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룡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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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황홀한 시의 세계 댓글:  조회:939  추천:1  2019-11-29
황홀한 시의 세계 □ 강룡운   1 나는 어려서부터 시를 좋아했다. 소학교 다닐 땐 동요 동시를 좋아했고 중학교 때는 선생님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조기천의 시를 유난히 좋아했다. 그때 우리 학교의 한 선생님은 휴교일이면 자주 학교에 나와 조용한 교무실에서 우람찬 목소리로 조기천의 시를 랑송하군 하였는데 격정에 차넘치는 그 모습이 얼마나 멋있어 보이던지 나도 가끔 선생님처럼 시랑송을 해보면서 시의 황홀경에 빠져보았다. 그 시절엔 무턱대고 시를 좋아하였기에 그저 손에 닥치는 대로 뿌쉬낀이며 레르몬또브며 이싸꼽쓰끼의 시집들을 들고 다니면서 그 어느 하나도 제대로 리해하지 못하는 주제에 그래도 열심히 읽군 하였다. 그러다가 대학에 진학해서는 김소월의 시에 흠뻑 빠져 그 아름다운 음률에 심취된 듯 때로는 시를 쓴답시고 무병신음 (无病呻吟)도 해보았고 한때는 마야꼽쓰끼와 하경지의 시를 흔상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전공이 중국문학이다 보니 주로는 당송시사(唐诗宋词)를 많이 접하게 되였고 ‘문화대혁명’ 때는 모택동의 시사를 최고의 시로 간주하기도 했었다.   2 이렇게 나도 명색이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그 언제부터인가 저도 모르게 점점 시를 멀리하게 되였다. 왜 이렇게 되였을까? 그것은 줄곧 전통시만 읽어오던 나로서는 현대시라는 타이틀을 붙이고 태여나는 시들을 보게 되면 아무리 읽어봐도 도통 그 뜻을 리해할수가 없었기 때문이였다. 지금은 다들 이미지시를 현대시라고 지칭한다. 한 시인이 쓴 《이미지》란 시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말짱 처음 보는 것들이구나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니고 죄다 이 생 저 생에도 없는 것들 불과 물의 살놀이로 태여난 이쁨들아   진달랜가 하면 진달래 아니고, 바윈가 하면 바위 아니고, 강아진가 하면 강아지 아닌 이런 시구들을 도대체 어떻게 리해한단 말인가? 그래서 나는 차츰 시와는 담을 쌓고 일찌감치 멀리 도망쳐버렸다. 그래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 후에는 잡지나 신문지상에서 시를 보게 되여도 아예 곁눈조차 주지 않았다.   3 최근 몇년간 나는 북경, 청도, 무석 등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면서 만년을 보내게 되였는데 금년 여름엔 무석이란 고장이 어찌나 무더운지 무작정 피서하러 고향으로 돌아왔다. 연길에 와서 우연한 기회에 흑룡강조선민족출판사에서 2007년 4월에 출간한 최룡관 저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책을 손에 쥐게 되였다. 범굴에 들어가야 범새끼를 잡고 배를 먹어봐야 배맛을 안다고 하지 않았던가. 인생만년에는 흔하디 흔한 게 시간이고 날마다 남아 도는 게 시간인지라 나는 어디 한번 시간을 허비해볼 셈 치고 《이미지시 창작론》이란 이 범의 굴속으로 직접 들어가 보기로 작심했다.   4 최룡관 시인이 10년 동안 심혈을 기울여 자료를 수집 정리하고 알심들여 집필한 《이미지시 창작론》은 수많은 동서고금의 명시들을 이미지즘의 시각으로 재조명한 48만자에 달하는 현대시론에 관한 전문적인 문학저서로서 우리 연변에선 물론, 중국조선족문단에서도 미증유의 거작이였다. 그래서 나는 최룡관 시인이 우리 겨레 문학 발전을 위하여 큰 일을 해놓았다고 생각한다. 한국 《자유문학》 문학계간(季刊)이 2008년 가을호 69기부터 시작하여 2011년 여름호 80기에 이르기까지 장장 3년동안이나 12기에 나누어 연변 조선족시인이 쓴 시론 《이미지시 창작론》을 련재했다는 것은 두말할것없이 이 책의 무게를 잘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최룡관 시인이 독자들에게 펼쳐 보인 현대시의 세계는 어쩌면 사람들에게 낮설어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막상 그 안에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한없이 황홀하고 아름다운 시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5 그러면 먼저 우리에게 너무나 친숙한 한 시인의 대표작부터 읽어보자.   하아얀 너울을 쓴 수천만 가수와 악사들 휘우듬히 반원으로 둘러서서 장엄한 교향곡을 울린다 튕기는 하아얀 목소리에 하아얀 악음에 젖어 속세의 어지러움과 소음 쥐죽은 나라로 달아나고 청신과 순수만 메아리쳐 구중천을 휘젓는다 천만년 부르고 불러도 끝이 없는 다부작 연주 그속에서 한번만 젖어봐도 혼령마저 시원히 가셔지는 너그러운 대자연의 교향곡이여   이것은 최룡관 시인이 우리 민족의 저명한 시인 김응준님의 수많은 시 가운데서 그의 대표작으로 점찍은 “나이아가라폭포”라는 시의 전문이다. “이 시는 폭포에 대한 설명이나 해석이 한마디도 없다. 제목에 ‘나이아가라폭포’란 명칭이 있을 뿐 본문에는 폭포라는 언어조차 비치지 않는다.” 이 시가 바로 이미지시, 바꾸어 말하면 현대시라는 것이다. 나는 이처럼 훌륭한 현대시도 온통 변형투성이라는 리유 때문에, 그리고 전통시처럼 쉽게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리유 때문에 거부감을 갖고 외면하여 왔다. 그런데 최룡관 시인이 펴낸《이미지시 창작론》을 읽고나니 김응준 시인의 “나이아가라폭포”를 비롯하여 김철 시인의 “대장간 모루우에서”, 조룡남 시인의 “옥을 파간 자리”, 리상각 시인의 “파도” 등 현대시 대표작품들이 차츰 가슴에 와 닿기 시작했고 비록 아직까지는 많이 미흡하지만 그래도 조금씩이나마 리해가 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걸음 더 나아가 이 현대시들의 묘미에 대해서도 재삼 음미해볼 수 있게 되였다.   6 서혜의 골짜기 파란 잔디밭에서 고독의 피스튼이 작업한다 한쌍 꽃망울의 향로에 취하여 무아의 황홀이 퍼득거림이여 비탄의 발광속에서 하늘의 열림이여 대지가 태여남이여 부옇게 휘여든 하늘에서 흐느끼는 구름구름 훨훨 태양의 힘찬 날개짓 아늑한 자장가의 부드러운 바람결에 별들이 익어가는 소리 생성의 도가니에 빠져버린 대지의 희열이여 면면한 산발은 그대 기발의 물결이런가 오색이 피여나는 오색의 소리는 그대의 아름다운 노래런가   이것은 최룡관 시인의 “고독의 노래”라는 시의 마지막 한 부분이다. 몇번 읽어봐도 무엇을 썼는지 잘 리해가 되지 않는다. 무언가 짚이는 데가 있으면서도 알듯말듯 아리숭하고 몽롱하다. 하지만 참 아름답다. 게다가 여러가지 해석이 가능한 시이므로. 독자 나름 대로 상상의 날개를 펼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져있기에 각양각색의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므로 이것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시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이런 시를 예술이라고 하는지도 모른다. 시는 언어의 예술이다. 만약 자연의 모습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그려낸다면 그것은 예술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생각을 생각나는 그대로 직설한다면 그것 역시 문학이 아니다. 신이 만들어낸 이 세상 만물 중에는 직선이라는 게 없다 곡선미가 바로 자연이 만들어낸 아름다움이다. 직선은 예술이 아니다. 미도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게끔 직설적으로 씌여진 시는 문학이 아니다. 예술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작자가 독자에게 전혀 상상의 공간을 마련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례외없이 미를 추구한다. 나는 이 세상 모든 예술의 궁국적인 미적 감수는 애오라지 수용자의 상상과 재구성을 거쳐야만 비로소 그 미적 가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7 나는 온 세상을 술렁거리게 만드는 피카소의 일부 대표작들을 감상하면서 나도 남들처럼 그것들이 어찌하여 그렇게 엄청난 천문학적인 수자로 헤아려지는 값어치를 지니게 된 명화들인가를 리해해보려고 무등 애를 써보았다. 그런데 그 게 다 허사였다. 아직까지 이것은 나에게 있어서 마냥 정답을 찾을 수 없는 미스터리, 아니 영원히 풀 수 없는 숙제일지도 모른다. 얼마전에 읽었던 피카소에 관한 한 일화가 매우 인상적이였다. 누군가가 피카소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당신의 그림은 어찌하여 그렇게 알아보기 힘든 겁니까?” 그러자 피카소가 되려 그 사람에게 물었단다. 그들의 일문일답은 아래와 같다 “당신은 새의 지저귐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까?”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소리가 듣기 좋았습니까?” “예, 듣기 좋았습니다.” “그럼 그 소리를 알아 들을 수 있었습니까?” 이 일문일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2015년 9월 15일 연길에서)  
32    연변문학 특별기획 리덕수의 고향사랑(6) 댓글:  조회:1079  추천:0  2019-02-14
연변문학 특별기획(6)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연변 로인절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것은 중화민족의 전통적 미덕이다. 많은 외지인들도 연변에는 로인 명절과 어린이 명절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로인들의 명절이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법적으로 규정한 8월 15일 연변로인절을 말하고 어린이들의 명절이란 6.1국제아동절을 가리킨다. 6.1국제아동절이면 집집마다 아이들을 곱게 차려입히고 온 집안 남녀로소가 아이들과 함께 공원이나 교외 혹은 기타 놀이터에 가서 아이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춤을 추고 유희놀이도 하면서 아이들의 명절을 축하해준다. 그리고는 교외나 공원의 잔디밭 우에 비닐천을 펴놓고 한집식구가 빙 둘러앉아 야외식사를 시작하는데 이것은 연변에서 이미 하나의 전통으로, 연변문화의 하나의 구성부분으로 되였다. 연변에는 자기의 로인절이 있으며 연변에서는 각급 행정급별로 로인협회를 세웠다. 전국에서 맨처음이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국무원에서 전국로년사업회의를 소집할 때 경험을 소개하도록 특별히 연변을 초청한 적 있었다. 기실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연변의 량호한 사회적 풍토는 연변의 력사적 전통, 연변의 사회문화,  민심에 순응한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오늘날 사회에서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이런 우수한 오랜 전통을 계속 발양하여 사회생활의 주류, 일종의 사회풍토와 사회문화로 정착시킬 문제를 두고 연변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그야말로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일찍 1982년에 연길현(나중에 룡정시로 개칭) 동성용공사 ‘로인독보조’(‘로인협회’의 전신)는 공사당위의 직접적인 령도하에 전 공사 각 대대의 ‘로인독보조’를 ‘로인협회’로 개칭함과 동시에 ‘공사로인협회’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토론을 거쳐 매년 양력 8월 15일을 전 공사 ‘로인절’로 결정하였다. 동성용향 당위와 정부에서는 전 향 ‘로인절’ 1주년 경축활동을  준비하느라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동성용향 당위와 정부에서는 이 일을 그 당시 부임하여온 지 얼마 안되는 신임 현당위 서기 리덕수한테 회보하였다. 리덕수는 그들의 이 장거를 전폭적으로 지지해 나섰다. 리덕수는 이 일을 갖고 특별히 현당위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전 현 각 향진, 각 가두에서 모두 동성용공사를 따라배워 전 현 각 향진과 부락의 ‘로인독보조’를 ‘로인협회’로 고치도록 포치함과 아울러 8월 15일, 전 현 로인절 경축행사와 동성용향 경축활동을 통일적으로 동성용향에서 치르기로 결정하였다. 이리하여 전대미문의 ‘로인절’ 경축활동이 동성용향에서 성대하고도 장중하게 치러지게 되였다. 리덕수 등 룡정 현위, 정부의 주요 책임자들이 모두 이 활동에 참석했다. 동성용향의 이번 경축활동은 전 주적으로 처음으로 치러진 대형 로인절활동이였고 나아가 전국을 들썽해놓았다. 전국 각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이 날 모임에 찾아왔다. 리덕수는 친히 문화부 부장 주목지((朱穆之), 부부장 정교(丁峤),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 임영(任英)그리고 전국 각 분야의 전문가, 학자와 기자 등 100여명을 배동하여 이 경축활동에 참가하였다. 경축대회가 끝난 후 리덕수는 동성용향 당위와 책임자를 보고 주당위에 매년 8월 15일을 전 주 ‘로인절’로 정해달라는 편지를 보내라고 건의했다.     그 때까지도 1983년 11월에 주에 와서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게 될 줄은 리덕수로서는 어디까지나 예상 밖이였다. 이 같은 인사변동이 있으면서 흥미롭게도  1983년 8월에 그가 주당위에 써보내라고 건의했던 그 편지를 나중에 그 자신이 주당위에 올라와서 친히 처리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기실 연변 로인들이 각종 문화활동을 전개한 것은 광범위한 군중적 토대가 있었기에 가능합니다. 신중국이 설립된 후 연변에는 어느새 ‘로인독보조’가 나지게 되였고  줄곧 이 활동을 이어나가 이미 일상적인 형태로 굳어지게 되였습니다. 독보조는 독보에만 국한되지 않고 다양한 다른 활동들도 조직하면서 연변에서 이미 하나의 문화로 자리잡게 되였습니다. 그러므로 연변에서 ‘로인절’은 그 력사적 전승으로 이뤄지고 대중적, 사회적 토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누가 연변에서 주당위 서기를 담당하든지 조만간 다 이 ‘로인절’ 테마를 탐색, 연구하게끔 객관적 환경이 마련되여있었습니다. 저는 그저 형세의 흐름, 사회의 발전과 군중의 수요에 순응하였을 뿐입니다.”      로인절을 망라하여 로인공대와 로인사업에 리덕수는 다함없는 감정을 품고 있었다. 그의 말을 그냥 들어보자.       “저는 연변에서 자라나면서 어렸을 때 자주 고향 ‘로인독보조’에 가서 신문을 읽어드리고 로인들의 글공부와 문화공부도 도와드렸습니다. 연변에서 로인을 공경하고 어린이를 사랑하는 관념과 감정은 평상시의 축적이지 갑작스레 튀여나온 깜짝 아이디어가 아니였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연스러운 과정을 거쳐 형성된 결과였습니다.”      1984년 7월 19일, 주당위에서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협회를 설립하기로 결정하였다. 사업의 편의를 위해 승용차 한대에다 사무실 두칸을  배치하였다. 그 회의에서는 또 매년 8월 15일을 연변조선족자치주 ‘로인절’로 한다고 정식으로 결정하였다.      리덕수는 전인영을 주로인협회 초대회장으로 천거하였다. 전인영은 려영준(吕英俊)에게 초대회장직을 내주고 자기는 명예회장직만 맡았다. 1984년 8월 7일, 연변예술극장에서 있은 ‘전 주 로인대표대회’에서 주당위 부서기 장진발이 주당위를 대표하여 연설하였다. 1984년 8월 15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첫번째 ‘로인절’ 경축대회는 왕청현 배초구진에서 성대하고도 장중하게 치러졌다.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가 전반 경축대회의 총지휘를 맡았다. 리덕수는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부주임 최채와 성당위, 성정부 관련 부문의 지도자들을 배동하여 대회에 출석했다. 그 때 마침 연변에서 열린 ‘전국선전리론사업회의’와 ‘전국과학기술사업회의’에 참가하고 있던 전국 각지의 대표  200여 명도 대회에 오게 하였다. 배초구진 16개촌 1,000여명이 출연한 민족집단무용과 400여명 로인이 자리를 같이한 회갑잔치는 대회장의 분위기를 한껏 끌어올렸다.  전국 각지의 래빈들은 저마다 대회의 이채로운 분위기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전통미덕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 때로부터 매년 8월 15일이 되면 연변 각 부문, 각 단위들에서는 여러가지 형식으로 로인들을 위해 ‘로인절’을 쇠여드렸다. 8월달은 날씨가 좋아 로인들이 활동하기에도 적합한 만큼 공원이며 나무숲속은 가는곳마다에서 노래소리와 웃음소리가 흘러넘치였다. 로인들은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아름다운 생활을 노래하고 행복한 만년을 즐기였다. 그리고 해마다 전 주 각지에서는 훌륭한 시아버지, 훌륭한 시어머니, 훌륭한 며느리, 훌륭한 아들을 표창하는 활동을 조직하여 ‘로인절’을 충실하면서도 다채롭게 보내였다. 연변 ‘로인절’을 본격 가동하면서 리덕수는 수많은 편지를 받게 되였다. 전국 각지에서는 연변의 장거를 높이 긍정하고 칭찬하면서 그들도 연변을 따라배워 륙속 법률적인 형식으로 자기들의 ‘로인절’을 확정하였다.             겨울철아시안게임          제2회 겨울철아시아게임은 1990년 3월 9일, 일본 삿뽀로에서 거행되였다. 중국, 인도, 이란, 몽골, 조선, 한국, 일본, 필리핀, 중국 향항, 중국 대북 등 10개 국가와 지구의 근 1,000 명 운동선수들이 대회에 참석했다. 참가규모는 첫회보다 대폭 늘어났다. 이번 겨울철아시안게임에서는 스케이팅, 스키, 컬링, 아이스하키 등 5대 종목을 내놓았다. 최종적으로 일본이 금메달 18개, 은메달 16개, 동메달 13개를 따내여 1위를 차지하였다. 중국은 금메달 9개, 은메달 9개, 동메달 8개를 따내여 2위에 머물렀고 한국은 금메달 6개, 은메달 7개, 동메달 8개를 획득하여 3위, 조선은 은메달 1개, 동메달 4개로 4위, 몽골은 동메달 4개로 5위를 차지하였다.      그 당시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주당위 서기를 담당하고 있던 리덕수는 그번 겨울철아시안게임 중국대표단 단장을 맡게 되였다.     우리의 운동선수들은 거의다 동북3성 출신들이였는데 흑룡강이 제일 많았고 그 버금으로는 길림과 료녕이였다. 기타 성, 시와 해방군 출신들도 더러 있었다. 그 때 국가에서 대표단에게 금메달 5개 내지 7개를 따내야 하되 5개는 반드시 보증해야 하고 7개는 쟁취하라는 목표를 정해주었다. 결과적으로 우리 나라는 금메달 9개를 따냄으로써 목표치을 초과완성하였다. 특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남자아이스하키가 따낸 우승이였다. 아시안게임 력사상 중국이 남자아이스하키에서 처음 따낸  우승이였다. 애초에 대표단이 출발할 때 《인민일보》 스포츠면에 경기결과를 예측하여 실린 글에서 아이스하키는 3등만 해도 리상적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리덕수는 국가겨울철스포츠종목의 경기수준에 대해 잘 료해하고 있지 못하더라도 이 같은 추측이 선수들의 정서에 찬물을 끼얹는다고 보고 있었다. 사기는 북돋우어주어야지 저락시켜서는 안된다는 판단에서였다. 팀이 아직 출정길에도 오르지 않았는데 이처럼 김빠진 말이 흘러나오면 선수들의 정서를 흐릴 수 있었다. 출발에 앞서 리덕수는 북경에서 전체 대표단을 상대로 동원연설을 하였다. 리덕수는 아이스하키팀은 스스로 분발하여 본때를 보여주어야 한다고 격려했다. 중국대표단 100여명은 전용기를 타고 갔다. 비행기가 도꾜공항에 착륙한 다음 곧바로 삿뽀로로 방향을 틀기로 예정되여있었다. 일본에 있을 때 리덕수는 중국선수가 참가하는 종목이라면 모두 직접 현장에 가서 지켜보았다. 하나도 례외가 없었다. 리덕수가 정치사상사업을 벌리는 방법은 주로 선수들과 마음을 나누고 친구로 사귀는 것이였다. 리덕수는 그 때 전국스키협회 주석이였다. 선수들이 경기장에서 나오면 성적의 여하, 순위의 여하를 막론하고 리덕수는 모두 잰걸음으로 다가가 위문해주고 축하해주고 고무격려해주었다. 그 몇해동안 리덕수는 체육계의 인사들과 다양하게 사귀였는데 특히 운동선수들과 친구로 사귄 비중이 많았다. 여기서 아무래도 남자아이스하키팀의 이야기를 좀더 상세히 짚고 넘어가야 할것 같다. 우리 아이스하키팀은 무언가 억울하다는 기분을 가지고 출정하게 되였다. 일본에 도착한 후 리덕수는 삿뽀로 주재 중국총령사관 총령사와 상의하고 총령사관의 도움을 받아 일본에서 전문 아이스하키팀을 위해 봉사하는 의사 두 분과 간호사 한분을 배치하였다. 의사 두 분이 모두 중국계 사람이여서 선수들과의 교류가 매우 편리했다. 아이스하키선수들은 저마다 신바람이 나서 기어코 잘해보겠다고 윽벼르고 있었다. 그들은 단장동지가 이처럼 우리를 잘 보살펴주는데 우리는 단장동지를 봐서라도 본때를 보여주어야 하겠다고 다짐했다. 젊은이들은 정말 몸을 내던지고 한국팀과 싸워 한국팀을 이기였고 조선팀도 꺽었다. 아이스하키에서 아시아의 강팀들인 한국이나 조선을 이겨버리자 사기가 충천해져 최종적으로 개최국인 일본팀과 우승을 다투게 되였다. 전반 아시안게임의 제일 마지막 종목이 바로 아이스하키 결승전이였다. 중일대전은 주말 저녁 7시에 시작되였다. 리덕수는 감독과 함께 경기장 밖에 서서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을 하였다. 리덕수는 뽈차기를 좋아 했고 어려서는 스케트도 타보았는데 그 때 그들은 굽은 나무가지를 낫과 도끼로 대충 다듬어가지고 하키를 만들어 아이스하키도 해보았다. 그 날 리덕수는 갑자기 아이스하키도 좀 알 것만 같아 감독과 함께 전략전술도 짜보았다. 그 날 저녁 온 체육관은 빈자리라곤 하나도 없이 꽉 들어찼는데 90%이상은 모두 일본 관객들이였다. 우리 사람이라야 령사관의 남녀로소가 전부였다. 령사관에서는 당직 한사람만 남겨 놓고 전원이 나섰다. 이에 앞서 리덕수는 령사관측에 혹까이도에 와서 류학하는 중국 대학생들을 불러줄 수 없겠는가고 상론했는데  그 날 예상대로 20여명 류학생들이 와서 응원에 동참했다. 리덕수는 기타 선수들도 모두 동원하여 도합 100여명은 푼히 되였다. 고맙게도 한국과 조선선수들도 우리 편이 되여주었다. 일본관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지만 우리의 응원대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중국령사관 외교관들이나 그들의 가속과 아이들도 고함을 너무 쳐서 목이 다 쉴 지경이였다. 어떤 사람들은 아이스하키의 규칙을 잘 몰라 우리팀이 공을 갖고 앞으로 달리기만 하면 와----와---- 하고 환호하면서 고함을 질렀다. 우리는 경기가 시작될 때는 좀 피동적이다가 나중에는 경기 주동권을 잡게 되였다. 중국인들의 응원소리를 딛고 아이스하키팀 젊은이들은 싸울수록 용맹해져 당하기 어려운 기세로 밀고나갔다.  이것이 바로 중국인들의 박투정신과 대항정신이였다! 최종적으로 우리는 두꼴 앞서는 성적으로 이겼다. 사람들은 모두 울었다. 령사관 사람들도 모두 울었다. 경기가 끝나자 모든 선수들이 우르르 달려와 리덕수와 악수하고 포옹을 하고 리덕수를 에워싸고 퐁퐁 뛰였다. 웃움과 눈물이 반죽된 그 장면은 정말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었다. 그 날 중국대표단 단장의 승용차를 운전한 기사는 일본인이였다. 그는 차에서 텔레비죤 생중계를 보고 나서 리덕수한테 이렇게 감회를 털어놓았다.  “일본은 아이스하키를 젔기 때문에 모든 게 다 진거나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은 아이스하키에서 이겼기 때문에 모든 걸 다 이긴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그런 것 같았다. 이스하키는 빙상종목중의 정상으로서 모든 운동종목중 축구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으리 만치 몸값이 높았다.     그 날 저녁 호텔에 돌아오자마자 수많은 축전이 끊임없이 날아왔다. 동북 뿐만 아니라 전국 그 어데라 할 것 없이 다 있었다. 남방에서 온 것도 적지 않았는데 상해, 광주, 심수 등 그 어디라 할 것 없이 몇백통 축전이 날아왔다. 국무원과 국무원 지도자, 흑룡강성정부, 길림성정부에서도 축전을 보내왔다. 그 날 저녁 온 대표단에는 잠든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처음엔 축하전보가 오면 리덕수는 한통한통 일일이 열심히 읽어보았는데 나중에 점점 많아지자 그걸 다 읽어내려가기가 힘들었다. 그 가운데서 리덕수는 한 나라로 말하면 체육이야말로 국민의 적극성을 움직이고 민심을 단합하고 국민의 응집력을 증강시키는 한낱 위대한 사업이란 것을 실감하게 되였다. 그 날 중국 아이스하키팀은 축제의 밤을 이어갔다. 아이스하키팀에서는 리덕수한테 저녁에 맥주를 좀 마시면 안되겠는가고, 보증코 배갈은 절대 마시지 않고 맥주만 마실테니 허락해 달라고 청시하였다. 그 당시 운동회기간에는 누구도 술을 마셔서는 안되거니와 맥주를 마셔도 안된다는 강행적인 규정이 있었는데 누구도 이 규정을 어길 수  없었다. 리덕수는 특수한 정황은 특수하게 처리해야 한다고 하면서 아이스하키팀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동의했다. 리덕수의 회시가 전달되자 선수들은 너무 좋아서 리단장이 동의했다고, 리단장이 오늘 저녁 우리가 술을 마시는 것을 허락했다고 웨쳐대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선수들은 리덕수를 그들의 련환모임에 참석해 달라고 초청했다. 리덕수는 응당 참가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부단장과 비서장을 데리고 함께 찾아갔다. 그들은 맥주를 마시며 온밤을 즐겁게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밤새도록 조국의 번영을 기원하였다. 그 이튿날은 다들 지쳐서 진종일 조용히 잠만 자다가 잠에서 깨여나자마자 곧 전용기를 타고 귀국하였다. 그 날 리덕수와 하진량 (何振梁) 두 사람이 특등석에 앉게 되였다. 리덕수는 하진량과 초면이였다. 하진량은 년세가 비교적 많은 편이였는데 그가 비행기에 탑승하여 자리를 찾아오자 리덕수는 주동적으로 그와 악수를 나누었다. 하진량은 “이번에 우리 성적이 정말 괜찮았습니다.” 하면서 리덕수가 선수단을 이끌어간 사업방식을 높게 평가하였다. 비행기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리덕수는 특등실이 비여있는 걸 보고 하진량과 의논했다. “우리의 부단장과 흑룡강성체육위원회 주임도 이리로 건너오라고 할가요?”  하진량이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하고 동감을 표하자 리덕수는 아이스하키팀 젊은이들도 다 함께 부르자고 제의했다.  리덕수는 스튜어디스를 시켜 기장을 불러왔다.  “중국 아이스하키팀이 우승을 한 걸 알고 있겠지요?” 기장이 머리를 끄덕이자 리덕수는 기장보고 청들었다.  “이 참에 아이스하키팀 선수들도 건너오게 하여 이 특등석에 있게 하면 좋겠는데요. 아무튼 일본에서 북경까지 시간도 그리 길지 않으니까 말입니다.”  “그건 문제 없습니다. 그런데 죄석이 좀 모자랄 겁니다.”  “좌석이 모자라도 괜찮습니다. 여럿이 좀 비좁게 앉지요.”  그리하여 나중에 흑룡강성체육위원회 주임도 건너왔다. 리덕수가 아이스하키팀 감독을 불러다가 이야기했더니 아이스하키팀 감독은 달려가서 여러 사람들한테 이렇게 소리쳤다.  “다들 잘 들읍시다. 리단장이 우리 아이스하키팀 전체 대원들을 특등석으로 건너와 리단장과 함께 좌담을 하자고 하셨습니다.”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듣고 와---- 하고 함성을 지르며 특등석으로 달려왔다. 운동선수들의 성격은 바로 이랬다. 어떤 친구는 춤을 추기도 하였는데 아무튼 우루루 한번에 다 몰려들어왔다. 그들은 들어와서도 자리에 앉지 않고 쏘파에 기대여 서로 앞다투어 리덕수와 이야기를 하고 싸인을 청하기도 했다. 비행도중 선수들은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꽃을 피우며 떠들썩하게 보내다보니 시간이 재빨리 흘러 비행기가  어느덧 북경에 도착한 줄도 몰랐다.     비행기에서 내려 직접 호텔에 가서 경축대회를 열었다. 지도자들은 연설에서 이번 겨울철아시안게임에서 보여준 중국팀의 완강한 표현에 높은 평가를 내려주었다. 리덕수는 열렬한 박수와 환호성 속에서 연설을 하였다. 스포츠는 이처럼 나라의 형상을 대표하고 국력과 중화민족의 막강한 응집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인격적 매력          리덕수는 순박하고 선량하며 친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리덕수의 몸에서 나타나는 이런 친화력은 주로 두개 측면에서 비롯된다. 하나는 정직이다. 그한테서는 올곧은 기운이 흐른다. 다른 하나는 물씬하는 인정미이다. 이런 인정미에 감화되여 많은 사람들은 그를 자신의 형제, 친구, 손우 선배로 받아들이게 된다. 리덕수가 이런 품질을 갖고 있었기에 그는 보다 많은 동지들을 단합하여 함께 일할 수 있었다.     실사구시적으로 말하면 사업상에서 부동한 의견으로 말미암아 론쟁이 발생하는 것도 어쩌면 불가피한 일이라고 볼 수 있고 나아가 론쟁을 부정적으로만 본다면 틀린 시각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실제 사업 가운데서 이로 인해 지도부 내부에 불화가 야기되고 심지어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그런 사례와 교훈들도 력사적으로 볼 수 있었다. 30년이 지난 후 그 당시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이였던 리정문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당시 주당위와 주정부 지도부에는 꽤나 개성이 뚜렷한 구성원도 있었다. 지도부 성원마다 그 사상방법과 사업방법이 서로 같지 않았기에 한가지 사업, 특히는 새롭게 가동하려는 대상을 둘러싸고 부동한 의견이 종종 엇갈리거나 론쟁이 매우 격렬할 때도 있었다. 쌍방의 의견이 서로 팽팽히 맞설 때면 리덕수는 늘 제일 먼저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다같이 여러 사람이 랭정해지기를 기다려 쌍방으로 하여금 다시한번 자기 자신들의 관점을 명석하게 재천명하도록 하였고 깊이 있게 검토해보도록 여유를 주었다. 이렇게 쌍방이 자신들의 의견을 분명하게 재천명하는 과정에서 홀연 쌍방의 의견이 기실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도 있었다. 만약 쌍방의 의견이 완전히 상반되는 경우라면 리덕수는 이런 론쟁이 그냥 이어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런 론쟁을 더해봐도 아무런 의의가 없을 뿐더러 자칫하면 오히려 동지들사이의 감정까지 다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리정문은 또 이렇게 말했다. “이런 론쟁이 발생할 때마다 리덕수의 인격적 매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부드러움과 너그러움, 차근차근한 타이름, 부드러운 심성, 깊이를 잴 수 없는 겸허한 마음, 언제나 사업을 첫자리에 내세우고 큰 국면에서 출발하는 그의 사업풍격…이 모든 것들이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속으로부터 그에게 감복하게 하였으며 종당에는 다들 마음속으로 그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되였다. 그는 각종 부동한 의견을 참답게 경청하면서 부동한 의견이라도 자르지 않고 거듭되는 토론을 거쳐 여러 사람이 공통점을 찾도록 공간을 열어주었다. 설득력이 없고 말발이 서지 않는 부동한 의견이더라도 리덕수는 회의에서 직접 허물을 지적하는 게 아니라 회의가 끝난 뒤에 부동한 의견을 갖고 있는 동지들을 찾아 소통하면서 매듭을 풀어나갔다. 이런 면에서 리덕수는 매우 까근하고 층차가 분명한 데다 인정미까지 갖추었기에 감화된 그들이 스스로 차분한 마음으로 자기의 의견을 거둬들이게 하고 마음속으로는 다른 사람의 의견을 받아들이게 하는 결과로 이어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즉각 태도를 보여달라고 난처하게 굴지 않았다. 상대방이 스스로 인식상의 편차를 느끼고 있다는 판단이 서면 이야기를 서둘러 마무리하거나 우정 화제를 돌렸다. 그것이 동료와 동지를 지극히 존중하는 그의 특이한 사업 예술이자 풍격이였다. 리덕수의 이와 같은 남다른 사업작풍은 동지들의 인정을 받게 되였다. 그러므로 매번 론쟁이 끝난 다음 지도부는 새로운 단합을 이루어내여 다음 사업에 힘을 몰부을 수 있었다.  손홍상은 그 당시의 정경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 시기에 연변은 시국이 잘 돌아가고 민심이 부드러워져 생기발랄한 새로운 기상이 나타나게 되였습니다. 이것은 ‘문화대혁명’ 이후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오래 동안 갈망해오던 아주 좋은 형세였습니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주당위의 사업은 여러 차례나 성당위 지도자들의 긍정을 받게 되였습니다.” 리덕수는 비록 지도부에서 제1책임자이고 “반장”역할을 맡고 있었음에도 자기보다 년세가 많은 동지들을 언제나 마음속으로부터 각별히 공경하고 존중하였다. 리덕수가 1983년에 연변에 돌아와 연변의 각항 사업을 주관하면서부터 1990년에 연변을 떠날 때까지 리덕수와 함게 옹근 8년 동안이나 같이 사업하게 되면서 리덕수의 일거일동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손홍상은 다음과 같이 감회를 털었다. “리덕수 서기한테서는 무엇보다도 인품이 돋보였습니다. 그 당시 리덕수 서기는 매우 젊은  ’반장’이였고 상무위원중에서 그의 년령은 꺼꾸로 세면 두번째였습니다. 그는 겸손하고 신중하였으며 오랜 동지들을 존중하고 수하 동지들과 평등하게 지내면서  종래로 ‘제1책임자’의 틀을 차리지 않았습니다. 리덕수는 지도부의 가타 성원들에 대해 늘 정치상에서 신임하고 생활상에서 보살펴주면서 맏형님 같이 까근히 챙겨주었습니다.”  한번은 손홍상이 병에 걸리게 되였다. 차음엔 그저 감기려니 했는데 나중엔 웬 일인지 페까지 감몀되면서 련일 고열이 내리지 않아 걸음걸이마저 비틀거릴 만큼 심각해졌다. 그런데도 손홍상은 페가 감염된 줄도 모르고 계속 출근하였다. 리덕수는 그를 보자 깜짝 놀라며 다급히 물었다.  “홍상동무, 이게 웬 일입니까?”  손홍상이 “감기에 걸렸는지 열이 좀 나는 것 같습니다.”하고 맥없이 대답하자 리덕수는 다가와 손홍상의 이마에 손을 얹어보더니 놀라서 다그쳤다.  “열이 나는구만. 안되겠습니다.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 하겠습니다.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는 자신의 차실인듯 사과했다.  “너무 지쳐서 난 병입니다. 다 내 탓입니다.” 손홍상이 “괜찮습니다. 약을 좀 먹으면 낫겠지요. 안 그러면 주사라도 한대 맞으면 됩니다.” 하고 말하자  리덕수는 단호하게 대방의 말을 잘랐다.  “홍상동무, 동무는 반드시 쉬여야 하고 입원치료를 받아야 합니다. 일을 더는 해서는 안됩니다.” 그 때는 모두 드높은 열정으로 일을 하고 있었다. 손홍상이라고 병원에 가서 입원할리 없었다. 그는 치료를 받으면서 일을 그냥 이어나갔다. 이를 알게 된 리덕수는  손홍상을 연변병원에 “압송”해가라고 주위생국 국장을 불렀다. 병원에 가서 검사를 해보니 페결핵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그 때 그래도 제때에 검사를 하고 치료를 받았기에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치유할 수 있었다. 나중에 손홍상은 이렇게 말했다.     “애초에 덕수 서기가 억지로 나를 병원으로 떠밀어보냈으니 망정이지 조금만  더 지체했더라도 아주 큰 우환거리를 남길 번했습니다!”     리덕수는 소박하면서도 공정하고 정파다운 작풍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항상 겸허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간직하고 있었다. 자치주의 지도자든지 일반사업일군이든지를 막론하고 늘 평등하게 매 한명의 동지들과 어울렸다. 여기에서 그의 몸에 축적된 두터운 수양을 볼 수 있었다. 리덕수의 이런 인격과 품격은 지도부 성원들을 잘 단합하여 힘을 합칠 수 있는 하나의 중요한 요인으로 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으로 있을 때 기관간부들은 “올라간다”와 “내려간다”는 말을 무척 신나게 입에 올렸다. 이른바 “올라간다”는 건 기관으로 돌아간다는 것이였고 “내려간다”는 건 기층으로 내려간다는 것이였다. 그 때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인 리덕수가 갑작스레 밭머리에 찾아가는가 하면 공장의 직장에도 찾아가고 농가나 로동자 가정으로 들어가보는 것은 너무나 자주 보는 풍경이여서 그 누구든지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1984년 가을, 박호만(朴浩万)이 룡정현 동성용향당위 서기를 담당하게 된 지 얼마 안되였을 때였다. 하루는 리덕수가 동성용향  농민 김시룡을 방문하였다. 사전에 현에서 향에 알리지 않았기에 박호만은 리덕수가 와서야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그리로 찾아갔다.      알다싶이 김시룡은 그저 평범한 농민이 아니였다. 저명한 전국로력모범인 그는 새 중국의 농업발전을 위해 뛰여난 기여를 한 전설적인 인물이였다. 일찍 전국이 해방되기 전인 1946년에 김시룡은 연길현 영성촌에서 농업생산호조조를 꾸리였다. 김시룡은 호조조에서 정액관리로 농업생산발전을 촉진하여 한때 전국을 들썽해놓았다. 김시룡은 194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다. 1951년에는 또 농업생산합작사를 세웠다. 그는 호조조 조장, 농업사 주임, 동성용인민공사 사장, 길림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위원을 력임했다. 또한 제1기로부터 제3기의 전국인민대표대회 대표, 제5기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이였다. 신중국이 창건되던 1949년에 김시룡은 영예롭게도 길림성 특등로력모범칭호를 수여받았으며 1950년과 1957년에 또 영예롭게 전국로력모범과 전국 농업로력모범의 칭호를 받아안았다. 1958년에 김시룡은 동성용인민공사에서 우리 나라에서 제일 첫번째로 되는 반농반독(半农半读) 농민대학을 세웠다. 1960년에는 전국 문화교육계통군영회(群英会)에 참석하였다. 이 농민대학은1980년에 려명농민대학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였고 김시룡은 명예교장을 담당하게 되였다. 김시룡은 생전에 20여차나 모주석의 접견을 받았으므로 그의 이름은 룡정현에서 현장이나 현당위 서기보다도 어쩌면 오히려 더 맵짜고 현장, 현당위 서기보다도 더 알려져있었다.      이윽고 동성용향당위 서기 박호만은 리덕수를 배동하여 김시룡의 집으로 찾아갔다. 김시룡은 새로 부임된 지 얼마 안되는 신임 주당위 서기가 이렇게 찾아온 게 이례적이여서 무척 반가워했다. 그는 나젊은 리덕수를 마주하니 자연히 지나온 자신의 경력을 이야기하게 되였다. 기실 김시룡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리덕수도 퍼그나 알고 있었다. 그러더라도 그냥 귀를 가다듬고 들으면서 말참견을 하지 않았다. 김시룡의 이야기가 다 끝나서야 리덕수는 그한테 해방초기와 ‘문화대혁명’ 이전의 농업생산과 농민생활 화제를 꺼냈다. 리덕수는 매우 까근하게 물어보았고 김시룡도 아주 진지하게 이야기해주었다. 리덕수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작은 수첩을 꺼내들고 열심히 기록하였다.  마치도 공손하고 례의 바른 소학생 같았다. 리덕수는 김시룡과 일상적인 이야기도 많이 나누었다. 이를테면 농업생산을 어떻게 틀어쥐어야 하는가, 토지도급문제도 이야기하면서 오랜 로력모범으로서 토지도급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등등 화제가 다양했다.     향에다 점심식사를 마련하려던 박호만은 김시룡이 기어코 자기네 집에서 리덕수를 대접하겠다고 고집하기에 들어줄 수 밖에 없었다. 리덕수도 편안하게 받아들였다.  리덕수는 그저 집에 뭐가 있으면 있는 대로 먹으면 되니 사람을 시켜 다른 걸 사오게 해서는 안된다고 딱 막았다. 기실 리덕수가 주인의 청을 받아들인 건 김시룡한테서 듣고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았기에 식사를 하면서 계속 한담을 이어가고 싶은 심정에서였다. 식사를 마치고 박호만은 리덕수를 배동하여 향으로 돌아왔다. 박호만은 신임 주당위 서기가 처음 동성용향에 온 이 기회를  빌어 리덕수한테 사업을 회보하면서 그의 도움을 받아 향의 실제적인 애로사항을 좀 해결해보려는 타산을 가지고 있었다. 리덕수는 그의 속궁리를 알아차리고 이렇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으면 그저 툭 찍어놓고 말해보시오.”  원래 동성용중학교 교사건물을 3년째나 짓고 있었는데 향정부에 자금이 없어서  줄곧 콩크리트지붕을 덮지 못하다보니 계속 반쪽 공사로 남아 있었다. .박호만의 회보를 듣던  리덕수는 즉각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현장에 가서 직접 보면서 이야기합시다!” 박호만은 이렇게 말이 떨어지게 바쁘게 신속하게 대응하는 리덕수의 단호한 사업작풍에 적잖게 충격을 받았다. 그는 곧 리덕수를 모시고 동성용중학교 교사건물 시공현장으로 찾아갔다. 리덕수는 현장을 다 둘러보고 나서 무거운 심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아이들이 이렇게 오래 동안 새로 지은 학교에 이사하여 강의를 들을 수 없었으니 우리 모두에게 다 책임이 있습니다! 내가 돌아가서 현의 동지들과 상의해서 해결책을 찾도록 하겠습니다.”  나중에 기타 자금에서 뽑아낸 45만원이 동성용향에 내려오게 되였다. 동성용중학교건물 마무리 작업을 마치면서 아이들은 드디어 새로 지은 학교에 이사하여 수업할 수 있게 되였다.     박호만의 기억 속에는 또 잊을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1986년 6월 25일, 룡정현 동성용중학교 10여명 아이들이 물에 빠져 숨진 사건이였다. 이것은 하늘땅을 놀래울 사고였다. 사고소식을 접한 리덕수는 즉각 사고현장에 와서 시체를 건져내는 작업을 직접 지휘하였다. 익사한 학생들의 부모님을  만나 일일이 이야기를 나누면서 위문을 하고 일일이 위로를 해주었다. 박호만은 리덕수를 보기 바쁘게 달려가서 머리를 숙였다.      “리서기, 저를 처분하십시오! 책임은 어디까지나 향당위 서기인 저한테 있습니다.”      리덕수는 박호만을 보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책임을 추궁할 때가 아닙니다. 전력을 다해 가족들을 위로하고 후사를 잘 처리하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리덕수는 제일 먼저 사고현장에 달려가 조난당한 아이들의 부모들을 위로하여 가족들의 정서를 차츰 안정시켰을 뿐더러 그들로 하여금 묵묵히 관련 부문들과 배합하여 후사를 처리하도록 이끌어주었다. 그 당시 현장에서 박호만은 깊은 감촉을 받게 되였다.     황재림은 1984년 12월 9일부터 연변조선족자치주 대리주장을 담당하게 되였다.  그 때부터 리덕수는 주장직무를 더는 겸임하지 않았다. 황재림은 열정이 있고 패기가 있는 데다 과감히 개혁하는 지도자였다. 그 이듬해 봄에 열린 주인민대표대회에서 황재림은 정식으로 주장에 당선되였다.     황재림은 공업을 익숙히 아는 데다 경험이 풍부하였고 그 만큼 연변 경제를 신속히 발전시켜려는 강력한 념원을 품고 있었다.      리덕수와 황재림은 한 지도부에서 몇해 동안 함께 일했다. 그들은 줄곧 서로 지지하고 긴밀히 배합하면서 친밀한 관계를 이어왔다. 이런 관계는 연변의 개혁과 발전 및 안정단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부주장으로 있었던 장지붕은 이렇게 회고했다.     “저는 리덕수 서기와 서로 알고 지낸지 40여년이 되였습니다. 리덕수 서기는  따뜻하고 순박한 데다 너그럽고 정파다우며 언제나 큰 국면을 능란하게 돌보았습니다.  지도부 성원들에 대해서 책망하거나 흠집을 잡는 일이 없었고 도량이 매우 넓었습니다.” 몇년이 지나서 리덕수가 이미 북경에 전근되여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당조서기 겸 주임으로 있을 때는 황재림이 진작 정년퇴직한 이후였다. 한번은 황재림이 병으로 북경에 와서 입원하게 되였다. 장지붕이 황재림한테 문병하러 갔다가 병원에서 나오면서 리덕수한테 이 소식을 전했다.  “황재림 주장이 지금 병환으로 북경에 와 입원하고 있는데 알고 계십니까?”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전 전혀 몰랐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면서 하던 일도 제쳐놓고 곧바로 병원으로 찾아갔다.     나중에 장지붕은 리덕수가 두번이나 병원에 가서 황재림을 문병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그중 한번은 박석산(전임 연변 주정부 부비서장, 주토지국 국장)이 그 자리에 함께 있으면서 리덕수가 황재림한테 하는 말을 듣게 되였다. “황주장은 나중에 비록 길림으로 자리를 옮겨갔더라도 연변에서 주장으로 있었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변에 돌아가 치료하고 료양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나서 리덕수는 박석산한테 또 이렇게 분부했다. “돌아가게 되면 주의 지도자들한테 이건 리덕수----나의 의견이라고 전하면서 황주장께서 연변에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잘 조처했으면 합니다.”      박석산은 그 때의 분위기를 려과없이 회고하였다.      “그 때 황재림 주장은 너무도 감동되여 리덕수의 손을 꼭 잡은 채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리덕수의 일거일동에서 우리는 그의 흉금, 그의 덕성, 그의 지조, 그의 품덕을 엿볼 수 있었다. 한마디로 추려내면 바로 인격의 집합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인격은 다름 아닌 리덕수가 세상을 헤쳐가는 하나의 강력한 카드였다. 장지붕은 그가 성공안청 청장으로 있을 때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리덕수 서기는 인정이 깊고 의리가 있는 데다 감정이 풍부하고 감정에 충실했습니다.” 1995년 1월, 제8기 전국겨울철운동회가 길림성 길림시에서 치러지게 되였다. 직업적 수요로 장지붕은 겨울철운동회에 참가하는 당정요인 명단을 훑어보았다. 그중 경호급별에 속하는 사람은 두 사람 뿐이였다. 한분은 중공중앙정치국 상무위원이며 전국정치협상회의 주석인 리서환(李瑞环)이였고 다른 한분은 제9기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며 중국민주촉진회 명예주석, 중국불교협회 회장인 조박초(((赵朴初)였다. 운동회 개막식은 저녁에 치러지게 되였다. 리서환은 “제8기 전국겨울철운동회 개막”을 선포한 뒤 그 날 저녁에 곧바로 북경으로 돌아가게 되였고 중점경호대상은 오로지 조박초 한사람만 남게 되였다. 문학과 예술을 남달리 애호해온 장지붕은 서화에 특별히 조예를 가지고 있었다. 조박초의 글씨는 천하가 다 알아주는 일품이므로 장지붕은 은근히 이 기회에 조박초한테 글씨를 좀 써달라고 청을 들어볼가말가 망설이게 되였다. 경기 첫날 장지붕은 먼저 일찌감치 길림시 북대호스키장에 가서 조박초를 기다렸다. 조박초가 탑승한 승용차가 도착하자 장지붕은 다가가 맞으면서 차에서 내리는 조박초를 부축해드렸다. 그가 조박초를 부축하고 산으로 올라가는데 길에서 조박초가 느닷없이 그한테 물었다.  “자네는 뭘 하는 사람인가?”  이 물음에 장지붕은 “저는 길림성공안청 청장 장지붕입니다. 이번에 제가 어른의  경호를 책임지게 되였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조박초를 배동하면서 이삼일이 지났다. 장지붕은 가슴 속에서 가까스로 참고 있던 말을 할 때가 되였다 싶어 기회를 타서 이렇게 입을 열었다.  “어른께서 어쩌다가 저희들 길림으로 오시게 되였는데 저는 어르신의 글씨를 경모한 지 퍽 오래되였습니다. 어른께서 이번에 저한테 어르신의 묵보를 남겨주실 수 없겠습니까?” 이 말을 듣고 조박초가 물었다.  “자네한테 무슨 글자를 써주면 좋겠는가?”  장지붕이 “딱 한 글자, 불(佛)자를 써 주십시오.”하고 말하자 조박초는 또 이렇게 물었다. “자네 같은 공안청 청장도 부처님을 믿는단 말인가?” 이 물음에 장지붕은 이렇게 대답했다.      “어르신, 저는 부처님을 믿지 않습니다. 저는 그저 불교를 하나의 학문으로 연구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말을 듣고 조박초는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걷기만 하였다. 장지붕은 그저 이렇게 물러설 수 없기에 다시금 다가갔다.  “어르신, 저는 1960년대부터 줄곧 어르신을 숭배하여왔습니다.” 이 말을 듣고 조박초는 이렇게 되물었다.  “자네는 나의 무엇을 숭배했단 말인가?”  장지붕을 제꺽 이렇게 대답했다.  “중, 쏘 두 나라가 한창 론쟁을 벌이고 있을 때 어르신께서는 라는 시를 쓰지 않으셨습니까? 저는 다 암기해두고 있습니다.”  장지붕은 얼른 조박초한테 그중의 한련을 읊어드렸다. 조박초는 그제야 무언가 흥미를 느끼는듯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여태까지도 그 시대의 시를 기억하고 있단 말인가?”  장지붕은 아예 시의 전문을 조박초 앞에서 읊었다. 기실 장지붕은 그 전날에 벌써 미리 보아두었기에 랑송을 할 때 감정까지 부여하여 읊을 수 있었다. 그러자 조박초도 한껏 기분이 도도하여 길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며 무척 즐거워하였다. 어느날, 장지붕은 텔레비죤뉴스를 보다가 무심결에 리덕수가 판첸라마와 조박초와 함께 앉아있는 화면을 보고 무릎을 탁 치게 되였다. 아이고, 내가 어찌하여 리덕수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가? 이 일을 리덕수한테 부탁하면 도움받을 확률이 커보였다. 장지붕은 곧 펜을 들어 리덕수한테 편지를 써보냈다. 그 시절에는 편지가 주요한 통신수단으로 많이 쓰이였다.     리덕수는 공무가 아니면 다른 사람한테 청을 들기 싫어하는 성격이였다. 리덕수는 조박초를 특별히 공경하였으므로 조박초 앞에서 쉬이 입을 열기 저어되였다. 그런데 또 친구와의 우정을 각별히 소중히 여기는 리덕수로서는 장지붕의 청을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그래서 기회를 타서 조박초를 찾아가 이 일을 회보했다. 조박초는 쾌히  수락하였다. 그런데 조박초가 장지붕한테 써 보낸 것은 외글자 “불(佛)”이 아니라 “불심(佛心)”이란 두 글자였다. 이것은 장지붕한테  “불심”이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가 아니였는지도 모른다.     1985년초, 주정치협상회의에서는 임기완료에 따른 지도부 교체가 있었다. 조봉명이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임명되고 그 전에도 주정치협상회의 2인자였던 리덕수의 오랜 지도자 김승옥은 계속 그 자리에 남게 되였다.     여기엔 이런 에피소드가 있었다. 리덕수가 성에서 연변에 돌아와 연길현에서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김승옥은 주당위 부서기 직무에서 주정치협상회의로 자리를 옮겨 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맡게 되였다. 그 때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은 전인영이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로 된 후 전인영은 년령관계로 물러나게 되였다. 자격이나 급별을 놓고 보아도 김승옥은 에누리없는 주정치협상회의 주석 인선중의 한 사람으로 될 수 있었다. 그 당시 주 다섯개 지도부의 민족구도를 보면 주당위 서기가 조선족이고 주장 황재림도 조선족이고 주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주임 조룡호도 조선족이고 주규률검사위원회 서기 신창순 (申昌淳) 도 조선족이고 오로지 주정치협상회의 주석  전인영만이 한족이였다. 전인영이 물러난 후 만약 김승옥이 전인영의 직위를 잇게 되면 주 다섯개 지도부의 제1책임자직을 몽땅 조선족이 담당하는 구도가 나타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이같은 배치가 합당하지 않다고 판단해 조봉명을 주정치협상회의 주석으로 추천하였다. 조봉명 본인은 주동적으로 리덕수한테 이렇게 말했다. “응당 김승옥동지를 주석이 되게 하고 저는 그 아래서 부주석으로 있으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러더라도 김승옥은 조직의 결정에 복종하여 아무런 원망도 없이 달갑게 계속 2인자 직위에 남게 되였다. 이 일에서 리덕수는 마음속으로부터 김승옥 주석이 보여준 흉금에 더구나 감격하고 탄복하게 되였다. 나중에 리덕수는 여러번 성당위 서기와 성당위 조직부 부장 등 지도자들을 찾아가 김승옥의 급별과 대우문제를 제기하였다. 리덕수의 적극적인 협조와 성당위의 배려하에 김승옥은 드디어 정청급 간부 대우를 향수하게 되였다.     조봉명한테는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있었다. 라창진은 원래 주당위 부서기였는데 사업의 수요에 의해 조직에서는 그를 주정치협상회의에 배치하게 되였다. 이 일 때문에 리덕수는 특별히 조봉명을 세번이나 찾아가 상의한 적이 있었다.     첫번째로 찾아갔을 때 리덕수가 조봉명한테 이렇게 물었다.  “라창진동지를 주정치협상회의에 보내려고 하는데 동의하십니까?”  조봉명은 이렇게 대답했다.  “리서기, 이것은 주당위의 결정이므로 저는 큰 국면에 복종하겠습니다. 게다가 라창진동지는 매우 수준이 있는 분이잖습니까?.”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봉명 주석이 동의하므로 우린 라창진동지를 정치협상회의에 배치하여 사업하도록 하겠습니다.”      두번째로 조봉명을 찾아가 이야기할 때 리덕수는 라창진을 2인자로 배치하여 서렬상 김영만 앞에 놓으면 어떻겠느냐고 건의했다. 이에 대해 조봉명은 부동한 의견을 내놓았다.      “라창진동지가 정치협상회의에 와서 사업하는 데 대해서는 저는 전적으로 동의하며 아무런 이의가 없습니다.  다만 라창진동지를  2인자로 배치하는 건 합당하지 않다고 봅니다. 김영만동지는 해방전에 혁명에 참가한 오랜 간부로서 자격으로 보아도 라창진보다는 더 두터운 분이고 정치협상회의에서 사업한 시간도 퍽 오래 되였습니다. 정치협상회의에서는 리직휴양 간부와 정년퇴직 간부를 배치할 때 모순이 생기면 우선 리직휴양할 간부를 고려하는 게 관행으로 굳어져있는 만큼 이 순위를 뒤바꾸지 않는 게 바람직하다고 봅니다.”     리덕수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는가고 조봉명의 의견을 청취했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라창진동지가 주정치형상회의로 오게 되면 김영만동지 뒤에 배치하는 게 비교적 합당하다고 생각됩니다.”     리덕수는 겸허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의 뜻을 잘 알게 되였습니다. 그럼 돌아가서 다른 상무위원들과 다시 검토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며칠 뒤 리덕수는 몸소 조봉명의 집무실로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동지, 주당위에서는 조주석의 의견에 동의하여 라창진을 김영만 뒤에 배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행정직무는 이렇게 배치하기로 하고 당내직무는 라창진동지한테 당조 부서기직을 맡기는 게 어떻겠습니까?”     조봉명은 이렇게 배치하면 김영만의 당조 부서기 직무를 해임해야 하므로 여전히  합당하지 않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조봉명의 의견을 듣고 리덕수는 잠간 진지하게 생각을 더듬다가 이렇게 말했다.      “조주석동지, 정치협상회의에 당조 부서기 명액 1명을 더 늘이면 어떻겠습니까?”     이 말에 조봉명은 시원히 받아들였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야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다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리덕수가 이렇게 세번이나 주정치협상회의에 찾아와 인사배치문제를 상의하는 것을 보고 조봉명 주석은 주당위 서기의 민주적인 사업작풍에서 잔잔한 감동을 받게 되였다. 기실 이것은 리덕수가 사업과 생활에서 보여준 일관적인 스타일이였다.     부주장 전평선은 1978년에 흑룡강에서 연변으로 전근하여 선후로 돈화현 량곡가공공장 공장장, 량식국 과장, 현당위 정책연구실 주임 등을 력임하였다. 1983년도에 나라에서 기구개혁을 진행하면서 젊은 간부들을 선발하게 되였는데 중앙에서 처음으로 지도부 건설에서의 ‘3화(년소화, 지식화, 전업화)’ 표준을 제기하면서 전평선은 40세에 돈화현당위 부서기로 임명되게 되였다. 1985년 기구개혁이후 전평선은 돈화에서 화룡으로 전근되여 현장을 맡게 되였다. 전평선이 화룡현에 와서 현장이 된 후 일을 본때 있게 해내여 간부와 대중들로부터 긍정을 받았고 선후로 화룡현당위 서기, 룡정현당위 서기, 주정부 부주장을 력임하게 되였다. 전평선은 이렇게 회고했다. “어디까지나 공적인 립장에서 출발하여 열심히 일을 하다가 혹시 사업중에서 이러저런 실수가 나타난다 하더라도 리덕수 서기는 언제나 걱정해주고 그를 대신해 말해주면서 공적과 과실을 분명히 갈라놓고 객관적이고도 공정하게 평가해주었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무형의 에너지로 되여 대담하게 사업하고 좋은 성과를 따내도록 밀어주었습니다.”     연변대학 전임 교장 김병민은 이렇게 회고했다. 연변대학의 김성걸이란 선생님이 담관암에 걸렸는데 리덕수가 이 소식을 듣고 여기저기에 수소문하여 동충하초를 구해서 인편으로 김성걸한테 보내주었다. 그 때 리덕수동지는 이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는데 그렇게 높은 직위에 있는 간부가 모교의 한 평범한 선생님하테 쏟는 관심에 깊은 감동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동지가 북경으로 전근되여간 이후에 연변대학에서 병에 걸린 교직원들이 끊임없이 그를 찾아가도 그는 조금도 시끄러워하는 기색이 없이 언제나 사처에 전화를 걸어 인맥을 찾아 그들이 입원하고 병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연변대학 전임 부교장 정판룡(郑判龙)교수가 암에 걸려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리덕수는 자주 찾아가 문병을 하고 위문을 하였기에 나중에 301병원 간호사나 의사들도 모두 리덕수의 신분에 대해 익숙하게 되였다. 한번은 한 간호사가 리덕수를 보고 “당신은 환자의 가속이지요?” 라고 묻기까지 하였다는 후문이다.  김병민은 고향사람들과 모교 선생님들에 대한 리덕수의 이같은 일편단심은 생각만해도 가슴이 뭉클해난다고 감격을 터놓았다.  리덕수는 항상 상냥하고 친절하여 가까이하기 매우 쉬운 사람이였지만 자기 자신에 대한 기준은 지극히 엄격하였다. 다른 사람들 보기에 하찮은 일도 리덕수는 그저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 손동식의 회억에 따르면 그가 연변대학 교장으로 있을 때 리덕수가 큰 수술을 받은 적이 있었다. 이 소식을 듣고 손동식과 많은 교우들은 무척 마음을 조이였다. 학교에서 북경에 사람을 보내 자그마한 성의라도 전하려고 하자 리덕수는 손동식한테 전화를 걸어 애초에 밀막아 버렸다.  “손교장선생님! 저는 저에 대한 모교의 배려를 더없이 고맙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교장선생님이나 저 모두 공산당원이 아닙니까? 액수가 적든지 많든지를 떠나서 저는 절대 그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현인은 리덕수가 연변에서 주당위 서기로 있을 때부터 시작하여 장춘에 가서 부성장, 나중에 중앙통전부 부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당할 때까지 줄곧 리덕수의 비서로 있었다. 나중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경제사 사장으로 있다가 전국공급판매합작총사에 전근되여 부주임을 담임하게 되였다. 그의 회고이다.      “리덕수동지가 주당위 서기로 있을 때나 부성장,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으로 있을 때나를 막론하고 그의 집으로는 누구나 다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찾아다니는 군중들도 그의 집으로 찾아오군 하였습니다. 그의 집에서는 제때에 저녁을 먹을 때가 거의 없었습니다. 리덕수동지의 집이 장춘에 있을 때 그의 부인 박춘자는 늘 찾아오는 사람들을 접대해야 했습니다. 기차표, 비행기표를 사고 주숙을 배치하고 큰 병원에 가서 의사를 찾고 등록하는 등등 자질구레한 일에 다 리덕수동지를 찾아오군 하였습니다. 어떤 이들은 리덕수한테 그렇게 높은 벼슬자리에 계시는 간부가 이런 시시껄렁한 일들에 아예 참견하지 말라고 권고하면 리덕수는 관여 안해서는 안되거니와 관여할 수 있는 일은 관여해야 한다고 딱 잘라 말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찾아오는 것은 그들이 나를 생각하고 있으며 또 나를 믿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데 어찌 나 몰라라 하겠는가. 리덕수동지의 말씀이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리덕수동지가 북경에 전근된 다음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동료들이 ‘우리 리주임은 정말 정이 많은 분인가 봅니다.’ 라고 말하자 리덕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아닙니다. 이것은 진정 저의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거야말로 고상한 품덕’이라고 말하지면‘아닙니다. 이것은 저의 성격에서 비롯된 것입니다.’하고 일축했습니다. ”                        석별의 정을 안고           이제 리덕수는 곧 연변을 떠나게 되였다. 그는 연변의 산과 물, 그의 동포들이 살고 있는 고향땅, 더구나 연변의 간부와 대중, 그리고 정든 고향 사람들에게 깊은 미련을 가지고 있었다.     1990년 11월 24일, 리덕수는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주직속기관 책임자회의에서 마지막으로 고향 연변에 대한 그의 석별의 정을 풀었다.     그 때는 벌써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전근되여 임직하게 된다는 임명장이 하달되였기 때문에 성당위에서 절차에 따라 이미 리덕수의 연변주당위 서기 직무를 해임한 뒤였다.      1990년 11월 23일, 리덕수는 성당위 서기 하죽강과 함께 신임 연변주당위 서기 장덕강을 배동하여 연변으로 돌아왔다. 리덕수는 이번에 연변에 돌아오면서 두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는 정식으로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고향에 돌아와 다년간 얼굴을 맞대고 함께 지냈던 친구들과 그를 관심해온 각계 인사들과 속심의 말을 나누면서 여러 사람들과 정식으로 작별의 인사를 나누려는 것이였고 다른 하나는 중앙과 성당위의 결정에 근거하여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을 주관하게 된 것을 환영하는 것이였다. 리덕수는 장덕강과 다년간 함께 일해온 오랜 전우였다. 리덕수는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장덕강이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게 된 것을 진심으로 환영했다. 그래서 그는 연변에 돌아와 친히 장덕강을 환영하려고 하였다. 바꾸어말하면 고향 땅에서 친히 장덕강을 영접하고 싶은 게 리덕수의 소망이였다.      주직속기관 간부대회에서 리덕수는 많은 속심의 말을 털어놓았다.  “오늘은 11월 24일, 저의 기억에 의하면 제가 작년에 성에 가서 사업하게 되여도착한 날도 바로 오늘과 같은 11월 24일이였습니다. 다시말하면, 딱 1년 전인 작년 겨울에 제가 연변을 떠나게 되였습니다. 어쩌면 력사의 우연한 일치가 아닌가 싶습니다. 어느덧 제가 성에 가서 사업한 지도 벌써 옹근 1년이 되였습니다.” “어제 저는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 가서 사직보고서를 제출하였습니다. 오늘 오후에 성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에서는 저의 길림성 부성장 직무를 해임하는 결정을 채택하게 될 겁니다. 이렇게 되면 저의 길림성 부성장의 사명과 저의 연변주당위 서기의 사명도 오늘로 끝나게 됩니다. 작년에 연변을 떠나 성으로 갈 때 저는 저의 심경을 솔직하게 밝힌 바 있습니다. 저의 개인적 감정으로 말하면 저는 정말 연변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연변은 저의 고향이고 연변의 당조직과 인민대중들이 저를 배양하였고 저를 교육하였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제가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주의 오랜 지도자들과 이 자리에 계시는 여러분들과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이 저의 사업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었습니다. 여러분들이 저를 아끼고 배려하며 저를 지지하고 저를 도와주었기 때문에 저는 그나마 당이 저한테 맡겨준 각항 사업임무를 원만히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동지들한테서 많은 것을 배우면서 지식과 재능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연변 200여만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나아가 연변의 산천초목에도 심후한 감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연변은 저를 낳아주고  키워준 고장입니다. 저는 장백산기슭에서 태여나고 자라난 장백산의 토배기 아들입니다. 저는 고향을 사랑하고 고향의 사업을 사랑하며 앞으로 어느때 그 어디에 있거나를 막론하고 한평생 고향에 자기의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고 싶습니다.”    리덕수는 그의 사업을 인계받게 되는 장덕강에 대하여 열정적이면서도 성근하게  높이 평가해주였다. 그 속에는 장덕강에 대한 자신의 간절한 기대도 들어있었다.      “장덕강동지는 연변 정황을 매우 익숙히 알고 있으며 연변 동지들도 장덕강동지에 대해 매우 익숙히 알고 있습니다. 장덕강동지는 대학문화수준을 갖고 있는 데다가 실천경험까지 갖고 있으며 기층사업경험이 있는 데다가 중앙사업경험까지 쌓고 있기에 덕재가 겸비하고 젊고 유망한 간부입니다. 장덕강동지는 수준이 있고 능력이 있으며 패기가 있고 과감한 개척정신이 있습니다. 장덕강동지가 어디에 가면 그 곳 사업이 곧 활기를 띠게 된다는 평판을 받으리 만치 능력 있는 간부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전임 서기로서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게 된 것을 마음속으로부터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는 이 자리에 있는 동지들과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도 모두 장덕강동지가 연변에 돌아와 사업하는 것을 환영할 것이며 기필코 전력을 다해 장덕강동지의 사업을 지지하리라고 확신합니다.” “오늘 여기서 연변은 소수민족지구이자 변강지구이므로 연변에서 변강의 안정과 민족단결 이 두 가지는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한번 말하고 싶습니다. 민족단결이란 이 문제상에서 저는 단결은 곧 각오이고 단결은 곧 수준이며 단결은 곧 힘이고 단결은 곧 안정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단결하여야 발전할 수 있고 단결하여야 번영할 수 있으며 단결하여야 더욱 아름답고 찬란한 연변의 미래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는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이 장덕강동지를 위수로 하는 연변주당위의 령도하에서 한마음한뜻이 되여 단결분투하면 기필코 더욱 휘황찬란한 성과를 따내게 되리라고 확신합니다!”      리덕수가 주석대 맞은켠에 앉아있는 간부들한테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리자 장내에서는 박수소리가 오래동안 끝이지 않고 터져나왔다. 그 박수소리 속에서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에 맺힌 이슬을 볼 수 있었다.        리덕수의 눈시울도 축축히 젖어들었다.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12월호 ]      
31    연변문학 특별기획(5) 리덕수의 고향사랑 댓글:  조회:1181  추천:1  2019-01-05
연변문학 특별기획(5)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민족문화의 수호자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한이래 주당위, 주정부 지도부 성원들과 같이 주로 몇가지 사업을 중점적으로 틀어쥐였다. 첫째로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사업을 틀어쥐였다. 둘째로 개혁개방이였다. 세번째로 경제건설이였다. 네번째로 연변의 문화 교육사업발전 사업을 틀어쥐였다. 문화에 대해 리덕수는 자기 나름 대로의 독특한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력사적 관점으로 보면  그 어떤 국가나 민족이나를 막론하고 그들의 력사가 곧 그들의 문화를 결정한다. 이른바 민족문화라면 각 민족이 력사발전과정에서 창조하고 발전시킨 본 민족의 특색을 지닌 문화를 말한다. 문화는 곧 그 민족의 정신이고 령혼이며 그 민족의 혈맥이고 그 민족의 정신적 고향이다. 보다싶이 우수한 민족문화를 지속적으로 이어나가고 계승발전시키는 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놓고 말하면 지극히 중요한 사업이다. 중국조선족은 예로부터 문화를 숭상하고 예술을 사랑해왔다. 조선족문화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무궁무진한 매력을 갖고 있고 나아가 인류의 문명과 진보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아울러 혁명과 건설, 개혁개방의 각 력사 시기에 인민들이 앞으로 나아가도록 힘을 주고 인민의 위업을 구가하는 특수한 역할을 발휘하였다. 리덕수는 개혁개방은 엔진이고 경제발전은 중심이며 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한 민족, 한 사회의 령혼을 고수하는 작업이라고 보았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시종일관 문화사업에 깊은 중시를 돌리였다. 그는 크고 작은 회의에서 늘 간부와 대중들에게 문화의 전승과 발전이 없으면 경제사업도 지속적으로 발전하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리덕수는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는 사이에 어느 문화예술단체는 마땅히 보호하고 부추겨주어야 하고 또 어느 문화예술단체는 마땅히 풀어주어 그들로 하여금 시장화의 길을 탐색하게 해야 한다는 구체적인 로선도 그려주었다. 그 당시 연변의 많은 문예단체들의 경우 인원이 많은 대신 공연이 적어 재정보조에 의해 살아가고 있었다. 리덕수는 문예단체들이 안정을 확보하면서도 개혁을 탐색하는 방안을 밀고나갔다. 그는 문화예술분야에서 힘있게 민주를 발양하여 작가, 예술가들에게 느슨하고 자유로운 창작환경을 마련해주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여기에는 작가, 예술가들의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시대적 요구에 손색이 없는 훌륭한 작품을 창작하도록 고무격려해야 한다는 깊은 의미가 들어있었다.  리덕수의 이러한 사유는  문학예술계에서 진정어린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였다. 작가, 예술가들은 사상을 해방하고 과감히 혁신하였고 창작의욕이 젠에 없이 끓어올라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창작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전통적인 민족문화에 대해서도 각별한 중시를 돌리였다. 리덕수 자신은 조선족 전통문예작품 가운데서 두개의 작품을 제일 반기였는데 하나는 《춘향전》이고 다른 하나는 《심청전》이였다. 리덕수는 어렸을 때 이 두 작품을 읽어 보았고 젊었을 때도 또다시 한번 읽어 보았으므로 매우 깊은 인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조선족의 미덕이 모두 이 두 작품에 체현되여있다고 보았다. 연변가무단에서 《춘향전》을 무극으로 개편하게 되였는데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는 이 무극이 아직 최종적으로 채 완성되지 못하였다. 1990년에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 사업하면서 문화교육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는데 그 때 그는 연변가무단에 80만원이란 자금을 해결해주었다. 그 때의 80만원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나중에 이 작품이 전국에서 최고의 영예인 문화상(文华奖)을 타게 되였다. 그 당시 문화부와 문화예술계에서는 이 작품을 상당히 높게 평가하고 있었다. 《인민일보》도 관련 평론글을 발표하였다. 그 시기에 창작된 무극 , 가극 ,무용서사시 ,연극   등 작품들은 모두 오랜 세월을 두고 감상할 수 있는 예술명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리덕수는 연변지구의 기타 민족 문화예술에 대해서도 특별히 관심하고 배려해주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연변평극단의 생존여건은 매우 곤난하였다. 리덕수는 상황을 료해한 후 연변평극단 단장 하원매(夏元梅)를 찾았다.  “ 만약 극단이 기업과 손을 잡고 련합경영을 해볼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하원매는 그 때 리덕수의 이 말을 듣고 경천동지라고 할 만큼 충격적인 느낌을 받았다고 한다. 문예가 무대를 만들어놓으면 경제가 나와 춤을 춘다는 말은 그 몇해  뒤에야 나온 슬로건이였다. 더구나 하원매로서는 놀랍게도 연변평극단에서 매번 새로운 종목의 리허설이거나 대형작품을 내놓게 될 때 심의해달라고 청을 들면 리덕수는  번마다 손에 잡혀있던 일들까지 다 제쳐놓고 친히 현장에 찾아왔다. 그 당시 연변가무단과 연변평극단을 합병시키자는 의견도 있었는데 리덕수는 견결히 동의하지 않았다.  “모든 민족은 모두 자기의 문화가 있으므로 두 민족의 문화는 모두 보호받아야  하며 두 민족의 문화는 서로 추진하고 서로 배우면서 서로 거울로 삼고 다 함께 진보하고 다 함께 발전하며 다 함께 번영을 이루어야 합니다.” 문화의 보호와 발전에 대해 리덕수는 정부가 응당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하므로 정부가 문화를 보호하고 발전시키고 번영시키는 면에서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방에서 사업하면서 문화적 리념이 없어서는 안된다는 게 그의 일관된 주장이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을 때 주동적으로 문예계의 작가, 예술가들과 친구로 사귀였다. 지휘가 박우(朴佑)도 그 속에 들어있다. 박우는 호쾌하고 시원시원하였고 그의 지휘풍격은 신 들린듯 무아경에 빠져 분방하기 그지없었다. 리덕수는 일찍 대학에서 공부할 때 박우를 알게 되였고 그가 지휘를 맡은 공연을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미술계의 석희만(石熙满)도 리덕수의 친구였다. 석희만은 오른손이 없어 왼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그가 그린 그림은 개인적인 색채가 지극히 짙었다. 박우와 석희만은 사회주의교양운동 때 리덕수와 같은 공작조에 있었는데 그들의 우정은 줄곧 변함없이 이어졌다. 작가 리근전(李根全)은 조선족이였지만 그는 조선문으로 글을 쓰지 못하기에 그의 소설들은 모두 한어로 쓴 다음에 다시 역자를 찾아 조선문으로 번역한 것이였다. 리덕수는 그를 보고 《주덕해전》을 쓰라고 부탁하였다. 리근전은 이를 수락하였고 여러번 리덕수의 집무실에 찾아와 자기의 창작구상을 들려주었다. 나중에 리근전과 주덕해의 부인 김영순(金永顺)의 공동한 노력 끝에 드디어 이 책이 완성되였다. 저명한 작곡가 정률성(郑律成)의 사적을 료해하기 위해 리덕수는 정률성에 관한 자료들을 몽땅 찾다싶이 해서 읽어보았다. 제1차 ‘정률성음악회’는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 치러지게 되였다. 이 음악회는 주당위 선전부장 리정문의 제의로 기획되였다.  리정문은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을 지닌 열성가로서 민족문화의 전승과 발전에 모든 정력을 몰붓고 있었다. 리정문한테 이  음악회를 치르려면 돈이 얼마나 수요되느냐고 물어 40만원이 수요된다고 하자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비준해주었다. 정률성음악회 첫공연이 막을 올릴 때 리덕수는 친히 관객석에 자리했다. 리덕수의 오른 편에는 정률성의 부인 정설송(丁雪松)이 앉고 그 곁에는 그의 딸 정소제(郑小提)가, 리덕수의 왼편에는 군부대 수장이 앉았다. 그 날은 부대 문예일군들도 대거 참가했다.  , ,  등 작품을 연주한 다음 연길시 유치원 어린이들이 무대에 올라가 아동음성으로 정률성의 작품을 노래했다. 이 노래을 듣다가 심양군구 수장이 먼저 흐느꼈다. 그러자 정설송과 정소제도 울기 시작했다. 이렇게 하나하나 감화되면서 모두 다같이 울음을 터뜨리게 되였다. 이러한 정경을 보고 리덕수도 울음을 참을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의 공동한 감정이 마구 한데 어우러졌기 때문이였다. 군부대 수장이 울음을 터뜨린 것도 아마 이런 감정이 내포되여 있었을 텐데 이것은 가슴속에 맺혀 있던 감정의 일종 방출이였고 가슴속에 깔려있던 울분의 로출이였다. 사람들은 모두 정률성을 한없이 그리는 감정을 품고 있었는데 만약 그런 감정이 없었다면 이런 울음판이 벌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움과 경모의 마음, 그리고 가슴 저미는 아쉬움 등 여러가지 감정이 한데 얼키고 설킨 감정이였다. 그 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리덕수는 침대에 누워서도 좀처럼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문예의  힘이란 바로 이렇게 엄청난 것이였다. 그 때로부터 리덕수와 정소제네 두 가정은 깊은 우정을 쌓게 되였고 서로 자주 오가면서 련계를 이어왔다. 정소제는 1943년생이였다. 정률성은 조선족이고 정설송은 한족이였다. 정률성이 연안에서 창작하고 지휘한 대합창에 정설송이  감동을 받으면서 그들은 차츰 련정이 생겨 나중에 연안에서 결혼했다.  정설송은 2011년 5월에 북경에서 별세했는데 향년 93세였다. 정설송이 입원하고 있는 기간에 리덕수는 특별히 병원을 찾아 위로하였다. 정설송은 신중국의 첫번째 녀성 대사로서 선후로 네드란드와 덴마크에 가서 대사로 있었다. 1996년에 정설송은 한국국립’국악원’의 초청을 받고 한국을 방문하였고 친히 정률성의 고향인 광주도 찾아보았다. 정소제의 남편 김인섭도 조선족인데 무한군구의 중장이였고 성도군구 부사령원으로 있다가 정년퇴직하였다. 그는 연변 룡정태생이였다. 리덕수가 룡정에서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김인섭의 형님은 룡정현공안국 국장이였고 김인섭은 야전군 모사단 사단장이였다. 중월자위반격전 때 그의 사단은 공을 크게 세워 등소평으로부터 ‘전군영웅사단’으로 명명되였다. 전투가 끝나고 철수하게 되였을 때 김인섭은 문예활동으로  부대의 사기를 고무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였다. 그는 그 때 주당위 서기였던 리덕수한테 편지를 띄워 도움을 청했다. 리덕수는 곧바로 연변가무단 배우들이 전선에 가서 공연하도록 배치하였다. 가무단이 돌아온 후 김인섭은 또 리덕수한테 편지를 보내 사단본부에서 가무단을 세우려고 하는데 리덕수더러 좀 도와 달라고 청을 들었다. 그리하여 사단 문공단을 설립하는 데 연변에서 20여명 배우를 데려다게 되였다. 2010년에 할빈시에서는 정률성음악회를 치르면서 모처럼 리덕수를 초청했다. 할빈시당위 상무위원이며 선전부장인 박일(朴日)도 조선족이였다. 그는 음악회 프로그람을 미리 리덕수한테 보여주었다. 리덕수는 그 프로그람을 하나하나 훑어보고 나서 이렇게 건의했다.  “박부장동무, 동무네는 한개 종목을 더 보충해야 할 것 같습니다.” 이  말에 박일은 너무도 뜻밖이라는듯 이렇게 물었다.  “무슨 종목을 더 넣어야 할 것 같습니까?”  “정소제더러 무대에 올라가 를 연주하게 하십시오. 그리고 할빈시에서 가수 한분을 불러 정소제의 피아노반주에 맞춰 를 부르게 하면 예상 밖의 효과를 볼 수 있으리라 기대됩니다.”  이 때 그들의 곁에 잠자코 앉아있던 할빈군분구 정치위원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는 키가 훤칠한 장신의 사나이였는데 먼저 군례를 올리고 자진해 청들었다.  “이  노래는 제가 부르게 해주십시오. 작년에 연안당교에 가서 학습할 때 일부러  이 노래를 배우면서 저는 이 노래에 무척 정들게 되였습니다. 정소제와 한두번만 맞춰보면 곧 무대에 오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도 뜻 밖이라 박일은 기쁜 김에 그 자리에서 무릎을 탁 쳤다. “좋습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걸로 합시다.”  리덕수는 박일한테 또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정소제는 연안에서 태여났습니다. 당시 연안의 경제상황이 너무도 어려워서 정설송은 정소제를 키우기 위해 남편이 제일 아끼던 바이올린까지 팔아야 하였답니다. 정률성이 전선에서 돌아와 그 바이올린이 보이지 않자 정설송한테 물어보아서야 그 바이올린이 이미 팔렸다는 걸 알게 되였답니다. 그래서 정률성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그럼 이 애의 이름을 소제(小提)라고 지읍시다.’소제란 이름의 유래입니다. 이번 이 음악회에서 이 일을 상기시키면 정말 기념의의가 있으리라고 보아집니다. 그러므로 정소제가 무대에 오르기 전에 사회자가 당년에 정률성이 어찌하여 딸애의 이름을 정소제라고 지었는지를 간략하게 소개하면 분위기를 더 끌어올릴 수 있겠습니다.”  박일은 너무도 고마워서 연신 머리를 끄덕였다.  “리부장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알겠습니다.” 점심식사를 마치니 벌써 한시가  다되였다. 공연은 오후 2시로 예정돼있었다. 정소제와 그 정치위원은 말 그대로 두번만 련습해보고 무대에 올랐다. 예상한 대로 사회자가 무대에서 정소제를 소개하면서  “정소제”란 이름의 유래를 들려주자 관객들은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내였다. 이어 정소제가 무대로 오를 때 관객들의 박수소리는 거의 1분동안이나 이어졌다. 정소제의 피아노연주가 정말 훌륭한 데다 금상첨화로  군분구 정치위원마저 참 노래를 격동적으로 불렀다. 다같이 가슴이 울렁거려 그가 노래를 부를 때 관객들도 다 함께 따라 부르면서 극장의 분위기는 화끈하게 끓어올랐다.  그 날 이 종목이 그 무엇보다도 음악회를 들썽해놓았다. 정률성과 그 일가에 대한 관심 속에서 우리는 혁명선렬에 대한 리덕수의 심심한 추모의 정과 무한한 경모의 정 그리고 예술가들을 열애하는 정감을 볼 수 있다. 항일전쟁시기, 해방전쟁시기와 항미원조시기에 연변에서 입대하고 참전한 사람들이 특별히 많은 만큼 혁명렬사들도 그만큼 많았다. 저명한 시인 하경지(贺敬之)가 연변에 와서 “산마다 진달래가 꽃피고 마을마다 렬사비가 서있네”라고 쓴 시구는 연변의 력사에 대한 진실한 묘사라고 할 수 있었다. 피로 얼룩진 100여년의 풍상고초를  다 겪어내면서 혁명전쟁년대에 연변인민들은 군대에 입대하고 참전하는 것을 영광으로 간주하였고 혁명을 위해 한목숨 바치는 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였다. 연변인민들이 선렬들을 경모하고 선렬들을 추모하면서 성심성의로 렬사가속들을 우대하는 것은 이미 대를 이어 전승되여 내려온 문화로 자리 잡았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을 때에도  늘 이 력사를 이야기하였고 나중에 북경에 가서도 잊지 않았다. 그는 자기의 나라를 사랑하고 자기의 민족을 사랑하며 앞사람이 쓰러지면 뒷사람이 뒤를 이어 용감하게 몸바쳐 싸운 것이 다름 아닌 하나의 연변의 문화라는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중국조선족의 첫 공산당원은 룡정현에서 태여난 한락연(韩乐然)이였다. 한락연은 중국공산당의 걸출한 정치활동가이자 중국혁명의 선구자였고 중국조선족의 혁명선구자였으며 아울러 중국조선족문화를 대표할 수 있는 걸출한 인민예술가였다. 리덕수는 정치적 측면에서 한락연의 ‘다섯가지 첫번째’를 개괄해냈다.  첫째, 한락연은 1923년에 입당한 중국조선족의 첫번째 공산당원이다. 둘째, 1925년 한락연은 동북 심양에서 첫번째 당지부를 건립하였다. 셋째, 한락연은 흑룡강 목단강에 우리 당의 동북국제련락처를 건립하였다. 넷째, 국공합작시기 한락연은 우리 당의 지하공작자로서 우리 당이 파견한 중국조선족의 첫번째 국민당 소장이였다. 나중에 국민당한테 발각되여 3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가 동필무 등 당의 지도자와 리제심(李济深) 등 국민당 군정요원들의 적극적인 구조에 힘 입어 마침내 구출되여 나올 수 있었다. 그런데 국민당은 그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고 서부에 남으라고 강요했기에 란주에 남아있게 되였다. 이것은 한락연이 그 후에 창작한 작품들이 모두 청해, 신강, 서장 등 서부 소수민족지역을 반영하게 된 배경이다. 다섯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으로는 ‘공산국제’에 참가한 첫번째 국제주의전사로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혁명전쟁에 참가하였다. “예술적 측면에서 한락연의 사위 강기민선생이 한락연에 대해 ‘다섯가지 첫번째’를 개괄하였는데 아주 잘 도출했다고 보아집니다.” 리덕수가 가리킨 강기민선생이 개활한 ‘다섯가지 첫번째’란 이러하다. 첫째, 한락연은 중국 미술계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첫번째 조선족 혁명예술가였다. 둘째, 한락연은 중국 동북에서 첫번째로 정규적인 미술학교를 창설한 중국조선족 미술교육가이다. 셋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첫번째로 프랑스를 류학한 저명한 화가이다. 그는 서방예술과 동방예술을 결합하여 예술작품창작에서의 독특한 풍격을 형성하였다. 넷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신강 키질벽화를 연구한 첫번째 화가였다. 다섯째, 한락연은 중국조선족 속에서 서북인민들의 생활을 소재로 창작을 진행한 첫번째 현대예술가였다. 국외에서는 한락연을 ‘중국의 피카소’라고 평가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주은래 총리께서 친히 회시를 내려 그들의 일가를 서북에서 북경으로 데려왔다. 한락연의 부인은 남방사람이였다. 신중국이 창건된 후 주은래 총리는 친히 그의 사업을 배치해주었고 등영초도 그의 생활에 깊은 관심을 돌렸다. 리덕수는 한락연을 아주 대단한 인물이라고 평가하면서 반드시 그의 사적을 잘 선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리덕수는 한락연이란 이 혁명력사인물에 대해 인식, 인식, 재인식 하여야 하고 연구, 연구, 재연구하여야 하며 선전, 선전, 재선전해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한락연의 사위는 건국 후 마카오주재 중국 첫 책임자였다.  한락연의 작품들은 한락연의 부인이 집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몽땅 국가에  기부하면서 지금은 모두 중앙미술관에 수장되여 있다. 당창건 90돐을 맞이하여 중앙미술관에서는 특별히 한락연미술작품전시회를 치렀다. 리덕수는 한락연의 고향인 연변 룡정에서 열린 한락연연구포럼에서 연설을 발표한 적이 있었는데 나중에 이 연설이 조선족 대중들한테 깊은 영향을 주게 되였다. 연변의 많은 젊은이들이 중국혁명력사에 이처럼 걸출한 조선족 혁명가 있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으니 그럴 법도 하였다. 리덕수는 그 회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저는 오늘 한락연의 가속들과 함께 이 뜻깊은 기념활동에 참가하게 된 것을 더없이 기쁘게 생각합니다. 이 활동은 기실 잊혀져가거나 사라져가고있는 력사와 문화를 다그쳐 되살리고 혁명전통을 전승하고 민족문화를 높이 추켜들고저 하는 움직임입니다. 한락연은 우리 중국조선족의 걸출한 혁명가이고 정치가이며 동시에 걸출한 예술가, 미술교육가이고 사회활동가였습니다. 그러므로 룡정시에 한락연기념관과 한락연공원을 세우는 것은 자못 큰 의의가 있다고 판단됩니다. ‘과거를 망각하는 것은 곧 배신을 의미합니다!’우리가 력사를 망각하게 되면 그것은 곧 력사에 대한 배신이며 자기의 문화를 망각하는 것은 자기의 령혼을 버리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지금 적잖은 사람들, 특히는 젊은이들이 한락연을 잘 모르고 있는데 이는 가슴 아픈 일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한창 다그치고 있는 이 응급구조사업은 매우 중요합니다. 룡정시는 한락연의 고향이자 그가 태여난 고장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룡정은 중국조선족문화, 중국조선족교육의 요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룡정은 우리 중국조선족력사의 축도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일찍 우리 중국조선족이 중국혁명을 위해 아주 중요한 기여를 하였고 수많은 혁명렬사들이 희생돠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룡정의 혁명력사는 영광으로 가득차있습니다. 룡정에서 성장한 혁명간부, 혁명지식인과 혁명예술가들이 매우 많습니다. 룡정시에서 한락연을 기념하는 활동들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응당 해야 할 일이며 매우 적시적인 일입니다. 우리는 한락연이란 혁명렬사에 대해 보다 충실하고 보다 전면적이며 보다 깊이 있게 평가해주어야 합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한락연처럼 특수하게 싸워온 혁명선렬들의 공적을 제대로 잘 조명하여야 하겠습니다. 저는 한락연렬사연구회를 설립하는 것을 찬성합니다. 연구회를 설립할 때 지도간부와 연변대학의 전문가와 학자들을 망라한 명인들을 고문으로 모셨으면 하고 건의하고 싶습니다. 또 북경에 가서 오랜 동지들을 찾아서 정황을 료해할 것을 건의합니다. 이를테면 염명복(闫明复)은 중국공산당의 정보 전문가였던 염보항(阎宝航)의 아들입니다. 염보항과 한락연의 관계가 매우 밀접했는데 이들 두 사람은 기실 모두 우리 당의 지하정보 일군이였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사람들이 한락연의 사적을 발굴할 때 이다지도 힘들다고 탄식하겠습니까? 당연히 그의 사업성격의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락연의 사위인 강기민대사의 관점에 동감입니다. 한락연은 정치면에서나 예술면에서 시종일관 개척적으로 일해왔습니다. 심양에서 동북의 첫 미술전문학교 창설 등을 례로 들 수 있습니다. 현재 한락연공원 1기 공사가 이미 마무리되였는데 이것은 룡정을 민족문화성으로 건설하는데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이 기초우에서 한락연기념관을 세우고 한락연공원 2기공사까지 마무리하게 되면 더욱 기대에 가까워지리라 추정됩니다. 저는 할빈시당위 서기를 보고 ‘당신네는 정률성과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되여 정률성기념관을 세우게 되였습니까?’하고 물은 적 있습니다. 그의 대답은 이러했습니다. ‘할빈이 문화대성인 만큼 응당 도시의 품위를 높여야 하지 않겠습니까?’할빈시당위 서기의 이 견해는 정중하고 명지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제라도 정률성기념관을 참관하고 그들의 경험을 배워와야 하겠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하는 이야기인데 저는 예전에 정률성에 대한 선전은 세가지 측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즉 영화 한부를 촬영하고 책 한권을 출판하고 기념관 하나를 세워야 한다는 겁니다. 영화는 이미 촬영되였고 책은 한창 집필중에 있습니다. 예상외로 기념관을 세우는 것은 할빈에서 앗아갔습니다. 그럼 한락연도 이렇게 세가지 공정을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하나는 차원 높은 한락연전기를 출판하고 영화 한부를 촬영하고 또 다른 하나는 기념관을 세우는 것인데 동무들이 이미 실행하였습니다. 한락연공원을 세우는 것을 저는 미처 생각지 못했는데 룡정시에서 생각하고 이미 건설했으므로 이젠 세개 공정이 아닌 네가지 공정으로 목표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오늘 주당위 상무위원도 이 자리에 와 계시는데 저는 주당위와 주정부에서 이 일을 중시할 것을 건의하면서 이 활동은 룡정시의 행위만이 아닌 우리 연변조선족자치주의 행위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리덕수의 이 연설은 생동하고도 감동적이였으며 혁명선렬들을 심심히 추모하고 혁명력사를 더없이 존중하며 혁명력사의 픙부한 내함에 대해 남다른 리해를 갖고 있는 리덕수의 내심세계를 진솔하게 표달한 것이였다. 이처럼 리덕수는 선렬문화, 민족문화, 혁명력사문화에 무한한 감정을 쏟아왔다. 나중에 리덕수는 북경에서 기업가의  자금을 협찬받아 한락연동상을 정교하게 제작하여 지금 한락연의 고향인 룡정시 한락연공원에 세우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있는 동안 기회만 있으면 중국혁명력사, 혁명선렬들의 영웅사적, 조선족의 우수한 민족전통과 민족문화, 중국조선족의 력사특점, 현실특점과 민족정신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목적은 사람들한테 민족적 자호감을 부여하고 민족의 자존자강정신을 수립시켜주려는 데 있었다. 리덕수는 특히 간부와 대중들에게 연변의 력명력사와 유구한 전통을 가진 연변의 민족단결력사를 즐겨 이야기해주었다. 연변 지구의 학교들에서 어느 언어문자로 교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  리덕수는 조선어와 한어 이 두가지 언어문자를 사용해야 한다고 명확히 지적하였다. 이 면에서 리덕수는 진정하게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적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연변의 중소학교들에서는 수업을 할 때 줄곧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할 때처럼 두가지 언어, 두가지 문자, 즉 조선어, 조선문과 한어, 한문을 사용하고 있다. 리덕수는 조선족 지도간부들한테 모처럼 강조한 바 있다.  “조선족들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잘 계승하고 잘 배우고 잘 사용해야 할뿐만 아니라 한어와 한문도 잘 배워야 합니다. 특히 우리의 후대들은 본 민족의 언어문자를 잘 배우는 동시에 반드시 한어와 한문도 능란하게 배워야 합니다. 이래야만 아이들의 앞날은 더욱 활짝 트일 수 있으며 사회라는 이 큰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한 사람이 자기 민족을 사랑하고 자기 민족문화를 사랑하는 것은 그가 지니고  태여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응당 부동한 환경에서 살아가고 발전하는 것도 배워야 합니다. 중국이란 이런 대환경 속에서 살아가려면 조선족은 마땅히 두가지 언어, 두가지 문자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하고 두가지 문화가 서로 어울리는 환경에서 성장하고 진보해나가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으로 실사구시한 태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나중에 리덕수가 북경에 가서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임한 이후에 내려보낸 문건중에서 가장 뚜렷하게 강조한 것은 소수민족지역에서는 반드시 두가지 언어문자를 다같이 배우고 다같이 틀어쥐어야 한다는 것이였는데 이것은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에 쌓은 경험에서 왔다고 할 수 있다. 리덕수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고 있을 때 그는 문화 교육사업뿐만 아니라 연변의 체육사업에도 남다른 관심을 보이였다. 리덕수는 체육운동을 보급하고 인민들의 체질을 증강시키는 것을 주당위의 중요한 사업으로 간주하면서 꾸준히 밀고나갔다.  연변의 대중체육운동은 매우 두터운 토대를 갖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이전의 연변축구팀은 이미 전국에서 명성을 떨치였다. 그 때의 연변축구팀은 연변팀이면서도 또한 길림성팀이였다. 1965년에 연변팀은 전국 갑급팀경기에서 우승을 하여 연변 나아가 중국 전역을 들썽해놓았다. 수천수만 대중들이 길거리에 떨쳐나와 환호성을 울리고 노래하고 춤 추면서 승리를 경축하였는데 그야말로 전대미문의 대성황을 이루게 되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게 된 후 주체육운동위원회 책임자한테 이렇게 말했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고 혼란한 국면도 바로잡아놓았으니 이제는 연변의 축구도 원래의 모습을 다시 회복해야 하겠습니다. 연변팀은 전국에서 우승을 했던 팀이므로 갑급팀에 들어간 다음에는 꼭 관리를 잘 해야 하겠습니다. 연변에는 두개 팀, 세개 팀이 있어야 하고 청소년팀도 있어야 하는데 앞으로는 녀자축구팀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동무들이 무슨 애로사항을 반영하면 주에서는 적극 동무들을 지지해줄 것입니다.”     리덕수 자신도 뽈차기를 무척 좋아했다. 현당위 서기로 있을 때 현에서 운동대회를 하게 되면 그는 축구장에 들어가 전반전 혹은 후반전을 뛰기도 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하고 있을 때 한번은 주체육위원회 주임과 부주임이 허둥지둥 리덕수를 찾아왔다.     “리서기, 확실한 소식에 의하면 래일 아침 성체육위원회 주임이 연변축구팀을 취소한다는 결정을 선포하러 내려온다고 합니다. 연변축구팀을 꾸리지 않고 그 자금으로 다른 작은 체육종목을 밀어준다면서요? 성정부 상무회의의 토론결정이라고 합니다. 리서기, 우리 연변에 축구팀이 없어서야 되겠습니까?”     리덕수는 한동안 뭔가를 생각하다가 그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이렇게 합시다. 래일 아침 동무들이 역에 나가 영접해서 먼저 성체육위원회 주임을 직접 저의 집무실로 데리고 오십시오. 제가 집무실에서 그를 기다리겠으니 우리가 먼저 이야기를 나누고 난 다음 그더러 그 결정을 선포하라고 해도 늦지 않을 겁니다.”     그 이튿날 주체육위원회 일군들은 성체육위원회 주임을 마중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 주당위 리덕수 서기가 지금 집무실에서 주임동지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 말을 듣고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이렇게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리서기는 저의 오랜 상급이므로 제가 먼저 찾아뵈야 하겠습니다.”     리덕수의 집무실에 들어서자 리덕수는 성체육위원회 주임과 악수를 나누면서 롱담 같으면서도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당신은 지금 성체육위원회 주임이니 좀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한가지 먼저 물어보겠습니다. 오늘날 이 세상에서 어느 종목이 스포츠 가운데서 으뜸가는 왕노릇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까? 좀 말씀해 보십시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사람좋게 허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야 물론 축구가 아니겠습니까.”     이 대답을 듣고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그렇다면 어찌 축구팀을 취소할 수 있단 말입니까? 우리 성, 특히 연변에서 축구는 더 키워야지 취소해서는 결코 안됩니다. 연변에서 축구는 인민의 투지를 고무하고 안정단결을 촉진하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연변에서 축구는 곧 정치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리덕수가 이처럼 축구에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하였는지 잠간 머뭇거리다가 이렇게 뒤를 남겼다.     “만약 리서기께서 굳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먼저 성에 전화를 걸어 태도를 보여주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럼 지금 곧바로 성에 전화를 걸겠습니다!”       리덕수는 성에서 체육운동사업을 분관하고 있는 지도자한테 전화를 걸어 연변의 실제정황을 회보하였다.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난 성의 그 지도자는 신중한 립장을 보여주었다.         “그럼 체육위원회 주임더러 잠시 그 결정을 선포하지 말고 먼저 장춘으로 돌아오라고 하십시오.”      성체육위원회 주임은 장춘으로 돌아가서 곧바로 리덕수한테 원 결정을 취소하였다고 전화로 알려왔다..     그 이튿날 리덕수는 황재림 주장한테 전화를 걸어 이 일의 전후과정을 설명하였다.  “래일 우리 함께 연변축구팀에 가서 그들을 좀 위로해 주기로 합시다.”  “그런데 주장어른이 빈손으로 갈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리덕수의 롱에 황재림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당연하지요. 좋기는 우리가 문진섭을 찾아서 그도 돈을 좀 갖고 가라고 말해줍시다.”  그  당시 문짐섭은 연길시 시장이였다. 리덕수가 문진섭한테 전화를 하니 그도 대찬성이였다.  이튿날 리덕수는 황재림, 문진섭과 함께 연변축구팀을 찾아갔다. 황재림과 문진섭은 모두 돈을 갖고 갔다. 물론 리덕수가 축구팀한테 들고 간 건 ‘정신적 식량’이였다.     “연변에는 ‘세떨기 꽃송이’가  있다는 걸 알고 계십니까? 이 ‘세떨기 꽃송이’는 어느 셋을 가르키는 것이겠습니까?  하나는 교육의 꽃----연변대학이고 다른 하나는 문예의 꽃----연변가무단이며 또 다른 하나는 체육의 꽃,바로 동무들 연변축구팀입니다.”      리덕수는 말을 이었다.      “우리 연변의 특수한 문화토양에서 자라난 이 ‘세떨기 꽃송이’는 연변의 문화를 대표하고 연변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그 날 축구팀 대원들은 리덕수, 황재림과 문진섭 세분 지도자들한테 그들 이름을 싸인한 축구공을 두개씩 선물하였다. 그런데 왜 공을 두개씩이나 선물하였는가? 그것은 공 하나에 그들의 이름을 다 써 넣을 수 없었기 때문이였다. 나중에 리덕수는 북경으로 전근할 때에도 이 축구공 두개만은 잊지 않고 갖고 갔다.     언젠가 리덕수는 문화와 문화사업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한 지도자가 문화에 대한 료해가 없고 문화를 잘 모른다면 그를 전면적이고도 성숙된 지도자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과거에 우리는 이 방면에 미흡한 점이 더러 있었는데 실제 사업에서 유익한 계시를 받게 되였습니다. 첫째, 민족문화사업의 특수성, 장기성과 군중성을 보다 충분히 인식하게 되였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56개 민족이 있는데 그 어느 민족의 문화를 막론하고 모두 그들 자신만의 특수성, 특수한 문화연혁과 광범위한 군중적 토대를 가지고 있습니다. 문화의 특수성을 볼 때 자연환경의 특수성, 인문환경의 특수성과 사회환경의 특수성을 념두에 두어야 합니다. 둘째, 한 민족을 료해하려면 반드시 그 민족의 문화를 료해해야 하고 한 민족을 존중하려면 그 민족의 민족문화를 존중해야 하며 한 민족이 발전하려면 반드시 그 민족의 문화를 발전시키고 번영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리덕수가 연변에 있을 때 한번은 중앙서기처 서기 등력군이 연변에 와서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다. 연변에 머무는 기간 등력군이 리덕수와 가장 많이 담론한 것이 바로 문화와 민족문화였다. 그 후에 국무원 부총리이며 중앙통전부 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였던 양정인(杨静仁)도 연변에 와서 휴가를 보내면서 리덕수와 가장 많이 담론한 것도 역시 문화와 민족문화였다. 등력군은 리론연구가였다. 그는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렇게 물었다. “민족개념 가운데서 동무가 보건대 가장 주요한 요소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저에겐 아직은 좀 미숙한 한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저는 대학을 다닐 때 쓰딸린의 민족리론을 배운 적이 있습니다만 실천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민족문화의 심리적 요소라는 것을 더듬어내게 되였습니다. 한 사람이나 한 민족의 정신적 령혼은 그 민족의 문화적 심리에 슴배여있습니다. 만약 이런 특수한 문화적 심리가 없다면 그들을 하나의 민족이라고 지칭할 수 없을 것입니다.”  리덕수는 조선족, 만족, 회족의 일부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자신의 론점을 천명하였다. 등력군은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동무가 한 말에 상당한 일리가 있습니다. 이 문제는 계속 그냥 연구해보아야 할 과제입니다. 중국의 민족개념을 좀더 완벽화하여야 할 것 같습니다.”  리덕수는 양정인과 민족문화를 담론할 때도 자기의 리해를 피력하였는데 양정인은 그의 관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문화건설을 지극히 중요시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였다.     손동식의 회고이다. 그가 연변대학 교장을 담임하고 있는 기간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 주관하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사업자협회’라는 협회가 있었다. 중국조선족 과학기술사업자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전국성적인 협회로서 1급 민간학술단체였다. 원래 관계부문에서는 이런 협회를 비준해주지 않았는데 리덕수가 전국과학기술협회  지도자들의 협조를 얻어 이뤄내게 되였다. 중국조선족축구협회가 설립될 때도 리덕수가 그 당시 국가체육위원회 주임 원위민(袁伟民)을 찾아가 동의를 얻어왔다. 이 두개 협회가 설립된 후 예상 밖으로 사회적, 긍정적 영향이 발생하게 되여 사람들은 마음속으로부터 리덕수를 고마워하게 되였다. 응당 지방의 경제건설을 위해 있는 힘껏 봉사해야 한다는 리덕수의 제의를 받아들인 데서 중국조선족과학기술사업자협회는 지방에서 큰 환영과 지지를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에 와서 보면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령혼을 틀어쥐는 것이였고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발전을 틀어쥐는 것이였으며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미래를 틀어쥐는 것이였고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민생을 틀어쥐는 것이였으며 문화를 틀어쥐는 것은 곧 안정을 틀어쥐는 것이였습니다. 문화사업을 틀어쥐려면 장원한 안목이 필수적입니다. 지금은 상하를 막론하고 모두 민생을 틀어쥐고 있는데 민생이란 하나는 물질적 측면, 다른 하나는 정신문화적 측면의 내용을 망라하고 있습니다. 물질적 생활이 일정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면 정신문화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이 각별히 강렬해지게 됩니다.”       리덕수의 재임기간에 연변의 문화사업은 줄곧 매우 두드러진 위치에 놓여졌다. 《길림신문》과 《중국조선족소년보》도 모두 그의 관심과 중시하에 ‘문화대혁명’ 이후인 그 시기에 창간되였다.                     끈끈한 모교의 정     교육에 대한 리덕수의 관심과 중시는 모교인 연변대학에 대한 감정에서도 그대로 나타났다. 현임 연변대학 교장 김웅(金雄)은 이렇게 회고했다.  “덕수 부장의 재임시절에는 저는 아직 학생이였습니다. 덕수 부장이 정년퇴직한 후 오히려 접촉이 잦아 거의 해마다 두세번씩은 만나뵙게 되였습니다. 덕수 부장의  모교에 대한 정감은 저한테 잊지 못할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저희들은 늘 한 교우는 곧 그 대학의 명함장이라고도 말합니다. 2013년 상반년에 연변대학 북경교우회는 특별히 ‘북경교우의 날’ 모임을 가지게 되였는데 저는 북경에 가서 이 활동을 조직하게 되였습니다. 덕수 부장도 친히 참석하셨습니다.  교우의 날 행사 때 모교에 대한  덕수 부장의 사랑은 그의 언행에서 그대로 드러났습니다. 저희 연변대학은 인재양성, 과학연구, 시회봉사, 문화의 전승과 혁신이라는 이 네가지 사명을 짊어지고 있습니다. 덕수 부장은 모교의 인재양성사업을 몹시 관심하시며 여러번 재임중인 학교 지도자들한테 신신당부해왔습니다.  ‘연변대학은 조선족 간부를 양성해야 하는 이 사명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계주봉이 그 누구의 손에 전해지든 이 사명만은 기어코 떠메고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과학연구라는 이 과제를 둘러싸고 덕수 부장은 저희들한테 많은 새로운 사유구도와 아이디어를 제시하였습니다.  연변의 실제에 결부하여 장백산과 두만강을 둘러싸고 과학연구를 하라고 덕수 부장이 건의했다싶이 김병민(金炳珉)교장 때부터 연변대학은  ’다원공존, 변연각성’을 테마로 하는 두만강포럼과 장백산포럼을 창립하게 되였는데 이것은 연변대학이 창출한 학술브랜드로 되여 국내외에 영향을 미치게 되였습니다. 2016년까지 두만강포럼은 이미 10년간 거행되였는데 우리의 전반 연구령역은 꾸준히 확대되고 있으며 참가인원의 차원과 수준도 부단히 향상되고 있습니다. 이를테면 장백산포럼만 보더라도 20,30명에 달하는 원사들이 연변대학에 모여와 자유롭게 당대과학기술을 담론할 수 있는 자리를 가지였습니다. 연변대학은 이 플랫폼을 통해 곧 원사사업소를 건립하게 되는데 의학을 전공하는 원사 두분이 연변대학에 와서 사업을 벌리게 됩니다. 이것은 모두 덕수 부장이 저희들한테 제시한 새로운 구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모교에 대한 리덕수의 감정을 언급할 때 전임 연변대학 교장 김병민은 감회가 남달랐다. 리덕수가 여러번 김병민 교장의 앞에서 자신은 연변대학의 영원한 교우일 뿐더러 연변대학의 영원한 학생이라고 자세를 낮추었다고 감회 깊게 회고하였다.  1999년, 연변대학 설립 50돐에 즈음하여 가졌던 간소하면서도 열렬한 개교기념행사는 생동하고 다채로운 프로그람으로 하여 교우들과 사회상에서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 당시 교장이였던 손동식(孙东植)은 개교기념일을 계기로 일부 자금을 기부받아 학교의 로후한 과학연구설비와 교수설비들을 갱신하고 일부 선진적인 과학연구설비와 교수설비들을 구입할 구상을 세워두고 있었다. 개교기념일 전에 손동식은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달라고 청하려고 북경에 가서 리덕수를 찾았다. 모교에 대한 리덕수의 혈육과도 같은 감정과 매번 새로 임직하는 학교 지도자들에 대한 존중은 손동식과 리덕수의 관계를 서로 존중하면서도 매우 친절한 진정어린 동지관계로 승화시켰다. 손동식은 성근하게 리덕수한테 청들었다.  “리부장동지, 제가 이번에는 그 무슨 요구가 있어서보다는 그저 리부장께서 꼭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 달라고 청하러 온 것입니다. 리부장이 돌아와 개교기념행사에 참석해주는 것은 모교에 대한 최대의 배려이자 지지로 될 것입니다.”  리덕수는 시원스레 이렇게 말했다. “물론 가야지요. 모교의 개교기념일인 만큼 저는 꼭 참가하겠습니다!” 개교기념행사 기간에 리덕수는 모교에서 자금을 조달하여 수업시설과 과학연구시설을 갱신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묵묵히 있다가 북경에 돌아가서는 전력을 다해 모교를 위해 상당한 액수의 자금을 조달하여 모교에서 과학연구시설을 개선할 수 있도록 밀어주었다. 박문일 로교장은 이렇게 회고하였다.  “리덕수가 왕청에서 현위 부서기로 있을 때 연변대학에서는 왕청현 중평공사에 연변대학 분교를 꾸리게 되였습니다. 이 분교의 책임자는 박규찬(朴奎灿) 로교장이였습니다. 분교를 꾸리는 과정에 리덕수는 적극적으로 도와나서서 토지사용 등 여러 면으로 모교에 편의를 제공해주었습니다. 그외에도 리덕수는 모처럼 중평공사당위에 부탁하여 그들더러 있는 힘껏 연변대학 분교의 운영에 필요한 조건을 마련해주라고 지시하였습니다.” 박문일 로교장은 또 연변사회과학연구기지를 건설하던 일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연변에서는 선후로 몇개 연구회를 설립하였는데 조선어문연구회와 연변력사연구회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나중에 이 두 연구회는 연변력사어문연구소로 합병되여 연변대학에 이름을 걸어놓게 되였다. 그 당시 소장은 조룡호였고 박문일은 부소장이였다.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사회 각계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   과학연구기구의 설치에 대해 매우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 연변에 사회과학연구기구를 설립해야 한다는 희망사항도 그 속에 들어있었다. 아예 연변에 사회과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주장도 구체적으로 제기되였다. 전국적으로 놓고 보면 성급에는 사회과학원이 있었지만 지구급에는 아직 그 선례가 없었다. 리덕수는 연변에 사회과학원을 설립해야 한다는 관점을 긍정해주면서 즉각 준비사업에 착수하라는 의견까지 제시하였다. 리덕수는 연변대학의 안웅섭(安雄燮)을 주에 전근시켜 연변사회과학원 설립에 관한 준비사업을 구체적으로 책임지게 하자고 제의했다. 긴박하고도 치밀한 기획과 준비를 거쳐 1985년 7월에 연변사회과학원이 정식으로 고고성을 울리게 되였다. 전국에서 첫번째로 나온 지구급 사회과학원이였다. 연변대학의 발전로정을 이야기하면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기획하고 준비하기 시작한 것은 1984년이였다. 그 때 연변에서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한 것은 한편으로는 기타 다른 대학과 마찬가지로 학생들로 하여금 현대과학기술을 학습하고 장악하게 하자는 것이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대학에서 주로는 외국 국적 교원들의 수업을 받아들이자는 취지에서였다. 이렇게 아이들에게 영어를 잘 배울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주어 그들이 졸업하게 될 때면 조선어, 한어, 영어 등 세가지 언어문자를 능숙하게 장악할 수 있도록 하여 연변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인재들을 육성하려는 것이였다. 그런데 학교를 막상 세워놓고 보니 국가교육위원회에서는 오래동안 비준을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이 대학은 연변과 길림성에서만 인정하는 ‘지방대학’과도 같은 그런 신세가 되였다.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 교육을 주관하다가 나중에는 또 북경으로 전근하게 되였다. 성에서 리덕수의 사업을 인계받은 부성장은 장악기(张岳琦)였다. 리덕수는 장악기한테 사업을 인계할 때 특별히 연변에서 과학기술대학을 건립해야 할 필요성을 설명하면서 지지해줄 것을 당부하였다.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는 외국 국적 교원들이 주축을 이루기에 모두 영어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대학을 지금 전 동북지역에서 퍼그나 선호하고 있는데 동북의 많은 입시생들은 모두 이 대학에 입학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이 학교에서는 수업의 질을 각별히 중요시하므로 이 학교 졸업생이라 하면 미처 졸업하기도 전에 벌써 많은 기업들이 찾아와서 당겨가고 있습니다. 연변의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려면 이런 인재들이 수요됩니다. 이 학교 졸업생들은 적어도 중, 조, 영 이 세가지 언어문자를 능숙히 장악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대학에 관한 모든 일들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부탁하는 바입니다.” 장악기는 이렇게 말했다.  “시름 놓으십시오. 저는 있는 힘을 다해 기어코 이 일을 성사시키겠습니다.” 리덕수는 특별히 연변대학에서 은퇴한 전임 연변대학당위 서기 신현무를 과학기술대학당위 서기로 배치하자고 건의했다. 신현무는 리덕수의 스승이였다. 리덕수가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박문일은 정치학부 주임이였고 신현무는 정치학부 부주임이였다. 리덕수는 신현무한테 이렇게 말했다.  “신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학생이므로 하고 싶은 말은 다 있는 그대로 선생님께 말씀드립니다. 선생님께 과학기술대학당위 서기를 맡기면서 딱 한가지 간곡한 부탁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이 학교가 정치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책임져달라는  그것입니다. 그저 이 점만 제대로 잘 파악해주셨으면 합니다. 다른 문제들은 부차적입니다.”  신현무는 자기의 제자한테 정중하게 자신의 태도를 표명하였다.  “덕수동무, 걱정하지 마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소.”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정식으로 비준을 받게 된 것은 리덕수가 북경으로 전근되여간 그 이후의 일이였다. 길림성 부성장 장악기가 북경에 가서 국가교육위원회를 찾아 연변과학기술대학 비준건을 상담하게 되였다. 그는 워낙 중공중앙 판공청 부주임이였다. 현임 중앙통전부 부부장 리덕수와 함께 둘이 교육위원회를 찾아가니 교육위원회에서도 신중하게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교육위원회에서는 1992년에 드디어 이 대학을 정식으로 비준하였다. 2012년에 연변과학기술대학에서는 개교 기념 20주년 행사에 리덕수를 초청했다. 리덕수는 감개에 젖어 이렇게 말했다. “준확하게 말한다면 연변과학기술대학이 설립된 것은 벌써 28주년이 되였습니다. 1984년에 학교가 설립되여서부터 1992년에 이르러 국가의 정식 비준을 받기까지 이 8년은 가장 힘겨운 나날이였습니다. 이 8년간 겪은 각종 어려움과 애로가 너무도 많았기 때문에 한마디로 다 말하기는 정말 어렵습니다. 만약 개교 후의 20년은 온당하면서도 쾌속적으로 발전한 20년이였다면 그 이전의 8년은 힘겹게 창업을 시작하여 그 후 20년의 발전을 위해 조건을 마련하고 토대를 닦아 놓은 8년이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과학기술대학에 오늘이 있기까지는 정말 시련이 많았습니다!” 그 때 리덕수가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우려고 강력히 주장한 데는 자기 나름 대로의 안목이 있었다.  연변의 문화교육을 한 차원 끌어 올리려는 것이였는데 연변과학기술대학을 세운 것은 그의 이러한 구상을 실현하는 하나의 포석이였다. 당년에 외국적 교장 김진경은 연변에 와서 그 땅뙈기를 선정하고 륙속 외국으로부터 자금과 인재를 도입하여 전국 대학교들중에서 외국인 교직원이 가장 많은 학교를 육성해냈다.  1996년 10월에 연변대학에 병합되면서 연변대학의 한개 독립적인 학원으로 되기까지 이 과정에 리덕수는 줄곧 관심을 돌리고 다함없는 지지를 보내주었다. 연변과학기술대학의 졸업생들은 이미 전국 각지에 분포되여있으며 국외에도 나가 손을 펴고 있다.  몇년 후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담임하고 있는 리덕수한테 호남성 장가계시 시 당위서기와 시장이 찾아왔다.  “리주임동지, 지금 저희들은 한가지 애로사항에 부딪쳤습니다. 저희들은 외국인 관광객들을 장가계로 많이 끌어오려고 하드웨어건설은 근사하게 해놓았는데 언어가 걸림돌이 되였습니다. 리주임께서 저희들한테 방도를 좀 가르쳐 주십시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한가지 방법을 알려 드리지오. 연변대학에 찾아가서 계약을 체결하십시오. 그러면 해마다 나오는 졸업생 가운데서 일부를 동무들한테 배치해 줄 수 있을 겁니다. 연변대학 졸업생들은 적어도 한어, 조선어, 일어 혹은 영어 등 세가지 언어문자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찾아가  보면 감이 잡힐 겁니다.”  그들 두 사람은 그길로 곧추 연길행 비행기에 올라 연변대학과 계약을 체결하였다. 그 해에 곧바로 30여명 졸업생을 데려가게 되였다. 나중에 그들은 리덕수더러 장가계에 한번 다녀가라고 여러번 초청하였다. 그 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서는 소수민족지구의 서부대개발 정책혜택향수문제를 연구하게 되였는데 마침 리덕수는 조사차  장가계를 찾게 되였다. 장가계시 당위서기와 시장은 원래 성에서 소집하는 회의에 참가하려고 하다가 갑자기 리덕수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청가를 맡고 장가계에 남아서 리덕수를 기다렸다. 리덕수를 보자마자 그들은 첫마디부터 이런 말을 하였다.  “리주임은 정말 저희들의 골치거리를 풀어주었습니다. 장가계에서 관광업에 종사하는 골간력량중 연변대학 졸업생이 적지 않습니다.” 연변의 조선족을 말하게 되면 사람들은 자연히 명성이 널리 알린 중국조선족 가무를 떠올리게 된다. 조선족 예술가를 양성하는 요람은 연변예술학교였다. 연변예술학교는 전국 민족예술분야에서도 이름이 널리 알려져있었다. 아쉽게도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하게 되였을 때 연변예술학교는 중등전문학교였다. 리덕수는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만들기로 작심하고 단번에 목표를 이뤄내기 힘들면 한걸음 물러서서  단과전문대학을 만들어서라도 중등전문학교를 단과전문대학으로 승격시켜야 보다 높은 차원의 예술인재를 배양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직접 국가교육위원회 주임 리철영(李铁映)한테 보고를 올려보냈다. 리철영은 그 보고를 읽어보고 주관 지도자한테 회시를 하였지만 시종 답복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전국의 거시적 환경은 대학교를 대폭적으로 압축하고 합병하는 분위기였다.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겠다는 것은 이 흐름과는 역행이라 볼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친히 북경에 가서 직접 리철영을 찾아 그한테 이 일을 회보했다. 리철영은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덕수동무! 저는 동무의 의견을 찬동합니다. 다만 교육위원회에서는 하동창 주임이 이 일을 구체적으로 관리하고 있으므로 그 분을 찾아가 이야기해보십시오.”  하동창(何东昌)은 교육부장이면서 국가교육위원회 상무부주임이였고 중앙위원이였다. 한번은 중앙에서 회의를 할 때 리덕수는 하동창을 찾아가 이렇게 말했다.   “하부장동지, 저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리덕수입니다. 저는 당위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였을 때 한가지 소망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만들거나 혹은 대학서렬에 편입시키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오라지 않아 곧 연변을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저의 이 소망이 아직 이루어지지 못했는데 하주임 생각엔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하동창은 이렇게 직언했다.  “이 일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이 일이 참 어려울 것 같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하부장동지, 하부장께서는 저희들 연변에 한번 가셔서 연변의 소수민족교육과 변강의 교육정황을 고찰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하동창은 나중에 시간이 있으면 꼭 한번 연변에 가보겠노라고 대답했다. 리덕수는 신임 성당위 서기 하죽강(何竹康)한테 이 정황을 회보했다. 하죽강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제 우리 소조토론이 끝나면 동무도 나와 함께 한번 하부장을 찾아가봅시다.”  리덕수와 하죽강은 함께 하동창을 찾아갔다. 하동창은 이렇게 말했다.  “저희들의 원칙은 이미 결정되였으므로 비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한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길림성예술학원은 대학이므로 당신들이 길림성예술학원 연변분원이라고 고치면 저희들은 대학서렬이라고 주석을 달아 밝혀줄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연변예술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키는 일은 마침내 비준되였다. 연변이란 이 자그마한 자치주에 이미 대학이 여러개나 있었는데 거기에 또 예술학원을 설립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였다. 이럴듯 적극적이면서도 끈질긴 노력이 있었기에 연변의 대학교육은 신속하게 발전하여 연변의 대학과 전문대학은 4개로부터 6개로 발전하게 되였다. 1996년에 국가교육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원래의 연변대학, 연변의학원, 연변농학원, 연변사범전문학교,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 등 5개 종합대학과 전문대학을 새로운 연변대학으로 합병하게 되였다. 그리고 그 해 10월에는 중외 합작으로 꾸려진 연변과학기술대학까지 연변대학에 병합하게 되였다.                                                          (강룡운 번역)       [ 연변문학 2018년 11월호 ]  
30    연변문학 특별기획 (4) 리덕수의 고향사랑 댓글:  조회:1166  추천:0  2018-12-04
연변문학 특별기획(4)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관광업의 흥기       장백산지대에 위치해 있는 연변은 산천경개가 수려하고 풍경이 매혹적인 데다 짙은 변경소수민족풍토까지 생생히 살아있어서 매력적인 관광명소로 될 천부적 자원을 가지고 있었다. 아쉽게도 지난 세기 80년대까지만 해도 연변에는 관광산업을 전문적으로 설계하고 기획하며 관리하는 실무부서조차 가지고 있지 않아서 연변전역에서 근사한 호텔마저 찾아보기 힘들었다. 이 같은 조건에서 관광산업의 흥기와 발전은 운운할 수도 없었다. 관광산업의 부흥에 필수적인 기반시설건설에는 의례 호텔이 망라된다 신중국이 창건된 지도 이미 오랜 세월이 흘렀는데 연변에는 호텔이라고는 지은지 퍽 오래된 건물 한채 밖에 없었다. 이 호텔은 1958년 대약진 열기 속에서 지은 4층건물이였는데 4층마저도 객실 대신 회의실로 쓰고 있었다. 이 호텔은 너무 헐망했을 뿐만 아니라 내부시설도 너무 초라하였다. 리덕수는 늘 이렇게 되풀이했다.  “연변은 반드시 장백산과 두만강을 둘러싸고 그림을 잘 그려야 합니다. 날마다 개혁개방을 담론하면서 두만강의 우세마저 충분히 파내지 않고 어떻게 대외개방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날마다 경제를 발전시킨다고 하면서 장백산의 관광자원을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관광산업이 제절로 찾아오겠습니까? 앞으로 개혁개방의 보다 큰 열기를 맞이하고 관광산업을 크게 발전시키려면 연변에서는 반드시 그럴듯한 현대화 호텔을 하나 지어야 합니다. 호텔은 그 지방의  ‘명함장’일 뿐더러 그 지방의 ‘얼굴’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주당위와 주정부의 련석회의를 사회하면서 특별히 새 호텔을 지을 데 관한 의제를 토론에 내놓았다. “지금 대내적으로 경제를 활성화하고 대외로는 개방하는 흐름은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연변은 매일 외지와 외국으로부터 오는 수많은 우호인사, 상인, 정계요인 및 기타 다양한 인사들을 접대해야 하는데 괜찮은 호텔이 하나도 없다면 연변의 형상이 구겨지게 됩니다.” 회의 참석자들은 토론을 거쳐 곧바로 현대화한 차원의 고급호텔을 짓기로 합의했다. 의견이 통일되자 곧 건설부지 선정에 들어갔다. 연길대교 북쪽교두 끝자락에는 연길시에서 노란자위라고 할 수 있는 부지가 있다. 주초대소와 옛 연변호텔이 바로 그 구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맞은켠  즉 지금의 백산호텔이 세워져있는 그 자리는 워낙  부대의 주둔지였다. 부대의 건물이라야 말짱 옛날부터 물려내려온 헐망한 단층집들이였고 텅 빈 뜨락에 흩어져있는 시뿌연 낡은 집들 사이 에 잡초들이 제멋대로 자라나  스산하기 그지 없었다. 도심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처럼 초라하여 연길시의 도시형상을 퍼그나 흐리고 있었다. 주에서는 시내 안에서 다른 한곳을 선택하여주겠으니 그 자리에 큰 호텔을 하나 지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달라고 부대측과 교섭하였다. 부대측에서는 지방건설계획을 지지한다면서 상급에 보고서를 올려보냈다. 주정부에서는 부주장 한 사람을 지정하여 전문 이 일을 맡겼다. 주위와 주정부에서 이 일을 얼마나 중시하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 일을 책임지게 된 부주장은 바로 장국근(张国勤)이였다. 장국근과 리덕수는 벽을 사이둔 이웃였다. 장국근은 리덕수보다 나이가 퍼그나 많은 년장자였지만 맡겨주는 일이라면 통쾌하게 받들어나섰다. 리덕수도 장국근을 극진히 공경하였다. 장국근은 새 호텔 건설주비사업을 책임진 후에 수시로 리덕수한테 호텔건설 진척 상황을 회보하였고 그 과정에 리덕수는 도면설계로부터 몇차례 설계변경에 이르기까지 낱낱이 체크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놓을 수 있었다. 새 연변호텔이 건설된 후 여러 방면의 의견을 받아들인 기초 우에 명칭을 “백산호텔”이라고 공식적으로 확정하였다. 이 명칭은 듣기에도 박력이 있거니와 지방특색까지 갖추었다는 평을 받게 되였다. 과연 국내외적으로 쟁쟁하게 불리워지게 되였다. 연길대교 아래쪽 로타리와 청년호 일대는 연길시의 중심지대라고 할 수 있었다. 청년호 서쪽으로 연집하 기슭에는 주당위 간부 주택구가 있었는데 초대주장인 주덕해를 비롯한 많은 주급 지도간부들이 과거엔 태반이 이 지대에 살고 있었다. 여기는 북적이는 연길에서도 고느적하다 할 수 있는 주택구였는데 고층건물은 한채도 없고 거의다 단층집들이였다. 제일 높아서 고작 2층집이였는데 게다가 이곳은 모두 한뜨락에  집 한채씩(혹은 한 뜨락에 집 두채씩) 설계되여 이곳에 거주하면 퍼그나  아늑하고  편안하면서 편리하였다. 강변에 위치해있은 만큼 이 주택구의 공기 또한 맑고 깨끗하였다. 그 때의 연집하나 부르하통하는 수면이 넓고 물도 넘치다싶이 흘렀다. 강에는 강물이 출렁출렁 흘러내리고 강변에는 록음이 우거져 그 경치가 그윽히 수려하였다. 연길시의 오랜 주민들은 이 주택구에 대해 모두 깊은 인상을 갖고 있었다.  원래 주당위 사무청사는 당시 청년호 길 건너편에 있던 지금의 농업은행청사자리였는데 그것은 그리 크지 않은 3층건물로서 일제치하 위만주국시기의 건물이여서 퍼그나 낡아있었다. 리덕수는 이 건물을 보면서 진작 자기 나름의 밑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그는 곧바로 주농업은행 최행장을 찾았다. 최행장은 성품이 아주 부드러운 오랜 금융사업인원이였다. 리덕수는 농업은행에서 주당위 사무청사를 사서 은행건물로 쓰는 게 어떻겠는가고 상의하면서 한가지 부가조건을 내놓았다. 농업은행에서 주당위 사무청사를 사게 되더라도 이 건물에 그냥 그대로 들라는 게 아니라 반드시 새롭게 장식해서 연길시의 도시적 분위기를 돋구어줘야 한다는 조건은 리덕수의 심사숙고 끝에 나온 고안이였다.  농업은행에서는 이 건의를 시원스레 받아들이였다. 주당위에서는  농업은행에서 건물을 구입하고 보내온  돈을 받자 원래의 주초대소를 주당위 사무청사로 개축하였다. 이리하여 한꺼번에 건물 두채가 새 모습으로 단장하게 되였다. 그 때는 연길시에 다층건물이 몇 개 안되였으므로 이 작업은 상당히 큰 역사라 할 수 있었다. 금상첨화로 백산호텔이 준공되여 사용에 교부되면서 이 구간 길거리 환경은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되였다. 이제 이 구역에서 옛 호텔 하나만이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였다. 리덕수는 옛 호텔에 깊은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 옛 호텔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창립 이래의 력사적 변천을 보여주고 있는 데다 신중국이 창건된 이래 당과 국가의 지도자들이 연변에  올 때마다 모두 묵어가던 정 서린 곳이였다. 경애하는 주은래 총리와 덕망 높은 주덕 위원장, 동필무 부위원장 그리고 호요방 총서기도 연변에 왔을 때 모두 이 옛 호텔에서 묵었다. 옛 호텔을 마땅히 력사유산, 력사문물로 남겨두어야 한다는 주장은 력사적, 미래지향적 안목에서 나온 명지한 결책이였다. 발전에 론리가 있다 하더라도 우리는 결코 발전을 위해 자기의 력사마저 몽땅 다 버릴 수 없다. 하긴 옛 호텔은 무용지물이 아니였다. 비록 설계리념이 너무 전통적이고 한물 가긴 하였지만 건축물 구조가 매우 튼튼하였기에 특수한 손님이 오게 되면 그냥 거기에 묵게할 수 있었다. 이 과정에 거기에 머물렀던 사람들을 떠올리고 거기서 벌어졌던 지나간 력사를 되돌아볼 수 있게 한다는 건 어쩌면 한결 더 특별한 의의가 있을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장백산관광업을 전 방위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금을 쟁취하여 장백산으로 올라가는 포장도로를 구간별로 다시 깔도록 추진하였으며 장백산 관광구에 여러가지 기능이 조합을 이루는 기반시설들을 마련함과 동시에 장백산 풍경구내 관광명소들을 하나하나 개발해나갔다. 따라서 건설대상들이 일사분란하게 진척되는 기꺼운 상황이 나타나게 되였다. 그 때는 장백산 관광이 한창 첫발을 내딛는 시기여서  방치되였던 일들이 하도 많아 모든 것은 죄다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였다. 장백산 관광사업에 착수하게 되자 맨먼저 걸리는 것이 장백산(북측) 관광 관리권한 문제였다. 그 당시 성에서는 전문적으로 장백산(북측) 관광 관리권한 문제를 연구하는 회의를 소집하기로 계획하고 리덕수와 손홍상을 회의에 불렀다. 회의에서 류희림(刘希林) 부성장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성정부에서는 이미 장백산 관광 관리권한을 성으로 올려오기로 의견을 모았습니다. 좀더 신중을 기하기 위해 문건을 내려보내기에 앞서 먼저 연변 동지들의 의견을 들어 보려고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손홍상이 먼저 발언하면서 자기 의견을 내놓았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간부인 제가 보기에는 성에서 이런 결정을 내리게 된다면 우선 연변 인민들이 동의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 손홍상은 장백산의 력사와 장백산을 지방에서 관리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력설하였다.  “이  일은 연변의 일입니다. 연변에 위치해있는 만큼 연변에서 관리해야 한다고 봅니다. 성에서는 저희 연변에서 잘 관리할 수 있고 또 장백산관광시설을 잘 건설할 수 있다는 걸  믿어주십시오. 저희들은 보호국과 성림업청 등 관련 부문과 잘 협상하고 조률하여 이 관계를 잘 처리해나갈 수 있습니다.”  처음에 손홍상은 앉아서 발언을 시작했는데 말을 할수록 점점  더 격앙되여 나중에는 일어서서 열변을 토하였다. 손홍상은 그가 한 이런 말은 그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주정부와 연변 여러 민족 인민을 대표한 의견이라고 강조하여 밝혔다. 손홍상의 발언이 끝나자 류희림 부성장은 연변의 의견을 존중하여 관리권한을 성에서 떼가지 않기로 한다고 선포하였다. 연변의 회보를 듣고 나서 성의 지도자들이 원래의 생각을 바뀌게 된 대목이다. 손홍상은 대학을 졸업하고 장백산기슭의 안도현에 배치되여 사업해왔기에 장백산에 대해 남다른 특별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회의가 끝나자 리덕수는 손홍상보고 “손동무! 오늘 동무의 발언은 정말 멋졌습니다!”하고 독려하였다.                  훈춘의 새로운 도약을 위하여    어느 날 리덕수가 룡정으로 사업을 검사하러 내려갔는데 주당위 판공실에서 훈춘에 산불이 발생했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리덕수는 조금도 지체없이 차에 앉아 훈춘으로 달렸다. 룡정으로부터 도문까지의 구간은 그나마 순조로웠다. 그런데 도문에서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금방 한 산굽이를 돌아서다가 한 초소에서 차가 막혔다. 동행하던 주당위 판공실 인원이 차에서 내려 변방초소 전사한테 이 차에 앉은 분이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겸 주장 리덕수라고 알려주는데도 그 변방전사는 규정에 따라 자기는 증명서만 인정할 뿐이라면서 주당위 판공실 인원에게 깍듯이 경례까지 올리면서 해석했다.  “저희들은 통행증이 없이는 통과시키지 못한다는 명령을 어길 수 없습니다!” 리덕수는 차에서 내려와 친히 보초병한테 자신의 재직증명서를 보였다. 재직증명서에는 사진도 있고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이라는 직무도 똑똑히 밝혀져있었다. 그래도 보초병은 여전히 통과시켜주지 않았다.  “수장동지! 죄송합니다. 저희들은 명령을 집행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그 보초병를 보고 임무를 에누리없이 집행하는 합격된 전사라고 칭찬해주는 여유도 보이면서 례절스레 물었다.  “보초병동무! 제가 동무들의 전화를 좀 써도 되겠습니까?”  그러자 보초병은 차렷자세를 취하면서 머리를 끄덕였다.  “네, 수장동지! 될 수 있습니다!” 판공실 인원은 초소의 전화로 군분구에 전화를 걸어 주당위 서기 리덕수가 지금  보초병한테 막혀 건너가지 못한다고 통보했다. 군분구 수장은 즉시 변방퇀 퇀부에 지시했고 그 지시가 초소에까지 내려가서야 가까스로 지나갈 수 있었다. 도문으로부터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 있는 두개의 초소는 모두 이렇게 지나갔다. 훈춘으로 들어가는 길에서 리덕수는 내내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였다. 훈춘을 개방하려면 이런 초소부터 반드시 철거해야 한다. 지금 같은 검사는 유야무야이다. 나쁜 놈, 파괴분자들이라면 어느 놈이 간덩이가 부어서 이런 큰길로 감히 다니겠는가? 틀림없이 산길이 아니면 두만강을 따라 강변으로 피해 다닐 게 아닌가. 리덕수는 성에 올라가서도 이런 상황을 이야기하였고 심양군구 지도자들한테도 이렇게 회보했다. 만약 변방초소를 철거하지 않으면 훈춘의 개혁개방을 맞아오기 힘들 거라고 피력했다. 그렇더라도 막상 이런 변방검사소를 철거하자고 하니 힘들기로 산 넘어 산이였다. 그래도 리덕수는 자신의 의견을 지키면서 계속 끈질기게 상급 관련 부문과 지도자들한테 정황을 반영하였고 나중에 직접 성당위 서기와 성장한테도 회보했다. 성군구와 심양군구 그리고 각급 지도자들의 지지 하에 훈춘으로 들어가는 도로에 놓여있던 두개 초소는 마침내 철거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훈춘시가 스스로 자기의 이미지를 개변하지 않으면 개혁개방에 걸림돌이 될 수도 있다고 문제를 심각하게 보고 있었다. 그 당시 훈춘현 경내의 도로 량켠에는 도처에 개인들이 석탄을 채굴하는 작은 탄갱들이 널려있었다. 방천으로 가는 길 량켠에도 눈에 안겨오는 것은 온통 헐망하고 나지막한 초가집들이였는데 그 주변에서 초라하기 그지 없는 작은 탄갱들이 엉성하게 눈에 띄였다. 이런 탄갱들은 국가의 자원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예측불가의 심각한 위험을 안고 있어 훈춘의 대외개방 이미지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래서 리덕수는 처음 훈춘으로 갔을 때 벌써 관련 부문과 이 문제의 해결책을 상의하였다. 나중에 여러 방면에서 힘을 모아 과감한 조치를 취하여 단호하게 이런 불법적인 탄갱들을 페기시키게 되였다. 1984년에 리덕수는 조사연구와 거듭되는 론증을 거쳐 연변이 발전하려면 훈춘건설을 두드러지게 강화해야 하고 훈춘의 개혁개방을 적극 추진하여 훈춘으로 하여금 한걸음 먼저 발전하게 하여 연변의 전면적인 발전을 진일보 추진하여 나가자는 구상을 내놓았다. 이런 사유에 따라 훈춘의 개발과 개방의 전략적 구상의 제기로부터 건설계획을 온건하게 추진하고 실시하기에 이르기까지 리덕수는 끈질지게 간고하고도 복잡한 전기 준비작업과 대량의 기초적인 작업을 벌려나갔다. 훈춘을 개발하고 개방하는 전략적 계획의 전기 기반시설 건설에는 주로 에너지, 통신과 교통(철도와 공로)이 망라되여 있었다. 그  당시 연변 8개 현, 시 가운데 유독 훈춘에 철도가 통하지 않았다. 이 일을 두고 최림 주장이 호요방 총서기한테 편지를 써보낸 적이 있었다. 호요방은 최림의 편지에 친히 회시를 하였고 그 회시는 국가계획위원회에 넘어가게 되였다. 그런데 최림이 성으로 돌아가게 되자 이 일에 살손을 붙이고 전문 추진하는 사람이 없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에 돌아온 후  이 일을 자못 중대한 사안으로 판단하고 직접 추진하였다. 철도를 건설하려면 대량의 자금을 투입해야 하는데 연변에는 그럴만한 자금이 없는 만큼 상급 관련 부문의 지지에 의지하는 게 지름길이라 할 수 있었다. 주에서 도문----훈춘철도 건설대상을 신청하기로 결정한 이후에 주당위 상무위원회에서는 연구를 거쳐 이 일을 기본건설사업을 관장하고 있던 손홍상 부주장이 구체적으로 추진하도록 맡기였다. 도문----훈춘철도 건설은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총길이가 겨우 70여킬로메터  밖에 안되는 이 철도를 건설하는 데 국가 계획위원회, 석탄부, 철도부와 림업부 등 중앙 부처의 참여와 심사비준을 거쳐야 했다. 도문----훈춘철도로선은 비록 매우 짧지만 산간지대를 가로 지나는 지리적 특성으로 많은 턴넬을 뚫어야 하는 데다 텐넬 길이가 길어 시공난도가 크고 건설 원가도 몇배로 뛰여올랐다. 최초의 예산은 억 6천만원이였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억 6천만원이라면 사람들이 놀랄만한 천문학적인 액수였다.  철도부에서는 건설원가가 너무 높아 수지가 맞지 않는 데다 미래의 경제적 효익성도 애매하다고 판단하고 이 일에 미지근하게 나왔다. 성에서도 연변에서 올려보낸 보고서를 보고 나서 이렇게 많은 예산을 내놓을 수 없다고 잘라말했다. 송홍상이 한동안 북경으로 다니면서 끈질기게 교섭한 결과 국가계획위원회로부터  연변에서 타당성보고를 올려보내라는 회답을 받게 되였다. 뒤이어 송홍상은 두번째 공략대상으로 석탄공업부를 찾았다. 그 당시 확정된 훈춘탄광구역의 년간 석탄 생산량은 300만톤이고 탄광구역공사가 전부 완료되면 년간 석탄 생산량을 700만톤으로 예상하고 있었다. 그중에서 230만톤은 훈춘화력발전소에서 발전용으로 소모한다 치더라도 그 나머지 470만톤은 밖으로 운송해 내가야 했다. 훈춘탄광에서 생산하는 석탄은 석탄공업부에서 관리하기에 석탄공업부에 자금을 신청하는 것은 관건적이면서도 필수적인 절차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송홍상은 그 해 석탄공업부를 제일 번다하다 할 만치 찾아다녔다. 송홍상은 석탄공업부의 관련 사급, 국급 부서로부터 시작해서 한층한층 상급부서로 올라가면서 정황을 회보하였다. 연변에서는 석탄공업부에 신청한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은 억원이였다. 그  당시 석탄공업부 부장은 우홍은(于洪恩)이였다. 그는 워낙 산동사람이였는데 1942년부터 흑룡강 학강 동산탄광의 갱부로부터 작업반장, 갱도작업반장, 부광산장, 광산장으로 성장한 광부출신의 지도자였다. 신중국이 창건된 이후에는 학강광무국 동산광산 부광산장을 맡았다가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학강광무국당위 서기에 이어 석탄공업부 부부장, 부장, 중앙위원을 력임하게 되였다. 우홍은은 기층으로부터 성장했기에 기층의 정황을 잘 알고 있었고 기충에서 찾아온 동지들이라면 항상 친절하게 맞아주었다. 우홍은은 손홍상을 만나서 직접 그의 회보를 듣고 나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에 출자하는 데 동의했다. 다만 석탄부에서 억원이나 출자하는 것은 무리이기에 단독으로 그렇게 많은 돈을 출자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손홍상은 돌아와서 리덕수한테 이 정황을 회보했다. 리덕수는 잠간 생각을 더듬다가 이렇게 물었다.  “손동무! 우홍은 부장을 한번 연변에 모셔올 수 없겠습니까? 우부장이 오게 되면 우리가 모시고 훈춘광산구역 현지에 가서 돌아보게 하면 석탄공업부에서 우리를 지지하는 결심이 더 커질 확률이 높을 수도 있잖겠습니까?” “리서기! 제가 다시 가서 힘써 모셔보겠습니다.”  손홍상은 리덕수한테 신중하게 한마디 남기고 다시 길에 올랐다. 과연 우홍은 부장은 정말 아주  바삐 보내고 있었다. 연변에 가 볼 시간을 짜낸다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였다. 그래도 손홍상은 맥을 버리지 않고 끈질기게 ‘삼고초려’의 인내성과 투지로 거듭 우부장을 청하였다.  한번은 우부장을 다시 만나게 되자 손홍상이 이렇게 건의했다.  “우부장동지! 제가 보건대 부장동지는 어차피 명절이고 휴일이고 다 없는 것 같은데 아예 명절이나 휴일을 리용해 스스로 자기한테 한번 말미를 주는 셈 치고 저희들 연변에 가보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우부장은 손홍상의 이처럼 끈질긴 집념과 진정에 감동된듯 잠시 머뭇거렸다.   “정말 동무의 말대로 어디 한번 그렇게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요.” 이 때라 하고 손홍상은 다그쳐 자기의 계획을 털어놓았다. “우부장동지! 제가 부장동지를 위해 이미 계획을 다 세워 놓았습니다. 며칠 후면 양력설이 다가오는데 부장동지는 이 참에 저희들 연변에 한번 다녀오시지요?” 이 때는 바로 1984년 양력설을 지척에 두고 있었다. 리덕수는 우홍은 부장이 훈춘탄광에 내려가 현지를 고찰하는 전반 과정을 시종 대동하였다. 훈춘탄광에서 우홍은 부장은 한곳한곳 까근히 살펴보았고 광부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이야기도 주고받았다. 우부장은 훈춘현지 고찰을 거쳐 훈춘탄광의 전망에 대해 무척 호감을 가지게 되였다. 그날 저녁, 바로 새해 첫날 저녁에 연길에 돌아와 연변호텔에서 식사를 하면서 회보를 듣게 되였다. 연변측에서는 리덕수와 손홍상, 그리고 장국근 세 사람이 자리했다. 리덕수는 회보를 하면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의 중요성과 절박성에 대해 거듭 천명하였다.  “이 철도는  빨리 건설해야 합니다. 이제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우부장께서도 보셨겠지만 훈춘에서 밖으로 석탄을 운송하려면 이 철도가 매우 절박합니다.”  리덕수는 실사구시적으로 우부장한테 이렇게 말했다.  “우부장동지! 제가 우부장께 솔직히 말씀드린다면 저희들 연변의 지방건설도 이 철도가 시급히 있어야 합니다!” 나중에 우홍은 부장은 석탄부에서 출자하여 도문----훈춘철도를 건설하는 데 동의했다. 그런데 얼마를 출자할지에 대해선 최종 확답을 주지 않았다. 그 날 분위기가 화애롭게 무르익어 나중에 회보회는 상호간에 교류하고 상담하는 자리로 바뀌여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자기의 감수를 구김없이 털어놓았다.  “우부장동지! 오늘 훈춘탄광에서 저희들은 석탄산업과 탄광로동자들에 대한 부장 동지의 그 심후한 감정을 읽으면서 큰 감동을 받았고 부장동지한테서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리덕수의 이 말에 뭉클하게 감동을 받았는지 우부장은 리덕수의 손을 와락 끌어다가 꼭 잡았다. “덕수동무! 해방 전에 난 갱도에서 석탄을 캐며 여러해 동안 탄광로동자로 일했고 그 후에도 한평생을 이 석탄산업에 몸 바쳐왔는데 어떻게 탄광로동자들한테 감정이 없고 석탄산업에 감정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 난 하루도 이 석탄을 떠날 수 없습니다!” 그 이튿날 우홍은은 일정배치에 따라 렬차로 연변을 떠났다. 리덕수는 주의  주요 지도자들을 이끌고 렬차역에 나가 우부장을 배웅하였다. 플래트홈에서 우홍은은 리덕수의 손을 꼭 잡은 채 정겹게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홍은은 리덕수보다 16년 년상이여서 세대별 차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우부장은 친절하고 너그럽게 친형님처럼 마음을 다 터놓고 진심으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 속에서는 소박한 친화력이 숨 쉬고 있었다. 렬차가 움직이자 리덕수의 가슴 속에도 련민의 정이 굽이쳐올랐다. 시간은 살같이 흘러 양력설이 지나기 바쁘게 어느덧 음력설이 다가왔다.  리덕수는 우연하게 우부장의 일정배치를 미리 알아내고 손홍상을 불렀다.  “손동무! 듣자니 우부장이 올해는 고향에 돌아가 음력설을 쇤다고 합니다. 고생스럽겠지만 동무가 학강에 다녀와야하겠습니다. 이번에 가서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에 대해 기어코 확답을 받아내야 하겠습니다.” 손홍상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습니다. 밤이 길면 꿈이 많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손동무! 이 일은 지체할 수 없습니다. 듣자니 우부장이 이미 고향으로 출발했다고 하는데 동무는 누군가를 데리고 곧 우부장의 고향으로 떠나야 하겠습니다!”  1984년 음력설은 양력으로는 2월 2일이였다. 1984년 1월말의 어느날, 손홍상은 최원근(崔元根), 정두남(郑斗男)과 함께 북경표 짚차를 타고 먼길에 올랐다. 주당위 차대 리동무가 핸들을 잡았다. 최원근은 당시 주통상구 판공실 주임이였고 정두남은 돈화현 부현장이였는데 주정부에 전근되여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은 밤에 낮을 이어  질주하여 목단강, 계서, 칠대하, 쌍압산, 가목사를 지나 섣달 스므여드래 되는 날에 학강에 당도하였다. 이틀 후면 곧 섣달 그늠날이였다. 눈보라가 기승을 부리는 흑룡강의 엄동설한은 연변의 겨울보다도 엄청 더 추웠다. 게다가 그 때는 짚차의 난방시설도 그닥지 않아 손홍상이 학강에 도착했을 때는 추위에 부대끼다 나니 온몸이 뼈속까지 뻣뻣하게 얼어있었다. 학강은 오랜 탄광구역이였다. 우홍은은 15세 때부터 이곳에서 갱도에 내려가 석탄을 캐내는 광부로 일하다가 나중에 한걸음한걸음 성장하여 광산장까지 하게 되였고  그 만큼 학강탄광에 대해 남달리 깊은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학강탄광의 여러 세대  광부들과 그들의 가족들도 우홍은을 늘 가슴 속에 품고 각별히 그리워하였으며 우홍은을 학강탄광의 자랑으로 받들고 있었다. 손홍상은 학강에 도착하자마자 곧 우홍은에 대한 학강사람들의 이런 특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손홍상이 짚차로 연길에서 학강까지 눈보라길를 헤치며 1,000여킬로메터나 달려올 줄은 우홍은 부장으로서도 예상 밖이였다. 우홍은은 연변 사람들의 이 같은 끈기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홍상동무! 솔직하게 말해서 난 동무가 여기까지 찾아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우부장동지! 덕수 서기는 금년에 우부장동지께서 고향에 돌아와 음력설을 쇤다는 소식을 듣고 우부장동지를 찾아뵙고 오라고 우정 저희들을 보냈습니다.”  이 말을 듣고 우홍은은 미안쩍어하는 표정을 보이였다.  “하필 이럴 것까지야.”  이렇게 인사말을 주고받다가 우홍은은 먼저 도문----훈춘철도의 화제를 꺼냈다. 그러자 손홍상은 제꺽 연변에서 작성하여 갖고 간 도문----훈춘철도 건설자금 신청보고서를 꺼내여 우홍은한테 건네였다. 우홍은은 보고서를 다 보고 나서 손홍상을 치하했다.  “이 보고서는 정말 잘 작성되였습니다. 빈틈없이 모두 써넣은 것 같습니다.”  “우부장동지! 부장동지가 보건대 별문제가 없으면 음력설 전에 이 보고서에 서명을 해주실 수 없겠습니까?”  손홍상의 청에 우홍은은 보고서를 다시한번 진지하게 검토하고 나서 이렇게 말했다.  “이 일은 여기로 오기 전에 이미 연구하여 결정했습니다. 다만 연변에서 요구한  이 억원을 그대로 다 준다는 건 어렵습니다.  9,000만원만 내려보내겠습니다!”  우홍은은 이렇게 말하면서 연변의 보고서에 서명을 하고 석탄공업부에서 9,000만원을 출자한다는 내용까지 명확히 밝히였다. 우부장이 서명한 보고서를 보고 손홍상 일행은 너무 기뻐서 얼굴이 함박꽃처럼 활짝 피여올랐다. 이렇게 큰 일을 성사시키고 나니 손홍상은 마치 자기의 가슴을 지지누르고 있던 큰 돌덩이가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그 날 저녁에 우홍은은 학강탄광 탄광장 및 당위 서기와 함께 손홍상 일행을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우부장은 한집식구처럼 손홍상 일행을 친절하게 대해주었으며 술좌석에서 훈춘의 미래 발전전망을 놓고 흥미진진하게 담론를 나누었다. 저녁식사가 끝나니 시간이 퍼그나 흐른 뒤였지만 손홍상은 숙소에 돌아오자마자 곧바로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었다.  “리서기! 우부장은 이미 저희들이 갖고 온 보고서에 서명했습니다.” 흥분에 젖어있는 손홍상의 목소리에 뭔가 예감하면서도 리덕수는 궁금하여 다우쳐물었다.  “우부장이 얼마나 비준했습니까?” 송홍상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석쉼해있었다.  “9천만원!” 리덕수는 그 소리를 듣고 못내 흥분된 듯 이렇게 소리쳤다.  “손동무! 마침내 큰 일을 해내고야 말았습니다!” 바로 그 해 7,8월경에 송평(宋平)이 연변에 와서 사업시찰을 하게 되였다. 그 때는 마침 여름철이라 연변에서 가장 좋은 계절이였다. 도문----훈춘철도건을 회보해야 하므로 리덕수는 손홍상을 데리고 송평의 연변시찰을 안내하다가 나중에 장백산에 이르게 되였다. 송평은 그 때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이였는데 국가계획위원회 6,7명 국장이 수행하고 있었다. 그 날 저녁 리덕수는 장백산 악화호텔에서 송평한테 도문----훈춘철도에 대해 회보하였다. 그 때 송평의 동행인 가운데는 석탄부와 림업부의 관계자들도 있었다. 리덕수의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송평은 시원하게 자기 생각을 내놓았다. “이 일은 이미 몇해 동안이나 끌어왔다. 호요방 총서기의 회시가 있었고 계획위원회 관 련 부문에서도 이미 모두 고찰을 마친 사안이다. 연변에서 매우 적극적인 데다 길림성에서도 지지하고 있으므로 나는 이 대상을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나중에 자금문제는 최종적으로 총예산은 억 6천만원으로 잡고서 석탄공업부에서 9,000만원, 국가계획위원회에서 5,000만원, 림업부에서 2,000만원을 출자하는 것으로 락착되였다. 처음 준비사업을 시작할 때 연변에서는 도문----훈춘철도 건설총지휘부를 설립하고 상무부주장 손홍상이 총지휘를 맡았다. 그런데 막상 자금이 조달되여 곧바로 착공에 들어가게 되자 사업의 수요로 말미암아 손홍상이 총지휘를 맡지 않고 주당위 부서기 김성화가 총지휘직무를 이어받게 되였다. 그 때 도문----훈춘철도 건설총지휘부에서는 확실히 많은 일들을 해냈다. 사람들은 열정이 한껏 끓어오르고 사기가 충천하여 거뜬거뜬하게 일들을 해제꼈다. 렬차의 첫 경적소리가 훈춘의 산골짜기에서 메아리치자 많은 사람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였다. 도문----훈춘철도를 건설하는 동시에 연변에서는 자금을 유치해다가 도문----훈춘간 두만강 강변도로를 대규모적으로 정비하는 작업을 벌렸다. 원래의 모래흙길을 아스팔트로 포장하였는데 이것은 그저 일반적인 건설이 아니라 거의 새로 갈아치우는 거나  다름이 없었다. 도로를 곧게 펴나가고 턴넬까지 뚫었다. 이렇게 큰 역사를 벌렸더니  훈춘으로 통하는 길이 대뜸 순통하게 되였다. 오늘에 와서 훈춘은 옛 모습을 찾아볼 수 없으리 만치 새롭게 일신하게 되였다. 게다가 고속도도로에다 고속도철도까지  통하니 훈춘이란 이 자그마한 변경도시는 내지와도 거칠 게 없이 쭉쭉 이어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 이렇게 말했다. “기반시설건설은 반드시 조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조합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많은 노력을 들이고도 성과가 적을 수 있지만 조합을 이루게 되면 적은 노력을 들이고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습니다.” 훈춘을 개발하는 문제에서 리덕수는 특히 교통이 꼭 한발 먼저 앞서 가야 한다고 하면서 무엇보다도먼저 도로와 철도 건설을 다그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훈춘에는 개발해야 할 대상이 이렇게 많은데 도로를 보면 도로가 말이 아니고 철도를 말하면 아직 철도도 없습니다. 밀강에 가로막힌 그  대반령고개를 보면 외지사람들이 지레 겁을 집어먹고 돌아설 텐데 남들이 뭐라 하겠습니까? 우리는 결심을 내리고 우선 훈춘에 철도를 건설하고 도로를 건설해야 합니다. 철도가 없으면 탄광과 발전소의 대형기계설비들도 운반해 들여올 수 없습니다. 앞으로 훈춘 탄광과 발전소가 제2기, 제3기 공사에 들어가면 더 많은 대형기계설비들을 훈춘으로 끌어들여와야 하겠는데 철도가 없이 무엇으로 나르겠습니까?” 도로를 건설하고 철도를 부설하려면 필연적으로 토지를 차지하게 된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무슨 견지에서 그랬는지 훈춘에 등급 이상의 도로를 건설하는 것을 한사코 가로막았다. 언제인가 리덕수는 대회에서 이런 사람들을 엄숙하게 비평했다. .  “우리가 철도와 도로를 건설하는 게 그래 백성들의 리익에 손해를 끼친단 말입니까? 훈춘을 크게 개발하여야만  우리 백성들이 더욱 잘살아갈 게 아닙니까? 제가 보건대 우리의 어떤 간부들은 한치 앞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는 근시안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훈춘의 래일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하거니와 훈춘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훈춘에 철도를 건설하지 않고 도로를 건설하지 않으면 훈춘은 희망이 없거니와 훈춘의 래일도 있을 수 없습니다.” 훈춘에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한집에 오누이가 살고 있었는데 오빠는 민병련장이였다.  ‘문화대혁명’ 시기에 여름철이 되면 일년 량식을 다 먹어버려 집에는 먹을 거라곤 하나도 없었다. 오빠가 민병련장이여서 늘 민병들을 거느리고 훈련을 하고 각종 힘든 중로동에 참가해야 했는데 오누이 모두 식욕이 장난이 아니였다. 그들은 배고픈 걸 힘들게 견디고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오빠는 누이동생이 풋옥수수를 삶아 놓은 것을 보고 이상쩍어 물었다.   “이 옥수수가 어디서 생긴 거니? 우리 집에서는 옥수수를 심지도 않았는데...”  누이동생은 그냥 속이고 넘어갈 수 없는지라 그대로 이실직고하였다.  “오빠가 민병련장까지 맡고 매일 그렇게 힘든 일을 하고 있는데 날마다 굶고다니는 걸 어떻게 그저 보고만 있겠소? 그래서 생산대밭에 들어가 몇 이삭 따왔어요.”  오빠는 그만 화가 치밀어 누이동생의 빰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그래도 니가 어떻게 감히 생산대 옥수수를 흠쳐올 수 있단  말이냐?”  누이동생은 하도 억울해서 울면서 뛰쳐나갔는데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도무지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화김에 그길로 강를 건너갔던 것이다. ‘문화대혁명’이 끝나고 우리 이쪽에서 개혁개방을 하면서 세월이 나아지자 그 누이동생은 다시 되돌아오게 되였다. 그 당시 리덕수는 이 사례를 들면서 대회에서 반문식으로 열변을 토하였다.  “이래도 개혁개방을 하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이래도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아도 된단 말입니까? 이래도 농민들이 부유해지는 게 배아프단 말입니까?  ‘문화대혁명’ 이전과 ‘문화대혁명’ 기간에 연변에서 저쪽으로 건너간 사람들이 한때는 퍼그나  많았는데 ‘문화대혁명’ 이후에 우리가 개혁개방을 하면서 경제가 발전하게 되자 저쪽에서 다시 건너오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만약 경제를 잘 틀어쥐지 않아 백성들의 생활이 유족해지지 않는다면 어떻게 변강이 안정해질 수 있겠습니까?” 훈춘은 매우 유리한 지역적 우세와 풍부한 자원적 우세를 가지고 있고 그 발전적 잠재력 또한 엄청나게 크다. 그런데 지난날 훈춘은 금산을 끼고 앉아서도 가난에 허덕이게 되였다. 그러므로 개혁개방의 새로운 형세하에서 하루빨리 가난하고 락후한 면모를 개변하려면 이러한 우세를 충분히 리용하여 자원을 개발하고 큰 프로젝트들을 많이 유치하여 닫는 말에 채찍질하듯이 경제를 내미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급선무였다. “이른바 건설대상유치에서 무엇보다도먼저 그것을 찾아 뛰여다니는 것이 가장  요긴합니다. 찾아 다닌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그것은 바로 찾아 다니면서 당겨와야 한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이 스스로 찾아 다니지 않고 주동적으로 당겨오지  않으면 허다한 일들은 탁상공론에 그치게 되고 아무리 훌륭한 건설대상이라고 해도 나중엔 모두 물거픔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 자신이 쟁취하지 않고 노력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없던 일로 되고 만다는 말입니다.” 훈춘탄광구역 화력발전소 제1기 공사는 훈춘의 전반 개발과 개방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전 연변의 발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건설대상였다.  이 제1기 공사를 시작하기 어렵다는 것은 주로 국가의 심사비준을 받아내기 어렵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훈춘 지하에는 엄청난 석탄자원이 매장되여 있으므로 탄광구역 화력발전소를 건설하게 되면 지척에 있는 석탄으로 전기를 발전할 수 있는 훌륭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기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와 훈춘의 관련 일군들은 국가 관련 부문을 찾아 수없이 뛰였다. 훈춘화력발전소는 1983년 년말부터 건설계획에 들어갔다. 1984년 10월에 국가 계획위원회와 수리전력공업부에서 연변의 신청보고서에 정식회시를 내려보내면서 훈춘화력발전소를 건설할 데 관한 지령이 동시에 떨어졌다. 3년간의 전기작업을 거쳐 1987년 4월에 착공의 첫삽을 뜨면서 급믈살을 타 1988년10월에 첫번째 발전기세트가 발전을 시작했고 또 다른 발전기세트는 1989년 11월에 발전에 투입되였다. 이리하여 제1기 공사의 두대의 100조와트 발전기세트는 최종적으로 국가송전망에 련결되여 전기를 생산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 대상건설의 전반 과정에 다 참여하였다.  그 당시 연변에는 전력공급 부족상태가 심각하여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에서마저 송전중단사태에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와 농촌 주민들의 일상생활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공업생산과 각항 사회사업발전에도 막대한 영향을 주었고 연변경제의 쾌속발전을 저애하는 걸림돌로 되였다. 그 시절에는 사람의 가슴을 잔뜩 조이게 하는 이런 사태들이 자주 터져나왔다. 병원에서 한창 수술중인데 갑자기 정전이 되면 환자가 극심한 고통을 받는 건 더 말할 것도 없거니와 환자의 생명도 풍전등화의 위기에 매몰리게 되는 사태도 있었다. 당시 길림성 전역이 전력공급에 목말라있었다. 이런 큰 배경 하에서 연변에서는 훈춘에 발전소를 건설할 것을 제기하였다. 이 훈춘발전소는 성에서 추진하는 건설대상이기도 했기에 마국산(马国山)한테 총지휘를 맡겨 보내였다. 이에 앞서 그는 장춘제2 화력발전소 부공장장 겸 총공정사였는데 화력발전소 건설실무를 익숙하게 장악하고 있었다. 결국 마국산과 손홍상이 동시에 훈춘발전소 건설공사 총지휘를 맡게 되였다. 연변쪽의 일은 손홍상이 구체적으로 추진하게 되였다. 공사 건설과정에 구체적인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대부분은 연변에서 협조하여 해결하였다. 훈춘화력발전소 건설대상은 그 규모가 엄청 크기에 애초 계획할 때부터 제1기와 제2기로 나누어 추진하기로 결정하였다. 제1기 공사는 20만킬로와트 발전기를 설치하기로 하였다. 이 20만킬로와트 발전기가 다 설치되여 가동에 들어가면 연변에서 전력공급이 딸리는 상황이 크게 완화시킬 수 있는 건 물론 전 성 전력공급 부담도 크게 줄일 수 있었기에 실제적인 효과가 매우 가시적이라 할 수 있었다. 화력발전소를 건설하려면 토지를 징용해야 했다. 발전소에서 토지를 징용하는 것은 대단히 까다롭고 시끄러운 일이였다. 징용하는 토지가 한무, 두무도 아니고 엄청나게 많은 만큼 엉키는 문제들이 복잡다단하였다. 물론 그 때의 토지징용은 지금의 철거이주와는 동일시 할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이뤄졌다. 첫째로 그 당시 토지징용 가격이 매우 낮았다. 둘째, 훈춘 백성들은 정부의 어려운 사정을 너무도 잘 헤아려주었다. 훈춘 백성들은 훈춘발전소가 국가의 큰 건설대상이고 이 발전소를 건설하는 것은 당지의 경제를 발전시키고 연변 백성들의 생활을 개선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정부의 토지 징용에 긍정적으로 나왔다.  그렇게 많은 땅이 징용되면서 수많은 농가호와 주거호의 리익과 엉켜있었지만 가가호호 저마다 넓은 아량으로 큰 국면을 돌보면서 사리를 옴니암니 따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 당시 이 일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그 때를 떠올리기만 하면 감개를 금치 못하고 있다. 훈춘발전소는 착공해서부터 첫번째 발전기가 가동에 들어가는 데 이르기까지 원래 계획보다 6개월이나 더 앞당겼다. 발전소 건설력사에서 그야말로 보기 드문 기록이였다. 나중에 성에서는 이 공사를 모범 공사로 평의하고 훈춘발전소 건설지휘부에 상금 30만원을 발급하였다. 주정부에서도 토의를 거쳐 지휘부에 상금 5만원을 발급하기로 결정했다. 이리하여 상금총액이 도합 35원에 달했다. 그 때는 아직 상금이란 것이  류행되던 시절이 아니라서 한꺼번에 이 많은 상금을 받게 되니 다들 기뻐는 하면서도  어쩔 줄 몰라서 머밋거렸다. 지휘부에서는 이 35만원 상금을 몽땅 건설자들한테 나누어주었다. 손홍상이 이 일을 리덕수한테 회보하자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잘했습니다. 참 잘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열심히 일한 건설자들에게 보내는  일종 감사와 경의, 례의가 아니겠습니까.” 훈춘발전소 공사와 관련이 있는 건설대상에는 훈춘탄광 건설대상도 포함되여있었다.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기 위해 리덕수는 또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 실무를 주관하는 한영(韩英) 부국장을 청해왔다. 한영은 원래 공청단중앙의 제1서기로서 당의 제10기, 11기 중앙위원이였는데 그 당시는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 부국장(부부장 대우)을 맡고 있었다. 한때는 다 같은 공청단간부였기에 리덕수는 한영을 익숙히 알고 있었으며 두 사람의 관계도 매우 가까웠다. 리덕수는 한영을 찾아가 그한테 훈춘탄광건을 회보했다. 한영은 이 건설대상을 지지한다는 명확한 립장을 내놓았다. 나중에 한영은 훈춘의 이 건설대상을 추진하는 과정에 확실히 매우 중요한 역할을 보였는데 이로하여 리덕수는 내심 한영한테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한영의 이와 같은 지지가 있었기에 동북내몽골석탄관리국에서는 훈춘탄광 건설을 중요한 건설대상으로 밀어주게 되였다.  리덕수는 한영을 청해오고 또 한영을 대동하여 훈춘에 가서 함께 갱도에까지 내려가 돌아보았다. 한영은 연변의 발전에 지극한 관심을 보이면서 연거퍼 여러번이나 연변으로 찾아왔다. 그 때마다 리덕수는 그를 대동하여 함께 훈춘탄광에 내려가 돌아보고 연변탄광에도 가보았다. 훈춘발전소 제2기 공사를 가동할 때에 리덕수는 이미 북경에 전근되여 중공중앙 통전부 부부장 겸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었다. 리덕수는 비록 몸은 북경에 가있었지만 늘 훈춘발전소 공사를 가슴에 두고 있었다. 훈춘발전소 제2기 공사의 두대의 33만킬로와트 발전기세트는 2004년 8월에 설치하기 시작하여 2006년 9월에 두 세트의 동시운행을 이뤄놓게 되였다.  매번 연변에서 북경으로 들어간 사람이 있으면 리덕수는 언제나 훈춘발전소의 건설 진척상황을 까근히 물어보았고 무슨 새로운 난관에 봉착하지 않았는가, 만약 새로운 난관에 봉착했으 면 어떻게 풀어나갔는가 하는 등등에 깊은 관심을 보이였다. 리경호의 회고이다.  “리덕수 서기는 참 실속있게 사업을 추진하는데 자기가 제대로 보았다고 판단되는 일은 꽉 잡고 끝까지 밀고나갔으며 성과를 보기 전에는 절대 손을 놓지 않았습니다, 훈춘의 개발과 개방은 리덕수 서기가 줄곧 고도의 관심을 보인 사업이였고 적잖은 일들은 그가 친히 추진한 대상들입니다. 그 당시는 계획경제가 금방 시장경제에로 전환하면서 두가지 경제체제가  마찰 속에서 적응되여가는 시점이였던 만큼 저희들은 천방백계로 끈질지게 상급부문으로 찾아 입이 마르도록 여러 관련 부문들을 설득시키면서 여러 부문에서 오는 각종 걸림돌을 일일이 타개하여야만 성사시키려는 건설대상을 쟁취해 올 수 있었습니다. 연변이 오늘과 같은 쾌속적인 발전을 이룰 수 있게 된 것은 리덕수 서기가 주당위 서기를 맡은 기간에 전반적인 전략적 기획을 세우고 솔선수범하여 이끌어나간 지도력과도 갈라놓을 수 없습니다.”  훈춘의 개발과 개방을 언급하면서 훈춘의 림업개발을 빠뜨릴 수 없다. 그 당시 연변으로 놓고 보면 삼림보호와 림목축적량보호가 가장 잘된 곳이 바로 훈춘이라고 할 수 있었다. 기타 현시의 삼림구역과  비교해보면 훈춘삼림구역에는 상대적으로 과도한 채벌현상이 없었으며 새로운 개발이 거의 없는 미개발상태였으므로 림산구역 환경보호가 매끄럽게 되여있었다. 훈춘이 연변의 기타 현, 시처럼 림업구경내에 대형삼림공업기업을 여러개 두지 않은 게 삼림을 고이 지켜낼 수 있게 된 강력한 카드였다. 훈춘에 린접해 있는 왕청현만 보더라도 왕청림업국, 대흥구림업국과 천교령림업국 등 3개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고 돈화에는 돈화림업국, 대석두림업국과 황니하림업국 등 3개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으며 화룡에도 화룡림업국과 팔가자림업국 등 두개의 대형삼림공업국이 있었다. 그런데 훈춘에는 나중에야 세워진 대형삼림공업국이 하나 밖에 없었다. 이러한 환경은 림산구역 자연환경보호와 림산구역 생태균형을 지켜주는 보호산이나 다름없었다. 훈춘 림업개발사업이 의사일정에 오른 다음 리덕수가 가지고 있는 많은 구상 속에서도 훈춘으로 하여금 다시는 기타 림산구역의 전철을 밟게 해서는 안된다는 의지가 단연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훈춘에는 한폭의 그림과도 같고 시처럼 정서적인 전원풍경이 있을 뿐만 아니라 울창한 삼림과 드넓은 습지가 있어 세계적으로도 이름있는 철새들이 잇따라 쉬여가고 있다. 해마다 두루미, 백조, 기러기를 포함한 수백만마리의 철새들이 훈춘에 와서 한숨 쉬고 각지로 날아간다. 훈춘의 삼림은 아름답고 울창하여 피복률이 87%에 달하고 있다. 훈춘시는 일본해와의 거리가 15킬로메터도 채 되지 않아 독특한 소기후를 형성하고 있다. 훈춘에서 출산되는 셀레니움사과는 달콤한 데다 아삭아삭하고 영양까지 풍부하여 훈춘에서 재배하기에 매우 적합한 과수로 몸값이 오르고 있다 리덕수는 훈춘에서 과일나무를 많이 심어 만무과원을 건설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 때 리덕수는 친히 붓을 날려 ‘만무과원(万亩果园)’이란 네 글자를 써주었는데 다만 거기에 자기의 락관을 남기지 않았다. 그가 이렇게 네 글자를 써준 것은 훈춘의 간부와 군중들에게 자기들의 삶의 터전을 보다 아름답게 건설하라는 격려의 마음을 전함과 아울러 훈춘의 만무과원 건설을 위해 여론을 조성하자는 데 그 뜻이 있었다. 사실 그 때로부터 리덕수의 머리속에는 대림업 개념의 륜곽이 그려지게 되였다 이른바 대림업 개념을 리덕수는 이렇게 풀이했다. “전 방위적이고 전면적이며 립체적으로 림산구역의 산업을 개발하여 연변의 림산구역으로 하여금 생태가 균형을 이루고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며 인류가 살기에 적합한 록색 삶의 터전을 건설하여 후대들에게 대자연이 인류한테 하사한 록수청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리덕수는 과수재배업을 발전시키는 것이 훈춘의 림업개발에서 하나의 중요한 내용이므로 기타 건설대상처럼 틀어쥐어야 그에 따른 성과와 효익을 거둘 수 있다고 내다보았다. 10여년이 지난 후에도 리덕수는 과수원을 둘러보려고 북경에서 특별히 훈춘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훈춘에서 사과과수원이 크게 발전한 것을 보고 못내 기뻐하였다. 그는 훈춘의 과수원 건설대상에 그토록 심혈을 몰부었다. 리덕수는 북경에 가서 임직한 후에도 국가민족사무위원회와 길림성민족사무위원회에서 자금면에서 훈춘 과수원건설을 특별히 지지해주도록 배려하였는데 이것은 자금지원이 절실한 훈춘으로 놓고 말하면 그야말로 가물에 단비나 다름없이 반가운 일이였다.               두만강에서 바다로의 출항   훈춘의 변경무역은 훈춘의 대개발과정에서 세인의 주목을 받는 초점이나 다름없었다. 리덕수는 훈춘의 변경무역에 깊은 중시를 돌렸다. 그는 변경무역이 없고 변경무역을 활성화시키지 못하면 훈춘은 활로가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 일 때문에 리덕수는 여러번 훈춘에 내려가 변경무역 문제를 조사연구하였다. 깊이 있는 조사연구를 거쳐 리덕수는 먼저 자금을 투입하여 이미 페기된 권하의 낡은 다리를 보수하고 리용해야 한다고 선참으로 제기했다. “훈춘에서 변경무역을 하려면 꼭 그 낡은 다리를 보수하고 다시 리용해야 합니다. 이것은 지금으로 말하면 가장 간편하고 빠르면서도 가장 품이 적게 드는 방법입니다.”  오래 동안 보수하지 않았기에 이 낡은 다리는 중간이 끊어져 차량이 통과할 수 없었다, 이 다리가 군사방비구역내에 위치해있으므로 이 다리를 보수하는 문제를 가지고  리덕수는 친히 군부대를 찾아가 협상하였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두만강 강물의 침식으로 방천초소로 통하는 도로가 훼손되는 바람에 우리가 방천으로 건너가려면 쏘련의 도로를 한 구간 차용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방천은 우리의 중요한 국경선 표지가 자리 잡고 있는 고장이다. 애초에 청나라 관원 오대정((吴大徵)이 몸소 훈춘 방천에까지 내려가 국경선 측량과 확정을 관여하면서 최종적으로 거기에 경계비를 세웠다. 경계비를 세우기에 앞서 오대정은 짜리로씨야와의 담판을 거쳐 최종적으로 이 구간의 중국----로씨야 동부변경선을 확정하였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남의 길을 차용해야 비로소 우리의 국경선까지 갈수 있게 되였으니 감정적으로나 리성적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리덕수가 여러번 방천으로 건너갈  때도 모두 남의 나라 쏘련의 길을 차용하군 하였다. 이런 실제적인 체험을 통해 그는 반드시 우리 나라 자체의 통로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지를 굳히게 되였다. 이 일은 아주 간단해보였지만 막상 손을 대니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였다. 나중에 여러 부문의 협상으로 마침내 도로수축방안을 확정하게 되였다. 방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수축된 후 부대 장병들과 지방간부들도 시름놓고 안전하게 차를 몰고 방천으로 다닐 수 있게 된 건 물론 방천의 백성들도 우리가 마침내 애국의 통로를 수축했다고 기뻐해마지않았다. 방천으로 통하는 도로가 수축된 다음 리덕수는 또 군부대에다 지방에 있는 백성들도 “토자비(土字碑)”가 세워진 경계비구역에 가서 참관할 수 있도록 받아줄 것을 건의했다. 리덕수는 이렇게 하면 하나는 여기에 와서 참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한차례 생동한 애국주의교육을 받게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지방 백성들이 와서 참관하게 되면 이 초소를 지키는 부대 장병들도 한결 더 영예감과 책임감을 갖게 될 것이라고 그 의미를 추려냈다. 나중에 부대에서는 리덕수의 이 건의를 받아들였다. 지금은 백성들이 경계비가 세워진 곳에 들어가 구경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망해각(望海阁)’에도 올라가 망원경으로 눈앞에 펼쳐진 로씨야와 조선의 넓은 지역과 일망무제한 일본해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되면서 이곳은 변경선에서 자못 특색이 있는 애국주의교육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현재 훈춘에서 장령자 통상구로 통하는 도로도 리덕수가 연변에서 사업을 주관하는 기간에 건설되였다. 지금까지도 장령자는 길림성에서 유일한 대로씨야 륙로통상구로서 국가 1급 통상구로 몸값을 올리게 되였다. 그 때 훈춘시로부터 통상구에 이르는 이 14.6킬로메터 되는 구간의 도로를 건설하기 위해 주에서는 변경무역방안에 관련하여 사전 제안서를 작성하였다. 제안서에는 로씨야의 대형트럭이나 심지어 무한궤도차가 이곳을 통과할 수 있도록 내다보면서 단기행위에 묶이지 말아야 한다는 등 비중 있는 내용들이 들어있었기에 이 제안서를 바탕으로 하여  이 도로를 단번에 국가 2급 도로로 건설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안서가 있었기에 철도도 곧추 통상구까지 깔게 되였다. 도로교통이 원활해지자 훈춘통상구를 통한 중국과 로씨야 량측 무역이 곧바로 활기를 띠게 된 건 물론 변경의 전반 기반시설건설도 본격적으로 추진되게 되였다. 훈춘은 지리적으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훈춘의 발전을 연변이라는 이 거대한 지역의 구도 속에서 함께 그려나갔다. 리덕수의 안목에서 보면 훈춘의 일은 곧 연변의 일이였다. 그 만큼 권하대교 건설이나 대로씨야 무역 등에서 리덕수는 줄곧 깊은 관심을 돌리고 전폭적으로 밀어주었다. 도문통상구의 국문(国门)은 그 웅위로운 모습을 자랑하며 위풍당당하게 우뚝 솟아있다. 그 국문에 새겨진 큰 글자는 강택민이 연변을 시찰할 때에 친필로 쓴 것이였다. 이에 앞서 1988년에 길림성 성장 왕충우(王忠禹)가 도문통상구에 와서 고찰할 때 당시 주당위 서기였던 리덕수는 도문해관이라는 이 국문을 다시 수축해야 할 데 관한 문제를 회보하게 되였다. 성에서 전문자금을 내려보내면서 새롭게 웅위로운 국문을 수축할 수 있었다. 1991년에 강택민 총서기는 리덕수의 안내 하에 연변을 시찰할 때 “중국 도문통상구”란 이 제사를 남기였다. 통상구 기능이 날따라 완벽화되고 중국의 대로씨야 무역과 관광산업이 신속히 발전함에 따라 훈춘통상구의 통관인원수와 통관화물량이 몇배로 급증하게 되였고 통상구로 통하는 도로도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되였다. 2009년에 훈춘시에서는 또 거액의 자금을 투입하여 이 구간의 도로를 2급 도로로부터 1급 도로로 확장건설하였다. 장(춘)길(림)도(문) 개발과 개방의 창구로서의 훈춘통상구는 국제통로 건설과 통상구 기반시설 건설을 다그치고 통관환경을 최적화하여 중국이 동북아시아 각국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출입문으로 되였으며 두만강구역의 편리한 국제통로로 부상하였다. “ 많은 일들이 다 그러하듯이 무슨 일이나 그저 앉아서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된다. 그저 앉아서 기다리면 기회는 멀거니 기다려주는 게 아니라 곧 사라져 버린다. 하고 싶은 일이 있고 추진하고 싶은 건설대상이 있으면 반드시 부지런히 뛰여다녀야 한다. 건설대상을 추진한다고 하면서 자기 자신이 뛰여다니지 않으면 어떻게 실적이 나올 수 있겠는가?” 실천 속에서 리덕수가 더듬어낸 체험이다. 연변의 개발과 개방을 두고 리덕수의 머리속에 형성된 구상은 연변은 두만강개발과 장백산개발이란 이 두 가지 개발을 견인차로 몰고 크게 일을 벌려야 한다는 것이였다. 두만강개발에는 당연히 두만강하구의 출항도 포함되여 있었다. 기실 두만강개발에서 가장 시급한 사안은 바로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일이였다. 력사를 돌이켜보면 중국은 줄곧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1938년 7월, 일본과 쏘련사이에 ‘장고봉사건’이 터진 이후 쏘련군이 두만강 항로를 봉쇄하면서부터 중국어선들이 다시는 바다로 나갈 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중국은 ‘장고봉사건’의 최대 피해국으로 되였다. ‘장고봉사건’ 이전에는 몇십척 심지어 몇백척 되는 중국의 민간 어선들이 두만강 항로를 따라 바다로 나가 일본해에 가서 고기잡이를 하였다. 또한 두만강하구를 통해 배를 타고 일본, 조선 그리고 중국의 남방 지역과 무역을 벌렸다는 상세한 문자자료도 있었다.  리덕수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의 지도자들은 저마다 전력을 다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사업을 추진하여왔는데 그 취지는 매우 명확했다. 첫째, 우리 나라 고유의 국가주권을 회복하여 행사하려는 것이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우리 중국의 국가주권인데 우리는 몇십년 동안 줄곧 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다. 력사가 오늘까지 발전해온 이상 주권 행사를 회복하는 것은 더 이상  미룰 수 없게 되였다. 그저 내버려두고 장기적으로 행사하지 않으면 이 주권은 차츰 상실할 수도 있다. 둘째,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것은 연변 개혁개방의 수요이기도 하였다. 연변에 출항권이 있게 되면 그 의의는 무궁무진하다 할 수 있었다. 중국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 행사하게 되면 주변국가 특히는 주변국가의 경제발전에도 유조하게 되고 전반 동북아시아지역의 개발과 개방에 매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게 된다. 셋째, 보다 장원한 시각에서 내다보면 중국이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회복하는 것은 쏘련(로씨야)과 조선과의 정치, 문화, 경제 합작을 강화하는 수요라고도 말할 수 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해야 한다고 제기하고 아울러 그 해결책을 탐색해나간  선도자는 바로 리덕수였다. 사실 두만강하구의 출항과 관련된 고찰을 조직하고 있을 때 리덕수는 이미 길림성 부성장(여전히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를 겸임)직을 맡고 있었다. 부성장이라는 직무를 가지고 있었기에 성의 지도자들과 직접 소통하고 의견을 교환할 수 있었으며 국가와 성의 관련 부문들을 설득하기에도 더욱 유리하였다. 그 당시 리덕수는 문화, 교육, 위생, 과학기술 등 분야를 분담하여 주관하고 있었는데 그 속에는 성과학기술위원회와 성과학기술협회도 포함되여 있었다. 리덕수는 이 두개 부문으로 하여금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적극 참여하도록 동원하였다. 아울러 국가적 차원에서는 그 당시 국무위원 겸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주임을 맡고 있던 송건(宋健)의 전푝적인 지지를 이끌어냈다. 리덕수가 송건한테 처음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해 회보하자 송건은 대뜸 연변의 의견을 전폭적으로 지지한다고 태도를 밝혔다. 그 후 송건은 친히 연변에 와서 현지를 고찰하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권을 회복하려고 뜻과 힘을 모으는 과정에서 국가과학기술위원회는 줄곧 매우 중요한 력량으로 밀어주었다.  물론 국가발전 및 개혁 위원회와 상업부도 이 구상에 매우 적극적이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려면 반드시 두개 부문을 통과해야 했는데 그중 하나는 외교부이고 다른 하나는 해방군총참모부였다. 리덕수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고 과학고찰을 진행하던 그 나날들을 떠올리면 가슴이 설레이고 감개에 젖어들군 한다. 1990년 연변에서 시동을 걸기 시작한 두만강하구의 츙항을 회복하는 사업이 실제 실시단계에 들어서게 되였을 무렵 제일 먼저 외교적 문제와 부딪치게 되였다. 우리의 출항이 이웃나라인 쏘련과 조선과도 관련이 있기 때문이였다. 지방정부에서는 국가와 국가간의 문제를 해결할 권한을 갖고 있지 못했다.  “주은래 총리께서는 일찍 ‘외교에는 작은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정말 천만지당한 말씀이였습니다.”  리덕수의 체험담이였다. 무엇보다 직접 외교부에 가서 전기침 부장을 찾는 게 시급하였다. 외교부 판공청의 협조 하에 리덕수는 그 이튿날 오후 3시에 전기침 집무실에 들어서게 되였다. 전기침은 진지한 표정으로 리덕수의 회보를 청취했다. 리덕수는 회보할 때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것은 우리 나라 고유의 주권인데 몇십년 동안 우리 자신이 이 주권을 행사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즉각 회복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각별히 힘 주어 말하였다. 국가의 주권과 관련된다는 리덕수의 회보는 곧바로 전기침의 중시를 받게 되였다. 전기침도 두만강하구의 출항이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의식한듯 리덕수를 보고 정황을 좀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라고 주문하였다. 전기침이 공간을 마련해주었기에 리덕수는 보다 상세하게 관련 정황들을 회보할 수 있게 되였다. 전기침은 말허리를 자르지 않고 귀를 가다듬은 채 리덕수의 회보를 들었다. 전기침이 리덕수의 회보를 들으면 들을수록 점점 더 흥미를 가지고 이따금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해 수시로 떠오르는 새로운 문제들을 물으면 리덕수는 아는 만큼  일일이 대답해주었다. 전기침이 제기한 문제들은 광범위하면서도 까근하였다. 리덕수의 회보도 그만큼 깊이 있고도 세분화되였다. 나중에 전기침과 리덕수 두 사람은 격이 없이 화기애애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으리 만치 가까워졌다. 리덕수는 길림성정부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주정부를 대표하여 전기침한테 길림성 그리고 연변에 와서 시찰할 것을 초청하였다. 전기침은 기꺼이 리덕수의 초청을 받아들였다.   “덕수동무! 동무가 방금 소개한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매우 중요한 사안입니다.  저도 무척 끌려들어가면서 정말 한번 가보고 싶습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일에 대해서 전기침은 외교부가 나서서 쏘련과   조선 이 두 나라에 통보할 것이라고 명확히 태도를 표명했다. 그 이튿날 전기침의 비서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전외장께서는 리성장과 함께 길림으로 가기로 하였습니다.” 리덕수는 기쁘게 희소식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그 이튿날 리덕수는 전기침을 안내하여 장춘에 당도하였다. 그 당시 성당위 서기 하죽강(何竹康)과 성장 왕충우는 리덕수가 훌륭한 일을 하였다고 크게 치하하였다. 왕충우는 우스개소리처럼 이렇게 말했다.  “덕수는 정말 여간내기가 아닙니다. 외교부장을 다 모셔 왔으니 말입니다.” 전기침은 장춘에 와서 길림성에 세가지를 대답했다. 첫째는 연변에 가서 두만강류역과 바다로 나가는 두만강하구를 현지답사하겠다. 둘째는 외사사업에 관한 길림성의 회보를 청취하겠다. 셋째는 길림성을 떠나기에 앞서 성당위와 성정부 간부들한테 당면의 국제 형세와 우리 나라 외교방침과 외교사업에 대한 보고를 진술하겠다. 리덕수는 전기침을 안내하여 승용차로 장춘에서 연변으로 떠났다. 그 때는 물론 지금처럼 고속도도로가 없었으므로 옛날식 흙모래길을 달려야 했다. 차 안에는 리덕수와 전기침 두 사람 뿐이였다.  길에서 많은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데 이야기를 하면 할수록 그들의 정은 점점 더 가까워졌다, 몇년이 지나 리덕수가 북경에 전근되여 임직하게 되면서 때로는 공식적인 장소에서 전기침을 만날 수 있었다. 전기침은 리덕수만 보면 언제나 반색을 하며 늘 먼저 리덕수한테 인사를 건넸다. 전기침은 그 때 이미 국무원 부총리에 정치국 위원이였는데 언제나 옛정을 잊지 않고 있었다. 어떤 때 회의를 하게 되면 전기침은 주석대에 앉고 리덕수는 밑에 앉게 되였는데 전기침은 리덕수가 눈에 띄이면 늘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보내기도 하였다. 연변에 도착한 후 리덕수는 먼저 전기침을 안내하여 장백산으로 올라갔다. 전기침은 파란 물감을 풀어놓은듯 맑디맑은 천지물과 가없이 펼쳐진 망망한 림해를 바라 보면서 깊은 사색에 빠진듯 한동안 아무 말없이 서있었다. 전기침은 전세계를 거의다 돌아보았음에도 장백산의 웅위롭고 아름다운 산천경개에 찬탄을 금치 못하면서 리덕수한테 여러번 자신의 감개를 이렇게 털어놓았다.  “덕수동무! 이번에 정말 잘 왔습니다. 결코 헛걸음은 하지 않았습니다!” 장백산에서 내려온 후 전기침은 중점적으로 두만강하류 3개 나라 린접지대에 위치한 훈춘의 방천을 고찰하였다. 전기침은 리덕수의 안내 하에 바다로 들어가는 두만강 하구류역과 그 곳의 지리와 지모를 살펴보았다. 전기침은 그 곳을 살펴보면서 리덕수한테 여러가지 문제들도 제기하였는데 그 대부분은 중국과 로씨야가 변경선을 확정하게 된 그 전후의 경위와 관련된 력사적 측면의 문제들이였다. 그리고 우리측과 저쪽 변경지대 주민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량쪽 백성들 사이에 래왕이 있는가, 또 어떤 형식으로 래왕하는가 하는 이러루한 정황들을 일일이 물어보았다. 리덕수는 깊은 감개에 젖은 목소리로 전기침의 물음에 대답했다. “전부장동지! 저희 연변에서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추진하면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게 되였음에도 손에서 놓지 않았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희들은 이걸 통해 먼저 리득을 좀 챙겨보려는 그런 생각은 없습니다. 저희들은 개척자이지 향유자가 아니라는 각오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희들은 장원한 안목에서 이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전기침은 리덕수의 이 말을 듣고 한참 동안 깊은 사색에 잠겼다가 이렇게 말했다. ”덕수동무! 이 며칠간의 접촉을 통해 저도 동무의 그 마음을 다 읽을 수 있었습니다!” 현지에서의 고찰과 리덕수의 상세한 소개를 다 듣고 나서 전기침은 두만강하구의 출항에 대단히 긍정적인 립장을 보여주었다. 한편 외교적 측면에서는 별문제가 없을 것으로 내다보면서 외교부도 연변에서 추진하는 이 사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며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지지한다고 명확히 밝히였다. 전기침은 연변을 떠나기에 앞서 다시한번 자신의 의사를 명확히 밝히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기 위한 연변의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한다. 국가 차원의 일들은 외교부가 나서서 린접국과 협상하고 조률하겠으니 구체적인 일들은 주당위와 주정부에서 직접 쏘련과 조선의 지방정부와 협상하고 조률해서 해결을 보기 바란다. 만약 그 과정에서 외교부가 나서야 할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곧 외교부가 나서서 해결해줄 것이다.” 전기침은 북경으로 돌아간 후 외교적 도경을 통해 연변에서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려는 계획을 쏘련과 조선에 통보했다. 이어 연변에서는 쏘련의 변경대표를 연길에 초청하여 연변의 계획을 통보했다. 조선측은 훈춘시당위 부서기 리춘록(李春禄)이 변경을 건너가 면담하였다. 쏘련측에서나 조선측에서는 우리가 통보를 하자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협의서 같은 문서에 서명하지 않고도 연변이 두만강하구를 통한 출항이 가능해지게 되였다. 그 때 쏘련과 조선은 모두 연변의 계획에 대해 적극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문제는 거의다 해결되였으므로 연변에서는 정식 출항을 서두르게 되였다.  그 이튿날 아침, 즉 1990년 5월 28일 아침 5시 30분에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이 방천 주둔부대 운동장에서 성대하고 장중하게 치러졌다. 길림성 부성장 겸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이며 출항회복 총지휘인 리덕수가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에서 동원연설을 하였다. 이어 리덕수는 고찰대 대장인 성과학기술위원회 주임 정사성(丁士晟)한테 고찰대 대기를 넘겨주었다. 외교부, 국가해양국, 국가과학기술위원회와 성, 주, 시정부 및 관련 부문 그리고 연변군분구 및 훈춘시 무장부의 대표와 방천촌 군중들이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을 지켜보았다.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이 끝난 다음 6시 정각에 우리의 선박들은 출항을 시작했다. 중국 국기를 나붓기는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은  62명의 고찰대원들을 싣고 ‘훈춘522호’ 선박의 인도 하에 방천 부두를 출발하여 호호탕탕하게 일본해를 향해 나아갔다. 이것은 장엄한 시각이였고 신성한 시각이였으며 중국 인민들이 몇십년 동안 간절하게 바라마지 않던 시각이였고 중국이 두만강하구에서 우리의 주권 행사를 다시 회복하였음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는 시각이였다. 출항을 회복하는 의식을 주최하는 전반 과정에 리덕수의 가슴은 마냥 한없이 설레이였다. 우람찬 목소리로 가지런히 늘어선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을 향해 “출발!”하고 선포할 때 리덕수의 가슴 속에서는 저도 모르게 열정이 굽이쳐올랐다. 배에 앉은 고찰대 대원들 가슴마다에도 감격의 물결이 흘러넘쳤다. 6시 30분 무렵에 선박들은 쏘련(로씨야)과 조선을 련결하는 철도대교를 지나 8시에는 드디어 바다로 들어가는 두만강하구에 이르렀다. 고찰대 대원들은 눈앞에 펼쳐진 일망무제한 바다를 바라보면서 저도 모르게 환성을 터뜨렸다. 우리가 워낙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이렇게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파아란 바다물을 살펴보면 어떤 수역은 하도 검푸른빛이여서 더구나 신비스러웠고 그 수심도 무척 깊어보였다. 해면의 파도는 그리 거세지 않았지만 바다 밑에서는 해류의 물살이 거세여 고찰대 선박을 마구 상하로 흔들어놓아 도저히 걷잡을 수가 없었다.  9척의 고찰대 선박들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의 해면에서 맘껏 달리였고 배에 앉은 고찰대 대원들은 가없이 드넓은 바다에서 설레이는 가슴을 안은 채 들떠있었다. 예정된 해역에 도착한 후 고찰대 대원들은 곧바로 계획 대로 일사분란하게 고찰에 들어갔다. 몇시간 후에 고찰대 선박들은 귀로에 올라 오후 14시 8분에 무사히 우리측 부두에 돌아왔다. 출항회복의 사전작업인 첫번째 고찰임무는 순리롭게 완성되였다. 고찰대 대원들이 돌아와서 바다로 흘러드는 두만강하구에는 물고기가 하도 많아 심지어 저절로 선박 안으로까지 뛰여든 고기를 사진 찍었다고 신나게 들려주었다.  고찰대 선박들이 오전에 나갈 때는 하늘에 구름 한점 없는 맑은 날씨였는데 오후에 고찰대 선박들이 돌아오자 갑자기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바람이 거세게 불어치고 장대  같은 비가 억수로 내리퍼부어 땅 우엔 짙은 안개가 꽉 덮허버렸다. 이미 뭍으로 돌아온 고찰대 대원들은 오늘은 하늘이 우리를 도왔다고 다들 기뻐하였다.   억수로 퍼붓는 비줄기 속에서 리덕수는 더없이 격동된 정서를 가까스로 가라앉히면서 전보문을 작성해나갔다. 그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는 행사가 성공했다는 희소식을 한시바삐 국무원에 알리고 싶었다. 전보가 발송된 그 날 저녁 국무원에서는 축하문을 보내왔다. 그 이튿날 《인민일보》는 두만강하구의 출항이 회복되였다는 기사를 내보냈다. 이튿날 고찰대 대원들은 모두 연길로 돌아왔다.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연변예술극장에서 성대하고 장중하게 경축대회를 열고 중국인민이 52년 동안이나 중단되였던,  두만강하구로부터 출항하는 이 국가주권을 다시 행사하게 된 경사와 력사적인 중대한 돌파를 경축하였다. 국무원 지도자들은 이번에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한 데 대해 깊은 중시를 돌리였다.  리덕수는 국무원에 와서 전문 이 과정을 회보하였다. 국무원 관련 책임자가 친히 리덕수의 회보를 청취하였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게 된 복잡다단하고 우여곡절도 많았던 전후 과정을 다 회보한 다음 리덕수는 이렇게 강조했다.  “두만강하구의 출항은 장기적인 사업이므로 우리는 반드시 견지하여야 합니다.” 리덕수는 관련 책임자한테 자신의 구상을 이렇게 피력하였다.  “우리는 반드시 해마다 출항하는 것을 견지하여 종당에는 출항의 정상화를 이뤄놓아야 합니다. 그 첫 보조로 우리는 먼저 두만강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의 항도를 깨끗이 정리하는 게 우선적 절차입니다. 그 다음 훈춘에 부두를 건설하고 뒤이어 해운회사나 어업회사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하여야 어선이 일년 내내 출항할 수 있도록 보장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또 이렇게 말했다. “1938년 ‘장고봉사건’ 이전에는 중국어민들이 모두 두만강하구로부터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았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러한 상태를 회복하게 되면 첫째, 이것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우리의 조상들이 물려준 나라의 주권을 수호하는 것이 되고 둘째, 경제적으로 이것은 훈춘 더 나아가 전반 연변의 개발과 개방에 유익할 뿐만 아니라 길림성의 개발과 개방에도 유익하며 중국과 조선, 쏘련(로씨야), 한국, 일본 등 주변국가들간의 협력과 교류에도 유익할 전망입니다. 눈앞의 가장 가까운 직접적인 경제리익만 감안해도 만약 어민들이 경상적으로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아 돈을 벌 수 있다면 바다로 나가는 적극성이 끓어오를 수 있으므로 민간출항이 정상적인 상태를 형성할 수 있고 관광업도 이끌 수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국면이 형성된다면 정치, 군사, 외교 분야 나아가 경제면에서도 우리에게 매우 유익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회보에서 리덕수는 조선의 라진항을 임대하여 우리의 개발과 개방에 활용하자는 건의도 국무원에 내놓았다.  국무원 책임자는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연변이 두만강하구의 출항을 회복하기 위해 추진한 사업에 대해 충분히 긍정하면서 “길림성에서는 이 일을 꾸준히 견지해나감으로써 쏘련과 조선으로 하여금 점차적으로 우리의 출항활동을 정상적인 작업으로 받아들이게 하여야 하겠습니다.”라고 당부하였다. 두만강개발의 영향은 날로 커져갔다. 연변에서는 성공적으로 두만강하구의 출항활동을 진행한 다음 뒤이어 북경에서 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소식공개회와 좌담회를 잇따라 소집하였다. 장춘에서 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제1차 국제포럼을 열 때 유엔에서도 관련 관원을 보내왔다. 미국의 10여명 대표단과 함께 일본, 몽골, 로씨야, 한국, 조선 등 11개 나라에서 온 대표가 포럼에 참가했다. 이것은 두만강(동북아시아) 개발에 관한 첫번째로 되는 국제적 포럼이였다. 리덕수가 주최국을 대표하여 주최하고 국무위원 송건이 포럼에서 연설을 발표하였다. 송건이 중국어와 영어 두가지 언어로 한 연설이 어찌나 멋진지 그 연설을 듣고 난 회의 참가가들 모두 정서가 북받치고 힘이 솟구치게 되였다고 이구동성으로 감회를 털어놓았다는 후문도 있었다.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10월호]                
29    연변문학 특별기획(3) 리덕수의 고향사랑 댓글:  조회:852  추천:0  2018-10-24
연변문학 특별기획(3)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통신과 교통이 선행해야          연변의 실정에 근거하여 계획이 있고 목표가 있게 경제건설과 사회 각항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할 장원한 안목으로부터 출발하여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의 관련 정신에 근거하여 을 제정하였다. 이어 주인민대표대회의 심의를 거쳐 채택하였다.        이 발전전략을 제정할 때 주당위 지도부 성원들은 거듭되는 토론을 가졌고 또 수차에 걸쳐 관련 전문가들의 의견을 청취하고 나서 연변의 네가지 특점을 귀납해냈다.  첫째, 연변은 자원이 풍부하고 나아가 거대한 발전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연변은 지리적 위치와 지역적 조건이 특수하여 동북아개발의 최전방에, 그것도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만큼 연변의 개혁개방은  타고난 우월한 자연조건을 갖고 있다. 셋째,  연변은 국내와 국외에 폭넓은 인맥우세를 갖고 있다. 넷째,  연변에는 민족자치조례  및  변강소수민족지역을 배려하여 중앙과 성에서 내놓은 우대정책이 있다. 이와 같은 조건은 연변의 쾌속적인 발전과 개혁개방을  다방면으로부터 보장해주고 있다.        리덕수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하고 귀납하면서 경제건설에서 주로는 두가지, 즉 공업기반건설과 공공기반시설건설을 잘 틀어쥐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공공기반시설은 주로 항공, 철도, 도로, 통신 등 기반시설 건설을 말하는 것인데 리덕수는  이러한 기반시설이 잘 갖추어지지 않으면 연변의 신속한 발전은 불가능하다고 문제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1984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구성한 정부대표단이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대표단의 인솔자는 리덕수였다.         이번 출국은 리덕수로 말하면 첫번째 미국행이면서 역시 처음으로 서방국가를 체험하는 과정이였다. 이번 방문길에서 리덕수는 발달한 자본주의국가의 실제적 상황을 현지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로스앤졀러스에서 리덕수가 아침에 일어나 빌딩 밖을 일별하니 연기를 내뿜는 굴뚝이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다는 사실부터가 새삼스러웠다.  구두를 신고 며칠 돌아다녀도 먼지라곤 오르는 게 없었다. 미국에서 고속도로는 어디로 가나 막힘이 없을 만큼 사통팔달했고 도시의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로세로 나드는데도 교통질서는 매우 정연하였다. 도시마다 모두 록화를 매우 중시하였고 위생환경이 정결하였으며 가는 곳마다 공기도 맑고 깨끗하였다. 리덕수는 이 모든 것을 지켜보면서 연변경제의 전면적인 도약을 실현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기반시설건설부터 틀어쥐어야 되겠다는 의지를 굳히게 되였다.        미국측 접대인원들은 리덕수 일행에게 일부 기업소와 회사의 생산, 운영정황을 소개하는 한편 이들을 안내하여 일부 기업소와 회사를 돌아보았다. 리덕수의 눈길은 저도 모르게 인원이 몇몇 안되는 작은 회사의 사무실에도 어김없이 놓여있는 팩스에  가게 되였다. 하도 신기해서 미국측 인원들한테 물어보니 전세계 각지의 정보들이 팩스를 통해 시시각각 전해오고 그들도 수시로 전세계 각지에 팩스로 업무사항을 내보내고 있다고 들려주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리덕수를 망라한 대표단 성원들 모두가 팩스가 무엇인지 들어보지도 못했으니 보지도 못한 건 당연하였다. 그렇더라도 이 물건은 확실히 빨려들어갈 만큼 신기하였다. 리덕수 일행은 의논 끝에 미국에서 팩스수신기 세대만 먼저 사가지고 돌아오기로 상론했다. 리덕수 일행에게는 갖고간 돈이 얼마 안되였다. 돈을 아끼느라고 그들 다섯 사람은 한스위트룸에서 비좁게 지냈다. 그러다 보니 미국에 머무는 동안 자기 돈으로 식당에 나가 식사를 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는 사치였다.         그들이 투숙하고 있는 스위트룸에는 랭장과 랭동 기능을 갖춘 전기랭장고가 있는가 하면 밥을 짓고 료리를 볶을 수 있는 취사도구도 구전히 갖춰져 있었다. 그런데 랭장고 안에 넣어둔 물건을 다치면 돈을 지불해야 했으므로 감히 손을 댈 수 없었다. 그 때 접대한측에서 그들한테 돈이 없다는 것을 눈치 채고 정기적으로 쌀이며 고기며  남새 같은 것들을 사다주면 그들은 끼니마다 저절로 밥을 지어 먹었다.  나중에 계산해보니 남긴 돈이 퍼그나 되였다. 그 때는 공무로 출국하게 되면 날마다 상응한 보조금이 있었다. 그들은 그 보조금을 모아 팩스수신기 세대를 사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온 뒤  연변대학에 한대, 주정부에 한대 넘겨주고 주당위판공실에 남겨두었다. 비록 그것을 잠시 쓸 수 없었지만 리덕수는 판공실 일군들에게 롱담삼아 이렇게 말했다.         “그저 거기다 놓고 보기만 해도 속이 든든하지요. 항시 현대적 통신수단에 대한  갈망과 추구를 우리들한테 일깨워주니 말입니다!”        리덕수는 미국을 방문하면서 앞으로 연변이 발전해 나가려면 현대화 통신시설부터 한발 먼저 앞서 나가야  하므로 연변에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현대화 통신기반시설건설부터 건설하는 것이 급선무라는 사색을 무르익히고 있었다. 그 당시 연변은 우전통신설비가 너무 락후하고 통신련계가 잘 되지 않아 외국에 전화를 하려고 해도 정말 통화하기가 어려웠다. 어렵사리 팩스수신기 세대를 사가지고 힘들게 메고 왔지만 그 때 연변에는 프로그램제어계통이 가설되지 않았으므로 한낱 진렬품이 되여버렸으니 이것은 결코 그저 웃고 넘어갈 일이 아니였다. 리덕수는 미국에 대한 고찰을 통해 연변을 개발하고 개방하고 발전시키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먼저 연변의 뒤떨어진 우전통신상황부터 돌려놓아야 한다는 데 사색을 모으게 되였다.  리덕수는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부터 우전통신방면의 기반시설을 서둘렀다.         리덕수는 연길에 돌아오자마자 연변조선족자치주우전국 국장 김태호(金泰昊)를 사무실로 불렀다.          리덕수는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오늘부터 동무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전문적으로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구축하는 이 대상을 추진해야 하겠습니다. 시간이 긴박하고 임무가 막중하므로 주당위에서는 동무가 분초를 다투어 전력을 다해 이 일을 내밀기를  희망합니다!”          리덕수는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설치하는 것이 연변의 쾌속적인 발전에 미치게 되는 긍정적이고 중요한 의의를 설명하고 나서 자기가 미국을 방문할 때 자기 가슴을 저미던 감수를 들려주면서 절박성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시대는 쏜살같이 앞으로 내달린다. 많은 나라들이 서로 앞다투어 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그러므로 시간이 긴박하다. 시간은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서둘러 쫓아 가지 않으면 그저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리덕수의 말을 다 듣고난  김태호의 얼굴은 대뜸 근엄해졌다.         “리서기! 그게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김국장동무! 무슨 곤난에 봉착하면 아무 때든 저를 찾아 오십시오. 이 대상을 추진하는 과정에 주에서는 전폭적으로 동무를 밀어주겠습니다!”        “리서기! 걱정하지 마십시오. 연변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저는 이 대상을 다해내기 전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을 것입니다!”          그 후 김태호는 천신만고를 다 겪으면서 일을 추진해나갔다. 김태호는 건강이 그닥지 않았음에도 이 대상을 쟁취하기 위해 쉴새없이 장춘에 갔다가 북경으로 가고 북경에 갔다가 다시 장춘으로 오며 밤낮으로 쉬지 않고 뛰고 또 뛰였다. 그 당시 장춘시와 길림시에도 프로그램제어전화시설을 가지지 못하고 있었는데 연변에서 이 시설을 먼저 설치하자 했으니 세간의 눈길이 어떠했겠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당연히 걸림돌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비록 그 과정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더 복잡하고 우여곡절도 많았지만 종당에 연변에서는 끝내 이 대상을 쟁취해오고 말았다. 그리하여 연변의 프로그램제어전화가 마침내 정식으로 가동되는 시대를 맞게 되였다.        이 시설을 설치하기 위해 우전국에서는 모처럼 새 빌딩을 신축하였다.  이 정보통신빌딩이 일떠서면서 그 당시 연길을 적잖게 들썽해놓았다. 이 빌딩은 한동안 연길시의 랜드마크로 불리울 만큼 물망에 오르게 되였다. 연변의 프로그램제어전화설치는  전국적으로도 상당히 일찍한편이였다. 그 때 북경 등 많은 지역에서도 아직 프로그램제어전화계통을 가설하지 않았다. 1990년도에 리덕수가 국가민족사무위원회에 취임했을 때 사무실전화도 아직 프로그램제어전화가 아니였다. 그 때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 판공실에서는 이미 직접 국내외 장거리 전화를 자유자재로 걸고 받을 수 있었다. 리덕수가 북경에 가서 취임한 어느날이였다. 당시 주당위 부서기 리정문이 중앙당학교에서 학습을 하는 여가에 모처럼 리덕수를 보러 온 적이 있었다. 리정문은 리덕수와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뭔가 떠올라 연변에 전화를 걸려고 하였는데 직접 통화가 안되였다. 그러자 리정문은 갸우뚱하면서 롱담을 건넸다.         “어쩌면 당신네 북경이 우리네 연변 시골보다도 못하단 말이요?”          그 당시 연변에는 프로그램제어전화가 있었으므로 시골에 살고 있는 백성들도 미국이나 한국 등 모든 나라에 직통전화를 할 수 있었다.         “저는 연변에서 정말 이런 기반시설건설을 착실히 틀어쥐고 싶었습니다. 연변은 기반시설건설을 잘 해놓아야 외부투자를 끌어들일 수 있거니와 전반 경제를 조속히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중국말 속담에 낫을 가는 일이 나무를 찍는 일을 지체시키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이 기반시설을 잘 갖춰 놓는 것은 지금의 시체말로 하면 투자환경이 좋아야 후속적 발전도 가능하다는 그것이겠지요.”         이 말 속에 리덕수의  마음속 진실한 감정이 묻어있었다.        미국에 쳬류할 때 그는 한가지 일에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다. 대표단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대표하여 미국을 방문하게 된 만큼 미국측에서도 매우 성의스레 그들을 접대하였다. 그래서 리덕수는 많은 사람들, 더구나 수많은 기업가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그는 거의 모든 기업가들한테 한결같이 “여러분들이 연변에 와서 투자하는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하면서 연변으로 청했다. 그런데 이들 기업가들은 연변이란 고장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모르고 있었기에 연변을 어떻게 찾아가느냐고 물었다. 리덕수가 그들에게 연변의 지리적 위치를 소개해주었는데도 그들은 그 곳이 너무도 편벽해서 찾아가기 힘들다고 시무룩하게 나왔다. 그러면 리덕수는 또 그들이 알아 듣기 쉽게 약간 유모아까지 곁들여 해석했다.         “당신들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 도착하여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고 두 시간이면 장춘에 도착하고 또 장춘에서 기차를 바꿔 타고 눈을 감았다가  다시 뜨면 곧바로 연길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연변이란 바로 이렇게 가까운 고장이랍니다.”          미국사람들은 처음엔 그게 무슨 말인지 좀처럼 말귀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하다가 곰곰히 따져보고 나서야 어이없다는듯 무릎을 탁 치며 탄식했다. 북경에서 장춘까지 비행기를 타고 장춘에서 또 기차로 바꿔 타고 꼬박 하루밤을 기차에서 잠을 자야 한다는 말이 그들한테는 천방야담 같았다. 그들한테는 멀면서도 교통마저 불편한   이 고장이 그처럼 아득해보였다.        그  때로부터 리덕수는 연변이 개혁개방하려면 꼭 공항을 건설해야 하고 나아가  연변의 려객렬차가 수도 북경으로 직행할 수 있게 길을 뚫어어야 한다고 단단히 결심을 다지게 되였다.         리덕수는 미국에서 돌아온 뒤  먼저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북경에 남았다. 그는 미국에 다녀온 려독이 아직 채 풀리기도 전에 북경에서 조금도 쉴새없이 부지런히 두가지 건설대상을 추진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바로 다름 아닌 공항건설대상이였다. 리덕수는 중앙과 국무원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 관련 부문들을 찾아다니며 연변을 대표하여 정식으로 연길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확장건설할 것을 제의하였다.  나중에 그 때 만났던 부장들과 주임들 그리고 국장급 간부들 가운데 적잖은 사람들은 모두 리덕수와 친구가 되였다.         처음부터 연길공항 개축확건대상의 추진과정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무명소졸’이 한명 있었다. 그 때 그는 교문을 금방 나선 대학졸업생이였다. 바로 나중에 연변조선족자치주 주장을 담임하였다가 지금은 길림성당위 상무위원 겸 통전부 부장을 맡고 있는 리경호(李景浩)이다.          1983년 8월, 리경호는 대학을 졸업한 뒤 주계획위원회 공업처에 배치되였다.  리덕수가 주위 서기 겸 주장으로 있을 당시 관심을 갖고 있는 몇개 중요한 공정건설현장으로 내려갈 때면 리경호는 자주 리덕수를 수행하여 각 공사장으로 내려갔다.  그 후 주계획위원회 종합처 처장으로 임명되면서 리경호는 리덕수가 소집하고 사회하는 공업 관련 의제 주당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에도 참가할 기회가 있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세부를 아직도 머리 속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리서기는 문제를 매우 깊이 있게 보았으며 늘 문제의 여러개 측면들을 다 전면적으로 장악하고 있었으므로 그의 연설은 론리성과 설득력이 매우 강했습니다. 어떤 때 리서기는 주위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사회하고 회보를 듣다가도 제기되는 수치 속의 오차를 그 자리에서 발견하고 바로잡아주었습니다. 어떤 때는 회보를 들으면서 건설적이고도 활용성 있는 건의들을 제기해주었습니다. 리서기는 회의를 소집하기 전에 가끔 따로 준비하지 않고 완전히 즉흥적으로 연설을 해도 문제를 면바로 파악하고 있었고 제기하는 의견도 적중하고 건설적이였습니다. 이것은 리서기가 전반적인 국면도 잘 파악하고 있었거니와 구체적인 매개 중점공정에 대해서도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저는 리서기가 관련 수치의 배후에 숨겨진 문제들과 그 수치 속에 감추어진 론리를 능란하게 분석해내는 지혜에 탄복할 때가 많았습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추억했다.  그 당시 연변에서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건설하자고 제기했을 때 풀어나가야 할 과제들이 산적해있었고 찾아다니며 일일이 뚫어야 할 장벽이 너무도 많았다. 관련이 있는 상급 부문만 해도 십여개가 넘었다. 지금 돌이켜보아도 그 때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만들어 낸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였고 아슬아슬한 모험이였다. 연길비행장의 지리적 위치가 너무도 민감하고 중요하여 국방적 차원의 시각으로나 변경의 시각으로 감안해도 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만든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문외한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사회적 환경과 정치적 환경에서 리덕수와 같은 자리에 있는 지도간부가 이런 건설대상을 제기하자면 일정한 정치적 위험을 감수하여야 했다. 송평(宋平)이 국무위원 겸 국가계획위원회 주임으로 있을 때 연변에 와서 시찰을 한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송평한테 연길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건설할 데 관한 항목신청을 회보하였다.         리경호는 그 때의 세부를 아직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그 날 저녁에 모처럼 관련 부문의 책임자들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회보할 내용을 포치하였다. 리덕수는 공항건설을 단독으로 제기해야 하며 반드시 빈틈없이 회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 회의에서 리경호가 입수한 자료에는 국내 몇개 지역에서 이미 군용비행장을 군민량용공항으로 개축했다는 중요한 정보도 들어있었다. 많은 일들이 왕왕  다 그러하듯이 그 누구도 먼저 그렇게 한 선례가 없는데 내가  맨먼저 그렇게 하자고 나서면 그 어려움은 두말할것없이 상상을 초월하기 마련이다.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먼저 그렇게 한 전례가 있다할 때 그 실례를 들어가면서 각 주관부문을 설득하게 되면 더 힘이 클 수 있었다. 그 이튿날 저녁, 주계획위원회 주임이 하루밤 새에 급히  를 작성하라고 리경호를 찾았다. 리경호는 연변의 실제정황에 근거하여 밤도와 보고서를 작성하여 그 이튿날로 교부하였다. 리덕수는 그 날 리경호가 작성한 를 직접 송평한테 넘기면서 차에서 상세한 정황을 설명하여 마침내 송평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리경호는 그 때의 지나간 일들을 회고하면서 감개무량하여 심경을 밝혔다.         “이로써 연길 군민량용공항을 건설하는 과정에서 가장 관건적인 한발작이자 결정적인 한발작을 내디디게 되였습니다.”          과연 예상했던 대로 송평은 회의에서 회보를 다 듣고 나서 그 자리에서 “이  일은 고려해 볼 수 있습니다.”라고 태도를 보여주었다.          송평의 이 말이 떨어지자 리덕수는 마음이 든든해졌다.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이런 유리한 형세를 다잡고 곧바로 관련 부문 회의를 열고 연길공항 확장건설대상의 각항 준비정황에 관한 회보를 청취하였다. 리덕수는 자신감에 넘쳐 연길공항 확장건설은 우리가 남들보다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게 되였다고 밝혔다. 그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형세를 분석, 판단하고 다음 단계의 사업을 연구하였다. 연길공항 확장건설대상에 대해 리덕수는 크고 작은 일을 막론하고 그 어떤 일이라도 매개 고리마다 하나하나 친히 챙기면서 꼬치꼬치 캐물었다.        그 때 리덕수는 주정부 상무부주장인 손홍상한테 이 건설대상의 구체적인 실행사업을 맡겼다.         30여년이 지난 후 손홍상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 몇해 동안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확실히 주요한 정력을 경제건설에 몰부었습니다. 목표가 명확하고 인식이 통일되여있으니 박력 있게 일을 밀고나갈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공항건설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 수 있습니다.”         연길공항 확장건설은 처음부터 우여곡절에 부딪쳤다. 애초에 이 문제가 제기되자마자 곧바로 부동한 의견을 내놓는 동지들이 있었다. 그들은 변경선이 이렇게 가까운 곳에다 연길공항을 건설하려고 하면 상급에서 비준할 리가 만무하다고 소극적인 시선을 보냈다. 그 당시에 민항계통에서마저 연길공항건설에 부정적이였다. 민항계통에서는 주로 옹근 연변 인구가 겨우 200 만명 밖에 되지 않는데 공항을 건설한다 쳐도 비행기에 탈 사람이 있겠는가 하는 경제적 측면에서 우려하고 있었다. 그들은 연변보다 한발 앞서 공항을 건설했던 목단강의 실례를 들었다. 간난신고 끝에 숱한 재력을 들여서 공항을  닦고 항로를 개통해놓았다지만 어떤 땐 한 항공편에 손님이 고작 한두 명 밖에 안되면서 밑지게 되자 목단강에서는 이미 개통해놓은 항로를 부득불 스스로 중지하게 되였다. 흔히 앞사람의 실패는 뒤사람의 거울로 된다. 그들은 연변에서는 반드시 목단강의 교훈을 거울로 삼아야 한다고 따끔하게 침까지 놓아주는 걸 잊지 않았다. 아무튼 그 당시의 여론은 연길공항건설에 지극히 불리하였다. 하지만 누가 뭐라 해도 리덕수의 의지는 그처럼 확고했다. 그는 연변에는 반드시 공항이 있어야 하고 연변에서는 어떻게 하나 자기의 공항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이 큰 방향은 조금도 흔들려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연변의 정황은 목단강과는 다르다. 연변은 전국에서 유일한 조선족자치주이고 각광받고 있는 관광명소 장백산 주봉도 연변 쪽에 있다. 전국 각지와 외국에서 손님이 많이 찾아올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우리 연변의 독특한 우세이다. 만약 연길에 항로가 개통되면 그 느릿느릿한 기차를 타고 연변에 오겠다 할 사람이 몇이 안될 것이다. 기필코 비행기를 탈 게 분명하다. 처음엔 손님이 좀 적을 수 있더라도 관광시장이란 것도 역시 사람들이 육성하기에 달린 만큼 그 예비는 예측하기 어렵다.         나중에 리덕수는 이 일을 여러번 상무위원회에 내놓고 토론하여 종당에는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통일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상무위원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주당위에서는 이미 결심을 내린 이상 누가 뭐라고 해도 우리는 반드시 난관을 돌파하고 기어이 공항을 개통해야 하겠습니다. 이 일은 주정부에 일임하고 구체적으로는 상무부주장 손홍상동무한테 맡기겠는데 주정부에서는 이 일을 꼭 해 내야 합니다.”        연길비행장은 공군 모부대 관할이였고 본부는 목단강에 있었다. 손홍상은 최고지휘관을 만나려고 목단강으로 찾아갔다. 지방에서 동지들이 찾아가면 군부대에서는 매우 열정적으로 맞는 관행이 있는 만큼  손홍상은 곧바로 최고지휘관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찾아오게 된 의향을 이야기하자 최고지휘관은 곧 난색을 보이였다.        “손주장동지!  만약 이 일 때문에 찾아오신 거라면 너무도 큰 사안이여서 저희들한테는 결정권이 없습니다. 응당 심양군구 공군을 먼저 찾는 게 순서인 것 같습니다.”          손홍상은 거기서 더 지체할 수 없어 곧바로 심양으로 달려갔다, 심양군구 공군 사령원은 전정(田征)이였다. 그는 나중에 상장계급을 수여 받은 군인이였다.          전정 사령원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약간 머밋거렸다. 솔직히 군부대에서도 지방과 이런 업무접촉을 가진 적이 없기에 감을 잡기 어려울 수 있었다. 군부대의 비행장을 차용하겠다는 지방정부의 청구 역시 처음이였다.         손홍상은 간절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사령원동지께서 한번 저희 연변에 오셔서 몸소 연변의 정황을 료해해보시면 감수가 다를 겁니다.”         손홍상의 진정이 전정 사령원의 마음을 움직였다. 나중에 전사령원은 혼자만이 아니라 공군부대 관련 책임자들을 다 거느리고 연변으로 찾아왔다,        리덕수는 매우 열정적으로 전사령원을 접대하였다. 이어 있은 리덕수의 회보는 그처럼 감동적이였다. 물론 리덕수는 미사려구를 늘여놓은 게 아니였다. 리덕수의 순박함과 성실함과 연변 인민에 대한 깊은 감정, 그리고 한마음한뜻으로 연변을 발전시키려는 절절한 심정, 책임감과 사명감이 전사령원의 마음을 울렸던 것이다. 전사령원은 연변은 변강지구이면서도 소수민족지구이며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이 신중국의 창립과 사회주의건설사업에서 막대한 희생을 치르고 거대한 기여를 하였지만 지금 연변의 발전이 내지보다 훨씬 뒤떨어져있고 연변 백성들의 살림살이가 아직도 부유하지 못하다는 리덕수의 소개를 듣고 깊은 사색에 잠기게 되였다. 그는 연변의 발전을 다그쳐 내지와의 격차를 줄여야 한다는 리덕수의 관점에 완전히 긍적적이였다. 지금 연변의 개혁개방사업이 군부대의 비행장을 수요하고 있고 그것도 차용하는데 그치는 사안인데 인민자제병으로서  연변 부모형제들의 이런 기대를 거절한다는 건 정감적 측면에서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연변에서의 현지고찰을 마치고 나서 전사령원은 자신의 태도를 이렇게 명확히 표명하였다.        “이것은 매우 훌륭한 시도입니다! 저희들한테는 연변 인민이 제기한 요구를 거절할 리유가 없습니다. 우리 다같이 한번 대담하게 해 봅시다!”         이리하여 공군사령부에서는 곧 회시를 내려보내 연길에 군민량용공항을 건설하는   데 동의하였다.        마지막엔 심양군구 사령원이 정식 명령을 하달하여야 했다. 역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리덕수는 또 손홍상을 그 당시 심양군구 사령원인 류정송(刘精松)한테 보냈다.         손홍상은 이번에도 류정송 사령원을 연변으로 모셔왔다. 리덕수는 류정송 사령원에게 정황을 회보하고 나서 그를 배동하여 비행장에 가서 현지를 고찰했다.        세월이 흘러가고 상황이 많이 달라져 지금 이런 일들을 돌이켜보면 매우 순탄했을 것처럼 보이겠지만 그 때는 이런 과정이 그야말로 걸음마다 하나하나의 문턱을 넘어야 하는 험난한 로정이였다.        이제는 또 민항계통을 설득하는 작업이 남아있었다. 민항계통에서 연변의 항로개통에 소극적인 이유는 주로 적자를 우려해서였다. 민항계통에서 문제를 고려하는 출발점은 어디까지나 려객수송량이였다.  려객수송량은 한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려객수송량이 모자라면 적자가 생기게 되고 또 결손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손을  책임져야 하는 민항계통의 립장도 어느 정도 리해할 수 있었다.       손홍 상은 리덕수한테 이렇게 물었다.        “그들이 려객수송량을 갖고 우리의 발목을 잡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성민항국을 설득해야 할가요?”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쉽게 이루어지는 게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래도 종당에는 기필코 그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리덕수가 연변의  미래 항공시장에 이처럼 자신감을 가지게 되는 데는 두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 하나로 리덕수는  중국 개혁개방의 큰 흐름을 똑똑히 내다보고 있었다. 그 만큼 국문을 여는 것은 중국 개혁개방의 첫걸음에 불과하다는 명석한 인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은 세계로 나아가야 하고 세계도 중국으로 들어오는 것은 시대적 추세였다. 이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다. 연변의 발전과 개방은 무한히 광활한 전망을 갖고 있다. 민항선의 개통은 연변의 개혁개방과 발전에서 조만간 반드시 걸어야 하는 과정이다.. 이제 연길공항이 건설되면 예상 밖의 돌파가 연거퍼 이어질 것이다. 또 다른 하나로 리덕수의 연변에 대한 료해였다. 그는 연변의 단기 발전목표를 똑똑히 내다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연변의 중장기 발전전망도  다 그림을 그려놓고 있었다. 연변의 지연적 우세, 자원우세, 관광우세, 민족자치구역우세 그리고 인맥관계 우세…이 모든 것이 하나하나가 다 엄청난 브랜드인데 려객수송량이 어떻게 문제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리덕수는 연길공항이 일단 건설되면 그 려객수송량은 기필코 기하급수적인 성장세를 보일 것이며 조만간 공항재확장건설이 절박하게 다가올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었다.        송홍상은 장춘에 찾아가 길림성민항국을 설득시키는 작업을 벌려나갔다. 그 당시 성민항국 서기는 림씨이고 국장은 오씨였는데 나중에 이들 두사람은 모두 리덕수와 손홍상의 훌륭한 친구로 되였다. 손홍상은 넓은 안목으로 멀리 내다 보는 리덕수의 리념을 림서기와 오국장한테 전달했고 드디어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더라도 민항국에서는 신중했다. 단도직입적으로 만약 연길공항 민항항로가 개통된 후 적자가 발생하면 그 결손부분을 연변에서 감당할 수 있는가 하는 어려운 문제를 내놓았다. 이로 하여 팽팽하게 론쟁이 있었다. 저녁에 손홍상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낮에 성민항국과 있은 론쟁을 그대로 회보했다. 리덕수는 이렇게 제기했다.        “만약 적자가 발생하여 그 결손부분을 연변에서 감당해야 한다고 하면 이와 반대로 만약 리윤이 발생했을 경우 연변을 빼놓아서는 안되겠지요?”         이튿날 손홍상은 리덕수의 의견을 성민항국 지도자한테 전달하였다. 성민항국 지도자들은 밖에  나가 따로 의론을 하고 다시 들어왔다. 완전히 다른 태도였다.         “결손화제는 이제 더는 꺼내지 맙시다. 앞으로는 다시 결손문제를 거론하지 않기로 하고 연변항로가 개통되면 힘을 모아 모나게 운영하여 리윤을 창출해냅시다!”         연길공항이 개항되여 얼마 안 지나 곧 리윤을 보게 되였다. 사실은 주당위의 결책이 정확하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연길공항건설을 몇년 뒤로 미루었다면 연변 개혁개방의 템포도 필연코 그 만큼 더 늦춰졌을 것이다. 성민항국의 지지를 확보하자 심양민항국에서도 동의하였다.        처음에 심양민항국 동지들은 연변의 일반 백성들도 비행기를 탈 수 있을가 하고 반신반의했다. 리덕수는 그들을 데리고 도문시 홍기대대에 가서 좌담회를 가졌다. 심양민항국 리부국장과 그가 거느린 관련 인원들도 같이 자리했다. 홍기대대에서는 70, 80세 되는 어른들로부터 20, 30세의 젊은이들, 심지어 십여세 되는 조무래기들까지 한꺼번에 숱한 사람들이 좌담회에 모여왔다. 홍기대대 농민들은 구김없이 자기들의 소망을 털어놓았다. 지금은 돈도 좀 있고 생활도 많이 나아져 모두 밖에 나가 한바퀴 빙 돌면서 세상구경을 좀 해보고 싶다. 그리고 외국에도 가보면서 시야를 좀 넓히고 싶다. 더우기 친적들이 많이 살고 있는 한국에도 가보고 싶다. 생산대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모두 조선어로 되였는데 리덕수가 몸소 심양민항국 동지들한테 한어로 통역을 해주었다. 나중에 심양민항국 동지들은 다들 항공시장은 결국 민간에 있다는 새로운 발견에 고무를 받았다.         심양민항국에서 연길공항건설을 동의하자 국가민항총국의 비준도 곧 내려왔다.   군부대에서 연변에 무상으로 비행기 활주로를 제공하고 또 무상으로 건설용지를 떼여주었다. 민항계통에서는 연변에 비행기 항행에 필요한 시설들을 제공하였다. 공항탑승터미널, 민항종업원 숙소와 비행기 계류장 등 기본시설 건설자금은 연변에서 책임졌다. 그 당시 얼핏 예산을 따져보니 1,000만원이 있어야 했지만 연변에서는 세밀하게 계획하고 꼼꼼하게 계산하여 실제로는 700여만원을 들이고 모든 시설들을 갖추어놓았다.        국무원과 중앙군사위원회의 비준을 거쳐 연길비행장은 1985년에 정식으로 군민량용공항으로 활용하게 되였다.        1985년 8월 29일,  An-24형 려객기가 연길----장춘 항로를 날게 되였다. 연변에 민용항공편이 없던 력사는 드디어 종지부를 찍게 되였다. 뒤이어 연길----심양----대련, 연길----심양----북경 등 항공편이 륙속 개통되였다. 개혁개방의 흐름과 추세에 따라 1986년부터 1987년까지,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연길공항에서 두차례의 확장공사를 벌리면서 대형려객기의 리착륙도 가능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민용항공지선에 위치한 연길이란 이 작은 공항에서 날마다 오르고 내리는 려객수송량은 국내 같은 류형의 지선 공항중에서 대뜸 두각을 드러내게 되였고 연길공항은 일약 전 동북지구의 다섯번째로 큰 공항으로 명성을 날리게 되였다. 지금은 국내 각지로 날아갈 수 있게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한국, 조선, 일본, 로씨야 등 나라로 오가는 국제항공편이 잇달아 개통되면서 명실상부한 국제공항으로 떠오르게 되였다.         연길공항이 건설되면서 이제 연변사람들은 제 집 문 앞에서 직접 비행기를 타고 거뜬하게 전국 각지로 날아갈 수 있게 되였다. 항로가 개통되는 그 날 연길시는 명절을 맞은듯 환희로 들끓었다. 개항의식도 아주 특별하게 치러졌다. 비행기는 먼저 연길시 가두에서 뽑힌 할아버지, 할머니 대표들을 모시고 연길시 상공을 세바퀴 빙빙 선회하였다. 시구역 시민들은 머리를 쳐들고 하늘 공중에서 선회하는 비행기를 신비롭게 올려다보았다. 비행기는 저공비행을 하였기 때문에 그 동음도 유난히 요란했다. 땅에서 하늘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너무도 기쁨에 넘쳐 흥겹게 환호성을 울리였다.  《연변일보》에서 파견한 특파기자는 첫 비행에 관한 장편통신을 써서 감격적인 이 순간을 낱낱이 기록하였다.        공항이 다 건설되고 비행기가 통항하게 되였다고 하여 만사대길이 아니였다. 아직도 일련의 협상과 조률 그리고 관리사업이 기다리고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를 담임한이래 사업을 온당하면서도 박력이 있게 벌려나가고 착실하면서도 실속 있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추진하였기에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긍정을 받게 되였다. 성당위의 연구와 중앙의 비준을 거쳐 1985년 5월에 리덕수는 성당위 상무위원으로 임명되였다.        1985년 9월 24일, 당의 제12기 중앙위원회는 당면한 형세와 특수한 력사조건에 근거하여 북경에서 당의 전국대표대회를 소집하기로 결정하였다. 그 대표대회에서 리덕수는 신규 중앙후보위원으로 당선되였다. 회의기간에 길림성위 서기 강효초는 우정  일부 사람들한테 리덕수의 정치적 업적과 위인을 소개하였다. 강효초는 료녕성당위  서기 전수인, 흑룡강성당위 서기 손유본과 의견을 나누고 리덕생을 찾아갔다. 리덕생은 리덕수와 진작부터 교분이 있었고 비교적 익숙한 사이였다. 리덕생이 앞에 서고 동북3성의 성당위 서기들은 리덕생과 함께 련명으로 중앙에 편지를 올려보내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 리덕수를 제12기 중앙위원회  후보위원으로 추가선거할 것을 제의하였다. 리덕수가 당선된 후 손유본을 포함한 몇몇 지도자들이 모두 건너와 일일이 리덕수를 축하해주었다. 조남기는 리덕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번에 리덕생동지가 앞에 서서 중앙에 보고를 올려보낸 만큼 동무는 의례 그  분한테 감사를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리덕수가 리덕생한테 사의를 드렸더니 리덕생은 이런 세부를 들려주었다.         “정치국에서 토론할 때 제일 먼저 발언한 분이 호계립동지였습니다. 호계립동지는 동무를 중앙후보위원으로 천거하는 걸 지지하였습니다.”          그 당시 조남기동지는 이미 중앙위원이였다.           1987년 10월, 당의 제13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리덕수는 중앙위원으로 당선되였다.         1988년 3월 19일, 제13기 중앙위원회 제2차 전원회의가 페막된 후 리덕수는 성으로 돌아왔다. 이 때는 연길공항 건설사업이 이미 완료되여 정식으로 사용에 교부된 뒤였다.  3월 19일 당일, 리덕수는 비행기를 타고 북경에서 장춘에 돌아온 뒤 장춘에서 일을 다 보고 나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연길로 돌아오려고 계획하고 있었다. 연길공항이 금방 사용에 교부되였기에 운영되는 건 소형비행기였다. 리덕수가 이 비행기를 타려하자 성민항국 정위가 기어코 리덕수를 배동하여 함께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가 연길 상공에 도착했을 때 뜻밖의 상황이 벌어졌다. 연길공항에서 시종 신호를 주지 않아 비행기가 공중에서 몇바퀴 선회하면서도 착륙할 수 없었다. 성민항국 정위도 지면에서 무슨 상황이 발생했는지 알 수 없어 미안하게 사과했다.         “리서기! 지금 공항에서 신호를 보내지 않습니다.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린 착륙할 수가 없습니다. 비행기의 기름도 부족하므로 여기서 더 지체할 수 없습니다. 우린 다시 장춘으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동무의 말 대로 합시다. 착륙할 수 없다니까 곧바로 장춘으로 돌아가야지요.”         비행기가 장춘공항에 착륙하자 민항국과 공항 책임자들이 줄을 서서 리덕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식사하고 나서 잠간 휴식한 뒤 민항국 지도일군들은 리덕수한테 이렇게 말했다.         “비행기를 반드시 바꾸어 타야 하겠습니다. 수장동지께서 타셨던 첫 비행기가 착륙하지 못했으므로 또다시 그 비행기를 보낼 순 없습니다.”          리덕수는 너그럽게 받아들였다.         “모든 것은 민항국 배치에 따르겠습니다. 그저 어서 빨리 연길에 돌아갈 수 있으면 됩니다.”         이번에도 민항국의 그 정위가 리덕수를 배동하여 연길로 날게 되는 비행기에 올랐다. 정위는 연길공항과 이미 다 련락이 되였다고 하면서 이번엔 문제가 없을 거라고 알려주었다. 비행기가 연길공항에 착륙하자 성민항국의 정위는 곧 그 비행기를 타고 장춘으로 되돌아갔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인 동시에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이였다. 그 당시 연길시 하남 쪽에는 연변주둔군부대 한개 사단본부가 또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군분구 제1정치위원의 신분으로 각 주둔군부대와의 관계를 조정, 조화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공안경찰, 무장경찰, 공군부대, 륙군주둔부대 할 것 없이 모두 리덕수가 소집한 련석회의에서 한자리에 모여앉아 연변의 안정과 단결문제를 상론하게 되였다. 나중에 지방과 군부대에서는 리덕수가 창도한 이런 련석회의를 자주 열어 무슨 일이 있으면 련석회의에서 다같이 상의하여 공동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군부대와 지방의 이런 련석회의는 연변에서 또 하나의 제도로 자리잡게 되였다. 그 이후의 실천은 리덕수가 이 문제를 제때에 틀어쥔 것이 매우 정확했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적시적이고도 효률적으로 연변의 군부대와 지방간의 관계를 잘 처리하였기에 연변은 옹군애민모범자치주로 되여 여러번 중앙과 국가민족사무위원회 및 성의 표창을 받게 되였다.         민용항로의 개통외에도 주에서 틀어쥔 또 다른 중점기반시설건설항목은 도로교통이였다. 당시  주교통국 국장을 맡고 있다가 정년퇴직하기 전에 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에 임명되였던  박남일(朴南镒)은 리덕수가 늘 자기한테 이렇게 말했다고 회억하였다.        “연변이 발전하려면 교통이 선행해야 합니다. 교통이 곧바로 경제의 동맥인데 동맥이 잘 통하지 않으면 어떻게 발전을 운운할 수 있겠습니까? “         리덕수는 하루빨리 연변의 변경도로와 주내 순환도로를 구축하기 위해 친히 주당위와 주정부 관련 지도일군들과 주교통국, 주계획경제위원회 등 관련 부문의 책임자들을 거느리고 반달 남짓한 시간을 들여 전 주를 한바퀴 돌면서 매개 도로구간 건설계획과 구체적인 시공방안을 상세하게 연구하고 주내 순환도로를 건설하기로 초보적으로 기획하였다. 주당위의 전폭적인 지지를 딛고 박남일은 주교통국을 거느리고  세가지 큰 일을 해낼 수 있었다. 첫째, 원래 비가 오면 질척거려 차가 다닐 수 없었던 주내의 모든 흙길을 전부 아쓰팔트포장도로로 바꾸었다. 둘째, 백성들의 나들이에 편리하도록 8개 현, 시에 모두 뻐스터미널을 건설하였다. 셋째, 전 주 향촌 일급까지 모두 려객뻐스가 통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동북아려객운수쎈터도 박남일이 주교통국 국장 임직기간에 완공한 큰 공정중의 하나였다. 이 동북아려객운수쎈터의 건설부지 역시 원래는 군부대 귀속이였다. 당연히  군부대를 설득하였다. 동북아려객운수쎈터를 건설하는 총 예산은 3,400만원, 공사예정기일은 3년이였는데 물가상승과 내부설계변동 등 원인으로 말미암아 1,000만원이 더  추가되였다.         이 항목에 수요되는 건설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리덕수는 성에서 회의하는 기회를 빌어 성교통청 청장한테 연변의 교통정황을 상세히 회보하였다. 교툥청 청장이 몸소 연변에 와서 현지를 고찰하고 전문자금을 비준, 하달하였기에 려객운수쎈터는 재빨리 건설될 수 있었다.         그 때 박남일은 교통부의 왕부장과도 련계가 비교적 많았다. 박남일은 리덕수의당부 대로 왕부장을 연변으로 모셔왔다. 왕부장은 연변의 도로상황을 돌아보고 나서 곧바로 연변에 도로건설자금을 비준해주었다. 민족지구의 교통사업에 돌려준 왕부장의 각별한 배려는 리덕수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박남일은 이렇게 회고했다.        “리덕수는 교통사업을 매우 중시하였는데 경상적으로 교통국 간부들과 함께 조사연구하러 내려갔습니다. 연변의 첫번째 턴넬인 소반령턴넬 착공에 앞서 리덕수는 현지에 가서 고찰하였고 시공에 들어간 다음에도 자주 내려가 시공진척상황과 시공질을 검사하였습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와 주장을 담당했을 때까지도 주내에 각 현, 시를 련결하는 아스팔트길이라곤 한갈래도 없었습니다. 리덕수는 1984년부터 아스팔트 로면 건설을 단단히 틀어쥐였습니다.  10 년간의 건설을 거쳐 1993년에 이르러 각 현, 시를 잇던 주내의 흙길은 몽땅 아스팔트길로 바꿔졌습니다.”         리덕수가 틀어쥔 네번째 기반시설건설은 철도교통운수사업이였다. 그 때 연변의 철도려객렬차는 도문에서 장춘으로 오가는 장도선 한갈래 뿐이였는데 그것도 그저 아침 저녁으로 한번씩에만 그치고 있었다. 장도선은 단선궤도로서 한쪽에서 기다려야 했고 속도도 느릿느릿했다. 연변 사람들이 전국 각지로 다니려면 먼저 장춘에 이른 다음 다른 지방으로 가는 렬차를 갈아타야 했다. 그 당시로 말하면 연변에서 떠난  려객렬차가 직접 북경으로 들어가기는 매우 어려운 상황이였다. 리덕수는 주의 기타  지도자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러더라도 이 일은 바짝 틀어쥐어야 하겠습니다. 너무 급히 성사시키려고 서둘러도 안되겠습니다. 단번에 북경직행이 어렵다면 먼저 심양, 천진까지 직행하고 점차적으로 이루어내는 방법도 연구해볼 만합니다.”         그 때 주에서는 전문 두 사람한테 이 프로젝트를 추진하도록 맡겼다. 한 사람은 주민족사무위원회 부주임이였고 다른 한 사람은 주민족사무위원회 간부이던 박유생(朴榆生)이였다. 리덕수는 북경에 일 보러 갔다가 특별히 이들 두 사람을 만나보았다.  북경은 5월부터 벌써 더워났지만 두 사람은 여전히 겨울에 신고 갔던 구두를 신고 있었는데 그마저 다 헤어져있었다. 옷도 아직 절기에 맞춰 갈아 입지 못하고 있었다. 1984년, 그 당시 간부들의 로임은 보편적으로 다 낮은편이였다. 이 두 사람의 초라한 모습을 보고 리덕수는 눈물이 날 지경이였다. 프로젝트를 추진하여 연변 인민들로 하여금 렬차를 타고 북경까지 직행할 수 있는 꿈을 이뤄내게 하기 위해 이들 두 사람은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불철주야 뛰여다니느라고 갖은 고생을 겪고 있었다. 연변에 돌아온 리덕수는 직접 관련 부문에 전화를 걸어 이들 두 사람한테 새옷과 새 구구도 사주라고 당부하였다.        나중에 박유생은 중병에 걸려 연변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다가 효험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하직하고 말았다. 리덕수는 지금도 박유생을 떠올리면 늘 괴로워 한다.  연변의 발전에는 박유생처럼 묵묵히 헌신만 하여온 수많은 간부와 대중들의 피와 땀이 응결되여있다. 이 동지는 민족사무위원회에서 근무하다가 특별히 려객렬차 북경직행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위해 차출한 사업일군이였다. 연변발 려객렬차는 진작 소원 대로 북경직행이 이루어졌지만 박유생은 끝내 그 날을 보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나갔다. 박유생의 안해 오애순은 연변대학도서관 선생님이였다. 리덕수는 연변대학에서 공부할 때 도서관에 가서 책을 읽고 자료를 찾으면서 이 선생님을 본 적이 있었다. 그의 남편이 타계하고 몇년이 지난 후 이 선생님이 리덕수를 찾아와서 그 때까지 집도 없이 살고 있는 고충을 털어놓았다. 이 말에 리덕수는 가슴이 못내 무거워났다. 리덕수는 그 때까지도 박유생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정직하고 사업책임심이 매우 강한 데다가 일에 들어서면 모든 걸 불사하는 그런 사람이였다. 리덕수는 깊은 감개에 젖어 오애순선생한테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의 남편은 연변의 발전을 위해 아주 큰 기여를 하였습니다. 저희들은 그  분을 잊지 않을 것이며 또한 잊을 수도 없습니다!”         리덕수는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한테 이 일을 맡기였다.  김동기의 구체적인 협상과 조률을 거쳐 오애순은 연변대학에서 60여평방메터짜리 아빠트를 분여받게 되였고 그의 딸애도 출판부문에 배치받게 되였다.                                 (다음 호에 이음)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9월호]      
28    연변문학 특별기획 (2) 리덕수의 고향사랑 댓글:  조회:1144  추천:0  2018-09-13
연변문학 특별기획(2)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특수한 접대임무   1984년 5월 4일부터 5월 11일까지 그 당시 중공중앙 총서기였던 호요방(胡耀邦)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대한  방문을  매우 성공적으로 진행하였다.  호요방은 조선에 대한 방문을 마치고 5월 11일 도문교두를 거쳐 귀국하면서 곧바로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사업을 시찰하게 되였다. 호요방 총서기의 래방은 리덕수는 물론 연변조선족자치주로 말하면 그야말로  엄청난  대사였다. 호요방의 귀국 하루 전에 호계립(胡启立)이 맞이하러 연변에 먼저 오게 되였다.  호계립은 당시 중공중앙 정치국위원, 서기처 서기였다.  호계립은  도착하는 날 오전에  곧 연변의 사업회보를 청취했다. 앞서 호계립은 다들 바쁠텐데 자기 때문에 정상적인 사업에 지장을 주어서는 안된다면서 각 부문마다 일일이 회보할 것 없이 리덕수 한사람의 회보만 듣겠다는 의견을 분명하게 내놓았다. 그래서 회보에는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 등 몇 사람이 더 자리를 같이 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의 력사개황과 현재의 정황을 비롯한 연변의 기본정황을 소개하고 나서 연변에서 중점적으로 해결해야 할 몇가지 문제를 회보하였다. 그중에서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해달라는 문제가 중점중의 중점으로 제기되였다. 회보가 끝나자 호계립은 갑자기 오후 시간을 타서 린근 현시에  내려가볼 수 없겠느냐고 물었다.  리덕수는 오후에 호계립을 배동하여  룡정으로  내려갔다. 사전에 호계립한테서 린근  현시에  내려가 조사연구하겠다는 제의가 없었기에 갑작스레  내려가게 되였고 룡정에서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갖추지 못하였다.  ’원생태’로 생기를 뿌리는  룡정의 모습을 보게 되여 호계립은 매우 즐거워하였다. 호계립은 룡정시내 거리를 거닐면서  연변 조선족의  일상생활과 생활습관. 특히는 미풍량속에 짙은 흥미를 갖고 이것저것 물었다. 호계립은 룡정현소재지가 매우 깨끗하다고 치하하는가 하면 또 룡정사과배과수원이 너무 커서 끝도 보이지 않는다고 감탄하기도 했다.  이 말을 듣고 리덕수가  “계립동지께서 가을에 오셨더라면  이 도로 량켠에 사과배들이 가득 쌓여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겠는데요.”라고 아쉬워하였다.       호계립은 동감인듯 머리를 끄덕였다.  “연변은 그야말로  확 끌리는 훌륭한 고장입니다.”     연길에 돌아와서 호계립은 부르하통하를 일별하더니 이 강바닥에 물이 넘치도록 다단계 물막이땜을 건설하면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그후부터 연길시에서는 부르하통하 다단계 물막이땜 건설계획과 사전작업에 들어가게 되였다. 호요방이 연변에 도착하기 전에 매사에 세심한 리덕수는 주당위 판공실 관련 책임자한테 이전에 호요방이 연변에 와서 시찰할 때 찍은 사진을 찾아보라고 분부하였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호요방은 연변에 시찰온 적이 있었다. 판공실 책임자는 반나절이나 뒤적여서야 겨우 사진 한장을 찾아냈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제1임 서기였던 주덕해가 호요방을 배동하여 연변대학을 시찰할 때 찍은 사진이였다. 그 속에는 연변대학의  로교장이자 저명한 중국조선족 교육가인 림민호(林民镐)의 얼굴도 함께 들어있었다.  리덕수는 호요방  및  대표단 일행을 영접하려고 미리 앞당겨 도문에 도착하였다.  이윽고 전용렬차는 조선 남양 쪽으로부터 두만강대교를 경유하여 우리 나라 경내 도문역에 서서히 들어섰다.  전용렬차가 멈춰서고 차문이 열리기 바쁘게 리덕수는 얼른 전용렬차에 올랐다. 호요방은 리덕수를 보자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멀리서부터 손을 내밀어 뜨겁게 악수를 나누었다.  리덕수는 정중하게 총서기한테 인사를 올렸다.  “총서기동지! 안녕하십니까? 저는 연변주당위 서기 리덕수입니다.”      호요방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알고 있습니다. 알구말구요...”   리덕수는 총서기한테 연변인민을 대표하여 다시 한번 인사를 올렸다.  “우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총서기동지를 열렬히 환영합니다!”      호요방은 가볍게 손으로 의자를 가리켰다.       “고맙습니다, 그럼 어서 이리로 건너와 우리 앉아서 좀 이야기를 해볼가요!”  호요방과 만나면서  리덕수는 총서기께서 대단히 열정적이고 붙임성이 좋으며 조금도 틀거지가 없다는 인상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그전에도 호요방을 뵌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근거리에서 서로 마주보며 만나뵙기는  이번이 처음이였다. 하긴 아직 젊은 리덕수한테는 애초에 다소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그런데 호요방과 악수를 나누고 몇마디 이야기를 주고받고 나니  대뜸 기분이 가벼워났다.     호요방은 리덕수에게 이렇게 물었다.      “동무가 보건대 조선 쪽에서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과 우리 연변 쪽 백성들이 살고 있는 살림집이 어느 쪽이 더 나은 것 같습니까?” 리덕수는 자기가 이미 알고 있는 정황에 근거하여 이렇게  대답했다.  “밖에서는 조선 쪽 가옥들이 우리 중국 연변 쪽 가옥들보다 나아 보입니다. 저 쪽에선 벽에다가 회칠을 깔끔하게 해서인지 먼데서는 정말 멋있어보입니다. 그런데 주택 구도나 사용상의 편리 그리고 가구를 장만해 놓은 걸 보면 저쪽이 오히려  우리 쪽보다 못한 편입니다.” 호요방은 수긍이라는듯 머리를 끄덕이였다.  “조선에서는 위생에 참으로 정성을 쏟는 걸 보았습니다. 그리고 교육도 착실히 틀어쥐고 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 할 부분들입니다.”  리덕수는 묵묵히 총서기의 말씀을 머리에 기억해두었다. 이 때 총서기는 리덕수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리덕수는 너무도 격동되여 이렇게 말했다.      “총서기동지께서는  연변행이 이번까지 두번째 아닙니까? 첫번째는 공청단중앙 제1서기로 계실 때 연변을 처음 찾으셨습니다. 이번에 총서기께서 오신다 하기에 저희들은 모처럼 당시 연변에 오셔서 시찰할 때 남긴 사진을 찾아보았습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하면서 확대한 그 옛날 흑백 사진을 꺼내보였다.  “보십시오. 이것은 총서기께서 그 때 연변대학을 시찰할 때 찍은 사진입니다.” 호요방은 못내 기뻐하시면서 사진을 들고 꼼꼼히 눈여겨보면서 입을 열었다.   “이 분이 주덕해동지 맞지요? 그리고 이 분은 연변대학 교장  림민호동지가 아닙니까?”      리덕수는 찬탄이 절로 튀여나왔다.   “총서기의 기억력은 정말 놀랍습니다.”  호요방은 사진을 한참이나 뜯어보다가 옆에 있는 양상곤(杨尚昆)한테 넘겨주었다. “상곤동지도 보십시오!”      양상곤이 사진을 보고 껄껄 웃으면서 “총서기동지는 그 때 정말 젊으셨습니다!”하고 덕담하는데 호요방이 느닷없이 물었다.      “주덕해동지는 그 후에 어떻게 되였습니까?”  갑자기 화제가 무거워졌다. 리덕수의 기분도  금세 가라앉았다. 그는 총서기한테 사실 대로 말씀드렸다.   “주덕해동지는  ’문화대혁명’ 속에서 엄중한 박해에 시달리다가 나중에 남방에서 별세하셨습니다.  ’문화대혁명’이 금방 시작되였을 때 주덕해동지가  연변에서 비판에다 투쟁까지  받게 되자 주은래 총리는 주덕해동지를 보호하려고  남방으로 옮겼습니다.  그는 실은 한을 품고 세상을 뜨게 되였습니다.”   여기까지 듣고난 호요방은 한참 동안 깊은 사색에 잠기더니 림민호 교장의 신상을 물었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림민호 교장도  ’문화대혁명’ 중에 박해를 받고 별세하셨습니다. 모교를 졸업한 학생으로서 저희들은 더구나 로교장님을 떠올리면 마음이 무거워납니다!”   리덕수의 말을 듣고 호요방은 또 한참 동안 침묵에 잠겼다.   계속 앞으로 달리는 전용렬차에서 호요방은 깊은 사색을 이어나갔다. 달리는 차에서 총서기는 주덕해동지한테 높은 평가를 내려주었다. 주덕해에 대한 총서기의 평가는 전면적이고도 공정하였으며 너무도 실사구시적이여서 더구나 마음을 후련히 적셔주었다.   총서기의 말씀을 들으면서 리덕수의 가슴은 세차게 울렁거렸다. 그는 마음을 가다듬고 귀담아듣는 한편 한마디라도 놓칠세라 열심히  적어놓았다.  나중에 리덕수는 자기의 기록을 정리하면서 총서기의 말씀의 심각한 의미를 보다 더 절실하게 파악할 수 있었다. 총서기의 평가의 의미는 너무나도 풍부하고 소중하였다. 나중에 주덕해기념비에 새겨넣은 비문은 호요방의 이 때 평가였다.    전용렬차가 도문을 떠나자 총서기는 리덕수한테 이렇게 물었다.     “덕수동무, 도문부터 연길까지는 얼마나 걸립니까?”    “딱  한시간 걸립니다.”   호요방은 호쾌하게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여유 있네요.  나머지 시간은 모두 동무한테 맡길 테니까 동무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다 털어놓으십시오.”   그 때 리덕수는 연변의 림업문제를 회보하면서 이 같은 의견을 내놓았다.    “연변림업의 관리권한을 상부에서  아래에 이양해주어야 합니다. 림업관리권한을 지방에 내려보내지 않으니 농민들과 자칫하면 갈등이 터지게 됩니다. 농사까지 지어야 하는 삼 림지구의 농민들이 가을철에 산에 들어가 소추수를 하거나 잣나무에서 잣을 좀 따려고  해도  여기저기 막히기에 불평이 대단합니다. 연변에서  림업을 발전시키려면 반드시 림업체제개혁을 가져와야 합니다.”      리덕수는 또 자기의 견해를 솔직히 밝혔다.      “총서기동지,  좀 외람될 수도 있겠지만 지금 우리의  림업체제는 50년대에 완전히 쏘련에서 그대로 옮겨온 묵은 틀이므로 반드시 개혁하여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해주어야 합니다. 연변의 림업체제도 역시 쏘련의  체제를 그대로 본떠온 것입니다.  이런 낡은 체제는 연변의 림업발전을 심각하게 저애하는 걸림돌로 되고 있습니다.”       “연변에서는 림엄을 흥성시키고 림업발전을 가져오려면 우선 림업체제를 개혁하여야 합니다.  목전에 림업관리권한을 아래로 이양해주는 게 시급합니다. 현재 상급에서 무엇이나 다 관리하고 있는 듯한 체제로 되여있으나 많은 정황, 특히는  많은 큰 일들에서도 강 거너 불 보기 식입니다. 례를 들면  지금 산에서 홍수가 자주 터지고 해마다 산불이 자주 일어나면서  적잖은 산들이 황페해있어도 관계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리덕수가 여기까지 이야기하자 호요방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차창 밖을 대다 보았다.        리덕수의 회보는 계속 이어졌다.      “총서기동지도 보시다싶이 도문 이쪽 우리의 산들은 얼핏 보아도 저 건너 조선 쪽 산들보다 엉성합니다.  ’문화대혁명’  10년 동란기간에 우리 이쪽에서는 산의  나무를 모조리 베여버렸습니다.  자손후대에게 죄를 짓게 되였습니다.”     호요방은 고개를 끄덕였다.    “오, 우리 이쪽에는 확실히  민둥산들 뿐이군요. 조선 쪽 산들이 우리 쪽 산들보다  푸릅니다. 덕수동무! 동무의 말에 일리가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대중들과 농민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여 봉산하고 산림을 육성하여 우리의 산을 잘 관리하고 살찌워야 하겠습니다.”      총서기의 말씀에 리덕수는 힘을 얻게 되였다.    “총서기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희들은 기어코 연변의 산림을 잘 육성하고 잘 보호해 나갈 것입니다!”       호요방은 다시 원래의 화제로 돌아와 리덕수한테 물었다.    “덕수동무!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일입니까? 동무들이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줄 것을 요구하고 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양해달라는 말입니까? 좀더 상세하게 이야기해주겠습니까?”     “현재 전반 림업계통은 현에서 관리하는 림업부문과 국유삼림공업기업을 포함하여 전부 다 국가림업부와 성림업청에서 통일적으로 관리하고 있고 아래에는 아무런 권한도 없습니다. 이런 관리권한을 지방에에 이양해주면 토지를 도급하는 것처럼 림업계통 종업원들이나 농민들한테 층층이 림업생산도급책임제를 실행하자는 것이 저희들의 그림입니다.”     호요방은 먼저 리덕수의 의견을 지지한다고 명확하게 태도를 밝히고 나서  고개를 돌려 양상곤한테 물었다.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저도 총서기의 의견에 찬성입니다.” 양상곤의 답복이였다.  호요방은 또 고개를 돌려 길림성당위 서기 강효초한테 물었다. “효초동지!   길림성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는 문제에 대해 성에서는 연변주의 의견을 지지하고 있습니다.”       강효초의 대답을 듣고 호요방은 뭔가 좀 리해가 안된다는듯 의아해하며 물었다.      “성에서도 모두 동의한다고 하는데 그럼 도대체 무엇 때문에 그 관리권한을 아래로 이양하지 못한단 말입니까? 도대체 매듭이  어디에 걸려있단 말입니까?”      리덕수는 솔직히 말씀드렸다.   “문제가 바로 북경에 걸려있습니다. ”      호요방은 이 말을 듣고 껄껄 웃었다.      “아, 이제야 좀 알 것 같습니다. 바로 우리 코앞에 있는 북경에 걸려있다는 말이군요.”     그리고는 리덕수한테 또 이렇게 물었다.   “이  일을 호계립동지한테 회보했습니까?”      리덕수가 회보했다고 대답하자 호요방은 “호계립동지는 어떤 의견이였습니까?”하고 되물었다.    “호계립동지는 림업관리권한을 아래에 이양하고 림업도급제를 실시하는데 대단히 긍정적이였습니다.”   그 말에 호요방은 이렇게 말했다.      “그럼 됐습니다. 래일 동무가 정식으로 회보할 때 이 문제는 그저 슬쩍 짚고 넘어가고  더 상세하게 회보하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그저 요점만 말해주십시오. 이 일은 북경에 돌아간 후 계립동지가 잘 협상하고 조률해서 제대로 실행할 수 있게끔 맡기겠습니다.”  리덕수는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야 한다는 이 문제의 핵심를 면바로 포착하고 호요방에게 실사구시적으로 회보함으로써 연변의 광범한 간부와 대중들의 절박한 요구를 제때에 반영하였다. 호요방은 회보를 다 듣고 나서 이 문제를 매우 중시하면서 림업관리권한을 우에서 아래로 이양해 주는 것을 지지한다고 명확한 태도를 내놓았다. 호요방동지를 총서기로 하는 당중앙이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에 대한 따뜻한  배려와 지지였다.  그 후 중앙 각 부서에서는  모두 푸른등을 켜주면서 림업관리권한을 연변에 이양되게 되였다. 지금은 주림업관리국에서 연변의 림업을 포괄적으로 관리하고 있다. 연변에서는 삼림공업기업과  림업기업을 잘  관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일련의  림업간부들도 배양해냈다.  력사는 그번 이양이 연변 림업발전에서 하나의 중요한 전환점이자 연변 림업발전의 하나의 중요한 리정표였다는 것을 확인해주었다.      호요방은 전용렬차에서 리덕수의 회보를 진지하게 들으면서 리덕수의 말허리를 거의 자르지 않았고 그저 리덕수가 이야기를 하다가 숨을 고르는 틈을 타서 자기가 묻고 싶은 문제들을 문의하였다. 한시간이란 시간은 이럴듯 눈깜박할 사이에 지나가고  전용렬차는 서서히 연길에 들어섰다.      호계립과 중앙의 기타 지도자들이 연길역 플래트홈에 줄지어 서서 박수를 치면서 조선방문을 마친 호요방 총서기 일행의 귀국을 뜨겁게 맞아주었다.     호요방 총서기는 전용렬차에서 내린 뒤 곧 호계립 등 지도일군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플래트홈을 걸어 나왔다. 리덕수는 줄곧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역에서 나온 리덕수는 그만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온 연길역 광장은 인산인해를 이루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들끓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가? 리덕수는 일순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보안사업에는 허점이 있을 리 없겠는데 도대체 어디서 탈이  생겼단 말인가?      나중에 돌이켜보니 세가지 인소에서 이 같은 현상이 나진 까닭을 풀어볼 수 있었다. 하나는 호요방의 전용렬차가 오기 전에 철도부문에서 다른 렬차를 일률로 연길역에 정차시켰기에 려객들의 호기심이 더구나 부풀어지게 되였다. 다른 한가지는 많은 사람들이 뉴스를 통해 호요방의 조선방문소식을 알고 있었기에 호요방이 방문을 마치고 도문교두를 거쳐 돌아올 수도 있다고 대체적으로 추정하고 있었다.  아닌게아니라 호계립 등 중앙지도자들이 마중을 나온 걸 보게되자 그들은 자기들의 추측이 맞다고 확신하고 좀더 기다렸다가 총서기를 보려고 몰려들었던 것이다. 세번째는 그 때 연길역에 도착한 렬차에는 연길 려객들이 많았는데 그들이 개찰구를 통과한 후 이 소식을 연길시에 알리면서 수많은 연길 시민들이 삼삼오오 연길역 광장으로 몰려오게 되였다.      호요방과 호계립 등 중앙지도자들이 역으로부터 역전광장에 나와보니 온통  인산인해였다. 호요방은 손을 흔들어 광장에 모인 시민들에게 인사를  보냈다. 사람들은 호요방 총서기를 보려고 한사코 앞으로 밀고 나왔고 그럴수록 경호울타리는 점점 더 조여들어 호요방 총서기는 움직이기조차 힘들게 되였다.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뒤에서 밀고 나와 총서기를  곧바로  차에 모시려고 다가갔다.     원래 배치 대로라면 호요방을 승용차에 모시기로 하였는데 상황이 급변하여 모든 승용차들이 죄다 군중들한테 에워쌓여 있었으므로 원래의 계획은 더는 집행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그 자리에서 즉각 결단을 내리고 기자들이 타고 있던 짚차를  돌려세운  다음  호요방을 금세 그 차에 오르게 하였다. 어느새 리덕수는 현장 총지휘로 되였다. 호요방 신변의 경호원이나  비서,   성에서 내려온 경호원들도 모두 리덕수가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이고 주장인 것을 알고 있기에 그가 림기응변하여 과감하게 지휘하자 총서기가 그 짚차에 오를 수 있게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호요방이 차에 오르자 리덕수도 곧바로 총서기를 따라 짚차에 올라 탔다. 호요방은 운전기사 옆자리에 앉고 성당위 서기 강효초가 뒤좌석 오른쪽,  중간에 호요방의 신변 경호원, 왼쪽에 리덕수가  앉았다.     그런데 뜻밖에도  미처 시동을 걸기도 전에 사면팔방에서 밀려드는 시민들이 겹겹이  에워싸는 바람에 짚차는 좀체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다금해서 가슴을 조이고 있던 리덕수의 눈앞에  갑자기 장지붕이 나타났다. 그 당시 주정법위원회 서기였던 장지붕은 경호사업을 책임지고 있었다. 리덕수는 차창을 열고 “동무! 장지붕동무!” 하고 불렀다. 장지붕은 그 소리를 듣고  제꺽 사람들을 비집고  건너왔다. 리덕수는 차창으로 머리를 내밀고 장지붕한테 소리쳤다.    “동무가  지금 공안간부와 경찰들을 조직하여 손을 잡고 인간울타리를 만들어 군중들을 좀 뒤로 물러서도록 해주시오!”    장지붕은 재빨리 공안간부와 결찰들을 조직하여 어느새 인간울타리를 만들었다.공안전사들이 서로 두팔을 걸고 “하나, 둘, 셋! 하나, 둘, 셋!”을 웨치며 뒤로 밀자  군중들은 조금씩 뒤로 물러 서게 되였다.      군중들이 힘들게 뒤로 물러나면서 마침내 좁다란 통로가 이루어졌다. 이젠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런데 짚차가 움직이려 하자 호요방이 차창을 열고 길 량켠에  있는 군중들을 향해 손을 저을 줄이야. 경호원은 대뜸 말렸다.  “수장동지! 차창을 닫아야 하겠습니다!”      강효초가 뒤에서 손을 내밀어 차창을 닫아버렸다. 연길시 시민들한테는 소중한 문명의식이 있었다.  그들은 스스로 나서서 자칫 막혀 버릴 수 있는 이 통로를 가까스로 지켜주었다. 호요방이 탑승한 이 짚차는 천천히 앞으로 미끄러져 나갔다. 드디어  역전광장을 빠져나오자 확 뚫린 길이 나타났다.      이 때 큰길 량켠에는 어느새 연길시의 남녀로소들이  빼곡히 줄지어 있었다. 민족복장차림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손에 생화묶음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분위기는 매우 뜨거우면서도 질서정연하였다. 호요방 총서기의 이번  시찰은 원래 기밀사항으로 다뤄졌는데 이제는 더 숨길 수 없이 드러나게 되였다.  전 시 인민들이 총서기께서 연변에 오신 사실을 알게 되였다. 길거리는 명절처럼 환희로 들끓었고 길 량쪽에 줄지어선 환영 인파는 연변호텔까지 길게 이어졌다. 그 때 연길에는 호텔이라고는 하나 밖에 없었기 때문에 군중들도 총서기가 오시면 연변호텔에 머무르게 되리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차창 밖으로 이처럼 뜨거운 환영장면을 목격하면서 마음속으로는 기쁜 심정을 감출 수 없었다. 군중들은  이렇게 자발적으로 떨쳐나와 총서기를 반기고 있었다. 분명 마음속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환대였다.      예정 대로라면 역에서 나온 후 곧바로 연변대학에 가서 시찰하고 그 뒤에 연변호텔에 가서 휴식을 하기로 되여있었다. 그런데 이런 환영열기 속에서 곧추 연변대학으로 가기는 어려웠다. 환영나온 군중들이 오래동안 길가에 서서 총서기가 오시기를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호요방이 탑승한 짚차는 직접 연변호텔로 핸들을 돌렸다.  길에서  호요방은 매우 기뻐하시면서 자주 차창을 열고 큰길 량켠에 서서 환영하는 군중들에게 손을 흔들어 답례하였다. 그럴수록 환영장면은 한결 더 뜨거웟고 감동적이였다. 리덕수는 호요방에게 이렇게 말했다.  “총서기동지, 군중들이 모두 자발적으로 총서기를 환영하러 나온 겁니다. 주에서는 포치하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호요방은 격동되여있었다.  “연변 인민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호텔에 도착하니 호요방이 투숙할 방은 이미 마련되여있었다.     “오시느라  길에서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총서기동지께서는 먼저 좀 휴식을 하셔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10여분이 지나서 호요방은 곧 비서를 보내 리덕수를 찾았다. 리덕수가  들어서니 호요방은 첫마디로 “기차역에서 군중들이 혹 상하지는 않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리덕수는 이미 장지붕을 통해 기차역 광장에서는 군중들이 상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았다는 정황을 알고 있었다..      “상한 군중은 전혀 없습니다.”   “한사람도 상하지 않았다니  마음이 놓입니다.”    그제야 한시름을 놓은듯 군중들의 열띤 분위기를 다시금 상기하였다.      “연변 군중들은 너무도 열정적이였습니다. 정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호요방이 도착한 그 날 오후에 공청단중앙 제1서기 호금도(胡锦涛)도 연변에 와있었다.  호금도는 공청단길림성위서기 두청림(杜青林)이 배동하고 있었다. 그 때 리덕수는 호요방 총서기 배동에 보내느라 호금도를 자주 동무할 수 없었다.  리덕수는 호금도에게 사업을 회보하려 하자 호금도는 시원스레 막았다.      “저는 괜찮으니 급한 일부터 보십시오.” 리덕수가 호금도를 알게 된 건 이 때부터였다.    5월 12일 오전 9시, 연변호텔 회의실에서 회보회가 있었다. 이번 회보에서는  리덕수에게 비교적 깊은 인상을 남긴 몇가지 사안이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에 앞서 리덕수는 회보회의에 참가하는 인원을 주 직속부문 주요 책임자를 포함한 각 현시 당위서기로 늘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의했다. 처음에 관련 부서에서는 “그렇게 되면 회의에 참가하는 폭이 너무 넓어지고  인원이 너무 많아진다”고 하면서 시원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리덕수는 호계립을 찾아갔다.   “우리 자치주로 말하면 이들 기층 간부들이 일년 내내 자기 일터에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이번에 총서기께서 마침 오셨는지라 다들 친히 총시기를 만나뵙고 친히 총서기의 지시를 경청하고 싶어합니다. 호계립동지께서 기층간부들의 이 같은 심정을 리해하리라 믿습니다.”    리덕수의 청을 호계립은 시원히 받아주었다.      “그럼 덕수동무 생각대로 하십시오.”      이리하여 결국 회보회에 참가한 인원은 주의 다섯개 지도부, 현시 당위서기와 주 직속부문의 주요 책임자로 확대되였다. 그 때 회보회에는 성당위 서기, 성장,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사령원, 연변군분구 사령원과 정위 등도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기 전에 호요방은 성에서 온 지도일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고 뒤이어 주급 지도일군들을 일일이 만나주었다. 호요방은 장홍규, 마서정, 조봉명을 접견할 때 그들의 년령을 일일이 물었다.  세 사람이 같은 57세라고 대답하자 호요방은 약간 롱담을 건네면서 분위기를 띠웠다.      “아, 세분이 모두 57세라, 그럼 ‘57 간부학교’라고 해야 하겠군요!”      이 말에  모두들 와그르르 웃었다. 호요방은 정세창의 정황을 듣고 나서 정중한 미소를 보냈다.      “조선족이 군분구 사령원을 맡고 있다니 조련찮은 일입니다.”   뒤이어 리덕수는 호요방동지의 희망에 따라 8개 현시 당위서기를 일일이 소개했다. 호요방은 8개 현시 당위서기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매개인을 소개할 때마다 호요방은 당신네 현은 인구가 얼마이며 그중 한족은 얼마이고 조선족은 또 얼마냐고 까근히 물어보았다. 훈춘현당위 목청림(穆青林) 서기를 소개할 때 “이 분이 훈춘현당위 목청림동지입니다.”라고 소개하자 호요방은 이렇게 물었다.      “훈춘현의 한족과 조선족의 비례가 어떻게 됩니까?”      목청림은 훈춘의 정황을 소개했다. 그 때에는 훈춘의 조선족인구는 60%에 가까웠고 한족인구는 40%였다. 호요방은 목청림에게 한걸음 더 나아가 물었다.    “동무는 한족입니까 조선족입니까?”    목청림이  “저는 한족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총서기는 훈춘에는 조선족인구가 더 많다는데 어째서 한족이 서기를 맡게 되었느냐고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그러자 리덕수는 인츰 호요방한테 목청림은 비록 한족이지만 조선어를 잘하거니와 알아들을 수도 있다고 소개했다. 이 말을 듣고 나서 총서기는 별다른 말을 더하지 않았다. 호요방이 떠나간 후 주당위 상무위원회에서 호요방 총서기의 연설정신을 어떻게시달할 것인가를 연구하게 되였는데 장홍규는 아주 상론할 여지도 없이 훈춘현당위 서기를 조선족간부로 바꾸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장홍규는 그 당시 직접 호요방의 연설을 들었던 주당위 서기이면서 연변의 제2책임자였다. 회의에서는 토의 끝에 그의 건의를 받아들이고 그 당시 훈춘현 현장 류순철한테 현당위 서기를 맡겼다. 원래의 현당위 서기 목청림은 주림업관리국에 전근되여 당위서기를 담당하게 되였다. 얼마  후 그는 주인민대표대회상무위원회 부주임으로 배치되였다.     리덕수가 주당위를 대표하여 회보를 하게 되였다. 회보제강은 주당위의  진지한  토론과 연구를 거쳤고 성당위의 주요지도자한테 청시한 내용이였다. 성당위에서도  검토를 거쳐 연변의 이 회보제강을 동의하였다. 리덕수가 연변의 기본정황을 회보할 때 호요방은 한마디 께끼였다.   “오, 동무네 연변은 6개 현,  2개 시이고 4만 2천 평방킬로메터라고 하니까 면적은 스위스와 비슷하군요. 인구는 189만이라고 하였지요.”  리덕수가 “거의 서장 인구와 비슷합니다.”라고 말하자 호요방은 의미심장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서장은 193만명이니까 동무네보다는 인구가 4만명이 더 많습니다. 그런데 면적은 대만보다도 더 큽니다. 동무네는 4만 2천평방킬로메커로서 대만의 3만 7천 평방킬로메터보다 더 크군요.” 나중에  리덕수는 그 날 회보회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바깥에서 아이들 말소리가 들려왔다고 회고했다. 그 때 호요방이 연변에 와서 시찰하는 사이의 모든 접대방안은 모두 리덕수가 친히 심사하였다. 그런데 이 아이들이 도대체 어디서 왔는가? 그리고 이 아이들이 또 어떻게 들어올 수 있었는가? 이 때 마침 호계립이 건너와서 리덕수한테 물었다.   “바깥에 유치원아이들이 왔는데 이건 동무들이 들여보낸 것입니까?”  리덕수는 그만 어리둥절해졌다. 자기가 안배한 게 아니라고 말하자니 아이들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해석할 수 없고 주에서 안배한 거라고 에둘러댈 수도 없고 자기는 확실히 이 일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리덕수는 주에서 누군가가 배치하였기에  이 아이들이 호텔안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는 림기응변으로 그저 희미하게 조직에서 배치한 것이라고 전했다. 호계립은 리덕수의 말을 듣고 나서 반색했다.   “아, 동무들이 배치한 것이였군요. 좋습니다. 그럼 동무의 회보가 끝나게 되면 곧바로 호요방동지더러 아이들을 만나게 하지요!”      “좋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호계립은 호요방 곁에 다가가 뭐라고 몇마디 말을 건네였다.  호요방이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보아 아이들을 만나는 데 동의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나다를가 회의가 결속되자 호요방은 곧  아래로 내려가 아이들을 만나주었다.      호텔 뜨락에서 기다리고 있던 어린이들은 호요방을 보자 너무도 신나서 꽃다발을 흔들거나 퐁퐁 뛰면서 소리높이 환성을 질렀다.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 호할아버지를 환영합니다!”      이  어린이들은  61유치원  어린이들이였다.  이들이 어떻게 되여 여기로 왔는지 리덕수는 그 때까지 감감 모르고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이 여간내기로 크지 않은 유치원 한 선생님의 소행이였다. 호요방이 왔다는 소식에  어린이들을 데리고 호텔로 찾아왔다가 호텔 문어구에서  경호원들에게  막혔았다. 그러자 민족복장을 곱게 차려입은 어린이들은 들어가서 호할아버지를 뵙겠다고 일제히 떠들었다. 그 소리를 들은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가 경호원들한테  말해 어린이들을 들여보냈다.     호요방과 어린이들의 그 때의 그 만남은 자못 유쾌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워낙 어린이들을 끔찍이 귀해하던 호요방은 민족복장까지 차려입은 조선족어린이들을 보더니 더구나 만면에 웃음꽃을 활짝 피웠다. 호요방이 어린이를 안고 찍은 사진은 그 당시 전국 각지 신문들에서  톱기사로 실었다. 뒤이어 허다한 잡지의 앞표지를 장식하여 조선족의 현주소를 널리 알리게 되였다. 이 일을 겪으면서  리덕수는 이와 류사한 옛일을 떠올리게 되였다. 그것은 1962년 6월 22일이였다. 경애하는 주은래 총리께서 연변에 오시여 사업을 시찰할 때도 이 연변호텔에 투숙하게 되였다. 물론 주에서는 총리와 군중들이 만나는 자리를 배치하지 않았다. 그런데 주당위 서기 주덕해가 한창 방안에서 주은래 총리에게 사업을 회보하고 있는데 갑자기  호텔 밖에서 “경애하는 주총리, 저희들은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 경애하는 주총리, 저희들은 당신을 뵙고 싶습니다!”하고 연길 시민들이 한결같이 웨치면서 연변호텔을 에워쌌다. 주총리는 그 웨침소리에 곧바로 2층 베란다에 나와  아래에 서있는 군중들에게 손을 저어 답례를 보내면서  인사를 전했다. 그러자 군중들의 환호성은 더욱 우렁차게 울려퍼졌다. 주총리는  그  자리에서 주덕해한테서 조선어 인사말을  제꺽  배워가지고 조선말로 아래에 있는 군중들에게 인사를 하자 군중들의 분위기는 더욱 끓어올랐다. 그 때 그 장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그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저도 모르게 감동에 젖어들군 한다고 심경을 털어놓았다.   그 날 리덕수의 사업회보에 이어 호요방의 발언이 있었다. 그는 연설문 원고도 없이 발언을 이어나갔다.   “저는 여러분들한테 세가지 큰일, 네가지 작은 일을 놓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는 림업관리체제 문제입니다. 림업문제는 회보를 듣고 난 호계립동지가 이미 방안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즉 주에서 국가로부터 도급을 받아 다시 아래에다 도급을 주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이렇게 일단락합시다. 나머지 문제는 호계립동지가 동무들에게 다  해결해 드릴 것입니다. 연변의 림업체제를 개혁하지 않으면 연변의 림업은 발전할 수 없거니와 연변인민들도 부유해질 수 없습니다. 이처럼 큰 사안인 만큼 바꾸어야 합니다. 둘째는 대외무역문제입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서서 조선 청진항을 통해 일본과 무역할 수 있는데 련합경영체 혹은 련합경영회사 조직이 가능하다고 봅니다. 해운 뿐만 아니라 철로까지 망라한 련합운송을 조직할 수도  있습니다. 김일성동지께서는 청진항 뿐만 아니라 청진 이북에 있는 라진항도 수심이 깊기에 다 리용할 수 있다고 가능성을 열어주었습니다. 하역량은 1,000만톤에서 1,500만톤으로 헤아릴 수 있습니다. 청진항과 라진항을 통해 대일본 수출, 대쏘련 수출 나아가 대홍콩 수출도 가능합니다. 셋째는 량식문제입니다.”      이 때 호계립이  한마디 첨부했다.    “량식은 주로 저장, 운수 나아가 수출의 경우를 말합니다. 만약 운수만 해결할 수 있다면  대외무역부를 통해 길림성에서도 대외담판에 나설 수 있습니다. 다만 수출하는 량식은 길림성에서 손익을 자체로 책임져야 할 것입니다.” 호요방은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라고 하면서 호계립의 의견에 동감을 나타냈다. 그 날 연설에서 호요방은 이렇게 특별히 강조했다.     “조사연구를 잘하는 것은 지도자한테는 가장 근본적인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성이나 지구, 그리고 주와 현의 동지들은 경상적으로 내려가 조사연구를 가지면서  문제를 발견하고 문제를 해결해야 합니다. 중앙의 동지들, 서기처의 동지들과 정치국의 동지들도 친히 부동한 지방에 내려가 고찰하고 문제를 발견하고 그들을 도와 문제를 해결하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세가지 큰 문제를 다  이야기한  다음 호요방은 계속해서 네가지 작은 문제를 언급하였다.     “이 외에도 또 네가지 작은 문제가 있습니다. 첫째는 두만강변에 세워진 모주석조각상의 위치를 움직여야 하겠습니다. 동쪽으로 향하나 서쪽으로 향해도 다  무방하지만  특정된 방향으로는 잡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성이나 주에서 과학연구일군이나 기술전문가들과 상론해보기 바랍니다. 선진국에서는 한개 큰 건물도 다  통채로 움직일 수 있다고 하는데  우리가 조각상의 방향을 돌려놀는 건 무리가 아니겠지요? 두번째는 조선족들이 입쌀을 맘대로 먹을 수 없는 문제입니다. 한달에 겨우 2.5킬로그람씩 공급한다고 하지요? 공화국이 창건된 지도 벌써 35주년이 되였는데 여러분들이 국경절에 이밥도 먹을 수 없다면 이건 너무 가슴 아픈 일입니다. 동무들은 꼭 결심을  내리고 조선족들이 입쌀을 먹을 수 있도록 이 문제를 해결해야  하겠습니다.”    이 때 길림성당위 서기 강효초가 “연변에서 바꿔온 입쌀은 조선족들한테는 좀더 공급해줄 수도 있습니다.”라고 가능성을 제시하자 리덕수는 대뜸 자기의 의견을 내놓았다.     “한  지방에서  다 함께 살고 있는 만큼 여러 민족 인민들이 마땅히 똑같은 대우를 누려야 할 게 아닙니까?”     이 말을 듣고 호요방은 대견하게 좌중을 바라보았다.     “덕수동지가 큰집 살림살이를 도맡고 식구들을 골고루 보살펴주느라고 마음 조이네요. ” 이어 호요방의 이야기는 계속되였다.    “세번째는 농촌주택을 개조하는 작업입니다. 특히는 쏘련변경과 조선변경에 가까운 고장의 주택들을 잘 개조해야 하겠습니다. 농촌주택개조는 좀더 속도를 낼 수 있겠지요? 농촌주택은 보기도 좋아야 하거니와 따스해야 합니다. “  네번째로 호요방은 또 특별히 주덕해동지의 문제를 언급하였다.  호요방이 연변을 떠나간 후 리덕수는 곧바로 주직속기관 간부대회를 열고  대회에서 연설을 하였다. 그는 따로 연설문을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습관 대로 연설제강을 카드에 써가지고 연설을 하였는데 제강도 스스로 작성했다. 그 때 성에서 내려온  일부 간부들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으므로 그들도 대회에 참가하여 리덕수의 발언을 함께 들을 수 있었다. 리덕수는 발언에서 호요방이 연변에서 가진  전반 시찰활동을 소개하면서  진지하면서도 까근하게 그리고 전면적으로 호요방이 연변에 머무는 기간에 남긴 모든 중요한 연설들을 전달하였다. 아울러 호요방의 연설정신을 참답게 관철시달할 데 관한 사업을  놓고 일일이 포치하였다.    연변에서 시찰하는 기간에 호요방은 부동한 시간, 부동한 장소에서 여러번 주덕해를 담론하면서 주덕해에 대해 대단히 높으면서도 아주 적중한 평가를 내려주었다. 물론 총서기의 평가는 연변 여러 인민들한테 더없는 깊은 감동을 안겨주었다. 이런 말씀은 기실 중국 로세대 무산계급혁명가들을 대표하여 주덕해동지에게 내려준 공정한 평가였다. 이는 주덕해동지의 일생에 대한 충분한 긍정이고 고도로 되는 개괄이였다. 연변에 머무르는 기간 호요방은 주 다섯개 지도부 성원들, 각 현시 당위서기, 주당위, 주정부 각 부문 제1 책임자, 그리고 길림성 당위 서기, 성장,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사령원, 연변군분구 사령원과 정위가 참석한 회의 석상에서 한없이 깊은 감회에 젖어 심경을 자연스레 밝힌 바 있다. “주덕해동지는 우리 당이 연안시기에 양성한 당의 우수한 조선족간부로서 중국 조선족의 령수입니다. 주덕해동지는 정치립장이 견정하고 사업작풍이 착실하며 대중과 밀접히 련계하고 전면적으로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집행하여 연변의 건설과 발전을 위해 거대한 공헌을 하였습니다. 당은 주덕해동지를 잊지 않을 것이며 인민들도 주덕해동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이어 호요방동지는 저으기 격동된듯 잠간 명상에 잠겼다가 숨을 들이쉬더니 눈길을 리덕수한테로 돌리였다. “덕수동무, 어디 마땅한 자리를 골라서 주덕해동지에게 기념비를 세워드려야 하겠습니다.” 총서기의 이 제의가 어쩌면 좀 갑작스럽게 와닿았는지 회의장은 삽시에 물뿌린듯 조용했다. 연변 인민에 대한 주덕해동지의 은덕은 한없이 깊고 두터웠고 그만큼 인민들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총서기께서는 친히 주덕해동지에게 기념비를 세워 드려야 한다고 건의하니 너무나도 반가웠다. 리덕수도 마음속으로 저으기 격동되여 몇번이고 총서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였다. “방금 주덕해동지에 대한 총서기의 고도로 되는 평가를 듣고 저는 몹시 격동되면서도 한없이 감동을 받게 되였습니다. 주덕해동지에 대한 충서기의 평가는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맘속의 말이나 다름 없습니다. 총서기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저희들은 꼭 총서기의 기대 대로 시야가 확 트이고 경치가 아름다운 좋은 곳을 골라 주덕해동지한테 기념비를 세워드리겠습니다.” 호요방은 미더운 눈길로 리덕수를 바라보았다. “그럼 믿겠습니다. 동무들은 기어코 이 일을 잘 성사시켜야 하겠습니다.”    이에 리덕수는 다시한번  “총서기께서는 마음을 놓으십시오” 하고 의지를 확인하고 나서 곧바로 “그럼 총서기께서 주덕해기념비의 비명을 써주시겠습니까?.”라고 청들었다. 호요방은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라며 흔쾌히 수락하였다. 회의가 끝나자 사업일군들은 재빠르게 붓과 종이, 먹과 연적을 마련해놓았다. 리덕수가 호요방동지에게 비명을 부탁드리자 호요방은 잠간 생각을 가다듬다가 붓을 날려 “주덕해기념비”라는 몇 글자를 써주었다. 한눈에 확 안겨오는 큼직한 정체의 해서였다. 그 때 호요방은 또 청을 받고 연변대학에 “민족인재의 양성에 힘써야 하겠습니다”라는 제사를 써주었다. 리덕수와 주당위의 주요 지도자들은 다 함께 호요방이 제사를 남기는 전반 과정을 지켜보았다.   호요방 총서기의 지시에 따라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상무위원회는 1984년 8월 8일에 특별히 회의를 열어 주덕해기념비 건립을 둘러싼 구체적인 사항들을 연구하였다. 회의를 마친 후 주당위 상무위원들은 기념비를 세울 지점을 현지답사하였다. 최종적으로 연길시 서북쪽 산비탈에 기념비를 세우기로 합의하였다. 소나무와 잣나무 숲이  우거지고 뉘엿한 릉선을 따라 연길시 전경을 굽어볼 수 있었다. 다들 이 자리를 퍼그나  만족스러워하였다. 주당위에서는 인차 성당위에 보고서를 올려보냈다.  보고서에는 주덕해기념비를 세우게 된 경위에서 호요방동지가 먼저 제기하고 기념비 비명까지 써주신 세부를 상세히 첨부하였다. 성에서는 곧바로 회시와 함께 성재정에서 전문 자금 80만원을 내려보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정부에서 그 나머지 자금을 조달하면서 주덕해기념비는 만민의 기대를 안고 연길 서북쪽 산비탈에 우뚝 솟게 되였다.   주덕해기념비 건립은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의 오래 된 숙원을 풀어준 경사였다고 할 수 있다. 중국조선족 인민대중들의 마음속에서 주덕해의 령수적 지위는 력사발전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여왔다. 주덕해가 중국 혁명전쟁시기와 새 중국이 창건된 이후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시기에 시종일관 견정불이하게 중국공산당을 따라 연변 여러 민족 인민대중들을  이끌고 사회주의 탄탄대로를 따라 세인들이 주목하는  눈부신 성과들을 이룩하는 과정을 보아왔기에 연변인민들은 더구나 주덕해동지를 높이 우러르고 있었다. 전쟁년대나 평화건설시기를 막론하고 주덕해동지는 자각적으로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옹호하고 국가의 통일과 민족단결을 단호하게 수호하였다. 연변에서 주덕해동지는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을 참답게 관철집행하고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한데 굳게 단합시켰으며 그들을 이끌고 간고하게 창업하고 분발노력하여 연변의 각항 사업이 공화국이 전진하는 발걸음과 보조를 맞춰나가도록 궤도를 맞물려놓았으며 연변조선족자치주의 번영발전을 위해 튼튼한 토대를 닦아 놓았다.                     사업중심 전이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한 이후 혼란한 국면을 바로 잡는 사업을 단단히 틀어쥐는 한편 적시적으로 사업의 중심을 경제사업에로 옮기고 착실하게 밀고 나갔다. 1983년 8월 13일, 등소평동지께서 날랜 발걸음으로 장백산에 오르시고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에게 “연변조선족자치주를 더 빨리, 더 훌륭하게 건설해야 하겠습니다”라는 제사를 간절한 소망을 담아 써주시면서 연변의 경제사회발전은 더구나 탄력을 받게 되였다. 리덕수는 경제사업을 보다 중요한 위치에 놓고 지도부의 거듭되는 연구를 거쳐 한층 보완하였다.이어 열린 몇개 중요한 회의도 이 같은 경제중심의 맥락에서 풀이 할 수 있었다. 1984년 1월초, 리덕수는 전 주 공업교통사업회의를 주관하여 소집하였다. 그는 회의에서 공업교통분야는 한걸음 앞서 나아가야 한다고 지적하면서 회의총화보고에서 공업교통분야에서는 1984년에 다섯개 드센 전역을 벌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첫째, 전 주 지방공업 총생산액이 7.83억원에 도달해야 하며 성장속도는 ’6%를 담보하고 8%를 쟁취하는 것’으로 잡는다. 둘째, 예산내 기업소 리윤액은 1,200만원을 실현해야 한다. 셋째, 일년내에 전 주에서 결손기업을 없애야 한다. 넷째, 예산내 기업소 정돈사업을 전면적으로 완성해야 한다. 다섯째, 20% 이상의 기업소를 ’6호’의 요구에 끌어올려야 한다.  그 시기에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주요한 정력을 기업개혁과 기업관리에 쏟았다. 리덕수의 사색은 매우 명확하면서도 단호했다. 즉 개혁과 관리를 드세게 틀어쥐여  경제적 효익을 올리자는 게 핵심이였다. 그 때 연길담배공장은 그 규모가 너무 작아서 기업의 경제적 효익이 수수한 데다가 가동 가능한 일부 생산능력도 잠자고 있는 상황이였다. 조남기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한 이래 연변에서 담배공장을 경영하는 것을 지극히 지지하였고 나아가 연길담배공장의 규모를 원래의 3만상자에서 5만상자로 늘여야 한다고 제출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임하게 되였을 때 길림성에서는 담배공장의 발전중점을 장춘에 두고 있었다. 그 전망에 따르면 연변은 그저 잎담배 생산기지로 눌러앉아야 할 상황이였다.  당시 성계획경제위원회에서는 어느새 관련 부문과 협상하고 조률하여 를 작성하여 성장에게 보고하였다. 회보를 듣고난 성장도 이 주관부문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성에서 누군가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 이 ’변고’를 알려주었다. 리덕수는 이 소식을 접하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것은 연변의 재정수입과 연변의 경제발전에 직결되는 대사였기 때문이였다. 그는 곧바로 관련 책임자들을 불러 긴급히 대책을 상의하고 는 보고서를 재빠르게 작성하였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장홍규와 함께 그 날 밤으로 성에 찾아가 직접 성당위 서기 강효초를 찾았다.  “강서기동지! 저희들 소수민족지구를 위해 다시한번 고려해볼 수 없겠습니까? 저희들이 어렵게 담배공장을 하나 건설해놓았는데 지금 와서 훌쩍 가져가면 연변의 재정은 무엇으로 돌아간단 말입니까?”  강효초는 리덕수의 회보를 상세히 듣고 나서 짤막한 자기의 립장을 내놓았다.  “덕수동무! 래일 상무위원회를 여니 동무도 참석하고 장홍규동무도 자리에 오십시오. 이 문제는 회의에서 결정하기로 합시다. 저는 개인적으로 동무들의 의견에 찬동합니다. 소수민족지구의 공업은 뭐니뭐니해도 부축해주는 게 마땅합니다.”  그 이튿날 열린 성당위 상무위원회에서는 연길담배공장문제가 림시의제로 늘어났다. 리덕수는 장홍규더러 먼저 발언하게 하였다. 장홍규의 설명은 조리정연하고 설득력과 감화력이 있었다. 장홍규의 발언에 이어 리덕수가 보충발언을 하였다. 연변 동지들의 설명을 듣고 나서 성당위 상무위원들은 모두 연변의 의견을 동의한다고 태도를 밝혔다. 물론 성장도 레외일 수 없었다. 맨마지막에 성당위 제1서기 강효초의 발언이 있었다.   “연변에서 성에 귀속시키는 것을 동의하지 않으므로 그냥 성에 귀속시키지 않는 걸로 하고 연변 동지들더러 계속 잘 운영해 나가도록 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읍시다.”  이리하여 연길담배공장을 지켜낼 수 있게 되였다. 나중에 연변에서는 력량을 쏟아 담배공장 2기 기술개조공정을 벌여 생산규모를 원래의 5만상자로부터 32만상자로 확대하였다. 현재 연길담배공장은 중국연초업종에서 중점적으로 부축하는 골간기업으로 육성되였다. 공업교통사업회의에 뒤이어 1월 11일부터 16일까지 주당위에서는 전 주 산간지대경제건설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주당위에서 연변의 자연지리적 특점에 근거하여 기획한 한차례 매우 중요한 회의였다.  “연변의 우세도 산에 있고 연변의 희망도 산에 있으므로 앞으로는 많은 품을  산에다 쏟아야 하겠습니다.”  리덕수가 늘 하는 말이였다. 특점을 부각시키고 방향을 제시함과 아울러 우세를 발휘시키려는 게 이번에 특별히 산간지대경제사업회의를 소집하게 된 배경이였다. 이번 회의를 통해 각급 지도간부들의 사상을 한층 더 해방시키고 산간지대에 대한 정책을 좀더 느슨하게 풀어주어 종국적으로 산간지대경제를 활성화하여 산간지대  군중들로 하여금 조속히 부유해지도록 정책적으로 밀어주자는 것이 리덕수가 그린 그림이였다. 이번 회의 참가자가 무려 470여명에 달하여 그 참가인수, 참가범위, 규모, 의제의 전문성으로 보아 모두 연변에서는 전례가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 말하면 이것은 연변의 산간지대경제발전방식을 전환시키는 미래 청사진과 직결된 한차례 회의로서 연변 경제건설의 발전을 가속화하는 한차례의 동원대회나 다름 없었다. 그 당시 전국의 전반적 형세로부터 보면 1984년에 이르러 중국농촌의 변혁은 이미 새로운 단계에 들어섰다. 즉 자급자족 혹은 반자급자족경제로부터 비교적 큰 규모의 상품생산에로의 전환단계, 전통적 농업으로부터 현대화 농업으로의 전환단계에 있었다. 이번 회의에서는 산간지대의 자원을 보호, 발전, 리용하여 농업, 림업, 목축업, 과수업, 약재업, 어업 생산기지를 개발하고 건설하며 가공업을 힘껏 발전시켜 적극적으로 상품생산을 발전시키는 것을 골자로 하는 산간지대경제건설방침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회의에서는 산간지대경제발전정책에 관한 약간의 정책(잠정규정)을 제정하였다.  리덕수는 회의총화에서 1984년도 농업생산에서 8개 돌파를 가져올 데 관한 분투목표를 제기하였다. 알곡 총생산량, 림업 총생산액, ’두가지 부류의 농가(전업화농가와 년소득1만원을 달성한 농가)”의 발전, 개발적인 생산, 가공업, 류통경로소통, 인구당소득, 구체적인 조치 등 8개 측면에서 력사최고수준을 돌파해야 한다는 요구와 함께 구체적 지표를 일일이 제시하였다. 산간지대경제사업회의는 전 주 사업중심이 경제사업에로의 전이를 알리는 전주곡이였다.   1월 29일, 주당위에서는 를 내보내여 경제사업의 중요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부각하였다. 그중 제 1조항부터 경제사업에서 경제효익향상을 중심으로 해야 한다는 내용을 두드러지게 내세웠다. 보다싶이 사업중심이 경제건설에로의 전이를 구현한 대목이였다. 그 시기 리덕수의 사업열정은 더없이 드높았다. 전 주의 사업중심이 아주 짧은 시간내에 경제사업에로 전이되면서 연변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은 드디여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이 시대의 큰 흐름에 합류하게 되였다. 형세가 이렇게 ’상전벽해’로 돌아서자 리덕수는 더없이 기쁘고 고무를 받게 되였다. 그는 모든 시간과 전부의 정력을 죄다 사업에 몰부었다. 당시 리덕수의 비서였던 조현인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아무튼 제가 비서로 있을 땐 휴일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 땐 련휴라는 개념마저도 없을 때여서 한주일에 일요일 하루가 휴일이였는데 리서기는 일요일이 휴일이라는 인식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회의가 없는 일요일을 타서 시골로 내려갈 때가 많았습니다. 양력설이나 음력설이 되면 되려 더 바삐 보내야 했습니다.  리서기는 변방초소에 이어 공장이나 광산으로 위문하러 내려가다 보니 명절이나 휴일을 집에서 보낸 적이라고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운전기사나 비서도 물론 쉴 수가 없었지요.” 리덕수는 연변에서 사업하는 8년 동안 전 주의 모든 향진을 다 누비다싶이 돌아보았고 연변 경내의 변경지대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리 만치 찾아보았다. 어디에서 복숭아꽃이 피고 어디에 과수원이 있는지, 인삼양식장, 검정귀버섯양식장, 소사양목장, 양계장, 양어장 등이 어디에 있는지까지 리덕수는 손금 보듯 환히 꿰뚫고 있었다.  주당위에서는 산간지대사업회의에 잇따라 벌방지대사업회의를 소집하였다. 연변 산간지대에는 한족농민들이, 벌방지대에는 조선족농민들이 비교적 많이 살고 있었다. 이런 특점에 착안하여 산간지대사업회의가 한족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도록 이끌어주는 회의였다면 벌방지대경제사업회의는 조선족농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부유해지도록 밀어주는 회의라고 해독하는 시각도 있었다. 리덕수는 이 두 회의에서 모두 연설을 하였다. 그 연설정신은 농민들이 자신의 근면한 로동으로 하루빨리 치부의 길로 나갈 것을 고무격려하자는 게 요점이였다. 누가 먼저 자신의 노력으로 부유해진다면 그가 바로 훌륭한 본보기이므로 모두다 그를 따라 배워야 한다고 힘실어주었다. 2월초에 리덕수는 주당위 상무위원들을 거느리고 연길시에 내려와 현지사무회를 열었다. 인민로확장공사, 청년호개조공사, 연동교건설공사, 전진로아스팔트포장공사, 하수도관개조공사 등 5개 공사를 완공하는 이외에 또 시민들이 된장, 맥주, 남새를 사기 힘들고, 뻐스타기, 변소다니기, 아이들 학교다니기 힘든 등 ’”여덟가지 난제’를 일일이 해결할 것을 연길시에 촉구하였다. 지식분자정책을 참답게 시달하여만 지식분자와 과학기술인재들의 적극성을 충분히 동원하여 경제건설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었다. 주당위에서는 지식분자정책시달지도소조를 내오기로 결정함과 아울러 시기와 형세를 잘 판단하고 적시적으로 지식분자에 관한 정책을 출범하였다. 그 당시 주당위 지식분자정책시달지도소조 부조장이며 주당위 통전부 부장이였던 김영만은 이렇게 회고했다.  “통전부는 여러 민족 각계층 지식분자들과 접촉을 비교적 많이 가지고 았었지만 그 당시로 말하면 아직 ’좌’적인 사상이 완전히 숙청되지 않았기 때문에 지식분자정책을 시달하자면 애로가 많았습니다. 저한테서 이런 정황을 회보받은 리덕수동지는 지식분자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 할 때라고 명확히 립장을 내놓았습니다. 리덕수동지의 위탁을 받고 저는 주당위와 주정부의 이름으로 을 작성하였습니다. 이 문건이 주당위와 주정부의 심의를 거쳐 정식으로 발부된 후 많은 지식분자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되였습니다. 지식분자들은 주당위 새 지도부의 기용을 받아 네가지 현대화 건설에서 자신의 재능을 펼칠 수 있기를 갈망하고 있었습니다.”   장백산이란 이 관광명소브랜드를 진일보 개발하기 위해 주당위에서는 상무위원회를 소집하고 전문적으로 장백산 을 건설할 데 관한 의제를 연구하였다. 장백산호텔의 설계를 놓고 리덕수는 보기 좋고 시원스럽고 민족특색을 갖춰야 한다는 세가지 요구를 내놓았다. 회의에서는 연구를 거쳐 등소평이 친필로 쓴 ’장백산’이란 세 글자를 석비에 새겨 화평영자 대문 앞에 걸고 등소평의 필체로 된 “천지”란 두 글자를 장백산정상 자연석에 새겨넣기로 결정하였다. 장백산정상으로 올라가는 도로개축사항은 주정부에 일임하여 조속히 성에 보고하기로 하였다.  상술한 바와 같이 이처럼 긴박하게 이어지는 일련의 조치들을 딛고 연변의 경제건설은 본격적인 가동에 들어갔다.    그 때 쏘련의 한 당정대표단이 연변에 와서 방문하게 되였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빈해변강구의 구당위 서기였다. 호텔에서 상면을 가지고 피로연이 끝나자 그들은 리덕수의 집무실을 보고 싶다고 제의했다. 쏘련사람들은 아마 대방 지도자의 집무실에까지 가보아야 진정한 의미에서의 례방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았다. 당시 리덕수의 집무실은 너무 간소하였다. 그렇더라도 쏘련대표단은 리덕수의 집무실에 와보고 나서 그처럼 즐거워하였다. 리덕수한테서 극진히 손님을 례우하는 진정을 읽을 수 있은 게 그들로서는 제일 반가운 선물이였다.  담화를 나누는 가운데 쏘련대표단 단장이 리덕수한테 느닷없이 물음을 내놓았다.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란 무엇을 말하는가요?”    리덕수는 중국의 개혁개방과 시장경제를, 나아가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자신의 리해수준에 따라 해석해주었다. 쏘련사람들은 귀를 강구하고 귀담아듣다가 나중에 알듯말듯 아리숭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리덕수는 그들한테 연변에서 실제 발생한 사례들을 들어가면서 이야기해주었다. 물론 그들한테는 중국이 선택한 길이 매우 새로울 게 분명하였다. 다만 그들 나라에서는 이 모든 것이 다 금시초문이였기에 그만큼 궁금해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사회주의운동에는 모두 세가지 사회주의방식이 있었습니다. 그중  사회주의원칙을 고집하면서 개혁개방을 외면한 방식의 사회주의는 빈곤한 사회주의이자 위험한 사회주의라 할 수 있고 근본적으로 말해서 과학적 사회주의라 할 수 없습니다. 두번째 방식은 개혁개방만 떠들면서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포기하는 모험적 사회주의, 맹동적 사회주의로서 이 역시 위험한 사회주의이고 자칫하면 멸망을 자처할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방식은 사회주의 기본원칙을 고수하면서도 전력을 다해 개혁개방을 추진하는 것인데 중국에서 현재 견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 세번째 방식입니다. 다시말하면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입니다. 이것이야말로 과학적 사회주의입니다.”  중국특색이 있는 사회주의, 즉 세번째 방식을 놓고 리덕수는 자기의 많은 관점을 피력하였다. 물론 이런 관점들은 그가 실천 속에서 부단히 총화해낸 정화들이였다.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개혁개방에도 세가지 방식이 있습니다. 첫번째 방식은 정치체제개혁과 경제체제개혁을 함께 틀어쥐고 이 두가지 개혁을 동시에 진행하는 것입니다. 현실적으로 조건이 주어지지 않는 만큼 리상주의적인 개혁개방이라 할 수 있고 객관적으로 아예 조건이 구비되여있지 않는 만큼 실제적으로는 예기한 개혁의 목적을 이루기 매우 어렵습니다. 두번째 방식은 정치체제개혁만 내밀고 경제체제개혁을 방임하는 것인데 이런 개혁은 그 기반이 없기 때문에 흔들릴 수 있는, 자칫 매우 위험한 개혁으로서 사회적 동란을 부를 수도 있습니다. 세번째 방식은 우선 경제체제개혁을 추진하고 정치체제개혁은 경제체제개혁의 진척에 따라  온당하게 점진적으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개혁이 바로 이 세번째 방식입니다. 이 세번째 방식은 우선 경제체제개혁을 틀어쥐고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잡고 있습니다. 경제체제개혁도 무엇보다도 기반의 기반을 틀어쥐여, 다시말하면 농촌개혁부터 착안해서 점차 도시로 확산해나가는 것입니다.”    리덕수는 쏘련대표단 단장과 유머러스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과거에 혁명을 하여 정권을 탈취할 때 사용한 전략은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것이였지요? 이와 마찬가지로 이번 중국의 개혁개방도 역시 농촌으로 도시를 포위하는 전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선 농촌토지도급제개혁부터 시작하여 농촌개혁으로 전국의 개혁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리덕수는 쏘련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김없이 자기가 우려하던 문제도 터놓았다. “정치개혁만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이 그 무슨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것처럼 경제개혁을 팽개친다면 그 기반으로 받쳐줘야 하는 경제개혁을 잃기에 예상 못한 후과를 빚을 수도 있습니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이어 리덕수의 배동하에 룡정과수농장으로 가보게 되였다.  그는 과수농장에는 아무런 흥미를 가지지 않고 리덕수가 이야기하는 정치적인 화제에만 잔뜩 빠져있었다. 그는 현재 자기네 나라의 사회주의는 매우 위험하다고 말하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였고 쏘련의 사회주의에 회의적이였다. 과연 1991년 년말에 쏘련은 해체되고 말았다. 사태의 발전은 쏘련의 한 지방지도자의 걱정이 결코 부질 없는 게 아니였음을 확인해주었다. 쏘련대표단 단장은 일개 변강구역의 구당위 서기였지만 쏘련의 사회주의의 전도에 대해 몹시 고민하고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담당한이래 시종일관 당의 민족정책을 관철하고 민족단결을 수호하는 것을 연변에서 가장 으뜸가는 일로 간주하고 틀어쥐였다. 그는 적시적으로 민족립법사업에서 민족자치조례의 제정을 하나의 중요한 기초적인 작업으로 간주하고 의사일정에 올려놓았다. 는 일찍 1981년 1월 1일, 연변조선족자치주 제7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에서 이미 제1차 심의를 가진 바 있는데 그 때 대표들은 조례초안을 놓고 수많은 건설적인 수정의견을 제기하였다. 그 후 4년간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전 주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을 발동하여 적극적으로 토론에 참여하도록 움직여 그들의 의견을 충분히 청취하고 받아들였다. 또한 전문가들의 거듭되는 수정과 보충을 거쳐 보다 완벽하게 보완하면서 자치조례가 날로 성숙되였다. 1985년 4월,  연변조선족자치주 제8기 인민대표대회 제3차 회의가 연길에서 열렸다. 회의에서는  을 청취한 기초 우에서 최종적으로 이 자치조례를 심의 채택하였고 길림성 제6기 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회 제14차회의 심의를 거쳐 반포,실시하게 되였다.   이것은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 나온 제일 첫번째 자치법규이자 전국 소수민족자치지방 속에서 가장 일찍 출범한 자치법규의 하나였다. 조례가 반포, 실시되면서 연변의 경제건설과 각항 사회사업은 발전과정에서 법률적 보장을 받게 되였다. 자치조례는 도합 7장 75조로 되여있다. 조례는 자치주의 자치기관, 자치주 인민법원과 인민검찰원, 자치주의 경제건설과 재정관리, 자치주의 교육, 과학, 문화, 위생, 체육 사업, 자치주내 민족관계 등을 연변의 실제정황과 결합하여 측면적으로 모두 명확히 규정해놓았다.   이 자치조례의 반포와 실시는 연변 법치사회건설로정에서의 한낱 중요한 표징으로 된다. 1984년부터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정력을 집중하여 경제건설을 억세게 틀어쥐였는데 자치조례의 법률적 근거까지 뒤심이 되여주자 각급 간부들은 더욱 시름 놓고 대담하게 경제사업을 틀어쥘 수 있게 되였으며 나아가 여러 민족 대중들의 창업과 치부의 열기가 한결 끓어오르게 되였다. 력사가 이 단계에까지 발전하는 과정에 리덕수는 건전한 법치사회야말로 시장경제발전에서의 가장 근본적인 담보라는 것을 진작 의식하게 되였다. 연변의 많은 간부와 대중들도 만약 량호한 법치환경이 마련되지 않는다면 연변의 경제건설도 교란에 직면하거나 심지어 충격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연변의 전반사업을 주관한 이후 의 제정과 반포에 더욱 박차를 가해 법에 따라 연변의 경제건설을 보다 신속하고 온당하게 발전시킬 수 있도록 보장하였다.                                                                                 (다음 호에 이음)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년 8월호]
27    연변문학 특별기획(1) 리덕수의 고향사랑 댓글:  조회:1018  추천:0  2018-08-29
연변문학 특별기획(1)       리덕수의 고향사랑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       편집자의 말: 은 김숙련, 서진청, 류석춘이 써낸 실화문학작품이다. 작품은 진실하면서도 생동한 필치로 리덕수동지가 연변에서 사업, 생활하는 사이에 우리에게 남긴 감동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우리는 리덕수동지가 고향에 쏟은 절절한 정감에 저도 모르게 숙연해지게 된다. 이번 호부터 본지는 이 작품의 부분적 내용들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아름찬 중임 앞에서        1983년 11월 11일,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에서는 성당위로부터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과 전인영(田仁永), 조룡호 등 일부 로간부들이 함께 성에 와서 회의에 참석하라는 전화통지를 받았다. 그중에는 주당위 상무위원도, 로간부도 아닌 룡정현당위 서기 리덕수도 들어있었다.   그 날 리덕수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아침 일찍부터 의란향의 어느 마을 소형저수지건설현장에서 향촌간부들과 함께 땀을 흘리고 있었다. 그한테 기층에 내려와 로동에 참가하는 것은 이미 습관으로 굳어져있었다  그 때까지 리덕수는 그 날 주에서 진종일 현에 전화를 걸어 그를 찾았고 또 현에서도 빈번히 사처에 전화를 걸어 그를 찾고 있는 줄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 때는 현당위 서기, 현장이 어디로 가나 지금처럼 항상 비서가 따라 다니지 않았고 어느 향진,  어느 마을,  어느 농호에 가려 하든 가볍게 떠날 수 있었다. 물론 그 때는 그 후에 나온 휴대폰과 같은 기타 이동통신수단 같은 건 구경할 수도 없었다. 그 날 현에서는 해질 무렵에야 겨우 그들의 현당위 서기가 의란향에서 사원들과 함께 저수지건설로동에 참가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전화를 통해 리덕수를 찾아낸 현에서는 그더러 반드시 그 날 저녁에 렬차편으로 성에 올라가 긴급회의에 참가하라는 주의 긴급통지를 전달하였다. 저녁에 장춘으로 들어가는 렬차편이 한번 밖에 없었으므로 그 때 출발하여 연길역에 가서 기차에 오르자면 시간을 맞출 수 없었다.  리덕수는 더이상 지체할 수 없어 옷도 갈아 입지 못한 채  일하던 옷차림 그대로 짚차에 올랐다. 짚차는 조양천역 쪽으로 질주했다. 조양천역은 연변 경내에서의 중요한 렬차환승역이다. 장춘발 도문행렬차와 도문발 장춘행렬차에 탑승한 려객들은 조양천을 경유하면서 차를 갈아타야 룡정이나 화룡 쪽으로 갈 수 있었으므로 정차시간이 그만큼 비교적  긴 편이였다. 그리고 조양천은 또 연길에서 장춘 쪽으로 떠난 렬차가 정차하게 되는 첫번째 역이였다. 리덕수를 태운 짚차가  직접 조양천으로 달려 갔기에 도문발 장춘행렬차에 아슬아슬하게 오를 수 있었다. 그 때 주당위 비서장 김동기(金东基)는 리덕수가 이미 조양천에서 렬차에 올랐다는 것을 알고 차안을 누비며 리덕수를 찾았다. 리덕수는 그 때에야 비로소 김동기한테서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이 모두 장춘으로 회의에 참석하러 떠났고 조룡호, 전인영 두분의 로동지도 함께 간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리덕수는 김동기한테 이렇게 물었다. ”비서장동무, 그럼 우린 장춘에 가서 무슨 회의에 참가하게 되는 겁니까? 저는 아무 준비도 없이 그저 이렇게 차에 올랐습니다.”     “덕수동무, 솔직히 말해서 그건  저도 모릅니다. 누구도 모릅니다.”   김동기의 말에 리덕수는 또 이렇게 물었다.  “그럼 조(남기)서기는?”  김동기는 이렇게 대답했다.  “조서기는 요즘 줄곧 장춘에 계십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아무런 정황도 듣지 못했습니다.” 리덕수한테는 궁금해나는 일이 너무 많았다.  “그럼 최림 주장은?”  “최림 주장도 지금 장춘에 계십니다.  차에 앉은 주당위 지도부의 그 누구도 이번에 장춘에 가서 무슨 회의에 참석하게 되는지  모르고 있습니다. 미안하게도 저는 지금 동무한테 이것 밖에 말해 줄 수 없습니다.”  김동기의 대답이였다. 이들은 11월 11일 저녁에 차에 올라 그 이튿날 아침,  즉 11월 12일 아침에 장춘에 도착했다. 성당위 곁에 위치한 1호 초대소에 가서 등록하니 관련 책임자는 하루밤 기차를 타고 오느라 피곤했을 터니 모두 하루 푹 쉬라는 성 지도일군의 분부를 전하면서  정식 회의는 래일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때  리덕수의 자택은 그냥 장춘 남호 부근에 위치한  성직속기관  간부주택구역에 있었다. 리덕수는 일단 집에 가서 하루저녁을 보내고 그 이튿날, 다시 말하면 13일 아침에 식사를 마치고 서들러 1호 초대소로 찾아갔다. 리덕수가 당도하고 보니 주의 지도자들은 벌써 다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리덕수는 조용히  뒤켠 줄에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 때 조남기가 들어섰다. 조남기는 여러 사람들과 차례로 악수로 인사를 나누고 나서 나중에 뒤에  앉아 있는 리덕수와 악수를 하면서 느닷없이 손으로 밖을 가리켰다. “덕수동무, 잠간 나와 함께 밖에 나가 산책이나 좀 할가?”  리덕수는 무슨 이야기를 하자고 그러는지 몰라 그저 조남기를 따라 회의실을 나와  초대소 정원으로 들어갔다. 1호 초대소 정원은 경치가 참 아름답게 꾸며져 있었다. 소나무와 잣나무가 많아 절기가 이미 립동을 바랬는데도 정원에는 의연히 푸른숲이 우거져 있었으며 공기는 한결 청신했다. 정원에는 오불꼬불 산책길이  여기저기 깔려 있었고 정원은 유난히  고느적하였다. 그야말로 우아하면서도 한적하기 그지없었다. 조남기는 리덕수와 산책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덕수동무, 동무는 성에서 오늘 동무들을 여기다 불러놓고 무슨 회의를 하는지  알고 있소?”  “조서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제가 김동기 비서장한테 물어보았더니   그 분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리덕수의 말에 조남기는 또 이렇게 물었다.  “혹 최림동지는 동무한테 무슨 얘기를 하지 않던가?”  “아무 얘기도 없었습니다. 저는 여직 최림 주장을 만나 뵙지도 못했습니다.” 그러자 조남기는 빙긋 웃었다. “그럼 동무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고 있었구만. 오늘 주당위 상무위원 전원은 강효초동지로부터 중요한 결정을 전달받게 되오.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의 지도부에  곧 중대한 조절이 있게 되오.” 조남기는 성당위  부서기이므로 연변에서 지도자 직무를 겸임하지 않고 성에  올라와  성당위  부서기, 성군구 정치위원을 담임하게 될 거 라는 말을 리덕수도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었다.      리덕수는 조심스레 물었다.  “조서기, 그럼 조서기는 이제 정말 떠나게 되는 겁니까?”   “그렇소. 나는 이젠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를 더는 맡지 않게 되오.” 조남기의 이 말을 듣고 나서 리덕수는 가슴이 텅 비는 것만 같았다. 마음이 허전하여 뭐라고 말했으면 좋을지 몰라 미처 뒤말을 잇지 못했다. 조남기는 리덕수를 한참 그윽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만 떠나는 게 아니라 최림동지도 함께 떠나게 되오.”  최림 주장도 움직인다고 하지 않는가? 이건 리덕수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인사변동이였다.  “뭐라구요? 최주장도 전근하여 가신다구요?” “그렇소. 최림동지도 성으로 돌아 오게 되오.” “그럼 최주장이 성에 돌아와 무슨 직무를 맡게 됩니까?”  “최림동지는 성에 돌아와 성정부 고문직을 맡게 될거요.”  이  모든 것은 리덕수에게 있어서  천만뜻밖의 일이였다. 일반적으로 주당위 서기가 연변을 떠나게 되면  의례 주장이 주당위 서기 직위를 인계받아 주당위 서기를 맡게 되고 나중에 다시 신임 주장을 선출하게 된다. 그런데 이젠 최림 주장도 조남기동와 함께 연변을 떠난다고 하니 리덕수로서는 모든 게 예상 밖의 변화였다. 이 때 조남기가  갑자기 다시금  리덕수를 그윽히 바라보았다.  “덕수동무, 성당위에서는 이미 결정했소.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서기와 주장을 동무 한 사람이 맡게 되였소!”  이  말에 리덕수는 그만 자기도 모르게 멍해지고 어리벙벙해졌다. 자신의 두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렇게 배치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 이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1임 서기는 중국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이며 걸출한 무산계급혁명전사인 주덕해동지였다. 주덕해동지는 1929년에 혁명에 참가하여 1931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연안 출신의 로간부였다. 1936년, 그는 당중앙의 파견을 받고 모쓰크바 동방대학에 가서 류학하고 귀국한 후 여러가지 중요한 직무를 력임해왔다. 1949년 3월, 주덕해동지는 당중앙의 지시에 좇아 할빈시민족사무처, 민주일보사, 민족가문단, 민족간부학교 등 단위의 전체 인원을 거느리고 중국조선족의 최대 집거지인 연변에 와서 연변의 전반 상부구조 조직건설에 착수하였다. 신중국이 창건되여서부터 ‘문화대혁명’ 이전까지 주덕해동지는 줄곧 연변에서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사업을 줄기차게 이끌어나갔다.  전쟁년대에 주덕해동지는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면서 피어린 투쟁에 나서서 신중국의 창건에 마멸할 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주은래 총리 등 중앙의 주요 지도자들은 주덕해동지한테 모두 매우 높은 평가를 내렸다 그만큼 주덕해는  중국조선족 간부와 군중들 속에서 그 누구도 비길 수 없는 숭고한  위망을 누리고 있었다.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제2임 서기는 길림성의  당과 정부, 군부대 내에서  높은 성망을 갖고 있는 있는 조남기동지였다. 조남기동지의 혁명생애는 전기적인 색채가 다분했다. 물론 항미원조 때 조선전장에서 겪은 경력이 가장 유명하다고 할 수 있다.  ‘문화대혁명’ 이전에 조남기동지는 줄곧 군부대에서 사업했다. ‘문화대혁명’ 이후에는  여러 민족 인민들의 기대 대로 연변에 돌아와 연변의 전반사업을 주관하게 되였다. 연변에서 사업하는 기간 조남기는  여러 민족 간부와 군중들의 광범위한 옹호와 애대를 받았다. 조남기는 과감하면서도 실사구시적으로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나가 ‘문화대혁명’ 이후 연변의 각항 사업을 신속히 정상적인 궤도에 올려놓았다.  요컨대 신중국이 창건된 이래 연변의 주당위 서기 두분은 선후하여 모두 당내에서 덕망이 높은 고위급 지도간부들이 맡아왔다. 그런데 지금 성당위에서는 갑자기 나젊은 리덕수더러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라고 한다니 리덕수한테는 아름찬 중임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중요한 직무를, 그것도 이렇게 무거운 두가지 중책을 한 사람의 어깨에 떠메운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사전에 정말 아무런 심리적 준비도 가지지 못했다. 너무도 갑작스러웠다.  더구나 그가 룡정현 당위 서기로 부임된지 8개월 밖에 안되였으니 말이다. 그래도 리덕수는 여전히 믿을 수 없어 조남기한테 또 물었다. “조서기, 이게 다 정말입니까?”  조남기는 피끗 리덕수를 쳐다 볼 뿐 그의  이 물음에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묻고 보니 리덕수 스스로 이 물음이 조금은 우스워났다 그는 조금도 숨김없이 솔직하게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저는 그저 성당위의 이 결정이 너무나 갑작스럽고 너무나 뜻밖이라서 … ”  조남기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덕수동무, 동무의 임용에 관한 결정은 이번에 북경에서 회의할 때 성의 주요 지도자들이 진지한 연구 끝에 내린 것이오. 동무에 대한 배치를 토론할 때 중앙 조직부 동지들도 자리를 같이 하였소. 성당위의 이 결정은 매우 신중하게 내렸소.” 리덕수는 진심으로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이 일은 확실히 너무나 갑작스러운 것 같습니다. 제가 룡정현에 와서 현당위 서기로 일한지 아직 1년도 채 되지 않고 시간이 너무 짧은데 이렇게 빨리 주에 올라 간다고 하니 말입니다.”  이제 오라지 않아 회의가  곧 시작될 것 같아 리덕수는 조남기와 긴 이야기를 나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아예 현에서 몇해  더 일하면서 보다 많은 실제적인 경험을 쌓고 싶다는 속심을 터놓았다. 조남기는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이젠 그런 말을 더 하지 마오. 우린 북경에서 연구하고 돌아와 또 정식으로 상무위원회를 소집하였소. 보다싶이 성당위에서 매우 신중하고 진지하게 내린 결정이란 말이요!” 이야기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리덕수는 진심으로 한번 더 청들었다.  “조서기, 만약 정 어쩔수 없다면 주당위 서기와 주장 이 두 가지 직무 가운데서 제가 주장을 맡고  다른 분이 서기를  맡으면 안되겠습니까?” 이 청에 조남기는 이렇게 대답해주었다.  “동무가 주당위 서기를 맡는 것은 이미 다 결정된 사안이요. 주장은 당분간 적임자가 없기에 동무가 먼저 같이  맡아서 하다가 앞으로 주장 적임자가 생기면 그 때 가서 다시 보기로 하기오. 난 동무가 잘 해내리라고 믿소. 그리고 성당위에서도 동무를 전폭적으로 밀어줄 거요.” 시간이 없었다. 회의 시간이 다가오자 리덕수는 착잡한 심정으로 회의장에 돌아왔다. 조남기는 회의장 문밖에서 성당위 기타 지도자들이 회의장에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리덕수가 회의실에 들어가 보니 최림 주장이 이미  와있었다. 그는 최림 주장한테로 다가가 악수를 하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또 아무거나 얘기하는 자리가 아닌 만큼 다른 말은 더 꺼내지 않았다. 잠시 후 성당위 지도자들이  다 함께 회의장으로 들어섰다. 성당위 제1서기 강효초가 친히 회의를 사회했다.   “오늘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상무위원들과 주의 로동지들을 다  여기에 오시게 하여 회의를 하게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이번에 성당위에서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와 정부 지도부에 대해 중대한 조절을 하기로 한 결정을 전달하기 위해서입니다. 조남기동지가 성당위에 올라와 사업하게 된 실제상황에 따라 성당위에서는 신중한 연구를 거쳐 조남기동지가  주당위 서기를 더는 겸임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심양군구에서는 또 조남기동지를 성군구 정치위원을 맡도록 따로 배치하였습니다.  한편 사업의 수요에 따라 최림동지도 연변에서 주장직무를 맡지 않고 성에 올라와 성정부 고문을 맡게 되였습니다. 그리하여 성당위에서는 리덕수동지가 연변조선족자치주 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도록 결정하였습니다.” 강효초는 중요한 결정을 전달하고 조남기 쪽으로 얼굴을 돌리며 물었다.  “남기동지, 할 얘기가 없습니까?”  이 물음에 조남기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할 얘기가 없습니다.   연변의 로동지들의 얘기를 좀 들어보는 게 어떨가요?” 전인영이 발언을 하겠다고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전인영의 발언은 간단하면서도 명료했다. “저는 성당위의 결정을 완전히 찬동하며 견결히 옹호합니다. 덕수동지는 능력이 있고 인품이 훌륭한 데다 매우 젊은 간부입니다. 덕수동지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도록  한 성당위의 결정은 정확하고도 원견성이  있습니다!” 전인영은 뒤이어 몇마디 더 했다. 그 주요한 의미를 간추리면 이러하다. 덕수동지는 룡정현에서 현당위 서기를 맡게 된 이 기간에 단련을 거쳐 좋은 경험을 쌓게 되였다. 룡정현의 사업성과는 누구나 다 주지하는 사실이다. 덕수동지가 새로운 직무를 맡은 이후에도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더욱 큰 성과를 이뤄내리라고 믿는다. 전인영의 말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태도가 분명하고 적극적이였고 성근하였으며 리덕수한테 지극한 신임을  보여주었다. 리덕수는 마음속으로부터 큰 감동과 힘을 받게 되였다. 뒤이어 조룡호도 발언했다. 오랜 상급이자 년장자인 조룡호의 발언에는 나젊은 간부를 아끼고 깊이  사랑하는 정감이 물씬했다. 한마디 한마디가 리덕수의 가슴을 뜨겁게  덥혀주었다. 기실 이 두분의 발언은 모든 사람들 맘속의 말을 대표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다른 사람들의 발언도 매우 간결했으나 다들 성당위의 결정을 견결히 옹호한다는 뜻은 하나같이 분명했다. 모두의 말이 크게 길지는 않더라도 리덕수는 그 속에서 여러 사람들의 신임, 더구나 그들의 따뜻하고 간절한 기대를 읽을 수 있었다. 맨 마지막에 강효초는 리덕수한테 발언기회를 넘겼다.  리덕수는 말문을 떼자마자 조금도 숨김없이 속심말을 그대로 털어놓았다.  “성당위의 이 결정에 대해 저는 정말 아무런 사상준비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저의 머리 속은 텅 비여있습니다.” 소박하고 정직하며 벼슬티를 낼 줄 모르는 분이 바로 우리가 익숙한 리덕수였다. 회의장에 앉아 있던 적잖은 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어떤 지도일군들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다. 자연히  회의장의 분위기는 한결 홀가분해졌다. 리덕수는 정신을 가다듬고 자신의 정서를 안정시킨 다음 사색을 더듬으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성당위에서 이처럼 무거운 두 개의 큰  짐을 그것도  한꺼번에 저 한사람의 어깨 우에 짊어지우리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린다면 저의 능력과 경륜으로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이란 이 막중한 책임을 감당하기가 정말 벅찹니다. 하지만 저는 당의 양성을 받고 자라난 소수민족간부인 만큼 성당위에서 이미 정식으로 내린 결정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도  이 자리에서 저의 태도를 보여드리려고 합니다. 앞으로 성당위의 정확한 지도 하에서, 그리고 연변조선족자치주 오랜 지도자동지들의 전폭적인 지지 하에서 저는 동지들과  일심단결하여 모든 력량을 하나로 묶어 확고한 신심과 결심을 갖고 기어코 연변의 사업을 잘 해나갈 것이며 연변의 일을 잘 해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회의가 끝나자 조남기는 리덕수한테 자기는 잠시 연변으로 돌아갈 수 없으므로 리덕수더러 돌아가자마자 곧바로 주의 사업을 전면적으로 주관하되 룡정으로는 다시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주었다. 리덕수는 조남기한테 이렇게 말했다.  “조서기, 조서기는 저의 오랜 서기이고 오랜 지도자인데 조서기가 친히 한번 돌아와 들여다보아야지 안 그러면 저로서는 정말 두서를 잡기조차 어렵습니다. 그리고 조서기가 돌아오셔서 여러 사람들한테 한말씀 하시는 게 우리 주나 저한테 사업을 인수인계하는 절차가 아니겠습니까?” 그러자 조남기는 빙긋 웃었다.  “그건 걱정하지 마오. 얼마간 지나서 성당위 지도자들과 주직부 부장이 내려가게 되오. 그 때 정식으로 대회를 열고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할 것이오. 오늘은 이미 회의를 했고 주의 주요  지도자들도 다 알게 되였으므로 동무는 돌아가서 직접 대담하게 사업을 틀어쥐어야겠소.” 회의가 끝나자 모두들 건너와 리덕수와 악수를 나누면서 축하해주었다. 사전에 그 누구도 성당위의 이런 결정을 예상치 못했지만 일단 결정이  선포되자  리덕수에 대한 그들의 축하는 모두 내심에서 우러 나오는 기대였다. 그들은 리덕수란 이 사람을 알고 있었거니와 리덕수의 덕목도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오니 리덕수의 부인 박춘자가 다가와 정겹게 맞아주었다. 박춘자는 물론 이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젼혀 모르고 있었다. 박춘자는 선량하고 소박한 전형적인 조선족녀성이였다.  1978년에 리덕수를 따라 장춘에 전근되여온 후 줄곧 성도서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박춘자를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박동무, 우린 아무래도 또 이사를 해야 할 것 같소!”  박춘자는 깜작 놀라며 이렇게 물었다.  “또 이사라니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난  아무래도 오래동안 연변에 남아서 사업해야 할 것 같소. 아마 성으로는 다시 돌아올 것 같지 못하오.” 이 말을 듣고 박춘자는 의아쩍게 남편을 바라보았다.  “당신이 이미 연변에서 사업하고 있기에 난 당신이 성으로 돌아 오리라고는 바라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이사란 말씀인가요? 애초에 당신은 룡정에서 사업하고 난 계속 장춘에 남아있기로 결정한 것도 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것이 아니였어요? 두 아이가 지금 모두 장춘에서 학교를 다니고 걔들이 갓 전학해 와서 이제 금방 이곳 환경에 익숙해지고 있는데 또다시  왔다갔다한다면 …” 안해의 말에 리덕수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래도 내가 당신한테 다 털어놓고 말을 해야 하겠소. 내  일자리가 또 변동되였단 말이요!” 그래도 박춘자는 그저 리덕수를 물끄러미 쳐다만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남편의 사업변동은 그녀에게 있어서 너무나 례사롭고 잦은 일이였다. 리덕수는 더 이상 빙빙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접 성당위의 결정을 박춘자한테 알려주었다.  그 말을 듣고 박춘자는 대뜸 남편의 속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럼 당연히 다시 연변으로 이사를 가야지요.” 1983년 11월 14일 아침, 리덕수네 일행은 연변으로 돌아왔다. 그날 밤 리덕수는 렬차에서 잠을 자려고 여러번 잠을 청했지만 단 1분 동안도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가 어떻게 잠을 잘 수 있었겠는가. 그저께 저녁에 이 렬차를 타고 들어올 때만 해도 그는 현당위 서기였는데 이틀이 지난 오늘 다시 이 렬차를 타고 돌아올 때는 이미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았으니 말이다. 절주 있게 달리는 렬차의 가벼운 률동과 흔들림 속에서 리덕수는 자신의 감정을 가눌 수 없어 성장해온 지난날들을 돌이켜보게 되였다. 그는 장백산 아래 한 두메산골에서 태여나 더없이 평범한 농민의 아들로 성장하였다. 고마운 사람들의 도움을 딛고 한걸음 한걸음 오늘 이 자리에까지  올 수 있게 되였다. 소학교에서부터 중학교, 중학교에서부터 대학교, 대학교에서부터 사업일터에 이르기까지 온갖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일편단심 그의 성장에 로심초사해온  수많은 선생님들, 그와 함께 어려움도 아랑곳하지 않고 동고동락하였던 현과 향촌의 수많은 기층간부들, 그리고 성과 주의 지도자들과 그와 함께 일했던 수많은 동료들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는 인생의  려정에서 그한테 도움을 주었던 모든 사람들한테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자신의 진정 어린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다.  그러더라도  리덕수의  머리는 매우 명석했다. 그는 무엇보다 먼저 지금껏 온갖 심혈을 쏟아 그를 키워준 당조직과 지금 그가 살고 있는 이 위대한 시대에 감사를 드려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자기의 운명은 바로 이 시대와 하나로 끈끈히 이어져있었다.  시대의 발걸음을 따라 한걸음 한걸음 성장해오면서 오늘 이 시대에서 비로소 자신의 재능을 한껏 펼칠 수 있게 되였다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행복이였다. 렬차가 돈화역에 들어서자 온밤을 지새우며 한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실면상태에서 벗어나 정신이 말짱하게 맑아졌다. 돈화는 연변땅을 밟게 되는 첫번째 현이였다. 그 때는 돈화현을 돈화시로 고치기 전이였다. 돈화현은 1985년에 돈화시로 고치게 되였다. 돈화역 플래트홈 불빛은 어둑시그레하였다. 그래도  리덕수는 마음을 걷잡기 어려워 차창가로 다가섰다. 캄캄한 밤의 장막이 내리드리운 어스름한 플래트홈에는 차에 오르내리는 손님이 두서넛 밖에 눈에 띄지 않아 똑 마치 옛날 흑백 무성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리덕수의 가슴속에서는 이름할 수 없는 일종의 충동, 일종의 갈망이 꿈틀거렸다. 그는 냉큼 새로운 사업에 뛰여들고 싶었다.  날이 훤히 밝아오면서 렬차는 서서히 연길역에 들어섰다. 연길은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수부이면서 전 주 정치, 경제, 문화와 사회생활의 중심지였다. 또한  연길은 중국조선족의 민족적 풍토와 인정, 그리고  민족문화를 가장 집중적으로 펼쳐보이는 고장이였다. 그만큼 리덕수는 연길이란 이 변경도시에 대해 남다른 특수한 감정을 지니고 있었다. 1962년 가을 연변대학에 입학하면서부터 리덕수는 연길이라는 이 도시와 도무지 떼여놓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되였다. 리덕수는 이 도시를 반기였고 이 도시를 사랑했다. 이 도시에는 그의 여러 민족 동포들과 여러 민족  부모, 형제자매들이 생활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도시는 그에게 있어서 뿌리와도 같은 존재였다. 연길에 돌아온 이튿날, 즉 1983년 11월 15일, 그 날 따라 눈이 펑펑 쏟아져내렸다.  그 날 리덕수는 진종일 바쁘게 보내다가 저녁이 다되어서 주당위 상무위원 장덕강(张德江)과 함께 리정문(李政文)의 집으로 찾아갔다. 리정문에 대한 성당위의 임명결정을 알리려는 길이였다. 그 당시 리정문은 연변대학 당위 선전부장이였다. 리덕수와 장덕강  그리고 리정문은 모두 연변대학 졸업생이였는데 그들은 모두 학생당원이면서 또 학생회 간부들이였다. 30년이 지난 후 리정문이 그 때의 감회를 회고한 말이다.  “그 날 저녁은 저의 일생에서 가장 잊을 수 없는 한때였습니다. 집이 너무 추워서 아예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책을 보고 있었는데 마침 노크소리가 들리기에 내려가 문을 열었더니 리덕수와 장덕강이 서있었습니다.  리덕수는  성당위에서 저를 주당위에  전근시켜 주당위 상무위원  겸  비서장을 맡도록 한 성당위의  결정을 전달하였습니다.” 리덕수의 말을 듣고 성당위의 이와 같은 결정을 알게 된 리정문은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리정문을 바라보는 리덕수의 표정은 근엄했다. “정문동무, 지금 우리 주의 수많은 사업이 모두 우리를 기다리고 있소. 그러므로 동무는 하루도 지체하지 말고 서둘러 연변대학 쪽 사업을 인계하고 빨리 주당위에 건너와 사업해야겠소.” 리정문은 지체할세라 그 이튿날 아침 일찍 연변대학당위 서기 리희일의 집무실로 찾아 갔다. 뜻밖에도 주당위 조직부 부장 조봉명이 벌써 그보다 한발 앞서 와있었다.  주당위 상무위원인 조봉명은 주당위를 대표하여 리정문을 맞아가려고 찾아온 것이였다. 나중에 리정문은 리덕수와 그 당시 주당위 제2책임자였던 장홍규(张洪奎) 서기를 찾아가  주동적으로 이런 제안을 내놓았다.  “만약 조금이라도 가능하다면 저한테 오랜 본업을 맡겨줄 수 없겠습니까? 아무래도  주당위 선전부장을 맡는 게 저의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습니다. 김동기동지는 주당위의 오랜 비서장이고 경험이 풍부하므로 그가 비서장을 맡는게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곁에서 리정문을 일별하면서 리덕수는 마음속으로 이 사람이야말로 정말 사업에서 사심이라곤 꼬물도 없는 데다 사상각오가  매우 높은 선전지도사업의 적임자임을 판단할 수 있었다. “정문동무, 동무의 소원이 이러하다면 제가 성당위에 보고해 보겠습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성당위의 회시가 곧바로 내려왔다. 그리하여  리정문은 주당위 선전부장을,  김동기는 주당위 비서장을 맡게 되였다. 이리하여 한지도부에서 6년 동안 함께 일했던 리정문은  30년이 지난 후 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리덕수를 이렇게 평가했다.  “리덕수는 큰 국면을 관리할 수 있는 강력한  능력을 갖춘 수준 높은 지도간부였습니다.  그 당시 주당위 새 지도부가 갓 출범했을 때  지도부 내부에는 새로 발탁된 젊은 간부도 있고 류임한 로간부들도 더러 있었는데 리덕수는 재빨리 여러 사람들을 하나같이 단합해놓았습니다. 리덕수는 지도부 성원들을 튼튼히 묶어세우고 정치적 분위기와 인심을 잘 조화시키면서 각자 나름 대로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여 맡은 바 직책을 충실히 리행하도록 공간을 내주었기에  누구나 다 사업에 전력투구할 수 있었습니다. 리덕수의 지도사상은 매우 명확했습니다. 그한테는 오로지 전심으로 경제를 발전시켜 백성들로 하여금 하루 빨리 유족하게 살수 있게 하자는 일념 뿐이였습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시종일관 이 주제를 거듭 강조했습니다.” 1983년 11월 28일,  리덕수가 연변에 돌아와 정식으로 사업을 주관하기 시작해서 반달이 지났을 즈음  성당위  부서기 겸 조직부장 왕선진(王先进)과 성당위의 기타 지도자 몇분이 조남기동지와 함께 연변으로 내려왔다. 간부대회를 열고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해야 하므로 이번에 성당위에서는 지도자 여러분이 함께 연변으로 나오게 되였다. 그 이튿날인 1983년 11월 29일, 주당위와 주정부에서는 주직속기관간부대회를 소집하였다. 간부대회를 소집하기에 앞서 주당위 상무위원회는 먼저 상무위원회 확대회의를 열고 그 회의에서 리덕수를 연변주위 서기, 주장으로 임명할 떼 관한 성당위의 결정을 선고하였다. 상무위원회 확대회의가 결속되자 회의 참석자들은 뒤이어 직접 로동자문화궁에서 열리는 주직속기관간부대회장으로 들어갔다.  대회의 시작을 선포하자 성당위 부서기 겸 조직부장인 왕선진이 성당위를 대표하여 정식으로 리덕수 등 주당위 새 지도부 성원들에 대한 임명결정을 선포했다. 성당위에서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지도부를 아래와 같이 조절하고 배치하기로 결정한다.  주당위 서기에 리덕수(주장 겸임), 장홍규  부서기에 장진발, 김성화  상무위원에 마서정, 조봉명, 김동기, 정세창, 장덕강, 리정문 왕선진이 성당위의 결정을 선포한 다음 리덕수의 연설이 있었다. 리덕수는 지금도 그 때의  연설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리덕수는 “다섯 가지에 의지하려 한다”는 것을 중점적으로 강조했다. 첫째, 전임 서기 조남기동지가 다져놓은 훌륭한 토대에 의지하려 한다. 둘째,  로동지들의 지지와 방조에 의지하려 한다. 셋째,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하는 사상로선에 의지하려 한다. 넷째, 당중앙  제11기 제 3차 전원회의 이래 개혁개방과 경제건설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로선에 의지하려 한다. 다섯째, 여러 민족 간부와 대중들의 단합과 협력에 의지하려 한다. 이 몇가지 “의지하려 한다”는 사고방식에 따라 연변의 각항 사업을 전면적으로 추진해 나가 성당위 지도부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고 고향 여러 민족 인민들의 희망을 저버리지 않도록 사업하겠다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으며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면서 한편으로는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사업을 계속 깊이있게 추진하고 개혁개방을 줄기차게 이끌고 나아가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확고부동하게 경제사업을 중심으로 틀어쥐고 경제사업을 착실하게 밀고 나가야 하는 막중한 짐을 어깨에 떠메게 되였다. 시시각각 두개 측면의 사업을 단단히 틀어쥐고 개혁개방으로 전반 국면을 총괄함으로써 전 주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미래를 향해 계속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 과업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따라 리덕수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칠 새 없었는가 하면 해결을 기다리는 문제들이 산적해있었다. 밤과 낮이 따로 없는가 하면 일요일이나 명절, 휴일도 례외일 수 없었다. 연길시나 다른 현, 시를 막론하고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예고도  없이 찾아왔는데  리덕수는 밤과 낮이 따로 없이 찾아온 사람들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하소연을 참을성 있게 듣고 성근하게 의견을 나누었다. 이럴듯 힘겨운 나날에 리덕수는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이 드바삐 내면서도 시종  매우  명석한 사유를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이런저런 오유가  많고 많았다 하더라도 만약 또다시 그릇된 방법으로  이런 오유들을  바로잡으려고 한다면 설상가상의 후과를 빚을 수 있다. 아무리 실타래가  천만갈래 뒤엉켰다 하더라도 꼭 실사구시 사업태도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리덕수는 이 원칙을 드팀없이 지켜나갔다.  10년에 걸친 대동란은 연변의 변강 안정과 민족단결의 량호한 사회적 토대를 형편없이  파괴해놓았다.  이런 토대는 일조일석에 다시 복구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였다. 그러므로 반드시 기초적인 사업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풀어나가야 했다. 이러한 정황은 주당위 지도부 앞에 반드시 고도의 정책수준과 강력한 정책집행능력 그리고  강력한 국면통제능력을 갖춰야야 한다는 새로운 요구를 내놓았다. 어느 쪽도 편들지 않거니와  어느 쪽에도 기울지 말고 실사구시적으로 간부와 군중들의 사상사업을 잘 하여야만 연변의 정치적 국면과 제반 국면의 안정을 확보하고 여러 민족 인민들 사이의 단결을 확보할 수 있었다. 리덕수는 연변의  민족구성특점으로부터 출발하여 문제를 관찰하고 문제를 분석하며 문제를 처리하였다.  그 최종 지향점은 항상 변강의 안정과 조화롭고 화목한 민족관계를 구축하는 큰 목표에 두고 있었다. 그는 연변의 조화로운 민족관계는 우량한 력사적 전통을 갖고 있다고 보고 있었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엄중한 파괴로 말미암아  큰 역경을 겪었지만 력사라는 이  대하의 흐름 속에서 보면 이것은 한낱 잔물결에 지나지 않았다. 그만큼 리덕수는  늘  간부와 대중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우리는 자기의 눈동자를 아끼듯이  연변의 민족단결을 아껴야 합니다. 민족단결에 불리한 말은 견결히 외우지 말아야 하며 민족단결에 불리한 일에는 견결히 나서지  말아야 합니다. 리덕수는 또 한족간부와 조선족간부의 사용문제에도 각별히 중시를 돌렸다. 그는 연변의 실제로부터 공정하고 합리하게 여러 민족 간부들을 잘 등용하고 배비하였다. 그 당시 주당위 상무위원이며 조직부장이였던 조봉명은 이렇게 그 때의 정황을 회억했다. 리덕수는 간부등용에서 조선족간부를 중시하면서  한족간부와 기타 소수민족간부에 대해서도 각별한 중시를 돌렸다. 비금성(费金成)은 원래 주당위 통전부  부부장이였는데 당시 부장은 김성우(金圣友)였다.  비금성은 통전부에서 사업한지 퍼그나 오랜 로부부장이였다. 김성우는  ’문화대혁명’ 이전의 공청단 주위 서기였고 비금성은 부서기였다. 이러한 구도 속에서 한족간부인 비금성이 승진하기가 매우 어려웠다. 리덕수는 주당위 기타 지도자들과 토의하고 비금성을 계속 주당위 통전부 부부장을 맡게 하면서도 정현급 대우를 주기로 결정했다.  이것도 그 당시로 말하면 파격적이였고  매우 조련찮은 결정이였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리덕수는 연변에서 여러 민족 간부들의 배비와 등용에서 또 하나의 대담한 돌파를 보여주었습니다.” 그 당시 연길시, 룡정시, 화룡시와 도문시의 당위와 정부 측 ‘제1책임자’는 모두 조선족간부였다. 이런 상황은 이 몇개 현, 시 한족간부의 등용과 급별대우에 련관될 뿐더러 그보다도 이 몇개 현, 시 한족간부와 기타 소수민족간부들의 적극성을 움직이는 문제와도 직결되여있었다. 리덕수는 조사연구를 거쳐 이 몇개 현, 시 한족 부서기를 정현급으로 조절하고 서렬상 서기의 뒤, 현장, 시장의 앞에 배치하도록 할 데 관한 그림을 구상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맨처음으로 주당위 상무위원회 석상에서 이 제안을 내놓았다. 대담한 발기였고 연변 력사에서 종래로 없었던 대담한 혁신이라 할 수 있었다.  리덕수가 사상을 해방하고 실사구시적으로  대담하게 내린 조절결책은 성당위 조직부와 성당위 지도부의 지지를 받게 되였다. 지금까지도 상기 현, 시의 지도부는 여전히 이런 구도로 이뤄지고 있다. 소수민족지역에서 여러 민족 간부들을  합리하게 배치하고 사용하는 정확한 간부로선이면서  연변의 실제에도 부합되였다.  조봉명은 이렇게 말했다.  “리덕수 자신이 바로 민족단결모범이였기에 국가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이라는 중임을 능란하게 맡아나갈 수 있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는 연변이라는 이 소수민족지역에서 태여나고 성장하면서 민족단결의 의의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소수민족지역에서 사업하는 과정에 대담하게 개척하고 혁신하여 풍부한  민족사업경험을  쌓게 되였습니다.  그만큼 그는 우리 나라와 같은 다민족국가의 민족사무위원회 주임을 맡기에 퍼그나 리상적인 적임자라 할 수 있습니다.”  리덕수는 연변사업을 주관하는 시기에 시종일관 민족단결을 자치주의 생명선으로 중시하면서 크고작은 많은 회의에서 늘 이렇게 강조했다.  “민족단결이 없으면 연변의 안정이 있을 수 없으며 연변의 안정이 없으면 경제발전도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민족단결이 없으면 모든 게 없게 됩니다.”  리덕수가 평상시에 늘  “쌍방이 서로 떨어질래야 떨어질 수 없다”는 것, 즉 조선족은 한족을 떨어질 수 없고 한족도 조선족을 떨어질 수 없다는 말을 가는 곳마다에서 되풀이하군 하였다. 리덕수는 단합할 수 있는 모든 력량을  다  단합하고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적극적인 요소들을  다 움직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을 이끌고 신심 가득히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그가 연변의 사업을 주관하게 되면서 내디디는 관건적 첫걸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만큼 이 시기에 리덕수는 침식을 잊어가면서 보냈고 끊임없이 사색하였다. ‘문화대혁명’ 기간에 발생했던 일들을 지나치게 추궁하게 되면 필연코 새로운 분쟁이 벌어져 안정단결에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혼란한 국면을 참답게 바로잡지 않거나 사람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주지 않으면 광범위한 간부와 대중들 마음속의 상처를 씻어버릴 수 없는 만큼 여러 민족 인민들의 적극성을 진정으로 움직이기 어려운 새로운 장애에 부딪칠 수 있었다.  리덕수가 회의와 같은 공식적인 석상이나 비공식적인 자리에서 ‘문화대혁명’의 과오를 처리할 때 갈등을 큰 틀에서 보아야지 너무 세부적인 것을 파고들어서는 안된다는 주장을 흔들림없이 지켜왔다. 한편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고  지나간 일들을 총화하는 것도 많은 사람들을 다같이 단합하여 미래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수요라고 강조했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지도사상이 있었기에 구체적인 문제들을 처리할 때 큰 편차가  발생하지  않았다.  당시 길림성당위 제1서기였던 강효초는 연변조선족자치주당위 새 지도부의 사업을 충분히 긍정하면서 더욱 단합하여 연변의 사업을 잘 밀고나가라고 고무격려하였다. 성당위의 이와 같은 적시적인 긍정에 리덕수와 주당위 지도부 성원들을 깊은 고무를 받았다. 혼란스러운 국면을 바로잡으면서 력사상에서 남아내려온 문제들을 시정하고 바로잡아야 할 과제들도 봉착하게 되였다.  그중에서도 ‘인민군’문제와 ‘민생단’문제가 비교적 뾰족하게 제기되였다. 이른바 ‘인민군’문제의 실제 정황은 이러했다. 1950년, 그 당시 맞띄운 특수한 력사적 환경에 근거하여 중, 조 두 나라 지도자들은 협상을 거쳐 재편성된 중국인민해방군 3개 사단의 조선족 지휘관과 병사들, 그리고 전군 군수산업분야에서 선출한  조선족 각 기술 병종의 군인들을 조선인민군에 합류시켜 조선측의 지휘를 받게 하기로 결정하게 되였다. 그 당시 조선인민군 속에서 련대장, 사단장 이상급 지휘관은 기본상 원 동북항일련군, 혹은 연안의용군 출신들이였다. 중국의 남과 북의 전쟁터를  넘나들며 풍부한 전투경험을 쌓아온 이 특수한 대오는 곧바로 조선인민군의 절대적 주력으로 활약하게 되였으며 조선전쟁에서 거듭 큰 전공을 세우며 아주 막강한 역할을 일으키였다 조선전쟁이 결속된 후 이들중 귀국한 절대다수는 조선족자치주인 연변을 선택하여 정착하게 되였다. 그들은 모두 농촌에 돌아가 농민으로 되였기에 상응한 대우를 받지 못하였고 생활형편도 그만큼 어려워졌다. ‘문화대혁명’이 종료되자 그들은  공개적으로 자신들의 요구를 제기하게 되였다. 그들은 주당위 리덕수를 찾아 자기들한테도 귀국한 지원군과 똑같은 대우를 해 달라고 강력히 청구했다. 그들은 사람을 조직하여 장춘, 북경 등 지에 가서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적잖은 파장을 일으켰다. 리덕수는 이들 로군인들의 심정을 어디까지나 리해할 수 있었거니와 이들 로군인들의 고충을 충분히 헤아릴 수도 있었다. 리덕수는 여러 차례나 이들 로군인 대표들을 열정적이면서도 인내심 있게 접대해주었으며 그들의 설음과 요구를 참답게 귀담아들어주었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리덕수는 허심탄회하게 그들한테 이렇게 말했다. “그 당시 조선부대에 귀속된 후 결연히 조선의 전쟁 마당으로 내달려간 여러분이야말로 그 시대의 영웅이고 인민의 공신이고 나라의 자랑으로서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들이였습니다. 당신들의 력사적 공적은 그 누구도 지워버릴 수 없습니다. 전쟁 가운데서 여러분은 수많은 형제와 훌륭한 전우들을 잃게 되였습니다. 연변에는 거의 마을마다 그들한테 기념비를 세우고 그들을 기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저희들은 여러분들을 소중하게 아끼고 생활도 잘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리덕수는 로군인들한테 이렇게 약속했다. “첫째, 주당위에서는 여러분들을 도와 문제가 해결되도록 전폭적으로 정성을 쏟겠습니다. 주당위에서는 꼭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상급에 정황을 반영함과 아울러 적극적으로 관련 사업을 밀고나가겠습니다. 둘째, 여러분들은 절차에 따라 제기해야 합니다. 우리 각급 당위와 정부를 믿어주십시오. 이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에 그 무슨 새로운 문제가 있으면 곧바로 우리 주당위에 와서 저 리덕수를 찾아주십시오.” 리덕수의 말에 로군인들은 격앙된 정서를 퍼그나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후 리덕수는 수차례에 걸쳐 주당위와 주정부의 주요 지도자들을 불러 전문적으로 머리를 맞대고 이 문제를 연구하였다. 나중에 주당위의 의견을 형성하고 나아가  주당위에서 연구한 해결방안을 성당위와 중앙에 상세하게 보고하였다. 주당위의 의견은 성당위와 중앙의 고도로 되는 중시를 받게 되였다. 나중에 전국 각지에도 산재해있던 이런 로군인들도 ‘연변의 처리방식’에서 열쇠를 찾아 해결받을 수 있었다. 이른바 ‘민생단’문제도 력사적으로 남아내려온 굉장히 억울한 사건이였다. 지난 세기 30년대 초반, 중공동만특위의 령도 하에 동만지구 당내부, 항일부대내부와 항일근거지 대중들 속에서는 이른바 ‘반민생단투쟁’을 벌리게 되였다. 사후의 조사에 따르면 그 당시 이른바 ‘민생단분자’ 속에는 ‘민생단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고 전부 다 항일투쟁 속에서 활약해온 골간분자들이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억울한 사건이 빚어지게 되였다. 그 때로부터 반 세기란 세월이 흘러간 후 리덕수는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광범위한 간부와 대중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실사구시해야 하고 오유가 있으면 반드시 시정해야 한다는 원칙에 좇아 주당위의 명의로 성당위와 중앙에 력사상에서 남겨진 ‘민생단’문제를 보고하고 주당위에서 마련한 ‘민생단’ 문제에 련루되여 박해를 받은 인원과 그 가족들의 억울한 루명을 벗겨줄 데 관한 방안을 보고하였다. 성당위와 중앙에서는 곧 주당위의 의견에 동의한다는 회시를 내려보냈다. 주당위에서는 성당위와 중앙의 회시 그리고 관련 정책규정에 따라 이 문제로 불공정한 대우를 받았던 로군인과 오랜 동지들에게 도시호적을 바꿔주고 경제대우를 해결해주었다. 문제가 다 해결 된 후 ‘인민군’ 로군인들과 ‘민생단’문제로 인해 박해를 받았던 오랜 동지들이 잇달아 주당위 리덕수의 집무실에 찾아와 주당위와 리덕수본인에게 사의를 전하였다. 결과가 보여주다싶이 오로지 사상관념상에서도 이같이 실사구시적인 과학적 사업방식으로 사업하여야만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 놓을 수 있고 나아가 진정으로 사상을 해방하고 개혁개방에서도 시장경제의 발전을 저애하는 걸림돌을 밀어버릴 수 있다. 연길시에서 건설한 서시장은 두말할것없이 시장경제의 동력이 낳은 산물이였다.  그러더라도 막상 서시장을 건설하려고 하니 예상 밖으로 거대한 벽에 부딪쳤다. 그럼 그 저항력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이였을가? 그 저항력은 바로 우리의 일부 관리부문에 있었다.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은 지 얼마 안되여서였다. 한번은 연길시  10여명 조선족녀성들이  리덕수네 집으로 찾아왔다. 그녀들은 남방에 가서 상품을 구입해다가 연길시 서시장에 와서 팔고 있었는데 유관 부문에서  그들이 ‘투기모리’를 한다고  몰아붙이면서 상품을 몽땅 몰수해가고도 성차지 않아 벌금까지 안긴 설음을 리덕수한테 하소연하였다.  리덕수는 몇번 연길 서시장에 가본 적이 있었다. 그 때 서시장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리덕수는 퍼그나 가슴이 쓰리고 서글퍼났다. 가랑비가 내리는 날이라도 장사군들은 난전에 펼쳐놓고 팔고 있던 물건들을 비닐천으로 덮어놓고 기운내여 싸구려를 불렀고 비가 억수로 마구 퍼부으면 저마다 부랴부랴 자기의 물건들을 손에 들거나 옆꾸리에 끼거나 한아름 부둥켜안거나 한 채로 비를 피할 구석을 찾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렇다고 비가 오지 않는 날이라도 무풍지대는 아니였다. 뙤약볕이 내리쬐면 어떤 이들은 우산으로, 어떤 이들은 돛천으로 해볕을 가리우고 또 어떤 이들은 옷을 머리 우에 쓰고 해볕을 피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어지럽고 란잡하고 지저분한 서시장의 렬악한 위생환경은 눈으로 보아서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서시장을 현장에서 둘러보면서 리덕수는 비바람을 막아주고 추위와 무더위도 피하게 할 수 있는 그런 실내시장을 짓는다면 파는 사람이고 사는 사람이고 모두다 편리하여 그야말로 매부 좋고 누이 좋은 일이 될 수 있겠다는 밑그림을 그리게 되였다. 그 몇년 사이에 연변의 일부 녀성들, 주로는 조선족녀성들이 남방 연해지구의 도시에 가서 옷감, 의상, 신발 모자 등 상품들을 가져다가 연길에 와서 팔게 되면서 서서장 구역에는 차츰 맞춤한 상품집산지가 형성되였다. 이 잡다하고 방대한 상품소매시장은 완전히 자발적으로 형성된 만큼 기획과 관리에서 외면되여있었다. 이런 상품시장을 건설하고 관리하여 연길시 주민들의 생활을 위해 보다 더 잘 봉사해야 할 책임이 바로 정부에 있었다, 그런데 일부 간부들의 사상관념은 한심하게도 형세의 흐름에 뒤떨어져 있는가 하면 상품류통을 활성화하느라고 일년 내내 밖에 나가 동분서주하고 있는 조선족녀성들을 무턱대고 “투기모리군”이라고 몰아세우면서 그들의 상업활동을 “투기매매” 행위로 매도하고 항상 그녀들과 떵떵거리고 눈초리를 세우는 것으로도 모자라  그들의 물건을 몰수하고 심지어 벌금까지 안기고 있으니 가만 놔둘 수 없었다. 착잡한 심정으로 그녀들의 하소연을 다 듣고 나니 리덕수의 가슴은 너무도 무거워났다.  ‘좌’적인 사상이 이미 우리의 적지 않은 동지들의 머리 속에 굳어져버렸으므로 사상해방사업은 그야말로 복잡한 종합공정이라는 현실을 절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였다. 신주대 지에 개혁개방의 봄바람이 불어치는데도 관련 부문 집법인원들이라는 사람들이 아직도 그따위 극’좌’적인 사유로 시장경제를 주물럭거리는 현실이 참담해났다.  리덕수는 이 사건을 돌파구로 삼아 모두의 사상해방과 관념갱신을 촉구하고 전 주적으로 시장경제의 발전을 추진해야 한다고 마음을 굳히였다. 리덕수의 눈에는 용감하게 집문을 뛰쳐나와 자발적으로 상품경제활동에 종사하는 연길시의 조선족녀성들이야말로 개혁개방의 선두주자들이며 상품경제의 물결 속에 뛰여든 용감무쌍한 시대의 풍운아였다. 이 군체에 힘을 실어주고 이 군체를 잘 보호해주어야 하는 게 절실했다. 보다 대담하게 밖에 뛰쳐나가 남방 연해지역의 복장 등 상품들을 들여오면서 남방 연해지역 시장경제의  봄바람을 몰아오게 하면 일거량득의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리덕수는 간부대회에서 여러번 특별히 이 문제를 언급하였다. 연길 서시장을 건설하기 전에 리덕수는 한 회의에서 이렇게 모질기게 발언한 적이 있었다.  “만약 그 누가 눈치를 보며 자리만 지키면서 개혁을 탐색하지 않고 시장경제발전의 흐름을 가로막는다면 저는 가차없이 그를 갈아치우겠습니다.” 당시 연길시 시장은 최봉련 (崔凤莲) 이였다. 일주일 쯤 지나서 최봉련은 리덕수한테 전화를 걸어왔다.  “리서기께서 친히 사람을 갈아치우지 않아도 되겠습니다. 저희들이 벌써 리서기를 대신해서 그 사람들을 갈아치웠습니다!” “당신들이 누구를 갈아치웠단 말입니까?” 리덕수가 묻자 최봉련은 이렇게 대답했다. “당연히 리서기께서 찍은 그런 사람들을 면직시켰습니다.” 이 말을 듣고 리덕수는 최봉련 시장에게 이렇게 말했다.  “잘 면직시켰습니다. 저는 동무를 지지합니다. 앞으로도 그 누가 언감 개혁개방을 가로막으려 하면 곧바로 그를 면직시켜버리십시오. 그리고 그 누가 감히 대중들이 치부의 길로 나가는 것을 가로막는다면 곧바로 그를 면직시켜주십시오! 저는 당신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여주겠습니다!” 개혁개방 초기에 최봉련 시장은 시장경제를 밀고나가고 혼란한 국면을 바로잡아나가면서 많은 일들을 해놓았다. 광명거리 확장공사도 바로 그의 재임시절에 추진되였다. 착공에 들어가자 의론이 분분하고 부정적 목소리도 적지 않았지만 최봉련은 귀등으로 흘려보내고 광명거리 확장공사를 마침내 마무리해내고야 말았다. 광명거리를 넓혀놓으니 길이 널직하고 시야가 탁 틔여서 다들 신난다고 입을 모았다. 연길시 서시장 건설도 그 같은 맥락에서 풀이할 수 있었다. 지난 세기 80년대에 그렇게 큰 규모의 상품소매시장을 건설한 것은 전 성적으로도 전례가 없었다.  리덕수는 언제나 최봉련을 실속있게 일하는 훌륭한 간부라고 긍정해주었다. 연길시 서시장이 건설되자  정부의 진심어린 지지를 마음 속으로 읽게 된 연길시 개체소상인들은 물론 전 주 개인장사군들이 경제활성화에 합류하려는 열정이 전에 없이 달아올랐다.  서시장이 다 건설되였을 때 마침 성당위 서기 고적이 연길에 와서 사업을 검사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일부러 고적 서기를 서시장으로 모시고 갔다. 서시장을 둘러보고 몹시 흥분된 고적 서기는 즉각  상업을 주관하는 부성장 고문(高文)한테 전화를 걸어 연길시에 와서 현지회의를 소집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아침, 고문 부성장은 성상업청, 성재정청 등 성정부 8개 관련 부문 책임자들을 인솔하고 연길로 떠났다. 주정부에서 재정무역사업을 주관하는 오장숙(吴长淑) 부주장이 역에 나가 그들을 맞아왔다. 그 날 연길시에서 열린 현장회의에 전 주 8개 현, 시의 재정무역 주관 현장과 시장들도  참가했다. 회의에서는 연길시 최봉련 시장이 경험을 소개한 뒤 고문 부성장과 오장숙 부주장은 각기 성, 주 정부를 대표한 연설에서 연길시의 경험을 전면적으로 널리 일반화할 것을 요구하였다. 그 후 전 성 각 지역에서는 연길시를 본받아 분분히 상품소매시장을 건설하게 되였다. 장춘시와 길림시의 상품소매시장도 연길 서시장 이후에 건설되였다. 이 회의가 있은 후 전 주 8개현, 시에서도 신속히 발빠르게 움직여 규범화된 종합성적인 농산품시장을 잇따라 건설하게 되였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은 이후에 착실하게 인민대중들한테 실제적인 일과 훌륭한 일들을 수두룩이 해놓았다. 그는 늘 스스로 자기 자신을 이렇게 타이르군 한다. 한 인간이라면 말을 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반드시 어깨를 낮추어야   하고  매사에 되도록이면 말은 적게 하고 솔선수범하여야 하며  일단 약속했다면 꼭 그대로 옮겨야 하고 심지어 입은 꾹 다물더라도 꾸준히 일하는 본령을 지켜야 한다.  간추리면  모든 것은  다 사실로써 약속을 보여줘야 한다는 말이였다. 인간으로서의 이와 같은 인격과 사업작풍을 갖추었기에  리덕수는 간부와 대줄들의 신임과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리덕수는 주당위 서기를 맡은 이후에 오랜 지도간부들을 일일이  찾아  담화를 나누었고 단독으로 련계할 수 있는 라인까지  마련해놓았다. 리덕수한테는 특별한 전화번호수첩이 하나 있었는데 그 속에는 전문적으로 최채, 전인영, 최림 등 많은 오랜 지도간부들의 련계전화번호를 메모해두고 있었다. 리직휴양한 지 10여년,  20여년이 지난  오랜 지도자나 로간부라 해도  리덕수는 늘 그들의 련계번호를 가지고 있었기에  그 누구든지 가장 빠른 시간내에 찾을 수 있었다. 그 당시 리덕수의 비서였던 조현인은 그 때의 경력을 이렇게 회고하였다.  “저는 로간부들의 련계번호가 적혀있는 그 수첩을 늘 갖고 다녔습니다. 리서기가  언제 누구를 찾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리서기는 평상시에 오랜 지도자와  로간부들의 생활에 깊이 관심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을 자기 사업의 훌륭한 선배로 모시고  사업상의 일들을 놓고 늘 조언을 받군 하였습니다. ” 주의 오랜 지도자와 로간부들은 모두 리덕수의 사업을 무던히도 받들어주었다. 장홍규는 원래 백성지구의 제2책임자였는데 연변의 지도부를 강화하기 위한 수요로 전근해 오게 되였다. 조남기가 주당위 서기를 맡고 있을 때 주당위의 일상 사업은 주로  장홍규가 맡아왔 다. 조남기와 최림이 성으로 전근되여 올라가고  리덕수가 주당위 서기 겸 주장을 맡으면서 장홍규는 주의 제2책임자로 되였다. 장홍규는 일을 매우 까근하게 하였고  문제를 깊이 있게 연구하였는가 하면  문제를 조리정연하게 귀납하는 스타일을 가진 지도일군이였다. 리덕수도 마음속으로부터 장홍규를 극진히 존경하였다. 이 같은  리덕수의 평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장홍규동지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지도부의 단합, 신로간부 사이의 단합, 민족간부 사이의 단합에서 장홍규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1987년에 장홍규는 다시 백성으로 전근되여 돌아갔다가 나중에 성정치협상회 부주석으로 당선되였다.                                              (다음 호에 이음)                                                               (강룡운 번역)             [연변문학 2018 년 7월호]                                
26    후회막급 댓글:  조회:2295  추천:2  2014-10-14
수필 후회막급 강룡운   희비가 엇갈리고 다사다난했던 쥐의 해 무자년이 물러가고 대망의 소의 해  기축년이 신주대지를 진감하는 요란한 폭죽소리 속에서 도래했다. 정월 초하루 아침, 나는 둘째아들놈과 함께 살고있는 이곳 산동성 청도에서 차례상을 차려놓고 머나먼 북쪽하늘아래 그리운 고향을 그려보며  아버지, 어머니께 차례를 지냈다. 어릴적엔 설이 되면 나이를 한살이라도 더 먹으면  빨리 자라 어른이 된다는 막연한 희망에 설레이며 퍼구나 들뜬 기분이였지만 나이 지긋한 로년에 접어든 다음부터는 설을 쇤다는것이 마냥 즐겁기만 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해마다 늘어가는 나이때문에 저으기 부담스러워진다는것이 나의 솔직한 고백이다. 뱀띠 신사년생인 내가 기축년을 맞아 예순아홉이 되여 인생 칠십 고래희 (人生七十古来稀)”의 턱밑에 바짝 다가서게 되였으니 어찌 감개무량하지 않으랴! 29년전, 나의 부친은 바로 올해 내 나이와 같은 예순아홉에 아홉고개를 넘기시지 못하고 아쉽게도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떠나셨고 그후 4년뒤에 어머니마저 타계하시니 나는 졸지에 그만 고아가 되였던것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갖고있는 가장 소중한 것들에 대해 그것들을 소유하고있을 때는 그것의 소중함을 가슴깊이 느끼지 못하고있다가도 일단 그것들을 상실한 뒤에야 비로소 사무치게 그리워질 때가 많다. 나는 부모님 생전에 그분들이 적어도 10년은 더 앉으시면서 자식들의 버팀목이 되여주고 손자녀석들의 성장도 지켜봐주리라고 생각하면서 부모님들의 건강에 대해선 너무나 등한시했던것 같다. 평소에 감기에도 잘 걸리지 않고 무병하시여 병원출입이 거의 없었던 어르신들인지라 너무나 무덤덤하게 잘 보살펴 드리지 못했었다. 이것이 나에게는 용서할수 없는 불효였음을 나는 나이가 들어서야 비로소 통감하게 되였다. 내가 안도방직공장에서 근무할 때 나는 비록 둘째아들이였지만 안해와 상의하고 부모님을 모셔다가 함께 지냈다. 그때까지만해도 무탈하시던 아버지는 내가 연길로 전근하여 아직 집도 잡지 못하고 있을 때 내가 근무하던 안도에서 갑자기 뇌졸증으로 우리곁을 떠나셨고 그 뒤를 이어 외기러기가 되신 어머니도 딸이 새집으로 이사를 간다는 희소식을 듣고 딸집에 놀려가셨다가 급작스레 뇌출혈로 사망하시였는데 유감스럽게도 나는 어머니의 림종을 곁에서 지켜드리지 못하였다. 부모님 생전에 그분들의 건강을 좀더 꼼꼼히 체크하고 조기진단과 조기치료만 잘 하였더라도 그렇게 총망히 황천길에 오르시지 않을수도 있었으련만 부모님을 다 잃은 후에  통탄하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후회막급, 이 세상에 후회라는 병을 치유할수 있는 약은 없는것이다. 한국가수 오승근의 희트곡 “있을 때 잘 해”를 들을 때마다 나는 맘속으로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후회막급”이란 이 성구의 깊은 함의를 새삼스럽게 터득하게 된다. 부모님이 돌아가신후에 제사를 지내고 설명절에 차례상을 차리고 청명과 추석에 성묘하러 다니는것도 자식된 도리이지만 그보다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제때에 건강검진을 해드리고 살뜰하게 건강관리를 도와드리는것이 오히려 더 절박하고 값진 효도가 아니겠는가! 부모님이 돌아가신후에 보이는 사후효성보다도 부모님이 살아계실 때 잘 챙겨드리는 생전효도가 진정한 효성이요, 값진 효도라는 말이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오늘 내가 자신의 건강을 챙기는 그 십분의 일의 정성과 노력으로 부모님의 건강을 챙겨드렸더라면 부모님은 그렇게 일찌기 타계하지 않았을것이다. 그리하여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고생만 하시던 량친께서 몇해라도 더 앉으시여 개혁개방의 호시절을 맞아 만년에라도 조금이나마 호강할수 있게 하였더라도 내 가슴이 이토록 아프지는 않았으리라.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있을 때 잘 해 흔들리지 말고 가까이 있을 때 붙잡지 그랬어 있을 때 잘해 그러니까 잘해…   들을수록 너무나 가슴에 와닿는 노래말이다. 부모님에 대한 효도도 살아 생전에 잘해 드려야하는것처럼 건강도 건강할 때 챙겨야 한다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건강할 때 건강을 챙겨야 한다는 도리를 잘 모르고 살아간다. 나도 그랬다. 그래서 30대, 40대에는 건강관리에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망가지고말았다. 두분 다 중풍으로 돌아가신 부모님의 유전인자가 나의 몸속에 깊이 배여서인지 나는 재직 당시 고혈압에 고혈지까지 겹치여 건강이 말이 아니였다. 14년전부터 벌써 뇌혈전진단을 받고 두번이나 한달 넘게 입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그런데 10년전 직장에서 은퇴하고 편안한 백성이 된 다음부터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던가. 그때까지만해도 귀밑머리에 내리기 시작했던 흰서리가 어느새 머리를 온통 뒤덮은 백설로 변하여  명실공히 백발로인이 되였다. 하지만 오늘도 나는 날마다 어김없이 한시간씩 신체단련을 위해 탁구 치러 다닌다. 어렸을 때 작난처럼 조금씩 배워두었던 탁구를 재작년부터 다시 치기시작했는데 웬만한 젊은이들도 상대하기 어려운 만만찮은 실력이란다. 워낙 고혈압, 고혈지 체질인데다가 재작년에는 또 고혈당진단까지 받게 되자 나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졌다. 그러나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등 3고의 성인병환자들도 약물치료에만 매달리지 않고 음식조절과 적당한 운동을 잘 결합하면 얼마든지 건강을 되찾을수 있다는 의사선생님의 충고가 나에게 희망을 갖다주었다. 술담배를 언녕 끊은데 이어  그렇게 즐겨먹던 기름진 음식도 줄이고 주식을 잡곡쪽으로 돌리고 날마다 한시간씩 산책을 하던 습관을 견지하면서 재작년부터는 또 매일 오후 한시간씩 탁구운동을 견지하였더니  80킬로 체중이 70킬로로 내려가면서 혈압, 혈지, 혈당이 모두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나간 10년동안, 나는 생명은 운동에 있다는 이 명언이야말로 만고불변의 철리임을 피부로 느끼기도 했다. 더우기 탁구를 다시 치기 시작해서 반년만에 혈당을 내리는 약을  더 복용하지 않아도 된다는 의사선생님의 말씀대로 그 약을 끊은지도 벌써 2년이 다가온다. 운동료법으로 땀을 흘린 보람이다. 기적이 아닐수 없다.  있을 때 잘 해 후회하지 말고… 나는 이 노래말을 생활의 지침으로 삼고싶다. 좀더 젊었을 때부터, 좀더 건강할 때부터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더라면 나는 “3고”환자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좀더 일찍부터 술, 담배를 멀리하고 끊어버렸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입맛의 노예가 되지 않고 육식을 적게 하고 소식을 많이 하였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입쌀이나 밀가루에만 련련하지 않고 좁쌀이나 옥수수 등 잡곡을 자주 챙겨 먹었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탁구와 같은 스포츠를 생활의 일과속에 정착시켰더라면, 좀더 일찍부터 승용차를 타고 출퇴근 하지 않고 많이 걸어다녔더라면 나는 그렇게 여러번 입원치료를 받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있을 때 잘해라는 이 말은 부모님에 대한 효도나 건강관리에만 국한된다는 그런 뜻이  아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있을 때 잘해야 할 일들이 너무도 많은것 같다. 사랑하는 인생의 동반자에 대한 애정도 그렇고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언어문자나 민족교육과 전통문화에 대한 사랑도 다 그렇지 않나하는 생각을 보다 심도 있게 해보고싶다.   2009. 1. 30.  청도에서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79-83]        
25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댓글:  조회:2492  추천:7  2014-10-04
수필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강룡운   지난겨울 나와 안해는 작년에 새로 이사 온 아빠트에서 추운 고생을 전혀 모르며 따뜻하게 한겨울을 잘 보냈다. 아들덕에 호강한 셈이다. 최근 몇년 사이에 석탄값이 엄청나게 뛰여오르면서 겨울 집중난방 열공급이 제대로 되지 않는 아빠트가 많아졌는데 원래 우리가 살던 아빠트 실내온도는 섭씨 15도에서 머뭇거리다가 13도까지 내려간 때도 하루이틀이 아니였다. 작년에 설 쇠려 집에 왔던 큰아들애가 집안에서 모직세타우에 솜옷까지 걸쳐입고 덜덜 떨고 있는 아버지, 어머니가 하도 가긍스러웠던지 우리한테 시설이 좀더 구전한 온돌난방 새 아빠트를 사주어 마침내 인테리어까지 마치고 이사를 오게 되었던것이다. 부르하통하강반에 자리한 새 아빠트의 북쪽 창가에 서서 호수처럼 넓어진 수면우로 유유히 노니는 뽀트들과 강변 유보도에서 산책하는 련인들의 모습이 마치 한폭의 아름다운 그림마냥 펼쳐진 수려한 바깥 풍경을 내려다보노라면 똑 마치 큰 호수가 유원지 근처의 관광호텔에 투숙한듯한 착각을 자아내기도 한다. 이사를 도와주려 왔던 고종사촌동생이 그 긴 두다리 콤파스로 집안을 두루 재여보더니  북쪽 창문에서 남쪽 창문까지의 거리가 무려 15메터나 된다고 했다. 거실외에도 침실 두칸과 서재까지 달린 휑하니 널다란 이 큰집에서 만년을 보내게된 우리 부부는 뙤창문 하나 없던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하던 그때가 자꾸 뇌리에 떠올린다. 나는 대학에 입학하기전까지도  뙤창문 하나 없는 초가집에서 자랐고 대학을 졸업하고 장가를 간 다음에도  그 초가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안도현 명월진 명안가 북쪽  기차역으로 가는 한 큰길목 우물가에 위치해있던 그 집은 팔간짜리 두집 사이 틈바구니에 이어지은 보잘것없이 헐망하고 초라한 오막살이집이였다. 이 초가집 앞과 뒤, 두 출입문 사이의 거리가 6메터도 채 안되고 방너비는 겨우 2메터 남짓, 면적이 12평방메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였다. 이렇게 작은 집에서 우리는 할머니,아버지,어머니 그리고 나와 녀동생 다섯 식구가 같이 살았고 이 작은 집에서  나의 형님과 나 그리고 녀동생 삼남매가 모두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다. 집이 작은 것도 불편했지만 뙤창문마저 하나 없어 집안이 늘 어둑컴컴한것이 더욱 사람을 미치도록 갑갑하게 만들었다. 유리문도 아니고 창호지를 밖으로 붙인 출입문으로는 겨울이면 랭기가 들어온다고 바깥쪽에 포장용종이상자를 뜯어 붙이고 또 그 우에 세멘트포장지까지 덕지덕지 두껍게 붙여놓아야 추운 한겨울을 지낼수 있었므로 대낮에도 전등을 켜야했다. 1959년 국경10주년 때 할빈공업대학을 갓 졸업하고 북경에 배치받은 형님이 이 초가집에서 결혼을 하게 되자 우리집 식구들은 며칠간 다른 집들을 전전하면서 잠자리를 찾아다녀야 했고 형님이 북경으로 돌아간 다음에는 금방 시집온 형수님까지 여섯식구가 이 작은 집에서 같이 살아야 했다. 1962년 가을, 내가 대학에 입학하여 이 초가집을 떠나게 된것은 나로 말하면 그야말로 오래동안 학수고대하여 오던 해방이였고 그 지긋지긋한 오막살이 생활과의 작별이였다. 그런데 모든것이 다 타고난 운명이라고나 할가. 나의 신혼생활도 바로 이 작은 오막살이집에서 시작되었다. 미닫이를 사이 두고 좁디좁은 아래 가마목은 나와 안해의 잠자리가 되였고 그 보다 조금 더 넓은 웃방에서는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팔순이 된 할머니가 비좁게 잠자리를 같이 해야 했다. 집고생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계속되였다. 그후 내가 공인계급의 “재교육”을 받던 안도방직공장에서는 건평 24평방메터 되는 집에서 부모님을 모시고 여섯식구가 같이 살아야했고 1980년 여름 내가 자치주인민정부에 전근되어 왔지만 집이 없어서 하는수없이 코구멍만한 연길방직공장 “모자숙사”에서 1년을 살아야 했으며 그 다음해에는 주정부에서 배치해주는 “사택”으로 이사를 왔는데 어머니를 모시고 로소 3대 다섯식구가 여전히 단칸방 한구들에서 살아야했다. 이 집은 옛날 왜놈들이 쓰던 낡은 집으로서 동서 량쪽 입구로 들어가면 기다란 복도가 있고 북쪽벽에는 창문이 하나도 없어  한낮에도 눈앞이 캄캄하였다. 여덟세대가 한칸씩 차지하고 사는 이 “사택”에서는 어느 문이 자기집 문인지 찾기가 힘들어 복도에 들어서서 몇발작만 앞으로 걸어나가면 아예 장님처럼 벽을 더듬어야 가까스로 자기집 문을 찾을수가 있었다. “뙤창문이 있는 집에서 살았으면...” 이것은 나의 오랜 소망이였다. 고생끝의 락을 고진감래라고 했듯이 1983년에는 나도 드디여 56평방메터짜리, 절반만 온돌인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됐고 1989년에는 78평방메터짜리 집중난방 아빠트로 이사를 하게 됐다. 몇십년전 안도현 명월진 그 12평방메터밖에 안 되는 초가집에서 장가를 들고 시집을 갔던 우리 삼남매는 지금 모두 100평방메터가 넘는 집에서 살고있다. 그런데 옛날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어찌하여 그렇게 비좁고 그렇게 헐망하고 그렇게 초라한 초가집에서 살지 않으면 안되였을가? 그것은 그때 그 시절에 오륙십원밖에 안되는 아버지의 박봉으로 가계를 유지하기도 힘들었을텐데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열여덟살 꽃나이까지 곱게 키워오던 나의 누나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내면서 그 몹쓸놈의 립파선암이라는 병을 고쳐보려고 모든것을 몰부어야했으므로 가난에 쪼들리지 않을수 없었을것이다. 게다가 두 아들의 대학공부 뒤바라지를 하시느라 다른 집을 마련할 엄두도 못내시였고 또 그럴만한 여유도 없었을것이다. 돌이켜 보면 이처럼 궁핍한 살림살이는 우리 집만의 사정이 아니였고 나의 부모님이 남들보다 무능해서도 아니였다. 나의 부모님은 두 아들을 모두 대학생으로 키워낸 분들이셨지만 아들덕에 호강 한번 못해보시고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시였다. 그때 그 시절은 계급투쟁의 시기였고 온나라가 “사람잡이”에 열을 올리던 동란의 시기였으며 나라경제가 붕괴의 위험에 빠져 가난에서 헤어나기 어려웠던 시기였다. 형님과 나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만 졸업하면 우리 집의 가난은 떨쳐버릴수있고 부모님을 호강시킬수 있으리라고 굳게 믿었었다. 그런데 현실은 그게 아니였다. 제아무리 대학을 졸업했어도 우리 개인의 힘은 너무나 미소하여 가난의 현실을 개변시킬수 없었다. 1978년 가을, 우리 나라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께서 당의 사업중심을 계급투쟁으로부터 경제건설에로 전이시켜야한다고 말씀하셨을 때 우리는 그 말씀이 중화의 대지에 얼마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오리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개혁개방의 물결은 점차 온 나라의 모습을 몰라보게 바꿔놓기 시작했다. 시대가 변하고 세월이 달라졌다. 바로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 개혁개방의 물결 속에서 나의 아들애들도 대학을 졸업하고 해외류학을 나갈수 있었고 또 해외취직도 가능하게 되었으므로 우리 세대와는 달리 자기가 번 돈으로 집을 사서 부모님께 효도할수도 있게 된것이다. 우리가 젊었을 때 이 모든것은 언감생심, 생각조차 할수 없었던 일이였다. 작년 국경절에 북경에 계시는 형님과 형수님이 연길에 있는 우리 집으로 오시였다. 그때 우리 삼남매는 안도방직공장 부근에 모셔진 아버지, 어머니의 산소에 가서 성묘를 마치고 부모님을 추모하는 심정으로 명월진에 올라가 옛날 부모님과 함께 살던 옛집을 찾아가보았다. 그런데 옛집터에 있던 나지막한 초가집들은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그 자리에는 층집들이 즐비하게 우뚝 솟아있었다. 우리 집 옛터뿐 아니라 명월진 전체가 천지개벽이나 한듯 완전히 몰라보게 변모돼있었다. 형님과 형수님은 명월진의 이곳저곳을 다 둘러보시고 “고향이 변하기는 많이 변했으리라고 생각은 했지만 그렇게 초라하던 명월구가 이처럼 몰라보게 변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고 하시면서 이구동성으로 감탄해마지않는것이였다. 명월구뿐아니라 지금 연변의 각 현 시, 더 나아가 전국 각지 그 어데라 없이 가는곳마다 모두 거대한 건설장으로 변하여 거족적인 발전을 이룩하고있다. 최근년간 우리 나라가 건설에 소모한 강재(钢材)만해도 전세계 강재 생산량의 3분의 1을 웃돌고, 세멘트 소모량이 전세계 세멘트 생산량의 절반에 가까웠다고 하였으니 그 건설규모를 가히 상상할수 있으리라. 그 누가 말했던가? “집은 참으로 그 누구에게나 소중한 삶의 둥지이고 마음의 항구이다.”라고. 지금 우리 나라에서는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을 다그치고 있는데 항간에는 “초요사회냐 아니냐의 분수령이 바로 주택이라”는 말까지 있다. 우리 나라는 금년부터 제11차 5개년계획이 개시되고 전면적인 초요사회건설에 더욱 세찬 박차를 가하게 된다. 이렇게 지속적인 발전이 계속된다면 우리의 후대들도 다같이 지금보다 더 훌륭한 주택에서 살게 될 날이 멀지 않아 우리앞으로 성큼  다가오고있다.   2006. 3. 5.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21-26]          
24    수필다운 수필을 한편만이라도 댓글:  조회:1824  추천:2  2014-09-24
수필다운 수필을 한편만이라도   나는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하여 오래동안 본의 아니게 공무원으로 공직에 몸 담고있으면서 줄곧 한어문으로만 글을 써왔다. 그런데 이런 글들이 모두  문학과는 거리가 먼, 틀에 맞춰진 글이 아니면 천편일률적인 공문이나 연설문들이였다. 이런 글을 쓰면서 나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아야 하였고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해야 했으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글을 대필해주면서 문학에는 겨우 곁눈질이나 하였을뿐 시름 놓고 크게 한눈을 팔지도 못했다. 정년이 되여 공직에서 은퇴하게 되자 나는 드디어 다른 사람이 아닌 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내 머리로 생각을 굴려보면서 다른 민족의 언어문자가 아닌 나의 모어인 조선문으로 오직 나만의 개성이 엿보이는 그런 글다운 글을 좀 써보고싶었다. 그래서 시작한것이 수필이다. 나는 비록 천부적으로 문학적재능을 타고나지는 못했지만 이제 얼마 남지않은 여생에라도 진정 문학수필의 반렬에 오를수 있는, 그야말로 수필다운 수필을 몇편만이라도, 아니 단 한편만이라도 써보고싶은것이 아직도 내 가슴속에서 꿈틀거리는 유일한 꿈이다.   2013년 6월 강소성 무석에서   [강룡운수필집 《무궁화련정》p.1 머리글 ]  
23    "로인네트워크" 례찬 댓글:  조회:2135  추천:3  2014-04-26
수필 “로인네트워크” 례찬 강룡운   나는 날마다 적어도 세번씩은 컴퓨터앞에 앉는다. 이른 아침 날이 밝아 기상을 하게 되면 난 맨먼저 버릇처럼 컴퓨터부터 켜놓고 세수하고 양치질을 하면서 하루의 일과를 시작한다. 그리고는 하루밤새 텅 비여있던 속을 달래기 위해 광천수 한컵을 손에 들고 느긋이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이메일 도착을 알리는 귀맛 좋은 신호소리에 귀를 기울인다. 북경 모교에 계시는 서영섭은사님께서 매일아침 제자들에게 보내는 이메일이 어김없이 이 시간이면  도착하기때문이다. 2년전, 우리 대학교 한학급 동창생들은 대학 입학 50돐에 즈음하여 동창문집 《추억의 메아리(岁月如歌)》를 출판해가지고 북경 모교에 찾아가 동창모임을 가진적이 있었다. “문화대혁명”이란 미명하에 이 땅에 휘몰아쳤던 그 사나운 회오리바람을 타고 사처로 흩날려가는 추풍락엽마냥 산지사방에 흩어졌던 우리 동창생들은 고희의 나이가 되여서야 비로소 오랜 세월의 격조끝에 락엽귀근의 심정으로 다시 모교로 찾아갔던것이다. 옛날 우리를 가르치던 년세가 많은 은사님들은 륙속 세상을 뜨시였고 젊은 나이에 교단에 올라 우리를 가르쳐주시던 은사님은 어언 팔순을 바라보는 로옹이 되여 우리들을 맞아주었다. 오매에도 그리던 은사님과의 재회는 뒤이어 “로인네트워크”로 이어질줄을 우리는 그때 미처 생각지도 못했었다. 동창문집의 출판을 기획하던 나날에 컴퓨터를 먼저 익힌 우리 몇몇 동창생들은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지지 못해 아직 이메일주소마저 갖추지 못한 다른 동창생들에게 이메일주소를 만들어주고 동창문집 출판기획을 통보하는 통지문을 발송하면서  자녀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기어코 통지문만은 읽어보라고 전화련락을 하게 된것이 동창생네트워크를 구축하는 첫 시발점이 되였다. 그것을 계기로 적잖은 동창생들은 고희의 언덕을 톺아오르는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뒤늦게나마 컴퓨터를 배우게 되였고 나중에는 저마다 서로 뒤질세라 자기가 직접 타자한 원고들을 이메일로 보내와 드디여 동창문집을 편집하여 출판하게 되였다. 모교에서의 동창모임은 동창문집의 출판으로 말미암아 그저 모여서 회포를 나누고 먹고 마시며 한껏 즐기는 차원을 넘어 한결 색다른 품위를 보이게 되였으며 일찍 모교를 떠났던 우리 오랜 졸업생들은 동창문집이란 이 소중한 선물을 통해 모교와 은사님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할수 있었다. 동창모임이나 은사님과의 재회도 잠간, 감격적인 만남의 희열를 만끽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던 우리들은 또다시 각자 저마다의 삶의 터전으로 돌아와야 하였고 사랑하는 모교와 존경하는 은사님들과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지 않으면 안되였다. 집으로 돌아온 우리 동창생들은 며칠후에 뜻밖에도 서영섭은사님께서 보내온 이메일을 받게 되였다. 동창생통신록을 보시고 제자들의 이메일주소를 확인하게 된 은사님은 2012년 8월 28일부터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보내기 시작했다. 은사님은 8월31일 나에게 보낸 답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요즘은 62년급 졸업생들에게 도합 280통의 메일을 전송하면서 즐거이 보내오. 세월은 덧없이 흘러갔어도 한때 맺은 사제지정은 변함이 없어 줄것 없는 나로서는 모아 두었던 남의 좋은 글이라도 전송해드리니 늘그막 삶의 바탕을 가꾸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라오.” 그때로부터 은사님께서는 팔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시여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제자들에게 이메일을 발송하신다. 은사님이 전송해오는 이메일중엔 “혼자만 보고 지나가기엔 너무나 아쉽다”는 수많은 정보들이 포함되여 있었는데 세계견문, 명승고적, 인생철학, 건강정보, 명언묶음, 좋은 글중에서 선택한 미문 등등 그 내용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만큼이나 다채롭고 다양했다. 은사님께서는 하루 평균 3통이상의 이메일, 지금까지 무려 2100여통이 넘는 이메일을 전송해 보내셨는데 그 속에는 엄청난 수량의 갖가지 정보들이 담겨져있었다. 네트워크를 구축하자면 우선 컴퓨터가 있어야 하고 컴퓨터를 다룰줄 알아야 하고 인터넷을 리용할줄 알아야 한다. 우리 학급의 적잖은 동창생들은 동창문집 편집을 계기로  컴퓨터를 배우게 되였고 인터넷을 통해 원고를 주고받으며 동창생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매일과 같이 이어지는 은사님의 이메일 접수를 계기로 동창생네트워크가 어느덧 사제간의 네트워크로 업그레이드된 셈이였다. 나는 내나름대로 우리 동창생네트워크나 사제간의 이 네트워크를 “로인네트워크”라고 부르고싶다.  1년 사이에 우리들의 이 “로인네트워크”는 은사님의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니라 사제간의 쌍방향 커뮤니케이션이 이루어짐으로써 우리들의 만년 생활을 2년전보다 훨씬 더 풍요롭고 윤택하게 만들어가고있다. “로인네트워크”를 통한 우리들의 커뮤니케이션의 핵심은 각자 소유의 지식과 정보의 공유이다. 우리 동창생들도 은사님의 본을 배워 각자가 독서를 통해, 혹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얻어낸 지식이나 정보들을 혼자만 보고 넘어가기엔 너무나 아쉽다싶으면 이메일을 통해 “로인네트워크” 성원들에게 다 전송해준다. 그리하여 우리는 날마다 몇통의 이메일을 주고받게 되였고 더불어 자기집 서재의 책들보다도 더 많은 책들을 볼수 있게 되였고 자기가 자주 드나드는 사이트이외에도 수많은 사이트의 정보들을 접수하게 되였다. 덕분에 우리는 인생만년에 들어섰어도 오히려 대학을 다닐 때보다도 더많은 지식과 정보를 향유할수 있게 되였다. 이렇다 보니 지금은 컴퓨터와 인터넷이 없는 생활은 아예 상상할수도 없을 정도로 되였다. 컴퓨터와 인터넷은 젊은이들이나 직장인들만의 전용물이 아니다. 직장을 떠나 한가로이 여생을 보내는 우리 늙은이들도 일사천리로 발전해가는 정보화시대의 흐름을 따라가고 시대와 더불어 전진하자면 컴퓨터도 배우고 인터넷도 리용할줄 알아야 한다. 나는 나의 동창생들과 더불어 은사님을 모시고 “로인네트워크”를 구축해가지고 만년을 보내게 된것을 더 없는 행운으로 생각한다.  “로인네트워크”는 우리들 만년생활에 큰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은사님과 동창생들이 보내오는 많은 지식과 정보는 우리의 생활습관까지 개변시켜주었으며  보다 원숙하고 건강한 인생만년을 보내도록 큰 도움을 주고있다. 은사님이나 동창생들이 보내오는 이메일은 내가 먼저 읽고나면 나의 마누라도 날마다 그 내용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고 명심해서 읽어본다. 왜나 하면 나의 마누라도 “로인네트워크”의 수혜자의 한 사람이기때문이다.   2년전에 불치의 병이란 진단을 받고 북경병원에 가서 방사성치료와 화학치료까지 받아야 했던 나의 마누라는 작년 여름에 또다시 입원하게 되였다. 그때 의사들은 이 병은 이미 방사성치료와 화학치료의 후유증까지 한데 겹치여 이젠 현대의학의 수단으로는  자기네들도 별다른 방법이 없다고 하면서 퇴원시킬 때는 약 한알도 처방해주지 않았다. 그때 마침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가. 북경에 계시는 은사님께서 보내온 이메일속에는 밀방이 하나 있었다. 한 사형수가 형장으로 나가기 사흘전에야 세상에 공개했다는, 중화포럼(中华论坛)에서 퍼왔다는 이 밀방을 받아안은 나의 마누라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더러 약방에 가서 이 약을 지어오라고 재촉했다. 그런데 이 중약을 몇달 련속 복용하였더니 현대의학으로는 별수 없다던 마누라의 병세는 거짓말처럼 큰효험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나의 마누라는 북경에 계시는 교수님을 생명의 은인처럼 생각하면서 날마다 은사님께서 보내시는 이메일을 명심해서 깐깐히 읽어보고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 있으면 어서 빨리 아이들한테도 보내주라고 졸라댄다. 북경 은사님께서 보내오는 이메일외에도 동창생들한테서 보내오는 이메일도 적지 않다. 동창생들도 저마다 자기네들의 네트워크에서 주고받는 정보들중에서 서로 공유하고싶은 정보들을 보내준다. 나는 그중에서 내나름대로 일부 정보들을 선택하여 나의 네트워크에 속하는 옛 동창생, 옛 동사자, 한 고향친구, 심지어 연길에서 함께 탁구를 치던 “탁구친구”들한테까지도 전송해준다. 그러면 그네들도 좋은 정보를 보내주어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네들 네트워크에서 공유하고있는 유용한 정보를 보내줌으로써 크고 작은 네트워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면서 서로 만나보지도 못한 숱한 이름 모를 네트즌들의 신세를 톡톡히 보게 되였다. 이렇게 동창생네트워크가 사제간의 네트워크로 이어지고 사제간의 네트워크가 또 다른 한고향친구네트워크, 옛동사자네트워크, 옛친구네트워크로 이어지는 양상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또 다른 하나의 모습으로 되였다. 우리 겨레의 말과 글을 매개로 이어지는 이와 같은 크고 작은 네트워크가 이어지고 또 이어지게 되면 우리 민족이 이 세상 방방곡곡에 흩어져 살아가고있는 새로운 생존방식인 민족네트워크가 이루어지게 될것이다.  만약 우리들 저마다가 북경에 계시는 은사님처럼 자신의 소유하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남들과 함께 나누면서 베풀며 살아가는 인생을 살아간다면 우리의 정신적문화생활은 훨씬 더 풍요롭고 다채로워질것이다. 그러면 그 언젠가 이 세상에서의 소풍을 마치고 저 세상으로 떠나갈 때면 나도 이렇게 말할수 있으리라. “인간세상은 존경하는 은사님과 사랑하는  동창생들로 이루어진 네트워크가 있었기에, 그리고 일면지교도 없는 수많은 고마운 네트즌들이 있었기에 그 동네는 그야말로 살맛나는 세상이였다”고 말이다.   (2014-04-09 무석에서) [2014년 4월 18일 연변일보 해란강 제1566기]
22    경외심과 요행심리 댓글:  조회:1757  추천:1  2013-12-19
칼럼 경외심과 요행심리 강룡운   우리 말 사전들을 두루 살펴보면 경외심(敬畏心)이란 이 한자어는 경외지심(敬畏之心)이라고도 하는데 사람이 그 무언가를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뜻하는 말이다. 한 사람이 이 세상에 태여나서 험난한 인생로정을 걸어가자면 반드시 경외심 이란게 있어야 한다. 하루강아지 범 무서운줄 모른다는 속담은 갓 태여난 강아지가 백수지왕인 범의 위엄이나 사나움을 모르고 함부로 덤빈다는 말이다. 이 속담을 좋은데 비유하면 그 어떤 권위나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모르고 과감히 도전하는 젊은이들의 패기를 말하는것이고, 나쁜데 비유하면 세상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햇내기들이 경솔하고 경박하게 행동하는 경거망동을 비꼬는 말이 되겠다. 그러므로 보다 성숙되고 로련한 사람일수록 경외심이 있기 마련이다. 인류는 최초부터 자연에 대한 경외심을 가지고있었다. 천둥번개가 무섭고 홍수가 무섭고 태풍이 무섭고 지진이 무서웠다. 그래서 자연을 숭상하고 하늘을 공경하기 시작해서 나중에는 하느님을 숭경하기에 이르른다. 《성경》을 보면 고대 유태인들은 무소불능, 무소불위의 여호와를 몹시 두려워하고 공경하였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자연을 통칭하여 하늘(天)이라 하고 그 하늘을 공경하는 경천(敬天)사상이 산생하게 되였으며 또한  백성을 하늘로 간주하고 민심이 바로 천심이라고 인정하는,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두려워하는 경천외민(敬天畏民)사상도 나라를 다스리는 하나의 리념으로 자리잡게 되였다. 당나라의 명군이였던 당태종도 순자(荀子)나 위정(魏征)의 영향을 받아 백성을 물에 비유하면서 물은 배를 띄울수도 있고 뒤집을수도 있다(水能载舟,亦能覆舟)고 하면서 경천외민을 자신의 치국리념으로 삼았다. 나는 공산당간부들도 경천외민사상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연계의 천둥 번개가 무섭고 홍수가 무섭고 태풍이 무섭고 지진이 무서운것처럼 백성도 무섭다. 백성의 눈이 무섭고 백성의 입이 무섭고 백성의 분노가 무섭고 백성의 반항이 무섭기때문이다. 공산당간부들은 자기 수중의 권력이 누구의것인가를 잘 알아야 한다. 그들이 손에 쥐고있는 권력은 모두 인민이 부여한것이다. 나라의 진정한 주인은 인민이고 간부는 인민의 심부름군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간부들은 주인앞에서 우쭐렁거리며 주인행세를 하려고 까불지 말고 공손히 주인을 위해 봉사할 의무밖에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리하여 간부는 인민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민을 위해 좋은 일을 많이 하는 동시에 인민에 대한 경외심으로 나쁜 짓을 삼가해야 한다. 나쁜 짓을 하기전에는 적어도 한번쯤 백성들의 눈치을 봐야 하고 백성들의 입에서 무슨 여론이 터져나올까를 우려해야 하며 백성들의 분노가 어떤 엄청난 후과를 초래하게 될것인가에 대해서도 심사숙고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백성에 대한 경외심이다.     지난 11월1일, 북경시제1중급법원에서는 몇년전 연변에서 제1인자로 군림해있으면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전임  연변주위 서기 전학인(田学仁)을 수뢰죄로 판정,  무기도형에 언도하고 정치권리를 종신박탈하며 개인의 전부 재산을 몰수한다고 1심 판결을 내렸다. 나는 이 기사를 보면서 부성장의 보좌에까지 올라갔던 이 거물급인물이 어떻게 되여 오늘날 이 모양 이 꼴이 되였는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 없었다. 나의 소견에 의하면 전학인의 타락과 몰락은 일개 공산당간부로 말하면 그가 권력의 보좌에 오른후 입당할 때의 선서를 망각하고 공산당원의 수양을 게을리한데 그 주된 원인이 있겠지만 일개 인민의 공복으로 말하면 그가 인민에 대한 경외심을 상실하고 요행심리의 함정에 빠져들어 헤여나오지 못했기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전학인밑에서 일해본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에 대해서는 아는바가 별로 없다. 내가 알고있는 전학인은 내가 연변일보사에서 정년퇴직하고 집으로 돌아온후 그가 자치주 제1인자의 권력을 람용하여 연변일보사에서 문화대혁명때나 있을법했던 필화(笔祸)를 연출하여 일장풍파를 일으켰다는 그 한가지 사실뿐이다. 그는 한 소인배가 고자질한 보고서를 받아보고 주당위 상무위원회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그 당시 연변일보사에서 조선문편집부를 책임지고 한창 일을 잘하고있는 최호(崔虎) 부사장에게 문화대혁명때처럼 어거지론리를 펼쳐대면서 터무니없는 엉터리죄명을 들씌워 해임시킨 그 필화를 말하는것이다. 전학인이 최호에게 들씌운  죄목은 매우 간단했다. 최호 부사장이 2000년 4월에 취임한후 2002년 3월 20일 조선문 《연변일보》 3면에 연변대학 김관웅(金宽雄)교수의 글 한편을 발표했다는 그 리유에서였다. 전학인이 그토록 문제시했던 김관웅교수의 문장은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어렵다”는 천자좌우의 짧은 글이였다. 김교수는 중국의  고전《국어. 주어상(国语·周语上) 에 나오는 “방민지구,심우방천 (防民之口,甚于防川)”, 즉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더 어렵다는 성구에 내포된 고사(故事)를 인용하여 우리 연변에서도 이 고훈(古训)을 거울로 삼아 인민대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취지의 글이였다. 오늘의 시각에서 보아도 이 문장은 우리 당의 일관된 군중로선에도 부합되는 글이다. 그런데 전학인은 최호를 고자질한 그 소인배가 그럴듯하게 꾸며낸 론리대로 이 글을 그 당시 법륜공지지자들을 부추기는 나쁜 글이라고 훼방하면서 사회의 안정을 위협하는 언론을 퍼뜨렸다는 죄명으로, 또한 신문지상에 이런 글을 발표하도록 방임했다는 그 한가지 리유때문에 최호 부사장에게 그 책임을 물어 그 문장이 발표된 이틀뒤인 2002년 3월 22일에 최호의 부사장 겸 부주필 직무를 해임시켰던것이다. 뿐만아니라 전학인은 최호가 신문분야에서 일할만한 적임자가 아니라면서 종신토록 다시는 연변의 신문출판보도분야에서 일할수 없다고까지 엄포를 놓았던것이다. 이 필화의 여파로 말미암아 연변대학에서는  김관웅교수에게 중임을 떠메이려던 계획조차 수포로 돌아가고말았다. 이것은 문화대혁명의 도화선이나 다름없었던, 4인무리의 요문원따위가 오함의 “해서파직”을 비판하고 등탁 등 삼가촌을 박해하던 론리와 조금도 다를바 없다. 전학인은 무엇때문에 백성의 입을 막는것은 강물을 막는것보다 더 어렵다는 이 천고의 진리를 그토록 싫어했을가? 그리고 전학인은 또 무엇때문에 이런 글을   주당위 기관지에 발표했다는 그 한가지 리유때문에 최호를 그토록 사경에 몰아넣지 못해 안달을 했을가? 도적이 먼저 매를 든다는 말이 있다. 그는 아마 이런 필화를 연출해냄으로써 인민의 입을 막고 당보의 입을 막고 김교수와 같은 지성인들의 입을 막을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보도에 의하면 전학인은 재임기간중 1919만원이라는 엄청난 거금을 수뢰했다고 한다. 전학인은 원체 처음부터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였을것이다. 바늘도적이 소도적이 된다고 했다. 그는 그의 수중에 장악하고있는 권력을 빌어 자기들의 사리사욕을 챙겨보려는 소인배들에게 옭매여 그들의 포로가 되였던것이다. 그는 그들의 요구대로 그들을 권력자의 자리에 발탁시켜주거나 혹은 그들의 돈벌이에 편의를 제공해주는 대가로 욕심스레 그 엄청난 거금을 받아챙기면서 한발작한발작 범죄의 수렁에 빠져들었을것이다. 그렇다면 전학인은 수뢰가 범죄라는걸 몰랐을가? 그건 절대 불가능하다. 장기간 고위급간부로 일해온 그가 국가의 법을 모르고 당의 당규당칙을 모를리 만무하다. 그는 다만 현실생활속에서 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에 걸리지 않고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는 위선자들을 많이 보아오면서 자기도 행여 운수가 좋으면 법망에 걸리지 않고 빠져나갈수 있을거라는 환상에 사로잡혀 전전긍긍 요행을 바라는 마음으로 범죄의 길에서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갔을것이다. 주지하는바와 같이 고기잡는 어부들이 뿌린 그물에 걸려드는 고기보다 거기서 빠져나가는 고기가 훨씬 더 많은것은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현실생활속에서 죄를 저지르고도 법망에 걸리지 않거나 당규당칙을 위반하고도 처벌을 모면하는 사례가 많은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전학인은 고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물에서 빠져나가기 더 쉬운데 반해 고기가 크면 클수록 그물에 걸리는 확률이 더 높다는것은 잘  몰랐던 모양이다. 곡식은 뿌린대로 거두고 죄는 지은대로 간다고 했다. 이는 불변의 철칙이다. 중국의 고전 《로자(老子)》에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网恢恢,疏而不失) 즉 하늘의 그물은 눈이 굉장히 넓어서 매우 성긴것같지만 악인은 결코 하나도 새여나가지 못한다는 격언이 있다. 걸핏 보기엔 그 그물에서 빠져나가기가 매우 쉬울것같지만 실제로는 빠져나갈수 없다는것이다. 환언하면 죄를 지었으면 천국의 징벌은 피해갈수 없다는 말로도 풀이된다. 오늘 인민대중이 나라의 진정한 주인으로 된 중국에서 천망(天网)은 바로 인민의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법망(法网)을 말한다. 법은 범보다도 더 무섭다. 인민에 대한 경외심이 없고 법에 대한 경외심마저 없는 주제에 범 무서운줄 모르고 함부로 날뛰는  강아지처럼 법을 무시하고 법의 권위에 도전한다면 그 끝장은 불 보듯 뻔한 일이다. 오늘 파리건, 호랑이건 걸리기만 하면 다 잡아치우는 이 마당에 요행만 바라고 경거망동해서는 결코 안될것이다. 전학인의 몰락이 그렇고 박희래(薄熙来)의 몰락도 그렇다. 그들에 대한 심판은 바로 법률의 심판이며 인민의  심판이다 보도에 따르면 2008년1월부터 2013년 8월까지 32명에 달하는 성(부)급 관료가 부정부패로 사법처리를 받았다고 한다. 전학인은 아직 그중에 포함 되지 않았다. 그리고 지난 5년동안 전국 각급 검찰기관에서 립안한 사건은 15만 6350건이며 관련인원은 19만8781명, 그중 16만7514명을 공소하고 14만8931명에 대해 유죄판결을 했다고 한다. 이것은 우리 당이 부정부패척결에서 취득한 위대한 성과를 말해준다. 그러나 지금도 우리의 주변에는 전학인처럼 인민에 대한 경외심은 꼬물도 없고 안하무인격으로 수중의 권력을 리용하여 우쭐렁거리며 범죄를 서슴치 않는 위인들이 존재하고있다. 그리고 범죄를 저지르고도 요행심리에 사로잡혀 요리조리 법망을 빠져나가려는 미꾸라지같은 위인들도 존재한다. 그러므로 부정부패척결은 아직도 갈길이 멀다.      《연변일보》 2013. 12. 18.
21    무궁화련정 댓글:  조회:2775  추천:8  2013-12-06
수필 무궁화련정 강룡운                  나는 무궁화란 이 낱말을 소학교 다닐 때 처음 알게 되였고 무궁화란 이 꽃은 대학교에 가서야 비로소 그 실물을 보게 되였다.     1949년 3월, 중화인민공화국의 탄생을 만천하에 선고하기 몇달전, 나는 만 7세에, 우리 나이로는 아홉살이 되어서야 소학교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가 처음으로 배운 어문과목이 한글이였는데 몇해 지나서부터는 조선어라고 바꿔 불렀다. 아직 철부지였던 나에게 있어서 한글이든 조선어든 모두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배워준 우리 말과 우리 글이였으므로 그것이 도대체 뭐가 어떻게 다른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수 없었으며 어째서 한글을 조선어라고 바꿔 부르는지 그 영문조차 알수 없었다. 아무튼 한글이라고 하든 조선어라고 하든 우리는 소학교 1학년때부터 우리의 모어를 배운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때 우리가 한글을 배우는것도 ㄱㄴㄷㄹ,ㅏㅑㅓㅕ로부터 시작하여 아버지, 엄마, 할아버지, 할머니하는 순서대로 우리 말, 우리 글을 배웠는데 교과서에는 무궁화란 낱말도 있었다. 선생님은 무궁화를 조선의 국화(国花)라 하면서 삼천리 금수강산을 상징하는 아름다운 꽃이라고 강조했다. 선생님의 이 말씀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나의 머리속에 무궁화가 바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다가 떠나온 조상의 나라를 상징하는 꽃이라는것을 각인해주었으며 또한 나의 어린 가슴속에 아름다운 동경의 꽃씨를 심어주었다.1962년 9월 나는 중앙민족대학에 입학하게 되였다. 그때 우리에게 현대조선어를 가르치던 선생님은 수업도중 무궁화를 언급하면서 조선의 무궁화를 중국에서는 목근화(木槿花)라 부른다고 하면서 학교도서관앞에 무궁화나무 두 그루가 있으니 꽃피는 계절이 되면 명심해서 잘 관찰해보라고 당부했다. 그후부터 나는 도서관으로 드나들면서 때로는 무궁화나무에 한참 눈길을 멈추고 다른 꽃나무를 마주할 때와는 달리 그 어떤 이름할수 없는 상념속에 빠져들군 하였다.    무궁화는 그 원산지가 중동의 시리아라는 일설도 있고 옛날부터 동서방 방방곡곡에 널리 분포되여있었지만 무궁화를 국화로 정한 나라는 오직 하나뿐이였다. 비록 지금은 조선반도가 남과 북으로 갈라져 서로 워쑤처럼 지내고있지만 옛날 통일신라나 고려왕조나 리씨조선은 모두 하나로 통일된 단일민족국가였다.    신라시대의 이름난 문장가 최치원(崔致远)의 문집 《최문창후문집(崔文昌侯文集)》제1권에 수록되여 있는 국서(기원897년7월에 신라의 효공왕이 당나라의 광종(光宗)에게 보낸 국서)에는 신라를 자칭하여 근화향(槿花乡)이라고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보아 “무궁화의 나라”라는 이 별칭은 일찍 신라때부터 있었다는 추론도 가능 하다.    력사는 길고 현실은 짧다. 내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아직 세상도 모르는 어린 손자에게 “사람들이 널 보고 성이 뭐냐, 본이 뭐냐, 고향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성은 강씨, 본은 진주, 고향은 함경북도 부령군 부거면 사구동이라고 대답해라.”고 하시면서 가끔 내가 제대로 기억하고있는가를 확인해보시군 하였다. 내가 대여섯살이 되나마나한 그 소시적부터 이렇게 가르쳐 주셨으니 그것은 분명 너희들이 절대로 자기의 근본을 잊어서는 안된다는 그런 간곡한 부탁이였으리라.    1989년 여름, 나는 연변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에 가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에 참가하게 되였다. 내가 평양 량강호텔정원에서 조선에 도착하여 처음으로 예쁜 꽃송이를 자랑하며 우리를 반겨주는 무궁화를 보게 되였을 때 나는 그 어떤 오래된 꿈이라도 이루고 마음속으로부터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소원을 성취한듯 홀연 달콤한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하였다. 그것은 바로 내가 20여년전 대학교 도서관앞에서 무궁화를 바라보며 빠져들었던 그 이름할수 없는 상념에서 비롯된것이였다. 아마 무궁화의 고향에 와서 무궁화를 보니 저도모르게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의 모습이 떠오르면서 일제의 식민지통치하에서 살길을 찾아 남부녀대하여 두만강을 건너지 않으면 안되였던 조부모님과 부모님께 내가 오늘 드디어 조상의 나라로 찾아왔노라고 알려드리고싶은 그런 충동을 느꼈기때문이였으리라.    1992년 중한수교가 이루어진후 나는 여러번 기회가 주어져 자주 한국을 방문하게 되였다. 한번은 《매일신문》 창간 50돐 기년행사에 참가하고 그 길로  경상남도 진주 (晋州)에 내려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고향을 찾아보고 돌아온적이 있다. 그때 나는 진주에서 그 유명한 촉석루(矗石楼)에도 가보았다.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진주성을 함락하자 촉석루에서 왜장들과 함께 주연을 벌이던중 의기(义妓) 논개(论介)가 왜놈들에 대한 불타는 적개심을 안고 왜장 한놈을 끌어안고 낭떠러지밑으로 흘러 내리는 강물에 뛰여들어 목숨을 바친 그 유서깊은 촉석루에 찾아간것이다. 내가 진주 에 머무르고있을 때 논개가 몸을 던져 순국한 그 남강기슭에서도 무궁화는 어김없이 꽃철을 맞아 나에게 그 특유의 이쁨을 보여주고있었다.    나는 세세손손 대를 이어 무궁화 꽃피는 삼천리 금수강산에서 오붓하게 살아오다가 1910년 “한일합방”후 일제침략자들의 착취와 압박에 시달리다 못해 살길을 찾아 두만강을 건너온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손자이다. 내가 이렇듯 조선반도의 북과 남을 오고가며 무궁화를 반기는것은 아마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저세상으로 떠나 가시면서도 떨쳐버리지 못한 그 망향의 넋이 아직도 나의 잠재의식속에서 맴돌고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무궁화는 아욱과에 속하는 락엽관목으로서 온대지방에서 7—10월에 약 100일 동안 줄기차게 피여나는 아름다운 꽃나무이다. 꽃은 종(钟)모양으로 생겼는데 새로 자라난 가지에 돋아난 잎겨드랑이에서 한송이 한송이씩 피여난다. 숱한 꽃망울이 동시에 나무가지 여기저기에 대롱대롱 매달려있다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면 련거퍼 꽃망울을 터뜨린다. 매일 이른 새벽에 피여나 저녁에 시들어 말라 떨어지면서  3개월이상 날마다 새꽃이 피어나 계속 신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의 조상들은 끝도 시작도 없이 영원하리라는 겨레의 념원을 담아 무궁화(无穷花)라는 아름다운 꽃이름을 지어준게 아닌가싶다. 이것은 고증된바 없는 내나름대로의 추론에 불과하지만 전혀 터무니없는 어불성설은 아닐것이다. 꿈보다 해몽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지금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는 무궁화를 정원수나 가로수로 심어 삶의 터전을 아름답게 가꾸고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지금 우리의 겨레들도 무궁화처럼 전세계 방방곡곡에 흩어지거나 한데 모여 살면서 각자나름대로의 삶을 영위해가고있다. 조선반도의 남과 북은 물론, 더 나아가 중국, 미국, 로씨야, 일본 등 나라에 비교적 많이 모여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뿐아니라 수많은 나라들에 흩어져 살고있는 우리 동포들을 모두 합치면 무려 7천만이 된다고 한다. 우리 할아버지가 생전에 자주 입에 올리시던 “3천만 백의동포”는 이미 력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지금은 7천만이 되였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을 살아가고있는 7천만 단군님의 후예들과 더불어 우리의 유구한 력사, 찬란한 문화 그리고 우리의 아름다운 말과 글을 공유하고있음으로하여 항상 더없는 긍지와 자부심을 안고 살아간다. 내 나이가 벌써 고희를 넘었지만 나에게 있어서 무궁화와 우리 말, 우리 글은 일찍  나의 소년시절에 할아버지가 몸소 사랑의 금실로 이어준 보석보다도 더 소중한 존재이다. 그리고 내가 소학교때부터 배워온 우리 말과 우리 글은 나의 인생에 막대한 영향을 주었을뿐더러 오늘도 이렇게 나로 하여금 이 수필을 쓰도록 령감을 주고있다. 그러므로 나의 무궁화사랑은 단순한 꽃사랑이 아니며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사랑인 동시에 또한 할아버지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에 대한 나의 다함없는 사랑이다.     일언이페지하면 국가와 민족은 서로 관련이 있으면서도 엄연히 동일시할수 없는 서로 다른 별개의 개념이다. 피는 물보다 진하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신앙과 국경을 초월하여 언제 어디서나 무궁화를 사랑할것이며 우리 말과 우리 글을 아끼고 사랑할 것이다. 그리하여 조부모님과 부모님의 기대에 손색이 없는 백의민족의 훌륭한 후손이 되고싶다. 이것이 내가 항시 가슴속에 간직하고있는 소망이다.     (2013년 11월 20일 강소성 무석에서)   [2013년 12월 6일 연변일보 해란강 제1549기]    
20    빨간 양말 댓글:  조회:1963  추천:2  2013-09-04
수필 빨간 양말 강룡운   빨간 양말이란 말만 들으면 아마 어린 아기들이 신는 쬐꼬맣고 앙증맞은 예쁜 양말이 먼저 떠오를것이다. 아기엄마가 임신 10개월의 천신만고끝에 이제 곧 태여날 아기에게 신기려고 일찌감치 마련해두었다가 아기가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면 신겨주는 빨간 양말, 그런 빨간 양말이 얼마나 신통하고 이뻐보이는가. 그런데 사람이 늙으면 어린애가 된다더니 내 나이 저그만치 일흔셋이 되여 금년에 나도 난생처음 빨간 양말을 신어보게 되였다. 지난 섣달 그믐날밤, 음력설고정프로인 CCTV음력설야회를 보고있다가 천지를 진감하는 요란한 폭죽소리속에 계사년의 도래를 알리는 새해의 종소리가 울려퍼지자 안해는 미리 준비해두었던 새해선물을 나에게 건네주었다. 궁금해서 펼쳐 보았더니 뜻밖에도 빨간 양말이였다. “여보, 올해는 당신의 본명년(本命年)이니 이 빨간 양말을 신고 액운을 막아내면서 작년처럼 쓰러져 병원에 실려가는 일이 없도록 하세요. 금년부터는 우리 둘 다 툭툭 털고 일어납시다. 제발 더는 앓지 말고 더도 말고 덜도 말고 그저 지금처럼 이렇게 오래오래 살아갑시다.” 작년에 우리 부부가 북경에 있는 큰아들 집에 가있을 때 두사람이 동시에 입원치료를 받는 악몽 같은 불상사가 발생하였는데 올해부터는 그런 “악몽”을 다시 꾸지 말고 43년전 백년가약을 맺으며 꼭 잡았던 두손을 더욱 굳게 마주잡고 계속 이대로 남은 여생을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아가자는 안해의 간절한 소망이였다. 빨간 양말을 보자 내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전혀 없었던건 아니였지만 난 그래도 안해의 청을 액면그대로 고스란히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는 날마다 오전이면 이 빨간 양말을 신고 로간부탁구협회 활동실로 탁구 치러 다녔다. 하루는 올해 금방 정년퇴직하고 탁구 치러 온 한 한족간부가 어느새 내가 신은 빨간 양말을 보고 나에게 물었다. “사장님, 금년이 본명년인가요?”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아, 그럼 금년에 일흔셋, 저하고는 띠동갑이네요. 지금은 조선족들도 우리 한족들처럼 이런 습관을 따르는군요.” 그 친구의 말처럼 한족들은 년세가 지긋한 부모님의 본명년이 되면 자식들이 부모님께 빨간 속옷, 빨간 양말, 빨간 허리띠, 빨간 옷 등을 사드려 그해에 들이닥칠지 모를 액운을 미연에 막아내고 탈없이 무병장수하기를 기원하는  풍속습관을 가지고있다. 안해도 오래동안 한족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족들의 이런 습관을 받아들이고 그 효험을 기대해보기로 작심한 모양이다. 허다한 습관은 그 어떤 믿음에서 기인된다. 다들 좋다고 하면 그것을 믿게 되고 그러면 믿음이 생겨난다. 아울러 그 믿음이 효험이 있을수도 있다는것이 일반 대중들의 심리이다. 심리학이나 의학분야의 전문용어를 빌어 말하면 플라시보효과(Placebo effect), 자기암시효과 혹은 가짜약효과이다. 즉 실제로 아무 효과없는것을 맹신하는것으로 그 어떤 효과를 기대한다는 뜻이다. 이를테면 수면제를 장기복용하는 수면장애환자에게 수면제라고 속이고 모양과 색상이 똑 같은 비타민제를 복용시키면 수면효과를 볼수 있다고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의 병도 몸에 드는 병이자 마음에서 나는 병인 경우가 많으므로 좋다는걸 믿으면 마음이 불안하지 않아 평온을 찾을수 있고 마음이 편안하면 건강도 그만큼 좋아질수 있다. 지금은 안해의 건강이 많이 좋지 않은 상황이다. 43년전 스물네살 꽃나이에 나에게 시집올 때는 퍼그나 매력적이고 건강한 모습이였다. 헌데 나한테 시집 와서 나때문에 풍파도 많이 겪고 고생도 많이 하면서 건강이 갈수록 나빠졌다. 때문에 나에겐 안해의 소망이 담긴 빨간 양말을 거부하고 진정어린 청을 들어주지 않을 아무런 리유도 없다. 내 나이 서른이 다되여 안해를 만나 결혼할 때는 온 나라가 온통 열병을 앓고있던 “문화대혁명”시기였는데 사람들이 거의다 제정신이 아니였다. 나의 아버지가 “혁명”의 대상이 되여 감금되고 투쟁을 받게 되자 딸가진 집들에서는  “흑오류(黑五类)”의 자식인 나를 외면하였다. 감히 나에게 시집오려는 처녀는 더욱 찾아보기 힘들었다. 금쪽 같은 아들녀석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이런 비참한 처경에 몰린것을 알게 된 아버지는 갇혀있으면서도 이게 다 못난 애비탓이라고 자책하시면서 몹시 가슴 아파하셨다고 한다. 하지만 하늘의 뜻이라고나 할가. 내가 이처럼 난처한 궁지에 처해있을 때 혜성처럼 내앞에 나타나 천사마냥 나와 백년해로를 약속한 처녀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의 안해이다. 가정배경이 여의치 않다는 딱 한가지 리유때문에 178센치메터 훤칠한 대학생도  탐탁치 않게 여기는 부모님의 거센 반대도 아랑곳하지 않고 고집스레 기어코 나를 선택한것도 나의 안해였고 그 어느 집에서나 딸을 시집보낼 때 어김없이 다 마련해주는 첫날이불도 안해줘서 낡은 이불에 새 이불겉감과 이불안을 얻어서 씌워가지고 시집 온것도 나의 안해였으며 결혼 첫날 큰상을 받을 때 꽃너울을 쓰면서 입어야 할 하얀 한복도 마련해주지 않아 삼촌댁이 시집올 때 입었던 첫날옷을 빌려입고 시집 온것도 나의 안해였다. “혁명”이란 이름아래 “정치가 제일”이랍시고 모든걸 압도하던 그 시절에 투쟁대상으로 몰린 사돈어른이 얼마나 마음에 걸리고 마뜩잖았으면 귀한 딸자식을 그렇게 시집보냈겠는가! 그뿐이 아니였다. 설상가상으로 갓 장가를 간 신랑이 결혼해서 불과 한달만에 “5.16반혁명분자”라는 죄명으로 구속되여 심사를 받게 되였으니 그 충격이야말로 백주에 악몽이요,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였다. 며칠후 공안인원들이 들이닥쳐 가택수색을 하였다. 그들은 내가 대학을 졸업하면서 집으로 가져온 서적들과 노트들을 낱낱이 뒤적여 “죄증”을 찾아내려고 설쳐댔다. 뒤늦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장모님이 신랑이고 시집이고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돌아가자고 막무가내로 안해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허지만 어디서 그런 용기와 힘이 솟아났는지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내곁을 지켜주었다. 그때로부터 나는 장장 8년동안 “반혁명”루명을 쓰고 살았다. 그 길고 험악한 세월에 한결같이 나를 믿어준 사람이 오직 안해뿐이였다. 당시 나는 로동개조를 하다가 갑작스레 허리를 다치게 되였다. 그때 마침 안해가 첫아이를 임신하였는데 나는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넉달씩 두번이나 꼼짝도 못하고 누워있었다. 그때 안해는 예산출산일이 눈앞에 다가와 반달 밖에 남지 않았는데도 만삭의 몸으로 온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수도물에 가서 물동이로 물을 길어다가 나에게 밥을 지어주었다. 그때 다쳤던 허리가 10년이 지난 1981년에 다시  척추원판탈출증으로 재발하였다. 그리하여 다리근육이 위축되고 하지마비가 와서  제대로 걸을수조차 없었다. 나는 부득불 북경대학병원에 입원하여 척추수술을 받았는데 다른 사람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하였다. 그때도 불철주야 나의 곁을 지켜준 사람이 나의 안해였다. 긴병에 효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안해는 지금까지 다섯번이나 뇌졸중으로 쓰러졌던 나의 건강을 회복시켜주기 위해 일편단심으로 나의 간병을 도맡았다.  그리고 당뇨병으로 6년동안이나 식단조절을 해야 하는 나에게 끼니마다 건강식을 챙겨준 사람도 안해였다. 내가 지금 뛰여다니며 탁구를 칠수 있는것은 모두 안해의 덕분이다. 이처럼 안해는 나와 결혼해서 지금껏 다사다난하고 고달픈 인생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직도 매사에서 나를 살뜰하게 보살핀다. 본명년이 돌아오자 새삼스럽게 나에게 빨간 양말을 선물한것만 보아도 그렇다. 여기에는 나와 함께 더 오래 살자는 간곡한 소망이 깃들어있다. 머리가 허연 늙은이가 주책없이 빨간 양말을 신고다닌다고 사람들이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소뿔도 제각각이라고 내가 좋고 안해가 흡족해 하면 그만이 아닌가. 모든것이 다 생각하기나름이다. 그래서 나는 안해의 그 갸륵한 마음에 보답하고저 열심히 빨간 양말을 신고 다닌다. 진정한 사랑은 받는것보다 주는것이라고 했다. 나는 안해와 결혼해서 43년이란 긴긴 세월을 함께 살아왔지만 준것이 적고 받은것이 많다. 이제 여생은 안해한테 주면서 베풀면서 살고싶다. 안해의 손이 되고 안해의 발이 되여 안해에게 기쁨을 보태주고 아픔을 덜수 있는 일이라면 소갈데 말갈데를 가리지 않으리라.   (2013년 4월 28일 연길에서) [2013년 제9호 제172--176페지]            
19    백양나무꽃씨 댓글:  조회:2399  추천:3  2013-07-23
수필 백양나무꽃씨 강룡운   1 나의 옛기억을 더듬어보면 내가 어렸을 땐 우리 이 고장에는 백양나무가 유난히 많았다. 우리 동포들이 아기자기 모여사는 고장이면 그 어데라없이 가는곳마다에서  우리 동포들의 얼굴을 자주 볼수 있었듯이 마을근처나 학교주변이나 길녘이나 강변에서 언제나 흔히 볼수 있는 수목이 바로 백양나무였다. 나무 잎사귀가 둥글넙적한 우리 겨레들의 얼굴을 닮아서인지 아니면 나무껍질이 희슴프레하여 마치 우리의 선인들이 옛날부터 많이 입고다니던 베천으로 만든 허름한 바지저고리나 두루마기와 비슷하여서인지 백양나무는 마냥 우리에게 친근한 존재였다. 해마다 만물이 소생하는 봄이 오면 백양나무는 이파리가 채 피여나기도 전에 겨우내 몸속에 한가득 품고있던 자양분을 유전인자에 몰부어 제나름대로 일찌감치 씨앗을 잉태하여 새하얀 꽃씨를 온 누리에 날려보낸다. 우리 백의 동포들을 많이 닮은 민들레의 홀씨 같은 새하얀 꽃씨를 수없이 천하 방방곡곡에 날려보낸다. 이 꽃씨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니다가 땅에 떨어져 흙속에 묻히여 새봄을 맞아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리게 되면 또 새로운 군락을 이루게 되는것이다. 때문에 새하얀 그 꽃씨가 나의 눈에는 꼭 마치 우리 겨레의 무한한 번성을 축원하는 꽃보라와도 같이 곱게 안겨와 나는 우리 겨레의 미래에 대해 늘 희망으로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백양나무는 경제림 조성에서는 락엽송과 같은 수종에게 밀리우고 가로수가운데서는 관상가치가 더 높은 다른 멋쟁이  나무들에게 밀려나면서  점차 우리의 주변에서 줄어들기 시작했다. 올해도 백양나무꽃씨가 하늘을 뒤덮고 하늘하늘 날아예는 화창한 봄날이 찾아왔건만 백양나무가 워낙 예전보다 많이 줄어서인지 눈에 잘 띄이지 않고 하늘을 날아예는 벡양나무의 새하얀 꽃씨들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다.   2. 해해년년 봄이면 만천하에 흩날리는 새하얀 백양나무꽃씨를 중국의 고대문인들은 양화(杨花)라고 불렀다. 즉 백양나무꽃이라는 말이다. 일설에 따르면 고대문인들의 시구에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양화”는 백양나무꽃씨가 아니라 버드나무꽃씨라는 주장도 있다. 백양나무꽃씨든 버드나무꽃씨든 그것이 결코 꽃이 아니고 꽃씨임을 그네들도 분명히 잘 알고있었던것 같다. “사화환사비화(似花还似非花)”라는 소동파의 “양화사(杨花词)”가 이를 잘 말해준다. 얼핏 보기엔 꽃과 흡사하여 꽃이라고 이름하였지만 결코 꽃은 아니라고 대서특필하였으니 천만 지당한 말씀이다. 백양나무꽃씨는 백양나무꽃이라고 불리우지만 필경 백양나무의 꽃이 아니고 백양나무의 씨앗인것이다. 깃털같은 새하얀 천사의 날개를 달고 날아다니는 백양나무꽃씨 하나를 손에 잡아쥐고 유심히 살펴보면 새하얀 날개속에는 티끌 같은 새까만 알맹이가 박혀있는데 그게 바로 백양나무의 유전인자를 간직한 씨앗이다. 그것이 바람타고 이리저리 날아다니다가 어느 한곳에 정착하여 흙속에 묻히여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리면 백양나무 애나무로 자라나게 되는것이고 또 한데 모여 자라면 새로운 군락을 형성하여 그네들의 새동네가 이루어지는것이다. 아마 백양나무꽃씨의 이같은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적의미때문에 백양나무꽃씨가 예로부터 줄곧 문인묵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는지도 모른다. 고대문학사를 한쪽에 저쳐놓고 중국의 당대문학사를 살펴보아도 옛문인들 못지 않게 백양나무꽃씨에 관한 멋진 시구를 남긴 위인이 계신다. 그분이 바로 중국 당대의 가장 위대한 정치가이자 시인이였던 모택동주석이다. ——나는 어엿한 양씨를 잃고 그대는 류씨를 잃었네. 양류는 훨훨 날아 하늘 높이 구중천에 올라가 오강더러 무엇이 있냐고 물었더니 오강은 계수나무꽃으로 빚은 계화주를 받쳐들고 나오더라. 이것은 1957년 5월에 쓴 모주석의 “접련화ㆍ리숙일에게 화답하노라”의 첫대목이다. 모택동은 혁명을 위해 희생된 자신의 애처 양개혜렬사와 리숙일녀사의 부군이였던 류직순렬사의 성씨가 양(杨)씨와 류(柳)씨임을 감안하여 혁명을 위해 먼저 떠나간 이들 두분을 양류(杨柳)라 지칭하고 백양나무꽃씨(杨花)와 버드나무꽃씨(柳絮)에 비유하여 양류는 훨훨 날아 구중천 월궁에 이르러 오강의 환대를 받았다는 기상천외한 시상(诗想)을 펼쳐보이면서 혁명을 위해 몸바친 혁명선렬들의 충혼이 영생불멸하리라는 혁명적영웅주의를 찬미한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양류는 그저 백양나무꽃씨나 버드나무꽃씨가 아니라 혁명선렬들의 충혼을 이르는 말이다. 즉 고매한 인간의 넋을 말하는것이다.   3. 그러면 백양나무꽃씨의 넋은 무엇일가? 그것은 그 꽃씨속에 숨어있는 유전인자이다. 이 세상 모든 생명의 존재 리유는 자신의 유전인자를 보전하여 물종의 존속을 유지하는것이라고 한다. 백양나무는 자연환경에 잘 적응하여 꼬챙이를 땅에 꽂아도 살아나는 강한 생명력을 소유한 수종이다. 지금은 인간들이 백양나무를 식수할 때면 나무가지를 꺾어심는 무성번식방법을 사용하고있지만 자연환경에서의 백양나무는 초봄에 벌써 나무가지에서 키워낸 이삭처럼 생긴 꽃줄기들을 땅에 떨어뜨려 일광과 춘풍에 건조된 꽃씨가 터져나오게 하고 자연의 풍력을 빌어 바람따라 산지사방으로 날려가게 하여 대자연속에 자신의 유전인자를 남기는것이다. 백양나무는 암수딴그루 나무이다. 즉 암나무와 수나무가 따로따로인 수종이다. 암나무에는 암꽃이 피고 수나무에는 수꽃이 피는데 수꽃이 피여 화분을 바람에 날려 보내면 암나무에 핀 암꽃이 수분하여 열매를 맺게 되므로 식물학에서는 곤충을 매개로 하기에 충매화(虫媒花)로 분류되는  버드나무꽃과는 왕창 달리 백양나무꽃은 바람을 매개로 하는 꽃이라 하여 풍매화(风媒花)로 분류한다. 암나무와 수나무가 풍력의 힘을 빌어 유전인자의 새로운 조합을 이루어냄으로써 수분과정을 완성하여 이 세상 만물속에 자신들의 후대를 남길수있는 꽃씨를 만들어내여 하늘로 날려보내는것이다. 때문에 백양나무군락에는 언제나 자연스럽게 암나무와 수나무의 혼거상태가 유지되고있는것이다. 만약 백양나무숲속에 수나무만 있고 암나무가 없다면 백양나무꽃씨도 이 세상에 태여나지 못하게 될것이다. 이것은 누구도 엇설수 없는 자연의 섭리이다. 일개 말못하는 나무가 다 이러할진대 인간세상이야 더 말해 무엇하랴. 광활한 대지에 얼기설기 여러 갈래 뿌리를 깊숙히 내리박고 하늘을 떠이고 꿋꿋하게 살아가는  백양나무처럼 우리 겨레들도 이 땅에 뿌리내려 150여성상을 세세손손 대를 이어 남못지 않게 떳떳하게 살아왔건만 언제부터인가 민족존속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처녀애들이라고는 거의 씨를 말린 시골에서 갓난아기의 울음소리를 들어본지도 퍽 오래 되였다. 이것은 우리 겨레들이 오래동난 살아오던 시골마을들이 지금은 자연계에서도 그 류례를 찾아볼수 없는 수나무만 자라고 암나무가 자취를 감춘 그런 백양나무숲과 같은 꼴이 돼버렸다는 얘기이다. 백양나무는 그래도 나무가지를 꺾어심는 무성번식이란 방법이 따로 있어 꽃씨가 없어도 번식이 가능하지만 짝을 이루지 못하고 늙어가는 우리 로총각들은 이 세상에 태여나서 자신의 유전자마저 남기지 못하게 되였으니 이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란 말인가!   4 모택동주석은 혁명적랑만주의수법으로 백양나무꽃씨와 버드나무꽃씨를 혁명렬사들의 충혼에 비유하여 불후의 시편을 남기였는데 나는 백양나무꽃씨를 볼때마다 어쩐지 나의 뇌리에는 그저 바람따라 산지사방으로 흩어져가는 우리 겨레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올해도 어김없이 백양나무꽃씨가 흩날리는 봄이 찾아왔다. 요즘 우리 주변에서 백양나무가 예전보다 많이 줄어들고 봄이면 하늘에서 흩날리는 백양나무꽃씨가 눈송이처럼 온 하늘을 뒤덮던 그런 광경을 다시는 볼수 없게 되였지만 그래도 부질없이 흩날리는 백양나무꽃씨의 공중 춤사위는 여전히 우리 이 고장에서 자주 보게되는 봄날의 풍경이다. 그런데 지금의 백양나무꽃씨들은 하늘 높이 훨훨 날아다니다가도 자신의 모체가 싹트고 뿌리내렸던 고장이나 그 린근 지역에 내려와 싹티우고 뿌리내릴 기미라고는 좀처럼 보이지 않고 그저 무작정 고향을 등지고 멀리멀리 타향으로만 날아간다. 멀리멀리 날아가더라도 그냥 하늘공중에서만 맴돌지 말고 산좋고 물좋은 고장을 만나면 땅에 내려와 흙속에 파묻혀 싹을 티우고 뿌리를 내려 자리잡는곳마다에서 더욱 번성한  백양나무군락을 이루었으면 하는것이 나의 자그마한 소망이다. .  (2013년 봄 연길에서) [2013년 제4호 제116-119페지]  
18    어머니의 사월초파일 댓글:  조회:2588  추천:7  2012-06-06
수필   어머니의 사월초파일 강룡운     사월초파일(음력 四月初八日)은 석가모니의 탄생일, 불교의 기념일중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그래서 불교신자가 많은 한국에서는 이날을 “부처님 오신 날”이라 지칭하고 전국적인 공휴일로 정하기도 하였다. 내가 어렸을 땐, 석가모니의 탄생일이요 “부처님 오신 날”이란건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사월초파일이 어머니가 각별히 명심하는 날이란건 알고있었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내가 서란현 막석이란 곳에서 태여나 첫돌생일을 쇠기도 전에 한번은 좀 크게 앓았다고 하는데 어머니의 속이 까맣게 타서 재가 되도록 마음고생을 많이 시켰다는것이였다.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찾아다니며 헤매는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가는 숨을 겨우 몰아쉬는 나의 그 갸냘픈 모습을 눈여겨본 누군가가  이런 애는 출가한 스님더러 이름을 지어달라고 해서 새 이름을 지어주면 혹시 운명이 바뀌여질지도 모른다고 귀뜸해 주었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날 걸식하는 스님 한분이 동냥하려 집으로 찾아왔기에 어머니는 쌀 두바가지에 정갈한 음식을 후히 드리면서 등에 업혀 칭얼대는 나를 가리키며 이애한테 이름을 지어달라고 청을 들었다고 한다. 그러자 그 스님은 어머니의 후한 대접이 너무 고마워 차마 거절할수 없었던지 “룡 룡(龙) 구름 운(云)”, 이렇게 두 글자를 적어주고 이애가 첫돌까지만 무사히 넘기면 앞으로 장수할거라는 덕담까지  남기고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지금껏 줄곧 나를 따라다니는 “룡운”이란 이 두 글자가 바로 그 스님이 나에게 지어준 이름이란다. 나의 어렴풋한 기억의 쪼각들을 한데 모아보면 어머니는 불교신자, 부처님을 믿고 섬기시는분이였다. 아마 내가 일곱살때였을것이다. 그때 나는 조양천에서 어머니를 따라 한 자그마한 사찰에 갔댔었는데 거기서 황금옷을 입은듯한 멋진 불상들을 처음 보았던 기억이 아직도 머리속 한구석에 남아있다. 맨날 수수밥만 먹던 그 시절에 어머니가 갖고간 새하얀 입쌀로 밥을 지어놓고 스님과 함께 밥 한끼 먹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유난히 향긋하던 그 밥맛이 어쩐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집은 워낙 길림지구의 서란, 막석, 구전 등 여러 곳을 옮겨다니며 살았었는데8.15광복을 맞고 길림에 나와 둘째고모네와 한데 모여서 살다가 1946년  국민당군대가 길림으로 처들어온다는 소문을 듣고 할아버지, 할머니를 따라 큰 할아버지, 둘째 할아버지가 살고계시는 조양천으로 나오게 되였다고 한다. 그런데 길림에서 우리와 이웃하여 함께 살던 둘째고모네는 미처 자리를 뜨기도 전에 국민당의 폭격을 맞아 여섯식구중 네식구가 목숨을 잃게되는 참사가 발생하였다. 이 비보가 전해오자 우리 집은 련며칠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국민당이 길림을 점령하고 교하를 지나 여기 연변에까지 쳐들어올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떠돌아 한참 민심이 불안하던 바로 그때에 어머니는  우리집 식구들의 안녕을 보우해 주십사하고 부처님께 소원을 빌기 위해 그 구차한 살림에도 어디 가서 벼를 구해다가 정성들여 절구에 빻고 또 빻아서 티끌 하나 볼수 없는  새야얀 “공양미”를 마련해 가지고 나를 데리고 사찰에 찾아가 불상앞에 향을 피워올리고 기도를 드린게 아닌가싶다.     내가 조양천에서 소학교를 다닐 때 옛 기억을 더듬어 그 사찰이 있던 곳에 찾아가 보았지만 불상이나 스님은 다시 찾아볼수 없었다. 토지개혁이후 여러차례 정치운동을 겪으면서 항미원조 전쟁을 치르는 와중에 그 구리로 만든 불상들은 혹여 포탄을 만드는 군공장에 들어가 탄피로 되였을지도 모른다.     사찰은 없어지고 스님은 어디론가 사라졌어도 해마다 사월초파일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언제나 잊을세라 명심해서 기다리는  사월초파일이 되면 어머니는 늘 미리 준비해 두었던 “공양미”를 갖고 오전엔 어디론가 가셨다가 오후가 되면 집으로 돌아오시군 하였다. 해마다 부딪치는 일이라서 나는 언젠가 궁금증을 풀어보려고 어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너희들이 잘 되라고 여태껏 불공을 드려왔는데 지금은 찾아갈데가 없어서 그저 조용한 강변에 가서 갖고 간 쌀로 밥을 지어 놓고 기도만 드리고 온다”는것이였다.     내가 초중 1학년때 청년단조직에 가입하여 2학년에 올라오면서부터 전교 단총지위원회 선전위원 책임을 지고있을 때였다. 한번은 우리 반 반주임이며 물리과 과임인 선생님의 입단신청을 심의하는 단총지위원회 회의에 참가하게 되였는데 그때 그 선생님은 천주교를 신앙하고 성당에 다니는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살고있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의 입단신청이 부결되는것을 목격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이런 일을 경험하면서 어머니가 사월초파일이면 어디론가  다니는게 어쩐지 좀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께 그런게 다 미신이고  부질없는 노릇이니 이젠 그만 두시라고 말씀드린적이 있다. 그랬더니  어머니는 “다 너희들이 잘 되라고 하는 일이다. 이건 내 마음이다. 너희들에게 해가 될게 하나도 없으니 걱정 말아.” 하시고는 당신이 운명하는 1984년까지 몇십년동안 해마다 사월초파일이 되면 한번도 어김없이 어디론가 조용히 다녀오시군 하였다.    1954년 우리나라 제일 첫번째 헌법으로부터 종교신앙의 자유는 줄곧 기타 여러가지 자유와 함께 명문으로 헌법에 규정되여 있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그것은 일종 형식상, 지면상의 규정이였을뿐 종교신앙의 자유란 지극히 제한된 자유였으며 보기좋은 허울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문화대혁명때는 극좌적인 사조가 홍수처럼 전국에 범람하여 종교신앙의 자유란 그 허울조차 깡그리 부셔버리고 모든 종교신앙을 무자비하게 탄압하는 미증유의 비극을 초래하기도했다.    개혁개방을 맞아 국문이 열린후 나는 여러번 한국에 다녀왔다. 한국에 갔을 때 성당에도 가보고 교회에도 가보고 신부와 목사님들의 설교도 들어보았으며 불국사나 해인사와 같은 사찰에도 가보았다.     나는 신앙적으로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네들 신봉자들의 주장이 도대체 무엇이길래 몇천년 세월이 흘렀어도 왜 지금까지 대부분의 인류가  아직도 종교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거기에 매료되여있는지 알고싶었다. 그래서 나는 서울 힐튼호텔에 주숙하고있을 때 기증용으로 놓아두는 《성경》을 갖고 돌아와 읽어보기도 하였고, 충천도 서천의 한 목사님이 나에게 선물한 큰글자 《통독성경》을 갖고 돌아와 안도방직공장에서 로동개조를 하면서도 시간을 짜내 《자본론》을 통독하던 그런 끈질긴 의지력으로 거의 1년이란 시간을 할애하며 통독하기도 하였고, 기독교와  불교와 이스람교 등 세계 3대 종교에 관한 서적들도 더러 읽어보았다.     이런 종교관련 서적들을 읽으면서 나는 알고도 모를것 같은 그런 아리숭한것들이 너무 많아 뭘 좀 알았다고 떠들어댈건 조금도 없지만 아무튼 종교란 우선 문화라는것은 알게되였다. 인류의 력사와 문화는 종교를 떠나서는 설명할수 없거니와 리해할수도 없는것이다. 여기까지 써내려오다보니 갑자기 백암송(白岩松)이 쓴 《행복했습니까?(幸福了吗?)》라는 책에서 읽었던 일화가 머리에 떠오른다.     세계가 알아주는 우리 나라 대석학 계선림(季羡林)선생이 해방군 301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중앙의 주요령도자 한분이 문병을 갔다고 한다. 두분은 많은 얘기를 나누다가 인간의 령적인 문제를 담론하게 되였는데 령도자분께서 계선림선생에게 “주의(主义)와 종교 이 두가지중에서 어느것이 인간들속에서 먼저 사라질거라고 보십니까?”라고 물으셨다고 한다. 그러자 계선림선생은 조금도 주저함이 없이 “아무때든 인간이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지지 않는한 아무래도 주의가 종교보다 하루라도 더 먼저 사라질겁니다.”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우리가 보건대 종교가 아무리 허황한것이라 할지라도 그 허황한 종교가 오히려 맑스주의와 같은 여러가지 정치적이데올로기보다도 오히려 더  장수할거라는 얘기다. 이것을 좀 더 실감나게 바꾸어 말하면, 례를 들어 인류 력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인 책  두 권을 놓고 비유해서 말한다면, 칼 맑스의《자본론》 신봉자들보다 《성경》을 읽는 예수님의 신자가 이 지구상에서 얼마간이라도 더 오래동안 생존할지  모른다는 말이 아니겠는가?.     인간은 생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마냥 죽음의 공포속에서 떨고있는 심약한 존재들이다. 그래서 인간은 예로부터 자신의 힘으로 이겨낼수 없거나 자신의 지혜로는 도저히 해결할수 없는 난제에 부딪치면 왕왕 그 어떤 초자연적인 힘, 초자연적인 존재에 기대여, 이를테면 부처님이나 하느님에게 기대여 죽음의 공포에서 해탈해보려고 시도하였던것이다. 이것이 바로 종교가 산생되고 지금껏 존재하고 또 앞으로도 장구한 세월 계속 존재할수 있는 여러가지 원인중의 하나일것이다. 이러한 인간의 령적인 신앙문제는 결코 그 어떤 강압적인 수단으로 해결될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맑스주의정당은 종교신앙의 자유를 주장한다. 즉 종교를 신앙할수 있는 자유와 종교를 신앙하지 않을수 있는 이 두가지 자유를 동시에 주장하는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어쩌면 종교를 마치 홍수나 맹수처럼 너무 무서워했는지도 모른다. 맑스주의가 진리라면 종교를 무서워할 아무런 리유도 없지 않은가? 유물론이 유심론을 겁나한다면 그것을 어찌 진리라고 말할수 있겠는가? 부모가 종교를 신앙한다는 그 리유 하나만으로 그 부모의 자식이 공산당을 따라 청년단에 가입하겠다는 그런 진보적인 소망마저 묵살해버릴수 있다면 그게 어디 진정한 신앙의 자유란 말인가?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이러한 사례는 결코 개별적인 사례가 아니였을것이다. 이러한 사례는 두말할것 없이 광범위한 보편성을 띠고있었을뿐만 아니라 그보다도 엄청 어마어마한 일들도 무지무지 많았을것이다. 돌이켜보면 유치하기 그지없다.    나는 지금도 어머니가 불공을 드리던 일들을 생각하면 평생을 동서방문화연구,  특히는 종교연구에 온갖 정력을 몰부었던 계선림선생님의 그 의미심장한 말씀에 다소 리해가 간다. 어머니도 역시 죽음에 대한 공포로 말미암아 부처님을 믿게 되였을것이다. 어머니로 말하면 한살도 되기전에 병에 시달려 경각을 다투는 어린 자식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 가정 식구들이 국민당의 폭격에 목숨을 잃게 되는 그런 참극을 모면하기 위해, 일곱이나 낳았어도 셋밖에 남지않은 자식들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해 부처님을 모신 사찰을 찾아다니시였고 사찰마저 사라진후에는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강가에 가서 “부처님”께 “불공”을 드렸을것이다. 나는 나에게 이름을 지어준 그 스님의 덕담때문에 첫돌이란 어려운 고비를 넘기고 “인생칠십고래희”의 고개를 넘어 지금껏 살고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리고 나는 어머니께서 그토록 경건한 마음으로 드팀없이 불공을 드린 그 부처님 덕분에 여러번 위험천만했던 인생의 험난한 고비들을 하나하나 용케도 뛰여 넘어왔다고 믿지 않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했다. 지성이 지극하면 돌에도 꽃이 핀다고 했다. 나는 신앙적으로는 부처님이나 하느님을 믿지 않지만 하늘도 감동시킬수 있고 돌에도 꽃을 피울수 있는 어머니의 그 지극한 정성의 힘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첫돌후에는 그나마 큰 탈없이  무난히 자랄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그처럼 어려운 가정형편에서도 대학공부까지 다 할수 있었고, 어머니의 그 다함없는 사랑, 그 지극한 정성이 있음으로 하여 문화대혁명때 “반혁명”의 루명을 쓰고 로동개조를 하면서 허리를 다쳐 거의 불구자신세가 되였던 내가 북경에 가서 수술에 성공하여 마침내 기적적으로 다시 건강을 되찾을수 있었다고 믿는다.   믿음이 곧 신앙이다! 이것이 나의 신앙이다!   (2011년 12월 10일 연길에서)   [2012《장백산》3 (5-6월호) 158-164페지/ 2013년03호77-81페지]
17    특효약광고 댓글:  조회:2470  추천:2  2012-05-22
수필 특효약 광고 강룡운 . 타지방 사람들이 우리 연길에 오면 이곳엔 노래방이 많고 사우나가 많고 약방이 많다고들 말한다. 이 “삼다”현상중 세가지가 다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수자적으로 보면 아마 약방이 제일 많을것이다. 그중엔 “신특대약방”이란 약방도 있다. 신특대약방이란  새로 나온 약이거나 특효약을 판매하는 약방이란 상호(商号)가 아니겠는가. 지금 중국의 광활한 대지우에서 도시마다 그 어데라 할것없이 한낮에 아무때든 길가에 나서면 심심찮게 건네주는 전단지들을 받게 되는데 얼핏 들여다 보아도 거기엔 약광고가 많고 그중에서도 특효약광고가 유난히 많다. 이런 광고들을 훑어보면 천하에 고치지 못하는 병이라고는 거의 없는것 같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 흔한 특효약의 혜택을 보지 못하고 병원엔 항상 환자들이 차 넘친다. 북경에 계시는 나의 형수님은 1976년 당산대지진때 그 여진때문에 아빠트에서 주무시지 못하고 림시천막에서 생활하던 그 시절부터 벌써 35년동안이나 류마티스(类风湿)란 괴이한 병에 걸려 갖은 고생을 다 하면서 좋다는 약은 별의별 약을 다 써보았지만 여전히 효험을 보지 못하고 휄체어에 앉아서 고달픈 여생을 보내고있다. 언젠가 내가 형수님께 류마티스를 고친다는 광고가 많더라는 얘기를 하였더니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어 웃으시면서 “말도 마오. 그건 다 광고요. 거짓말이요. 나도 설마가 사람을 죽인다고 행여나 해서 그런 약들을 다 사서 써보았는데 돈만 날렸지 지금도 이 모양 이꼴이라오. 진짜 그런 약이 발명되였다면 진작 노벨의약상이라도 탔을텐데 그런 얘기는 아직 누구도 들어보지도 못했지 않았소.”라고 말씀하시면서 고소를 금치 못하는것이였다. 말그대로 전단지의 특효약 광고들을 살펴보면 류풍습 같은 병은 두말할것도 없고 인류의 제일 큰 난제의 하나라고하는 각종 암도 못 고치는 병이 아니란다. 광고는 광고대로 약장사들의 상술이지만 세상에 특효약이 전혀 없는것은 아니다. 1929년 영국의 학자 플레밍(Fleming)이 항생제중에서 처음으로 페니실린을 발견하고 영국의 병리학자 플로리(Florey)가 그에 대한 끈질긴 연구끝에 드디어 페니실린의 제약공정을 현실화하고 페니실린의 전염병에 대한 약효를 발견함으로써1945년 노벨생리의학상을 수상했다. 그뿐만 아니라 인류는 질병과의 투쟁에서 더 많은 특효약들을 발견하고 제조해냈는데 각종 세균의 감염으로 인한 질환을 치료할수 있는 천연항생제만 해도 이미 알고있는것이 만여가지가 넘는다고한다. 무릇 약이란 모두 약이 일곱이면 독이 셋이란 말이 있다. 다시 말하면 약이란 다 일정한 치료효과를 갖고있는 동시에 부작용이 따른다는 얘기다. 지금 항생제의 람용과 오용으로 하여 각종 병원균(病原菌)이 항생제에 스스로 저항할수 있는 내성이 점점 강해져 병치료에 더 큰 어려움을 조성하고있다는것이 인류의 건강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새로운 문제로 나서고있다. 나도 날마다 약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이다. 쉰살이 되기도 전에 고혈압 진단을 받고 오늘까지도 계속 혈압약을 장기 복용하고있다. 그래도 특효약이 없어서인지 50대중반에 덜러덩 중풍에 걸려 입원치료를 받았었는데 그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벌써 세번이나 뇌혈전, 뇌경색으로 하여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4년전에는 또 당뇨병진단까지 받았다. 연변병원 내분비내과 정박사님은 나에게 2형 당뇨병환자라는 진단을 내리면서 당뇨병엔 인슐린이 특효약이지만 장기적으로 인슐린투입에 의존하면 부작용이 있으므로 좋기는 음식조절과 운동료법에 약물치료를 적당히 결합하는것이 가장 바람직한 치료방법이라고 알려주었다. 그의 지론에 의하면 뇌혈전, 뇌경색과 당뇨병을 유발하는 고혈압, 고혈지, 고혈당은 모두 영양과다섭취와 운동부족과 련관되므로 그 병인을 통제하고 병을 치료하려면 인슐린등 약물투입보다도 음식조절과 운동료법을 우선시해야한다는것이였다.  중국말에 당뇨병 치료에는 “입단속을 잘 하고 팔다리를 많이 움직이라(管住嘴,迈开腿)”는 노하우가 있다. 병은 입으로부터 들어온다는 말이 있으니 입단속부터 잘하는 동시에 운동을 많이 하라는 충고이다.   돌이켜 보면 내가 고혈압으로 인하여 뇌혈전, 뇌경색, 당뇨병에 시달린것도 다름아닌 나의 입때문인것 같다. 나는 워낙 먹새가 좋은 놈이였다. 그래서 대학교때는 늘 량표가 부족하여 다이어트에 신경을 쓰는 녀학생들의 지원을 받아야 했고 농촌에 내려가 농업생산을 지원할때는 한끼에 찐빵 한근두냥을 먹어도 성차지 않아했으니 매달 35근씩 주는 량권이 모자라지 않을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게 살면서 제대로 먹지 못해 한이 맺힌 놈이였던지라 개혁개방을 맞아 생활이 풍족해지자 얼씨구좋아라 허리띠를 풀어놓고 좋은것만 찾아 먹기 시작한것이 바로 그게 화근이 되여 그만 탈이 나게된것이였다. 따지고보면 이게 모두 가난콤플렉스에서 기인된 과욕때문이였다. 옛 성인들도 언녕 과유불급이라고 가르쳤건만 된장에 생파를 찍어먹어도 살이 찌기 시작할때는 쇠고랑이를 삼켜도 다 녹여낼것만 같았다. 그런 놈이 집살림이 점차 펴이면서 하루 삼시 먹고싶은걸 맘대로 먹는데다가 사업의 수요랍시고 손님접대가 자주 이어지면서 거의 날마다 진수성찬을 접하게 되였으니 영양과다섭취는 블보듯 뻔한 일이였지만 그때까지만해도 아직 건강상식 무지몽매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었다. 결국 쇠고랑이를 녹여내기는커녕 과다섭취한 지방질과 탄수화물도 제대로 삭이지 못하여 점점 체중이 늘어나더니 그만 팔자에도 없는 “맥주배”가 나오기 시작했다. 게다가 수입이 많으면 그만치 지출도 많아야 균형을 이루어 건강을 유지할수 있었을텐데 날마다 차타고 출퇴근하고 이 사무실에서 저 사무실로 걸어다는것이 고작이였으니 운동부족으로 몸에는 군살이 찌고 비게덩이가 늘어나고 앞배가 점점 나와 과다한 지방이 혈관을 압박하는데 혈압이 아니 올라갈수가 있었겠는가. 나는 재직시 뇌졸증에 걸려 그렇게 고생하면서 겨우 금연에는 성공했지만 정년퇴직후 당뇨병 진단을 받고서야 뒤늦게나마 겨우 입단속에 들어갔다. 육류와 기름진 음식은 멀리하고 채소를 많이 먹고 정제된 밀가루나 입쌀은 적게 먹고 잡곡을 주식으로 삼으면서 옛날 가난에 쪼들리던 그 시절의 밥상으로 되돌아갔다. 어쩌면 “초식동물”이 “육식동물”로 되였다가 다시 본연의 “초식동물”로 되돌아온 셈이라고나 할가.  그리고 의사선생님의 권유대로 규칙적인 운동을 시작했다. 4년전부터 탁구채를 사가지고 탁구를 치기 시작했다. 소학교 다닐때 목수일하는 친구의 아버지가 엷은 널조각을 깎아 만들어준 탁구채를 갖고 여름방학때 학교에 가서 흑판을 책상위에 엎어놓고 처보기 시작했던 그 탁구를 70고개를 바라보는 시점에 다시 손에 쥐게 되였던것이다. 뭐니뭐니 해도 늘그막엔 건강이 제일이라고 뒤늦게 셈이 들어 건강을 챙기면서부터 거의 날마다 한시간씩 탁구운동을 견지했더니 드디어 기적이 발생했다. 음식조절과 더불어 운동료법이 효험을 보기 시작하여 약물치료 석달만에 의사선생님께서 혈당이 정상으로 되돌아왔으니 약물치료는 이제 그만 중단해도 된다는것이였다. 그때로부터 벌써 4년이 지나갔다. 일주일에 한번씩 혈당을 체크하고 1년에 한번씩 건강검진을 받지만 혈당은 여전히 정상이다. 그 비결이 바로 엄격한 음식조절과 규칙적인 운동을 견지한데 있다. 작년에 연변병원 내분비내과에 재검진 받으러 갔더니 정박사님은 많은 당뇨병환자들 앞에서 “나는 당뇨병 치료를 오래동안 해왔지만 이 아바이처럼 딱 석달만 약을 자시고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하는 환자는 처음 보았습니다. 당뇨병에 걸리면 모두 이 아바이처럼 치료하면 됩니다”라고 하면서 나더러 계속 음식조절을 잘하고 운동만 잘하면 다시 재검진 받으러 오지 않아도 된다는것이였다. 당뇨병은 치유되는 병이 아니다. 혈당을 정상으로 유지한다고해서 병이 완전히 나아지는것은 아니다. 언제라도 음식조절을 등한시하고 규칙적인 윤동을 견지하지 않으면 또다시 당뇨병증세가 나타나게 된다는것이 정박사님이 나에게 준 경고메시지이다. 그래서 나는 그 어떤 연회석상에 가도 절대 탐식하지 않고 청도나 북경의 아들집에 가 있을 때도 “약대신 탁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면서 먼저 탁구장이 어디에 있는가부터 살펴보고 뻐스를 타고 날마다 탁구치려 다녔다. “생명은 운동에 있다”는 명언은 나의 몸에서도 그대로 체현되였다. 비록 체중은 80키로 이상에서 70키로이하로 내려왔지만 10년전 정녕퇴직할 때 병약하고 로쇠한 그 모습은 어디로 사라지고 지금은 온몸에 활력이 넘쳐 날마다 씩씩하게 로간부국 활동실로 탁구치러 다닌다. 그래서 70고개를 넘긴 지금도 옛직장의 젊은이들과 탁구시합을 해보면 나를 손쉽게 이기는 선수가 그리 많지 않다. 나는 나의 몇년간의 체험을 통해 다른 병은 잘 몰라도 당뇨병에는 그래도  음식조절과 운동료법만한 특효약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유명한 페니실린도 어떤 환자들에겐 과민반응이 있어 과민반응시험을 먼저 해보고서야 약을 투입할수 있는것처럼 운동료법이라는 이 특효약도 모든 환자에게 다 적합한것은 아닐것이다. 자신의 병세와 신체조건에 맞게 의사선생님의 지도를 잘 따르는것이 바람직하다. 만약 나의 이 글도 진짜 광고같다고 생각한다면 틀림없이 특효약광고임은 분명하다. 모든 약방과 병원들에서 이런 특효약을 헐값에 잘 팔아서 더 많은 사람들이 그 혜택을 볼수 있게된다면 참 좋겠다.   [2011-06-03 해란강 1427기]
16    황혼의 붉은 노을 댓글:  조회:3502  추천:70  2009-12-04
수필 황혼의 붉은 노을     지난 8월 하순, 우리 대학교 동창생들은 연변에서 첫동창모임을 가졌다. 연변에 있는 동창생들은 물론 대련, 심양, 장춘, 길림에 있는 동창생들이 연길로 모여왔고  한국에 일보려 나갔던 동창생도 서울에서 날아왔다. 이번에 확인해 보니 벌써 11명 동창생이 타계하였고 와병중에 있는 몇을 제외하면26명 동창생만이 모일수 있는 아쉬운 자리였다. 이번 동창모임의 주제가는 김경석작사, 동희철작곡으로 된 《동창상봉가》였다.    한 고향 한 학교를 다닌 친구야/ 졸업하고 리별한지 몇해이더냐    한 고향은 아니여도 한 학교 한 학급에서 6년동안이나 고락을 함께 했던 동창생들의 이번 모임은 졸업하고 42년, 문화대학명때문에 1년 늦게 배치를 받고  모교에서  석별의 정을 나눈지 41년만의 첫 상봉이였다.   거멓던 머리에는 서리 내리고 / 복스럽던 얼굴에는 주름졌구나 야 반갑다 나의 동창아/ 우리 서로 그리운 정 풀어나 보자/ 풀어나 보자    41년만에 처음 만나 두손을 마주잡았지만 기억속에서 상대방의 옛모슴을  확인하지도  못한채 서로 서먹해 하고 머뭇거리는 친구들도 없지 않았다. 옛추억속으로 돌아가 서로를 확인하는데는 긴 시간이 필요 없었다. 상봉의 첫날저녁 연길 해란강민속궁 연회청에서 축배의 술잔을 들고 《동창상봉가》를 부르는 사이에 어느덧 모두들 40여년전 대학교시절로 돌아가 스스럼없는 친구가 되여버렸다. 이튿날 우리들은 돈을 주고 임대한 뻐스를 타고 왕청 만천성풍경구로 자리를 옮기였다. 유람선을 타고 수려한 호반풍광을 감상하고 가파로운 신녀봉정상으로 등반하면서 40여 성상 서로 다른 고장 다른 직장에서 겪어온 생활의 시련을 이야기 했고 부모님 모시고 자식 기르며 나라 위해 쌓은 업적도 회고해보았다. 더구나 만천성에서 하루밤을 자고 떠나기에 앞서 호반운동장에서 가졌던 남녀동창생 배구시합은 우리들로 하여금 세월의 무정함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였다. 몸은 비록 늙었어도 늙지 않는게 마음이라고 생각같아서는 40여년전처럼 멋지게 잘 칠것만 같았던 배구공이 좀처럼 말을 들어주지 않아 얼마나 많은 웃음을 자아내고 또 얼마나 잊을수 없는 즐거운 추억을 만들었는지 모른다. 기실 배구공이 말을 들어주지 않는게 아니라 이미 로구가 돼버린 몸들이 생각대로 말을 들어주지 않는 그것이였다. 녀자배구팀의 주력멤버는 대학교때 학교팀 주력멤버 그대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는데 40여년 세월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서브도 제대로 들이는 선수가 거의 없었다. 아무튼 우리의 이번 모임은 너무도 때늦은 만남이였다. 10년전, 20년전에 이런 모임을 가졌어도 오늘처럼 이렇게 로쇠한 모습들은 아니였을것이고 타계한 동창생들도 더러 만나볼수 있었을텐데 이미 늦어도 너무 늦어진것은 어쩔수 없거니와  또 돌이킬수도 없는 엄연한 현실이였다. 우리가 아직 재직일 때에 연길에 있는 동창생들이 주체가 되어 이런 모임을 조직해 보라는 건의가 없은것은 아니였다. 그때는 자치주 직속기관에서 근무하는 국장급 동창생만해도 다섯이 넘었으니 조금만 수중의 권력을 리용하면 차량을 움직이고 숙식을 해결하는데 커다란 어려움이 별로 없을거라고 하면서 “유권불용, 과기무효(有权不用,过期无效)”라는 농담까지 오고갔지만 우리는 누구도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정년퇴직한 다음에는 자식들의 공부뒷바라지를 하고 자식들을 시집 장가 보내고 손자 손녀가 태여난 다음에는 또 그 뒷바라지를 하느라 여념들이 없었다가 지금에 와서 조금 여유가 생겨나니 이제 더는 미룰수 없다는듯이 다그쳐 동창모임을 가지게 되였던것이다. 만약 우리가 재직중인 그 시절에 이런 모임을 가졌더라면 이번처럼 돈을 주고 임대한 뻐스를 타고 만천성으로 가지 않고 승용차를 움직이여 모임에 참가한 동창생들을 모시면서 허세를 부렸을지도 모른다. 그랬더라면 두고 두고 량심의 견책을 받으며 여생을 보내느니 차라리 이번처럼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숙식과 교통비를 해결하는것이 얼마나 마음 편한 처사였는지 모른다.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먼곳에서 찾아온 동창생들을, 그것도 40여년만에 만나는 동창생들을 민족호텔 4층의 초라한 객실에 류숙하게하였지만 누구 하나 잠자리를 탓하는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2년전 나는 《생일파티》라는 수필의 결미에서 우리 자치주의 주요책임자의 한분이셨던 어르신이 자기의 부하들로부터 옛동료들에 이르기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채 자택의 비좁은 방안에서 그저 친인척들끼리만 모여앉아 조촐하게 회갑잔치를 치루었다는 감동적인 이야기를 쓴적이 있다. 그 시절에는 한자리 한다하는 어른들이 회갑잔치를 차린다는 소문만 나도 벌써 몇백명 하객이 줄지어 문전성시를 이루고 하루사이에 몇만원 ”수입”을 올렸다는 사례도 있었지만 이 어르신은 이런 시체류행은 아랑곳하지않고 시종일관 입당할 때의 약속을 맘속깊이 굳건히 지키면서 아름다운 황혼을 불태우는 공산당원의 숭고한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석양의 찬연한 붉은 노을은 바로 이러한 어르신들이 있음으로 하여 한결 더 아름다운것이리라! 우리 대학교 동창생들도 인제는 오라지 않아 고희의 언덕에 올라서는 늙은이가 되였다..아침 여덟시나 아홉시의 이글이글 타오르는 태양이라고 비유하던 청춘의 황금기는 이미 아득한 옛추억으로 되었고 지금은 서산마루에 걸려 여열을 발산하고있는 석양의 빛을 받아 황혼을 불태우는 저녁노을이라 하면 그 아름다움이 한결 더 돋보이리라는 일념으로 여생을 살아간다.    한 고향 한 학교를 다닌 친구야/ 모교 위해 떨친 영예 얼마였더냐 그 어느날 어디에서 다시 만날 때 / 후회없는 여생을 자랑해보자    “후회 없는 여생을 자랑해보자.” 이 얼마나 멋진 말인가! 바로 우리의 마음을 그대로 그려낸 노래말이다. 나는 이와 같이 후회없는 여생을 자랑하자면 생일파티도 흥청망청 공금으로 차리는 일부 부정적인 세태 풍조에 편승하지 않고, 그 어느 누구도 재직시절의 여세를 빌어 후배들에게 기웃거리며 손을 내밀지도 않고, 늦기는 많이 늦었어도 다소곳이 자신들의 호주머니를 털어 숙식과 교통비를 해결하면서 동창모임을 가졌다는 그 자체가 천번만번 옳바른 선택이였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번 동창모임에서 2012년 9월 대학교 입학 50주년에 즈음하여 북경의 모교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동창생들이여, 다시 만나는 그날까지 부디 몸 건강하시라! 나는 지금부터 우리들이 수도 북경에서 다시 만나 《동창상봉가》를 더욱 우렁차게 부르는 그 황홀한 광경을 눈앞에 그려보며 모두들 깨끗하게 옥체안강하기를 날마다 두손 모아 빌겠나이다.   (2009년 9월 10일 연길 자택에서)  
15    손녀의 미니홈페지 댓글:  조회:3074  추천:92  2009-08-26
수필 손녀의 미니홈페지 강룡운   나와 마누라는 지난해 봄부터 손녀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구경하는 재미로 즐거운 나날을 보내고 있다. 며느리가 딸 지연이에게 만들어준 미니홈페지다. 나의 중학교 동창생들 가운데 어떤 친구의 손녀는 금년에 벌써 시집을 간다고 하는데, 그리고 또 대학교 동창생들 가운데 어떤 친구의 손자 손녀들은 언녕 중학교나 고중에 다니는 애들도 많다고 하는데, 그런데 나는 작년에야 비로소 할아버지가 되였다. 늦어도 한참 늦었다. 손녀가 북경에서 태여났다는 희소식을 접하고 나는 너무 기뻐서 아들의 이메일주소로 갓 태여난 손녀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지연아. 반갑다! 너의 출생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할아버지는 너에게 강지연(姜智渊)이란 이름을 지어놓고 기다렸단다. 너의 아빠 엄마는 이 이름이 이쁘단다. 너도 아마 이 이름을 좋아하게될것이다. “앞으로 니가 커서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니가 태여날 때 너의 할아버지는 벌써 고희를 바라보는 백발로인이였단다. 그래서 너의 출생이 너무 너무 반가워 주름진 얼굴에 때늦게나마 함박꽃이 피였단다. “지연아, 너는 만물이 소생하는 춘삼월 호시절에 태여난 우리가문의 귀염둥이이고 보배둥이란다. 니가 아빠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서 어서어서 무럭무럭 잘 자라서 하루 빨리 할아버지가 써보내는 이 이메일을 읽을수 있게된다면 얼마나 좋겠니! 더덩실. 춤이라도 출것만 같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그날이 도래하기를 학수고대할것이다.” 갓 태여난 아기가 이메일을 받을수도 없고 읽을수도 없다는걸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래도 손녀에게 꼭 평생을 두고 간직할수 있는 좋은 선물을 남겨주고싶은 심정으로 이렇게 이메일을 보냈던것이다. 갓 태여난 아기에게 이메일을 보내다니? 이게 어디 말이나 되는 소리이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아 있겠지만 나는 내 나름대로의  생각이 따로 있었다. 지연이가 지금은 이 이메일을 읽을수 없다는건 불보듯 뻔한 사실이지만 장차 커서 학교를 다닐 때가 되면 그때 그 어디에서 살든지를 막론하고 꼭 우리 말과 우리 글을  배우게 하여 할아버지가 써보내는 이 이메일을 읽을수 있도록 잘 키워야한다는것이 바로 이 이메일속에 담겨진 나의 소망이였고 나의 진정한 속셈이였다. 나는 이메일을 보내면서 큰아들더러 앞으로 지연의 출생일에 찍은 사진과 첫돐 사진 그리고 기타 성장과정의 사진과 동영상들을 편집하여 CD를 만들어 지연이에게 선물하면서 꼭 할아버지의 이 이메일도 함께 편집하여 기념으로 남겨주라고 부탁했었다. 이런 부탁을 하면서 나는 스스로 나의 생각이 그래도 디지털시대에 걸맞는 괜찮은 아이디어라고 확신하고있었는데 아들과 며느리는 나보다 훨씬 더 앞서가고있었다. 그애들은 나로서는 전혀 상상도 할수 없었던 미니홈페지를 만들어 갓 태여난 지연이에게 선물했던것이다. 그리고는 륙속 “사진일기” ”백일기념” ”첫돐앨범” 등을 올려 지연이가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고스란히 인터넷에 남겨놓고있었다. 손녀의 이 미니홈페지가 있음으로 하여 나와 마누라는 얼마나 편리했는지 모른다. 우리는 비록 북경에 있는 지연이와는 멀리 떨어진 타고장에서 살고있었지만 지연이가 보고싶을 때마다 아무 때든 상관없이 인터넷으로 손녀의 미니홈페지에 들어가 그애의 사진과 동영상을 볼수 있었을뿐만 아니라 지연의 “극성팬”들이 남겨놓은 대글을 읽어보는 재미에 푹 빠져보는것도 말그대로 금상첨화였다. “야, 이쁘다!” “이거 완전히 예술이구나!” 손녀가 이쁘다고 극찬하는 이런 찬사를 읽으면서 어깨가 으쓱하지 않을 늙은이가 이 세상에 어디 있겠는가! 내가 직장을 떠나 집에 돌아와 “편안한 백성”이 된지도 어언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는 이 10년사이에 내가 시도했던 여러가지 일들중에서 그래도 먼저 서둘러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진것을 제일 잘한 일이라고 손꼽는다. 만약 내가 아직도 적지않은 늙은이들처럼 컴퓨터를 다룰줄 모르는 컴맹이였다면 손녀에게 미니홈페지가 있다고한들 감히 들어가 구경할수나 있었겠는가! 컴맹의 모자를 벗는다는것은 문맹의 모자를 벗는다는것과는 차원적으로 보아 천양지차임은 틀림없다. 하지만 컴맹탈출과 문맹탈출은 비슷한 점도 많은것 같다. 낫놓고 기윽자도 모르던 문맹이 가갸거겨의 식자관(识字关)을 넘어 글을 쓰고 글을 읽을수 있게 되면 문맹의 행렬에서 탈출할수 있게되는것처럼 내가 컴맹의 모자를 벗었다는것은 컴퓨터의 ABC를 초보적으로 장악하고 컴퓨터로 글을 쓰고 인터넷에 들어가 정보를 찾고 열람할수 있고 또 자기가 쓴 글도 인터넷에 올릴수 있는 초보수준에 이르렀다는것이다. 이것은 무소불능의 컴퓨터기능으로 놓고 말하면  천만분의 일, 아니 억만분의 일에 불과한 수준일지도 모르지만 그저 식자관을 넘은지 얼마 안되는 “소학생”수준과 비슷하다고 하면 어불성설은 아닐것이다 그러므로 디지털시대 컴퓨터기술의 발전과 더불어 동행하고있는 “중학생”이나 “대학생”수준에 도달하자면 아직도 갈길이 아득히 멀고도 멀다는것이다. 그래서 나는 짬만 있으면 홀로 컴퓨터에 마주 앉아 이것저것 작업을 하며 공부를 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늘 TV에만 매달려 시간을 보내던 마누라도 손녀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보고난 다음부터는 차츰 저절로 컴퓨터앞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더러 지연의 미니홈페지를 열게하여 손녀의 사진을 보자고 졸라대던것이 어느날부터인가 자기도 인제는 컴퓨터를 배우겠다는것이였다. 아마 지연이가 보고싶을 때마다 남편의 손을 빈다는게 장구지책이 아니라는걸 뒤늦게나마 각성하게 되였던 모양이다. 컴퓨터를 아주 신비한 물건으로 간주하고 감히 손을 대지도 못하던 마누라였는데 차츰 지연의 미니홈페지가 열려있는걸 보기만해도 자기손으로 마우스를 움직여 사진을 찾아 한장 한장 넘기면서 감상하던 단계를 넘어서 지금은 “야후”와 같은 사이트에서 자기가 보고싶은 기사들을 찾아 읽으면서 좀처럼 컴퓨터에서 떨어지기를 싫어하는 할망구가 되여버렸다. 지연이가 돐전부터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더니 지연의 할머니도 인제는 컴퓨터앞에서 아장아장 걸음마를 타기 시작하였다고나 할가. 나는 손녀의 미니홈페지를 접촉하면서부터 마누라의 신상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미세한 변화들을 감지하면서 시대의 락오자가 되지 않으려는 모지름도 읽을수 있었다. 븐명한것은 전통적인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에 물젖은 우리 늙은 세대들로 말하면 디지털시대를 맞아 앞장서 달려가고있는 젊은 세대들을 보고 너무 빨리 달린다고  짜증만 낼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생신한 사고방식과 생활방식을 수용하면서 되도록이면 시대의 발전에 맞추어 그들을 따라가는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바람직한 자세라는 그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아무리 흘러간 옛노래를 좋아한다고 해도 계속 트로트만 고집할것이 아니라 젊은이들이 즐기는 발라드나 댄스 그리고 랩이나 록 같은 현대음악도 수용하면서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지혜를 갖추어나가는것이 세대간의 의사소통을 보다 원활하게 할수 있는 지름길이라는것이 나의 새로운 인생체험이다. 아무튼 손녀의 미니홈페지가 이순의 나이를 넘긴 나의 마누라로 하여금 차츰 컴퓨터에 다가서게 하였으니 그야말로 대견한 일이 아닐수 없다. 이제 나의 마누라도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질 가망이 환히 내다보이는것 같다. 그래서 손녀 지연이가 더욱 예쁘기도 하고 지연의 미니홈페지가 더욱 고마운지도 모른다. 이제 마누라도 컴맹의 모자를 벗어던지고 컴퓨터를 좀 더 능숙하게 다룰수 있게 된다면, 그리고 지연이도 몇해 지나서 우리의 말과 글을 배우고 컴퓨터도 다룰수 있게 된다면, 그때가 되면 지연이는 할아버지가 작년봄에 써보낸 출생축하 이메일도 읽을수 있게 될것이고 고향에 있는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메신저로 채팅도 할수 있게 될것이다. 그날을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설레이고 행복의 미소가 저절로 주름진 로안을 헤가르며 피여오르는것만 같다..     (2009년 4월 청도에서 초고 2009년 8월 연길에서 수정        2009년 8월 21일 연변일보/해란강 제1361기)   .
14    [수필]"몽당연필"과 더불어 댓글:  조회:2615  추천:118  2008-08-08
“몽당연필”과 더불어                                   강룡운   이 글을 구상하면서 한족들이 늘 말하는 “훌륭한 기억력도 뭉드러진 붓보다 못하다”(好记性不如烂笔头)는 속어가 자꾸 머리에 떠올라 “뭉드러진 붓”을 우리말인 ”몽당연필”로 바꾸어 놓고 생각을 굴려보다가 이렇게 글제목을 달아보았다. “훌륭한 기억력도 뭉드러진 붓보다 못하다”는 이 말은 내가 고중에 갓 입학해서 처음 듣고 마음속에 아로새겨둔 말이였는데 나는 이 말을 “아무리 훌륭한 기억력도 몽당연필만 못하다”고 번역해 놓고 나름대로 배움의 좌우명으로 간주해오던것이다.  그리하여 바로 그때 그 시절부터 나에겐 책을 읽거나 신문을 보다가도 자기가 잘 모르는 새로운 지식이나 꼭 기억해 두어야 하겠다고 판단되는 명언이나 경구같은것들이 눈에 띄면 곧바로 노트나 종이장에  기록해 두는 습관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그것은 자신의 기억력을 과신하지 않고 “몽당연필”의 기억력을 더 확신하였기때문이다. 지난 7월 15일에 우리 중학교(初中)동창생들의 “졸업 50주년 기념행사”가 성대히 거행되였는데 이것을 바꾸어 말하면 내가 고중에 진학한지도 어언 50년 세월이 흘러갔다는 얘기가 된다. 그러니까 나의 이 습관도 저그만치 반세기를 넘긴 고루할대로 고루해진 낡아빠진 습관인 셈이다. 고희의 언덕을 지척에서 바라보고있는 로구가 되였지만 지금도 나는 독서나 독보를 할 때는 물론, 텰레비죤를 볼 때에도 탁자우에 펜과 종이장을 놓아두고 가끔 무언가를 적군 한다. 심지어 마누라와 같이 앉아 한국드라마를 보다가도 종이장에 무언가를 적고있으면 안해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또 무얼 적느냐고 묻는다. 하도 세월이 흐르니까  안해도 인제는 내가 무엇을 적었으리라고 짐작이 간다는 눈치이다. 50년전 내가 조선족중학교을 졸업하고 추천을 받아 한족고중에 입학하였을 때의 일이다. 나로 말하면 엄마 아빠라는 말을 배워서부터 줄곧 조선말만 하면서 자라고 공부를 해오다가 갑자기 한족애들속에 끼여들어 공부를 하게되었으니 앞을 가로막는 애로사항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그러나 중학교에서 한어공부를 열심히 했고 또 다른 과목들도 한어로 된 참고서적들을 더러 열독하여왔던지라 한어어문과목을 제외하고는 기타 다른 과목에서 한족애들에게 조금도 뒤지지 않았는데 유독 어문과목에서 한어로 글을 짓는 작문(作文)이 나에게는 제일 큰 걸림돌이 되여 공부를 잘하는 한족애들에게 다소 밀리는 형국이였다. 이러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내가 벌린 작전이 바로  “몽당연필”작전이였다. 그 시절 베스트셀러였던 《청춘의 노래》.《림해설원》.《붉은 바위》와 같은 장편소설들을 읽거나 《붉은 기》나 《중국청년》과 같은 잡지들을 읽을 때면 나는 생소하다고 느껴지는 단어들과 멋지다고 생각되는 성구들을 노트에 많이 적어놓았다가 새로운 작문제목을 받아안으면 먼저 내가 수집해 놓은 성구나 경구, 관용어들을 뒤적이면서 작문을 구상하는 새로운 습관이 생겨나게 되였는데 1년간의 고투끝에 2학년에 올라가면서부터 졸업할 때까지 나의 작문도 자주 “모범작문(范文)”으로 선정돼 전 학급 한족애들에게도 읽혀지게되었다. 나는 이렇게 ”몽당연필”작전으로 한어공부에서 단맛을 보게된 다음부터는 이 방법을 조선어공부에도 활용해보았다. 조선어공부라고는 중학교때까지밖에 해보지 못했던 나로서는 고중을 다니고 대학을 나와서 기업소와 당정기관을 두루 전전하면서 주로는 한어로 글을 많이 써왔는데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스스로 조선어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조선문서적도 손에서 놓지 않았다. 아마 그래서인지 오늘도 이렇게 조선어로 수필이랍시고 어설프게나마 긁적거리고있는데 이것도 모두 ”몽당연필”과 갈라놓고는 생각할수 없는것이다. 언젠가 내가 주정부에서 근무할 때 연변대학 조문학부 류은종교수가 우리집에 놀려왔다가 우연히 내가 수집, 정리해서 특제나무박스에 소장해두고있던  조선어자료카드를 발견하고는 “주정부관원의 집에서 이런걸 보기는 처음 “이라고 떠들어대면서 깜짝 놀라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였다. 우리말 속담에 세살 때 버릇이 여든살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이팔청춘 젊은 시절에 형성된 나의 이 습관은 고희를 바라보는 지금에까지 이어지면서 아예 하나의 고질이 돼버렸다. 아날로그시대에서 디지털시대에 진입하면서도 펜으로 종이에 메모를 하는 나의 이 아날로그식 구태의연한 버릇은 좀처럼 고쳐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있다. 오히려 컴퓨터를 리용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 되였다고나 할까. 고중시절부터 지금까지 모아온 노트들만 헤아려보아도 어림잡아 몇십권도 많이 넘을텐데 거기서 무얼 찾아본다는것은 이미 너무 힘에 부치는 일이 돼버려서 도무지 그럴 엄두조차 못 내고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지금은 컴퓨터를 리용하고있다. 솔직히 말해서 지난날의 필기노트를 자주 펼쳐보지도 못하거니와 또 그럴 필요성도 크게 느끼지 못하고있다. 지금은 무엇을 알고싶으면 어느 사이트에 들어가 검색을 하면 세상만사 알고싶은걸 다 찾아내 읽을수 있는 현실인데도 나는 오늘까지 나의 “몽당연필”을 버리지 않고있다. 왜냐하면 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결합하여 계속 내나름대로의 노트문화를 만들어 가고있기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는 거의 매일이다싶이 종이장에 메모해 두었던 유용한 자료들을 분류하여 다시 컴퓨터에 입력해서 수시로 찾아볼수 있도록 편집하고 저장해 두는 작업을 멈추지 않고 계속 진행하고있으므로 시체말로 말하면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내가 굳이 이렇게 하는것은  나로 말하면 종이장에 메모했던걸 다시 컴퓨터에 입력하는 과정이 바로 나의 대뇌속에 재입력하는 과정이 되고 머리속에 다시 아로새겨 각인하는 과정이 되기때문에 결코  무의미한 무효로동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무릇 지식이란 다 이렇게 축적해 가는 과정에 앙금처럼 가라앉는 침전물들이 아니던가?  그리고 이 세상에 그 어떤 뛰여난 천재가 있다고하더라도 그의 기억력도 “몽당연필”만 못하다는것은 당연지사이고 더구나 컴퓨터의 저장능력을 초과할수 없다는것은 일반상식의 범주에 속하는 문제이다. 그래서 아무리 박식한 학자들도 자신의 서재를 떠나서는 저술활동을 하기 힘들다고 하는것이고 그들도 “몽당연필”로 모아놓은 자료가 없거나 컴퓨터의 도움이 없으면 촌보난행이라고 하는것이다. 대학자님들도 이러할진대 나같이 범상한 사람에게는 “몽당연필”이 한결 더 필수적이라는건 너무나 불보듯 뻔한 도리가 아니겠는가!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해 두해도 아닌 장장50여 성상을 한결같이 “몽당연필”과 더불어 함께 살아 온 인생! 나는 이렇게 살아온 인생을 조금도 후회하지 않는다. 그리고 앞으로의 남은 여생도 이렇게 살아갈것이다. 생을 마감하는 그날까지 배우고 배우고 또 배우며…     (2008-07-31 산동 청도에서)  [2008-08-08 연변일보/해란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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