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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지기-죽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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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잊혀진 민속] - 담뱃대 댓글:  조회:3785  추천:0  2020-04-21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담뱃대     이미지 크게보기   유형 물품 성격 생활용품 용도 흡연용 목차 정의 내용 정의 담배를 피우는 데 쓰이는 도구. 내용 우리나라의 옛 문헌에서는 연죽(煙竹)·연관(煙管)·연배(烟盃) 등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중 연죽이 일반적이다. 담뱃대는 담배를 담아 불태우는 담배통과 입에 물고 빠는 물부리, 그리고 담배통과 물부리 사이를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담배통은 대꼬바리·꼬불통, 물부리는 물추리·빨부리 등으로 일컫기도 한다. 또, 설대가 긴 것은 장죽(長竹),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은 곰방대[短竹]라 부른다. 담배가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임진왜란 후 광해군 때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므로, 그 흡연구는 필연적으로 담배 보급 이후에 수반되었을 것이다. 담배는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초기의 담뱃대는 역시 일본의 양식이 이식되는 형편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담뱃대는 대일무역의 창구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에서 일찍부터 제작되기 시작하여 명성을 굳혔던 것으로 보인다. 19세기의 ≪오주연문장전산고≫나 ≪규합총서≫에서 동래연죽을 유명물산의 하나로 지목하였고, <춘향전>에서도 “왜간죽 부산대에 담배를 너훌지게 담는다.”는 구절이 보인다. 오래 된 양식의 담뱃대는 담배 담는 통이 작고 설대도 짧았다. 그러나 18세기 풍속도에 나오는 한국인의 담뱃대는 이미 장죽이 유행되었음을 볼 수 있다. 유득공(柳得恭)의 ≪경도잡지 京都雜志≫에 의하면 조관들이 담배합과 담뱃대를 말 뒤에 달고 다닌다고 하면서, 비천한 사람들은 존귀한 분 앞에서 감히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고 하였다. 또, 서유구(徐有榘)는 ≪금화경독기 金華耕讀記≫에서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통이나 오동(烏銅 : 검은빛이 나는 구리)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의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는 대단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현재 전통공예로서의 담뱃대가 백통을 기본으로 하여 오동과 금은으로 시문(施文)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종래 담뱃대의 재료는 담배통의 경우 구리·놋쇠·백통을 쓰고 도자기로 된 것도 더러 썼으며, 물부리에 있어서는 쇠뿔·수정·호박·옥 등이 다양하게 이용되었다. 또, 설대는 자죽(紫竹)·반죽(斑竹)을 즐겨 썼으며, 특히 장죽에 있어서는 각죽(刻竹) 및 낙죽(烙竹)으로 치장하는 기법이 성행하였다. 서구식의 파이프는 19세기 무렵 함경도지방에 보급되었는데, 이를 목연통(木煙筒)이라 하였다. 참고문헌 『오주연문장전산고』 『규합총서』 관련이미지 4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담뱃대전통사회에서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던 도구. 온양민속박물관 소장. 이미지 갤러리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네이버 지식백과]담뱃대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두산백과 담뱃대     요약 잘게 썬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는 기구. 이미지 크게보기 곰방대 대통[雁首] ·설대[煙道] ·물부리의 3부분으로 이루어진다. 앞부분은 구부러진 끝에 담배를 담는 작은 통이 붙어 있고, 바닥에 작은 구멍을 만들어 설대와 이었으며, 물부리는 입에 물기 편리하도록 끝으로 갈수록 가늘다. 대통은 지름 2.3cm, 깊이 3.5cm로, 담배를 한 번 재우면 20∼30분 동안 피울 수 있다. 설대는 지름 7∼8mm, 마디 사이는 20cm 정도의 가는 대를 사용하는데, 흑단재로 만든 것 외에 붉은 칠을 한 목관(木管)의 것도 많다. 설대가 길어서 연기가 식어야 맛이 좋다고 한다. 설대가 길고 대통이 작은 것이 파이프와 다르며, 한국 ·중국 ·일본 등에서 주로 사용한다. 대통을 안수라고도 하는데, 마치 기러기의 목과 유사하다 하여 붙은 이름이다. 한국에 담배가 들어온 시기는 1618년경이고, 담뱃대는 17세기 초엽경에 보급되었다. 담뱃대에는 장죽이라는 긴 것과 곰방대라는 짧은 것이 있다. 장죽은 양반의 권위의 상징처럼 되었다가 담배가 대중에 파급되면서 널리 퍼졌지만, 일반 서민들의 일상활동에서 거추장스러웠으므로 설대가 점점 짧아졌으리라고 생각된다. 그 후 곰방대도 점점 짧아져서 호주머니 속에 넣을 수 있을 만큼 짧아진 것은 오랜 뒤의 일이다. 담뱃대가 전래된 당초의 대통은 크고, 물부리와 함께 금속제(금 ·은 ·구리 ·적동 ·놋쇠 등)가 많았으나, 이 밖에 돌 ·옥도 사용되었다. 활석제 대통도 있는데, 6각형으로 재를 터는 부분에 ‘男’ ‘多’ 등의 문자를 은으로 써서 맞춘 것이 있고, 물부리가 짧고 둥그스름한 청색 유리제의 것도 볼 수 있다. 오늘날에는 궐련이 보급되어 썬 담배의 수요가 날로 감소됨으로써 담뱃대는 거의 자취가 사라졌다. 참조항목 끽연용구, 백동연죽장 역참조항목 수연통, 파이프, 세계의 파이프, 한국의 끽연용구, 연관장, 황영보, 끽연사우 카테고리 생활 > 생활용품 > 기타생활용품 관련이미지 8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담뱃대잘게 썬 담배를 피울 때 사용하는 기구. 이미지 갤러리 출처: doopedia.co.kr [네이버 지식백과]담뱃대 (두산백과)   e뮤지엄 곰방대     이미지 크게보기   국적 > 시대 한국 > 광복이후(光復以後) 재질 금속 > 철(鐵), 나무 > 대나무 크기 길이 44 용도 · 기능 주 > 생활용품 > 신변잡구 > 끽연구(喫煙具) 소장처 명지대학교 박물관 유물번호 금속(금속) 001928-000 담배를 피우는 데 사용하는 도구. 연죽(煙竹), 연관(煙管), 연배(煙盃)라고 한다. 담뱃대는 담배가 수입되면서 퍼지기 시작하였으며, 일본을 통하여 들어온 까닭에 대일 무역의 창구 구실을 하였던 동래(東萊)가 담뱃대 제작으로 명성이 높았다고 한다. 담뱃대는 담뱃잎을 넣고 불을 붙이는 곳인 금속으로 된 대통과 연기를 빠는(흡입) 부위인 물부리, 그리고 이 둘을 연결하는 설대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은 반구형 금속관 하부에 ㄴ자 모양의 가는 금속관이 연결되어 있는 형태이며, 이 관의 반대쪽 부분인 설대와 연결된다. 설대의 끝 부분에는 역시 금속으로 제작되어 입을 대고 연기를 빨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진 물부리가 연결되어 있다. 보통 담뱃대의 담배통과 물부리의 재료로 상류층에서는 금ㆍ은ㆍ수마노ㆍ옥, 서민층에서는 구리ㆍ적동ㆍ놋쇠 등 금속을 사용하였다. 설대는 참대나무ㆍ오죽 또는 참대에 낙죽(烙竹)을 하거나 염색하여 만든다. 담뱃대는 길이가 다른 것들이 있는데, 긴 것을 장죽(長竹)이라 하고, 설대가 없거나 짧은 것을 단죽(短竹) 또는 곰방대라 부른다. 처음 담배가 우리나라에 수입될 당시 상류층의 문화로 유입되었기 때문에 담배는 권위의식과 깊이 관련되어 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담배통도 작고 설대도 짧았으나 점차로 길어져 18세기 이후에는 매우 긴 담뱃대들이 이용되었다. 《금화경독기(金華耕讀記)》를 보면 "전국에 걸쳐 다투어 사치하는 자들이 백동이나 오동(烏銅)으로 담뱃대를 만들뿐더러 금은으로 치장함으로써 쓸데없는 데에 막대한 비용을 허비한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조선 말기로 갈수록 담뱃대가 길어지고 담뱃대에 대한 사치풍조 역시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전통공예로서의 담뱃대가 백동을 기본으로 하여 오동과 금은으로 시문(施紋)하고 있는 것과도 일치한다. 이 유물은 대통과 설대 및 물부리로 구성되어 있다. 대통은 `ㄴ`자로 구부러진 형태로 담배를 담는 통이 달리고 설대가 끼워지는 원통형 투겁이 있다. 설대는 6개의 절부(節部)가 돌출된 대나무통으로 갈색을 띠며, 물부리는 원통형 투겁과 가는 대롱 형태의 흡입구가 있는데 끝이 구형으로 처리되었다. 참고문헌 맹인재,《한국의 민속 공예》, 세종대왕기년사업회, 2000년. 온양민속박물관,《한국의 민속》, 1980년. 고려대학교박물관,《목공예명품도록》,1990년. 금오민속박물관,《옛 사람들의 살림살이와 세간》, 2004년.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2005년. 관련이미지 40 이미지목록 이전                                       이미지목록 다음 이미지 이전 곰방대 이미지 갤러리 출처: e뮤지엄 [네이버 지식백과]곰방대 (e뮤지엄)  
1    [그것이 알고싶다] - 지구의 날 댓글:  조회:3367  추천:0  2020-04-21
시사상식사전 지구의 날      지구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알리기 위해서 자연보호자들이 제정한 지구 환경보호의 날로, 매년 4월 22일이다.             외국어 표기     Earth Day(영어)     날짜     매년 4월 22일   출처: 게티이미지 코리아 환경오염 문제의 심각성을 일깨우기 위해 제정한 날로, 유엔이 정한 세계환경의 날(6월 5일)과는 달리 순수 민간운동에서 출발했다. 이는 1970년 4월 22일 미국 위스콘신주의 게이로드 넬슨 상원의원이 앞서 1969년 미국 캘리포니아주에서 발생한 해상원유 유출사고를 계기로 환경문제에 관한 범국민적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지구의 날'을 주창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당시 하버드생이었던 데니스 헤이즈가 주도해 첫 행사를 열었는데, 200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행사에 참가해 연설을 듣고, 토론회를 개최하고, 환경을 깨끗이 하기 위한 실천적인 행동을 하였다. 특히 뉴욕 5번가에서는 자동차의 통행을 금지시키고, 6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센트럴파크에서 열리는 환경집회에 참여하였다.  이어 1972년에는 113개국 대표가 스웨덴 스톡홀름에 모여 '지구는 하나'라는 주제로 환경보전 활동에 유기적인 협조를 다짐하는 '인간환경선언'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이 지구의 날이 세계적 규모의 시민운동으로 확산된 것은 1990년에 이르면서부터로, 그해 지구의 날 행사에는 세계 150여 개국이 참가하여 지구 보호에 인류공영이 달려 있음을 호소하였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땅을, 이 하늘을, 우리 모두를 살리기 위해' 라는 슬로건 아래 '하나뿐인 지구, 하나뿐인 국토, 하나뿐인 생명'을 주제로 '지구의 날' 행사를 진행했다.  한편, 우리나라는 2009년부터 매년 ‘지구의 날’을 전후한 일주일을 기후변화주간으로 정하여 기후변화의 심각성을 인식하고, 온실가스 감축을 위한 저탄소생활 실천의 필요성을 알리기 위한 소등행사 등을 전국 각지에서 진행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지구의 날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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