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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이미지"를 말하다...
2017년 02월 20일 19시 46분  조회:2951  추천:0  작성자: 죽림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1)

 

 

   이미지라는 단어도 다른 말들처럼 다양한 의미를 갖는다. 예를 들면, 아폴로 신이나 성모 마리아의 조각처럼 상의 의미를 갖기도 하고, 상상력을 통하여 상기하거나 만들어내는 실재적 혹은 비실재적  모습을 뜻하기도 한다. 이런 맥락에서, 말은 심리적 가치를 지닌다고 말할 수 있다. 즉, 이미지들은 상상적 결과물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상적 결과물들이 이미지가 갖는 유일한 의미도 아니며,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여기서 이미지라는 말이 가리키는 것은 모든 언어적 형태, 즉 시이이 말하는 구와, 이것들이 모여서 시를 구성하는 구들의 총체라는 것을 밝혀둔다. 

 

  수사학은 이러한 표현들을 분류하여 비교, 은유, 말의 유희,

유사어, 상징, 알레고리, 신화, 우화 등으로 부르고 있다. 이러한 용어들을 가르는 차이점이 무엇이든지 간에, 그것들을 묶는 공통점은 구나 구들의 총체의 구문론적 통일성을 깨지 않고 말이 갖는 의미의 다원성을 보존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이미지 --혹은 이미지들오 이루어진 각각의 시편--는 자신 안에 품고 있는 대립되거나 조화되지 않는 많은  의미들을 하나도 제거하지 않은 채 껴안아 화해시킨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침묵의 음악"이라는 시적 구를 사용하여 겉으로 보기에 화해 불가능한 두 단어를 걸합시킨다.

 

 

이런 맥락에서, 비극적  영웅도 하나의 이미지이다. 가령, 안티고네라는 인물은 선험적 가치인  효와 사회적 가치인 인간 법 사이에서 고뇌하는 비극적 영웅이다, 아킬레우스의 분노 역시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파트로클로스에 대한 사랑과 프리아모스에 대한 연민, 영광스러운 죽음에 대한 매혹과 오래 살고자 하는 욕망의 대립이 얽혀 있다. 세히스문도에게서는 불면과 꿈이 풀리지 않는 불가사의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오이디수스에게는 자유와 운명이 얽혀 있고........이처럼 이미지는 인간조건의 표식이다.

 

서사적이거나 희극적 혹은 서정적이거나 간에, 하나의 구에 농축 되어 있거나 혹은 천 페이지에 걸쳐 풀어 헤쳐져 있거나 간에, 모든 이미지는 대립되거나 무관심하거나 혹은 서로 멀리 떨어져 있는 요소들을 가깝게 접근시키거나 결합시킨다. 다시 말해, 다원적 현실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개념과 과학적 법칙이 의도하는 바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일한 논리적 환원 덕분에 개체적 대상들--가벼운 깃털과 무거운 돌--은 동질적인 단위로 변화된다. 어느 날 어린아이들이 돌 일 킬로그램은 깃털 일 킬로그램과 똑같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놀라는 것은 당연하다. 돌과 깃털을 킬로그램이라는 추상성으로 환원시키는 것은 어린아이들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어린아이들은 돌과 깃털이 스스로의 존재 방식을 포기하였을 뿐만 아니라, 속임수에 의해 그것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환원이 갖는 통일적 기능은 그러한 질적인 특성들과 자율성을 망가뜨리고 빈약하게 만든다. 시에서

는 그와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시인은 이것은 깃털이고, 저것은 돌이라고 이름붙인다. 그리고 느닷없이 돌이 깃털이고, 이것이 저것이라고 단언한다. 이미지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자신의 구체적이고 독특한 성질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돌은 여전히 거칠고, 딱딱하고, 불투명하고, 태양처럼 누렇거나, 이끼에 덮여 초록빛을 띄거나 간에 어쨌든 돌, 무거운 돌이다. 그리고 깃털은 여전히 가벼운 깃털이다.이미지는 '무거운 것은 가벼운 것이다'라는 모순의 원리에 도전함으로써 물의을 일으킨다. 대립되는 것들의 동일성을 말하는 것은 우리의 사유 토대를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미지가 보여주는 시적 현실은 옳고 그름을 지향하지 않는다. '시는 ~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 될 수 있다'를 말한다. 시의 왕국은 존재의 왕국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적인 "불가능한 그럴듯함"의 왕국이다.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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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오 파스]이미지 (2)

 

 

이러한 반대되는 언급에도 불구하고, 시인들이 고집스럽게 단언하는 것은 이미지가 드러내는 바는 '~이다' 이지,'~이 될 수 있다' 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지는 존재를  재창조한 다고 말한다. 이미지의 철학적 권위를 회복하려는 욕심에서 어떤 이들은 변증법적 논리로부터 그 근거를 찾아내는 일에 주저하지 않기도 한다. 결국, 많은 이미지들은 변증법적 과정의 세 시기에 부합된다. 즉, 돌은 실재의 한 단계이며, 깃털은 또 다른 단계이고, 양자의 충돌에서 새로운 실재로서의 이미지가 솟아나는 것이다. 그러나 변증법이 모든 것에 적용되지 못한다는 것을 알기 위해서 이미지들을 무한히 열거할 필요는 없다. 어느 때는 첫번째 용어가 두번째 용어를 삼켜버린다. 또 어느 때는 두번째가 첫번째를 중화한다. 혹은 세번째 용어는 산출되지 않고 두 요소가 환원 불가능하고 적대적인 상태로 마주서 있는 모습으로도 나타난다. 유머의 이미지들은 일반적으로 마지막 경우에 해당한다. 모순은 단지 현실이나 혹은 언어의 복구 불가능한 부조리한 특성을 가리키기 위하여 쓰인다. 결국,많은 이미지들이 헤겔의 변증법적 질서에 의거하여 전개된다고 할지라도, 거의 언제나 문제가 되는 것은 정과 반의 진짜 동일성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유사함이다. 변증법적 과정에서 돌과 깃털은 돌도 아니고 깃털도 아닌 제 3의 현실을 위하여 사라진다. 그러나 어떤 어미지 정확히 말해 가장 높은 이미지에서는 돌과 깃털은 여전히 돌과 깃털이다. 즉, 이것은 이것이고 저것은 저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이것이 저것이다. 돌은 돌이면서 깃털이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이다. 여기에는 과학이 요구하는 양적인 환원도 없고, 헤겔의 변증법이 요구하는 질적인 변화도 없다. 요약하면, 변증볍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물의를 일으키는 도전이며, 사유의 법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변증법은 현실의 모습적인 성격을 소화시키기 어려운 논리적 원리들, 특히 모순의 법칙(이것이 이것이지 저것이 될 수 없다) 같은 것을 해결하려는 시도이다. 따라서 변증법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미지는 소위 현실이라고 부르는 것들처럼 그렇게 실제적으로 우리 눈앞에 있는 어떤 것을 설명할 수 있기에는 불충분한 것이라고 보인다. 정은 반과 동시에 주어지지 않는다.

리고 양자는 새로운 긍정에 자리를 내주고 사라지는데, 새로운 긍정은 양자를 포괄하면서 그것들을 변화시킨다. 세 단계들의 각각에는 모순의 원리가 지배한다. 긍정과 부정이 결코 동시적인 실재로 주어지지 않는 것은 그것이 과정이라는 개념 자체를 말살하는 것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모순의 법칙을 존중하는 변증법적 논리는 그러한 법칙을 뛰어넘는 이미지를 비난한다.

 

여타의 학문들처럼, 논리학도 모든 체계가 어느 순간 스스로에게 던져야만 하는 질문, 즉 자신들의 근거에 대한 비판적 질문을 던진다. 만일 내 생각이 틀리지 않다면, 버틀란트 러셀의 역설이 의미하는 것과, 러셀과는 정반대의 위치에 있는 훗설의 연구가 의미하는 것도 역시 논리의 근거에 대한 질문들이다.  이렇게 새로운 논리적 체계들이 출현해다. 

어떤 시인들은 뤼파스크의 연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는데 그는 자신이 상보적 모순의 원리라고 부른 것에 기초한 일련의 명제들을 발전시키자고 제안했다.

뤼파스코는 대립되는 용어들을 그대로 존중하면서, 양자간의 상호의존성을 강조하였다. 각각의 개념을 상호 직접적이고 모순적인 관계 속에서 의지하고 있는 상대 속에서 현실화될 수 있다. 즉, A는 B와의  모순적 기능에 의해 존재한다. A에서 발생하는 하나하나의 변화는 겨로가적으로 B에게 상반된 의미의 변화를 가져온다. 부정과 긍정, 이것과 저것, 돌과 깃털은 동시적으로 그리고 상대의 상보적인 기능에 의해서 주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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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3)

 

 

  동양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앎은 공식이나 이성으로 전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경험이며 각자가 스스로 위험 무릅쓰고

경험해야만 한다.  가르침은 우리에게 길을 보여주지만, 아무도 우리 대신

그 길을 갈 수는 없다. 그래서 명상의 기법들이 중요하다.

배움은 지식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라, 육체와 정신을 단련시키는 것이다. 명상이 가르쳐주는 것은 모든 가르침을 잊어버리고 모든 지식을 포기

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시험 뒤에 우리는, 아는 것을 감소하지만 더 가벼워진 자신을 느끼게 된다, 즉, 우리는 여행을 떠날 수 있고, 아찔하고 텅 빈 진리의 시선을 마주할 수 있게 된다. 정중동이며 만중허, 헤겔이 절대의 무와 충만한 존재 사이의 최종적인 일치를 발견하기 훨씬 전에, 우파니샤드는 범의 상태를 존재와의 교감의 순간들로 정의했다.  "오감이 고요해지면서 정신 속에서

하나로 합쳐질 때, 그 안정된 정신을 통해 인간은 가장 높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생각한다는 것은 숨쉬는 것이다. 

 

숨을 멈추는 것은 관념의 순환을 정지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가 모습을 드러내도록 비우는 것이다. 생각하는 것이 숨쉬는 것인 이유는 사유와 삶이 개별적 우주가 아니라 연통관이기 때문에, 즉 이것은 저것이기 때문이다. 인간과 세계, 의식과 존재, 존재와 실존의 최종적인 동일성은 인간의 가장 오래된 믿음이며 고학과 종교, 주술과 시의 뿌리이다. 우리의 모든 활동은 오래된 오솔길, 즉 양쪽 세계를 소통시키는 잃어버린 통로를 발견하는 것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원초적 동일성을 반영하는 것, 대립물의 보편적 상응을 재발견하거나 검증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 영감을 받은 탄트라 불교의 체계는 육체를 우주의 은유 혹은 이미지로 인식한다. 육체의 경락은 에너지의 매듭이며, 별자리와 혈액과 신경의 흐름이 합류하는 곳이다. 포옹하는 육체들이 취하고 있는 각각의 자세는 수액, 혈액 그리고 빛의 삼중 리듬에 의하여 움직이는 점성술의 황도 12궁에 해당한다. 남인도의 코나락 사원은 서로 위얽힌 현란한 육체들이 밀림처럼 뒤덮여있다. 이 육체들은 화염의 잠자리에서

깨어나는 태양들이며, 서로 교미하는 별들이다. 돌은 불타오르고 사랑에 빠진 사물들은 서로 결합한다. 연금술적 결합은 인간의 결합과 다르지 않다.

백거이는 자전적 시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한밤중에 나는 슬쩍 훔쳐보았다

음양이 다정하게 껴안고 있는 것을,

상상도 못한 자태로

아내와 남편처럼 껴안고 있었다.

두 마리 용처럼 서로 칭칭 감은 체.

 

동양적 전통에서 진리는 개인적 경험이다. 그 때문에 엄격한 의미에서 진리는 소통 불가능한 것이다. 진리의 탐구는 각자 스스로 해 나가는 것이다. 충만함에 도달했는지, 존재와의 동일함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는 모험을 감행하는 당사자 외에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체험적 앎은 말로 전달할 수 없다. 이러한 '깨달음의 상태'는 너털웃음, 미소 혹은 역설로 표현된다. 하지만 그러한 미소는 수행자가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음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모든 앎은, 앎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경전들은 자주  이러한 모순적인 말을 한다. 가르침은 침묵으로 귀결된다.

도는 규정할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다. "길은 길이라 말하면 늘 그

러한 길이 아니고, 이름을 이름지으면  늘 그러한 이름이 아니다"

장자는 언어란 본래 절대를 표현할 수 없다고 확신했다. 이것이 상징 논리

학의 창시자들을 노심초사케 하는 난제이다.

 

"도는 말로 규정할 수 없는 것이다.....아는 사람은 말하지 않는다.

말하는 사람은 알지 못하는 사람이다. 고로,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

상대적이며 상호 의존적인 대림물들의 세계를 초월하지 못하는 언어의

무능력이 말의 근원적 한계를 야기한다.

 

"사람들이 진리를 배운다고 말할 때, 그들은 책을 생각한다.

그러나 책은 말로 되어 있다. 말도 가치를 갖는다고 할 수는 있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이 의미는 바로

말로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도달하려는 노력 그 자체이다. "

 

결국, 의미하는 사물들을 지향하고, 사물들을 가리키지만, 결코 그것들에 도달할 수는 없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4)

 

 

장자는 언어를 비판했지만, 말을 포기하지는 않았다. 이것은 선불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뛰어난 언어적 창조물인 연극 노오와 바쇼의 하이쿠는 역설과 침묵으로 용해되는 선불교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러한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장자는 현자는 "말없는 가르침을 전한다"고 확신한다. 기독교와 달

리 도교는 좋은 가르침도 나쁜 가르침도 믿지 않는다. 간단히 말하

면, 언어로 된 가르침을 믿지 않는다. 장자가 말하는 말없는 가르침

이란 모범이 되는 가르침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 되어 있으

면서도 언어를 넘어서는 언어, 즉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말을

뜻한다장자는 이것과 저것의 의미를 초월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언어가 시라고 말한 적이 없지만, 그의 글은 이미지, 말의

유희, 그 밖의 시적 형태들과 떼어놓을 수 없다. 장자에게서 시와

사유는 날줄과 씨줄이 되어 하나의 기막힌 천을 짜낸다. 다른 경전

들도 마찬가지이다. 도교, 힌두교, 불교의 사유가 이해될 수 있는

것은 시적 이미지 대문이다. 장자가 도의 경험이란 언어가 갖는 상

대적인 기의들이 무효화되는 자연적이고 원초적인 의식으로 돌아

가는 것이라고 설명할 때, 그 말은 말의 유희, 즉 시적 수수께끼를

암시하는 것이다. 본래의 우리 자신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새들을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

새들은 말을 의미하기에, 이 말은 결국 말없이 하고 싶은 것을 표현하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여여함의 왕국인 침묵으로 돌아가는 것, 즉

" 이름이 필요 없는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혹은 이름과 사물이 융합하여 하나가 되는 곳, 즉 말이 존재가 되는 시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지는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가벼운 깃털은 무거운 돌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언어가 말할 수 없는 것을 이미지가 어떻게 말하는 지 보기 위해서는 언어를 살펴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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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타비오 파스] 이미지 (5)

 

 

   언어는 이것 혹은 저것의 의미이다.  깃털은 가볍고 돌은 무겁다.

가벼운 것은 무거운 것과의 관계 속에서 가벼운 것이며, 어두운 것

은 밝은 것에 비교해서 어두운 것이다. 모든 의사 소통의 체계는

시체들과 그 의미들의 세계 안에서 가능하다.  그러므로 언어 체계는

가변성을 갖는 기호들의 총체를 구성한다. 예를 들어, 수의 경우에 왼쪽에

쓰인 영은 오른쪽에 쓰인 영과 같지 않다. 숫자는 놓이는 위치에 따라 의미가 바뀌는 것이다. 언어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며, 단지 기타의 의미화와 의사

소통 수단에 비해 가변성의  폭이 더 넓다는 것이 다를 뿐이다. 각각의 낱말은 서로 관련을 맺고 잇는 여러 의미를 갖는다. 그러한 의미들은 문장에서의 낱말의 위치에 따라 정돈되며 뜻이 정해진다. 낱말들이 구를 형성하게 되면

문맥의 의미라는 다른 의미가 만들어진다. 낱말들의 다른 의미들은 사라지거나 약화된다. 혹은 달리 말한다면, 말은 그 자체로 무한한 의미의 가능성이지만, 하나의 구 속에 들어가 활성화될 때, 즉 언어로 변화될 때, 그러한 가능성은 단지 하나의 방향으로 고정된다. 산문에서 구의 통일성은 의미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 의미는 구를 이루는 모든 낱말들을 동일한 대상 혹은 동일한 방향을 겨냥하게 겨냥하는 화살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의미의 다원성이 사라지지 않는 구이다. 이미지는 일차적인 의미와 이차적인 의미 그 어느것도 배제하지 않고 단어의 모든 가치들을 거두어 고양시킨다.

그렇다면 어떻게 두 개 혹은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이미지가 단순히 말장난이 아니라, 하나의 이미지가 되어 상반되는 여러 힘들의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어떤 명제들은 문법적이며 논리적인 구문으로는 완벽하게 옳지만, 의미상으로는 모순되기도 한다.

가르시아 바카가 그의 책 [근대의 논리학 입문]에서 인용하는 있는 것처럼

(" 숫자2는 두 개의 돌이다"). 논리상으로는 문제가 없지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명제를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이미지는 모순도, 무의미도 아니다. 이미지는 모순적, 무의미적 혹은 비일관적인 명제들을 훨씬 뛰어넘는 통일성을 갖는다. 만일 다양하며 서로 다른 의미들이 이미지의 내부에서 투쟁한다면, 이미지의 의미는 무엇일까?

 

 시인의 이미지들은 다양한 층위에서 의미를 갖는다. 첫째로, 이미지는 진정성을 갖는다. 이미지는 시인이 본 것이며 들은 것이고, 세계에 대한 시인의 비전과 경험에 대한 진솔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이미지는 심리학적 차원의 진리를 다르는 것이며, 명백히 우리가 걱정하는 논리적인 문제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둘째로, 그러한 이미지들은 그 자체로 유효한 객관적 실재를

구성한다. 즉, 이미지들은 작품들이다.

공고라의 작품에 나타나는 풍경은 자연 풍경과 동일하지 않다. 그러나

비록 서로 다른 세계에 속할지라도, 양자는 현실성과 확실성을 갖는다.

즉, 서로 병행하며 자율성을 갖는 현실의 두 질서이다. 이 경우에, 시인은

진리를 말하는 것 이상의 행위를 한다. 즉, 스스로의 실존의 진실이라는

또 다른 진리의 세계를 창조한다. 시적 이미지들은 스스로의 논리를 가지며,

 시인이 '물은 유리이다'라고 말하거나 혹은 '물오리는 수양버들의 사촌이다"

(카를로스 페이세르)라고 말한다고 해서 문제를 삼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이미지의 미학적 진리는 단지 자신의 세계 안에서만 대해서 무엇인

가를 말하며, 그 무엇은, 비록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우리가 누구인

지를 진정으로 드러내준다고 확신한다. 시적 이미지들에 관련된 이러한 주장은 어떤 객관적인 근거를 갖는 것일까? 시적 언어가 보여주는 외견상의 모순 혹은 무의미는 어떤 의미를 내포하는가?

 

우리가 어떤 대상을 자각할 때, 이 대상은 우리에게 여러 가지 성질들, 감각들, 의미들의 복합체로 나타난다. 이러한 복합성은 접촉의 순간에 즉시 동일된 상태로 지각된다. 다양한 성질과 형태의 모순적인 총체를 동일시키는 요소는 의미이다. 사물들은 의미를 갖는다. 현상학적인 분석이 보여주는 바에 따르면, 가장 단순하고 우연적이고 방심한 상태로 지작하는 경우에조차도

어떤 지향성이 주어진다. 이렇게 의미는 언어의 근거이면서 동시에 실재를 포착하는 근거이다. 실제의 복합성과 모호성에 대한 우리의 경험은 의미 속

에 녹아든다. 일상적인 지각과 비슷하게, 시적 이미지는 실재의 복합성을

살려내는 동시에 통일성을 부여한다. 여기까지는 시인이 하는 바가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 이제 살펴보아야 할 것은 실재를 표현하는 다른 형태들과 이미지를 구별시켜주는, 이미지의 통합 작용이 무엇인가 하는 점이다.

 

[옥타비오 파스]이미지(6)

 

  실재에 대한 우리의 모든 해석들 --삼단논법, 묘사, 과학적 공식, 실천적인 수준의 논평 등--은 표현하고자 의도하는 것을 재창조하지 않고 그것을 표상하거나 혹은 묘사하는 데 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의자를 본다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의자의 색깔, 형태, 재료 따위를 지각한다. 이러한 분산적이고

모순적인 특성들에 대한 감지는 그것의 의미, 즉 의자가 기구이며 도구라는 것을 아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만일 의자에 대한 우리의 지각을 묘사하기를 원한다면, 세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 맨 먼저, 의자의 형태,

그 다음에는 색깔 그리고 의미에 이를 때까지 이렇게 계속해야 한다. 

묘사의 과정에서 대상의 총체성은 점점 상실되어간다. 처음에 의자는 단지 형태였다가 나중에는 나무의 종류가 되고 마침내는 순수한 추상적 의미

'의자는 앉기 위해 사용하는 대상이다' 가 된다. 시에서 의자는 느닷없이

우리의 주의를 자극하는 순간적이고 총체적인 현존이 된다. 시인은 의자를 묘사하지 않고 대신 우리 앞에 의자를 보여준다. 지각의 순간에서처럼, 의자는 그것의 모든 모순적인 성질들을 지닌 채 우리 앞에 주어지며, 그 순간의 정점에는 의미가 자리잡는다. 이렇게 이미지는 지각의 순간을 되살려내며

독자로 하여금 언젠가 지각한 일이 있는 대상을 자신 안에서 되살려내도록

충동한다. 리듬을 갖는 구인 운문은 일깨우고, 되살려내고, 환기시키고,

재창조한다. 혹은 마차도가 말했던 것처럼, 한 번 걸러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현시한다. 실재에 대한 우리의 경험을 재창조하며 되살린다.

그러한 부활은 우리의 일상적인 경험의 부활일 뿐만 아니라, 우리삶의 가장 어둡고 멀리 떨어져 있는 부분의 부활이기도 하다.

시는 우리가 잊고 있는 것, 즉 진실한 우리 자신을 기억하게 해준다.

 

 의자는 동시에 여러 가지 사물이 된다. 앉기 위해서 사용하기도 하지만

다른 쓰임을 가질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은 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말이 자신의 충만함을 회복하자마자, 잃었던 의미들과 가치들을 다시 획득

하게 된다. 지각의 순간에 감지할  수 있는 것처럼, 이미지의 복합성은 실재의 복합성과 다르지 않다. 즉각적이고 모순적이며 복합적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깊숙이 숨어 있는 의미를 갖는다.

이미지에 의해서 이름과 대상, 표상과 실재 사이에 순간적인 화해가 이루어진다. 그 때문에 주체와 객체는 매우 충만한 일치를 이룬다. 만일 시인이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리고 이미지 덕분에 그 언어가 원초적인 풍요로움을 회복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의견의 일치는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말이 맨 처음의 상태로, 다시 말해, 의미의 복합성으로 복귀하는 것은 시적 기능의 첫 번째 행위일 뿐이다. 우리는 아직 시적 이미지의 의미를 완전히

착하지 못했다.

 

 모든 구는 다른 구와 관련되며, 다른 구로 설명되는 것이 가능하다. 

기호의 가변성 덕분에, 말은 다른 말로 설명될 수 있다. 뜻이 모호한 구문에 부딪혔을 때, 우리는 '이 말들이 뜻하는 것은 이것이 나 혹은 저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것 혹은 저것'을 말하기 위해서 또 다른 말들에 의탁한다. 모든 구는 다른 구에 의해서 말해지거나 설명될 수 있는 어떤 것을 뜻한다. 결과적으로, 의미는 말하고자 함이다. 혹은 다른 방식으로 말해질 수 있는

언표이다. 이와 반대로, 이미지의  의미는 이미지 자체이지 다른 말로 설명

될 수 없다. 이미지의 의미는 그 자체로만 설명된다. 그 자신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이미지가 의마흔 것을 말할 수 없다. 의미와 이미지는 동일하다. 하나의 시편은 이미지 이외에 다른 의미를 갖지 않는다. 의자를 볼 때, 우리는 즉시 그것의 의미를 감지한다. 아무 말없이 우리는 의자에 앉는 것이다. 시에서도 똑같은 일이 일어난다.

 

시의 이미지들은 산문과는 달리 우리를 또 다른 사물로 데려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구체적인 실재와 마주서게 한다. 사랑하는 사람의 입술이 내게 "소리 얼음을 쌀쌀맞게 내뱉는다"라고 시인이 말할 때, 그는 새하얀 것 혹은 교만함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는 우리로 하여금 긴말이 필요 없이 직접 현실에 마주서게 한다. 즉, 치아., 말, 얼음, 입술, 부조화한 실재가 느닷없이 우리 눈 앞에 출현한다.

고야는 전쟁의 공포에 대해서 묘사하는 것이 아니고 있는 그대로 전쟁의

이미지를 보여준다. 주석도, 지시체도, 설명도 필요치 않다. 시인은 의미하지 않고 말한다. 문장과 구는 수단이다. 그러나 이미지는 수단이 아니라 목적이며, 이미지 자체가 의미이다. 그 의미는 이미지에서 시작하고 이미지에서

끝난다. 시의 의미는 시 자체이다. 이미지들은 어떠한 설명과 해석으로도 환원 불가능하다. 이렇게 원초적인 복합성을 최복한 말은 이제 또 다른 당황스럽고 과격한 변형을 겪는다. 이것은 어떻게 성립되는가?

 

 

 [옥타비오 파스]활과 리라 '이미지'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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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의 <활과 리라>와 <흙의 자식들>을 읽다 노트해 두었던
그의 시론에 관한 그리고 삶에 대한 시적 잠언 몇 구절을 다시 옮겨봅니다. 

"시는 이 세계를 들어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색깔이고 소리이면서 의미이기도 한 말로 이루어지는 애매한 존재이다."

"말들은 규정을 거역한다."

"시어는 관계를 형성하며 일어선다. 시는 일어선 언어이다."

"삶을 소재로 시를 쓰는 것보다 삶 자체를 시로 변화시키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은 아닐까?" "단어들도 사랑한다" -부르통 재인용- "모든 언어 현실의 밑바닥에는 리듬이 존재한다. 단어들은 어떤 리듬의 원리에 따라 서로 모이고 흩어진다."

"시인은 리듬을 통하여 언어를 유혹한다. 리듬은 기대를 유발하며 어떤 바램을 떠받이고 있다. 리듬은 내용이 없는 단순한 측량이 아니라 방향성이고 느낌이다." "모든 춤은 리듬이며, 모든 리듬은 춤이다. 리듬에는 이미 춤이 있고 춤에는 이미 리듬이 있다." "리듬의 반복은 원초적 시간의 초대이며 소환이다. 좀더 정확히 말하면 원형적인 시간을 재창조하는 것이다." "산문은 행진, 시는 춤" -발레리 재인용- "파운드는 분묘 도굴범의 영웅적 분위기를 가지고 인용들을 끌어 모았고, 엘리엇은 난파선의 유품들을 거둬들이는 사람처럼 인용들을 정돈하였다. 파운드의 작품은 우리를 아무 곳에도 데려가지 않는 여행이며, 앨리엇의 작품은 조상의 집을 찾는 탐색이다."

"말의 가치는 말이 숨기고 있는 의미에 있다. 대상은 말 너머에 있다." "어떤 교리도 설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교리를 설하는 것이다." "근대 예술의 비판은 근대성이 지향하는 직선적 시간에 대한 부정이었고,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부정이었다. 이러한 부정을 통하여 예술은 지속되었다." ""자본주의가 인간을 기계로 취급했다면, 후기 산업사회는 인간을 기호로 취급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죽음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영원과 미래를 생각해냈지만, 이것이 바로 치명적인 함정이었다. '지금'은 우리를 우리의 현실과 화해시킨다. 우리의 현실이란 우리가 죽는다는 것이다. 오직 죽음 앞에서만 우리의 삶은 진실한 삶이 된다." "자연은 창조하고 예술가는 인식한다."

"시는 부분들간의 유사성과 대립성의 상호 보완적인 운동에 의하여 움직이는 -감동(서로를 느껴(感) 움직이는 (動) 총체다." "시장은 이념을 갖지 않는다. 시장은 가격만을 알 뿐, 가치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18세기 기하학적 균형을 부순 낭만주의가 번갯불의 섬광아래 탄생했을 때부터 우리 시대의 황혼녁의 혼돈에 이르기까지 시는 고집불통이고 완강한 이단이 되어왔다. 그것은 지그재그의 쉴새없는 운동이고 모든 이념과 종교에 대한 끊임없는 반란이며, 동시에 비천한 현실에 대한 끊임없는 사랑이고, 독단적인 신앙과 이성주의의 관념론적 공론에 대한 항거였다. 시, 그것은 근대성에 파문을 일으킨 돌이었다." 모든 예술, 특히 미술과 조각은 형체를 가지고 있는 물건이어서 간수할 수 있고 팔 수도 있고, 또한 투기의 대상이 될 수도있다. 그림과 반대로 시는 어떤 형상도 무늬도 없으며 단지 독자들에게 말의 주문을, 청자들에게는 심적인 이미지들을 불러일으킨다.

시는 귀를 통해 듣지만 상상력을 통해 본다. 그 이미지들은 이중적인 침묵이어서 생각이면서 형태고 소리이면서 침묵이다." "시는 기술과 시장에 대한 해독제다." "우주는 유사성과 대립성으로 짜여진 살아 있는 그물이다. 시의 작용은 언어를 끌어당김과 밀어냄이라는 두 흐름에 의해 흘러가는, 살아 있는 우주로 인식한다. 언어 내에서는 천체와 세포 간의, 입자와 인간간에 투쟁과 사랑 그리고 뭉침과 흩어짐이 재생산되고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서 그에 대해 답할 수 있을 때까지 끊임없이 우리를 괴롭히는 질문에 대답하려고 애쓰는 것이다." "신은 우리에게 첫 구절을 베풀어 줄 뿐이다(발레리 재인용). 그것을 완성하되, 첫 구절에 육박하도록 써내야 하는 것은 오로지 시인의 몫이다."
 
 

       

자의식의 성장은 대화와 독백이라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을 위협한다. 대화는 다의성에 기초하고, 독백은 동일성에 기초한다. 대화의 모순은, 각자가 타인들과 말할 때 사실은 자기 자신과 말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독백의 모순은, 자아가 결코 자신이 아니라 내가 나에게 말하는 것을 듣는 타인이기 때문이다.

詩란 언제나 용어의 전환을 통해 이러한 불화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되어왔다. 그것은 대화 속의 나를 독백 속의 너로 바꾸는 것이다.

시는 ‘나는 너’라 하지 않고, ‘나의 나는 바로 너’라고 말한다.

시적 이미지는 ‘타자’이다.

의사불통이라는 근대의 현상은 주체의 복수성 때문이라기보다는, 개별의식의 구성요소로서 ‘너’가 사라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타인들과 말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아의 암세포 같은 증식은, 세계가 이미지를 상실한 원인이 아니라 그 결과다.

(…) 파편과 분산 속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발견하는 것, 하나 속에서 타자를 인지하는 것은 언어에게 은유의 능력을 되돌려주는 일이 될 것이다.  -<활과 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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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옥타비오 파스와 함께 하루를...^^

 

시는 언젠가부터 나의 연인이 되었다.

시가 없는 삶은 참으로 사랑없는, 호흡의 정지와도 같은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짧은 시에 숨어있는  역설, 아이러니, 모호성..

그속에 숨어있는 샘물같은 잠언과..

사랑..꿈틀거리는 무심의 언어들....

 

실오라기처럼 올올이 나를 휘감는

언어들이 언젠가부터 떨림으로 다가 왔다.

 

시인들마다의 모습이 다르듯

그들이 추구하는 시의 형태라든지

구사들이 아주 독특하고 개성있게

창작으로 우리앞에 다가오면

우리는 눈으로 읽고 가슴으로 느끼며

머리로 생각하게 된다

또 우리 내면 깊숙히 매만지면

시는 치유요, 힘이요, 사랑이요, 꿈이요,

원동력이 되기도 하다.

 

옥타비오 파스의 활과리라를 읽으면서

시란 뭘까 ...시가 도대체 무엇이길래 나를 이렇게 감전시키고

변화시키고..나로 하여금 역동적인 힘을 부여해 주는 것인가,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아울러 시를 통해 나는 내적 치유함을 얻게 되고

시로 표출하면서 내속의 잔 오물들을

내 벹음으로서 후련함을 얻는 것인가,

다시 한 번 되짚어 보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MR

 

 

 

활과 리라 옥타비오 파스 

 

무심無心의 언저리를 건드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무심의 경험은 방심자, 은둔자 그리고 심약자까지도 인간의 원형으로 제시하려는 서구 문명의 지배적인 경향에 반대된다. 무심한 사람은 근대 세계를 부정한다. 근대 세계를 부정할 때, 그는 전체를 얻기 위해서 자신의 전체를 건다. 지적인 면에서, 그의 결단은 생의 저편에 무엇이 있는지 알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자살을 하는 사람의 결단과 다르지 않다. 무심한 사람은 이성과 소극적 안일함의 다른 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무심이란 이 세상의 반대편에 대한 매혹이다. 의지는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방향을 바꿀 뿐이다. 즉, 의지는 분석적 힘에 봉사하는 대신에, 분석적 힘이 자신의 목표를 위하여 정신적 에너지를 억압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이다. 이 문제에서, 서구 언어의 심리학적이고 철학적인 빈곤함은 시적 표현과 이미지의 풍성함과 대조가 된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침묵의 음악' 혹은 노자老子의 '텅 빈 충만'이라는 말을 기억해보자. 수동적인 상태는 침묵과 빔의 경험일 뿐만 아니라 능동적이고 충만한 순간의 경험이기도 하다. 즉, 존재의 핵심으로부터 이미지가 샘솟는 것이다.

'나의 가슴은 한밤중에 꽃들을 피운다'라고 아즈텍인의 시는 말한다. 자발적인 마비는 정신의 다른 부분을 상승시킨다. 한 영역의 수동성은 다른 영역의 능동성을 야기하며 분석적이고 담론적이며 혹은 추론적인 경향성에 맞서 상상력의 승리를 가능케 한다. 어떠한 경우에도 창조적 의지는 사라지지 않는다. 창조적 의지가 없으면, 실재와의 만남을 가능케 하는 문들은 완고하게 닫혀있게 된다.'
  
   
         ***

 

 

  자신 너머의 저곳으로 발사되어 날아가는, 끊임없이 대기를 가르며, 항상 앞을 향하여 날아가는  화살인 인간은 쉼없이 전진하고 추락한다. 그 순간 순간 그는 '타인'이며, 자기 자신이다. '타자성'은 인간 안에 있다. 그치지 않는 죽음과 부활이라는, 하나의 통일성이 '타자성' 속에서 용해되어 다시 새로운 통일성으로 재탄생한다는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비로소 어쩌면 '다른 목소리'라는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릴지 모른다.

 

 여기 한 시인이 종이 앞에 앉아 있다. 그가 사전 계획을 가지고 있건 없건, 그가 앞으로 쓸 것에 대해 길게 사색을 했건 안 했건, 번갈아가며 그를 유혹하고 거부하는 순결한 백지처럼 그의 의식이 비어 있건 아니건 상관없다. 글을 쓰는 행위는 먼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나와 마치 허공으로 던져지는 것 같은 이탈을 요구한다.

이제 시인은 혼자 있다. 조금 전만 해도 그를 신경 쓰게 만들었던 모든 일상 세계가 사라진다. 만일 시인이, 단지 의례적인 글쓰기에서 벗어나 진정으로 글쓰기를 원한다면, 그의 행위는 그를 세상과 단절시키고 그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괄호 속에 집어넣는다. 그때 두가지 가능성이 일어난다. 모든 것이 증발하고 희미해져서 중력을 잃고 떠다니다가 결국 녹아 없어지거나, 혹은 모두가 스스로를 닫아걸어 의미의 빛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물질인 무의미체가 되고 만다. 세계는 스스로를 연다. 그것은 하나의 심연, 거대한 하품이다. 책상, 벽, 컵, 기억나는 얼굴 등 세계는 스스로를 닫아걸고 균열없는 담으로 변한다. 두 경우 모두 시인은 의지할 곳 없는 외톨이가 된다. 다시 세계를 창조하여, 저 위협적인 외부의 텅 빔을 하나 하나 이름붙여야 한다. 책상, 나무, 입술, 별, 그리고 무까지도. 하지만 낱말 역시 증발하여, 도망가고 만다.

말 이전의 침묵이 우리를 감싼다. 같은 침묵의 또 다른 얼굴인 무분별하고 말로 옮길 수 없는 중얼거림, '알아들을 수 없는 말과 분노the sound and the fury', 수다, 아무 의미 없는 소음 등이. 세계가 사라질 때, 시인에겐 말 역시 사라진다. 어쩌면 이 순간 그는 뒷걸음질치고 있는지 모른다. 그는 말을 기억하려하고, 학습했던 모든 것, 즉 조금 전만 해도 그에게 외부로의 길을 열어주고 모든 문을 열 수 있는 열쇠 같던 그 아름다운 말들을 내부에서 끄집어내려 애쓴다. 그러나 뒤에, 혹은 안에는 아무것도 없다. 팽팽하고 긴장되게, 앞을 향해 던져진 시인은 문자 그대로 그를 벗어나 있다.

시인처럼, 말들도 저 너머, 언제나 저 너머에서, 스치기만 해도 바스러질 듯이. 자신 밖으로  던져진 그는 결코 말과, 세계와, 그리고 자기 자신과 하나가 될수 없다. 시인도 말도 '항상 저 너머이다'. 말들은 그 어디에도 없다. 그것은 주어진 상태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마치 매일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세계를 창조하듯이, 그것들을 창조하고 발명해 내야 한다. 어떻게 말들을 창조하는가?

무에서는 무만 나온다. 만일 시인이 무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다 해도, '언어를 발명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언어란, 당연히, 대화이다. 언어는 사회적인 것이고, 언제나 최소한 말하는 자와 듣는 자 두명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시인이 발명하는 말은--그 말은 모든 순간을 포함하는 한 순간에 허공으로 사라지거나 아니면 침투할 수 없는 물건으로 변한다--매일 매일의 일상의 말이다.

시인은 자신에게서 그 말을 꺼내지 않는다. 외부에서 오는 것도 아니다. 우리 앞에 세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닌 것처럼, 사실상 안도 밖도 없다. 우리가 존재한 순간부터, 우리는 세계 안에 있고, 세계는 우리 존재의 구성 요소 중 하나이다. 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것들은 안이나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존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 즉 우리 자신이다. 그것들이 바로 우리 존재이다. 그리고 우리 존재의 일부이기 때문에, 우리와는 낯선, 다른 사람들의 것이다. 즉, 그것들은 우리를 구성하는 '타자성'의 여러 형태 중의 하나이다. 시인이 스스로를 세계에서 떨어져 나온 존재로 느끼고, 언어를 포함한 모든 것이 그로부터 떠나고 해체될 때, 그 자신도 떠나고 사라진다. 그 다음 순간 침묵이나 알아듣지 못할 혼돈과 정면으로 맞서기로 결심하고 더듬더듬 언어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때, 그 자신이 새로 창조되고 치명적 도약을 통해 재탄생해서 다른 사람이 된다. 자신이 되기 위해서는 타인이 되어야 한다. 그의 언어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난다.

타인의 것이기 때문에 자기 것이 된다. 그것을 진짜 자기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이미지와 형용사와 리듬에, 즉 그것을 타자화하는 모든 것에 의지하게 된다. 이렇게 그의 말은 그의 것이면서 또한 아니다. 시인이 어떤 이상한 목소리를 듣는게 아니다. 자신의 목소리와 자신의 말이 이상한 것이다. 그것은 세계의 목소리와 말인데 단지 그가 새로운 의미를 부여했을 뿐이다. 그의 말과 목소리만 이상한 게 아니다. 그 자신, 그의 존재 전부가 끊임없이 낯선 것, 항상 타자로 변하는 무엇이다.

시어는 우리의 원초적 존재 조건의 계시이다. 왜냐하면 시어를 통하여 시인은 타인으로 불리며, 이렇게 그는 동시에 이것이며 저것이고, 그 자신이면서 타인이 되기 때문이다.

-활과 리라,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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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poetry)와 시편(poem)> 



1. 시에 대한 다양한 정의


시는 앎이고 구원이며 힘이고 포기이다. 


시는 이 세계를 드러내면서 다른 세계를 창조한다. 


시는 경험이며 느낌이고 감정이며 직관이고 방향성이 없는 사유이다. 


시는 우연의 소산이자 계산된 결과물이다.(13쪽) 


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는 것이며 성교이고 낙원과 지옥 그리고 연옥에 대한 향수이다. 


시는 민중의 목소리이자 선민의 언어이고 고독한 자의 말이다. 



2. 시편에 대한 정의 


시편은 음악이 울리는 소라고둥이고, 시편의 운율과 각운은 전체적인 조화의 상응이자 울림이다.(14쪽) 



3. 시와 시편에 대한 종합적 정의 


시는 순수하면서 순수하지 않고, 신성하면서도 저주받았고, 다수의 목소리이면서 소수의 목소리이고, 집단적이면서 개인적이고, 벌거벗고 치장하고, 말하여지고, 색칠되고, 씌어져서, 천의 얼굴로 나타나지만, 결국 시편은 밤—인간의 모든 작위의 헛된 위대함에 대한 아름다운 증거!—을 숨기고 있는 가면일 뿐이다.(14쪽) 


시는 모든 시편들의 합계가 아니다. 모든 시적 창조물은 그 자체로 자기 충족적인 단위이다. 부분이 곧 총체이다.(17쪽) 


시편의 다양성은 시의 단일성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확인하는 것이다.(29쪽) 


모든 시편은 유일하다. 강도의 차이는 있지만, 모든 작품에는 시의 맥박이 뛰고 있다. 이 때문에 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이고 문헌학적인 연구보다 단 한 편의 시를 읽는 것이 더 확실하다.(29쪽) 



4. 시(시편)의 조건 


운율의 법칙에 따라 만들어졌다고 해서 모든 작품이 시를 품고 있는 것은 아니다. 


시는 양극화되기도 하고 한곳으로 모이기도 하면서 그림, 노래, 연극의 형식으로 생산된다. 


시적인 것이 무정형 상태의 시라면, 시편은 창조물, 즉 ‘일어선 시’이다. 


시는 단지 시편이라는 형식을 통해 자신을 완전히 드러낸다. 


시편은 단순한 문학적 형식이 아니라 시와 인간이 만나는 장소이다. 


시편은 시를 품고 있고 시를 유도하며 시를 방출하는 언어적 유기체이다. 형식과 본질은 동일하다.(15쪽) 



5. 시(시편)에 대한 역사 전기적 접근 


시편의 공감을 일으키는 열쇠는 역사적 탐구가 아니라 전기이다. 


역사와 전기는 역사적 시기와 삶에 대한 주조를 말해주고 작품의 경계를 보여주며 작품의 외재적 스타일을 설명해준다. 또한 하나의 경향성이 가지는 의미를 명확히 보여줄 수도 있고 시편이 왜 씌어졌으며 어떻게 씌어졌는지도 보여줄 수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편이 무엇인지는 말해줄 수 없다.(19쪽) 



6. 시와 스타일 


시인은 스타일에서 자양분을 공급받고, 스타일은 자라서 죽지만, 시편은 영속한다. 왜냐하면 하나하나의 시편은 자기 충족적인 단위, 결코 반복되지 않을 독립된 본보기를 이루기 때문이다.(22쪽) 


예술의 다양성은 예술의 단일성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각시키는 것이다.(22쪽) 


재료의 면에서나 의미의 면에서나 작품은 인간을 초월할 수 없다.(25쪽) 


*하나의 스타일 안에서, 시편을 운문으로 씌어진 논문과 구별짓고, 그림과 교육적 삽화를 가르며, 가구와 조각을 분리시키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차별적 요소가 바로 시이다. 창조와 스타일을 구별짓고, 예술 작품과 도구 사이의 차이점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시이다.(26쪽) 



7. 시와 산문 


산문의 가장 상위의 형태는 담론이다. 


산문은 말해지는 것이 아니라 씌어지는 것이다. 말해지는 언어는 산문보다 시에 가깝다. 말을 하는 것은 글로 쓰는 것보다 덜 반성적이며 더 자연스럽기 때문에, 산문 작가가 되기보다 시인이 되는 것이 더 쉽다.(26~27쪽) 


산문에서 언어는 많은 의미의 가능태들을 희생시키고 그 중의 단 하나와 동일화를 시도한다.(27쪽) 


시인은 결코 단어의 다의성을 거역하지 않는다. 산문과 일상 언어가 강요한 구속으로 불구가 되었던 언어는 시 속에서 원초의 상태를 회복한다 . 본성의 회복은 총체적이어서 의미론적 가치뿐만 아니라 음악적이고 조형적인 가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자유를 찾은 말은 농익은 과일처럼 혹은 하늘에서 폭발하기 직전의 불꽃처럼 자신의 내부, 즉 모든 의미들과 암시들을 드러낸다. 시인은 말을 자유롭게 풀어주고 산문 작가는 말을 구속한다.(27쪽) 


돌은 조각으로 변형될 때 광휘를 회복한다. 시적 기능은 기술적 조작과 정반대이다. 시적 기능에 힘입어 재료가 본성을 회복하게 됨으로써 색깔은 더욱 색깔다워지고 소리는 충만한 소리가 된다. 시적 창조에서는 재료나 기구에 대한 구속을 찾아볼 수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에 자유를 부여한다 .(27쪽) 


시적 창조에서 시의 재료(언어)는 의미 작용과 의사 소통의 도구이면서 ‘다른 사물’로 변화한다. 다른 사물이 된다는 것은 원래의 사물이 되는 것이다.(27쪽) 



8. 다른 예술장르와 시 


광채를 발하거나 혹은 불투명한 재료를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되돌려서 유용성의 세계를 부정하며, 다른 한편으로 그것을 이미지로 변화시키며 동시에 의사 소통을 위한 특별한 형태로 만드는 시적 작용을 고려한다면, 조형 작품이나 음악 작품도 시로 간주될 수 있다.(28쪽) 


그림은 회화적 언어 이상의 어떤 것일 때 시가 된다.(28쪽) 


수공예업자가 자신의 도구라 할 수 있는 돌, 소리, 색깔, 말을 이용하는 것과 달리 예술가는 그 재료들의 고유한 본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그것들에게 봉사한다. 언어의 봉사자는 그 언어가 무엇이든지 간에 언어를 초월한다.(29쪽) 



9. 시의 독서 


모든 시편이 갖는 공통점은 참여이며, 이것 없이는 결코 시가 될 수 없다. 독자가 진실로 시편을 소생시킬 때마다 그는 시적이라고 일컫는 상태에 참여한다. 그러한 경험은 이런저런 형태를 취할 수 있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며 시간의 벽들을 부수고 다른 ‘나’가 되는 것이다.(31쪽) 


시편을 읽는 것은 시적 창조와 거의 흡사하다. 시인은 이미지, 즉 시편을 창조하며 시편은 다시 독자를 통해 이미지, 즉 시로 태어난다.(32쪽) 


*시편은 순수한 시간에 도달하는 통로이며 실존의 생명수에의 잠항이다. 시는 끊임없이 창조하는 리듬 이외에 그 어떤 것도 아니다.(32쪽) 
 

 

시인이란

 

 

홀로 독백하는 외로운 산책자이다

 

시인이란 숭고하면서도 괴상하고 가련한 악마이며

타고난 채플린이다

 

사소한 것, 가까이 있는 것, 친근한 것에 대한

미적 향수자이다

즉 일상적 언어가 갖는 비밀스런 호흡이며, 힘이다

 

하나의 독백 속에

반성과 서정, 노래와 아이러니 산문과 운문이 뒤섞이고

분리되며, 관조하고 또다시 합일된다

 

그것은 노래의 단절이다

더듬거리는 독백이며, 그것은 침묵의 여백으로 끊긴다

 

시는 노래의 단절에서 비평의 체계로 변했다

여기에 엉뚱한 이미지와 상투어 같은

말들을 덧붙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는 결국 노래일 수밖에 없으며

포퓰리즘(대중)의 공유재산이

아니라

고독한 자의 사유재산이다

 

 

  ==========///////////======
 

 

 

  영감은 인간의 구성 요소인 '타자성'의 발현이다. 
그것은 우리 내부에 있지도 않고, 과거의 진흙으로부터
갑자기 솟아닌 존재처럼 뒤에 있지도 않으며, 굳이 말하자면 앞에 있으면서
우리 자신이 되기 위해 우리를 부르는 무엇, 혹은 차라리 누구이다.
그 누구는 바로 우리 자신이다.그리고 사실 영감은 그 어디에도 있지 않다.

 

  그냥 '있지 않으며', 그 무엇도 아니다. 그것은 지향이며, 나아감이며,
바로 우리 자신인 그것으로 향한 앞으로의 움직임이다.
이렇게 시적 창조는 우리의 자유와 존재하고자 하는 결심의 연습이다.
여기서 되풀이 말하지만, 이 자유는 좀더 충만해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 너머에 있는 저곳으로 가고자 하는 행위이다
.

 

  자유와 초월은 시간성의 표현이며, 움직임이다. 
영감과 '다른 목소리'와 '타자성'은 본질적으로, 끊임없이 스스로를 발현시켜서 흐르게 하는
시간성이다
. 영감, '타자성', 자유 그리고 시간성은 초월이다.
하지만 그 초월과 존재의 움직임은 어디로 향하는 것인가? 우리 자신을 향해서이다.

 

  보들레르가 "우리의 가장 고귀하고 찰학적인 능력은 상상력이다"라고 주장할 때,
그는 다음과 같이 표현할 수 있는 진실을 확인한 것이다.
상상력을 통하여, 즉 우리들의 본질적인 시간성에 내재하면서
바로 그 시간성을 육화하려는 끈질긴 욕망을 이미지로 바꾸는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자신에게서 벗어나, '자신과의 만남을 위해 자신 저 너머로 갈'수 있는 것이다.

 

  영감의 첫 단계에서, 우리는 먼저 자신이되기를 멈춘다.
두 번째 단계에서 자신으로부터의 탈피는 더욱더 전체적인 자신이 된다.
 
신화와 시적 이미지가 말하는 진실은, 대개 매우 신비롭게 나타나는데,
이탈에서 귀환으로, '타자성'에서 통일성으로 가는 변증법에 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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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2 중국 연변 룡정 동산마루에 "별의 시인" 윤동주묘소가 있다... 2017-02-24 0 2210
281 시인은 궁핍(窮乏)으로 시인의 이름에 누를 끼치지 말아야... 2017-02-24 1 1962
280 윤동주 시와 이육사 시를 재조명해 보다... 2017-02-23 1 7874
279 책을 그렇게도 사랑했던 덕화 남평 길지籍 허봉남 문학가 2017-02-23 0 2180
278 시는 꽃씨와 불씨와 꿈을 지닌 여백(餘白)의 미학이다... 2017-02-23 0 2097
277 "하이쿠시"는 불교, 도교, 유교의 종합체이다... 2017-02-22 1 2392
276 덕화 남평의 "마당형님"이였던 허충남 문학가 2017-02-22 0 1954
275 시는 예쁜 포장지속에 들어있는 빛나는 보석이여야... 2017-02-22 0 2007
274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4)... 2017-02-22 0 2937
273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3)... 2017-02-22 0 1960
272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2)... 2017-02-22 0 2229
271 "한글통일"이 언제 오려나... 2017-02-21 0 2317
270 세계가 기리는 100년의 시인... 2017-02-21 0 1935
269 진정한 시는 "찾아지는 감춤"의 미덕과 미학의 결과물이다... 2017-02-21 0 2346
268 안도현 시론을 재정리하여 알아보다... 2017-02-21 0 2796
267 시 안에서 "잔치"를 벌리라... 2017-02-21 0 2309
266 시는 발효와 숙성의 간고하고 처절한 시간과의 결과물이여야... 2017-02-21 0 2451
265 시인이여, 단순하고 엉뚱한 상상력으로 놀아라... 2017-02-21 0 3017
264 시어는 "관념어"와 친척이 옳다?... 아니다!... 2017-02-21 0 2332
263 멕시코 시인 옥타비오 파스가 "이미지"를 말하다... 2017-02-20 0 2951
262 애송시가 되는 비결은 우리 말로 우리 정서를 표현해야... 2017-02-20 0 2015
261 창조적 모방을 위하여 // 트럼블 스티크니 / 정지용 2017-02-19 0 3713
260 "아버지가 서점이고, 서점이 곧 아버지였다" 2017-02-19 0 2624
259 한국 최초의 번역시집, 최초의 현대 시집 / 김억 2017-02-19 0 4021
258 작문써클선생님들께; - "즈려밟다" 와 "지르밟다" 2017-02-19 0 3322
257 아르헨티나 극단주의적 모더니즘 시인 - 보르헤스 2017-02-19 0 4130
256 "내 시가 독자를 감동시키지 못한다면 죽어도 쉬지 않으리라" 2017-02-19 0 1809
255 시작은 탈언어화로부터 시작하라... 2017-02-19 0 2022
254 "낯설게 하기"를 처음 제시한 사람 - 러시아 작가 쉬클로프스키 2017-02-19 0 2088
253 시는 언어의 건축물이다... 2017-02-19 2 2094
252 시작을 낯설게 하기도 하고 낯익게 하기도 하라... 2017-02-19 0 1879
251 시인은 재료 공급자, 독자는 그 퍼즐맞추는 려행자 2017-02-19 0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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