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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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의 기(气)
2021년 09월 22일 15시 38분  조회:290  추천:0  작성자: 하얀 진주
수필
 
라면의 기()
 
김영분
 
 
고중을 졸업하기 바쁘게 나는 엄마가 한국회사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는 도시인 청도로 발길을 옮겼다. 현성에 있는 중학교를 다니면서 간간히 가뭄에 콩 나 듯 시내를 거쳐갔다고 말할 수 있었으나 그 시내돌이도 겨우 뻐스나 기차를 갈아타기 위해 잠시 머문 스산한 역전이 전부였다. 그런 시골뜨기인 나에게 처음으로 펼쳐진 큰 도시의 기차역은 으리으리 그 자체였다. 붐비는 사람들의 물결도 졸랑대는 시내물이 아닌 넘실대는 바다의 파도처럼 스케일이 커서 헉 소리나게 가슴에 부딪쳐 왔다.
엄마가 다니고 있는 한국회사에 처음으로 들어섰을 때, 회사란 과연 이런 곳이구나를 련발하면서 호기심이 눈에서 떨어질 정도로 이리저리 비질하며 두리번거렸다.  

한뉘 농사만 짓던 엄마가 이렇게 큰 공장에서 회사이름이 적혀있는 작업복을 입고 경비가 망을 봐주기까지 하는 튼튼하고 커다랗게 지어진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 멋졌다. 때는 점심이 퍽 지난 오후였는지라 엄마는 나를 데리고 발뼘발뼘 주방으로 가셨다. 가스렌지에 불을 붙여 빨간 플라스틱포장지를 뜯더니 뽀글뽀글한 면을 삶아 주셨다.

흐늘거리며 솟아오르는 하얀 김과 함께 주방을 가득 채우는 그 매콤한 냄새가 어찌나 얼큰하고 구수했던지 여태 보지 못했던 큰 세상을 구경하느라 배 속에서 누른하게 기죽어 있던 장기들이 꼬르륵대며 박수를 치는 것만 같았다. 꼬들한 면발이 목을 타고 넘어가자 혀로 보는 맛인지 위 속에서 퍼지는 맛인지 온몸이 그 맛을 음미하고 기억하려고 흥분에 떨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신라면이였다. 캉스푸라면이 제일 맛있는 줄 알고 기차로 오는 내내 먹기도 하고 냄새를 맡기도 하면서 달려왔는데 이처럼 맛있는 라면도 있다는 것이 놀랍기만 하였다. 그때까지 먹어본 라면 중에 제일 맛있는 라면이였다.

한창 맛나게 먹고 있는데 삐꺽하며 주방문이 열렸다. 흰 머리의 아저씨가 들어섰다. 엄마는 화들짝 놀라면서 송구스레 머리를 떨구고는 가느다란 목소리로 다른 색의 작업복을 깔끔하게 받쳐입은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이사님, 제 딸이 금방 기차로 여기에 도착해서 라면을 좀 끓여 줬어요.”
당황한 경상도 말투가 힘없이 바닥에 떨어져 불안하게 뒤척였다.
“허허. 그랬구먼. 언제부터 온다던기 이제야 왔나 보군. 아니, 라면만 먹으면 쓰겠나. 아주머니, 맛있는 거 좀 해주이소. 얘야, 마이 묵거라. 서서 먹지 말고 밥상 차려서 먹어라.”
생각밖으로 너무 소탈한 한국 아저씨였다.

나는 엄마의 그 망설임에 가슴이 찌릿했다. 몰래 라면 끓여 주다 들킨 엄마의 얼굴은 당황한 기색이 력력했다. 번듯하고 커다란 공장에서 눈치보며 묵묵히 참고 벼텨왔을 힘든 나날들을 엿보았다. 가슴이 스르르 저며왔다.
엄마는 우리 동네에서는 처음으로 울바자가 얼기설기 늘린 마을 길을 벗어나 멀리 있는 시내로 발길을 돌린 용기있는 사람이였다. 몇푼 안되는 차비만 들고 낯선 땅에 들려 소개소에 기거하면서 일자리를 찾았고 회사에서 식숙을 하였다.월급을 받아 그 돈으로 나와 동생의 학비를 벌어 뒤바라지를 하던 참이였다.
엄마는 후날 늘 되뇌이였다.

“난 청도 와서 맛있는 음식을 먹는데 집에 두고 온 자식들 생각에 목이 메여 넘어가지를 않더라. 과일도 맛있고 라면도 얼마나 맛있던지.”
말 뒤끝엔 항상 눈굽을 찍으시였다.
지금이야 도처에 널려서 어디에서나 쉽게 구할 수 있는 인스턴트 음식이고 “라면 먹고 갈래”가 썸을 타는 남녀 사이에 사랑표현의 도구로까지 쓰여지는 엽기적이고 보편적인 음식이 되였지만 아직도 나는 처음으로 신라면 먹을 때의 감탄과 행복이 교차하던 기억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나는 그 라면맛에 홀딱 반하고 허허거리며 당황한 엄마와 나를 위로해주던 아저씨의 호의에 세상의 따뜻함을 느꼈다. 급기야 한국회사에 입사해야겠다는 결심이 섰고 새로 펼쳐야 질 사회생활이 기대되기까지 하였다.
기차를 타고 오면서 근심걱정에 휩싸였었다. 처음으로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주해야 할 새로운 고민들을 상상을 했었지만 어느새 거부감과 두려움이 봄눈 녹 듯 사라지고 용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매콤한 라면맛으로 배도 든든해졌고 배짱도 두둑해졌다. 빨리 직장생활을 하고 싶어졌다. 새롭게 펼쳐질 사회생활이라는 길에서 라면 맛과 같은 행복한 일들이 많이 벌어질 것 같은 기대에 부풀었다.
하지만 마치 신라면이 맛있기만 한 것이 아니라 매운 맛도 강하 듯이 시련은 거추장스럽게 눈치없이 사계절 내내 따라다녔다. 호락호락하지 않은 현실의 벽은 높고도 견고했다. 칼칼한 억양의 산동지방말투에 귀를 도사리는 거로부터 짠 음식과 퍽퍽한 빵을 씹어 삼키는 련습도 수없이 해야 했다. 따뜻한 온돌이 없는 겨울은 집안에서도 허옇게 입김이 새여나오기도 했으며 손등이 얼어 가렵기도 했었다.

성질이 급하고 갑갑해하는 한국 상사들은 모두 소탈한 한국아저씨처럼 너그럽지도 않았다. 서투른 신입은 작은 질책에도 마음을 닫아 걸고 불평불만을 터뜨리기가 일쑤였다.
봄에는 화난 바람의 몸부림에 먼지를 된통 뒤집어쓰기도 했고 한 여름 땡볕에 녹아내릴 것 같은 아스팔트길은 멀고도 험난했다. 가을날의 향수는 또 왜 그리 서럽게 가슴팍을 파고 드는지 눈시울이 붉어지기가 일쑤였고 겨울의 시린 바람은 자주 코끝을 스쳤다.

버텨나갈 수 없을 것 같은 두려움이 발목을 잡을 때면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보다 어디로 돌아가야 할지가 몰라 더 막연했다. 담쟁이처럼 아슬아슬하게 한발짝씩 벽을 타고 오르며 더 높고 넓은 곳으로 나아가려고 항상 모진 애를 썼다.
다행히 밥상을 차려 많이 먹으라고 관심을 보이던 한국아저씨처럼 마음이 따뜻한 동행자들도 많아 같이 지혜를 나누고 힘을 합칠 수 있었다. 민들레의 끈질긴 성품을 이어받아 흩날리다 걸터앉은 자리에서 뿌리를 내리기에 도전하고 꽃과 잎을 피우기 위해 혼신의 힘을 쏟아부었다. 반토막의 중국말로 통역일을 맡아하며 회사발전에 큰 힘을 보태고 차츰 일의 요령을 터득하기 시작했다.
사람의 욕구 중에 가장 중요시되는 의식주를 해결한 뒤, 안정을 취하고 사회활동에 더 활발히 참여를 할 수 있었다. 존중받을 권리를 주장함으로써 더 겸손해지고 프로가 되기 위해 안간힘을 쏟으며 가치실현을 꿈꾸는  생활의 기반을 다졌다.

이젠 서먹하고 낯선 타향이 아니라 설 쇠러 고향에 행차를 했다가도 열흘이 지나면 바로 되돌아오고 싶어 지는 친숙한 삶의 터전으로 탈바꿈을 하였다.
봄이면 살구꽃과 사쿠라꽃이 만발하고 여름에는 더위를 날려주는 바다의 파도소리가 철썩인다. 가을에는 여름부터 더운 김을 내뿜던 나무잎들이 자지러지게 붉게 익으며 겨울은 가끔 은색단장을 한 고향을 떠올려 보라고 눈보라가 휘몰아치기도 한다.
제2의 고향에서 여전히 땀을 동이로 쏟으며 힘겹게 살아가고 있지만 모든 것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몸에 딱 맞는 옷처럼 편해졌다.
늦은 저녁시간, 티비를 보다가 촐촐해진 배를 달래며 식구들이 둘러앉아 신라면을 끓여 먹는 화면은 절대로 빼놓을 수 없는 행복한 풍경이다. 신라면 양푼 속으로 젓가락들이 이리저리 오가면 가족간의 대화도 웃음꽃으로 피여난다.
언제 먹어도 맛있고 친숙한 라면이다.

라면맛에 반해 열정을 피워올렸고 허둥지둥 힘든 줄 모르고 달려온 세월이 그 맛처럼 매콤하고 얼큰하고 구수하기만 하다. 전통의 맛을 고수하는 라면이 전세계를 종횡무진하고 있다. 우리도 신라면의 기를 받아 언제나 자기의 색갈을 잃지 않으면서도 어디에서나 씩씩하게 살아갔으면 좋겠다.

처음 먹었던 신라면이 매콤하고 얼큰한 유혹이였다면 지금 먹는 신라면은 시련 속에서 우려지고 계란까지 덤으로 받은 구수한 향수이다.

도라지2021.5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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