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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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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시공부 101] - 19... 댓글:  조회:2558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그 선비들은 왜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분야 고전 시가 목차 꿈속으로, 시 속으로 파고든 전쟁 낭만적 언어에서 현실의 언어로 사대부의 미의식을 뛰어넘다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 작품의 맥락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과 사회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 시대에 가장 큰 전란인데 전쟁을 겪으면서 사회가 많이 변했다고 들었어요. 그렇다면 시가 문학에는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고 싶어요. 이정환과 박인로 등의 작품을 보면 조선 전기의 사대부 시가 작품과는 사뭇 달라 보이거든요. 꿈속으로, 시 속으로 파고든 전쟁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있기 전까지 상당수의 시조는 주로 사대부들에 의해 지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시조는 대개 유교적인 이념을 전달하거나 자연의 경치를 노래한 작품이 많았지요. 그런데 전쟁 이후에 시조의 내용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전란의 고통을 노래한 시조들이 나타났으며, 기존 체제와 현실에 대한 비판의식이 담긴 시조도 등장했고 현실을 사실적으로 표현한 시조도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시조의 향유층도 이전과는 달리 점점 더 넓어졌습니다.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 묻노라 이 내 꿈아 만 리 요양(遼陽)1)을 어느덧 다녀왔느냐? 반갑다 학가 선용(鶴駕 仙容)2)을 친히 뵌 듯하여라 이정환, 「국치비가」 중 1수 이 작품은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초장에는 ‘꿈’을 의인화하여 표현하고 있네요. 꿈은 아무리 먼 곳이라도 얼마든지 오고 갈 수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조선 땅에 있지만 꿈속에서 청나라에 볼모로 끌려간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만나게 됩니다. 짧은 내용 속에 치욕스러운 전쟁의 결말이 제시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조선 후기의 시조는 유교적 이념으로부터 차츰 벗어나 다양한 주제의식을 표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물론 이 시기에도 윤선도와 같은 시인들은 자연을 벗 삼아 노래하기를 즐기기도 했지요. 낭만적 언어에서 현실의 언어로 임진왜란 이후 조선 후기 가사는 시조에 비해서 예술성이 떨어지며 조선 전기에 비추어 볼 때 문학성이 뒤처진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가사 작품을 쓴 작가가 있는데 그가 노계 박인로입니다. 박인로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쓴 「선상탄」과 선비의 곤궁한 삶을 표현한 「누항사」가 있습니다. 그의 작품은 정철의 가사에 비해서 문학적인 기교는 떨어지지만 훨씬 더 사실적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누항사」는 제목처럼 누추한 집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 것입니다. 이 작품은 박인로가 나이 51세 되던 해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가 생활하던 중에 지은 가사입니다. 이 작품 역시 서사—본사—결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서사는 모든 일을 하늘에 맡기고 안빈낙도하며 살아가고자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음을 한탄하는 내용입니다. 본사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자 하나 소가 없어서 농사를 제대로 짓지 못하는 상황을 안타까워 하는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가뭄에 잠시 동안 비가 와서 때마침 소를 빌려 주겠다는 사람의 말을 듣고 밤늦게 소를 빌리러 갔다가 소를 빌리지 못하고 수모만 당하고 돌아오는 처지를 그려 놓습니다. 소를 빌려 주겠다던 사람이 그만 다른 사람에게 먼저 빌려 주어야 할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결국 시적 화자는 세상을 한탄하며 밭 갈기를 포기해 버립니다. 잠 못 드는 새벽, 그는 붓을 들어 몸과 마음이 고단했던 하루를 돌아보고 있습니다. 결사에서는 자연을 벗하며 늙어 가겠다는 다짐을 하지요. 가난하다고 해서 남을 원망하지는 않을 것이며, 가난한 중에도 충과 효를 지키면서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구간에 의리를 지키며 살아갈 것을 맹세합니다. 결사에 나타난 충과 효, 우애와 의리는 모두 유교적인 이념으로 사대부의 태도를 변함없이 보여 주고 있습니다. 비록 결사에서 사대부 가사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 주고 있지만 박인로의 가사는 현실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일상생활의 언어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에서 조선 전기 가사와 다릅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언어를 버리고 솔직한 언어로 선비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는 점에서 전기 가사와 큰 이를 보이고 있는 것이지요. 사대부의 미의식을 뛰어넘다 박인로 이후에 가사 장르에는 다양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현실 문제에 대한 관심이 확대되고 가사를 향유하는 계층도 넓어집니다. 기행가사, 유배가사, 내방가사, 평민가사 등 다양한 가사의 형태가 나타난 것도 이 시기이지요. 이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은 일반 서민들도 가사를 짓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해학적인 표현으로 가사 문학이 지녔던 엄숙함을 떨쳐 내고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고 풍자하는 등 사대부들의 미의식을 뛰어넘는 가사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가사의 형태도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실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루면서 자연스럽게 길이가 길어졌지요. 가사가 운문적인 경향에서 산문적인 경향으로 변화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가사의 산문화 경향은 18세기 우리 문학에서 산문이 발달하던 시대적인 분위기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조선 후기 가사 중에서 길이가 긴 가사에는 어떤 것이 있나요? 조선 후기에는 대체로 장편가사가 창작되었습니다. 유배가사, 내방가사, 평민가사 모두 적지 않은 분량이었습니다. 이는 조선 후기에 산문이 발달하던 현상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긴 작품은 기행가사에서 꼽아 볼 수 있지요. 특히 홍순학이 지은 「연행가」는 총 3,924구로 청나라 북경을 다녀온 130일간의 기록을 노래한 작품입니다. 여정이 매우 자세하게 제시되어 있고 북경의 새로운 문물에 대한 감상이 객관적으로 제시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장편기행가사로는 김인겸이 일본을 다녀와 쓴 「일동장유가」가 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그 선비들은 왜 불면의 밤을 보냈을까?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2    [시공부 101] - 18... 댓글:  조회:2546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면, 조선의 시가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임금을 사모하여 부르는 노래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작, 「사미인곡」 「사미인곡」의 뒤를 잇다, 「속미인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 작품의 맥락 고등학교 국어Ⅱ 한국 문학의 전승과 흐름 고려 가요를 가리켜 남녀상열지사라고 했던 것처럼 조선 시대 사대부의 노래에는 충신연주지사라는 말이 따라붙는 것 같아요. 이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싶어요. 임금을 사모하여 부르는 노래 충신연주지사는 한자로 ‘忠臣戀主之詞’라고 적습니다. 한자를 풀이하면 충성스러운 신하가 임금을 사모하는 노래라는 뜻이지요. 대개의 충신연주지사에서 임금은 남성으로, 신하는 여성으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임을 그리워하는 주체가 여성으로 그려질 때 더욱 효과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충신연주지사의 시작은 대개 고려 시대 정서가 지은 「정과정」을 손꼽습니다. 이 작품은 고려 시대 때 지어졌지만 향가와 비슷하다고 하여 향가계 여요(고려 가요)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내 임을 그리워하여 울고 있으니 산 접동새와 나는 비슷합니다 옳지 않으며 거짓인 것을 지는 달과 새벽 별이 알 것입니다. 넋이라도 임과 한곳에 살고 싶어라, 아아 정서, 「정과정」 중에서 정서는 고려 시대 인종의 처남으로 왕의 사랑을 받았으나 의종 때 역모에 가담했다는 의혹을 받아 귀양을 갔습니다. 3행의 “옳지 않으며 거짓인 것을”이라는 구절은 모함을 당했음을 암시합니다. 의종은 정서에게 곧 다시 부를 것이라며 위로했지만 정서는 이후 20여 년 동안 부름을 받지 못했습니다. 이에 정서가 자신의 억울함과 더불어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애절하게 표현한 노래가 「정과정」입니다. 이와 같이 임금과 떨어져서 임금을 사모하며 부른 노래가 충신연주지사입니다. 정서의 「정과정」 이후 충신연주지사는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습니다. 자연을 노래한 송순의 「면앙정가」마저도 마지막 구절은 ‘이 몸이 이렇게 지내는 것도 또한 임금의 은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역시 충신연주지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충신연주지사의 대표작, 「사미인곡」 충신연주지사의 대표 작품은 송강 정철의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을 들 수 있습니다. 정철은 송순의 가사 「면앙정가」에 영향을 받아 「성산별곡」이라는 가사를 썼던 인물입니다. 그가 지은 「사미인곡」과 그 속편 「속미인곡」의 의미는 미인을 사모하다, 혹은 그리워하다라는 것인데, 여기서 미인은 ‘아름다운 사람’을 일컫는 말인 동시에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했습니다. 「사미인곡」은 송강 정철이 관직에서 물러나 전남 담양 창평에 머물면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이별한 임을 그리워하는 여인의 심정에 비유하여 표현한 작품입니다. 당시 정철이 창평에 머무른 까닭은 과열된 붕당 정치로 인해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인과 서인이 첨예하게 갈등하던 시절이었는데 정철은 당시 서인의 대표 격으로 벼슬살이와 귀양을 반복하고 있었지요. 정철은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임금에 대한 충직한 마음과 벼슬에 나아가지 못하는 초조한 마음을 동시에 표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작품의 구조는 서사—본사—결사로 나뉘는데 본사는 다시 봄, 여름, 가을, 겨울로 그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각각의 계절에는 이별한 임에게 보내는 시적 화자의 정성이 담긴 사물들이 제시되어 있지요. 결사 부분을 현대어로 풀이해 살펴보겠습니다. 하루도 열두 때, 한 달도 서른 날, 잠시라도 임 생각을 하지 말자. 이 시름을 잊고자 하니 마음속에 맺혀 있어 뼛속까지 사무쳤으니, 편작 같은 훌륭한 의사가 열 명이 온다 한들 나의 병을 어찌하랴. 아, 내 병이야 임의 탓이로다. 차라리 죽어서 호랑나비가 되리라. 꽃나무 가지마다 가는 곳마다 앉아 있다가, 향기 묻은 날개로 임의 옷에 옮아가 앉으리라. 임께서 나인 줄 모르셔도 나는 임을 쫓으려 하노라. 정철, 「사미인곡」 중에서 사랑하는 임을 잊고자 하지만 잊을 수가 없는데 그 까닭은 임에 대한 그리움이 뼛속까지 사무쳐 있기 때문입니다. 임을 향한 충성스러운 마음은 변함없다는 것을 문학적으로 표현한 것이지요. 죽어서 호랑나비가 되더라도 임을 따르겠다는 구절 또한 임금에 대한 충절을 나타냅니다. 「사미인곡」의 뒤를 잇다, 「속미인곡」 「속미인곡」은 「사미인곡」의 속편으로 이 작품 역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나타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사미인곡」과 달리 계절의 변화가 아니라 ‘두 여인의 대화’로 내용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는 임과 이별한 서러운 사연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이를 듣고 있는 또 다른 여인은 시적 화자의 말에 대해 공감하며 위로하고 있습니다. 시적 화자가 처한 상황이 다른 사람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것임을 작가가 전달하려 했던 것이지요. 마음속에 맺힌 일이 있습니다. 임을 모신 적이 있어서 임의 형편을 내가 잘 아는데, 물같이 연약한 몸이 편하실 때가 몇 날일까? 이른 봄날의 추위와 한여름의 무더위에 어떻게 지내시며, 가을과 겨울은 누가 모셨을까? 아침, 저녁 진지는 예전과 같이 잡수시는가? 기나긴 밤에 잠은 어떻게 주무실까? 정철, 「속미인곡」 중에서 내용이 모두 이별한 임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걱정하는 것이네요. 비록 임과 이별한 상황이지만 임에 대한 사랑과 충심은 변하지 않았음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정철의 임금에 대한 충성된 마음은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에도 고스란히 나타나있습니다. 정철은 지금의 강원도 지역 관찰사로 부임하고 난 후, 자신이 다스리는 강원도 지역 전체를 유람하며 가는 곳마다 임금과 나라에 대한 애정을 표현했습니다. 충신연주지사는 조선 사대부들의 대표적인 노래였습니다. 임금에 대한 충절은 유교의 가르침이었기 때문입니다. 이후에도 많은 사대부들이 임금에 대한 그리움을 시조와 가사, 한시로 표현했는데 그것들도 모두 충신연주지사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충신연주지사에서 시적 화자는 왜 여성으로 설정되어 있나요? 우리 시가 문학에서 여성적 화자를 설정하는 것은 오랜 전통이었습니다. 고대 가요 「공무도하가」, 「정읍사」, 그리고 고려 가요와 기녀들의 시조에는 모두 여성 화자가 등장했지요. 이 여성들은 임과 어쩔 수 없이 이별에 처한 이들이었습니다. 안타깝고 절실한 마음으로 임이 자신을 다시 찾아 주길 바라는 이들의 어조는 깊은 공감을 자극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임금에게 내쳐진 신하가 글로써 공감을 불러일으키려면 안타깝고 절실한 여성적 어조를 사용하는 것이 효과적이었겠지요. [네이버 지식백과] 고려 가요가 남녀상열지사라면, 조선의 시가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1    [시공부 101] - 17... 댓글:  조회:2423  추천:0  2020-02-28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가사문학관은 왜 전라도 담양에 있나요?     분야 고전 시가 목차 정읍 태인에서 최초의 가사가 탄생하다 호남 가사 문학의 계통을 잇다, 「면앙정가」 호남 가단을 완성하다, 「성산별곡」 교과 연계표 교과 연계표 구분 교과 단원 중학교   문학의 갈래 고등학교 문학 한국 문학의 갈래와 흐름 고전 시가 중에 가사 장르가 있던데 그것을 기리는 가사문학관은 어째서 전라도 담양에 있는 것인가요? 가사 문학이 전라도에서 많이 발달한 건가요? 정읍 태인에서 최초의 가사가 탄생하다 조선 시대 대표적인 시가 형식인 가사(歌辭)는 우리가 흔히 말하는 노래의 가사가 아닙니다. 가사를 정의한다면 4 · 4조 4음보로 연속체 시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시조처럼 4음보로 되어 있지만 초장—중장—종장의 구분 없이 길게 이어서 노래한 작품이지요. 형식은 운문이지만 내용이 길어서 산문적인 성격을 띠고 있지요. 운문과 산문의 중간 형태라고 볼 수 있습니다. 가사가 형성된 것은 대개 경기체가가 쇠퇴한 이후라고 보고 있습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정제된 형식의 시조보다 좀 더 자유롭게 자기 생각을 펼칠 수 있는 문학을 추구했습니다. 경기체가가 있었지만 그것은 한자를 나열한 것에 지나지 않는 한계가 있었지요.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사대부들이 고안해 낸 장르가 바로 가사였습니다. 조선 시대 사대부들은 가사를 통해서 교훈적인 내용을 전달하기도 하고, 기행과 견문을 기록하기도 하고, 임금에 대한 충절과 자연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삶의 태도 등 다양한 주제의식을 작품을 통해 형상화했습니다. 조선 시대 최초의 가사는 정극인의 「상춘곡」입니다. 정극인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고향인 정읍 태인에 내려와 그곳에서 후진을 양성했다고 합니다. 「상춘곡」은 바로 그곳 태인에서의 삶을 그린 작품이지요. 세속에 묻혀 사는 분들이여! 나의 삶이 어떠한가? 옛사람의 풍류에 미칠까, 못 미칠까. 세상에 남자 몸으로 태어나서 나만 한 사람이 많지마는 산림에 묻혀서 지극한 즐거움을 모르는 것인가? 초가집을 푸른 시냇물 앞에 두고 소나무 대나무 빽빽한 곳에 자연을 즐기는 사람이 되었구나. 정극인, 「상춘곡」 중에서 현대어로 풀이해서 리듬감이 잘 느껴지지 않겠지만 본래는 4 · 4조 4음보 형식을 갖추고 있습니다. 인용된 부분은 작품의 첫 부분인데 뒤에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로 자연 속에서 만족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선비들은 물질적인 만족보다 정신적인 만족을 추구했고 그런 까닭에 가난을 편안히 여기고 자연 속에서 도의(道義)를 기르고자 했습니다. 이를 가리켜 흔히 안빈낙도(安貧樂道)라고 하지요. 세속의 이익과 권세를 따지다 보면 도의를 추구하기 어렵지만 자연의 아름다움 속에서는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호남 가사 문학의 계통을 잇다, 「면앙정가」 정극인의 「상춘곡」 이후로 가장 주목할 만한 가사 작품도 호남 지방에서 지어졌습니다. 바로 송순의 「면앙정가」입니다. 송순은 그의 나이 41세에 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고향인 전남 담양에 내려와 면앙정을 짓고 자연을 즐겼는데 그때에 지은 작품이 「면앙정가」입니다. 작품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합니다. 첫 번째 부분인 서사에서는 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의 모습을 노래하였고, 두 번째 부분인 본사에서는 면앙정에서 바라본 아름다운 자연의 경치를 노래하였지요. 본사는 다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서는 시선을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며 면앙정의 근경과 원경을 묘사하였습니다. 그리고 뒷부분에서는 면앙정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의 풍경을 묘사하였지요. 마지막 결사 부분은 ‘이렇게 지내는 것도 모두 역군은(亦君恩, 역시 임금의 은혜)이샷다’ 라며 유학자로서의 충절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을 떠나와도 내 몸이 겨를 없다. 이것도 보려 하고 저것도 들으려 하고 바람도 쐬려 하고 달도 맞으려 하니 밤은 언제 줍고 고기는 언제 낚고 사립문은 누가 닫으며 떨어진 꽃은 누가 쓸까. 아침이 부족한데 저녁이 싫겠는가. 오늘이 부족하니 내일이라 여유가 있을까. 이 산에 앉아 보고 저 산에 걸어 보니 번거로운 마음에 버릴 일이 아주 없다. 쉴 사이 없거든 소식 전할 틈이 있으랴. 다만 푸른 지팡이만 다 무디어져 가는구나. 송순, 「면앙정가」 중에서 인용한 부분은 「면앙정가」에서 가장 유명한 구절로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나타난 부분입니다. 인간 세상의 번거로운 일로부터 벗어났지만 자연의 흥취를 즐기는 데에 몹시 바쁘다는 시적 화자의 자부심이 나타난 구절입니다. 밤도 줍고 달도 맞아야 하고 낚시도 하고 꽃도 쓸다 보면, 벼슬을 하지 않더라도 여전히 마음이 바쁘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보면 이 구절에는 벼슬을 그만둔 이후에 심리적인 보상을 얻으려는 마음도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겠네요. 호남 가단을 완성하다, 「성산별곡」 송순의 「면앙정가」는 이후에 등장하는 정철의 「성산별곡」에 영향을 줍니다. 이 작품은 정철이 전남 담양 창평에 내려가 있을 때, 그곳에 식영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풍류를 즐기던 김성원을 예찬하며 부른 노래입니다. 김성원은 정철 아내의 일가친척이었습니다. 작품의 내용은 식영정의 경치와 김성원의 풍류를 예찬한 것인데 그 구조가 「면앙정가」와 매우 흡사합니다. 「면앙정가」가 면앙정의 사계절을 노래했듯이, 「성산별곡」도 식영정에서 바라본 성산의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지요. 이런 까닭에 이 작품은 「면앙정가」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학자들은 흔히 전라도 지역에서 자주 지어진 가사 문학을 일컬어 호남가단이라고 부릅니다. 호남가단은 정극인의 「상춘곡」, 송순의 「면앙정가」, 정철의 「성산별곡」으로 이어져 내려온 셈이지요. 자, 이제 여러분의 궁금증이 조금 해결되었나요? 가사문학관이 전라도 담양에 있는 것은 당시 가사 문학이 전라도를 중심으로 발달하였기 때문입니다. 전라도에서 가사 문학이 발달한 것은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해 지방으로 내려온 사대부들이 다른 지역보다 전라도 지역에 많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들은 남도의 여유롭고 한가로운 자연과 벗하며 자신들의 좌절감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가사 문학은 사대부만 지어 부른 건가요? 아닙니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사대부들이 지어 불렀지만 임진왜란 이후에는 양반뿐만 아니라 여인들도 불렀고 평민들도 지어 불렀습니다. 개화기에는 개화가사가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그중에서 여인들이 부른 내방가사는 편수도 많았고 가장 오랫동안 지어지기도 했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사문학관은 왜 전라도 담양에 있나요? (국어선생님도 궁금한 101가지 문학질문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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