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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광인 련재작ㅣ중국혁명 속 우리 겨레 혁명가들(관내편) - 89
조글로미디어(ZOGLO) 2020년7월9일 07시11분    조회: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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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최음파 소속 로농극사 8.1문예공연이라면 로농극사 소속 람삼극단은 8.1를 계기로 소속 교원과 학생들로 30여명 중앙람삼극단공연대를 무어 1933년 봄과 여름 사이 여러 홍군부대를 찾아 전방순회공연길에 올랐다.  선후 3개월에 걸치는 전방위문공연은 리백소가 친히 이끌었다. 람삼단의 의무교원이기도 한 홍군음악가 최음파가 중앙람삼극단의 공연준비에 한몫을 차지하였으나 공연대와 같이 나섰는지는 알려지는 바가 없다.
 
그 때 홍1방면군은 서금 북부, 강서 중부의 의황과 영풍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의황과 영풍으로 가자면 200여킬로미터의 먼길을 도보로 걸어내야 하였다. 한데서 중앙람삼극단의 제1기생들로 말하면 다채로운 졸업실습을 위한 공연길이기도 하고 자기들을 단련하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저저마다 가방과 미대, 공연도구를 메고 초모자를 쓰고 무더운 전야의 소로길을 따라 걸었다. 산길을 넘을 때면 울퉁불퉁한 령길을 넘기란 여간 어렵지 않았다. 밤이면 풀이슬로 하여 넘어지기가 일쑤다. 나어린 학생들은 가쁜 숨을 톺기도 하지만 대오에서 떨어지는 학생은 단 한명도 나타나지 않았다. 휴식할 때면 명랑한 웃음소리, 노래소리로 넘치였다.
 
그들은 이렇게 하나 또 하나의 산길을 넘으며 먼길을 조이였고 한번 또 한번의 위문공연을 펼치였다. 7월 17일에는 행운스럽게도 홍1방면군 본부가 자리잡은 영풍현 동사파(永丰县东沙陂)에 이르렀고(江西文艺史料3. 1988.8) 그 뒤 1방면군 홍군장병들 8.1검열선서식에 참가하게 되였다. 검열선서식은 사면이 무성한 삼림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지이고 공지의 한켠에 나무로 검열대를 만들어놓았다. 검열대 주변에는 수십기의 붉은기가 바람에 나붓기였다. 중앙람삼극단의 공연은 시종 뜨거운 열기 속에서 펼쳐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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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세기 80년대 후반 전문 《중앙쏘베트구역로농극사 시말》을 써낸 오방초(吴邦初)는 이 글에서 이날의 공연에 홍1방면군 총사령원 주덕과 홍정치위원 주은래가 참석하였다(강서문예사료 3. 내부자료. 1988년 8월 인쇄)고 하지만 가능성이 적다고 보아진다. 중앙람삼극단 공연대가 영풍현 동사파에 도착한 7월 17일 그 때 공연하였다면 가능하겠으나 그 시절 8.1문예활동은 모두 8.1전후 며칠사이 일이였다. 홍1방면군 전방 8.1열병은 8월 1일의 일이여서 더구나 그러하다. 이제 아래에서 보여지지만 주덕과 주은래의 8.1 참석은 서금에서 나타난다.
 
중앙람삼극단 공연대는 8월 1일 밤, 홍1방면군 장병들을 위한 위문공연의 막을 올리였다(左莱 梁化群, 苏区红色戏剧史话。文化艺术出版社,第63页,1987年5月). 처음으로 성수난 로천무대에서 부대위문공연을 펼치는 그들은 유난히 격동된 심정으로 맘껏 노래하고 춤추며 돌며 자기들이 배운 모든 재능을 다 뽐내였다.
 
그날 밤 공연에서 가장 인기프로는 연극 《전투의 여름》, 부대 관중들 모두가 《전투의 여름》이 펼치는 생생 생활 속으로 끌려 들어갔다. 토지조사운동이 승리를 거두는 장면에 이르러서는 뜨거운 박수가 터져 오르면서 한동안 구호소리가 그칠 줄 몰랐다. 이날 밤 전방홍군부대 위문공연에 최음파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최음파가 중앙람삼극단공연의 작곡, 편곡 등에 참여한 것만은 사실이다.
 
8월 1일날 서금에서의 8.1기념일 경축활동은 서금 성남(城南)의 포병광장에서 성황리에 펼쳐졌다. 새벽 어둠의 밤길을 걸어 열병장에 모인 홍군대오는 홰불을 들고 대기하고 있었다. 최음파와 최음파 소속 로농극사의 문예일군들도 이날의 열병장에 들어섰다. 새벽 4시, 첫 8.1기념일을 경축하는 홍1방면군 열병식이 시작되면서 주덕, 주은래 등 열병수장들과 관련 인원들이 검열대에 오르자 례포소리, 군악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새벽 4시로 정함은 국민당군의 공중폭격을 미연에 막아내기 위해서였다. 열병지휘원이 달음질로 열병수장들 앞에 이르러 군례를 올리였다.
 
“각 병퇀 열병대오가 이르렀습니다!(비밀사항으로 구체 열병인수는 알리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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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나팔수(当号兵)가 환영호를 연주하면서 열병식이 정식으로 시작되였다.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대리주석 항영 등 3명의 열병수장이 말을 타고 600여미터의 대렬을 지나며 검열을 할 때 열병수장이 이르는 구간 열병식 대렬마다 전체가 “지총립정주목례”(持枪立正注目礼)를 올리고 그 때마다 수장은  “동지들, 동지들의 건강을 축복합니다!”(同志们,祝你们健康!)라고 목소리를 높이였다. 그러면 열병대렬도 “동지들의 건강을 축복합니다!”로 화답하였다. 열병식 장소는 련속 환호소리, 구호소리로 터져 올랐다(红军在中央苏区的三次阅兵. 南方网, 2016-01-08 11:20:07).
 
열병식이 끝난 후 열병수장들이 선서대로 돌아가고 주덕 총사령이 전체 열병식 참가대오를 이끌고 한마디 한마디 선서사를 선독하였다. 어떤 연구자료는 주덕 총사령이 아닌 중앙혁명군사위원회 대리주석 항영이라고도 한다(苏区首次纪念八一节盛况, 铁军传媒网,2014-12-04。本文作者是中国人民大学马克思主义学院中共党史系博士生). 이어 기발 수여식에서 열병수장이 전투의 기발을 각 홍군퇀에 수여하면서 “붉은기를 잘 아끼면서 이 기발을 전 중국에 휘날리게 하여야 한다” 말했다. 홍군상장을 수여할 때 처음으로 이 같이 장엄하고 성대한 열병선서에 참가한 최음파와 최음파 소속 로농극사의 문예일군들은 흥분된 심정을 금할 수 없었다. 그들은 영웅적 홍군대오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고 홍색문예전사로 된 영광으로 하여 자부감을 느끼였다.
 
기발수여식 등이 끝나자 분렬식(分列式)이 시작되였다. 열병지휘원이 열병수장에게 청시하고 높은 소리로 “제행분렬식!”(齐行分列式)을 선포하니 각 열병부대는 중대를 단위로 종대(纵队)를 이루어 씩씩한 걸음으로 검열대로 나아갔다. 검열대에 이르러 목례를 하면서 높은 소리로 열병수장이 부른 “쏘베트정부를 위하여 분투하자!”에 화답하였다. 길고 긴 열병대오가 한종대 한종대 검열대 앞을 지나노라니 한시간 남짓한 시간이 쭉 흘러갔다(红军在中央苏区的三次阅兵. 南方网, 2016-01-08 11:20:07).
 
 
홍군학교 교내공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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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3년 봄부터 1934년 가을에 이르기까지 로농극사는 전면흥성의 시절을 맞이하였다. 이 시절 거의가 홍군학교 장병들로 구성된 최음파 소속 로농극사 본사는 홍색수도 서금과 중앙혁명근거지 제반 공연에 나서는 한편 홍군학교의 교내공연에서도 한몫을 맡아 나섰다.
 
1933년 6월 25일, 중앙혁명근거지를 지켜선 로농홍군 후방부대의 청년동지들이 참관단을 무어 서금 중부의 양씨사당에 위치한 홍군학교에 들어섰다. 이튿날 참관단은 홍군학교의 모형실 등을 돌아보며 홍군학교의 여러 부대들과 어울려 돌아갔다. 참관단은 학습열성으로 끓어올랐다. 그들은 저저마다 일기책을 가지고 다니며 자기들이 본 홍군학교의 장점, 단점을 망라하여 일일이 적어넣었다.
 
6월 26일 밤 홍군학교 청년부에서는 서로의 사업실정을 료해하고 사업경험을 교환하며 실제사업의 보다 큰 전변을 도모하고저 참관단과 더불어 련환만회를 조직하였다(《청년실화》 제2권 제22호, 1933년 7월 9일). 련환만회는 명절의 기분으로 꾸며진 양씨사당의 홍군학교 구락부에서 열리였다. 홍군학교 측에서는 여러 부대들에서 선발된 청년대표들과 최음파 소속 로농극사 총사 문예일군들이 주인으로 나섰다.
 
먼저 홍군학교 정치부주임이 당면 정치정세보고를 하면서 후방부대 참관단에 숭고한 동지적 경례를 드리였다. 이어 홍군학교 청년부 책임자가 홍군학교의 청년사업실정을 여실히 회보하였다. 나중에 참관단 대표가 홍군학교 동지들의 열광적인 환영 속에 후방부대 청년들의 생활실정과 사업실정을 보고하여 깊은 인상을 남기였다.
 
서로간의 보고가 끝난 후 홍군학교 람삼단 어린이들과 로농극사 총사에서 생기로 넘치는 청년활보극을 공연하여 보고회구락부는 환희로 넘치였다. 최음파가 어느 면으로 공연에 참가하였는 지는 알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최음파의 바이올린 연주와 독주는 어느 공연에서나 빠질 수 없는 종목으로 나타난다고 할 때 최음파의 무대등장은 긍정적으로 말할 수 있다.
 
밤은 깊어가도 명절의 기분으로 넘치는 홍군학교 구락부는 조용할 줄 모른다. 후방부대 참관단 청년들은 련속 “재연!”, “재연!”(再演)을 웨치며 떠날 념을 하지 않았다. 구락부에 걸린 쾌종은 어느덧 밤 11시를 알리였다. 홍군학교 정치부주임이 정식 페회를 선포해서야 구락부에 모인 홍군장병들은 아쉬운대로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섰다.
 
최음파 소속 홍군학교는 강철같은 홍군간부들을 양성하는 혁명의 용광로였다. 1933년 8월 1일 홍군학교 제5기 1기생들이 졸업하여 나갈 때 여러가지 폭죽소리가 하늘땅을 진감하였다. 많고많은 홍군간부들은 여러 전선으로, 소공국제사로, 지방무장으로 달려갔다.
 
제6기생은 규모면에서 제5기생보다 훨씬 많았다. 졸업하지 않은 제5기, 2기생들은 5기 퇀으로 편성되고, 신입생들은 6기 퇀이나 교도퇀으로 편성되였다. 교도퇀은 대부분 지방간부대와 청년대로 구성되여 학제를 대략 2년으로 하였다.

료녕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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