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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무정장군》

항일장령 무정장군의 인생비화2
2016년 09월 18일 20시 45분  조회:1290  추천:0  작성자: 리함

1930년 5월 이후 장세걸은 상해조선인지부의 추천과 중공강소성위의 파견으로 강소에 가서 홍14군 제1사 사장 겸 제2퇀 퇀장으로 활약하다가 상해로 돌아왔고 1931년초이후 중앙군위의 파견으로 강서 중앙혁명근거지로 들어가 홍1방면군 제1군단 제22군 참모장, 제1군단 제2사 제6퇀 퇀장 등 중책을 맡게 되였다. 장세걸은 중공강소성위 위원을 겸한 양림(원명 김훈), 무정(원명 김무정) 등과 더불어 중앙홍군의 3김, 즉 세 김씨 장군으로 활약하던 위인이요, 무정의 전우였다.

최정무와 윤호는 그 시절 쏘련 울라지보스또크 우쑤리스크 태생이다. 최정무는 1910년생이고 윤호는 확연히 알수는 없지만 같은 또래로 알려진다. 쏘련 공청단원들인 최정무와 윤호는 10대 중반의 나이에 극동지역의 조선인혁명가인 박우(朴禹)의 소개와 영향으로 혁명의 장도에 오른 젊은이들이다.

어느날 박우는 그들을 보고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에는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을 갈라볼수 없는거요.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요. 그러니 중국 상해로 들어가도록 하시오."

그러면서 박우는 손수건 하나를 건네주면서 상해로 가서 복신로 182번지 2층집을 찾으라, 려운형이란분을 만나라, 그분은 조선공산당 상해지부 서기라고 동을 달았다. 1926년 최정무, 윤호 등 5명의 쏘련 공청단원이 울라지보스또크 우쑤리스크를 떠나 중국 상해행에 오를 때 최정무의 나이는 16살이였다.

불원천리하고 상해에 이른 최정무 일행 5명은 복신로 182번지를 찾아 상해조선인지부 서기 려운형선생을 만나 비밀소개신인 손수건을 건네였고 려운형선생의 파견으로 광주 황포군관학교로 가서 제6기 예비생으로 입학하게 되였다. 1927년초 넉달 동안의 예비과목 단계를 거친후에는 제4기생으로 군사훈련을 받았다. 이는 최정무의 경우이지만 동행한 윤호 등 4명도 비슷한 학습과 훈련 과정을 거치였다고 보아진다.

황포군관학교 제4기생 시절, 최정무는 조선인 양림의 소개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중국공산당이 지도한 1927년 12월의 광주봉기에 뛰여들었다. 윤호도 같은 과정을 밟으며 중국공산당에 가입하고 광주봉기에 참가하였다. 광주봉기 실패후에는 각기 천신만고를 겪으며 상해에 이르러 조선인지부를 찾았고 보정군관학교 출신인 무정과 더불어 한지부에서 당생활을 하며 상해 한인청년회를 개편한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 성원으로도 뛰게 되였다.

무정은 보정군관학교 출신이였고 오명, 최정무, 윤호 등은 황포군관학교 출신이였다. 당시 무정은 사기가 부쩍 올라있었다. 다 같은 중국 군관학교 혁명군인 출신들이니 중국혁명에서 몸을 내번지며 해볼만했다. 최정무가 말하는 극동지역 조선인혁명가 박우선생처럼 중국혁명과 조선혁명은 갈라볼수 없고 중국혁명에 참가하면 역시 조선혁명에 참가하는것과 마찬가지이니까.

그런데 생때같던 윤호가 상해조선인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에서 별반 활동하지 못하고 1928년 5월 28일에 일부 동지들과 함께 불행히도 적들에게 체포되여 남경감옥에 갇히게 되였다. 무정과 그의 동지들은 분하여 펄쩍 뛰였다. 알고보면 이 적들이란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들이였다. 황포출신 윤호는 어찌하여 이자들에게 체포되였을가? 이는 조선의용군 출신의 항일로간부 최채평전 "불멸의 영령 최채"(류연산 저)에서 자상히 알려진다.

1928년부터 1932년 몇년사이만 해도 상해의 조선인들은 무정 등이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당지부와 그 외곽조직인 "상해 한국독립운동자동맹", "상해조선인청년동맹"의 지도하에 상해에서 광범위한 반일선전활동을 자주 벌리였다. 낮이면 반제집회, 시위행진 등이, 밤이면 프랑스 공공조계지에 삐라와 포스터가 나타나니 조계지당국의 비위를 거슬릴수밖에 없다. 이때를 두고 최채는 아래와 같이 알려주고있다.

“프랑스조계지 순포방과 공공조계지 공부국에서는 조선인혁명가를 체포하여 조선인으로 확인되면 일본령사관에 넘겨 서울 서대문감옥 등에 압송하고 조선인으로 밝혀지지 않으면 국민당정부에 넘겨 남경감옥 등에 투옥케 하였습니다. 상해 조선인당지부의 주요 골간이였던 정향명(丁向明,일명 성시백)과 윤호, 김석철 등 동지들은 선후하여 체포된 뒤 남경감옥에서 옥살이를 하였으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강선필은 국민당에게 학살되여 남경 우화대(雨花台: 남경시 혁명렬사릉원)의 이슬로 사라졌습니다.”

최채의 이 증언은 황포출신 윤호가 중국공산당 당원으로서 상해 프랑스조계지 순포방 순포들에 의해 체포되고 남경감옥에 투옥되였음을 잘 알리고있다. 일제측의 관련 자료로 보면 무정 등 동지들의 지도하에서 상해 조선인들의 반일혁명활동은 정말 활발히 전개되였었다.

1932년, 조선의 전민족적인 반일운동—3.1운동 13돐을 맞으면서 상해한인녀자청년동맹에서는 "3.1절을 당하여 동지에게 격함"을 발표하고 상해한인청년당에서도 "3.1기념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국혁명호제회(互济会) 상해한인분회에서도 "3.1 운동 제13주년 기념 선언"을 발표하고 조선인 민간단체 화랑사(花郎社)에서도 "3.1절 기념에 대하여"를 발표하여 그 성세가 이만저만이 아니였다. 이런 발표문과 기념활동은 비록 무정이 중국공산당이 지도하는 홍3군단으로 떠난후라 하지만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그의 외곽조직인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의 구체적인 지도의 결과라는것은 에누리없는 사실이다. 무정의 상해시절도 그러했었다.

상해시절의 무정과 그가 포함되고 지도하는 상해 조선인 중공지부와 상해 중국본부 조선청년동맹 상해지부는 여러 반일활동들과 더불어 남경감옥에 수감중인 윤호, 김석철, 성시백 등 세 동지를 구출하기 위한 대중적인 선동 및 위문금 모집 활동을 활발히 벌렸다. 무정은 이 구출운동의 선두에 나섰다. 그러나 윤호는 조직과 동지들의 이같은 노력의 결과도 보지 못하고 남경감옥에서 옥사하여 상해 조선인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구체적인 옥사시간이 어느해, 어느달인지는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지만 1932년 3월 직후라고 추측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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