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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    누나바지 댓글:  조회:1956  추천:0  2016-02-08
손자가 제누나가 입던 바지라고 입지 않겠다고 난리다. 새옷을 사내라고 …. 누나가 얼마 입지도 않은 바지여서 새것과 다름이 없는 바진데도 말이다. ……                                       1 내가 어릴때는 정말 새 바지라곤 입어 보지를 못하였다. 어쩌다 새 오바(외투) 하나를 입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내가 10 살 때 쯤 어머니는 나에게 새 오바를 만들어 준단다. 너무나 기뻐서 정말 날뛰다 싶이 하였다. 오바감 원단을 가지고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영철이네 집을 갔다. 당시 우리 모태 (연변사투리로 우리동네라는 말)에는 영철이네 집이 아니면 저 길건너 두만이네 집에 가서 옷들을 지어 입었던것 같다. 우리 어릴때는 옷은 대부분 마선집에 가서 지어다 입었다.   영철이 엄마가 나의 몸에 치수를 이리저리 잰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나는 기쁜 심정으로 그 오바가 빨리 완성 되기만을 고대하였다. 그런데 그옷이 그렇게 늦게 될줄이야 …   오바를 영철이 엄마에게 맡긴 다음날부터 맨날 학수고대하고 새 오바를 기다리던 난 끝내 참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따졌다.   “어머니!  내 오바는 언제 나온답니까.” “오~  그거 ” 어머니의 모호한 대답이였다. 난 그 오바가 그 새 오바가 그렇게 빨리 입어 보고 싶었다. 비록  춥지도 않은 가을이였지만… 그 새오바가 하루 빨리 완성되기를 고대 기다리는 나였다.   정말 새옷이라곤 입어 보지도 못한 나에게 겨울 오바가 그것도 새 오바가 만들어 진다는데 …                                                                                 2   내가 어릴때 나에게는 어쩌다 차려진 바지라곤 형님이 기껏 입다가 해진 바지를 뚝잘라 만든 바지가 아니면 아버지가 입던 바지를 어머니가 어떻게 손으로 깊고 줄이고 하여 만든 바지가 전부였다. 새 바지라고는 입어 본 기억이 한번도 없다.   그때는 대부분 단련이란 원단으로 만든 곤색 아니면 검정색 바지였는데 다 만들었는데도 엄마는 나를 입게 못하였다. 그 저 바지가 맞는가를 잠간 입어 보고는 퍼그나 큰데도 명년이면 딱 맞겠다며 그대로 거의 한뼘이나 올려 홀쳐 매놓고는 다시 한번 나를 입혀 보고는 그대로 다시 벗으란다. 그리고는 꼭 무슨 춘절이나 아동절이나 명절부터 시작해 입으라는 것이다. 어쩌면 설명절에 곱게 입히려는 것이었을지는 몰라도 그 리면에는 조금이라도 늦게 입혀서 절약하자는것이 최종목적?이 아니였나 싶기도 하다.   그 새 오바도 예외가 아니였다. 오바가 어찌나 큰지 둘째형님이 입으니 딱 맞는것이다. 그래도 어머님은 음 명년에는 딱맞겠다. 하면서 그대로 긴 팔소매를 거의 10센치나 걷어 올려서 홀쳐 주고는 다시 나에게 입혀 본다. 오바라 다른데는 크면 큰대로 널으면 넓은 대로 그대로 입어도 괜찮았다.   그리고는 또 그 오바를 벗어서는 설날부터 입으란다. 그보다도 억울한 것은 새오바도 새 오바란 허울뿐이다. 안감은 헌 원단을 뜯어 대여서 겉감만 새것이였지 속안은 볼품이 없었다. 본래 그런 헌  안감도 얻지 못하여 그 오바는 그해 겨울도 다지난 겨울방학에 만들어 진 것이리라 … 아마도 오바를 크게 만든것도 어머니가 한 삼년은 입게 해달고 하였기때문였을것같다 ! 그리고 그때는 무럭무럭 자랄때였으니 … 그때는 옷 한견지를 꼭 삼년이상 입어야 한다. 새것으로 한해, 낡은것으로 한해,, 기워서 한해 …                                          3   그땐 정말 지지리도 가난하였다.   내가 줄두개를 달었을 때였으니 아마도 소학교 2, 3학년때 일인가 싶다.   그해 6;1 절에 연길에는 대 축제가 있었는데 우리는 집체무에 행진검열연습에 매일 오후를 할애 하였다. 그리고 드디여 6:1 절이 바야흐로 다가 오는 그 전날 우리는 모두가 6:1절 행사에 입을 집체복을 입고 오라는것이였다. 마지막으로 복장을 입고 검사해 보려는 것이다.   집체복이라야 그당시에는 검정이 아니면 곤색 바지에 흰대복이면 다였다. 나는   어머니에게 미리 준비+다짐을  주었다. 이번에는 꼭 곤색바지와 흰대복을 만들어 6;1전으로 준비하여 내놓으라고 …   그런데 야속하게도 어머니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엉엉 울면서 어머니에 투정을 부렸으나 당시에는 너무나 가난하여 그런 곤색 바지에 소선대 대복은 어디서 나올떼가 없는 우리집이었다. 어머님은 나에게 내일만은 꼭 행사에 빠짐없이 만들어 놓겠으니 근심말라 안심을 주어서 그대로 학교에 가서 나하고 몇몇은 바지는 물론 대복도 입지 못하고 연습하였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롭다.   다른애들은 몰라도 중대대기를 들고 대렬 선두에 선 내가 헌 바지에 대복도 안 입고 있었으니 얼마나 보기가 싫었을가! 거기에 내옆에는 여자애 둘이나 이 중대기수를 호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끝날 무렵 내일은 모두 꼭 통일복장을 입고 오라고 반주임선생님은 나에게 신신당부하였다.   그리고 이튿날 나의 어머니는 정말 약속을 지켰다. 정말 어머니는 어디서 만들어 왔는지 내가 입어본 바지중 가장 새것인 곤색바지를 나에게 입혔는데 그 바지는 나한테 딱~ 맞았다. 머, 당시는 대충 길이만 맞으면 만사가 오케이였던 시대였으니 …   곤색바지에 새하얀 대복을 거기에 넥타이까지 누나는 아침짓고 남은 풍로에서 남은 석탄불을 다리미에 넣고 나의 그 겸열식에 입을 대복과바지, 그리고 넥타이까지 반듯하게 다려 나에게 입혔다. 정말 멋졌다.   나는 그 곤색 바지에 새하얀 소선대 대복을 입고  거기에 새빨간 두줄 표식을, 그리고 새빨간 붉은 넥타이도 멋지게 메고는 라라 라~ 학교로 달려 갔다. 그리고 6:1절 행사도 멋지게 끝내였다.   검렬을 끝내고 우리는 참았던 소피보러 주석대 뒤로 달려 갔다. 그때는 공원안에 화장실이라곤 기억에 없다. 주석대 뒤 골짜기가 바로 변소였던것이다.   나는 바삐 바삐 서둘러 소변을 보려고 앞에 오줌 구멍을 찾았으나 …아뿔싸 급한 나머지 구멍을 찾지 못하겠는거 아니겠는가. 이리저리 손가락을 만져가며 천천히 찾았으나  구멍이 없다. 다시 머리숙여 찾았으나 원래 오줌 구멍이란  없는 바지가 아닌가 …   나는 너무도 기막혔다. 소변은 급하지 구멍은 없지 바삐 바삐 허리끈을 풀려고 하였는데 어머나!? 글쎄 그끈이 올 매여진 것이 아닌가 급한 나머지 아무끈이나 잡고 당겼으니 …   당시에는 혁띠는 아버지나 띠는 것이고 각띠를 차고 다니는 애들도 있었으나 우리집은 가난하기에 그런 각띠는 형님들 차지고 나에게까지 그런 허리띠가 차려진다는것은 너무나 사치였던 그때 그시절이였다. 나는 그저 노끈으로 허리띠를 대신하여 끈을 매고 있었던 것이다.   혼자 급해서 그 올매여진 바지끈을 풀려고 애를 썼으나 허사였다. 어린 나에게는 그것을  풀수 있는 손가락 힘도 두뇌도 역부적이였다.   그 끈을 풀려고 무지 애를쓰던 나는 … 종내는 바지가랑이에 뜨거운 액체가 줄줄 흘러 내렸다. 난 그래도 재빨리 한쪽 가랭이를 안쪽으로 잡아 당기고는 그대로 쉬~ 하고 말았다. 얼마나 부끄러웠던지 … 다행이 바지가랑이가 널러서 그렇게 많이 젖지는 않았다. 정말 불행중다행이라 할가 사위를 휘 둘러보니 본사람이 없는것이 아닌가   난 남들에게 발각 될가봐 머리를 굴렸다. 나는 중대 기수였으니 중대기를 들고 있었는데 그 기발을 거꾸로 쥐고 노는 것처럼 그것을 휘휘 돌리면서 … 대렬속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온 나는 어머니를 보자 서러움에 울음이 터졌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따져 물었다. 이 바지, 오줌구멍도 없는 이바지는 어디서 났는가고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고 … 울며불며 난리 쳤다. 알고 보니 어머니는 밤새도록 쉬지않고 누나의 바지를 줄여서 내 바지를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본래 누나가 입던 바지였는데 누나에게는 새 바지를 사주기로 하고는  누나가 입던 바지를  뒤집고 줄여서 나에게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자바지를 남자바지로 고치려거나 그 바지에 오줌 구멍을 내려면 어머니 바느질 손재간으로는 역부족이였던 것이다.   어머니 솜씨로는 여자바지에 어떻게 오줌 구멍을 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본래 바지는 그 부분이 제일 손과 일이 많이 가는 부분인데 … 거기에 시간과 재간 부족으로 어머니는 오줌구멍도 없는 바지를 나에게 입혔던 것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모를것이다. 당시에 여자들의 바지는 앞에 구멍이 없고 옆이 째개져 있었다. 그리고 주머니도  없다.)   오줌구멍이 없는 바지때문에 바지에 오줌을 싼 내가 얼마나 서럽게 울었던지 어머니는 아버지가 석탄비를 타면 올해는 꼭 새것을 만들어 준다고 … 형님이나 누나가 입던 바지가 아니라 새것을 만들어 준다고 달래여 나의 울음은 겨우 끊쳤다. 그 사건에 나의 그 서러운 울음이 새 오바 그것도 허울뿐인 새 오바를 만들어 준것이다.   오 ~ 그때는 설날을 기다리는게 얼마나 애가 탔는지 우리 그때는 정말 설날이나 무슨 명절이여야 색다른 음식을 먹을 수 있었고 새 옷도 입을수가 있었다.   요즘도 난 손자 손녀들이 새 바지를 사서 입어 볼때면 “야! 딱 맞고 정말 멋있다.” 그리고 조금 크면은 “명년에는 딱~ 맞겠다.”  그다음 또 우스개 소리를 한마디 더 한다. “야 벗어 두었다가 설에 입어라”고. …   이번 설에 손자손녀가 옷타발을 하기에 난 그옛날 내가 어릴때 누나 바지를 입었다가 바지에 쉬를 한것이 새삼스레 떠 올라 이렇게 수필(随笔)했다.               
46    그옛날 고향의 김장철 댓글:  조회:1286  추천:0  2015-11-11
11월이면 우리고향에는 각 단위마다 재무과나 공무과가 바빴다. 사처로 배추밭을 찾아 다니면서 어디에 더 좋은 배추가 있나? 어디에 더 싼 배추가 있나?하고 연길근교에 있는 채소대를 찾아 동에서 서로 남에서 북으로 달아 다니며 배추밭을 찜한다. 그 찜한 배추 밭은 바로 우리 회사거나 우리단위, 혹은 우리 공장의 몫으로 … 우리들의 한해의 김장, 즉 다시 말하면 겨울나기 채소를 마련하는것을 도맡는다. 우리 어릴적부터 우리가 장가를 가서 애 낳고 썩 얼마후,중국이 개방해서까지 우리 연길시에서는 이렇게 가을 김장 배추를 각 단위에서 채구해서 나누어 주고 … 그리고는 다음달 월급에서 결산하고 … 하였다. 11월이면 우리 방직공장에서는 각 공단별로 겨울김장배추나 감자, 그리고 무우등을 본인들이 요구하는대로 기록하여서는 요구한 수량대호 집집이 단위의 차로 집문앞까지 운송해 준다. 누구하나 자가용은 물론 이어커 하나 없던 세월이라 차는 단위의 차로 무료로 운반해 주었다. 배추 캐는 날이면 차간车间이거나 공단마다 사람을 될수록이면 딱 필요한 사람, 다시 말하면 일선에 필요한 사람만 남아 생산을 유지하고는 모두들 옷들을 두툼이 챙겨 입고 배추캐러 떠난다. 차라야 트럭이 고작이다. 그때 당시 우리는 모두가 평등하다 보니 운전간에 서로 앉겠다고 서두는 사람도 있었다. 그때는 어찌나 춥던지 … 날씨가 요즘보다 더 추운것은 아니겠는데 … 아마도 옷들을 너무 보잘것 없이 엷게 입어서 그랬던가부다. 하여간 너무나 추워서 방직공장 준비차간에서 솜을싼 투레기 보자기를 그대로 목에다 두루거나 머리에 쓰거나 … 하는 늠들도 있었다. 달리는 트럭에 요즘 가축을 운반하는것처럼 그대로 노천에 노출되여서 바람을 맞으며 배추밭이나 감자밭 그리고 무우밭을 향해 달린다. 그렇게 추워도 당시에는 그런 차도 별로 타 보지 못한 이들도 있어서 그 트럭위에 앉아 스피드 호사를 즐기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때는 따뜻한 운전석을  간부들에게 양보하는 인간들도 있었으나 ... 없지 않아 있어으나 아주 드믈었다.  그래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요즘 그누가 한대 밖에 없는 트럭의 운전좌석에 먼저 올라 령도에 자리를 내지 않으면 ㅎㅎ 이튿날로 모가지가 날아 나지 않을가부다. 아! 나도 처음 외국에 나갔을때 망신한적이 있다. 아침 일찍 직원들을 출퇴근시키는 봉고차가 있는데 나는 일찍 나가서 멋도 모르고 우리 고향식대로 먼저 타는게 임자라고 운전수 좌석에 덥석 앉았다. 스스럼없이 부끄럼하나 없이 말이다. 본래 나이로 보아도 내 나이는 기숙사 그누구 보다 많았다. 그런데 차장이란 자식이 뒤늦게 나오더니 앞좌석문을 열고 그대로 나를 빤히 쳐다보더니 “내려” 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내가 더 먼저 나왔는데 “이~자식!“하고 속이 울컥거렸으나 그놈이 차장이고 바로 내 상급이라 잠간 머뭇거리고 있는데 뒤에 대리, 내가 사랑하는 박대리가 “정형 이 뒤에 자리 있어요 여기앉아요.“ 하기에 박대리 옆에 자리를 잡고 출근하는데 온하루 냉가슴 앓았다. “쬐꼬만 녀석 차장이라고 .,..” 썩~ 후에야 알았다. 자본주의는 본래 평등이란 없다는것을 … 우리가 배운 평등은 또 너무나 몰상식한 평등이였단것을 어쨌든 우리 그때는 대체로 누가 먼저 운전석에 앉으면 그게 그의 자리였다. 11월이면 우리는 각 부처거나 각 반별로 아니면 공단별로 배추를 얼마나 요구하는가고 ... 요구대로 신청한다. 우리 엄마, 엄마때는 보통 한집에 천근좌우였다.  그때는  집집이 식구가 많아서 항상 먹을 것이 모자라고 반찬이 모자라는 때여서 … 처음 새살림을 하는 젊은이들은 누가 몇식구에 얼마나 요구하는가에 따라 본인도 거기에 비슷하게 맞춰서 배추를 등기?한다.  나는 82년도 결혼하였는데 그해엔  남의집 세방살이에 김치를 담굴처지가 되지 않아 배추를 요구하지 않았다. 다음해에 난 작은 집을 분배 받았고 그래도 김치굴이라는 것이 있었기에 대충 어름잡아 겨울나기 3개월 푼푼히 처서 100일로 계산하고 거기에 배추 한포기 사나흘 먹는다고 계산하여 배추를 35 포기 를 예산하여 한포기당 4,5근 좌우로 쳐서 150근을 보명하였다. 단위에서 몇몇 젊은이들이 나의 계산에 머리를 끄덕이며 대체로 젊은이들은 나와 같이 백여근 씩 보명하였다. 물론 욕심이 많은이도 있어서 될수록 김치독이나 김치굴에 보관할수 있을 정도로 보명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당시에 김치움은 보온이 괜촪으면 통풍이 잘 안되고, 통풍이 잘되면 보온이 잘 안되또 매일 김치움 뚜껑으로 덥고 열고 하며 온도를 조절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힘들었다. 그래도 돈을 아끼려는 욕심, 그리고 남보다 더 장만하려는 부질없는 승벽심에 많은 생배추거나 김치를 될수록 많이 장만한다. 11월이면 우리는 각 단위별로 채대를 찾아서 찜해놓은 배추는 배추 채대에 장사들이 배추 캐러 오라고 통지하면 그날로 차를 갖고 밭에 간다. 트럭에는 배추 캐러가는 사람들로 가득채우고 어떤데는 저울이 없기에 우리는 큰 저울을 차에 싣고 간다. 거기에다 문짝같은 널판자를 깔고는 그위에 배추를 올려놓고 한사람몫씩 저울에 달고는 그대로 차에 싣는다. 그리고는 거기에 다음사람배추를 싣고는 그 중간에 원단이나 신문지로 표시하고 또 다음사람몫을 싣는다. 그런데 어느밭이나 다 그러하듯이 배추밭에도 밭머리 배추는 그닥 좋지 않아서 모두들 처음에 다시 말하면 밭머리 배추를 가지기를 싫어한다. 그러면 먼저 일하기 싫어 오지 않는 사람들의 배추를 먼저 달아 싣는다. 보통 그런 배추는 포기가 작고 질이 차하다. 그렇게 반나절 고생하고는 모두들 점심때면 허기가 지면 차간에서는 간단한 건량을 사고 빼갈두어병 … 거기에 된장을 사서는 밭에 생배추속을 빼서는 된장에 뚝~찍어 술안주 삼는다. 뭐 “시장이 반찬이라”고 당시에는 그렇게 배추속+된장 안주에다도 넘 많이 마셔서 일도 바로 못하는 늠들도 종종 있었다. 요즘 어른들은 당시 배추가 맛있었다고 하는데 내생각에는 그래도 굶고 배고파서 맛있었지 않았나 싶다. 머 생가지도 뚝 따서 생오이 처럼 맛나게 먹을 정도였으니 … 이렇게 집까지 날라온 배추는 이튿날부터는 양지쪽에 배추를 널기 바쁘다. 요즘은 몰라도 당시 배추는 집집이 꼭 양지쪽에다 배추를 널어 시들구군하였다. 그렇게 낮에는 널어 놓고 밤이면 다시 모아서 무져 놓고는 얼지 않게 벼짚가마니 같은거나 헌 투레기 원단이나 보자기 같은 것으로 덮어 놓고 아침이면 또 널어 놓고 하여간 집집이 김치를 만들어 굴에 넣기전까지는 이런 고생을 많이들 한다. 이런 고생은 내가 방직창 사층집에 살때까지하였는데 그후엔 내가 외국에 나가다 보니 얼마후 까지 계속되였는지 … 이렇게 며칠 지나면 온동네 아줌마들이 바빠진다. 대체로 김장을 먼저 시작하는이들은 대부분 집에서 주부로 있는 아낙네들이다. 그들이 먼저 김치를 소금물에 담근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을 재워서 배추 숨을 죽이고는 그 소금물든 배추를 꺼내서 다시 깨끗한 물에 깨끗이 씻는데 …. 이것을 초절임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집집이 줄지어 살던때였는데 ...정말 속담 그대로 “이웃이 바로 사촌”이였던 시대여서 그 배추를 담금었던 그 소금물을 그저 버리기 아까워서 이웃집에 물어 본다. 소금물을 쓰겠는가고 … 그러면 그집에서는 그대로 그 집에서 담았던 배추물 (소금물)에 다시 또 배추를 담군다. 울 엄마는 옆집에서 소금물을 가져 가라니 그대로 일요일 늦잠자는 나를 깨워서 옆집 김치독에서 소금물을 퍼 오게 하였던 기억도 있다.  엄마는 그 소금물을 손으로 찍어 입어 넣어 소금간을 보더니 소금을 약간 더 넣고는 바로 배추를 다듬어 거기에 넣는다. 하여간 당시에는 이렇게 이웃사촌이라 김장 때면 소금물이라도 서로 나누어 쓰곤 하였다. 며칠후 초절임이 된 후에는 배추를 싹 씻어서는 고추 양념을 바른다. 그때는 대채로 고추가루에 마늘을 같이 넣고 절구나 방아간에 찧은 양념이 고작이였다. 개방후에는 그래도 김치에 사과배도 넣고 파도 넣고 하였으나 그것은 썩 후였다. 배추를 양념까지 바른후에는 그것을 바로 굴에 넣어야 된다.  그리고 배추는 될수록 추울때에 넣어야 오래 보관 된다고 될수록이면 손을 호 호 불며 동지가 썩 지난후에야 시작한다. 그때면 남자들이 도와서 굴에 넣어 준다. 나도 바께쯔에 담아서는 굴에 넣어 주면 엄마가 담아서는 한포기씩 독에 넣는다. 독에 다 넣으면 그날 저녘에는 생김치! 금방 담근 생김치를 그대로 찢어서 만포식할 수가 있다.  생배추김치는 그대로 대가리 쪽을 따고는 찢어 먹어야 제 맛이다. 우리는 배추 김치를 담그고 난후, 그 남은 양념 량에 따라 깍뚜기를 담그거나 채지도 담근다. 물론 그것들의 독은 작은 독이다. 이러면 우리 김장은 끝~ 엄마들은 그다음부터는 큰시름을 던 셈이였다. 어떤이들은 그래도 작은 김치굴을 넓게 쓰는라 김치굴 안에 감자굴을 덧 파고는 거기에 널판자로 뚜껑을 해서 덮는다. 그러면 작은 김치굴 안에 작은 움이 하나 더 하는 셈이여서 무우거나 감자를 더 넣을수도 있었으나 그것도 넘 일찍 봄이 찾아 오거나 김치움뚜껑관리가 부지런하지 못하거나 서툴다보면 많은 생배추 무우 감자 그리고 김치등은 봄이면 그대로 변소에 공동변소에 가만히 가져다 버린다.  하여간 우리가 어릴적에는 봄이면 우리마을에 있는 공동변소에는 썩은 감자, 속이간 무우, 그리고 시여서 뭉클어 버린 김치를 심심잖게 볼수가 있었다. 감자는 그래도 싹이 나면 싹이난 부분을 싹뚝 잘라 버리고는 감자칼에 갈아서 감자떡을 해 먹을수가 있다. 감자는 얼어버리면 언 감자떡이 된다. 요즘 레스토랑에 가면 감자떡을 시꺼먼 감자떡을 만들어 한개에 1, 2원씩 팔던데 당시에는 정말 먹기싫은 음식중에 하나였다. 큼직한 열콩을 삶아서 박은 꼬장감자떡은 처음 한두때는 그런대로 먹을만 하였지만 … 정말 봄이면 언 감자떡을 매일 먹어야 할 정도였다. 하지 않으면 냉장고도 없는데 움에 그대로 두면 그 감자가 다 썩어 버리니깐 빨리 빨리 갈아서 떡이라도 만들어 먹어야 했다. 미처 갈지 못해 떡을 만들지 못하면 그대로 썩어 버린다. 정말 그때는 썩은 감자떡이란 말이 있었다. 요즘처럼 냉장고나 있었으면 그래도 두고 두고 먹고 싶을때 먹을수도 있었으련만… 당시에는 정말 먹을 반찬도 별반 없어서 그저 배추 김치나 깍두기 아니며 영채 김치 거나 갓김치들 밖에 없었던 같다. 기껏 저장할 것이라고는 무우나 감자 혹은 당근이 고작이였던것 같다. 집집이 별로 생활력 차이가 없기에 대부분 대체로 이러했다. 그때는 아마도 배추 한근에 3전씩 하였던것 같다. 요즘 애들은 믿을지도 모르겠다. 좌우간 그때 그시절 우리는 11월이면 김치굴 손질한다. 김장배추 장만한다. 무우를 굴에 넣는다. 감자를 움에 넣는다… 정말 바쁘다. 그리고 게방후부터는 사과배거나 귤도 한박스씩 굴에 넣고 양력설이거나 음력설 좌우에 종종 꺼내 먹군하였다. 요즘은  고층 아파트들이라 김치굴이 없다. 우리도 굴이 없어서 그때 그때 담그어 먹거나 하다가 올해는 마누라가 김치 냉장고를 기어코 사자고 하여 하나 샀더니 거기에 30포기나 들어가기에 어째다 오래만에 김장을 담그는 폼이 났다. 자연히 그 옛날 우리 가난하던 시절 김장철이 주마등처럼 스치기에 생각나는대로 긁적거렸다.  
45    장화가 그립던 시절 댓글:  조회:2074  추천:1  2015-08-28
련며칠째 구질구질 잘도 내린다. 가을비가 이렇게 매일 내리다니 …. “서울놈은 비만 오면 풍년이라”하지만 그래도 빈하중농 재교육을 몇년 받은 나는 이런 비는 별로 풍년에 도움이 될것 같지도 않다.    그래도 모른다. 저기 가을 배추나 무우 영채나 갓 같은 농작물에는 반가운 비가 아닐가도 싶다. 좌우간 만사는 이렇게 네가 밉다고 남들도 미운 것이 아니고 네가 반기지 않는다고 남들도 반기지 않는 것은 아닌것 같기도 하다.   어머? 철학도 얼마 배우지도 못한 주제에 너무 철학적이 아닌가… 주정배 주제에 이런 철학적인것들을 …   이 주정배가 오늘 간만에 필을 들었음은 다름이 아니라 비가 오니 … 그 옛날 옛적에 그렇게 그립던 장화 생각이 떠 올라서 컴푸터 앞에 앉았다. 그보다도 구질구질 내리는 가을비에 지짐을 구워 놓고 홀짝 홀짝 마신술에 취하여 … 그옛날 지겹도록 가난하던 시절에 장화 없어서 … 장화가 그렇게 그립던 시절이 떠 올라서 취흥에 저절로 컴푸터 앞에 마주 앉았다…   우리 어릴적에는 비만 오면 근심이 태산이다. 어린나이에 근심은 농사일도 출근길도 아니고 그저 학교에 어떻게 갈가 하는 근심밖에 없다. 요즘처럼 스쿨버스는 꿈에도 보이지 않던 것들이고 … 아버지 자가용이란 소설책에서도 읽지도 못한 것들이고 자전거마저도  연길시내에 몇대 없던 시절이라 … 연길역에서도 뻐스대용? 아니 택시 대용으로 쨔~! 쨔 하고 마차가 부끄럼 하나없이 대통로에서 작은것은 가리지도 않고 큰것도 마구 싸대며 달아 다닐때였으니 하는 말이다.    비만 온다하면 남들은 몰라도 나는 우선 먼저 책가방을 쌀 비닐이 없나하고 집구석을 뒤진다. 정말 그당시에는 요즘처럼 쓰레기통에 나 뒹구는 비닐봉다리 하나 찾기도 힘들때다. 어쩌다 하나 자그마한 비닐봉다리를 찾으면 책가방부터 싼다. 책가방 다음에는 머리다. 그래도 집에 어머니가 잘 간수해둔 큰 비닐 주머니가 있으면 정말 잘코사니구나 하고 그것을 머리부터 윗몸에 쓰며는 만사가 해결된 셈이다.   어느 가을비 오는날 그런 싸구려 (당시는 싸지도 않았을것 같음)비닐마저도 없어서 어머니는 가을에 고추를 말릴때 쓰던 큰 보 하나를 나에게 주었는데 호 ~ 어찌나 맵던지 …. 재채기가 연속 나오는데… 어머니가 밖에서 사랑칸 벽에 대고 오래동안 털었는데도 말이다. 그래도 참고 그 큰 시커먼 보자기를 쓰고 학교를 갔던 기억이 아직도 비올때면 새록새록하다.   요즘 애들 같으면 비옷에 우산에 … 아버지 자가용까지 … 하겠지만  당시는 그저 바지 가랑이를 썩 걷어 올리고 신발을 벗어 쥐고 보자기로 책가방과 머리만 가리면 끝인다.   본래 신이란 인간의 발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일진데 우리는 그 신발을 아껴 발을 희생하는 것이다. 비에 젖는 신발, 흙탕물에 젖는 신발이 아까워서… 내몸에 발이 아깝기보다는 신발이 더 아까운 시기였으니 그럴수밖에 …   옛날에 시골사람들이 신발을 쥐고 다니다가 서울 가까이서부터 신발을 신었다는 이야기도 웃음이 나오지 않는 가난하고 말끔하던 시절이였다.   비만 오면 연길시내 거리는 진흙탕이였다. 주요거리 몇개만 아스팔트였는데 그마저도 인행도에서 흘러 내린 진흙들에 말이 아니다. 그러니 비오는 날 신발을 신으면 진흙물에 방금 새까매 진다.   당시 우리집에는 장화가 두컬레 있었다. 아버지가 출근길에 장화 신고 큰형님이 하나 신고나면 우리는 차례도 없다. 그대로 장화에 대한 미련도 없이 바지가랑이를 썩 걷어 올리고는 비닐을 둘러 쓰면 만사는 오케이다.   그랬던 우리 고향연변은  요즘은 아스팔트길이 잘 빠지고 모두가 콩크리트나 블록으로 된 인행도여서 장화를 신은 사람은 좀 보기 힘들다. 시골도 요즘은 길이 잘 빠져서 그 옛날 애비 없이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우스개 소리는 옛말이 된듯하다.   하지만  나 이주정배는 요즘 장화 한컬레를 쌌다. 요즘 유행하는 인터넷에서 단돈 27원주고 장화 한컬레를 샀다. 이런 아스팔트길에 장화를 어디에 쓰려고 하고 고개를 갸웃하는 분들도 있겠지만 ... 나의 출근길에는 이 장화가 아주 필요하다.   나의 출근단위 연대로 출근하는 길에 장화가 필요해서 샀단 말이다. 하 ! 글쎄 이 아스팔트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 연대 올리막에서 내려오는 그 내리막길에는 비만 오면 하수도도 없는 길에 도랑물이 찰랑 거린다. 거기에 막바지 시내길목까지 내려오면 그 연결목에 어찌나 잘 연결하였는지 … 깊은 물수렁이 자그마한 저수지가 되여 나의 출근길을 막고 기다린다.  (우리 고향의 최고의 학부 연대로 다니는 출근길이 이럴진데 ... 다른길들은 어떠하랴?!)   적어도 발목까지 차는 물들이 빠지지 않는 작은 저수지를 방불케 하는곳이 서너곳이 된다. 거기에 해마다 뜯고 수리하는 하수구 … 전기 … 가스배관 … 도처에 진흙탕수렁이다.   거기에 각 社区에도 말이 아니다. 어쩌면 그렇에 대충 할수가 있는가 싶다. 우리 社区는 비교적 잘되여 시도 아니고 성에 모범이란 社区도 대리석 바닥을 어찌나 수평이 있게 수평을 잘 봤는지 … 비만 오는날이면 물이 고인데 하도 많아서 장화 없이는 다니기 힘들다.   연길에서 두번째 가라면 서러운 우리 앞 공원에도 대리석바닥을 어찌나 잘 깔았는지 물이 고인데가 사처에 있다. 수평자로 이리대고 저리대며 "만만디 만만디"하며 대리석을 깔더니만 도대체 어떻게 된것인지 자치주 성립 60돐이 지난지 한해만에 말이 아니다. 거기에 깨여진 대리석도 도처에 심심찮게 보인다.   시정에 도시건설한다는 분들이 무슨짓을 하는지 모르겠다. 해마다 건설은 적지 않게 한다만 … 중국말 그대로 “바지 벗고 방구 뀌는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우리 고향건설이 바로 이렇지 않는가도 싶다.(중국사람들은 두벌일을 하거나 효과가 없는 일을 한것을 바지벗고 방귀뀐다고 함.)                                      “脱了裤子放屁 “ 내가 인터넷에서 산 장화가 오늘 도착하였다.   오늘에 모임이 있는데 딱 마침 비가 오기에 그대로 새 장화를 신고 갔더니 많은 친구들의 큰 웃음 자아냈다. 하지만 나의 장화를 싼 해석에 모두들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적인 반응들을 보이더라.   정말 우리 고향 연길시가 지금처럼 도시를 꾸려 가다가는 그 옛날 아스팔트 없던 시절, 우리 어린시절처럼 모두들 장화를 그리워하는 시대가 다시 오지 않을가도 싶다.   도시 건설사들이여! 제발 도시를 잘 건설 하여주소서! 장화가 필요 없는 연길시로 만들어 주세요! 제발 “바지 벗고 방구 뀐다”(세금낭비) 는 쓸데 없는 짓거리만 하지 마라 주세요.!          
44    "누워서 챔뱉기" 댓글:  조회:1306  추천:1  2015-07-05
이 주정배 나이가 바야흐로 환갑이 지나고 보니 별로 글쓰는 재미가 식어진다. 전에 연통에 있을때는 그나마 적잖은 원고비에 팬들이 댓글이나 달아 주고 하여 글쓰는 재미가 솔솔 하였는데 요즘은 그 마저도 없어지고 모두가 누가 글을 썻나 ? 무슨 새글을 썻나 하고 대충 기웃거리다가 가버리고 일언방구?도 안 뀌니 왼통 재미가 없다.   대신에 요즘은 워이씬이나 카카오란 것이 핸폰에 나와서 그것이 그렇게 정보가 빠르고 하여 나도 그쪽으로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는데 ….   오늘 뜻밖에 조선족 아줌마에 대한 워이씬이 친구한테서 보내져와서 재밌게 보았다.   어쩌면 나도 외국에서 한국사람들과 많이 동고동락을 하였었고 한국에도 다년간 돈벌이를 하다가 돌아온 나다.   때문에 그김성이란 여사?가 전중국에 퍼뜨린 한국에 대한 단상이라고 할가 (제발 단상이라고 승인하면 좋겠다. 짧은 생각이란 말이다.) 하여간 그 언니의 어느 매체에서 연설을 하는 동영상을 올렸는데 내가 보아도 대부분 맞다.   (우리민족은 어쩌면 너무 있는체 하고 너무 잘난체 하고 너무 아는체 하고 너무 잘하는체 하는것이 흠이다.) 라고  나의 선생님이신 고 허흥식농민시인이 우리 민족의 네가지 체병에 대한 언급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민족의(한국,북한인 포함) 보편적인 습성인것만을 틀림이 없는것 같다.   너무 있는체 한단 말이다. 썩전에 내가 한국에 가자 한국분들과 연통에서 변론을 벌인적이 있는데 그때에 어느분이 중국은 한국보다 30년은 뒤떨어졌다고 하더라. 하여 내가 발끈하여 중국에 첨단 공업은 한국보다  많이 앞서서 세계 3위권 안에 있다고 하였더니 코웃음 치더라 잘못 알고 있다고 …  하여간 내가 보기에는 공업기술이나 첨단 공업 기술은 정확히 우열을 가리기 힘들다고하여도 국민의 수준 만큼은 30년이 떨어졌다는 평에 공감된다. 중국 사람들의 의식형태 수준이 말이 아니다.   그래도 "人穷志不穷" 이라고 "거지 자존심만 강하다"고 나도 한국에 있을때는 한국분들과 많이들 다투고 얼굴을 붉혔었다. 오죽하면 나의 어느 글에서는 10년 안에 연길에 93 빌딩을 짓는다고 뻥을 쳤을가 ... 30년 떨어졌다는 그 삼십년 설이 듣기 싫어서 한국에 63 빌딩에 30을 더올려 93 빌딩을 10년안에 짓는다고 뻥을 쳤는데 아직 우리 고향에는 그렇다 할만한 빌딩은 없고 ... 겨우 100여 메터 되는 모아산탑이 그나만 나의 뻥을 무마 시켜 준 것 같기도 하다. 서울 남산타워와 가히 우열을 가릴수 있은니 하는 말이다. (그것도 요즘 심사에 들어가서 말이 아니란다.)   각설하고/ 김성이란 조선족 언니가 한국에 요청으로 한국에 가다가 당한 봉변? 아니 봉변은 아닌것 같고 본인이 그저 얻어 들은 한국사람들의 한국말, 그것도 저희들끼리 하는 입속말을 알아듣고 그것을 큰 문제 삼아 대형국영 티비에서 대한민국을 비웃어 주는데 나는 듣다가 실소를 금치는 못했다. 머 김성이란 조선족 언니가 중국말 수준은 대단하던데 우리말 수준은 어떨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않는가 싶다.   언니도 조선족인데 한국이 조국이 아니릴지라도 우리의 모국이라 할수가 있지 않을가 싶다. 다시 말하면 당신의 조국이 아니랄지라도 어머님의 조국이란 말이다. (祖国就是自己的国家。简单来说,祖国是祖先开辟的生存之地,人们崇拜、爱惜和捍卫这片生生不息世代相传的土地。人们对祖国的感情包括了对国家主权,大好河山,灿烂文化以及骨肉同胞的感情。母国,即文化上的祖国。那些本人已经拥有他国国籍的人,其祖先世代居住的国家即是其的母国。)   때문에 김성이란 중국의 스타! 우리 조선족 언니가 대한민국을 그런 국영 방송에서 까지 비웃어 전세계에 웃음거리로 만든것은 어찌보면 너무 한 감이 없지 않다고 못하겠다.     어찌보면 우리말 속담 그대로 이런것을 두고 "누워서 침뱉기"라 하는것이 아닌가 싶기도하다. 물론 이런 연설은 중국사람이나 몽고족이나 ... 아니면 한국말 잘 하는  다른 민족이 한 연설이라면 나도 박수갈채는 몰라도  물개박수라도  보낼터지만 …  우리에 스타 우리민족의 스타가 중국 공영 방송에서 저의 고국? 아니면 모국?인 한국을 비웃어 준데에 대해서 어쩐지 "황련을 씁은듯"​ 씁쓸하다.  쩝쩝…
43    남한개(분)+북조선개(똥)=고향(분통) 댓글:  조회:2543  추천:1  2015-01-01
이글은 약 십여년전에 썼던 글인데 요즘 고향에 개똥이 사처에 널려 있으니 여기에 한번 다시 올립니다.      중국사람들은 회식을 할 때 이런 말을 자주 한다. “ 천상에는 용 고기요. 지상에는 당나귀 고기다.”   당나귀고기는 나도 먹어 봤는데, 그 맛이 괜찮더라.   그런데 용은 용하게도 한 마리도 남지 않아서 ... 난 물론 먹어보지 못하였다. 용 고기 먹어본 사람은 이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글쎄 하늘에 날아다니는 짐승을 그 옛날 무엇으로 잡아 다 맛보랴. 만은 용 고기가 제일 맛있다고 했어도 아직 의의를 제기하는 놈이 없는 것을 보니 그 말도 맞는 모양이다. 하긴 요즘 어디 가서 용 고기를 시식해 검증할 방법도 없다.   하여간 중국사람들은 땅 위에서는 당나귀고기를 제일로 치는 것 같다. 물에서는 무엇을 제일로 치는지??? 고래 ?!   우리는 선조 때부터 개고기를 즐겨 먹었다. 개고기는 몸 보양에 어찌나 좋던지 삼복철에는 한 점만 먹어도 보약이요 머요 할 정도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하늘에 까마귀고기는 또 대한사내들이 어찌나 좋아하였던지 씨 종자가 말라 버릴 정도이다.   그래서 나는 중국의 명언을 따서 우리 명언을 만들었다. 하늘에는 까마귀고기, 땅 위에는 개고기다.  참, 멋진 말이다. 주정뱅이가 술만 잘 먹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이럼 멋진 명언을 뱉었으니 말이다. 그 누가 이 명언에 이의를 달겠는가? 하늘에 까마귀는 대한사나이들이 다잡아 먹어서 맛볼 수가 있어야 이의를 달지 ... 그리고 까마귀는 이미 멸종의 위기에 있는지라 ...                                         북조선의  개   몇 년 전에 어머님이 북쪽에 외삼촌 집에 갔다가 왔는데 집에 들어서는 대로 ;”어머님 북조선 어떴습데까?” 하였더니 어머님은 한마디로 “야! 개 판이더라 ! “ 하기에 나는 원래 북조선에 대해 들은 말도 있고 또 북조선이 가난하고 말끔한 것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지라 웃으면서 다시 상세히 물어 보았더니 ... 이건 원 , 진짜로 개판이라는 것이었다.썩 후에 평양에 계시는 삼촌이 중국에 방문 왔다가 하시는 말씀을 듣고서야 그 개판 내막을 알게 되였다.   어느 날, 어버이 수상님은 단고기 자시러 평양 옥류관에 갔다가 그 단고기 맛이 하도 좋아서 ... 명언 하나 던지었다. “개고기는 그 맛이 일품이고 또 몸보신에 좋고, 그 가죽은 구두를 만들 수 있으니...이것을 두고 일거양득이라 하니...개를 많이 기릅시다 !”   이 최고사령관님의 최고의 지시를 그 누가 감히 NO 할 사람이 있겠는가? 그로부터 북조선 땅에 가가호호 개들을 기르기 시작했는데 ... 그 수가 헤아릴 수가 없어서 ... 금수강산이 똥판이 되고 조선팔도가 개판이 되였단다.   그런데 개란 토끼와는 달리 풀만 먹을 수 없고, 항상 인간의 음식 찌꺼기를 먹여야 되는데... 사람이 먹을 것도 없는 판국에 음식쓰레기가 있어야 개밥도 있을 것이 아닌가? 먹을 것 없는 개들은 들판에서 풀만 뜯어 먹어서 살도 찌지 않고 힘도 없어서 도적보고도 짓지도 못하더란다. 너무 맥이 없어서 말이다. 풀만 뜯어 먹은개는 똥마저 퍼러퍼런 물똥이고  ... 먹지 못한 그 개가죽 또한 토끼가죽마냥 ?고 질기지 못한지라  그 개가죽 구두도 개발에 보선처럼 이틀만 신어도 ... 앞창이 헤어져서 너덜너덜한 것이 똑 마치 삼복철 더위에 헐덕거리는 개 혓바닥처럼 되였더라.   그래서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우리와 같은 불체자나 무까지같은 서민들은 아무 말이나 툭툭 뱉어도 쌍욕이나 들으면 끝이지만 ...   일성이나 정일이 같은 분들...그리고 정치깨나 하신다는 분들은 말씀하시기 전에 입안에서 혀를 몇 번 굴러보고 던지야 마땅하다. 개고기 먹었다고 개소리를 헛되이 치고 다니시니 ... 그 말 한마디 금수강산을 똥판으로, 조선팔도를 개판으로 만든다 이 말이다.   그럼 북한산개똥은 이것으로 마치고 이제부터는 남한산개똥에 대해서 개소리 조금만 더하겠다.                                             남한 개   남쪽에는 북한처럼 일성이나 정일이 같은 고위급 정치인들이 헛소리에 개붐이인 것은 아니고... 나날이 향상하는 경제 발전에 힘입어 국민들 생활이 나날이 좋아지고 .물질이 풍부해지고 돈도 충족해지고 ... 그런데도 외로웁고 한가한 귀족들이 점점이 생겨나기 시작하면서 개들이 불어 나기 시작하였는데 ...   전염되는 스피드는 놀라울 지경이니...그러니 남한 땅 곳곳에서 개똥을,(아니 남한 분들은 개 대가리나 ... 개고기나 ... 이런 명사를 싹 버려 버려서 인칭대명사와 동물대명사도 구분을 하지 않으니 나도 개똥이라 하지 않고, 구분이라 부르겠다.) 이렇게 되여 아름다운 서울 땅 곳곳에서 狗糞이 널려 있게 되였어라.   개를 반기지 않는 서민들은 물론 그 狗糞 때문에 분통이 터져서 정부에 진정서를 내고 항의를 하니 정부는 하는 수없이 개똥법을 내였다. 즉 개분 일인 분에  10 만원을 벌금 시킨다고 한다. 이건 진짜로 삶은 개 대가리도 웃을 일이다.   그 개똥, 아니 그 개분을 벌금 받자고 누군가가 개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당장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개분을 개와 함께 개 주인을 잡아야 망정이지 ...하지 않으면 오리발을 내밀며 개 성질을 부리면 ...??? 하여간 이 개똥 법이 나온지 일년이 넘어 몇년이 되도록 개똥벌금 10 만원을 내였다는 뉴스는 없고... 개 분이 아직도 서민들 분통이 터지게 서울 한 거리에나 시민공원에서 아쉼찮게 찾아 볼 수있다.   혹시. 혹시나. 정말로 정부에서 드세게 벌금을 시키면 또 모른다. 애견 동호회에서 개들을 안고 업고 ... 종로 1가에서부터 종로6가까지 종을 치며 떠들고 다니거나 ...인터넷 사이트에 수많은 글을 올리거나 백만명 서명운동을 벌리면 ... 이 개똥법도 삼복철의 개 목숨이 되지 않을지?!   뭐, 서울이나 평양이야 개똥천지던지...개분천지던지... 이 주정뱅이가 탓할 것은 아닌가 싶다.                                            고향의 개   부질없이 오늘 휴가를 할애하여 이 글을 올리는 목적은 요즈음 우리고향엔 타향살이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타향이나 타국에서 피땀으로 번 돈을 고향에서 옳바른데에 쓰는 것이 아니라 그 무슨 개턱을 쳐들고 개똥폼을 잡는라고, 강아지를 끌고 다니는 것을 심심찮게 볼 수가 있더라.   고향에는 북조선에서 기르는 개처럼 개고기를 먹으려는 개, 집을 지키려고 기르는 개, 사냥하려고 개포수들이 기르는 개들도 아직 많다. 그런데 요즘은 또 남한처럼 경제가 향상되고 배가 좀 부르니 발바리를 기르는 자들이 생겨나는 모양이다. 전번에 어느 홈페이지 사진에서 보았는데 ... 발바리한테 알록달록 꼬때옷을 입히고 꼬까모자까지 씌워 조상들의 산소를 가는데 정말 어이 없었다.   참 ! 조상들이 저 멀리 저승에서 한숨을 짓지 않을까 근심이 된다.   " 야! 이뇬들아 살아 생존에 네 아들딸 나한테 맡겨놓고 돈 벌러 가더니만, 애비,에미한테 용돈도 푼푼히 보내주지 않더니만 ... 개에게 꼬때옷을 입혀 날 보러 왔노? ! " 하고 욕할지도 모르겠다 "   우리 고향에서는 제발 이런 북조선처럼 개를 너무 많이 기르거나 남한처럼 어린애들 대신 개들을 안고 업고 다니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는 현상이 없어야 하겠는데 … 외국에서나 돈이나 벌고 오면 될 것이지 ... 이런 개똥이나 개분같은 것도 狗糞하지도 않고 배워가지 말았으면 하는 바램이다.   아마도 머지않아 우리 고향에도 남한개분 + 북한개똥 = 고향엔 분통이 되여 터질 것만 같다. 이 등식은 머지않아 성립될 것 같다      
42    "불알" 없어진 시계 댓글:  조회:2329  추천:0  2014-12-28
아마도 내가 열세네살 정도 되였을때쯤 들은 이야기이다. 우리 친구 하나가 연변 병원 동네 애들이 연변병원로비에 있는 커다란 시계의 불알을 욕심낸다고 ... 그들 병원동네에 있는 애들 몇은 머리를 써서 밤에 인적이 드믄 틈을 타서 병원로비에 있는 그 시계 불알을 도적질 하기로 합의 되였었단다.    그리고는 비오는날  밤 병원에 환자나 환자들 가족이 극히 드믄 틈을 타서 그 대형시계의 왕 불알을 훔치기로 계획하였다. 그날밤 그들은 주밀하게 이층에 올라가는데 한놈, 그리고 문앞에 한애가 망을 보고 다른 한놈이 그 시계의 뚜껑을 열고 시계 불알을 빼서 옷속에 감추고 밖으로 나가자 마자 우르를 밖으로 쓸어 나갔다.    그런데 그 시계 불알은 생각밖에 아주 가벼웠다. 동이라면 적어도 돌처럼 무거워야 하겠는데 ...   연집강 강둑에 가서 불알(시계추)을 빼서 가만히 살펴보니 쯔쯔쯔 시계 불알은 속이 텅빈 얇다란 동이였다.  그래도 다문 얼마라도 받겠지 하고 그대로 무쇠장수(그때는 무쇠장수라고 불렀음)한테 가져가 저울에 달았더니 동값으로 20몇전을 주더라나 ...   20전 짜리 불알을 도적질 하려고 비오는 날에 그것도 세명이서 망을 보면서 "전략과 전술"을 쥐여 짰던 그들은 너무나 허구퍼서 자신들의 웃음거리로 친구들과 재미삼아 말하는것을 들은 기억이 있는데 아마도 이 시계 불알은 그들에 의하여 없어진 것이  아닐가 싶다.   요즘은 그들의 나이도 이미 환갑이 넘었으려니 이들도 어느날 몸이 말째거나 편찮으면 연변병원에 와서 이 불알 없는 시계를 보고 허구픈 웃음을 짓지 않을가 싶다.     우리가 어리던 그때는 정말 이렇게 큰 시계는 연길에도 몇개 있은것 같지가 않다. 울집에는 장춘에서 만든 자그마한 벽시계가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었는데 옆집에 봉춘이란애가 항상 시간을 물어 볼때가 많았다. 불시에 문을 뚝 떼고는 "몇십둥"하고 말이다. 머, 문을 두드리거나 인기척을 하는것은 너무나 예절스러워서 웃음거리가 될수도 있던 시대였으니 그럴법도 하다. 노크란 습관화 되지도 않은 부담스러운 예모였다고나 할가 하여튼 그때는 그렇게 시계가 귀하디 귀할때였으나 인심만은 최고였지 않을가.  정말 말그대로 "이웃이 사촌"이던 시대였으니 누가 문을 뚝 따고 "몇십둥" 물어보아도 짜증 한번 내지 않고 알려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후 벽시계보다 그 알람이 울리는 사발시계가 나오니 그 사발시계가 집집이 하나씩은 갖추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그 사발시계는 매일 매일 탑을 주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벽시계는 보름에 한번씩  탑을 주면 되지만 이 자명종이 달린 사발시계 (탁상시계)는 혹시 까먹고 탑을 주지 않으면 그저 그대로 멈춰 버린것을 모르고 늦잠을 자다가 학교에 지각한 적도 몇번 있던 기억이 있다.   그리고 몇년후, 우리가 빈하중농 재교육을 받을 때인가부터 손목시계라는것이 유행이 되면서 모두들 손목에 시계를 차고 멋 부리는라 팔을 걷어 올리고 다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농촌에 내려간 첫해 가을에 분농을 받은 것이 백원 겨우 턱걸이 하였는데 엄마가 거기에 20원 돈을 더 보태여 상해표 시계를 사준 기억이 아직도 남아 있다.   그때는 상해표 는 120원이고 동풍표란 것이 있었는데 그 시계는 료녕에서 만들었던지지 ... 모두가 상해표 보다 동풍이 못하였고 디자인도 못하였었고 질량도 못하였으며 그 가격도 20원 차이가 났던것 같다.   내가 시계를 차고 집체호에 가니 내시계를 모두가 한번씩 빼서 차보고는 부러워 하던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리고 어떤 집체호 여자들은 밥짓는 시간을 알기위한다는 아름다운구실로 내 시계를 종종 빌려 차기도 하였고 어느 촌의 친구는 맞선을 보러 갈때 남의 손목시계를 빌려 차고 다닌던 시대였다.   요즘은 그따위 시계는 누가 그저 주어도 차고 다니지 않는다. 전번에 볼라니 누나네 집에 서랍속에 아직도 그 기계시계 하나가 굴러 다니고있는데 누가 차는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90 넘은 우리 로모도 내 조카가 준 여자용 금도금을 한  손목시계를 차고 있는데 …   하여간 요즘 주변에 손목시계를 찬 인간은 별반 없다. 간혹 있어도 그것을 부러워 하는 이도 빌려 차보는 일은 더욱더 없다. 시계대신 스마트 폰이다. 그것만 있으면 전화도 시간도 날자도 요일도 ... 심지어 신문같은 뉴스거나 영화마저 볼수 있는 무엇이나 다 되는 스마트폰을 갖고 다닌다. 참 좋은 세상인것 같다.   그렇게 말끔하게 가난 하던 시절 병원에 시계 불알을 훔쳐 팔아 먹으려고 하던 시절,  정말 영화 볼 돈 15전이 없어서 아버지 놋수가락을 가져다 팔아  영화를 봤다가 어머니 한테 되게 꾸지람을 받던 친구들도 있었으니 …   휴 ~ 그때는 왜 그렇게 가난했던지 ?! 요즘 애들은 말해도 믿지 않을 것 같다.   뜻밖에 마누라 아파서 연변병원에 약 20 여년 만에 와보니 병원도 대단히 변하였는데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 커다란 시계가 눈에 익어 다시 찬찬히 보는데 …그때 그 어릴때 들은 시계 불알 이야기가 새삼스레 떠올라 심심 풀이로 적어 본다. 
41    비행장 눈치기 댓글:  조회:1262  추천:0  2014-12-06
아침에 기상하니 밤중에 꽤 많은 눈이 내렸다.   “어 ! 오늘은 제기차기는 다 틀렸군…” 난 주섬 주섬 옷을 주어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래도 행여나 제기를 찰 수가 있지 않을가 싶어서였다. 그러나 그것은 큰 오산이였다. 눈은 퍼그나 와서 눈을 치지 않고는 제기를 찰수가 없었다. 나는 그래도 어디 눈 칠 도구가 없나 싶어 찾아 보았다. 공원 청소하는 중국 아줌마가 대나무 비자루 하나 두고 간 것이 있어서 그것으로 눈을 쓸어보았으나 눈이 좀 많이 내려서 비자루로는 역부족이다. 포장박스로 밀어 보니 그것은 생각밖에 꽤나 괜촪았다.   “이 없으면 이몸”이라고 난 포장박스를 쪼개여 그것으로 밀고 대나무 비자루로 쓸고 공원에 있는 우리제기 차는 운동장의 눈을 치였다. 머 운동장이라고는 하나 별로 크지도 않은 겨우 20평 남짓이 될가 하는 운동장?에 눈을 겨우?치고 나니 출근시간이 가까워 오는지라 나는 바삐 집에 와서 아침밥을 먹고 출근길에 올랐다. 눈이란 인간들이 밟기 전에 치워야 쉽고 깨꿋이 칠수가 있다. 다년간 북방에서 살고 어릴때 부터 눈을 많이 쳐온 나인지라 눈치기에는 해박한 상식?이 있다. 나는 남들이 회사앞뜨락을 밟아 놓기전에 가서 눈을 치려고 서둘러 여전보다 일찍 출근하였다.   그러나 이미 많은 장사군들이 앞다투어 장사를 서둘다 보니 모두들 나보다 앞서서 출근하여 이미 회사 앞은 그들의 발자국으로 아수라장이였다.   정말 첫눈치고는 많이 온셈이였다. 아침부터 눈을 치고 출근하자마자 눈을 친 난 피곤한 몸을 쉬우면서 진붉은 홍차 한잔을 따랐다. 진붉은 홍차는 나를 그옛날 붉은기 펄펄 날리던 그때 그시절로 되돌아가게 하였다….   옛날 눈만 오면 우리는 무조건 달려가는 곳이 있었으니 그것은 학교 운동장도 아니요. 자동차가 다니는 큰 신작로도 아니였다. 고속도로는 당시에는 하나도 없었고 철길에 눈도 아니였다. 우리가 최우선으로 달려가 눈을 치는 거기는 바로 연길 토배기는 다 아는 그곳, 그곳은 바로 연길 비행장이였다. 눈만 오면 학과도 뒤로 미루고 무조건 삽이나 비자루를 들고 저멀리 비행장으로 달려갔다.   연길시에서 학교(중확교)를 다녔던 사람이라면 눈오는 날이면 무조건 비행장 생각이 날것이다. 만약 비행장 눈치기 생각이 없다면 그분은 아마도 연길시 사람이 아니면 시골서 올라온 사람! 한국분들의 말그대로라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이 아니면 북한 특무가 아닐가?!     그때는 그래도 집집이 헛간이거나 사랑간?이라는 것이 집집에 하나씩 있어서 거기에 는 난방으로 쓰는 석탄이거나 화목들이 가득한 가운데 꼭 삽이나 곡괭이거나 혹은 곽지나 낫 같은 것들이 어느 구석에 세워 두지 않으면 어느 천장에 곧혀 있었다.   머 요즘 애들은 삽은 알고 있겠는지 모르겠지만 서울에서는 어느 국민학교 교과서에 “낫놓고 기억자도 모른다”는 속담이 나오니 낫이란 무언가 물어 보더란다. 정말 기막힌 선생님은 낫을 칠판에 그려 놓고 이런 것이라고 해석해도 아무도 모르더란다. 도대체 애들이 어디서 실물을 본적이 있어야 알지? 어찌보면 요즘 애들은 그옛날에 우리 때에 이머리를 갖고 태여 나며 모두가 천재일것이 틀림이 없으나 낫놓고 그윽자도 모르는 무식한? 놈은 틀림이 없는것 같기도 하다.   우리 그때는 그렇게 눈만 왔다하면 모두들 삽 한자루거나 비자루 하나씩 들고 저멀리 비행장으로 향하였다. 학교에서는 대렬을 지어 가기도 하였는데 비행장에 가서는 모두들 제 단위에서 맡은 구역에 눈을 치는라 바쁘다. 눈은 본래 눈 온뒤 이튿날에 가장 맵짭은 날씨인데 그런 날씨에 눈을 치다보니 귀를 얼구거나 손발을 얼구는 애들이 대단히 많았다.   요즘 학부형들은 만약 그런 눈치기에 애들을 동원시켰다가 귀나 손발을 얼구어 돌아 온다면 대 난리가 나지 않을가 싶다. 적어도 학부형들이 교장의 목덜미를 잡고 교육부 부장한테 끌고 가지 않을가 싶다. 우리애를 누가 이렇게 만들어 놓았을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때 우리 부모들은 어째 그렇게 온순한지 … 난 60 이 다된 지금도 이해가 잘 되지 않지만 그래도 어찌 보면 그때 우리 부모들이 참 존경스럽다. 참! 그렇게도 온순하다가도 어떻게 혁명에는 그렇게 열정이 높던지 당시에 유명하던 코신부대들이 바로 우리 어머니들로 결성된 조직이 아니였던가…   비행장 눈치기 가면 그래도 기대하고 은근히 바라는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점심이였다. 비행장이라 비행사들의 식당에서 나오는 점심이라 그많은 사람들한테 밥까지는 다 주지 못하지만 그 소탕국은 모두들 한사발씩 나누어 주는데 정말 맛있었다. 소고기는 정말 소가 장화 신고 지나 갔는지 몇오리가 둥둥 뜬것이였지만 그 추운 날씨에 뜨근은 쇠탕은 정말 죽인다.   더욱이 그때는 모두가 어찌나 가난하였던지 그런 멀건 국물도 정말 맛이 있었다. 그래 그런지 난 아직도 60이 넘은 이나이에도 눈이 많이 오면 비행장 눈치기가 생각나며 비행장 눈치기 하면 그 구수한 소고기 국물이 생각나군 한다.   눈치기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 올때면 모두들 삽을 들 맥도 없이 피곤한것도 있겠지만 재미로 삽들을 비행장 콩크리트바닥에 질질 끌고 오는데 그 소리 또한 비행기 발동소리보다도 뒤지지 않게 소음이 대단했다. 집으로 돌아오면 이미 강추위에 언귀거나 언발을 뒤늦게 발견한다.   우리큰형은 그 비행장 눈치기에서 귀를 얼구어서 저녘에 어머니한테 꾸중을 모질게 들었다. 멋부리는라 모자를 쓰지 않았다고 말이다. 추운데 무슨 멋이 있는가고 손으로나 아니면 목수건으로라도 머리를 동일것이지…   책망을 하시면서도 어머니는 가지 말린것을 물에 불구어 놓았다가 그것을 삶은 물에 형의 귀를 담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둘째 형도 발을 얼구어서 형이 불근 가지물에 자기 발도 집어 넣고 … 참 그때는 그래도 누가 누구를 원망하지 않고 그저 그것으로 끝내였다.    요즘 부모들 같으면야 될가. 이튿날로 당장 교장 사무실에 찾아 가지 않을가 싶다. 참 그때 우리 부모들은 어쩌면 어질다면 대단히 아니 지나치다 싶이 어질었고 혁명에 헌신하는 것을 보면 또 물불을 가리지 않았던 것 같다. 참 대단한 우리 어머니 세대였고 정말 가난하고 무식해도 세계혁명을 하였던 우리 어머니 세대였다.    그때는 모든것이 혁명을 위한 것이였고 모든것이 전비(战备)를 위한 것이였고  모든것이 혁명조직을 위한 것이였다.    난 오늘 온 눈을 치다보니 그 옛날 눈오는 날이면 달려가던 비행장 눈치기가 생각났다. 눈을 치지 않으면 미제국주의가 쳐들어 오는데 우리 비행기가 날수가 없기 때문이란다. 요즘은 세월이 많이 좋아져 그런 눈치기는 이미 옛말이 되였다.      
40    진달래는 어디갔소?! 댓글:  조회:1251  추천:1  2013-05-31
봄이 오니 갖가지 꽃들이 울긋불긋 피여 기분이 좋아지오. 집앞에 공원에는 작년 9:3 을 쇠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였는데 정말 아름답구만. 전에 있던 콩크리트 길도 모두 대리석으로 바꾸어 놓고 거에 나름대로 무슨 꽃무늬 ? 삼아 멋지게 포장하였소. 그리고 갖가지 나무 꽃들을 심어 놓더니 정말 울긋불긋 꽃피는 아름다운 공원이 되였소. 그런데 미중부족이라 할가?! 아니다! 큰 착오인것 같소.   공원에 심는 꽃들이 말이오. 작년에 심었던 꽃들이 가을이 되니 다 죽어버려 올봄에 또 다시 땅을 번지고 새로 심는구만, 난 도대체 무슨 꽃을 심는가  유심히 살펴 보았더니 작년에 심었던 꽃들과 똑 같은 꽃나무? 와 풀들이였소. 난 작년에는 9;3이 다가오니 급하여 피여있는 멋진 꽃들을 가져다 놓았는가 하였댔소. 그런데 그것이 아니고 이렇게 해마다 봄이면 땅을 번지고 새 꽃모들을 사서 심고 여름이면 그 곷들이 만발하고 가을이면 그 꽃들이 지고 겨울이면죽고 ...  그리고 봄이면 또 꽃모들을 사서 옮기는 모양이오. 내가 지나가다가 우연히 꽃 심는 분들과 물어 보았소. “이꽃들은 해마다 이렇게 다시 심어야 합니까?” “그럼요.”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는 그들의 말투로 미루어 저들의 눈에는 내가 이상하고 싱거운 놈으로 보인 모양이오. 나는 공원에서 제기차는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공원에 원예관리자를 욕하였소.  “ 저 바보 같은 놈들이 해마다 저렇게 많은 인권비를 들여 꽃을 심고 밭을 번지고 할 것 있어? 차라리 우리고향의 꽃들을 심으면 한번만 심으면 되는데 ...  “ 나의 말에 제기차는 친구들도 동감이였는데 몇몇 친구만은 나를 가소롭다는듯 비웃었소. ”이보오 당신, 그럼 그들이 어떻게 돈  벌겠소? 꽃자래우는 사람도 돈 좀 벌어야 되지 않겠소 ... 머 국가에서 주는 돈이니 머 상관 할것 있소?” 난 그의 말에 너무 놀랐소. 국가에 돈이라 상관할 일이 아니라니 ... 오 ~ 아직 우리고향에 시민들의 수양은 말이 아닌듯 하오.  그렇게 외국에 나간 사람이 많고 한국에 갔다온 사람은 100%에 가까운데 ... 외국에서 돈만 벌어왔지 외국 국민들의 좋은 사상의식은 배워오지 않았는가보오. 나라의 돈이 바로 우리인민들에게서 걷은 세금에서 산생한 것인데 ... 나라돈이 바로 우리의 땀인데 ... 나라의 돈이 바로 "쌈지돈"인데... 난 오늘도 꽃을 심는 분들을 보면 속으로 욕하오.  어떻게 저런 꽃종들을 골랐는가 누가 원예사인가? 옛날에 외국에 달이 더 밝다고 하였다더니 꽃도 남방에 꽃이 우리고향에 꽃보다 더 이쁘단 말인가.  물론 남쪽에 꽃이 더 이쁜것이 많다만 ... 아니오.  꽃은 우리 연변의 꽃도 이쁜것이 아주 많소.  우리땅에는 우리종자를 심어야 한다오. 우리 진달래 고향이란 연변인데 어쩌면 공원안에  진달래가 한그루도 없단 말이오? 개살구 꽃도 아주 이쁜데 개살구 꽃도 하나도 없고만.  함박꽃, 개나리...등도 얼마나 이쁘오!  우리고향연변에 야생화도 정말 이쁜것이 많소.  그런데 왜서 자꾸만 외지에 종자만 가져다 심는지 이상하오?! 잘 살지도 않고 키우기도 힘들고 겨울이면 죽어 버려 봄이면 또 다시 심어야 하는 남방에 꽃들을 말이오. 고향의 원예사들은 무얼하고 밥을 먹는지 ...  우리고향에 꽃은 왜 길거리에서 하나도 볼수가 없는지 모르겠소.  누구의 지시인지 ... 왜 남방의 것만 자꾸만 가져다 심는지 모르겠소. 실지로 한국에서는 외국의 풀을 한강변에 심었다가 너무 번식이 강하여 토종풀들을 싹 죽여 버려서 몇년전 부터 그 풀들을 다 뽑아 버리기로 하였다오 그런데 그풀들이 어찌나 생명력이 강한지 ...  더욱이 한강변이라 기계화도 못하고 약도 못치고 전부다 인공으로 하나 둘 뽑는데 숱한 돈을 들였다오. 우리땅에는 우리꽃을 심어야 한다오. 그래야 잘 자라고 그래야 우리 특색이 살아나고 남들이 우리 고향에 오면 우리고향에 특색이 살아나는 꽃, 남방에는 없는 꽃들을 감상하고 부러워 하게 말이오. "남과 똑같이 해서는 남을 이기지 못한다."는 말을 명심하오.   우리땅에는 우리것, 우리진달래 같은 토종꽃들을 보고 싶소. 이대로 나가다간 연변에 진달래는 먼 옛날의 이야기로 되지 않을가 싶소.  
39    정 떨어지는 내고향 댓글:  조회:1690  추천:2  2013-03-18
노모가 저멀리 운수공사에 가서 무료교통카드를 만들려고 갔다. 그런데 집문을 들어서며 툴툴 거리며 자신을 탓한다.   "에구 에구 이정신 좀 봐라 이젠 죽어야지 글쎄 호구부를 갖고 가지 않았지 머야!"   "아니? 신분증이 있는데 호구부는 왜 가져 오라는 건가요?!"  난 너무나 의아해 모친에게 다시 물었다.   "엄마! 신분증이 있으면 될터인데 호구부는 해서 뭐 한답니까?!" "이건 신분증이 아니라서 안된대 호구부를 같이 가져와야 된대!" "아니 신분증 복사본에 본인이 직접갔는데 왜 안된다고 그럼까 ?!" "안된다니 안되는거지 ..." 당연히 것처럼 말씀하신다.   나는 열 받았다.   "엄마 이것이 신분증 하고 똑같은 것인데 무엇때문에 안된답니까?" "내가 아니? 거기서 안된다하니 안된다는 것이지 ... " 혼자 내가 아니 거기서 안되면 안되는 거지 내가 아니 거기서 안되면 안되는 거지 몇번이나 이렇게 되뇌이다가 내가 아니 ... 하면서 흥얼흥얼 거리며 서랍을 들추고 장농을 뒤지고 가방을 뒤집고 하더니 호구부가 없다고 한다.   "아니 엄마 호구부는 어디에 있는데 ... " 엄마는 호구부가 어디에 뒤었던지 잘 생각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한참후 엄마가 하시는 말씀 옳지 전번에 둘째가 가져 갔지 ...  본래 엄마의 호구부와 신분증은 가두에서 90세 이상 노인들에게 드리는 보험비인가 아니면 보조인가 하는 돈을 준다고 호구부를 신분증과 같이 가져 오라 하여 가두에 가져 갔는데 거기서 그것을 두고 가라 하여 두고 왔는데 이젠 석달이 다 되였는데도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   참 기막혔다. 아무리 만만디 중국이라고 해도 이건 말도 완되는 것이다. 어쩌면 남의 호구부의 신분증을 이렇게 오래 갖고 있는지 ... 안되면 안되고 되면 된다고 하던지 ... 무엇이 그렇게 오랜지 ...   거기에 또 신분증 복사본이 안된다는 운수공사! 작년에 서류를 보면 엄마의 교통카드 만들었던 서류가 그대로 컴푸터에 남아 있겠는데 ... 신분증이 없이 안된다고 호구부를 가져 오라가 하는 이들이 정말 너무 하다. 자기 엄마나 아버지라면 이렇게 말도 되지 않는 이유로 그먼데를 다시 두번 걸음을 시킬가 ?   저멀리 한국이나 일본에는 신분증 복사본이 없이 신분증 번호만 끝자리만 암기하여도 되는데 ... 심지어 핸드폰에 사진을 찍은 신분증도 공항에서는 똑같이 사용되고 있는데 ...   아직도 멀었다. 중국은 그들 자본주의 서비스를 따라 가자면 멀고도 멀었다. 이런 불쾌한 서비스를 받을 때마다 나는 내고향이 정이 떨어지고 자꾸만 외국 생각이 나곤한다.  
38    해우소 댓글:  조회:1483  추천:0  2012-09-05
해우소?! 해우소란 단어를 난 대한민국에서 처음 들었다. 그것도 어느 홈페이지에 글을 올렸다가 내글을 보시는 애독자 한분이 나의 글을 보시고 한마디 적어 놓았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였다. "주정배님의 글은 항상 잘 나가다가 해우소로 간다." 고。 난 정말 무슨 말인지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아는것처럼 "ㅎㅎㅎ" 하고 웃어 넘겨 주었다. 물론 그 “해우소”란 뜻도 모르는 나는 내글을 잘 썻다는 뜻인지 나쁘다는 뜻인지 모르고 그저 ㅎㅎㅎ 했다는 말이다. 얼마후에 인터넷에 검색을 해 보고서야 오~ 이런 명사구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우소란 중국글로 쓰면 해:해방할 해, 다시 말하면 해방군 해자에 우: 근심우자에 소: 장소 소자를 합친 단어로서 근심을 해결하는 장소란 뜻이 되겠다. 어떻게 보면 내글에 독자가 달아놓은 댓글은 조금 독자가 내글에 대한 비웃음의 뉘앙스와 의도가 틀린 것이 아닌가 싶다. 다시 말하면 고민을 해결하는 장소란 뜻이라면 내글은 정말 괜찮은 글, 다시 말하면 마지막, 다시 말하면 내글의 결말에 가서 고민을 해결하는 장소로 간다는 뜻이 아닌가? 그러나 내글에 단 댓글은 그저 측간이란 말을 멋지게 나도 모르는 단어를 골라 쓰는라 골라쓴 단어인것 같다. 아니면 그 댓글을 다신 님은 아마도 그런 해우소가 있는 절을 즐겨 다니는 분이 거나. 목탁을 두드리며 나미아미타블을 부르는 분이였던 모양이다. 하여간 난, 이 주정배 글의 애독자 때문에 이 해우소란 단어를 배우게 되였다. 솔직히 말하면 고향에는 이단어를 모르는 분들이 적지 않다. 왜냐면 이단어는 전자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단어로서 절이나 사찰에서 화장실을 일커서 말하는 명사이기 때문이다. 하여간 나의 글은 대부분 이렇게 독자를 잘 끌고 가다가 나중에 이독자의 말마따나 해우소로 가는 것 같기도 하다.  그것은 내글의 중점은 항상 마지막 단락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사찰이나 절에서 언제부터 화장실을 해우소라 불렀는지 몰라도 우리 선조는 옛날부터 화장실을 여러가지로 불렀다. 변을 보는 곳이라고 변소라! 똥을 누는 곳이라고 똥수간? 뒤에서 보는 뒤를 보는 곳이라 뒷간, 항상 앞쪽에 있지 못하고 집 가장자리나 측면에 차지 하고 있다고 해서 측간? ... 하여간 이 화장실에 대한 이름은 많기도 하였다. 이런 저런 이름중 어느것 하나 현시대에 맞는 이름이 없었던지 아니면 종양미외 하는 한국분들이여서 그런지 그들은 그대로 외국식으로 화장실이라고 부르게 되였던 모양이다. 어쩐지 우리연변 사람들은 맨처음 이화장실이란 명사에 거부감이 적지는 않았었다. 어쩌면 사람이 죽으면 화장하는 화장터를 말하는 것 같기도 하고 ... 또 거기에 중국사람들은 위생간이라고 부르기도 하였으니 ... 종내는 고향에서 한국에 다녀오는 사람이 백프로?에 달하더니 그대로 한국식?! 화장실이란 단어가 그대로 입에 붙었던것 같다. 저 두만강 건너 북한에서는 어떻게 부르는지 ... 아직도 우리 할아버지 때처럼 측간이나 똥숫간이라고 부르는지는 모르겠으나 모르긴 해도 앞으로 멀지 않아 북한에서도 화장실이라 불러질 것은 의심할 나위조차 없는듯!하다. 혹간 모른다. 북한식 우리말 만들기 달인들이 모여 연구하면 멋진 우리말 명사가 탄생할지도. 전번에 서장에 유람갔다오다가 난 죽는가 했다. 기차가 처음 떠날때는 그런대로 괜찮은 화장실, 아니 화장실이라기에는 너무해서 변소라고 하자. 오 ~ 말도 말라. 기차에 오른지 얼마 되지 않아 인간의 오물이 찰랑 대는데 남자들은 그런대로 작은 것은 서서 보기에 별문제인데 여성들, 모든 볼일을 앉아서 보는 여성들은 정말 어떻게 볼일을 보았는지 ... 정말 불가사의하다. 정말 서장으로 가는 화장실에 몰래 파파라치족들이 있었다면 별 멋진 동작, 희한한 자세, 어찌보면 이번 올림픽에 탄생한 한국체조선수의 xxx 1 보다 못진 않은 동작도 나오지 않을 가 싶었다. 서장행 기차에 앉은 이튿날 부터는 난 아예 맥주를 먹지 않았다. 화장실을 가기 싫어서 말이다. 될수록이면 마시는 물도 줄이고 그저 침대에 누워서 잠만 억지로 청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될말인가? 서장을 가자면 2박 삼일을 가야 하는데 ... 굶고서 갈수가 없는데 ... 먹으면 볼일이 생기는데 ... 막~ 처음에는 누가 일회용 쓰레빠를 주어서 반갑게 받아 신었는데 장강을 넘어서면서부터 화장실엔 오물이 장강처럼 출렁대는데 쓰레빠를 신고 들어 가기는 틀렸고 그대로 여행간다고 반짝반짝 닦은 구두를 다시 신고 화장실을 다니는데 ... 그다음부터는 점점 불어 나는 인간의 배설물! ... 정말 말도 못하겠더라. (다음에 기차 여행을 할때면 꼭 장화를 챙겨가리라 !) 고 결심할 정도였다. 서장에서 이박삼일을 구경하는 내내 나는 돌아 올때의 뒷일, 그 뒷근심이 태산 같아서 구경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이미 돌아오는 티켓은 끊어 놓은 터이라 ... 울며 겨자 먹기로 또 그기차를 타고 돌아 오는데 ... 기차 타기 전에 화장실을 갔다오고 ... 금방 검표를 시작하기전에 또 갔다 왔으나 기차를 타고 좌석을 정하자 마자 또 화장실 가고 싶은데 ... 난 정말 환장하겠더라. 이런것을 두고 아마 노이로제라고 하지 않는가 싶다. 나는 화장실 노이로제가 걸렸던 것이다. 정말 난 돌아 오는 길에는 빵 밖에 먹지 않았다. 그것도 마른 빵을 억지로 씹어서 삼키면서 ... 물한모금도 먹지 않고 ... 2박삼일 큰 것을 참아 왔다. 오늘 특히 이 해우소에 더불어 화장실 생각이 떠올라 타자를 치기 시작한 것은 우리 연변에 지금 이런 화장실이 변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오락터나 광장이나 공원등 요즘은 생활이 좋아지니 이런 오락 장소도 많이지는 추세인데 어디던 즐기다 보면 이 화장실 걱정이 태산 같다. 더욱이 이 주정배 나는 어디가나 먹기 좋아 하고 놀기 좋아 하는 이주정배인데 ... 요즘은 정말 마음껏 놀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않는다. 전번 서장여행 후부터는 화장실 노이로제가 와서 그저 기차만 탔다~ 하면 화장실을 가고프고, 장도뻐스만 탔다해도 화장실이 그립고, 길만 떠난다면 차타기전에 화장실을 꼭 들어가 앉았다가 나오는 난, 정말 화장실 노이로제가 걸린 병신이 된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일본이 그립기도 하다. 일본엔 뻐스에도 화장실이 있고 전철에도 화장실이 있다. 정말 말그대로 일본 전체가 해우소인것 같기도 하다. 요즘 고향의 변화는 정말 천지개벽이다. 전번에 글에 썼듯. "십년이면 강산이 변하는 시대"가 아니라 하루만에 고향이 변하는 "천지개벽의 시대"가 열린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이 화장실 노이로제가 있는 주정배 같은 사람들은 제쳐 놓고도 보통 시민들을 위하여서라도 우리 연변에는 고향의 발전에 알맞게 해우소가 좀 많아야 되겠다. 저 하남다리, 연신교... 등  놀이터에 마다에는 밤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놀러 오는데 화장실이라곤 다리 밑에 숨겨져 있는 변소 뿐이였다. 어쩌면 변소를 측간이라 불러온 우리, 사돈집과 변소는 멀어야 된다는 우리민족의 풍습상 뒷간을 다리 밑에 숨겨 놓은 것은 좋으나 어쩌면 그것도 아닌것 같다. (어쩌다 새것이 하나 있던데 그마저 개방되지 않고 있었다.) 우리 연변에 하나 밖에 없는 강, 고향의 강, 어머니강에 화장실 오물이 그대로 방치 되지 않았는가 싶은 근심도 없지 않아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그래도 그 화장실을 없애 버리는 것 까지는 좋은데 그 화장실이 없으면 또 많은 주정뱅이, 나같은 주정배들이 그대로 부르하통하에 쉬 ~ 하고 노상방뇨하지 않을 가 싶기도 하다. 요즘 적지 않은 화장실을 자치주 성립을 앞두고 부셔 버리는 것까지는 좋은데 빨리 연변의 의식수준에 맞게 화장실을 지었으면 좋겠다. 멋지게 ... 깨끗하게 ... 아름다운 화장실, 진정 해우 할수 있는 해우소를 말이다. 어쩌면 돈 받는 화장실이라도 추진시켜서 개인적인 경쟁이라도 시켜서 깨끗한 화장실!이 있었으면 ... 어쩌면 돈을 좀 받더라도 저 진달래 광장에도, 아리랑 광장에도, 공원에도, 여기 부르하통하반에도 ... 근심걱정없이 깨끗한 화장실 다운 해우소를 지어 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깨끗한 화장실, 진정 화장실 다운 화장실! 절에서 일커는 해우소! 근심을 해결하는 이런 해우소! 해우소다운 해우소가 정말 그립고도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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