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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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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오늘의 시론/ 시문학 10월호/ 심상운 댓글:  조회:1256  추천:0  2019-01-24
단선구조의 세계에서 다선구조의 세계로 -21세기 '하이퍼시'의 이해를 위하여     심상운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바꾸는 방법에서 1차적인 방법은 시 속에 제2 제3의 등장이다. 제1의 화자가 '나'라면 제2 제3의 화자는 '너'와 그'가 된다. 소설에서 1인칭 시점에서 3인칭 시점으로 바귀는 것과 비슷하다. 화자의 변화는 시점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기 땨문이다. 시점의 변화는 구조의 변화를 수반한다. 그러나 단선구조에서 다선구조로 이동하는 방법에는 화자의 시점 변화가 아닌 하이브리드(hybrid)적인 리좀(이미지)의 연결이나 화자의 '의식의 변화'도 가능하다. 의식의 변화는 실세계와 가상세계의 만남과 의식에서 무의식으로, 무의식에서 의식으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경우는 '의식의 다선구조'라고 한다.  조향/「 바다의 층계」, 문덕수/「마릴린 몬로」는 하이브리드적 다선구조의 시이고, 문덕수「철원군 노동동 당사 」는 의식의 중층구조로 이루어진 다선구조의 시라고 말할 수 있다.   시 속에 '나' 만이 아닌 '너' 나 '그' 가 들어가서 시상을 전개하는 다선구조의 시는 서정시의 표현방식을 주관적인 독백 형식에서 벗어나게 하고, 화자는 시 속에서 리포터의 역할을 하게 된다. 따라서 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서사구조(敍事構造)가 된다. 인물과 환경과 행위가 결합할 때 서사는 발생되기 때문이다. 이때 시에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물은 시의 캐릭터(character)가 된다. 그리고 시의 이미지는 움직이는 이미지 즉 동영상이 된다. 따라서 하이퍼텍스트 시에 등장하는 '나' 와 일반 서정시의 '나'는 입장이 전혀 다는 존재가 된다. 일반 서정시의 나는 시인 자신일 경우가 많지만, 하이퍼텍스트 시의 나는 '상상 속의 나' 가 되어 시의 캐릭터로서의 나가 되기 때문이다.   다음은 하이퍼텍스트의 시의 중심이 되는 상상엥 대한 고찰(考察)이다. 하이퍼텍스트 시는 시인의 모겆ㄱ의식, 의도상과 연관ㅇ되어서 비유적 상징적 의미를 갖게 되는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상상보다 콜리지(Coleridge 영국의 문예비평가)의 말처럼 '시간과 장송의 서열에서 해방 되어서' 자유롭게 펼쳐지는 비합리적이고 비논리적인 공상(fancy)에 더 비중을 두게 된다. 공상은 어떤 모적의식이 없이 공상의 가지치기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하기 때문이다. 공상의 가지치기는 어떤 고정된 의미를 갖지 않으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양한 가상공간을 제공한다. 공상은 목적의식의 조1은 공간에서 벗어난 무목적의 넓은 공간 속으로 시인과 독자를 안내하다. 이것이 순수한 하이퍼텍스트의 세계다. 그러나 삶의 현실을 외면할 때, 시는 관념 쪽으로 끌려들어가게 되고 박제(剝製) 같은 이미지의 그림만 남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삶으이 현실과 하이퍼텍스트의 상상이 어떻게 조화로운 화합을 하느냐 하는 갓이 중요하다. 자유로운 상상과 현실의 조화 속에서 시의 싱싱한 감각이 생동하기 때문이다. 아래의 시를 읽어보자.          어두컴컴한 매립지埋立地에서는 새벽안개가 흰 광목처럼 펼쳐져서 나     뭇가지를 흐늘쩍흐쩍 먹고 있다.  나무들은 뿌연 안개의  입 속에서도 하               늘을 향해 아우성치듯 수십 개의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다.          그는 봄비 내리는 대학로 큰길에서 시위대들이 장대 깃발을 들고 구호     를 외치며 행진하는 장면을 촬영하고 있다고 한다.          나는 그이 우렁우렁한 목소리에 끌려가다가 그가 직어온 '안개 속의 나     무들' 을  벽에 붙여놓고 식탁에 앉아 푸른 야채野菜를 먹는다. 마른 벽이     축축한  물기에 젖어들고 깊은 잠속에 잠겨 있던 실내의 가구들이 조금씩     몸을 움직거린다.          그때 TV에서는 파도 위 작은 동력선動力船의  퉁퉁대는 소리가 지워지        고, 지느러미를 번쩍이던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     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                                            -심상운「안개 속의 나무 또는 봄비」전문        '자연풍경 + 사회와 정치적 사건 + 실내의 식탁 광경 + TV 화면'으로 구성된 이 시는   1.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 2.동영상과 공연시 지향 3.영화의 몽타주(montage) 기법 4.가상현실의 구현 드의 기법을 시에 도입하여 제작된 시다. 그래서 네트워크가 형성된 하이퍼텍스트적인 공간의 시라고 하여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시의 장면들은 분리되어 있지만 심리적인 이미지로 링크(연결) 된다. 따라서 이 시의 맥락을 추적해보면, 시의 내면에 생명의 본능적인 움직임과 갈구가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먹는다'라는 행위와 '아우성'으로 표현된다. 안개는 나무를 먹고, 나는 야채를 먹고, 여자 리포터는 갈치 히를 먹는다. 안개 속의 나무들도 또한 안개의 입 속에서 아우성치듯 팔과 손가락을 뻗고 있고, 시위대들은 구호를 외치고(아우성치고) 있다. 이 시는 이런 생명현상의 움직임을 '이미지의 집합적 결합'이라는 디지털적 기법으로 표현한다. 자신의 생각을 독자들에게 설득적으로 표현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그래서 영화의 몽타주기법도 사용된다.   이 시에 나오는 '나'와 '그'는 시 속의 캐릭터다. 끝부분 "은빛 갈치의 회膾를 고추장에 찍어 먹으면서 싱싱해서 좋다고 떠드는 여자 리포터의 붉은 입이 화면 가득 확대되었다."는 사이버 공간의 장면이지만 현실과 구분되지 않는다. 그것이 21세기의 현실감각이다. 그리고 이 장면은 시에서 TV도 등장인물과 같은 역할을 하는 매체가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 시는 하나의 경로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이 시는 하나의 독립된 공간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공간은 세계를 모사(模寫) 한다거나 어떤 정리된 정보를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이루어져 있지 않다. 시 속에 존재하는 것은 실세계와 맞닿아 있는 가상공간(假想空間)이다. 그래서 이 공간은 실세계와의 관계에서 리좀을 형성한다. 이것은 어느 하나가 다른 하나를 복제(複製)하거나 또는 다른 하나의 의미가 되기를 거부하는 하이퍼텍스트 공간이다.    
2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 吳南球 댓글:  조회:1068  추천:0  2019-01-24
             [하이퍼텍스트 시론.2 ]                    디지털 시대의 詩 展望   吳南球       지금은 디지털 영상 시대이다. 드브레(Regis Debray, 프, 1941~)는 현대를 메디올로지 시대라고 한다. 메디올로지는 단순히 매스컴론이 아니라 IT의 기술, 제도, 조직 등을 다 포함한다. 순간적으로 정보가 어떻게 전달되는가라는 문제보다 장기적으로 어떠한 정보가 전달되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한 과제다. 그는 네 개의 권역으로 구별하여 원시부족 사회의 ‘기억권’, 제국주의 시대의 ‘언어권’, 근대 이성의 ‘문자권’, 미디어가 주인인 IT, 디지털의 ‘영상권’으로 나눈다. 현대는 ‘영상권’의 이미지 시대, 보여주는 영상 시대이다.  따라서 시도 영상의 보여주는 시가 되고 있다. 그런데 보는 시란, 시는 언어로 표현되므로 묘사하여 사물의 표상이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 즉 ‘보여주기’가 되겠다. 독자는 보여주는 대로의 상을 마임을 보듯, 마음 속 화면에 떠 올리고 그 의미를 상상하여 읽고 감상할 수 있다. 시인은 연출자와 같은 입장에서 사물의 표상과 이미지를 보여주는 형식에 그치고 시를 완성하는 주체는 시인이 아니라 독자가 된다. 이 ‘보여주기’는 주체가 바뀌는 시 쓰기이다. 즉 시를 의미의 예술에서 해방시켜서 의미보다는 감각과 이미지의 예술로 전환시키고 독자에 대한 일방적인 설득이나 강요가 아니라 독자 참여의 공간을 확대시키는 쓰기의 방법이다. 이 형식은 시인이 직접 말하지 않고 다만 독자에게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을 묘사하여 보여줌’(디지털적)으로 시인의 어떤 생각이나 판단 등이 빠져서 관념 빼기가 이루어진다. 관념 빼기는 곧 탈-관념으로, 고정되어 있는 관념 언어의 벽을 제거해 버림으로써 독자가 무한한 의미의 공간을 만들어 갈 수 있다. 이 특성은 미래에 디지털(히이퍼텍스트)와 아날로그(텍스트)의 시 쓰기의 중요한 차이점으로 나타날 것이다.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내용을 ① 언어에서 관념 빼기 ② 사물성의 쓰기 ③ 사이버성의 쓰기로 간단히 요약해서 살핀다. 이로써 디지털 시대의 시 특성의 일단을 소개하며 전망한다. 실험은 미완성을 전제하고 있으므로 그 성과는 시의 역사가 평가할 것이다.   1.   언어에서 관념 빼기에는 ①단어에서 관념 빼기 ②어구(단어+단어)에서 관념 빼기 ③문장에서 관념 빼기 ④ 시 전체에서 그 무엇이라고 하는 주제 등의 관념 빼기가 있다. 하이퍼텍스트의 이러한 네 가지의 관념 빼기를 살펴본다.   붉은 공이 튄다. 목련 담장 넘어서 깍 깍 깍 세 번 짓는다 붉은 공이 튄다. 소리 계곡 넘어서 울긋불긋 몇 점 핀다 붉은 공이 튄다. 진달래 암벽 넘어서 日 - 出 - 山 - 行 붉은 공이 튄다.   ―吳南球 「日出山行」전문     이 시에서 첫째, 단어 ‘공’을 보자. 공에 무슨 관념이 붙어 있는가, 이를테면 인생의 비애라든가 희망이라든가 그 무엇도 생각할 수 없다. 어떤 상징성이나 배경의 의미도 없이 탁구공이라든가 축구공이라든가 하는 그저 사물인 공이라는 단어만 있다. 둘째, 어구(단어 + 단어) ‘붉은 공’에도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아무 관념이 없다. ‘붉은+공’이라고 해서 공에다가 이데올로기 이미지를 더하지 않았을 뿐더러 잘 익은 사과라든가 하는 아무런 뜻도 없다. 셋째, ‘붉은 공이 튄다.’라는 이 문장에도 어떤 의미를 뜻하지 않고 있다. ‘붉은 공’이 공산주의의 공이 아닐 뿐더러 ‘튄다’에는 그저 튀는 그 사물성만 있다. 넷째, 또한 이 한 편의 시 전체에는 ‘붉은 공’이라는 사물이 심리적인 공간에서 감각적으로 튀고 있을 뿐, 무슨 주제니 주의주장이 있지 않다. 이 시는 공이 튀고 있는 동영상의 환상적인 공간이 펼쳐진다( 이러한 심리적 이미지를 묘사해내는 것을 필자는 ‘염사’라고 한다). 위의 텍스트는 ‘탈-관념의 시쓰기’(吳南球.『이상의 디지털리즘』범우사.p37~p51)로 ‘관념 빼기’를 하고 있다. 이 쓰기는 ‘있는 그대로의 사물’을 사진 찍듯(접사와 염사) 묘사하는 방법으로 독자에게 영상 이미지를 보여준다. ‘접사’는 사진기술을 시 쓰기에 도입한 말로서 사물을 보는 하나의 관법이다. 원근법이나 방위감각에 끼어든 오염된 관념을 제거하여 외부세계의 사물을 직관하고 생생하게 하는 방법을 의미한다. 지금 앞에 있는 유리컵에 바짝 눈을 대어보면 일상적인 컵의 모습은 갑자기 사라지고 유리만 보인다. 새로운 질감과 함께 긴장감을 느낀다. 염사 또한 내면의 의식세계를 염사(念寫)한다. 이 쓰기는 이와 같이 사물을 인지하고 언어로 묘사하여 서술하고 독자가 이미지나 표상을 통해 마음으로 볼 수 있게 한다. 이러한 관념 빼기의 시와 비교되는 관념의 시를 보자.   일본의「진보적」지식인들은 소련한테는  욕을 하지 않는다고 한다 나도 얼마 전까지는 흰 원고지 뒤에 낙서를 하면서 그것이 그럴듯하게 생각돼서 소련을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했었다.   ―김수영「轉向記」에서   이 시의 일본, 소련, 진보적 지식인이란 단어와 어구에는 시인의 어떤 관념이 있다. ‘일본’은 자유 민주주의, ‘소련’은 공산주의, 일본의 ‘진보적 지식인’은  ‘공산주의를 두둔하는’ 등의 관념이 있다. 여기서 ‘나’는 ‘내심으로도 입 밖으로도 두둔 하는 지식인’이며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 시는 그러했는데, 그가 ‘전향’(轉向)했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독자는 그의 회고담을 듣는다.   2. 사물성의 쓰기는 언어 이전의 ‘사물과 언어와의 만남’이다. 사물이란 무엇인가, 추상의 슬픔, 미움, 사탄, 하나님, 사회주의는 관념이다. 관념이 아닌 사물이란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일과 물건이다. 존 로크(John Locke, 1632 - 1704)는 고성(固性)이 사물의 1차적 성질이라 한다. 다른 요인의 침입을 막고 사물 자체의 성질을 고수 유지하려는 성질이다. 사물의 넓이, 무게, 부드러움, 단단함은 고성이다. 책상을 탕 치게 되면 손이 아픈데 이것은 사물이 갖는 저항감이다. 이 순간 ‘사물의 언어와의 만남’은 관념이 들어갈 틈이 없다. 있는 그대로의 1차적 사물성의 즉 고성은 색, 소리, 향, 감촉 등 거의 무한하다. 사물성의 시 쓰기는 이러한 사물이 갖는 1차적 성질의 감각적 요소가 관념의 제로 포인트인 있는 그대로의 대상(사물)이다. 이를 기호화(추상화)하는 것이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속에 재떨이는 오롯이 앉아 있었다. 열린 문으로는 서 있는 한 사나이, 길 건너 어느 고층으로 뛰어오를 듯이 서 있는 그 신사의 등이 실은 유리컵을 노려보고 있었다. 세 유리컵 그 세 지점을 그으면 삼각형이 되는 그 금 밖으로 밀려나 금박金箔의 청자 담배와 육각형성냥갑이 앉아 있고 그 틈새에 조그만 라이터가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문덕수「탁자를 중심으로 한 풍경」에서   사물들, 즉 유리 컵, 재떨이, 열린 문, 신사, 금, 금 밖의 청자담배, 라이터, 숨 ... 이렇게 일상적으로 살아가면서 만나는 것들이 탁자 위에 모여서 어떤 형태를 이루고 있다. 모이는 것을 ‘집합’해 있다고 하는데, 이것을 수학적 개념을 도입해서 말하게 되면, 사물이 집합하여 ‘순열’ 또는 ‘배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문덕수는 이것을 ‘모여서 결합’되어 있다 하여 ‘집합적 결합’이라 한다. ‘집합적 결합론’을 이렇게 보면 이해가 쉽다. 여기서 좀 더 이학적인 논리를 전개시키게 되면, 모여 있는 사물들은 하나하나가 집합을 이루는 ‘원소(元素)’이다. 이 원소는 어떤 관념을 가지고 있지 않다. 다만 집합하여 조합하고 순열되어 있을 뿐이다. 다시 사물성의 얘기로 돌아가 보자. 원소의 개념으로 파악된 이 사물의 단어들이 상징 등 어떤 의미를 가지게 되면, 아니 그것들이 논리적인 인과로 놓이게 되면, 즉 시인의 생각을 설명하게 되면 자연스럽지 않다. 인위적이다. 인위적이라면 곧 관념적이 된다. 그러면 존재하고 있는 진실이 왜곡되고 만다. 그 뿐만이 아니라 시인의 어떤 의미인 사상이나 주의주장을 강요받음으로써 독자의 시적 공간이 극히 좁혀진다. 위의 시를 살펴보면, 앞의 ‘관념 빼기’에서와 마찬가지로 단어, 어구, 문장에 어떤 관념도 가지고 있지 않다. 관념 이전의 순수한 사물들이 그저 탁자 위에 놓여 있고, 여기서 시인이 직관(直觀)하고 직각(直覺)하고 있다. 세 유리컵이 놓인 지점을 이으면 삼각형이 된다. 물론 삼각형이 계급적 의미라든가 사회적 상징적인 어떤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그저 삼각형이라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그 삼각형 금(선) 안에는 재떨이가 금 밖에는 한 사나이, 청자담배, 라이터가 놓여 있다. 그런데 이 사물들이 ‘오롯이 앉아 있었다.’ ‘노려보고 있었다.’ ‘밀려나’ ‘틈새’ ‘발딱발딱 숨을 쉬고 있었다.’ 한다. 시인이 가지고 있는 심경의 어떤 배경 의미를 느끼게 하는 것들이 사물에 얹히어 있다. 이런 시 쓰기가 바로 물리주의(?)인 듯싶다.   3. 사이버성의 쓰기는 가상현실의 이미지의 분리와 결합이다. 예를 들면, 물고기에다가 사람의 얼굴을 붙이면 인어가 된다. 인어를 가상현실의 시라고 보면 된다. 현대는 이미지를 분리하고 결합하는 이러한 기능이 컴퓨터 그래픽에서 간단하게 이루어진다. 스캔(데이터화)하여 그림이 모니터에 뜨면 이것을 가지고 마음대로 창의적인 이미지를 만들 수 있다. 그림을 찌그러뜨리거나 늘어 빼거나 할 수 있고 어느 부분을 떼어낼 수 있고 두 사람의 얼굴을 바꾸어 놓을 수 있고 그래서 분리와 합성이 마음대로 되므로 사람이 바다 위로 걸어가게 할 수도 있다. 걸어가고 있는 사람의 배경(육지)을 바다로 바꾸면 된다. 이런 가상현실은 실제처럼 느낀다. 그러나 가상현실과 현실 사이에는 중요한 차별성이 있다. 예를 들어 현실의 물질(아날로그)인 시계를 보자. 바늘이 가리키는 시간을 순간적으로 읽을 수 없고 정확하지도 않다(상대적으로 디지털과 쉽게 비교되는 특성). 더구나 이것이 거울(물질) 속에 비치게 될 때는 시계바늘이 거꾸로 보이고 잘 읽을 수 없다. 그러나 거울 속처럼 보이는 컴퓨터 화면의 시계는 정확하다. 왜곡되고 굴절되어 보이는 것은 물질이 서로 간섭하는 성질 때문인데, 소리의 잡음(노이즈 현상)은 좋은 예이다. 비물질의 가상현실에서는 이런 노이즈(관념과 같은 성질) 현상을 일으키지 않는다. 데이터화, 즉 샘플링(sampling. 현실에서 견본 추출하여 데이터화, 즉 디지털화 하는 것)하는 과정에서 노이즈가 제거된다. 시의 현실은 가상현실이다. 이것은 현실을 샘플링한 세계다. 바꾸어 말하면 시는 시인에 의해서 기호화 된 것으로 현실 그 자체가 아니다. 그런데 디지털 시는 기호화 하는 과정에서 염사와 접사 등의 방법으로 관념 빼기를 한다. 그래서 기호에는 순수 이미지만 남게 된다. 그 순 수 이미지에는 심리 세계나 현실의 표상이 담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이 아날로그의 연속적인 개념에서 디지털의 불연속적인 개념으로 바뀐다. 그래서 공간과 공간의 마주보기, 시간과 시간의 마주보기 뒤섞이기가 가능해 진다. 그것은 이미지를 컴퓨터의 그래픽처럼 임의로 결합하기도 하고 합성할 수 있으며 반대로 이미지의 분리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디지털 시 즉 사이버성의 시 쓰기이다.     나는 그가 타고 간 기차의 빛깔을 파란 색으로 바꾸었다.   그때 어두운 바닥에서 바람을 타고 날아오른 먼지가 햇빛에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그가 안고 간 눈물의 무게는 몇 킬로그램이었을까?)   (그는 드디어 눈물이 없는 세계를 발견한 것일까?)   2006년 7월 21일 오후 2시 23분 서울 중계동 은행 사거리 키 6m의 벚나무 가지 위로 하얀 비닐봉지 하나가 날아간다.   -심상운 「검은 기차 또는 하얀 비닐봉지」에서   이 시는 지하철역 사고현장을 설명 없이 최대한 간략하게 보여준다(이것은 가상현실이다). 독자는 시인이 보여주는 대로 마음속에 한 장면씩 떠올리고 마음대로 상상할 수 있다. 이때 장면과 장면이 서로 간섭하고 잔상을 일으키어 이미지형성의 효과를 빚는다. 이 공간엔 내면의 의식이 흐르고 영상이 움직인다. 가상현실을 만들고 있는 기법을 보자. 그는 컴퓨터 그래픽처럼 기차의 색깔을 파란색으로 바꾼다. 그때 먼지가 반짝인다. 이 두개의 장면은 기본적으로 사진 찍듯(염사접사) 샘플링(기표화)한 것으로, 어떤 의미도 없이 사물성의 산뜻한 이미지만 있다. 그래서 독자를 가상현실의 세계로 이끌어가고 있는데, 일상적으로 칙칙하고 그을리고 무거운 기차의 관념을 파란색으로 바꾸어서 가볍고 유쾌한 환상을 펼쳐 놓는다. 그런데 특이하게 시 속의 괄호로 묶은 곳이 시나리오 지문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그가 디지털(탈-관념) 표현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실험하는 아날로그의 퓨전이라 할 수 있고 소위 디지로그(디지털과 아날로그)일 것 같다. 그래서 그의 디지털 시의 실험이 한발 더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라고 한다.   이상과 같이 최근 주목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를 살폈다.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는다. 그래서 존재하는 것은 시간과 공간의 노예가 되어 유한한 수명(목숨)을 가지고 있다. 유승우(시인, 인천대 명예교수)는 「시와 현실-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이란 글에 “시의 소재로서의 현실은 시간과 공간의 규제를 받고 있는데, 이러한 규제의 극복이 시적 형상화 작업이며 시의 영원성이라는 예술적 가치를 획득하는 수단”이라고 했다. 디지털의 가상현실은 시간을 살해하고 공간을 살해하고 전 세계가 현실의 공간을 극복하고 공간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또한 현실의 시간과 원근을 극복하고 동시적 마주보기를 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의 시 세계는 현실이 가지는 시간과 공간의 형식을 파괴하고 탈-관념의 시간과 공간이 확장된 새로운 질서와 형태를 만든다. [문학선언.2006.11.1.시의 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 吳南球 (시인, 평론가) 댓글:  조회:1071  추천:0  2019-01-24
[하이퍼텍스트 시론 1]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 ― 시집 「실험실의 미인」을 중심으로     吳南球 (시인, 평론가)     ❙ 들어가며 ❙현대시가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고 있다. 해체된 언어(조각, 유니트)가  다시 통합되는 원리는 무엇인가?,'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종의 초현실로서 저절로 통합되어 자동기술 되는 ‘탈-관념'의 시 쓰기이다.     1976년, '시인의집' 모임에서 현대시의 ‘수학적 존재 증명’을 얘기하곤 했다. 모임이 활기를 띠기 시작할 무렵 한성례씨가 찾아왔다. 분위기가 갑자기 환하게 느껴지는 용모였다. 가까운 문우들에게 필자가 이 모임을 탈관념의 ‘실험실’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시를 살펴보니 ① 탈관념의 선언에 영향을 받은 존재론적인 것과 ② 탈관념의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 과정에서 비롯된 것과 ③ 탈관념 그 습작과정에서 쓰여진 것과 ④ 수학여행이라는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시고(詩稿)들을 읽어보니 모던이스트 중에서도 모던이스트로 그 문명비평적인 쎈스의 풍자와 기지들은 많이 지나칠 정도여서 내게 씨(氏)가 시골사람이라는 걸 아조 잊어버리게까지 하고 있다.”   미당(서정주)이 한성례씨의 시집에 붙인 서문의 글이다. 이 말이 아니라 해도 시를 읽어보면 독자는 깨뜨려진 어떤 낮선 느낌을 받게 될 것이다. 한마디로 그의 시는 표백제로 얼룩진 물감을 탈색해서 이제 막 내어놓는 옥양목 같다고나 할까, 고정관념이 깨뜨려지고 있는 시어들은 낯설고 싱싱하다.     한 가름, 탈관념 선언에 영향을 받은 시   당시 탈관념의 실험을 시작하면서 모임에 내세울 새로운 이슈를 선언하기로 하였다. 그래서 미당을 찾아가서 자문도 구하고 노장사상(老莊思想)도 읽었다. 동경대전(東經大全)도 다시 읽었다. 숙고한 끝에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평소의 소신대로 한국적인 사상에 기초한 선언문을 작성한다. 그 해가 1980년 1월 무렵이었다. 후에 그 일부가 경구(警句)처럼 동인지 표지에 한동안 게재된다. 그 표지에 써 놓은 글은 이러하다.   “신은 시인 앞에 오면 한 낱의 낱말이다. 시인은 낱말을 죽이고 또 창조한다.”   이 같은 문구는 동인들 중 크리스천들에게는 충격적이 아닐 수 없었다. 필자는 시를 쓰는 ‘주체’에 대해서 ‘신이 아니라 사람, 즉 시인’이라는 등, 시의 본질이 되는 요인들을 하나하나 담론해 갔는데, 물론 그 선언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는 내용이었다. 그것이 바로 다음 항에서 말하는 탈관념의 논리를 구축해 가는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인데, 지적이고 논리적이던 한성례씨는 이러한 시론을 좋아했다. 이 무렵 그는 갈등하며 시적인 많은 변화가 있었던 것 같다. 당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관념적 허구’로서 절대자를 파악하게 된다. 그래서 ‘허무감’을 느꼈고, ‘막막한 신천지에 서듯’ 외로움을 타고, 불안・초조 등의 실존주의적 경향이 나타났다. 다음의 시를 보면,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 그가 드디어 동양적인 사고로 ‘직립’하여 바로 서는 자존적인 자의식을 갖게 된다. 그래서 서구화된 우리 현실을 바로 직시하고 절망과 고뇌를 반복한다.     1.「무풍대에서」에 나타난 자아, 그 직립   「무풍대에서」그가 자아의 눈을 뜨고 바라본 진실은 무엇인가? 시를 보자.   종소리 속에서 느릿느릿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관성만 남은 일상 더듬이가 필요한 날에는 볕이 드는 쪽과 음지를 혼동한다.   낯선 바람 원점 향해 위치 변동 꽉 채우고 있는 물먹은 공기 빠져나갈 출구가 없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첫째, 사고가 신의 세계에 갇혀 “종소리 속에서 / 느릿느릿 / 뚝 뚝 떨어져 내리는” 그런 관성이 남아 있는 상태이다. 그래서 정작 옳고 그름의 이성적인 ‘더듬이’의 가치 판단이 필요할 때마다 그 관성으로 인하여 그 판단이 혼동된다. 둘째, ‘낯선 바람’조차 불지 않는 곳이라고 파악되는 ‘무풍대’이지만 ‘낯선 바람’이 태동한다. ‘낯선 바람’이란 시인이 의식한 ‘새로운 것’ 즉 서구적이 아닌 동양적인 의식의 ‘새 바람’이다. 그런데 우리 삶의 현실이란 서구 정신문화가 포화된 상태로서, “꽉 채우고 있는 / 물 먹은 공기”로서, ‘새바람’의 출구도 없는 무풍지대로 인식된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 그 언저리는 꼭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다.   직립한 바람은 직립한 바람끼리 손잡고 있는 무풍대에서    껌딱지로 도배된 기지촌의 포도처럼 사인 코사인의 귀를 맞추며 덕지덕지 하품으로 이어 놓는다. ─「무풍대에서」중에서    셋째, 그는 이 현실을 직시하면서 절망을 느낀다. “구겨져 쓰레기통 속에 / 곤두박질하는 멍한” 하늘을 본다. 또 죄지은 듯이 “꼭 / 지평에 맞닿아 숨죽이고” 있고, ‘기죽은 초라한 자아’ 그 실존의 위기를 본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가 시인으로서 ‘직립’ 하여 ‘바로 서는’ 자의식의 입지(立志)를 한다. 물론 ‘기지촌’, ‘껌딱지’의 서구적 극한 상황에서도 의연한 의지로 견디어야 하는 숙명이다. 이제 그는 무풍대에서 직립한 바람의 존재로서 홀로 서 있다.     2. 「벼랑 끝에서」의 춤   신을 ‘관념적 허구’로 파악하고 ‘절대자’를 부정했으나, 그는 아직 확고하지는 못하다. 그래서 실로 한성례씨는 두려움 속에 있다. 신천지에 서듯 막막함과 불안・초조의 벼랑에 서게 된다. 이때 ‘춤’을 추게 되는데, 불안・초조로부터의 극복과 탈출을 위한 몸짓이다. 이 절대 고독상황에서 손잡아 주는 것은 새로운 의식의 ‘어설픈 바람’ 뿐이며, 그 절실한 모습에 비장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낭떠러지에 서서 춤을 춘다. 동작보다 언제나 한 템포 느린 음악   아래로부터 걷어 올라온 바람이 어설프게 손잡아 준다.   언제부터였을까  엄청난 배반의 현실에도 때때로 풋풋한 여명을 맛보곤 한다.   내 가슴 속에 출렁이는 배 한 척 무거운 방황은 젊은 날의 피를 낭비하는 것이라 해도 음울한 예정론에 기대를 걸고 출항을 서둘렀다.   이제 나이 드는 것이 타락의 나이테라면 차라리 돌아가지 말아야지   벼랑 끝에서 느릿느릿 춤을 춘다. ─「벼랑 끝에서」전문     3.「불완전 명사의 저녁」에 나타난 존재   눈을 뜬 자아, 그래서 막 태어난 '불완전 명사'로 나타난 존재! 그 직립에 의한 행보는 방황과 갈등이다. 벼랑에서 새로운 출항을 하게 되지만 이는 불안한 항해로서 익숙지 못한 실존주의자의 삶이다. 좌절과 불안과 머뭇거림의 연속이다. 그의 사상은 불투명한 상태로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리는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갈등 한다.   터널로 빠져 드는 녹슨 연기 시침을 살피며 얼룩진 돛을 내린다. 철분의 붉은색 앙금으로 가라앉히고 머무는 일이 불투명해서 늘 자맥질처럼 움직인다.   퇴색된 석양 언저리에서 태우며,  가늘게 남은 내 생의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   줄자로 잴 수 없는 문화의 어정거리는 습성  그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   터널로 빠져드는 녹슨 연기 아우성으로 떠는 흐느낌이다. ─「불완전 명사의 저녁」 중에서   그러면서, “가늘게 남은 내 생의 / 나머지 끈을 푸는 저녁”으로 그의 존재(存在)를 확인하며, “줄자로 잴 수 없는 / 문화의 어정거리는 / 습성”을 꼬집어 “물결을 거스르지 못한다”고 스스로 질타한다. 존재자의 갈등! 바로 진실과 연민을 느끼게 하는 시인, 그 인간다움이다. 이러한 그는 「도편수의 노래」에서 스스로의 배-새로운 출항을 위한 도편수가 되기도 하고, 줄타기 하는 삶의 곡예사로서 ‘땅에 발 디디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      두 가름, 언어여행 또는 감각여행의 감성훈련에서 비롯된 시   이렇듯 그가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 일은 쉽지 않았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을 했는데, 그것은 ‘최면을 통한’ 자동기술(自動記述) 훈련이었다. 그 한 가지 내용을 보면,   “자, 자세를 가다듬고 눈을 감는다. 편안히 호흡을 고른다. 깊이 숨을 들이 마신 후에 아랫배에 지긋이 힘을 모은다. 그리고 천천히 천천히 숨을 쉰다. 1초, 2초, 3초……. 이제 감각여행을 떠난다. 태양! 태양을 마음에 그린다. 태양을 향해서 몸이 둥둥 떠간다. 경비행기 속도로 간다. 빛의 속도로 간다고 생각한다. 1초, 2초, 3초…. 태양! 태양이다! 느껴본다. …뜨겁다. …탄다!…… 눈을 뜬다.”   대강 이런 식으로 실험을 했는데 그 성취는 괄목할 만 했다. 눈을 떴을 때는 대체로 들뜬 상태가 아니면 착 가라앉은 상태였다. 공통점은 한결같이 마음이 가벼워졌고 바라보는 사물들이 움직인다고 했다. 여기서 ‘움직인다’는 것은 느낌을 말한다. 몇 분 전만 해도 무심히 무감각하게 보아 넘겼던 커피잔, 스푼, 화분, 의자 등이 새로운 정서로서 움직인다. 그 성취 정도는 사람들마다 각기 달랐다. 불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은 비교적 강렬하고 빠른 반면에, 서구적인 종교와 철학, 지식의 깊이가 강한 사람은 그 성취가 느렸다. 그의 시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는 그 즈음 겪은 갈등과 실험을 꾸밈없이 쓰고 있는데, 드디어 관념이 깨어지는 그의 꿈꾸기(Image-Dream)는 ‘황홀한’ 첫 시적 경험을 한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    ─ 타버린다 ─ 는 감각은 없어지고 경비행기로 출발한 우주여행은 그저 행위로만 남았다   기착지는 태양 뜨거움보다는  황홀한 색채에 질식당했다. ─「태양을 향해 날아갔다」 전문   당시 그는 자동기술의 감성훈련에 적응이 늦었던 것 같다. 개성이 강할 뿐만 아니라 지적인 서구적인 합리성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때 자신의 곤혹스런 입장을 “태양으로 떠난다 해서 따라나섰다”로 진솔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턴가 늘 도로(徒勞)의 작업이던 ‘꿈꾸기’가 첫 느낌을 얻게 된다. 자연스러운 “기착지는 태양”으로서, 첫 시적(詩的) 체험인 “황홀한 색채에 질식” 당하는 희열을 맛본다. 이후 그는 초현실적인 감각의 시 쓰기가 익숙해진다.「구의역에서」,「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등의 다양한 시각을 갖게 되고, 또한「방」,「장마」에서는 빗줄기의 기하학적인 선(線)이 꿈처럼 펼쳐지며 새로운 시세계를 열고 있다.     1.「구의역에서」의 우주적인 시점   이러한 ‘탈관념의 꿈꾸기’를 체험한 사람들은 우주적 감각인 둥둥 떠가는 ‘느낌’이 자유로워진다고 한다. 「구의역에서」는 시점의 ‘일상성 벗기’라는 ‘감성훈련’으로 빚은 큰 성과다. 그가 바라보는 사물(역, 길, 사람 등)이 둥둥 떠다니며 지구의 자전에 따라 시각이 바뀐다. 낮에 바로 서 있던 물건이 밤이면 거꾸로 처박히는 모습이 된다. 이 시는 바로 우주적인 시각에서 본 움직임인데, 탈관념의 꿈 중 하나이다. 한성례씨에게는 그녀 인생의 무대, 그 지구가 자전함에 따라 바로 서기도 하고 거꾸로 서기도 한다.   둥둥 떠가는 구의역 내 앞에 누워 있는 길. 뱉어낸 사람들 물살로 흘러 흘러서 무시로 흩어져 간다.   질주하던 길이 문득 산 밑에 가서 머문다. 시선 끝으로 길 한 줄기 붙잡으면 녹음이 앞서 무질러 오고 밀려드는 차 물결   쏟아질 듯 곤두박힐 듯 가로수 함께 일렁이다가 몇 개로 틀어지고 조각난 풍경 판토마임의 내가 거꾸로 서서 자막 속을 걸어간다. ─「구의역에서」중에서    그는 우주적인 감각이 자유로워졌고, 그에 따라 무한하게 시의 세계가 확장된다. ‘가로수와 함께 일렁이기도’ 하는 판토마임 속의 자신을 확인하면서 눈을 뜬 현실로 되돌아 와서 다음과 같이 ‘구의역’을 직시한다.     잠시 눈 뜬 플랫폼, 흘러 흘러서     투사되듯 입력(入力)되는 곳 구의역.  ─「구의역에서」 중에서     2.「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의 전전반측   전전반측(輾轉反側)하는 시인의 정(情)은 무엇일가? 그는 밤을 지새우고 있다. 그러면서 갈증 같은 향수를 느끼고, 그때 “기지개 켜는” 의식이 꿈꾸기를 한다.     산과 들, 강물 걸어 넘는다.   그 끝은 평행선 한 가닥 분실된 몇 낱 낯선 어둠에 섞여 보이지 않고 ─「변주곡에 대한 상상 연습」 중에서   몽롱한 의식 상태의 그의 ‘꿈꾸기’는 비몽사몽간 눈앞에 고향산천을 그려보지만 원근 속에 하나의 점이 되어 소멸돼가서 끝이 보이지 않고, 다만, “멍든 석양의 조각들이 / 도시 꼭대기에 차양처럼” 매달린 메커니즘의 현대문명 속의 삭막함만이 남는다. 현대인의 짙은 외로움이 드리워져 있다.      3.「장마」에서의 기하학적인 선   1980년대의 답답한 현실은 그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래서 현실을 탈출하려는 꿈꾸기가 이루어지는데, 이때에 기하학적인 선으로 나타나는 빗줄기는 대단히 시원하고 자유분방하다.     빗줄기 속에서 뻗어 내린 흰 꼬리 화살 화살은 내게 일제히 달려든다.  몸짓으로 털고 몸짓으로 도망하고 또는 몸짓 거부로 넘어지는 행위   시대의 재채기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 ─「장마」중에서    그의 시는「장마」에서 안정(安定)되고 한 단계 더 세련되었다. 빗줄기로 시작한 ‘꿈꾸기’가 “시대의 재채기 / 최루탄의 화살이 쏟아져 내린다”로서, 현실과 이어져 있다.     세 가름, 탈관념의 자동기술된 시   1. 수학적 시론의 전개   탈관념의 ‘꿈꾸기(Image-dream)’는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리는데 있어 새로운 질서의 공감각과 방향이 있어야만 망상이 되지 않는다. 필자는 그 질서는 ‘자연’에서, 그 방법은 ‘직관’이라고 설명했는데, 이것은 실험에 의한 체험적 소신이었다. 고정관념의 ‘깨뜨림’은 습작을 위한 중요한 과정으로서 상당기간 대화법으로 실험을 도왔다. 그때 집약된 내용이 ‘쓰레기통 문답’ 또는 ‘함수f(x) 시론’이었다. ‘쓰레기통 문답’은 이러했다.   ‘꽃 한 송이를 들고 신인들에게 보인다. “이게 뭡니까?”라고 묻는다. “꽃입니다”라고 대답한다. 그때 필자는 쓰레기통에 꽃을 던진다. 그리고 “쓰레기입니다”라고 말한다. 누군가 그 얘기를 듣고 와서 “쓰레기입니다”라고 대답하면 “이게 왜 쓰레기통입니까? 꽃이죠!”라고 무안을 주었다.’   이 쓰레기통 문답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데 첫째, 사물에 대한 일상적인 고정관념을 깨뜨려서 신선한 충격을 경험하게 하고 둘째, ‘꽃’이라는 이름이 쓰레기통(박스) 속에 들어가면 순간 ‘쓰레기’가 됨으로써 허무하게 관념(의미)이 바뀌는 것을 보여 준다. 셋째, 청각이나 시각 등 오감으로 느낀 사물에 대한 정서와 감정이 시시각각 변하며 각기 다른 언어로 표출된다는 것을 쉽게 이해시킨다. 그럼으로써 시인 한 사람 한 사람의 개체가 각기 다른 ‘의식의 함수 f(x)다’ 라는 가설로 유도시킨다. 당시 한성례씨는 이러한 수학적 시론의 전개를 신선한 충격으로 공감하고 받아들였다. 필자는 보다 체계적으로 시론을 정립해 가며, 그 가설을 다음과 같이 요약하고 설명했다.   “시인의 삶이 f(x)면 시는 그 도함수(기울기)이다. x는 ‘만남(사물)’의 변수, y는 의식 공간이다.”             2. 의식의 단면   어느 날 좌표평면 상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나타나는 순간변화(의식의 단면)를 발견했다. 수학적 시론의 가설을 구체화시켜 x축과 y축으로 하는 평면좌표를 그렸는데, x축은 시간의 만남(시간적인 흐름 속에서의 만남)이고, y축은 그때그때의 ‘의식 공간’으로 구성했다. 다음은 한 ‘시인(한성례씨)’과 남산’의 ‘만남을 함수관계’로서 그 의식(체험)을 나타내 보았다.   [예] 만남의 요소-남산   ① 20대의 한 시인이 1974년 1월 처음 남산을 보았다. 이후 계속 보게 된다. 그 높이를 300m쯤으로 직감한다. 이를 y축 3에 표시한다. ② 그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동진강변의 평야지대에 살았다. 그가 산을 보아온 일상적인 의식체험은 100m 쯤의 야산들이었다. 이를 y축 1에 표시한다      위의 ‘가나다라’ 선은 시인이 사물을 만나서 느낀 의식의 그래프이다. 이것은 의식(체험)의 한 단면이고, 여기에서 수평을 이루고 있는 선분 ‘가나’와 ‘다라’는 늘 바라보았던 일상적인 것인데, ‘반복된 사건의 일상성’이다. 그런데 상경하여 남산을 접한 어느 순간, 그 일상성이 깨뜨려지는 수직의 선분 ‘나다’가 나타난다. 이 순간의 의식(느낌)은 긴장이나 시적 충동으로 설명될 수 있다. 나는 이를 ‘일상성의 깨뜨림’이라 했고, 수평의 선분 ‘가나’ ‘다라’를 반복된 사건의 고정관념을 나타내는 ‘일상성의 직선’ 이라고 했다. 이로써 좌표평면 상에 시의 존재(기울기)가 나타나는데, 바로 선분 ‘나다’로서 긴장의 정도를 가시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이 ‘나다’의 선분은 앞의 가설인 함수 f(x)의 ‘시간 x축’과 ‘의식 공간 y축’으로 하는 좌표 상에 나타난 ‘순간변화’이다. 그래서 이것을 의식의 ‘순간변화’ 또는 ‘순간변화율’이라고 이름 붙였고, ‘느낌의 기울기’라고 했다.  이렇듯 '만남의 자극과 반응’으로 나타난 ‘순간변화율’로서 그 존재를 확인하고, ‘만남이라는 사건’에 착안하여 집합과 조합으로 이해했다. 그래서 ‘시공에서 사물과의 만남은 무수히 진행되고 의식은 집합적으로 결합된다.’ 이처럼 시공의 개념에서 접근하여 수학적인 방법으로 좌표 위에 '나'의 존재(의식)를 나타내고, x축을 시간의 흐름, y축을 의식공간으로 표시하였다. 그리고 x축과 y축 사이에 무수히 진행되는 ’만남의 사건‘을 변수 x로 가정하였다. 그래서 자동기술의 시는 무수히 사물과 만나면서 이뤄진 체험이 잠재했다가 ‘자연스럽게 흘러나온다’는 것을 알았고, 이것은 초현실주의 작품 이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특히 초현실 시 쓰기인 탈관념의 ‘꿈꾸기’를 하면서 시의 ‘질서는 자연에서, 방법은 직관’이라는 방법론을 제시하게도 되었다. 여기에서 ‘자연스럽게’란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자연스러움’은 곧 시를 평가하는 척도가 되었다.     3. 그 습작과정에서 쓴 시,「서울의 큐비즘」   그는 그때까지 ‘매끈한 시’, ‘잘 다듬어진 시’가 좋은 시라는 소박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고등학교에서 문예부장으로 활동하며 고교생 대상의 여러 시문학상도 수상하고 나름대로 시에 식견이 있다고 여겼던 그에게 탈관념은 커다란 충격과 혼란이었다. ‘깨뜨림’을 당한 멍한 상태라고 할까, 아무튼 이로 인하여 시적방황이 시작되었는데, 그 와중에서 처음으로 자동기술 되어 나온 작품이 ‘서울의 큐비즘’인 것으로 기억된다. 이어서 ‘지하도 풍경’도 발표했는데, 두 작품이 각각 문학지 ‘신인문학상’과 ‘대학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에게는 기념비적인 작품들이다.     핏빛 바람 갈대숲 안고 달아나는 소나무 하늘은 꽃씨 눕힌다. 누이의 속치마 능선을 타고 호랑나비 하늘을 앓는다. 소나무 허리 껴안은 거문고 울음과   한강변 세 살 난 잠실동 아이의 맏연습  아파트 아파트 우리 집은 아파트 충무로 1가에서 떠돌던 바람 소리 내어 돌아가고   호랑나비 푸득 푸드득 날개 짓 하는 하오는  종합전시장 앞 14차선 도로 악을 쓰며 누워 있다. 맨드라미 노을 넘실거리고   서울의 꿈은 유리알 맑은 모래처럼 내 온몸을 휘감는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걸치고 앉아 있다. ─「서울의 큐비즘」 전문   우선 시에 나타난 어휘들을 집합(集合)해 보면, "달아나는", "앓는다", "울음", "맏연습", "떠돌던", "악을 쓰며", "허리를 반쯤 걸치고" 등의 말들이 모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그 즈음의 그의 갈등에서 생성된 것으로서 인위적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표출, 순열(順列)된 것이다. 시 자체는 좀 생경스러우나 일대 혁신의 작품으로 받아들여졌다. 미화되거나 인위적으로 포장됨이 없이 시인의 솔직한 진실(감정)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감이나 확신이 없다. 긍정 반 부정 반의 자세로서 엉거주춤한데, 시에 잘 나타나 있다. “남산 중턱에 해가 허리를 반쯤 / 걸치고 앉아 있다”의 표출이 그것이다. 그의 신경세포가 ‘반쯤’의 어중간한 상태를 자의식하고 있는 가운데, 해의 한 시점인 반쯤 앉은 상태가 강한 이미지로 입력되었다가 자동기술(순열)된 것으로 이해된다.     네 가름, 삶 언어의 집합・조합・순열의 묘    1. 언어의 표현   시인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물과 만나며 느끼는 자극(느낌→의식)을 y 라고 하고, 사물과 만나는 시간 x를 변수로 하는 의식의 함수 y= f(x)를 가정할 때, 어느 시점의 자극(만남)과 반응(의식)을 나타내는 순간변화율(기울기)이 있다. 즉 사물과 만나는 '의식(느낌)의 변화율'이 있다. 이것을 필자는 '의식의 기울기'라 하고, '긴장' 또는 '흥분' 등의 파동을 나타내는 '시의 순간 변화율'이라고 했다. 곧 시를 어떤 순간 변화율인 '생명의 파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언어로 표현 기술되었을 때, 이 기울기(시라는 순간변화율)는 생명적이므로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는 어떤 생명의 존재질서 위에 있으며 이것은 자연스럽게 집합, 조합, 순열된다. 그래서 벤다이어그램으로 이를 도표화해서 보면 ‘언어A, 언어B, 언어C’의 표현을 다음과 같이 나타낼 수 있다.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그림]언어의 집합   도표를 살펴보면, 언어의 합집합인 최대공배수 ①A∪B∪C와 공통집합인 최대공약수 ②A∩B∩C 등의 모양이 나타난다. 합집합은 세 단어가 나타낼 수 있는 의미 내용의  최대로서 표현의 L.C.M이고, 세 단어가 의미 내용을 공통으로 가지는 빗금 친 부분의 공통집합은 표현의 G.C.M이다. 이 G.C.M으로써 보편적인 언어의 의미가 구성된다. 그러나 이 의미는 독자(평론가)에게 수용되고 물론 그의 체험에 의해 재구성된다.   2. 시 해설은 적분   이상의 수학적 시론의 전개는 동인들에게 거의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고, 이것을 바탕으로 실험습작을 했다. 그에 따른 시의 성취나 그 가치는 별도로 하고, 당시 탈관념의 ‘꿈꾸기’에 몰두했던 한성례씨의「지하도 풍경」의 한 예문을 분석해서 정리해보겠다.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 ─「지하도 풍경」 중에서   위의 예문에 “범람/ 성욕 / 용설란 / 남아프리카지도 / 피” 다섯 개의 단어가 있다. 이것은 시인이 사물과 만남(사건)으로써 생긴 단어들인데 긴장과 흥분 등 느낌의 기울기(미분)를 갖는다. 이것은 삶의 한 시점이 미분된 것이고 의식 또는 잠재의식 속의 언어(하이퍼텍스트)이다. 이 단어들이 독자(평가)에게 수용되고 해설될 때 시적체험이 되고 시인의 삶이 된다. 그러므로 해설은 곧 ‘적분’이다. 표현되는 내용은 집합, 조합, 순열된다. 여기서 표출되는 내용을 도표화해 보면,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예문의 ‘집합① 범람하는 성욕의 용설란들, 집합② 남아프리카 지도가 피를 흘린다.'를 보자. 그림 ①처럼, ‘범람∪성욕∪용설란’의 집합과 그림 ②처럼, ‘남아프리카 지도∪피’ 의 합집합은 단어들이 갖는 상징과 이미지 등 표현의 모든 범위를 갖는다. 그리고 단어들의 내용이 겹치는 부분인 공통집합(빗금)은 특별한 의미를 만들고 공감을 얻는다. 그런데 집합 ③에서 한 행 한 행의 내용 표현이 문장을 이루고, 다시 조합, 순열로서 한 편의 시를 완성해 간다. 이와 같이 언어, 즉 의식 또는 체험으로 연결된 잠재의식 속의 단어(하이퍼텍스트)는 시인을 통해서 다시 집합, 조합, 순열해서 통합된 하나의 질서를 이룬다. 그림과 같이 ‘범람∩성욕∩용설란’으로 공통집합 되면 시인 개체 안에서 자동으로 이미지나 의미가 결합되어 생명의 질서(정서)를 갖고서 표출된다.    3. 언어의 징검다리 건너기   이렇듯 해체에서 통합으로 가는 원리는 미래 시의 새로운 항해에서 나침판이 되어줄 수도 있다. 구문론을 과감하게 파괴(탈-관념)하는 시가 길을 잘못들 경우 난해한 미로에 빠져들 위험이 있다. 그래서 해체된 언어들은 어떤 질서로 통합되어야 한다. 그의 시 ‘옵니버스 율’은 시인(생명)의 어떤 질서를 내포한 무의식의 흐름이고, 그 흐름의 경로(항해 -‘탈-관념의 꿈꾸기’)가 나열됨으로써 정서(질서)가 표출되었다.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햇살은 나비의 눈물같이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들판」 전문   ‘산 빛 초록촉록 꽃밭동’ 에는 조사가 없다. 다른 행에서도 주어, 술어 등의 구문론이 다수 파괴되어 있다. 그래서 일반적인 시에서 보이는 선형성(線形性)이 없다. 비선형적이다. 또한 앞뒤의 문장이 원인과 결과, 논리가 없고 순차적이지 않다. 이 텍스트는 전통적인 텍스트에서 벗어난 하이퍼텍스트 적이라 할 수 있다. 끊어져 있는 마디가 무작위로 배열되어 있다. 그래서 독자가 이 시를 읽을 때는 징검다리를 건너가듯 언어의 마디와 마디를 뛰어 읽어가야 한다. 이때 독자는 단절된 마디와 마디 사이의 틈을 뛰는 스릴을 맛볼 수 있고, 그 공간에서 자신만의 상상을 펼칠 수도 있다. 또한 시의 행갈이 순서도 자유로워서 역순 뿐 아니라 얼마든지 행을 뒤섞어 읽어도 이미지가 선명하다.   새까만 기적의 음률이 간다 펼치어 흔들리는 들판 머슴애의 논갈이 뒤꿈치에 산 빛 초록초록 꽃밭동 햇살은 나비의 눈물 같이 프리즘에 갈리는 하얀 겨울 회부럭담 아이들 어깨 너머로 햇살 빠른 음률이 피어   그는 이러한 시들의 묶음을 ‘옴니버스 율’이라고 했는데, 행이나 구문에 이미지나 표현이 묶이지 않고 한 행 한행 독립적으로 배열된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옴니버스이므로 한 줄 한 줄 독립된 이미지의 마디를 다시 독자가 재배열해서 읽어도 된다. 그런데 위와 같이 역순으로 배열된 텍스트가 더욱 선명한 이미지를 보이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원본 텍스트보다 역순 텍스트인 메타텍스트가 더 하이퍼텍스트 적이고, 특히 선형성과 순차적인 배열을 전혀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가 행한 이 실험은 모더니즘 시의 한 가닥 새로운 길을 열고 있다.     ❙ 나가며   탈-관념의 꿈꾸기는 우주적(하이퍼) 공간이다. 그의 시「구의역에서」에서 보이는 부유하고 있는 모습이 그러하고,「태양을 향해 날아갔다」에서도 현실감각이 사라진 공간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시적 꿈꾸기는 사이버세계의 ‘경로’로 이해할 수 있다. 별과별을 잇는 상상의 ‘링크’가 있고, 그 링크를 계속 따라가는 궤적과 같은 그런 경로다. 은하계의 ‘북두칠성’을 보자. 하나하나는 멀리 떨어진 별이다. 우리의 상상은 일곱 개의 별을 이어 놓고 이 별자리에 ‘북두칠성’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의 시를 이처럼 우주 공간의 ‘경로’로 이해해도 되고, 봄날에 꽃과 꽃을 옮겨다나며 자유자재로 날아다니는 나비의 ‘경로’에 비유해도 된다. 이러한 시 쓰기는 인간의 뇌 속에 잠재해 있는 기억의 소자(원소)들 사이를 흐르는 의식의 흐름과 흡사하다. 시를 ‘의식이 흐른 하나의 경로’로 볼 수 있다는 것은 참 흥미롭다. 현대시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해도, 해체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시인의 의식을 표출하는 그 무엇이 되어야 한다, 그 중에서 특히 경로를 통해 표출된 정서나 음률은 시의 바탕을 이룬다. 한성례씨의 탈-관념된 시가 정서와 음률을 잃지 않고 있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그의 시는 시대를 뛰어 넘어 언제든 수준 높은 독자와 만나게 될 것이다.(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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