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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황금의 화가" - 그스타프 클림트
2017년 01월 29일 18시 18분  조회:2618  추천:0  작성자: 죽림

 

 
출생일 1862년 07월 14일
사망일 1918년 02월 06일
국적 오스트리아
대표작 〈유디트 1〉, 〈사랑〉, 〈키스〉, 〈처녀〉, 〈죽음과 삶〉 등

빈 분리파를 결성하여 반아카데미즘 운동을 펼쳤다.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작풍으로 여성의 관능미 표현에 뛰어났다.

 

구스타프 클림트는 1862년 7월 14일 빈 근교 바움가르텐에서 에른스트 클림트와 안네 핀스터 사이에서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보헤미아에서 온 이민자로, 금속세공사로 일하며 판화가로 활동했으나 그리 성공하지는 못했다. 당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말기로 1873년 경제 위기가 몰아닥치면서 생활 형편은 매우 어려웠다.

클림트는 14세 때 빈의 장식미술학교에 입학했고, 이듬해에는 동생 에른스트가 입학하면서 형제는 함께 공부하고 일하게 된다. 클림트 형제는 1879년 친구 프란츠 마치와 빈 미술사 박물관의 중앙 홀 장식을 맡았다. 이를 시작으로 세 사람은 슈트라니 궁전, 라이헨베르크 극장 등을 장식하는 우의화나 천장화 등을 그렸으며, 1883년에는 벽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공방을 열고 카를스바트 극장, 부르크 극장 등의 천장화 등을 그렸다. 그런 한편 클림트는 〈우화〉, 〈목가〉 같은 고전적인 작품을 그리며 화가로서도 첫발을 내디뎠다.

1886년경부터 클림트는 두 사람과 독립적인 노선을 걷기 시작해 작품에 상징적인 장식 요소를 도입한다. 그는 누구보다 여성의 관능미를 표현하는 데 뛰어난 화가로 유명하다. 경멸을 담은 듯한, 무심한 듯한 표정을 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 화려한 색채와 장식적이고 기하학적인 장식 모티프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들은 상징적이고 몽환적인 이미지로 관람객들을 매혹시킨다. 특히 그는 사진처럼 정밀하게 인물을 묘사하는 데도 뛰어났다. 이런 숙련된 기교에 바로크적인 우아함, 애수에 젖은 듯한 표정과 나른한 분위기를 더해 그는 빈 사교계 여성들의 주목을 받았고, 여성의 초상화로 대중적 인기를 얻게 되었다.

클림트의 이런 재능은 동생 에른스트, 프란츠 마치와 함께 작업한 엘리자베트 황후의 헤르메스 빌라, 빈 미술사 박물관 제단실 천장화 등에서도 뚜렷이 구별된다. 클림트는 인물들의 초상을 세밀하고 사실적으로 그린 부르크 극장 장식화로 대중들을 경탄시켰고, 1888년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그 공로를 인정해 예술적 공헌에 대한 ‘황금 공로십자훈장’을 내렸다. 1895년에는 헝가리 토티스의 에스테르하지 궁정 극장 홀 장식으로 안트베르펜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등 장식화가로서 큰 명망을 떨쳤다.

1892년, 클림트는 아버지와 동생의 죽음을 겪고 실의에 빠지면서 2, 3년간 작품 활동을 거의 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이 시기에 인상파와 상징주의, 정신분석학 등에 관심을 두었고, 이를 작품으로 표현하여 최초의 걸작 〈사랑〉을 탄생시켰다. 사랑을 우의적으로 표현한 이 작품은 사실적으로 묘사된 연인들 뒤로 몇 가지 형태의 얼굴들이 희미하게 그려져 있다. 이는 ‘질투’의 다양한 형태를 나타낸 것으로, 행복 뒤에 숨겨진 불안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현실 세계와 환상 세계를 몽환적으로 중첩시키고, 죽음과 염세주의, 관능과 에로티시즘으로 대표되는 클림트의 작품 세계는 이 작품부터 시작되었다고 여겨진다.

〈사랑〉
〈사랑〉

빈 미술사 박물관

클림트는 고급 예술과 저급 예술, 성녀와 유녀를 구별하는 이분법을 지양하고 총체적 예술을 추구했다. 이를 중심으로 1897년 모든 사회적, 정치적, 예술적 보수주의로부터 탈피한다는 기치 아래 젊은 예술가들이 모여 빈 분리파(Wien Secession)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빈 분리파에는 에곤 실레, 오토 바그너, 칼 몰 등 회화, 건축, 디자인을 가리지 않고 당시 오스트리아 예술계를 선도하던 다양한 예술가들이 참여했으며, 클림트가 초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1894년, 클림트는 마치와 함께 빈 대학 대강당 천장화 작업을 시작했다. 1907년까지 계속된 이 작업에서 〈철학〉, 〈법학〉, 〈의학〉이 완성되었는데, 이 작품들은 지나치게 선정적이고 염세적이라는 이유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1899년, 첫 번째 작품인 〈철학〉은 빈 대학 교수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았으나 파리 만국박람회에서 금메달을 받았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당국은 이 작품이 빈의 문화적 위상을 실추시켰다면서 빈 대학에서 철거할 것을 명했다. 두 번째 작품 〈의학〉과 세 번째 작품 〈법학〉은 ‘외설적이며 과도한 성 도착적 표현’이 난무한다는 이유로 제국회의 심의까지 올라갔다.

그러나 클림트는 아랑곳 않고 오히려 〈금붕어〉라는 제목의 그림으로 이에 응수했다. 애초에 〈나의 평론가들에게〉라는 제목이 붙었던 이 그림은 나체의 세 여인이 금붕어처럼 물속에서 유영하듯 흔들리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클림트는 에로티시즘에 대한 공격을 에로티시즘으로 응수하면서 자신의 작품 세계에 대한 견해를 전하려고 했다. 그러나 지나친 외설성으로 대중의 분노는 더욱 거세졌다. 결국 1905년 클림트는 작품 대금을 대학에 반환하고 세 점의 그림을 철수시켰다. 이 그림은 그의 후원자들이 구입했다. 클림트는 “검열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면서 이후 국가의 대규모 주문을 받지 않고 개인적인 주문에만 응하기로 한다.

〈금붕어〉
〈금붕어〉

졸로투른 미술관

1901년, ‘황금의 화가’로 불리는 클림트의 ‘황금 시기’ 첫 작품인 〈유디트 1〉이 탄생했다. 가슴과 배꼽을 드러낸 채 황금색으로 장식된 기하학적이고 상징적인 배경과 문양들에 싸여 있는 유디트는 관능적이기 그지없다. 적장 홀로페네스를 유혹하여 조국을 구원한다는 전통적인 묘사와는 완전히 다른 표현 방식으로, 구국에 대한 결사 혹은 비장미나 숭고함보다는 유디트의 관능과 고혹적인 부분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이 작품에서 클림트는 죽음마저 관능으로 탈바꿈시키는데, 왜 클림트가 한때 ‘퇴폐적 에로티시즘’으로 비판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본연의 의미가 아니라 관능적으로 표현된 이 작품의 유디트는 클림트 생전에 요부의 대명사인 ‘살로메’로 여겨지기도 했다.

〈유디트 1〉
〈유디트 1〉

빈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1905년, 클림트는 빈 분리파가 더 이상 본래의 취지에 부합하지 않는다 여기고 탈퇴했고, 이후 모자이크 기법과 장식적인 패턴, 금박을 사용한 화려한 색채 표현으로 독자적인 양식을 발전시켰다. 〈유디트〉에서 시작하여 〈베토벤 프리즈〉, 〈희망 1〉, 〈여성의 세 시기〉 등을 거쳐 클림트의 황금 스타일은 〈다나에〉와 〈키스〉에서 절정에 달한다.

〈키스〉는 포옹을 하는 연인을 묘사하고 있다. 작품 속의 두 사람은 클림트 자신과 그의 운명의 연인인 에밀리 플뢰게라고 한다. 기하학적인 문양과 황금색에 둘러싸여 두 사람의 구별이 사라지고 단단히 결합되어 있는데, 여인의 수동적인 자세와 입술이 아닌 볼에 입 맞추는(입 맞추려 다가간다고 보기도 한다) 남자, 수동적이지만 황홀경에 빠진 듯한 여인의 표정 등으로 클림트가 무엇을 표현하려 했는지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낳았다. 키스라는 성적인 암시를 담고 있음에도 화면 전반에 흐르는 몽환적이고 비현실적인 분위기와 아름다운 묘사로 클림트는 대중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로써 클림트는 장식 미술가에서 현대 미술의 거장으로 추앙받게 되었으며, 퇴폐적 혹은 선정적인 작품을 그리는 작가라는 비난에서도 벗어났다.

〈키스〉
〈키스〉

빈 벨베데레 궁전 미술관

클림트는 1906년 〈프리차 리들러의 초성〉과 〈아델 블로흐 바우어의 초상〉부터 은박을 사용했으며, 점차 황금색 배경을 포기한다. 금색과 비잔틴풍의 화려한 문양들은 섬세한 심리 표현을 저해하고 양식화된 장식화로 보인다는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는 점차 장식적인 문양 사용을 배제하고, 넓은 단색조의 화면 구성을 시도했다. 툴루즈 로트레크의 영향을 받은 〈깃털 모자를 쓴 여인〉 등을 제작하면서 역동적이고 화려한 색채로 치장된 작풍에서 탈피하려고도 했다.

곧 다시 자신의 작풍으로 돌아왔으나 이런 시도들을 통해 그는 보다 섬세하고 조심스러운 방식으로 색채와 기하학적 문양을 사용해 내면세계를 표현할 수 있게 되었다. 〈처녀〉, 〈죽음과 삶〉 등 말년의 걸작들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편 클림트는 기분 전환을 위해 명상의 즐거움을 느끼며 풍경화도 종종 그렸다. 휴일이면 공원이나 마을에 나와 농가, 꽃, 나무, 들판 등을 그렸는데, 그는 이에 대해 방학 숙제를 하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고 표현했다.

〈죽음과 삶〉
〈죽음과 삶〉

빈 레오폴드 미술관

1918년 1월 11일, 클림트는 뇌출혈을 일으킨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은 2월 6일에 합병증으로 조용히 숨을 거두었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요한나 슈타우데의 초상〉, 〈신부〉, 〈아담과 이브〉 등 수많은 작품이 미완으로 남았는데, 이는 평소 동시에 여러 개의 캔버스를 세워 두고 작업을 하는 방식을 취했기 때문이다.

클림트는 평생 자신의 그림에 대한 어떤 코멘트나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사생활을 철저히 감추기로 유명하다. 많은 화가들이 자화상을 그렸지만, 그는 자화상에도 관심이 없었다. 이 내성적인 화가는 오로지 자신을 매료한 여인들과 그림 그리는 일에만 탐닉했다.

“자신에 대해서는 그다지 흥미가 없으며, 간단한 편지 한 장을 쓰는데도 멀미가 날 듯한 불안을 느낀다. 그래서 자화상이나 자서전은 불가능하다. 예술가로서 클림트를 알고 싶다면 내 작품 속에서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아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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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티시즘의 대명사 클림트

서양 미술에서 에로티시즘을 대표하는 작가로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클림트일 것이다. 물론 에로티시즘의 도발적인 성격으로 에곤 실레(Egon Schiele)를 따라가기는 힘들다. 두 사람은 에로티시즘이라는 측면에서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둘 중 선구자는 클림트이다. 그는 실레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후원자의 역할을 했다. 이 과정에서 실레가 클림트의 소재를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또한 클림트가 실레의 아이디어를 자신의 그림에 살려 내기도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의 표현 방식은 사뭇 달랐다. 클림트가 금기의 경계선에 있었다면 실레는 금기의 경계선 저 너머로 치달아 갔다. 실레는 흔히 생각하는 교태의 표현을 넘어서 노골적이고 생생한 포즈를 그대로 보여 준다. 하지만 클림트는 인물의 표정이나 묘한 분위기를 통해 관능을 묘사했다. 그런 점에서 실레가 드러냄의 미학을 추구했다면 클림트는 감춤의 미학을 추구했다.

키스
키스

클림트, 1907년

클림트의 그림 중에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이 〈키스〉이다. 그림을 접하자마자 제일 먼저 드는 느낌은 화려하다는 것이다. 색이나 구성 형식에서 장식적인 느낌이 매우 강해 화려한 디자인 작품처럼 다가온다. 특히 전체적으로 사용된 황금색의 화려함이 눈이 부실 정도이다. 그는 실제로 금에 정통했다. 금 세공업자 집안에서 자라났기 때문에 금을 다루는 데도 익숙했다. 보통은 배경색이 화려하면 그 자체가 워낙 두드러져 보이기 때문에 그림 속의 물체나 인간은 묻혀 버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클림트의 탁월함은 화려한 색과 무늬를 뚫고 인간의 관능이 살아나게 한다는 점이다. 언뜻 보면 그냥 남녀의 평범한 키스 장면에 불과한데도 금 빛깔과 어우러지면서 묘한 관능미를 발산한다. 그럼 무엇이 이 그림을 관능적으로 만들고 있을까?

그 비밀은 두 남녀의 손과 팔에 있다. 사실 남자는 여자의 뺨에 고개를 파묻고 있기 때문에 어떤 표정인지 알 수 없다. 드러나 있는 여인의 표정도 특색을 찾아보기 힘들다. 여인이 지그시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이나 뺨의 붉은 홍조가 남성의 키스가 주는 달콤함을 음미하고 있는 느낌을 전해 주기는 하지만 그냥 거기까지이다. 표정 자체에서 그 이상을 찾아내기가 어렵다. 하지만 손과 팔은 다르다. 가만히 두 사람의 손과 팔을 보면 섬세한 표현이 놀라울 정도이다.

먼저 남성의 손을 보자. 한 손은 여성의 머리를 잡고 있고, 다른 한 손은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단지 손을 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부드럽게 뺨을 어루만지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게 뺨을 만지고 있는 손 위에 여성이 왼손을 덧대고 있다. 살며시 얹은 손가락이 남성의 손을 쓸고 있을 것이라는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여성의 나머지 한 손은 남성의 목을 두르고 있다. 하지만 마찬가지로 그냥 두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손목과 손가락 마디마디가 기대감으로 비틀려 있다. 어깨는 잔뜩 움츠려 남성에게 밀착시키고 있다. 두 남녀의 팔과 손이 절묘하게 어우러지면서 관능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고 있다.

흔히 클림트를 ‘여성의 화가’ ‘관능의 화가’라 한다. 하지만 그의 관능은 〈키스〉에서 보이듯이, 노골적인 성적 표현에 있다기보다는 절제되고 감추어진 표현을 통해서 살아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인간 신체, 특히 아주 작은 부분에 대한 세밀한 묘사를 통해 극적인 효과를 내는 데 탁월했다. 이는 다른 그림에서도 나타난다.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다나에〉도 마찬가지이다.

다나에(Danae)
다나에(Danae)

클림트, 1907년

〈다나에〉는 신화를 소재로 한 그림이다. 대략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르고스를 통치하던 아크리시오스는 자신이 아들을 가질 수 없으며, 손자에게 살해당할 것이라는 신탁의 예언을 듣는다. 두려워진 그는 사랑하는 딸 다나에를 사나운 개들이 지키는 탑에 가두어 버렸다. 하지만 다나에의 매력에 빠진 제우스는 황금 비로 변해 그녀와 사랑을 나눈다. 그 후 다나에는 뒷날 영웅이 되는 아들 페르세우스를 잉태한다. 이 그림은 황금 비로 변한 제우스와 다나에가 사랑을 나누는 순간을 표현했다.

〈다나에〉는 클림트의 그림 중에 가장 도발적인 포즈를 보여 주는 그림이다. 다나에의 몸 위로 쏟아지는 황금 비나 그녀의 휘어진 다리는 남녀의 성관계를 상징한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이 그림에서 전체적으로 풍기는 강한 관능을 설명하지 못한다. 비밀은 마찬가지로 그녀의 손과 얼굴에 있다. 손가락 하나하나가 황홀경에 빠진 그녀의 느낌을 그대로 전해 준다. 또한 뺨의 붉은 홍조와 입술이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약간 일그러진 듯이 살짝 벌린 입술 사이로 하얀 치아가 드러난다. 효과를 낸 손이나 얼굴을 제외한 나머지는 두 그림 모두 인체의 경계선이 분명하지 않게 보일 정도로 희미하게 처리했다. 혹은 장식적인 무늬나 화려한 금빛이 대신했다. 어찌 보면 그림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움직임이 그림 전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

에로티시즘은 미술의 영원한 일급 주제이다. 에로티시즘적인 회화와 조각은 고대에서 중세, 근대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동서양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할을 했다. 대체로 여성의 동작이나 표정을 통해 관능미를 드러내는 방식을 취한다. 가장 고전적인 방식은 이상적인 몸의 비율과 곡선을 지닌 여인의 몸매를 드러내는 것이다. 조금 더 진전된 방식으로 아름다운 여인을 희롱하는 남성을 등장시키기도 한다. 물론 대체로 신화의 옷을 빌려서 나타나기는 하지만 말이다. 다만 특이하게도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는 관능을 표출하는 대상으로 남성이 종종 등장한다. 이는 아마도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여성을 출산의 도구 정도로 생각하고 사랑은 이성적 능력을 지닌 남성들 간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었던 그리스인들의 사고방식이 작용했을 것이다.

물론 관능을 드러내는 적극성의 정도와 방식은 아주 상이하다.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면서 시대가 허용하는 금기의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드는 시도가 나타난다. 서양에서 관능적 표현이 가장 억압되었던 시기는 당연히 중세였다. 중세 미술에서는 아예 현실의 인간 모습을 그리는 일 자체가 예술적인 대상이 되기 힘들었다. 주로 성경 속 이야기가 예술의 대상이었다. 그나마 그림 속에 여성으로서 등장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은 마리아 정도였다. 성경을 읽어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여성이 주인공은 물론이고 심지어 주변 인물로 등장하는 일도 극히 드물다. 그러니 미술에서 마리아가 의도하지 않은 특혜를 받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마리아조차도 ‘여성’으로 다루어지는 것이 어려웠다. 예수를 둘러싼 여성들은 여성이 아니라 신성한 존재로 그려져야 했기 때문이다. 남성과의 성관계 없이 아이를 임신한 ‘동정녀 마리아’를 여성으로 표현하는 것 자체가 불경스러운 시도로 여겨졌다. 그래서 중세 시대에 벽화나 캔버스 회화 등 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마리아는 다분히 중성적인 이미지를 가득 풍긴다. 중세에서 르네상스로 넘어가는 시기에 와서야 마리아를 여성으로 묘사하는 시도가 나타난다. 그나마 지극히 한계적인 묘사로 시대의 금기를 아슬아슬하게 넘어서려 한다. 마리아의 모습에서 여성을 느끼게 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인간과 자연의 재발견을 향한 부드러운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에 와서야 인간이 인간으로, 여성이 여성으로 묘사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 시기에 성(性) 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한 대표적인 소설로 보카치오(Giovann Boccaccio)의 《데카메론》이 있다. ‘데카메론’은 그리스어로 ‘10일 동안의 이야기’라는 의미이다. 이탈리아의 피렌체에 흑사병이 돌자 이를 피해 10명의 남녀가 교외의 별장에 머물면서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하루 1인당 1편씩, 열흘간 이야기한 것을 기록한 형식을 띠고 있다. 책 속에는 다양한 일화가 나오는데 그 중 아홉째 날의 두 번째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거룩함과 깊은 믿음으로 이름난 수녀원의 이사베타라는 젊은 수녀가 어느 청년과 사랑에 빠져 섹스를 즐긴다. 다른 수녀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되고 수녀원장에게 알리러 간다. 이때 마침 수녀원장은 신부와 함께 한창 육체적인 재미를 보고 있다가 어둠 속에서 황급히 수도복을 주워 입고 심판을 위해 이사베타와 수녀들 앞에 나선다. 그런데 수녀들은 수녀원장의 머리 양쪽으로 남자의 옷이 늘어져 있는 것을 보게 된다. 급하게 수도복을 입다가 실수로 함께 섹스를 즐기던 남자 옷을 머리에 쓰고 나왔던 것이다. 자신의 육체적 쾌락 추구가 드러난 수녀원장은 인간의 육욕이란 억누를 수 없는 것이니, 남몰래 환희를 즐기는 것을 허용하겠노라고 말한다. 그리고 수녀원장과 수녀는 버젓이 자신들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종교적 의무감의 속박도, 남녀 간의 정절이라는 굴레도, 선한 자만이 축복을 받는다는 신앙도 갖고 있지 않다. 이러한 내용들은 한편으로는 신의 권위로 서민에겐 금욕을 강요하면서도 특권을 누리면서 인간의 욕망에 도취되어 있던 교회나 성직자의 타락과 기만성을 폭로하는 것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만큼 인간의 육체적 욕망은 지옥에 떨어져야 할 죄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성도덕에 있어서의 기독교적 교의와 청교도적 속박에 대한 근대인적 반항은 보카치오의 소설에서처럼 인간의 자연스러운 본능과 욕망에 대한 긍정의 방향을 취한다. 보카치오가 머리말에서 이 책이 ‘어디까지나’ 세상사의 고뇌와 우울증에 사로잡힌 사람들, 특히 여성들을 위로하고자 씌어졌다고 밝힌 점을 보더라도 육체적 욕망을 일정하게 수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통해 인간의 성을 적극적으로 다룬 것이나, 미켈란젤로의 성당 벽화와 조각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예술에서 여성을 여성으로, 인간을 인간으로 다루는 신호탄 역할을 했다. 그 이후 미술에서 인체나 에로티시즘의 표현은 일대 개화기를 맞이한다. 물론 초기에는 여전히 많은 한계 속에 머물러야 했지만, 클림트나 실레에 와서 활짝 꽃을 피운다.

하지만 현대미술은 다시 에로티시즘을 경계하는 기색이 뚜렷하다. 적어도 주류 미술을 중심으로 한 화단에서 에로티시즘은 경멸의 대상으로 무시되곤 한다. 특히 회화가 추상화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면서 더욱더 에로티시즘과의 분리가 선명해졌다. 상식적으로 현대사회로 올수록 성에 대한 개방적인 태도가 확산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우리들의 상식인데 실제로 미술에서는 지속적인 퇴조를 보이고 있다. 왜 그럴까?

곰곰이 따져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다. 현대 문명은 철저하게 이성의 토대 위에 구축되었다. 과학기술 문명이든 민주주의를 향한 방향이든 철저하게 이성의 안내에 따라서 움직여 왔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을 약화시키는 일체의 시도는 문명에 대한 도전으로 치부되고 경계의 대상이 된다. 때문에 감성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에로티시즘은 이성을 약화시키는 비정상적인 일탈로 간주되었다. 현대미술은 이성을 향한 행진을 하는 현대 문명의 산물이다. 서양 미술의 역사를 비롯해 표현 외적인 요소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 없이는 이해 자체가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해졌다. 이제 그림은 감상의 대상의 아니라 해석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성(性)은 인간에게 가장 일상적인 영역이고 그만큼 가장 친근한 주제다. 인간의 감정과 욕망이 가장 꾸밈없이 드러나는 영역이다. 육체적이고 본능적인 영역을 거부하고 정신의 절대적 우위를 강제했던 서양의 중세는 최종적인 종말을 맞이한 게 아니었다. 현대사회에 와서도 새로운 조건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일종의 보호색처럼 말이다. 신의 자리를 이제 이성이 대신 차지하고 여전히 인간의 일상과 감성은 시민권을 얻고 있지 못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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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을 능숙하게 다룬 클림트의 독창적인 금빛 색채
엽서나 노트, 커피 잔에서도 자주 보는 클림트의 ‘키스’.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복제되어 팔려나가는 작품으로 손꼽힙니다. 그만큼 매혹적이라는 뜻이겠죠? 
황금빛 베일에 싸여 남녀가 키스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을 황홀하게 만듭니다. 에로틱하면서 비밀스러운 분위기, 적극적인 남자와 속내를 알 수 없는 여자, 직사각형으로 장식된 남자의 옷과 곡선인 여자 옷, 절벽 같은 낭떠러지 끝에서의 아슬아슬한 키스… 꽃으로 가득한 바닥에 무릎을 꿇은 남녀는 시공간을 초월한 세계에 있는 듯합니다. 
무엇보다 눈을 자극하는 것은 황홀한 순간을 더없이 화려하게 만드는 황금빛 색채입니다. 클림트는 금 세공사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금을 능숙하게 다루었는데, 장식적인 패턴과 더불어 금빛 색채는 그만의 독창적인 스타일이 됐습니다. 

결혼 안했지만 14명이나 친자 확인소송
문득 ‘이렇게 매혹적인 작품을 남긴 클림트는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집니다. 
그런데, 정작 클림트는 “나는 특이한 점이 아무 것도 없다”고 말하는 수수께끼 같은 인물입니다. 생전에 인터뷰도 하지 않았고, 그림에 대한 설명도 한 적이 없고, 사생활도 철저히 숨겼죠. 자신이나 작품에 대해 말할 때는 “멀미가 난다”고 할 정도로 애를 먹었다고 해요. 
에로틱한 작품을 많이 남겼지만, 클림트는 평생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상을 떠나자 14명의 여인이 친자 확인소송을 낼 정도로 여자관계는 복잡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작품으로 돌아가 금빛 아우라를 내뿜으며 신비로움과 화려함 속에 파묻힌 남녀를 봅시다. 세상에 오직 둘만 남은 듯 합일의 경지를 보여주는 저 몽환적 영원함 속으로 들어가 보고 싶은 게 저만의 느낌은 아니겠죠? 여러분은 언제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을 가져보았나요?

/글·이지현(‘예술에 주술을 걸다’ 저자) /우먼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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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에 대해서 알려면 내 그림을 보라"
예술의 전당 '한가람 미술관', 5월 15일까지

 

   
유디트1, 1901년작

 

여성을 모티브로 자못 에로틱한 분위기를 묘한 장식과 함께 섹슈얼한 명작을 숱하게 그려냈던 구스타프 클림트(1862∼1918). 에로티시즘, 팜므파탈 등 의 각종 '19금' 수식어를 달고 다니는 그의 대작이 한국에 왔다.

화가들의 누드화를 보면 여성의 신체가 사실적으로 묘사된 작품들을 많이 볼 수 있는데 나신이 구체적임에도 클림트의 누드처럼 묘한 상상을 연상시키는 작품은 그리 흔치 않다. 몽환적이며, 에로틱하고, 유혹적이다.

그래서 그의 크로키작업을 에로틱드로잉이라고 했던가. 예컨대 정면에서 다리를 벌린 여성의 포즈나 엉덩이 뒤에서 그려내어지는 과감하고 현란한 스케치는 캔버스에 도발적인 모습으로 환생한다. 몽롱한 눈빛, 반쯤 벌어진 입술, 한쪽 가슴만 가려진 상체, 발그레한 볼…하지만 이상한 상상은 금물. 에로티시즘이라는 이중적 잣대에 이미 클림트가 생존 당시 받았던 비난과 상처로 충분하다.

19세기 후반 구스타프 쿠르베의 '세상의 기원' 작품이후 극사실주의 화가의 인체묘사로만 볼 때에는 오늘날 관객의 눈에 비친 그의 여인들은 오히려 고혹적이며 매력적일 뿐이다.

 

   
유디트1, 1901년작

 

클림트의 작품세계를 여성과 에로티시즘으로 관조하기엔 너무 협소하다. 그는 풍경화를 즐겨 그렸으며, 19세기 초 '비엔나 분리파'에 큰 영향을 주는 작가이자 진보적 예술가의 핵심이다. 그들은 국지적으로 진행되던 예술분야의 체제를 무너뜨리고 하나의 주제 하에 총체적인 프로세스를 갖춘 예술의 새로운 시스템을 구축하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비엔나 분리파'의 핵심인 '토탈아트' 운동이다.

'토탈아트'는 아르누보·유켄트 스틸과 같은 예술운동에서 추구했던 개념, 회화·조각·건축·실내장식 그리고 공예에 이르는 장르의 통합적 과정을 통해 현실과 환영의 성공적인 융화를 뜻한다. 이번 전시에서는 '유디트1' '아담과 이브' '은물고기' 등의 대표적 캔버스 작품 외 '벤토벤 프리즈' 벽화, 기타 다양한 공예작품 등에서 그러한 그의 정신을 엿볼 수 있다.

'클림트는 자화상이 없다. 그는 타인의 거울이다. 그는 여인과 풍경을 그린다. 그의 말처럼, 개인으로서의 클림트를 알고자 한다면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아야한다. 그 안에서 그가 누구인지, 그리고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게 될 것이기에…'라고 갤러리 초입에 그를 소개한다.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같이 살고 있던 정신병 증세의 어머니와 누이·제수·조카 외 끊임 없이 이어지던 믓 여성들과의 스캔들 그리고 14건의 사생아 양육비 소송 등등…이러한 그의 개인사는 그의 작품속에서 어떻게 나타났을까?

구스타프 클림트…왜 갑자기 피카소의 여인들이 떠 오르는 걸까?

/윤세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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