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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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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시공부 하기] - "데칼코마니" 댓글:  조회:2897  추천:0  2020-02-14
  © ADAGP, Banque d'Image, Paris - GNC media, Seoul, © René Magritte / ADAGP, Paris - SACK, Seoul, 2010 이미지뷰어로 이동 데칼코마니 Decalcomanie 아티스트 르네 마그리트(RENÉ MAGRITTE) 출생-사망 1898년 11월 21일~1967년 8월 15일 제작연도 1966년 사조 초현실주의 종류 유화 기법 캔버스에 유채(Huile sur toile) 크기 81 x 100 cm 소장처 개인 캔버스에 유채로 크기는 81x100cm이며, 개인이 소장하고 있다. 제작 배경 데칼코마니(Decalcomanie)는 원래 일정한 무늬를 종이에 찍어 다른 표면에 옮겨 붙이는 장식 기법을 일컫는 용어로, 인쇄기에 넣을 수 없는 물체에 무늬를 새기거나 상표를 붙일 때 사용하던 방식이었다. 20세기 중엽에 이르러 독일 태생의 초현실주의 화가 막스 에른스트(Max Ernst, 1891-1976)는 자신의 그림에 이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했으며, 점차 특징적인 하나의 미술 기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데칼코마니에는 과슈(guache) 등을 종이에 바른 후에 캔버스 혹은 다른 종이에 눌렀다 떼는 방식이 사용되었는데, 그를 통해 작가들은 예측하기 어려운 색다른 형태를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이는 이성을 거부하고 무의식을 중시하는 초현실주의자들의 입장과 잘 부합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서 등장한 하나의 운동으로 문학과 미술 등의 분야에서 전개되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세계대전 이전의 합리주의가 결국 비극적인 파괴를 가지고 왔다고 여겼으며 이를 거부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앙드레 브르통(André Breton, 1896-1966)은 1924년 ‘초현실주의 선언’을 발표 함으로써 이 운동의 대표자로 자리잡았다. 그에 따르면 초현실주의는 의식의 영역과 무의식의 영역을 결합하려는 시도이다. 그들에게 무의식의 세계는 이성의 세계처럼 분명하게 존재하는 것이었으며, 동시에 예술가들에게 수많은 상상력을 제공하는 원천이었다. 초현실주의자들은 무의식적 세계를 작품에 담아내기 위해 여러 방식을 고안했는데, 대표적으로 요철이 있는 재료 위에 종이를 놓고 연필 등으로 문질러 독특한 형태를 담아내는 프로타주(frottage)나, 마음 속의 이미지를 즉흥적으로 기록하는 자동기술법(automatism) 등이 있었다. 데칼코마니 역시 그와 같은 방법 중 하나로, 초현실주의 작가들로 하여금 자유로운 형식의 작품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작품과 표현기법 데칼코마니라는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이 작품에는 중산모를 쓴 남자의 이미지가 중앙을 중심으로 대칭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실제로 데칼코마니 기법을 통해 만든 모습과는 다르게, 이 작품의 대칭적 이미지는 그 형태만 같은 뿐 서로 담고 있는 내용에는 차이를 보인다. 화폭의 오른편에 그려진 바다와 하늘의 모습은, 왼편의 남자가 자신의 몸으로 가리고 있는 부분을 그대로 가져와 그려놓은 듯 보인다. 하지만 정작 남자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바다의 모습보다도, 커튼 가운데 기묘하게 남아있는 바다 풍경은 더 밝고, 선명하게 느껴진다. 이 그러했듯이 이 작품 역시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사물에 대한 개념에 혼란을 불러일으킨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캔버스 속 남자와 커튼, 바다와 하늘 중 어느 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인지 알지 못하며, 어떤 것이 다른 것들보다 앞에 놓여있는지 구분할 수 없다. 결국 관람자는 자연스럽게 그림이 가지고 있는 ‘모사’라는 속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며, 이는 일상적인 경험에서는 얻기 힘든 새로운 감정을 만들어 낸다. 그림 속 등장하는 중산모를 쓴 남성의 이미지는 1930년대부터 꾸준히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1898-1967)의 작품에 등장하는 것으로, , , 등에서 역시 나타난다. 르네 마그리트14 전체보기 다음  
1    [세계인] - "더 극심한 형 없느냐"... 댓글:  조회:2863  추천:0  2020-02-14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한 일본 판사에게 웃으며 건넨 질문 2020.02.14.    좋아요 슬퍼요 좋아요 평가하기 댓글 beta   글자 크기 변경하기  인쇄하기  보내기 밸런타인데이? 안중근 의사 사형선고일…올해 서거 110주년[서울신문] 안중근의사기념관 제공.흔히 연인끼리 초콜릿 등을 주고받는 ‘밸런타인데이’로 알려진 2월 14일. 110년 전 오늘 안중근 의사는 사형을 선고받았다. 14일이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이라는 것도 기억하자는 내용의 카드뉴스가 SNS에서 화제를 모으고 있는 가운데, 그가 사형 선고한 일본 판사에게 웃으며 건넨 하나의 질문이 눈길을 끌었다.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역에서 대한제국의 원수 이토 히로부미에게 세 발의 탄환을 발사했다는 이유로 안중근 의사는 사형선고를 받았다. 세 발의 탄환은 모두 급소에 명중했고, 이토 히로부미는 사망했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교도소로 옮겨진 뒤 일제의 위압 속에 지냈지만 단 한 번도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하하, 이보다 더 극심한 형은 없소?” 1910년 2월7일부터 8일간 진행된 6번의 공판을 겪는 동안 그는 죽음을 코앞에 두고도 재판부를 향해 웃으며 “더 극심한 형은 없느냐”고 묻는 등 의연한 태도로 일관했다. 한 달 뒤인 3월 26일 교수형이 집행되어 짧은 생을 마감했다. 사형 집행 전 안 의사는 “자신의 뼈를 하얼빈 공원에 묻었다가 조선이 국권을 되찾거든 고국으로 옮겨달라”라는 마지막 말을 남겼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 그의 유해는 아직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안 의사의 유해가 기독교 묘지에 매장됐다는 러시아 신문기사가 공개됐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14일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는 “안중근 의사의 사형선고일은 연인들의 대표적 기념일인 밸런타인데이와 같은 날이어서 대중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의거일과 서거일은 잘 모른다고 판단하고 카드뉴스를 만들어 배포했다”고 카드뉴스를 배포한 이유를 설명했다. 이는 서 교수가 벌이고 있는 ‘한국사 지식 캠페인’ 가운데 하나다. 대한민국의 역사적인 날에 맞춰 그날의 정확한 한국사 지식을 누구든지 이해하기 쉽게 카드 뉴스로 제작해 SNS상에 널리 전파하는 홍보 운동이다. 서 교수는 3월 26일 안중근 의사 서거 110주년을 맞아 그가 주창한 ‘동양평화론’을 주제로 한 영상도 공개할 계획이다. 많은 이들이 설렘을 안고 초콜릿을 구매하는 밸런타인데이인 오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던져 사형선고를 받고도 의연하게 미소를 지은 안중근 의사의 숭고한 희생을 되새겨보는 것은 어떨까. /김채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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