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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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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3    [쉼터] - "아프리카 모나리자" 댓글:  조회:1998  추천:0  2018-03-25
나이지리아 화가 벤 엔원우가 1974년에 그린 이페의 아데투투 아데밀루 공주의 초상화 수십년간 자취 감췄다 런던 아파트서 발견 나이지리아 화가 벤 엔원우가 그린 이페의 아데투투 아데밀루 ‘투투’(공주) 초상화. 사진출처: 본햄 누리집 40여년간 홀연히 종적을 감췄다가 돌연 나타난 이른바 ‘아프리카 모나리자’가 런던 경매에서 120만5000파운드(약 18억원)에 낙찰됐다. 당초 예상가였던 30만파운드보다 4배나 높은 가격이다.   영국 일간 등 외신은 나이지리아 남서부 도시 이페의 아데투투 아데밀류이 ‘투투’(공주)의 초상화가 28일(현지시각) 런던 경매에서 낙찰됐으며, 나이지리아 모더니즘의 아버지 벤 엔원우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고 보도했다. 런던과 나이지리아 라고스에서 동시 입찰이 이뤄졌으나, 낙찰받은 사람의 신원은 공개되지 않았다.   벤 엔원우는 1973~1974년에 걸쳐 세 가지 버전의 투투 초상화를 그렸다. 세 작품 모두 1960년대 나이지리아-비아프라 전쟁 이후 나이지리아 재건의 상징이 됐으나, 안타깝게도 모두 행방이 묘연했다. 1973년작은 1994년까지 웬원우의 스튜디오에 걸려 있었으나 강도에 의해 도난당했다. 암투병 중이던 엔원우는 이로 인해 완전히 무너졌고, 그의 죽음을 재촉하는 계기가 됐다. 세 번째 작품도 여전히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이번에 경매에 나온 두 번째 그림은 1974년 그려져 1975년 이탈리아 대사관 전시회에서 공개된 이후 사라졌다.   수십년간 미스터리었던 ‘아프리카 모나리자’는 지난해 런던 북부의 한 아파트에서 발견된 뒤 경매업체 본햄스 본사에서 보관해왔다. 본햄의 현대 아프리카 미술 디렉터인 자일스 페피아트는 “나이지리아에서 투투의 초상화는 국민적인 아이콘이며, 문화적으로도 엄청난 의미를 지닌다”고 설명했다.   페피아트는 ‘아프리카 모나리자’를 발견한 장본인이기도 하다. 런던 북부에 사는 한 가족이 지난해 12월 페피아트한테 그림 감정을 해달라고 연락을 취해왔고, 페피아트가 진품임을 감정해줬다. 이 가족의 아버지는 나이지리아 관련 사업을 하면서 그림을 구입했고, 초상화 속 여성이 누군지 모른 채 수십년간 그림을 벽에 걸어두고 감상했다. 이 가족은 해당 그림이 “사라진 명작”이라는 얘기를 듣고 매우 놀랐다고 페피아트는 전했다. 그는 “이런 놀랄만한 작품의 발견과 판매에 있어서 역할을 했다는 건 매우 흥분되는 일”이라는 소감을 밝혔다.   맨부커상 수상자인 나이지리아 출신 작가 벤 오크리는 봄호에서 이 작품은 나이지리아에서 ‘아프리카 모나리자’로 인식되며, 거의 신화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작품을 본 사람은 없으나, (1973년작) 포스터는 나이지리아 곳곳의 가정에 걸려있다는 설명이다. 오크리는 “40여년간 신화적인 작품이었고, 모두가 ‘투투는 어디 있는 거야?’라며 투투 얘기를 한다”며 “아프리카 현대 미술에서 50여년 만에 가장 중대한 발견”이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초상화의 속 공주의 아버지는 이페 왕의 손자인데, 이페 왕은 아내를 37명이나 뒀고 자손이 수백명에 이른다. 최근 은 라고스에 사는 공주의 사촌으로부터 “(초상화 속 공주가) 어디에 있는 지는 모르나 살아있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보도했다. 엔원우는 공주의 긴 목과 우아한 아름다움에 감동해 6개월간 가족들을 설득한 끝에 캔버스에 담을 수 있었다. 엔원우의 아들 올리버 엔원우는 “그녀는 아버지가 추구했던 아프리카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전정윤 기자 /한겨레
492    머리카락으로 3D 그림을 그리는 중국 청년 댓글:  조회:2719  추천:0  2018-03-07
  왕샤오주(王小玖)는 매번 그림을 그릴 때마다 인터넷을 통해 생중계한다.                                                                                                         [인민망 한국어판] 중국 지린(吉林, 길림)시의 한 헤어디자이너 왕샤오주(王小玖)가 머리카락으로 3D 그림을 그려 화제가 되고 있다. 생동감 넘치는 묘사로 3D 그림 속의 뱀이 금새라도 기어나올 듯 리얼했다. 2016년 7월부터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왕샤오주는 지금까지 약 150여 편에 달하는 작품을 그렸다. 그는 지금도 여전히 인터넷을 통해 그림 그리는 상황을 생중계하며 팬들과의 소통을 통해 10만 명에 가까운 팬덤을 형성하게 되었다고 전했다. 왕샤오주가 그림을 그리는 데는 보통 3~4시간 정도가 걸리며, 그는 평균 이틀에 한 번 꼴로 머리카락 그림을 그린다. 왕샤오주는 풍경화나 인물 초상화 등 다양한 소재로 그림을 그렸었고, 제작된 작품 가운데는 2.8m에 달하는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작품도 있다. 왕샤오주는 3D 머리카락 그림은 2D 그림과 비교해 음영까지 처리해야 해서 더욱 어려운 작업인데다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기 때문에 처리하기 힘든 부분도 많다고 전했다. (번역: 김미연)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인도} 오직 ‘머리카락’으로만 그림을 그리는 놀라운 아티스트    그림을 그리기 위해 가장 편한 도구가 ‘머리카락’은 아니겠지만, 인도의 아티스트 미드헌 R.R.은 짧은 머리카락 수천 가닥으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기술을 터득해냈다.         온라인 미디어 오디티센트럴이 소개한 이 아티스트는 오로지 흰색 종이와 머리카락으로만 그림을 그린다.   유투브에 작업 과정을 올리기도 한 미드헌은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려내는 것이 보기보다 굉장히 어렵다고 한다.       따라서 그는 머리카락을 사용하기 전에 화학적 처리를 가하고 잘게 잘라낸 다음 바늘을 이용해 이를 배치한다.   완성된 그림은 유리판 사이에 끼어 보관된다.       미드헌이 연구했던 재료는 머리카락뿐이 아니라고 한다. 그는 커피가루를 이용한 그림, 3D 페인팅, 코코넛 껍질 파내기, 와이어로 조각하기 등 여러 매체를 실험해왔다.   ///출처:오늘의 큐레이션 "포스트쉐어"   ==============================={한국} 식구들의 머리카락도 곧 아저씨의 재료이다 보니, 온 가족 모발 관리는 필수! 이렇다보니 머리를 감고 수챗구멍에 떨어진 한 가닥까지 허투루 버리지 않는다. 작품에 대한 열정으로 머리카락 보기를 금 같이 하라! 섬세함의 끝, 머리카락화가의 놀라운 작품 속으로... 특이한 자세로 등산객들 사이에서는 유명인사가 된지 오래. 매달린 것도 모자라 팔과 다리를 하늘로 곧게 직선을 이뤄야만 ‘할머니표 링운동’의 완성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이리 찢고 저리 찢고 다리 찢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   매일 빼놓지 않는 링 운동과 72세에 요가지도자격증까지 딸 정도로 운동에 푹 빠져있다. 젊은 시절 고된 일과 남편의 병간호로 정작 본인의 건강은 챙기지 못했지만 늦게 시작한 운동. 꾸준한 노력의 결과로 지금의 건강을 얻게 되었다. 유연성 갑! 근력왕 백발의 링 할머니의 유쾌한 하루를 만나본다.  ==== 누구도 상상치 못한 소재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춘천의 한 미용실, 바닥에 엎드린 채 무엇인가에 열중한 한 여자 발견!! 잠시 후, 그녀가 일어선 자리에 남은 것은... 바로 그림?! 스케치북이 없어도~ 물감이 없어도~ 그림이 완성된다!! 미용실 바닥에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한국 춘천 안정숙씨(37세)!! 꽃, 나무, 사람 얼굴 등등~! 정숙씨의 손에 닿은 머리카락들은 저마다 형태를 갖게 된다고~ 3년 전 미용실을 연 정숙씨, 문득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이 그림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그때부터 손님들이 다녀 간 후의 미용실은 정숙씨만의 화실이 되었다는데~! 한 번 그린 그림을 보관할 수가 없어 사진으로만 남겨둔 채, 쓸어버린다는 정숙씨~ 때문에 한 번 밖에 볼 수 없는 머리카락 그림이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고~ 버려진 머리카락으로 그리는 예술 작품!!... ============================={미국} “머리 빠지는 것도 아쉬운데, 그냥 버리기 아까워서요.” 샤워 할 때마다 빠지는 머리카락들을 모아 벽에 다양한 그림을 연출하는 여성이 있습니다. 미국 앨라배마 주에 거주하는 루시 가포드 씨는 2014년부터 스스로를 ‘샤워 헤어 아티스트’라 칭하며 머리카락 그림을 SNS에 공유하고 있습니다. 루시 씨는 “긴 머리카락이 몸에 달라붙거나 배수구 구멍에 엉켜 있는 걸 보고 아이디어를 떠올렸습니다. 그냥 버리기 아깝더라고요”라고 머리카락 그림을 그리게 된 이유를 밝혔습니다.      사람, 개, 꽃, 음식 등 루시 씨가 머리카락으로 그려내는 형상들은 아주 다양합니다. 언뜻 보면 볼펜으로 슥삭슥삭 그린 스케치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빠진 머리카락을 소재로 예술성을 발휘한 루시 씨는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머리카락 그림’을 업로드 하고 있습니다. ========================={중국 상해} 중국 상하이에 거주하는 ‘띵 꾸이 씽’씨는 머리카락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다. 그가 선보인 작품들은 상상을 초월했다. 0.03mm 두께의 머리카락에 고대 중국 미녀들과 글씨가 그려져 있었다.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머리카락엔 42명의 전현직 미국대통령 얼굴이 나란히 들어가 있었다. 단 한 올이었다. 머리카락을 그리는 방법은 정교함 그 자체였다. 도구는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늘다는 쥐수염, 번지지 않는 특수물감, 현미경이었다. 먼저 ‘띵 꾸이 씽’씨는 머리카락을 하얗게 칠한다. 그림이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서다. 머리카락을 말린 다음 한 올의 쥐수염 붓으로 현미경을 보면서 점으로 찍는다. 손은 전혀 움직임이 없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세심한 작업이었다. 머리카락 그림을 통해 2003년 그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기네스북에 올랐다. 흥미로운 사실은 그가 미세 그림을 시작한 계기는 20년전 머리카락 조각을 보고 나서였다. 머리카락 조각 제작자는 또 다른 중국인 ‘리우 이 린’(61)씨. 제작진은 ‘띵 꾸이 씽’을 미세 그림 화가로 이끈 주인공을 찾아 나섰다. 중국 하이난에 사는 그는 여전히 머리카락 조각에 심취해 있었다. 머리카락 조각 작품 역시 경이로웠다. 길이 2cm, 두께는 채 0.1mm가 되지 않는 가는 머리카락에 글씨와 고대 중국 여인의 모습이 조각돼 있었다. 머리카락을 말린 다음 특수 기계로 홈을 파 물감을 입히는 것이었다. 25년전 스승으로부터 이 기술을 전수 받았다는 그는 아무나 할 수 없는 힘든 작업이기에 더 보람이 느낀다고 밝혔다. 또한 인간에게 불가능한 것은 없다고 강조했다. “무슨 일이든 목표를 가지고 도전하면 못할 것이 없어요. 사람들이 내 작품을 통해 그걸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온 대가의 한 마디는 단순하지만 의미 깊었다. ==================={한국 의정부} ■ 머리카락 아트 [의정부] -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린다?! 머리카락의 大 변신!   특이한 재료로 그림을 그린다는 제보! 대체 어떤 그림일까 찾아가 봤는데! 미용실에서 펼쳐지는 머리카락의 놀라운 변신~ 형식도 스케치도 없다! 생각대로 척척! 머리카락으로 순식간에 그림을 완성시키는 22년 차 베테랑 미용사 이창석(42세) 씨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쓰레기통으로 직행해야 할 머리카락이 순식간에 그림으로 변신하는데! 모든 그림은 즉석완성이 기본. 미용실 바닥을 캔버스 삼아 화려한 미술 세계를 펼쳐나간다. 더욱 놀라운 건,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단 10분이면 충분하다는 것. 꽃과 나비 등 갖가지 풍경은 물론이요~ 실물을 꼭 닮은 인물화까지! 머리카락 하나로 표현할 수 있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창석 씨는 왜 머리카락 아트에 빠지게 됐을까? 화가가 꿈이었지만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미술이 아닌 미용을 택하게 됐다는 창석 씨. 그런데 어느 날,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보고 불현듯 잊고 살았던 꿈이 떠올랐다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오직 머리카락만으로 완성되는 놀라운 그림들... ===================={한국}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824회 예고 머리카락 화가 [사진=SBS] 머리카락 화가,ㅡ 유재석-이경규-전지현 초상화 머리카락으로 그렸다?  [뉴스핌=이지은 기자]       SBS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824회에서는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전파로...       한 남성이 긴 생머리를 뽐내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일이' 제작진을 찾아와 자신이 '특~별'한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가 일하는 미용실에는 벽면을 가득 채우며 끝도 없이 이어지는 초상화들이 펼쳐져있다.           100%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머리카락화가 오명근(53)씨는 국민MC 유재석부터 개그맨 이경규, 전지현의 초상화 모두를 '머리카락'으로 그렸다고 말해 놀라움을 자아냈다.      보는 듯 정교한 표현력은 기본, 각계각층의 국내외 유명 인사들이 한 자리에 모여있으며 . 바람 불면 휘날릴 듯 실감나는 구렛나루와 헤어스타일까지 실제 머리카락을 붙여 표현했다는 오명근씨.       심지어 자른 머리카락의 길이별로 다양한 질감과 명암을 표현해 낸다고 말해 보는이들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머리카락화가의 놀라운 작품들...         [뉴스핌 Newspim] 이지은 기자
491    머리카락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백 댓글:  조회:3501  추천:0  2018-03-07
  ▲ 둔덕고개 '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바로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 는 철학을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표현한 작품에 담고 있다. ⓒ 김광철   ...서울 평창동에 있는 가나아트센터에서는 '십만 개의 머리카락'이라는 이색적인 작품전이 열리고 있었다. 강원도 태백의 탄광에서 광부로서 몇 년 간 탄을 캐는 생활을 하면서 탄가루를 개어 그걸로 광부들의 삶의 이야기들을 그리기도 했던 황재형 화백이 이번에는 사람의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표현을 작품들을 전시장으로 들고 나왔기 때문이다. ▲ 황재형 화백 부부 '십만 개의 머리카락' 열림식을 하던 날 참가자들과 함께 인사를 나누면서 ⓒ 김광철   며칠 전 모 일간지에 황재형의 '십만 개의 머리카락' 작품전을 한다는 기사를 읽었는데, 그날 오후에 오래만에 낯익은 목소리가 핸트폰을 울렸다. "선생님, 저 장정희에요. 저 아시죠?" "어, 이게 누구야? 태백의 장정희 선생이란 말이지요?" "예, 이번에 황선생님이 서울에서 작품전을 여는데, 선생님 꼭 오시라도 전화를 드리라고 했어요." "그래요. 아주 축하드릴 일이네요. 그렇지 않아도 오늘 아침 신문에서 소식을 보았는데..."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몇 사람들의 근황과 연락처를 묻기도 하였다. 그래서 나는 목요일 오후 열림식이 열린다는 평창동의 가나아트센트를 찾았다. 황 화백이 아주 반갑게 맞아주었다. 그러면서 근황을 서로 물으며 잠깐 인사를 나누고, 밀려드는 손님들을 받느라 바쁜 황 화백을 두고, 작품들을 둘러보기 시작하였다. ▲ 드러난 얼굴 머리카락을 이용하지 않은 작품과 이용한 작품의 작품성을 비교할 수 있게 전시되어 있는 작품 ⓒ 김광철   전시관 1층. 유화물감으로 그린 광부의 얼굴과 그 옆으로 똑같은 그림 위에 머리카락을 붙여 독특한 질감을 표현한 그림이 나란히 걸렸다. 이런 방식으로 그려진 작품들이 이번 전시회의 주요 콘셉트인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머리카락'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이발소나 미용실 바닥에 널부려져 있는 지저분한 쓰레기일 것이다. 그걸 그림 위에 붙여서 표현했으니 사람에 따라서는 불결하다는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건 사람 나름일 수도 있겠지만. 털실이나 면봉, 쌀 등 다양한 재료들이 미술 작품에 이용이 되었지만 머리카락을 이렇게 그림에 사용된 예는 없었다고 가나아트센터 쪽에서는 이야기한다고 한다. 이 머리카락은 태백의 미용실 등을 돌면서 모아온 것이라고 한다. ▲ 원이 엄마 편지 안동에서 묘 속에서 발굴된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절한 사랑의 이야기와 거기서 발굴된 머리카락과 삼을 섞어 만든 미투리를 머리카락으로 재연하고 있다. ⓒ 김광철   현대인들도 머리카락에 대한 스트레스가 엄청나다. 머리가 빠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머리가 빠져 대머리가 되면 머리의 다른 부분에 나 있는 모발을 이식할 정도로 모발과 사람의 외모에 대한 관심과 보호하려는 노력이 지대하다. 머리카락을 우리 조상들은 부모님께 물려받은 소중한 신체의 일부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는 모발 한 올이라도 훼손하는 것은 불효라고 생각할 정도로 모발에 대한 숭앙심을 가져왔다. 갑오개혁 때 단발령이 내려지자 전국의 유생들이 목숨을 걸고 싸웠다는 이야기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점차 인간이 진화를 하면서 탈모를 지향하고, 요즘 대머리도 많이 늘어나는 추세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번 작품들 중에 특별히 눈길을 끄는 작품이 있었다. 1998년 안동에서 오래된 묘를 이장하면서 발굴된 이응태의 묘에서 발견된 '원이 아버지 전상서'라는 편지에 관한 내용이 이번 작품전에 관련하여 출품되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31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한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담은 그 편지의 내용도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지만 삼과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삼은 미투리가 그대로 발굴되었다는 것이다. 부인의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그것과 삼을 섞어서 삼은 짚신을 신고 저승길 잘 가시라는 애틋한 사랑의 징표를 보면서 황화백은 그걸 다시 머리카락을 이용하여 다시 재연하고 있었던 것이다.  가난한 민중들, 핍박 받았던 역사, 바닥의 아픈 이야기들이 작품의 주제로 ▲ 별바라기 광부들이 위험하고 고단한 삶을 표현하고 있는 작품이다. ⓒ 김광철   ▲ 새벽에 홀로 깨어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를 담고 있는 작품이다. ⓒ 김광철   이번 작품전 주요 콘셉트가 머리카락을 그림에 이용하여 표현했다는 것이긴 하지만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미중미술가답게 탄광촌 광부들의 이야기가 중심에 놓여 있었다. 황 화백은 광부들이 막장에서 언제 사고로 죽을지도 모르는 힘든 삶, 가난한 탄광 마을의 풍경이라든가 가난한 농촌 사람들, 노동자들의 삶의 이야기, 제주 해녀의 '숨비소리' 등 고단한 사람들의 삶을 표현하는 리얼리즘 화가로 널리 알려져 있는데, 이번 작품전에도 그런 분위기의 작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 하모니카 나고야 징용에 끌려가서 하모니카와 같은 집에서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현실을 표현한 작품이다. ⓒ 김광철   ▲ 탄착점 단둥의 압록강변에서 남북 분단 '반공 교육'의 공격성을 지적하는 작품이다. ⓒ 김광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다. 탄광마을과 관련된 소재들은 물론이고, 세월호 어머니의 절규하는 이야기라든가 일제 때 징용으로 끌려가 고단한 삶을 살았던 조선인들의 삶이 담겨있는 '하모니카 나고야'라든가 '강주룡, 을밀대에 오르다', 중국 단둥에서 바라보는 압록강에서 반공교육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탄착점',  백두산 천지의 가마꾼 그림, 고려 고종과 조선 인조의 '삼배구고두'의 항복 의식 등 역사의 아픈 곳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둔덕고개'라는 작품을 통해서는 현시대에 회화가 가지는 본질에 대하여 물으면서서, '시간은 지나는 한 점이 현재이고, 그 현재는 바로 과거가 된다'고 하면서 우리는 이렇게 살아간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 알흔섬 민족의 시원인 바이칼호의 알흔섬을 방문하고 받은 영감을 흑연을 이용하여 표현하고 있다. ⓒ 김광철   그런가 하면 흑연을 이용하여 바이칼 호수의 '알흔섬'을 그린 작품에서는 바탕을 까맣게 하고 흑연을 칠해서 빛이 반사되는 효과 표현하기, '진여'와 '썰물(고향바다)' 등의 작품은 과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그리려고 했다고 하며 까망 속에 있는 물의 침묵을 재조명하고 있다. 이렇게 우리 민족의 시원지와 고향 등 민족과 자신의 근본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도 눈길을 끌었다. 이런 자양한 주제와 머리카락 등을 이용하여 가난한 민중들의 삶을 재조명하고, 민족, 역사 등에 대하여 관심을 일깨우는 작품들을 대할 수 있어, 황재형이란 화백을 처음 만나던 때를 떠올리게 된다.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이다 황재형 화백은 이번 작품전 도록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한 인간의 머리에 자라나는 십만 개의 머리카락이 한날한시에 태어나는 경우가 없고 동시에 죽어가는 법 없이 독립되어 제 기능을 다 합니다. 불평등이 체화된 인간의 몸에서. 내게 머리카락이 귀중한 것은 머리카락은 개개인의 삶이 기록되는 필름과 같기 때문입니다. 나의 그림은 내가 아니라 우리가 익명의 개인에게 보내는 뜨거운 연서입니다. 내 실핏줄이 터지는 까닭입니다. 무심코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 몇 올이 섬찟한 것은 그것의 생명력 때문이 아니라 나의 배타성 때문입니다. 머리카락은 인간 최초이자 최후의 옷입니다." 내가 환경과생명을지키는교사모임 활동을 하면서 태백시와 태백산으로 생태와 역사 탐방을 갔다가 황 화백 이야기를 듣고 그가 어떤 사람인가 궁금하여 찾으면서부터 인연을 맺게 되었다.  당시 전교조 운동을 열심히 하던 나는 광부 화가가 동네 벽화도 그리고 탄광촌 사람들 이야기를 그림에 표현하기도 하면서 지역의 노동 운동과 지역 사회 운동에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고 하여 관심을 갖게 되어서 이다. 교사가 되기 위하여 교대 2년을 다니면서 몇 학점 받기 위하여 수강했던 것이 전부인 나는 제대로 된 미술 교육을 받아보질 못하고 있었다. 그런던 차에 참교육을 한다고 설치던 나로서는 이분의 미술교육에 대하여 호기심을 갖게 된 것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다시 면으로 발전하는 이런 관계를 미술 작품에 가져와 미술교육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점, 선, 면'을 이용하여 사람들의 내면의 세계를 표현하거나 구도를 잡는 등 특별한 미술교육 프로그램이 있다고 하여 배워보아야 하겠다는 호기심이 발동한 것이다. 그래서 당시 나와 가깝게 지내서 서울에서 전교조 활동을 하는 초등교사들 8멍과 함께 10박을 하면서 미술공부를 하는 기회를 만든 것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미술의 대중화를 위한 운동에도 앞장서는 황재형 화백 1996년이던가? 정확하게 연도 기억은 나지 않지만 그 연간이다. 태백의 황재형 미술연구소로 찾아가서 아침 8시부터 시작하여 새벽 1시까지 이어지는 열흘 간 강행군을 하면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그러던 중간 어느날은 그 프로그램에 참가한 교사들의 성의가 부족하다고 보였는지, 어느날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 몇 잔씩 먹이더니 "다들 짐싸고 돌아가라"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맞자 대표격인 나는 "죄송합니다. 뭐가 잘못 되었으면 고쳐서 더욱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정하여 눌러앉아 미술공부를 했던 기억은 지금도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이 과정을 통하여 그림의 구도가 어떤 것이며, '점, 선, 면'을 이용하여 작품을 완성하면, 무엇을, 어떻게 표현하였는지에 대하여 자신의 작품을 함께 하는 동료들에게 설명을 하고, 그들로부터 질문을 받고, 더 보완할 점은 없는가 등 이런 과정을 통하여 미술 작품 표현에 대한 근본을 배우고 익혔던 것이다. 30년 세월이 가까워 오지만 미술 표현의 근본과 기초를 배웠던 것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그러면서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무건리'라는 곳(고려가 패망하자 이곳으로 숨어들어 살았던 고려충신들이 숨어살았다는 은거지)을 탐방하거나 황지못, 폭설이 내린 태백 시내를 누비던 일, 귀틀집 주막 겸 식당에서 관솔주를 마시고, 친환경 음식을 먹었던 기억 등 독특한 문화체험을 했던 일들도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다. 나는 이런 미술교육 체험을 하고 나서 당시 전교조 초등위원장이었던 나는 이것을 전교조의 참교육 차원에서 널리 보급하고자 소식지 등을 통하여 전국의 많은 전교조 초등교사들에게 알렸다. 그런 도움을 통하여 시작은 하였지만 나중에는 이곳을 거쳐간 교사들의 널리 알려져 이 미술교육프로그램은 해마다 여름과 겨울방학을 이용하여 지속이 되고 있다.  기초 과정과 심화과정까지 프로그램이 발전을 하면서 이 프로그램에 참가했던 교사들 중에는 아예 이곳 태백시로 근무를 지원하고 와서 작품 활동에 몰두하고 있는 교사들도 있을 정도이다. 나는 이 미술교육프로그램 1기 참가자로서 가끔 초청받아서 당시의 경험들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그렇다고 여기서 배운 것을 학교로 가지고 와서 초등학교 학생들한테 그 방법으로 가르치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지만 어디 미술전이 열린다 하여 가면 비구상 작품일지라도 최소한 내 나름대로 작품의 구도며, 미적 표현에 대하여 감상하려는 작은 힘은 생겼다는 생각을 해 본다. 요즘은 교사들들 뿐만 아니라 현직 판사에서부터 일반인들까지 그 참가 범위가 넓어졌다고 한다. 태백미술연구소의 미술교육 프로그램은 이제는 태백에서만 하지를 않고 광주 등 지방을 찾아가서 열기도 하고, 작년에 황재형 화백이 제1회 박수근 미술상을 받으면서 이번 겨울에는 강원도 양구에서 미술 캠프를 열기로 하였다고 한다 황 화백은 자신의 작품을 통한 예술의 세계를 열어가는 노력 뿐만 아니라, 미술교육의 대중화를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면에서 참 존경해 마지 않는다. 당시 태백의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가하면서 장정희씨 등 황재형 화백의 제자들 5명이 우리 교사들과 달라붙어서 지도를 해 주었는데, 여전히 그들은 지금도 그곳 황 화백의 품을 벗어나지 않고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장정희, 김은아, 하은영, 박신자, 김지희 선생님 등 이번 전시회에서 그 선생님들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다. 그렇지만 아직도 결혼도 안 하고 예술활동에 푹 빠져 산다는 선생님들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럴 수 있는 자신감이 부럽기도 하였다. ▲ 태백미술연구소 회원들과 함께 '십만 개의 머리카락' 작품전 열림식을 끝내고 뒷풀이 행사를 함께 하고 있는 '태백미술연구소' 교사들과 그 과정 이수자들 ⓒ 김광철   이번 작품전을 축하해 주기 위하여 전국 이곳, 저곳에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특히 이곳 미술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이수자들 중에는 전라도 광주에서까지 올라와서 새벽녘까지 축하 뒷풀이 자리를 이어갔다. 나도 그 자리에 함께 끼어 어울려, 막걸리에 노래도 한 순배씩 돌리면서 옛정을 나누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한 게 없는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었다.  '역시 흥이 있어야 창의성도 발현되는가 보다'는 생각을 하면서 내가 그 동안 출간했던 시집 두 권을 들고가 황 화백에게 드렸더니 기어이 그 중에 두어 편을 나를 포함하여 참석자들에게 낭송을 시키기도 하여 늦은 밤까지 우의를 다질 수 있었다. 역시 예술하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은 이런 걸쭉한 재미를 더할 수 있어 늘 흥겹다. 그래서 더욱 이런 자리에 오라하면 거절을 못하는 것 같다...    ========================= 태백서 탄광촌의 삶 그려온 1세대 민중미술 작가의 변신 물감 대신 미용실 모발 이용해 인물·집단화·풍경까지 표현 ‘광부화가’로 불렸던 민중미술 1세대 작가 황재형(65)이 거듭났다. 전시장에 펼쳐 놓은 그림 속 대상은 평생 화폭에 옮겼던 강원도 태백의 광부들, 조국의 등허리 같은 산하, 허허로운 폐광촌이다. 한데 어딘가 모르게 숫돌에 벼린 칼처럼 선이 날카로워졌다. 그 날카로움에 베인 듯 풍경과 인물들이 더 아프게 날아와 박힌다. 무엇이 시각적 변화를 만들어내는가 싶어 캔버스 가까이 가 보면 놀라운 일이 벌어져 있다. 사용한 매체가 흔히 쓰는 유화 물감, 혹은 판화가 아니라 사람의 머리카락이다. 전시 제목 그대로 ‘십만 개의 머리카락’으로 그린 작품들이다. 동서양 어느 작가도 시도하지 않았던 놀라운 창안이다. 머리카락이 선이 되고 면을 만들어내며 특유의 검은 톤을 통해 수묵의 번짐 효과까지 낸다.  지난 19일 ‘황재형 개인전-십 만개의 머리카락’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종로구 가나아트센터에서 황 작가를 만났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유화 도구를 만졌으니 50년이 넘게 사용해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그려도 나랑 맞지 않아요. 먹처럼 스며들지 않고 여운도 없고 표면을 덮기만 하니….” 새로운 매체에 대한 고민은 꾹꾹 가슴에 담아둔 숙제였다. 눈이 번쩍 뜨이는 계기가 왔다.  1998년 경북 안동에서 고성 이씨 문묘를 이장하던 중 관 속에서 조선시대 묘주 이응태의 아내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나온 것이다. 31세에 요절한 남편의 병이 낫기를 바라는 애틋한 마음에서 엮은 일명 ‘원이 엄마 미투리’ 뉴스를 듣는 순간, 그는 무릎을 쳤다.  칠십에 황혼 이혼한 한 여성을 알게 된 것은 그를 더욱 이 매체로 몰아세웠다. 원하지 않는 결혼을 하게 됐고, 또 직장을 다닌다는 이유로 시어머니의 구박을 받았다는 그 여성은 첫 아이를 낳고 받아든 미역국에서 한움큼 머리카락을 건져내고 기겁을 했다. 며느리가 밉다며 시어머니가 넣은 것이다. 머리카락은 사랑의 징표이지만, 미움의 표출 수단이기도 했던 것이다.  황 작가는 “머리카락은 징표일 뿐 아니라 만지고 느낄 수 있는 현존체로 실재하는 것”이라며 “사적이면서도 그것이 품는 정신성으로 인해 사회적 철학적 정치적 도덕적 메시지까지 전달한다”고 말했다.  유화로 그린 광부를 작가가 ‘머리카락 버전’으로 새롭게 그린 ‘드러난 얼굴’을 보자. 동물성 머리카락이 그려낸 얼굴의 쭈글쭈글한 주름은 너무나 사실감이 있어 오싹해진다. 머리카락을 뭉쳐 만든 눈은 더욱 퀭하다. 그러면서도 태백의 백두대간 같은 풍경에선 지구의 굴곡 같은 깊은 맛을 내기도 한다.  처음엔 가족의 머리카락을 사용했지만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동네 미용실에서 얻어온다. 작업시간이 유화의 세 배나 걸린다. 눈에 충혈이 생기고 어깨는 굳어졌다. 속도의 시대에 거꾸로 느리게 가는 작업이다. “더디게 하다 보니 전에 보이지 않던 게 보여요. 풍경이든 사람이든. 왜 자동차 대신 자전거를 타고 가면 그렇잖아요. 앞으로도 계속할 거냐고요. 지금은 몰라요. 그때 가면 또 다른 게 나오겠지요.”  황 작가는 전남 보성 출신으로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나왔다. 70년대 후반부터 작품 소재를 얻기 위해 강원도 탄광촌을 드나들다 80년대부터 태백에 눌러앉았다. 광부들과 그 주변 풍경을 소재로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려오고 있다. 내년 1월 28일까지. /손영옥 선임기자
490    오스트리아 황금빛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 댓글:  조회:3498  추천:0  2018-03-07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 황금빛이 쏫아지는 듯한 그림들...   구스타브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의 바움가르텐에서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보헤미아 출신의 귀금속 세공사이자 조각가였다.  그가 나중에 금을 이용하여 모자이크 작업을 펼칠 때 아버지의 수공예품에 대한 기억이 크게 도움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클림트는 또 오페라 가수인 어머니에게서 음악에 대한 열정을 물려받았다. 천재 베토벤을 기념하는 위대한 작품을 만든 것도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음악에 대한 열정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클림트의 집안은 다복했으나, 1873년 경제위기의 여파로 형편이 어려워지게 된다. 1876년 클림트는 빈 응용미술학교에 입학했고 그곳에서 1883년까지  모자이크 기법이나 금속을 이용하는 방법, 그리스의 도자기 미술, 이집트와 바빌론의 부조, 슬라브 민속학 등 수세기에 걸친 다양한 장식 기법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고, 이 또한 훗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        1883년 클림트는 남동생 에른스트 클림트와 친구 프란츠 마치와 함께 왕실에서 각 지역에 새로운 건축물을 건설하거나 수리할 때 실내에 적절한 그림을 그려 넣곤 했다.    부르크 극장 부르크 극장 장식화 1886년 클림트는 기념비적인 작품을 착수하게 되는데, 그것은 부르크 극장을 장식하는 작업이었다.  1888년에 완성된 은 등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세밀한 초상을 섬세하게 그려 넣어 보는 이들을 경탄케 했다. 이 작업으로 인해 황제에게 특별격려상인 황금공로십자훈장을 받았고, 그들의 명성은 빈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부르크 극장 장식화 1892년 아버지가 사망하는 몇 달 후에 동생 에른스트가 죽자 클림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은 욕구가 생기지 않았다.  이 휴지기가 어쩌면 클림트에게 사고의 깊이를 확보하게 한 기간이었는지도 모른다.  동생의 죽음으로 깊이 파인 가슴을 쓸며 클림트는 인간의 운명과 구원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였다.      ,1895년 1895년 클림트가 위기를 극복하고 제작한 은 그의 최초의 걸작이다.  장식적인 배경과 인물의 사실적 표현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사랑의 형태를 우의적으로 표현한 작품으로 사랑하는 여인을 뒤로 질투의 얼굴들이 보이는 것으로 니는 행복속에 숨어있는 불안을 의미한다. 클림트의 작품중 현실적인 내용과 추상적인 내용이 그림 화면속에 동시에 등장하는 최초의 작품이기도 하다.       클림트는 개성이 강한 예술가였다. 한동안 역사화를 그렸지만, 그것은 어차피 종합예술로 표현되는 자신의 예술세계로 가는 과정이었다. 빈 미술가협회의 보수적인 태도에 반감을 느낀 클림트는 1896년 요제프 엥겔버트, 카를 몰과 함께 분리파의 기원이 되는 연합회를 처음으로 기획했고, 빈 분리파를 공식적으로 창설했다. 클림트를 비롯한 분리파 예술가들은 대규모 전시회를 기획하는 한편 모나코 분리파가 만드는 잡지 와 유사한 잡지를 기획했다. 이듬해 빈 분리파는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를 개최했으며 잡지 을 창간했다.   창간호.1898년 1898년 3월 23일, 한 원예회사 가건물에서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 개회식이 간소하게 열렸다. 개회식에 황제가 참석하여 축하하는 자리에서 분리파 예술가들이 적절한 선을 넘지 않는다면 새로운 예술 활동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포스터를 만드는 과정에서 그 ‘적절한 선’을 넘은 적이 있었던 것이다. 이 포스터는 젊은 예술가를 상징하는 테세우스가 전통 예술가를 상징하는 괴물 미노타우로스를 물리치는 장면을 그린 것이었는데, 테세우스의 성기가 노출되었다는 것이 문제였다. 클림트는 그 앞에 나무를 그려 넣어 성기를 가려서 검열에 통과했었다. 빈분리파 제1회 전시회 포스타 왼쪽(수정전), 오른쪽(수정후) 제1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5만7천여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218점의 작품을 판매하는 엄청 난 성공을 거두면서 끝을 내었다. 이제 클림트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해 빈 분리파가 안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그들만의 공간인 ‘분리파관’이 지어졌다.  건축가 요제프 마리아 올브리히가 전시한 이 건물은 오늘날에도 빈의 문화적 상징물이 되었다.     요제프 마리아 얼브리히, , 1898년 1902년 제14회 분리주의 전시회는 분리파 역사에서 정점을 이룬다. 이 전시회는 천재 음악가 베토벤에게 헌정되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클림트가 기획한 종합예술작품을 지향하는 새로운 도전이었다.  요제프 호프만이 전시실 내부 장식을 맡았고, 개막일에는 구스타프 말러가 베토벤 9번 교향곡의 모티프로 편곡한 작품을 직접 지휘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전시회의 백미는 무엇보다도 클림트가 베토벤의 을 모티프로 그린 벽화 였다.   베토벤 프리즈1 ,1902년 베토벤 프리즈2 , 1902년 베토벤 프리즈, , 1902년 베토벤 동상과 확대 벌거벗은 여인들의 고통스런 모습으로 시작되는 그림은 온갖 악마의 위협적인 공간을 지나,  마침내 합창하는 여인들 사이에서 두 남녀가 뜨겁게 포옹하고 키스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한 영웅이 무절제한 여인들의 유혹과 악마들의 방해를 물리치고 마침내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인과 함께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담은 이 작품이야말로 클림트가 꿈꾸는 유토피아의 실현, 예술에 대한 끝없는 갈망과 사랑을 노래한 상징주의의 절정이었으며 다양한 기법을 활용한 응용미술의 극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난잡함과 향락과 무절제가 그려진 이 작품에 대해 관람객들은 반감을 일으켰고, 그들의 싸늘한 시선은 빈 분리파의 열정을 얼어붙게 했다.      , , 1900-1907년 클림트에게 또 다른 시련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빈 대학의 천장 도안으로 그린  , , 시리즈 때문이었다.  클림트는 나체의 임신부를 비롯한 벌거벗은 사람들, 혼돈 속에서 무기력하게 떠도는 사람들의 이미지를 통해 병에 들고 죽음을 두려워하고 고뇌에 찬 인간의 불안한 심리와 필연적인 운명과 삶의 부조리를 표현했다. , ,1907년 1903년 이 완성되자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학 건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판정을 받았다.  클림트는 그 작품들을 새로 건축한 현대미술관에 전시할 것을 제안 받았지만,  본래 그림의 목적과 어긋나는 일이라며 거절하였다.  클림트는 이렇게 나체와 성을 대담하게 표현하면서 대중의 고상한 취향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그의 인기는 식어갔고, 빈 분리파 안에서도 지지를 잃었다.    ,1904년 클림트는 1904년 빈 분리파 전시회에 를 출품하는 것을 끝으로 이듬해에는 빈 분리파를 떠나고 만다.       이때부터 클림트는 지극히 개인적인 생활을 누리게 되는데, 대가에게는 그것이 또한 최상의 작업 조건이 되었다. 그는 단체와는 어울리지 않는 누구보다도 고집 센 사람이었고, 더욱이 어떤 것에도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독창적인 예술세계에 몰두하여 특별한 세계를 구축해나갔다.  그리하여 (1907~1908), (1907~1908) 등 이른바 ‘황금 시기’의 대작과 클림트의 예술세계를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풍경화를 포함한 명작들이 우리 앞에 선보이게 된 것이다. ,1907-1908년 는 남녀가 열정적으로 사랑을 나누는 장면 같지는 않다.  여성이 수동적인 것을 넘어서 오히려 거부하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남자는 입술이 아니라 볼에 키스하고 있다.  입술을 굳게 다문 여성의 표정도 황홀함과는 거리가 멀다. 더욱이 두 사람은 몸을 잘못 놀리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지게 되는 절벽 위에서 키스하고 있다.  결국 는 클림트가 꿈속에서 그려본 이상적인 여인인 플뢰게와의 사랑을 그린 것이 아닐까?  아직도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영원히 밝혀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작품의 신비함에 이끌리고 더 황홀해하는지도 모른다.       클림트는 평생 혼인하지 않고 많은 여인들과 관계를 맺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들이 친자확인소송을 냈다.  많은 모델들과 관계했지만 그는 어쩌면 진정으로 안주할 여인을 찾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혹은 혼인하여 아기를 낳고 생활에 안주하는 것 자체가 스스로에게 부담되는 일이었을까? 클림트에게는 이상적인 사랑을 나눌 만한 모델은 없었다.  오직 한 사람, 에밀리 플뢰게라는 여인은 클림트의 진정한 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  플뢰게는 클림트와 늘 함께한 정신적 반려였지만, 두 사람이 육체적인 관계를 맺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클림트의 명작 의 여주인공이 플뢰게라고 짐작하고 있다.     클림트가 에밀리 플뢰게에게 보낸 엽서(왼쪽), 클림트와 에밀리 플뢰게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졸중으로 쓰러진다.  그는 다급하게 “미디를 오라고 해!”라고 소리쳤다.  미디는 에밀리 플뢰게의 애칭이었다.  플뢰게는 급히 달려와 클림트가 저세상으로 갈 때까지 그의 마지막을 지켜주었다.  2월 6일 클림트가 죽은 후 플뢰게는 많은 서신들을 태워 그의 비밀을 없앴다고 한다.  플뢰게는 1952년 세상을 뜰 때까지 구스타프의 추억을 안고 살았다.  클림트의 마지막에는 또 혈육 못지않게 절친했던 에곤 실레가 함께했는데,  실레는 클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림 속에 담았다.     , 에곤실레 구스타프 클림트는 생전에 이미 유명 작가였지만, 한편으로는 영욕이 교차하는 경험을 거듭했다.  그가 빈번하게 그린 나체와 섹스 장면이 줄곧 문제되었던 것이다.  클림트 사후 약 50년 동안 클림트나 그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곤 실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작품은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 오스카 코코슈카 자화상(오른쪽) 그런데 1980년대 후반 클림트의 작품들이 급부상하더니 이제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화가가 되었다. 한때는 외설로 여겨졌던 것이 지금은 참으로 부드러운 낭만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인간의 육체가 발하는 미묘한 숭고함을 느낄 수 있다.       그의 그림을 즐기다가 우리는 문득 그가 향락 속에 빠진 듯한 생활 속에서도 진정한 사랑과 자유를 갈구했음을, 끝내 그것들을 구할 수 없었음을 가슴 아프게 확인하고야 만다.  그러나 그의 작품만은 인간 구원의 황홀경을 참으로 숭고하면서도 적나라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열광하는 이유가 아닐까?       클림트의 주요 그림 몇 점를 더 감상!!        , 1898년 1898년 동생 에른스트가 죽은 후 남은 조카의 후견인이 된 클림트는 36세에 이 초상화를 완성. 흰색과 크림색이 섞여서 순수한 느낌과 안정적인 느낌을 준다. 단발머리를 한 채 앞으로 똑 바로 직시하고 있느 눈은 세상을 향해 당당한 주인공의 태도를 형상화했다.       ), 1901 유디트 2(오른쪽), 1909년 황금을 사용해 ‘황금 스타일’의 시작을 알리는 중요한 작품으로 1901년이 있다. 구양성서에 나오는 유디트는 아름다운 미망인으로 이스라엘을 침략한 앗시리아 장군 홀로페르네스를 유혹하여 그의 목을 베어 버리고 나라를 구한 구국의 영웅이다. 그러나 클림트의 작품속의 유디트는 어떠한 숭고한 의지도 기상도 없다.  그저 죽은 장군의 머리를 든채 황홀경에 빠져 있을 뿐이다. 클림트는 유디트의 이야기에서 주인공의 애국심보다는 남자를 유혹함으로써 파멸에 빠뜨릴 수 있는 여성의 성적인 파워,  ‘위대한 마력’에 주목하고 있다. 유디트 얼굴의 부드러운 표현이 작품을 보는 사람의 시선을 사로 잡는다.  우리는 잠시 얼굴표정을 취한 후에야 비로소 작품의 오른쪽 아래 여주인공이 들고 있는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발견하게 된다.       에서는 그림의 형태를 바꾸고 홀로페르네스의 머리를 보다 선명하게 나타냈다.  꼭 다문 입술과 가차없이 드러낸 젓가슴 그리고 무엇보다도 예민하고 긴장된 유디트의 구부러진 손 모양은 여인의 잔혹한 마력과 복수욕을 보여준다.    ,1903년 은 배가 부른 젊은 임산부를 표현한 것으로  화가를 베일 한 장 없이 여인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었다.  이 그림속 여인인 짐머만 역시 클림트의 아이를 낳은 여성이다.  여성의 관능적 아름다움을 생명 잉태의 힘으로 파악하여  어머니의 모습에 요부의 이미지를 오버랩 시켰음을 알 수 있다.     육체적 사랑을 뛰어 넘아 평생을 정신적 사랑의 동반자로 함께 했던 에밀리 플로게.  그녀는 일찍 세상을 떠난 동생 에른스트 아내의 여동생 이다.      , 1891년, , 1893년 은 평생동안 에밀리 플로게의 초상을 4번 그렸던 초상화중  가장 유명한 그림이다.    장식적인 요소가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드레스의 우아함에 주의를 집중하면서 모델에게는  무관심한 척하면서 심리적 거리를 둔 흔적이 나타난다.      ,1907년 클림트의 대표적인 작업스타일인 금박을 사용한 그림은  화려하고 웅장하다. 나치 정권시에는 히틀러의 소장품이기도 했던 작품.  히틀러가 그의 작품 몇점을 강제로 소유했다고 하는데 이는 그 당시 화가로서의 클림트의 명성과 인지도를 말해준다. 클림트는 살아생전에 작품을 통해 부유한 삶을 누렸으며, 상류층과도 자연스럽게 어울렸다고 한다. 상류층과 교류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이 바로 이 여인 블로흐바우였다.  아델레 블로흐바우어는 클림트가 가장 선호했던 모델이자 후원가였으며 클림트와의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던 엄청난 재벌집 안주인이었다.     , 1907-1908년 클림트는 자신의 성적 환상을 감추기 위해 신화의 주제를 즐겨 사용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다나에의 이야기는 클림트의 성적인 환상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소재였다. 에 등장하는 다나에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오스의 딸이다. 아크리시오스 왕은 딸이 낳은 아들한테 살해당한다는 예언을 듣고 남자들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위해 딸을 탑속에 가두어 버린다.  하지만 다나에한테 반한 제우스는 부인인 헤라의 질투를 피해 황금빛 빗물로 병하여 그녀의 다리 사이로 스며들어 사랑을 나눈다.  그 결과 페르세우스가 태어났다.  클림트는 밀실 속에서 감금된 다나에의 움직일 수 없는 상황을 보다 강조하기 위해 정사작형 화면 전체에 다나에를 그려 넣었다.  다나에는 성적 황홀감에 빠져 있으며 눈을 감고 있다. 왼쪽 아래부분에는 금색 윈형들 사이에 남성성을 상징하는 검은 사각형이 있다.       , 1905년-1911년, 벨기에 브뤼셀 클림트의 프리즈가 있는 대식당 1903년에 벨기에의 실업가 아돌프 스토클레가 건축가 요제프 호프만에게 저택 건축을 의뢰하자  요제프 호프만은 클림트에세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장식 벽화를 의뢰한다.  클림트는 후원자의 풍부한 재정 덕분에 유리, 산호, 자개, 준보석 등 값비싼 재료를 이용하여 벽화를 완성했는데 그 거대한 작품이 생명의 나무이다.  저택의 식당 양쪽 긴 벽면에 장식된 생명의 나무는 구상적 표현이 전혀없는 추상적인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 , 스토클레 저택의 식당 긴 벽을 장식하고 있는 패널화는 세부분으로 구성된다.  중앙의 나무는 생명의 나무이다.  맨 왼쪽의 여인은 인데 그림속 유일하게 얼굴과 손이 구체적으로 표현되었다.  생명의 나무에 휘감겨있는 왼쪽 여인은 고대 이집트 벽화처럼 얼굴은 측면을 향하고 있고  몸은 정면을 향하고 있다. 또한 이집트풍의 인물과 추상화적인 배경이 완벽하게 하나가 되어 있다. 오른쪽 패널은 이다. 주인공들이 입고있는 동양풍의 의상은 클림트의 오리엔탈리즘과 비잔틴 미술 양식의 취향을 짙게 나타내고 있다.     , 1911 1911년 즈음 유럽에는 여러 흉조로 인해 세기말적 비관주의가 성행하고 있었다.  1908년에는 8만면 이상이 생명을 앗아간 지진이 일어났고. 2년뒤 헬리혜성이 나타나 많은 이들을 공포로 몰아갔다.  그리고 1912년 호화 여객석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클림트는 이런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느꼈던 죽음에 대한 공포를 이 작품에서 죽음의 신과 직면하는 인간 군상으로 표현하고 있다.       1918년 1월 11일(56세) 클림트는 갑작스런 뇌출혈이 있는 후, 같은 해 2월 6일 합병증으로 병원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다. 화가라면 한 두장 남긴다는 자화상을 단 한 장도 남기지 않았다 클림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내 자화상은 없다. 나는 회화의 대상으로서 나 자신에 전혀 관심없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 특히 여성에 관심이 있고 그보다 더 다름 형태에 관심이 더 많다. 나는 스스로를 특별히 흥미로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루종일 그림을 그리는 화가이며 인물과 풍경 그리고 가끔 초상을 그린다.“      [출처] 황금빛 화가 - 구스타프 클림트|작성자 아스타  
489    벨기에 철학자 초현실주의 화가 - 르네 마그리트 댓글:  조회:8225  추천:0  2018-03-07
출생 1898년 11월 21일 사망 1967년 08월 15일 국적 벨기에 대표작 〈길 잃은 기수〉, 〈이미지의 반역〉, 〈인간의 조건〉, 〈빛의 제국〉, 〈투시도-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에〉 등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사물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현실 감각을 뒤틀었으며, 팝아트라는 새로운 사조를 창출했다.   르네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의 대표적인 화가이다. 그는 친숙한 대상을 생소한 배경에 배치하거나 말과 이미지의 관계에 의문을 제기함으로써 양자의 괴리를 드러내 보는 이들의 현실 감각을 뒤흔드는 작품들로 유명하다. 마그리트는 화가보다 철학자로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며, 헤겔, 베르그송, 하이데거 등의 철학서들을 탐독하고 그 사상을 그림으로 표현했다. “나는 회화를 이용하여 사유를 가시화한다.”라는 말이 그의 작품 세계를 설명하는 가장 적합한 단어가 될 듯하다. 마그리트는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남부 지역의 공업 도시 에노 레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양복 재단사이며, 어머니는 모자 상인이었다. 그는 〈팡토마〉 같은 범죄모험영화와 탐정소설, 에드거 앨런 포, 로버트 루이스 스티븐슨 등이 쓴 소설을 매우 좋아하는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러나 14세 때 어머니가 강에 투신자살을 하면서 유년 시절은 끝이 났다. 그는 어머니의 시체를 건져 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으며, 어머니의 얼굴을 덮은 드레스 자락의 이미지는 그의 머릿속에 각인되어 평생 영향을 미쳤다(이 이미지가 〈연인〉이라는 작품에 투영된 것이 아니냐는 비평이 있었으나 그는 부인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아버지는 르네와 다른 두 아들을 데리고 샤를루아로 이사했다.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면서 고전을 공부했으며, 18세 때부터 브뤼셀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 입학하여 회화를 공부했다. 이 시기에 그는 인상파와 입체파 양식의 회화를 시도했으며, 그래픽 아트를 배웠다. 졸업한 후에는 포스터와 광고 디자인 등 상업 미술가로 일했는데, 이 무렵까지는 화가가 되겠다는 대단한 열정을 품지는 않은 듯하다. 1922년은 마그리트에게 전환점이 되는 해였다. 그는 어린 시절 소꿉친구였던 마리 조르제트 베르제와 결혼했으며, 그해 시인 마르셀 르콩트가 보여 준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사랑의 노래〉 복제화에 큰 충격을 받고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키리코는 건물 풍경, 버려진 광장, 잘린 고전주의 시대의 조각 등을 기묘하고 음울한 공간에 배치함으로써 초현실주의를 예고하는 작품을 제작한 인물이다. 마그리트는 한동안 광고 디자인으로 생계를 꾸렸으나 1926년 브뤼셀의 라상토르 화랑과 계약하면서 회화 작업에 집중적으로 몰입했다. 그해 그는 60여 점의 작품을 그렸고, 초현실주의적 작품 〈길 잃은 기수〉(1926, 같은 제목으로 1948년에 더욱 정돈해서 그린 그림도 있다)로 주목받게 되었다. 1927년부터 3년간 마그리트는 파리에 머물며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으며, 초현실주의 운동에도 가담했다. 초현실주의 그룹은 프로이트의 이론을 근거로 하여 무의식의 세계에 도달하기 위한 기법으로 자동기술법과 데페이즈망(Dépaysement) 기법을 창안했다. 데페이즈망이란 ‘추방’이라는 의미로, 사물을 일상적인 환경에서 추방하고 이질적인 환경에 배치시키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사물의 원래 의미, 즉 실용적인 성격을 배제하고, 보는 이들의 감각의 심층부에 충격을 준다. 이는 종종 19세기 프랑스 시인 로트레아몽의 〈말도로르의 노래〉 중 ‘해부대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만나듯이 아름다운’이라는 구절로 표현되곤 한다. 마그리트는 1930년 브뤼셀로 돌아와 여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3년간은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이후에도 초현실주의 전시회에 계속 참여했다. 그는 데페이즈망 기법을 활용해 다양한 방식으로 익숙한 대상을 ‘낯설게 보이게 하는’ 충격을 주었고, 그럼으로써 관람객들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 상식에 의문을 제기하게 만들었다. 예컨대 대표작 〈이미지의 반역〉에서 그는 우리의 언어 질서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 작품에는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고 그 아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쓰여 있다. 일견 모순되어 보이는 이 글은 언어와 이미지의 실제 관계를 드러내고 있다. 먼저 그림은 사물을 아무리 사실적으로 재현하더라도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이미지일 뿐이다. 또한 단어 역시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의 본질을 내포한 것은 아니며, 다만 대상을 지칭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실제 ‘파이프’와 ‘파이프라는 단어’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없음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또한 미술의 환각법을 이용해 실제와 환영에 대한 상호 관계도 탐구했다. 예컨대 〈인간의 조건〉에서는 화면 오른쪽에 바다 풍경을 그린 캔버스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화면 속 그림의 소재가 되는 바다 풍경, 즉 창밖의 바다 풍경은 캔버스 속 풍경과 합쳐져 있는 듯 배치되어 있다. 창문을 통해 외부(바다)와 내부(캔버스 속 바다)의 접점, 경계를 모호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인식 체계를 다시 숙고하게 만든다. 〈폭포〉, 〈인간의 조건 2〉, 〈해 지는 저녁〉 등에서도 그는 ‘그림 속의 그림’을 제시하여 우리가 믿고 있는 인식 체계의 불완전함과 그 경계의 모호함에 대해 이야기한다. 특히 말년에 그린 〈백지 위임장〉에서는 현실과 환상의 경계, 혹은 두 차원의 경계가 완전히 혼란스럽게 표현되어 있다. 말을 타는 여인과 그녀가 지나가는 숲의 나무들 중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경계인지조차 불분명하다. “보이는 것은 보이지 않는 것이 될 수 있다. …… 말을 탄 사람은 나무를 가리고 나무는 여자를 가린다. 하지만 우리의 사고 능력은 눈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 〈백지 위임장〉을 사용한 그룹 스틱스의 앨범 〈더 그랜드 일루전〉 〈빛의 제국〉과 같이 언뜻 보기에는 아무 이상이 없어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서로 다른 개념들이 한 공간, 하나의 시간 속에 존재하는 것도 있다. 〈빛의 제국〉은 일견 밤의 풍경으로 보이지만, 그 위의 하늘은 낮의 하늘이다. “이 풍경은 우리에게 밤에 대해, 낮의 하늘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내 생각에 낮과 밤의 동시성은 우리의 허를 찌른다.” 마그리트는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던 현상, 기존의 상식에 의문을 제기했다. 다른 초현실주의자들이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세계를 표현한 것과 달리, 일상에서 접하는 친근한 사물을 통해 현실 감각을 뒤트는 실험을 한 것이다. 그리고 지극히 사실적인 표현으로 그 효과는 극대화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마그리트는 ‘죽음’이라는 주제에 몰두하게 되었다. 〈투시도-다비드의 마담 레카미에〉처럼 사람이 앉을 자리에 관을 놓는 충격적인 작품을 그리기도 했으며, 마네와 르누아르풍의 작품을 제작하는 실험도 했다. 그러나 1940년대 후반 다시 원래의 양식으로 돌아와 더욱 세심하고 기묘한 장면들을 그려 나갔다. 1960년대에는 미국 순회전을 가졌으며, 1965년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면서 당대 미국의 아방가르드 작가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마그리트는 1967년 8월 15일 로테르담의 보이 망스 미술관에서 회고전이 열리던 가운데, 브뤼셀 자택에서 사망했다.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수많은 현대 아티스트에게 영감을 주면서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팝아트라는 새로운 사조를 창출한 젊은 미국 예술가들은 그에게 열광했고, 1960년대 이후 대중문화의 기수들도 그의 작품에 관심을 보였다. 제프백, 스틱스, 잭슨 브라운 등의 뮤지션들이 그의 작품을 앨범 재킷으로 사용했으며, 영화 제작자들, 미술가, 광고 제작자들도 많은 영감을 얻었다. 그러면서 그의 작품들은 현대인에게 매우 친숙한 이미지가 되었다. =========================덤으로 더...   요약 마그리트는 초현실주의 화가로 작품에는 공포와 위기감, 희극적 요소 및 신비주의적 환상이 어우러져 있다.  1927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으나 실패한 후 파리근교로 이사해 그곳에서 여러 초현실주의자들과 교제했다. 1930년 브뤼셀로 돌아온 후에는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1940년대에 인상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 후로는 자신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비논리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작품에서 겉으로 보기에는 일상적이고 친숙한 사물을 어울리지 않고 예상하지 못한 배경에 놓거나, 크기를 왜곡시켜 낯섦과 기묘함을 의도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이미지의 반란을 일으키고 상식에 대해 도전하면서 사물의 본질적인 가치들을 환기시켰다.   르네 마그리트(Rene(-Francois-Ghislain) Magritte) 초현실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벨기에의 화가이다. 기괴하게 번득이는 그의 환상에는 공포와 위기감, 희극적 요소 및 신비주의가 어우러져 있다. 그는 1927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는데, 실패한 후 파리근교로 이사했다. 거기에서 그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등 초현실주의자들과 교제하며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도 접하게 되었다. 1930년 브뤼셀로 돌아온 후에는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1940년대에 인상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후로는 그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비논리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생애의 마지막 해에는 그의 그림에서 따온 이미지를 토대로 8개의 청동조각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그의 그림에는 어린시절부터 그가 열중했던 바다와 넓은 하늘이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위협적인 날씨 Threatening Weather〉(1928, 영국 런던 펜로즈 컬렉션 소장)에서는 구름이 흉상과 깔때기 모양의 금관악기 및 의자 모양으로 나타난다. 〈피레네 산맥의 성 The Castle of the Pyrenees〉(1959)에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 성이 서 있고, 그 바위가 바다를 떠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밖의 환상적 표현으로는 인간의 다리를 가진 물고기, 몸통이 새장으로 되어 있는 인간, 애완용 사자 옆에서 벽 위로 몸을 기대고 있는 신사 등이 있다. 〈골콘다 Golconda〉(1953, 미국 텍사스 휴스턴 D. J. 드 메닐 소장)에서는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거리를 향해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덤으로 더 더...     출생 1898년 11월 21일, 벨기에 레신 사망 1967년 8월 15일, 브뤼셀 국적 벨기에 요약 비논리적이며 신비주의적 화풍의 20세기 벨기에 초현실주의 화가로 주요 작품은 . 벨기에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부터 바다와 넓은 하늘을 묘사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파리에서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작품생활을 시작, 강렬한 이미지와 상식을 파괴하는 연출 등으로 주목 받았으며, 공포와 위기감마저 불러일으키는 환상적인 화풍으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생의 마지막에는 자신의 그림에서 따온 이미지를 토대로 청동조각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마그리트(René(-François-Ghislain) Magritte) 초현실적인 작품을 많이 남긴 벨기에의 화가이다. 기괴하게 번득이는 그의 환상에는 공포와 위기감, 희극적 요소 및 신비주의가 어우러져 있다. 브뤼셀 미술 아카데미(1916~18)에서 공부한 뒤, 벽지공장의 디자이너로 일하다가 광고를 위한 스케치를 그리게 되었고 1926년 브뤼셀의 한 화랑의 지원을 얻어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가 초현실주의에 몰두하기 시작한 것은 그 직후였다. 그는 1927년에 첫 개인전을 가졌는데, 당시의 비평가들에게는 그의 작품이 좋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같은 해 그는 아내와 함께 파리근교로 이사했다. 거기에서 그는 시인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를 포함한 초현실주의자들과 알게 되어 가까이 지냈으며 막스 에른스트의 콜라주도 접하게 되었다. 1930년 브뤼셀로 돌아온 후에는 여생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지냈다. 그는 1940년대에 인상주의적 요소를 부분적으로 사용하는 등 다양한 양식을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작품들은 그다지 훌륭하지 못했고 그는 차츰 이러한 실험을 그만두었다. 그후로는 그만의 고유한 양식으로 비논리적이며 수수께끼 같은 이미지를 그리는 일에 몰두했다. 생애의 마지막 해에는 그의 그림에서 따온 이미지를 토대로 8개의 청동조각을 만드는 일을 감독했다. 그의 그림에는 어린시절부터 그가 열중했던 바다와 넓은 하늘이 강렬하게 묘사되어 있다. 〈위협적인 날씨 Threatening Weather〉(1928, 영국 런던 펜로즈 컬렉션 소장)에서는 구름이 흉상과 깔때기 모양의 금관악기 및 의자 모양으로 나타난다. 〈피레네 산맥의 성 The Castle of the Pyrenees〉(1959)에는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 성이 서 있고, 그 바위가 바다를 떠다니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밖의 환상적 표현으로는 인간의 다리를 가진 물고기, 몸통이 새장으로 되어 있는 인간, 애완용 사자 옆에서 벽 위로 몸을 기대고 있는 신사 등이 있다. 〈골콘다 Golconda(겨울비)〉(1953, 미국 텍사스 휴스턴 D.  J. 드 메닐 소장)에서는 집들이 줄지어 서 있는 거리를 향해 사람들이 빗방울처럼 떨어지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덤으로 더 더 더...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다... ㅡ초현실주의 작가 르네 마그리트        라는 작품.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을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분은 “기이하다” 였습니다. 훗날 하나의 미술 사조로 접한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그 기이한 수수께끼가 풀리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기이함의 근원은 바로 르네 마그리트가 자주 사용했던 데페이즈망(Dépaysement)이라는 표현 기법 때문이었습니다. 데페이즈망은 추방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초현실주의에서 자주 쓰이는 표현 기법입니다. 조금 더 정확히 이야기 하자면 입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들중 꽤 많은 작품은 데페이즈망으로 해석이 됩니다. 그럼 데페이즈망과 관련 깊은 그림들 위주로 우선 살펴보겠습니다.   위의 그림은 1928년에 제작된 이라는 작품입니다. 1921년에 르네 마그리트의 어머니는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어린 그는 어머니의 시체를 건져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입고 있던 드레스가 얼굴에 덮인 채 건져진 어머니의 이미지는 내면에 깊은 충격으로 자리 잡았을 것입니다. 그 사건은 후에 그의 그림에 많은 영향을 남깁니다. 위의 은 그 영향을 받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라는 작품입니다. 전형적인 데페이즈망의 표현 기법이며 사물의 크기를 기존의 우리가 알고 있던 상식보다 키워 묘한 느낌을 연출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속에는 다양한 모양의 이 등장합니다. 마그리트는 “말 방울”에서 공의 모티브를 따왔다고 합니다. 그 당시 20세기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말의 목에는 방울이 달려있었는데, 방울은 그러한 과거의 소리를 회상하는 매개체의 역할로 그의 작품에서 종종 등장하곤 합니다.   위의 그림은 라는 작품입니다.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에서 자주 등장하는 양복 입은 신사는 마그리트의 가족사와 관계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사실 양복 재단사와 모자 상인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그림에서 등장하는 양복 입은 신사는 르네 마그리트 본인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르네 마그리트가 즐겨 사용한 표현기법인 데페이즈망으로 해석이 안 되는 그림이 있습니다. 바로 위의 < 이미지의 배반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이라는 작품입니다. 그림을 보면 백과사전에나 나올법한 딱딱한 기법으로 파이프가 하나 그려져 있고 바로 밑에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문구가 필기체로 쓰여 있습니다. 이 그림을 통해, 르네 마그리트는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대상의 재현일 뿐, 그 자체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르네 마그리트는 또한, 사물이 이름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그보다 더 적합한 이름을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위의 시는 김춘수의 유명한 이라는 시입니다. 꽃에 나오는 시의 내용 중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꽃이라는 하나의 이름 즉 기표(Signifiant)가 있습니다. 만약 시 속의 화자가 꽃이라고 명명하지 않았다면 그 것은 오래도록 그저 익명의 존재로만 남겨지게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꽃이라고 부르는 소리 즉 기표(외적 형식)는, 사회적 합의와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일 뿐 꽃이라는 존재가 담지하고 있는 내적인 의미(기의)와는 관계성이 떨어집니다. 즉 기표(외적 형식)와 기의(의미) 사이에는 끊어지기 쉬운 자의적 연결고리가 존재합니다. 즉,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보고 느끼는 수많은 기호 체계들은 이러한 자의적 연결관계 아래에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 언어철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는 기호의 탄생을 기표(Significant)와 기의(Signified)의 자의적 결합이라고 정의 내렸습니다. 그는 더 나아가 이러한 자의적 관계에서 벗어나 기표와 기의가 서로 충분히 반영하는 유기적인 관계에 놓인 상태를 상징이라고 규정짓습니다. ) 이러한 자의적 연결성에 대한 여러가지 근거 중 일상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것들은 번역에 관한 것입니다. 가령 우리나라의 “알쏭달쏭”이라는 말을 영어로 번역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intricate”나 “motley”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생겨난 “알송달쏭”이라는 말 속에 담긴 기의(의미)를 한 스푼도 흘리지 않고 모두 옮겨 담기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위의 기호학적 관점에서 드러나듯, 르네 마그리트는 “보는 것이 믿는 것”인 세상에 대한 반론을 제기 합니다. 다시 한번 위의 파이프 그림을 봅시다. 가까이서 보니 픽셀로 이루어진 망점들도 보이는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이 정말 파이프가 맞나요? 이렇듯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먼저 우리의 상식적인 고정관념을 깨부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그는 평소 우리에게 익숙해져 있는 사물과 관습화된 사고에 이의를 제기하고 뜻하지 않은 충돌을 작품 속에 펼쳐 놓습니다. 그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신선한 경험이며, 그의 작품에서 만나게 되는 낯섦과 수수께끼와 같은 의문은 보는 우리들의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줍니다.   –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미술을 아예 모르는 사람도 마그리트란 이름을 들어보거나 작품 한두개 정도는 봤을거야   주로 낯선 배경에 친숙한 물건들을 기괴하게 배치해놓은 그림들이 주를 이뤄   서로의 이미지를 애매한 관계에 두며 그 사이의 괴리감을 이끌어내주고있어       바로 이그림! 피레네의 성에서 영감을 받아....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나오게됐어       이렇듯 마그리트의 작품들은 세계 유명한 작가,감독,뮤지션같은 사람들에게 영감을주거나 하는 경우가 많아   그 유명한 빛의 제국이라는 그림도 영화 엑소시스트의 모티브가 됐다능     르네 마그리트는 양복재단사인 아버지와 모자상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나.   그래서그런지 그의 그림에서는 양복,중절모가 끊임없이 등장함 한번 볼까?           마그리트는 역설의 의미를 정말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화가중 하나로 평가받고있어   절대 어울릴수없는 두사람을 예로 들자면   중절모의 신사는 '가을' 로 걸어들어가고있지만   독자를 응시하고있는 저 여자는 봄의 여신이거든. 양립할 수 없는 존재인거지           '             유명한 그림이 또하나 나왔네 ! 이작품의 이름은 골콩드   다들 미술책이나 패러디 등등 어디서든 한번 본 기억이 있겠지?   똑같은 의상에 똑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개성 없는 인간들이     허공에 불안정하게 붙잡혀 있어  실제 저 패션을 즐겨입던 마그리트 자신을 응축시켰다 라는 이야기도 있다능   이 그림에서 우리는 '데페이즈망' 이라는걸 알수있는데..       데페이즈망이란?    초현실주의에서 쓰이는 말로, ‘추방하는 것’이란 뜻. 일상적인 관계에서 사물을 추방하여 이상한 관계에 두는 것을 뜻함.  있어서는 안 될 곳에 물건이 있는 표현을 의미한다.  그 결과 합리적인 의식을 초월한 세계가 전개된다. 시인인 로트레아몽의  ‘여신과 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우연히 만난 것처럼 아름답다’ 라는 유명한 어구가 그 전형이다.                 또 나왔지! 마그리트의 잘 알려진 그림들중 하나 [연인들]   사실 마그리트의 유년시절엔 어머니의 비극적인 죽음이 크게 자리하고 있어   1912년 마그리트의 어머니인 아들린이  샹르브 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는데,    어린 마그리트는 어머니의 시체를 강에서 건져내는 과정을 모두 지켜보았다. 그리고 드레스 자락이 얼굴에 덮여진 채 건져지는 그 모습을 본거야. 그 이미지가 각인이되어서 작품제작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 같지만 그는 그 이야기를 터무니없는 낭설이라고 일축해버렸다능         유명한 빛의 제국. 우리나라에서도 영화포스터로 활용된적이 있지? 검은집이라는 작품. 검은집 감독이 마그리트의 열성적인 팬인가봐 다른 포스터에서도 마그리트의 작품이 쓰였더라고   언뜻보면 오 풍경인가? 하지만 자세히봐봐   이것도 말도안돼는 마그리트 특유의 역설을 담고있거든   태양이 빛나는 시간에 야경이라니 말도안되는 것들이 공존하고있지?   낮과 밤의 공존은 놀랍고도 매력적이다       나는 이와같은 힘을 시적(poetry)이라고 말하고 싶다                                                          - 르네 마그리트 -     [청취실 Listening room] 익숙한 공간에 익숙한 물건인데도 기이한 느낌이들어.   왜냐면 우리에게 익숙한 물건인 사과의 크기도 우리에게 익숙한 크기가 있잖아   하지만 여기선 과감하게 확대시켜버리면서 익숙함을 깨버리고 우리에게 불안감을 심어주고있어!   사실 난 이 작품의 타이틀이 왜 청취실인가..생각을 해봤는데 이곳에 등장하는 사과는 유리창을 통해 흘러나오는   빛을 받고있어. 사과가 빛의 소리를 청취하고있는 것처럼 느껴지고있어 나는...                     무생물일뿐인 조각상에 생명을 상징하는 피를 그려넣어 생명을 불어넣음           "나는 실제로 테이블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내게 불러일으키는 감정을 그린다." -르네 마그리트-         초현실주의, 또다른 차원을 열다         사람들이 물건을 사용할 때는 그 물건 속에서 상징적 의도를 찾지 않지만, 그림을 볼 때는 그 용도를 찾을 수 없고 회화를 접하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지 모르기 때문에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의미를 찾게 된다.           초현실주의는 우리 꿈의 욕망,욕구의 자유를 현실에서도 요구하고있어                       마그리트는 파이프를 그린 이 그림 밑에 사족을달아.   이 프랑스어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라'라는 뜻이야. 언뜻보면 말도안되지? 파이프를 보고 파이프가 아니라고하는건 무슨 모순이지?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저건 맞는말이야.    이 그림은 파이프가 아냐. 파이프의 이미지에 불과할 뿐임. 이를 통해 마그리트가 말하고자 한 것은, 미술가가 대상을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대상의 재현일 뿐이지, 그 대상 자체일 수는 없다는 의미.         우리의 눈은 두가지 기능을 가지고있어. 단순한 거울의 기능과, 사물을 보고 해석하는 능력. 하지만 이 그림 [잘못된 거울]에서는 눈을 단순히 거울기능의 수동적인 눈으로만 사용하고있지? 그냥 보고있는 하늘이 그대로 비치는. 자신의 그림을 역생각하지않고 그냥 있는그대로 바라보고 말아버리는 관람자들을 비꼬는 것이라는 해설도 있음.     마그리트는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익숙한 환경에서 떼어내 엉뚱한 곳에 갖다놓고, 크기를 재조합하는것만으로도   사물을 낯설게 하여 우리에게 익숙했던 사물의 잊혀진 존재감을 다시 깨워주고있어         "대상은 그 이름이나 이미지가 갖는 똑같은 기능을 결코 완성하지 못한다. 이 때문에 현실마저 그 단어가 지칭하는 대상이 바뀔 수 있다." -르네 마그리트-      
488    루마니아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 카라스 이오누트 댓글:  조회:3409  추천:0  2018-03-07
루마니아 출신의 초현실 사진작가  '카라스 이오누트'를 포스팅한다.     그는 디지털 아티스트이자, 사진작가로 활동중인데 그의 동화같은 환상의 세계로 들어가보자,                 같은 나무임을 알 수 있다.                                       [출처] 루마니아의 초현실 사진작가 '카라스 이오누트 (Cars Ionut)'|작성자 수련     테마 합성을 이용한 초현실주의 사진   선정이유 포토샵에 흥미가 많기도 하고 스트레이트 사진으로는 보여주기 힘든 시각적으로 재미있는 사진을 많이 만들 수 있을것 같다. 작가의 상상력이 중요한 사진테마이다.   촬영계획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필요한 소스 사진들을 직접 촬영한 후 포토샵을 이용해 완성한다.   촬영장비 니콘 D800,2470,sb700 삼각대   참고사진   카라스 이오누트       마틴 드 파스콸레      
487    미국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 메기 테일러 댓글:  조회:2458  추천:0  2018-03-07
  메기 테일러_A curious feeling_안료, 잉크젯 프린트_92×92cm_2006 미술의 역사는 흔히 '상상력'을 얻기 위한 인간의 노력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그만큼 상상력이란 신의 선물은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요. 학습하고 투쟁하고, 사물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을 정립하고, 표현하며, 그 과정에서 획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풍경화 혹은 풍경사진 하면 최근 무한증식되며 모든 이들이 들고 다니는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낸 아름다운 자연이나, 사물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습니다. 인상주의란 미술사조도 결국 사진의 등장과 더불어, 회화가 자신만의 언어를 습득하기 위한 노력의 산물이라고 봐야 합니다. 스튜디오에서 모델을 놓고 그림을 그렸던 이들이 자연과 외광 속으로 들어가 시간의 흐름에 따른 빛의 변화, 그 속에서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물과 인간과 자연을 그린 것이죠.     메기 테일러_But who has won_안료, 잉크젯 프린트_92×92cm_2007   사실 인상주의 그림이 예쁘다고만 하는 건 적절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햇살 아래 빛나는 파리의 풍경 뿐만 아니라, 어둡고 눅눅한, 파리의 밤도 그렸지요. 사회적 모순과 당시 부상하던 소비사회의 한 단면도 그렸습니다. 에서 저는 마네가 그린 에 나온 여자 바텐더의 의상을 분석했지요. 원나잇 스탠드를 위해 나와 있는 '젠체'하는 당시 남자들의 모습에 대해서 논평을 한 적이 있습니다. 도덕주의자 마네는 어둑시근한 시선으로 파리를 그렸다고요. 메기 테일러_Garden_안료, 잉크젯 프린트_92×92cm_2005   결국 인상주의는 빛의 과학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사회학적인 풍경화를 그릴수 있었습니다. 이제 이런 풍경장르는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바로 초현실의 세계를 그리거나 포착하는 작품들이 나오게 되는 것이죠. 오늘 소개하는 메기 테일러의 작품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녀는 꿈을 기억하고 이것을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합니다. 사실 제가 그녀의 작업을 좋아하는 건 작품을 볼때마다 를 연상하게 하는 초현실성이 무겁지 않게 우리를 편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기 때문이지요. 메기 테일러_I suppose you'll be telling me next that you never tasted an egg! _안료잉크젯 프린트_56×56cm_2006   사람들은 참 편하게 '초현실주의'란 단어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현실을 초월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지요. 하지만 왜 초월하려고 하는지, 작가는 왜 이런 의도를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생각하진 않는 것 같습니다. 툭하면 고등학교 미술 교과서에서 본 달리의 이 초현실주의 작품의 정수다....정도로 외우고 다니죠.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초현실주의란 개념을 일일이 누구는 이랬다, 어느 학교의 저명한 누구는 이렇게 설명했다는 식의 정의보다, 초현실이란 걸 만들고 싶었던 사람들은 그만큼 현실의 세계에 대한 따스한 시선을 가졌던 사람일거라고요. 지금 당장 보여지는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면, 혹은 속살에 배어있을 이상적인 면모들을 믿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러니 현실을 초극해서 우리가 가져야 할 이상적인 꿈과 면모를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고 싶었을테지요. 메기 테일러_It's getting late_안료, 잉크젯 프린트_92×92cm_2006   메기 테일러의 작품을 볼때마다 작품 속 세계 속에 빠져들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합니다. 경제 지수는 제로를 향해가고 촛불은 다시 점화되고, 세계 언론은 한국의 경제항로에 대해 부정적인 논평만 쏟아내고 있는 지금, 수장이란 자의 횡보는 그저 '로우키(얼굴 숨기기)' 정책을 통해 감추느라 정신이 없더군요. 747 정책이 주가지수로 현실화 될지도 모를 이 위기의 상황에서 이 땅의 수장과, 극우 보수세력들의 무능 그저 남의 탓, 전 정권 비판으로만 칼날을 피하는 정치인들을 보는 현실은 소롯합니다.   피하고 싶은 현실이지요. 너무나도 꿈 속으로 퇴행하고 싶을 정도로, 무거운 현실이 눈앞에, 사회속에서 펼쳐지고 있습니다.   메기 테일러_The patient gardener_안료, 잉크젯 프린트_105×105cm_2007   메기 테일러는 자신의 사진 작업을 위해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할 도구인 카메라 보다 평판 스캐너와 컴퓨터, 포토샵과 같은 이미지 프로그램을 사용합니다. 온라인 경매를 통해 사 모은 오브제나 이미지를 결합하고 지우고, 결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길게는 6개월이 넘는 시간에 걸쳐 하나의 작품을 만든다고 알려져 있죠.   상상력은 하나의 상징을 만들어 냅니다. 여러분......그거 알고 계세요? 상징(Symbol)이란 것도 결국은 쪼개어진 이미지의 한 부분이란 뜻을 갖는다는 걸 말이에요. 그만큼 상상력도 우리 주변, 익숙한 사물과 언어와 의미들을 새롭게 조합하고 조립하고 구성할때 생겨나는 것이랍니다.   제게 이 삭막하고 어두운 현실을 재조합하고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만큼 지금은 위기상황이고 우리는 그 속에서 정신적 공황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메기 테일러_These strange advedtures_안료, 잉크젯 프린트_92×92cm_2006   요즘 회사도 어렵고, 중소기업들은 너무 버겹습니다. 생의 굴레란 표현을 쓰고 싶을 정도로 말이죠. 패션분야는 거의 초죽음 상태입니다. 이럴땐 작품 속 꿈의 세계로 토끼랑 대화나 나눌까 봅니다. 피할수 없으면 즐기라지만 경제는 피한다고 해결되는 게 아니지요. 경영학을 공부한 제겐 이 현실이 막막합니다.   심리적 공황과 싸우고 경제의 근간을 뒤흔드는 공포심 우리안에 있는 두려움과 대면해야 할 시기입니다. 차은주의 목소리로 듣는 을 띄웁니다 최근에 알게 된 가수인데, 드럼을 스틱대신 맨손으로 연주해서 그 느낌이 색다르네요. 어쿠스틱 사운드가 디지털에 지친 여러분에게 노래 가사처럼 서로에게 '행복을 주는 사람'이 되자는 마음으로 준비했습니다. Smile in your eyes란 앨범에 수록된 곡이에요.   이 글을 읽으실 때쯤 저는 강릉에 가 있을 거 같네요. 오늘 하루 자연 속에서 마음의 예배를 드려야 할 듯 합니다. 두번째 책 탈고 때문에 머리도 식힐 겸, 생각거리들을 둘러매고, 바다를 보러가려고요. 다녀와서 글 올리겠습니다.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이상한 나라의 앨리스_ 앨리스라는 소녀가 꿈속에서 토끼굴에 떨어져 이상한 나라로 여행하면 겪는 갖가지 신비로운 모험을 그린 동화. 옥스퍼드 교수를 지낸 수학자 루이스 캐럴은 어린이를 어른에게 부속된 존재로 여기기 않고 독립된 존재로 보았다. 온갖 어려운 은유와 비유로 실제론 매우 어려운 작품이라고 하지만 독특한 유모어와 누구나 꿈꾸어 봤을 법한 상상의 세계와 유모넘치는 이야기는 전세계 어린이들에게 지금까지 읽혀지고 있다.  지난주 폭풍질주를 마친 화제의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소재로 주인공들의 사랑을 이어 준 책이기도 하다. 드라마 덕분에 판매량이 엄청 늘어나기도 한. 매기테일러(Maggie Taylor)의 작품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롯데에비뉴엘 지하2층~ 5층에 현재 전시되고 있다. 이 작품들은 컴퓨터와 스캐너,포토샵을 이용하여 이미지를 조합하고 지워가는 과정을 거쳐 완성된다. 그에게 있어 사진은 순간의 이미지가 아닌 기억의 재생 도구다. 매기테일러의 작품속엔 책속의 이미지들이 그의 특유한 방법과 구성으로 정적이면서도 짜임새 있게 들어가 있다. 가벼운 동화같은 이야기 속에 지은이 루이스캐럴의 수학적 논리와 계산, 나름의 법칙이 매기테일러의 사진 속에 완벽하게 녹아 있다.   꿈의 재구성,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메기 테일러 꿈을 기억하여 사진으로 표현하는, 꿈의 풍경화(Landscape of Dream) 꿈을 기억하여 사진으로 기록하는 작업을 하는 그의 작품은 접하는 순간부터 온갖 미스터리와 모순으로 가득한 몽환적인 분위기에 빠진다. 사진의 영역을 확장시킨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그녀는 20세기 미국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 포토몽타주의 대가 제리율스만의 제자 이자 동료이며 부인이기도 하다.   꿈과 현실 현실과 상상의 모호한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들 어딘가 회중시계를 보며 바삐 뛰어다니는 토끼를 만나게 될 것만 같다. 자- 이제 모험을 떠나 볼 시간~             =============================== 메기 테일러는 사진가 제리 율스만이 지난 1965년 주창한 ‘Post Visualization(후 시각화)’ 이론을 따라 작업하는 작가이다.  율스만의 ‘후(後) 시각화’ 이론은 자신의 작업을 예측할 수 없는 가운데, 암실 작업에서 얻게 되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깨닫게 되고, 확정된 결정을 시도하는’ 작업기법을 가리킨다.   율스만 이후 이같은 표현양식을 추종하는 아티스트들이 많이 생겨났다. 그의 제자였고, 이제는 아내가 된 메기 테일러도 같은 맥락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작업방식은 같으면서도, 다르다.   제리 율스만이 여전히 아날로그적인 프로세스를 고집하는데 비해, 아내 메기 테일러는 디지털 프로세스를 사용해 작업한다.   사진설명=Maggie Taylor의 사진작품. [사진제공=트렁크갤러리]   메기의 이미지들은 또한 ‘여성적 판타지’와 ‘동화적 내러티브’로 서양문화가 형성해놓은 많은 내러티브 구조에서 이미지를 차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시대를 초월하며 온갖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다루면서, 후 시각화(Post Visualization) 이론을 거침없이 구현하고 있는 것.  박영숙 트렁크갤러리 대표는 “메기가 욕망하는 이미지 세계는 과거와 미래가 같이 할 수 있는 세계, 그 누구도 발을 딛지 않은 처녀지, 그녀가 그리워하고, 그녀가 소망하는 미래향, 그녀의 고향인 것만 같다. 그녀가 좋아하는 사물들, 그녀가 사랑하는 동식물들, 그녀가 꿈에 그리는 낙원의 모습들이며 그녀만의 이미지 세계라 생각된다. 결코 소녀의 꿈에서 깨어나지 않으려 하는, 아직까지도 자라나지 않은 엘리스같아 어쩌면 메기 테일러가 엘리스가 아닐까 싶다”고 밝혔다.   이어 “후 시각화 이론은 오늘 우리 시대의 욕망실현의 공장인, ‘21세기 꿈 공장’의 시스템 구축을 가능케 한 이론이라 생각한다”고 밝혔다. 
486    [그것이 알고싶다] - 淸明上河圖 감상하기 2 ... 댓글:  조회:2542  추천:0  2018-03-06
중국 회화계 국보 1호?...   어느날 두가가 세로에 비해 가로의 길이가 무척이나 긴 동양화 그림을 한 점 만났다. 그림을 이곳에 올려 한눈에는 도저히 보여 드릴 수 없는 가로 길이가 엄청나게 긴 그림이었다. 그리고 그 그림의 소재를 파악 하던 중 그것이 바로 중국의 국보인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란걸 알았고, 중국에는 우리와 달리 국보에 순위가 없는데도 이 청명상하도를 중국의 국보 1호라고 칭하는 곳이 많았다. 이는 그만큼 이 그림이 대단하다는 뜻이리라... 일단 그림을 먼저 한번 훑어 보시고 다시 설명을 잇고자 한다. 흔히 동양화를 논할때 양대산맥이 있는데 당나라 왕유가 원조인 남종화(南宗畵)에서는  원나라 황공망(黃公望)이 그린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를 최고로 치고,  풍속화의 경우에는 위에 이야기 한 청명상하도(淸明上河圖)를 으뜸으로 친다고 한다. 청명상하도는 지금부터 천년 전, 중국 북송(北宋, 960-1126)시대 때 풍속화가 장택단(張擇端)의 대표작이다. 이 그림의 풍경은 청명절(4월 5일경) 전후 그 당시 북송의 수도인 변경(汴京, 지금의 河南星 開封)을 흐르는 강가 주변의 시끌벅적한 풍경을 아주 상세하게 그린 그림이다. 이 그림에는 각양 각색의 인물이 700여명 등장하고, 100여채의 집, 34개의 점포, 48개의 마차, 배, 가마 등과, 84 마리의 가축, 기타 동물은 60여 마리, 190그루의 나무, 교량은 20여개고, 선박도 20여척,100여자(字)의 낙관(落款)글자와 6개의 도장 등으로 가득 차 있는 중국 고대의 최대 규모의 풍속 그림이다. 특히, 각 인물 및 건물 내의 세심한 부분까지 정교하게 표현돼 있는데, 이 많은 사람과 동물 중 같은 표정의 그림은 없다고 한다. 원작의 크기는 세로(폭) 25.5cm 가로(길이) 525.7cm로 얇은 비단에 그려서 현재 베이징(北京)의 고궁박물관에서 가장 엄격하게 관리 보관되어 지고 있다.   이 그림은 그 사연도 많아 최초에 장택단이 그려 송나라 왕 송휘종에게 올리고, 송휘종은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해서 친필로 그림에 청명상하도라고 쓰고 쌍용(雙龍)도장을 찍었다. 송휘종은 멋지게 그려진 그림에 무척 기뻐하며, 이때부터 청명상하도는 송휘종 조길에 의하여 황궁내부에 수장된다. 북송이 멸망한 후 송휘종 조길과 아들 송흠종 조환은 금나라에 포로가 되어 북방으로 끌려갈 때, 북송 궁중에 보관돼 있던 청명상하도와 6000여건의 예술품도 金에 노략된다. 송휘종 조길의 11째 아들인 宋高宗 趙構는 항주에서 황제에 오른다. 장택단은 송고종 조구에게 국가의 원한을 잊지 않도록 하고 금나라에 항거하게 하기 위하여, 문을 걸어 닫고 다시 한 번 청명상하도를 그려 송고종 조구에게 바친다. 그러나 송고종 조구는 부친인 송휘종 조길과 달랐다. 그는 그림에 흥미가 근본적으로 없었으므로, 그림을 돌려보낸다. 장택단은 그림을 길게 펼치고, 마음을 진정시킬 수 없었다. 그는 홧김에 그가 그린 청명상하도를 불살라버린다. 다행히 집안 사람들이 그 중의 절반을 구해낸다. 이후 명나라에 들어서 청명상하도는 陸完의 수중에 들어간다. 육완이 죽은 후에는 그의 부인이 그림을 베개에 넣고 꿰매어 버리고, 자신의 목숨처럼 아꼈으며 친아들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陸부인의  조카 중에 王씨 성의 인물이 있었는데, 그는 그림을 잘 그렸고 유명한 인물들의 서화를 좋아했다. 육부인이 집안에 청명상하도를 수장하고 있는 것을 알고는 여러 번 부탁해서, 육부인이 결국은 보여주게 된다. 다만, 다른 사람에게 절대 말을 못하게 하였다. 왕은 10 여번 본 후에 그림을 모방하여 한 폭 그리게 된다. 명나라 때의 간신으로 유명한 嚴嵩은 이때 사방으로 청명상하도를 손에 넣기 위해 찾았는데, 마침 왕도어사라는 사람이 800냥을 들여 왕모로부터 모방한 청명상하도를 입수하고, 엄숭에게 바친다. 엄숭이 그림을 표구하도록 맡기자, 표구하는 사람은 모방품이라는 것을 눈치 채고 왕도어사에게 사실을 말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요구하다 거절당한다. 표구상은 일부러 가짜임을 드러내도록 표구하여, 엄숭이 손님들 앞에서 그림을 보여주다 망신을 당한다. 이후 엄숭은 왕도어사를 모함하여 죽여 버린다. 왕모도 연루되어 감옥에서 굶어죽는다. 이 이야기는 널리 퍼져, 이후 일봉설전기라는 극본으로 정리된다. 그러나 사실은 육완이 죽은 후, 육완의 아들이 돈이 필요해 그림을 팔아버리는데, 곤산의 顧鼎臣이 이를 매입한다. 이후 엄숭과 그 아들 嚴世蕃에게 빼앗긴다. 엄숭 부자가 탄핵을 받아 가산이 몰수되면서 청명상하도는 명황실로 들어간다. 淸1644-1911)나라에서도 청명상하도는 몇 번의 곡절을 겪는다. 우선 수장하게 되는 사람은 陸費犀이다. 그는 안휘 상향 사람이며, 乾隆帝때 진사를 지낸 사람이며, 청명상하도에 발을 쓰고 도장을 찍어둔다. 오래지 않아 그림은 畢沅의 손에 들어간다. 필원은 강소 태창 사람으로 역시 건륭제 때의 進士이다. 필원은 금석과 서화를 좋아하여 많은 서화를 소장한다. 그는 청명상하도를 매입한 후, 동생인 畢龍과 함께 낙관을 찍어둔다. 필원이 사망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청의 황실은 필원이 호광총독을 지낼 때 직무유기와 군비남용을 하였음을 들어 가산을 몰수한다. 이 때, 그림은 淸 황실로 들어간다. 청황실에서는 청명상하도를 자금성의 영춘각에 걸어두며 이후 1860년의 영국 프랑스 연합군의 침입과 1900년의 팔국연합군의 칩입 때도 빼앗기지 않고 살아 남는다. 1911년 선통제 부의의 퇴위 이후, 그림은 부의가 동생 부걸에게 상으로 내리고, 그림은 천진조계의 장원(張園)에 걸어둔다. 1932년 만주국을 세우면서 그림은 다시 장춘으로 가져가 동원 도서루에 걸어둔다. 1945년 8월 부의가 장춘에서 도망치면서 만주국황실의 많은 서화와 보물들이 민간에 흩어지게 된다. 1946년 중국인민해방군이 장춘을 점령한 후, 해방군 간부인 장커웨이(張克威)는 지방간부들을 통하여 만주국황실에서 흘러나온 유물 수십 점을 수집하는데, 거기에 청명상하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1947년에  장커웨이가 동북행정위원회로 전근 가면서 청명상하도를 비롯한 서화들을 당시 동북지방의 주요한 지도자 중의 한 명인 린펑(林楓)에게 넘겨준다. 린펑은 청명상하도를 동북박물관에 넣었으나 그림은 다시 북경의 고궁박물관으로 보내진다. 오랜동안의 방랑을 거쳐 청명상하도는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온 것이다. 그림은 크게 초,중,후반 등으로 나눠 살펴볼 수 있는데 초반부는 개봉시 교외의 풍경이고 중간부는 무지개다리(虹橋)라고 불리우는 다리를 중심으로 백성들의 삶의 현장들이 보여지고 있으며 후반부에서는 점포들이 늘어서 있는 성(城)의 다운타운을 나타냈다. 아래 그림은 현재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원본을 6조각으로 나눈 것이다.                           이제 궁금증이 하나 생긴다. 그럼 위에서 컴퓨터 화면으로 본 청명상하도(그림 한번 더 보기)는 무엇인가? 그렇다.. 컴퓨터 화면으로 만난 청명상하도는 장택단이 최초에 그린, 지금 북경의 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는 청명상하도의 원본 그림에 컴퓨터로 채색을 하여 1000년 전의 그림 그대로 최초의 화려하고 아름다운 그림 그것으로 만든 것이다.  그렇게 1000년을 거슬러 올라가서 만난 청명상하도를 폭의 방향으로 16조각을 내어 보았다.                                                                  중국의 8대 고도의 한곳인 하남성 개봉에는 청명상하도를 본떠 만든 청명상하원이라는 테마공원이 있는데 멋지고 아름답게 만들었지만  아무래도 상업적인 냄새가 나는건 어쩔수 없다.            글: 장계합(張繼合)   장택단(張擇端)의 걸작 는 북송시대 시정리속(市井俚俗)의 활화석이라 할 만하다. 현재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으며, 1급국보이다.   비록, 송휘종(宋徽宗) 조길(趙佶)이 황제로서는 별로였지만, 예술상으로는 극히 탁뤌한 서화가였다. 그의 창도로 한림원에는 "도화원(圖畵院)"이 설립된다. 그리하여, 산동 제성 사람인 장택단은 황실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고, 자신의 회화재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원래, 소위 "원체화(院體畵)"는 모두 풍화설월, 성색견마의 귀족 및 사대부 생활을 묘사한다. 유럽 르네상스시기이전의 부화(浮華) 상태와 꼭 닮았다. 장택단은 바로 새로운 길을 열었다. 그는 심혈을 쏟아서 새로운 길을 개척하여 마침내 를 완성한다. 이 작품의 첫번째 감상자이자 수장가는 당연히 조길이다. 황제는 너무나 기뻐서 그 특유의 "수금체(瘦金體)"로 "청명상하도"라는 글자를 썼고, 쌍룡소인장을 날인한다.   송휘종,송흠종시기에 변량성은 이미 국제적 대도시의 모습을 갖추었다. 호구는 백만에 이르고, 상점이 줄지어 늘어섰으며, 도처에 구란(勾欄)등 오락장소가 있었다. 심지어 번화한 야시장까지 등장했다. 에서는 북송 도성의 수륙교통 및 일상생활을 재현했다.   제등겸(齊藤謙)이 쓴 의 통계에 따르면, 에는 각양각색의 인물 1,643명, 동물 208마리가 그려져 있다. 이는 삼국연의(1191명), 홍루몽(975명), 수호전(787명)에 나오는 인물들의 수보다 많다.   전체 그림은 3개의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전개하는 순서에 따라서 보면, 첫째는 변경 교외의 경치이다. 이어서 크 다리와 변하의 양안에 펼쳐진 번화한 모습이 나온다. 뒤에는 변량시의 길거리모습이다. 인물의 크기는 커도 3밀리미터가 되지 않는다. 작으면 콩알만하다. 비록 인물의 형체는 미소하지만, 개개인은 세세하게 그려져 있고, 아주 정취가 있다. 이런 수법은 모방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알려진 바에 따르면, 장대천(張大千)은 모조품을 만드는데 대가였는데, 그는 고의로 헛점을 하나씩 넘겼다고 한다. 이를 통해서 잘못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중 한 장에는 작은 새에 헛점을 남겼다. 비록 아주 은밀하지만, 눈이 밝은 사람을 속일 수는 없다. 작은 새의 몸은 기왓장 두 개보다 크다. 확실히 진실한 상황과 배치된다. 비율이 조화를 잃은 것이다. 이것은 장대천의 심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모든 명화는 남에게 말할 수없는 비밀을 숨기고 있다. 삼라만상을 다 포함한 것같은 에는 시정에서 자주 볼 수 있는 두 가지 동물이 빠졌다. 그것은 말(馬)과 양(羊)이다. 말은 왕왕 당나귀나 황소로 대체된다. 이것은 왜 그랬을까? 원래 말과 양은 북송의 '군사기밀'이었다.   북송은 전형적인 민부국궁(民富國窮)의 국가였다.특히 개국황제 조광윤은 개국하자마자,중문경무의 기본국책을 확정한다. 북방에서 호시탐탐 노리는 유목민족은 "삼추계자, 십리하화(三秋桂子,十里荷花)"의 중원에 일찍부터 군침을 흘려왔다. 그래서, 송나라조정은 부득이 전쟁물자를 통제해야 했다. 말과 양은 그 리스트에 들어있는 것이다. 말은 반드시 있어야 하는 교통공구이다. 양가죽은 영장, 군복을 만드는 제료이다.    황인우는 에서 이렇게 썼다: "에서 명확히 얘기한다: 송나라와 호시(互市)를 열 때 말과 양은 절대로 국외로 나갈 수 없다고. 같은 책에서는 요와 금의 결전시 전마의 공급처를 잃지 않은 것이 아주 의미가 컸다고 적는다.이것은 마필의 남하를 제한하는 금령이다. 이것은 장택단의 에서도 엿볼 수 있다. 화폭에, 개봉의 큰 수레는 모두 황소, 물소가 끝다. 이를 보면 마필이 부족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필은 원래 중원에서도 번식가능하다. 그러나 현지 농업경제의 제한으로, 비용이 많이 들어 유지하기 어렵다. 그리고 정밀한 경작지구에서 자란 마필은 비교적 마르고 약하다.   생각지도 못하게, 장택단의 현실주의 화풍은 천년이후, 북송왕조의 군사기밀 하나를 누설하였다.    
485    [쉼터] - 중국 회화 력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1급 국보 댓글:  조회:2731  추천:0  2018-03-05
북송(北宋). 장택단(張擇端)       북송(北宋) 시대 장택단(張擇端)의 사진출처: 베이징 고궁 박물관 소장품 [인민망 한국어판 7월 17일] 베이징 고궁 박물관 소장품이다. 견본(絹本), 채색, 폭 24.8cm, 길이 528.7cm로 극히 보기 힘든 북송 화가 장택단(張擇端)의 진귀한 작품이다.   는 중국 회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1급 국보이기도 하다.   는 정교한 궁비(工筆, 세밀화 화법)로 북송(北宋) 말엽, 휘종(徽宗) 시대 수도 변경(汴京, 허난 성의 도시 카이펑의 옛 이름)교외와 성 안 벤허(汴河) 양안의 건축과 민생을 기록했다. 북송 수도 벤량(汴梁) 및 벤허 양안의 청명절의 번화한 풍경과 자연 풍광을 묘사한 이 그림은 변경(汴京)의 번영을 입증해 주는 그림이자 북송 도시 경제 상황을 사실처럼 잘 설명해 주고 있는 그림이다. 긴 두루마리 형식의 이 작품은 원근법(散點透視)을 채택해 번잡한 정경을 표현했다. 입은 옷도 모두 다르고 표정도 각양각색인 그림 속 인물 500여명은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다. 그림은 드라마틱한 부분에 중점을 두었고 적당한 구도의 밀도로 인해 정취가 있으며 리드미컬하게 운율의 변화에 치중한 필묵 장법(筆墨章法)이 절묘하다. 그림 전체는 3개 단락으로 나뉘어 있다.   도입부: 변경 교외의 풍경 옅은 안개가 끼어 있고 초가집, 차오챠오(草橋, 다리), 흐르는 물, 고목, 조각배가 희미하게 보인다. 지게꾼 두 명이 짐 실은 나귀 다섯 마리를 몰고 도시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길에 있는 가마에는 한 여인이 타고 있다. 가마 지붕은 버드나무와 꽃으로 장식되어 있고 가마 뒤로 말 탄 사람, 짐을 진 사람들이 교외에서 답청 성묘를 하고 돌아오고 있다. 청명절이라는 특정한 시기와 풍속을 선택해 전체 그림의 서막을 열었다.   중간 부분: 바쁜 벤허(汴河) 부두 벤허(汴河)는 북송(北宋) 운송의 중추이자 상업교통의 요충지였다. 그림에 많은 사람들과 운집해 있는 배가 보인다. 사람들은 다관에서 휴식을 취하거나 관상을 보거나 식당에서 음식을 먹고 있다. 강의 배들이 오가는 모습, 선착장에서 일하는 인부들 모습, 사공이 노를 젓는 모습, 만선해서 거슬러 올라가는 배, 해안에 정박해 있는 배에서 짐을 하역하고 있는 모습 등이 보인다. 이 곳은 명성이 자자한 훙챠오(虹橋) 부두로 오가는 사람들과 배가 많아 늘 시끌벅적하다.   높다란 성루를 중심으로 양 쪽에 집들이 즐비하고 찻집, 술집, 발 안마소, 푸줏간, 사당, 궁세(公廨, 옛날 관원이 사무를 보던 장소) 등이 보인다. 능라주단(綾羅綢緞), 보석과 향료, 향불과 즈마(紙馬, 제사 때 태우는 종이로 만든 말)를 전문으로 파는 상점, 진료소, 대형 짐차 수리소, 관상 보는 곳, 면도해 주는 곳 등 각양각색의 상점이 늘어서 있다. 교통수단으로는 가마, 낙타, 우마차, 인력거, 태평거(太平車), 평두거(平頭車)가 다양하게 묘사되어 있다.   총 5미터남짓한 길이의 그림 속에 총 550여 명의 인물, 소, 말, 노새, 당나귀 등 5,60여 필, 수레, 가마 20여 대, 크고 작은 배 20여 척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은 집, 교량, 성루 등 송대 건축의 특징을 잘 묘사하고 있다. (번역: 김명희) 명(明)나라 구영(仇英)의 모본(摹本) 사진출처: 타이완 국립고궁박물원 소장품  
484    [그것이 알고싶다] - 淸明上河圖 감상하기... 댓글:  조회:2632  추천:0  2018-03-05
▲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에 한 주택단지 외벽에 그려진 청명상하도(清明上河图) ⓒ 봉황망(凤凰网) ▲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에 한 주택단지 외벽에 그려진 청명상하도(清明上河图) ⓒ 봉황망(凤凰网) 지난달 30일(2017년 11월), 중국 봉황망(凤凰网)은 쓰촨성(四川省) 청두시(成都市)에 한 주택단지 외벽에 그려진 청명상하도의 모습을 공개했다.  청명상하도가 벽화로 완성되자 길을 걷던 청두 시민들이 관심을 갖고 사진촬영을 하는 모습이 담겨있다.        ============================ [홍익 통일 역사=플러스코리타임즈 소산] 조선을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일제와 식민반도사관자들과 위정자들은 조선이 명·청의 연호를 빌어다 썼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명·청의 연호가 곧 대조선 연호이다. 왜냐하면, 조선이 속국이었다면 황제의 시호인 ‘조(祖, 국내외적 외치에 탁월한 황제)’와 ‘종(宗. 국내외적 덕치를 이룬 황제)’을 쓰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 조선은 1대 태조부터 27대 순종까지 황제의 시호를 썼다는 사실이다.   ▲ 청명상하도. 낙관(落款),인장(印章),인영(印影) 아래에 ‘乾隆元年 十二月十五日'로 건륭제 영조가 황제로 취임한 다음해인 1725년에 제작되었다는 걸 알 수 있다.     © 소산   그림은 대조선사 회원 송계선생이 대만(타이페이)고궁박물관에 보관중인 것을 발췌한 것이다. ‘청명상하도’란 제목으로 그려졌는데, 그림의 폭이 엄청나다. 그런데 그림의 제작일자를 보면 낙관(落款),인장(印章),인영(印影) 아래에 ‘乾隆元年 十二月十五日’이라고 나와 있다.   ▲ 청명상하도. 12월인데 따뜻한 지역을 나타내 주고이다.     © 소산   여기서 건륭은 누구인가? 바로 조선의 영조의 연호가 건륭제(乾隆帝)이다. 영조가 1724년 즉위 했으니 연호는 1년 후부터 사용하게 되는데, 경종(옹정제)이 1720~1724년까지 재위하고 퇴위 했으니, 즉위한 황제는 그해는 선대의 연호를 썼고, 다음 해부터 독자적인 연호를 쓴다. 다만, 반정 등으로 인해 강제 퇴위시키면, 즉시 독자연호를 썼다. (연산군-중종, 광해군-인조) 그럼으로 건륭원년은 1725년이다. 즉, 1725년 12월 15일에 청명상하도를 완성했다는 뜻이다.   ▲ 대륙 양자강 이남지역임을 알 수 있다     © 소산   그림을 보면, 강줄기에는 조선의 대표적인 선박인 판옥선이 운행한다. 또한 사람들을 보면 흰옷과 비단옷을 입고 상투와 갓을 쓴 사람이 많고, 영락없는 조선인의 모습과 복식이다. 또 김홍도의 그림에도 조선인들의 집에 집 채 만 한 조경석이 그려진 그림이 등장하는데, 이 그림에서도 조경석의 크기가 가히 압도적이라 할 만큼 어마어마하다.       이 그림이 청나라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있다면, 청나라가 당시 어디에 위치해 있었는지 밝혀야 한다. 청은 북방호족이다. 대조선에서의 북인이다. 조선말 북인이 정권을 잡았고 북양군대를 창설한 원세개(袁世凱. 위안스카이)가 북양대신으로서 대표적이다. 바보천치가 아니라면 저 그림은 12월에 그렸는데, 대조선국의 양자강 이남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는 청명상하도 영상과 나머지 그림이다. (淸明上河圖/https://youtu.be/UdRIbCP4N4Q?t=707)         ▲   조선의 상징 패루와 건축양식이 또렸하다  © 소산     ▲  초가집이 보이지 않는 걸로 보아 사대부들이 밀집해 사는 지역임을 알 수 있다   © 소산           ▲ 대부분이 조선인의 모습과 복식이며 낙타도 보인다   ©  소산     ▲ 마차와 일상 생활상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 소산     ▲  우마차와 거리   © 소산     ▲   패루와 관공서 담벽이 선명하다  © 소산     ▲ 상업배 판옥선과 관청의 성곽 성루,성문을 드나드는 사람들  © 소산     ▲   강가를 나타내주고 있다  © 소산                 ▲ 판옥선이 짐과 사람을 싣고 떠나는 풍경    © 소산     ▲ 집안에 경사가 생겨 잔치를 벌이고 있다    © 소산     ▲  혼일풍습도. 신부를 태운 가마가 보인다   © 소산           송대 장택단이 그린 청명상하도.. ㅡ중국 국보 1호   아래 3점이 바로 질문하신 청원본청명상하도(淸院本淸明上河圖)부분도입니다 작품크기가 무려 35.6x1152.8cm이며.. 청(淸) 건륭원년(1736)에 청 궁정의 다섯화가인 김곤,손호,진매,대홍,정지도 등 이 함께 제작한 것으로 송대 청명상하도 및 그 이후 방품들을 두루 모아 분석 한 후 명대와 청대 풍속까지 더 포함시켜서 완성한 대만 국립고궁박물관 소장 품..대표작 중 한점이기도하답니다                  
483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재두루미야, 맘껏 날아라... 댓글:  조회:1774  추천:0  2018-03-05
재두루미의 아름다운 비행 2018.03.0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재두루미의 아름다운 비행을 담아보았습니다. V자 비행, 1자 비행 등 다양한 편대를 이루며 날아가는 재두루미 속에서 한 쌍이 하트(♡)를 이룬 모습이 눈에 띕니다. ///사진가 뷰파인더
482    [쉼터] - 우주를 나는 사람들... 댓글:  조회:1823  추천:0  2018-03-04
중국 우주비행사들의 작품, 우주에서 찍은 셀카 공개 [ 2018년 03월 02일 ]     [최고의 셀카] 2003년 10월 15일 9시, 우주비행사 양리웨이(楊利偉)가 탑승한 선저우(神舟) 5호 비행선이 우주로 진입했다. 중국은 세계에서 3번째로 인류를 우주로 보낸 국가가 되었다. 양리웨이는 우주비행 당일 저녁 셀카를 촬영하며 중국 우주비행사 최초의 ‘우주 셀카’ 사진을 남겼다. (촬영/양리웨이) 우주에서 톈산(天山, 천산)산을 바라보면 어떤 모습일까? 중국인이 우주에서 최초로 촬영한 사진은 무엇일까? 위 세트에는 중국인이 우주에서 최초로 촬영한 셀카 사진과 중국 우주비행사들이 지구를 내려다보는 시각으로 찍은 다수의 대작, 우주비행사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생활을 담고 있는 사진이 담겨 있다. 이 사진들은 우주비행사들의 독특한 시각을 통해 중국 우주비행의 기술발전에 대한 기록을 담아내고 있다. 또한 중국 국민들은 하늘을 날고 싶은 꿈과 끊임없이 연구하는 정신을 실현하기 위해 중국 우주사업과 우주정신을 찬양하며 희망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다. 중국 우주비행사들이 촬영한 사진을 통해 우주 공간의 신비함을 느껴보도록 하자. 인민망 [지구, 잘자요] 여성 우주비행사 류양(劉洋)이 톈궁(天宮) 1호 선실에 있는 슬리핑백으로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다. 우주비행사들은 누워서 자지 않고 우주선 벽에 붙어있는 ‘주머니’ 형태의 침낭에 서서 잠을 청한다. 이는 잠을 자면서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징하이펑(景海鵬), 류왕(劉旺), 류양] [삼인행(三人行)] 선저우(神舟) 9호와 톈궁(天宮) 1호의 비행 임무를 맡은 3명의 우주비행사들이 톈궁 1호 선실에서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사진 제공: 징하이펑(景海鵬), 류왕(劉旺), 류양(劉洋)] [우주에서의 다이어트] 류양(劉洋)이 톈궁(天宮) 1호 선실에서 ‘우주 체중계’로 체중을 쟀다. 우주비행을 하는 우주비행사들은 근육이 쇠퇴하는 등의 이유로 체중이 일반적으로 모두 감소한다. [사진 제공: 징하이펑(景海鵬), 류왕(劉旺), 류양] [우주 황페이훙(黃飛鴻, 황비홍)] 류왕(劉旺)이 톈궁(天宮) 1호 선실에서 ‘중국 무술’을 선보이고 있다. 이는 우주비행사들이 신체단련을 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한다. [사진 제공: 징하이펑(景海鵬), 류왕, 류양(劉洋)] [나는 한 마리의 물고기] 선저우(神舟) 9호 비행 임무 중 징하이펑(景海鵬)이 톈궁(天宮) 1호 선실을 한 마리의 물고기처럼 배회하고 있다. [우주 선생님] 선저우(神舟) 10호 비행 임무 중 우주비행사 왕야핑(王亞平)이 톈궁(天宮) 1호 선실에서 중국 최초의 ‘우주 수업’을 진행하고 있다. 사진은 물의 표면장력 작용에 의해 물방울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촬영한 것이다. [사진 제공: 녜하이성(聶海勝), 장샤오광(張曉光), 왕야핑] [하늘을 나는 말] 우주비행사 천둥(陳冬)이 비교적 넓은 톈궁(天宮) 2호 선실에서 신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고 있다. 선저우(神舟) 11호 비행 임무를 수행하는 징하이펑(景海鵬)과 천둥은 모두 말띠로 사람들에게 ‘하늘을 나는 말’라고 불렸다. [촬영: 징하이펑] 사랑해요, 중국] 징하이펑(景海鵬)이 톈궁(天宮) 2호 선실에서 오성홍기를 선보이고 있다. [촬영: 천둥(陳冬)] [지구와 달] 2003년 10월 양리웨이(楊利偉)는 선저우(神舟) 5호 유인우주선을 타고 지구로 돌아오는 길에 100장 정도의 사진을 촬영했다. (촬영: 양리웨이) [우주의 날개] 선저우(神舟) 5호 우주선 선실에서 태양광 날개와 지구를 함께 촬영한 사진이다. [촬영: 양리웨이(楊利偉)] [멀리 보이는 우리 집] 페이쥔룽(費俊龍)이 선저우(神舟) 6호 우주선 선실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촬영한 바단지린(巴丹吉林)사막의 모습이다. 바단지린사막은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고) 지역에 위치하고 있으며 선저우 6호는 네이멍구에서 우주로 발사됐다. (촬영: 페이쥔룽) [중국 북부 지역에 핀 진주] 선저우(神舟) 9호 우주선 비행 임무를 수행하던 우주비행사들이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내몽고) 지역을 촬영했다. 사진 속 호수는 바옌나오얼(巴彥淖爾)시에 위치한 담수호인 우량쑤하이(烏梁素海)호이다. 우량쑤하이호는 황량한 사막 지역에 위치한 보기 드문 초원호수이자 같은 위도상에서 가장 큰 습지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징하이펑(景海鵬), 류왕(劉旺), 류양(劉洋)] [하늘 궁전에서 바라본 고향] [촬영: 징하이펑(景海鵬), 천둥(陳冬)]
481    [그것이 알고싶다] - 그림은 복합적인 이미지로 그려야... 댓글:  조회:1994  추천:0  2018-02-25
[표지로 읽는 과학] 최초의 네안데르탈인 벽화 발견,                     그리고 그 이후... 윤신영 기자 2018.02.25.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표지로 읽는 과학 - 사이언스 사진 제공 사이언스 이번주 ‘사이언스’ 표지는 염료를 사용해 그린 가장 오래된 동굴 벽화가 차지했다. 스페인의 남부와 서부 동굴 세 곳에서 발견된 벽화를 연대 측정한 결과로, 이곳에는 달 월(月)자 모양의 문양과 김환기 화백의 그림이 언듯 떠오르는 반복된 점 무늬, 동물 형상 등이 그려져 있었다. 표지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다른 동굴에는 손바닥 스텐실(손바닥을 대고 주위에 염료를 뿌려 손 모양을 남긴 그림)도 남아 있다. 연구팀은 이들 그림 60여 곳의 연대를 새로 측정해 일부 그림이 최소한 6만 4000년 전에 그려졌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유럽에 현생인류가 도달한 것은 빨라야 4만 년 전으로 추정되기에, 이번에 연구된 6만여 년 전 그림을 그린 주인공은 당시 아직 유럽에 남아 있던 네안데르탈인일 가능성이 대단히 높다고 영국 및 독일 공동연구팀은 주장했다. 실제로 기존 고고학 연구 결과를 보면, 네안데르탈인이 지구에서 자취를 감추기 전 마지막까지 생존했던 지역은 스페인 서쪽 끝 지브롤터의 동굴이었다. 네안데르탈인은 이곳에서 약 2만 8000~4만 년 전 마지막 흔적을 남긴 뒤 지구에서 자취를 감췄다. 연구 결과는 현생인류와 네안데르탈인은 인지 능력이 다르며, 특히 예술은 현생인류의 독보적인 성취라고 선을 그어온 고고학계의 기존 주장을 뒤엎어 화제가 됐다. 연구팀은 “네안데르탈인에게도 상징 능력이 있었다는 사실이 증명됐다”며 “그들 역시 현생인류다”고 주장했다. 자세한 기사 ☞ 네안데르탈인은... 예술가였다...6만 4000년 동굴벽화 주인공으로 밝혀져 스페인 동굴에서 발견된 손바닥 스텐실. 세 개의 스텐실 가운데 하나는 적어도 6만 6000년 전 작품으로 밝혀졌다. 사진 제공 사이언스 ●네안데르탈인은 정말 예술가였나… 격해지는 논쟁   그런데 발표된지 며칠 지나지 않은 이 연구 결과를 둘러싸고 후속 논쟁이 뜨겁다. 먼저 외신들은 연구팀의 주장대로 이 그림들이 네안데르탈인의 작품일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뉴욕타임스의 과학기자 칼 침머는 “네안데르탈인이 그저 친척 인류(현생인류)를 흉내 내기만 했다는 기존 생각에 일격을 가했다”고 평했다. BBC와 워싱턴포스트 등도 비슷하다. 주요 고인류학 전문가들도 대체로 결과를 받아들이며 후속 연구를 준비하는 분위기다. 크리스 스트링어 영국 런던자연사박물관 교수는 개인 논평을 발표해 “6만4000년이라는 연대는 (이 작품이 현생인류의 것일지 모른다는) 의심의 여지를 없애준다”며 “(오히려) 네안데르탈인이 4만 5000년 전 현생인류를 만나 자신들의 벽화와 치장 예술을 가르쳤을 가능성까지 제기될 수 있다”고 말했다. 스트링어 교수는 “하지만 인도네시아와 호주에서도 3만 5000~4만 년 전 그림을 그린 것으로 보아, 아프리카를 떠난 6만 년 전 현생인류에서 시작된 행동일 가능성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번에 6만 4000년 전으로 연대측정된 달 월(月)자 형상의 왼쪽 선. 일부 학자들은 이 그림 중 오직 선 하나만 네안데르탈인 시대로 측정돼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반면 몇 가지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는 신중파도 있다. 배기동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해당 연대의) 네안데르탈인의 인골이 발견되지 않아 아직 직접적인 증거는 아니다”라며 “현생인류가 아프리카를 떠난 시점이 최근 앞당겨지고 있는 추세이므로 현생인류가 6만 4000년 전 이미 유럽에 존재했을 가능성 역시 완전히 무시할 수는 없다”고 말했다. 배 교수는 “다만 예술이 4만~5만 년 전에 갑자기 탄생했는지 혹은 이전부터 서서히 탄생했는지 논쟁이 있었는데, 후자를 지지하는 증거로는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네안데르탈인이 만든 작품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들이 정말 상징을 해석하거나 고도의 예술 능력이 있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한는 주장도 있다. 리베커 사이크스 프랑스 보르도대 연구원은 트위터에 공개한 논평에서 “(사이언스 표지에 공개된) 라 파시가 벽화는 전체가 아니라 (月자) 그림의 맨 왼쪽 선만 6만4000년 전 이상으로 연대측정됐고 나머지는 1만3000년 전 이상으로 나왔다”며 “’선 하나를 그릴 수 있는 능력’과 ‘복합적인 이미지를 그릴 수 있는 능력’ 사이에는 인지적으로 차이가 크다”고 밝혔다. 사이크 연구원은 “벽화 전체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형우 전북대 고고문화인류학과 교수는 “고고학 이론에는 문화가 갑자기 등장하지 않고 서서히 등장했다고 보는 진화론적 이론이 있다"며 "이 이론에서는 후기구석기의 혁명성이라고 흔히 이야기하는 장거리 이동이나 우수한 사냥, 예술 등이 (네안데르탈인이 살던 시대인) 중기구석기에 이미 등장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다만 네안데르탈인과 현생인류 사이에는 ‘인지적 유동성’이라는 능력에 차이가 있다는 이론이 있다”며 “인지적 유동성의 핵심은 기존 소재나 규칙 등을 가지고 새롭게 조합하는 능력인 창조성인데, 이것을 네안데르탈인이 지니고 있는지는 더 두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윤신영 기자 
480    이색적인 그림화가와 이색적인 가수화가 댓글:  조회:2111  추천:0  2018-02-25
화투 그림과 도박 공화국 조영남 ‘극동에서 전해져 온 꽃다발’과 보르헤스 ‘바빌로니아의 복권’ 폰트확대| 목차 조영남과 화투 그림 도박 공화국, 대한민국 보르헤스의 〈바빌로니아의 복권〉 조영남과 화투 그림 조영남은 이색적인 화가이다.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가수이면서 꽤 오래전부터 미술 작업을 해온 화가이기도 하다. 가수로서 그는 송창식, 윤형주, 한대수 등과 함께 70~80년대 통기타 문화의 기수 역할을 했다. 스스로 ‘변변한 히트곡 하나 없는 가수’라고 말할 정도로 자기 곡 없이 주로 번안곡이나 다른 가수의 노래를 불러 30년 이상을 살아남은 희한한 가수로도 유명하다. 그러던 그가 20여 년 전부터 본격적인 미술 작업을 시작했다. 집요하게 화투를 매개로 하여 작업을 해오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색적이다. 그림 그리는 가수라는 의미에서 화수(畵手)로 불리는 조영남은 체계적으로 미술 공부를 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동안 50여 회의 국내외 전시회를 열었을 만큼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지금까지 완성한 그림만 2천여 점에 이른다고 한다. 또한 《현대인도 못 알아먹는 현대미술》이라는 미술평론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조영남은 미술을 즐기는 사람이다. 아마 그 자신이 삶을 경쾌하게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난 내가 대한민국에서 제일 행복한 남자라고 생각해요. 돈, 사랑, 명예, 재능 빠짐없이 갖췄잖아. 특히 직업이 끝내주지. 나 좋아서 부른 노랜데 박수갈채는 물론 돈까지 척척 집어 주니까. 아, 난 천벌을 받을 거야. 별로 노력한 것도 없이 이런 행운에 둘러싸여 있다니···”라고 할 정도로 낙천적이고 최대한 자신의 어깨에서 힘을 빼려고 하는 사람이다. 미술 작업도 가벼운 분위기를 그대로 보여 준다. 살아가면서 가장 재미있는 일이 ‘연애’고 두 번째 재미있는 일이 ‘그림’이란다. 실제로 그는 미술의 대중화를 지향한다. 대중가요가 그러해야 하듯이 그림도 대중적으로 쉽고, 재미있게 그려야 한단다. 조영남이 화투를 집요하게 파고드는 것이 어떤 사회적 문제의식의 발로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화투라는 소재 자체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그의 다음과 같은 말도 이러한 점을 잘 보여 준다. “현대미술의 특성 중 하나가 독창성입니다. 비슷하게 그리면 짝퉁밖에 안 되죠. 화투라는, 아무도 하지 않은 소재를 등장시켰으니 성공했다고 자부합니다” 그의 말은 심하게 말하자면 튀기 위해서 화투라는 소재를 선택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단지 차별성, 독창성을 추구한다는 화가의 형식적인 의도와는 무관하게 조영남의 그림에는 한국 사회의 적나라한 단면이 보인다. 그의 작품 중에 〈극동에서 전해져 온 꽃다발〉을 보자. 여기에서 말하는 ‘극동’이란 당연히 우리나라, 한국을 지칭하는 단어이다. 화투장에 나와 있는 목단꽃과 매화, 벚꽃, 흑싸리로 알려진 등나무꽃 등이 가득하다. 직접 화투장을 캔버스에 붙이고 여기에 채색을 하는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었다. 한국을 상징하는 게 화투라는 얘기가 되어 버린다. 즉 도박의 나라, 대한민국인 것이다. 극동에서 전해져 온 꽃다발 조영남, 1999년 도박 공화국, 대한민국 한국은 자타가 공인하는 도박 공화국이다. 한국과 도박을 연결시키는 데 가장 기여한 것이 ‘바다 이야기’ 같은 성인 게임장이나 인터넷 도박 사이트 등이다. 한때 바다 이야기 게임장은 도시의 웬만한 골목마다 있었다. 물고기가 가득한 바다 이야기의 화려한 간판을 보고 퓨전 개념의 횟집이 생긴 것으로 착각을 한 이들도 많았을 정도이다. 도박장이 공공연하게 동네 골목길까지 파고들어 왔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문화 산업의 일환으로 게임 산업을 육성한다고 마구잡이로 인허가를 해준 결과 사실상 도박장에 해당하는 성인 오락실이 약국보다 많은 이상한 나라가 되어 버린 것이다. 국가정보원 발표에 의하면 도박 중독자가 32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 발표대로라면 전체 인구 중에 성인만을 놓고 보면 거의 열 명에 한 명꼴로 도박 중독자인 셈이다. 하지만 〈바다 이야기〉는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미 경마, 경륜, 경정 등 합법적인 도박 산업이 판을 치고 있다. 과천 경마장이나 미사리 경정장은 주말마다 사람이 가득하고 천문학적 액수의 돈이 베팅을 위해 뿌려진다. 공식적 · 합법적으로 허가받은 도박 산업의 연 매출액만 해도 수십조에 이른다고 한다. 경마장, 경륜장, 경정장, 카지노 등 합법적인 대규모 도박장만 해도 전국에 80여 개에 이른다. 도박 게임장은 미등록 업소를 포함해 2만여 곳에 이르고 연간 시장 규모가 88조라고 하니 도박 공화국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다. 어디 그뿐인가? TV로 방송까지 하는 로또 복권 역시 도박의 한 종류이기는 마찬가지다. ‘인생 역전’ ‘대박의 꿈’을 상징하는 로또 복권 1등 당첨 확률은 국민의 일상을 지배하는 중요한 요소가 되어 버렸다. 로또 복권은 벼락을 맞아 숨질 확률보다 훨씬 낮은 814만분의 1이다. 자동차 사고 사망 확률이 4천분의 1, 벼락 맞을 확률이 30만분의 1이라고 하니 그 희박한 확률을 짐작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한 방에 수십억 원을 손에 쥘 수 있다는 대박의 꿈이 사람들을 이 황당한 도박성 복권의 대열로 이끌고 있다. 전국의 로또 판매점은 무려 9천여 곳에 이른다. 매주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이 6백만 명 정도라고 한다. 대한민국 전체 인구 7~8명 중 1명, 경제활동인구만을 대상으로 비교했을 때는 4명 중 1명이 매주 복권을 구입하는 셈이다. 이 정도면 가히 전 국민을 도박 게임에 참여시키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정말 황당한 것은 도박 산업의 상당 부분이 바로 정부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다. 경마, 경륜, 경정은 아예 공기업이 운영한다. 로또 복권의 판매 수익은 복권 사업자들과 정부가 나누어 갖는다. 운영과 판매를 담당하는 국민은행, KT(전산망 제공자), KLS(시스템 운영자), SDS(단말기 제공자), SK(마케팅 담당자), 안철수연구소(보안담당자) 등도 수익금을 분배받는다. 정부의 세수입만 해도 100억 원대를 넘어선다. 결국 도박 공화국의 배후에는 기업과 정부가 있는 셈이다. 정부가 도박 산업에 발 벗고 나서는 명분은 ‘국민들의 레저 문화 증진’ ‘각종 기금 확보’ ‘지방자치단체의 세수 확보’ 등이다. 실제로 도박 산업에서 확보한 기금이 각종 복지 기금, 주택 기금, 문화예술 증진 기금, 청소년 육성 기금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 보르헤스의 〈바빌로니아의 복권〉 더 큰 문제는 도박이나 사행성 산업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투기의 천국이기도 하다는 점이다. 부동산 투기나 투기성 증권 투자가 한국 사회를 상징하는 단어가 되어 버린 지도 이미 오래되었다. 집을 5~20채 갖고 있는 집 부자가 29만 명에 이른다. 일반 회사원까지 부동산 투기 열풍에 휩쓸리고 있다. 주식도 마찬가지여서 하루가 멀다 하고 단타 중심의 투기성 증권 투자를 한다. 결국 온 국민이 도박 산업이든, 투기성 투자든 온통 타짜가 되어 있는 형국이다. 한국감정원 조사에 의하면 1963~2004년까지 주요 도시 땅값은 무려 780배, 서울 땅값은 954배 뛰어 올랐다. 이 기간 동안 소비자 물가가 38배 오른 것을 감안하면 대도시 땅값 상승률이 기록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1953년~1991년 동안 서울의 땅값이 39,920배 상승했다고 한다. 반세기 동안 4만 배 인상된 것이다. 건설교통부 공시지가에 따르면 2005년 우리나라 땅값 총액은 2,041조에 달한다. 그나마 이 액수도 공시지가를 시가가 아니라 ‘적정가격’을 기준으로 한 것이어서 실제는 훨씬 더 높다고 봐야 한다. 국내총생산액(GDP)이 800~900조, 총예금과 총대출금이 각각 500조~600조인 점을 감안할 때, 2천수백 조를 훌쩍 뛰어넘는 땅값 총액은 경악할 만하다. 한국 땅값은 총액으로 따져 세계 3위 수준이라고 한다. 투기 역시 도박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도박 공화국이라는 말이 전혀 과장이 아니라는 점을 실감할 수 있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는 〈바빌로니아의 복권〉이라는 작품에서 복권을 매개로 도박의 나라를 재미있고 날카롭게 파헤치고 있다. 소설의 중요 대목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나는 복권이 현실의 한 부분이던 그런 어지러운 땅에서 태어났습니다. ··· 당첨된 사람들은 행운을 얻기 위한 또 다른 절차를 거치지 않고 즉석에서 은전을 받았습니다. 그런 식의 복권이 실패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런 방식에는 도덕적 가치가 부재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유의 복권은 인간이 가진 모든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희망만을 겨냥한 것이었지요. 어떤 사람이 개량을 시도했습니다. 행운의 숫자들 사이에 몇 개의 불운의 숫자들을 끼워 넣은 겁니다. 이러한 개량을 통해 구매자들은 상을 탈 수도 있고, 반대로 상당한 액수에 해당하는 벌금을 물게 되는 이중의 아찔한 재미를 느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복권을 사지 않는 사람들은 소심한 사람, 즉 겁쟁이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렇게 당연시되어 버린 경멸은 시간이 흘러가면서 더욱 증폭되었습니다. ··· 몇몇 완고한 사람들은 그것이 필연적인 역사적 단계로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의미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 천박한 또 다른 어떤 사람은 그 은밀한 기업의 존재를 긍정하건 부정하건 상관이 없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바빌로니아는 우연들의 영원한 놀이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아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여기에서 유프라테스 강 유역에 있던 실제 도시 바빌로니아를 직접 다룬 것은 아니다. 바빌로니아는 ‘신의 문’이라는 뜻을 가진 그리스어의 ‘바벨(babel)’이 그 어원인데, 히브리어로 ‘바랄(balal)’인 이 단어는 ‘혼돈’을 가리킨다고 한다. 아마 보르헤스는 혼돈이라는 단어의 어원을 비유적으로 사용했던 것 같다. 보르헤스의 소설 속에는 도박의 한 단면이 날카롭게 살아 있다. 단순히 희망만 주는 것은 매력적인 도박일 수 없다. 평범한 복권일 수는 있지만 이른바 대박을 치는 것일 수는 없다. 도박적인 요소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행운과 함께 위험도 동반되어야 한다. 그래야 짜릿한 승부욕을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투기와 도박이 마약처럼 중독성이 강한 이유는 바로 천당과 지옥을 넘나드는 극적인 요소에 있다. 잘되면 대박이지만 실패하면 큰 낭패를 맛보아야 한다. 보르헤스에 의하면 ‘우연들의 영원한 놀이’라는 생각은 천박하다. 맞는 얘기다. 도박은 형식적으로는 우연이라는 요소를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엄밀하게 말하자면 우연을 가장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도박은 복권이든 카지노든 경마장이든 할 것 없이 최종적으로는 모두 도박장을 운영하는 쪽에서 큰돈을 가져가게 되어 있다. 그리고 투기는 그 대상이 주식이든 부동산이든 돈과 정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이기게 되어 있다. 우연은 가장된 것에 불과하다. 보르헤스가 ‘필연적인 역사적 단계로서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지적한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현대 자본주의를 지칭하는 개념 중의 하나가 카지노 자본주의이다. 이미 세계 자본주의 시장은 산업자본이 아니라 금융자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금융자본 중에서도 천문학적인 규모의 투기자본이 단기 차익을 노리며 전 세계 곳곳을 기웃거리고 있다. 어느 새 자본주의 시장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도박판으로 변해 버렸다. 그런데 도대체 왜 한국 사회는 도박과 투기가 지배하는 사회가 되었을까? 이것을 단지 각 개인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의 문제로 본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의 국민성에 그 원인이 있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것은 말도 안 되는 주장이다. 한국인들에게는 도박이나 투기의 피가 흐른다는 얘긴가? 그러면 원래 한국 사람들이 그랬어야 하는데 지난 수십 년 사이에 생겨난 현상이니 이렇게 원인을 분석할 수는 없다. 그러면 도대체 왜 이럴까? 세계적으로 도박이나 투기로 유명한 나라를 꼽으라고 한다면 대체로 어떤 나라들이 떠오를까? 도박의 도시 라스베가스로 유명한 미국, 빠징고라고 불리는 슬롯머신의 천국 일본, 영화마다 도박 장면이 등장하는 홍콩, 이미 도박 공화국의 칭호를 얻은 한국 등의 나라들이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이 나라들은 공통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들썩거리고 단기성 증권 투자나 투기 자본으로 유명한 나라들이기도 하다. 반대로 도박이나 투기성 투자가 적은 나라는 어떤 나라들일까? 아마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 등이 떠오를 것 같다. 실제로 이들 나라들은 도박 산업이나 부동산 투기 등이 세계적으로 낮은 경우에 속한다. 그러면 이 두 계열로 나뉘는 나라들의 차이는 무엇일까?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스위스 등은 복지국가로 유명하다. 복지국가에서는 왜 도박이나 투기가 덜한 것일까? 복지국가는 빈부격차가 적기로 유명하다. 다양한 분배정책으로 상위 계층과 하위 계층 사이의 격차를 줄여 왔기 때문이다. 그러한 이유로 복지국가에서는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웬만큼 중산층의 삶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하다. 열심히 일하면 중간 수준 이상의 삶을 영위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도박이나 투기와 같은 모험을 할 필요가 적은 것이다. 하지만 복지 개념이 취약한 미국, 일본, 한국 등은 빈부격차 문제가 심각하다.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이지만 흑인이나 중남미 계통의 이주자인 히스패닉의 삶은 비참하다. 일본 역시 ‘부자 나라, 가난한 국민’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사회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다는 얘기는 이미 신물이 날 정도로 듣고 있고, 국가 전체의 경제력에 비교했을 때 복지 후진국이라는 점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상식에 속한다. 이렇게 빈부격차가 극심한 사회에서는 열심히 일한다고 해도 중간 수준의 삶을 영위하는 게 쉽지 않다. 오히려 부의 대물림으로 인해 부익부빈익빈 현상이 심화되는 경향이 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 경제적인 상황을 개선시키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박의 꿈’ ‘인생 역전’이라는 한탕주의가 자라나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결국 한국이 도박과 투기의 천국이 된 가장 큰 원인은 극심한 빈부격차와 사회복지의 미흡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빈부격차가 도박과 투기를 위한 훌륭한 토양을 제공하고 있는 셈이다. ‘바다 이야기’나 로또 복권이 판을 치게 된 이유가 외환위기 이후 실업이 늘고 물질 만능 풍조와 일확천금의 허황된 꿈이 확산된 것임을 부인할 수 없다. 도박 공화국의 오명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회구조와 정책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참고 조영남(1945년~ ) 1964년 서울 음대 성악과에 입학했으나 1969년 〈딜라일라〉라는 번안 가요로 하루 아침에 가요계 스타로 등극했다. 1979년 미국 플로리다 트리니티 신학교에서 신학학사 학위를 취득했다. 1973년 첫 미술 전시회 이후 오늘날까지 서울, 부산, 뉴욕, LA 등 세계 각지에서 화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부른 주요 노래로는 〈제비〉 〈딜라일라〉 〈보리밭〉 〈화개장터〉 등이 있고 저서로는 《놀멘놀멘》 《예수의 샅바를 잡다》 《이상은 이상 이상이었다》 등이 있다.
479    스페인 화가 - 에드가 드가 댓글:  조회:8143  추천:0  2018-02-25
에드가 드가 〈몸을 기울인 발레리나〉 Bailarina basculando (Bailarina verde)|     에드가 드가 〈몸을 기울인 발레리나〉 1877-1879, 종이에 파스텔과 과슈, 64x36cm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서양 미술은 아마 인상주의 작품일 것이다. 모네, 르누아르, 드가 같은 인상주의자들의 그림과 그들보다 조금 나중에 등장한 빈센트 반 고흐, 폴 고갱 같은 후기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은 달력부터 시작해서 광고나 책 표지 등 각종 매체로 재생산되어 누구에게나 익숙하다. 대규모 미술관에서 잊을 만하면 열리는 인상주의 전시 역시 매번 성황리에 치러진다. 왜 이렇게나 인상주의의 인기가 높을까 생각해 보면, 중세나 르네상스, 바로크 시대의 미술처럼 그 시대의 역사나 이야기의 맥락을 알아야만 이해된다거나 현대미술처럼 도대체 뭘 그린 것인지 알기 힘든 것이 아니라, 무엇을 그렸는지도 충분히 알아 볼 수 있고 그림의 내용을 알기 위해 무엇인가를 (성경, 신화 혹은 유럽의 역사) 특별히 더 알아야만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부담 없이 그림을 보다 보면 색채의 아름다움, 빛의 다양함, 과감한 구성까지도 함께 발견하고 좋아하게 되는 것이다. ‘인상주의’라는 이름은 클로드 모네(Claude Monet)의 〈인상: 해돋이(Impression, Soleil levant)〉라는 작품을 당시의 평론가가 혹평하면서 나온 것이다. 당시에는 회화란 어떤 불멸의 것을 화폭에 옮기는 것이었기 때문에 해가 뜨는 순간의 르아브르 항구를 엷은 물감으로 그린 모네의 그림은 마치 그리다 만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바로 이 점, 하루의 어떤 순간을 보이는 대로 잡아낸 것이 우리가 인상주의 그림을 친숙하게 느끼도록 하는 이유인 것 같다. 인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사진과 일본 판화의 영향이다. 당시 유럽과 일본의 무역 교류가 증가하면서 일본의 판화가 유럽으로 많이 유입되었는데, 일본 판화의 특징 중 하나는 서양의 회화와는 달리 주제가 되는 형체가 화면에서 잘려 있기도 하고, 대상을 보는 시선의 위치가 과장되게 위에 있다든가 화면의 한쪽을 훤히 비워놓는 것이었다. 이에 자극 받은 인상주의 화가들은 강가에 떠 있는 배가 화면 밖에서 막 들어온 듯 잘라서 그리기도 하고, 사람을 그릴 때도 팔이나 치마폭 등만 그리기도 했는데,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드가의 그림이 그렇다. 발레리나들을 그린 이 작품에서 몸과 옷이 모두 그려진 사람은 초록색 의상을 입은 소녀뿐이다. 나머지는 얼굴과 상체만 보인다든가, 치마와 다리만 보이기도 한다. 이는 사진의 특징이기도 하다. 인상주의자들이 사물의 한 순간을 포착하려고 했던 의도는 사진의 특징과 잘 맞아 떨어지기도 했고, 이미 사진이 가지고 있던 순간을 잡아내는 재현 능력과 자유로운 시점을 보면서 기존의 고전적인 회화와 다른 길을 모색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상주의자들의 그림에는 누구나 볼 수 있는 도시의 거리, 시골의 길과 풍경, 카페의 한 순간, 극장이나 공연장의 장면을 그린 것이 많다. 실제로 볼 수 있는 우리 주위의 무엇인가를 눈에 보이는 대로 그리는 것, 이것이 인상주의다. 인상주의자들이 그린 대상은 요즘 우리가 디지털카메라로 찍는 사진의 대상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오랫동안 서양 회화의 주인공이었던 전지전능한 신과 위대한 영웅들은 사라졌다. 에드가 드가(Edgar Degas, 1834-1917)는 우리가 보는 그림에서처럼 공연을 준비하거나 무대 위에 있는 발레리나, 사적인 공간에 있는(목욕 중이거나 머리를 빗는) 여인들, 공연장, 카페의 장면을 주로 그렸다. 왜 그렇게 발레리나들을 자주 그리냐는 질문에 “왜냐하면 발레리나들만이 고대 그리스인의 움직임을 갖고 있기 때문이죠”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만큼 드가는 인체의 다양한 자세를 그리고 싶어 했다. 야외 장면으로는 말들이 있는 공간을 즐겨 그렸다. 유화를 그리기도 했지만 파스텔처럼 빨리 그릴 수 있으면서도 풍부한 색을 표현할 수 있는 재료를 선택하기도 했다. 유화는 주로 캔버스 천 위에 그리고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만, 파스텔은 종이 위에 빠르게 그릴 수 있다. 그래서 드가의 작품 중에는 파스텔화가 많다. 그러나 파스텔이라는 재료는 가루가 날리고 표면에 달라붙지 않는 성질 때문에 보존이 어려운 재료이기도 하다. 미술관에서는 대부분의 유화가 별다른 보호막 없이 액자에 걸려 있지만, 파스텔로 그린 작품들은 유리판을 댄 액자에 걸려 있고 파스텔화가 있는 방은 조명도 더 어두운 이유가 그 때문이다. 스페인의 어떤 미술관보다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을 많이 볼 수 있는 곳이 티센 미술관이다. 모네, 드가, 시슬리, 르누아르, 모리조 등 인상주의자들의 작품을 모두 소개할 수 없어 안타까울 뿐이다. ====================================   드가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 동역학과 정역학의 공존   목차 클래식과 모던의 조화를 꿈꾼 화가 대립의 긴장감을 통한 조화 미술의 정물성에 대한 도전 드가,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 1878년, 캔버스에 유채, 81×76cm,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 정역학은 물체 내부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고, 동역학은 물체의 거시적 이동을 다루는 학문이다. 역학은 외부의 힘을 받은 물체가 내부적 스트레스(stress), 외부적 스트레인(strain)으로 반응하는 것을 말한다. 드가(Hilaire Germain Edgar De Gas, 1834~1917)가 그린 많은 발레 그림은 겉으로는 동적인 운동을 보여준다. 그러나 드가 그림의 특색은 내적이고 정적인 긴장을 함께 표현하는 것이다. 스트레인을 억제하면 스트레스가 증가한다. 드가 그림의 매력은 바로 이 대립에서 오는 긴장감에 있다. 클래식과 모던의 조화를 꿈꾼 화가 드가는 1834년 프랑스 파리의 은행가 집안에서 태어났다. 유복하게 자라나 다른 화가들처럼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고 미술에 전념할 수 있었다. 아버지를 이어 사업가가 되기 위해 명문 루이르그랑 학교에 들어갔으며, 드로잉에서 발군의 실력을 나타내며 졸업했다. 1853년 법과대학에 입학하였으나 그만두고, 1855년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하여 미술가의 길로 들어섰다. 미술 애호가이면서 열린 지식인이었던 아버지는 아들의 결정을 존중하여 적극적으로 후원해 주었다. 드가는 미술학교에서 앵그르를 만났고 그의 조언대로 드로잉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 루브르 박물관에서 르네상스와 고전주의에 이르는 작품을 700점 이상 모사하는 훈련을 했다. 드가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마네와 친해졌고 마네를 중심으로 모이던 인상파 화가들과도 친해졌다. 과거와는 다른 현대성이 필요하다는 그들의 생각에 동조하여 마네가 주도하는 인상파전에 창립회원으로 참여하였고 이후 7회 한 번만 빼고는 계속 참가하였다. 그러나 드가의 화풍을 인상파라고 할 수는 없다. 그의 화풍을 정교한 드로잉과 고전적 구성에 바탕을 두었기에 순간의 빛을 포착하는 데 전념한 인상파에 동화될 수 없었다. 그는 카페 게르부아에서 열띤 토론을 벌이며 고전성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려는 희망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다. 대립의 긴장감을 통한 조화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을 보면 마치 한 장의 사진을 보는 느낌이 든다. 이 그림에는 등장인물이 모두 일곱 명인데, 연습 중인 세 명의 발레리나와 휴식 중인 두 명의 발레리나, 한 명의 귀부인(아마도 어느 발레리나의 엄마일 것이다), 그리고 화면 속 유일한 청일점인 발레 교사 쥘 페로이다. 드가는 열세 살 때 어머니를 여의었다. 이후로 그의 인생에 여자는 등장하지 않는다. 아마도 너무 어리고 예민한 시기에 곁을 떠난 어머니로 인해 여성으로부터의 박탈감이 여성혐오증으로 발전한 것 같다. 그런데도 그는 귀부인, 무희, 가수, 배우 등 많은 여인을 그렸다. 그가 그린 어린 발레리나나 배우의 자태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성적인 모티브가 담겨 있다. 하늘거리고 투명한 무용복 때문에 소녀들의 육체가 더욱 인상 깊다. 발레는 고전과 현대를 조화시키려는 그에게 아주 적절한 주제였다. 그리스인들이 인체로부터 추구하였던 조화와 통일의 미학이 현대의 발레리나에게서 잘 나타난다. 당시 발레 그림은 장식적인 효과가 있어서 상당히 잘 팔렸다. 당시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는 인물을 대담하게 클로즈업시키고 중요 오브제(objet)를 과감하게 자르는 화면 구성과, 단순하고 선명한 색상 등으로 프랑스 화단에 충격을 주었다. 우키요에의 판화는 고전적 미술 교육을 철저히 받은 드가의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다.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에서도 오른쪽 소녀의 몸이 예기치 않은 화면 절단으로 반이나 잘려 나가고, 배경은 동양의 병풍처럼 몇 개의 수직과 수평선으로 구획되었다. 19세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19세기 일본 목판화 우키요에 드가의 예술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대립의 긴장'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대립되는 두 오브제 사이의 불안한 균형에서 오는 긴장감을 드러낸다. '바쁜 동작을 하고 있는 연습생들 vs 휴식하는 사람들', '발레와 관련 있는 사람들 vs 발레에 관심 없이 신문을 읽고 있는 부인', '여자 vs 남자', '하얀색 vs 검은색' 등 몇 개의 대립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대립의 긴장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화면의 가장 가운데에 갑자기 텅 빈 공간을 설정한다. 이렇게 그의 그림에서는 주제와 거리를 둔 소외된 존재가 종종 나타난다. 드가는 르네상스 화가들이 자주 쓰는 기법인 거울도 사용했다. 화면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큰 홀의 나머지 부분에 서 있는 참관인 중의 몇은 발레에 관심 없이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드가는 그들이 보고 있는 창밖의 파리 풍경을 뒷부분의 거울에 그려 넣었다. 〈오페라 극장의 무용교실〉은 우연히 포착된 한 순간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구성이 면밀하게 계산되었다. 순간적인 발레 동작의 동적 불안정은 검은 색채의 무게까지 더한 귀부인의 정적인 안정과 대립된다. 드가, 〈발레 수업〉, 1871년, 패널에 유채, 19×27cm,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드가의 또 다른 발레 그림 〈발레 수업〉을 보면 왼쪽에는 사람들이 너무 치우쳐 있고 검은색의 무거운 피아노까지 있지만 오른쪽에는 불안한 공간이 있다. 그리고 연습에 열중하는 소녀들이 있고 등을 긁는 소녀가 있다. 이렇게 조화롭지 못한 구도는 찰나의 순간을 포착했다는 느낌을 강하게 준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은 아주 면밀하고 의도적인 계산 위에 이루어 놓은 긴장된 대립이다. 미술의 정물성에 대한 도전 드가, 〈관중석 앞의 경주마들〉, 1866~68년경, 캔버스에 유채, 46×61cm,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드가는 운동감을 연구하는 데 관심이 많았다. 그는 발레와 함께 당시 붐을 일으킨 경마에도 관심이 많아 경마장, 경주마, 기수 들의 그림도 많이 그렸다. 경주마를 그린 그림인 〈관중석 앞의 경주마들〉을 보면 모두 출발선에 정렬해 있는데 맨 끝의 말은 제어불능 상태로 날뛰고 있다. 관람자의 시선은 가운데 서 있는 심판의 말에서 시작하여 시계 반대방향으로 돌아 날뛰는 말까지 가서 왼쪽에 모여 있는 관중을 살피다가 다시 말들을 따라 순환한다. 이것은 그가 의도적으로 만들어 놓은 운동성이다. 발레리나건 경주마건 모두 그에겐 동작을 연구하기 위한 도구였다. 당시 영국의 사진가 머이브릿지(Eadweard J. Muybridge, 1830~1904)는 순간의 연속동작을 사진을 통해 가시화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는 열두 대의 사진기를 말의 주행로에 설치하고, 말이 각 사진기 앞을 지나며 끊는 선에 사진기의 셔터를 연결하여 25분의 1초 속도로 열리고 닫히도록 장치했다. 그 결과 말의 순간동작이 차례로 기록되었다. 제리코, 〈엡섬에서의 경마〉, 1821년, 캔버스에 유채, 91×122cm, 프랑스 파리 루브르 박물관 머이브릿지, 1878년 12월 14일자 플아스 신문 「라 나튀르」에 게재된 〈달리는 말〉 이 작업 결과가 1878년 12월 14일자 프랑스 신문 「라 나튀르」에 게재되었고, 이전에 그려진 말의 움직임이 틀렸다는 것이 드러났다. 제리코(Jean Louis Ardré Théodre Géricault, 1791~1824)의 〈엡섬에서의 경마〉에서 두 앞발과 뒷발을 동시에 쭉 펴고 달리는 그림은 멋지게 보이지만 틀린 묘사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시인 보들레르(Charles Baudelaire, 1821~1867)는 풍요로웠던 19세기 중반 파리 한량들의 생활 태도를 일컬어 '플라뇌르'(Flaneur)라고 했다. 플라뇌르란 한가롭게 거니는 사람을 말하는데, 드가야말로 플라뇌르의 전형이라 할 만하다. 드가는 자신을 파리의 클럽이나 카페를 드나들며 문화적 토론을 즐기는 도시적 플라뇌르라고 생각했다. 스물아홉 살에 그린 자화상을 보면 잘 차려 입고 당당하고 거만한 풍모를 한 그의 플라뇌르적 자신감을 엿볼 수 있다. 드가, 〈자화상〉, 1863년, 캔버스에 유채, 26×19cm, 포르투갈 리스본 미술관 드가는 카페나 거리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고 관찰하고 생각하고 기억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화실에 돌아와서 화폭에 그렸다. 이제까지와는 매우 다르게 가까이 눈을 대고 본 장면이나 올려다 본 시선으로 파악한 화면을 창조했다. 드가는 전통적인 미술 교육 위에 인상주의, 일본 우키요에 판화, 사진술에서 받은 신개념을 왕성한 탐구심으로 받아들여 독특한 그만의 예술 세계를 창조하였다. 유화뿐 아니라 파스텔·수채화·목탄 등 재료를 다양하게 사용하였고 혼용 기법도 자유롭게 구사하였다. 말년에는 조각까지 손대어 몇 개의 뛰어난 조각도 남겼다. 특히 청동으로 만든 조각에 천으로 진짜 무용복까지 입힌 청동 조각상은 그다운 걸작이라 할 수 있다. 드가는 자연보다 인공을, 순간보다 본질을, 그리고 무엇보다도 드로잉을 사랑한 화가였다. 그는 자신의 묘비에 "드가는 드로잉을 진정 사랑했다"라고 새겨 달라고 부탁하고 1917년 9월 27일 세상을 떠났다. 드가, 〈소녀 무용수〉, 1879~81년경, 청동에 직물 스커트와 비단 댕기,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노동의 고단함 드가 ‘다림질하는 여인’과 에밀 졸라 ‘목로주점’ | 목차 미술작품 속 여성 노동자 생동감이 주는 감동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미술작품 속 여성 노동자 동양과 서양을 모두 살펴보아도 19세기까지 노동자의 삶을 묘사한 그림은 그리 많지 않았다. 아무래도 미술을 비롯하여 음악, 문학 등이 귀족 출신의 상류층이나 시민계급, 지식인들의 전유물이었던 사정과 연관이 깊다. 특히 신분제도가 유지되던 시절에 미술은 왕족이나 귀족의 모습, 혹은 신화 속의 일화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농노의 삶은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없었다. 그나마 시민혁명 이후 신분제가 사라지면서 조금씩 하층민의 삶이 캔버스에 담기기 시작했다. 인상파에 의해 미술이 화실 작업에서 야외 작업으로 바뀌면서 밀레의 작품처럼 농부의 모습이 캔버스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도시 노동자들을 그린 작품들은 적었다. 그중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삶을 묘사한 경우는 더욱 드물었다. 19세기 대표적인 여성 노동은 세탁 공장에서의 빨래와 다림질이었다. 토지를 잃고 도시로 떠밀려 온 수많은 농부들이 할 수 있는 일은 공장에서의 육체노동뿐이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어,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여성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은 드물었다. 그녀들에게 세탁 공장의 노동은 적은 돈이라도 만질 수 있는 기회였다. 당시 몇몇 화가들은 종종 세탁부의 모습을 캔버스에 담았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도 그중 하나이다. 우리에게 드가는 우아한 발레리나의 모습이나 목욕하는 여인을 그린 화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일상의 노동에 찌들어 사는 가난한 여성 노동자들의 삶도 외면하지 않고 작품에 담았다. 세탁부의 노동을 그린 작품이 14점이나 되는 것은 드가가 그녀들의 삶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다림질하는 여인 드가, 1884년 〈다림질하는 여인〉은 여성 세탁부를 다룬 14점의 연작 중 하나이다. 오른쪽 여성은 다림질을 하고 있다. 주름을 펴고 있는 중인지 두 손을 모아 다리미를 힘껏 눌러 가며 식탁보나 침대 시트로 보이는 옷감을 다리고 있다. 깊숙하게 숙인 고개에서 고단함이 뚝뚝 묻어난다. 그녀의 어깨와 팔에서는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진다. 왼쪽의 여인은 피곤에 지쳤는지 졸린 눈으로 크게 입을 벌리고 하품을 하고 있다. 앞에 세탁물과 다리미 대신 작은 물통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다림질을 할 때 옆에서 물을 뿌려 주는 보조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녀의 한쪽 손에는 병이 들려 있는데 병 속의 액체는 피곤을 쫓기 위한 포도주로 보인다. 다림질을 하고 있는 오른쪽 여성이 풍기는 긴장감과는 다르게 하품을 하고 있는 모습에서 이완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도록 재미있는 대조를 보여 주고 있다. 두 여인의 뒤편으로 난로가 흉물처럼 서 있다. 세탁 일을 위해서는 항상 뜨거운 물이 준비되어 있어야 하고 다리미의 열기를 위해서도 계절을 가리지 않고 난로가 필요했다. 겨울이야 그렇다고 해도 가뜩이나 더운 여름에는 그녀들에게 난로가 괴물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그런 느낌을 상상하면 다림질의 열기와 수증기로 후끈거리는 세탁소 안의 분위기가 더 실감나게 다가온다. 그래서인지 후덥지근한 실내에서 일하느라 옷도 대충 걸치고 화장은 신경조차 쓰지 못한 모습이 역력하다. 생동감이 주는 감동 이 그림에서는 드가의 특색을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다. 그의 그림은 대체로 순간적인 움직임을 포착해 우리에게 그대로 보여 준다. 특히 발레리나의 모습을 담은 수많은 작품에서 순간 동작의 특징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이 마치 그 장소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현실감이 살아난다. 〈무용 수업〉 〈무대 위의 무희〉 〈리허설〉 등의 작품을 보면 무희들의 역동적인 동작이 너무나 생생해서 춤 동작에 열중하고 있는 소녀들의 거친 숨소리가 전해져 오는 느낌이다. 통 속에 앉아서 목욕을 하고 있는 여인을 그린 〈목욕하는 여인〉도 순간적인 동작이 주는 생생함 때문에 마치 우리가 옆에서 여인의 몸을 훔쳐보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다림질하는 여인〉도 마찬가지다. 오른쪽의 여성처럼 그냥 다림질하는 모습만 있었다면 정지된 화면이 주는 고정적인 느낌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품을 하고 있는 여인의 표정과 몸짓이 극적으로 그림에 생동감을 불어넣고 있다. 그녀의 길게 늘어진 하품 소리가 가깝게 들릴 듯하다. 실내에 가득한 습기와 열기로 후덥지근한 세탁장 안에 함께 있어서 숨이 턱 막히고 우리 몸에도 땀이 날 것만 같다. 물론 생동감은 현장성을 중시한 대부분의 인상파 미술가들에게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당대의 화가들 중에서도 드가는 현장성과 생동감이라는 면에서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탁월한 연출력을 보여 준다. 미술을 통한 연출력이 다분히 의도한 결과임을 드가가 친구에게 들려준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젊은 여인들을 그리는 이유는 피조물로서 한 인간이 그 자신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여 주기 위해서이네. 마치 고양이가 제 몸을 핥아서 닦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까? 누드화는 항상 관객의 시선을 염두에 두었지만 내가 그린 여인들은 정직하고 소박한 자신의 신체적 상황 외에는 전혀 다른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네. 이는 마치 열쇠 구멍을 통해서 몰래 바라보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네.” 같은 소재로 그린 다른 그림과 비교해 보면 드가의 특징이 더욱 잘 살아난다. 피카소의 〈다림질하는 여인〉도 세탁부의 고단함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그림 중 하나로 이른바 피카소의 청색시대(The Blue Period, 1901~1904)를 상징하는 작품이다. 이 시기 피카소는 청색을 주로 사용해 노동자를 비롯한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 참상과 고독감을 표현했다. 당시 피카소는 낯선 파리에서의 생활을 시작하던 때였는데, 거처할 곳이 없어 몽마르트르 언덕에 사는 친구의 방에 더부살이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의 어려운 삶에 더 공감을 했고 그들을 캔버스에 자주 등장시켰다. 피카소의 작품은 드가의 것과 같은 소재, 같은 제목이지만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긴다. 물론 드가의 그림과 마찬가지로 다림질을 하고 있는 여성이 피곤에 절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눈이 전체적으로 검게 묘사되어 있어서 피곤함의 정도를 더해 주고 있다. 그림 속 여인은 밤을 새워 똑같은 동작을 되풀이했을 것이다. 두 손으로 다리미를 쥐고 세탁물을 다리고 있는 모습이 힘겨워 보인다. 세탁장의 칙칙한 분위기도 비슷하다. 하지만 드가처럼 그 장소에 우리가 함께 있는 느낌은 아니다. 캔버스 속의 장면이 일정하게 대상화되어 있고 감상자의 눈으로 작품에 접근하도록 하고 있다. 어떤 면에서는 석고상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에밀 졸라의 《목로주점》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을 비롯해서 당시 세탁부의 노동을 묘사한 많은 화가들의 그림은 다분히 에밀졸라(Emile Zola)의 대표적인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목로주점》에서 큰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1877년, 이 소설이 발표되자 뜨거운 논란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당시에 매년 3~5만 부 정도씩 팔렸다고 하니 얼마나 폭발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는지 알 수 있다. 이 소설은 에밀 졸라를 자연주의 소설의 기수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 《목로주점》에는 찬사와 함께 비난도 쏟아졌다. 비판하는 이들은 “노동자 계급의 참상을 그려 노동자를 비하하고 중상하는 것”이라거나 “사회의 욕된 면과 저열한 면만을 극히 일방적 · 일반적으로 폭로하고 있는 비관적이고 무정부주의적인 작품”이라며 경멸을 했다. 이 작품에 대해 에밀 졸라는 어느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노동자 계급을 그린 내 그림은 특별한 음영이나 바람도 시도하지 않고 그리고 싶은 대로 내가 그린 것입니다. 나는 내가 본 것을 말로 표현할 뿐입니다. 나는 상류층의 상처를 발가벗겼습니다. 하층민의 상처도 결코 은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목로주점》은 세탁 공장에서 일하는 주인공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서 세탁 일을 하는 여성 노동자들의 고단한 삶을 생생하게 보여 준다. 소설에서 세탁 공장의 노동을 묘사한 다음 대목은 다림질하는 여인들의 모습을 스케치하듯 우리에게 보여 준다. 드가의 그림을 그대로 설명하고 있는 듯하다. 클레망스는 서른다섯 장 째의 남자 셔츠에 줄을 대고 난 참이었다. 일거리는 넘칠 정도였다. 서둘러 해도 11시까지는 밤일을 해야 할 참이었다. 그야말로 작업장 전체가 한눈 하나 안 팔고 열심히 거세게 다리미질을 해댔다. 다리미 난로엔 또다시 코크스를 퍼 넣었다. 천장에 스커트와 식탁보가 널려 있어 숨이 막힐 지경으로 답답했다. 이 때문에 사팔뜨기 오귀스틴느는 침이 마르는지 혀끝을 입술 끝에 내밀고 있었다. 과열된 스토브와 쉰내 나는 풀, 다리미의 녹내가 목욕탕같이 후덥지근하게 무미한 냄새를 만들어 내는 한편, 열심히 일에 취해 있는 네 여자의 머리와 땀에 밴 목덜미에서 한결 더 강한 냄새가 섞여 나왔다. 당시 유럽은 우리가 흔히 야경국가라고 부르는 상태 그대로였다. 국가는 도둑 잡는 일이나 하고 시장과 공장의 운영에 대해서는 어떤 간섭도 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기업의 이윤 획득에 어떠한 제한도 없는 상황에서 노동자들의 삶은 갈수록 처참해져 갔다. 임금은 날이 갈수록 줄어들었다. 기업가가 가장 손쉽게 이윤을 확대할 수 있는 방법이 임금을 내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남성들의 노동으로 살림을 유지하다가 임금이 계속 내려가게 되면 이미 온갖 집안 일로 시달리고 있던 여성들도 공장에서 일을 해야 입을 풀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여성 노동은 남성 노동에 비해 훨씬 싼값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기업이 이윤을 손쉽게 확대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노동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지금처럼 노동시간을 제한하는 법도 없는 상태여서 무한정 장시간 노동이 이어졌다. 위의 소설 내용에도 언급되었듯이 새벽부터 시작해서 밤 11시까지든 12시까지든 시키는 대로 일을 해야 했다. 그림에서 보이는 지칠 대로 지친 여성 노동자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일상적인 모습이었다. 문제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한동안은 그렇게 생계를 유지하다가 계속 임금이 내려가면 급기야 철부지 아이들까지 공장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당시 유럽에서는 아동노동이 일상적인 현상이었다. 7~8세 정도만 되면 공장에서 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당시 영국의 관청에서 조사한 보고서에 의하면 아이들이 도망가지 못하도록 발을 쇠사슬로 묶어 놓기도 했고, 심지어 채찍질도 다반사였다고 한다. 예술 작품은 종종 현실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에 대한 비판적인 힘으로 작용하곤 한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막론하고 지배층은 노동자나 농민의 고단한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그림을 경멸해 왔다. 마치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기라도 하는 것처럼 격렬하게 비난을 쏟아냈다. 우리는 어떤가? 지금 한국 사회에서 미술이나 문학은 노동자나 농민, 빈민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관심을 갖고 있을까? 작가 자신의 내면에만 갇혀서, 혹은 우아하고 세련된 문체를 구사하는 테크닉에 갇혀서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고통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   유명 화가의 미술 작품들 : 드가 Edgar Degas (1834~1917)   철저하게 집착하는 데상의 명수(名手)       예술가의 초상   19세기의 전형적인 초상화 양식에는 몸체와 두부(頭部)를 비스듬히 돌려 정면을 향하는 다소곳한 모습들이 자주 보이며, 드가 자신의 모습을 그린 이 초상화 역시 전통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20세 무렵에 그린 19세기 서구의 전형적인 옷차림 새로 책상 위에 한 쪽 팔을 얹은 채 다른 한 손에는 밑그림 제작용 석묵(흑연)을 가볍게 쥔 모습이다. 이 작품을 제작하던 무렵 약관의 그는 이탈리아를 여행하고 르네상스 회화에 대한 새로운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또한 이미 고전주의 작가들의 작품에 심취하여 그들의 작품을 차례로 모사한 바 있는 까닭에서인지 그리스-로마의 양식을 답습함으로써 극히 정적이며 차가운 느낌을 주는 고전주의 회화의 경향이 이 작품에서 뚜렷이 엿보인다.         벨렐리 가족   이 작품의 특징은 섬세한 묘사의 고전적 화풍을 따르고는 있지만, 여태까지의 전통적인 구도법에서 벗어난 특이한 점을 보인다. 화면의 오른편에 보이는 드가의 고모부인 벨렐리 씨는 의자에 앉아 등을 돌린 뒷모습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그리고 얼굴은 측면만을 보이며, 드가의 고모와 두 사촌 누이 동생들은 시선의 방향을 제각기 달리 하고 있다. 이것은 드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것으로서 당시의 보수적인 화풍으로서는 상상치도 못할 파격적이며 대담한 구성을 보이는 것이다. 경직된 정면향의 자세보다는 이처럼 자연스러운 순간을 포착함은 현실의 실제감을 더욱더 강조하며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원래 드가의 회화적 특질은 강한 명암 대비, 활달한 윤곽 선묘, 특이한 시각에서 포착한 대담한 구도, 현실감 넘치는 소재의 선택 등인데, 이 작품에서 그는그 중 의도적인 대담한 구성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奏樂席의 악사들   전통적인 화법으로는 중점이 되는 소재를 강조하기 위해 작위적으로 부수적인 요소를 끌어들인데 반해, 드가는 어떤 상황의 극적인 한 순간을 포착하여 이를 실감 있게 재현하고 있다. 드가의 그러한 면이 비로소 인상주의 회화와 동질성을 갖는다. 이 작품은 주악석의 악사들에 초점을 두어 한참 연주의 절정에 달한 악사들의 진지한 모습을 담고 있다. 구도는 예의 '우끼요 에'의 영향 탓인지 전경은 의자의 등걸이 면과 간막이 선을 대각시켜 중앙부에 편중된 인물과 악기들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춤추는 무희들을, 그 부분만을 그린 까닭은 그곳이 극장의 내부라는 것을 암시하고자 함이며 또한 무희들에게 각광(脚光; foot-light)을 비춤은 환상적인 화려한 분위기를 조성키 위함이다. 이 작품의 내용적인 면에서 분석해 보면 사실처럼 보이지만, 실제의 있어서는 드가의 관찰과 상상이 융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젊은 여인의 초상   이 여인상은 드가가 그린 여인의 초상화중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이다. 이지적인 느낌마저 주는 이 여인의 인상은 자신 속에 깊이 빠져든 채 무엇인가에 골몰하고 있는 느낌을 주며, 용모에 흐르는 차분한 기품은 보는 이의 시선을 자극한다. 그러한 느낌의 요인은 어딘가를 향해 차분한 듯 하면서도 날카로움을 보이는 눈매, 오똑 솟은 콧날, 굳게 다문 입술, 모든 소리를 귀담아 듣고 있는 듯 곧게 세워진 귀, 학처럼 긴 몸 등 여인의 용모를 이루는 요소들이 짜임새 있게 조형화된 데서 비롯한다고 볼 것이다. 그것들과 더불어 가다듬어 틀어 올린 단정한 머리의 차림새가 여인의 청순미를 일층 고조시키고 있다. 르노와르처럼 여인의 아름다움을 예찬한 적이 없는 드가는 유독 이작품에서만은 여인의 아름다움을 서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예술 애호가   도미에는 여러 점의 를 그린바 있는데, 드가가 이와 같은 소재를 택하게 된 것은 그의 영향 때문인 것으로 짐작된다. 이 작품 속의 벽면, 책상 위, 그리고 화판 속에는 여러 장의 작품들이 보이며, 모자를 쓴채 의자에 걸터앉아 자신의 수집한 작품들을 살펴보는 짙은 수염의 남자가 그려져 있다. 정면을 향해 쳐다보고 있는 강인한 인상의 남자를 그린 드가는 굵고 활달한 필치로 채색하고 있다. 훗날, 드가는 화면에 자신의 의도에 따라 커다란 공간을 구성하곤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그러한 면이 아직 보이지 않고 있으며 재래적인 공간 구성 법을 택하고 있다. 인물 상체의 배경을 밝게 채색한 것과 와이셔츠의 옷깃이 검은 옷에 비해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것은 강한 명도 대비 때문이며, 이로 인해 인물의 강인 한 인상이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       국화의 여인   탁자의 곁에 팔을 기대 앉은 여인과 꽃들은 구도상 서로 양분되어 대칭을 이루고 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꽃송이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한데 비해, 여인이 모습은 화면의 한쪽에 치우쳐져 있다. 전통적인 관점에서 파악한다면 당연히 인물이 주제가 되고, 꽃은 부제가 될 터인데 드가는 이를 역이용하고 있다. 불균형의 면적비에 비해, 전혀 한쪽에 치우침이 없어 보이는 짜임새는 드가만이 지닌 대담한 구도 설정의 재치일 것이다. 현란한 색채 및 갖가지 크기의 꽃이 한데 어울림이 부분적으로는 산만해 보이지만, 그 산만함이 오히려 여인의 모습과 표정에 시선을 끌게 한다. 또한 인물의 뒷배경을 창문 밖 멀리의 풍경이 내다보이게 함으로써 가득한 화면의 공간감을 확대시켜 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피아노 앞의 디오孃   손에 붓을 쥐지 않고 어떤 대상을 바라봄과 그 대상을 그리면서 그것을 관조하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체적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은 보이는 대로의 것을 붙잡아 그대로 옮겨 놓으려고 들 하였다. 이를테면 그것은 전통적인 화법 즉, 어두운 실내의 조명 아래에서 제작함과 전통적인 관념을 구현하고자 함에서 벗어나, 실제의 대상이 지닌 생동감을 포착키 위해 예민한 관찰자의 입장을 취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렇게 인상주의 화가들은 순간적인 감흥을 옮기곤 하였는데, 드가 만은 그의 눈에 투영된 현실을 기억 속에 담아 이를 다시 정리하여 표현하곤 하였다. 이 작품은 여인 디오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잠시 뒤돌아보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며, 단순화된 면들과 얼굴 쪽에 시선을 이끌기 위해 악보에 높은 명도의 흰색을 채색한 것이 돋보인다.           파강과 오귀스트 드가의 초상   이 작품에서는 참신한 구도를 모색하기 위해 드가가 골몰하던 흔적이 역력히 보인다. 우선 기타를 가슴에 안은 인물은 파강인데 그의 몸체가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정면이 아닌 측면향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오른쪽의 인물은 드가의 아버지 오귀스트이며 그는 파강보다는 작게 그려져 있다. 그러나 피아노 위의 악보면이 밝은 흰색으로 채색되어 화면의 절반을 차지하는 파강과 동등한 비중을 보인다. 또 자유 분방한 거친 붓자국과 명도 조절의 효과 등은 드가가 인상주의적인 빛의 작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는 예의 날카로운 붓자국의 면이 보인다. 이로 인해 여느 작품과는 또 다른 생동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고빌라르 모리소 부인의 초상   드가는 데상에 대해, '데생과 정리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서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라며 '앵그르의 장점은 조화에만 치중하는 다비드화파에 상반되는 아라베스크식의 형태로 반작용하는데 있었다.'고 한다. 앵그르부터 선묘에 대한 교훈을 얻은 드가는 이 작품에서 숙련된 경쾌한 선묘를 보인다. 침대 위에 비스듬히 팔을 기대 앉은 여인은 인상파의 여류 화가 베르트 모리소의 언니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도 여인의 피부가 드러나 보이는 부분에만 세밀한 묘사를 보일 뿐, 나머지 부분에는 굵고, 가는 선이나 거친면 등으로 대담하게 화면을 처리하고 있다. 수직과 수평이 교차되는 배경의 면들과 유연한 자태의 인물은 심한 대조를 보인다. 그 강한 대조에 따라 시선이 자극되기 때문이다.         화실에서의 자메 티소   1860년대의 드가는 '일본의 우끼요에(浮世畵; 풍속화 판화)'의 영향으로 그의 회화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지금까지 고전적인 좌우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구도법에 익숙해 있던 드가는, 의도적으로 균형을 깨뜨린 것과 같은 불안정한 느낌의 '우끼요에'의 구도에서 새로운 회화 표현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다. 전통적인 화법에서의 시각위치는 주로 관점자의 눈 높이인데 반해, 드가가 이 작품에서 시도한 구도는 위에서 아래를 향해 내려다보는 구도이다. 이로 인해 원근감과 공간감이 확대되는 것이다. 이작품의 윗부분 벽면에 가로로 걸린 것은 일본의 풍속화이며, 이러한 풍속화는 유럽의 많은 화가들이 이국 정서에 이끌려 자신들의 작품 속에 화제로서 끌어올리곤 하였던 것이다. 드가도 예외 없이 그것을 이 작품 속에 그리고 있는 것이다.         불쾌한 얼굴   지극히 도시적이며 인간적인 주제를 즐겨 택한 드가는 그 자신 스스로가 그러한 분위기 속에 처하기를 갈망하였다. 그러한 갈망은 곧 그의 관심이며, 그것은 회화라는 형식을 빌어 그의 인간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드가가 택한 작품의 소재들은 드가 자신이 그것들을 향수하고 그것에서 미감을 구하려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 작품의 소재도 당시의 여느 사무실에서 빚어진 미묘한 어느 상황에 초점을 둔 듯하며 성장을 한 젊은 여인이 책상에 앉은 남자의 곁에서 실쭉 한 표정을 보이고 있다. 배경의 경마하는 장면의 그림은 날쌘 움직임과 밝은 색채로 어둡고 무거워 보이는 화면을 자극하며 두 사람간의 미묘한 분위기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화면 뒤쪽의 창구와도 같은 것이 보임은 그들이 처한 실내가 은행임을 짐작케하기도 한다.         무용 연습장   대개의 인상주의 화가들이 순간적으로 변화하는 색채에 관한 연구를 거듭함에 비해, 드가는 현실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에 관심을 두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특정한 부분에 관심을 두고 그를 강조함보다는 무희들이 무용 연습에 열중하는 장면과 신발을 신거나 무용복을 입고 있는, 그리고 잠시 휴식을 취하는 등 극히 일상적인 한 단면을 취재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드가는 그것을 화면 속에 작위적인 짜임새로 집약함보다는 그 일부분만을 표현함으로써 실제감을 더욱 돋우는 효과를 거둔다. 역광이 투사된 실내 연습장에 발과 다리를 일직선이 되도록 곧추세워 준비 자세를 취한 무희를 필두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무희, 계단을 내려오는 무희 등과 다른 동세의 무희들이 그려져 있어 넓은 공간, 그리고 분주한 연습장의 느낌을 잘 표현하고 있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우끼요 에'가 드가에게 미친 영향은, 단순하고 정확한 선묘에 의한 날카로운 형태의 파악과 자유 분방한 구도 등이다. 그것은 통념의 범주에서 벗어난 의도적인 설정의 불안정한 구도를 말한다. 그 불안정한 느낌은 오히려 현실의 생생한 느낌을 강조하는데 주효하며, 그로 인해 드가는 그러한 방법을 자주 활용하는 것이다. 연습장의 벽면에 붙은 횡으로 된 막대를 붙잡고 다리가 90도를 이루도록 앞뒤로 들어올리는 연습을 하는 무희들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도 예의 에서 처럼 바닥면과 벽면의 면적 비의 차가 두드러짐과 사선(斜線)으로 기운 동감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중감(重感)때문에 전혀 불안정한 느낌을 주지 않는다. 더구나 마루 면의 얼룩이나 물뿜이까지도 넓은 공간의 불균형을 바로 잡는 요소가 되고 있다.         꽃다발을 든 무희           무대에서의 발레 연습   드가의 발레에 대한 중요한 관심은 넓은 공간에서 약동하는 무희들의 군상(群像)에 있었다. 즉 드가는 발레의 세계 그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훗일 차츰 무희들의 개별적인 모습 쪽에 관심을 돌리게 된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연습실에서만 이루어지던 것에서 벗어나 실제의 무대에서 총연습에 임하는 광경을 그린 것이다. 드가는 이처럼 난무하는 무희들의 모습을 스냅사진처럼 생생하게 포착한 다음 그의 기억에 남은 인상을 아틀리에에서 제작하곤 했다. 드가의 그 박진함은 그야말로 기억의 세계를 통해 어느 정도 초현실적인 세계로 치닫고 있음이 분명해지는 것이다. 중심의 무희는 발끝을 모아 제자리에 잘게 움직이는 모습을 하고 있으며, 이 작품은 처음 펜으로 그렸던 것 위에 유화구로써 채색한 것이어서 펜의 흔적이 뚜렷이 드러나 보인다.         애수   이 작품에서 드가는 무엇인가 형언키 어려운 슬픔에 잠긴 듯한 여인상을 그리고 있다. 거침 없이 뻗쳐진 날카로운 선묘를 보이고, 측면광은 안부(顔部)를 흐르게 하여 시선을 쫓고 있으며, 활달한 붓의 움직임과 회화용 칼의 흔적 등이 이 작품의 분위기를 더욱 짙게 하고 있다. 드가의 작품 속에 반영되는 대개의 여인상들에서는 여성다운 가냘픈 면모를 찾을 수 없는데, 이 작품에서만은 고뇌어린, 그리고 고달픔이 담긴 여인의 자태가 보이고 있다. 어떤 깊은 의미가 내포된 듯한 슬픈 표정의 여인을 통해 드가는 그 자신만이 지닌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이 작품 속에 반영하려 했던 점이 엿보인다. 여인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한 점과 활달하여 간략한 묘법으로 보아 다른 작품을 위한 습작 정도로 보여지기도 한다.         압상트   드가는 현실에서 보여지는 것을 조금도 그자신의 미관 (美觀)에 따라 임의로 변형치 않고 실제의 그대로를 표현하고 있다. 그것은 현실을 파악하는 그의 관조력이 냉철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파리의 평범한 카페, 그 내부에 대리석 탁자가 놓이고 무표정하고 초라해 보이는 여자와 다른 곳에 시선을 보내는 남자가 나란히 앉은 모습이다. '우끼요 에'의 영향이 짙은 이 작품은 제작된지 17년이나 지난 1893년에야 발표되었다. 인물의 뒤쪽에 보이는 거울과 탁자의 가장자리 선 등이 사선으로 기움에도 불구하고 인물이 차지하는 중감(重感)으로 알맞은 균형세를 이루고 있다. 압상트 술 잔을 앞에 놓고 앉은 여인은 창녀이고, 이 두 인물의 모델은 드가의 친구 데브탱과 당시 미모의 여배우인 엘렌 앙드레라고 전해진다.         장갑을 낀 여가수   1870년대 후반에 접어들어 드가는 카페를 자주 출입하는데, 그로부터 10년 후에는 드가를 평소 존경하던 로트랙 역시 이 집의 단골이 되어 수많은 명작을 남기게 된다. 드가는 카페에서 노래를 열창하고 있는 여가수를 이 작품에서 표현하고 있다. 드가의 여느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가수 한 사람만을 아주 가까운 위치에서 본 것처럼 크게, 그리고 자세히 몸의 일부만을 그리고 있다. 예의 각광을 받고 열창을 하는 이 여가수는 오른 손에 검은 장갑을 끼고 있어 배경의 화려한 커튼과 극명한 명도 대비를 이룬다. 가수를 근접한 위치에서 올려다보며 그린 이 작품과 같은 경우는 드가의 작품 중 그리 흔치 않다. 아무튼 고전주의의 영향을 받은 그가 전혀 상반된 동적이며, 현실감 넘치는 표현을 보이는 것은 아이러니한 현상이기만 하다.       무대 위의 무희   꿈의 날개를 펴 보이는 듯한 이 무희의 자태는 높은 시각에서 포착되고 있다. 커튼 뒤로 가리워진 남자와 무희들은 간략하게 생략된 묘사를 보이며, 주가되는 무희 이외에는 자유 분방한 거치른 필치로 처리하고 있다. 배경의 오른쪽 저 멀리 산과 같이 펼쳐진 무대 장치는 전면의 공간감을 일층 확대시키며 무대 면과의 원근감을 강조해 주고 있다. 각광을 받고 있는 화려한 의상의 무희는 실제의 공연에 있어 주역인 듯하다. 이 작품에 관한 것으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품과 이 작품의 소장자였던 귀스타브 카이유 보트는 그가 임종하기 전 유언으로써 그의 소장 작품들을 나라에 기증키를 원하였지만, 그 당시의 보수적 성향 때문에 그것들의 대부분이 거절 당하였으나, 드가의 이 작품만은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무용 수업을 받고 있는 장면   빠 드 트르와(세 사람이 함께 추는 춤)를 연습하는 정경을 그린 이 작품 역시 벽과 바닥의 공간 대비가 큰 차를 보인다. 화면의 왼편 상단부에는 세 사람의 무희가 몸의 균형을 잡으려 하고 있거나 준비 자세에 임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편에는 지도 선생인 듯한 남자의 모습이 보이는데, 그의 옆머리는 괴이하리만치 길쭉하게 보인다. 머리를 길게 늘여 뜰인 오른편의 무희는 곧 이어 배우게 될 무용 자세를 홀로 연습하고 있으며, 화면의 전경(前景)에는 어느 부인이 신문을 보고 있는 모습이다. 어느 무희의 보호자인 듯한 이 여인의 무관심한 모습이 무용에 열중하는 다른 인물들과는 상반된 느낌을 갖게 한다. 가까이 그리고 위에서 내려다본 듯한 시각 위치에서 포착한 구도가 특이하다.       디에고 마르텔리의 초상   드가의 친구 마르텔리를 그린 이 초상화는 널찍한 탁자 위에 화구들이 널리어져 있고, 그 곁의 의자에 걸터앉은 화가 마르텔리가 새로운 착상에 골몰하는지 깊은 명상에 잠겨 있다. 이 작품에서도 드가는 예의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파악하고 있다. 인물의 상반신은 평범하지만 하반신은 지나칠 정도로 작게 보이며 바닥 면에 널리어진 신발의 바닥 면이 들여다보이는 것 등이 드가가 높은 시점에서 대상을 포착하고 있음을 감지케 한다. 인물과 탁자는 수직으로 양분되어 있지만 그것들의 중감 때문에 전혀 균형을 잃지 않고 있다. 드가는 일반적으로 현실감이 넘치는 등적인 자세에 매우 집착하지만, 초상화에서만은 극히 차분한 정적인 표현을 보이는 것이다.       뒤랑티의 초상   드가가 그린 대개의 초상화는 여느 주문에 의하여 그려진 것들이 아니다. 항시 그와 친분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드가 스스로가 그들을 그리고 있으며, 또 그것을 그들에게 선물하곤 하는 것이었다. 이 초상화에서의 주인공도 드가와 같은 시대의 비평가로서 드가 와는 매우 절친한 사이였다. 뒤랑티는 '새로운 회화'라는 그의 평론을 통해 드가의 작품을 인용, 자신의 이론을 전개하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드가는 그의 미망인의 생계를 돕기 위해 뒤랑티의 유품 경매에 자신의 작품 4점을 내놓기도 했던 것으로 보아, 그들의 관계는 매우 절친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서재 속에서 잠시 포즈를 취한 뒤랑티를 그린 이 작품은, 수많은 책들이 굵은 선과 면으로 어우러져 중심된 인물 쪽에 시선을 모으도록 하고 있으며, 얼굴에는 잘게 분할된 붓자국이 보이기도 한다.     분장실 속의 무희   이미 발레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이모저모를 날카롭게 관찰한 바 있는 드가는 무희들의 생태와 그 이면에 이르기까지도 그의 회화에 관한 독특한 눈길을 보내기 시작한다. 이 작품은 마치 무대 뒤의 분장실 근처를 지나치다 조금 열린 문틈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분장실의 무희를 그린 것이다. 현실의 세계를 포착한다는 점에서 볼 때 인상주의 화가들과 동질성을 보이면서도 대상의 범위와 그 파악의 면에서는 전혀 다른 면을 드가는 보이는 것이다. 유난히도 세로가 긴 화면의 3분의 1가량을 출입문으로 하고, 그 나머지 화면만으로 분장실의 정경을 표현함은 명도 대비로써 주제를 강조하려 함이다. 문이 열린 틈 사이로 보여지는 분장실은 마치 출입이 금지된 내밀한 세계를 들여다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奏樂席의 악사들   이미 음악의 세계에 깊은 관심을 보여 여러 음악가들과 교우 관계를 갖고 그들의 모습을 화면 속에 끌어들인 드가는 또 하나의 을 그린 것이다. 이 작품은 1860년대에 그려진 작품보다 시각 거리가 훨씬 더 가깝게 묘사되어 있다. 많은 수의 악사들 중 세 명의 악사들 등 너머로 무대 위의 무희가 객석을 향해 인사를 보내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작품의 특색으로 보이는 점은 고전적인 균형을 이룬 짜임새 있는 구성이 아닌, 현실의 한 단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한 구도의 설정이다. 이를테면 화면을 가르는 수평의 선분 위, 아래로 각기 무희와 악사들이 배치되어 있는 점이다. 세 사람의 악사들 중 중간의 악사 머리 부분에는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가 그려져 있어 마치 사람의 귀와 같은 연상을 갖게 하는 것도 흥미롭다.         세탁물을 운반하는 두 세탁녀   1879년 제 4회 인상주의 전람회에 출품된 이 작품을 두고 어느 비평가는 '멀리서 보면 도미에의 것과 같아 보이지만 가까이 접근해서 보면 도미에보다 훨씬 우수하다.'고 격찬했다고 한다. 극히 요약된 활달하며 간략한 선묘로써 인물을 묘사한 이외에는 장식적인 어떠한 요소조차도 포함되지 않은 드가의 작품 중 특색있는 작품이다. 두 세탁녀와 바닥면의 짙은 세피아 색을 주조로 한 색과 샛노란 벽면의 색채가 강렬한 명도 및 채도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가 이렇듯이 대담한 공간을 구성함은 새삼스러울 것은 아니지만, 명도 높은 샛노란 색채로써 색의 대비를 이룸은 여태까지의 그에게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닥과 벽면을 가르는 수평의 면과 두 인물의 높낮이도 수평의 높이를 보이지만, 무거운 듯 세탁물 바구니를 든 구부린 동세가 그러한 경직된 느낌을 완화시켜 준다.         잘못된 출발   드가는 경주마에서 자기의 본성이나 그 시대가 요구하는 조건에 부합되는, 찾아 보기 힘든 주제를 택하였다. 드가는 뮈 브릿지 대령의 스냅 사진을 빌어, 움직이는 동물의 참모습을 연구한 최초의 화가로 손꼽힌다. 게다가 당시로서는 예술가들이 사진을 외면하고 그것을 이용하기를 엄두도 못 내던 때에, 그것에 관심을 갖고 그의 회화 속에 멋진 사진을 남겨 두었던 것이다. 그의 말에 대한 관심은 어쩌면 로맨티즘의 화가 제리코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출발이 잘못 이루어져 먼저 뛰쳐 나가버린 말과 기수의 힘찬 동세가 어김 없이 표현되어 있다. 특히 말의 진행을 억제하려는 기수의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 현실감 넘치게 표현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말을 화면의 좌측편에 그려놓음도 말의 운동 방향을 암시하고 동적인 느낌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에 서이다.         외교관들이 감상하는 카페의 여인   지금까지 정확한 데생에 의한 형태 파악에 중점을 두었던 드가는 인상주의 전람회를 계기로 점차 밝은 색채 표현의 경향을 보인다. 인상주의적인 색채 분할법 자체를 수용할 수는 없었지만, 1870년대 말경부터는 색채가 급속히 화려한 국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그것은 속도감 있는 선의 움직임을 나타낼 수 있는 재료인 파스텔에 매료된 때문이었다. 소용돌이 모양의 악기와 모자가 가로지르는 양분된 면을 연결시켜 주고 있으며, 예의 각광(foot-light)은 밤 무대의 화려함을 더욱 강하게 한다. 제명(題名)으로 보아 당시 사교계의 귀빈들과 각국의 외교관들이 이 카페에 참석하고 있는 듯하며, 정열적인 몸짓의 가수가 입은 샛 빨간 의상과 객석의 어두운 색조는 극도의 강한 색의 대비를 이루고 있다.         분장실의 무희   누구의 도움조차도 없이 스스로 분장을 마친 무희가 두 팔을 올려 머리의 맵시를 가다듬는 순간을 드가는 그리고 있다. 거울 앞에 놓인 가스등의 불빛이 아리따운 무희의 얼굴과 화려한 차림새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이 작품에서 눈여겨 보이는 점은 율동과는 무관한 분장하는 모습에서마저도 무희의 율동적인 발의 움직임, 즉 두 다리를 서로 엇갈리게 놓는다는 점이다. 이는 무희의 연작에서 익숙해진 율동 표현의 습성이 은연 중 그렇게 표현케 되지 않았나 짐작되기도 한다. 분장실 내부의 바닥 면에 널리어진 무질서한 것들이 무희의 아리따운 자태와는 상반되어 이질감(異質感)을 준다. 이는 실제의 분장실이 그러하기도 하겠지만 상호 대비라는 관점에서 이루어진 드가의 의도적인 구성이라고 보여진다.         무용 시험   파스텔의 유연한 질감과 화려한 색채를 알맞게 표현한 이 작품은 인물의 특징, 파악의 방법이 자못 날카로움을 보인다. 예의 작품들과는 달리 화면을 가득 메운 무희들이 자신의 발 동작을 살펴보는 모습이거나, 긴 양말을 고쳐 신은 모습이며, 보호자인 듯한 여인이 이를 지켜보고 있는 장면이다. 드가는 이 작품에서 인체의 동세,그리고 신체의 각 부분의 특징을 강조하여 날카로운 선묘를 구사하고 있다. 사각(斜角)을 이루는 지면의 불안정한 느낌을 보완키 위해 수직으로 곧 추선 인물을 두어 대각(對角)을 이루게 하며, 그 결과 V자 모양의 구도를 이룬다. 시험의 차례를 기다리며 준비 중인 무희들의 새하얀 의상은 유연한 여체의 탄력을 뒷바침이나 하듯 유난히도 밝게 빛나 보인다.         휴식을 취하는 무희들   드가는 지금까지 젊은 무희들의 생기 넘치는 발랄한 동세만을 추구해 왔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는 고된 일과를 잠시 멈추고 휴식을 취하는 지친 모습의 무희도 그리고 있다. 화면의 상단 중간에는 신발을 고쳐 신는 무희를, 그리고 왼편에는 지친 모습으로 웅크리고 앉아 턱을 괴고 있는 무희를 각기 그리고 있다. 마치 초벌 그림을 그리 듯한 거침없는 파스텔의 흔적이 완연히 드러나 보이며, 인체의 윤곽선들을 유연한 선들로써 간략하게 묘사되어 있다. 붉은 색의 긴의자는 화면의 긴장감을 이끌기 위해 사선으로 가로 놓여 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상단의 무희가 입은 상의 역시 붉은 색의 복장으로 채색되어 있다. 아마도 드가 만큼 파스텔화에 열중하고 그 재질의 특성을 적절히 구사한 화가는 없으리라 짐작되어지는 것이다.           가로 막대를 잡고 연습하는 무희   드가는 바닥에 중요성을 두는 드문 화가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는 멋진 마루를 자신 속에 간직하고 있었다. 때로는 아주 높은 데서 무희를 포착하며 온갖 형태가 마루 면에 투영된다. 마치 해변가에서 게를 내려다보듯 그것은 그에게 새로운 관점과 참신한 구도를 안겨준다. 1876년에 이은 같은 주제의 이 작품은 예의 작품에 비해 무희의 자세, 벽, 의상, 마룻바닥 등 구도보다는 색채 쪽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각기의 작품마다에서 보이는 색다른 구도의 효과라든가 섬세한 필체가 보이지 않고, 작은 필세로 전체적인 색조를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색채 또한 사실적인 느낌보다는 단순히 화면 조화에 치우치고, 마룻바닥의 질감 표현도 전과 같은 사실성을 잃고 있음이 보여지는 작품이다.             에드가르 드가(Edgar Degas, 1834년~1917년)                 파리에서 태어난 드가는 주로 발레 무용수와 경주마를 작품 소재로 삼았다. 주로 인상주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의 작품들 중에는 고전주의와 사실주의 색채를 띠고 낭만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들도 있다.   루이르그랑 중등학교를 졸업하고 파리 대학 법학부에 들어갔으나 학업을 포기하고 1855년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트의 소개로 국립미술학교에 입학했다. 루브르 박물관을 드나들면서 거장들의 그림을 익혔다. 1856-1857년에 걸쳐 이탈리아를 여행하며 르네상스의 거장, 특히 기를란다요, 만테냐의 작품을 배우고, 또 푸생·홀바인의 그림도 배웠다. 1865년 살롱에 을 출품하고,보불전쟁 후, 인상파 전람회에 참가하였으나 뒤에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다.   1872년 어머니의 고향인 미국 루이지애나 주의 뉴올리언스로 떠나 미국의 역동성을 목격했다. 1873년 파리로 돌아와 인상주의 화가들과 본격적인 교류를 시작했고, 말년에는 지병인 눈병이 악화되어 시력을 거의 잃는 바람에 주로 조각에 몰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지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아버지를 두고 다른 남자(다름 아닌 아버지의 친형제)를 사랑했기에 집안 분위기가 말이 아니었다. 그때의 영향으로 여자를 싫어하게 됐다는 말이 있다.   초기에는 가만히 서 있는 사람만을 그렸으나 후기 그림은 일상 생활을 하는 그림을 그렸다.   초기의 화풍은 고전적으로   등의 초상화에서 출발했으나, 차츰 무용, 극장 등의 근대적 민중 생활의 묘사를 시작했다.움직이는 것의 순간적인 아름다움을 포착하여 그리는 독자적인 수법을 썼다. 특히, 보는 각도를 바꾸어 가면서 정확한 데생과 풍부한 색감을 표현하였다. 무희를 모델로 한 작품이 많아 '무용의 화가'로 불린다. 주요 작품으로   등이 있다. 당시 드가의 이런 소재 선택은 꽤 파격적인 편인데, 당시만 해도 무용수들의 처우는 매춘부보다 약간 나은 수준이라 할 정도의 하층민이었기 때문이었다. 드가는 무용수들의 모습을 모델로 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용수들의 처우 개선에 대해서도 직접 노력하는 등 깊은 관심을 보였다.   사실주의 그림을 무척 싫어했기에 귀스타브 쿠르베가 그린 사실주의 그림을 보고 차라리 사진을 찍으라며 엄청 악평했다. 그리고 술자리에서 거나하게 취하자 한번은 지팡이를 쳐들고 사실파 색히들에게 쏘는 총이다! 탕!탕! 이렇게 친구들 앞에서 크게 외친 적도 있었다.       노턴 사이먼 뮤지엄의 19세기 전시관에 가면 에드가 드가의 작품세계가 펼쳐져 있다. 유난히 많은 작품이 전시되어 있음이 내겐 놀라움이었다.             '무희의 화가'라는 에드가 드가 Edgar De gas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데생화가 중 한 명인 에드가 드가는 고전주의 미술과 근대 미술 사이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화가이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부모가 아들의 재능을 일찍부터 알아차려 집안에 작업실을 두게 했고, 그런 부모의 후원으로 회화와 드로잉, 그리고 조각뿐만 아니라 18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한 사진술에도 정통했다.     그의 초기 작품들은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Auguste Dominique Ingres. 신고전주의 초상화가이자 서사화가로 나폴레옹의 초상화를 그렸으며 '터키의 욕탕'으로 유명하다)와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대표화가)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았다.   드가는 1855년에 앵그르를 만났는데, 그는 드가에게 "선에 충실하라"라는 유명한 조언을 해주었다. 드가는 파리 에콜 데 보자르(Ecole des Beaux-Arts)에서 미술 교육을 받았고 그후 이탈리아에서 3 년간 공부했다. 그리고 1865년에는 파리 살롱전에 처음으로 작품을 전시했다. 드가는 무명미술가협회의 회원이었는데, 이 협회는 1874년부터 계속 공동 전시회를 열었다. 첫번 째 협회전에는 드가,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소, 피에르 오귀스트 르누아르 등의 작품이 전시되었다. 나중에 평론가 루이 르루아가 이 전시회에 대해 야유섞인 의미로 '인상주의자들의 전시회'라는 표현을 썼다. 이는 불충분한 세부묘사와 두드러진 붓질, 색을 혼합하지 않고 사용하는 등의 회화양식 때문이었다.         드가의 가장 큰 고객이었던 화랑 주인 폴 뒤랑 뤼엘은 드가가 활동하는 내내 그를 후원해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드가의 작품을 이해하거나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1880년에 색다른 시점의 구도와 자유롭고 빠른 붓질로 그려진 그의 그림들은 호평을 받았다. 그러나 밀랍 모형(이후 청동으로 주조됨)에 다른 요소들인 실제 천으로 만든 발레용 치마, 인형 머리카락, 새틴 리본 등을 결합하여 만든 그의 걸작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1880~1881경)]에 대해서는 열광, 분노, 혐오감 등 여전히 의견이 분분했다.             1886년에 드가의 작품들이 뉴욕에서 전시되었고, 1905년에는 런던에서 드가와 다수의 인상주의 화가들의 전시회가 열렸다. 그에 대해서 알려진 바에 의하면 그는 어느 정도 여성혐오증이 있었고, 여자보다는 자신의 미술 세계를 더 소중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결혼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 중 대다수는 여자 무용수, 여자 세탁부, 재봉사, 목욕하는 여자와 같이 여자와 여성노동자들을 묘사하고 있다. 말년에 드가는 시력이 나빠졌으나, 스케치하고, 그림을 그리고, 조각하는 능력은 그럭저럭 계속 유지해나갔다.     인상주의 화가들속의 드가     드가는 여덟 차례 열렸던 인상주의 전시회 중 일곱 번을 참가했음에도 불구하고,자신의 양식과 인상주의 미술 사이에 거리를 두고 싶어 했다. 그는 "내가 정부라면 야외에서 실물을 직접 보며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감시할 특수 경찰부대를 조직할 것이다"라고 말하며 '외광회화'를 비판했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에도 휘말렸다. 이 사건은 유대인 군인 알프레드 드레퓌스가 반역죄로 잘못 기소당했고, 드레퓌스의 지지자와 반대파 간의 논쟁으로 프랑스가 양분되었던 사건이다. 드가는 드레퓌스가 유죄라고 주장하여 그의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드러냈다.결국 이 일로 그는 많은 동료 인상주의 화가들을 잃게 되었다고 한다.     *드레퓌스 사건(1895년); 스파이라는 누명을 쓴 유대인 대위였던 드레퓌스를 지지한 좌파로는 에밀 졸라가 유명하다. 드가는 반유대인파. 1995년에서야 무죄로 인정되었다는데, 유시민의 '거꾸로 읽는 세계사'에서 처음 알게 된 역사였다.       드가는 경마장에도 자주 갔다는데, 역동적인 말의 모습보다는 경마장 주위를 관조하는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The false start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The Belleli Family   드가가 그림공부를 하러 이탈리아에 갔을 때 그린 그림으로 벨레리 훼밀리는 드가의 고모네 식구라 한다.             이젠 드가에 대한 사람들의 호기심에 대해 이야기를 해 보자.   그가 남긴 작품과 그에 대해 세상은 왜 호기심이 많은지 전반적으로 그의 가십이라는 것은 그가 결혼을 하지 않은 이유와 그 이유가 여성을 혐오스러워 했다는 것인데 왜 이런 이야기가 있는 것인가?   그럼에도 그의 그림을 이야기하자면 많은 발레의 무대와 발레리나를 먼저 떠올리게 되는데 말이다. 세상은 그러한 주장의 근거로 그의 그림들속에 있는 여자의 얼굴이 전혀 예쁘지 않게 그려진 것과 대다수의 발레리나를 그린 그림들은 여성의 얼굴이 뚜렷히 그려지지 않은 점, 혹자는 뭉개진 듯 보인다는데....,                 드가가 어느 유명 작가 부부를 그리며 그의 부인을 예쁘게 그리지 않아 작가가 화를 내며 부인의 얼굴이 있는 부분의 그림을 찢어버린 것을 예로 들며 드가의 여성 혐오증을 설명한 TV프로도 있었다.(SBS)   드가가 여성 혐오를 가지게 된 이유는 어린시절 뛰어난 미모의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의 동생, 즉 드가의 삼촌과 불륜관계를 가진 것에 있다고 한다.(신비한 TV서프라이즈, MBC) 더구나 드가에 대한 글들 중에서 그의 아버지는 그런 사실을 알고도 부인을 사랑하여 그러한 사실을 묵인했다고 한다. 어머니의 부정과 그 사실을 묵인하는 아버지, 이 모든 것을 알게 된 아들의 현실을 생각하면 그가 여성을 혐오한게 아니라 어머니의 부정으로 인한 여성에 대한 불신과 사랑이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면 그가 그린 발레리나와 여성들의 초상화를 보자. 노래하는 여가수나 발레리나의 얼굴이나 표정이 아름답지는 않다.           장갑 낀 여가수                          그러나 그가 여성을 혐오한다는 것은 사실이 아닐 것이다. 드가의 그림에서 발레가 주제인 경우, 드가는 남자 무용수를 그린 적이 없다. 그는 남녀가 같이 만드는 예술 장르로서의 발레에 관심이 있던게 아니고, 여성 발레리나에게 관심이 있었고 그들의 몸이 환상과 환멸의 대상이 되는 현실에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화가로써 여성의 얼굴에서 아름다움을 찾기보다는 여성의 움직임을 그렸던 그에게 사람들은 여성을 혐오했다는 낭설을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생각해 보았다.   그것을 보여주는 예로 발레 주제 그림에서 무대위의 모습이 담긴것은 그의 수백여점의 발레 주제 그림 중에 20%도 되지 않는다. 드가의 발레리나들은 대게 리허설이나 공연이 끝난 직후의 모습인 경우가 많다, 그에게 '무희의 화가'라는 별명을 붙여주고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절에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준 발레리나 그림들 중 유명한 그림인 [무희, The Star], 여기에서도 그의 관심은 무희뒤에 있는 검은 옷을 신사의 모습이 드가 특유의 리얼리즘을 보여주는 그림이다.                당시 파리 오페라하우스에 부설되어 있었던 발레 스쿨에는 10대 초반의 소녀들이 등록해서 춤을 배웠는데,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노동자 가정 출신이었다고 한다.오페라하우스의 부유한 고객은 이 소녀들을 공연 전후에 따로 만날 수 있었는데,놀라운건 이런 만남이 종종 매춘으로 이어졌다고 한다. 드가의 그림[스타]의 소녀는 요정같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환상의 대상이지만, 곧 검은 옷을 입은 신사가 암시하는 난잡한 현실, 환멸의 세계에 속하게 되는 안타까운 대상의 보여짐이었다. 또 하나 재미있는 사실은 드가는 발레 스튜디오를 너무 많이 드나들어 발레의 기본 스텝을 거의 외웠다고도.....,               근대적인 조각, 조각의 사실주의를 시도하다.   드가는 30대 부터 시력이 나빠져서 30대 후반에는 아예 한쪽 눈의 시력을 상실했다고 한다. 그런 그가 그림말고 관심을 가진 곳이 조각이다. 그는 예술에 대한 끊임없는 열정으로 화가였다가 조각가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조각가이기 보다는 화가이기를 원했다. 그저 조각은 자신이 사랑하는 그림을 대신하고자 한 일이라 여겼다고 한다.   당시 기존의 살롱 제도의 운영에 불만이 많았던 드가는 ‘리얼리스트를 위한 살롱도 하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드가는 카페 게르부아의 친구들과 모임을 조직해 1874년부터 열게 된 이 ‘새로운 살롱’은 1886년까지 8번 개최되었는데 포스팅의 윗 부분에도 언급했지만, 드가는 7번째 전시를 빼고 모두 참여했고, 이 전시에 출품을 하게 된 이후로는 살롱에 작품을 내지 않았다. 이 전시회에는, 1회 때 전시된 모네의 [인상, 해돋이]때문에 인상파전이라는 이름이 붙게 되었는데, 드가는 한 순간의 인상을 그대로 작품화한 적이 없고, 기억과 상상력을 동원해 화면을 구성했던 '인상파'라는 이름을 싫어했다. 그는 ‘사실주의자’로 불리길 원했고, 작업실에서 완성된 그의 작품은 야외에서 그려지곤 했던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그가 인상파전에 선보인 작품 중 가장 큰 화제를 모은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그가 평생 단 한번 전시한 한 점의 조각 [14세 소녀 발레리나 Little Dancer Aged Fourteen]였다.           [열네 살의 어린 무용수], 청동ㆍ모슬린 스커트ㆍ실크 리본, 24.5×35.2×98cm, 1880~1881, 노턴 사이먼 미술관.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은 1878년에 열네 살이 된 마리아 반 구템이라는 소녀였다. 이 작품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도 화제작으로 관심을 끄는데, 첫째가 화가의 조각품이라는 것이며, 주목할 점은 혁신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이 작품은 아무도 생각해내지 못한 청동 조각에 실제 천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허리에는 모슬린 스커트를 두르고 땋아내린 머리는 실크리본으로 묶어 등 뒤로 늘어트렸다.이는 당시 조각계의 불문율을 깨트린 파격으로 지금도 이런 작품은 없다고 한다.   [14세의 어린 발레리나]의 모델이 된 소녀의 어머니는 세탁부였다. 1880년대에 드가는 패션의 도시 파리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만들고 있는 모자가게 점원, 세탁부 등의 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쏟았다. 세탁부라는 주제는 드가가 존경한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 근대 생활의 화가, 판화가)가 처음으로 그림에서 다룬 바 있다. 파리 사회의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 이전에는 저널에서만 다뤄졌을뿐, 본격적인 회화의 주제가 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드가의 [다림질하는 여인들 Women Ironing]의 주인공은 19세기 말 노동 계급 여성의 상징이라고 불릴 만큼 유명해졌다.       The Laundress 노턴 사이먼 뮤지엄 소장.   그러면 독신남 드가는 평생 로맨스가 없었을까? 아니다. 그가 호감을 가진 유일한 여성이 있다. 큰 키에 호리호리한 몸매, 날카롭고 작은 눈에 강인한 턱을 가진 화가 '메리 카사트'(Mary Cassatt)였다. 그녀는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정착한 부유한 집안의 미국인으로 드가는 카사트에게 특별한 매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녀에게 마음을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이 가진 호감으로 그녀를 화폭에 담기도 했다. 드가가 그린 [카드를 쥐고 앉아 있는 메리 카사트], 세상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여성에 대한 환멸로 그녀조차 예쁘게 그리지 않았다고 했지만,그녀 자신의 초상화와 생김새는 별반 다름이 없는 모습은 그가 여성혐오자라서 여성의 얼굴을 일부러 밉게 그렸다는 설을 부정하는 확실한 면이다. 카사트는 평범한 가족의 소소한 일상을 즐겨 그렸는데 뛰어난 데생과 자연스러운 비대칭 구도는 드가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에드가 드가 [카드를 쥐고 앉아있는 메리 카사트]   카사트가 직접 그린 자신의 자화상(아래)과 드가의 그림(위)을 비교해보면, 자화상에 등장하는 카사트는 단아하고 얌전한 모습으로, 드가의 그림에 카사트는 느낌이 중성적이다. 이렇게 개인마다 관점은 틀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호사가들의 관심부분으로 드가와 카사트의 관계도 과연 마네와 모리소의 관계처럼 분홍빛이었을까? 확신할 수는 없지만, 카사트는 드가에 대해 연정을 품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드가도 역시 카사트와 결혼할 생각은 있었지만, 그 당시 드가는 무일푼이었고, 일정한 수입조차 없었다. 게다가 몰락한 집안을 먹여 살려야 하는 막중한 책임까지 지고 있는 상황에서 자존심 강한 드가가 선뜻 카사트에게 결혼하자고 나섰을 리가 없었다는 것이다. 세월은 지났고, 아무도 ‘만일’을 이야기할 수 없다. 이렇게 카사트와 드가의 숨겨진 로맨스는 인상파의 역사에서 마네와 모리소 못지않게 깊은 연막을 풍기며 궁금증과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있다.         메리 카사트의 자화상       예술의 가치와 과학의 가치는 만인의 이익에 대한 사욕이 없는 봉사이다. - 존 러스킨 -          
478    [쉼터] - 봄물은 흐르고... 댓글:  조회:1760  추천:0  2018-02-22
[서소문사진관] 다시 흐르는 청계천,           새들이 몸을 씻는다 최정동 2018.02.21.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서울의 도심하천 청계천에 봄이 왔다. 콸콸 소리를 내며 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마지막 한 덩이 남은 얼음은 세찬 물살에 씻겨 빠르게 녹는다.     비둘기들이 차례차례 묵은 때를 씻는다.     새들의 목욕법은 비슷하다. 머리부터 물속으로 다이빙한다.     한결 개운해졌다. 비둘기들은 목욕을 마친 뒤 청계천 변에 앉아 다시 꼬박꼬박 졸았다.     직박구리는 비둘기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버드나무에 앉아 시끄럽게 울다가도 사람이 접근하면 멀찍이 날아 간다. 바위 아래 은밀한 곳에서 물을 마시고 목욕을 한다.     그러다 물속으로 다이빙을 하기도 한다.     목욕을 마치면 다시 서울의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오리 부부가 급류를 거슬러 오르며 먹이를 찾다가,     곧 포기하고 물가의 말랑말랑한 흙에 부리를 박는다.     아직 공기는 차지만 바람 끝은 맵지 않다. 다시 흐르기 시작한 청계천에 사람들도 모인다. 캐나다 관광객이 징검다리에서 멋진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고,     나들이 나온 가족은 행운을 시험한다. ///최정동 기자
477    [쉼터] - 까치야, 나와 놀쟈... 댓글:  조회:1660  추천:0  2018-02-22
새 둥지 짓는 까치  2018.02.21.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봄을 앞두고 까치가 부지런히 새 둥지를 짓는 모습들이 눈에 띕니다. ///사진가 무지개/박노희 ====================== [포토뉴스] 창녕우포늪 노니는 황새 한쌍 강종효 2018.02.21.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20일 경남 창녕군 우포늪에서 천연기념물 황새 한쌍이 노닐고 있는 장면이 포착됐다. 창녕군 관계자는 "우포늪에서 한쌍이 발견된 건 30~40년 만이며 3~4년 전 한마리가 발견된 적이 있을 정도 아주 드문 경우"라고 설명했다. ///창녕=강종효 기자   
476    [그것이 알고싶다] - 동양화 화법 "홍운탁월"법?... 댓글:  조회:1729  추천:0  2018-02-21
홍운탁월 (烘云托月) 읽기 : hōng yún tuō yuè 뜻 : 구름을 드러내 달을 받치다. 1. 달빛을 밝게 묘사하기 위해 어스름한 구름을 이용하는 동양화 기법. 2. 한쪽 측면을 약간 과장되게 표현하여 주체를 또렷이 드러내다. 출처 : 원/왕시보 (극작가)/서상기/금성탄비  元·王实甫《西厢记》第一本第一折金圣叹批 “而先写张生者,所谓画家烘云托月之秘法。” 이선사장생자, 소위화가 홍운탁월 지비법. 전체적으로 생동감있게 묘사하는 것을,  화가들은 구름으로 달을 받치는 비법이라 한다. 동양화의 화법 가운데 ‘홍운탁월법(烘雲託月法)’이란 것이 있다. 수묵(水墨)으로 달을 그리려고 할 때 달은 희므로 색칠할 수 없다. 달을 그리기 위해 화가는 달만 남겨둔 채 그 나머지 부분을 채색한다. 이것을 드러내기 위해 저것을 그리는 방법이다.      남리 김두량, 「월야산수도」, 종이에 담채, 81.9×49.2㎝, 1744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사대부 출신으로 그림 그리기가 취미였던 남리 김두량(1696-1763)의 「월야산수도」는 보름달이 떠 있는 초겨울의 깊은 계곡을 보여줍니다. 낮게 깔린 이내 사이로 고목이 괴괴한 분위기를 더하는 가운데, 계곡물소리가 하얗게 피어나는 그림입니다. 초상화 작업을 할 때 인물의 외형을 통해 정신까지 그리듯이 남리는 치밀한 묘사로 개의 마음까지 그려내곤 했습니다(「흑구도」). 그만큼 묘사력이 뛰어납니다. 이런 실력이 발휘된 그림에서 전체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은 보름달입니다. 홍운탁월(烘雲拓月: 달을 그릴 때, 직접 달을 그리는 대신 달 주변에 구름만 그려서 달의 모양을 표현하는 기법)로 처리한 보름달이 숲속의 정취를 한껏 돋우어 줍니다.    조선시대(18세기중기) 김두량의 작품 는 풀밭에 옆으로 누워서 가려운 곳을 긁고 있는,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개의 모습을 그린 것인데, 개가 몸이 가렵고 근질거려서 앞발을 번쩍 쳐들고 이제 막 긁기 직전인 자세를 포착한 것이다. 포착된 동작과 털의 흐름을 한올 한올 가는 붓을 반복하여 표현함으로써 음영법이 잘 드러나 있다. 얄궂은 입가의 선하며 눈의 갑갑하다는 듯한 표정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어서, 활달하면서도 생동감이 넘치는 필치를 생생히 보여준다. 반면 배경의 고목은 거칠고 재빠르게 표현하여 개의 섬세함과는 대조를 이룬다.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출처] 홍운탁월 (烘云托月)|작성자 나무
475    [쉼터] - 사진으로 보는 자연세계... 댓글:  조회:1678  추천:0  2018-02-20
위키가 뽑은 '세계의 자연' 사진 베스트10  2018.02.16.  자동요약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위키미디어재단, 13만여 출품작 중 선정 [한겨레] 1위 바이칼호의 오고이섬. Sergey Pesterev, CC BY-SA 덤불 뒤에서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 재규어, 해를 등지고 목욕하는 물소…. 무료사진 공유 사이트 ‘위키미디어 코먼스'(Wikimedia Commons)를 운영하는 위키미디어재단이 지난해 상반기에 걸쳐 전세계 사진 애호가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세계 자연유산 사진 콘테스트 결과를 발표했다. 사진 기증을 촉진하기 위해 `위키 지구 사랑'(Wiki Loves Earth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 이번 콘테스트는 올해가 4번째다. 전세계 38개국에서 약 1만5000명의 사진가들이 총 13만2천여개의 사진을 출품했다. 위키미디어 코먼스에 등록된 이 사진들은 저작권 걱정 없이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콘테스트는 국립공원 등 각국의 보호구역에서 촬영한 사진을 대상으로 자연 유산으로서의 독특함, 미래세대를 위한 기록물 가치 등에 초점을 맞춰 진행했다고 한다. 1위는 러시아 바이칼호에 있는 오고이섬 사진이다. 사진가 세르게이 페스테레프의 작품으로 세계에서 가장 큰 민물호수인 바이칼호의 얼음 위에서 촬영한 것이다. 사진 중앙의 바위에 프레임을 맞추고, 하늘의 구름과 얼음의 균열을 함께 잘 포착한 점이 심사위원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끝이 뾰족한 바위와 그 밑에 쩍쩍 갈라져 있는 얼음이 어우러져 바이칼호의 찬 기운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 2위 응시하는 재규어. Leonardo Ramos, CC BY-SA 4.0. 2위는 세계 최대의 담수 습지 생태계 가운데 하나인 브라질 판타나우 보존지구의 재규어다. 불확실성을 상징하는 어두운 숲을 배경으로 재규어의 표정을 돋보이게 한 점이 좋은 평가를 받았다. 3위 유라시아 저어새. Ryzhkov Sergey, CC BY-SA 4.0. 3위는 우크라이나 다뉴브 생물권 보호구역에 있는 유라시아 저어새다. 물에 비친 모습이 마치 예술작품을 연상시키는 점, 서로를 쳐다보며 뭔가를 교감하려는 듯한 새 두 마리의 역동성이 좋은 점수를 받았다. 4위 목욕하는 물소. Candra Firmansyah, CC BY-SA 4.0. 4위는 인도네시아 동부 자바의 발루란국립공원에서 물놀이를 즐기고 있는 물소다. 아침녘인지 황혼녘인지 밝히지는 않았지만 불그스름한 햇빛 조명과 거무스름한 물소 색상이 대비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점에서 박수를 받았다. 5위 풀뜯는 순록. Siri Uldal, CC BY-SA 4.0 . 5위는 풀을 뜯고 있는 노르웨이 스발바르제도 스피츠베르겐섬 사센뷘소우란국립공원의 순록 3마리다. 동물에 명확한 초점이 있는 점, 갈색에서 파란색까지 색의 변화가 좋았다는 평가다. 6위 밤하늘의 은하수. EduardoMSNeves, CC BY-SA 4.0. 6위는 브라질 동북부 페드라 아줄(포르투갈어로 파란돌이란 뜻) 지역에 있는 한 주립공원 밤하늘에 떠 있는 은하수다. 7위 무표정한 오랑우탄. Ridwan0810, CC BY-SA 4.0. 7위는 말레이제도 보르네오섬의 오랑우탄. 무표정한 모습이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분위기를 풍긴다. 8위 황혼녘의 바위들. Пивовар Павло, CC BY-SA 4.0. 8위는 황혼빛을 받아 빨간색조를 띤 우크라이나 서부 폴랴니츠키조경공원의 도부쉬바위 군상. 9위 공중에서 본 호수섬. Vadym Yunyk, CC BY-SA 4.0 9위는 공중에서 본 우크라이나 짜릴하크섬 국립자연공원. 400개가 넘는 작은 호수들이 있으며 독특한 동식물들이 잘 보존돼 있다. 크리미아반도 남쪽에 있다. 10위 등 타는 청개구리. Renato Augusto Martins, CC BY-SA 4.0. 10위는 동료의 등을 타고 넘어가는 청개구리. 밑에 있는 청개구리의 게슴츠레한 눈이 지쳐보인다. 브라질에서 촬영된 것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느 지역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곽노필 선임기자 
474    [록색문학평화주의者] - 봄이 오기는 오는 모양이라카이... 댓글:  조회:1963  추천:0  2018-02-08
봄을 기다리는 직박구리  2018.02.07.  SNS 공유하기   음성 기사 듣기   인쇄하기 새창열림 글씨크기 조절하기   대구 두류공원에서 만난 직박구리가 빨간 열매를 먹고 있는 모습. ///사진가 황홀한공자
473    [동네방네] - 앉아서 세계려행 하다... 댓글:  조회:1145  추천:0  2018-02-07
가오징 1호 위성이 전송한 고화질 사진 공개 [ 2018년 02월 07일 ]     [인민망 한국어판 2월 6일] 지난 1월 31일 중국쓰웨이처후이기술유한공사(中國四維測繪技術有限公司)의 소식에 따르면, 최초의 0.5m급 고해상도 상업용 원격탐사위성인 ‘가오징(高景) 1호’가 최근 4개 위성이 팀을 이룬 후 처음으로 고해상도 사진을 전송했다. 가오징 1호 03•04 위성은 지난 1월 9일 성공적으로 우주로 발사됐으며, 궤도를 돌고 있던 01•02 위성과 같이 팀을 이룸으로써 서비스 능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현재 중국 국내에서 민간용 원격탐사위성 중 ‘가장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전 세계 어디든 1일 이내에 다시 찾아갈 수 있으며, 전 세계의 80% 이상 지역을 매일 2번씩 갈 수 있다. 이밖에도 촬영과 동시에 전송할 수 있으며, 사진 전송 효율을 대폭 끌어올렸다. 가오징 1호가 전송한 고해상도 사진을 함께 감상해 보자. (번역: 이세현) 원문 출처: 科技日報 뎬츠(滇池)국제컨벤션센터는 윈난(雲南, 운남)의 랜드마크이다. 사진 속 건물을 우주에서 내려다보니 마치 공작새가 깃털을 펼친 모습이다. 풍부하고 선명한 색상과 촘촘한 철근 구조는 보는 이로 하여금 마치 눈앞에서 보는 것처럼 실감 나게 해준다. 궁(故宮, 자금성)은 중국 명청(明淸)대 황제의 궁전이었다. 사진 속 태화전(太和殿)은 금빛으로 휘황이고, 유리 기와는 밝게 빛나고 있다. 관광객 또한 끊이지 않는다. 싼야(三亞, 삼아)는 열대 해변 풍경의 특색을 가진 국제관광 도시이다. 사진 속 다둥하이(大東海) 관광구의 시설이 매우 깔끔하게 갖춰져 있고, 바닷가에 펼쳐진 파라솔과 비치 체어들이 정갈하게 배열되어 있다. 인파 또한 매우 북적인다. 101빌딩은 중국 타이완(臺灣) 타이베이(臺北)시에 있으며, 현지의 랜드마크로 꼽힌다. 508m의 높이로 인해 매우 긴 그림자가 만들어졌다. 지붕 모서리가 매우 선명하며, 자세히 보면 층층이 나타난 건축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두바이 국제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바쁜 국제공항이며, 모든 종류의 비행기 이착륙이 가능하다. 사진 속 공항 활주로에 마침 에어버스 380이 이륙 준비를 하고 있다. 공항 지상 표지까지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는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다. 사진 속 부르즈 할리파는 3개의 꽃잎과 같이 층층이 포개져 있다. 건물 아래의 수영장과 분수 설비들이 매우 선명하게 보인다. 인민망
472    {이런저런} - 사진은 강력한 무기 댓글:  조회:1248  추천:0  2018-02-03
50년 전 '사이공식 처형' 사진의 두 주인공은 (ZOGLO) 2018년2월2일 AP통신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가 1968년 2월 1일 전쟁 중이던 베트남 사이공(현 호찌민시)에서 촬영한 '사이공식 처형' 사진. 이 사진은 미국 내 반전 여론을 들끓게 했다. /AP 연합뉴스 딱 50년 전인 1968년 2월 1일 한 장의 사진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미국의 여론을 ‘혐오’로 돌려세웠다. 통신사 AP를 통해 전 세계에 뿌려진 사진이었다. 사진은 그날 베트남 경찰청장 구옌 곡 로안(Loan) 준장이 사이공(현 호찌민시) 거리에서 생포된 베트콩의 간부 구옌 반 렘 머리 가까이에 권총을 갖다대고 즉결 처형하는 장면이다. 이 사진은 ‘사이공식 처형(Saigon Execution)’이라 불리며 전 세계에 충격을 줬다.   이틀 전 음력 1월 1일(1월 30일)을 맞아 북베트남 인민군과 베트남 내부의 공산 게릴라인 베트콩은 베트남 전역에서 ‘구정(舊正) 공세’를 개시했다. 수십 곳의 도시에서 시민을 잔혹하게 죽이고 불을 질렀다. 로안 준장은 AP 사진기자 에디 애덤스와 NBC 방송 카메라 앞에서, 그날 집단 매장지에 은신했다가 붙잡힌 구옌 반 렘을 쏴 죽였다. 렘은 로안의 부하 일가족 7명을 죽인 혐의도 받았다.   애덤스는 처음엔 그저 ‘권총 위협’ 정도로만 생각하고 카메라를 들었다가 총알이 렘의 머리를 관통하는 순간을 동시에 찍었다. 이듬해 이 사진으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사진 속 로안은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인에게 “냉혹한 살인마”로 찍혔다. 사진을 찍은 애덤스도 그렇게 생각했다가 나중엔 변했다. 이후로도 로안과 계속 접촉한 그는 당시 상황을 자세히 전해 들었다. 로안은 “바로 밑 부하에게 ‘즉결 처분’ 명령을 내렸으나 망설이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직접 쐈다”고 했다. 로안은 애덤스에게 “내가 망설이면 누가 나를 따르겠는가”고 말했다. 로안이 ‘구정 공세’ 첫 사흘 동안 베트남 군경(軍警)을 독려해 사이공 함락을 막을 수 있었다는 미군 연락 장교의 증언도 있었다. 계속 전쟁을 취재하며 로안을 더 알게 된 애덤스는 나중에 “그는 그 시대 베트남의 산물(産物)이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로안은 미국에선 이미 ‘괴물’이었다. 1975년 베트남 패망 후 미국에 도착했지만 추방 위기에 몰렸다. 애덤스가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하고 나선 덕분에 버지니아주 북부에 정착했다. 이어 햄버거와 피자, 베트남 음식을 파는 식당을 운영했지만, 1991년쯤 ‘정체’가 드러나 폐업했다.   1998년 7월 로안의 사망 소식에 애덤스는 “그 사진에선 두 사람이 죽었다. 장군은 베트콩을 죽였고, 나는 카메라로 장군을 죽였다. 그리고 난 영웅이 됐다”고 말했다. 2004년 숨진 애덤스는 “사진은 강력한 무기이지만, 딱 한순간만 골라 찍어 정확한 의미를 줄 수 있는 촬영 전후의 순간과는 단절된다”는 말도 남겼다. ///조선일보
471    [쉼터] - 사진아, 나도 어디 한번 찍어나보쟈... 댓글:  조회:1736  추천:0  2018-02-02
2017년 최고의 항공사진, '북극곰의 점프'. [ 2018년 02월 01일 ]     DJI-스카이픽셀 사진전서 대상을 수상한 프랑스 사진작가 플로리앙 르두의 작품 ‘하늘에서 본 북극곰’. [사진 SkyPixel, Florian Ledoux] DJI와 공동으로 운영하는 세계 최대 항공 촬영 커뮤니티 사이트 스카이 픽셀(SkyPixel)이 2017년 사진 콘테스트 우승자를 1일 발표했다. 이번 콘테스트는 풍경, 인물, 스토리 세 가지 부문으로 나눠 진행했으며, 지난해 10월부터 약 두 달간 141개 국가에서 4만4000건 이상의 작품이 접수되며 성황리에 마무리됐다.   대상은 프랑스 사진작가 플로리앙르두의 작품 ‘하늘에서 본 북극곰’이 수상했다. 팬텀 4 PRO를 이용해 캐나다 누나부트에 서식하는 북극곰이 유빙에서 점프하는 아름다운 순간을 담았다.     르두는 “야생에서 놀라운 광경을 많이 봐왔지만, 이 순간이 내가 본 장면 중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될 정도로 인상 깊었다”며 “미래 후손들도 지금 우리 세대가 본 북극 야생동물의 아름다움과 자연의 웅장함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스카이 픽셀 심사위원이자 호주 출신 사진가, 영화제작가,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겸하고 있는 재라드 성은 “사진의 종류에는 크게 작가들의 탁월한 기법으로 감명을 주는 사진과 감정을 전달함으로써 감동을 주는 사진 2종류가 있다”라며 “이 사진은 후자의 케이스로 현재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기후 변화의 위기를 떠올리게 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르두는 부상으로 DJI 인스파이어 2를 포함한 약 1600만원($1만5100) 상당의 상품을 받았다.   대상 외에도 각 부문에 전문가 및 애호가 그룹으로 나눠 1등, 2등, 3등 수상자가 선정됐다. 수상작들은 상하이의 190년 된 낡은 건물에서 춤을 추는 소녀부터 기후 변화가 불러온 환경 변화 등, 다양한 시각으로 담은 세상을 선보였다.   대니 정 DJI 마케팅 부사장은 “2017년 스카이 픽셀 사진 콘테스트는 지난해에 이어 접수 기록을 경신하며 세계 최대 규모의 항공 촬영 사진 콘테스트로 자리 잡았다”라며 “사람들이 세상을 독창적이고 고유한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태어난 스카이 픽셀은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장면들을 공유하는 글로벌 플랫폼으로 우리가 사는 세상의 기록을 남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수상작은 조쉬랍 타임지 멀티미디어 편집자 및 국제 포토그래피 센터 교수, 수상 경력이 있는 사진가이자 콘텐츠 제작자인 팻 케이, 세계 각지에서 풍경과 야생동물을 촬영하는 사진가인 크리스 맥레넌 같은 각 분야의 권위자들이 심사를 통해 선정했다.  사진 크게보기 풍경 프로페셔널 부분 1위 수상작인 Zay Yar Lin의 ' Sun's Up, Nets Out' [사진 SkyPixel, Zay Yar Lin ] 사진 크게보기 풍경 프로페셔널 부분 2위 수상작인 Drone Hikers의 Comet Into Darkness.[사진 SkyPixel,Drone Hikers] 사진 크게보기 풍경 아마추어 부분 1위 수상작인 Trung의 Lobsters Farm [사진 SkyPixel ,Trung] 사진 크게보기 풍경 아마추어 부분 2위 수상작인 Javier del Cerro의 'GEOMETRY OF LIQUID GOLD' [사진 SkyPixel, Florian Ledoux ] 사진 크게보기 최고 인기작 탑 10중 하나인 mark calayag의 'Plane in the Forest'. [사진 SkyPixel, mark calayag] 사진 크게보기 최고 인기작 탑 10중 하나인 Eberhard Ehmke의 'white wonderland'. [사진 SkyPixel, Eberhard Ehmke] 사진 크게보기 미수상작 탑 9중 하나인 Abdullah Alnassar의 'The path of camels across the sands'.[사진 SkyPixel,Abdullah Alnassar ] 사진 크게보기 미수상작 탑 9 중 하나인 olivier의 'ELEMENTS'. [사진 SkyPixel, olivier]    사진 크게보기 미수상작 탑 9 중 하나인 LENG_VISION의 '抓住秋天的尾巴'. [사진 SkyPixel, LENG_VISION] ///중앙일보
470    중국 조선족 민속화가 - 림룡순 댓글:  조회:1946  추천:0  2018-01-28
   ◐ 동양화 최고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 민족작가, 재중교포 림룡순(1955년~) 개인전이 2008년 3월 22일부터 포털아트 2층 전시실에서 개최되었다    ◐  림룡순 화백은 고조선, 고구려의 땅에서 우리의 전통을 지키며 우리 부모 형재의 삶을 화폭에 담아 오고 있다. 그 가 창작한 민속화, 역사화가 전시된다    ★  우리는 한국화라고 하고, 북한은 조선화라고 하고, 중국은 국화라고 한다. 림룡순 화백 작품은 한국화, 조선화, 국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작 품 명 : [봄날의춤] 작품규격 : (69cm x 96.5cm 약35호)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秋野騎射(추야기사) 작품규격 : (68.5cm x 93cm 약33호)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秋趣(추취) 작품규격 : (100.5cm x 68.5cm 약36호)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산리목동(山里牧童) 작품규격 : 약17.3호(68cm x 52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산춘정야(山春靜夜) 작품규격 : 약28호(85cm x 65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노반(老伴) 작품규격 : 약25호(82cm x 59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심산노손(深山老孫) 작품규격 : 약25.3호(85cm x 58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모정소감(茅亭小?) 작품규격 : 약31호(89cm x 68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반산월잠간례(攀山越岑?禮) 작품규격 : 약23.5호(79cm x 58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강월한촌(江月寒村) 작품규격 : 약25.3호(81cm x 61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하욕소성(夏浴笑聲) 작품규격 : 약46.4호(129cm x 67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월하(月下) 작품규격 : 약37호(68cm x 101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추산명정(秋山明淨) 작품규격 : 약26호(82cm x 62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장하촌월(長夏村越) 작품규격 : 약25.4호(80cm x 62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신설과산(晨雪過山) 작품규격 : 약55호(123cm x 84.5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파식(婆食) 작품규격 : 약36호(94cm x 72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추성재산중(秋聲在山中) 작품규격 : 약41.7호(118cm x 65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강촌소하(江村銷夏) 작품규격 : 약26.3호(83cm x 62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축수(祝壽) 작품규격 : 약46호(104cm x 82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신풍(晨風) 작품규격 : 약46.4호(133cm x 65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우후산광(雨後山光) 작품규격 : 약44.5호(129cm x 64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린거(隣居) 작품규격 : 약26.7호(83cm x 63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소원추색(小圓秋色) 작품규격 : 약26.4호(82cm x 62.5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솔교도 작품규격 : 약46.3호(104cm x 83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춘농산복(春濃山馥) 작품규격 : 약26호(83cm x 62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춘풍함소(春風含笑) 작품규격 : 약20.5호(83cm x 48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3        작 품 명 : 원방래객(遠方來客) 작품규격 : 약24.4호(82cm x 58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산구학생(山溝學生) 작품규격 : 약36.6호(99cm x 69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반우취면(伴牛醉眠) 작품규격 : 약58호(137.5cm x 84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석양무한호(夕陽無限好) 작품규격 : 약23호(80cm x 56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야연도(夜宴圖) 작품규격 : 약125.6호(208cm x 118cm) 장 르 : 천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4        작 품 명 : 여서문래료(女壻們來了) 작품규격 : 약34호(66.5cm x 97.5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6        작 품 명 : 연우추심(煙雨秋深) 작품규격 : 약24.3호(75cm x 63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5        작 품 명 : 월원인수(月圓人壽) 작품규격 : 약103호(173cm x 108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작 품 명 : 춘경여경(春耕麗景) 작품규격 : 약28호(83cm x 66cm) 장 르 : 종이에 먹, 분채, 석채 창작년도 : 2008            在中 민족화가 림용순  ● 1955. 중국 길림성 집안시 출생 ● 1974. 길림성 중점작가 12명 중 최연소 작가로 선정. (당시 19세) ● 1976년 영화 삽화 작업 ● 1978년 중국 로신 미술대학교 졸업 ● 1984년 혼인 ● 1998~2004년 야야 동화 제작학교 교장 역임 現 : 중국 길림성 집안시 소화원 부원장 現 : 미술협회 부원장 ================== 동양화 최고작가 중국 교포 작가이자 동양화 최고작가로 불리는 림룡순 작가가 최근 한국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열었다. 림룡순 작가는 중국에서 태어나 중국에서 계속 생활했음에도 불구하고 60여 점의 작품에서 고조선, 고구려의 땅에서 한국의 역사와 전통을 지키는 한민족의 삶과 정서를 그림으로 표현했다. 림룡순 작가는 어린 시절부터 그림에 남다른 두각을 나타냈다. 1955년 길림성의 한적한 농가에서 태어난 림룡순 작가는 한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9세 때는 중국 길림성에서 선정한 중점 작가 12인 안에 선정되기도 했다. 중점 작가란 말 그래도 가장 중요한 작가라는 말로, 림룡순 작가는 길림성이 선정한 12명의 중점 작가 중 최연소 나이로 선정되었다.  사실 소수민족으로 화가 생활을 해서 인정받는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림이란 볼 때는 좋지만, 화가 입장에서는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어려움이 많은 작업이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는 비용이 필요하다. 림룡순 작가의 어린 시절은 고난하고, 시골이라 종이를 구하기가 어려워 나뭇잎, 벽 등에 그림을 그렸다. 당시는 열정이 있어도 조건 때문에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중점 작가에 선정되면서 이를 계기로 림룡순 작가는 국가에서 제공하는 숙소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림룡순 작가의 작품들은 주로 한민족들의 삶에 대한 내용으로 고조선, 고구려의 땅에서 우리의 전통을 지키며 우리 부모 형제의 삶을 담고 있다. 우리 민족의 서민생활을 담은 민속화와 우수성이 담긴 역사화를 주로 하고, 한국은 한국화, 북한은 조선화라고 하고 중국은 국화라고 한다. 림룡순 작가의 작품에서는 한국화, 조선화, 국화의 진수를 볼 수 있다. 앞으로의 계획 림룡순 작가는 현재 고구려왕들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화를 진행 중에 있다. 고구려 28대 왕 중 현재 12대 왕까지 절반 정도 진행 중이고, 이 작품은 20m가 넘는 대작이다. 앞으로 4,5년 정도의 기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고,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을 만들기 위해 고구려 관련 자료와 박물관을 다니며 작품 완성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림룡순 작가는 자신의 인생 목표로 고구려왕을 그리는 것으로 삼고 있으며, 화가로서, 앞선 선배로서 우리 역사의 뿌리를 찾아 널리 알리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있다. ========================= 동양화 최고작가로 평가 받고 있는 민족작가, 교포작가 림룡순(1955년~) 개인전이 3월 22일부터(2008년) 포털아트 2층 전시실에서 개최된다. 림룡순 화백은 고조선, 고구려의 땅에서 우리의 전통을 지키며, 우리 부모 형재의 삶을 화폭에 담아 오고 있다. 그 가 창작한 민속화, 역사화가 전시된다. 우리는 한국화라고 하고, 북한은 조선화라고 하고, 중국은 국화라고 한다. 림룡순 화백 작품은 한국화, 조선화, 국화의 진수를 보여준다. 그의 작품은 서민들의 삶을 꾸밈없이 순수하게 고스란히 화폭에 담았다. 그의 작품 중에는 20m가 넘는 역사화 대작들도 있다. 포털아트 김범훈 대표는 "포털아트는 미술품 전문 판매사로 3만점 이상의 작품을 판매했다. 전세계에서 가장 많은 작품을 판매한 미술품 전문 판매사다."며 " 지금까지 보아온 작품만해서 수십만점이 넘고, 국내 작가 수백분, 해외 작가 수백분의 작품을 소개하였지만, 꾸밈없는 순수한 우리 부모 형재의 삶을 고스란히 담아낸 유일한 작가로 동양화 최고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고 설명했다. 림용순 화백은 1955년 길림성의 한적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한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9세에 이미 최연소로 길림성이 선정한 12명의 중점작가로 선정되어, 국가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창작을 계속하면서 중국 로신미술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럼에도 그는 중국에 동화되지 않고 "우리 고조선, 고구려의 땅에서 고구려의 후손으로 우리 민족의 삶과 우리 부모 형제의 삶을 꾸밈없이 순수하게 화폭에 담아왔다." 그는 직접 한국을 방문하여 토요일(3월 22일) 오후 3시 시간에 포털아트 3층 세미나실에서 미술품 애호가들에게 그이 작품세계를 직접 설명한다. ◆ 우리는 우리 교포인 조선족을 우리 스스로 비하는 느낌을 만들고 있는것이 아닌지 우려된다. 그러나 조선족은 고조선에서부터 고구려의 영토에서 지금까지 민족의 소질과 민족의식을 보존하면 자긍심을 가지고 살아오면서 아무리 가난해도 자신 공부만은 꼭 시켜는 것까지 같은 우리 형제다. 이러한 우리 민족의식, 우리 아버지 어머니가 살아 온 삶, 우리의 풍습과 문화, 고구려의 역사를 자긍심을 가지고 화폭에 담아 온 분이 있다. 그분이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라고 말하는 재중동포화가 림룡순 화백이다. 포털아트는 북한의 조선화, 한국의 한국화, 중국의 국화를 소개하였다. 그러나 이를 통합한 작품, 이 모든 것을 녹여낸 화가의 작품을 소개하지 못했다. 어느 날 오후 교포작가라는 분이 찾아왔다. 그의 작품을 보는 순간, 나는 우리 화가 보다, 북한 화가보다, 우리의 부모님들의 진솔한 삶을 완벽하게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화백에 담은 작품을 보고 놀랐다. 림용순 화백은 길림성의 한적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그림 실력을 인정받아 한족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19세에 이미 최연소로 길림성이 선정한 12명의 중점작가로 선정되어, 국가가 제공하는 숙소에서 창작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고, 창작을 계속하면서 중국 로신미술대학교를 졸업했다. 그는 "우리가 고조선, 고구려 후예임을 일깨워 주고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후대에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어렸을 때부터 밤낮으로 그림에만 매달려왔다"고 한다. 그의 작품은 2가지 장르로 나누어진다. '서민적 미감을 담은 민속화' 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화폭에 담은 기록화'다. 그는 "문화가 있어야 생명이 있다." 신념으로 우리 민족의 삶 그리고 현재 우리 교포분들의 삶을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그의 기록화는 오랜 기간 창작한 대작들이다. 그는 기록화 한 작품을 완성하는데 3년을 걸려 완성한 작품도 있다. 그는 어떠한 화가도 하지 못한, 우리의 삶을 예술적으로 승화시켜 화폭에 담아내고 있다. 이번 림룡순 화백 초대전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우리 땅에서 민족의 자긍심과 전통을 소중히 간직하면서 살고 있는 우리 형제들의 삶, 우리 민족의 고유한 세태 풍속, 웅비한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를 만나 실 수 있습니다. ///'No.1 IT 포털 ETNEWS'  
469    [이런저런] - 세계 기네스기록 = "눈밭 그림" 댓글:  조회:1825  추천:0  2018-01-27
  1월 20일 작업자들이 눈밭에 그림을 그리고 있다.                                                                                   [인민망 한국어판 1월 23일] 1월 20일 지린(吉林, 길림)성 퉁화(通化, 통화)시 눈밭에 그려진 2221.7㎡짜리 ‘답설심매(踏雪尋梅: 눈을 밟으며 매화를 찾다)’ 테마의 그림이 세계 기네스기록을 경신했다. 해당 그림은 모두 식용 가능한 염료를 사용했으며 총 60명이 20일 동안 완성했다고 한다. (번역: 은진호)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1월 20일 뤄충(羅瓊) 기네스 검사관이 ‘눈밭에 그린 가장 큰 그림’ 증서를 전달하고 있다.
468    [이런저런] - 얼마나 추울가?... 꽁꽁 언 상어에게 물어보라... 댓글:  조회:1932  추천:0  2018-01-24
  폭설도 축구팬들의 열기를 식히지 못했다.                                                                                                                   [인민망 한국어판 1월 12일] 중국에 내린 폭설이 당신의 SNS를 가득 메웠다. 북미 지역 사람들이 폭설로 고통받고 있다. 북극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그들에게 불어온다. 강추위와 폭설로 상어가 얼어 죽었고 바다거북도 얼어 죽었다. 펭귄은 온실로 옮겨졌고 에스키모 사람들은 눈물을 머금고 북극으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미국 알래스카주 오마하는 영하 29도를 찍었고 이는 130년 만에 최저 기록이다. 사우스다코타주 애버딘은 영하 36도를 찍으며 1919년 기록한 최저 기록을 경신했다. 매사추세츠주는 얼마나 추울까? 바닷속 상어에게 물어보면 그 답이 있다. 폭풍설은 북미 사람들에게 화이트 크리스마스를 가져왔지만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회오리바람’의 영향으로 1월 4일 동북 지역에 폭풍설 피해가 발생했고 4,000개 정도의 항공 노선이 취소됐다. 미국 CBS는 폭설로 13명의 사람이 죽었다고 보도했다. 많은 지역, 수천에 달하는 사람들이 폭설로 정전 및 휴교 등의 영향을 받았다. 뉴욕주, 뉴저지주, 조지아주, 노스캐롤라이나주 지역에 긴급 상황 상태가 발령됐다. 뉴욕 길거리에 제설차가 모습을 드러냈다. 다행인 것은 폭설과 한파는 북미 사람들을 패닉으로 이끌지 않았고 즐길 수 있는 방법을 일깨워 주었다. 캐나다에서 면요리를 먹는 방법 얼어버린 호수 위에서 아이스하키를 즐기는 사람들 극한의 날씨가 지나고 기온이 올라갈 것이라는 좋은 소식도 전해졌다. (번역: 은진호) ///중국일보(中國日報)
467    [이런저런] - 100년전 반고흐 그림 해빛 보다... 댓글:  조회:1207  추천:0  2018-01-20
반고흐의 진귀한 스케치 작품 100년만에 공개 (ZOGLO) 2018년1월17일 반 고흐의 스케치 작품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석장' [AP=연합뉴스] (서울=연합뉴스) 한상용 기자 = 빈센트 반 고흐의 진귀한 스케치 작품이 100년 만에 일반인에게 공개된다. 17일 영국 가디언과 AFP통신에 따르면 네덜란드 출신의 '불멸의 화가' 반 고흐와 17세기 유명 화가 호페르트 플링크의 '잊혀 있던 작품' 4점이 100년 만에 대중에 선보인다. 이들 작품 중에는 개인 소장품으로 여태껏 공개되지 않았던 반 고흐의 단색 스케치 그림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석장'도 포함됐다.  이 그림은 반 고흐가 벨기에 앤트워프와 프랑스 파리에서 살던 1886년 때 그렸던 작품이다. 당시 반 고흐는 프랑스의 저명한 화가 페르낭 코르몽의 스튜디오에서 작업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채석장'은 개인이 소장한 탓에 대중에 알려지지 않다가 2013년 진본인지 가리기 위해 반 고흐 박물관에서 확인 작업을 거쳤다.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박물관의 선임 연구원 테이오 메이덴도르프는 "이 작품이 이쪽에 오고 나서 우리는 진짜 반 고흐의 것인지 확인을 했다"며 "우리는 그 출처에 대한 의문에 강한 흥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2013년 진본임을 입증했지만, 소장가가 작품의 공개를 원하지 않아 몇 년간 랩으로 싼 채 보관해 왔다"고 전했다. 그는 또 "이러한 발견은 항상 위대하다"며 "이러한 일은 정말로 예외적으로 종종 일어나지도 않는다"고 설명했다. 애초 이 작품은 반 고흐 남동생 테오의 부인이 소유했다가 1917년 개인 소장가에게 팔렸다. 반 고흐의 또 다른 스케치 작품 '몽마르트르 언덕'은 16일 네덜란드 중부 '싱어 라렌' 박물관의 전시실에서 공개됐다. 이 작품 역시 반고흐 박물관이 진본임을 입증했다. 싱어 라렌 박물관은 성명을 통해 "두 스케치 작품에 사용된 문구류 종류는 같다"며 "그(반 고흐)가 1886년 겨울과 봄 자신만의 스타일을 여전히 찾고 있음을 멋지게 보여준다"고 평가했다. 렘브란트의 제자였던 플링크(1615~1660)의 미공개 작품 2점은 16일 암스테르담 박물관에서 1895년께 사라진 뒤 처음으로 일반 대중에 공개됐다. 반 고흐의 스케치 작품 '몽마르트르 언덕' [AP=연합뉴스]
466    [쉼터] = 50여년 사진기와 씨름한 사진작가 - 신승우 댓글:  조회:1157  추천:0  2018-01-09
“북국빙설 강성무송” 신승우촬영작품집 출간 [ 2018년 01월 08일 ]     신승우 프로필: 필명 신화(新华) 1946년 길림성교하출생 원 길림신문사 고급기자 중국촬영가협회, 중국예술촬영협회, 세계민간예술가협회, 중국서화예술가협회, 중국예술협회, 중국문예협회 회원 북경인민화원 종신원사, 중국조선족사학회리사, 중국서화명가연구회 부리사장, 중국당대예술가협회 부주석 40여년간 국내외100여개 신문잡지에 촬영, 판화, 전각, 시가 등 작품 1000여편 발표,, 선후로 “중국우수촬영가 중국문예 금작상”, “제1회 세계민간예술가 최고상 금비웅상” 등 다수 수상 “2008년 중국예술 올한해의 인물”에 선정 “중국당대전각가 500인”, “중국촬영가전집, 세계중국인문학예술명인록”, “중국당대촬영가작품감상집”, “감동중국 시대의 걸출신문인물풍채 작품집”에 입선 선후로“신승우사진미술전각작품집”, “신승우사진판화작품집”, “중국사진작가가 보는 세계-신승우사진작품집”, “북국빙설 강성무송” 등 12권의 작품집 발표 이번에 출간된 “북국빙성 강성무송”(중국시서화출판사 출판)신승우촬영작품집에는 신승우선생이 70년대부터 지금까지 40여년간 고향 길림시의 빙설과 무송을 배경으로 창작한 지방특색이 농후한 촬영작품 141점이 수록되였다. 길림시는 무송으로 세계에 유명하다. 겨울철 송화강량안의 기묘한 자연경관 및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카메라에 담은 사진들, 그속에는 신승우선생이 촬영예술을 향한 무한한 추구와 자연애, 인간애, 고향정이 다분히 녹아있다. 신승우선생은 길림신문사에서 은퇴한후 자신의 취미와 애호인 사진, 전각, 미술, 시가 작품의 정리에 모든 정력을 몰부어왔는데 “북구빙성 강성무송”신승우촬영작품집의 출간은2006년부터 시작된 “신승우사진미술전각작품집”, “신승우사진판화작품집”, “중국사진작가가 보는 세계-신승우사진작품집” 등 11권 신승우작품집에 이은 12번째 작품집이다. 신승우선생은 총 1000권 인쇄된 “북국빙성 강성무송”신승우촬영작품집을 올겨울 길림시무송빙성제개막식에 150권 증정했으며 기타는 여러 대학과 지인들에게 기증할 타산을 밝혔다. 신승우선생이 지금까지 출간한 12권의 개인작품집 모두 사비(약 20여만원)를 들여서 출판되였는데 판매는 단 한권도 하지 않고 국가도서관, 길림시도서관, 연변대학, 북화대학, 동북전력대학, 길림농업과학기술학원 등과 지인들에게 기증을 했다. “이번 작품집은 아마 내 생에 마지막작품집일거여.. 나의 작품세계를 유감없이 세상에 다 털어놓고 가는 기분이지. 후세들에게 남겨준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후련해.” “내가 태여나고 평생 살아온 고향에 대한 보답”이기도 하다고 말하는 신승우선생, 사진기를 만진지 50년이 넘는 로장 사진작가의 페부에서 우러나온 말에 가슴이 뭉클해온다 . ///길림신문 차영국 기자            
465    [이런저런] - 수자를 아는 머리카락... 댓글:  조회:1040  추천:0  2018-01-09
녀배우 8년동안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새해 맞이 [ 2018년 01월 09일 09시 34분 ]     외국의 한 여배우는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새해를 맞이했다. 그는 2010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년도를 그려 주변에 웃음을 선사한 이슈인물이다. ///봉황넷                                                  
464    [그것이 알고싶다] - 중국 국보급 10대 고전 名畵... 댓글:  조회:3928  추천:0  2017-12-26
  중국의 국보급 10대 고전 名畵       1. 晋. 고개지 《洛神賦圖》 낙신부도 2. 唐. 염립본 《步輦圖》 보련도 3. 唐. 장훤, 주방 《唐宮仕女圖》 당궁사녀도 4. 唐. 한황 《五牛圖》 오우도 5. 五代. 고굉중《韓熙載夜宴圖》 한희재야연도 6. 宋. 왕희맹《千里江山圖》 천리강산도 7. 宋. 장택단《淸明上河圖》 청명상하도 8. 元. 황공망《富春山居圖》 부춘산거도 9. 明. 구영《漢宮春曉圖》 한궁춘효도 10. 낭세령《百駿圖》백준도       ☜ 모든 작품사진을 클릭하면 큰 그림이 나옵니다.             1. 東晉 고개지의     27.1cm x 572.8cm , 北京故宮博物院         사랑의 슬픔을 그린 낙신부도(洛神賦圖) 동진때 유명화가 고개지(344-405)가 그린 산수 인물화로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관에 소장돼있다. 삼국시대 조조의 아들인 조식이 지은 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다. 조식이 낙수(洛水)를 지날 때의 감회를 지은 것인데, 내용은 낙수의 선녀 복비(宓妃)를 만나 사랑하지만 이룰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결국 헤어지는 슬픔을 묘사한 내용이다.  전하는데 의하면 조식은 견일녀라는 여인을 흠모하였는데 조조는 번연히 이를 알면서도 그녀를 조식의 형인 조비에게 시집 보낸다. 그러나 그녀는 행복하게 살지 못하고 그만 참언을 당해 죽음을 맞게 된다. 그제야 자신이 한 일을 후회한 조조는 조식을 궁중으로 불러 그녀가 시집올 때 가져왔던 옥과 보석으로 장식된 베개를 건네준다. 슬픔에 잠겨 집으로 돌아가던 중 낙수를 지나게 되었는데 조식은 그곳에서 견일녀의 영혼을 만나 사랑고백을 듣게 된다. 조식은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안타까움과 슬픔에 못이겨 시를 지었는데 그것이 바로 라고 한다.       2. (唐) 염입본의     38.5 x 129.6, 北京故宮博物院       토번사절단을 맞는 당태종- 보련도(步輦圖) 당나라 초기 염입본(?~ 673년)이 그린 보련도는 문성공주와 송찬감보의 정략결혼 내용을 담고 있다. 641년 당태종은 토번과의 관계를 공고히 하기 위해 문성공주를 토번의 국왕인 송찬감보에게 시집 보내게 되는데, 보련도는 당태종이 토번의 사신을 맞이하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오른쪽에 시녀들에 둘러싸여 앉아있는 이가 당태종이고 그를 마주한 붉은 도포의 관리는 전례관(典?官), 그 뒤는 토번의 사신 녹동찬, 그 다음 인물은 역관이다. 염입본은 당나라의 궁정화가로 그의 작품 대부분은 당태종과 연관되어 있다.         3. (唐) 장훤, 주방의     51.8 x 148,요령성博物館     51.8 x 140.8,1860年“火??明?”后被掠??流失海外,미국博物。     46 x 180 요령성博物?藏。     33.7cm x 204.8cm,故?博物院藏。     48.7 x 69.5 台北故?博物院藏。       당나라 미인도- 당궁사녀도(唐宮仕女圖) ‘당궁’은 당나라 때 궁중, ‘사녀’는 궁녀를 뜻한다. 당궁사녀도는 당나라 장훤(張萱 현종때), 주방(周昉779-805)이 그린 것으로 이들은 당나라때 가장 유명한 화가였다. 장훤과 주방은 귀족의 유락생활을 표현했고 사녀화와 초상화에 뛰어났다. 장훤은 당나라 귀족 부녀들의 아름다운 자태를 잘 표현할뿐 아니라 궁녀들의 처량한 생활을 교묘하게 화폭에 담아냈으며 주방은 장훤에게서 배운뒤, 독특한 화법으로 부녀자들의 풍만한 모습을 표현함으로써 일대의 화풍을 이루었다.             4. (唐) 한황의     28.8 x 139.8 , 北京故?博物院?藏珍品。       중국정부가 구매한 오우도(五牛圖) 두루마리 종이에 채색한 것이다. 당나라 한황(723-787)이 그린 것으로 굵은 선을 사용하여 소의 완만함과 무게감을 잘 표현하고 있다. 다섯마리의 소는 좌측에서 우측으로 일렬로 배열됐는데 그 외형적 특징이나 모습이 각양각색이다. 풀을 뜯고 있는가 하면 머리를 쳐들고 있으며 천천히 걷고 있는 등 소들의 모습에서 서로 다른 성격을 나타내고 있다.  ‘오우도’는 1950년대초 중국정부가 홍콩 경매시장에서 구매해 중국으로 돌아오게 된 명화이다. 당시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편지가 왔는데, ‘오우도’가 홍콩경매시장에 나타났으니 중국정부가 구매해 국보가 해외로 유실되지 않도록 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에 중국정부는 문화부 인사를 홍콩에 파견해 ‘오우도’의 진위를 감별 후 6만 홍콩달러에 사들였던 것이다. 한황 韓滉 (병)Han Huang (웨)Han Huang. 723~787. 한황은 중국 당나라 때의 화가·정치가로 생몰연대는 기원후723~787 로 알려져 있으며 자는 태충(太沖). 장안(長安:지금의 산시 성[陝西省] 시안[西安]) 사람이다. 그의 부친역시 정치가 였으며 본인도 지방관을 거쳐 중앙 조정에 들어가 평장사를 지내고 진국공에 봉해 지는등 요직을 거치며 경력을 쌓았다. 교양에 뛰어나 시서화에 능했고 역사에 밝았는데 서예는 장욱풍으로 그림은 육탐미의 비전을 이었다. 사녀도나 행렬도등이 유행하던 당시 화단은 극히 상류풍과 사치화려한 주제를 많이 다루었지만 그는 오우도를 통해 소를 그리는등 새로운 접근을 했다. 광초의 필의를 간직한 오우도 五牛圖는 지금도 명작으로 꼽히고 있으며 후대 화가 조자앙은 신령스런 기운이 생동하는 명작이라고 극찬했다.  그는 인물 묘사에도 능해 현존하는 작품으로는 〈문원도 文苑圖〉가 있다.     바로 아래 소개된 그림이 문원도인데 기역자로 꺽어진 나무에 팔을 걸고 대화하는 문관들을 묘사한 것이다. 고답적인 주제를 그리면서도 발랄한 영기와 심오한 자연의 기가 결합 조화되어 창의적인 느낌을 주는 명작이다.   당나라 사람들은 말을 좋아해서 는 여러 형태로 중국 예술 전통에 녹아 나타났고 당나라의 한간은 말을 잘 그리기로 유명했다.  그러나 한황은 모두 말을 그릴때 소를 그렸으니 그의 오우도는 그런 의미에서 독특한 작품이라고 하겠다. 소를 그린 작품은 동시대 미술에 흔치 않으며 한황의 묘사는 후대에 수묵 문인화와 결합하는 모티브가 되기도 했다. 아래는 오우도의 전체 이미지와 부분 묘사도 이다.             - 한황(韓滉) -                                               - 생몰년 : 723~787 - 국    가 : 중국 韓滉 723~787 중국 당(唐)나라(618~907)의 화가이며 정치가. 자(字)는 태충(太沖). 한휴(韓休, 673∼740, 중국 당나라 현종 때의 재상)의 작은아들로, 산시성(陝西省) 창안[長安, 지금의 시안(西安)]에서 태어났다. 동남 지방에서 관리(官吏)를 지냈으며, 나중에 조정(朝廷)에 들어가 검교좌복야동중서문하평장사(檢校左僕同中書門下平章事)를 지내고 진국공(晉國公)에 봉해졌다. 국가 통일을 유지하고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서예와 그림에 뛰어났는데, 서예는 장욱(張旭, ?~?, 중국 당나라의 서예가)을 배웠으며, 그림은 남조(南朝) 송(宋)나라(420~478)의 육탐미(378)를 배웠다. 인물화와 농촌 풍속화를 잘 그렸는데, 특히 소[牛]나 양 등의 동물을 그리는 데 뛰어났다. 이는 묘사의 초점을 상류 사회에서 농촌으로 옮긴 것으로, 화재(畵材)와 내용상 커다란 진보였다. [오우도(五牛圖)]를 통하여 놀랄 만한 관찰력과 표현력을 살필 수 있다. 필력(筆力)은 무거운 듯 거칠며 광초(狂草)의 필의(筆意)를 깊이 터득하였다. 원(元)나라(1271~1368) 초 서화(書畫)의 천재 조맹부(539)는 이 그림에 대하여 ‘신령스러운 기운이 꿈틀거려 세상에 보기 드문 명필이다.’라고 칭찬하였다. 이 밖에 작품으로 [문원도(文苑圖)]가 있다.    (五牛图,wǔniútú,오우도)    한황(韩滉)의 (723-787), 중국 10대 역대명화다. 몇개 없는 당대 지견화 작품 원작중 하나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본 중국화로 진국의 보배라 할만하다. 현재 베이징 고궁박물원에서 보관중이다. 마지본은 세로 20.8cm, 가로139.8cm이며, 작가의 인장은 없으나 14명의 이름이 적혀있다. 그림중에는 다섯마리의 각기 다른 형태의 소가 있다. 순박한 화풍과 뛰어난 예술적 기예로 당시대 최고의 수준을 표현했으며, 중국 10대 역대 명화 중 하나라 불리운다.   5. (五代) 고굉중의     27.9cm ?69cm, 北京故?博物院?藏珍品。         연회장면을 그린 한희재야연도 오대(五代)때 남당(南唐)의 화가 고굉중이 중서시랑 한희재 집에서 열리는 연회의 정경을 담아 군주에게 바친 그림이다. 그림은 음악을 듣는 장면, 춤 구경하는 장면, 휴식하는 장면, 손님과 작별하는 장면 등 서로 관련되면서도 독립된 5개의 장면을 담고 있다.  국사보다는 유흥에 빠져있는 남당의 군주는 한희재에게 재상을 위임하려 하지만 이를 회피하기 위해 한희재는 매일같이 집에서 연회를 열고 즐긴다. 군주는 화가 고굉중에게 몰래 진실을 알아오라 명하고 손님을 가장하고 한희재의 집을 찾은 고굉중은 연회가 열리는 장면을 머리에 새겨두었다가 그대로 그려서 군주에게 바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한희재야연도’이다. ‘한희재야연도’는 줄곧 중국 황실에 보존돼 있다가 마지막 부의황제 때 민간에 유출된다. 중국 근대 유명한 화가인 장대천은 자신의 모든 재산을 털어 ‘한희재야연도’를 구매 후 소장하고 있다가 해외 이주를 앞두고 중국정부에 헌납하였다고 한다. 이 그림을 연결하면 총 길이가 3m에 달한다.             6. (北宋) 왕희맹의 천리강산도     51.5 x 1191.5, 北京故?博物院?藏珍品。         천리강산도(千里江山圖) 북송(北宋) 시대 요절한 화가 왕희맹(王希孟1096~1119))이 18세에 그린 그림으로 현존하는 그의 작품으로는 유일하다. 높고 낮은 산세가 기복을 이룬 산과 산 사이로 이어지는 강이 신비한 청색, 녹색을 띠며 장관을 이룬다. 끝없이 펼쳐지는 산과 강의 모습, 힘차게 흘러내리는 폭포, 화려한 누각, 생활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세밀하게 그려져 있다. 이음새가 없는 비단에 그려진 그림으로 길이가 12m에 달한다. 2008베이징 올림픽 개막식에서 무용수들이 온몸으로 그림을 그리고, 완성된 그림 밑으로 LED화면을 통해 청록색의 중국 옛 산수화 영상이 펼쳐졌는데 그것이 바로 왕희맹의 ‘천리강산도’이다.             7. (北宋) 장택단의 청명상하도     24.8 x 528.7, 北京故?博物院?藏珍品。         청명상하도 ‘청명상하도’는 북송의 풍속회화 대가 장택단(1085-1145)이 청명절 시가지의 시끌벅적한 전경을 그린 그림이다. 5m 길이의 그림에는 도합 1,659명의 사람과 209마리의 동물, 수백여채의 집과 점포 등으로 가득 차 있다. 시장을 보거나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가마를 타고 가는 장면 등 인물들의 다양한 표정과 행동이 생기있게 그려져 있다.  ‘청명상하도’는 크게 3개 부분으로 나누어 볼수 있다. 첫부분은 시가지 외곽의 정경, 가운데는 강 옆의 번화한 모습, 뒷부분은 시가지 풍경을 그린 것이다.  현존하는 장택단의 작품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2005년에는 중국언론에서 ‘청명상하도’가 표구작업 중 일부가 잘려나갔다고 보도해 큰 관심을 끌기도 했다. 잘린 부분은 그림 첫부분 약 80cm 지점에 있는 암당나귀로, 길가 반대편의 숫당나귀를 향해 소리를 지르는 모습이며 그 옆에 쉬고 있는 사람, 차를 마시는 사람은 모두 이를 쳐다보고 있는 것이라 한다. ‘청명상하도’는 표구 전 정려판본(情?版本), 표구 후 당나귀의 머리부분만 남고 나머지가 지워진 실려판본(失?版本), 당나귀를 초가지붕으로 해석하고 그려 넣은 초붕판본(草棚版本), 무표정한 당나귀를 임모한 판본 등 4가지가 있으며 잘려나간 부분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8. (元) 황공망의 부춘산거도     33 x 636.9         부춘산거도(富春山居圖) 원(元)대 황공망( 1279~1368)이 종이에 그린 수묵화이다. 황공망이 82세 때에 3년에 걸쳐 완성한 작품으로 산수화의 걸작으로 꼽힌다. 부춘산은 항저우 근처의 산으로 황공망이 만년에 살던 곳이다. 그는 자신이 익숙한 산과 강의 풍경을 6m가 넘는 긴 두루마리에 꾸밈없는 기법으로 담아냈다.  이 그림은 순탄치 않은 소장내력을 갖고 있다. 청대때 이를 소장하고 있던 오문경이 죽으면서 평소에 자신이 아끼던 이 그림을 함께 태워 순장하도록 했던 것이다. 그림은 불더미 속에 던져졌는데 그의 조카가 구해냈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림은 두개 부분으로 나뉘게 되었다. 앞부분은 ‘잉산도(剩山圖)’라는 이름으로 현재 저쟝성박물관에 보존돼있고 뒷부분은 ‘부춘산거도’라는 이름으로 대만 고궁박물관에 보관돼있다.       9. (明) 구영의 한궁춘효도     37.2cm × 2038.5cm,?藏台北故?博物院。       한궁춘효도 명(明)나라 때 대표적인 화가 중 한 명인 구영(仇英)의 대표작품이다. 원래 가구에 기름칠을 하여 옻칠로 그림을 그리던 구영의 작품은 여타 다른 문인화가의 작품과는 전혀 달랐다. 그는 소설, 희극에 판화 형식의 그림을 많이 그려 유명세를 탔다.  ‘한궁춘효도’는 이른 봄 궁 안의 궁녀, 태자, 후궁, 환관 등 1백여 인물들의 사소한 정경을 담고 있다. 그림 속의 인물들은 차림새가 화려하고 다양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는 화가의 뛰어난 관찰력을 보여주고 있다. 섬세한 표현과 우아하면서도 아름다운 색깔로 후궁들의 일상생활상을 생동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구영의 필 끝에서 그려진 인물은 형상이 아름답고 선이 유창하게 흐르며 그 시대 풍조에 맞춘 판박이식 습성과는 구별된다. 그의 그림은 훗날 궁녀도 등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10. (淸) 낭세령의 백준도     102 x ?813, 目前保留在台北故?博物院         백준도(百駿圖) 청(?)나라 궁중화가였던 낭세녕(카스틸리오네1688~1766)이 그린 그림으로 현재 미국뉴욕 박물관에 소장돼있다.  낭세녕은 이탈리아인으로 강희제 때 선교사로 중국으로 들어왔다. 서양회화에 능통했던 그는 서양화가 최초로 중국의 재료와 도구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리고 동서양의 두가지 회화를 하나로 융합시켜 새로운 화풍을 만들었다.  청대는 중국 궁정회화의 전성기였으며 낭세녕의 이러한 화법의 영향으로 독특한 풍격의 청대궁정화풍이 형성되게 되었다. ‘백준도’는 낭세녕이 일생동안 그린 백여폭의 준마 작품가운데서 가장 성공적인 걸작으로 꼽힌다. 그림은 다양한 형태의 준마 1백필의 방목 서식하는 모습을 그렸는데 짙고 아름다운 색채와 복잡한 구도, 독특한 풍격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출처 :장계인의 그림 이야기    글쓴이 : 병풍산방 ============================================ 중화문화의 미... 중국 10대 명화 감상 [ 2017년 12월 27일 ]     당(唐)-한황(韓滉) 이 그림은 몇 안되는 당대 종이비단화 원화 중 하나이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종이화로 ‘진국(鎮國)의 보물’로 불리며,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안치되어 있다. 해외반출 불가.   오대(五代)-고훙중(顧閎中) 이 그림은 긴 두루마리 형태로 남당(南唐) 대신 한희재(韓熙載) 집에서 열린 연회 풍경을 담고 있다. 현존하는 오대 시기 인물화 중에서 가장 걸출한 대표작이다.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 중이다. 해외반출 불가.   송(宋) 모사본 원작 는 동진(東晉) 시대 저명한 화가 고개지(顧愷之)가 그린 것이며, 현재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소장하고 있는 것은 송(宋)대 모사본으로 삼국 시기 문학자 조식(曹植)의 를 근간으로 그렸다.   당(唐)-염입본(閻立本) 당(唐)대 시기 유명한 화가 염입본의 작품으로 원본 여부는 아직 확인되지 않다. 서화 감정단 측은 이 그림을 송(宋)대 모사본으로 여기지만 이것이 당대, 당대 모사본 혹은 송대 모사본이든 간에 작품의 회화 수준은 매우 높다.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 중이다. 해외반출 불가.   당(唐)-장훤(張萱) 송(宋)대 모사본 송대 모사본으로 원작은 유실되었고, 당대 전성기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당송 시대 그림 중 희귀한 작품이며, 랴오닝(遼寧)성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북송(北宋)-왕희맹(王希孟) 이 그림은 중국 북송시대 산수화 작품이다.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 중이다. 해외반출 불가.   북송(北宋) -장택단(張擇端) 북송 화가 장택단의 유일한 현존 작품으로 국보급 문화재로 베이징(北京)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 소장 중이다. 이 그림은 산포투시구도법을 도입해 생동감있게 당시 도시의 모습과 사회 계층별 사람들의 생활상을 담았다. 이는 중국 나아가 세계 회화 역사에서도 유일무일한 작품이다. 따라서 매우 높은 역사적 가치와 예술적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해외반출 불가.   원(元)-황공망(黃公望) 이 그림은 청(淸)대 순치(順治) 연간에 화재로 인해 두 쪽으로 나뉘어져 앞 쪽은 별도로 표구 작업을 진행해 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 현재 저장(浙江)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저장 박물관에서 ‘박물관 보물’로 불린다. 다른 한 쪽은 으로 이름 붙여 현재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명(明)-구영(仇英) 이 그림은 중국 색채 미인도의 첫 번째 긴 두루마리 작품이며, 중국 인물화의 전통적 소재로 궁전 여인들의 삶을 담고 있다. 현재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故宮博物院)에서 소장하고 있다.   청(淸)-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이탈리아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는 1715년 선교사 신분으로 중국에 왔다. 그는 회화 구상 중에 동서양을 융합한 새로운 스타일을 창작해 당시 황궁으로부터 큰 신뢰를 얻었고, 50년 넘게 궁정 화가로 지냈다. 백준도는 그의 대표작이다. 현재 타이베이(臺北) 고궁박물원에서 소장하고 있다. ///인민망 
463    [쉼터] - "1억 달러 화랑 클럽"에 합류한 중국 예술가 - 齊白石 댓글:  조회:1773  추천:0  2017-12-21
  치바이스(齊白石, 제백석)의 ‘산수십이조병(山水十二條屏)’ 작품.  [사진 출처: CCTV뉴스 웨이보(微博)]                                                                          [인민망 한국어판 12월 20일] 12월 17일 저녁, 베이징(北京, 북경) 바오리(保利) 2017년 추계 경매에 치바이스(齊白石, 제백석)의 작품 ‘산수십이조병(山水十二條屏)’이 시작가 4억 5,000만 위안에 출품됐다. 70여 번의 경매가 진행되었고 최종 8억 1,000만 위안(수수료 포함 9억 3,150만 위안: 한화 약 1,500억 원)에 낙찰되며 전 세계 중국 예술품 가운데 최고 가격을 기록했다. 해당 기록은 전 세계 중국 예술품 경매 가격 가운데 최고 기록으로 치바이스는 처음으로 ‘1억 달러 클럽’에 합류한 중국 예술가가 됐다. ‘산수십이조병’은 1925년 완성된 작품이며 치바이스가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시골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을 담아 그린 대작 가운데 하나이다. 치바이스의 ‘산수십이조병’은 1925년 완성되었다. 한 폭의 높이는 180cm이고 넓이는 47cm이며 가지런한 디자인을 자랑한다. 또한 치바이스의 스타일이 변화하던 때의 대표적인 산수화 작품이자 현재 유통되고 있는 가장 큰 산수화 ‘산수십이조병’이다. 영국 예술사학자 마이클 설리번(Michael Sullivan)은 “치바이스의 산수화는 그 수가 적고 그의 창의성이 가장 많이 부합된 작품이다. 강렬한 색채와 담백한 표현, 기쁨이 담겨 있는 간결한 형식과 구조는 그의 예술 가운데 다른 예술가의 영향을 가장 적게 받은 작품이다”라고 소개했다. (번역: 은진호) ///중국신문망(中國新聞網) ==============================덤으로 더...                                                                                                [인민망 한국어판 12월 20일] 쿠무타거(庫木塔格)사막은 신장(新疆, 신강) 동부, 산산(鄯善)현 남쪽에 있는 라오청둥환루(老城東環路) 남단과 인접하고 있다. 동서를 가로지르는 거리는 62km에 달하고 남북 거리는 40km에 달하며 총면적은 1,880㎢에 달한다. 쿠무타거사막은 중국에서 해발이 가장 낮은 분지인 투루판(吐魯番)분지에 속해있으며 해당 지역의 해발은 일반적으로 500m 정도에 달한다. 또한 타커라마간(塔克拉瑪幹)사막을 구성하는 주요 부분이자 세계에서 흔히 볼 수 없는 도시와 인접해 있는 사막이기도 하며 천지(天池), 보쓰텅(博斯騰)호와 함께 신장에 위치하고 있는 국가중점풍경명승구 세 곳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번역: 은진호) ///인민망(人民網)                                                                                    [인민망 한국어판 12월 20일] 최근 윈난(雲南, 운남)성 서부에 위치한 난젠(南澗) 이족(彜族) 자치현 우량(無量, 무량)산 잉화구(櫻花谷)의 벚꽃이 활짝 피며 화려한 모습을 드러냈고 겨울철 이색적인 경치를 만들어냈다. (번역: 은진호) ///신화사(新華社) 눈이 오던 12월의 나무는 나무대로 사람은 사람대로 새는 새대로 견뎌내기, 이겨내기, 버텨내기. 그렇게 겨울을 나는 생물들을 위하여 하얀 눈은 덮어주고 녹아주고 그리고 얼리기도 하는 지도......  하얀 12월이 얼고 녹고 있더라는. ///서울에서ㅡ  /사진가 치자향
462    [이런저런] - "요지경세상", "세상요지경"... 댓글:  조회:1734  추천:0  2017-12-19
'로이터 올해의 사진'으로 본 2017년 이슈 [ 2017년 12월 17일 ]     로이터통신이 '올해의 사진 2017' 100작품을 선정했습니다. 로이터통신 기자들이 세계 각국에서 찍은 역사의 기록입니다. 선정작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트럼프 시대의 미국  1월 14일 미국 뉴욕 트럼프 타워 앞에서 벌어진 흑인 민권 운동 '블랙 라이브즈 매터(BLM)' 집회에 참석한 캔디 프리먼. [REUTERS=연합뉴스/Stephanie Keith] 10월 19일. 백인우월주의자 리처드 스펜서가 플로리다 대학교 캠퍼스에서 연설을 하는 동안 나치 표식이 그려진 옷을 입은 남성이 군중의 야유를 받으며 걷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Shannon Stapleton] 관련기사 '히틀러 만세' 외친 백인 우월주의자, 차별반대 시위대에 총격 11월 10일. 중국 베이징 공항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대통령 전용기 에어포스원에 탑승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REUTERS=연합뉴스/Jonathan Ernst] 트럼프 대통령 취임식(1월 20일)과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 취임식(2009년 1월 20일)에 참석한 인파를 비교한 사진. [REUTERS=연합뉴스/Lucas Jackson (L), Stelios Varias] 관련기사 입맛 따라 사실이 달라진다? … 백악관의 '대안적 팩트' 3월 8일. 뉴욕 경찰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여성 없는 날' 행진에 참여한 한 여성을 체포하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Lucas Jackson] 관련기사 성폭력 침묵 깬 사람들이 2017년을 바꿨다 전쟁터의 삶    3월 4일. 이슬람 국가(IS)가 통제하던 이라크 모술 지역에서 폭격을 피해 딸을 안고 울면서 특수 부대에게 다가가는 남성. 그는 자살폭탄테러범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셔츠를 들어올리라는 명령을 받았다. [REUTERS=연합뉴스/Goran Tomasevic] 관련기사 "IS 최대거점 모술 해방" 이라크 총리 '승리' 선언 1월 22일. IS의 근거지 시리아 북부 도시 라카 인근의 난민촌에서 어린이들이 밧줄을 잡고 걷고 있다.[REUTERS=연합뉴스/Rodi Said]    관련기사 미국, 시리아 공습에 700억원 썼다 전쟁같은 삶 6월 12일. 베네수엘라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에 맞서 시위를 벌인 남성이 국기를 들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Carlos Garcia Rawlins] 7월 28일. 베네수엘라 시위대에 발포하는 진압군. [REUTERS=연합뉴스/Carlos Garcia Rawlins] 관련기사 [채인택의 글로벌 줌업] 차베스 포퓰리즘 유산이 부른 불황·독재 … 끝모를 잔혹극 11월 1일. 미얀마의 '인종 청소'를 피해 강을 넘어 방글라데시로 탈출하고 있는 로힝야 여성의 손을 잡고 도와주는 사진기자. [REUTERS=연합뉴스/Hannah McKay] 국경을 넘다 지쳐서 주저앉은 로힝야족 여성. 9월 11일. [REUTERS=연합뉴스/Danish Siddiqui] 관련기사 [영상] 목숨 걸고 탈출하는 로힝야 난민 '하루 평균 7000명'…그들과 함께 하는 이들       지중해에서 리비아 해안경비대에 구조된 난민. 목숨은 구했으나 유럽으로 탈출하려는 꿈은 좌절됐다. 11월 6일. [REUTERS=연합뉴스/Ahmed Jadallah] 관련기사 "힘센 소년 2명 90만원!" 리비아 노예 경매시장 포착    재해·재난 6월 14일. 영국 런던의 서민 아파트 그렌펠 타워가 불길에 휩싸였다.[REUTERS=연합뉴스/Toby Melville] 관련기사 영국 경찰, 그렌펠 화재에 '공공기관 과실치사' 적용할 듯 8월 14일. 네팔 대홍수로 집을 잃은 이재민.[REUTERS=연합뉴스/Navesh Chitrakar] 관련기사 네팔 대홍수...마른 땅이 없어 아이를 물에 묻었다    미국 텍사스에서 태풍 하비의 폭우를 피해 이동하는 주민들. 8월 28일. [REUTERS=연합뉴스/Jonathan Bachman] 관련기사 미 역사상 최대 '물폭탄'…카트리나 악몽 때보단 인명 피해 적어    4월 16일. 캐나다 뉴펀들랜드 근처를 지나는 올해 첫 빙하 덩어리를 주민들이 지켜보고있다. [REUTERS=연합뉴스/Jody Martin] 관련기사 [week&] 한여름의 겨울, 10만 년 전 빙하기에 착륙했다 그리고... 3월 10일, 사우디아라비아 '문화의 봄'의 일환으로 열린 콘서트에서 한 여성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있다. 문화생활을 죄악시해오던 사우디의 변화상을 보여준다. [REUTERS=연합뉴스/Hamad I Mohammed] 관련기사 남녀 합석 첫 공연에 사우디 들썩    11월 17일, 인도 뉴델리의 야무나 강에서 한 사내가 갈매기에게 먹이를 주고 있다. 인도는 심각한 공기오염에 시달리고 있다. [REUTERS=연합뉴스/Saumya Khandelwal] ///중앙일보 다리가 너무 길어 '거미'라고 불리며 왕따 당했던 126cm 롱다리 여성 (ZOGLO) 2017년12월19일 0 YouTube 'Barcroft TV'   다리 길이만 무려 126cm인 유명 모델의 과거 어두웠던 아픔이 공개됐다.    최근 영국 일간 데일리메일은 세계에서 가장 다리가 긴 모델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여성 홀리 버트(Holly Burt)의 사연을 보도했다.    미국 플로리다주에서 디자인을 전공하던 홀리는 얼마 전 세계 최장 다리 길이를 보유한 여성으로 이름을 올렸다.   놀라운 점은 홀리의 부모님과 언니 모두 큰 키를 가진 최장신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홀리 엄마의 키는 182.5cm, 아빠는 187.6cm 그리고 언니도 키가 180cm로 그녀의 가족은 유전자부터 남달랐다.   YouTube 'Barcroft TV'   홀리 엄마의 키는 182.5cm, 아빠는 187.6cm 그리고 언니도 키가 180cm로 그녀의 가족은 유전자부터 남달랐다.   그중 196cm에 다리 길이만 무려 126cm인 홀리는 가족 중에서도 가장 큰 키를 자랑했다.   길쭉한 다리로 현재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만 사실 홀리는 과거 긴 다리 때문에 아픔을 겪은 적도 있다.     초등학생 때부터 남다른 다리 길이를 가졌던 홀리는 언제나 친구들의 놀림 대상이었다.   친구들은 홀리의 길쭉한 팔과 다리를 '징그러운 거미'라고 놀리며 홀리를 따돌렸다.   자신의 긴 다리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려 지낼 수 없었던 홀리는 항상 위축됐었다.    YouTube 'Barcroft TV'   하지만 체육 시간 때마다 길쭉한 다리를 이용해 빛을 발휘하며 하나둘 장점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홀리는 특출나게 긴 다리로 자신보다 작은 친구를 도우며 삶을 즐기기 시작했다.   성인이 된 홀리는 늘씬하고 길쭉한 다리를 내세워 모델이 되기로 결심했고, 업계에서도 흔치 않은 그녀의 바디 라인을 높게 평가했다.   그렇게 홀리는 현재 196cm의 큰 키를 뽐내며 세상에서 가장 긴 다리를 보유한 모델로 활동 중이다.   홀리는 "과거 긴 다리 때문에 아픔도 겪었지만 지금은 다리가 내 최대 장점이 됐다"며 "뉴욕에서도 내 다리를 보며 모두 놀랍고 아름답다고 말하고 있다"고 전했다. ///인사이트
461    [쉼터] - 54명의 집단 초상화 댓글:  조회:1672  추천:0  2017-12-17
벽화 〈아테네 학당〉에  여성이 존재했을까     ‘○○아카데미’라는 곳이 참 많아졌습니다. 본래 아카데미는 B.C.385년,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플라톤이 청년들의 심신을 수양시킬 목적으로 아테네의 근교에 설립한 교육기관입니다. 그러다 중세에는 귀족이나 왕실의 보호를 받는 학자의 집단을, 나중에 대학이라는 명칭이 나오기 전까지는 중등교육기관이나 고등교육기관을 의미했는데요. 정부가 앞장서서 설립하고 육성한 과학, 문화, 예술 분야의 아카데미는 근대문화를 발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런 유서 깊은 아카데미가 최근에는 학원 개념으로 소모되는 감이 없지 않지요. 산치오 라파엘로가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에 있는 ‘서명의 방’에 그린 프레스코 벽화 〈아테네 학당〉은 가로 길이가 8미터가 넘는 대작입니다. 아테네 ‘학당’이라고 하지만 아카데미였을 테고 고대의 철학자와 천문학자, 수학자들 54명을 한데 모아 그린 일종의 집단 초상화입니다. 그리고 중세 이탈리아와의 합성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 같습니다. 고대 학자들의 얼굴을 동시대 이탈리아인의 얼굴로 대체했기 때문입니다. " class="img_thumb" height="382" src="http://t1.daumcdn.net/thumb/R659x0/?fname=http://t1.daumcdn.net/encyclop/m58/wVPlXibm1bAgmYU3RxRZR2mbe6yj9ZQSHNpumBZg?t=1490753125000" style="border: 0px none; vertical-align: top;" width="600" /> 산치오 라파엘로의 그림 그 덕에 우리는 르네상스의 거장 3인의 얼굴을 〈아테네 학당〉에서 함께 볼 수 있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데요. 계단 위 정중앙에 서서 검지를 들어 하늘을 향해 가리키는 하얀 수염의 노인 플라톤은 라파엘로가 평생 존경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얼굴입니다. 계단 아래 대리석 탁자에 턱을 괴고 앉아 사색에 잠긴 이는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 그는 “우리는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그의 철학은 니체 사상의 근본이 됐습니다. 위치나 크기 면에서 그림에서 가장 눈에 띄는 인물인데, 바로 미켈란젤로의 얼굴입니다. 라파엘로가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천지창조〉를 그리고 있는 미켈란젤로를 보고 크게 감명을 받아 〈아테네 학당〉에 그의 얼굴을 그려 넣었다는 설이 있지만 그 이유가 전부는 아니었을 것 같습니다. ‘세상의 근원은 불’이라고 주장했던 헤라클레이토스입니다. 그 ‘불’이란 조화와 원리를 이루는 데 필요한 대립과 투쟁을 의미했지요. 라파엘로는 〈천지창조〉를 그리느라 그야말로 고군분투 중인 미켈란젤로에게서 헤라클레이토스의 면모를 읽어냈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미켈란젤로는 라파엘로가 자신을 그린 것을 불쾌하게 여겼다고 하지요. 라이벌인 라파엘로의 그림에 자신이 등장한다는 자체가 찜찜했던 모양입니다. 게다가 다른 인물도 아닌 헤라클레이토스라니, 생전에 조소와 비웃음을 서슴지 않았던 인물이었으니 라파엘로가 자신을 비꼬는 것으로 느꼈을 수도 있습니다. 라파엘로는 자신의 얼굴도 수줍게 그려 넣었습니다. 그림의 맨 오른쪽, 아치형의 기둥 너머에 그리스 복장과는 동떨어진 초록색 베레모를 쓴 젊은 남자, 그가 바로 산치오 라파엘로입니다. 이로써 〈아테네 학당〉에 르네상스의 거장 3인이 한 자리에 모이게 됐습니다. 이번에는 이 거장들이 누구와 함께 시공간을 초월한 이 상상 속 아테네 학당에 있는지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살펴볼까요. 플라톤 옆에서 손바닥을 따을 향해 펼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입니다. 둘이 가리키는 손의 방향은 각각 이상주의와 현실세계를 상징하지요. 왼편에 플라톤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사람들에게 열심히 이야기하는 대머리 남자가 보입니다. 소크라테스입니다. 그의 강연을 투구와 갑옷 차림으로 듣는 젊은이는 알키비아데스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사랑하는 미소년이었습니다. 명문가라는 배경에 그리스는 물론 페르시아까지 소문이 자자했을 만큼 준수한 외모, 유창한 웅변술에 우수한 두뇌까지, 모든 조건을 갖춘 이 소년은 자라서 아테네 정계의 중심에 섰고 지도자로 도약하기 위해 펠레폰네소스 원정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엉뚱한 스캔들에 휘말려 스파르타로, 스파르타에서 다시 페르시아로 망명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알키비아데스의 이런 행보는 펠레폰네소스 원정 실패로 이어졌고, 아테네의 시민들로 구성된 배심원들이 소크라테스의 사형 판결에 손을 드는 비극을 낳았습니다. 아테네의 영광이자 오욕인 알키비아데스 뒤에서 반대편을 바라보며 손을 들어 누군가를 부르는 사람은 아이스키네스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실 때 함께 있던 제자입니다. 자, 이제 계단 아래로 가봅니다. 그림 왼편에 큼지막한 책을 펼치고 필기 중인 이는 피타고라스, 그의 필기를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터번 쓴 이는 이슬람 학자 아베로에스입니다. ‘정신은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는 주장을 했다고 하지요. 그 옆에 월계관을 쓰고 선 채 필기 중인 이는 에피쿠로스입니다. 그가 주장한 쾌락주의는 육체적 쾌락이 아니라 정신적 쾌락이었고, 그의 생애는 무소유와 금욕에 가까웠는데 후세의 사람들이 간혹 오해하고 있습니다. 시선을 오른편으로 훌쩍 옮겨봅니다. 허리를 굽혀 컴퍼스로 흑판에 뭔가를 그리고 있는 남자는 에우클리데스입니다. 지금 기하학을 강의하는 중인 모양입니다. 에우클리데스의 뒤로 천구의를 든 사람들이 보입니다. 등을 돌리고 선 이가 천문학자 프톨레마이오스, 맞은편에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이 조로아스터, 자라투스트라로도 불리는 바로 그 인물입니다. 프리드리히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와 이 책에 영감을 얻어 리하르트 슈트라우스가 작곡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차라투스트라’, 그리고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의 오페라 에 등장하는 ‘자라스트로’로 우리 귀에 익숙한 이름이지요. 그러나 이들 작품 속 인물은 실제 조로아스터와는 관계없고 현자로서의 면모를 차용해 새로운 인물을 창조한 작품들입니다. 조로아스터가 서양인에게 신비롭게 느껴졌다는 것도 관련이 있었겠지요. 그런데 조로아스터는 페르시아의 국교를 창시한 인물로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지옥에 떨어졌을 것이 틀림없는 이교도의 교주일 뿐입니다. 가톨릭교회 안에 ‘정신은 육체의 죽음과 동시에 끝난다’는 주장을 설파한 이슬람 학자와 이교도의 창시자를 등장시킨 것은 가히 파격을 넘어서는 수준입니다. 라파엘로가 이 그림에서 보여주는 파격은 또 있습니다. 그림에서 라파엘로와 함께 유일하게 정면을 응시하는 인물이 있습니다. 중앙에서 약간 왼쪽에 서 있는 흰색 옷을 입은 금발의 젊은 미인입니다. 여성인지 남성인지 긴가민가하지만 여성입니다. 그녀의 이름은 히파티아,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이집트 사람이고 서양 역사에서는 ‘플라톤의 정신과 아프로디테의 육신’으로 불리며 신격화됐습니다. 히파티아는 수학사에 최초로 등장하는 여성이며 기원전 4세기에서 5세기 사이, 고대의 뉴욕이라 할 수 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강의를 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습니다. 빼어난 미모 때문에 가는 데마다 화제였고 많은 남성에게 구혼을 받았지만 “나는 진리와 결혼했노라”라는 말로 모두 물리쳤다고 하지요. 이쯤 되면 라파엘로가 왜 아테네 학당에 히파티아를 그렸는지 근거가 충분합니다. 그녀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유일한 여성입니다. 히파티아가 이 그림에 무사히 남기까지 우여곡절이 없을 리 없습니다. 라파엘로는 처음에 히파티아를 그림 중앙에 그렸습니다. 그런데 그림을 본 주교가 당장 지우라고 했다고 하지요. 히파티아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였던 키릴로스에게 이교도로 몰려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히파티아가 고대의 훌륭한 수학자이자 철학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어떤 이론을 정립했고, 어떤 강의를 했는지 전혀 알 수 없는 것은 그녀가 쓴 책이 죽음과 동시에 한 권도 남김없이 모두 불에 태워져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파엘로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교의 눈을 속이기 위해 생각한 방법은 이러했습니다. 먼저 그리스 철학자 파르메니데스를 당대의 유명한 지휘관이었던 로베레를 모델로 그린 다음, 그의 우람한 체격 뒤에 히파티아를 숨기듯이 그려 넣은 것입니다. 그럴 듯한 이 이야기는 그러나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큽니다. 왜냐하면 이교도가 히파티아 한 명은 아니니까요. 〈아테네 학당〉에 등장하는 학자들은 사실상 모두 이교도입니다. 그들 중 그리스도를 섬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의 인물들이니 당연하고, 유대인이 아니니 여호와에 대해 알기 힘들었을 뿐 아니라 알았다 해도 신앙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그림은 카톨릭교회 안에, 그것도 교황이 머무는 공간에 있어서는 안 될 그림입니다. 이 말을 다시 뒤집으면ㄴ 교황이 의도적으로 이교도를 그리게 한 그림이라는 뜻이 됩니다. 이런 문제작을 그리게 한 교황은 바로 율리우스 2세입니다. 교황치고는 희한할 정도로 미술에 관심이 많아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끊임없는 경쟁구도로 몰어넣어 많은 작품을 생산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오늘날의 바티칸 미술관을 태어나게 한 사람입니다. 바티칸은 성 베드로의 묘지가 있는 세계적인 성지이자 세계적인 예술의 도시입니다.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의 건축물과 미술품 대부분이 바티칸에 집중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요. 이런 바티칸 미술관의 최초 전시품은 당연히 기독교와 관련된 것이고 그래야 할 것 같지만, 엉뚱하게도 〈라오콘〉입니다. 높이 2.4미터에 이르는 이 거대한 조각상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막바지였던 B.C. 25년경에 제작됐다고 하는데요. 트로이의 제관인 라오콘과 두 아들이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거대한 뱀에게 공격을 받는 순간, 그 고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제관도 모자라 포세이돈이라니 숨겨도 마땅찮을 것 같은데 바티칸 최초의 전시품이었다는 사실이 놀랍지요. 이 이교도적인 기획과 전시를 주도한 이가 바로 교황 율리우스 2세였습니다. 그는 1506년 1월 14일, 로마의 어느 포도밭에서 라오콘이 우연찮게 발굴됐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사들였고, 한 달 후 라오콘을 보고 싶어 하는 대중을 위해 바티칸의 벨베데레 정원에 조각상을 전시하고 정원을 개방했습니다. 바티칸 미술관은 1506년의 이 전시회를 바티칸 미술관의 기원으로 삼고 있습니다. 바티칸 정원에 라오콘을 전시하고, 성당 안에 이교도 집단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테네 학당〉을 그리게 하고, 율리우스 2세는 왜 그랬을까요? 바야흐로 르네상스의 시대였습니다. 14세기부터 불기 시작한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정신 본받기 열풍은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각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율리우스 2세는 자신이 시대의 흐름을 모를 만큼 꽉 막힌 교황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을지 모릅니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카톨릭보다 르네상스에 푹 빠져 있었습니다. 이탈리아를 통일해서 옛 로마제국의 영광을 재현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교황이 아니라 황제가 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율리우스 2세에게는 ‘전사교황’이라는 별명이 붙어 있는데 교황이라는 사람이 전쟁의 선봉에 섰기 때문입니다. 다른 교황들처럼 막후에서 전쟁을 기획하고 부추긴 것이 아니라 실제로 갑옷으로 무장하고 칼을 들고 군대를 이끌고 전장에 나섰습니다. 라파엘로가 그의 초상화를 그릴 때 손에 성경을 든 모습으로 그리자, 성경을 칼로 바꿔달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질 정도지요.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롤 모델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라 율리우스 카이사르였으니까요. 진두지휘한 전투의 성과도 좋은 편이었습니다. 베네치아 공화국이 점령한 소도시와 요새를 탈환했고, 이탈리아를 침략한 프랑스 군대를 상대로 직접 전투를 치러 몰아냈습니다. 주위에서 교황이 그러면 안 된다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듣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1506년에는 자신을 호위할 군대를 만들기 위해 스위스 용병들을 고용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바티칸 시국을 지키고 있는 근위대의 기원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멋진 군복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이 군복은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했습니다. 그러나 그 멋진 군복을 오직 스위스 사람만 입을 수 있습니다. 스위스 사람만 바티칸의 근위대에 입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했을 때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목숨 바쳐 지켜준 이들이 스위스 용병들이었던 데서 생긴 전통으로 5백 년 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율리우스 2세가 성 베드로 성당을 재건하고 자신의 전담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치를 돈이 어디에서 나왔을까 생각하면 뇌물과 횡령 등이 떠오르지요. 그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정점을 이끈 동시에 가장 타락한 교황 중 한 명이었습니다. 1510년에서 1511년 사이 로마를 방문한 마르틴 루터는 율리우스 2세를 오토만 술탄보다 더 사악한 인간으로, 로마 교회를 부패의 온상지로 인식했고, 종교개혁의 필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6년 후인 1517년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는 〈9개조 반박문〉을 발표하는데요. 하지만 이때는 이미 율리우스 2세가 죽은 후였습니다. 지독한 열병에 시달리면서도 전장에 나섰을 만큼 용맹한 ‘전사교황’이었지만 1513년 2월, 병에 걸려 자리에 눕더니 끝내 다시 일어나지 못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율리우스 2세로부터 온갖 스트레스를 받으며 처절한 고통 속에 〈천지창조〉를 4년 6개월 만에 완성한 지 불과 석 달 후였습니다.
460    화가 반고흐도 그림 표절 혐의가 있다고?... 댓글:  조회:1878  추천:0  2017-12-17
빈센트 반 고흐는  우키요에를 표절했을까 |   1888년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빈센트 반 고흐는 프랑스 아를에 있었고 그곳에 머물렀던 열다섯 달 동안 무려 2백여 점이 넘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리고 그중 한 작품에 대해 고흐는 아홉 살 어린 여동생 빌헬미엔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파란 밤, 카페 테라스의 커다란 가스등이 불을 밝히고 있어. 그 위로는 흰 별이 빛나는 파란 하늘이 보여. 창백하리만치 옅은 흰 빛은 그저 그런 밤 풍경을 제거해버리는 유일한 방법이지. 검은색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아름다운 파란색과 보라색, 초록색만을 사용했어. 그리고 밤을 배경으로 빛나는 광장은 밝은 노란색으로 그렸단다. 특히 이 밤하늘에 별을 찍어 넣는 순간이 정말 즐거웠어. 우리에게 〈밤의 카페 테라스〉로 유명한 이 그림의 정확한 제목은 〈Cafe Terrace, Place du Forum, Arles(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1888)〉입니다. 고흐의 그림 중 가장 인기가 높은 작품이기도 한데요. 그런데 고흐의 이 그림에는 표절 혐의가 있습니다.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를 그리기 1년 전, 고흐는 테오로부터 파리의 몽마르트에서 화방을 경영하고 있던 줄리앙 프랑수아 탕기를 소개받습니다. 당시에 화방은 화랑 역할도 겸했는데 탕기는 팔리지 않는 고흐의 그림을 받고 그에게 물감을 대주었습니다. 고흐가 얼마나 고마운 마음이었는지는 탕기를 그린 석 점의 초상화를 통해 전달됩니다. 그런데 〈탕기 영감의 초상〉의 배경을 보면 온통 왜색 짙은 우키요에로 도배돼 있습니다. 탕기가 자신의 화방 겸 화실에 우키요에를 다량 소장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요. 그 시절 파리에는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자포니즘 열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고흐는 탕기를 통해 우키요에를 접하고 단숨에 매료됩니다. 그중에서도 특히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작품을 좋아해서 그의 작품 여럿을 모사했고, 이런 연습을 거쳐 완성한 〈아를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는 히로시게의 〈사루와카 거리의 밤 풍경(1857)〉과 구도와 소재, 채색 등 많은 면에서 흡사합니다. 히로시게의 그림 속에서 거리를 거니는 많은 사람들, 짙은 남색으로 펼쳐진 밤하늘, 하얀 보름달, 창 너머로 비치는 노란 불빛 등은 고흐의 그림에서 카페 테라스에 앉아 있는 사람들, 파란 밤, 하얀 별, 커다랗고 노란 가스등으로 매우 비슷하지요. 우타가와 히로시게의 그림 요즘 같으면 저작권 소송에 휘말렸을 소지가 다분합니다. 가장 큰 근거는 그때까지 서양회화에서 밤하늘을 이렇게나 강렬한 파랑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고, 더구나 파랑에 노랑까지 이토록 강렬한 원색 대비를 이루는 경우 또한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참신하고 획기적인 발상을 어떻게 떠올렸느냐는 질문을 받으면, 고흐는 차마 “어느 날 밤하늘을 보고 영감을 얻었다”고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고흐뿐 아닙니다. 모네가 1899년부터 시작한 〈수련〉 연작에 등장하는 다리는 히로시게의 그림에 등장하는 일본식 다리와 비슷하고 마네와 로트렉, 보나르 등 19세기 후반에 활약한 인상파 화가들 대부분이 우키요에의 요소를 차용했습니다. 우키요에는 일본의 풍속화입니다. 당연히 서민들에게 친숙한 풍경과 주변의 사물, 인물과 이야기가 소재입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화투에 나오는 우키요에는 단순한 구성에 대담한 구도, 입체감은 거의 없고, 검정색이 주를 이룹니다. 이에 비해 히로시게의 그림은 다양한 색감으로 화려할 뿐 아니라 원근법을 사용해 입체감을 살리고 있습니다. 이것은 히로시게뿐 아니라 동시대에 활약한 또 다른 걸출한 화가 가쓰시카 호쿠사이(1760-1849)의 그림에도 공통적으로 나타납니다. 특히 그의 그림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한 우키요에 중에서도 가장 유명했는데요. 클로드 드뷔시가 이 그림에 영감을 얻어 〈바다-3개의 교향적 스케치〉를 작곡한 후에 악보 표지에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를 실었고, 카미유 클로델은 청동상 〈파도〉를 빚었습니다. 또 라이너 마리아 릴케는 〈산〉이라는 시를 썼다고 하지요. 세 예술가가 같은 그림을 봤지만 남은 인상이 각각 바다, 파도, 산으로 달랐다는 점이 재밌습니다. 가스시카 호쿠사이의 그림 이들에게 영감을 준 원작 〈가나가와 앞바다의 파도〉에서 파도는 아무래도 쓰나미 같습니다. 그 기세가 어찌나 대단한지 저 멀리 파도 너머에 있는 후지산은 무기력해 보일 뿐입니다. 에도 시대 초기의 우키요에에 없는 원근법을 사용한 덕에 파도가 입체감 있게 살아나 더욱 위력적으로 느껴지는데요. 이처럼 원근법을 응용한 일본의 우키요에를 ‘우키에’라고 따로 분류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우키에는 서양화, 구체적으로는 네덜란드의 그림을 차용함으로써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정리하면 고흐가 차용한 것은 자기네 나라의 서양화를 차용한 우키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아무도 우키에를, 고흐의 그림을 표절이라고 하지 않는 것은 둘 다 ‘A+B=AB’가 아니라 ‘A+B=C’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어떤 위대한 예술도 다른 예술의 영향을 받지 않고는 탄생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품었다 그대로 뱉어내고, 누군가는 자신의 세계관과 기법을 계발하는 자양분으로 삼습니다. 표절했다와 영향받았다, 백지 한 장 차이 같아도 정신이나 마음에 있어서만큼은 천지차이입니다. 어설프게 흉내 내는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완벽한 내 것으로 승화하기, 예술가에게 피할 수 없는 과제입니다.
459    [동네방네] - " 'no'라고 말하는 녀인" 댓글:  조회:1515  추천:0  2017-12-13
프랑스 화가 “위안부”제재 유화 창작 및 기증 2017년 12월 13일        12월 12일, 파허가 기증식에서 자신의 유화작품을 소개하고있다. 이날, 프랑스 유명 화가 크리스티안·파허가 남경리제항위안소 옛터 진렬관에 자신이 창작한 5폭의 “위안부”제재 유화작품을 기증했다. 이번에 기증한 유화는 “고통의 웨침”, “신체검사”, “지옥의 눈”, “’no’라고 말하는 녀인”, “남경, 평화를 위해 힘써”가 포함된다. 그중 4폭은 파허가 올해 남경리제항위안소 옛터 진렬관을 체험하고 한달간 창작하여 그린것이다. 파허는 화필로 인류가 평화를 위해 함께 노력할것을 호소한다고 말했다(신화사).
458    이미 타계한 화가들은 말이 없다... 댓글:  조회:1257  추천:0  2017-12-09
그림을 부검했다, 고흐 죽음 미스터리 2017년12월2일 작성자: 최고관리자 법의학자 문국진의 분석 두 개의 ‘도비니의 정원’ 비교 고양이 등장 여부로 자살 추정 내과 의사 박광혁의 진단 죽음에 이르게 한 술에 주목 마지막 과정 의료과실 의혹도   법의학, 예술작품을 해부하다 법의학,  예술작품을 해부하다  문국진 지음  이야기가있는집     미술관에 간 의학자  박광혁 지음, 어바웃어북     요절한 화가 빈센트 반 고흐(1853~90)는 문제적 인간이었다. 미친 듯이 그림에 탐닉했던 그는 귀를 자르고 정신분열을 일으키는 등 짧고 굵은, 나아가 극적인 삶으로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최근 개봉한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는 그의 죽음에 얽힌 의구심과 작품세계를 회오리치는 화풍으로 살아 움직이게 해 불행하게 살다 갔지만 남긴 것 많은 사나이 고흐의 일생을 반추하고 있다.    미술관에 간 의학자 법의학자와 의사 두 명이 동시에 고흐에게 집중한 것은 그러니까 우연이 아니다. 그만큼 풍부하고 신묘한 콘텐트의 인간도 드물기 때문일 것이다. 문국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심지어 고흐의 죽음을 규명한 책을 쓰려 ‘자료 부검’을 실시해 그의 사인을 파헤쳤다. 그림 속 인물의 생로병사가 궁금한 내과의 박광혁씨는 고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독주(毒酒) 압생트를 영감을 준 ‘초록 요정’이라 부르고, 그의 마지막을 지켜본 의사 두 명을 거론하며 의료과실의 가능성을 내비친다. 고흐의 죽음은 동생 테오 가족을 위한 자살이면서, 동시에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지 못한 ‘사회적 타살’이란 것이 두 의학도의 결론이다.    의학의 눈으로 명화(名畫)를 해부하면 억울한 죽음이 좀 줄어들 수 있을까. 문 교수는 예술가의 경우, 작품을 검체(檢體)로 분석해 법의학이 목적하는 인권의 침해 여부나 사인 등을 가려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술작품을 즐기는 새로운 감상 방법도 될 수 있어 일석이조인 이 분야를 ‘예술법의학’ 또는 ‘의학탐정의 예술’이라고 부른다.    화가 빈센트 반 고흐의 죽음을 파헤친 유화 애니메이션 ‘러빙 빈센트’의 한 장면. 문국진 교수와 박광혁 내과의도 고흐의 죽음을 분석한다. [중앙포토] 다시 고흐로 돌아가 보자. 문국진 교수는 고흐가 생을 마칠 무렵인 1890년에 그린 ‘도비니의 정원’ 두 점을 비교해 검은 고양이가 ‘있고 없고’로 자살했음을 입증한다. 꽤 흥미로운 추측이지만 100% 확증할 수는 없다. 다만 고흐가 남긴 편지 800여 통과 600여 점 작품을 샅샅이 분석해 자살에 대한 전형적인 위험인자를 내포하고 있는 자살학의 교본임을 밝힌 점은 평가할 만하다. 문 교수는 “예술 해부의 대상이 되는 창작물 중에서도 미술작품은 가장 믿을 수 있는 분석 대상이 된다”며 “시대를 증언하는 증인의 역할을 한다”고 결론짓는다.      DA 300   인권 침해를 줄이고 억울한 입장에 처하는 사람이 없도록 검시제도 수립을 강력히 주장해온 문 교수의 책이 다소 딱딱한 데 반해, 박광혁 내과의의 명화 속 의학 이야기는 시시콜콜 의학 상식이 곁들여지면서 상상력을 자극한다. ‘통풍’을 주제로 영국 정치 풍자화가 제임스 길레이의 작품을 소개하고, 스페인 화가 주세페 데 리베라의 ‘안짱다리 소년’이 실은 선천적인 기형인 내반족 환자임을 증명한다. 그는 “한 점의 그림에서 오랜 상처를 치유할 처방전을 얻기도 한다. 이것이 의사인 제가 그림에 매료된 이유일 것”이라고 말한다.     두 의학도가 그림을 뜯어보는 시각을 보면 역시 ‘의사의 눈’은 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그들이 예리한 눈의 메스로 통찰한 가정은 모두 맞을까. 이미 타계한 화가들은 말이 없다. 상상은 자유다. 미술과 만난 법의학이 내린 진단은 인류의 미래를 더 풍요롭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예술작품을 법의학적 안목으로 분석해 인권의 침해 여부와 사인을 가려내는 일도 어떤 의미에서는 제2의 창작에 속한다 할 수 있다”는 문국진 교수의 한마디가 느껍다.  ///중앙일보
457    [쉼터] - 동화세계 = 목단강 놀러 오이소...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7-12-08
겨울날의 동화세계 -목단강 탐방 [ 2017년 12월 06일 ]     한 눈집 등 독특한 매력으로 중내외 많은 유람객들이 이곳을 찾아 유람하고 있다. 알아본데에 따르면 2017년 동계설향이 개원해서부터 11월 30일까지 접대한 관광객은 5만2699 연 인에 달하며 동기대비 20.1% 증가했다. ///신화망                                                  
456    [화단소사전] - "추상화"란?... 댓글:  조회:2095  추천:0  2017-11-20
추상이란 점, 선, 면, 색채 등의 조형요소만으로 이루어지는 그림이라는 뜻입니다. 이 정의의 뒤에는 식별할 수 있는 요소(Recognizable factor)가 그림의 유일, 절대적인 지침이자 방향이었던 20세기 이전의 구상회화가 버티고 있습니다. 또한 구상회화의 영향력은 20세기의 2/4분기까지 절대적인 세력이었읍니다. 추상을 지향하는 화가들까지도 '이것은 추상이되 구상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변명을 그림에 심을 수 밖에 없었던 시기입니다.  1차대전 이후, 실존적 인간의 절망적 상황과 양자역학 등의 영향으로 앵포르멜과 같은 본격적인 탈화면 경향의 추상이 시도됩니다. 그리고 2차대전 이후, 화면의 주변에 맴돌던 앵포르멜의 화면을 다시 화면으로 정착시킨 것이 추상표현주의라고 평가됩니다. 아래는 "미술이야기"에서 발췌했습니다. 추상의 개념 양자역학은 추상화의 산실이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는 소리가 허구라는 것을 일깨워준 것이 양자역학이다.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인간이 인간을 그린다는 것이 허구라는 이야기가 될까. 그래서 인간이 개입되지 않거나 인간과 무관한 조형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은 다분히 오해의 소지가 있다. 데이비드 호크니는 인간과 분위기를 함께 그린다. 그리고선 실체에서 분위기를 빼거나 분위기에서 실체를 제거한다. 호크니는 풀장에 다이빙의 순간을 그린다. 그러나 사람은 간곳 없고 물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그것은 경직되고 개념화된 화면이 된다.  또 앙드레 드렝은 풍경 속의 인물을 하나의 색점으로 표상한다. 인체라는 실체에 쏟아지는 시선을 분산하기 위해 배경과 똑같은 점으로 그려낸다.  그것이 추상화였다. 추상화에서 인체가 빠지면 안되는 이유는 뒤샹의 작품에서도 극명하게 보여진다. 뒤샹이라면 이제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머리칼을 쥐어뜯는 흉내부터 내는 것이 좋다. 그만큼 골치아픈 화가이다. 평론가들도 자료만 모아두고 미술사의 평가를 기다릴 정도이다. 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직역해서 '그녀의 독신자들에 의해 발가벗겨진 신부'라고 많이 소개되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신부도 노총각들도 없다. 그들이 쓰리라고 생각되는 도구와 분위기를 통해 단지 인간의 냄새가 암시될 따름이다.    추상화의 태동과 모네 모네는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 중에서 인상파를 최고의 수준으로 끌어올린 화가로 평가된다. 그 중요성은 1940년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의 후광 아래 더욱 강조되었다. 색채의 영역에서 팔레트를 더욱 밝게 사용했다. 우중충하고 침울한 톤 대신 밝고 맑은 안료가 등장했다. 인상주의의 무한한 색채표현의 가능성이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모네는 캔버스를 여럿 펼쳐놓고 시간마다 다른 캔버스에 루앙 성당과 건초더미를 그렸다. 그려진 것은 자연에서 얻은 순간적인 느낌이 아니라 가변적인 인상을 일관성 있는 빛으로 파악하려 했던 새로운 시각과 자율성이었다. 그거야 추상화 아닌가? 그렇게 묻겠지? 아니면 그렇게 물어주기 바란다. 사실 그것이 추상화의 태동이었다. 모네는 만년에 지베르니의 정원에서 수련을 그렸다. 히로시게의 판화집 에 그려진 다리를 본따 일본풍으로 꾸몄다. 에서 이미 회화의 자율성은 암시되어 있었다. 수련에서 그 자율성은 극대화하여 추상으로 향하게 된다. 모네에게 추상이란 그림이 자신의 세계를 주장하고 형성하여 가는 자율성을 의미한다. 수련을 그릴 당시 모네는 거의 실명상태였다. 그때 그려진 그림이 화가의 의지에 따라 그려졌겠는가. 그림이 요구하는 질서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추상회화는 태동하고 있었다.     추상화의 성장과 마티스 마티스에게 표현은 인물이나 대상 및 에워싼 공간 비례등의 장식적 구성이다. 그 과정에서 음악의 상태가 십분 고려된다. 하모니, 멜로디, 리듬을 살리고 나머지는 모두 제거한다. 이 제거는 본질환원의 과정을 연상케한다. 잘 계산되고 논리적으로 추론가능한 화면은 현상학적 접근방식으로 극대화한다. 그 결과로 탄생하는 것이 추상화면이다. 현상학이란 본질이 아니라고 판단되는 언어나 사상 사유 등을 괄호 안에 가두어 나감으로써 현상에서 환원된 선험적인 본질을 찾아나간다.     뜨거운 추상-칸딘스키 칸딘스키는 추상화를 실증적으로 체계세운 화가로 평가된다. 인간사회의 공통적인 심적 정서적 바탕을 추상화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칸딘스키는 법률가 지망생이었다. 45세가 지나 겨우 추상화풍을 정립했다.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면 이게 무슨 그림이야 라는 말이 나오지? 도대체 뭘 그렸는지 알아볼 수가 있어야지.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데 하고 불평하지 말기 바란다. 이 그림은 알아볼 수 있는 그림이다. 먼저 즉흥곡이라고 악보같은 제목이 붙어 있지? 미술과 연관은 노젓기라는 제목에 있다.  화면에는 배를 암시하는 빨간 아치형의 선이 있다. 그러고보면 노젓는 사람은 그리다만 것처럼 웅크리고 있다. 이제 알겠지? 이 그림은 석양에 노젓는 사람처럼 어느 부분만이 강조되어 있을 따름이다. 그런데도 추상화같다면 그것은 미적분 함수를 닮았기 때문이다. 최초의 대수함수는 이다. 한번 미분하여 이 가 그려졌다. 그리고 또 한번 미분하면 뭐가 나올까. 노젓기를 다시 거꾸로 놓고 석양에 보자. 어떻게 보일까? 그것이 두 번째 미분의 결과로 나올 추상화이다. 칸딘스키는 그렇게 대상성에서 비롯하는 추상화를 다졌다. 조형요소에 의한 추상이 대중에게 이해되기에는 아직 시간이 일렀던 것이다. 표현적 추상의 사상은 19세기 말까지 소급된다. 칸딘스키는 1911년에 의식적으로 추상작품을 창조했다. 풍경화나 인물화 또는 정물화 등의 일상적인 주제를 벗어나 음악의 상태로 접근했던 것이다. 그리고 색채가 있었다. 칸딘스키는 회고록에서 태초에 색채가 있었다라고 할만큼 색채를 중요하게 생각했다. 추상형태들에 상징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강도를 부여하기 위한 직접적인 수단이 색채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차가운 추상-몬드리안 몬드리안은 1908년에 로 성공의 가능성을 타진한다. 아수파적인 색채에 영향을 받은 작품이다. 큐비즘의 형체분할에도 영향을 받았다. 이어 줄곧 대상의 분해와 재해석에 매달린다. 밀물은 수직선으로 표현했다. 썰물은 수직선이다. 자연에서 연상되는 색채를 도식화했다. 노랑은 태양광선의 찬란한 움직임이다. 파란색은 공간의 무한확장이다. 빨강은 노랑과 파랑을 통합하는 중간색이다. 그것을 그래픽 디자인처럼 그렸다. 그가 주장한 신조형주의는 단순화에 역점을 두었다. 다양한 현상을 기호화함으로써 순수한 리얼리티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렇다고 그 작업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물감과 대상 뿐 아니라 자신과의 악전고투로 얻어지는 결과였다.   추상, 구상에서 벗어나다 루치오 폰타나는 화면을 찢어 세계를 인간에게 직시하도록 했다. 포트리에는 화면을 밟을 수 있는 바닥에 깔았다. 일그러지고 갈라진 석고의 화면은 추함의 미학을 낳는다. 장 뒤뷔페는 가공되지 않은 예술이라는 뜻의 라르 브뤼를 하나의 이즘으로 제시한다. 나뭇잎이나 흙을 석고에 이개어 캔버스에 바르기도 한다. 클레처럼 아동화를 소재로 선택한다.  프란시스 베이컨은 전후의 불쾌감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교황의 젊쟎은 초상화를 절규하고 찢어발긴 듯한 그림을 그린다. 알베르토 부리와 안토니오 타피에스는 어둡고 바위같은 릴리프와 찢어지고 불태운 천을 배치한다.  앙포르멜은 산발적인 유럽 작가들의 구심점이었다. 앙포르멜은 1952년 미셀 타피에가 사용한 말이다. 자발적인 테크닉을 위해 구상적이고 기하적인 그림을 거부한다는 뜻이다. 볼스, 포트리에, 아르퉁, 술라쥬, 마티외 등이 활약했다.   점, 선, 면, 색채-추상의 정립 폴록 신화의 제작자는 페기 구겐하임이다. 1942년, 먼저 자신이 운영하는 금세기화랑에 초현실주의자들의 전시를 연다. 당시 미국에 망명해왔던  마타, 달리, 마송 및 남편인 에른스트 등의 전시에 폴록을 끼워넣는다. 그러자 평론가 알프레드 바는 추상표현주의라는 애매한 이름을 붙여준다. 또 다른 평론가 해롤드 로젠버그는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한스 호프만과 아쉴 고르키의 그림에서 착안했다. 구멍 뚫린 깡통에서 페인트를 흘리고 다니는 폴록의 그림과 큼지막한 붓으로 휘저어 그리는 드 쿠닝의 그림에서 행위를 강조했다. 그러나 유럽의 앙포르멜과 연관지을 속셈이었다.   20세기 미술에서 추상을 조망하면 몇 개의 징검다리가 눈에 들어옵니다. 이 징검다리를 건느면서 다른 징검돌들을 보시면 더 쉽게 강을 건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징검다리의 큰 돌 옆에는 작은 돌들이 큰돌이 기울어지지 않도록 받혀줍니다.  때로는 작은 돌들이 더 중요할 수도 있습니다. ///토마토해 ==============덤으로 더...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다 추상표현주의 미술의 선구자인 잭슨 폴락은 살아생전에 유럽의 현대 미술 화가들과 동등하게 인정받았던 최초의 미국 화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와이오밍 주 코디에서 태어나 애리조나와 캘리포니아에서 성장한 그는 1928년 로스앤젤레스의 메뉴얼 미술고등학교에서 미술을 공부했습니다.   당시 폴락의 작품들은 전형적인 미국 서부 풍경에 기초한 작업과 구상 회화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는 서부에 위치한 자신의 고향을 여행하고 그곳의 풍경을 보면서 작품의 영감을 얻었습니다.   폴락의 미술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 것은 멕시코의 벽화가인 의 작업실에서였습니다. 여기서 그는 페인트를 붓고 떨어뜨리는 것이 예술적 기법일 수도 있으며, 그림 표면에 에나멜 페인트와 래커, 모래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 당시 폴락은 알코올 중독, 우울증과 싸우는 중이었습니다. 1937년에는 정신병원에 넉 달간 입원해 심리치료를 받기도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작품들은 추상적인 형태로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스페인의 현대 화가인 파블로 피카소와 후안 미로의 작품들에서 따온 모티프들과 시케이로스로부터 배운 기법들을 통합하여 자신의 그림에 이용하였습니다.   폴락은 1945년 여성화가 리 크래스너와 결혼해 롱아일랜드의 이스트햄프턴에 정착했습니다. 그는 헛간을 개조해 작업실로 꾸미고 이전에는 결코 상상할 수 없었던 새로운 작업을 시도했습니다 우선 그는 커다란 캔버스를 바닥에 펼쳐놓고 사방을 돌며, 캔버스 위로 물감을 흘리고, 끼얹고, 튀기고, 쏟아 부으면서 몸 전체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것은 떨어뜨린 물감의 흔적이 층위를 쌓아가면서 화면의 밀도를 높여감과 동시에 작가의 다이내믹한 제작행위를 직접 캔버스에 기록하는 것이었으므로 ‘액션 페인팅’이라 불리게 되었습니다.   폴락은 미국 미술계의 첫 번째 슈퍼스타로 주목을 받았으며, 특히 1947년부터 1952년까지의 작품은 미술계에 대변혁을 일으켰습니다. 그는 1948년 뉴욕의 금세기 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고, 1950년에는 빌럼 데 쿠닝, 아실 고키와 함께 베니스 비엔날레 전시에 참여하는 등 예술적인 열정을 불태웠으나, 알코올 중독과 창조성의 한계에 가로막힌 그는 육체와 정신의 쇠락으로 방황하다 1956년 만취상태에서 과속으로 차를 몰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고 전해집니다.   폴락은 평소 커다란 크기의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 넓은 공간에 캔버스를 놓고 사방에서 작업했습니다. 그는 막대기나 팔레트나이프를 이용해 캔버스 위해 페인트를 붓거나 떨어뜨리기(드리핑)를 시작했습니다. 예전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이 모래 그림을 그리는 것을 본 적이 있던 폴락은 그들의 방법을 착안해 작업에 이용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왼손에는 페인트 통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팔레트나이프 등을 이용해 재빨리 페인트를 튀기며 캔버스를 가로지르는 것이었습니다. 폴락이 말하길, 그림은 그림만의 독자적인 운명을 갖지만, 최종 작품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예술적인 의지에 좌우된다고 말했습니다.   폴락은 1947년부터 1951년까지 미술계를 놀라게 할 회화들을 제작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폴락이 아무런 의미도 없는 그저 혼란스러운 작품을 만들 뿐이라고 비평하기도 했지만 클레멘트 그린버그와 같은 저명한 비평가들은 “현대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화가”라며 폴락의 재능을 칭송했습니다. 그의 작품은 팝 아트 같은 뒤이어 등장하는 미국의 미술 운동들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폴락은 비로소 20세기 문화의 아이콘이 되었습니다.   20세기 추상회화를 대표하는 화가 잭슨 폴락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있습니다. 영화는 천재적이면서도 알코올에 중독되어 기벽을 일삼던 폴락과 그의 아내 크레이즈너의 이야기를 주된 소재로 삼았습니다. 폴락에게 그녀와의 사랑은 그의 인생 전반에 걸쳐 예술적 진폭을 더욱 크고 넓게 만들어주었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그의 작품들을 보면 조금은 특별한 느낌이 있습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왜 예술가는 평범한 삶을 살 수 없을까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준 영화이기도 합니다. 1912년 미국 와이오밍주에서 태어난 폴락은 아들 5형제 중 막내였는데 화가가 꿈이었던 어머니 덕에 일찍부터 미술에 눈뜰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공황 시절에는 공공사업진흥국(WPA) 연방미술사업계획에서 화가로 일하기도 했습니다. 초창기만 해도 폴락의 작품은 우리가 알고 있는 폴락의 작품들과는 거리가 먼, 평범한 풍경화나 구상화가 대부분이었습니다.   폴락의 작품은 앞에서도 이야기 했듯 멕시코의 벽화가인 를 만나면서 한 단계 도약합니다. 캔버스에 유화 채색이라는 고전적인 방법 대신 다양한 기법들에 눈을 뜨게 된것입니다. 운좋게도 그는 당대 미술계의 유명한 후원자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 1943년에 개인전을 열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됩니다.   그는 이후 이젤에 고정된 캔버스를 버리고 바닥에 캔버스를 펼쳐놓고서 캔버스 위로 물감을 뿌리고, 쏟으면서 몸으로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게 바로 액션 페인팅, 드리핑(dripping)이라는 기법입니다. 드리핑이란 붓이나 주걱 등의 도구를 사용하여 칠하거나 바르는 것이 아니라, 그림물감을 캔버스 위에 흘리거나 붓든지 또는 튀겨서 제작하는 회화기법을 말합니다. 폴락은 이 드리핑 기법으로 안료를 직접 캔버스에다 흘림으로써 얻어지는 우연적인 표현 효과를 성취하였습니다. 폴락의 드리핑 기법은 다다이스트들의 오토마티슴(회화나 시에서 무의식적으로 작품을 창작하는 기법)과 흡사한 점이 많으나 그 궁극적인 목표가 회화의 새로운 형식적 요소의 개발이라는 점과 정신 보다는 육체의 적극적 활용이라는 점에서 다릅니다. 드리핑 기법은 잭슨 폴락, 하면 떠오르는 그의 전형적인 작품 양식이기도 합니다. 층층이 다른 물감을 사용하면서 그 물감들이 우연하게 번지고 퍼지며 만들어내는 흐름과 윤곽은 회화를 미지의 카오스 상태로 밀어넣어 그전까지는 볼 수 없었던 느낌을 주는 회화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그린버그를 필두로한 미국 비평계는 폴락의 드리핑 행위를 보고 다분히 미국적인 행위라고 말했습니다. 즉, 미국인들의 개척정신과 남자다움등으로 상징화된 폴락의 예술 행위 뒷면에는 백인우월주의의 폭력성도 같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새로운 사조를 이끌어낸 폴락은 미술계의 인기스타였습니다. 추상표현미술주의의 선구자였고, 사람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화가였습니다. 미술계에 긍정적인 큰 반향을 일으키고 여러 번의 개인전을 열고 비엔날레에도 참여했던 폴락이었지만 알코올의 마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창조의 고뇌로 고통받는 약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1956년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짧은 생을 마감했으니 그가 좀 더 오래 살아남았다면 현대 미술계가 어떤 진전을 겪었을지 또 모를 일입니다. 지난 2006년 폴락의 작품 한 점이 1억 4천만 달러에 판매되었다고 합니다. 생전에는 가장 위대한 미국의 화가였고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몸값 높은 화가이기도 한 잭슨 폴락, 어지럽고 난해하기만한 그 물감의 폭풍 속에서 잭슨 폴락의 액션페인팅을, 그 몸짓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요? ///가치디자인그룹 SY Kim    
455    4대 불운이 겹친 화가,-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것들이여"... 댓글:  조회:3902  추천:0  2017-11-20
      아실 고르키(1905—1948)   아르메니아 출신이다. 본명은 보스다니그 마누그 아도이안Vosdanig Manoog Adoian인데 그는 아실 고르키란 예명을 사용했다. 아실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 아킬레스Achilles에서 유래된 말이고 고르키는 러시아말로 ‘냉혹한 사람 the bitter one‘이란 뜻이다. 고르키란 이름을 러시아 작가 막심 고르키Maxim Gorky에서 따왔다.   고르키는 1904년 아르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 중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고르키와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인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는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르키는 여동생을 데리고 난민 틈에 끼여 1920년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왔다. 아버지는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주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르키는 프로비던스와 보스턴에 있는 미술학교에서 수학했고 21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 그만두고 나중에 교사로 부임했다.   1925년에 뉴욕으로 이주하여 미술 공부를 하였다. 초기에는 피카소의 영향으로 입체파 경향의 그림을 그렸으나, 호안 미로의 영향을 받았다. 1930년대에 ‘연방예술프로젝트’에 참여하여 공공 건물의 대형 벽화를 추상 양식으로 그렸다.      1940년대에 브르통(프랑스 초현실주의 화가이고 이론가로서 1941년에 뉴욕으로 왔다)을 만나서 그의 영향으로 초현실주의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의 작품은 호안 미로의 작품과 유사한 ‘생물 형태적 형상’을 보여주는 추상 형식을 만듬으로 자신의 양식을 정립하였다. ‘소치의 정원(1941)이 그의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21세기 시각예술의 p222에)  1941년에 재혼 후에 버지니아 풍경 속에서 서정적인 추상 소묘의 연작을 발표하였다.    1946년에 화실에 불이 나서 대부분의 작품이 소실되었다. 그 해에 암이 발생하였고, 교통사고로 목을 다쳐 고통스러워 하다가 1948년에 자살하였다.  초기에는 여러 화가들의 작품을 혼합 모방하는 작업을 하였으나, 미로와 칸딘스키의 영향과 초현실주의의 영향으로 자신의 양식을 확립하였다. 최후의 초현실주의 화가이자, 최초의 추상표현주의 화가라는 명칭을 얻었다. 추상표현주의에서 아실 고르키Arshile Gorky가 차지하는 비중은 적지 않다. 고르키는 폴록에게 직접 영향을 주었으며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서 폴록과 함께 그로부터 수학한 필립 페이비어는 “고르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고르키로부터 수학한 휘트니 대로우는 “고르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 모든 것은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고르키는 자신의 강의실에 헝가리아인 바이올린 연주자를 데리고 와 학생들이 그림 그리는 동안 연주하게 했는데 학생들로 하여금 감성을 작품에 이입시키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중 한 사람으로 나중에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로부터 수학했는데 로드코의 말에 의하면 고르키는 엄격한 교사였다. 가르치지 않을 때는 그는 유머가 풍부한 사람이었다. 다.     고르키는 처음 폴 세잔으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렸으며, 그의 별명은 ‘워싱톤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긴 후로는 이브 탕기, 앙드레 마송, 로베르토 마타, 호앙 미로의 그림을 연구했다. 고르키는 동갑내기 드 쿠닝과 가까운 사이였는데 드 쿠닝은 고르키를 가리켜서 자신이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고르키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는 인정받은 예술가였으며 휘트니 뮤지엄은 1937년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고 이듬해 개인전을 열어주었다.   고르키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한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 줄리앙 레비 화랑에서 열린 그의 전시회 카탈로그를 초현실주의의 교황 앙드레 브르통이 썼다.고르키는 1944년에 제작한 도 이때 소개했다.브르통은 “고르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적었다. 그는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추상표현주의를 추구한 화가였다고 말할 수 있으며 달리 말한다면 초현실주의와 추상표현주의를 연결하는 가교의 역할을 한 화가였다고도 할 수 있다. 고르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다.    칠레 사람 마타의 본명은 로베르토 세바스찬 마타 에차우렌Roberto Sebastian Matta Echaurren(b. 1911)이었는데 사람들이 부르기 편하게 마타라고 했다. 마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다가 파리에 안주했고 르 코르뷔지에와 함께 건축을 수학한 후 1937년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가담했다. 브르통은 마타의 그림 한 점을 사주면서 “자네는 초현실주의 화가이네”라고 했다. 마타는 그때 자신은 초현실주의에 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었고 자신이 찾고자 한 것은 “작은 거북이가 사막 한가운데서 알로부터 깨어 나와 바다를 향해 조금씩 기어가는 것이었다”고 했다. 마타는 1939년에 뉴욕으로 왔고 젊었기 때문에 영어를 잘해 이내 미국 예술가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미국 예술가들은 마타의 아파트에 모여 자동주의 드로잉을 배웠는데 예를 들면 불, 물, 대지, 공기를 주제로 무심한 상태에서 드로잉하는 것이었다. 로버트 머더웰과 폴록도 그의 아파트에서 드로잉을 배웠다.    고르키의 아내는 고르키와 마타 두 사람의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 화재가 나서 고르키의 그림 27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사라졌고, 이튿날 암이란 진단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948년 6월 26일에는 교통사고로 목이 부러졌고,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르키는 우울증으로 괴로워하다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의 자신의 화실에서 자살했다.   그는 자살하기 한 해 전에 을 그렸는데 피빛 붉은색과 어두운 색을 주로 사용했다. 그의 작품 을 보면 자신의 고통스러운 모습을 자신만이 알 수 있는 상징들을 사용해 그렸음을 알 수 있다. 중앙에서 왼쪽을 향한 것은 치과 의자를 의인화한 것이며 의인화한 기계 중앙에 발기한 자지처럼 생긴 것은 털이 달린 원시인들의 숭배물처럼 보인다. 동물의 내장과도 같은 그가 사용한 유기적 형태들은 아르프, 미로, 혹은 마티스의 것들과는 달랐는데 고르키는 식물에서 주로 형태들을 가져왔다. 브르통은 “고르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자신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 오늘 소개할 자화상 작품은  아쉴 고르키 자화상 / Arshile Gorky Self-Portrait Untitled (Self-Portrait) Arshile Gorky · 1928-1929 나는 미술을 통해 나의 내면 가장 깊숙한 곳에 존재하는 인식, 바로 나의 세계관과 소통한다 - 아쉴 고르키 - Self-Portrait Arshile Gorky · 1937   Portrait of Myself and My Imaginary Wife Arshile Gorky 자신의 자화상과 상상 속 아내라니..  Arshile Gorky · 1926 - 1936 Arshile Gorky · 1928 년 The Artist with His Mother / Arshile Gorky · 1926 - 1936 표현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인 아실고르키의" 예술가와 그의 어머니"는 아르메니아 학살의 생존자이다. 왼쪽 사진은 1912년 전 어린 시절의 유일한 사진이라고 합니다.  안녕, 내가 사랑했던 모든 것들이여... 아쉴 고르키는 작업실 화재, 암 수술, 교통사고, 아내의 사망, 불운이 겹쳐 이겨내지 못하고, 끝내 44세의 나이로 자살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위 사진은 Arshile Gorky in December 1936 아쉴 고르키 / Arshile Gorky  미국 화가. 미국으로 이민 온 미술가로, 대외적으로 인정받은 추상표현주의 화가이다.  초기에는 입체주의와 초현실주의 기법으로 풍경화와 초상화를 그렸다. 어린 시절 겪었던 비극과 고난을 작품의 주요 주제로 삼았다. [1904년 추정 8월 15일 ~ 1948년 7월 21일] 대표작은《The Liver is the Cock's Comb 간장(肝藏)은 수탉의 벼슬》(1944, Albright–Knox Art Gallery, Buffalo, New York) 등이 있다. 자료 :  theartstory, 위키백과, 구글이미지, 네이버지식백과, 위키아트, [출처] 아쉴 고르키 자화상 작성자 history   ======================== 지난 수세기동안 파리는 프랑스는 물론 유럽 문화의 중심지였다. 20세기에 들어 미술에서는 야수파, 입체파, 초현실주의, 파리 학파 등 수 많은 새로운 기법이 활발하게 시도되었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피카소는 잠적했고 마티스는 프랑스 남부로 내려갔다. 파리를 점령한 나치스 독일정권은 모든 추상미술을 퇴폐한 예술로 간주해서 수많은 작품들을 파괴하거나 약탈했다. 따라서 프랑스의 미술계는 심한 침체상태에 빠졌다. 프랑스 미술의 몰락과는 별개로 이차대전 무렵부터 미국 뉴욕에는 일단의 미술가들이 각 지역에서 모여 추상화를 시도했다. 그들의 공통점은 추상미술을 한다는 점과 술을 무지하게 마셨다는 점뿐이었다. 그들의 추상화에는 어떤 경향이나 주류라고 말할 것이 없었다. 그래서 평론가들은 그들을 “추상표현주의”(Abstractive Expressionism)라고 칭했다. 잭슨 폴락, 빌렘 드 쿠닝, 마크 로스코, 로버트 머더웰, 바넷 뉴먼, 프란츠 클라인, 아돌프 고틀리브, 클리퍼드 스틸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들이 유럽 화단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다 해도 대서양을 건너 교류가 전혀 없던 것은 아니다. 초현실주의 미술의 창시자라고 볼 수 있는 앙드레 브레통(Andre Breton)은 미술이론이나 기법에서 프로이드 정신분석학의 영향을 크게 받아 “무의식” “상징” “억압” “꿈의 해석” 같은 이론을 도입했다. 그러나 이미 알려진 대로 정신분석학이 나치스에 의해 불건전한 학문으로 간주되어 억압해 버리자 일시적으로 그는 미국으로 망명해 자신의 이론을 미국 미술계에 소개했다.  아쉴 고르키(Ashile Gorky, 1904-1948)는 아르메니아 출신이었는데 아버지는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하던 터키 군에 징집되었다. 군 복무를 피해 가족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가족이 강제추방을 당하는 과정에서 어머니는 굶어 죽었다. 이렇게 아실 고르키는 불우한 소년생활을 하면서도 주로 독학을 통해 화가로 등장했다. 그의 본명은 아르메니아 이름으로 아도얀 이었지만 1931년 결혼한 이후 고르키란 이름을 사용했다. 당시 소련에서는 작가 막심 고르키가 크게 영향을 떨치고 있었다. 이 화가와 막심 고르키는 민족도 혈연도 다르고 전혀 관련이 없는 사이었지만 화가는 이 작가와 사촌관계라고 떠벌리고 다녔다. 초기에 그는 세잔느와 피사로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나 차차 초현실주의 화풍을 받아들였다. 1913년 미국으로 이주해 와서 현지에 머무르면서 이곳의 추상 화가들과 어울렸다. 자신의 그림을 그들에게 소개하면서 자연히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일원이 되었다. 유럽에서 체득한 미술기법이 남은 영향인지 그의 그림은 추상화를 표방하면서도 여러 군데에서 구상화의 체취를 느끼게 한다. 마치 미로나 탕기의 그림을 연상시키듯 인체 부분과 흡사한 사물들을 초현실적인 방법으로 화폭에 즐겨 그렸다.  그가 교류한 화가들 중 드 쿠닝은 “나는 많은 화가들을 만났다. 그러나 고르키는 단연 두각을 나타내었다. 그는 사물의 정수리를 내려찍는데 탁월했다. 나는 그와 급속히 가까워져서 친한 사이가 되었다.” 고 칭찬했다. 1940년대 고르키는 자기의 새로운 그림들을 브레통에게 보여주었다. 브레통은 깊게 감명을 받았다. 특히 “간은 닭의 볏이다”란 작품을 보고는 미국 땅에서 창작된 최고의 작품이라고 칭찬하면서 고르키를 초현실주의자로 불렀다. (처음으로 초현실주의를 제창했으니까 그가 남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던 것이다.) 그의 말년은 비참했다. 1946년 스튜디오에 불이 일어나 아끼던 작품 27편이 소실되었다. 화불단행(禍不單行)이라고 했던가.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직장암 수술을 받고도 고통과 고난 속에서도 화필을 놓지 않았다. 그러나 1947년에 아버지가 사망하고 다음해 교통사고로 인해 목뼈가 부러져 더 이상 화필을 들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아내는 동료 화가와 바람이 나서 아이들까지 데리고 그를 떠났다. 결국 그는 1948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 중앙일보     ===================== (미술문화) 중에서    자살한 아실 고키  아실 고키와 스튜어트 데이비스가 아트 스튜던츠 리그의 새 교사로 부임했다. 고키는 마흔네 살의 나이에 스스로 세상을 버렸지만 그가 뉴욕파 예술가들에게 준 영향은 적지 않았고, 폴록은 그로부터 미학적 도움을 직접 받았다. 고키는 1904년에 아메니아(Armenia)의 벤 호수(Lake Ven) 근처에서 네 형제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고, 아버지는 상인이며 목수였다. 일차대전이 일어나자 어머니는 고키와 그의 여동생을 데리고 러시아 사람들이 거주하던 에레반(Erevan)으로 이주했으며, 어머니는 러시아에서 사망했고, 고키와 여동생은 난민들 틈에 끼여 아버지를 찾아 미국으로 향한 배에 승선했는데 아버지는 그때 미국 동부 로드 아일랜드의 수도 프로비던스(Providence)에 거주하고 있었다.    고키는 예술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프로비던스와 보스톤(Boston)에 있는 미술학교에 입학했으며, 스물한 살 때인 1925년 뉴욕으로 와서 아트 스튜던츠 리그에 입학했다가 이듬해에 그만두었지만, 나중에는 교사로 재직했다. 추상표현주의 예술가들 가운데 중요한 예술가이며, 클리포드 스틸과 더불어 컬러필드(Color-Field) 회화를 창조한 마크 로드코가 그에게 수학한 적이 있었는데 로드코는 고키가 아주 엄격한 교사였다고 말했다. 그러나 가르치지 않을 때에는 유머가 많은 사람이었는데 로드코의 개인전람회가 열렸을 때 고키는 화랑으로 와서 그림들을 아주 진지하게 들여다보다가는 제자들이 있는 곳으로 오더니 제자 한 사람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문지르면서 “이 부분을 조금 엷게 해라”고 말해 다같이 웃었다고 회상했다.    고키는 처음에 세잔느로부터 영향을 받았고 나중에는 입체주의 회화방법에 매료되어 거의 피카소와 같은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의 별명은 ‘워싱턴 스퀘어의 피카소’였다. 그리니치 빌리지 중앙에 있는 워싱턴 스퀘어(Washington Square)는 뉴욕 대학교(New York University)의 정원과도 같은 곳으로서 지금도 대학생들뿐 아니라 무명예술가들이 한가롭게 스케치를 하거나 행위예술가들이 이벤트를 벌이는 정감있는 장소이다. 그는 초현실주의에 관심이 생기자 프랑스의 이브 탕기와 앙드레 마송, 칠레의 로베르토 마타, 그리고 피카소와 같은 나라 스페인의 호앙 미로의 그림들을 연구했다. 1930년대 중반에 그는 친구 예술가들을 화실로 초대한 후 “우리가 직면해야 할 것은 우리가 파산선고를 받았다는 점일세”라고 말했는데 그의 말은 피카소가 회화의 모든 가능성들을 실험했다는 의미였다. 이때는 예술가들이 피카소에 의해서 “회화는 죽었다”는 말을 예사로 할 때였다.    폴록과 다른 학생들은 고키와 데이비스가 학교식당에서 미술에 관해 나누는 대화를 자주 들을 수 있었다. 폴록은 벤턴의 소개로 학교식당 탁자를 청소하는 일을 했으므로 고키가 식당에서 미인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었다. 주요 추상표현주의 예술가 중 한 사람인 고키는 육 척 장신에 검은 머리칼을 앞이마에 떨어뜨린 매력적인 모습이었고, 수염을 길렀으며, 숙고하는 듯한 커다란 눈망울의 소유자였다. 학교식당에 자주 와서 미인들에게 그의 특유의 우수에 찬 음성으로 “나의 화실로 와서 애인이 되어준다면 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주겠다”며 유혹하곤 했다. 미술학교에 재학했던 필립 페이비어는 “고키가 우리를 직접 가르치지는 않았어도 우리는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면서 “그는 잭슨을 감동시켰다”고 술회했다. 1930년 여름부터 재학중이었던 휘트니 대로우(Whitney Darrow)는 “고키는 학문적으로는 전혀 아는 게 없었다. 그에게는 모든 것들이 지성의 문제가 아니라 감성의 문제였다”고 회고했다.    1934년 고키의 첫 개인전이 필라델피아의 멜론(Mellon) 화랑에서 열렸으며, 이 시기에 그는 드 쿠닝과 우정이 두터웠는데 드 쿠닝은 고키를 가리켜 미국에서 만난 재능있는 몇몇 예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1930년대 경제공황의 참담한 시기를 살면서 그는 식량보다는 붓과 물감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다가 아내로부터 호된 비난을 받은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인정받는 예술가였고, 1937년에 휘트니 뮤지엄은 그의 그림 한 점을 구입했으며 이듬해에는 그의 개인전을 열어주기도 했다.    그는 1941년에 재혼했으며, 미국으로 피신했던 유럽의 초현실주의 예술가들과 교통했는데 1945년에 줄리앙 레비(Julien Levy) 화랑에서 열렸던 그의 전람회 카탈로그를 앙드레 브르통이 쓰기도 했다. 브르통은 “고키가 자연을 은화식물처럼 여긴다”고 기술하였다.    고키는 마타와 아주 가까운 사이였는데 마타는 동성연애자였고, 고키의 아내는 고키와 마타 두 사람 사이를 질투했다. 1946년 1월에 화재가 나서 고키의 그림 스물일곱 점과 노트, 드로잉들이 분실되었고, 다음달에는 암이라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1948년 6월 26일 교통사고를 당하여 목이 부러졌으며, 그가 병원에서 퇴원할 무렵 아내는 그와 마타와의 동성애 관계를 참을 수 없어 별거를 요구했다. 고키는 우울증으로 번민하며 지내다 절망감을 이기지 못하고 1948년 7월 21일 코네티컷 주에 있는 화실에서 자살하여 세상을 버렸다. 브르통은 “고키만이 자연을 직접 대하면서 평생 그의 주제로 삼았다”고 말한 적이 있었는데 그가 마흔네 살로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은 뉴욕 추상표현주의의 큰 손실이었다.    
454    남의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것으로 만들고 남과 달라야 산다... 댓글:  조회:3398  추천:0  2017-11-20
  폴 잭슨 폴록(Paul Jackson Pollock  1912년 1월 28일 ~ 1956년 8월 11일) 은 미국의 화가로,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기수였다. 그의 부인은 추상화가 리 크라스너이다. 와이오밍 주에서 태어나 로스앤젤레스와 뉴욕에서 공부하였다. 1930년대부터 표현주의에서 추상화로 방향을 바꾸었다. 1947년 마루바닥에 편 화포 위에 공업용 페인트를 떨어뜨리는 기법을 개발하여 하루 아침에 이름을 떨쳤다. 이것은 작가의 제작 행위를 직접 화폭에 기록하는 것이라 하여 '액션 페인팅'이라 불렀다. 대표작으로 〈가을의 리듬〉 등이 있다. 그의 생애를 다룬 영화로《폴록》이 있으며, 그의 생일인 2009년 1월 28일 구글의 로고가 그의 작품과 비슷한 그림으로 바뀐 바 있다.   윌렘 드 쿠닝(Willem de kooning)   1904년 4월 24일 네덜란드 로테르담 ~ 1997년 3월 19일 미국 뉴욕 이스트햄프턴. 네델란드 태생의 미국화가. 1904년 로테르담출생.    1926년에 미국에 정착하여 당시에 미국에 이민온 죤 그래함이나 아쉴 고르키 등과 친분을 맺고, 1935~36년에는 벽화 화가로서 연방 미술 프로젝트에 참가한다.  소년시절에는 미술장식회사 견습공으로 들어가 일하면서 미술아카데미 야학에 다녔다.   로테르담 미술학교에서 공부한 후 장식미술가로 활동하던 그가 불법으로 미국땅을 밟은 때는 스물두 살이던 1926년 이었다.   뉴욕의 건축사장에서 페인트공으로 일하던 그는 1930년대 스듀어스 데이비스, 아쉴 고르키과 같은 뉴욕의 아방가르드 작가들과 친해지면서 전업작가의 길을 결정한다.  불법이민 노동자였던 윌렘 쿠닝(Willem de Kooning)은 이름에 드(de)를 덧붙여 작가 윌렘 드 쿠닝 (Willem de Kooning)으로 변신 하게 된다.   2차대전 직후에 부상한 유럽과 미국의 추상미술이 기존원칙의 거부와 전통적 구성방법과의 단절에서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면, 드 쿠닝의 회화 또한 전통의 파괴 작업에서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남의 것을 빌어 어떻게 나의 것으로 만들어 가야하며, 또 나의 길은 남과 얼마나 달라야 하는가.   이를 위해 모방이 있고 파괴가 있으며 재구성이 있고 재창조가 있듯이  드 쿠닝의 초기 20여년에 가까운 작가 생활은 이러한 과정의 연속으로 점철되어 왔다.   1938년의에서 55년 의 작품에 이르기까지 나타나는 일관성 있는 진보과정은 구상에서 추상으로 변화하는 치밀한 파괴작업으로 50년대 말 탄생하는 드 쿠닝의 최고의 추상 작품들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증명해 주고 있다.   드 쿠닝은 1940년까지는 인물화가이자 초상화가였다.  그리고 어떠한 특별한 환경속에 놓인 그의 인물 습작들은 자코메티의 그림과 유사성이 있다.     그가 추상화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을 때 추상의 형태들은 고르키를 통해 드러난 피카소를 연상하게 했다.   실제로 그의 작품을 보면 드 쿠닝의 작업이 바로 20세기 미술의 혁명이라고 불리우는 입체주의 미술의 바탕에서, 특히 피카소의 영향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드 쿠닝이 자신의 작품에서 피카소의 흔적을 지우기 까진 장장 15년에 가까운 세월을 필요로 했다.  전통회화에서 시작한 30년대 후반의 초기 작품은 사실적 구성회화로서 앵그르의 회화에서 보이는 것과 같은 볼륨과 콘트라스가 뚜렸하다.   이 시기의 작품의 대부분을 작가가 스스로 파괴시킨 탓에 그 흔적을 뚜렷이 찾아보기가 힘들지만, 간과해도 무관하다 할 수 있다.   40년대 중반까지 입체주의에 바탕을 두고 마티스적 색채를 빌어쓴 인물회화가 주를 이루는데,  피카소의 20년대 작품에서 보이는 생물형태학적인 무정형으로 인체의 윤곽을 설정하고 그 위에 마티스적인 색채를 반복 칠함으로 조금씩 3차원의 공간을 2차원화 시켜가는 용해작업의 시작이다. 드 쿠닝의 작품의 핵을 이루는 주제는 여인과 풍경으로, 특히 시리즈는 작품의 진보과정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열쇠를 지니고 있다.   이 시리즈는 드 쿠닝이 미술평론가였던 엘렌느 프라이드와 결혼한 1940년에 시작되었으며 최초의 시리즈 작품은 (1940)이었다. 이어 (1944), (1944), 등을 거쳐 2년 동안의 작업으로 완성됨  (1954∼55)에 이르기까지, 여인을 둘러싼 그의 작품은 구상에서 추상으로의 변화과정을 면밀히 보여 주고 있다.      시리즈    드 쿠닝의 여인은 뒤틀린 몸매의 흉란 얼굴을 한 드라마틱한 인물이며 복잡한 구성 속에 서서히 흔적을 감추어 버리는 미움받는 여인이다.   이 여인을 지우고 또 지우면서 여인의 몸이 얼굴로 확대되고 그 입술이 풍경으로 되면서, 추상으로 변신되어 간다.   이러한 관점에서 드 쿠닝의 작품은 그 하나하나가 다음에 이어지는 작업을 위해 거쳐가는 미완성의 작품이라 여겨지기도 한다.   그의 가장 성공적인 작품은 1950년경에 제작된 검은색 바탕의 하얀색의 드로잉이 조화를 이룬 작품들이다.   또한 1950년까지 그는 칸딘스키, 고르키, 피카소 또는 그보다 앞선 어느 누구와도 다른 추상표현주의의 개성적인 측면을 전개했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양식, 새롭고 격렬한 표현양식을 예언하는 자들의 한 사람으로 등장했다.   동시에 인물에 대한 그의 향수는 그로 하여금 유명한 '여인화 연작'을 착수하게 했다.   이러한 작품들은 힘이 넘치고 때로는 거부감을 일으키기도 하지만, 성의 상징이나 풍요의 여신으로서, 그리고 에드바르트 뭉크의 관례에서 피를 빨고 있는 흡혈귀등으로서의 여인을 최면에 걸듯 환기시킨다.   위협적인 모습에서 부터 단순한 풍자만화, 온화한 에로티시즘에 이르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1950년대는 (1952∼53)이나 (1953)에서 보이듯 피카소적인 인물처리가 남아 있으면서도, 반복되는 터치작업으로 여인의 얼굴을 용해시키는 추상작업을 통해 붓처리가 난폭하면서도 강한힘이 서린 자신의 회화를 찾아가는 시기이다.   이러한 과정은 (1954∼55)과 (1955)에서 모방과 그 영향의 탈을 벗는 피카소와 고르키의 망령에서 완전히 해방되는 드 쿠닝 작업의 획기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이어지는 50년대 후반은 드 쿠닝의 황금시대라고 일컬을 수 있겠는데,  빨강과 노란색조가 주를 이루는 가운데 붓작업이 뛰어난 추상회화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   60년대에는 장미색과 분홍색을 섞어 두껍게 칠한 우스꽝스러운 여인들이 재등장함으로써 다시 구상으로 뒷걸음질 한다는 의혹을 불러 일으킨다.   드 쿠닝의 작품에 대해서 평론가들의 따가운 시각이 비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부터이다.   (1971)에 이르러야 드 쿠닝은 여인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해방된 50년대 후반의 추상에서 보다 더 세부적으로 파고든 자신만의 작업을 만들어 내었다. 또한 그의 작업은 실체를 용해하면서 드러나는 변화의 회화이며, 그 과정의 복잡성으로 인해 귀결되는 미완성의 회화라는 의미를 지닌다.   드 쿠닝은 하나의 작품을 제작하기까지 수십번에 걸친 덧칠과 수정작업을 고의적으로 해왔다.   완성도에 대한 커다란 집념을 지닌 그의 작품이 그에게 언제나 미완성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작업 자체가 드 쿠닝에게 있어 하나의 인간드라마 연출과정이었기 때문이다.   즉 모든것을 수용해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간다는 것은 그만큼 힘든 작업이기 때문이다.   또한 드 쿠닝의 작품을 세밀하게 관찰해 보면 놀라운 것은 작품이 마치 멀리있는 이미지를 가까이 끌어들이는 '클로즈업'과 같은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는 것이다. 초기 구상작품에서 추상으로 발전한 해체작업과 이에따라 부분을 확대해 보다 세밀히 비춰내는 작업은 그의 조형예술가로서의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거장 " '창작'은 '모방'에서 시작된다고 하지만, 드 쿠닝처럼 이 문구가 잘 적용되는 작가는 드물지 않을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 스스로가 타인에게서 비롯된 회화라고 할 정도로 모방과 모방을 거듭한 끝에 찾고자 했다.   그 때문인지 드 쿠닝의 작품을 처음 대할때 낯설지 않고 비교적 친숙한 이미지가 느껴졌다.   그가 영향을 받은 화가들이 많은 만큼 그의 그림을 보면 작품 하나에서도 마치 몇가지 작품을 보듯 복합적인 면이 느껴진다.   하지만, 드 쿠닝의 작품 뿐 만아니라 그보다 더 유명한 그에게 영향을 준 작가들의 작품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더 많이 있다.   그러기에 드 쿠닝의 작품이 모방으로 이루어졌다고 비난할 수 도 없고,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비교해 자신있게 지적하고 평할 수가 없다.   단지 그의 작품을 단순히 하나의 작품으로만 생각하고 그 작품을 감상할 뿐 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흔히 말하듯 정말 강렬한 색채와 거친 붓작업, 화면을 가르는 힘찬선이 두드러짐을 느낄 수 있다.  또한 그속에 담겨진 인물의 모습이 흉물스러워 보이기도 하지만, 다시볼 땐 전혀 다르게 화면의 구성에 눈길이 가기도 한다. 그의 작품들을 살펴보면 남을 의식 하기보다는 자신의 독자적인 세계를 이뤄내고자 수많은 모방의 작업을 거듭하고 완성을 찾아 불태운 그의 집념이 그를 추상표현주의의 거장으로 이루어 놓지 않았나 생각된다.   프란츠 클라인(1910-1962)은 미국 펜실베니아주의 윌크스-바에서 출생하였다. 1931~1935년에 보스턴대학을 다녔고, 그 후 1936~1938년에는 런던의 Heatherley 예술학교를 다녔다. 1939년에 런던에서 돌아와 뉴욕에 정착하였으며, 1930년대와 1940년대에 도시풍경과 그가 자란 지역의 광산촌의 풍경들을 그렸다. 1943년 클라인은 콘라드 마르카-렐리의 작업실에서 윌렘 드 쿠닝을 만났고, 또한 그 후에 잭슨 폴락을 만났다.  그의 그림에서의 추상적 스타일에는 분명히 이들의 영향이 컸을 것이다. 또한 클라인의 일본예술에 대한 관심도 이 당시에 시작된 것이다. 이러한 영향 탓일까? 194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그의 성숙한 추상적 스타일은 빠르게 마르는 백색과 흑색 에나멜의 과감한 붓질이 특징적이다. 그의 첫 단독 전시회가 1950년 뉴욕의 에간 갤러리에서 열렸다. 그 후 그는 추상표현주의 운동에 있어 중요한 인물이 되었다.  클라인은 주로 흑백그림으로 유명하지만 1950년대 중반부터 말년까지 색채그림도 광범위하게 그렸다. 클라인은 1960년에 유럽에서 1달간을 지냈는데, 이때 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전 10년간 여러 세계 전시회에 참가하였는데, 대표적인 것이 1956년과 1960년에 열린 베니스 비엔날레, 1957년에 열린 상 파울루 비엔날레 등이다. 클라인은 1962년 5월 13일 뉴욕에서 사망하였으며, 같은 해 워싱턴주 현대미술관에서 그의 추모전이 열렸다.///지식넷 ===============   윌렘 드 쿠닝의‘인터체인지’. 미국의 추상표현주의 화가인 잭슨 폴락과 네덜란드 태생의 추상표현주의 미국 화가 윌렘 드 쿠닝의 추상화 각 1점이 5억달러에 팔려 미술품 프라이빗세일(컬렉터를 개인적으로 만나 진행하는 판매) 가격으로는 최고가를 기록했다. 23일(2016년 2월), 블룸버그통신과 영국 일간 더타임스 등은 세계 최대 헤지펀드인 시타델의 창업자이자 최고경영자인 켄 그리핀이 프라이빗세일을 통해 작년 가을 폴락의 ‘넘버 17A’를 2억달러, 쿠닝의 ‘인터체인지’를 3억달러에 각각 사들였다고 전했다. 그리핀이 사들인 이들 미술품 두 점은 미국 대중문화계의 ‘큰 손’인 데이빗 게펜이 소유했던 작품들이다.   지금까지 경매가 아닌 개인간 미술품 거래에서 최고가를 기록한 작품은 폴 고갱이 타히티에서 활동할 때 그린 ‘언제 결혼하니’다. 이 작품은 지난해 가을 카타르 왕가가 소유한 미술관에 쿠닝의 작품과 같은 3억달러에 팔렸다. 한편 미술품 경매 최고 기록은 피카소의 유화 ‘알제의 여인들’로 지난해 5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서는 1억7,936만5,000달러에 팔렸다. /한국일보 문화 ======================= 2위는 빌렘 드 쿠닝 ‘인터체인지’  슈퍼리치들 간 미술품 손바뀜 한눈에   [헤럴드경제=이한빛 기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예수 초상화가 미술품 경매사상 최고가에 낙찰됐다.   지난 15일(현지시간2017년 11월), 세계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뉴욕 2017 가을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Salvador mundiㆍ구세주)’가 4억5000만달러(한화 약 4935억원)에 낙찰됐다고 밝혔다. 기존 미술품경매작품 최고가였던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1억7936만달러ㆍ약1975억원)의 두 배가 넘는 가격이며, 작품의 소장자였던 러시아 부호이자 AS모나코의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제시한 가격(1억 달러)도 네 배이상 넘겼다. 이로 인해 세계미술품 고가 랭킹도 재구성됐다. 헤럴드경제가 ‘세계에서 가장 비싼그림 5선’을 정리해 봤다. 경매는 물론 개인거래를 포함, 시장에서 거래됐던 작품만을 대상으로 했다.       지난 15일 세계적 경매회사인 크리스티는 뉴욕 2017 가을 경매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살바도르 문디(Salvador mundiㆍ구세주)’가 4억5000만달러(한화 약 4935억원)에 낙찰, 최고가미술품기록을 경신했다. [사진=AP연합]   ▶ 1위 : 레오나르도 다빈치 ‘살바도르 문디’= ‘남자 모나리자’로도 불리는 ‘살바도르 문디’는 ‘세상을 구원하는 자’라는 뜻이다. 즉 ‘구세주’인 예수의 초상화인 셈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던 1500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된다. 푸른색 로브를 입고 오른손으로는 축복을 왼손에는 투명 구를 들고있는 이 작품은 목판에 유화로 그려졌다.   작품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건 지난 2011년부터다. 이전까지는 다빈치의 작품이 아니라 그를 추종하는 제자가 그렸다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심지어 1958년 소더비 경매에서 불과 45파운드(6만6000원)에 낙찰되기도 했다. 당시 작품은 예수의 얼굴과 머리부분이 심하게 덧칠해져 있었다. 2005년 미국아트딜러협회는 이 작품이 다빈치의 것이라는 확신으로 1만달러(약 1100만원)에 사들였고, 이후 6년간의 복원과정을 거쳐 2011년 세상에 내놓는다. 복원을 거친 작품은 다빈치 특유의 스푸마토 기법이 명확했고, 다수의 평론가들로부터 진품으로 인정받았다. 이후 2011년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 다빈치 작품으로 처음 전시됐으며, 2013년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1억2750만 달러에 구입했다.   ▶ 2위 : 빌렘 드 쿠닝 ‘인터체인지’ = 역대 두번째로 비싼 작품은 네델란드 출신 작가인 빌렘 드 쿠닝(1904~1997)의 1955년작 ‘인터체인지(Interchange)’다. 지난 2015년 9월 헤지펀드사 시타델의 창립자인 켄 그리핀이 데이비드 게펜 재단으로부터 3억달러(약 3300억원)에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그리핀은 잭슨폴록의 1949년 작품도 구매하는 조건으로 5억 달러(5500억원)를 지불해 크게 이슈가 됐다. 인터체인지는 드 쿠닝의 추상표현주의가 잘 표현된 작품으로 지난 2015년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에 전시되기도 했다.   ▶3위 : 폴 세잔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3위는 폴 세잔(1839~1906)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이다. 이 작품은 지난 2011년 4월 카타르 왕가의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가 2억5000만 달러(약 2750억원)에 그리스 선박왕 조지 엠비리코스로부터 구매했다. 1892년~1983년에 제작한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은 여러 명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을 그린 연작 다섯 작품 중 하나로, 완숙기인 50대에 그린 작품이다.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가 이 그림을 구매하면서 세계 미술계 큰 손으로 떠올랐다. 블룸버그 보도에 따르면 공주가 연간 미술품구매에 쓰는 비용은 약 10억달러(1조1000억원)에 달한다.      ▶4위 : 폴 고갱 ‘언제 결혼 하니’ = 4위 역시 카타르 왕가가 소유하고 있는 작품이다. 셰이카 알 마야사 공주는 지난 2014년 9월 폴 고갱(1848~1903)의 ‘언제 결혼하니’를 스위스 개인 소장자인 루돌프 슈테린으로부터 3억달러(3300억원)에 구매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예술전문매체인 아트넷뉴스는 지난 7월 영국 슈테린이 카타르 왕가에 실제 넘긴 가격은 2억1000만달러(2300억원)이라고 보도했다. 슈테린을 대리한 유명 미술 중개인 시몽 드 퓌리와 카타르 왕가 미술품 구매대리인 기 베넷이 3년여의 협상끝에 도달한 가격이라는 것이다. 실제 거래가가 2억1000달러라고 할지라도 세계에서 가장 비싼 미술작품 4위에는 변함이 없다.   ▶5위 : 마크 로스코 ‘넘버6(바이올렛, 그린 앤 레드)’= 5위는 추상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의 작품이다. 2014년 8월 프랑스 와인제조업체를 이끄는 크리스티앙 무엑스가 마크 로스코의 1951년작 ‘넘버6(바이올렛, 그린 앤 레드)’ 프라이빗 딜러인 이브 부비에를 통해 1억8600만달러(2000억원)에 판매했다. 작품 구매자는 미술품사상 최고가로 낙찰된 ‘살바도르 문디’의 전 소유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다. 최고가 작품을 놓고 벌어지는 슈퍼리치들 사이 손바뀜이 흥미롭다.  ================ ... 일본 사이타마 현의 인터체인지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인터체인지   고속도로 인터체인지는 이리저리 복잡하게 돌도록 만들어져 있다. 간단한 평면 대신 이렇게 입체적으로 만들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 걸까? 고속도로상의 신호대기는 교통흐름을 방해할 뿐 아니라 위험한데, 입체적으로 설계하면 신호대기 없이도 자동차가 뒤얽히지 않고 좌우회전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교차하는 2개의 고속도로에서 차들은 동서남북, 4개 방향으로 달리므로 모두 좌회전이 가능해야 하는데, 고속도로 2개가 직각으로 교차한다면 좌회전을 하기 위해서 신호대기를 거쳐 90도 왼쪽으로 꺾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90도 우회전을 세 번 하면 신호대기 없이도 90도 좌회전을 한 번 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반대편 차량의 흐름 위 또는 아래를 지나 90도 왼쪽으로 진행할 수 있도록 인터체인지를 입체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고속도로 인터체인지 =========================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것으로 알려진 예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구세주)’가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크리스티 경매에 나와 사상 최고가격인 4억5,000만달러(약 5,000억원)에 낙찰됐다. 신원을 드러내지 않은 매입자는 전화 응찰로 그림을 낙찰받았다. /AFP=연합뉴스     그림 한 점의 경매 시작가가 1억 달러. 약 1,100억원이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과학자인 레오나르도 다빈치(1452~1519)가 그린 예수의 초상화 ‘살바토르 문디(Salvator Mundi·구세주)’를 손에 넣기 위해 5명의 응찰자가 45번이나 경합했다. 3억5,000만 달러에 이르자 전화 응찰자가 단숨에 5,000만 달러를 높여 “4억 달러”를 불렀다. 꼭 사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것이었다. 결국 세상에 16점만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 다빈치의 작품 가운데 유일하게 개인이 소장한 이 희귀작은 그의 소유가 됐다. 다빈치가 말년에 프랑스 왕 루이 12세를 위해 그린 이 그림은 17세기 영국 왕 찰스 1세, 18세기에는 노르망디공에게로 옮겨갔고 덧칠과 훼손으로 인해 1958년 영국 소더비 경매에서는 작자미상의 작품으로 단돈 60달로도 안되는 값에 팔렸다. 이후 주목받지 못하던 이 그림에 의문을 품은 그림 딜러들이 컨소시엄을 구성해 2005년 약 1,000만원에 낙찰받아 연구 및 복원작업을 진행했고 다빈치의 작품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2011년에는 영국 내셔널갤러리에서 공개전시를 했고 상당수 르네상스 미술사 전문가들이 ‘진품’ 의견에 힘을 실어줬다. 이후 러시아의 컬렉터이자 축구팀 AS모나코 구단주인 드미트리 리볼로블레프가 2013년 1억2,750만달러에 이 그림을 구입했고 이번에 시작가 1억달러에 다시 내놓았다.  수수료를 포함한 이 작품의 낙찰가는 4억5,000만 달러로 한화 약 5,000억원에 달한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예술경영지원센터가 매년 발표하는 한국 미술시장 전체 규모인 약 4,000억원 보다도 더 큰 액수다.  ◇글로벌 아트마켓과 달리 흔들리는 한국 미술시장=다빈치의 ‘구세주’는 미술시장의 역사를 새로 썼다. 지금까지 경매에서 최고가로 거래된 작품은 지난 2015년 약 1억7,940만달러(약1,980억원)에 낙찰된 파블로 피카소의 ‘알제의 여인들’이었다. 비공개 시장인 개인거래로 팔린 빌렘 드쿠닝의 ‘인터체인지’도 3억 달러였다.   세기의 거래가 이뤄진 글로벌 아트마켓은 지금 후끈 달아오르고 있다. 지난 주 빈센트 반고흐의 ‘들판의 농부’가 906억원에 낙찰됐고 앤디 워홀의 ‘60개의 최후의 만찬’은 670억원, 싸이 톰블리의 ‘무제’는 510억원에 팔렸다. 13~17일 단 닷새간 크리스티의 뉴욕 경매에서만 인상주의 이후 현대미술까지 1조5,600억원 어치 이상이 팔렸다. 블룸버그는 11월 경매주간의 뉴욕시장 거래액이 전년 대비 45% 이상 증가했다고 분석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인상파 회화가 10년 만에 최고 낙찰총액을 기록하며 글로벌 미술시장이 호황세라고 보도했다. 반면 한국 미술시장은 2013년부터 달아오른 ‘단색화’ 열풍이 사그라들면서 위축되는 모양새다. 박서보·정상화·하종현·권영우·이우환 등 ‘단색화’ 작가들의 활약으로 지난 2015년 약 1,120억원의 최대 매출을 기록했던 국제갤러리는 지난해 410억원대로 매출이 급감했다. 양대 미술경매사인 서울옥션(063170)과 케이옥션의 11월 현재 올해 낙찰 총액은 각각 622억원, 595억원 정도로 특히 서울옥션이 전년 수준을 크게 밑돌고 있다.    지난 15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크리스티 경매에서 약 510억원에 낙찰된 싸이 톰블리 ‘무제’ /사진출처=크리스티  ◇내우외환…그래도 안전자산 희망적=‘단색화’ 거래가 주춤거리는 것은 일종의 안정기를 모색하는 시장 다지기로 분석된다. 미술시장은 작품 가격이 급등한 후, 형성된 가격대가 적합한지를 살피는 시장의 검증시기를 거치는 선례를 보여왔다. 낙서같은 그림으로 유명한 미국의 추상화가 사이 톰블리의 경우 2011년 타계 이후 작품값이 폭등하다가 총 거래액 감소 등 안정기를 거치며 시장에서의 가격검증을 거쳐 다시 상승세를 탔다. 현재 그의 작품은 값이 떨어지지 않는 ‘안전자산’이 됐다. 하지만 경매 총액의 부진 등에는 국내 소비심리의 위축과 더불어 사드 배치로 인한 한한령 분위기로 중국 큰손이 떠난 것과 한반도 안보위기가 악재로 작용했다. 남북관계 악화 등이 외신을 통해 자주 보도되자 외국인 컬렉터들이 불안감을 느껴 한국 미술품을 구매하는 데 더욱 신중해졌다. 한한령의 조짐이 보이자 민첩하게 홍콩경매를 전격 취소하고 국내에 집중한 케이옥션의 낙찰총액은 감소하지 않은 반면 홍콩경매를 지속한 서울옥션은 낙찰총액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서울옥션 측은 아시아 시장을 장기적으로 내다보고 홍콩 현지에 ‘상설전시장’을 여는 등 적극적 행보를 이어갈 것이라는 방침이다. 서울옥션은 오는 26일 홍콩 완차이 그랜드하얏트호텔에서 개최할 올해의 마지막 홍콩경매에 약 240억원 규모의 작품을 내놓는다. 마르크 샤갈, 쿠사마 야요이, 무라카미 다카시, 탐 웨슬만 등 해외작가의 수작을 확보해 경쟁력을 더했다. 서울옥션과 케이옥션은 다음 달 국내 마지막 메이저 경매를 1회씩 남기고 있다.  디트로이트컨설팅은 최근 내놓은 ‘미술과 금융 보고서’에서 경제불확실성의 증가가 미술품 수집에 대한 수요를 더 키울 것이라 전망했다. 2001년 ‘9·11사태’ 직후 뉴욕의 11월 경매가 사상 최고의 매출을 기록한 것도 미술품을 안전자산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최정표 건국대 경제학과 교수는 “미술시장은 부동산이나 금융시장과 무관하게 고유한 사이클로 움직이며 특히 한국 미술시장은 아주 왜소한 시장”이라며 “단색화가 추진력을 다시 얻거나 대체작이 등장하고, 미술시장에 대한 신뢰가 더해진다면 상승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며 글로벌 호황도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 ”이라고 말했다. ///서울경제 조상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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