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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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나의 문학관과 창작의 길

시맥(詩脈)따라 40년(김동진)
2007년 12월 19일 13시 52분  조회:922  추천:45  작성자: 김동진
시맥(詩脈)따라 40년


김동



손꼽아 헤여보니 시맥따라 허우적거린지도 40년을 넘기였다. 비록 금노다지는 캐지 못하고 버럭만 가득 쌓았지만 인생 60에 40년이나 시를 안고 방아를 찧었으니 그런대로 문학인생을 살았다고 말할수 있으리라.

문학인생― 참 듣기좋은 말이다. 그것은 이른바 상부구조 (상층건축)에 속하는 문학예술은 특정된 하나의 업종으로서 누구나 다할수 있는 일이 아니기때문이다. 나는 이런 특종에 매달려 정신을 팔며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것은 선택과 애착, 추구와 아집으로 지속된 내 삶의 길이였다. 길다고 할수도 있고 짧다고 할수도 있는 40년간 내가 이룩한 성과는 보잘것 없지만 그렇다고 하여 나는 스스로 선택한 나의 문학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에게 문학이라는 생명을 움트게 한것은 1950년대초 소학시절에 퀴즈풀이를 맞춘 기념으로 연변인민출판사인지 연변교육출판사인지 하는데서 보내준 64절지 아동독물 《섣달그믐날밤》이였다. 세상에 태여나 처음 접촉한 이 손바닥만한 소책자가 나더러 책속에 빠지게 하였고 책을 사랑하게 하였으며 이런 책을 만드는 사람들을 부러워하게 하였다. 초중때에는 《라이라크》라는 엉터리시가 교내의 간행물에 실림으로 하여 글짓기에 더구나 애착을 가지게 되였는데 그 뒤로 가정방문을 오신 담임선생님이 나의 부모님앞에서 《이 집 아이는 장차 문학을 하면 될것 같습니다》 라고 하시여 내 가슴속의 문학생명이 다시 한번 꿈틀하는 계기가 되였었다. 그러던 어느날 문병교라는 학급친구가 나를 찾더니 앞으로 문학가가 되라고 하면서 나의 힘으로는 살수도 없고 구할수도 없는 《조기천선집》을 선물로 주는것이였다. 그때 나는 그 책을 받아들고 눈물이 글썽하도록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른다. 그 책을 통하여 나는 세상에 이렇게 좋은 시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마흔 일곱해가 지났지만 그 책은 지금도 나의 서재에 영원한 기념으로 소중히 보관되여있다.

문인으로 된 사람들이 다 그러했듯이 나도 독서로 무수한 밤을 팼고 무엇을 쓴다고 쉴새없이 끈적거리였다. 그러다가 1962년 고중을 졸업하게 되였는데 대학입시를 며칠 앞두고 채운묵이라는 동창과 두만강을 건너갈 월경밀모를 하였다. 원인이라면 당시의 시국이 너무나 복잡하여 조선족은 대학에 가기 힘들다는 사회여론때문이였다. 그런데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아 조선에 가서 문학공부를 하려던 망상도 철저히 무너지고말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정말 가출했더라면 나의 인생그라프는 완전히 다시 그려야 했을것이다. 헤염을 모르니 두만강물귀신이 될수도 있고 변방초소에 걸려 돌아올수도 있고 요행 건너갔다 해도 그다음의 일을 알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리하여 나는 친구가 약속을 지키지 않은것이 나를 도와준것이라고 생각한다.

그후 나는 농사일을 하면서 《봉화청년》이라는 등사판 신문을 꾸리였고 그 누구의 가르침도 없는 홀로의 자학을 견지하였다. 《지성이 감천이면 돌우에도 꽃이 핀다》더니 마을에서 10리나 떨어진 농막의 이불속에서 쓴 《봄비》라는 시가 1963년 《송화강》잡지에 실리였다. 나는 환성을 질렀다. 나도 하면 된다는 자신감에 온몸이 뜨거워났던것이다.

이런 밑천으로 2년후에는 공사중학교의 조선어문교원으로 초빙되였고 16년이라는 조선어문교수에 몸을 담그게 되였다. 그사이에 동란이라는 어지러운 년대가 끼워 다른 교수는 할수 없었지만 《모주석시사》가 있어 급한 목을 막을수 있었고 나는 《모주석시사》 35수를 몽땅 암기할수 있었다. 세월이 아무리 조화를 부려도 교단에 오른 16년은 내가 조선어문공부를 다시한 16년이였다.

그러다가 나의 신변에서 《기적》이 일어난것은 1980년 서정서사시《거리의 울음소리》가 《연변문예》에 실린것이다. 이 한수의 《폭로문학》이 《연변문예》 제1회문학상을 수상함으로 하여 나의 이름은 정식으로 문단에 오르게 되였다. 그해 6월에 중국작가협회 연변분회에서 나를 회원으로 비준한다는 통지서를 보내왔다.

《동진동무: 좋은 글 많이 쓰십시오.  김철.》

입회통지서의 아래쪽 여백에는 당시의 작가협회주석이며 우리 시단의 저명한 시인이신 김철선생님의 친필까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가끔 이 통지서를 꺼내보면서 무량한 감회에 젖어들군 한다. 그것은 그해부터 나에게 진정한 문학생명― 단체가 승인하는 문학생명이 부여되였기때문이다. 처녀작을 발표해서부터 작가협회 회원이 되기까지의 17년은 나에게 있어서 문단밖에서 문단에로 접근하는 기인 과정이였다. 이 과정을 통하여 가슴에 품어온 아이적 문학생명의 싹은 마침내 해빛을 보게 되였다.

내가 구구하게 문학을 생명과 밀착시키는것은 나로서의 리유가 있어서이다. 작가협회는 정당에 가입하는것처럼 주먹을 들고 선서하지는 않지만 분명 장정이 있고 규약이 있는 이 사회의 조직체이기에 그 조직에 가담하면 그에 따르는 생명을 가지기 마련이다. 정당에 문학을 비하는것은 타당하지 못하지만 생명의 도리는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다른 생명이 자연연소일 때 문인의 생명은 의식적으로 가슴을 불태워 만든 빛과 열을 남들에게 나누어주는것이라고 하면 틀리는 말일가?

시를 쓰면서 나는 문인의 문학생명에도 제한이 있음을 깨달았다. 백년을 산다 해도 중도에 필을 놓거나 다른 일을 한다면 그의 문학생명은 그로서 끝나는것이다. 단명을 살았다 해도 그가 남긴 작품이 세인의 가슴속에 살아있다면 그의 문학생명은 영원한것이다. 한평생 쭉정이글만 썼다면 그 문학생명도 육체의 사멸과 함께 소실될것이다.

문인의 문학생명이란 바로 이러한것이다. 도리는 이렇듯 명백한데 유감스럽게도 나의 문학생명은 리상적이 되지 못하고있다. 문학을 한다는 간판을 들고 농촌에서 교단―문화관―문련―창작실로 전전하면서 수십개의 가을을 넘어왔건만 상기도 나의 문학의 열매는 여물지 못하였고 그윽한 향기를 풍기지 못하니 사람들앞에서 감히 문학을 했노라고 떳떳이 말할 체면이 없다. 엄마의 메주는 발효를 거쳐 그처럼 맛있는 된장, 간장, 고추장이 되는데 나의 문학《메주》가 그렇지 못한것을 보면 분명 소금을 덜 먹었거나 바람간수를 제대로 못한탓이리라. 

어쩌면 저 하늘의 별을 혼자서 다 따올것처럼 술덤벙 물덤벙 너무 욕심을 부린것 같기도 하다. 남보다 우월하지 못한, 너무나 평범한 lQ(지력상수)와 EQ(정서상수, 교육지수)를 가지고 명작을 만들겠다고 꿈낟가리를 쌓았으니 그 생각부터가 우직했 다고하겠다. 속담에 《우물을 파도 한우물을 파라》고 했는데 나는 자신이 천재가 아닌 둔재임을 망각하고 여기저기 조금씩 다 뚜져보았다. 재담, 방송소품, 실화, 동요동시, 동화, 번역, 가사. 시조, 수필, 통신… 이렇게 닥치는대로 기웃거린건 말할것도 없고 한때는 소설을 쓴다고 설치기도 했으니 결국 지금의 요 모양 요 꼴이 되고말았다. 게다가 시를 쓴다는것이 《아, 오》라는 감탄사를 끌어안고 문학의 본연이 무엇인지도 모른채 정치에 종속된 문학을 하느라고 아까운 생명을 허비했으니 이 역시 불행이 아닐수 없다. 그리하여 지금 와서 단행본이라고 출간한 이른바 《저서》를 펼치면 《쓰레기의 집대성》이라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게 되였다. 

시대가 변하여 늦게야 눈을 떴지만 내가 추구하는 전통과 현대의 접목이 잘 이루어지지 않아 새로운 고민과 고독으로 새로운 가슴앓이를 하지 않으면 안될 처지, 하지만 숙명으로 받아들인 문학이고 여직껏 아껴온 문학생명이기에 필을 꺾을 생각은 없다. 이미 내친걸음이니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가야 한다는 일념으로  오늘도 많은 시간을 《무엇을 어떻게 쓸것인가?》를 생각하는데 소모하고있다. 한편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고 사이버문학을 뒤적거리며 남들의 좋은 글을 탐독하면서 내나름의 《행복한 고독》을 만들기도 한다.
나의 손에 필을 들수 있는 날까지 시맥을 찾고 시맥을 따르는 나의 작업은 계속될것이다. 이는 시맥따라 살아온 나의 문학생명앞에 털어놓는 나의 고백이며 언약이다.

지금 나의 귀전에는 《너는 왜서 아직도 남들처럼 훌륭한 시를 쓰지 못하느냐?》 라는 질문이 끊임없이 메아리치고있다. 그러니 이 글은 이만큼 쓰고 그 답안부터 찾아야 하겠다.

2006. 4. 10



<<연변문학>> 2007년 1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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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작성자 : 정마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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