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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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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2017년 06월 18일 18시 21분  조회:2428  추천:4  작성자: 김재현
 
 
       내가 어릴때 아버지는 촌위생소 약제사였습니다.밖에서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분이셨지만 집에선 따분할 정도로 과묵하고 엄숙한 분이였습니다.
      내가 소학교 다닐때 아버지는 집에서 30리 떨어진 석국저수지 공사현장에 의사로 가셧습니다.한달에 두세번씩 집에 오셨습니다.한번은 저녁을 드시고 나보고 "재털이"가져오라고 하셨습니다.재털이는 가져다 드렷는데 어쩌다 오셨으면서 별명을 부른것이 속에 걸렷습니다.이름에 재자가 들어있어 별명이 "재털이"였거던요.변소 가는척 밖에 나가 변소옆 돼지우리에가  막대기로 죄없는 돼질 한매 패줬습니다.돼지는 아프다고 울고 나는 아프지도 않으면서 울었습니다.눈물은 계속 나는데 날씨도 춥고 어머니가 데릴러 나올것같아 대충 울고 들어왔습니다... 소시적 아버지는 눈도 마주볼수없는 호랑이같이 무서운 존재였습니다.
       초중다닐때 룡수에 계신 큰아버지 사냥총 총대를 훔쳐다 키만큼되는 총을 만들었습니다. 그때 오금상점에서 총증을 가지고 가면 화약을 팔았는데 친구 아버지 총증을 가지고가 화약을 사서 무철을 장탄하고 해란강에  사냥 다녓습니다.한번은 동네 친구들과 해란강 하루종일 돌다 사냥물을 찿지 못하고 집에 돌아오다 장탄한 총을 집에 그냥 가지고 올수도 없고해서 윗동네 탈곡장 바로 옆에서 닭무리에 갈려 닭도 잡았었는데 아버지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지금 생각해보면 정말로 위험천만한 일이였습니다.
       내가 열세살때 아버지가 사고로 소퇴가 골절되시여 용정 병원에 입원하셨습니다. 용수에서 30전주고 기차를 타고 병원에 찿아갔엇습니다.아버지는 우리 아들 다 컸구나 한마디 하시고 즐거워하시며 돈 5원을 주셨습니다.그때돈 5원이면 열음과자 200대였습니다.
      초중을  룡수일중에 붙었는데 한학기 다니고 자퇴하고 10리도 더 멀리 떨어져잇는 투도이중에 다녔습니다.그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투도이중 다니면서 학기마다 사고쳤습니다.한번은 돌총싸움하다 돌멩이에 얻어맞아 일주일 학교에 못 갔습니다.또 한번은 철봉에서 떨어져 팔목뼈가 끊어져 한달넘게 학교에 못갔습니다.그때도 아버지는 연변병원에 데리고가 사진찍어 보시고 밀방으로 호애씨에 구리를 갈아먹이고 아무 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어렵게 화룡고중에 붙었는데 역시 학생본분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고중3 학년에서 자원퇴학하고 어머니가 조선에서 가져온 채색텔레비를 팔아 토끼양식을 시작했습니다. 이때도 아버지는 아무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연변농학원에서 꾸린 토끼사양강습반에 참가하고 한자웅에 몇백원씩하는 비싼 종자토끼를 사가지고 뒤늦게 룡정에서 자전가로 집에 돌아왓는데 집안 분위기가 어수선햇습니다.정교처주임 선생님이 반주임선생님을 우리집에 파견하시여 학생을 당장 학교에 돌려보내라고 최후통첩하고 가신겁니다.종자닭을 잡아 선생님을 대접하시면서 한잔드신 연고로 아버지는 얼굴이 상기되여 계셧습니다.이날 아버지는 나를 불러 앉히고 한마디 하셨습니다. "이후 부모말 않들어도 괜찮은데 이번만 내말 듣거라.내일 학교에 돌려보낸다고 선생님한테 답복햇으니 아무말 말고 학교로 돌아가거라."한마디 하시고 돌아앉으시는 아버지 등뒤에서 나는 변명할 용기와 리유를 찿지 못햇습니다...
        또 변소 가는척 밖에나와 이번엔 토끼우리옆에 갔습니다. 어둠속에서  잘 보이지도 않는 토끼를 들여다보며 숙고한 끝에 학교로 돌아가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습니다.이틑날 다시 토끼우리에 찿아가 "미안하다.토끼들아."한마디하고  메고왔던 나무궤작 다시 둘러메고 아쉽게 떠낫던 화룡고중에 돌아갔습다.후날 전에살던 마을 친구들과 새로 이사간 동네 친구들을 불러 몇백원씩 주고사온 종자토끼를 잡아 먹었는데 그때도 아버지는 아무 말씀하시지 않으셧습니다.
      내가 대학교에 입학하자 아버지는 동네에서 제일큰 돼지를 사다 잡으시고  온촌 사람들을 청하시여 마당잔치를 베풀었습니다.아버지는 뭍사람들 권하는 술잔을 한잔도 마다하지 않고 드셨습니다.허나 이날에도 아버지는 나한테 별말씀을 하시지 않았습니다.
       천진에가 대학교 다닐때 아버지는 또 다치셨읍니다.룡정에서 공부하는 초중시절녀동창보고 우리집에 아버지병문안 가보라고 하였습다.녀동창이 과일통졸임 사가지고 갔었다는데 이때도 아버지는 별 말씀하시지 않으시고 나중에 어머니한테 저사람 며느리될사람 같다고만 하셧답니다.아버지 말씀대로 그 초중녀동창이 아버지며느리로 됐는데 나몰래 용돈도 주시고 하셨다네요...
       대학교 졸업하고 천진에서 재직간부연수생으로 공부하던 형님이 힘써준덕에 주정부기관에 분배받았습니다.어머니는 잘 됏다고 손벽치며 좋아하셧지만 아버지는 별 말씀을 하지않았습니다.나중에 어머니 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그날 아버지가 기뻐하시면서 춤추자고 해서 양주가 록음기를 켜놓고 춤판을 별였었대요.
        남들이 부러워하는 주정부 기관에 들어갔지만 워낙 자리 지킴을 잘 못하는 나는 5년만에 집 한채 분양받고 사직하고 보따리 쌌습니다.그때도 아버지는 별말씀 하시지 않았습니다. 이년후 부모님과도 집사람과도 아무 얘기없이 한국으로 떠났습니다.젊은시절 첯 출국이라 많고많은 추억을 남겼습니다.하루는 늦은밤 경북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하는 친구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우리 아버지가 몸이 편찮아하는 꿈을 꾸엇다는것입니다.뜬눈으로 밤을 패고 아침일찍 집에 전화하니 아버지가 전화를 받았는데 아무일 없는듯이 넘겨버렸습니다.사실 며칠전 아동저수지에 유람가셨다 가슴을 심하게 다치셨는데 내가 걱정할까 념려하여 별일 없다고 넘기셨습니다.
        한국에서 돌아와 공부도 더하고 세상구경도 더할겸 일본유학 신청했습니다. 헌데 일어가 전혀 깜깜부지인 두 친구는 입학통지서를 받고 일어 좀 한답시고 통역도하고 일본선생님들 모시고다니며 비싼 송이도 구워대접하고 노래방에가 일본노래도 함께 부르고한 내가 떨어졌습니다.실책이 였습니다.나중에 안일이지만 일어를 알아도 잘 하는 티를 내면 어학원에서 안 뽑아간답니다.화김에 영국수속을 넣었는데 당날로 비자가 나왔어요. 미루었던 부모님 회갑잔치를 부랴부랴 치르고 아버지한테 북경출장간다합시고 영국으로 떠났습니다.영국에 도착해서 전화하니 아버지는 잘도착햇으면 됏고 몸 조심하라고 한마디 하시고 전화기를 어머니한테 넘기셨습니다.나중에 안 일이지만 아버지는 내가 영국으로 떠나는걸 아시면서 내색을 내시지않으시고 어머니하고도 말을꺼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영국서부에 있는 웨얼스 필립스전자 납품업체에 근무 할때엿습니다.꿈에 모주석을 만나 보았습니다.아침에 함께 근무하는 년세 계시는 분과 꿈 얘기를 햇더니 큰인물을 꿈에 보면 좋지만 세상떠난 큰인물을 보면 윗사람들 건강에 안좋을수있다고 해몽했습니다.오전 휴식시간 집에 전화를 햇었는데 아버지가 받아야할 전화를 어머니가 받으시고 한참동안 말씀을 하지않았습니다. 어덴가 모르게 불길한 예감이 들어   따져물어서야 아버지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하셨다고 알려주었습니다.그것도 절대 아들한테 병원갔단 얘기를 하지말라고 신신당부하고 병원으로 가셨답니다...당신도 얘기를 하지않으면서 옆사람도 얘기 못하게하고 그 많고많을 하고싶었을 말들을 가슴에만 닮고 사신 분이였습니다...아버지가 이전에 뇌출혈로 앓은적 있기에 병원에 가셧다하니 머리를 한매 얻어 맞은 감이들었습니다. 아버지를 다시 볼수 없을것같은 억망이 머리를 쳤습니다.소설에서나 볼수있는 하늘이 무너지는것같다란 말뜻을 그날 실감했습니다.눈물이 앞을 가려 보이지 않았습니다.혼신의 힘이 싺다 빠지고 몸이 땅속으로 스며 드는것 같은 느낌이 였습니다.온몸이 후들후들 떨려 운전도 못하고 걸어서 숙소로 향했습니다.30분이면 닿을 길을 세시간 넘게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습니다.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누나와 통화했는데 아버지가 의외로 버티고 계신다 하였습니다. 심령의 힘이란 참으로 가늠할수없이 큰가 봅니다.통화 끝나기 바쁘게 온몸에 힘이 돌아와 그 길로 다시 회사에 나갔습니다.
         5년반만에 영국에서 돌아 왔습니다. 아들놈을 앞세우고 집사람과 함께 부모님을 찿아 갔습니다.아버지는 희색을 띠우시고 잘 갔다왔으면 됐다 하시면서 잘 안되는 말씀으로 어머니한테 닭을 잡으라고 지시하셨습니다...
       2006년 6월 절강성 이우에서 남미로 보낼 물건 선적중 아버지가 위독하시단 전화를 받았습니다. 급히 차로 항주에가 억지로 마지막 한장  비지니스석으로 북경도착.이틑날 아침 첫비행기편으로 연길에 도착하여 아버지옆에 뛰여갔지만 아버지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눈을 감으셨습니다...
       인젠 슬하에 키넘어가는 아들을 두고 부친절이랍시고 아들한테서 선물도 받고나니 하늘나라에 계실 아버지생각에 필을 들게되였습니다...
        어려서부터 공부도 잘하고 받들리면서 나름대로 귀엽게 자랏지만 아버지눈엔 하냥 철부지로 개구장이로 보였을 겁니다.허나 아버지는 눈 감으신 그날까지 매나 욕은커녕 싫은소리 한마디 안하시고 얼굴 표정 한번 찡그리신적없이    믿음으로 사랑으로 나를 키웠습니다. 낳아준 그 은혜,키워준 그 은정 어찌 하늘에 비기련만 돌이켜보면 받기만하고드린것이 너무나 적어 송구스럽기 그지 없었습니다.어려서부터 나를 어른들 술상에 동석시켜 키우시고 작은일에 까지 내 의견을 물었지만 나는 나의 종신대사는 물론 가문의 대사에서 까지 아버지와 별로 상론 없이 내소견대로 독단독행했습니다.하지만 아버지는 별말씀 안하시고 묵묵히 지켜봐 주시고 뒤에서 소리없이 밀어 주셨습니다...
        고중때 동창생이 쓴
 어머니사랑은 
내가에서 돌돌 
흐르는 시내물
아버지사랑은 
땅밑 깊은곳에서 
소리없이 흐르는 지하수
하던 모범작문 생각이 나네요.
       아버지는 지하수 밑 지하수였습니다.
        아버지는 린색하셔서 나를 사랑한단 말씀 한마디 안하시고 나를 기다리지도 않고 떠나셨지만 나는 늦게남아 합니다.
        아버지 사랑했습니다.
        그리고 정말 사랑합니다.
 
       아버지날 아버지 명복을 기리며
       2017년 6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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