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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세 일본학자,연변을 못잊는 까닭은?
조글로미디어(ZOGLO) 2018년9월28일 00시00분    조회:11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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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생가 퇴마루에 앉아있는 오오무라 마스오교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 답사길에서 쓰러져도 좋다

9월22일, 연변에 반가운 일본손님이 찾아왔다.

길림신문 일본특파원 리홍매씨 부부의 안내하에 일본 와세다 대학의 명예교수이며 일본에서의 중국문학연구학자이면서 또 조선문학연구학자인 오오무라 마스오(大村益夫)교수가 86세 고령의 몸으로 연변의 답사길에 오르신것이다.

리홍매씨에 따르면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의 이번 연변행은 가족들의 만류가 심했다. 80세를 훨씬 넘긴 고령의 로인이 이국타향의 고달픈 답사길에 올랐으니 가족들의 념려도 결코 공연한것은 아니였다. 그러다가 답사길에서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고 한사코 말리는 가족앞에 오오무라 교수는 “답사길에서 쓰러져도 좋다”는 말을 남기고는 기어이 떠나셨다고 한다.

86세 고령의 일본로인에게 도대체 연변의 어떤것들이 이다지도 와보고 싶은 충동과 못견딜 유혹으로 작용했을가?

일찍 중국문학을 전공했던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전반 조선반도의 문학에 대한 연구를 거쳐 중국의 조선족문학에 이르기까지 60여년을 쉼없이 정진해오고있는 학자이다. 그는 우리 민족시인 윤동주의 사적을 발굴, 조사한 최초의 연구자인 동시에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며 중국조선족문학의 거장인 김학철선생과 작품을 일본에 널리 알렸다. 김학철 선생과는 오래된 마음의 지기요, 상호 가족들사이도 30년간의 깊은 교분을 갖고있는 가까운 사이이기도 하다.

1985년도에 연변대학에서 1년간 재외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연변과의 인연을 시작한 이후로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30년 넘게 연변 그리고 중국조선족 지성인들과 끈끈한 감정과 돈독한 우정을 쌓아갔다. 특히 오오무라교수는 겸허한 학자적 태도와 꾸준한 학문적 추구로 깊은 존경과 애대를 받고있다.

2013년 2월에 연변을 찾은적 있었던 오오무라교수는 그동안 여러가지 원인으로 연변에 와보지 못하고 있다가 가족의 만류도 물리친채 이번에 5년만인 연변행을 결심하게 된것이였다.

가장 좋아하는 시, 윤동주의 <눈감고 간다>

9월22일 오전,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윤동주시인의 장례식이 치러졌던 유서깊은 룡정자택 바로 그 앞뜰에 위치한 룡정•윤동주연구회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오오무라 교수는 자신이 집필한 《윤동주자필시고전집》 등 저서들을 룡정•윤동주연구회에 싸인 증정했다.

오오무라교수가 룡정•윤동주연구회에 저서들을 증정했다

2014년 윤동주시인의 고향인 룡정에서 발족된 룡정•윤동주연구회는 유서깊은 력사의 현장에서 윤동주시인의 문학정신과 민족정신의 고양을 위한 일련의 사업들을 활발히 펼쳐나가고 있다.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회장은 오오무라교수님은 세월의 행간에 류실될번했던 윤동주시인의 묘소를 찾아내 세상에 알리고 시인의 고향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최초의 윤동주 연구자라고 소개, 교수님이 86세 산수의 고령에도 잊지 않고 룡정을 찾아준데 대해 무한한 존경과 뜨거운 감사를 표했다.

이날 오오무라 교수는 룡정•윤동주연구회 김혁회장과 부분적 회원들의 안내하에 윤동주 생가, 명동학교 옛터, 윤동주묘소, 은진중학 옛터, 일제 간도령사관 옛터 등 곳을 일일이 돌아보았다.

오오무라교수가 명동학교에서 "윤동주"를 만나 즐겁게 웃고있다

윤동주생가에서 오오무라교수는 윤동주시인의 시 <눈감고 간다>가 새겨진 시비앞에 멈춰서 다시금 그 시를 읽어보았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감고 가거라

가진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많은 사람들은 윤동주시인의 서시를 가장 좋아하는 시로 꼽고 있지만 오오무라교수는 윤동주의 <눈감고 간다>와 <곡간>(谷间) 등 시들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했다. 오오무라교수는 서정성이 대부분이고 시인의 사상성이나 정치성이 내비치는 시들이 그리 많지 않은 윤동주의 대부분 시들에 비해 상술한 두 시는 윤동주의 사상이 비교적 잘 나타나 있다고 하면서 <눈감고 간다>는 좌절당한 사람에게도 도움이 된다는 생각에 그 시가 좋다고 말했다.

윤동주묘소 발견후 오랜만에 다시 그곳을 찾은 오오무라교수는 오래 떨어져 있던 친구를 만난듯 반갑게 묘비를 어루쓸며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다. 그리고는 묘비뒤면의 문자들을 눈빗질하다가 비문해독에서 자신의 불찰로 잘못된 판독이 있었다고 털어 놓았다.

묘비뒤면 두번째 행 우에서 네번째 글자의 及자를 反자로 잘못 알고 학술발표했던 것, 잘못된 것을 정정해두지 않으면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면서 잘못의 원인은 자신에게 있다고 겸허히 반성했으며 학술연구에서의 진실성과 엄숙성을 강조했다.

윤동주묘비에서 잘못 판독된 부분을 찾고있는 오오무라교수

윤동주묘비의 뒤쪽 밑부분의 일부 글자가 흙에 묻혀 있었는데 발굴당시에도 그렇게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고 말했다. 혹시나 하는 바램에 묘비뒤부분을 확인한 오오무라교수는 비석을 묘지에서 조금 앞으로 옮기면 비문이 묻히는 페단이 없을 것 같다고 조언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윤동주무덤이 과거보다 커지고 묘역도 확대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바람에 윤동주묘소옆의 다른 묘지들의 묘역도 일부 점용된 것 같다고 했다. 오오무라 교수는 윤동주가 자신의 커진 무덤으로 인해 주위무덤이 영향받게 된다면 분명히 슬퍼할것이라고 말했다. 윤동주가 살아생전 “한점 부끄럼없이 살기”를 원했던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였는데 죽어서도 남에게 페와 피해가 되는 일은 결코 바라지 않을것이라는 해석이였다.

이날 오오무라교수를 안내해 룡정에서의 답사코스를 마친 룡정•윤동주연구회 회장이며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김혁은 “구부정한 로구의 몸으로 윤동주의 묘소를 찾아 헌화하고 다시금 동주의 비석을 어루쓰는 오오무라선생의 뒤모습에 울컥해났다”면서 로학자에 대한 존경과 흠모의 감수를 글로 남기기도 했다.

중국조선족문학연구 “내가 좋아해서 한다”

9월23일 오후,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연변대학을 방문했다.

연변대학 가는 길목에 있는 상우호텔을 지나면서 오오무라교수는 연변에 오게 되면 이 호텔에서 항상 묵군 했다고 알려 주었다. 지금도 공원가의 4백화상점이 있는가고 묻기도 했다. 오오무라교수님을 모시러 나온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학부장 최일씨가 최삼룡선생의 아드님이라는 소개에 반색하시면서 최삼룡선생도 만나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만큼 연변에 대한 오오무라교수의 기억은 가는 곳마다 새록새록 떠올랐고 추억거리도 많은듯 했다.

연변대학에서 오오무라교수는 김웅교장의 뜨거운 환영을 받았으며 자신의 다년간의 학술연구성과들을 집대성한 오오무라저작집 시리즈 총6권을 증정했다. 김웅교장은 후학들이 오오무라교수의 연구성과와 학자의 정신을 널리 학습할수 있도록 선물한 책을 도서관에 비치하겠다고 말했다.

연변대학 김웅(오른쪽)교장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김호웅, 리광일교수의 안내로 연변대학교정을 돌아보면서 오오무라교수는 연변대학이 이전에 비해 많이 커졌다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농학원과 의학원, 예술학원 등 과거 연변대학교정밖에 있던 학교들이 모두 들어와있다는 소개를 들은후 신축된 농학원자리가 과거 군부대의 남새밭과 사양장이 있던 곳이라는 기억까지 더듬어 냈다.

1985년 4월부터, 일본 와세다대학교의 재외연구원으로 1년간 연변대학에서 연구류학하면서 밟았던 교정은 이젠 더는 옛날모습을 찾아 볼수있는 그때의 교정이 아니였다.

로기순 의학박사의 동상과 연변대학 창시자인 림민호 부교장의 동상도 첨앙했다. 고 정판룡전임교장의 문학비앞에서 그분의 덕망을 떠올리고 기념사진도 남기면서 교정을 거닐다가 연변대학도서관을 지나면서 오오무라교수는 문뜩 도서관에 혹시 1982년도 <송화강>잡지 제3기가 있는지 알아봐 달라는 부탁을 했다.

 

김호웅 리광일 등 교수들의 안내로 연변대학 교정에 세워진 정판룡문학비를 찾아

그 잡지에 실린 김학철선생의 단편소설 <담배국>을 연구차 확인 작업할 일이 있기때문이라는 것이였다. <송화강>잡지에 실린 그 소설은 오오무라교수가 1957년도에 일어로 번역한 <담배국>을 김학철선생이 다시 조선어로 번역하여 발표한 작품이라고 해서 초판작품과의 대조연구작업을 거치고 싶기때문이였다…

오오무라 교수가 돈도 안되고 명예도 바랄수 없는 중국조선족문학 연구에 집념하고 시종 관심을 가지는 리유가 무엇일가? 기자의 물음에 오오무라 교수는 간단히 “내가 좋아해서 한다”고 대답했다.

동행한 김호웅교수는 일본류학시절 오오무라교수가 술 한잔도 못하지만 식사때면 술을 좋아하는 김교수를 생각해 항상 맥주를 함께 주문시켰던 일과 가보고 싶었던 일본의 후지산구경을 시켜주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 항상 따뜻이 남을 배려해주는 분이셨다고 이야기했다.

몰라보게 달라진 연변, 연길은 별천지

오오무라교수는 5년만에 다시 연변땅을 밟았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세월이다. 그 동안의 변화에 대해 오오무라교수는 “별천지이예요” 하고 간단명료하게 대답했다. 가는 곳마다 높고 큰 새로운 고층건물들이 많이 들어섰고 도시모습도 과거보다 훨씬 밝아지고 거리를 달리는 차들도 많이 늘어 났기때문이다.

요구하신 1982년도 <송화강> 잡지에 실린 김학철의 단편소설 <담배국>을 길림신문 연변분사의 김성걸선생이 <송화강>잡지사에 직접 전화해 요구했더니 불과 몇분 안돼 위챗으로 수요되는 영상자료가 인차 건너왔다면서 이러한 것들이 바로 빠르게 발전해가고있는 중국의 놀랍고 엄청난 변화가 아닐가 하면서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김학철선생이 저보고 “멋있는 남자”라고 했어요

9월25일은 중국조선족의 저명한 작가인 김학철선생의 타계 17돐이 되는 날이다. 이날 오오무라선생은 김학철선생의 장남 김해양씨의 안내로 김학철선생의 골회를 마지막으로 띄워보낸 두만강하구를 찾았다.

“벌써 17년이 지났군요…”

김학철선생을 추모하는 오오무라선생의 눈길은 먼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동안 세월이 흐르면서 당시의 두만강은 물곬이 바뀌여 강줄기가 사라졌고 그 자리엔 수목만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었다.

김학철선생의 골회를 마지막으로 떠나보낸 두만강 하구에서

김학철선생이 운명하기 10여일전에 오오무라교수는 부인과 함께 김학철선생의 댁을 찾아갔다. 그때 김학철선생은 오오무라 교수의 손을 잡고 일어로 “이이 오도코다네” (いい男だね〜)하고 말해주었다고 한다. 그 말의 뜻은 멋있고 잘 생긴 남자라는데 있지만 오오무라선생은 자신은 미남하고는 거리가 멀다면서 쑥스러워했다.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 30년 넘는 세월을 마음의 지기로 지내오면서 김학철선생이 운명직전 오오무라교수의 인간됨과 학술연구에 대한 최고의 긍정이고 칭찬이지 않았을가 싶다.

오오무라교수는 김학철선생의 작품을 일어로 번역하는 작업을 계속하겠다고 말했다.

연변에 다시 또 오겠습니다

9월25일 오후 연변작가협회 사무실에서는 화기애애한 장면들이 펼쳐졌다.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 친분이 있는 연변의 지성인들이 모여 따뜻한 환영식과 함께 즐거운 옛추억을 곁들인 좌담회를 조직했던것이다.

소설가 림원춘선생은 오오무라교수님과 33년 지기라고 하면서 그동안 교수님이 우리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해 로심초사하면서 우리가 할수 없는 일을 했고 우리들에게 큰 재부가 되는 일을 했다면서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소설가 리혜선씨는 오오무라선생이 1991년도에 자신들이 조직한 문화연구회에 일본돈 3만엔을 지원한적 있는데 그 돈을 경비삼아 연구회가 3개조로 나누어 연변각지 답사길에 나서면서 많은 성과들을 남겼다고 말했다.

리혜선씨는 그때 답사길에 나섰던 류연산, 최홍일, 우광훈, 리광일 등 많은 작가들이 그후 창작과 연구에서 모두 큰 성과들을 따낼수있게 된 것은 오오무라교수님의 사심없는 지원이 최초의 씨앗으로 되였기때문이라고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정작 경비를 지원했던 사실을 오오무라교수는 벌써 까맣게 잊고 있었다.

정세봉작가는 당시 오오무라교수님이 농촌에 있는 작가집에 왔다가 식당에서 배달해온 료리는 안 드시고 집에서 삶은 풋옥수수를 허물없이 잡수시던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최홍일, 최삼룡, 조성희, 한석윤 등 지성인들도 오오무라 마스오교수와의 잊지 못할 추억이거나 받았던 영향 혹은 소감들을 이야기하면서 즐거운 분위기속에서 웃음꽃을 피웠다.

보고싶던 얼굴과 오랜 지기들과 함께 있어서연지 원래 말수가 적으신 오우무라교수님이였지만 얼굴에 화색이 돌고 즐거워하셨다.

연변작가협회에서 좌담회를 마치고 남긴 기념사진

이번 걸음에 오오무라 마스오교수는 자신이 일어로 번역해서 출간한 중국조선족단편소설집 <시카고 복만이>를 여러권 가지고 왔다. 단편집에 올라있는 조선족작가들에게 기념으로 선물하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세월이 이미 많이 흘렀다. 단편집에 올라있는 김성휘, 김학철, 박은, 류원무, 리홍규… 등 적잖은 작가들이 이미 타계했고 책도 선물할수 없게 되였다.

서글픈 마음에 잠시 침묵하는 오오무라교수에게 림원춘선생이 “오오무라 교수님을 만나 너무 기쁘고 이제 다시 볼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말하자 오오무라 교수는 “래년에 다시 오겠다”고 웃으면서 답했다.

최삼룡선생도 오오무라교수에게 “몇년전에 연변에 왔다가 돌아가실 때 그번이 마지막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번에 다시 만나게 되여 매우 반갑다”면서 “교수님이 래년에도 다시 오겠다고 하니 진심으로 래년에도 볼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오오무라 교수는 “또 오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길림신문 안상근기자 리홍매 일본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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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0-05-20
  • 학과도 원래의 보병과, 정치과, 특과로부터 퇀정위훈련반, 상급간부대(上级干部队), 사호대(司号队), 측량반 등으로 늘어났으며 학생양성방향도 홍군의 중고급 군정간부 양성으로 잡고 홍색수도 서금 위수과업도 맡아나섰다. 학교시설과 규모가 크게 늘어남에 따라 관련 인재들도 많이 수요되였다.   홍군학교의 이 같...
  • 2020-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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