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봄 춘경순회공연
1
1934년 3월초 최음파가 의무음악교원으로 활동하는 람삼단은 쏘베트극단으로 개편된 후 중앙쏘베트극단의 이름으로 중앙혁명근거지내 흥국현과 회창현의 매갱, 서강, 락강, 장부, 주란부, 회창, 답강, 무양(梅坑-西江-洛江-庄埠-朱蓝埠-会昌-踏冈-武阳) 등지를 돌면서 춘경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홍색중화》보는 쏘베트극단의 이 거동에 대해 높이 평가하면서 즉각 뉴스를 내보냈다.
쏘베트극단(즉 이전의 람삼단)은 최근 몇개월 중앙기관소재지에 머물면서 군중들과 그리 접촉하지 않았다. 지금 그들은 해방되였다... 특히 어제(7일) 새로운 활보극, 연극 등을 많이 준비해 각지 춘경운동과 ‘3.8’공연에 나섰다.
뉴스가 일컫는 '해방되였다'는 초롱에 갇힌 새처럼 한때 서금과 그 일대에서만 활동하던 문예단체가 다시 근거지 각지로 진출하게 되였음을 말해준다. 이는 구추백의 과단하고 신속한 사업작풍과 문예가 대중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문예방향의 실제 체현으로 된다. 홍군부대로, 홍군병원으로, 농촌으로의 순회공연이 바로 그러하다. 최음파는 이 춘경순회공연의 음악교원이고 문예일군이였다.
춘경순회공연의 첫 공연지는 후일 홍군장정 출발의 첫 산으로 불리우는 운석산에 위치한 매갱촌, 오늘의 서금시 운석산향 매갱촌이고 그 다음 공연지가 서금 서부, 회창 북부의 서강이다. 1934년 5월 1일자 《홍색중화》보는 서강을 중앙혁명근거지의 한개 현을 이룬 서강현으로 적고 있지만 오늘의 서강은 서강진으로서 서금, 우도, 회창 3개 현을 이어주는 교통요지로 되고 있다.
중앙쏘베트극단은 리백소가 이끄는 로농극사 본사 산하 극단이다. 중앙쏘베트극단은 3개 현 교통요지로 되여있는 서강에서 5일간 머무르면서 4회의 밤공연을 성공적으로 펼치였다. 로농극사와 극단의 작곡가인 최음파는 악대지휘와 바이올린 반주, 독주로 누구보다 바삐 돌아쳐야 했다. 그러면서도 서강에서 공연한 연극프로가 매갱에서의 첫 공연보다 훨씬 낫다고 하니 최음파는 기분이 둥둥 뜨는 것 같았다. 더우기 춘경운동을 표현한 <춘경운동가> 등 노래와 무용, 연극 종목들이 관중으로 나선 로농대중의 환영과 호평을 받으니 더구나 그러하다.
<춘경운동가>의 가사는 이러하다.
춘경운동 전쟁을 도운다
동지들아 모두다 떨쳐나서자
두할의 수확으로
5만섬의 황무지 없애자
5만섬의 면화를 심어가자
흥국현위 선전부에서 편집한 《쏘베트구역 가곡집》에 <춘경운동가>가 실려있다. 그러나 이 가곡집은 <국제가> 외 다른 노래들은 모두가 작사자와 작곡자가 밝혀지지 않아 가사와 곡이 그대로 나타나도 누구의 작사이고 작곡인가를 알 수 없다. 최음파가 그번 1934년 봄 춘경순회공연에 참가한 데서 십중팔구는 최음파의 작곡이 아니면 편곡이겠지만 그렇다고 찍어말하기 어려워 안타깝기만 하다.
2
《쏘베트구역 가곡집》에는 그번 춘경순회공연에서 널리 불리여진 <올해 춘경> 노래도 실리였다. 4분의 2박자에 3절로 된 가사를 보기로 하자.
춘경시절이 왔다
아버지 형님 밭으로 가네
올해 춘경 빨리여
힘을 합쳐 적을 때려부시세
영용한 홍군 전선에서
적들을 여지없이 쓰러눕히네
올해 춘경 요긴하니
홍군밭뙈기 먼저 붙히세
촌마다 둼무지 만들어
비료 100근 더 내세나
올해 춘경 힘다해
수확고 두할로 늘이세
<올해 춘경>도 작사, 작곡자를 알 수 없다. 이 노래의 작곡이나 편곡 둘중 하나는 최음파의 노력이 깃들어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서강의 군중들이 춘경운동의 노래와 춤을 보다 좋아하면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니 최음파는 기분이 둥둥 뜨지 않을 수 없었다.
서강 순회공연 프로들을 보면 자체로 준비한 춘경운동 필수종목 외 모두가 군중생활의 실제자료에 따라 극단의 집체 창작과 연구를 거쳐 이루어졌다. 이 집체창작 속에는 조선인 최음파도 들어있었으니 그들 극단 주요일군들은 원유의 토대 우에서 서강의 실제와 어울리는 종목을 무대에 올릴 수 있었다. 군중들은 당연히 즐겨보면서 “홍군가속을 우대하는 종목들은 잘 꾸미였다. 춘경가도 너무 듣기가 좋다. 배웠으면 좋겠다”고 말하였다.
최음파를 망라한 중앙쏘베트극단 배우들은 시간만 있으면 <춘경운동가> 노래보급에 여념 없었다. 이렇게 하나가 열을 배워주고 열이 백을 배워주니 서강의 군중들은 너나없이 <춘경운동가>를 부를 줄 알았다. 하기에 중공흥국현위선전부에서 일찍 1958년 11월에 <국제가>까지 수집한 34수의 가곡으로 <쏘베트구역 가곡>집을 펴낼 때 류재영(刘才英)이라는 녀성은 혼자서 <춘경운동가> 등 7수의 노래를 불렀다. 흥국현 문화관에서 류재영이 부른 노래를 기보하니 최음파 관련 <춘경운동가> 등 당년의 노래들이 다시 해빛을 보게 되였다.
서강에서의 순회공연이 한창일 때 공연장은 번마다 당지의 남녀로소들로 초만원이였다. 사람들은 밤이면 여기저기서 홰불을 들고 모여들었으며 어린이들은 어른들이 앉을 걸상을 들고 나섰다. 가장 멀리로는 15리, 20리길 밖에서 모여들었다. 그들은 공연시간을 어길가봐 공연 전에 북과 징을 울리고 장날같은 때는 대낮에 공연할 것 등을 건의하기까지 하였다.
3
대낮에 공연하던 그날은 어딜 보나 명절기분으로 넘치였다. 이 때의 공연을 두고 중앙쏘베트극단 책임자인 리백소는 과려(戈丽)라는 필명으로 《홍색중화》보에 <쏘베트극단 춘경순회공연기사(纪事)>란 한편의 글을 실었다.
매번 극단 공연시 언제나 비빌틈 하나 없었다. 늙은이, 어린이, 남자, 녀자 모두가 밤이면 홰불을 들고 어린 것이 어른의 걸상을 들고 끼리끼리 모여들었다. 가장 먼 사람은 15리나 20리 길이 되였다. 그들은 우리가 들썽하지 않을가봐 또 늦어서 다 보지 못할가봐 우리더러 공연 전에 북과 징을 울려달라고 제의하였다. 또 “낮에도 공연하는 것이 좋다”고 하여 우리는 그들의 요구를 완전히 받아들이였다. 장날이면 낮에도 공연하였다. 장날에 공연할 때면 전야의 소로길에는 새옷을 갈아입은 한패 또 한패의 부녀들이 나타났고 어떤 부녀들은 길다란 꽃신까지 받쳐신었다. 녀자애들은 붉은 댕기를 곱게 드리웠다. 아이를 안은 사람, 지팽이를 든 사람 그야말로 흥성흥성하였다. 여보게들, 중앙서 온 문명대극을 보러 갑세. 볼 만하다이!
리백소가 《홍색중화》보에 실은 기사이다. 이 기사로부터 우리는 그 시절 최음파 소속 중앙쏘베트극단의 춘경현지공연이 얼마나 들끓었는가를 헤아릴 수 있다. 근거지 농촌사람들이 그토록 중앙쏘베트극단의 공연을 열망한 것은 그들이 공연한 종목들이 군중들의 실생활과 정서, 요구를 군중들이 즐기는 형식으로 잘 반영한 것과 갈라놓을 수 없다. <춘경운동가> 등 노래와 춤들이 그러하고 《게으른 아줌마 춘경에 게으르다》, 《족발녀인 생산로동에 적극 참가하다》, 《부농로파 민며느리를 학대하다》, 《글 모르는 해로움》, 《간상배 부농 쏘베트경제를 해치다》, 《그들 꼬임에 들다》 등 연극과 활보극(活报)들이 그러했다.
종목마다 너무도 생동하고 교양가치가 컸다. 연극과 활보극이 끝난 후에도 관중들은 “더, 더” 소리치기가 일쑤였다. 극단의 동지들은 새로운 즉흥표편으로 관중의 요구에 만족을 주어야 했다. 공연이 끝난 뒤에도 관중들은 헤여질 념을 안하고 술상에 모여앉지 않으면 차집이나 음식점에 모여앉아 간식을 하거나 차를 마시였다. 그러다가도 극단의 배우들이 지날 때면 연극분장과 연극효과가 일품이라며 엄지를 내들었다.
서강에서의 공연은 말 그대로 진짜 대성황을 이루었다. 1934년 5월 1일자 《홍색중화》보 4면에 실린 <순회극단통신ㅡ중앙쏘베트극단 최근 서강에서의 성과>가 이 대성황을 잘 알리고 있다. 《홍색중화》보 기사에 따르면 중앙쏘베트극단의 공연을 본 부녀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춘경운동에 우리 부녀들이 적극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아들애는 탁아소에 맡기면 된다. 게으른 부녀들은 극에서 나오는 것처럼 저마다 춘경에 떨쳐 나서야 한다.
서강현의 기관간부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이번 극단의 공연은 우리의 사업에 매우 큰 도움으로 되고 있다.
4
근거지 부녀들과 기관간부들의 호평은 공연의 성공을 말해주고도 남음이 있다. 중앙쏘베트극단의 공연 성과에 고무된 군중들은 서강에도 극단을 세울 것을 서강현정부에 요구하면서 고구마 등 10여개 담(担,한개 담은 100근임)을 모아 극단에 보내왔다. 군중들은 극단의 공연 부족에 대해서도 묵과하지 않았다. 그들은 극단의 표현이 선동성이 비교적 약하고 그다지 뜨겁지 않으며 연극의 내용에서 해설이 제대로 따르지 못하여 어떤 사람들은 잘 리해하지 못한다고 비평하기도 하였다. 최음파는 극단의 동지들과 함께 군중의 비평을 귀담아들으며 당지 군중생활의 신선한 자료들로 노래와 극본의 편곡을 보다 충실히 하기에 최선을 다하였다.
료녕신문
이미지를 클릭하면 다음이미지가 보여집니다.
1 /
[필수입력] 닉네임
[필수입력] 인증코드 왼쪽 박스안에 표시된 수자를 정확히 입력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