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화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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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흡연, 자유만은 아니다 댓글:  조회:651  추천:0  2019-01-08
‘무연교정’이란 슬로건으로 학교에서는 지난 학기부터 흡연하는 교원들을 배려하여 마련했던 ‘흡연실’을 아예 없애버렸다. 하지만 흡연실이 없다 하여 모두 금연한 건 아니다. 지정된 장소를 잃은 흡연하는 교원들은 어느 때부턴가 층마다 주어진 중앙현관에서 창문을 열고 흡연하면서 제딴엔 불만이 가득했다. 헌데 창문을 열었지만 담배 연기는 렴치없이 복도에서 마음대로 감돌았다. 무언의 발로, 별로 아름답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렬악한 환경 속에서도 흡연애호가들은 뻔뻔스레 버티고 있다. 나도 그 속의 일원이다. 어느 날 점심휴식시간이였다. 그 날도 아주 자연스럽게 3층 중앙현관에서 창문을 열고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한 녀학생이 슬그머니 내 옆에 와서 말했다.   “선생님,담배가 건강에 그렇게 좋지 않다는 데도 계속 피우세요?!”   나는 인츰 합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무슨 대답을 하랴! 학생의 관심 어린 충고인데. 그래도 그냥 묵묵부답으로 넘기기엔 어딘가 어색하다는 생각에 “네, 관심에 감사합니다.” 하고 얼버무릴 수 밖에 없었다. 이것이 가벼운 충고였다면 한 남학생이 나에게 한 말은 그대로 충격이였다.   “선생님,학생들한테는 담배를 피우지 말라면서 우리 앞에서 스스럼 없이 공기를 오염시켜도 되나요?!”   스쳐만 들을 수 없는 너무나도 무거운 말이였다. 그 한마디 말은 그 날 하루 아니, 며칠이고 내 머리를 괴롭혔다. 어딘가 본의 아니게 무책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의 곬은 어느덧 교정이라는 작은 공간을 훌쩍 뛰여넘었다. 이미 공중오염의 반렬에 오른 흡연이다. 페암이나 심장질환을 일으킨다는 건 삼척동자도 잘 아는 사실이지만 ‘담배의 협박’은 거기서 스톱이 아니다. 최신 연구에 따르면 흡연의 최대의 위해성은 ‘구강암’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북미 (北美)의 구강암 환자 약 75%는 모두 흡연이 원인이라는 것으로 보도되였다. 흡연의 위해성은 바로 매일 흡연하는 것, 그리고 흡연의 년한이 길수록 구강암을 쉽게 유발한다는 데 있다. 구강암을 방지하려면 당연히 금연해야 한다. 모골이 송연한 사례지만 대처할 방법이 있어 그나마 위안이 된다.   그리고 흡연은 자신의 건강 뿐만 아닌 제3자, 특히 비흡연자에게도 간접 피해를 크게 끼친다. 하기에 흡연은 자연히 공중도덕과도 직결된다. 이미 개인적인 차원을 벗어나 전세계적인 화두로 떠올랐으며 전사회의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문득 “몸에 그렇게 좋지 않다는 담배를 왜 피우는지 정말 리해할 수 없다”며 늘 귀에 못이 박히도록 잔소리하던 안해의 말이 떠오른다. 나름 대로 ‘흡연은 향수’라고 큰소리 떵떵 쳤고 ‘남자의 전리품’이라고 주해까지 달아가며 으시댔지만 세월의 흐름과 함께 나날이 얼굴이 붉어지는 호언장담이다. 몰라도 너무 모르는 무지와 몽매인 것 같다. 이처럼 좋은 세월에 좀더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라도 안해에게 숙어들어야 할 시점이 아닐가? 물론 안해가 말해서 끊었다고 말하기는 싫어도.   나에게 충격을 준 그 남학생은 그냥 편히 대화할 수 있는 선생님이라는 믿음에 롱 삼아 한 말일 수도 있지만 나의 생각은 거기서 멈출 수 없었다. 적어도 말이 힘을 잃은 경우라겠다. 그 어떤 변명도 모두 궤변이다. 확실한 답을 주려면 오직 몇십년의 경력을 자랑하는 흡연행위를 철저히 끊어버리는 길 밖에 없다.   좋으나 궂으나 함께 했고 기쁘나 슬프나 변함없이 나를 따라준 ‘지기’같은 담배다. 그만큼 지독하게 사랑해온 담배지만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퇴로가 없다. 나를 위하여 집사람들을 위하여 그리고 학생들을 위하여 이 세상 비흡연자들을 위하여 오직 담배를 끊어야만 한다. 도리는 대낮같이 환하지만 오랜 세월 한일자로 쏟아부은 정을 단칼에 베기란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도 오직 나를 희생해야 마음이 편할 수 있다. 따져보면 사실 그런 것도 아니다. 자신을 벼랑 끝에 세우는 일 같지만 오히려 나를 위하는 일인 것을 모르고 산 궤변이다.   지금 흡연은 공중도덕이 허용하는 범주를 벗어나고 있다. 흡연, 더는 자유만은 아니다. ‘무연지구’(无烟地球)를 바라는 이 세상 사람들의 지향 앞에서 자기 고집을 부리면 ‘야만인’이 될 수 밖에 없다.   흡연, 시원히 터놓고 말하면 호박 쓰고 ‘무슨 굴’로 들어가는 망측한 짓거리가 아닐가?! 길림신문
18    고독,그 아픈 속살 댓글:  조회:669  추천:0  2017-02-25
고독,그 아픈 속살       행주치마를 둘러야 한다. 채소를 볶아야 한다. 맛이 있으나 없으나 군소 리조차 할수 없다. 식후에는 그릇을 가셔야 한다. 둬봤자 누구 가셔줄이가 없다. 그리고 오늘은 이것이 먹고싶어 상에 올렸건만 통 맛이 나지 않는다. 음식은 혼자 먹는게 아니라는 생각이 깊어진다. 그래도 먹기는 먹어야 하 는 매 한끼가 지겹게 느껴진다. 전에 없었던 새로운 감수가 이 근년에 새 로 머리를 빳빳이 쳐든 나의 일상이다. 안해를 “잃은” 자취생활이란 정말 슴슴하다. 슴슴하다 못해 느끼하다. 방학이 되면 거의 빠짐없이 한국행이 주어지지만 반년을 아우르는 한학 기라는 긴 시간을 혼자 지내는 고역을 이미 5년을 겪어오고있다. 그만큼 고독은 피할래야 피할수 없는 “인간수업”이 된 오늘이다. 왜 이렇게 사느 냐고 물으면 할 말이 궁금하다. 물론 아주 간단하다. 안해가 집을 떠나서 이다. 헌데 왜 집을 떠나게 했는가를 물으면 역시 확실한 대답이 어렵다. 리유를 찾으면 구구하지만 그것이 또한 리유 아닌 리유인것으로 생각되여 아예 입을 다무는편이 더 편하다는 생각이다. 안해가 한국으로 간후부터 시작된 독신생활에 신물이 나는 나날들을 겪으면서 나는 오직 숙명처럼 고 독을 씹고있다.   일찍 지난 세기 8-9십년대에 주어진 한국행은 오늘까지도 그 기세가 누 그러들줄 모른다. 아직까지는 누그러들수도 없다는 현실이다. 밀물처럼 들 이닥친 조류를 어느 한사람의 힘으로는 거역이 어려운 법이다. 사실이 증 명하다싶이 나에게는 한국으로 떠나는 안해를 막을 뾰족한 방법이 없은 것도 사실이였다. 중국에서는 일자리가 마땅치 않은 사람이고 또 한국에 서 버는 돈만큼 벌수 있는 일자리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는 대답을 줄수 없 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돈이 무엇인지?   내가 몸을 담고있는 학교에는 쌍직공이 몇쌍 있는데 때론 그들 부부동 반 출근이 부럽다. 적어도 그들은 이런 생리별을 모르고 산다는데서이다.  한국행 모두를 아우를수는 없지만 생리별도 서슴치 않는데는 어쩜 돈의 유 혹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집을 떠난 안해를 탓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선은 내가 적합한 일자리를 알선해주지 못한것이고 또 나 자신 의 엷은 수입으론 날따라 높아가는 물질생활에 만족을 주지 못한것이니 이 모두는 되려 나의 무능을 증명하는 재료나 별다름이 아니다. 그러니 나를 멀리 떠난 안해에겐 리별을 참아가며 이악스레 돈을 벌고있다는 좋은 평판 이 차례지고 가정을 위해 자식들의 앞날을 위해라는 슬로건으로 만사람이 입을 모으지만 남편은 그냥 그렇게 살아 마땅한듯 별로 아껴서 말하는 사 람조차 없는 오늘이다. 그래도 할말이 없는 남편들이 아닌가? 찍소리 한번 크게 못하고 그냥 숙명처럼 고독을 썰고있는 남편들이다.   세탁기가 윙윙 소리치며 돌아간다. 믹서기가 누가 쫓기라도 하듯 드륵 드르륵 달음박질이 한창이다. 흡진기가 씩씩 숨을 몰아쉬며 방안을 핥는다. 텔레비의 채널이 대중없이 바뀐다. 록음기가 꽝꽝 집안을 흔든다. 집에 있 는 모든 가전제품들이 총동원하여 방안의 적막과 싸우고있다. 아니 방안 의 적막과 승부를 가리려는듯 맞붙어 칼부림 한다.   집이라고 들어와도 왔다는 말 한디 없고 나가도 나간다는 소리 누구에게 할수 없는 집은 그냥 려관이나 다를바가 아니다. 집이라는 의미가 새삼스 러운 순간이기도 했다. 때론 어이없어 문을 열었다 닫아버리고 식당으로 곧장 발걸음을 옮기기도 하였다. 그런 날은 애매한 술이 밤새 나의 동무가 되여 나의 쓰거운 하소연을 들으며 날을 밝히기도 하였다.   물론 이는 이미 지나간 어제에 대한 회억의 한토막이다. 또한 고독은 이 것뿐이 아니임도 부언하지만 이렇게 나날을 엉망으로 보내는것이 아니라 는것도 그렇게 보낸 나날들이 알려주기도 하였다. 사람은 굽은 길을 걸어 봐야 굽었다는것을 확실하게 깨닫는 얄궂은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고독은 고독을 벗어나려고 발광할수록 더욱 세찬 불길인것도 그때 함께 깨닫았다. 그리고 고독은 일종 인생을 차분히 점검하고 인생을 랭철하게 반성하는 촉 매라는것도 체감했다.   “피할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이 있다. 줄느런히 이어질 고독을 고독자체 에 빠져 허우적일수는 없었다. 고독한 시간을 즐기는 시간으로 바꾸었다. 독서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모든것을 가신듯 잊고 책에 빠지면 그 비여있 던 무미한 시간들에 새파란 생기가 주입되였다. 머리는 맑아지고 마음은 가벼웠으며 산다는 존재가 만져지였다. 내용물이 없는 화는 갈앉고 스트레 스 또한 꼬리를 감추었다. 아니 스트레스가 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자신 이 계획한대로 거침없이 달릴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주어져 호황을 누린 다는 생각이였다. 사람이라는 존재가 원래 요렇게 요사한건지? 전에는 신 경을 자극하던 사소한 잡념들이 되려 좋은 기회가 되고 좋은 환경으로 바 뀌였다. 알게 모르게 독서 목록이 늘어나고 사색의 즐거움이 깃을 펴며 일상이 더는 마른 강대가 아니였다. 록음이 우거지고 바람에 실실이 춤추 는 강변의 수양버들인양 하느작이였다.   쉴새없이 해도 해도 끝없이 할일이 있다는 행복을 만끽하고있다. 사람 은 할일이 있어야 한다는 지극히 간단한 삶의지침을 고독은 너무 알기 쉽 게 가르쳐주고있다. 이제는 되려 고독이 날 떠날가봐 무섭기도 하다. 고독 은 장명등이 되여 내 생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래일까지 비춰줄것이라는 확신이 선다. 그리고 고독은 내 몫이라고 세상 마주하고 아무런 부끄럼없 이 떳떳이 웨치고싶다. 고독을 위한 고독은 없지만 고독도 씹으면 씹을수 록 고소한 맛이 있다는 체험만은 공유하고싶다.   봄을 기다려 선 저 겨울나무를 보면서 남자는 남자만의 아픔을 새길줄 알아야 한다는 메세시가 찡하니 내 가슴에 꽂혀왔다. 남자는 남자가 감당 해야 할 늘찬 고개길이 따로 있다. 남자는 취약한 면이 있지만 겨울나무 처럼 속은 파랗다. 때가 되면 언제 그랬냐싶게 파란잎을 피우며 봄을 마중 하는 저 강변의 수양버들처럼 말보다 행동을 앞세우는 조용한 지혜도 한 가슴에 넘친다. 오직 묵묵히 때를 기다리는 나무의 침묵은 결코 나약함의 대명사가 아닐것이다.   고독, 잠시 혼자사는 나에게 차례진 뜻밖의 선물이지만 그 고독이 가져 다준 선물을 세상에 내놓아 해볕을 보이고싶다. 
17    사랑은 상표가 붙지 않은 "약" 댓글:  조회:698  추천:0  2016-12-30
사랑은 상표가 붙지 않은 “약”       고향에 다녀온 뒤로 나에게는 한가지 명심할 일이 생겼다. 바로 옥수수 수염차를 끓여 마시는 일이다. 오늘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마시고 있는 데 그걸 마셔서 어떤 효과를 보았다는 자랑의 뜻은 꼬물만치도 없다.   내가 혈압이 좀 높다는 얘기를 어디서 얻어들었는지? 그리고 혈당을 낮 추고 혈압을 정상수치로 돌려놓는데 옥수수수염차가 좋다는것은 또 어디서 알았는지? 고모가 손수 마련한 고모네 터밭에 심은 비료 한알 안친 옥수수 수염차다. 지금 세월에는 얻기 무척 힘든 록색이다. 고모는 옥수수이삭이 여무는대로 옥수수수염을 알뜰히 말리웠다. 보지는 못했지만 한이삭도 빠 뜨리지 않고 옥수수수염을 열심히 모았다는 직감이 들었다. 그렇게 알뜰히 모으지 않았다면 어찌 별로 크지 않은 터밭에서 깨끗히 말리운 옥수수수 염을 한보따리나 보내올수 있으랴!   그 사랑과 정성이 곱게 깃든 옥수수수염차를 끓여 마시면서 나는 행복한 사내로 되군 한다. 그리고 혈육의 정보다 더 뜨거운 정이 이 세상에 존재 하겠는가 하는 어쩜 초하루날에도 생각해보지 않았던 엉뚱한 생각에 잠기 기도 한다. 필경 옥수수수염차가 어떤 병근을 뽑을수 없다는것은 잘 알고 있지만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면서부터 나는 근 반년동안 매일 아침 일어 나면 첫일과로 공복에 명심해서 먹던 혈압약을 아예 칼로 베듯 썩뚝 잘라 버렸다.   오늘까지의 생애에서 약을 별로 입에 넣어본 경력이 없다 보니 약을 먹는 일이 정신적으로 지겨웁게까지 느껴졌다. 그리고 혈압약은 일단 먹기 시작하면 죽을때까지 줄곧 먹어야 한다는 의사의 권고에 괜한 스트레스까 지 덧생기다 보니 알게 모르게 그것이 일종 정신부담으로 되였다. 하기에 몇달간 마음이 개운하지 않았다.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같이 일상마저 리유 없이 뒤흔들렸다. 하지만 이런 나의 심리를 전혀 모르는 안해는 혈압약을 끈어버린 나의 소행에 그런 모험을 어찌 하는가 하며 불안해 하였고 나중 에는 매일이다싶이 바가지를 긁는데 이르렀다. 하지만 오늘까지도 별다른 이상이 없는것을 보며 또한 정신적으로 포만한 나의 일상에 안심이 되였 는지 잔소리는 언제 그랬더냐 싶게 갈앉았다. 진정 옥수수수염차의 덕택인 지는 확인하지 않았지만 혈압이나 몸의 상태가 감각으로나마 차츰 제자 리로 가고있음은 확연하다.   의사앞에서 이런 말을 하면 십중팔구 나를 정신이 좀 정상이 아니라고 비난할 소지가 다분하지만 몇달간의 체험에서 나는 자기 몸에 대한 확신 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거듭 가져보았다. 몸의 이상에 대한 진단 을 부정하는것이 아니고 의학에 대한 의심은 더욱 아니지만 진단이 난후 환자 자신의 심리가 아주 중요하다는 생각을 체감하는 계기로는 충분하 였다.   별로 반갑지 않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몸은 확실이 변하고있으며 그만큼 의식과 몸은 전혀 같은 방향으로 이전하는것이 아니임도 눈으로 보는듯 환해지고있다. 몸은 몸대로 변화를 일으키는가 하면 마음은 마음대로 젊음 을 끌어안고 놓지를 않는다. 생각은 뻔한데 몸은 말을 들어주지 않는 불균 형이 점차 일상을 괴롭히고있는 시점이다.   “사랑은 상표가 붙지 않은 ‘약’이라.”는 명제가 새삼스럽다. 몸이 성할 때는 몰랐지만 몸이 좀 불편을 겪을 때일수록 사랑이 더욱 그리워지는 것 이 아마 인지상정이 아닌가 싶다. 이 순간도 누군가 나를 떠올리는 사람 이 있다는 확신과 나의 존재는 누군가에게 아주 소중하다는 생각만으로도 무거운 짐을 부리워 놓은 홀가분함이 깃들고 꽉 막혔던 숨이 활 나가는 후련함을 감수한다.   엄마 없는 나에게 엄마이상의 사랑을 몰부어온 고모다. 이제는 운신마 저 귀찮은 고래희를 훨씬 넘긴 년세에도 그 사랑은 더 뜨겁게 끓고있나 본다. 오히려 더 받들어 모신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고작 명절에나 다녀가는 별로 효도를 모르는 조카이건만 항상 마음에 두고 멀리 길 떠난 자식같은 걱정을 안고사는 고모다. 그러기에 그의 사랑의 손길이 속속 배 인 옥수수수염차를 마시며 나는 다시 젊음을 찾은 기분을 얻는다. 아니 먼 어린 시절로 돌아가 응석이라도 부릴만큼 감미롭다.   억지 같은 론리로 들릴지는 모르겠지만 종종 사랑으로 기적을 창조한 이 세상에 존재한 엄연한 현실을 감안한다면 몸의 균형이 파괴된 소위 일컽는 병증도 사랑은 그 치유의 처방이라고 써넣고 싶다. 그만큼 사랑은 적어도 환자 당사자가 어떤 병증을 이겨낼수 있는 원동력에 불을 지펴주는 일이 되며 삶의 욕구를 촉구하는 촉매제가 되여 왕성한 정력이나 적극적인 배합 으로 병마를 단죄할수 있는 힘이 될수는 있다는 믿음이다.   나 앞으로 약을 다시 입에 대야 할 소지가 충분히 있지만 약이 나의 균형이 깨진 몸을 치유할수 있다는 믿음은 확실하지 않다고 우겨본다. 그 만큼 상표가 번듯이 붙혀지고 설명이 구구한 약에 대한 믿음보다 볼수도 만질수도 없는 사랑에 대한 믿음이 더 굳건한것을 나 자신도 부정할수 없 어서이다.   일상을 가꾸고싶다. 그리고 사랑으로 자신과 더불어 매일을 가꾸고싶다. 나의 사랑이 믿음으로 승화하고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모든 사물 들에 사랑을 쏟아부을 때 내 몸은 껍질이 두꺼워지고 파란 잎들이 빨갛게 단풍이 들어도 속은 푸름이 짙은 랑만의 년륜을 새겨가는 나무처럼 튼실 하리라고 한번쯤 크게 광고하고싶다.   “고모, 오늘도 어김없이 옥수수수염차를 끓여 마셨습니다.”   매일 이렇게 고모한테 보고하고싶다. 고모 얼굴에 피여오를 함박꽃같은 웃음을 그려 본다. 
16    댓글:  조회:798  추천:0  2015-09-09
약     약하면 인차 병을 떠올릴것이다. 병이 없는 사람과 약은 별로 관계가 발생 하지 않으니 말이다. 건강한 사람이 약과 관계를 가진다면 극상 보신 약이 아니면 예방약 정도일것이다. 하지만 삼척동자도 포함하여 세상사는 모든 인간이 약을 떠나서는 못살만큼 약은 나서부터 죽을 때까지 우리곁을 멀리 떠난본적이 있는 같지 않다.   고공공포증이 있듯 난 어려서부터 약에 대한 공포증이 있는걸로 안다. 약을 먹으면 지레 죽어자빠지기나 하는듯 무서워 했으니 말이다. 그래서 어렸을 때 감기라도 걸리면 나에게 약을 먹이는 일이 그렇게 힘들었다고 내가 커서도 자주 들어왔다. 약을 먹이려면 아예 달아나서 집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겁을 잔뜩 먹었다니 부모님 속을 작히나 태운같지는 않다. 심리적으로 그런 공포증을 보여주었는가 하면 생리적으로도 좀 모자라는데 가 있었는지? 알약같은건 통째로 물과 함께 넘겨야 하는데 약을 전혀 넘기 지 못했단다. 먼저 알약을 입에 넣고 물을 마시면 물과 함께 넘어가야 하 는데 물만 홀랑 넘어가고 약은 그냥 입안에 남아있어 쩍하면 뱉아버기가 일쑤였단다. 자연 입안에 남은건 쓰디쓴 약맛뿐이였으니 뱉지 않는게 더 이상한 일이긴 하지! 그래서 다 큰 나에게 생각해낸 방법이 알약을 숱가 락으로 부수고 물을 좀 타서 어린애에게 밥 먹이듯 그렇게 얼려서 먹였다 고 한다. 그러니 난 약의 쓴맛은 볼때로 보았다. 통째로 훌쩍 넘기면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넘겼을 약을 알뜰히 부숴 가루내고 거기다 물까지 타다 보니 순약맛을 다 감지했다고나 할가.   그렇게 약을 죽어라 싫어해서인지는 몰라도 점점 크면서 나는 약과 별로 가깝게 지우지는 않은것 같다. 일년가야 약 한알 먹었던가 하는 기억이 안날 정도로 약을 모르고 살아왔다. 하지만 내남이 사느라면 약의 세례는 누구나 면치 못하는건지? 내가 장가들어 가정을 일구어서부터 약은 우리집 의 보물단지가 되였다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결혼해서 애 둘을 봤는데 태아가 어찌나 컸던지 작은 체구의 안해는 자연분만을 할수가 없었다. 애 둘이나 포복하고 꺼내다보니 작은 고추 맵 다고 동네에 소문이 자자하던 안해도 기가 많이 빠져서인지 골골거리는 준환자로 된듯 싶었다. 그러니 자연 우리 집에 약이 방문하기 시작했다. 크게는 중약과 서약이였지만 그 종류가 류류별별 알약에 가루약에 물약에 환약 그리고 뿜어주는 약, 바르는 약, 붙이는 약, 지어는 약에다 불을 붙혀 쬐이는 약도 있었다. 복용법도 각이했다. 식사 반시간전에 먹는 약, 식사 반시간후에 먹는 약이 있는가 하면 약먹는 주기도 각각이였다. 하루에 세번 먹는 약, 하루에 두번 먹는 약, 하루에 단 한번 먹는 약, 이렇게 이름도 다르고 모양새도 다르며 물론 약효과도 다른 약들이 다 모여오다 보니 한때 우리집은 작은 약방을 방불케 했다.   가슴 아픈것은 이렇게 쌓인 약을 안해의 왜소한 몸이 소화해내야 하는 일이였다. 거짓말 보태 안해는 하루에 약 한사발은 먹어내야 했다. 꿀꺽 넘기는가 하면 마시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고 붙이기도 하며 신고하는 일 을 보노라면 난 실말이지 전혀 리해할수 없은것도 사실이였다. 그만큼 앞에서도 말했듯이 난 약을 별로 입에 넣지 않고 살아왔으니깐. 자연 리해 보다는 불평같은 소리나 비꼬는 소리가 나가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 면 너무나 맹랑하고 안쓰러운 일이였다. 아픈 사람 리해는 못해줄망정 빈 정댔으니 그때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쓰렸겠는가싶다.   작은 “약산”을 허물어서인지? 아니면 하늘이 감동해서인지? 하루라도 아프다는 소리가 안들리면 내가 되려 무엇인가 채 완성하지 못했다는 감이 들 정도로 아픔을 입에 달고살던 안해가 점차 아프다는 소리가 자취를 감추고 얼굴에 화색을 띄우며 “젊음”이 감돌았다. 걸음도 가벼워 지고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생기를 되찾았다. 자신은 입밖에 내지 않았어도 보는 내가 감지할수 있을 정도였다.   세월 거슬러 올라가는 영웅 없나보다. 자기는 천상 앓지 않고 살기나 하는듯 으시대던 나의 몸에 자박자박 이상이 오고있었다. 정부의 혜택으로 하는 교사절기념 교원신체검사에서 생각지 못한 숱한 모병들이 줄을 쳐서 고발하였다. 고혈압이요, 경추병이요, 심률이 빠르오, 가벼운 지방간이요, 신장이 허하오. 하며 나를 놀래웠다. 그것도 해마다 하는 신체검사인데 어쩜 한해사이에 이런 돌변이 생길줄은 천만 생각밖이였다. 나절로도 어리벙벙할 지경이였다. 그냥 집체로 받는 검사다 보니 대수한것은 아닌지 의심하다가 대수한것이 이런데 깐깐히 하면 오직 더 험한 결론이지 않겠냐 하는 생각에 검사결과를 부정할 자신이 서지 않았다. 오직 수긍할수밖에 없었다. 과연 검사는 거짓이 아니였다.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내 마음이 요사할 뿐이였다. 혈압이 높다면 약을 먹어야 했고 경추병이라면 뾰족한 수가 따로 없다니 물리치료를 받아야 했다. 심률이 빠른것도 지방간도 신장이 허한것도 다 약을 먹어야 했다. 약, 약, 약 가뜩이나 약에 약한 내가 후반생은 약과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화가 번저졌지만 어쩔수 없는 현실이기도 했다. 다행히도 그간에 알약은 꿀꺽 넘길수 있서서 다행이였다.   어제날 내가 잘난체 흘겨보던 안해의 일상이 나한데 옮겨온듯 나는 날마다 시간 맞춰 약을 복용해야 하는 준환자가 되였다. 어쩜 환자를 보는 시각과 환자가 되였다는 시점이 이렇게 십만팔천리를 상거하는지? 날이 갈수록 심각해진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빈정대던 일들이 떠오르면서 못난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 세상 누구에 한해서도 비웃지 말라는 말이 새삼스 럽다. 제가 당하고 보면 모두 알것 같다. 하지만 알았을 때는 이미 다 엎지른 물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 내가 안해앞에서 그때 잘못했다고 반성 한들 그때 아프던 마음을 치유할수 없는것처럼.   후회에 약이 없다는 말은 그르친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 다분하다. 그리 고 그 당시의 깨닫지 못함을 꼬집어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나름대로 풀이 하면 제때에 점검보수하지 못했다는 안타까움일것이다. 약은 증상에 따라 그때 그때 효과를 보듯 우리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고약한 병페도 그때 그때를 놓지지 말고 적시기에 약이 따라서야 후회를 줄이거나 없앨수 있다 는 지혜가 아닐가? 적어도 두번 다시 후회를 자초하는 일은 경계할수 있다 는 지당한 깨우침이다.   입에는 쓰지만 몸에는 리롭다는 약이다. 더 건강한 삶을 위하여 쓴약도 달게 찌우는것이 순리인듯 가슴에 차분히 스며든다.
15    우리 딸 곱다 댓글:  조회:1986  추천:3  2015-08-30
우리 딸 곱다        삼십대가 다 되는 딸에게는 좀 어색한 말이 아닐수 없다. 하지만 한번이 라도 꼭 이렇게 말하고싶은 마음을 감출수 없다.    아버지가 될 준비가 다는 되지 못한 80년대 중기에 얻은 딸이다. 별것만 했다. 문득 아버지가 되여버린 당혹감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내가 자 식을 보았다는 현실자체가 흥분을 불러왔다. 새신랑과 아버지의 차이는 확 실히 다르다는 체험이기도 했다. 딸애가 쌔근쌔근 자고있는 얼굴만 보아도 기분이 붕 떴다. 어떤 조건부도 없이 그저 기분이 좋아지는걸 어쩌랴! 혈육 이라는 존재는 말로써 형언이 잘 안되고 말로써는 근본 그 기분을 그려낼 수 없는 황홀함이랄가?   한때는 안해이상으로 집에만 들어서면 애에게 집착한다고 안해의 고운 눈흘김도 받았었다. 이미 옛말같이 되였지만 그때 딸애는 그냥 연고없이 고왔다. 남의 눈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냥 고운것이 전부였다. 젖내나 는 얼굴에 매일 여람번씩 뽀뽀해줘도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런 나의 사랑표현의 덕을 입어서였는지는 몰라도 딸애가 서너살되여 말을 쨀쨀 해댈 때 동네 어른들이 안해와 나를 가리키며 누가 더 곱니? 하 고 물으면 딸애는 서슴없이 “아빠”라고 하여 나를 즐겁게 하고 동네어른 들을 놀라게 하였다. 동네어른들의 눈길에서 나는 해박함이라곤 잘 보이지 도 않고 오직 무뚝뚝한 인상의 애비가 어쩜 더 곱다는 소리를 들을수 있을 가 하는 의문을 읽을수 있었지만 딸애의 야무진 대답만은 사실이였다. 두번 다시 물어봐도 “아빠”라는 대답을 들으며 나는 저으기 흐뭇하기까지 했다.   그렇게 고운 딸이였지만 마음처럼 곱게 키운것은 아니다. “청화대학생으 로 키운다.”고 안해앞에서 희떠운 소리를 해댔지만 결코 대학문도 못들여 보낸 애비다. 30여년의 교직생활에 숱한 학생을 키워 일류대학에 보냈지만 딸은 대학가에도 못보낸것이 내내 마음속에 무거운 앙금이 되여 시도 때도 없이 마음을 괴롭힌다.   딸애가 유치원에 들어갈 나이 때는 안해가 유치원교양원으로 있었으니 매일 아침 제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으로 가는 모습이 그렇게 보기좋았다. 그리고 만시름이 놓였다. 그만큼 유치원서부터 제 앞가림을 온천하게 하여 하냥 웃음꽃이 흐늘거렸다. 희망 또한 차넘쳤다. 당금 인재로나 된듯한 착각도 없지 않았다.   딸애가 소학교에 다닐 때는 내가 또한 딸애가 다니는 소학교 교원이였으 니 당연히 혜택이 아닌 혜택이 없은것이 아니였다. 담임을 맡은 교원마다 애비를 담아서 어쩌고 저쩌고 하며 나무람보다는 항상 칭찬을 앞세웠다. 그리고 제앞의 공부도 열심히 한다고 받들어주어 마음 하나만은 든든했다.   순풍에 돛단듯이 앞으로 질주하였다고 할수 있은 우리 딸의 행운도 거기 까지가 한계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한것은 중학교로 올라올 나일 때 나의 사업터가 중학교로 옮겨지면서 안해가 민영으로 하던 유치원교양원이라는 일자리를 잃게 되여서였다. 서푼어치되는 나의 봉급으로는 가정생활유지 도 어려움이 있게 되여 안해는 내가 조동되여오던 그날부터 실업한거나 다름이 아니였다.   생활의 핍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안해는 집에다 기숙생을 넣었다 자그만치 다섯이나 넣다보니 그때부터 딸에 대한 관심은 기숙생과 꼭 같았다. 오히려 기숙생에게 신경을 더 쓰면 더 썼지 딸애에겐 손길이 미치 지 못하였다. 원래 곱게 커오던 딸애는 그때부터 무슨 기미를 알아차렸는 지 공부보다 오히려 독립적인 생활에 더 신경을 쓰는듯 하였다. 다 알다싶 이 초중단계공부에서 제일 관건으로 되는 2학년 때부터 알게 모르게 미끄럼을 타기 시작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를 놓지지 말고 잘 다독 이든지 아니면 바싹 뒤를 받쳐줘야 했는데 그럴 겨를이나 정력이 없었다. 퇴근하여 집에 오면 시장을 방불케 하는 벅석임에 딸애에게 말 한마디 건네는것조차 사치였다. 그렇게 장장 5년이 흐르다 보니 딸애에 대한 관심 과 배려는 꿈에서나 본듯 까마득해졌다.    “애들은 정성을 먹고 큰다.”는 말이 내가슴을 때렸을 때는 이미 늦었다. 애들은 필경 나무처럼 방치해도 곱게 크는것은 아니였다. 내가 현성중학교 로 조동되여 그나마 딸애의 고중진학이나 고중공부에 조건은 창조하였지 만 공부는 외부적인 조건으로 향상하는것이 아님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막바지 고중공부에 신경을 써보느라 했지만 애매한 딸애의 스트레스만 더 키웠을뿐이다. 기대가 높으면 높을수록 딸애의 안타까움은 커만 갔다. 지어 는 이렇게 압력을 가하면 생사람 잡겠다싶어 내쪽에서 순기자연 (顺其 自然)으로 위안하는수밖에 없었다. 결과는 나의 호언장담이 물거품으로 되여 동료들앞에서 떳떳하지 못할만큼 초라해졌다.   3류대학에서 온 입학통지서를 찢어버리고 일본류학을 권장했다. 딸애의 자존심을 세운다기보다 나의 자존심의 작간이라는것이 더 알맞는 처사였 다. 십여만이라는 빚을 내는것도 눈 한번 깜짝 하지 않고 보란듯이 유학을 보낸다고 내세운 자존이였다. 거의 망발에 가까운 오기였으나 그렇게라도 내 속에 도사린 공허를 메우려고 작정하였다. 하지만 딸애의 운명인듯 유학은 순순히 풀리지 않았다. 어느 일본 대학교의 통지서가 오고 학비까 지 다 보내기에 이르렀는데 령사관에서 비자를 내려주지 않았다. 답답해 도 한참 답답했지만 막무가내였다. 때가 마침 중국과 일본간의 관계가 악화되던 때여서 그렇다는것이 내가 알수 있는 전부의 원인이였다. 요행을 바라 이듬해도 시도해봤지만 똑같은 미역국이였다. 그래서 한국유학도 시 도했봤는데 역시 꿩구워먹은 자리였다.   이런 굴곡은 나의 짜증만 불러온것이 아니였다. 딸애는 집을 나가겠다고 했다. 나에겐 이미 딸애를 붙들어둘 힘이 딸렸다. 딸의 요구에 따르는수밖 에 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집나갈 돈을 대주는 서러움이 내가 할수 있 는 유일한 선택이기도 했다.   단 돈 3천원을 들고 청도에 있는 친구를 찾아 떠난것이 십년이 더 되게 청도에 정착하여 소위 말하는 제노릇 알뜰하게 하고있는 딸애다. 십년이 넘도록 집에다 손 한번 내밀지 않고 오히려 아빠생일이요 엄마생일이요 하며 돈이나 기념품을 부쳐오는 딸애 앞에서 내가 왜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딸애가 애틋하게 굴수록 나의 마음은 더 아릿함을 속일수 없다. 장중보옥으로 키우려 했던 초지가 다 깨여진 마당이지만 올곧게 자 란 의젓한 딸애를 떠올리면 아빠로서 할수 있는 말이 더 있을수 있으랴!   오직 “우리 딸 곱다.”로 못난 자신을 위안하고싶다.
14    감자채 볶음 댓글:  조회:963  추천:0  2015-05-22
감자채 볶음     남자가 채소를 볶는다고 해서 놀랄 사람이 별로 없는 세월이다. 그만큼 남성자체가 각성했다기보다는 세월이 각성을 보여준건 아닌지? 남녀평등은 남녀가 같은 일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여도 남녀평등의 일환으로 남녀가 같 은 일을 할수 있다는 자체에도 분동은 올려야 할것이다.   별로 상관이 없는 론제 같은 느낌에 거두절미하고 내가 감자채 볶음을 익힌것은 순전히 료리에 대한 호기심에서였다. 일반 가게에서도 먹을수 있는 천하디 천한 감자채 볶음이지만 입맛을 당겼다. 나도 한번 실 천해보고싶은 마음이 생겼다. 그래서 몰래 한번 실천해보게 되였다. 가족 일동의 환성을 샀다. 안해는 내가 료리를 했다는 그 한 해방에 박수를 보냈을것이고 애들은 그냥 덩달아 좋아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고무하는 각도에서 있을수 있는 환성임은 틀림없을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빛을 보였으면 하는 기대도 한몫이였을것이다. 어찌되였던지 나의 기분도 과히 나쁘지는 않았다. 가정 기분을 리드할수 있는 신대륙이나 발견한듯한 순간이기도 했다.   나의 료리 솜씨는 감자채 볶음부터 시작이 되였다. 근데 감자채 볶음 한가지가 소문까지 날줄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이였다. 안해친구들이 종 종 우리집에서 마작을 논 일이 있었는데 그들이 내가 한 감자채가 맛이 여차하다며 감자채 볶음 한번 먹어보겠다고 아닌밤중의 홍두깨마냥 들이 대여 나를 난처하게 하였다. 모르긴 해도 안해의 입자랑 덕을 본것임에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당장에서 안해를 나무린다는건 센스가 아닌지라 그럼 한번 본때를 보여주겠다고 응답하는수밖에 없었다.   감자채 볶음은 간단하다. 채칼에다 잘 채친 감자오리를 물에다 한 반시 간 불궈서 감분을 살짝 뺀다. 그다음 갖춰야 할 양념이라야 파를 엇썰어서 기름이 단 가마에 넣어 살짝 파냄새를 살리고 다음 감자오리를 그대로 넣어서 골고루 볶는데 각별이 신경써야 할 부분이 불조절과 시간이다. 너무 익어도 안되지만 썩썩해도 맛을 내지 못한다. 오직 너무 익지도 설익 지도 않은 그런 도를 장악하는것이 기술이라면 기술이고 정성이라면 정성 일것이다. 한두번의 실패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과히 어려운 고비이 기도 하다. 물론 그뿐이 아니다 감자채 볶음에는 꼭 들어가야 하는것이 있는가 하면 꼭 들어가지 말아야 하는 양념도 있다. 꼭 들어가야 할 양념중 가장 엄지가 되는것은 마늘이다. 궁합처럼 어울리는 마늘이 빠지면 감자채 볶음은 제맛이 아닐만큼 중요하다. 그리고 간장을 넣으면 보기에도 안좋을뿐더러 맛도 간다. 그러니 간장은 빼고 소금만 살짝 뿌려 노란색상 을 보장해줄뿐만 아니라 맛도 순 감자채 볶음맛을 살리게 되여있다.   그날 안해의 친구들이 감자채 볶음을 먹어보고 입에 침이 마르도록 나를 올리띄워 나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였다. 근데 그날 그들이 나에 대한 칭찬은 채소맛에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이런 남편을 잘 만났다는 안해에 대한 부러움으로 번질줄이야!   세월이 흘러 이미 지나간 옛말이 되여가는 일이지만 그날의 그 기억을 되살리느라면 료리의 의미가 새로와진다. 뭐라고 꼭 짚어 말하기에 앞서 우리가 소홀히 스치는 일상에서 조금만 눈을 주어본다면 정감의 광산은 우 리들의 가장 가까운 주변생활에 있다는 생각이다. 오직 발굴한다면 가정의 모든 사소한 일에도 따뜻한 정이 숨쉰다는 생각에 새삼스럽다.
13    고향행 (외 2편) 댓글:  조회:1145  추천:2  2015-03-20
수필 고향행 (외 2편)     이번의 고향행은 미리 준비된것이 아니였다. 지난 한학기에 걸쳐 있었던 민족간부조선어훈련반의 교수를 담당한것이 인연이 되여 민족간부들과 어 울리게 되였는데 그중의 한 학원이 내 고향에 처가집이 있어서 우리는 자연 한고향인연이 거론되였다. 아무때건 자기가 처가로 떠나게 되면 나한테 알리겠으니 나더러 편히 자기자가용으로 함께 가자는것이였다. 물론 그 얘기가 술자리에서 있었던지라 그냥 스쳐지나는 소리로 들었는데 당사자가 잊지 않고 이번 련휴에 처가로 떠나게 되니 함께 동행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전화가 왔다. 사실 지난 여름방학에 다녀온 고향이다보니 이번 련휴에는 가도 그만 안가도 그만인 나였으나 그 마음이 고마워 함께 가자고 선선히 응낙했다.   고향가는 일보다 더 즐거운 일이 이 세상에 더 있을가 싶다. 국경절날 떠나기로 약속이 되였는데 전날부터 흥분이 실렸다. 고향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고모의 얼굴이 떠오르는가 하면 언제나 인자함만을 보여주는 고모 부의 환한 미소도 함께 떠오르면서 종시 잠을 이룰수 없었다. 정말 한밤을 그대로 하얗게 밝히는 체험이였다. 그래도 피곤기라곤 찾아보기 어려울만 큼 정신은 되려 올똘하니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 었다.   그렇게 잠을 설치고 눈을 뜨니 겨우 아침 5시였다. 8시반에 만나기로 약정이 되였으니 그 시간대면 한잠을 자도 되련만 도무지 재잠을 청할수 없을만큼 마음은 연고없이 들떠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련휴로 가는 걸음 인데 무엇인가 사들고 가야 하지 않는가 하는 예전에는 생각도 못하던 자상함도 떠올리는 시각이였다. 그래야지 무엇인가 사들고가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하는 자문자답을 하면서 떠올린 생각이 고향에서는 사먹기 힘든것을 고르기에 이르렀다. 여름방학에 갔을 때 들을라니 우리 여기서는 시장에서 흔히 살수 있는 우리 민족의 떡 등속을 거기에서는 파는 곳이 없었다. 아마도 조선족이 좀 적은편이여서인지는 몰라도 그런 음식도 맛보려면 오직 자신이 손을 써서 만들어야 했다. 이미 고희를 넘기신 고모 이고 보면 생각은 있어도 손수 만들어먹기에는 귀찮을것이 뻔했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더는 앉아있을수가 없었다. 발길은 말없이 떡집을 향했다. 요사이 한국에서 들어온 부부가 떡집을 경영하고있는데 경기가 좋아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차례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너무 이른 아침이여서 좀 주춤하였는데 떡집문을 떼고들어서니 그게 아니였다. 나보다 먼저 와서 줄을 선 사람이 대여섯 잘되였다. 내가 되려 조급증이 날 정도였다. 떡이 포장되는대로 손님들의 손에 들리워지다보니 떡집에서 좋이 한식경을 기다려야 했다. 참 일찍 오기 다행이였다. 나의 뒤로도 줄을 지었으니 말이다. 그러구려 내가 떡 한가방 꼴똑 채웠을 때는 시침이 7곱시반을 가르켰다. 나는 밥도 안먹은 빈속으로 또 다른 한 시장 을 떠올렸다. 우리 이곳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순대매장으로 부랴부랴 걸음 을 재우쳤다. 순대는 꼭 사가야 했다. 고모부가 떡을 좋아한다면 고모는 떡보다 순대를 더 좋아하는것을 잘 아니깐!  8시를 다 채워서야 떡 한보따 리에다 순대 한짐을 다 챙겼다. 그때까지도 빈속이였으나 전혀 배고프다는 생각이 뜨지 않았다. 되려 어떤 포만감으로 하여 마음이 든든하였다.   고향이란 어떤 곳이기에 이토록 마음을 설레이게 하는것일가? 차에 앉은 우리 일행중 사위가 되는 그 사람 내놓고 우리 둘은 그냥 들뜬 상태였다. 기사를 맡은 남편과는 달리 안해가 되는 사람은 끝없이 종알거리고있었다. 여기가 바로 어렸을적에 오빠와 함께 고기잡이 하던 곳이라고 하는가 하면 좀 지나서는 이 산이 바로 오빠와 함께 나물캐러 다니던 산이라고 하면서 이십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어제일처럼 떠올리는것이였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오직 옆에서 들어줄 사람이 궁하다는 생각에 말을 하지 않은것뿐이다. 나의 눈에도 역시 개울에서 반두질하며 뛰놀던 동년이 그려진 강이 아니던가? 성범이랑 인주랑 쌍가마 그리고 순자랑 함께 벌거벗은채로 시름없이 첨벙거리며 목욕하며 희희닥거리던 동년이 다시 되사는듯하였다. 아니 아주 되살아서 지금 달리고있는 차창에 아른거리는 환각에 빠지기도 하였다. 두시간여 달려온 피로가 없지 않았지만 우리의 마음은 조금도 피로를 모르고있었다. 기사를 맡은 남편 역시 안해의 기 분에 따르는듯 그렇게 시물시물 웃고있었다. 애처럼 즐거워하는 안해모 습이 보기좋았던것임이 틀림없었다. 모르긴 해도 이번 고향행차에 대하여 은근히 기뻤으리다. 어떤 일상에서 오늘과 같이 이렇게 기뻐하고 흥분하는 모습을 보았으랴 싶을 정도였으니깐!   고향이란 나 혼자만의 그리움의 의미지가 아니였다. 이 세상 고향을 둔 모든 사람들이 그리워하는 그리움이 꼴똑 담긴 곳이라는 생각이 새삼스 러웠다.    내가 이 시간대면 거의 집에 도착한다는것을 이미 전화련락을 받은 고모와 고모부는 아예 집앞 뜨락에서 서성이고있었다. 이맘때라고 짐작해 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렇게 서성대고있는 모습에서 고모와 고모부의 그리 움도 함께 읽는 찰나였다. 사실 나를 먼저 집까지 태워주고서야 처가로 달리는 그 남편의 안해 립장에서는 얼마나 야속했으랴 하는 생각이 떠오르 는 순간이기도 했다. 엄마 보러 가는 안해의 마음이야 나보다 더 급했지 않았겠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리고 엄마가 집 뜰안에서 서성거릴것을 생각하니 내가 막 미워나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누구면 안그러랴! 날개라도 돋혔으면 언제나 할것없이 아무때건 훨훨 날아가고싶은 곳이 아니랴!   고향, 떠나갈 사람들 거의 다 떠나버린 고향, 짜개바지친구 하나 찾을수 없는 고향이기에 얼핏 스치는 생각에는 스산하고 한산한것 같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세월이 이렇게 많이 흘렀음에도 한치의 변화가 없는 고향에만 유독 살아있는 농익은 정으로 하여 마음은 뜨거워났으며 내 마음에 앙금이 되였던 옥생각들을 다 풀어주는 고향이였다. 유독 나의 애명을 불러줄수 있는 곳이고 나의 천진한 과거와 없지 못해 유치했던 성장과정을 손끔보듯 그렇게 환히 알고있는 고향이기에 고향에 머무는 내내 나는 아이로 다시 태여난 기분이였고 다시금 되돌릴수 없는 세월을 억지로가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게 되돌려본 아름다운 추억이였다.   기쁨과 환락은 짧은것이다. 제한된 련휴였으니 떠나야 하는 서운함도 함께였다. 떠나기 전날부터 무엇인가 보낸다는 소리를 곱백번도 외우고 있는 고모를 보며 나는 나에게 수요되는것 하나도 없다고 그렇게 딱 잘라 말했건만 그래도 아니란다. 안해를 한국에 보낸 내가 어떻게 자취생활을 하고있는지가 궁금해서 밤잠도 안온다며 세월타령에 밤가는줄 모르더니 어느새 올망졸망 숱한 보따리를 꿍져놓았다. 큰딸이 로씨야에서 뜯어말려 가져왔다는 고사리에 사위가 짬짬이 잡아서 말리운 메기, 붕어에다 늦게 심어서 지금도 삶아먹는다는 풋강냉이 그리고 손수 심어 깨끗이 말리워 빻은 고추가루 이렇게 짐을 꿍지다보니 내가 가지고간 떡보따리보다 한배 는 더 큰 보따리가 주어졌다. 사실 이런 올망졸망한 보따리에 든것이 시장 에 나가면 다 있지만 차마 당장에서 그 말을 할수가 없었다. 내가 가져간 것은 돈만 주면 손쉽게 사는것이였지만 고모가 나에게 챙겨준것은 그런것 들이 아니였다. 이를 어찌 올망졸망한 보따리로만 보랴! 이는 오직 따뜻한 마음이고 뜨거운 숨결이 아니랴! 이런 끓어번지는 정앞에서 난 단 한마디 말도 할수 없었다. 오직 넣어주는 그대로 받아야만 했다. 받지 않을 그 어떤 구실도 있을수 없었고 또한 찾을수 없었다.   떠나오면서 나는 끝내 눈굽을 적시고야 말았다. 이제 앉으면 얼마나 더앉겠는가 싶은 애달픔도 애달픔이였지만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 나를 생각하는 청고한 사랑에 감격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내가 고향으로 가는 목적은 없지 못해 무엇인가 더 보태주고 싶은 마음이였다면 내가 고향에 가서 가져오는것은 나의 한생에도 다 못쓰 고 죽을 위대한 사랑이였다.   고향, 나에게 둘도 없는 고향, 나는 오직 그 품에 안겨야만 사는 보람과 더불어 사는 의미를 터득하는것이 아닐가?!             나이, 내것만은 아니다        사춘기 그때는 왜서 나이에 그렇게 민감했던지? 나이말이 나오면 한살 이라도 올려붙이지 못해서 안달이였다. 그만큼 나이 한살 더 많은것으로 어깨를 살리기도 한적이 있다. 실은 한살이 아니라 생일이 한달 빠른것으 로도 우에 올라서려고 바득거렸다. 오뉴월 하루볕이 새롭다는 속담을 내세워 등치면서도 형님이나 오빠노릇에 몰입했는지도 모르겠다. 오죽했 으면 나이 한살 더붙이는것으로 얼굴을 붉히다 못해 주먹질이 오갈정도 였으랴!   그때 나이에 대한 리해는 담배를 마음대로 태우고 술을 시름놓고 마시는 그런 알량함도 속일수 없다. 어쩌면 나이와 자유는 정비례인듯한 유치함이 였다. 아니면 꽃같은 처녀손을 잡고 청실홍실 늘이는 연애생활이 부러워 서였을가? 그때만 해도 결혼하면 알콩달콩 신혼을 즐기는 새신랑 새각시가 부러운것이 사실이였으니깐! 아무튼 나이를 올려붙이는데는 특별한 다른 뜻이 없이도 그렇게 신경을 썼으니 오늘날 생각해보면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 아닌가 짚어진다.   세월의 흐름에 실려 덧없이 먹은 나이가 불어나면서 그런 덧붙이기는 고사하고 나이를 되려 줄이고싶은 마음이 한두번이 아니다. 벌써 마흔고 개를 넘기다니 래일모레 오십줄이라니 하는 한탄같은 신음을 주변에서도 심심찮게 많이 들어오는 터이다. 해놓은 일 없이 나이만 늘어간다는 세월 타령이다. 어찌보면 우리의 힘으로 막을수 없는 막무가내앞에서 인생에 대한 허심탄회한 반성이 아닐가 하는 생각도 든다. 오직 먹을수만 있고 뱉을수는 없는 년륜같은 시간의 기록앞에서 우리는 숙연해지는 자신을 놀랍게 발견하게 된다.   일찍 성인 공자는 나이에 대하여 정채로운 선견지명을 내놓은적이 있다. 바로 삼십이립, 사십불혹, 오십지천명, 육십이순, 칠십고희다. 말하자면 나이도 때가 있다는 뜻이되겠다. 그때 그때가 서로 다른 생명의 의의가 부여된다는 암시라고 봐도 무방할것 같다. 그리고 그 나이면 그나이로서 충실히 갖춰야 할 어떤 순리를 깔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함께 터득 된다. 그러고 보면 나이는 오직 나이에 그치는것이 아니다. 나이도 일종 사회성 을 띠는 존재라고 보아야 할것 같다.   일떠세울 때는 세워야 하고 막힘이 없이 쭉 치달을 때는 치달아야 하며 고개를 숙이고 명상에 잠길 때는 명상에 잠길줄도 알아야 하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릴 때가 되면 성근하게 귀를 귀울릴줄도 알아야 하니 말이다. 그냥 내가 생겨난 그대로를 고집하는것은 나이에 대한 배반이고 나이에 대한 부정이다. 어찌보면 세월과 엇서는 아름다운 몸부림이라고 할수 있겠 지만 결국엔 나이를 헛먹었다는 사회지론이 따르게 되는것이다. 이렇게 나이에 대한 행위철학은 우리가 알던 모르던 그물처럼 존재하는것만은 사실이다. 물론 그렇다고 나이에 매워 살자는 말은 절대 아니지만 나이에 따르는 무형의 준칙을 누가 부정하랴!   꼭 같은 말일지라도 애입에서 나왔다면 천진하고 귀엽다며 들어주지만 칠십을 넘긴 로옹의 입에서 나왔다면 오망 아니면 치매라고 하는 현실을 우리가 어찌 스칠수 있으랴! 이십대가 하는 일들이 우리 눈에 안들어오듯 이십대의 눈에도 우리 오십대들의 어떤 사유는 전혀 먹혀들지 않는것도 따져보면 바로 나이차이에서 유래된것이다. 세월은 오직 공정하다고 보아 야 한다. 그때를 살아온 우리들의 삶이 다르고 그때의 사회배경이 다른만큼 우리는 우리의 사유로 모든 오늘의 현실을 부정할 힘이 없는것도 사실이잖은가? 종점이 주어진 우리의 생명을 놓고 말하면 오직 안타까움 이지만 우리는 그런 안타까움에 빠져서는 안되는 불쌍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들의 입에 잘 오르는 노래 “내 나이가 어때서”를 열창하는것은 아닌지?   이 세상에 나이에 깔려죽은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나이를 치받고 우뚝 일어서서 백년을 청춘의 기백으로 산 사람이 없는것도 자명한 일이다. 뱀 을 그려놓고 다리를 덧붙이는 소행인지는 몰라도 오십대를 넘기면 육체적 인 나이보다 정신적인 나이로 사는것이 어떠랴 싶다. 풀떡풀떡 뛰던 육체 적인 어제를 미련하기보다는 풍만한 오늘의 정신력으로 살아가는것이 더 지혜롭고 총명하지 않겠는가?   천고마비로 일컽는 이 가을, 홀연 높아진 푸른 하늘아래 풍성한 열매 들을 껴안고 흐느적이는 여유를 만끽하면서도 고운 단풍잎에 눈길이 간다. 수확의 희열뿐이 아닌 쓸쓸하고 소슬한 가을바람을 감수하며 애처롭게 떨고있는 단풍잎이다. 그냥 빨간 단풍으로 고운 여생이 될수 없는것이 운명인줄 뻔히 알기라도 하는듯 나무가지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악이 눈에 밟혀온다. 우리들의 인생도 저 고개만은 그냥 지나칠수 없는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떠오르며 여유작작 산책하는 발걸음은 결코 가볍지가 않았다. 잎이 지면 나무는 또 봄을 기다리고 봄이면 새잎을 피우고 한여 름을 왕성하면 나무잎은 결국 락엽이 되여 새로운 꿈을 위한 밑거름이 되는것이 아니랴! 한번으로 끝나는 우리들의 인생, 나이와는 상관없이 사는 그날까지 행복하게 사는데는 지혜가 필요하다.         내 령감의 발원지      거의 매일을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듯 달려가는 곳이 있다. 바로 내가 사는 아빠트에서 한 500미터 상거한 목단강이다. 시골태생이고 또 내가 태여난 곳에는 큰강도 없다보니 수영에 대해선 거의 까막나라인 나지만 기어이 강변으로 줄달음치는 그 연유에 대해선 나도 어떤 확답이 주어지지 않는다. 그냥 강을 마주하면 언제던지 속이 후련해나고 어떤 답답함도 시원히 푸는듯한 감수가 전부일뿐이다.   오늘도 이른 아침 동으로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마주하고섰다. 어제 저 녁에도 마주했던 강물이건만 오늘 아침에 마주한 강물은 또 다른 느낌이다. 빨간 아침노을을 싣고 흐른다. 아주 여유작작한 느긋함과 질서정연한 흐름 이다. 누가 쫓기라도 하는듯 그런 서두름이 없고 그렇다고 느릿느릿 잔꾀 를 부린다는 그런 느낌도 아니다. 그냥 마음이 내키는대로 생긴대로 나름이 주어진 그 모습이 참 보기 좋다. 흠잡을데 없이 보기에 가관이다.   산이 좋고 물이 맑아 세상에 소문이 자자한 고산호 경박호가 발원지라고 알고있는 목단강물은 내가 사는 녕안땅을 굽이쳐 흐르고있다. 물론 녕안땅 만이 아닌 동으로 말없이 흘러흘러 끝간데 없는 바다가 귀향일것이다. 그러니 내가 지금 서있는 여기는 근근히 목단강의 한 구간 그것도 크지 않 은 자그마한 구간임에는 틀림이 없다. 나의 생활자체가 생활속의 한 구간인것처럼. 필경 나의 생활반경도 주어진것이며 제한된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을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사는가가 나름일뿐이다.   목단강이 어떤 굴곡을 거치며 바다에 이르는가에 대하여 다는 모르지만 또한 다를 알수도 없지만 내 눈에 비쳐든 이 한구간에서의 만남만으로도 나의 마음을 적시기에는 족하다.   할머니가 나한테 정중하게 묻던 그 물음이 새삼스럽다. 사람이 살면서 무엇이 가장 중요한가 하는 물음이였다. 그때가 내 나이 열두살, 세상물 정에 어섯눈이나 떴을가 하는 소년에게는 당치도 않는 물음이였다. 아마 자신이 나와 길게 같이 할 시간이 없었음을 미리 알았는지는 오늘까지도 수수께기지만 이런 당돌한 물음에 나더러 확답을 해라는것이였다. 일시 떠오르는것이 없었다. 아니 머리가 하얗게 비는 순간이기도 하였다. 그래도 작심한듯한 할머니의 물음은 집요하였다. 그리고 꼭 어떤 답을 주어야 한다는 기대가 눈에 력연하였다. 의아한 눈길로 할머니 얼굴을 빤히 쳐다 보며 그때 내가 준 대답이였다. 잘먹고 잘사는것이 아닙니까? 동문서답 이였다. 할머니의 물음은 그것이 아니였건만 내가 할수 있는 대답은 그것이  전부였고 또 더 다른 정면적인 답은 머리에 없었다. 그만한 대답 에도 만족이라는듯 할머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자신은 이미 정해 놓은듯한 답을 나에게 주는것이였다. 그건 너나 내나 바라는바이고 생활 하며 제일 중요한거는 오직 사랑이란다. 또박또박 꼬집어 답을 주었지만 답 자체가 나에게는 천방야담이 아닐수 없었다. 사랑이란 낱말조차 입에 오르지 않은 그때고 보면 아리숭한 물음이자 역시 희미한 답이였다. 하지만 그말이 할머니가 나에게 남긴 유언이기도 했다. 나에게서 시원한 대답도 들어보지 못한 할머니는 며칠을 더 벋티지 못하고 이세상을 영영 떠났던것이다.   할머니를 떠올리면 이것밖에 또 하나 잊지 못할 명언이 있다. 어렸을 적에 내가 좀 부랑져서 걸핏하면 자기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애들과 맞다 들었다. 불보듯 뻔했다. 내가 맞아들어오는 때가 반이 넘었다. 그러면 금이야 옥이야 하며 나를 물고빨던 할머니였지만 이때만은 아예 모르쇠를 대는 눈치였다. 나의 역성을 들어주기는 고사하고 되려 나를 책망하고 닥달하였다. 심하면 맞아온 나에게 비짜루를 들기도 하였다. 참 리해할수 없는 일이였지만 그런 봉변을 당하기가 일쑤였다. 그런 일이 반복되던 어느 여름날 밤 나를 품에 꼭 껴안고 하던 말이 오늘까지도 나의 머리속에 파랗게 살아있다. 때린 사람은 다리를 꼬부리고 자도 맞은 사람은 다리를 쭉 펴고잔단다 알겠니? 그러니 절대 남을 때리겠다고 헤덤비지 말거라. 그말이 어떤 효과를 발생했는지는 몰라도 그후로 나는 바락바락 악을 쓰며 달려들어 싸우는 일이 거짓말같이 사라진건만은 오늘 묻는다 해도 사실이 였다고 떳떳하다.   소리없이 갈길에 충성하는 강을 마주하면 지켜야 할 비밀이 따로 없다. 그냥 시원히 터치고싶고 여유도 없이 깡그리 털어놓고싶다. 그만큼 믿음이 굳다. 그리고 믿어서 어떤 손해나 낭패 같은것이 있을리 없다. 속이 깊고 마음 또한 너그럽기로 인간이 왜소하게 보이는 강이다. 오직 자신이 숙명 에 충직하고 오직 주어진 운명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기에 삶의 거울을 마주한것처럼 숙연해질뿐이다.   생활의 강자는 결국 생활을 사랑하는자 라는 말이 있다. 생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철학이 아닌가싶다. 그리고  생활에 대한 많은 명언 명구의 집합이라는 생각도 함께 한다. 뿌리를 떠나면 금방 말라버리는 나무처럼 땅속을 깊이 파고드는 뿌리가 있기에 땅우에는 푸름을 떠인 숲이 우거지는 것이다. 자신의 자아반경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이 바로 숲속의 한그루 나무에 해당한것이 아니겠는가? 바로 자신이 발붙힌 땅 그리고 자신이 하는 사업과 자신이 영위하는 생활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때만이 우리는 생활이란 무엇인가를 깨닫는것이며 그런 뜨거운 사랑이 은근히 앞설 때 만이 쪼박지만한 글이라도 얻게 되는것이 아닐가?   흘러도 흘러도 끝없이 흘러야만 하는 강, 그것이 강의 숙명이라면 사랑 하고 또 사랑해도 끝없이 사랑만을 기발처럼 추켜들어함은 할머니의 유언 에 답을 줄수 있는 나의 숙명이다.   생활이 글의 광산이라면 생활에 대한 사랑은 령감의 발원지다.  
12    담배변주곡 댓글:  조회:1035  추천:2  2015-03-06
담배변주곡       왜서 담배를 태울가? 어린애같이 천진한 이런 물음에 담배경력 30년을 넘어선 나지만 대답이 궁하다. 사랑하는데 리유가 없듯이 확실한 리유가 주어지지 않는다. 그저라는 말보다 더 뾰족한 답이 나에게는 없다. 하지만 담배와 엉킨 사연은 저그만치 마대다 넣어도 차고넘칠것이다.   코수염이 돋기 시작할 그무렵 담배는 이성처럼 물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였다. 사춘기 소년은 울대뼈가 튀여나오면서부터 바로 어른이나 된듯 성 대변화와 더불어 예전과는 좀 다른 양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많은 일에 서 옛스보다 노우가 등장하였다. 이따금 보리먹은 소처럼 씩씩 거리며 용 을 쓰기도 하여 집식구들을 놀래웠다. 그리고 밥술만 놓으면 누가 부르기 라도 하는듯 바람같이 사라졌다. 집은 그냥 밥먹고 잠자는 곳이였다. 도대체 무엇이 한 소년의 마음을 송두리채 앗아간것일가? 집에서는 단통 련애라고 짚었다. 좋아하는 새기가 있는가를 부지런히 물어왔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였다. 집식구들은 감감 몰라있었다. 내가 담배피운다는 사실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까지는 담배맛을 알아서부터 몇년이 썩 지난후였다. 지어는 아주 시름놓고 담배피우던 그때도 사람들은 내가 담배를 피운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않았다. “어, 너 담배 피우나?” 하며 놀라했다. 그러니 내가 담배를 붙이기 시작한 년대를 나와 나의 딱친구를 내놓고는 거의 아 는 사람이 없었다. 마치 내가 마음속으로 사모한 녀자가 누구인가를 모르 고있다가 결혼해서야 알았듯이. 은밀히 붙힌 담배지만 그 위력이 대단함을 승인하지 않을수 없다. 하긴 청춘남녀가 서로 죽자살자 좋아했던 련애시절도 그랬었지만 담배에 대한  애심은 오늘까지도 파랗게 변함없는데 우리 주변의 혼인을 살펴보면 너무 도 락차가 크다. 그 옛날 알콩달콩은 어디로 가고 어제까지도 히히호호 하 던 부부들이 하루새에 남남이 되는 경우가 비일비재다. 나의 담배사랑보 다 못한 부부사랑에 자못 감탄이 이어진다. 30여년 세월이 흐르도록 한일자로 이어가는 일은 내 인생 통털어 담배, 혼인, 그리고 습작이랄가? 친구들은 아직도 그녀자와 사는가 하며 롱을 걸어오기도 하지만 난 그런 말이 전혀 싫지가 않다. 그만큼 혼인에 대하여 딴 생각을 가져본적이 없으며 도적담배를 피우면서부터 여태까지 담배도 끊어본적이 없다. 습작도 그렇다. 이렇다할 “명작”은 없어도 습작에서 아예 손을 뗀적은 없다. 그만큼 우직하다할가 아니면 미련하다고 할가? 아무튼 한번 먹은 마음은 수월히 변하지 않는것이 나라는 인간이 아닌가 본다. 사실 도적담배는 그 풍파도 유유하지 않다. 지난 세기 70년대말 아직은 가난의 때를 벗지 못했던 그시절 찡지라는 담배 한갑에 10전이였 다. 하지만 그 10전을 장만하기는 만만치가 않았다. 고작 한책에 7 전 하는 필기장을 사는 돈에서 야벼내야 했으니 웬간히 머리를 굴려야 했고 담배 한갑을 다 태우는데도 숱한 눈을 피해야 했으니 말그대로 조련찮은 일이였다. 내가 금방 딴살림을 차렸을 때처럼.   친구가 뒤늦게야 결혼축하를 왔는데 손에 쥔것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 다. 소매점에 가서 외상으로 한상 푸짐히 차려먹이던 일이 새삼스럽다. 물 론 친구가 우리 집을 떠난 다음은 딩강댕강 싸움이 이어지던 그런 어려운 시기가 있었다. 집안살림이 구차하다는것을 뻔히 아는지라 돈 야비는 일에 속은 알찌함 이 없지 않았지만 그 알찌함보다 담배생각이 앞이였다. 담배를 웬간히 피 우기 시작해서부터는 그맘때가 되면 담배생각이 났으며 그것도 참기 어려 울 정도였다. 그냥 연기를 뿜어올리던 재미만이 아니였다. 그래서 잠간 후 회해본적도 있다. 배우지 말아야할것을 배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마치 이런 결혼을 왜서 해놓고 이 고생이야 하던 후회처럼. 그때 칼로 베듯 썪뚝 했더라면 이런 글은 탄생하지 않을수도 있었겠건만 혼자 힘으로 썩뚝 자르기에는 너무도 힘에 부쳤다. 아예 담배피우는 일이 들통나서 야단이라도 맞았으면 담배를 떼는데 보탬이 되였을수도 있었겠 는데 집에서는 시종 모르는 눈치여서 혼자 끙끙거리다 결국 그 “사랑”에 더 깊이 빠지고 말았다. 그런 와중에도 사람이 유혹을 물리치는데는 한계 가 있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도리는 알았지만 그것 을 실천으로 옮기는데는 또다른 강한 의지력이 수요된다는것을 터득하기 에는 아마 너무 어렸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기에 그런 유혹에서 시작된것이 아예 끈끈한 “사랑”으로 이어진것이 아닐가?! 혼인도 한시기의 어려움이 있었기에 오늘까지 끈끈한것처럼.  리혼을 운운하던 소홀했던 그때가 되려 유치해보인다. 글 좀 쓴다고 사람들은 내가 담배피우는건 의례로 여겨주기도 한다. 글 쓰는 사람이니깐 담배를 피우는거지 뭐 이런식으로 두둔해준다. 사실은 글쓰는것과 별 관계가 없다고 본다. 되려 사람들의 관념이 그렇게 돼있는 것뿐이라는 생각이다. 담배를 물면 뭐 깊은 명상에라도 잠긴듯 그런 형상 을 보여주는것은 드라마나 영화의 장면을 상기시킬뿐이다. 모든 사유가 담 배와 밀접한 관계를 발생하지 않듯 적어도 사색과 담배는 한선에 놓이는 것은 아니다. 뭐 얼마간 그런 입내라도 내는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내가 오늘까지 담배를 태우고있는것은 글쓰는 일과는 별로 상관이 안된다는 말 이다. 오히려 어떤 애착과 더불어 뜨거운 정이라함이 더 적절할것 같다. 글 한편 쓸줄 모르던 그 시기에 담배를 더 태웠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 유 혹도 지금보다 배로 컸었다.   혼인은 절대 형식적인것이 아니다.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만난것은 더더욱 아니며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무마하며 사는것도 아니다. 오직 끈 끈한 정으로 이어지는것이다. 화려한 겉보다는 진지한 내속을 다지는것 이여야 한다. 사회적 지위가 바뀌거나 돈이 좀 생겼다해서 잊어도 되는 그 런 헌신짝같은 존재가 아니여야 한다. 때론 의무와 리성이 필요한것이 혼인이 아니랴! 담배를 태우는 사람이 기하급수로 줄어드는 현실이다. 그만큼 담배가 대중들의 기시를 몰아오고 사람들이 기피하는 “괴물”로  탈바꿈하고있는 시점인 오늘날 담배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자체가 큰 뜻은 없다고 생각되지 만 그래도 담배와 얼킨 이야기는 그냥 버리기 심히 아깝다. 리혼을 밥먹듯 가볍게 보는 현상을 그냥 스쳐보고 지날수 없듯이.    아빠트를 금방 사고들었을 때였다. 친구들 앞에서까지 자기는 담배냄 새가 향기롭다고 두둔해주던 안해마저 집에서는 절대 담배를 못피운다고 금지령을 내렸다. 복도에 나가서 피우든지 아니면 아예 담배를 떼라는 암시가 아닌 명령이였다. 담배를 피웠던 사람들은 다 알다싶이 담배는 올방자를 틀고앉아 피워야 제맛이다. 그러니 아빠트를 사고든 이틀날부터 담배 맛은 절반 간것이다. 아옹다옹 하는것이 귀찮아 한동안 복도에다 재털이까지 내다놓고 거의 도적담배생활을 하였다. (복도에서 담배를 피 우다보면 때론 이웃들과 만나게 되였는데 열에 아홉은 눈을 흘겼으니 자연 눈치가 보여서 하는 말이다.) 자존심을 잃어도 너무 잃는것 같았다. 그렇게는 도저히 지탱할수가 없었다. 그래서 안해의 경각성이 좀씩 늦춰 지는 틈을 타서 집에서 붙이기 시작했는데 내가 하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서인지 아니면 안해의 도량이 바다같이 드넓어서인지 집들이해서 반년도 안되여 소위 말한 담배의 제맛을 살려냈다. 하긴 그것도 옛말이다. 안해가 한국으로 간지가 벌써 일년을 넘어서다보니 집에서 담배피우는건 아예 구 속없는 자유다. 그래서일가 때론 악마같이 달려들어 집에서 담배를 못피운 다고 바락바락 악을 쓰던 그때가 되려 그립기도 하다. 그래서 담배를 더 붙혀무는지도 모르겠다. 고독이 서리는 밤이면 담배도 동무가 된다. 담배 가 어느정도 서리는 나의 고독을 태워주는것이다. 자신의 몸을 태워 내 마음의 아픔을 어느정도 어루쓸어 무마해주는 느낌이다. 반갑지 않은 스트 레스도 뿜어내는 연기와 함께 해소하는듯 하다. 물론 어떤 과학적인 근거는 한쪼박도 들이댈수 없다. 그리고 그런 과학적인 근거가 없다는것도 잘 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정이 가고 더 떨어져 살수 없는 소중한 존재 인지도 모르겠다. 옆에 없어도 그리움이 남아있는 사랑처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나의 곁에서 한시도 떨어진적이 없는 담배, 즐거 울 때보다 오히려 슬플 때를 더 많이 같이해준 담배다. 어찌보면 백년 해로를 함께 하기로 한 부부와 무엇이 다를바이랴. 내가 원해서 함께 하는 한길에서 세상의 달고 쓰고 맵고 신맛을 다 본 그런 정을 나는 소중히 여 긴다. 그리고 그런 정은 얄팍한 인간들이 소화해내기는 어려운 깊은 정이 라고 말하고싶다. 그렇다. 사실 내가 담배를 떼지 못한다는것은 거짓말 이다. 떼려고 든다면 떼는것이다. 그냥 갈라지면 리혼이 되듯이. 지금은 리혼이 너무 수월한것 같다. 밥먹듯 간단하게 진행되고있으니 말이다. 어떤 실리가 아닌 정으로 따진다면 어찌 그렇게 간단한 일이랴! 난 도무지 리해가 안간다. 물론 나에게는 그런 선언이 있을수 없다. 그리 고 실천은 더구나 있을수 없다. 내가 사랑할수 있는날까지 쭉 이어 사랑할 것이다. 오늘날 사랑은 눅거리로 비난받기도 한다. 그만큼 사랑의 진가가 정으로 이어지는것이 아니라 도깨비들의 장난에 가깝다고나 할가?! 정에 약한자의 변호일지는 몰라도 30여년을 함께 한 정분을 단칼에 벤다는건 너무 무정한것이다. 어떤 리유도 당치않다. 난 그렇게 할수 없다. 내몸이 상하는한이 있더라도 난 그렇게 할수 없다. 내가 좀 손해나는 일이 있더라 도 난 그냥 사랑을 고수할것이다. 그래서 담배 한대에 생명이 몇분씩 감소 된다는 과학적인 결론도 그냥 가볍게 웃어넘긴다. 그 몇분을 떼운다 해 도 나는 정을 배반하는 삶은 살고싶지 않다.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그 이 상의 삶이 어디 있으랴! 어찌보면 담배에 대한 미련보다 더 가벼운 사랑은 썩 물러가는것도 괜찮을것 같다. 인간의 순진하던 감정과 우직한 감성은 어디로 가고 허영과 리기의 숨 결이 되려 사랑을 지배하기에 이르렀을가? 반짝반짝 타들어가는 담배의 의문은 결코 뿜어내는 가벼운 연기같은 우연만은 아닐것이다.
11    전화 댓글:  조회:768  추천:6  2014-11-21
전화        한때는 그렇게 흥행하던 bb가 가뭇없이 사라지듯 전화의 전성기도 막을 내리고있다. 핵가정이 주축을 이루는 오늘날 식구생긴대로 다 휴대폰을 소 유하고있다보니 자연 전화는 장식품에나 해당된다고 할가? 우리 집도 전화 를 놓고 옥신각신한적이 있다. 무용지물이나 다름이 없다고 안해는 전화를 없애자는걸 내가 한사코 반대하여 오늘까지 구석쪽에 댕그랗게 놓여있는 실정이다. 딱히 왜서 전화를 없애지 않았을가? 이렇게 자문해 보면 사실 나자신도 대답이 궁금하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이지만 전화번호가 아까와 서 버리지 못하겠다는건 그냥 그때 주어댄 리유아닌 억지였다. 내 마음을 보여주었을뿐 적어도 그것이 전화를 없애지 않는 리유가 되기에는 택부 족이라는 생각이다. 그냥 어떤 집요함이라는 내 성격적인 나름이라는것이 오히려 더 사실에 가깝다고나 할가? 그만큼 나는 정에 약한 사람이기도 하다. 고작 전화번호에도 이렇게 연연한 자신이 때론 자신도 리해가 가지 않을만큼 우직하다.    그렇게 아등바등 전화를 없애지 못해 안달하던 전화가 안해의 전용으로 되였다. 한국에 간 안해는 오직 집전화로 통화를 시도하고있다. 내가 집에 있는가를 확인하는 전용품노릇을 택택히 하고있다. 집전화를 쳐서 받는 이가 없어야 휴대폰이 울린다. 방정맞게도 휴대폰으로 통화가 이루어질 때는 거의 술상인 경우가 태반이 넘어서다보니 맨날 술마이는격이 되여 주정뱅이가 아닌 주정뱅이라는 애매한 루명을 쓰게 되였다. 실은 그렇지가 않은데 그렇게밖에 생각할수 없게 만든것이 집전화의 죄책이 아닐가? 그래 서 내가 되려 전화를 없애야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적시 기가 아니였다. 전화를 없애려는것을 극구 반대하던 내가 나절로 고집을 꺾고 전화를 없애버렸다고 하면 오히려 어떤 의심이 따를것이 뻔하지 않을 가? 이런 돌변은 적어도 어떤 쓸데없는 오해를 자초하는 일이라고 생각되 였다. 그래서 오늘까지 아주 평온하게 우리집을 지키고있는 전화이기도 하다.    전화에는 얼키고 설킨 이야기도 많다. 어느날인가 동생부부가 우리집에 오게 되였는데 내가 잠간 자리를 비운 사이여서 제수가 전화를 받게 되였 다. 근데 누가 걸어온 전화인지는 모르나 정상통화가 이어지지 않은채 두 마디 안짝에 전화를 놓더라는것이였다. 아무런 연고없이 대방에서 전화를 놓으니 제수는 많이 의아했다는것이였다. 물론 거기서 그치면 그런대로 일 이 아니였겠는데 그 상대방의 목소리가 녀자라고 꼬집어 말해 공연히 할 말을 잃게 되였다. 후에 안 일이지만 그날 전화는 장모가 건것이였다. 그래 서 내가 왜 전화를 놓아버렸는가 물었더니 어떤 여자가 받기에 순간 적으 로 할말이 궁해서 놓아버렸다는것이 전부였다. 그러면서 되려 나보고 어제 전화받은 녀자가 누구인가 캐물었다. 실은 전화 당시 당사자를 확인하는 것이 상리임에도 그걸 마구 무시하고 되려 나를 문초하는 리속은 도대체 무엇인지? 참 울다가도 웃을 일이다. 그렇다고 내쪽에서 무엇이라 나무 람할수도 없는 처지가 아닌가?! 꼬치꼬치 따지고들면 되려 공연한 의혹만 늘어갈터이니 말이다. 어떤 이의나 타이름이 모두 변명이 되는 같아서 그 냥 꿀먹은 벙어리가 되였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는 하지만 이상한것은 이런 애매한 전화라도 없는 날이 더 궁금한것이다. 사람의 요사함이랄가? 전화로 하여 쓸데없는 신경 이 쓰일 때는 그냥 전화선을 뽑아버리고싶다도 전화 한통 없는 날은 되려 서글픔이 서리니 말이다. 그리고 과장된 표현 같지만 인생 헛산것이 아닌 가 하는 불쌍한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자격지심이라고 볼수도 있겠지만 온하루 전화 한통 없는 날은 말 그대로 처량하다. 어떻게 살았기에 이렇 게도 야박하냐 싶을 정도로 전화가 놓여있는것이 미워난다. 아예 전화가 없었으면 그런줄 모르고 제멋에 친구자랑이라도 하겠건만 이건 엄연히 너에게는 그렇게 살가운 친구가 있다고 소리칠 기본이 서지 않는다는 확실 한 증거가 되는것이 아닌가? 물론 몸에 지닌 휴대폰련락이 있으니깐 전화 자신이 고독한거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날은 휴대폰을 꺼놓은 상태 를 잊고있었으니 휴대폰련락도 없은것이 사실이였다.    나는 왜 이렇게 비참한가? 이런 생각을 굴리다가 돌아서니 그것이 아님 을 놀랍게 발견하였다. 애매한 전화타령하는 자체가 호박쓰고 돼지굴로 들어가는 소행이라는것을 놀랍게 발견하였다. 모두 제 살기에도 바쁜 이 세월에 하필이면 나의 일상에서 없어도 별로 문제시되지 않을 전화에다 신경을 쏟는 내가 우스워서이다. 그런 안락함을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에다 쏟아붇는다면 적어도 그런 고독은 자초하지 않을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때론 이렇게 자기절로 자기의 고뇌를 사서 누리고있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슬그머니 마음이 편하였다.    전화를 아예 없애버려야 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그것도 현대 를 사는 지혜는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문제해결의 기본이 아닌듯 싶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나 혼자 옥신각신하는 꼴이 되였다. 문득 뇌리를 치는 생 각이 번쩍였다. 그찰나의 생각을 고스란히 내놓는다. 원래 사람들은 남과 옥신각신하는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신과  옥신각신하는것이 아닌가? 뒤이 어 이런 엉뚱한 론리가 꼬리를 이었다. 어떤 일에서든지 상대나 객관에다 밀어부치지 말고 자신의 마음을 먼저 굳혀보라 그럼 어떤 결론이던지 마음에 내키는것이 아닐가? 항상 자신의 가슴에다 조용히 손을 얹어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을 하면서 얼굴에 미소를 띄워본다.    내가 바르게 섰다면 그림자가 비뚠것이 문제 아니라고 가볍게 밀쳐보는 지혜를 얻어본다. 전화가 없던 날 공연히 궁싯거린건 아닌듯싶다. 안개처럼 가리운 대인관계철학을 한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을뿐만아니라 뜻밖으로 인 생충고가 되는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10    가난한 마음의 행복 댓글:  조회:1214  추천:0  2014-01-15
수필    가난한 마음의 행복    어떤 이가 석가모니를 찾아가 호소를 하였답니다. "저는 하는 일마다 제대로 되는 일이 없으니 이 무슨 리유입니까?" "그것은 네가 남에게 베풀 지 않았기 때문이니라" "저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빈 털털이입니다. 남 에게 줄것이 있어야 주지 뭘 준단 말입니까?" "그렇지 않느니라, 아무리 재산이 없더라도 줄수 있는 일곱가지는 누구나 다 있는것이다." 첫째는 화 안시(和顔施) 얼굴에 화색을 띠고 부드럽고 정다운 얼굴로 남을 대하는 것이요 둘째는 언시(言施) 말로써 얼마든지 베풀수 있으니 사랑의 말, 칭찬의 말, 위로의 말, 격려의 말, 양보의 말, 부드러운 말 등이다. 셋째는 심시(心施) 마음의 문을 열고 따뜻한 마음을 주는것이다. 넷째는 안시(眼施) 호의를 담은 눈으로 사람을 보는것처럼 눈으로 베푸는것이요. 다섯째는 신시(身施) 몸으로 때우는것으로 남의 짐을 들어준다거나 일을 돕는것이요. 여섯째는 좌시(座施) 때와 장소에 맞게 자리를 내주어 양보하는것이고, 일곱째는 찰시(察施) 굳이 묻지 않고 상대의 마음을 헤아려 알아서 도와주는것이다. 네가 이 일곱 가지를 행하여 "습관이 붙으면 너에게 행운이 따르리라." 라고 하셨답니다. 석가모니가 한 말에 내가 한마디라도 보태거나 떼여낼 말이 없음을 나는 안다. 그만큼 너무도 명백한 말이기도 하다. 오직 수긍이 가는 말이고 오직 그렇게 하면 될듯한 생활의 속성과 묻는자의 속셈을 환히 꿰뚫어본 말이다.  우리가 사는 일이 얼핏 보기에는 모두가 자신을 위하여 사는 같은데 따져보면 문뜩 문뜩 그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반대로 자신을 잊고 어떤 일에 집착하거나 남의 일에 발벗고 나섰을 때 오 히려 사는 의미가 더 밝음을 느끼게 된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 자신의 울음으로 이 세상에 태여나서 남의 울음속에 하직한다는 한세상. 우리의 집착을 다시 반추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가? 한사람이 일생동안 꼭 필요한 물건을 손꼽으라면 결국 많지가 않음을 우리 모두 알고도 나머지가 있다. 그리고 따져보면 불 필요한 허욕으로 가져온 물건이나 넘치게 가진것은 되려 부담스럽고 확실 히 부담이 되는 경우도 가져본 사람 혹은 무엇인가 불필요한것이 많은 사 람들은 체감하고있거나 또는 그렇게 진실하게 느꼈을것이다. 물론 그럼 에도 더 가지려 하는것도 우리는 너무도 많이 봐오고 있으며 너무도 많이 눈에 띄이기도 한다. 난 이런 경우를 애매한 갈등이라고 본다. 갈등이 아 니여야 하는 갈등, 사실은 자기절로 사서하는 고생이고 긁어서 부스럼을 만든다 해도 과언이 아닌 쓸데없는 욕심이기도 하다.  마음이든, 물건이든 남에게 주어 나를 비우면 그 비운만큼 반드시 채 워진다고 한다. 남에게 좋은것을 주면 준만큼 더 좋은것이 나에게 채워진 다. 좋은 말을 하면 할수록 더 좋은 말이 떠오르고 좋은 글을 쓰면 쓸수록 그만큼 더 좋은 글이 나오고 그러나 눈앞의 아쉬움 때문에 그냥 쌓아두었 다가는 상하거나 쓸 시기를 놓쳐 무용지물이 되고 만단다. 좋은 말이 있 어도 쓰지 않으면 그 말은 망각 속으로 사라지고 더 이상 좋은 말은 떠오 르지 않는다. 나중에 할 말이 없어질까 두려워 말을 아끼고 참으면 점점 벙어리가 된다. 우리의 마음은 샘물과 같아서 퍼내면 퍼낸만큼 고이기 마 련이다. 나쁜것을 퍼서 남에게 주면 더 나쁜것이 쌓이고 좋은것을 퍼서 남에게 주면 더 좋은것이 쌓인다. 참 신기하다. 그냥 쌓이는게 아니라 샘 솟듯 솟아나서 우리 마음을 가득 채우는것이다. 가난이 두렵다고 과도한 재물을 탐하지 말것이며 부자의 있음을 비방하여 자신의 무능을 비호하지 말아야 한다. 차고 넘치면 비우면 가득하다는 진실을 생각하며 사는것이 진정한 인생이란다.  남의 글로 자신을 무장하자는 의도는 아닌데 너무도 지당한 말을 보고 그냥 나만의 소유로 하는것이 너무 벅차다는 생각에 이렇게 나의 글에다 렴치불구 올림은 딴 뜻 하나 없고 그냥 공유하자는 소원임을 부언하면서 내 자신의 몸에 웅크리고 앉은 과욕을 빨래하듯 씻어본다. 그리고 우리의 과욕이 결국 우리 자신을 괴롭힌다는 선인들의 말에 깊은 숙응이 간다. 그러면서 천고의 주제인 행복이란 오직 부의 소유가 아니라는 어려운 수수 께기가 풀리는듯 하다. 어찌보면 억지 맞춤인것 같지만 또한 억지 맞춤만 아니라는 생각이 어렴풋이로부터 확실하게 륜곽을 드러내고있다. 가난이 결국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가난 자신은 가난뿐인것도 아니다. 가난속에 살아온 어제가 웅변하고 가난했던 우리 조상들의 어려운 생활이 말해주듯 가난은 가난보다 더 큰 무형의 재부였다는것도 시사한다. 오직 우리가 생활을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그 함의가 나름으로 풀이될 소지 가 있을뿐이다. 가난속의 행복에 깊이 동감하고싶다.
9    【 수필 】 생활의 메아리 댓글:  조회:939  추천:3  2014-01-02
  답답해나는 가슴을 달래고저 산에 오른적이 있다. 그리고 산의 정상에 올라서 목청껏 웨쳐본적이 있다. 그때 그 돌아온 메아리는 지금도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여있다. 뿐만아니라 때때로 내 마음의 거울이 되여 나의 생활을 동반하고있다. 아주 벌거벗은 내 석쉼한 목소리가 멀리 저쪽의 어딘가에 부딪쳐서 다시 돌아왔다. 그 소리는 내가 들어도 섬뜩하리만치 격에 맞지 않았고 내 소리가 옳은가 의심이 갈 정도로 수긍이 안 갔다. 하지만 그것이 분명 내소리임은 속일수도 없는 일이였다. 온 산에 나 혼자뿐이고 금방 웨쳐댄 소리가 되돌아왔음에야 승인하지 않을래야 승인하지 않을수 없는 엄연한 내 웨침의 메아리였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가공되지 않은 순 메아리가 그렇게도 귀에 설었다. 산울림이 되여 되돌아온 메아리로부터 나는 내 생활을 반추하게 되였다. 우리의 일상에서 되돌아오는 소리가 아닌 자신의 모습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생활의 메아리는 곧 자신의 생활지향이고 생활태도이며 자신의 어제와 오늘의 축영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함께 하게 되였다. 산다는 의미가 확실치 않은 20대의 애숭이로부터 “지천명”으로 불리우는 50대를 조약하면 그 생활의 심처에 느긋이 깔려있는 보기 흉한 허물들이 약속없이 뛰쳐나온다. 물덤벙술덤벙하던 그 세월에 찍힌 나의 발자욱은 너무 조잡하고 헝클어져서 내 인생의 뒤안길에 사라졌다면 다행이라고 간주하겠는데 그렇지가 않은것이 생활의 진실이고 생활의 본색이 아닌가싶다. 까맣게 잊혀져서 없나 했는데 어느날, 어느곳에서 어떤 계기를 만나면 새파랗게 되살아나 나를 괴롭힌다. 나절로도 인정하는 나의 둔한 기억력임에도. 가지고싶은 물건이 많았다. 당시 류행하던 모든것에 호기심을 보였고 흠모하였으며 모든 류행을 따르려 했다. 자신의 처지는 뒤전이고 오직 발빠른 그 시대에 뒤지지 않으려는것이 그때 생활의 거의 전부였다. 그래서 짧은 다리임에도 입었던 꼴불견의 나팔바지, 련 몇달동안 가위를 대지 않아 녀자가 아닌 녀자로 탈변했던 폭포머리, 오직 류행에 걸맞아야 현대를 사는것이고 현대생활이라고 착각 아닌 착각에 코노래가 성했던 그 시절, 지금은 별로 기념할만한 기억으로 남은것이 아니라 다시 생각하면 너무 유치했다는 아름다운 반성으로 내 마음에 자리하고있다. 하지만 긍정하고 넘어야 할것은 이것이 바로 그때 당시의 생활임은 묵과할수 없는것이다. 그때 우리의 생활은 단조롭고 단일한 일색에서 다색으로 과도하는 시기였다. 자신의 남다른 개성 과시에 금방 눈을 뜨면서 괴상하면 괴상할수록 아름답게 보이고 엉뚱하면 엉뚱할수록 기발하다는 인정을 받던 극단으로 몰려가던 시기였다. 물론 한두가지 사실을 가지고 생활을 론하기에는 론거가 역부족임을 알고있다. 그리고 닭알로 바위를 치는 격이라는것도 아주 자명하다. 하지만 그런 사실들이 다시 되살아나 나의 기억의 창고에서 일어나 밖으로 성큼 걸음을 뗄 때면 나는 당황하다. 그런 유치한 과거가 사람들의 입에 다시 오르는것이 싫다. 오늘의 나와 대조되는 어제의 나를 너무 싫어했던 나날들의 아픈 기억에 부채질하는것이 괴롭기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내 인생에 있은 생활의 한토막임은 누구도 부정할수 없는것이다. 바로 내 생활의 메아리가 아니겠는가?! 생활의 메아리, 말 그대로 내 생활 이상으로 돌아오는 법은 없다. 내가 어떻게 살았으면 어떻게 살았다고 그대로 고백하고 그대로 돌려주는것이 바로 생활임을 절실하게 느껴보았다. 헝겊막대처럼 그렇게 갈팡질팡 자신이 도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야 할지를 몰랐던 그 년대의 생활 한토막은 그대로 후날 내 생활에서 교훈의 거울이 되였다. 원래 생활이란 나의 그림자이고 나의 쌍둥이자매였구나. 나를 분식할줄도 모르고 그렇다고 나를 내리까거나 나를 형편없이 짓뭉개는것도 아니였다. 오직 내가 어떻게 살았다는 고백을 그때가 아니라 썩 후날에야 되돌려주는것이다. 물론 그런 되돌림도 내가 찾아야 가지는것임은 틀림없다. 그냥 묵과해버리면 그런 되돌림은 자신도 의식하기전에 스쳐지나 영원히 세월속에 묻혀버린다. 생활에 대한 투철한 리해가 맑은 물속의 고기마냥 꼬리치며 여유작작 노니는 모습을 보는듯하다. 메아리를 탓하나 나무리고싶지 않다. 탓해봤자이다. 아무런 의미를 부여할수 없는 어제의 불찰이나 불행이 그리움만 되여지고 더는 새로운 부활이 없다면 생활은 만세라는 메아리를 돌릴것이다 한수의 시를 선택하는것으로 이 글을 마무리고싶다. 사람은 사랑한만큼 산다/ 저 향기로운 꽃들을 사랑한만큼 산다/ 저 아름다운 목소리의 새들을 사랑한만큼 산다/ 숲을 온통 싱그러움으로/ 만드는 나무들은 사랑한만큼 산다/ 사람은 사랑한만큼 산다/ 사람은 그 무언가를 사랑한/ 부피와 넓이와 깊이만큼 산다/ 그만큼이 인생이다.
8    강물과의 대화 댓글:  조회:1169  추천:0  2013-08-25
수필  강물과의 대화      하루라도 강변으로 나가지 않으면 무엇을 잃은듯 허전하다. 그만큼 강변을 산책하는 일이 나의 생활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날씨에는 상관없이 매일이고 나가봐야 직성이 풀리고 기분 또한 상쾌하다. 금방 녀자친구를 사귀여 하루라도 못보면 속이 부글거리는 그런 련애시절의 느낌이다. 강변은 변함없이 나를 지켜주는 지기같고 강물은 사랑하는 나의 련인같다.    간밤에 있은 오만가지 오색령롱한 꿈을 접어주는 아침이면 누가 부르기라도 하는듯 강변으로 나간다. 불타는 아침노을과 함께 서서히 떠오는 태양을 맞이하는 일이 거의 일과처럼 반복이 되여도 매일 다른 감수를 떠올린다. 빨갛게 불타는 노을은 그대로 강물에 실려 나의 눈앞을 현혹한다. 어쩜 매일 봐도 싫지 않고 매일 봐도 새로운 감수를 주는지? 아침은 이렇게 우리의 신변으로 다가선다. 강물은 언제나 아무 일이 없었던듯 그렇게 평온하게 소곤거린다. 도대체 무엇이 강물을 그렇듯 안온하고 그렇듯 일매지게 가꾸고있을가? 동에도 닿지 않는 물음이지만 나는 강을 마주하면 이렇게 물으며 강물에서 답을 찾으려고 한다. 강물은 그대로 답이 없다는듯 말없이 자신을 갈길을 재촉하지만 난 나대로 강물에서 답을 찾고있다.    강물은 아픔이 없을가? 이렇게 물으면 아픔이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듯 강물은 자신의 흐름에 충성할뿐이다. 하긴 내가 보건대는 강물에도 아픔은 있을것이다. 가슴 한복판에서 뛰놀던 애들이 많이 없어진 오늘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강물은 알수 없어도 그렇게 가슴에서 흥겹게 뛰놀던 애들이 거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데 어찌 가슴이 쓰리지 않으랴. 그리고 찰방찰방 빨래방치소리마저 뜸해진 오늘 강물은 필경 말못할 고독이 있을 것이 다. 빨래방치소리와 함게 웃음소리 와그르르 쏟아지던 강변이 아니였던가? 그런 환락이 그칠줄 모르던 오뉴월 삼복이건만 강변은 싸늘하기만 한데 어찌 그 들끓던 생활의 진풍경을 칠판글 지우듯 말끔히 지울수 있으랴! 하긴 강물의 하소연을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것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래서 더 알고싶은 강물의 마음이다.     천년을 그렇게 살고 만년을 그렇게 살아온 강물을 마주하면 내가 왜소해 진다. 그런 가벼운 아픔을 강물은 아픔으로 간주하지 않는것은 아닐가? 이렇게 의문을 달기도 하지만 그런것도 아니다. 강물도 유유한 흐름만은 아니다. 때론 락차가 커서 꺼꾸로 마구 떨어지는 흐름도 있는데 그런 구간 에선 아픔을 호소하는듯 그렇게 큰소리를 지르기도 한다. 누가 듣건 말건 그건 필경 강물의 어떤 아픔이 아닐가? 하지만 강물은 리성적이다. 잠간 그렇게 하소연하듯 소리를 지르지만 인차 평온을 찾으며 오직 앞으로 달려 가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어떤 역경이 가로놓여 앞을 막아도 오직 갈길에 충성하는 강물은 한치의 드팀도 없이 모든 아픔을 뒤로 젖히고  꾹 묻을줄 안다.    그래서일가? 강을 마주하면 나는 애가 된다. 다사스런 애가 된다. 숨김 없이 말할수 있는 애가 된다. 모든 비밀이 비밀이 아닌 그런 큰애가 된다. 강물에다는 모든것을 부리우고싶다. 강물에다는 모든 아픔을 쏟고싶다. 강물에다는 모든 자신의 고민을 다 보여주고싶다. 그리고 강물에서 답안을 찾고싶다.    오늘도 쫓기듯 그렇게 다급한 걸음으로 달려가는 강물을 마주하고 나는 사색에 잠긴다. 인생의 절반길은 착실히 걸어왔다고 인정되는 오늘 나는  자신을 돌이키며 사색에 잠긴다. 나는 자신이 걸어온 길과 가는 길, 그리고 갈 길에 대하여 얼마만큼 충성했던가? 그리고 없지 못해 맞띠운 좌절이나 곤혹에 대하여 어떤 자세를 보여줬던가 강물처럼 그렇게 꾹꾹 짓밟는 그런 아량을 보여줬던가? 이런 자문앞에서 나라는 인간은 깊은 자성에 앞서 변명이나 궤변을 꿈꿨다는것을 강물은 본대로 들은대로 나에게 고백한다.  나의 기억에서는 아물아물한 허점까지 강물은 숨김없이 드러낸다.  강물을 마주하면 가슴이 뻥 뚫린다. 강물을 마주하면 풀수없는 인생 수수께기가 없는듯 하다. 인생은 천차만별 오묘해도 강물은 아주 간단하다. 강물은 그런 간단함으로 오묘함을 쉽게 풀이하고있다. 강물에 대한 나의 사랑에 강물도 어느 정도 감복했는지? 어느 날 나는 문득 강물이 나의 물음에 정면 대답을 하는 소리를 이끌어냈다.    “나 갈 길이 멀어요. 그래서 사소한 일에는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그리고 남들의 말에는 신경 쓸 마음 전혀 없어요. 난 오직 내 갈 길을 달리기에도 힘드니깐요!”    “어디로 가는데 그렇게 바쁘시죠?”    “어디긴 어디겠어요. 자기도 알면서… 태양이 솟아오르는 멀고도 가까운 지평선이 있는 곳,  바다지요.”  감각이 둔한 나의 머리지만 강물이 들려주는 이런 대답에서 나는 무엇 인가 머리를 크게 때리는 깨달음을 얻었다. 오십성상 살아오면서 매달려 있은 나의 인생 수수께기가 강물의 한마디 말에서 결국 대낮처럼 환히  깨여지는것을 나는 똑바로 보았다.    “… 태양이 솟아오르는 멀고도 가까운 지평선이 있는 곳- 바다지요.”    그렇지 않을가? 결국 우리는 모두 바다로 줄달음치는것이 아닐가? 그래서 모든것을 감내하는 보람을 느끼는것이 아닐가?  나는 강물을 사랑한다. 앞으로도 쭉 한일자로 사랑할것이다. 그리고 강물 과 한몸은 아니더라도 한마음이 되고싶다. 
7    나무의 언어를 정리한다 댓글:  조회:1220  추천:2  2013-07-08
나무의 언어를 정리한다 최화길 대화는 소리로만 이루어지는것은 아니다. 일상에서도 그 사례를 찾을수 있지만 손시늉이나 눈길 하나에도 소담한 언어가 담기는 경우가 있다. 나무의 언어는 바로 나무와 접근하면서 나무의 속성을 읽게 되는 과정에서 얻은것이다. 나무는 의젓한 존재이다. 나무는 그냥 나무로 자라는 자신에 대하여 자신감이 넘친다. 한겨울을 소리없는 침묵으로 살아오지만 봄이 되면 언제 그런 침체가 있었던듯 그렇게 생기로 차넘친다. 제일 먼서 땅의 정기를 감지하고 제일 먼저 잎을 피우는 아름다운 소행에 우리는 머리를 숙이게 된다. 봄이라는 이름을 가슴으로 받아안고 봄이라는 의미를 몸으로 실천한다. 우리의 일상들을 깨우치는 나무의 행위에서 우리는 알게 모르게 나무의 불굴을 우러르게 된다. 주어진 자신의 환경이나 처지에 대하여 탓할줄 모르는 나무의 돈후한 성격에 나무는 항상 푸름을 보유하는것이 아닐가? 나무에 기대면 마음이 세워진다. 나무를 마주하면 마음이 시원함을 느껴본다. 언제 어디서나 소박한 차림의 가식없는 나무앞에서 자신의 모습을 반추해본다. 벗어버린 적라라한 모습이 가득 껴입은 사상보다 곱절 돋보이는 모습을 나무에서 찾아보았다. 보란듯이 우로 치솟는 나무의 향상을 적어본다. 발붙힌 땅을 꽉 그러안은 나무의 속은 깊다. 겉에 드러나지 않는다. 사람들은 흔히 스치지만 그런 스치는 눈길에는 보이지 않는 깊은 사랑이다. 사랑한다고 입에다 바르는 그런 팔랑개비사랑과는 인연이 없는 순후한 사랑앞에서 나무는 항상 겸양을 보이고있다. 나무는 도고한것 같지만 나무는 안하무인이 아니다. 나무는 한결같이 우로 향하지만 땅밑의 뿌리를 잊지 않는다. 그 뿌리의 근면으로 자라는 자신의 신분에 대하여 누구보다 잘 알기때문이다. 하기에 나무는 크면서 마음에 년륜을 새긴다. 나무는 크면서 속에다 자신의 일기를 적고있다. 항상 잊음이 헤픈 우리의 일상과는 달리 나무는 잊지 말아야 할것들은 심장으로 새기고있다. 한여름 폭양을 가리워주는 나무는 자신만을 그러안은 옹졸한 존재가 아니다. 잎을 피우고 생기에 넘치는 자신의 몸과 마음 모두를 바치는 아량으로 나무는 하느적인다. 바람결에 가지와 잎으로 손짓하며 오가는 길손들을 반갑게 맞이하는 나무는 사실 고독을 모른다. 외따로 서면 홀로서기이고 함께 서면 숲을 이루는 나무의 사랑은 오직 자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는 웅변이 될것이다. 필요하면 모두를 그대로 바치는 아름다운 죽음까지 각오한 나무이기에 나무앞에서는 큰소리가 나가주질 않는다. 말없는 위엄이 서리는 나무다. 소리없는 이끔에 끌리기도 하는 나무다. 어찌하라는 지시는 없어도 되려 순순히 따라가는 마음을 걷잡을수 없다. 항상 말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행위철학으로 감명하는 나무의 속에는 과연 우리가 보지 못하는 무엇이 숨쉬고있는것이다. 곱게 장식하던 푸른 잎을 다 버리면서도 나무는 한마디 원망을 모른다. 그냥 순리에 따르는 나무는 중후하다. 어떤 무모한 발악도 없이 운명을 순순히 받아들이는 나무의 관용에서 우리는 우리와는 다른 한 세상을 마주하게 된다. 가진것을 버릴줄 아는 나무는 버릴 때는 한점의 미련도 없다. 아니 미련이 없다기보다는 미련에 연연하지 않는다. 욕심을 버릴줄 알기에 그는 언제 어디서나 떳떳한 모습이고 욕심에 미련이 없기에 그의 행적은 티없이 맑고 깨끗하다. 가진것이 없지만 누구보다 가진것이 많은 락엽진 나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나무의 삶을 배우게 된다. 나무와 함께 하는 인생이란 어떤것인가를 재삼 숙고하게 한다. 나무는 그렇게 말이 없지만 말이 많은 우리보다 더 귀중한 말을 하고있다. 나무는 그렇게 침묵으로 일관하지만 나무의 몸에는 서리발같은 빛이 번쩍인다. 나무에게는 아프다는 소리가 없다. 오직 살아가는 이야기를 함축하여줄뿐이다. 오직 사는 길에서 감수한 천고의 진리를 행위철학으로 대신할뿐이다. 만약 나무에게도 말이 있다면 그 나무는 내가 정리하려는 나무는 아닐것이다. 말이 없기에 말이 궁금하고 말이 없기에 말을 듣고싶은것은 그의 행위에서 기립하기때문이 아닐가?! 자신이 다 불어먹으면 속은 텅 비기때문이다. 말이란 자신밖에서 울려나올 때 비로소 값진것이다. 나무의 언어는 그래서 나무만이 가지는것이고 오직 나무의 말을 정리할 때만이 말이 되는것이다. 나무는 말이 없어도 나무의 한생을 베여보면 숱한 말을 속에다 두고있다. 오직 그 말을 함부로 내뱉지 않았을뿐이다. 하기에 우리는 나무의 말을 들을수 없었고 나무의 아픔을 알아주거나 감내할수는 없었어도 나무에게도 필경 말 못할 깊은 속은 있었다는것을 나는 나무를 대신하여 말하고싶다. 나무가 들려준 나무의 언어를 정리한다는것은 거의 망발에 가까운 나의 소망이지만 나는 나무를 마주하면서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려는 욕심이 생긴것만은 사실이다.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면서 나의 말을 정화할수 있기때문이다. 나무의 언어를 정리하려는 욕심으로부터 나는 나무의 삶을 배울수 있었기때문이다. 하지만 필경 나무가 나에게 준것은 언어가 아님을 성명하지 않을수 없다. 그리고 나무의 언어는 나의 정리로 끝나는것이 아님도 부언하고싶다.
6    아우, 정문이를 떠나보내며 댓글:  조회:1713  추천:2  2013-06-23
아우 정문이를 떠나보내며 ----녕안문협의 중견작가 정문이를 추모하여      뜻밖에 뇌출혈로 사망했다는 부고를 받고 한밤중에 택시를 잡아타고 화장터로 향발하는 나의 마음은 무겁기만 하였다. 하늘도 무심하지 어쩌면 한창 문학의 성당에서 자신의 재질을 꽃피우고있는 새파란 나이의 사나이 를 묶어간단 말인가?     일찍 학교시절부터 문학을 지향하고 문학에 남다른 애착을 보여준 정문 작가는 9십년대초 그러니 스므살을 갓 넘긴 애숭이 청년시절에 벌써 수필 “눈내리는 날이면 네가 보고싶다”를 흑룡강신문 진달래문예부간에 발표 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다. 그후 륙속 신문과 간행물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정문이라는 이름이 서서히 문단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사람의 뜻대로 안되는 생활의 곡절은 그런 활발한 작품활동이 불과 몇년이 못되여 거의 자취를 감출만큼 잠잠한 양상을 보이기도 하였다.      내가 녕안문협을 책임지면서 안 사연들이지만 그사이 그는 민영교원사 업에서 부득히 떠나야 하는 고충과 사랑에서 겪에된 불행으로 하여 목숨처 럼 소중히 여겨오던 문학창작에 심혈을 기울릴수 없었다.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하해하면서 더는 창작에 정진하던 그가 아니였으며 오직 새로운 직장 생활에 적응해야 하는 고배를 마시기도 하였다. 하지만 생활이 궤도에 잡 히자 이미 마음속에 깊이 락인된 문학창작이란 불씨는 다시 타오르기 시작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곡절적인 생활에 의해 침체했던 의욕은 더 세찬 불길 로 타번졌다.      2008년 이후로 그의 창작은 왕성기를 맞이하면서 무게있는 작품들을 선보이기 시작하였다. 부활된 그의 창작은 전성기를 맞았을뿐만 아니라  문학활동에도 남다들 열정을 보여주었다. 우리 문협에서 활동경비난으로 의례 가져야 할 활동마저 못하는 정황를 안 그는 서슴없이 자신의 호주머 니를 털어 우리 문협활동을 자기집 온돌방에서 할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 하여 녕안문인들의 응집력을 키우는데 물심량면으로 서슴치 않은 의협심이 강한 정의의 사나이기도 하였다.      우리 녕안문협에서 말하면 그는 이미 중견이였지만 언제나 허심한 자세로 문협동료과 글을 두고 진지하게 의견을 나누었으며 자기 나름대로의 견해와 단평을 내놓으며 문학에서 자신의 기량을 다같이 공유하는 문학량심도 보여주어 문협동료들의 마음의 지기기도 하였다.      다시 문학창작의 끈을 잡고 그렇게 행복해하던 모습을 떠올리며 눈앞이 흐려진다. 하늘에 삿대질하고싶다. 어쩜 소망으로 들끓는 무고한 생명을 그렇게 수월히 앗아가는지?     무정한 현실을 마주하고 그저 탄식할뿐이다. 만약 하늘에 천당이 있다 면 나의 아우 정문이 너는 천당에 고이 모셔질것이다. 그만큼 너는 지상에서 높은 덕을 쌓았기 때문이다. 고인이 된 아우 정문아, 선배라고 나를 언제나 존경의 대상으로 높이 모시던 어제가 나에게 눈물만 심어 주었구나. 이시각 네가 눈앞에 얼른거려 나는 눈물 하염없이 흘리고있다. 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내가 되려 죄스럽구나!
5    강변에서 주은 수감 댓글:  조회:1125  추천:0  2013-06-02
 강변에서 주은 수감       내가 강변유보도를 걷게 된데는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어느 때던지는 딱히 기억이 안나지만 안해가 강변유보도를 걷기 시작하였다. 저녁식후 걷게 되면 몸에 좋다는 어디서 얻어들은 론리였다. 하기사 운동이 사람한테 좋다는것쯤은 삼척동자도 거의 아는 일이지만 나한테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은근히 고집이 센 나의 성격이랄가? 남에 말을 크게 밭아듣지 않는 나다. 그러구려 안해는 저녁술만 놓으면 누가 부르기라도 하듯 강변으로 달려갔다. 그것이 한두날이 아닌 한달 두달 그렇게 줄창 이어지더니 아예 습관행위가 되여 저녁설걷이마저 난 몰라라였다. 그만큼 강변유보도걷기에 푹 빠진 안해의 거동에서 나는 은근히 웬심이 쓰였다. 무엇이 그렇게 좋아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은 강변유보도를 걷지 못하여 안슬을가? 그래서 나도 한 둬번 따라나가게 되였다.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발광하리만치 좋은지? 궁금증이나 풀어보려는 심산에서였다. 나의 생각을 꼬물만큼도 드티울수 없는 정경이였다. 그냥 사람이 바글바글 하고 여유작작 산보하는 사람들로 붐비였다. 별 볼거리도 없는 슴슴한 그대로였다. 내 마음이 심드렁해서인지 그저 걷기를 하는 무미함 그것이 전부였다. 그러던 내가 되려 강변산보에 푹 빠지게 되였다. 안해가 같이 산보하던 친구들이 하나 둘 한국으로 나가더니 아예 안해 혼자 남게 되였다. 안해는 혼자걷기가 좀 그렇 다며 나를 못살게 굴었다. 원래 나의 심드렁한 태도를 잘 아는 안해인지라 그냥 억지다짐으로 나를 끌었다. 나 역시 이따금 궁금증이 있었는지라 각근히 달라붙는 안해를 못이기는척 하고 나서게 되였다. 그것이 아마 안해가 강변산보를 시작해서 한 일년이 지난뒤의 일이였다. 우리 집에서 한 일리쯤 떨어져있는 강변유보도는 그새 몰라보게 변했다. 아치교에다 형광등을 설치하여 어둠이 깃들면 형광등이 그림같은 풍경을 반짝이는가 하면 유보도 옆에다 화단도 가꾸고 길량켠에는 수풀이 꽉 우거져 공원을 방불케하였다. 참 일년사이 에 변화가 많다는 놀라움과 더불어 강변광장에서는 집단춤을 추는 사람들로 하여 흥이 절로 났다. 곡에 맞춰 춤추는 춤군이 자그만치 천명을 넘기고 있다는 안해의 자랑 아닌 자랑이다. 참으로 사람들의 의식이 변해도 크게 변했다. 어느 누가 불러서 나오거나 어느 단위에서 행정적으로 벌리는 집단춤이 아니고 모두 자발적으로 무어진 춤군들 이란다. 춤을 추기 위해 추거나 누구에게 보여주려고 추는 춤도 아닌 오직 자신의 건강을 위해 추는 건강춤이다. 가로세로 하나같이 일매지게 곡에 맞춰 춤추는 춤군들의 절주있게 흐르는 춤물결을 바라보면서 자연 감회가 깊었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이 사라진 오늘이라는 생각과 더불어 인간의 정신적추구가 이렇게 생기는가 하는 생각도 함께 하는 순간이였다. 싫지 않은 강변산보였다. 환희로 들끓은 강변은 그대로 삶의 현장같은 느낌이 들면서 나도 그속의 일원이 되는것에 자랑스러운 생각까지 들었다. 그리고 안해와 언제 한번 나란히 쇼핑도 못해본 나로 말하면 저녁 한나절의 산보는 산보만이 아닌 서로의 소통과 교류의 장이 되여 별로 더 새롭다는 생각도 함께 들었다. 아마 이런것을 일컬어 생활이 가져다준 부부의 자연스러운 통합이라 할가?! 그리고 집에서 들으면 잔소리같던 안해의 수다도 강변을 걸으며 듣노라면 노래같이 들리는 까닭은 또 무엇일가? 사람의 기분이란 참 알다도 모를 일이다. 별 희한한 소리가 아니여도 강변을 함께 걸으며 들으면 안해의 소곤대는 소리가 그렇게 귀에 쏙쏙 들어오고 또한 감칠맛을 느끼게 되니 말이다. 그리고 또 우리 부부가 나란히 걷는 모습이 좋아보였던지 많은 사람들의 눈길을 받는다는 은근한 자부감도 가지게 되여 강변유보도걷기는 그대로 어떤 의젓함 도 함께 받아안는 꿩먹고 알먹고 둥지털어 불때기였다. 이런 강변산보가 하루가 아닌 한달, 두달 줄창 이어지는 가운데 없지 못해 옥에 티같은 불길함도 나의 눈을 아프게 한다. 생기와 활기로 넘치는 강변에서 어느 날인가 젊은패들이 다리밑 널직한 그늘에서 숯불을 피워놓고 모여앉아 고기구이를 하는것을 보게 되였다. 물론 이는 로천식문화가 예까지 보급이 된다는 생각으로 난 옆에서 걷고있는 안해를 보며 사람들의 식문화에 많은 변화가 있다는 얘기를 하며 확실히 의식전변이 크다고 감탄까지 하였다. 이런 로천식문화는 말없는 광고가 되여 강변으로 나가면 심심찮게 보게 되는 풍경이 되였다. 물론 누구를 비난할바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로천식문화가 끝나서 며칠이 지나면 그자리가 그대로 파리들의 천국이 되여 사람이 범접하기조차 역겨운 곳으로 바뀌는데는 그대로 보고만 있을수 없었다. 먹다 남은 쓰레기는 물론 비닐봉지와 술병 그리고 일회용젓가락이나 컵들이 그대로 뒹굴다 보니 로천식문화장은 그대로 쓰레기장으로 변하는것이다. 고기 한점에 거짓말 보태 파리 수십마리가 앵앵거리는 살풍경을 보면서 나는 또 쓸데없는 생각을 가져보게 되였다. 사람은 입을 걱정 먹을 걱정이 사라지면  모든것이 다 순리대로 흐르는것이 아니라는 엉뚱한 생각이다. 환경보호나 남에 대한 배려같은 큰 화제는 말고라도 털끝만한 위생상식만을 갖추었다면 오뉴월 삼복염천에 먹다남은 음식을 아무데나 그대로 버리지는 않을것이다. 황차 숱한 사람들이 공유하는 공중장소인 강변유보도옆에 이런 살풍경은 만들지 않을수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으로 가슴은 저도몰래 무거워짐을 어쩔수 없었다. 이렇게 글로라도 쓰지 않으면 너무나 가슴이 아파 밤잠은 물론 나의 일상을 괴롭힐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이 글을 쓰게 된것이다.    평화가 깃들고 생기와 활력으로 차넘치는 강변에 파리같은 오물을 우리 인간이  만들어 키워 될소냐!
4    남자라는리유 댓글:  조회:1199  추천:0  2013-03-01
남자라는리유 최화길 남자가무슨따로리유가있다고“남자라는리유로”라고하는지? 궁금증을 불러오는노래제목이다. 그럼에도 나는그 많은 노래중에서 한국 조항조가수가 부른 “남자라는 리유로”를 많이 애창한다. 프로가 아닌 아마츄어지만 이노래만은 얼마간 정감을 살려내는 같아 자기감각이 좋다. 하기에 일단 노래방에 가면 늘 이 노래를 선곡하다보니 동료들로부터 “남자라는 리유로”가 나의 다른 한 별명으로까지 지칭될 정도다. 그래서 안해의 가벼운 오해가 뒤따르기도 했다.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것처럼 보여진다고. 생각해보면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데는 별로 특별한 리유가 없다. 어느 해인것마저 딱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한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녀선생이 사무실에서 록음기를 틀어놓고 이 노래를 감상하였는데 나는 그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귀를 스치였는데 그냥 소음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인차 끌리는데가 있는 노래였다. 그래서 그 녀선생에게 다시 들을것을 요청하여 두번 다시 들어보니 더 듣고싶을만큼 마음에 와닿았다. 두번 세번 듣는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부르기까지 하며 그렇게 반복이 된 노래가 이제는 십년을 넘어서다보니 그 가사가 머리에 환하다. 누구나 웃으면서 세상을 살면서도/말못할 사연 숨기고 살아도 나역시 그런저런 슬픔을 간직하고/당신앞에 멍하니서 있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소리내어 울어볼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두고지낸/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저마다 처음인듯 사랑을 하면서도/쓰라린 이별 숨기고 있어도 당신도 그런저런 과거가 있겠지만/내앞에서는 미소를 짓네 언제 한번 가슴을 열고 소리내어/소리 내어 울어볼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 두고지낸/그 세월이 너무 길었어 언제 한번 그런날 올까요 가슴을 열고/소리내어 울어울어 볼날이 남자라는 이유로 묻어 두고지낸/그 세월이 너무 길어요. 생활속의 남자에게 무게를 실어주는 무거운 가사의 힘을 입은 노래이다. “남자라는 리유로 묻어두고 지낸/그세월이너무길어요..” 남자임에도 애절함을 숨길수 없어 즙액처럼 흘러나오는 뜨겁고 걸쭉한 정감, 어느 세월인지는 몰라도남자라면 수월히 뱉지 않는다는 비장함이 가슴을 때린다. 십년이고 이십년이고마음에 묻어 두고 살아야하는 남자. 하지만 남자는 그냥불쌍하다는 말로는통할수 없다. 남자로서의 자존을 세워야하고 남자로서의 의무가 색다름을 지적해주는 통속적이면서도 의미심장한 고백이 아니랴! 숨기고싶어서 숨기고 사는것은 아닐것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도 남자라면 숨겨야 할 일이 너무 많은것이 아니랴! 그렇게 되는것이 소원이 아니지만 그렇게 되여야하는 현실앞에서 우리는 때론 속수무책이 아닌가? 어느새 파란 부부가 서로 이역만리를 떨어져살기를 원했으랴! 하지만 그런 리별이 현실로 다가서야했고 그런 현실을 감내해야 하는 오늘이 아닌가? 남자의 자존으로몰아붙일 일은 아니지만 남자가 행주치마를 둘러야하고 남자가 애를 키워야하고 남자가 집을 거둬야 하고…어느 세대 어느 력사가 남자를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었던가? 그럼에도 소리쳐 하소연할수 없고 가슴치며 통곡할수없는 남자들, 그냥 숨막히게 답답한 일상을 달리는 남자면서도 남자로 떳떳하지 못한남자들이 어디 한둘만인가?! 어디론가 훌 사라지고싶을 만큼 안스러운 나날속에서 그냥 바라며 버티며 살아가는 남자들의 마음을 대변하고 그 안타까움을 하소하는 노래다. 하지만그 노래속의 함의는 거기서 그치는것만이 아니다. 울고싶으면 울라는 메쎄지도 은근히 내함하고있다. 오직“그세월이 너무 길었어”이지 그 세월이 끝이 없어는 아니라는 말이겠다. 그 세월은 계속 되는것이 아니라는 암시임에 틀림이 없다. 그 세월은 있으되 그 세월은 끝없이 이어지는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세월을 줄여야 하고 그런 세월을 해방해야 하며 그런 세월을 개변해야 하는것이“남자라는 리유로”를 이어주는 리유가 아닐가?! 물론 남자의 어깨는 힘을 실어야 한다. 아무리 무거운 짐이라도 떠멜수 있는 힘이 실려 야한다. 남자가 녀자보다 다른것이 바로 그런 타고난 힘이 아니랴! 남자가 남자답다는 또 하나의 징표로 남자는 그릇이 커야 한다. 옴니암니가 아니고 요리조리가 아니며 폴짝폴짝은 더욱 아니다. 산처럼 드놀지 않는 믿음이 있고 물처럼 유유한 여우가 있으며 용암처럼 뜨거운 불길이 있어야한다. 문득 남자라는 리유를 고쳐 보고싶다. 물론 이는 가사에 이의가 있어 고쳐보려는 생각이 아님을 성명한다. 다만 그가사로부터 유발된 내마음속에 자리잡은 남자의 함의를 고쳐 보고싶다. 자신이 자신에게 억누름이 되는 부분을 가볍게 버려야 한다. 남자로 각인된 남자의 외피를 벗겨야 한다. 남자이지만 지지콜콜 끌고가는 남자의 멍에를 벗어야 한다. 오직 삶을 즐기며 사는 남자, 남자라는 리유로 살아가는 남자가 아니고 남자로 떳떳한 남자의 삶을 사는것이 오늘의 센스있는 남자가 아닐가 한다. 남자라는 억지같은 리유는 원래 존재한것이 아니다.
3    아픈 매가 그립습니다 댓글:  조회:2072  추천:3  2012-01-17
아픈 매가 그립습니다        첫살에 부모를 잃은 불우한 나에게 다행이였다면 고모가 있은것입니다. 그만큼 고모는 나에게 있어서 엄마를 초월하는 존재입니다. 세월을 거슬러 추억의 쪽배를 젓노라면 아직도 생생하고 감동적인 기억들이 그냥 화폭마냥 눈앞에 선합니다. 그런 감동을 내혼자 묵새긴다는건  너무나 잔혹한 형벌이 아닌가싶어 이 글을 씁니다. 나를 낳고 한시간후에 이세상을 떠나셨다는 어머니, 그 어머니의 뒤를 이어 한달사이에 아버지도 뒤따라가셨다니 나는 아마 운명적으로 불행한가 봅니다. 하긴 아들며느리를 앞세운 우리할머니도 불행하긴 마찬가지였을것입니다. 할머니는 그때 이미 정신을 잃어버린상황이였을것입니다. 오죽했으면 금방 태여난 나를 쪽구석에 처박아둔채로 어머니의 장례를 치렀겠습니까.  어머니의 장례를 다치르고나니 하루가 썩 지난뒤였다고 합니다. 죽은 사람은 죽었지만 사람을 어떻게 한구석에 처박아둘수 있는가하며 고모가 포대기에 싸인나를 헤쳤다는데 그때까지 나의 숨이 붙어있더라는것이였습니다. 내 생명은 바로 고모손에서 시작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것입니다. 첫살에 부모 모두를 잃은 고아, 나는 철저한 고아였습니다. 할머니 손끝에서 자라게 된 나는 어렸을적에 집안의 황제였답니다. 할머니는 더 말할나위도없이 내말이면 어명으로 받아들였답니다.  그러기에 나는 그때 범무서운줄 모르는 아이였답니다. 별로 어려운 식구가없는 우리집이고 보니 동네할머님네들이 우리집에 많이 마실을 왔는데 그 할머님네들 모두가 나를 한결같이 불쌍히 여겨 무엇이든 좀색다른것이 있으면 꼭 감추었다는 나를 가져다주군하였다고 합니다. 그런것을 나는 또 당연한것으로 받아들이군하였답니다.  지금 시체말로 하면 아마 좀 싸가지없는 언행을 서슴치않았나 생각됩니다. 그래도 우리 할머님은 그냥 어려서 그렇거니하거나 크면 제절로 셈이들겠지로 미루며 매 한대 올려붙이지 않았답니다. 하지만 이런 정경이 고모눈에 띄이면그 당장에서 나는 벌을 받아야했답니다. 그벌이란 다름이 아니라 아픈 매였지요. 그때 내눈에 제일 무서운 존재는 할머님이 아니라 바로 고모였습니다.  고모는 나의 부정행위나 례의에 어긋나는 언행에 인정사정을 두지 않았으며 당장에서 실시하였습니다. 물론 내몸에 매가 떨어지면 머니가 두둔해나서서 나를 감싸주며 되려 고모를 욕했으며 지어는 시집으로 가라고 내쫒기까지 하였답니다. 철부지 나때문에 그렇게 집으로 쫒겨가기도한 고모였으나 밤이 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싶게 또 우리집에 찾아오군하였습니다. 집안의 황제인 내가 고모를 보기싫다고 가라고 떼질쓰면 고모는 언제나 환한 얼굴로 나를 품에다 꼭 껴안아주었습니다. 그리고 귀속말로나를 달래였는데 그러면 내마음의 고드름은 어느새 사르르 녹아버렸으며 언제 고모한테 맞았냐싶게 고모의 품을 파고들었습니다. 그품은 그렇게 따스하였으며 그품은 나의 넋을 앗아가기에 족했습니다. 할머님손에서 내하고싶은대로 자란 나에게는 무슨 일이나 내마음대로하는 나쁜 버릇이있었습니다. 그런 내마음대로가 물론 할머님한테는 아무것도 아닌것으로 알려지였으나 고모만은 절대 허락을 하지않았습니다.    내가 소학교에 다닐 때의 일입니다. 우리 부락에서 학교까지가 한 3리가량 떨어져있었는데 그때 우리는 교실이 모자라는 상황이여서 오전 오후로 교차수업을 하였습니다. 말하자면 2 학년에서 오전 수업을 하면 3학년은 오후수업을 하게되였습니다. 우리마을에서 학교로 갈려면 꼭 작은 강을 건너야 하였는데 문제는 바로 그 작은강이였습니다. 그날도 나는 집에서 학교로 간다고 나와놓고선 그강에서 놀다보니 그만 수업시간을 어기게 되였는습니다. 시간을 이미 어기게 되였으니 학교에 가도 욕보기는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에라어긴바하곤 아예학교로 안간다고 단정하고 그냥 제놀음에 빠져 날이 어둑해서야 학교에서 돌아온양으로 스물떼리고 집에 돌아갔습니다. 물론 할머니는 그런 낌새도 모르고 이왕과마찬가지로 나에게 밥상을 차례주었으며 항상 그러하듯 내 머리를 쓸어주셨습니다. 바로이때 우리집문이 벌컥 열렸습니다. 고모였지요. 어디서 들어알게되였는지는 모르나 고모는 노기등등하여 다짜고짜로 밥도 채먹지 못한 나를 잡아일으켜세우더니 비깡댕이(비자루)를 잡아쥐고 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덜돼먹기로 어디서 함부로 아무런 연고없이 학교를 안가느냐였습니다. 사건의 시말을 대충 알게된 할머님도 이때만은 나의편을 들어주지않으셨습니다. 죄를지었다고 생각된 나도찍소리 못하고 맞았습니다. 아마그매가내 평생에서 제일 아픈매라고 생각됩니다. 그 매가 있었기로 나는 그후부터 연고없이 학교에 안가는 일이 더는 없었습니다. 아마 그 매가무서워 그후로는 그런 생각조차 떠올리지 못한것같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사정을 두지 않고 나를 때린 고모건만 나중에는 우는 나를 안고 자신도 함께 우시였습니다. 그것도 슬프게 슬프게 우시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를 꼭 껴안고달래였습니다. 너는 우리집의 기둥이라며 앞으로 공부를 잘해서 큰사람이되여야한다고 절대 노름에 탐해서 공부에 지장주는 일이 없어야한다며 결국은 눈물로 나에게서 다짐을 받아냈습니다.    무정세월은 흘러 나의 잊지 못할 동년을 40여년이나 뿌리치고 달려왔지만 지천명을 치달으는 오늘도 새라새록 떠오르는 향수에 젖는 추억입니다. 사실 나보다 한살 어린 동생을 둔 고모였기에 나는 알게 모르게 고모님의 젖을 얼마나 먹었는지를 모릅니다. 우유사러간 할아버지께서 그것도 돈을 아끼느라 20여리를 걸어 현성에 가서 사다보니 제때에 오지 못하는 때가 태반이였답니다. 그때마다 가까이에 있는 고모가 나의 “엄마”였음은 말하면 잔소리나 다를바가 아니지요. 그런 고모기에 고모가 나를 대함은 그냥 엄마가 자식을 대하는 당당함이였나 봅니다. 그래서인지 내 성장과정에 제일 깊은 기억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고모가 선사한 아픈 매입니다. 그때는 나에게 눈에 든 가시처럼 미웠던 고모입니다. 그런데 이상한것은 내가 커가면서 그것도 셈이 들어가면서 미워지기는커녕 내마음속에서 점점 거연하게 커가는 고모입니다. 아마그때 고모의 그 엄한 단속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떻게 발전했겠는가가 환히 알려지여서이겠지요. 할머님의 응석둥이로만 자랐다면 아마 나의 오늘은 그냥 꼴기없는 무골충이 아니였을가 하는 생각도해보게되는오늘입니다. 그만큼 고모가 나에게 안긴 매는 사랑을 감싼 가장 순진한 바램이기에 돈으로도 살수없는 값진 매이며 나의 평생을 바른 길에 에워넣은 둘도 없는 사랑의 매였음을 절실히 느끼는 오늘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미 지천명에 치달으는 오늘도 나는 머리가 뜨거워날 때면 언제나고모님의 그 아픈 매를 떠올리며 자신을 반성하는것으로 뜨거워진 머리를 식히군합니다. 내 인생의 보석으로 빛나는 아픈 매, 나는 그 매를 어머니사랑의 대명사로 간주하며 내 평생의영원한 길동무로 생을 다하는 날까지 고이 간직하려합니다.    
2    중년의 곤혹 댓글:  조회:2004  추천:6  2012-01-12
수필 중년의곤혹       한여름의 무더위가 청소한듯 깨끗이 사라진 싸늘한 마가을이다. 온통 푸름으로 장식했던 산과들이 차렷자세로 기립하고 무거운 생각에 잠긴듯. 바람도 더는 얼굴을 쓰다듬어주던 그런 후더움이 아니고 어딘가 쌀쌀함으로 다가선다. 꼭마치 따뜻한 보금자리를 빼앗긴서운한 기분을 주는 가을이다.  하기야 계절의 바뀜을  누가 막을수 있으랴만 가을이 깊어가면서 이런 느낌이 점점 더 깊어간다. 울긋불긋 산과 들을 곱게 단장하던 단풍의 계절도 지나고 열매의 향기도 사라진 마가을의 들녘에 서면 그냥 서리발 반짝이는 사색이 앞선다. 여름의 들끓던 희열은 옛말처럼 아득히 멀어지고 삭정이와 흑먼지를 일구는 시끄러운 바람이 마음대로 불어치는 스산한 풍경이다. 가을은 호함진 열매를 선사하는 희열을 동반한다지만  그냥 희열만이 아니다.  희열을 마주한 색다른 의미를 뚜렷이 세워주는 계절이다.      온하루가 단조로운 선률이다.  근삼십년을 하루같이 지켜선 교단에  서는 일이다보니 사무실에 앉으면 학생과 더불어 교재 그리고교수법에 신경을 쓰는 일, 가끔 사무실내의 동료들끼리 오가는 한담에서 폭소가 터지는 경우도 있긴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찰나나 순간에 그치고,   별로 새로운 소식이 없는가하면 별로 반겨맞게되거나 반겨맞아야 할 충동이나 흥분이 갈앉은 느낌이 자신도 별로좋아하지 않건만 한자리를 틀고 앉아 비켜주지 않는다.  사실 막 들뜨고싶은 심정이 사라진것은 아닌데 그렇게 막 들떠지지를 않는다. 참! “내 나이 먹어보면 알수있을거다” 하던 옛날 웃어른들의 말이 새삼스러운 오늘이다. 사람도 계절처럼 단계가 주어졌는가? 이슥한나이는 보는 사람을 속일수없을뿐만 아니라 버둥거리는 자신도 속일수 없는듯하다.  그냥 나이타령만은 아니다.     “흐르는 물은 썩지 않고 문지도리는 좀 먹지 않는다”는  근면을 칭송한 우리말 속담이다. 사람이 근하면 근한만큼 원색을 보존한다는뜻이 다분한 제시인데 사실 말이지 이는 어디까지나 속담이 지적하고싶은 어떤 지향적인 뜻이 아닌가싶다.  세월의 기록으로 주어지는우리의 나이는 오직 근면으로 앞당기거나 뒤로 미룬다함은 어딘가 론거가 부족한 론증이 아닐가? 혹시 특수한 경우를 들고나온다면잠간 수긍이될는지는 몰라도 대다수를 아우르는 일반적인경우와는 빈틈을 많이 보이는 근거이다     호기심이라는 끈이 어디를 갔는지 아득하다.  어떤 일에도 호기심이 앞에 세워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럴수도 있다는 느슨한 리유를세워주기도 한다. 세상살다보면 그럴수도 있겠지! 그러고보면 모든 일이 순리인듯 그저 그렇다는 수용으로 넘어가기가 일쑤이다. 원하는바는 아니지만 허다한 일들이 집념을 불러오기전에 벌써 흐르는 물이 되고만다.     때론 자신을 추스르기도 하지만 그것도 순간이나 한단계의 집착으로 그치고마는 경우가 다반이다. 결과에다 주해를 달아주는가하면 과정을 통채로 알아주며 그럴수도 있다거나 그렇지 않을수도 있다는 두가지를 다 수용하는 이중자세이다. 어찌보면 모든 일에 가장할말이 많은듯하지만 또 가장 할말이 없다함도 배제할수 없다. 존재자체에 대한 불확실성의 관성일수도 자신에 대한 과대한 확신일수도 있겠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객관현실에 대한 확실한 진단은 아니다.     세상리치대로라면 틀리는것과 맞는것을 한줄에 세울수는  없는것이다. 이것이 아니면 저것이여야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것은 존재가치를 상실했거나 아예 존재하지 않기때문이다.     사실 한인간의 고뇌는 자신이 처한 현실을 정시하지 못하는데서 이루어진다. 자신이 처한 현실에 대한 회피  바로 그것이다.  중년이 완연한데 중년임을 부정하는 심리에 대한 배반이나 부정이다. 몸의 어느 부위인가도 가까운  어제와는 달리 령활하지 못할뿐만 아니라지긋지긋해난다. 내 몸이건만 내 몸답지 않게 내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련습이 없는 자신의 인생, 이 나이를 먹었으면 이러려니 해야하는 순리가 잘 먹혀들지를 않는다. 마음과 몸이 두쪽으로갈라지는듯한 느낌으로 하여 자아갈등이 치렬하다. 이런 갈등은 찰거마리처럼 달라붙어 떨어질념이 없다. 자신을 확인하기란 이렇게 어려운것인가? 하며 자문해도 그냥 확답은 주어지지 않는다.      밖은 마가을의 맵짠 바람이 불고있다. 문득 이것이 바로 이 계절이 나한테 선사한 둘도없는 선물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살갗을 어루쓸던 봄바람도 아니요 따뜻한 손길같은 여름의 미풍도 아니니 많이 괘씸하고 허전해야 하지만  쌀쌀함과 매서움만을 기발처럼 치켜든  가을바람에정신이 펄쩍 들기때문이다. 뺨이라도 한대 얻어맞은 얼얼함을 주는 가을바람에 정신이 펄쩍 들었기때문이다. 거의 낭떠리지에 이른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알몸이 된 나무를 쳐다보며 새라새록 일어서는 생각을 금할수 없다. 때가 되면 버릴건 버려야 한다는 리념을 세워본다 하긴 버리지않으려 해도그건 어디까지나 욕심이지 그러안고 버틸수 없는것 또한 순리가 아니랴?! 이순간 내 마음을 사로잡은 시 한수가 떠오른다. 다시는 묻지 말자//내 마음을 지나 손짓하며 사라진 그것들을/ 저 세월들을/ 다시는 돌이킬수 없는것들을/ 새는 날아가면서/ 뒤 돌아보는 법이 없다/고개를 꺾고 뒤 돌아보는 새는/ 이미 죽은 새다.//     새로 펼쳐질 하얀 지평선에 새로운 발자국을 찍어야겠다.  
1    남자라는 리유 댓글:  조회:2110  추천:8  2012-01-06
수필 남자라는리유      남자가무슨따로리유가있다고“남자라는리유로”라고하는지? 궁금증을불러오는노래제목이다. 그럼에도나는그 많은 노래중에서한국조항조가수가부른  “남자라는리유로”를많이애창한다. 프로가 아닌 아마츄어지만이노래만은  얼마간정감을살려내는같아자기감각이 좋다. 하기에 일단 노래방에 가면 늘 이 노래를 선곡하다보니 동료들로부터 “남자라는 리유로”가 나의 다른 한 별명으로까지 지칭될 정도다. 그래서 안해의 가벼운 오해가 뒤따르기도 했다.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것처럼 보여진다고.    생각해보면 내가 이 노래를 좋아하는데는 별로 특별한 리유가 없다. 어느 해인것마저 딱히 기억되지는 않지만 한사무실에서 근무하는 녀선생이 사무실에서 록음기를 틀어놓고 이 노래를 감상하였는데 나는 그때 이 노래를 처음 들었었다. 그저 지나가는 바람처럼 귀를 스치였는데 그냥 소음으로는 들리지 않았다. 처음 듣는 노래임에도 인차 끌리는데가 있는 노래였다. 그래서 그 녀선생에게 다시 들을것을 요청하여 두번 다시 들어보니 더 듣고싶을만큼 마음에 와닿았다. 두번 세번 듣는데만 그치지 않고 자신이 부르기까지 하며 그렇게 반복이 된 노래가 이제는 십년을 넘어서다보니 그 가사가 머리에 환하다.   누구나웃으면서세상을살면서도/말못할사연숨기고살아도 나역시그런저런슬픔을간직하고/당신앞에멍하니서있네 언제한번가슴을열고소리내어/소리내어울어볼날이 남자라는이유로묻어두고지낸/그세월이너무길었어 저마다처음인듯사랑을하면서도/쓰라린이별숨기고있어도 당신도그런저런과거가있겠지만/내앞에서는미소를짓네 언제한번가슴을열고소리내어/소리내어울어볼날이 남자라는이유로묻어두고지낸/그세월이너무길었어 언제한번그런날올까요가슴을열고/소리내어울어울어볼날이 남자라는이유로묻어두고지낸/그세월이너무길어요.    생활속의남자에게무게를실어주는무거운가사의힘을입은노래이다. “남자라는리유로묻어두고지낸/그세월이너무길어요..” 남자임에도애절함을숨길수없어즘액처럼흘러나오는뜨겁고걸쭉한정감, 어느세월인지는몰라도남자라면수월히뱉지않는다는비장함이가슴을때린다. 십년이고이십년이고마음에묻어두고살아야하는남자. 하지만남자는그냥불쌍하다는말로는통할수없다. 남자로서의자존을세워야하고남자로서의의무가색다름을지적해주는통속적이면서도의미심장한고백이아니랴!    숨기고싶어서숨기고사는것은아닐것이다. 오늘을사는우리에게도남자라면숨겨야할일이너무많은것이아니랴! 그렇게되는것이소원이아니지만그렇게되여야하는현실앞에서우리는때론속수무책이아닌가? 어느새파란부부가서로이역만리를떨어져살기를원했으랴! 하지만그런리별이현실로다가서야했고그런현실을감내해야하는오늘이아닌가? 남자의자존으로몰아붙일일은아니지만남자가행주치마를둘러야하고남자가애를키워야하고남자가집을거둬야하고…어느세대어느력사가남자를이렇게비참하게만들었던가? 그럼에도소리쳐하소연할수없고가슴치며통곡할수없는남자들, 그냥숨막히게답답한일상을달리는남자면서도남자로떳떳하지못한남자들이어디한둘만인가?!    어디론가훌사라지고싶을만큼안스러운나날속에서그냥바라며버티며살아가는남자들의마음을대변하고그안타까움을하소하는노래다. 하지만그노래속의함의는거기서그치는것만이아니다. 울고싶으면울라는메쎄지도은근히내함하고있다. 오직“그세월이너무길었어”이지그세월이끝이없어는아니라는말이겠다.    그세월은계속되는것이아니라는암시임에틀림이없다. 그세월은있으되그세월은끝없이이어지는것이아니다. 바로그런세월을줄여야하고그런세월을해방해야하며그런세월을개변해야하는것이“남자라는리유로”를이어주는리유가아닐가?!    물론남자의어깨는힘을실어야한다. 아무리무거운짐이라도떠멜수있는힘이실려야한다. 남자가녀자보다다른것이바로그런타고난힘이아니랴! 남자가남자답다는또하나의징표로남자는그릇이커야한다. 옴니암니가아니고요리조리가아니며폴짝폴짝은더욱아니다. 산처럼드놀지않는믿음이있고물처럼유유한여우가있으며용암처럼뜨거운불길이있어야한다.    문득남자라는리유를고쳐보고싶다. 물론이는가사에이의가있어고쳐보려는생각이아님을성명한다. 다만그가사로부터유발된내마음속에자리잡은남자의함의를고쳐보고싶다. 자신이자신에게억누름이되는부분을가볍게버려야한다. 남자로각인된남자의외피를벗겨야한다. 남자이지만지지콜콜끌고가는남자의멍에를벗어야한다. 오직삶을즐기며사는남자, 남자라는리유로살아가는남자가아니고남자로떳떳한남자의삶을사는것이오늘의센스있는남자가아닐가한다. 남자라는억지같은리유는원래존재한것이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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