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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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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연변 유적비 순례] - 강경애문학비 댓글:  조회:4511  추천:0  2017-12-08
  강경애 문학비 룡정에 건립         우리 현대녀성문학의 선구자로 지칭되는 강경애의 문학비가 룡정의 비암산더기에 세워졌다.   한국의 유명녀류작가 박완서 등 녀성문인들의 추렴으로 경립된 문학비는 앞면에 라는 이름이 새겨지고 뒷면에는 강경애의 리력서와 문학세계 및 문학비건립취지가 명의로 적혀졌다. 비면에는 또한 라는 강경애의 작품 한 구절이 곁들어 적혔다.   소설가 강경애는 1906년 4월 20일 조선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 평양 숭의녀학교를 다녔다. 1925년 강경애는 룡정으로 와서 1년 반 정도 교원으로 지내다가 고향 장연으로 되돌아갔다. 1931년 6월 남편과 함께 다시 간도로 이주하여 1939년까지 머물면서 창작과 평론활동을 펼쳤다. 1931년 1월 처녀작 을 발표한 뒤로 강경애는 2권의 장편과 17편의 중단편 그리고 많은 평론과 수필, 시 등을 발표, 1944년 향년 38세로 타계하기까지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형상을 창조해냈다. 당시 룡정에서 창작하여 에 련재한 유명장편 는 녀성의 한계를 벗어나 앞선 주제의식과 문학적 완성도로써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8월 8일 룡정에서 강경애문학비제막식을 거행, 한국의 저명한 평론가 김유식, 한국평론가협회 신임회장 홍기삼 등 30여 명과 연변대학, 연변작가협회, 룡정시 문련 등과 연변의 녀류작가들이 제막식에 참가하여 시비를 첨앙하였다. 그들은 라고 입을 모았다.   /김혁 기자   ///"연변일보" 99년 8월 20일                         ===================== 강경애 그는 누구인가... 소설가나 시인에게 있어 태어난 곳 혹은 살았던 곳, 고향은 소중한 재산입니다. 나이 지긋한 노인들이 옛 추억을 곱씹으며 살듯이, 작가에게 고향이란 소설의 첫 문장이자 마침표와 같습니다. 모든 주제가 고향에서 시작되고 그곳으로 회귀하죠. 작가에게도 귀소본능이 있는 걸까 싶을 만큼 고향에 집착하는 직업군 중 하나입니다.  먼훗날 소설가 강경애를 만나게 된다면 꼭 묻고 싶습니다. 당신에게 간도는 어떤 의미인지, 간도에서의 삶이 작가로서의 삶을 얼마나 좌우했는지 말이죠.  대한인 14번째 주인공은『인간문제』,『소금』등 1930년대 일제의 억압에서도 꿋꿋하게 자신의 작품세계를 펼쳤던 소설가 강경애다. 그녀는 당대 일반적인 여성작가들보다 앞서 리얼리즘 문학을 시도했습니다. 유난히 항일투쟁지역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작가는 그때의 기억을 살려, 그 시기를 배경으로 소설을 쓰죠. 그녀의 소설은 마치 사진 한 장을 보듯 생생한 1930년대를 담고 있어 소중한 자산으로 남아 있습니다.    ▲강경애 작가와 대표작품인 인간문제.   강경애는 1907년 황해도에서 태어났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총명했던 탓에 책을 읽으며 한글을 깨우쳤고 동네사람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영특한 소녀였죠. 가난했던 집안형편에 간신히 초등과정을 마쳤고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에 입학했지만 3년 만에 퇴학당합니다. 이 시기 국문학자 양주동을 만나 열애를 하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의 관계는 끝이 났죠. 당시 양주동은 이미 결혼한 유부남이었고 두 사람의 부적절한 관계가 알려지자 타지로 떠돌이 생활을 하는 고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관계가 정리 된 후 강경애는 양주동의 글을 공개적으로 비판하는 모습을 보였죠. 양주동은 비록 헤어진 연인지만 강경애의 삶에서는 충분히 중요한 역할을 했죠. 글을 쓰고 싶었던 강경애의 재능을 이끌어 냈다는 부분이죠.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쓰여졌다 이후, 강경애는 약 8년여를 문학공부에 몰두합니다. 그녀의 작품 세계가 다시 시작된 것은 운명의 남자 장하일을 만나면서인데요. 두사람은 1931년 결혼하지만, 장하일도 오래전 조혼한 상태였습니다.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간도로 이주를 선택하죠. 이곳에서 가난과 싸우며 작품에 쓸 중요한 자산을 얻게 되는 사실상 제2의 인생이 열리는 순간이었습니다.  장하일은 강경애를 상당히 아끼고 그녀를 위해 헌신했다고 전해집니다. 그녀의 작품을 가장 먼저 읽는 독자이자 조언자였고, 오래토록 앓던 귓병을 낳게 하려 여러 방법을 찾는 등 다방면으로 그녀를 위해 노력했죠. 장하일의 강경애에 대한 애정은 그녀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나타납니다. 해방직후 강경애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 19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발행했고 이로인해 남북 문단에서 그녀의 이름이 알려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강경애가 남긴 소설 작품 가운데 가장 먼저 씌여진『파금』이라는 소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간도에서 쓰여졌습니다. 자전적 이야기를 담은『어머니와 딸』, 간도를 잠시 떠나며 쓴『간도를 등지면서』,『간도여 잘있거라』,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다른『인간문제』, 빈궁의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쓴『소금』까지 모두 간도로 시작해서 간도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시기는 1931년부터 1939년까지 겨우 8년이었다. 최서해, 안수길도 간도의 체험을 문학적 기반으로 삼았지만, 여성작가로는 강경애가 유일 했지요.  간도는 강경애가 장하일과 이주해서 살던 곳으로 당시 항일투쟁의 중심지역이었다. 그녀는 생생하게 항일투쟁의 모든 순간을 보았고 그 안에서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대립, 항일무장 조직의 어두운 단면 등을 몸소 체험했고 이 모든 것이 소설의 밑바탕이 되어 여러 작품에 녹아들게 되었죠.  그 시절 서울은 문학의 중심지였지만, 강경애는 조금 달랐습니다. 서울이 아닌 간도에서 문학적 자양분을 모두 얻었고 중앙문학계로의 진출보다는 자신의 진실 된 작품에 매진해왔습니다. 이 부분은 다소 아쉽습니다. 간도라는 변두리에서 작품을 쓰다보니 이름을 그다지 알리지 못했던 것이죠. 북한에서는 1940년대 이름이 알려졌지만, 남한에는 1970년에 이르러서야 강경애라는 소설가를 알게 됐고, 그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됐죠. 강경애가 남긴 리얼리즘 문학은 대한민국 문학계에서 중요한 구심점이 되고 있습니다.    ▲1934년 8월23일 동아일보에 연재된 소설 인간문제.   삶에서 시작된 리얼리즘 문학 리얼리즘 소설이란, 주체적 내면세계를 가진 주인공이 당당히 환경에 맞서며 사물을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재현하는 소설 종류입니다. 한국 문학에서는 일제강점기였던 1920년부터 리얼리즘 문학이 두각을 드러냈습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 거론되는『인간문제』는 근대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로 꼽힙니다. 소작인의 딸로 지주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방적공장 여공으로 살다 결국 폐병으로 죽는 선비의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선비는 조선의 대표적인 농민의 딸인데 그녀의 삶을 따라가다 보면 식민지 시대의 친일 지주와 소작농민, 친일 자본가와 하수인 공장 감독과 공장 노동자들의 고뇌와 모순을 엿볼 수 있습니다.  1934년 쓴『소금』은 당연히 간도를 배경으로 중국인 지주와 일본 경찰에게 학대받는 조선 민중의 비참한 처지를 보여줍니다. 불합리한 사회를 뒤엎고자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유격대의 모습을 담아 민중의 분노를 세세하게 표현해 냈죠.  세상을 떠난 뒤에야 강경애 작가의 가치가 비로소 인정됐습니다. 간도 용정 비암산에는 강경애 문학비가 세워져 있습니다. 문학비에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다”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살아있는 동안 강경애는 소설가로서는 불행했습니다. 자신의 글이 실린 단행본 하나 갖질 못했기 때문이죠. 일반 동네사람들처럼 물을 긷고 빨래하고 소박하게 살아가는 강경애의 모습을 보며 작가일거라고는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반 고흐가 떠오르는 이유는 뭘까요.  1930년 여성작가로 산다는 것은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여성의 목소리를 끌어올린 여성들의 대변자다.”    ▲1934년 7월 동아일보에 신작연재소설 예고기사로 실린 강경애 모습. 오른쪽이 강경애 소설가.   학계는 그녀를 이렇게 평가합니다. 식민지 시대의 작가로 여성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자주적인 노력을 기울인 작가로 말이죠. 작가의 삶은 현재도 어렵지만 1930년 당시에는 더욱 어려웠겠죠. 또 여성이라는 성 차별적인 시선 또한 강경애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고, 극한의 궁핍도 경험했고, 식민지 간도라는 척박한 환경까지 감당하기 어려운 시련들이 많았죠. 또 그 시대의 여성이 자아성찰을 거쳐 습작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놀랍습니다.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을 대변했고 모든 상황을 극복해 낸 강경애 소설가.  1939년 강경애는 아픈 몸을 이끌고 고향인 장연으로 돌아옵니다. 이곳에서 짧은 수필 두편을 쓴 후 펜을 내려놓습니다. 귀도 들리지 않고 눈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1944년 4월26일 숨을 거둡니다. 젊은 유능했던 작가의 삶이 끝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강경애는 다시금 태어났습니다. 현대의 문학계에서 강경애의 리얼리즘 문학이 재조명되고 있기 때문이죠.  어려운 시대에 보석같은 작가가 있었음을 우리는 이제야 깨닫게 됐습니다. 4월26일 강경애 작가를 추모하며, 아주 먼 간도의 옛시간을 조금이나마 상상해봅니다. /이해미 기자 ======================== (서울=연합뉴스) 남광식기자 = 소설가 강경애(여. 1906-1944)의 문학비제막식이 지난 8일(1999년 8월), 중국 지린(길림(吉林))성 룽징(龍井)시 비암산 기슭에서 열렸다. 흑룡강신문 최근호(8.11)는 강경애 문학비는 높이 2.6m로 문학평론가, 한국 초당대학의 서정자 교수, 정판룡 연변대학 교수 등 국내외 저명한 인사들의 후원으로 세워졌다고 전했다. 강경애는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으며 무애 양주동과의 연애로도 화제를 모았 던 작가로서 25년 룽징시에서 1년반 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고 31년부터 40년까지 룽징시에 머물면서 문학단체 `숙향회' 동인으로 활약하다 44년 고향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노동신문 부주필을 지내기도 했던 남편 장하일이 지난 49년 대표작인 `인간문제'를 북한에서 처음으로 출간하기 전까지 주목받지 못하던 작가였다. 한국에서는 지난 4월 26일 그의 55주기를 맞아 이상경 한국과학술원 교수가 장편소설 2편과 19편의 단편소설 등을 모아 엮은 `강경애 전집'(소명출판)이 출판됐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인간문제'(39년)을 비롯해 `어머니와 딸'(32년)이 있으며 단편으로 `지하촌'(36년), `원고료 200원'(35년) 등이 있다. 북한(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여류 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북한은 지난 60년대초 강경애 작품집을 발간했으며 현재 그의 작품집의 재발간을 준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 (서울=연합뉴스) 최선영기자 = 재일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10.25)가 지난 8월 남한 문화인들의 후원으로 중국 지린(길림(吉林))성 룽징(龍井)시 비암산기슭에 여류소설가 강경애의 문학비가 세워진 것을 높이 평가해 눈길을 끌었다. 조선신보는 지금까지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각 분야에 걸쳐 북한의 입장을 비교적 상세히 대변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강경애 문학비 건립에 대한 평가 역시 북한의 입장과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강경애는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출생했으며 25년 룽징시에서 1년반동안 교편을 잡은 적이 있다. 31년부터 40년까지는 룽징시에 머물면서 문학단체 `숙향회' 동인으로 활약하다 44년 고향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장편소설 `인간문제'(39년)를 비롯해 `어머니와 딸'(32년)이 있으며 중.단편으로 '소금'(34년) '원고료 200원'(35년) '지하촌'(36년) '어둠'(37년) 등이 있다. 조선신보는 박완서 등 남한의 여성문인들과 남한 여성문학학회 이덕화 회장 등이 강경애 문학비 건립을 후원한 사실을 상세히 전하면서 이것은 "살아 생전에 단행본 한권 갖지 못했던 작가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남북이 함께 그의 문학을 옳게 이행하고 정당하게 평가하는데서 의의깊은 일로 된다"고 지적했다. 신문은 또 강경애가 우리나라 현대여성문학의 기초이고 남북이 함께 인정하는 몇 안되는 작가중의 한 사람이라면서 그의 문학비 건립은 △조선문학사에서 여성문학을 옳게 자리매김하고 △21세기 여성들의 삶의 방향타를 잡아주며 △바람직한 여성문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신문은 이어 남한에서는 70년대부터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민족문학론과 사실주의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고 카프문학운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강경애문학이 커다란 주목을 받게 됐다고 말했다. 신문은 남한에서 △원작이 심하게 왜곡됐던 70년판 '인간문제'를 원전그대로 되살려 92년 출판(창작과 비평사)하고 △지난 4월 '강경애전집'(이상경편. 소명출판)을 펴낸 사실을 상기하면서 이것은 80년대 중반이후 남한에서 여성해방을 지향하는 여성연구가들에 의해 여성문학론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강경애의 삶과 작품이 재평가된데 따른 것이라고 지적했다. 특히 '강경애전집'에 실린 '인간문제'가 49년 북한 노동신문사에서 출간한 단행본을 저본으로 삼은 것은 그 의의가 매우 크다고 이 신문은 의미를 부여했다. 신문은 현재 강경애의 묘가 황해도 장연군에 있다면서 묘는 지난 49년 7월 1일 이기영 등 카프작가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묘비 뒷면에 그의 유고시 '산딸기'가 새겨져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강경애전집'을 펴낸 이상경씨가 이 사실을 몰라 전집에 '산딸기'를 싣지 못한 사실을 언급하면서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장벽은 한 작가의 작품집을 내놓는 길에서 험난한 가시덤불길을 펴놓고 기나긴 시간과 엄청난 에너지를 소모하게 하고 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신문은 끝으로 강경애 문학비 건립을 계기로 "남북한 연구가들이 자료와 정보를 자유롭게 교환하고 여성문학연구의 원활한 활동을 전재해나갈 밝은 날이 오기를 진심으로 바란다"고 덧붙였다. 강경애를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작가'로 평가하고 있는 북한은 지난 49년 강경애의 대표작인 '인간문제'를 단행본(노동신문사)으로 펴낸데 이어 60년대초에 출판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소설을 게재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30권)에 이 작품을 실었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신상옥감독, 최은희.최창수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 /////////////////////////////////////////////////////// 덤으로 다른 더...   ■ 김혁     소학시절, 내가 다니던 신안학교(지금의 북안소학, 그 전신이 윤동주가 다녔던 광명학교이다)에서 봄, 가을로 원족가는 곳은 룡정 서남쪽에 우람하게 솟은 비암산이였다.  그 비암산으로 오르는 자드락길에 문학비 하나가 호젓이 서있다. “녀성작가 강경애문학비”이다. 1999년 8월 8일, 룡정에 강경애 문학비가 건립되자 당시 “연변일보” 문화부 기자로 뛰고 있던 나는 열심히 취재하여 강경애 특집을 꾸몄었다. 룡정출신으로 문학에 환혹되여 있는 나에게서 그 동년의 아련한 추억이 서린 곳에 서있는 강경애문학비는 다른 이들보다 농도와 줄기 다른 감수로 안겨온다. 강경애(姜敬愛)는 일제 강점기에 활동한 얼마 안되는 녀성작가 가운데서 여느 작가들과는 흔치않게 일제식민통치의 암울했던 시기에 억업받는 하층의 로동자와 농민, 녀성을 대변한 작품과 만주 지역 항일무장운동가들의 고난의 삶을그려내여 근대문학의 대표적 녀성 작가로 자리매김했다. 나아가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보지 못했던 식민지의 실상을 세밀하게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했다. 학계는 “강경애는 식민지 시대 작가로서는 드물게 하층 녀성의 목소리를 공식 기록으로 끌어올린 식민지 시대 하층 녀성의 대변자이다.”고 그의 문학적 공적에 대해 평하고 있다. 그는 또 한동안 룡정에 체류해 있으면서 간도체험을 많은 글로 펴내여 우리 조선족문단에도 익숙히 알려진 작가이다. 하지만 지난 2005년 해외의 한 매체에 “강경애가 김좌진장군 암살동거범”이라는 기사가 떠 커다란 혼선이 빚어졌다. 매체의 한 언론인이 무책임하게 써 내친 한편의 글이 그 곤고한 세월에도 치렬한 문학혼을 보여주면서20세기 30년대를 빛낸 한 우수한 녀류작가를 자칫하면 매도의 나락에로 밀어넣을수 있는 형국이였다. 이때 연변조선족문화발전추진회가 나섰다. 추진회에서는 조성일, 장춘식, 리광인등 평론가들과 함께 “문화산맥” 사이트의 "열린마당" 코너에 강경애 시시비비 사이버토론을 벌리고 유력한 리론적 증거로 강경애의 청백을 강력히 호소했다. 그와 더불어 한국의 량지가 있는 학자와 평론가들은 진상시정을 촉구하며 드센 반발을 들이댔다. 결국 강경애는 끝끝내 그해 3월의 "이달의 문화인물"로 선정되였다. 선정리유에는 “강경애는 불우한 가정환경과 극한의 궁핍을 극복하고 작가로 성장해 민족적, 계급적, 성적 억압에 고통받는 녀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했다. 나아가 하층 녀성의 시선을 넘어 당대 여느 작가들이 볼수 없었던 식민지의 실상을 두루 포착했고, 이를 작품화해 우리 근 대문학사에서 일제시대 최고의 사실주의 작가로 자리잡았다”고 밝혔다. 그동안 “문화인물 선정"에서 비여 있었고 보류되였던 강경애는 마침내 루명을 씻고 마땅히 찾아야 할 위치에 오른것이다. 당시 “문화산맥”사이트의 편집을 맡고있던 나는 조성일등 문화파수군들의 진지한 학술적 자세와 로고에서 큰 감명을 받았었다. 그들과 함께 진상규명에 미력이라도 바치면서 나는 다시금 강경애라는 인물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했었다. 황해도에서 태여나 강경애는1906년 4월, 서해 바다를 향해 소뿔 모양으로 반도를 이룬 명승 조선 황해도 송화군의 한 가난한 농민의 딸로 태여났다. 이곳은 유명 녀류시인 로천명(盧天命)이 태여난 곳이기도 했다. 그가 세살나던 해인 1909년 겨울 아버지가 세상을 뜨자 가세는 기울어 나무껍질을 벗겨 먹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강경애가 다섯살이 되였을때 병약했던 그의 어머니는 후구지책으로 황해도 장연군 장연의 최도감의 후처로 재가했다. 의붓아버지는 돈은 있었으나 환갑이 지난데다 장애인이라 어머니는 거의 몸종 같은 신세였다. 하지만 워낙 총명하여 여덟살나던 무렵부터 한글을 깨친 강경애는 “춘향전”, “삼국지”, “옥루몽”, “숙향전” 등 구소설을 거의다 읽고 동네 사람들에게 읽어주기까지 했다. 영특하고 총명함이 파다하게 알려져 이에 동네사람들이 다투어 그를 데려다 사탕을 사먹이고 소설을 읽게 했다. 그래서 동네에서 “도토리 소설쟁이”라는 별명을 얻었다고한다. 의붓형제들 사이에서 힘든 유년기를 보내던 그는 열살이 지나서야 어머니의 애원과 간청으로 겨우 장연소학교에 입학하여 눈치공부를 하게 되였다. 그동안 월사금, 학용품값 등을 마련할수 없어 옆 친구의 돈과 물건을 훔치기라고 했으면 하는 절박한 심정으로 학교를 다녔다. 형부의 도움으로 1921년 평양 숭의녀학교에 입학했다. 숭의녀학교에 입학한뒤 평양의 진보적 학생들로 조직된 친목회 “독서조” 등에서 활동하던 강경애는 추석성묘를 미신이라고 규제하는 미국인 교장과 엄격한 기숙사 생활에 항의하는 동맹휴학에 참가한 연고로 학교에서 퇴학을 당했다. 1923년, 그녀 앞에 한 남자가 나타난다. 역시 황해도 출신 일본 류학생인 양주동이였다. 서양의 자유로운 사상에 물들어 련애 결혼, 리혼의 자유, 특히 련애지상주의를 크게 외치고있던 양주동에게 빠져든 강경애는 엉뚱하게도 어두운 저녁에 비를 철철 맞으며 찾아와서는 양주동에게 “선생님 나 영어 좀 가르쳐 줘요. 그리고 시도, 문학도, 문학적 소질은 충분히 있으니 좀 길러주세요.”라고 말했다. 당돌함과 랑만적 성격을 가진 강경애의 방문으로 두 사람은 사귀기 시작했고 동거라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그는 다른 녀자의 남편이였고 이를 안 가족과 이웃의 비난으로 그녀는 무산과 간도 등지를 혼자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동안 양주동이 주재하던 “금성”지에 강가마라는 필명으로 “책 한 권”이라는 짤막한 시를 발표했다. 강경애는 원체 머리에 쌍가마가 있어서 강가마로 아명을 불리웠는데 이를 필명으로 적용한것이였다. 글벗이요, 애인 관계에 있던 두 사람은 함께 서울로 가서 동덕여학교에서 1년 간 공부했지만 1924년 가을,관계가 깨지고 말았다. 그러자 강경애의 학비를 대주던 형부가 련이은 중퇴와 련애사건에 실망하여 질책하며 뺨을 때린다고 한것이 잘못 되여 이후 강경애는 늘 귀병을 앓고 청력도 나빠졌다고 한다. 1924년 "책 한권", 1925년 "가을", 1926년 "다림불"과 같은 습작수준의 시를 발표한뒤 3년간의 공백을 거친후, 1929년 10월 "조선일보"에 민족과 계급의 절충을 내세우는 중도파인 양주동과 렴상섭을 비판하는 글 "염상섭씨의 론설 “명일의 길”을 읽고"를 발표하면서2년 뒤 같은 신문에 필명으로 “양주동군의 신춘평론-반박을 위한 반박”을 써서 옛 애인을 비판했다. 애증이였든 분노였든 결과적으로 양주동은 그녀의 필을 움직이게 만든 시작점이 된 남자였다. 룡정으로 이주 고향에서 작가수업에 빠져들던 강경애는 수원 고등농림학교 출신으로 장연 군청에 부임한 황해도 황주 사람 장하일을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장하일은 조혼한 부인은 멀리 두고 어머니와 함께 장연으로 와서 강경애의 집에 세들어 살다 강경애와 사랑에 빠지게 되였다. 1931년 6월, 둘은 간단하게 결혼식을 올렸다. 그런데 장하일의 부인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장연을 떠나 한동안 인천에서 품팔이를 하며 지내다가 “고향에서의 질식스러운 환경을 박차고” 간도 룡정으로 이주하여왔다. 두만강! 호탕한 장강을 연상하고 들었건만 지금에 보니 장강엔 어김없을망정 놀랄 만큼 좁다랐다… 내가 간도에 들어오기는 생각하니 지난 해 늦은 봄날이었다. “(간도풍경” “신녀성” 1932년 1월) “내가 처음으로 두만강을 대하기는 1931년 봄 바야흐로 신록이 빛나는 그때였다. 나는 차창에 의지하여 두만강을 바라보았다.” ( “두만강례찬”. ”신동아” 1934년 7월호) “내 고향을 떠난지 벌써 3년이 잡힌다. 그동안 고향에는 많은 변동이 생겼을것이다.”(“고향의 창공”.1935년5월 “신가정”) 강경애의 상기 작품들에서 살펴 보면 강경애가 룡정에 발을 들여 놓은것은 1931년 봄이였다. 룡정에서 그는 때로는 강사노릇도 하고 때로는 무직업으로 있으면서 끼니도 넘기는 가난의 고초를 겪게 되었다. 이 간도에서의 방랑체험은 1932년 9월 "삼천리"지에 "그 녀자"란 소설에서도 나온다. 룡정에서 남편 장하일은 동흥중학(지금의 룡정 3중)에 취직했다. 동흥중학은1940년경의 통계만 봐도 졸업생이 애초의 9명으로부터 211명이 나 됐다. 이런 급증한 학생수는 문학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바 간도지역은 특이한 이방감과 유난한 향수와 민족의식으로 한글문학이 왕성했던것이라고 평론가들은 분석하고있다. “기존의 한국문학사는 일본의 폭압이 점점 가혹해졌던 1939년 국민징용령 이후부터 1945년까지를 ‘암흑기’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국내에서의 탄압상과 정비례하여 비교적으로 민족의식을 보유할 수 있었던 간도지역엔 학생수가 급증했다.” (임헌영 문학평론가, 한국 중앙대 교수) 동흥중학에서 교원, 교무주임으로 있었던 장하일은 언제나 제일 먼저 강경애의 작품을 읽고 조언해 주는 독자였으며 그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장하일은 항일무장대오와도 련계가 있는 진보적인 지식인이였다. 1934년의 동흥중학교 교장은 일찍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 동만도 골간으로 뛰였던 림계학이고 교원은 장하일 등 6명이였다. 교재는 일본 문부성에서 검정하고 조선 총독부에서 편찬한 교과서를 채용하였으나 장하일 등 교원들은 여전히 일체 교내외행사나 교수용어에서 한글을 사용하였다. 1939년 6월에 동흥중학교 전체학생들이 7일간의 동맹휴학을 단행하고 룡정총령사관의 밀정 김호연을 붙잡아 혼뜨검을 낼 때도 장하일은 선두에 나섰다. 장하일은 후에 귀국하여 “조선일보사” 총편집을 맡았고 광복후에는 조선 황해도 위원장, 로동신문 부주필로 뛰였다. 반일정신이 강한 행동하는 지식인이였던 남편의 영향하에서 강경애는 룡정에 이주한후 사회활동에서도 두각을 드러냈다. 대하소설 “북간도”의 작가 안수길은 당시 룡정에서 그녀의 이웃에 살았었다. 안수길의 수기에 따르면 강경애는 “물동이 몇개씩 깨드리면서까지 우물에 물 길러 다니고 양재물에 손끝이 빨갛게 벗겨지면서까지 빨래를 하여”, “수수한 품이 어느 부인네들과 같이 물동이를 이고 우물에서 물을 길어 살림을 하는등 이웃에서도 유명한 작가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1932년 룡정에서 강경애를 만났던이는 다음과 같이 강경애에 대한 인상을 적었다. “아주 되는대로 차리고있는 옷모양, 물동이 이고, 밥 짓고, 나무 사들이고 하는 것이 보석반지, 피아노, 문화주택, 털 침대를 동경하는 현대 여학생들과 달라서 더욱 유쾌한 기분을 주었다.” (김경재 “최근의 북만정세-동란의 간도에서” “삼천리” 1932.7.1) 강경애의 문단 진출은 잡지 “혜성”의 1931년 8월호에 그녀의 자전적 소설로 알려진 장편소설 “어머니와 딸”을 발표한것이 계기가 되였다. “어머니와 딸”은 봉건적 억압아래 비참하게 살아간 어머니에 비해 딸은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새로운 인생을 개척한다는 내용을 담은 소설로서 봉건적 인습과 성적·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녀성의 해방을 로동자 계급의 전망에서 찾고자 했다. 초기의 작품에서부터 강경애는 이미 시대정신을 주제로 삼았고 그 표현과 기법도 상당했다. 1931년 7월, 일제는 “9.18사변”을 일으켜 괴뢰정부만주국을 세웠고 "치안숙청"이란 이름으로 대대적인 토벌을 진행하였다. 특히 동만지방에 조선주둔군 제19사단을 "간도파견대"로 삼고 1932년 4월부터 잔혹한 대토벌을 시작하였다. 이런 아비규환의 수라장에 강경애는 일제의 토벌을 피하여 1932년 6월 잠시 룡정을 떠났다. 이때 그 심정을 토로한것이 "간도를 등지면서”, “간도야 잘있거라"에 세세히 적혀있다. 1933년에 강경애는 다시 룡정에 돌아왔다. 그동안 궁핍하고 비참한 생활을 목격하고 체험했으며 룡정 일대에서 항일대오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 유격대에 들어가려고 하기도 했던 그는 자신의 감상주의적 문학관을 비판적으로 바라보게 되였다. 따라서 당시 일제의 폭압과 그에 대항해 나선 간도의 시대상을 증언하는것을 자기 문학의 중요한 과제로 삼았다.  근대문학사상의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의 작품 세계의 주요한 특징은 바로 작가 생애의 대부분을 보낸 간도 체험에서 나온것이다. 간도 방랑을 통해 얻은 이러한 입장과 내용으로 원고지를 메워가면 그는 간도에서 항일투쟁을 벌인 사람들의 삶의 실상을 검열을 피해 가며 세상 독자에게 알리는것을 작가로서의 의무로 생각했다. 1933년 11월, 룡정에서는 광명중학교 교원 리주복등의 발기로 민간문인단체인 “북향회”가 설립되였다. “북향회”는 민족문학을 발전시키고 동포대중을 불러일으켜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견실한 기초를 닦는다는 취지로 설립되였다. “북향회”가 발간한 간행물 “북향”은 강렬한 민족사명감으로 민족문학의 수호와 발전에 큰 노력을 기울여 간도지역의 작가와 문학을 애호하는 청년문인들의 중요한 진지로 부상했다. 강경애는 박계주, 안수길,윤영춘 등 당지의 유명 작가들과 함께 “북향회”의 발전을 이끌었다. 강경애의 대표작품으로는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하여 근대 소설사 최고의 리얼리즘 소설의 하나로 꼽히는 장편소설 “인간문제”(1934)와 장애자들을 주인공으로 해서 빈궁의 극한 경지를 그려낸 “지하촌”(1936)으로 꼽는다. 특히 “인간문제”는 식민지 친일지주와 농민, 식민지 자본가와 로동자의 뚜렷한 갈등 구조 속에서 작품을 구성했을 뿐 아니라, 농촌의 각종 풍경, 생명 있는 것들을 사랑하는 농부의 마음과 그것을 빼앗길 때의 쓰라린 마음, 인천 부두 로동자의 세계, 식민지 대자본이 들어와 설립한 대규모 방적 공장의 내부 모습과 운영 방식, 그 당시 로동운동에 투신했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식민지 사회의 전반적인 모습을 정확한 세부로써 묘사하는데 큰 성과를 내였다.  강경애는 “인간문제”를 통해 최고의 위치에 올라섰다. 이 작품은 로동자의 힘든 생활과 그 변혁의 노력을 장편소설의 형식에 담아낸 식민지시대 우리 리얼리즘 문학의 소중한 성과로서 리기영의 “고향”과 비등한 위치에 있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간도에서의 체험을 바탕으로 써낸 “소금(1934), 역시 그의 대표작품이다. “소금”은 괴뢰정부 만주국에서 총을 들고 일어선 항일무장부대의 모습과 그에 대한 민중의 감정을 암시적으로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들을 강경애는 일제의 검열을 교묘하게 피해가면서 한반도의 독자에게 전하려고 애썼다. 때문에 그의 허다한 작품들은 검열 때문에 시커멓게 붓질을 당하는 수난을 겪곤 했다. 집안문제, 연애문제로 고민하던 청춘남녀가 만주로 가서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한다는 내용의 단편소설 “파금(破琴)”(1931)등이다. 간도에서 소박하고 평범한 주부로 자처하면서도 노력하는 작가인 강경애는 작품을 쓸 때 원고지에 쓰다가 찢고 또 쓰다가는 찢고 하여 엄청난 파지를 내면서 자신의 체험으로부터 소재를 구하여 직접 답사를 해가면서 글을 썼다고한다. 룡정에서 창작생활을 하면서 간도지역 문학단체인 "북향"회의 고문을 담당하는 한편 한때 "조선일보"사 간도지국장을 력임하기도 했다. 다년간 강경애 연구에서 개척적인 실적을 쌓은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 리상경 론문 “녀성의 대변자 강경애”에서 강경애의 룡정체험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강경애의 모든 소설은 간도에서 씌어졌다. 1931년 간도로 가서 1939년까지 8년 정도의 길지않는 기간이였지만 첫 작품을 제외한 전 작품이 모두 이 기간에 발표한 것으로 그의 작품의 특성과 한계 모두가 간도라는 땅과 밀접하게 련결되여있다고 볼수있다. 강경애보다 앞서서는 최서해나 안수길이 간도에서의 체험을 문학적 기초로 삼았지만, 녀성 작가로서는 강경애가 유일하다. 당대의 다른 녀성 작가들 대부분이 조선문화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며 창작한것과 달리 서울을 멀리한 문단의 변두리이지만 항일무장투쟁의 중심지인 간도에 살면서 창작에 전념한것이 작가 강경애에게 예술적·정치적으로 긴장을 주었고 동시대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강경애 작품세계의 기초가 되었다.  또 그러한 피부로 겪은 체험때문에 당대 어느 작가보다도 뛰여난 예술적 성취를 이룰수 있었다고 봐야 할것이다.”  고향에서 영면 1939년 경 고향 장연으로 돌아온 강경애는 1940년 짤막한 수필 2편을 끝으로 붓을 놓았고 병고에 시달리다가 1944년 4월 3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강경애는 그녀의 문학적 재능에 비해 한민족 문단에서 뒤늦게 그리고 아직 도 불충분하게 인정받고있는 녀성 소설가이다. 가난한 가문의 녀성이라는 탓으로, 38세의 나이에 요절했던 탓으로 그리고 그녀의 소설이 지닌 저항적 성격 때문에 일제의 검열을 받으며 제대로 알려지지못한 탓에, 그녀가 30년대의 대부분을 간도지방에서살면서 서울 중심의 문단과는 거리가 있은 탓이기도 했다. 이런 그를 발굴해준 사람이 바로 남편 장하일이였다. 강경애와 동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강경애가 쓴 원고를 최초로 읽고 조언해주는 좋은 독자였던 남편 장하일은 해방전후의 어수선한 상황에서도 안해의 작품을 간직하고 있다가49년 “인간문제”를 단행본으로 상재하여 안해에 대한 사랑을 구현했다. 그후로 강경애는 남북문단에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조선에서는 강경애를 "해방전의 진보적이고 재능있는 녀류소설가"로 무산대중의 편에 서서 창작활동을 벌여 "일제식민지 통치하에서 착취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비참한 생활과 비극적 운명을 깊은 동정을 가지고 묘사하였으며 계급적 원쑤들에 대한 증오심과 항거의식을 형상했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리고1961년, 조선에 “강경애론”(김헌순)이 출판되였다. 85년께에는 강경애의 소설을 각색한 영화 “소금”을 신필림촬영소 (신상옥감독, 최은희 주연)에서 제작하기도 했다. 86년에는 문학예술종합출판사에서 중편소설 “소금”과 함께 엮어 작품집 “인간문제”를 내놓았으며 94년에도 새로 출간된 “현대조선문학선집'”에 이 작품을 실었다 한국문단에서는 70년대 들어서 그녀의 문학적 성과가 평가되기 시작해 “인간문제”가 처음 단행본으로 출판되였지만 원작이 심하게 왜곡, 훼손된 상태, 신문련재본을 원본으로 한 “인간문제”단행본이 출판된것은 1992년이였다. 한국에서 리화녀대 리규희에 의해 “강경애론”이 나온것은 1974년, 서울대 리상경에 의한 석사학위론문 “강경애연구”는 1984년이다. 1999년 4월에는 리상경교수에 의해 “강경애전집”이, 2002년 5월에는 수정증보”강경애전집”(리상경엮음)이해빛을 보았다. 2005년에는 한국에서“3월의 문화인물”로 떠올랐다. 일제의 검열에 의해 지워진 강경애의 대표 단편 “소금”결말부의 260자가 2006년 복원되면서 그녀는 또 한번 세상의 주목을 받게 되였다. 따라서 2007년엔 남북 첫 공동 론문집인 “강경애, 시대와 문학”이 출간되기도했다. 연변에서도 룡정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그의 작품이 일찍 출판되였다. 연변인민출판사에서는 조선 로동신문사의 1949년 초판에 의해 1957년 6월에 그의 대표작 “인간문제”를 출판했고 또 조선 작가동맹출판사 1959년4월 초판에 의해 1979년 10월에 재차 출판했다. 1999년 8월 8일, 뒤미처 룡정의 비암산에 그녀의 문학비를 세워 룡정 체험을 수작(秀作)으로 남긴 그의 문학과 생애를 기념했다. 찌는 듯이 무더운 그 날, 연변의 문인, 교수들은 한국의 학자들과 함께 비암산 소나무숲에서 강경애 문학비 제막식을 가졌고 뒤이어 연변대학에서 강경애문학연구학술발표회를 가졌다. 학술발표회의에서 연변대학 조문학부의 채미화교수의 "강경애 소설창작의 미학적특징"이라는 표제의 론문과 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 학부의 리상경씨의 론문 "강경애와 간도체험"이 발표되였다.…   비암산은 산정의 바위가 가마처럼 생겼다하여 일명 “가마산”이라 부르는 곳 이다. 머리에 두개의 가마를 가진 강경애의 어릴적 별명이 “쌍가매”이다. “쌍가마"라는 그 이역의 녀류작가는 “가마산”이라는 산에 그 문학혼을 묻었고 “가마산”아래의 뭇사람들이 기리고 있다. 그녀의 빼여난 문학업적때문이다. 그녀만큼 남과 북 그리고 중국에서 공동으로 이의가 없이 높이 평가하는 문인도 드물다. 높이 2.6m의 강경애문학비는 오늘도 비암산 중턱에 외홀로 서있다. 관광기이면 일송정을 찾는 해외 관광객들이 발을 잇지만 관광뻐스들은 바로 일송정을 향하는 길녘 산중턱에 세워져 있는 그의 문학비를 지나치기가 일쑤다. 늘 소복차림이였다는 강경애처럼 하얗게 선 문학비에는 약력과 함께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녀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녀성 작가이다. … … "라고 새겨져 있다. =============== ===================== (강경애 탄생 110주년을 기념해 강경애문학비를 찾은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회원들) 사실주의문학 여성작가 강경애 탄생 110주년을 맞아 그의 문학과 삶을 기리는 기념행사가 4월 15일(2016년), 길림성(吉林省) 용정(龍井)에서 펼쳐졌다.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가 주최한 '여성작가 강경애 탄신 110주년 기념식'에는 최국철 연변작가협회 주석을 비롯한 소설가들과 용정시의 일부 문학도, 언론인 도합 40여명이 참석했다.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회원들은 이날 용정비암산에 위치한 강경애문학비를 찾아 헌화하고 묵례를 드린 뒤 용정시 도서관에서 강경애문학세미나를 열었다. 세미나에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김혁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이 '용두레 우물가에 족적을 남긴 강경애'라는 제목의 특강을 진행해 작가 강경애 작품을 재조명했다. (세미나에 참가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김혁 연변작가협회 소설창작위원회 주임) 그는 "오늘날 조선족문학의 근저에는 김창걸, 윤동주, 리욱과 더불어 당시 연변지역에 족적을 남겼던 안수길, 최서해,강경애와 같은 작가들의 영향이 있었다"면서 이로써 "우리 문학이 다원화적인 깊이를 이루게 될수 있었다"고 말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사실주의 여류(類)작가로 정평되는 강경애(1906.4.20~1943.4.26)는 조선 황해도 송화출신으로1931년 용정에 거주하면서 간도체험을 작품에 담아 보여주었다. 당시 용정의 문학동인 '북향회'와 함께 활동했고 조선일보 간도지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1942년 황해도에서 요양하던중 작고하였다. 어려운 살림살이와 병고, 그리고 중앙문단과 멀리 떨어져있다는 불리한 여건에도 불구하고, 준렬한 작가정신으로 당시의 극한적인 빈궁상이라는 사회적 모순을, 특히 작자 나름의 사실적 기법으로 상세히 묘사한 점에서 강경애의 작품세계는 1930년대 문학의 독특한 위치를 차지하는 것으로 정평되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소금', '인간문제' 등이 있다. (강경애 탄생 110주년 기념해 세미나에 참가한 연변 문학인들) 출처:길림신문 글/안상근 기자 /사진 차청국 ==================================== 용정 시내에서 서쪽으로 3-4㎞ 떨어진 '비암산(琵岩山)'에는 1930년대 리얼리즘 문학의 대표작인 『인간문제』의 작가 '강경애'의 문학비와 가곡 '선구자(先驅者)'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일송정(一松亭)'이 있다. 먼저 강경애문학비를 찾아갔다.     해란강海蘭江 맑은 물 허리에 두르고 백두白頭의 정기精氣로 기암奇巖이 솟아 그 이름 비암산琵岩山 용드레촌 지켜주는 아름다운 명산名山 일송정一松亭과 더불어 천만년千萬年 푸르른 낙원樂園의 산山 수려秀麗하고 장엄莊嚴한 그 자태姿態 오르지 않으면 모르리라         이 세모 건물 뒤편으로 올라가면 '강경애 문학비'를 만날 수 있다.   '녀성'임을 강조한 '녀성작가강경애문학비'. 『인간문제』의 작가로 이름만 알 뿐이었던 '강경애'를 여기서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었다. 1906년 황해도 송화에서 태어나 1944년 38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한 강경애는 1931년부터 1939년까지 8년을 용정에서 보내며 그가 남긴 대부분의 작품을 이곳에서 썼다고 한다. 용정시문학예술계연합회 조선-한국문학연구회(1999년 8월 8일)가 세운 '강경애문학비'에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하고 올곧은 문학정신으로 간악한 일제와 그 치하의 비정과 비리에 저항하면서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부드러운 언어로 아름다운 문학 형상들을 창조한 우리 현대문학의 대표적인 여성작가다”라고 새겨져 있다.      강경애는 최하층 인민들의 생활을 '동정'한 게 아니라 그 자신이 최하층 인민이었다. 가난한 집안형편에 간신히 초등과정을 마치고 형부의 도움으로 평양 숭의여학교를 다니게 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3년만에 퇴학을 당한다. 유부남이었던 양주동과의 염문 때문인지도 모른다. 강경애가 본격적인 작품활동을 하게 된 것은 '장하일'이라는 남자를 만나게 되면서부터라고 한다. 1931년 두 사람은 결혼하고 간도로 이주하는데 1939년 지병이 악화하여 고향 장연으로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서 그녀는 겉으로는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 살면서 치열하게 작품활동에 매진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간도는 항일투쟁의 중심지역으로 그녀는 생생하게 항일투쟁의 모든 순간을 보았고 그 안에서 자본주의와 노동자의 대립, 항일무장 조직의 어두운 단면 등을 몸소 체험하며 간도를 주무대로 한 '간도의 문학'을 탄생시켰다. 강경애의 문학은 간도에서 시작해서 간도에서 끝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간도에서의 체험이 소설의 밑바탕이 되었다.  강경애의 대표작 『인간문제』는 일제 식민지 지배 아래 소작농의 딸과 아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 노동자가 된 후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 자신임을 깨닫는 내용으로 리얼리즘문학이면서 프롤레타리아 계급문학으로 남/북의 소설사 논의에서 공히 한국현대문학사에서 식민지시대 문학의 탁월한 성과로 평가되는 작품이다.  길지 않은 생을 가난과 고통의 나날로 보내면서 식민지 현실과 여성적 고난의 현장을 예리한 필치로 묘파한 한 젊은 여성작가의 삶에 고개가 숙여진다.    [출처] 옌볜조선족자치주 우리역사기행 / 용정 비암산(龍井琵岩山) / 『인간문제』의 작가 강경애문학비|작성자 혹성공주  
2    [쉼터] - 동화세계 = 목단강 놀러 오이소... 댓글:  조회:1148  추천:0  2017-12-08
겨울날의 동화세계 -목단강 탐방 [ 2017년 12월 06일 ]     한 눈집 등 독특한 매력으로 중내외 많은 유람객들이 이곳을 찾아 유람하고 있다. 알아본데에 따르면 2017년 동계설향이 개원해서부터 11월 30일까지 접대한 관광객은 5만2699 연 인에 달하며 동기대비 20.1% 증가했다. ///신화망                                                  
1    [타산지석] - 세치 혀끝과 험담... 댓글:  조회:2841  추천:0  2017-12-08
말이 험담으로 변하면                   /장학규     이맘때가 되면 각 단체마다 송년회요 신년회요 하면서 야단법석이다.    청도는 다른건 몰라도 이 한가지만은 대단하다. 지연, 학연은 물론 연령별, 흥취별, 직업별, 신분별로 여러 단체와 모임이 만들어져있다. 대수 손꼽아보아도 3~40개는 되는거같다.    정부차원의 주선이 없어도 자기들끼리 알아서 잘들 놀고있다. 어쩌면 조선족의 최대 웃점이 이 점이 아닌가 싶다. 나약한거 같으면서도 모름지기 강하고 흩어진양 보이면서도 결집되여있는 이런 모습에서 조선족만의 특유의 기질이랄까 아니면 조선족들의 생존철학이랄까를 보아낼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때는 또 말썽이 참말로 많은 계절이기도 하다. 이 시기엔 누구나 다 입을 열게 된다. 엄마 모임까지 있는 동네이니 특별히 세상과 담을 쌓고 사는 가정주부는 없어보이고 어린이들을 대동하는 단체도 있어 어린이들의 견해 역시 반영되는 양상이다.    사람이 모이면 자연 말이 많아지기 마련이다. 한해를 총화짓다보면 이런저런 부족점이 있게 되고 그것을 꼭 짚고 넘어가야 직성이 풀려하는 사람은 모임마다 있기 마련이다.    임기란것도 대략 이때에 바뀌게 되니 회장단이나 운영진의 인선을 두고 견해차이도 보이게 된다. 그래서 티격태격하는 것은 가히 자연스럽고 정상적이라 해야겠다.    문제는 호사군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년내내 여기저기 쏘다니며 말썽을 만들어 즐겼었는데 이때는 진짜 물 만난 고기처럼 제철 한번 잘 만났노라고 야단을 떤다. 남 잘되는건 죽어도 보아주지 못하겠다는 속셈을 아주 그럴듯하게 멋진 포장까지 해가면서 썰어대는 이런 설치류들은 어느 모임에나 한두사람은 꼭 있는거 같다. 얍삽한 꾀를 부리는데는 조조 량반 저리 가라 하는 이런 인간들때문에 단체들마다 바람 잘 날이 거의 없다.    세치 혀끝이라는 성구처럼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무기가 바로 일명 말이라는 허울을 쓴 “험담”이란 물건이다. 험담은 형체가 없어도 사람을 쉽게 가볍게 죽일수 있는 날카로움이 있다. 험담은 공기와 같은것으로서 도무지 막아낼 방법이 없다. 험담이라는 주사위는 일단 던지면 그물을 쳐서 잡을수 있는것도 아니고 벽을 쌓아서 저지할수 있는것도 아니다. 그리고 사람의 요해를 찌르는 방식도 각각이다. 바로 덮치는가 싶다가도 어느새 에둘러 공격한다. 험담의 공세는 종래로 예약되여 있지도 고정되여 있지도 않다. 수시로 달려들수 있고 어디서나 조준이 가능하다.    대뇌를 거치지 않고 마음 내키는대로 대수롭지 않게 내뱉는 말 한마디도 사람에게 영원히 아물수 없는 아픈 상처를 주는 경우가 있는데 하물며 자로 재듯이 치밀하게 계산하고 바람처럼 달려드는데야 누가 당해낼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험담을 “업”으로 일삼는 사람들이 공포의 대상이 된다. 정력이 딸리고 배포가 부족한 사람이 운수 사납게 입으로 인생을 살아가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였다면 되도록 멀리 피해버리는게 상책이다. 괜히 니전투구로 섞여서 리익될게 하나도 없다. 그런 사람들에게 낚시 미끼처럼 어떤 말미를 던져주는것만큼 아둔한 일은 다시 없다. 상대해주지 않으면 모름지기 저절로 문드러지고 떨어져나가게 되여있다. 자꾸 응수를 해주면 문제는 점점 불어나고 모순도 실타래처럼 엉켜 전혀 풀어지지 않는다.   심은만큼 거둔다는 말이 있다. 심은것만큼 돌아온다고도 한다. 이 말은 결코 신근한 노력이 풍성한 성과를 거두게 된다는 적극적인 의미로만 쓰이는것이 아니다. 콩 심으면 콩이 나고 팥 심으면 팥이 나오게 되는것이 인간세상이라면 좀 더 형상적이 될지도 모르겠다. 어떤 일을 행했으면 그에 상응한 대가를 지불하게 되는것은 천고불변의 진리란 말이다.    험담이란 양면의 칼과 같다. 자칫 남을 찌른것만큼 자기도 다치게 된다. 상대방에게 치명타를 입혔다고 착각하면서 오버액션에 취해있던 사람도 홀로 남은 공간에서는 덕지덕지 딱지가 앉은 마음을 부여잡고 고통속에서 헤매인다. 결국 자기가 입은 상처가 상대보다 가볍지가 않기 때문이다. 험담을 일삼느라고 허구헌날 아무 일도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한 인생 역시 보답받을 방법이 없다.    어쩌면 말은 씨앗과 같은 존재라고 볼수 있다. 악을 심었으면 원망이 발아되고 미움이 줄기쳐서 증오가 맺혀질수밖에 없다. 거기서 선의 과일이 맺어지기를 기다린다면 참말로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래서 옛 성현들은 사람들에게 입을 합부로 놀리지 말라고 가르쳐왔다. "일 하기전에 사람이 먼저 되고, 마음을 다스리기 전에 먼저 입을 다스려라(做事先做人,修身先修口)"고 인격을 접목시켜 잘 다듬어낸 말은 존귀한 귀부인이나 수양있는 젠틀맨 같이 주위에 기쁨과 행복을 가져다준다. 반대로 외곡을 장착한 험담은 세상을 암담하게 만드는 죄악에 다름 아니다.    글로벌시대에도 농경문화의 악습을 답습한다면 꼴불견이다. 이제부터라도 늦지 않으니 좀 스마트하게 인생을 영위하면 아니 좋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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