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같은 노력을 거쳐 1934년에 이르러 로농극사 분사와 지사기구는 중앙혁명근거지 각지에 우후죽순처럼 조직되여 자못 활기를 띠였다. 《홍색중화》보 제83기에 따르면 1933년 5월 설립된 흥국, 박생, 우도, 정주 등 7개 분사에 소속된 사원은 1100여명에 달하였다. 1933년 5월 19일과 20일, 모택동주석이 서금 무양에서 소집한 춘경생산운동 기발수여대회에서 석수, 무양, 룡강, 라석 등 4개 향 구락부들에서 대회 참가 대표들을 위해 두번의 만회를 거쳐10여부의 연극을 성공적으로 공연하였다(강서문예사료 3, 내부자료, 1988년 8월 제1판, 제38페지). 이런 현상은 로농극사 총사 지도를 통한 각지 분사와 지사들의 한결같은 노력의 결과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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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운동에서 연극의 성공 여부를 알리는 중심고리는 극본의 성공 여하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부의 극본이 연극으로 번져지며 무대공연으로 이어지자면 노래편곡과 삽곡, 악기 반주 등이 따라야 하니 이는 꼭 거쳐야만 하는 연극활동의 절차로 되였다. 이 절차의 중심에 서서 지휘하는 사람이 다름 아닌 최음파였다. 그 때의 반주악기라야 피리, 얼후, 하모니카, 바이올린 등이라지만 이 모두를 통일지휘하며 무대에 오르기까지 최음파는 할 일이 많고 많았다.
이 같이 연극운동은 반드시 극본들이 선행하여야 하는바 로농극사 본사를 중심으로 하는 중앙혁명근거지의 연극 극본들은 자체의 뚜렷한 특징을 지내였다(강서문예사료 3, 내부자료, 1988년 8월 제1판, 제30-40페지).
첫째가 선명한 정치성이다.
그 시절 근거지에서 창작된 극본들은 모두 선명한 정치목적을 가지고 당의 정치로선을 위하여 봉사함을 첫자리에 놓았다. 1933년 2월 8일, 중공쏘베트구역중앙국은 '100만의 강철같은 홍군을 창조하자(创造一百万铁的红军)'는 과업을 내놓았다. 이에 최음파 소속 홍군학교에서는 전후 반달 밖에 되지 않은 2월 23일, 쏘련홍군 창립 15돐을 경축하는 기념대회에 《100만의 강철같은 홍군을 확대(扩大一百万铁的红军)》란 새 연극을 공연하기에 이르렀다(《홍색중화》제56기에서).
둘째는 강렬한 전투성.
1934년 5월 8일, 로농극사 본사에서 공연한 《유린(蹂躏)》, 《여하를 막론하고 승리하여야 한다(无论如何要胜利)》 등 두부의 극본이 강렬한 전투성을 지닌 극본이라 할 수 있다. 《홍색중화》보 제192기는 이 두부의 극본에 표현된 “극히 긴장한 장면, 비장한 묘사는 무대아래 관중들로 하여금 성나 부르짖으면서 자연스레 ‘파쑈 백색공포를 반대하자!’, ‘무장하여 선전으로 나가자!’(武装上前线去)를 부르게 하였다”고 기사화하였다.
셋째는 극의 진실성.
근거지 중앙인쇄공장 로농극사 분사에서 공연한 연극은 “극본의 재료가 공장의 생활이기에 그들의 표현은 아주 자연스럽고 아주 진실과 가까왔다. 공연효과도 좋았다(《홍색중화》보 제189기에서). 《청년실화(青年实话)》 제111기는 “조정현(兆征县) 동파구(东陂区)극단은 홍군확대운동 가운데서 구내 일부 향간부들이 청년들을 이끌어 참군하면서 전방에서 백군사장을 붙잡은 진실한 이야기로 극본을 만들어 공연하니 홍군확대효과가 뚜렷하였다”고 기사화하면서 극본의 진실성을 강조하였다.
넷째는 명확한 겨냥성(针对性).
1933년 1월초, 홍군은 금계의 황사도(金溪黄狮渡)와 호만(浒湾) 등지에서 국민당 제14사, 17사, 25사, 27사의 3000여명 장병들을 생포하였다. 황사도와 호만은 오늘의 강서 길안지구로서 홍3군단과 홍22군이 벌인 한차례 전역을 가리킨다. 홍군부대에서는 국민당장병들을 동원하여 홍군에 가입시키기 위하여 포로한 장병대표들로 참관단을 조직하여 홍색수도 서금을 참관하도록 하였다. 2월 27일 이들 대표단이 서금에 이르자 그날 저녁으로 로농극사는 그들 참관단을 위하여 창작한 연극 《출로》를 공연하였다. 연극은 국민당 장병들에게 오직 폭동을 일으켜 홍군에 가입하는 것만이 그들의 출로라고 가리켜 강렬한 공명을 자아냈다.
다섯째는 대사의 통속성.
중앙혁명근거지에서 창작된 극본은 모두 통속성을 가지며 군중들의 일상생활중 언어로 창작되기에 군중들은 대사를 들으면 인차 그 뜻을 리해하게 된다. 하기에 식자를 모르는 근거지의 농촌부녀들은 관련 연극을 본 후 로농극사 배우들을 보면서 “당신들은 극을 잘 꾸몄다. 머리도 있고 꼬리도 있어 우리 부녀들이 보아도 모두 알 수 있다. 과거 극들은 굉장히 들썽거려도 우리는 어리벙벙하기만 하였다”고 엄지를 내들었다. (《홍색중화》보 제180기에서) 하기에 로농극사의 번마다 공연은 번마다 인산인해를 이루면서 밤늦게까지 지속된다. 그래도 사람들이 떠나기를 아쉬워하니 대중화된 극본의 통속성과 연극의 효과의 강렬한 체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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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음파 소속 로농극사 본사와 산하 분사, 지사들이 이 같이 선명한 정치성, 강렬한 전투성, 극의 진실성, 명확한 대처성, 대사의 통속성을 나타내면서 중공쏘베트구역 중앙국과 중화쏘베트 중앙정부의 각 시기 중심과업을 둘러싸고 신속히 창작, 공연되기에 근거지 군민들 가운데서 거대한 추동역할을 놀군 하였다.
1933년 2월 8일, 중공쏘베트구역중앙국에서는 국민당군의 제4차 ‘포위토벌’을 분쇄할 데 관한 당의 긴급과업을 내리면서 “모든 모범대, 모범소선대를 동원하여 옹근 영, 옹근 퇀으로 홍군에 가입하자”고 요구하였다. 한데서 그후 상당한 기간내에 로농극사 본사와 산하 분사, 지사들의 연극공연은 홍군확대 위주 내용으로 꾸며졌다. 《홍색중화》보 제64기에 따르면 3월 22일, 로농극사 본사에서는 상해폭동을 기념하면서 서금의 황백에서 2000여명의 신입전사와 군중들을 위한 전문 연극 《홍군으로 가자》를 공연하여 효과가 아주 좋았다.
그뒤 5월 23일, 중앙혁명근거지 소공중앙국에서 '소공국제사(少共国际师)'를 조직하기로 결정하자 그후 무대들에는 '소공국제사'를 반영하는 연극들이 륙속 출현하여 강렬한 선전고동 역할을 놀았다. 연극의 이런 선전고동으로 하여 중앙혁명근거지에는 어머니가 아들을, 아내가 남편을, 누이동생이 오빠를 홍군에 보내는 감동적인 장면들이 그칠 줄 몰랐다. 근거지는 이르는 곳 마다에서 <소공국제사>, <군대가 되려면 홍군이 되리(当兵就要当红军)>, <홍군환송가>, <전선으로 가자>, <십송홍군(十送红军)> 등 허다한 혁명가요를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혁명가요가 <십송홍군>이다. <십송홍군>은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강렬한 생명력으로 널리 불리워지면서 사람들을 고무해주고 있다. 이런 혁명가요들의 작곡과 편곡, 보급에서 최음파의 역할이 컸으련만 지금 보이는 중앙혁명근거지시절 혁명가요 거의가 작사, 작곡자가 밝혀지지 않은 데서 어느 노래가 최음파 관련이라고 말하기가 어려운 사정이다.
연극 《전투의 여름》
1933년 1월, 상해에서 배기지 못한 림시중앙 책임자 박고와 그 일행은 상해를 떠나 중앙혁명근거지로 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복건 장정을 경유할 때 누군가 장정의 복음병원에서 휴양하고 있는 모택동을 찾아보라고 권유할 때 26살 밖에 안된 박고는 알은 체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박고는 그 뒤 2월 휴양지서 서금으로 돌아온 중화쏘베트중앙정 부주석 모택동을 찾더니 모택동더러 '사전운동(查田运动)'을 지도하라고 지시하였다(查田运动, 中文百科在线. 2011年4月6日).
새과업을 접수한 모택동은 모스크바동방대학 출신이고 중앙정부 토지부 부부장인 왕관란(王观澜, 1906-1982)을 엽평향에 파견하면서 밭조사 시점을 하도록 하였다. 한동안의 조사과정에서 경험을 얻은 후 모택동은 중앙정부 사업단을 이끌고 서금현의 운집(云集), 임전(壬田) 두 지구에 가서 사전운동을 지도하며 시점과정에서 얻은 성과를 넓혀갔다. 사실 사전운동은 1933년 2월에 이르러 처음 벌어진 운동이 아니였다.
그 전해인 1932년 2월 8일, 쏘베트구역 중앙국은 중앙혁명근거지에 대한 국민당군의 제4차 ‘포위토벌’ 관련 '긴급과업'에서 "사전운동을 반드시 완수하여 토지문제를 철저히 해결하여야 한다(必须完成查田运动,彻底解决土地问题)"고 규정을 내렸다. 각지 쏘베트정부에서는 잇따라 사전운동조례를 반포하면서 사전검거운동을 시작하였다. 1933년 1월 서금에 나타난 박고는 중앙혁명근거지 제반 사업에 대하여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면서 이른바 ‘좌’경 토지정책을 하달하였다.
2월 1일에는 중앙정부의 이름으로 제2호 훈령을 내면서 온 근거지가 즉각 “다시 토지를 나누고(重新分田)”, “토지를 조사(查田)”하라고 호통쳤다. 이는 쏘베트 1차대회에서 통과한 <중화쏘베트공화국토지법>중 “지주에게 토지를 분여하지 않으며 부농에게 나쁜 토지를 분여한다”는 ‘좌’로선의 계속으로서 중앙혁명근거지 토지혁명의 실제와 너무나도 어울리지 않았다.
모택동은 서금 주변의 몇개 현 농촌을 찾아 관련 토지문제를 진지하게 조사한 후 서금 구보의 주숙지로 돌아갔다. 마침 리백소가 거느리고 최음파가 동행한 고리끼희극학교 실습극단이 구보에 가서 실습공연에 나섰다가 모택동 주석과 만나게 되였다(左莱 梁化群。苏区红色戏剧史话。文化艺术出版社,第60页,1987年5月). 실습극단 꼬마배우들은 모주석을 에워싸며 좋아서 야단이다. 상상외의 만남에 모택동도 기쁜 나머지 극단의 공연에 대하여 이것저것 물으며 짙은 관심을 보이였다. 꼬마배우들은 서로 뒤질세라 극단의 학습생활과 실습공연에 회보하면서 실습공연에 대해 조잘거리였다.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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