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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순수시 시인 - 김영랑
2019년 09월 29일 22시 24분  조회:5147  추천:0  작성자: 죽림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영랑

 

 ]

김영랑(김윤식)

1903-1950. 시인. 대표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동아일보사 제공.

이칭별칭  영랑()
유형 인물
시대 근대
출생 - 사망 1903년 ~ 1950년
성격 시인
출신지 전라남도 강진
성별
본관 김해()
저서(작품)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거문고, 독을 차고, 망각, 바다로 가자, 천리를 올라온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정의

일제강점기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독을 차고」 등을 저술한 시인.

개설

본관은 김해(). 본명은 김윤식(). 영랑은 아호인데 『시문학()』에 작품을 발표하면서부터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전라남도 강진 출신.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경무()의 5남매 중 장남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혼인하였으나 1년반 만에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뒤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공부하고 난 다음 1917년 휘문의숙()에 입학, 이 때부터 문학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이때 휘문의숙에는 홍사용()·안석주()·박종화() 등의 선배와 정지용()·이태준() 등의 후배, 그리고 동급반에 화백 이승만()이 있어서 문학적 안목을 키우는 데 직접·간접으로 도움을 받았다.

휘문의숙 3학년 때인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 강진에서 거사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간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1920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학원[] 중학부를 거쳐 같은 학원 영문학과에 진학하였다. 이무렵 독립투사 박렬(), 시인 박용철()과도 친교를 맺었다.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인해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하였다. 이후 향리에 머물면서 1925년에는 개성출신 김귀련()과 재혼하였다. 광복 후 은거생활에서 벗어나 사회에 적극 참여하여 강진에서 우익운동을 주도하였고, 대한독립촉성회에 관여하여 강진대한청년회 단장을 지냈으며, 1948년 제헌국회의원선거에 출마하여 낙선하기도 하였다.

1949년에는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평소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어 국악이나 서양명곡을 즐겨 들었고, 축구·테니스 등 운동에도 능하여 비교적 여유있는 삶을 영위하다가, 9·28수복 당시 유탄에 맞아 사망하였다.

시작활동은 박용철·정지용·이하윤() 등과 시문학동인을 결성하여 1930년 3월에 창간된 『시문학』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언덕에 바로 누워」 등 6편과 「사행소곡칠수()」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후 『문학』·『여성』·『문장』·『조광()』·『인문평론()』·『백민()』·『조선일보』 등에 80여편의 시와 역시() 및 수필·평문() 등을 발표하였다. 그의 시세계는 전기와 후기로 크게 구분된다. 초기시는 1935년 박용철에 의하여 발간된 『영랑시집』 초판의 수록시편들이 해당되는데, 여기서는 자연에 대한 깊은 애정이나 인생태도에 있어서의 역정()·회의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슬픔’이나 ‘눈물’의 용어가 수없이 반복되면서 그 비애의식은 영탄이나 감상에 기울지 않고, ‘마음’의 내부로 향해져 정감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요컨대, 그의 초기시는 같은 시문학동인인 정지용 시의 감각적 기교와 더불어 그 시대 한국 순수시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1940년을 전후하여 민족항일기 말기에 발표된 「거문고」·「독()을 차고」·「망각()」·「묘비명()」 등 일련의 후기시에서는 그 형태적인 변모와 함께 인생에 대한 깊은 회의와 ‘죽음’의 의식이 나타나 있다.

광복 이후에 발표된 「바다로 가자」·「천리를 올라온다」 등에서는 적극적인 사회참여의 의욕을 보여주고 있는데, 민족항일기에서의 제한된 공간의식과 강박관념에서 나온 자학적 충동인 회의와 죽음의식을 떨쳐버리고, 새나라 건설의 대열에 참여하려는 의욕으로 충만된 것이 광복 후의 시편들에 나타난 주제의식이다.

주요저서로는 『영랑시집』 외에, 1949년 자선()으로 중앙문화사에서 간행된 『영랑시선』이 있고, 1981년 문학세계사에서 그의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이 있다. 묘지는 서울 망우리에 있고, 시비는 광주광역시 광주공원에 박용철의 시비와 함께 있으며, 고향 강진에도 세워졌다.

참고문헌

  • 『모란이 피기까지는』(김학동 편, 문학세계사, 1981)
  • 『전형기의 한국문예비평』(김용직, 열화당, 1979)
  • 『한국현대시인연구』(김학동, 민음사, 1977)
  • 『한국현대문학사탐방』(김용성, 국민서관, 1973)
  • 「조밀한 서정의 탄주: 김영랑론」(정한모, 『문학춘추』, 1964.2.)
  • 「시와 감상: 영랑과 그의 시」(정지용, 『여성』, 1938.9·10.)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랑 [金永郎]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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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문학이다

김영랑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

 ]

출생 - 사망 1903년 1월 16일 ~ 1950년 9월 29일

『영랑시집』

1903년 1월 전라남도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김영랑(, 1903.1.16~1950.9.29)의 본명은 윤식이다. 그는 강진보통학교를 나오고 완고한 아버지의 반대로 상급학교 진학이 막힐 뻔하였으나 어렵사리 어머니의 도움을 받아 1916년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힌다. 1917년 휘문의숙(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하는데, 선배인 홍사용안석주박종화와 후배로 들어온 정지용이태준 등과 문학 이야기를 나누며 학창시절을 보낸다. 1919년 3·1운동 당시 열여섯 살이던 그는 구두 속에 선언문을 감추고 고향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거사 직전에 발각되어 6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한다. 결국 재학 중이던 휘문의숙을 졸업하지 못한 채 1920년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학원(현재 아오야마 가쿠인대학) 중등부에 입학한다.

1950년 4월1일 서울 근교에서

1950년 4월1일 서울 근교에서

이 무렵 김영랑은 평생 우정을 나누게 되는 박용철을 만난다. 박용철은 그에게 시를 쓸 것을 권유한다. 중학교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음악에 남달리 관심 많던 그는 도쿄에서 성악을 전공하려고 했으나, 음악 공부를 하면 절대로 학비를 대줄 수 없다는 아버지 때문에 영문과로 적을 옮긴다. 그러나 이 또한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중도에서 포기하고 만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서울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과 교유하게 된다. 최승일의 집을 드나들던 그는 숙명여고에 다니던 최승일의 누이동생이자 해방 후 월북한 당대 최고의 무용가 최승희와 사귀며 문단에 염문을 뿌린다.

1930년 3월 김영랑은 <시문학> 창간호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후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제목이 바뀜)’, ‘언덕에 바로 누워’, ‘4행 소곡 7수’ 같은 시편을 발표함으로써 정식으로 등단한다. 신진 시인 김영랑은 관념과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던 문단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의 시로 빛을 발한다. 이렇게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의 시가 지닌 매력과 독자성에서 말미암지만, <시문학> 발간을 주도한 친구 박용철의 도움도 적지 않다.

박용철은 일찍이 김영랑의 시적인 자질을 간파해 유학시절부터 시 쓰기를 권유하고, <시문학>을 발간하는 동안 꾸준히 김영랑의 시를 부각시킨다. 박용철은 김영랑의 시를 거의 다 외울 정도로 몹시 아끼고 사랑했다. 이러한 사실은 박용철이 자신의 시집은 내지 않으면서도 1935년 11월 <시문학사>에서 [영랑시집]을 펴낸 것으로도 입증된다.

김영랑의 생애는 대체로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는 김영랑의 작품 속에 알게 모르게 시대의 암울한 그림자가 깃들여 있으리라는 유추를 가능하게 한다. 그의 시 세계에서는 흔히 경험의 구체적 상()들이 생략된 채 막연한 슬픔과 한의 감정을 토로하는 것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김영랑의 시 세계를 뒤덮는 슬픔과 한, 상실과 좌절의 어두운 그림자는 사회적 자아를 실현할 계기를 봉쇄한 일제 식민지 지배 체제의 억압성을 간접적으로나마 증언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좁은 길가에 무덤이 하나
이슬에 젖이우며 밤을 새인다.
나는 사라져 저 별이 되오리
뫼 아래 누워서 희미한 별을

눈물 속 빛나는 보람과 웃음 속 어둔 슬픔은
오직 가을 하늘에 떠도는 구름
다만 후젓하고 줄 데 없는 마음만 예나 이제나
외론 밤 바람슷긴 찬별을 보았습니다

두 시편에서는 무엇보다 외로운 혼의 비애와 방황을 읽을 수 있다. 이는 운명의 주체가 되어 당당하게 삶을 개척, 창조해나갈 수 없는 사람의 실의와 공허감으로 얼룩진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 운명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것은, 작게는 밖으로부터의 구속과 억압을 극복하지 못하고 노예화된 개인의 비극을 보여주며, 크게는 주권을 상실한 민족 전체의 상황을 나타내는 것일 수 있다. 이러한 것은 김영랑의 의식을 오랫동안 간섭하고 짓누른 주제이기도 한데, 아쉽게도 체험과 현실의 구체성에서 우러나온 논리가 뒷받침되지 않아 작품들이 감동을 주는 차원으로까지 승화되지는 못한 느낌이다.

김영랑의 시 세계는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인 ‘모란이 피기까지는’에 나오는 ‘찬란한 슬픔의 봄’이라는 구절 속에 잘 함축되어 있다. ‘찬란()’이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영롱하고 현란함’, ‘광채가 번쩍번쩍하고 환함’이다. ‘슬픔’은 ‘슬픈 느낌, 또는 그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슬프다고 할 때 이는 무슨 일에 낙심하여 눈물이 나거나 한숨이 나오며 마음이 아프고 괴롭다, 또는 불쌍하고 원통한 느낌이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찬란한’이라는 말이 품은 눈부시게 환한 빛과 ‘슬픔’이라는 말이 품은 무겁고 칙칙한 어둠은 잇댈 엄두가 나지 않는, 모순된 가치의 표상이다. 이는 마치 ‘밝은 어둠’이라는 말과 같다. 이 모순되고 양의적()인 세계가 동전의 앞뒤처럼 결합하여 ‘봄’을 수식한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나의 봄을 기다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읜 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꽃잎마저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뻗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느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내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직 기다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문학>(1934, 4)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영랑생가. 앞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다.

전라남도 강진에 있는 영랑생가. 앞에는 모란꽃이 피어 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떠받친 시적 구조는 모란을 중심으로 한 기대·기다림, 상실·소멸, 기대·기다림의 구조다. 이는 김영랑의 순환론적 세계 인식을 반영한 것이다. 바로 이 점 때문에 한 평론가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구조가 죽음과 재생의 순환, 완성과 파괴의 순환을 보여주고 있다고 지적한다. 모란의 피어남에 대한 시적 자아의 기대·기다림은 봄에 대한 기대·기다림과 맞닿아 있다. 아울러 모란의 떨어짐은 봄의 상실·소멸을 뜻한다. 봄의 상실은 시적 자아의 뻗쳐오르던 보람의 좌절을 가져오고, 이는 상심의 원인이 된다. 따라서 시적 자아는 봄을 여읜 설움과 섭섭함 속에서 다시 모란이 피어나기를 고대한다.

모란의 피어남에 대한 기대의 이면에는 “찬란한 슬픔의 봄”에 대한 동경과 지향이 숨어 있다. 모란이 해마다 피어난다는 것, 그리하여 떨어져 버린 지난해의 모란이 다시 피어나기까지 ‘나’의 보람은 새롭게 뻗쳐오른다는 것, 바로 이러한 까닭에 ‘나’의 기대·기다림의 시간은 찬란하다. 그러나 모란은 오래도록 피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모란은 피어나고서 이내 시들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 그리하여 모란을 매개로 하는 찬란한 봄의 누림도 끝난다는 것, 이 때문에 ‘나’는 슬프다. 모란을 통하여 절정·완성의 순간에서 곧바로 쇠퇴·파괴의 순간으로 이어지는 영원한 순환 속에 놓여 있는 삶의 의미를 투시하는 시인의 눈은 날카롭다. 모란의 피고 짐, 봄의 오고 감, 찬란함 슬픔, 밝은 어둠의 영원한 순환 속에 갇힌 인간의 숙명에 대한 긍정은 김영랑 시 세계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내 가슴 속에 가늘한 내음
애끈히 떠도는 내음
저녁해 고용히 지는 제
먼 산허리에서 슬리는 보랏빛

오! 그 수심 뜬 보랏빛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

얼결에 여읜 봄 흐르는 마음
헛되이 찾으려 허덕이는 날
뻘 위에 철석 갯물이 놓이듯
얼컥 이는 훗근한 내음
아! 훗근한 내음 내키다마는 서어한 가슴에 그늘이 도나니
수심뜨고 애끈하고 고요하기
산허리에 슬리는 저녁 보랏빛

- 김영랑, ‘가늘한 내음’, <시문학>(1930, 5)
1949년 12월 14일 서울 경회루에서의 김영랑 시인

1949년 12월 14일 서울 경회루에서의 김영랑 시인

그러나 김영랑의 많은 시편에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찬란함 밝음보다는 슬픔 어둠 쪽이다. 이러한 슬픔 어둠은 불행한 넋에서 솟구치는 심정의 등가물이다. 이는 ‘가늘한 내음’, ‘물 보면 흐르고’, ‘낮의 소란 소리’, ‘땅거미’, ‘두견’, ‘망각’ 등의 시편에서 “수심 뜬 보랏빛”, “한숨만 끝없이 떠돌던 시절”, “밤의 검은 발짓”, “고되인 넋”, “흰뜻 스러지는 것”, “잊은 봄 보랏빛의 낡은 내음”, “원한과 슬픔”, “불행의 넋”, “서럽고 쓰라림”, “비운의 겨레” 등의 표현을 얻어 구체화한다. ‘가늘한 내음’에 나오는 보랏빛은 상실의 슬픔에서 연유한 어둠의 빛깔이다. 이 보랏빛은 “한 이틀 정열에 뚝뚝 떨어진 모란의 / 깃든 향취가 이 가슴 놓고 갔을 줄이야”라는 구절에 암시되어 있듯이 모란의 떨어짐과 결부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모란의 떨어짐으로 생긴 “내가 잃은 마음의 그림자”의 빛깔이다. 모란의 찬란함은 곧 생명의 찬란함이다. 이것이 없는 삶은 텅 빈, 무의미한 삶이다. 왜냐하면 모란은 의미 있는 세계의 지평에서 피어난 생명의 상징물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떨어져 사라져버린 모란을 찾으려고 헛되이 현실 속에서 허덕이기도 한다. 왜 ‘헛되이’인가? 세상 어디에도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현실 세계 속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꿈결처럼 지나가고 마는 것이기 때문이다. 모란, 찬란한 슬픔의 봄을 상징하는 꽃, 밝은 어둠 속의 꽃, 모란은 이 모순어법 위에 서 있는 것, 부정 속의 긍정, 무의미 속의 의미, 비진정성의 세계에 둘러싸인 진정성의 삶이다. 이를 향한 동경과 이를 손에 잡지 못하는 슬픔이 뒤섞여 김영랑의 시 세계가 형성되는 것이다.

[영랑시집]을 펴내고 그는 잠깐 공백기를 가진다. 이 시기에 그는 단점으로 지적된 극단적 형식을 스스로 인식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애쓴 것으로 추측된다. 따라서 공백기 이후 1939년 <문장>에 발표한 ‘독을 차고’, <시림> 1호에 발표한 ‘전신주’, 1940년 <조광>에 발표한 ‘한줌 흙’, 1948년 8월에 발표한 ‘발짓’, 1950년 6월에 발표한 ‘오월 한’ 등에서는 다소 사회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해방 이후 그는 고향인 강진으로 가서 우익 운동에 참여하고 1949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내며 <시문학> 시절의 순수 문학 분위기에서 벗어나려는 몸짓을 보인다. 그러나 1950년 한국전쟁 때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하고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9·28 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김영랑은 길에서 포탄 파편에 맞아 숨을 거둔다.

김영랑의 연보

 
연도 내용

1903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의 지주 집안에서 태어남. 아버지 김종호와 어머니 김해 김씨 사이의 5남매 중 장남. 본명은 윤식(), 영랑은 아호.

1909

강진보통학교 입학

1916

결혼(1년 만에 사별). 어머니의 도움으로 서울 기독교청년회관에서 영어를 익힘.

1917

휘문의숙(현재의 휘문고등학교)에 입학, 선배 홍사용안석주박종화와 후배 정지용이태준등을 만남.

1919

3.1운동 당시 선언문을 감추고 강진으로 내려갔다가 발각되어 6개월 동안 옥고를 치름.

1920

일본으로 가서 아오야마학원 중등부에 입학. 박용철을 만남.

1921

성악을 전공하려 하나 아버지의 반대로 일시 귀국

1922

아오야마 학원 영문과로 적을 옮김

1923

관동대지진 때 일시 귀국 후 김귀련()과 두 번째 결혼.

1926

장녀 김애로 출생.

1928

장남 김현욱 출생.

1930

<시문학> 창간호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후에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로 제목이 바뀜)’ 등의 시 30여 편을 발표하며 정식으로 등단

1932

차남 김현국 출생.

1934

<문학> 창간호에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을 발표.

1935

박용철의 후원으로 [영랑시집] 간행(시문학사). 3남 김현철 출생.

1938

4남 김현호 출생.

1939

<문장>에 시 ‘독을 차고’, <시림>에 시 ‘전신주’ 발표.

1940

<조광>에 ‘한줌 흙’ 발표, 5남 김현도 출생.

1944

차녀 김애란 출생.

1945

해방 후 강진에서 우익 운동에 참여

1949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냄. [영랑시선] 간행.

1950

한국전쟁 때 서울에서 은거하던 중, 수복 하루 전인 9월 27일 포탄 파편에 맞고 중상을 입어 29일 운명.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

1954

망우리에 이장.

1981

시와 산문을 모은 [모란이 피기까지는](문학세계사) 간행

[네이버 지식백과] 김영랑 [金永郞] - 한국어의 시적 아름다움에 헌신한 시인
(나는 문학이다, 2009. 9. 9., 장석주, 전라남도 강진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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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산백과

김영랑

 

金永郞 ]

요약 〈모란이 피기까지는〉의 시인.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하며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을 발표하였다.
영랑 김윤식 시비

영랑 김윤식 시비

출생-사망 1903.1.16 ~ 1950
본명 윤식(允植)
활동분야 문학
출생지 전남 강진(康津)
주요저서 《영랑시집(永郞詩集)》(1935)
주요작품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본명은 윤식(允植)이다. 전라남도 강진(康津)에서 출생하였다. 부유한 지주의 가정에서 한학을 배우면서 자랐고, 1915년 강진보통학교를 졸업하였다. 이후, 결혼하였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하였다. 1917년 휘문의숙(徽文義塾)에 입학하였으며, 이 때부터 문학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고향인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였다. 이듬해에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靑山]학원에 입학하여 중학부와 영문과를 거치는 동안 크리스티나 로세티존 키츠 등의 시를 탐독하여 서정의 세계를 넓혔다. 그러다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면서 귀국하여 고향에 머물며 은거하였다. 1930년 박용철(朴龍喆)·정지용(鄭芝溶) 등과 함께 《시문학(詩文學)》 동인으로 참가하여 동지에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제야(除夜)〉 등의 서정시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시작(詩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어 《내 마음 아실 이》 《가늘한 내음》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의 서정시를 계속 발표하였고, 1935년에는 첫째 시집인 《영랑시집(永郞詩集)》을 간행하였다. 잘 다듬어진 언어로 섬세하고 영롱한 서정을 노래한 그의 시는 정지용의 감각적인 기교, 김기림(金起林)의 주지주의적 경향과는 달리 순수서정시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창씨개명(創氏改名)과 신사참배(神社參拜)를 거부하는 저항 자세를 보여주었고, 8·15광복 후에는 민족운동에 참가하는 등 자신의 시의 세계와는 달리 행동파적 일면을 지니고 있기도 하였다. 6·25전쟁 때 서울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은신하다가 파편에 맞아 사망하였다.

 
김영랑 연보
출생 1903.1.16~ 사망 1950

1903

1월 16일 전라남도 강진의 부유한 집안에서 장남으로 출생. 본명은 김윤식.

1909

강진보통학교에 입학.

1916

결혼했으나 1년 반 만에 사별함.

1917

휘문의숙에 입학.

1919

3ㆍ1운동 당시 강진에서 의거하려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6개월 간 옥고 치름.

1920

일본으로 건너가 아오야마 학원에 입학.

1923

김귀련과 재혼.

1930

<시문학> 창간호에 시 <동백잎에 빛나는 마음>, <언덕에 바로 누워>, <쓸쓸한 뫼 앞에> 등 30편 발표.

1934

<문학> 창간호에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 등 발표.

1935

첫 시집 《영랑시집》 발간.

1939

<문장>에 시 <독을 차고>, <시림>에 시 <전신주> 발표.

1945

해방 후 우익 운동에 참여.

1949

《영랑시선》 간행.

1950

한국전쟁 당시 포탄 파편에 맞아 사망. 이태원 남산 기슭에 가매장.

1954

망우리에 이장.

1981

유고시집 《모란이 피기까지는》 간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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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랑 시인의 작품 경향=

김영랑의 시의 세계


영랑은 1930년대 시문학파의 대표적 시인으로, 계몽 문학과 목적주의적 경향파의 문학에 반발하여 문학 자체의 순수성을 추구하고자 했던 시인이다. 그는 시의 음악성을 강조하고 순수 서정시, 세련된 언어 감각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그는 소월 이후 우리말 구사에 가장 뛰어난 시인으로 칭송될 정도로 섬세하고 깨끗한 서정시를 많이 발표하였다.

때로는 지나치게 개인의 내면 세계에만 빠져 역사 의식을 상실, 시어의 조탁에만 열중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으나, 우리 시를 언어나 형식면에서 한 차원 올려놓은 것은 그의 공적이기도 하다.

 


1) 영랑 시의 출발은 바로 순결성에 있다. 이러한 특징이 그의 시를 아름다운 해조와 서정주의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그 순결한 마음은 자연의 미묘한 변화와 대응되므로 분명히 파악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꽃가지의 은은한 그늘이나 봄날의 미미한 아지랑이처럼 모호한 상태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예] 돌담에 속삭이는 햇발, 내 마음을 아실 이, 오매 단풍 들것네 등

 


2) 자연을 통한 순결성의 추구는 현실 세계에 대한 추악함을 인식하는 데서 오는 경우가 많다. 이 때 자연은 현실과 대립적 위상에 놓이게 된다. 현실은 고통과 비애가 교차되는 장소로 인식되는 반면, 자연의 아름다움과 순결함은 이 모든 현실적인 것을 망각할 수 있게 해 주기도 한다.

[예] 모란이 피기까지는, 끝없는 강물이 흐르네, 독을 차고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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