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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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 17 ]

17    [시] 푸른 하늘아래서 댓글:  조회:1307  추천:18  2009-01-29
푸른 하늘아래서최화길푸른 하늘아래서푸른 빛이 그립다변함없는 자연인데매일매일 달라지니해님이 눈감지 않을가그 누가 장담하랴!
16    [시] 자연의 보복 댓글:  조회:1224  추천:12  2009-01-29
자연의 보복 최화길소나기는 예나제나다를바가 아닌데사태는 옛날보다엄청 달라진거다맘먹고 달려드는 자세누군가를 겨냥한거다.
15    [시] 어우르는 삶 댓글:  조회:1291  추천:17  2009-01-29
어우르는 삶최화길생태의식 깨우치니산향길에 꿩들이 날아들고생태의식 세워가니작은 늪에도 물오리 동동사람과 날짐승이 어우르매사는 멋과 맛이 짭짤타!
14    [시] 우리의 꿈 댓글:  조회:1318  추천:17  2009-01-29
우리의 꿈최화길잎이 꽃을 받쳐주기에꽃이 한결 아름답듯이사람도 서로 조화로워야밝은 사회 가능하거니나만의 꿈에 취하지 말고우리의 꿈 둥그르자.
13    [시] 시간 댓글:  조회:1201  추천:14  2009-01-29
시간 최화길더도 덜도 아니고 네편 내편도 아니다물처럼 투명하고해살처럼 대범한시간은주인에 의해 꽃이 되고 열매가 된다.
12    [시] 사랑의 메아리 댓글:  조회:1193  추천:16  2009-01-29
사랑의 메아리최화길감동이 깃들면행복의 꽃보라 유감이 남는다면 아름다운 거짓말사랑은 바친것만큼 돌아오는 메아리다.
11    [시]자연과 우리(최화길) 댓글:  조회:1217  추천:38  2008-08-21
자연과 우리  최화길 네가 재채기하면 우리는 감기에 걸리고 네가 감기에 걸리면 우리는 노랗게 시들고  네가 노랗게 시들면 … 약은 그저 약일뿐이다  <<연변문학>> 2008년 7월호
10    [시]위기예감(최화길) 댓글:  조회:1160  추천:36  2008-08-21
위기예감 최화길 (녕안) 바람은 쉰 내를 풍기고 해살은 노기가 이글거린다 꽃에는 화분이 없어 꿀벌은 사탕무우 파먹고 산이 눈물 쏟는가 하면 강은 가슴이 드러나고 눈이 펑펑 쏟아지는 삼동에 우뢰울고 번개치는 살풍경 파아란 하늘아래서 파아란 하늘을 그린다  <<연변문학>> 2008년 7월호
9    [시] 아버지는 물 (최화길) 댓글:  조회:1305  추천:77  2008-03-07
아버지는 물최화길쯥쯜한 바다물에 입을 대면 아버님의 얼굴이 우렷이 다가선다. 에두름이나 겉발림을 모르는 오직 깊숙이 숨기는 하나의 세계— 해면 같은 자식에게 물처럼 스미여 쥐여짜지 않으면 한몸이 되는 사나운 파도이다가 아름다운 노을이다가 무한히 펼쳐진 길이다가 갈증은 모두 앗아간 나의 정갈한 물이다.  
8    세월과의 대화(최화길) 댓글:  조회:1386  추천:62  2008-01-10
세월과의 대화 최화길강남갔던 제비들은 돌아왔건만 나의 봄은 어데 가서 못오는거냐! 나무잎은 해마다 푸르건만 내 인생의 푸른 잎은 언제 피려나 한번 가면 다시 없는 세월앞에서 두번 다시 쳐다보는 둥근달의 의미 깨여지는 불행에서 둥그는 참뜻 건지고 둥그는 과정에서 세월의 무상함을 읽는다 자연의 질서에다 나를 세우면 그 존재가 너무도 왜소하지만 고운 자욱 남기려는 모지름이 있다면 세월의 강하에는 하얀 돛이 팽팽하리    <<연변문학>> 2007년 12월호
7    내가 살던 고향 (최화길) 댓글:  조회:1403  추천:68  2008-01-10
내가 살던 고향최화길 고향엔 어제의 이야기들 오간데 없고 잎이 없는 라목들이 엉성하다 화기애애하고 아기자기하던 풋풋한 인정은 줄기가 끊긴 샘처럼 웅뎅이만 휑뎅그레하고 사람이 그리운 빈집들에는 그리움만 높이 서려 봄을 기다리는 겨울나무처럼 길목만 우두커니 지켜보고있다 <<연변문학>> 2007년 12월호
6    낚시질 (최화길) 댓글:  조회:1257  추천:64  2007-11-26
낚시질 최화길실은 백분의 일의 가능성이다 하지만 그 일의 힘은 욕망의 불길이 되여 자석같이 끌어당긴다 취한듯 매달리는 그 재미에는 못난 고기들의 욕심이 꼬드기는것이다 작은 미끼에 큰 고기가 발버둥치는 모습 애석하도다 인간도 때론 고기로 되는 일이<<연변문학>> 2007 년 8월호
5    커피향 (최화길) 댓글:  조회:1254  추천:56  2007-11-26
커피향 최화길슴슴한 일상을 몸부림하는 오랜 친구 같이 은근하고 머언 사랑같이 황홀한 마주앉은 순간이 넘 너무 좋아 쓴맛 끝에 다가서는 추억의 감미롬 그대는 멀리 곁을 비웠어도 향만은 가까이서 곱게 피여오르는  혼자 아닌 님과 함께 즐거운 커피 당신은 향기로 내 몸에 배여 어려운 일상들을 비워줍니다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4    비 오는 날의 명상 (최화길) 댓글:  조회:1311  추천:45  2007-11-26
비 오는 날의 명상 최화길말없는 상봉이 이루어져 갈증을 풀어주는 님의 손길에 한껏 목이 메이는 감동이다 사납게 들이닥치던 바람도 자고 은은한 선률들이 춤추는 마당에서 애들의 즐거운 웃음소리에 흐뭇하다 어느새 무지개가 곱게 비껴요  래일은 날씨가 맑을것이라는 예고런듯 마르는 마음을 적셔주는 싱그러운 비 때론 이렇게 준비가 없는 자연의 조화에 갈채를 보내며 하루의 진한 의미 떠올린다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3    사람 (최화길) 댓글:  조회:1189  추천:53  2007-11-26
사람 최화길그 이름 쇠가 아니다 유리처럼 짤―랑 바람처럼 쉬―익 사랑 하나 까맣게 잃어버면 세월은 무정하게 묻어버린다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2    보이지 않는 소원(최화길) 댓글:  조회:1180  추천:71  2007-11-26
보이지 않는 소원 최화길푸른 숲에서 불어오는 청청한 바람 그 풋풋한 정을 둬근 베여다 혼탁한 아빠트의 창가에 걸어놓고 매일매일 약처럼 청산의 푸른 맛 시원한  그 맛에  취하고싶다 <<연변문학>> 2007년 8월호
1    내가 문학에 집착하게 된 경우(최화길) 댓글:  조회:1280  추천:56  2007-11-26
내가 문학에 집착하게 된 경우최화길문학이라는 성스러운 전당에 접근해온지도 어언 20여년을 헤아립니다. 이 20여년간 한일자로 변함없는 마음을 가지고 딴데는 눈 한번 안 팔고 곧게 걸어올수 있은데는 자연 나의 운명을 떠올리게 됩니다. 한살에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다 잃은 불운한 내 생명은 아마 태여나면서부터 무엇인가 깨쳐야 하는 남다른 생명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것입니다.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자란 나의 동년입니다. 12년간 할머니의 뜨거운 품에 안겨 《왕자》로 컸습니다. 할머니는 나를 정말이지 쥐면 깨여질가 불면 날려갈가 애지중지 키웠습니다. 나의 유일한 의탁이였던 할머니의 슬하에서 커온 12년은 나에게 아름다운 정감세계를 만들어준 12년이기도 합니다. 어려운 식구들이 없는 우리 집이다보니 우리 집에는 매일 할머니의 로인친구들이 한구들씩 차고넘쳤습니다. 나는 아마 내 귀로 말을 들을수 있던 그 시절부터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구수한 옛말을 들었습니다. 우리 민족의 아름다운 정감세계가 깃든 그 하나하나의 옛말들에서 나는 선한 사람에게는 복이 차례지고 악한 사람은 벌을 받는다는 소박한 정감세계를 형성하였다고봅니다. 하지만 순진한 동심에 바야흐로 아름다운 동경의 세워져갈シ?나의 《하늘》은 무너졌습니다. 나는 12살에 혈혈단신이 되였습니다. 더는 그 따뜻한 품에 안길수 없었습니다. 나의 눈앞은 캄캄했습니다. 나는 문뜩 자신이 벼랑가에 선 아이로 느껴졌습니다. 무정한 현실앞에서 나는 눈물이 무엇이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생활은 아름다움만 선사하는것이 아님도 너무 이른 12살 눈높이에서 깨우쳤습니다. 70년대중반 모두가 넉넉치 못한 생활고를 겪었습니다. 농촌에 살면서도 쌀고생이 막심하던 시기였습니다. 의지가지 없게 된 나의 운명은 결국 오촌숙이 맡았습니다. 우리 아버지가 독자이고 아버지의 큰집에 아들 하나 둔 가문이다보니 우리 아버지는 사촌형이 제일 가까운 친지였습니다. 당시 대학생출신이였던 큰아버지는 우리 경주 최씨가문이 퍼렇게 살아있는데 어찌 조카를 고아원 같은데로 보낼수 있느냐고 당시 내가 살던 곳의 촌간부들과 재삼 협상하여 고아원에 보내려고 했던 사람들을 설복하였습니다. 그리고 모든 후사처리를 깨끗이 처리하고 나를 선뜻 맡으셨습니다. 그 고마움은 두고두고 기억에 새롭습니다. 그만큼 큰집일가는 인정이 풋풋한 화목한 가정이기도 했습니다. 큰집에 짐을 풀고보니 웬걸 내가 맏이였습니다. 원래 대학공부하느라 장가를 우리 아버지보다 늦게 드신 큰아버지다보니 맏아들이 9살이였고 아래로 6살에 나는 녀동생, 그리고 3살짜리 막둥이 이렇게 3형제였습니다. 자연 나는 큰형님이 되였습니다. 그때 나의 학습성적은 좋았습니다. 20여명이 되는 우리 5학년 기말시험에서 나는 총점 2등을 따내여 큰집은 물론 학교 선생님들의 총애를 한몸에 안기도 했습니? 그후로 줄곧 2∼3등에서 벗어나본적이 없었으며 선생님들로부터 덕, 지, 체 모든 방면이 우수한 3호학생으로 평선되여 장려를 받기도 했습니다. 하다보니 큰집에서 얹혀사는 몸이였으나 큰집의 각별한 사랑을 받기도 했습니다. 타고난 복이였는지는 몰라도 우리 큰엄마가 어려서부터 부모없이 자랐답니다. 하여 나는 아마 갑절 더 행복을 누려본것인지도 모릅니다. 큰엄마는 내가 좀만 어색한 빛을 띄여도 인차 내속을 알아내여 따뜻한 마음으로 풀어주군 하였습니다. 12살 어린 나이에 서먹서먹한 큰집에 짐을 푼 나에게 제일 눈치보이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가? 바로 무엇인가 손을 내밀어야 할 일들이였습니다. 원래 마음이 약한 나는 자신이 요구되는걸 입으로 내뱉지 못하였습니다. 무엇인가 달라는 말은 당초에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습니다. 그럴 때마다 큰어머니는 내 속내를 보기라도 하는듯 차거운 나의 손가락을 펼쳐 손바닥에다 정히 놓아주군 하였습니다. 그때 그 고마움에 난 눈물을 많이 흘렸습니다. 바로 감동의 눈물이였지요. 속으로 우러나오는 뜨거운 눈물이였습니다. 물론 남모르게 가만가만 흘린 눈물이기도 합니다.  할머니께서 나를 키운 12년은 뜨거운 품이였다면 그후 옮겨앉은 큰집은 뜨거운 손길이였습니다. 큰집에 와서 3년만에 나는 초중졸업생으로 자랐습니다. 바로 1974년 나는 역시 좋은 성적으로 녕안중학교로 진학할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때 생활형편으로 나를 현성중학교에 보낸다는것은 정말 그림의 떡이나 다를바가 아니였습니다. 그때는 생산대별로 가을에 분배하게 되였는데 농사가 안된 해는 한공에 십전씩 차례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니 일년내내 일해서 3백공을 벌었다 해봐야 겨우 30원에 맞먹는 돈이니 그 돈으로 쌀값도 부족하였습니다. 그러다보니 농사하는 농민이 되려 국가량곡을 얻어먹는 신세였습니다. 그것도 말짱 강냉이였습니다. 실로 강냉이밥을 신물이 나게 먹었습니다. 그러하니 한학기에 입쌀 두마대를 내야 하는 현성중학교로 어찌 갈수 있었겠습니까? 나는 또 억지로 떼를 쓸수도 없는 신분이다보니 그렇게 소원하던 현성고중으로는 갈수가 없어 향한족중학교밖에 갈수 없었습니다. 역시 아름다운 리념이 돌바위에 부딪치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15살의 어린 나이로는 감내하기 어려운 좌절이였습니다. 그래도 속수무책이기도 했습니다. 그 어떤 주관노력으로는 도저히 넘어설수 없는 조건앞에서 나는《하늘같은 자존심》을 꺾지 않으면 안되였습니다. 3년간의 고중공부는 너무도 마음에 들지 않는 공부였습니다. 처음 한두달은 반벙어리신세로 눈치보기 했고 말 좀 알아들을만하니 뒤처진 공부에 전혀 신심이 서지 않았습니다. 결국 아까운 황금시기를 한족말 몇마디 얼버무릴수 있는것으로 마무리게 되였습니다. 소위 말하는 고중공부는 이렇게 시원섭섭하게 끝마쳤습니다.  1979년 7월 나는 속에 별로 넣은것 없는 귀향청년으로 탈을 바꾸었습니다. 졸업이라고 교문을 나서는 그 마음은 아프다고밖에 형언할수 없었습니다. 그래도 명색이 고중생이라고 촌에서는 막로동은 시키지 않고 농업기술원을 따라다니며 농업기술을 배우라고 배치하였습니다. 촌의 농업기술원이라야 논에 칠 농약을 비례맞추어 버무리고 치는 기술을 지도하고 함께 치기도 하는 체력로동이였습니다. 그러나 일단 벼에 피해가 있으면 그 모든 후과는 기술원의 몫이고, 한 일년 이렇게 토박이농군보다는 월등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촌에 수도꼭지공장이 서게 되였는데 고중생인 내가 선반공의 적임자로 꼽혀 선반공으로 한 2년간 보내다가 그것도 경기가 시원치 않아 부도나는바람에 촌소학교의 민영교원으로 들어가게 되였습니다. 그때가 1983년 10월이였습니다. 내가 촌소학교에 민영교원으로 아주 쉽게 발탁될수 있은데는 그럴만한 리유가 있습니다. 모든 아픔과 슬픔을 속으로 삭여야만 했던 나는 자연 학교문을 나서면서부터 책읽기에 전념하였습니다. 하여 그때 당시 중국청년들이 꼭 읽어야 한다는 필독명작은 다 읽었으며 그것이 끈이 되여 문학작품이면 닥치는대로 읽었습니다. 오직 책과 동무할 때만이 쌓였던 스트레스가 해소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때이르게 쓰고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하여 1980년 당시 《연변문예》잡지 제7월호에 풍자성을 띤 시《이런 간부 있다오》가 활자로 찍히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것이 불씨가 되여 나는 밤을 패면서 책을 읽었고 글을 쓰기에 여념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런 열광의 힘으로 나는 1983년도까지 시를 비롯한 통신, 수필 등 수십편이 해볕을 보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시험을 쳐서 합격되여야 등용하던 민영교원을 나는 시험이라는 절차를 빼버리고 합격하는 혜택을 받기도 했습니다.  아마도 이것이 물덤벙 술덤벙 앉을 자리 설자리가 확실하지 못했던 나에게 어떤 집착을 심어주었던것 같습니다. 그 집착은 나의 유일한 구세주가 되여 나의 불운을 메워주었으며 나에게 차례지는 모든 불합리와 불평등을 느긋이 짓밟아나갈수 있는 힘과 용기 그리고 분출구가 되였습니다. 그러기에 나는 나의 시가 아주 예리한 상대성을 띤다고 봅니다. 나의 시 한수 한수는 모두 내 마음의 심한 갈등에서 불꽃이 튕기여 씌여지고 이어집니다. 그속에 바로 아름다운 공중루각이 서고 칠색의 무지개가 찬연합니다. 그것이 순간의 반짝임이지만 내 마음에서 우러나와 쏟아지는 긴 마음의 려과가 있다는것을 선언하면서 나는 시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시도 나 같은 인간을 좋아한다고 떳떳이 선고하고싶습니다. 한것은 20여년간 눈길 한번 다른데 돌릴세라 변함없이 사랑하는 《랑군님》을 어떤 《아가씨》면 외면하고 돌아서랴! 모든 지배권에 대하여 전혀 흥취가 없는 나지만 자신의 마음 지배권만은 꼭 잡고있습니다. 하기에 나는 떳떳하게 말할수 있습니다. 시를 사랑하는 마음과 나의 생명은 한줄에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다고.  <<연변문학>> 2007년8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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