면 지덕체가 겸비하고 전면발전한 인간만이 나라와 인민에게 유익한 인간으로 될수 있다는것이다. 그래서 자식농사가 그 어떤 다른 농사보다 엄청 힘들다는것이고 세상에서 제일 부모의 마음대로 되지 않는것이 바로  자식농사라는 말도 있는것이다. 자식농사가 얼마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였으면 천군만마를 통솔하여 외래침략자와 800만 국민당군대를 물리치고 새중국을 일떠세운 중국력사상 절세의 민족영웅 모택동주석도 전쟁에서 잃은 둘째동생 모택민렬사의 아들 모원신을 수양해 키우면서 어찌하여 그애를 자신의 뜻대로 잘 키울수 있다고 장담하지 못하였겠는가! 내가 대학을 다니던 1964년 여름이였다. 어느날 우리는 모택동주석께서 당시 할빈군사공정학원 원장직을 겸임하고있던 라서경(罗瑞卿)총참모장을 불러 그때 그 학교에서 공부하고있는 모원신에 대한 교육문제를 놓고 두분이 나눈 담화록을 내부문건으로 전달받고 학습한적이 있었다. 모주석은 그 담화록에서 모원신과 같은 렬사의 자녀도 혁명적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옳바른 혁명적세계관을 확립하지 못하면 앞으로 꼭 훌륭한 후계자가 된다고 장담할수 없다고 하시면서 그애가 장차 우파만 되지 않아도 천만다행이라고까지 말씀하시였던것이다. 그때 우리는 모주석의 말씀을 듣고 잘 리해할수 없었는데 그후의 력사는 모주석께서 하신 걱정이 결코 기우가 아니였음을 립증해주었던것이다.                                문화대혁명이 터지자 바로 이 모원신이 자신의 특수한 신분을 리용하여 연변에 기여들어와 주덕해를 타도하고 당의 민족정책을 말살하며 림표, 강청등 반혁명집단의 악당이 되여 이름하여 “동북의 태상황”이라는 자리에까지 기여오르지 않았던가? 자식농사에 있어서도 중국 신민주주의혁명에서처럼 “최저강령”과 “최고강령”이 있는것이다. 그 “최저강령”은 자식을 낳았으면 아들이든 딸이든 절대로 나라와 인민에게 해만 끼치는 그런 애물단지로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것이고 그 “최고강령”은 자기의 자식을 나라와 인민에게 유익한 인간으로 잘 키워야한다는것이다.   중국 신문화운동의 기수였던 로신선생도 하나밖에 없는 아들의 장래가 걱정되어 특이한 유언 하나를 남기시였다. 그는 자신의 신변에서 맴돌며 좌익문학을 한답시고 빈말만 늘여놓기 좋아하는 그런 “문학가”들이 가증스러워 그때까지 아직 어린애였던 아들 주해영(周海婴)에게 장차 커서 성인이 되거들랑 제발 빈말만 하기 좋아하는  그따위 “문학가”는 되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였던것이다.  셋 지금 우리 옆집에는 십대 소녀가 홀로 살고있다. 엄마, 아빠는 모두 한국에 돈벌러나가고 그들이 돈을 벌어다가 사놓은 아파트에서 그애 혼자 밥을 해먹으며 학교에 다닌다. 어떤 날에는 제때에 깨워주는 어른이 곁에 없어 늦잠을 잤는지 오전 아홉시가 넘어서야 택시를 잡아타고 학교로 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운다. 구체적인 집계는 보지 못했지만 학교에 가보면 아직도 엄마, 아빠곁에서 한참 응석을 부려야 할 어린 나이에 엄마, 아빠와 멀리 떨어져 외롭게 살고있는 아이들이 엄마, 아빠와 함께 살고있는 아이들보다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놓고 돈벌러 떠나간 사람들은 거의 다 한결같이 자식들의 장래를 위해서, 아이들이 멀지 않아 대학에 가게되면 그들의 공부뒤바라지를 잘 해주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애들을 떼여놓고 돈벌러나간다고 하소연한다. 하지만 부모가 곁에서 지켜주지 못하는 어떤 아이들은 부모의 사랑에 굶주리다가못해 나쁜 친구를 사귀게 되고  이렇게 저렇게 저도모르는 사이에 탈선하거나 범죄에 길에 들어서게 되여 대학에 가기도 전에 감방으로 가는 사례가 비일비재라고 한다. 부모가 곁에 없는 아이들 가운데는 공부엔 전혀 관심이 없고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컴퓨터게임에 빠져들어 학업은 아예 포기한채 방황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사춘기의 예민한 시기에 미디어를 통해 너무 때이르게 포르노를 접하게 되여 범죄의 길에 들어선 아이들도 있다고 한다. 그애들의 엄마, 아빠가 이제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왔다고한들 그애들의 앞날에 그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모와 떨어져있는 아이들만 불행한게 아니다. 부모가 곁에 있어도 불행한 아이들이 있다. 일자무식인 문맹은 아니지만 신문 한장, 책 한페지도 들여다보기 싫어하는 그런 위인들이 자기는 학교문을 나선후 평생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면서도 아이들 보고는 공부를 잘 하라고 마구잡이로 닥달을 한다고 해서 어느 애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주겠는가? 애비 에미는 웃방에서 손님들과 마작판을 벌려놓고 밤잠도 자지 않으며 도박을 놀면서 어처구니없이 아이들은 텔레비도 보지 말고 공부에만 집중하라고 윽박지른다고 해서 어느 애가 그 말을 고스란히 들어주겠는가? 밭에서 자라는 곡식도 해볕과 수분만 충족하면 잘 자라는게 아니다. 반드시 농부의 땀방울을 먹어야 제대로 잘 자란다. 기음을 매서 잡초를 뽑아주어야 하고 후치질해서 송토도 하고 배토도 해주어야 잘 자란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이들도 피자나 햄버거를 맘대로 먹을수 있다거나 용돈을 물쓰듯이 맘대로 쓸수 있다고 해서 다 행복하게  잘 자라는게 아니다. 아이들은 엄마, 아빠의 사랑을 먹어야 잘 자랄수 있고 엄마, 아빠를 인생의 첫번째 스승으로 간주하고 그들의 가르침을 잘 따라주어야 비로소 올곧게 잘 자랄수 있는것이다. 학교교육이나 사회교육도 가정교육을 떠나서는 그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고 한다. 요컨대 자식농사의 진정한 비결은 바로 여기에 있는게 아닐가? (2008년 4월 15일)  주: 2008년 4월 25일 연변일보 B2 해란강 제1315기에 1/2삭제본으로 발표  
11    마작과 도박(강룡운) 댓글:  조회:3442  추천:142  2008-02-24
수필 마작과 도박 강룡운 《사해(辞海)》라는 사전을 펼쳐보면 마작은 마장(麻将)이라 하고 작패(雀牌)라고도 하는데 일종의 도박놀음(博戏)이라고 풀이하고있다. 한어에서 마작(麻雀)은 참새를 뜻하는 낱말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마작이 이 놀음의 공식적인 명칭으로 되였을까? 마작의 어원은 이 놀음의 모체가 되는 마조(马吊)라는 놀이에서부터 온것인데 처음엔 종이로 만든 지패(纸牌)를 가지고 놀던것이 후에는 물소의 뼈에 대나무로 안을 댄 골패(骨牌)를 사용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이 골패를 섞을 때면 마치 대나무숲에서 시끄럽게 지저귀는 참새떼와 같은 소리가 난다고 해서 마작이란 이름이 붙여지게 되였다는것이다. 지금도 일본에서 마작놀이로 돈벌이를 하는 놀이방의 간판을 살펴보면  한결같이  참새 “작(雀)”자가 씌여진 외글자 한자간판들이 눈확에 안겨온다. 마작도 일종의 문화이다. 로신과 진독수와 더불어 중국 신문화운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이였던  호적(胡适)선생은 일찍 여러 나라 국민들의 특수한 기호를 살펴보고 영국의 국기(国技)는 크리켓(cricket板球)이고 미국의 국기는 야구이고 일본의 국기는 스모(相扑)라고 하면서 중국의 국기는 마작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지금 우리 나라 13억 인구중 10억이 마작을 논다는 조금은 과장된 얘기가 나도는걸 보면 국기라는 말이 과연 적중한 용어인것 같기도 하다. 해방전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마작이 많이 류행되였다고 한다. 흔히는 관가에서 한자리 한다 하는 벼슬아치나 부자들의 전용물이였고 상류사회의 교제도구인 동시에 도박도구였다. 해방후 당과 정부에서는  도박에 물젖은 사람들의 악습을 고치게 하기 위해 1953년 이전에는 마작놀이를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그러다가 1954년 이후에 당에서 로동과 휴식을 결부시켜야 한다는 원칙을 창도하면서부터 마작에 대한 금기(禁忌)도 풀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방이나 부대의 구락부 등 장소에 오락도구로서의 마작이 다시 나타나게 되였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처음으로 마작을 만져본것도 바로 그 시기였던것 같다. 우리 집에는 토지개혁때 부자집을 청산하고 나누어준 네모난 정사각형 마작상이 하나 있었는데 우리는 그걸 밥상으로 사용하고 있었다. 내가 초중을 다닐 무렵, 아버지 직장친구들이 우리집에 와서 그 네모상에 마주 앉아 속칭 “조선마장”이라는 놀음을 노는걸 몇번 목격하였는데 나는 그들의 곁에 앉아 호기심에 찬 눈길로 눈여겨 보았지만 그때는 그 게임의 룰(rule, 규칙, 규정)을 도무지 터득할수가 없었다. 그때 아버지 친구들은 성냥개비를 나누어 가지고 한판이 끝날 때마다 몇 개비씩 주고 받았고 놀음을 다 마치면 서로 성냥개비를 헤여보면서 누가 더 잘하고 못하는가를 따져보았고 술 한잔 나누며 환담을 하다가 헤여지기가 일쑤였다. 말하자면 휴식의 한때를 보내는 오락이였을뿐 돈내기를 하는 도박은 아니였다. 그러다가 반우파투쟁이며 대약진이며 문화대혁명을 거치면서 자주 자취를 감추는듯 했던 마작이 다시 나의 눈앞에 나타난것은 대동란이 결속된 1976년의 마가을이였다. 내가 근무하던 안도방직공장에는 자치주 여러분야에서 지도일군으로 일하다가 문화대혁명때 농촌에 쫓겨나가 몇년간 “재교육”을 받고 안도방직공장에 배치되여온 간부들이 많았는데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그들은 휴일이면 모여앉아 또다시 마작을 놀기 시작했다. 동란의 년대에 “주자파(走资派)”의 감투를 쓰고 혼쭐이 난 그들인지라 처음에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백주대낮에도 창문에 커텐이나 모포를 치고 마작판을 벌리였는데 나는 한달가량 남몰래 그들을 쫓아다니며 견학을 하고 실습을 하여 차츰 그 대오의 일원으로 되여버렸다. 이 놀음이 어찌나 재밌던지 금방 배웠을 때 나는 몇번이나 밤을 지새운적도 있었다. 내가 마작을 배운걸 보고 배워달라고 조르는 친구들이 많아지자 나는 아예 내가 배운 리론과 실전경험을 결부하여 이른바 《조선마장 입문(入门)》이라는 “교과서”를 집필했었는데 그것이 수사본으로 전해지면서 꽤나 인기가 있었다. 그때도 마작은 그저 일종의 오락이였으며 플라스틱쪼각으로 만든 가짜 “돈”으로 성냥개비를 대체하여 서로 주고받으면서 옛날 우리 아버지네처럼 승부를 겨루었을뿐 돈내기를 하는 도박은 아니였다. 그런데 최근 도시와 농촌 어디라 없이 도처에서 펼쳐지는 마작판을 살펴보면 진짜 돈이 오고가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옛날엔 성냥개비나 플라스틱쪼각으로 만든 가짜 ”돈”을 주고받으면서도  재미있게 놀수 있었건만 지금은 어디서나 거의 다 돈내기를 하고있다. 심지어  정년이 되여 직장에서 물러난 늙은이들마저 적어도 “10전내기” 마작을 놀고있는데 기실 “10전내기”도 필경은 돈내기이므로 제창할바는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도 도박이라고 마구 몽둥이를 휘둘러서도 안될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각자로 하여금 보다 “책임성”있게 게임에 참여함으로써 좀 더  재미있게 놀려고 10전짜리 잔돈이나마  주고받는것이지 결코 돈을 따기 위해서가 아니기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사회의 어둑시그레한 구석의 “밀실”이나 “별장”같은 곳에서 개별적인 도박군들이 법망의 감시를 피해 다니면서 몇 천원 지어 몇 만원이 오고가는 도박판을 벌이고있다고 한다. 그러면 오락과 도박의 구별점은 도대체 어디에 있다고 보아야 하는가? 나는 그 구별점이 바로 마작을 노는 목적성과 출발점에 있다고 본다. 휴식할줄 모르는 사람은 일할줄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혁명의 성지 연안의 움집에서 중국혁명을 승리에로 이끌기 위해 불후의 혁명적경전저서들을 집필하던 나날에 모택동주석께서도 머리를 좀 쉬우려고 가끔 신변의 일군들과 어울려 마작을 놀았다는 일화가 있다. 마작은 유구한 문화를 자랑하는 중국인들의 하나의 발명품이며 그속엔 중국의 문화가 녹아있고 중국인들의 지혜가 배여있다. 가령 모주석께서 마작을 전혀 모르는 문외한이였다면 마작에서 유래된 “청일색(清一色)”과 같은 그런 생동한 언어들을 그처럼 지혜롭게 구사할수 있었겠는가! 마작을 배우고 노는게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재미로 여가를 보내거나 오락으로 친구나 동료들끼리 친분을 다지거나 일터에서 물러난 로인들이 소일거리로 마작을 논다면 그건 구태여 왈가왈부할 일이 아니다. 하지만 도박은 금물이다. 그저 재미삼아 노는 오락이 아니고 서로 남의 돈주머니를 겨냥해서 노는 마작이라면 그건 분명 도박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된다는 속담이 있다. “10전내기’하던 사람이 결코 “10원내기”, “100원내기”를 안 한다는 법은 없다. 목적성과 출발점이 변하고 오고가는 돈의 량적변화가 질적변화를 초래한다면 오늘저녁 놀이군이 래일아침에 도박군으로 될수도 있다는게 오늘 우리가 몸 담그고있는 현실이다. 누구나 경각(警觉)의 탕개를 단단히 조이지 않으면 자신도 걷잡을수 없이 천길 나락에 굴러 떨어질수도 있다는 얘기다. 사람은 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자기가 하고픈 일을 무엇이나 다 하면서 살아갈수는 없다. 국가의 법규에 위배되고 사회의 도덕적기준에 어긋나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가는 일이라면 아무리 하고픈 일이라도 억제하고 자제할줄 알아야 한다. 마작은 즐기면서도 도박은 절대 하지 않는것, 이것도 역시 자기자신을 스스로 단속할줄 아는 자제력이 수요된다. 그리고 “완물상지(玩物丧志)”라는 말이 있듯이 신선놀음에 도끼자루 썩는줄 모른다고 놀음에 지나치게 빠져들면 가슴속에 품었던 큰뜻도 상실하기 십상이라는 고훈(古训)도 명심해야 할바이다. 세상 만사가 다 마작처럼 이중성을 지니고 있으므로 어떤 일에서나 그것의 적극적인 일면은 리용하고 소극적인 일면은 극복해 나갈줄 아는것이 우리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참다운 삶의 지혜가 아니겠는가!   (2008년 2월 22일 《연변일보》B2《해란강》1307기에 일부 삭제된후 발표)  
10    례식장의 이채로운 풍경 (강룡운11) 댓글:  조회:3215  추천:139  2007-09-20
[수필] 례식장의 이채로운 풍경 강룡운 연변일보사 전임 사장   나의 한 동창생은 딸애가 나이 서른이 많이 넘도록 시집갈 궁리라곤 전혀 하지를 않는것 같아 늘 걱정을 입에 달고  다니였는데 그러던 그한테서 드디어 사위를 삼는다는 희소식이 전해왔다. 그도 그럴것이 손아래인 남동생이 먼저 장가를 가서 언녕 손주까지 안겨주었는데 맏이로 태여난 녀식한테서는 종시 감감무소식이였으니 부모의 마음이 왜 다급해나지 않았겠는가? 나는 동창생의 전화를 받고 약속한 시간에 약속된 장소인 성보빌딩 7층 례식장에 당도하여 사위를 둘러보며 대기하고있는데 때마침 6층에서 7층으로 올라오는 에스컬레이터(계단식승강기)에서는 주위의 시선은 아랑곳 하지 않고 이 순간에도 뜨거운 키스를 주고받기에 여념이 없는 한쌍의 신랑 신부가 눈에 띄였다. 아무리 개방된 시대라고는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 연변에서는 보기 드문 이채로운 풍경이 아닐수 없었다. 게다가 사람들의 이목을 확 끄당기는것은 웨딩드레스로 곱게 단장한 신부는 우리와 똑 같은 동방인인데 반해 양복차림의 신랑은 파아란 눈동자의 서방인이라는것이였다. 알고보니 이들 국제커플(情侣)이 바로 이날 7층 례식장의 주인공이였고 나의 동창생은 미국인 사위를 삼게 된다는것이였다. 자식을 낳았으면 곱게곱게 키워서 공부뒤바라지를 다 해주고 사회에 진출시켜 시집장가까지 보내주어야 부모된 도리를 다 했다고 생각하는것이 우리의 전통관념이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아들이든 딸이든 18세까지만 키워놓으면 부모된 책임을 다했다고 간주하면서 자기의 인생은 자기가 알아서 살아가라고하는게 우리 동방인들과는 색다른 그네들의 전통관념이다. 자녀에 대한 이 한가지 태도만 보더라도 동방과 서방은 그 문화적전통이 너무나 거리가 멀어서 한데 어울리기는 힘들다는것이 옛날 우리들의 생각이였다. 그러나 인제는 동서방이 한데 어울려 지구촌이라는 이 한동네에서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돼버렸으니 미우나 고우나 다같이 더불어 살아가야만 하는것이 오늘 우리의 눈앞에 다가온 외면할수 없는 현실이다. 이날 결혼하는 신부는 일본에 류학갔다가 일본에서 취직해 현재 일본 체류중인 중국조선족처녀 최송설이였고 신랑은 미국에서 일본 도꾜에 와서 파견근무를 하고있는 미국인 총각 아담스였는데 이들 두사람은 어찌어찌하여 인연이 닿아 도꾜라는 이 국제대도회지에서 서로 만나 연애를 하게 되였고 드디어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였다는것이였다. 이날 결혼식은 완전히 우리 연변의 조선족혼례식으로 진행되였다. 신랑 신부의 부모가 자리를 마주하고 앉아 지켜보는 가운데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고 결혼선물을 주고받았으며 신랑 신부가 큰상을 받은 다음 바가지를 던져 첫 아이는 아들을 낳을것이냐 딸을 낳을것이냐 하고 점을 쳐보면서 하객들의 축복과 웃음을 자아내는  그런 장면 하나하나가 모두 다름아닌 우리 연변의 조선족혼례식 그 자체였다. 신랑측에서는 대양 건너 미국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누나와 녀동생, 그리고 신랑의 두 프랑스 친구가 참석하였고 신부측에서는 연변에 있는 일가친척은 물론 신부가 일본에서 근무하고있는 일본회사의 일본인 사장님까지 하객으로 오시였다. 연변의 조선족가수가 불러대는 우리의 노래가락에 맞춰 신부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일가친척들, 신랑의 아버지, 어머니, 누나와 녀동생 그리고 프랑스인, 일본인 하객들마저 서로 스스럼없이 손에 손잡고 한데 어울려 둥실둥실 춤을 추는 그 축제의 분위기는 이날의 결혼식을 말그대로 국제대화합의 장으로 만들었다. 이날의 결혼식은 연변조선족사회자의 사회하에 우리 말로 우리의 흥겨운 노래가락을 곁들이면서 진행되였다. 식순에 따라 신부의 아버지가 일가친척을 대표하여 사돈님일가와 래빈들에 대한 환영사가 있었고 미국에서 온 신랑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연설을 하는 재미있는 장면도 연출되였다. 신랑의 아버지는 통역을 통해 자기가 얘기할 차례임을 확인하고는 부랴부랴 두 따님이 앉아있는 테이블에 다가가 가방에서 “연설문”을 찾아들고는 아주 여유로운 자세로 마이크를 잡았다. 뭐라고 말씀하시는지 나는 도통 알아들을수 없었건만 그가 연설을 마치고 인사를 하자 장내에서는 박수갈채가 터져나왔다. 바로 이때 사화자가 내뱉는  말 한마디가 퍼그나  유머스러웠다. "참 미국과 사돈을 맺는 집안이 다르긴 다름니다. 나는 한마디도 알아 듣지 못했는데  이집 친척들은 통역을 안해줘도 벌써 다 알아듣고 박수를 쳤습니다." 사회자의 재기넘치는 이 한마디로 하여 장내에서는 또다시 일장 박장대소가 터져나왔다. 우리식으로 말하면 신랑의 아버지가 이미 얘기를 하였으면 그 가정을 다 대표했다고 말할수도 있을것인데 그들은 그게 아니였다. 신랑의 어머니도 이미 “연설문”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그녀는 마이크를 잡기에 앞서 먼저 미리 준비해 온 행주치마를 앞에 두르면서 진지하게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통역을 통해 알게된 것이였지만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러한 말씀이였다. ---내 아들 아담스는 내가 이 행주치마를 입고 지어준 밥을 먹으면서 어렸을 때에는 엄마라는 이성(异性)의 품속에서 엄마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아왔다. 아들이 다 자라서 이미 성인이 되였으니 이제 곧바로 나의 품을 떠나 또 다른 하나의 이성인 안해의 품속으로 가게 된다. 아들에게 그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이쁜 안해가 생겼으니 나는 그들의 행복을 진심으로 축복한다… 신랑의 어머니는 이야기를 마치면서 손수 가위를 잡고 입고있던 행주치마의 끈을 한 토막 잘라내여 며느리의 두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는 이제 내아들은 너의 남편이 되였으니 이 끈으로 아담스를 단단히 동여매놓으라고 당부하는것이였다. 아닌게 아니라 그 내용과 형식이 모두 우리와는 판이한 모습이였다. 이날 결혼식 진행도중 신랑과 신부는 큰상을 다 받고난 다음 갱의실에 들어가서 웨딩드레스와 양복을 벗고 우리 조선민족의 전통의상인 한복을 갈아입고 테이블마다 다니며 하객들에게 술을 따르기 시작했다. 파아란 눈동자의 키다리 신랑이 한복 바지저고리를 입은 그 모양새가 조금은 우습강스럽기도 하였지만 우리 민족의 풍속습관을 존중해주는 그 갸륵한 모습이 참 대견스러워 보였다. 안해가 고우면 처가집 말뚝에도 절을 한다고 하지 않는가! 신랑 아담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우리 연변의 조선족처녀 최송설을 자기네 며느리로 맞아들이는데 대해 시종 매우 흡족해 하는 기색이였고 연변의 조선족혼례식의 이채로운 분위기에 경이로움과 감탄을 금치 못하는 표정이였다.  나는 이날 혼례식에 참석하고 나서 우리의 민족언어와 풍속습관이 얼마나 소중한것인가를 다시 한번 맘속 깊숙히 되새기게 되였다. 만약 150여년전부터 두만강 압록강을 건너와 이땅에 뿌리 내린 우리 조선족이 지금까지 자신의 언어문자와 전통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계승발전시키지 않았다면 어떻게 오늘처럼 이럴듯 떳떳한 민족공동체로서 세인들의 주목과 찬사를 받을수 있었겠는가? 세상이 많이 변해가고있다. 옛날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 시절에는 이 마을 총각이 당나귀 타고 저 마을에 건너가 새색시를 가마에 앉혀가지고  돌아와 백년가약을 맺는게 고작이였는데 지금은 이웃나라도 아닌 대양 건너 다른 대륙간의 혼사가 비일비재로 이루어지고있으니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경사가 아닐수 없다. 나에게도 노란 머리 미국인과 결혼한 조카딸이 있고 중국의 한족과 결혼한 조카딸도 있다. 세상물정에 밝은 나의 형님도 딸애들의 타민족, 타국인과의 혼인이 마뜩지 않아 사위감을 문전박대한적도 있다고 하지만 그것은 다 부질없는 일이였다. 사랑에는 국경도 없다는 말이 이제는 그저 가볍게 해보는 빈말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속에 깊숙히 파고들어와 자리잡기 시작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얼마전에 일본으로 시집간 나의 외조카딸도 일본인 신랑을 데리고 연길에 와서 작년 단오날에 태여난 아들 소우조우마사시(宗象将司)의 첫돌생일을 굉장히 쇠여주고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그들 세식구가 모두 우리 민족의 한복을 차려입고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이 누가 뭐래도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이였다. 최송설과 아담스, 그리고 마사시일가가 모두 우리 민족의 멋진 한복을 입고 찍은 사진과 비디오는 앞으로도 아름다운 추억으로 길이 남아 그들의 평생을 환하게 빛내여갈것이다. 세상이 너무 빨리들 변해간다고 걱정을랑 삼가하자. 우리 민족이 생존하는 공간이 이처럼 드넓게 펼쳐지고있으니 우리 민족이 립지도 그만큼 더 넓어지는게 아닌가? 나는 가끔 이런 생뚱같은 생각을 머리속에 굴려본다. 2007년 9월 1일 연변일보 6면(문학)에 발표( 일부삭제)  
9    전단과 약품광고 (강룡운10) 댓글:  조회:2912  추천:123  2007-05-24
전단과 약품광고                                         강룡운  나처럼 나이 지긋한 사람들에게 전단(传单)이라고 말하면 먼저 뇌리에 떠오르는것이 소설이나 영화에 나오는 선전삐라나 비밀유인물들이다. 이를테면 고리끼의 장편소설 <<어머니>>에서 빠벨의 어머니가 혁명에 투신한 아들이 짜리경찰들에게 붙잡혀가자 아들을 대신하여 공장으로 가져가던 그 선전삐라, 그리고 한일합방후 항일투사들이 일제침략자들의 삼엄한 경계망을 피해가면서 도처에 내붙이던 <<타도!제국주의>>와 같은 그런 비밀유인물 말이다.중한수교가 이루어져 한국나들이를 시작하면서부터 나는 전단이란것이 꼭 정치투쟁의 수단으로만 쓰이는것이 아니고 상품마케팅수단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였다.지하철입구를 지날라치면 손에 인쇄물을 들고있는 할머니와 아줌마들이 서로 앞을 다투어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전단을 나눠주는 광경을 자주 목격했는데 하루 스케쥴을 마치고 호텔방에 돌아와 낮에 받아서 보관했던 전단들을 펼쳐보면 대개는 은행대출광고나 중소기업들의 신제품광고같은것들이 많았다. 잠간 공무로 한국에 체류하다가 곧 중국으로 돌아갈 나에게 그런 전단들은 아무런 소용도 없는 무용지물들이라 그냥 휴지통에 넣어버리기가 일쑤였다.상품경제는 아마 광고마케팅과 함께 동반성장하는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연길시의 길거리에도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이 나타나게 되였고 해마다 그 대오가 늘어나는 추세다.작년 음력설에 프랑스에서 석사공부를 하고있는 둘째아들놈이 2년만에 집에 놀러와서, 그애랑 함께 시내로 나갔다가 하남시장앞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과 맞띄우게 되였다. 그들이 내게도 손을 내밀었다. 나는 시끄러워 되도록이면 그들을 피하가려고 애썼다. 그런데 아들놈은 그 전단들을 하나하나 받아쥐더니 집에 돌아와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것이였다.<<아버지, 후에라도 사람들이 전단을 나눠주면 받아주세요. 아버지 둘째아들도 프랑스에서 그런 일을 해봤습니다. 전단을 나눠주는데 그걸 받아주지 않으면 얼마나 기분이 상하는지 아세요?!>>그애가 프랑스로 건너간 이듬해 여름방학이였다고 한다. 아르바이트자리를 얻으려고 빠리시내를 헤매고 다니면서 돈 한푼 더 벌기 위해 전단을 배포하는 일을 해보았다고 한다. 프랑스에서 류학하는데 1년에 대략 6000유로(인민페로 약 6만원)가 수요되는데 평생 월급쟁이로만 살아온 나로서는 기껏해야 2000유로밖에 보내주지 못하는 형편이다보니 나머지는 스스로 벌어야만 힘겹게나마 공부를 계속할수 있는 상황이였던것이다.집에 있을 땐 고생이라곤 전혀 해보지 못한 녀석이지만 이역만리 타국땅에서 방학마다 이런 저런 고생들을 해보면서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을 헤아릴줄 알게 되었고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의 아픔마저 배려할줄 알게 된 모양이였다. 사실 길거리에서 전단을 배포하는 사람들중에는 농촌에서 올라와 아직 일자리를 찾지 못한 사람도 있을것이고 도시의 실직자도 있을것이며 나의 아들놈처럼 아르바이트 하는 대학생들도 있을것이고 아이들의 공부뒤바라지를 해주기 위해 얼마 안되는 푼돈벌이에 나선 사람들도 있을것이다.내가 알고있는 한 친구도 이런 대오에 있는 사람이다. “문화대혁명”때 장춘공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회사가 합자기업으로 넘어가면서 직원들을 많이 줄이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였는데 타의에 의해 다른 동료들과 함께 한달에 400원이 되나마나한 생활비를 받으며 정년을 많이 앞둔채 퇴직하게 되였다. 그 돈으로는 도저히 생계를 유지하고 자식을 공부시키기 어려웠던 그 친구는 60고개를 바라보는 나이에 하는수 없이 길가에 나와 전단광고나 벼룩신문을 배포하는 일에 나서게 되였다. 얼마전에 알게 된 소식이지만 그는 불행하게도 페암에 걸렸다고 한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엄창난 치료비용을 감당할수 없는 상황인지라 아예 치료를 포기한채 집에 앉아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죽기만을 기다리고있다는것이였다.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수 없다.길가에 나와 전단을 배포하는 사람들이 큰돈을 벌수 없다는건 너무나 자명한 일이다. 여름엔 삼복더위에 비지땀을 벌벌 흘리고 겨울엔 엄동의 혹한속에서 추위에 덜덜 떨면서도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다른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마지못해 이런 일거리라도 찾아나선 사람들일것이다.아들놈이 다녀간후 나는 광명거리와 인민로가 교차하는 네거리길목에서 신약대약방 “청혈팔미캡슐(清血八味胶囊)” 전단을 나눠주는 한 아즘마에게 하루에 이런 전단을 얼마나 배포하며 그 대가로 돈은 또 얼마나 받느냐고 물어본적 있다.<<1000장을 나눠주면 20원을 받는데 하루종일 서있어도 한 1200장이 나가나마나 합니다. 2000장이 나간 날은 거의 없었습니다.>>지금 연길시의 길거리에서 배포되고있는 전단들에는 약품광고가 유난히 많다. 가짜 약품광고가 하도 많아 나를 포함한 적지 않은 사람들은 이런 약품광고에 거부감을 가지고 전단을 나눠줘도 받아쥐기를 꺼려하는 실정이다.그러나 돌이켜보면 가짜 약품광고가 밉더라도 그런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을 미워할 일은 아니다. 그들은 사회의 약자군체들이며 그저 호구지책으로 그런 일에 종사할뿐이다. 그들은 가짜약품과  그 광고내용과는 무관한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의 뒤에는 광고주들이 있다. 큰돈을 벌어도 그들이 벌고 망해도 그들이 망한다.약품광고내용들이 아무리 허황하고 가짜라 할지라도 길거리에서 전단을 나눠주는 사람들은 탓하지 말자. 그들은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해 그런 전단을 배포할뿐이다. 한장이라도 더 많이 배포하면 그들은 적은 일당이나마 받아 푼돈이나마 손에 쥐게 될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전단을 나눠주면 나처럼 피해 다니지 말고 사회의 약자를 돕는다는 마음으로 흔쾌히 받아주자. 받아쥐고 돌아서서 가짜광고로 치부하고 아예 들여다보지 않아도 좋다. 그냥 휴지통에 집어넣어도 좋다. 거창하게 사랑의 손길을 웨치지는 못하더라도 그저 어려운 사람이 내미는 손을 잡는 심정으로 나눠주는 전단을 받아주면 되는것이다. 둘째아들놈이 정중히 나에게 권고하던 그 말 한마디를 다시 한번 되뇌여본다.<<전단을 나눠주면 받아주세요!>>2007년 4월 24일 길림신문(A3 문학)
8    [수필] 얼음낚시 하는 사람들 (강룡운9) 댓글:  조회:3476  추천:130  2007-03-09
                           얼음낚시 하는 사람들                                                        강룡운                                       조양천쪽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강바람에 소대가리도 얼어터진다는 대소한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길 부르하통하 빙판우에선  얼음낚시군들의 겨울낚시가 한창이다.  하남다리를 지나다니면서 다리 량켠을 아래우로 둘러보면 하얀, 노란, 빨간, 파란색 텐트들이 알록달록 옹기종기 주런이 널려져 있는 모습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마냥  예전엔 연길에서 볼수 없었던 겨울풍경을 연출하고있다.     몇해전엔 겨울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차를 타고 멀리 오도저수지쪽에 가 얼음낚시를 했었는데 연길시에 부르하통하 다단계 물막이땜이 건설되면서부터 낚시군들은 멀리 가지않고도 집 가까이에서 얼음낚시를 즐길수 있게 됐다.     이곳 연길 얼음낚시군들의 모습을 스케치해 보려고 컴퓨터속에 있는  지난 겨울 을 펼쳐보았다.   ......     2003년 12월 25일 목요일 구름 많음     오늘은 크리스마스. 며칠전까지만해도  겨울답지 않게 따스하던 날씨가 갑작스레 추워졌다.  오후 3시, 산책하려 강뚝에 나가보니 이 추운 날씨에도 낚시군들이 강추위를 피해 언몸을 텐트속에 감추고 얼음낚시를 하고있었다.  내가 산책하는 구간에만해도 낚시군들이 쳐놓은 텐트가  28개나 눈에 띄였다...     2004년 1월 2일 금요일 흐림     오늘은 신년련휴 두번째 날. 강에는 얼음낚시군들이 전에 없이 많아졌다. 하남다리 서쪽엔 낚시군들의 텐트가 10개, 하남다리와 연동교 사이에는 34개, 연동교 동쪽에는 16개...  하루에 적어도 60여명 낚시군들이 얼음낚시에 투신하고있는 셈이다...     2004년  1월 25일 토요일 맑음     오늘은 음력 정월 초사흘. 음력설련휴기간인데도 강심 빙판우에는 얼음낚시군들의 텐트가 14개나 있었다. 저 사람들은 어찌하여 저렇게 낚시에 미쳐서 설명절도 쇠지 않고 빙판우에서 고생을  찾아 하고있을가?  나는 돈을 주면서 하라고 해도 이 추위속에서 저 고생을 찾아 하지는 않을텐데...     ......     나는 나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 올겨울에도 지난 겨울처럼 매일 한시간씩 강뚝에서 산책을 한다. 그리고 여전히 일기를 쓴다.     올겨울에 쓴 "일기책"을 읽어보면 얼음낚시에 "미친" 낚시군들이 지난 겨울보다 더 많아진것 같다. 하남다리 서쪽켠만 봐도 어림짐작으로 하루에 적어도 크고 작은 텐트들이 30개는 넘어 보인다.  나는 날마다  낚시군들이 또 얼마나 출동했는가를 알아보기나 하려는듯  빙판에 널려있는 텐트들을 하나하나씩 세여본다.     나도 어렸을 땐 낚시를 많이 좋아했고 그래서 한때는 "강태공"이란 별칭까지 붙여지기도 했었지만 겨울낚시는 한번도 못해봤다. 그래서 겨울낚시가 얼마나 재미있고 또 얼마나 고생스러운지 모른다.     어느날,  강뚝산책길에서 중학교 때 나와 절친한 사이였던 한 동창생을 만나 그한테 물어보았더니 겨울낚시는 몹씨 고생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무척 재미있다고 했다. 그가 처음 얼음낚시와 인연을 맺게된것은  그 무슨 심심풀이나 재미에서가 아니라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일장의 비장한 생존투쟁이였으며 무가내하의 선택이였다고 했다. 그의 얼음낚시엔 도대체 무슨 기막힌 사연이 깃들어 있길래 이토록 심각하게 얘기하는것일가? 나는 그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     퍼구나 오래전의 일이였다고 한다. 연변농기공장에서 근무하던 그는 공장이 조업중단상태에 들어가게되자 이태동안이나 낚시를 해서 생활고를 이겨나가게되였는데 공장 출근이 불가능해지고 생활비마저 끊기게 된 상황에서 위로는 로모를 모셔야하고  아래로는 두 아들애의 공부 뒤바라지를 책임져야 하는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그는 휴일 때만 즐겨오던  낚시를 부득블 생업의 수단으로 삼게 되였다는것이였다. 나로서는 금시초문이여서 놀라지않을수 없었다.  글쎄 바다가도 아닌, 또 큰 호수나 큰 강에 근접해있는 곳도 아닌 연길에 살면서 낚시로 잡은 물고기를 팔아 생계를 이어갔다는것이 도통 믿겨지지 않는 일이였지만 이것은 분명 엄연한 사실이였음을 나는 그 공장에서 그와 같이 일하던 다른 한 동창생을 통해 확인할수 있었다.    그는 처음엔 부르하통하를 따라 오르내리며 강에서 낚시를 해보다가 몇마리 잡히지 않는 그 물고 기를 팔아선 도저히 돈이 되지 않으므로 입장료를 내면서 저수지 낚시를 시작했다고 한다.  무슨일이든 꾸준히 하고 열심히 하다보면 미립이 생기는 법. 그의 낚시질도 차츰 미립이 트면서 날씨가 나빠 빈손으로 돌아오는 날도 없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는 남들보다 고기를 많이 낚는 편이여서 그날그날 잡은 물고기를 팔아서 겨우겨우 밥을 먹고 살았다는것이였다. 물론 추운 겨울에도 생계를 위해선  얼음낚시를 해야만 했고 1년 사계절 쉬임없이 낚시대를 들고 다녔으니 그가 겪은 고생인들 오죽하였으랴만 그때 그시절을 회고하는 그의 표정은 그저 담담하기만 했다. 모진 시련을 이겨낸 굳센 의지의 소유자들의 얼굴에서나 찾아볼수 있는 그런 특유의 표정이였다고나 할가.      낚시는 원래 우리 인류가 머나먼 유년시기 석기시대로부터 장악해온 일종의 생존수단였다. 그러나 력사의 흐름속에서 인간의 생활에 차츰 여유가 생겨나면서부터 일부 한가한 부류의 사람들 그리고 세상과 멀리하고 살아가려는 은둔자들이 낚시를  한적한 생활의 소일거리로 삼기도 했지만 후날  적지않은 사람들은 낚시를 숨가뿐 일상에서 벗어나 심신의 안정을 찾거나 여가생활을 즐겨보려는 레저의 일종으로 탈바꿈시키기도 했다.       오늘 연길시의 얼음낚시군들을 두루 살펴보면 거개가 생계형낚시군은  아니고 심심풀이삼아 재미로 낚시하는 사람이 더 많은것 같다.      "이놈이 녀편네가 인제는 돈도 안 보내고 전화도 안 친다. 한국에서 다른 놈하고 같이 산단다. 그래서 이렇게 홀애비 신세가 됐는데 아이가 학교에 간 다음 집에서 혼자 뭘 하겠니?..."      "도박을 놀자니 돈이 없고, 책을 보자니 공부할 대가리가 아니고,  또 텔레비를 보자니 재밌는게 별로 없고..."      "그 마작판에 가면 그저 매캐한 담배 연기만 나는데 여기 이 얼음판에만 나오면 얼마나 좋은지 모르겠다. 공기도 시원하고..."      "할일은 없고 놀기도 심심한데 어떻게 시간을 보내겠니? 맨날 앉아 마작을 놀아봤자 돈이나 잃고 허리가 쑤셔나지만 그래도 낚시질하면 몸도 안 아프고 병원에 가서 약 사먹는 돈도 절약하니 이거야말로 꽁먹고 알먹기지... "      얼음낚시군들의 곁을 지나다니면서 귀동냥으로 주어들은 얘기들이다.      기업의 구조조정으로 인해 일자리 잃은 사람이 많아지고 해외로무송출인원이 증가되면서 안해는 해외로 나가 돈벌이 하고 남편이 집을 지키면서 아이를 키우는 가정이 점점 많아진 이 시점에서 그들이 하는 얘기는 모두 외면할수 없는 현실이고 또한 오늘 연변의 적지않은 가정의 현주소임은 틀림없다.       인생은 끊임없는 선택의 련속극이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한생을 살아가면서 여러차례 선택의 기로에 서게된다.  진학할 때 학교와 전공분야를 선택하는것도 선택이고 취업할 때 직장과  직종을 선택하는것도 선택이며, 연애할 때 애인을 선택하는것도 선택이고 결혼할 때 배우자를 선택하는것도 선택이다. 기업이 조업중단했거나 일자리를 잃었을 때 삶의 용기를 잃고 자포자기 하느냐  아니면 새로운 생업수단을 찾아 새롭게 거듭나느냐도 선택이고, 날마다 빈들빈들 놀기만 하느냐  아니면 몇푼짜리 일거리라도 찾아 열심히 살아가느냐도 선택이며, 밥술만 떨어지면  마작판에 나가 담배연기만 마시느냐  아니면 시원한 강변에 나와 맑은 공기를 마시며 얼음낚시라도 하느냐  하는 이런 모든것이 다 일종의 선택이다.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     두말할것 없이 인생드라마에서  승자가 되려면 이와같이 선택도 중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무슨 일이든 해내고 말겠다는 집착과 온갖 어려움도 참고 견디는 그런 의지력과 노력이 더욱 중요하다. 한겨울 엄동설한속에서 매서운 강바람을 맞으며 옷속까지 파고드는 혹한도 감내하면서 얼음낚시하는 그런 강인한 의지와 억센 투지, 그리고 언제 물릴지도 모르는 그 미지의 물고기를 기다리면서 강추위도 참고 견뎌내는 그런 집착과 인내심이 있다면 이 세상에서 못해낼 일이 어디 있으며 또 이루지 못할 꿈이  어디 있겠는가?      선택에 따라 인생이 달라지고 의지와 노력에 따라 성공여부가 결정된다.      나는 강뚝에서 산책하면서 얼음낚시군들의 텐트를 볼 때마다 부질없이 이런 생각을 하군 한다. 2005년 3월 18일 제1232기
7    [수필] 생일파티 (강룡운8) 댓글:  조회:2991  추천:103  2007-02-28
생일파티 강룡운     한 가정에서 그 누구나를 막론하고 어느 한 식구의 생일이 되면 으레 평소보다 조금이라도 색다른 음식을 차려놓고   명절을 맞은듯한 즐거운 기분으로 서로 축하해주고 축복해주는것이 우리 민족의 오래된 미풍량속이다. 어린애가 태여나서 백일이 되면 백일잔치요 한돐이 되면 첫돐생일이라 부모된 사람들이 희망에 부플어 큰 잔치를 베풀기도 하고, 인생 만년에 접어든 로인들에겐 회갑잔치요 칠순잔치라 이름하여 자식된 사람들이 부모님께 효성을 바치는 이벤트가 진행되기도 한다. 내가 어렸을 땐 가정형편이 어려워 생일을 어떻게 쇠였던지 특별한 기억이 따로 없다. 그저 생일이 되면 어머니께서는 생진둥이가 아직은 어린애일지라도 꼭 밥 한그릇 따로 떠주면서 그 속에 삶은 닭알 한알을 묻어주던것이 아마 최대의 배려였던것 같다. 성인이 되여 결혼한후에는 안해가 명심해서 나의 생일을 챙겨주어 집식구들끼리 조용히 기념했었는데 언제부터인가 친척들이 나의 생일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어는 문화대혁명시절 우리 아버지가 혁명의 대상이 되여 투쟁을 받고 있을 때 우리 집과는 거의 발길을 끊었던 친척들도 나의 생일에 찾아오는것이였다. 그것이 아마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내가 자치주인민정부 판공실 부주임으로 발탁된 그 후부터였다고 생각된다. 친척들이 모여와 술잔을 기울이며 회포도 나누고 축복해주는것이 사람 사는 모습이며 인지상정이라 생각되여 기분이 별로 나쁘지 않았다. 오는 정 가는 정, 미운 정 고운 정이 얽히고 설키여 더블어 함께 살아가는것이 바로 우리네 인간이 아닌가. 그 당시만해도 내가 주정부판공실 요직에 있다는것이 일부 친인척들에게는 그 어떤 유혹이였을지도 모른다. 한해 이태가 지나면서 친인척들한테서 "인사청탁"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주로는 자식들에게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주고싶어 찾아오는것이 많았다. 가문에서 일어나는 경조사때마다 서로 얼굴을 맞대야하는게 친인척인데 어느날 누가 무슨 부탁을 하여왔다고 하여 갑자기 "나 몰라요"하고 외면할수도 없는것이 또한 친인척 사이의 난감한 립장이라서 나는 진퇴량난의 궁지에 몰리게되는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 도움을 청했다가 이런 저런 사정으로 하여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 친척들한테서 욕사발이 쏟아져나오기도 했지만 정책에 위배되지 않는 일이면  나는 내나름대로 연줄을 놓아가며 몇몇 친인척집 아이들에게 일자리를 마련해줌으로써 그들의 인생궤적을 달리 해주기도 하였다. 그런데 야속하다고는 말할수 없지만 아이들의 일자리가 해결되고 또 내가 권력과는 좀 거리가 멀다고 할수있는 신문사로 자리를 옮겨가자 나의 생일에 다시 찾아오지 않는 친인척들도 더러 있었다. 이 역시 인간세상 염량세태---사람들이 살아가는 또 하나의 다른 모습이 아니겠는가! 지금은 생일을 쇠는 모습들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 친척들 생일축하모임에 참가하면 직접 집으로 찾아갈 때가 많았는데 최근 몇년사이에는 고급식당이나 고급호텔에 초대받아 갈 때가 더 많다. 얼마전에 나는 한 친척집 생일파티에 참가하려 세기호텔 6층 특실에 가보았다. 고급료리로 푸짐하게 두상을 차렸는데 파티가 끝날 무렵 그집 자식들이 두상에 돈 천원이 훨씬 넘어 들었다고 하면서 령수증을 챙겨가는것이 눈에 띄였다. 설마 누가 그걸 갖고가 손님접대용지출이랍시고 령수증 처리를 하는건 아니겠지만… 어느 땐가 한번은 아들놈들한테서 걸려온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합니다"하는 전화를 내가 받은적이 있었다. 그애들은 나더러 "오늘은 엄마한테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고 두분 모두 즐겁게 잘 보내세요."라고 부탁하는것이였다. 그날 저녁 나는 안해와 같이 분위기 괜찮은 식당으로 찾아갔다. 거기서 나는 안해가 즐기는 료리 몇가지를 청해놓고 단촐하지만 둘이서 와인잔을 부딪치며 오붓한 분위기를 만들고 있는데 그 곁방 특실에서는 대규모 생일파티가 성황리에 거행되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용히 진행되던것이 술이 몇 순배가 지나가는가 싶더니 너도 나도 뒤질세라 자리를 차고 일어나 "국장님의 생신을 진심으로 축합니다"라는 소리가 이어졌고 나중에는 술기운이 솟구쳐 올라와 흥분상태에 진입하는듯 싶더니 문화대혁명때 귀에 익은 "영원히 건강하옵소서"하는  목소리가 울려퍼지고 마지막에는 "만수건강하옵소서"하는 축원의 환성까지 터져나오는것이였다. 물론 농담조로 하는 "홍색 유머"들이겠지만 이렇게 함부로 "영원히 건강하옵소서"와 "만수무강하옵소서"를 란발하고도 무사태평한 세상이 되였으니 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인가. 그날 국장님의 생일파티는 1차로 끝이 나지 아니하고 2차로 이어지는듯 싶었다. 다들 술이 거나해서 떠들썩하며 식당문을 나서면서 서로 주고받는 얘기들을 들으면 3차 4차까지 이어질지도 모를 일이였다. 그날 저녁 국장님의 생일파티 령수증은 누가 갖고가서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궁금하지도 않다. 후에 나는 어느 신문에서 그 국장님이 또 승진했다는 소식을 보면서 그 양반이 진짜 해야 할 큰 인물이 아닌가 하고 부질없는 생각도 해보았다. 만약 그 양반이 좀 더 무거운 중책을 걸머지게 된다면 혹시 만방에 인덕을 베플어 해야할 큰 재목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 공산당원 선진성교육이 여러차례 거듭되고 있으니 예전에 그런식으로 공금을 갉아먹던 사람들도 인제는 크게 각성하고 그 고약한 나쁜 버릇들을 언녕 다 고쳤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여기까지 쓰고보니 나는 내가 자치주 기관에서 근무할 때 겪었던 영원히 잊을수 없는  이야기 하나를 꼭  글로 남겨야 하겠다. 어느날 퇴근할 무렵이였다, 우리 자치주의 주요책임자의 한분이시였던 어르신이 퇴근길에 나의 사무실에 들리시여 래일은 개인사정이 좀 있어서 집무실에 나오지 못할것 같으니 딱 하루만 결근하겠다는것이였다. 종래로 이런 경우가 없었는데 뭔가 좀 이상한데가 있는것 같았다. 이튿날 출근한후 나는 그 어르신께서 승용차를 타고 외출하지 않았다는 보고를 받았고 또 이틀전에 그의 두 아드님이 항공편으로 연길에 도착했다는 정보도 입수하게 되였다. 그리하여 나는 추론과 추측을 거듭하며 혹시 이 어르신이 남몰래 회갑잔치를 치르는게 아닌가 하고 의심하게 되였다. 그래서 나는 능청스럽게 모든것을 다 알고 있기나 한것처럼 그 분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생각대로 그분이 아니고 부인이 전화를 받았다 "녜, 안녕하십니까! 그런데 오늘 행사는 몇시에 시작하기로했습니까?"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무작정 이렇게 물었다. "아, 녜! 난 또 누구라구… 열시에 시작하기로했습니다." 그 부인은 내가 이미 모든걸 다 알고있다고 믿었던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곧이곧대로 알려주는것이였다. 열시가 넘어서 나는 판공실부주임과 함께 그분의 댁으로 찾아갔다. 아니나다를가 두 어르신께서는 이미 회갑상을 받고 계셨다. 그 시절에는 벌써 회갑잔치를 차리기만 하면 몇백명 하객이 줄지어 문전성시를 이루고 하루사이에 몇만원 수입을 올렸다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날 회갑잔치의 주인공은 자기의 부하일군들로부터 옛동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자택의 비좁은 방안에서 그저 친인척들끼리만 모여앉아 조촐하게 회갑잔치를 치루고 있었던것이다. 우리가 좀 달리 생각해보자. 만약 이 어르신이 이렇게 하지않았다면 하객이 그저 몇백 명뿐이였겠는가?… 아무리 세월이 변하고 시대가 달라진다고해도 이렇게 시종일관 입당할 때의 약속을 맘속 깊이 굳건히 지키면서 아름다운 황혼을 불태우고 빛내이는 공산당원들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이런 공산당원들이 점점 적어지는게 못내 아쉽다. 2007년 제3기 장백산
6    40년전 "나의 장정" 댓글:  조회:3355  추천:100  2007-02-21
금년은 중국공농홍군 장정 승리 70주년이 되는 해이다. 새중국의 서광을 비껴준 이 위대한 승리를 기념하여 CCTV에서는 여러가지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지난 5월초부터 "나의 장정(我的长征)"이라는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다. 유명한 TV프로그램 사회자인 최영원(崔永元)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고있는 이 프로그램이 첫방송을 시작하기 전후하여 CCTV 뉴스채널에서는 1남1녀,  1로1소가 출연하는 "나의 장정" 홍보물을 련일 방송했다. 손녀애가 묻는 말 : "할아버지, 최아저씨들이랑 장정을 간다는데 그들은 어째서 장정을 가는가요?" 할아버지가 하시는 말씀 :  "신앙을 위해서란다." 이제 겨우 대여섯살밖에 안돼보이는 나어린 녀자애가  "신앙을 위해서"라는 할아버지 그 말씀의 참뜻을 다 리해할수는 없겠지만 나는 그 신앙이 무엇인가를 알것만 같다. 왜냐하면 지금으로부터40년전, 대학 5학년에 재학중이던 나도 신앙을 위하여 "나의 장정"을 해보았기때문이다.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어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느 고급간부의 집에서 흘러나온듯한 "내부간행"으로된 미국의 저명한 기자 에드거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한어문 책명은 《西行漫记》)이란 책과 그의 부인이였던 헬렌 포스더 스노가 쓴 《서행만기속편(续西行漫记)》이란 책을 읽게 되였다. 20세기 30년대 중반  미국의 나젊은 기자 부부가 선후로 생사를 무릅쓰고 첩첩 난관을 꿰뚫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 들어가 모택동, 주덕, 주은래, 장문천, 팽덕회등 중국공농홍군 2만 5천리 장정의 통솔자들을 직접 인터뷰하여 써낸 이 책들은 그 당시에 홍군 장정 승리의 소식을 서방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온 세상을 들썽하게 만들었던 책들이다. 이 두권의 책은 20세기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의 풍랑속에 몸을 담근 20대 열혈청년의 가슴을 더없이 뜨겁게 달구었다. 나는 한 친구한테서 이 책들을  빌려다가 가만히 밤을 새워가며 읽으면서 저도 모르게 홍군의 발자취를 더듬어 2만5천리 장정의 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였다. 나로말하면 이것이 아마 그해 11월 하순에 이루어진 "나의 장정"의 최초의 발단이 되였던것 같다. 그때는 "문화대혁명"의 충격으로 학업이 완전히 중단된 상태였으므로 우리는 학교에 머물러 있어도 할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북경에서 남하하여 강서성 서금으로 내려가 홍군의 장정로정을 따라 연안을 향해 대장정을 해보려고 시도했었다. 그런데 그 동란의 년대에 우리는 몇달 앞으로 다가온  졸업을 앞두고 딱히 어느때 졸업할수있는지 그 누구에게서도 확답을 받을수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우리가 그때 그 로선을 따라 장정을 시도했다면 연안으로 채 가기도 전에 중도에서 일단 귀교하여 복학하라는 지시가 내려올수도 있기때문에 그 장정은 중도이페될수밖에 없을것이 불보듯 뻔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보다 실시가능한 방안을 모색하던중, 긴 시간이 소요되지 않고 장정의 간난신고도 체험하고 혁명의 성지 연안에도 가 볼수 있는 방안으로 북경에서 연안까지의 "장정"을 단행하기로 작심했던것이다. 1966년 11월 하순, 그해 마가을도 다 가고 락엽이 우수수 떨어지기 시작하는 초겨울에 나는 한학급 동창생들인 림장춘, 장철수, 주청일과 함께 넷이서 "장정대"를 무어 이불짐을 둘러메고 무작정 북경을 출발하여 연안을 향해 "나의 장정"을 시작했다. 세상 만사가 다 시작이 어렵다고 한다. 돌이켜보면 "나의 장정"도 첫번째  한 주일이 제일 힘들었던것 같다. 매일 아침 날이 희붐히 밝아오면 우리는 아무리 일어나기 싫어도 피곤이 채 가시지 않은 몸을 가까스로 추스리고 일어나 서둘러 이불짐을 동여매야했고 그것을 짐바로 등에 짊어지고는 아침식사를 하기도 전에 하루의 강행군을 시작해야했으며 한두시간 걸어가다가 길가에서 "접대소"를 만나면 아침밥을 얻어먹는것이 다반사였다. 첫날은 북경에서 석가장방향으로 빠지는 출구를 찾지 못해 몇시간 헤매다나니 저녁녘에야 겨우 장신점(长辛店)에 도착하였으므로 얼마를 걷지 못하였고 이튿날은 한 70리를 걸었지만 사흘째 되는 날부터는 다리 근육 통증이 오기 시작하고 발이 부르트고 물집이 생겨나면서 진종일 부지런히 걸어도 겨우 40리를 넘기지 못하는 날도 하루 이틀이 아니였다. 북경에서 출발하여 1주일만에 보정(保定)에 도착하여 하루동안 휴식을 취했더니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차 적응이 돼 가면서 처음처럼 그렇게 힘겹지 않았다. 하지만  고난의 행군은 여전했다. 날마다 걸음을 재우치며 걸고 또 걷다가 허기진 배를 붙안고 "접대소"에 찾아가면 먹으라고 내놓는것은 가는곳마다  거의 다 옥수수가루로 만든 음식이였고 저녁에 자고 가라고 안내하는 잠자리는 짚을 깔아놓은 학교 교실이거나 곡식창고의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이였다. 우리는 날마다 거의 하루 세끼를 옥수수로 만든 음식을 먹으며 강행군을 해야했고 추운 겨울밤에도 아무런 난방시설도 없는 콩크리트바닥에서 새우잠을 자면서 하루하루의 장정을 이어갔다. 이렇게 우리는 한달동안 드넓은 하북평야를 주름잡으며 석가장을 거쳐 태항산으로 톺아올랐고 광활한 진중평원에 위치한 태원을 지나 산서성의 허리를 가로 지르면서 황하기슭에 이르렀고 나루배를 타고 황하를 건너 섬서성 북부지역에 도착하였으며 1966년 12월 하순에는 드디어 오매에도 그리던 혁명의 성지 연안의 땅을 밟을수있게되였다. 만약 우리가 이렇게 "나의 장정"을 하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그냥 학교 기숙사에서 발편잠을 자고 날마다 입쌀이나 밀가루로 만든 음식을  먹으면서 하루하루를 한가로이 보냈을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저절로 고생을 찾아나섰다. 물론 처음 겪어보는 고생들이라 힘들기는 하였지만  이 한달동안의 "나의 장정"은 평생을 두고 잊을수 없는 과감한 도전이였으며 심신에 유익한 실천이였다. 말이 고생이지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장정길에서 부딪쳤던 간난신고에 비교하면 그것은 고생도 아니였다. 우리들이 가는 길에는 당년 홍군이 직면해야했던 그런 험난한 상황, 즉 지궂게 뒤를 쫓는 추병도, 앞길을 가로막는 적군도 없었으며 노도가 사품치는 금사강과 대도하도 없었으며 사람의 목숨을 앗아가는 설산 초지도 없었다. 때문에 우리가 겪은 고생은 홍군이 이겨낸 간난신고의 천분의 1, 만분의 1, 아니 억만분의 1도 안되는 고생이였으며 고생이라는 말조차 어울리지않는 그런 어려움이였다고나 할가. 40년전 20대 열혈청년이였던 우리는 그때만해도 이 나라의 해방을 위해 피흘리고 목숨을 바친 혁명선렬들의 고귀한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주력군이 되고자 자신을 보다 억세게 련마하기 위해 "나의 장정"에 자진해 나섰던것이다  나는 "문화대혁명"이라는 이 력사적재난때문에 졸업론문도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대학을 졸업하게 되였지만 "나의 장정"을 통해 책에서나 교실에서 배울수 없었던 많은것들을 터득할수 있었다. 나는 그렇게 추운 엄동설한에 차가운 콩크리트바닥에서 쪽잠을 자고 옥수수떡을 먹으면서 하북, 산서, 섬서 세개성을 경유하면서 태향산지역의 척박함과 황토고원의 황량함을 피부로 느꼈고 그런 고장에서 일본제국주의 침략자들이 감행했던 저주로운 "삼광정책"이 빚어낸 참상이 그 얼마나 참혹했을가를 다소 상상할수 있었으며 이땅에서 혈전을 벌였던 그 고장 사람들과 그 후손들을 우러러 볼수 있는 마음가짐을 가질수 있었다.  우리 말에는 젊어서의 고생은 금을 주고도 못 산다는 속담이 있다. 중국 고대의 성현인 맹자님께서도 "하늘이 누구에게 큰 일을 맡기려면 반드시 먼저 그의 심지(心志)를 괴롭히고 그의 근골을 지치게 하고 그더러 굶주림에 허덕이게  하고 그가 길을 떠날 때 로비도 없게 하여 제멋대로 할수 없게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마음을 련마하게하여 그가 할수 없었던 일도 할수 있도록 하게 하느니라."라는 금쪽같은 명언을 남기였다. 이런 관념에 깊이 물젖은 나로서는 이따금 이런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오늘과 같이 평화롭고 풍요로운 여건속에서 복된 삶을 누리며 순탄하게만 자라난 젊은이들이, 이 세상에 태여나 아직까지 큰 고생이라곤 전혀 겪어보지못한 젊은이들이 래일 나라의 중임을 떠메고 혁명선렬들이 피로 바꿔온 이 강산을 대를 이어 굳건히 지켜나갈수 있을가?… 나의 이와같은 생각들이 그저 나의 부질없는 기우였으면 좋겠다. 누군가가 력사는 오늘과 래일을 창조하는 밑거름이라고 말했다. 중국의 현대사에 막대한 재난을 가져왔던 "문화대혁명"이 갈무리되고 본격적인 현대화건설이 바야흐로 서서히 그 막을 올리던 시절에 우리는 현대화건설을 "신장정"이라고 일컫었다. 그 시기에 창간된 당의 한 리론간행물의 명칭도 바로 이 《신장정》이 아니였던가. "신장정"은 비록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그런 고난의 행군이 아니지만 일년사시절 만년설이 녹지 않는 청장고원의 동토층우에 청장철도를 부설하고 인적조차 보기드믄 망망한 타클라마칸 대사막에서 유전을 개발하는 그 간난신고 역시 홍군이 설산 초지를 넘나들던 2만5천리 장정에 못지않는 고난의 행군이다. 그리고 지금 한창 진행중인 장강의 물을 황하이북지역으로 끌어올리는 "남수북조(南水北调)"공정이나 서부의 천연가스를 동남연해지역으로 수송하는 "서기동수(西气东输)"공정, 그리고 서부에서 다 쓸수 없는 전력을 동부지역에 수송하는 "서전동수(西电东输)"공정과 같은 대역사(大役事)도 설산 초지를 넘나드는 간난신고에 비견할수 있을것이다. 지금 CCTV에서는 "나의 장정"이 계속 방송되고있다. 층층의 여러 관문을 거쳐 선발된 21명 정식대원과 5명의 후보대원들로 구성된 "나의 장정"대원들은 날마다 70년전 홍군이 걸었던 그 길을 다시 걷고있다. 그들중에는 군인출신도 있고 운동선수출신도 있으며 기자, 교사, 상인, 간호사, 대학생, 장군부인, 자유직업인, 사회과학원연구원등 여러분야의 인원들이 망라되여있다. 상해의 한 큰 회사의 총경리인 동봉(董峰)은 "나의 장정"에 참가하면서 장정을 하는 1년동안 자기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보고 앞으로의 후반생을 어떻게 살아갈것인가를 곰곰히 생각해보겠다고 말했다. 동봉총경리와 같은 백만장자가 "나의 장정"에 참가했다는 그 사실 자체가 세인을 놀라게할만한 인생드라마가 아닐수 없다. 그러나 오늘 우리가 홍군의 장정정신을 계승함에 있어서 누구나 꼭 "나의 장정"을 해야한다는것은 아니다. 아직 고생을 크게 못해본 젊은이들로 말하면 한번쯤 고생을 찾아 해보는것도 그들에게 있어서 인간수업의 필수과목이기는 하지만 굳이 "나의 장정"과 같은 고난의 행군이 아니더라도 좋다. 도전과 실천이 중요하다. 례를 들면 방학이나 여가를 리용해 아직도 어렵게 살고있는 농민들속에 내려가 논밭에 발을 담그고 모내기도 같이 해보고 기음도 같이 매면서 그네들의 로고를 체험해보는것이 무엇보다 바람직하다. 진정 이렇게 도전과 실천으로 자신의 심신을 꾸준히 련마해 나간다면 조국의 미래를 떠메고 나갈 미더운 주력군으로 성장하는데 좋은 밑거름이 될것이라고 나는 굳게 믿어 의심치 않는다. 2006년 10월 28일 길림신문(A3 문학)
5    대학으로 가는 길 댓글:  조회:2886  추천:101  2007-02-21
  지난 6월 7일과 8일, 올해 대학입시가 진행되던 날, 나는 차량통행이 엄격히 통제된 연변1중과 연길시2중 두 고급중학교 대문앞을 지나가다가 두곳에서 다 이런 광경을 목격하게 되었다. 학교부근 길목은 온통 사람들로 붐비며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학교대문앞에는 누군가 벌써 마련해놓은 대문짝 같은 널판자우에 새하얀 찰떡덩어리가 수없이 어지럽게 붙어있었다. 입시생 학부모와 일가친척들이 시험장에 들어간 입시생들을 위해 그들의 성공을 기원하고있는 장면이였다.   1954년 내가 중학교입학시험을 칠 때는 아직 초중교육도 보급되지 않은 때라서 입학률이 6대1이였는데 나의 할머니는 내가 혹시 시험에서 탈락하여 붙지 못할가 걱정되여 "쟤가 시험치려갈 때는 찰떡이나 한 함지 쳐가지고 가서 떨어지지 못하게 떡 붙여놓았으면 좋겠는데..."하고 말씀하시군 했다. 아마 우리 민족의 의식속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자녀교육에 대한 찰떡같이 끈질긴 소망이 담긴 이러한 설법이 있었던것 같다. 다만 그때는 아직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한 시절이여서 먹고 살기가 힘들어 그저 말로만 그랬을뿐 실천단계는 아니였던가싶다. 1992년 12월 22일, 한국 대학입시가 진행되던 날, 나는 서울에서 난생처음으로 입시생 학부모들이 시험장밖에서 돼지머리를 밥상우에 올려 놓고 고사를 지내기도 하고 찰떡덩어리와 엿덩어리를 입시장밖 담장에 덕지덕지 붙여놓고 입시생들이 시험을 잘 치르도록 기도드리며 전전긍긍 로심초사하는 모습을 목격하였다. 몇해가 지나지 않아 우리 연변에서도 민족의 동질성을 확인이나 하려는듯 이런 진풍경이 연출되기 시작했고 해마다 그 규모가 날로 확대되고있는 추세이다. 도대체 대학이 무엇이길래 천군만마가 왜 이렇게 대학이라는 이 외나무다리로 몰려드는것일가? 대학은 원래 우리 인류의 력사에서 사회의 엘리트를 배양하기 위해 퍽 오랜 옛날에  발족되기 시작한 고등학부로서 이미 1500년전 구라파에는 영국, 독일, 프랑스, 이딸리아 등 제국을 중심으로 약 80여개의 유니버시티(university: 종합대학)가 있었으며 19세기초에 창설된 베를린대학이 근대대학의 본보기로 되였다고 한다. 그러면 대학에서 배양한다는 엘리트란 또 무엇인가? 영어에서의 엘리트(elite)란 정예, 지배층, 선택된 사람 등을 가르키는 말인데  아무튼 지식있고 능력있는 세련된 부류의 사람들로서 사회의 지도층이 될 사람들을 지칭하는것 같다. 한 사람이 기왕 이 세상에 고고지성을 울리며 태여났으면 힘들게 낳아주시고 애타게 키워주신 부모님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보다 높은 인생가치의 실현을 위해 설사 엘리트는 되지못할지라도 대학교육 한번 받아보고싶은것이 많은 사람들의 욕심이고 한낱 소망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오늘까지 국민의 다수가 대학생이 된 나라는 하나도 없다. 미국 마틴 트로우(Martin Trow)교수의 고등교육 3단계론에 의하면 선진국가의 대학교육은 엘리트단계에서 대중화단계를 거쳐 보편화단계로 넘어간다고 한다. 여기에서 대중화단계는 해당 년령층의 취학률이 15%를 넘어야 하며 보편화단계는 50%를 넘어야 한다는것이다. 그러면 지금 우리 나라의 대학교육은 어느 단계에 와 있는것일가? 2006년 2월 28일, 신화넷은 교육부장 주제(周济)의 말을 빌어 2005년도 우리나라 대학 입학률은 해당 년령층의 21%로서 국제상에서 공인하는 대학교육 대중화의 표준 15%를 초과했다고 보도했다. 뿐만아니라 2005년 우리나라는 대학교 재학생수 2300만을 기록하며 세계에서 최대규모의 대학교육을 영위하고있는 국가로 되였으며 대학교육이 대중화단계에 진입하였다는것이다. 더욱 놀라운것은 북경 등 대도시는 승학률이 50%를 넘어 이미 대학교육 보편화단계에 진입했다는것이다. 최근 몇년사이에 북경시의 대학입시 록취률은 줄곧  70%를 유지하고있다고 한다.  1962년 내가 대학에 입학할 때는 전국적으로 고작 22만명을 초생하였는데 금년도 초생규모 530만명의 24분지 1밖에 안되는 수준이였다.  먼 옛날 얘기를 해서 무엇하랴. 근 10년사이의 변화만 보더라도 1998년 초생규모는 108만명, 1999년에는 164만명, 2000년 220만명, 2001년 260만명, 2002년 275만, 2003년 335만명, 2004년 400만명, 작년 2005년에는 504만명이였다. 나젊은 학도들에게 대학으로 가는 길은 이렇게 활짝 열려있다. 대학입학이 이처럼 쉬워졌는데도 입시생 학부모들의 근심은 아직도 태산같다. "우리 아이는 아무 대학이라도  붙어야 하겠는데 속이 싹 타 죽겠다. 아버지나 어머니가 다 대학생인데 하나 밖에 없는 자식이 대학에도 못 붙으면 이게 무슨 망신이야." "우리 조카아이는 꼭 붙어야 한다이. 글쎄 동생하고 제수가 한국으로 돈 벌러 가면서 애를 우리 집에 맡겨놨는데 저애가 만에 하나 대학에 붙지 못하면 제새끼 공부 못하는 줄은 모르고 똑 마치 우리 집탓인것처럼 두고두고  원망하겠으니 죽을 때까지 그 싫은 소리를 어떻게 들어주겠소?" "우리 안깐이가  이제 한국에서 제아들이 대학에 못 붙었다는 소리만 들으면 나를 죽이자고 덤빌께다. 집에서 빈들빈들 놀고있는 주제에 애 하나 제대로 공부시키지 못하는 사람과 뭘 믿고 같이 살겠는가? 당장 이혼하자고 야단칠텐데…" "우리 아이는 모의고사때마다 반급 10등안에는 들었는데 이번엔 시험을 제대로 치겠는지 모르겠다. 십년전 우리가 리혼할 때 내가 우겨대서 아이를 내가 키우기로 했는데 걔가 대학에도 못가면 내 체면이 어떻게 되겠니?"… 시험장안에서 입시생들은 답안을 쓰기에 여념이 없고 머리가 아플텐데 시험장밖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어른들은 서로 내심속의 고충을 하소연하면서 시험종료시간를 초초히 기다리고있었다. 나는 이러한 모습들을 지켜보면서 저도 모르게 오늘 쓰고있는 이 글, "대학으로 가는 길"이란 제목을 머리에 떠올리게 되였다. 대학으로 가는 길은 지식과 학문의 전당으로 가는 길이며 인격의 새로운 수련장으로 가는 길이며 진리를 추구하는 젊은이들이 모이는 시대의 광장으로 가는 희망에 차넘치는 길이다. 오늘날 현시대에 있어서 대학으로 가는 길은 인생 성공의 유일한 길은 아니지만 인생 성공의 첩경임은 분명하다.  대학으로 가는 길에서 대학입시는 하나의 중요한 관문이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오라지 않아 시험점수가 발표될것이고 뒤이어 록취결과가 발표될것이다. 그러면 대학입학의 영예를 받아안은 행운아들은 들뜨고 부풀어 오른 심정으로 오매에도 그리던 배움의 전당으로 달려갈것이다.  대학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다. 진짜 공부는 이제 대학에서 시작된다.  대학에서의 공부는 여러가지 기존의 지식을 배우며 지식의 편린들을 주어모으는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뛰어넘어 세상을 폭넓게 리해하는 안목을 키워가면서 앞으로 혼자 공부하고 탐구할수 있는 방법을 터득하는것이다. 대학으로 진학하는 학생들이 있으면 대학에 못가는 학생들도 있기 마련이다. 금년도 전국 입시생이 950만명이고 초생규모가 530만명임을 감안하면 절반이 넘는 55.5%가 입학하게 되고 절반이 못되는 44.5%가 락방하게 되는데 입학자가 락방자보다 11포인트나 많은 셈이다. 이것은 성공과 좌절이 교차할수 밖에 없는, 오늘 우리가 당면한 어쩔수 없는 현실이다. 이번 입시에서 락방한 학생들은 너무 실망에 빠져 의기소침하지 말고 청춘의 푸른 꿈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이 세상은 대졸생들만 사는 세상이 아니다. 이 세상엔 학자, 교수, 음악가, 예술가, 사회지도자, 우주로케트 설계사들도 있어야 하지만 농사짓는 사람, 집 짓는 사람, 옷 만드는 사람, 쓰레기를 처리하는 사람들도 있어야 한다. 장군만 있고 병사가 없는 군대가 어찌 적을 무찌를수 있겠는가?. 한마디로 인간세상은 엘리트만 수요하는게 아니고 다양한 인재를 수요한다. 때문에 대학에 못붙었다 하여 인생이 끝났다고 비관하지 말라. 뜻있는 곳에 길이 있다. 결심만 있으면 한해 더 재수하여 재도전 할수도 있고 일하면서 배울수도 있다. 어떤 일에 종사하든지 최선을 다한다면 사회에 유익한 사람으로 될수 있으며 그 분야의 전문가로 될수도 있는것이다.   만약 진정 대학입학의 꿈을 접을수 없다면 기회는 언제나 얼마든지 있다. 몇년전에 우리 나라에서는 대학입학 년령제한까지 취소하지 않았는가! 그리하여 회갑을 훨씬 넘긴 나이에 대학에 입학했다는 로익장들도 있지않은가! 세상은 언제나 노력하는 자에게 성공의 기회를 준다. 2006. 6. 15. [강룡운수필집《무궁화련정》33-38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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