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염기념관을 짓기 위해 20년째 조성 중인 제주 조촌읍 정원. 외곽으로 나무와 꽃을 심어 바람을 막고, 가운데에 연못을 만들었다. / 김두규 교수
 
김염기념관을 짓기 위해 20년째 조성 중인 제주 조촌읍 정원. 외곽으로 나무와 꽃을 심어 바람을 막고, 가운데에 연못을 만들었다. / 김두규 교수

봉준호 감독과 윤여정 배우로 대표되는 한국 영화는 이제 세계적이다. 그러나 일찍이 1930년대 중국 영화계를 제패한 한국 출신의 영화배우가 있었다. 김염(1910~1983)이 그 주인공이다. 박규원 작가의 ‘상하이 올드 데이스’(2003·민음사)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되었다.

김염은 1910년 한성(서울)에서 양의사 면허를 최초로 받은 김필순의 3남으로 태어났다. 김필순은 독립운동으로 수배를 당하자 만주로 이주한다. 의사 활동을 하던 중 그가 의문의 독살을 당하자 아들 김염의 삶은 힘들어졌다. 고생 끝에 1927년 상하이로 가서 영화계에 발을 디딘다. 1930년 ‘야초한화(野草閑花)’에서 주연을 맡으면서 일약 스타가 되었다. 1934년 상하이 영화잡지 ‘전성’에서 실시한 인기투표에서 ‘영화 황제'로 뽑혔다.

배우 김염과 그의 아내 친이를 담은 책표지.
배우 김염과 그의 아내 친이를 담은 책표지.

훗날 중국 수상 저우언라이(周恩來)는 김염과 아내 친이(秦怡)를 베이징으로 초청한 자리에서 “김염, 당신은 영화 황제이면서 동시에 우리 중국의 부마요”라고 칭찬하였다. 중국의 실력자 정치가만이 김염을 높게 평가한 것이 아니다. 2012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莫言)의 김염 평이다.

“한마디로 김염은 전기적인 인물이다. 어린 시절 독립운동의 선구자였던 부친과 친척을 따라 사해를 내 집 삼아 떠돌아다녔다. 그의 천부적 재능·경험·정의감·혁명성·진보적 면모만으로 된 것은 아니라고 본다. 어떤 신비한 힘 같은 것이 그를 도운 것이고 그 신비한 힘이란 바로 부친과 형, 독립지사들의 영혼이 아닌가 한다.”(박규원, ‘아주 특별한 올드 상하이’).

모옌은 “신비한 힘”이라고 하였지만, 박규원 작가는 그 성공 배경을 다음과 같이 분석한다. “중국의 장래를 위한 사상을 대표했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고통을 대변했으며, 외세를 배척하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려는 진보적인 젊은이상을 보여주어 1930년대 중국을 대표하는 최고 배우가 된 것이다.”

 

박규원 작가는 글을 통해서뿐만 아니라 김염의 위대함을 세상에 알리고자, 제주시 조천읍에 정원 ‘OLD SHANGHAI(올드 상하이)’를 조성하고 그 안에 김염 기념관을 계획하고 있다. 정원은 ‘까끄래기 오름’이란 산기슭에서 아래로 조용히 흘러내리는 지면의 흐름을 따라 천미천 냇가 쪽으로 경사를 이루고 있다. 지세는 좋으나 바람 많고 돌 많은 제주도 환경은 어쩔 수 없다. 또 제주에서도 가장 추운 동북쪽이고, 땅밑은 용암이 굳은 바위투성이고, 땅 위는 화산재가 퇴적된 푸석거리는 땅이라 초목이 자라지 않는 환경이다.

박규원 부부는 우선 주변에 높게 자라는 낙우송(메타세쿼이아와 비슷)·대나무·소나무를 외곽에 심어 높은 바람을 막았다. 그 안쪽에는 동백·철쭉·수국을 심어 잔바람을 막고, 땅에서 캐낸 바위들로 담장을 쌓아 낮은 바람을 막았다. 그리하여 “안으로는 생명이 자라게 하고, 밖으로는 아름다운 경관이 생기게 하였다[내기맹생외기성형·內氣萌生外氣成形]”(‘청오경’). 그리고 정원 한가운데는 연못을 조성하였다. 사방을 감싸는 산(‘오름’)→교목→관목·돌담→연못 순의 동심원 정원이다. 연못의 물[水]은 정원의 생명이다. 열악한 땅을 좋은 땅으로 만들어가는 비보(裨補) 풍수의 지혜가 돋보인다.

최근 필자가 방문한 이곳은 20년째 ‘정원 만들기’를 진행 중이란다. “사람은 40년을 살아야 그럴듯한 얼굴을 가질 수 있지만, 정원은 100년이 지나야 겨우 제 모습을 드러낸다”는 영국 격언을 인용하면서 ’100년의 정원'을 꿈꾼다고 한다.

‘정원 만들기’ 과정에서 김염의 아내 친이와 모옌이 이곳을 방문해 기념 식수를 하였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영화 황제 김염이 봉준호·윤여정과 함께 기억되기를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