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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미국
2016년 12월 25일 23시 57분  조회:4664  추천:1  작성자: 죽림

90세 녜화링(聂华苓) 작가의 인생 스토리

 
90세 녜화링-뿌리는 중국, 줄기는 대만,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
”나는 한 그루 나무이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미국 중서부)에 있다.” 녜화링(聂华苓)은 자신의 일생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Paul Engle)이 공동으로 창립한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은 수많은 양안(两岸-중국과 대만)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온라인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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녜화링과 남편 폴 엥글
[기자/수졔 (미국 아이오와주에서 보냄)]  아이오와강 강물은 마치 검은 비단처럼 콸콸 흐르며 아이오와 도시 전체를 구불구불 휘감으며 펼쳐져 있다. 40년 전 녜화링과 남편 미국 시인 폴 엥글은 강 옆에 있는 집에 정착한 후 이름을 ‘훙러우(红楼)’라고 지었다.

 

 

‘훙러우’는 산과 넗은 숲을 뒤로 하고 있어 날씨가 좋은 날에는 사슴들이 부근에 와서 먹이를 찾기도 한다. 젊었을 때 녜화링은 엥글과 함께 자주 훙러우 뒤에 있는 숲에 가서 사슴들에게 먹이를 주었다. 시간이 지나자 사슴들은 점차 늘어나기 시작하여 그들의 사슴원(鹿园)까지 생기게 되었다.

 

매번 여행을 마치고 아이오와에 돌아와 사슴원으로 가는 길에서 끝없이 펼져진 광야를 보며 엥글은 감탄을 금치 못한다. “화링, 저기 좀 봐, 흙토지대! 얼마나 좋은 흙이야!” 

 

올해 아이오와의 겨울도 변함없이 강 옆에는 잎이 떨어진 나무들이 높이 서있다. 다람쥐가 나뭇가지 위를 뛰어다닌다. 차를 몰고 도로표지판을 따라 산 위로 올라가면 높고 낮은 나무 숲속에 있는 훙러우가 한눈에 들어온다. 계단을 따라 올라가면 문에는 바르게 ‘안위(安寓)-편안한 거처’라는 문패가 걸려 있다. 문에 달려 있는 풍경이 달랑거린다.


녜화링은 자주색 스웨터를 입고 겉에는 솜털 블라우스를 걸치고 있었다. 체구는 작고 왜소했지만 말하는 톤은 높고 컨디션이 좋아 보였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그녀는 거실의 전등을 켰다. 노란색 전등은 거실을 따뜻하게 비추었다. 추억이 가득 담긴 집처럼 보였다.

 

벽에는 사진과 그림이 걸려있고, 책상에는 시대를 느끼게 하는 액세서리들이 놓아져 있다. 책자에 들어있는 책과 CD는 주인의 스타일을 보여주었고 예술작품이 집안 곳곳에 놓여있었다. 꽃을 좋아하는 그녀는 식탁, 창가, 거실에 활짝 핀 꽃을 놓아두었다. 

 

정성스럽게 가꾼 꽃들이 생기발랄하게 느껴진다. 주방에서 바라본 사슴원은 고요했다. 녜화링은 셜리주 두 잔을 따랐다. 엥글이 함께 있을 때 매일 셜리주를 마시는 것은 두 사람이 즐기는 시간이다. 날씨가 좋은 날이면 그들은 아이오와강에서 배를 타며 이야기를 나눈다. 그녀는 셜리주를 마시고 엥글은 쥬네바 술을 즐겨 마셨다. 나중에 홀로 남은 녜화링은 셜리주를 마시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이가 들면서 점차 적게 마시게 되었다. “당신 알고 있나? 이 램프는 나와 엥글이 미주에 여행 갔을 때 산건데”. 녜화링은 술을 한 모금 마시고 나서 “그때 이 램프을 보고 너무 맘에 들어 바로 구매했는데 아이오와에 와서 아무리 기다려도 배달이 되지 않는 거야, 그래서 포기하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받게 됐어.” 녜화링은 테이블에 놓아져 있는 정교한 조개램프를 가리키며 말한다. 


90세 된 녜화링은 자주 잊어버린다. 어떤 때는 방금 뭐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같은 물음도 몇 번씩 물어보면서 사과를 한다. “죄송해요, 방금 물어본 것 같은데요.” 하지만 집안에 놓인 사물에 들어있는 이야기는 모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일들과 그 시대의 사람들의 사소한 것들도 일일이 기억하고 있다. “1978년에 소설가 아이칭을 만나러 중국에 갔을 때 차가 골목길에서 더는 들어갈 수 없어 나와 엥글은 걸어가게 됐었지. 당신도 알잖아, 베이징 골목길이 얼마나 좁은지. 걸으면서 멀리 보니 누군가 집 앞에 서서 이리저리 보고 있는 거야, 가까이 가서 ‘아이칭’하고 불렀지. 그러자 아이칭은 나보고 ‘왜 인제서야 왔어!’하는 거야.”

 

 

1978년, 이별한 지 30년 만에 녜화링은 다시 조국 대륙에 발을 딛게 되었다.

 

중국에 돌아오는 전날 밤 아이오와는 큰 비바람이 몰아쳤다. 사슴원에 있는 백 년 묵은 참나무는 윙윙 소리를 내고 아이오와강은 출렁거렸다.


18시간 장시간 비행하는 내내 녜화링은 잠을 자지 않았다. 홍콩에 착륙한 후 다시 뤄후(罗湖)로 향했다. 뤄후교의 맞은편이 바로 고향 땅이다. 녜화링 일가족은 중국으로 향하는 도로표지판을 따라 이동하였다. 뤄후교에 올라선 녜화링은 발길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주 길게 뻗어진 길이다.


기차는 부드러운 기적소리를 내며 보슬비와 안개, 파란 벌판을 가로질러 선전(深圳)에서 광저우(广州)에 도착하였다. 30년 동안 만나지 못한 큰 형과 동생 두 집 가족들이 역에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 만나는 장소를 잘못 알고 있어서 한참을 만나지 못했다. 사람들이 전부 흩어지고 나서야 서로를 알아보게 되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달려갔다. 서로 부르짖으며 원망하고 해명도 하면서 손에 쥔 가방도 들어야 해서 그들은 정신이 없었다. 만나기 전에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 생각했지만 정작 만나고 나니 기쁨과 혼란 그 자체였다.


한자리에 모인 일가족은 차를 타고 광저우에서 우한(武汉)으로 갔다. 마침내 큰 강 옆에 있는 고향에 도착하게 되었다. 창강(长江)의 물은 예전과 같이 흐르고 있고 쟝한관(江汉关)의 시계도 여전히 우뚝 솟아 있었다. “하지만 집은 이미 없어졌다. 모든 것이 변했다.” 녜화링이 말한다.


1925년 녜화링은 우한에서 태어났다. 부친 녜시(聂洗)는 꾸이저우성(贵州省) 핑웨(平越)의 행정 전문 요원이고 모친은 온화하고 선량한 여성이었다. 여덟 명의 아들 딸을 낳아 키웠다. 녜화링은 자신의 회고록에 이렇게 모친을 묘사하였다. 

 

”어머니께서는 올 블랙 치파오를 입고 모기장이 있는 침대에 기대어 손에 있는 책을 보면서 작은 소리로 읊었다. “<삼소인연(三笑姻缘)> <천우화(天雨花)> <필새화(笔生花)> <재생연(天雨花)>” 어릴 때 녜화링은 모친 옆에서 모친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이야기를 들었다.


평온한 어린 시절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집안의 기둥인 부친이 돌아가셨다. 1937년 중국 항일전쟁이 전면적으로 일어났다. 녜화링의 모친은 일가족을 데리고 시골로 피난하러 내려갔다. 비록 피난 중이지만 모친은 녜화링이 계속 학교에 다니기를 바랬다. 

 

그래서 그녀를 후베이언스(湖北恩施)에 가서 중학교를 다니게 하였다. 언스에 서 학교를 다니게 됐지만 모친은 동행하지 못했다. 녜화링을 보내는 길에 모친은 눈물을 보이며 몸 챙기고 열심히 공부하라고 말했다. “너는 이 어미와 떨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데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너희들이 출세하길 바란다.”고 녜화링 모친이 말했다. 녜화링은 <중국신문주간>에게 그때 마지막 그 한마디 말이 자신의 인생을 결정지었다고 말했다.


학교에 있는 친구들은 거의 녜화링처럼 집을 떠나 공부하러 왔다. 생활 구역에서 집에서 온 편지를 받았다. 웃는 친구가 있고 우는 친구가 있다. 고민을 모르는 나이에 고민이 생겼으니 어떻게 그 답답함을 해결할지 몰랐다. 저녁 자율시간에 둘이서 등잔불을 사용한다. 

 

불빛이 깜빡거린다. “만리장성의 길이는 만리, 장성 밖에는 고향, 수수는 지름지고 콩은 향기로우며 곳곳이 황금이고 재난이 없다.” 동북에서 온 여학생이 숙제를 하며 <장성요(长城谣)>를 부른다. 따라 부르는 친구가 있는가 하면 책상에 누워 우는 친구도 있다. 노래 소리에 울음소리가 들린다.


집 생각을 하면 고통스럽지만 공부는 열심히 해야 한다. 그 당시의 삼시세끼와 드레스 옷은 전부 정부에서 대부금으로 공급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열심히 공부하지 않으면 대부금을 받지 못해 공부를 할 수 없게 되는 거예요. 우리 그 시대 사람들은 모두 고난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은 외부를 향해 팔을 벌리기 시작하였다. 그때 중국행을 하고 나서 그녀는 성공적으로 중국대륙 작가인 삐수왕(毕朔望)과 쇼우챈(萧乾)을 제1기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프로그램’에 초청하였다.


1979년 초 가을, 중국대륙의 작가를 환영하기 위하여 녜화링과 폴 엥글은 특별히 ‘사슴원’에서 ‘중국주말’이라는 파티를 열었다. 양안의 세 개 지역과 미국, 유럽 등지의 30여 명의 화교 작가들이 30년 단절 후 처음으로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다들 대륙에 오랫동안 가지 못했습니다. 아이오와에 온 작가들은 대륙작가를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특히 쇼우챈. 모두 기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그 당시 쇼우챈은 누명을 벗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 다시 작가의 신분으로 국제무대에 선 그녀는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웠다. 다른 작가들은 분위기에 맞추어 즉흥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지만 유독 쇼우챈만은 원고를 들고 하나하나 읽었다. 원고에도 글씨가 정연하게 쓰여 있었다. 


쇼우챈 외에 녜화링은 잇따라 아이칭, 딩링(丁玲), 왕멍(王蒙), 왕증치(汪曾祺) 등 작가의 문을 열었다. 아이칭을 만났을 때 그는 아직 누명을 벗지 못하였다. 처음에 그녀를 만나는 것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여러 번 이이칭을 만나겠다고 부탁해서야 만나게 되었다. 1979년 아이칭이 복귀하고 공식 연설을 할 때 처음으로 한 말이 “나의 대문은 녜화링과 엥글이 열어주었다. 다시는 닫을 수가 없다.”이다.


1980년 아이칭 부부는 아이오와로 가서 미국에서 4개월간의 교류 방문 시간을 가졌다. “아이칭과 고우잉(高瑛)은 아이오와주를 좋아했어요. 이곳이 큰 공원 같다고 했어요.” 녜화링은 아이칭 부부는 미국에 와서도 중국음식을 좋아했다고 말했다. 모두 불러서 만두를 먹든지 산시(山西) 칼국수를 먹었다. 시간이 나면 함께 한자리에 모여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방문하러 온 중국 작가들과 사슴원에서 술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점차 녜화링 부부의 습관이 되었다. 딩링 부부가 미국에 있을 때에는 저녁을 먹은 후 녜화링 집에 와서 넷이서 마당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이런 추억들을 딩링은 25편의 방미 기록지에 적었는데 이는 당시의 <원후이월가(文汇月刊)>과 <신관찰(新观察)>에 기재되기도 하였다.

 

딩링은 이곳이 와서 본 것은 상상 속의 미국과 완전 달랐다. 죽어가는 미국이 아니었다. 그녀는 온통 푸른 나무와 풀로 뒤덮여 있고 강물이 흐르며 아름다운 집들이 있는 아오이와를 좋아했다. 편안하고 편리한 우위에화(五月花公寓) 오피스텔과 없는 게 없는 슈퍼마켓에서 장바구니를 들고 쇼핑하는 것도 좋아했다.


초기 미국에 간 중국대륙 작가 중에서 녜화링과 딩링은 각별한 우정을 쌓았다.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딩링은 녜화링에 보내는 편지에 아오이와에 있었던 시절을 말한다. “올해 아오이와는 춥나? 나는 아직 네가 얼음과 눈이 뒤덮인 산길에서 트럭을 몰고 내려가는 장면이 생각하네. 얼마나 걱정했는데. 하지만 너희 부부 둘이서 집을 소유하고 창문 앞으로 경치를 구경하며 글을 쓰고 난로에 기대여 담소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부럽다. 

 

가장 좋았던 것은 손님들이 적게 오고 친구들과 같이 문학과 예술에 대해 말하고 시집을 보면서 팝콘을 먹고 좋은 차를 마시는 것이었어. 너무 좋다!” 딩링은 후베이에서 구매한 ‘소우쥔 식기(昭君餐具)’를 미국의 ‘소우쥔’인 녜링화에게 선물하였고 타이바이(太白) 음주 주기(酒具)를 미국의 ‘타이바이 시인’인 엥글에 선물하였다. 


1986년 딩링이 세상을 떠났다. 녜화링은 회고록에서 이런 글을 적었다. “1986년 딩링이 세상을 떠났다. 1991년 폴도 세상을 떠났다. 딩링과 폴은 상대에게 호기심이 있고 좋아하며 존중한다. 그들은 20세기의 온갖 풍파를 겪었다. 그들은 감성적이고 솔직하며 세심하다. 

 

그들은 같은 날인 10월 12일에 태어났다. 그들은 확고부동한 사명감을 갖고 있다. 다른 것이 있다면 딩링은 공산주의에 대한 사명감이고, 폴은 아메리칸 드림에 대한 사명감이다. 딩링과 폴 두 사람이 같이 있으면 한 권의 현대사가 내 앞에 펼쳐져 있는 것 같다. ”

 

1949년 초, 해방군은 베이핑(北平)에 진입하려 한다. 버줘이(傅作义)는 공산당과 협상을 한다. 집집마다 라디오를 하루 종일 틀어놓고 공산당과 국민당 방송국에서 보내는 내용을 듣고 있다. 전쟁 형세를 전해주고 있으면서 각자 승리에 가까워지고 있다고 전한다.

 

간혹 제갈량이 성루에서 술을 마시며 악기를 다루는 방송이 전해지는데 이상하게만 들려졌다. 이런 상황은 오래 가지 않았다. 어느 날 라디오에서 맑고 깨끗한 소리가 들려왔다. “료선전투(辽沈战役)가 승리로 끝났다. 화이하이전투(淮海战役)는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인민해방군은 지금 적극적으로 강을 넘을 준비를 하고 있다. 핑진전투(平津战役)도 결정적 단계에 이르렀다.” 녜화링은 인민해방군의 승리 목소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같은 목소리를 난징(南京)에서 들은 적이 있다.

 

1949년 2월 3일, 해방군은 침착하고 조용하게 베이핑에 입성하였다. 그 해 6월 녜화링 일가족은 베이핑에서 광저우로, 광저우에서 타이베이(台北)에 왔다. 대만에 온 녜화링은 중학교에서 교사직을 맡고 어렵게 안착하게 되었다.


“푸른 섬은 한 척의 배와 같다, 달빛 아래 떠돌고 있다. 아가씨, 당신도 나의 마음속에서 떠돌고 있구나.” 1950년 중기 즈웨이(紫薇)가 부른 <푸른 섬의 밤 노래(绿岛小夜曲)>는 부드러운 바람처럼 대만 섬에 있는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위로해 주었다. 나무는 조용히 있고 싶지만 바람이 멈추지 않는다.


민주와 자유공간을 얻기 위하여 <자유중국>잡지는 대만에서 창간되었다. 후쓰(胡适)가 발행인을, 레이쩐(雷震)이 책임자를 맡았다. 국민당과 함께 대만에 온 레이쩐은 1917년에 국민당에 입당하여 국민정부에서 여러 중요한 직무를 담당하였다. 대륙을 떠나기 전에는 국민참정회의 부 비서실장으로서 국민당의 헌법 제정에 도움을 주었고 장제스(蒋介石)를 대표하여 공산당과 협상을 진행하기도 하였다. 


<자유중국>은 문학적인 편집자가 필요했다. 그 당시 녜화링은 여러 작품을 발표하여 문학계에서 이름이 조금 알려져 있었다. 그녀를 레이쩐에게 소개해 주었다. <자유중국> 잡지사는 타이베이 진산제(金山街)에 있다. 녜화링은 문을 열고 작은 다다미방에 들어갔다. 

 

이곳이 <자유중국>의 사무실이다. 편집자 한 명, 사장 한 명, 세무사 한 명, 발행 책임자 한 명, 총 네 명이다. 레이쩐은 책상에 앉아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살짝 끄덕이고는 “그래! 내일부터 시작하자.”라고 하였다. 녜화링은 <중국신문주간>에게 그 당시의 상황을 말한다. “나는 그렇게 <자유중국>에 가입되었습니다.” 


그 당시의 문학계는 거의 전부 공산당을 반대하는 세력에게 통제되어 정치 외에 단순한 문학 작품을 볼 수 없었다. <자유중국>의 편집위원회는 모든 자유 자식인과 국민당 개명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예를 들면 베이징대학 교수 모우즈수이(毛子水)와 짱퍼쵠(张佛泉), 대만대학 인하이광(殷海光), 사상이 투철한 문인 따이뚜헝(戴杜衡)과 쌰또우핑(夏道平). 국민당 관원인 교육부장 항리우(杭立武), 대만은행 총경리 취징저우(瞿荆州)이다.


편집위원회에서 가장 어리고 유일한 여성인 녜화링은 편집회의에서 보수파와 개명파를 변론하는 것이 큰 재미로 여겨졌다.


1961년 9월 1일, <자유중국>은 장제스의 연임을 비판하였다. 3일 후에 큰 재난이 닥쳐올 것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녜화링은 회고록 <삼생삼세(三生三世)>에 9월 4일 아침에 일어난 일을 적었다. 9시 넘어 잠에서 일어난 그녀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복 경찰들을 보게 된다. 이리저리 살피더니 잘못 찾았다고 하고는 건물의 다른 한쪽에 가서 <자유중국> 편집 버쩡(傅正)의 문의 두드렸다. 

 

버쩡이 문을 열자 경찰들이 떼로 모여들어 버쩡을 방안으로 몰고 방문을 잠그었다. 녜화링은 창밖으로 사복 경찰들이 골목에서 돌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녜화링은 그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되었다. 그녀는 침착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였다. 


몇 시간이 지나자 버쩡의 방문이 열렸다. 경찰과 사복 경찰들이 그를 둘러싸고 밖으로 나왔다. 녜화링과 그녀의 모친은 버쩡을 맞이하러 갔다. 버쩡은 열쇠 뭉치를 녜회링의 모친 손에 쥐어주면서 “녜이모, 저를 도와서 이걸 보관해 주세요.” 버쩡은 붙잡혀 갔다. 녜화링은 자신도 잡혀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반나절을 기다리며 한 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레이선생이 잡혀갔다!” 그날 오후 <자유중국>의 천찌콴(陈济宽)이 마당으로 들어오면서 녜화링한테 말한다. ”마즈커우(马之筘)도 잡혀갔다! 류즈잉(刘子英)도 잡혀갔다! <자유중국> 신문사가 몰수 당했다! 자료와 원고를 모두 가져갔다!” 천찌콴이 소리를 지르며 마당으로 들어왔다.

 

“버쩡도 잡혀갔어요.” 녜화링이 급하게 말한다. 천찌콴은 쇼크를 먹어 한동안 그 자리에 서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오지도 않고 나갔다. 그때부터 녜화링과 <자유중국>의 동료들은 격리되었다. 그들의 집 밖에서는 밤낮없이 사람들이 감시하고 있었다. 


나중에 녜화링은 대만경찰본부가 반란협의로 레이쩐과 편집장 류즈잉, 마즈커우, 버쩡 등이 체포했다는 것을 매체 보도를 통해 알게 되었다. 군사법정에서 레이쩐은 비적(匪賊)을 위해 홍보하고 비적을 알고도 제보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징역 10년을 선고 받았고, 버쩡과 마즈커우는 3년 감화 받는 것을 선고 받았으며 류즈잉은 징역 12년을 선고 받았다.


이번 일이 벌어진 후 <자유중국> 동료들은 서로 만나지 못하다가 후쓰(胡适)가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올 무렵에야 만나게 되었다. “내 눈에서 정치는 전쟁 같기도 하고 한편의 연극 같기도 합니다.” 녜화링이 말한다.


녜화링의 모친은 2년 후에 돌아가셨다. 남편과 6년을 떨어져 살던 녜화링은 혼자서 두 딸을 보살펴야 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걱정하고 있을 때 1962년 대만대학 중문과 교수 타이징눙(台静农)은 녜화링의 집에 와서 그녀를 대만대학에 와서 문예창작을 가르쳐 달라고 초청하였다. 그제야 녜화링은 다시 문학과 창작을 하게 되었다.

 

 

녜화링 부부가 그네를 타고 있다.

 

녜화링은 사회에 돌아온 후 얼마 되지 않아 새로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1963년 봄, 녜화링은 대만 미국신문사 뜰에서 열린 칵테일 파티에서 대만에 있는 청년 작가를 미국에 요청하러 온 미국 현대파 시인, 아이오와대학 ‘작가 작업장’의 책임자 폴 엥글를 만나게 되었다. 

 

 

엥글은 놀랍게도 왜소하고 여린 이 여성이 그가 즐겨 읽던 단편 소설 <비취고양기(翡翠猫)>를 쓴 작가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4년에 녜화링은 미국에 갔다. 1967년 녜화링과 폴 엥글은 아이오와대학 ‘국제창작 프로그램’을 공동으로 창립하였다. 지금까지 천여 명이 넘는 작가들이 세계 각지에서 아이오와를 다녀갔다. ”이곳은 축소된 세계이다.” 아이오와를 방문한 작가 류헝(刘恒)이 말한다.

 

“이 프로그램은 서로 다른 종족, 다른 국가, 다른 의식형태, 다른 경력, 다른 성격의 각양각색의 작가와 사람들을 융합시켜 주었다. 새롭고 독특한 교류 방식을 창설한 녜화링과 엥글 선생님의 위대한 창조와 구상이었다.”


중국 대륙 작가 중에서 쇼우챈, 아이칭, 딩링에 이어 왕멍, 왕안이(王安忆), 루즈죈(茹志鹃), 천바이천(陈白尘), 왕증치(汪曾祺), 위광중(余光中), 펑지차이(冯骥才), 베이도우(北岛), 수퉁(苏童), 류헝, 리루이(李锐), 츠즈잰(迟子建), 모옌(莫言) 등 중국 대륙의 당대 유명 작가와 대만의 바이센융(白先勇), 정처우위(郑愁予), 위광중, 양무(杨牧), 린화이민(林怀民), 장쉰(蒋勋), 장다춘(张大春), 홍콩의 둥치장(董启章), 리이(李怡), 중링(钟玲), 판요밍(潘耀明)이 아이오와에 와서 ‘국제작가 프로그램’을 통하여 각국의 작가들과 교류하였다.


“아이오와대학 ‘국제작가 프로그램’에 와서야 나는 세계가 이렇게 자유롭고 하고 싶은 일들을 할 수 있고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이곳에 있으면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되려는 것에 대하여 스스로 답을 찾아간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모두 사회를 개조하고 변혁하는 책임과 능력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이오와를 떠나 대만에 돌아온 린화이민은 ‘윈먼우지(云门舞集)’를 창설하였다. 그 후부터 그는 항상 측근들과 담소를 나눌 때 “오늘 내가 춤을 추게 된 것은 모두 녜화링 선생님 덕분이다.”고 하였다. 장다춘은 녜화링을 이렇게 표현하였다.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할 것과 하지 않을 것을 잘 알고 있다(无所不包,有所不为)” ”그녀가 처신하는 방식과 포용력은 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고 결단력 있는 선택은 아직도 우리들이 실천하려고 하고 있다. ”


1976년 24개 국가에서 연합하여 녜화링 부부를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하였다. 그들을 “국제합작의 꿈을 실천하는 독특한 문학조직의 건축가”라고 표현하였다. 1990년 녜화링의 작품 <상칭과 타오훙(桑青与桃红)>은 ‘미국도서상(美国书卷奖)’을 받았다.


1991년 3월 22일 녜화링과 폴은 폴란드 정부 문화부에서 수여하는 ‘국제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들은 즐겁게 유럽으로 친구도 만날 겸 수상을 하러 떠나게 되었다. 녜화링이 예상하지 못한 것은 이번이 그녀와 폴의 마지막 여행이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시카고에서 환승해야 했어요. 폴은 신문을 사러 가고 나는 앉아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죠.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 않아서 찾으러 갔더니 폴은 쓰러져 있었고 누군가 인공호흡을 해주고 있었어요.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이미 늦은 거예요.” 녜화링은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나는 그 날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어요. 아이오와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죠.”


지금 훙러우 2층에 있는 폴의 서재는 폴이 살아있던 원래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폴이 자주 사용하던 낡은 타자기는 창 밖에 있는 아오이와강을 마주하고 있다. “나는 물을 좋아해서 물 근처에서 살았습니다.” 취재가 끝난 후 녜화링은 아오이와 강변의 식당에 앉아 창밖을 보며 유유히 이런 말을 한다.


“나는 한 그루 나무입니다. 뿌리는 중국에 있고 줄기는 대만에 있으며 가지와 잎은 아이오와에 있습니다. ” 녜화링은 이렇게 자신의 일생을 표현하였다. 요즘 들어 거동이 불편한 녜화링은 먼 거리 여행을 하지 않지만 강변에 와서 산책하는 것을 즐긴다. 녜화링은 이 강에서 폴과 함께 20세기의 인경(人景)-기쁨, 재난, 죽음, 생존을 겪었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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