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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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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
2007년 06월 29일 05시 54분  조회:3993  추천:73  작성자: 김혁


. 평론 .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
 
           ㅡ 작가 김혁에 대한 이야기
 
             조성일

 
 
 

 

들어가면서
 
우리 말 속담에 “뒤에 난 뿔이 우뚝하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후생각고”(後生角高), “청출어람”(靑出於藍)이라는 사자성어와도 뜻이 통한다. 말하자면 젊은이나 후배가 나이가 젊고 의기가 장하므로 학문을 계속 쌓고 덕을 닦으면 선배를 릉가하는 경지에 이를것이라는 기대와 존중의 뜻이 담긴 말이다.
필자가 사술한 속담과 사자성어를 음미하노라니 김혁씨가 생각난다. 김혁씨가 바로 선배들을 릉가하고있는 우리 문단에 우뚝 솟은 중견작가로 각광을 받고있으며 광범위한 독자들의 사랑을 받는 문인 수위자(首位者)들의 보좌에 착석하고있다.   
나는 김혁씨보다 나이가 많아 같은 또래가 아니고 또 서로 다른 직장에서 일하다보니 소통의 기회를 많이 가지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그의 작품을 통해 그의 밑바닥인생살이에서의 처절한 몸부림, 놀라운 예술적천부, 빼여난 예술적감수성, 지칠줄 모르는 독서와 독학에 의한 연박한 지식 그리고 그를 바탕으로  무더기로 쏟아내는 질높은 작품생산력에 감탄을 금하지 못했고 그의 앞날이 어디까지 어떻게 다채롭게 펴지게 될지 알수없는 흐믓한 기대에 마음이 설레였다. 이 설레임은 최근에 이르러 나로 하여금 그에 대한 감수를 피력하도록 정서적흥분속에 빨려들어가게 하였다.
 
역경을 딛고 일떠선 “오뚝이”
 
20세기의 실존주의 철학가 하이데거는 “인간은 피투성(被投性)존재”라고 하였다. 그가 말한 피투성의 존재란 세상속에 내던져진 존재라는 뜻이다. 던져진 인간의 삶은 고해(苦海)일수 밖에 없다. 김혁씨의 인생살이도  례외가 아니다.
김혁씨는 전대미문의 문자옥(文字獄)인 “문화대혁명”전야인 1965년 9월에 룡정에서 태여났다. 그의 미혼부모는 가정의 결사적인 반대와 당시 사람들의 무서운 시선 탓에 룡정병원에서 태여난지 사흘밖에 안되는 그를 보자기에 쌓인채로 무정하게 버렸다. 그가 태여나자마자 풍을 일구고 담이 목에 막혀 우유도 넘기지 못해 죽어가는 절체절명의 시각에 이웃 로인의 비방(秘旁)에 의해 구사일생으로 탄생의 고고성을 울렸다고 한다. 이렇듯 김혁씨는 소름이 끼치는 화택(火宅)속에서 불운의 화인(火印)을 찍고 세상에 버려졌다가 다시 소생하여 밑도 끝도 없는 괴로움의 바다인 고해를 항해하게 되였다.
김혁씨는 양부양모의 슬하에서 자랐다. 동년에 양부양모의 배려도 받았지만 불우한 운명을 면하지 못했다.생모가 류산하려고 각가지 약들을 람복한 바람에 엄중한 칼슘결핍증에 시달려 몸은 장작개비처럼 말라있었고 머리만은 어른의 모자를 쓸수 있을 정도로 컸다고 한다. 그는  옹근 동년을 병원에서 보내다시피하였다.
그러나 소학을 졸업할 무렵 친아버지같은 양부가 “문화대혁명”때 장기간의 투병생활에 지쳐 세상을 뜨시고 나중에 이붓아버지가 가장으로 들어와서 오누이를 만들어준다며 3살짜리 녀자애를 수양했다. 이붓아버지의 잘못된 처사로 하여 가정은 화목을 잃게 되였다. 이붓아버지와 양모는  사사건건 싸움으로 나날을 보냈다. 바로 이때에 김혁씨는 자기가 생부생모에 의해 세상에 버려진 아이, 양모양부에 의한 입양아라는 엄청난 비밀을 알게 된다. 이는 그에게 너무나도 큰 충격이였다. 감수성이 예민하던 사춘기의 그는 자기의 정체성 혼란에 함몰되여 사회의 불량배들과 휩쓸리기 시작했으며 순식간에 문제아로 추락되였다. 그는 결국 고중 2학년때 한차례의 큰 무리싸움의 주모자라는 죄목으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한다. 따라서 고중 2학년, 이것이 그가 가진 학력의 전부였다.
정규적인 교육의 길에서 중도이폐되고 게다가 의붓아버지에 의한 가족의 갈등으로 하여 가정이 파산됨에 따라 김혁은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완전한 고아, 외톨이로 된다. 따라서 그는 다시 차디찬 세상에 동댕이쳐져 삶의 근원적인 허무의식 못지 않게 생존의 위기의식에 심하게 시달리게 된다. 고립무원한 그는 17세의 어린 나이에  울며 겨자먹기로 생존을 위해 일터를 찾아나선다. 그는 샌들장사 실패의 쓴맛도 눈물겹게 씹어야 했고 하수도 덮개와 스팀을 만드는 주물공장, 양계장 등 일터로 정처없이 전전하면서 힘에 버거운 고된 로동에 무거운 부하를 겪어야 했고 죽살이를 쳐야 했고 홍역을 치러야 했다.    
이런 번중한 로동의 고달품속에서도 그는 독서를 잊지 않았고 글쓰기에서도 심혈을 몰부었다. 이런 때(1986년)에  길림신문사의 사장은 그의 양양한 필재를 발견하고 그를 길림신문사의 기자로 취직을 하게 한다. 하지만 고중2학년의 초라한 학력을 가진 뜨내기 막벌이군이 기자로 발탁되는 조건은 가혹했다. 2년의 시간은 고험기로 견습기자, 그 기간 로임이나 장려금은 한푼도 없으며 대신 원고료는 발급한다는 조건이였다. 김혁씨는 이 기회를 인생 역전의 중요한 기회로 간주한 나머지 그 조건을 흔쾌히 동의하였다. 그때 그의 나이는 만20세였다.
1986년부터 1993년까지 사이에 2년간의 견습기자의 생활을 마치고 합격된 기자로 되여 우수한 성과를 떠올렸고 1994년에 연변일보사에 전근되여 2002년 연변작가협회에로 직장을 옮기기 전까지 <해란강>문예부간 편집기자로 맹활약하였다. 하지만  두 신문사의 기자생활에서 대학졸업장이 없다는 단 한가지 리유로 대학문을 갓나와 취업한 애숭이들보다도 적은 가련한 정도로의 로임을 받았고 직함이나 대우, 집 분배 등 기본적인 면에서 아무런 보장도 없었다. 실로 그는 사람의 능력을 보지 않고 대학졸업장 한장을 중요한 증거로 삼아 인사를 결정하는 그 세월의 불합리한 인재채용제도의  희생물로 되여 억울함을 당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오기와 치기로 무소의 뿔처럼 생벽을 지르며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였다.
2002년 김혁씨는 연변작가협회로 전근되여 창작련락부 사업과 연변작가협회 사이트 편집을 담당하였다. 그는 자기의 본직사업을 열심히 함과 더불어 문학창작에서도 풍만한 성과를 떠올리고있었다. 그는 쨍하고 해 뜬 날이 왔다고 기쁨이 샘솟아올랐다. 하지만 이런 좋은 날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2004년에 접어들어 한 문인의 작품출간 기념모임에 참석였다가 기념파티후 돌연적으로 일어난 황당한 사건에 말려들어 공직을 떼우고 또다시 세상의 밑바닥에 내버려지며 조사조의 조사를 받는 한편 엄청난 현찰을 꾸어서 부과해야만 하는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극한의 상황에 이르게 된다. 세대주로 가정을 담당해야 할 나이에 어수룩한 일에 휘말려 이변을 당한  그는  3년동안이나 “문인집시”로 이리저리 굴려다니는, 벼랑끝에 매달린 암담한 삶을 힘겹게 지탱하다가2007년에 겨우 연변일보 <종합신문>편집부로 전근되여 작년말까지 근무하다가 올해 벽두부터 그 자리를 잃게 되는 고배를 마시게 되였다. 행렬을 잃고 땅에 떨어진 기러기 신세가 되고 말았다. 
김혁씨는  <문학자서전>에서 흘러간 자기의 인생을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오늘로 오기까지 나는 정말로 수없이 넘어지고 또 넘어져 왔다. 어떻게 되다보니 내가 걸어온 길은 다른 사람들이 여유작작 노량으로 걷고있는 탄탄대로가 아닌 뒤안길, 아니면 국도를 벗어난 진창길이 아닌가 싶다. 삶의 길이 너무나 울퉁불퉁하였다. 삶의 굽이굽이에서 해일처럼 밀려와 연줄로 들이닥친 불상사가 호된 일격으로 육신을 강타했다”.”나의 삶은 조악하였다. 강보의 몸에 버려졌고 양모와 의붓아버지의 끝없는 소시민적갈등속에서 암울한 사춘기를 지내왔고 대학문전도 못간 몸으로 엘리트속에 묻혀 필봉 하나만 믿고 신심을 혹사해왔으며 청빈한 문인신세때문에 혼인이 파열되였다. 30대중반이 넘도록 안식할 보금자리 하나 마련 못해 수천책의 책 꾸러미를 지고 메고 열다섯번씩 이사를 해야 했다. 그리고 오로지 사랑하는 딸애와 타향 멀리 떨어져 함께 지낼수없는 살을도려내는 마음의 진통속에 거액의 비빚짐에 눌리워 수년간 내내 리자돈을 꾸어대야 하는 나날이 지금도 계속되고있다”.
실로 그의 삶은 현실에서의 갈등과 좌절, 가난과 고통, 고독과 소외, 불행과 절망으로 점철된 눈물겨운 처절한 삶이였다. 실존주의 철학가들이 말한것처럼 그의 삶은 “불안의 정조(情調)”속에서 시달린 끝없는 콤플렉스였다.
그러나 그는 불우한 운명의 노예가 아니였다. 남다른  의력과 용단 그리고 각고의 노력으로 자기의 불우한 운명과 지속적으로 대결하면서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역전의 삶을 일궈냈으며 향후 또 그런 감격적인 인생드라마를 쓰리라고 믿어의심치 않는다. 그가 옛날 어른들이 말한 어두운 구름밖으로 나오면 맑고 푸른 하늘이 보인다는 운외창천(雲外蒼天)의 도리를 되새기며 전화위복(轉禍爲福)의 인생 승리자의 길에서 숨가쁜 질주를 계속하리라는 나의 기대는 변함이 없다.
 
독서삼매경에  빠진 독서광
 
나는 김혁씨의 사이트에 매일마다 방문하는 네티즌이다. 몇년전에 나는 그의 사이트에서 그의 프로필에 겯들어진 사진 한장을 보고 깜짝 놀랐고 경탄을 금치 못한적이 있다. 지금도 그 사진을 보면 가슴이 뭉쿨해진다.
그 사진인즉 사다리를 타고 올라갈 정도의 엄청난 분량의 책이 꽂힌 서재 및 그 서재에 들어가지 못한 엄청난 책들이 방바닥에 모로 누워있는 정경을 배경으로 하고 그 앞에 팔장을 끼고 상념에 잠겨 앉아있는 포즈를 취하고있는 김혁씨를 찍은 사진이다. 듣는바에 따르면  바람벽을 꽉 메운 서재와 그 주변도 부족해서 침실, 주방 지어 화장실에까지 책을 쌓아놓고있다고 한다. 나의 서재에도 책이 많다고 자부하였는데 김혁의 서재를 보고나서는  나의 서재가 너무나도 초라하다고 느껴졌다.
김혁씨는 자기 서재에 “허강재”(虛崗齋)란 이름을 붙혔는데 빈 언덕, 몸과 마음을 비운 곳이란 뜻을 이르는 말이다. 그가 말하는 이 소우주(小宇宙)와 그의 자택 곳곳에는 1만여권의 책과 5천여부의 영화 테이프가 소장되여 있다고한다. 그는 이 소우주속에서 독서삼매경(讀書三昧境)에 함몰된 독서광으로 살아오고있다. 그의 독서범위는 문학뿐만 아니라 예술, 철학, 력사, 종교, 천문학, 회화, 동식물학,  민속 등등  매우 넓은데 이런 분야의 책들을  대량적으로 구매하여 읽는다. 신간 베스트셀러면 죄다 사들이는 외에도 주문하거나 사서 읽는 잡지만해도 10여 종류나 된다. 그의 독서시간도 우리를 못내 감동을 먹게 한다.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독서에서 잡식적인 취미를 가졌던 만큼 홀로 조용할 대면 무게있는 명작이나 철학서들을 새겨 읽고 술 마신 뒤면 자유분방한 시집을 펼쳐들고 명절이 맞뛰면 권수가 좀 많은 판타지나 연정소설같은 기분 좋은 족으로 찾아쥐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종합지같은것을 읽는다. 그리고 휴식일이면 할리우드 영화 한편, 중국영화 한편씩 , 정극 한편, 오락물 한편씩 곁들이면서 온 하루 영화파티를 벌린다”.
보다싶이 김혁씨는 장서가로 책을 소장한것이 아니다. 읽고 생각하고 쓰기위해 엄청난 재력난에 시달리면서도 책을 사서 탐독하였다. 독서광으로서의 그의 미친듯한 책읽기는 하루이틀에 생긴 일이 아니다. 그는 양모의 슬하에서 다섯살때에 철자를 죄다 떼였고 독서가 가능하였다. 소학교에 입학하던 날 그는 입학등록을 책임진 선생님들  앞에서 교과서 읽기는 물론 모택동의 <로3편>이며 당시 베스트셀러였던 장시 <서사군도에서의 싸움>이며를 줄줄 외워 그의 남다른 기억력과 암송력은  현장의 선생님들과 학부모들을 놀라게 했다.
동년시절 애초의 독서생활은  련환화(蓮環畵) 읽기가 주되는것이였다. 그는48권으로 된 <삼국연의>, 40권으로 된 <수호전>, 이며 22권으로 된 <서유기>며 15권으로 된 <악비전>과 같은 고전명작들, 그리고 구쏘련의 문호 고리키의 자서전적인 3부작 <동년>, <인간세상>, <나의 대학> 등을 모두 그림책으로 읽었다. 이 시기에 그가 맨 처음 매료되였던 그림책은 고리키의 <동년>이였다. 소학교 4학년때부터는  성인들의 책을 읽기 시작했고 장편도 손에 쥐였다. <들끓는 광산>, <안명호반>, <흥남투쟁사>, <상앙의 이야기>, <고옥보>…등을 읽었다. 그중에서도 그가 가장 인상깊게 읽은것은 구 사회를 경유하여온 분의 자서전적소설<고옥보>였다. 그는 양부양모의 덕택으로 신화서점에 나오는 련환화들을 모조리 사들여 읽었다. 이렇게 동년시절에 천권에 달하는 련환화를 읽고 소장하였다. 따라서 당시에 룡정신화서점의 극성스런 “꼬마단골”, 룡정에서 책이 가장 많은  “소년장서가”로  소문이 났다.
그는 청년기에 들어서면서 동년시절보다 더욱더 신들린 사람처럼 걸탐스럽게 독서를 했다. 그는 독서에 미쳐 닥치는대로 읽고 읽으면서 끝없는 환상의 나라, 그리움의 세계로 빠져들었다. 그는 글읽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문학을 하고싶었다. “문화대혁명”이 력사의 뒤안길에 사라지자 그는 왕성한 열정으로 세계명작들을 거의 다 읽었으며 연변출판사와 북경민족출판사에서 간행된 잡지와 총서들을 빠짐없이 사들여 그 간행물을 통해 세계문학과 중국문학, 중국조선족문학을 본격적으로 독파하였으며 그리고 미술, 영화, 노래 등도 놓치지 않고 좋아했으며 음식탐을 하는 허기진 애마냥 그 경전과 류행들을 그의 두뇌속에 정성스럽게 부어넣었다.
그는 지금까지 내내 붙박이로 자기의 옹근 몸둥아리를 책더미속에 부장품처럼 묻어버렸다. 그의 일상에서 독서가 없는 나날이란 상상할수 없다. 청소년시절에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제대로 전수받지 못한 콤플렉스에 상처입은 그는 남보다 몇배로 되는 책을 읽었다. 그것이 그의 생리적행위로 굳혀졌고 체질화되였다. 독서는 그가가장 좋아하는 취미가 되였고 친구가 되였다. 부모 대신 독서가 그를 키웠다. 남다른 독서 탐닉의 지적생활을 통해 동서고금의 많은 현인들을 만났으며(讀書尙友) 세상과 사회에 대한 지식과 시각을 넓혔으며 삶의 온갖 모습을 보게 되고 외로움과 고난, 소외를 물리치고 선과 아름다움을 향한 인간의 근질긴 투쟁의 이야기를 들을수 있었다. 그는 독서를 통해 온갖 혼란스런 생각, 감정, 사건들을 정돈하고 새로운 꿈을 키우는 심전경작(心田耕作)을 꾸준히 하였다. 또한 그는 독서를 통해 자기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에  대해 이야기하는 법을 배워냈다.
김혁씨는 자기의 독서에 대한 느낌을 두고 다음과 같이 피력하였다. “좋은 작품 한권에 좋은 영화 한부에서 나는 법열(法悅)을 느끼듯 몸을 부르르 전율한다. 그 속에 진리의 말씀이 있고 슬기의 샘터가 있고 고난을 이겨나가는 주문이 있고 뮤즈의 노래가 있다.
… 그 속에 들어앉아 무더기로 사들인 신간 잡지와 서적들을 미친듯이 읽고 새로 개봉되는 영화 테이프들을 대량 소장하고는 보고 읽고, 일고 본다. 그리고 쓴다. 그 피스톤의 작동같은 따분한 동작이 여태껏 내가 해온,그하고 있는 그리고 할줄밖에 모르는 짓거리다. 순수한 심안(心眼)으로 보고 읽는 그것이 내 인생에 보탬이 될 황금의 열쇠인줄을 나는 안다. 그것은 내 불운을 ‘액막이’해 줄 팥 한주머니이다”.
바로 이런 생각이 있었기에 그는 서중유락(書中有樂)의 마음가짐을 갖고 지금까지 독서광으로 살아오고있는것이다.
고금중외의 이름난 영재들은 한결같이 똑같은 하나의 별명을 가지고있다. 바로 “독서광”이다. 그들은 입을 모아 책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자신은 없었을것이라는 요지의 말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력점찍어 말하고픈것은 독서광이라 해서 다 유명한 사람으로 되는것은 아니지만 성공한 영재들은 죄다 독서광이라는 점이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는다”고 했던 안중근, 독서로 눈병이 난 와중에도 책을 놓지 않았던 세종대왕, “만권의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내 몸은 서럽기만 하다”고 했던 괴테…등은 남들보다 몇배 많은 독서량으로 혜안을 얻어 성공적인 삶을 얻어낸 독서광들이다.
김혁씨도 바로 이런 독서광에 속하는  조선족문단의 중견작가가이다. 실로 그는 정규적인 학교 선생들의 가르침을 받지 못하고 무사자통(無師自通)한 지성인이며 자신의 처절한 삶을 문학적자원으로 승화시킨 장한 모습을 독서로 보여준 기인(奇人)이다. 무서운 독서가 결국은 그를 작가의 길로 이끌었고 인생과 운명을 바꾸는 에네지로 되였다.
 
문단의 앞자리에  우뚝 솟은 작가
 
 김혁씨에 대한 글을 쓰노라니 러시아의 대문호 막심 고리키가 내 머리에 떠오른다. 고리키는 소학교때 천연두에 걸려 입학한지 5개월만에 자퇴하게 되였다. 그것이 그가 가진 학력의 전부였다. 빈약한 학벌로 인해 제본소(製本所)의 막일꾼, 과자가게의 점원, 려객선의 접시닦기, 수위, 부두로동자 등 일을 하면서 언제나 밑바닥인생을 살아야만 했다. 그러던 그가 려객선에서 한 요리사의 조수로 일하던 때부터 요리사의 선실에 있는 책을 가까이 하게 되였다. 그는 독서에 취미를 붙이게 되였고 미치듯이 글을 읽는 독서광이 되였다. 그는 책속에서 자기가 보지 못한 세계를 접하면서 닥치는 대로 막일을 하는 과정에 문학에 대한 열망을 불태웠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또 썼다. 드디어 24세가 되던 해 처녀작 <마카르 추드라>를 발표하여 독자들의 넓은 공명대를 획득하여 소설가로 일약 변신하였다. 뒤이어 <첼카시>, <해연의 노래> 등을 발표하여 러시아의 하층생활을 묘파한 대표적인 작가로 부상되였고 종당에는 장편소설 <어머니> 등을 창출하여 세계적인 문호로 각광을 받게 되였다. 실로 그는 초라한 학력을 가졌지만 독서와 독학, 모진 고난과 어려움을 통해서 창출해 낸 그의 문학세계는 뭇사람들이 경탄을 금치 못하는, 또한 그만이 가질수 있는 독특한 예술세계였다.
김혁씨의 <문학자서전>에 따르면 소학시절에 자기가 맨 먼저 매료되였던 작가는 고리키이고 작품은 그림책으로 각색한 고리키의 작품 <동년>이라고 고백하였다. 김혁씨는 고리키의 소설 <동년> 등 작품들을 탐독하면서 모름지기 그의 영향을 받았던것이다. 김혁씨의 동년시절을 보면 고리키의 동년시절과 닮은데 있다. 그는 고리키처럼 어린 시절에  사회의 저층에서 고통스러운 나날들을 보냈고  그런 와중에서도 저급적인 학력으로 인한 콤플렉스를 이겨가며 독학과 독서에 이악스레 달라붙었고 문학에 매료되여 자기의 힘겨운 삶을 묻혀내는 글을 쓰고 또 썼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의 우수한 창작성과로 조선족문단의 앞자리에 우뚝 솟은 중견작가로 자리를 단단히 굳히였다.
김혁씨에게 있어서 문학은 처절한 삶과 한의 문학이며 그의 삶을 구원해주고 그의 삶의 의욕과 에네지를 준 구원의 문학이요, 힘의 문학이다. 그는 <문학자서전>을 통해 문학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다음과 같이 형상적으로 묘파하고있다.
“문학은 내가 컴컴한 생의 동굴속에서 변신을 이루게 하는 쑥과 마늘이였고 내 삶의 절망속에서 희망을 바란 자기투척이였고 내 무채색의 삶을 채색으로 만들어주는 조색판이였다. 아픈 나날에 내 흩어지는 마음과 행동을 붙들어주고 위로해준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고 초라니같던 나를 어엿이 증명해준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고 끊임없는 생활의 의욕의 에너지를 준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고 상처투성의 내 삶을 표구할수 있게 해준것이 바로 그 문학이였다”.   
1985년 그가 19세가 되던 해에 처녀작인 단편소설 <피그미의 후손>으로 문단에 데뷔한 이래 오늘에 이르기 까지  <마마꽃, 응달에 피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완용 황후>, <시인 윤동주> 등 장편소설, <적(笛)>, <천재 죽이기>, <조모의 전설>, <타인의 시간>, <뜨거운 양철지붕에 올라앉은 고양이>, <불의 제전>,<혼불>,<설태를 내보여라, 어제라는 겨울에>,<바람과 은장도>, <꽃뱀>, <뼈> 등 중편소설, 장편르포<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었다>,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등 인물전기,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력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등을 발표함과 더불어 단편소설 80여편,시 300여수, 명상시리즈 500여편, 수필과 칼럼 200여편을 독자들에게 선물함으로써 조선족문학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그는 상술한 성과와 기여로 하여 국내외의 각종 문학상을 30여회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김혁씨는 우리 문단에 라이벌이 없는 다산작가이다. 그가 창출한 수많은 작품들이 다룬 내용과 인물들은 다양하지만 크게 두가지로 개괄할수 있는바 하나는 밑바닥인생들의 처절한 몸부림에 대한 취급이요, 하나는 우리 민족의 정체성에 대한  사색과 고민이다.
김혁씨의 작품에서 우선 주목되는 것은 밑바닥인생의 처절한 삶을 다룬 “처절함의 미학”이다. 그는 자기 자신의 불우한 운명과 처절한 인생체험을 회피하지도 숨기지도 않고 자기 작품에 녹아들게 하였다. 바꿔말하면 그가 이 비정한 세계에서 감수성이 가장 예민한 성장기에 자기가 겪어야 했던 가혹한 체험을 독자들에게 설파하였으며 가슴속에 고여있는 한과 서러움과 괴로움을 이야기하였다. 그의 소설 <적>, <바람속에 지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올린>, <천재죽이기>, <박쥐는 낮이면 날지 못한다>, <마마꽃, 응달에 피다>을 비롯한 많은 작품들을 보면 그 소설들에 부각되고있는 거의 모든 주인공들은 죄다 방황과 좌절을 거듭하고 근원적인 아픔에 시달리면서 죽어가는 비극적인 인물들이다. 나는 이런 인물형상들을 통해 실존주의자들이 말하는 “불안의 정조”속에서 비장한 혈투로 몸부림치는 사회의 저층에 깔린 인간들의 령혼을 읽어낼수 있었고  불투명한 시대에 자기의 실존을 위해 쓰러질듯 휘청거리면서도 약속없는 미래를 향해 힘겨운 행보를 하고있는 “소인물”들의  불안과 실망, 소외와 고독, 아픔과 슬픔을 절감할수 있었으며 빛에 가려진 지난한 어둠속 약자들과 그들이 살아가는 시대의 력사적의미를 읽을수 있었다. 추호도 의심할 나위없이 이 모든것은 김혁씨의 밑바닥 체험에서 우러나온것들이다.
김혁씨의 밑바닥인생 체험을 바탕으로한 그의 추구와 아픔의 묘파는 9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그 양상이 변모하기 시작한다. 다시말하면  그가 말한것처럼 “나의 육신밖의 아픔 그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집단적인 아픔을 피부로 느끼”면서 “갓길에 섰던 나의 필봉은 새로운 좌표를 찾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이 무르익혀짐에 따라 일부 몰지각한 한국인들의 조선족 한국초청사기사건을 다룬 장편르포 <천국의 꿈에는 색조가 없다>,도시와 외국으로의 진출과정에서 조선족녀성들이 겪게 되는  아픔을 다룬 장편소설 <국자가에 서있는 그녀를 보았네>, “중국조선족 문제 테마소설”이라는 부제하에 변혁기 중국조선족의 고뇌를 취급한 작품들이 그 사례로 짚어본다.  또한 그는 자기의 필묵을 조선족의 정체성에 대한 심각한 사색에 힘입어 우리 민족의 력사와 우수한 인걸들을 조명한 <주덕해의 이야기>, <한락연의 이야기> 등 인물전기, 장편력사기행 <일송정 높은 솔, 해란강 푸른 물>, 문화력사시리즈 <영화로 읽는 중국조선족>,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 등 수작들을 무더기로 쏟아냈다.
김혁씨는 타인을 쫓아다니면서 뒷북을 치거나 부화뢰동하는 창의성없는 “작가”가 아니다. 그는 불같은 열정과 남다른 의력과 각고의 정신으로 새것에 부단히 도전하며 과감하게 새로운 실험에 투신하는 작가이다. 그는 국내외 문학사조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자기의 고유한 문화감수력을 바탕으로 한 자기나름의 개성적인 작품창출에 모를 박아왔다. 초현실주의 소설 <천재죽이기>, <신오감도>를 비롯한 초현실주의 계렬시, 신사실주의소설 <라이프 스페이스>, 황당파소설 <바다에서 건져올린 바이올린>, 사이버소설 <병독>, 판타지소설<불의 제전>,그리고 지적섬광이 짙게 묻어나는 문화칼럼 등이 그 사례라 하겠다.
이런 작품들에서 표출된 기발한 아이디어, 내용과 공간의 확장, 다양한 현대표현기법의 능란한 사용, 화려한 문체는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실로 나는 그의 낡은 틀을 까부시고   기성의 벽을 허무는 선봉정신과 반역정신에 감동을 금할수 없으며 그의 천부적인 재질에 매료되지 않을수 없다.
김혁씨는 누구인가고 물을때 소설가 하나의 타이틀로만으로 대답할수 없다. 그의 문학은 소재나 형식, 그 어느면에서나 문학예술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었다. 말하자면 그는 문학의 거의 모든 분야 이를테면 소설,시, 수필, 칼럼, 르포, 다큐멘터리, 아동문학…등을 섭력하면서 자기의 글쓰기를 계속해왔고 문학이라는 전당의 구석구석에 이름을 남겨 독자들의 이목을 끌고있다.
그를 소설가라하는것은 물론 시인, 수필가, 칼럼리스트, 아동문학가, 지어는 “아이디어 뱅크”라해도 무방하다. 따라서 나는 그의 이런 창작의 다양한 성향을 감안한 끝에 소설가 김혁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글을 엮으면 그의 전면을 다룸에 어려움이 느껴져 작가 김혁이라는 타이틀을 달게 되였다. 실로 그는 다쟝르작가로, 다면수로 우리앞에 당당하게 다가오고있으며 그만큼 우리 조선족문학예술에 대한 기여가 다방위적이라고 말할수 있다.
 
나오면서
 
나는 실존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음과 같은 지론을 머리속에 새겨넣었다. 피투성(被投性)존재로서의 인간은 언제나 지금 던져져있는 자기의 상황을 알아차리고 그 상황을 지속적으로 깨고 새로운 자세로 살수 있는 “가능성”을 놓치지 않는 일이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욕망으로서 인간의 실존을 바쳐주고있는것이다.
필자의 생각에 따르면 김혁씨는 불우한 과거를 가지고있을뿐만아니라 현재의 삶도 순탄하지 않다. 그는 자기의 천부와 빼여난 예술적감수력, 지독한 독학과 뼈를 깎는 노력으로 수많은 훌륭한 작품을 창작혀 우리 조선족의 발전에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지만  그에 따른 경제적대우는 미미하기 그지없다. 한때 일시적인 충동으로 하여 말려들어간  황당한 사건으로 하여 공직에서 추방되여 월급도 없이 원고료에 의해 생계를 힘겹게 유지하고있다. 그 일이 있은지도 10년이 지났지만 그에게는 관대가 따르지 않았고 해탈할수 있는 출구가 열리다가 최근에는 또 막히고 말았다. 그는 경제적으로 안정된 생활이 없다. 몇푼도 안되는 원고료에 기대어 생활을 엮어가고있다. 그는 생계를 위해 매일마다 분초를 다투며 글을 써내야 하는 생계형작가의 운명을 면치 못하고있다.문학은 그에게 “밥그릇”으로 되였고  험한 세상을 살아가는 “부적”으로 되여버렸다. 묻노니 그가 무슨 죄를 범했다고 그의 인생과 문학의 행로에는 지속적으로 찬비만 내리는가.
하지만 김혁씨는 이런 처절한 삶에 주눅이드는 약자가 아니다. 그는 누구보다 강렬한 욕망과  확고한 신념을 가진 사나이다.
그는 이렇게 자기의 속심을 거침없이 들어내고있다. “남과 달리 단 한곳에 아집을 거는것은 기실 괴로운 일이다. 어쩌면 줄곧 예술적인 요구와 현실사이의 간극에서 괴로워하고있는 나는 나 자신의 률법대로 살아가는 실성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유폐된 자아를 지니고 세상으로부터 중절된 인간일수도 있다. 어쩌면 나는 생의 어느 시기 블랙홀에 잘못 빠져들어가 중력을 상실해 버린 사람일수도 있다.
하지만 주어진 운명을 속여 비켜가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미 나는 혼자서 쉼없이 달리는데 익숙해 있다. 스스로의 무드를 만들고 그로서 생성되는 엔돌핀에 도취되는 나는 문학과 예술이라는 거대한 씻김굿의 휘모리에 신들려 있다. 속박없는 본연의 삶에 대한 동경은 자기구제의 너무나도 당연한 귀결, 그 내가 달려가는  궁극은 문학에 있다고 나는 믿는다”. “나는 숙명으로 문학이라는 이 황금의 밭뙈기를 지키는 파수꾼으로 거급날것이다”.
“문학이라는 궁극의 다리를 건너는 나의 ‘오체투지(五体投地)’의 행보는 계속 될것입니다. 젊음과 어제를팔아 걸어 온 이 길을 진통속에서 마저 걸어갈것입니다. 멈추지 않을것이며 에돌아가지 않을것이며 더욱이 샛길로 빠지지 않을것입니다”.
  욕망과 신념과 꿈이 없는 무기력과 좌절과 절망은 죽음의 모습이며 욕망과 신념과 꿈은 가능성이며 밝은 빛이다. 나는 김혁씨가 마라톤 선수처럼 끝까지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않고 참고 견디는 용기를 갖고 문학의 산상봉을 톱아오르는 성스러운 길에서  지난날의 성과에 집착하지 말고 부단한 도전과 실험을 거쳐 문학의 새로운 금자탑을 구축하길 바라마지않는다.
 내가 읽은 어느 한 책에 의하면  독자가 소설가에게 “어떤 소설가가 되고 싶느냐?”고 묻자 그는 주저없이 “마지막 작품이 그의 대표작인 사람”이라고 대답하였다. 일리가 있는 대답이다. 문학사를 보면 데뷔작이 대표적작품으로 된 작가가 많다. 하지만 세상뜨기 전의 작품이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가도 적지 않다. 톨스토이 말년의 걸작이라 할수있는 장편소설 <부활>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작품인 <카라마조프의 가족들>이 그 일례이다. 마지막 작품이 대표작이라는 것, 그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자신의 문학성과를 계속 크게 넓혀간다는것, 문학의 문을 두드리기 시작해서부터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성장했다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계속 성장하고 더 좋은 작품을 쓴다는것은 작가로 놓고 볼때 고통스럽고 어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경제적으로 안정되지 못한 김혁씨의 경우에는 험산준령이 아닐수 없다.  가는 길에 그 어떤 병풍상서(病風傷署)와 풍상고초가 있더라도 희랍신화에 나오는 시스포스가 끝없이 바위덩이를 산꼭대기까지 짐져 올리는 정신으로  모든 난관을 박차고 일취월장하여 대성하기를  바란다.
내가 나이가 많아 그의 최후의 웃음을 볼수 없지만  천당에 가게 되면 먼저 간 동료들과 같이 그의 창창한 앞날을 기원하며 향후 그가 부각할 유종의 미를 감상하면서 축복하리라.


장백산” 20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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