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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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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    [쉼터] -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모음(3) 댓글:  조회:4537  추천:0  2017-02-14
  2002년 뉴욕타임스진 일동 9.11 테러의 모습을 촬영.         뉴욕 타임스 아프간과 파키스탄의 오랜 분쟁지역을 취재한 뉴욕 타임스가 수상.  이중에는 한국인도 있다고 한다. 마리카의 옆에는 새로 때어난 딸이 잠들어있다.  아프가니스탄의 잘랄라바드 근처의 마을로부터 도망쳐온 그들은  파키스탄의 샴샤투 난민캠프에서 살고 있다. 밀수를 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아프간 반군에게 물자를 제공하기 위해 탈레반 지역을 건너야 한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길 그들은 폭행을 당하거나 뇌물을 건네야 한다고 하는데,  이 남자의 경우에는 나귀 한 마리당 12센트를 냈다고 한다. 마자리샤리프의 아즈라트 알리의 성지의 물라가 말하길  비둘기들이 분쟁이 일어나자 가장 먼저 떠났고 가장 늦게 돌아왔다고 했다. 수십명의 하자라 부족이 카불근처 카타사크히 마을의 폐허에서 무함마드 카람 카릴리의 귀환연설을 듣고 있다.  그는 북부지역에서 탈레반에서 대항해 싸운 인물이다.  마을의 경우 1993년부터 95년사이 반 탈레반군의 내분으로 피해를 입었고,  지금 새로운 연합정부가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다. 친 탈레반 지원자들이 2001년 10월 2일 파키스탄의 쿼에타의 반미집회중  종교지도자의 연설을 듣고 있다. 155명의 탈레반 전사들이 수감되어 있는 나가하르 지역의 카와이 마을의 한 창고. 창문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 중이다.  왼편에는 남자가 코란을 읽고 있다. 아프간의 가뭄을 피해 부르카를 뒤집어 쓴채로  Jamillah는 그의 10달된 어린 딸 Shabanah과 함께 가족과 피난을 와  2001년 11월 파키스탄의 잘로지 난민캠프의 국경없는 의사회의 병원에 서있다. 케타타의 난민지구 중심에서 파키스탄과 아프간 인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거리 이발사로부터 머리를 깎고 있다. 2001년 10월.  지난주 칸다하르의 미군 공습으로 아들을 잃은 42세의 파잘 무함마드는  파키스탄의 쿼에타에서 부상당한 눈을 치료받고 있다. 탈레반 학생들이 파키스탄 북서쪽 국경지역에서 이슬람 문학을 공부중에 있다. 아프가니스탄 카불의 샤흐 사히드 마을의 바브라크 공터에서  말을 타며 소를 잡기 위한경주를 하고 있다.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프간 어린이들이 마자르 이 샤리프에서 포탄으로 만든 회전목마에서 놀고 있다.  2001년 11월 이 마을은 반 탈레반 세력이 장악했다.  한번 타는데 5000 아프가니 또는 10센트가 든다. 달이 파키스탄의 쿼에타의 산 위로 떠오르면 묘지 가운데 있는 동굴안에서 아편 중독자들이 모여든다. 2001년 9월 30일 매일밤 그들의 고통을 잊기 위해 매일 밤 사람들이 모여 헤로인과 마리화나를 주사한다. 2001년 10월 9일 아프가니스탄에서  미국이 가한 공격에 항의해 파키스탄 쿠흐락에서 시위를 벌이다 다른 세 사람과 더불어 사망한  13살의Hamid Ullah의 시신을 움켜잡고 어머니가 오열하고 있다. 2001년 9월 29일 파키스탄의 쿼에타의 푼지 푸티 난민캠프에서 아프간 난민 Shafia Helmand 가 다른 난민들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텐트 앞에 서 있다.  캠프에서는 아프간의 칸다하르로부터 피난온 난민들이 살고 있다. 2001년 12월 12일 쿤두즈의 첫 폭격이 일어난뒤 난민들에게 첫 식량배급을 하면서  8살난 Naim이 10살난 Saidmazfar가 지고있는 100파운드 무게의 포대를 돕고 있다.  Bagh-i-Shirkat 난민캠프의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2001년 12월 3일, 겨울의 첫 눈이 내렸을때  아프간 북쪽의 마자르 이 샤리프의 외곽지역의 캠프에서 한 난민이 그의 텐트 앞에 서 있다.  난민들은 솔게라 지역에서 피난왔으며 3달전 탈레반과 북부동맹 사이의 전투를 피해 도착했다. 2001년 12월 12일 미국의 B52 폭격기가 동부 슈라 사령관과 탈레반 사이의 발포금지협정이 깨진이후  토라보라를 계속 폭격하고자 기수를 돌리고 있다.     2003년    Rocky Mountain News 직원들이 콜로라도 산불을 취재한 공로로 수상.        LA 타임즈의 돈 바트레티 기자 중남미계의 불법 입국자를 취재하여 퓰리처상을 받다. 미국으로 향하는 큰 여정에, 온두라스 소년이 멕시코로 통하는 화물열차를 타고 있다.  매년 수천명의 중남미 사람들이 1500마일의 여정에 기차 꼭대기를 탄다.  어떤 이는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부모들이기도 하다.  많은 아이들이 오래전 떠난 부모를 찾아 떠나기도 한다.  단지 용감하고 운좋은 자만이 그들의 목표에 도달할 뿐이다. 말똥가리들과 아이들이 온두라스의 매립지에서 작은 조각들을 찾고 있다.  소년들은 먹을 수 있거나 팔수 있는 것을 위해 찾아 헤맨다.  멕시코를 향하는 화물열차에는 수많은 온두라스인으로 가득차 있다. 미국으로 일거리를 찾거나 가족을 찾기 위해서다. 13살의 Elio Trujillo Martinez는 물건들이 가득담긴 외바퀴 손수레를 끌며  테구시갈파의 옥외시장에서 벌이를 위해 일한다.  매년 나라에서는 수천명의 아이들이 미국으로 떠난 부모를 찾아 그곳을 떠난다. Richard Alberto Funez 는 장난감 권총을 흔들어대며 친구 Alexis Joel Sanchez와 놀고 있다.  10살의 두 어린 소년들은 음식과 돈을 구걸하기 위해 테구시갈파의 시장을 돌아다닌다.  지역 봉사자가 말하길 거리에는 부모가 미국으로 떠난 많은 어린 소년들이 있다고 한다. 구치소 방에는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붙잡힌 10대 소년들로 가득차 있다.  많은 남미계인들은 기차에 타 미국 국경을 넘기위해 수없이 많은 시도를 한다. 몇몇 밀입국자는 과테말라와 멕시코 국경 사이를 뗏목을 통해 건너기도 한다.  밀입국자들이 멕시코로 향하는 기차 위에 서 있다.  만약 그들이 붙잡히며 다른 외국인들처럼 처리될것이지만,  이 화물철도는 미 국경으로 향하는 주요 길목이 되었다. 12살의 무모한 소년을 위험을 감수하고 다른 칸으로 뛰어들고 있다.  그는 샌디에이고에서 일하는 그의 어머니를 찾길 바라고 있다.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화물 열차위에서  밀입국자들이 위험하기 짝이없는 나뭇가지 아래를 지나치고 있다.  12살의 Dennis Ivan Contrares는 온두라스를 벗어난 2주가 지났다.  그에게는 샌디에이고에 있는 어머니의 전화번호를 가지고 있는게 유일하다.  소년은 항상 꿈꿔왔던 꿈에 대해 말한다. "엄마를 찾고, 학교에 가고, 영어를 배우고 싶고 다른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제가 거리를 걸어갈때 그들이 거리에서 죽어가기 때문에 거리의 아이들을 돕고 싶어요." 학교가방을 맨 온두라스 10대 소년이 멕시코의 베라 크루즈의 화물 열차에 몸을 싣고 있다.  관리를 피하기 위해 밀입국자들은 열차가 출발할때까지 몸을 숨겨야 한다.  이런 위험함은 자갈에 미끄러지거나 바퀴 아래로 떨어지는 가능성을 높인다. 멕시코 시티 근처에 이르러 해가 지면서 10대 여행자들이 옷이나 쓰레기등을 태우고 있다.  그들이 몇주전 온두라스를 떠날때부터 옷을 갈아입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산 위에서의 추운밤을 준비하지 못한다. 열차를 통해 수천마일을 가로질러 온두라스의 밀입국자들은  멕시코의 누에보라레도에 있는 리오그랑데 강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밀입국자들은 여기 머물러야 하는데  미 국경 패트롤이 미국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기위해 많은 방해를 한다.   철도를 통한 여행끝에 두 젊은 밀입국자들이 리오그랑데 강을 통해 밀입국을 시도하고 있다.  75야드 거리의 강을 건너면 그들이 오랫동안 꿈꾸었던 곳 : 미국이다. 헤어진지 7년만에 노스캐롤라이나 주에서 Enrique 와 어머니가 상봉했다.  "이 애가 내 아들이에요." 그녀가 말하길.  "이 애가 여기 있는건 기적이에요."  Enrique 는 3달동안 기차를 타고 도착했다.  전문가들은 매년 48000명의 멕시코와 중남미 어린아이들이  부모없이 불법적으로 미국으로 들어가고 있다고 추산하고 있다.     2004년 David Leeson 과 Cheryl Diaz 이 이라크 전쟁의 참상을 촬영한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침공 이후 바그다드에서 가장 문을 먼저 연 학교인 Al Amtithal 학교에서  10살 oldUniss Mohammad Salman가 자랑스럽게 서 있다.   미 제 2사단 탱크대대 소속의 제프리 굿맨 대위와 조지 산체스 하사가  전쟁터로 변한 바그다드 시내에서 부상당한 민간인 한명을 안전한 곳으로 끌고 나오고 있다. 바그다드의 길목에서 미군이 저항세력으로 의심하는 사람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다. 고요가 지속되는 가운데 Andy MacLean 대위가  카르발라 근처에서의 격렬한 전투의 밤이 지나고 난뒤의 휴식에서  2주간의 전쟁동안 이토록 조용한 순간은 좀처럼 느껴지지 않는다며 감사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죽은 이라크 군인의 발에 신겨진 민간인의 신발.      2005년 딘 피츠모리스 기자 촬영 전쟁터에서 크게 다친 뒤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는  이라크 소년과 가족을 따뜻한 시선이 담긴 기사와 함께 카메라에 담았다.  이 사진들은 퓰리처상 올해의 '특집사진 보도상'을 수상했다.  사진의 주인공은 이라크 소년 살레.  살레는 항상 밝은 모습을 하고 있지만 외모에 관해서는 매우 민감하다고 한다.  전쟁 중 떨어진 폭발로 인해 복부와 오른팔, 외쪽 대부분의 손가락을 잃고 왼쪽 눈도 심하게 다쳤기 때문이다. 최근 각종 커뮤니티 사이트와 네티즌들의 개인 블로그에는  딘 피츠모리스 기자의 기사가 해석된 사진모음이 인기 게시물로 종종 오르고 있다.  사진마다 사진에 대한 설명이 붙어 네티즌들의 눈시울을 붉게 만든다. 사진 속 모습처럼 폭발 후 10개월 동안 32차례의 수술을 받아야 하는 살레를 위해,  살레의 아버지는 매일 기도를 하며 매일 밤 살레의 침대를 지키고 있다.  사람들의 시선에 당황한 살레가 땅바닥에 주저 앉아 흐느낄 때  아무 것도 해줄 수 없는 아버지의 안타까운 모습도 카메라에 그대로 포착되었다. "어느날 오후, 다른 아이들이 그의 외모를 빤히 쳐다보는 것을 보고 매우 화가 났다. 간호사는 Saleh를 진정시키기 위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그의 팔에 펜을 테이프로 붙여 주었고  Saleh는 폭탄이 떨어지는 비행기를 그렸다." 위 사진은 살레가 팔에 펜을 붙이고 폭탄이 떨어지는 비행기를 그리는 모습을 담고 있다.  설명에 따르면, 다른 아이들의 시선에 화가 난 살레를 위해  간호사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팔에 펜을 붙여준 것이다.  무엇보다 네티즌들을 가슴 뭉클하게 하고 있는 것은 살레 가족들의 진한 가족애가 담긴 사진들이다.  살레의 치료를 위해 병원 관리인으로 일하며    아들 곁을 지켜주는 든든한 아버지의 모습이 유독 많이 담겨 있다. "사람들의 시선으로 당황한 Saleh는 그만 가게에서 뛰쳐 나간다. 아버지는 Saleh를 위로해보지만 어린 Saleh에게는 감당하기에 너무도 힘든 일이었다. 땅바닥에 주저 앉아 흐느끼는 Saleh 앞에서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미안한 마음으로 서있는 아버지" 기사에 따르면 살레의 어머니와 동생들은 먼저 이라크 탈출을 감행, 요르단을 거쳐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다.    뒤이어 탈출한 살레와 그의 아버지는 기쁨에 겨운 모습으로 가족들과 재회했다. Hadia(Saleh 어머니)가 Reaheem(Saleh 아버지)에게 콧수염이 없어 우스워 보인다고 말하자  장난으로 툭툭 찌르는 아버지.           
332    [쉼터] -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모음(2) 댓글:  조회:5811  추천:0  2017-02-14
  1991년  For a series of photographs of supporters of South Africa's African National Congress  Greg Marinovich of Associated Press brutally murdering a man they believed to be a Zulu spy. 자료없음.     윌리엄 스나이더 촬영  루마니아의 독재자 차우세스쿠의 몰락 이후 에이즈에 걸린 고아원 아이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1992년  AP 통신사 일원들 촬영 소련붕괴의 현장들을 촬영한 사진으로 퓰리처 상 수상.     존 카플란 촬영 존 카플란이 일곱개의 사진 에세이로 21살의 청년 일곱명의 사진을 찍은 사진으로 퓰리처 수상.  헤비메탈 가수, 모델, 풋볼 선수, 마약 복용자, 불법이민자 등 다양한 기록이 사진으로 남았다. 판테라의 리드싱어 Phil Anselmo. 고등학교 중퇴자 Frank Cline.  그의 얼굴은 가난으로 인한 어려움으로 찌들려 있다. 샌디에이고에 사는 불법체류자 Beatriz.    아이를 위해 미국으로 건나왔다. 아동학대의 희생자였던 Tanya.    무명배우에서 뉴욕의 톱모델이 된다. NFL의 신인 Marc Spindler.  데뷔시합에 앞서 부상으로 인한 아픔으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다.   반복되는 부상탓에 데뷔 첫해 그는 단 3경기만 출장할 수 있었다. 하버드대 4학년의 Malli Marshall.  남자친구와 만나는 일조차 자제하면서 의사의 꿈을 키우고 있다. 마약을 위해 필요한 돈을 마련하고자 남창으로 일하는 Brian. 형사들이 그가 살인을 할때 사용한 총을 찾아내자  21세의 Rodney woodson은 망연자실해 있다.   1993년 켄 가이거와 윌리엄 스나이더.  바르셀로나 올림픽의 현장을 담아 퓰리처 상을 수상하다.   Staff of Associated Press. For its portfolio of images drawn from the 1992 presidential campaign. 자료없음.     1994년  케빈 카터 촬영 프리랜서 사진기자였던 케빈 카터는  1993년 2월 수단에서 허기져 일어날 힘도 없는 어린아이를 찍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굶주린 독수리가 어린아이를 지켜보고 있다.  사진을 찍은후 케빈 카터는 독수리를 쫓아내 아이를 구호소로 데려다주었다.  이 사진으로 94년도 퓰리처상을 받았지만  어떻게 사진부터 촬영할 생각을 했냐는 비난여론에 그는 스스로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어쨌건 이 사진 한장으로 수단 문제를 국제적으로 환기시키는데 큰 영향을 준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폴 와트슨 촬영 소말리아 내전당시 추락한 헬리콥터에서 나온 미군의 시신이 분노한 군중들에게 끌려가는 장면을 촬영하였다.  이 사진 한장으로 미국 내에는 거센 반전 여론이 일어났고 수개월뒤 미군과 UN는 소말리아를 떠났다.  이후 집권자였던 아이디드는 96년 살해되고 소말리아는 계속되는 혼돈에 빠졌다.      1995년 AP통신. 르완다 내전의 광경을 찍다. 아이들이 예방주사를 맞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그 와중에 한 아이는 지쳤는지 엎드려 있다.   한 어린아이가 자이르 난민캠프에서 병에 걸려 쓰러진 엄마를 깨우고 있다. 어린 난민들이 르완다에서 자이르로 향하는 다리에서 호소하고 있다 르완다 난민들이 탄자니아의 난민캠프에서 물을 나르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의 캐롤구치 촬영 아이티 공화국의 혼란상을 사진에 담에 퓰리처 상을 수상한다. 9월 27일 포르토프랭스에서 일어난 식량난동때 아이티 여인이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다.  그녀의 얼굴에는 쌀이 묻어있다.    식량창고는 약탈당한 이후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한 미군병사가 9월 29일 포르토프랭스의 거리행진때 폭발물을 던진 용의자를 성난군중들로부터 보호하고 있다.    폭발로 5명이 죽고 40명 이상이 다쳤다. 아이티 여인의 미소 악수 눈물 홀로 남겨진 죽음 평화의 비둘기 분노  군중재판     1996년   찰스 포터 4세 촬영 1995년 4월 19일 프리랜서 기자였던 찰스 포터 4세가  오클라호마 연방건물 폭파 사건때 구조되는 피묻은 아이의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aP통신에 실렸고 많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아이는 병원에 도착하자마 숨을 거두었다.     스테파니에 웰시 촬영 프리랜서 사진작가 스테파니에 웰시가 케냐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에게 행해지는 할례의식을 찍은 사진 할례를 받을 소녀는 세이타 렌질라라고 한다.   할례식에 사용되는 유일한 도구.       1997년 애니 웰즈촬영 산타로자 소방구조 대원이 나뭇가지에 걸린 소녀를 구하려는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알렉산더 젬리아니첸코 촬영 춤추는 옐친 대통령의 모습.      1998년 마씨 리알 촬영 아프리카의 인종분쟁을 담아내는 여러장의 사진들로 98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7살짜리 Bitama는 자주 울음을 터뜨린다.  이 소녀의 부모는 94년 르완다 사태때 살해되었다. 르완다의 후투족 난민들이 탄자니아의 Benaco Junction 도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다.  그들은 르완다에서 도망쳐 탄자니아로 흘러들어왔다.  군인들에 의해 르완다로 돌려보내는 걸 막기위해 피난민의 일부는 케냐나 말라위로 갈것이라고 말한다. 영양실조에 걸린 4달바기 어린아이가 그의 어머니에 등에 업혀 탄자니아에 도착했다.  그들은 부룬디를 벗어났고 치료를 받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자전거로 부룬디를 벗어난 한 후투족 남자가 북 탄자니아 국경근처에서 쉬고 있다. 북 탄자니아의 북경지에서 형제들이 옥수수 식사를 기다리고 있다.  이것이 부룬디를 벗어난 후투일가의 첫 식사가 될것이다. 40세의 부룬디의 후투족 여성으로  그녀는 옷을 내려 3년전 투치족 병사들에게 강간당하고 찔린 상처를 보여주고 있다.  그녀의 남편은 납치되어 그들에게 살해당했고 6아이들은 안에 있는 채로 불에 태워졌다.  5명이 죽었다.  그녀는 임신을 했으나 유산되어버렸다.  그녀는 걷기조차 어려웠으나 자유를 찾아 탄자니아로 떠났다.  그녀는 1996년 7월 케네바와 난민캠프에 머물고 있으며 치료를 받는중이다. 잠비아에서 온 폭력상담 프로그램 진행자인 Sydia Nduna는  참여한 여성들이 편한 마음을 갇게 하기 위해 춤을 추고 있다.  그녀는 북 탄자니아의 부룬디 난민캠프의 여성들에게 상담을 하고 있다. 탄자니아 응가라 근쳐 케자 난민캠프에서 르완다인 후투족 난민 여성이  다른 난민들이 그들이 받을 식량을 요구하는 광경을 듣고 있다.  대부분의 다른 케자 거주자들은 지난밤 르완다로 돌려보내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캠프를 떠났다. 프완다의 성 조셉 센터에서 한 아이가 있다.  이 아이는 탄자니아로부터 돌아오는 여행길에 부모와 헤어졌다. 난민들이 Mtendeli 난민캠프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숨진 어린 여자아이를 위한 또 하나의 무덤을 준비중에 있다. 탄자비아의 병원에서 한 르완다 어린아이가 누워있다. 탄자니아의 Kibondo 난민캠프에서 한 부모가 그들의 양자를 돌보고 있다.  이 커플은 최근 어머니가 죽었을때 어린 아이를 성심껏 돌보기로 약속하였다. 탄자니아의 응가라 근처 케자 난민캠프에 한 어린 여자아이가 서있다.  르완다로부터의 송환이 이루어지기 전 이곳에는 25000명이 살았었다.  난민들은 또다시 르완다를 떠나고 캠프에 공동체를 이루게 될것이다. 탄자니아에서 르완다로부터의 여행동안 한 난민소녀의 발이 여러겹의 양말로 둘러 싸여 있다. 어린 소녀와 부모는 4일동안 걸었다. 10대 후투 소녀들이 고아원에 서 있다.  나이 있는 여자아이들이 보다 어린 고아들을 돌보고있다. 투치족 사람인 Marthe Nyirabahinzi 가 양녀 Bitama를 달래고 있다.  비록 그녀의 자식들은 장성했고 심지어는 Bitama보다도 나이가 많은 손주까지 있지만,  그녀는 잘 돌보겠다고 말한다.  Bitama 의 출생은 신경쓰지 않는가보다, 후투족이라도 말이다. Bitama 가 Mkugwa의 난민캠프에 있는 학교에서 조용히 앉아있다.  그녀는 너무 어렸을때 부모가 사망했는지라 태생에 대해 모른다.  어릴때 부모가 사망한 충격으로 조용하고 무표정한 모습으로 종종있다. 이 어린 소년은 탄자니아에서 르완다로의 여정에서 가족과 헤어졌다. 어린 후투 수년은 식량프로그램에서 받은 죽을 먹고 있다.  영양실조로 건강이 안좋은지라 그는 매일 4번의 식사를 한다.     LA 타임즈의 Clarence Williams 촬영 이 알콜과 마약으로 중독된 부모들과 살고 있는 아이들의 비참함을 카메라로 담았다. 34세의 테오도라 트릭스.  헤로인 주사를 맞은뒤 3살난 딸 타미카를 잠재우고 있다. 3살의 타미카 트릭스는 롱비치의 허름한 집에서  그녀의 어머니 테오도라가 친구와 코카인과 헤로인에 취해있는 동안  더러운 매트리스위에 잠을 자고 있다. 타미카가 버스 창문을 바라다보고 있다.  그녀의 삶은 어머니의 마약복용으로 엉망이 되어버렸다. 올해까지 타미카는 전 남자친구의 어머니의 집, 차고, 호텔, 마약을 하는 곳을 포함해 최소 9번을 옮겨다녔다. 딸을 등에 두고 테오도라 트릭스가 헤로인 주사를 맞고 있다.  그녀는 타미카를 사랑하며 자기들보다 더 심한 중독자의 아이를 알고 있다고 하지만,  자신이 약에 취할때는 타미카에게 관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은 인정했다. 아이다운 발랄함으로, 타미카가 웃으며 어머니와 잠시 동거하는 남자 조니 앞을 뛰어다니기 있다. "아빠는 감옥에 있어요"  타미카는 최근 설명했다.  "그래서 엄마가 슬퍼해요." 테오도라 트릭스가 잠에 떨어진 타미카를 돌보고 있다.  어머니가 약을 찾으러 몇 시간 혹은 며칠을 안보일때면  타미카는 그녀의 어머니가 영영 돌아오지 못하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 조니는 에이즈에 감염된 테오도라와 같이 쓰기로 한 칫솔로 타미카를 닦아주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잇몸에서 피가 나오는 것을 알고는 테오도라는 먼저 타미카의 이를 닦아주라고 청했다. 8살의 케빈 브라이언.  그의 아버지의 여자친구 리타 그린이 마약중독자들이 모이는 롱비치의 아파트에서  브라이언에게 고함을 지르자 귀를 막고 있다. 타미카는 어머니와 친구가 함께 약에 취해있는 동안 뒷뜰에서 서성이고 있다. 칼빈 홀로맨이  "서둘러, 난 아이들에게 이런 모습 보이고 싶지 않아" 라면서 환각제를 피우고 있다. 케빈이 환각제에, 알콜 중독자인 그의 아버지 칼빈 홀로맨이 맥주를 마시는 것을 지켜보고 있다. 케빈은 작은 아파트에 종종 드나드는 중독자들을 일컫어 "나쁜 놈들"이라고 부른다. 케빈은 10살짜리 누나에게 줄 옷을 찾기를 바라며 쓰레기통을 뒤진다.  신발을 찾았지만, 너무 작았다. 10살의 애슐리 브라이언.  그녀의 아버지 칼빈 홀로맨은 아파트 거실의 매트리스에 누워있고 애쉬는 허공을 보고 있다.  남동생과는 달리 애슐리는 조용하고 차분하며, 의기소침해 있다.  그녀는 또래의 아이들처럼 학교에 다니지 못하는 것을 슬퍼하며 말한다.  "3곱하기 3이 뭐죠? 모르겠어요."  그들의 아버지는 애슐리와 케빈을 학교에서 자퇴시켜버렸었다. 케빈 브라이언은 거실 소파에 누워  부엌에서 그의 아버지의 마약중독자 친구들이 바닥에 누워 잠에 떨어진 광경을 보고 있다.  냉장고와 스토브는 마약살 돈을 위해 이미 팔아버렸다.  8살의 케빈은 수년전 어머니가 가족을 버리고 나간후 화내고 거칠게 되어버렸다. 잠에 떨어지기 전 애슐리 브라이언이 다시 생활이 나아지게 해달라고 기도를 올린다.  무관심에 애슐리와 그의 동생은 일주일째 목욕도 하지 못했고 배고픔이 일상이 되어버렸다     1999년  AP 통신사 기자들이 클린턴 대통령의 섹스 스캔들에 관한 내용을 카메라에 담아 퓰리처 상을 받았다. 1998년 1월 27일 워싱턴 대통령 개인비서인 Betty Currie가 미 대법원을 나오면서 기자들 사이를 지나치고 있다. 1998년 12월 19일 워싱턴   1998년 9월 21일 워싱턴   카메라맨들이 클린턴과 모니카 르윈스키의 대배심 증언과 관련문서들을 카메라에 담고 있다. 1998년 4월 6일 필라델피아  백악관 인턴이었던 모니카 르윈스키와 그녀의 변호사 William Ginsburg 가 차로 향하고 있다. 1998년 7월 29일 워싱턴  린다트립이 법원 밖에서 기자들에게 얘기를 하고 있는 광경 1998년 12월 19일 워싱턴 클린턴 대통령이 의회에 의한 역사적인 탄핵투표 이후  백악관 집무실 바깥에 있는 민주당 의원들에게 말할 연설문을 준비하며  힐러리 여사와 엘고어 부통령과 웃고 있다. 클린턴은 웃음뒤에 눈물을 닦고 있다.  1998년 11월 19일 워싱턴 백악관 측 변호인이 데이비드 켄달, 케네스 스타 검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1998년 8월 18일  대통령이 휴가차 가족들과 마서즈 빈야드에 도착하고 난뒤 차에 탑승하고 있다. 1998년 9월 21일 뉴욕 NBC의 팀 루서트가 1998년 8월 17일부터 녹화된 대통령의 대배심 증언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할때  한 인부가 비디오 스크린을 닦고 있다. 1998년 11월 19일 워싱턴 케네스 스타 검사의 선서모습. 1998년 1월 27일  클린턴의 오랜 동료인 Vernon Jordan이 집을 나오고 있다. 백악관에서 클린턴 대통령이 힐러리가 보는 가운데  탄핵의결에서 반대투표를 한 민주당의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있다.  클린턴과 딸 첼시, 힐러리, 애완견 버디가 백악관에서 마서즈 빈야드로 떠나기 위해 헬리콥터로 향하고 있다.         1998년 4월 1일 세네갈  클린턴 대통령이 힐러리 여사와 세네갈식 전통의상을 입고 이야기꾼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있다.     AP 통신이 탄자니아와 케냐 사태를 촬영한 것으로 퓰리처 상 수상.       2000년  콜럼바인 학교 총기사고 현장을 촬영하여 수상.   Daniel Rohrbough 가 죽어 누워있는 동안 왼쪽에는 학생들이 경찰관의 보호를 받으며 숨어있다. 학생들이 대피용 학교버스로 달려가고 있다. 겁에 질린 학생들이 철조망으로 도망치는 와중 벽에 붙어있던 다른 학생들을 경관이 수색하고 있다. 구조대원이 부상당한 학생을 엠뷸런스로 실어가고 있다.     Carol Guzy, Michael Williamson, Lucian Perkins 촬영 세 사람이 코소보 난민들의 모습을 담은 사진으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마케도니아 국경에서 남자가 그의 딸을 난민캠프로 향하는 버스에 태우려고 하고 있다. 마케도니아의 세노코스 난민캠프에 도착한 모녀. 세그레인 난민 캠프의 난민들이 블레이스로부터 난민을 태우고 온 버스가 도착하자   헤어진 가족과 친구들의 소식을 듣고자 담으로 몰려들고 있다. 북 코소보의 미트로비카에서 온 알바니아계이들이 알바니아로 향하는 국경에서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사람들로 가득찬 난민캠프에서 기다리는 동안    8살난 Avdullaha가 수천명의 난민을 알바니아로 태우고 간 차량과 비슷한 빨간 트랙터위에서 놀고 있다. 베나데트 수녀가 알바니아의 쿠크스에서 식량을 나누어주고 있다.    모리나 국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이 더이상 없자 그녀는 난민캠프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알바니아 쿠크스의 난민캠프에서 가족들이 재회했을때  2살의 Agim Shala가 철조망을 가로지르고 있다. 한 코소보 알바니아계 난민이 그녀의 삼촌 장례식에 애통해하고 있다. 난민들이 코소보로부터 피난길에 몇주 밖에 살지못한 아이를 묻고 있다. 집시 Velina는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  말하기를 그녀의 집은 돌아온 알바니아계 난민들에게 의해 불태워졌다고 한다 두 알바니아계 소년들이 집시의 폐허에서 불타오르자 도망치고 있다. 아파치 헬기가 폐허 위를 날라다니고 있다. "하느님께 감사합니다, 제가 살아있어서"  17세의 소년 (가운데 유니폼입은 사람) Ilir Bajraktari은 말한다.  그는 세르비아 감옥으로부터 풀려나온뒤 친구들과 친척들의 축하를 받고 있다.   세르비아인 경찰들이 그와 형제와 조카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뒤 담배를 먹이는 등의 고문을 가했다고 한다. Shquipe Spahiu 는 그의 25살된 아들 Astrit이,    세르비아 경찰에게 살해당한 것을 떠올리며통곡하고 있다     2001년 AP 통신의 알란 디아즈 촬영 요원들이 쿠바 난민 엘리안 곤잘레스를 데려가는장면을 찍은 사진.      Matt Rainey 촬영 시턴홀 대학교 화재로 부상을 당한 두 학생의 치료와 회복과정을 담아 상을 받았다. 블러드 홀 기숙사의 화재로  3명의 신입생이 사망하고 58명의 다른 학생들이 부상당했는데 이 중 4명의 상태가 심각하였다.  3층 문중 하나가 그 화재현장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Alvaro Llanos는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은 학생중에 한명으로  혼수상태에 빠져 수술실에 누워 목과 턱의 피부이식 수술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알베로의 팀원중 한명인 닥터 Michael Marano는 앞으로 많이 있을 첫번째 수술을 준비하며 바라보고 있다.  가족들에게는 그것은 너무나 긴 기다림이다.  알바로의 부모 Alvaro Llanos Sr는 대기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2년전 그는 뇌일혈로 쓰러진 바가 있기 때문에 여전히 걸을땐 지팡이를 사용해야 한다. 알바로의 혼수상태가 지속되는 동안  그의 룸메이트 Shawn Simons는 목욕을 하는 동안 그의 화상입은 손을 보고 있다.  비록 그는 그의 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지만    그의 룸메이트에 비해서는 생명을 위협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숀은 주문제작한 마스크를 쓴채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마스크가 꽉 조이고 뜨겁고, 무섭게까지 느껴져서    차라리 그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다. 심하게 다친 손가락 관절에 핀을 대는 수술을 앞두고,    어머니 Christine Simons 가 아들 숀을 수술실에서 편안하게 해주고 있다. 알바로는 여전히 병원에서 혼수상태이고 숀은 퇴원후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갔다.  집으로 가는 길에 화재가 난 학교 기숙사를 보았지만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온지 몇주가 지나고 숀은 교회로 가기 위해 입은 조끼에 단추를 맬수 있게 되었다.  그는 여전히 손에 난 화상을 가리기 위해 특별한 장갑을 쓴다. 알바로가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 숀은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그는 친절하게 그의 여자친구 Tila의 손에 키스를 했다.  숀이 화재로 인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둘의 관계는 계속되어갔다 숀이 회복되어 가고 있는 와중에  그의 룸메이트 알바로는 여전히 그의 삶과 싸움을 벌이고 있는 중이었다.  알바로는 그의 몸의 58%가 화상을 입었다.  화재가 난 지 3개월만에 약물투여로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알바로의 어머니 Daisy Llanos는 그의 아들이 의식을 되찾자 마스크를 낀채로 아들에게 키스를 했다. 알바로는 화재가 난뒤 3개월만에 첫 걸음을 뗐다.  휘청거려서 도움이 필요했다.  첫날, 그는 5걸음을 걸었고 다음날에는 88걸음을 걸었다. 그의 회복과정은 느리고 고통스러웠다.  그의 병실에 누워있는 동안, 알바로의 눈에는 눈물이 떨어졌다. 통원치료를 받게 된 알바로는 그의 어머니와 함께 그를 검사해줄 의사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이 기다리는 와중에 어머니 데이지는 너무나도 힘들어 했다.  그녀는 의자에서 구부려 있다가 갑자기 알바로를 두고 밖으로 나갔다 알바로와 숀의 시련은 그들을 이전보다 더욱 가깝게 만들어주었다.  그들은 뉴욕 메츠의 야구경기에 초대되었고,  그들이 메츠의 매니저 보비 발렌타인이 전화를 하는 동안 덕 아웃에 앉아있었다. 알바로는 메츠의 팬으로,  나중에 알바로는 그가 덕아웃에 앉아 공을 던지기 위해 올라가는 장면을 상상했다고 말한다. 화재가 난지 5달이 지나고 나서 알바로는 스스로의 힘으로 움직이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의 상처를 최소화 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수술들이 여전히 남아있다.  그와 숀의 어머니는 Shea 스타디움의 특별관람석으로 가기위한 엘리베이터를 탔을때  알바로는 한 소녀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했다. 심하게 화상을 입은 사람을 돌보는 것은 많은 스트레스를 가져올 수 있다.  알바로의 어머니 데이지가 그를 목욕시키고자 도와주려고 할때 그런 일이 일어났다.  이때문에 데이지는 알바로가 그의 청바지를 혼자 입을때 침실로 가 있어야 했다. 화상 전문의 토니 슈미트가 탱크룸 안에서 숀과 포옹하고 있다. 알바로와 그의 여자친구와의 관계는 숀 만큼만 하지 못한 것 같다.  화재 이후 알바로가 그의 학교를 처음 방문한뒤 알바로가 그의 여자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Angie 는 알바로의 회복을 위해 8개월동안이나 그와 함께 있었다.  "난 우리가 결혼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어요."  그녀와 알바로와의 관계에 대해 말하며  "하지만 지금 지금 그는... 그는 내가 사랑에 빠졌던 알바로가 아니에요" 알바로가 숀과 함께 숀의 19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촛불 앞에 서 있다.  "알바로는 모든 게 다 괜찮아질거에요. 난 그걸 의심하지 않아요. 그리고 전 그와 함께 할거에요."            
331    [쉼터] - 퓰리처상 수상작 사진모음(1) 댓글:  조회:5927  추천:0  2017-02-14
      1942년 밀턴 브룩스 촬영 1941년 4월 3일 아침. 노동조합원의 해고를 계기로 벌어진 디트로이트의 르주 공장에서 1만 5천명의 노동자가 파업에 들어갔다. 파업을 저지하려는 회사측과 노동자들의 투쟁에 경찰이 개입.  난투극이 벌어졌으며 미국 자동차 산업 사상 최대의 노동쟁의가 되었다.     1943년 프랭크 노엘 촬영 "Water" 1942년 1월 태평양 전쟁당시 일본의 공격을 받던 노엘 기자는  본사의 철수명령을 받았고 영국군의 호위를 받으며 수송선에 타 철수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뢰공격을 받고 침몰.  77명의 선원중 27명의 생존자들과 구명보트에 타 표류했다.  표류한치 며칠, 다른 구명보트가 노엘이 탄 보트에 가까워졌을때  보트의 인도인 선원이 물을 구걸하다시피 청했고 노엘은 그 광경을 촬영했다.  하지만 노엘의 구명보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한다.      1944년  프랭크 필란 촬영 "Tarawa Island"  태평양 전쟁 당시 초토화된 타라와 섬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Earle L. Bunker 촬영 "Homecoming"  1943년 7월 로버트 무어 대령이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광경.      1945년    조 로젠탈 촬영 "Iwo Jima flag raising"  미 해병대 6명의 병사가 이오지마 정상을 점령하고 수리바치산에  성조기를 꽂는 역사적 현장을 AP통신의 로젠탈이 촬영.     1946년 수상작 없음.     1947년    아마추어 사진사 아놀드 하디 촬영 1946년 12월 하디가 와인코프 호텔 화재현장을 찾아서 촬영한 사진.  이 여인의 사진은 다행히도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마추어 사진사로는 처음으로 수상.     1948년  프랭크 커싱 촬영 "Boy Gunman and Hostage"  1947년 6월 15세의 어린강도 에드 밴크롭트가 윌리엄 로넌이라는 소년을 인질로 잡고 있는 광경을 촬영한 것.  인질을 잡고 있는 현장을 포착한 드문사진으로 평가받았다.  로넌은 별 상처없이 풀려났다고 한다.      1949년  뉴욕 해럴드 트리뷴의 Nathaniel Fein 촬영 "Babe Ruth Bows Out"  1948년 6월 13일 거인으로 추앙받았던 베이브 루스의 은퇴식을 촬영하였다.  모든 사진기자들은 그의 앞모습을 촬영하였지만 페인은 그의 뒷모습을 촬영하였다.  어쨌건 루스는 은퇴 이후 얼마안가 세상을 떠났다.     1950년  "Near Collision at Air Show"     1951년  막스 데스퍼 촬영 "Flight of Refugees across Wrecked Bridge in Korea" 한국전쟁의 비극을 가장 잘 나타낸 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 12월. 극심하게 추웠던 겨울.  국군은 중공군을 피해 남하하기 시작하였다.  수많은 시민들은 남쪽으로 내려가려면 어떻게든 추운 강을 건너야만 했는데  유일한 길이 폭격으로 부서진 다리 뿐이었다.  그 광경을 촬영한 사진.  데스퍼는 자신이 본 광경중 가장 비참한 장면이었다고 회상한다.      1952년  존 로빈슨과 돈 울탕 촬영 1951년 10월 20일 미식축구의 흑인선수 조니 브라이트의 턱이 깨지는 사고를 6장으로 촬영하였다.  문제는 이 사고가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고의였다는 것.      1953년  윌리엄 M. 갤러거 촬영 1952년당시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애들라이 스티븐슨의 유세기간중  그의 신발에 난 구멍을 보고 촬영.     1954년  Walter M. Schau 촬영 탈출순간을 잡아낸 사진.      1955년  존 L. 거운트 촬영 "Tragedy by the Sea" 부부의 아이가 사라져버려서 절규하는 광경을 촬영.      1956년  뉴욕 데일리 뉴스의 스탭진 촬영 "Bomber Crashes in Street" 1955년 민가 앞에 추락한 폭격기를 촬영한 사진이다.      1957년    해리 L 트래스크 촬영 그는 안드레아 도리아호가 충돌에 의해 바다속으로 침몰하는 광경을 드라마틱하게 촬영해냈다.      1958년 워싱턴 데일리 뉴스의 William C. Beall 촬영 "Faith and Confidence" 두살배기 어린아이가 거리의 퍼레이드에서 안으로 걸어가려는걸  경찰이 다정하고 정중한 태도로 말리는 아름다운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1959년  윌리엄 시맨 촬영 거리의 아이가 갑작스런 사고를 당해 사망한 광경을 촬영하였다.     1960년  앤드류 로페즈 촬영 쿠바의 바티스바 정권시기에 복무했던 Pepe Caliente라는 남자가  혁명군에게 사형당하기 직전 신부에게 고해성사를 하고 있다.  1959년 1월17일 이 광경을 촬영했다.      1961년  마이니치 신문의 나가오 야스시 촬영 "Tokyo Stabbing" 사회당 당수였던 이네지로 아사누마가 연단에 나와 연설하던 도중  유세장에 한 학생이 달려들어 아사누마를 찌르는 장면. 이 장면은 두번째 칼날을 빼는 순간을 촬영.  이후 아사누마는 병원에 도착하기도 전에 사망하였다.     1962년  폴 배시스 촬영 "Serious Steps" 아이젠하워와 케네디의 뒷모습을 촬영하였다.  이 사진은 1961년 4월 22일 처음 실렸다.     1963년 헥터 로든 촬영 "Aid From The Padre"  62년 베네수엘라 쿠데타 당시  파디랴 신부가 부상당한 군인을 총알이 빗발치는 가운데 성사를 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1964년    로버트 H.잭슨 촬영 케네디 살인범 리 오스왈드를 잭 루비가 살해하는 장면을 촬영했다.     1965년  Horst Faas 촬영 1964년 베트남 전쟁당시의 광경.     1966년  키요치 사와다 촬영 미군의 폭격을 피해 강을 헤엄쳐 도망가는 베트남 일가의 모습을 찍었다     1967년  Jack R. Thornell 촬영 총격을 받고 괴로워 하는 흑인 인권운동가 메레디스의 모습을 찍었다.     1968년  로코 모라비토 촬영 "The Kiss of Life" 감전사고를 당해 쓰러져 있는 동료에게 생명을 불어넣고 있는 모습을 촬영했다.       토시오 사카시 촬영 "Dreams of Better Times" 1967년 6월 베트남의 미군의 모습을 촬영.      1969년 에드워드 . T 애덤스 촬영 "Saigon Execution" 베트남의 경찰청장 구엔 곡 로안이 베트콩을 처형하기 직전의 모습을 찍은 모습. 이 잔인한 장면은 이후 전파를 탔고  베트남의 여론을 반전으로 돌아서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Moneta Sleet Jr 촬영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장례식 광경을 찍었다.       1970년 스티브 스타 촬영 "Campus Guns" 코넬 대학교의 광경     "Migration to Misery" 자료없음.      1971년  존 폰 필로 촬영 켄트 주립대학교의 학생이었던 필로는  수업을 듣고 나오다가 학생과 방위군이 대치하는 광경을 보았다.  그러다가 방위군이 실탄을 쏘았고 한 학생이 쓰러진 광경을 찍었다.         Jack Dykinga 촬영 열악하기 짝이없는 장애 특수아 학교의 광경을 촬영한 사진이다.     1972년  "Death in Dacca" 자료없음     Dave Kennerly 촬영 초토화된 대지라 불리며 베트남 전쟁의 무상함을 잘 드러내주고 있는 사진.      1973년 Huynh Cong Ut 촬영 말로 설명하기에는 너무나 유명하지 않을까.  네이팜 탄 폭격에 판 틴 킴 퍽이라는 소녀가 불바다가 되어버린 곳을 피해 도망치고 있다.  전쟁에 끔찍한 순간을 포착한 이 사진은 베트남 전쟁에 종지부를 찍는데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소녀의 주인공은 현재도 잘 살고 있다.      브라이언 랭커 촬영 "Moment of Life" 한 아이의 탄생을 극적으로 잡아낸 사진이다      1974년  안소니 K 로버츠 촬영 "Fatal Hollywood Drama" 자료없음.      Slava Veder 촬영 캘리포니아 트라비스 공군기지에서 베트남 전쟁포로였던 로버트 스텀이 1973년 3월 18일, 가족들과 상봉하는 광경을 잡아내었다.  사진만이 말할 수 있는 순간이다.      1975년 제럴드 H. 가이 촬영 "Lull in the Battle" 시애틀 남부의 화재현장에 달려들고 난뒤 쉬고 있는 네명의 소방대원들의 모습.      Matthew Lewis 촬영 자신의 모습을 흑과 백의 명암으로 촬영. 자료없음.     1976년 루이스빌 학교의 통학버스.  자료없음.     스탠리 포만 촬영 1975년 7월 22일 보스턴에서 일어난 화재.  한 모녀가 소방 사다리를 타고 피신하려고 했으나  그만 소방 사다리가 붕괴되면서 둘은 추락하고 말았다.     1977년  Neal Ulevich 촬영 방콕거리의 무질서를 촬영.     Robin Hood of Chattanooga News-Free Press For his photograph of a disabled veteran and his child at an Armed Forces  Day parade. 자료없음.     1978년  John H. Blair of a special assignment photographer for United Press International For a photograph of an Indianapolis broker being held hostage at gunpoint. 자료없음.      스탠리 포만 촬영 1976년 4월 6일 보스턴 광장에서의 시위자들의 모습을 촬영하였다.     1979년 Thomas J. Kelly이 촬영 "Tragedy on Sanatoga Road" 사나토가 거리의 비극이라는 이름의 연작 시리즈.      Staff Photographers of Boston Herald American For photographic coverage of the blizzard of 1978.  자료없음.      1980년  자한지르 라즈미 촬영 이란의 이슬람 혁명당시에 1979년 8월 27일 쿠르드 인 11명을 집단처형하는 광경을 촬영.  당시 촬영자의 신원 보호를 위해 익명처리하였으나 최근에 라즈미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Erwin H. Hagler of Dallas Times Herald For a series on the Western cowboy.  서부의 카우보이.  자료없음.      1981년  래리 프라이스 촬영 당시 래리 프라이스는 선교사들을 찍기 위해 라이베리아로 갔었는데  1980년 4월 사무엘 도우라는 특등하사가 쿠데타를 일으켰다.  정부를 전복시키고 도우는 해변에서 정부 관계자들을 사형 시키겠다고 밝혔다.  프라이스는 이 사형 광경을 사진에 담았다.      Taro M. Yamasaki of Detroit Free Press For his photographs of Jackson (Mich.) State Prison. 자료없음      1982년  에드먼즈가 촬영 1981년 3월 30일 레이건의 암살시도.     존 H.화이트 촬영 20여장의 사진으로 다양한 일을 하는 사람들을 촬영한 것을 찍었던 사진.      1983년 빌 폴리 촬영 베이루트의 사브라 난민캠프에서의 학살에서의 피해자와 생존자를 담아낸 연작 사진들.  레바논 사브라에는 당시 팔레스타인 난민캠프가 있었는데 바시르 게마이엘 대통령의 암살사건의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고용한 용병에 의해 난민캠프의 사람들이 학살된 사건.     딕맨 촬영 1982년 엘살바도르의 폭력사태가 극에 달했을때 존 딕맨은 군부수행원들과 함께 시골을 방문했다.  그때 당시 반정부 지도부로 여기는 사람들을 닥치는 대로 처형하는 죽음의 분대가 있었는데  딕 맨의 사진은 한 여인이 최후의 순간에 집행유예로 살아남자  풀썩 무너질듯한 여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1984년  Anthony Suau 촬영 전몰장병기념일에 한 여인이 남편의 묘비를 부여잡고 오열하고 있는 모습. 전쟁의 비참함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보스턴 글로브의 스탄 그로스펠드 촬영 레바논 사태당시 스탄이 베이루트로 날라가 사진을 찍으면서 레바논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다가 뛰놀고 잇는 아이들을 발견하고 그 사진을 담았다.      1985년 스탄 그로스펠드는 1985년 멕시코의 불법입국과 에티오피아 기아로 퓰리처 상을 수상하였다. 본 사진은 1984년 수단의 난민수용소에서 식량배급을 기다리는 에티오피아 모녀의 모습.  이 사진의 소녀는 그날 세상을 떠났다.     Larry C. Price of Philadelphia Inquirer For his series of photographs from Angola and El Salvador depicting their war-torn inhabitants. 자료없음     1986년 Tom Gralish 촬영 당시의 사회문제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Carol Guzy 와 Michel duCille 촬영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즈 화산의 분화장면을 찍었다.     1987년  For his photographic coverage of the fall of Ferdinand Marcos. Kim Komenich of San Francisco Examiner. 자료없음.     For his photographs depicting the shattered dreams of American farmers. David Peterson of Des Moines Register 자료없음.     1988년 Scott Shaw 촬영 1987년 10월 텍사스 미드랜드에서 18개월된 Jessica McClure가 우물에 빠졌을 때 구조되는 장면. 아이는 현재 결혼해서 잘살고 있다고 한다.      For photographs portraying the decay and subsequent rehabilitation of a housing project overrun by the drug crack. Michel duCille of Miami Herald. 자료없음     1989년 론 올쉬방거 촬영 프리랜서 사진기자였던 론 올쉬방거가 촬영한 사진.  1988년 12월 세인트 루이스에서 일어난 화재현장을 사진에 담았다.  올쉬방거는 한 아파트에서 소방관에 의해 구조되는 한 아이의 사진을 촬영하였다.  소방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진속의 아이 페트리샤는 화상으로 인해 6일만에 생을 마감했다.     For his series of photographs. depicting student life at Southwestern High School in Detroit. Manny Crisostomo of Detroit Free Press 자료없음     1990년 Photo Staff of Tribune, Oakland, Calif. For photographs of devastation caused by the Bay Area earthquake of October 17, 1989     데이비드 턴리 촬영 "천안문과 베를린" 차우세스쿠의 사망 소식에 감격해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남성. 서유럽의 분쟁지역을 촬영한 공로로 퓰리처 상 수상.    
330    [쉼터] - 신비스러운 폐허세계 댓글:  조회:2359  추천:0  2017-02-14
  신비스러운 세계의 폐허  ▲ 1. 이탈리아 샌 프루투오소 '심연의 예수'  ▲ 2. 나미브 사막의 버려진 마을 '콜만스콥' ▲ 3. 호주 홈부시 베이에 있는 SS Ayrifield ▲ 4. 베이징 외곽의 버려진 '놀이 공원' ▲ 5.Chesapeake 만에 위치한 홀란드 섬 ▲ 6. 독일 검은숲 안에 있는 15세기 수도원 ▲ 7. 남극 맥머도 사운드에 있는 페가수스 잔해 ▲ 8.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 9. 영국 몬셀 바다 요새 ▲ 10. 영국 서섹스 지방의 보디엄 성 ▲ 11. 폴란드 체스토초바 기차 정거장 ▲ 12. 남극 침몰한 요트 ▲ 13. 1984년 사라예보 동계올림픽 봅슬레이 경기장 ▲ 14. 러시아 로켓 공장 ▲ 15. 이탈리아 소렌토, 버려진 방앗간 ▲ 16. 폐기 발전소의 냉각탑 ▲ 17. 불가리아 공산당 강당 ▲ 18. 대만 버려진 도시 'Keelung' ▲ 19. 콜롬비아 'El Hotel del Salto' ▲ 20. 일본 나라 '드림랜드' ▲ 21. 플로리다 남서부, 폐허 돔 하우스                
329    작은 가족, 큰 가족, 세포조직, 그리고 그림의 세계... 댓글:  조회:3606  추천:0  2017-02-11
    큰가족도/ 1986/ 193x259 /캔버스에유채   숲의가족/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숲을날으는가족/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숲속의가족/ 1990/ 73x91 / 캔버스에유채   소와가족/ 1986/ 194x259/ 캔버스에유채   어느가족의여행/ 1989/ 53x45/ 캔버스에유채   가족이있는전원/ 1988/ 90x116/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72x60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90x72 /캔버스에유채   작은가족/ 1994/ 73x91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3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2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1/ 73x6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5/ 72x90 /캔버스에유채   가족/ 1994/ 72x60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60x72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45x53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60x72 / 캔버스에유채     가족여행/ 1990/ 91x73 / 캔버스에유채         출처:카틀레야의 이야기  [출처] 황영성의 그림세계|작성자 임 산   ====================================================                   황영성의 고향과 가족에 대한 미학적 관찰               ▲농부의 집, 유화 97*145cm 1975                     ▲시장에서, 1984                 ▲ 황소와 가족, 1975                   황영성은 무조건적인 얼싸안음의 미학이다. 이것은 바로 따뜻한 인간들의 체온이 만들 수 있는 일종의 유토피아이다. 자연에 안긴 인간 어머니의 품에 안긴 아이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한국의 내면에 이런 모든 것이 하나로 연결되고 품어지는 세계에 대한 노스탤지어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런 한국적 정서를 회화적으로 승화시켜 그림을 보이는 이로 하여금 탄성이 터지게 하는 그림이다. 1990년대 그의 작품 '가족'시리즈는 아이러니컬한 절충주의가 중대한 원칙인 레퍼토리 방식으로 전개된다. 몇몇 기호들은 수평으로 기울어지거나 비스듬히 미끄러지기 때문에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있어 상하의 구분이 정확하지 않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의 기억이나 인생과도 같이, 특이하고 기이한 구성이며, 모순과 균형의 놀이이며, 움직이는 세계이다. 그러나 이 작품에는 일관성이 있다. 그것은 분할되어 있음에도 조각 조각으로 분열되지 않으며, 복합적이면서도 잘게 부서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 필립 다장 (미술비평가)  황영성의 1980년대 작품에서 추출할 수 있는 가장 요긴한 성소는 인간에 대한 애정이다. 우리의 가족과 이웃들에 대한 정감 넘치는 애정의 표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가 차단 당한듯한 오늘의 산업사회에서 발견하기 힘든 친화관계를 그는 작품을 통해 설득적으로 개진한다. 그의 작품의 주소재가 농촌인 것은 그 장소야말로 마지막 남은 인간의 애정의 보루이기 때문일 것이다.  때묻지 않은 자연, 그것을 근거리에 둔 전원지대의 녹색 들판과 빛이 수직으로 수평으로 이어지면서 거기 옹기종기 모여 있는 농가와 토담과 황소가 동심적 시각으로 닿아온다. 요컨대 작가는 동심적 시각과 표현방법을 차용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이의 순진무구한 동심에서 조력을 구하여 그와 유사한 테두리 안에서 작업을 진행시킨다. 따라서 소재대상은 실체적으로 닿아오는 물질화된 대상이 아니라 어린이의 추상적 관념으로서만 건질 수 있는 비현실적 풍경이다.   - 김인환(미술평론가)     확실히 1970년대 황영성의 그림에는 전설적인 고향이야기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응축되어 있다. 찌그러진 초가며, 촌부, 황소, 숲, 황톳길 같은 먼 기억 속의 고향과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앉는 정겨운 가족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것들이 조금도 낯설지가 않다. 슬픈 고향의 이야기, 가족에 대한 점액질 사랑과 그리움이 끈끈하게 담긴 그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세대의 비극적이었던 과거 기억들이 모두 되살아나는 것 같다.  그는 '가족과 고향'시리즈를 통해 '잃어버린 것들'을 열심히 회복시키고자 했었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의 이와 같은 일련의 작품의 뿌리는 과거 그의 아픈 삶의 체험적 기억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는 '가족'시리즈를 통해 그의 모든 것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황영성은 "언젠가는 홀 맺힌 과거의 궤적을 모두 털어놓고 싶다"고 말한 것을 보면 아직도 그는 할 이야기가 너무 많은 것 같다.   - 문순태(소설가)           황영성 - 소ㆍ고향ㆍ가족ㆍ생명의 작가     병역미필로 교사 해직…새옹지마 될 줄이야 조선대 입학…임직순과 '운명의 만남' / "블랙ㆍ화이트로 색 표현해야" 깨달음 67년 국전출품 수상…'회색시대' 도래    킬리만자로 이야기 1. 1980년대. 60.6×72.7㎝. 캔버스에 유채   황영성은 광주사범학교를 마치고 나주 아름다운 영산강변의 남초등학교로 부임했다. 그러나 행복했던 교사생활은 2년 만에 끝나버렸다. 5ㆍ16 직후 "병역을 마치지 않은 교사는 모두 해임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기 때문이었다. 반공법과 함께 병역기피는 당시 가장 가혹한 처벌대상이었다.    영성은 징집영장을 받아놓은 상태여서 엄밀한 의미에서는 연기였지 기피는 아니었다. 그러나 초등교사의 항변 따위가 통할 리 없었다. 내팽개쳐지듯 교사직에서 쫓겨난 그는 조선대학교 문리과 대학 미술학과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운명처럼 평생의 스승인 임직순을 만났다. 1961년은 임직순이 서울생활을 접고 조선대 미술학과장으로 부임한 첫해였던 것이다.  새옹지마란 이런 상황을 이르는 말인가. 인생의 물굽이가 화업의 세계 쪽으로 급선회하는 순간이었다. 임직순은 1957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래 한국 최고의 화가로 부상해 있었다. 화단의 절정고수로 등극해 있었던 것이다. 그런 스승의 실력과 인품이 영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화가의 꿈을 키우던 가난한 사범학교 미술부 시절의 열망이 불꽃처럼 되살아난 것이다.    소 이야기. 1983. 72×90㎝. 캔버스에 유채.   그렇게 스승에 대한 감탄과 존경으로 가슴을 졸이며 미술학과 1학년을 마친 뒤 입대했고 64년에 복학했다. 군복무를 마쳤으므로 그는 교사 발령을 받아 초등학교 교사를 겸하면서 학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리고는 1년 후인 1965년, 그가 근무하던 영산포의 대흥당이라는 조그만 찻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그동안의 가슴 아린 열정이 시골동네의 개인전으로 되살아난 것이다.  2월이었으므로 몹시 쌀쌀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스승 임직순은 조교이던 진양욱ㆍ김종수 등과 함께 그곳까지 직접 찾아와 주었다. 전시작품은 주로 풍경을 소재로 한 유화 50여 점이었다. 임직순은 그 자리에서 "젊은 작가 황영성은 진실과 열정을 지닌 이 고장의 보기 드문 예술가입니다. 서정적인 정감을 바탕으로 한 학구적 구성력과 아름다운 색감의 소유자입니다."라는 평을 내려주었다.    소. 1980. 130×193㎝. 캔버스에 유채   스승의 칭찬에 고무된 영성은 그 전시 이후 곧바로 교직생활을 정리하고 학업과 작업에 몰두해나갔다. 1966년 조선대학교 미술과를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해 조교로 근무하면서 그림세계로 정진해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영성의 목표는 스승 임직순의 세계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뛰어넘기 위해서는 우선 모방을 통해 그 세계를 체득해야만 했다.   그러나 임직순의 구도는 너무나 높은 벽이었고, 색채는 끝이 보이지 않는 우물처럼 깊었다. 임직순의 구도와 색채 앞에서 남도의 화가 지망생들은 너나없이 깊은 혼란에 빠져 있는 상황이었다. 스승의 세계는 반드시 넘어야 할 벽이었고, 그러나 너무 높은 벽이었다. 영성은 스승의 구도와 색채를 뛰어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그러나 무작정 모방에 매달리던 그의 정신은 벼랑에 매달린 나뭇가지 같았다. 무언가 붙잡지 않으면 벼랑 아래로 추락해버릴 것만 같았다.  어느 날 작품 평가시간에 임직순은 스페인의 화가 크라베의 작품을 펼쳐놓은 채 이렇게 말했다.  "진정한 색채의 달인이 되려면 블랙과 화이트만으로도 모든 색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크라베는 검은 색과 무채색을 주조로 하는 화가였다. 그 순간 임직순의 그 말은 커다란 충격과 함께 깊은 깨달음으로 밀려왔다. 한국최고의 색채화가에게서 검은색과 흰색만으로 모든 색채를 표현하라는 말 속에는 엄청난 비밀이 깃들어있는 것이었다. "아, 이것이구나!" 섬광처럼 번뜩이며 뇌리를 스쳐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영성은 그 순간 스승에게서 은밀한 비밀 하나를 순간적으로 포착해내고야 만 것이었다.  그날부터 영성은 흰옷을 입은 모델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인물을 그릴 때는 모델이 필수적이던 시절이었다.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죄악시 되던 때였다. 그때 흰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자신이 찾는 모델로서는 적격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때마침 친구의 부인이 전남대병원에 간호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영성은 친구에게 부탁을 했고 친구 부인은 전남대 병원의 간호사를 모델로 소개해주었다. 그날부터 병원을 들락거리며 날마다 드로잉을 하고 조금씩 그림을 완성해가기 시작했다. 흰색과 검은 색 사이에서 자연스레 회색톤이 배어나오기 시작했고 회색에 맞는 구도가 나타났다. 새로운 세계로의 혼신의 침잠 끝에 마침내 두 명의 간호사를 그린 '병동의 오후'라는 그림이 태어났다.  자신만의 색채와 구도를 화폭에 가득 채운, 그야말로 황영성 풍의 그림이었다. 가슴 졸이며 그 작품을 국전에 출품했고, 마침내 그해 특선을 차지해버렸다. 스승의 가르침에 깨달음을 얻은 지 2년만인 1967년의 일이었다. 그리고는 내쳐 회색조의 그림을 그려 그해 전남도전에서 서양화부 수석상을 받았다. 본격적으로 영성의 회색시대가 열린 것이다. 열정과 노력과 끊임없는 모색의 남도 천재화가가 자신의 세계를 활짝 열어젖히는 순간이었다...   그림 '초가집' 미국인 사로잡아… 작품 매진석양속 고향풍경 감동…화폭에    해마다 국전 도전해 특선 6번    작업 중인 작가   황영성은 1970년 부인 김유임을 맞아 결혼 했다. 전임강사로 조선대 미술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하던 그 이듬해였다. 누구에게나 그렇듯 결혼은 그의 차갑고 메마른 가슴을 감싸주는 온기의 울타리가 되어주었다.  가정의 따스함은 예술가에게 영혼의 치유제이며 작품의 원동력이 되는 것이다. 오랜 지우인 소설가 문순태씨는 "대학시절 그의 보랏빛은 음울한 슬픈 빛깔이었다. 그때의 보랏빛은 외로움을 이야기해주는 듯 싶었다. 그러다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갖게 된 후부터 그의 빛깔은 놀랍도록 화사해졌다. 그는 어두운 색감으로 밝음을 빚어내는 놀라운 미감을 갖고 있다. 그것은 우리의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원초적인 미의 빛깔이며 참으로 위대한 발견이었다."라고 적었다.  가정이라는 따스한 울타리가 그의 삭막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그 따스함을 연료삼아 그의 가슴에 상처처럼 각인된 그리움의 정체를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가족 1988. 캔버스에 유채. 129X192Cm.   71년도 봄, 그는 화우인 박상섭의 아버님 회갑잔치에 초대받았다. 박상섭의 집은 지금의 매곡동 전남연수원 부근에 있었다. 학교의 일과를 끝내고 그곳에 도착했을 때는 석양 무렵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펼치고 앉았는데 지붕 너머로 해가 뉘엿뉘엿 기울어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아름다움이었다. 석양의 지붕과 마을의 온기와 집안의 떠들썩함이 문득 그의 가슴에 안기듯 내려앉고 말았다.   감성의 어느 부분이 건드려진 것일까. 가슴이 마구 뛰면서 금세 눈물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만 같았다. 처음 겪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감동이었다. 갈 곳 몰라 하며 가슴에 갇혀 있던 그리움의 물줄기가 석양의 고향풍경을 만나 둑을 무너뜨린 것만 같았다. 토방 아래로 북적이며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흥겨움이 그의 외로움을 다독거려주는 것만 같았다. 그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가슴 속을 소용돌이치던 화가의 본능이 툭, 하고 튀어나와버렸다.  '아! 이 감동을 그려서 원인 모를 외로움에 시달리는 사람들의 가슴에 걸어주어야만 한다!'  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그는 내내 그 감동을 화폭에 옮기는 상상 속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었다.  다음날부터 날마다 학교의 일과가 끝나면 박상섭의 집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인자하신 그 고향의 어머니와도 사진을 찍었고, 그 아름다운 고향의 구도를 수없이 스케치 하고 또 가슴에 담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집뿐만이 동네 전체를 스케치하고 기운을 들이마셨으며 조금씩 아름다운 구도를 완성시켜나갔다. 틈나는 대로 그 너머에 있는 서방면 마을까지 가서 그곳의 초가집들을 샅샅이 스케치 하곤 했다.    소와 가족. 1986. 194X259Cm. 캔버스에 유채.   드디어 한국의 고유한 조형미를 구축해내는데 성공했다. 마침내 그해 최초의 초가집 그림 '토방'을 국전에 출품해 특선을 받았다. 120호짜리 대작이었다. 그 그림을 감상한 고향과 서울의 선배들이며 후배들의 칭찬과 감탄이 줄줄이 이어졌다. 알고 보면 너나없이 고향과 어머니 품이 그리운 미아들이었으며 아련한 그 그리움의 기준점을 영성이 화폭에 그어준 것이었다. 외로움의 정체가 드러나고 그 그리움의 기준점이 명확해졌을 때 환호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때부터 영성은 본격적으로 초가집을 발전시켜가며 한국의 토속적 아름다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73년도에는 마루에 노인이 앉아있는 그림 '온고'를 출품해 그해 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받았다. 그렇게 그는 해마다 국전에 도전해 6번 특선 차지했고, 7번 입선했다. 마침내 80년도에는 국전추천작가가 됐다. 그런데 아쉽게도 그 다음해부터는 국전이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문득 발밑이 꺼져버린 듯 한 아쉬움이 느껴졌다. 젊음을 불태우며 도전과 실패를 거듭하던 목표가 문득 꺼져버린 것이다. 그 순간, 비로소 그는 도전해야할 목표는 바로 자신이라는 것을 알았다. 끝없이 모색하고 도전해오는 동안 어느새 쌓아진 자신의 역량이 바로 딛고 일어서야 할 발판이며 목표라는 것이 깨달아졌던 것이다.  국전추천작가가 되던 80년 그해, 뉴욕에서 열리는 한국 작가 6인전에 참여할 기회가 왔다. 5ㆍ18 나던 그해 9월이었다. 임직순ㆍ최영림ㆍ윤주석ㆍ홍종명ㆍ황규백 등의 기라성 같은 대가들과 함께였다. 뉴욕에 내리니 모든 건물이 아찔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너무나 현대적인 건물들이었다. 그 건물들 앞에 서는 순간 영성은 후회하고 말았다. 자신이 가지고 간 그림은 모두가 지극히 촌스러운 초가집 그림들이었기 때문이었다.    마을. 1984. 50X60Cm. 캔버스에 유채.   되돌릴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순간 앞에서 영성은 진땀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초가집 그림 6점은 최고급 빌딩의 벽면에 내걸렸고 영성은 아예 눈을 감았다. 태생이 그러하니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뉴욕 관객의 눈길을 단박에 사로잡은 것은 바로 영성의 초가집 그림들이었던 것이다.  이 한국작가 6인전을 '크리스천 사이언스 모니터'지에서는 '서구식 현대미술 시장에 나타난 한국인들'이라는 표제로 보도했다. 그 기사 속에서 "이 가운데 황영성은 강한 조형언어로써 시선을 사로잡으며 상쾌한 색채감각에 의해 자연과 직접적인 대화를 나누며 사랑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다"라는 내용의 기사가 떠들썩하게 실린 것이었다. 일거에 영성의 초가집 그림들은 뉴욕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남김없이 팔려나가 버리고 말았다. 한국 초가지붕의 아름다운 색채와 구도가 현대문명의 극점에 선 미국인들의 가슴을 울려버린 것이다.   '남도의 화풍' 세계에 알린 '한국화단의 총아' 뉴욕6인전 이후 유명화가로 급부상 / 회색톤 '마을'→녹색톤 '농경도'로    가족. 1994. 72×60㎝. 캔버스에 유채.   뉴욕전시 후 황영성은 세계 속 한국화단의 총아로 떠올랐다. 가장 남도적인 화풍을 세계적인 화풍으로 끌어올린 것이다. 뉴욕 6인전으로 영성은 세계무대에 화려하게 데뷔한 것이다. 뉴욕전을 계기로 그는 한국적인 그리움의 뿌리를 찾아 여행을 떠났다. 한국 속에서는 한국적 그리움의 정체가 뚜렷해지지 않는 법. 뉴욕을 기점으로 영국ㆍ독일ㆍ프랑스ㆍ노르웨이ㆍ덴마크ㆍ스웨덴 등지를 떠도는 내내 한국의 정체성을 가슴에 새겼다. 비로소 그리고자 하는 그리움의 본질이 선명하게 정체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가 돌아가고자 하는 곳은 고향이었고, 생명의 근본이었고, 어머니의 품안이었다. 외로움의 지향점이 확실해진 것이다.    가족여행. 1990. 45x53cm. 캔버스에 유채.   세계여행에서 돌아온 직후 서울 예화랑에서 초대전을 가졌다. 예화랑은 진양욱 등의 남도화가들이 성황리에 데뷔전을 치른 곳이었다. 예화랑의 전시는 그를 유명작가로 끌어올리는 출발선이 되어주었다. 관훈동에서 강남으로 옮기면서 영성을 대표적인 뉴스타로 내세운 것이다.  이것이 한국에서는 정식 데뷔전인 셈이었다. 이렇게 뉴욕에 이어 그는 한국에서도 일약 스타로 부상했다. 그해 세계 속에 남도를 알리는 공훈을 인정받아 전라남도 문화상을 수상했으며 조선대 미술대학의 부교수가 되었다. 영성의 존재감으로 화단의 저울바늘이 크게 휘청인 한 해였다.  영성의 회색시대가 서서히 저물고 있었다. 지금까지는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 결핍감을 승화하는데 진력을 다했다. 모든 그리움의 귀향점이 어머니의 품과 자궁 안이듯 그는 그리움의 기점을 완성시키는데 노력했다. 붓끝에 남도의 온기를 적셔 한 획, 한 획 그어대며 마침내 그리움의 다리를 완성시켰다.    =...발췌.....   출처 :풍기인삼    작업 중인 작가의 모습.   쉬시린 중국서예연구원장(왼쪽에서 두번째)이 춘화추실이라는 글을 써서 황영성 화가(세번째)에게 증정한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춘화추실(春花秋實)”. ‘봄에 꽃을 피우고 가을에 열매를 맺어 추수한다’는 뜻이다.  쉬시린(許喜林) 중국서예연구원장은 9일 황영성(黃榮性, 71) 화가의 진르메이슈관(今日美術館) 개인전 개막식이 끝난 뒤 열린 뒤풀이 장소에서 “황영성 화가의 그림을 보고 너무 감동해서 이 글을 썼다”며 직접 쓴 붓글씨를 들고 나와 황 화가에 선물했다.  한국 화가로는 처음으로 중국의 대표적 민간미술관인 진르메이슈관(今日美術館)의 제1전시실에서 10일부터 20일까지 개인전을 여는 황영성 화가의 그림이 중국인의 화심(畵心)을 사로잡고 있다.  ‘기호의 비밀(符號的秘密)’이란 주제로 열리고 있는 이번 황 화가 개인전에 대한 중국인의 관심이 얼마나 뜨거운지는 9일 오후 열린 개막식에 200여명이 몰린 인파로 느낄 수 있었다. 황영성 개인전을 기획한 황두(黃篤) 큐레이터는 “마을 소 닭 달 호랑이 숫자 등의 물상(物像)에서 아동적이고 질박함 정취를 추출하고 재해석한 뒤 추상성과 장식성 및 상징과 기하학적 기호들을 화면에 재구성한 것이 중국인들에게 호소력을 발휘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로 154cm, 세로 77cm의 '가족이야기' 작품 9개를 이어붙여 전시한 작품. 7억~8억원으로 팔릴 예정이다. 황영성 작가는 “자연과 사람은 함께 사는 가족”이라며 “함께 어울려 사는 과정을 축약해서 표현하다 보니 기호처럼 느껴지지만 그 기호를 보면 따듯한 한국의 자연과 함께 하는 사람의 삶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이번 황영성 화가의 ‘기호의 비밀전’을 여는데 기여한 김성현 커번광뎬(科本光電) 회장은 “황 화가의 작품은 100호 기준으로 5000만원 정도로 판매될 것”이라며 “중국 화가에 비해 한국 화가가 중국 시장에서 저평가돼 있는데 황 화가의 이번 개인전을 계기로 한국 화가가 중국 시장에서 제대로 평가될 것”이라고 밝혔다.  황영성 화가는 조선대 미술학과를 졸업하고 국전에서 특선(1973년)상을 받았으며, 1991년에는 제25호 몬테카를로 국제회화제 특별상을 수상했다. 1993년에는 금호미술상, 2004년에는 이인성 미술상을, 2006년에는 황조근조훈장을 받았다.  한편 진르메이슈관은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지 1년 뒤인 2002년에 진르그룹이 만든 민간미술관으로 현대미술을 대표하는 사립미술관이다.   
328    "락서화" 뒷면엔 녀인의 얼굴이 없다?... 있다!... 댓글:  조회:2807  추천:0  2017-02-10
  성(聖)과 속(俗)의 차이는 뭘까? 속세와 열반은 종이 한 장 차이 아닐까? 불상(佛像)과 해골, 포르노 영상을 빠른 속도로 중첩시켜 대형 스크린에 투사하는 박현기의 비디오아트 '만다라'(1997)는 영상에서 새어나오는 신음소리 못지않게 관람객을 향해 움찔한 화두를 던진다. 서울시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열리고 있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은 문패만큼이나 철학적인 전시다. 돌, 철판, 나무, 물, TV 모니터를 소재 삼아 '실재와 허상'에 대한 질문을 집요하게 던졌던 1세대 비디오 아티스트 박현기(1942~2000·사진)가 주인공이다. 백남준 명성에 가려 큰 빛을 보진 못했으나, 박현기는 1970년대 말부터 한국 비디오아트를 선구적으로 이끈 인물이다. 홍익대에서 서양화와 건축을 공부한 뒤 대구로 낙향, 건축 인테리어 사업을 해 번 돈으로 모니터와 카메라를 사서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대구 미문화원 도서실에서 우연히 백남준의 1973년 작 'Global Groove'를 보고 충격을 받은 것이 비디오 작업을 시작한 계기. 열 살 연상이던 백남준 영향을 받으면서도, 첨단기술보다는 인간의 온기, 동양적 정신세계를 비디오 작업에 불어넣으려 노력했다. 일본을 비롯해 상파울루 비엔날레(1979), 파리 비엔날레(1980) 등에 출품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글자와 기호들이 낙서처럼 뒤섞인 박현기 드로잉. 자세히 보면 왼쪽 부분에 여인의 얼굴이 보인다. /갤러리 현대 이번 전시에서는 '만다라' '낙수' '반영' 같은 대표 영상 작업을 비롯해 그간 소개되지 않은 드로잉 작품 20점을 볼 수 있어 귀하다.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열린 박현기 회고전에선 볼 수 없었던 회화들이다. 숲 같기도 하고, 나비 같기도 하며, 수학 강의실 칠판 낙서 같기도 한 드로잉들은 모두 오일스틱으로 그렸다. 작품에 바짝 눈을 들이대고 볼수록 오묘한 재미가 솟는다. 숫자와 도형, 글자와 그림들이 서로를 감추고 덮으면서 중첩된 화면은, 삶의 실체와 진실이 무엇인지 평생 의문하고 답을 구했던 작가의 머릿속을 훔쳐보는 듯 흥미롭다. 호기심 많은 사람이라면 화폭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삼각형과 '物=心' 'spirit' 'matter' 'utopia' 같은 문자들을 암호 해독하듯 풀고 싶어질 것이다. 여인의 얼굴이 희미하게 숨어 있어 섬뜩한 작품도 있다. 미술평론가 강태희는 "실체를 향한 작가의 끈질긴 질문과 그것들을 그림으로 풀기 위한 치열한 투쟁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썼다.   불상과 포르노 영상을 중첩시켜 보여주는 비디오아트 ‘만다라’. /갤러리 현대 전시장 3층, 나무와 철판으로 구성한 설치 작품도 재미있다. 역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두툼한 원목들을 마루처럼 깐 형상인데 다 같은 나무가 아니다. 절반은 철로에 깔았던 낡은 침목, 절반은 박달나무로 만든 다듬이대로 언뜻 보면 구분되지 않는다. 설치물의 정면과 측면에 서로 다른 크기로 그려진 사각 프레임도 묻는다. '진짜 내 모습은 무엇일까?' 음양오행설부터 변증법적 유물론까지 심취했던 작가답게 생각할 거리를 쏟아내는 전시다. "완전한 대상이 그물에 걸렸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우리가 잡았다고 생각하는 그 대상은 추상의 결집이지 대상 그 자체는 아니기 때문이다." 생전 작가의 말이다.  =================== 박현기(1942~2000)는 모니터를 나무, 돌, 대리석과 함께 설치하고 특정 주제를 가진 영상들을 중첩, 조합해 이미지를 재구성하는 방식의 작업으로 한국 현대미술의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작가다. TV모니터를 작업의 재료로 사용하는지라, 곧 잘 세계적 비디오아티스트인 백남준의 후대작가로 불리기도 하지만 “백남준이라는 큰 산을 넘고자 노력했고, 그와는 전혀 다른 예술언어를 구사한다”는 게 후배인 신용덕 미술평론가의 말이다. 이번 전시에는 대표작으로 꼽히는 영상작품을 비롯, 설치작품, 오일스틱 드로잉 등 25점이 선보인다.  박현기, 무제, 1982, 돌, 가변설치.[사진제공=갤러리현대] 전시를 관통하는 주제는 작가가 살아 생전 관심을 보였던 ‘이미지의 중첩’과 ‘바라보는 것의 문제’로 요약된다. 화면 전체에 배경으로 깔린 수많은 포르노 영상과 불교 만다라 도상의 중첩은 현대사회의 ‘진리’를 그려냈고, 철도에 쓰인 침목과 천을 두들기는데 사용했던 나무 다듬이대는 그 위로 수없이 지나갔던 기차의 시간과 옛 여인의 방망이질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보이지는 않지만 실재했던 타격들의 중첩이다. 또한 바닥에 놓인 다듬이대와 침목의 조합은 관람객의 위치에 따라, 길쭉한 직사각형으로도 혹은 정사각형으로도 보이며 이것이 벽에 설치된 철제 프레임과 쌍둥이처럼 겹쳐진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같은 중첩은 회화작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박현기는 설치작업으로 더 유명하지만 1993~4년엔 회화작업에 몰입하기도 했다. 한지에 오일스틱을 활용한 드로잉으로, 여러번 겹쳐그린 선이 인상적이다. 생활을 위해 건축가로도 활동했던 흔적이 회화에도 드러난다. 짧고 곧으면서도 부드러운 선은 도식화된 건축 드로잉의 특징이기도 하다. 중첩된 선은 여느 추상화 작품처럼 보이나 사실 그 아래 작가가 늘 작품에 차용했던 돌과 모니터, 만다라 등 다양한 이미지가 섞여있다. 화면 하단에 작가 자신의 주민번호가 또렷히 기록된 것 또한 독특하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신용덕 미술평론가는 “들쑥날쑥 하는 생각의 과정을 뭉툭하게 그려지는 오일스틱으로 한지에 그려낸 것은 명확하고 깔끔함을 추구하는 서양미술에선 일종의 ‘에러(틀린 것)’로 볼 수 있으나, 그렇게 선명하지 않고 빗 맞추는 것의 미학이 있다”며 “국제무대에서 최근 한국미술, 특히 단색화가 재평가 받는 것도 이러한 한국적 미학을 이해하기 시작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림도, 메모도, 음표도, 단어도 아닌 낙서같은 회화작업 앞에 서면 사실은 명확하지 않은 우리 삶의 모습과 닮았다. 강태희 미술평론가는 전시 서문에서 “특정 대상의 이미지를 그리기보다 즉흥적인 손의 움직임이 그대로 기록되는 인덱스적 작업”이라고 설명했다.  Untitled, 1993-1994, 한지에 오일스틱, 79x104cm [사진제공=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2015년 국립현대미술관서울관에서 회고전에 이어 2년만에 열린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지난 회고전에 다루지 못했던 박현기 작가의 다른 모습에 집중했다”며 “단순히 한국 비디오아티의 선구자로 설명되는 박현기를 넘어서 그의 작품세계 전반에 흐르는 철학적 메시지를 깊이있게 다루고자 했다”고 기획의도를 설명했다.  ========================= (79×104㎝, 3월12일까지 갤러리 현대)   아들은 부끄러웠다. 자랑스레 친구를 이끌고 아버지 전시가 열리고 있는 전시장을 찾았지만 그림은 없고 돌무더기만 덩그러니 쌓여있었다. 창피한 마음에 아들은 친구의 손을 급히 이끌어 전시장에서 도망치듯 나와버렸다. 얼마나 황당한 일이었을까. 박현기(1942~2000) 작가의 장남 성우씨가 그랬다. 1981년 중학생이었던 아들은 친구에게 아버지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서 ‘결행’한 일이었지만 그런 마음을 송두리째 앗아간 것이다.    당시 전시가 열리고 있었던 대구 수화랑 전시장에는 강가에서 주운 돌들이 무더기를 이뤘고, 그 중앙에 마이크가 꽂혀 있었다. 전시장 바닥이 나무마루라 관람객들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돌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고스란히 마이크에 전달되도록 한 설치작품이다. 요즘에도 현대미술 문외한들에겐 여전히 별스러운 풍경이다. 1970년대 ‘대구현대미술제’는 한국 현대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 박현기도 그 공간에서 활동한 작가다. 한국 비디오아트 선구자답게 모니터를 나무, 돌, 대리석 등과 함께 설치하고 특정 주제를 가진 영상을 중첩시켜 작품을 풀어갔다.  사실상 박현기의 작품은 만다라의 현대적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만다라는 우주 법계(法界)의 온갖 덕을 망라한 진수(眞髓)를 그림으로 나타낸 불화(佛畵)의 하나다. 만다라의 본래 의미는 본질이 여러 가지 조건에 의해서 변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생각을 바탕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게 마련인 것이다. 박선기는 그 다양한 층위를 보여주고 싶어 했을 것이다. 박현기의 20년 전 작품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티베트불교인 밀교의 만다라 불화 이미지와 포르노그래피 속 남녀 간의 노골적인 성행위를 결합시킨 이미지가 반복적으로 30분간 흐른다. 여성의 신음까지 더해져 상당히 파격적이다. 언뜻 보면 구더기들이 꾸물거리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에게 무엇을 보고 무엇이 보이냐고 질문을 던지는 듯하다.  작가는 컬러풀한 오일스틱 드로잉도 남겼다. 인테리어 일로 생계를 꾸리가면서 작업의 고삐만큼은 놓지 않으려 했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시시각각의 상념들을 잡아두기 위한 고육책이었을 것이다.  박현기는 대구화단에서 이강소 최병소 등과 맹렬하게 현대미술 실험을 하던 중 위암으로 쉰여덟의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백남준과는 또 다른 비디오아트의 발걸움이 아쉽게도 멈춰버린 것이다.  /편완식 미술전문기자
327    엘리자베스2세 녀왕과 함께 버킹엄궁전 돌아보다... 댓글:  조회:3232  추천:0  2017-02-05
英 女王 미공개 가족사진, 60년만에 공개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남편인 필립공, 찰스 왕세자, 앤 공주 등 왕실 가족의 60년 전 모습을 담은 미공개 사진이 공개됐다.  영국의 일간 텔레그래프지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지난 1952년 4월 부친인 조지 6세의 사망 후 애도기간에 촬영한 것으로 보이는 가족사진이 공개됐다고 10일 보도했다.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 /사진=데일리 메일   이 사진들은 당시 BBC방송의 사진기자였던 케네스 클레이튼이 촬영한 것인데, 당시 왕실은 클레이튼에게 사진을 30년간 공개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계약서에서명하도록 했다.  클레이튼은 이를 매우 진지하게 받아들여 평생 사진을 공개하지 않았는데 그의 유족들이 여왕 즉위 60주년을 맞아 이를 공개한 것이다.  사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과 남편인 필립공, 당시 3살이었던 찰스 왕세자가 20개월 된 앤 공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 등이 담겨 있다.       당시 3살이었던 찰스 왕세자가 20개월 된 앤 공주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있는 모습. /사진=데일리 메일   클레이튼은 조지 6세 사망 후 공식 애도기간에 버킹엄궁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가받은 첫 외부 인사였으며, 이 사진도 여왕의 첫 공식 사진인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당시 찰스 왕세자와 앤 공주의 사진 12장을 앨범으로 만들어 버킹엄 궁에 보냈는데 여왕이 매우 만족해한다는 내용을 담은 감사의 편지를 받았다.  클레이튼의 손자 대니얼 클레이튼은 “할아버지가 이 작업을 매우 자랑스러워 하셨고 기회만 있으면 여왕과의 만남에 대해 말씀하시곤 했다”고 말했다.         본명 Elizabeth Alexandra Mary. 1926년 런던에서 출생하였다.  윈저왕가의 조지 6세의 장녀이다.  1947년 에든버러공(公) 필립과 결혼하여, 이듬해 11월 큰아들 찰스(Charles Phillip Arthur George)를 낳았다.  1952년 2월 뉴질랜드 방문 중 아버지 조지 6세의 급서로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였다.  1953년 6월 웨스트민스터대성당에서 성대한 대관식(戴冠式)이 거행되었는데, 연합왕국(聯合王國)의 왕이자 자치령 각국의 왕이며 나아가 구제국(舊帝國)에 속한 독립국들의 결합체인 코먼웰스(Common Wealth)의 수장(首長)으로서 대관한 최초의 왕이 되었다.  이후 영국 국왕으로서의 다망한 정무를 처리하는 한편, 수많은 외국방문으로 세계 각국과의 우의를 다졌다.  슬하에 황태자인 찰스와 차남 앤드류(1960∼), 3남 에드워드 (1964∼)와장녀 앤(1950~) 등 3남 1녀를 두었다.  2002년 2월 6일 즉위 50주년 축하행사로 황금마차 퍼레이드, 기념주화 및 축하복권 발행, 여왕부부의 영연방 국가 순방 등을 가졌으며, 역대 왕 중 대영제국의 기틀을 마련한 엘리자베스 1세에 이어 영국민에게 신뢰와 인기도가 높다.    /글 출처: 네이버닷컴.        엘리자베스 여왕, 부친 죠지6세.       1943년.               1950년.       1952년 2월 부친 죠지 6세의 사망으로 대관식 거행.                   1957년.     엘리자베스2세 여왕과 아이젠하워 美 대통령. 1957년       美 죤 F. 케네디 대통령 부처와 엘리자베스 2세 여왕 부처. 1961년.       1965년. 여왕 일가족.       1968년.       닉슨 美 대통령과 함께... 1970년.     1973년.     엘리자베스 2세 여왕과 부군 필립公.     제럴드 포드 美대통령과 함께. 1976년.         1977년.     지미 카터 美대통령과 함께. 1977년.       로널드 레이건 美 대통령과 함께. 1982년.     마거릿 영국수상 부처와 함께. 1985년.     넬슨 만델라 남아공 대통령과 함께. 1996년.     클린턴 美 대통령 부처와 함께. 2000년.     2002년.     죠지 부시 美 대통령과 함께... 2007년.     아들 찰스 황태자와 함께. 2009년.     2010년.   2010년. 엘리자베스 여왕은 올해 85세이며 내년 2012년이면 여왕 즉위 60주년이 된다.   英여왕,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         엘리자베스 공주, 젤라틴 실버 프린트, 버킹엄 궁전, 1945.   올해는 영국 여왕 엘리자베스 2세가 즉위 60주년을 맞는 해입니다. 이른바 ‘다이아몬드 주빌리’라고 하는데요, 6일(현지시간) 여왕이 60주년 경축 행사인 ‘다이아몬드 기념일’ 행사에 참석한 것을 시작으로 영국은 축제 분위기로 떠들석합니다.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의 서막 테이프를 끊은 것은 처음 공개되는 여왕의 초상 사진전시회입니다. 이 사진들은 엘리자베스가 첫 왕관을 쓰고 버킹엄 궁전의 새주인이 된 1939년부터 1968년까지, 여왕이 가장 아름다웠던 젊은 시절 모습을 담은 작품들로 영국 왕실 전속 사진작가이자 패션지 보그 사진작가로 유명한 초상 사진의 거장 고 세실 비튼(Cecil Beaton)이 촬영했습니다.   전시회가 열린 빅토리아 앨버트 박물관 큐레이터 수산나 브라운은 방송 인터뷰에서 “여왕이 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세실 비튼과 여왕의 관계가 특별했습니다. 대관식은 물론이고 수많은 사건마다 여왕을 촬영했어요”라며 여왕과 비튼의 인연을 말하기도 했습니다.   전시에는 여왕의 젊은 시절 앳된 얼굴과 엄마가 된 모습, 그리고 즉위 후의 모습 등 백여 장의 사진이 공개돼 영국 국민의 사랑을 받을 예정입니다.   다이아몬드 주빌리 행사는 115년 역사 영국 왕실 사상 두 번째로, 1837~1901년까지 64년간 영국을 통치한 빅토리아 여왕이 있었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영국 사상 최고령 군주이기도 합니다.   엘리자베스 여왕, 버킹엄 궁전 정원, 1939 비튼은 이 시기부터 여왕에게 낭만적인 초상화 사진을 기록하자고 제안했다고 합니다. 당시 보그 패션 사진을 맡고 있던 그는 여왕의 사진도 의상, 액세서리 등 소품을 준비해 역사에 남을 스타일리시한 사진을 탄생시켰습니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동생 마가렛 공주(맨 앞), 버킹엄 궁전, October 1942   공주 엘리자베스, 버킹엄 궁전, October 1942   공주 엘리자베스, 버킹엄 궁전, October 1942 엘리자베스 공주는 전쟁을 겪으며 성장했다. 성인이 된 공주는 아버지 조지 6세에게 입대하고싶다고 끈질기게 졸랐다고 한다. 군번 230873, 엘리자베스 윈저 소위는 군용트럭을 몰며 타이어를 바꾸고 엔진을 수리하는 등 조국을 위해 군에서 봉사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국왕 대관식, 2 June 1953 여왕의 대관식은 세기의 장면을 구경하기 위해 버킹엄 궁전과 웨스트 민스터 성당 사이의 거리에 몰려든 300만 인파로 대성황을 이루었다.   대관식날 엘리자베스 여왕과 필립 에딘버러 공작 부부의 기념사진, 2 June 1953 전 세계에 배포됐던 여왕의 대관식 초상화 사진들. 여왕의 대관식 가운은 카르띠에 수석 디자이너 노먼 하트넬의 작품으로 영국 정교와 영 연방 국가들의 국화를 꽃수로 장식했다.   엘리자베스 여왕 딸 앤 공주, 2 June 1953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국왕 대관식, 2 June 1953 영국 화폐와 메달에 사용한 여왕의 프로필 초상화다.   찰스 왕자의 탄생 한 달 기념 사진, December 1948 여왕은 즉위 전인 1948년 11월 찰스 필립 아서 조지 왕자를 출산했다. 여왕은 자신이 먼저 갓난 아기들의 사진을 찍자고 비튼에게 제안했다.   찰스 왕자와 앤 공주 남매의 어린 시절, September 195 영국 왕실이 신문에 공개한 사진. 이 사진서부터 영국 왕가는 권위적인 왕실 이미지에서 친근한 왕실로 영국 국민에게 다가섰다.   찰스 왕자와 함께, September 1950   앤드류 앙자, February 1960 여왕은 1960년 2월 19일 알버트 앤드류 왕자를 출산했다.   앤드류 왕자 사진을 촬영 중인 왕실 스튜디오에 모인 왕실 가족 , 1960 사진촬영을 보기 위해 엘리자베스 여왕 부부와 찰스 왕자, 앤 공주가 한 자리에 모였다.   버킹엄 궁전에서, 1968   버킹엄 궁전 야외 테라스에서 같은 옷 다른 사진을 연출, 1968   왕실 예복 차림을 한 여왕의 모습, 1968 왕실 예복을 착용한 여왕. 에드워드 3세가 1348년 제정한 가터 훈장과 진한 파란색 벨벳 어깨띠를 둘렀다. 가터 훈장은 가문의 수호신인 성 조지의 십자가를 보석으로 만든 것이다.   버킹엄 궁전 화이트 드로잉 룸, 1968 하디 아미스가 디자인한 드레스를 입은 여왕. 드레스에는 실버 꽃 자수와 청록색 실크 소매가 달렸다.   커티스 모패트가 촬영한 비튼의 젊은 시절 모습, 1930       세실 비튼(1904~1980)은 1972년 영국 왕실로부터 작위를 받은 최초의 사진작가이기도 합니다. 2차대전 때 영국 정보국 사진가로서 전쟁의 충격 속에 있던 영국 국민을 기록한 3만 여점의 사진은 현재 영국 왕립전쟁 박물관에 보존돼 있습니다. 비튼이 촬영한 오드리 헵번, 비비안리,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그레타 가르보, 마를린 디트리히 등 유명배우들의 초상 사진은 전설적입니다. 예술의 전당은 지난해 봄 전을 통해 이 사진들을 전시하기도 했습니다
326    상상력앞 흰벽을 그냥 놓아두고 간다?... 놓아두지 않는다!... 댓글:  조회:2809  추천:0  2017-02-01
‘위대한 낙서(The Great Graffiti)’ | 문화 이제는 예술이 된 거리의 낙서 ‘위대한 낙서(The Great Graffiti)’ /권종술 기자  ‘위대한 낙서(The Great Graffiti)’ⓒ기타   폼페이는 기원후 79년 8월24일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멸망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이다. 18세기부터 본격 발굴되기 시작된 폼페이는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문화유산이 많았다. 폼페이 발굴 과정에서 특히 학자들의 이목을 끈 유물들 중엔 수천 개에 이르는 낙서도 있었다. 연정, 유머, 음담패설, 인신공격에서 정치적 비판까지 내용도 다양했다. 벽에 무언가 쓰고 싶은 인간의 욕구가 얼마나 오랜 것인지 폼페이 유적은 알려주고 있다. 이런 인간의 욕구는 오늘날까지 이어져 벽면에 낙서 형태의 그림을 그리는 그라패티 등으로까지 발전해왔다.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상상력이 모자란 이들은 흰 벽을 그냥 놓아두고 간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얀 빈 벽을 그냥 두지 않은 인간의 욕구가 수천년의 시간을 넘어 드디어 예술의 반열로까지 오르게 됐다. 거리의 낙서에서 이제는 예술이 그래패티 관련 뮤지엄쇼가 우리나라에서도 열린다. 국내 최초 그래피티 뮤지엄쇼인 ‘위대한 낙서(The Great Graffiti)’가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12월9일부터 내년 2월26일까지 열린다. 팝아트 이후 우리의 동시대를 기록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술로 자리 잡고 있는 그래피티는 이번 전시를 통해 우리나라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고 대중화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국내 관객들에게는 전 세계적으로도 한데 모으기 힘든 최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직접 만날 수 있다. Nick-Walker_Micky-Pistols-1100x878ⓒ서울서예박물관 제공 Crash_Fear-of-nothing-145x155cm-2015-1100x1007ⓒ서울서예박물관 제공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하는 행위를 가리키는 반달리즘(vandalism)에서 시작해 상업적인 협업까지 이끌어 온 그래피티는 이제 순수 예술의 한 장르이자 팝아트를 이을 최고의 현대미술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퐁피두센터, 영국의 테이트 모던,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 네덜란드의 현대미술관(Stedelijk Museum)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갤러리들이 앞 다투어 그래피티 작가들을 초대해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전시에선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그래피티 작가 7명을 엄선해 국내 최초로 기획된 세계적 그래피티 전시답게 그래피티의 역사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이 선정됐다. 이들은 현대 그래피티가 태동한 60년대부터 미술로 본격화된 70, 80년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랐으며 작가 중 일부는 내한하여 라이브 페인팅을 선보이고, 대중문화와 밀접한 그래피티의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를 동시에 진행 할 예정이다. FShepard-Fairey-1100x1477ⓒ서울서예박물관 제공 Liquidated-Logo-Chanel-Wall-drawing-Zevsonite_-Zurich-2007-©ZEVS-courtesy-DepuryLuxembourg--1100x1375ⓒ서울서예박물관 제공 현대적 의미의 그래피티를 있게 한 그래피티의 선구자 중 한명인 크래쉬부터 그래피티를 명실공히 현대 미술의 중심으로 만든 영국의 뱅크시가 존경하는 아티스트로 꼽은 닉 워커. 사회, 정치적인 메시지를 대통령 선거에 활용하면서 일약 대스타가 된 쉐퍼드 페어리(오베이 자이언트). 프랑스 문화 예술인의 명예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한 존원.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트리트 아티스트 중 한명인 JR. 스트리트 아트를 한 단계 더 높이 끌어올린 프랑스 대표작가 제우스. 옵아트, 랜드아트, 타이포그래피 등을 포괄하고 글자의 의미와 형태를 예술적 표현의 한 분야로 승화시킨 라틀라스에 이르기까지 최고의 작가들의 엄선된 작품을 모두 만나볼 수 있다. 팝아트 이후, 예술의 주요 키워드로 자리 잡은 대중성과 상업성은 거리 예술에서 출발한 현대 그래피티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재미다. 세계적인 명품 시계브랜드 파텍 필립, 가방 브랜드 투미와 협업해 예술상품을 내놓은 크래쉬, 프랑스 항공사 에어프랑스, 명품 화장품 겔랑, 음료수 페리에, 스포츠용품 라코스테, 스피커, 노트북 등 LG전자와 협업한 존원, 영국의 대표 도자기 브랜드 로얄덜튼과 협업한 닉 워커, 오바마 대통령의 2008년 첫 대선 승리에 기여한 선거 포스터를 만들고, 고급 양주 헤네시와 협업한 오베이 자이언트, 구글, 샤넬, 코카콜라 등 세계적인 브랜드 로고가 흘러내리는 듯한 작품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2016년 세계기후협약회의 대표작가로 선정된 작가 제우스의 작품들을 볼 수 있다. ////////////////////////////////////////////////////////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12월 9일부터 2017년 2월 26일까지 국내 첫 그래피티 뮤지엄쇼인 전           원본보기                       권종술 기자
325    그래피티 아티스트 - 쉐퍼드 페어리 댓글:  조회:3712  추천:0  2017-02-01
셰퍼드 페어리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셰퍼드 페어리 셰퍼드 페어리의 모습 출생 1970년 2월 15일 (46세) 찰스턴 분야 공공미술, 스텐실 셰퍼드 페어리(Frank Shepard Fairey, 1970년 2월 15일)은 미국의 길거리 예술가이 자 그래픽 디자이너, 활동가, 삽화가이다.     현대미술가 I 그래피티,그래픽아티스트 쉐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       낙서화가인 바스키아, 키스 해링과 비슷한 시대에 활동했던 쉐퍼드 페어리 입니다. 낙서화가라고 하기 보다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라고 부르는 것이 더욱 좋겠어요. 스텐실을 이용한 그래피티로 90년대 초부터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바스키아와 키스해링이 삶을 마감할 무렵 쉐퍼드 페어리는 활동을 시작한 것이죠.         앤디워홀의 캠벨스프 통을 변형시킨 쉐퍼드의 실크스크린 작업   지금까지도 활동하고 있는 작가에요. 바스키아와 키스해링은 정말 옛날 작가처럼 느껴지는데 쉐퍼드 페어리가 지금까지 활동하는 것을 보면 시간이 참 주관적으로 느껴집니다.        이 포스터 많이 보셨죠? 2008년 오바마가 대선에 출마했을 때 쉐퍼드 페어리가 작업한 실크스크린 그래피티에요. 바스키아, 키스해링과 같이 격동기였던 미국의 8-90년대의 미술계를 이끌었던 쉐퍼드 페어리. 미국 최고의 명문대인 리즈디 RISD를 졸업한 수재로 그래피티와 낙서처럼 찍어내는 그림을 미술 시장의 중심으로 이끈 역할을 한 작가들 중에 하나였어요.   앞으로의 행보도 기대됩니다.   [출처] 현대미술가 I 그래피티,그래픽아티스트 쉐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 |작성자 하얀 도화지   ///////////////////////////////////////////////////////////////////   반전의 메시지를 담고 있음 충분이 논란이 됄수있는듯 합니다.   소속사 오피셜 그룹 트러블메이커가 욱일승천기 의상을 입었다는 논란을 빚고 있는 가운데 소속사 측이 입장을 밝혔다. 트러블메이커의 소속사인 큐브 엔터테인먼트 측 관계자는 27일 "트러블 메이커가 입은 의상 속 그림은 욱일기가 아닌 꽃봉오리 모양"이라며 "하지만 오해의 소지가 있어 세심하게 신경쓰지 못한 부분에 대해서는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전했다.논란의 중심이 됐던 해당 문양은 전쟁을 반대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으로 유명한 그랙픽 디자이너 셰퍼드페어리(Shepard Fairey)의 작품을 인용한 것으로 나타났다. 셰퍼드 페어리는 최근 반전과 전체주의를 반대하는 캠페인을 열며 총 끝에 꽃이 달린 그림과 방사선 패턴을 주로 이용                     //////////////////////////////////////////////////////////////   화보사진 모두보기4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위더피플 홈페이지에 공개한 포스터.[사진 위 더 피플 홈페이지]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이 열린 20일(현지시간) 전후로 미국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트럼프 반대 시위가 열리고 있는 가운데 시위현장 곳곳에 'We The People'이 적힌 포스터를 들고 시위하는 사람들이 등장했다. 이 포스터는 2008년 대선 후보였던 오바마의 얼굴 그림에 '희망'이라는 글자를 적어 그의 성공을 기원한 작가 셰퍼드 페어리가 제작했다. 이번에 그가 만든 'We The People'은 백인, 기독교 우선주의 등의 정책을 주장하는 트럼프에게 인종, 종교 등과 관계없이 모두가 국민임을 알리려는 목적으로 '위 더 피플'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했다.   화보사진 모두보기4 오바마 얼굴 그림에 `희망`을 적어놓은 작품을 내놓은 작가 셰퍼드 페어리. [사진 로스엔젤러스 타임즈 캡처] 성조기를 머리에 쓴 무슬림 여성과, 머리에 꽃을 꽂은 히스패닉 여성, 레게머리를 한 흑인 소년의 그림 밑에 'We The People'을 새겨 넣었다. 또 포스터는 존엄과 상생 등의 메시지를 담았다. 트럼프 취임 이후 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등 이민 규제가 실행되면서 미국 전역에서 시민들이 포스터를 비롯한 플래카드를 들고 '진정한 미국인의 정체성과 가치'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DA 300   글 = 전민규 기자 [출처: 중앙일보] 트럼프 시위에 등장한 'We the people' "여성들은 완벽하다" 제시카 사보갈의 작품(왼쪽)과 "우리, 굴하지 않는 사람들" 에르네스토 예레나의 작품(오른쪽) [위더캠페인 홈페이지]
324    7인 초대전 : 7인 화가 : 7색 무지개 : 7인 위대한 락서 댓글:  조회:2965  추천:0  2017-02-01
▲ 위대한 낙서’ 전시회 작품 위대한 낙서 전시회 @예술의 전당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 7인이 한 자리에!   안녕하세요. 한화건설입니다. 한때 문화유산이나 예술품 등을 파괴하거나 훼손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그래피티는 이제 순수 예술의 한 장르이자 팝아트를 이을 최고의 현대미술로 인정받고 있어요. 오늘 소개해 드릴 전시회가 바로 이 그래피티를 주제로 한 ‘위대한 낙서’ 전시회입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최고의 그래피티 작가 총 7명의 작품을 한 곳에서 감상할 수 있는데요. 지금부터 한화건설과 함께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가 7인을 만나보실까요? 1. 2016년 세계기후협회의 작가, ‘ZEVS (제우스)’ ▲ 작품활동을 하고 있는 ZEVS의 모습 (출처: http://muralform.com/)과 위대한 낙서 전시회에 전시 중인 작품들 가장 먼저 소개해드릴 그래피티 작가는 제우스(ZEVS)입니다. 제우스(ZEVS)는 프랑스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현재 프랑스 스트리트 아티스트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사람이에요. 루이뷔통, 코카콜라, 애플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기업 로고 및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지속적인 영향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데요, 제우스는 베를린의 거대 광고판에 그려진 3m의 광고모델 이미지를 잘라가거나 홍콩에서 샤넬 로고를 흘러내리게 하는 등의 작업으로 체포된 적이 있다고 해요. 그랬던 제우스는 현재 흘러내리는 듯한 작품들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아 2016년 세계기후협약의 대표작가로 선정되었답니다! 2. 사진과 그래피티를 결합한 ‘JR’ ▲ 프랑스 그래피티 작가JR의 모습과 건물 외벽에 그려진 작품 (출처:http://graffiti.jmsrhdt.com/) ▲ 위대한 낙서 전시회에 전시 중인 JR의 작품 JR은 프랑스 사진작가이자 그래피티 작가예요. 13 살에 처음 그래피티를 경험한 이후에 전 세계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스케일의 인물 사진 콜라주 작품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해요. 사진과 스트리트 아트를 결합하여 독창적인 작품을 만드는 JR은 그의 작품을 보는 사람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지금은 명실상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트리트 아티스트 중 한 명으로 꼽히고 있어요. 3. 그래피티를 현대 미술의 주류로 끌어올린 ‘닉 워커 (Nick Walker)’ ▲ 외벽에 작품 활동 중인 닉워커 (출처: http://thegreatgraffiti.com/) 와 Nick Walker의 작품 닉 워커는 영국 스트리트 아트 혁명의 선두 주자이자 스탠실을 사용한 최초의 아티스트입니다. 1990년 3D처럼 보이는 그래피티 기법을 보였던 닉 워커에게 스텐실의 잠재력을 몰랐던 동료들은 그 기법을 그만두길 권했다고 하는데요. 하지만 끝까지 스텐실을 고집하여 쉽게 이미지를 재생산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였어요. 닉 워커는 영국은 물론 세계 다른 스트리트 아티스트들에게 새로운 길을 내주었다는 점에서 기념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4. 그래피티의 선구자로 불리는 ‘크래시(Crash)’ ▲ Crash의 모습(출처: http://www.antiquorum.com/)과 위대한 낙서 전시회에 전시 중인 그의 작품 우리에게 잘 알려져 친숙한 키스 해링(Keith Haring), 장 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와 나란히 그래피티 아티스트 운동의 선구자로 뽑히는 미국 아티스트가 있습니다. 바로 크래쉬(Crash)인데요.  크래쉬는 13살 때 처음 뉴욕 브롱크스의 또래 10대들처럼 친구들과 어울려 기차에 그래피티를 시작했어요. 그래피티 문화가 예술세계에서 정립되기 시작할 때쯤 크래쉬는 스트리트 아트와 순수미술 세계를 연결짓는 그래피티 아트의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죠. 그의 작품들의 특징은 팝아트와 그래피티를 혼합했다는 것인데요, 밝고 빛나는 색감과 더불어 코믹한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활용한 작품들이 눈길을 끈답니다. 그의 작품은 전 세계 유수의 갤러리, 박물관에 만나보실 수 있으며 뉴욕현대미술관(MoMA) 등의 주요 박물관에서 영구 컬렉션으로 소장하고 있을 정도예요! 5. 글자를 독창적으로 재해석한 ‘라틀라스(L’atlas)’ ▲ L’Atlas의 모습(출처: http://www.widewalls.ch/)과 위대한 낙서 전시회 전시 중인 그의 작품 프랑스 아티스트 라틀라스는 그래피티 뿐만 아니라 그래픽 디자인, 사진, 캘리그라피 등 여러 면에서 재능을 나타내고 있는 작가입니다. 그는 현대 건축, 고고학, 지리학, 그리스 신화, 동양 철학 등에서 영감 받은 요소들을 작품에 녹여 예술로 만들고 있어요. 특히 그는 각 도시의 맨홀 커버를 찍어내는데 맨홀 시리즈를 연출하는데요. 이런 작품들은 미래의 시점에서 바라본 고고학적인 요소로 평가받고 있답니다. 6. 최고 훈장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한 ‘존원(JonOne)’ ▲ Jonone의 모습(출처: http://flavorwire.com/)과 위대한 낙서 전시회 전시 중인 그의 작품 뉴욕 할렘에서 나고 자란 존원은 다이나믹하고 거침없는 붓 터치와 흘러내림 기법을 사용하여 작품 활동을 하는 그래피티 작가예요. 뉴욕의 지하철, 벽 등의 도시 경관을 컬러풀한 추상 스타일로 물들여 놓았습니다. 이후 프랑스로 이주한 존원은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인정받아 2015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문화/예술 부문 훈장을 받았어요. 그뿐만 아니라 에어프랑스, 롤스로이드 등의 세계적인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그의 작품활동은 미술계를 넘어 문화 전반적으로 우리 사회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어요! 7. 오바마 신드롬을 빚은 ‘셰퍼드 페어리(Shepard Fairey)'  ▲ Shepard Fairey의 모습(출처: http://www.telegraph.co.uk/ )과 위대한 낙서 전시회 전시 중인 그의 작품 마지막으로 소개해드릴 작가는 스프레이 그래피티가 중심이었던 스트리트 아트에서 실크 스크린 기법의 포스터와 스티커 작품을 탄생시킨, 쉐퍼드 페어리입니다. 티셔츠, 스케이트보드, 포스터부터 거리를 점령한 Obey Giant 캠페인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해 2008년 당시 오바마 미국 대선 후보의 얼굴이 담긴 HOPE 포스터를 통해 그래피티 아트 팬뿐만 아니라 일반 대중들에게까지 폭넓게 이름을 알렸어요. 현재 그는 자기 작품들을 대부분 다양한 정치적,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대중들에게 반복적으로 노출하면서, 미국 내 가장 영향력 있는 그래피티 작가로 꼽히고 있어요! ▲ 위대한 낙서 예술의 전당 서예박물관 외벽의 그래피티 모습 여기까지 ‘위대한 낙서’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그래피티 작가 7명을 소개해드렸는데요. 이번 전시는 국내 최초로 기획된 세계적 그래피티 전시답게 그래피티에 대한 고정관념을 깨고 예술로 바라볼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어요. 이번 주말, 예술의 전당을 방문하셔서 세계적인 그래피티 작품들을 감상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 장소 :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기간 : 2016. 12. 09(금) ~ 2017. 02. 26(일) 출처: [한화건설]
323    프랑스 그래피티 화가 - 라틀라스 댓글:  조회:3287  추천:0  2017-02-01
APORTO 저는 90년대 초반 파리에서 그래피티를 시작했고,  10년 후인 2001년부터 지금까지 Agnes B 혹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전시회를 열었습니다.  제 작품들은 캘리그래피 같은 전통적인 것들과 현대적인 흐름을 뒤섞어 놓음으로써,   여러 장소에서 행해지는 여러 움직임들을 느낄 수 있는 반항적인 예술입니다.  저는 Gram을 그릴 겁니다. 저는 단지 어떤 문장을 적어놓을 뿐이죠.  저는 설명해주는 느낌의 작품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생각하기 사람들은 충분히 이러한 작품들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죠. 게다가 저의 예술은 어떤 상징성을 뚜렷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더더구나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런 종류의 행사는 거리에서 펼쳐지는 색다른 행동들의 시작점입니다. 제가 이 벽에 적어놓은 것처럼제가 생각하기에 거리로 돌아가 작품을 그리는 것이 더 나은 방법입니다.  당신이 이곳에 왔을 때, 당신은 거리에 당도했을 당시 무언가를 보기 위해 초대되었고 작품들에 놀랐을겁니다.  왜냐하면 당신이 여지껏 보지 못했던 형태의 것들이기 때문이죠.  따라서 저에게 있어 거리에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강렬한 의미를 가집니다.  또한 이런 행사들은 제 마음과 눈을 열게 만들고  그리고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것들을 깨우치면서 사람들의 시야를 확장시킵니다.  여기 수천,수백만의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존재하는 예술이 있습니다. 라틀라스가 자신의 그래피티 작품에 대해서 인터뷰한 내용 어떠셨나요? 중간중간에 여러분의 지루함을 ㅋㅋㅋ 없애기 위해 라틀라스의 사진들을 좀 끼워넣어 봤는데............. 유명한 사진들이..다...기하학[?]적인 도형들밖에 없네욬ㅋㅋㅋㅋㅋ 라틀라스작품들, 위대한 낙서 전시회에 모두 come come!!   안녕하세요, 그래피티아티스트 입니다 :-) 전통 예술과 현대 예술을 융합한 아티스트, 라틀라스를 소개해보려고 합니다! 라틀라스는 프랑스의 스트리트 아티스트이자, 화가, 사진가,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만의 독특한 글자 스타일의 작품으로 유명합니다.  오늘날의 Street Art (Urban Art) 를 대표하는 세계적으로 중요한 인물 중 한사람으로서,  이미 Centre Pompidou, the Palais de Tokyo, the Fondation Cartier and the Grand Palais 등 세계 일류의 기관으로부터 검증받았다고 하네요.  라틀라스는 자신의 글로벌한 세계관을 반영한 그리스 신 Titan Atlas로부터 그 이름을 따서  L’Atlas라는 이름으로 90년대부터 그래피티를 통한 기나긴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당시 캘리그래피에 흥미가 많았는데, 왜냐하면 당시 라틀라스는 캘리그래피가 그래피티의 순수한 형태와 매우 비슷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캘리그래피를 공부하기 시작했을 때 아랍 캘리그래피와 한자 캘리그래피를 공부했죠. 라틀라스는 캘리그래피 같은 전통적인 예술과  그래피티 같은 현대 예술의 본질적인 부분을 융합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모로코, 이집트, 시리아에서 모든 종류의 Caligraphy 마스터들과 함께 오랜 시간을 보내고 난 후,  이로부터 그가 경험한 다양한 문화와 영감을 종합하여 전세계적인 활자가 되기를 바라며  그만의 특별한 typography를 창조해냈죠! 라틀라스에게 그래피티가 주는 에너지는 예술의 강한 원동력이며 아드레날린입니다.  그가 생각하기에 각각의 움직임들이 예술의 역사로 인식되었을 때 매우 위험해질 것이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움직임들이 결국 형식화되고 단지 유명세만을 위해 행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틀라스는 이런 양태가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합니다만,  또 어찌보면 예술의 역사가 거리 예술을 사라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는 여지가 있기 때문에 어쩌면 좋은 신호일 수도 있겠다고 언급했습니다. (이걸 보면서 그래피티 문화 확산이 좋다는 건지?싫다는 건지? 좀 혼란스러웠던 부분..ㅋㅋㅋㅋ)   라틀라스는 그래피티를 그리기 시작하고 난 후, 거리에서 생각에 잠길 때면, 도시 속에서 눈에 띄지 않게 하기 위해 Euro band worker를 입는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거리에 있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 나누죠.  그는 자신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그래서 사람들과 얘기 나누는 것을 좋아하고 특히 어린아이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하네요.  어린아이들은 그가 하고 있는 일을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Perrier ‘Street Art Limited Edition’ collaboration (2015) 라틀라스는 사람들이 언제나 '공간'과 맞닥뜨린다고 생각합니다. 이 '공간'은 사람들의 내면과 외면 그리고 벽과 우주를 가지고 있는 공간을 지칭하죠. 따라서 라틀라스는 사람들이 공간의 유한성을 가지고 하는  스트릿 아트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Géodésie I, 100 x 100 cm, aérosol et acrylique sur toile, 2013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스트릿 아트와 인터넷은 함께 태어난 존재들입니다.  스트릿 아트와 인터넷은 2000년대에 거의 연속적으로 흥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죠. 거리에는 캔버스가 없기 때문에 오로지 사진만이 흔적을 잡아낼 수 있었고 사진을 찍기 위해 거리에서 어떤 행동을 취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것들을 어떻게, 어떤 식으로 내타내고 어떻게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킬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인터넷이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라틀라스는 스트릿 아트가 인터넷과 함께 태어났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좌, 퐁피두미술관앞 광장, 2008 / 우, Palais Royal 광장, 2011 @ Place du Capitole, Toulouse 라틀라스는 고고학에서부터 지리학, 천문학부터 그리스 신화, 동양 철학부터  도시 건축학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범위에서 영감을 받습니다.  작품에서 보시다시피, L’Atlas는 Kinetic Art, Land Art, Optical Art 를 직접적으로 참고한  기하학적인 추상을 선호합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를 융합해 하나의 예술로 창조해낸 L'ATLAS, 그래피티 뮤지엄쇼에서의 활약이 정말 기대됩니다! 이상으로 L'ATLAS에 대한 소개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D [출처] 위대한 낙서 참여작가 : L’ATLAS(라틀라스), 수백만의 사람들과 함께 숨쉬며 존재하는 예술, 그래피티|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출처] 그래피티 아티스트 라틀라스의 "Street Art AXAPORTO"|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322    "거리의 락서"가 "위대한 락서"로 되기까지... 댓글:  조회:2981  추천:0  2017-02-01
    국내 최초 그래피티 뮤지엄쇼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열고 있는 전시, 展에 다녀왔다. 그래피티는 1970년대 뉴욕 브롱스 빈민가에서 가난한 흑인과 푸에르토리코 소년들의 ‘거리 낙서’로 시작해 순식간에 전 세계로 확산된 힙합문화다. 간단히 말하자면, 건물 벽·담벼락·경기장·버스·지하철 등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려진 거대한 그림을 의미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그래피티를 그저 낙서로 생각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피티는 이제 순수 예술의 한 장르이자 팝아트를 이을 최고의 현대미술로 인정받고 있다. 현재 프랑스의 루브르박물관, 퐁피두센터, 영국의 테이트 모던, 미국의 뉴욕현대미술관, 네덜란드의 현대미술관Stedelijk Museum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과 갤러리들이 앞 다투어 그래피티 작가들을 초대해 전시를 열고 있다.       이번 展에서는 전 세계에서 활발하게 활약하고 있는 미국, 영국, 프랑스의 그래피티 작가 7명을 엄선했다. 국내 최초로 기획된 세계적 그래피티 전시답게 그래피티의 역사와 현재, 미래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작가와 작품이 선정되었다. 이들은 현대 그래피티가 태동한 60년대부터 미술로 본격화된 70, 80년대 미국, 영국, 프랑스에서 태어나 자랐다. 작가 중 일부는 내한하여 라이브 페인팅을 선보였고, 대중문화와 밀접한 그래피티의 다양한 문화예술 이벤트가 동시에 진행되고 있다.               ▲ ⓒZevs - 제우스, Liquidated Chanel             제우스 ZEVS     프랑스 스트리트 아트씬의 선구자이자 대표작가인 제우스는 그의 트레이드 마크인 'Liquidation'기법의 작품들로 유명하다. 이번 전시에는 샤넬뿐 아니라 여러 유명 상표들을 'Liquidation'기법으로 표현한 작품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다. 그는 또한 루브르 모나리자 작품과 브랜드와의 협업을 했고, 2016 세계 기후 협약 회의의 대표작가와 작품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워홀을 연상시키는 팝아트 정신과 스트리트 아트 정신이 결합된 그의 작품들은 욕망과 우상으로 자리잡은 명품의 로고를 비틀고 있으며, 동시대 문화의 본질을 강조한다.       ​         ▲ ⓒJR – 제이알, OPÉRA GARNIER, 2014               제이알 JR     프랑스 태생의 제이알은 포토그래퍼이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멀티미디어 아티스트이다. 13살에 처음 그래피티를 경험한 이후에, 전 세계 도시 곳곳에서 대규모 스케일의 인물사진 콜라쥬 작품을 선보이는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작품은 적말 독특하고 신기했다. 대규모의 사진에서 인물을 찾아보는 쏠쏠한 재미도! 그는 2011년 테드상을 수상하기도 했다고 한다.       ​         ▲ ⓒNick Walker – 닉 워커, Micky Pistols               닉 워커 NICK WALKER     고급스러우면서도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활용한 스텐실 작업으로 유명한 닉 워커는 지금은 일반화된 스텐실 그래피티 움직임의 선구자 중 한 명이다. 그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반달'이라는 블랙 수트의 사나이를 통해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아내고 있다. 기존의 그래피티가 지닌 날것의 느낌을 보여주는 핸드 프린팅과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된 그래피티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John CRASH Matos  - 크래쉬, Fear of nothing, 2015       ​   ​   크래쉬 CRASH     ​크래쉬는 바스키아, 키스 해링 등과 나란히 그래피티 아티스트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한명으로 꼽힌다. 현재 MoMA, Stedelijk Museun, Brooklyn Museum 등 세계적인 뮤지엄에 그의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         ▲ ⓒL’atlas – 라틀라스, MAZE TECHNIQUE MIXTE, 2011               라틀라스 L'ATLAS     라틀라스는 프랑스의 스트리트 아티스트이자, 화가, 사진가, 비디오 아티스트로, 그만의 독특한 글자 스타일의 작품으로 유명하다. 오늘날의 스트리트 아트를 대표하는 세계적으로 즁요한 인물 중 하나로, Centre Pompidou, the Palais de Tokyo, the Fondation Cartier and the Grand Palais 등 세계적인 미술관에 작품이 전시되어 있다.       ​         ▲ ⓒJonOnce - 존원, Open Your Eyes, 2014               존원 JONONE     그래피티씬을 넘어 세계적인 아티스트로 인정받는 존원은 2015년 프랑스의 최고 권위의 명예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 문화/예술 부문 훈장을 수여받았다. 에어프랑스, LG, 페리에, 롤스로이스 등의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는 등 그의 작품활동은 단순히 미술계를 넘어 우리 사회와 생활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         ▲ ⓒShepard Fairey (Obey Gaint) - 쉐퍼드 페어리 (오베이 자이언트), Peace and Justice Woman, 2013               셰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     내가 가장 인상깊었던 작가다.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중 하나인 셰퍼드 페어리는 스프레이 그래피티가 주류였던 스트리트 아트씬에서 실크 스크린 기법의 포스터 혹은 스티커 작품을 통해 스트리트 아트의 아이콘이 되었다. 2008년 당시 오바마 미국 대선 후보의 얼굴이 담긴 HOPE 포스터를 통해 그래피티 아트팬을 넘어 일반 대중들에게 폭넓게 인지되기 시작했고,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되었다.               팝아트 이후 우리의 동시대를 기록하는 가장 대표적인 예술로 자리 잡고 있는 그래피티는 이번 전시를 통해 대한민국에 그래피티 대장르의 서막을 알리는 계기가 될 것같다. 또한, 展은 국내 관객들에게 전 세계적으로도 한데 모으기 힘든 최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들과 그들의 수준 높은 작품들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뜻 깊은 기회가 될 것이다.   =================================== 예술의 전당 서울 서예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위대한 낙서' 를 관람하고 왔습니다. 서울 서예 박물관은 처음 가보는 것이었는데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먹물 향이 났고, 마치 옛 생각이 나는 장소였습니다. 추운 날씨여서 그런지 그곳은 한산했고 혼자서 시간을 여유롭게 잘 보낼 수 있었습니다.   표를 받을 때 알게 된 사실인데, 현재 KT 포인트 할인으로 하면 성인 기준으로 5,000원에 입장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관람하실 분들은 참고하시면 좀 더 효율적인 관람이 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번 전시는 "세계적 그라피티 작가들의 그라피티 뮤지엄 쇼"로 진행됩니다. 순서대로 제우스 ZEVS - 제이알 JR - 닉 워커 NICK WALKER - 크래시 CRASH - 라틀라스L'ATLAS - 존 원 JONONE - 셰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입니다.               제우스 ZEVS 의 작품은 'Liquidation'기법이 가장 유명합니다. 흘러내리는 듯한 효과를 보여주어 원래의 기본적인 틀을 건드리는 표현 방식입니다. 이는 욕망과 우상으로 자리 잡은 명품의 로고를 비틀고 동시대 문화의 본질을 강조합니다.   누구나 알 수 있는 익숙한 로고들로부터 작품이 시작되어 거리감 없이 전시를 즐길 수 있었습니다. 색이 화려하고 강렬하여 초반부터 제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널찍널찍하게 떨어져 있는 작품들을 충분히 바라보며 다음 작가로 넘어가게 되었습니다.         제이알 JR 의 작품으로 이어집니다. 사진과 스트리트 아트를 결합하여 그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만들어나가는 그는 작품을 보는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 깊숙한 곳에 들어와 응답하게 만든다는 평가를 받습니다. 작품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면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고, 전혀 위화감 없이 조화롭다는 점이 가장 훌륭합니다.   작품들을 보다가 보면 짧은 영상을 마주하게 되는데 발레를 하면서 아름다운 몸의 움직임을 표현하고, 같은 색이면서도 진함의 정도가 있는 옷을 어느 정도의 틀에 맞게 구성을 합니다. 정확히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를 알지는 못했지만 스트리트 아트라는 것은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구나 느낄 수 있었습니다.             닉 워커 NICK WALKER입니다. 그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반달 Vandal'이라는 블랙 슈트의 사나이를 통해서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여내고 있습니다. 기존의 그라피티가 지닌 느낌과 동시에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된 그라피티라고 평가받습니다.   벌써 반 정도의 작품들을 보았는데 확실히 모든 작가들의 특성이 달라서 구분하기가 쉬웠습니다. 보통 여러 명이 함께하는 전시인 경우에는 헷갈리다 못해 서로 섞여버려 중간쯤 관람했을 때 의미 없이 보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그렇지 않아서 현재 후기를 쓰고 있는 중에도 새록새록 기억이 남아있습니다.             크래시 CRASH 작품입니다. 바스키야 Basquiat, 키스 해링 Keith Haring 등과 나란히 그라피티 아티스트 운동의 선구자 중의 하나로 꼽힙니다. 친근하게 느껴질 수 있도록 배트맨, 아이언맨 등을 그려 넣은 것이 보입니다. 어린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가 좋아할 분위기를 가졌던 작가였습니다. 큼직큼직하고 화려하여 멀리서도 잘 보이도록 한 것이 가장 큰 특징이었습니다.             라틀라스L'ATLAS 로 이어집니다. 그만의 독특한 글자 스타일의 작품으로 유명하며 스트리트 아티스트이자, 화가, 사진가, 비디오 아티스트입니다. 이곳에도 영상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는데, 아파트 외관에 그림을 그려 넣음으로써 화려함을 가중시킵니다.   세세한 선을 작업하다 보니 손이 많이 가고 왔다 갔다 해야 하지만 그 정성이 느껴져서 계속 쳐다보고 싶게 만들어주었습니다. 흰색과 검은색의 조화는 다른 어떤 색보다 품위 있었습니다. 선으로만 표현했고 반복적인 모양이 모여지는 것을 보면 저도 한 번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됩니다. ^^             존 원 JONONE  작가의 작품입니다. 세계적인 브랜드와 협업하는 그의 작품 활동은 단순히 미술계를 넘어 우리 사회화 생활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칩니다. 에어프랑스, LG, 페리에, 롤스로이스 등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예쁘면서도 정신없는 스타일의 작품을 좋아하는 편인데, 제 기준에 딱 맞췄던 작가였어요. 이번 전시에서 가장 좋았던 부분이었습니다. 무심하면서도 어느 정도 틀이 있고, 난장판처럼 보이면서도 정돈된 느낌이 드는 것. 가장 가까이서 만나볼 수 있는 LG와 협업을 했었는데 왜 몰랐을까요. 앞으로 더욱 눈여겨보고 싶어진 작가였습니다.           마지막은 셰퍼드 페어리 SHEPARD FAIREY입니다. 스프레이 그라피티가 주류였던 스트리트 아트씬에서 실크 스크린 기법의 포스터 혹은 스티커 작품을 통해 스트리트 아트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08년 당시 오바마 미국 대선 후보의 얼굴이 담긴 HOPE 포스터를 통해 대중들에게 폭넓게 인지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그라피티 중에서 가장 정교하고 차분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제가 생각해 온 그라피티와의 기준이 달라서 이것도 해당되는 건가 싶었는데, 이 작품들을 보고 나서는 정해진 기준이란 없는 거구나 생각을 바꿨고 차분함의 매력에도 빠져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끝마무리를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게는 생소한 작가들을 무려 7명이나 만나볼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좋은 작품들을 하나씩 보면서 눈에 익혔기 때문에 다음에 만나면 더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혼자 관람해서 여유로움이 좋았고 붐비지 않는 전시장이라 남을 의식하지 않고 보고 싶은 만큼 볼 수 있어서 뿌듯했습니다. 유명한 로고로 눈길을 끌고 차분한 포스터로 끝맺음을 보여주었던 전시 동선도 완벽했습니다. 사색을 즐기고 싶다면 딱 적절할, '위대한 낙서' 전시의 후기였습니다^_^  
321    영국 그래피티 아티스트 - 닉 워커 댓글:  조회:3612  추천:0  2017-01-31
      [매경닷컴 시크뉴스 이상지 기자] 2016년 12월 15일 오후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에서 그래픽 아트의 선두주자 닉 워커(Nick Walker)의 스텐실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최근 국내에서 힙합 문화의 발전에 발맞춰 많은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이 사랑받고 있는 추세다. 이에 발맞춰 서울서예박물관에서는 그래피티 뮤지엄쇼 ‘위대한 낙서(The Great Graffiti)’ 전시회의 특별행사로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닉 워커의 스텐실 공개작업을 진행했다.   닉 워커는 회화적인 요소에 실을 결합하는 특유의 정교한 거리미술 작품을 통해 기존 고정관념과 편견을 유머러스한 형식으로 전복하며 큰 관심을 모아온 작가다. 최근 젊은층 사이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내고 있는 뱅크시(Banksy)와 함께 브리스톨 그래피티의 선구자로 손꼽히는 인물이다. 90년대 초반부터 브리스톨을 벗어나 전세계 길거리에 스텐실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그는 기존의 그래피티가 가지고 있는 날 것의 느낌을 보여주는 핸드 프린팅으로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발전된 그래피티를 보여준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그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또다른 자아인 ‘Vandal’이라는 블랙 수트의 사나이를 통해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아내고 있다. 이날 퍼포먼스에서도 역시 검은 배경을 바탕으로 검은 수트를 입은 사나이가 등장했다.   이날 그는 신나는 힙합 음악 틀어놓고 작업에 몰두하는 과정을 공개해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스탠실 기법을 통해 구멍 안에 면을 채우는 방식으로 그림을 완성해 나가는 일련의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즉석으로 완성된 작품들을 관람객들은 SNS를 통해 공유하며 전시를 하나의 놀이처럼 즐기는 모습이 관찰됐다.   전시 관계자는 아트를 퍼포먼스를 기획한 의도에 대해서 “살아있는 작가들을 전시하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동시대 아티스트 중에서도 톱클래스를 초대해서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게 의미있다. 그래피티 장르 중에서도 선구자적 아티스트를 보여드리고 싶었다. 이미 그려진 작품이 아닌 가장 컨템포러리한 아트를 보여드리려 한다”고 밝혔다.  [이상지 기자 / 사진=이미화 기자] =====================================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 세계적 그래피티 작가들의 뮤지엄 쇼 ―――――――――――――――――――――――――――――――――――――――――― 어제 그래피티 뮤지엄쇼 전시장 내에서 한국에 방문한 참여 작가, 닉 워커의 스텐실 퍼포먼스가 펼쳐졌답니다! 관객분들 모두 전시회 관람은 잠~깐 중단하시고 닉 워커의 퍼포먼스를 보러 모이셨다는 ㅋㅋㅋㅋㅋㅋ 자 이제 그 생생한 현장을 직접! 보시러 가볼까요~~!? Nick Walker in Seoul 스텐실 퍼포먼스 관객들에게 게릴라 이벤트 방식으로 진행된 퍼포먼스! KBS 등 여러 방송사의 기자분들은 이미 아시고[?] 오셨더라구요..@_@ 관객들을 대상으로 전시회 관련 인터뷰도 진행하시는 걸 옆에서 힐끔힐끔 구경했어요~~ㅎㅎ 짠! 이게 뭘까요? 바로 오늘 스텐실 퍼포먼스에 쓰여질 종이(??맞나? 뭐라고 해야될지 모르겠네용ㅠ)입니다! 처음에는 스텐실 퍼포먼스인줄 모르고 엥? 이 그림으로 뭘 한다는거지?? 라고 의문을 가지며 보고 있었는데 요렇게 검은 판넬에 붙여서 스텐실 작업을 하시더라구요! 앞에 사진을 보시다시피 작업물이 굉장히 커서,  저렇게 사다리를 이용해서 작업을 해야 했답니다 ㅇ.ㅇ   스텐실 퍼포먼스는 약 1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는데요. 관객분들도 그렇고 모두 조용한 분위기에서 ㅎㅎㅎㅎ 집중해서 퍼포먼스를 관람했답니다. ㅋㅋㅋㅋ처음에 작업하기에 앞서 이렇게 테이프도 세세하게 붙여 놨었어요. 혹시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닉 워커의 작품 하나를 첨부합니다 :-) 잠깐! 여러분들도 닉 워커가 '러브 반달리즘(Love Vandalism)'의 창시자라는 거, 다들 아시죠? 저는 그래서... 처음에 닉 워커가  스텐실 작업을 할 때 하트 모양을 그리지 않길래  반달리즘 작품은 맞는 거 같은데...하트가 없는 작품인가?(그럴리가 없는데;;) 하고 의아한 느낌이 들었어요 하지만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스텐실 작업을 하고 종이를 뗀 다음에 이렇게 종이를 대지 않고 하트는 직접 그리시더라구요 X-D 러브 반달리즘으로 인해 하트를 하도 많이 그려보셔서 그런지 ㅋㅋㅋㅋ 매우 능숙 + 현란해보이는 닉 워커의 퍼포먼스   그리고 마침내 완성된 스텐실 작품!!!!!!!! 퍼포먼스가 끝난 후에는 작품에 대한 짧은 설명과 함께 작가와 팬들과의 만남을 가졌답니다. 싸인도 해주시고, 사진도 찍어주시는 친절한 닉 워커! 한 시간에 걸친 퍼포먼스를 하시느라 힘들었을 법도 한데, 팬들 한 분 한분께 웃음을 잃지 않고 대해주시는 모습에 정말 감동받았어요! 닉 워커씨, 실제로 만나뵙게 되어 반가웠습니다 X-D ===================   [출처] 현장 취재 : 닉 워커(Nick Walker), 스텐실 퍼포먼스를 펼치다|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Nick Walker, 그는 누구인가?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고급스러우면서도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활용한 스탠실 작업으로 유명하며 지금은 일반화된 스텐실 그래피티 움직임의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브리스톨을 벗어나 전세계 길거리에 스텐실 아트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죠! 기존의 그래피티가 갖고 있는 날것의 느낌을 보여주는 핸드프린팅과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된 그래피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네요. 닉 워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Vandal'을 아시나요? Vandal은 블랙 수트의 사나이로, 작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Vandal을 통해 닉 워커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VANDAL VS LOUBOUTIN, 2015 닉 워커에 대한 소개는 이것으로 마치고,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  아티스트가 가져야 할 필수 조건 "영감"을 얻는 방법에 대한 닉 워커의 인터뷰를 소개하겠습니다^0^ Q. 주로 어떤 방법으로 영감을 얻으시나요?  A. 영감은 그 어떠한 것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러한 사물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그리고 나면 모은 사물들을 한 곳에 모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고민하세요.  어느 순간 펑 하면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를 겁니다.  Q.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A.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면 자료를 모으고, 사진을 찍어서 배치를 바꾸고, 전혀 다른 장소를 가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상상의 나머지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보세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무(無)에서부터, 상상력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가는지 지켜보십시오. Q. 당신의 작품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A. 축구는 제 작품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마치 패스가 어디로 올 지 모르는 것처럼, 제 작품의 출발선은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에 있습니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도시의 벽을 찾아다니는 것은 미친 듯이 축구를 하는 열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제 작품을) 지나칠지 모르니, 팔 가는 대로, 다양한 환경으로 (작품을) 퍼뜨립니다. Q. 영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A. 화려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예술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일상적인 물건이나 배경도 영감의 주제가 될 수 있어요.  닉 워커와의 가상[+실제] 인터뷰 잘 보셨나요??? 닉 워커의 말에서 보다시피, 아티스트는 영감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될 수 있다고 하네요! (마치 밥 로스 아저씨가 그림 그리고 나서 "참 쉽죠?"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ㅋㅋ) 이상으로 닉 워커에 대한 2번째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위대한 낙서 참여작가 : Nick Walker(닉 워커), 이것이 반달리즘이다 ②|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320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 존원 댓글:  조회:3393  추천:0  2017-01-31
[머니투데이 베를린(독일)=김성은 기자] [[IFA 2016]LG전자, '그래피티' 입힌 노트북·모니터 등 내놔] 존원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IFA 2016 LG전자 부스에 전시된 존원 아트시리즈를 소개하고 있다./사진제공=LG전자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 존원(JonOne)이 2016년 9월 3일(현지시각)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고 있는 유럽 최대 가전전시회 IFA 2016에서 LG전자 부스를 찾았다. 존원은 화려한 색감과 자유로운 구도를 통해 자유와 젊음을 표현하고 거리 낙서를 미술 장르로 발전시킨 예술가로 평가받는다. 지난해 프랑스 최고 훈장인 레지옹도뇌르를 수상했다. LG전자는 이번 전시회에서 존원의 그래피티(Graffiti) 작품으로 독창적인 디자인을 강조한 존원 아트시리즈를 공개했다. 그램 15 노트북, 21대9 울트라와이드 모니터 등으로 구성된 존원 시리즈는 제품 외관에 존원의 그래피티 작품을 적용해 관람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베를린(독일)=김성은 기자     http://blog.naver.com/hanbandoblog/2208734041   위대한 낙서 닉워커(좌), 제우스(우) 그래피티 뮤지엄쇼 : 위대한 낙서전 세계적 그래피티 작가들 7명의 그룹전시가 전 세계 최초로 한국에서 진행되는 거라 언론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데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7인의 작가들 중 닉워커에 대해 소개를 하려고 합니다.  닉워커(Nick Walker)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지켜보세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서부터 상상력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는지.. 이것이 반달리즘입니다.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인 닉 워커는 80년대 초부터 뱅크시와함께 브리스톨 그래피티 씬에서 활동하였습니다. 고급스러우면서도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활용한 스텐실 작업으로 유명한 그는 지금은 일반화된 스텐실 그래피티 움직임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뱅크시가 존경하는 아티스트라고 밝혔습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브리스톨을 벗어나 전세계 길거리에 스텐실 아트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존의 그래피티가 가지고 있는 날 것의 느낌을 보여주는 핸드프린팅으로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된 그래피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들에 자주 등장하는 작가의 또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는 'Vandal'이라는 블랙 수트의 사나이를 통해서 그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아내고 있습니다.  위대한 낙서전   위대한 낙서전 대표작인 "Moona Lisa"는 2006년에 이미 런던 Bonhams 옥션에서 약 £54,000 (한화 약 8000만원)에 판매가 되었으며, 2008년 런던의 Black Rat 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의 작품들은 약 £750,000  (한화 약 10억 9천만원)에 판매되었습니다.  [출처] 12월전시, 연말전시, 예술의전당 위대한 낙서전 |작성자 양촌리 일룡이 Nick Walker, 그는 누구인가? 영국 브리스톨 출신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고급스러우면서도 아이러니한 이미지를 활용한 스탠실 작업으로 유명하며 지금은 일반화된 스텐실 그래피티 움직임의 선구자 중 한 명입니다. 90년대 초반부터 브리스톨을 벗어나 전세계 길거리에 스텐실 아트작업을 선보이기 시작했죠! 기존의 그래피티가 갖고 있는 날것의 느낌을 보여주는 핸드프린팅과 사실적인 이미지들을 함께 병치하면서 한층 더 발전된 그래피티라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네요. 닉 워커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Vandal'을 아시나요? Vandal은 블랙 수트의 사나이로, 작가의 또 다른 자아라고 할 수 있습니다! Vandal을 통해 닉 워커는 아이러니와 유머를 적절히 녹아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요. VANDAL VS LOUBOUTIN, 2015 닉 워커에 대한 소개는 이것으로 마치고, 누구나 아티스트가 될 수 있다!  아티스트가 가져야 할 필수 조건 "영감"을 얻는 방법에 대한 닉 워커의 인터뷰를 소개하겠습니다^0^ Q. 주로 어떤 방법으로 영감을 얻으시나요?  A. 영감은 그 어떠한 것에서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주변의 것들을 유심히 관찰하고, 그러한 사물에서부터 시작하세요.  그리고 나면 모은 사물들을 한 곳에 모은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고민하세요.  어느 순간 펑 하면서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오를 겁니다.  Q. 기막힌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요?  A. 아이디어가 떠올랐으면 자료를 모으고, 사진을 찍어서 배치를 바꾸고, 전혀 다른 장소를 가보세요.  그러고 나서 그 상상의 나머지 공간에 무언가를 채워 넣어보세요.  머릿속의 상상을 현실로 가져올 수 있어야 합니다.  무(無)에서부터, 상상력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 가는지 지켜보십시오. Q. 당신의 작품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A. 축구는 제 작품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마치 패스가 어디로 올 지 모르는 것처럼, 제 작품의 출발선은 무한한 가능성과 상상력에 있습니다.  작품을 그리기 위해 도시의 벽을 찾아다니는 것은 미친 듯이 축구를 하는 열정과 다를 바 없습니다. 누가 (제 작품을) 지나칠지 모르니, 팔 가는 대로, 다양한 환경으로 (작품을) 퍼뜨립니다. Q. 영감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한마디?  A. 화려한 것을 찾아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세요. 예술은 생각보다 우리 가까이에 있습니다. 일상적인 물건이나 배경도 영감의 주제가 될 수 있어요.  닉 워커와의 가상[+실제] 인터뷰 잘 보셨나요??? 닉 워커의 말에서 보다시피, 아티스트는 영감과 상상력을 가지고 있다면 누구나 될 수 있다고 하네요! (마치 밥 로스 아저씨가 그림 그리고 나서 "참 쉽죠?"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이는..ㅋㅋ) 이상으로 닉 워커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위대한 낙서 참여작가 : Nick Walker(닉 워커), 이것이 반달리즘이다 ②|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319    미국 "입술화가", "키스화가" - 나탈리 아이리쉬 댓글:  조회:2738  추천:0  2017-01-31
입술 화가 나탈리 아이리쉬의 키스예술작품 ♥ 이번에는 입술로 그린다 ! '입술화가','키스화가' 라고 불리는 나탈리 아이리쉬입니다. 나탈리 아이리쉬 (Natalie Irish)는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붓이 아닌 입술로 그림을 그리는 이색 예술 작가입니다. 그녀가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명인사들의 인물화를 포함한 풍경화 추상화등 다양한 작품을 입술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인터넷으로도 구입이 가능하여 직접 소장이 가능하다. 손으로도 그리기 힘든 그림들을 입술로 그리는 나탈리 아이리쉬의 작품을 보며 모두가 신기해하고 있다.     물감대신 립스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네요. ㅎㅎ 이렇게 보니 귀여워보이네요 ~ 찍을 곳을 보고 ~ 바르고 ~ 찍고 ! 이게 근데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입술도 완전 상해있고 허리도 아플거 같네요 ㅠㅠ   손으로 그리는 것보다 몇배는 더 힘들어보이는게 가만히 앉아서 그리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그리는 것도 아니여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품인거 같아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만큼 그 작품의 가치는 더욱 커지겠죠. 캔버스지에 수백 수천번의 키스로 이루워진 작품을 이제 만나 볼까요?   나탈리 아이리쉬의 열정이 담겨져있는 그녀의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제 그의 열정이 담긴 키스예술을 만나보겠습니다.   Natalie Irish 입술로도 한계없는 작품을 지금처럼 즐겁게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 ㅎㅎ 언젠가는 저도 실제로 보는 날이 있겠죠 ㅎㅎ 입술이 힘들수도 있겠지만 많이많이 뽑아내주세요 !! [출처] 입술 화가 나탈리 아이리쉬의 키스예술작품 ♥|작성자 훈쌤   ===================================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으면서 '키스 화가, 입술 화가' 등으로 불리는 나탈리 아이리쉬(Natalie Irish)는  붓이 아닌 입술에 물감을 묻혀 캔버스에 작품 활동을 하고 있어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열정적인 키스'를 떠올리게 한답니다. 나탈리 아이리쉬의 멋진 작품들 함께 만나볼까요? :) 나탈리 아이리쉬(Natalie Irish)는  마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유명 인사들의 초상화는 물론  풍경화, 추상화 등 다양한 작품을 입술로 그려내고 있어요. 어떻게 입술로만 이렇게 멋진 작품들을 그려낸건지 작품이 더욱 사랑스럽게 느껴져요~♡ 나탈리 아이리쉬(Natalie Irish)의 특이한 작업방식 때문일까요? 그녀를 향한 루머들도 상당히 많다고 해요.  그녀가 창조해내는 작품을 즐겁게 감상해주기만 해도 좋을텐데 말이에요. 개개인의 개성이 중요한 시대니까요. 인정해주자구요 :) 그녀의 입술 자국이 더욱 빛나길 바라면서요~ [출처] 키스로 그림을 그리는 아티스트 나탈리 아이리쉬(Natalie Irish)|작성자 이클레어  
318    "키스"로 그림에 생명을 불어넣다... 댓글:  조회:2487  추천:0  2017-01-31
입술로 그린 그림, “키스로 탄생한 명작” ‘입술로 그린 그림’ 이 누리꾼 사이에서 화제다. 온라인커뮤니티 사이트에서는 ‘입술로 그린 그림’ 이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인기를 끌고 있다. 영상에 등장하는 여인은 자신의 입술에 립스틱을 짙게 바른 뒤 캔버스에 키스를 하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린다. 이런 모습에 고개가 갸웃거려지지만 잠시후 캔버스에는 헐리우드의 섹시스타 마릴린먼로의 초상화가 완성된다. 이 여인의 정체는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거주하는 화가 나탈리 아이리쉬. 그녀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엄지손가락으로 그림을 배우는 것을 배웠지만 다른 화가들이 같은 방법으로 그리는 것을 보고 흥미를 잃었다” 고 말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을 찾다가 입술로 그림을 그리게 됐다” 고 계기를 밝혔다.     아이리쉬는 고충도 털어놨다. 입술을 자주 써야하기 때문에 자주 부르튼다는 것. 또 캔버스 가까이에서 작업해야하기 때문에 눈이 쉽게 피로해진다는 것이다. 입술로 그린 그림.    입술로 그린 그림을 접한 누리꾼들은 “놀라운 방법이다”, “키스라면 신물이 나겠다” 등의 반응을 보이고 있다.    /동아닷컴 ================================   입술 화가 나탈리 아이리쉬의 키스예술작품 ♥ 이번에는 입술로 그린다 ! '입술화가','키스화가' 라고 불리는 나탈리 아이리쉬입니다. 나탈리 아이리쉬 (Natalie Irish)는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서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붓이 아닌 입술로 그림을 그리는 이색 예술 작가입니다. 그녀가 작품을 만드는 모습을 보면 정말 열정적인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녀는 유명인사들의 인물화를 포함한 풍경화 추상화등 다양한 작품을 입술로 그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작품은 인터넷으로도 구입이 가능하여 직접 소장이 가능하다. 손으로도 그리기 힘든 그림들을 입술로 그리는 나탈리 아이리쉬의 작품을 보며 모두가 신기해하고 있다.     물감대신 립스틱을 사용하는 경우도 있네요. ㅎㅎ 이렇게 보니 귀여워보이네요 ~ 찍을 곳을 보고 ~ 바르고 ~ 찍고 ! 이게 근데 작품 하나를 완성하고 나면 입술도 완전 상해있고 허리도 아플거 같네요 ㅠㅠ   손으로 그리는 것보다 몇배는 더 힘들어보이는게 가만히 앉아서 그리는 것도 아니고 손으로 그리는 것도 아니여서 상당한 시간이 소요되는 작품인거 같아요. 엄청난 시간이 소요되는만큼 그 작품의 가치는 더욱 커지겠죠. 캔버스지에 수백 수천번의 키스로 이루워진 작품을 이제 만나 볼까요?   나탈리 아이리쉬의 열정이 담겨져있는 그녀의 작품은 어떤 것들이 있는지 이제 그의 열정이 담긴 키스예술을 만나보겠습니다.   Natalie Irish 입술로도 한계없는 작품을 지금처럼 즐겁게 만드셨으면 좋겠어요 ~ ㅎㅎ 언젠가는 저도 실제로 보는 날이 있겠죠 ㅎㅎ 입술이 힘들수도 있겠지만 많이많이 뽑아내주세요 !! [출처] 입술 화가 나탈리 아이리쉬의 키스예술작품 ♥|작성자 훈쌤  
317    세 화가가 모두 "락서화가"로 유명해지다... 댓글:  조회:2870  추천:0  2017-01-30
  앤디워홀과 바스키아   키스 해링과 바스키아 앤디 워홀과 키스 해링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   클라우스 호프네 | 레온하르트 에메클링 | 알렉산드라 콜로사 | 마로니에북스 |      리뷰 그림에 관심이 있어 1년 정도 화실에서 배워 봤지만 미술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닌 것 같다. 특히 현대 미술은 더 어렵다. 창원독서클럽 정기모임 도서인 세 권의 미술 도서 앤디 워홀, 장 미셸 바스키아, 키스 해링으로 현대 미술을 만나본다.     "예술은 근본적으로 금전을 통해서 아름다움을 획득한다."                                                                                       -앤디 워홀   원본에 관한 생각을 바꿔 버린 앤디 워홀, 그는 늘 새로운 것에 목 말라한 인물로 보여진다. 상업 예술가에서 팝 예술가로 변신한 그로 인하여 상업과 예술의 경계가 모호해졌다. 을 쓴 문소영 기자의 말처럼 그의 작품이 미술관이 아닌 곳에서 전시되어도 예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열 일곱 살 이후 나는 늘 스타를 꿈꿨다. 찰리 파커, 지미 핸드릭스 같은 우상들을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사람들이 유명해진 방식에 낭만을 느꼈다."                                                                -장 미셸 바스키아   "진짜"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어린이의 드로잉에 더 존경을 표한다고 말한 바스키아는 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낙서를 하던 낙서미술가이다. 어린 시절 교통사고로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해부학 책을 선물한 엄마, 그녀는 무슨 생각으로 그 책을 아들에게 주었을까?   해부학 차트나 어린이의 드로잉 양식을 편향적으로 좋아한 바스키아는 가끔 '매드' '배트맨' '슈퍼맨' '포퐈이'와 같은 만화책에서 가져온 것을 추가했다. 그의 회화는 텔레비전이나 대중적인 시각매체에서 가져온 순수한 영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38페이지   미술 교육을 정식으로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의 작품들은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의 작품을 예술이 아닌 돈이 되는 상품으로 생각하고 작품이 완성되기도 전에 팔아 버리는 미술상은 미술 애호가가 아닌 욕심 많은 장사꾼으로 밖에 볼 수 없다.   스물 일곱 살에 죽음을 맞이한 그가 안타까운 것은 꽃다운 나이에 죽었다는 사실보다 자신이 그리고 싶은 그림의 주제를 발견했는데 그 꿈을 펼치지 못하고 떠났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는 능력으로 세상에 이바지한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가능한 한 많이 그릴 것이다."                                                 -키스 해링   "미술은 그것을 보는 관람자의 상상력을 통해 생명을 얻는다. 그런 소통이 없다면 그것은 미술이 아니다. (중략) 미술은 소수의 사람들만 즐기는 엘리트적인 활동이 아님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되었다. 모든 사람을 위한 미술이 바로 내 작업의 지향점이다."라고 말한 키스 해링은 자신의 삶 속에 그리고 우리의 삶 속에 예술이 함께 하길 바랬다. 비록 서른 한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지만 그의 예술적 진정성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세 사람의 작품 중 단순한 선으로 표현된 키스 해링의 작품도 좋지만 바스키아의 페가수스가 제일 마음에 든다.     현대 미술은 대체로 추상적인 개념과 모습으로 표현되어 일반 대중이 이해하기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그러나 해당 작가의 삶이나 생각을 알고 나면 어렴풋이나마 공감이 가는 부분이 생기는 것 같다. 열린 마음으로 보는 것, 그것이 현대 미술을 보는 첫번 째 시작인 것 같다.  
316    "검은 피카소" 미국 길거리 화가 - 장 . 미셸 바스키아 댓글:  조회:4307  추천:0  2017-01-30
  출생일 1960년 사망일 1988년   장-미셸 바스키아 벽이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서 그림을 그리는 그래피티를 예술로 승화했다는 평가를 받는 미국 화가. 1980년대 극단적인 추상미술에 대한 반동으로 생긴 신표현주의와 원시주의 성향의 작품을 제작하면서 일약 스타 화가로 떠올랐다. 주류 미술계에서 볼 수 없는 길거리 화가 출신이라는 점에서 작품 외적으로도 화제를 모았다. 바스키아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협업을 제안한 앤디 워홀과의 관계도 유명하다. 1960년 뉴욕에서 아이티 출신의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덕분에 그는 영어뿐만 아니라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도 유창하게 할 수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어머니는 그에게 일찍부터 미술을 가르쳤다. 그를 데리고 미술관을 자주 갔으며 여섯 살 때는 미술관에서 미술 강좌를 듣게 했다. 여덟 살 때 우연히 해부학 교과서를 보면서 근육, 골격, 장기 등 인체의 구조와 형태에 익숙해졌다. 이런 해부학적 이미지들은 그의 그림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같은 해 부모님의 별거로 바스키아는 아버지와 함께 푸에르토리코에서 2년을 살았다. 열한 살 때는 어머니가 심각한 정신질환으로 병원에 입원했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서 길거리 생활을 했는데 친구 한 사람과 함께 ‘세이모(SAMO, Same Old Shit의 약자로 마약류를 지칭하는 비속어이다)’라는 그래피티 아티스트 그룹을 결성하여 근처 빌딩에 그래피티를 그렸다. 1978년 〈빌리지 보이스〉를 비롯해 여러 매체에서 세이모를 소개하면서 바스키아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1979년 바스키아는 세이모 활동을 그만두고 방송 출연과 록밴드 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1980년 여러 아티스트가 참여한 타임 스퀘어 전시회에 작품을 출품하여 주목을 끌었다. 1981년 애니나 노제이 갤러리에서 작업실을 제공해 주어 그림 작업에 전념했고 이듬해 같은 갤러리에서 열린 최초의 개인전에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 이후 바스키아는 성공 가도를 달렸다. 1982년에는 이탈리아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뉴욕 최대의 상업 갤러리인 개고시언 갤러리 등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펑크 록의 대부 데이비드 보위와도 작업했다. 1983년 당시 미술계의 중요 딜러인 브루노 비쇼프버거의 제안으로 앤디 워홀을 만나 공동 작업을 몇 차례 진행했다. 워홀이 먼저 작업을 하면 바스키아 그 위에 덧그리는 방식으로 진행된 작업이었다. 두 사람 모두 죽음을 앞두고 있었지만 둘은 가깝게 지냈다. 1983년 미국에서 최고 권위 있는 비엔날레인 휘트니 비엔날레에 최연소 화가로 참가하고, 1985년에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를 장식하는 등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그러나 높아져 가는 명성과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마약에 빠지고 말았다. 앤디 워홀이 1987년 사망하면서 바스키아는 정신적 지주를 잃어버린 상실감에 정신적으로 피폐해졌으며, 이를 달래려고 더욱 더 약물에 의존했다. 결국 헤로인 중독으로 1988년에 사망했다. 바스키아는 인종차별주의 비판, 만화, 죽음, 해부학 등의 주제를 낙서 속에 담아냄으로써 낙서를 예술로 승화시켰고 신표현주의의 유명주자가 되었다. 그림에 대한 천재성과 원시미술을 연상시키는 스타일 때문에 ‘검은 피카소’라는 별명을 얻었다. 거리의 부랑아에서 하루아침에 스타 예술가로 짧은 생을 마감한 그의 드라마틱한 인생은 영화로 제작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63위. 〈더스트헤즈〉 ===================   제작시기 1982년 가격 $48,843,750(512억 4000만 원)1) 작가 장-미셸 바스키아(Jean-Michel Basquiat, 1960~1988)   장-미셸 바스키아, 〈더스트헤즈〉, 캔버스에 아크릴 물감, 오일스틱, 스프레이 에나멜, 메탈릭 페인트 / 182.8×213.3cm “나는 평생 길거리 부랑아로 살 거라고 생각했어요.” -장-미셸 바스키아 국제 미술 시장 분석 기관인 아트프라이스닷컴(artprice.com)은 매년 ‘한 해 동안 전 세계에서 낙찰 총액이 가장 높았던 작가’ 리스트를 발표한다. 장-미셸 바스키아는 2012년 발표한 리스트에서 11위에 올랐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에 10년도 채 안 되는 짧은 기간 작품 활동을 했고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떴지만, 피카소, 모네, 워홀 같은 역사적 대가들에 버금가는 인기를 얻고 있다는 뜻이다. 아트프라이스닷컴 발표 다음 해인 2013년 5월에 열린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급기야 회화 한 점이 4884만 달러(512억 4000만 원)에 낙찰되는 기록을 세우며 바스키아 작품 가운데 최고 경매가 기록을 세웠다. 작품을 팔 때는 시기가 중요하다. 2013년 5월은 바스키아의 주가가 한창 올라가던 때였다. 마침 세계 최고 갤러리라 할 수 있는 개고시언 갤러리가 그해 초 뉴욕에서 바스키아 회고전을 열어 수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가는 등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덕분에 경매 직전 바스키아에 대한 관심이 크게 올라갔다. 경매 직후에는 개고시언 갤러리 홍콩 지사에서 바스키아 개인전이 열릴 것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개고시언 같은 세계적 갤러리가 이렇게 대규모 전시회를 열어 화제를 만들면 사람들의 관심이 그 작가에게 쏠리고, 미술 시장에서도 자연스럽게 그 작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다. ‘낙서 같은 이 그림이 수백억 원이라고?’ 바스키아의 그림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황당해서 잠시 말을 잃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무렇게나 휘갈긴 듯한 그림을 남긴 바스키아는 놀랍게도 현대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가 시대정신을 잘 표현한 작가였기 때문이다. 좋은 작가가 되는 여러 조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꼽으라면 나는 ‘시대성’을 꼽겠다. 자신이 속한 그 시대를 잘 읽어 내고 반영하는 작가는 길이 남는다. 인상파 화가들, 피카소, 워홀도 결국 그런 작가였다. 바스키아는 1980년대 미국 사회를 그대로 반영한 작가다. 그래서 이토록 중요한 작가가 된 것이다. 1980년대 뉴욕은 화이트칼라 중산층 인구가 점차 증가하면서 겉으로는 발전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당시 이 도시에 살고 있던 이민족과 저소득층은 변두리 슬럼가나 싸구려 거주 지역, 길거리로 밀려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젊은이들의 정신적 공황이 심해져 마약과 범죄가 판치는 도시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젊은이들의 자유로운 정신세계를 드러내는 재즈와 힙합 문화로 도시의 열기가 터질 듯했다. 바스키아는 아이티 출신 아버지와 푸에르토리코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 시기 뉴욕의 전형적인 저소득층 이민자 가정에서 나고 자란 그는 시대에 반항하는 젊은이였다. 열다섯 살에 가출해 길거리를 나돌며 친구와 함께 ‘세이모(SAMO)’라는 이름으로 거리의 벽에 스프레이로 그림과 메시지를 그렸다. SAMO는 ‘Same Old Shit’, 즉 늘 똑같은 것, 반복되는 것이라는 뜻의 줄임말로, 그들이 늘 피우던 마리화나를 의미한다. 그러나 SAMO 프로젝트는 함께하던 친구와 관계가 틀어지면서 1979년에 그만두었다. 이어 바스키아는 스물한 살이던 1981년부터 캔버스와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거리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를 이어 붙여 콜라주도 했다. 바스키아의 그림에서 인종 문제, 범죄, 마약 등 당시 뉴욕이 겪었을 사회적 불안이 느껴지는 것은 작가가 바로 그런 사회적 문제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에게는 ‘시대성’이 제일 중요하다고 했는데, 어떤 시기에 어떤 형태의 작품을 만들었는지도 중요하다. 바스키아가 폭발하는 감정을 숨김없이 표현한 1980년대 초는 마침 미술계에서 표현주의적인 그림에 대한 갈증이 있던 때였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까지 유행한 미니멀리즘 미술은 표현 방법과 재료를 최소한으로 줄여 ‘작가의 손’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니 1980년대에 이르러 사람들이 다시 ‘작가의 손’이 많이 들어가고 표현이 풍부한 미술을 원할 만도 했다. 바스키아는 주제 면에서는 불안한 시대의 정신을 담으면서 작품의 외형은 사람들이 원하는 짙은 표현주의적인 형태를 띠었으니 1980년대를 대표하는 작가가 될 모든 조건을 갖춘 셈이다. 특히 바스키아와 같은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뉴욕 동남부의 ‘이스트 빌리지(East Village)’는 1981년부터 1987년 사이에 예술로 폭발하고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사이에 이스트 빌리지에서만 갤러리가 백 군데 이상 생겨났다가 사라졌다. 이런 조건들이 뒷받침되면서 바스키아는 1980년 화가로 정식 데뷔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잘 팔리는 작가’가 되었다. 1985년에는 《뉴욕 타임스 매거진》의 표지에 국제 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새로운 작가로 소개되기도 했다. 바스키아는 1980년에 워홀을 만나 자신의 작품 몇 점을 보여 주었다. 이때 워홀은 그의 천재성에 탄복했고 이후 공동 작업을 하는 등 죽을 때까지 약 7년간 바스키아와 아주 가까이 지냈다. 1987년 자신의 적극적 후원자이자 정신적 지주로 여기던 워홀이 담낭 수술 후유증으로 사망하자 바스키아는 심한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러다 이듬해 스물여덟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헤로인 과다 복용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1980년대를 불꽃처럼 살다 간 그의 인생은 오히려 신화로 남았다. 그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에 세계 주요 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꾸준히 열리고, 미술 시장에서 수요가 많아 값도 천정부지로 올랐다. 거침없는 표현이 돋보이는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특징을 한눈에 보여 준다. 그는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초상화를 즐겨 그렸다. 이 작품은 바스키아의 전형적 특징인 해골 같은 얼굴 두 개가 등장하고, 온갖 원초적 색깔과 흑백색이 아낌없이 발현되었으며, 두꺼운 질감의 표현도 넘쳐 난다. 이 그림은 1996년 토니 샤프라지 갤러리에서 열린 바스키아 회고전에 나왔는데, 당시 미국의 권위 있는 미술 월간지인 《아트 뉴스》에서 이 전시를 리뷰 하며 이 작품을 직접 예로 들어, 바스키아의 원초적 표현력이 한껏 드러나는 작품이라고 언급했다. 어떤 작품이 판매될 때는 이런 기록이 작품 가격에 큰 영향을 준다. =========================   경제와 문화의 가교 한경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는 ‘검은 피카소’로 불리며 1980년대 미국 화단을 풍미했다. 스프레이, 마커(채색용 물감), 오일 크레용으로 뉴욕 소호 거리의 외벽에 ‘낙서 그림’을 그리는 세이모(SAMO:Same Old Shit, 흔해 빠진 쓰레기) 그룹에서 활동하며 ‘그래피티 아트(graffiti art)’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정규 미술교육을 받지 않은 그는 1980년대 초 팝아트계의 거장 앤디 워홀의 소개로 단숨에 뉴욕 화단의 중심부로 진입했고, 8년여의 짧은 활동 기간에 세계적인 스타 화가 반열에 올랐다.     뉴욕에서 헤로인 중독으로 27세에 요절하기 6년 전 그린 이 작품은 낙서인지 작품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파격적 화풍의 자화상이다. 악마를 연상시키는 얼굴을 강렬한 검은색과 브라운 톤, 파란색의 붓터치로 묘사했다. 미국 사회의 인종차별, 현대인의 온갖 욕망과 위선을 색깔 미학으로 은유했다. 이 작품은 2016년 4월 10일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추정가를 훨씬 뛰어넘은 5730만달러(약 668억원)에 팔렸다. /김경갑 기자  ===============   ✔미술계의 검은피카소_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    장 미셸 바스키아는  천진하고 익살맞은 내용의 낙서화로  뉴욕 미술계의 주목을 받으며 혜성같이 등장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어린아이의 낙서 같고 무질서해 보이지만, 모아놓고 보면 단순한 낙서에서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아우라가 있습니다.     장 미셸 바스키아는 20대에 생을 마감하는 짧은 인생을 살았지만, 그의 작품은 여전히  우리에게 긴 여운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해볼까요?        세계 미술 경매에서 가장 잘 팔린 현대미술가 장미셸바스키아(848억,아트프라이스)가 앤디워홀의 뮤즈였다는 사실 알고계셨나요? :)     '흑인 피카소'라고 불리는 장 미셸 바스키아 (Jean-Michel Basquiat, 1960년 12월 22일 ~ 1988년 8월 12일)는 미국에서 태어난 아이티계 미국인 입니다.     어릴 적 어머니와 함께 갔던 뉴욕현대미술관 MOMA의 피카소-게르니카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엄마의 모습을 보며 화가가 되기로 마음을 먹은 그는 그래피티 그룹 세이모 SAMO에서 방랑예술가의 길을 시작하게 되고, 당시 가장 유명한 아티스트였던 앤디워홀에게 자신의 엽서를 1달러에 팔게되면서 친분을 맺게 되었습니다.     1970년대 뉴욕의 미술시장이 어마어마하게 커지면서 앤디워홀도 더한 성공을 누리게 되고 바스키아 역시 새롭게 조명되어 인기를 얻게됩니다. 갤러리에서는 때마침 새로운 아티스트를 찾고있었고 바스키아 그림은 그들에게 적격이었지요. 지금은 흔하지만 당시에는 낙서예술이 신선한 충격이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작품은 '암시적인 이분법'의 성격을 띄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부와 가난, 통합과 분리, 내면과 외면, 이미지와 텍스트, 추상과 형체, 역사적 정보와 현대비평을 긴밀히 결합시키곤 하였습니다. 또한 작품에 사회 비판적 메세지를 담음으로써 사회에 뿌리박힌 권력 구조와 인종차별주의를 공격하고자 하였습니다.     바스키아와 워홀은 서로의 동경의 대상이자 뮤즈로서 왕성히 활동하였습니다. 바스키아는 워홀과 함께 작업하고 공동전시회를 열며 부를 축적해 갔으며, 신표현주의와 원초주의로 세계적인 성공을 거뒀으나 앤디워홀이 1987년 2월 사망하자 그도 1년뒤인 1988년 워홀의 건물에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요절하게 됩니다.       
315    "락서예술" : "경계" : "융화" : 31 : 팝 아트 대작 댓글:  조회:3046  추천:0  2017-01-30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담아, ㅡ키스 해링(Keith Haring)       1982   1982 여기 역동적이면서 우스꽝스러운 사람들의 모습이 있다. 너무도 간단해서 ‘작품인가’는 생각도 든다. 한 획으로 그은 듯 굵은 면 표현으로 왠지 에너지 있어 보이고 율동적인 형상에 쉽게 매료된다. 낙서인 듯 낙서 같지않은 작품, 바로 키스해링(Keith Haring)의 그림이다.    1985 1985 1986 ‘낙서와 예술의 경계에 서있다’기 보다는 서로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작가 키스해링(Keith Haring). 예술을 사랑한 그의 표현은 대중들이 쉽게 미술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뚜렷한 색감으로 긍정적인 에너지를 전하는 그의 작품은 마치 초원을 뛰어다니는 말 같다. 그만큼 자유분방하고 자연스럽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자유분방하기 그지 없는 그의 작품은 실이 어렵고 심오한 주제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다. 작품 속에는 심오한 사실을 부정도 외면도, 오버도 하지 않은 그의 사상과 신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89   1987   1987   Munster Project, 1987   키스 해링은 그래픽 디자인과 시각디자인 접하면서 행위예술과 비디오아트, 설치미술, 콜라주, 데생 등 다양한 예술을 시도한다. 특히,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작가는 사회적으로 민감한 문제를 예술로 표현하는 대안예술을 시도했다. 그는 뉴욕 곳곳에 하얀 분필로 메시지를 전달하면서 예술을 대중의 곁에 둔다. 이러한 시도가 키스 해링의 가치관을 내보이는 것이 아닐까.  1989 1989   1989 그는 자신만의 예술철학에 대해 지속적으로 질문하고 고뇌하면서 언제, 어디서든 그림을 그려나갔다. 그리고 시대 변화 흐름에 예민하게 반응하면서 사회 문제에 대해 더 많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작품에 녹아냈다. 반(反)핵, 인종차별, 에이즈 등, 사회적으로 소외되기 쉬운 문제를 담아내지만 자신만의 표현력으로 밝게 무겁지 않게 표현했다.   1990 1990 1990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 키스해링 (Keith Haring)   1987   1983   1986   해링은 대중의 곁에 있기 때문에 무거움보다는 가벼움을 택했고 어두움보다 밝음을 택함으로써 항상 사람들과 소통하는 작가로 인식됐다. 때문에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이 키스 해링의 세계를 잊지 못하고 많은 곳에 담아내고,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1985   1982   1982   해링의 작업 방식은 간단한 그림만큼 굉장히 간결했다. 스케치나 습작조차 하지 않지만 그는 실수도, 그래서 수정도 없었을 만큼 확실한 작업을 이어나갔다. 한 획에 시작과 끝만 있듯 키스해링은 깔끔한 작품을 완성해나갔다. 아마 이런 작업방식은 작업환경의 제약이 없으므로 대중들과 항상 소통할 수 있는 원천이 됐다.    1985   1988   1988   1988   2> 1988   1986   1985   31년이라는 짧은 생애 동안 거침없는 표현들로 자신이 하고 싶은 예술을 짧고 굵게 보여준 키스해링. 극과 극의 경계에서 어떤 것을 택하기 보다 서로의 ‘융화’를 택한 그는 사회적으로 이단아로 낙인되며 작품마다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어떠한 가식도 없이 많은 의미를 내포한 그의 작품은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기에 여전히 팝 아트의 대작으로 남아있다. 1990, 모든 이미지 출처: http://www.haring.com/  
314    미국 거리미술가, 사회활동가 - 키스 해링 댓글:  조회:24450  추천:0  2017-01-30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년 5월 4일 ~ 1990년 2월 16일)은 1980년대 뉴욕의 거리문화에 영향을 받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사회 운동가였다. 그래피티 예술가로 잘 알려진 인물로서, 하위문화로 낙인찍힌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하였다. 간결한 선과 강렬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표현으로 그의 이미지는 세계적으로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작품 세계 3주요 작품     생애[편집]   바르셀로나에 있는 해링의 벽화.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Reading)에서 태어나 쿠츠타운(Kutztown)에서 성장하였다. 어린 시절부터 예술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다.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1978년 뉴욕으로 이사를 와 시각예술학교(School of Visual Art)에 입학하였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의 벽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했다. 그의 간결한 선과 생생한 원색,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기법들은 뉴욕 지하철의 분필 그림으로서 처음 대중의 관심을 얻게 되었고 1981년 토니 샤프라치(Tony Shafrazi)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다. 해링은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그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다. 활동 중 마돈나(Madonna)와 앤디 워홀(Andy Warhol)과도 친분을 쌓았다. 1985년에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다. 1986년 해링은 소호(SoHo)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다.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 팝 가게의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 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했다.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으며,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다.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다. 1990년 2월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다. 작품 세계[편집] 해링은 다른 낙서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거리와 지하철에서 벗어나 티셔츠와 장난감, 공익광고와 포스터,벽화 등으로 제작하였고 상업화하였다. 그는 탄생과 죽음, 사랑,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인종차별 반대, 에이즈 교육, 동성애자 인권운동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었다. 상위예술과 하위예술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려 노력한 그의 작품은 전 세계적으로 대중적 인기를 얻고 있다. 주요 작품[편집]《무제 Untitled》(1982) 《앤디 마우스-뉴 코크 Andy Mouse-New coke》(1985) 《무지=공포 Ignorance=Fear》(1989) 낙서화에 담긴 묵직한 사회문제  "나는 예술가로 태어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들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뉴욕의 도심부 빈민가를 중심으로 낙서화, 즉 그래피티 아트가 하위문화로 널리 확산되고 있었다. 작가 키스 해링은 뉴욕의 거리와 지하철역 벽을 메우고 있는 낙서들을 본 순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낙서에 담긴 인간 본연의 표현 욕구와 일상 속 공간에서 일어나는 대중과의 교감을 눈치챈 것이다. 그는 도시의 길거리에 흰색 분필을 들고 나섰고, 그의 재치 있는 낙서는 경찰과의 쫓고 쫓기는 일련의 소동과 함께 대중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키스 해링의 작품 시리즈 중 하나로 총 17점으로 이뤄진 '블루프린트 드로잉'은 1980년대 초 해링이 블루프린트 인쇄를 염두에 두고 그렸던 이미지들을 후에 실크스크린으로 완성한 것이다. 빛나는 아기, 날아가는 비행접시, 짖는 개 등 해링을 특징짓는 만화적 이미지로 표현된 이 작품은 언뜻 보기에 가벼워 보이지만, 그 속에는 다른 낙서화가들과 달리 인종차별 반대, 반핵운동, 동성애자 인권운동, 에이즈 교육 등 무거운 사회문제를 담고 있다.      해링은 1990년 만 31세에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도 예술가로서 본인의 책임을 생각하면서도, 예술이 실제 삶에 더욱 가까워져 더 많은 사람이 즐길 수 있기를 바랐다.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주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던 해링은 그의 바람과는 다르게 1988년 에이즈 진단을 받았다. 하지만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던 그의 말처럼 그의 작품은 지금까지도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다.  /류정화  위대한 낙서 (The Great Graffiti) 세계적 그래피티 작가들의 뮤지엄 쇼 ――――――――――――――――――――――――――――――――――――――――――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굵은 검정색 선과 대담한 색, 그래피티에서 영감을 얻은 만화 같은 인물로 가득 찬 독창적인 양식 덕분에 그는 예술계와 일반 대중 모두에게서 좋은 평가를 받았죠.  그리고 모르시는 분들도 많으실거라고 생각되는데, 키스 해링은 동성애자였답니다.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 커밍아웃을 하고 이 문제를 그의 작품주제 중 하나로 삼아 이를 형상화했죠. 작품이 상업화가 되면서 키스 해링은 많은 돈을 벌게 되었지만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어린이와 에이즈 환자를 위해 지원하려고 노력합니다. 그의 화풍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해링의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관객을 유혹하죠.  해링의 아이콘에는 만화영화에서 봤던 여러 이미지들을 연상시켜 친근감을 줍니다. 해링은 만화처럼 그림을 빠르게 그렸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합니다. 그림을 조각으로 만들 때도 마치 대형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했다고 하네요. 반복되는 선의 뒤엉킴은 감칠맛이 나고 사람들의 잠재된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하죠. 키스 해링은 평생 거리의 아이들에게 관심을 쏟았다고 합니다.  그는 낙서를 통해 사람들에게 친숙하게 다가가고 다소 무거운 주제들을 밝고 경쾌하게 풀어나갔죠. 아마 이렇게 재미있게 주제를 풀어낸 이유는, 어린이들 또한 그러한 주제들을 쉽게 인식하게끔  만들어 주기 위한 해링의 의도가 아니었을까 추측해 봅니다 :-) 1988년 해링은 에이즈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는 그 다음 해인 1989년에 키스 해링 재단을 설립하여 에이즈단체와 어린이 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에이즈에 대한 경각성을 일깨우는 데에 힘썼죠. (에이즈에 걸린 것만으로도 슬픔에 빠져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거나, 자신의 건강을 챙기기 위한 최대한의 노력을 쏟아 부을 것 같은데... 이에 굴하지 않고 재단을 설립하여 남들을 돕고자 했던 키스 해링은 정말 대단한 분이신것 같아요.) 키스 해링의 마지막 작품 토투몬도 벽화 키스 해링은 같은 해 6월에 피사 Sant'Antonio의 교회의 후면 벽에 마지막 작품인 토투몬도(Tuttomondo) 벽화를 그렸고, 1990년 2월 16일 에이즈 합병증으로 사망하였습니다. 하위문화로 인식되는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서 본인만의 독자적인 회화양식을 구축한  대중적 그래피티의 아버지, 키스해링.   상위예술과 하위예술간의 장벽을 무너뜨리려 노력했으며, 간결한 선과 원색적인 색채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은 특유의 재치와 유머로 현재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아래는 이 포스팅의 하이라이트! 키스 해링의 명언을 우연히 발견하게 되어ㅎㅎㅎ가져왔어요.  한번 감상해 보시죠 ;-) 나는 예술가로 타고났고, 따라서  예술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살면서, 그 책임이 무엇인지 알아내려고 무척 애를 썼다. 다른 예술가들의 삶을 연구하고, 세상을 연구하면서 배웠다. 내가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역할은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나는 가능한 한 오랫동안 살면서,  가능한 한 많은 사람을 위해 그림을 그릴 생각이다. 그림은 사람과 세상을 하나로 묶어준다. 그림은 마법처럼 존재한다. - 키스 해링(Keith Haring) - 키스 해링에 대한 포스팅, 재미있게들 읽어 보셨나요? 그래피티의 시초이자 그래피티 역사에 거대한 한 획을 그은 거장, 키스 해링. 단지 그의 작품들만 어렴풋이 알고 있었을 뿐이지  키스 해링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이번에 글을 쓰기 위해 조사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자신의 유명세에 안주하지 않고 타인을 배려하는 모습이 진심으로 아름다워 보였습니다. 이렇게 좋으신 분이 젊은 나이로 생을 마감하셨다는게 정말 안타깝네요. 개인적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는 작가였던 것 같습니다.   ――――――――――――――――――――――――――――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 키스 해링은 1958년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성장하였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 디즈니의 만화영화를 보면서 그림에 흥미를 가졌으며,  1976년 피츠버그의 아이비전문예술학교에 입학하여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였죠.  그러나 이에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그는 뉴욕으로 이사를 가서 시각예술학교에 입학합니다. 하지만 그의 주 무대는 ‘길거리’ 였습니다.  그는 뉴욕 거리의 벽면과 지하철 플랫폼에 그려져 있는 낙서 스타일의 그림을 보고  깊은 영감을 얻어 길거리, 지하철, 클럽 등의 벽을 캔버스로 삼기 시작합니다. 키스 해링의 지하철 드로잉 사진 특히 키스 해링은 뉴욕 지하철의 비어있는 광고판에 분필로 그림을 그려나갔는데,  공공기물 훼손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합니다. 키스 해링의 단순한 표현들 뒤에는 무거운 주제들이 숨어 있습니다. 바로 인종차별, 에이즈, 동성애자의 인권, 반핵문제 등등의 사회문제들이죠.  그는 탄생과 죽음, 사랑, 전쟁과 평화 등의 우주관을 바탕으로 자신의 작품활동을 통해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표현하고 위와 같은 다양한 사회문제를 다루었습니다. 키스 해링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양성 형상의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하는 모습,  손을 마주잡은 모습, 하트 이미지 등을 통해 그는 남녀노소, 인종과 인종,  나라와 나라간의 차별 없이 모두가 하나되어 사랑하는 세상을 꿈꿨습니다. 1981년 토니 샤프라치의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게 된 키스 해링.     그는 이 전시를 계기로 스타 작가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낙서화의 형식을 빌려 새로운 회화 양식을 창조해낸 키스 해링의 그림은 뉴욕의 새로운 흐름을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해링은 활동 중 마돈나와 앤디 워홀과도 친분을 쌓았다고 합니다.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의 모습  1985년에 키스 해링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으며 보르도(Bordeaux) 현대 미술관에 작품 전시회를 열고 파리 비엔날레에 참가하였습니다. 키스 해링의 Pop shop. 2005년에 문을 닫았다고 하네요..또륵   그는 다른 낙서화가들과는 다르게 자신의 작품을 거리와 지하철에서 벗어나 공익광고와 포스터, 벽화 등으로 제작하였습니다.  또한, 1986년 대중과 예술을 공유하기 위해 소호에 팝 가게(Pop Shop)를 열고 자신의 예술품들을 티셔츠, 장난감, 포스터 등으로 상품화하여 팔기 시작하였죠.  그는 상위 예술과 하위 예술의 장벽을 무너트리려 노력하였으며, 가게 개점과 함께 그의 작품들은 더욱 더 에이즈(AIDS) 인식, 코카인 전염병 등과 같은 사회-정치적인 주제들을 반영하기 시작합니다.  약 20년간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의 실제 작업실로 쓰이던 곳, 매장 내부 기둥에 키스 해링의 원본 작품이 그대로 남아있어 눈길을 끈다. 화장품 브랜드 투쿨포스쿨 매장 개업[2016년 11월] (웃 사진과 비교해 보세용^^... 기분이 알싸찌근...)      맨해튼의 라파예트 스트리트에 자리한 뉴욕 작업실은 약 20년 간 미국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키스 해링’이 실제 작업실로 쓰이던 곳으로,  매장 내부 기둥에 키스 해링의 원본 작품이 그대로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투쿨포스쿨의 독특한 패키지 디자인과, 도자기 인형, 비커 등 브랜드 고유의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실제 예술가의 아뜰리에에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팝아트 슈퍼스타, 키스 해링' 전이 그의 사망 20주년을 맞아 소마미술관에서 오는 9월 5일까지 열린다. 그의 판화 130여 점과 영상자료, 3점의 조각 등 총 150여 점이 소개된다.  키스 해링(Keith Haring 1958~1990)은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레딩에서 태어나 쿠츠타운에서 자랐다.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했고 아버지로부터 드로잉의 기초를 배웠다. 1976년 피츠버그칼리지 그래픽디자인과정에 입학했으나 상업미술가가 되는 걸 포기한다.  1978년 뉴욕명문 시각예술학교(SVA)에 다시 입학, 그러나 1980년에는 이마저 그만두고 거리로 나선다. 지하철, 클럽, 건물 벽을 캔버스로 삼아 작업한다. 공공기물 훼손혐의로 경찰에 체포되기도 하나 이런 방식으로 도시와 소통하며 그만의 아이콘을 만든다.  1981년 '클럽75' 전 이후 그는 독일 카셀 도큐멘타, 상파울로 비엔날레에 초대됐고 뉴욕뿐만 아니라 유럽, 일본 등에 초대받는다. 워홀과 바스키아를 비롯하여 동갑인 마돈나, 마이클 잭슨 그리고 오노 요코, 브룩 실즈 등 당대 스타들과 폭넓게 교류한다. 그러나 1990년 2월 16일 31살에 에이즈합병증으로 죽는다. 심각한 사회이슈를 단순명쾌한 그림으로  ▲  '남아프리카에게 자유를(Free South Africa)' Lithograph 102×81cm 1982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그는 위에서 보듯 1982년 반핵운동을 시작으로 동성애와 에이즈, 문맹퇴치와 인종차별과 같은 정치적 메시지가 강한 작품을 남겼다. 팝아트의 정신이 그렇지만 그는 무거운 사회적 이슈가 담긴 주제를 간결한 선과 강렬한 색채로 명쾌하게 그려내는 재주가 있었다. 동성애자였던 그는 당시로는 드물게 커밍아웃하고 이 문제를 그의 작품주제 중 하나로 삼아 이를 형상화한다. 동시에 성적 소수자의 인권과 취향을 옹호하는 운동에도 앞장섰다. 하긴 이 문제도 요즘은 생각이 많이 다르다. 최근 시카고대학의 세계적 신학자 테드 제닝스(Ted Jennings)는 교회의 동성애 혐오는 성서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지배자들이 자신들의 위선을 감추려고 보통사람들의 성을 죄악시한 탓이라고 해석한다. 그는 성서에서 말하는 죄란 권력 가진 자가 사회적 약자를 괴롭힐 때 그걸 외면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신냉전시대 따뜻한 팝아트를 선보이다 ▲  '무제' 실크스크린 53×76cm 1989. '짝꿍(Best buddies)' 81×66cm 1990. '앤디 마우스(Andy Mouse)' 96×96cm 1986(중앙하단)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키스 해링이 주로 활동하던 80년대는 정치보다는 경제에 관심이 높았고 과소비를 부추기는 시대였다. 레이건의 신자유주의로 빈부차가 심해지고 노숙자가 늘고 마약, 범죄 등이 증가했다. 동시에 뉴욕의 이스트 빌리지 같은 곳에서는 힙합이나 낙서화 등 뒷골목문화도 성행했는데 키스 해링은 바로 이 구역에서 활동했다. 해링은 이런 냉전기에 밥처럼 따뜻한 팝아트로 사회분위기를 밝게 하는 데 일조한다. 그의 사상과 철학을 최소한의 기호로 바뀐 귀여운 이미지의 아이콘을 만들어낸다. 그의 멘토인 앤디 워홀을 미키 마우스의 이미지로 합성한 '앤디 마우스'를 봐도 그렇다. 그의 최고 장점은 천진난만한 동심 ▲  '곡예사(Acrobats)' enamel on aluminum 높이 122cm 1986. 아라리오갤러리소장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그의 화풍은 가장 순수하고 긍정적인 인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한 동심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천진난만한 캐릭터가 관객을 유혹한다. 그의 아이콘에는 만화영화에서 봤던 여러 이미지들을 연상시켜 친근감을 준다. 해링은 만화처럼 그림을 빠르게 그렸기에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림을 조각으로 만들 때도 마치 대형 장난감을 보는 것 같이 마음을 즐겁게 하고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반복되는 선의 뒤엉킴은 감칠맛이 나고 사람들의 잠재된 동화 속 환상을 자극한다. '현대판 이솝우화' 같은 그림  ▲  '개' Lithograph 114×90cm 1985. 릴랑가(Lilanga)작품(아래)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사람 같은 개를 독창적으로 형상화한 위 작품은 유머와 위트로 넘친다. 마치 '현대판 이솝우화'를 보는 것 같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감을 준 장 뒤뷔페(J. Dubuffet 1901~1985)나 릴랑가(Lilanga 1934~2005)와 같은 작가도 있었다. 작가의 메시지가 농축된 아이콘  ▲  '무제' 실크스크린 15×15cm 1987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위에서 보듯 상단에 자리 잡은 붉은 하트는 두 사람 간의 우정과 신뢰를 뜻하리라. 또한 하트에서 뻗어져 나오는 반짝이는 선들은 사랑이 뿜어내는 에너지라 할 수 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어깨를 감싸는 모습에서는 따사로운 인간애도 느껴진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메시지를 혼합한 아이콘으로 독특한 이미지를 일궈낸다. 예컨대 생명을 찬양하는 임신부, 후광 받는 아기들, 짖는 개, 심장에 구멍을 내는 막대 총, 교신하는 비행접시와 피라미드 등이다. 이는 모든 걸 넘어 하나로 춤추게 하는 유토피아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미술관 벽 넘어 공공미술의 초석 놓다 ▲  키스 해링이 뉴욕 41가(街) 지하철에서 벽화 그리는 모습(가상설치) 1983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그는 팝아트작가답게 "대중에게도 예술을 즐길 권리가 있다. 예술은 만인을 위한 것, 대중이 이해하기 힘든 예술을 고집스레 추구하는 건 자기를 과시하는 허튼 수작일 뿐이다"라는 글을 일기장에 남겼다. 그는 이렇게 고급문화인 예술과 대중문화인 미디어산업의 경계를 없애려 했다.  또한 그는 동시대 낙서화(graffiti)의 또 다른 거장인 장 미셸 바스키아(1960~1988)와 함께 80년대 뉴욕지하철 광고판 그림으로 명성을 날렸다. 당시 광고나 간판글씨처럼 하위문화 취급을 받던 낙서를 당당한 미술장르로 자리매김하는 데 기여한다. 그렇게 그는 미술관 벽을 넘어 거리로 나선다. 개인적 감정도 공공적 공간에 표출시킬 수 있음을 보여준다. 미술은 누구나 즐기며 소비할 수 있음을 알린다. 점차 이런 생각이 사람들에게 설득력을 발휘하면서 그는 뉴욕은 물론 베를린, 암스테르담, 런던, 동경, 파리, 보르도, 몽트뢰, 피사 등 세계도시로부터 초대받아 벽화작업을 하게 된다. 생사의 기로에서 마지막 날인 듯 그리다 ▲  '종말(Apocalypse)' 연작 실크 스크린 96×96cm 1988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그는 누구보다 생명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인다. 그가 에이즈 감염자였기에 더욱 그랬으리라. 그래서 죽음을 생명으로 코드 변경하거나 잉태의 환희를 보여주는 작품이 많다. 그가 임신부를 많이 그리고 있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가 죽기 2년 전 남긴 위 '종말' 연작에 바로 그걸 주제로 하고 있다. 그는 어려서 네덜란드계 보수적 기독교 집안에서 자라 묵시문학의 영향을 받았으리라. 그는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가는 종말론적 삶을 작품에 구현한다. 그는 죽음의 문제를 예술로 극복하려 했는지 모른다. 상업성을 뛰어넘은 탁월한 예술성 ▲  '무제' 실크 스크린 127×107cm 1983. 형광효과를 줌 ⓒ 김형순 관련사진보기 이제 그의 이야기를 마무리해 보자. 그는 자신의 작품을 파는 가게인 팝 숍(Pop Shop)을 1986년에 열어 상업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나 그는 그런 범주를 넘는 풍부한 상상력과 높은 예술성을 갖추고 있다. 또한 그는 작업을 통해 신화를 부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또한 키스 해링은 예술이란 "영혼을 자유롭게 하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키고 세상은 더 멀리 볼 수 있는 용기를 주는 것"이라고 했는데 그의 말처럼 그는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작업에 몰두하고 용감히 싸웠다. 그러나 어느 날 혜성처럼 지구에서 사라졌다. 그럼에도 그의 업적은 사람들 가슴 속에 길이 오래 남을 것이다.   [출처] 글로벌 그래피티 아티스트 특집 ② : 키스해링-1|작성자그래피티 아티스트   [출처] 글로벌 그래피티 아티스트 특집 ② : 키스해링-2|작성자 그래피티 아티스트  
313    "얼굴없는 거리" 화가가 그린 벽화 뜯어 팔다... 댓글:  조회:3987  추천:0  2017-01-30
얼굴없는 예술가 뱅크시의 '해피 차퍼스(Happy Choppers)'의 예상 낙찰가는 약 15만달러다. (경매업체 줄리엔스 제공) © 뉴스1 얼굴없는 거리의 그래피티아티스트 뱅크시의 작품 3점이 2016년 4월로스앤젤레스에서 경매에 나온다. 총 예상 낙찰가는 50만달러(약 5억7000만원) 이상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 AFP통신에 따르면 뱅크시의 2002년 작품인 '해피 차퍼스(Happy Choppers)'는 가장 높은 15만달러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된다. 분홍 리본을 달고 있는 헬기들이 그려진 이 작품은 런던 화이트크로스 마켓의 벽에 그려진 작품이다. 장난스런 표정으로 하트 모양을 그리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담긴 '아이 하트 보이즈(I Heart Boys)'의 예상 낙찰가는 12만달러이다.  마지막으로 2013년 뉴욕 로어이스트사이드의 한 차량에 그린 '크레이지 호스(Crazy Horse)'는 6만~8만달러에 낙찰될 것으로 예상된다.  뱅크시는 영국 브리스톨 등지에서 공공장소나 사유물에 사회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그래피티를 그리면서 명성을 얻었다.  이름이나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 얼굴없는 예술가로 불리지만 지난 2008년 과거 학교 동기가 뱅크시의 정체를 브리스톨 출신의 로빈 거닝엄으로 지목했다.  거리 벽면에 그림을 그린 뒤 사라지는 '게릴라'식 활동 방식 때문에 뱅크시의 작품은 경매 시장에 나올 때마다 높은 관심을 모았다. 작품이 경매에서 수억 원을 호가할 만큼 인기를 끌자 건물주가 그의 작품이 그려진 벽면을 뜯어내 팔거나 작품 보존을 위해 유리벽을 설치하는 등 소유권 문제가 논란이 되기도 한다. 다음달 30일 열리는 ‘거리·현대미술 경매’를 총괄하는 경매업체 줄리엔스의 대런 줄리엔 대표는 "뱅크시는 팝문화의 아이콘이자 수요가 많은 예술가"라며 "뱅크시의 가치는 그의 정체가 드러난다해도 계속 올라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까지 가장 고가에 팔린 뱅크시의 작품은 2008년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80만달러(약 20억6000만원)에 낙찰된 대미언 허스트와의 합작품 '킵 잇 스포틀리스(Keep Spotless)'다.  /정이나 기자 ==================== 【서울=뉴시스】이수지 기자 = 영국의 유명 그래피티 예술가 뱅크시는 지난 2008년 영국 데일리 메일이 보도했던 것처럼 로빈 거닝햄으로 확인됐다고 주장하는 연구가 발표됐다고 CNN이 보도했다.  영국의 퀸메리 대학교 연구진이 이날 과학전문지 공간과학지에 발표한 연구에서 형사 사건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기법인 지리학적 프로파일링과 질병 원인을 추적할 때 사용하는 방법을 활용해 뱅크시의 신원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이 연구에 사용된 지리적 프로파일링은 범죄자와 질병 전염자는 집, 사무실 같은 고정 지점을 두고 있고 범죄나 질병이 그 주변으로 확산한다고 가정한다.  이 연구는 런던과 브리스톨에서 뱅크시의 벽화 140점을 확인했고 벽화가 발견된 지역들이 가장 유력한 로빈 거닝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론했다.  이 연구는 또한 뱅크시와 로빈 거닝햄이 모두 초기에 잉글랜드 남서부, 브리스톨에 살다가 지난 2000년 영국으로 이사하는 등 두 인물 간에 눈에 띄는 우연의 일치가 많다고 지적했다.  연구진은 그러나 자신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가 부족하다는 점은 인정했다. 연구진은 “뱅크시의 작품들이 거닝햄이 살던 지역 주변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 외에 뱅크시의 정체성에 대해 결정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고 인정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연구진은 프로파일링 분석 결과는 거닝햄이 뱅크시라는 이론을 일부 뒷받침해주고 있다고 덧붙였다.  ====================== (런던=연합뉴스) 김진형 특파원 = 영국 집권 노동당이 신원 공개를 거부하는 영국의 그래피티 미술가 뱅크시가 기부한 작품 때문에 난감한 처지에 빠졌었다고 인디펜던트 신문이 2008년 8월 29일 보도했다. 뱅크시는 노동당 소속 켄 리빙스턴 전 런던 시장의 재선 캠페인을 위해 지난 3월 런던에서 열린 예술작품 경매 행사에 자신의 유명한 작품 중 하나를 기부했다. '에식스 도로의 스케치'라는 제목이 붙은 이 작품은 대형 슈퍼마켓 체인 테스코의 비닐봉투가 걸린 깃대를 향해 두 어린이기 가슴에 손을 얹고 맹세를 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경매에서 뜨거운 입찰경쟁이 벌어지면서 결국 19만5천파운드에 판매됐다. 당시 리빙스턴 전 시장은 "완전히 머리가 핑 돌 정도였다"고 흥분을 토로했고, 자금난에 쩔쩔 매는 노동당은 환호했다. 그러나 노동당은 곧 고민에 빠졌다. 현행 선거법상 200파운드가 넘는 기부는 익명으로 할 수 없게 돼 있고 실명을 공표해야 했기 때문이다. 뱅크시는 본명, 나이, 출생지 등을 전혀 공개하지 않은 채 게릴라처럼 활동하는 익명의 작가라서 노동당은 기부자의 신원을 밝힐 수 없었다. 심지어 뱅크시의 에이전트조차 그를 만난 적이 없다고 토로할 정도다. 결국 선거위원회와 협상에 들어간 노동당은 최근 작품 낙찰가 중 12만파운드 상당만 받고 낙찰자를 기부자로 올리기로 합의를 봤다. 노동당은 뱅크시 작품을 거래하는 화랑 주인이자 이 작품의 낙찰자인 스티브 래자리드의 이름으로 12만1천600파운드를 기부받고 7만3천400파운드는 손해를 봤다. 노동당 대변인은 "선거법을 준수해 모든 기부금을 받았다는 데 노동당은 만족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최근 뱅크시가 사립학교를 졸업한 로빈 거닝엄이라는 이름의 34세 중산층 영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기사가 보도되고, 본인도 이에 대해 부인을 하지 않아 노동당이 안 봐도 될 경제적 손실을 입었을 수도 있다고 인디펜던트는 지적했다. =======================   당신이 국제적으로 수배를 받고 있는 그래피티 테러리스트 뱅크시?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래피티 아티스트유튜브 유저 Mia S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뱅크시를 촬영했다고 주장했다. 영상에는 청바지, 짙은 색 재킷, 후드 티, 모자 차림에 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한다.영상에서 Mia S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에게 말을 거는데, 남성은 “꺼져.”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뱅크시는 누구인가? 10명의 가능성을 검토해 봤다. 영국 스트리트 아티스트 뱅크시는 누구인가?  신랄한 세계적 그래피티(거리미술) 및 스텐실 작가 뱅크시가 등장한 이래 그의 정체는 비밀로 지켜져 왔다.(지금도 누구인지 잘 모른다.) 그간 뱅크시의 정체를 밝히려는 시도가 여러 번 있었다. 지난 주에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뱅크시가 목격되었다는 주장이 나왔다. 그의 정체에 대한 이론은 그럴싸한 것부터 말도 안 되는 것들까지 다양하다. 우리는 스트리트 아트 전문가인 큐레이터 카를로 맥코믹에게 10명의 가능성을 검토해 달라고 부탁했다.   세계적인 그래피티 아티스트(Graffiti Artist/거리예술가) 뱅크시의 감독 데뷔작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가 개봉을 확정지으며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사람들이 뱅크시의 정체를 알고 싶어하는 건 흥미로운 집착이다. 하지만 이건 사람들이 그에게 공감을 느끼는 것의 표현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헛된 일이고, 중요한 일에 가야 할 관심을 흩트리는 일이고, 정말 아마추어스러운 짓이다. 뱅크시는 실재하는 사람이고, 그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만큼 흥미롭지는 않을 수도 있지만 결코 상상의 인물은 아니다.” “아마 그의 정체는 몇 번이나 드러났겠지만, 좋은 음모론과 마찬가지로 사실일 것 같지 않은 화려한 픽션은 언제나 단순하고 재미없는 진실보다 더 강렬하다.”     스프레이를 사용하여 스티브 잡스 그래피티를 그리고 있는 뱅크   뱅크시가 제작한 스티브 잡스 그래피티   뱅크시가 제작한 스티브 잡스 그래피티를 보고 있는 시리아인. 뱅크시의 진짜 정체는 누구? 1. 폴 호너 2014년에 미국 뉴스 웹사이트에서는 반 그래피티 단속반이 추적해 공공 기물 파손, 음모, 공갈, 위조 혐의로 체포한 폴 호너라는 리버풀 출신의 35세 남성이 뱅크시라고 보도했다.  팽크시의 언론 담당자 조 브룩스는 뱅크시가 체포되지 않았으며 해당 기사는 풍자 웹사이트가 올린 가짜라고 밝혔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0%   2. 리처드 파이퍼 2015년 3월에 브루클린의 33세 아티스트 리처드 파이퍼가 뱅크시가 그린 그래피티 때문에 체포되었다.  파이퍼는 약혼녀와 함께 맨해튼 이스트 빌리지에서 스트리트 아트 워크를 보고 있었는데, 경찰이 나타나 그가 그린 그림이라고 체포했다. 펜을 가지고 있었던 파이퍼는 그 펜이 경찰이 지목한 그림을 그린 펜이 아니라는 걸 증명할 수 있었다. 6개월 후 혐의가 취소되었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0%   3. 여성 HBO 다큐멘터리 ‘뱅크시 더즈 뉴욕 Banksy Does New York’에서 캐나다 미디어 아티스트 크리스 힐리는 뱅크시는 여성이 주도하는 아티스트 7명의 집단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2010)에 나오는 뱅크시의 스튜디오 장면에 등장하는 금발 여성이 지도자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이 아직까지 유효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0% “아니, 정말 틀린 말이다. 팀이라는 주장은 이 아티스트의 비젼과 기이함에 대해 부끄러울 정도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4. ‘디스멀랜드’ 주차장 직원 영국 매체에서는 뱅크시가 2015년에 휴양지 웨스턴-수퍼-메어에 만든 풍자적 놀이 공원 프로젝트 현장에 대놓고 등장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뱅크시의 팬들은 데일리 메일이 2008년에 뱅크시라고 주장했던 사진 속 남성이 디스멀랜드에서 목격되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로빈 거닝햄으로, 그가 뱅크시라는 소문이 있다. 그렇지만 그 주차장 직원은 지방 자치 단체에서 고용한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0% 5. 로빈 뱅크스 2015년에 영국의 한 십대는 어떤 남성의 가방에서 떨어진 페인트를 줍는 것을 도와주자 자신이 로빈 뱅크스라고 소개하며 잉글랜드 옥슨홈의 기차에서 뱅크시의 사인이 있는 그림을 주었다고 주장했다. 뱅크시는 소년에게 이 그림이 약 2만 파운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0% 6. 티에리 구에타(미스터 브레인워시)  뱅크시의 다큐멘터리 ‘선물 가게를 지나야 출구’에 등장하는 광대 같은 프랑스 아티스트 게타가 사실은 뱅크시라는 주장도 있다.  미스터 브레인워시는 미술 전문가들에게 형편없는 아티스트라고 조롱받긴 하지만 말이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1%   “아니, 절대 아니다. 미스터 브레인데드의 멍청함과 뱅크시의 영리한 급진성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리트 아트의 팬들 대부분이 얼마나 무지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티에리는 뱅크시 같은 아티스트들이 더 대담한 정복을 허가 받을 수 있도록 L.A.의 좋은 자리에 접근하게 해줄 수 있는 돈 많은 아이다.  난 그런 일의 전문가는 아니지만, 티에리는 자신의 형편없는 아트 디렉션의 유치한 공식에 따르며 생각없이 복사해서 붙여 병치해 놓는 짓거리만 해댄다.”   7. 로버트 델 나자 언론인 크레이그 윌리엄스는 매시브 어택의 프론트맨 로버트 델 나자가 뱅크시라는 강력한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윌리엄스는 매시브 어택이 공연했던 도시와 뱅크시의 벽화가 등장한 장소들 사이에 연관성이 있다는 걸 발견했다고 했다. 델 나자는 이 루머는 ‘크게 고장된 것’이라며 즉시 부인했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5%   영국 경매시장에서 무려 8억원에 팔린 뱅크시 작품. “이건 정말 재미있다. 나를 내 친구로 잘못 본 사람들도 있었으니 이건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매시브 어택이 언제나 도를 넘는 멋진 사람들이었다는 건 기억해 둘만 하다. 이런 체제 전복적인 목소리가 음악에서 시각 문화로 넘어온 것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8. 오스트레일리아의 그래피티 아티스트 유튜브 유저 Mia S는 오스트레일리아 멜버른에서 뱅크시를 촬영했다고 주장했다. 영상에는 청바지, 짙은 색 재킷, 후드 티, 모자 차림에 안경을 쓴 남자가 등장한다. 영상에서 Mia S는 그래피티 아티스트에게 말을 거는데, 남성은 “꺼져.”라고 말하고 사라진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50% 9. 레드 훅 창고의 남성 2013년에 뱅크시가 ‘Siren of the Lambs’를 준비하는 모습이라는 사진들이 온라인에 올라왔을 때 트위터는 폭발했다.  브루클린 레드 훅의 창고 밖에서 남성 5명이 트럭 안에서 동물 인형들을 늘어놓는 사진이었는데, 트럭 옆에 서서 지시를 내리는 것 같은 남성이 뱅크시라는 설이 돌았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50% “목격담은 물론 신원 확인과는 아주 다르다. 사실일 수도 있지만 로르샤흐 검사나 마찬가지로 바라는 것을 보게 만드는 것에 불과하다.  UFO 납치 이야기나 엘비스가 죽은 뒤에 엘비스를 봤다는 이야기들보다 더 그럴듯한 이야기도 아니다.  나는 피의자들을 쫙 세워 놓으면 내 친구나 가족도 잘 못 골라낼 사람이긴 하지만, 뱅크시가 주장했던 ‘CCTV 아래 하나의 국가’란 말처럼 카메라들은 넘쳐나고 우리는 전부 밀고자들이 되어 가고 있다. 뱅크시가 우리의 저예산 영상들의 유령 밈이 되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   10. 로빈 거닝행 런던 퀸 메리 대학교의 범죄학자들은 지리적 프로파일링이라는 기술을 사용해 뱅크시가 브리스톨 주민 로빈 거닝햄이라고 지목했다. 지리적 프로파일링은 범죄학에서 계속 범행을 하는 사람의 위치를 찾아내기 위해 사용하는 복잡한 통계 분석 기술이다.  연구자들은 런던과 브리스톨의 뱅크시 작품 140개와 뱅크시로 자주 지목되는 사람 10명의 상관 관계를 살폈다. 맥코믹의 의견: 가능성 75% “그렇다. 또한 지리적 프로파일링이라는 오싹한 것을 이런 목적으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면 무섭다.”   뱅크시....그는 누구인가?   [출처] 드디어 세계적 그래피티(Graffiti) 테러리스트 뱅크시(Banksy)의 정체가 밝혀졌다(?)|작성자 아솜   ===============================================================        벽이나 그 밖의 화면에 낙서처럼 긁거나 스프레이 페인트를 이용해 그리는 그림을 ‘그래피티(graffiti)’라고 한다. ‘긁다, 긁어서 새기다’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graffito’에서 생겨났는데 유럽에서는 ‘거리 예술(street art)’로 이미 자리를 잡았다. 그래피티는 1960년대 말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콘브레드(Cornbread)’와 ‘쿨 얼(Cool Earl)’이라는 서명(tag)을 남긴 인물들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장 미셸 바스키아(Jean Michel Basquiat)와 키스 해링(Keith Harring) 같은 예술가들이 나와 예술의 한 장르로 발전시켰다. 최근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인물은 얼굴 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유명한 익명의 작가 ‘뱅크시(Banksy)’다. 영국의 거리예술가로서 자신의 신원을 숨긴 채 분쟁지역 등 세계 곳곳에서 활동하면서 파격적인 주제로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는 중이다. ‘뱅크시’는 브리스톨 시의 로빈 거닝햄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존재를 확인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궁금증을 과학자들이 해결했다. 영국 퀸 메리 대학 연구팀이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geographic profiling)’이란 기법을 사용해 이 익명 작가 신원을 밝혀냈다고 5일 ‘인디펜던트’ 지 등 외신들이 보도했다.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고 있는 얼굴 없는 거리 작가 ‘뱅크시(Banksy)’의 작품. 그의 거주지가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 기법으로 드러남으로써 익명 작가로서의 그의 명성이 위협을 받고 있다.   지리학적 프로파일링은 경찰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사용해오던 기술이다. 범죄 현장에서 수집된 데이터를 이용, 범인의 행동 혹은 심리적 특성을 추론해 범죄 용의자로서 확률이 높은 인구통계적 특성, 단서를 도출해내는 것을 말한다. 실제 경관이기도 했고 범죄학으로 학위를 받은 미국 텍사스 대학의 킴 로스모(Kim Rossmo) 박사로부터 이 기술을 전수받은 퀸메리대 연구팀은 익명 예술가 뱅크시의 작품 분포, 활동 반경 등을 분석한 후 그가 거주하고 있는 곳으로 추정되는 지도 140개를 작성했다. 그 결과 대다수의 지도가 런던과 브리스톨 시에 집중된 것으로 나타났다. 연구팀은 지도에 표시된 지점이 집중된 것을 중심으로 뱅크시의 거주지 가능성을 좁혀 나갔다. 그리고 실제 아티스트로 추정되고 있는 인물을 찾아냈다. 영국 예술가, 로빈 거닝햄(Robin Gunningham)이었다. 2008년 이후 줄곧 뱅크시의 실제 인물로 거론되던 인물이었다. 연구에 참여한 스티브 르 콤버(Dr. Steve Le Comber) 박사는 “최종적으로 작성한 모든 지도들이 거닝햄이 살고 있는 장소를 지목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퀸 메리 대의 콤버 교수는 지난 2014년 이집트 카이로에서 발생한 말라리아의 데이터를 사용 이 질병을 퍼트린 모기들의 발생지 추적에 성공한 바 있다. 당시에도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 방식을 적용해 300㎢의 65%가량만 조사하고도 모기의 발생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익명의 예술 활동, 위축될 전망  콤버 박사는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 기법을 사용할 경우 좁은 지역만을 찾아보고도 찾고 있는 지점을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고 말했다. “컴퓨터로 계산하면 몇 분이 안 걸리는 시간이기 때문에 작업 시간 역시 많이 걸리지 않는다”고 말했다. 익명의 작가 ‘뱅크시’는 그동안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Art Terrorist)’라고 호칭하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파격적인 내용의 작품들을 발표해왔다. 대영박물관에 잠입해서 쇼핑하는 원시인이 그려진 돌을 몰래 진열시켜놓은 적도 있다. 며칠 동안 사람들은 그게 가짜인줄 모른 채 관람할 만큼 작품 수준이 높았다. 이외에도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브루클린 박물관, 뉴욕현대미술관, 뉴욕 자연사박물관에서도 같은 행적으로 보이면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바 있다. 최근 들어서는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는 중이다. 특히 시리아, 이라크 등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난민들을 주제로 심각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어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익명이지만 한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영국 온라인 뉴스 사이트 ‘가디언 언리미티드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1974년생이며, 14살부터 낙서화를 시작했다고 했다. 백인이고,브리스톨시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를 채 마치지 못하고 퇴학을 당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익명의 예술가 ‘뱅크시’의 신분이 거의 밝혀짐에 따라 향후 뱅크시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에 따른 검색 추정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또 다른 궁금증을 증폭시키고 있는 중이다.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은 각국 경찰에서 도입해 사용하고 기법이다. 그러나 최근 전염병 추적은 물론, 테러범 색출작업에 활용되는 등 그 사용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는 중이다. 이 프로파일링 기법이 더욱 진화할 경우 익명의 작가들의 예술 활동 역시 크게 위축될 전망이다./이강봉 객원기자 ======================= ▶ 벽화 192점 지도 작성·압축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 활용 ▶ “로빈 거닝햄 거의 확실” 결론 거리의 화가 뱅크시의 작품들. 유머와 익살, 사회적 메시지를 담은 그의 낙서들에서는 웃음과 함께 진한 페이소스도 느껴진다.  ■ 영국서 끈질긴 추적 끝 단서 포착 신출귀몰한 익명의 낙서화가 뱅크시(Banksy)의 신원이 밝혀진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퀸메리 대학교 연구진이 지난 주 과학전문지 ‘공간과학지’에 발표한 내용에 따르면 유명 그래피티 예술가 뱅크시는 영국의 예술가 로빈 거닝햄(Robin Gunningham)임이 거의 확실하다. 그는 이미 영국 데일리 메일이 2008년에 뱅크시의 실제인물이라고 보도한 이후 줄곧 유력하게 거론되어온 인물이다.   뱅크시와 거닝햄 가족은 그 연관성을 부인하고 나섰다. 뱅크시 대변인은 웹사이트를 통해 부인 코멘트를 전했다. 그러나 거닝햄 본인으로부터는 아무런 코멘트도 나오지 않고 있다. 그는 등록된 전화번호가 없고 가장 최근 것으로 나와 있는 런던의 주소는 10여년 전의 것이다. 연구진은 이번 연구에서 형사 범죄사건을 조사할 때 사용하는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geographic profiling) 기법을 활용했다. 이 연구에 참여한 4명의 학자 중 한명이며, 1990년대 경찰 조사관으로 일하면서 수사에 지리적 프로파일링을 도입한 선구자로 꼽히는 미국 텍사스대학의 교수 킴 로스모(Kim Rossmo) 박사는 거닝햄이 ‘탁월한 혐의자’라고 말하고 “그는 두 개의 전혀 다른 도시에서 뱅크시와 연관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연구진이 사용한 지리학적 프로파일링은 경찰에서 범인을 잡기 위해 사용해오던 기술로, 범죄자가 살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시의 집, 사무실 같은 고정 지점을 축으로 범죄가 그 주변으로 확산한다고 가정한다. 이 방법은 사건을 해결하지는 못하지만 수사관들이 혐의자 리스트를 좁혀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준다. 연구진은 런던과 브리스톨에 그려진 뱅크시의 거리 벽화 192점을 찾아내 지도를 작성했다. 이 두 지역은 뱅크시가 성장한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이 가운데 그가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런던의 3개 주택과 브리스톨의 4개 장소(그가 살았던 집, 다녔던 학교, 축구를 했던 운동장 등)가 거닝햄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은 LA 경찰국과 알콜담배총기국 등 사법집행 기관 및 미해병대 등지에서 도입해 사용하고 기법이다. 그러나 최근 전염병 추적은 물론, 테러범 색출작업에 활용되는 등 그 사용범위가 계속 넓어지고 있다. 닥터 르카머와 닥터 로스모는 자신들의 연구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집중시켰는지 깜짝 놀랐다면서 그러나 자신들이 “뱅크시를 아웃시켰다”든가 숫자놀이로 프라이버시를 침해했다는 비난에는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또한 자신들이 뱅크시의 신원을 증명했다는 식의 신문 헤드라인들도 달갑지 않다고 말한 닥터 로스모는 “우리가 걱정했던 바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며 무엇을 믿어야할지 알기란 어려운 일이라고 지적했다. 누구를 믿는가에 따라 뱅크시 신원에 대한 미스터리는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데일리 메일은 이미 자신들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나섰다. “데일리 메일이 찾아낸 뱅크시의 아이덴티티를 과학자들이 옳다고 인정했다”는 헤드라인과 함께 “그래피티 아티스트가 로빈 거닝햄이라는 우리의 발견을 하이테크 도구가 확인해준 것”이라는 자랑도 곁들였다. ■‘예술 테러리스트’ 뱅크시는 얼굴없는 거리의 화가 뱅크시는 스스로를 ‘예술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면서 영국을 중심으로 세계 각지에 파격적인 내용의 그래피티 작품들을 발표해와 세계적으로 엄청난 추종자를 가진 아티스트다. 20여년 전부터 런던과 브리스톨을 비롯해 세계 여러 도시의 건물이나 벽에 특이하고 재미있는 낙서와 그림을 남겨 유명해졌다. 그의 그림에는 깜짝 놀랄만한 익살과 유머, 사회적 메시지와 풍자가 있어 인기가 높다. 거장들의 명화를 패러디한 작품을 루브르나 영국박물관에 잠입해 몰래 걸어놓고 사라지는 악동 같은 일도 했다. 최근 들어서는 국제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주제로 한 작업이 많아졌다. 특히 시리아, 이라크 등으로부터 쏟아져 나오는 난민들을 주제로 심각하면서도 영향력 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자본주의, 기득권, 소비주의, 상업주의, 권위 등에 반대하는 의미가 담긴 그의 그림들은 사람들을 웃음 짓게 하면서도 동시에 페이소스가 느껴지는 독특한 매력이 있다. 하룻 밤새 갑자기 등장하는 뱅크시의 낙서는 이제 인기가 너무 높아 아무도 이걸 낙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벽에 그려지는 것을 영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며, 그림이 그려진 벽을 통째로 떼어다 전시하기도 하고 거액에 팔기도 하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낙서는 물론 불법이다. 그래서 뱅크시는 들키지 않기 위해 최대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만반의 준비를 갖춘 후 전광석화처럼 나타나 평균 35초만에 낙서를 완성하고 사라진다. 그는 이런 일을 25년간이나 해왔지만 한번도 경찰에 잡혀본 일이 없다. 이런 주도면밀함 때문에 한 사람이 아니라 팀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도 무성하다. 뱅크시의 작품은 워낙 위작도 많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작품은 공식 웹사이트(banksy.co.uk)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그는 익명이지만 언론사와 인터뷰를 가진 적이 있다. 영국 온라인 뉴스 사이트 ‘가디언 언리미티드’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은 1974년생이며, 백인이고, 브리스톨 시에서 태어났으며,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4세부터 낙서화를 시작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제 뱅크시의 신분이 거의 밝혀짐에 따라 향후 그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특히 ‘지오그래픽 프로파일링’의 검색 추정 결과에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에 관한 작품이 나오지 않을지 사람들은 궁금해하고 있다. /한국일보  
312    원조 팝아티스트, 팝아트의 아버지 영국 화가- 리처드 해밀턴 댓글:  조회:3733  추천:0  2017-01-30
"대량생산과 젊음,위트,교묘...팝아트는 매력적 비즈니스"? [중앙선데이]2011.09.18  타계한 ‘팝아트의 아버지’ 리처드 해밀턴 별세한 리처드 해밀턴의 1997년 모습. 가고시언 갤러리는 그의 사망원인과 장소에 대해 밝히지 않았다.[AP=연합뉴스] 2011년 9월13일 영국 작가 리처드 해밀턴(1922~2011)의 타계 소식이 전해졌다. 대형 스타 작가인 앤디 워홀의 그늘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알려져 있지만 ‘팝아트의 아버지’ ‘원조 팝아티스트’라는 타이틀은 해밀턴에게 돌아간다. ‘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1956)라는 긴 제목의 작품은 그를 미술사에 분명히 각인시켰다. 이 작품 속에 등장하는 현대의 가정은 전기청소기, 오디오 기구, TV 등 각종 가전제품과 포스터, 회사 로고, 영화 광고 등 현대적 시각매체로 채워져 있다. 창밖에는 최초의 유성영화인 ‘재즈 가수’의 극장 간판이 보인다. 램프에는 포드 자동차의 로고가, 벽에는 명화가 아닌 만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멋진 집이지만 읽을거리라고는 소파 위에 있는 신문이 전부이며, 먹을거리는 테이블 위의 인스턴트 햄뿐이다. 벽에 걸린 엄격한 19세기 비평가 존 러스킨의 초상화는 이런 상황이 못마땅한 듯 보인다. 이런 현대적인 집에 사는 남자는 당연히 근육질의 몸짱이고, 여자 또한 당연히 섹시하다. 울퉁불퉁 근육남이 들고 있는 것은 ‘POP’이라고 쓰인 사탕. 팝아트란 용어는 로런스 알로웨이라는 평론가에 의해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는데, 공교롭게도 ‘POP’이라는 단어가 이미 여기 등장해 이 작품을 팝아트 작품의 효시로 여기게 한다. 이 작품에 대해 평론가 할 포스터는 “새롭게 등장할 팝아트 도상학의 목록을 보여 준 작품”이라고 평한다. 239도대체 무엇이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색다르고 매력 있게 만드는가?39(1956),콜라주, 26x25cm, 튀빙겐 미술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추상표현주의의 등장과 더불어 현대미술의 주도권은 미국으로 옮겨 갔다. 전쟁의 후유증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유럽 작가들이 움직인 것이 50년대 중반 이후다. 해밀턴과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피터 블레이크 등 ICA(Institute of Contemporary Arts)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영국의 젊은 작가들은 전후 변화하는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하며 새로운 작품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도대체…’는 56년 ICA에서 개최된 ‘이것이 내일(This is Tomorrow)’이라는 전시 도록을 위해 만들었다. 해밀턴은 57년 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팝아트에 대한 고전적이면서도 매우 섹시한 규정을 내린다. “팝아트는 대중적이고, 일시적이며, 소모적이고, 저가다. 그것은 대량생산되고, 젊고, 위트가 있으며, 섹시하고, 교묘하며, 매력적인 큰 비즈니스다. 20세기에 도시 생활을 하는 예술가는 대중문화의 소비자이며 잠재적으로는 대중문화에 대한 기여자일 수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을 모두 실천한 사람은 해밀턴 자신이 아니라 미국의 앤디 워홀이다. 워홀은 할리우드 스타의 마케팅 기법을 자신에게 적용하고, 스튜디오를 팩토리라 부르면서 작품을 대량생산해 미술을 큰 비즈니스로 만들었다. 팝아트는 일용할 육체적 양식으로서의 대량생산 상품과 정신적 양식으로서의 대중문화를 바탕으로 하는 미술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본 단위이자 가장 지배적 요소인 상품이 발견한 가장 적확한 미술적 기호가 바로 팝아트다. 상품은 미술작품 속의 주인공이 됐다. 또 스타나 유명인 같은 상품적 가치를 가진 인물들이 미술작품 속에 등장하게 됐다. ‘위인’이 아니라 스타나 유명인에게 더 큰 상품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바로 대중문화다. 팝아트는 이런 대중문화의 이미지를 적극적으로 발견하면서 ‘동시대성’을 구가했다. 해밀턴을 비롯한 영국 작가들이 팝아트를 먼저 선언했지만 궁극적으로 그 주도권이 미국으로 넘어갔던 것도 이러한 이유와 관련 있다. 50년대 중반 영국은 여전히 미국의 전후 원조를 받고 있었고, 해밀턴 등 영국 작가들은 이런 소비문화에 대해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반면 미국은 경제대국으로 ‘소비가 미덕’인 시대의 풍요로움에 취해 있었고 상품사회의 미학을 더욱 발전시켰다. 미국의 팝아트는 재스퍼 존스, 로버트 라우션버그, 앤디 워홀, 로이 리히텐스타인, 톰 웨슬먼, 제임스 로젠퀴스트 등 긴 명단으로 이어지는 미국식 흐름을 만들어 냈다. 해밀턴을 비롯한 영국의 팝아트 작가들은 자신들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 그의 인상 깊은 또 다른 작품은 ‘Swingeing London’(1968)이다. 민트색 양복을 입은 롤링스톤스의 믹 재거는 카메라를 피해 얼굴을 가리는데, 그와 같이 수갑이 묶여 있는 사람은 60년대 해밀턴의 아트 딜러이기도 했던 로버트 프레이저이다. 두 사람은 약물 복용 혐의로 체포됐다. 신나는 록음악과 약물 복용, 학생운동과 히피문화 등 60년대 후반 서구사회의 명암을 고스란히 담아낸 장면이다. 팝아트 작가로서는 드물게 그는 정치적인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했다. 북아일랜드 감옥에 수감돼 있는 죄수 보비 샌즈를 예수처럼 형상화한 ‘The citizen’(1981~83), 2003년 바그다드 대공습과 관련해 카우보이 복장을 한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의 모습을 담은 ‘충격과 공포’(2007~2008)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이미 런던 테이트 갤러리, 뉴욕 구겐하임, 쾰른 루드비히 미술관에서 대규모로 치러졌던 그의 회고전은 미국 LA 현대미술관에서 2013년 다시 한 번 준비되고 있다. 2004년 톰 웨슬먼, 올해 리처드 해밀턴까지 한 시대를 풍미하던 팝아트 작가들이 하나 둘 우리 곁을 떠나고 있다. 한 시대가 물리적·육체적으로 종언을 고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팝아트 작가들이 유명을 달리한다고 팝아트 자체가 사라지는 것 같지는 않다. 80년대 접어들면서 서구에서는 시들해졌던 팝아트 현상이 90년대가 되면서 한·중·일 동양권에서 새롭게 등장했다. 60년대 서구에서 팝아트가 발전해 나왔던 것과 유사한 경제·문화적 배경이 다시 한 번 형성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양권의 팝아트는 이동기의 ‘아토마우스’, 무라카미 다카시의 ‘Mr. DOB’, 웨민쥔의 ‘웃는 남자’처럼 강한 캐릭터적인 성격을 띠며 서구의 팝아트와는 다른 측면을 보여 준다. 21세기 미술에서 상품사회를 배경으로 대중문화적 요소를 차용하는 일은 더 이상 이슈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운 일이 돼 버렸다. 등장한 지 30~40년 만에 팝아트는 끈덕지게 생명력을 이어 나가며 다양한 형태로 얼굴을 내밀고 있다. 그 동력은 대중문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동시대성’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원조 팝아티스트 해밀턴에게 원조 팝아트 작품인 ‘도대체…’에 관해 묻자 “그 작품이 난 좀 지겨워졌어. 그런데 소소한 돈벌이는 해 주지”라고 대답했다. 박제화된 역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생한 동시대성을 추구하는 진정한 팝아티스트다운 말이었다.       ////////////////////////////// 팝 아트 Pop art 요약 팝 아트라는 용어는 영국의 미술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처음 사용하면서 유래했으며 영국의 리처드 해밀턴이 선구자이다.  팝 아트는 추상표현주의에 대한 반발로 등장했다. 추상표현주의가 추상적·개인적인 작품을 추구했다면 팝 아트는 보다 객관적·보편성을 중요시했다. 팝 아트는 순수예술이 주장하는 우월성과 전위미술의 허식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전통을 파괴했고 현대생활에 강한 충격을 주는 대중문화의 모든 현상을 가리지 않고 특징적으로 묘사했다.  재스퍼 존스, 로버트 로젠버그 등이 큰 영향을 끼쳤으며, 유명한 작가들로는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클레이즈 올덴버그,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등이 있다.  팝 아트는 20세기 중반 매스 미디어와 고도의 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표적인 미술양식으로서 인정을 받았다.   팝 아트(Pop art) 팝 아트라는 명칭은 미술 평론가 로렌스 앨러웨이가 이 경향의 회화와 조각의 서술적인 표현양식에 대하여 언급한 데서 유래했다. 영국 팝 아트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사람인 리처드 해밀턴에 의하면 팝 아트는 "통속적이고, 일시적이고, 소비적이고, 값싸고, 대량생산적이며, 재치 있고, 관능적이고, 선동적이고, 활기차고, 대기업적인…… 미술 양식"이다. 특히 미국의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 클레이즈 올덴버그, 톰 웨셀먼, 제임스 로젠퀴스트, 로버트 인디애나, 영국의 데이비드 호크니, 피터 블레이크 같은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현대생활에 강한 충격을 주는 대중문화의 모든 현상을 가리지 않고 특징적으로 묘사했다. 그들은 긍정도 부정도 담지 않고 노골적·직접적으로, 또한 그림 자체를 있게 한 매스 미디어에서 사용된 정확한 상업적 기법을 수단으로 도상학적인 측면(텔레비전이나 만화책, 영화, 잡지 및 모든 형태의 광고에서 고안됨)을 뚜렷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냈다. 미국과 유럽에서 매우 개인적인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물결이 가라앉을 무렵 팝 아트는 보다 객관적·보편적으로 수용될 수 있는 미술 양식으로 되돌아가고자 했다. 이와 더불어 과거의 순수예술이 주장하는 우월성과 당대의 전위미술에서 볼 수 있는 허식을 모두 거부함으로써 전통을 파괴했다. 팝 아트는 특정한 사회적 상황을 충실하게 반영했으며 매스 미디어에 의해서 쉽게 이해될 수 있는 이미지를 즉각적으로 받아들이고 이용했기 때문에 문화적인 대사건이 되었다. 통속적·선정적·반미학적인 대사건이 농담으로 평가되어왔지만, 생활에 직접 반응하는 미술, 즉 전문가와 훈련받지 않은 관람자들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민주적·비차별적인 미술로서 평가되었다. 팝 아트는 당대의 파리풍 미술에서 볼 수 있는 진지함과 좀더 넓게는 유럽에 전쟁을 몰고온 정치적·문화적 상황을 조롱한 1920년대의 허무주의 운동인 다다이즘의 후예로 볼 수 있다. 당대의 대량생산물을 찬양함으로써 미술과 생활의 간격을 좁히려고 한 미국 다다이즘의 대표자인 마르셀 뒤샹은 팝 아트의 발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팝 아트에 영향을 준 다른 미술가로는 스튜어트 데이비스, 제라드 머피, 페르낭 레제 등이 있는데 이들은 기계공업시대의 정밀하고 대량생산적·상업적인 물건을 그렸다. 직접적인 선조로는 1950년대에 비록 회화적이고 표현적인 기법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깃발과 맥주깡통 등을 그린 미국의 미술가 재스퍼 존스, 래리 리버스, 로버트 로젠버그 등이 있다. 특히 인상적인 작품으로는 상업 인쇄물에서 사용하는 색점에 이르기까지 연속만화를 충실하게 복제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그림과 수프 깡통의 상표와 비누 상자, 나란히 배열된 청량음료병을 있는 그대로 정밀하게 그리거나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찍어낸 앤디 워홀의 작품, 욕실의 붙박이 설비와 타자기 또는 거대한 햄버거 등을 부드러운 플라스틱재로 제작한 클레이즈 올덴버그의 작품, 얼굴 없는 인물의 섹스 심볼을 노골적이고 직접적으로 그린 톰 웨셀먼의 〈미국의 거대한 누드 Great American Nudes〉, 그리고 폐품처리장에서 주워온 실제의 환경물(간이식당의 식탁과 버스 등)에 실물 크기의 석고 인물을 설치한 조지 시걸의 구조물 등이 있다. 대부분의 팝 미술가들은 작품에서 비개성적·도시적인 태도를 추구했다. 그러나 미묘한 표현으로 사회를 비판한 것도 있는데 예를 들면 올덴버그의 늘어진 오브제와 워홀의 똑같은 평범한 이미지의 단순한 반복은 명백히 혼란스러운 효과를 일으킨다. 시걸 작품의 신비하고 고독한 분위기는 공공연하게 표현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 미국의 팝 아트는 상징적·익명적·공격적인 반면 영국의 팝 아트는 주관적·직접적이며 그들로서는 비교적 거리감이 있는 팝 문화에 대해 다소 낭만적인 태도를 보인다. 영국의 팝 미술가들은 주로 과학기술과 대중문화를 다루었는데 미국의 몇몇 팝 미술가들은 이러한 생각을 직접 실천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워홀은 "나는 모든 사람이 일종의 기계라고 생각한다"라는 것을 자신의 모토로 삼았으며 실제 작업에 있어서도 기계가 하듯 작품을 제작하려고 노력했다. 팝 아트는 일반대중에게 전혀 진지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20세기 중반 서양의 산업국가에서 발생한 매스 미디어와 고도의 산업사회에 적합한 대표적인 미술양식으로서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 팝 미술가들이 스스로 내건 목표는 바로 생활과 구별할 수 없는 미술을 창조하는 것이었다.  
311    클림트, 그는 녀인 없이 그림 못그려... 댓글:  조회:2743  추천:0  2017-01-29
  Gustave Klimt Austrian Art Nouveau painter, designer & draftsman  born 1862 - died 1918            Allegory of sculpture Gustav Klimt             Junius. 1896. Black chalk, pencil and gold. 41.5 x 31 cm. From "Allegorien" Neue Folge, Nr.63, 1895-1901, Published by Gerlach & Schenk. Historical Museum of the City of Vienna, Vienna, Austria.        Portrait of Mada Primavesi c. 1912 Oil on canvas 150 x 101.5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Music I 1895 Oil on canvas 37 x 45 cm Neue Pinakothek, Munich      Judith I 1901 Oil on canvas 60 1/4 x 52 3/8 in. (153 x 133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The Kiss 1907-08 Oil and gold on canvas 180 x 180 cm O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The Kiss Detail  1907/08 Oil on canvas 180 x 180 cm Austrian Gallery, Vienna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Oil on canvas 178 x 198 cm 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 Rome      Portrait of Adele Bloch-Bauer I 1907 Oil and gold on canvas 138 x 138 cm Private collection     Joseph Pembauer 1890 Oil on canvas 69 x 55 cm Tyrolean State Museum Ferdinandeum, Innsbruck        Portrait of Fritza Riedler 1906 Oil on canvas 153 x 133 cm Austrian Gallery, Vienna      Serpents I 1904-07 Watercolors and gold paint on parchment 50 x 20 cm Austrian Gallery, Vienna      Water Serpents II 1904-07 Oil on canvas 80 x 145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Beethoven Frieze Central narrow wall (detail): Unchastity, Lust and Gluttony 1902 Casein paint on plaster  Austrian Gallery, Vienna      Nude Veritas 1899 Oil on canvas 252 x 56 cm Theatre Collection of the National Library, Vienna      Nude Veritas Detail  1899 Oil on canvas 252 x 56 cm Theatre Collection of the National Library, Vienna      Mermaids (Whitefish) c. 1899 Oil on canvas 82 x 52 cm Zentralsparkasse, Vienna        Medicine (composition draft) 1897/98 Oil on canvas 72 x 55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Judith II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Hygeia Detail from "Medicine"1907  Oil on canvas 430 x 300 cm Destroyed by fire at Immendorf Palace, 1945     Hope II 1907/08 Oil and gold on canvas 110 x 110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Hope II Detail  1907/08 Oil and gold on canvas 110 x 110 cm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Hope I 1903 Oil on canvas 189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Danae 1907-08 Oil on canvas 77 x 83 cm Private collection, Graz     Portrait of Sonja Knips Oil on canvas, 1898 57 x 57 inches (145 x 145 cm) ?terreichische Galerie, Vienna        Portrait of Emilie Floge 1902 Oil on canvas 71 1/4 x 26 1/8 in. (181 x 66.5 cm) Historisches Museum der Stadt Wien, Vienna      Fregio di Beethoven Gustav Klimt Oil on canvas  770 × 361 pixels          Die Freundinnen (zerstört) Oil on canvas  99 × 99 cm          Porträt der Margaret Stonborough-Wittgenstein Oil on canvas  180 × 90 cm          Porträt einer Dame Oil on canvas 60 × 55 cm          Pallas Athene 1898 Oil on canvas 33 x 16 1/2 in. (84 x 42 cm) Historisches Museum der Stadt Wien, Vienna       Auditorium in the Old Burgtheater, Vienna Gouache, 1888 32 1/4 x 36 1/8 inches (82 x 92 cm) Historisches Museum der Stadt Wien, Vienna       Bloch-Bauer urn-grave                 Gustav Klimt (1862-1918)     1862년 오스트리아 빈 교외 바움가르텐에서 금 세공사인 아버지의 일곱남매중 둘째로 태어났다.   14세때 입학한 빈의응용미술 학교에는 수공예적 장식성을 강조하는 실기 교육 시간이 있었다. 이러한까닭에 그의 그림은 장식적 문양과 패턴으로 가득 차 있다.   "키스"에서는 남자의 사각형 패턴 속으로 여자의 원형 패턴이 스며들고있다.  장식은 꾸미는것이고, 꾸미는것은 감추는 것이기도하다.   클림트의 그림에서 나타나는 도저한 장식들은 그의 심리적 콤플렉스를 감추고자 하는 장치일지도 모른다.   장식으로 가득찬 망토로 자신을 감추려고하는 "키스"의 남자처럼 그리하여 클림트의 그림에서는 배경의 장식속으로 전경에 있는 사람의 몸이 흡수되어 버리는 경우를 자주 볼수있다.   여기에서 완전한 은폐가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기어코 몸은 사라지고 장식만 남는다.   최상의 장식은 황금빛이 되고자 한다. 금이야 말로 장식을 위한 것이지 않는가. 장식의 완성 , 불멸의 황금빛 속에서는 오히려 실제 생명은 소멸해야 한다.   그리하여클림트의 황금빛 장식은 불길하다. 그것은 죽음을 덮고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의 냄새가 그의 황금빛을 더욱 강렬하고 황홀하게 느끼도록 만드는 것인지도 모를일이다.     "곧 그는 죽고 다른 이들은 내 유혹에 빠져 젊은이들은 내 욕망의 재물이 되고 아름다운 젊은이여, 이제 그대의 날은 다하였도다."   - 괴테 "코린트의 신부" 중에서 _     크림트의 여성은 이러한 도착적인 사랑이 뒤섞인 복잡한 성적 콤플렉스덩어리다.     _ 이성희의 미술관에서 릴케를 만나다. 전문中 -           오페라 - 조수미 -모차르트 오페라 마술피리 중 밤의 여왕의 아리아 < 지옥의 분노가 내 마음에 끓는다. >                       ======================= 포옹의 현기증과 눈감은 자아의 황홀한 순간에 대한 예찬 [아시아경제 이상국 기자] 오늘(6월14일)은 '키스데이'라고 한다. 이런 날이 있다는 것도 신기하지만, 이런 날엔 뭘 해야 할지도 좀 난감한 사람들이 있을 법 하다. 클림트의 잘 알려진 작품 는 발 자세가 인상적이다. 여자의 발은 침대 끝에 발등을 걸고는 발가락 끝에 힘을 주면서 내면의 전율을 표현한다. 그림 속의 꽃들이 들판을 표현한 것인지, 침대 커버나 이불같은 장식물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정확하게 알기 어렵지만, 여자의 발이 모서리에 걸려 있는 상황과, 그 뒤에는 벼랑같아 보이는 '황금 암흑'이 불안감을 살짝 돋운다. 포옹의 현기증을 이렇게 표현한 것일까.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는 이런 말을 한다. "나는 결코 자화상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나 자신이 그림의 소재로는 그다지 흥미를 끌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 특히 여자들이 내 관심을 끕니다. 나는 내가 특별히 다른 사람의 흥미를 끌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습니다. 내게는 특이한 점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나는 매일 아침부터 밤까지 그림을 그리는 화가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회화로든 글로든 나의 자화상을 볼 수 없을 겁니다. 나에 대해 뭔가 알고 싶다면 내 그림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서 그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찾으면 될 겁니다."     클림트의 작품 '키스' 여인의 얼굴은 클림트의 이 말을 자꾸 떠오르게 한다. 눈을 감고 있는 저 표정에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심연이 있다. 키스를 할 때 눈을 감는 사람을 보았지만, 저렇게 영혼의 눈을 뜬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그 얼굴을 '주의 깊게 살펴보고' 있노라면, 클림트의 갈망이 떠오르고, 그가 다다른 신성에 가까운 평화와 만족이 느껴진다. 키스란, 얼마나 따뜻한 자애(自愛)인지 저 여인은 그 표정으로 다 보여준다.   클림트가 저런 얼굴을 모델로 선택한 건 우연이었을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그림의 매력은 남녀가 걸치고 있는 의상의 무늬를 활용한 '명품'스런 장식이다. 그녀의 얼굴은 클림트의 그림이 지닌 화려하고 행복한 장식성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녀의 얼굴 자체가 장식의 일부처럼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장식이 지닌 단조로움의 내재율, 그러나 그것이 서서히 고양시키는 미묘한 정서적 흥취. 게다가 뭔가 텅빈 것 같은 것의 불안한 아름다움, 바로 그 허영끼까지. 내가 알고 있는 여자의 이미지 명세서는, 그래서 클림트의 저 여자와 분리하기 어렵다.   남자의 목에 걸쳐진, 그리고 목을 감아쥔 남자의 손을 다시 잡고 있는, 여자의 흰 손은, 에로틱한 느낌이 클림트의 저 장식미에 대한 열정과 어떻게 살을 섞는지 잘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사람의 체형을 알기 어려울 만큼 풍성하게 부푼 옷 위의 강렬한 프린트는, 그것이 옷의 무늬가 아니라 존재를 배열하는 하나의 염색체같은 느낌을 준다. 남자의 옷에 있는 희고 검은 길쭉한 무늬들과 중간중간에 달팽이관으로 돌아간 무늬, 작은 알갱이와 이쁜 원들, 그리고 아기자기한 파편들이 빛나는 여인의 옷의 무늬. 여인의 옷 위에 걸쳐진 덧옷 위에 번져나간 자잘한 물방울의 파문들. 그 모두는 황금빛 톤을 유지하면서, 퇴폐를 느끼게 하는 호사스런 감미(甘味)를 변주하고 있다.   천경자의 그림이, 장식성이 강하다고 말하지만, 클림트의 이 그림에 비하면 그건 양반이라 할 만하다. 이 그림은 널찍한 거실에 걸어놓고 바라보면 좋을 것이다. 인간을 매혹시키는 꿈의 무늬들이 카펫처럼 깔린, 그 그림에선, 키스도 하나의 파격적인 장식일 뿐이다. 남자가 고개를 굽힌 각도 만큼 고개를 젖힌 여자. 키스는 저 조응(照應)하는 각도의 아름다움이다. 어쩌면 저 함께 꺾은 각도의 긴장이, 황금빛 옷과 황금빛 허공 속 온갖 무늬의 움직임을 만들어냈는지 모른다. 키스는 입술 부근의 문제 만은 아니다. 클림트는 키스를 통해, 인간의 생에서 가장 자기의 환희와 본능에 충실한 아름다운 한 때를 표현해낸 것인지 모른다. '키스데이'라는 날이 만들어진 것은, 클림트의 화의(畵意)와 같은 의도가 아니었을까.    /이상국 기자     
310    클림트, 고가 명작에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다... 댓글:  조회:2979  추천:0  2017-01-29
수수께끼 같은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와 그의 여인들         구스타프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사생활은 철저히 숨겼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그림이 풍기는 매력이 한층 돋보이게 된 것일까?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되었다.       .           " 시대에는 그시대의 예술을, 예술에겐 자유를," 예술도시 빈에 새바람이 불다.   세계 미술사에서 ‘분리주의’ 또는 ‘분리파’를 얘기하게 되면 당연히 구스타프 클림트를 떠올리게 된다. 예술사조 중에서 ‘분리파’라는 이름처럼 특이한 것도 없다. 통합이 아닌 분리를 이념으로 세울 수 있다는 말인가? 예술의 경우에는 ‘분리주의’가 있을 수 있다. 19세기 말 클림트를 비롯한 혁신적인 예술가들은 빈 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으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중견과 원로들의 작품을 참을 수 없었다. 이들은 빈 미술가협회로부터 분리(독립)를 꿈꾸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권력이란 안정적인 활동을 보장하는 울타리가 되어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감과 도전정신이 넘쳤던 클림트는 안주를 거부하고 ‘빈 분리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1897년 4월 3일, 클림트를 회장으로 그래픽 디자이너이자 공예가인 콜로먼 모저, 건축가 오토 바그너,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 등이 함께한 빈 분리파는 빈 미술가협회에 공식 통보하고 조촐한 창설식을 올림으로써 세상에 그 존재를 알렸다.   ‘빈 분리파’가 분리파의 처음은 아니었다. 1892년 독일의 프란츠 폰 슈투크를 중심으로 ‘모나코 분리파’가 창설되었으며, 1893년에는 막스 리베르만을 중심으로 ‘베를린 분리파’가 이미 창설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리파 하면 ‘빈 분리파’가 떠오르는 것은 클림트라는 거장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의 제자 에곤 실레와 오스카 코코슈카가 있었기 때문이다. 1897년 빈 분리파가 결성되면서 클림트의 작품은 혁신적으로 바뀌게 되며, 그의 작품세계는 예술의 도시 빈에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 결국 빈 분리파의 등장은 빈이 음악의 도시에서 예술의 도시로 이미지를 확대하는 계기가 되었다.   빈 분리파는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는 표어를 내세워 매너리즘에 빠진 미술가협회에 맞섰다. 그들은 이제 검열에 통과하려고 애쓰지 않았고 오직 진실만을 생각하고 자신이 보고 느낀 것을 솔직하고 대담하게 그렸다. 빈 분리파는 상대적으로 낮게 평가되는 수공예를 위한 투쟁이기도 했다. 이들은 ‘부자를 위한 예술과 가난한 자를 위한 예술’을 일치시키고자 했고, 감각적인 예술을 추구했다. 아울러 모든 예술 영역의 요소들을 이용하여 종합예술작품을 만들고자 했으며 나아가 자신들의 작품으로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바야흐로 유럽 작단의 아틀리에에 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었다.       탄탄한 기본기를 닦은 어린시절, 청년시절에는 최고의 역사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 자세한 것을 알기 힘들다. 클림트가 자서전을 쓴 적도 없고 인터뷰 한 적도 없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짐작할 수 있는 기본적인 사항이 그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1883년까지 이 학교에서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 시기에 클림트가 특히 매료된 것은 한스 마카르트로 대표되는 역사화였다. 역사화는 거대한 스케일을 자랑하면서도 섬세한 필치가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장르였다. 특히 ‘예술의 연인’이자 ‘빈의 우상’인 한스 마카르트의 그림은 모호하면서도 지극히 매혹적이었다.       클림트는 한스 마카르트를 능가하는 재능을 갖고 있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의뢰 받은 작품을 그렸다. 당시 왕실에서는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세 예술가는 트란실바니아의 펠레스키 왕궁, 헤름스빌라의 침실 등 빈의 저택들을 ‘한스 마카르트의 스타일’로 장식했다.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클림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상징주의자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상징과 알레고리를 통해 현실을 풍자하고 인간의 운명을 암시하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당시 클림트는 교육부에서 의뢰 받은 빈 대학의 대강당을 장식할 내용을 구상하고 있었다. 오랜 구상 끝에 마치와 클림트는 첫 천장 도안을 제출했다. 마치는 중앙과 신학 부분을 작업하고, 클림트는 철학, 의학, 법학 부분을 맡았다. 나중에 이 작품이 완성되었을 때 빈의 미술계는 뜨거운 스캔들에 휩싸이게 된다       빈 분리파의 전성시대, 불후의걸작 역사속에 등장하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스 마카르트의 작품에 매료되어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이제 클림트는 빈 분리파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준비해야 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을 창간했다.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클림트는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이라는 단서가 불편하긴 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였다.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빈 분리파에서도 분리된 자유인, 고집과 뚝심으로 혼자의 길을 선택한다.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 ,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1903년 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빈 분리파를 떠났다고 해서 분리파 이념까지 버렸다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때부터가 진정한 분리파를 실현한 시기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권력화된 분리파로부터도 분리되는 것이 진정한 분리파의 이념일 수도 있으니 말이다. 물론 클림트를 추종하는 몇 명의 예술가와는 계속해서 교류했지만, 이제 클림트를 막을 수 있는 단체는 없어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어차피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이제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1907~1908), (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자유로운 성생활의 이면에 존재한 영원한 소년이되고 싶었던 "피터펜"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의 전기작가들도 그가 영원한 피터 팬이 되고 싶어했다고 짐작한다. 그것은 그가 오히려 사랑에 관한 한 이상주의자였음을 말해준다. 이상적인 사랑은 쉽게 오지 않는 것,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실로 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1918 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묘하게도 빈 분리파의 주축 멤버였던 오토 바그너, 콜로만 모저, 그리고 에곤 실레도 같은 해에 죽었다.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 속에 숨은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자유를 향한 열망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는 무덤에서 벌떡 일어서게 된다. 20세기의 세기말이 19세기의 세기말과 비슷해서일까?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클림트는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클림트의 전기를 쓴 니나 크랜젤은 이렇게 말한다. “빈이 낳은 유명한 예술가 클림트가 만약 자신의 작품이 현재 얼마나 큰 인기를 누리고 있는지 볼 수 있다면 깜짝 놀랄 것이다. 그는 지금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로 이름을 올렸고, 그 당시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었던 작업 방식은 일상 문화의 일부로 자리잡았다.” 그의 그림에 나왔던 모티프들은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하여, 넥타이, 열쇠고리, 도자기, 게임용 카드, 퍼즐 등으로 다시 나온다. 우리는 다양하게 다가오는 그의 생애와 예술을 퍼즐을 맞추는 것처럼 즐긴다. 그는 수수께끼를 내는 스핑크스인지도 모른다. 다행히 이 스핑크스는 우리가 답을 맞히지 못하더라도 우리를 죽이지 않는다. 우리는 다만 그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고민하고 즐길 뿐이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인상파 풍경       ▲ 빈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장소인 벨베데르 궁전.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 등이 전시돼 있다. 오스트리아 빈 만큼 유명인이 많은 곳도 드물 것이다. 유럽의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였던 합스부르크 왕가 이외에도 음악계에서는 모차르트, 미술계에서는 구스타프 클림트가 대표적이다. 클림트는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오스트리아 예술의 간판스타일 것이다. 오스트리아 기념품 가게에는 클림트의 그림이 새겨진 물건들이 부지기수다. 오스트리아의 빛낸 세기의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의 삶 또한 흥미롭다. 빈가에서 태어나 자수성가 오스트리아 빈에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의 그림을 만나기는 어렵지 않다. 거리, 기념품 샵에서는 그의 그림들이 다양한 상품으로 둔갑해 관광객들을 유혹한다. 클림트라는 화가는 모르더라도 ‘키스’(The Kiss, 1907~1908 작)라는 황금색의 몽환적인 작품은 눈에 익다. 여성의 숨결이 섬세하게 느껴지는 그의 그림 색에 걸맞게 각양각색으로 만든 기념품은 너무나 현혹적이어서 주머니 사정 얄팍한 여행객들을 사라고 부추긴다. 그는 생전에 자신의 그림에 대해 한번도 설명한 적이 없고, 인터뷰도 하지 않았으며, 자서전도 없으며 그 흔한 자화상도 그리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드러난 자료에 따르면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Baumgarten)에서 태어났다. 체코 보헤미아에서 이민 온 그의 아버지는 이름 없는 가난한 금 세공사이며 판화가였다. 그의 어머니는 오페라 가수가 꿈이었지만 여섯명이나 되는 자식들로 인해 꿈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어릴 적부터 미술을 좋았지만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미술을 제대로 배울 수 없었다. 다행히 주변 사람들의 추천과 도움으로 14세(1876년) 때, 빈 응용미술학교에서 회화와 수공예적인 장식 교육을 받았다. 1883년, 졸업 후에는 그의 동생 에른스트(Ernst)와 동료 학생인 프란츠 마치(Franz Matsch)와 함께 공방을 차려 공공건물에 벽화를 그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 그의 인생에 전환기를 맞게 되는데 바로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1886~1888)이었다. ‘구 부르크 극장의 관객석’에 등장하는 초상화는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프란츠 요세프 국왕에게 특별 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게 됐다. 그때부터 빈의 유명인사가 됐고 오스트리아 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왕궁의 벽, 체코슬로바키아의 온천 천장화까지 주문을 의뢰받게 된다. 그러다 1892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적인 공황에 빠졌다. 1895년, 그가 다시 붓을 들기 시작했을 때는 그의 화풍도 달라져 오히려 자기만의 색깔을 넣은 작품들을 만들 수 있었다.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도, 타협하는 것도 원치 않던 그의 작품 세계는 확실해진다. 특히 금을 사용한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그가 금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은 아버지가 도움이 됐을 것으로 추측한다. 그는 ‘키스’(1907~1908),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1907), ‘다나에’(1907~1908), ‘아담과 이브’(1917~1918) 등 황금의 대작을 만들어낸다. 1918년(56세) 1월11일, 클림트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었고 그 해 2월6일 일련의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숨을 거뒀다. 그는 사후 50년 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언제부턴가 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화가로 손꼽히게 됐다. ‘키스’의 주인공은 누구? BBC가 다큐멘터리는 클림트를 ‘호색한’으로 소개하고 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엄마와 함께 살았다. 그럼에도 그에게는 숨겨 놓은 자녀들이 있었고, 그가 죽은 후에도 열네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에 나섰다. 그중 네명은 친자로 확인됐다. 클림트는 수수께끼 같은 화가다. 그의 그림 ‘키스’의 주인공은 현재까지도 누구냐에 대해서 의견만 분분하다. 그 첫번째 추정자는 에밀리 플뢰게(Emilie Floege, 1874~1952)다. 클림트보다 열두살 어린 그녀는 클림트의 남동생 부인의 여동생으로 즉 사돈이다. 글쓰기를 그리도 싫어했던 그가 그녀에게는 약 400통의 편지를 보냈단다. 거기에 클림트가 뇌졸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녀부터 찾았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줬다.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고 재산을 정리해 클림트의 자식들을 낳은 여인들에게 골고루 나눠 주기도 했다.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두번째 후보는 클림트의 아이까지 낳았던 짐머만(Zimmermann)이 있다. 유대인이었으며 가구공의 딸이었던 그녀는 클림트를 찾아와 모델이 됐고 두명(혹은 세명)의 아이를 낳았다. 클림트가 자기 아들의 그림을 그린 것을 보면 자식을 좋아했던 것 같으나 자유를 원해서였든, 마마보이였든, 변화를 싫어했든, 클림트는 결혼은 하지 않았다. 짐머만은 두번째 아이가 죽고 나서 사라져 버렸고 행방은 알 수 없다. 세번째는 클림트 그림에서 빠지지 않고 나오는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다. 유대인인 그녀는 돈 많은 남편이 있었고 그 남편이 그녀의 초상화를 원했다고 한다. 정신적인 사랑만 한 에밀리 플뢰게와는 달리 그녀와는 깊은 관계를 가졌다고 짐작한다. 클림트가 좋아하는 여성 스타일은 공통점이 있다. 유대인이거나, 날씬하고 빨간 머리를 가진 여자였다. 빈에서 클림트 그림 찾기 빈에서 클림트의 그림을 볼 수 있는 대표적인 곳은 벨베데르(Belvedere) 궁전이다. 호프부르크나 쇤부른 궁전에 비해 크기는 작고, 정원도 아담하다. 이 왕궁은 16세기 오스만투르크 전쟁을 승리로 이끈 오이겐 왕자의 거처였다. 오이겐 공이 사망한 후 합스부르크 왕가는 이곳에 미술품을 수집해 뒀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상 궁전에는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들이 걸려 있으며 클림트의 명작 ‘키스’ ‘유디트’ 그리고 인상파 화가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로 빛도 그림자도 없는 아름다운 전원을 그린 초기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또 제체시온(Secession, 1898년)의 지하엔 클림트의 프레스코화인 ‘베토벤 프리즈(Beethovenfries)’가 있다. 건물은 금색 장식 때문에 눈에 확 띈다.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설계했는데 클림트의 조언에 따라 금빛 찬란한 둥그런 월계수를 올렸다. 그래서 ‘절인 양배추 바구니’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외에도 빈 미술사박물관에서는 천장화나 에밀리 플뢰게의 초상화, ‘구 왕궁극장의 관객석’(1888년) 등을 만날 수 있다.  /이신화 
309    "녀성의 화가" - 클림트 댓글:  조회:3138  추천:0  2017-01-29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 클림트가 사랑한 여인들의 이야기 몽환적이면서도 관능적인, 그러면서도 처연한 느낌의 화풍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 에로스가 뚝뚝 떨어지는 클림트의 그림은 보는 이를 아찔하고 몽롱하게 만듭니다. 섬세한 기교와 화려한 장식과 상징으로 가득 찬 그의 작품은 탐미주의와 쾌락예찬에 빠진 빈의 상류층 사회의 종말론적인 분위기를 에로틱하게 보여줍니다. 클림트의 에로스.. 그 바탕에는 그의 영감이었고, 사랑이었으며, 전부였던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있을까요?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어요.  생전의 클림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끔찍이 아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의미였을 뿐입니다. 그는 동료 화가인 에밀 쉰들러의 딸 ‘알마 쉰들러’(훗날 구스타프 말러, 발터 그로피우스의 아내, 오스카 코코슈카의 연인이었던 알마 말러)부터 에밀리 플뢰게에 이르기까지 수 많은 여인을 품었고, 그 결과 14명이나 되는 사생아들을 세상에 남겼습니다.    자신의 모델이 된 여성과는 꼭 잠자리를 했다는 풍설이 있을 만큼 그를 둘러싼 여성 편력에 대한 이야기들은 풍성합니다. 하지만 클림트는 여성들에 대해 매우 뚜렷한 이분법적 태도를 취했습니다. 그에게 여성은 성녀(聖女) 아니면 요부(妖婦)였죠. 직업모델들은 클림트의 요구에 따라 매우 관능적이고 때로 외설적이기까지 한 포즈를 취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클림트가 이들 모델들과 주고받은 것은 철저히 육체적인 사랑에 국한된 것이었습니다.  클림트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을 느끼고 이를 실천한 대상은 지체 높은 사교계 여성들이었습니다. 그는 그들에게서 구원의 여인상을 보았죠. 클림트는 이들과 육체적인 관계를 갖지 않았습니다. 오로지 ‘플라토닉 러브’만을 추구했습니다. 하지만 플라토닉 러브와 에로틱 러브를 넘나들었던 여인이 있었으니 세계에서 세 번째로 비싼 그림 속 주인공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입니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그와 정신적, 육체적 사랑을 나눴습니다.    아델레 블로흐 바우어  Adele Bloch-Bauer 1882-1925 그녀는 황금빛 배경 속에 황금빛 의상을 입고 황금빛 의자에 앉아 있습니다.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시선, 의상에 박혀 있는 눈들, 존재의 비밀을 훔쳐보느라 부릅뜬 눈.. 그림 속 아델레의 뺨이 붉게 처리되어 있음에도 생동감 넘치는 젊음을 상실한 채 금속 틀 속에 박혀 있는 인형이나 조각상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아델레 바우어는 1881년 매우 부유한 오스크리아의 유대인 금융업자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이른 나이에 자신보다 열 여덟 살이나 많은, 역시 유대계 부호인 페르디난트 블로흐와 결혼했죠. 명문가의 여인으로 아델레는 무척 교양 있고 지적인 여인이었습니다. 그녀는 살롱을 열어 문학인들, 예술인들, 정치가들과 교류를 했습니다. 그녀는 당시 빈의 스타화가로 떠오른 클림트와 컬렉터와 화가로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클림트와 아델레 사이에서 특별한 관계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클림트가 그녀의 초상을 주문 받은 1899년부터 입니다. 이때 아델레의 나이가 열 여덟, 클림트의 나이는 서른 일곱이었습니다.    당시 아델레는 나이는 어렸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림트의 작품 속 그녀는 상당히 매혹적이고 뇌쇄적입니다. 그녀는 상류층 출신의 여성이면서도 클림트를 위해 매우 관능적인 그림의 모델이 되어주었고, 또 그와 정신적인 사랑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사랑도 나누었습니다. 클림트는 그녀를 모델로 그 유명한 연작을 그렸으며 유명한 작품 의 주인공도 그녀라는 설이 있습니다. 특히 은 7년 이상이나 걸려 완성된 작품으로 제작의 어려움 때문이라기보다 서로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두 사람의 필요에 따른 것 아니었냐는 분석이 지배적입니다.    알마 말러 Alma Mahler 1879 - 1964   20세기 초 많은 예술가와 염문을 뿌렸던 알마 말러는 세기 말 비엔나의 가장 아름다운 꽃으로 불리며 많은 예술가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 일으킨 금발 미녀입니다. 그녀는 타고난 재능을 소유한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였지만 동시에 남성들의 꿈과 악몽을 동시에 구현하는 여인이었습니다. 알마는 20세기 최고의 교향곡을 작곡한 구스타프 말러를 시작으로 미술과 산업을 연결한 미술 운동 바우하우스의 창시자 그로피우스, 문학가 베르펠과 정식으로 결혼했고, 클림트를 비롯한 작곡가 쳄린스키, 표현주의 화가 코코슈가 등 아홉 명의 예술가 및 거물급 문화 인사와는 연인으로 지냈습니다. 특히 그녀가 55세에 만난 연인인 신학자 호렌 슈타이너는 알마 때문에 추기경 지위를 버리고 사랑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그녀는 지금도 많은 예술가의 작품 속에서 우리를 유혹하지만 그 중 클림트의 는 가장 유명합니다. 알마를 모델로 한 이 작품은 그리스 신화에서 주제를 따온 것입니다. 이 그림은 클림트의 특징인 섹슈얼리티가 가장 잘 나타나 있는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붉은 빛깔의 머리카락, 지그시 감은 눈, 벌어진 입술, 무엇인가를 감아 쥔 손, 발그레한 볼, 그리고 터질 듯한 허벅지와 가는 종아리, 다나에가 태아처럼 웅크린 채 꿈을 꾸는 듯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습니다. 황금 소나기로 변한 제우스가 잠든 다나에의 허벅지 사이로 쏟아져 들어오고 있습니다.  클림트가 알마를 처음 본 것은 그녀가 19세 때였습니다. 알마는 동료화가의 딸이었죠. 처음 보자마자 그녀의 미모에 반한 클림트는 알마를 모델로 많은 작품을 제작합니다. 클림트는 알마를 만난 후 우아하면서도 에로틱한 표정의 관능미 넘치는 독창적인 스타일을 완성했습니다. 이 점은 클림트가 세계 미술사의 독보적 존재로 발돋움하는 그만의 미술적 특징입니다. 알마가 처음으로 키스한 남자가 클림트였다고 하는데, 알마의 일기를 훔쳐 읽은 어머니에 의해 클림트는 쫓겨나고 말았다고 하네요.   마리아 짐머만   Maria Zimmermann   정신적 사랑이 에밀리 플뢰게였다면, 어두운 밤의 육체적 사랑은 마리아 짐머만의 것이었습니다. 노동자 출신으로 자신의 아이를 둘이나 낳았지만 결코 결혼할 수 없었던 육체적인 사랑.. ‘미치’라는 애칭으로도 더 잘 알려진 그녀는 16살 때 모델과 작가로서 클림트와의 운명적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둘은 곧 연인관계로 발전해 구스타프와 오트 두 아들까지 두게 되었죠. 클림트가 자신의 자식으로 유일하게 인정한 아이가 바로 미치 짐머만이 낳은 이 두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둘째 아들 오트의 죽음으로 둘은 결별하지만, 짐머만에 대한 클림트의 애정은 평생 지속되었습니다. 그녀는 한 여인에게 정착하지 못했던 클림트의 기질을 눈감아 준 여인이죠.  임신한 여인이 옆으로 서서 고개를 돌려 정면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만삭의 여성은 해골과 악마, 적대적인 남성들 사이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있습니다. 하지만 그녀의 눈동자만은 그 누구보다 강렬합니다. 임신한 여성은 희망을, 여성 머리 뒤로 보이는 해골은 죽음을 상징합니다. 이 작품은 인류의 희망, 임신이라는 위대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클림트의 에로틱한 감정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클림트는 미술사에서도 보기 드문 소재인 임산부를 대담하고도 노골적으로 묘사했죠. 그녀는 부끄러움 없이 붉은 머리카락과 음모를 당당히 드러내고 있는데요, 이것은 임신이라는 것은 섹스에 의해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성적 암시라고 합니다.    에밀리 플뢰게 Emilie Floge 1874-1952 살바도르 달리에게 갈라 달리, 존 레논에게 오노 요코가 있었다면 클림트에게는 에밀레 플뢰게가 있었습니다. 에밀리 플뢰게, 그녀는 클림트의 정신적 사랑의 주인공이었습니다. 에밀레 플뢰게와 클림트의 관계는 사돈 관계로 출발했습니다.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와 에밀레의 언니 헬레네가 결혼하면서 클림트와 에밀레는 자연스럽게 친분을 쌓았죠. 클림트보다 17살이 어렸던 에멜리는 1891년 그의 첫 모델이 됩니다.  클림트는 17살 꽃다운 나이의 에밀리의 화사하면서도 기품 있는 외모에 반해 그를 모델로 한 작품을 4점이나 남겼습니다. 둘의 관계가 급속도로 가까워진 계기는 결혼한 지 1년도 안 돼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뇌일혈로 사망한 후부터입니다. 동생의 이른 죽음 후 클림트가 조카딸인 헬레네의 후견인이 되었지요. 둘은 서로 깊이 사랑했지만 정신적인 관계 이상의 선을 결코 넘지 않았던 기묘한 동반 관계였습니다. 그가 에밀리에게 보낸 편지와 엽서는 발견된 것만 399통에 이릅니다. 하루에 8통을 보낸 날도 있었죠.  1918년 치명적인 심장 발작으로 죽음을 눈앞에 둔 클림트가 마지막으로 애타게 외친 여인의 이름은 바로 에밀리 플뢰게였습니다. 그녀 역시 클림트 생전은 물론 사후에도 다른 남자와는 사랑을 나누지 않고 영원한 클림트의 여인이 됩니다. 또한 그의 사후 14명의 사생아에게 재산을 분배한 이 역시 그녀입니다.    왼손을 허리춤에 받치고 어깨를 당당하게 쫙 편 자세로 우리를 내려보고 있는 에밀리.  그녀는 상류층의 오만함을 결코 숨기지 않습니다. 약간 도톰한 볼에 얇은 입술, 눈빛에는 총기가 가득하죠. 가늘고 섬세하지만 많은 것을 보여주는 그녀의 손가락, 그녀는 감각적이면서 지적이었습니다. 클림트는 에밀리에게 온통 푸른빛을 입혀놓았습니다. 화려하고 괴기스럽기까지 한 장식들로 과장하는 관능도 이 그림에서만은 예외였습니다.  아주 차분하고 감정을 절제하는 갈색 배경은 그녀의 기품 있고 도도한 푸른빛에 묻혀있습니다. 추상적이고 장식적으로 그려진 의상이 당시 유행하던 스타일과는 너무나 동 떨어져 있어 빈에서 유명한 의상실을 하고 있던 에밀리의 마음에 들지 않아 클림트에게 다시 그려 달라고 요청하지만, 클림트는 이 작품을 끝으로 에밀리에 플뢰게의 초상화는 더 이상 그리지 않았습니다.  /글 . 이정아           구스타프 
308    스승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제자 화가 에곤 실레 댓글:  조회:4371  추천:0  2017-01-29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이 전시된 벨베데레 궁전. 사람들이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겠지만 나에게 영감을 준 것은 영화 ‘우먼 인 골드’였다. 오스트리아 유대계 금융업자의 딸이던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의 후원자이자 뮤즈였다. 황금빛 연못에서 아델레가 수련처럼 피어오르는 모습을 표현한 ‘아델레 블로흐-바우어의 초상’의 모델이다. 클림트는 그를 모델로 수많은 그림을 그렸다. 1919년 클림트가 죽고 난 뒤 아델레는 자신의 집에 클림트를 기리는 ‘성소’를 마련했을 정도로 두 사람의 관계는 각별했다. 두 사람이 연인 관계였다고 추측하는 평론가들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그의 그림들은 운명의 소용돌이로 빠져들어 간다. 아델레가 죽고 난 뒤 그의 남편 페르디난트 블로흐는 나치에게 소장한 그림을 모두 빼앗긴다. 50여년이 흐른 뒤 아델레의 조카 마리아 알트만은 클림트의 그림 다섯 점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와 외롭고 긴 싸움을 시작한다. 나치의 박해를 피해 가족을 뒤로한 채 미국으로 탈출한 자신의 어린 시절 추억을 되찾기 위해서였다. 8년이라는 긴 싸움 끝에 그는 숙모의 그림을 되찾는다. 그림은 현재 미국 뉴욕 노이에갤러리에 전시돼 있다.  실화를 바탕으로 제작된 영화는 역사의 ‘희생물’이 된 클림트의 그림들을 통해 전쟁으로 망가진 한 가족의 삶을 조명한다. 마리아에게 오스트리아는 아름다운 예술과 가족의 추억, 전쟁의 상처가 공존하는 곳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은 클림트와 에곤 실레(1890~1918)의 도시였다. 클림트가 자주 가던 카페부터 그의 연애사,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던 클림트와 실레의 대화와 발자취까지 속속들이 들여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클림트의 ‘키스’를 만날 수 있는 벨베데레 궁전 빈의 중심부에 자리한 슈테판 대성당의 내부. 베토벤 빈 호텔이 있는 카를스플라츠(Karlsplatz)에서 트램을 타고 벨베데레 궁전으로 향했다. 트램에서 내려 3분 정도 걸어가자 옥색 지붕의 바로크·로코코 양식 건물과 프랑스풍 정원이 인상적인 벨베데레 궁전이 모습을 드러냈다. ‘좋은(bel) 전망(vedere)의 옥상 테라스’라는 이탈리아 건축 용어에서 유래했다. 1683년 오스트리아를 침략한 오스만튀르크군을 무찌른 전쟁 영웅 외젠 왕자의 여름 별장으로 쓰기 위해 지어진 궁전이다. 상궁과 하궁으로 나뉘어 있는데, 클림트의 그림이 목적이라면 상궁만 돌아봐도 충분하다. 세계에서 그의 그림을 가장 많이 소장한 곳이다. 그와 인연이 깊은 실레, 오스카어 코코슈카 등의 그림을 전시하고 있다. 구스타프 클림트의 대표작품인 ‘키스’. 이곳에서 클림트의 ‘키스’가 황금빛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꽃이 흩뿌려진 작은 초원 위에 서 있는 두 연인은 자신들을 둘러싼 금빛 아우라 안에서 서로에게 황홀하게 취해 있다. 클림트가 금박과 금색 물감을 활용해 그림을 그린 1907~1908년 ‘황금 시기(golden period)’를 대표하는 작품이다. 관람객이 가장 많이 몰려 있는 곳을 찾으면 된다. 사진 촬영은 할 수 없다. 대신 기념 촬영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다. 구약성서 속 유디트를 팜파탈로 표현한 ‘유디트’도 벨베데레 궁전에서 만날 수 있다. 클림트 이전의 예술가는 대부분 유디트가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어버리는 행위에 초점을 맞춰 그림을 그렸다. 반면 클림트는 유디트를 승리감에 도취해 황홀경에 빠져 있는 여인으로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가슴이 훤히 드러나는 옷을 입은 채로 유혹하는 표정을 짓고 있는 클림트의 유디트는 매혹적인 힘을 과시하며 감상자들을 에로틱한 상상으로 이끌었다. 이외에도 ‘요하나 슈타우데의 초상’ ‘아담과 이브’ ‘아테제 호수의 캄머 성’ 등 클림트의 대표작을 만날 수 있다.  클림트의 작품 ‘아담과 이브’. 실레의 그림으로는 ‘죽음과 소녀’가 있다. 애절하게 매달린 소녀와 언제든 그녀를 밀어낼 듯한 남자의 손. 전문가들은 1911년부터 1915년까지 그의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질을 향한 ‘관계의 종말’을 그린 작품이라고 분석한다. 아인슈패너와 초코 케이크가 유명한 ‘카페 자허’ 미술관을 둘러본 뒤 비엔나커피를 마시기 위해 오페라 하우스 인근 ‘카페 자허’를 찾았다. 빈의 예술가와 지식인들은 단골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토론을 벌였고, 영감을 얻었다. 빈에서 가장 유명한 카페는 총 세 곳. 초콜릿 케이크인 자허 토르테와 아인슈패너(비엔나커피)로 유명한 ‘카페 자허’ ‘카페 데멜’ ‘카페 첸트랄’이다. 1968년 문을 연 카페 첸트랄은 젊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고 한다. ‘키스’의 주인공으로 추정되는 클림트의 연인 에밀리와 그가 이곳의 단골이었다. 이미 세계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선보이고 있는 한국의 카페들 덕분인지 아인슈패너는 그리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살구잼으로 상큼하고 단맛을 낸 자허 토르테는 훌륭했다. 오페라하우스에서 시청으로 향하는 길에 주요 관광지가 모두 몰려 있다.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미술사 박물관, 자연사 박물관, 레오폴트 박물관, 국회의사당, 궁정극장, 시청, 빈대학을 줄줄이 볼 수 있다. 빈대학은 클림트의 인생에서 가장 많은 비난을 받게 한 곳이다. 대학 측의 주문 의뢰를 받은 클림트는 철학과 의학, 법학을 자신의 철학대로 해석해 관능적으로 표현한 작품을 완성해 대중의 비난을 받았다. 안타깝게도 그림은 화재로 소실돼 볼 수 없다. 대신 맞은편에 있는 궁정극장에서는 클림트의 천장화를 만날 수 있다. 다른 도시에 비해 길이 굉장히 넓고 도시 구획이 잘 돼 있어 도보 여행이 즐거웠다. 기회가 된다면 자전거를 타고 녹음이 우거진 빈의 속살을 속속들이 들여다볼 것을 추천한다.  또 다른 에곤 실레의 자화상. 빈은 ‘실레의 도시’였다. 거리에서 클림트의 그림보다 실레의 대표작 ‘자화상’을 더 자주 마주쳤기 때문이다. 실레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레오폴트 미술관을 빠뜨려서는 안 된다. 세계에서 실레의 그림을 가장 많이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의사이던 루돌프 레오폴트와 엘리자베스 레오폴트 부부가 직접 수집한 작품 5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실레의 작품을 비롯해 클림트, 코코슈카의 작품을 위주로 전시한다. 에곤 실레의 자화상. 마리아테레지아광장 뒤쪽으로 5분 정도 걸어가자 박물관 지구가 나왔다. 18세기부터 왕가의 마구간으로 사용된 이곳은 1921년 전시장으로 용도가 바뀌어 오스트리아 현대미술의 ‘메카’가 됐다. 모던한 느낌의 하얀색 박물관 앞에는 청록색 벤치 모형의 엔지스(Enzis) 의자가 설치돼 있다. 빈의 상징물 중 하나라고 한다. 오스트리아 시민은 이곳에 누워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저마다의 방식으로 광합성을 즐기고 있었다. 이곳에 온 목적도 잠시 잊은 채 의자에 누워 오스트리아의 햇살을 누렸다. 실레의 삶과 마주하고 싶다면…레오폴트 미술관 빈에 있는 레오폴트 미술관. “저에게 재능이 있나요?”  “응, 오히려 너무 많아서 문제지.”  미술관에 들어서자 벽에는 실레가 그의 스승이자 멘토이던 클림트를 처음 찾아갔을 때 나눈 대화가 적혀 있다. 실레는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만들어간 뒤에도 지속적으로 클림트와 교류했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그림을 교환하기도 했는데, 당시 클림트는 말했다. “왜 나와 그림을 교환하려 하지? 네 그림은 이미 내 것을 훨씬 더 뛰어넘는데 말이야.” 이미 거장의 반열에 올라 있던 클림트가 실레의 재능을 얼마나 인정하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레는 인간의 육체를 통해 인간의 영혼을 표현했다. 초기에는 클림트와 ‘빈 분리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점차 죽음에 대한 공포와 내밀한 관능적 욕망, 인간의 실존을 둘러싼 고통스러운 투쟁에 관심을 기울였다. 불안에 싸인 인간의 육체를 왜곡되고 뒤틀린 형태로 거칠게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그는 성(性)과 죽음을 표현해 구원에 이르고자 했다. 그의 묘사는 적나라할 정도로 솔직하고 생생하다. 함께한 일행은 “클림트의 그림에선 따뜻함이 느껴지는데, 실레의 그림은 지나치게 적나라하고 고독한 느낌이 들어 부담스럽다”고 했다. 당시에도 여인과 소녀들을 모델로 한 누드는 사회적 논란이 됐다. 1912년 노이렝바흐에서 미성년자 유인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24일 동안 감옥 생활을 했다. 당시 그는 옥중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내게 예술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나는 생을 사랑한다. 나는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심층으로 가라앉기를 원한다.” 클림트-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능적 욕망  실레의 그림을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4년간 그의 연인이자 모델이었던 발리 노이질이다. 미술관에는 실레의 대표작 ‘자화상’ 옆에 발리 노이질의 초상화인 ‘발리의 초상’이 나란히 걸려 있었다. 발리는 실레에게 헌신적이었지만 실레는 4년여의 사랑에 마침표를 찍은 ‘죽음과 소녀’를 그린 뒤 부르주아 철도 공무원의 딸 에디스 함스와 결혼한다.  실레는 1918년 클림트의 사망 후 열린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둔다. 클림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된 순간이다. 이 시기에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그린 그림이 벨베데레 궁전에 있는 ‘가족’이다. 하지만 그림 속 아이는 영영 만나지 못했다. 그해 10월 그의 아내는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다. 그 자신도 독감에 감염돼 생을 마감했다. 아내와 배 속의 아기를 잃은 지 사흘 만이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에곤 실레가 그린 ‘클림트’ 레오폴트 미술관에는 클림트의 그림도 있다. 그중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죽음과 삶’이다. 죽음에 대한 공포와 관능적 욕망은 클림트의 작품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요소들이다. 작품에는 공포와 욕망이 공존한다. 죽음을 상징하는 사신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형형색색으로 표현된 꽃밭에서 꿈을 꾸며 잠들어 있는 이들이 보인다. 새 생명을 상징하는 갓난아기부터 젊은 여성, 노인까지 다양하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온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듯이. 클림트와 실레의 인생을 따라가다 보니 통유리창을 통해 건너편 현대미술관이 한눈에 들어왔다. 빈의 풍경을 액자에 넣어 또 하나의 작품으로 만든 순간이었다. /빈=고재연 기자 ========================+++   Judith II, 1909, Oil on canvas, 178 x 46 cm, Galleria d'Arte Moderne, Venice     유디트는 유명한 이스라엘의 애국 여걸이고, 서양 미술사에서 오랫동안 비중있는 소재로 다루었다. 하지만 이 사람이 클림트의 그림에서 마약에 취한듯 몽롱한 요부로 돌변해 액자에 유디트1이란 글자가 있음에도 세례 요한의 목을 벤 살로메로 잘못 알려져 왔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때로 풍성함으로, 때로 앙상함으로 드러나지만 그것이 어떤 양감을 지녔던 클림트의 그림이 묘사하는 여인들은 아름답다. 그도 그럴 것이 클림트만큼 여성을 사랑한 화가가 또 어디 있었을까? 오죽하면 그의 별명이 '빈의 카사노바'였겠는가.   Water Serpents II, 1907  Oil on canvas, 80 x 145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Danae, 1907-08  Oil on canvas, 77 x 83 cm, Private collection, Graz   The Black Feather Hat, 1910,  oil on cavnas, Private Collection, Graz   Death and Life, 1916  Oil on canvas, 178 x 198 cm, Private collection, Vienna   The Three Ages of Woman, 1905 Oil on canvas, 178 x 198 cm, Galleria Nazionale d'Arte Moderna, Rome     Hope I, 1903, Oil on canvas, 189 x 67 cm, National Gallery of Canada, Ottawa -    그의 작품 중 임신한 여인을 그린 세 개의 작품이 있는데 그중 의 작품에 등장하는 임신한 여성 모델이 바로 '미치 짐머만'이다. 제목은 희망이지만 마치 해골과 적의를 띤 남성들에 둘러싸인 채 창백하게 질려 있는 듯 하다.    Hope, II, 1907-08 Oil gold, and platinum on canvas 43 1/2 x 43 1/2"   삶과 현실의 기로에선 그의 시각을 엿볼 수 있는 그림들   Portrait of Mada Primavesi, c. 1912, Oil on canvas, 150 x 101.5 cm, Metropolitan Museum of Art, New York   Helene Klimt, 1898 oil on canvas , 60 x 40cm    헬레네 루이즈 클림트는 요절한 동생 에른스트의 딸이다. 평온하고 소박한 느낌의 이 그림은 구성이나 채색도 매운 단순하여 예닐곱 살먹은 소녀를 다룬 그림답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헬레네는 벌써 여성적인 특성을 갖추기 시작한 느낌이다. 클림트는 소녀의 옅은색 의상은 마치 스케치처럼 표현하면서도, 이와는 대조적으로 약간 앞으로 기울인 소녀의 머리와 짙은색 머리카락은 매우 섬세하게 표현하여 그림 전체에 묘한 긴장감이 감도는 특이한 매력을 부여한다.   Portrait of Sonja Knips ,1898 Oil on canvas, 57 x 57 inches (145 x 145 cm), sterreichische Galerie, Vienna, Austria    
307    오스트리아 "황금의 화가" - 그스타프 클림트 댓글:  조회:3422  추천:0  2017-01-29
    출생일 1862년 07월 14일 사망일 1918년 02월 06일 국적 오스트리아 대표작 〈유디트 1〉, 〈사랑〉, 〈키스〉, 〈처녀〉, 〈죽음과 삶〉 등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아카데미즘 운동을 펼쳤다.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작풍으로 여성의 관능미 표현에 뛰어났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에른스트 클림트와 안네 핀스터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온 이민자로, 금속세공사로 일하며 판화가로 활동했으나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로 1873년 경제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생활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클림트는 14세 때 빈의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에는 동생 에른스트가 입학하면서 형제는 함께 공부하고 일하게 된다. 클림트 형제는 1879년 친구 프란츠 마치와 빈 미술사 박물관의 중앙 홀 장식을 맡았다. 이를 시작으로 세 사람은 슈트라니 궁전, 라이헨베르크 극장 등을 장식하는 우의화나 천장화 등을 그렸으며, 1883년에는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공방을 열고 카를스바트 극장, 부르크 극장 등의 천장화 등을 그렸다. 그런 한편 클림트는 〈우화〉, 〈목가〉 같은 고전적인 작품을 그리며 화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 1886년경부터 클림트는 두 사람과 독립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해 작품에 상징적인 장식 요소를 도입한다. 그는 누구보다 여성의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화가로 유명하다. 경멸을 담은 듯한, 무심한 듯한 표정을 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 모티프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관람객들을 매혹시킨다. 특히 그는 사진처럼 정밀하게 인물을 묘사하는 데도 뛰어났다. 이런 숙련된 기교에 바로크적인 우아함, 애수에 젖은 듯한 표정과 나른한 분위기를 더해 그는 빈 사교계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고, 여성의 초상화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클림트의 이런 재능은 동생 에른스트, 프란츠 마치와 함께 작업한 엘리자베트 황후의 헤르메스 빌라, 빈 미술사 박물관 제단실 천장화 등에서도 뚜렷이 구별된다. 클림트는 인물들의 초상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린 부르크 극장 장식화로 대중들을 경탄시켰고, 188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 공로를 인정해 예술적 공헌에 대한 ‘황금 공로십자훈장’을 내렸다. 1895년에는 헝가리 토티스의 에스테르하지 궁정 극장 홀 장식으로 안트베르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장식화가로서 큰 명망을 떨쳤다. 1892년, 클림트는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겪고 실의에 빠지면서 2, 3년간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이 시기에 인상파와 상징주의, 정신분석학 등에 관심을 두었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여 최초의 걸작 〈사랑〉을 탄생시켰다. 사랑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연인들 뒤로 몇 가지 형태의 얼굴들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질투’의 다양한 형태를 나타낸 것으로, 행복 뒤에 숨겨진 불안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를 몽환적으로 중첩시키고, 죽음과 염세주의, 관능과 에로티시즘으로 대표되는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사랑〉 빈 미술사 박물관 클림트는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성녀와 유녀를 구별하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총체적 예술을 추구했다. 이를 중심으로 1897년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보수주의로부터 탈피한다는 기치 아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빈 분리파(Wien Secession)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빈 분리파에는 에곤 실레, 오토 바그너, 칼 몰 등 회화, 건축, 디자인을 가리지 않고 당시 오스트리아 예술계를 선도하던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며, 클림트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894년, 클림트는 마치와 함께 빈 대학 대강당 천장화 작업을 시작했다. 1907년까지 계속된 이 작업에서 〈철학〉, 〈법학〉, 〈의학〉이 완성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이유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899년, 첫 번째 작품인 〈철학〉은 빈 대학 교수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으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작품이 빈의 문화적 위상을 실추시켰다면서 빈 대학에서 철거할 것을 명했다. 두 번째 작품 〈의학〉과 세 번째 작품 〈법학〉은 ‘외설적이며 과도한 성 도착적 표현’이 난무한다는 이유로 제국회의 심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클림트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금붕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이에 응수했다. 애초에 〈나의 평론가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었던 이 그림은 나체의 세 여인이 금붕어처럼 물속에서 유영하듯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공격을 에로티시즘으로 응수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견해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나친 외설성으로 대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05년 클림트는 작품 대금을 대학에 반환하고 세 점의 그림을 철수시켰다. 이 그림은 그의 후원자들이 구입했다. 클림트는 “검열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면서 이후 국가의 대규모 주문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주문에만 응하기로 한다. 〈금붕어〉 졸로투른 미술관 1901년,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 클림트의 ‘황금 시기’ 첫 작품인 〈유디트 1〉이 탄생했다. 가슴과 배꼽을 드러낸 채 황금색으로 장식된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배경과 문양들에 싸여 있는 유디트는 관능적이기 그지없다. 적장 홀로페네스를 유혹하여 조국을 구원한다는 전통적인 묘사와는 완전히 다른 표현 방식으로, 구국에 대한 결사 혹은 비장미나 숭고함보다는 유디트의 관능과 고혹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죽음마저 관능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왜 클림트가 한때 ‘퇴폐적 에로티시즘’으로 비판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본연의 의미가 아니라 관능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의 유디트는 클림트 생전에 요부의 대명사인 ‘살로메’로 여겨지기도 했다. 〈유디트 1〉 빈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1905년,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고 탈퇴했고, 이후 모자이크 기법과 장식적인 패턴, 금박을 사용한 화려한 색채 표현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유디트〉에서 시작하여 〈베토벤 프리즈〉, 〈희망 1〉, 〈여성의 세 시기〉 등을 거쳐 클림트의 황금 스타일은 〈다나에〉와 〈키스〉에서 절정에 달한다. 〈키스〉는 포옹을 하는 연인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속의 두 사람은 클림트 자신과 그의 운명의 연인인 에밀리 플뢰게라고 한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황금색에 둘러싸여 두 사람의 구별이 사라지고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데, 여인의 수동적인 자세와 입술이 아닌 볼에 입 맞추는(입 맞추려 다가간다고 보기도 한다) 남자, 수동적이지만 황홀경에 빠진 듯한 여인의 표정 등으로 클림트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키스라는 성적인 암시를 담고 있음에도 화면 전반에 흐르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묘사로 클림트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클림트는 장식 미술가에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퇴폐적 혹은 선정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라는 비난에서도 벗어났다. 〈키스〉 빈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클림트는 1906년 〈프리차 리들러의 초성〉과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부터 은박을 사용했으며, 점차 황금색 배경을 포기한다. 금색과 비잔틴풍의 화려한 문양들은 섬세한 심리 표현을 저해하고 양식화된 장식화로 보인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장식적인 문양 사용을 배제하고, 넓은 단색조의 화면 구성을 시도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은 〈깃털 모자를 쓴 여인〉 등을 제작하면서 역동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치장된 작풍에서 탈피하려고도 했다. 곧 다시 자신의 작풍으로 돌아왔으나 이런 시도들을 통해 그는 보다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색채와 기하학적 문양을 사용해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처녀〉, 〈죽음과 삶〉 등 말년의 걸작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편 클림트는 기분 전환을 위해 명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풍경화도 종종 그렸다. 휴일이면 공원이나 마을에 나와 농가, 꽃, 나무, 들판 등을 그렸는데, 그는 이에 대해 방학 숙제를 하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표현했다. 〈죽음과 삶〉 빈 레오폴드 미술관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출혈을 일으킨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2월 6일에 합병증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요한나 슈타우데의 초상〉, 〈신부〉, 〈아담과 이브〉 등 수많은 작품이 미완으로 남았는데, 이는 평소 동시에 여러 개의 캔버스를 세워 두고 작업을 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평생 자신의 그림에 대한 어떤 코멘트나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사생활을 철저히 감추기로 유명하다.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는 자화상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내성적인 화가는 오로지 자신을 매료한 여인들과 그림 그리는 일에만 탐닉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며, 간단한 편지 한 장을 쓰는데도 멀미가 날 듯한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자화상이나 자서전은 불가능하다. 예술가로서 클림트를 알고 싶다면 내 작품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라.” ========================= 에로티시즘의 대명사 클림트 서양 미술에서 에로티시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클림트일 것이다. 물론 에로티시즘의 도발적인 성격으로 에곤 실레(Egon Schiele)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두 사람은 에로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둘 중 선구자는 클림트이다. 그는 실레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후원자의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실레가 클림트의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한 클림트가 실레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그림에 살려 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현 방식은 사뭇 달랐다. 클림트가 금기의 경계선에 있었다면 실레는 금기의 경계선 저 너머로 치달아 갔다. 실레는 흔히 생각하는 교태의 표현을 넘어서 노골적이고 생생한 포즈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하지만 클림트는 인물의 표정이나 묘한 분위기를 통해 관능을 묘사했다. 그런 점에서 실레가 드러냄의 미학을 추구했다면 클림트는 감춤의 미학을 추구했다. 키스 클림트, 1907년 클림트의 그림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키스〉이다. 그림을 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화려하다는 것이다. 색이나 구성 형식에서 장식적인 느낌이 매우 강해 화려한 디자인 작품처럼 다가온다. 특히 전체적으로 사용된 황금색의 화려함이 눈이 부실 정도이다. 그는 실제로 금에 정통했다. 금 세공업자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금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보통은 배경색이 화려하면 그 자체가 워낙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에 그림 속의 물체나 인간은 묻혀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탁월함은 화려한 색과 무늬를 뚫고 인간의 관능이 살아나게 한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그냥 남녀의 평범한 키스 장면에 불과한데도 금 빛깔과 어우러지면서 묘한 관능미를 발산한다. 그럼 무엇이 이 그림을 관능적으로 만들고 있을까? 그 비밀은 두 남녀의 손과 팔에 있다. 사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고개를 파묻고 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드러나 있는 여인의 표정도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나 뺨의 붉은 홍조가 남성의 키스가 주는 달콤함을 음미하고 있는 느낌을 전해 주기는 하지만 그냥 거기까지이다. 표정 자체에서 그 이상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손과 팔은 다르다. 가만히 두 사람의 손과 팔을 보면 섬세한 표현이 놀라울 정도이다. 먼저 남성의 손을 보자. 한 손은 여성의 머리를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단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뺨을 만지고 있는 손 위에 여성이 왼손을 덧대고 있다. 살며시 얹은 손가락이 남성의 손을 쓸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여성의 나머지 한 손은 남성의 목을 두르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냥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손목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대감으로 비틀려 있다. 어깨는 잔뜩 움츠려 남성에게 밀착시키고 있다. 두 남녀의 팔과 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관능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흔히 클림트를 ‘여성의 화가’ ‘관능의 화가’라 한다. 하지만 그의 관능은 〈키스〉에서 보이듯이, 노골적인 성적 표현에 있다기보다는 절제되고 감추어진 표현을 통해서 살아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인간 신체, 특히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내는 데 탁월했다. 이는 다른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다나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나에(Danae) 클림트, 1907년 〈다나에〉는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이 아들을 가질 수 없으며, 손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듣는다. 두려워진 그는 사랑하는 딸 다나에를 사나운 개들이 지키는 탑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다나에의 매력에 빠진 제우스는 황금 비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 후 다나에는 뒷날 영웅이 되는 아들 페르세우스를 잉태한다. 이 그림은 황금 비로 변한 제우스와 다나에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표현했다. 〈다나에〉는 클림트의 그림 중에 가장 도발적인 포즈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다나에의 몸 위로 쏟아지는 황금 비나 그녀의 휘어진 다리는 남녀의 성관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그림에서 전체적으로 풍기는 강한 관능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밀은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과 얼굴에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황홀경에 빠진 그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또한 뺨의 붉은 홍조와 입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약간 일그러진 듯이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효과를 낸 손이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는 두 그림 모두 인체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게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처리했다. 혹은 장식적인 무늬나 화려한 금빛이 대신했다. 어찌 보면 그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그림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에로티시즘은 미술의 영원한 일급 주제이다. 에로티시즘적인 회화와 조각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여성의 동작이나 표정을 통해 관능미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가장 고전적인 방식은 이상적인 몸의 비율과 곡선을 지닌 여인의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다. 조금 더 진전된 방식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희롱하는 남성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물론 대체로 신화의 옷을 빌려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는 관능을 표출하는 대상으로 남성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아마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출산의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사랑은 이성적 능력을 지닌 남성들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었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관능을 드러내는 적극성의 정도와 방식은 아주 상이하다.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시대가 허용하는 금기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도가 나타난다. 서양에서 관능적 표현이 가장 억압되었던 시기는 당연히 중세였다. 중세 미술에서는 아예 현실의 인간 모습을 그리는 일 자체가 예술적인 대상이 되기 힘들었다. 주로 성경 속 이야기가 예술의 대상이었다. 그나마 그림 속에 여성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마리아 정도였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여성이 주인공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그러니 미술에서 마리아가 의도하지 않은 특혜를 받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조차도 ‘여성’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어려웠다. 예수를 둘러싼 여성들은 여성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그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남성과의 성관계 없이 아이를 임신한 ‘동정녀 마리아’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시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벽화나 캔버스 회화 등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다분히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득 풍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와서야 마리아를 여성으로 묘사하는 시도가 나타난다. 그나마 지극히 한계적인 묘사로 시대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려 한다. 마리아의 모습에서 여성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을 향한 부드러운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에 와서야 인간이 인간으로, 여성이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성(性)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소설로 보카치오(Giovann Boccaccio)의 《데카메론》이 있다. ‘데카메론’은 그리스어로 ‘10일 동안의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흑사병이 돌자 이를 피해 10명의 남녀가 교외의 별장에 머물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 1인당 1편씩, 열흘간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형식을 띠고 있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일화가 나오는데 그 중 아홉째 날의 두 번째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거룩함과 깊은 믿음으로 이름난 수녀원의 이사베타라는 젊은 수녀가 어느 청년과 사랑에 빠져 섹스를 즐긴다. 다른 수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수녀원장에게 알리러 간다. 이때 마침 수녀원장은 신부와 함께 한창 육체적인 재미를 보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황급히 수도복을 주워 입고 심판을 위해 이사베타와 수녀들 앞에 나선다. 그런데 수녀들은 수녀원장의 머리 양쪽으로 남자의 옷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급하게 수도복을 입다가 실수로 함께 섹스를 즐기던 남자 옷을 머리에 쓰고 나왔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 쾌락 추구가 드러난 수녀원장은 인간의 육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니, 남몰래 환희를 즐기는 것을 허용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녀원장과 수녀는 버젓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교적 의무감의 속박도, 남녀 간의 정절이라는 굴레도, 선한 자만이 축복을 받는다는 신앙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편으로는 신의 권위로 서민에겐 금욕을 강요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면서 인간의 욕망에 도취되어 있던 교회나 성직자의 타락과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인간의 육체적 욕망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도덕에 있어서의 기독교적 교의와 청교도적 속박에 대한 근대인적 반항은 보카치오의 소설에서처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망에 대한 긍정의 방향을 취한다. 보카치오가 머리말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나’ 세상사의 고뇌와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위로하고자 씌어졌다고 밝힌 점을 보더라도 육체적 욕망을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통해 인간의 성을 적극적으로 다룬 것이나, 미켈란젤로의 성당 벽화와 조각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예술에서 여성을 여성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다루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미술에서 인체나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일대 개화기를 맞이한다. 물론 초기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 속에 머물러야 했지만, 클림트나 실레에 와서 활짝 꽃을 피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시 에로티시즘을 경계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적어도 주류 미술을 중심으로 한 화단에서 에로티시즘은 경멸의 대상으로 무시되곤 한다. 특히 회화가 추상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에로티시즘과의 분리가 선명해졌다. 상식적으로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인데 실제로 미술에서는 지속적인 퇴조를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따져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현대 문명은 철저하게 이성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다. 과학기술 문명이든 민주주의를 향한 방향이든 철저하게 이성의 안내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약화시키는 일체의 시도는 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치부되고 경계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은 이성을 약화시키는 비정상적인 일탈로 간주되었다. 현대미술은 이성을 향한 행진을 하는 현대 문명의 산물이다. 서양 미술의 역사를 비롯해 표현 외적인 요소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 없이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해졌다. 이제 그림은 감상의 대상의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성(性)은 인간에게 가장 일상적인 영역이고 그만큼 가장 친근한 주제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가장 꾸밈없이 드러나는 영역이다.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을 거부하고 정신의 절대적 우위를 강제했던 서양의 중세는 최종적인 종말을 맞이한 게 아니었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보호색처럼 말이다. 신의 자리를 이제 이성이 대신 차지하고 여전히 인간의 일상과 감성은 시민권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금을 능숙하게 다룬 클림트의 독창적인 금빛 색채 엽서나 노트, 커피 잔에서도 자주 보는 클림트의 ‘키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복제되어 팔려나가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만큼 매혹적이라는 뜻이겠죠?  황금빛 베일에 싸여 남녀가 키스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듭니다. 에로틱하면서 비밀스러운 분위기, 적극적인 남자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 직사각형으로 장식된 남자의 옷과 곡선인 여자 옷, 절벽 같은 낭떠러지 끝에서의 아슬아슬한 키스… 꽃으로 가득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녀는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에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눈을 자극하는 것은 황홀한 순간을 더없이 화려하게 만드는 황금빛 색채입니다. 클림트는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금을 능숙하게 다루었는데, 장식적인 패턴과 더불어 금빛 색채는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됐습니다.  결혼 안했지만 14명이나 친자 확인소송 문득 ‘이렇게 매혹적인 작품을 남긴 클림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클림트는 “나는 특이한 점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생전에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한 적이 없고, 사생활도 철저히 숨겼죠. 자신이나 작품에 대해 말할 때는 “멀미가 난다”고 할 정도로 애를 먹었다고 해요.  에로틱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소송을 낼 정도로 여자관계는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금빛 아우라를 내뿜으며 신비로움과 화려함 속에 파묻힌 남녀를 봅시다. 세상에 오직 둘만 남은 듯 합일의 경지를 보여주는 저 몽환적 영원함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게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죠? 여러분은 언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보았나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우먼동아일보 =============================================  "나에 대해서 알려면 내 그림을 보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5월 15일까지       유디트1, 1901년작   여성을 모티브로 자못 에로틱한 분위기를 묘한 장식과 함께 섹슈얼한 명작을 숱하게 그려냈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에로티시즘, 팜므파탈 등 의 각종 '19금'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의 대작이 한국에 왔다. 화가들의 누드화를 보면 여성의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나신이 구체적임에도 클림트의 누드처럼 묘한 상상을 연상시키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몽환적이며, 에로틱하고, 유혹적이다. 그래서 그의 크로키작업을 에로틱드로잉이라고 했던가. 예컨대 정면에서 다리를 벌린 여성의 포즈나 엉덩이 뒤에서 그려내어지는 과감하고 현란한 스케치는 캔버스에 도발적인 모습으로 환생한다. 몽롱한 눈빛, 반쯤 벌어진 입술, 한쪽 가슴만 가려진 상체, 발그레한 볼…하지만 이상한 상상은 금물. 에로티시즘이라는 이중적 잣대에 이미 클림트가 생존 당시 받았던 비난과 상처로 충분하다. 19세기 후반 구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작품이후 극사실주의 화가의 인체묘사로만 볼 때에는 오늘날 관객의 눈에 비친 그의 여인들은 오히려 고혹적이며 매력적일 뿐이다.       유디트1, 1901년작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여성과 에로티시즘으로 관조하기엔 너무 협소하다. 그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19세기 초 '비엔나 분리파'에 큰 영향을 주는 작가이자 진보적 예술가의 핵심이다. 그들은 국지적으로 진행되던 예술분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주제 하에 총체적인 프로세스를 갖춘 예술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비엔나 분리파'의 핵심인 '토탈아트' 운동이다. '토탈아트'는 아르누보·유켄트 스틸과 같은 예술운동에서 추구했던 개념, 회화·조각·건축·실내장식 그리고 공예에 이르는 장르의 통합적 과정을 통해 현실과 환영의 성공적인 융화를 뜻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디트1' '아담과 이브' '은물고기' 등의 대표적 캔버스 작품 외 '벤토벤 프리즈' 벽화, 기타 다양한 공예작품 등에서 그러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클림트는 자화상이 없다. 그는 타인의 거울이다. 그는 여인과 풍경을 그린다. 그의 말처럼, 개인으로서의 클림트를 알고자 한다면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아야한다. 그 안에서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기에…'라고 갤러리 초입에 그를 소개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같이 살고 있던 정신병 증세의 어머니와 누이·제수·조카 외 끊임 없이 이어지던 믓 여성들과의 스캔들 그리고 14건의 사생아 양육비 소송 등등…이러한 그의 개인사는 그의 작품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구스타프 클림트…왜 갑자기 피카소의 여인들이 떠 오르는 걸까? /윤세호 기자  
306    "세로 된" 명작 "가로로 되여도" 명작... 댓글:  조회:2677  추천:0  2017-01-29
  제작시기 1907~1908년 원제 The Kiss 작가 구스타프 클림트 (Gustav Klimt, 1862~1918년) 소장/전승 벨베데레 오스트리아 미술관, 빈 기법 캔버스에 유채와 금 목차 접기 작품 설명 명화 이야기 화가 이야기 화법 이야기 키스 작품 설명 남녀가 황금빛 옷과 장식에 둘러싸여 입맞춤을 하는 모습을 그렸어요. 명화 이야기 이 작품은 클림트의 그림 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에요. 클림트가 사랑하는 연인 에밀리에를 꼭 안고 볼에 입맞춤을 하고 있어요. 두 사람을 둘러싼 황금빛 천에 여러 가지 무늬가 잔뜩 그려져 있어요. 남자의 옷에는 네모난 무늬가 그려져 있고, 여자의 옷에는 동그란 무늬가 그려져 있어요. 몸은 화려한 장식에 묻혀 거의 보이지 않고 얼굴과 손, 그리고 발만 보여요. 하지만 화려하고 아름다운 색채만으로도 사랑의 환상이 느껴져요. 화가 이야기 클림트는 오스트리아 빈 근교의 작은 마을에서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났어요. 그래서 클림트가 금을 사용하여 작품을 만든 데에는 아버지의 영향이 있었다고도 해요. 그리고 클림트가 살던 시대의 빈에는 예술과 문화가 꽃피고 거리에는 멋진 옷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했어요. 그래서 클림트의 그림이 더욱 화려해졌어요. 화법 이야기 클림트는 계란을 사용하는 템페라 기법과 금박과 은박을 꿀이나 아교 등의 접착제로 붙이는 방법으로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인 그림을 그렸어요. 클림트의 그림을 보면 사람의 몸과 배경이 온통 장식적인 무늬로 뒤덮여 있어요. 그래서 그림이 마치 한 덩어리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아요.
305    세기의 명작과 "키스" 그림 댓글:  조회:2826  추천:0  2017-01-29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 ‘세기(종전)의 키스’ 2차대전 종전을 상징하는 명작 사진 라이프 매거진의 사진기자였던 알프레드 아이젠슈테트가 촬용한 사진으로 사진역사에 명작으로 손꼽히는 사진입니다!! ————————————————– 블라디미르 쿠쉬 ‘Walnut of Eden’ 에덴동산의 호두라는 이름과같이 호두속에 키스를 하는 아담과 이브가 들어있답니다. ————————————————– 샤갈 ‘연인’ 파란색이 강렬한 샤갈의 연인이라는 작품. 연인이라고 이름 붙여진 여러 작품들 중 하나예요. 파란색의 분위기가 키스와 안 어울리는 것 같지만서도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네요. 예술은 어려워요…ㅎ ————————————————– 로이 리히텐슈타인 ‘키스(Kiss)’ 팝아트로 유명할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키스 연작 중 하나의 첫 작품. 카툰 기법과 강렬한 색상으로 대중에게 어필한 키스작품입니다. ————————————————– 구스타브 클림트, 1908? ‘키스’   ‘키스’라는 단어로 가장 유명한 그림. 금빛 배경과 화려한 장식들, 행복을 보여주는 여인의 표정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그 달콤하네요! ————————————————– 안토니오 카?노바, 1787-1793? ‘에로스의 키스로 깨어나는 프시케’ 그리스 신화 속의 한 장면을 재현한 이 조각은, 깨어나는 프시케가 두 팔을 벌려? 연인을 끌어안고, 에로스는 위에서 사뿐히 내려오면서 그녀를 감싸안은 상하의 대비로? 더욱 드라마틱한 연출을 보여줍니다. ————————————————– 오귀스트 로댕, 1889 ‘키스’ 범접할수 없는 로댕의 작품은 실로 ‘사람이 돌이 된’ 듯한 느낌을 줍니다. ‘신곡’ 속의 연인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키스 장면을 조각으로 영원속의 작품을 완성했네요ㅎ. ————————————————– 쟝 오노레 프라고나르, 1788 ‘도둑 키스’ 로코코 화가 프라고나르의 섬세하며 아기자기한 공간에? 장난스러운 놀라움을 입힌 아름다운 몰래키스ㅎ. ————————————————– 콘스탄틴 소모프? ‘연인들2’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조각가이기도 했던 콘스탄틴 소모프의 로코코풍의 동화같은?장면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 메리 케세트 ‘아기 앤을 향한 키스’ 귀엽고 포동포동한 아기 뺨!!!!! 뽀뽀를 부르는 마성의 매력을 가지고 있죠~~ㅎ 뽀뽀가 연인 독점이 아니랍니다.ㅎ ————————————————- 단테 가브리엘 로세티, 1863 ‘해방의 검에 입맞추는 잔다르크’ 존경, 믿음의?경건한 표현이기도 한 키스. 복고적인 전통을 중시한?라파엘 전파 소속 로세티의 작품!! 강인하고 흔들림없는 잔다르크의 모습을 심도있게 표현하고 있네요. ————————————————- 폴 세잔 ‘뮤즈의 입맞춤’ 영감!!!! 창작의 고통을 한방에 날려줄 잠이 든 예술가의 이마에 입마춤을 해주는 뮤즈 ‘천사’ㅎㅎ ————————————————– 콘스탄틴 브랑쿠시, 1912 ‘키스’ 단순하지만 강렬하고 귀여운 작품!! 추상 조각의 시초로 불리는 브랑쿠시의 재료의 질감을 깎아내지않고? 그대로 살려내고 있어요~ ————————————————- 로이 리히텐슈타인 ‘키스’ 리히텐슈타인의 그림이 매력 ‘솔직함’!! 진실한 기쁨과 눈물로 사랑 그대로의 사랑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어요 ————————————————- 르네 마그리트, 1928 ‘연인들2’ 마그리트의 은유적 그림 볼때마다 많은 생각을 하게 해요~ 단순함으로 마을을 차분하게 하는 특별한 힘이 담겨져 있네요. ————————————————- 마르크 샤갈, 1915 ‘생일’ 화사한 실내 생일 케이크 그리고 둥둥 떠 있는 행복한 연인의 모습. 샤갈 자신과 연인 벨라의 행복한 시절을 그린 작품. 그림 전반에 행복감과 사랑이 넘치네요. ————————————————- 로베르 두아노 ‘호텔 드 빌 앞의 키스’ 20세기 사진의 거장 로베르 두아노는? 파리의 일상을 정지한듯 카메라로 담아냈습니다. 너무나도 유명한 키스에서?사진 속 주인공이 누군지 법정 소송까지 일어날 정도로?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두아노가 실제 연인관계였던 배우들에게 연출을 주문했던 것이 밝혀져 일단락되었다네요. ‘캔디드 포토’가 아니라서 실망한 사람들도 있지만 저도 실망했어요~~ㅎ 그에 불구하고도 여전히 가장 로맨틱한 장면 중 하나이죠. ————————————————- 파블로 피카소 ‘Figures on the seashore’ 거장 피카소!!!!! 독특한 추상화로 담은 해변에서 격렬한 키스를 하는 연인의 모습. 난해한 그림체지만 상당히 적나란 묘한 키스네요ㅎ 어려워요…..ㅎ ———————————————— ? 또다른 피카소 작품인 ‘키스(Kiss)’ 역시나 독특한 추상화. 위의 작품보다는 이해하기 쉽죠.^^
304    세계 최고가 그림 中 "반에 반점"이라도 갖고 있다면... 댓글:  조회:3461  추천:0  2017-01-29
  1. 폴 고갱 : 3,272억원     2015년 2월 폴 고갱의 1892년 작품 '언제 결혼하니?'가 비공개거래를 통해 3억 달러(약 3,272억원)에 팔리며 세계 최고가 그림 타이틀을 획득하는 신기원을 이루었다. 스위스 개인 수집가가 소장하던 이 작품을 구입한 사람은 중동의 산유국인 카타르 왕가로 추정된다.이 그림은 고갱이 타히티에서 생활하면서 그린 초기작품에 해당된다. 그림에는 검게 그을린 피부의 두 여인이 화면 가득 위치하고 있으며, 배경에는 타히티의 풍경이 묘사되어 있다.        [ 폴 고갱, 1892년.  《 언제 결혼하니? (When Will You Marry?)》  캔버스에 유채, 77 × 101 cm.  ]         2. 피카소 : 1,982억원     파블로 피카소의 걸작 '알제의 여인들(버전 O)'이 2015년 5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약 1억 7,936만 달러(약 1,982억원)에 낙찰됨으로써 역대 미술품 경매 역사에서 세계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알제의 여인들'은 피카소가 19세기 프랑스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방 안에 있는 알제의 여인들'을 재해석한 작품으로 1954~1955년까지 그린 15개 연작(알파벳 A~O) 중 마지막 작품 'O'다.       [ 피카소, 1955년.  《 알제의 여인들 버전 'O' ; Les femmes d'Alger (Version 'O') 》    캔버스에 유채, 114 x 146.4 cm.  ]         3. 모딜리아니 : 1,972억원     모딜리아니의 말년의 작품 '누워있는 누드(Reclining Nude)'가 2015년 11월 크리스티 뉴욕 경매에서 1억 7,040만 달러(약 1,972억원)에 거래되면서 역대 경매가 2위를 기록했다. 한국인 컬렉터를 제치고 이 작품을 낙찰받은 사람은 중국의 신흥 부호 류이첸이다. 중국 상하이의 룽 미술관 설립자인 류이첸은 택시 운전사 출신의 억만장자로, 최근 세계 미술품 경매시장에서 걸작들을 사들이는 데 돈을 아끼지 않는 것으로 잘 알려진 대표적 큰손이다. 모딜리아니의 최고 걸작으로 손꼽히는 '누워있는 나부'는 붉은 색 소파 위 파란색 쿠션에 누워있는 나체의 여인을 담았다. 당시로선 대담한 작품이었던 탓에 프랑스 파리에 처음 전시됐을 때부터 거센 논란이 일었고, 군중이 이 작품을 보기 위해 창밖에 몰려든 탓에 경찰이 전시 폐쇄를 명령하기도 했다.       [ 모딜리아니, 1917-1918년.  《 누워있는 나부 (Nu couché) 》  캔버스에 유채, 59.9 x 92 cm.  ]         4. 렘브란트 : 2,080억원     2015년 9월에는 네덜란드와 프랑스 정부가 렘브란트의 남녀 전신 초상화 한 쌍을 1억 6,000만 유로(약 2,080억원)에 공동 구매해서 암스테르담의 레이크스 미술관과 파리 루브르 미술관에서 교대 전시하기로 합의했다. 이 그림은 프랑스 로스차일드 가문이 소유한 것으로서 17세기 네덜란드의 황금기인 1634년 당시 결혼식을 앞둔 예비부부 마르텐 솔만스와 오프옌 코피트를 각각 그린 실물 크기의 초상화이다.       [ 렘브란트, 1634년.  《 마르텐 솔만스의 초상화 (Portrait of Marten Soolmans)》    캔버스에 유채, 210 x 135 cm.  ]         [ 렘브란트, 1634년.  《 우프옌 코피트의 초상화 (Portrait of Oopjen Coppit, Wife of Marten Soolmans) 》    캔버스에 유채, 210 x 134 cm.  ]       5. 알베르토 자코메티 : 1,549억원     2015년 5월 미국 뉴욕 록펠러 센터에서 열린 크리스티 현대미술 경매 이브닝 세일에서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1947년 청동상 '포인팅 맨(Pointing Man)'은 1억 4,130만 달러(약 1,549억원)에 낙찰되며 세계에서 가장 비싼 조각품이 됐다. 그동안의 조각품 경매 최고가는 역시 2010년 소더비에서 1억 330만달러에 판매된 자코메티의 '걸어가는 남자 I(Walking Man I)'이었다.         [ 자코메티, 1947년.  《 포인팅 맨 또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남자 (Pointing Man)》    Bronze with patina, 높이 177.5 cm.  ]   ⊙ $141,285,000  |  뉴욕 크리스티 2015년 5월           6. 로이 리히텐슈타인 : 1,103억원     팝아티스트 리히텐슈타인의 회화 '간호사(Nurse)'는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540만 달러(약 1,103억원)에 팔리며 리히텐슈타인 작품 가운데 최고가를 경신했다. 리히텐슈타인은 삼성 비자금 의혹에 휘말렸던 작품 '행복한 눈물'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작가이다. 리히텐슈타인 특유의 점묘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말풍선이나 대사가 없었음에도 팝아트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 리히텐슈타인, 1964년.  《 간호사 (Nurse)》  Oil and Magna on canvas, 121.9 x 121.9 cm.  ]         7. 싸이 톰블리 : 824억원     칠판을 연상케 하는 사이 톰블리의 작품 '무제(뉴욕시)'가 2015년 11월 미국 뉴욕 소더비에서 열린 경매에서 7,053만 달러(약 824억원)에 낙찰됐다. 이 작품은 검은 바탕에 6개의 원이 연속적으로 그려져 있어 어린 아이의 장난스러운 낙서를 연상케 하는데, 톰블리 작품 경매사상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 톰블리, 1968년.  《 Untitled (New York City) 》    Oil based house paint and wax crayon on canvas, 172.7 x 228.6 cm.  ]               8. 빈센트 반 고흐 : 717억원     빈센트 반 고흐가 그린 풍경화 '알리스캉의 가로수 길'이 2015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633만 달러(약 717억원)에 팔렸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1888년 프랑스 아를에서 친구 폴 고갱과 함께 두 달 동안 머물면서 그렸다고 알려져 있는데, 2003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177만 달러에 거래되었던 작품이다.       [ 고흐, 1888년.  《 L'Allee des Alyscamps 》  캔버스에 유채, 91.7 by 73.5 cm.  ]       9. 루시안 프로이트 : 616억원     사실주의 화가 루시안 프로이트의 대표적인 작품 '휴식을 취하는 공제 조합 감독관'이 2015년 5월 뉴욕크리스티 경매에서 무려 5, 616만 달러(약 616억원)에 팔렸다. 런던 직업소개소 책임자로 있었던 작품의 모델 틸리 슈(Tilley Sue)는 매일 8시간씩 하루 20파운드(약 4만원)를 받고 일주일에 두 세 번씩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루시안 프로이트는 오스트리아의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이다.         [ 프로이트, 1994년.  《 Benefits Supervisor Resting 》  캔버스에 유채, 150.5 x 161.2 cm.  ]         10. 피에트 몬드리안 : 552억원     몬드리안의 1929년 작품 '빨강, 파랑, 노랑, 검정의구성 No.3'가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5,056만 달러(약 552억원)에 낙찰되었다. 그 동안 몬드리안의 최고가는 2009년 2월 파리 크리스티 경매에서 2,780만 달러에 매각된 '파랑, 빨강, 노랑, 검정의구성'이었다.           [ 몬드리안, 1929년.  《 Composition No. III, with Red, Blue, Yellow, and Black 》    캔버스에 유채, 61 x 61 cm.  ]             11. 게르하르트 리히터 : 514억원     2015년 2월 런던에서 열린 소더비의 현대미술 이브닝 경매에서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추상화' 회화 작품이 4,630만 달러(약 514억원)에 팔렸다. 1999년 60만 7천달러에 팔린 바 있는 리히터의 1986년 작품 '추상화'는작가 개인의 종전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을 뿐만 아니라 생존작가 작품 중 가장 비싼 값에 팔렸다.       [ 리히터, 1986년.  《 추상화 (Abstraktes Bild)》  캔버스에 유채, 300.5 x 250.5 cm.  ]         12. 판톈서우(Pan Tianshou) : 495억원     판톈서우의 독수리 작품 '응석산화지도(鹰石山花之图)'가 2015년 5월 베이징 가디언 경매에서 2억 7,900만 위안(약 495억원)에 낙찰되었다. 판톈서우(潘天寿, 반천수)는 화조화와 산수화를 전공했으며 뛰어난 교육자로서 국화(國畵)의 주요 주창자 중 하나였다. 판톈서우는 석도와 팔대선인, 석계 등 명말 청초 화가들과 근대의 우창숴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들의 장점을 고루 수렴하고 여기에 자기만의 화법을 더해 독창적인 모델을 개발하였다.        [ 판톈서우.  《 Eagle, Rock and Flora 》  Ink and colour on paper, 182.3 x 141.8 cm.  ]         13. 앤디 워홀 : 414억원     팝아트의 거장인 앤디 워홀의 작품 '네 명의 마릴린(Four Marilyns)'은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아시아계 입찰자에게 3,600만 달러(약 414억원)에 팔렸다.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크리스티가 최저 예상 낙찰 가격을 보증하는 계약을 체결했는데, 예상 낙찰가는 4000만 달러(약 460억)였다. 결국 크리스티는 이번 앤디 워홀의 작품 경매로 입찰가와 예상가의 차액 만큼을 그림 소유자에게 지급해야 하는 비용부담을 안게 된 것이다. '네 명의 마릴린'은 헐리우드 스타 마릴린 먼로의 초상을 소재로 실크스크린 판화 작업을 한 것이다.       [ 워홀, 1962년.  《 Four Marilyns 》  Acrylic, silkscreen ink and graphite on canvas, 73 x 55.2 cm.  ]         14. 루치오 폰타나 : 337억원     루치오 폰타나의 1964년 작품 '공간 개념 (신의 종말)'이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2,920만 달러(약 337억원)에 거래됨으로써 폰타나 작품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폰타나(1899~1968)는 아르헨티나 태생의 이탈리아 화가이다. 폰타나는 1940년대 말부터 깊게 베인 캔버스, 구멍 뚫린 판금, 회화와 조각 사이의 경계를 확장시키는 변형 물질 등의 연작을 선보이기 시작했다. 은 '4차원 예술'을 창조하고자 하는 폰타나의 욕망을 보여 주는 작품이다.         [ 폰타나, 1964년.  《 Spatial Concept, The End of God 》  Oil on shaped canvas, 178.4 x 123.2 cm. ]         15. 크리스토퍼 울 : 328억원     크리스토퍼 울 (1955년~ )의 1990년 작품 '무제(Riot)가 2015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2,993만 달러(약 328억원)에 낙찰되는 기염을 토했다. 미국의 개념미술가 울은 무언의 말을 통해 언어를 희화화시켰다. 고딕체로 정중해 보이는 단순한 글씨 'RIOT(폭동)'은 도대체 어떤 계몽의 철학을 담고 있을까.       [ 울, 1990년.  《 Untitled (Riot) 》  Enamel on aluminum, 274.3 x 182.9 cm.  ]         16. 루이즈 부르주아 : 325억원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 '공간 개념 (신의 종말)'이 최고가를 기록했던 같은 날 경매에서 부르주아의 거미 조형물이 약 2,820만 달러(약 325억원)에 낙찰됐다. 종전 작가의 최고 기록은 2011년 11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거래된 거미(Spider) 작품으로 약 1,072만 달러였다. 우리나라에서도 부르주아의 대표작품 중 하나인 거대한 거미를 형상화한 '마망(Maman)'을 삼성 리움미술관에서 볼 수 있다.           [ 부르주아, 1997년.  《 Spider》  Bronze, 326.3 x 756.9 x 706 cm.  ]       17. 샤임 수틴 : 309억원     리투아니아 출신의 프랑스 화가 수틴의 고깃덩어리 시리즈 작품 '쇠고기'가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816만 달러(약 309억원)에 낙찰되었다. 이 작품은 렘브란트의 1655년 작품 '가죽을 벗겨낸 황소'보다 더 사실적이며, 프랜시스 베이컨의 고깃덩어리 시리즈보다 더 인간적이다.         [ 수틴, 1923년경.  《 Le Boeuf 》  캔버스에 유채, 81 x 60 cm.  ]         18. 시그마 폴케 : 298억원     '독일 현대미술의 거장' 시그마 폴케의 1967년 작품 '정글'이 2015년 5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2,713만 달러(약 298억원)에 낙찰되었다. 폴케는 인쇄물을 확대하여 캔버스에 옮겨가는 과정에서 '망점(網點)'이 가진 의미를 발견, 모든 이미지는 인쇄과정을 거치며 망점으로 환원되는데, 바로 이 망점이 역사적 층위를 통합하는 채널이라고 생각했다. 여기에서 전통적 그리기 방식과 팝 아트식 망점을 한데 겹친 '레이어 회화'의 계보가 시작된다.        [ 폴케, 1967년.  《 Jungle 》  Dispersion on canvas, 160 x 245.5 cm.  ]         19. 피터 도이그 : 285억원     스코틀랜드 화가 피터 도이그의 1990년 풍경화 '늪에 빠진(Swamped)'이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2,590만 달러(약 285억원)에 낙찰되어서 도이그 작품 중 사상 최고가를 기록했다. 그의 작품은 환상과 현실사이를 넘나든다. 특히 이 작품은 환각적인 색채, 그리고 서정적인 느낌을 통해 몽환적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 도이그, 1990년.  《 Swamped 》  캔버스에 유채, 197 x 241 cm.  ]         20. 로버트 라이먼 : 226억원     '백색의 화가'라고 불리우는 로버트 라이먼의 1980년 작품 '다리'가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2,060만 달러(약 226억원)에 낙찰되었다. 로버트 라이먼은 정사각형의 흰색 화면을 고집한다. 그는 '흰색은 그림의 여러가지 성질을 드러내는 색'으로 단정하고 흰색만을 이용해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 라이먼, 1980년.  《 다리 (Bridge) 》  캔버스에 혼합재료, 191.7 x 182.8 cm.  ]         21. 로버트 라우센버그 : 205억원     깡통이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라우센버그의 1961년 작품 '요한슨의 그림'이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864만 달러(약 205억원)에 낙찰되었다. 라우센버그는 1954년부터 1964년 사이에 회화와 조소가 혼합된 이른바 컴바인 작품들을 만들었다. 라우센버그가 창안한 컴바인 페인팅(combine painting)은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전통적인 방식을 거부하고 일상의 모든 사물과 버려지거나 파기된 것들을 조합하여 만든 일종의 확대된 개념의 콜라주식 미술경향을 말한다.         [ 라우센버그, 1961년.  《 Johanson's Painting 》  혼합재료, 142.2 x 122.5 x 17.5 cm.  ]         22. 귀스타브 쿠르베 : 177억원     쿠르베의 1862년 작품 '누워있는 누드(Reclining Nude)'가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1,500만 달러(약 177억원)에 낙찰되었다. 이 가격은 기존 쿠르베의 최고가 작품이었던 '에트르타 절벽'의 낙찰가의 4배가 넘는다. 쿠르베는 1860년대 자신만의 새롭고 독창적인 양식으로 감각적인 여성의 누드를 그리기 시작했다. 이 작품도 지나치게 음란하게 보이지 않으면서도 누드 모델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 쿠르베, 1862년.  《 Femme nue couchée》  캔버스에 유채, 74.9 x 97.1 cm.  ]         23. 대 루카스 크라나흐 : 165억원     독일 르네상스 시대의 화가, 루카스 크라나흐(1472년~1553년)의 작품 '진실의 입'이 2015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933만 파운드(약 165억원)에 낙찰되었다. 진실의 입이란 이름은 중세 시대 때 사람들을 심문할 때 진실을 말하지 않으면 손이 잘려도 좋다고 서약하게 한 데서 유래했다. 사자 조각상의 입에 손가락을 넣고 심판을 기다리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 비장하다.        [ 크라나흐.  《 The Mouth of Truth 》  Oil on red beechwood panel, 111 by 100 cm.  ]         24. 프랭크 스텔라 : 160억원     프랭크 스텔라의 1961년 작품 '델라웨어 교차로'가 2015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1,369만 달러(약 160억원)에 낙찰되었다. 이 작품은 프랭크 스텔라가 그린 36개의 미니멀리스트 연작 중 하나이다. 이 연작을 구성하는 개개의 작품들은 규칙적 패턴의 선으로 구성돼 있다. 정사각형 캔버스 위에 그려진 이 선들은 다시 가는 줄로 세분된다.       [ 스텔라, 1961년.  《 Delaware Crossing》  캔버스에 알키드 수지, 195.6 by 195.6 cm.  ]       25. 조르주 쇠라 : 127억원     쇠라의 대표작인 '아스니에르에서 물놀이' 습작이 유화가 아님에도 2015년 2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약 1,178만 달러(약 127억원)에 주인을 찾았다. 이 작품은 수많은 데생과 유화 습작을 거쳐 완성된 초기의 기념비적 작품으로서 쇠라의 작품 가운데 사상 최고액을 기록했다.       [ 쇠라, 1883-84년.  《 아스니에르에서의 물놀이 습작 》  Conté crayon on paper, 32.4 by 24.1 cm.  ]         26. 발튀스 : 115억원     프랑스 화가 발튀스(1908년~2001년)의 초기 작품 '숙녀 압디'가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991만 달러(약 115억원)에 낙찰되었다. 발튀스는 초기 르네상스 회화의 대가인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작품을 연구하고 모사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어색하고 도식적인 여인의 모습에서 프란체스카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 발튀스, 1935년.  《 숙녀 압디 (Lady Abdy) 》  캔버스에 유채, 185.1 x 134.9 cm.  ]         27. 페르디난트 볼 : 92억원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페르디난트 볼(1616년~1680년)은 렘브란트의 제자이다. 볼의 아들로 알려져 있는 8살 때의 '소년의 초상'이 2015년 7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519만 파운드(약 92억원)에 낙찰되었다.       [ 볼, 1652년.  《 Portrait of a Boy 》  캔버스에 유채, 170 by 150 cm.  ]         28. 제임스 앙소르 : 81억원     벨기에 화가 제임스 앙소르의 1892년 작품 '넋을 잃은 어부들'이 2015년 11월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697만 달러(약 81억원)에 낙찰되었다. 앙소르는 해골과 가면의 그로테스크하고 환상적인 이미지를 통해 삶에 대한 공포를 철학적으로 표현했던 화가이다. 이 작품은 꺼져 버린 촛불과 현실에 불만이 가득한 해골, 다리에 상처를 입은 게, 반토막이 되어버린 물고기, 빈 생선통을 마주하고 망연자실한 어촌의 아낙네들, 미울만치 의기양양한 고양이의 모습이 조화의 부조화를 이룬다.         [ 앙소르, 1892년.  《 The Melancholy Fisherwomen 》  캔버스에 유채, 110 by 80.5 cm.  ]         29. 조반니 안셀모 : 71억원     이탈리아 현대 미술가 안셀모의 1968년 작품 '비틀림'이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44만 달러(약 71억원)에 낙찰되었다. 안셀모는 '아르테 포베라(artepovera)' 운동의 주창자 가운데 한 명이다. 이 운동은 팝 아트의 상업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미술 운동이다.         [ 안셀모, 1968년.  《 비틀림 (Torsione) 》  Metal and flannel, 229.8 x 186 x 29.8 cm.  ]       30. 한스 호프만 : 70억원     독일 태생의 미국 추상표현주의 화가, 한스 호프만의 말년의 작품 '오세르'가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633만 달러(약 70억원)에 팔려서 작가의 최고가를 경신했다. 호프만의 후기작은 자연을 소재로 하고 있으면서도 결과적으로는 재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는 추상의 형태를 띤다.         [ 호프만, 1960년.  《 오세르 (Auxerre) 》  캔버스에 유채, 152.4 x 132.1 cm.  ]         31. 지나이다 세레브리아코바 : 65억원       러시아 여성화가 세레브리아코바의 1923년 작품 '잠자는 소녀의 습작'이 2015년 6월 런던 소더비 경매에서 585만 달러(약 65억원)에 낙찰되었다. 그녀는 매우 유복한 집안에서 자랐지만, 1917년 10월 볼세비키 혁명으로 남편이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게 되고, 집안도 풍비박산이 났다. 다행이 그녀는 1924년부터 파리에 거주하게 되면서 과거의 활력을 되찾게 되었는데, 파리에 정착하기 1년 전에 그린 이 작품은 다른 누드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과감성을 보여주고 있다.           [ 세레브리아코바, 1923년.  《 Study of a Sleeping Girl 》  캔버스에 유채, 70 by 98 cm.  ]         32. 마크 브래드포드 : 64억원     '미국의 콜라주 화가' 마크 브래드포드(1961년~)의 작품 '구성 4'가 2015년 10월 런던 필립스 경매에서 378만 파운드(약 64억원)에 낙찰되었다. 2009년 천재에게 수여된다는 '맥아더상'을 수상한 브래드포드의 작품은 길거리에서 찾을 수 있는 포스터, 신문지, 쓰레기 등을 켭켭이 쌓은 후 공업용 전기사포로 갈아내고 그 위에 다시 종이를 쌓는 '콜라주'와 '디콜라주'의 과정을 거쳐 완성이 된다.       [ 브래드포드, 2013년.  《 Constitution IV 》  Mixed media on canvas, 335.3 x 304.8 cm.  ]       33. 아서 도브 : 60억원     미국의 추상화가, 아서 도브(1880년~1946년)의 작품 '해협을 가로지르는 보트'가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543만 달러(약 60억원)에 거래되어 작가의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였다.       [ 도브, 1929년경.  《 Boat Going Through Inlet 》  Oil on tin, 51.4 x 71.8 cm.  ]         34. 토머스 하트 벤턴 : 54억원     벤턴의 작품 '오자크의 가을'이 2015년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487만 달러(약 54억원)에 거래되었다. 토머스 하트 벤턴의 명성은 그의 제자였던 잭슨 폴록의 엄청난 성공에 의해 다소 가려지긴 했지만, 생전에 그는 미국의 지방주의 화가로서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그는 개척 시대의 상인과 사냥꾼, 탐험가들을 미국 건국 정신의 화신이라고 여겼다.           [ 벤턴, 1949년.  《 Ozark Autumn 》  Oil and tempera on board, 52.7 x 81.3 cm.  ]         35. 크리스 오필리 : 52억원     크리스 오필리(1968~ )는 나이지리아 태생의 영국 화가이다. 오필리의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바로 '코끼리 똥'이다. 주로 동물원에서 공급받는 이 재료는 동그랗게 빚어 건조한 후 바니쉬를 바르거나 구슬 따위로 장식한다. 이렇게 손질된 똥은 작품을 올려 놓는 받침대 역할을 하기도 하고 그림 표면에 붙여져 화면의 일부가 되기도 한다. 이 때문에 그에게는 '엘리펀트 맨'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닌다.   역시 코끼리 똥으로 만들어진 '성모 마리아'는 2015년 6월 런던 크리스티에서 무려 452만 달러(약 52억원)에 낙찰되었다.       [ 오필리, 1996년.  《 성모 마리아 (The Holy Virgin Mary) 》  혼합재료, 253.3 x 182.4 cm.  ]         36. 바수데오 가이톤드 : 52억원     바수데오 가이톤드(1924~2001)는 인도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화가이다. 그는 '인도 최초의 추상화가'라 불리운다. 이 작품 '무제'는 2015년 12월 인도 뭄바이의 최고급 호텔 타지마할 팰리스에서 진행된 크리스트 경매에서 추정가의 2배에 가까운 금액(440만 달러)에 거래되었다. 이 기록은 인도 현대미술 거래 역사상 최고가이다. 가이톤드는 뭄바이의 전위적 미술 그룹(Bombay Progressive Artist’s Group)을 이끈 선구적 작가로 손꼽힌다.               [ 가이톤드, 1995년.  《 무제 (Untitled) 》  캔버스에 유채, 140.3 x 101.9 cm.  ]         37. 김환기 : 47억 2,000만원     2015년 10월 김환기의 점화 작품 < 19-Ⅶ-71 #209 >이 국내 미술품 시장의 신기원을 이루었다. 박수근과 이중섭을 제치고 국내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9년 만에 경신한 것이다. 홍콩에서 열린 서울옥션 경매에서 3,100만 홍콩달러 (약 47억 2,000만원)에 낙찰돼 한국 현대미술 사상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 김환기, 1971년.  《 19-Ⅶ-71 #209 》  Oil on cotton, 253 x 202 cm.  ]         38. 요시모토 나라 : 39억원     이른바 '오타쿠'를 상징하는 꼬마아이 시리즈의 주인공 요시모토 나라는 네오팝 세대의 대표작가로 불리운다. 요시모토의 2006년 작품 '작은별 통신'이 201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341만 달러(약 39억원)에 낙찰되면서 한 획을 그었다. 대한민국의 팝아티스트 마리 킴, 이동기, 권기수의 작품 최고가는 수천만에 불과하지만 ?       [ 요시모토, 2006년.  《 The Little Star Dweller 》  Acrylic and glitter on canvas, 227.3 x 181.3 cm.  ]         "예술가가 예술가를 위대하다고 생각하는 세상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사회이다."    "창조경제와 문화예술은 선진국으로 가는 두 개의 수레바퀴이다."  
303    그림과 키스, 키스와 그림 댓글:  조회:4211  추천:0  2017-01-29
사랑에서 가장 로맨틱한 순간은 언제일까. 여러 순간들이 있겠지만, 나는 단연코 ‘키스’라고 생각한다. 뽀뽀가 좋아하는 감정을 장난스레 드러내는 것이라면, 키스는 본격적인 사랑을 향한 육체의 수신호 같은 느낌이다. 키스를 통해야만 우리는 상대와 호흡을 맞추고 사랑을 감각적으로 느껴볼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생애 첫키스는 누구에게나 잊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다. 물론 생애 처음은 아니더라도 사랑하는 사람과의 첫키스는 소중한 기억이다. 아, 빼놓을 뻔했다. 거칠게 싸운 다음에 화해하는 순간의 격정적인 키스. 서로를 향한 오만가지 증오와 격노도 격정적인 키스 뒤에는 눈 녹은 듯 사라져버린다. 사진 크게보기 구스타프 클림트, 키스, 1907~1908년 ‘키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그림이 있다. 바로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ㆍ1862~1918년)의 ‘키스’다. 찬란한 금빛 후광에 둘러싸여 있는 남녀 한 쌍이 서로에게 황홀하게 취해 있다. 이들 밑에는 만개한 꽃들이 찬란히 펼쳐져 있다. 말 그대로 꽃길 위에서 젊은 남녀가 꽃 같은 키스를 나누는 중이다. 둘의 키스가 더 빛나는 이유는 커플을 겹겹이 둘러싸고 있는 황금빛 때문이다. 실제로 이 그림은 클림트가 금박과 금색 물감을 자주 사용한 1907-1908년, 이른바 ‘황금 시기(golden period)’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다. 이 그림에서 남녀의 자세가 흥미롭다. 남자는 여자의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싸안고 키스를 주도하고 있다. 그래선지 남자의 남성성이 잔뜩 강조돼 보인다. 여자는 남자의 황홀한 키스에 부끄러운 듯 살포시 눈을 감고 있다. 여자의 태도가 더 수동적으로 비치는 이유는 연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자세 때문인 것 같다. ===@"키스"가 있는 궁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바로크 로코코양식의 벨베데레 궁전은 사보이 왕가의 프린츠 오이겐공을 위해 세워졌다고 해요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   [출처] [유럽] 오스트리아 여행#2 벨베데레 궁전 / 클림트 키스|작성자 러블리아     사진 크게보기 로이 리히텐슈타인, 키스, 1961년 ‘키스’하면 유명한 그림이 또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ㆍ1923~1997년)의 ‘키스’다. 이 그림에서 볼 수 있듯 리히텐슈타인은 이미 발표된 만화를 차용해 그림을 그렸다. 그 이유는 대량 복제 시대에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대중 문화의 속성을 극대화해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의 이러한 현실 인식은 미술의 영역을 대중 문화로까지 확장하는 결과를 낳았다. 어찌 됐건 그림 속 키스는 화해의 키스가 아닐까 싶다. 두 사람은 격정적인 싸움으로 서로 마음을 헤집어 놓은 다음에야 사랑을 확인했을 거다. 그제야 둘은 눈물로 화해를 하고 열정의 키스를 나누고 있다. 클림트의 그림보다 이 그림 속의 여자는 키스에 적극적이다. 남자의 목을 팔로 두르고 그에게 밀착하며 키스를 만끽하고 있다.   사진 크게보기 카롤루스 뒤랑, 키스, 1868년 이 그림의 키스는 어떤가. 카롤루스 뒤랑(Charles Auguste Emile Durandㆍ1837~1917년)은 매혹적인 초상화에 타고난 재능을 발휘한 작가다. 고전적이지만, 촌스럽지 않은 도도한 기품이 그의 그림에 서려있다. 이 그림에도 그의 재능이 유감없이 발휘돼 있다. 그림 속 남녀의 키스는 매우 로맨틱하다. 누워 있는 여자 위에 있는 남자가 키스를 건넨다. 남자는 한 손으로는 여자의 머리를 받치고 있다. 오랫동안 유지할 자세는 아니다. 남자의 왼손 위치만 봐도 조만간 남자의 자세가 바뀔 것이라는 걸 예상할 수 있다. 다음 장면이 더 궁금해지는 그림이다.   사진 크게보기 르네 마그리트, 연인, 1928년 이 그림 속 키스는 다른 그림과 전혀 다르다. 얼굴에 하얀 천을 두른 남녀가 키스를 하고 있다. 둘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지만, 감각에 의존해 서로 얼굴과 입을 찾아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키스라니. 뭔가 더 로맨틱한 느낌이다. 시각이 차단된 상태의 키스는 아무래도 더욱 강렬할 것 같다. DA 300   이 그림은 벨기에의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ㆍ1898~1967년)의 ‘연인’이다. 마그리트의 작품은 익숙한 사물을 왜곡하거나 축소ㆍ과장해서 상상력을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작가의 주특기대로 이 그림은 키스에 대한 다양한 상상력을 부추기고 있다. 위 그림 가운데 당신이 해보고 싶은 키스는 무엇인가. 자세가 어떠하던 무슨 상관인가. 사랑하는 연인이 서로 눈빛을 마주치고 묘한 끌림에 입술이 맞닿는 순간, 멈추지 못하고 더 큰 욕망의 불꽃을 지피는 순간, 키스는 그 자체로 아련하고 애틋하며 아름답다. 아, 황홀한 키스여! 그 기억이 아득하기만 하다. KISSME 중앙일보 문화부 [출처: 중앙일보] [연애를 그림으로 배웠네] ‘키스’를 부르는 그림들 =========== 덤으로 더 보기 @@+ 클림트 '키스' 컬러링 /참쌤  블로그 교육자료                                '클림트의 키스'를 주제로 한 컬러링 활동지입니다.       그림은 참쌤스쿨 3기 남양주 오남초 윤보연 선생님께서 그렸어요!    시리즈로 제작하고... =================================+++ ㅡ"키스" 그림ㅡ 원화로 봐도 아름답겠지만, 이렇게 미디어로 보니까 더욱 영롱하게 빤딱빤딱 효과를 주셔서 이렇게 감상하는 것도 또 다른 재미...! =========================== /정숙영 포항시 칼럼니스트 동유럽 여행을 하면서 벨베데르 궁전에 있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키스’ 작품을 우연히 보게 되었다. 처음부터 여행에 대한 사전 지식도 없이 그 궁전에 그토록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 작품이 있는지도 몰랐었고 언젠가 어디선가 본 기억은 있는 그 그림이 ‘키스’라는 저명한 작품인지도 몰랐었다. 아무런 지식도 없는 무방비 상태에서 가이드가 ‘키스’ 작품 해설을 했을 때 작은 전율들이 가슴 저 밑에서 일어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클림트의 팬이 되어 버렸다. 그 작품 속에 완전히 몰입이 되었고 그 작품에 반하여 키스 열쇠고리, 키스 손가방, 키스 엽서, 키스 우산 등 키스와 관련되는 것은 무슨 여행상품이던 다 사고 싶어져서 샀다. 지금도 가까운 곳에 나들이 갈 때면 내 어깨에는 크로스로 ‘키스’ 가방이 얌전히 매달려 있다. 금 세공사의 아들로 태어난 클림트의 ‘키스’는 사랑하는 연인 에밀리에를 품에 가득 안고 볼에 입맞춤을 하는 모습인데 여러 가지 도형들로 둘러 싸여서 남자는 네모로 여자는 동그라미로 곡선미를 표현하며 얼굴, 손, 발만 보이는데도 환상적인 사랑의 몽환적인 모습이 절로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떠나려는 사랑하는 여성 에밀리에를 떠나지 못하게 끌어안고 키스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작품 전체의 금빛이 원래 커튼도 금 색깔로 할 정도로 골드 색깔을 좋아하는 나는 이 작품 속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에로틱하면서도 너무나 아름다운, 무릎을 꿇고 있는 여성에게서 떠나야만 하지만 떠나지 못하고 눈을 감고 시간이 멈추어 주기를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 떠나 보내야 하는 것을 알면서도 떠나 보내지 못하고 키스로서 여성을 붙잡으려는 남성의 남성미가 잘 어우러지는 애절하게 키스를 하는 그 순간만큼은 모든 걱정을 잊고 완전한 하나가 되는, 반짝이는 금빛 별들이 우주 전체로 퍼져 나가는 듯한 환상적인 작품이었다. 아이리스 드라마에서 이병헌과 김태희가 했던 사탕키스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여자의 몸 곳곳에 이름 모를 꽃들이 안개처럼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특별한 키스다. "우주에서 가장 찬란한 진실, 가장 순결한 신의는 한 소녀의 키스 속에 들어 있다."고 로버트 브라우닝은 노래했고 '키스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가는 순간의 경험'이라고 플라톤은 말했다. 키스를 한다는 것은 닫혀 있던 마음의 문이 열려 이미 깊은 사랑의 문으로 들어섰다는 의미이며 하나의 우주 속에 모든 것은 사라지고 오로지 두 사람만이 존재한다는 울림이며 떨림이며 잃어 버렸던 갈비뼈가 서로 맞추어져 온전한 하나가 되는 것이다.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자신의 작품 모델들과 숱한 염문을 뿌리면서 자유로운 영혼으로 살다간 클림트가 수많은 여자들과 사랑에 빠졌지만 가장 사랑했던 여인은 아마도 키스 작품속의 에밀리에가 아니었을까 혼자 추측해 본다. 인간은 사랑하기 위해 또한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났다.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받기도 하고 또 누군가의 사랑을 갈망하기도 한다. 애틋한 사랑도 있고 이루지 못 한 사랑도 있고 이루고 싶은 사랑도 있고 소망대로 이루어지고 맺어져서 행복한 사랑도 있다. 이 세상의 모든 노래들이 모든 시들이 모든 글들이 사랑으로 시작해서 사랑으로 끝이 나는 것을 보노라면 우리들의 가장 큰 숙제도 사랑이고 가장 어려운 난제도 사랑이고 가장 행복한 것도 사랑이고 가장 힘들게 하는 것도 사랑인 것 같다. 요즘 남녀노소 모두가 소원하는 건강하게 오래 사는 데 키스가 최고의 명약이라 한다. 키스는 사람의 수명을 길게 해주는 효과가 있는데 키스를 많이 하는 사람은 오래 산다고 한다. 키스를 하는 순간 심장이 뛰고 체내에서 화학물질이 배출되는데 진통제의 일종으로 약물과 같은 작용을 하게 되며 이 화학물질은 핏속의 백혈구 활동을 활성화시켜 질병 발병의 기회를 차단하고 다이어트에도 도움이 되며 규칙적으로 키스 하는 사람은 평균 5년이나 더 장수한다고 하니 그 어느 보약 보다 좋은 키스를 에머랄드빛 파도 출렁이는 호젓한 바닷가에서 노을지는 석양을 바라보며 클림트의 ‘키스’처럼 키스를... /대경일보  =======================     벨베데레 상궁     전망 좋은 궁전 벨베데레 빈 중심가의 남쪽 언덕 위에 위치한 궁전 벨베데레(Belvedere)는 이태리어로 '아름다운 전망'이라는 뜻을 가졌으며, 18세기 초 오스만 튀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오이겐 장군(Prinz Eugen von Savoyen 1663-1736)을 위해 지은 여름별궁이다.   궁전 벨베데레는 바로크 양식의 건축가로 유명한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Johann Lucas von Hildebrandt 1668-1745)가 맡아 건축했다.   상궁과 하궁, 두 개의 궁으로 이루어져  있고 언덕 사이를 가로지르는 아름다운 프랑스식 정원이 널따랗게 펼쳐져 있다.   상궁에서 바라본 벨베데레 정원의 모습     그 당시 귀족 자제들에게 프린스나 프린세스 같은 호칭을 붙였는데, 오이겐 장군 역시 프랑스와 이태리의 혈통을 잇는 사보이 가문의 귀족 자제였으므로 프린스 오이겐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다른 귀족 자제들과는 다르게 출신지에 관계하지 않고 자신을 장군으로 명한 오스트리아에 충성을 다해 싸웠다. 또한 성공한 다음에는 많은 예술가를 후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을 수집하는 데 조예가 깊어 벨베데레궁을 전시용도로 사용하였다.   오이겐 장군이 죽고 1752년 미망인 안나가 황후 마리아 테레지아에게 성을 매각하였는데 그 후로 벨베데레궁은 1890년 미술사 박물관이 완공될 때까지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집품을 전시하는 미술관으로 쓰였다. 그리고 황태자 페르디난트가 1894년부터 사라예보에서 암살되기 전인 1914년까지 그의 거처로 사용하다가 1918년 오스트리아 국가 건물로 흡수되었다.   1903년 벨베데레 하궁은 현대작품 미술관으로 개관하게 되었다. 1897년 개관한 빈 분리파 미술관인 “세체시옹”(Wiener Secession)의 도움을 받았는데 이는 분리파 화가들이 활동을 넓히는 계기가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는 1921년 오스트리아 국립미술관(Ö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이라는 이름 불렸다.   여기서 하궁은 바로크 시대 전시관으로, 상궁은 19세기 전시관, 오랑제리를 현대 전시관으로 열어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1918)의 유명한 작품들을 전시하였다.   2008년 상궁은 오스트리아 중세 시대 작품에서부터 바로크, 19~20세기에 이르기까지 한눈에 볼 수 있는 상설 전시 미술관으로 정착하였으며, 하궁과 오랑제리는 시즌마다 작품이 바뀌는 특별전시관으로 탈바꿈하였다.   특히 벨레데레 미술관에는 클림트와 에곤 실레의 대작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질 않는다.   클림트의 대작 《키스》는 상설 전시관인 상궁에서 언제든지 만나볼 수가 있다. 하지만 다른 유수의 작품들은 다른 나라의 미술관으로 대여하는 일이 잦기 때문에 상궁에서도 클림트실과 에곤 실레실의 그림이 자주 바뀐다.   《키스》만큼이나 사랑받는 클림트의 또 다른 걸작 《유디트》가 6월 말부터 다시 전시되었다. 특히 올해 10월 11일까지 하궁에서는 "클림트와 링 도로(KLIMT UND DIE RINGSTRASSE)"라는 특별전시회가 열리는데, 이제까지 볼 수 없었던 클림트의 작품과 벽화들을 관람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벨베데레 상궁의 모든 것 벨베데레 상궁의 입장권은 2015년 7월 현재 14유로이다. 하궁에서의 클림트 특별전시를 함께 볼 수 있도록 만든 패키지 상품이 클림트 티켓으로 20유로이며, 특별전시 기간인 10월 11일 까지 30일 내에 상궁과 하궁을 모두 관람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상궁 위의 매표소 건물에서 입장권을 구입하고 상궁 안으로 들어서면 4명의 아틀라스가 힘겹게 기둥을 지고 있는 살라 테레나(Sala terrena)에 이른다.   원래 상궁의 입구는 기둥이 없이 큰 살롱의 형태였다. 그런데 건축 상의 문제로 건물이 내려앉을 위기에 놓이자, 이를 대비하여 오늘날의 바로크식 둥근 아치형 지붕의 네 기둥에 아틀라스를 조각해 넣었다.   오른편 전시실에는 중세 시대의 조각상과 그림이 전시되고, 왼편에는 20세기의 작품을 전시하는 현대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눈여겨 볼만한 작가는 훈데르트바서(Friedensreich Hundertwasser 1928-2000)와 헤르베르트 보클(Herbert Boeckl 1894-1966)이다.   살라 테레나 (Sala terrena)     벨베데레 상궁의 정중앙 계단으로 올라가 마주하는 1층 전시실 첫 번째 방에는 오이겐 장군 초상화가 걸려있다. 이곳은 초상화 전용실이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초상화를 지나 대리석실에 이르기까지는 역사적인 사건들을 담은 풍경화 전시실, 종교화 전시실, 바로크 시대 전시실 등 18세기까지의 그림들로 배치되어 있다.   벨베데레 궁전 건축의 꽃은 바로 붉은 대리석으로 지은 대리석실이다. 큰 규모의 연회도 가능한 이 방은 조각처럼 다가오는 천장의 프레스코화가 보는 이를 압도할 정도이다. 이 천장벽화는 이태리의 화가 카를로 이노센조 카를로네(Carlo Innocenzo Carlone 1686-1775)가 완성하였다.   《오감》(Die Funf Sinne 1879)     대리석실까지 관람하였다면 다음의 전시관부터는 본격적으로 클림트와 에곤 쉴레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 첫 번째 방은 “감각의 화가” 한스 마카르트 (Hans Makart 1840-1884)의 전시실이다.   그의 대표작인 《오감》(Die Fuenf Sinne 1879)이 우리 눈을 사로잡는다. 촉각, 청각, 시각, 후각, 미각의 오감각을 다섯 여인의 누드로 표현하였다. 클림트와는 스무 살 이상 나이 차가 있지만 어린 클림트를 동료로서 인정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던 화가 마카르트. 언제나 그의 아틀리에에는 당대의 이름난 예술인과 귀족들로 가득했고 그가 직접 만든 공예품과 장식품은 큰인기를 끌었다.   당시 빈에서는 링 도로 주변의 건축물들이 한창 완성되어 가는 시기였으며, 부유한 중산계층들은 실내 인테리어를 그의 스타일처럼 화려하게 꾸미기를 바랐다.   마카르트를 지나면 빈 분리파들의 그림과 분리파에 영향을 끼친 해외 인상주의와 표현주의 작가들의 그림도 함께 볼 수 있다.   인상주의의 대표적인 화가 빈센트 반 고흐(Vincent van Gogh 1853-1890)와 에드바르드 뭉크(Edvard Munch 1863-1944)의 그림도 전시되어 있다.   클림트 방을 나오기 전에 상징주의 방이 있다.   큐레이터 그라브너 씨의 말에 따르면, 클림트는 상징주의에서도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그의 그림 안에 숨겨진 모형이나 물체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림을 감상 할 수 있다.   설렌 마음으로 기다린 클림트 방에 닿으면 사람들이 몰려 있는 그의 대표작 《키스》를 마주한다. '루브르의 모나리자' 크기에 실망했다는 혹자들의 말이 들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 클림트의 《키스》는 한 벽면에 홀로 걸려 있어도 꽉 찬 느낌을 준다.   클림트의《키스》(Der Kuss 1908)     1908년《키스》가 처음 전시되었을 때 당시 벨레데레를 관장하던 문화부에서는 2500크로네를 지불하고 이작품을 사들였다. 이는 오늘날의 24만 달러의 가치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비싸게 팔린 그림이 500크로네 내외인 것을 보면 《키스》는 이미 다른 그림보다 5배 더 비싸게 팔린 것이다.   요즘 상영되는 《우먼인골드》(women in gold) 속의 화제작 아델레 블로흐-바우어(Adele Bloch-Bauer) 초상이 2006년 135밀리언 달러에 팔린 것과 비교해 볼 때, 국가가 선견지명으로 대작 《키스》를 사들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라브너 씨의 말에 의하면, 클림트는 이미 팔린 그림 《키스》를 여인의 발가락이 꺾이는 포즈로 수정하여서 오늘날의 작품이 되었다 한다.   여행에서 영감 받은 비잔틴 스타일의 모자이크 양식과 금을 직접 녹여 만든 물감으로 다양한 명도와 채도를 표현한 클림트의 《키스》는 매우 인상적으로 기억에 남는다.   그의 황금기 시대 대표작품 《키스》에서 키스를 하고 있는 땅딸막한 남자는 직사각형 도형으로, 키스를 받으며 살포시 눈감고 있는 여인은 꽃 모양을 연상케 하는 둥그런 모양으로 표현하여 음과 양의 조화를 나타내고 있다. 후세에 사람들은 여인과의 이분법적 사랑을 화폭에 담은 클림트 "키스" 주인공의 정체를 궁금해 하였는데, 남자는 클림트 자신이고 여인은 그의 영원한 정신적 사랑이었던 에밀리 플뢰게(Emilie Flöge 1874-1952)일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금색의 사용이 자유로웠으나 지나치지 않고 따뜻함을 풍기는 《키스》는 오늘날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림 중의 하나이다. 여성용 장신구에서부터 일상생활의 달력, 식기 등에 그의 그림들이 들어가지만 그 어떤 복제품도 원본이 지닌 따뜻하고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을 살려내지는 못한다. 그것은 안타까운 일이랄 수도 있다. 이는 클림트의 《키스》를 벨레데레에 와서 보아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클림트 그림은 대부분의 소재가 여성이다. 심오한 철학, 인생의 굴곡과 같은 내용도 여성으로 담아낸다. 그에게 어머니의 자궁은 "태초의 시작과 끝"과도 같은 의미를 갖는다.   심오한 내용을 포장하는 여성들의 거침없는 누드 포즈에서 사람들은 몽환적 에로티시즘을 이야기하거나 천박함을 느낄 수 있지만, 상류층 여성들 사이에서는 굉장히 인기 있는 화가였다. 하나같이 클림트 초상화를 소장하고 싶어 했으므로 상류층 부인들과 여성을 담은 그림이 클림트 전시실에 즐비하였다.   《키스》 맞은편의 다른 한쪽에는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Judith und Holofernes)가 액자마저 아름답게 빛난다. 액자는 특별히 클림트의 동생 에른스트가 제작하였으며, 1901년 뮌헨에서 열린 '제8회 국제예술 박람회' 때 처음으로 선보였다.   유디트와 홀로페르네스(Judith und Holofernes 1901)     유디트는 구약 성경 외전에 나오는 성스러운 인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아시리아의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죽이고 조국을 구한 여인이다. 이전까지의 화가들은 유디트를 나라를 구한 인물로 성스럽게 묘사하거나 여성의 몸으로 적장과 맞서 싸우는 영웅으로 신격화했다. 그러나 클림트는 유디트를 눈이 반쯤 감기고 입술이 황홀경에 빠지듯 벌리고 있는 팜므파탈 여성상으로 그려냈다. 반나체 여성의 모습에 모든 시선이 사로잡혀 있을 때 발견하게 되는 것은 바로 목이 잘린 장군 홀로페르네스다. 황홀한 모습에서 이내 죽음의 공포가 엄습해 오는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클림트의 인물화를 충분히 감상하고 나면 다음 전시실에서 그의 풍경화를 볼 수가 있다. 모자이크 기법으로 색채를 풍부하게 표현한 풍경화들은 클림트가 말년에 지냈던 곳을 화폭에 담은 것이다. 그는 나이가 들고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자 연인 에밀리 플뢰게와 그녀의 가족들과 함께 상류층의 여름별장으로 유명한 잘츠캄머굿의 아터 호수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림은 당시 호수에 비치는 자연모습과 농가의 풍경인 것이다. 당대에 인정받지 못한 반 고흐를 높이 평가했던 클림트의 풍경화는 언뜻 반 고흐 화풍을 느끼게 한다.   오스트리아에서 음악의 천재가 모차르트라고 한다면 미술의 천재는 클림트의 수제자 에곤 쉴레이다. 화려한 클림트 전시실을 지나면 곧 어둡고 음울한 화풍이 도는 그림을 만난다. 에곤 쉴레의 예술성 깊은 그림은 당시에는 스승 클림트만큼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오늘날에는 그의 천재성이 높이 평가되고 있다.   다섯 살 때부터 식탁보에 스케치를 해댔던 에곤 쉴레의 그림 솜씨를 보고 클림트는 그를 수제자로 거두었다.   클림트 문하에서 화가의 길을 걷던 에곤 쉴레는 스물한 살 무렵 이미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빈 외곽도시의 호텔에서 어린 소녀와 문란한 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린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그는 불행하게도 교도소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그 사건 이후 스물다섯 살에 평범한 집안의 여성과 결혼을 하고 군인으로 입대해 군인미술관에서 작업 활동을 하는 등 안정된 생활을 꿈꾸었으나 1918년 10월 28일 부인이 임신 6개월째 들어 스페인 독감에 걸려 죽음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며칠 뒤인 31일에 같은 병으로 28세의 짧은 생을 마감하였다.   《포옹》(Die Umarmung 1917)     에곤 쉴레의 대작 《포옹》(Die Umarmung 1917)은 그가 죽기 1년 전에 행복한 결혼생활을 반영하듯 격정적이면서도 애틋한 남녀의 사람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그의 굴곡 있는 인생을 담은 그림들은 대부분 높은 값을 받지 못하였다. 이러한 실레의 작품을 자신의 모든 걸 던져 사들인 사람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수집가 루돌프 레오폴드(Rudolf Leopold)이다.   레오폴드는 에곤 쉴레의 작품 외에도 당시에 인정받지 못했던 표현주의 작품들을 수집했는데, 훗날 국가에 헌정하여 레오폴드 미술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에곤 쉴레의 작품은 레오폴드 미술관에 가장 많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벨베데레에서 쉴레의 작품이 마음에 들었다면 레오폴드 미술관을 가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에곤 쉴레와 표현주의 화가들의 전시실을 마지막으로 1층의 전시실을 모두 둘러보게 된다.   벨베데레의 중요 전시품들은 거의 둘러보았으니 시간이 촉박한 관람객은 여기서 마무리를 짓고 다음 일정으로 넘어가도 좋다. 시간이 여유롭다면 한 층을 더 올라가 2층에 마련된 전시실을 한 바퀴 돌아보면 아주 유익한 미술관 관람이 될 것이다. 2층 전시실은 고전 ․ 낭만주의 작품들과 비더마이어 시대(Biedermeier:1815-1848)의 살롱 문화를 잘 반영한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 외에도 《이삭줍기》《만종》《씨 뿌리는 사람》 등 농부들의 일상을 그린 작품으로 유명한 현실주의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1814-1875), 여성의 육체를 뛰어나게 묘사한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Auguste Renoir 1841-1919), 풍경 묘사에 인상주의 기법을 잘 살린 클로드 모네(Claude Monets 1840-1926), 에드가드가(Edgar Degas 1834-1917)의 작품들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릴 수 있다.     쿠쿠쿠뉴스 / 비엔나 워킹투어 =======================================  
302    미국 팝아트 선구자 中 화가 - 로이 리히텐슈타인 댓글:  조회:8009  추천:0  2017-01-29
  출생일 1923년 사망일 1997년 직업 아티스트   앤디 워홀, 클래스 올덴버그와 더불어 미국의 팝아트를 이끈 선구자이다. 앤디 워홀이 마릴린 먼로나 코카콜라 같은 대중문화 이미지를 변용했다면, 리히텐슈타인은 미키마우스나 도널드덕 등 대중적인 만화 캐릭터를 작품 주제로 했다는 점에서 ‘가장 미국적인 작가’로 불린다.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리히텐슈타인은 1923년 10월 27일 뉴욕의 한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가 만화를 작품으로 사용한 것은 아들 때문이다. 미키마우스 만화책을 읽던 아들이 “내가 확신하건대 아빠는 그림을 이렇게 잘 그릴 수는 없을 거야!”라고 한 말에 자극을 받았던 것이다. 밝은 색채와 단순화된 형태, 뚜렷한 윤곽선, 기계적인 인쇄로 생긴 점(dot)들이 그의 작품 특징이다. 대중에게 친숙한 만화를 골라 그것을 확대하고 단순화하는 등 작품으로 표현했다. 특히 엘리트 예술 대신 저급 문화로 알려진 만화를 소재로 택함으로써 만화와 회화의 경계를 허물었다. ‘팝콘을 먹으면서 감상할 수 있는 미술’을 모토로 한 그의 작품은 초기 평론가들의 “쓰레기 같은 작품”이라는 악평을 딛고 오늘날 천문학적인 가격의 가치를 지닌 소장품이 됐다. 대표작으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행복한 눈물〉, 〈희망이 없는〉, 〈꽝〉, 〈공을 든 소녀〉, 〈붓 자국〉, 〈차 안에서〉 등이 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행복한 눈물〉 1964, 캔버스에 유화, 97×97cm, 개인 소장 =========================================     출생일 1923년 사망일 1997년   로이 리히텐슈타인 앤디 워홀과 더불어 미국 팝 아트를 대표하는 화가. 하류 문화로 여겨지던 만화의 장면을 독특한 스타일의 회화로 만들어 일상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다. 그의 작품은 만화가 지닌 단순하지만 강렬한 선, 점, 색채 등을 저급 인쇄물에서 보이는 망점(벤데이닷)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뉴욕 맨해튼의 중산층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고 학창 시절부터 미술과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는 미술에 관심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등록해서 공부할 수 있는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공부했다. 당시 그를 지도했던 사람은 1920~30년대 뉴욕의 풍경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던 화가 레지널드 마시였다. 1940년 오하이오 주립 대학 미술학부에 입학하면서 본격적으로 미술을 공부했다. 1943~1946년까지 약 3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으며, 군 제대 이후 학교로 돌아와 강사로 일하며 석사학위를 받았다. 1951년에는 뉴욕의 칼리백 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전시회를 개최했다. 1951년부터 1957년까지 클리블랜드에 살면서 대학 강사, 제도공 등 여러 직업을 전전했다. 1957년 뉴욕으로 이주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당시 유행하는 여러 스타일을 시도했다. 그는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을 싫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 당시에는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의 작품도 만들었다. 1960년부터 럿거스 대학교의 강사로 일하면서 동료 강사이자 전위 예술가인 앨런 카프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고 팝 아트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자신만의 스타일을 처음 시도하게 된 것은 아주 우연한 일이 계기가 되었다. 어느 날 미키 마우스 만화를 보던 아들에게 “아빠는 이런 그림을 못 그리잖아”라는 말을 듣고 미키 마우스와 도널드 덕 등을 모티브로 〈이것 봐! 미키(Look Mickey)〉를 그렸다. 그는 곧이어 만화 캐릭터 작품 여섯 점을 만들었다. 리히텐슈타인 특유의 망점(벤데이닷)을 처음으로 사용한 그림이었다. 1962년 뉴욕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말풍선과 의성어, 망점 등이 두드러진 그림들을 선보였다. 그리고 전시회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든 작품이 판매되는 성공을 거두며 일약 스타 작가로 떠올랐다. 1966년에는 미국 작가로는 최초로 런던의 테이트 미술관에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1960년대에는 작품 영역을 꾸준히 넓혀 가 만화를 모티브로 한 그림 외에도 정물화, 풍경화 등을 그렸고, 폴 세잔, 앙리 마티스, 파블로 피카소 등 대가의 작품을 자신의 스타일로 재생산하기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실린 피카소의 〈꽃 모자를 쓴 여인〉을 비롯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모나리자〉, 빈센트 반 고흐의 〈아를의 침실〉 등이 대표적이다. 그는 거장들의 작품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표현해 새로운 느낌을 주면서 하위 문화로 여겨지던 만화같은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예술과 다른 것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1970년대에는 뉴욕에서 동쪽으로 150킬로미터 떨어진 부촌 사우샘프턴으로 이주하여 여생을 보냈다. 말년에는 주로 공공 설치 작품이나 초기작의 리메이크 작품을 만들었다. 1997년 뉴욕 대학교 메디컬 센터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52위. 〈꽃 모자를 쓴 여인〉 • 76위. 〈잠자는 여인〉 • 83위. 〈방이 다 보이는데!···아무도 없어!〉 • 86위. 〈아···알았어···〉 ================================== 로이 리히텐슈타인 화가의 아들 미첼 리히텐슈타인 영화감독 |   출생일 1956년 03월10일, 미국 직업 영화감독, 영화배우 성별 남성 데뷔 1983년 영화 'The Lords of Discipline' 인물 미첼 리히텐슈타인 ================================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1923-1997 1960년대 앤디 워홀과 쌍벽을 이룬 미국 팝 아트의 대표작가 만화적 상상력의 키치 아트 Pop Art 로이의 여인들 Roy's Women     로이 리히텐슈타인-머리 리본을 한 소녀     로이 리히텐슈타인-브래드를 알아요. I know Brad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잊혀지지 않는 멜로디. Reverie   로이 리히텐슈타인-피아노 앞의 소녀 Girl at Piano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아마도 maybe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이 리히텐슈타인-알로하 Alo ha     로이 리히텐슈타인-비치볼     로이 리히텐슈타인-물에 빠진 소녀 drowing girl     로이 리히텐슈타인-울고 있는 소녀 1964      Roy Lichtenstein,                "HAPPY TEARS" (1964)   은 몇 년 전 삼성 특검 때문에 여론의 집중 조명을 받음으로써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리히텐슈타인 작품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결정적인 작품으로  만화 같은 그림의 거래 가격이 '716만 달러(약 86억원)' 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여성은 리히텐슈타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처럼 특별한 개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리히텐슈타인은 진실한 감정이나 깊은 의미를 전달하고자 한 것이 아니고, 단순함을 강조함으로써 대중문화의 가장 '친근한 이미지' 를 새롭게 변형시켰다.   만화의 한 컷 같은 이 작품은 마치 인쇄된 것처럼 보이지만, 망점 하나하나 오랜 시간 '손으로 직접 그려 완성' 했기 때문에 리히텐슈타인의 작품들은 인쇄물처럼 보여도 제작 과정은 결코 쉽지 않은 작품들이라고 할 수 있다.            Drowning Girl (1963).  On display at the Museum of Modern Art, New York.    는 소용돌이치는 파도에 휩싸여 울고 있는 여자의 모습을 묘사한 작품으로 그녀는 여자에게 중요한 '자존심' 을 다친 듯 하다.  "상관없어! (도움은 필요 없어!) 브래드에게 도움을 요청하느니 차라리 물에 빠져 죽겠어!" 라고 외치지만, 물 속에 빠진 그녀는 지금 위험해 보인다.   로맨스 만화를 보고 그린 '물에 빠진 소녀' 에 등장하는 여인은 눈물을 흘리며 말풍선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는데, 비극적인 결말이 뻔히 보이는 것처럼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여인의 모습은 리히텐슈타인의 다른 작품에서 보이는 여성의 모습과 비슷하다.       '물에 빠진 소녀' 의 원작인 마이크 세코스키의 만화 장면 원작에서는 물에 빠진 소녀의 남자친구가 뒤집힌 배에 찰싹 달라 붙어 소녀 쪽을 지켜 보고 있다.          Whaam! 꽝! (1963). On display at Tate Modern, London.   은 리히텐슈타인의 회화 작업 가운데 비교적 사이즈가 큰 1.7×4.0m로, 화폭 두 개를 이어붙인 '이면화(二面畵)' 형식의 작품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 중의 하나다.   '꽝!' 이 참조한 원본 만화는 1962년 만화책 86호에 수록된 전쟁 만화의 한 장면으로 원본 만화에서는 폭격 맞는 오른편 비행기가 세 대 등장하고,  말풍선도 두 개였지만, 리히텐슈타인은 각각 한 개로 수정해서 그렸으며,  또한 폭격당한 비행기에서 솟구치는 화염도 훨씬 유머러스하게 단순 도식화했다.              Roy Lichtenstein's Mural with Blue Brushstroke, in the atrium of the  AXA Center, New York       Red and Yellow  (1962) Oil on canvas. 121.9 x 121.9 cm.          Aloha (1962)    에서 배경 점들의 교차 지점을 살펴보면 문질러 제작한 흔적이 드러난다. 초벌 그림을 그린 종이 아래에 질감이 있는 물체를 놓고 그 위에서 연필로 문지르는 방식이다. 이 방식은 다소 회화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였다.           Alka Seltzer (drawing) (1966) Pencil and tusche, pochoir on paper / 69.2 x 50.8 cm         World's Fair Mural (1964) Oil and magna on plywood / 240 x 192 inches       Modern Painting with Clef (1967) Oil and magna on canvas. 3 panels; 100 x 180 inches overall       Artist's studio "The Dance" (drawing for painting), (1974) Cut and pasted paper, ink, and pencil on paper / 60.8 x 86.7 cm              Girl with Ball, (1961) Oil on canvas / 153.7 x 92.7 cm   는 윤기나는 머리와 빨간 립스틱의 여자가 비치볼을 높이 들고있다.   이 여자의 모습은 매우 진부하지만 리히텐슈타인은 이 그림에서 색채 사용을 제한하고 원래의 흑백 이미지의 소박한 효과를 단순화하였고, 몇안되는 색깔이 각기 다른 기능을 완수하는 싸구려 인쇄만화처럼, 그는 경제의 원칙에 따라 색을 사용했다. 리히텐슈타인의 초기작에는 '공을 든 소녀'에 나오는 이런 젊은 여자들이 계속 나온다.  후기 만화 그림에 나오는 여자들은 좀더 세련된 모습이며, 말이나 생각을 나타내는 말풍선과 함께 등장한다.            Still Life with Goldfish (1974) Oil and magna on canvas / 80 x 60 inches           Sailboats (1985) Oil and magna on canvas / 304.8 x 243.8 cm.       Arctic Landscape, Oil and magna on plexiglass / 61 x 76.2 cm               Still Life with Crystal Bowl (1973) Oil and magna on canvas / 52 x 42 inches             Crying Girl (1964) Enamel on steel / 116.8 x 116.8 cm.          Thinking of Him, (1963) Magna on canvas / 172.7 x 172.7 cm       의 간결함은, 만화를 복제한 작품을 내건 로이 리히텐슈타인을 일약 팝아티스트로의 '명성' 을 얻게 만들었다. 이 작품은 단순한 그림 구성이 잘 표현된 작품으로                      눈물을 흘리며 말풍선 속의 남자를 그리는 한 여성의 복잡한 심경을 대중 문화로서 만화가 갖는 가장 큰 특징인'간결함' 으로 캔버스에 표현되어 있다.           Big Painting No. 6 (1965) Oil and magna on canvas / 235 x 327.7 cm.         Little Big Painting  (1965)   에서는 액션 페인팅의 필치의 세부를 주제로 차용하였다.  세부적인 묘사부분을 위해 그것을 크게 부풀리고 이것이 함축하고 있는 뜻을 액션 페인팅이 정서적으로 충만했던 단계를 이미 지나쳐 회화적 은유가 더 이상의 설득력을 지니지 못한다는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은 액션 페인팅의 표현기법 그 자체가 자동화되었음을 간파했던 것이다.           Hopeless, 절망 (1963)  Oil on canvas / 111.8 x 111.8 cm         여성의 속마음은 “그거야.. 그렇게 시작했어야 했는데! 하지만 이제는 절망적이야!” 라는 문구가 적혀있으며, 빨간색 배경과 노란색 금발 등 원색을 그대로 사용하여 강렬한 인상을 준다. 리히텐슈타인의 작품속 여성들은 모든 문제를 해결줄 수 있는 '백마탄 기사'를 기다리고 있는데, 이러한 여성은 로이 리히텐슈타인이 스스로 구상해 낸 이미지라기 보다는 광고, 연애만화 등 당대의 대중매체에서 흔히 접할 수 있었던 여성의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Kiss1 (1961)   은 리히텐슈타인이 1961년부터 그가 제작한 연작의 출발이었으며, 이 작품을 비롯해 다양한 만화의 컷에서 연작 등이 탄생했다.   리히텐슈타인의 독특한 작업 방식은 망점 이외에도 환등기도 사용했다고 하는데, 캔버스에 환등기를 이용해 만화의 컷을 비추면, 윤곽선과 색감은 필연적으로 떨어지다 보니  윤곽선을 더욱 짙게 그리고,  명암을 강조하면서, 색채의 사용에서도 평면성을 한층 강조하면서 확대된 망점으로 작품으로 만들었다.     Kiss 5  (1964)         Landscape with Figures and Rainbow (1980) Oil and magna on canvas / 84 x 120 inches        We Rose Up Slowly (1964) Oil and magna on canvas, 2 panels / 68 x 92 inches overall         Blonde (1965)   Glazed ceramic / 15 inches high; 38.1 cm high        휠체어를 탄 여자 (Woman in a wheelchair, 1963)   이 작품은 마치 입체파 화가 '파블로 피카소' 의 작품에 영향을 받고  리히텐슈타인만의 독특한 작품으로 표현 한 듯 하다.          The Red Horseman (1974)  Oil and magna on canvas / 213.4 x 284.5 cm.             In the Car, (1963) Magna on canvas / 172.7 x 203.2 cm   는 동일한 제목으로 두 점이 남아있는 작품으로, 애정 관계에 놓인 남녀 주인공이 달리는 차속에서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긴장감' 있게 묘사한 작품이다.  정장 차림의 말끔한 신사가 자신이 모는 승용차 안에 호피 무늬 코트를 입은 콧대 높은 팜므 파탈(악녀)의 블론디 미녀를 태우고 달리는 차안의 장면으로 말풍선이 없어 전후 상황을 파악하긴 다소 어려워, 보는 이에게 '상상' 을 유도하게 하는 작품인 듯 하다.   이 작품은 2005년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 1600만 달러(약 180억원)에 낙찰되었다.        Brattata  1962    리히텐슈타인이 재현한 이미지들은 일견 통속적인 만화이미지를 그대로 캔버스에 옮겨 놓은 듯이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만화의 원래 이미지와 차이점을 보인다. 그는 종종 슬라이드 환등기를 이용하여 작은 만화이미지를 크게 확대하여 그 윤곽을 따라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는데, 그 결과 인쇄 과정 중에 생기는 망점이 눈에 띄게 확대되어 나타났다.                 Coup de Chapeau II ( 1996) Painted and patinated bronze / 89 x 30 x 1 7/8 inches.          Brushstroke Nude (1993) Painted cast aluminum /140 x 42 x 24 inches         Modern Head (1974/89) Painted aluminum / 31 feet x 13 feet x 8 inches.          
301    멕시코 초현실주의 녀성화가 - 프리다 칼로 댓글:  조회:4403  추천:2  2017-01-28
고통스런 삶을 그림으로 승화시킨 화가 프리다 칼로 프리다 칼로 데 리베라(Frida Kahlo de Rivera), Frida Kahlo     출생일 1907년 07월 06일 사망일 1954년 07월 13일 국적 멕시코 대표작 〈내 옷이 거기에 걸려 있다〉,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 〈부러진 척추〉, 〈희망이 없다〉 등 현실주의, 초현실주의, 상징주의와 멕시코의 전통 문화를 결합시킨 화풍이 특징이다.   프리다 칼로의 얼굴이 담긴 멕시코 우표 자신의 고통스러운 생을 강렬하고 충격적으로 그려 냄으로써 관능적이고 개성 강한 자의식의 세계를 창조한 프리다 칼로. 그녀의 작품들은 그녀의 인생과 무관하지 않으며,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자신의 기억과 경험, 환상의 세계를 재창조했다. 멕시코 토속문화와 결합된 초현실적인 화풍은 때로 그녀를 초현실주의자로 분류하지만, 그녀 자신은 초현실주의와의 연관성을 부정했다. 이는 그녀의 그림에 표현된 초현실적인 세계가 그녀에게 있어서는 ‘현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프리다 칼로는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코요아칸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막달레나 카르멘 프리다 칼로 이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유대계 독일인 빌헬름 칼로, 어머니는 스페인과 인디오의 혼혈인 마틸데 칼데론이다. 아버지는 사진가로 온건한 성격이었으나 어머니는 강한 성격에 멕시코 혁명 당시 멕시코 청년공산당에 가입했을 정도로 열성적인 스탈린주의자였다. 프리다의 성격과 혁명가적 기질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듯하다. 프리다는 6세 때 소아마비에 걸려 오른쪽 발이 휘어 다리를 절었다. 친구들은 그녀를 ‘목발의 프리다’라고 놀렸고, 이는 그녀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사춘기 시절에는 오른발이 제대로 자라지 않아 다리 길이가 다른 것을 감추기 위해 늘 긴 멕시코 전통 치마를 입고 다녔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비극은 18세 때 일어났다. 1925년 9월 17일 하굣길에 그녀가 탄 버스가 전차와 충돌하면서 전차의 금속 기둥이 그녀의 몸을 관통했고, 버스가 폭발하면서 그녀의 몸에 무수히 많은 파편이 박혔다. 프리다는 사고에서 회복되는 데만 2년이 넘게 걸렸으며, 이 사고로 평생 고통받았다. 꼼짝하지 못하고 누워 있어야 하는 지루함과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해 그녀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사고는 그녀의 육신만 망가뜨린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꿈도 빼앗아 갔다. 그럼에도 프리다는 다른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에너지가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침대의 캐노피 윗부분에 거울을 달고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했다. 인용문 “나는 자주 혼자여서, 또 내가 가장 잘 아는 주제가 나이기에 나를 그린다.” 〈물이 나에게 준 것〉 파리 다니엘 필리파치 컬렉션 1928년, 칼로는 멕시코 공산당에 가입했고, 평생의 사랑이자 고통, 연인이자 적인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그녀는 당대 추앙받는 화가이자 혁명가였던 디에고에게 자신의 그림을 보여 주었고, 디에고는 그림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았다. 디에고는 프리다에 대해 이렇게 느꼈다고 한다. “예기치 않은 에너지, 특색 있고 명쾌한 인물 표현, 진정한 엄정함 …… 이 소녀는 진정한 예술가다.” 프리다는 이에 화가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혔고, 이듬해 두 사람은 21세의 나이차를 극복하고 결혼했다. “나의 평생의 소원은 단 세 가지, 디에고와 함께 사는 것, 그림을 그리는 것, 혁명가가 되는 것이다.” 프리다는 디에고를 화가로서, 혁명가로서 존경했지만, 한 남자로서도 지극히 사랑했다. 그리고 디에고는 그녀의 인생 전체를 지배했다. 그러나 두 번의 이혼 전력과 심각한 여성 편력을 지니고 있던 디에고는 결혼 후에도 수없이 외도했으며, 그중에는 프리다의 여동생 크리스티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프리다의 결혼 생활은 고통과 고독, 상실감으로 얼룩졌다. 훗날 프리다는 디에고와의 결혼 생활을 (교통사고에 이어) ‘두 번째 대형사고’라고 표현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평생 디에고를 놓지 못했다. 프리다 칼로와 디에고 리베라 결혼 후 프리다는 작품 활동을 할 여유가 없었다. 또한 멕시코 혁명에 적극적으로 동참했으나 결혼한 해에 리베라가 공산당에서 축출당하면서 그녀 역시 공산당에서 탈당했다. 1930년, 디에고가 샌프란시스코 증권거래소 벽화 작업을 의뢰받은 것을 계기로 부부는 샌프란시스코로 떠났다. 3년간의 미국 생활은 끔찍했다. 화가로서의 정체성은 ‘디에고 리베라의 아내’라는 이름에 묻혔고, 디에고는 프리다를 홀로 내버려 두었다. 사고 후유증으로 골반과 등뼈가 손상되어 두 차례의 유산을 경험했고, 몸의 통증 역시 심각해졌다. 게다가 디에고가 미국의 산업화와 발전에 경탄을 보낸 것과 달리, 그녀는 미국 상류층의 부패, 근본적인 인간 가치 붕괴, 심미안과 감수성 결핍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멕시코로 돌아가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두 사람은 항상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절망적인 상황은 〈멕시코와 미국의 국경에 선 자화상〉, 〈내 옷이 거기에 걸려 있다〉, 〈헨리 포드 병원〉, 〈나의 탄생〉과 같은 작품으로 표출되었다. 결국 1933년 디에고가 록펠러 센터 벽화의 노동자 지도자를 레닌의 얼굴로 그리는 바람에 록펠러 재단과 불화를 일으켜 부부는 멕시코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부부의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리베라는 작업을 하면서 모델을 선 여성들과 계속 바람을 피웠고, 이번 상대는 여동생 크리스티나였다. 정신적 충격과 함께 몸의 통증도 심해져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세 번째 유산을 했다. 그녀는 멕시코시티에 집을 얻었고, 디에고와 살던 집을 떠났다. 그리고 〈몇 번 찔렀을 뿐〉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 그림은 질투 때문에 애인을 살해한 남자가 ‘그저 몇 번 찔렀을 뿐이라고요’라고 변론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고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살인에 대한 끔찍한 묘사는 마치 당시 디에고와 프리다의 개인적인 상황에 대한 은유로 읽힌다. 1936년, 프리다는 다시 리베라의 집으로 돌아왔고, 공산당 활동을 재개했다. 리베라의 바람기는 다소 잠잠해졌으나 이번에는 프리다가 염문을 일으켰다. 상대에는 멕시코로 망명 온 레온 트로츠키도 있었는데, 프리다는 〈레온 트로츠키에게 바치는 자화상〉을 그리고, 거기에 ‘사랑을 담아’라는 헌사를 담아 생일 선물로 선사했다. 앙드레 브르통은 이 그림을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프리다와 멕시코를 초현실주의가 구체화된 곳이라고 여겼다. 브르통과의 만남으로 프리다는 1938년과 1939년 뉴욕과 파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국제적인 명성을 누리기 시작했다. 1939년 말, 디에고는 프리다에게 이혼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이혼했다. 끝없이 실망하고 배신감에 고통받으면서도 디에고를 놓지 않았던 그녀는 완전히 절망했다. 척추의 고통도 심각해져 몇 차례 대수술을 받아야 했고, 이듬해 그녀는 수술을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리베라가 다시 그녀를 찾아왔고, 두 사람은 1년 만에 재결합했다. 고통과 절망뿐인 관계였지만, 그녀에게 있어 디에고는 없어서는 안 될 절대적인 존재였다. 두 번째 결혼은 비교적 고요하고 안정적이었다.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회화 조각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으며, 리베라의 아내가 아니라 화가 프리다 칼로로서 국내외에 명성을 쌓아 갔다. 그러나 고요한 생활은 얼마 가지 않았다. 등과 오른쪽 다리의 통증이 계속되었고, 몇 차례의 척추 수술을 거듭하면서 침대 생활을 하는 날이 길어졌다. 1944년 작 〈부러진 척추〉에는 황폐한 풍경을 배경으로 몸이 갈라지고 철제 보정기를 착용하고 있는 프리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녀는 석고 깁스에 자신의 부러진 척추나 다양한 아이콘들을 그려 넣기도 했다. 회복에 대한 희망과 절망을 오가면서 그녀는 〈희망이 없다〉, 〈희망의 나무, 굳세어라〉, 〈상처 입은 사슴〉과 같은 그림을 그렸다. 1940년대 말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었고, 혈액 순환이 되지 않아 오른발이 썩어 들어갔다. 결국 프리다는 1953년에 다리 아랫부분을 절단해야 했다. 휠체어에 기대 간신히 앉아 있는 그녀를 지탱해 준 것은 사회적인 활동이었다. 그녀는 집 밖에 거의 나가지 못했으나 1948년 공산당에 재입당해 당에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했다. 〈마르크스주의가 병든 자를 낫게 하리라〉, 〈프리다와 스탈린〉, 〈긴 일생과 파릴 박사가 있는 정물〉 등 그녀가 죽기 전 그린 그림에는 이런 정치적 관심들이 포함되어 있다. 또한 평화 운동 지지 서명 운동에 참여하고, 미국의 과테말라 내정 간섭에 항의하는 시위에도 참가했다. 그녀는 어느 날의 일기에 이렇게 썼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조그만 일이라도 혁명에 도움이 되도록 온 힘을 다해 투쟁해야 한다. 혁명은 살아야 할 유일하고 진정한 이유다. 수술과 약물, 고통으로 그녀의 그림은 선명함을 잃어 갔고, 최후에는 몸도 가누지 못해 침대에 이젤을 설치하고 누운 채로 그림을 그렸다. 1953년 그녀의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한 디에고와 친구들은 그녀의 전시회를 개최했다. 멕시코에서의 첫 개인전이었다. 프리다는 침대에 누운 채 참석했다. 그리고 1954년 7월 13일, 47세의 고통스러운 삶을 마쳤다. 그녀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 돌아오지 않기를’이라고 쓰여 있었다. 1년 후 디에고는 그녀가 태어나고 죽은 ‘푸른 집’을 국가에 기증했고, 이곳은 1958년 프리다 칼로 미술관으로 개관됐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는 프리다 칼로의 ‘푸른 집’     프리다칼로   나는 프리다칼로를 생각하면, 그녀의 아픔부터 생각이 난다. 직접 겪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작품을 보면 그녀가 얼마나 큰 고통을 참으면서 하루하루를 그리고 1분1초를 살아갔을지가 느껴진다.   프리다칼로는 어린시절 버스를 타고 가다 전차와 부딪히는 사고를 겪게된다. 승객용손잡이가 달려있었던 쇠파이프가 프리다칼로의 몸을 관통한것이다.   가슴, 골반, 허벅지까지 관통한 쇠파이프   살아있음에 감사해야 했던 사건이었다. 그 후 프리다칼로는 침대에 누워 거울을 들여다보면서 자신의 자화상을 그렸다.                     그림만으로 그녀의 고통이 어떠한지가 느껴진다.              아름다운외모를 가졌지만, 불의의 사고로 고통과 함께 삶을 살아가야했던 프리다칼로 프리다칼로는 그 고통을 미술로 잊어보려고 했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고통을 잊을수있었다는 프리다칼로...   그녀의 그림을 보면서, 가슴이 아프고, 뜨거워지는건 그녀의 고통이 그림속에 스며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   프리다 칼로의 생애와 작품세계   멕시코를 대표하는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페미니스트들의 우상인 프리다 칼로(Frida Kahlo, 1907~54)는 멕시코의 한촌 코요아칸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태어난 1910년대의 멕시코에는 민중적 각성에 의한 농민봉기, 노동자 파업, 지식인의 무장투쟁이 끊이지 않았다. 결국 다가올 러시아혁명을 예고하는 최초의 사회혁명이 여기에서 일어났다.     이런 사회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 프리다는 21세 되던 해에 운명적 사랑인 디에고 리베라(Diego Rivera, 1886~1957)를 만났다. 천재 벽화화가이자 열렬한 사회주의자며 호색한인 디에고와의 결혼은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합’만큼이나 어울리지 않는다는 당대의 평가를 받았다. 평생에 걸쳐 여러 번의 헤어짐과 재결합을 계속 한 끝에 두 사람은 마침내 서로에게 영감을 주는 예술적 동반자로서의 자리매김을 간신히 할 수 있었다. 디에고는 연약한 육체를 가졌지만 불굴의 예술적 투지를 가진 프리다에게서 예술혼이 뭔가를 체험한 반면, 프리다는 디에고를 통해 ‘초현실주의 화가’라는 범위를 넘어 가장 멕시코적인 작품을 좀 더 집요하게 파고 들 수 있었다.  처제와의 염문 등 청탁을 가리지 않는 디에고의 병적인 호색기질에 한평생을 시달리고, 18세 때 겪은 끔직한 교통사고로 살아 생전 7번에 걸친 척추 대수술을 감내해야 했던 최악의 운명도 그녀의 불타는 예술혼을 잠재우지는 못했다. 그녀에게 있어 그림은 육체와 영혼의 파멸을 딛고 일어나 자기자신으로 남는 유일한 길이자 존재의 긴박한 이유였다. 자화상을 자주 그린 그녀는 그림 속에서 단 하나의 고정된 자아가 아닌 다양한 자아의 모습을 담아내려 애썼다.    1939년 파리 ‘르누와 콜 갤러리’에서 열린 ‘멕시코전’에서 당대의 거장 파블로 피카소, 바실리 칸딘스키, 마르셀 뒤샹 등의 찬사를 받으며 초현실주의를 넘어서는 민중예술가로서 세계적 위상을 마침내 구축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도 육체적 불행을 계속 강요하는 운명의 굴레는 너무도 버거웠던 것일까... 1954년 7월 13일, 오랜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을 직감한 그녀는 “이 외출이 행복하기를,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이라는 인상적인 일기 귀절을 남기며 민중집회에 참여했다 47세의 우여곡절적인 삶에서 마침표를 찍었다   버스에서(1929)   이 당시 멕시코 사회의 여러 사회계층적 인물들을 버스 승객으로 묘사하여  자리에 서로 앉아있게함으로서 각 계층 간의 관계를 한 눈에 보여주려 한다.. 서로 간에 냉담한 포즈를 애써 지으려 하는것에서 계층 간 골이 제법 깊게 여겨진다   프리다와 리베라(1931)   프리다의 인생에서 버스충돌 사고 만큼이나 괄목할 만한 사건은 식인귀라는 별명을 가진 디에고 리베라와 운명적으로 만나 21세의 나이 차이를 넘어 결혼한 것이었다   나의 탄생(1932)   이 그림은 프리다의 그림 중 가장 충격적인 대담함을 보인다. 비탄에 잠긴 마리아 상이 걸려있는 벽을 배경으로 자궁에서 힘들게 나오는 아이는 험난한 운명이 기다리고 있는 프리다 자신을 상징하는 듯 하다.   떠있는 침대(1932)[ 헨리포드 병원 (1932) ]   이 그림은 프리다의 선혈적인 자화상 시리즈 중 첫번째 작품이다. 여기에는 고독감에 싸인 채 아무런 외부 도움을 받을 수 없는 프리다 자신의 처지가 지평선 너머 황량한 산업도시를 배경으로 하여 을씨년스럽게 그려지고 있다. 리본의 끈은 유산 당시의 절망적인 심정을 나타내고, 달팽이는 임신에 실패하는 유산과정의 상징인양 묘사된다 [ 헨리포드 병원 (1932) ] 세번이나 임신을 해도 모두 유산이 되고 만 프리다는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하기도 합니다. 많은 사고와 병으로 인해 완전하지 못한 몸을 가진 그녀였지만 그녀안에 있는 열정들은 쉽게 포기하지 않게 하죠. 아기도, 자궁도, 희망도, 기대하는 마음이 클수록, 커지는 그녀의 슬픔이 그림 속에 묻어나고 있습니다   멕시코와 미국 두개의 세계 사이에서(1932)   이 그림은 디트로이트를 방문한 뒤 이 지역 찬미가로 변신한 디에고에 대한 실망감을 프리다 자신의 멕시코 사랑과 대비시켜 묘사한 작품이다. 오른쪽은 미국의 모던화된 산업도시의 차가움을 , 왼쪽은 멕시코의 태양과 토착문화에 대한 프라다의 애착을 은연 중 드러내고 있다   내 치마가 저기 걸려있다(1933)   이 그림에서 프라다는 넘칠 것 같은 쓰레기통, 공기를 오염시키는 굴뚝, 기둥 위에 놓인 하얀 변기 등 미국에서 가장 추한 물건들을 전면에 드러내 보임으로서 미국적 산업세계에 대한 자신의 반감을 나타내었다. 대신 멕시코 원주민의 상징인 치마를 한복판에 걸어놓은 것에 대해 시인 살바도르 노보는 "말리려고 널어놓은 테우아나의 셔츠가 허드슨 강에 오줌을 눈 상황"이라고 프리다의 의미심장한 내심을 포착해 내었다   몇 개의 작은 상처들(1935)   디에고가 여동생 크리스티나와 염문을 피운 사실을 전해 듣고 그 절망한 심정을 이 그림 한 장으로 묘사했다. 디에고가 자신에게 가한 배반의 칼질로 얼마나 쓰라린 고통의 상처 속에 몸부림치는가를.. 그녀는 디에고가 그토록 좋아한 긴 머리카락을 잘라버린 채 난도질 당한 몸매를 침대 위에 널부러뜨려 놓고 있다.   가슴 아픈 기억(1937)   디에고에게 떨어져 몇 달을 보낸 뒤에 프리다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외로움에 못 견뎌 디에고에게 다시 돌아왔다. 하지만 균열된 믿음은 결코 복구할 수 없었다. 이 상황을 이 그림은 잘 나타내고 있다. 프리다의 발치에 놓여있는 거대한 심장은 샘처럼 피의 강을 이룬 채 산과 바다를 향해 흐르고 있다.   세살에 죽은 디마 로사(1937)   프리다의 친구이기도 했던 꼬마 디마의 죽음은 그녀에게 멕시코의 비극을 그대로 상징하는 듯 했다. 프리다는 고대 인디언 의식에 제물로 바쳐진 어린 아이처럼 그녀의 치마 위에 누워 있는 디마의 모습을 존엄성이 가득차게 묘사했다   유모와 나(1937)   프리다는 여기에서 연년생 동생 때문에 유모의 젖을 먹고 커야 했던 자신의 유아시절을 묘사하고 있다. 성인 얼굴에 어린 소녀의 몸을 하고 대지의 어머니이자 멕시코 혼혈 원류의 상징인 인디오 유모 품에 안겨 젖을 먹는 형상은, 자신의 뿌리가 아즈텍의 토착 신앙에 근거하며 여기에 자신의 예술혼을 내맡기겠다는 이심전심을 보여주는 듯도 하다.   트로츠키에게 헌정한 자화상(1937)   스탈린과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해 멕시코로 망명온 트로츠키 일행을 프리다와 디에고 부부는 자신의 집에 귀빈으로 머물게 초대했다. 이 시기에 프리다는 라틴 여인의 활달한 장난기와 바람기가 섞인 조금 복잡한 감성으로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영웅인 트로츠키와 유혹적인 연애유희 게임을 즐겼다. 이런 심사속에 프리다는 자신의 연애상대인 노정객을 당혹감에 빠뜨리는 애정고백적인 자화상을 그린 것이었다.   물이 내게 주는 것(1938)   이 그림을 보고 앙드레 브루통은 "여기에는 잔인함과 해학성이 대담하게 버무려져 있다. 하지만 이들만이 고귀한 멕시코적 감정의 힘들을 결합시킬 수 있다"고 평했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예술은 '폭탄 주위에 둘러진 리본'이다"라고 말을 맺었다.   도로시 헤일의 자살(1938)   미국잡지사 여기자인 베네티 웨어가 뉴욕 고층빌딩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여배우 도로시 헤일의 자살관경을 그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제작한 그림이다. 하지만 프리다는 자신이 자살한 광경으로 변형시켰다. 이 무렵 디에고와 헤어져 멕시코를 떠날 때의 절망적 심정을 노출한 것이리라..     두명의 프리다(1939)   디에고와 이혼한 직후에 그려진 이 그림은 프리다 자신이 가진 두개의 상치된 자아를 표현하고 있다. 두 형상 중 실제 프리다의 모습은 멕시코 전통의상인 테후아나를 입고 있고, 그 옆에는 자신의 분신이 유럽풍의 드레스를 입고 있다. 이 둘의 심장은 하나의 혈관으로 연결되고, 그 혈관의 끝은 분리되어 유럽적 프리다의 드레스에 피를 흘러내리게 한다. 그녀가 자신을 빼다 닮은 분신을 설정해 피로 얼룩지게 한 것은 자살과 죽음의 이미지를 표출하려는 의도 외에, 끝없는 고독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심정을 나타낸 것 같다.   꿈(1940)   머리카락을 깎은 자화상(1940)   여기에서 프리다는 방안 가득 잘라낸 자신의 머리카락 속에 무표정한 얼굴로 꼿꼿하게 앉아 있다. 그 위에는 분노와 허탈감이 교차된 노래가사가 울려 퍼진다: "알아?, 내가 널 사랑한 건 네 머리카락 때문이었는데 이제 그 머리카락이 네게 없으니 더 이상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엘로서 박사에게 보낸 자화상(1940) 프리다만큼 자화상을 많이 그린 화가는 드물지요. 어려서부터 혼자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던 그녀는 거울을 천장에 붙여놓고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며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자신의 얼굴에 대한 인상을 확실히 가지고 있었지요. 그리고 확실히 가지고 있던 자신의 얼굴을 그리면서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고자 하였습니다   내 마음 속의 디에고(1943)   테후아나 지방의 전통 의상을 착용한 채 이마에 리베라를 담고 있는 이 자화상은  불성실한 남편에 대한 분노와 질투보다는 어느 정도 체념한 듯 달관한 듯한 심리변화를 엿보이게 한다 “테우아나 차림의 자화상”이라고도 불리우는 작품입니다. 테우아나는 멕시코 전통의상입니다. 특별한 의식의 의상을 입고 있는 자신의 이마에 디에고를 그려놓았다는 것은 그녀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프리다에게 있어서 디에고는 가장 완벽한 존재, 그리고 그녀가 유일하게 신성시하며 존경하는 존재였습니다.   뿌리 또는 거치른 땅(1943)   이 그림에서 프리다는 대지의 어머니같이 여겨지는 식물로부터 더없이 편안한 자세로 자양분을 제공받고 있다. 보다 더 멕시코적인 예술을 꽃피우기라도 하겠다는듯이..    그림 속의 화산으로 뒤덮인 멕시코 대지가 자신의 뿌리임을 나타내고 있는 작품잊요. 식물의 줄기와 사람의 핏줄이 서로 얽혀 있는 모습으로 남들보다 몸은 건강하지 않지만 생명력만은 누구보다 강하다는 것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한 사람의 생명과 죽음은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부러진 척추(1944)   여섯 번이나 척추 대수술을 받아야 했던 자신의 육체적 고통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코르셋으로 부러진 척추를 얼기설기 추스려 몸을 고정시킨 채 힘겹게 서있는 프리다의 모습은 보는 이들을크게 안스럽게 한다. 저 멀리 황폐한 배경조차 그녀의 고통과 처연함을 극대화하는데 한 몫 하고..   16살때에 당한 전차 사고로 인해 프리다의 척추는 부서졌고 그녀는 7번이나 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20년동안 그녀의 척추는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였습니다. 그 사고로 인해 그녀가 받았던 고통은 그녀의 몸에 박혀있는 못들로, 흘러내리는 눈물로, 황량한 사막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   희망은 사라지고(1945)   희망의 나무여 우뚝 솟아라(1946)   살갗을 벗길 듯 강렬하게 내려쬐는 태양과 차가운 요기의 달로 인해 둘로 나뉜 사막을 마주한 프리다가, 허리에 깊은 상처가 움푹 패인 채 들 것에 누워있는 자신의 분신을 옆에 하고 앉아 있다. 이런 극심한 부정속에서야 희망은 떠오르는 법이런가.. 자신의 망가진 척추를 지탱해주고 있던 지지대를 떼어내고 언젠가는 건강한 모습으로 서고 싶다는 바람을 그려낸 것입니다. 그림의 반쪽이 어둡고 황량한 밤의 모습이지만 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뒷모습의 그녀는 밝은 햇살 속의 아침에 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그녀의 희망입니다   원숭이와 함께 한 자화상(1945)   디에고와의 사이에서 임신한 아이를 유산한 뒤 프리다는 더욱 무표정한 얼굴로 원숭이 등 애완동물릉 동반한 자화상을 많이 그리게 된다. 이런 애완동물은 말할 것도 없이 세상을 못보고 간 아이에 대한 대체적 상징이다.   머리를 늘어뜨린 자화상(1946)   이 자화상은 디에고가 프리다의 눈썹이 하늘을 나는 티티새같다고 말하던 시절의 추억을 담은 그림이다. 여기에서 운명의 손은 귀고리가 되었고, 머리카락은 뒤엉켜서 풀잎 목걸이로 변모했으며, 늘 그렇듯 뺨위에는 눈물방울이 맺혀져 있다.  무언가 묻는 듯한 시선은 별들이 사라진 후에도 오랫동안 우주를 떠다니는 빛처럼 공허하면서도 집요하다   상처입은 사슴(1946)   여러차례의 척추수술, 유산, 한쪽 발 절단 등 온갖 신체적 고통을 겪은 프리다는 자신을 상징하는 화살맞은 사슴을 그리며 달관 속에 단련된 심정을 처연하게 드러낸다. 도대체 저렇게 많은 화살을 맞고서도 얼굴 한번 찌푸리지 않는 저 평온한 표정의 역설이라니... 비록 여러 개의 화살을 맞아서 피를 흘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강한 시선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면서 얼굴은 프리다로 표현하여 자신과 동일시 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삶에 대한 강한 의지와 자신의 고통을 통하여 또다른 차원의 예술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디에고와 나(1949)   여기에서 프리다의 긴 머리는 저절로 목부분에 감겨져 있으며, 그것은 그녀를 질식시킬 듯이 위협적이다. 그럼에도 디에고에 대한 맹목적이다 싶은 애정은 그녀의 표정에서 조금도 사그라진 것 같지 않다.   우주, 지구, 멕시코, 디에고와(1949)   고대 멕시코의 신화적 분위기를 풍기는 이 그림 이후에서부터 프리다는 더 이상 디에고에 대한 절망감을 표출하지 않는다. 대신 모성애적 관대함으로 점철된 그녀의 심리가 뚜렷이 보인다. 그녀의 모습에서는 달관한 여인처럼 금욕 억제적이며 냉정한  표정으로 모든 것을 참고 이기며 담담히 받아들이려는 결의가 엿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디에고와 연출했던 사랑과 증오의 오랜 유희는 무한한 생명추구 유희로 승화된 듯 하다.   Fruits Of The Earth(음식)      
300    미국 미술계 팝아트 제왕 - 앤 디워홀 댓글:  조회:5851  추천:0  2017-01-28
  출생일 1928년경 사망일 1987년 02월 22일 국적 미국 대표작 〈캠벨 수프 통조림〉, 〈2달러 지폐들〉, 영화 〈첼시의 소녀들〉 등 매스미디어에서 소재를 찾아 작품을 대량 생산하면서 미술계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나는 그저 언제나 내게 아름다워 보이던 것들, 우리가 깨닫지 못한 채 매일같이 쓰고 있던 물건들을 그린 것뿐이다.” 미술계 최초의 팝스타, 생전에 이미 전설이 된 현대 미술의 아이콘 앤디 워홀. 그는 캠벨 수프, 코카콜라, 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먼로 등 등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들을 모티프로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그는 대량 소비 사회의 일상적 오브제들을 예술품으로 승화시켰으며, 실크 스크린, 스텐실, 에피스코프, 데칼코마니 같은 혁신적인 기법을 사용하여 작품을 대량 생산하면서 순수 미술과 상업 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이런 시도들에 담긴 함의는 포스트모던 미술에 전반적인 영향을 끼쳤으며 워홀은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미술가로 꼽힌다. 워홀은 1928년경 미국 펜실베이니아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본명을 앤드류 워홀라이다. 아버지는 석탄 광산에서 일하던 체코슬로바키아 이민자로, 그가 14세 무렵 오염된 물 때문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런 가정환경은 후일 워홀을 아메리칸 드림의 표상으로 만들었으며, 워홀은 여기에 몇 가지 소문을 더하여 인생 내력을 포장해 마케팅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는 개인적인 내력을 모두 감추거나 부정했는데, 출생증명서가 위조라고 주장할 만큼 객관적인 기록조차 모두 부정했다. 그는 사생활을 지키고자 무척 신경을 썼으나, 이 역시 단순한 사생활 보호가 아니라 자기 인생에 대한 신비화 작업의 일환이기도 했다. 워홀은 피츠버그의 카네기 공과대학에서 산업 디자인을 전공했으며, 1949년 뉴욕으로 올라와 잡지 일러스트레이터 및 광고 디자이너로 일했다. 1950년대 〈보그〉, 〈하퍼스 바자〉 등의 잡지와 광고에 삽화를 그렸으며, 아트 디렉터로 각종 상업 광고물을 제작했다. 그는 아트 디렉터 클럽 어워드, 아트 디렉터 클럽 메달 등을 수상하고, 뉴욕 현대미술관의 〈최근의 드로잉, 미국〉 전에 초청되었다. 또한 〈라이프〉 지도 그의 삽화들을 출판하는 등 젊은 나이에 상업적으로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워홀은 늘 ‘위대한 예술가’로 성공하기를 꿈꿨으며, 르네상스 시대의 작품들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때도 그는 미래의 예술적 행보를 꿈꾸면서 자신의 이미지를 만들었다고 한다. 가령 그는 자신의 진지한 성격과 취향을 백치미가 넘치는 백금발의 가녀린 외모 뒤에 숨겼으며(이는 그가 숭배했던 마릴린 먼로가 스타가 된 행보와 유사하다), 옷차림과 장신구에 무척 관심을 기울였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1950년대 말, 워홀은 캔버스에 작품을 그리기 시작했으며, 광고와 뉴스 표제 기사, 연재 만화 등 매스미디어에서 소재를 찾았다. 그리고 1960년대 초 배트맨, 딕 트레이시, 슈퍼맨 등 만화 속 인물에 대한 연작을 제작하면서 팝아트 운동에 동참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도 대중 만화와 광고에서 소재를 찾은 아티스트들은 여럿 있었다. 또한 워홀의 작품 제작 방식 역시 당대의 다른 팝아트 작가들을 모방하여 대량 생산된 이미지에 물감을 뭉개거나 흘린 것으로 신선하다고 할 수 없었다. 때문에 이때만 해도 그는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 무엇보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제재를 가지고 다른 방식으로 작업한 로이 릭턴스타인의 작품을 보고 대중 만화를 모티프로 삼기를 포기했다. 곧 그는 일상적인 소비재, 달러 지폐, 유명인의 초상화 등을 제재로 삼았으며, 기법도 실크 스크린으로 바꾸었다. 1962년, 워홀은 〈캠벨 수프 통조림〉, 〈2달러 지폐들〉을 실크 스크린 기법을 사용해 제작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비 사회의 물품들에서 마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엘비스 프레슬리 등 대중문화의 아이콘이 된 할리우드 스타들의 스틸 사진을 잘라 다양한 크기에 다양한 색깔을 입혀 대량으로 복제했다. 워홀은 인물의 내면이나 성격을 드러내는 ‘초상화’의 기능을 수행하는 데 관심이 없었으며, 그의 작품 속에서 인물들은 대중문화와 소비문화의 산물, 그 자체로 보였다. 앤디 워홀이 실크 스크린 기법으로 제작한 〈마릴린 먼로〉가 담긴 우표 또한 이 시기 〈제트기에서 129명 사망(비행기 추락사고)〉, 〈피로 물든 인종 폭동〉과 같이 신문의 보도사진을 활용한 실크 스크린 작품을 제작했는데, 이 사진들은 그의 작품 속에서 ‘사건’이 지닌 비극성과 진실을 보여 주는 대신 회화적이고 시각적인 이미지로만 기능했다. 그럼으로써 워홀은 실제 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태도에 존재하는 취약성을 그대로 폭로했다. 그런 한편 사형 제도를 고찰하게 하는 전기의자 연작들과 케네디 대통령 저격 사건 직후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를 복제하면서 시대 상황 및 그에 대한 함의를 담은 작품도 제작했다. 워홀이 만들어 낸 아름다운 영부인에서 미망인이 된 재클린 케네디의 이미지들은 그 어떤 보도사진보다 대중에게 강한 충격을 주었다. 1962년, 워홀은 후일 ‘팩토리’라고 불리는 다락방을 임대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공장에서 대량 생산하듯 만들어진다는 것을 이미지화하여 작업실에 팩토리라는 이름을 붙였고 실제로 그는 ‘아트 워커’를 고용해 작품을 대량 복제했다. 이곳에서 그해부터 2년간 약 2천 점이 넘는 작품이 제작되었다고 한다. 팩토리는 단순히 작업실이 아니라 사교의 장소이자 워홀의 이미지를 생산해 내는 곳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워홀은 믹 재거, 트루먼 카포티, 에디 세즈윅 등과 함께 머물렀고, 끊임없이 파티를 열어 당대의 유명인사들을 불러들였다. 이곳은 당대 예술 현장의 중심이 되었다. 또한 영화, 음악 등 다양한 작업들이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워홀은 1963년 팩토리에서 전위 영화 〈잠〉과 〈엠파이어〉를 제작했으며, 이듬해에는 75편의 영화를 만드는 엄청난 기록을 세웠다. 할리우드 스타들에 대한 관심만큼 영화 제작에 열을 올린 나머지 1965년에는 영화 제작에 몰두하기 위해 회화를 포기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그러나 실제로 그가 회화 작업을 하지 않은 것은 몇 년 되지 않았다). 그가 만든 영화는 총 250여 편에 달하며, 그중에는 〈첼시의 소녀들〉과 같이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작품도 있다. 또한 1965년에는 전위 음악을 하는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프로듀싱과 재킷 디자인을 했다. 앤디 워홀과 극작가 테네시 윌리엄스 1968년, 워홀은 팩토리에서 작업하던 중 직원이었던 발레리 솔라나스에게 저격당했으나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솔라나스는 “그가 내 인생을 지배하고 있다.”라고 저격 이유를 밝혔다. 워홀은 여기에서 영감을 얻어 작품 〈해골〉을 만들었으며, 이 사건으로 팩토리는 더욱 유명세를 탔다. 1970년, 〈라이프〉 지는 워홀을 비틀스와 함께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선정했다. 1970년대에 워홀은 미술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잡지 〈인터뷰〉를 창간했다. 또한 유명인의 초상화를 주문받아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했으며, 닉슨의 중국 방문에 맞춰 〈마오〉 연작을 제작했다. 1980년대에는 카무플라주 패턴을 활용한 〈요셉 보이스〉, 심리학자 헤르만 로르샤흐가 개발한 심리 테스트용 형상에서 모티프를 얻어 얼룩을 활용한 추상 작품 〈로르샤흐〉를 제작하는 등 실험적인 시도를 했다. 또한 1972년부터 시작한 〈마오〉 연작에서는 실크 스크린으로 작업한 뒤 수작업으로 표현한 부분을 강조했는데, 이런 경향은 1980년대에 더욱 심화되어 〈르네상스 회화의 부분〉 연작처럼 캔버스에 아크릴이라는 정통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제작하기도 한다. 워홀은 도발적인 멋쟁이, 팝아트의 제왕, 최초의 예술가 스타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우며 도발적인 삶을 살았다. 총격 사건 때도 두 달간의 투쟁 끝에 살아난 그였으나, 죽음은 생각보다 어이없이 찾아왔다. 1987년 2월 21일, 워홀은 뉴욕 코넬 의료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았다.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으나 워홀은 다음 날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인한 심장발작을 일으켜 사망하고 말았다. ================================     출생일 1928년 사망일 1987년   앤디 워홀 미국 팝 아트를 대표하는 작가. 산업 디자이너로 미술계에 발을 들인 후 예술가로 큰 명성을 쌓았다. 도발적인 주제와 혁신적인 제작 기법, 파격적인 언행으로 늘 화제의 중심에 있었으며 예술을 지나치게 상업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등 수많은 논란을 일으켰다. 회화뿐만 아니라 출판, 영화, 사진, 광고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했으며, 미국 문화 특히, 물질 만능주의와 관련된 작품들을 만들었다. 1928년 미국 피츠버그의 슬로바키아 출신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똑똑하고 창의적인 기질을 보였으나 몸이 약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주로 라디오를 듣거나 대중문화 잡지의 사진을 모으며 시간을 보냈다. 대학교 교육을 받을 만큼 여유로운 형편이 아니었으나 열네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남긴 돈으로 카네기 멜론 대학교에 입학하여 산업 미술을 공부했다. 1949년 뉴욕으로 건너와 1950년대에는 잡지 일러스트와 광고 제작 일을 했고 업계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상업 미술에서의 성공을 바탕으로 예술가가 되기 위한 준비에도 착수했다. 1952년 드로잉 작품 15점으로 개인전을 연 것을 시작으로 몇 번의 전시회를 열었고 1956년 뉴욕 현대 미술관(MoMA)에서 열린 그룹전에 참가했을 때 접한 재스퍼 존스나 라우션버그 등 떠오르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접하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초기에는 만화나 광고에서 이미지를 차용하여 붓 터치를 노출하는 등 추상 표현주의 스타일의 작품을 만들었으나 점차 작가의 손길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자신만의 스타일을 찾았다. 1961년 캠벨 수프 이미지를 사용한 작품을 처음 만들었고 1962년에는 실크스크린 기법을 작품 제작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같은 해 진보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을 주로 전시한 로스앤젤레스의 페러스 갤러리에서 전시회를 열고 〈매릴린 두 폭〉, 〈100개의 수프캔〉, 〈100개의 코카콜라 병〉, 〈1달러 지폐 200장〉 등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한 작품을 선보이며 유명세를 얻었다. 그는 대량 생산된 이미지를 그리는 것을 넘어서 작품 자체를 대량으로 생산했다. 코카콜라, 캠벨 수프와 같은 기성품 외에도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등 할리우드 스타들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제작하면서 대량 생산, 대량 소비로 대표되는 미국 자본주의를 보여 주었다. 또한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에 수록된 〈1달러 지폐 200장〉과 같은 그림을 그려서 과열된 미술 시장을 조롱하기도 했다. 1964년 작업실이 있던 건물이 철거되면서 새로 작업실을 구했다. 그는 이 작업실에 ‘공장(The Factory)’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작업을 도와줄 사람들을 고용하여 수많은 작품을 만들었다. 이 작업실은 당대 지식인들, 극작가, 할리우드 스타, 후원자 등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한데 어울리는 사교장이기도 했다. 그는 회화 작업뿐만 아니라 대중문화 전반에 관심이 많았는데 특히 영화 작업에 애착이 컸다. 1965년에는 회화를 그만두고 영화 작업에만 전념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 선언을 지키지는 않았지만 1963년부터 1976년까지 약 600여 편의 영화를 찍었다. 그중에는 상영시간이 24시간 되는 것도 있었다.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게 유명하다 보니 여러 사건 사고에 휘말렸는데 1968년에는 작업실에서 어느 과격한 페미니스트가 쏜 총에 맞는 사고를 당하기도 했다. 정신분열증 증세를 보였던 그녀는 인터뷰에서 “그가 나의 삶을 통제하고 있다”고 진술했다. 워홀은 폐, 위, 식도를 관통당하는 부상을 입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평생 총상 후유증에 시달렸다. 1970년대 이후 뉴욕 상류층과도 밀접하게 교류했던 그는 부유한 고객들의 의뢰를 받고 실크스크린 초상화를 제작했다. 고객 명단에는 이란 팔레비 왕가를 비롯해 존 레논, 다이애나 로스, 브리지트 바르도 등이 있었다. 돈의 노예가 되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 작업을 통해 큰돈을 벌었다. 1970년 비틀즈와 함께 〈라이프〉가 선정한 1960년대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1980년대에는 다시 회화 작업에 몰두했다. 특히 장-미쉘 바스키아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들과의 공동 작업을 통해 제2의 전성기를 구가했다. 워홀은 20세기 후반에 활동한 예술가 중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이다. 누구나 알만한 상업적 이미지를 예술 작품으로 바꾼 그의 작품들은 예술의 정의를 바꿔 버릴 만큼 파격적이었다. 회화뿐만 아니라 영화, 사진, 조각, 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서 실험적인 작품을 만들었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컴퓨터를 이용한 예술을 시도하기도 했고, 《앤디 워홀의 철학》, 《팝피즘 : 앤디 워홀의 60년대》라는 책을 쓰며 작가로도 활동했다.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특히 성소수자의 인권 운동에 앞장섰다. ‘팝아트의 교황’, ‘팝의 디바’라고 불리며 현대 미술의 새로운 축을 형성했고 예술가로서는 드물게 연예인 못지않은 인기를 누렸고 늘 언론의 관심을 받았다. 한편으로 예술을 지나치게 상업화하는 ‘비즈니스 아티스트’라는 비난을 받았다. 1987년 2월 22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서 담낭 수술을 받은 뒤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당시 쉰여덟 살이었으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피츠버그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설립되었는데,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는 미국 최대로 알려져 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그림 100위 순위권 내 작품(2014년 기준) • 10위. 〈실버 카 크래시(이중 참사)〉 • 13위. 〈여덟 개의 엘비스〉 • 23위. 〈청록색 매릴린〉 • 30위. 〈그린 카 크래시(녹색의 불타는 자동차 I)〉 • 42위. 〈그녀의 남자들〉 • 43위. 〈인종 폭동〉 • 50위. 〈코카콜라(3)〉 • 80위. 〈1달러 지폐 200장〉 • 82위. 〈자유의 여신상〉 • 93위. 〈흰색 매릴린〉 • 순위 외. 〈자화상〉 • 순위 외. 〈더블 엘비스〉   앤디 워홀의 무덤 =====================                                             ==========================================================    앤디 워홀 특집     앤디 워홀 특집 세 번째 시간에는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9가지를 소개한다. 물론 오늘 소개하는 대표작 외에도 대표작의 범주에 포함해야할 작품들도 있겠지만, 가급적 현재 진행되고 있는 '앤디 워홀 라이브'를 관람한다면, 이 작품들만큼은 보고 넘어가자는 기준에서 선정했다. 이번 글에서는 작품에 대한 얘기인만큼 작품에 대한 배경 설명에 충실하여 소개한다.      캠벨 수프 캔 Campbell's Soup Cans, 1968 캠벨 수프 캔(Campbell's Soup I), 1968 @ 앤디 워홀 라이브   먼저 위의 사진을 통해 작품을 감상해보기 바란다. 어떤 느낌이 드는가? 에게~ 이게 뭐야? 이게 예술이야? 그럴 지도 모른다. 바로 그 지점이다. 캠벨 수프는 미국에서만 한 해에 100억 개 이상이 팔리는 대량 생산품이다. 국내로 치자면 참치 캔이나 꽁치 통조림만큼 대중에게 친숙한 제품을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인 것. 앤디 워홀의 캠벨 수프 캔 연작을 보면 상품과 예술품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것이 이 캠펠 수프 캔 연작이 가지는 의미라 할 수 있겠다.   앤디 워홀은 본인 스스로가 상업 미술가에서 비즈니스 미술가가 되고저 했던 이였다.(이에 대해서는 앤디 워홀 특집 마지막편인 명언편에서 자세히 다룬다.) 그가 왜 캠벨 수프 캔을 대상으로 했을까? 만약 당신이 즐겨 먹는 식품 혹은 마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품들이 예술 작품에 나왔다고 하면 적어도 예술을 모르는 이들이라 하더라도 그 작품의 대상이 무엇인지는 알고 관심을 갖기 마련이다. 이처럼 앤디 워홀은 대중의 심리를 잘 간파하여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능했다.   캠벨 수프 캔은 내용물에 따라 32가지 종류가 있는데, 그는 이 모두를 마치 기계로 찍어내듯이 제작한다.(원래 1962년 처음에는 손으로 그렸지만 1968년 연작에서는 종이에 스크린 프린트를 하여 제작한다. 위의 사진 속 전시된 연작은 이렇게 제작된 1968년 연작이다.) 게다가 전시를 할 때도 연작들을 일정한 간격으로 함께 전시함으로써 마치 마트에 상품이 진열된 것과 같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마릴린 Marilyn, 1967 마릴린 연작(Marilyn), 1967 @ 앤디 워홀 라이브   '마릴린'은 앤디 워홀의 작품 중에서 여러 의미를 갖는다. 우선 사진을 활용한 실크 스크린 작품 중에 가장 첫 번째 작품이다. 캠벨 수프 캔 연작에서 보았듯, 앤디 워홀은 대중의 심리를 잘 간파했는데 이 작품 또한 그런 면을 잘 엿볼 수 있다. 그가 실크 스크린 기법을 시험하던 1962년 마릴린 먼로의 사망 소식을 접하고 그 길로 마릴린 먼로가 란 영화를 찍기 위해 촬영한 사진을 폭스 스튜디오에서 구매해와서 그 사진 속의 마릴린 먼로를 토대로 작품을 제작한 것. 비즈니스 미술가답다.   알록달록한 색상들의 부조화가 돋보이는 앤디 워홀의 '마릴린'은 앤디 워홀을 모르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이거 어디서 봤던 거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중들에게 알려진 작품이다. 앤디 워홀은 화려한 것들 그러니까 유명인사나 아름다움이란 주제에 집착했었는데, 이 모든 것을 사라지게 할 죽음이란 주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이는 1960년대 말 '죽음과 재앙' 연작을 통해서 선보이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합일이 되는 게 바로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었던 것. 그의 수많은 연작들 중에서 가장 많은 작품이 바로 '마릴린'이다.   앤디 워홀은 마릴린 먼로 이외에도 많은 영화배우의 초상화를 제작하는데, 그 중에는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도 있다. 이 중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경우, 에 캐스팅되면서 당시로는 최고의 금액인 1백만 달러 개런티 기사를 접하고 제작했다. 역시 비즈니스 미술가 앤디 워홀다운 면이 아닐 수 없다.     마오 Mao, 1973 마오(Mao), 1973 @ 앤디 워홀 라이브   '마릴린' 연작이 영화배우 초상화 중에 대표작이라면, '마오' 연작은 정치인 초상화 중에 눈에 띄는 작품이다. 1972년 닉슨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중국을 방문한 소식을 접하고, 중국인들 모두가 갖고 있다는 '마오쩌둥 어록'의 표지 사진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앤디 워홀 라이브'에는 2점이 전시되어 있는데, 스티코 매거진 편집장의 말을 빌면 전시되기에는 우여곡절이 많았다고 한다. 게다가 편집장이 귀뜸해준 얘기. 이 작품이 4점인가 있는데, 이 중 1점이 경매로 나올 경우, 5,000억 정도로 역대 최고가를 기록할 듯하다고. 정말 헐~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케첩 박스 Brillo Box & Heinz ketchup Box, 1964 브릴로 박스(Brillo Soap Pads Box), 1964 @ 앤디 워홀 라이브   현재 동대문디지털플라자에서 진행 중인 '앤디 워홀 라이브'에 가면 전시장 중간에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케첩 박스'가 놓여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웬 박스인가 하며 그냥 지나칠지도 모를 일이지만, 알고 보면 이 박스들 역시 앤디 워홀의 작품이라는 사실. 자세히 살펴보면 알겠지만 판지로 제작된 박스가 아니라 나무로 제작된 조각품이다. 여기서도 볼 수 있듯 앤디 워홀의 작품은 상품과 예술품의 경계선 상에 있다. 하인즈나 델몬트는 친숙해도 브릴로란 브랜드는 친숙하지 않을텐데, 브릴로는 비누 제품이다.   '캠벨 수프 캔'이 상품을 회화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면, '브릴로 박스'와 '하인즈 박스'는 상품 박스를 조각의 영역으로 끌어올렸다. 똑같은 모양와 크기로 조각했는데 원래는 판지로 제작했었다 한다. 그러나 모양 유지가 어려워서 목수에게 나무로 제작하게 했던 것. 실제로 앤디 워홀의 손이 간 부분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걸 예술품이라고? 직접 그리고 만드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콘셉트가 중요한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앤디 워홀은 이 작품들 수백 개를 채워 전시를 여는데, 이는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에 얽힌 재밌는 일화가 있다. 이 작품들이 전시를 위해 캐나다로 보내졌을 때인데, 원래 캐나다는 예술 작품에는 관세를 매기지 않는다. 그런데 이 앤디 워홀의 작품은 예술품이 아니라 잡화 상자로 여겨 관세를 매겼던 웃지 못할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       바나나 The Velvet Underground & Nico, 1967 앤디 워홀의 바나나가 그려진 벨벳 언더그라운드 앤 니코의 음반 커버, 1967 @ 앤디 워홀 라이브   앤디 워홀은 두 개의 음반 커버를 남겼는데 음반 커버마저도 정말 앤디 워홀다운 면이 돋보인다. 본인이 프로듀서로 나섰던 록그룹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의 첫 음반 커버를 직접 제작하는데, 바나나 사진을 실크 스크린으로 제작했는데 먹음직스럽다기보다는 다소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긴다. 게다가 이 바나나는 섹시한데, 노란 껍질을 벗길 수 있기 때문. 위의 사진은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된 음반 커버인데 오른쪽이 벗기기 전, 왼쪽이 벗긴 후다. 바나나 꼭지 쪽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PEEL SLOWLY AND SEE"(천천히 벗겨 보세요.)   벗긴 바나나를 보면 당신은 무엇이 상상되는가? 필자의 상상과 아마 같으리라. :) 이후 1971년에는 롤링 스톤즈의 '스티키 핑거스' 앨범 커버도 제작하는데, 여기서는 바나나보다 좀 더 직설적으로 청바지를 입은 남성의 벨트 아래 부분을 앨범 커버로 제작하면서 바지 지퍼를 실제 지퍼로 달았다는 점. 앨범을 산 이들은 지퍼를 내리면서 무슨 상상을 했을 지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다. 바나나 음반 커버는 음악 역사상 가장 인상적이면서 섹시한 표지가 되었고, 지퍼를 단 커버 이미지는 그래미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한다.      무하마드 알리 Muhammad Ali, 1978 무하마드 알리(Muhammad Ali), 1978   이번엔 영화배우, 정치인에 이어 운동선수다. 운동선수도 1977년 연작하는데, 종목별로 대표되는 선수들 10명을 초상화로 제작한다. 골프는 잭 니클라우스, 축구는 펠레, 농구는 카림 압둘 자바(이소룡의 에 나왔던 키 큰 농구 선수) 등이 있는데 여기서는 권투의 무하마드 알리를 소개한다. 무하마드 알리의 초상화를 제작하기 위해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는데, 앤디 워홀 특집 2편인 창작 기법편에서 소개했듯 앤디 워홀이 맘에 드는 사진이 나올 때까지 다양한 포즈로 찍었다. 그 중 주먹을 턱에 가져다 둔 사진을 선정하여 제작한다.     20세기의 유태인 열 명의 초상 Ten Portraits of Jews of the Twentieth Century, 1980 20세기 유태인 10명의 초상(Ten Portraits of Jews of the Twentieth Century), 1980 @ 앤디 워홀 라이브   앞서 소개한 '운동선수들' 연작은 친구의 의뢰로 시작한 반면, 지금 소개할 '20세기의 유태인 열 명의 초상'은 변호사 출신의 화상 로널드 펠드먼과의 대화에서 비롯되었다. 아무래도 앤디 워홀이 비즈니스 미술가다 보니 그림을 파는 이들의 아이디어를 종종 묻곤 했는데, 원래는 미국 대통령 10인을 제안했지만 그닥 맘에 들지 않았던 앤디 워홀. 이를 계기로 유태인 명사 10인으로 아이디어가 발전되었는데 이를 앤디 워홀이 수용하여 제작하기에 이른다.   유태인 10명은, 배우 사라 베른하르트, 배우 막스 브라더스, 작곡가 조지 거슈윈,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 작가 거트루드 스타인, 철학자 마르틴 부버,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정신분석가 지그문트 프로이트,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 미국 최초의 유태인 출신 연방 대법관 루이스 브랜다이스다. 애초에는 밥 딜런이나 우디 앨런 등도 포함하려고 했지만 제외되었다. 원래 미국 대통령 10인에서 유태인 명사 10인으로 발전하게 된 접점이 된 인물이 바로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총리가 된 골다 메이어 때문.     달러 사인 Dollar Sign 달러 사인 (9), 1982   상업 미술가로 돈 잘 버는 예술가의 반열에 올랐던 앤디 워홀은 자신이 좋아했던 돈을 주제로 작품을 제작하는데 이게 '달러 사인'이다. 달러 사인은 붉은 계열의 바탕에 4개의 달러 사인이 그려져 있는 '달러 사인 4'와 9개가 그려져 있는 '달러 사인 9'이 있다. 둘 다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되어 있다. 이미 다른 많은 작품에서 보여주었듯 상품이 예술이 되고 예술이 상품이 된다는 앤디 워홀의 지론을 담고 있는 듯 보이는 '달러 사인'을 계속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돈, 싫어하는 사람 있냐?"는 앤디 워홀의 목소리가 울리는 것 같다.      자화상 Self-Portrait 여장을 한 워홀(Self-Portrait in Drag),1986   어릴 때 연필로 스케치한 자화상을 시작으로 무수히 많은 자화상을 남긴 앤디 워홀. 그는 때로는 실크 스크린으로, 때로는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자화상을 남겼는데 이 중 '여장을 한 워홀' 같은 작품도 있다. 물론 이런 작품 외에 무난한(?) 자화상도 있지만 대체로 가발을 쓰거나 화장을 하는 등의 연출이 들어간 자화상이 주를 이룬다. 마치 대중들에게 "나는 이런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처럼. 아마 이 중에서 대중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자화상으로는 은색 가발 프라이트 위그를 쓴 자화상이 아닐까 한다. 물론 이 또한 '앤디 워홀 라이브'에 전시되어 있다.  =========================================   제작시기 1963년 가격 $100,000,000(1049억 2000만 원)1) 작가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앤디 워홀, 〈여덟 개의 엘비스〉, 캔버스에 실크 스크린, 실버 스프레이 / 200×370cm “엘비스 작품 쉰 개를 하루에 만들었다.” -앤디 워홀 〈실버 카 크래시〉를 제작할 무렵인 1963년에 앤디 워홀은 ‘죽음과 재난’ 외에도 ‘대중 스타’라는 주제를 즐겨 택했다. 〈여덟 개의 엘비스〉는 이 무렵 나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이탈리아의 안니발레 베를린지에리라는 유명한 컬렉터가 40년 동안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2009년 11월에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가 이 작품이 개인 거래로 1억 달러(1049억 2000만 원)에 팔렸다고 보도하면서 거래 가격이 알려졌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매릴린 먼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함께 워홀의 단골 소재였다. 그리고 이 시리즈의 다른 작품들이 이미 유명한 미술관들에 전시돼 있어서 이 작품의 이미지가 사람들 눈에 익숙하다. 게다가 가로 길이가 무려 3.7미터에 이르는 대작이어서 1억 달러(1049억 2000만 원)에 팔렸다는 것은 믿을 만한 보도였다. 워홀의 작품이 비싸게 팔리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시장에 나올 만한 작품의 수가 많아서 꾸준히 거래된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다. 비슷한 정도의 작품성을 지닌 피카소와 워홀의 작품 두 점을 놓고 같은 값으로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대부분 피카소의 작품을 고를 것이다. 하지만 피카소의 대표작은 시장에 그렇게 자주 나올 수가 없다. 그에 비해 워홀의 대표작은 주요 경매 때마다 고가의 대표작이 하나씩 나온다 해도 과장이 아닐 정도로 거래 작품 수가 충분하다. 그래서 그의 수작이 비싼 가격에 팔려 뉴스가 되는 경우가 자주 있는 것이다. 피카소 이야기가 나온 김에 워홀을 피카소와 비교해 보자. 앞서 피카소를 이야기할 때 그의 작품이 비싼 가장 중요한 이유는 피카소의 역사적 중요성 때문이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워홀의 작품이 비싸게 거래되는 것도 미술사적인 이유가 제일 크다. 서양 미술사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작가가 20세기 초반에 피카소였다면, 20세기 후반에는 워홀이었다. 워홀은 1960년대 미국 미술의 핵심이던 팝 아트의 대표 주자다. 상업 디자이너 출신의 워홀은 코카콜라, 캠벨 수프 깡통, 매릴린 먼로, 엘비스 프레슬리 등 이미 널려 있는 대중적인 이미지를 작품에 사용했고, 제작 방법도 기계처럼 찍어 내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선호했다. 그럼에도 그의 대표작들은 1000억 원 이상에 팔린다. 워홀이 이처럼 유명한 작가가 된 비결은 그가 시대상을 민활하게 반영한 아티스트였기 때문이다. 워홀은 1963년에 미술 평론가 G. R. 스웬슨과 했던 인터뷰에서 “나는 사람들이 모두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은 이후 워홀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나올 정도로 매우 유명해졌다. 왜 그는 사람들이 기계가 되어야 한다고 했을까? “사람들은 매일 똑같은 일을 되풀이하며 살고 있다”는 게 그 이유다. 현대인들은 똑같은 대중 스타를 좋아하고, 똑같은 인스턴트 음식을 먹고, 서로서로 별다를 바 없는 삶을 산다. 개개인의 생활을 들여다보아도 큰 변화 없이 매일 거의 똑같은 생활을 되풀이한다. 이런 기계 같은 현대인의 삶을 반영하는 미술은 기계 같은 미술이어야 한다는 게 워홀의 주장이다. 미술 작품은 작가의 손끝과 영혼으로 만들어 내는 창조품이라는 과거의 미술 개념을 뒤집어엎는 희한한 발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인의 특징을 족집게처럼 집어낸 것이기도 했다. 워홀은 한마디로 “살기는 그렇게 살면서 왜 예술은 다른 걸 추구하느냐?”라고 주장한 것이고, 사람들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60년대 미국은 소비재가 넘쳐 나고 대중문화가 폭발하던 사회였다. 싸구려 이미지를 고급 예술의 소재로 사용하면서 이 사람 저 사람이 가질 수 있도록 마구 찍어 내는 제작 방법을 쓴다는 것은 미국이 앞세우는 민주주의와도 들어맞았다. 그러니 워홀은 피카소와 마찬가지로 자신이 살던 시대상을 아주 잘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피카소 이후 작가들이 피카소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로, 워홀 이후 현대 작가들은 지금까지도 워홀의 영향을 받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워홀이 반영한 1960년대 미국 문화는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나라에서 공감할 수 있는 문화다. 그 때문에 워홀은 영원히 살아 있는 작가처럼 느껴진다. 워홀의 가장 놀라운 점은 그 자신이 살던 시대를 대변하면서 이후에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속 살아 있는 신화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워홀은 대중문화를 찬양하는 동시에 비판했다. 대중 스타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대중 스타는 소비자들이 자신들의 환상에 따라 만들어 낸 상품이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여덟 개의 엘비스〉에 사용된 이미지는 1960년에 엘비스 프레슬리가 출연했던 〈불타는 스타(Flaming Star)〉라는 영화의 한 장면으로, 당시 이 영화의 홍보용으로 여기저기에 뿌려졌던 이미지다. 이 작품이 만들어진 1963년에 엘비스 프레슬리는 스물여덟 살밖에 되지 않았지만 이미 세계적 팝 스타로 살아 있는 전설이나 마찬가지였다. 그가 권총을 들고 서부 카우보이 자세를 취하고 있는 모습은 미국적인 영웅의 이미지를 대변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엘비스 프레슬리는 어딘지 약해 보이기도 한다. 과연 이 모습에 미국인들과 전 세계인들이 그렇게 숭배할 만한 진정한 파워가 있는지 의문을 품게 만드는 이미지다. 슈퍼스타의 이중적 면모라는 주제로 다루기에 엘비스 프레슬리와 매릴린 먼로는 더없이 좋은 소재였다. 그래서 엘비스 프레슬리를 다룬 작품은 매릴린 먼로가 나오는 작품과 함께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워홀의 대표적인 시리즈가 되었다. 워홀은 엘비스 프레슬리 이미지를 가지고 스물두 점의 작품을 만들었는데 그중 아홉 점은 미술관에 소장돼 있다. 이 작품 하나를 가지면 세계적인 컬렉션 수준에 올라갈 수 있다는 심리적 보상 때문에 컬렉터들은 이 그림에 아낌없이 거액을 지불하는 것이다. 실크 스크린(Silk Screen) 실크 스크린은 워홀의 작품 제작 방식에서 핵심이 되는 기법이지만, 실은 옷이나 가방 등 생활용품에 이미지를 인쇄할 때 쓰는 아주 흔한 방법이다. 사진 이미지를 원하는 크기로 확대해 망사 위에 놓은 뒤 망사 아래에 천을 놓고 잉크로 찍어 눌러 그 이미지를 천 위에 그대로 찍어 내는 방법이다. 똑같은 이미지를 몇 번이든 찍어 낼 수 있고, 같은 이미지라도 색깔과 농도를 달리해 다른 느낌으로 찍어 낼 수 있다. 워홀은 똑같은 것을 되풀이하는 현대 사회, 대량 소비재로 꽉 찬 미국의 자본주의 사회를 나타내는 데 이 기법이 아주 잘 맞는다고 보았다. 기계적으로 찍어 내면서 판화처럼 작품을 여러 장 만들어 낮은 가격에 보급할 수 있는 것은 미국이 지향하는 민주주의와도 맞았다. 그래서 워홀은 실크 스크린 제작 방법을 매우 선호했다. ============================   앤디 워홀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이 문서의 내용은 출처가 분명하지 않습니다. 지금 바로 이 문서를 편집하여, 참고하신 문헌이나 신뢰할 수 있는 출처를 각주 등으로 표기해 주세요. 검증되지 않은 내용은 삭제될 수도 있습니다. 내용에 대한 의견은 토론 문서에서 나누어 주세요. (2014년 1월) 앤디 워홀 Warhol in 1977 원어이름 Andy Worhol 본명 Andrew Warhola Jr. 출생 1928년 8월 6일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 사망 1987년 2월 22일 (58세)  미국 뉴욕 주 뉴욕 국적  미국 분야 미술, 영화 학력 카네기 멜론 대학교 사조 팝 아트 대표작 Chelsea Girls (1966 film) Exploding Plastic Inevitable (1966 event) Campbell's Soup Cans (1962년 회화) 앤디 워홀(영어: Andy Warhol, 1928년 8월 6일 - 1987년 2월 22일)은 미국의 미술가이자, 출력물 제작자, 그리고 영화 제작자였다. 시각주의 예술 운동의 선구자로, 팝 아트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산업 일러스트로 성공적인 경력을 쌓은 후에 화가, 아방가르드 영화, 레코드 프로듀서, 작가로서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본명은 앤드루 워홀라 주니어(영어: Andrew Worhola Jr.)이다.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워홀의 그림은 1963년에 제작된 캔버스로 1억 달러에 거래된 《여덟 명의 엘비스》(Eight Elvises)라는 제목의 그림이다. 개인적으로 거래된 이 사실은 《이코노미스트》의 기사를 통해 알려졌다. 이코노미스트는 미술 시장의 주도자로서 워홀의 지위를 설명한 것이다.[1] 1억 달러라는 가격은 잭슨 폴록, 파블로 피카소, 구스타프 클림트와 윌렘 드 쿠닝만이 기록한 기준 가격이다.   목차   [숨기기]  1생애 220~30대 2.1팩토리에서 제작 활동:30대후반~40대 2.240대와 저격 사건 2.350대와 최후 3작품 세계 3.1실크 스크린 3.2영화 3.3책 4갤러리 5같이 보기 6출처 7바깥 링크   생애[편집] 1928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슬로바키아(당시는 체코) 이민 가정으로 위로 두 형이 있었고, 부모님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그 자신도 평생 교회를 다녔다. 본래 그의 집안 성씨는 바르홀라(Varchola)였으나, 영어식인 워홀로 바꾸었다. 육체 노동자였던 아버지는 1942년 앤디가 14세 때 사망하였고, 그 후 어머니 줄리아가 혼자 아들들을 키운다. 앤디는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지역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카네기 공과 대학(현재 카네기멜론 대학교)에서 상업 예술을 전공한다. 1949년 졸업을 하면서 뉴욕 시로 이주하여 잡지 삽화와 광고 제작으로 명성을 쌓았다. 20~30대[편집]   캠벨 수프 캔 1950년 (22세) 대학 졸업 후 뉴욕으로 옮겨 '보그'(VOGUE)나 '하퍼스 바자'(Harper's BAZAAR) 등의 잡지 광고와 일러스트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2년에는 신문광고 미술 부문에서 "아트 디렉터스 클럽 어워드"(Art Director's Club Award)를 수상하고, 상업 디자이너 일러스트레이터로 성공했지만 동시에 주문주의 요구에 부응하여 그림을 수정 하느라, 사생활에서는 대인 관계에서 타격을 받은 고난의 시기이기도 했다. 그는 나중에 단지 정확하게 비추는 TV 영상처럼 내면을 버리고 표층을 철저히 충실하게 추구하는 길을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곧 선에 잉크를 실어 종이에 전사하는 "브로테드 라인"(Burottedo line)이라는 대량 인쇄에 적합한 기술을 발명한다. 1960년 (32세), 그는 일러스트레이션의 세계를 버리고 미술의 세계로 옮겨간다. '배트맨’, '딕 트래이시’, '슈퍼맨’ 등 만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제작하지만, 계약했던 〈레오 캐스테리 갤러리〉에서 뿐만 아니라 미국 만화를 모티브로 한 시대를 풍미한 한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팝 일러스트레이션 작품을 접한 이후 이 주제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당시 미국은 눈부신 경제 발전을 추구하고 있었다. 1960년대부터 그는 〈캠벨 수프 캔〉이나 〈코카콜라 병〉 등 유명한 상품들의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후에 그는 실크스크린으로 바꾸어, 대량생산된 상품의 그림을 그리는 것만 아니라 작품 자체를 대량생산하였다. 그는 "예술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뉴욕에 있는 그의 스튜디오인 《팩토리》(The Factory)에서 판화, 신발, 영화, 책 등을 만들어내었다. 워홀의 작품에는 의뢰를 받아 제작한 초상화나 광고도 포함되어 있다. 1961년 (33세),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캠벨 수프 캔〉이나 지폐를 모티브로 한 작품을 그린다. 1962년에는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이용하여 작품을 양산하게 된다. 주제에도 대중적으로 화제가 풍부한 것을 선택했다. 메릴린 먼로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는 곧바로 영화 《나이아가라》의 먼로의 최고의 스틸 사진 초상화를 잘라서 다른 색깔을 입혀서 대량 생산을 계속했다. 제트기 사고, 자동차 사고, 재해 등의 화재의 신문 보도 사진을 사용했다. 팩토리에서 제작 활동:30대후반~40대[편집] 1964년(35세)부터는 뉴욕에 《팩토리》(The Factory)라고 하는 스튜디오를 짓는다. 팩토리는 알루미늄 포일과 은빛의 그림물감으로 덮인 공간이며, 마치 공장에서 대량생산 하는 것 같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을 이미징하여 만들어졌다. 그는 여기서 예술 노동자(art worker; 아트 워커)를 고용해,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 프린트, 구두, 영화 등의 작품을 제작 한다. 팩토리는 믹 재거(롤링 스톤즈), 루 리드(벨벳 언더그라운드), 트루먼 커포티(작가), 에디 세즈윅(모델) 등 아티스트가 모이는 장소가 된다. 1965년(36세), 벨벳 언더그라운드(The Velvet Underground; 이하 V.U.)의 데뷔 앨범을 프로듀싱 한다. 워홀은 V.U.의 연주를 듣고 공동 작업을 신청해, 배우 겸 모델인 니코를 데려와 합류시킨다. 1967년 3월 발매한 그들의 데뷔작 《벨벳 언더그라운드 & 니코》(The Velvet Underground & Nico)에서는 프로듀스와 자켓 디자인을 다루었다.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에 의한 〈바나나〉를 그린 레코드 표지는 유명해 졌다. 전위적 음악이기 때문에 앨범은 별로 팔리지 않았지만, 이후 재평가되었다. 워홀은 V.U.의 악곡을 영화의 사운드 트랙에도 이용했다. 두 번째 앨범을 제작할 무렵에는 워홀과의 관계도 끝난다. 그들과의 관계는 영화 《루 리드: 로큰롤 하트》(Lou Reed: Rock and Roll Heart)에 그려져 있다. 또 워홀의 사후 멤버인 리드와 케일은 재결성해 《드렐라를 위한 노래》(Songs For Drella, 1990년)라는 추모곡을 만들었다. (Drella는 드라큘라와 신데렐라를 조합한 합성어이며, 워홀에 대한 그들의 인상을 나타냈다고 한다) 40대와 저격 사건[편집] 1968년 6월 3일 팩토리 스튜디오의 직원 밸러리 솔라나스가 스튜디오에 들어와 워홀을 총으로 세 발 쏘았다. 두 발은 빗나갔지만 세 번째 총알이 그의 양쪽 폐, 지라, 위, 식도를 관통했다. 병원에서 의사들은 그가 죽었다고 선언했으나 그는 그 총격에서 살아남았다. 그러나 죽을 때까지 완전히 회복되지는 못했다. 솔라나스는 후에 "그는 내 삶의 너무 많은 부분을 통제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1995년에 《나는 앤디 워홀을 쏘았다》라는 제목으로 영화화되었다. 1970년대부터 1980년대는 사교계로부터 의뢰를 받아 초상화 실크 스크린 제작 프린트를 다수 제작한다. 1970년 〈라이프 지〉에 의해서 비틀즈와 함께 '1960년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던 인물'로 선정된다. 1972년,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방중에 맞추어 마오쩌둥의 초상화를 제작했다. 같은 해 그의 어머니가 피츠버그에서 사망하면서, 전 세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게 된다. 50대와 최후[편집] 1982년부터 1986년 사이에는 재해와 신화를 모티브로 한 일련의 작품을 창조한다. 마지막 작품은 1986년 〈레닌의 초상화〉 등이다. 1987년 2월 21일 뉴욕 코넬 의료 센터에 담낭 수술을 받은 다음 날인 22일, 페니실린 알레르기 반응으로 상태가 악화되어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다. 그의 나이 58세였으며, 평생 독신이었다. 피츠버그 성 세례 요한 가톨릭 공동 묘지에 묻혔다. 피츠버그 시내에서 아르게이니 강건너 맞은 편 언덕의 노스 쇼어 지역에 앤디 워홀 미술관이 있다. 개인 예술가 전문 미술관으로서 미국 최대이다. 작품 세계[편집] 워홀의 작품 세계는 대부분 ‘미국의 물질문화’와 연관되어 있다. 그는 돈, 달러 기호, 식품, 잡화, 구두, 유명인, 신문 스크랩 등을 그렸다. 그에게 이런 주제들은 미국 문화의 가치를 의미했다. 예를 들어, "코카콜라는 언제나 코카콜라다. 대통령이 마시는 코카콜라는 내가 마시는 코카 콜라와 같은 그 콜라다". 그는 대중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이미지를 이용해 20세기 미국의 문화적 정체성을 표현했다. 화려한 색채 같은 도판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는 실크 스크린 기법을 이용하여, 메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스타의 이미지와 상품, 달러 기호 등 미국 사회에 유포하는 경박한 기호를 작품화했다. 고전 예술과 모더니즘 등과는 달리 그 도안은 풍부한 미국 사회를 구현하는 명쾌한 팝아트, 상업 회화로 인기를 끌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미국의 자본주의와 ‘대중문화’가 가지는 대량소비가 아닌 인류, 진부, 공허함이 표현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보편성을 구한 그의 작품은 그 자신이나 대중이 매일 접하고 있는 자본주의와 매스미디어와도 관련이 있으며, 또한 사고와 죽음의 이미지도 그려졌다. 워홀은 자신에 대해 물었을 때, "나를 알고 싶다면 작품의 표면만 봐 주세요. 뒷면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라며 철저하게 '예술가의 내면'을 없애고 표면적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유명한 것에 애정을 숨기지 않고, 스타와 정치인이나 사고, 패션 제품을 그림의 주제로 삼았으며, 그것이 유명하고 또 내 자신도 그것을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밝혔다. 또한 그 자신이 미국의 유명인이 되고 나서도 걸음을 흩트리지 않고, 유명인을 연출하여 작품을 제작하고 유지하는 것을 이상으로 삼았다. 실크 스크린[편집] 초기에는 아크릴 물감 등으로 캔버스에 그렸지만, 1960년대 이후에는 판화의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를 많이 사용하고 있다. 공판 인쇄인 실크 스크린 프로세스의 원리는 평평한 "프린트 고코"와 같은 것으로, 작가가 직접 인쇄에 종사하지 않아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대량생산에 적합한 기술이다. 그는 기계로 만들어 내듯 실크 스크린 작품을 찍어내는 아틀리에 《팩토리》를 마련하여 많은 젊은이를 고용하여 제작에 종사하게 했다. 한편, 같은 판을 사용하여 의도적으로 프린트를 늦추거나 잉크를 많이 쓰게 했다. 실크 스크린 모티브로 한 것들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상품 : 캠벨 수프 캔, 샤넬 N°5와 코카콜라, 앱솔루트 보드카의 병, 브릴로 패드 상자 등 유명 상품 유명인 : 엘비스 프레슬리, 엘리자베스 테일러, 잉그리드 버그먼, 크리스토퍼 리브, 하노버 왕자비 카롤린, 지미 카터, 존 F. 케네디, 재클린 케네디, 트루먼 커포티, 마이클 잭슨, 메릴린 먼로, 말런 브랜도, 믹 재거, 체 게바라, 마오쩌둥, 무하마드 알리, 블라디미르 레닌 캐릭터 : 미키 마우스, 미니 마우스 (이것 역시 실크 스크린을 이용하여 제작되었다.) 그가 만드는 초상화는 당시 고액을 받는 유명 인사들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많은 유명인이 자신의 모습을 프린트하기를 원했다. 기타 : 지폐, 원자폭탄, 권총, 자유의 여신상, 전기의자, 석양, 꽃, 최후의 만찬 영화[편집] 실크 스크린 프린트를 제작 한편 1963년부터 1968년에 걸쳐 60편 이상의 영화도 다루었다. 그러나 실험영화 같은 작품으로 일반에 알려진 것은 적다. 처음 공개된 작품은 1966년 《첼시 걸즈》이며, 가장 유명한 것은 잠자는 남자를 8시간 동안 계속 비춰주는 《잠》(Sleep)(1963년)이라는 작품이다. 그는 액션 영화를 좋아하지 않았고 (본질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사소한 차이를 고집하고 있기 때문에) 자신의 영화가 "근본적으로 같을 뿐만 아니라, 세세한 부분까지 완전히 똑같은 것"을 원했다. 끝없이 변화가 없는 영상은 보편적인 것을 테마로 한 워홀의 관점에서 보면 이상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이후에도 영화 제작을 하였고, 극 영화도 제작하였다. 뉴욕의 유명 호텔 "첼시"를 무대로, 각 객실에서 펼쳐지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임의의 2방만 적절한 시간을 선택하여, 2개의 화면을 이용하여 무작위로 계속 비춰주는 (도중 한쪽 스크린은 니코의 모습이 임의로 삽입된다), 《첼시 걸즈》(1966년)는 미국에서 출판에서 대히트를 했다.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이전의 작품은 완전히 다른 조 달레산드로(Joe Dallesandro)와 우도 기어(Joe Dallesandro)를 주연으로 한 《악마의 죽음》(1974년)와 《처녀의 생피》(1975년) 등 공포 영화 감독도 시도하였다. 책[편집] 앤디 워홀의 철학The Philosophy of Andy Warhol(From A to B & Back Again)(1975) (2007) 열린책들 김정신 옮김 9788990641175 앤디 워홀 일기The Andy Warhol's Diaries(1989) (2009) 열린책들 홍예빈 옮김 9788990641380 갤러리[편집] 오슬로 샵의 디자인   앤디 워홀 박물관   수프 캔   워홀 미술관 같이 보기[편집] 팝 아트 클래스 올덴버그 로이 리히텐슈타인 제프 쿤스 에디 세즈윅      
299    최초의 사진가, 프랑스 미술가 - 루이 다게르 댓글:  조회:2927  추천:0  2017-01-27
루이 다게르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루이 다게르 루이 자크 망데 다게르(Louis-Jacques-Mandé Daguerre, 1787년~1851년)는 프랑스의 미술가, 사진가이다. 사진술 다게레오타입(Daguerreotype)의 발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출생일 1787. 11. 18, 프랑스 파리 근처 코르메유 사망일 1851. 7. 10, 브리쉬르마른 국적 프랑스 요약 최초의 실용적 사진인 다게레오타이프 (은판사진)를 발명했다. 실물을 영구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은 1826, 1827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만들었지만, 질이 좋지 않고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나 필요했다. 반면에 다게르가 개발한 방법은 노출시간이 20~30분 정도면 충분했다. 다게르는 세관관리로 일하다가 오페라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1822년 파리에서 그는 빛에 따라 다양한 효과가 나타나는 생생한 풍경을 전시하는 디오라마관을 열었다. 1814년부터 햇빛을 이용하여 영구적인 그림을 만들려고 애쓰던 니에프스는 1826년 다게르도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동반자가 되어, 1829년부터 니에프스가 죽은 1833년까지 헬리오그래피(사진제판법)의 과정을 함께 개발했다. 다게르는 그뒤에도 실험을 계속하여, 사진기 속에 요오드로 처리한 은판을 넣어 빛에 노출시키면 은판에 보이지 않는 영상이 남는데 여기에 수은증기를 쏘여 현상한 다음 소금물로 정착시키면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 영상이 남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최초의 실용적 사진인 다게레오타이프(은판사진)를 발명했다. 실물을 영구적으로 기록한 최초의 사진은 1826, 1827년 프랑스의 조제프 니세포르 니에프스가 만들었지만, 질이 좋지 않고 노출시간이 무려 8시간이나 필요했다. 반면에 다게르가 개발한 방법은 노출시간이 20~30분 정도면 충분했다(→ 다게레오타이프). 다게르는 세관관리로 일하다가 오페라 무대배경을 그리는 화가가 되었다. 1822년 파리에서 그는 빛에 따라 다양한 효과가 나타나는 생생한 풍경을 전시하는 디오라마관(館)을 열었다. 런던의 리젠트파크에도 비슷한 시설을 세웠지만, 1839년 불이 나서 망가져버렸다. 1814년부터 햇빛을 이용하여 영구적인 그림을 만들려고 애쓰던 니에프스는 1826년 다게르도 똑같은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두 사람은 동반자가 되어, 1829년부터 니에프스가 죽은 1833년까지 헬리오그래피(heliography:사진제판법)의 과정을 함께 개발했다. 다게르는 그뒤에도 실험을 계속하여, 사진기 속에 요오드로 처리한 은판을 넣어 빛에 노출시키면 은판에 보이지 않는 영상이 남는데 여기에 수은증기를 쏘여 현상한 다음 소금물로 정착시키면 영구히 사라지지 않는 영상이 남는다는 사실을 처음 발견했다. 1839년 1월 9일, 뛰어난 천문학자이자 물리학자인 D. F. J. 아라고가 프랑스 과학 아카데미에서 다게레오타이프를 발표했고 다게르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1839년 니에프스의 상속자와 다게르는 사진기술을 개발한 공로로 각각 4,000프랑과 6,000프랑씩 연금을 받았다.
298    오스트리아 화가 - 에곤 쉴레 댓글:  조회:3111  추천:0  2017-01-27
  에곤 쉴레(Egon Schiele)       1890년 6월 12일(오스트리아)~1918년 10월 31일           1906년 빈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였으나 보수적인 학교에 반발하여   몇몇 동료들과 ‘새로운 예술가 그룹’을 결성하고 3년 만에 학교를 그만두었다.   ‘오스트리아 화가 연맹’의 클림트를 만나 많은 교류를 하였다.             다뉴브 강가의 스타인 교회 Church in Stein on the Danube 1913, 판넬에 유채,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에곤 쉴레 자화상 Self Portrait,  1912, 32.2 × 39.8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레오폴드 미술관 Sammlung Leopold                   붉은 옷을 입고 선 여자 Standing Woman in Red 1913, watercolor 구아슈 그림물감과 연필 Gouache, watercolor and pencil,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맹인 The Blind,  1913,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성가족 The Holy Family 1913, 종교 성화 religious painting                                 빨간 브라우스와 왈리 Wally with a Red Blouse  1913년 경, 개인 소장   쉴레의 연인이며 미술에 눈을 뜨게 한 모델, 발리 노이질(Wally Neuzil), 그녀가 열일곱 살이던 때 클림트에게 물려 받았다.                                             연인 남녀 Lovers Man and Woman 1914, 캔버스에 유채, 119 x 139cm, 개인 소장   쉴레는 그녀를 만난 이후 언제나 모델 발리 노이질(Wally Neuzil)의 '몸'을 잊지 못했다.                                             기대누운 금발의 여자 Reclining Woman with Blond Hair 1914, 종이 위에 그림물감, 볼티모어 미술관 Baltimore Museum of Art, Baltimore, MD, USA                                                               왼손으로 머리를 받치고 앉은 여자 Seated Woman with Her Left Hand in Her Hair 1914, 종이에 그림물감, 오스트리아 빈 알베르티나 판화수집 미술관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Austria                                         초록색 스타킹 The Green Stockings  1914, 리차드 나지 갤러리 Richard Nagy Gallery                                              오렌지 스타킹을 신고 서 있는 누드 Standing Nude with Orange Stockings 1914, 리차드 나지 갤러리 Richard Nagy Gallery                                           검정 스타킹과 붉은 가터를 한 여인 Semi-nude in Black Stockings and Red Garter 1913, 리차드 나지 갤러리 Richard Nagy Gallery                                           속옷 입은 여자 Girl in Underclothes 1917, 리차드 나지 갤러리 Richard Nagy Gallery                                             이야기 속의 난쟁이와 여인 Woman with Homunculus  1910, 리차드 나지 갤러리 Richard Nagy Gallery                                                   옷 벗는 여자 Woman Undressing 1914, 종이에 물감,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점(1,001 Paintings you must see before you die) 중 선정된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작품                                                           젊은 엄마 Young Mother 1914,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비엔나 안톤 페슈카 콜렉션 Collection of Anton Peschka, Vienna, Austria   안톤 페슈카(Anton Peschka)는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비엔나 미술학교 동기로, 쉴레보다 다섯살이 많지만 절친으로 지내다가 나중에 실레가 자신의 여동생을 소개해주어 결혼하게 된다. 안톤 페슈카도 물론 화가다.                                                     죽음과 처녀 Death and the Maiden 1915, 캔버스에 유채, 오스트리아 국립갤러리와 바로크 예술박물관인 벨베데레 궁전미술관 O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앉아있는 커플 Seated Couple-에곤 쉴레와 그의 부인 에디트 쉴레 Egon and Edith Schiele 1915,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베르티나 판화 미술관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Austria                                             러시아 전쟁 포로 Russian prisoner of war, 그리고리 클라디스츄일리 Grigori Kladjischuili 1916, 미술책에서 인용 repro from art book,                                       물방앗간 The Mill 1916, 켄버스에 유채, 독일 하노버 니더작센 주립미술관 Niedersachsisches Landesmuseum, Hannover, Germany                                                     배 깔고 누운 여성 Female Nude Lying on Her Stomach 1917, 비엔나 알베르티나 판화 미술관 Graphische Sammlung Albertina, Vienna, Austria                                                               드러누운 여성 누드 Reclining Female Nude  1917, 종이에 물감,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보라색 스타킹을 신고 앉은 여자 Seated Woman in Violet Stockings 1917, 종이에 물감,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녹색 스타킹을 신고 기대누운 여자 Reclining Woman with Green Stockings, 처제 아델레 하름스(Adele Harms)   쉴레는 1915년 아내 에드트 하름스(Edith Harms)를 만나 결혼한다. 그 집에는 여동생 아델레 하름스(Adele Harms)가 있었고 두 자매의 아버지는 자물쇠 장인이었고 종교는 개신교였다. 쉴레는 두 자매 모두 마음에 있었지만 언니 에디트와 결혼한다.                                               구부린 무릎으로 앉은 여자 Seated Woman with Bent Knee 1917, 크레온, 구아슈, 물감 crayon, gouache, watercolor, 체코 프라하 국립미술관 Narodni Galerie, Prague, Czech Republic  여전히 처제 아델레 하름스(Adele Harms)가 모델이다.                                                       크루마우 여름 풍경 Summer Landscape, Krumau, 1917, 모던 아르누보 Art Nouveau (Modern) 스타일, 켄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체코슬라바키아의 몰다우 강변의 어머니 고향 크루마우를 쉴레는 자주 갔다.                                             포옹 The Embrace,  1917, 캔버스에 유채, 98 x 169 cm, 오스트리아 비엔나 벨베데레 궁전미술관 O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이미 소개해드린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명화 1,001점(1,001 Paintings you must see before you die) 중 선정된 에곤 쉴레(Egon Schiele)의 작품.   죽은 모습은 실레 자신의 자화상이고, 처녀는 쉴레에게 '꿈에도 잊지 못할'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칠(Wally Neuzil)이다.                                         앞으로 구부린 긴머리 여성 누드 Long haired nude, bent over forward, jerk view 1918, 종이 위에 목탄 Charcoal 스케치, 29 x 45.8cm,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초록 스타킹을 신고 앉은 여자 Seated Woman with Green Stockings 1918, 종이에 물감,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뒤돌아선 여자 Semi Nude, Back View 1918, 종이에 연필화, 49.5 x 31.7cm,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가족 The Family 1918, 캔버스에 유채, 152 x 162.5cm, 오스트리아 비엔나 국립 벨베데레 궁전미술관 Osterreichische Galerie Belvedere, Vienna, Austria                   예술가를 억압하는 것은 범죄다, 그것은 인생의 꽃봉오리를 짓밟아버리는 살인이다. Hindering the Artist is a Crime, It is Murdering Life in the Bud(제목이 길다), 1912, 종이에 수채화 물감, 48.6 x 31.8 cm, 개인 소장           '나는 나의 예술과 사랑하는 이를 위해 최후까지 기꺼이'   노일렝바흐의 감옥 Afera v Neulengbachu에서                                 1914년 쉴레 Schiele in 1914 by Anton Josef Treka           1913년 쉴레는 클림트가 이끄는 ‘오스트리아 예술가 동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빈 분리파 전시회에 참여했다. 그리고 베를린의 평론지 의 편집진에 합류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고 1915년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결혼했다. 쉴레는 바로 군에 징집되어 러시아 전쟁 포로를 호송하는 일에 배치되었지만 재능을 인정받아 그림 작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를 무렵에는 유럽의 주요 전시회에 여러 차례 참가하면서 재정적인 안정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에곤 쉴레/육체와 풍경                                  작은 마을 Die kleine Stadt II,  1912~1913.  몰도우 강의 크루마우 View of Krumau an der Moldau, 캔버스에 유채 oil on canvas, 89.5 × 90.5cm, 오스트리아 그라츠 빅토르 소장품전시미술관 Sammlung Viktor Fogarassy   "봄에는 삶의 찬가를 꿈꾸었고, 찬란한 여름에는 의기양양했으며, 새하얀 겨울을 그릴 때면 웃음을 터트렸다.”                             검정 스타킹의 여인 Woman With Black Stockings[발레리 뉘질(Valerie Neuzil)]   1911년 21세 쉴레는 클림트로부터 여성 한 명을 소개받는다. 17세의 그녀 이름은 발레리 뉘질(Valerie Neuzil), 쉴레의 작품 중 가장 인상적이고 선정적인 드로잉의 모델이 되었던 여성이다.                               초록 모자를 쓴 여인 Woman in green bonnet,  1914, 48.4 x 31.2cm, 오스트리아 비엔나 알에르티나 판화미술관 Albertina, Vienna, Austria   쉴레에게 본격적인 미술을 일깨워준 그의 모델 발레리 뉘질(Valerie Neuzil) 쉴레의 누드 드로잉에 품격을 높혀준 그녀 발레리 뉘질(Valerie Neuzil)은 쉴레와 4년동안 작업 동지이며 삶을 동반자였다. 1915년 쉴레가 부인 에디트를 만나기 전까지는...                     기대누운 금발의 여성 Reclining Woman with Blonde Hair,  1912, 30.5 x 44.7cm, 종이에 수채화 그림물감, 개인 소장                               두 여자 Two Female Nudes, 한 사람은 드러눕고 한 여성은 무릎 꾼 One Reclining, One Kneeling, 1912, 34.93 x 46.04cm, 종이에 수채화 그림물감, 개인 소장                       푸른 스타킹의 여자 Woman with Blue Stockings 1912, 31.75 x 44.13cm, 종이에 수채화 긔림물감,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등을 뒤로 기댄 두 여인 Two Women  1915년, 종이에 연필과 템페라 기법 알베르티나 판화미술관  이 해에 쉴레는 오랫동안 동거동락해온 자신의 작업 동반가 발레리 뉘질(Valerie Neuzil)과 결혼을 결심한 아내 에디트 하름스(Edith Harms)와 두 여인의 '기묘한 쌍곡선' 얽히고 섥힌 마음이 표현되어 있다.                                               무릎 꿇은 여인 Kniendes Madchen 1917, 46 x 28.8cm, 독일 뮌헨 국립 판화 미술관 Statliche Graphische Sammlung                               에곤 쉴레의 사진들           Egon Schiele. (June 12, 1890 - October 31, 1918)                             자신의 작품 앞에서 에곤 쉴레 Egon Schiele, 1914                       에곤 쉴레 1916년 경 Egon Schiele. ca. 1915-18             에곤과 아내 에디트 하름스, 그리고 친척 Egon and Edith Schiele with Edith’s nephew Paul Erdmann. Photograph 1915                                         조안 피셔 사진가의 사진 Photograph by Johannes Fischer. 1915                                                         에곤 쉴레와 그의 모델 발레리 뉘질 1910, Egon Schiele, Valerie Neuzil                               쉴레는 1918년 클림트의 사망 이후 오스트리아를 이끄는 예술가의 지위에 올라서게 되며, 그 해 3월 빈 분리파 전시회에서 큰 성공을 거둠으로써 예술적으로, 경제적으로 클림트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그는 곧 태어날 아기를 기다리며 《가족》이라는 작품을 완성했다. 하지만 같은 해 10월 그의 아내가 당시 유럽을 휩쓸던 스페인 독감에 걸려 사망했고, 그 자신도 독감에 감염되어 아내와 뱃속의 아기를 잃은 지 사흘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대표작에는 《자화상 Self-Portrait》(1910), 《자기 응시자들 II The Self-Seers II》(1911), 《추기경과 수녀 The Cardinal and Nun》(1912), 《죽음과 소녀 Death and the Maiden》(1915), 《포옹 The Embrace》(1917), 《가족 The Family》(1918) 등이 있다.                 에디드 쉴레 죽어 가다 Dying Edith Schiele,  쉴레의 마지막 드로잉 Schiele's last drawing, 1918, 미술책에서 재현 repro from art book           임신 6개월이던 그의 아내 에디트 하름스가 죽어 가는 최후의 모습을 스케치 하던 쉴레는 그림에 서명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사흘 뒤 역시 그도 죽었다. 그가 죽어 가는 모습은 그릴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작품은 그의 마지막 드로잉이 되었다.                                 머리 위로 손을 꼬아쳐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rm Twisted Above Head, 에곤 쉴레를 아무리 흉내내어도 역시 에곤 쉴레의 존재감을 찾아내지는 못한다.                 에곤 쉴레, 머리 위로 손을 꼬아쳐든 자화상 Self-Portrait with Arm Twisted Above Head (1910, 종이에 목탄과 수채화 물감 watercolor and charcoal on paper, 17¾″ x 12½″ [45.1 x 31.7cm]). 개인 소장 Private collection. 뉴욕 신미술관 Neue Galerie, New York                                 팔을 머리 위로 올리고 있는 에곤 쉴레 Egon Schiele with arms raised above his head. 1914년 3월 March 1914. Photograph by Anton Josef Trcka. 쉴레 사인이 된 그림 앞에서 Overpainted by Schiele and signed twice           쉴레 1914년 Schiele in 1914 by Anton Josef Treka d’Antios                         에곤 쉴레가 그의 그림 앞에 앉아 그가 깎아만든 나무 말 목조각을 들고있는 사진 by Anton Josef Treka. 1914. 비엔나 알레르티나 판화미술관 Albertina Museum, Vienna 소장 사진                                                   아마 1915년 사진 Egon Schiele, Vienna (ca. 1915) by Johannes Fischer                     에곤 쉴레 Egon Schiele (1890~1918)  그래서 그토록 부지런을 떨며 살다가 애석하게도, 1918년 10월 31일 28살의 나이로 죽다.     의 한 장면. 지금까지 나왔던 무수한 '예술가' 영화와, 이 작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1227/IE002075749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의 한 장면. 지금까지 나왔던 무수한 '예술가' 영화와, 이 작품은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가.ⓒ (주)티캐스트 화가라는 예술가들의 삶을 그린 영화들은 대개 일정한 패턴이 존재한다. 아니, 그렇게 분류할 수 있다. 우선 명작의 탄생 비화가 궁금하다. 그럼 화가와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둘러보는 게 먼저다. 그러다 보면, 주변 가족과 연인(이나 뮤즈), 친구(와 소울 메이트)들이 두둥실 떠오른다. 이를 위해 특정 시기를 조명하기도 하고, 전체 인생 여정을 따라 잡기도 한다.  이 모두는 예술가의 고뇌로 수렴되기 마련이다. 숱한 화가와 예술가의 삶을 그린 영화들이 이렇게 범주화된다. 그러 패턴이 존재하건만, 관객들은 궁금하고 또 궁금한가 보다. 그 예술가들의 창작 혼이 어디로부터 연유하는지, 또 그들 각자의 사정은 어땠는지 말이다.  그렇게 화가를, 예술가의 생애를 조명한 주목할 만한 '예술'영화들이 한 해에만 어림잡아 서너 편은 꼭 소개된다고 보면 틀리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이러한 작품들은 한국 관객들이 유달리 좋아하는, '빼도 박도 못하는' '실화'(!)아닌가.     인상주의 미술의 거장 폴 세잔과 19세기 프랑스 문학의 대명사 에밀 졸라의 발자취와 우정을 그린 영화 에 이어 또 한 편의 예술가가 세밑 극장가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2일 개봉, 주말 관객 1만을 돌파하며 26일까지 1만3617명을 동원한 (아래 )가 바로 그 작품이다.  매년 연말, 대형 미술 전시가 북새통을 이루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의 흥행 역시 스크린으로 에곤 쉴레의 작품을 감상하려는 예술영화 관객들이 극장을 찾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19세 이상 관람가라는 약점에도 불구하고, 는 크리스마스 당일 34%라는 높은 좌석점유율을 기록했고, 26일까지 영화진흥위원회 다양성 영화 박스오피스 1위를 고수하는 중이다.  그렇다면 는 이른바 '예술가 영화'의 패턴에서 얼마나 같고, 또 얼마나 다를까.   에곤 쉴레와 그의 네 여인들 에 등장하는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1227/IE002075748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에 등장하는 에곤 쉴레의 '죽음과 소녀'.ⓒ (주)티캐스트   의 한 장면. 그림 '죽음과 소녀'와 포즈가 같다."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1227/IE002075750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의 한 장면. 그림 '죽음과 소녀'와 포즈가 같다.ⓒ (주)티캐스트 가난과는 거리가 멀 정도로 유복했다. 대신 매독에 걸린 아버지는 광기에 사로잡혔고, 어머니는 남매에게 지독히도 무관심했다. 두 살부터 무언가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정식 미술 교육은 받지 않았다. 그래도 빈 예술 아카데미에 최연소로 입학했다.  그러나 태생적인 자유분방함이 아카데믹하고 보수적인 학풍과 맞을 리 만무했다.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구스타프 클림트도 질투했던, '죽음과 소녀' 등의 작품으로 우리에게도 친근한 오스트리아 출신의 화가 에곤 쉴레는 '천재'였다.  이 천재의 죽음의 목전에서부터 짧았던 전성기를 되짚는 를 연출한 디터 베르너 감독은 아마도 에곤 쉴레의 먼 후배쯤 될 듯싶다. 역시 오스트리아인으로서 먼저 배우로 커리어를 시작했고, 이후 연극과 드라마, 영화 연출 등 다방면에서 활동 중이다.  오스트리아 출신인 만큼, 에곤 쉴레의 영감을 자극한 실제 오스트리아 빈을 비롯해 체코, 이탈리아, 룩셈브루크 등 유럽의 풍광을 유려하게 담아냈다. 또 영화 말미, 에곤 쉴레가 속한 '빈 분리파'가 전시회에 등장하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베토벤 프리즈'는 실제 작품이기도 하다. 는 그런 '메이드 인 오스트리아', '메이드 인 유럽'의 흥취가 물씬 배어난다.    이 베르너 감독이 영화화의 모태로 삼은 작품은 이다. 5년간의 조사를 거친 작가 힐데 베르거는 에곤 쉴레와 뮤즈들의 관계가 그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천착했다. 에곤 쉴레가 미성년자 납치 및 추행 혐의로 고소된 사건이나 그의  마지막 뮤즈였던 에디트 하름스에 관한 영화 속 내용 역시 이 원작에 힘입은 바 크다.  그런 점에서, '에곤 쉴레의 여자들'이란 원작의 부제는 영화의 부제라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에곤 쉴레의 강렬했던 청춘을 조명하는 또한 그의 예술 세계를 풀어 가는 실마리로 그를 사랑했고, 그에게 영감을 줬던 네 여인과의 순간을 이야기의 주요 얼개로 배치했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만나는 에곤 쉴레의 작품과 그의 생애    의 공식 포스터. 그가 여성과 만나고 헤어졌던 과정을 그렸다."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1227/IE002075747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의 공식 포스터. 그가 여성과 만나고 헤어졌던 과정을 그렸다.ⓒ (주)티캐스트 유일하게 정을 나눈 혈육이자 남매를 넘어선 교감과 애정 관계로 그려진 동생 게르티 쉴레, 역시 유일하게 에곤 쉴레의 작품 속에 이름을 남긴 댄서 모아 만두, '영혼의 반쪽'이라 할 만한 모델 발리 노이질,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함께한 부인 에디트 하름스. 의 이야기 구조는 이 네 여성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그리는 것으로 채워진다.  여성을 작품의 전면에 내세웠고, 사랑하는 여인들을 꾸준히 모델로 삼았던 에곤 쉴레였기에,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한 일견 적절한 선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중 중심을 차지하는 인물은 클림트를 통해 소개 받은 발리 노이질이다. 에곤 쉴레가 발리 노이질과의 사랑과 이별을 담았다고 평가받는 는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 깊게 등장하는 그림이기도 하다.  발리 노이질은 모델뿐만 아니라 에곤 쉴레의 정신적, 일상적 지지자이자 동반자였고, 미성년자 납치 및 추행 혐의로 재판에 구금됐을 때나 군에 복무하게 됐을 때도 그의 곁을 지키며 헌신했다. 베르너 감독은 와 같은 구도의 장면을 그대로 찍었을 만큼, 둘의 관계를 영화의 중심 축에 가져다 놓는다.   그리하여 발리 노이질과의 관계와 파국이야말로 에서 격정적인 삶을 살았던 한 젊은 예술가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창으로 기능한다. 한편으론, 발리 노이질과 여타 여성들과의 관계는 결국 무엇이 에곤 쉴레를 고뇌하게 만들었고, 또 어떻게 범인들과는 다른 길을 갔는가를 드러내는 반사판과도 같은 역할을 한다.   물론 관계와 사랑이 전부는 아니다. 20세기 초 오스트리아가 배경인 는 그가 겪는 음란함에 대한 시시비비나 군 징병을 통해 당대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나 제1차 세계대전한창이던 유럽의 역사적인 맥락이 어떻게 예술가에게 영향을 미쳤는가 하는 거시적인 시각까지 제공해 준다.   그리고, 에곤 쉴레의 작품들. 에곤 쉴레는 1918년 10월 31일, 28세의 나이로 사망하기 전까지 약 300여 점의 유화와 2000여 점이 넘는 데생과 수채화를 남겼다. 는 그의 미완성적인 을 필두로, 발렌 노이질을 모델로 한 , 등이 등장하고, , 등 작품이 탄생하는 순간을 고루 포착해 미술 애호가들의 구미를 자극시킨다.  에곤 쉴레가 드로잉을 하거나 다양한 방법으로 작품을 구상하고 그리는 장면도 빠지지 않는다. 여기에 구스타프 클림트의 팬이라면, 그림 교환 장면에서 등장하는 나 이 스크린으로 비칠 때 무척이나 반가울 듯 하다.  결론적으로, 여타 예술가의 초상을 그린 작품마냥 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역작이나 문제작은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범인들의 시각에서 예술가의 예술혼의 어떤 양상을 훔쳐보는 경험은 분명 흥미진진한 일이다. 가 그리는 뜨거운 청춘과 시대를 앞서간 작품 세계, 다소 비극적인 죽음의 궤적 역시 이 범주에 충실하다고 할 수 있다. 미술애호가라면, 에곤 쉴레의 팬이라면, 극장에서 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알현하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그의 작품도, 영화의 주제도 결국은 젊은 예술가의 예술혼과 사랑으로 귀결된다. 보편적인 예술가의 이야기로 읽어도 무방하다. 오스트리아로부터 날아 온 는 그렇게 충분히 '클래식'하다.    의 한 장면. 낯선 화가의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src="http://ojsfile.ohmynews.com/STD_IMG_FILE/2016/1227/IE002075751_STD.jpg" style="letter-spacing: -0.025em; margin: 0px; padding: 0px; border: 0px; outline: 0px; vertical-align: baseline; background: transparent; max-width: 100%;" /> ▲영화 의 한 장면. 낯선 화가의 보편적인 이야기이다.ⓒ (주)티캐스트      
297    그림에 침을 뱉느냐 안 뱉느냐 하는 문제가 "문제"로다... 댓글:  조회:2387  추천:0  2017-01-27
1800년, 고야가 ‘옷 벗은 마하’ 그림을 내놓았을 때 유럽 문화계는 그의 그림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신성모독이다, 외설이다, 말도 많았다. 그 전 여성의 누드 그림들이 신화 속 인물들을 차용해서 현실과 거리가 먼 것이라는 면죄부를 받았지만 어떤 신화적 모티프와도 상관없는 등신대의 지극히 현실적인 여성 나체화가 보수적인 평단의 분노를 일으킨 것이다. 결국 거센 비난을 받은 3년 후 ‘옷 입은 마하’라는 제목으로 그림을 조신하게 바꾸어 놓았지만, 1813년 외설, 이단이란 제목으로 일종의 종교재판을 받게 된다. 마네의 1863년 벌거벗은 여인과 양복 입은 신사가 함께 앉아 있는 ‘풀밭 위의 식사’, 1865년 나체 여인을 그린 ‘올랭피아’ 역시 비슷한 항의를 받았다. 티치아노가 그린 ‘우르비노의 비너스’를 패러디한 그림이지만, 머리띠, 고양이, 머리에 꽂은 난초, 흑인 여종, 치골 위의 손가락 등이 현실세계의 팽팽한 성적 긴장감을 도발했기 때문에 여성으로 하여금 성적 수치심을 느끼게 한다는 평도 들었다. 에밀 졸라 같은 문인이나 세잔, 고갱 등 화가들은 이 그림을 역사적인 명화라고 생각했지만, 당시 많은 사람이 그 그림에 침을 뱉었다. 20세기라고 크게 다르지 않다. 에곤 실레의 누드 그림과 관련된 소동은 마침내 화가를 감옥에 가두게 만들었다. 실레의 파격적이고 도발적인 누드 자화상들은 남자가 자신의 몸을 그렇게까지 리얼하게 묘사한 전례가 없기 때문인지 많은 이에게 불쾌감을 자아냈다. 게다가 그의 스튜디오에 꽤 많은 반항적인 젊은이들이 모여들어서 재판부가 청소년에게 포르노그라피를 보여 주었다는 죄로 화가를 구금했다. 이 일은 실레에게 큰 상처가 되고 얼마 후 스페인 독감이 유행했을 때 임신한 아내와 함께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이들이 들어야 했던 비난의 말들은 표면적으로는 ‘점잖지 못한 외설’이지만, 실제로는 과거를 답습하려는 보수적인 화단과 감상자들이 가지고 있는 새로움에 대한 저항, 또 창조적인 길을 가려는 이들에 대한 질시가 더 크다. 외설적인 이미지에 대한 논쟁은 심지어 베트남 전쟁에서 화상을 입고 알몸으로 도망치는 여아를 찍은 닉 우트의 ‘네이팜 소녀‘란 역사적인 사진도 비켜가지 않았다. 누드를 신문에 실을 수 없다는 원칙 때문에 세상에 나오지 못할 뻔 했었고, 이후에도 어린 소녀란 점 때문에 두고두고 논란이 되기도 했다. 시각예술뿐 아니라 문학도 마찬가지다. 고전이 된 데카메론, 엘로이즈, 캉디드, 로리타 같은 책들도 발표 당시에는 사회적 윤리를 깨는 해로운 책으로 간주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책 좋아하는 정조가 사물을 묘사한 박지원의 문체를 문제삼을 정도이니 더 말할 필요가 없다. 결국 18세기 진경산수, 실학, 서학 등 우리 정신사의 자유로운 성취는 19세기에 이르러 퇴행해 버리고 만다. 일본의 우키요에가 유럽의 화단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자연과학 예술, 모든 면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일본문명에 비해 경쟁력이 끝없이 추락해 버린 것이다. 그와 같은 우리 사회의 보수성이 결국 세계사에서 우리를 뒤처지게 만든 이유 중 하나가 아닐까. 올랭피아와 pjh의 얼굴을 합성한 사진이 전시되어 이런저런 논란이 되고 있다. 자식 얼굴을 어떻게 볼 것이냐, 여성들을 모욕했다 라는 말들도 한다. 보는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는 자유다. 나라면 그런 그림을 g회 전시관에 걸면 괜히 복잡해진다고 말렸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세상과 맞서서 신념대로 살아가는 예술가들에게 세상과 타협해서 사는 나 같은 이들의 비겁한 인생관을 강요한다면, 모욕이자 폭력이 된다. 미적 성취의 높고 낮음을 떠나 마음 가는 대로 자기를 표현하는 예술가들은 일상의 비루함에 갇혀 좀비가 된 보통 사람들에게 권태로운 삶을 견딜 수 있는 에너지와 고통 속에 숨은 의미를 알려 준다. 예술에 대한 테러인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고 장관과 수석까지 구속한 마당에 예술 작품을 자신의 정치적 신념 때문에 훼손하거나 예술가들을 억압한다면 앞뒤 논리가 맞지 않는다. 실제로는 지극히 비도덕적인 사람일수록 죄 없는 예술가나 작품에 극단적인 도덕률을 강요하기도 한다. 본능에 휘둘리는 자신의 어두운 무의식 세계는 부정하고 남에게 투사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성숙하지 못한 사람들일수록, 내 안의 문제는 보지 못하고 남들에게서 잘못을 찾는다. 스스로의 영혼이 황폐하고 공허하기 때문에 대신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종하려는 데 인생을 거는 것이다. 그래야 스스로의 무가치감과 무의미함을 잊을 수 있으니까. 세상에는 무언가를 만드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질투로 남들이 해 놓은 것을 무조건 깎아 내리는 이들이 있다. 악성 댓글 부대건, 예술작품을 훼손시키고 예술가들의 발에 족쇄를 채우는 이들이건, 그저 세상을 흉흉하게 만드는 일일 뿐이다. 작품이 이로운지 해로운지, 쓰레기인지 높은 성취인지는 감상하는 이들 각자가 결정할 일이지, 폭력을 휘두를 일은 아니다. 이나미 이나미심리분석연구원 원장
296    사진술 나타나자 판화가들 자살로 이어지다... 댓글:  조회:2124  추천:0  2017-01-25
15세기 말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유럽 문명사에 괄목할 만한 또 하나의 과학 기술이 나타났다. 바로 1839년 프랑스의 루이 다게르(1787~1851년)가 발명한 사진 기술(‘다게레오타이프’라고 이름 붙임)이다.  사진술은 사물을 대량 복제(생산)해 소비자에게 공급하는 기술이며, ‘상품의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로 특징지어지는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산물이다. 사진 기술의 발명은 기계가 침범할 수 없을 것 같던 인간의 정신적 표현영역인 예술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특히 인물과 자연을 충실히 재현하던 화가들과 문자의 서술적 형식을 빌려 자연을 감성적으로 표현하던 문학가들에게 사진 기술 발명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당시에는 명성을 얻기 위해 살롱전에 입상하는 화가, 초상화로 명성을 얻은 뒤 국가나 단체들로부터 역사화를 주문받는 관학풍 화가 등이 있었다. 그러나 사진술의 발명으로 초상화를 주문하는 고객이 줄어들자 초상화가들은 흑백사진에 색을 입히는 채색화가로 전락한다. 사진기의 렌즈가 인간의 눈을 대신하게 된 것이다. 화가들은 이제 ‘미술은 끝났다’고 생각했으며, 기록에 따르면 판화를 제작하던 화가들이 집단 자살을 시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사진술의 발명이 꼭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묘사하는 데 충실했던 앵그르와 같은 사실주의 화가들은 초상화 제작에 사진을 이용했으며 자신의 작업을 사진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1870년대에 ‘확대된 사진을 적당한 가격에 옮겨드립니다’라는 광고가 신문에 빈번히 게재된 걸 보면 당시 화가들이 사진을 그림에 이용했었음을 알 수 있다.  사진술의 발명은 당시 화가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이런 미술의 위기상황에서 인상주의 화가들만의 독특한 표현양식이 어떻게 탄생되는가를 살펴본다는 것은 당시 미술의 특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지금부터는 자연·인물의 대량 복제 방식 중 하나인 사진술의 발명으로 위기에 처한 당시 화가들이 그들 앞에 놓인 커다란 벽을 어떻게 헤쳐 나갔는가에 대해 표현양식의 관점에 국한시켜 살펴보도록 하자. 무엇(What)을 그렸는지에 대해서는 다음에 설명하도록 하겠다.  문학가와 공조한 인상주의 화가들  물론 인상주의 표현양식을 사진술이라는 기계매체의 출현만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자연과 사회적 현상을 시나 소설로 표현했던 보들레르, 에밀 졸라, 플로베르, 모파상 등 문학가들은 인상주의 화가들이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 보들레르의 시집 ‘악의 꽃’에서 ‘교감(交感)’이라는 시의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자연은 하나의 신전(Temple)이고, 그곳에 살아 있는 기둥들에서…말소리가 새어나오고, 인간이 그곳 상징의 숲을 지나면 숲은 정다운 시선으로 그를 지켜본다. (중략) 어둡고 깊은 통합 속에서…향기와 색채와 소리가 서로 화답한다. (중략) 정신과 관능의 환희로 노래한다.”  이 시를 음미해보면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지니고 있는 자연에 대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세계는 객관적으로 보이는 것으로서는 의미가 없다. 그 뒤에 숨어 있는 눈에 보이지 않는 현실의 상징이 무엇인지가 예술가들에게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 대표적 관점이다. ‘카메라 렌즈로 보는 객관적인 자연은 의미가 없다’는 주장을 시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문학자들의 주관적 미안(美眼)에 당시 화가들은 용기를 얻었다. 마네와 보들레르, 에밀 졸라와 모네, 드가 등이 매우 친한 사이였음이 역사적 우연은 아닐 것이다.  사물을 재현하는 사진술의 한계  마네, 모네, 드가 등 인상주의 화가들이 활동하던 1860년대의 사진술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사진기의 기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열악했다. 사물의 재현이라는 기능적 측면에서 당시 사진술의 한계점을 몇 가지 지적해보자.  첫째로 대상을 흑백으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즉, 농염(검은색과 흰색의 짙은 정도)으로 형태를 표현할 수 있었지 색채로 사물을 구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둘째로 움직이는 물체를 포착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867년에 파리 시내를 찍은 사진을 보면 거리에 사람이 보이질 않는다. 같은 시기에 모네가 그린 ‘왕비의 정원’이라는 그림에는 산책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자연을 눈이 아니라 화가의 마음으로 읽어낸 것이다. 셋째로 특정 인물이나 대상에 초점을 맞춰 사진을 찍으면 사진에 잡히는 구도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야외에서 자연을 배경으로 인물이 서 있는 모습을 찍을 때 인물에 초점을 맞추면 사진에 잡히는 배경(시야)이 좁아질 수밖에 없다. 줌 렌즈가 발명되기 이전이기 때문이다. 마네가 그린 ‘폴리 베르제르의 술집(1881년)’은 당시 사진 기술로는 불가능한 구도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창조력에 높은 점수를 줘야 할 것 같다.  마네는 좀 더 넓은 배경을 그림에 넣기 위해 거울에 비치는 고객들을 그려 넣었다. 당시 화가들은 사진술의 약점에서 착안해 ‘기계적 눈(사진)이 보지 못하는 사물을 사람의 눈으로 보는 새로운 회화적 기법’을 탄생시켰다. 지금부터 당시 화가들의 그림을 감상하면서 중요한 특징 몇 가지를 살펴보도록 하자.  색채기법으로 승부한 인상주의 화가들  인상주의 화가들의 색채기법을 이해하기에 앞서서 색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살펴봐야 할 듯하다. 소리가 음의 길이, 높낮이와 어울림으로 이뤄져 있듯 색도 무슨 색인지를 나타내는 색조, 색의 밝기를 표현하는 명도, 색의 맑고 탁함의 정도를 나타내는 채도로 구성돼 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공통적 특성은 명도와 채도가 높은 색을 사용하고 명도대비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이다. 마네의 ‘올랭피아(1863년)’라는 그림은 명도대비를 최대로 활용한 대표적 작품이다. 여인의 피부색을 밝게 표현하기 위해 원래 캔버스 바탕색을 그냥 두고 배경은 어두운 색을 사용해 색의 대비 효과를 극대화했다.  모네는 명도뿐 아니라 채도가 높은 색을 많이 사용했다. ‘트루빌 해변(1870년)’ ‘아르장퇴유 요트경주(1872년)’ 같은 그림을 보면 독자들도 모네의 색채 감각을 잘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바람에 날려 사라질 것 같은 모네의 색채는 실제 화가의 눈에 보인 자연의 색이 아니라 화가가 마음속으로 상상한 자연의 색이다. 1865년경에 발명된 컬러사진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색채기법을 사용했다.  움직임도 포착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눈  마네와 모네는 그림을 그릴 때 사진을 이용했으며 드가는 실제로 사진기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사진기가 사물이나 사람의 움직임을 포착하지 못한다는 점을 다른 화가들보다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네와 모네는 사물의 움직임을 화폭에 옮기려는 시도를 많이 했다.  움직임을 표현하기 위해 마네와 모네의 그림에는 구름의 이동, 물결의 흐름, 깃발의 나부낌,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 등이 자주 등장한다.  마네가 그린 ‘아르장퇴유(1874년)’ ‘뱃놀이(1874년)’ 등의 그림에는 흐르는 물결과 움직이는 구름 등의 장면이 나타난다. 모네의 그림에는 사물 움직임의 포착이 더욱 더 확연하게 나타난다.  ‘생타드레스의 테라스(1867년)’에는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 움직이는 구름, 물결치는 바다, 증기선 밖에서 나오는 연기 등이 나타나고 ‘생자르 역(1877)’에는 기차의 연기가 대기에 흐트러지는 동적인 모습이 잘 나타난다.  한편 주로 실내에서 작품 활동을 하던 드가(1874~1917년)는 무용수의 움직임을 표현한 ‘발레’라는 이름이 붙은 그림들을 그려낸다.  실내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가장 잘 포착할 수 있는 곳이 발레 연습장이었고, 인상주의 화가들 중 가장 부유했던 드가가 자신이 발레에 취미를 갖고 있다는 것과 발레 연습장에 자유로이 드나들 수 있었음을 과시하려는 측면도 있다.    그의 발레 그림이 사진과 차별화되는 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점을 어디에 두고 있는가를 잘 관찰할 필요가 있다.  ‘무대 위의 발레 리허설(1874년)’이나 ‘초록빛 무용수(1877~1879년)’ 같은 그림은 높은 곳으로 사진기(초창기 사진기 무게는 50kg 정도)를 이동시키지 않고서는 담아낼 수 없는 구도라는 점에서 높게 평가해야 될 것이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기법을 그림의 주제와 별도로 이해한다는 것은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  여기에 설명되지 않은 표현양식들은 그림의 주제를 설명하는 시간에 추가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성제환 원광대 교수·경제학부]  ※ 주요 경력:미국 코넬대 경제학 박사, 게임산업개발원장, 원광디지털대 총장. 
295    그림 한점에 나타난 와인이 당 현재, 와인 너머 향기 흐른다... 댓글:  조회:3209  추천:0  2017-01-25
마네의 ‘폴리-베르제르의 술집’과 그림 속 바 테이블 위의 샴페인 유럽 사람은 오래전부터 와인을 식사의 일부로 여겨 음식과 함께 샴페인, 화이트, 레드, 스위트 와인 순으로 마셔왔습니다. 1869년 예술의 도시 파리에 뮤지컬, 발레, 곡예, 마술 그리고 누드 공연이 열리는 최초의 뮤직홀 폴리-베르제르가 문을 엽니다. 이곳으로 예술가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인상주의의 아버지’로 불리는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1832~1883) 역시 즐겨 찾아 그의 작품 소재로 등장시킵니다.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가 소장하고 있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A Bar at the Folies-Bergère)은 마네의 마지막 주요 작품입니다. 인상주의 화가 에드아르 마네의 마지막 주요 작품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바 테이블 위에 샴페인이 놓여 있다 이 작품은 처음 발표된 1882년 파리 살롱에서 비평가들에게 원근법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비난을 받습니다. 마네는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Diego Velazquez, 1599~1660)의 영향을 받아 거울을 이용한 그림을 그립니다. 화가와 여성과 거울이 일직선상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면 화가는 거울에서 여성의 뒷모습을 볼 수 없어야 하지만 그림의 오른쪽 거울에는 여성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후 그림의 상황을 재현하는 사진 작업이 진행되었고, 그 결과 화가는 여성의 정면이 아니라 오른쪽으로 치우친 위치에서 본 장면을 그린 것임이 밝혀집니다. 스파클링 와인은 길쭉한 모양의 잔에 따르는데 그 이유는 와인의 기포를 즐기기 위해서입니다. 와인의 기포는 시각뿐만 아니라 청각으로도 느낄 수 있습니다. 기포가 있는 와인을 통칭하여 스파클링 또는 발포성 와인이라고 합니다. 특히 상파뉴 지역은 라벨에 원산지를 표시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와인 산지로, 오직 스파클링 와인만 생산합니다. 이곳에서 전통 방식으로 만든 와인을 지역명과 같은 명칭인 상파뉴 또는 영어식 발음으로 샴페인이라고 합니다. 예술가들의 메카 폴리-베르제르에서 술이 빠질 수 없었고, 마네 역시 이 작품 속에 다양한 술을 표현합니다. 그림 속의 바 테이블 위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병 입구 부분이 금색 코일로 쌓여 있는 스파클링 와인입니다. 식탁 위의 와인은 맑은 금빛을 띱니다. 흡사 화이트 포도 품종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화이트뿐만 아니라 레드 포도 품종이 블랜딩되어 만들어집니다.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 신선한 과실 향에 산도가 뛰어나다,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 질감이 부드러우며 밸런스가 뛰어나다 중년 신사 닮은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와 발랄한 소녀 같은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 금융 명문가인 로칠드 가문의 문장(紋章) 속의 5개 화살은 다섯 아들의 화합을 바라는 마이어 암셸 로칠드(1744~1812)가 남긴 유언입니다. 그의 뜻에 따라 아들들은 프랑스 상파뉴(Champagne) 지역에서 최초로 하나의 뜻을 펼칩니다. 아들들이 함께 만들어낸 와인이 샴페인 바론 드 로칠드 브뤼(Champagne Barons deRothschild Brut, 이하 바론 드 로칠드)입니다. 마네가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서 여러 송이 꽃들이 함께 샴페인을 머금은 모습으로 표현했듯이, 로칠드는 화합의 정신을 담고 있습니다. 각기 다른 색을 가진 분들과 함께 좋은 밸런스를 이루는 로칠드 브뤼로 와인의 시작을 열어보시기 바랍니다. 샴페인이 다른 지역에 비해 명성을 얻는 가장 큰 이유는 와인의 기포에 있습니다. 파이퍼 하이직 퀴베 브뤼(Piper Heidsieck Cuvee Brut, 이하 파이퍼 하이직) 역시 오밀조밀한 기포를 가지며 지속력이 좋습니다. 샴페인은 샤르도네, 피노 누아 그리고 피노 뫼니에 품종이 블랜딩되는데, 각 샴페인 하우스마다 사용 품종과 비율은 각각 다릅니다. 로칠드 브뤼는 와인에 산도와 꽃 그리고 감귤류의 풍미를 주는 샤르도네와 구조감, 바디감과 여운을 주는 역할을 하는 피노 누아를 6:4로 블랜딩해 만듭니다. 코로 은은하게 아카시아 꽃향이 나기 시작해 서양배, 복숭아 그리고 그 뒤로 샴페인 특유의 비스킷과 잘 구워진 빵의 풍미를 느낄 수 있습니다. 섬세한 기포들이 촘촘하고 힘있게 올라옵니다. 입안에 머금으면 기포가 터지며 역시 흰 꽃에서 시작해 시트러스, 열대과일 향을 거쳐 이스트 풍미를 가지며, 충분히 좋은 크리스피한 산도가 받쳐줍니다. 전체적으로 훌륭한 밸런스를 이루며 부드럽게 넘어갑니다. 바론 드 로칠드가 기품 있고 고급스러운 중년 신사의 느낌이라면, 파이퍼 하이직은 아직은 어리고 톡톡 튀는 소녀같은 와인입니다. 파이퍼 하이직은 화이트 포도 품종을 포함하지 않고 오직 레드 품종만을 사용합니다. 피노 누아와 함께 블랜딩되는 또 다른 레드 품종인 피노 뫼니에는 와인에 과실 향을 주어 어릴 때 마시기 좋습니다. 향의 복합미 또한 뛰어납니다. 빵과 비스킷의 향으로 시작해서 파인애플 같은 열대과일을 거쳐 서양배의 풍미로 마무리됩니다. 혀 위에서 역시 자몽과 붉은 사과 같은 신선한 과실 향이 인상적이며, 충분한 산도를 가집니다.   서민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 강사 /서민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공예문화정보디자인학과 강사 겸 금속공예작가로 개인전을 5회 개최했다.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립대에서 금속공예와 주얼리를 전공했고, 템플대학교에서 CAD-CAM 학위를 받았다. 영국 와인전문교육기관 WSET를 수료한 와인전문가다. ==================== 등록 2015-06-02 10:25:09  |  수정 2016-12-30 09:50:56     【런던=AP/뉴시스】 소더비 경매사는 24일 런던서 에두아르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 술집'을 경매한다고 1일 발표했다. 소더비는 이 프랑스 인상파 작품의 예정가를 2300만∼3070만 달러로 발표했다. 2015.6.2   ========================       에드가 드가 1876년, 캔버스에 유채, 92*68cm 오르세 미술관, 파리   연말입니다. 한해를 마무리 하는 모임에 참석하느라 바쁠 때이지요. 저 또한 이런 연말의 부산함에서 자유롭지 않습니다. 벌써 문자로만 받은 것이 8개의 모임입니다. 모임을 가면 빠지지 않는 것이 바로 이 술입니다. 첨잔하며 한 두잔 기분좋게 마시면 분위기도 돋우고, 가일층 기분도 좋지만 지나치면 항상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이 술이죠.   오늘은 그림 속에 나타난 과 그들이 즐겨 마신 압생트란 술에 대해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드가의 작품 는 당시 유명한 파리의 카페 누벨 아테네를 배경으로 합니다. 이곳은 마네와 드가가 자주 들렀던 카페였죠. 당시 여배우인 엘엔 앙드레를 모델로 삼아 당시 패션의 아이콘으로 명성을 날리던 파리여인들, 파리지엔의 삶을 그려냈습니다.         바로 카페에서 그녀가 마시고 있는 술이 압생트란 것입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은 압생트를 마시는 사람들의 모습을 화폭에 자주 담았습니다. 이번 주 미국 타임지에 흥미 있는 기사가 올랐습니다. 이란 기사인데 번역하자면 "압생트의 부활, 압생트가 돌아왔다" 정도가 되겠지요. 도대체 이 압생트가 뭐길래 난리일까요? 인터넷을 찾아보니 그 유해성을 둘러싸고 찬반론도 만만치가 않더군요.   압생트의 기원은 18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피에르 오디넬이란 프랑스 출신의 의사가 편백나무와 아니스라 불리는 향료식물, 회향열매(흔히 마리화나라고 하지요), 약용 박하를 함께 증류해서 치료용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 처방전이 당시 유명한 주류업체인 페르노 리카르에 넘어가게 되지요. 이 회사의 유명한 브랜드가 바로 시바스 리갈입니다.(이건 잘 아시죠) 이후 이 증류주는 인기를 끌면서 당시 부르주아 사회와 드미 몽드(당시의 고급창녀)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됩니다. 매해 2백만 리터가 소비될 정도로 그 인기의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죠.         장 베로 연도미상, 캔버스에 유채, 퐁텐블로 경매에서 낙찰   유럽에서 인기를 끌었던 이 압생트는 한 세기동안 미국내에 유통이 되지 않았습니다. 미국 연방정부에서 술 자체에 들어있는 환각유발효과를 근거로 수입을 하지 못하게 막았지요. 압생트는 지중해산 약용/향료 식물인 아니스에서 추출한 연두빛 향이 눈길을 끄는 술입니다. 1800년대 후반 프랑스에선 정신이상을 유발한다는 악평을 들어야 했던 술이었고 그 유명한 빈센트 반 고흐도 이 술에 중독되어 자신의 귀를 잘랐다는 후문까지 있습니다.          장 베로 캔버스에 유채, 연도미상, 개인소장   이라 불리는 압생트는 쑥과 식물인 웜우드에서 추출해낸 연두빛깔이 그 생명입니다. 아주 곱지요. 문제는 이 식물이 환각효과를 유발하는 화학성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편백나무 껍질에서 추출되는 이 Thujone 이 환각효과를 불러일으킨다는 것 때문에 이 물질을 넣지 않고 술을 제조한다는 조건 하에 압생트를 미국에서 판매할 수 있도록 허락을 한 것이죠. 여기에  유럽의 주류업자들의 강력한 로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는 후문입니다.   1890년 후반의 파리를 아름다운 시절이란 말로 설명합니다. 당시 활동했던 장르화가 중에 장 베로란 작가가 있습니다. 파리지엔의 일상과 거리의 풍경을 마치 사진으로 찍듯 묘사한 작품들을 많이 남겼죠. 시리즈에 나오는 저 술....연두빛 압생트입니다. 당시 값싸고 도수가 높아 예술가들에게도 큰 인기를 얻었죠                                좌 : 빈센트 반 고흐 1887년, 46.3*33.2cm캔버스에 유채 반 고흐 미술관                      우 : 에두아르 마네 1859년, 캔버스에 유채, 178*103cm, 코펜하겐 미술관   이번 빈센트 반 고흐전에 가시면 이란 작품을 보실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을 그리던 당시 고흐는 거의 알콜 중독 상태였다고 하죠. 거리가 보이는 창문 앞쪽에 놓인 테이블, 그 위에 놓여진 압생트 (물론 물로 희석해서 마셨을겁니다) 는 작가의 외로움과 고독을 드러내는 일종의 장치이기도 했죠.         툴루즈 로트렉(1864-1901) 1892년, 캔버스에 유채, 123*141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헬렌 버치 바틀렛 기념 컬렉션   파리의 밤 풍경을 즐겨 그린 로트렉의 그림 속 카페 물랭루즈는 지금으로 치면 극장식 술집이었던 셈입니다. 물론 여기서도 압생트의 인기는 절정에 달했겠지요 술과 질펀한 유희가 가득한 이곳에서, 사람들은 압생트를 마시며 더욱 생생한 기분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 그림 속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저 카페를 찾아온 일반 사람들이 아닙니다. 철저하게 화가의 지인들이죠. 화가와 시인, 사진작가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모델로 삼아 초록빛 얼굴을 한 광대의 모습을 아주 정밀하게 그려냅니다. 광대의 모습이 일정부분 화면에서 지워진 것은 당시 사진의 영향이라고 하네요.         파블로 피카소 1901년, 종이에 구아슈와 파스텔, 에르미타쥬 미술관, 생 페테르 부르크   최근 연구자료를 보면 이 압생트에 포함된 Thujone은 마치 강한 커피를 수십잔 마신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고 해요 신경자극을 통제하고 전달하는 효소를 막음으로써 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더구나 이 성분에는 납이 일정량 포함되어 오랜동안 음용할 경우 건강을 해친다고 하는 것이죠.   피카소 또한 이 압생트에 푹 빠져 있었다고 하죠. 1901년 가을 파리의 한 카페에서 이 압생트를 마시는 여인을 보고 그린 그림입니다. 보라색과 황색의 강한 대비가, 마치 술에 취했을 때 느껴지는 신산함을 토해내지요.         파블로 피카소 1901년 캔버스에 유채,    태생적으로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다보니 사실 거나하게 취해야 하는 자리엔 약간 불청객 취급을 받기도 합니다. 행복한 기분 올려주는 한 두잔의 술까지 싫어하는 것은 아니죠. 그저 눈이 내리고 꽃이 지는 날, 인생에서 배운 것들이 나를 살찌울때 반주 겸 곁들였으면 합니다. 연말에 술 너무 드시지 마시고요. 좀더 풍성하고 아름다운 한해의 갈무리 하셨으면 하네요. 후회없는 올 한해의 마무리를 향하여.....에디프 피아프의 듣습니다.   인생은 나에게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가을밤 막다른 골목 끝 포장마차에서  빈 호주머니를 털털 털어  나는 몇번이나 인생에게 술을 사주었으나  인생은 나를 위해 단 한번도  술 한잔 사주지 않았다  눈이 내리는 날에도  돌연꽃 소리없이 피었다  지는 날에도   정호승의 전문 ============================================     이 그림은 마네가 남긴 마지막 작품으로, 현재 영국 런던의 코톨드 갤러리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제목의 "폴리베르제르"는 프랑스 파리에 있는 콘서트홀로, 서커스, 콘서트 등이 공연되었다고 합니다.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기도 하고요.     무엇보다도 이 그림에서 눈에 들어오는 존재는, 화면 정중앙에 위치한 바텐더 아가씨입니다. 세로로 이어진 그녀의 상의 단추는, 이 화면의 정중앙을 수직으로 2등분하고 있습니다. 그녀는 화려하고 떠들썩한 홀을 등진 채,  까닭을 알 수 없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녀는 어디를 보고 있는 것일까요? 바로 그녀 등뒤의 홀입니다. 사실 그녀 등뒤에 보이는 홀의 모습은, 그녀 등뒤에 놓인 커다란 거울에 맺히고 있는 영상인 것입니다. 이 사실은 그녀가 손을 얹고 있는 대리석 재질의 바가 그녀의 등뒤에도 있다는 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 위에 놓인 병이 비치는 모습은 완전히 일치하지는 않지만요(사실 그림 오른쪽에 보이는 여자의 뒷모습도 바텐더 아가씨의 뒷모습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광학 법칙에 어긋나는 부분인데, x선을 투사해서 보면 스케치를 여러번 고치면서 구도를 변경하다가 이런 일이 생겼음을 알 수 있다고 하네요.).  저는 홀을 바라보고 있는 그녀의 무심한 눈빛이 무척 마음에 듭니다. 군중속의 고독...같은 것이 느껴진다고나 할까요. 더욱이 그녀의 눈빛은 작자인 마네의 인생과도 맞닿은 부분이 있습니다.   마네는 고등법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부르주아 집안에서 태어나 당시 문화예술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자란 그는 세련된 파리지앵이었습니다. 그는 대도시로서의 파리를 사랑했고, 그래서 파리 시민들의 도시적 삶의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습니다(교외의 풍경화를 자주 그렸던 동료들, 모네나 르누아르 등과는 성향이 달랐습니다).  한편 그는 전형적인 기득권층이었음에도 보헤미안 기질이 다분하여, 금기와 관습을 깨는 문제작을 많이 그렸습니다. 그 유명한 , 등이 그것입니다. 이 때문에 그는 젊은 시절 모진 혹평을 견뎌야만 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의 화풍으로 주류 화단의 문을 꾸준히 두드렸고, 만년에야 비로소 인정을 받아 화가로서는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르(명예 훈장)까지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수상의 기쁨도 잠시, 그는 화가로서의 생명을 오래 이어가지 못합니다. 젊은 시절의 방종 때문에 얻은 매독으로 인해 한쪽 다리가 썩어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다리가 썩어들어가는 고통 속에서 (공식적으로) 마지막 작품인 이 을 완성했고, 다리를 절단하는 수술을 받았습니다. 다리를 절단하고 난 마네는 자신이 더 살지 못할 것임을 예감했다고 합니다. 병상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파리 시내를 내다보던 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그는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화려하고 세련된 대도시, 파리에 작별을 고해야만 했습니다. 병상에서 누워 활기찬 파리 시내를 내다보던 그의 표정은, 아마도 시끌벅적하고 화려한 홀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바텐더 아가씨의 표정과도 비슷하지 않았을까요. 이 표정에 대해 미술사학자 프랑수아즈 카생은 "이 그림은 마네를 줄곧 사로잡은 파리 생활의 마지막 이미지의 결론을 말해 주는 듯하다. 잔치는 끝나고, 아름다운 여인들과 아름다운 생애도 막을 내렸으며, 이제는 그림에게도 마지막 인사를 고해야 할 시간이 왔으니까.(프랑수아즈 카생著, , 시공사, 1998 중에서)"라고 평한 바 있습니다.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비평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이제쯤 이런 의문이 드시리라 생각합니다. 왜 맥주랑 관련도 없는 이야기를 왜 이렇게 주절주절 썼을까? 아마 제 의도를 눈치채신 분도 있을겁니다.     화면 아래에 어디서 많이 본 라벨이 붙은 병이 보이네요~아~~     많은 분들이 드셔보셨을 BASS입니다.  1777년에 버튼온트렌트에 설립되었고, BASS의 대표격인 맥주 페일에일은 1877년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그림이 그려진 것이 1880년대이니, 확실히 출시된 이후네요. 그림속의 라벨은 빨간 삼각형에 녹색 테두리인데, 인터넷 검색 결과 아래 사진의 라벨과 제일 유사한 것 같습니다.       인상파의 아버지 마네의 작품과 정물의 조화    이번 호에서는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1882)”에 앞 정물들을 배치해서 그려 보았다.  명화와 정물을 조합해서 “명화 다시 그리기”의 형식으로 연재를 하기 시작한지도 4달째에 접어들었다.  한 달에 한번쯤은 거장들의 작품을 분석하고 연구하며 현대의 정물들을 그들 거장의 시각으로 해석해 보는 것도 정말 좋은 공부라 할 수 있겠다.  더불어 작가의 삶과 함께 예술철학과 시각, 그 당대의 역사와 환경도 함께 알아볼 수 있으니, 수채화를 공부해 나가는 입장으로서는 일석이조의 테마가 될 수 있다.  선선한 가을바람이 불어 그림 그리기에도 최적의 환경이 돌아왔고 계절에 거스름 없이 익어가는 들녘과 착한 열매들처럼, 노력함에 게으름 없는 여러분들에게도 좋은 결과물이 있기를 바란다.   01   인물과 앞 정물을 제외하고는 그다지 세밀하게 묘사하지 않아도 되는 그림이기에 4B연필을 날카롭게 깎아, 연필을 약간 눕힌 상태에서 밝음과 어두움의 위치구분만 해 놓는다는 개념으로 스케치했다.   스케치선이 결국 채색과정에서 모두 묻힐 그림이므로 빠른 속도로 그리되, 인물만큼은 정확한 비례로 자세하게 그려야 한다.   02   터치를 겹쳐가며 맑기를 유도하는 학생형+입시형 그림이 아니기에, 굳이 초벌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자료를 위한 그림그리기가 아니었다면 필자도 직접 제 색을 얹어나갔을 것이다.  다만, 채색에 들어갈 때의 두려움이나 머뭇거림을 없애고 싶다면 사진에서처럼 간략한 초벌을 하는 것을 권한다.    03   원화를 잘 살펴보면 샹들리에와 함께 배경의 작은 인물들이 실은 거울에 비친 인물군임을 알 수 있다.  우울한 표정의 여종업원과 상반된 배경의 화려함이(규모가 큰 술집임을 알 수 있다) 대조를 이루는 이 부분은, 인디고에 반다이크 브라운을 약간 섞어서 명암처리 하는 정도로만 채색해 놓았다.   04   붓터치에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그림인 반면 색상의 무게를 맞추는 일에 더욱 신경을 써야 한다.  큰 술집이 여급의 뒤에 있는 거울에 비친 부분이므로 선명도도 약하고, 아마도 담배연기나 평평하지 않았을 거울의 반사면의 얼룩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자주 보인다.  울트라마린 딥에 오페라를 섞고 물을 많이 혼합하여 색상을 가볍게 만들어 칠 해 놓았다.    05   마네는 호평만큼이나 악평도 많았던 작가로 유명하다.  당대의 실존인물들을 작품에 그대로 옮겨 그려 당혹감을 주기도 하였고, 명암이 조용히 옮겨갈 뿐만 아니라 강한 색채가 등장하더라도 반드시 중간색이나 회색의 매개에 의해 연결하던 당대의 일반적인 화법과는 달리 선명하게 색상이 대비되거나 평면적으로 칠해서 관객들에게 이질감이 느껴지고 생뚱맞게 보였기 때문이다.  이 부분처럼 거칠게 남아 있는 붓자욱 역시 비방의 원인이었다.   06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마네지만 그는 인상파 화가들과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다.  그 중 기억해야 할 점은 색채로서의 검정색을 중요시 했으며 이를 매혹적으로 사용한 화가라는 점이다. 즉, 같은 검정이라도 밝고 품위 있는 검정, 분위기 있는 검정 등으로 구분해서 사용했으며 아주 적은 변화 외에는 검정은 검정색으로 펼쳐 칠해 놓는 솔직하고 강한 주장이 있는 화가였다.   07   굳이 초벌이라고 구분하자면 이 정도의 과정이 될 것이다.   여종업원의 짙은 색 옷은 인디고에 반다이크 브라운을 약간 섞어서 듬뿍 만들어 놓은 후에 펼쳐 칠해 놓았다.  완전히 마른 후에는 두 번 세 번 같은 색을 반복해서 칠해서, 터치 보다는 색상으로 먼저 느껴지기를 원했던 마네의 생각을 따라 갈 것이다.   08   인상파 화가로 분류되는 마네이지만 실제로 인상파전에는 한번도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역설적이다.  사진에서 보이는 부분처럼 거친 필치들을 보면 분명히 인상파처럼 섬세하지도 않고, 빛에 의한 색의 과정을 찬찬히 넘어가 주지도 않는 불친절함(?)까지 엿보이는 것이 마네 그림의 특징이다.  필자 역시 따라 그리는 과정에서 점점 흥미가 붙어가던 기억이 난다.   09   유화작품을 수채화로 옮겨 그려 보는 것이 점차로 흥미로워지고 있는 중이다.  수채화가 가진 특성, 즉 맑음과 탁함을 표현하는데 자유로우면서도 유화에 비해서 간편하고 빠르다는 장점이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이러한 인물도 유화로 따라 그리는 경우라면 마르기 기다리느라고 속이 답답했을 텐데 수채화로는 색상의 무게만 맞추어 나가면 금방 해결이 된다.   10   마네의 생존당시 저널리즘에 나온 혹평은 다음과 같다.  “...음영도 양감도 없고 이처럼 강한 색채를 평평하게 늘어놓다니 회화에 대해 무식해서 그랬거나 그렇잖으면 사람들을 모욕하기 위해서 그랬을 것이다.”   정말 가혹한 악평이지만 사진에서처럼 평평한 얼굴표현을 보면 당시에는 그리 말했을 비평가의 시각도 이해가 가는 부분이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현에는 화면에서 어떻게 하면 3차원적인 깊이를 표현할 수 있을까에 대해 서구 회화가 지향해 온 전통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알 수 있고, 그것을 부정한 마네의 힘겨운 싸움도 익히 짐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11   여종업원의 옷을 검정에 가까운 인디고 계열로 짙게 완성해 놓았다.  간신히 외곽부분에만 블루를 살짝 얹어 놓은 마네의 재치이기도 한 솔직한 표현을 이해할 수 있는 듯하다.  평면에 그리는 그림을 입체로 보이게 하기위한 화가들의 노력과의 단절이 무엇보다 마네의 미술사적 위치를 대변해 주는 것이며, 여기에서부터 비로소 근대에로의 문이 열리고 있다는 미술사를 기억하며 복숭아에서도 습관적인 반사광 처리를 아껴야 했다.   12   그렇다면 마네야말로 사실주의를 표방한 작가였다는 생각이 든다.  마네라면 장미를 채색할 때에도 명암의 단계를 복잡하게 구분하며 넘기려 애쓰지 않고, 밝음은 그대로 두고 어두운 부분에만 강하게 필치를 얹었을 것이고, 빵은 빵대로 빵이 가진 갈색계열 색상 외에는 쓰지 않았다는 사실도 좋은 공부가 되고 있다.  장미를 칠한 후에는 세밀하게 스케치 했던 밝음 부분의 연필선은 다 지워 버렸다.   13   생각이 여기에 닿자 괜히 초벌칠을 했구나 하는 엷은 후회가 들었지만, 1800년대에 결코 평탄하지만은 못했던 마네가 만년에야 찾아온 영광과 찬사에 이르기까지의 “마네 역사”에 대한 공부로 미루어 보면, 앞 정물은 빛 부분은 남기고 어둠은 강하게 잡으면 가능하리라는 낙관적인 생각이 들고 있으니, 대가를 공부해 가는 여정이 결코 헛된 공부가 아님에는 틀림이 없다.   14   터치가 울컥거리며 남게 되더라도 색상 선택이 솔직하게 이루어지면 뒷면의 마네 그림과의 괴리감이 적어지게 될 것이다.  붓을 세우거나 내리긋는 등의 터치법에 좌우되지 않고 사물이 전달해 주는 정도의 색상만을 찾아서 정물 자체의 솔직한 표현에 집중하기로 하였다.  일반 정물화였다면 아마도 빛이 닿고 어둠으로 넘어가는 포인트 부분에 엄청난 밀도와 화려한 색 올리기를 하였겠지만 마네의 손이었다면 과연 그랬을까!   15   입시를 위한 학생작 기준에서라면 식빵의 표현에서도 분명 다른 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식빵의 외곽부분 즉, 여종업원의 짙은색 옷과 닿는 부분이나 바구니의 손잡이와 식빵이 닿는 부분에 화사하게 넣어주었던 반사색 처리를 절제하고 식빵 제 색상으로만 칠 해 보았다.   인상파 화가들이 추구했던 과학적 성찰과는 달랐던 마네의 시각이 흥미롭다.   16   거친 듯한 유화의 붓자욱과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혼합재로로 그릴 때 쓰던 일명 막붓(기름진 매체나 마스킹 액을 쓸 때 썼던 붓이다)으로 바꿔 칠하니 훨씬 나아지는 느낌이다.  색상의 혼합도 파렛트에서 완전히 섞던 방법에서 벗어나 직접 물감을 찍어 화지에 바르듯이 칠했다.     17   부비기도 하고 색상을 그대로 얹어 놓기도 하면서, 당대에 비난을 많이 받기는 했으나 작업표현 방법에서 스스로의 기질과 의지가 강건했던 마네처럼 칠하는 과정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부분이다.  평범한 캔트지에도 가능한 수채화가 가진 풍부한 색상과 다양한 표현방법을 적극 활용하면서 느낀 생각은, 재료를 아끼지 않고 쓰는 것도 좋은 습관중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18   이정도 과정에서 전체를 한 눈으로 보는 것이 필요하다.  실제 원화는 가로길이가 있는 작품으로 거울에 비친 우울한 표정의 여종업원의 뒷모습과 그녀 앞에 마주 서 있는 수염있는 당대의 신사도 그려져 있어 이 세 인물의 배치가 교묘하게 연출되어 있음을 찾을 수 있다.  이 그림은 마네의 말년을 장식하는 가장 유명한 작품으로 이 그림의 성공을 마지막으로 보고 난 후 마네는 병든 육신을 마감한다.   19   세잔느라면 인물도 원과 원기둥의 조합으로 보았을 것이고, 모네였다면 빛에 따라 색상이 변화하는 찰나들로 인물을 표현했을 것이나, 마네는 인물의 살색을 인물이 가진 색상 그대로 표현하고자 했다고 한다.  당시 인상주의 그림에 열광하던 사람들이 그에 익숙해져 있었던 눈으로 마네의 작품을 보았으니 그 지나치게 단순하고 생생한 살색을 보고 당혹스러워 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20   하지만 마네가 인상파와 맥을 같이 하면서도 표현이 다른점은 모네와는 달리 고유색을 희생해서까지 프리즘적인 빛의 물결에 자신을 몰입시키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즉 외광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던 인상파 화가들과는 방법적인 거리감이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여급의 옷에 있는 장식물에서도 솔직하게 보이는 부분만을 표현한 마네의 시각을 엿볼 수 있다.   21   바구니 손잡이의 채색에서도 반사면에 주조색의 보색인 보라 계열색을 쓰지 않고, 직접 갈색으로 색상을 칠했다.  칠하는 붓의 모양새를 살펴보면 붓 몸 전체로 종이를 강하게 내리누르며 색상을 올리고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일상에서 벗어나는 여행이 사람을 충전시켜 주듯이, 일반적인 채색 방법에서 벗어나 마네와 함께 하는 것도 그러한 느낌을 준다.   22  “ 마네는 무척 성실하고 단순하며 분별있는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지만, 불행하게도 천성이 낭만주의의 껍질을 달고 있다.” 마네의 친구이자 대시인 보들레르가 마네의 일면을 평한 말이다.  주제와 방법의 혁신을 꾀한 최초의 혁명자라고 할 수 있는 마네이지만 어떠한 글도, 그림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던 화가였으며, 천성적으로 부르조아적인 습성을 가져 지나치게 명예에 집착한다는 비난도 함께 받았었다니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일이다. 23   앞의 사진에서 바구니를 채색할 때 바구니가 가진 고유의 색을 고집해서 칠해졌듯이, 복숭아는 복숭아라는 과일이 전달해 주는 색상에 충실하고자 노력했다.  터치나 물방울이 남아도 될 것이고, 밝은 부분은 붓으로 닦아서 복숭아다운 부드러움을 표현하면 되기에 심리적으로 평화롭다고나 할까, 마음이 부드러워지는 방법이라고 느껴진다.   24   아마도 마네가 유화로 표현했더라면 더욱 강렬한 색상으로 식빵이 채색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적어도 마네가 표현하고자 하는 채색의 방법적인 부분은 공부가 되었기에 여러분도 이정도 과정에 이르러서는 색상 선택과 필체가 많이 자유로워졌으리라 생각한다.  마네는 풍경화, 인물화, 정물화 등 모든 부분에서 자신의 방법을 구축해가며 많은 양의 그림을 그렸던 화가이다.   인터넷이나 화집을 통해서 꼼꼼히 살펴보기를 권한다.   25   Susanna's Comment   에두아르 마네(Eduard Manet, 1832~1883)는 인상파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받는 인상파의 거장이다.  우리는 흔히 모네와 너무도 헷갈린다는 얘기를 많이 하는데, 단지 이름이 주는 어감이 우리에게 혼돈을 주는 것뿐이지 그들의 그림을 함께 기억한다면 절대로 헷갈리지 않을 정도로 큰 차이가 있다.  마네는 외교관의 딸이었던 어머니와 법률가인 아버지를 둔 유복한 상류층이었으나, 그가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까지는 악평의 스캔들로 그 어떤 화가보다도 우여곡절이 많았던 화가였다.  마네가 말년에 그린 이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 살롱에 전시되었던 1882년에 마네는 최고의 영예인 레죵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나 이듬해에 죽었으며 그 후에 불멸의 명예를 안게 되었다.  미술사에서 기술적으로나 묘사 방식에서 획기적인 변화를 이룩하여 20세기 회화를 전면적으로 바꿔 리드한 인물로 평가되는 마네의 그림에 여러분들도 도전해 보기 바란다.       
최근 수정 시각:  ÉDOUARD MANET (1832년 1월 23일 ~ 1883년 4월 30일) 1. 유년기[편집] 에두아르 마네는 할아버지도 판사이고 아버지도 판사인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화가의 길을 허락해주지 않아 17살에 남아메리카 항로의 견습사원이 되었다. 그 뒤 해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낙방한 후 1850년에 겨우 쿠튀르의 아틸리에에 들어갔다. 그러나 학구적인 역사화가인 쿠튀르에게 반발, 자유연구로 나아가 루브르 박물관 등에서 고전회화를 모사, F.할스나 벨라스케스 등 네덜란드/에스파냐화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 사이 이탈리아 ∙ 독일 ∙ 네덜란드 ∙ 벨기에로 여행이 잦았다고 한다. 2. 작품[편집] 1859년부터 살롱에 출품해 낙선이 잦았지만, 고티에나 보들레르부터 주목을 받게 된다. 살롱에는 1861년 입상해 겨우 수상한 적이 있으나, 이색적의 수난은 초기부터 계속되었다.  1863년 낙선전[1]그의 작품인 는 많은 이들의 관심과 함께 조롱을 받았다.  그는 이때까지의 회화와는 다른 관점으로 그림을 그렸는데 ,당시까지만 해도 그림은 명암의 변화를 섬세하게 구분하여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렸지만 마네는 쏟아지는 햇볕아래서 밝은 부분을 어둡게 보이고 어두운 부분도 주위 사물에서 내쏘는 반사광으로 인해 어둡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인 풀밭위의 점심식사는 어두운 부분은 하나의 색채를 가지고 그림 속의 사물들은 입체감을 잃고 평면이 되었다. 또한 논란이 되었던 부분은, 옷을 입지 않은 나체 여성과 옷을 입은 남성을 일상적인 정경 가운데 함께 그렸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도 그의 그림은 여러번 논란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의 작품인 올랭피아는 1865년 샬롱에 전시되었지만 신랄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2][3] 이 두 작품에 대한 비난은 지나쳤지만 훗날에 그의 표현기법의 밝음과 참신성을 이끌어준 계기가 되었다. 이 사건 이래 화단과 문단 일부에서 열렬한 지지자를 얻었고, 자신을 경모(敬慕)하는 C.피사로, 클로드 모네, 알프레드 시슬레등 청년화가들 사이에서 그 후에 대두될 인상주의에의 길을 여는 기연(機緣)을 이루었다. 그러나 마네 자신은 아카데미즘의 공인을 기다려, 인상파그룹의 전람회에 참가하기를 거부하고, 그들과 동일시되는 것을 대단히 꺼렸으나 한때는 인상파기법을 채용하여 제작한 적도 있다. 역시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었으며 매우 최근까지도 미술학도와 일반인들이 즐겨 씹는 안주거리였다. 이 그림에 등장하는 여성이 매춘부라는 주장부터 이 작품에서 보여지는 구도는 실제로는 불가능한 구도이며 마네는 미술의 기본도 모른다는 등 갖가지 구설수에 시달린 작품. 결국 21세기 들어서야 사진 전문가가 그림 속의 상황을 그대로 재현한 사진을 촬영함으로써 마네의 억울함을 풀어 주었다. . 중앙의 여성의 뒷모습과 그녀 앞에 서 있는 남성의 정면이 거울에 비치고 있는데, 현실적으로 이런 각도가 나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진으로 실제로 재현할 수가 있다. 보는 이(즉 사진사)와 모델, 거울의 위치 및 각도를 나타낸 그림. 출처: Manet's Bar at the Folies-Bergère: One Scholar's Perspective, Malcolm Park, 2000.  말년에는 류머티즘 질환으로 고생하여 근육적 피로가 덜한 파스텔화 위주로 그렸지만, (1867), (1882)등 황혼기에 유화의 역작들을 그려내고 51세에 파리에서 생을 마감했다. 세련된 도시적 감각의 소유자로 주위의 활기 있는 현실을 예민하게 포착하는 필력에서는 유례 없는 화가였다. 종래의 어두운 화면에 밝음을 도입하는 등 전통과 혁신을 연결하는 중개역을 수행한 점에서 공적이 크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의 수훈자 중 한명이다. 여담으로 BBC의 다큐인 빛을 그린 사람들에선 매독으로 사망한다. 에로게 사쿠라의 시에서 마네의 그림, 올랭피아가 자주 언급된다.   [1] 낙선자 미술전시회 또는 '살롱 데 르퓌제(Salon des Refusés)라고도 알려져 있다. 나폴레옹 3세가 개최했으며 파리에서 개최되었다. 관선전시회에서 낙선된 작품들을 모아 전시했는데, 세잔 · 마네 · 모네 · 피사로 · 휘슬러 등 당시의 가장 혁신적인 작품이 일반에 처음으로 전시된 근대 미술사상 획기적인 사건이었다.[2] 비평가曰 :"배가 누런 이렇게 천하게 생긴 모델은 어디서 누가 구했을까?"[3] 이 모델의 이름은 빅토린 뫼랑으로 '올랭피아'나 '풀밭 위의 점심 식사' 등 모네의 그림에 많이 출현한다. 원래 화가 지망생이었다.   ======================= 에두아르 마네 (Edouard Manet 1832-1883)   부유한 부르주아 출신 멋쟁이였던 마네는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한다. 그러나 마네는 학교보다는 루브르박물관, 헤이그,피렌체,마드리드 등의 미술관에서 대가들의 작품을 보며 더 많은 것을 배웠다. 마네는 티치아노, 루벤스, 벨라스케스, 렘브란트,고야, 등 루브르 박물관 거장의 명작을 모사하다가 드가를 만나서 우정을 나누게 된다. 둘은 모두 앵그르를 좋아했다. 앵그르의 영향을 받은 한편, 원근법을 무시하고, 또 당시에는 낯설게 받아들여진 대중적인 주제를 골라 강조했기 때문에 마네는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1860년에서 1870년대에 마네는 에 참여하는 것을 거절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따르던 주위의 많은 젊은 화가들은 마네를 예술 혁명의 선구자라 불렀다.   마네 자신은 자신의 새로운 회화 경향을 이론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네의 회화적 현대성을 이해했던 마네의 친구들이자 당대의 예술적 리더였던 보들레르, 졸라, 말라르메같은 문인들은 마네를 옹호하고 그 현대성을 알리려고 노력했다. 현대화의 선언이라고 일컬어진 그의 초기작 ,등은 일상적인 이웃집 여인처럼 창작가를 논쟁의 쟁점이 전위적 시사 인물로까지 만들게 된다. 상처받은 마네는 스페인으로 여행을 떠났고 스페인에 매혹되어 1865년가지 머물며, 옛날 대가들의 작품에서 집시와 기타 연주가, 무희들이란 주제를 빛과 그림자의 격렬한 대조로 그려냈다.   1870년에서 1880년 대에 클로드 모네와 다시 만난 마네의 그림은 밝아진다. 그러나 그는 인상파로부터 철저히 독립적인 화가로 남고싶어한다. 마네는 ,,,등 대표작을 통해 거장의 솜씨와 순발력을 시적이고 친숙한 유머로 연결했다는 평을 얻는다. 또한 이 작품들 덕분에 그는 파리장의 삶을 가장 훌륭하게 묘사한 작가로 불리게 된다. 말년에는 몸에 마비가 와서 꽃만 겨우 그리다가 손 절단 수술을 받은 후 51세에 사망한 작가. 20년이란 예술적 경륜을 남긴 마네 절친했던 졸라의 "어느날인가 자네 작품을 루브르박물관에 갈걸세"라는 예언대로, 사후 4반세기 만인 1907년 작품 가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작가. 그는 현대회화의 길을 활짝 열어준 자유 예술가의 이미지로 우리곁에 남아있다.   =============================== 에두아르 마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1881-1882, 캔버스에 유채, 96×130cm 코톨드 갤러리의 가장 큰 전시실에 걸린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나 말고도 몇몇 관람객들이 그 자리에 서서, 또는 그림 앞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아서 조용히 이 그림을 응시하고 있다. 아무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림과의 대화’가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금 그림 속의 인물과 대화하고 있는 셈이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 똑바로 서 있는 검은 옷의 여인(모델은 실제 폴리베르제르의 여급이었던 쉬종이다)이 우리의 시선을 묵묵히 마주 바라본다. 그녀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다. 그녀는 웃지도, 울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 무표정 어딘가에는 매일의 노동에서 오는 고단함이 배어 있다.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는 카페, 여자, 밤, 검은색 등 화가 마네가 발휘할 수 있는 모든 모던한 요소들이 총집결해 있다. 쉬종의 등 뒤에 있는 거울을 통해 비치는 폴리베르제르 술집의 모습은 화려한 불빛과 소음이 명멸하는 파리 카페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보여 준다. 실크해트를 쓴 신사들과 잘 차려입은 여자들이 눈부신 조명 아래 앉아 술을 마시고 있고, 왼편에서는 서커스가 한참 진행되고 있다. 폴리베르제르는 19세기 말, 파리에서 유명한 고급 술집이었다. 무표정하게 서 있는 것 같지만 쉬종 역시 지금 한 신사를 상대하는 중이다. 그녀 뒤편의 거울을 보면, 쉬종 바로 앞에 콧수염을 기른 신사가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아마도 쉬종은 지금 이 사내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쉬종의 본마음은 그림 속 정면으로 보이는 얼굴처럼 피로할 뿐이다. 그녀는 파리의 밤 문화가 시끌벅적하게 요동치는 이 술집을 빨리 벗어나고 싶지만, 그녀에게 할당된 하루의 노동은 끝이 보이지 않는다. 쉬종은 앞에 선 남자를 따라 원치 않는 ‘2차’를 가야 할지도 모른다(당시 폴리베르제르를 비롯한 파리 술집의 여급들 대부분은 매춘으로 돈을 벌고 있었다). 마네의 예리한 시선은 쉬종이 애써 숨기고 있는 피로감을 놓치지 않는다. 마네 최후의 걸작(이 그림은 마네가 죽기 1년 전인 1882년에 완성되었다)인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에 대해서는 미술사가들의 의견이 늘 분분하다. 그중 가장 큰 의문은 ‘왜 마네가 쉬종의 뒷모습과 앞모습을 엇갈린 각도로 그렸는가’ 하는 점이다. 쉬종의 뒤편에 있는 벽면에는 대형 거울이 설치되어 있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우리는 쉬종의 정면 모습과, 술집의 소란스러운 저녁 풍경을 동시에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림 오른편, 거울에 비치는 쉬종의 뒷모습은 오른쪽으로 비스듬히 몸을 튼 모습이다. 이런 쉬종의 모습이 거울에 비치려면 그림에 그려진 쉬종의 앞모습은 정면이 아니라 왼편을 보고 선 모습이어야 한다. 엑스레이로 이 그림을 투사해 보면, 왼쪽으로 돌아선 쉬종의 옆모습을 스케치한 밑그림이 보인다. 그러나 붓을 댄 순간, 마네는 생각을 바꾸어 쉬종의 정면을 그렸다. 말하자면 마네는 의도적으로 거울 속 쉬종과 실제 쉬종을 왜곡된 방향으로 그려 넣은 것이다. 왜 마네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가장 유력한 것은, 그리고 내게도 가장 설득력 있게 들리는 가설은 마네가 쉬종의 정면 모습을 통해 그녀가 침잠하고 있는 ‘군중 속의 고독’을 확연히 부각시키려 했다는 것이다. 그림 속의 쉬종은 세련된 스타일의 미인이다. 몸에 꼭 맞는 검은색 드레스는 그녀의 풍만한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더욱 강조해 준다. 목에 건 커다란 메달, 귀에 걸린 앙증맞은 귀걸이, 가슴을 장식한 커다란 코르사주와 레이스 등도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러나 그녀는 겉모습만큼 멋지고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을까? 쉬종의 무표정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녀는 지금 눈앞에 밀려오는 피로감을 억지로 참으며, 돈을 벌기 위해 마음에 없는 남자를 상대하고 있다고 말이다. 마네가 보여 주고 싶은 부분은 바로 이것이었다. 자본주의가 막 꽃을 피운 대도시 파리의 화려한 밤 풍경과, 그 속에 서 있는 쓸쓸한 인간의 모습. 만년의 마네는 술집의 떠들썩하고 화려한 풍경보다도, 그 화려함 속에서 더욱 고독해질 수밖에 없는 한 여인의 쓸쓸함에 마음이 끌렸던 것이다. 쉬종 앞에 차려진 테이블의 풍경들, 색색의 술병과 꽃들, 금방이라도 과즙이 흘러내릴 듯 무르익은 오렌지들은 쉬종의 검은 옷과 분명히 대비되며 쉬종의 내면에 가득한 황량함을 더욱 역설적으로 보여 준다. 이 그림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은 쉬종이 입은 검은 드레스다. 마네는 도회적이면서도 세련된 색감이라는 이유로 다른 화가들이 기피하는 검은색을 즐겨 사용했다. 여기서도 검은 드레스는 거울에 비친 모습까지 합해서 화면을 반 가까이 채우고 있다. 그림 한가운데에 검은색을 대담하게 바른 시도는 화가의 원숙함을 느끼게끔 한다. 이 그림을 그릴 무렵 마네는 검은색의 또 다른 상징,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다면 마네는 더더욱 젊고 아름다운 여인인 쉬종과, 그녀가 지닌 고독과 우울을 통해 자신의 흔적을 세상에 남겨 놓고 싶었을 것이다. 코톨드 갤러리에 갈 때마다 나는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을 하릴없이 응시한다. 그림 속의 풍경은 인상파와 모더니즘의 멋들어진, 그러나 멜랑콜리에 찬 결합이다. 취객들의 소란 한가운데 서 있는 쉬종은 이 떠들썩한 현실 속에서 혼자만의 상념에 잠겨 있다. 쉬종을 둘러싸고 있는 소음은 그녀 앞에서 일순 물속같이 적요해진다. 그 적요함은 물결처럼 나를 감싸고, 그리고 코톨드 갤러리의 전시실을 가득히 채운다. 그래서인지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앞에 선 관객은 그림 속 쉬종처럼 이내 쓸쓸한 표정이 된다. 갑자기 쉬종의 무표정한 얼굴이 누구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매일 아침의 출근길,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채워진 아침의 지하철에서 늘 마주치는 표정들이 바로 저렇지 않은가. 삶의 고단함에 익숙해진 나머지 더 이상 고단하다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슬픈 현대인의 얼굴, 쉬종의 모습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고단한 현대인의 일상을 한 세기 전에 그림으로 형상화했던 마네는 얼마나 위대한 화가였나 하는 경외감이 새삼스럽게 마음속 가득히 차오르는 것이다. ============================= 에두아르 마네  제작 1881~1882, 코톨드 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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