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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인송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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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같은 단원에서 사는 예술 댓글:  조회:652  추천:0  2013-01-26
☆ 수 필 ☆ 같은 단원에서 사는 예술 오늘날 사회가 발전함과 더불어 거주문화도 크게 발전하여 많은 사람들이 초라했던 단 층집과 리별하고 아빠트에서 살고 있다. 알다싶히 아빠트는 단층집에 비하여 작은 공간에서 많은 세대들이 살게 되여있다.아빠 트의 한개 단원에서 일반적으로 열네세대거나 그 이상으로 더 많은 세대가 살고 있다. 이런 밀집형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은 대문하나를 공동히 사용하게 되여있으므로 대문에서나 층 계를 오르내릴 때 늘 같은 단원에서 사는 사람을 만나게 된다. 승강기를 타고 오르내리는 경우에도 한 단원에서 사는 이웃들을 늘 만나게 된다. 이렇게 한단원에서 날마다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어떻게 어울려 살아갈것인가 하는 문제 이다.내가 처음으로 아빠트에 4층에 들게 되였을 때이다.대문에서나 층계에서 한 단원에서 사는 이웃들을 늘 만나게 되였는데 처음엔 초면인지라 이 한단원에서 사는 사람이 옳은지 옳 지 않은지 모르니 서로 인사도 없이 모르는 사이로 스쳐지나게 되였다.상대방에서도 그러했 고. 하지만 시간이 길어가니 한단원에서 사는 사람을 거이다 알게 되였다. 겨우 스쳐지날 정 도로 좁은 층계에서거나 대문에서 만나서 모르는척 하고 지나가다니며 생각하니 생각할수록 내심상으로 어쩐지 어색한감이 생기는것이였다.특히는 이상분들을 만나고 스쳐지날 때 그저 지나는 나의 마음은 더구나 어색하여지더라는것이다.차라리 층계에서나 대문에서 사람들을 만나지 않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가 하는 생각도 떠오르면서 아무튼 이웃들과 만나는것이 부 담스럽게만 생각되였던것이다.하지만 어디 그런가.한 단원에서 숱한 사람이 살다나니 이웃 들과 만나게 되는것은 피면할래야 피면할수 없는 일이다.따라서 마음속으로 부담스러운 생 각도 피면할수 없는것이다. 좋은 아빠트에서 살면서 심리상 부담을 갖고 살것이 뭔가?이렇 게 생각한 나는 이런 부담을 해소하려고 생각하고 자주 만나는 사람들에게 먼저 인사 하면 서 금후엔 서로 알고 지내자고하였다.인사란 엎드려 절을 한것도 아니고 머리를 숙여 90도 경례를 한것도 아니고 하고 한마디 하였더니 상대방에서는 하고 성근하게 대답하는것이였다. 그 다음부터는 다시 만나게 되면 하고 한마디씩 하고 지내니 이전의 그런 부 담스럽던 심리는 단번에 종적을 감추었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그 후로부터는 로인들도 먼저 인사말을 건네면서 서로 기분좋게 지내게 되였다. 짧은 인사말 한마디로 이웃들과 더 가깝게 지내게 되고 어색하게 지내던 심리는 사라져 가벼운 기분이 되였다.먼저 상대방에 인사를 올려 자신을 소개하여 서로 알고 지내는 이것 도 아빠트에서 어울려 살아가는 한가지 예술인가 본다. 경제사회에 들어서면서 금전만능사상이 잔뜩 머리를 쳐들면서 사람들 사이의 관계가 점차 모색한 관계로 변해가고 있는것이 오늘날 현실이다. 특히 도시사람들이 그런가 본다. 한 단원에 살면서 옆집에 사는 사람이 성씨가 뭔지도 모르고 무슨 단위에 출근하는지도 모 르는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어느 한고장에서는 홀로사는 로인이 죽은지 일주일이 되였을 때까지도 옆집에 사는 사람들은 모르고 지냈다는 끔찍한일도 있다고 한다.옆집에 사는사람 인줄을 뻔연히 알면서도 모르는척 인사도 안하고 지내니 그럴수밖에 없는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전보다 못해지기는 하였지만 농촌의 실정은 많이 다른가 본다.지금까지도 농촌마을 에서는 하면 하면서 한마을 사람들을 상세히 료해하고 살아가고 있다.한집에 경사가 나면 온 동네가 호 응해서 법적거리며 즐거운 분위기를 만들면서 함께 즐기고 좋은 일 궂은 일도 함께 나누어 하는 그런 멋이 농촌에서 사는 살맛인가 본다. 아무튼 인정이란 꼭 돈으로만 오가는것이 아니고 간단한 인사 한마디로도 한단원에서 사는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하니 인정이 도는 인사말 한마디도 아빠트에서 사는 예 술의 하나인가 본다.게 살아가자면 자신부터 쓸데 없는 자존심을 버리고 지금부터 주동적으로 이웃들과 인사를 나누는것이 응당한 일이라 본다. 2010년 6월 7일
6    산동사람들의 거주의식 댓글:  조회:574  추천:0  2013-01-26
☆ 수 필 ☆ 산동사람들의 거주의식 2007년도에 나는 행운스럽게도 에 가서 교단에 오를 기회가 생겨 산 동으로 가게 되였다. 우리 연변에서도 늘 산동사람들을 볼수 있어 산동사람과 연변조선족의 여러면에서의 차이점을 볼수 있었지만 이번 걸음에는 산동사람들의 거주의식이 우리 조선족 과는 완전히 다르다는것을 느끼게 되였다. 내가 갔던 뒤에는 라고 하는 꽤나 큰 농촌마을 하나가 있다. 이 마을은 7백여호가 모여사는 큰 마을이다. 농민들의 주택이 자리잡은 모양을 보아 력사기 긴 마을인듯하다. 마을중간에는 드문드문 비슬나무 고목들이 있었는데 이 마을이 오래 된 마 을임을 말해주는상 싶었다. 또한 집집마다 뜨락에는 나이깨나 먹은 굵직한 무화과 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있다. 적지 않은 집들의 담벽에서는 그젯날 충성을 나타내는 색바래진 구호 라던가 충성패쪽들을 찾아볼수가 있었으며 당년의 명인의 말씀이나 귀글들을 볼수 있었다. 마을의 모든 집들은 벽돌 기와집이였는데 바깥벽에 하얀 사기벽돌(瓷砖)을 붙여 집집마다 아주 말쑥하고 깨끗해 보였고 무늬가 고운 사기벽돌을 보기좋게 배렬해 붙여놓아 집은 한결 아름답게 보였다. 집 앞에는 두메터반의 높이로 벽돌담벽을 쌓았고 대문은 만년먹기로 철판 대문이였다. 대문테두리에는 고전식이거나 서양식의 무늬를 놓아 실용성과 관상성이 결합된 대문이였다.대문기둥에도 흰 사기벽돌을 붙였는데 기둥중간에는 자기의 애호에 따라 한족들 에게서 늘 볼수 있는 전통그림인 어린아이가 큰 고기를 안고 있는 (年年有魚'余')그림이거나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그림이 있는 사기벽돌을 붙이였다. 과거사회에서 만 볼수 있었던 지주집이거나 자본가의 집을 방불케 했다. 어느 하루, 머리깎으러 리발관을 경영하는 집에 들어갔었는데 리발관설비는 수수하였지만 살림살이설비는 현대화설비로서 각가지 가정용 전기기구를 포함하여 아주 구전하였다. 머리 를 깎는 기회에 나는 리발사에게서 마을자랑을 많이 들었다. 내가 외지사람인것을 알아서인 지 리발사는 성수나서 마을자랑을 늘어놓았다. 이 마을 대부분 촌민이 오래전부터 이고장에서 살아온 사람들이란다. 이 마을에는 3대가 사는 가족들이 많다고 한다.산동사람들은 바로 이렇게 한곳에 자리잡으면 집을 짓고 울안에 나무를 심고 화초도 가꾸며 백년대계로 살아갈 잡도리를 한다.이 마을의 뒤에는 창격산(窓 格山)라는 산이 있는데 산은 전부 집채같은 화강암으로 된 돌이다.돌이 가깝게 있는것이 편 리해서인지 집집마다 기초돌은 화강암을 두부모처럼 반듯반듯하게 깎고 다듬어서 만든것이 다. 진짜 이곳에서 오래오래 살아가려고 잡도리한것이 틀림없다. 집집마다 둬메터도 넘는 담벽을 멋지고도 견고하게 쌓은걸 보아서도 웬간해서는 이 고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맹세했 음이 확실하게 보여진다. 나는 내가 직접 목격한데 의하여 산동사람들의 거주의식에 대해서 보다 깊은 료해가 있게 되였고 우리 조선족들의 거주의식과 대비해보게 되였다. 우리 조선족들은 일반적으로 집을 살 때면 출근에 편리하겠는가,자식들이 학교에 다니는 데 편리하겠는가 하는것도 따지지만 더욱히는 앞으로 이집을 팔아먹을수 있겠는가 하는것 을 기본으로 하면서 집의 위치를 따지면서집을 산다. 새집에 들기도 전에 이사갈 궁리부터 한다. 이런 의식이 바탕으로 되고 있기에 오늘날 조선족사회에는 집을 버리고 자기의 피땀 으로 걸군 정든 땅을 버리고 정처없이 떠다니는 현상이 많이 존재한다고 본다. 우리도 산동사람들의 거주의식을 본받아야 한다고 보아진다.
5    이 춤판을 깨지 말아주오 댓글:  조회:633  추천:0  2013-01-25
이 춤판을 깨지말아 주오 며칠전 저녁 나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람도 쏘일겸 진달래 광장에 산책을 나갔다. 시내 한끝에 위치하고 있는 광장인지라 시내안 멀리에서 온 사람들도 많았는지 광장주위에는 숱 한 승용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고 오토바이며 자전거 같은것들은 더 말할나위도 없이 많았다. 광장에 가설되여 있는 각가지 등불들이 휘황찬란한데다가 밤시간을 리용하여 장사 를 하는 장사군들이 갖추어 놓은 알락달락한 등불, 광장주위 고층건물에 설치되여 있는 부 단히 명멸하는 광고네온등으로 하여 광장은 생기가 넘쳐나고 있었다.밤놀이를 나온 붐비는 사람들로 하여 광장은 일장 명절의 밤 기분으로 술렁이고 있었다. 붐비는 사람들을 겨우 피하면서 광장을 돌다가 광장 남쪽에 이르렀을 때였다. 수백명 사람들이 원을 지어 뭔가를 구경하고 있었다.도대체 뭘 구경하고 있을가고 의혹이 생겨 나 도 사람들 가까이에 가보았다.허허, 노래반주기를 틀어놓고 숱한 사람들이 나와서 춤을 추 고 있었던것이다. 아무렴 우리 조선족들이였던것만은 말할나위도 없다.흥겨운 우리 가락에 맞추어 늙은이도 젊은이도 신나게 춤을 추고 있었다. 춤은 우리 민족이 살아가면서 하루도 없어서는 안될 생활의 한부분인가 본다. 나는 거 의 60성상을 살아오면서 우리 민족들의 많은 춤놀이를 보았다. 내가 금방 세상물정을 알가 말가할 때니깐 아마 50년대 초기겠다.그 때는 농업합작화 시기였는데 우리 마을 합작사 사 원들은 농사절기에 따라 한해에도 몇번씩은 춤판을 벌리군 하였다. 설날이나 단오명절같은 때는 말할것도 없고 모내기를 끝내고는 사원들이 모여서 모내기총화를 하면서 막걸리를 마 시고 춤판을 벌리던 일, 논물을 뗄때면 논물을 떼는 좋은 기회에 생선을 잡아서 온마을 사 람들이 함께 앉아 생선국을 먹고는 춤판을 벌리던 일, 추석명절에 햇곡식밥을 해먹으며 멍 석을 펴놓고 춤판을 벌리던 일이 눈앞에 삼삼하다. 지금엔 그래도 기성음악이 담겨있는 록 음테프와 록음기가 있어서 춤판을 벌리는데 아주 편리하다.지내온 분들은 알다싶이 오락설 비가 없던 당년엔 곡을 잘 부르는 사람들의 노래가락에 맞추어 저가락으로 절주를 치고 함 지에 물을 떠놓고 바가지를 엎어놓고 두드리면서 물장고로 북을 대신하기가 보통이였다.아 직 경제가 락후하고 농촌문화사업이 활성화 되지 못했던 그시대에 농촌마을에 손풍금 하나 가 있었다면 대단한 일이였고 대퉁소나 피리를 불줄 아는 사람이 있었어도 괜찮은 셈이였다. 이렇듯 문화오락 시설이 없었던 나날에도 우리 민족은 노래와 춤을 즐기면서 살아왔다. 우리민족 인구가 점점 줄어들고 사처로 분산되고 있는 오늘날에,양걸이 북소리 높은 다른 한켠에서 흥겨운 우리 춤판이 벌어지고 있다는점이 너무도 대견스럽게 보이고 자랑 스럽게만 보인다. 우리 민족의 영광스러운 문화전통을 지켜가고 이어가고 있는 모든 사람 들이 참으로 사랑스럽고 고맙게만 보인다. 그 춤판이 영원히 깨여지지 말기를 바라는 마음이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이 더는 헤여지 지 말기를 바라는 나의 간절한 마음이다. 리 창 국 2007년 7월 21일 (연길에서)
4    그리운 백양나무 댓글:  조회:650  추천:0  2013-01-25
                                 그리운 백양나무 / 리창국        우리 학교 운동장주위엔 워낙 높이높이 솟은 백양나무가 아주 많았었다. 이 백 양나무들은 그루그루가 모두 우리들이 손수 심었고 물도 주면서 알뜰살뜰  정성스레 키운 나무들이다.병풍처럼 둘러선 백양나무들은 수년간을 내려오면서  우리들에게 많고많은  즐거움을 가져다 주었다.       추운 겨울이 지나가고 따뜻한 봄철이 돌아오면 나무가지가 움트는 모양도 볼수 있었고 파릇파릇 연록색 잎들이 점차 짙은 록색으로 변하여 가는 과정도 관찰할수 있었다. 백양나무잎이 한창 무성한 계절이면  학생들은 일찍이 학교에 나와 백양나 무그늘 밑에서  책도 보았었고 나무를 에워싸고 돌면서 재미나는 유희도 놀군 하였 다. 가을이 돌아오면 백양나무들은 실로 미혹적이였다. 진록색을 띠였던 백양나무 잎들은 점차 누런빛을 띠다가 마지막엔 노란빛으로 변한다.마치도 요술쟁이가 재주를 부린것 같다. 며칠이 지나 면 선들선들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잎들은 하나하나 땅에 떨어진다.오래지 않아 운 동장엔 새노란 주단을  펴놓은듯이  단풍잎들이 보기좋게 한벌 쫙 깔린다.학생들은 누가 더 큰 잎을 주었나 내기도 하고 나무잎우에서 뒹굴어보기도 한다; 교정엔 가 을을 마음껏 느껴보는 학생들의 즐거운웃음소리가 넘쳐난다 .하늘은 맑고 푸른데 선들바람까지 불어와서 심정은  한결 상쾌하다. 아, 가을이란 이렇구나! 이런것이 가을이구나!       백양나무는 사계절을 두고 우리의 꼬마화가들이 즐겨 그리는 사생대상물로 되여주었다.  사계절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릴 때도 백양나무는 화면에서 늘《주인 공》이였고 색채련습을 할 때도 학생들은  백양나무를 견본으로 하여 색채를 관찰 하고 알심들여 그 색채를 표현하였다. 백양나무가 날따라 키커갈 때 학생들의 그 림재간도 날따라 익어갔다. 숫한 꼬마화가들은 백양나무와 함께 자라났다.가을바 람에 날린 나무잎들은 교정의 구석구석에 쌓여 교정의 환경위생에 일정한  영향도 가져다 주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아침일찍 학교에  등교하여 지저분하게 널린 나무잎들을 쓸어버려야 했다.저급학년꼬맹이들로부터 고급학년의 학생들까지 모 두가  동원되여 자기학급의 담당구역을 소제하기에 다망하다.이것도하나의 시끄 러운 일거리이긴  하였지만 이런 간단한 로동은 학생들에게 어려서부터 깨끗한 환경을  가꾸는 습관을 길러주었고 부지런한 습관을 길러주었으며 집체를 열애하 는 정신을 키워주기도 했다.      가을 한계절에 아침마다 운동장청소를  해야되는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시끄 러운 일거리이기도 하였다. 아마 이것이 큰 원인으로 되였는지  학교에서는 운동 장주위에 있던 백양나무를 몽땅 찍어버렸다. 그대신 사시장철 푸른색밖에  모른 는 소나무를 심었다.이후부터 다시는 백양나무가 있을 때의 그런 즐거움을 느껴 볼수가 없게 되였다. 운동장 주위의 백양나무가 없어진지는 몇년이 잘 되지만 아 직도 높이높이 솟은 백양나무의 모습이 눈앞에 선히 떠오르고 백양나무로하여 즐거움을 느끼던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         아, 백양나무야, 나는 네가 사무치게 그리워난다.
3    <살구꽃락원>에 깃든 이야기 댓글:  조회:542  추천:0  2013-01-22
에 깃든 이야기                             미 인 송     은 저의 고향인 명월구 토월산산정에 있는 작은 운동장의 이름입니다. 은 2006년8월에 수건한 작은 운동장입니다.     토월산 산정에는 8년전만 하여도 사람이 10명 좌우가 활동할 수 있는 작은 운동장이 하나 있었을 뿐입니다. 등산하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짐에 따라 그 운동장은 너무 작아서 사용하기가 불편했 습니다.후에 등산애호가들은 그 운동장을 곱절로 늘여 확건했지만 오래지 않아 또 작은감이였습니다. 여러 등산애로가들의 토론 끝 에 새롭게 운동장을 더 크게 닦기로 결정되였습니다. 그리하여 길 이가 17메터 너비가 8메터인 100평방메터가 넘는 운동장을 닦았습 니다.시간이 감에따라 등산애호가들이 늘어남에 따라 운동장 두개 도 만족을 줄수가 없었습니다.산에 오르는사람도 많아 동시에 50 명 좌우가 한 운동장에서 활동하려니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저의 한친구와 토론하고 새로 운동장을 만들기로 했습니다. 주체운동장에서 약 50메터 떨어진 곳인,앞이 확 트이고 뒤에는 피 나무와  참나무들이 병풍처럼 둘러선 곳을  정하고 작은 운동장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온 여름 새벽에 등산하여 둘이서 운동장을 닦 았는데 50평방짜리 두개를 닦았습니다. 자연생태를 보호하는 원칙 하에서 주변의 나무들을 하나도 다치지 않고 잘 리용하면서 멋진 활동장소를 마련하였습니다.     나이가 60에 가까운 사람이 이제 등산을 하면 몇년을 더 하겠 다고 그렇게 힘을 빼는가고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우리는 그 사 람에게,우리는 아직도 20년 동안을 더 등산운동을 할수 있다고 하 면서 락심하지 않고 끈질기게 해냈습니다. 인젠 토월산에서 다섯 번째로 되는 운동장을 닦았습니다. 토월산에 운동장이 여러개여서 분별하여 부르기가 말쨌던것입니다. 그래서 다른 운동장과 분별하 기 좋게 이름을 달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이라고 이름 을 달았습니다. 저의들이 닦은 운동장 주위에는 살구나무가 여러 그루가 있거든요. 그래서 그 특징을 따서 이런 이름을 달았던것입 니다.운동장 변두리에 움직일수 없는 큰 돌이 바로 그림에서 볼수 있는 그 돌이고 그 돌에 이라고 새겼습니다. 이 운동 장이 수건되자 숫한 등산애호가들이 찾아와서 운동을 하며 즐기고 있습니다.     토월산에는 아름다운 꽃과 풀들이 있고 산아래를 내려보며 촬 영하기 좋은 곳이여서 숫한 촬영애호가들이 모여오는 곳입니다. 둘째 촬영사가 당콩알만큼 큰 살구를 찍는 장면입니다.
2    고향의 가을 댓글:  조회:578  추천:0  2013-01-22
        연변의 가을은 알찬 열매를 수확하는 황금계절이다. 가을이 돌아오면 우리 고향 연변은 산은 산마다 과일과 산열매들이 주렁지고 들판은 황금 물결로 술렁인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저기 저 사과배과원에서는 알알이 무르익은 사과배를 따는 여인들의 흥겨운 노래소리가 들려온다. 드디어 사과배과원엔 상자마다 꼴똑꼴똑 담긴 사과배상자 들이 산더미로 쌓인다. 과수농들은 한해의 풍성한 성과를 바라보며 만면에 웃음꽃이 활 짝 핀다.          아득히 바라보이는 논벌 저쪽 산밑에는 옹기종기 들어앉은 붉은기와집들이 보인다.     집처마끝이 덩실하게 들린것을 보아 모두가 우리 민족들이 살고 있는 집들인가부다. 확 트인 금빛벌판을 문앞에 두고 마을뒤엔 사철푸른 소나무가 우거진 산을 병풍으로 삼 고 있는 마을마다 굉장히 큰 한폭의 아름다운 수채화를 방불케 한다.         풍년을 맞은 동성벌은 알알이 터질듯이 무르익은 벼들이 황금파도로 술렁인다. 고향 사람들이 부지런한 노력으로 바꾸어 온 로력의 열매이다. 논밭 변두리에 초병마냥 곧게 서있는 백양나무들도 누런옷을 바꿔 입기 시작한다. 백양나무들은 긴 팔을 저의며 오가 는 차량들을 향해 정답게 손짓한다. 고향사람들의 알찬 성과를 온세상에 자랑한다.         새벽부터 가을걷이에 나선 마을사람들은 풍요로운 가을에 취했나부다.흥겨운 노래 소리가 그칠새 없다. 노래소리는 행복을 싣고 기쁨을 싣고 자랑을 싣고 출렁이는 해란 강의 여울소리에 어 울려 저 멀리 푸른 하늘로 울려퍼지고 있다.         유유히 흐르는 해란강아, 끝없이 넘실거리는 황금벌판아 고향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시와 노래가 들어찬 고향의 강, 고향의 황금벌로 하여 내가슴도 격정의 뜨거움이 물결 친다. 억센 투지로 하늘땅과 싸워 보람찬 오늘을 안아오 동성벌의 사람들이 대견스럽고 부지런한 두손으로 고향을 아름답게 수놓아가는 해란강반의 사람들이 참말로 사랑스 럽다.         해란강아 흘러흘러 고향의 풍년소식을 온세상에 자랑해다오.         해마다 만풍년을 안아 오는 고향사람들을 온천하에 자랑해다오.
1    휘파람소리를 멈췄습니다 댓글:  조회:563  추천:0  2013-01-22
휘파람소리를 멈추었습니다     5월17일은 우리가 자전거려행을 떠난지 사흘째 되는 날입니다.이날 아침 우리는 화 룡에서 떠나서 정심때가 되여 룡정에 도착했습니다.정심밥을 치른 우리는 래일엔 도문 에 가기 위하여 조금이라도 거리를 단축하려고 덕신에 가서 주숙하기로 하고 덕신에로 가는 길에 올랐습니다.      오전까지 그렇게도 무덥던 날씨가 오후가 되자 갑자기 구름이 많이 떠돌면서 잔잔 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너무 무덥기보다는 많이 좋았습니다. 선들바람이 부는 지라 기분도 좋아서 휘파람도 저절로 나오더군요.  룡정을 떠나서 남양령이라는 길에 들어섰는데 점점 바람이 세여지더군요. 그러나 우리는 웬간한 길에서는 자전거를 탔고 힘든 곳에서는 자전거를 밀고 올리막을 올라가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길은 줄창 올 리막이더군요.약 20리 길을 갔을가 했을 때 길 아래에 아주 멋진 현대화 농촌마을이 나 타났습니다.가로세로 줄을 쫙쫙 맞춘 모양이 서로 꼭같은 집들이였습니다.몇세대나 되 겠는가 세여보니 대략 백세대는 잘되더군요.  마을 밖에는 액화가스공급기지도 있구요. 아마 우리 연변에서는 제일  아담한 마을이라 보이더군요.  마을 가까이에 이르니 길까 에 기념비석을 세운것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하였 다고 씌여 있더군요. 마을 이름은 이라고 기억됩니다.우리 일행은 마을구경도 휴식도 할겸 자전거에서 내려 한창 길가에 앉아서 한담중인 이 마을 로인들을 만났죠. 말소리를 들어보니 모두가 조선족이네요.    우리가 인사를 올리며 마을이 아름답다는 칭찬부터 했습니다.    성격이 통쾌한 한 로인 의 말씀이였습니다.       그 로인은 서글프게 대답했습니다.    그뜻을 얼마든지 알아 들을수가 있었습니다.  출국풍에 어느 농촌이나 젊은이들은 모두  출국하지 않으면 성시로 진출하다나니깐 마을엔 로인과 애들만 남은 것이 우리 연변의 실정이거든요.그러니 이 마을 역시 그런 실정이란 뜻이겠죠.    돈이란 무엇이길래  아름답고 정든 고향을 떠나야 하고 무엇 때문에 부모처자와 갈라 져 이국타향에서 고역살이를 해야 하는건가?!멋진 마을을 구경하던 우리의 심정에는 갑 자기 큼직한  돌덩이라도 떨어진듯 큰 물결이 술렁이였습니다. 멀리서부터 이 아름다운 마을을 감상하던 도도한 흥취는 단번에 깨뜨러지고 말았습니다. 멋진 집들을 구경할 생 각도 가뭇없이 사라졌고 머물러 더 휴식하려던 생각도 대뜸 사라졌습니다.    우리는 또다시 려로에 올랐습니다.살랑살랑 기분좋게 불던 바람은 점점 세차졌고 가 야할 길도 의연히 올리막길입니다. ,,다시 또 이 머리속에 소용돌이 치기에 금방까 지도 성수나게 불던 휘파람소리는 딱 끊쳐버렸습니다.   우리는 점점 세차게 부는 바람을 맞받아 힘겹게 자전거를 밀면서 묵묵히 올리막길을 걷고 또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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