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복동전투가 벌어졌던 우복동 4중촌. 오늘의 화룡시 남평진 고산촌의 한 마을. (2019년 9월 17일 현지촬영)
1
1933년 3월, 화룡현유격대는 3개 중대를 가진 현유격대대로 발전하였다. 투쟁의 시련을 거친 현위 산하 삼도구유격대 출신 차룡덕은 현유격대대 첫 정위로 임명되였다.그해 5월경에 일본군과 위만군 ‘련합토벌대’가 어랑촌근거지에 대한 제3차 ‘토벌’을 시작하자 차룡덕은 대대장 장승환과 의견을 나누고 근거지 본부에서 물러나 유격전을 벌릴 제의를 내놓았다.
중공화룡현위 군사부에서는 이 제의를 받아들이였다. 차룡덕과 장승환은 유격대를 동원하여 근거지 인민들을 안전지대로 전이시키고 토벌대를 이리지리 끌고 다니며 력량을 분산시켰다. 반일부대ㅡ항일구국군도 반 ‘토벌’에 나섰다. 결과 100여명의 일본수비대놈들이 차룡덕, 장승환이 지휘한 토성포전투에서 된 불을 맞았다. 20~30명 수비대가 죽어자빠졌다. 적들은 근거지에서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
항일무장투쟁을 앙양시키자면 근거지방어전만으로는 부족했다. 적들을 효과적으로 타격하며 계속되는 ‘토벌’을 분쇄하기 위하여 차룡덕은 주동적으로 적의 배후에 출격할 방안을 내놓았다. 이에 따라 화룡현유격대는 1933년 봄과 여름철에 두갈래로 나뉘여 적후에 출격하였다. 장승환 대대장이 20여명 대원들을 이끌고 개산툰구, 달라자구 일대에서 활동하고 차룡덕은 8명 유격대를 이끌어 삼도구일대에 진출하였다.
적시적인 움직이였다. 이에 앞선 이해초 화룡현 삼도구 우복동의 적후투쟁은 자못 어려운 처지였다. 삼도구 주둔 일제수비대의 ‘토벌’이 계속되고 류동, 청산 등 무장자위단이 창궐하게 횡행한 데서 우복동에서 활동하고 있던 삼도구위와 구위 산하 여러 혁명단체, 우복동당지부의 골간들은 등산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낮에는 산속 생활이요, 밤에는 하산생활이라 그 고생이 말이 아니였다.
그럴 때 차룡덕 정위가 거느린 화룡현유격대대 소부대가 삼도구 경내에 진출했으니 금상첨화요, 가물에 단비 격이였다. 때는 그해 1933년 음력 5월 18일 (양력 6월 10일) 밤을 가리킨다. 이날 밤 차룡덕 정위는 강위룡, 남창수, 최승권, 김창선, 김수원, 김정옥, 맑스머리(녀전사) 등 8명 소부대를 이끌고 짙은 어둠 속 산발을 헤치며 우복동 4중촌에 숨어들었다. 소부대와 동행한 100여명 항일구국군은 사중촌에서 남으로 몇리 떨어진 우복동어구의 2중촌 류통사의 작은 댁을 중심으로 거처를 정하였다.
우복동 4중촌은 서쪽골 막바지 작은 산아래 자리잡은 산간마을로서 10여세대의 조선이주민들이 띠염띠염 흩어져 살고 있었다. 음력 5월 19일 새날을 잡아 4중촌 산재부락에 이른 9명 유격대원들은 김창복과 동수홍, 아동단원 김련옥 등 집에 나뉘여 식사를 하고 두 집에 나누어 들었다. 지방적위대에서 동북쪽의 우심산에 바깥보초를 세우고 유격대에서 복판집 지붕 우에 문전보초를 세워 유격대원들은 시름놓고 꿈나라에 들 수 있었다.
2
새날 음력 5월 19일 아침에 마을의 아동단원 리복동이 제 또래 아동단원 김련옥의 집을 찾더니 김련옥을 밖에 불러냈다.
“련옥아, 적위대에서 우리 둘한테 뒤산에 가서 무엇이 오는가고 살피라고 하였어.”
“그래?!”
두 소녀는 조용히 주고받으며 뒤산언덕으로 치달았다. 헌데 집에서 100메터도 못가서 산등성이로부터 갑자기 총알이 날아 내려올 줄이야. 련옥이와 복동이는 더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서다가 산아래 김창복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 집에는 차룡덕, 김수원 등 여러 유격대원들 외에도 김련옥, 리복동, 림하춘 등 아동단원들과 김창복의 집식구들이 그대로 있었다.
후에야 안 일이지만, 음력 5월 18일 밤에 우심산일대 대지주 류통사무장자위단 10명이 부단장의 인솔하에 바깥에 나섰다가 우복동 서산치기에서 길가에 어지럽게 난 발자국을 발견하였다. 이자들은 발자국을 따라 4중촌부근에 이르렀는데 정찰결과 과연 항일유격대가 4중촌에 머무르고 있었다. 자위단 부단장은 워낙 우복동에서 살았던 진목수를 급히 류통사한테로 보내여 급보를 전하게 하였다.
류통사는 이 급보를 다시 전화로 삼도구주둔 일본수비대에 알리였다. 살기등등한 일본수비대 학강 대장(쯔루오까)은 저들 수비대와 경찰들, 지방자위단 놈들이 약간 섞인 100여명을 여러 대의 자동차에 앉혀가지고 와서 4중촌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다. 우복동의 바깥보초가 잠간 잠들다가 적들에 의해 피살되는 바람에 마을에 세운 유격대의 보초는 적들을 미처 발견하지 못하였다.
때는 오전 10시경이였다. 두집 조선인농가에 나뉘여 주숙하던 9명 유격대원들은 적들의 첩첩한 포위 속에 들었다. 항일구국군 부대는 4중촌에서 몇리 밖에 있는 2중촌 류통사의 작은 댁을 중심으로 거처한데서 지원을 바랄 수도 없었다. 사태가 갑자기 험악한 분위기로 변하자 차룡덕 정위는 자기의 총소리가 울리기 전에는 절대 경거망동하거나 움직이지 말라고 엄명을 내리고는 반드시 철환을 아끼여 한발에 한놈씩 어김없이 쓸어눕혀야 한다면서 그것도 기관총수거나 칼, 기를 든 놈을 쏘아야 한다고 지시를 주었다. 그리고는 이럴 때일수록 든든히 먹어야 싸울수 있다면서 장사기를 화로불우에 올려놓고 장을 끓이며 자기부터 밥을 푹푹 퍼서 먹었다.
이윽고 적들은 유격대가 든 두 귀틀집에 대고 기관총소사를 시작하였다. 차룡덕은 김창복의 집안에서 유격대원들을 진정시키며 용감하라고 웨치였다. 적들이 기관총 여러정으로 두층 세층으로 쏘아대니 벽은 삽시간에 채발처럼 구멍이 숭숭했다. 그래도 차룡덕은 반격하지 못하게 하고 집안군중들을 부엌바닥에 엎드리게 한다음 구들돌을 몽땅 뜯어 벽쪽에 대게 하였다. 유격대원들이 구들고래에 음페하니 잠시 전보다는 훨씬 안전한 편이였다.
그사이 적들은 한치한치 기여들었다. 벌써 100메터 이내에까지 접근하였다. 80메터, 70메터 그래도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긴장한 침묵이였다. 어느덧 선두에 선 놈들이 50메터 가까이에까지 기여들었다.
3
“땅, 땅!”
드디여 반격을 알리는 차룡덕의 총성이 울리였다. 그 소리와 함께 첫 두방에 기를 든 놈과 군도를 든 놈이 단꺼번에 거꾸러졌다. 여러 자루의 총이 동시에 울렸다. 유격대의 집중사격에 첫 기관총수와 두번째 기관총수가 련이어 거꾸러지고 앞장선 놈들이 밑둥 잘린 통나무꼴이 되여 푹푹 꼬꾸라졌다. 어떤 놈은 뺑소니 치다가 제편의 총에 맞아 뻐드러지군 하였다. 싸창 들고 달려들던 놈, 군도를 빼들고 오던 놈, 담가를 들고 시체 가지러 들어오던 놈들이 멸적의 명중탄을 면치 못하였다.
하지만 치렬한 전투 속에서 우리측에도 부상자들이 늘어갔다. 유격대의 완강한 반격에 겁을 먹은 적들은 전술을 잠식 공격으로 바꾸어 한집한집 불을 지르며 포위전을 조이였다. 마을 동쪽가에 자리잡은 림하춘의 집도 그렇게 불의 세례를 받았다. 놈들은 이미 격사된 아동단원 림하춘의 부친을 그대로 태워버렸다. 그집에 가서 형편을 알아보던 동수홍의 부친은 밖에 나와서 뛰다가 부상을 당하였다.
부상당한 사람들은 동수홍의 부친뿐이 아니였다. 김창복의 집에 숨었던 김창복과 김련옥, 림하춘 두 아동단원이 또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그러나 우리 당과 공청단의 지도에서 자란 아동단원들은 만만치가 않았다. 김련옥은 적탄에 복부를 맞아 넘어지면서도 용감히 소리질렀다.
“유격대아저씨, 저는 총에 맞아도 괜찮으니 놈들을 빨리 다 죽여주세요!”
“놈들을 빨리 다 죽여달라!”
아동단원의 웨침소리는 유격대원들을 크게 고무하였다. 어디에서 생기는 힘일가, 유격대원들은 결사전을 각오하였다. 어느결에 차룡덕도 다리에 부상을 입었지만 언제 상처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벌써 몇차례 적의 진공을 격퇴하였다. 전투는 각일각 치렬하였다. 탄알이 떨어져갔다. 차룡덕은 탄알을 아끼라고 거듭 분부하였다. 그때이다. 머리에 쓴 모자에다가 붉은 줄을 띄운 일본놈 학강 대장이 저만치 나무 뒤에서 군도를 휘두르면서 “도쯔께끼!”를 불렀다. 그 시각에 저들 기관총수가 또 쓰러지자 당황해난 학강 대장은 제딴에 엎드려 기관총을 쏘기 시작하였다. 분노한 김창선 유격대원은 13식 보총으로 학강 대장놈을 한방에 쏘아넘기였다.
우복동 태생인 유격대원 김수원은 적장이 꺼꾸러지는 것을 보고 흥이나 벌컥 일어서다가 날아오는 적탄에 치명상을 입었다. 목숨이 경각에 다달은 순간에 김수원은 다리에 쳤던 각반을 풀면서 자기 총과 같이 잘 보관해달라고 신신당부하고서야 눈을 감았다. 김수원 오빠의 비장한 최후는 김창복 집안의 김련옥 등 아동단원들을 심히 감동시켰다. 아동단원들은 우복동 아동단조직의 창시자와 조직자의 한사람인 김수원 오빠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김수원은 우복동 2중촌에서 김도여의 맏아들로 태여났다. 1930년 봄에 본격적인 혁명활동을 시작할 때는 20대의 끌끌한 젊은이였다. 이해 봄에 김수원은 마을의 선진청년들과 함께 우봉동에 첫 아동단조직을 내오고 아동단 지도자로 나섰다. 첫패의 아동단원들로는 김련옥, 김분선, 리도익, 김대원 등 6명이였는데 리도익이 아동단 단장을 맡았다.
4
김수원을 책임자로 하는 우복동의 공청단조직에서는 아동단원들은 일제놈들과 지주, 자본가를 타도하기 위해서는 글을 배워야 한다면서 해당 교양을 앞세웠다. 아동단조직의 주요임무는 학습과 보초였다. 아동단에서는 또 아동연예대를 조직하여 산속의 유격대와 구국군부대를 찾아 무대를 꾸며놓고 위문공연을 조직하군 하였다. 1931년 1월에 우복동당지부가 조직되자 김수원은 공산당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때가 어제 같은데 어언 2~3년이 훌쩍 지났다. 그 나날의 아동단 지도자 김수원 오빠는 1932년 12월에 신생한 현유격대에 참가하더니 오늘은 적탄에 쓰러지면서도 훌륭한 본을 보여주었다. 이에 고무된 김련옥과 림하춘은 유격대원들에게 영향을 끼친다면서 신음소리 한마디 내지 않았다.
그날 해질녘에 적들은 적장 학강 대장 등10여명 살상자를 내고 끝내 물러섰다. 우리측에서는 군중들까지 김수원, 림하춘 부친 등 3명의 희생과 수명의 부상자를 냈을 뿐이였다. 주인집 김창복과 아동단원 김련옥, 리창림의 안해 등 셋은 조직의 배려로 산속에 들어가 치료를 받았다. 리창림의 모친이 그들 세 부상병을 돌보았는데 리창림의 안해는 치료과정에 불행히 숨을 거두었다. 김창복과 김련옥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그해 1933년 8월 초순에 아동단원 김련옥이 집에 돌아왔다. 그제야 그는 우복동전투가 벌어졌던 바로 그날 마을의 동수홍의 안해가 조직에서 주는 과업을 맡고 로친옷차림에 머리를 얹은 다음 싸움장소로 정찰을 갔다가 적탄에 맞아 희생되였다는 것을 알았다. 이름을 모르기 때문에 동수홍의 안해라고 할 수밖에 없지만 이 녀성은 키가 작은편이여도 혁명활동에는 남달리 열성적이다. 야밤삼경이라도 일이 있으면 밖으로 내달렸고 며칠씩 나가있는 일은 비일비재였다.
그만큼 이 녀성ㅡ동수홍의 안해는 우복동 4중촌 마을의 부녀회 책임자로서 부녀회원들을 이끌어 구위간부와 망명해온 동무들의 식사를 등한시하지 않았고 그들의 옷을 자주 빨아주군 하였다. 그 표현으로 보아 중공당원으로 짐작되지만 밝혀지는 자료가 보이지 않는다. 이 녀성의 남편 동수홍은 1934년 음력설 이튿날 사망되였다. 공산당원이고 혁명자인 그는 1933년 섣달그믐날 저녁에 차창자분주소에 끌려가서 죽도록 얻어맞았다. 그래도 그는 견결하기만 했다. 그가 거의 죽게 되니 집에 알린 모양이다.
김련옥은 두 주먹을 꼬옥 틀어쥐였다. 그는 우복동 전투의 직접적인 목격자이고 우복동 전투가 벌어진 날은 1933년 음력 5월 19일(양력 6월 11일)이였다. 유명한 우복동 전투에서 화룡현 유격대대 정위 차룡덕 등 9명 유격대원들은 일본군 지휘관 학강과 10여명 놈들을 쓰러눕힌 전과를 올리였다. 이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된 불리한 상황에서 적들을 소멸한, 어랑촌 13용사 전투에 이은 또 하나의 빛나는 승리였다.
연변일보
파일 [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