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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81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5월20일 15시19분    조회: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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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활동 가운데서 신문잡지 선전을 보면 쏘베트구역 반제총동맹은 1932년 8월 1일에 《반제전선(反帝战线)》이란 8절지 인쇄본 신문을 꾸리고 매기 4개 면(주.中央苏区革命文化史料汇编. 江西人民出版社 1994年版, 第400页)으로 하였다. 1933년 7월에는 서금 교외에서 쏘베트구역어모구국대표대회(苏区御侮救国代表会议)를 소집하였다. 모택동이 회의에서 중요한 연설을 하였다. 이에 따라 총동맹은 반월간 《반제화보(反帝画报)》를 꾸리였다. 이해 7—8월간에는 또 16절지 프린트본 《반제옹쏘통신(反帝拥苏通讯)》을 출간 (주.中央苏区革命文化史料汇编.江西人民出版社1994年版,第400页)하였다.
 
 
홍군특과학교 교장
 
1
 
1930년 12월부터 1933년 3월에 이르기까지 장개석은 중앙혁명근거지와 홍군에 대한 제1차, 제2차, 제3차, 제4차 포위토벌을 련속 발동하였지만 번마다 우리 중앙홍군에 의해 격퇴당하였다. 1933년 9월 하순에 이르러 국민당군의 4차 포위토벌을 격파하는 반포위토벌전에 나선 중앙홍군은 8만여명(주. 중국로농홍군학교 로농홍군대학교. 百度快照, 2013.4.27. 원래 中国广播网에 실렸음)으로 늘어나고 무기장비는 날로 다양해졌다. 홍군무기의 다양화와 반포위토벌전의 현실은 현유의 중국로농홍군학교(홍군학교)를 홍군대학으로 발전시키고 반포위토벌전에 수요되는 여러가지 전문학교를 꾸릴 것을 바라고 있었다. 이에 중앙혁명군사위원회는 1933년 10월 17일에 중대명령(주. 중국로농홍군학교 로농홍군대학교. 百度快照, 2013.4.27. 원래 中国广播网에 실렸음)을 반포하였다.
 
현 홍군학교 조직구성을 새로 편성하게 된다. 원 고급반 상급반을 홍군대학으로, 제6기 퇀을 홍군 제1보병학교로, 제7기 퇀을 홍군 제2보병학교로, 공병영, 포병련, 중기관총련, 방공 및 장갑차련을 홍군특과학교로 개칭하며 유격대훈련반을 유격대학교로 개칭한다. 
 
중앙홍군내에서의 여러가지 홍군학교 편제는 인민군대의 학교구성이 홍군의 여러 병종 초급, 중급, 고급 양성체계를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이 양성체계에서의 중요한 것은 홍군대오내의 포병지휘관과 포수를 되도록 빨리 양성하여 반포위토벌전의 수요에 적응하는 것이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군위직속 포병퇀 퇀장을 맡았던 현임 홍군학교 포병과 주임 무정을 지체없이 새로 조직하는 홍군특과학교로 소환하여 포병과 주임—포병인재를 키우는 중책을 맡도록 하였다.
 
홍군특과학교는 원 홍군학교의 공병영, 포병련, 중기관총련과 방공련, 장갑차련을 갈라 내온 신형의 특과학교로서 홍군시기 우리 당이 꾸린 여러가지 홍군학교들 가운데서 특수성을 띠고 있다. 이는 우리 군 력사에서 첫 기술병종인재를 양성하는 전과학교임을 온 세상에 알리는 중대한 조치였다. 우리 군 학교들은 단일학과(单一学科)로부터 여러가지 학과(多学科)로 나아가는 첫 발걸음을 힘차게 떼기 시작하였다. 이렇듯 력사적 전환기에 무정은 군위의 명령을 받고 홍군특과학교가 자리한 서금 무양에 들어섰다.
 
2
 
홍군특과학교는 서금성에서 서남으로 18킬로미터 떨어진 회창(会昌)현성과의 사이 면강(绵江)의 중류-무양진(武阳镇)에 위치하였다. 중앙혁명근거지 시절 무양은 모택동 등 중앙지도자들이 생활하며 싸운 곳이고 온 근거지의 모범구역으로 이름난 홍색고장이였다. 지금도 무양에는 ‘모택동동지 옛집’(毛泽东同志旧居)과 ‘춘경생산우승기대회 옛터’(春耕生产赠旗大会旧址), ‘장정의 첫 다리’(长征第一桥), 홍군특과학교 옛터 등이 있어 사람들을 30년대 초반과 중반 시절로 안내한다.
 
2009년 7월 12일 여름방학에 대학에 다니는 쌍둥이 큰 딸애와 같이 서금시 무양진을 찾으니 당지사람들은 우리를 무양진과 조금 떨어진 평지로 된 밭 가운데의 무양 추씨종사(邹家祠)로 먼저 안내하여 주었다. 뒤늦게 알았지만 이 추씨종사가 1933년 5월 18일부터 22일까지 중화쏘베트정부에서 조직한 근거지 춘경생산운동대표대회, 즉 춘경생산우승기대회가 열린 옛터였다. 평소에 다니는 사람들이 별반 없어 추씨종사 정문은 닫겨져 있었지만 80여년이 지난 오늘도 옛집은 그대로 서있었다.
 
추씨종사 옛건물에 걸맞게 서금시 무양은 1930년 봄 이후 서금현혁명위원회 산하 무양구혁명위원회(그해 7~8월간에 무양구쏘베트정부로 개칭)가 설립되여 혁명활동이 활발한 고장이였다. 1931년 11월 중화쏘베트공화국 림시중앙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무양사람들, 특히 부녀들이 쏘베트경제건설생산운동에 총궐기하였다. 1933년 봄에 중앙정부에서 춘경생산시합운동을 벌이자 무양구와 구산하 석수향(石水乡)에서 많은 선진전형들이 배출되여 중앙정부와 중앙정부 주석 모택동의 표창을 받았다. 1933년 5월의 춘경생산우승기대회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이곳 추씨종사에서 성황리에 열리였다.
 
무양은 바로 이런 홍색고장이였다. 중앙군위에서는 홍군특과학교를 이같은 홍색고장ㅡ무양에 세우기로 하고 학교터를 추씨종사의 바로 서북쪽가에 잡았었다. 지금은 추씨종사 옛건물외 다른 건물들이 없는 밭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었다. 이미 무너진 특과학교 건물의 기초돌들과 허물어진 벽체들이 그대로 남아 여기가 당년 중앙홍군의 특과학교 자리임을 알리고 있었다. 1930년 10월, 무정은 바로 이 건물에 설립된 홍군특과학교에서 포병과 주임을 맡고 자기 직무에 충실하였었다.
 
홍군특과학교 제1임 교장은 공병전문가 호국걸(胡国杰)이고 정치위원은 장화(张华)로 알려진다. 학교기관으로는 훈련처와 교무처, 정치부가 있고 학교내에 기관총, 포병, 공병 등 전업을 설치하였다. 여러 전업의 학원들은 영과 련, 패, 반 4급 편제로 조직하고 교원들은 홍군학교와 부대에서 선발되여온 홍군장병들과 국민당 포로들 가운데서 뽑은 특장인원들로 구성되였다. 포병과 주임과 포병영장은 무정이 맡고, 기관총영장은 려유장(黎有章), 공병영장은 담희림(谭希林)이 맡았다.
 
3
 
1934년 2월 15일,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 규정하여 발표한 ‘특과학교 학원선발조건’(关于特科学校选送学员的条件)에 따르면 특과학교 학원들은 년령이 18세 이상, 30세 이하의 신체가 건강하고 전투경험이 있으며 적어서 1년간 기관총련에서 반장이나 자격이 있는 전사여야 하며 정치립장이 견정하고 사업에 적극적이며 배우려 하고 성분이 좋아야 하며 문화정도가 식자 100자 이상이여야 했다.
 
그번 학기 학원들이 곧 졸업하게 될 때 중앙혁명군사위원회에서는 1934년 6월 12일에 또 <여러 부대들에 특과학교 기관총과 학원들을 배치할 데 관한 조건과 배치명액> 명령을 반포하면서 학원들의 년령은 반드시 18세 이상, 30세 이하로서 신체가 건강하고 정치립장이 견정하며 사업에 적극적이고 배우려는 로농분자여야 하며 식자정도를 제한하지 않는다고 했다.
 
만 1년의 전투경험이 있는 반장이나 경력이 있는 전사여야 하며 선발인원이 모자랄 때에는 반년이상 전투경험이 있는 인원도 선발할수 있다, 홍군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적이 없고 훈련을 받지 않은, 부대에서 발탁이 늦은 패장급 인원도 선발하여 훈련시킬수 있다. 선발된 학원중 반장 또는 발탁이 늦은 패장 인원수가 절반을 차지하여야 한다고 규정하였다.
 
홍군특과학교 관련 군위의 두가지 명령은 특과학교 기관총과 학원들을 상대한 것이지만 특과학교 다른 병종학원들에도 통하였다. 특과학교에서는 학원들 소수만이 군위 규정조건에 부합되고 대다수가 입대 전 농사를 지었거나 글을 모르는 현실 앞에서 “적게 강의하고 많이 해보며 과당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는 전문 교수원칙을 제정하였다.
 
무정은 포병과 주임으로 부임한 후 교학기재가 매우 부족함을 느끼였다. 포병전업에서는 적게 강의하고 많이 해보며 과당수업을 적게 하고 야외훈련을 많이 한다는 특과학교의 교수원칙이 잘 먹혀들지가 않았다. 실물이 없이는 모두가 공담으로 흐를 수 있었다. 이런 현실에서 무정은 군위와 홍3군단과 련계하여 홍3군단의 크로백 대포를 끌어왔다.
 
1930년 7월 장사진공전에서 로획한 이 크로백은 무정과 깊은 인연을 가진 대포로서 포병교학실천에서 더없이 귀중하고 유일한 대포였다. 무정이 학원들에게 크로백 대포에 깃든 감강 순라정 포격 등 이야기를 생생히 말해주니 흥미를 느끼지 않는 학원들이 없었다. 무정의 솔선수범과 생동한 강의로 학원들은 문화지식이 떨어져도 포사용방법을 척척 배워냈다.
 
홍군특과학교는 중앙혁명군사위원회의 직속단위로서 여러 병종들 가운데서도 포병전업을 첫 자리에 놓고 틀어쥐였다. 이런 현실 속에서 군위는 얼마후 포병과 주임 무정을 특과학교 제2임 교장으로 임명하고 홍군을 위하여 포병을 중심으로 보다 많은 여러 병종인재들을 다그쳐 양성하도록 하였다. 무정은 직심이였다. 누구보다도 군위의 신뢰를 잘 알고 있는 무정은 홍군특과학교를 빠른 시일내에 우리 홍군의 실제에 어울리는 특과학교로 꾸리여 군위와 동지들의 칭찬과 긍정을 받았다.

료녕신문 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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